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주민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2:8-11 &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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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주민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2:8-11 & 23,24)

왜오직예수인가

 

 

(수2:8-11 & 23,24) 여리고 주민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6) /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비밀 (3)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수2:8-11 & 23,24)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면서 능히 대적할 자가 없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백성들도 모세에게 그랬듯이 그를 통해 전해질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새 지도자 여호수아의 취임식을 마쳤기에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해야 합니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상대할 대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보장했어도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므로 구체적인 전투 계획은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데스 바네야에서 정탐꾼을 보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여러 면에서 많이 다릅니다.

 

우선 정탐꾼을 두 명만 보냈습니다. 그것도 가만히 보내었다고 합니다.(1절) 이스라엘 백성들 모르게 비밀리에 보냈다는 뜻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한국속담이 있듯이 정탐꾼이 많으면 의견이 갈릴 확률이 높습니다. 또 혹시라도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 백성들이 동요할 수도 있으니 자기에게만 먼저 은밀히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겐 가데스바네야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다가 의견이 나눠져 처절하게 실패했던 체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벌로 사십 년간 광야를 방황하다 죽는 모습을 곁에서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가데스 바네야 사건이 그에게 분명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보낼 필요가 없었던 더 중요한 이유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전략과 전술

 

어떤 전쟁이라도 전략과 전술을 세워야 합니다. 전략은 넓은 지역의 전쟁 전부를 통괄하는 장기적 계획이고 전술은 제한된 지역의 개별 전투에 대한 일회적 방안을 말합니다. 그가 두 정탐꾼에게 “여리고를 엿보라”고(1절) 지시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가나안 땅 전부를 정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의 전체 지리와 형세는 이미 열두 명이 자세하게 정탐했었고 사십 년이 지났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열 명의 보고도 사실 그대로 정확했습니다. 그 땅의 성읍은 견고했고 가나안 족속들도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전체 전쟁에 대한 전략은 이미 수립되어져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한반도의 중간지역을 확보했습니다. 북한군을 남북으로 절단하여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도 지금 가나안 중간으로 들어가서 남북으로 나눔으로써 그 땅의 족속들이 연합해서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수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전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고 제사장 나라 언약을 서약한 후에 가나안으로 진군해 처음 당도한 곳이 가데스 바네야였습니다. 그곳에선 가나안을 남에서 북쪽으로 종단해서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장대한 가나안 족속에 비해 자기들이 너무 연약하게 보이는 메뚜기 신드롬에 걸려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했습니다. 그 벌로 사십 년간 방황으로 광야에서 다 죽었고 하나님은 이제 신세대들로 그곳을 우회시켜서 요단 동편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어쩔 수 없이 동에서 서로 횡단해서 중앙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신세대마저 처참했던 실패를 상기하고 크게 두려워할까 하나님이 배려해준 것입니다. 출애굽 직후에도 가나안을 향한 지름길인 해변대로에 애굽 군대가 진을 치고 있기에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출13:17)하여 광야로 우회시켰듯이 말입니다. .

 

하나님이 세워준 이 전략에 따라 처음으로 치를 국지전투가 여리고 성입니다. 그 성의 방어태세만 잘 살펴서 단기 전술만 세우면 됩니다. 여러 명이 성 안에 몰려다니면 아무래도 쉽게 발각될 것이므로 판단력이 뛰어나고 담대한 믿음을 지닌 심복 두 명만 보낸 것입니다.

 

실패한 정탐?

 

그 정탐꾼이 들어가서 처음으로 행한 일이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는 것이었습니다.(1절) 그러나 그들이 스파이인 줄 눈치 챈 여리고 군대가 잡으러 오자 적진을 제대로 정탐도 못한 채 급하게 돌아왔습니다. 그 두 사람이 정탐한 결과가 본문 23, 24절인데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라고만 했고 여리고 성의 군대와 방어 태세 등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이라곤 기생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일입니다. 그럼 정탐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정반대로 대성공이었습니다.

 

우선 기생 집에 머문 까닭이 있습니다. 그곳은 여관을 겸한 술집이었습니다. 여행객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한국의 조선시대로 치면 주막 같은 곳입니다. 그 성과 주변의 최신 소식들을 수집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문제는 기생 라합과 가나안 족속의 말을 통역 없이 알아 들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중다한 잡족”이 따라 나왔다고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출12:38) 그 중에 가나안 족속들도 있었을 것인데 정탐꾼으로 그들이나 그들과 결혼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여리고 사람들과 대화가 되는 자를 골랐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무심코 지나치는 간단한 문구가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거나 의심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그만큼 성경은 정미하고 완전한 기록입니다. 기록이 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라면 반드시 앞뒤로 모순되거나 무리한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여리고 성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신자들도 있는데 바로 이 “중다한 잡 족”이라는 아주 간단한 언급이 그 사실성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하나님이 깔아둔 복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시킬 장기적인 전략을 벌써 세워놓았고 이스라엘이 그 구체적인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이에 한 치의 차질 없이 당신께서 완벽하게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세를 광야 인솔의 전문가로 사십 년을 훈련 준비시켰으며 여호수아는 사십 년간 후계자 수업을 받도록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백 년간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도 세계 최강국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이 창성케 되는 그분만의 비결이었지 않습니까?

 

이 두 정탐꾼도 이 일에 자기들이 쓰임 받으리라고는 전혀 계획 기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말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여리고 성 함락에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일에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쓰임 받을지 모릅니다. 신자는 그분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지식 지혜 능력 성품 체험 무엇이든, 심지어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에 처참하게 실패했던 일까지 들어 사용하여서 당신의 거룩한 일을 이루십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마음껏 사용해 주시옵소서.”라는 태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아버지 세대들의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 신세대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가 생각과 길과는 다르고 광대하고 완전합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순종 둘째도 순종 셋째도 순종 뿐입니다.

 

최고로 유용한 정보

 

그런데 두 정탐꾼이 대화는 통해도 아무래도 현지인들과는 그 형색과 분위기에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상하게 여기고 여리고 왕에게 신고했으며 곧바로 체포조가 출동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순간적인 기지로 여리고 군인을 따돌리고 성벽 위에 있는 집에서 줄로 달아내려 아슬아슬하게 피신시켰습니다.

 

두 정탐꾼은 그 모든 경과를 여호수아에게 보고했습니다. 성경기록에는 없지만 성벽 위에 기생집이 있을 만큼(15절) 성벽이 아주 튼튼하고 웅장했다는 보고도 틀림없이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리고 성벽은 전차 두 대가 교차해서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합니다. 그 두꺼운 성벽을 뚫고 공격하기는 현재의 이스라엘로선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을 덴데도 거동이 수상한 자로 신고 당했습니다. 곧바로 체포조가 들이닥칠 정도로 경계 태세 또한 철저하다는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생집은 외지인이 현지의 정세를 수집하기도 편하지만 대신에 현지인이 수상한 나그네를 물색하기도 쉬운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언뜻 보면 큰 수확이 없었을 것 같은 정탐이 사실은 너무나 중대한 정보를 캐왔습니다. 기생 하랍에게서 여리고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인해 간담이 녹아 있고 정신을 잃을 정도라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한 이유는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먼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10절a) 때문입니다. 바닷 물을 마르게 하는 일은 지금도 그렇지만 가나안 족속들에겐 너무나 엄청난 일입니다. 누구라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처음에는 전부 거짓말로 여겼을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이자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가 홍해의 기적에 대해 자세히 전해 들었습니다.(출18:1) 미디안 족속은 여러 나라를 장사하러 다니는 중근동 지역의 정보통이었습니다. 거기다 애굽에서 함께 탈출한 잡족들도 홍해의 현장에 동참했기에 그들의 증언도 각 족속들에게 순식간에 번져나갔을 것입니다.

 

출애굽은 요즘으로 치면 군대조차 조직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최소국이 미국을 상대로 열한 번 싸워 전승한 것입니다. 미국이 처음에는 얕보고 몇 천 명만 파병하여 전투하다가 패배하자 차츰 장비와 숫자를 늘려서 항공모함과 스텔스기 전폭기들을 다 동원해도 패배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최신예 핵무기 레이저 무기들마저 전자장비가 전혀 작동이 안 되어서 사용도 못해보고 완패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출애굽 이후의 애굽은 역사의 중심무대에서 사라졌듯이 미국도 열한 번의 패배 후에 완전히 국력이 소진되어서 최강국의 지위에서 약소국으로 내려앉은 꼴입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고대에는 전쟁은 각 민족 신들의 능력 대결로 간주되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아홉 번의 재앙은 전부 그들 우상 신들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실제로 애굽의 인명 피해는 열 번째 장자가 죽기 전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우상이란 인간이 인생살이의 예상치 못한 불행과 자연 재앙에서 스스로 위로 받으려고 큰 위력을 지닌 자연 현상이나 물건에 빗대어 고안해낸 것입니다. 인간 성정이 동일하기에 고대의 우상들은 이름만 달랐지 사실은 같은 신들을 섬긴 셈입니다.

 

애굽의 신들도 그 나라가 최강국이니까 고대의 가장 위력이 센 신들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신들이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고 형상도 없는 이스라엘의 신에게 그것도 선지자 노인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으로선 자기들 신들은 대보나마나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압 왕 발락이 자기들 신들로만 대적하면 승리의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판단하고 당대 최고의 우상주술사 발람을 동원하려 했으나 세 번 다 실패했지 않습니까? 가나안은 그 소식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여리고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갖는 공포심은 현대인들이 미국에 갖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이스라엘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쳇말로 미국을 완전히 떡이 되도록 열 한 번이나 갖고 놀았던 민족에게 주변의 아프리카 소국들이 전쟁을 치르겠다고 나설 만큼 무모한 짓은 없습니다.

 

광야를 생생하게 건너온 이스라엘

 

문제는 홍해를 마른 사건은 이미 사십 년 전 일이라 그 직후에는 몰라도 지금쯤은 잊어버리거나 처음 들었을 때보다 충격이 훨씬 덜할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 민족이 광야로 들어간 이후로는 구체적인 소식이 끊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홍해 때문에 간담이 녹았다는 라합의 고백은 엄연한 진실이었습니다.

 

라합이 또 어떻게 실토했습니까?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10절b) 이스라엘이 먹고 마실 것이 없고 불 뱀과 전갈들이 설지는 광야를 사십 년간이나 방황했음에도 숫자는 전혀 줄지 않고 생생한 모습으로 이방 족속들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입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십 년 전의 홍해 사건이 오히려 더 실감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흔히들 뉴스나 소문이란 전해지는 기간과 통로가 많아질수록 더 부풀려지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바로 얼마 전에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전멸했다는 소식까지 들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도 그 소식을 들은 위에 이스라엘이 백성이 많음으로 인하여 심히 두려워하고 번민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민22:2,3)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은 일상적 전투에서 전멸 당했고, 모압 왕 발락은 신들의 대결에서 저주의 신탁 한마디도 벙긋 못하고 철수해버렸습니다. 여리고가 현실적 무기나 영적 무기 중에 택할 수단이라곤 없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난공불락의 성벽을 자랑하지만 막상 여리고 주민들은 이미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리고 성 안은 극도의 공포심으로 패닉에 빠졌습니다. 스파이에 대해서 신속하게 대처한 것이 그들의 평소 군대 체제와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극도로 긴장하여서 예민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라합이 심히 두려워했고, 간담이 녹았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그 짧은 문장 안에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했겠습니까? 라합으로선 적국인 이스라엘의 정탐꾼에게 잘 보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에 구태여 그렇게까지 과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예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고 확정적으로 선언한 후에 성내의 사정을 말해주었습니다. 여리고로선 어떤 수를 써도 대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금 성중의 분위기가 대적할 꿈도 못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정탐꾼들이 한갓 기생의 말을 쉽사리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몰래 숨겨주고 여리고 군인을 따돌리는 것을 보고서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간주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술집에서 많은 여리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그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뜨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았습니다.

 

지금 여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요단 동편까지 다다른 히브리 족속이 언제 어떻게 쳐들어올지에 쏠려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무 방도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그저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을 두 정탐꾼도 쉽사리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미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그들 성 앞에 도달한 첫날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수6:1) 적극적으로 전투를 개시할 시도는커녕 엄두도 못내고 있었습니다. 전혀 미동도 않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나올지만 두고 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적국의 신인 여호와의 처분에 맡기려는 꼴입니다.

 

출입하는 자가 전혀 없었으니 자기들 나름의 정탐꾼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현실적 대책이라곤 두터운 성벽의 위력만 믿고 장기전으로 버틸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엄청난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 났습니다. 바다를 가른 여호와인데 인간이 만든 성이 아무리 튼튼한들 그분 앞에 전혀 장애가 될 수 없음은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나 어리석고 불쌍할 따름입니다.

 

여리고로선 외적에게 함락당한 적이 없어서 성안에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아모리의 시혼과 옥 왕이 맞서서 싸우는 바람에 전멸 당했다고 하니까 대적만 안하면 우회해줄 것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정탐꾼이 살펴본 결과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애굽에서부터 광야를 거쳐 요단 동편까지 자기 백성을 이끌며 역사했던 일들을 가나안 족속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 앞에 대적할 군대도 신도 없다고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음도 알았습니다. 애굽과 아모리 두 왕이 졌다면 일개 성읍인 여리고가 도무지 맞설 수 없다는 계산도 못할 정도로 여리고가 바보는 아닙니다.

 

그들로선 자기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스라엘이 손쉽게 승리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주민들이 공포에 가득 차 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시한 것입니다.(24절)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완벽하고 오묘합니까? 하나님이 이미 그들의 간담을 주물러서 완전히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십 년 전의 가데스 바네야에선 이스라엘이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여서 아예 전쟁도 치르지 않고 포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지금은 여리고 성 주민이 반대로 메뚜기 신드롬에 걸렸습니다. 전쟁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우회해주기만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아니라 여리고 백성의 역 메뚜기 신드롬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더 크고도 신묘한 역사가 하나 더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정미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라 기록이 없어도 행간의 의미까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합이 홍해 물을 마르게 한 일로 마음이 녹았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십 년 전 홍해의 기적 후에 이스라엘과 처음으로 맞서 싸워야 할 가데스 바네야를 비롯한 가나안 주민들이 느꼈을 공포심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아말렉이 설마 그렇게 셀까 하고 덤볐다가 무참하게 패배한 뒤라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만약 그 때 이스라엘이 두렵긴 해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일단 진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호와가 틀림없이 여리고 이상의 초자연적 기적으로 아무 피해 없이 가데스 바네야를 탈취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처자식이 잡혀가는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가 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사방을 살피며 손으로 물을 떠로 혀로 핥아 먹는 큰 겁쟁이들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삿7:6)

 

멀지도 어렵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

 

모세가 신세대들에게 율법을 다시 강론한 후에 입이 닳도록 권면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4) 백성들은 말씀이 멀리 있어서 어렵게만 여겨지지만 모세는 정반대라고 강조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선 진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멀고 어렵게 여겨졌습니다. 주변 족속들은 여호와가 홍해 물이 마르게 했다는 소문만 듣고도 벌써부터 간담이 녹아내려져 있었는데 말입니다. 반면에 그 마른 땅을 걸어서 안전하게 건너고 애굽의 최정예 군대의 시체들이 바다에 즐비하게 떠있는 것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아낙 자손의 큰 덩치에 간담이 녹아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화가 났겠습니까? 당신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사시나무 떨듯이 이미 완전히 주물러 놓았는데 거꾸로 당신의 백성이 더 떨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스라엘이 너무나 어리석고 완악해 보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와서 판이하게 달라지는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급할 때만 기도해서 겨우 해결 받고는 입을 닦는 것이 솔직히 우리의 너무나 치사한 믿음이지 않습니까? 이미 받은 축복은 기억에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지금 당장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을 쏟아 부어달라는 요구밖에 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사백 년 전에 확정해 놓은 미래를 당신의 일정표와 방식 대로 착착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방해할 세력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를 빼고는 말입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의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징벌도 항상 당신의 백성에게 먼저 행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기 이전에 당신의 백성부터 두 번이나 진멸하려 했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 당신께서 확보한 미래의 축북 안에서 이스라엘로 거룩하게 자라게 하려는 애끓는 심정으로 그런 벌을 내린 것입니다. 지금도 그 후손을 이끌고 다시 복을 부어주려는 그분의 열성과 끈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와 동일한 열성과 끈기로 지금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삶의 모든 측면에서 분별해내어 걸맞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구세대들은 한 발자국만 건네는 그 몇 초간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무려 사십년이 지체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정말로 아무 의미 없게 허무하게 멸망당했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이 생명과 죽음으로 나뉜다는 모세의 권면이 결코 과장된 종교적 표어가 아닙니다.

 

그런 당부를 했을 때의 모세의 심정도 헤아려 보십시오. 떨기나무 불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워진 이후에 자기에게 계시해준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 결과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복이 됨도 체험했습니다. 그 말씀대로만 살면 풍요롭게 기쁨이 넘치니까 제발 순종하라고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신신당부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신자들은 자기 욕심과 판단에만 따라서 눈에 닥치는 여건과 사건에 대한 단기적 일회용의 전술만 세우기 바쁩니다. 하나님의 확보된 미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으므로 신앙생활에 장기적으로 일관된 전략이 없습니다. 급할 때에 기도하는 것 말고는 믿음의 실현 방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땅을 밟으며 기도하는 것이 아주 절묘한 전술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기도란 자기가 정한 큰 것을 무조건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확보해 놓은 큰 승리에 그분께 쓰임 받으며 동참해 나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여리고의 큰 승리는 이스라엘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 아니라 이미 무너져 내리도록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신세대들이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잘 분별하여서 그 열매를 취득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눈앞에 아무리 커 보이는 문제와 환난의 뒤에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영광된 미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뜨겁게 기도하여서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에 순종으로 동참하여 그 보장된 영광의 열매를 취득하는 것입니다.

 

2/2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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