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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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요한일서주석



성 경: [요일1:1]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들은 바요'(*,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성 경: [요일1:2]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 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성 경: [요일1:3]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 본절에서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귐'이다(Stott, Barker, Smalley, Wilder). 요한이 본절에서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다(2:3). '사귐'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노니아'(*)는 문자적으로 '공동 소유', '협동'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공동자금을 모금한 '서로 나눔'의 의미(롬 15:27; 고전 9:23; 고후 13:13) 둘 다를 함축한다(Smalley, Barker).

⭕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본문은 1절 전반부부터 암시되어 온 예수의 이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본질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임을 분명히 제시함으로 그 사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임을 시사한다(2:1; 3:23; 4:2; 5:6, 20, Smalley, Wilder).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는 수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예수의 인성이나 신성을 경시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내포한다(고전 1:9, Smalley, Stott).

성 경: [요일1:4]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 본문은 요 15:11을 반영한다.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사귐의 결과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Smalley, Stott).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불완전하므로 기쁨 또한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귐 가운데 누리는 완전치 못한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사귐과 기쁨의 표징이며 보증이다. 그러기에 이 기쁨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헌신적인 사귐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요일1:5]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36:9; 119:130; 사 5:20; 미 7:8b;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8:12; 9:5;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8,10절; 2:4,6,9;눅16:8; 요 8:12;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성 경: [요일1:6]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5절)는 말씀을 전제로 하여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적 사상에 빠져 물질 세계를 악한 것으로 배척함으로써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로 인해 그들의 행위는 방종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사귐이 있다는, 하나님의 본성과 선하심에 모순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헌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진리인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그릇되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Smalley). 그리스고 안에서 생명을 부여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된 삶을 상징하는 어둠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Smalley, Stott). 한편 '행하면'의 헬라어 '페리파토멘'(*)은 문자적으로 '동행한다'라는 의미로 구약 성경에서 유래된 표현이다(2:6, 11; 창 17:1; 왕상 2:4; 왕하 20:3; 요 8:12; 요이 1:4). 이것은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의 일부이며, 계속해서 최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함을 내포한다(Barker). 그러기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때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빛 가운데의 삶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귐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성 경: [요일1:7]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요한은 계속해서 빛과 어두움위 이미지를 대조하고 있다. 어두움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빛 안에 거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필수 요건이 된다. 그런데 그 '빛'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시다(Smalley, Wilder).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사귐을 가능케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에 대해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은 단순히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귐을 성취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함을 암시한다.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위 대속의 사역을 가리킨다. 또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된 성품까지 깨끗하게 하심을 의미한다(Barker, Stott, Smalley). 이러한 두 가지 결과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비롯된 것이다(Smalley).

성 경: [요일1:8]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죄없다 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안우크 에코멘'(*)은 죄가 자신들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것을 암시한다(Low, Brooke, Barker, Smalley). 죄가 부재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속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거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거부할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

성 경: [요일1:9]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롬 3:25; 고전 10:13; 딤후 2:13; 히 10:23; 11: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카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성 경: [요일1:10]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요한이 염두에 둔 영지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이 6, 8절에 이어 세번째로 소개된다. 본절에서 요한은 보다 보편적인 진리를 통해 도전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인간 전체가 범죄하였으며 죄에 신음하고 있음을 선언하셨다( 시 14:3; 사 53:6; 요 2:24, 25; 룸 3:2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며(렘 31:34; 엡 4:32)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요 16:8; 롬 8:1, Smalley). 한편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선포된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증거가 이들 이단적 경향을 가진 자들에게 수용될 여지가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죄를 부인하는 것은 구원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말씀과 빛 가운데 살 수 없게 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를 바랄 수 없게 함을 시사한다(Barker).

성 경: [요일2: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성 경: [요일2: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혹자는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혹자는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성 경: [요일2: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계명'(*, 타스엔톨라스)은 구약성경에서 십계명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출 20:2-17)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 되었다(마 22:37-40;롬 13:8-10;갈 5:14). 이러한 계명에의 순종은 비록 하나님을 아는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앎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Bultmann, Smalley).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Barker).

⭕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알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코멘'(*, '지식')는 본서나 요한복은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도덕 폐기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절대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취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인 관계이다(Smalley). 그래서 요한은 '아는 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완료 시상인 '에그노카멘'(*)으로 표현하여 과거에 알았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멸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Stott) 보다 세밀하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성 경: [요일2: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다. '저를 아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장이다(요 17:3).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인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한다. '지키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론'(*)은 3절의 '테로멘'(*, '지키면')과 같이 현재 시상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를 아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1:6). 여기서 '진리'는 요한이 '구원의 복음'이나 '참된 것'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도덕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성 경: [요일2: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개역성경에는 '드'(*,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과 연결된 상반된 측면의 진술임을 시사한다.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 '그의 말씀'(*, 아우투 톤 로곤)에서 '그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의 '계명' 대신에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도덕적인 계명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복음의 내용에 대한 순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arker). 한편 '지키는'의 헬라어 '테레'(*)는 현재 시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데우'(*)에서 나타난 속격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주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Houlden, Bultmann). (2) 혹자는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3) 혹자는 특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일종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본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견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온전케 되었나니'의 헬라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전과 성숙의 개념을 내포한다(Barker). 더욱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는 완전과 성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성숙의 과정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어가며 완전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요일2: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대언자이신 그리스도]

⭕ 저 안에 거하는 자는. - '저'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tott) 문맥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그러기에 '저 안에 거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시사한다. 이 내주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5절).

⭕ 그의 행하신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 본문은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자들의 삶 속에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나탸낸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는 상반절의 '저'와는 달리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Stott, Smalley, Barker). 왜냐하면 본서에서 '에케이노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3:3, 5, 7, 16;4:17). 한편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텐센'(*)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계명은 물론 복음에 대해 순종함이 그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성 경: [요일2: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성 경: [요일2: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성 경: [요일2: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은 문자적으로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요 15:4), 그리고 본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빛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수신자 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성 경: [요일2:10]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 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셩젤마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다.

성 경: [요일2:1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본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메고 있다.

성 경: [요일2:1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행 4;12;10:43;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하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성 경: [요일2:1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혹자는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3:12;5:18, 19;요 17;15;엡 6:16;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골 2:15;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성 경: [요일2:1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성 경: [요일2:1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성 경: [요일2:1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2)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3)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성 경: [요일2:1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새 계명]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세상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명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3;14;5:11, 12;고후 4:18).

성 경: [요일2:1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열국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될 날을 기대하였다(사 2:2, 3;겔 38:14-23).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이러한 메시야 대망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루시아 때의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지막 때'(*, 에스카테 호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엄은 의미의 말세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거나 혹은 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세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징후나 성격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ooke, Dodd). (2) 혹자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여 마지막 날들 중의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요한복음에서 '시간'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요 2:4;4:21; 7:30; 8:20;12:23)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Barker).

⭕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적그리스도'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는 관사가 없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문의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적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안티크리스토 폴로이'(*, '많은 적그리스도')가 복수인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안티크리스토스'에서 접두어 '안티'(*)를 '적'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w, Stott, Dodd). 요한이 이러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 많이 나와 있음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다(요이 1:7, Smalley).

성 경: [요일2:1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 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 판테스 여스 헤몬'(*)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다'(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스'(*)는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 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Smalley).

성 경: [요일2:20]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 성경에서 '거룩하신 자'라는 칭호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1)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78;41;사 1:4;합 3:3). (2)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4:18;15:26;16:7;행 2:27;3:14).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 '기름 부음을 받고'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 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한 것을 반영한다(Dodd, Schnackenburg).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의식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기름 부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눅 4:18;요 14:17;15:26;16:13;행 4:27;10:38;고후 1:21, 22, Barker, Stott, Smalley).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성유식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진정한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판테스'(*)는 '너희 모두가 안다'(you all know, RSV)나 '너희 모두가 진리를 안다'(all of you know the truth, NIV)를 의미한다. 두 가지 중 후자에서 '진리를'이 삽입된 것은 다음절과의 연관성을 나타낸 해석이다. 요한은 본문은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극소수만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을 수신자 공동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진술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다(Smalley). 또한 극소수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한은 '너희 모두'라고 진술하여 수신자 공동체 중 일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영지주의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요일2:21]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본절은 세 개의 '인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 사용된 '호티' 중에서 처음 두 번에 대해 혹자는 선언이나 진술을 나타내는 서술격(that,'...것')이라고 주장한다(Blutmann, Haas, Schnackenburg). 그러나 세 번 중 처음 두 번의 '호티'는 원인격(because, '때문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왜냐하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이 모두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서를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세번째 '호티'에 대한 해석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원인격으로 보아 본문이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2)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쓴 것'과 연결시킨다(Schnackenbu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나는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 (3)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너희가...앎을'과 연결시킨다(Dodd, Smalley).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거짓이 진리에게서 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앞에 나타난 두 번의 '호티'를 원인격으로 기술함으로 수신자 공동체가 기름 부음을 받아 온전히 진리를 식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마지막'호티'를 서술격으로 사용함으로 '거짓이 진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성 경: [요일2:22]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앞절에서 진리가 '거짓'에서 나올 수 없음을 선언한 요한은 본절에서 '거짓'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4:2, 3;요이 1:7). 이들은 예수께서 참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요 12:44, 45).

성 경: [요일2:23]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결과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없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에케이'(*)와 '있느니라'의 헬라어 '에케이'(*)에서 '에케이'는 문자적으로 '가지다'란 뜻이다. 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영적인 경험을 시사한다. 또한 본장에서 '에케이'는 '거하다'의 헬라어 '메노'(*)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여(24, 27, 28절) 확신의 동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으며(요 1:18;14:9)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 2절;요 14:6).

성 경: [요일2:24]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리라. - (*, 휘메이스 호에쿠사테 아프 아르케스 엔 휘민 메네토). '처음부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개종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2) 혹자는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처음 복음을 선포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들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선포된 복음을 들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과거에 사도들이 선표했던 복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리라고 명령한다.

⭕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엔 휘민 메이네 호 아프 아르케스 에쿠사테'(*)이다. 본문의 헬라어 어순과 본절 상반절의 헬라어 어순을 살펴보면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너희 안에'에 해당하는 '엔 휘민'(*)이 상반절에서는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20절) 수신자 개인의 삶에 거하고 있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상반절에서는 '에쿠사테'(*, '들은')가 '아프 아르케스'(*, '처음부터')보다 앞에 기술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아프 아르케스'가 '에쿠사테' 보다 앞에 진술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상반절에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복음이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요한의 강조점이 아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때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상호간의 내주가 성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거하리라'의 헬라어 '메네이테'(*)는 상반절에서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미래 시상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를 통한 현재의 영적 경험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Smalley).

성 경: [요일2:25]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2)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uld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약속'은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나 성경 전체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성경은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완성되며(행 13:23;롬 15:8;고후 1:20-22)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치할 것이라고 말한다(갈 3;16;엡 2:12;히 10:23;11:13, 39, 40).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속받은 자들이 약속된 성령에 의한 새 시대, 즉 메시야 시대의 종말론적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눅 24:49;행 1:4, 5;2:33). 목회 서신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이 영생임을 진술하고 있다(딤전 4:8;딤후 1:1;딛1:2).

⭕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들을 알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인 영생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성 경: [요일2:26]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미혹케 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플라논톤'(*)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들의 특성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마귀의 특성을 닮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요한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미혹행위가 지속적인 것으로서 현재에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썼노라'의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간체 부정 과거이다. 이 '에그랖사'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의 시점, 즉 수신자 공동체가 본서를 받아보면서 요한의 기록 시점을 생각하는 당시 표현 방식이다.

성 경: [요일2:27]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 24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수신자 공동체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요한은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수신자들이 거룩한 자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름 부은'은 성령을 가리킨다(20절 주석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진리이시다(5:7).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5:28, 42;고전 12:29;엡 4:11;딤후 2:24)과 상치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은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 5;요이 1:9, 10, Schnackenburg).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 그런 반면에 당시에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Brooke, Houlden). 한편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는 요한복음에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성격과 병행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 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요14:26). 이런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과 대조를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은 지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을 소유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 안에 거하게 한다.

⭕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스 에스틴 카이 우크 에스틴 프슈도스'(*)는 문자적으로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스틴'(*, '이다')의 주어인 그것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가르침보다는 기름 부음 자체를 가리킨다(Smalley). 기름 부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 전체가 참되며 거짓이 없다. 한편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의 주어는 '기름 부음'으로 보기 보다는 '예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가르치신'의 헬라어 '에디닿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어서 예수께서 지상 사역 때에 행하신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Smalley).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신다(요14:26).

성 경: [요일2:28]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 본문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요약한 것이다. '그 안에 거하라'는 본장에서 자주 언급된 권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사랑하라'는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의 내주는 그리스도인들로 약속된 영생을 소유하게 한다.

⭕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나타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데'(*)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역사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파네로데'와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아'(*)를 연결시켜서 그리스도게서 눈에 보이게 광채를 입고 재림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Barker).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약성경에서 31번이나 나타나며 그 중에서 13번이 요한이 쓴 책들에서 나타난다. '파르레시안'은 헬라 세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나(행4:29; 고후7: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딤전3:13; 히10: 19) 담대함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요일2:29]

주제1: [빛 가운데 행하는 성도의 삶]

주제2: [적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계]

⭕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표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의'이다. 여기서 '그'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나(Smalley)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w, Barker, Stott). 왜냐하면 다음 절인 3:1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되어 있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본장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3-6절).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성 경: [요일3:1]

주제1: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

주제2: [하나님의 자녀]

⭕ 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데테'(*)는 감탄사의 역할을 하는 명령형으로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복수 형태는 가시적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어법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음을 암시한다(Smalley, Westcott).

⭕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 '어떠한'의 헬라어 '포타펜'(*)은 신약 성경에서 대개 놀라움이나 경탄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마8:27; 막13:1; 벧후3:11), 본문에서는 '어떠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의미한다(Brooke). 한편 '자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는 실제적인 부자 관계에서의 자녀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이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주로 '휘오스'(*, '아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법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Plummer, Wilder).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써 값없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