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뜨게질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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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뜨게질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6:15-21)

왜오직예수인가

 

 

(수6:15-21) 하나님의 뜨개질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13) /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비밀 (10-완)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6:15-21)

 

여리고를 맘껏 조롱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정복의 첫 전투를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치르라고 명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보기에는 사격 연습하기 아주 적합하게 횡대로 열을 지어서 무방비 상태로 찬양하며 성 주변을 걸어서 돌게 했습니다. 제 삼자가 볼 때는 마치 여리고 성의 주민에게 “내 잡아봐라!”는 식으로 놀리는 것 같습니다. 여리고로선 약이 오르고 분노에 차서 뭔가 반응을 해야 마땅한데 일주일 내내 쥐 죽은 듯 침묵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권능 앞에 그들의 심장이 이미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던 철옹성 같은 성벽을 믿고 의외로 편안하게 지냈을지 모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기괴한 전투 방식 때문에 두려웠겠지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조금씩 긴장이 풀렸을 것입니다. 대엿새가 지나자 평온에 익숙해지고 점점 신경이 무뎌져 갔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계획한 대로 장기간 농성하면 이스라엘이 제 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이라고 안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 주민으로선 이스라엘이 며칠 동안 몇 바퀴를 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7일 째는 한 바퀴가 아니라 계속 돌자 다시 바짝 긴장하며 예의 주시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일곱 바퀴째에 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고 그러자 전차 두 대가 교차할 수 있는 그 튼튼하던 성벽이 순식간에 폭삭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사방에서 물밀 듯이 쳐들어와 완전히 진멸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진멸하라고 명령했다고 해서(21절) 우상 숭배를 하는 이방 족속들을 극도로 미워하는 비정하고 잔인한 분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애굽에서 아홉 번이나 큰 재앙을 내리며 회개의 기회를 주었으나 바로가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장자들이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리고도 그 사십년 전의 홍해의 기적을 통해 당신의 엄청난 권능에 대해 익히 알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사백 년간이나 노예로 고생시키면서도 가나안의 죄악에 대해선 계속 참아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상 어느 신에게도 없는 그런 큰 자비를 지금 7일 째 일곱 바퀴까지 여리고에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제사장의 양각 나팔 소리 빼고는 온 사방이 고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성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정말 입에 지퍼를 달아놓은 듯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제사장을 따라 걷기만 합니다.

 

오래전 영화 ‘미션’(Mission)에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존 원시부족들에게 파송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다 살해당합니다. 주인공 선교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임지로 떠났는데 활과 창으로 무장한 원주민을 만나자 작은 피리를 꺼내어 불었습니다. 영화에선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해 아카데미 음악상까지 받은 절묘한 선율이었으나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수도사가 연주할 수 있는 곡조는 찬양뿐입니다. 당장 죽일 듯이 달려들던 원주민들은 그 신기한 음악에 취해서 처음으로 그 선교사를 살려주었고 드디어 복음의 씨앗이 그곳에 뿌려지게 됩니다.

 

지금 여리고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리고 백성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 우상 신에게 바치는 음악과는 곡조가 달랐을 것입니다. 자기들 영혼을 울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겸손하고 정결해졌을 것입니다. 화려하고 거창한 신상도 없고 감각적인 춤도 없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곡조일 뿐 아니라 음악을 듣고 마음이 깨끗해지기도 생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흥분만 일으켜서 음행으로 이끄는 우상 신전의 세속적인 음악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족속 여리고도 그만큼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찬양이 일주일 째 성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백성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 안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 눈에 보이는 증거로 이스라엘이 공격할 기색을 전혀 내비취지 않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리고는 그 잘난 성벽 하나만 믿고서 하나님이 먼저 내밀어주신 긍휼의 손길을 끝까지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

 

여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전투였습니다. 그렇다고 진멸하는 본보기를 보여서 다른 가나안 족속들에게 경고하여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단순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는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과업의 첫 열매인 셈입니다. 첫 열매는 반드시 거룩한 하나님에게 거룩한 모습으로 바쳐져야 합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타락한 더럽고 추한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어선 안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성벽을 직접 일시에 전부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의 진멸하라는 명령을 정확히 알려면 모세오경 전체를 종합적 심층적으로 분석해야만 합니다. 그 가장 근본적인 뜻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더러 절대로 더럽고 추한 죄악과 공존하지 말고 그들과 통혼하여 우상숭배의 유혹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진멸 대신에 이스라엘더러 먼저 화평하기를 요청하고 그 제안을 거절하고 대적하면 전쟁을 치르라는 원칙을 명시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신20:10-12) 여리고 이후로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자진해서 항복하는 성과는 전투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리고처럼 끝까지 대적하는 성들만 정복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리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지 조롱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천하보다 더 무거운 부담감을 갖고서 진정으로 애통해하며 안타깝게 바라보십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원죄 하의 모든 인간이 사탄과 죽음의 세력에 눌려 있는 상황에 대해 통렬히 분노하면서 크게 슬퍼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울었다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 탐사가 알아낸 사실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곡물을 많이 비축해 놓은 것이 밝혀졌습니다. 마침 보리를 처음 추수하는 때와 겹쳐 장기 농성 계획이 무리 없이 채택되었음을 입증합니다.

 

무엇보다 성벽이 일시에 안쪽으로 폭삭 무너졌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지진으로는 그렇게 무너질 수 없다고 하며 당시에 그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홍수로 물이 침투해서 지반이 약해져서 무너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무너지면 먼저 무너진 곳의 피해가 가장 심해 나중에 그 원인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진도 없는데 성 전체가 단번에 동일한 모습으로 무너진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끔 TV 뉴스에서 보듯이 오래 된 빌딩에 무게 중심이 되는 요소마다 폭약을 부착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없던 고대에 그런 방식으로 무너져 내렸으면 강력한 초자연적인 힘이 작동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단번에 무너졌으니까 성 위의 군인들은 아무 대비도 못하고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성안의 주민들도 너무나 놀라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일시에 성안으로 침투해서 진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미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하는 방식이 참으로 오묘하고 정미하지 않습니까? 성이 안쪽으로 무너졌다면 얼마든지 고라당의 반역 사건 때처럼 땅을 열어서 모든 백성을 함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태여 당신의 백성들의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후대에 더 큰 권능으로 기억될 텐데 오로지 성벽만 무너뜨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리고 주민이 그 튼튼한 성벽이 자기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 한에는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 큰 것에 의존한들 절대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미국의 일부 어리석은 부자들이 한적한 리조트로 피난 갔으나 오히려 자기들처럼 도망친 부자들이 몰려서 더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핵전쟁 대피소를 구입하는 자들도 늘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개한 원시종교의 거대하고 기묘한 신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에게 안전과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붙들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여리고는 바알보다는 사실상 성벽이 우상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진실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보다 더 좋아하고 섬기는 존재나 물건이 있다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에 먹칠하고 당신의 영광을 가리면 그냥 넘어가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 잘못을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이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벌하십니다.

 

출애굽 때에 애굽에 내린 아홉 재앙은 그들의 중요한 우상 신들을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만들어서 당신만이 천하를 다스리는 유일한 신임을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 말년에 이삭을 바치라고 명했습니다. 틀림없이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당신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지 엄숙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이를 성전에서 다윗이 밤새 기도했어도 앗아간 것은 그 죄를 심각하게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심판뿐 아니라 은혜를 베푸실 때도 마찬가지 방식을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생산이 전혀 불가능한 때에, 그것도 많은 인간적 시행착오를 겪게 한 후에 정말로 자기 몸에서 이삭을 나게 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당신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뤄짐을 온전히 믿게 하여서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얼굴에 직접 손을 대고 낫게 해주셨습니다. 너무 추해서 아무도 근처에 가지 않는 문둥병자도 직접 살을 맞댈 정도로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자가 아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면서 봉사였던 자는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우물에 가서 씻게 해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새로운 눈을 창조해준 것입니다. 당신의 극렬한 대적자 바울도 사흘간 눈을 멀게 했다 다시 보게 해주었는데 율법의 멍에에 묶인 영적 봉사를 십자가 은혜의 구원으로 이끈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뿐만 아니라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매사를 당신의 영원하고 완벽한 뜻과 계획에 따라 거룩하게 통치하십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당신만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뜻이 있으며 또 그래서 반드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특별히 당신의 백성을 향해선 그분에게 중요하지 않는 사건이나 사람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묵상하는 기회

 

여러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여리고 성 승리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그 주변의 땅을 밟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이 잘된다는 가르침입니까? 그럼 땅을 밟으며 돌지 않으면 즉, 일상적인 기도는 응답 받기가 힘들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아홉 번이나 살펴보면서 강조했듯이 이스라엘의 행진은 기도가 아니라 승리의 찬양이자 목숨을 것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앞에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모습으로만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에서 언제 창이나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서 하나님께 지켜 달라는 기도는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칠일 째 일곱 번까지 돌면 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했으니 돌긴 도는데 왜 꼭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해야 하는지 의아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와 미숙한 영성으로는 도무지 분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신세대더러 침묵하며 행진만 하라는 명령은 모든 인간적인 수단은 물론 생명까지 당신께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여리고가 아무 대응을 하지 않자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해보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들로선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불가항력적인 코로나 사태로 모두가 집에 격리되자 그동안 돈만 주인으로 열심히 섬기던 불신자들마저 자기 인생을 절대자와 연결해 진지하게 묵상할 계기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돔과 모압과는 싸우지 말고 우회하라, 음행으로 이끈 미디안 족속과 발람을 심판하라, 급류가 넘치는 요단을 건너라, 전쟁을 눈앞에 두고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치르라는 등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모든 지시는 선뜻 기쁨과 감사로 행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꾸 주저하게 만들고 담대한 믿음의 결단과 순종이 요구되는 힘든 일들뿐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척박한 광야에 부모를 묻어야만 했던 쓰라린 추억도 있습니다. 비록 아침저녁으로 구름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만나 메추라기 반석의 생수로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지만 그것과 별도로 당시로선 그분의 명령과 역사들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며칠 간 곰곰이 따져봤더니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모든 일이 선하게 결말 지어졌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하나님만의 은혜와 권능이 있었음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모든 개별 결과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유익과 구원과 연결되었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사백년 전에 선조들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당신은 세상의 어떤 제약과 훼방 없이 그 길로만 앞서서 꾸준히 걸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방 대적들과 자연 기후 지리 등 그 어떤 것들도 그분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불순종과 주저함만이 그분의 걸어가시는 속도를 지체케 만들었다는 점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영적 깨달음의 내용과 깊이는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진리에는 도달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분께 불순종해선 당장 자신들이 손해볼 뿐 아니라 그분의 엄위한 징벌이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같은 맥락에서 자기들 부모가 광야에서 너무나 헛되게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자기들은 앞으로 진군하여 가나안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이스라엘로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의 배수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고 초조하면서도 지루하고 언제든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데도 열 세 바퀴를 군말 없이 행진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하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광야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습니다. 하나님이 이곳에서 죽이면 죽이고 살리면 살리십시오.”라고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 이심전심으로 합의했을 것입니다. 열세 바퀴 채에 이르자 그 간절한 소원을 담아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여 달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여리고가 기도로 무너졌다는 교만

 

금주까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배경, 근거, 요소, 목적들을 여호수아가 새 지도자로 세워진 이후로만 열 번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과 족장들의 시대를 거쳐 아브라함을 불러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과 섭리가 종합적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작용되었는지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진리는 가장 적합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사건이 가장 적합한 인물에게 일어났다는 것과 그 각각의 사건에 하나님의 고유한 영적 의미 진리 훈계 등이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땅 밟기 기도로 무너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신 통치를 그렇게 간단하고도 시시하게 이해하고 치워선 안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은 인간 신자가 열심히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는 너무나 교만한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신자들의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의 권능과 은혜를 폄하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여 여리고 같은 엄청난 초자연적 기적도 일으켜주지만 그분의 뜻과 계획으로 이미 확정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행한 기도보다 더 간절하고 순전하게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인데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서 이뤄지지 않았지 않습니까?

 

최대한 양보하여 여리고 성을 돌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끝내 믿지 못한 일부 백성들이 성벽을 무너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칩시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럼 그 기도는 누가 시킨 것입니까?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부터 하나님이 심어준 것입니다.

 

무조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 부모도 자식의 성장 단계에 맞추어서 힘에 부대끼는 과제를 주어서 자식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 극복할 수 있게 양육합니다. 그 힘든 가운데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고 순종하는 자식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럼 비록 자녀들 본인이 수고했지만 올곧게 자란 근본 배경과 근거는 부모의 사려 깊은 계획이지 않습니까? 또 그런 훈련이 끝나면 자식이 전혀 기대도 않았는데 부모는 여리고 성 승리처럼 최신 스마튼 폰 같은 엄청난 선물을 준비해 놓지 않습니까? 신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도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상충되지 않고 조화 통일 되어서 그분의 일을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만 한다고 도깨비 방망이처럼 뿅 하고 응답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전부 초자연적 기적으로만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어리석은 우리와 아주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신자의 기도를 통해 신자와 크게 다른 그 당신의 길을 역사하시길 기뻐합니다.

 

여리고성의 특이한 전투와 승리는 역사상 딱 한번만 있었습니다. 성경에 또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 딱 맞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백 년 전부터 계획해 놓은 승리였습니다. 다른 세대에서 다른 상황에 처하면 그에 합당한 다른 방식의 승리를 주십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선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이 아낙의 후손처럼 기골이 장대한 것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담대히 믿음으로 전투에 임했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노예근성에 절은 그 약점을 고쳐주기 위해서 다윗이 골리앗을 간단히 물리친 것 같은 엄청나고도 손쉬운 승리를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신자 인생을 뜨개질 하는 하나님

 

우리의 믿음도 이스라엘처럼 연약하고 영적 분별력도 어리석어 각 개별 사건을 겪을 때마다 아주 힘들고 하나님의 뜻이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한 사건이 완전히 끝나도 그 뜻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신자는 드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자의 일생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맡겨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각자에게 가장 적합하게 마련해 놓은 계획에 따라 일생을 거룩하게 인도해주십니다. 당신의 절대적인 섭리와 주권을 당신만의 고유한 방식과 시기에 따라서 신자의 현실 삶에 완벽하게 실현시킵니다. 신자로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으로 참여케 하고 신자 본인에게도 큰 유익이 되게 이끌어주십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은 신자의 일생을 뜨개질 하듯이 주관하십니다. 형형색색의 실을 갖고 짜기 시작하면 그 실만 봐선 또 그때까지 짠 형태로만 봐선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각 개별 실에도 온갖 색깔이 섞여 있고 그런 실들이 어지럽게 가로 세로로 엮어져 나가므로 당시로는 도대체 이해도 안 되고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다 짜고 나서야 너무나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완벽한 옷이 되고 그런 복잡한 색깔의 여러 실들이 없었더라면 그 무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 입성시키기 위해서 신자에게 짜서 입혀가고 있는 예복에는 신자 본인이 계획 소망 상상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너무나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질 것입니다. 각 신자에게 가장 합당하고 그 신자에게만 어울리기에 다른 사람이 입어선 전혀 멋지지 않는 그런 옷을 지금도 뜨개질 하고 계십니다.

 

어지간한 믿음으로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그림을 알 수 없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개별사건들의 의미조차 모릅니다. 신자로선 그냥 순순히 기도하면서 앞서 가시는 주님을 묵묵히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다 그 옷이 다 지어질 무렵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사백년 전부터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차지할 첫 열매가 이제 열세 바퀴 채 돌면 실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뜨개질로 치면 마지막 코에 매듭을 지어서 옷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옷이 얼마나 아름답게 짜였는지 보고 싶은 열정과 소망으로 충만해서 마지막 외침으로 추측컨대, “할렐루야 여호와를 송축합니다!”라는 한 목소리로 터져 나왔고 성벽은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진영에서 지켜보던 노인과 여자들과 아이들 나머지 백성들도 정말로 땅이 흔들려 지진이 일어날만한 기쁨의 함성을 함께 질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믿음, 한 소망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세울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를 하나님 당신께서 모든 추한 것들이 진멸되어서 온전히 순전하게 바쳐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분별한 것에 걸맞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만 시선을 집중하면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불안 염려 초조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 불평만 쌓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도 마찬가지로 광대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뜨개질이 끝나면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 반드시 그려질 것이라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사태가 끝난다고 당장에 더 풍요롭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어려운 일이 계속 생기고 어쩌면 우리 세대에, 아니 그 다음 다음으로 아무리 세대가 흘러도 이 땅의 고난은 없어지지 않고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감사와 기쁨과 자유와 평안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의 삶이 아무 형통이 없고 광야 같을지라도 그 궁극적인 영광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그와 정반대의 영원한 절망과 죽음으로 걸어갔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 길이 옳다고 끝까지 고집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오직 성령이 간섭하는 은혜로 우리 인생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만 해도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고 연약하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죄가 많았어도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그 큰 사랑으로 내 인생에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형형색색의 씨줄 날줄을 엮어서 뜨개질 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그 마지막 그림을 보기를 소망하기에 이 땅에선 아무리 힘들어도 묵묵히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행진하는 것이 신자의 인생입니다. 그럼 현실의 삶이 어떤 모습이던 간에 영적으로는 여리고의 오묘하고도 엄청난 승리를 매일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4/1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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