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성경해석
“나의 예술은 곧 나의 삶이다.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생활에 충실한 인간은 뛰어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고 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은 예술가가 아니며 결코 예술가가 될 수도 없다.”
1963년 워싱턴 D.C. Meridian House에서 샤갈이 한 연설 중 일부분이다.
러시아 비테프스크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난 샤갈은 자신의 삶을 예술로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유대교의 하시디즘에 심취한 아버지와 자녀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흔히들 샤갈은 하시디즘에 큰 영향을 받았다지만, 샤갈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거칠고 말이 별로 없으며 엄격한 유대교를 강조한 아버지를 싫어했다.
오히려 그의 미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준 어머니에게 언제나 감사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는 그림 공부를 위해 1906년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예술의 중심지인 상페테부르크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은 통행증이 없으면 거주 지역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임시통행증을 얻어 예술학교에 겨우 다닐 수 있었다.
그가 유대인으로 겪어야 했던 고난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샤갈이 77세 되던 해, 그는 이미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샤갈에게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의 천장화를 의뢰하였다.
그때 프랑스 언론에서 유대인 출신인 샤갈에게 프랑스 문화재를 맡긴다고 수많은 논란과 비난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유대인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샤갈은 더욱 큰 위험을 느꼈다.
그의 그림 3점이 독일군에 의해 불살라졌고, 독일에 있던 그의 그림은 헐값으로 팔려나갔다.
그는 폴란드 여행 중에 ‘더러운 유대인’이란 모욕을 당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다시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온갖 차별과 탄압을 경험하고 이주를 하면서도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그는 염세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성경은 문학 작품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모든 영감을 얻었습니다. 저도 제 삶과 예술을 위해 늘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서양의 모든 화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도 성경은 물감이 담긴 그릇과 같았습니다. 다양한 색깔의 알파벳이 담긴 성경이라는 물감 통에 제 붓을 담가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도 나치에게 고통받는 동포 유대인을 생각할 때마다 괴로워했다.
그는 ‘나의 눈물’이란 시를 통해 고통에 함께하지 못하는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나는 숨을 쉽니다. 나는 살아갑니다.
나는 찾습니다. 나는 찾습니다. 그대를
나는 믿습니다. 그대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그대는 다른 곳에 계시지요.
무엇 때문이죠?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듣습니다. 주변에서조차.
길과 숲이 하나씩 지나갑니다.
미소 지으며 하루를 시작하지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를 기다립니다.
무엇 때문이죠?
밤낮으로 나는 십자가를 집니다.
저들은 나를 밀어뜨리죠. 나를 끌어당기죠. 억지로.
이미 밤은 어두워 나를 감싸는군요.
그대는 여전히 날 밀쳐내시는군요. 하나님!
무엇 때문이죠?
1938년 11월 9일 나치가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할 때 프랑스에 있던 샤갈은 “하얀 십자가 처형”이란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유대인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 중앙에 그렸다.
샤갈은 십자가 좌우로 핍박받고 고통당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한가운데 희망을 상징하는 흰색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렸다.
샤갈에게 예수는 모든 아픔과 고통을 감당하시는 분이었다.
미술과 신학의 대화를 추구했던 독일의 신학자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샤갈의 그림에 그리스도교적 구원의 표상이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십자가가 구원의 표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구원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유대인의 기도 숄인 ‘탈리쓰’이기 때문에 비판하는가?
유대인이 그린 십자가라서 비판하는가?
샤갈은 이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죄목으로 2,000년 동안 핍박받았던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화해와 평화, 용서와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수많은 고통을 온몸으로 겪은 샤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는 십자가 옆에 사다리를 그려넣었다.
이 사다리는 중세기 전통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사다리이다.
샤갈은 폭력과 살인, 핍박과 차별, 소외와 분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고통당하신 예수께서 오셔서 평화와 화해와 사랑을 나누기를 소망하였다.
사다리는 샤갈의 그런 소망을 담고 있다.
샤갈은 십자가와 관련하여 이런 시를 썼습니다.
1. 매일 나는 십자가를 진다.
그들은 나를 손으로 밀고 끌고 다닌다.
이미 밤의 어둠은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왜?
2. 나는 위층으로 달려간다
내 마른 붓이 있는 곳으로
나는 그리스도처럼 처형을 당한다.
이젤에 못 박혔다.
샤갈은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고통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평화가 공존하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그의 희망이 아니더라도, 사랑과 평화와 화해를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예수님을 이 땅에 모셔와야 한다.
더는 차별과 갈등과 분쟁과 싸움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십자가에 올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