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Sep 18. 2021

카라바조와 다윗과 골리앗

화가들의 성경해석

1606년 5월 말 어느 저녁, 새까만 눈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남자가 결투용 칼을 차고 비장하게 서 있었다.

맞은 편에는 그보다 10살 아래로 보이는 20대 중반의 남자가 칼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두 남자의 결투는 한 명의 여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말로 싸우다 마침내 생명을 걸고 위험한 칼싸움을 하였다.

35세의 남자는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화가 카라바조였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싸움판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처참한 혈투 끝에 청년은 카라바조의 칼에 죽고, 카라바조도 머리를 얻어맞아 상처가 났다.

졸지에 살인자가 된 카라바조는 도망을 쳤다.

카라바조에게 현상금이 걸렸고, 잡히면 단두대에 머리가 잘릴 판이었다.

카라바조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라바조는 뛰어난 화가였기에 그를 보호하고 지원해줄 귀족이 있을 듯 했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귀족을 찾아 이탈리아 남동부 콜로나 가문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가롤로에서 팔레스트리나로, 또 나폴리로 계속 도망하였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살인자를 보호해줄 만한 담력과 권력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았다.

카라바조는 몰타 섬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몰타에는 기사단이 있었고, 그곳의 통치자인 위그나코르에게 그림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린 그림이 ‘성서를 쓰는 성 제롬’과 ‘세례요한의 참수’다.

위그나코르는 그림에 만족하여 카라바조에게 몰타 기사단의 망토를 하사하였다.

이제부터 몰타기사단이 카라바조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성서를 쓰는 성 제롬

그쯤되면, 마음을 고쳐잡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 데, 카라바조는 싸움꾼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몰타 기사단의 기사 한 명과 난투극을 벌였다.

그 싸움에서 서로 험한 말이 오갔고,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위그나코르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카라바조는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감옥에서 탈출한 후,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도망하였다.

그는 시라쿠사에서 메시나로, 그리고 팔레르모르 계속하여 도망했다.

그의 삶은 피곤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그렸는데, 시라쿠사에서는 ‘루치아의 성녀의 매장’을 메시나에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팔레르모에서는 ‘성 로렌스와 성 프란시스가 함께한 양치기들의 예배’를 그렸다.

나사로의 부활

카라바조는 도망 다니면서 심신이 극도로 약해져 갔다.

그는 공포에 사로잡혀 손에 단검을 쥔 채 잠을 잤다.

그가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단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예술적 감각과 열정과 불굴의 의지 때문이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에게 그림을 그려 바치므로 죄 용서받기를 원했다.

그때 그린 그림이 ‘성 우르술라의 순교’,’세례요한’등이었다.

성 우르술라의 순교

1609년 10월 그는 추격자들에게 둘러싸여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다.

너무도 심하게 다쳐,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죽을 뻔했지만, 복수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도 싸움에 지쳤고, 도망자의 삶에 한계를 느꼈다.

더는 죽고 죽이는 싸움과 복수와 원한에 사로잡혀 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때 그린 그림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이 그림은 이중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소년 다윗은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을, 골리앗은 몰타 기사단에 얻어맞은 현재의 모습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많은 목회자는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베고 높이 쳐들어 승리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설교한다.

그 순간 온 이스라엘이 크게 기뻐하였고, 블레셋 군대는 심히 놀라 도망하였다.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고, 이스라엘의 처녀들은 다윗의 승리를 소리높여 노래하였다.

승리에 도취하면,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패배자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지 못한다.


한때 카라바조는 잘나갈 때가 있었다.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이 그를 줄지어 찾았다.

그의 그림은 지난 100년 동안 미술계를 지배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을 거부하고 빛의 효과를 극대화했으며,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물감을 직접 화폭에 그리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의 참신하고 혁신적인 방법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의 추종자들을 ‘카라바지스타’라 하였다.

그는 전도유망한 화가로 부귀와 명성을 손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안에 있는 악한 면, 즉 급한 성격과 분노는 그를 망가뜨렸다.

살인자로 쫓겨 다니며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 용서에 대한 희망과 함께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와 탄식이 교차하였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렸다.

골리앗의 머리를 자른 소년 다윗은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슬퍼 보인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눈에 연민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다 꺼져가는 눈을 반쯤 뜨고 입을 벌린, 뭉그러진 골리앗의 얼굴은 삶의 허무를 표현하였다.

그는 용서받기 위해 자신의 진짜 머리 대신, 자기 얼굴을 그린 그림을 내밀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의 사형은 취소되었고, 그는 로마로 길을 떠났다.

그가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항구에 도착했을 때, 위병은 그를 다른 현상 수배자로 오해하여 체포하였다.

이틀 후 풀려나긴 했지만, 타고 왔던 배는 이미 로마로 떠났고, 자신의 짐은 물론, 죗값을 덜기 위해 마련한 그림 선물마저 다 잃어버렸다.

그는 실망하였다.

지글지글 끓는 여름 더위에 다음 정박지인 포르투 에르콜레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바닷가를 달렸다.

그러나 그 배도 떠났고, 카라바조는 바닷가에 쓰러졌다.

열벙에 걸린 그는 1610년 7월 18일 40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은 성공에 너무 도취하여 자신의 삶을 망치지 말라고 교훈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고 기고만장하다간 쓰러질 수밖에 없다.

골리앗의 얼굴 속에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카라바조가 그린 이유는 충분히 이룬 셈이다.

https://youtu.be/3QmQs6RDjU4

작가의 이전글 화가 조토보다 못한 설교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