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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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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는가 | C. 존 콜린스 | 김광만 역 | 새물결플러스 | 2019

 

최승주 (과신대 정회원)

 

 

이 책은 교회 역사 대부분에 걸쳐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창세기의 등장인물과 존재들-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생명을 알게 하는 나무 등-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짜 존재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소개한다. 책을 지은 C. 존 콜린스는 구약학 교수답게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대할 때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읽는 것을 조심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핵심을 발견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구약의 본문들뿐만 아니라 신약 그리고 구약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인 외경의 본문들, 그리고 질문에 대한 여러 신학자의 입장을 친절하게 나열하면서 소개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를 다루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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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내용 및 주요 포인트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나에게 훅 들어온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았다.

 

1)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다.

 

만약 이 책을 3~4년 전에 접했다면 ‘맙소사’, ‘말도 안돼’, ‘저자는 이단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먼저 했을 것 같다. 다행히(??) 몇 해 전 과신대를 알게 되면서 미시적 수준의 지각변동을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터라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수긍이 갔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다(59p). 그렇다면 왜 한국 교회 안에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 나는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합동측 교단에서 조신(??)하게 자라서 질문하거나 토를 다는 것이 불신앙으로 비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성장하던 당시에는 이런 신학적 논의가 지금보다는 덜 활발해서였을 수도 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의미하는 바는?

 

주일학교에서 배우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눈코입을 진흙으로 붙여 주셨다고 했다. 저자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담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실존성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담긴 고통과 고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76p).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빌리자면 “학자들의 노력이 그런 질문들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라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눈코입을 닮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성화에서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인간을 위해 오실 거고 온 인류가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확인된 우주의 크기만 해도 138억 광년만큼 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꼭 지구에 오실까? 꼭 인간에게만 오실까? 그럴 리 없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여기에서는 외현적)을 닮아 특별하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제한하는 생각일 수 있겠다.

 

3) 창세기와 과학의 조화? 일치주의는 주의할 것

 

역시나 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의 과정, 아담 가족이 살았던 시대 등을 과학적(또는 역사적) 설명과 일치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이러한 시도는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전도의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소개하면서 일치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이에 즉각 반대하는 반일치주의도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나리오를 살피는 것이 여러 가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결코 성서의 주요 스토리라인을 깨는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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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래도 남는 질문?

 

1) 어디까지가 내러티브이고, 누가 정하는가?

 

창 1~11장은 그렇다 하자. 12장에서 등장하는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복으로 부르신 사건은 신화라고는 볼 수 없을까?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는데(69p)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아의 홍수는 상징적, 비유적 표현일까 역사적 사실일까?

 

2) 관습적으로 사용했던 복음에 대한 설명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기독교는 오랫동안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관습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고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믿어 왔는데,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인간에게 죄의 DNA가 작동할 가능성이 있도록 창조 때 이미 허가를 내주신 걸까? 저자 역시 “뱀의 말로써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어떻게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죄로 인한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시점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3) 책의 마지막 결론-슬퍼하는 법

 

한 권의 책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저자가 아담과 하와가 실존했을까에 대한 논문을 맺는 방식이다. 저자의 결론은 ‘슬퍼하는 법’이라는 세 페이지에 담겨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화를 소개하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담겨 있고, 죽음이라는 침입자를 추방하시고 회복과 최종적인 복을 주신다는 확신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위로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월호 사건, 하나님을 잘 믿는 친구의 과로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의 암으로 인한 죽음... 물론 하나님은 나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실 필요는 없을 테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질문에 답을 캐기보다 죽음 앞에 함께 슬퍼하고,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찌글어짐에 함께 애통해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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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에게 과신대란 무엇인가?

 

서평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과신대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신대를 만나면서 나는 자유함을 얻었다. 궁금해 하고 질문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리고 질문해야 하는구나... 과신대를 통해 과학자도 신학자도 아닌 내가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를 풀고 있는 중이다.

 

2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손에 합동측 목사이신 아버지가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을 쥐어 주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과학으로도 증명된다는 근사한(??) 사실을 딸에게 알려주고 싶었을거다. (나라도..) 그래서 나는 창조하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생물학도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한국교회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에게 많은 기회를 주던 때, 믿음이 좋은(??) 나는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우면서도 이는 시험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결국 이원론적인 전략을 취한 나는 내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펜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신대를 만나며 드는 생각은 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 자녀를 기독대안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로서 아직도 한국교회와 기독학교에 남아있는 일치주의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고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지면을 빌어 과신대와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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