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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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8 17:58
기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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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즐거움 Joy.||#1. 고전 헬라어의 용법||명사 카라(Homer이래로)는 카이로($5463: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b) 환유적으로는 '기쁨의 상태'와 '기쁨의 대상'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카라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라는 신약성경에서 59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① 마 13:20; 병행구, 막 4:16; 눅 8:13에서 카라는 '말씀을 받는 (부정적) 기쁨을 표현한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마 28:8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 뿐만 아니라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눅 1:14에서 사가랴에게 카라의 약속이 주어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눅 10:17에서 70인의 제자는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5:7; 눅 15:10에서 카라는 잃은 것을 찾은 자의 기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뻐한다. 진실로, 잃은 양과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 주는 바는, 아버지께 돌아온 잃은 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5:6, 눅 15:9, 눅 15:32).|눅 24:41, 눅 24:52에서 카라는 놀라움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② 행 13:52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힘주심을 통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였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행 20:24). 행 8:8에서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③ 요 3:29에서 카라는 '기쁨'의 충만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요 15:11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도 부여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그는 아버지께 요청한다(요 17:13).|요일 1:4에서 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가지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 16:22에서 카라는 장차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표현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현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종말론적 기쁨은, "어떤 황홀한 정신적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신자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정의된다"(R.Bultmann).|④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빌 1:25; 롬 15:13에서 그것은 "믿음과 기쁨"이다(빌 1:25; 롬 15:13). 그것은 소망, 믿음,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싸움과 두려움(고후 7:5)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확신하며(롬 8:31이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의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믿음의 기쁨으로서, 그것은 또한 성령(→ 영 Spirit)의 → 열매 Fruit이기도 하며(갈 5:22),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도 불린다(롬 14:17; 살전 1:6). 이처럼 기쁨은 하나의 영적 은사이며, 이러한 점에서 카리스(charis: → 은혜 Grace)의 개념과 근사하다.|고후 1:14에서 바울은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우리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 너희와 함께 일한다"고 확언하였다. 고후 2:3에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인(참조: 고후 13;11; 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고후 7:13에서 카라는 안심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⑤ 히 10:34에서 카라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당시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미 극심한 경지에 이르러 교회의 존속 그 자체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참조: 벧전 4:13; 롬 8:17). 그러나 비록 물질적 재산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이것은, 시 46편에 영감을 받은 루터의 찬송가 "견고한 성"(Ein' Feste Burg)의 마지막 몇 행이 잘 예증해 준다:|그리고,|우리의 생명, 재산, 영예, 자녀 아내까지,|그들이 취하여도|그것의 유익은 하찮도다;|이는 모두 사라질 것:|하나님의 도성의|영원함이여.|⑥ 약 1:2은 순교에 대해 기뻐하라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가깝다(참조: 약 5:41). 그러나 교회사상(敎會史上) 이것은 종종, 사실상 순교 그 자체를 위해 순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약 4:9이하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는 배척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십자가 상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회적, 영구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b) 환유적으로는 ① 카라는 '기쁨의 대상'을 나타낸다. 빌 4:1에서 카라는 아무개의 기쁨이 되는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살전 2:19이하에서 카라는 같은 용법을 나타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② 카라는 '기쁨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주인의 즐거움" 곧 주께서 누리는 지복을 나타낸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히 12:2에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있는 지복을 나타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다. 오직 그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시험에서의 참음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히 12:2).|③ 카라는 '즐거운 잔치'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잔치',또는 '축하, 회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참조: E. Beyreuther; G. Finkenrath; Walter Bauer's GEL 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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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즐거움 Joy.||#1. 고전 헬라어의 용법||명사 카라(Homer이래로)는 카이로($5463: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b) 환유적으로는 '기쁨의 상태'와 '기쁨의 대상'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카라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라는 신약성경에서 59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① 마 13:20; 병행구, 막 4:16; 눅 8:13에서 카라는 '말씀을 받는 (부정적) 기쁨을 표현한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마 28:8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 뿐만 아니라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눅 1:14에서 사가랴에게 카라의 약속이 주어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눅 10:17에서 70인의 제자는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5:7; 눅 15:10에서 카라는 잃은 것을 찾은 자의 기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뻐한다. 진실로, 잃은 양과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 주는 바는, 아버지께 돌아온 잃은 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5:6, 눅 15:9, 눅 15:32).|눅 24:41, 눅 24:52에서 카라는 놀라움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② 행 13:52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힘주심을 통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였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행 20:24). 행 8:8에서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③ 요 3:29에서 카라는 '기쁨'의 충만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요 15:11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도 부여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그는 아버지께 요청한다(요 17:13).|요일 1:4에서 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가지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 16:22에서 카라는 장차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표현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현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종말론적 기쁨은, "어떤 황홀한 정신적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신자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정의된다"(R.Bultmann).|④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빌 1:25; 롬 15:13에서 그것은 "믿음과 기쁨"이다(빌 1:25; 롬 15:13). 그것은 소망, 믿음,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싸움과 두려움(고후 7:5)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확신하며(롬 8:31이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의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믿음의 기쁨으로서, 그것은 또한 성령(→ 영 Spirit)의 → 열매 Fruit이기도 하며(갈 5:22),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도 불린다(롬 14:17; 살전 1:6). 이처럼 기쁨은 하나의 영적 은사이며, 이러한 점에서 카리스(charis: → 은혜 Grace)의 개념과 근사하다.|고후 1:14에서 바울은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우리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 너희와 함께 일한다"고 확언하였다. 고후 2:3에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인(참조: 고후 13;11; 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고후 7:13에서 카라는 안심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⑤ 히 10:34에서 카라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당시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미 극심한 경지에 이르러 교회의 존속 그 자체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참조: 벧전 4:13; 롬 8:17). 그러나 비록 물질적 재산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이것은, 시 46편에 영감을 받은 루터의 찬송가 "견고한 성"(Ein' Feste Burg)의 마지막 몇 행이 잘 예증해 준다:|그리고,|우리의 생명, 재산, 영예, 자녀 아내까지,|그들이 취하여도|그것의 유익은 하찮도다;|이는 모두 사라질 것:|하나님의 도성의|영원함이여.|⑥ 약 1:2은 순교에 대해 기뻐하라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가깝다(참조: 약 5:41). 그러나 교회사상(敎會史上) 이것은 종종, 사실상 순교 그 자체를 위해 순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약 4:9이하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는 배척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십자가 상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회적, 영구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b) 환유적으로는 ① 카라는 '기쁨의 대상'을 나타낸다. 빌 4:1에서 카라는 아무개의 기쁨이 되는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살전 2:19이하에서 카라는 같은 용법을 나타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② 카라는 '기쁨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주인의 즐거움" 곧 주께서 누리는 지복을 나타낸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히 12:2에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있는 지복을 나타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다. 오직 그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시험에서의 참음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히 12:2).|③ 카라는 '즐거운 잔치'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잔치',또는 '축하, 회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참조: E. Beyreuther; G. Finkenrath; Walter Bauer's GEL 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