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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직 예수인가

기도의 양이 채워져야 응답되나요?




기도의 양이 채워져야 응답되나요?

 

[질문]

 

불신자 남편을 구원받게 해달라는 기도를 계속 열심히 하고 있으나 아직 별다른 진척이 없습니다. 주위 성도님들이 기도의 양이 차야 응답받으니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불신자 남편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 안 들어 주시면 서운할 것도 같고 내 기도가 아직도 부족한가 싶어 혼란합니다.

 

[답변]

 

슬로건 식의 가르침

 

목회자분들이 종종 정확한 설명은 생략한 채 짧은 구호나 격언 형식으로 영적 진리를 표현합니다. 기억하기 쉽고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막상 신앙생활에 적용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어 표현법은 대체로 두리뭉실하고 한국인들의 성격도 일반적으로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성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슬로건 식의 그런 영적 가르침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몰라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무슨 뜻인지 정확히 가르쳐 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분명히 진리인 것 같고 감성까지 자극하여 은혜롭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양이 차야 응답을 받는다.”는 가르침도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응답이 안 되고 있으면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았으니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 가르침의 맥락에선 기도의 양(量)은 기도에 쏟아 붓는 시간의 크기와 수고의 세기가 됩니다.

 

그럼 역으로 따지면 어떤 결과가 됩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응답이 잘 된다는 뜻이 됩니다. 끈기 있게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모든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그럼 또 자신이 소망하는 것, 계획하는 일 등을 가능한 크게 잡아서 계속 기도만 하고 있으면 응답이 된다는 뜻도 됩니다.

 

결과적으로 기도가 응답되는 근거는 신자가 행하는 기도의 시간과 열정입니다. 요컨대 신자 자신의 의지력과 인내력이 기도 응답을 이뤄내는 능력이 됩니다. 엄밀히 말해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분을 종으로 부려먹는 꼴입니다.

 

각 신자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 기도하는 제목, 나아가 그의 중심과 믿음과 의도 등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럼 기도가 응답되는 방식과 시기와 내용도 천차만별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양이 차야 응답이 된다.”라고 모든 신자의 모든 경우에 통용되듯 일반화시켜서 가르쳐선 안 됩니다.

 

아주 위급한 경우에는 신자가 순간적으로 마음속으로 짧은 한 문장으로 기도해도, 아니 ‘주여!’라고 부르짖기만 해도 응답됩니다. 그 어려운 상황을 본인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신자를 급하게 구해주어야 하므로 신자가 기도하자마자 즉, 기도의 양과 아무 관계없이 곧바로 응답해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 가지 제목으로 평생을 두고 순전한 마음으로 정말로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의 양이 차도 응답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사실은 응답이 되지 않은 것 자체가 그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실을 신자에게 깨우쳐주려고 틀림없이 삶에서 이런저런 표징을 벌써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신앙상의 모든 의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선적 최종적 절대적 해답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쳤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마지막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선 그런 기도의 모범을 그들 앞에서 해보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며 가르친 내용이 무엇입니까?(마6:9-13) 간략하게 살피면 크게 넷입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 둘째 일용할 양식을 달라, 셋째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 넷째 우리를 시험과 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선 필자의 E-book, “기도 걱정꾼들”을 참조하십시오.)

 

예수님은 기도의 양이 차야한다는 식의 기도하는 방식에 관해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을 많이 해야 그 신이 잘 듣는 줄로 아는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마6:7) 질문하신 뜻에 비추면 기도의 양이 차야만 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하신 셈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가르쳤습니다. 그중에 가장 눈여겨 봐야할 것은 첫째 기도제목입니다. 첫째니까 당연히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즉, 인간 사회와 신가 개인에게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이뤄지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뜻이 이뤄진 것 같이 땅에도 이뤄지길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라야 응답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인간의 뜻과 큰 비전에 따라서, 아무리 그것이 인간의 생각에는 선하고 경건해보여도, 좌우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신자의 어떤 기도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만 응답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앞에서 신자가 평생토록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도 기도의 응답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기도의 양이 차면 응답되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래야만 응답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아니라 간절함과 진정성에서 이보다 더한 기도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의 양이 찰대로 찬 기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기도도 자라야 한다.

 

하나님 뜻대로만 응답하신다는 원칙에서 유일한 예외가, 엄밀히 따지면 예외가 아니라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지만,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에 신자들이 자기 소원을 아뢰었더니 응답이 술술 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신자의 신음과 한숨 소리를 다 듣고 계시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진정으로 힘입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자로 체험적으로 알게 해주려는 목적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게 되는 이유가 대체로 현실적으로 큰 고난이 닥쳤을 때이므로 그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얼마 동안은 잘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아도 응답됩니다. 신자로 하나님이 자기를 알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기쁨으로 자꾸 기도하게끔 해주려는 뜻입니다.

 

그러다 서서히 기도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현실 문제만 갖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의식이 생성되기 전 아주 어릴 때는 자녀들이 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만 조금씩 성장하면 홀로 서게 하려고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믿음이 자람에 따라서 점점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주님의 그것에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국 신학자가 처음에는 자기가 소원하는 이것저것 해달라는(give me) 기도를, 다음에는 나의 성품과 믿음을 변화 성장시켜달라는(change me) 기도를, 마지막에는 나를 당신의 뜻대로만 들어 사용해달라는(use me)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 더 보태여 주님이 시키는 기도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서 스스로는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 땅의 흑암의 세력과 맞서서 죄악을 고쳐내는 내용의 선지자적인 기도(prophet’s prayer)입니다. (이는 물론 방언 기도와는 다릅니다. 기도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본 사이트의 첫 홈페이지 하단의 지난 글 찾기의 주제별 찾기에서 ‘기도’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기도의 양이 찬다는 첫째 의미

 

그럼에도 “기도의 양이 차야 응답 된다”는 가르침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영적인 진리를 함축해서 드러내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회개 서원 감사하는 기도가 아닌 일반적인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신 해주십시오.”입니다. 그럼 신자가 일상적으로, 혹은 최선을 다하면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일까지 기도할 필요는 사실상 없습니다. 혹시 실수하거나 지치거나 나쁜 방해가 염려된다면 하나님이 지켜달라는 기도만 하면 됩니다. 쉬운 예로 대학입시는 공부 열심히 해서 실력을 쌓는 것이 급선무이지 기도는 이차적이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신자 개인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웃의 문제나 인간 사회의 죄악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를 주로 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는 기도를 하면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쳐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자는 스스로 소원하는 일을 계획도 하지 말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아무리 인간이 계획하고 노력하며 기도해도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렸음을 정확히 알고 기도하면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만 응답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어떤 기도를 하던 자신이 원했던 내용과 방식과 시간대로 응답되어야만 한다는 고집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기도의 양이 찬다는 첫째 의미는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든 심지어 응답하지 않더라도 진정으로 감사하고 순응하겠다는 단계에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나로선 이 계획과 뜻이 아주 선해 보이지만 주님의 응답이 나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좋을 것이므로 주님 뜻대로 이루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본을 보이셨던 기도입니다. 또 앞에서 기도의 세 단계 중에 마지막인 “나를 들어 사용하여 주십시오”(use me)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 기도의 양이 찬다는 의미입니다.

 

기도의 양이 찬다는 둘째 의미

 

간혹 신자가 하나님의 뜻인 줄 미리 아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배우자의 전도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어긋날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를 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질문자와 그 가정에 임하였고 하늘에서 뜻이 이뤄진 줄 믿으셔야 합니다. 언제 어느 때에 구원해주실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미래에 확정되어 있는 사실임을 아셔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기도 제목일 때에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자기 뜻을 이루려 끝까지 고집하는 것을 믿음의 기도가 결코 아닙니다. 미래에 확정된 사실이므로 남은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이렇게 확정된 기도제목을 붙들고 그대로 이뤄질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 기도의 양이 찬다는 두 번째 뜻입니다.

 

이는 사실은 기도의 양을 채우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끝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구원을 위하는 기도인데 어찌 중간에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물리적 양을 채우려 들면 자꾸만 응답의 시기만 초조하게 기다려지고 또 응답 가능 여부가 계속 궁금하고 불안해집니다.

 

기도의 거인 조지 뮬러가 전도대상으로 기도한 자들 중에 몇 명이 그가 죽을 때까지 믿지 않고 있었으나 그의 장례식에 감동 받아 그가 죽은 후에 믿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함께 기도의 양이 찬 또 다른 예입니다.

 

끝까지 평생을 두고 기도하는 확정된 제목 외에도 신자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기도할 제목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일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그분이 기뻐하실 지부터, 최소한 싫어하는 내용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사전에 행하는 묵상과 기도도 실질적으로 기도의 양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기도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배우자가 구원 받도록 기도만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부터 정말로 예수 믿는 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 예수 믿더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네, 예수에게 거룩한 권능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 정말로 예수 믿어서 당신 같이 살게 된다면 나도 예수를 믿고 싶어!”라는 반응이 배우자에게서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6:2에서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후 3-10절(인용생략,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은 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에 너의 기도를 듣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주어야만 하는 기도라면 일상 삶속에서도 그것을 붙들고 항상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엎드려서 하는 정식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고를 그 기도 제목에 맞추어서 묵상하고 모든 되어져 가는 일들을 그 제목에 비추어 영적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 영적인 분별도 다 기도입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며 또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기도의 양을 채우는 셈입니다.

 

한마디로 결론내리자면 기도의 양이 차는 것이 시간과 노력이 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서 기도하는 제목 동기 목적 믿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끔 맞추어 나가되 삶에서의 구체적인 인도는 그분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9/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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