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순종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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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순종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6:1-7)

왜오직예수인가

 

 

목숨을 건 순종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수6:1-7)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12) /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비밀 (9)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수6:1-7)

 

전투를 포기한 여리고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로 너무나 힘든 요즘 같은 시기에는 많은 신자들이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함락한 기사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백성들이 줄서서 성 주변을 돌면서 함께 기도만 했는데도 철옹성 같던 성벽이 그대로 무너지고 손쉽게 진멸하는 큰 승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교지에서나 어떤 해결하기 힘든 대상의 주변 땅을 밟으면서 기도하면 마찬가지로 기적적인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번 위기도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종식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신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응답해주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고 이번에도 반드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로 무너졌다는 것은 본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신자들로 더 이상 신앙생활에 잘못된 적용을 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까지 그 승리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여덟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이 바로 본문 1절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으로부터 엄청난 정보를 얻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신이 그 백성을 애굽 노예에서 탈출시켰을 뿐 아니라 광야에서 거뜬히 생존케 했고 최근에는 아모리 왕들 시혼과 옥을 심판한 것까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출애굽 직후에 홍해 물을 둘로 나누고 마른 땅을 건너게 한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실토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장대한 군대와 튼튼한 성벽들을 보고 자기들이 메뚜기처럼 너무 작게 여겨져 전투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라합에 따르면 사실은 가나안 족속들이 사십년 전부터 여호와에 대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신이 이번에도 급류가 흘러넘쳐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갈라 마른 땅을 건너게 했다고 하니 다시 더 크게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수5:1)

 

본문 1절은 여리고 성 주민들이 거꾸로 메뚜기 신드롬에 걸려서 전투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리고가 전투를 포기했기에 이스라엘이 성 주변을 돌며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라 찬양이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지시한 내용을 정확히 살펴보면 지금껏 여리고 성 전투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 해석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땅 밟기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과, 둘째 결코 손쉽게 기적적으로 거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양각 나팔을 불고 그 뒤를 또 다른 제사장들로 언약궤를 매고 행진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려고 앞뒤로 무장한 군사들을 배치했고 언약궤 뒤를 모든 군사가 따르게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처음 육일 간 한 바퀴씩 돌 때나, 마지막 칠일 째에 일곱 바퀴 돌 때나 줄곧 나팔을 불러야 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가 백성이나 군사들에게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언급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여호와가 지시하는 대로 전했는데 기도하라는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기”(2절b)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이미 확정해놓은 승리를 두고 기도하라고 지시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양각 나팔을 부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매고 전투를 수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전쟁은 여호와의 것으로 당신이 지시하는 대로 행하면 당신께서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성 주변을 돌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양각 나팔은 이스라엘의 매 절기마다 하나님의 임재 하에 드려지는 예배에 나오라는 소집 공고였습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베풀어주셨던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 감사하는 예배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스라엘 군대들이 여리고 성 주변의 땅을 밟으면서 돌 때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찬양의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6:1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모세오경을 눈으로만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읊조리듯이 작게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귀에 들리는 소리에 따라 다시 말씀에 생각을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독특한 운율이 있어서 시를 낭송하면 노래처럼 아름답게 들립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암송해야 할 유대인들로 당신의 역사와 은혜를 암기하기 쉽도록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도 그렇게 묵상하듯이 작은 소리로 읊조리듯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야단쳤습니다.(마6:5)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들으라고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행진하는 동안에 일절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것은 기도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지금은 제사장의 선창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때때로 아주 짓궂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급한 전쟁터에서 너무나 한가하게 찬송에만 귀 기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너무나 여유자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위급한 일이라도 전지전능하신 그분에겐 절대로 위급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즉, 당신께서 그들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어 놓았는데 구태여 급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행진

 

둘째로 이스라엘이 손쉽게 승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런 전투 방식은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세계 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가장 정상적이고도 효과적인 전술은 제일 약해 보이는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입니다.

 

바위로 쌓은 성벽은 폭약이 개발되기 전에는 무너뜨리기 아주 힘듭니다. 가장 방어태세가 허술한 곳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백병전을 벌립니다. 또 나무로 만든 성문을 부수려고 뾰족하게 자른 큰 나무둥치로 계속 힘껏 두들깁니다. 이번처럼 튼튼한 성안에서 장기적으로 농성하려고 들면 공격하는 쪽도 충분한 보급을 받으면서 성내의 식량과 물이 떨어지도록 기다립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가 어떤 모습으로 행군하고 있습니까? 제사장을 따라서 성 주변을 빙빙 돌아야 하니까 여리고 성에서 볼 때는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걷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성을 바라보며 방어 태세를 갖추고 도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성 쪽을 보고 돌려면 가재걸음이어야 하는데 그 많은 군대로선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무장한 자들이 제사장 앞뒤로 호위했다고 말합니다.(6,9절) 일반 군사는 무장을 하지 않았거나 했어도 아주 빈약한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였다가 얼떨결에 탈출했으니 제대로 무기를 갖출 수도 없었습니다.

 

출애굽 후에 천부장 백부장 제도를 통해 군대를 조직하긴 했지만 광야를 도는 동안에 무기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보급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사기 시절부터 다윗 시대까지 블레셋 족속에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한 까닭도 철기로 된 무기를 블레셋이 독점했고 유대인들은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않습니까?(삼상13:19-23, 17:7)

 

말하자면 자기들 약점을 최대한 감추며 여리고의 최고 약한 부분을 공략해야 할 이스라엘이 거꾸로 자신들의 가장 취약한 상태를 적군에게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 위에서보면 이스라엘 군대는 화살이나 창으로 사격연습하기에 딱 좋은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모습으로 칠일이나 돌라고 했고 마지막 날은 일곱 번까지 돌라고 명합니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신세대라도 이는 전투에선 절대로 행해선 안 되는 일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예 창이나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돌라고 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명령이라면 순종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그냥 운동하며 체력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구태여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앞뒤에서 양각나팔을 불며 찬양할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지시를 내릴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틀림없이 창과 화살의 사정권 안에서 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명령을 듣자마자 더더욱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여호수아는 물론 모든 백성들에게 순간적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너희 목숨을 걸고 칠일 동안이나 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그들은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처럼 아무나 창과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져 죽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요단 급류를 건너는 동안, 또 길갈에서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치르는 동안에 적군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이 완전히 공포에 질려있다는 라합의 실토가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나타나 이 전투는 당신께서 먼저 가서 행할 테니 너희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순종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다 마련해주면서 당신의 권능을 실제로 체험케 했습니다.

 

성문 앞에 이르러 보니 하나님 말씀대로 전쟁을 치르려는 기색이라곤 없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두려워서 조금 망설였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대면하여 힘을 얻은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제사장들을 독려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마지못해 용기를 내어 진군했는데 성에서 창이나 화살이 전혀 날라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군사들도 여전히 조금 불안하긴 해도 담대히 그 뒤를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장한 자들로 앞서게 한 것도 여리고가 공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 해도 맨 앞장을 서야하는 제사장들이 두려워할 수 있기에 그들을 격려할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로선 공격 받기 너무 좋은 모습으로 행군하기에 하나님에게 자기들을 지켜달라는 기도는 했을 것입니다. 성을 무너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행진만 하면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여호와의 약속까지 이미 받았습니다.(5절) 그럼 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 위급하고 소중한 것이 자기 목숨이고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 아닙니까?

 

찬양으로 치르는 전투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면 이 행진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아주 아슬아슬한 땅 밟기였습니다. 그것도 칠일 동안에 도합 열 세 번이나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네가 밟는 땅을 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럼 여리고 성을 한번만 돌아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더러 구태여 이렇게 번잡하고 가슴 졸이는 절차를 거치게 하신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첫째 이유는 살펴본 대로 신세대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시험한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야 이후로 부모들과 동일한 체험을 시켜서 동일한 의미의 신앙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지금 성을 공격하려는 태세가 전혀 아닙니다. 그 반대로 완전히 무력하게 두 손과 두 발을 다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동안 교육받은 것을 실전을 통해 최종시험을 치르는 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절망에 빠져 현실의 소망이 없어질 때가 하나님의 기적적 권능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오직 그분만 소망하고 의지하여서 그 절망을 당당히 싸워 이겨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칠일 동안 돌되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아야 했고 일곱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나팔을 불었던 그 회수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숫자는 칠년 째의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는 희년을 상징합니다. 희년의 영어가 ‘jubilee’인데 히브리어로 양각 나팔 ‘요벨’(יבל)이 그 어원입니다. 지금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면서 희년을 상징하는 숫자만큼 찬양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 번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처음 하루 이틀은 불안해서 자기들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들이 겁을 집어먹고 미리 도망갔고 당시에 위세를 크게 자랑하는 여리고 성입니다. 적의 사정권 내에서 완전 무방비 상태로 걸어가는데도 성은 쥐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습니다.

 

점점 여호와의 크신 권능과 완전하신 섭리가 가슴 가득히 채워지고 나중에는 정말로 신나고 힘이 넘치는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양각 나팔 소리는 찬양 가사로 이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저 굳게 닫힌 성문과 너무나 조용한 성벽을 보라. 이 전쟁은 너희 힘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나에게 속했으니 아무 염려 말아라. 할례 없는 백성의 성벽은 이제 곧 무너지리라.”

 

상식과 이성으로 따져선 너무나 비정상적인 전투였으나 사실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간에 너무나 은혜로운 교제와 동행의 시간이었습니다. 출애굽 때에 구세대는 홍해를 완전히 건넌 후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찬양예배를 드렸지만 지금은 전쟁 중에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예배로 전투를 대신하게 하시는 신은 온 천하에 오직 여호와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당신만의 오묘하고 완전한 섭리와 주권이 역사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십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심지어 아무리 이해가 안 될 만큼 힘들어도 당신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는 자만이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영적 유익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 아주 번거롭고도 너무나 아슬아슬한 땅 밟기를 명하시는 이유입니다.

 

너무나 기괴한 전투방식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유가 또 있는데 성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꼼짝도 않는 여리고 주민들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여호와가 그렇게 명하시는 구체적인 이유, 과정, 결과는 몰라도 이번에도 당신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기본적인 신뢰는 있습니다.

 

반면에 이런 전투의 방식은 여리고 주민들에게 이상하다 못해 아주 기괴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 전투 현장에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평온한 가운데 찬양만 부릅니다. 공격할 태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성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칠일 동안 열 세 번이나 말입니다. 가뜩이나 홍해와 요단강을 가른 여호와에게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그 공포심은 더 심해졌을 것입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히브리신이 언제 큰 능력을 발휘할까 긴장해서 초조하게 지켜봤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항복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걸어놓은 붉은 줄을 보고 제발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항복을 의미하는 힌 깃발을 내걸라는 것입니다. 칠이라는 수자가 중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만의 긍휼을 인내의 한계까지 베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제사장과 언약궤를 앞세운 이유도 지도자로 솔선수범시키려는 뜻이 전부가 아닙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고대 전쟁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파워게임(power game)이었습니다. 히브리신이 홍해와 요단강을 갈랐고, 발람의 세 번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고 그 탐욕스런 이방에서 최고로 영험한 주술사를 심판하셨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습니다. 능력으로는 히브리 신과 자기들 신과는 전혀 게임이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지만 익히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리고 주민이 겁을 먹은 대상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신 여호와였습니다. 그 신의 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사장과 언약궤를 창과 화살로 공격해보려니 철통같이 무장하여 사방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여호와로 인해 간담이 녹아있는 판에 그런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여리고는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전쟁을 어떻게 시작할지 눈여겨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신에게 제사도 드리지 않고 곧바로 양각 나팔을 불며 찬양부터 시작했습니다. 발락과 발람의 예에서 보듯이 이방족속들은 전쟁을 앞두고는 자기 신에게 풍성한 제물을 바치며 승리의 신탁을 받으려는 제사부터 경건하게 드립니다.

 

이스라엘이 성을 도는 동안에 여리고 주민들도 틀림없이 성안에서 자기들 신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제사를 경건하고 거창하게 드려도 갈멜산의 바알 선지자들이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치성으로 자기 몸을 찔러 피까지 흘렸으나 묵묵부답이었듯이 아무 응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발람의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가 도리어 축복으로 바뀌었듯이 저주의 주술도 승리의 신탁도 전혀 먹히지 않고 도리어 불안과 공포만 커져갔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은 실존조차 하지 않기에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 배후에 작동하는 사탄도 지금 여호와 앞에 완전히 메뚜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신탁의 절차 없이 바로 찬양을 시작할 뿐 아니라 신상조치 없다는 점이 더더욱 이상했을 것입니다. 단지 금으로 덮은 상자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매고 있습니다. 장엄한 인간이나 동물 모습의 신상이 아닙니다. 이방의 우상들은 위엄을 조장하려고 아주 크게 만들기에 신전에 모셔놓습니다. 저렇게 어깨에 메고 다닐 크기가 아닌데다 신성모독이라 인간이 감히 맬 수도 없습니다.

 

신들끼리 능력을 다투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변변한 신상도 없는데다 제사장들의 출정식을 치루는 모습부터 전혀 달랐습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이 성 주위만 빙빙 돌고 있으니까 우리라도 그런 상황에선 간담이 완전히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찬양하며 언약궤를 매고 행지하는 것은 히브리신은 당신의 백성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들 안에서 동행하시며 이런 전쟁에선 더더욱 앞장서신다는 뜻입니다. 이방들처럼 가만히 앉아서 치성과 제물만 배불리 받아먹는 신이 아닙니다.

 

여리고가 히브리신에게 감히 맞설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절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다른 신들보다 능력이 더 센 것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신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로 단순히 당신의 능력이 두려워 항복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온 족속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유일한 신임을 제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지금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진행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여리고는 하나님의 그 넘치는 긍휼을 헌신짝처럼 차버렸습니다. 모든 인간적 지혜를 다 동원해 짜낸 대책이 기껏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성벽만 믿고 버티다 보면 이스라엘이 포기하고 돌아가 주기만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싸우지 않고 이스라엘 스스로 우회했다는 소문도 들은 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자기들 스스로 현실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지시에 따랐다는 점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만약 우회해 줄 양이면 그렇게 열세 바퀴나 행진할 리가 없음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원죄 하의 인간들이 이성적인 지혜도 너무 모자라고 영적으로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모르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징벌적인 큰 고난을 겪어봐야 겨우 정신을 차릴까 말까입니다.

 

주술적인 땅 밟기는 당장 그만두라.

 

이 행진에서 완전 숫자 칠이 두 번 겹치듯이 하나님이 여리고에 대해서 끝까지 인내하셨다는 것은 만약 마지막 한계가 차기 전에 여리고가 항복했다면 진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가나안과 여리고를 진멸하라는 진술을 보고 너무나 냉혹 잔인한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잘못했는데도 모든 애굽 집의 장자를 심판한 것이 냉혹해보여도 그 전에 아홉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그전에 당신의 백성들로 사백 년간이 애굽의 노예로 고생시킨 후입니다. 여리고에도 하나님은 모든 기회를 주셨고 참을 때까지 참은 것입니다.

 

이스라엘더러 한가하게 할례나 유월절 제사를 지내게 하며 지체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칠 일간 성을 도는 것도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는 여호와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 신에게 항복하는 대신 끝까지 버텨보자는 완악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모든 이는 자기 죄로 심판 받으며 또 하나님도 반드시 심판해야 할 자만 심판하는 너무나 공평하신 분입니다.

 

이제 여리고성 전투에서 우리가 정말로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전통적으로 배워왔던 가르침에서 수정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응답 받고 싶은 제목을 정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해놓은 승리를 감사하고 기쁨으로 받아 누리는 찬양예배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승리는 사백년 전에 이미 작정되었고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때문이라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이 차지하고 싶은 지역 내지 대상을 정해놓고서 둘레를 돌며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한다고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달렸고 응답하는 시기와 방식도 그분이 정하십니다. 더 중요하게는 신자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과 제목들도 사실은 하나님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여리고 성 같이 궁극적 승리가 보장된 소명을 다 심어주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십니다. 패배로 끝날 것이면 그런 권세로 동행하지 않습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에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신앙생활의 현장에선 큰 어려움이 따르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순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는 예언과 약속을 함께 주셨습니다. 신자의 눈에는 큰 고난과 위험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흉계를 깨트렸기에 궁극적 승리가 신자들 앞에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처럼 하나님은 그 승리를 확신하고 범사에 감사 찬양하기만 요구하십니다. 최소한 아무 염려 초조해 하지 않고 그분이 주실 승리를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리고 주민의 회개를 기다리며 끝까지 인내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해야 합니다. 불신자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신자부터 먼저 주도적으로 자기 목숨까지 거는 순종으로 그들 앞에 증명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선봉에 섰는데 여호와가 가장 앞서 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리고가 공격하면 제사장 즉, 여호와가 먼저 죽는 셈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여리고 현장에도 충만하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지도자들부터 주님을 따라서 먼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자기가 죽어서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의 미혹된 영혼을 예수님의 영으로 살려내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두고 땅 밟기 기도만 하면 큰 응답을 받는다는 죄송하지만 주술적인 가르침은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시장어귀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고 야단쳤지 않습니까?

 

무슬림 지역에 가서 눈에 띄게 수십 수백 명의 신자들이 모스크 사원을 줄지어서 돌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바람에 현지인들과 충돌을 빚고 추방당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이야 그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지만 막상 현지인들은 제2의 십자가 전쟁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먼저 자기를 죽여 가며 그들을 섬기면서 십자가 대속죽음의 순정한 복음이 함께 전해져야만 그들의 얼어붙은 심령을 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승리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고 세밀한 섭리로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비상식적이고 목숨까지 걸어야 할 방식의 전투를 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앞서서 행하셨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홍해나 요단이나 철옹성 여리고나 이번 코로나 사태나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그분을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매일의 삶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친밀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쥬블리 참 안식의 찬양을 목청껏 부를 수 있습니다.

 

4/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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