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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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유다서주석

성 경: [유1:1]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인사말]

본절은 저자와 수신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1)본서의 저자인 유다는 두 가지 칭호를 사용하여 수신장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유다'는 8명이 등장하나 본서의 저자는 예수와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를 의미한다(서론 '저자론' 참조).

⭕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는 오직 주인의 뜻대로만 행해야하는 소유물로서 주인의 재산에 불과한 존재를 가리킨다(Cranfield).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노예와 포로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을 자신의 피값으로 사셔서 현재 자신의 종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고전7:23).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 사역자인 '사도'를 지칭할 때도 사용되었다(롬1:1; 벧후1:1). 본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유다가 주와 한 가족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주께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역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Bauckham).

⭕ 2. 야고보의 형제. - 혹자는 '형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스'(*)가 혈연적인 형제를 의미하지 않고 동역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여 본서의 저자가 '유다 바사바'(Jude Barsabbas)라고 주장한다(Ellis).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아델포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 즉 사역자를 지칭하지는 않는다(B- arsabbas). 그러기에 본문의 '야고보의 형제'를 '야고보의 동역자 중의 한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부당하며 혈연적인 형제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유다'와 '야고보'가 혈연적인 한 형제로 나타나는 곳은 신약 성경 막6:3뿐이다. 저자인 '유다'가 주의 형제인 '야고보'의 형제임을 강조한 것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주의 형제로서 잘 알려져 있는 '야고보'와 혈연적인 형제임을 드러냄으로 자신의 정체(正體)에 대해서 밝히기 위함이다. (2)저자인 유다는 수신자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갖는 특징을 세 가지 호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 1. 부르심을 입은 자. -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것이 그리스도에게 전이된 호칭이다(사41:9; 42:6; 48:12,15; 49:1; 54:6; 호11:1). 이 호칭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그리스도인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Kelly).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며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생활과 모습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롬1:7; 고전1:2; 빌3:12,13; 벧전1:15; 벧후1:10; 계17:14).

⭕ 2.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의 헬라어 '엔 데오 파트리'(*)는 해석상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유다가 본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행한 자신의 사랑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진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에서'의 헬라어 '엔'(*)은 도구격으로 사용된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사랑을 받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한편 '사랑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에가페메노이스'(*)는 완료 시상이다. 이는 이전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호칭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신7:7,8; 대하20:7; 사5:1; 43:4; 렘31:3; 호11:; 14:1) 신약에 와서 새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칭호가 되었다(골3:12; 살전1:4; 살후2:13).

⭕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 - 앞서 언급된 수신자들에 대한 두 가지 칭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간을 나타내는 반면 본문의 칭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드러낸다(Cranfield). '지키심을 입은 자들'로 번역된 헬라어 '테테레메노이스'(*)는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요17:11,15; 살전5:23; 벧전1:4,5, Cranfield). 유다가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거짓 교사들의 영향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보호하심을 분명히 밝히고 위로하기 위함이었다(Bauckham).

성 경: [유1:2]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인사말]

⭕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본절은 수신자들을 위한 유다의 기원이다. '긍휼'은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한 태도와 동정을 의미하며,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고 그를 의지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안녕을 의미하고,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호의와 관대함을 가리킨다(Blum).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유대인들의 인사법이었다. 유다는 비록 '긍휼' 속에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할지라도 '사랑'을 더 첨가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원하는 초대 교회의 독특한 인사를 하고 있다(Bauckham).

성 경: [유1:3]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 유다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호칭을 통하여 수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17,20절). 한편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의미한다. 이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믿음으로 온전히 받을 구원이요(21절; 벧전1:5),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받아 누리는 구원이다(히6:9). 저자인 유다는 수신자들이 이미 누리고 있으며 주의 파루시아 때에 참여하게 될 온전한 구원에 대해 편지하려고 하고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 '성도'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음을 전달받은 사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Spitta) 교회를 설립한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행9:13,32,41; 롬12:13; 히6:10, Blum, Bauckham, Green, Bigg).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도데이세'(*)는 '받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람바네인'(*)과 한 쌍을 이루어 사도가 주고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고전11:2,23; 15:3; 갈1:9; 빌4:9; 골2:6; 살전2:13; 살후2:15; 3:6, Green, Bauckham). 한편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서 '믿음의 도'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복음, 즉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내용을 의미한다(행2:42, Cranfield, Green, Bauckham). 이러한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들에게 전해지고 사도에 의해서 교회에 전해진 기독교 구원의 중심 메시지는 단번에 전해진 것으로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유다는 복음의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함으로 거짓 교사들이 변질되고 왜곡된 거짓 진리를 전하는 것에 대해 암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 '힘써 싸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고니제스다이'(*)는 본래 레슬링 경기에 선수들이 쏟는 노력을 의미하였다. 유다는 '에파고니제스다이'를 사용하여 수신자들 모두가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변질시키고 있는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운동 선수가 경기에 애를 쓰듯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유다는 현재 시상인 '에파고니제스다이'를 사용하여 복음 수호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항상 지속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는 저자 유다가 수신자들이 거짓 교훈에 휩싸여 있음을 알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수호하도록 권면하기 위하여 본서를 썼음을 시사한다.

성 경: [유1:4]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 '가만히 들어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레이세뒤에산'(*)은 비밀리에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울과 베드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갈2:4; 벧후2:1). 이러한 자들은 진정한 진리인 복음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인에게 거짓 교훈을 전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 거짓 교사들로서 외적으로는 교회의 일원이었으나 내적으로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다(Cravfield). 한편 '사람 몇'의 헬라어 '티네스 안드로포이'(*)는 수신자들이 명확하게 잘 아는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표현이다(롬3:8; 고전4:18; 15:34; 고후3:1; 10:12; 갈1:7; 딤전1:3,19; 벧후3:9). 유다는 이 표현을 통해서 수신자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명확하게 경고하고 있다.

⭕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 '옛적부터...미리 기록된 자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팔라이 프로게그람메노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에 대한 정죄가 하늘 책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Clement, Windisch, Kelly). (2)혹자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에 대한 정죄가 베드로후서와 같은 사도들의 예언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딤후3:13; 벧후2:1-3:4, Bigg, Green, Zahn). (3)혹자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에 대한 정죄가 신약 시대 이전의 예언, 즉 구약이나 에녹서와 같은 것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Maier, Mayor, Grundmann, Chaine, Cantinat, Blum, Bauckham).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세번째 견해가 '옛적부터'라는 표현을 가장 충족시키며, 실제로 유다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다가 멸망당한 자들에 대해 5-7절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에녹서의 내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정죄는 이미 과거의 예언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 그들로 거짓 교사들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하게 하고 있다. 한편 '이 판결을 받기로'를 해석함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토'(*)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벧후2:3에 언급된 거짓 교사들에 대한 정죄나(3b절) 거짓 교사들이 가만히 들어왔다는 정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yor, Zahn). (3)혹자는 본절 하반절에서 언급된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pitta). (4)혹자는 5-15절에서 언급되는 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lement, Cantinat, Grundmann, Bauckham). 네 가지 견해 중 문맥상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이 판결을 받기로'는 5-15절에서 언급된 유형의 정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때에 주어질 정죄를 의미한다.

⭕ 경건치 아니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세베이스'(*)는 유다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지칭한 포괄적인 단어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의 도덕적 권위를 거부하고 불의한 행동을 하는 거짓 교사들의 도덕 폐기론을 함축적으로 고발하는 용어이다.

⭕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와 율법의 정죄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 즉 성적인 탐닉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모든 도덕적인 제한조차도 무시할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여(벧후2:19) 성적인 방종을 행하였다(Blum, Bauckham).

⭕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헬라어는 '톤모논 데스포텐 카이 퀴리온 헤몬 예순 크리스톤'(*)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가 하나님에게 사용된 것을 이유로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눅2:29; 행4:24; 계6:10, Green, Cranfield). (2)혹자는 하나의 관사 '톤'(*)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벧후2:1; 에녹1서 48:10, NIV, Bauckham, Knibb).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부인하는 자들이니'에서 '부인하는 행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교리적인 부인으로 영지주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reen). (2)혹자는 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부인이라고 주장한다(Luther, Plummer, Chaine, Grundmann, Blum, Calvin, Cranfield).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라 한다면 8절에서 오직 천사들을 훼방한 것만을 언급해야 하나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다른 죄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성적인 방종으로 바꾸었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경건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였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인하였다(딛1:16).

성 경: [유1:5,6,7]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거울이 되었느니라. - '범사를'에 대해서 혹자는 저자인 유다가 말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Spitta, Mayor, Grundmann)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에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믿음의 모든 본질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Bauckham, Bigg). 왜냐하면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단번에'를 의미하는 '하팥스'(*)가 첨가되어 있어 과거에 수신자들이 받았던 복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유다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구약의 세 가지 예를 제시함으로써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을 분명하게 인식시키고자 하고 있다(롬15:15; 살후2:5; 딤후2:8; 벧후1:12; 3:1,2; 계3:3). 유다가 제시한 심판의 예는 다음과 같다.

⭕ (1)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첫번째 예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불신앙으로 인해 심판을 받은 사건을 나타낸다. 이것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선발된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돌아와 보고한 내용을 듣고 출애굽한 것을 원망하고 불신앙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내용을 암시한다(민14장, Cranfield, Bauckham).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였고, 광야 생활 가운데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체험하였으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한 열 지파의 정탐꾼들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보고만을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유다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믿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정의하면서 불신앙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심판자로 지칭되는 '주'에 대해서 혹자는 벧후2:4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reen). 그러나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Justin, Origen, Jerome, Bauckham). 왜냐하면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4,17,21,25절). 한편 '후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듀테론'(*)은 문자적으로 두번째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암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Green). 즉 '토 듀테론'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나 이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신 주께서 재림하셔서 배교한 그리스도인을 심판하실 것을 시사한다.

⭕ (2)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 유다가 두번째로 제시한 예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에서 '지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켄'(*)은 영역이나 자치권 혹은 책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천사들이 자신의 영역과 책무를 버리고 배교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 예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그들을 타락케 한 정욕이다. 타락한 천사들은 땅에 내려와 여인들과 교접하였다(창6:4; 욥1:6). 이러한 사상은 본서에 자주 반영되고 있는 위경인 에녹1서에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9:8; 10:11; 12:4). 또 다른 하나는 사단과 그의 천사들의 교만으로 인한 반역이다(사14:12; 24:21,22). 유다는 타락한 천사들이 자신의 지위나 처소를 버리고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심판을 당한 것과 거짓 교사들의 경우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가두셨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테레켄'(*)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여 이미 가두셨음을 나타낸다. '테테레켄'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의 헬라어 '메 케레산타스'(*)와 대조를 이루어 타락한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교만하고 음욕하여 자유로와지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영원히 결박되어 갇히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비록 에녹서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인 '큰 날의 심판까지'(에녹서10:6; 16:1; 22:4,10,11; 103:8),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일시적으로 갇혀 있지만 그들의 결박은 영원한 것이다(Bauckham).

⭕ (3)소돔과 고모라의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히 불의 형벌을 받음. - 세번째 예는 창19장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다. 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로 자주 나타난다(신29:23; 사1:9; 13:19; 렘23:14; 49:18; 50:40; 호11: 8; 암4:11; 습2:9). 유다는 본문의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앞서 언급한 타락한 천사들과 '같은 모양으로', 즉 같은 종류의 범죄를 통하여 멸망당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위에서 '다른 색'이란 문자적으로 '다른 육체'(*, 사르코스 헤테라스)를 의미한다. 즉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육체와 성관계를 맺기를 원한 것과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은 것을 비교한 것이다. 유다는 타락한 천사들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신 질서를 무시함으로 영원한 불로 멸망당함같이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무시하는 거짓 교사들 역시 지옥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성 경: [유1:8]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 '그러한데'로 번역된 헬라어 '멘토이'(*)는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예, 특별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의 예를 거짓 교사들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로 '그와 같이'와 연결되어 거짓 교사들이 이미 잘 알려진 세 가지 예와 같은 범죄를 반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꿈꾸는 이 사람들도'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 유다는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의 수단인 꿈을 거짓 교사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으로 이해하여 도덕을 폐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미명하에 도덕폐기론을 가르치고 있음을 암시한다(Green, Cranfield, Bauckham). 거짓 교사들이 범한 죄에 대해 유다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 (1)육체를 더럽히며. - 앞서 언급한 예와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타락한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무시하고 '다른 육체'와 성관계를 맺음으로 자신의 육체를 더럽혔다(에녹1서 7:1; 9:8; 10:11; 12:4; 15:3,4).

⭕ (2)권위를 업신여기며. - '권위'의 헬라어 '퀴리오테타'(*)는 문자적으로 '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인간의 권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lvin, Luther). 2. 혹자는 천사의 주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Werdermann). 3. 혹자는 하나님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Cranfield, Green, Bauckham).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유다가 거짓 교사들의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이미 말하였기 때문이다(4절).

⭕ (3)영광을 훼방하는도다. -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돝사스'(*)는 천사들을 지칭한다(출15:11; 벧후2:10, Cranfield, Blum). 거짓 교사들은 9,10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천사들을 멸시하였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천사들은 모세의 율법을 전달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유지시키는 존재였다(행7:38,53; 히2:2, Johnson).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멸시하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불리시키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Chaine, Bauckham).

성 경: [유1:9]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영광', 즉 천사들을 비방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모델로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사단을 대적하는 자로 알려진 천사장 미가엘을 들고 있다(단10:13,21; 12:1; 계12:7). 이 예는 '모세의 승천'(Testament of Moses of Assumption of Moses)에서 인용한 것이다. '모세의 승천'에 의하면 사단은 모세가 살인자라는 이유로(출2:12) 모세의 시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천사장 미가엘은 분명히 권세와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훼방하는 판결', 즉 비방하거나 고소를 하지 아니하고 사단에 대한 판결과 심판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 버렸다. 본절에서 유다는 당시에 잘 알려진 '모세의 승천'의 내용을 인용하여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있는 천사장 미가엘도 훼방하는 것을 대조함으로 거짓 교사들의 범죄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은 슥3:2의 말씀으로 '모세의 승천'에 이미 인용된 것이다. 미가엘의 이러한 선언은 홀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사단의 고소를 물리치시고 정죄하실 것을 요청하며,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유다는 이러한 미가엘의 예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이 천사를 비방하는 행위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성 경: [유1:10]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들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비방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은 이성이 없고 단지 본능(本能)으로 살아가는 짐승의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시49:20).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출애굽 역사를 경험하고도 원망과 불신앙으로 인해 멸망당한 것과 같이 그들의 이성없는 짐승과 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여 멸망당하게 된다.

성 경: [유1:11]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 '화 있을진저'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할 때 자주 사용하신 표현으로(마23:13,15,16,23,25,27,29) 거짓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음을 시사한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죄를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세 인물의 죄와 동일시하고 있다.

⭕ (1)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 가인의 죄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1. 가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하시지 않자 열납된 제사를 드렸던 형제 아벨을 살인하는 죄를 범하였다(창4:1-15; 히11:4, Blum, Green). 2. 가인은 공의의 심판과 구원을 부인하는 자였다(Cranfield, Bauckham, Green). 필로(Philo)나 창4:7에 대한 탈굼(Targum)은 가인이 '심판도 없고 심판자도 없으며 다른 세상, 즉 내세도 없으며 의인에 대한 선한 보상의 선물도 없고 악인에 대한 징계도 없다'(There is no Judgement, there is no a Judge, there is no other world, there is no gift of good reward for the just and punishment for the wicked.)라고 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가인이 미래의 심판을 부정하여 부도덕한 일을 자유롭게 행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는 자로서 거짓 교사들과 동일한 최초의 이단자였음을 시사한다. 유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거짓 교사들이 가인의 길을 따라 행동하였음을 시사한다.

⭕ (2)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 발람은 자신에게 약속된 커다란 보상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서 발락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한 배교의 책임을 갖고 있다(민31:16-19, Philo). 거짓 교사들은 발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부도덕한 범죄를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가르쳐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에 빠지고 타락하여 배교하도록 하였다.

⭕ (3)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 고라는 다단과 아비람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반역한 자였다(민16:1-35; 26:9,10; 시106:16-18). 유다는 고라의 반역을 언급하여 거짓 교사들의 죄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고라가 모세의 권위에 반역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죄를 범하였다(Zahn, Werdermann, Bigg, Windisch, Kelly, Reicke, Green). 2. 고라의 반역이 단순히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인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도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는 죄를 범하였다(Bauckham).

성 경: [유1:12,13]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유다는 본문에서 여러 가지 은유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 '애찬'의 헬라어 '아가파이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서로가 준비한 음식으로 구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기 위한 식사를 의미했다. 이것은 실제로 '아가페'(Agape)라는 애찬과 주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만찬으로 구분되나 신약 시대에는 두 가지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본절에서 유다가 말하는 '아가파이스'는 단순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한 '아가페'만이 아니라 성만찬도 내포하고 있다(Green, Bauckham, Cranfield).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애찬을 남용하여 자신의 탐욕이나 음란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은 물론(고전11:20ff.; 벧후2:13) 두려움 없이 불경건한 자세로 애찬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쳐 위험하게 만들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암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필라데스'(*)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더럽혀진 사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23절, zahn, Didymus). (2)혹자는 오점이나 흠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벧후2:13, KJV, RSV, NEB, NIV, TEV, Spitta, Bigg, Windisch, Grundmann, Cantinat, Spicq, Cranfield). (3)혹자는 암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Mayor, Alford, Kelly, Green, Reicke). 세 가지 견해 중 첫째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오점'으로 보는 견해의 경우 거짓 교사들의 행위는 애찬을 모독하는 의미가 되며, '암석'으로 보는 견해의 경우 거짓 교사들의 행위는 공동체의 믿음을 파선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시사한다(Blum).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애찬에 함부로 참여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아들을 희롱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가공할 만한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고전11:27-32; 히10:26-31).

⭕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순종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역하며 자신이 목자임을 자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igg). (2)혹자는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교회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나 양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Cranfield, Gre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양들을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을 나타내는 겔34:2을 반영하는 것으로 11절에서 언급된 자기 이익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음란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 발람의 예와 연결된다.

⭕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이요. - 본문은 잠25:14을 반영한 은유이다. 팔레스틴(Palestine)과 시리아(Syria) 해변에 뜨는 구름들은 비를 뿌릴 것처럼 보이나 바람에 밀려서 그냥 지나가는 경우가 흔하다. 이 은유는 비를 뿌리지 아니하고 바람에 밀려 그냥 지나가는 구름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의 주장과 교훈이 허망한 약속에 불과하여 전혀 쓸모가 없음을 시사한다(Green, Blum, Bauckham).

⭕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 거짓 교사들은 열매를 맺을 가을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를 평가하는 기준이다(마7:20; 벧후1:8) 거짓 교사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맺어야 할 열매들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뿌리까지 뽑혀 죽임을 당한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한편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으로(시52:5; 잠2:22) 거짓 교사들이 도저히 생명과 연결될 수 없는 심판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두 번 죽음을 나타내는 '죽고 또 죽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yor, Bigg, Green, Grundmann). (2)혹자는 최후의 심판에 악한 자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지는 둘째 사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auckham, I. Abraham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 본문은 사57:20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문의 초점은 파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도로 인해서 해변에 밀려온 오물에 있다. 파도가 밀려와서 해변에 더러운 오물들을 뱉어 놓듯이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오직 수치스러운 행위와 언어만을 내뱉어 놓는다.

⭕ 영원한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 본문은 에녹1서 18:14ff를 반영한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은 거짓 교사들이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상징한다(벧후2:4). 한편 '유리하는 별들'은 유성이나 혹성, 혹은 별똥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짓 교사를 가리키는 은유이다. 유리하는 별들이 항해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바와 같이 거짓 교사들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이 빛날 것이나(단12:3) 거짓 교사들은 유리하는 별들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파묻혀 심판을 당하여 사라질 것이다.

성 경: [유1:14,15]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 '아담의 칠세손 에녹'이라는 표현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창5:3-24과 역대상1:1-3에서 아담을 일대손으로 하여 계산할 경우 에녹이 칠대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다는 창세기나 역대상을 인요한 것이 아니라 에녹서를 인요한 것이다(에녹서60:8; 93:3). 유다는 당시에 인정을 받고 많이 알려진 위경인 에녹서의 인용을 통해서 자신의 진술의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다(Green, Bauckham). 이어지는 인용의 내용은 에녹서1:4,9에서 비롯된 것이다.

⭕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 '주께서...임하셨나니'는 에녹서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도래 즉 현현에 대한 예언이었으나(에녹서1:4),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적용해서 악한 자의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에 동반되는 '그 수만의 거룩한 자'는 천사들을 의미한다(신33:2; 슥14:5; 마16:27, Cranfield, Green, Bauckham). 그리스도께서는 파루시아 때에 천사들과 함께 임하셔서 불경건한 자들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 - 유다는 본문에서 '아세베스'(*, '불경건한')와 관련된 네 개의 단어, 즉 '투스 아세베이스'(*, '경건치 않은 자'), '아세베산'(*, '경건치 않게'), '아세베이아스'(*, '경건치 않은), '아세베이스'(*, '경건치 않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의 행위와 말을 심판하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세베스'와 관련된 이러한 단어들은 이미 유다가 거짓 교사에게 적용한 것이다(4절). 유다는 의도적인 인용을 통해 경건치 않은 자의 행위와 말이 그리스도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처럼 거짓 교사들의 행위와 말이 파루시아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거짓 교사들의 행위와 말은 주되신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모욕하는 것이기에 파루시아 때에 반드시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4-10절).

성 경: [유1:16]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거짓 교사들이 받을 심판]

유다는 본절에서 다시 한번 거짓 교사들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혹자는 본절의 내용을 유다가 '모세의 승천'(Testament of Moses ro Assumption of Moses)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나(M.R.James) 에녹서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Chaine, Green, Bauckham).

⭕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의 뜻을 거부하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민14:2,27,29,36; 신1:27; 시106:25; 고전10:10) 앞절에서 언급된 에녹서의 인용문에서 불경건한 자들이 주를 거스려 강퍅한 말을 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처럼 거짓 교사들은 주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원망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유를 남용하여 율법을 멸시하고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다.

⭕ 불만을 토하는 자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멤프시모이로이'(*)는 '원망하는 자'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거짓 교사들이 자신의 몫에 대해 늘 불만족하여 습관적으로 비판하고 불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도덕적인 규정들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여 내던져 버리고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다.

⭕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 이것은 '그들의 정욕을 따라 산다'라는 의미로 거짓 교사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따라 행동하였음을 시사한다(Blum, Bauckham, Green). 그 결과 그들은 정욕, 탐욕과 같은 죄에 빠지게 되었다.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 '자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롱카'(*)는 문자적으로 '거대한'을 의미한다. '거대한'이란 말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utiochus Epiphanes, 단11:36)나 적그리스도(계13:5)를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떠드는 것을 의미한다(에녹서5:4; 101:3).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하고 거부하여 도덕폐기론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거만한 태도를 취하였음을 시사한다.

⭕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 이것은 유다가 들은 구약 성경의 예에서 발람의 예에 해당된다(11절). 발람의 삯을 위하여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과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던 것처럼 거짓 교사들의 행동은 자신의 이익(利益)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아첨하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존테스 프로소파'(*)는 히브리어 '나사 파님'(*)을 번역한 것으로(신10:17; 대하19:7; 잠18:5) 사람을 편견으로 대하거나 뇌물을 줌으로 정의를 왜곡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교회 내의 부자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부하였음을 암시한다(Green, Bauckham).

성 경: [유1:17]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 유다는 4-16절까지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비판한 후 본절에서부터 수신자들에게 권면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사도들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미리 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이레메논'(*)은 사도들이 유다가 본서를 기록하기 이전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도들이 이전에 미리 거짓 교사들에 대해 권면과 경고를 하였음을 시사한다(Green). 수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한 사도들의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거짓 교사들의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고 그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유1:18]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 본문은 사도들이 미리 경고한 말씀이다.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를 가리킨다(히1:2; 약5:3; 벧전1:5,20, Cranfield, Bauckham). 한편 '기롱하는 자들'은 신앙과 도덕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시1:1; 잠1:22; 9:7,8; 13:1) 거짓 교사를 의미한다(벧후3:3). 기롱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경건하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였다(14,15절).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등장은 마지막 때의 특징이다(막13:5-23).

성 경: [유1:19]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유다는 12절과 16절에 이어 다시 한번 거짓 교사들에 대해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 당을 짓는 자며. -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자신들을 구분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서 또 다른 그룹을 형성한 것이 아니다. 고라와 같이(11절) 교회 내에서 애찬에도 참여하면서 자신들만이 참된 영을 소유(所有)한 것처럼 인식하고 그룹을 형성하였다(Bauckham, Blum).

⭕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 '육에 속한 자'의 헬라어 '프쉬키코이'(*)는 '성령은 없는 자'와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고 단지 세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인 존재라고 주장할지라도 실제로는 종말론적 선물인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비그리스도인이었다.

성 경: [유1:20]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 '믿음'은 복음을 가리킨다(3절, Green, Bauckham, Cranfield). 이것이 거룩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Blum). 한편 '자기를 건축하며'란 말은 수신자들이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받은 복음을 잘 상고하고 연구하여서 터되신 그리스도 안에서(고전3:11) 뿌리를 내려 공동체 전체가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야 함을 의미한다Green, Bauckham). 유다는 이러한 권면을 통해 수신자들이 거짓 교사들의 도덕폐기론에 미혹되지 말고 오직 복음에 근거해서 영적 성장을 이룸으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해야 함을 강조한다.

⭕ 성령으로 기도하며. - '성령으로'의 헬라어 '엔 프뉴마티'(*)는 '성령의 통제 안에서'라는 의미이다(마22:43; 막12:36; 눅2:27; 4:1; 롬8:9; 고전12:3; 계1:10; 4:2). 거짓 교사들은 스스로 영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정욕대로 불경건하게 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성령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롬8:26,27; 갈4:6; 엡6:18).

성 경: [유1:21]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페 데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Bauckham, Green). (2)혹자는 목적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haine, Cantinat).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문과 병행(竝行)을 이루는 요15:9의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가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순종함으로 이루어 진다.

⭕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 '영생'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도 향유하는 것이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한편 '긍휼'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대하는 종말론적 소망으로(마5:7; 딤후1:18; 마카비2서2:7; 에녹1서1:8; 5, 6; 27:4) 항상 하나님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라고 기술함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委任)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Bauckha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속죄 사역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3절, Green).

성 경: [유1:22]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 '의심하는 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도덕폐기론에 미혹되어 진리인 복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흔들리는 자들을 가리킨다. 수신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서 흔들리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보여줌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성 경: [유1:23]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 '불'은 지옥의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7절). 혹자는 '어떤 자'가 이미 불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Windisch) 불 속에 떨어지기 직전에 있는 자, 즉 그냥 내버려두면 불 속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Bauckham, Blum, Green). 한편 '끌어내어'는 슥3:2을 반영하는 것으로 거짓 교사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범죄 행위를 일삼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거부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으므로 지옥의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을 건져내어 형제애로써 책망하고 경고함으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마18:15-17; 눅17:3; 갈6:1; 살후3:15; 딤전5:20; 딛3:10; 약5:19,20).

⭕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 '육체'는 죄성이 있는 신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 교사들이 탐닉했던 육체의 죄를 의미한다(8,10절).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주장했던 잘못된 교리로 인해서 자유를 빙자한 방종으로 부도덕한 죄를 범하였고 그 죄로 인해서 자신을 부패시켰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보여줌으로 긍휼히 여겨야 하지만 그들의 죄에 전염되어 거짓 교사들처럼 죄를 탐닉하지 않도록 주를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의해야 한다.

성 경: [유1:24]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는 시편 기자들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질 지경에서 자신들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을 반영한다(시38:16; 56:13; 66:9; 73:2; 91:12; 116:8; 121:3-8; 140:4; 141:9). 신약 성경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요17:11; 롬16:26; 엡3:20; 살후3:3; 계3:10). 유다는 이러한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교리 그리고 부도덕성에서 보호하셔서 파루시아 때에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하실 것임을 드러냄으로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한편 '흠이 없게'의 헬라어 '아모무스'(*)는 제사 용어로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실 것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온전하게 하셔서 자신의 존전(尊前)에 담대하게 그리고 즐거움으로 설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성 경: [유1:25]

주제1: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

주제2: [경계와 권면]

⭕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게'에서 '구주'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유대적 용어로서(시94:1) 신약 성경에서는 드물게 하나님께 사용된다(눅1:47; 딤전1:1; 2:3; 4:10; 딛1:3; 2:10; 3:4). 또한 '홀로 하나이신'의 헬라어 '모노'(*)는 유대인 신앙 고백에서 독특하게 사용되는 '유일신이신 참 하나님'을 나타내며 신약 성경의 송영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고백이다(딤전1:17; 6:15,16). 한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며 성도들은 오직 그를 통해서 하나님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벧전4:11). 유다는 참 구원자이시며 참 신이신 유일한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하나님의 네 가지 속성이 있을 것을 찬양하고 있다.

⭕ (1)영광. - 이것은 모든 송영에서 거의 발견되는 하나님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로서 광채를 가리킨다.

⭕ (2)위엄. - 이것은 영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신적인 본질로서 하나님의 경외스러운 초월성을 나타낸다(Kelly).

⭕ (3)권력. - 이것은 송영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딤전6:16; 벧전4:11; 5:11; 계1:6; 5:13) 하나님의 힘(God's power)을 가리킨다.

⭕ (4)권세. - 이것은 권력과 밀접한 의미를 지니나 특히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