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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직 예수인가

믿음이 없다고 모세를 꾸짖은 이유(민수기강해#30-민20:12,13)




 

 

(민20:12,13) 믿음이 없다고 모세를 꾸짖은 이유는?

구약성경강해 (40) / 민수기강해 (30)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20:12,13)

 

영광을 독차지하는 하나님

 

하나님이 말로 명하여 반석에 물을 내라고 지시했으나 모세는 지팡이로 두 번이나 힘껏 내리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성 앞에 드러내야 할 주의 종이 오히려 가려버렸기에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가나안의 입경이 취소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 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 동안 자기 전부를 희생하며 당신께 충성했던 모세에겐 너무나 허무한 인생의 종말이라는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출애굽 이후 끈질기게 계속된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모세가 대신 다 받아주었고 이번에도 그런 백성들을 향해서만 화를 내었지 않습니까?

 

그의 120년 동안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졌습니다. 그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그가 출생하기 전부터 출애굽을 계획한 대로 그를 택하여서 지금껏 당신께서 인도해오셨습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지막에 안면몰수하고 내치는 것 같습니다.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모든 영광은 하나님 당신만 차지하고 모세는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성경 내용에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좀더 쉽게 접근하는 방법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시켜 보라고 했으며, 둘째는 반대의 상황을 추정해서 다시 역으로 분석해보라고 했습니다.

 

이번 주는 세 번째 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이나 위치에서 그 상황을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므로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또 성경 전체가 그분의 말씀이니까 이는 모든 성경 해석의 가장 중요하고도 첫째가는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하자나 오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인간이 당장 이해는커녕 오히려 잘못하고 있다고 여겨져도 당신만의 완벽한 진실하심, 아름다움, 선하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역사한다는 차원에서 성경을 묵상해보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모호해서 하나님의 입장이 잘 헤아려지지 않더라도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동일한 진리를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 반드시 나옵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그분의 뜻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또 그러려면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하여서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침 종교관련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Pew Research)가 지난주 8/21에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현실이긴 하지만 불신자나 불가지론자들이 기독교와 성경에 관한 기본지식을 신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읽지 않기는 아마도 한국이 더할 것입니다. 거기다 죄송하지만 많은 목사들이 설교에서조차 성경 본문과 무관한 출세 형통하는 방안만 이야기만 합니다. 신자들도 주일에 예배를 신령과 진정을 다해서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행하는 종교공연을 보러 오는 실정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모릅니다. 그러면 믿음도 구원도 모릅니다.

 

찾을 수 없는 모세의 무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벌을 주는 첫째 목적은 회개의 촉구이나 본문의 모세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 경고를 받고는 곧바로 일이 년 안에 죽었습니다. 단순히 그더러 남은 기간이라도 정신 차려서 당신의 거룩함을 가리지 말라는 목적뿐이었다면 그가 받아야 할 벌에 비해서 그 목적은 너무 약합니다.

 

반드시 더 중요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향한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그 벌도 모세 본인에게 오히려 복이 된다는 차원에서 성경을 접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말하자면, 고난을 먼저 준 한참 후에 신자가 끝까지 견디면서 간절히 기도해야만 구해주는 분은 아닙니다.

 

흔히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완전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럼 고난은 축복을 감추기 위한 용도뿐이기에 축복을 발견하는 순간 그 효능이 다해서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고난은 계속 괴로운 것으로 남고 어서 빨리 끝내달라는 기도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허용하거나 역사하는 일들이 인간의 눈에는 형벌이 분명해 보이지만, 심지어 하나님이 그런 뜻을 밝혔지만 축복이 그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축복이 분명해 보여도 형벌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모세가 받은 형벌은 분명히 그의 잘못에 대한 견책이면서도 동시에 축복이었습니다.

 

본문 안에 그런 설명이 없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4:6을 보십시다. 모세 오경의 끝이라 그 결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는 예수님처럼 무덤이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 승천하셨기에 무덤이 텅 비었으나 인간 모세는 시신을 땅에 묻었으나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 가능성은 셋일 것입니다. 먼저 모세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의미에서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했을 수 있습니다. 둘째 진시황의 예처럼 고대 왕은 도굴을 걱정해서 무덤의 위치와 묘실 자체를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를 원수로 여길 애굽 사람들이 시신을 훼손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뜻입니다. 셋째는 가나안 진군 직전이라 광야의 골짜기에 급히 묻었고 근3500 여년의 세월 동안에 마모 훼손되어 흔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자세한 사정은 성경에 기록이 없어서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 하나님이 역사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힌트가 그 앞뒤 구절에 나옵니다. 그 앞 5절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오늘 본문 12절에 예언한 그대로를 당신께서 실현시켰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7절은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의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을 것이며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그 장소 그 시간에 죽도록 직접 간섭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을 삼십일이나 애곡했었음에도 유대인들 아무도 무덤의 위치를 모르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자 간섭하신 역사였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럼 그의 무덤을 모르게 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우선 본문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죽음을 맞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끝까지 그 백성들과 함께 있게 해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거역해 광야를 방황하다 죽는 심판을 받은 너무나도 완악했던 자들 옆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양떼를 맡은 종의 생애는 그래야만 한다는 점을 하나님이 보여준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수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53:9) 예수님은 십자가 좌우에 사형수 강도들과 함께 죽으면서 죄인의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그 죄값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또 그 시신이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묘실에 안장되었으나 부활 승천하시어 무덤은 비어졌고 지금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도 광야에서 완악한 죄인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 무덤도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나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오실 것이라”(신18:15)는 모세의 말을 인용하여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입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했지만 그 당시는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거기다 자신이 실제로 1500여년 뒤에 오신 그 메시아를 가장 잘 예표하는 선지자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모세가 주님과 가장 닮았고 그 이후에 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는데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직접 대화한 유일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신34:10) 예수님도 모든 것을 자의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이를 것을 친히 주셨기에 그대로만 이른다고 선언했습니다.(요12:49,50)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분의 거룩함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을 그것도 사역 마지막 순간에 저질렀습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가혹하리만큼 엄정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를 성자 하나님과 방불한 자리에까지 하나님이 올려주었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깎아내린 종을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으로써 최고로 거룩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얼마나 풍성하고 오묘하며 완벽합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모세의 무덤 자체가 우상이 되고 그도 자칫 신으로 추앙받는 소지를 미리 막아주신 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신자의 경우에는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분명히 고달픈 징계로 여겨지지만 그분의 입장에선 사랑이 넘치는 구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두 부류 뿐인 인간

 

동일한 맥락에서 성경에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들의 무덤이 하나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해낸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엄연히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지니고 연약하고 제한 된 육체를 지니고 짧은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실존 활동하다가 시신을 남기고 죽었으나 한 결 같이 무덤이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위인들의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무덤이 남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고고학적 발굴로 일부 이스라엘 왕들, 특별히 다윗 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있으나 관광을 증진할 목적이지 그 신빙성은 없습니다.

 

그들이 당시에 통용되는 장례 절차도 하지 않고 아무데나 시신을 묻거나 버릴 리는 없습니다. 본문의 모세가 30일장, 요즘으로 치면 국장 같은 장엄한 장례의식을 거쳤듯이 다들 소정의 장례식을 거쳐 특정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무덤 하나도 남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또한 너무 거창하게 여길 것 없으며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은 오직 두 부류로만 나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무덤을 거창하게 남기길 좋아하는 사람과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깨달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이 땅의 삶이 전부이고 사람들 사이에 자기의 업적과 이름을 대대로 기억해주길 바라는 자입니다. 후자는 이 땅의 삶이 절대로 전부가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자기 업적과 이름이 기억되기 보다는 하늘의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더 소원하고 좋아하는 자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잘 사는 일에만 아등바등 매달린 자와 오히려 죽음을 잘 준비해서 그 이후를 미리 대비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에서 말한 대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전자는 해 아래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그분이 없다고 믿는 바탕에서 스스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었던 자입니다. 심지어 자신도 그 헛됨을 느끼기에 어떤 의미를 찾으려 발버둥 쳐봤지만 끝까지 그 헛됨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무덤 장식이라도 장엄하게 꾸미려 발버둥치는 자입니다.

 

후자는 하나님이 없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절감했기에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그분께 기도하며 인도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시면 제 인생은 그야말로 헛된 것밖에 남지 않으니 제발 저와 함께 동행 하시어 당신의 긍휼로 이 짧은 인생을 채워달라고 간구하는 자입니다. 모세도 인생이 겨우 70이고 강건해야 80이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생을 계수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시90:10-12)

 

그리고 후자에게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의미와 가치는 물론 기쁨이 충만했지만, 그보다 더 나은 본향이 따로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든 그것이 끝이 아님을 잘 아는 것입니다. 당연히 무덤을 꾸미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단순히 후손들이 찾아올 수 있는 표지석만 있으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무덤이 없는 까닭을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고 설명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땅에서의 삶은 이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것일 뿐임을 절감했습니다. 더 나은 본향으로 올라갈 것을 확신하기에 이 땅에 구태여 거창한 무덤을 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도 그래서 자기 무덤을 꾸미려던 자였다가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사고 재앙 질병 가운데 억울하게 죽도록 하나님이 방치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더 나은 본향으로 이끈 것이라 아무 문제 삼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 육신적 이별의 아픔과 슬픔은 아주 크지만 이 땅의 삶은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준비 과정, 그것도 아주 짧고 제한된 차원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가 신자입니다.

 

믿음으로 죽은 모세

 

지난주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벌을 내린 이유를 당신의 거룩함을 가렸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으나 사실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더 근본적인 이유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라고 하나님이 직접 밝혔습니다. 믿지 아니하니까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지,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아서 믿지 아니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일차적인 이유는 물론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만 해도 반석에서 물을 내줄 텐데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막대기로 두 번이나 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하나님은 물을 낼 능력이 없으니까 내 스스로 이 반석을 힘껏 쳐서 물을 내도록 해야지 마음먹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그럴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백성들이 당장 궁핍해지자 당장 원망만 해대니 당장에 짜증난 것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믿으니까 힘껏 내리친 것입니다.

 

그럼 내 말대로 하지 않고 왜 네 맘대로 하느냐고 꾸짖으면 될 텐데 하나님은 구태여 당신을 믿지 않는다니 조금 심한 말씀 아닙니까? 우리도 때로 하나님이 극심한 고통이나 이해되지 않는 억울한 일에 처하도록 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그분에 대한 의심 원망이 나오지만 그분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우리를 본문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믿지 아니한다고 야단치면서 평생의 꿈마저 깨트려 버리는 벌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에 대한 해답도 히브리서 기자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모세가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죽은 것과 문자적으로도 일치합니다. 믿음을 따라 죽었지만 약속을 멀리서 보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구원은 알지 못했으나 이 땅에선 나그네임을 증거했기에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죽는 즉, 구원 얻는 믿음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모세더러 믿음이 없다고 하신 뜻이 밝혀졌습니다. 그가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이유가 순간적으로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천국에 입성할 자답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확신하고 하나님 안에서 잘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라면, 그것도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라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기에 당신을 믿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바로 그 순간 그 현장에선 그 사건이 즉, 이 땅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당장의 자기감정을 삭이고 분을 발산하는 데에만 신경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순간만은 전혀 이 땅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닌 자답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하나님의 믿음 없다는 꾸중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언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했던 잘못을 정확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후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며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그곳에서 마감하라고 하신 깊은 뜻까지 분명히 헤아렸을 것입니다. 이 땅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요 하나님이더 나은 본향에서 너무나 큰 영광과 사랑으로 기다리고 있음을 그 들어가지 못하는 약속의 땅을 볼 때에 그 하늘의 땅을 함께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처럼 말씀만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 하여 완전한 평강과 자유로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 입경이라는 평생의 꿈에 대한 미련을 더 이상 갖지 말게 하려는 너무나도 은혜로운 그분의 배려였음을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던 하나님의 품 안에서 죽게 된 것이 더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후손들이 차지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기쁩니다, 그들도 정말로 나처럼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인도해주십시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겸손해지고 순전해졌습니다. 어쩌면 모세 본인이 자기 무덤에 아무 장식이나 표식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살고 죽는 믿음을 지녔는가?

 

지금 우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모세 같은 믿음의 위인에 대해서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이미 올라가 있습니다. 우리도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전당의 후속편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 엄연한 진리를, 아니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원천이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목사라서 허풍 떨며 과장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신앙 문제는 성경에서 성경으로 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12:2) 앞에서 인용한 11:13에서 구약 성도들은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만 했으나 믿음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그 약속을 이미 보았습니다. 요한 사도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선언한 것이 바로 우리의 간증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했습니다. 그 후로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고 천국 소망을 날로 키워가는 믿음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모세처럼 순간적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묶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잘못을 하지 않도록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전에 나에게 일어나는 범사가 하나님이 마련해주시는 선한 선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정은 물론 믿음도 연약하고 특별히 감정에 잘 넘어지므로 그러기가 절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평생을 두고 피 흘리기까지 그 싸움을 해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자기 소원과 계획을 열심히 기도해서, 실은 기도가 아니라 떼만 쓰는 것이지만, 기어이 받아내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 혼자 좋으려고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받아서, 아니 그전에 그 모든 것이 당신께서 만드시고 조성한 것인데 다시 받아서 그분에게 무슨 실제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선한 것이 그분께로 오므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져선 그 인생이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분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분의 선한 것으로만 우리를 채워주시기를 그 분이 더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 단순히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선한 일만 하라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이 땅의 신자의 여정은 그 전부가 천국을 향해 가는 여정의 일부입니다. 그 마지막인 죽음도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로 좋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첫 출발입니다. 스데반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고통 가운데 천국 보좌의 주님을 보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기쁨 가운데 하늘의 영광으로 들리어 올라갔지 않습니까?

 

신자 된 특권

 

간혹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어서 빨리 그 힘든 것을 벗어나고 싶어서, 혹은 이 세상의 악인들을 당장 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날을 고대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헛된 소망입니다. 천국이 연약 나태하여 충성하지 않았던 교인들이 최후에 기댈 방책이거나 이 땅에서의 억울했던 일 원수 갚아주는 그런 시시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첫 설교로 천국이 왔다고 선포했고 또 적극적으로 차지하라고 명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이 땅의 것들이 썩어 없어진다고 해서 헛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천국으로 거룩하게 이끌어가는 여정입니다. 신자가 현재 처한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이 현실적인 의미와 가치에선 좋고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무나 깊은 차원의 사랑을 갖고서 그 모두를 그분께서 허용하셨다는 차원에선 너무나 중요하고 귀합니다. 형벌 같이 보여도 축복이고 축복 같이 보여도 형벌입니다.

 

믿음은 한 마디로 자신의 신분이 예수 십자가 안에서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답게 이미 변화되었고 영원토록 변하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의 힘들고 고달프고 짜증나는 사건, 사람, 여건 등으로 천국까지 보장된 그 신분을 절대 흔들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최소한 불안 염려 분노를 잠재울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신자는 당장 자기 가정에서부터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가족들 모두 항상 신나고 즐겁고 사랑으로 가득 넘쳐야 합니다.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그 신자로 하여금 기쁨과 감사의 바이러스가 전파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다른 이에게 신자의 삶과 인생이 어둠이 전혀 없는 따듯한 빛과 사랑을 비춰내어서 부러움을 사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이 땅이 나그네이고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린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고난이 닥치면 마냥 불안해하거나 분노 원망의 감정에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받은 죄인들과 함께 죽게 되었지만 확실히 기억해 둘 사항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기에 벌이 아니라 최고의 상이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힘든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그 고난을 믿음으로 끝까지 참아내고 어서 빨리 구해달라고 기도해서 축복을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만 없애달라는 것은 그 시간 그 장소에만 머무르는, 엄격히 말해 이 땅만 중요하게 여기는 불신자의 생각입니다. 신자가 그런 생각에만 붙들리면 그런 생각을 고치라고 오히려 고난이 더 겹칠 수 있습니다. 그럼 그것이 복입니까 벌입니까? 당연히 복입니다.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평생을 고난과만 싸우다 믿음을 갖고도 해 아래서 헛된 수고만 하다 끝날 것입니다.

 

신자의 평생은 하나님의 의롭고 강한 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눈을 감아도 모세나 스데반처럼 그분 품 안에서 이 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평강 기쁨 자유 영광중에 눈을 다시 뜰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신자만 바로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소지했습니다.

 

9/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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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심용환이 전해준 북간도의 십자가 역사N교육 연구소 심용환 소장 간증ㅣ10분 새롭게하소서
버려진 것들을 새롭게ㅣ사회적 기업 모어댄 최이현 대표 간증ㅣ10분 새롭게하소서
역사적인 하나님보다 성령 하나님 - 역사N교육연구소 심용환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