(룻3:6-13)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강해 (9)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룻3:6-13)

 

따르기 힘든 시어머니의 계획

 

나오미는 모압에서 베들레헴까지 자기를 따라와 정성껏 섬기는 며느리 룻의 장래를 평안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언뜻 교묘해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최선의 계획을 세워서 룻에게 지시했고 룻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추수철 마지막 날에 종들과 잔치를 벌인 보아스가 잠자리에 들자 그의 발 치 이불을 들고 곁에 누었습니다. 룻이 자기 곁에 누워있는 줄 몰랐던 보아스가 잠결에 뒤척이다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룻은 자신을 아내로 거두어달라고 간청했고 보아스는 흔쾌히 감사하며 승낙했습니다.

 

본문은 이 두 사람의 믿음의 순종이 교차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각기 순종한 경위와 내용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는 차원은 같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성도 간의 섬김이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므로 왜 그러한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율법이 과부에게 계대결혼을 적극 추진해도 된다고 규정해 놓았어도 룻의 입장에선 선뜻 따르기 힘든 계획입니다. 밤중에 여자가 스스로 먼저 찾아가서 자기 몸을 내맡긴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보아스가 남자답고 존경할만해서 룻도 내심 흠모했다 쳐도 여자가 먼저 구애하는 것은 어색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거기다 이방 모압의 젊은 여인이 베들레헴의 유력자이자 부자 노인에게 팔려간다는 느낌이 은연중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보아스가 야단을 치면서 쫓아내면 어떻게 됩니까? 종들이 다 깨서 그 현장을 목격할 것이고 그럼 효성과 믿음이 지극하다는 룻에 대한 평가는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됩니다. 거꾸로 돈을 밝히는데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몰염치하고 음흉한 여인이라는 딱지가 평생 붙여 다녀서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데도 큰 장애가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고 또 아무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내년부턴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 대신 나서야할 것입니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인데도 룻은 과감히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보아스의 모든 지난 행적으로 봐서 설령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룻의 입장을 배려해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룻의 예상대로 그날 밤에는 구혼만 받아들이고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게 해주었습니다.(14절) 추수 첫날부터 룻이 눈치 채지 못하게 종들에게 이삭을 조금씩 땅에 버리라고 지시했던 보아스였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보아스처럼 남들에게 온전한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뢰라는 것은 상대가 다음에 행할 행동이 올바른 길에서 절대 어긋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마음 턱 놓고 맡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다른 이는 신자에게서 어떤 거짓 가식 음모 교만 불법 불의 등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룻도 혹시라도 잘못된 소문이 날까봐 잔치가 벌여지는 동안에 현장에 있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 못 채게 숨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을 텐데도 참고 기다렸습니다. 보아스가 잠에 떨어지자 인기척도 내지 않고 그의 곁에 누었으니까 자신의 여성적 매력으로 그를 유혹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보아스와 단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주위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계대결혼과 자기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정확히 말해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순종의 의미와 결과

 

사람은 어차피 자기가 싫고 귀찮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총으로 갖다 대고 목숨을 위협해야 겨우 하는 시늉을 하는 존재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도 자신이 그 일이 좋고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납득했기에 행하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의 계략에 순순히 동의한 것도 시어머니의 명령에 따른다는 도덕적 양심이나, 이제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으니까 율법규정을 지키려는 종교적 의무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계대결혼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뜻부터 확실히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모와 둘이서 간절히 기도했던 것에 대한 응답 내지 확신을 얻으려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 최악의 경우가 생기면 하나님의 뜻이므로 순순히 감수할 작정이었습니다.

 

룻이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절b)라고 청했습니다. 이는 보아스가 룻과 처음 만났을 때에 그녀의 효성과 믿음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다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2)고 자기에게 했던 말을 룻이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받는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관용구입니다. 모압 여인인 룻이 그 관용구를 미리 알고 있었을 리는 없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두 달 전에 자기에게 축복해준 말을 지금 이 일에 적용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주어를 여호와에서 보아스로 바꿨습니다. 보아스더러 여호와가 나에게 주는 복을 대신 전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해달라고 요구한 셈입니다. 당신은 여호와가 나에게 붙여준 재혼 상대이므로 내 여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끌어주실 하나님의 대역이 되어달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두 달 전에 당신이 나에게 축복한 말을 그대로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보아스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하며 이 모든 일의 배경에 여호와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보아스도 룻이 젊은 육체를 무기로 부자 노인을 이용해 팔자를 고쳐보려는 뜻이 아님을 모를 리 없습니다. 평소 룻의 행실로 보아서 그녀의 인품과 믿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그도 그녀와 여생을 같이 보냈으면 하는 소원을 이미 마음에 품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룻이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인지라 자기 재산이나 나이를 보지 않은 것을 아니까 그 구혼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일차 고엘과 상의해서 최선의 길을 모색해보겠으니 룻더러 두려워말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거절하면 곧바로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고엘의 평소 성격으로 봐서 그 임무를 지지 않으리라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 고엘이 룻과 계대결혼 하겠다고 하면 율법이 규정한 사항이라 나로선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절대로 내가 너를 싫어하거나 이 제안이 귀찮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룻에 대해서 현숙한 여자인 줄 자신과 성읍 백성이 다 안다고 말했습니다.(11절) 여기서 ‘현숙한’의 원어는 성경이 보아스에 대해 ‘유력한’ 자라고(2:1) 표현한 것과 의미가 같습니다. 잠언 마지막 장에 성문에서 칭찬 받는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힘이 세다, 뛰어나다, 가치 있다는 뜻인데 여자이므로 우리말로 현숙하다고 번역했는데 영어로는 worth, excellence, 등으로도 번역해 놓았습니다. 보아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 룻의 인품과 믿음이 같다고 말한 셈입니다. 하나님이 맺어주는 아름다운 부부인지라 모든 일의 배후에 성령이 거룩하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시작했습니다.(1:1)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고 끝을 맺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때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룻과 보아스가 있었고 그들이 결혼해서 예수님의 선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만사를 주관하는 여호와께 순전한 믿음으로 순종했고, 보아스도 마찬가지로 아내가 될 현숙한 룻과 여호와께 순전한 믿음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범사에 그분께 순종하는 신자는 필연적으로 또 자연스럽게 사람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든 의사 결정을 예수님처럼 자기 욕심과 감정과 이해타산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통제는 물론 예측도 전혀 불가능한 최악의 위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분의 뜻이 어떠하든 또 그로 인해 어떤 부정적인 여파가 나타나든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보아스처럼 믿음과 인품이 훌륭해 신뢰할만해도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인간 상대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필수적이고 그 전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면 사람에게도 결코 쉽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 먼저 순종했기에 서로 간에도 아름다운 순종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열매도 누린 것입니다.

 

거꾸로 된 감사

 

그런데 정작 따져봐야 할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정황상 지금은 룻이 보아스에게 감사해야 할 판인데 거꾸로 보아스가 룻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젊은 여인이 아버지뻘 되는 자기에게 청혼한 것은 너무 감사했고 보아스도 그런 뜻은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룻의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하다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오히려 먼저 감사해야 했다면 룻의 인애는 과연 무슨 의미이며 왜 나중이 더 하다고 말했는지 궁금합니다.

 

인애(仁愛, 인자하고 따뜻한 사랑)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 양심에 따라 행하는 긍휼이나 사랑이 아니고 이스라엘 고유의 종교적인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그 언약에 기초한 인간끼리의 사랑을 뜻합니다. 구약성경에 245회나 나오니까 한마디로 여호와가 이스라엘 역사에 베푼 사랑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언약이 나오는데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 그것입니다. 먼저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 각기 이행할 의무를 정한 후에 반드시 그 의무를 다하겠다고 서로 약속하고 그러지 못했을 때는 응분의 형벌이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 언약은 하나님이 주도적 일방적으로 복을 베푸시겠다는 약속으로 그 열매를 얻기 위해서 따로 행해야 할 의무사항이 없습니다. 당연히 별도의 벌을 추가로 주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상벌은 신자의 선택적인 권리사항일 뿐입니다.

 

인애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십계명의 우상숭배를 금하는 둘째 계명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마지막 구절에서 은혜(mercy)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헤세드-인애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 주신 율법 중의 율법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면 그 죄를 묻고 반대로 당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면 은혜를 베푼다고 했으니 행위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사실상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는 첫째 계명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그분의 인애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기 약 5백 년 전에 이미 그 조상인 아브라함을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워주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사항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는 별도의 선행과 공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땅을 뒤로하고 당신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십계명에서의 첫째와 둘째 계명과 사실상 같은 내용으로 하나님의 안에만 거하면 그분의 인애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먼저 있었고 그 은혜를 아는 자가 세상 앞에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서기 위해서 지켜야할 의무로 행위 언약인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대로 준행하겠다고 피의 맹세를 했습니다.(출24:1-8) 하나님의 의도는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께 행위로 순종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충분히 그럴 수 있도록 은혜를 먼저 풍성히 베푸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의 의미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복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족속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복을 전해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눠주지 않고 택함 받은 자기들에게만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여호와를 열방에 전해주지 않았기에 모든 족속이 여전히 심판의 자리에 남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먼저 주신 은혜언약의 열매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순전하게 믿고 다른 신을 두지 않으면 되는 그 간단한 일도 해내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가나안의 우상들을 함께 혹은 더 주도적으로 섬겼습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어긴 것, 정확히는 첫째 계명조차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하나님은 시내 산 행위언약에 따라 바벨론을 사용해 눈물을 머금고 당신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또 다른 은혜 언약을 주는 인애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3,34)

 

언약을 인간의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부터 행위로 준행하는 여부로 벌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악행을 다 사하고 지은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물론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의 재앙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오직 당신께서 인간의 하나님이 되고 인간은 당신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만 원한다는 뜻입니다. 새 언약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에서 또 그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에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당신을 알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 나아가 당신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죄 중에 신음하는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 천하에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고 십자가를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고도 그분을 알지 못하겠다고 고집하면 원래 있던 진노의 심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의미는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물론 온 인류에 대한 헤세드를 완성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현실적 조건과 상태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베푸는 사랑입니다. 오직 당신께서 약속하신 언약에 따라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랑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대로 행하며 수많은 죄를 저질렀으나 잠시 징계는 했으나 그들이 괴로워서 부르짖으면 사사를 계속 보내어 구원해 주었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도 하나님이 참고 또 참고서 계속 살려준 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신자가 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점검해볼 때 과연 하나님이 예뻐해 줄 모습이 단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저도 “이스라엘 민족 종교의 창시자 인간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왜 죽어야 할 천하의 죄인이냐? 남들보다 훨씬 의롭게 살았는데 나를 대신할 인간 제물이 왜 필요하냐? 제발 말도 안 되는 광신적인 종교놀음 그만 두라.”고 비방하기 바빴습니다. 그런 제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게 되자 저라는 존재 전체가 하나에서 열까지 치사함 음란 거짓 교만 부패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저를 만나서 제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주는 인애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헤세드

 

신자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에서 끊어낼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인애도 예수님으로부터 차별 없이 먼저 받은 그 사랑을 주변에 차별 없이 나눠주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를 칭찬한 말을 다시 보십시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은 자신의 외적 조건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인애를 베푼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는 일차적인 의미는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긴 것보다 이제 나를 섬기려는 정성과 사랑이 더 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제안만 해도 너무 감사하지만 나중에 룻과 계대결혼하게 되면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룻과 부부가 된 후에도 그녀의 선한 성품과 신실한 믿음으로 나에게 베풀 인애가 날로 커질 것을 믿는다는 의미도 내포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보아스도 룻에게 똑같은 인애를 그것도 처음보다 나중에 더하게 베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적 측은지심이나 종교적 의무감으로 룻을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룻의 믿음과 효성이 갸륵해서 율법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은 과부로 이스라엘의 대적인 모압 여자이므로 외모를 보고 베푼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번 추수철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평소의 신실한 믿음대로 도움이 꼭 필요한 자에게 그 은혜를 나눠준 것입니다. 나중에 고엘의 의무를 감당하여 룻의 남편이 되면 지금까지 이삭을 양껏 줍게 배려해준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인애가 될 것입니다. 보아스도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하여 룻이 요구한 그대로 하나님의 복을 룻에게 전해주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보아스와 룻 같은 헤세드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기심 이해타산 욕심 감정 교만 인간적 의로움 어느 것도 개입되지 않은 예수님의 온전한 참 사랑은 십자가 보혈로 거듭난 신자만이 알고 또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 사랑만이 세상 문화 관습 법률 도덕 종교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세상 최고의 흉악한 죄인도 영혼에 찔림을 주어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어리석고 영적으로 가난합니다. 좋은 일, 선한 일, 사랑하는 일, 그것도 상대를 위한답시고 하는 일 중에도 알게 모르게 죄악과 욕심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상대에게 오히려 해가 되고 큰 상처와 모멸감을 안길 때도 종종 생깁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전히 연약한 인간인지라 자신의 의리, 열심, 윤리, 지식, 경험, 종교 등이 이웃을 사랑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비우고서 저는 너무나 부족하고 부족하오니 예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전해지는 통로로만 저를 사용해 달라고 주님 앞에 매번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완악한 백성에게 누구를 보낼꼬 한탄할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것처럼(사6:8) 순종 헌신해야 합니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가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를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사람을 절대 외모로 차별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가뜩이나 펜데믹 사태라 온갖 어려움에 시달리며 불쌍하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신자 자신부터 너무나 연약해 수시로 넘어지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감정적 동물이라 때로 싫고 미운 사람이 생길 수 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기 전에 나는 그들보다 더 심했던 존재였고 또 주님이 그런 나에게 어떤 인애를 베푸셨는지 회상해보면 그런 감정을 씻고서 주님을 닮은 인애를 조금씩 실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숙되었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인애가 커져 가므로 사람에 대한 인애도 커져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처럼 현실 삶과 인간관계에서 지치고 상처받고 눌린 사람들이 찾아오면 외면하지 않고 주님 사랑으로 섬기고 말씀으로 위로하고 성령 안에서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이웃들도 자신의 처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신자를 온전히 신뢰하고 먼저 찾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룻이 보아스를 믿었던 것과 그에 대해 보아스가 인애로 보답한 것 같은 모습을 실현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교회 안에는 종교적 형식적 사랑만 넘치고, 교회 밖에는 극히 일부 사람들 사이에 윤리적 적선만 남았습니다. 그런 사랑을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가장 잘 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구제와 봉사에 열심이었기에 하나님께 그에 마땅한 복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여전히 행위 언약 아래의 율법적 사랑이지 헤세드 사랑이 아니며 자기들 선조가 범한 죄를 답습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복의 종착지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장님이 같은 장님들을 멸망의 길로 이끈다고 야단맞았습니다. 지금이 그와 거의 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교회 밖이 타락해서가 아니라 교회 안이 부패해서 조만간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죽어도 남을 복 받게 하라고 당신의 백성을 택하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만 손해보고 희생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서로 간에 참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면 신자 본인은 물론 그가 속한 공동체에도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지금 우리 스스로를 솔직히 한 번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 안에 실제로 거하기에 그분의 참 인애를 받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나를 형통케 하는 현실적 가시적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내가 그의 자녀가 됩니까? 그럼 구약의 실패한 이스라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룻처럼 최악의 경우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여호와의 처분에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인애가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또 그것을 주변에 나누는 양도 자꾸 더 많아져야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신자가 그렇지 않고는 세상의 종말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10/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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