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주관성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그리고 이 양자가 맺는 관계의 성격 내지 특성을 일컫는다. 즉, 나는 나 홀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는데, 이때 이 서로-함께-존재함의 성격이 대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상호주관성을 둘러싼 철학적 쟁점이다. (본문 중)

김동규1)

 

우리 시대의 탁월한 현상학자 중 한 사람인 단 자하비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곧 “‘Intersubjektivität’라는 독일 용어는 최초로 요하네스 폴겔트의 1885년 작품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뒤 제임스 워드가 채택해 1896년에 처음 영어로 사용되었다”(Zahavi 2014, 97[180])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자하비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이, 상호주관성은 후설과 여타 현상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세심하게 발전되었고, 현대 철학의 주요 주제이자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상호주관성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타자, 그리고 이 양자가 맺는 관계의 성격 내지 특성을 일컫는다. 즉, 나는 나 홀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는데, 이때 이 서로-함께-존재함의 성격이 대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상호주관성을 둘러싼 철학적 쟁점이다. 후설은 상호주관성과 관련해서 기본적으로 일인칭 관점의 ‘나’로부터 타자를 향하는 사태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 각 주체는 타자에게 접근할 때 나로부터, 나 아닌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지향적 체험의 맥락에서 그 또는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를 맺는다는 말, 타자를 체험한다는 말에는 타자의 신체와 마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타자, 곧 나와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점이다. 사물이 고정된 방식으로 있으며,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 있는 반면, 다른 인간에 대해서 자아는 타자의 신체와 마음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타자를 나와 유사한 존재로 상정하여, 나의 체험 방식과 마음 상태의 복사물 내지는 유사물로서 타자를 이해한다. 예를 들어,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때, 그 웃음은 즐거운 마음 상태의 반영일 수 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나 연인을 보면서 저절로 웃는 얼굴이 표현된다면, 그것은 나의 즐거움과 호감 어린 마음이 웃음과 기쁨의 신체적 표현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인의 웃음에 대해서도 그것을 나의 웃음 행위에 비추어 그 또는 그녀의 마음 상태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보고 기분이 좋아질 때 웃는 표정이 나오니 저 사람도 마찬가지로 친구나 연인을 보고 기쁜 마음에 웃는 모습이 표정에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타자의 주관적 마음 상태를 이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설이나 다른 현상학자들은 이런 식의 상호주관적 이해 방식이 타자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위에서 설명한 유비 추론을 기반으로 삼아 타자를 이해한다는 게 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결정적으로 우리가 나의 체험에 대한 유비적 추론으로 타자의 마음과 삶을 이해한다고 하면, 그것은 추론이지 실제로 타자를 체험하는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후설과 여러 현상학자는 이런 식의 이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제로 타자를 타자 자체로 경험하는 것이지, 나의 유비적 체험의 추론을 미리 전제하거나 입증할 수도 없는 마음의 개념이나 형식, 이를테면 선험적 범주 같은 것을 활용해서 타자에게 접근하는 게 아니다. 상호주관성 안에서의 체험은 추론이 아니라 나의 체험 그 자체이다. 즉, 나는 나의 일부가 아닌 타자를 그 자체로 경험한다는 점에서, 나를 넘어서 존재하는 이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에는 나의 이성적 추론에 앞서, 신체적 실존의 경험이 놓여 있다. 즉, 나는 나의 다른 행동이나 마음 상태를 이리저리 추측하는 작용을 해볼 수는 있지만, 그 모든 작용이 상호주관적 체험의 본질은 아니며, 근원적으로 타자는 신체-존재로 나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신체적 경험에서 내가 아닌 또 다른 자아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객관성은 고유한 의미의 자아에 속하지 않는 것에, ‘나 이외의 누구’라는 형식으로 있는 나의 고유한 자아가 아닌 다른 자아에 구성적으로 소급해서 관련된다. 그것은 ‘다른 자아’라는 형식으로 있는 비자아다”(Husserl 1974, 248).

 

즉, 나는 나와 다른 자아가 있음을 그 자아의 신체적 나타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해한다. 추론이나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타자를 나는 늘 경험한다. 물론, 우리는 나와의 유사성을 통해, 유비적으로 타자의 신체적 나타남을 경험함으로써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추론이라는 형식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조금 풀어서 얘기해 보자면, 나는 나의 마음과 신체-주관으로부터 타자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의 유사성 가운데 타자를 이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타자는 나를 넘어서, 즉 나를 초월해서 존재하므로, 내가 타자를 나에게 짝을 지으려는 나와의 유비와 짝지음 가운데서 타자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우리는 “자아와 타자는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원래부터 ‘짝지어진’ 것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자아와 타자는 짝으로 구성되어…주어진다”(Husserl 1950, 142)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타자는 이러한 나의 접근 방식을 회피할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자는 “나의 근원적 영역에서 원본적으로 인식 작용의 결과가 아니고”, 또한 “완전하게 현전할 수 없는” 인격으로 존재한다(Husserl 1950, 142, 148). 즉, 나는 타자를 경험하면서 나에 비추어 나와의 유비를 따라 타자를 이해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타자가 나에게 주어지는 차원에서, 그 타자의 신체적 나타남과 마음 상태는 언제나 나의 기대에 어긋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나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후설의 상호주관적 체험의 기본 양식이다. 즉, 타자는 나의 인식 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라 나와의 실재적인 관련성 가운데 체험되어야 할 존재다. 만일 내가 기대한 대로, 내가 타자를 나에게 짝을 맞추어 이해하는 방식 그대로 타자가 나타나고 바로 그렇게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한다면, 나는 굳이 타자에 대한 경험을 색다른 것으로 상정할 필요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타자는 언제나 내가 예견하는 방식 그대로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게 타자 경험의 특이성이고, 후설의 상호주관성은 바로 이 점을 포착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와 다른 모든 “타자도 역시 자신의 신체를, 곧 거기에 있는 신체이자 즉각적으로 자신만의 본질을 갖는 것으로 파악되는 신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Husserl 1950, 152). 이처럼 타자는 자신만의 본질을 갖는 고유한 존재이며, 나는 이러한 거리 속에서 타자를 나와의 유비 속에, 나와 다른 자아로 실질적으로 체험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할 뿐이다. 즉, 상호주관성은 나를 중심으로 삼아 내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타자가 일정하게 나와 거리를 둔 다른 자아이며, 나는 이 거리를 완전히 삭제할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낸다.

 

 

후설 이외의 다른 현상학자들은 상호주관적 이해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여러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막스 셸러의 경우 공감 또는 동감에 대한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 바 있다. 상호주관성 아래 나와 다른 자아를 이해한다는 것은 타자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한다는 체험 사실을 포괄한다. 다른 사람이 질병의 고통이나 어떤 몸과 마음의 상처로 인해 괴로워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태를 그저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타자의 신체적 표정의 일그러짐이나 흔들림, 비틀거림을 보면서 정서적으로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게 된다. 셸러는 이것을 동감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셸러는 조금 인위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공감과 동감을 구별하는데, 공감이 타자에 대한 지각적 이해의 차원에 속한다면, 동감을 그러한 이해에 정서적 반응이 첨가된 타자 경험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어색한 구별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공감과 동감을 별로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셸러의 의도를 들여다보면 이 구별은 매우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공감의 능력’을 하나의 좋은 성품이나 도덕적 덕목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만일 공감이 타자의 슬픔이나 아픔, 기쁨에 대해 정서적으로 잘 반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매우 의아한 공감의 사례를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고통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른 독재자의 죽음이나 그 독재자가 처벌받는 현상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거나 마음 아파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실상 이런 식의 반응을 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자식을 아무런 감정 없이 살해한 후, 이 행위가 발각되어 처벌받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사람은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하므로, 이제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과 헤어져야 한다. 결국 그 사람은 혼자 남겨질 자식의 아픔을 상상하며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자식의 미래를 다른 이에게 부탁하기에 이른다. 이런 식의 공감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점에서 사실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공감의 능력’이란 말은 여러 빈 공백을 가지고 있는 말이며, 그다지 엄밀하게 사용되는 말도 아니며, 여기에는 특정한 도덕적 감수성이 결부되기도 한다. 이런 난점을 고려하면서 셸러는 더욱 엄밀한 방식으로 공감이나 동감을 규정해야 한다고 보며, 일차적으로 이러한 사태에 도덕적 가치를 결부하기를 일단 피해야 한다고 본다. “동감윤리학은 행동을 관찰하는 자(또는 타인의 체험과 태도에 반응하는 자)의 태도에서 도덕적 가치를 도출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도출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출발하는 오류를 범한다”(Scheler 18[35]). 즉, 극단적인 경우를 떠올려 볼 때, 타자를 고문하는 사람이나 타자를 의도적으로 조종하려거나 착취하려는 이들이 공감적 판단을 더 잘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야 타자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어떻게 해야 타자가 고통받을 수 있을지를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그런 부도덕한 일을 더 잘 자행하는 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공감과 동감을 그 자체로 올바로 이해하고, 규정하려면 일련의 도덕적 가치 판단에 대한 판단 중지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의도하는 전망이나 결과를 내세우지 말고, 어떤 경우 공감과 동감이 일어나는지를 더 섬세하게 파헤쳐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공감과 동감의 상호주관적 체험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셸러는 공감과 동감을 매우 섬세하게 구별하게 세심한 분석을 제공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해나 공감보다는 존재론적 체험이나 존재 방식의 공유로서 상호주관성을 이해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더불어-있음(Mitsein)의 양식 아래 공공의 세계, 또는 공동 세계에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그저 나 홀로 길을 걷고 몸을 쓸 때조차도 그러한 더불어-있음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잘 경작되지 않은 땅이 그 땅의 소유자나 소작농을 대신 나타낸다. 정박하고 있는 범선은 특별히 그 배에서 여행하는 사람을 대신 나타내고 있다.…그들은 그들의 세계-내-존재에서 거기 있으며, 또 그들이 이런 식으로 나에 대해 거기 있는 한, 그들은 나, 세계-내-존재의 이 존재로 있는 이 나 자신과 함께 거기 있다. 그들은 하나의 세계 안에 나와 함께 거기 있다”(Heidegger 1985, 330).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실존론적 존재 경험은 이미 타인과 더불어 있는 공동 세계 안에 함께 있다는 현상학적 사실로서 일어난다. 내가 커피숍에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다고 해도, 이미 그 차를 떠받치고 있는 탁자, 차를 만들어 준 사람과 나는 이미 함께 있는 것이다. 비록 인격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맺지 않았다고 해도, 익명적 차원에서 나는 타자와 함께 있다.

 

이처럼 상호주관성은 나와 타자의 다양한 경험의 차원을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용어로서, 내가 더는 원자론적 개인이 아님을 암암리에 전제한 말이며, 타자가 나로 환원될 수 없고, 타자는 사물이 아니며, 사물이 아닌 인간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물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석이 필요함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주관성 개념은 위에서 보았듯이 타자에 대한 경험은 그것이 인격적이건, 익명적이건, 적어도 주체와 타자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보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경험이라는 점도 이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논점이다.

 

그리스도교의 견지에 보면, 이런 상호주관성과 거기서 비롯하는 다양한 타자 이해에 관한 연구는 종교적 삶의 중요한 차원과 관련해서 큰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나 거의 모든 종교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념상 그리스도교의 타자 이해는 적지 않은 경우, 특정한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이를테면 교리와 교의적 가르침에 근거해 타자를 향한 일정한 판단과 평가를 미리 전제한 다음에 타인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죄인이라거나 의인이라는 방식의 규정과 판단을 처음부터 내려버린 채로 관계를 설정하려는 다소간 폭력적인 태도가 그리스도인에게서 흔하게 발견된다. 이에 앞서 언급한 현상학자들의 타자 경험에서 기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는 판단 중지라는 현상학적 방법의 조치를 배울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상호주관적 체험을 비롯한 현상학적 경험을 할 때, 우리의 편견이나 사변적 전제를 괄호치고 유보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또 한 편의 글이 필요하므로, 다음 글에서는 판단 중지라는 조치를 포괄하는 현상학적 환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문헌

 

Heidegger, Heidegger (1974). Prolegomena zur Geschichte des Zeitbegriffs (Sommersemester 1925). Gesamtausgabe 20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Husserl, Edmund (1950). Cartesianische Meditationen und Pariser Vorträge. Husserliana I. Ed. Stephan Strasser (Den Haag: Martinus Nijhoff).

 

Husserl, Edmund (1974). 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Versuch einer Kritik der logischen Vernunft. Husserliana 17. Ed. Paul Janssen (The Hague: Martinus Nijhoff).

 

Scheler, Max (1973). 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 (Bern/München: A. Francke AG Verlag)

 

Zahavi, Dan (2014). Self and Other: Exploring Subjectivity, Empathy, and Sham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국역본: 『자기와 타자: 주관성·공감·수치심 연구』. 강별화 옮김(파주: 글항아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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