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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직 예수인가

신자가 범하는 가장 심각한 잘못(민수기강해#36-민22:41-23:6)




 

 

 

(민22:41-23:6) 신자가 범하는 가장 심각한 잘못

구약성경강해 (46) / 민수기강해 (36)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 발람이 아뢰되 내가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민22:41- 23:6)

 

제대로 밥값도 못하는 발람

 

발락의 사신과들 함께 가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자 발람은 다음날 아침에 부리나케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그를 나귀와 당신의 사자를 시켜 크게 혼을 내고 당신이 이르는 말만 말하라고 재차 엄중히 경고했습니다.(민22:36)

 

그 경고를 들은 발람으로선 발락이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고 세 번이나 장소까지 옮기며 제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대로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도리어 그들의 진로를 방해한 죄로 모압과 에돔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으로(24:14-25) 이 사건은 끝이 납니다.

그 세 번의 신탁 과정을 순서대로 자세히 살피면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첫째 과정으로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이는 바알의 산당에서 신탁을 행하라고 요청했습니다.(22:41) 이스라엘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영험한 발락이 바알의 이름으로 바알 신이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그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이 그곳을 떠나 언덕길로 올라가서 여호와의 신탁을 받겠다고 했습니다.(3절) 여호와를 바알과 구별하여 참된 신으로 섬기려는 뜻이 아닙니다. 조용히 혼자서 신접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는 여호와가 자기 입에 주시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5절) 당연히 발락은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데려왔는데”(11절) 왜 축복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데 돈을 받으려면 제대로 그 값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발락이 다시 발람을 이스라엘 진영의 끝만 보이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13절) 가장 약해 보이는 진영을 향해서 어떤 형태라도 저주해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전군대로 상대해서 승리하지 못하면 후진을 기습해서 재물을 일부라도 약탈하겠다는 심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자 발락은 저주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발 축복만은 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25절) 여호와가 이스라엘에 힘을 보태주지 않으면 자기들 신 바알을 앞세우고 자기들 군대만으로 여러모로 엉성해 보이는 이스라엘과 상대해보겠다는 뜻입니다.

 

발락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세 번째로 광야가 내려 보이는 곳으로(28절) 제사 장소를 옮겼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안 보이거나 아주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곳입니다. 발락은 혹시라도 발람이 이스라엘의 군대의 허다한 숫자만 보고 겁을 먹고서 저주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짐작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모압에 대한 여호와의 저주만 들었고 발람에게서 저주의 신탁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발락은 군대를 철수했습니다.(24:25)

 

발락이 바라는 대로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의 신탁을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우상 신에 대한 믿음과 그 신을 섬기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 번의 신탁절차에서 여호와에게 바칠 제물과 이스라엘을 저주할 장소에 대해 서로 의견이 틀렸던 적이 없을 정도로 짝꿍이 맞았습니다.

 

그들 믿음의 공통점을 크게 셋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신들은 장소와 여건과 시기에 따라서 행사하는 능력의 크기와 방식이 각기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둘째는 신의 축복과 저주는 반드시 현실 상황의 좋고 나쁨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이 바치는 정성에 따라서 어떤 신도 심지어 적대국의 신도 자기들 소원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향한 그들의 세 번의 저주를 정반대로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세 가지 믿음이 여호와에겐 아예 먹혀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신께선 그 정반대로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반대로 역사하시는 모습이 신자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믿음의 근본적인 세 가지 요소가 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장소 여건 시간에 따라 그 권능이 결코 바뀌지 않으며, 둘째 현실상황의 풍요 혹은 고난이 그분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셋째 예배 전도 기도 봉사 헌금 등에 쏟아 붓는 신자의 열성으로 하나님께 받는 복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상한 두 가지 결과

 

발람이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여호와의 크신 권능에 따른 당연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둘 있습니다. 첫째, 발락이 발람을 그냥 순순히 돌려보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의 왕들은 당신의 말을 거역하면, 아니 기분을 상하게 하는 어투로 말하면, 심지어 에스더서에서 보듯이 알현 허락을 미리 받지 않고 불쑥 만나러 들어가도 종종 죽음의 벌을 내렸습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백지수표를 제시했고 그가 말하는 대로 정성껏 제사 절차도 마련해주었는데도 자기 요구를 세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거기다 정반대로 축복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압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예언까지 했습니다.

 

언뜻 발람이 대단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여호와의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발락에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에 처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나귀 사건으로 인해 여호와가 가장 강력한 신임을 절감한 위에, 여호와가 들려주는 계시가 너무나 뚜렷했고 강력한 힘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발락에게 거역하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어쨌든 제가 모압 왕이었더라도 무지 화가 났을 것이며 신하들과 백성들 보기에도 그냥 두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발락에게 인간적으로 의로운 면이 있어서 발람을 살려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발람 나름대로 자기 신당에 들어가서 최선을 다해 저주의 신탁을 시도하는 모습을 발락의 사신들이 이미 두 번이나 봤습니다. 발람도 여호와가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다고 발락에게 몇 번이나 미리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여호와가 세 번이나 완악하게 당신을 대적했던 발락에게 당장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발락이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감으로써 모압에게 실질적으로는 어떤 손해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발람을 초대하고 또 세 번의 제사를 드리는 데에 들어간 경비를 빼고는 말입니다. 발락이 발람을 살려준 것을 선하게 봐준 것입니까?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발락이 발람을 살려준 진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발람이 나귀와 여호와의 사자에게 크게 혼이 나는 모습을 발락의 사신들이 곁에서 목격했고 그 사실을 왕인 발락에게 다 전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발락도 발람이 자기 생각으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여호와의 권능에 완전히 붙잡혀서 축복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발락도 여호와의 권능에 어느 정도 항복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귀와 여호와의 사자로 발람을 크게 혼을 낸 이유 중의 하나가 발람이 발락에게 자칫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까지 감안했던 것입니다. 발람에게 복 주려는 뜻이 아니라 당신께서 발락에게 가라고 명령해놓고 그를 죽게 버려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지금 사탄의 두 충성된 종의 경우에 보듯이 하나님의 불신자를 향한 본심도, 결코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큰 오해

 

많은 신자들이 구약성경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사항이 바로 이런 측면입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만 편애했기에 이방은 무자비하게 심판했다고 여깁니다. 또 그런 잘못된 선입견이 은연중에 작용하여서 신약시대임에도 교회와 교인들만 하나님께 큰 복을 받고 불신자와 그들이 하는 일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갖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19:24-25)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땅을 새롭게 고쳐 구원을 완성시킨다는 예언입니다.

 

그 때 가서야 마지못해 애굽과 앗수르도 구원 대상을 삼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그렇게 하려면 시작과 과정에도 동일한 뜻이 담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네 인생처럼 갈지자 행보를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인류에 대한 구원계획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일관됩니다. 죄는 벌하시되 죄인에겐 무한한 긍휼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동서 양쪽에서 대적한 나라의 대표 즉, 불신자 모두를 총칭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복도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열방 앞에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증명할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삶에 직접 간섭하여서 당신을 먼저 알게 해서 믿고 따르게끔 해주신 것뿐입니다.

 

누차 강조했듯이 출애굽 때에 애굽에게 열 번이나 재앙을 내린 것이 엄청난 벌을 많이 내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완전수인 열만큼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끝까지 인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애굽에 복을 주신다는 예언의 바로 앞 22절에서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런 뜻을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전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은 단 한명도 개입은커녕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직접적인 복을 받은 것이 없고 대신에 발람과 발락이 여호와께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구약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도리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큰 벌을 받았습니다. 그 원인도 일관되게 하나로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방들이 오히려 형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때 빼고는 항상 이방족속들보다 궁핍했으므로 우상 신의 힘이 더 센 줄 착각하고 그 신들도 함께 섬겼습니다. 그 결과 애굽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았던 그분의 백성들이 다시 타향에서 타민족에게 노예로 살아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에게 따지고 든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왜 의인은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처사 아닙니까?” 이방족속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형통했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는 하나님께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그럼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외적인 현상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도 당신께서 사랑하시기에 일반적인 은총은 베푼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사람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고 중심을 보고 판단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발람과 발락에게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으면서 세상 어떤 신보다 크고 다른 당신의 영광을 그들 앞에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 혼자 생색내려는 뜻이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애굽에게서 열 번이나 참아주었는데 이번 세 번은 못 참아 주실 리 없지 않습니까? 발람도 발락도 모압도 에돔도 당신께서 지으셨지만 아직도 사탄의 종에 묶인 죄인일 뿐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그런 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벌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으로서 영광은 사라지고 그 전지전능성조차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발락과 동일한 오늘날의 신자

 

그런데 하박국이 하나님에게 던진 질문을 엄밀히 따져보면 발락이 갖고 있는 신관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왜 의인이 환난을 겪고 악인은 형통하느냐는 그의 의아심은 그들의 현실적인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에 승리하면 신께 복 받는 것이고 패배하면 저주 받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박국이 그와 다른 점은 신의 이름과 숫자뿐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던진 질문을 역으로 따지면 의인인 자기를 축복하고 악인들은 벌을 주어야 하거나, 최소한 그 둘 중에 하나는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나아가 놀랍고도 신기하게도, 아니 근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에서도 우리와 발락이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발락이 세 번이나 장소를 옮기며 발람에게 요청한 신탁의 내용을 다시 살펴봅시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진영이 다 보이는 앞에서 완벽한 승리를 달라고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양보해서 진영의 끝에서 부분적인 승리라도 달라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이스라엘을 저주는 못할지라도 제발 축복하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을 받으면 자기들이 지는 것이니까 자기들에게 환난만은 생기지 말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마저 안 되니까 완전히 힘이 빠져서 평상시 모습으로 말하자면 자기들 우상에게나 잘 보여야지 하고 쓸쓸히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전지전능하시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하나도 없으니 꿈을 크게 갖고서 간절히 기도하면 이뤄진다는 설교 말씀에 감동 받고 신이 나서 그대로 해봅니다. 그러나 도무지 이뤄질 기미가 안 보이면 내가 비전을 너무 크게 잡았나, 사실은 자기 욕심인데도, 싶어서 기도 제목을 조금 하향조정합니다. 그래도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악화될 조짐마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제발 나에게 나쁜 일만 안 생기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뀝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축복 받을 것은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있지만 발생하지 않는 나쁜 일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니 기도할 제목이 사실상 없습니다. 그냥 그런 식의 생각이 믿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뿐입니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인간적 정서적으로 조금 감동을 주는 설교를 듣고는 은혜 받았다고 착각합니다. 지난 주간의 여전히 하나도 나아지지 않고 고달프기만 했던 삶이 너무 서글퍼 눈물 찔끔 흘리고 돌아갑니다. 신앙생활에 기쁨과 활력은커녕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못 느끼고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의무적 형식적으로 주일예배 참석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따로 계시고, 내 믿음도 겉으로만 돕니다.

 

죄송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그나마도 다행입니다. 현실적으로 자꾸 어렵기만 하니까 결국에는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신자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하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됨을 느낍니다. 현실 삶에선 불신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다가 양심에 조금 찔려서,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서 지난주의 제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는 입에 바른 기도만 반복적으로 하고 치웁니다. 한 주라도 정말로 회개해서 순전한 믿음으로 죄를 이겨냈다는 감사가 없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교회들, 특별히 이곳 이민교회의 실상이 그렇다고 겸허히 인정하고 함께 고쳐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회자인 저로선 더더욱 이런 사태의 책임을 통감하고 주님 앞에 온전하게 헌신 충성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애굽에게 여호와를 증거해야 함에도 그들이 더 형통하는 것 같아서 그들을 흉내 내다가 거꾸로 그들에게 노예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것이 부러워서 그것을 얻으려고 세상 방식을 택하면 하나님보다 세상으로부터 그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세상에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징계를 받는데 세상 죄악으로 함께 타락하게 되고 같은 죄를 함께 즐겼음에도 영악한 불신자들에게서 멸시 비방을 받게 됩니다.

 

나쁜 일만 생기지 말라.

 

발락의 사건에서 신자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건 전과 후에 발락에게 아무런 현실적인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해서 나아진 것도 그렇다고 패배해서 망한 것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절박해서 최선을 다해 간절하게 드렸던 세 번의 신탁 제사는 아무 효력 없이 끝났습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전혀 할 필요가 없었던 제사였습니다. 발락 혼자서 일시적으로 절박하게 느껴졌지만 당장에 죽고 사는 문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을 크게 잡았다가, 조금 줄이고, 점점 유야무야 되다가, 결국에는 나쁜 일만 안 생겼으면 좋겠다는 식의 기도라면 사실은 처음부터 전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정말로 살고 죽는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정말로 살고 죽는 문제라면 그 기도에 힘이 빠지고 나중에 유야무야 되는 법은 없습니다. 말기암에 걸린 환자라면 끝까지 절실하게 붙들 것 아닙니까?

 

스스로 조금만 따져 봐도 우리 기도의 대부분이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의도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적게 주어도 된다는 식의 기도라면 하나님이 힘에 부대낄 것을 배려해서 미리 양보해주는 것입니까? 참으로 건방지고 교만하다 못해 하나님의 권능을 깎아내리며 그 이름을 훼손하는 죄 아닙니까?

 

모든 신자의 기도의 본이 되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정말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죽기 살기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인류의 살고 죽는 문제였습니다. 이 땅의 공사역 중에도 매일 새벽 한적한 곳에 가서 따로 기도했는데 돈을 달라, 출세해서 이름을 높이게 해 달라, 최소한 환난과 핍박이 없게 해달라는 등의 기도는 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단 한명이라도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한 기도였을 뿐입니다.

 

제자들에게도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달라는 간구로 시작해,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나의 죄도 사해달라는 기도로 끝맺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지만 현실적 축복을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로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끼니를 때우는 것이 정말로 살고 죽는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을 구하는 것이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일 필요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매일의 삶 전부를 전적으로 그분의 보호 인도 아래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통치 아래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참여하라.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믿음이 현실에서 복을 받거나 최소한 환난을 없애는 용도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뜻이 그 정도만 만족시켜도 좋다는 생각이라면 다른 종교를 찾아가시던지 아니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에 참여하는, 정확히 말해 그 통치를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실제로 구현시키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이 항상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하나님의 뜻을 땅에 이루기 위한 기도부터 하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그분의 대리인으로써 이 땅을 책임질 유일한 청지기입니다. 신자가 지니는 이런 정체성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또 그 정체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발락과 발람처럼 자기가 바치는 정성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는 복과 화를 조절하려고 덤비거나, 은연중에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뜨겁다 해도 하나님과 주고받는(give & take) 거래(deal)일 뿐입니다. 성전 복판에서 자기가 행한 율법적 선행을 구실로 유대 사회에서 의인이라는 칭송을 받아 합당하고 또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만 한다고 따졌든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들을 가장 멀리했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불려낸 이유는 간단하고도 하나입니다. 세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건져냈으니까 당연히 그 세상을 아름답게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지금 당장, 공간적으로는 우리가 서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하늘의 거룩한 통치를 실현시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더러 애굽과 앗수르에게 당신을 알게 해주라는 명했습니다. 그런데 애굽과 앗수르는 단순히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오래 동안 심한 착취와 핍박을 가했던 원수들입니다. 주님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하신 까닭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신자가 받을 팔복 중에 마지막 최고 좋은 복이 무엇이었습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0-12) 주님의 십자가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핍박받는 것이야말로 또 그럴 때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자가 받는 최고의 복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사는 한국과 미국에 주님이 지적한 그런 종교적 핍박은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믿음으로써 살고 죽는 문제에까지 이어질 일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도 이단들에게도 전도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고 큰 잘못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 거래하려고 기도하는 바로 그 잘못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잘 알면서도 매번 망각합니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복과 화로 나눈 것처럼 여겼던 불신자 시절의 생각을 완전히 없애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범사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온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그분의 전지전능성을 인정하기에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가 당신께서 맡기신 청지기 일을 실제로 성실히 수행하기를 소원하고 목을 빼고 기다리십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하나님이 거룩하게 이 땅을 다스리는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천국은 이 땅에 강력하게 도래했으니 제자들더러 탈취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대적과 나의 원수들 앞에서도 그분의 영광만 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나를 신자로 부르신 그분의 뜻을 달성하는데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뜨거운 열정으로 간절하게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자신을 축복해달라는 신탁입니다. 또 그분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제거해달라고 마찬가지로 뜨겁게 기도해야 하는데 나의 대적을 저주해달라는 신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충성하고 있는 신자라면 나는 너무 연약하니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식의 종교적인 겸손은 버려야 합니다.

 

발람의 사건의 의미는 한마디로 사탄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이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백성답게 사는 모습을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 앞에 보이라는 것 하나이지 않습니까? 그럼 또 그 일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도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10/2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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