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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히브리서

히브리서 주석

성 경: [히1:1]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 옛적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라이'(*)는 '지나간 시대' 즉 '구약시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2절의'이 모든 날 마지막에'와 대조를 이룬다.

⭕ 선지자들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이다. 여기서 전치사 '엔'(*)을 NIV에서는'...통하여'(through)로 번역하고 있으나(Moffatt) 이것의 본래 의미는 '...안에'(in)이다(Westcott, Kent). 따라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선지자들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께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나타낸다(Morris). 이러한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공인된 선지자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전체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Hewitt).

⭕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 '여러 부분'의 헬라어 '폴뤼메로스'(*)는 '여러 시기', '여러 번'(many times,NIV)을 뜻하며 '여러 모양'으로의 헬라어 '폴뤼트로포스'(*)는 '다양한 방법으로'를 의미한다. 두 단어는 부사로서 모두 접두어 '폴뤼'(*)를 사용하여 두운체(頭韻體)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수사법(修辭法)은 당시에 일반적인 것이었다(Moffatt). 그러나 본절에서 그것은 관습적인 표현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서 저자가 구약의 계시에 대한 신빙성을 확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한편 '조상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2절의 '우리'와 대조를 이룬다.

성 경: [히1:2]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 헬라어 '에프 에스카투 돈 헤메론 투톤'(*)은 문자적으로 '이 날들의 마지막에'를 의미한다.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팔라이'(*, '옛적에')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옛적에'가 구약 시대를 가리킨다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구약 시대가 끝나고 메시야가 오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 곧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가지 모든 날을 가리킨다(Hewitt, Bruce, Morris). 이것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마지막 때' 혹은 '말세'로 표현되고 있다(행 2:17;약 5:3;벧전 1:20;벧후 3:3; 요일2:18;유 1:18).

⭕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아들로'의 헬라어 '엔휘오'(*)는 1절의 '선지자들로'(*,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와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 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심을 시사한다. 그러나 '엔 휘오'에는 '엔토이스 프로페타이스'와는 달리 관사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아들'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들과 동급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지닌 자로서 아들 안에서 주어진 계시가 구약의 계시보다 탁월하며 완전함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Vincent).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상속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모든 세계를 아들에게 전임(專任)하셨다. 혹자는 본구절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제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7,8)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며(Bruce) 혹자는 창 17:5과 본문의 문자적 유사성을 들어 '아브람'이 열국의 아비로서 '아브라함'으로 임명되어 하나님의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시작을 이룬 것과 본문이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한다(Langkammer). 창 17:5이나 시 2:7,8에서는 '모든 나라'가 그 유업(遺業)이 되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만유'가 그 유업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임점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위의 구약 본문들과 연결되어 아들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사를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만유보다 탁월한 지존의 위치에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Lane).

⭕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으니라 - '저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후'(*)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심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창조 사역을 이루셨다(요1:1-3; 고전8:6; 골1:16).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시다. 한편 '세계'의 헬라어 '아이오나스'(*)는 '시대'(an era), '세대'(an age)를 의미하는 '아이온'(*)의 복수이다. '아이오나스'는 본래 시간적인 의미를 지니나 본절에서는 '우주 세대'로 해석되어 우주(universe, NIV)를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낸다.

성 경: [히1:3]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 '영광'의 헬라어 '독세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겔 1:28; 11:23)를 나타내며 신약에서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의미한다(마16:27; 행7:2,55; 롬1:23; 3:23; 5:2; 딤전 1:11). 한편 '광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우가스마'(*)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빛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빛'. (2) 외부에서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 혹자는 본절의'광채'가 전자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Bruce, Hewitt)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는 견해가 더 타당하다(Morris).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빛' 자체로 묘사되기도 하며(요1:4-9;고후4:6) 동시에 본절과 같이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여 드러내는 분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영광을 볼 수 있다.

⭕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 '본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세오스'(*)는 철학적인 용어로 사물의 하부(下部)에 있으면서 그 사물을 존재하게하는 실체를 가리킨다(Moffatt). 이는 하나님 자신을 시사한다. 한편 '형상'의 헬라어 '카라크테르'(*)는 '긁어 표시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랏소'(*)에서 유래된 말이다. '카라크테르'는 문자적으로 '표식'이나 '인장'(seal) 혹은 '같은 모양의 복제(複製)'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체의 본질' 즉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 그리스도를 볼 때 성부 하나님을 보는것과 같음을 의미한다(요 14:8-10).

⭕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 '만물'(*, 판타)은 모든 피조물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한편 '붙드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론'(*)은 '인도하다', '이끌어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라스(Atlas)가 지구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신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어떤 목적을 향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개념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자로서 자신의 능력있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을 유지시키며 인도하신다(Morris, Bruce).

⭕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 본문은 본서의 중심 주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자신을 제사로 드려 자기 피로 단번에 우리를 깨끗게 하셔서 죄를 도말하셨다(9:12,26,28; 10:12,18).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불완전했던 옛 언약의 제사 행위가 하지 못한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것이다(10:2,4,6,11).

⭕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본절은 시 110:1을 인용하여 예수께 적용시킨 것이다. '누운 곳'은 '하늘'을 의미하며(엡4:10; 빌2:9) '위엄'은 장엄함을 가리키는 것으로(8:1; 유1:25)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그리스도께서 승귀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권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소유하심을 시사한다(Lane).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심으로 온 우주를 지배하시며 다스리신다(Hewitt).

성 경: [히1:4]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 '뛰어남'의 헬라어 '크레이트톤'(*)은 '보다 우월한', '보다 탁월한'의 의미이다. 저자가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설명하는 이유는 천사의 사역에 있다. 이 '천사'는 1절에 언급된 '선지자'와 동일한 기능을 가진 존재로서 옛 언약인 율법을 모세에게 중재한 자이다(2:2; 행7:38-39,53; 갈3:19). 그러나 천사가 모세에게 중재해 준 율법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비교할 때 열등한 것이었다.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율법은 불완전하여서 구속 사역을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드려 그 피로 온전히, 단번에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드러내셨다(Lane,Hewitt, Morris).

⭕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의미한다(5절; 시2:7). 그리스도께서 영광받으셔서 승귀되시기 이전에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Bruce).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도 '아들'이란 칭호가 주어졌으며(5:8) 성육신하시기 이전에도 아들의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져 있었다(2절).

성 경: [히1:5]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저자는 5-14절에서 7개의 구약성경 본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심을 입증하고 있다. 본절에서 인용된 두 구절은 교차 대구법적인 구조를 갖는다(Lane).

네가 내 아들이라 --------------------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 본 구절은 시 2:7의 인용이다. 시편에서 언급된 '아들'은 표면적으로 '솔로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Hewitt) 저자는 본 구절에 나타난 '아들'이 특정한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Morris).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 본절은 삼하 7:14의 인용이다. 사무엘하에서 나타난 '아들' 역시 표면적으로 '솔로몬'을 가리키나 저자는 본절을 메시야에 관한 구절로 해석하였다. 삼하 7:14은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할때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출현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심을 시사한다(Hewitt).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Morris). 저자는 이런 메시야 사상을 통해서 야버지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천사에게 적용될 수 없는 유일하면서도 우월한 관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성 경: [히1:6]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 '맏아들'의 헬라어 '프로토토콘'(*)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후사로 임명된 사상(2절)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그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나타내는 칭호이다(Lane). 이 칭호의 기원은 시 89:27로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계셨고 만유를 상속받은 자이심을 시사한다(2절; 골 1:15,18, Bruce).한편 '다시'의 헬라어 '팔린'(*, '다시', '그 위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팔린'을 '에이사가게'(*, '들어오게')와 연관시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el, Hewitt, Westcott). (2) 혹자는 '팔린'을 '오이쿠메넨'(*, '세상')과 연관시켜서 그리스도께서 '오이쿠메넨'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 높임을 받으시고 보좌에 좌정하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Bruce,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 본절은 신 32:43(LXX)의 인용이다. 신명기에는 '천사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 휘오이 데우)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천사들'이라고 바뀌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아들에게 천사들이 종속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Bruce,Lane). 이렇게 천사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포함한 온 우주 즉 '오이쿠메넨'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셨기 때문이다(3절, Bruce). 그래서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경배해야만 한다.

성 경: [히1:7]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 본절은 천사의 본성에 관한 진술이며 시 104:4(LXX)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맛소라 본문에서는 본절을 "바람을 그의 사자로, 불꽃을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고 묘사함으로써, 바람과 불을 하나님의 통치의 도구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따르고 있는70인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을 바람과 불꽃으로 삼는다고 말함으로써 천사들이 가변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과 천사들의 서열, 임무 등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됨을 시사한다(Lane, Morris). 또한 '삼으시느니라'의 헬라어 '포이온'(*)은 문자적으로 '만들다'는 의미로 천사의 피조성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문을 통하여, 변하거나 소멸되지 아니하고 모든 창조 질서를 초월하시는 '아들'에비해 가변적이며 소멸하기 쉬운 천사들이 열등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Bruce, Kuss,Michel, Thompson).

성 경: [히1:8,9]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본문은 아들의 지위에 대한 진술로서 시 45:6,7(LXX)의 인용이다.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 저자는 본문에서 아들을 '하나님'이라 부름으로 합당한 경배의 대상으로서 인정하고 있다(Lane, Morris). 이것은 6절에서 아들이 천사들의 경배대상이 되는 것과 상통한다.'홀'에 해당하는 헬라어 '랍도스'(*)는 '막대기' '지팡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왕권을 시사한다. '보좌'와 '홀' 그리고 '나라'라는 표현은 '아들'의 왕적 권위와 통치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기 나라를 통치하심을 시사한다(시 103:19;애 5:19;마 25:31;계 4:2). 한편 '공평'의 헬라어 '유뒤테토스'(*)는 '막대기의 곧음'을 나타내는 말로서 '의(righteousness, NIV)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홀 즉 막대기는 곧은 막대기로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정의롭고 바른 것임을 시사한다. 이 공평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기초이다(Bruce, Hewitt).

⭕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 본문은 시 45:7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위의 구절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하신 행동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Hewitt). 아들이 지닌 '의'는 자기의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공의'의 판단으로 통치함을 의미한다(벧전 2:23;계 19:11).

⭕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행하는 의식이다(출 28:41; 삼상 10:1; 왕상19:16).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기름을 예수께 부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기름부으신 목적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하시기 위함이다(Hewitt).

⭕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 '동류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는 '동참자' 혹은 '동료'를 의미한다. '메토쿠스'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2:12에서 언급된 '형제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Burce), (2) 혹자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전후 문맥이 천사와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천사는 아들과 '동류'이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천사보다 뛰어난 직분을 수여하였다. 천사는 섬기는 직분을 지니나 아들은 통치하는 직분을 가지셨다(Lane).

성 경: [히1:10,11,12]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본 구절은 시 102:25-27의 인용이다. 비록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라 할지라도 본 구절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으로서(Bruce, Westcott, Hewitt, Morris,Lane) 아들되신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나타낸다.

⭕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롬11:36).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를 창조주로서 묘사함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 7절에서 천사들의 가변성과 유한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여기서 '그것들'의 헬라어 '아우토이'(*)는 앞절에서 언급한 땅이나 하늘을 가리키는 것으로 피조물을 의미한다. 모든 피조물은 멸망할 것이나 그리스도는 영원하실 것이다.

⭕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 저자는 본문에서 피조물의 멸망과 유한성을 의복에 비유하고 있다. 이 의복의 비유는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의복이 '낡아진다'는 것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멸망함을 시사하며, 다른 하나는 '갈아 입는다'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변형시키심을 시사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글을 기록하면서 파루시아(재림) 때 새롭게 변하게 될 우주를 의식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사 66:22;계 6:14;21:1, Morris).

⭕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 '다함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이프수신'(*)은 '끝나다' 혹은 '없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클레이포'(*)의 미래 능동태로서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심을 암시한다(13:8).

성 경: [히1:13]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 본절은 시 110:1을 인용한 것이다. 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초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으로 나타난다(Hay, Hewitt, Lane).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소유하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나타낸다(3절). 그런 그리스도의 지위와는 달리 천사들은 하나님에게서 우편에 앉으라는 초대를 받은 적도 없으며 단지 하나님 앞에 서서(눅 1:19;계 8:2) 섬기는 직분을 감당할 뿐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초대를 통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절대성과 천사에 대한 우위성을 입증하고 있다(Hewitt). 한편 '네 원수로 발등상되게 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키심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1:14]

주제1: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우월성]

주제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본절은 천사의 위상과 직분을 묘사한다.

⭕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 '모든'은 천사들이 지닌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천사가 포함됨을 뜻한다. 한편 '부리는'의 헬라어 '레이투르기카'(*)는 '섬기는', '봉사하는'이란 의미로서 천사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임무가 종으로서 섬기는 일임을 시사한다.

⭕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 저자는 본절에서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얻을 후사'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수신자들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구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구원얻을 후사'는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2절)께서 이루신 대속 사역을 의지함으로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롬 8:17;딛 3:7, Morris). 천사들은 이렇게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자들을 섬겨야 한다. 한편 본절의 '아니뇨'는 수신자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의문이다(Lane). 저자는 이런 질문법을 통해서 지금까지 언급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히2: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그러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앞장의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Morris, Hewitt). 따라서 이것은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사들 보다 우월한 존재이므로'라는 의미이다.

⭕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 '들은 것'의 헬라어 '아쿠스데이신'(*)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 즉 '복음' 혹은 '케리그마'를 의미한다(Bruce, Lane, Morris). 옛 계시는 모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임한 것으로서 옛 계시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구원의 복음이다(Bruce).한편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페릿소테로스 프로세케인'(*)은 '더욱 많이 주의하여 숙고하라'는의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며, 전해주신 복음이 온전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상고해야 함을 강조한다(Hewitt).

⭕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 '흘러 떠내려갈까'의 헬라어 '파라뤼오멘'(*)은 '흘러가다' 혹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다'의 의미로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린는 것을 시사한다(Lane). 이것은 성도가 복음의 진리라는 안전한 항구에서 떠나 위험하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Westcott).

성 경: [히2:2]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 이것은 모세가 시내(Sinai)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암시하고 있다(갈 3:19).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 33장에서는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70인역에서는 '천사들이 그의 오른편에 함께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LXX 신 33:2;시 68:7). 1세기의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율법을 전해준 천사에 대해 설명했으며(Antiq XV. 36), 랍비들도 율법과 관련된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천사들이 율법을 전해주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Lane,Bruce).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은 하나님의 목적과 바람을 계시해 주었고 율법 안에 제시된 모든 규례들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Robinson).

⭕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 '순종치 아니함'의 헬라어 '파라코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것으로(TDNT) '범죄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도적(意圖的)인 거절을 내포한다(Lane). '공변된'의 헬라어 '엔디콘'(*)은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엔'(*)과 법정 용어인 '공의'를 의미하는 '디케'(*)의 합성어로서 '공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보응'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다포도시안'(*)은 응당히 치러야 할 '보수'라는 뜻으로 율법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리대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의 행위를 시사한다(롬 2:2-12). 하나님께서 옛언약 아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에 대한 범죄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는 상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성 경: [히2:3]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 '큰 구원'이란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의 구원 사역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시사한다(Bruce, Morris, Hewitt). 한편 '어찌 피하리요'로 번역된 헬라어 '포스 에크퓨크소메다'(*)는 수사적 의문문으로서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은 그리스도보다 열등한 천사를 통해 전해준 율법을 거역해도 그에 상응한 심판을 받는데 하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무시하게 되면 율법을 통해 시행되었던 공의의 심판보다 더 큰 보응을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 '주로'에서 '로'의 헬라어 '디아'(*)는 '...을 통하여'의 뜻을 갖는 전치사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로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낸다(Morris).

⭕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들은 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로서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증거해줄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Lane). 한편 '확증한 바니'의 헬라어 '에베바이오데'(*)는 법률 용어로서 '보증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성 경: [히2:4]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하나님도...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본절은 '큰 구원'(3절)과 상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큰 구원에 대해 함께 증거하셨음을 나타낸다. '함께 증거하셨느니라'의 헬라어 '쉬네피마르튀룬토스'(*)는 '쉰'(*, '...함께')과 '마르튀레오'(*, '증거하다')가 결합된 이중합성어이다. 예수로부터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선포할 때 확증시켜주신 방법은 네 가지이다.

⭕ 표적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오이스'(*)는 '표시','증거', '표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 곧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Morris, Lane, Hewitt).

⭕ 기사들 - 이로 번역된 헬라어 '테라신'(*)은 가시적(可視的)으로나타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 '표적'과 함께 나타난다(마24:24; 막13:25; 요4:48; 행2:19,22,43; 4:30; 5:12; 6:8; 7:36; 14:3; 롬15:18; 고후12:12). 이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로서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Lane).

⭕ 여러 가지 능력 -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메신'(*)은 본래 자연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힘을 의미했지만 후에 표적과 기사를 내포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마8:13)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며 또한 계시하신 말씀을 확증하고 보증하시기도 한다(Lane, Hewitt).

⭕ 성령의 나눠 주신 것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소유격으로된 '성령의'를 목적격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해석(갈3:5). (2) '성령의'를 주격으로 보아 믿음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주신 은사를 의미한다는 해석(고전12:11).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뜻을따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Morris,Hewitt).

성 경: [히2:5]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장차 오는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구원을 행사하시는 새창조된 세상을 가리킨다(Lane, Bruce,Hewitt). 천사들은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으며, 이러한 세상도 천사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전하신 율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히2:6,7,8]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본 구절들은 시 8:4-6을 인용한 것이다.

⭕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 본문은 유대인들의 문어체 표현 방식으로서 저자와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절에서 인용된 시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Hewitt, Robertson, Morris).

⭕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 '사람'과 '인자'는 히브리 시(時)의 병행 법칙을 따른 것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서 '...의 아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어떤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됨의 속성을 지닌 자'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Morris, Hewitt). 본절에서 사용된 '인자'(*, 휘오스 안드로푸)는 본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동일하지않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Lane, bruce, Hewitt). 한편 '생각하시며'의 헬라어 '밈네스케'(*)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이며 '권고하시나이까'의 헬라어 '에피스케프테'(*)는 '조사하다'혹은 '방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기 위해 기억하시며 돌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 저를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천사'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은 '엘로힘'(*)으로서 RSV는 이것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는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명확하게 '천사들'(*, 파르 앙겔루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탈굼역(Targum)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한편 '못하게 하시며'는 맛소라 본문을 따를 경우 하나님보다 잠시 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Westcott) 저자가 1장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천사보다 못한 상태 즉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빌 2:7,Morris).

⭕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 '관 씌우시며'의 헬라어 '에스테파노사스'(*)는 '왕관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심을 시사한다(Hewitt).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의 우편 즉 왕위에 오르셨으며(1:3: 엡4:8),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권한을 소유하셨음을 시사한다.

⭕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본문은 1:13의 인용문인 시 110:1과 연결된다. 1:13에서는 원수가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맛소라 본문에서는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만물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왕위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므로 모든 만물 즉 온 우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주권을 통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한편 여기서 '저에게'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저에게'(*, 아우토)가 대표적 단수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ruce, Lan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를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절의 내용과 연결될 수 없으며, 저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인자'나 '사람'을 순수하게 '사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6절).

⭕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 본절은 시 8편에는 없는 구절이다. 본절의 '저에게'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Hewitt).'아직'의 헬라어 '우포'(*)는 '일시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미래에 성취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Michel, Lane).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모든 주권을 회복하여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의 왕국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이 때의 지배자처럼 행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마4:8,9; 엡2:2)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즉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실현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

성 경: [히2:9]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천사들 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잠깐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라퀴 티'(*)를 7절과 다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 겔루스) 9절 *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한편 '인하여'의 헬라어 '디아'(*)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Bruce, 빌 2:8,9).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Morris, Lane).

⭕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신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ruce),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타당하다(Morris, Hewitt, Moffatt).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판토스'(*)에서 '판토스'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1) '판토스'는 중심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Origen). (2)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Hewitt,Morris, Bruce, Robinson).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한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카리티 데우'(*)는 몇몇 사본에 '코리스 데우'(*, '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마27:46; 막15:3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Origen, Eusebius, Theodoret,Jerome, Ambrose).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Tasker,Morris, Jerome, Ambrose).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Hewitt).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15, Lane, Morris).

성 경: [히2:10]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만물이 인하고'의 헬라어 '디 혼 타판타'(*)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하며'만물이 말미암은'의 헬라어 '디 후 타 판타'(*)는 '만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 폴로스 휘우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되었음'을 시사한다(Lane, Kogel). 한편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Montefiore, Morris).

⭕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본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곤'(*)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 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Hewitt, Lane, Muller). 또한 '온전케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털레이오사이'(*)는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출29:9,33: 레8:33; 16:32; 21:10;민3:3). 이런 제의적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되심을 시사한다(Klappert, Lane).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미이다(Bruce).

성 경: [히2:1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 호 하기아존)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31:13; 레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Bruce, Morris, Procksch).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의 헬라어 '판테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노스'(*)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Phillips).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Hering). (3)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Lane, Hewitt,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Kogel, Sqicq, Michel).

⭕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12:49,50; 막3:33-35;눅8:21; 롬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준다(11:16).

성 경: [히2:12,13]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막 15:34;요 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Bruce).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클레시아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 7:38;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여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 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 12:2이나 삼하 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 8:18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있다(Hewitt, Morris).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Lane).

성 경: [히2:14,15]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혈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두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의 헬라어 '케코이노네켄'(*)은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은'의 헬라어'메테스켄'(*)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Bruce, Lane).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Lane, Morris). 한편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음을 시사한다(Hewitt).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하심이니 -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Robertson).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노코이'(*)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성 경: [히2:16]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 - '붙들어'의 헬라어 '에필람바네타이'(*)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Hewitt, Lane, NIV).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Bengel, Moffatt, Westcott, Bruce, RSV, NIV). (2) 혹자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hrysostom, Ambrose, Beza, KJV).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 3:29).

성 경: [히2:17]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3:16;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제사장'(*, 아르키에류스)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聖潔)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성 경: [히2:18]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며(마4:1-11; 눅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Lane).

성 경: [히3:1]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8:5;9:23;11:16;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19:6;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10:40;눅10:16;요4:34;5:23,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Ned.35b;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 '사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2)'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3:10,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Hewitt).

성 경: [히3:2]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한 것과 같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민12:7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온 집을 맡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인정받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는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중의 하나인 모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하면서 3절이하에서는 예수를 보다 우월한 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혹자의 기적대로 저자가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Hewitt).

⭕ 하나님의 온 집에서 -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는 '가족', '가문' 혹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느1:6)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엡2:21,22;딤전3:15;딤후2:20;벧전4:17). 따라서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을 뜻한다. 한편 '온'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는 모세의 충성과 예수의 충성 사이의 차이점을 암시한다. 모세와 같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에게 충성하였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3:3]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다(출34:29-35;고후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고후3:7,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요1:4,5,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 비유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받아야 하는 이유를 묘사한다. 본절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쿠'(*)는 2절의 '온 집'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구원받은 무리'를 의미한다. 모세는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하더라도 그 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는 그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으로(행20:28) 그 집에 속해 있는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성 경: [히3:4]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서언급한 '집 지은 자'와 연결된 변론임을 시사한다.

⭕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 본절의 상반절에 있는 '집'은 하반절에서 '만물'로 대치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묘사된다(사40:28;45:7,LXX). '집'이 존재하는 것은 '집 지은이'가 존재함을 시사하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성 경: [히3:5]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었다(Calvin).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다. 한편 저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표현한다. '사환'은 '종'의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역에서는 자주 모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출4:10;14:31;민11:11;12:7;신3:24;수1:2;8:31,33,LXX). 이 용어는 하나님과 친밀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위엄과 존귀를 지닌 '종'을 가리키나 동시에 여전히 '주인'에 예속된 '종'임을 암시한다(Morris, Hewitt, Lane).

성 경: [히3:6]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저자는 모세에게는 전치사 '엔'(*, '...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에게는 '에피'(*, '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모세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을 시사한다(Lane). 즉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본절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의 충성스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고 바라봄을 의미한다(Lane, Morris).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이 소망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담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뢰'를 뜻한다. 본래 '파르레시안'은 헬라 문화 속에서 헬라 시민들 상호간의 개방적이고도 솔직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하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의 '확신과 담대함'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다(Philo). (2)자랑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케마'(*)는 자랑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내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이 갖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뜻한다(Morris). 한편 '집'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집'이다(2절).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과 자랑스러움을 인내 속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성 경: [히3:7]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그러므로 - 헬라어 '디오'(*)는 8절의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에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Lane).

⭕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저자는 7-11절을 시95:7-11에서 인용하면서 이것을 성령께서 하신 말씀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사실은 저자가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본문은 선지자나 천사나 모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이란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아울러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Hewitt, Morris).

성 경: [히3:8]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로 출애굽할 때에 발생했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반역 행위를 나타낸다. 비록 그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거나 거역한 적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대적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반역하였다(출14:10-14;15:24;16:2-9;17:1,2).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반역 중에서 본절의 내용이 말하는 반역은 출17:1-7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때 물이 부족하자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던 사건이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는데 그 곳의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칭하였다(출17:7).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맛사'와 '므리바'라는 지명(地名) 대신에 '격동'(*, 호 파라피크라스모스)과 '시험'(*, 호 페이라스모스)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번역자가 시편95:7-11을 번역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해석한 듯하다(Lane).

⭕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본 구절의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적인 요소인 '속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벧전3:4) 인간의 '지성'(욥9:4;38:36;잠10:8;11:29), '감정'(신28:47;삼상25:31;시34:18;사21:4;겔27:31)과 '의지'(4:12;시64:6;잠6:18;전10:2;눅24:25;롬10:10;고전2:9;엡6:6)의 좌소(坐所)이다. 한편 '강퍅케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스클레뤼네테'(*)에서 '메'(*)는 부정어이며 '스클레뤼네테'(*)는 '말라서 굳은', '딱딱한'의 뜻을 갖는 '스클레로서'(*)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이 '강퍅함'은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이적을 보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던 것처럼(출9:35)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일절 거부하는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 인간의 심성을 가리킨다.

성 경: [히3:9]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거기서'(*, 후)는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방황했던 '광야'를 말한다.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의 헬라어 '에페이라산 엔 도키마시아'(*)에서 '에페이라신'은 '시험하였다'(tested, NIV)의 뜻이며 '도키마시아'는 '입증하는'(proving)의 뜻으로 본 구절의 뜻은 '입증하기 위하여 시험하였다'(tes-ted in proving)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님의 '행사'(*, 에르가)를 보고자 하였다.

⭕ 사십년 동안에 - 맛소라 사본과 70인역에서는 이 40년을 하나님의 진노의 4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저자는 본절에서 70인역을 인용하면서도 이 40년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Lane, Schroger, Kistemaker). 이것은 저자가 진노의 40년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음을에 초첨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본절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예수께서 죽임을 배척하는 태도에 양자의 유사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Morris, Hewitt).

성 경: [히3:10]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는 70인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디오'를 본 인용문에 삽입함으로 시편을 인용한 본절의 내용을 보다 명백히 하고 있다. 한편 '이 세대'가 가리키는 '세대'는 문맥상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열조들을 가리킨다(16절).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KJV, RSV, NIV)과 공동번역은 '그 세대'(thatgeneration)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 격노하셨다. '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소크디사'(*)는 '증오' 혹은 '극도의 혐오'를 느끼는 감정을 의미하는 헬라적 용어로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뢰하지 않음과 강퍅한 마음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분노하셨는가를 암시한다(Delitzsch).

⭕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미혹되어'의 헬라어 '플라논타이'(*)는 '방황하다', '속다', '잘못하다'라는 의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無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주어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거부해 버렸음을 암시한다(Delitzsch, Moffatt).

성 경: [히3:11]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내가 노하여 - '노하여'의 헬라어 '오르게'(*)는 10절의 '노하여'(*, 프로스크디사)와는 다른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Morri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진노와 심판을 행하셨다.

⭕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이 인용구는 민14:21-23, 28-30절의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 특히 민 14:30의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와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을 맹세하셨다. 이러한 맹세와 심판은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정당하고도 적절한 보응이다(Lane). 한편 심판의 내용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 카타파우신)이란 창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그후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의 규례가 제정되었다(출20:8).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신12:9).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 안식은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악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의와 공평이 실현된 곳이다(행7:49;계14:13).

성 경: [히3:12]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 '삼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레페테'(*)는 '조심하라'는 의미로 '명령'임을 뜻한다.

⭕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으로 보아 저자는 성도들 중에 더러는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것을 인식하였음을 암시한다(Hewitt). 그들은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에서 섬기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배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Morris). 저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었다고 설명한다. '믿지 아니하는'(*, 아피스티아스)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로서 새로운 문단의 시작인 본절과 새 문단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19절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 불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민14:11과 연관된다(신1:32;9:32;시106:24). 또한 '악심'역시 민 14장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악한 회중'이란 표현으로 두 번 나타난다(민14:27,35). 이와같은 민 14장에 대한 저자의 암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 14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믿음이나 신뢰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Lane). 따라서 본절의 '믿지 아니함'도 믿음에 대한 부족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그것은 참으로 '악한' 것임을 시사한다.

⭕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 저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아계신'이란 수식어를 첨가하여 자주 사용하였다(9:14; 10:31;12:22). 이 수식어는 죽어 있어서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할 수 없는 이방신들과 대조를 보이기 위하여 흔히 사용된 문구였다(시115:4-8;사44:9-20;렘10:1-16;합2:19). 한편 '떨어지다'의 헬라어 '아포스테나이'(*)는 '분리되다', '떠나다', '배신하다'라는 의미로 불신앙의 결과를 나타낸다. '믿는 형제들' 가운데 소수가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다시 돌아가려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인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으로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를 초래하는 행위이다(Bruce).

성 경: [히3:13]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 '오늘'(*, 세메론)이란 표현은 시95:7의 인용이다. 이것은 저자가 성경을 근거로 수신자들을 권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본절의 '오늘'은 과거의 '오늘' 즉 시편이 쓰여질 그 당시 상황에서의 '오늘'이라기 보다는 성경과 사도들의 복음 전승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재로서의 오늘'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시간의 긴박성을 암시한다. 저자는 배교의 위험성이 있었던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게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긴박감을 가지고 서로를 권면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어 가도록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로 인해 죄와 이단에 대해 방어할 수있는 힘을 얻게 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강퍅케 됨'의 헬라어 '스클레륀데'(*)는 8절에 나오는 '스클레뤼노'(*)의 제1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저자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는 주체가 '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약속을 좇아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민14:19,34,LXX,Lane).

성 경: [히3:14]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 이것은 본절 하반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여기서 '시작할 때'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의미한다(Morris). '확실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세오스'(*)는 '본질' 혹은 '정수'를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확신'을 뜻한다(confidence, KJV, RSV, NIV, JB).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민수기의 내용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때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려고 했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민14:3,4), 수신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그러한 전철(前轍)을 밟지 말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다(Hofius, Lane).

⭕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 메토코이 투 크리스투)에서 헬라어 '메토코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있다. (1)혹자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시45:7의 인용이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료'(compan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fius, Bru-ce). (2)혹자는 '메토코이'가 파피리 문서(the papyri)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진 '동반자'(partner)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ane). (3)혹자는 '메토코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to share in, NIV, RSV, Morris, Moffatt, Hewi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어 낙심치 아니하며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을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 경: [히3:15]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하지 말라 - 본절은 시95:7,8의 인용이다. 본절과 전후절의 관련성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절이 지금까지 진술해 온 것에 대한 요약으로 앞절인 14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Morris, Lane, NIV). (2)혹자는 본절이 새로운 문단의 시작으로서 다음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Hofius). (2)의 견해로 본다면 16절 첫머리에 있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에 대한 해석이 애매하게 된다. 따라서 두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 가데스의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수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Lane,7,8절).

성 경: [히3:16]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 '격노케 하던'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크라난'(*)은 '화나게 하다', 혹은 '반역하다'라는 의미로 15절에서는 '노하심'(*, 파라피크라스모스)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여 하나님을 여러 번 진노케 한 사실을 나타낸다(Lane).

⭕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 본문의 강조점은 모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모두'듣고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친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애굽을 그리워함으로 '모두'가 하나님을 격노케하였다. 한편 '좇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통하여')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끌어내었다(lead out of Egypt, NIV) 는 의미라기보다는 '모세를 통하여(*, 디아 모위세오스)나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애굽을 탈출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서 다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성 경: [히3:17]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본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40년의 광야 방랑 생활 속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진노하에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란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나온 자들로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민 14:29,30,32). 이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서(Henry)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을 불신앙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과 답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것과 같이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도 동일한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성 경: [히3:18]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 본절은 민14:43의 반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그들의 불순종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출 5:21; 14:11;15:24;16:2;17:2,3;32:1;민11:1,4;12:1;14:2,22,23).

⭕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믿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5:9;11:31;신30:20;롬1:5;6:17;10:16;16:26;갈5:7). 이러한 불순종은 불신앙의 정점이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민14:23)이며 반항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Lane).

성 경: [히3:19]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 이로 보건대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블레포멘'(*)은 저자가 지금까지 시편 95편에 대한 것을 해석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 저자는 본절에서 이제까지 인용하여 수신자들에게 제시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신앙'이다. '믿지 아니하므로'(*, 아피스티안)는 비록 시편 95:7-11에는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민14:11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항함으로 맞이하게 된 비참한 결과를 암시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기는 본서의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가데스에서의 조상들처럼 그들도 같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성 경: [히4:1]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의 헬라어 '포베도멘'(*)은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본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시사한다(Lane).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말씀에 보다 민감한 태도를 지닐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목회자적 관심을 나타낸다(11절;3:12).

⭕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안식'의 헬라어 '카타파우신'(*)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Lane). 그래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14:1-4). 한편'약속'(*, 에팡겔리아스)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Morris).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었다(1:14;6:12,17;9:15).

⭕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본절은 '있을까 함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 '판단하다', '가정하다')를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1)혹자는 수신자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한다(Moffatt, Stuart). (2)혹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Dod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비록 안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Morris).

성 경: [히4:2]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복음 전함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스메노이'(*)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를 뜻하는 헬라어'유앙겔리조'(*)의 완료 수동형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19:3-6; 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화합지'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대한 독법은 두가지이다. (1)'말씀'(*, 로고스)과 연결되어서 단수인 '슁케케라스메노스'(*)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말씀과 이를들은 자들의 믿음과 화합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저희'(*, 에케이누스)와 연결되어서 복수인 '슁케케라스메누스'(*)로 읽는다. 이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자 즉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으로 화합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경우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Morris,Moffatt, Hewitt). 한편 '믿음'의 헬라어 '피스테이'(*)는 본서에서 '순종'과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4:3]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의 헬라어 '에이세르코메다'(*)는 '에이세르코마이'(*)의 현재 중간태이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istemaker, Lane, Montefiore).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Bruce).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 카타파우신)은 시95:11의 '내 안식'(*, 카타파우시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Morris, Bruce). 그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이 구절은 시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H-ewitt, Morris).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Bruce).

성 경: [히4:4]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 창2:2을 인용하면서(출20:11;31:17) '어디 이렇게'(*, 푸 후토스)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무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5:17, Hewitt).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성 경: [히4:5]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또다시'에 해당하는 '팔린'(*)은 앞에서 인용한 문구에 다른 인용구를 첨가시킬 때 저자가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1:5;2:13;10:30).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으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Lane, Schroger).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

성 경: [히4:6]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본절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요약이다.

⭕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남아 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이페타이'(*)는 '뒤에 남겨두다'라는 의미로(9절) 설사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유효함을 시사한다(Lane).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다(3:7).

⭕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본절은 3:16-18과 4:2에 대한 요약이다(Lane).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란 시95:8-11에서 언급된 출애굽 세대를 가리킨다(민13:26;14:9). 출애굽 세대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민14:11,12;21-23). '순종치 아니함'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시사한다(11절;3:10;롬11:30).

성 경: [히4:7]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 '오랜 후에'(*, 메타 토수톤 크로논)는 광야 시대 이후부터 다윗의 때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Robertson). 한편'다윗의 글에'는 인용문인 시 95편의 저자를 나타낸다. 그러나 '다윗의 글에'라는 표현은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70인역에는 시 95편의 제목으로 '아이노스 오데스 토 다우에이드'(*, '다윗의 찬양')이라고 기록되어 다윗이 지은 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70인역을 따라 '다윗의 글에'라는 구절이 틀림없이 다윗이 쓴 시편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elitzsch).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의 저자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Bruce).

⭕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본절은 시 95:7b, 8a의 인용으로 그초점은 '오늘날'에 있다. '오늘날'이라 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효함을 시사한다(Morris). 따라서 본절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현재에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나타낸다(Lane, Hofius). 그러기에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성 경: [히4:8]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다(신3:20;12:9;25:19;수1:13).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수21:44;22:4).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 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이점이 발생한다(Lane).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 95편에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정한 안식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 예수스)라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 예수스)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Morris).

성 경: [히4:9]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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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a절 | |

| | (아폴레이페타이 티나스 에이셀데인 에이스 아우텐) |

| |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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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절 | |

| | (아폴레이페타이 삽바티스모스 토 라오 투 데우) |

| |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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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의 헬라어 '삽바티스모스'(*)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혹자는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chanan). (2)혹자는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신25:19),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Hewitt, Rendall). (3)혹자는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ustin, Hofius).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마11:28-30)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성 경: [히4:10]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한다(Ebrard, Alford, KJV, LB).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Morris, Hewitt). 이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셀돈'(*)은 부정 과거 분사이나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형으로 나타난다(for whoever enters God's rest, RSV, NIV, De Wette, Vince-nt).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Morris).

성 경: [히4:11]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힘쓸지니'의 헬라어 '스푸다소멘'(*)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3절, Lane).

⭕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3:17,18). 이스라엘의 불순종 행위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가져다 주는 모델이다. 여기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데이그마티'(*)는 '본보기', '복사본'을 뜻하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성 경: [히4:12]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거 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골수'(*,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이크누메노스'(*)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리티코스'(*)는 법정 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성 경: [히4:13]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믿음으로 얻은 안식]

⭕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고후5:17;갈6:15) 가리킨다.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의 헬라어 '아파네스'(*)는 본문에만 사용된 형용사로서 부정 접두어 '아'(*)와 '보이다'를 의미하는 '파이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12절)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사실이었다(Lane).

⭕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는 동사가 없는 구문으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Morris),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드러나느니라'의 헬라어 '테트라켈리스메나'(*)는 '목(*, 트라켈로스)을 뒤로 젖히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Morris).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Lane).

성 경: [히4:14]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큰 대제사장'(*, 아르키에레아 메간)으로 지칭하고 있다.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함을 나타낸다(Lane).

⭕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 예수의 우월성은 '승천하신 자'라는 초월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승천하신 자'의 헬라어 '디엘렐뤼도타 투스 우라누스'(*)에서 '디엘렐뤼도타'는 '...통하여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디에르코마이'(*)의 완료 능동태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뜻보다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곳으로 가셨음을 뜻한다(Morris).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다(Hewitt). 한편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는 예수께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행위와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Hewitt).

⭕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더 나아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근거가 된다. 여기서 '믿는 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고백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익히 알고있는 공식화된 고백으로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Lane, Neufeld, Bornkamm). 한편 '굳게 잡을지어다'의 헬라어 '크라토멘'(*)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권고이다.

성 경: [히4:15]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Hewitt). 한편 '체휼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파데사이'(*)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to sympathize, NIV)라는 의미이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한다(10:34;13:23;4Macc 4:25, Lane).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Schenk).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2:17,18).

⭕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Cullmann)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Bruce,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죄가 없으시니라'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두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1)혹자는 본문의 내용 즉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점을 부인한다(Buchanan, Williamson). 이들은 '예수께서 본장에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5:3), 예수도 대제사장으로서 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해야 함을 알고 모델이 되셨다'(5:8)고 주장한다.(2)혹자는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Bruce).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일에 한결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드 호모이오테타'(*)는 '같은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동일성 보다는 유사성 내지는 구별성을 나타낸다(Lane).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낸다.

성 경: [히4:16]

주제1: [안식의 약속과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유'(*)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주심을 나타낸다.

⭕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보좌'의 헬라어 '드로노'(*)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1:3,8)를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다. 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된다(9:5;출25:21,Bruce).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9:5;레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있다.

성 경: [히5:1]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저자는 본절에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 직무의 세 가지 특징을 언급한다.

⭕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의 입장과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Bruce, Morris).

⭕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 대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중재하는 중보자(中保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Hewitt, Lane).

⭕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 대제사장은 중보자적 역할을 이루기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는 대속죄일과 연관된 것으로서, 대제사장은 1년에 한차례씩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 자신을 포함한온 백성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다(레16장). 본절의 '예물'(*, 도라)은 대속죄일에 드렸던 '소제물'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나타내는 밀가루, 감람유, 유향, 무교병(無교餠)등을 가리킨다(레2:1-16). 또한 '속죄하는 제사'는 번제물을 가리킨다. 번제에 드리는 제물은 흠 없는 수소, 수염소, 수양, 비둘기 등으로서(레1:3-17) 화제를 통하여 이런 번제물을 드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대속받으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였다(레1:3-17).

성 경: [히5:2]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 본절은 대제사장에 대한 설명이다. 대제사장은 타인의 무지와 미혹을 용납할수 있는 자이다. '무식하고'의 헬라어 '아그노우신'(*)은 '알지 못하다' 혹은 '모르고 죄를 짓다'라는 의미이며 '미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노메노이스'(*)는 '잘못 인도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10:26의 '짐짓'(*, 헤쿠시오스) 즉 의도적으로 범죄하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로 모르고 짓는 우발적인 죄를 시사한다(Robertson). 한편 '용납 할 수 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리오파데인'(*)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인 '체휼하지 아니하시는'의 헬라어 '메 뒤나메논 쉼파데사이'(*)와는 다르다(4:15). '메트리오파데인'은 철학적인 용어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거나 자제하여 다른 사람을 친절하고 사려깊게 대하는 것을 뜻한다(Yarnold, Lane). 대제사장은 이러한 성품으로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동정을 베풀어 용납하였으나(9:7;레4:2,13,22,27;5:2-4), 의도적으로 범죄한 자는 이스라엘의 회중에서 제외시켰다(민15:30,31).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다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서 범죄할 수 있는 '연약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히5:3]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또한 일반 제사장들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으나(출28: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죄지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대비하여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레4:3-12;9:7).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일반 회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직계 권속을 위하여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행하는 제사 중에 드리는 기도는 세가지이다(Lane). (1)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를 위하여(m.Yoma 3:8). (2)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의 죄를 위하여(m.Yoma 4:2). (3)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하여(m.Yoma 6:2). 구약시대 대제사장에 대하여는 4:15에서 예수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죄는 없으시니라'(*, 코리스 하마르티아스)고주장할 수 없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바로 '죄 있음'과 '죄 없음'에 있었다(Stewart).

성 경: [히5:4]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직분이 세습되었다(출28:1;민3:10;18:1). 아론 집안 외의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부르셨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직분을 업적이나 성품 혹은 물질에 의해서 획득할 수 없는, 타인과 동등한 연약한 존재이며(Lane, Vanhoye)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임명(任命)된 존재이다.

성 경: [히5:5]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 저자는 앞에서 모세와 예수의 유사성을 비교하여 모세와 예수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서 유사성이 있었으나(3:1-2), 우월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음을 논증하였다(3:3-6). 같은 방법으로 본절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아론과 그리스도가 비교되고 있다. 양자는스스로 대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시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하늘의 특권을 지닌 자이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존재임을 제시한다.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라는 이름 대신에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 즉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Morris, Lane).

성 경: [히5:6]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저자는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110:4을 인용하고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의 헬라어 '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은 멜기세덱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시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Hewitt).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은 다음과 같은 유사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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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리 스 도 | 멜 기 세 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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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시작과 끝이 없음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

| (요8:58;계1:4) |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음(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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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사장이시며 만왕의 왕이심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

| (계19:16) | 살렘 왕임(7:1;창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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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떡과 포도주로 예표되는 자신의 | 아브라함에서 떡과 포도주를 줌 |

| 몸과 피를 인류의 대속물로 주심 | (창14:18) |

| (마26:26-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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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레위 지파를 좇는 | 레위 지파 이전의 인물로 지극히 높으신 |

| 제사장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 하나님의 제사장이 됨(7:1) |

| 제사장이 되심(5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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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신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제사장이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훨씬 더 우월하시다(Bruce).

성 경: [히5:7]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 본절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음을 시사한다(2:14-18).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사르코스'(*)는 '살'을 뜻하는 말로서 '영'과 반대되는 물질적인 육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이 느끼고 당하는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4:15, Bruce).

⭕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눅22:39-46, Bruce, Robertson, Hewitt) 예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Lane, Maurer, Morris). 한편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에서 '올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넹카스'(*)는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제의적(祭儀的) 용어이다(Maurer).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Rasco).

⭕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 '경외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이아스'(*)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1)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유'(*)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Robertson).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본문은 시22: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와 상응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막14:32-36)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Boman, Rissi, Maurer).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받아들여졌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Lane). 한편 본문은 앞에서 언급된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과 연결된다. '죽음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다나투'(*)는 예수께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예수를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역을 극복하셨음을 시사한다(Vos, Fri-edrich).

성 경: [히5:8]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마덴 아프 혼 에파덴'(*)은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어진 관용구로서'배우다'의 헬라어 동사어근 '마드'(*)와 '고난받다'의 동사어근 '파드'(*)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효과를 위해 자주 함께 사용되었다(Lane). 수사학적 관용구가 적용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순종의 과정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Bruce, Morris). 본절에서 사용된 '고난받다'의 헬라어 '에파덴'(*)은 '파스코'(*)의 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본서에서 오직 '예수의 수난'에만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한다.

성 경: [히5:9]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온전하게 되었은즉 - 본절은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케 되셨음을 뜻한다(Lane, Hewitt, Meeter, Morris).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Klappert, Hewitt).

⭕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온전케 되신 결과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본절의 '순종'은 앞절에 언급된 예수 자신이 행하신 '순종' 즉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행한 철저한 복종을 의미한다(Lane).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한 것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러한 순종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의 헬라어 '아이오니우'(*)는 '끝없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참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하늘에 속한 것임을 암시한다(Morris, Williamson).

성 경: [히5:10]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자격]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율법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시사한다(Hewitt).

성 경: [히5:11]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영적 미성숙에 대한 경고]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페리 후'(*)로서 헬라어 '멜기세덱'이라는 명칭이 직접 거명되지 않고 관계대명사 '후'(*)로 나타난다. '후'의 성(性)에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후'는 남성으로 10절의 멜기세덱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Robertson,Bruce, Morris). (2)'후'는 중성으로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대제사장직을 가리킨다고볼 수 있다(Lane, Hewitt). 전자의 경우는 멜기세덱에 관하여 일반적인 유대 개념과는 다른 관점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저자가 7:1-28에서 그것을 논하기에 앞서 본절을 통해 수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Robertson). 후자의 경우는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납득할 만한 이해력이 수신자들에게 결핍되어 있음을 수신자들에게 주지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Hewitt). 한편 '할 말이 많으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뤼스 호 로고스'(*)는 헬라 문학의 관용구로서,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Lane).

⭕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 '둔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드로이'(*)는 부정어 '네'(*)와 '멀다'라는 뜻의 '호데오'(*)의합성어로서 '듣는 것에 무관심한' 혹은 '이해력이 부족한'을 뜻한다. 혹자는 본절을 앞 문단의 결말로 보아 '듣는 것이 둔하다'는 말은 9절에서 언급된 '자기를 순종하는' 즉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저자의 말을 수신자들이 충분히 깨닫지못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Lane, Morris).

성 경: [히5:12]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영적 미성숙에 대한 경고]

⭕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 '때가 오래므로'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Morris). 본절은 수신자들의 신앙이 성숙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롬2:2;벧전3:15) 신앙의 연조(年條)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 말씀의 초보 - 이 말의 헬라어 '테스 아르케스 톤 로기온'(*)에서 '로기온'은 '로고스'(*, '말씀')의 지소어(指小語)로 단순히 말씀 자체를 의미한다(Hewitt).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초적인 진리를 시사하는 것으로, 본절은 수신자들이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도 결핍되어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나타낸다.

⭕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젖'(*, 갈라크토스)과 '단단한 식물'(*, 스테레아스 트로페스)은 헬라 윤리학(倫理學)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서(Bruce, Lane), 헬라 윤리학에서는 아직 기초단계에 있는 자들을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에 비유하며 성숙한 단계에 이른 자들을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에 비유한다(고전3:1-3, Williamson). 저자는 본비유를 통해서 수신자들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이 여겨 그들을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다.

성 경: [히5:13]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영적 미성숙에 대한 경고]

⭕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경험하지 못한 자요 - 저자는 본절에서 '젖을 먹는 자'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린아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피오스'(*)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된 상태나(Riggenbach, Schrenk) 옳은 것을 분별하는 도덕적인 기준이나 '의'에 관향 원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Robinson, Spicq, Owen).

⭕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 '의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Hughes).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성 경: [히5:14]

주제1: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

주제2: [영적 미성숙에 대한 경고]

⭕ 단단한 식물은...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킨다(Lane).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자는 본절에서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 장성한 자 -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3:1;13:11)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 시사한다.

⭕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 '지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스데테리아'(*)는 스토아 학파(Stoics)에서 '감각 기관'을 가리키던 말로(Robertson) 본절에서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능을 뜻한다(Michel, Morris). 한편 '연단을 받아'의 헬라어 '게귐나스메나'(*)는 '귐나조'(*, '훈련하다')의 완료 수동 분사로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성 경: [히6:1]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한다. 그는 본절에서 더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Lane).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Bruce, Morris, Lane).

⭕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9:10, Hewitt).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Morris). 또한 죽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Morris). 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창15:6;합2:4).

성 경: [히6:2]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은 기독교의 '세례'(*, 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6:4;엡4:5;골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 '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8:17-19). 본절의 '안수'는 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26:19;단7:9,10;12:2;눅20:37,38;행23:8;마카비2서 7장,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성 경: [히6:3]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의 헬라어 '에안페르 에피트레페 호 데오스'(*)에서 '...하시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안페르'는 '페르'(*, '참으로')를 접미어로 취한 형태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문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ffatt, Hewitt).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obertson, Morris, Bruce, Lan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Lane).

성 경: [히6:4]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는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포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asemann,Conzelmann, Bruce).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 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요1:9;고후4:4,6;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Lane).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Morris).

⭕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는'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성 경: [히6:5]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성 경: [히6:6]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 '파라페손타스'(*)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파라피프토'(*)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에서'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이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성 경: [히6:7]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개역 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44:3;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Hewitt, Morris, Lane).

성 경: [히6:8]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것이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12:29).

성 경: [히6:9]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의 헬라어 '아가페토이'(*)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어린 호칭이다.

⭕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이보다 나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크레잇소나'(*)는 저자가 4-8절에서 언급한 배도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수신자들을 배도자와 비교할 때 훨씬 좋은 상태 즉 배도자들이 받는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Morris, Robertson). 한편 '구원에 가까운 것'의 헬라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에서 '에코메나'(*)는 '소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코'(*)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10절).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성 경: [히6:10]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Morris). 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Hewitt).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성 경: [히6:11]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간절히 원하는'의 헬라어 '에피뒤무멘'(*)은 '열렬히 바라다'라는 의미로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다.

⭕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끝까지'의 헬라어 '아크리 텔루스'(*)는 3:14의 반복으로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즉 이것은 '파루시아'(parousia, '그리스도의 재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9:28, Lane).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롬8:24,25).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10:22-24;롬5:2-5;고전13:13;갈5:5,6;골1:4,5;살전1:3;5:8;벧전1:21,22).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한다.

성 경: [히6:12]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영적 성장에 대한 권고]

⭕ 게으르지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도드로이 게네스데'(*)에서 '게으르지'의 헬라어 '노드로이'(*)는 5:11의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5:11의 내용을 기능적으로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Lane). 즉 그리스도 도에 대한 초보자들은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Hewitt).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Bruce). 그런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Lane, Grasser).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즉 구원을 온전히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한 것을 예로 들어 수신자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인내하여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권면한다.

성 경: [히6:13]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할실 때에 -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할때 대부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으며(행3:25;7:17;롬4:13;갈3:8,14,16,18) 본서에서도 아브라함을 예로 제시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13-15절;2:16;7:4-5;11:8-19). 13-15절의 아브라함에 관한 서술은 믿음의 모범으로서 12절의 '본받으라'는 권면에 대한 내용이다.

⭕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 본절은 창22:16의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를 저자가 논리적인 부연 설명을 덧붙여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맹세'에는 약속에 대한 지연(遲延)이 암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맹세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West-cott). 하나님은 자신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셨다(출32:13;사45:23;렘22:5;49:13).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대한 확실한 이행을 보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가장 큰 보증이 되신다(Lane).

성 경: [히6:14]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 본절은 70인역의 창22:17을 다소 변형시킨 인용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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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22:17 | |

| (LXX) | 에 멘 율로곤 율로게소 세 카이 플레뒤논 플레뒤노 토 |

| | 스페르마 수 |

|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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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에이 멘 율로곤 율로게소 세 카이 플레뒤논 플레뒤노 세 |

| |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

| | 번성케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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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인역에는 '플레뒤노 토 스페르마 수'(*, '내가 너의 씨를 번성케 하리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플레뒤노 세'(*, '내가 너를 번성케 하고')로 되어 있다. 두 구절의 의미는 동일한 것이나, 이렇게 저자가 '너의 씨'를 '너'로 변경시켜 인용한 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브라함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다(Schroger). 또한 창22:17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자손의 번성뿐만 아니라 땅에 대한 소유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자손에 대한 약속만을 언급한다. 이는 11:17-19의 내용 즉 약속을 성취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까지 인내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Swetnam).

성 경: [히6:15]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창22:1,15-18).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마저도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이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Lane). '약속을 받았느니라'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에서와 야곱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기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보다 깊은 의미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6:16]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17절) 당시 일반 사람들이 하던 맹세와 비교하여 설명한다(Cicero, Philo). 일반적으로 맹세는 발언한 것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구속력이 있는 확증이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보다 더 크고 위대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되어졌으며(신6:13;10:20) 만일 맹세를 하고서 이를 어기면 그것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출20:7;신5:11;슥5:3,4). 실제로 맹세는 약속한 것의 명백한 진실성을 비준해 달라고 하나님을 엄숙히 부르는 행위를 수반하였다(Philo).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방인들과 다툼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사실과 이러한 맹세는 최후 결정으로 더이상 변개(變改)할 수 없음을(창14:22;21:23-24;24:3) 염두에 두고 본절을 기록하였을 것이다(Lane).

성 경: [히6:17]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22:16-17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특히 '보증하셨나니'의 헬라어 '에메시튜센'(*)은 '중재자'란 뜻의 '메시테스'(*)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재자가 되다', '보증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없으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 한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을 시사하는 것으로 육체적인 후손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후손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Lane, Mo-rris).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을 고무(鼓舞)시켜 주는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Michel, Spicq, Foerster).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는 자신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성 경: [히6:18]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본절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나타낸다.

⭕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 '이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3절과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킨다(Bruce, Michel, Kuss). '약속'은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1: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통해 성취되었다(20절;히5:6,10; 7:17,21,28;시110:4, Lane). 한편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뒤오 프라그마톤 아메타데톤 엔 호이스 아뒤나톤 프슈사스다이 데온'(*)은 '이 두 가지 변할 수없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므로'(by two unchangeable thingsin which it is impossible for God to lie, NIV)라는 의미로 이 두 가지 사실 즉 '약속'과 '맹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단편적인 한 두 구절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민23:19;삼상15:29;시89:35;사31:2).

⭕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소망'은 본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이룩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되어질 구원을 나타낸다(Michel, Grasser,Glaube, Mora). 저자는 '앞에 있는 소망' 즉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Lane, Schierse).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Morris). 한편 '큰 안위'는 앞서 언급한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오는 '용기' 혹은 '위로'를 가리킨다(Robertson). 하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 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

성 경: [히6:19]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 본절에서 닻의 비유가 사용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문학에 있어서 흔히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Hilgert).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와같은 비유는 오직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 '닻'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Lane).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의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스'(*)는 인간을 '육'과 '영혼'으로 분리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생명을 나타낸다(Morris).

⭕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즉 안쪽은 지성소를 의미한다(출26:31-35;레16:2,12,15;21:23;24:3).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27:51;막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들어가나니'의 헬라어 '에이세르코메넨'(*)은 '에이세르코마이'(*, '들어가다')의 현재분사로서 '닻'(*, 앙퀴란)을 수식한다. 따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닻'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Windisch,Kasemann, Grasser, Koster, Schroger). 그러나 이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이다(Lane, Kuss, Michel, Spicq).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Morris).

성 경: [히6:20]

주제1: [성숙한 신앙에의 권고]

주제2: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

⭕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앞서 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드로모스'(*)는 본절에서와 같이 단수로 사용된 용례가 고전에서나 헬라 문헌에는 거의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인 '프로드로모이'(*)는 주력 부대 앞에 나가있는 '첨병'이나(Herodotus, Polybius), '주력 함대를 앞서 인도하는 배들'(Alciphron), '처음 익은 열매'(민13:20;사28:4), 혹은 '전령'(Herodotus)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프로드로모스'는 '선구자', 혹은 '선두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프로드로모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직 수행을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7-10).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씻어 백성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14, Lane).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속을 힘입어 뒤따라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확증이 된다(Hewitt).

성 경: [히7:1]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이 멜기세덱은...복을 빈 자라 - 본절은 창 14:17-20에 대한 언급으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 살렘 왕이요 - '살렘'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2) 혹자는 세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XX 창 33:18, Kirland). (3) 혹자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시 76:2, Morris, Lane, Vincent, Winter).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최고의 하나님'이란 의미로(Hewitt)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성을 암시한다(Lane, Hanlon, Philo).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이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제사장으로 인식하여 십일조를 그에게 바친다(창 14:19,20).

⭕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창 14:17-20(LXX)에서는 '아브람'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아브라함'('A )으로 되어 있다. 이런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저자는 본절의 내용을 70인역에서 인용한 듯하다(Lane). 한편 저자는 인용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연합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한 부분은 삭제하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사건과 아브라함이 얻은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준 사건(2절)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변개를 통해서 저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탁월함을 강조한다(Lane, Williamson).

성 경: [히7:2]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저자는 본절에서 멜기세덱의 두 가지 칭호를 제시한다.

⭕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 '멜기세덱'은 '나의 왕'을 의미하는 '말키'(*)와 '의'(義)를 의미하는 '체뎌'(*)이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도다'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로 부른 것과 연결된다.

⭕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살렘'이라는 지명(地名)은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Morris). 장차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평강의 왕'(사 9:6)이라 칭한 것과 연결된다.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러 오셨으며(마 11:28), 자신의 의를 통하여 공의가 넘치는 나라를 완성하며 다스리신다(사 9:7;11:1-5).

성 경: [히7:3]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토르 아메토르'(*)는 사생아나 천한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성적(性的)인 것을 초월하여 태어난 신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Morris). 이것은 저자가 멜기세덱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멜기세덱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나타낸다(Lane).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탄생이 기적적으로 되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사장적인 특질을 설명하려는 것으로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탄생이나 족보와 같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거나 레위계통의 제사장직의 승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5:5, 6, Lane, Horton)

⭕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러한 예표와 강조를 통해서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는 다른 제사장임을 진술한다(Spicq). '방불하여'의 헬라어 '아포모이오메노스'(*)는 '유사하여'라는 의미로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이 외형적인 형태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본문은 창 14:18-20의 내용에 대한 해석인 시110:5(LLX)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자는 시110:5(LLX)의 '영원한'(*, 에이스 톤 아이오나)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항상'(*,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으로 변형시켰다. 이런 변형은 저자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멜기세덱의 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성 경: [히7:4]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4-10절까지는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진술이다.

⭕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어떻게 높은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펠리코스'(*)는 영탄법(詠嘆法)으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략물 중 좋은 것'의 헬라어 '아크로디니온'(*)은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는 '아크로스'(*)와 '무더기'를 뜻하는 '디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쌓인 것들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것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받은 멜기세덱의 권위를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사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드렸음을 나타내며, 멜기세덱이 레위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위대하고 우월함을 암시한다(Cockerill).

성 경: [히7:5]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 저자는 본절과 6절에서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놓고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민 18:21, 24), 레위인들은 다시 그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민 18:26). 이런 제도는 바벨론 유수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느 10:38,39). 이와 같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모두가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기업으로 삼았다. 한편 '허리에서 난 자'에서 '허리'의 헬라어 '오스퓌오스'(*)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활동을 위한 준비 태세'나(왕상18:46) '힘의 근원'(나 2:1)을 의미하기도 하나 본절에서는 잉태와 출산에 관련된 생식 기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라 할지라도 제사장들은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즉 제사장들이 백성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형제로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그들이 십일조를 걷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임을 나타낸다(Morris).

성 경: [히7:6]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취하고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의해 십일조를 거두었으나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2절; 창 14:18-20). 저자는 앞절과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을 십일조를 받는 문제로 비교하여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한 존재임을 진술하고 있다.

⭕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그 약속 얻은 자'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을 빌어 주었다(1절;창 14:19,20). 고대 사회에서 축복의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신분상(身分上)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Morris).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성 경: [히7:7]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 '폐일언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리스 데 파세스 안틸로기아스'(*)는 파피리(Papyri)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용구로서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한편 '높은'의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는 비교급으로서 '더 나은', '더욱 탁월한' 혹은 '더욱 위대한'이란 의미로 본서에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19,22절;8:6;9;23;11;40). 본절의 이런 '비교급' 표현은 창 14:18-20의 내용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1절)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위대한 존재였음을 암시한다(Cockerill).

성 경: [히7:8]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6,7절에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더 위대함을 논증한 저자는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여기는'(*, 호데)과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저기는'(*, 에케이)을 통해서 표현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십일조를 백성에게서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로서 십일조를 받았다. 여기서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저자가 3절에서 언급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 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성 경: [히7:9]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있나니 -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는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를 바쳤다. '할 수 있나니'의 할라어 '호스 에포스 에이페인'(*)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등장하는 저자 특유의 표현이다. 본서의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길게 다루지 않고 주위를 환기시켜 간결하게 끝맺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Lane, Westcott, Morris).

성 경: [히7:10]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된 '레위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그러기에 레위가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레위를 대표하는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그것은 곧 레위가 바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Lane).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는 레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아브람함의 후손(後孫)임을 암시한다. 비록 레위는 태어나지 않았고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조상을 말할때 그의 후손까지 포함하였기 때문에(창 25:23; 고전 15:22)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레위가 바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결국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시사하고 있다(Morris).

성 경: [히7:11]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 본절은 '에이'(*, '만약')로 시작하는 가정법으로 율법과 연관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불완전함을 나타낸다. '온전함'의 헬라어 '텔레이오시스'(*)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혹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온전한 행위를 뜻한다(Lane, Robertson).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Moffatt). 왜냐하면 레위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9:9;10:1)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은 율법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줄 뿐 그것을 완전히 준수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롬5:20). 그래서 아론을 좇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 대신에 멜기세덱을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별다른'의 헬라어 '헤테론'(*)은 '전혀 다른 종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새 제사장이 과거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며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할 수 없었던 '온전케 함'을 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한다.

⭕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 '그 아래서'(*, 에프 아우테스)에서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테스'(*)는 본절 상반절의 '레위계통의 제사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래서'의 헬라어 '에프'(*)는 '...을 근거로 하여'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을 근거로 하여 율법을 받았으니'라는 의미로 제사장직과 율법이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7:12]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 제사장 직분과 율법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맺고 있다(11절).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불완전하여 백성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제사장 즉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제사장직과 관련된 율법도 불완전하여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성 경: [히7:13]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본절은 12절에서 언급된 '율법의 변역'에 대한 내용이다. 율법은 오직 레위 지파만 제사장직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새로운 제사장은 율법에 규정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곧 유다 지파에 속한 제사장이었다(Morris).이 유다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아닌 왕족 지파였기에 저자는 이 지파 사람 중 어느 한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유다 지파에 속했던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이 나타난다(삼하 6:13,17,18:24:25; 왕상 3:4;8:62). 이러한 경우 다윗과 솔로몬이 직접 제사 의식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희생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이 제사를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Morris).

성 경: [히7:14]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 본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의 제사장임을 나타낸다(Morris, Bruce, Hewitt).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음을 계속 증거하고 있다(마 1:2,3;2:6;눅 3;33;행 2:29-36;롬 1:3;딤후 2;8;계 5;5;22:16). 예수께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고 유다 지파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의 대제사장직이 혈통적인 것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秩序)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좇아 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테탈켄'(*)은 70인역이나 헬라 고전에서도 어떤 가문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아나테탈겐'은 70인역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거나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옴을 의미하는 말도 아마도 저자는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들을 상기하면서 본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민 24:17;렘 23:5, Schlier, Buchanan, Cockerill).

⭕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 오직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에 속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심을 암시한다.

성 경: [히7:15]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은 시 110:4의 인용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11절). '더욱 분명하도다' 에서 그 분명한 내용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11절에서 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그 효능을 상실하게 된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Westscott). (2) 혹자는 모세 율법이 폐지되었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이러한 세 가지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를 지닌다.

성 경: [히7:16]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 본문은 11절의 부정적인 표현 곧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와 동일한 의미로 11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Lane).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은 포괄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레위 계통의 합법적인 후손, 혹은 어떤 신체적 자격 요건 등을 가리킨다(Michel).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나타난 바대로 레위 자손의 혈통이나 외적 조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 본문은 11절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과 연관된다. 저자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대조시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썩거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의 계명 즉 율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된 것임을 강조한다(시 110:4,Lane).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만세의 왕'으로서(딤전 1:17)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생명를 부여하는 영원한 것이다.

성 경: [히7:17]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 본절은 시110:4의 인용으로서 16절에서 저자가 말한 것 곧 그리스도가 무궁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이다. 저자가 본절에서 '증거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레이타이'(*)를 사용한 것은 저자 자신이 시 110:4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 불완전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과 무관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직임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함을 암시한다.

성 경: [히7:18]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본절과 다음절은 저자가 11절부터 언급한 내용의 결론이다. '계명'은 문맥상 제사장직에 관련된 율법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있느나(Lane), 1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타당하다(Morris). 한편 '연약하며'의 헬라어 '아스데네스'(*)는 율법자체가 연약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Lane). 또한 '무익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펠레스'(*)는 율법이 단지 사람의 외형적인 것만을 정결케할 뿐 그 내적인 양심(良心)을 깨끗게 할수 있는 능력은 없음을 시사한다(9:9,10,14,23;10:14, Hewitt).

성 경: [히7:19]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 '온전케'로 번역된 헬라어 '에델레이오센'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는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11절). 율법은 단지 외형적인 것만 깨끗하게 하고 내적인 양심은 깨끗게 할 수 없어서(9:9,14)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즉 사람들은 제사장직이나 성결 의식과 같은 율법적인 제도에 의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Riggenbach , Michel).

⭕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리라 - '더 좋은'(*, 크레이트토노스)이란 표현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특한 표현이다(19, 22절;8:6;9:23). '더 좋은 소망'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레위적인 율법 제도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Lane).

성 경: [히7:20]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 본절과 다음절은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사이의 비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숙하신 맹세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 지목된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맹세없이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부여받았다(28절).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니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코리스 호르코모시아스'(*)는 시 110:4의 추론으로 하나님의 맹세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 됨으로 신자들은 그의 제사장직에 소망의 닻을 드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6:18-20,Schneider, Thompson).

성 경: [히7:21]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는 시110:4의 인용이다(17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 부여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맹세하신 약속의 신실성으로 인해(Cockerill) 보증된 것이다. 반면에 율법하에서 이루어진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나 약속 혹은 보증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다만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16절)을 좇아 이루어진 직분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제사장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며,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언약에 대한 보증임을 암시한다(22절).

성 경: [히7:22]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 저자는 '언약'의 헬라어 '디아데케스'(*)를 본서에서 17회나 사용하여 중시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디아데케'는 '유언', '서약', '의지'라는 의미로 70인역(LXX)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은혜로운 '의지'를 가리킨다(Lane). 동시에 그 단어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함축되어 있다(Morris). 문맥상 본절의 언약은 제의적(祭儀的)인 것으로(Lane) 옛 언약 즉 구약의 제의는 하나님께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었으나 외형적인 것만 정결케 하고 내적인 양심은 정결케 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다(1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시고(8:8-10;9:15-20), 새 언약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온전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25절;9;14,15).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다. 한편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에 대한 '보증'은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9절;13:20).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오스'(*)는 '보증인'이라는 의미로 이 보증인은 '중재자'의 뜻인 헬라어 '메시테스'(*)와는 달리(8:6;9:15;12:24) 보증인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이 행한 말에 대해 보증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Michel).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담보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성 경: [히7:23]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 저자는 새 언약의 제사장은 예수 한분 뿐인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수효가 많음에 주목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론부터 시작해서 A.D. 70년 예루살렘멸망에 이르기까지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취임했었다고 한다(Antiq. 20,227).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이 행하는 제의가 불완전함을 반영한다(1:1;10:1-4, Michel, Thompson).

성 경: [히7:24]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직을 감당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반면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므로 뒤를 이을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뒤이을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행하신 사역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아파라바톤'(*)은 70인역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제사장이 그의 의무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Josephus). 예수의 영원성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일시성과는 달리 그의 제사장직이 영구적임과 동시에 최종적(最終的)인 것임을 시사한다(Lane).

성 경: [히7:25]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덴'(*)은 본절이 23,24절의 논리적 귀결임을 나타낸다.

⭕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온전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판텔레스'(*)는 '완전히', '절대적으로'라는 의미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뜻한다. 한편 '구원하실'의 헬라어 '소제인'(*)은 현재시상이다. 본서에 나타나는 '구원'이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유업을 가리키는 반면(1:14;5:9;9:28) 본절의 '소제인'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시사한다(2:3,4;6:4,5,9, Lane).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제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새 언약인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 현재 구원에 참여케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구원에의 참여를 보증하신다.

⭕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간구하심이니라'의 헬라어 '엔튕카네인'(*)은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을 가리킨다(Lane, Snell, Morris).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할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히7:26]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 '이러한 대제사장'이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원하시며(24절),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25절), 항상 살아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중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새 언약에 합당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도록 모든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이다. 저자는 영원한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신 대제사장 그리스도에 대해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지녀야 할 성품과 지위를 나타낸다(Hauck).

⭕ 거룩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시오스'(*)는 70인역에서 '충실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1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낸다(5:7,8).

⭕ 악이 없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코스'(*)는 '교활하지 않은', '순수한'이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수하셨으며 어떠한 악과도 접촉하지 않으셨음을 시사한다(Moffatt, Grundmann, Bruce).

⭕ 더러움이 없고 - 이의 헬라어 '아마안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제의적 순결성을 나타낸다(마카비 2서 15:34).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제의 의식을 통해서 외적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깨끗이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온전한 도덕적 순결성을 소유하셨다(Morris).

⭕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성품과 연결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류와는 다른 존재이시다(Buchanan, Peterson).

⭕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 '하늘보다 높이'의 헬라어 '휩셀로테로스 톤 우라논'(*)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Lane). 예수께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는 달리 승천하셔서(4:14)곧바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중재자가 되신다(Morris).

성 경: [히7:27]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린다(5:3;레 4;3-12;16:6-10). 왜냐하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안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저자는 본절에서 '날마다'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드리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9:7,25;10;1) 대제사장이 제사를 매일 드렸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부주의로 죄를 범했을 때 매일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Bruce).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4:15)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드린 한 번의 제사는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저자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을 그의 대제사장직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제사한다(Zimmermann). 죄 없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그의 속죄사역은 일시적인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속제 사역과는 달리 한 번으로 영구화(永久化)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본절을 통해서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불완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설명하고 있다.

성 경: [히7:28]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저자는 본장을 결론지으면서 사람인 제사장과 온전하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세 가지 차이점을 제시한다. (1) 율법과 맹세의 말씀. 옛 언약에 속한 레위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셔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맹세의 약속을 성취하였으며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2) 사람과 아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반복적이고 일시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셔서 온전한 중재 사역을 행하셨다. (3) 약점을 가진 자와 온전케 되신 자. 옛언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져서 불완전한 사역을 행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하셔서 지상 생활의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2:10;5:8,9)

성 경: [히8:1]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 '중요한 것'의 헬라어 '케팔라이온'(*)은 '머리'를 뜻하는 헬라어 '케팔레'(*)에서 유래한 단어로 '요점', '핵심'을 의미한다(Hewitt,Robertson).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적인 사실을 설명해 나아가기 위해서 '케팔라이온'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앞에서 지금까지 한 언급을 가리킨다. (2) 다음에 이어지는 말, 곧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언급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중 본절에서는 후자가 타당하다(Cockerill, Morris).

⭕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 저자는 7:28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하나님의 아들됨의 개념을 함께 묶어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의 제사장직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연결하였다. 본문은 시 110:1의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에 대한 인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70인역(LXX) 슥 6:13의'그리고 그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라'를 의식하고 반영하였을 것이다(Synge). 본문에서 '하늘에서 위엄의'는 하나님을 존대히 여기는 표현 방법으로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위대한 분이심을 시사한다(Morris, Lane).

성 경: [히8:2]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 '성소와 참 장막'은 문자적으로 '참 장막인 성소'(the sanctuary, the truetabernacle, NIV)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소'와 '참 장막'은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시는 하늘 처소를 가리킨다(롬 8:34, Heitt). '성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기온'(*)은 70인역에서 종종 성소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지 않고(9:2,3) 사용된 일반적인 용어이다(Moffatt, Michel, Hughes). 또한 '장막'의 헬라어'스케네스'(*)는 문자적으로 '천막'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예배드리는 장소로 사용했던 천막(출 27:21)을 암시한다. '장막'을 수식하는 형용사 '참'의 헬라어 '알레디네스'(*)는 '원형' 혹은 '영원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Bietenhard). 이것은 '거짓'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 혹은 '불완전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하늘 처소를 시사한다(Cody). 한편 '부리는 자'의 헬라어 '레이투르고스'(*)는 공식적인 일을 수행하는 자로서 '사역자' 혹은 '종'을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 그 실제적인 의미는 '대제사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지상의 장막과는 다른(9:11,24) 주께서 직접 이루신 하늘 처소에서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중보 사역을 행하신다(Hewitt).

성 경: [히8:3]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그들은 소제물과 수소, 수염소, 수양, 비둘기 같은 번제물로써 1년에 한 번씩 속죄 제사를 드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도 드려야 할 제물이있어야 한다.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려야 할 제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은 저자의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드려야 할 것은 '흠 없는 자신'이었다(7:27;9:14).

성 경: [히8:4]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라는 말은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제사장이 되셨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께서는 지상의 어느 성소에서도 제사장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 이 땅의 성소에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아론 계통의 레위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막 밖에서 잡은 짐승의 피를 기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다(레 4:4,5). 그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땅에서 대속의 피를 흘린 몸을 가지시고 하늘에 있는 참된 성소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중보 사역을 수행하신다(7:25;9:12,24).

성 경: [히8:5]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지상의 성소에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성소는 하늘에 있는 참 성소의 모형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상은 플라톤(Platon)의 이데아 사상 곧 지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하늘에 있는 '이데아'들의 모형이라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쉬우나 본절은 저자가 출 25:40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으며, 유대인들에게 지상의 것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는 뿌리깊은 사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플라톤의 사상보다는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Bruce).

⭕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 본문은 출 25:40의 인용이다. 이외에도 동일한 문구가 출애굽기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어 있다(출 25:9;26:30;27:8).'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폰'(*)은 출 25:40에서 사용된 '탑니트'(*, '식양')와 동일한 표현으로 구두적(口頭的)인 지시보다는 가시적(可視的)인 것을 의미한다(Bruce, Lane). 그래서 혹자는 모세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Bruce, Cross). 지상에 있던 성소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식양(式樣)대로 지어진 것이었으며 이같은 식양을 따라 세워진 성소와 성소의 각종 기구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상징적 의미를 지닌 모형에 불과하다( 출25-40장). 이러한 상징적인 모형들은 언젠가 실체에 의해 대체(代替)될 수 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체되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쳤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마 27:51)은 더이상 이 땅의 성소가 필요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지상의 성소는 하늘의 성소로, 인간의 제사장 사역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성 경: [히8:6]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직분을 행하시는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처소이다. '직분'의 헬라어 '레이투르기아스'(*)는 헬라 고전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사용된 예가 없는 단어이다. 그러나 70인역(LXX)에서는 제의적인 어감(nuance)을 지닌 말로서 성스러운 직임(職任)을 나타낼 때에만 사용되었으며(Lane), '아름다운'의 헬라어 '디아포로테라스'(*)는 '우월한'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superior,NIV, Rovertson). 예수께서 얻으신 직분이 아름다운 이유는 대제사장의 가장 본질적인 임무인 속죄 사역에 있어서 예수께서 이루신 것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Strathmann). 한편 '얻으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튀켄'(*)은 '달성하다', '얻다'의 뜻을 지닌 동사 '튕카노'(*)의 완료형이다.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러한 직분을 얻으셨으며 현재에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 '중보'의 헬라어 '메시테스'(*)는 본서에서 언제나 '더 좋은 언약' 혹은 언약이 새 중재자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더 좋은 약속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 크레이트토신에팡겔리아이스'(*)에서 '에피'는 '...의 근거 위에'라는 의미이다(Robertson). 이것은 아론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맺은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 더 좋은 약속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약속'의 내용은 10-12절에서 인용되고 있는 렘 31:31-34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완전한순종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렘 31:31-34에 예언된 새로운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Lane). 새 언약은 과거에 맺었던 옛 언약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언약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원 사역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성 경: [히8:7]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필요성]

⭕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 저자는 '첫 언약'과 '둘째 언약'의 비교를 통해서 '첫 언약의 불완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둘째 언약'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시한다. '저 첫언약'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계약, 즉 유대인들의 율법과 규례와 계명을 가리킨다(출 19:3-8;24:7;신6:1-3). 그리고 '둘째 것'이란 '새 언약'(8절), 즉 하나님께서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더불어 세우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완전한 언약을 가리킨다(막 14:24;요19:30). 새로운 언약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옛 언약이 불완전하였음을 시사한다. 모세의 중재로 주어진 율법은 외적인 면만을정결케 할 수 있었을 뿐 인간의 내면 즉 양심을 깨끗게 할 수 없었으며(9:9,10) 인간이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좋은 새 언약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성 경: [히8:8]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필요성]

본절에서 12절까지는 렘 31:31-34의 인용이다. 저자는 이 인용을 통해서 첫 언약을 대체한 새 언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 본절의 '날이 이르리니'나 10절의 '그 날 후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주 사용한 표현으로(렘 30:3;31:27,31,38)미래에 도래할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다. 한편 '내가...새 언약을 세우리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은 옛 언약 즉 모세의 율법을 폐하심을 암시한다(Lane). (2) '세우리라'의 헬라어 '쉰텔레소'(*)는 '이룩하다'란 뜻의 '쉰텔레오'(*)의 미래 능동태이다. 이는 새 언약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성취됨을 시사한다. 이러한 새 언약의 상대자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되어 있다(렘 31:31). 예레미야 당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한국가로 존속하지 못하고 두 왕국으로 나뉘어져 이미 북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유다만이 남아 있던 때였다(렘 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나타나는 것은 장래에 두 나라가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기도 하다(Morris).

성 경: [히8:9]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즉 옛 언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즉부모가 어린 자녀를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 11:1-4, Morris)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의 땅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언약을 세우셨다. 이때 맺은 언약은 첫 언약으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이 언약은 불완전하였다(7절;9:9,1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 언약을 미래에 주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였다. '같지 아니하도다'는 새 언약이 모세 율법을 수정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나타낸다(Morris).

⭕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지 않았음을 시시한다(Hewitt).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노예와 같은 처지에 있던 이스라엘 열조(列祖)들을 구원해 주신 후 그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언약을 맺었으나(출 19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언약을 준행치 아니하였다. 그결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맺어졌던 옛 언약의 효력은 상실되었으며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고 진노의 심판을 선고 받았다(렘 22:5). 여기서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멜레사'(*)는 '무시하다' 혹은 '등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음을 나타내는 강한 표현이다.

성 경: [히8:10]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 저자는 예레미야서를 인용하는 가운데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문구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일이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그 날후에'가 언제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으로'라는 말로 보아서 예레미야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었던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하나가 될 그 어느 미래를 내다보며 예언한 표현일 것이다(Morris).

⭕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롭게 세울 언약은 '첫 언약'(7절) 즉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는 다른 것이었다. 후자가 외적인 것으로서 돌판에 새겨진 것이었다면(출 32:15,16), 전자는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으로서 돌판이 아닌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 것이었다. 여기서의 '생각과 마음'은 인간의 내적 본성인 지성(至誠)과 감성(感性)을 총체적으로 일컫 는표현이다(Robertson, Westcott). 하나님의 법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은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9:9,10) 곧 인격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하나님은 더이상 의문(儀文)에 의해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 반대로 하나님의 법을 자기 백성의 심비에 새겨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하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성 경: [히8:11]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니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 10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새 언약의 특성이 열거되고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모세를 통하여 내리신 계시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세대가 다 죽은 이후의 세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일도 알지 못하였다(삿 2:10;호 4:1,6). 그러나 새로운 언약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는 개개인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Bruce). 새 언약은 10절에서 언급된 대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를 먼저 받아들인 자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여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도 사역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주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눅 10;1-16;고전 1:21). 전도 사역을 통해서 전해진 지식은 객관적이며 피상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인용된 예레미야 선지자의 '나를 앎이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실제적인 지식으로서 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할 때 비로소 아는 지식을 가리킨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타인이 전해준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생각과 마음으로 알게 되며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Morris).

성 경: [히8:12]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새 언약안에는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약속이 들어있다(Morris). 옛 언약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할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 제사를 드려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6절) 단번에 신자들의 모든 죄를 속해 버리는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이다(7:27;10:10). 따라서 하나님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의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구약 시대의 제사와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필요한 것은 범죄할 때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다(요 5:14;갈4:8,9).

성 경: [히8:13]

주제1: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주제2: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 저자는 이제 새 언약의 내용에서 관심을 돌려 '새 언약'의 '새'(*, 카이넨)에 초점을 맞춘다(8절).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주셨던 옛 언약 즉 율법의 효력을 폐기시키셨음을 암시한다. 옛 언약은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해서 옛 언약을 폐기시키고(7:11,12) 불완전한 구약 시대의 율법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완전히 대체시키셨다.

성 경: [히9:1]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첫 언약에도...있더라 - 저자는 첫 언약 곧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기 위해 첫언약에 대해 먼저 진술하고 있다. 첫 언약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방법은 임시적인 것이다(10절). (1) 섬기는 예법 - 이것은 예배에 관한 규례이다. 첫 언약에도 완벽하고 거룩하게 규정되어 있다(6-10절). (2) 세상에 속한 성소 - '세상에 속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코스미콘'(*)은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하나님과의 대적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에 본절의 '코스미콘'은 하늘과 대조되어 '지상적인'이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본문는 '손으로 만든 성소'와 동일한 의미이다(24절).이 성소는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현재 세상의 불완전함을 반영한다(Lane, Hewitt).

성 경: [히9:2]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본절은 성소와 그 안에 있는 기물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쪽에 있던 '향단'(출30:1-10)은 언급되지 않는다.

⭕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이는 성소라 일컫고 - 본절은 첫 언약에서 나타난 '세상에 속한 성소', 즉 성막은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된다. 두 개의 방중 안쪽 방을 '지성소'라고 부르며(3절) 바깥쪽 방을 '성소'라 라고 부른다.

⭕ 등대 - 이것은 성소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가운데에 중심 줄기를 기준으로 양편에 세 개의 가지가 나와 있고 7개의 등잔과 22개의 꽃모양의 받침대가 있다(출25:31-39;27:20,21).

⭕ 상과 진설병 - '상'은 조각목, 즉 아카시아 수종의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진설병을 놓아두는 곳이다. '상과 진설병'은 성소의 북쪽에 위치하며 12개의 진설병이 각각 6개씩 두 줄로 놓여 있고 안식일마다 교환되었다(레 24:8).이 떡은 무교병이었다(Philo,Lane).

성 경: [히9:3]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 '둘째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휘장을 가리킨다(출 26:31-33;36:35,36;레 24:3). 둘째 휘장의 뒷편 즉 안쪽에 있는 방을 지성소라고 부른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로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제사을 지냈다(7절).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을 때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다(마 27:51). 이 사건은 성도들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까지 제한되었던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히9:4]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금향로...있고 - '향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미아테리온'(*)은 70인역에서는 '향로'로만 사용된 반면에, 요세푸스(Josephus)나 필로(Philo)는 '향단'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다. '뒤미아테리온'은 본래 성소에 속한 기물로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앞에 있었다(출 30:6;40:26). 그런데 본절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기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향로'와 지성소와의 관계에서 해결할 수 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곧 속죄일에 향을 피운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는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 앞에 분향하여 그 연기로 속죄소를 가리웠다(레 16:12, 13). 향의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속죄소를 가리워 범죄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면하도록 하였다(출 20:18, 19). 비록 향로는 항상 지성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소에 속한 기물(器物)로 볼 수 있다(Hewitt,Bruce, Morris). 더욱이 본절의 '있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는 '...에 속하다'란 의미로 향로가 지성소 속에 고정 배치된 기물이라기보다는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임을 시사한다(Hewitt, Morris).

⭕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 -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 즉 조각목으로 만든 상자로서 '증거궤'라고도 불렸다(출 25:22).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다.

⭕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던 양식임을 알리기 위한 증거였다(출 16:32-34).

⭕ 아론의 싹난 지팡이 - 이것은 아론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에서 제사장 직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사람임을 알리기 위한 증거였다(민17:1-11).

⭕ 언약의 비석들 -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의 돌판이며, 그 내용은 십계명이다(출 25:16;31:18;신 9:9;10:3,4).

성 경: [히9:5]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 저자는 70인역을 따라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라고 부르고 있다(출25:17, 21, Philo).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속죄제의 피를 속죄소에 뿌렸다(레 16:14,15). 속죄소인 언약궤의 뚜껑에는 한쌍의 그룹(cherubim)이 있었다. 이 그룹은 언약궤의 뚜껑 위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대하는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수호하는 천사들이다(겔 10:1-8;계 4:6-8).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삼상 4:4;시80:1;99:1). 더욱이 '영광'은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룹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Bruce, Morris). 한편 저자는 그룹에 대해서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한다. 그 이유는 저자가 본서를 통해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옛언약을 상징하는 성막에 대한 자세한 교훈이나 설명이 아니라 옛 언약을 상징하는 성막에 대한 자세한 교훈이나 설명이 아니라 옛 언약과의 비교를 통해 새 언약의 우월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Hewitt).

성 경: [히9:6]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 '첫 장막'은 '성소'를 가리킨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예(禮)는 세가지였다. (1) 아침마다 금향단에 분향하였다(출30:7-8). (2) 저녁마다 등대에 불을 밝혔다(출 27:20, 21). (3)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열 두개의 진설병을 교체하였다(레 24:8, 9).

성 경: [히9:7]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 '둘째 장막'은 '지성소'를 가리킨다. 이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이년 중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11-16). '일차씩'은 횟수로 한 번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루씩'으로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최소한 두 번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레 16:12,15). 한 번은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들어갔다. 이렇게 두번 외에도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들어갔을 가는가능성이 있으며(레 16:14), 랍비 전승에 의하면 앞서 언급한 세 번의 경우 외에도 번제를 드리고 나서 놓아둔 기구와 불 담는 그릇을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서 들어갔다(Morris).

⭕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 '허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에마톤'(*)은 대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이 모르고 범한 죄로서 무지를 가리킨다(Morris,Hewitt). 이러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대제사장은 '피'를 드려야만 했다.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매개체로서 '피'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언급될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e).

성 경: [히9:8]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 저자는 성령께서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 주신다고 진술한다.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7절에서 언급한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의적인 규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Bruce,Lane). '첫 장막'은 6절에서와 같은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세워진 '성막'을 가리키며(Johnsson, Young, Bruce, Morris),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곧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시사한다(Bruce, Morris).

성 경: [히9:9]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 장막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상징이다. '현재까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장막이 있던 때까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해석할 때 본절은 구역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2) 바로 지금까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본절은 당시의 성막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대조로 성막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함을 시사한다. 이 두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Bruce, Morris).

⭕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 본문은 구약 시대의 성막이 불완전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성막과 제사로는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의식(儀式)인 '예물과 제사'는 외형적이어서 내면적이며 영적인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 '양심'의 헬라어 '쉬네이데신'(*)은 하나님과의 전인적 관계를 의미하며, '온전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사이'(*)는 몸뿐만 아니라 양심까지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한다(Lane). 구약 시대의 의식은 일년에 한번씩 행해지는 속죄 제사를 통해서(7,25절;10:1-3) 영원한 정화를 할 수 없었으므로(Johnsson) 하나님과 섬기는 자 사이의 전인적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위해 참장막인(8:2) 그리스도의 희생과 언약이 성취되어야 했다.

성 경: [히9:10]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첫 언약의 예법]

⭕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 장막에 관련된 규정들은 물론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규례들 즉 '먹는 것'(레 11장)과 '마시는 것'(레 10:8,9;11:33-38;민 6:2,3), 그리고 '씻는 것'(출 30:20;레 15:4-27;17:15,16;민 19:7-13)에 관한 규례들은 모두 육체와 관련된 외형적인 예법이다. '육체의 예법'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새 언약으로 대체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옛 언약이다. 옛 언약의 제의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지고(11-14절) 하는 성소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10:19,20) 새 언약이 성취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새언약이 성취됨으로 그것의 지위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Hofius, Lane).

성 경: [히9:11]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1-10절에 언급된 불완전하고 제한된 첫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으로 주제가 바뀜을 시사한다.

⭕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장래 좋은 일'은 옛언약이 제공해주지 못한 온전한 죄의 씻음과 하나님께로 자유롭게 나아가게 해주는 새 언약의 구속을 의미한다(Morris). 이러한 영적 축복은 구약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일에 행한 제사와는 달리 영원한 새 언약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종말론적 특성을 반영한다(Johnsson, Grundmann, Lane). 한편 '오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게노메스'(*)는 부정 과거로서 새 언약의 좋은 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그러나 아직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 '통해서')는 도구격으로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혹자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천국이라고 주장하나(Bruce)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Calvin, Morris,Westcott).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 새언약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4절;10:20).

성 경: [히9:12]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 구약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동물의 피를 통해서 구속 사역을 행하였다(레 16:3, 5-11,15,16). 염소는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며 송아지는 대제사장 자신과 가족을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나 그 효력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매년 속죄일마다 희생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Lane).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희생 제사는 영원하며 완전한 것이었다(Hewitt). '단번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 팍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사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매년 반복되는 옛 언약의 구속 사역과는 달리 반복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이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Lane). 한편 '성소'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Hewitt) 본절에서는 지상의 장막이 아닌 하나님의 존전인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Lane, Bruce, Morris).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Lane).

성 경: [히9:13]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 본문은 옛 언약하에서 드려진 동물의 피의 효력에 대한 언급이다.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 제사에 드려진 제물이었음은 물론 속죄일에 대제사장과 가족, 그리고 백성의 속죄를 위한 피였으며 (12절), '암송아지의 재'는 정결케 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민19:1-10). 이러한 희생 제물의 피와 재는 효과가 있는 것이나 단지 외형적이며 상징적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에 불과하였다(Morris, Lane).

성 경: [히9:14]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하물며...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 본문은 새 언약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사역의 효과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의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옛 언약의 제사가 성취할 수 없는 것 즉 양심을 깨끗이 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막던 죄를 제거하는 구속 사역을 성취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 언약의 목적이다. 새 언약을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하에서 불완전한 속죄로 인하여 제대로 섬길 수 없었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디아 프뉴마토스 아이오니우) - '프뉴마토스'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 자신의 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 영을 통해서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nell). 그러나 '프뉴마토스'는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임무를 성취하는 이사야서의'주의 종' 사상을 암시하는 것으로 성령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사42:1;61:1,Bruce, Morris, Lane).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속죄 사역을 이루신 대제사장이심을 시사한다(Morris, Lane).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 - '흠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몬'(*)은 70인역에서 결점이 하나도 없는 희생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된 희생 제사 용어이다(민 6:14;19:2).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완전한 순종의 성취를 시사한다(5:8, 9;10:5-10, Hewitt, Lane).

성 경: [히9:15]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이를 인하여 드는 새 언약의 중보니 - '이를 인하여'는 본문이 11-14절에서 언급한 내용의 결과임을 나타내다. 특히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한 것을 가리킨다(Morris, Lane, Hewitt). 한편 '중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는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의 효과를 시사한다(Michel).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종말론적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기로 약속하신 새 언약을 실현시키셨다(8:8-12;10;16,17;렘 31:31-34). 따라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

⭕ 이는 첫 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첫 언약하에서 외형적인 면만 속죄한 불완전한 요소를 해결하여 온전한 속죄를 이루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해결하여 양심까지 깨끗하게 속죄시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기업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녀들에게 주어질 '기업'은 죽은 사람의 유언에 따라 얻는 재산을 가리키는 것으로(Morris) 영원한 구원을 시사한다(1:14; 5:9, Lane).

성 경: [히9:16,17]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셨음을 시사한다(Hewitt, Lane). 이러한 죽음의 필요성은 언약의 절차에서 비롯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비준(批准)은 희생 제물에 의해서 보증된다(창 15:9-21;출 24:3-8;시 50:5;렘 34:17-21, G.E. Mendenhall).그리스도는 이러한 새 언약의 비준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고자 하시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으며(요 4:34;6:38, 39)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죽으셔야만 했다(8:9-12;요6:40).

성 경: [히9:18]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은 것이 아니니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덴'(*)은 본절의 결론이 16,17절에서 언급된 법적 원리에서 유래된 것임을 시사한다. 제사의식에서 희생 제물이 대표하여 피를 흘림으로 언약의 효력이 발생한 것처럼 새 언약에서도 대리자의 죽음을 통해 언약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언약에서는 구속 사역이 한 사람의 대리적인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으나 첫 언약 즉 옛 언약에서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의 죽음을 통해서 외형적인 구속 사역이 이루어졌다. 이와같이 옛언약이든 새 언약이든 간에 '디아데케'('유언')의 효력이 발생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Morris).

성 경: [히9:19]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저자는 본절에서 구약 시대에 언약 체결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출 24:3-8).

⭕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 구약시대에 언약을 맺는 과정은 세가지 단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 본절은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명을 백성들에게 선포함으로 언약을 맺기 위한 항목과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다(Morris). 언약의 조건들을 선포하면 백성들은 받아들일는지에 대한 가부(可否)를 결정해야만 한다. 조건의 선포 후에 두번째 과정은 언약의 내용들을 책에 기록하는 것이나 본절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 본문은 언약 체결의 세번째 과정이다. 피뿌림의 과정을 통해서 언약의 비준이 결정된다. 출 24장에는 피를 백성에게 뿌렸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으나 '물과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였다'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민 19:1-22) 문둥병자(레 14:4-6, 49-51)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책'에 뿌렸다는 사실 역시 나타나지 않으나 이것은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Morris).

성 경: [히9:20]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 본문은 출 24:8(LXX)의 인용이다.

┌──────┬───────────────────────────────┐

│ │ │

│ │ │

│ │ │

│ 출 24 : 8 │라본 데 모위세스 토 하이마 카테스 케데산 투 라우 카이 에이펜 │

│ LXX │이두 토 하이마 테스 디아데케스,헤스 디에데토 퀴리오스 프로스 │

│ │마스 페리판톤 톤 로곤 투톤

| 마스페리판톤 로곤 투톤 │ │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들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

│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

├──────┼───────────────────────────────┤

│ │ │

│ │ │

│ │ │

│ 본 문 │레곤 투토 토 하이마 테스 디아데케스 헤스 에네테일라토 프로스 │

│ │휘마스 호 데오스 │

│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

│ │ │

└──────┴───────────────────────────────┘

저자는 70인역 출 24:8을 본절에 인용하면서 두 가지를 변경하였다. (1) 70인역의 '이두'(*, '보라')가 본절에서 '투토'(*, '이것')로 변용(變用)되고 있다. 이 사실은 저자가 본절에 인용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성만찬 말씀과 일치시키기 위해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Lane, Hewitt). 따라서 본절은 '주의 만찬'을 암시하며(마 26:28;막 14:24, Spicq,Michel, Thomas). 희생된 동물의 피에 의해서 옛언약의 효력이 발생됨을 시사한다(Lane). (2) 70인역의 '디에데토'(*, '위탁하였다')가 본절에서는 '에네테일라토'(*, '당부하였다')로 바뀌었다. '디에데토'는 하나님께서 첫 언약을 제정하셨음을 암시하는 반면에, '에네테일라토'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기 위해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비준해야 함을 시사한다(Hughes).

성 경: [히9:21]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 본절은 후대에 이루어진 장막의 정결 과정과 연결된다. 장막의 봉헌은 첫 언약과의 연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첫 언약이 보다 구체적이고 제도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Morris). 이러한 장막의 봉헌 후 모세는 아론 집안의 제사장들을 피와 기름으로 거룩하게 하였으며(레 8:23,24,30) 또한 장막과 그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장막과 모든 기구에 기름만 바른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피를 뿌렸던 것처럼 장막과 기구에도 피를 뿌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Bruce,Morris).

성 경: [히9:22]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인한 새 언약]

⭕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 '거의'의 헬라어 '스케돈'(*)은 정결케함에 있어서 피를 제외한 다른 예외적인 방법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 예외의 방법은 네 가지이다. (1) 전쟁터에서 노략한 전리품은 '물'로 정결케 하였다(민 31:23). (2) 속죄제에서 비둘기조차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는 '곡물'을 제물로 드려 정결케 되었다(레 5;11-13). (3) '향'을 속죄제로 드리기도 하였다(민16:46). 그러나 이러한 정결 방법은 예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희생 제물이 피를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피 흘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이마텍퀴시아스'(*)는 '피를 의미하는 '하이마'(*)와 '쏟아 붓다'라는 의미의 '엑퀸네인'(*)의 합성어로 피를 통한 속죄를 묘사하기 위해서 저자가 만든 조어인 듯하다(Bruce, Lane, Morris).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고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죽을 죄인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는 피흘림이 필요하였다(레 17:11). 첫 언약에서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온전한 사함과 생명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피흘림은 죄사함을 얻기 위한 절대적(絶對的)인 조건이다.

성 경: [히9:23]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저자는 본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그 모형인 '지상에 있는 것들'을 비교하여 희생 제물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대조시키고 있다.

⭕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은 본절이 19-22절에서 논한 내용에서 비롯된 추론임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첫언약과 장막을 통한 희생 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다. 이러한 모형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정결케 하는 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2절).

⭕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더럽혀진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하늘 성소에 들어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Spicq, Morris, Moffatt, Delitzsch,Hewitt). 이 두가지 해석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지상에 있는 것들은 피로써 정결케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외형적인 정결케 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더 좋은 제물'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영적이고 내적인 양심의 정결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엡 2:22).한편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제물'의 헬라어 '뒤시아이스'(*)는 복수이다. 이것은 한번의 제사로서 속죄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총칭적 용법으로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제사가 단번에 행한 영원한 제사임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9:24]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통해 들어가신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다. 지상의 성소는 단지 외형적(外形的)인 것만을 속죄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하늘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지상 성소의 실체인 하늘이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거하는 성소인 참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Hofius) 이미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들처럼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위함이었다(Hewitt, Morris, Bruce).

성 경: [히9:25]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씩 속죄일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레 16장). 이러한 속죄 행위는 매년 반복되었으며 이 속죄 행위를 위해 매년 다른희생 제물의 피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구속 사역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다. '드리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페레'(*)는 제사 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드린 사역과 속죄일의 제사 행위를 비교하고 있다.

성 경: [히9:26]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 '그리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이'(*)는 문자적으로 '만일 달랐다면'이란 의미이다(Morris). 이것은 저자가 설정한 가정(假定)으로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행한 것처럼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신을 드렸다면'이란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옛언약의 대제사장처럼 자주 자신을 드렸다면 여러 번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 것이다.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본문은 앞서 언급한 사정에 대한 대답이다. 저자는 그 대답으로 '단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단번에'는 앞서 언급한 '자주'와 대조되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하셨음을 나타낸다(Bruce, Lane, Hewitt). 한편 '세상 끝'은 구속사역의 성취의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도래(到來)케 하셨다(Bruce, Morris).

성 경: [히9:27]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성 경: [히9:28]

주제1: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 본절은 사 53:12(LXX)에 나타난 주의 종의 사역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앞서 언급한 모든 인생에게 적용된 죽음의 원리가 적용되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셨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 인생의 최종성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목적 또한 최종적(最終的)인 것이다. 그가 자신을 '단번에' 드린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 본절은 구약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연결된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근심 가운데 대제사장이 직무를 마치고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린다.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왔을때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대신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가(24절) 자신을 기대하는 자를 위하여 두번째 나타나시는'파루시아'(*, '강림')와 대비된다(Lane, Bruce).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초림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고 하나님 존전에서중보 사역을 행하시며(24절), 또한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를 드리고 성소에서 나올 때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받으셨음을 확신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구원의 상소자로서(1:14;2;3, 10;5:9)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Hewitt,Lane, Bruce).

성 경: [히10:1]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8:3-5, 23-26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 저자는 본문에서 `율법'과 '장차오는 좋은 일'의 대조를 통해 율법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제사 제도를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을 의미한다(Morris). 저자는 본절에서 율법을 두가지로 정의한다. (1) 그림자. '그림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키안'(*)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유래하는 '비실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은 미래의 실체를 증언하는 과거의 증거이다(Williamson,Lane). (2)참 형상이 아님. '참형상'의 헬라어 '에이코나 톤 프라그마톤'(*)은 문자적으로 `그러한 실체들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슷하거나 닮은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실체를 완전히 구현한 화신을 가리킨다(Bruce). 율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림자에 불과하며 초월적인 실체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한편 율법의 대조 개념인 '장차 오는 좋은 일'은 `톤 프라그마톤'(*, '그러한 실체들')과 동일한 의미로 새 언약으로 이루어진 새 시대의 축복을 가리킨다(Peterson).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서(9:11)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Michel,Cody).곧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의미하며 동시에 불완전한 옛언약이 성취할 수 없는 완전함을 뜻한다(5:9, Bruce, Hewitt).

⭕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본문은 참 형상의 그림자인 율법의 한계에 대한 진술이다. `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의 어순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해마다'를 수식한다(NIV). (2)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를 수식한다(NEB).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의 어순도 '에이스토 디에네케스'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를 수식하고 있으며 본문이 옛 언약인 율법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Montefiore). 이와 같이 옛 언약인 율법은 해마다 속죄일에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재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지만 그 효력은 일시적이며 불완전한 것으로 죄를 제거하는 데에 아무런 효력이 없다(Peterson).

성 경: [히10:2]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 본절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논증이다. 본절의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신 하마르티온'(*)은 문자적으로 '양심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율법이 정결케 할 수 없었던 내적인 죄를 가리킨다. 율법에 의해서 행해진 희생 제사만으로는 외적인 죄만을 정결케 할 뿐 내적인 죄인 양심의 죄는 단번에 완전히 정결케 할 수 없었다(9:9). '정결케 되어'의 헬라어 `케카다리스메누스'(*)는완료 분사로서 최종적인 정결을 성취할 수 없었다. 만약 율법이 완전하여서 온전히 정결케 할 수 있었다면 매년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매년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며 한계성을 시사한다.

성 경: [히10:3]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Lane). 백성들은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민 5:11-15)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나 징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저자는옛 언약하에서의 제사의 역할이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새 언약에서 약속을(8:12) 대조시켜서 반복적인 제사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드린 제사 사이의차이점을 강조하고 있다(Bruce). 한편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나니'의 헬라어 '아남네시스'(*)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면서 당신을 '기념하라'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다(눅 22:19;고전 11;24, 25). 두 언약에 사용된 `아남네시스'는 옛 언약의 제사가 죄를 기억하고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 매년 드려져야 하는 반면에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 이상 죄를 기억지 아니하심을(렘31:34) 비교하여 옛 언약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Morris, Hewitt).

성 경: [히10:4]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이는 황소와 염소의 죄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 '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를 제거함에 있어서 '피'를 전제로 해야 함을 나타낸다(9:22). 이처럼 속죄일에 드려진 동물의 희생 제사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죄를 깨끗이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나 양심의 죄까지 깨끗게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황소와 염소의 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Hewitt, Berkhof, Bruce). 저자는 본절에서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불충분한 것임을 드러냄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해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피를 강조하고 있다(Johnsson).

성 경: [히10:5,6,7]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본문은 시 40:6-8(시 39:6-9, LXX)의 인용이다. 시편은 본래 다윗의 시였으나 저자는 본문을 인용하면서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여 다윗에 관한 내용이 아닌 그의 자손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인용을 통해서 옛 언약하에서 드렸던 희생제물보다 새 언약하에서 드려진 그리스도가 더 탁월함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성육신의 이유를 제시한다(Hewitt, Morris).

⭕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 '세상에 임하실 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 즉 성육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음에 언급되는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와 연관된다(Hewitt, Lane). 저자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다음 인용문들의 화자(話者)가 다윗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임을 드러낸다.

⭕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 저자는 본문에서 옛 언약을 나타내는 네 가지 종류의 제사를 언급하고 있다. 네 가지 제사 중 `올라'(*, '번제')와 '해타트'(*, `속죄제')는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다섯 종류의 제사-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에 속하며, '제사'(*, 제바흐)는 종류에 상관없이 동물 희생 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화목제와 연관되며 '예물'(*, 민하) 역시 일반적으로 제사를 가리키나 레위기에서는 곡물 제사 즉 소제와 연관되어 사용된다. 이러한 네 가지의 제사는 레위기에 묘사된 주요한 종류의 제사들을 모두 내포하는 것으로 옛언약을 대표한다(Spicq, Hughes).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불만족은 제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만을 반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불만족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새 언약을 맺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삼상 15:22;시40:6;50:8-10;51:16-17;사 1:10-13;66:2-4;렘 7:21-24;호 6:6;암 5:21-27).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시고 열납하시는 제사는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제사이다(Taylor, Manson).

⭕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세상에 들어올 때'와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능동적인 순종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드린 제사가 율법에 의해서 드려진 동물 희생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함을 시사한다(8-10절, Lane). 한편 헬라어 본문은 70인역의 영향을 받아서 맛소라 본문과는 약간 상이하다. 맛소라 본문(MT)의 '귀'(시 40:7)가 70인역이나(시 39:7) 본문에서 `몸'으로 변화된 것에 대해서 혹자는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주장하나(A. Kuyper, F. Bleek, G. Lunemann) 70인역자들이 일부러 '귀'를 '몸'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Bruce, Delitzsch). 70인역자들이 위와 같이 해석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구약 시대에 종이 귀를 뚫어 주인에게 평생토록 종노릇하겠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Hewitt). (2) 혹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귀로 들어 몸으로 행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Westcott). (3) 혹자는 신체의 일부인 귀가 신체전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Bruce).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 첫번째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Morris).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 '두루마리 책'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팔리디 비블리우'(*)는 문자적으로 두루마리의 봉을 가리키는 것으로 토라 즉 모세 오경을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을 의미한다(Bruce, Hewitt, Morris). 저자는 율법에 기록된 사실을 언급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을 성취함은 물론 율법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음을 시사한다(막 14:49). 한편 본문은 70인역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

│ │ * │

│ 본 문 │ 투 포이에사이, 호 데오스, 토 델레마수 │

│ │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

├─────┼────────────────────────────────┤

│ │ * │

│ LXX │ * │

│ 시 편 │ 투 포이에사이 토 델레마 수, 호 데오스무, 에불레덴 │

│ 39:9 │ `오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나이다' │

└─────┴────────────────────────────────┘

헬라어 본문에는 70인역에 언급되어 있는 두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 '무'(*, '나의')와 '에불레덴'(*, '내가 원하옵건데')이다. 저자는 70인역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을 생략시킴으로 인용문 전체를 보다 더 자연스럽게 기독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한다(Lane, Kistemaker).

성 경: [히10:8,9]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본문은 5-7절의 인용문에 대한 설명으로 저자가 그 본문을 본서에 인용한 강조점을 나타낸다.

⭕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 앞서 언급된 인용문(5-7절)에서는 '제사와 예물'의 헬라어 `뒤시안 카이프로스포란'(*)은 단수로(5절), '번제함과 속죄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카우토마타카이 페리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나타난다. 반면에 본절에 언급된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 뒤시아스카이 프로스포라스 카이 홀로카우토마타 카이페리 하마르티아스)는 모두 복수이다. 본절에서 사용된 복수는 총체적인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네 종류의 제사가 구약성경에 언급된 모든 종류의 제사를 대표하는 것임을 나타낸다(Morris). 저자는 단수에서 복수로의 변화와 반복을 통해 율법속에 나타난 희생 제사들이 근본적으로 부적당함을 나타내고 있다(Lane). 즉 율법에 나타난 희생 제사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뜻과 죄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으며 단지 방향만을 제시하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다(Morris).

⭕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 7절의 '말하기를'의 헬라어 `에이폰'(*)은 부정 과거인 반면에 '말씀하시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켄'(*)은 완료 시상이다. 이러한 시제의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지속성을 시사한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인용문 즉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는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본질적인 언급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신을 희생시킨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희생 제사임을 시사한다(Johnsson, Davidson, Lane).

⭕ 그 첫것을 폐하심은 둘째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아나이레이 토 프로톤 히나 토 듀테론 스테세) - 헬라어 본문은 구조적으로 교차 대구법으로 되어있다. 저자는 본문 자체를 교차 대구법으로 기록하면서 앞서 언급된 시편 인용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1) 첫 것: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첫 것'은 8절에서 묘사된 율법과 희생 제사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는 율법에 의해서 규정된 제사로서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적인 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 둘째 것: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다(Bruce). 둘째 언약 즉 새 언약이 효력이 있고 유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언약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세우신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첫 것의 폐지를 요구한다.

성 경: [히10:10]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방법과 결과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방법'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는 것이다. `드리심으로'의 헬라어 `프로스포라스'(*)는 70인역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된 용어이다(LXX, 시 39:7;단 3:38). 저자는 '프로스포라스'를 사용하여 효력이 없는 동물 희생 제사와 온전하고 효력있는 희생 제사 즉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는 인격적인 제사를 비교하고 있다(Taylor, Manson). 그리스도께서 몸을 드리신 것은 완전한 것으로 더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번에' 드린 제사이다. `단번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팍스'(*)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시사함과 동시에 구속 사역의 완전성을 암시한다(7:27;13:12, Bruce, Lane). 한편 그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말은 하나님께로 성별됨을 나타낸다.

성 경: [히10:11]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 본절은 1절과 비슷한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

│ 본 절 │ 1 절 │

├─────────────────┼────────────────────┤

│ 매일 │ 해마다 │

│ │ │

│ 같은 제사를 │ 같은 제사로 │

│ │ │

│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 │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성소에 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였다. 지상의 제사장들이 '서서' 직무를 감당한다는 사실은 그 직무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동물 희생 제사로는 죄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아 양심을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Bruce, Lane, Morris).

성 경: [히10:12,13]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본문은 시 110:1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지상의 제사장들의 직무와 비교되는 예수의 대제사장 직무에 대한 진술이다. '앉으사'는 지상의 제사장들이 '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11절)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옛 연약의 속죄 사역과는 달리 온전히 성취되어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것임을 암시한다(Lane, Hewitt). '영원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는 부사구로 문법적으로 '드리시고'를 수식할 수도 있고 '앉으사'를 수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 '드리시고'를 수식한다고 보는 것이 본절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Morris, Westcott).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단번에' 드리신 희생 제사로 그 죄를 제거하는 효력은 더이상 반복할 이유가 없는 영원한 것이다. 한편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는 시편 110:1의 인용으로 등극(登極)하신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중보사역을 행하신다(8:1-6).

⭕ 그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 본문은 시110:1의 인용으로 시 8:6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이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등극한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고전 15:24-28) 중보 사역을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Bruce).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중보로서(8:6) 모든 원수가 멸망할 때까지 중보 사역을 행하신다. 저자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암시하며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대적하여 멸망당하는 원수들의 자리에 동참하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다(3:14, Morris, Hewitt).

성 경: [히10:14]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이 10,12절과 연관됨을 시사한다.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 '한 제물로'의 헬라어 `미아 프로스포라'(*)는 10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프로스포라스)와 12절의'한 제사를 드리시고'(*, 미안 프로세넹카스 뒤시안)와의 연관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강조점은 `미아프로스포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에 있다(Lane).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의 영원한 결과를 시사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된 자들'로 만드셨으며 완전케 하셨다(Peterson).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단지 외적인 면만이 깨끗게 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양심까지 깨끗하여졌으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Bruce).

성 경: [히10:15]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 '증거하시되'의 헬라어 `마르튀레이'(*)는 현재 시상으로 성령께서 다음에 언급되는 렘 31:33,34의 예언 신탁을현재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을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서 실현시키셨으며, 새 언약의 약속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성 경: [히10:16,17]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하셨으니 - 렘 31:31-34이 본문 외에 이미 8:8-12에서 인용되었으나 8장의 인용은 옛 언약의 희생제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반면에 본문의 인용은 그리스도인에게 미친새 언약의 완전성을 강조한다(Bruce, Lane). 그래서 저자는 본문에서 렘 31:31-34의내용 중 31:33,34만 선별하여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선별된 본문의 인용을 통해서새 언약의 두 가지 약속에 대해 언급한다.

(1)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 이것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이상 외적인 율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을 이마나 팔에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출 13:16;신 6: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단과의지를 나타내며 내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Behm, Lane).

⭕ (2)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 옛 언약 하에 있던 희생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지만(3절)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더이상 기억지 아니하시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리스도인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더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제사임을 시사한다(Bruce, Lane).

성 경: [히10:18]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그리스도 희생의 영원성]

⭕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새로운 상황과 연결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다시 기억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더이상 속죄제사가 필요하지 않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희생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다(Peterson). 그 결과 새언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19-22절).

성 경: [히10:19]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그러므로 형제들아 - '그러므로'의 헬라어 `운'(*)은 본절이 속해 있는19-25절 단락이 9:1-10:18까지 전개된 논의의 결과적인 권면임을 시사한다(Michel,Morris) 한편 `형제들아'는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간절한 권면을 하기에 앞서 애정어린 호칭을 사용하여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지상의 성소에 속한 자들 중에서 오직 한사람 즉 대제사장만이, 오직 제한된 즉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담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권리로(Lane) 양심을 깨끗게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전제로 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속죄 사역의 확실성을 시사한다(22절;9:9, 14, Bruce). 한편 '예수의 피를 힘입어'는 새 언약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소유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예수의 피'를 강조하여 진술하고 있다(29절;9:12,14; 13:12,20). 이는 희생 제사적 측면에서(9:1-10;18)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ne).

성 경: [히10:20]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길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Lane). (1) 새로운 길이다. 이 `새로운 길'은 두 가지 차원 즉 시간상으로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 그리스도의 희생 결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현재 주어진 것임을 나타내며, 질적으로 옛 언약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새 언약에서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 (2) 산 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길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시사한다. 또한 이 길은 '휘장' 가운데 열어놓은 길이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는 것으로서(Bruce, Hewitt)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장애물로 인식되었다(Hofius). 이렇게 장애물로 인식되었던 휘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졌으며(마 27:51;막 15:38;눅 23:45) 그 결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열려진 길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 본문의 '휘장'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NEB, Westcott). (2) 혹자는 '육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Hofius, Johnsson, Hewitt, Moffatt). 이 두가지 견해 중(10절)과 '예수의 피'(19절)가 본문의 '저의 육체'와 연결되며 동시에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졌을 때 휘장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성 경: [히10:21]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 본절은 4:14절과 병행을 이룬다.

┌───────┬─────┴────────────────┐

│ │ * │

│ 19-21절 │ 에콘테스 운 히에레아 메간 │

│ │ `그러므로 큰 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

├───────┼──────────────────────│ │ * │

│ 4:14 │ 에콘테스 운 아르키에레아 메간 │

│ │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

└───────┴───────┴───────────────

'큰 제사장'은 히브리어 '해헨 하가돌'(*, '대제사장')을 직역한 것으로(레 21:10;민 35:25, 28;슥 6:11)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으로서(12-14절)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다스리시며 중재사역을 행하신다(Bruce, Michel, Hewitt).

성 경: [히10:22]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 '마음에 뿌림을 받아'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피를 뿌림으로 깨끗하여진 것을 연상케 한다(출 29:21;레 8:30).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옛 언약하에서 깨끗게 할 수 없었던 양심이 온전히 깨끗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맑은 물'의 헬라어 '휘다티 카다로'(*)는 70인역에서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물을 가리킨다(민 5:17;겔 36:25). 그러나 본절의 '휘다티 카다로'는 육체의 외적인 더러움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 정결을 통해서 깨끗게 된 양심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나타내는 것이다(Bruce). 따라서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성취된 내적 정결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징으로 '세례'를의미한다(Windisch, Bruce, Morris, Spicq, Dahl).

⭕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내적인 정결을 경험하고 세례를 통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것을 권면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참마음.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서 자기 백성에게 '새 마음'을 창조하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킨다(렘 31:33).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성취되었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더럽혀진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정결케 되었다(18절;9:13,14).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양심 곧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Bruce, Morris, Hewitt). (2) 온전한 믿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성과 확실성을 가리킨다(Morris, Lane).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이시며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한다.

성 경: [히10:23]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믿는 도리의 소망'의 헬라어 '텐 호몰로기안테스 엘피도스'(*)는 문자적으로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이라는 의미이다. 이 '소망'은 예수의제사장적인 행위와 연관된 것으로 그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이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행위에 의해 약속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을 의심치 말고 확신 가운데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소망 즉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 경: [히10:24]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며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서로 돌아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돌아보는 방법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두 가지 덕목을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 (1)사랑 - 이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나타나야만하는 행동 표현이다(Morris).

⭕ (2)선행 - 이것은 돌보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6:10).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능동적인 지원과 관심은 당시 시련으로 인해 좌절하기 쉬운 공동체 삶 속에서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것이었다(Bruce, Peterson).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격려와 돌봄은 공동체의 일원들로 하여금 용기를 잃지 않고 소망을 굳게 지켜 확신 가운데 거하게하며 친교와 확신을 복돋우는 자극제가 된다.

성 경: [히10:25]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모이기를'의 헬라어 `에피쉬나고겐'(*)은 '에피'(*, '그 외에도')와 '쉬나고게'(*, '회당')의 합성어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예배외에도 다른 특별한 그리스도인 모임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이 경우 특별한 그리스도인 모임을 폐하는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유대인 관습에 빠져 그리스도인로서의 신앙과 생활을 잃어버리게 되기에 저자가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Manson).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에피'라는 접두어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으며 본문 외에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경우로 해석되는 예가 없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따른다. 모임을 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모임의 협동적인 생활을 파기하게 되며 상호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에 저자는 모이기를 폐하지 않도록 수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그 날'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본서의 기록 연대와 연관되어 예루살렘 멸망의 때를 가리킨다. (2)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실제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두 날을 구별하여 생각하였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Hewitt, Bruce). 저자는 그 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욱 열심을 내어 다가오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서로 격려와 위로를 통해 담대해지기를 권면하고 있다.

성 경: [히10:26]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6:4-8과 병행된 구절들로 배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시사한다.

⭕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의 개시를 의미하며 '죄를 범한'의 헬라어 '하마르타논톤'(*)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범죄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진 희생제사의 효력을 거부하고 계속적으로 범죄하는 자는 더 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는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 배교하였으며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히10:27]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 의도적으로 배교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자에게는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고 오히려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맹렬한 불'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로스 젤로스'(*)는 문자적으로 '불의 질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백성의 배교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손상되어 생겨난 격정적인 질투를 시사한다(Montefiore). 이것은 사 26:11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멸망시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대적자로서 그들에게는 오직 맹렬한 불의 심판만이 존재한다.

성 경: [히10:28,29]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모세의 율법을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거부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은 신 17:2-7을 인용한 것이다. 신명기 본문은 우상 숭배를한 자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두 세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그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 하물며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 본문은 새언약을 성취시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한 자에 대한 징벌이 옛 언약하에서 우상 숭배로 인해 죽임을 당한 징벌보다 훨씬 더 엄함을 나타낸다. 그 형벌이 훨씬 더엄한 것은 옛 언약보다 새 언약이 훨씬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새 언약을 성취시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고 배교하는 것은 옛 언약하에서 우상 숭배하는 것보다 더 강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Lane, Morris).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배교 때문에 고소를 당하는 이유는 세가지이다. (1)하나님 아들을 밟고 - 예수의 칭호로 사용된 '하나님 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내에서 이미 잘 알려진 공식적인 신앙고백이었다(4:14, lane). 한편 '밟고'의 헬라어 '카타파테사스'(*)는 모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배교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Morris, Bruce). (2)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 '언약의 피'는 옛 언약을 세울 때 사용되었던 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출 24:8) 새 언약을 세울 때 희생되었던 그리스도의 피 곧 십자가상의 죽음을 의미한다(9:20;마 26:28;막 14:24;눅22:10;고전 11:25). 새언약을 위해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하에서 제거할 수 없었던 양심의 더러움까지 정결케하며 거룩하게 하는 매우 귀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10, 14절;13:12) 배교자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피를 가볍게 여기고 사소한 것으로 이해하며 보통 사람의 죽음과 동일하게 여긴다(Morris,Lane). 배교자의 이러한 이해는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축복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Bruce). (3)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 성령께서 '은혜의 성령'으로 나타나는 곳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뿐이다. `은혜의 성령'은 슥 12:10(LXX)을 암시한다(Windisch,Michel). 만약 이것이 의도된 암시라면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은혜를 공동체에 부어주신 오순절의 성령을 의미한다(Michel).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부어주신 성령은(2:4;6:4)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은혜를 나타내는 표시이다(Lane,Schweizer). 따라서 본절의 '은혜의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영'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영'을 가리킨다(Morris). 의도적으로 배교하는 것은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성령을 모욕하는 죄이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막 3:29, Bruce, Hewitt).

성 경: [히10:30]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본절은 신 32장에서 인용된 두 가지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인용문을 통해서 배교자에 대한 심판이 공동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Lane) 그 심판의 엄중함을 나타낸다(Hewitt, Bruce).

⭕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 본문은 신 32:35의 인용이다. 신명기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고 변호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잘 섬겼을 때 원수를 갚아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며 변호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직접 개입하셔서 공정한 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심판하신다(Bruce,Morris).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배교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본문은 배교자에게 반드시 심판이 임할 것임을 시사한다(Lane).

성 경: [히10:31]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 본문은 다윗 왕이 인구 조사를 한 후 심판을 받을 때 한 말의 인용이다(삼하 24:14;대상 21:13). 다윗 왕은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본절의 요점은 다윗 왕의 선택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할 경우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배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피할 수 없는 무서운 것임을 시사한다(Lane,Morris). 그래서 저자는 `포베론'(*, '무서울진저')을 27절의 '포베라'(*, '무서운')와 연결시켜 배교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엄함을 나타내고 있다.

성 경: [히10:32]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개역성경에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이전 문단에서(26-31절) 배교자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한 반면 32-36절에서는 경고와는 달리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 수신자들은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빛을 마음에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를 받았다. '싸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들레신'(*)은 본래 운동 경기를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박해를 의미한다(Lane). 이 박해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박해는 아니다(12:4, Bruce,Hewitt). 수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나 그것에서 좌절하지 않고 잘 인내하였으며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과거에 겪었던 박해와 인내를 상기시킴으로 수신자들이 배교에 이르지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도록 권면하고 있다.

성 경: [히10:33,34]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본문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박해에 대해 인내했던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한 표현이다. 본문은 교차 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Riggenbach, Vanhoye).

┌──────────────────────────────────────┐

│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 이런 형편에 있는 자 │

│ 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들로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

├──────────────────────────────────────┤

│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

│ 것도 기쁘게 당함 │

└──────────────────────────────────────┘

⭕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 '비방'은 거짓으로 고소하여 비난하는 것을 나타내며 '환난'은 폭력을 동반한 박해를 의미한다(Lane). 또한 '구경거리'의 헬라어 '데아트리조메노이'(*)는 `데아트론'(*, '극장')과 연관된 것으로 공적이고 공개적인 박해를 받는 것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과거에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폭력을 당하기도 하며 공개적으로 조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빼앗기는 것'의 헬라어 '텐하르파겐'(*)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들이 자신이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재산을 자진 헌납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uchanan) 본절에서는 수신자들이 당한 박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타당치 않다. '텐하르파겐'은 도리어 폭도들에 의해 재산조차 빼앗기는 고난을 당하는 것을 시사한다(Morris).

⭕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 본문은 고난당한 그리스도인들과 동참함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재산이 하나도 없이 감옥에 갇힌 자는 밖에 있는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굶어 죽기 쉬웠기 때문에 당연히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감옥에 갇힌 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행위였다(Bru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봄으로 감옥에 갇힌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이런 행위가 당시에는 위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장래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행위이다(마 25:36).

⭕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 수신자들이 앞서 언급한 위험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큰 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이다(눅 6:22,23, Bruce). 저자는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며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휘파르크신'(*, `산업')을 수신자들이 지상에서 고난당하면서 상실했던 '휘파르콘톤'(*, '산업')과 연결시켜 비교함으로 고난과 위험을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산업이 훨씬 더 탁월함을 드러내고 있다(Lane).

성 경: [히10:35]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 '담대함'은 본서에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다. (1)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수 있게 되었다(4:16;10:19). (2) 새 시대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있는 신앙을 나타낸다(3:6). 본절은 후자의 경우로 사용되었다. '담대함'은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비방과 재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받을 상 때문이다(34절;11:26;눅 6:23).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며(11:6) 그 상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23,25절;9:28, Lane).

성 경: [히10:36]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필요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이안'(*)은 단순히 바라는 어떤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없어서는 안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담대함 뿐만 아니라 인내도 그리스도인의 표식임을 시사한다(Lane).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고난과 위험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잘 인내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약속'을 받게 된다.그 '약속'은 새 언약하에 있는 하나님 백성이 바라보아야 할 최종적인 목표로서 앞절의 `큰상'과 동일하며 `영생'을 의미한다(9:15, Thompson).

성 경: [히10:37,38]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잠시 잠간 후면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이것은 본절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반드시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잠시 잠간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사실이다. `잠시 잠깐'은 사 26:20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환난과 위험의 기간이 짧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셔서 심판과 보상을 하실 것을 암시한다.

⭕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 본문은 합 2:3, 4(LXX)의 인용이다. '오실 이'는 70인역에서 '에르코메노스'(*)인 반면에 본절에서는'호 에르코메노스'(*)로 본절에는 관사 '호'(*)가 첨가되어 있다. 70인역에서 '오실 이'는 '기다리던 어떤 구원자'에 불과하나 저자는 본문에서 관사를 첨가함으로 재림 때에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Michel, Spicq,Lewis).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인내해야만 한다.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나의 의인'은 '살리라'와 '물러가면'의 주어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롬 1:17;갈 3:11, Morris, Lane, Hewitt,Bruce).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속히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직면한 고난과 박해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며 인내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삯과 약속을 허락하실 것이지만 반대로 뒤로 물러나 인내하지 못하고 배교한다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성 경: [히10:39]

주제1: [새 언약의 영원성과 믿음의 도리]

주제2: [믿음의 도리]

⭕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앞서 인용한 합 2:3, 4의 결론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신자들이 믿음을 가진 자임을 확인시킴으로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만약 수신자들이 직면한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여 배교를 한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멸망의 심판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박해와 위험을 잘 인내하고 담대하게 맞서서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수신자들의 '믿음'을 언급함으로 다음 장에서 설명할 믿음을 예시하고 있다.

성 경: [히11:1]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정의]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 '실상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는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와 '서게 하다', 또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래에 확립하다' 혹은 '...아래에 서다'를 뜻하는 것으로 '기초'(Morris), '실체'(KJV), '확증'(NIV), '객관적 실체'(Lane)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객관적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이다(Lane). 바꾸어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객관적 실체를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의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견고히 붙잡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확신하게 한다(Grasser). 한편 저자는 본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믿음'과 '바람'(hope)을 거의 동일시 하였다. 이는 믿음의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이다(Thompson).

⭕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보지 못하는 것들'의 헬라어 '프라그마톤...우블레포메논'(* ... )에서 '것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톤'은 '되어진 것', '사실', '행위', '사건', '업무'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인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한다. 저자는 '프라그마톤'을 사용하여 믿음을 인간사의 영역에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Lane). 이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플라톤의 철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아직 보여지지 않은 사건들 즉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한다(Williamson).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고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Lane). 한편 '증거'의 헬라어 '엘렝코스'(*)는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으로서(Morris)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성 경: [히11:2]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정의]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선진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프레스뷔테로이'(*)는 '조상들'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1:1)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위인들을 지칭한다(Morris). 한편 '이로써'의 헬라어 '엔 타우테'(*)는 여성 지시 대명사로서 1절에서 언급한 '믿음'(*, 파스티스)과 연결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성 경: [히11:3]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정의]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 '믿음으로'(*, 피스테이)는 본절에서 31절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4-31절까지는 '피스테이'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저자와 수신자들을 포함한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해 사용되었다.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헬라어 원문의 첫 문장인 '믿음으로...우리가 아나니'(*, 피스테이 노우멘)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시사한다. 특별히 본절은 창 1:1에 나타나는 세상 창조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보이는 것'의 헬라어 '토 블레포메논'(*)은 헬라적 유대주의(hellenistic judaism)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가시적인 우주를 가리킨다(외경 지혜서 13:7). 한편 '나타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파이노메논'(*)은 헬라어 오랜 철학적 전통에서 기인한 표현이다(Williamson, Philo). 저자는 유대주의 전통과 헬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차용하여 그 내용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당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플라톤과 필로의 우주론, 즉 태초 혼돈 상태에 있었던 가시적인 물질들을 창조자가 이데아나 원형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우주론을 배격하고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헬라적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려는 시각을 막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물질들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지혜서 11:17, Lane). '보이는 것' 즉 물질 세계는 '나타난 것' 즉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Ehrhardt). 즉 저자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Widders, Bruce, Williamson).

성 경: [히11:4]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저자는 2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절에서 시작하여 31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본절은 창 4:3-5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70인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이유가 제사 절차상의 결함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고 아벨은 제사 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Aptowitzer, LXX 창 4:7). 또한 필로에 의하면 아벨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아벨이 드린 제사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였다(Morris). 따라서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자신이 드린 제사를 통해 나타난 믿음 때문이었다.

⭕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이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창 4:4). 즉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본문은 창 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는 '핏소리'로 되어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는 '디헤스'(*, '그것을 통하여')로 되어있다. '헤스'는 '믿음'을 뜻할 수도 있고 '제사'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대로 아벨이 드린 제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믿음이든 제사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벨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Lenski).

성 경: [히11:5]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 본절은 창 5:21-1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에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니'로 되어 있다(창 5:24, Bruce, Morris, Lane). '옮기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테데켄'(*)은 '변화하다'라는 뜻을 갖는 동사 '메타티데미'(*)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바뀌다', '변화되다'를 의미한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믿음으로'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시락의 교회서 44:16, Lane, Bruce). 저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6: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믿음은 회개와 동일시 될 수 있으므로 유대 전승에서 회개의 표본으로 나타났던 에녹은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있다(Luhrmann).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본 요인이었다(Lane).

⭕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본문은 에녹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 5:22-24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뿐만 아니라 에녹에 관한 유대 전승마다 나타나는 어구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 나타내고 있다(시락의 교회서 44:16;지혜서 4:10,14).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연결지어 다음 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성 경: [히11:6]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1:1, 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성 경: [히11:7]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는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5;12: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즉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1절). 한편 '경외함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라베데이스'(*)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이란 의미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Robertson). '율라베데이스'는 '거룩한'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고 '두려움'에 강조점을 둘 수도 있으나 전자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노아가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이다(Morris).

⭕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이로 말미암아'(*, 디 헤스)에서 '이'의 헬라어 '헤스'(*)는 지시 대명사로 '믿음'이나 '방주' 또는 '구원'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헤스'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by his faith, NIV, Robertson).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으나(Bruce) 노아의 믿음은 옳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상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정죄받았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었다(Morris). 한편 '믿음을 좇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피스틴'(*)은 노아의 의가 실현되는 방법이나 조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노아가 믿음이라는 규범을 따라 하나님에게서 의를 수여받았음을 시사한다.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창 6:22, Bruce). 따라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는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수여하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음을 시시한다(Lane).

성 경: [히11:8]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 저자는 본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 성경에 없어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루메노스'(*)는 '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즉시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음을 시사한다(Westcott). 순종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창 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으며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 12:5, 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았다(창 12:7). 아브라함은 찾아가야 할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성 경: [히11:9]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우거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로케센'(*)은 나그네처럼 기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 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였으며(행 7:5),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밭을 사라의 매장지로 사기전까지는(창 23장)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와 동일한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장막에 거하였으니'는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속해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창 12:2, 3)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성 경: [히11:10]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타낸다. '터'는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터가 있는 성'은 9절의 '장막'(*, 스케나이스)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장막은 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반면에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이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12:28;13:14)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Bruce, Lenski) 하나님에 의해 견고히 세워진 '시온 성'을 암시한다(시 48:8;87:1-3, 5;121:3;사 14:32;33:20, Lane). 한편 '경영하시고'의 헬라어 '테크니테스'(*)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뜻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성'과 결부시킬 때 본절에서는 '설계자'나 '건축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으실'의 헬라어 '데미우르고스'(*)는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데미오스'(*)와 '일'이란 뜻의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자'의 뜻을 지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음을 시시한다.

성 경: [히11:11]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 '잉태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카타볼렌 스페르마토스'(*)는 남성의 정액을 생산하는 기능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헬라 관용구이기 때문에(Lucian) 이를 사라에게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라 자신'이란 말을 주격으로 보지 아니하고 대격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사라 자신과 함께...잉태하는 힘을 얻었다'라고 해석하면 된다(Bruce).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라도(창 18:9ff.)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성 경: [히11:12]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자손을 낳을 수 없었던 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는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 수많은 무리를 가리킨다(창 15:5;22:17;출 32:13;신 1:10;10:22).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자손으로 둔다는 기적적인 약속의 성취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한 바울의 진술처럼(롬 4:19) 아브라함의 변치않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었다(롬 4:22).

성 경: [히11:13]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이 사람들'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Morris).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Bruce).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외국인과 나그네'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와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 47:9)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성 경: [히11:14]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앞절의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한 옛 조상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本鄕)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Bruce). '본향'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트리다'(*)는 '선조의 땅',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목적지가 하늘나라였음을 시사한다.

성 경: [히11:15]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본절의 '본향'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을 가리킨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도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하였다. 야곱 역시 메소포타미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창 30:25;31:3).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다(창 23:19;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이다(Bruce). 그러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성 경: [히11:16]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레곤타이'(*)는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성 경: [히11:17]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그는 순종하였다. 혹자는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식마저 포기해야함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Lane).

⭕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한 믿음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의 성취 여부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커다른 모순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Morris). 그러나 이런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였다(Bruce).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성 경: [히11:18]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으며(창 12:2), 이러한 아브라함의 민족은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한다고 약속하셨다(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Morris).

성 경: [히11:19]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 본절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생각한지라'의 헬라어 '로기사메노스'(*)는 부정 과거로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단호한 내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Westcott, Lane).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11, 12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으며(Moxnes, Teodorico)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믿지 못하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Bruce, Morris).

⭕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비유컨대'의 헬라어 '엔 파라볼레'(*)에서 '파라볼레'는 '유형',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Bruce) '엔 파라볼레'는 본절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Lane). 한편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창 22:10)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Bruce). 그러나 그 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성 경: [히11:20]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창 26:2-5)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창 27:27-29, 39, 40). 이 때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자는 맏형인 에서였으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챘으며 에서는 그 나머지 축복을 받아야 했다(창 27:39, 40). 저자는 이러한 부당성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삭의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예(例)에 해당한다(Bruce). 한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 비합법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25:23).

성 경: [히11:21]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 본문은 20절과 마찬가지로 족장 야곱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아들들에게 축복하였음을 나타낸다(Morris).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였다(창 48:13-20).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장자인 므낫세가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왼손으로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장자의 축복을 차자에게 해주었다(창 48:14, 19, 20). 이러한 사실은 장자에게 축복과 혜택을 부여하는 인간의 관습에 구애됨 없이 하나님은 그의 주관대로 뜻을 이루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본문은 창 47:31(LXX)의 인용이다. 맛소라 본문(MT)에는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지팡이'와 '침상'이라는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mth)가 모음을 붙이기에 따라 '말테'(matteh, '지팡이')로 읽을 수도 있고 '밑타'(mittah, '침상')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본문은 70인역이므로 전자를 택하고 있다.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9, 13절)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특징짓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순례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Michel).

성 경: [히11:22]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본문은 창 50:24, 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출 13:19;수 24:32). 이러한 사실은 요셉의 믿음을 잘 예증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시사한다.

성 경: [히11:23]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수가 급증함에 따라 위협을 느끼며 그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내아이가 출산되었을 때 그들을 전부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출 1:9-10, 15, 22).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출생하였다(출 2:1, 2). 저자는 70인역을 인용하여 본절에서 믿음으로 그 부모가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겼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출 2:2에는 모세를 숨긴 일을 한 사람으로서 오직 어머니만 언급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숨기는 일이 남편과의 합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Morris). 70인역에서 부모가 모세를 석달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테이온'(*)은 '도시'라는 뜻의 헬라어 '아스튀'(*)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도시에 속한', '잘 양육된' 혹은 '우아한'이란 뜻이다. 아마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을 예견한 듯한다(Morris).

성 경: [히11:24]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 '장성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가스 게노메노스'(*)는 출 2:11(LXX)의 '장성한 후에'를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히브리인 어머니를 통해서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출 2:9) 모세가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identity)을 알았음과 동시에 그가 내린 결단은 장성한 사람이 내린 신중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Morris).

⭕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본문은 저자가 출 2:11, 12의 내용을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Lane). 모세는 자기 형제인 히브리 노예를 돕는다고 무력으로 개입하여 애굽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자처한 행위였으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거절하였다.

성 경: [히11:25]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향유하며 세상적인 온갖 쾌락을 다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민족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교적 개념이 내포된 표현이며(Morris), '죄악의 낙'은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그대로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큰 죄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Bruce). 한편 '더 좋아하고'의 헬라어 '말론 헬로메노스'(*)는 '...보다 ...을 택하다'라는 의미로 모세가 그 일을 판단하여 선택하였음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더 가치있게 여겼다.

성 경: [히11:26]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 63:9에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Bruce), 고전 10:4에서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25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13:8)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셨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凌辱)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시안'(*)은 10:35절에서의 '상'과 동일한 용어로서 '보상'을 뜻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상은 바로의 궁전에 있는 온갖 보화들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으로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이었다. 저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사실을 알고(13:13)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Bruce)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도록 권면한다.

성 경: [히11:27]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 모세는 애굽을 두 번 떠났었다. 첫번째는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한 일이며(출 2:11-15),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때였다. 본절의 '애굽을 떠나'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 중 전자에 해당한다(Lane, Morris, Bruce).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모세가 유월절을 정하여 피 뿌리는 의식을 하게 한 사건인 출애굽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건은 출애굽 전에 되어진 일로서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일을 가리킨다. 본절의 해석의 문제점으로 모세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할 때에는 두려워 하였다는 것이다(출 2:14, 15). 그러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동기는 애굽인을 죽여서 생겨난 바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출 2:14). 왜냐하면 출애굽기나 다른 성경에서 모세의 도망과 두려움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Morris). 즉 모세가 비록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Bruce, Morris).

⭕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 '보이지 아니하는 자'(*, 아오라톤)는 유대교나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롬 1:20;골 1:15;딤전 1:17, Lane). 필로(Philo)는 바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이와 대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Life of Moses 1.88). 모세는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출 33:11;민 12:7, 8)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성 경: [히11:28]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 '정하였으니'의 헬라어 '페포이에켄'(*)은 '만들다'의 뜻인 '포이에오'(*)의 완료형으로 유월절의 항구성을 시사한다(Robertson). 모세는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제정하였다(출 12:14). 모세가 이같이 정한 것은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출 12:12, 13)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의 죽음을 가져다 백성들로 하여금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게 하였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애굽인의 장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다.

성 경: [히11:29]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저자는 본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다(출 13:17-14:4).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곳까지 추격해 왔을 때(출 14:10-12)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바다를 건넜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믿음을 함께 나누었음을 시사한다(Lane).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과 변치않는 그의 사랑의 언약을 나타내는 경이로운 일로서 찬양되고 있다(출 15:1-21;시 106:9-12;사 43:16, 17;44:27). 홍해를 믿음으로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불신앙과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홍해 바다에 난 길로 들어 온 애굽군대는 바닷물이 본래대로 돌아와 물 속에 침몰하여 전멸하였다(출 14:23-28).

성 경: [히11:30]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 여리고 성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수 2:1).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를 따른 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 주위를 6일 동안은 하루에 한번씩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칠 때 그 성이 무너져내렸다(수 6:1-21). 이러한 사건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Spicq). 저자는 본절에서 특별히 실제 믿음을 갖고 행동한 여호수아나, 그를 따른 군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따라 행동으로 실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e, Spicq).

성 경: [히11:31]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기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조나'(*)를 번역한 것으로 이방 신전에서 일하는 창녀가 아니라 일반 창녀를 가리킬때 사용된 용어였다(수 2:1, Bruce). 라합은 이러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받는 인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라, 아비가일, 에스더와 더불어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여인 중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바빌론 탈무드 Megillah 15a). 신약성경에서도 라합의 믿음은 본절 이외에 약 2:25에서 찬양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한다. 이와 같이 그녀가 믿음의 인물로 추앙받는 것은 이스라엘의 첩자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이 동족에게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못하게 됨을 알고서도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실천한 행위였다(수 2:1-21, Morris). 한편 '순종치 아니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아페이데사신'(*)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긴 라합과 대조를 이루는 여리고 백성들을 가리킨다(Lane).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당하였다. 저자는 여리고 사람들의 멸망을 언급하므로 수신자들에게 순종치 아니함으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시키고 있다(3:18).

성 경: [히11:32]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티 에티 레고'(*)는 수사적이며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시간이나 지면 관계상 제한을 받게 될 때 흔히 사용되던 관용구이다(Lane, Robertson). 저자는 이와 같은 관용구를 사용하므로 믿음에 대한 예를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취급할 수 없음을 나타내면서 여섯 명의 믿음의 사람을 예로 제시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이들 네 사람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되었고(행 3:24;13:20) 다윗은 자주 언급되었다(마 1:1, 6;막 2:25;행 1:16 등). 여기서 이들 여섯 사람의 이름은 연대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바락(삿 4, 5장), 기드온(삿 6-8장), 입다(삿 11, 12장), 삼손(삿 13-16장), 사무엘(삼상 1-15장), 다윗(삼상 16-삼하 24장)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 기드온 - 이는 이스라엘의 다섯번째 사사로서 미디안의 군대를 무찌른 사람이었다(삿 7장).

⭕ 바락 - 이는 네번째 사사로 가나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이었다(삿 4장).

⭕ 삼손 - 이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서 그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을 괴롭힌 사사였다(삿 13-16장).

⭕ 입다 - 이는 길르앗의 서자(庶子)로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암몬 족속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큰 전과를 거두었던 사사였다(삿 11-12장).

⭕ 다윗 - 이는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 된 인물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다(삼상 16:1-13).

⭕ 사무엘 - 이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일찍이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으며 성장 후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서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신앙으로 인도한 선지자였다(삼상 1-15장). 저자는 이들 여섯 명의 믿음의 인물들을 열거하고서 이들에 관한 일을 말하려면 자신에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필레잎세이 메 가르 디에구메논 호 크로노스 페리'(*)로 이는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수사적 관용구로서 고대 저술가들이나 필로(Philo)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표현법이다(Lane). 저자는 이런 수사법을 사용하여 이들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히11:33]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 저자는 본절부터 38절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산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승리의 삶을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본문은 여호수아를 위시하여 32절에서 언급된 사사들과 다윗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Bruce).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 사업은 사사 시대를 거쳐 다윗에 이르러서 최고의 절정에 달하여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이집트 국경에서부터 유브라데스강까지 확장되었다(왕상 4:20, 21). 특히 '이기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고니산토'(*)는 '정복하다'(to conquer, NIV)의 뜻이다.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다윗이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 했음을 기록할 때 사용하여서(Antiq vii, 53) '나라들을 이기기도'가 다윗이 블레셋과 모압과 수리아 그리고 에돔을 정복했던 것을 가리킨다고 진술한다. 한편 '의를 행하기도 하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사들이나 열왕들의 의롭고 바른 통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사무엘이 완전한 의로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삼상 12:3-5, 23) 다윗 또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공과 의'로 모든 백성에게 행하였음을 가리킨다(삼하 8:15;대상 18:14). 이상 언급된 사사들이나 열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다(Bruce).

⭕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본문은 저자가 특별히 다니엘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인 듯하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신체적으로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단 6:17-22). 다니엘 이외에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으며(삼상 17:34-37), 브나야도 사자를 죽였었다(대상 11:22).

성 경: [히11:34]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 이것은 다니엘과 함께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온 세 명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가리키는 것이다(단 1:7). 그들은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한 죄목으로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곳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단 3:23-37). 그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단 3:19-23)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시사한다(Bruce).

⭕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 칼날을 피한 자들로는 구약 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였으며(왕상 19:2), '엘리사'는 이세벨의 아들인 여호람에게서 구원받았고(왕하 6:31 ff.),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피하여 숨었다(렘 36:19,26). 또한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무사히 피하여 도망하였다(삼상 18:11).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심을 강조한다(시 18:2).

⭕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실례는 구약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제일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으로서(삿 6:31 ff.)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엄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손(삿 16:28-31)이나 하스기야 왕(왕하 20장;사 38장)은 연약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다. 에스더 역시 연약한 여자였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Clement 1서 55:3).

⭕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 이는 여호수아나 사사들 그리고 다윗의 전쟁사 등을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어떠한 권세나 군대의 세력 혹은 모든 위험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성 경: [히11:35]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 이것은 구약성경의 사르밧 과부(왕상 17:17-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의 경우를 가리킨다. 전자는 엘리야가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눅 7:11-14),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요 11장), 도르가(행 9:36, 41)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곧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요 3:15, 16,36;5:24;6:40, 47).

⭕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 본절 상반절에서 여인들은 자신의 자녀나 관계된 자들을 부활로 되돌려 받았었다. 그 부활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아들들은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문의 '더 좋은 부활'에서 '더 좋은'의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더 좋은 부활'은 본절 상반절의 '부활' 즉 일시적인 부활과는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되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킨다(Spicq). 한편 '악형을 받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튐파니스데산'(*)은 고문대나, 곤봉을 뜻하는 명사 '튐파논'(*)에서 유래한 말로서 '죽도록 때리다', '고문하다'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고문대 위에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서 죽이는 형벌을 말하는 것으로 마카비서에 나오는 신앙인이었던 엘리아살이 이와 같은 형벌을 받았다(마카비 2서 6:19, 28;7:31, Robertson, Bruce). 또한 마카비 2서 7장 1절이하와 4서 8장 1절 이하에서는 그 어머니와 일곱 명의 아들이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모든 고문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마카비 2서 7:9). 즉 이들은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 보다는 새로운 삶과 부활이 있다는 믿음의 확신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성 경: [히11:36]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 본절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마카비 전쟁 당시 시리아의 침략군들이 신앙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마카비 2서 7:1, Morris). (2) 혹자는 예레미야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ruce).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렘 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으며(렘 29:7ff.), 구덩이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 38:6). 본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저자는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하였음을 강조한다.

성 경: [히11:37]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돌로 치는 것과 - 돌로 치는 행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을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쳤다(Tertullian, Scorpion Antidote 8;Jerome, Against Jovinian 2.37). 또한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탄식하셨다(마 23:37). 예수께서 탄식하신 내용은 여호와의 전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대하 24:21;눅 11:51).

⭕ 톱으로 켜는 것과 -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Lane).

⭕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칼날을 피하기도'하였지만(34절) 또 다른 이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엘리야는 이세벧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왕상 19:10). 또한 여호야김이 집권할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 26:23), 신약 시대 사도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 12:2).

⭕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라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한 말로 볼 수 있다(Lane).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한' 사람들을 본 받으라고 촉구하였다(Clement 1서 17:1). 클레멘트는 거기서 그들이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에스겔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엘리야는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던 (슥 13:4) 털옷을 입고 다녔으며(왕하 1:8)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었다(막 1:6). 이러한 복장은 특수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언자들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는 말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의 삶을 요약하고 있는 말로 볼 수 있다(왕상 17:2-16;19:1-19;왕하 1:3-16;8:1, 2, Lane). 또한 이것은 특별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마카비 2서 5:27).

성 경: [히11:38]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 본문은 '세상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는 의미이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NIV).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시 될 수 없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본절은 시 106:4(LXX)을 인용한 것으로 박해가 있을 때 광야나 산 혹은 굴 속으로 피신하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왕상 18:4, 13;19:1-4, 9).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이 땅에서 안락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Bruce).

성 경: [히11:39]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32-33절에서 언급된 인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장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Michel, Moffatt).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자들이었다(2, 5절).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지도 못하였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기도 하며'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팡겔리안'(*, '그 약속')으로 단수로 표현된 반면에 33절의 '약속'은 '에팡겔리온'(*, '약속들')으로 복수이다. 따라서 33절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었다. 그러나 본절의 '그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9:15)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구현을 가리킨다. 저자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사람들은 다...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이다(13절, Peterson).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교훈하는 실제적인 본보기가 되었다(Lane).

성 경: [히11:40]

주제1: [믿음의 본질]

주제2: [믿음의 선진들]

⭕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좋은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이트톤 티'(*)는 부정 대명사로서 더 좋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온전케 되는 구원을 시사한다(Morris).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Bruce).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히12:1]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믿음의 경주]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증인'의 헬라어 '마르튀론'(*)은 일차적으로 '관람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절이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 경기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의 '마르튀론'은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Michel, Peterson). 즉 '마르튀론'은 앞장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11장)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증인들을 먼저 언급함으로 수신자들에게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다하여 경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 모든...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경주자는 두 가지를 벗어버려야 한다.

⭕ (1) 무거운 것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옹콘'(*)은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체중을 나타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Morris, Bruce).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장애물은 부를 사랑하는 것, 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 있다(Spicq, Mora).

⭕ (2) 얽매어기 쉬운 죄 - '죄'의 헬라어 '텐 하마티안'(*)에 대해 혹자는 배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asemann). 그러나 배교는 본절의 내용인 그리스도인들이 경주하는 것과 무관하므로 타당하지 않다. 본절의 '텐 하마르티안'은 단수로 어떤 특정한 죄를 지칭하기보다는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Montefiore, Michel, Peterson, Bruce, Hewitt) 여기서는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성을 가리킨다(Spicq, Mora).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며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만하며 동시에 인내로서 경주해야 한다. 저자는 인내하는 가운데 경주를 한 앞선 증인이 많음을 진술함으로 수신자들을 비롯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경주해야 함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Bruce).

성 경: [히12:2]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믿음의 경주]

⭕ 믿음의...예수를 바라보자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주의 목표인 예수에 대한 진술이다. '믿음의'는 '주'만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온전케 하시는 이' 둘다를 수식한다(Bruce, Lane). '믿음'은 11장에 나타난 허다한 증인들이 삶속에서 지녔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나타내며 예수의 지상생활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가있다(Moffatt, Westcott, Bruce, Hughes). 한편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두가지 칭호를 사용한다.

⭕ (1) 주(*, 아르케곤) - '아르케곤'은 '아르코'(*, '시작하다', '지배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능동태일 경우 '지배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며 중간태일 경우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취해 선구자되심을 나타낸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Lane, Morris). 그리스도께서는 수신자뿐 아니라 앞절에서 언급된 앞선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이다(유1:5, Bruce).

⭕ (2) 온전케 하시는 이(*, 텔레이오텐) - '텔레이오텐'은 '텔레이오오'(*, '완수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성자' 혹은 '완전자'라는의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낸다(Moffatt, Westcott, Bruce). 저자는 '아르케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우선적으로 행한 자이며 동시에 믿음을 행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자임을 시사하며 '텔레이오텐'을 통해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Peterson, Westcott).

⭕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대신에'. 이 경우에 본문은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누리셨던 하늘의 지위와 복을 버리시고 죄인들만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음을 시사한다. (2) '위하여'. 이 경우에 본문은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음을 시사한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이다(2:5-9; 8:1,2; 10:12,13). '앉으셨느니라'의 헬라어 '케카디켄'(*)은 완료 사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낸다(Bruce).

성 경: [히12:3]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믿음의 경주]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성 경: [히12:4]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본절은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비교이다.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 것과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죄와 싸우되'는 수신자들의 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는 1절에서 언급한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절의 '죄인들'과 같이 악의 무리를 가리킨다(Lane). 한편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수신자들이 죄에 대항하여 당한 고난이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때 자신들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성 경: [히12:5,6]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 본문은 '아들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 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의문문이다. 이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본문은 잠 3:11,12의 인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심을 시사한다. '징계하심'에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스'(*)는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신 8:5).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됨'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한다(Bruce, Hewitt,Morris). 한편 본문의 '내 아들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에 무'(*)이나 인용문인 70인역 잠 3:11에는 '휘에'(*, '아들아')로 되어 있어 본문에 인칭대명사 '무'(*, '나의')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우'가 없는 '휘에'는 잠언 전체에서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Lane, E.Ahlborn). 저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70인역에 '무'를 삽입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하고 있다(Bertram, Bornkamm).

성 경: [히12:7]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 '너희가 참음은'의 헬라어 '휘포메네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직설법으로 이해하여 개역성경 본문처럼 해석한다(Hewitt). (2) 혹자는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너희는 징계를 참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됨의 증거임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성 경: [히12:8]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도이'(*)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또한 '참아들이 아니니라'의 헬라어 '우크 휘오이'(*)는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히12:9]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할 이유]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께서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영의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Kuss, Lane).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고 헌신을 요구할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살려'의 헬라어 '제소멘'(*)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신30:11-20)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10:38,39, Peterson).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야만 한다.

성 경: [히12:10]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본절은 '호이 멘 가르...호 데'(* ... , '저희는 ...오직 하나님은')라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 '자기의 뜻대로'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자녀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또한 '징계하였거니와'의 헬라어 '에파이듀온'(*)은 미완료 시상으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불완전하여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저희' 곧 육신의 아버지가 행한 징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유익을 끼치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였다(9절).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시사한다. '거룩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테토스'(*)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진다(Bruce, Lan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륵 하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다(Lane, 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 경: [히12:11]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 저자는 '프로스 토 파론'(*, '당시에는')과 '휘스테론'(*, '후에')을 대비 시켜서 하나님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 주지만 궁극적으로 놀라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한다(Lane). '평강과 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로서(Michel) 미래에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이다(Peterson).

성 경: [히12:12]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저자는 본문에서 사 35:3을 인용하여 고난으로 인해 소진(消盡)된 상태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해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 '피곤한 손'은 '불구가 된 손'(JB)으로 무용(無用)하여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소진되고 좌절한 사람을 나탄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우고'의 헬라어 '아노르도사테'(*)는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로(NIV) 고난으로 인해 좌절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서 담대해질 것을 나타내는 권면이다.

성 경: [히12:13]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고난을 인내해야 할 이유]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 - 본문은 잠 4:26의 인용이다. '곧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다스'(*)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한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편 '어그러지지'의 헬라어 '에크트라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곧은 길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Hughes, Kasemann). (2) 혹자는'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Bruc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만약 전자의 경우 처럼 배교를 의미한다면 '배교는 더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10:26)과 '고침을 받게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Lane). 저자는 본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 경: [히12:14]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모든 사람으로...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좆으라'의 헬라어 '디오케테'(*)는 단순히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Morris, Lane, Michel).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노력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진술한다.

⭕ (1) 화평함 - 이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ㄱ)혹자는 불신자들까지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Spicq,Montefiore, Andriessen). (ㄴ) 혹자는 십자가상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의해서 회복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ne, Foerster). 이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해서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한 책임을 갖게 된다.

⭕ (2) 거룩함 - (*, 하기아스몬) -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에서 '-모스'(*)로 이루어진 단어는 '행위'를 나타낸다(Lane). 그러기에'하기아스몬'은 거룩해진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에 강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Michel, Morris, Bruce)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거룩해져야만 한다(레 11:45; 벧전 1:15,16). 이러한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평과 거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마 5:9).

성 경: [히12:15,16]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너희를 돌아보아 - '돌아보아'의 헬라어 '에피스코푼테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적으로 지켜 보고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적인 목회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돌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3:12,13; 10:24,25). 저자는 그 과정에서 조심해야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 (1)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 '이르지 못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스테론 아포'(*)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떤 혜택으로 부터 제외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구하여도 얻기가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은헤에 대한 거절,불신앙, 혹은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은혜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을 시사한다(Lane, Morris, Michel, Casey, Bruce).

⭕ (2) 쓴 뿌리가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 본문은 신 29:12(LXX)의 내용을 반영한다. 그러나 본서의 헬라어 본문은 본서 저자가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생략한 것이 발견된다.

┌────┬─────────────────────────────────┐

│ 본 문 │ │

│ │메티스 리자 피그리아스 아노 퓌우사 에노클레 │

│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두려워 하고' │

│ │ │

├────┼─────────────────────────────────┤

│ │ │

│ 신 │메 티스 에스틴 엔 휘민 리자 피크리아스 아노 퓌우사 에노클레 카이 │

│ 29:17 │피그리아 │

│ (LXX) │'너희 중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

│ │두려워하라' │

└────┴─────────────────────────────────┘

저자는 신명기 본문에서 두 가지를 생략하고 있다. (ㄱ) '에스틴 엔 휘민'(*, '너희 중에 있다'). 왜냐하면 '에스틴...에노클레'(* ... , '있다...괴롭게 하고')가 구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Michel). (ㄴ)신명기 본문의 마지막에 있는 '피크리아'(*, '쓴').이 말을 생략한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Lane).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 (3)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예로 들어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경고한다. 성적 부도덕을 행하는 '음행하는 자'(*, 포르노스)와 나란히 '에서'를 언급한 점에 대해 두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음행하는 자와...망령된 자'의 헬라어 '포르노스에 베벨로스'(*)에서 '에'(*, '또는')가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수신자의 공동체내에 '음행하는 자'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Elliott, Bruce, Riggenbach, Morris, Westcott). (2) 혹자는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망령된 자'와 동일한 의미로 보며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 둘다가 에서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주장한다(Lane).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 저자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3:4). 한편 '망령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벨로스'(*)는 '거룩하지 못한' 혹은 '세속적인'이란 의미로 영적인 면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하늘의 참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내던져 버리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Thompson). 이러한 에서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장자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배교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Hewitt, Morris).

성 경: [히12:17]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망령된 자의 예로 제시된 에서에 대한 설명이다. '축복'은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서 받고자 했던 하나님의 실제적인 복을 의미한다. 또한 '기업'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의 소유를 가리키나 본서 내에서는 아들됨과 연결된다(Lane). 예수께서는 만유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2,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아들의 지위를 얻는 자로(2:10)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자들이다(6:12,17,18;9:1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당하신 것이다. 한편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 이페르 메타 다크뤼온 에크제테사스 아우텐'(*)은 문자적으로 '비록 눈으로 그것을 구하였을지라도'라는 의미로 개역성경 본문에는 '그것을'(*, 아우텐)이 생략되어 있다. '아우텐'은 앞서 언급한 '축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서가 축복을 다시 받기 위해서 눈물로 간구했음을 나타낸다(Bruce, Hewitt). 에서의 눈물은 축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 명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다(Lane). 그러기에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간구했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Westcott, Andriessen). 에서가 눈물로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장자권에 대한 재고(再考)의 기회를 얻어내지 못한것은 배교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고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된다(6:7,8,Lane).

성 경: [히12:18,19]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느니 - 본문에는 '시내 산'이라고 나타나지 않지만 시내 산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Morris,Lane, Bruce, Hewitt).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징조에 대해 본문은 일곱 가지-만질 만한, 불 붙는 산,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구약의 시내 산 사건 때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만질만한'의 헬라어 '프셀라포메노'(*)를 사용하여 다음에 언급된 시온 산 사건과 분명한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시내 산 사건이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현상을 통해서 물질적이고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상태임을 시사한다(Windisch, Casey). '프셀라포메노'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가지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현현 때 동반되었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칭적인 현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두려움을 품게 한다(출 19:16-22; 20:18-21; 신4:11,12; 5:22-27). 이 일곱 가지 징조는 두려움을 주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호하게하는 현상이다. 즉 불 붙는 산과 흑암, 흑운 등과 같은 가시적인 현상은 하나님을 계시하기보다는 도리어 모호하게 하여 하나님의 임재만을 느끼게 하였으며, 폭풍과 나팔소리 그리고 말하는 소리와 같은 가청적인 현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이해할 수없는 굉장히 큰 소리로 두려움만을 유발시켰다(신 4:12, Casey, Lane).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그 간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다(출 19:16-19;20:18-21; 신 5:23-28)

성 경: [히12:20]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금지된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에게도 해당되었다(출 19:12,13).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심판은 신속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옛 언약하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시사한다(Thomas, Casey,Lane).

성 경: [히12:21]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 '보이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판타조메논'(*)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청적인 현상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본절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만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도 두려워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시내 산 사건 때 모세가 두려워했다고 진술된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모세가 시내 산의 가시나무떨기 불꽃을 보고 무서워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행 7:30-32, Hughes, Thurston). (2) 혹자는 모세가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는 것을 보고 돌판을 던진 후 다시 새 돌판을 받으러 올라가서 두려워 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신 9:19,Moffatt, Buchanan,Kuss, K. J. Thomas) (3) 혹자는 유대 전승인 하가다 전승의 '천사들이 입에서 나오는 호흡로 나를 소멸시킬까 두려웠다'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Michel, Bruce, Spicq,Westcott). 저자가 어디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말하는 강조점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현현을 두려워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옛 언약하에서 예배자와 하나님과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음을 시사한다(P.R. Jones).

성 경: [히12:22,23,24]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 '그러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본문이 앞서 언급된 시내 산 사건과(18-21절) 대조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시내 산 사건이 물질적이고 외적이며 가시적이고 가칭적인 반면에 본문의 시온 산 사건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것이다. 한편 '너희가 이른 곳은'의 헬라어 '프로셀렐뤼다테'(*)는 완료 시상으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초월적인 축복을 현재 수신자 공동체가 이미 공유하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Bruce, Michel, Hewitt). 저자는 옛 언약즉 시내 산에서 나타난 징조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진술한 바와 같이 본문에서 새 언약의 초월적인 축복에 대해서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호칭은 동의어이며 하나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이다(Spicq, Michel, Bruce, Casey,Westcott).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집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스라엘 지파들이 만나던 장소였고(Bruce, Morris) 영광스러운 하늘 도성의 기초로 불려지기도 하였다(LXX 사 28:16; 54:11-14). 이러한 시온 산이라 불린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유로서(28절; 겔 48:35; 계 3:12)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할 나라임과 동시에(13:14)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이다(28절, Lane, Bruce).

⭕ 천만 천사...총회(*, ,뮈리아신 앙겔론, 파네귀레이). 개역성경 본문에는 '총회'(assenbly, NIV)가 '장자들의...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으로 볼 때 '천만 천사'와 연결되는 것이훨씬 더 자연스럽다(NIV, Morris). '총회'의 헬라어 '파네귀레이'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이는 '즐거운 집회'를 가리키는 것으로(Spicq, Morris, Bruce) 앞서 언급된 옛언약하의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포에 떠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만 천사와 연합하여 축복의 장소인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앞에 나아가게 된다.

⭕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 '장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창조사역 때에 제일 처음으로 창조된 천사장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Clement). (2)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구속받은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Hewitt, Bruce, Michel, Marshall).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첫 열매이며 상속자로서 비록 지상에서 생활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사 4:3; 단 12:1; 눅 10:20; 롬 8:6,29; 빌4:3; 약1:18; 계 3:5; 13:8; 17:8; 20:12).

⭕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 이것은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한 표현으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시사한다(Lane).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경히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배교자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10:26-29)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거룩해지고 깨끗하여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교제로 함께 하심을 시사한다(Hewitt, Bruce).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 '온전케 된'에 해당하는 혤라어 '테텔레이오메논'(*)은 완료시상으로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10:14, Spicq, Lane). 한편 '의인의 영들'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그리스도 이전에 참믿음을 소유하였다가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2) 혹자는 그리스도 이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chel). (3) 혹자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상관없이 죽은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11:10, 13-16; 13:14).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 있는 믿는 자들이 온전하여졌다(10:14; 11:40).

⭕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 본문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죄없이 죽은 아벨의 피의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의 우월성과 새 언약의 효능성을 시사한다. '중보'의 헬라어 '메시테'(*)는 본서에서 항상 새 언약과 연결되어 사용되며(8:6; 9:15; 렘31:31-34)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21절)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 흘리신 피에 의해서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함을 입게 되었고,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존전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9:11-14). 한편 '아벨의 피'는 창 4:10-12에서 언급된 아벨의 죽음을 가리킨다.죄 없이 가인에 의해 살해를 당한 아벨은 흘린 피로 하나님께 신원하였으며 그 피는 저주와 연결되었다(창4:11,12). 아벨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도 죄없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과 은혜를 가져다 주었으며,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구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Bruce, Morris, Lane).

성 경: [히12:25]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 '말하신 자'의 헬라어 '톤 랄룬타'(*)는 24절의 '랄룬티'(*, '말하는')와 연결되는 것으로 본문에서 '땅에서 경고하신 자'와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로 나타난다. 이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나타낸다(Andriessen, Lane). 한편 '땅에서'와 '하늘로 좇아'는 26절의 '그 때'와 '이제'의 대조와 동일한 비교로 전자는 옛 언약을 가리키며 후자는 새 언약을 가리킨다(Spicq, Michel, Bruce,Hughes). 옛 언약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순종하기를 거절하여 심판을 당하였다(3:16-19). 새 언약보다도 열등한 옛 언약을 거절한 것도 심판을 피할 수 없었건만 옛 언약보다 훨씬 월등한 새 언약의 메시지를(2:1-4)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율법을 거부할 때보다 더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행위이다(Morris, Hewitt).

성 경: [히12:26]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저자는 본문에서 세 가지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 (1)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 '그 때'는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18-21절의 내용을 시사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현현하실 때 땅이 진동하였으며(출 19:18; 삿 5:4,5; 시 68:8; 77:18; 114:4,7) 그 위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 (2) 이제는 약속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뉜 데 에펭겔타이'(*)로서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시내 산 사건에서 나타난 땅의 진동보다 더 큰 진동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약속하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형식으로 말씀하신 실체들(4:1; 9:15)을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약속하여'의 헬라어 '에펭겔타이'(*)는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약속하셨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재까지 그 약속이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록 과거에 약속하셨다 할지라도 약속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10:23; 11:11).

⭕ (3)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은 학 2:6의 인용으로 앞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인 시내 산 사건과 대조를 이루어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은 땅만 진동하였으나 미래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할 것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땅'과 '하늘'은 시내 산에서의 계시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에 대한 상징이며(Thomas) '진동'은 미래에 벌어질 세상의 변형 또는 긍극적인 파멸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주적 대변혁을 나타낸다(Lane). 또한 본문은 새 언약의 공동체에게 임할 심판을 나타내어 하늘로부터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은 땅으로 부터의 경고를 무시한 자와 마찬가지로 심판당함을 강조한다(25절). 새 언약의 계시를 거부한 자들은 최후의 파멸의 날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산에서 주어진 계시를 무시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하실 것이다(Morris, Lane).

성 경: [히12:27]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이 또한 한번이라 하심은 - 본문은 앞절의 '땅'과 '하늘'의 대비와는 달리 '진동치 아니할 것'과 '진동할 것'을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시내 산의 현현을 통해 땅을 진동하시고도 다시 한번 미래에 하늘과 땅을 진동하시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 (1)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 '영존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네'(*)는 하나님의 지속적이고도 변함이 없는 속성이나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실체 혹은 하나님과 연관된 의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사 66:22). 본절에서 '메이네'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불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간적인 지속성이 아니라 남아있는 실체의 질적인 불변성을 나타낸다(Grasser). 새 언약에 신실한 자들은 미래에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함과 같이(28절) 영원한 구원을 즐길 것이며 심판하시는 이인 하나님의 불변성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23절).

⭕ (2)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 하나님께서 세후의 날에 심판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변동될 것 즉 창조물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진동할 것'과 동일시 되고있는 '만든 것들'의 헬라어 '페포이에메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종속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Lane). 그러나 저자는 '진동할 것'과 '진동치 아니하는 것'의 차이를 '창조물'과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유무에서 찾고 있다(G.B.Caird).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은 진동할 것이며 제거될 것이다.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22-24절)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저주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25절).

성 경: [히12:28]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 '진동치 못할 나라'의 기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단 7:14,18 (LXX)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Westcott, Michel). (2) 혹자는 시 95:9-11(LXX)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Vanhoye,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본서에서 자주 시편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으며, 또한 앞서 학 2:6을 인용하여 진동의 문제를 해석하면서 단 7:14,18을 인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것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실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Morris). 한편 '은혜를 받자'의 헬라어 '에코멘 카린'(*)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감사하자'로 해석한다(NIV, Hewitt, Lane). (2) 혹자는 '은혜를 붙잡자'로 해석한다(JB, Morris, Montefiore).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카린'(*)은 감사보다는 은혜를 의미하며, 또한 뒤에 언급되는 '이로 말미암아'(*, 디 헤스)로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는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동치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하는 배교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를 범하지말고 오직 은혜를 굳게 붙들 것을 권면한다.

⭕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 '경건함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인식하는 가운데(29절)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나타낸다(Morris, Lane). 그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

성 경: [히12:29]

주제1: [믿음에 대한 권면과 배교에 대한 경고]

주제2: [배교에 대한 경고]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한 것, 즉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임을 나타낸다.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본문은 신 4:24의 인용이다. 저자는 신명기 본문에서 본절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너의'(*, 수)를 '우리'(*, 헤몬)로 변경하고 있다. 이는 본문이 새언약 하에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시내 산 현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새 언약하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Riggenbach, Moffatt, Michel). 한편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6:8; 10:27). 본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새 언약의 효력을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배교자들과 비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함과 완전함을 암시한다(Lane). 그러기에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하지 말고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성 경: [히13: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형제 사랑'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성결 법전과 연결되는 것으로(레 19:18)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것이다(22,23절; 2:11,12,17; 3:1,12; 10: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독특한 특징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Bruce, Hewitt).

성 경: [히13: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더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Thuren, Morris, Hewitt).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본문은 아브라함의 일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본문은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임을 시사한다.

성 경: [히13: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대우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10:32-34; 11:36-38, Filson).

성 경: [히13: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 '모든 사람'의 헬라어 '엔 파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Morris, Hewitt). (1) 중성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성적인 순결 뿐만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결혼을 중시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2) 남성으로 이해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시사한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며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결혼 생활 속에서 성적인 범죄를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귀하게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침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테'(*)는 성적인 정결(淨潔)과 함께 사용된 용어로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 (1) 음행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 (2)간음하는 자들 - 이것은 결혼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Bruce, Lane, Hughes).

성 경: [히13:5,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타인의 권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여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범죄하게 만든다(마6:24; 눅 16:13; 딤전 6:10, Bruce, Thuren).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용문은 없으며 단지 필로(Philo)가 동일한 인용문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On the Confusion of Tongues, p.166). 하지만 저자의 인용문과 필로의 인용문이 동일하다고 해서 저자가 필로의 것을 인용했다고(Moffatt, Spicq)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도리어 다른 헬라어 역본에서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rris, Lane, Michel, Delitzsch, Riggenbach).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 본문은 시 118:6의 인용으로 앞서 언급된 인용문과 연결되어 '약속과 응답'의 형태를 취한다(Michel). 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Lane).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롬 8:31, Hewitt, Morris).

성 경: [히13: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인도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헤구메논'(*)은 본장에서 본절을 제외하고 두 번 더 나온다(17,24절). 17절과 24절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반면에 본절의 '톤 해구메논'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Hewitt,Bruce). '톤 헤구메논'이 가리키는 인물에 대해 혹자는 '장로'라고 추측하며(Morris) 혹자는 '주의 제자'라고 주장하나(2:3, Hewitt) 명확하지 않다. 한편 '인도하는 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4:29,31; 8:25; 13:46, 빌1:14, Michel, Riggenbach) 지도자들이 청중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나타낸다(1: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 '종말'의 헬라어 '에크바신'(*)은 매일의 생활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며(Hughes, Bruce)동시에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Moffatt, Westcott).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 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야 한다.

성 경: [히13: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예수께서 '어제'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계심을 나타낸다. (2) 혹자는 본절이 7절과 9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어제'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하였으며 '오늘' 수신자 공동체가 '어제' 전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상한 가르침과(9절) 바꾸려고 하는 상태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구속이 '영원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성 경: [히13: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마신'(*)은 9:10에서 사용된 '먹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자들은 이러한 식물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블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히13:10]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 혹자는 '제단'의 헬라어 '뒤시아스테리온'(*)이 문자적인 희생 제단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Hewitt) 그것은 '희생 제사'에 대한 환유(換喩)로(Bruce, Lane)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Spicq, Montefiore,W. Manson,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성 경: [히13:1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니라 -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한편 '영문 밖에서'라 함은 다음 절에서 언급될 그리스도의 고난의 장소를 암시한다. 구약의 성소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시하는 제단에서 먹을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구약의 제의에 따라 사는 자들은 골고다에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 속죄 사역의 결과인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없다(Lane).

성 경: [히13:1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영문 밖에서' 희생 제물을 불살라 버린 것과(11절) 성문 밖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고난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성문 밖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속죄일의 속죄제를 나타내는 것으로(J. Jeremias). 예수의 고난이 대제사장적인 속죄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새로운 조건임을 시사한다(10:12). (2)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예수께서 정죄받으심은 물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심과 급기야 처형 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거룩케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세'(*)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제시하지 못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거룩해질 수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히13:1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그런즉 우리는...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영문 밖'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그것이 지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천상적인 영역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Thompson). (2) 혹자는 그것이 유대교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Morris, Bruce, Hughes, Westcott, Filson).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거룩한 영역에서 제외 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 그 능욕을 지고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유대교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 곧 십자가 상의 죽음은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신 21:22,23; 갈 3:13,Hewitt, Morris).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수치와 치욕으로 이해된 십자가를 짐으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복음서의 제자도와 동일하다(마10:37,38; 막 8:34-38).

성 경: [히13:1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성 경: [히13:15,16]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전진적 신앙의 촉구]

⭕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맘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예수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되었음을 시사한다(Hewitt).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옅매니라 - 본문은 호 14: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의 헬라어 '유포이이아스'(*)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스'(*)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Y.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로 열납하신다(Lane).

성 경: [히13:17]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 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2:1-4; 3:7-12; 5:11-6:12; 10:23-29; 12:12-17,25-29, Hewitt,Lane, Riggenbach).

⭕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 본문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존경을 받고 복종함을 받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부여하신 목회적 권위와 책임감이다. '경성하기를'의 헬라어 '아그뤼프누신'(*)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상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Spicq, Bruce, Morris).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즉 그들의 영적 생활과 복리를 위해서(10:39, Morris,Bruce, Michel) 날마다 깨어 있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는 지도자들의 책임을 나타낸다. 참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책임 이행에 대한 답을 요구하실 때 응답해야만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 교사들과 같이 이상한 다른 가르침을 전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인을 돌보고 양육한다.

⭕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도자들을 섬기고 순종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Bruce, Hewitt, Morris).

성 경: [히13:18]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1인칭 복수인 '우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가 순수한 복수로 저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Kent). (2) 혹자는 '우리'가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witt, Bru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Morris).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1인칭 단수인 '내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 즉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Morris, Lane, Hewitt)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시사한다(Bruce).

성 경: [히13:19]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지도자를 위한 기도]

⭕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 경: [히13:20,21]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본문은 송영이다.

⭕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 본문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를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모세에 대한 진술이다. 저자는 모세에 대한 진술인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 부터 이끌어 낸 모세를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메간'(*)은 본서에서 예수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4:14; 10:21) 모세와 예수의 비교 또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저자의 독특한 논증 방법이었다(1:1-4; 2:1-4; 3:1-6; 8:1-6; 10:26-31;12:18-29).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 영원한 언약의 피로 - 본문은 슥 9:11(LXX)의 영향을 받았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1:8; 5:6,9; 6:20; 9:12,14,15;10:12,14). 예수의 사역과 희생은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러한 영원한 언약은 새 언약과 동일한 것으로 옛 언약올 대신하였다. 본문은 다음에 언급될 예수의 부활과 연결된 것으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신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나타낸다(9:20, Morris, Hewitt, Lane).

⭕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 본문은 본서 내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한편 '이끌어내신'의 헬라어 '아나가곤'(*)은 두 언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나타낸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간섭은(출 6:7; 20:1,2; 레 19:36; 25:38; 26:13; 신 5:6; 사63:11-14)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예표한다(Lane).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 즉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근거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21절, Cranfield,Thuren).

⭕ 평강의 하나님이 - 이 칭호는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하나님의 칭호라고 볼 수 있으며(Lane)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자이심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Spicq, Thuren, Morris, Bruce).

⭕ 모든 선한 일에 너희들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 '모든 선한 일에'의 헬라어 '엔 판티아가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윤리적인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선한 윤리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Spicq). (2) 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 2:17, Michel). (3)혹자는 선한 일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해석한다(마 7:11; 눅 1:53; 갈 6:6; 약1:17, Lane,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하여 주셔서 온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행할수 있도륵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와 상호 보완적이다. '즐거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중재자이시며 새 언약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Lane,Morris).

⭕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륵 있을지어다 아멘 - '그에게'에 대해서 혹자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와 모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나(Morris)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왜냐하면 본문의 송영은 죽은 자로부터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Lane).

성 경: [히13:22]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로구 테스 파라클레세오스'(*)는 행 13:15에 나오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 '설교를' 지칭한다(Bruce, Morris, Lane). 한편 '간단히...썼느니라'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13:18-25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x).(2) 혹자는 13장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 Anderson). (3)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bruce, Hewitt, Lane).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썼느니라'의 헬라어 '에페스테일라'(*)는 '편지를 썼다'라는 의미로 본 서신 전체를 가리키며,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Hewitt, Lane).

성 경: [히13:23]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인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렐뤼메논'(*)은 완료 시상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역의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E.D. Jones). (2) 혹자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아폴렐뤼메논'이 전자의 견해처럼 사용되었을 경우는 목적어를 동반하나 본절에서는 목적어를 동반하고 있지 않으며, 더욱이 '아폴렐뤼메논'이라는 단어는 흔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Brice, Morris).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성 경: [히13:24]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절).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2) 혹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의 헬라어 '호이 아포테스 이탈리아스'(*)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혹자는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cq). (2) 혹자는 이탈리아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호이 아포 테스 이탈리아스'는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성 경: [히13:25]

주제1: [마지막 권고와 축복]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축복]

⭕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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