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가 신자들의 합심기도로 끝나지 않는다.(요15: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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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오직예수인가

코로나 사태가 신자들의 합심기도로 끝나지 않는다.(요15:16-20)

왜오직예수인가

 

 

(요15:16-20) 코로나 사태가 신자들의 합심기도로 끝나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16-20)

 

코로나를 종식시켜 달라는 합심기도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큰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멀쩡한 직장을 잃고 당장에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 자들도 많습니다. 정말로 여태껏 살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누구에게나 고통이 되는 방식의 삶이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데도 강요되고 있습니다. 언제 이 사태가 종식될지 관련 과학자나 의료진들조차 확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 신자들이 하나님께 이 재난을 어서 빨리 끝내달라고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재앙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우리 잘못을 되돌아보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참된 예배로 회복해야 할지 열심히 토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아주 좋은 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인지라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이 새겨듣고 삶에 실천해야 할 진리입니다. 주님은 신자가 되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당신께 속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자의 정체성과 삶이 이전과 정반대로 바뀐 것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번 코로나 사태에 종교적 요소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신자가 고난에 대해 어떤 인식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으므로 우리가 코로나에 올바르게 대처하고 있는지 본문에 비추어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아셔야 할 사항은 주님은 코로나 같이 누구나 겪게 마련인 현실적인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가장 큰 고난인 질병과 가난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는 반응을 보인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질병을 고침 받으려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을 뒤로 하고 다른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막1:38, 눅4:43) 불치와 불구를 기적적으로 치유해 준 후 허다한 무리가 따르자 치유는 완전히 뒷전이고 산상수훈의 설교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첫마디가 질병치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로 좋은 복 여덟이 있는데 그 첫째가 심령이 가난해져서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마4:24-5:3)

 

마리아가 옥합의 향유를 깨어 주님의 발을 씻어주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훨씬 옳은 일이라고 분개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마26:11) 심지어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정복해 지배 수탈하고 있는 로마제국에 대해서 일절 벌주거나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가이사와 성전 둘 모두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했습니다.(마22;21)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하므로 백성들로 가난에 더 쪼들리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코로나 사태처럼 예수님 당시에 재산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에게 공통적으로 가해졌던 고난은 로마의 압제였습니다. 주님은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시도도 하지 않았고 잘못이라고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신자들이 코로나를 어서 빨리 종식시켜 달라고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아무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과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이 그런 현실적 고난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주러 오셨다고 익히 배워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모든 고난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척한 죄 때문이기에 죄 문제부터 해결하시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고통은 믿음과 무관하게 모든 세대의 모든 이들에게 일생토록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란 당신께서 택하여 당신께 속하게 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당신을 미워했듯이 신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신자는 모든 사람이 겪게 마련인 일반적 고난 위에 새로운 고난이 하나 더 추가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주제입니다. 대체로 믿음을 갖는 첫째 이유는 삶에서 겪는 힘든 일을 이겨내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정반대로 믿음을 가진 너희 모두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두 배로 힘든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고난에 대해서 가장 먼저 뜯어 고쳐야 할 인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쉽게 말해 교회에서 새벽마다 병을 고쳐 달라, 돈을 벌어서 삶이 조금 더 여유가 생기게 해달라는 것들은 신자가 기도해야할 일차적이고 중요한 제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해결해야 할 인간이 만든 고난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해라고 가르치긴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하루 끼니를 때우는 일이 삶의 첫째 과제 내지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만 해도 미국정부에서 일인당 1200불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식량도 많은 단체에서 무료로 나눠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가난과 질병이 현실 삶에서 가장 심각한 위험요소였던 때에 주님이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고 했음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내려주셨듯이 어디까지나 일용할 양식이지 쓰고 남을 정도의 풍요와 형통을 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 앞에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길 먼저 간구하라고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조차 없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굽어지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마6:33,34)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코로나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주도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통치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분이 능동적으로 주도한 것보다 수동적으로 허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당신께서 수동적으로 허용한 것이기에 그 해결도 수동적으로 인간에게 맡겨 놓습니다.

 

수동적이라고 해서 세상을 바로 잡을 하나님의 권능이나 의지가 약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순히 능동적으로 주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하신 뜻과 계획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침 지난 금요일에 존 파이퍼 목사가 코로나 사태에 수억 가지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는데 그중에 신자가 꼭 깨닫고 실천해야 할 일곱 가지에 대한 전자책을 발간했습니다.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 받게 했으므로 저도 곧 읽어볼 예정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환난이나 불행의 대부분은 그 근본원인이 인간의 탓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오직 자신의 풍요와 안락만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인간 세상은 서로 먼저 최고 좋은 것을 최고로 많이 차지하려는 무한 경쟁의 터가 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시기 질투 경쟁 저주 다툼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인정하긴 싫어도 엄연한 진리이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불신자들마저도 실제로 체감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창세기에서부터 세상 고통은 인간인 너희 책임이니 너희가 고치라고 냉정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을 거역하고 타락하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3:18,19)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땅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너희의 힘든 노동으로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따져보면 가난은 너희 잘못으로 생긴 것이니까 너희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코로나 사태는 완전히 인간이 잘못한 탓입니다. 박쥐를 식용으로 먹었고 또 그것을 연구하는 중국 우한의 바이러스 연구소의 실수라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타당한 분석입니다. 공교롭고도 은혜롭게 율법은 박쥐를 먹지 말라고 이미 3500여 년 전에 금했습니다.(레11:19, 신14:18) 지금 중국만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세계인들이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과 나라별로 탐욕이 앞서서 무차별적으로 지구환경을 오염시킨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근본적인 원인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보다 더한 재앙이 중국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원인이 인간에게 귀속되는 재난은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마침 지난 수요일이 지구의 날이었는데 이번 사태로 차가 다니지 않고 공장 가동 등이 일시 중단되니까 대기오염으로 최고로 악명 놓은 인도 뉴델리 시에 푸른 하늘이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과학자는 의료기기외 백신을 개발하고 일반인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힘을 합쳐 구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앞으로 처음 살아보게 될 삶의 방식에도 하나님 뜻이 거룩하게 실현되도록 전 인류적인 회개와 개선의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그 일을 교회와 교인들이 가장 앞서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를 종식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교회의 예배를 회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갖고 있는 아주 잘못된 신앙 행태가 하나 있는데 그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자기가 실수 한 것, 잘못한 것, 욕심과 죄로 타락한 것 까지도 전부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뻔뻔스럽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엎질러진 물도 다시 담을 수 있는 분이긴 해도 우리가 고의로 최소한 빤히 그렇게 될 줄 알고 엎질러 놓은 것까지 뒤치다꺼리해주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죄나 허물은 하나님 앞에 당연히 참회의 기도는 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니 그보다 먼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스스로 뼈를 깍듯이 고쳐나가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의 근본 자세

 

신자가 일생을 두고 행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것 두 가지입니다. 열성적 종교 활동이 하나님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그분이 사랑하는 만큼 똑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심히 좋고 아름답게 창조하셔서 인류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그 아름다웠던 원래 상태로 보존 유지할 책임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에게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가장 두드러질 변화는 대면적인 개인적 친밀한 교제가 대폭 사라지고 점차 매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가장 두드러진 징조입니다.(딤후3:2-5) 그럴수록 신자는 온라인 오프라인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찬바람이 몰아칠 인간관계에 성령의 따뜻한 바람이 역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定意) 내렸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택해서 세상에서 따로 불러낸 자라고 합니다.(16절a) 인간 쪽의 필요나 이유로 하나님을 찾아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믿음이 하는 역할도 너무나도 당연히 가난 질병 고난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도 그것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계기가 고달픈 삶의 탈출구를 얻으려는 뜻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믿음으로 이끌려는 통로이지 그 자체가 구원이나 믿음은 아닙니다. 문둥이 열 명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으나 주님을 믿고 따른 자는 그 중에 이방인 한 명뿐이었습니다.(눅17:11-19) 그 한명을 당신의 자녀로 택하기 위해서 나머지 아홉 명도 고쳐준 것입니다. 단순 수치로만 따지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받았어도 그분을 믿지 않는 완악한 사람이 90%나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받을 수 있다”(16절b)는 약속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일차적으로 바로 앞 절(15절)에서 신자는 당신의 종이 아니라 친구가 되었는데 그 의미를 설명해준 것입니다. 무조건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종에서 무엇이든 기도로 요구할 수 있는 친구의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 본문에서 말하듯이 따로 불려 나온 자다운 삶의 열매를 맺어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이어진 말씀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17절) 서로 사랑하려는 목적의 기도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모두가 당신처럼 미움을 당할 테니까 더욱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모두 솔직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새벽마다 교회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 중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은 것과 또 그래서 서로 사랑하기 위한 것이 얼마나 차지합니까? 자기 죄를 고치려는 기도를 하고는 있습니까? 자신의 현실적 어려움에서, 그것도 스스로 자기 잘못으로 일어난 것들에서 벗어나려는 기도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미움 받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따로 불려 나와 예수님께 속했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고 그대로 살고 있어야 신자입니다. 지금껏 인생을 살아왔던 목표 방향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세상 사람과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갖고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전의 삶을 유지해도 된다면 구태여 세상에서 따로 불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이 땅에서 자신의 형통과 안일만을 위해서 삽니다.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 돈으로 돈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제일 먼저 돈의 많고 적음에 자기 인생이 좌우되거나 영향 받지 않아야 합니다. 또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 헌신하면 하나님이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세계에선 완전히 별종인간이었습니다.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인격과 삶의 자세에서 세상 어떤 사람과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워했던 자들을 더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정죄하면서 상종도 않던 문둥병자 창녀 세리 이방인 불구자 귀신들린 자들과 주로 교제했습니다. 그런 자들도 서로 사랑하게 하려고 유대교에서 제정한 안식일이나 정결 규례 등에 상관하지 않고 고쳐주었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왕으로 삼으려고 열광해서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막상 자기들이 해결해주길 원하는 가난 질병 로마 박해 등은 외면해버립니다. 대신에 너희 모두가 천하의 죄인이니 주님 앞에 새롭게 회개하고 순전히 헌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모세 율법을 소지했기에 가장 의롭고 천국 문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향해서 말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는 천국과 반대로 행하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런 시골의 이름 없는 랍비가 자기들더러 거꾸로 독사의 자식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면할 길이 없다고 정죄 선포하니 극도의 분노와 저주가 치솟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더러 바로 그렇게 살라고,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극도의 미워함을 받으라고 세상에서 택하여 불러내었습니다. 역으로 말해 세상의 미워함을 받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께 속한 것도 아니요, 세상에서 불려 나온 것도 아니요, 주님의 택함을 받은 것도 아니라는 증거인 셈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 겪는 고난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해서 추구하는 돈과는 초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이 돈을 더 모으기 위해서 예사로 사용하는 불법적인 방안에 절대 함께 참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혼자서 깨끗한 척 한다는 오해를 사고 미움을 받더라도 그들로 도덕적 영적 양심에 찔리고 죄의식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구별된 삶이 진리임을 보이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이익은 물론 큰 수고와 희생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고난이 희생이 아니라 기쁨이어야 한다.

 

베드로는 유대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이미 받았음에도 주님의 메시아 되심과 재림을 담대히 선포하는 바람에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서 큰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 후에 그가 보인 반응을 성경이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29 & 41) 박해 받은 것을 오히려 기뻐했는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능욕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 자체를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고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랍니다. 그가 기뻐한 내용은 그런 핍박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본문의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가 신자로서 올바른 정체성을 갖고 있고 또 그 정체성에 따라 살고 있다고 인정받았기에 기뻐한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서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었던 베드로는 특별히 더 감회가 깊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나중에는 제사장의 하녀 앞에서 저주하면서까지 그랬습니다. 반면에 지금은 주님처럼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서 유대 대통령 격인 대제사장 앞에서 주님처럼 목숨도 전혀 아끼지 않고 십자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전의 그 비겁하고 치사한 베드로가 아니라 당당하게 예수의 수제자라고 밝혔습니다.

 

성경은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들 모두가 그랬다고 말합니다. 열두 제자들 모두 겟세마네에서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가기 바빴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단순히 자기들 잘못에 대해 도덕적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자신들의 바뀐 정체성과 삶에서 넘치는 생명과 기쁨이 얼마나 귀한지 매일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재판정에 주님이 함께 하심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주님의 심정으로 자기들을 정죄하는 자들이 더 안타깝고 애처로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베드로처럼 되라고 택하여 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20절) 주님처럼 세상에서 별종 인간으로 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만 그 중에 하나님이 택하여서 남겨둔 소수의 사람은 주님의 자녀로 따라 나선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박해에도 동참하지만 주님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멸망할 자에게는 사망의 냄새를, 구원 받을 자에게는 생명의 냄새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는 재력 권력 신분 지성 종교성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큰 두려움에 싸여서 많은 이들이 절대자에 찾아서 의지하려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복음을 선포해야할 하나님이 마련해준 절호의 기회입니다. 우리끼리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논의 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제가 감히 예측하자면 코로나 사태가 끝나 교회에 다시 모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은 양 금방 현실적 고난을 없애달라는 기도만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진 것을 팔고서 모든 물건을 소유권의 구분 없이 모두가 통용하는 정말로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타락한 세상 풍속과는 정반대의 선한 삶으로 사람들의 칭송까지 받았습니다. 교회로 모이길 힘쓰며 열심히 서로 사랑하며 기도했습니다. 정말로 오늘날의 교회가 본을 받을 원형 교회이자 참된 예배였습니다.(행2:43-47)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범적인 교회를 유대교로부터 큰 박해를 받게 해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듭니다.(행8:1) 자기들끼리는 너무 좋고 은혜가 넘쳐서 모이는 데에 주력하다보니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미움을 당해야 하는데 그러는 데에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에 대한 신자의 올바른 자세

 

하나님이 묵인하신 현실적인 고난은 현실적인 대응책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번에 신자들마저 카톡으로 전문가 의견이라고, 사실은 가짜 뉴스가 태반이었지만, 얼마나 많이 실어 날랐습니까? 믿음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현실 문제를 정확한 전문지식에 따라 해결하는 것도 사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당신을 닮게 그런 뛰어난 이성과 지혜를 주셨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예수님과 베드로처럼 살아가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부정부패 안 하려니 수입이 적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니까 세상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자녀를 출세와 형통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키우려니 남들처럼 풍요롭게 베풀지 못해 마음이 쓰라리며, 무엇보다 죄의 본성과 자존심이 생생히 살아있어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라가려니 때로 지치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아니 아주 작은 일에서라도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주님의 풍성한 은혜와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비록 머리 둘 곳도 없이 힘들고 고달프긴 해도 정말로 그분의 사랑과 권능이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된 것부터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최고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가 사탄에게 묶여서 거짓, 모략, 음란, 죄악, 흑암, 공허, 절망과 죽음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현실이 형통하고 풍요해질수록 더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진리, 자유, 평강, 기쁨, 가치, 빛, 소망, 사랑, 생명이 풍성하게 역사하는 영역으로 옮겨주셨습니다. 때로 지치고 힘들면 성령의 보호 인도를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존재와 삶과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담대히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비록 적은 수이긴 해도 눈물로 겸손히 항복하는 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당장 나부터 예수를 만나 정반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도 나처럼 그 인생이 뒤집어지는 일에 쓰임 받고 도와주며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신자에게 두 배의 기쁨이 됩니다. 현실적 고난 때문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기쁨을 빼앗기거나 방해받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세상에서 받는 어떤 큰 미워함과 싫어함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고난이 생겨야 그것을 없애는 수단으로 믿음을 동원하고 그 전에 믿음을 갖는 동기부터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소지하고 적용하는 모습이 그와 정반대 순서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고난 안에서 고난을 당해가며 주님만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고난이 뒤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뒤가 아니라 신자가 믿음으로 행하기만 하면 항상 따라 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된 후에 겪는 고난은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믿음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다 보니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신자의 고난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오히려 더 괴로워야 신자입니다. 믿음이 고난의 원인이자 사실상 실체인데 그런 고난을 없애면 믿음을 없애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풀면 신자에겐 근본적으로 환난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현실적 불편함 내지 고통인데 어떻게 자기에게 고난이 될 수 있습니까?

 

현실 고난을 두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서 빨리 끝나게 해달라는 것은 교회에서 행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라고 세상에서 불려 나온 것입니다. 일생 동안 따라올 누구나 겪는 코로나 같은 현실적 고난에 대해 신자는 다른 이들로 먼저 이겨나가도록 자기 것을 희생하며 앞장서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최소한 자유와 평강 가운데 초연함으로써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감으로써 스스로 자초한 신자의 두 번째 참 고난에 대해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에 쓰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언젠가는 끝납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더 위급한 일이라 반드시 조만간에 백신과 치료약을 개발해 냅니다. 신자가 행할 일은 다시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회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에도 속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지금 하늘에서 이 땅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할지 헤아려 보십시오. 세상에서 따로 불러낸 우리가 해주길 바라는 일이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해답은 간단히 나옵니다. 모든 신자가 세상 속에 뛰어 들어가 베드로처럼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는 것 하나뿐이라고 말입니다.

 

4/2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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