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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문장 3_김승옥 "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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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중의 하나입니다. 1964년에 쓰인 소설이고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무진기행은 아름다운 문장이 많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김승옥이 이 작품을 23세에 썼다는 것입니다. 1941년 오사카에서 출생한 김승옥은 1964년, 23세 때에 무진기행을 썼습니다. 어떻게 약관에 불과한 나이에 이런 감수성을 가진 섬세한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작가의 재능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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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이라는 곳이 허구의 도시라는 사실을 저는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안개 무'에 '나루 진'을 써서 '안개나루'라는 뜻을  가진 도시로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 도시입니다. 아마도 김승옥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전라남도 순천시를 모티브로 한 것 같다고 하네요. 작품의 내용과 제목이 어울립니다. 무진기행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내용 자체는 좀 혼란스럽습니다. 주인공인 윤희중이 무진에서 쾌락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아픈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지,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자신의 과거를 변명하려고 하는 것인지, 향수를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것인지 되게 애매하거든요. 

 

무진기행에서 베스트 문장 세 개를 뽑아 보았습니다. 

 

3. 나는 기억을 헤쳐보았다. (39)

 

헤쳐보았다는 동사가 어울립니다. 기억을 더듬다, 혹은 단순히 기억해 보았다 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인 동사입니다. 기억을 헤쳤다라고 말하면 이상했을 텐데 헤쳐보았다고 하니 오해할 소지도 없고요.

 

2.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38-39)

 

한 쌍의 커플이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는 표현을 이렇게 어려운 말로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몇 번을 읽어 보았는데요. 이해가 될 듯 말 듯 합니다. 마초적인 느낌도 나고 너무 주인공인 윤희중의 입장만을 대변한 표현인 것 같아서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의 심정에 빗대어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 매우 독창적으로 보였습니다. 

 

1.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바다의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의 생활을 나는 '쓸쓸하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로 대신시켰던 것이다. (37)

 

저는 문장을 쓸 때 단문을 선호합니다. 복문으로 쓰면 문장이 복잡해지고 호흡도 길어지고 잘못 이해될 확률도 높습니다. 그래서 단문으로 짧게 짧게 끊어 쓰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이 문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문장을 켜켜이 쌓아서 복잡한 심정을 이 문장 자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작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쓸쓸하다"는 단순한 단어로 이렇게 복잡다단한 주인공의 심정을 묘사할 수 있겠어?" 지루함과 허전함, 그리고 안타까움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황을 '쓸쓸하다'는 한 단어로 바꿔치기할 수 없다는 저자의 설명에 동의합니다. 

 

그 외에도 제게 인상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 "(27)

 

"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통금 사이렌이 불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요란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길었다. 모든 사물이 모든 사고가 그 사이렌에 흡수되어갔다."(29)

 

"세월이 그 집과 그 집 사람들만은 피해서 지나갔던 모양이다.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38)

 

이 작품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구성적인 측면에서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각 장면들이 너무 예술이라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는 좀 엉성한 면이 보이나 촬영감독이 각 장면을 예술로 찍어놔서 푹 빠지게 만드는 영화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무진기행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어도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나서 '아, 나도 무진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입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무진이 허구의 도시였다니... 배신당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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