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팝가수 돈 맥클린Donald Richard Mclean이 부른 ‘빈센트’ 란 노래 때문에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온전한 정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리고 당신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 들어야 할지도 몰랐지요. 아마도 지금은 귀 기울일 거예요.”
노랫말은 고흐의 작품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면서, 고흐의 마음과 의도를 바로 알기를 소망한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자발적으로 생 레미 요양원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에 그렸다(안재경, p.218). 그는 언제 다시 발작이 일어날 지 모르는 불안함 나날을 보냈다. 그림은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평안을 찾았다.
“오늘 아침 나는 태양이 뜨기 전에 계명성만 떠 있는 하늘을 창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단다. 그 계명성은 대단히 커 보였어. 도비니와 루소가 그렀듯이 그것은 광활한 평화와 장엄미를 간직한 친밀감을 느끼게 했단다.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느낌을 주기도 했지. 나는 이런 감정에 아무런 반감을 갖지 않는단다.”(L. 593)
정신병 증세가 있어서 요양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삶에 제약은 거의 없었다. 그는 아래층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 그리고 싶은 것은 밤 하늘이었다. 작업실은 낮에만 출입할 수 있었기에 창문 너머 깜빡이는 별 빛을 보며 상상하여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Steven p.826-7)
고흐가 별이 있는 밤을 그리고 싶어했던 마음을 친구 베르나르에게 표현하였다.
나는 아직도 지난날에 대한 기억들에 사로잡혀 있고, 씨 뿌리는 사람과 곡식 다발이 상징하는 무한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 있네. 늘 내 마음속에 있는 그 그림, 나의 별이 빛나는 밤은 언제쯤 그릴 수 있을까?(L. B07)1988. 6. 18
고흐가 10대 때 어머니 아나는 편지하였다.
“사랑스러운 저녁 별은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나타낸단다.”
고흐는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면서 밤 하늘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를 회상하였다. 그는 강둑을 따라 산책할 때마다 별들 아래 신의 음성을 들었고 별들만이 이야기하는 신성한 황혼 속에서 위로를 느꼈다.(Steven, p.712-3)
고흐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밤에 밖으로 나가 별을 그리곤 하였다.
““이렇게 힘들게 작업하니까 아주 좋다. 그래도,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종교에 대한 끔찍스러운 나의 갈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별을 그리려고 깊은 밤 한가운데 서곤 한다.”(L.543)
그런데도 많은 비평가들은 고흐의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밤 하늘의 별들이 일렁이고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를 보여준다고 오해한다. 어떤 사람은 고흐의 작품은 외계인과 접촉을 시도하는 작품이라는 식으로 황당한 주장을 한다. (안재경, p.213). 어떤 이들은 교회의 불이 꺼져 있다는 점을 들어 고흐가 기독교를 버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라영환, p.294).
고흐는 어떤 의도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을까?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 요소는 그의 편지다. 그의 편지는 그가 직접 자기 의도를 글로 표현하였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고 싶다고 하였다.
사이프러스나무 옆으로, 혹은 잘 익은 밀밭 위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고 싶다. 이곳의 밤은 지독하게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걸 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L. 474) 1988. 4. 9
그는 친구 베르나르에게 별과 천체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죽은 후 변화의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편지하였다.
우리네 삶은 실제로는 초라하다네. 우리 화가들은 보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곳, 예술을 사랑하다가는 진실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사명을 무거운 멍에처럼 메고 하루하루 구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던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므로, 수없이 많은 다른 행성이나 다른 태양에도 선과 형태와 색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여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며 마음을 놓을 수 있다네. 화가의 삶에도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거나 구더기가 풍뎅이로 변하는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말이네.
나비 화가(painter-butterfly)의 삶은 무수히 많은 별들 가운데 하나를 활동의 장으로 삼아 이루어지겠지. 살아 있는 동안 지도에서 검은 점으로 표시된 도시와 마을에 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고 나면 그런 별들에 가게 되겠지.(B08) 1888.6.23
동생 테오에게는 죽음은 천상으로 가능 교통수단이라고 하면서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라고 하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예술가, 시인, 음악가, 화가들은 죄다 경제적으로 불우한 처지였고 그러면서도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니 말이다. 최근에 네가 했던 모파상 이야기도 그 생생한 증거가 아니냐. 그러고 보니 영원히 되풀이되는 질문이 다시 생각난다. 과연 우리에게 삶 전체가 다 보일까? 혹 우리 눈에 보이는 죽음은 구의 한쪽 면과 같은 게 아닐까? 화가들만 놓고 보더라도, 죽어서 땅에 묻힌 후에도 작품을 통해 다음 세대는 물론 몇 세대 뒤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잖니.
그게 전부일까, 아니면 뭔가 더 있을가? 아무래도 화가에게 죽음은 일생 일대의 불행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 지도에서 도시와 마을을 나타내는 검은 점을 보면서 꿈을 꾸는 것처럼 나는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 꿈을 꾼다. 그리고 혼잣말로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에 그려진 검은 점에 가듯 하늘에서 반짝이는 점에 닿을 수는 없는 걸까? 기차를 타고 타라스콩Tarascon이나 루앙Rouen에 가듯이, 우리는 죽음을 통해 별에 닿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진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서 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죽어서는 기차를 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증기선과 합승마차, 철도가 지상의 교통수단이듯이 콜렐라, 결석, 결핵, 암은 천상의 교통수단이 아니겠느냐. 가만히 있다가 늙어서 죽는다는 건 걸어서 그곳까지 가는 거나 다름없다. (편지 506)1988. 6.
여동생 빌에겐 하늘은 하나님이며, 하늘엔 영원이 있다고 하였다.
휘트먼이라는 미국 시인이 쓴 시를 읽어보았니? 테오한테도 그 시집이 있을 거다. 시가 정말 훌륭한 데다 영국인들이 휘트먼의 시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 휘트먼은 미래에도, 현재에도 별빛 비치는 커다란 둥근 하늘 아래 건강하고 인간적인 사랑, 강렬하고 솔직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일하는 세상을 본다는구나. 하늘은 인간이 결국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그 무엇이지. 하늘에는 영원함이 있다. (W18) 1988. 8. 27
그러므로 이 작품은 상당히 종교적이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교회와 사이프러스 나무, 올리브 동산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모두 종교적 상징으로 사용하였다(라영환, p.295). 고흐에게 구원의 약속이란 모든 달빛 비추는 밤이나 별이 빛나는 하늘 속에 있는 위로가 되는 진리였다(Steven, p.236) 그가 위기를 만날 때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그에게 어둠 속의 빛이었다(Steven, p.826)
‘별이 빛나는 밤’에서 강조되는 선은 수직선이다. 교회의 첨탑과 사이프러스 나무는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서 해방되어 무한한 하나님과 영혼의 합이리을 이루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을 상징한다(Erickson, p.315). 사이프러스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의 재료로 알려진다(라영환, p.295).
그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면 약간의 영감이 필요하고, 지상의 것이 아닌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있어야 한다. 전에 내가 해바라기를 그린 다음 해바라기와 상반되면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을 찾다가 그게 바로 사이프러스나무라고 이야기했잖니.”(L596) 1989.6.25
고흐는 올리브 나무와 함께 사이프러스 나무를 좋아하였다. 그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여러차례 그렸다. 그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힘이 들더라도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볼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Guzzoni179).
데렉은 “날씬한 교회 지붕이 마을을 우주와 연결시켜 주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니 고흐의 작품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머리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놀라운 빛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는 것은 어두운 허공과 두려움이다. 그래서 「별이 빛나는 밤」은 빈센트의 예술을 상징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감상하고 음미할 가치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다.”(Derek, p.220-1)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밤 하늘의 별은 영원함을 생각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고 하였다.
여전히 달은 빛나고, 태양과 내가 사랑하는 저녁별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하는구나. 저걸 보니 ‘보라 나는 언제라도 세상 끝까지라도 너희와 함께 있도다’라는 말이 떠오른다.(L101a) 1877. 6. 12
“반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에서 거룩한 사랑과 은총과 우주의 광대함을 형상화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덧없는 삶을 영원불변한 우주의 시간과 대비시켰다. 반 고흐는 별에서 희망과 위안을 얻었다. 일정한 경로로 늘 똑같이 이루어지는 별들의 순환과 달의 위상 변화는 곧 불멸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Hope, p.37)
결론적으로 ‘별이 빛나는 밤’은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영원의 문에 도달하는 세상을 이어주는 작품이다(Erickson, p.322)
빈센트는 죽음은 생명과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이해한 죽음에는 슬픔이 없다.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띤 이 작품은 아주 두럽게 칠해졌는데, 소재는 아름답고 단순하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는 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했단다. 그건 그가 베어들이는 밀이 바로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란다 그러므로 전에 그린 〈씨 뿌리 는 사람〉과는 반대되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단다. 태양이 모든 것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란다(L 604)1889년 9월 5-6일
‘별이 빛나는 밤’은 반 고흐가 고통을 극복하며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나님과 신비로운 합일의 갈망을 고취시키는 몽환적인 걸작이다((Erickson, p.314).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땅과 피조물들의 잃어버린 복음을 재발견하였다면 , ‘별이 빛나는 밤’은 “반 고흐의 영적 순례가 완성되어 무한한 하나님과의 결합이라는 신비주의적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Erickson, p.308).
Derek Fell, Van Gogh’s Women, His Love Affairs And Journey Into Madness(반고흐, 사랑과 광기의 나날), 최일성 옮김, 세미콜론, 2007.
Edward Cliff, The Shoes of Van Gogh, A Crossroad Book, 2016.
Erickson Kathleen P. , At Eternity’s Gate : The Spiritual Vision of Vincent Van Gogh(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안진이 옮김, 청림출판, 2008
Guzzoni Mariella, ‘Vincent’s Books’(빈센트가 사랑한 책) 김한영 옮김, 이유출판, 2020년
Hope Wemess, “Whitman and van Gogh : Starry Nights and Other Similarities”. Walt Whitmand Quarterly Review 2, no4(Spring 1985), p37
Steven Naifeh and Gregory White Smith, Van Gogh : The Life(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최준영 옮김, 민음사, 2016.
Vincent Van Gogh, Letters De Vincent Van Gogh(고흐 영혼의 편지), 김유경 옮김, 동서문화사, 2019
Vincent Van Gogh,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8
라영환, 반 고흐, 꿈을 그리다, 피톤치드,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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