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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27. 2022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오해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우니라” 논어의 위정 편에 나오는 말이다.

배움은 생각을 동반하여야 한다.

생각 없이 배우기만 하면, 편견과 독선에 빠지기 쉽다.

둘째 딸이 독일에서 공부할 때, 문화 충격을 받았다.

한국 대학에선 질문하여도, 대답을 듣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혹시나 교수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여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신입생 시절, 멋모르고 교수의 의견에 반박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에선 교수와 다른 생각을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점수를 받지 못하였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배움은 지식을 전수받는 자리가 아니란다.

배움은 생각을 서로 나누는 자리다.

교수는 때로 진지하게 논쟁을 유도하였다.


한때 독일도 한국처럼 주입식 교육을 하였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국민 90% 이상이 히틀러에게 맹종하였다.

히틀러가 잘못된 명령을 하여도, 사람들은 생각 없이 그것을 따랐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는 유대인 학살에 적극 참여하였다.

전쟁 후, 아이히만이 잡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을 때,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그 모든 과정을 참관한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썼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근원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희대의 악마로 여겨지는 아이히만을 깊이 연구하므로 악의 근원을 밝히고자 하였다.

재판과정을 자세히 지켜본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의외였다.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위에서 내린 명령에 아무런 생각 없이 복종했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은 그의 생각하는 무능력함, 즉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선전 문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였다.

그는 히틀러의 명령에 단순 복종한 것을 넘어서서 히틀러의 생각 틀에 갇혀있었다.

그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말이 없었다.

한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의 죄는 바로 자기 생각이 없음이었다.

위에서 명령한 사람의 생각만 하였지, 그 명령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편 사람들의 사고 틀에 갇혀서, 다른 편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였다.

우리 편 생각만 옳고, 다른 편 생각은 모두 틀렸기 때문에 그들을 없애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생각 없음은 단순히 생각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 않다.

그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생각 없음이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생각한다는 것은 타인을 배려한다는 뜻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개미들은 인간을 향하여 이렇게 질타하였다.

“당신들은 단 한 가지 방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오로지 당신들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본다. 당신들은 과거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을 측정하고, 틀 안에 넣고, 분류하고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눈다. 당신들은 모든 것을 잘게 자르면 자를수록 더욱더 진리에 다가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매미를 잘게 자른다고 매미가 왜 노래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난초 꽃잎의 세포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한다고 해서 난초 꽃이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처지가 되어 보아야 하고 그것들과 한마음이 되어 보아야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의 입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타인을 배려하거나 생각하는 데 무력한지 말하였다.

인간은 편견의 노예다.

특별히 생각의 폭을 넓혀주어야 할 교육이 편견을 고착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교육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요즘 SNS나 유튜브는 편견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SNS에서 ‘좋아요’를 클릭하므로 자기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맺는다.

자신과 생각이 좀 다르면 클릭 한 번으로 친구 끊기를 한다.

유튜브는 알고리즘에 의해 같은 관점의 영상이 계속 노출된다.

편견의 고착화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면서, 자기 생각이 옳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건 아이히만이 저지른 잘못과 다를 바 하나도 없다.

외국여행을 하다 보면 늘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깃발을 든 가이드 뒤에 유치원생들처럼 졸졸 따라가는 단체 관광객이다

한껏 들뜬 마음에 큰 소리로 떠드는 관광객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호기심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두려움이다.

혹여나 일행에서 이탈하면 어떻게 하나?

자유 시간을 줘도, 무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조심조심 다닌다.

그들은 가이드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말해주는 것만 듣는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보고 찾으려는 탐구적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단체 관광 여행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혼자 모르는 곳을 여행할 때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여행지도이다.

지도란 여행자들의 경험이 모인 결과물이다.

과거에 여행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려 놓은 것이 지도다.

비록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작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 지도 뒤에는 수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지도에는 선배들의 모험, 좌절, 아픔, 만남, 교제, 기쁨이 진득하게 묻어 있다.

지도는 선배들의 모든 경험을 총 집합하여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 지도에 의지하여 우리만의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것이 후배들에게 전수되어, 또 다른 모험과 도전을 하게 만들 것이다.


보수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을 많이 들었다.

교수들은 자유주의 신학 근처에는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나는 그러한 가르침이 싫었다.

그들이 왜 그리 비판받아야 하는지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었다.

나는 해방 신학, 민중 신학, 자유주의 신학 등 비판받는 것들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치원생들처럼 우향우 좌향좌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물론 앞선 선배들의 통찰력과 경험에 근거한 지도는 필요하다.

그렇지만 나도 여행 중에 만나고 경험해야 할 나만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의 학문 여정이다.


유튜브를 하면서 근본주의 보수 우파 신학을 공부하였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와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신학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고 적대시한다.

신앙의 편향성은 폭력적이고 위험하다.

대량 학살은 지식의 편향성이 신앙으로 고착될 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한국 교회가 편향성을 보일 때마다 두렵기 짝이 없다.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믿는 대로 기독교가 진실하다면, 이제 시험을 받고 판단 받아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어느 신학자가, 어느 목회자가, 어느 그리스도인이 자기 생각은 하나님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자신은 진리를 완벽하게 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허물 많은 인간이다.

날마다 죄를 탐하며, 죄에 걸려 넘어지는 죄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토론하자고 요청하신다.

너희가 과연 옳은지 그른지.

어느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는가?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도 하나님 앞에선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100%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100%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약점이 많고, 관점의 한계가 있기에 대화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생각, 상대방의 관점을 듣고 서로 대화해야 한다.

때로 화가 나서 밥상을 엎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대화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대화함으로써 생각의 폭을 넓혀야,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고 생각 틀을 넓혀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하였다.

https://youtu.be/S3Cc2scO6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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