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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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주석(1장-28장)



성 경: [마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계보 개관(槪觀)]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 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 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 자손(*, 휘오스).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 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란 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 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성 경: [마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 낳고(*, 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성 경: [마1: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 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성 경: [마1: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성 경: [마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성 경: [마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 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 11:3)라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 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다시금) 덧입은'(*, 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성 경: [마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를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마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성 경: [마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전까지의 계보]

⭕ 웃시야는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12;왕하 15:13, 17-20비교)와 동일 인물이다.

성 경: [마1:1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벨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성 경: [마1: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고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벨론 유수(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왕하 24:6-16), 바벨론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벨론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편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고냐와 바벨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Gundry). 한편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마1: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이다.

⭕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체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벨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 곧 형수(兄嫂)에게서 스룹바벨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바벨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벨은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성 경: [마1:13-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름들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다.

성 경: [마1: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러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 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 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스도가 인간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라식 음역이라고도 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떤 것이 되었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성 경: [마1: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치(Monarchy), 제3의 14대는 성직 정치(Hierachy) 등으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價)가 도합 14(다렐<*>이 4, 와우<*>가 6, 다렐<* >이 4)가 되기 때문이다. 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明期)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렘 22:30), 포로 이후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 경: [마1: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 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 후토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 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 예식을 끝내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11;골 1:15-19).

성 경: [마1: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하고자 하여'(*,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서서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 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마1:2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 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 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 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성 경: [마1:2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 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닌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벨(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자기 백성(*,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 경: [마1:2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성 경: [마1:22-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 13:35;21:4; 26:56;27: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성 경: [마1: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마1:2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성 경: [마1:2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훗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성 경: [마2:1]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 헤롯왕 때에 - 마태는 예수의 탄생 시기가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던 기간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탄생 일자를 기산(起算)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의 왕통이 단절되고 이방인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실현됨으로써 '홀(笏)이 유다를 떠나고, 치리자(治理者)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남으로, 지금은 실로가 오실 때이며, 백성이 그에게 복종할 때'(창 49:10)라는 야곱 예언의 성취를 묵시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본절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있다. 여하튼 여기 '헤롯왕'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Idumean) 안티파터(Antipater)의 아들로서 주전 73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영웅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팔레스틴 인접 지역을 B.C. 55년경부터 A.D. 93년까지 통치한 왕조의 실질적인 중흥자였다. 실로 그는 25세에 이미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했고 그러한 탁월한 정치력으로 로마군의 도움을 받아 그의 반대 세력을 팔레스틴에서 완전히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하여 계속되는 로마 정권의 교체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각종 건축사역(극장. 원형 경기장, 기념비, 우상 제단, 성채<城砦> 등)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고된 부역을 강요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제 3성전) 사역을 B.C. 20년에 시작하여 그가 죽은 뒤인 A.D. 68년에 완성시킴으로써 주위로부터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10명의 아내두었고, 그중 에돔 출신의 첫 아내 '도리스'(Doris)에게서 안티파터(Antipater)라는 아들을 얻어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가 죽기(B.C. 4년) 수일 전에 그의 과대 망상증으로 그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마카비가(家) 출신의 둘째 아내 마리암네(Mariamne)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으나 그들 역시 그 어미와 더불어 살해 당하고 말았다. 또한 대제사장 시므온의 딸이었던 미리암네 2세를 세번째 아내로 맞아 이두메의 분봉왕이 된 빌립 1세를 낳았다. 한편 사마리아 출신의 넷째 아들 마르다게(Malthace)에게서 아켈라오(2:22)와 안티파스(Herod Antipas;14:1)를 낳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출신의 다섯번째 아내 크레오파트라(Cleopatra)에게서 칼시스(Chalsis)와 빌립 2세를 낳았다. 이러한 가족 관계에 대한 도표는 신약 서론 참조하라. 여하튼 헤롯은 B.C. 4년에 매우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70세를 일기로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19절).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본문이외에는 성경 어느 부분에서도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 일자를 산출하는데 많은 애로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해롯이 B.C. 4년에 죽었기 때문에(Schurer) 적어도 예수는 그전에 태어났음이 틀림없다고 믿어왔다. 한편 헤롯의 사망 일자에 대해서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죽기 전에 월식(月食)이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 B.C. 4년 3월 12-13일로 측정케 했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의 전승은 헤롯이 죽은 후 유월절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이때를 B.C. 4년 4월 11일 경으로 추정케 한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적(政況的) 증거로 보아 예수의 탄생 연대는 B.C. 5년 후반기나 B.C. 4년 초반기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 유대 베들레헴 - 이 베들레헴은 '유대'(in Judea)라는 단어와 함께 쓰임으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위치한 스불론지파의 베들레헴(수 19:15)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 두 단어가 함께 쓰인 것은 2절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에 대한 암시인 듯하다. 한편 구약때 이 지명은 주로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로 불리어졌었다(창 48:7;룻 1:2;삼상 17:12;미 5:2).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 남방 8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메시야가 탄생할 곳으로 예언된 장소이자(미 5:2) 유대의 실질적인 건국(foundation lf a nation)을 이룬 다윗왕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 16:1-18). 여기서 히브리어 지명 베들레헴(*, 베트레헴)은 '떡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아마 그 지역이 곡식과 과실이 풍성한 비옥한 곡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이 지명과 걸맞게 온 인류에게 풍족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이곳에서 출생하신 것이다(눅 2:4).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 본 문장의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이두'(*), 곧 '보라'는 감탄사가 원문에 언급되어 있다(1:20). 이는 저자 마태가 본문이 지니는 중요성과 그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술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내방(visit)한 방문객의 출발지와 그들의 지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동방으로부터'의 헬라어 '아포 아나톨론'(*)은 '떠오르는' 이란 뜻의 '아나톨레'(*)에서 유래한 말로서 '동쪽으로부터의'(from the east, NIV)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 '동방'을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향 특정한 땅, 곧 페르시아(Vincent), 바벧론, 메데(Carr), 아라비아, 또는 동쪽에 위치한 모든 곳(Bruce)이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적 해석 이외에 문화가 발달한 지역일 것이라는 관점에서 소아시아, 애굽, 인도, 그리이스 등지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같은 다양한 견해들 중 '동방'이 바벧론이었다는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D.A. Carson). 왜냐하면 바벧론에는 예루살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유대인 포로들이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메시야에 관한 구약 예언을 사전(事前)에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이 유대인과 긴밀한 유대(紐帶) 관계에 있었던 자들임을 암시하며(Wycliffe),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대거 운집해 있던 바벧론에 거주하던 자들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박사(*, 마고이)들의 신원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여기 '박사'로 번역된 '마고이'는 박수나 점장이 등의 엉터리 마술사가 결코 아니었고 꿈을 해석하는 신통력을 지닌 메데, 바사, 또는 바벧론의 제사장읕 언급할 때에 주로 사용되었다(단 2:2, 48;4:6, 7). 특별히 이 용어는 이 때로부터 600년 전에 바벧론의 모든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 어른으로 높임 받았던(단 5:7, 11) 다니엘에게 적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훗날 그리이스에서는 이 용어를 마술사와 박수 등의 의미로 사용하였다(행 8:9;13:8). 한편 터툴리안(Tertullian, A.D. 255년경 사망) 당시의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마고이'가 왕들이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것은 왕들이 와서 메시야를 경배할 것이라는 구약예언들(시 68:29, 31;72:10, 11;사 49:7;60:1-6)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듯하다. 여하튼 박사들이 (1) 점성학적 계산에 따라 자극을 받고 베들레헴을 향해 온 점, (2) 디아스포라(Diaspora)의 영향 등으로 다니엘의 예언 및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각종 예언에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볼 때 '동방 박사'는 바벧론 출신의 천문학과 점성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존귀한 자들로 볼 수 있다. 6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이름이 각각 멜콘(Melkon, 후에는 Melchior로 밝혀짐), 발사살(Balthasar) 그리고 가스퍼(Gasper)로 밝혀진 바 있다.

⭕ 예루살렘에 이르러 -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를 찾기위해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성 경: [마2:2]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 유대인의 왕 - '다윗의 자손'(1:1;9:27;12:23;15:22 등)이란 말이 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메시야의 별칭이었듯이, 이 명칭은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메시야의 별칭이었다. 실로 '메시야 대망'은 모든 유대인의 공통된 현실이었거니와 바벧론 유수 사건으로 인해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에 의하여 유대에서 나시는 메시야가 유대를 구하고 온 세상이 그로 인해 축복받는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었었다(Josephus).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이 이름으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으심으로써(27:37) 당신의 메시야성을 직.간접으로 드러내셨다.

⭕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 동방 박사들의 이러한 질문은 그들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 사실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왕이 이미나셨고, 그 사실을 모든 유대인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정작 메시야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ironical)한 일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는 단순히 혈통적 '유대인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영적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것이 분명하다.

⭕ 그의 별 - 별을 통해 인간의 중대사(重大事)를 결정짓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관례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한 자연 현상으로서 별을 이용하셨다. 그런데 이 별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1) 자연계의 일반적인 현상과는 무관한 이적적 현상이다(Chrysostom을 위시한 대부분의 초대교회 교부들 및 초기 기독교 문서들), (2) 실재하지 않은 심리적 현상이다(Spinosa 등), (3) 혜성(혜성) 또는 폭발로 인해 엄청난 양의 빛을 몇 주 정도 발하는 초신성(超新星)이다(Kepler, Martin, Schubert 등)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존을 확신할 수 있듯이 이 별의 실제적 현상 역시 인정할 만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코 과학적으로도 모순되거나 결함이 없다는 점에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적절한 것 같다. 한편 본서의 저자 마태는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적어도 민 24:17의 발람의 신탁(神託), 곧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묵시적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염두(念頭)에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태는 초대 기독교 문서들에서 가끔 발견되는 '별'에 대한 무분별한 알레고리칼(Allegorical)한 해석법으로는 본문을 접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본문과 민수기는 둘 다 '별'을 이스라엘의 왕,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약 성경에는 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를 적절히 묘하해 주고 있다(밸후 1:19;계 22:16).

⭕ 경배하러 왔노라 - '경배하다'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신약 성경에서 그 대상으로 대부분 하나님과 예수를 두었다(8, 11절). 그러나이 말은 일반 헬라어에서 넓은 의미로 '복종하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 단어를 근거로 지나치게 그리스도론 정립에 적용시켜서는 안된다(Broadus). 따라서 여기서는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알아보고 '경배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여기서 '경배'는 페르샤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을 연상케 하는 말로서 무릎을 꿇고 상대방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는 예(禮)를 가리킨다.

성 경: [마2:3]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 말 초반부에 부드러운 반대 의사를 나타내는 접속사 '데'(*)가 들어 있다. 따라서 본절이 시작하기 전에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 경배코자 한 것과 대조적으로'라는 말이 의미상 첨가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유대인의 왕'의 탄생 소문은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던 70세의 늙은 헤롯왕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와 더불어 메시야를 갈망하던 예루살렘 백성들까지 헤롯의 병적인 정도의 잔인한 학정(oppressive government)과 또는 왕권 교체에 따르는 정변(political change) 등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사실 헤롯은 전에 그의 과대망상증 때문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5명의 마카비 용사들을 살해하기까지 했었다(1절 참조). 한편 백성들의 이와 같은 우유부단한 태도는 예수의 생애 속에서 끊임없는 배척으로도 이어졌고 마침내 '자기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비극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 소동한지라 - '소동하다'는 뜻의 혤라어 '타랏소'(*) 는 '뒤흔들리다', '당황하게 하다', '무섭게 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서 그 당시 예루살렘 성내(城內)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실로 헤롯은 자기 왕권의 위기 의식 때문에, 메시야의 오심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지 못했던 백성들은 사회, 정치적 혼돈과 생존에의 위협 때문에 심각한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곧 평화의 왕이시자 모든 역사의 처음과 끝이 되신(계 1:8) 예수의 도래가 악인들에게 미칠 궁극적인 영향력이 어떠한가를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성 경: [마2:4]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왕이...서기관들을 모아 - 이 모임을 산헤드린 공회(Sanhedrin)로 보는 학자(De Wette)도 있으나 그보다는 주로 종교적 문제들에 대해 헤롯의 자문 역할을 하던 개인적인 성격의 단체(Bruce, Vincent)로 보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결국 이 자문 위원들은 기나긴 역사의 면면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듯이 진리를 외면하면서까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애썼던 권력의 하수인들이라 볼 수 있다.

⭕ 대제사장 - 헬라어 원문에는 '대제사장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이라는 복수로 기록되었다. 이는 그 당시의 대제사장 제도를 반영한 표현으로서 여기 '대제사장'은 헌직 대제사장과전직 대제사장 및 대제사장 가문에서 유력한 인물 등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그러나 원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후손만이 할 수 있는 영구직이었으나, 헤롯이 율법을 어기고 대제사장을 임의로 면직 또는 임명하는 불법을 자행함으로써(Josephus) 종교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 그같은 사실은 솔로몬 성전 이래 바벧론 포수전까지(약 410년간) 18명의 대제사장이 교체된 것에 비해 스룹바벧의 성전 재건 후부터 헤롯때까지(약 420년간) 300명이 넘는 수의 대제사장이 교체된 것으로도 중명될 수 있다.

⭕ 서기관 -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일반 서기관은 주로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였는데(행 19:35) 비해 유대 종교 집단내의 서기관은 구약 율법에 능통하며 구약의 구전(oral tradition)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일종의 율법 해석자요 교사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율법사(lawyer)로 불리워지기도 했고(22:35) 때로는 랍비로 호칭되기도 했다. 당시 시민법의 상당 부분이 서기관들의 해석에 근거해서 만들어졌을 정도로 그들의 권위는 대단했다. 한편 그들은 대부분 바리새인 출신들이었는데 반해 그들과 경쟁적 관계에 있던 대제사장 계급은 대부분 사두개인 출신들이었다고 한다(D.A. Carson). 따라서 당시 헤롯이 체질적으로 함께 모이기를 싫어하는 이들 두 계급 사람들을 동시에 부른 데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한 학자들도 있다(Schweizer). 그러나 간ry한 헤롯이 이 두 부류의 견해를 동시에 수렴함으로써 '유대인의 왕' 탄생에 관한 사건이 종교, 역사적으로 거짓이 아닌지에 대한 사실 여부를 명확히 알아보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부류를 동시에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D.A. Carson).

⭕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 헤롯은 그리스도(1:1)와 유대인의 왕(2:2)이 동일 인물이며,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자의 칭호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27:37).

⭕ 물으니(*, 에퓐다네토) - 동사시제가 미완료형으로서 질문이 집요(執拗)하리만치 끈질겼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말은 종종 '시험삼아 물어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헤롯이 어떻게든 자신의 의구심을 풀어보려는 깊은 갈증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성 경: [마2:5]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가로되...기록된 바 - '기록된'(*, 게그라프타이)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들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본문의 '선지자로'에서 '로'는 헬라어 '디아'(*)에 해당하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지자를 '통하여' 기록된 것을 의미한다. 즉 전치사 '디아'는 구약의 예언을 전한 선지자가 말씀의 궁극적인 근원이 아니라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 일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1:22).

⭕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 헤롯의 질문에 조금도 주저치 않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 미 5:2에 근거하여 예언된 메시야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지적했다(1절). 이는 그들의 해박한 성경 지식을 보여주며 더불어 그 당시 팽배해 있던 메시야 대망 사상을 반영해 준다. 실로 그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참믿음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기록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지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유대 땅...목자가 되리라 - 이 부분은 미 5:2의 인용이며, 삼하 5:2(대상 11:2)이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 기자 마태는 히브리 맛소라 사본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았고, 또 70인역(LXX)을 따르지도 않았다. 이처럼 마태가 독자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미 5:2과 차이가 나게 된 점을 살펴보면 (1) '베들레헴 에브라다' 가 여기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것은 '에브라다'가 고전적 표현으로서 시적(詩的)인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변형을 이룬 것 같다(Gundry). (2) 미가서의 '유다 족속 중에'가 '유대 고을 중에'로 바뀌어져 있다. 이 차이는 단지 '족속'이란 용어가 '고을'의 의인화된 표현이란 점에서 큰 무리없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3) '작을지라도'와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가 상반된다. 이 두 구절들의 전체적인 해석을 보면 이 차이가 단지 형식적(표면적)인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즉, 두 구절은 모두 베들레헴이 메시야의 탄생 장소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크게 드러 내놓을 곳이 못되지만, 이제 메시야의 탄생으로 크고 위대한 처소(處所)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Hengstenberg). (4) 한편 마태는 삼하 5:2에서 인용한 '목자'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의 목적은 미 5:2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다름아닌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을 성취하는 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양으로 비유된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먹여주시는 선한 목자(요 10:11) 가 되신다. 이를 가리켜 사도 베드로는 '영혼의 목자', '목자장'(牧者長) 등으로 표현하였다(벧전 2:25;5:4).

성 경: [마2:7]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이에(*, 토테) - 이 용어는 마태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막 9회, 눅 14회, 요 10회) 자주 사용한(약 90여회)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그리고 나서', '그때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적 의미로 사용된 본절 이의에는 대부분 단순히 다음 문장을 연결하는 연결사로 사용되었다(17절;3:5, 13).

⭕ 헤롯이 가만히 - 이는 헤롯이 은연(隱然) 중에 일을 추진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처럼 정치적 술수와 음모에 능통한 자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와 아이를 살리려는 요셉의 의로운 행동 '가만히'(1:19)와 대조적으로 헤롯의 '가만히'는 아이를 죽이려는 음모를 암시하는 사악한 행동을 묘사한 것이다.

⭕ 박사들을...자세히 묻고 - 아마도 헤롯은 박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극진한 예우로 대했을 것이다. 한편 '별이 나타난 때'를 묻는 헤롯의 질문을 통해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아직 감지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질문 속에는 어린 왕의 탄생기점을 알아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16절) 사내 아이들을 살해하려는 무서운 음모가 감추어져 있었다. 헤롯은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훼파된 다윗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간악한 계획은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던 셈이다.

성 경: [마2:8]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 헤롯은 박사들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었다는 자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박사들에게 염탐꾼을 딸려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이 빗나간 것(16절)임을 뒤늦게 알게되었다. 진정 그는 이 이방의 박사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으로 인한 지시(12절)대로 옴직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헤롯의 비상하고도 교활한 '지혜'를 아기 예수를 찾아가는 박사들의 '발' 밑에 놓이게 하시는(고전 2장) 하나님의 섭리가 명쾌히 드러나게 된다.

⭕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 자신의 추악한 음모를 은폐하기 위하여 경건을 가장한 혜롯의 위선이다. 아기 예수를 살해하기 위한 계략(stratagem)의 겉포장은 '경배'였다. 먼길을 마다 않고 자기 발로 걸어 와서 스스로 드리는 동방 박사들의 진정한 '경배'(2, 11절)와 어두운 데 웅크리고 앉아서 '나도...하게 하라'는 헤롯의 거짓 '경배'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거짓 경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로마 군사들의 모독과 조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7:29)

성 경: [마2:9]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 본서의 기자 마태는 분명히 '별'이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이 10절에서 별을 보고 기쁨을 표한 것은 적어도 별이 계속 보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그 당시 '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던 박사들이 그 '별'이 보이지 않게 되자(Meyer, Bengel)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장소는 당연히 예루살렘일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예루살렘을 찾았고, 또 그 당시 유대의 유력자 헤롯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헤롯의 경건하게 보이는 말에 고무(encouragement)되어 있었을 것이다.

⭕ 동방에서 보던 그 별 - 자신들의 지혜에 의해 길을 잘못 들었던 박사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밝 은계시의 별이 다시 나타났다. 실로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참 생명되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계시 뿐이다(시 119:105). 한편 본문은 박사들이 궁(宮)을 떠날때 이미 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낮이 무덥고 밤이 서늘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먼길을 가기 위해 밤에 별을 보고 여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Meyer).

⭕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 여기서 '문득'이란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갑작스런 상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의미상 첨가한 말이다. 이제 박사들은 다시 '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앞서 인도하여'라는 헬라어 '프로에겐'(*)은 서술적 미완료 시상으로 동작(인도)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즉 '손으로 이끌듯 계속해서 인도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이다(Chryststom).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 말이, 별이 동방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 옴직였다는 것과 베들레혭 상공에 계속 떠서 움직이고 있는 별을 보고 박사들이 왔다는 것(Bruce)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 말인지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사들은 그 별이 '유대인의 왕'(2절)을 가리킨다고 믿었고, 그 별은 그들을 '아기 있는 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 아기 있는 곳 위에...섰는지라 - 여기서 '있는 곳 위에'(*, 에파노 후 엔)란 '아기가 있었던 베들레헴의 한 특정한 곳 위에'로 볼 수도 있고, 그저 막연히 '베들레헴 동네 위에'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전자를 받아들인다면 이 사건의 초자연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받아들여 일단 베들레헴에 도착한 박사들이 수소문하여 아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할지라도 이 사건의 초자연성을 감소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여하튼 별은 아기가 '있는' 곳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굳게 '머물러' 있었다. 실로 그곳에 바로 인도(leading)와 축복과 그리고 구원이 있었다. 정녕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머물러서'(눅 18:40) 있는 곳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10]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저희가 별을 보고...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별을 보고'라는 말은 그들이 새삼스럽게 별의 나타남(7절)을 보았다기 보다, 아기 예수위에 '머물러 서'있는 별이 자신들의 기나긴 여행의 최종적인 목적지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1:23) 탄생을 드디어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는 말이다. 이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맛볼 수 없었던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그러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한 본문 중 특별히 '가장'에 해당하는 헬라 '스포드라'(*)는 '충만하여 차고 넘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며, '큰'(*, 메가렌) 역시 크고 놀랍고 장엄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두 단어의 만남은 결국 그 기쁨의 실체가 최상에 이르렀음을 암시향다. 그리고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에카레산 카란)는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라는 동일 어근의 중첩(重疊)으로서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기쁨을 기뻐했다'(they rejoiced with joy)가 된다. 이는 어떤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중첩해 사용했던 셈어의 영향을 받은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라 할 수 있다(Moule). 따라서 본문은 박사들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택한 백성들의 소동(3절)에 비하여 얼마나 값진 일인가. 그들은 샛별(벧후 1:19)의 인도를 따라 왔기 때문에 의(義)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뵐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의 기쁨은 자신들에게 닥친 크나큰 행운(메시야를 만나 보는 일)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 경: [마2:11]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집에 들어가 - 누가복음에는 '아기가 나신 곳'이 마구간으로 되어 있다(눅 2:7). 그에 비해 본문에는 '아기가 있는 곳'이 집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 박사들이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A.D. 14)의 명(命)에 의한 호적, 곧 인구 조사(눅 2:1)가 끝난 얼마 후(아마 수개월 경과 후, Wycliffe) 요셉이 거처를 마련한 다음이었을 것이다(Theophylact, Lenski, Alford등).

⭕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 여기서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헬라나 로마의 예법이 아니라 동방의 예법이다(2절). 동방 박사들이 경배했던 대상은 마리아와 '함께'가 아니고 오직 아기 예수 뿐이었다. 즉 그들은 헤롯에게나 아기의 부친과 모친에게도 경배하지 아니했다. 경배의 대상은 오로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한 분 밖에 없는 것이다(4:10).

⭕ 보배합 - 이 단어는 번역이 애매하게 된 것으로 '귀중품 상자'나 '보물 상자'를 의미한다. 그들의 '보배합'은 그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마음(예물)의 저장소였다(6:20).

⭕ 황금과...예물로 드리니라 - 이 내용은 이방의 왕들이 메시야 앞에 예물을 드리고 복종하게 될것이라는 구약 예언(시 72:10;사 60:6)의 분명한 성취이다. 한편 고대 동양 풍습에서는 왕을 알현(audience)할 때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상례(常禮)였다(창 43:1;삼상 9:7, 8;왕상 10:2;Derett, Clarke). 박사들이 헌상(offering to a superior)한 세 가지 예물 중 황금은 동서 고금을 통해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다. 그릭고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반질반질하고 향내나는 흰색의 액체이며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 껍질에 자국을 내어 얻는다. 또한 몰약은 역시 주로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서 상당히 고가(高價)의 향기를 지닌 액체이다(시 45:8;아 3:6). 이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내지는 마취제로 사용되었다(막 15:23). 그런데 고금의 많은 주석가들(Origen, Hendriksen등)에 의하면 이 예물 가운데 황금은 메시야 왕권을, 유향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그리고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왕과 제사장과 그분의 장사(葬事)되심을 각각 상징한다고 본다. 어쨌든 동방 박사들의 종교적 동기를 이해한다면 예물들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기서 예물이 세가지라는 사실에서 동방 박사들을 세 사람이라는 교회 전승이 형성되게 되었다. 어떤 전설(legend)에 따르면 완전 수에 해당하는 '12'명의 박사라고도 전한다. 한편 이 세 예물들은 모두가 값비싼 것들로서, 예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신하였을 때(14절)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성 경: [마2:12]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꿈에...지시하심을 받아 - 여기서 '지시를 받아'(*, 크레마티스덴테스)란 신탁(神託)으로 의문시했던 사실에 확실한 해답을 얻는 행위, 또는 공무(公務) 수행을 위해 조언을 받거나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앞으로의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치 못하고 주저했던 동방 박사들의 계시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응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Vincent). 그런데 여기 언급된 '꿈'은 본서의 초두에서 두번째로 나오는데, 첫번째(1:20)와는 달리 주의 사자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꿈은 아기 예수를 지키시기 위하여 헤롯의 악한 계획을 무산시키시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볼 수 있다(P. Gaechjter).

⭕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서 박사듸에게 헤롯의 눈길을 벗어나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길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정확히 어느 길로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다만 예루살렘을 피하여 사해의 남단으로 돌아갔든지 요단강을 건너 돌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예수를 참으로 만난 자는 지금까지 걸어 왔던 길을 버리고 다른 길, 즉 생명과 진리의 길(요 14:6)로 가게 될 것이다.

성 경: [마2:13]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애굽으로 피난한 예수 가족]

⭕ 저희가 떠난 후에 - 본절의 '떠나다'는 동사는 12절의 '돌아가다'는 동사와 같은 의미로서 본절 이하의 사건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주의 사자를 통한 애굽 피난 지시가 박사들이 떠난 얼마 후에 내려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박사들에게 지시가 임했던 시기에 같이 내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떠난 그 날 밤에 있었을 수도 있는 만큼 매우 근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 주의 사자가...현몽하여 - 요셉은 제 2차로 주의 사자의 계시(revolution)를 접하고 있다(1:20). 그런데 이번 계시의 요지는 당신의 아들인 메시야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나타내는 데 있었다.

⭕ 헤롯이...죽이려 하니 - 메시야에 대한 헤롯의 살해 음모가 이방인의 경배와 예물 바로 뒤에 다가왔다. 실로 이것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계속되는 배척과 수모(受侮)의 전조(前兆)가 되는 셈이다.

⭕ 일어나...애굽으로 피히여 -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겔데이스'(*)는 조금도 여유를 두지 말고 곧바로 행하라는 촉급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실로 유대인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께서 유대 땅의 환영을 받지 못하시고(요 1:11), 마치 도망자의 모습으로 이방 땅에 급히 피하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애굽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서 헤롯의 통치권밖에 있는 지역이며, 그 당시 약 100만명 정도의 유대인 집단이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한다(Philo, A.D. 40). 애굽 특히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헬라화된 거주민들을 위해 헬라어로 된 구약인 70인역(LXX)이 만들어진 것은 직어도 애굽에서의 유대인 지위가 상당히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例)이다. 한편 유대인의 애굽 피난 역사는 오래 전부터 행해진 것이었다. 그곳은 일찍이 흉년으로 인해 아브라함(창 12:10)과 야곱(창 46:6)이 내려간 바 있으며, 솔로몬 사후(死後)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난하였고(왕상 11:40), 포로 시대에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그곳으로 갔으며(렘 26:21-23;43:7) 특히 신구약 중간기 때는 시리아의 학정에 의해 그곳으로 많은 유대인이 내려가는 등 애굽은 유대인이 피난하기에 적지(適地)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식구들은 쉽게 애굽에 이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팔레스틴 계열의 외경 중 하나인 '예수 유년기의 복음'(Gospel of the Infancy)은 당시 애굽으로 내려간 예수의 각종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 내가...거기 있으라 - 아기 예수를 안은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애굽으로 간 것처럼 돌아와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즉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만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19, 20절) 애굽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지시는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피난 길 뿐만 아니라 피난 기간과 그 이후까지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성 경: [마2:14]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애굽으로 피난한 예수 가족]

⭕ 요셉이 일어나서...애굽으로 떠나가 - 여기서 '일어나서'에 해당하는 '에게르데이스'(*)는 수동태 제 1과거 시상으로서 주저함없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취한 것임을 나타낸다. 마치 1:24처럼 요셉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부각되어 있다. 실로 요셉은 그 밤에 출발하여 애굽의 변경까지 약 120km나되는 먼 여행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믿음이다(히 11:1, 6). '아기와 그의 모친'이란 구절은 본장에서 계속 나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추호(秋毫)도 실수가 없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마2:15]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애굽으로 피난한 예수 가족]

⭕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 헤롯은 추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비참히 죽어 갔다고 전한다(Josephus). 이러한 헤롯의 죽음(B.C.4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지시를 고대하던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와 함께 '나사렛'(23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도 초금욕주의자들인 에센파의 쿰란 종파 사람들은 B.C. 31년에 파괴되었던 그들의 본부에 돌아와 재건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에서 체류(stay)하는 동안에 그곳에 살고 있던 동족들의 도옴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애굽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유대 회당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유대인들의 접촉이 많았으며, 더불어 직업을 구하는 일이나 각종 생활 정보도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같은 부류의 직업인들끼리는 쉽게 동화(同和)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목수 출신의 요셉은 애굽 생활 중에 쉽게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들을 향해 글을 쓰고 있던 마태의 독특한 문장 표현이다(1:22). 즉 마태는 구약의 예언과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완성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졔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적 메시지(호 11:1)예수의 생애와 접목(grafting)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 마태는 예수의 애굽 피난 사실을 11:1의 말씀과 일치시키고 있다. 사실 11: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사건을 언급한 말이다. 그러나 마태는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그 사건을 예수께 적용시켰다. 즉 마태는 이스라엘(하나님의 자녀)의 역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의 생애 속에서 재현(reappearance)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구속사 전개의 정점인 예수의 개인적 생애에 신.구약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역사가 다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은 예수의 사역이 단순한 민족적 해방에 그친 모세의 사역을 넘어서 전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는 신약에서 이스라엘의 원형(原形)으로 종종 나타난다. 몇가지를 예시해 보면 (1)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시험(신 8:2, 3)-예수의 40일 금식 기도(4:2), (2)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포도나무(사 5장)-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15장), (3)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장자(출 4:22)-예수는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히 1:6),(4) 이스라엘은 다윗의 골육(삼하 5:1)-예수는 다윗의 자손(1:1) 등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어디에서나 구약의 역사와 율법을 예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看做)하고 있다. 즉 '예언의 성취'라는 말은 그것이 구약과 연결되어 구약의 예표의 실체(원형)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호 11:1은 단순히 출애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그 사랑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진행되는 동안에 펼쳐진 계시, 즉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그려진 그림과 같은 전형적(典型的)인 계시의 일부분을 제공했고, 마태는 그 계시의 '완전한 의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야 대망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민족적, 혈통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데서 결정된다.

성 경: [마2:16]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유아 학살]

⭕ 이에 헤롯이...속은 줄을 알고 - 여기서 '속다'는 뜻의 '에네파이크'(*)는 단순히 속다는 뜻 이상의 의미로서 '희롱(조롱)하다'는 강렬한 뉘앙스(nuance)를 담고 있다(Calvin). 따라서 박사들이 자기에게로 오지 않고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헤롯은 박사들의 태도를 기만(欺瞞) 이상인 자신을 희롱한 사실로 여겼을 것이다. 박사들이 자신의 교활한 음모를 꿰뚫어 보고 몰래 달아남으로 자기를 앉아서 '바보처럼'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이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헤롯을(1절) 못견디게 했을 것이다.

⭕ 심히 노하여 - 여기서 '노하다'는 뜻의 헬라어 '뒤모오'(*)는 거친 숨올 몰아쉬면서 분노하다는 뜻으로서 그당시 혜롯의 활화산같이 꿇어 오르는 극렬한 분노를 예감케 해준다.

⭕ 사람을 보내어...그 모든지경 안에 있는 - 헤롯의 칼날같은 명령이 실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는 약 8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베들레헴은 조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지경에'는 베들레헴 뿐 아니라 베들레헴 근교의 한적한 오두막까지를 포함한다(Meyer).

⭕ 사내 아이를...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헤롯은 자기가 찾는 아이의 나이를 정확히 몰랐다. 따라서 그는 장차 유대인의 왕이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모조리 살해하기 위해 살해 범위를 '2살 이하의 사내 아이'로 한정시켰다. 여기서 '두 살부터'는 '별이 나타난 때'(7절)에 근거하는 바, 이에 대한 견해는 (1) 아이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충분한 여유를 둔 것이다. (2)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근 2년동안이나 걸려 도착했다. (3) 박사들의 귀국 후 2년 만에 살해했다 등이 있는데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2살이하'란 말이 갓 태어난 신생아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회의적(懷疑的)이다. 대신 15개월 내지 20개월까지로(A.T. Robertson) 보기도 하며 좀더 넓게 6개월에서 20개월 사이까지로 보기도 한다(D.A. Carson) 당시의 분노에 찬 상황으로 보아 후자의 견해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당시 살해된 유아의 수효에 대해 대단히 많았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Alford) 있고 심지어 14,000명 정도로 추산(calculation)하는 전승도 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 조그마한 도시요 당시 주민이 1,2천명 정도였다는 점을 들어 단지 수십명 안팎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Farrar, Carr). 그런데 헤롯의 이러한 잔인한 살상극은 '유대인의 왕'에 대한 영적 무지의 결과이다. 즉 예수의 진상 도래는 로마 정복을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키 위해 오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헤롯은 살인마의 탈을 또 한 번 쓰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다루지 않고 있어 진위(眞僞)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마크로비우스(Macrobius)의 저서 '축제'(Saturaalia)에 보면 아구스도(Augustus) 황제가 '헤롯의 명령으로 시리아 지역의 두 살 이하 아이들이 살해 당할 때 그 속에 헤롯 자신의 아이도 포함되었다' 하면서 '차라리 그의 아들이 되기보다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권능과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손에서 예수를 거뜬히 건져내셨고, 세상의 왕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대해서 가소로이 비웃고 계셨을 것이다(시 2:1-6).

성 경: [마2:17]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유아 학살]

⭕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 마태복음에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며(16:14;27:9), 그 밖에는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성 경: [마2:18]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유아 학살]

⭕ 라마에서 슬퍼하며...라헬이...애곡하는 - 예레미야가 이 예언(렘 31:15)을 선포한 시기(여호야김 통치 초기)를 고려해 볼 때(렘 30:1-33:26) 주전 586년에 멸망한 유다와 베냐민의 포로 장면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라마(Ramah)는 베냐민 지파 성읍이며(수 18:25)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까우며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하는 곳이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Zelzah)가 있었다(삼상 10:2). 이러한 정황들을 익히 알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수를 바라보며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포로가 된 자손들, 즉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 40:1, 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은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라마에서 에브라다(베들레헴)로 가는 도중에 자식이 없어 슬퍼했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産苦)로 인해 죽은 사실(창 35:19,20)을 포로됨에 비유하여 예레미야가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마태가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에다 관련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마태가 여기에서 바벧론 포로 장면을 연결시키고 있는지 이해할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사건들의 초점은 베들레헴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바벧론 유수 때에는 다윗의 혈통에서 이어지던 왕권이 물러나고 이방의 속박으로 인하여 흘리던 탄식의 '눈물'이, 또다른 이방인(헤롯은 에돔인이었음)의 학정으로 살해된 베들레헴(다윗성이라고 불리우는, 삼상 16:1)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곧 그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오랜 포로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언약해 주신 새 언약(26:28;렘 31:31-34)이 온 이스라엘에 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마2:19]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헤롯이 죽은 후에 - 헤롯은 그의 통치 38년, 즉 로마 기원 750년(B.C.4년)에 70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었다. 한편 그의 최후를 기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 따르면 그는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며 악취와 경련이 끊이질 않아 백약이 무효하여 죽으니 그 모습은 잔인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의 죽음이었다 한다.

⭕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현몽하여 - 이는 요셉에게 나타난 세번째 현몽(現夢)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관심과 역사가 아기 예수의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이 엿보인다. 한편 마태는 요셉이 3차 현몽 당시에도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애굽 체류 기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외경 '예수 유년기의 복음'(Gospel of the Infancy)에는 약 3년간 애굽에서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이때 예수께서 고용 일꾼으로 일하셨고, 각종 이적을 베푸셨다고 전한다(Origen). 여하튼 예수의 가족이 애굽에 머무른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성 경: [마2:20]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요셉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시고 계신다. 여기서 이스라엘 '땅'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오직 20, 21절에서만 나오는 것으로서 6절의 '유대 땅'과 동일한 의미이다.

⭕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 여기서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란 단순히 혜롯을 지칭하는 막연한 묘사이다. 그런데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 호이제툰테스)이라는 복수 형태에 대하여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출 4:19을 인용한 것이다(Hill). (2) 헤롯이 죽기 5일 전에 죽었던 그의 아들 안티파터(Antipater)가 이 학살에 가담하였다(Meyer, Clarke). (3) '그들'이라는 복수대명사는 막연한 지칭일 수도 있고, 3인칭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Turner). 그 중에서 마태가 바로 앞 구절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한 호 11:1을 인용하면서부터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생애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모세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출 4:19 을 인용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2:21]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요셉이 일어나...들어오니라 - 여기서도 요셉의 절대 순종이 돋보인다. 아마 이때는 어둠을 틈타 행동해야 할 아무런 장애 요소가 없었기에 해가 있는 낮에 본국(本國)으로의 입국을 결행했을 것이다. 실로 '밤에' 떠났던(14절) 그들이 낮에 돌아오게 된 것이야말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절대 의지를 일견(一見)나타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2:22]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아켈라오 - 헤롯 사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63-A.D.14)가 헤롯이 관할했던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아켈라오(Archelaus)에게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주었고,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 I)에게는 바타네아(Batanea)와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를,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각각 주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한편 아켈라오는 그의 부친과 다름없이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로마에서 성장하여(Josephus) 로마 황제에게서 이스라엘의 분봉왕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만약 통치만 잘하면 '왕'의 칭호까지 부여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되어 A.D. 6년에 폐위당하고 축출되었다. 그런 관계로 유대지방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된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바로 그 무렵에 요셉은 식구들을 인솔하여 이스라엘 경내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시이저로부터 분봉왕으로 임명받기전부터 잔혹한 살상을 저질렀다 한다. 그 한 예로 그의 부친 헤롯이 죽기 전 자신이 성전에 세워 놓았던 금 독수리상을 훼손시켰던 유다와 맛디아라는 열렬한 애국자 둘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켈라오가 아직 즉위하기 전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이 두 순교자들을 위하여 애도(哀悼)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성전을 에워싸도록 하고서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요셉이 들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 아마도 그때 마태의 생각에는 요셉이 헤롯의 음모가 아니었다면 애굽으로 도피하기 직전에 머물렀던 베들레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했으며, 애굽에서 돌아올 때에도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린 메시야가 성장하기에 알맞은 곳은 예루살렘 성도(聖徒) 주변이지 '이방의 갈릴리'(4:15;사 9:1)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는 이곳 나사렛이 원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눅 1:26;2:4, 39) 그들의 나사렛 정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여하튼 이 현몽(現夢)은 그가 받은 네번째이자 마지막 현몽으로 이때 받은 '지시'(*, 크레마티조)는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의미이다.

성 경: [마2:23]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나사렛(*) -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유래한 말인데 '싹, 어린 순'이라는 뜻이다. 갈릴리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 약 9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비옥하지 못한 모래 땅, 주위의 산들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성읍이었다. 이곳은 구약성경에도 외경(外經)에도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도 나오지 않고 여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실로 나사렛은 경멸받던(요 1:46) 성읍의 하나였으나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루려함이러라 - 본절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구절은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음과 같은 여러 논쟁을 야기시켜왔다. 즉 (1) 구약 이외에 구전되어 오던 구절이거나 분실된 부분이다(Chrysostom, Zigabenus, Theophylact). (2) 나사렛의 뜻이 '싹'이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사 11:1)을 가리킨다(Jerome, De Wette, Vincent). (3) 나사렛의 어근은 나사르(*)로서 '구별'을 뜻하므로 '나실인'(민 6:2, 8)에 관련된다(Tertullian, Erasmus, Wetstein). 위와 같은 견해들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보다 타당한 해석은 다음 경우이다. (4) '선지자'(*, 프로페톤)란 용어가 복수 형태인 것은 한 특정한 선지자가 '메시야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시 22:6-8, 13;69:8, 20, 21;사 11:1;49:7;53:2, 3, 8;단 9:6, Michaelis, Paulus, Rosenmuller, Kuinoel, ol-Shausen). 실제로 나사렛은 멸시당하던 곳이었으며(요 7:41, 52), 심지어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조차 경멸당하던 곳이었다(요 1:46).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행 24:5)으로 취급되었을 때의 이 '나사렛'이란 단어는 비방과 모욕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다윗의 왕통에서 나온 줄기였고 조룽과 경멸을 받으며 비천한 환경에서 자란 왕이신 메시야였던 것이다.

성 경: [마3: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 세례 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스) -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은 '유앙겔리조마이'(*)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성 경: [마3: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마3: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퀴리오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 여기서 '첩경'(*, 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는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성 경: [마3: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 메뚜기(*,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양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성 경: [마3: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마3: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 요단강 - 히브리어 '야라드'(*,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 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 세례를 받더니(*,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성 경: [마3: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바리새인(*,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 사두개인(*,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 오는 것을(*,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6:16, 17).

성 경: [마3:8]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마3:9]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3:10]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성 경: [마3:1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성 경: [마3:1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성 경: [마3:1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 때에(*,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성 경: [마3:1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말려(*,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성 경: [마3:1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받는 종(사 42:1-9;49:1-6; 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성 경: [마3:1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 하늘이 열리고(*,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성 경: [마3:1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성 경: [마4: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시험 받으시러 광야로 가심]

⭕ 그때에(*, 토테) -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 성령에게 이끌리어 -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성령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 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 마귀(*, 디아볼로스) -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 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장이 (요 8:44)요,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본문 강해참조).

⭕ 시험을 받으러(*, 페이라스데나이) - '페이라조'(*, '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5)일 뿐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 결단(死生決斷)의 시험이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 광야 -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사 13:21;34:14;마 12:43;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성 경: [마4: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새애의 개시]

주제2: [시험 받으시러 광야로 가심]

⭕ 사십 일을 밤낮으로 -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왕상 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수(神性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o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예수께서는 40일 밤낮동안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동안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등). 어쨌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당신의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Godet).

성 경: [마4:3]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본질에 대한 시험]

⭕ 시험하는 자(*, 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 나아와서(*, 프로셀돈) -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단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했다기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야적 권능을 메시야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 문제(허기)를 해결하는대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된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가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단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앙을 하든 그것은 손으로 집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 아르토이)은 유대인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loaves)을 가리키는것 같다(Thayer).

성 경: [마4:4]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본질에 대한 시험]

⭕ 기록되었으되(*, 게그라프타이) -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벧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 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다.

⭕ 사람이...말씀으로 살 것이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 에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 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 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단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 생활의 헛점을 파고 드는 사단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원(元)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말씀'(*, 레마 데우)그 자체인 것이다. 이말씀이야말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한다(Trench).

성 경: [마4:5]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충실성에 대한 시험]

⭕ 데려가다(*, 파라람바네이) -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을 가리킨다.

⭕ 거룩한 성...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이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률 뜻하는 '프테뤼기온'(*)이 '작은 날개'를 의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우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위장하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의 메시야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 세우고(*, 에스테센) -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롤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성 경: [마4:6]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충실성에 대한 시험]

⭕ 뛰어내리라 -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심으로써 메시야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나꿔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케한다. 이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흑하는 것이었다.

성 경: [마4:7]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충실성에 대한 시험]

⭕ 또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 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Bengel, Calvin, Luther;Scriptura explicanda est). 신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 -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사건에 근거한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을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성 경: [마4:8]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의 순결성에 대한 시험]

⭕ 지극히 높은 산 - 누가복음에는 이같은 기록이 없다(눅 4:5). 어떤 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 내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지켜보았던 느보산(신 34:1-3)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모든 나라를 보실 수 있는 산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천하 만국의 영광'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귀와 시험의 객관적 실재(實在)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 천하 만국과 그 영광 -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Clarke). 사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De Wette, Meyer).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천하 만국'을 지도상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초자연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 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가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實際)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 세상의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고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것이지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the former)를 버리고 후자(the latter)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이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6:23).

성 경: [마4:9]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 순결성에 대한 시험]

⭕ 경배하면(*, 프로스퀴네세스) -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 당착(自家撞着)이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奸計)였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bow)이면 된다는 사단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 네게 주리라 -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 만국'의 정당한 소유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14:30;16:11), 공중의 권세잡은(엡 2:2) 타락한 신(고후 4:4)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endurance)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천하 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使嗾)한 사단과 함께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성 경: [마4:10]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의 순결성에 대한 시험]

⭕ 사단아 물러가라(*, 휘파게 사타나) - 시리아 사본(Syrian)이나 서방 사본(the Western)에는 16:23의 영향을 받아 '오피소 무'(*), 곧 '내 뒤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단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여하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단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決然)에 찬 예수의 명령이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단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personal name)인 '사단'(*)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막 1:13;3:23, 26;4:15;눅 22:3;요 13:27 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야 왕국이 사단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 온 것이다(12:25-28;눅 10:1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敵)인 사단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이다(고전 15:25, 26).

⭕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섬기라 -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다. 예수는 사단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한편 여기서 '경배'(*, 프로스퀴네세이스)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禮)를 갖추는 행위이다. 한편 70인역(LXX)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티라'(*), 곧 '경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섬김'(*, 라트류세이스)이란 원래 고용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경배'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 교호적(交互的)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 모노) 하나님만을 섬겨야(shall serve) 되는데 그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마4:1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시험을 이기신 예수]

⭕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위 앞에 마귀는 참패한채 그분에게서 패퇴(敗退)해 갔다. 여기서 '떠나고'(*, 아피에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한다(Hill).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첫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敗走)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 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崩壞)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번역치 않은 '카이 이두'(*)가 문두에 제시되어 이어지는 상황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수종들다'의 '디에 코눈'(*)은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게속적인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8:15;25:44;27:55;왕상 19:6, 7). 따라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氣盡)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에게 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隨從)들었을 것이다(Bengel, Bruce, Alford, Lange 등).

성 경: [마4:1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 '요한의 잡힘'에 대한 상세한 내력은 14:1-12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결심했을 때를 가리키는 대략적 시점을 표시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체포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들으시고'(*, 아쿠사스)는 '들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전후 문맥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히기 전 얼마동안 유대 지방에 머무시면서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17절;막 1:15), 세례를 베풀었다(요 3:22).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요한이 투옥된 때부터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 '물러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코레인'(*)은 종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어떤 위기의식에 따른 장소적 이동과 한적한 곳에서의 '은거'(隱居)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다스렸던 곳으로, 예수의 고향 동네이자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선교지로, 또한 은신처로 적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유대의 중심지인 예루살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의 갈릴리'(15절)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 갈릴리(*) -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히브리어로는 '고리', '주변'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복후 갈릴리 지방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건축 자재들을 공급한 대가로 갈릴리의 성읍 20을 준(왕상 9:11) 이후로 이 지방은 앗수르(왕하 15:29), 바벧론, 바사(Persia),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유행하고 있던 혼합 종교들과 제사가 갈릴리 지방에 유포(流布)되어 유대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웠으며,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요 7:41, 52) 여겨져 왔다.

성 경: [마4:13]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본절에는 이 일에 대한 동기가 분명치 않으나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한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고(눅 4:29-31)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갈릴리 정착에 대한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요 4:45)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버나움에로의 이거(移居)는 예수의 사역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해변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며,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 통로에 위치하여 예수의 사역에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참빛을 절대 필요로 하는 흑암의지대로서 예수 선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비쳐졌으며 그들의 눈에는 메시야 사역의 최적지(最適地)가 유대 땅 특히 예루살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거함로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옛 지경(地境)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되었으며(15, 16절), 예수의 이중 사역, 즉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눅 4:18, 19)에 갈릴리 지방이 더 적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가버나움(*) - 신약에만 나오는 곳으로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이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이 성읍의 소재(所在)에 대해서 전에는 '칸 민예'(Khan Minyeh)라고 생각되어 왔으나(Stanley, Carr) 1931년의 유적 발굴 결과 아랍인이 지은 우마야드(Umayyad) 궁전의 폐허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버나움은 칸 민예에서 4km 정도 북동쪽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으로 인정되고 있다(Thomson, Robinson).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에 세관이 있었고(막 2:14)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마 8:5-8). 또한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8:14;막 1:29),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곳이 고향인 듯하다.

성 경: [마4:15]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 사역의 시작]

⭕ 스불론 땅과...갈릴리여 - 여기서 영토의 범위를 표시하는 5개의 고유 명사들은 '백성'(*, 호 라오스)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에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중에,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곳 각각의 지명을 강조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상(上) 갈릴리' '하(下) 갈릴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해변길'(*, 호돈 달라쎄스)이란 70인역(LXX)의 사 9:1 에 언급된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데레크 얌'(*) 곧 '바다쪽으로'란 말을 축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다로 가는 길'이라기 보다 '바다 옆' 곧 갈릴리 해안 지대로 보는 것이 좋다(Turner). 그리고 '요단 저편'이란 갈릴리 동쪽 해안 지대로서 앗수르 침공시 납달리가 곤혹을 치뤘던 곳이다(왕하 15:29).

성 경: [마4:16]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흑암에 앉은 백성 - '백성'(*, 호 라오스)이란 말은 '나라', '이방인'을 의미하는 '타 에드네'(*)와 구별되어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15절에 언급된 지방에 '앉은'(히브리어적 의미로는 '행하던'으로 볼 수 있다) 백성들, 즉 멸시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토 중 '흑암의 지경에 행하던' 땅, 곧 종교적, 정치적 이점(利點)이 없는 가장 어두운 지역이 이제는 참 빛이신(요 1:9)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흑암'이라는 말은 '빛', 즉 '하나님의 진리'의 부재(不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참 복음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들이 놓여 있던, '사망의 땅과 그늘'이 드리운, 곧 죽음과 절대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 카데메노스. '계속적으로 거주하며 살다'는 뜻) 절망 속에 헤매었으나 자신들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한 흑암 속에서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 4:2)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비취다'(*, 아네테일렌)는 '특별한 예언에 따라 특정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찬란히 빛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참빛이 다른 지역에서가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제일 먼저 눈부시고아름답게 '발'(發)했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형식주의와 율법적인 의의 빛이 폐기되어 버리고 본래의 참 빛(요 1:9)이 높이 솟아 가장 어두운 곳을 가장 먼저 가장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4:17]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이때부터(*, 아포 토테) -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26:16) 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 전파하여(*, 케륏세인) -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 케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 로고스)과 진리(*, 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 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 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음(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막 1장 강해, '하나님의 나라 개념' 참조).

성 경: [마4:18]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갈릴리 해변 -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수 11:2;19:35;왕상 15: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벧론 포로 귀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막 6:53;눅 5:1)로 불리웠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 얌)라는 말과 헬라어에서의 '바다'(*, 달라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14:24;막 4:37;6:48;눅 8:23;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이 된 성읍들(마 4:13;11:20;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름이다(10:2;16:18;막 3:16;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 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 안드레(*) -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 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 그물 던지는 것 - '그물'(*, 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 '그물들', 4:20)와 '사게네' (*, '그물', 13:47) 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눅 5:2) 반면에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 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

성 경: [마4:19]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나를 따라 오너라 - 예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의 효력을 갖는 '따라 오너라'(*, 듀테)라는 표현은(10:38;눅 9:23;14:27) 예수의 사역 수행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좇아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의 육체를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두 청산(淸算)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이다(10:38, 39).

⭕ 사람을 낚는 어부 -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직업과 새로운 사명을 연결시켜 그들에게 주어질 직무가 사망의 땅과 그늘(16절)에 영원히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성령과 복음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렘 16:16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포로로 삼기 위해 어부를 보냈듯이 이제 예수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어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영광스러운 직책에 대해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전(以前) 직업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주변 환경과 밀접한 일상사를 문학적인 표현(비유)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를 교훈하시고 나타내실 때가 많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종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람'(*, 안드로포이)이란 복수 용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아무튼 이 명령은 28:18-20의 대선교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름지기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마4:20]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곧 -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제자로 부름받는 두 사람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요 1:35-51) 크나큰 영적 감화력(感化力)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들이 내.외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 버려 두고(*, 아펜테스) - 이 용어는 '멀리 내던지다', '포기하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린 제자들의 철저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거나, 그들의 생업을 영원히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자했던 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었고, 전에 이미 알고 있던(요 1:35이하) 제자로서의 소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즉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제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을 미워하고(눅 14:26), 그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10:37)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6:33).

성 경: [마4:2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세베대(*) - '여호와의 주심'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자, 예수의 이모인 살로메의 남편(27:56;막 15:40;16:1)이다. 그의 집에서는 삯꾼을 부리고 있었으며(막 1:19,20), 예루살렘에도 그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요 19:27) 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출신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 야고보(*) - 이스라엘의 조상의 이름과 같은 '발꿈치를 잡았다'란 뜻이다(창 25:26). 야고보와 그의 동생(17:1;막 3:17)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로서 예수와 사촌 형제간(요 19:25)이 된다.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던 제자 중 한 사람이다(17:1;막 5:37;9:2;13:3;눅 8:51;9:28). 후에 그는 해롯 아그립바에 의해 피살되어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 요한(*) - 이 헬라명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란 뜻을 가진다. 그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요 1:35-37),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눅 22:8;요 13:23;19:26, 27), 장수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기록한 자(계 1:1)이다. 또한 그의 성격은 내성적(요 20:1-10)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져(눅 9:49,54)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란 별명(막 3:17)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만큼 남자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주님의 십자가 최후를 지켜보았으며(요 19:26),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의 당부에 따라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극진히 봉양했다 한다(Irenaeus, Polycrates, Clement).

⭕ 배(*, 프로이온) - 모든 배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서 여기서는 서너명이 함께 타고 조업할 수 있을 만큼의 배였던 것 같다(막 1:20).

⭕ 그물 깁는 것 -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깁고'(*, 카타르티조)라는 동사는 '준비하다', '수선하다' 또는 '원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눅 5:1-11의 상황를 고려해 볼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후에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 일'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이같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일선에서의 '복음 전파 활'을, 전자는 배후에서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 부르시니 - 여타의 말씀을 생략하신 채 단지 예수께서 영적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는 부름에 따른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기 보다는 22절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즉각적 순종에 그 초점이 맞춰진 묘사이다.

성 경: [마4:2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저희가 곧...버려두고...좇으니라 - 베드로나 안드레처럼(20절) 야고보 형제는 지체없는 순종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의 '버려 두고'란 말도 그들이 혈연 관계를 포기하거나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좇아 제자로서의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과(막 1:20) 인정많은 가족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은' 바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제자됨의 필수 요건이다.

성 경: [마4:23]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갈릴리 사역]

⭕ 온 갈릴리 - 예수의 사역 당시 갈릴리는 동쪽은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 서쪽은 지중해, 남쪽온 사마리아, 서북쪽은 베니게로 둘러싸여 남북이 약 80km, 동서가 약 45km정도의 작은 지역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저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Life 235<45>;war , 41-43<iii, 2>)에 의하면 갈릴리는 204개의 대소 성읍들과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비록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는 매우 비옥하여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근처에는 호수가 위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최소한 3백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Josephus, De Bello Jud. iii, 3, 1). 그러므로 이곳을 예수께서 매일 2개의 마을씩 순회하며 모든 동리를 다 돌아보려고 하였다면 안식일도 쉬지 않고 강행한다 하더라도,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이 소모(消耗)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모든 동리를 샅샅이 돌아다녔음을 뜻하기 보다 갈릴리의 전구역을 이리저리 왕래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암시한다(9:35).

⭕ 회당(*, 쉬나고가이스) -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종교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서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신 31:11과 시 74:8을 인용하여 회당이 매우 일찍이 기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바벧론 포로 중에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느 8:1-8, Carolus Sigonius). 예수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유대인 랍비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Winer).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에 이곳 회당에 모여 기도와 율법을 배우는 일에 힘썼다. 특히 구약 율법서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허락에 의해 율법 교육에 합당하며 권위있는 자가 나서서 율법을 해석,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당을 전도 활동의 무대로 활용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나(막 9:5;요 1:38) 백성들에게(막 10:51;요 20:16) '랍비'라고 불리웠다. 이 회당이란 용어는 본서에서 '가르침'과 연결되어 나온다(9:35;13:54). 더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부분을 참조하라.

⭕ 가르치시며...전파하시며...고치시니(*, 디다스콘...케륏손...데라퓨온)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도의 세 가지 특수한 양식(樣式)으로서 모두 천국(메시야 왕국)과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르치다'는 예수의모 든 활동이 근본적으로 '교훈'(*, 디다스코)과 관계가 있으며, '전파하다'는 예수자신이 오심과 함께 천국의 도래가 가까왔다는 '복음'(*, 유앙겔리온)과 관계가 있다. 끝으로 '고치다'는 예수께서 천국이 축복과 더불어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행하신 바 이는 흑암의 왕국(16절)이 파괴되고 천국이 '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 행 3:21)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이 세 가지 전도 방법(teaching, preaching, healing)은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선교 역사에 계승되었다.

⭕ 천국 복음(*, 토 유앙겔리온 테스바실레이아스) - 이 용어는 본서 9:35과 24:14에 다시 나타나는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메시야가 임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 말이다. 한편 '천국(의)'은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비교 눅 8:1 '하나님의 나라')으로서 복음이 천국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천국'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고(3:2;4:17), 또한 그것은 산상수훈(5-7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이 '천국 복음'일진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은 이것을 명심하여 그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 병...약한 것 - '병'(*, 노소스)은 일반적인 '질병'(sickness), 그중에서도 만성적이고 중한 질병을 의미하고, '약한 것'(*, 말라키아)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생활적 기능의 쇠약'을 의미한다. 실로 사랑이 많으신(9:36) 예수께서는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그의 사역의 최종 목표였으나 인생의 현세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아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 임하신 사실에 대한 예보(豫報)이자 천국 왕의 신임장(credentials of the King)이다(Walvoord, 사 35:4-6;마 11:2-6).

성 경: [마4:24]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갈릴리 사역]

⭕ 소문(*, 아코에) - '들음'이라는 뜻으로서 '평판'(report, Living Bible) 또는 '명성'(fame, KJV)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당시 예수의 전도 활동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환대(歡待)를 받았으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 수리아(*) - 이곳의 지리적 범위는 불확실하나 예수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에 있는 갈릴리를 제외한 유대 북쪽의 팔레스틴 전체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서로 미워하였으나 이제 그곳에도 예수의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한편 그후 바울 당시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다메섹, 안디옥,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세워지는 등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근거지가 되었다(행 15:41;18:18;21:3;갈 1:21).

⭕ 모든 앓는 자...중풍병자 - '모든 앓는 자'(*, 투스 카코스 에콘타스)는 질병에 대한 보통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고질적인 병에 걸린 자'란 뜻으로 의학적 처방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 '모든'이라는 수식어는 정신적 질환과 구분되는 육체의 모든 질환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이 육체적 질환에는 그 병증에 따라 가벼운 것(각색 병)과 무거운 것(고통에 걸린)으로 나누인다. 여기서 '각색병'(*, 포이키라이스 노소이스)이란 '가지 각색'(various)의 병증이 크게 위급하지 않는 질병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고통에 걸린 자'(*, 바사노이스 쉬네코메누스)란 병들어 거의 기진하다시피 고통당하는 중환자를 의미한다. 이상이 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었다면, 뒤이어 나오는 세가지의 병명은 구체적인 분류이다.

⭕ 귀신들린 자(*, 다이모니조메노이) - 더러운 병(17:18;막 9:25)인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음이나 몸을 혼란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귀신들린 자는 육체적인 기능이 일부 또는 전체가 상실되기도 하고(9:32, 33;막 9:18;눅 11:14), 정신적인 장애 현상(17:15;요 10:19-21)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12:28;눅 10:17;행 16:18)에게 귀신은 굴복당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불못(계 20:14)에 던지움으로 영구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막 9:14-29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 간질하는 자(*, 셀레니아조메노이) - 이 질병에 대한 혤라어의 본래 의미는 '졸도 증세'란 뜻이다. 이 병은 중추 신경 계통이 이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데, 증세는 의식을 잃는 것과 발작성 경련,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의학의 시조라 불리우는 B.C. 4백년 경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간질을 어떤 귀신에 사로잡혀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문에서와 같이 '간질'을 '귀신 들림'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한 '셀레니아조메누스'란 용어는 고대 점성가들의 견해대로 간질이 '달'(*, 셀레네)의 '영향을 받은'(*, 조메누스)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당시의 민간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중풍병자(*, 파랄뤼티코이) - 이 용어는 신약에만 나타나는 용어로서 일반적인 마비 증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질병은 대뇌조직의 손상이나 척추신경의 파괴, 또한 중추신경 개통의 질환으로 인하여 야기된다. 한편,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하시는 예수의 기적들은 그의 메시야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타락된 흑암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불안(8:17 참조)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질병의 근본 원인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메시야의 사명이라는 것이다(1:21).

성 경: [마4:25]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갈릴리 사역]

⭕ 데가볼리(*, 데카폴레오스) - '열 도시들'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요단강 동편과 갈릴리 바다 남쪽, 곧 북쪽의 다메섹에서 남쪽의 빌라델비아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헬라인 도시들의 연맹체이다. 이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B.C. 323) 그의 후계자들과 노장(老將)들이 전형적인 혤라인 도시를 건설한 데서 기원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거점(據點)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는 배타적이었다. 예수 활동 당시 즉 A.D. 1세기에 이 도시들은 크게 번화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이방인들 조차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은 예수사역이 유대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요단강 건너편 -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얍복강과 아르논강 사이'로 단정하는데, 여기서는 이곳이 베레아로 소개된 동부지역 전체를 잎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팔레스틴 경내에 인접한 지역까지 예수의 소문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 갈릴리에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신 예수(15,16절)의 생명의 빛이 갈릴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계시하는 마태의 웅장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갈릴리로 모여 들어 예수를 '좆는' '허다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Christ follower)였지,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참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christan)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았을 뿐, 예수의 영적, 신적 측면, 즉 우리의 왕되신 예수께서 구원자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이적과 축복만 탐하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진리와 사랑, 아니 예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한 기복적이고 현실 지상주의적인 신앙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5: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 제자들이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같이'(출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마5: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 가르쳐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성 경: [마5: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심령이 가난한 자(*,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성 경: [마5: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성 경: [마5: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성 경: [마5: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 경: [마5: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성 경: [마5: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성 경: [마5: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성 경: [마5:1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성 경: [마5:1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성 경: [마5:1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1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성 경: [마5:1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성 경: [마5:1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성 경: [마5:1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성 경: [마5:1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1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amen>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 일점 일획(一點 一劃)(*,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 경: [마5:1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2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마5:2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성 경: [마5:2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 지옥불(*, 게엔나 투 퓌로스). -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 라가(*,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 미련한 놈(*,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성 경: [마5:2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것이다.

성 경: [마5:2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가 아닌 '디아'(*,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성 경: [마5:2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옥'(*,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성 경: [마5:2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 호리라도(*,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성 경: [마5:2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성 경: [마5:2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 음욕을 품는(*,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마음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성 경: [마5:29,3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성 경: [마5:3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5:3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 버리면(*,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 간음하게 함이요(*,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성 경: [마5:3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성 경: [마5:3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성 경: [마5:3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옴뉘나이 엔)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다'(*,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성 경: [마5:3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성 경: [마5:3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 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성 경: [마5:3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3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성 경: [마5:4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訟査)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성 경: [마5:4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성 경: [마5:4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성 경: [마5:4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성 경: [마5:4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빈(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래동안 은총을 베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 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의 연장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성 경: [마5:4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 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 무슨 상이 있으리요 -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성 경: [마5:4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인'(*, 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Scott).

성 경: [마5:4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라 -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온전'(*, 텔레이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탐밈'(*, 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탐밈'이라는 말은 희생 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한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전 14:20; 엡 4:13;히 5:14; 6:1).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앞의 대립 명제와 관계된 권위있는 율법 해석에서 보여졌듯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할 것이 바로 이런 온전함이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脈絡)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反映)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던 것처럼(레 11:44, 45;19:2;20:7, 26)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서 이같은 특징(벧전 1:16)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France).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있게 예수가, 무제약적인 온전함이 제자들에게 가능 하다고 가르친 거스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들이 영적으로 파산(破産)하였다(3절)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사'(6:12)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던 종말론적인 목표인 아버지의 온전함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추구(追求)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6: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사람에게 보이려고 - 이 구절은 1-18절까지의 서론에 해당된다. 이 단락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세 가지 종교적 의무, 즉 의(義, 2-4절),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 등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제시되고있다. 즉 5장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해석을 설명하시고도 높은 경지의 의(義)를 가르치신 후 이곳에서부터는 율법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전(inheritance)과 관습에 관한 바른 지침 및 그들이 당면할 종교적 위선의 위험성을 계시하고 있는것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外飾)적으로 이 같은 종교적 관행을 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여기서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아데나이'(*)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강조하는 제 1부정 과거 수동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란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처럼 전적으로 인간을 의식하고 그의 판단을 고려하면서 취하는 행동은 항상 위선의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을 익히 아시고, 또 그것을 능히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고려하고 날마다 신전(神前,Coram Deo)의식을 지닐때 인간의 오류와 위선은 최소화 될 수 있다.

⭕ 너희 의를 -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너희 구제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까닭은 아마 '의'란 말이 히브리어로 '체다카'(*)로서 70인역(LXX)에 따르면 간혹 구제를 위한 의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신 6:25).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의'를 '구제'란 의미로 직접 변형하여 사용한 적이 없고, 또 다음 절에는 '구제'란 말이 따로 쓰이기 때문에 이를 구제란 말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구별되는 '너희'라는 말과 더불어 이 '의'(*, 디카이오쉬넨)는 예수의 제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의로운 생활 방식의 배후에 있는 거룩한 동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A. Carson).

⭕ 행치 않도록 - 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실천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바른 행위를 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이를 행하였다. 이에 주께서는 이러한 위선적 행위를 규탄하고 하나님의 실존을 의식하고 그분이 미구(未久)에 내려주실 온전한 보상만을 기대하며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주의하라(*, 프로세케테) - 이는 주로 고대 헬라어에서 종종 발견될 뿐 성경 문학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서(LXX, 욥 7:17), 특히 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는 '마음'을 뜻하는 '눈'(*)이란 말이 생략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의 원의(原意)를 살펴보면 '이것을 항상(생각)하라','오직 이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라'는 뜻이 된다.

⭕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염려했으며, 또 그들에게서 이미 위대하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상(賞)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의 행위 전체를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성 경: [마6: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그러므로 - 이 말의 원어 '운'(*)은 여기서 앞 구절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보충적 설명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예를 들자면',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들자면'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 구제할 때에 - 이 어구가 '구제한다면'이라는 조건문으로 기록되었으면 구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어구는 단순히 직설적으로 '구제할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께서는 구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가 공적(功績)을 쌓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편 중의 하나로 생각할 정도로 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구약 외경 토비트 12:8, 9). 어쨌든 여기서는 공적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하거나 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함에 있어서 과시나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 외식하는 자(*, 호이 휘포크리노마이) - 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 '...인 체하다'는 등의 뜻인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타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 '배우'등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 용어는 주로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형태와 연관되어 본서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5, 16절;7:5;15:7;23:13-15;24:51). 여하튼 '외식'은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속이는 악행으로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단죄될 것이다(고후 5:10).

⭕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 의와 기도 그리고 금식으로 삼대별(三大別)되는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 중에서 아마 '의'의 일부에 속한 이 구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셨던 것 같다. 그러나 외식자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동기(動機)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회당과 거리에서 이러한 종교 의무를 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께 '오직 영광'(Sola Gratia, 전 12:13;롬 11:36)을 돌리는 데는 전혀 무신경했던 것이다.

⭕ 나팔을 불지 말라 -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때 나팔을 불던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Hill, Bonnard). 그리고 칼빈(Calvin)은 구제자들이 성금을 내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자 나팔을 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헌금궤(눅 21:1)의 모양이 뿔피리 모양으로 생긴 데에 이 말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한다(Edersheim, Jeremias).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정적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실제로 나팔을 부는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더불어 '뷔흘러'(A. Buchler, St. Matthew V:1-6)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즉 '공적인 금식 기도는 나팔소리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런 때에는 사람들이 비오기를 탄원하는 기도 등을 길 거리에서 드리곤 하였다(5절).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제 행위가 자신들의 그러한 금식과 기도의 효과를 한층 더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Sanhedrin 35a;P. Tannith 2:6).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제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제 행위가 자기 과시(誇示)적인 행동을 낳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 상을...받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이 원하던 것은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대중의 칭찬이었으므로 그들은 헛된 영광의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여기서 '받다'에 해당되는 원어 '아페쿠신'(*)은 상업 용어로서 자주 쓰이는데, 거기서 이 말은 전액을 영수(receipt)했다는 뜻이다.

성 경: [마6: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이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따라서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자신이 베푼 자선을 도무지 기억지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그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듯이 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들자면, (1) 겸손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말없이 주는 것을 상징한다(Chrysostom). (2) 오른손으로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고 하지 말라(Luther). (3) 선을 행하고는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고기들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리라(동양 격언)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성 경: [마6: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은밀하게 하라 - 이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이 어구는 이곳 외에 6절과 18절에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KJV나 Textus Receptus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본절과 6절에 '은밀히'와 대구를 이루는 '드러내 놓고'(openly, *, 엔 토 파네로)란 말이 첨가되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갚으시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실 뿐이다. 여하튼 우리가 우리의 자선을 잊게되면 잊게 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목해 보실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높이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이다.

⭕ 너의 아버지 -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그 위선의 속깊은 내면을 보고 계시는 심판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義)를 드러내지 않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조용하고 따사로은 눈길로 다 하나하나 보시고 기억해 두시는 '아버지'로 다가오실 것이며, 따라서 그 같은 사실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 갚으시리라(*, 아포도세이 소이) - 직역하면 '그에 합당한 양을 어김없이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실 것인지 또는 그 보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들이 계시하고 있는 여러 증거들을 참고할 때 우리는 그 보답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지고(至高)한 기쁨과 원숙한 인격의 완성으로 주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Broadus).

성 경: [마6: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기도할 때에 -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따라서 이는 구제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에'(*, 호탄)란 말이 가정법 현재 시상과 더불어 사용됨으로써 규칙적인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넌즈시 비추고 있다(Lenski).

⭕ 외식하는 자 -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유형,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2:15-18). (2)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또 타인을 속이는 유형, 이런 유형의 외식자들은 보통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만, 타인을 속이지는 못하고 곧 발각된다(9:1-5). 아마 예수의 책망을 들었던 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유형에 속했던 것 같다. (3)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는 가장 완벽한 위선자이다. 따라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 행위를 보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

⭕ 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한 표현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이 의식적인 기도에 빠지지 않도록 여기서 그 허황된 위선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래 시상의 어구로서 이 경고를 받은 이후부터 절대 그 같은 잘못을 범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 회당과 큰 거리 어귀 - 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서 1차적으로 외식자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단으로서 이 장소를 택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비난한 내용이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눅 18:9-14;행 3:1;10:9). 만약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성을 보였다(M.Taanith 2:1, 2). 이렇듯 그들 행위의 처음 의도는 순수했으나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즉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자아와의 순결한 만남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하는 것은 금을 주고 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창조자의 순결한 사랑을 인간의 음흉한 위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눅 18:1-4). 이처럼 예수께서는 기도의 장소나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책망하였다기 보다는 그들이 기도한 동기와 목적이 불순(impurity)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께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외식적 태도로 장황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 서서 기도하기를 -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몇 가지 언급되고 있다. 즉 기도는 엎드려서(민 16:22;단 8:17;계 11:16), 또는 무릎을 꿇고(대하 6:13;눅 22:41;행 9:40), 또는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막 11:25)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 한 그들의 헛된 동기(motive)인 것이다.

⭕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외식자들은 관례에 따라기도 시간(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맞추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장소에 나아가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로 기도한 것 같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여지(margin)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공적(公的) 기도를 폐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모든 공적기도를 금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는 그것을 오해하지도 않았다(18:19, 20;행 1:24;4:24-30). 실로 공적인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의 구분이 기도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있는사람, 곧 경건보다 경건으로 인한 명성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사적인 기도는 무시한채 공적인 기도만을 추구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식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골방 기도'이다.

성 경: [마6: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 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 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성 경: [마6: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이방인과 같이 -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5:47;6:32), 본문의 이방인은 두번째의 언급이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심지어 그들과 섞여 살기도 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해서 예수는 자연적으로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동을 비난함과 아울러 바른신앙 생활을 가르치셨던 것같이 이들 이방인들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는 기도의 장소와 그 동기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면, 본문은 주로 기도의 내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 중언 부언 -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Erasmus),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 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呪文)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神)을 질리게 만들었다(왕상 18:26, 28)

⭕ 말을 많이 하여야 - 이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 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사 65:24;히 11:6)

성 경: [마6: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본받지 말라 -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强化)되어 쉽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신앙관(왕상 18:26-28)에 미혹되어 신앙의 본질을 망각치 말라는 당부이다.

⭕ 구하기 전에...아시느니라 - 이는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이시느니라'(*, 오이덴)는 말은 긴밀한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직관적 인식을 뜻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전부터 그 간구하는 자의 삶에 깊이 개입(介入)해 오신 분으로서 그 필요(necessity)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이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지니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 필요를 구하기를 원하신다(Hill).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기도와 많은 노력을 통해 신에게서 탈취하듯 복(福)과 소원을 앗아옴으로써 그 간구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 경: [마6: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 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듸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 우리 아버지(*, 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사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겔 36:23;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성 경: [마6:1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눅 21:27, 28;계 21:1-8).

⭕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야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6:1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오늘날(*, 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 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수 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톤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from hand to mouth)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 일용할(* . 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뜻 '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앙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 ...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막 3:20;살후 3:12;약 2:15).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것은 하나님께서 앙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수 있는 능력은 물른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고전 4:7;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성 경: [마6:1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혼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 우리가...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성 경: [마6:1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 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 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 다만(*, 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 악(*, 루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살후 3:3;요일 2:13, 14).

⭕ 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 복음에는 나와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성 경: [마6:1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용서에 대하여]

⭕ 과실(*, 파라프토마타)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한 편에 치우침'이란 뜻으로서 진리나 의(義)로부터의 이탈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는 근본적인 범죄, 곧 '하마르티아'(*)와 구별된다.

⭕ 용서하면 -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함을 받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부적인(conditional) 공적(merit)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단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참된 회개의 자세이다.

⭕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 이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절)라는 다섯번째 갈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강조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이곳 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18:23-35;막 11:25). 이는 예수를 주로 모신 공동체의 성격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성 경: [마6:1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용서에 대하여]

⭕ 용서하지 아니하면 - 내용적 측면에서 14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실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바를 우리는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율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고자 하면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원하면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성 경: [마6:1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금식에 대하여]

⭕ 금식할 때에 - 모세의 율법에는 1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다 금식(禁食)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6:29-31;23:26-32;민 29:7). 그리고 바벧론 유수 기간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셨던 지난 날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할 것을 규정하였다(슥 7:3-5;8:19). 그러나 이런 국가적 차원의금식 외에 각 집단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금식은 때때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는 주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기 위해서(느 9:1, 2;시 35:13;사 58:3;욘3:5 등) 그리고 헤어날수 없는 큰 번민과 위기 또는 절망에 빠졌을때 하나님께 구원을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출 24:18;삼하 1:12;예 4:16;행 14:23 등) 행해졌다. 사실 이금식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적 측면에서 자기 훈련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시대에서부터 금식이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사 58:3-7;렘 14:12;슥7:5, 6). 그중에서도 특히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 구제에 무관심한 사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내려졌었다(사 58:1-7).

⭕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 이는 바로 앞의 '금식할 때에'라는 말이 현재 시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당시에 금식은 어떤 특별한 행사라기보다 유대인들이 늘상 게속해 오던 행사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 경에 금식하였다. 그리고 '안나'와 같은 경건한 여선지는 일상적으로 금식하였다(눅 2:37). 그런데 이러한 금식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배고픔과같은 육체적인 고통통 따르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고통을 자기 의(義)와 경건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적 고통에 인위적인 표정까지 가미(加味)하는 위선을 범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신앙 생활을 결코 자기의(義)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轉落)시켜서는 안 된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뤄져야 하는 참된 경건인 것이다.

⭕ 사람에게 보이려고 - 금식을 할 때에 자연적으로 용모가 흐트러지고 또한 자신의 내적인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중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재(災)를 뒤집어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의 진실된 통회의 표시로써 금식이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종교심을 자랑하고 또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동기에서 외식적인 금식이 행하여졌던 것에 대해서이다.

⭕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 여기서 '흉하게 하다'는 뜻의 원어 '아파니주신'(*)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뜻인 '파노신'(*)은 그 음운상 비슷한 단어로서 헬라 문학에 있어서의 일종의 재담적(才談的)표현이다(Robertson). 한편 '얼굴을 흉하게 하는'것이란 먼지와 재 등을 머리에 뒤집어 씀으로서 본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삼하 15:30;겔 24:17).

⭕ 자기 상을...받았느니라 - 2절 주석 참조.

성 경: [마6:1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금식에 대하여]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어떤 특별한 기름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몸단장을 위한 한 절차로서 사용된 것을 말한다(룻 3:3;삼하 12:20;전 9:8). 그 한 예(例)로써 다윗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병을 위해 금식하다가 그 아이가 죽고 나자 금식을 중단하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발랐다(삼하 12:15-20). 이처럼 기름을 바르는 것은 금식의 행위를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대응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

⭕ 얼굴을 씻으라 - 이 역시 일상의 몸단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지시를 하신 예수께서 금식 그자체를 금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금식의 필요성을 절대 부인하지 않으셨다(9:14, 15). 다만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슬픈 기색을 지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성 경: [마6:1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금식에 대하여]

⭕ 네 아버지께 보이게 -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위이며 육신의 고행(苦行)이고, 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한 일종의 육체적 단절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세상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 거룩, 겸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야지 조금이라도 사람을 대상으로하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4절 참조).

성 경: [마6:1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보물 - 이 말은 본래 소중한 물품을 보관해 두는 장소라는 뜻이었으나, 그 의미가 발전하여 그 장소에 보관해 둔 물품,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2:11). 여하튼 이 보물은 값비싸고 귀중한 귀금속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홋날 최고의 가치를 발하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팔레스틴인들이 자기의 소중한 물품을 땅속에 묻어두었던 전통에 입각해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13:44).

⭕ 땅에(*, 에피 테스 게스) - 하늘과 반대되는 장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영원한 미래가 없는 순간적이며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 쌓아 두지 말라(*, 메 데사우리제테) - 이는 현재 시상으로서 '쌓아두기를 그만 두라'(stop storing up)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Turnur, Syntax, p. 76). 이는 그릇된 행위를 단호히 끊어버릴 때가 왔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에 최선의 가치와 행복을 두지 말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땅에 쌓인 재물과 보화가 최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가는 훗날 큰 화(禍)를 만날 수 있다. (2) 탐욕이 가득한 자들은 지상의 재물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위해 살고 있으나 신자(信者)는 하늘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때 이런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 (4) 재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풍족히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것에도 만족할 수 있어야한다.

⭕ 좀과 동록(*, 세스 카이 브로시스) - 먼저 '좀'(moth)은 옷이나 음식을 해치는 벌레들, '동록'(rust)은 금속의 부식(corrosion)을 기리킬 뿐 아니라 간혹 쥐들이나 곰팡이에 의해 입게되는 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와 반대되는 일시적 재물이나 명예, 보물 등이 이것들에 의해 잠식되고 파괴된다고 기록한다(사 51:8;약 5:2, 3).

⭕ 도적이 구멍을 - 당시 팔레스틴에 건축된 가옥들은 대개 진흙벽이나 흙색돌을 쌓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적들은 주택의 출입구를 통과하지 않고 그 흙 벽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그 집의 귀중품을 훔쳐갈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바로 앞 문구에서는 재물의 내적인 파괴 원인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외부의 손길에 의해 이땅의 재물이 안전하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성 경: [마6:2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하늘에 쌓아 두라 - 지상의 보물에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뒤따른다(19절). 본절에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안전하다는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 특별히 '땅'에 대비되는 '하늘'은 그 안전성의 차이 뿐 아니라 그 영원 '지속성과 거룩성 및 무한한 가치성에 있어서 땅에 쌓아 둔 보물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눅 12:33;유대 문헌중 M. Peah 1:1;Pss Sol 9:9). 한편 '하늘의 보물'이란 이 땅 위에서 행한 선한 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면 그 무엇이나 해당된다. 즉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 남을 용서해 주는것 등, 이 모든 것들은 보상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 된다(5:12;고후 4:17). 또한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10:42;25:40), 자기 소유를 타인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것 등도 하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딤전 6:17-19).

성 경: [마6:2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 신앙인의 영원한 경구(警句)인 본문의 요지는,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 그 사람의 인격의 중심, 즉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지(知). 정(精), 의(義)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의 마음에 틈타서 반드시 그의 행동의 방향과 그의 가치관을 결정짓고 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친 바있다. 그러나 위의 것을 늘 생각하고(골 3:1, 2) 천국의 법에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항상 선한 일에 힘쓰게 되며 또한 그들의 행적(行蹟)이 언제까지나 남아 그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것이다(계 14:13).

성 경: [마6:2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눈은 몸의 등불 - 눈을 통해 몸이 갈길을 찾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눈은 '몸의 등불'이 된다. 물론 본문에서는 이 '눈'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하다(Philo). 그러나 이 '눈'을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의 눈 그 자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과(onerlooking)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육체의 '눈'이 보는 바는 '마음'이 보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육체의 눈이 세상의 것에 심취한다면 그마음 역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며, 반면육체의 눈이 하늘의 것을 바란다면 그 마음은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 성하면(*, 하프루스) - 이 말은 원래 '주름없는'이란 뜻으로서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이차적으로는 '진실한'(고후 11:3), '단일한', '풍부한', '관대한'(약 1:5)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상태를 지칭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눈과 마음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하면'이란 적어도 육체와 마음에 궁극적으로 유익을 얻게할 수 있을 정도로 '건전하다'(is sound, RSV)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두 개의 물체(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를 동시에 바라보는 혼란하고 난시안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한 방향으로 '단일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진실하고 성실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온 몸이 밝을것이요 - 건전하고 진실한 눈을 통하여 얻어진 밝은 빛으로 인하여 몸은 바른 판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실로 밝은 빛되신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굴절없이, 혼선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신령한 것과 속된 것을 바로 구분할 뿐아니라 그 빛 안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분별하고 평가하며, 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

성 경: [마6:2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나쁘면(*, 포네로스) - 이 말은 분명 22절의 '성하면'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혼히 '악한'의 뜻을 가진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이기적이고 인색(吝嗇)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눈이 나쁘다'는 어구는 문맥상 하나님과 재물 양자에다 관심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볼수 있다.

⭕ 온몸 - 앞 구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빛을 받아들이는 물질적 몸을 가리킴과 동시에 도덕적 차원의 전 인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 어두울 것이니(*, 스코테이노스) - 어둡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대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즉 세상 재물에 현혹(眩惑)되어 영적 세계와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은 온몸에 진리의 세계를 전달해 주는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온몸으로 상징되는 그의 전 인격과 영혼은 아무것도 분간치 못하는 흑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 네게 있는 빛 - 여기서 '빛'은 헬라어로 '토 포스'(*)로서 태양 빛과 같은 일반적인 빛(light)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이는 22절의 등불로 번역된 '호 뤼크노스'(*)와 동일한 뜻의 빛(lamp)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인 진리의 세계를 밝혀주는 마음의 등불이 어두우면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여기서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쁜' 눈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실로 본래의 기능이 밝은 빛을 받아 들여야 하는 눈이 어두움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온몸의 상태는 얼마나 치명적이며 절망적이겠는가! 진정 '성한' 눈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죄와 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성 경: [마6:2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 예수께서는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디에다 보물을 쌓아야 할 것인지 또는 우리의 눈을 그 무엇에 고정(fixation)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선택적 문제를 제시하였다(J. Stott, Sermon on the mount, p. 158).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

⭕ 섬기지 못할것이니 - 누가는 불의(injustice)한 청지기 비유를 설명한 다음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싣고있다(눅 16:13). 이는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야 하고 또 목적이 분명해야 함을 가리킨 내용이다. 사실 '종'이란 오직 한 주인에게 전적으로 매인바 되어 그 주인의 명령에 자신의 전의지를 동원해 순종해야 한다(Tasker). 따라서 그 종이 진실하다면 결단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게 된다. 만약 그가 두 주인을 섬긴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을 자신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얻는 한 수단으로서 그 주인들을 섬긴 것이 된다.

⭕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 한 주인을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다. 즉 두 주인을 섬기려 하는 것은 한 주인도 섬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움'과 '사랑'은 인간이 지닌 본성적 감정을 뜻하기 보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성을 지닌 마음의 현상을 뜻한다. 어찌되었든 이 양자는 엄밀히 말해 겸비(兼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또는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든지 하게 된다고 말한다(롬 6:16).

⭕ 이를 중히 여기며(*, 에 헤노스 안뎌세타이) - '중히 여기다'란 말은 그에 대해 변함없이 성실하다란 뜻이다. 그리고 본 어구에서는 둘 중에 하나인 '이를'이란 말이 강조되고 있다.

⭕ 재물(*, 맘모나) - 이는 나쁜 의미로서의 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서 특정한 부(富)나 재산을 뜻하는 아람어 '마노나'에서 유래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재물과 돈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재물은 하나님과 병기(倂記)되어 의인화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 재물 역시 종의 주인으로 묘사되었다.

⭕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서 '겸하여'(*, 카이)란 원어상 '대등하다'는 뜻의 접속사로서 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물질과 동등한 위치예 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받으시거나 또는 아예 섬김을 받지 않으시거나 둘 중에 하나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양자 모두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주를 따르는 제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며, 또한 이러한 행위는 부분적 죄악이 아니라 근본(根本)적인 죄악으로서 그 원인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재산 소유를 정죄한 것은 분명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재산을 모을 수 있으나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6:2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그러므로(*, 디아 투토)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로써'란 뜻으로서 본절에 언급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을 버려야 할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의 절대적 권위릍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서 그 가르치는 바가 세상의 어떤 진리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 목숨을 위하여( , 테 퓌스케 휘몬) -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10:28).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 염려하지 말라 - 이는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시사한 바 있는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염려'(*, 메림나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실로 이러한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된 자는 생(生)에 있어서 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 음식은 생명체의 존속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 goods)이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준 이상, 이에 필요한 음식과 옷은 우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다.

성 경: [마6:2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공중의 새를 보라 - 누가의 기록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새'라는 말 대신에 '까마귀'로 언급된다(눅 12:24). 본문의 '공중의 새'란 순수한 히브리 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늘을 날으는 새', 곧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한다. 한편 본문의 '보라'(*, 앰브려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있다.

⭕ 심지도 않고 -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거두지도 않고 -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 이는 성경적 우주론(宇宙論)을 전제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떨게 해결해 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를 질서있게 경영하고 계시며 따라서 이 자연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부'에 관해서는 5:16 주석을 참조하라.

⭕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선자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 디아페로)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보다'로 번역된 바로 앞의 혤라어 '말론'(*)은 '심히', '대단히'라는 뜻인 '말라'(*)의 비교급 부사로서 '훨씬 더', '더욱'이라는 강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법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까지도 포착(capture)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6:2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그 키를(*, 텐 헬리키안 아우투) - '키'로 번역된 '혤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키를 '한 자'(*, 펙쿠스 헤나; 한 팔 길이로서 히브리인들의 '규빗'과 비교될 수 있다)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 8인치 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를 뜻할 때는 나이를 더 먹는다는 뜻이 된다. 현대 주석가들은 이를 생명의 길이, 곧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延長)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마6:2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 백합화(*, 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 생각하여 보라(*, 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븐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성 경: [마6:2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솔로몬의 모든 영광 - 원문은 솔로몬이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솔로몬 조차도'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 3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고 가장 훌륭한 궁궐에서 그 영광의 극치(極致)를 누렸다.

⭕ 입은것이...못하였느니라(*, 우데 페리에발레토) - 이 말은 헬라어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을 입히지 못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이 꽃 하나만 -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 경: [마6:3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오늘 있다가(*, 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 아궁이에(*, 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 들풀(* 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6:3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성 경: [마6:3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 '이방인들'이란 하나님 나라의 의(義)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맡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있다.

⭕ 천부께서...아시느니라 -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이유가 본절에서 몇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 첫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심'은 단순한 지적 인식(recognition)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주되 넉넉히 채워주시는데까지 미치는 완전하고도 전인적인 인식을 뜻한다(8절).

성 경: [마6:3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 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Stott, Sermon on the mount, p. 172).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 이 모든 것(*, 타우타 판타) -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 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이다.

⭕ 더하시리라(*, 프로스테쎄세타이) -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성 경: [마6:3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내일 일을 위하여(*, 에이스 텐 아우리온) -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 다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 새로운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hint)하셨다. 즉 내일의 염려는 내일의 새 은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 한 날 괴로움 - 여기서 '괴로움'(*, 카키아)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적 견지에서 본 '악'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윤리적 측면의 '죄악'을 뜻하지 않고 인간이 감내(堪耐)하기 힘든 고초, 역경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말은 가끔 우박으로 인해 수확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절망적 재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70인역(LXX)은 히브리어 '라아'(*)를 '카키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라아'는 '악한', '불운한', '곤고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각 날(日)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이라고 해석할 수있다.

⭕ 족하니라(*, 알케톤) - 그 날에 주어진 것은 그 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리, 즉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내일에 대한 원리는 결국 염려의 근원적 치유(healing)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넘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실로 내일 일의 염려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오늘로서 끝나야 할 것이며 내일의 불행과 고난(distress)은 오늘 앞당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b. Sanhedrin 100b;b. Berakoth 9a). 한편 본문의 교훈적 말씀을 살전 5:16-18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단순한 권면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 자체가 불신앙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내일'의 주인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 경: [마7:2]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여기 비판이란 말도 역시 평론 혹은 정죄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말한 죄 값의 보응은 누구에게서 받는다는 것일까?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에게서 받는다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를 그 죄대로 갚아 줄 권세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한 죄의 경중을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지혜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성 경: [마7:3]

⭕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성 경: [마7:4]

⭕ 의식하는 자. - 이것은 위의 말씀과 같이,(1)자기의 큰 허물을 못보고 남의 작은 것은 볼줄 아는 자 곧, 약대는 통으로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먹는 자요 (2)내부적의 것은 못보고 겉으로 보이는 것은 잘 보는 자를 가리킨다.

성 경: [마7:6]

윗말 1-5절에서는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판단함에 대하여 경계하셨다. 그는 이제 그 듣는자들이 그의 말씀을 오해해서 남을 대하여 분변없는 주의 곧, 맹목적 타협 주의에 흐를까 우려하셔서 여기에 적합한 교훈을 주셨은 곧, 주님의 진리와 거룩한 일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중히 분변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 거룩한 것. -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이니, 제사 후에 제사장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서 이것이 영적 제물 곧, 복음을 가리킨 듯하다. 복음이 요점은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로 말미암아 먼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희생제가 십자가에서 거행되었다. 그 다음엔 그의 백성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 곧, 복음을 믿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거룩한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혹은 그것과 관계 있는 성직이라고 생각함이 좋다.

⭕ 개. - 이것은 배교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배로써 하나님을 삼는 거짓 일군들을 가리킨다. 바울도 거짓 일군을 "개"라고 하였다.(빌3:2), 거짓 일군의 특색은 (1)먹는 것과 대접 받는 것을 탐하여 다님이요(빌3:19) (2) 개가 보화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것인 줄만 알고 물고 찢는 것과 같이 거짓 일군들은 복음이 보화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들의 육체나 치는 길로 삼아 복음을 전한다 하면서 실상은 그 길을 해한다.

⭕ 진주.- 이것은 진리나 지혜로운 말을 비유하는데 고대의 랍비 문학에도 그렇게 사용되어 말하기를, "미련한 자에게 지혜로운 말은 돼지에게의 진주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의 진주는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혹은 교회의 성직을 가리킨다. 이것을 그 윗 문구의 "거룩한 것"과 딴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두말은 동일한 내용의 것을 두 가지 방면으로 관찰하는 것이니 하나는, 그것의 거룩함, 다음 하나는 그것의 귀중성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즈안 박사의 해석이다.

⭕ 돼지.- 이것 역시 위의 개와 동일한 내용의 인물들을 비유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7:7,8]

여기에 다시 기도에 관한 부탁이 나온다. 여기 기도에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1)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말씀들은 기구함에 있어서 모든 노력을 다 함이다. 그런데 이 명령사들이 모두 다 현재 시간의 명령사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다 그 행동의 계속성을 표시한다. (2) 어김 없이 주님을 믿고 기도할 것.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니. - 이 말씀들은, 주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가르치는 동시에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도를 반드시 들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처럼 우리의 기도를 작흥시키고 격려시키는 것은 없다. 의심을 품고 하는 기도는 무력하고 냉정하고 태만한 죽은 의식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성 경: [마7:9-11]

이 귀절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강이유 논법이 다시 보인다. 죄인인 너희도 자식의 청구를 들어주거든 선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니 아버지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사49:15; 시27:10 참조.

⭕ 좋은 것.- 이것은 영적인 것들이니 곧, 셩령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것들인데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물질 아닌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누가 복음에서는 간절한 기도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는데 이와 동일한 내용 있는 말씀이다.(눅11:13)

성 경: [마7:12]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칼빈은 이 말씀이 먼저 말씀(7-11)과는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윗말씀과 어떤 관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 귀절의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되어 있다. 이 말씀의 원문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적극성을 가지는 도덕률이다. (1) 인본 주의에서는 기소불욕을 물시어인하라(내가 원치 않는것을 남에게도 행치 말아라)라고 하여 겨우 악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을 남에게도 하라고 하였으니 적극적 도덕이다. (2) 이것은 남들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줄 줄 미리 생각하고 행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남들이야 네게 그렇게 행하건 아니 행하건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눅6:30-26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뜻이다. 이것은 사랑의 정신으로 선을 행함이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롬13:8-10). 세간에는 고래로 이와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소극적인 것이었을 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 경: [마7:13,14]

여기서 인생의 가는 길에는 "좁은 "것과 "넓은 "것이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1) 고행주의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육체의 소욕대로 방종스러이 살 수 있는 넓은 길과 하나님의 복음 진리대로 따라가는 규범있는 생활의 길을 대립시킨다. 좁은 길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낙이 없고 고통만 있다 함은 불가하다. 이 좁은 길에는 도리어 감추인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는 것이다. (2) 이것은 자력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포함하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여기 이 비유가 포함한 뜻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따라가는 길이 함부로 범죄하는 생활에 비해서는 제한이 있고 절제가 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헤로 구원얻는 길이니 그 길을 가는 도중에도 생명과 희열이 있고 그 길을 다 간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을 받는다.

성 경: [마7:15]

⭕ 거짓 선지자. - 이것은 거짓 선생을 의미하는 바 위에서 말한대로 사람을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 넓은 길로 사람을 꾀어 이끄는 자들이다.

⭕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 - 그들이 외식으로는 겸손하며 사랑도 있고 모든 이익을 그들이 교훈에서 약속하니 그것이 양의 옷과같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생명이 성령님이 없고 다만 자기들을 위하는 야욕만이 가득하였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교회를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것이다.

성 경: [마7:16]

⭕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여기 열매란 것은 이 교훈과 그것의 영향과 및 그의 행위를 의미한다. 혹설에 이것은 행위만을 가리킨다고 하나 이 해석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좋은 행위도 악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이용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나타났으니(창3:18), 이 둘은 죄악의 상징이다. "포도"와 "무화과"는 의와 선의 비유인 듯하다.

성 경: [마7:19]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이것은 거짓 교훈과 악사상의 무리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악사상의 소유자들로서 심판 받은 일이 많다. 그러나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는 이 무리가 다시 일어난다. 이는 마치 밭에서 잡초를 제하여도 얼마 후에 다시 잡초들이 나옴과 같다.

성 경: [마7:21]

⭕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이 귀절은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시는 듯하다. 이 아래 귀절들이 모두 다 그러한 논조로 흐르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 이 귀절들은, 구원의 이법을 말함이 아니고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정죄의 원리가 있고서 그 후에 사죄의 규례가 생긴 것이다. 이 귀절들이 말하는 심판의 원리는, 후일에 구원의 원리를 말씀하실 준비 계단인 것이다. 이 귀절들의 말씀을 가리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도리에 대한 전제하고 하는것은 가하나, 은혜로 받는 구원의 제도를 부인한 것이라 함은 똑바른 신학적 관찰이 아니다.

성 경: [마7:22]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 여기 "그 날"은 이 세상 끝의 심판날을 이름이다. (눅10:12). 그 때에는 하나님이 일을 한다고 하던 자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약3:1에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 거짓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그리함이 아니고 다만 자기들의 육체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이용하여 그러한다.

성 경: [마7:23]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능한 일을 하였다고 했다. 주님은 어떤 때에 악인들도 이용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에게 일시 이용된 일이 구원 받을 조건은 아니다. 오직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알아 주시고 나는 주님을 아는 신앙의 관계가 구원받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눅10:22)

성 경: [마7:24]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 곧, 거짓 선지자들이 말을 듣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행하는 자는 반석에 집을 세움과 같다. 에수님의 말씀은 한개의 반석과 같이 든든하나 거짓 선지자들이 말은 모래와 같이 무너지고 만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하신 하나님이 말씀이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것을 언제나 감시하시며 또 그것을 가지시고 능력을 행하신다.(히4:12,13).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말은 죽은 것과 같아서 생명의 능력이 없고 바람에 불리는 모래와 같다.

성 경: [마7:25-27]

이 부분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의 두 가지 지혜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두가지 우매가 나타났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집을 짓는데 있어서 터가 든든해야 될 것을 알았고 또한 장차 풍우가 그 집에 부딪힐 것을 알았다. 그러나 미련한 건축자는 그 부딪칠 것을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신앙 인격을 건축함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 밖에 기초를 둘데 없는 줄 알아야 되며 또는 장래에 우리의 신앙 인격을 시험하는 환난이 온다는 것을 예감해야 된다.

성 경: [마7:29]

⭕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실 때에 남의 사상을 취급하듯이 하시지 않았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모세에게 주셨던 것이니 곧 그 자신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그의 교훈의 태도가 권위 있게 나올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성 경: [마8: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 산에서 내려 오시니 - 이말은 5:1의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란 어구와 대칭을 이루는 구절이다. 5:1 및 8:5과 연결 시켜 볼 때 예수께서는 유대 산악 지방에서 이제 12제자 임명 및 산악 지방에서의 다소 긴 제자 훈련 기간을 마치시고 다시 일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전도 여행을 잠시 멈추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심신(心身)을 쉬시는 동시에 집중적으로 제자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이 경우 외에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몇번 더 시행되었다(10:5 - 42; 13:11 - 32 등).

⭕ 허다한 무리 - 이 말은 5:1의 '무리'나 7:28의 '무리'보다 숫자가 더 많은 무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5:1과 7:28의 '무리란 말, '오클로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본문의 '허다한 무리'란 말인 '오클로이 폴로이'(*)에는 관사가 사용 되지 않아 그 숫자가 한정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란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그에게로 모여 들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8: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새로운 어떤 사실을 도입하고자 할때 주로 사용되는 (*, 카이 이두 - and behold, 그리고 보라) 말로 시작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이 말은 여러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1) 특별한 의미없이 영어의 'there is(was)'나 'here is(was)' 등과 같은 도입사로 쓰인다.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었다).12:10, '사람이 있는 지라'(*, 카이 이두 안드로포스). (2) 어떤 예화나 비유를 소개하고자 할때 '가라사대'란 말 다음에 소개될 내용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쓰인다.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이두) 씨를 뿌리는 자가 '. 여기서도 가라사대 다음에 쓰인'이두'('I*, 대문자로 쓰이고 있음)는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고 있다.(3) 본문처럼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면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할 때 이 말이쓰인다. 4:11'(카이 이두) 천사들이 나아와서 '(*, 카이 이두 앙겔로이 프로셀돈 ; 그리고 보라 천사들이 나아왔다'). (4) 특별한 주의를 요할때, '갑자기'나 '홀연히'란 의미로 이 말이 쓰인다. 17:5,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이두 네펠레 포테이네 에페스키아센 아누투스). 아무튼 본문의 '카이 이두'는 이제 이야기의 한 단락이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로 진입되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역활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치고 하산(下山)하신 후 새로운 사건과 조우(遭遇)함으로써 예수생애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문둥병으로 표현된 병이 병리학(patholge)적으로 실제 문둥병(leprosy)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문둥병을 위시한 제반의 피부병을 일컫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레 13, 14장). 여하튼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판정(判定)에 따라 문둥병이라 지목된 자를 몹시 꺼려했다. 왜냐하면 문둥병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기도 했거니와 문둥병자와의 접촉 자체를 의식적으로 불결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죄의 악함과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discipline)을 상징하는 것으로(미 12:10, 12; 욥 18:13) 문둥병자는 종교적 위생적 관점에서 일반 대중과 철저히 분리되어 특정 장소에 격리되어 있어야 앴다(레 13:45, 46). 만약 이를 어긴 경우 그 문둥병자는 심한 제재 조치나 돌에 맞아 죽는 수모(受侮)를 감수 해야 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이 문둥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 그자체가 이미 파격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온갖 죄악된 성품을 다 지니고 있는 인간은 모두가 다 영적인 문둥병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습(convention)과 억압을 깨치고 예수께 나아온 사실에서 우리는 세속의 모든 욕망과 죄의 사슬을 깨치고 과감히 예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임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 절하고 - '무릎을 꿇는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본서에 여러 번 언급된 용어로서(2:2, 8, 11:; 4:9, 10; 9:18; 14:33) 상대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의 외적 표현으로간주되었다. 특히 본문에서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행동의 이면(background)에 담겨진 문둥병자의 적극적 겸손이 강조되었다. 결국 이런 모습은 그가 예수의 절대적 치유성을 확신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 주여 - 당시 유대인들은 현자(賢者)나 율법학자를 높여 부를 때 주로 랍비(rabbi)란 말을 사용하였다. 반면 본문에 사용된 '주여'(K*, 퀴리에)란 말은 종이 주인에게 또는 독립된 집단 내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를 때 사용한 존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 문둥병자가 랍비라는 칭호가 아니라 '주여'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예수를 학자나 설교가로서가 아니라 능력과 위엄을 갖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자신의 주인으로 믿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는 그 뒤에 계속되는 문둥병자의 요청이 선한 가르침을 달라는 것임을 살펴보면 더 명확히 드러난다.

⭕ 원하시면 - 이 말은 예수에게는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은 분명히 있는데 다만 고쳐줄 의사(意思)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일 뿐이라는 문둥병자의 강한 믿음을 반영하고있다. 실제로, 한 인격적 주체가 어떤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을 성취하려는 강한 의지와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문둥병자는 예수의 객관적 능력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베푸셔서 자기를 고쳐주겠느냐고 그는 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3절의 '내가 원하노니'란 어구에서 발견한다. 즉 예수께서는 그에게 은혜 베푸실 의지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이는 매우 충격적인 고백과 동시에 요청이다. 왜냐하면 문둥병은 그 치료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왕하 5:7, 14), 오직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10:8; 11:5).

성 경: [마8:3]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구약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와 접촉한 자는 문둥병자가 상징하는 죄성(罪性)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어 의식법상 똑같이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다(레 11:40; 13:46). 율법대로라면 예수는 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부정한 자가 된 것이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이다. 즉, 그는 율법에 갇혀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하신다. 더욱이 구약의 제사장들이 문둥병자의 치유 여부를 판별할 때 그에게 접촉해도 부정하지 않았듯이(레13:2 - 8)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셔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지 않게 된 것은 그분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해 주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는 부정한 자에게 '대심으로'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역(逆)으로 부정한 자가 주님의 '대심으로' 정(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손을 내밀어'란 본문의 표현을 능력 행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J.D. Kingsbury) 이는 잘못 이해한 해석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긴 하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손을 내미신 것은 실제 병자를 만지기 위함인 것으로서 상징적 표현이 아니며 또한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는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 역시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부연코저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말씀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성경 말씀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방해받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내가 원하노니 - 2절의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문둥병자의 믿음에 찬 간구에 대한 신적 권위 해석의 답변이다. 이는 결굴 당신이 원하시면, 즉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권세와 능력의 말씀이다.

⭕ 깨끗함을 받으라 - 이는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의식적 정결까지를 포함한(문둥병 판별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치유를 뜻한다(Westcott).

⭕ 즉시 깨끗하여진지라 - 치유(healing) 선언과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의 초월성을 입증해준다. 실로 예수는 손(죄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상징)과 말씀(어떠한 장애도 극복 치유시키는 능력)으로 한 생명을 새롭게 탄생 시키신 것이다.

성 경: [마8: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 삼가 이르지 말고 - 공관복음서에서 수차 거듭되는 예수의 함구령(12:16; 16:20; 17:9; 막 3:12; 눅 8:56) 중의 하나로서 마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같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에 대해 (1) 이적에 따른 허황된 소문이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방지하시기 위해, (2) 치유받은 자의 교만을 예방키 위해, (3)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견제와 시기를 받고 이로 인해 복음 전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Plummer) 등이 있다. 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허다한 무리가 목격하는 가운데(1절)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당신의 소문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을 의향(意向)은 없으셨다. 단지 예수께서는 그 치유받은 자가 율법의 예를 따라 제사장에게 나아가기 전에 미리 이적(miracle)의 소문이 전파됨으로써 나타날 제사장의 편견어린 판결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사장들이 편견없는 순수한 의식으로 그 치유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 치료받은 자가 함구령을 무시함으로써 그후로 복음 전파에 많은 장애를 맞이하게 된다(막 1:45).

⭕ 모세의 명한 예물 - 바로 앞의 구절에서 예수는 율법의 소극적 조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셨지만 그것은 율법을 부정하고 파괴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즉 여기서 보듯이 레 13:4 - 17의 문둥병 규례에 따를 것을 당부하심으로써 예수는 율법을 이기고 극복하시지만 율법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고 완성하는 방법을 택하시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5:17). 한편 문둥병자의 정결 절차는 (1) 신적 권위자인 제사장의 판결을 받고 (레 13:16, 17), (2) 정결의 선언이 주어지면 산새 두 마리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헌상하고(레 14:4), (3) 8일 후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바쳐야 했다(레 14:8). 물론 이런 의식법상의 규례는 예수의 운명시에, 구약의 모든 의식 규례를 집약적(集約的)으로 상징하고 있는 성전 휘장(揮帳)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도는 구약 의식의 그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그 내용은 존중 해야 하는 것이다(히 10:14 - 18).

⭕ 저희에게 증거하라 - 문둥병자가 율법 의식에 따라 완치(完治)된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율법을 통해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인증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율법은 예수께서 원하기만 하면 어떤 질병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의 역활, 곧 예수의 권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성 경: [마8:5]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4:13에 이어 예수 선교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번째 언급되고 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 -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다.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유대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쨔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 한 백부장이 나아와 -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활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면서(눅 7:2 - 10)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성 경: [마8:6]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주여 - 예수를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이다(7:21 참조).

⭕ 내 하인이(*, 팡스). - 아들 또는 하인에 해당하는 '파이스'란 헬라어는 신약성경 중에 약 24회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하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쨔든 자신의 수하 친병(親兵)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성(humanyty)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 중풍병이란 말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등에 빠지게 된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이 중풍병은 문둥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병보다 훠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8:7]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에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 - '고쳐 주리라'의 원어 '데라퓨소'는 개역 성경대로 미래 서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서 고쳐주랴 ?'라는 뜻의 의문문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흔히 인칭 대명사 주어가 생략되며 또 이것이 생략되더라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지만 본문에는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가 특별히 쓰이고 있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인 '내가'란 말이 강조된 것이다. 어쨔든 예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오거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다.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설사 예수가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예수는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성 경: [마8:8]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백부장의 이 같은 겸손한 행위를 예수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민족 차별적 통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이러한 이유에서였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께 이런 요청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치가 않다. 또한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란 어구의 원어인 '우크 하키노스'(*)는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의 다함 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이다(시 147:6).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 4:46 - 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편 만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성 경: [마8:9]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본절은 개역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지만 앞 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란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이 예수께 다만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 안드로포스 휘포 여수시안) - 이것은 권세(여수시안)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자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성 경: [마8:10]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 '기이히 여기다'란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로서 본문에는 단순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등르로 번역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신(神)이신 동시에,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적 성정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Calvin). 즉 예수가 지닌 신적인 전지성(全知性) 마저도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이다(Homer A. Kent, Jr.). 한편 본문에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에 대해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셨던 반면 막 6:6에는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신 기록이 있다. 물론 예수께는 신앙과 불신앙 모두가 무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건한 경이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이다(Bengel). 예수께서는 당신과 접촉한 모든 이에게 특별한 관심(부정적이든, 긍적적이든)을 가지고 계신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어구는 다음에 대단히 주요한 내용을 말씀하시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던 말이다(5:18).

⭕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야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마태는 이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을 누가 보다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옮겨질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8:1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표현 뒤에 나오는 말씀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장이다(10절). 예수는 지금 거듭해서 유대인의 신앙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될 이방인 선교에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 평행구인 눅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동서남북으로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지경 내(內)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 이는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확약(definite promise)받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된다. 이어서 '앉다'(*)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이 잔치는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야 잔치'라고 명명되는데,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사 25:6 - 9; 65:13, 14 등). 그리고 메시야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예(例)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백부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饗宴)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이다(마 26:29; 눅 14:15 -24).

성 경: [마8:1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나라의 본 자손들은(*, 호아 데 휘오이 테스 바실레이아스). 이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 바깥 어두운데 - 이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야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한다. 한편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밸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두움의 권세인 사람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단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Turner),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심해(深海)의 절망을 의미한다(McNeil).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동서남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된다(시 107:3; 사 43:5, 6; 49:12). (2)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45:6; 59:19; 말 1:11). (3) 동서남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다(사 2:2, 3; 60:3 - 4; 미 4:1, 2; 슥 8:20 -23).

성 경: [마8:13]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이 표현은 마태가 자주 사용한 말씀으로 주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9:22, 29; 15:28). 그런데 '믿은대로'란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뜻이 파생(derivation)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에 비례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2)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편의 믿음의 양(量)에 따라 주어진다. (3) 본문의 기적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4)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 바병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2)와 (4)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 그 시로 - 눅 7:6을 보면 예수와 백부장의 집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 순간, 즉 예수의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문둥병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8:1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의 장모 치유]

⭕ 베드로의 집에 - 이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4:18-20). 그리고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벱세다였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가 벱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벳세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 그의 장모가 -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이다. 훗날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9:5). 그리고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베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다소 희석(稀釋)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 열병으로 누운 것을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자면 아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던 것으로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눅 4:38, 39).

⭕ 보시고 -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목격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주의에 사람들이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目睹) 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8:15]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 장모 치유]

⭕ 그의 손을 만지시니 -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열은 어떤 질병에 대한 증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열 그자체를 일종의 병으로 여겼던 것같다(요 4:52; 행 28:8). 이런 이유로 해서 유대인의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생활 방식을 구정하고 있는 랍비들의 율법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이 있는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절에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 대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 열병이 떠나가고 -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세번째로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순간적인 치유와 더불어 오랜동안의 건강까지 선사(膳賜)하셨던 것으로 보인다(Chrysostom).

⭕ 예수께 수종들더라(*, 카이 디에코네이 아우토). - 여기서 '수종들더라'는 말의 동사 원형은 '디아코네오'(*, 시중들다, 돌보다, 섬기다)로서 본눈에서는 과거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과거 미완료형이란 것은 과거 어는 한 시점을 전후해서 사건이 계속됨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 본문은 '섬기기 시작했다'(began to serve)는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자신을 구원한 주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그를 섬기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8:16]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의 장모 치유]

⭕ 저물매 - 이 사건은 막 1:32 - 34과 눅 4:40, 41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으로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다음에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시점은 저물 때로서, 곧 해가지고 저녁이 된 때인데, 이는 해가 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연관이 있다. 즉 사람들은 노동이 일체 금지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레 23:32에는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를 철두철미 안식하였던 것이다.

⭕ 귀신들린 자를 많이 -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단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 말씀으로 - 마태는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기록할 때 이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3,8절).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 여기서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로 '타 프뉴마타'(*)로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영혼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모두 거기서 '귀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들을 조사해 보면 이 '타 프뉴마타'란 것은 병을 가져다 주는 사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보통 악한 존재로 설명한다. 한편 예수께서 귀신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그 질환자의 정신을 맑게 하신 것은, 곧 예수께서 영 육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땅에 어두움의 세력을 완벽히 몰아내고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사 11:1 - 5; 35:5, 6).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누가는 본 사건을 어급하면서 "귓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눅 4:41)라고 그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마가복음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막 1:34)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다'(all, NIV)란 표현이 마가복음에서는 '많은'(many, NIV)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상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 고친 것이, 곧 많이 고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고칠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 중에 고백하고 있다.

성 경: [마8:17]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의 장모 치유]

⭕ 우리 연약한 것을 짊어지셨도다 - 이말은 사 53:4의 인용으로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고 또 다른 성경 기자들이 인용할 때 자주 사용하던 70인역(LXX)이나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Stendahl). 다시 말해서 4번째 '종의 노래'인 사 52:13 - 53:12에 대한 70인역이나 탈굼역은 사 53:4의 이부분을 영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마태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저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육체적인 질병을 대신 '담당하고' 또 '짊어지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개역 한글 성경 사 53:4와 본문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질고'는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질고'와 '슬픔'은 분명히 추상적이고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사 53:4 주석 참조). 그러나 영적 육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점에서, 속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 53:4의 영적인 번역은 본질적으로 히브리 본문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담당하시고'(*, 에라벤)란 위치상의 '이동'이나 무엇을 '취하다'(take up)라는 뜻이며, '짊어지셨다'(*, 에바스타센)는 '참다', '들어 올리다', '고통을 참다'는 의미를 지니다. 이는 질병이나 고통이 예수께 그대로 옮겨졌다는 의미이기보다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 형벌의 빛나는 열매들인 것이다.

성 경: [마8:18]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 마가는 여기에 '그 날 저물 때에'란 말을 명기해 놓고 있다(막 4:35). 아마 이때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14, 15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모여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에워싼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편으로 떠나고자 하셨는데 이는 아마 수면을 취할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예수는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떠나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셨던 것 같다.

⭕ 저 편으로 - 예수는 지금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의 북서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계신다. 그렇다면 저편이라고 하는 곳은 아마 디베랴 바다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8:19]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한 서기관이 나아와 -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흔히 예수의 적대자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이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해 예수를 뒤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마 이 사람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백성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데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서기관들을 긍정적인 양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더러 있다(13:52; 23:8 - 10, 34). 여하튼 본문에 언급된 '서기관'은 끝내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것을 알 수 있다(21절).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R. Walker) 서기관이라는 신분상의 장애 요인 때문에 '나를 좇으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제자로도 부름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받아 들여질 수 없다. (1) 일상의 생활을 포기한 전적 헌신자만이 제자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따른 자도 제자인 것이다. (2) 21절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또 하나'(Another man, one his disciples)가 아니라 본절의 서기관과 연결하여 '제자 중에 또 하나'(Another of his disciples)라고 기록되었다.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의 해석은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3) 예수께로 아무 주저없이 나아왔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선생님' 이라 부르고, 또 어디든 따르겠다는 헌신의 의지를 보인 서기관의 태도는 제자로 부름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4) 예수께서 두번째 사람에게만 '너는 나를 좇으라'(21절) 한 것은 그 사람이 서기관보다 제자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이 즉시 예수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 서기관은 분명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았음에 틀림없다.

⭕ 선생님이여(*, 디다스카레) - 이는 교사 또는 가르치는 자(teacher)라는 뜻으로 서기관이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이는 그가 예수의 제자되기를 원한다는 표현이다. 특히 '좇으리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오'(*)는 '따르다', '닮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는 일이, 곧 그분의 삶을 좇아가고 인격과 모습 닮기를 노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는 절대 순복(obedience)의 자세로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언급하는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주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치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려면 온갖 박해와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성 경: [마8:20]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여우도 굴이 있고 거처가 있으되 -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제자되길 원하는 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됨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제자가 될 경우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이 뒤따름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굴'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굴)를, '거처'는 둥지가 아닌 단지 새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나뭇가지 등의 임시 처소를 의미한다(McNeile). 결국 이 말은 아주 빈약한 거주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지어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비록 엉성하나마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세계에 와서 안식처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쫓김을 당한 방랑자가 되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 오직 인자는 -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가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의 신성을 밝힌 칭호라면, '인자'란 칭호는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종말에 이르러 (단 7:13, 14)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자로 인식되었고, 바로 이 용어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셨다. 자칭(自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행 7:56; 계 1:13; 14:14). 이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어,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칭호인 것이다(눅 22:69, 70). 특히 본문에 언급된 '인자'는 단순히 거처할 곳조차 없는 바로 '나'라는 말로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인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 하고 앞으로 당신의 당하실 고난을 묵시적(默示的)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하튼 본문에서의 인자란 칭호를 살펴볼 때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거처도 없는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는 초월적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눅 5:24 주석을 참조하라.

⭕ 머리 둘 곳이 없다 - 이는 머리 놓을 곳,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할 만한 소유나 집 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고 피곤하다는 뜻이다. 실로 이러한 절대적 가난을 통해 예수께서는 온 인류에게 충만한 안식과 풍요한 부(富)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고후 8:9).

성 경: [마8:2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제자 중에 또 하나가(*, 헤테로스 데 톤 마데톤) - 이 어구는 19절에 어급된 서기관 역시 예수의 제자에 속한 자였음을 암시해 준다. 즉 '또 하나'란 말의 원어 '헤테로스'(*, another)는 신약성경에서 '알로스'(*, 다른 하나의, 같은 부류 내의 또 하나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분명, 앞절의 서기관 외에 또 하나의 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자'란 자신의 전(全) 삶을 예수께 헌신하고 다른 모든 생활을 모두 다 내팽개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것(요 6:66)으로 볼 수 있다(19절). 왜냐하면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을 먼저 장사(葬事)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런 요청이 거절당하기 이전에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질문을 던진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 곧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다름 한 사람 곧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예수의 제자에 속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 주여 나로 먼저 - 이 두번째 사람은 예수께로 소명받은 제자가 추구해야 할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욕망, 곧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정과 자시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소망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다. 실로 앞절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삶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였다. 진정 그는 제자의 길이 차선(次善)의 신앙으로써가 아닌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황을 초월하여 예수를 좇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내 부친을 장사하게 - 당시 예수는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제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 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그가 죽으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라는 학설과 (2) 실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학설이 대립되나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업에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의 척도는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急先務)는 그리스도 복음의 선교 사역이다.

성 경: [마8:2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부자(父子) 윤리조차 무시하는 불효 막심한 반(反) 도덕적인 종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인륜과 도덕을 초월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이해한 다음, 설명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더욱이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장례 절차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적 윤리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무시해서 이처럼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인 용어를 선택한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우선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죽은 자'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뜻을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죽었다는 말을 (1) 어떤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2)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란 말은 세상이나 율법, 죄 등이 우리 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우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내일에 무관심한 자, 곧 영적인 사망자들 그리고 죄안에 죽어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자들'로 하여금(엡 2:1) 죽은 자들을 돌보게 하라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들이 육적인 죽음을 맞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적 근심에서 자유한 상태로 복음 선교에 참여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 제자의 우유 부단한 면을 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라고 재차 가르치신 바 있다. 정녕 죽은 자를 돌보는 일은 좋은 것이나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이보다 더 좋은 더 영원한 일이다(Chrysostom).

성 경: [마8:23]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배에 - 배를 가리키는 본문의 헬라어 '플로이온'(*)은 크기와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배를 가리킬 때 쓰이는 낱말이다. 하지만 이 곳의 배는 돛을 달지 않은 약 12 - 13명 정도의 어부와 잡은 고기를 실을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잡이 배였던 것 같다.

⭕ 제자들이 - 본문의 제자들이란 항상 같이 다니던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마가에 의하면 예수가 탄 배와 함께 그 뒤를 이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실은 다른 배들도 해안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막 4:36).

성 경: [마8:2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 이 구절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카이 이두'(*, 그리고 보라. 그런데 갑자기)란 말로 시작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큰 놀'로 번역되고 있는 헬라어 원어, '세이스모스 메가스'(*)는 지진이나 바다의 폭풍우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으로서 어부 출신 제자들 조차도 심한 두려움을 느낄만큼 강력한 힘의 풍랑을 뜻한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이 같은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약 240m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주변의 산들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갈릴리 바다의 표면 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기압이 형성되어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거센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이같은 거센 파도를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구약성경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욥 38:8 - 11; 시 29:3, 4; 65:5-7; 89:9).

⭕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 마가는 "물결이 부따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계속되는 풍랑에 의해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킨다.

⭕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 마가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막 4:38)라고 주무시던 곳을 명시해 놓고 있다. 당신이 머리 둘 곳 없는 처지임을 말씀하셨던(20절) 예수께서는 평지의 안식처를 얻지 못한 채 격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물에 머리를 의지한 채 주무시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렇게 풍랑이 치고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해 있던 시각은 밤으로서 예수는 매우 짙고 피곤하여 깊이 그리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자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격랑이 이는 상황에서 계속 잠을 청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 자신의 자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다(요 7:6).

성 경: [마8:25]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 여기 언급된 제자들 중에는 풍랑과 배를 다루는일에 노련한 어부 출신들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름대로 경험을 살려 위경(crisis)을 헤쳐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드디어 현상적으로는 바다에 문외한인 목수 출신 예수께 나아오게 되었다. 한편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본다.

⭕ 주여 구원하소서(*, 퀴리에 소손) - 여기서 '구원 하소서'란 '구출하다', '보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소조'(*)의 제 1 부정 과거형으로서 지급 즉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이는 눈앞에 닥칠 위기의 급박성을 또렷이 나타내 준다. 즉 제자들은 절규에 가까운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를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2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인 통일성 가운데서 각 저자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당시 위험에 집면해 있던 배 안에서는 이 말들이 모두말해졌을 것이지만 각 저자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외침만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여 구원하소서'란 용어는 '우리를'이라는 목적어가 첨가된 상태로(Metzger) 1세기 이후의 예배 의식 중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 우리가 죽겠나이다 - 헬라 원문에 현재시제로 묘사된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죽어가고 있나이다'가 된다. 실로 제자들은 자신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게 되었을 때 비록 조그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가닥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다. 이는 곧 날마다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분노의 폭풍우가 불어 닥칠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줄 자가 없음을 깨닫게 한다.

성 경: [마8:26]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바람과 파도의 지배권 아래만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금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감정적인 공포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재한 불신앙적 성향고 환경 의존적인 미숙한 신앙 상태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단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준다. 결국 이 불완전한 믿음은 그들이 예수와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 정녕 그들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된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들은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 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신 만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올리고피스토이) - 이 말은 믿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 말이 사물의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그 표면만을 보는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 마가는 이 부분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둘은 모두 믿음과 두려움과의 대립된 성질, 곧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려움은 믿음을 몰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뢰는 모든 두려움의 뿌리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요일 4:18).

⭕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 이는 예수의 탁월하고도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행동이다. 혹자(Bruce)에 의하면 이 표현은 실제적 권능의 행사라기 보다 하나의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예수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 진정 예수는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말씀 한 마디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스려가시는 전능자이시다. 한편 본문의 '꾸짖으신데'(*, 에페티메센)란 말은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아직 채 꾸짖는 일이 완결되기도 전에 그 꾸짖음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때 바람 뿐만 아니라 바다에게도 명령 하셨다 그러므로 바다의 풍랑은 그 즉시 그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에게네토 갈레네 메가레) - 직역하면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바로 이같은 극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자연의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말씀은 곧 폭풍우도 굴복시키고 잠잠케하는 신적 권위인 동시에 전우주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태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예수의 모습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종종 사용하는 방식이다. 사단에 의해 시험받으셨으나 사단을 꾸짖으셨고(4:1 - 11) 귀신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처럼(12:22 - 32) 여기에서도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피곤함으로 인해 잠드셨으나 당신과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잠재우셨다.

성 경: [마8:27]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그 사람들이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본문의 '그 사람들'이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인 것으로 보인다(Meyer, Jerome, Nosger). 그러나 다른 배들도 함께 출항했기 때문에(막 4:36) 제자들 이외에 다른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도(Weiss) '그 사람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이는 자신들의 간구가 실제적이고도 전인격적으로 응답됨으로 인해 당황하고 놀란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9:33; 14:33).

⭕ 어떠한 사람이기에(*, 포타포스 에스틴 후토스) -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능력의 예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껏 지녀온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인 것이다.

⭕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 헬라어 원문에는 '순종하는고'란 말 속에 '그에게'를 강조하여 '아우토 휘파쿠우신'(*), 즉 '그에게 순종하는 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자연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자연의 지배는 구약적 배경하에서(시 89:9; 107:25-30) 예수의 신적 탁월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성 경: [마8:28]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가다라 지방 - 마가(마 5:1 - 20)와 누가(눅 8:26 - 39)의 기록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기되고 있다. '가다라'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데가볼리(Decapolis, 팔레스틴에 있는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로서 10개의 도시를 의미함)중의 한 도시였다.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본문의 가다라 지방이란 표현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상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다라'는 베레아 지역의 수도(首都)였으므로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라사'까지 가다라 지방으로 호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Carr). 더욱이 복음서 기자들은 이 지역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명칭을 통일시키지 않아도 무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4:25). 이는 돼지 떼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로(30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돼지를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귀신들린 자 둘이 - 마가와 누가는 예수 앞에 등장한 귀신들린 자를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다(막 5:2; 눅 8:27).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한 삶은 제쳐두고 증세(症勢)가 보다 더 심각한 한 사람에게만 주의를 집중시켜 초점을 맞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ugustine, Calvin). 한편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들은 주로 정신적 결함이나 자폐적 환자로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 아래 놓인 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항키 위한 사단의 극렬한 저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Homer A. Kent. Jr).

⭕ 무덤 사이에서 나와 - 마가와 누가는 이들이 무덤 안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가다라 지방에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위에는 고대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무덤들은 조그만 방이나 굴 식(式)으로 되어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처럼 되어 있으며 성벽 바깥에 흔히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귀신들린 자에게는 이와 같이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동굴같은 무덤이 거처하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사람들이 가까이 갈 경우 그사람은 의식적으로 더럽힘을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 저희는 심히 사나와 - 본절과 평행구인 막 5:2 - 6과 눅 8:27에서는 귀신들린 자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실로 이들은 군대 귀신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광적인 힘을 과시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격이 파괴된채 오직 마귀의 파괴적 성향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이 거하는 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친 바다를 잠잠케하셨던 그 주께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곳을 친히 찾아오셨다.

성 경: [마8:29]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하나님의 아들이여 - 이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닌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칭호이다(3:17). 이 말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학히 알았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영적 감지력(感知力)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행 19:15).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티 헤민 카이 소이) -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사이)은 무엇이냐'란 말로서 그 뜻은 '왜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하느냐?' '제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구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관용어다(삼하 16:10; 왕하 9:18; 스 4:3). 여하튼 사단의 세력들은 영원한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상대적이며, 제한적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던 것이다(엡 2:2; 6:12).

⭕ 때가 이르기 전에 - 본문의 '때'(appointed time)란 것은 마귀의 최후 운명의 날이요 세상의 종말, 곧 대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악령들을 미혹하고 괴롭히도록 허용되지만, 심판날에는 모든 악인들과 함께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벧후 2:4; 유 1:6; Enoch 16:1; Jub 10:8, 9). 결국 본문의 이 말은 그들이 예수가 그 심판주이심을 알았음을 시사하며 더욱이 지금, 즉 그 때가 이르지도 전에 혹시 무저갱에 던져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계 20:3). 한편 이 '때'가 이르기 전에 예수께서 귀신들의 활동을 억제하시고, 추방하셨다는 것은 종말의 순간에 예수께서 귀신들을 모두 심판하실 것에 대한 전조적(前兆的) 행동인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신 것이가(12:28).

⭕ 여기 오셨나이까 - 귀신들린 자의 '여기'란 말은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할 종말 개념과 연관된 '때 가 이르기 전에'란 말과 결부시켜 볼 때 미혹과 파괴를 일삼는 귀신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이 땅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8:30]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위]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많은 돼지 떼가 - 마가는 돼지 떼의 수효가 약 이천 마리라고 밝히고 있다(막 5:13). 한편 마태는 돼지 떼가 '멀리서'(some distance from them) 먹고 있다는 상세한 보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의 사실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돼지 떼의 바다에의 몰사(沒死)가 단순히 사람들의 소동에 놀라 도망치다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적 능력에 따른 결과로서 되어진 일임을 시사해 준다.

성 경: [마8:3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귀신들이 간구하여 -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이 귀신들린 자를 만나자 마자 귀신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음을 밤히고 있다(막 5:8; 눅 8:29). 이에 대해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는데, 이는 마귀의 활동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 귀신들이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에 대한 몇 견해가 있다. (1) 귀신들은 육체적인 '거처'(home)를 소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2) 하나님의 피조물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 떼의 죽음을 초래하려 했다. (3) 그 지방 사람들의 소유인 돼지 떼들을 몰살시킴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세 가지 의견들 중에서 첫번째 의견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돼지 떼를 자기들의 새로운 '거처'(home)로 삼기를 갈구하였다면 어떻게 그 새로운 거처에 들어가자마자 그 거처를 파괴할 수 있겠는가? 두번째와 세번째에 제시된 이유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 중에 다른 곳에서도 예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난폭한 행위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17:14 - 20; 막 9:14 - 32). 한편 율법은 돼지 고기를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레 11:7). 그렇다면 이 돼지 떼를 먹이는 주인은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에게 팔기 위해 이 돼지떼를 기르는 불경건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마8:3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가라 하시니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 예수께서 마귀의 요구를 들어주신 사실에 대해 (1) 어떤 이들은 (Plummer, Weiss) 예수가 귀신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 마귀가 무저갱에 떨어질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일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endriksen). 이와 더불어 (3) 예수께서 그곳 주인들에게 귀신들린 이 두 사람의 가치가 돼지 떼보다 더 귀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는 학자들(Rosenmu ler)이 있다 여하튼 귀신들은 모든 생명체, 특히 무인격체에 쉽게 들어가 그 대상을 자유로이 장악할 수 있었기에 돼지에게로 손쉽게 돌입할 수 있었다.

⭕ 온 떼가 비탈로 몰사하거늘 - 이는 귀신들린 자가 귀신들에게 완전히 놓임받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실로 대자연의 주인이신(23 - 27절) 예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키 위해 그 천하 중 일부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귀신들의 난폭성이 두사람에게서 떠나 돼지에게로 옮겨짐으로써 판단력이 결여된 무인격체인 돼지들은 죽음에의 질주(疾朱)를 하게 된다.

성 경: [마8:3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 이 지방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재산에 입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수를 체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를 만나려고 앴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보자 그 위엄에 제압당하여 단순히 그곳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불러 일으켜 그리스도를 반대하게 한다. 특히 사단은 '온 시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두려움을 크게 주입시킴으로써(눅 8:37) 자연히 온 시내 사람들과 예수 사이를 완전히 결별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2)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곧 가엾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선한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구세주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으며 세상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실로 물질적 한계 상황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은 진리와 구주를 수용할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오늘날도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선한 기적을 보고도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온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성 경: [마9: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배에 오르사 건너가 - 이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건너왔던(8:23-27) 게네사렛 호수를 다시 건너 되돌아 가심을 뜻한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본 사건의 평행기사를 다루면서 예수께서 되돌아가기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그 지역 사람에게 증거할 것을 당부하시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막 5:18-20; 눅 8:38, 39).

⭕ 본(本) 동네에 - 이는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4:13; 막 2:1),가버나움이 갈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문맥을 보면 뒤이은 2-8절의 내용이 마치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돌아온 후에 발생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 광인(狂人) 사건을 살펴볼 때 오히려 다음의 중풍 병자 사건이 가다라 사건 이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막 2:2-12과 막 5:1-20 비교). 이는 이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상, 즉 예수는 귀신과 죄 문제같은 영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보다는 신학적 주제에 따라 마태가 이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뒤에 언급될 2-8절의 도입부로서가 아니라 앞의 8:8-34의 사건을 마무리짓는 결론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절은 원문상,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새로운 사건을 소개할 때 흔히 등장하는 '카이 이두'(*)란 어구로 시작되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9: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 본 사건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평행 기사에 의하면 예수가 계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자의 친구인 듯한 자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그를 줄에 매달아 예수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되고 있다(막 2:1-12; 눅 5:17-26). 여기서 침상을 뜻하는 '클리네스' (*)란 그것을 들고 돌아가라는 6절의 예수의 명령에서도 암시되어 있다시피 한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메트리스(mattress)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저희'란 것은 데리고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병자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Clarke, Plummer). '저희의 믿음'이란 것은 예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칼빈(Calvin)은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히 11:1, 6).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겔 18:1-4).

⭕ 소자야(*, 테크논) - '테크논'은 연장자가 손 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요일 2:1).

⭕ 안심하라(*, 다르세이) -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으로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파도를 일거에 잠재우시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자는 진정 무서움의 그늘을 벗고 용기의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 (*)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서 진행의 의미보다는 완료의 뜻이 강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그 순간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Burton).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주목할만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는데, 예수께서는 질병 치료에 앞서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했다는 점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있다가, 즉 오랫동안의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후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주목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한 것은 질병의 치유선언과 같은 뜻인 동시에 나아가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해 주신 것이었다. (2)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려는 적절한 기회로 삼았다. 만약 그가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 용서함을 선언했다면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자들까지도 의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 용서함과 아울러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가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이유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중풍병자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 것이고 후자는 예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성 경: [마9: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어떤 서기관들이 - 서기관이란 용어는 바리새나 사두개 등과 같은 종교적 당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앙 성전 또는 각급회당 등에 속하여 율법 필사 또는 각종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서(2:4) 공직을 가리키는 직명(職名)이었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수구(守舊) 세력으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2절과 같은 예수의 선언을 듣고는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후토스 블라스페메이) - '참람하다'란 말의 '블라스페메이'는 원래 '남을 욕하다', '부당하게 비난한다'(shander)는 뜻이며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다',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하다'로 쓰였다. 그후 이 말은 그 개념이 확대되어 '신성모독'(blasphemy)의 뜻을 가졌다. 즉 어떤 서기관들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이시며(사 43:25; 44:22). 그런 이유에서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시 51:4). 이런 점에서 마가는 여기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는 어구를 덧붙이고 있다.

성 경: [마9: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그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 동료들의 믿음을 직시하셨던(2절) 것처럼 서기관들의 마음의 심연(深淵)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2:8).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을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대상 28:9; 렘 17:10; 요 2:25; 롬 8:27; 계 2:23). 따라서 이 같은 일은 예수께서 전지(omniscience)하심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증거인 것이다.

⭕ 악한 생각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하신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적을 베푸심과 동시에 이 이적과 함께 주어진 '죄 사함'의 진의를 성실하게 알아 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예수를 불신(不信)하며,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예수를 파멸시킬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마9: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는 죄 사함과 병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문하셨는데, 후자의 것, 즉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것이 분명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러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이비 메시야의 경우에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가시화(可視化)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명령을 남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의 생각에는 죄 사함보다는 병고치는 능력이 더 쉬울 것이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권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둘 다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 균일하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여기서 이 두 가지 신적 일을 동시에 행하신 것은 대부분의 예수의 이적이 그렇듯이 자신의 메시야직의 진정(眞正)성과 그에 따른 권능을 보임과 아울러 자신의 메시야직의 궁극적 목적, 곧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더나아가 자신이 메시야로서 죄 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성 경: [마9: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 여기서 '권세'(*, 여수시아)란 '능력'과 '권위의 위임받은 권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행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세상에서'란 말은 미래에 도래할 신천신지(新天新地)나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던 하늘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바로 이 지구상에서'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은 죄와 죽음이 현존하는 곳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한다(1:21). 실로 죄를 사하는 것은 '인자'된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속죄의 영원한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다.

⭕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앞절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사죄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병자에게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는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려는 방편으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어나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적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 중풍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곧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성경에 이적이 기록된 이유는 저자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신적 목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 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고친 이적의 목적은 예수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문맥을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라고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 일어나...가라 - 이 명령은 부정 과거 능동,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지체치 말고 일어난 즉시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매우 생동감 넘치는 3중의 명령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1) 그 중풍병자의 병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는 사실과 (2) 그의 죄악을 완전히 도말하셨다는 사실및 (3)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셨음을 나타낸다. 실로 그는 사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성 경: [마9: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그가...돌아가거늘 - 병고침 받기 위해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는 의심없는 절대적 순종을 통해(2절) 병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1:21) 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임마누엘(Immanuel)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 사함까지도 받은 것이다. 즉 그는 건강한 육체 뿐만 아니라 건강한 영혼도 선사받았다. 영육의 동시 축복,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성경은 영혼을 우선하지만 우리의 육체도 무시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때 우리는 새육체도 가지게 될 것이다.

성 경: [마9: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두려워하며(*, 에포베데산) - 초기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 가이사랴 사본등)에는 하나같이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등의 뜻을 지닌 본문의 원어를 사용했지만 후기 필사자들(copyists)은 이를 그저 '이상히 여겼다', '놀랐다'는 뜻의 '에다우마산'(*)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약화시키고 있다. 실로 죄악에 물든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신 절대적 존재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직면할 때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17:6; 28:5, 10). 한편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항상 경배와 찬양을 수반한다.

⭕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 공관복음서 3기자 중 유일하게 마태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도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1) 찬양을 돌린 주체 : 이 구절은 복음서 기자의 생각, 즉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부활을 목격하며 성령 세례를 받았던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에서 나온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며 찬양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사람의 정체 : '사람에게' (*,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란 말은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좀 애매하다. 문맥상 '이런 권세', 즉 중풍병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신 분은 분명히 예수이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Benoit, Held, Hill, Hummen) '사람에게'란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킨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16:19과 18:18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말은 마태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무리들은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본것이 아니라 한 특수 그룹의 자연인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일부 율법주의자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사죄권에 대해 크게 놀라서 찬양을 드리긴 하였지만 예수의 참 정체,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을 이해하는 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

는 뜻이다.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죄사함 선포를 신성 모독으로 보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이 문제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원래 단순하고 겸허한 자들의 심령에는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신의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이들에게는 혼돈과 불평거리만 될 뿐이다.

성 경: [마9: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예수께서...지나가시다가 - 본문의 평행구인 막 2:13, 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마태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아마도 레위 소명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하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두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 마태는 12제자들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본서 서론 참조)

⭕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Van Lennep).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5:46; Edersheim).

⭕ 나를 좇으라 - 여기서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한다(4:19; 19:21).

⭕ 일어나 좇으니라 -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낸다. 이 제 2의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다(눅 5:28).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즉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성 경: [마9:1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되었다)란 말로 시작되고 있다(7:28, 29). 이는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 마태의 집에서(*, 엔 테 오이키아) -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로 규정하고 있다.

⭕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 자찬(自畵自讚)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성도는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적이어야 하겠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 많은 세리와 죄인들 -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특별히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 함께 앉았더니 -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셨다. (3) 주님께서는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다.

성 경: [마9:1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다.

⭕ 함께 잡수시느냐 - 이 말은 예수가 종교적.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한편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할 경우만은 에외였던 것 같다.

성 경: [마9:1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의원이...병든 자에게라야 -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대답이 아니었으며 또한 바리새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하고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즉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예수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간과치 말아야 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이다.

성 경: [마9:1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너희는 가서...배우라 - 이는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이다.

⭕ 내가 긍휼을 원하고 -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호 6:6). '긍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언컨대, 제사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 예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하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죄인이긴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는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

성 경: [마9:1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그 때에(*, 토테) -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 요한의 제자들이 -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이 메시야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다.

⭕ 당신의 제자들은...아니하나이까 -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성 경: [마9:1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혼인집 손님들이(*,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다.

성 경: [마9:1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는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마9:1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째번의 '새'(*,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인 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성 경: [마9:1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 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synagogue)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오셔서...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출 29:1-37 강해, '안수에 대하여' 참조).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성 경: [마9:1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도 무릎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성 경: [마9:2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 (*)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 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였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런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 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9:2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을 해야만이 나을 수 있다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성 경: [마9:2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 안심하라(*, 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주술적 방법)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성 경: [마9:2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리이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 도뤼부메논)이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 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흔재(痕在)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9:2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문이다.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썬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불며 곡하기 위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웃더라'(*, 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9:2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었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9:2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성 경: [마9:2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거기서 떠나 가실새 -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후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절(28절)에 언급된 '집'이란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거처가 아니면 다시 마태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두 소경이 -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에 등장하는 소경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소경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 10:46-52과 눅 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소경 치유 사건과 요한 9장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팔레스틴 지방에는 동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소경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 다윗의 자손이여 -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1:1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호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이하)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진정 메시야라면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1)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으며(요 7:42), (2)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분임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12:23)라고 하는 점이다.

⭕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이 두 소경이 자기들에게는 메시야의 은혜를 입어 구원함을 받을만한 공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 표현으로서 우리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은 메시야를 식별하고 있었으며, 또 이렇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빛을 어느정도나마 감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9:2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집에 - 이 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야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히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내가...할 줄을 믿느냐 - 소경들이 더듬거리며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인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措置)이기도 했거니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특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소경들에게 자신의 능력, 인격,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질문을 하신 것이다.

⭕ 주여 그러하오이다 - 이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임을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이 같은 소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은혜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과 (2) 이 은혜를 받아 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르짖음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고한 인식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성 경: [마9:2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저희 눈을 만지시며 - 이 같은 행동은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든 행위였던 것 같다(8:3).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너희 믿음대로(*, 카타 테 피스틴 휘몬) - 문자적으로 '너희 믿음에 따라' 인데, 소경들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란 의미보다는 '믿고 바라는 바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13).

성 경: [마9:3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에 의해 그들이 가장 소망하던 바 눈이 밝아졌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믿고 바라는 바대로 그들에게 눈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예수를 영.육의 온전한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인식하는 자에게 그의 도래로 인해 실현된 축복의 약속(사 35:5, 6)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 엄히 경계하시되(*, 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스) - 이는 다소 격렬한 감정적 요소가 있는 자에게 대한 경고의 말을 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단 11:30; 막 1:43; 요 11:33, 38).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조국을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진 대중들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 이적을 발설치 못하도록 밝은 세계를 이제 막 봄으로써 환희에 들떠 있던 소경들에게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군중들로부터 메시야 추대(推戴)를 받는 것이 그가 이 땅에 온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9:3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나가서...전파하니라 -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다(삼상 15:22). 따라서 눈을 뜬 이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마 이 놀라운 사건을 당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선전하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설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지혜란 것은 이렇게 어리석기 마련인 것이다(Calvin).

성 경: [마9:3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벙어리의 치유]

⭕ 저희가 나갈 때에 - 이 장면은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소경을 고치셨던 바로 그 집에서 막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 귀신 들려 -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소경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단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성경 기자들의 우매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막 9:14-29,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 벙어리 된 자(*, 코포스) -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인 것이다.

성 경: [마9:3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벙어리의 치유]

⭕ 귀신이 쫓겨나고 - 벙어리 된 자의 질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벙어리의 원인이 귀신들린 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이 사람의 벙어리를 고치신 것이다.

⭕ 벙어리가 말하거늘 -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 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벙어리가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야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 경: [마9:3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 바리새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의 사역과 이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9:3, 11, 24) 급기야 여기에 와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 이적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었다고 극단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예수의 가르침, 그중에서도 특히 10:16-28의 배경이 된다.

⭕ 귀신의 왕 - 귀신들의 괴수, 곧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서(4:1-11, 사단과 귀신)이는 바알세불을 가리킨 것이다(10:25; 12:24 참조).

⭕ 빙자하여(*, 엔) - 이는 귀신의 왕을 '통하여' 라는 뜻도 있고 귀신의 왕 '안에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단을 방편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다.

⭕ 귀신을 쫓아낸다 - 이와 같은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표자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목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기와 질투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메시야의 광채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와같이 악한 사단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비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도의 악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이상 이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겠다.

성 경: [마9:3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순회 사역]

⭕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이는 예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 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된다. 따라서 예수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5-38절은, 4:23-25이 첫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번째 강론(10:5-42)의 전제가 된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 가르치시며...고치시니라 - 이는 마태가 예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 천국 복음 -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스리라는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실로 예수 자신은 곧 천국 복음의 실체였으며, 그분의 메시지는 그 복음의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 병과 모든 약한 것 -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예수는 오직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기적만을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분의 원래 목적은 이적을 행하는 초능력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성 경: [마9:3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순회 사역]

⭕ 민망히 여기시니(*, 에스플랑크니스데) - 이 말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이다.

⭕ 목자 없는 양 -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졌다(겔 34장).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눈에는 이들이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떼로 보였던 것이다.

⭕ 고생하며(*, 에크레뤼메노이) - 이 말의 원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A.T. Robertson) 백성을 올바로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심지어 천국 입성을 방해하곤 했던(23:13)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 유리함이라(*, 엘림메노이) -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낸다.

성 경: [마9:3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일꾼의 필요성]

⭕ 추수할 것은 많되 - 이는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추수가 영혼 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13:49) 추수할 시기 곧 세상 끝과 그때 있을 심판으로 해석된다.

⭕ 일군은 적으니 - 여기서 일군이란 예수 자신, 세례 요한, 예수의 치유 이적을 경험한 산 증인들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로 유대 지방에는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신사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성 경: [마9:3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일꾼의 필요성]

⭕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 여기서 '청하여'(*, 데에데테)란 공적 간구라기 보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간청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하나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히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한편 여기서 '천국 일꾼'이란 10:1 이하에 제시되는 12제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오히려 12제자에 구애됨 없이 많은 하늘 일꾼들로 보는 것이 좋다.

⭕ 보내어 주소서(*, 호포스 에크발레) - 이는 강제력이 동원된 상태로 밀어내 달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 요청을 나타낸다. 실로 그때나 지금이나 천국 일꾼이 시급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0: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의 직위와 권능을 부여하심]

⭕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 부르사(*,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이 말의 원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여기서 먼저 '권능' (*,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단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야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야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적인 충만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도들의 단회적(單回的)이고도 제한적(制限的)이며 유일무이(有一無二)한 특수 권능이었다.

성 경: [마10: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사도(*, 아포스톨로스) -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1; 갈 1:1). 한편 본절 이하에 제시된 12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벳새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벧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 안드레(*) -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 야고보, 요한(*) -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성 경: [마10: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빌립(*, 필리포스) -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바돌로매(*) -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 도마(*) -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동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 세리 마태(*, 말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과 9:9 주석을 참조하라.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 다대오(*, 닫다이오스) -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성 경: [마10: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가나안인 시몬(*,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 가룟 유다(*,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번째와 여섯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성 경: [마10: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이방인의 길로도 -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같은 금지 명령은 어떤 민족적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영원적 엄명으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한시적(限時的)명령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복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임받은 바 있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 되어야 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훗날 예수께서 전세계에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맡기실 것이다(28:19; 행 1:8).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도 구원 역사의 순차성(順次性)을 역설한바 있다(롬 1:16; 2:9, 10). 실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3; 사 49:6; 행 3:25).

⭕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으로,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성 경: [마10: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성 경: [마10: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가면서 전파하여 -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쏘' (*)는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 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Quesnel).

성 경: [마10: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병든 자를 고치며...귀신을 쫓아내되 -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식적 치유(문둥병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 경: [마10: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전대에 -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이다.

⭕ 금, 은, 동 -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 가지지 말고 -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성 경: [마10:1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주머니 -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 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 두 벌 옷 -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틴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저 먹을 것 받는 것 -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성 경: [마10:1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성이나 촌에 - 여기서 먼저 '성'(*, 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 코메)은 자연 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 합당한 자 -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 떠나기까지...머물라 -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0:1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평안하기를 빌라(*,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 직역하면 단순히 '인사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 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0:1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성 경: [마10:1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영접도...아니하거든 -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성 경: [마10:1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내가 진실로 -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 심판 날에 -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 소돔과 고모라 땅이 -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 견디기 쉬우리라 -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성 경: [마10:1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보라(*,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 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성 경: [마10:1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사람들을 삼가라 - 먼저 '삼가라'(*, 프로세케테)란 말은 '...로부터 떨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Bruce)를 가리킨다(33절).

⭕ 저희가...공회에 -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 저희 회당에서 -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채찍질 하리라 -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 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성 경: [마10:1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총독들과 임금들 -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다.

⭕ 끌려가리니 -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 증거가 되게 -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성 경: [마10:1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넘겨 줄 때에 -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 어떻게...말할까 염려치 말라 -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 그 때에 -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10:2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너희가 아니라 -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 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 너희 아버지의 성령 -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의 신(사 11:2) 등이 있다.

성 경: [마10:2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죽게 하리라 -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성 경: [마10:2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내 이름을 인하여(*, 디아 토 오노마 무) -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 모든 사람에게 -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 나중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칼빈(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 구원을 얻으리라 -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성 경: [마10:2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핍박하거든...피하라 -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 이는 예수께서 선언하신 바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방문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때부터 단지 40년후에 발생하기 때문에 다음 어구에 언급되는 인자의 오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것을 지리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복음 선교의 충만성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전해져서 그들이 개종하게 되는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 인자가 오리라 - 이 어구는 대단히 난해한 어구 중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자의 오심은 12제자들을 파송한 후 주께서 그들을 뒤따라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J. Dupont). (2) 이는 예수의 부활이나 또는 예수가 메시야로 널리 인정될 때를 가리킨다(Sabourin). (3) 인자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을 말한다(Chrysostom, Calvin). (4)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Agathangelus). (5) 예수 당신이 지상에 있을 때 종말이 임한다고 착각하여 잘못 내뱉은 말이다(Schweitzer). (6) 이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Walvoord). (7) 인자의 오심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France).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보여지나 본문의 문맥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천국의 도래(到來)'와 연결시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즉 인자의 임하심은, 곧 천국의 임재를 뜻하며 이 천국은 현재 이미 임해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를 메시야로 깨닫고 영접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그 실패로 인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거듭 말했던 예수의 경고는 바로 이 '인자의 오심'과 관계가 있다(Feuilet).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으나 그분의 경고는 그 선지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심판자이며, 메시야의 통치는 이제 축복과 진노 속에서 모두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8:11, 12; 21:31, 32). 결론적으로 본절의 '인자의 오심'은 거듭 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천국이 임함으로써 유대인에게 떨어지고야마는 종말론적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전에서의 구약적 예배와 혈통적 선민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 포도주는 필연적으로 새 부대에 담겨져야 했다(9:16, 17). 이로써 천국은 이제 그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5:17-48).

성 경: [마10:2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제자가 그 선생보다 -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종이 그 상전보다 -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10:2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도 만족할 것이었다.

⭕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단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데스포테스'(*)를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

성 경: [마10:2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그런즉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저희를 -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단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단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10:2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 과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 광명한 데서 말하며 -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 귓속으로 듣는 것을 -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 집 위에서 전파하라 -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번째 나팔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성 경: [마10:2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 이는 유한한 능력, 그것도 현세에서만 발휘할 수 있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한편 예수께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로 육(肉)과 영혼(靈魂)을 제시하셨는데(전 12:7; 롬 8:10; 고전 5:5; 히 12:9) 그중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요 불멸의 것이므로 영혼을 해(害)할 권세를 가진 자는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셨다. 이에 비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몸이란 영혼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시적인 육의 죽음은 영원한 영혼의 멸망과 비교했을 때 역시 그 가치가 극히 약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 두려워하지 말고(*, 메 포베데테 아포) - 이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탈피하라'는 뜻으로 단 한 순간의 공포마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미를 품고 있다. 실로 영.육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지니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Bengel). 일찍이 베드로는 의를 위한 고난은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가질것을 당부한 바가 있다(벧전 3:14, 15). 인간이란 고난이나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예견할 때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을 생각하고 그 만을 두려워할 때, 또 영원한 생명과 의를 생각할 때, 이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 몸이 물질적이요 현재적이라면 영혼은 비물질적이요 영원적이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동시적 멸망은, 곧 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파멸을 뜻하며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동시적 멸절(滅絶)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은 전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관할하고 계신다. 인간으로 인한 두려움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능히 극복된다(Cramer).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옥'(*, 게엔나)이란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의 전인격이 사후(死後)에 거하면서 심판의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5:22, 29, 30; 18:9; 23:15; 약 3:6). 이에 대해서는 막 9:43-50 강해 '지옥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멸하시는'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레사이'(*)는 완벽하고도 철저한 멸망을 뜻하기보다 영벌(永罰)의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5:46; 막 9:47, 49; 살후 1:9). 바로 그런 점에서 누가는 '지옥에 던져 넣다 -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맛보게 할 의사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 12:5).

⭕ 두려워하라(*, 포베이스데) - 이는 앞의 '두려움'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항상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는 자에게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녕 여호와를 두려워(경외)하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예비하는 참지혜가 아니겠는가? (잠 9:10)

성 경: [마10:2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약간의 푼돈에 두 개의 생명이 팔릴만큼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앗사리온'이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1/16의 가치를 가진 적은 돈이다.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에도 이 앗사리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이사르), 이때 이 금액의 가치는 네 개의 은(銀) 알맹이에 해당되며, 최저의 금액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Clarke).

⭕ 참새(*, 스트루디아) - 새의 종류를 가리키기보다 일반적으로 매우 작은 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아주 작고 또 매우 흔해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새로, 가난한 유대인들의 식량이 되기도 하였고 또 슬픔과 고독의 상징(symbol)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매매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값싼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참새와 같은 몇몇 조류들이 예루살렘과 욥바 등지의 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 너희 아버지께서 - 이는 매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표현이다. 즉 예수는 우주만물(宇宙萬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6:26).

⭕ 허락지 아니하시면(*, 아뉴) - 이는 적극적으로 참새를 죽지 않게 했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참새의 생존과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숙히 관여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참새가 붙잡히고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나님이 지정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문제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보살핌과 자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창조주로서 그들을 지키시는 것이다.

⭕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이는 사냥군의 화살이나 돌팔매에 의해 땅바닥으로 추락(墜落)하는 돌발적인 죽음을 의미한다(F.R. Fay). 혹자는(Chrysostom, Origen) 이를 사냥군의 올무에 걸리는 상황으로 이해하나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없다. 한편 누가는 이 상황을 새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잊어버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찮은 생명체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자상한 배려를 더욱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눅 12:6).

성 경: [마10:3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예수께서는 앞의 '참새'와 대조적으로 '너희'를 강조하심으로 그 보살핌의 강도(强度)를 더욱 깊게 하셨다. 한편 '세신 바 되었나니'(*, 에리드 메메나이 에이신)란 분사형태의 완료 수동형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이미 옛날부터 셈을 하신바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관심의 시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으로 그때부터 우리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머리털은 너무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루 평균 약 50개 정도의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러한 일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시며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들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공중에 나는 보잘것없는 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한 문제와 보이지 않는 일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성 경: [마10:3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두려워하지 말라 - 이 말씀은 이곳에서 세번째 언급되고 있다. 첫번째는 모든 진리가 드러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 두번째는 박해자들이 아무리 성도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그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또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번째로 언급된 이 말씀은 앞의 두개의 내용보다 더 고무(鼓舞)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긔까지 다 세시고 간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불필요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 많은 참새보다 - 한 앗사리온에 둘씩 팔리는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감찰하시거늘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시겠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와 생명을 주고 구속하신 한 심령의 가치를 감히 어느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고통이 오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멸망 중에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며 설령 핍박 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과 의(義)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0:3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 (*,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시인하면'으로 예수와 연합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시인하면'이란 말은 오히려(신앙을) '고백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자신이 예수와 생명적 연합을(갈 2:20) 이룬 존재로서 예수 그분이 바로 자신의(主)이심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는 것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시 66:16). 이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마음으로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영(靈)을 받고 또 그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생활로 표현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는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7:21) 사람 앞에서도 그와 같이 고백하는 담대한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 먼저 '하늘에 계시 내아버지'란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와 무궁한 사랑을 암시한 표현인 동시에 성자 예수와의 지극한 친밀감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아버지앞'이란 모든 인간으 종말적 귀결(conclusion)지점, 곧 심판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으며(요 5:22), 바울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 하였다(고후 5:10).

⭕ 저를 시인할 것이요 -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是認)하면 주께서는 심판날에 우리를 그와 똑같이 시인해 주실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의 충성을 기쁘게 여기고(25:34-36, 40; 계 2:10), 또한 그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中保)의 간구를 아끼지 않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히 7:25).

성 경: [마10:3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 사람앞에서 주를 부인한다는 말씀은, 곧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솔직히 인정치 않고, 그분을 주(主)로 여기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그결과 하나님께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보다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며 하늘의 신령한 것보다는 지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영교(靈交)를 단절한 채 세속적 인간 관계를 더 좋아하게 된다. 한편 이것은 베드로와 같은 순간적인 부인(否認)이 아니라(26:69-75) 전생애와 전인격을 통해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판가름하실 것이다(Homer A. Kent, Jr.).

⭕ 저를 부인하리라 -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메시야로 인정치 않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날, 심판장이시며 대속자이신 만유의 주로부터 부인당하고 버림받게 된다(7:23; 딤후 2:12). 왜냐하면 예수를 부인하는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들은 자신의 열매(입술과 행위)를 자신이 거둬들여야 하는 것이다. 실로 현세에서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된다.

성 경: [마10:3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내가...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예수당시 많은 사람들은 메사야가 와서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야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는 바로 이 같은 그릇된 기대들을 일거(一擧)에 거부하시면서 당신이 이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피력(披瀝)하셨다.

⭕ 화평이 아니요 - 이 어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순전히 불화(不和)와 반목(反目)을 일으키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평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인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로 번역된다. 유대인들은 영적 문제이든 세속적 문제이든지 간에 온갖 종류의 복을 기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번영이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꽃피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문에서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를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바로서의 화평, 즉 현상적(정치, 경제 등)이고 외적인 평화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로 예수는 본질적(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요일 4:10)이고 내적인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검을 주러 왔노라 - 이사야는 메시야의 탄생을 '평강의 왕'이라 예언하였으며(사 9:6), 예수 탄생시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그의 탄생을 두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사실 예수는 평화의 실체이자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다(눅 1:79; 요 14:27; 롬 10:15; 골 1:20). 따라서 이곳에서 예수께서 '화평'이 아니라 '검'(sword)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은 메시야의 임하심으로 야기되는 그 영향력과 결과들 중의 하나가 불의를 정복하고 악을 제거하는 투쟁일 것임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다'는 뜻의 원어 '바레인'(*)은 '던지다'는 뜻으로 긴박하고도 급작스런 전투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문구로서 본문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高潮)시켜준다. 여하튼 검이라고 하는 것은 적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며, 무기로서 검을 준다는 것은 적대감을 유발시켜 투쟁과 분열과 전쟁을 발발케 한다는 것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신국(神國)을 건설키 위해 오셨는데(5:9), 이 신국은 곧 땅 위의 죄악된 질서를 척결(剔抉)함으로써 그 위에 세워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상은 메시야와 그의 통치를 완강히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생 결단의 치열한 혈전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요 14:27; 16:33). 한편 그 전투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성 경: [마10:3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내가 온 것은 - '내가 왔다'(*, 엘돈)는 표현은 예수의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자의식(自意識)을 반영해 준다.

⭕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 본문은 미 7:6의 인용으로써, 미가는 아하스 왕 시대의 죄악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예수는 복음이 빚어낼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모 자식 간의 가족적 분쟁을 일으키는데 자신이 오신 목적이 있다고 천명(闡明)하셨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는 아주 사악하고 이기적인 종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분명 예수의 참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즉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지금 게속해서 제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그러한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오셨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즉 제자들의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될 때 수많은 박해가 예상되지만 그들을 가장 많이 핍박할 자는 이방인이 아닌, 예수 자신의 경우처럼(13:53-58; 요 7:3-5), 자기 가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를 가장 핍박한 자들은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여기서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적대감을 갖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젊은 세대(결혼한 아들 - '사람', 미혼의 '딸', '며느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언급되었으며, 이들이 늙은 세대에 항거할 것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1) 복음의 생동감 넘치는 침투력과, (2) 고답적(高踏的) 사상에 물들지 않은 여린 신앙인들의 복음에의 열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불화하게'(*, 다카사이)란 '둘로 나누다'는 뜻으로 신앙 문제에 관한한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마치 기름과 물처럼 결코 연합(聯合)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어떤 불신자들은 이 구절을 보고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라고 비난하고 또 일부 신자들은 가족까지도 무시하거나 원수 취급을 해서라도 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앞장 서서 가족의 불화와 반목을 야기시키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본문의 말씀을 그릇되게 이해한 데서 나온 엄청난 파행(跛行)적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는, 당신을 신앙하며 헌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많은 사람들과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招來)하는 일임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성 경: [마10:3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주는가 하면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케 한다. 그 까닭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지녔다거나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접한 각인(各人)의 부패한 심성(心性)과 반항적 기질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 경: [마10:3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 이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연적인 성품에서 나온 혈연적, 인본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시는 장면이다. 즉 예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된자의 제일의 의무요 본분임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definition)해 둘 필요가 있다. 즉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자연적인 애정의 표시, 즉 혈육간의 사랑에는 흔히 '필레오'(*)란 말을 쓰고, 차원 높은 신(神)적이고 윤리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는 '아가파오'(*)란 말을 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남녀간의 육적인 사랑이나 가족간의 애정을 넘어선 절대적 신뢰와 모든것을 초월한 종교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주로 이 용어가 쓰인다. 그리스도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차선(次善)이나 여분으로서가 아닌 최고(最高)의 우선적 사랑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특정한 평가 기준에 알맞다는 뜻이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 자신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자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로 예수의 제자란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이다.

성 경: [마10:3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써 관례에 따라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刑場)에까지 가야 했다(27:32),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 반란군들이 대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당한 사건이 이전에 여러번 있었다. 특히 갈릴리를 중심한 유다의 반란(행 5:37)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 형틀의 이슬로 사라져 간 적이 있었다(Jos, Antiq. XVII, 10:10).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이 십자가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십자가란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러한 시련까지도 감내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否定)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였다. 한편 예수는 그때까지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발설(發說)하신 적이 없으셨지만, 적어도 당신께서는 곧 지게 되실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Bengel).

⭕ 나를 좇지 않는 자도 -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즉 가장 무가치해 보이고 또 억울해 보이는 시련과, 또 죽음의 아픔까지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뒤따라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는 질적으로나(인류 대속 - 헌신과 충성), 시간적으로(영원 효력을 지닌 단회적 사역 - 계속적 사역) 큰 차이가 있다. 여하튼 제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받은 희생과 죽음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동참하는 충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성 경: [마10:3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 목숨에 해당한는 원어 '프쉬케'(*)는 혼(soul)이나 생명(life)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프쉬케'는 또한 본문처럼 일시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모두 함축한 단어이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한부(時限附)적인 생명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영원한 참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내동댕이 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해와 관련된 이 문맥에서 우리는 이 구절의 내용을 처참하고도 굴욕적인 순교(殉敎)까지도 각오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순교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의 참 신앙을 버리면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목숨을 잃는 자는 -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박해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를 당부한 말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되 생명까지 희생하는 자는 다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조금도 상실(loss)되지 않는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칠 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며,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즉 생명은 주 안에서 거듭 태어날 것이고 재물과 시간은 축복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성 경: [마10:4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너희를 영접하는 자 - 보냄을 받은자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눅 10:16; 요 12:44, 45; 13:20; 행 9:4; Mishna, Berach, V.5).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는 자기를 보낸 자를 믿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자는 자기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44, 45). 따라서 제자들은 단순 대리인(代理人)으로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 지체(肢體)로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아가 자기들의 생각과 뜻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0:4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선지자의 이름으로 - 먼저 '선지자'(*, 프로페테스)란 히브리어 '나비'(*)를 번역한 말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그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자를 가리킨다(삼상 10:10; 렘 1:9). 그리고 '이름으로'란 '뤠쉠'이라는 랍비적 아람어의 전치사로 보아 '...때문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Moffatt). 즉 본문은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로 번역한다. 문맥상 이러한 번역도 가능하며, 이름과 그 인격의 본체 및 지위와 결부시켜(6:9) 해석해도 무방하다. 여하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선지자를 단순히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의 차원에서 떠나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 곧 선지자로서의 지위에 합당하게 대우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의 상급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 선지자의 상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선택된 자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이 다 선지자의 일을 할 수는 없다. 한편 하나님의 권위를 덧입은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것은 결코 작은 영예(榮譽)가 아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은 선지자를 우대함으로써 그의 거룩한 사업에 동참하여 그가 받는 은혜와 보상을 다소나마 받을 수 있는 것이다(왕하 4:8 ff).

⭕ 의인의 이름으로 - 본문과 유사한 구절인 13:17; 23:29에서의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이전(주로 마카비 시대)의 인물이나 구약 시대의 의인을 지칭함인 듯하다. 그러나 문맥상 '의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행 22:14; 약 5:6). 한편 다니엘은 의인들의 최후 승리를 예언하면서 구원을 얻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의롭다고 묘사한 바 있다(단 12:1-4). 여하튼 이 말을 제자 파송(派送)사건을 계속 다루고 있는 본문에 적용하면 이 '의인'은 결국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훈도(薰陶)를 따르며, 그들이 제시한 예수를 온전한 믿음으로 수용(受容)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5:20), 이러한 해석이 적절한 듯이 보인다.

성 경: [마10:4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제자의 이름으로 - 40-42절은 제자들을 격려, 위로하는 강화의 결말부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병렬(竝列)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동일한 대상 즉, 12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으로 해석하고 있으며(Allen, Manson), 다른 이들은 이들 모두가 각기 신분과 직책이 다른 구별된 특수 계층이라고 이해하고 있다(Hill). 아마도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뒤이어 나오는 '소자'란 말과 연결시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더욱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소자'라 부르셨던 것이다(25:40).

⭕ 소자 - 소자는 흔히 배우는 자(사 60:22; 슥 13:7; A. T. Robertson)나 미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의미하지만(18:6, 10; 막 9:42) 본문에서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모두 포함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나 사도들 그리고 의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작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가치관에서는 섬기는 자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 선지자나 의인, 사도들은 모두 이 소자의 신분에 있다고 본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 - 실로 찬물 한 사발의 제공은 선행의 가장 초보(初步)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메마르고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하에서 한그릇의 냉수란 곧 생명력 넘치는 환대(歡待)를 의미할 수 있다. 이처럼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정성어린 대접은 제공하는 편에서는 별 것(a rarity) 아닐지라도 제공받는 자와 그를 그곳에 보낸 자의 편에서는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사역자들과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자들의 봉사를 단순한 도덕적 선행 이상의 가치로 평가하신다(25:35-40)

성 경: [마11: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제자 파송]

⭕ 예수께서...마치시고 -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결 문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10장과 이 구절을 나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훈련과 각종 선교 지침을 가르치셨던 가버나움 근처에서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사건에 뒤이어, 마가나 누가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각처에서 전도하고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막 6:30; 눅 9:10) 마태의 기록에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사건의 진행 과정보다는 예수의 공적 사역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고 조금 전의 제자 파송이 예수 자신의 일을 덜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천국을 널리 선포하기 위한 조처(management)였음을 보여주려는 집필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저희 여러 동네 - 여기서 '저희'(*, 아우톤)라는 대명사는 '파송된 제자들'과 연관시킴으로써 (1) 제자들의 출생지(Zigabenus), 또는 (2) 제자들이 전도한 각 동네로 보기도 하고(Fritzsche, Meyer), 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관시켜 (3)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로 해석하기도 한다(D.A. Carson). 이 견해들 중 (2), (3)번을 조화시킨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즉 예수께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방의 성읍들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다(Bruce, Chrysostome).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예수께 보고(report)하게 된다(막 6:30).

⭕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사적(私的)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의 주임무가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것(*, 디다케)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케뤼그마)임을 추론할 수 있겠다.

⭕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여기서 '거기'란 제자 훈육(discipline)과 파송을 했었던 가버나움 주변의 한 곳을 가리킨다.

성 경: [마11: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이 옥에서 -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가 세례 요한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 있다(14:3, 4).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때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XVIII, 119<2절>). 이러한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자 예수께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게 된다(4:12). 한편 세례 요한은 이곳에서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지게 된다(14:1-12). 여하튼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언어로 선포했었다.

⭕ 그리스도의 하신 일 - 마태는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는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懷疑)하고 있는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마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있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 곧 오실 메시야이심을 깨우쳐 줌으로써 불필요한 회의를 막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마태는 그의 책 서두(1:1)와 서론에 해당하는 1-2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해 놓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는 (1) 세리들 및 죄인들과의 은혜스러운 교제(9장, F.R. Fay), (2)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 파송 등의 사건들(5-10장), (3)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눅 7:11-17, A.T. Robertson), (4)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세례 요한의 투옥에는 무관심했던 일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 제자들을 보내어 -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9:14). 그때 제자들은 요한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으며 요한의 사후(死後)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었다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앞에 전치사 '디아'(*, 통하여)가 들어 있어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KJV에는 '디아'를 '뒤오'(*, 둘)로 번역하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둘만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눅 7:19).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들어보면 (1) 메시야에 대한 회의 때문에(Tertullian, Bruce), (2) 자기 제자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Chrysostom), (3)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Holtzman)등이 있다. 그중 첫번째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이에 비해 어떤 학자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낼 형편에 처해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내고 있다(D.F. Strauss).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막 6:20)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만나지도 못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마11: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오실 그이(*, 호 에르코메노스) - 몇몇 랍비들은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지만(McNeile), 이 말은 분명 메시야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다(막 11:9; 눅 13:35; 히 10:37).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인자'(막 9: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시 118:26), '왕'(시 2:6), '정한때에 오시는 자'(합 2:3)등이 있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과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그의 오심이 에언되어 왔다(창 49:10; 사 9:1-6; 11:1-5; 35:4; 단 9:24-27 등). 따라서 메시야가 '오실 그 이'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한편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도했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눅 7:21). 아마도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이'가 왔을 때 일어날 메시야적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 당신이오니이까 - 헬라어의 어법상 주어가 없더라도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명사는 흔히 생략되는데 본문에서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당신'(*, 쉬)이란 대명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니이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이 질문은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전체 신앙의 의심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호에르코메노스'(*, 그 오시는 자)인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의 의문인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이를 -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은 견해들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한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그가 왜 이런 회의를 품게 되었는가? (1) 아마도 그가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Bruce). 즉 시간이 갈수록 요한은 감옥에 갇혀 마음이 조급해진 반면 메시야로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없었던 것이다. (2)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와 요한의 제자들 간의 경쟁 의식에서, 예수의 명성이 높아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심을 느낀데 그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그러나 주된 원인은 예수가 그 당시 흔히 이해되고 있었던 민족적 차원의 메시야 사역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은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했으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사랑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Dunn). 즉 그는 적어도 예수가 오실 메시야라면 엘리야와 같은 메시야적 표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만 하지 않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말 4:5; 요 1:19-21). 따라서 그는 예수의 행위가 메시야로서는 합당치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 기다리오리이까(*, 프로스도코멘) - 이는 막연히, 수동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을 읽을 수 있다.

성 경: [마11: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 듣고 보는 것을 -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변호(辯護)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적 실재(實在)를 증거하셨다(사 29:18, 19; 35:5, 6; 61:1). 한편 누가는 "마침 그 시(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고 기록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는 것'이란 그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1)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요 (2)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고, 보는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 요한에게 고하되 -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을 듣고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마11: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 소경이 보며 -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사 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야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야 이적 중 '소경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1에 언급된 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 앉은뱅이, 귀머거리 - 메시야의 이적이 주로 현상(現象)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된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는데(9:18-26; 눅 7:11-15) 이는 메시야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메시야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며 또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 여기서 복음이란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아름다운 소식'(사 61:1)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즉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온작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문둥병자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학자들에 따라 (1) 물질적 빈곤자(Robertson, De Wette), (2) 심령이 가난한 자(Meyer), (3)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 등으로 이해한다. 이중 (2)의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이 많으나 그 견해가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성 경: [마11: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복이 있도다 -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참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야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거가 된다(요 20:31).

성 경: [마11: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저희가 떠나매(*, 투톤 포류오메몬) -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다.

⭕ 예수께서...말씀하시되 -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Jesus began to speak, NIV)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F.R. Fay). 한편 혹자(Plummer)는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세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葬禮辭)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요한에 대하여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外樣)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1-12).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신다.

⭕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여기서 먼저 '광야'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3:1). 실로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우뢰와 같은 메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요 5:35)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 칼라몬)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라고 있다. 이 갈대(calamus)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요삼 1:13), 지휘대(27:29), 측량자(계 11:1)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도(Grotius, De Wette) 있으나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Allen, Bruce, D.A. Carson).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성 경: [마11: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부드러운 옷 - 여기 '부드러운'(*, 말라코스)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눅 7:25; 고전 6:9).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高價品)이었다.

⭕ 입은 사람이냐 -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옷차림을 하였다(3:4).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 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 왕궁에 있느니라 -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野生)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성 경: [마11: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하셨다.

⭕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7, 8, 9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問答式)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more excellent)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성 경: [마11:1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認准)하신다.

⭕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70인역과는 다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사 9:6).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말 4:5, 6; 눅 1:76), 성육신(Incarnation)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 예비하리라(*, 카타스큐아조) -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base)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全)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성 경: [마11:1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내가 진실로...말하노니 -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세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至大)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야적 증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 여자가 낳은 자 -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 (*, 엘루드 이솨, 욥 14:1) 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과 고통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창 3:15; 갈 4:4). 즉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없도다 - 이는 세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이 타(他)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야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사 40:3; 말 3:1). 또 친히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자였던 것이다.

⭕ 천국에서는 - 천국(Kingdom of heaven)은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質)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 개념' 참조).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入參)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主)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3:2).

⭕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神的)인 측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Weiss),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Luther, Chrysostom, Origen),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Calvin, Plummer)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예수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 이가 당신이냐'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1:1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 이말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lbright, Mann). 그러나 이보다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Jeremias),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이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있는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빼앗느니라'(*, 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눅 7:28-30). 실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성 경: [마11:1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5:17; 7:12; 눅 16:16). 여기서 먼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을 뜻한다.

⭕ 요한까지니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1:1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즐겨 받을진대 -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는 '좋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 오리라 한 엘리야 -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왕하 2:11).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3:1; 4:1, 5).

⭕ 이 사람이니라 -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messenger)였던 것이다.

성 경: [마11:1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말은 예수께서 빈번히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으로서(13:9, 43; 눅 14:35; 계 2:7)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나 복음의 영적인 진리에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들을지어다'(*, 아쿠오)란 말이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라'는 강한 의미의 요청으로서 직면한 상황에 대해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앞에서 선언한 내용의 말씀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듣고 확신해야만 함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도 이를 경시(輕視)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귀를 막고 악의에 찬 방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진리를 수용하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복있는 자일 것이다.

성 경: [마11:1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이 세대를 - '세대'(*, 게네아)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요한과 그리스도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 세대'란 말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등),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否認)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되었다.

⭕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 이는 비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교육기법이다(눅 7:31). 그런데 '비유할꼬'(*, 호모이오소)의 원뜻은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로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곁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영적인 지혜를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심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것이다(Stier). 이처럼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목도(睦睹)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아이들의 놀이까지 빠뜨리지 않고 비유로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하신 것이다.

⭕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 여기 '장터'란 말의 원어 '아고라'(*)는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물론 이곳에서 여러 보임 외에 상거래(商去來)가 형성되기도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지금껏 무관심 속에 버려졌었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예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불일치하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銳意注視)하셨던 것이다(Wycliffe, A.T. Robertson).

⭕ 제 동무를 불러 - 장터에서 아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놀이를 제안하는 모습이다.

성 경: [마11:1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피리를 불어도...춤추지 않고 - '피리'와 '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인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Buxtorf). 이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imitation)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던 것 같다.

⭕ 애곡하여도...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 곡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을 말한다(23:30; 겔 24:16). 즉 아이들은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놀이에 참석하여 어른들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였으나 동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같이 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를 바꾸어 장례식 놀이를 하며 애곡(哀哭)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무시(無視)요 무관심과 불일치를 암시한다.

⭕ 함과 같도다 - 예수께서 이 세대의 성격을 규명하신 말씀이다. 즉 아이들이 제 동무들을 불러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춤추지 않고, 애곡하였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다. 적어도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회개와 애통해 할 것을 역설(力說)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과 기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는 무감각(insensibility)중에 빠져 있었다. 실로 그들은 내심 그 두 분을 모두 멸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기쁨도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도 없는 것이다.

성 경: [마11:1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이었으며(3: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고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눅 1:15; 7:33). 즉 그는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에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 귀신이 들렸다 -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즉 주의 선구자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잡혀(F.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1:1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인자는 와서 -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히 사용하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야란(단 7:13)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5:24 강해 '인자'참조).

⭕ 먹고 마시매 - 이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9:10, 11; 눅 15:1, 2 등). 이는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되며,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에 분명하다.

⭕ 먹기를 탐하고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운다. 즉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성별(聖別)시킨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인 것이다.

⭕ 죄인의 친구로다 -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세례 요한의 절제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 누가의 평행구에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평행구가 이런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원래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대(古代)의 많은 필사자들은 이 부분을 누가의 기록대로 고쳐 '그 행한 일'을 '자기의 모든 자녀'로 표기하였다(레기우스 사본, Vulgate역 등). 아마 누가의 기록이 원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점에서 본 구절은 '지헤의 요구 사항들은 모든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 진정으로 입증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란 지혜의 사자(messenger)들(세례 요한과 예수)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했다(눅 7:29, 30; Marshall).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행한 일'(행위들, actions, NIV)로 변형되어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혹자(Suggs)는 본문의 '그 행한 일'이란 것은 지혜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지혜는 그 지혜의 행위들에 의해 옳다고 입증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한편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으며(욥 28장; 잠 1:8등), 유대 전승들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어떤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 반인적인 존재(a guasi - personal hypostasis)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본문의 지헤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잠 8:12-16, 22-31; 눅 11:49)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혜와 관련된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것 같다.

⭕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 경: [마11:2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권능(*, 뒤나미스) - 이말은 원래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또는 '초자연적인 행위와 사건'을 가리킨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흔히 이 '권능'이란 말을 쓰고 있다.

⭕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 먼저 '고을'이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서의 전체 성읍을 가리킨다. 실로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이었다(창 18:22 ff).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을들이 당신을 배척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메시야시라는 신적(神的)인 이적들을 도시들에서 행하였음에도(5, 6절)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다(3:2; 4:17). 이로써 확인하건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고을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고와 이적들을 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주님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때에 - 11:20-24의 내용은 눅 10:12-15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70인 전도파송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후기에 해당하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온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중 누가의 시간 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이는 마태가 연대순(chronological order)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그 때에'란 표현은 마태가 이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 부사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책망하시되 - 이 말의 원어 '에릍사토 오네이디제인' (*)을 직역하면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시다'로서 그릇된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 질책(叱責)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23장에 이르러 예수의 책망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께서는 그 고을들이 자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책망했던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입증해 주는 대부분의 이적들을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보여주었는데도 그 도시가 회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또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새 언약, 곧 복음을 얻게 될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Bengel).

성 경: [마11:2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화가 있을진저 - 이 말의 원어 '우아이'(*)는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 고라신 -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t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고라신'과 '벳새다'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셨을 것으로 본다.

⭕ 벳새다 - 이 지명의 문자적인 뜻은 '사냥집'이며,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알 텔'(al-Tell), 또는 '마사디야'(Masadiya) 등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뱃새다 줄리아스라고 명명했던 것 같다(눅 9:10).

⭕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 뵈니게(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곤 하였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 10). 한편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供給)을 받았을 만큼 두로는 고대로부터 문물(civilization)이 번성했던 것 같다(대하 2:11-16). 그리고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에 위치해 있었으나 아셀 지파는 시돈을 한 번도 점령해본 일이 없었다(수 19:28; 삿 1:31). 여하튼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이방 우상 숭배와 더불어 대단한 부(富)와 향략을 누렸던 것같다.

⭕ 베옷을 입고 -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거친 직물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살에다 이 옷을 입곤 하였다(삼하 3:31; 왕상 21:27; 욘 3:5-8).

⭕ 재에 앉아 - 사람들은 슬픔을 표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2:10), 재 위에 앉거나 하였으며(욘 3:6), 또 그 위에 눕기도 하고(에 4:3) 심지어는 그 위에서 구르기도 했다(렘 6:26; 미 1:10). 여하튼 이 두 행위는 모두 회개와 애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도시로 알려진 이방인의 도시들에게, 선민이라 자처하는 유대 고을들에게 베풀어졌던 것같은 이적과 회개의 기회들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 단언하셨다. 여기서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제공치 않으셨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위해 보내셨던 것이다(10:6).

성 경: [마11:2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심판 날에 - 이는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는데(Bengel), 이때 예수께서는 심판주(審判主)로 임하실 것이다(10:15; 행 17:31; 벧후 2:9). 한편 예수께서는 이방 도시보다는 유대인의 성읍인 고라신과 벱새다에게 많은 권능을 행하고 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들려주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았으므로, 결국 그들은 그 이방 도시들보다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께서 고라신과 벱새다에 베푼 이적들을 두로와 시돈에다 베푸셨더라면 그 도시들의 주민은 회개했을 것이다. 따라서 심판장은 이 점을 참작(consideration)하실 것이다. 그리고 (2)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 하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만큼 심판 때에도 아주 공평(公平)하게 판단하실 것이며, 하늘나라의 축복 뿐만 아니라 지옥의 형벌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롬 1:20-2:16). (3)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찾으실 것이다(눅 12:47, 48).

⭕ 견디기 쉬우리라(*, 안네크토테론 에스타이) - 직역하면 '훨씬 더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로, 그들의 도덕적 태도의 결과로 인한 보다 가벼운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11:2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가버나움아 -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 동리이며(9:1) 활동 무대(4:13)로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시어 어느 성읍들에서보다 더 많은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셨다(4:13).

⭕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 이 말은 최대의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즉 가버나움은 여태까지 수많은 주님의 이적과 권능을 목격하고 그 영예를 누려왔던 것이다. 실로 하늘나라가 바로 이 성읍에서 역동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 가버나움은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표현은 바벧론 멸망 예언(사 14:12-15) 구절과 유사한 것으로서 결국 그들의 처참한 멸망을 비소(誹笑)하고 있는 것이다.

⭕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여기서 '음부'를 뜻하는 원어 '하데스'(*)는 히브리어로는 '스올'(*)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말은 1차적으로 무덤을 가리킬 때 쓰였으며, 2차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靈)들의 세계를 뜻했다(눅 16:23; 계 1:18). 따라서 이 말을 저주받은 자들만이 가는 장소로 이해한다면 원어의 뜻을 적절하게 살리지 못한 결과가 된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이 말이 하늘과 대조를 이루면서 앞의 '심판 날'과 조화를 이루어 교만한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처하게 될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의 장소로 이해된다. 한편 예수의 이 예언은 영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성취되었다. 즉 이 두 도시는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焦土化)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성 경: [마11:2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심판 날에 소돔 땅이 - 소돔은 그들의 악한 죄로 심판받아 멸망한 도시이다(창 19장). 그러나 그리스도는 가버나움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여 그때까지 존속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가버나움 주민들의 죄악이 엄청난 특권을 부여(附與)받았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라리 아무런 이적도 보지 않았던 소돔의 죄악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는 뜻이다.

성 경: [마11:2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 그 때에 - 마태는 이 시간의 어구를 역사적인 시점을 명시(明示)해 주는 시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만 앞뒤 문맥을 분명히 구분하며 잇는 연결 내지는 접속사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20-24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묘사라면 이 어구가 시작된 25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이 용납(容納)해 주신 자들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누가는 눅 10:21에서 이 어구와 비슷한 '이 때에' (*, 엔 아우테 테 호라)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70인 전도사역의 성공적인 결과와 연결시키고 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지금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엄숙하고도 고결한 영적 교제의 분위기에 잠겨 계신다(A.T. Robertson). 실로 예수께서 막힘없는 언어로 엮어낸 이하의 말씀은 당신의 경건한 영혼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자, 찬양이며, 자기 성찰(省察)이기도 했다(Bruce).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이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킨 표현이다. 특별히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Tobit 7:18)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이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시 146:6; 사 42:5; 행 17:24). 그리고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과의 인격적 일체(一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한 것이다(6:9; 26:39; 요 11:41; 17:1). 한편 이 말들을 다음 절의 내용과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시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감추시기도 한다는 점이 암시(暗示)되어 있다.

⭕ 이것을 - 예수의 이적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그 당시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던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인식과 예수가 가르치신 교훈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 - 어떤학자(Meyer)는 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어구는 이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는 16절에서 이 세대를, 그리고 20-24절에서는 몇몇 도시들을 책망하셨던 바, 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이적과 권능을 보고도 자고(自高)하여 예수를 영접지 않는 이 도시들의 주민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숨기시고 - 실로 자기 아집(我執)과 편견 및 이성적 판단으로서 예수와 그의 나라를 영적으로 깨닫기는 불가능하다. 특히 본문의 '숨기시고', '나타내심'등의 표현은 이러한 영적 진리의 이해가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시사한다. 정녕 성령의 도우시는 내적 조명(illumination)이 없이는 아무도 자연적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

⭕ 어린아이들 -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시 19:7; 119:130)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즉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스스로 만족하며 자칭 지혜롭다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인 반면 어린아이들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 감사하나이다(*, 여소몰로구마이 소이) - 찬송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격적인 고백을 뜻한다(수 7:19; 대하 30:22; 롬 15:9).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ruling)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同意)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11:2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 옳소이다 - 이 말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감사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의 맨 앞부분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왜냐하면')란 말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으며, '아버지'란 호격(呼格) 역시 번역에서 생략되어 있다.

⭕ 이렇게 된 것 - 25절에 언급된 바 하나님의 독특하신 계시 전달 방법을 가리킨다.

⭕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가 된다. 이를 아람어식 표현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다(삿 13:23).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실현이 완전히 합치(agreement)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의지의 실현을 고대(苦待)하며 실현된 의지를 전적으로 수납(受納)했던 자들의 신앙 고백이 되기도 했다(말 1:15; B. Berakhoth 17a, 296). 실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지상의 기이한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란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때가 빈번히 있다. 즉 우리의 지식을 넘어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정당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성 경: [마11:2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성부에 의한 성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셨다(28:18; 요 13:3). 이 내용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요 3:35; 6:46; 골 1:26, 27). 여기서 '모든 것'이란 성부께서 위임(委任)한 모든 것에 대한 통치권(Meyer), 또는 모든 인류를 통괄하실 권위(Bengel, De Wette), 가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Weiss), 전적인 위탁(委託)과 위임(McNeil),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련된 모든 것(Grotius, Kuinoel),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Wycliffe)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에의 위임은 성부의 통치가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보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계시며 또 온 우주가 그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속할 수 있으며 그들을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로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시다(엡 1:21). 한편 본문의 '주셨으니' (*, 파레도데)란 무시간(無時間)적 부정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모든 것을 성자께 주셨음을 뜻하고 있으며, 결국 예수의 역사적 선재성(先在性)을 증거해 주고 있다.

⭕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구이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인격적 일체성을 이루는 특별한 것으로서 다른 어떤 피조물의 접근도 불허(不許)하고 계신다. 한편 '아는'에 해당하는 원어 '에피기노스케이'(*)은 단순한 지적인 인식(*, 기노스케이)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이다. 즉 이는 완전한 상태의 지식, 또는 전인적이고 초월적인 앎을 뜻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이루지 못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전 2:10). 실로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 여기서 '소원대로'(*, 부레타이)란 '...을 하기 원하는'이라는 뜻으로 강한 의지적 소망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성자는 성부를 인간들에게 능히 계시(revelation)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하시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골 1:15),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자(요 1:14, 18)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 1:1). 하나님은 예수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던 것이다.

성 경: [마11:2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 수고하고 - 원어 '호이 코피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형으로 명사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들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한다.

⭕ 무거운 짐진 자 - 원어 '페포르티스메노이'(*)는 현재분사 수동형으로서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 특별히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遺傳)의 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비난하신 적이 있다(23:1-4).

⭕ 다 내게로 오라 -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을 초대(invitation)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마음을 두고 나아오는 그 어떤 사람도 모두 받을만한 넓은 사랑과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실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구원과 안식(rest)에의 초대를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25절)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그리고 '아이같이 지혜는 없으나 순박한 자들'을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이것은 마지막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을 해소(解消)한 후의 평화와 안식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즉 신자가 주께로 가면 신자는 죄에서의 해방과 율법의 속박에서의 해방,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특히 '내가' (*, 카고)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즉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11:2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이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였고(사 42:2, 3; 53:1-2등), 다른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메시야를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로 소개하고 있다(슥 9:9).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의 겸허하며, 비천(卑賤)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다. 여기서 '마음' (*, 카르디아)이란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단순히 육체의 일부로서의 심장 기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히브리적 관념으로 인간이 지닌 전인격의 핵심적 좌소(坐所)로 이해된다. 이는 결국 예수의 본질적 성품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종(servant)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당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는 말이다.

⭕ 나의 멍에를 메고 -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멍에란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는 바, 결국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와 함께 메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자들의 영적인 신앙 생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의 멍에(Pirke Aboth 3:6, 집회서 51:26)를 메게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지고 있는 멍에를 질 것을 당부한다. 실로 율법과 세상의 멍에가 아니면 예수와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사망을 안겨다 주는 세상과 율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방법, 곧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 질고(疾苦)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내게 배우라 - 이는 자신을 '모방하라', '자신의 경험을 배우라'(Stauffer)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만이 전달해 줄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Schmid). 이는 결국 완전한 신앙 생활에의 부름일 것이다.

⭕ 너희 마음이 - 여기서 '마음'(*, 프쉬케)이란 예수의 '마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생명의 요체(要諦) 또는 생명의 혼(soul)을 뜻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의지(自意志), 자아(自我)라 할 수 있다.

⭕ 쉼을 얻으리니 - 이는 28절의 '쉬게 하리라'는 약속에 대한 응답이다. 여기서 '얻으리니'(*, 휴레세테)란 원래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참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었고, 또 그분이 주리라 약속한 것을 발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어구는 렘 6:16의 어구를 인용한 것 같다. 거기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본문을 이 부분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려면 예수의 멍에를 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는 율법학자들이 뒤집어 씌운 그런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을 가져다 주며 평강을 가져다 주는 쉽고도 가벼운 것이다.

성 경: [마11:3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초대의 말씀]

⭕ 내 멍에는 쉽고...가벼움이라 - '쉽고'(*, 크레스토스)란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된다. 실로 예수의 멍에는 이 다양한 의미를 모두 갖추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벼운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e)은 예수의 멍에를 새의 깃털에 비유하여 그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다고 설교한 바 있다(F.R. Fay). 이와 같이 예수께서 제공하신 짐, 곧 그의 계명은 사랑의 게명(commandment of love)으로서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그러나 이는 결코 예수의 가르침이 세상의 도덕이나 율법보다 무가치하거나 경박(輕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숭고(崇高)하며 엄정한 것이다(Clausner). 그러나 예수의 짐은 (1)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2)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3) 항상 예수의 능력에 의존하는 신앙이 전제되기 때문에, (4) 나 혼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또 영생을 동반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2: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그 때에...안식일에 - 이삭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일년 전 4월의 유월절과 밀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태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의 중간 어느 한 안식일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취하신 날로서,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할 것과 쉴 것을 동시에 명하고 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극단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었다(출 20:9 ff ; 31:14 ff ;신 5:12 ff).

⭕ 밀밭 사이로 가실새 - 먼저 랑게(Lange)에 의하면 전답(田畓)으로, 루터(Luther)에 의하면 곡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밀밭'(*, 스포리모스)은 파종한 밭 혹은 곡식 밭으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리밭'으로 해석 될 때가 많다. KJV에서는 '곡식밭'(grainfieled)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제자들이 이삭은 잘라 먹은 일에 대한 시비가 논쟁의 초점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약 1.8km) 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경작지들은 대부분 길고 좁다란 이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 제자들이 사장하여 - 그 당시 제자들은 안식일의 그지 조항을 간과해 버릴 만큼 몹시 배가 고파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매우 활발하고도 촉급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 이삭을 잘라 먹으니 - 율법에 의하면 이 행위는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되었다. 한편 평행구인 눅 6:1에 보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打作)에 해당되며 만약 그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의 율법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남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M. Sabbath, 7:4).

성 경: [마12: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는 한 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칼끝같은 눈초리로 예수의 무리들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예수께서 고하되...당신의 제자들이 -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는 제자들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 고착(固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사사건건(9:14 ; 15:2) 제자들의 반율법적 행위를 빌미로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았다.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여기서 '하지 못할 일'에 해당하는 '욱크여세스틴'(*)는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한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유전에 의한 것으로 39개의 항목이 있다. 즉, 39개 항목이 기록된 할라카(Halakah)에 의하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犯法)행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는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The Gemara).

성 경: [마12: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이는 삼상 21:1-6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하여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違背)한 행위가 된다. 또한 삼상 21:5-6의 본문에는 진설병이 방금 대체(代替)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III, 10:7). 여하튼 예수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몬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그의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예외(exception)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들을 주장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만 구약 자체는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Cranfield). 즉 예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Mek Exod 26:13 ; 2 Macc. 5:19)에 지나치리 만큼 매사에 적용하고,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되었던 것이 아닌가(Hooker).

성 경: [마12: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때에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광야의 여행길을 앞서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었던 그 희막을 가리킨다(삿 18:31).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 표현은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이 거처(居處)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기도 했다(대하 5:14 ; 딤전 3:15).

⭕ 진설병 - 이스라엘 12지파의 수(數)에 따라 성소의 금상위에 두 줄로 배설했던 12개의 떡이다(출 25:30 ; 레 24:5-8). 이는 제사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명적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한 성만찬을 예시(豫示)하고 있다.

성 경: [마12: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 다윗의 안식일 예외 조항에 이은 두번째 예외 사례이다. 안식일 법은 출 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 중 제 4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 규례에도 불구하고 성전안에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儀式)을 행할 때 몇 가지의 일들, 예를 들어 진설병은 대체시키는 것(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민 28:9-10) 등의 직무를 행한다. 이러한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 하위법이요, 성전에 관한 법이 상위법이며 또한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을 범(犯)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 자체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과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존칼빈(J. Calvin)은 '성전법이 희생드리는 일과 모든 외적 제사에 관련된 제사장들이 안식일 범법행위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면, 참되고 신령한 성전인 예수께서는 그 예배자들이 신성한 의무를 행할 때 그들이 범한 모든 과오(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를 보다 더 거룩케 하실 능력이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현재 복음으로 인해서 다소 거룩해진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강건하게 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생각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대속사업의 지속과 복음전파를 돕는 것과 예배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 이는 결코 과오로써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실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執禮)하기 위해 일을 하여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면, 그 성전과 제사의 궁극적 존재이신 예수와 그의 사역을 위해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안식일의 노동을 명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레 24:8)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유대인의 고답적인 사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외적이고 통속적인 규례를 철폐(abolition)하시고(F.R.Fay)이제 하나님 중심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규례를 깨우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12: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성전보다 더 큰 이 - 성전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이 구절의 논쟁의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이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법이다(Daube). 한편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은 남성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명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1)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주장, (2)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가 있다. 이들은 7절의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3)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가 있으며, (4) '메이존'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4)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율법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율법은 비로소 완상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따라서 예수가 그의 모든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사실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편 성전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다음가는 최고의 존재였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견해에 의하면 건물로서의 성전은 한낱 예수 자신을 예표, 상징(히 8:5)하는 일시적 모형일 뿐, 예수 자신의 등장 이후에는 결코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성전 속에서 그의 임재와 현현(顯現)을 나타내어 보이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성전인 예수 안에서 임재하시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요 12:45). 따라서 예수가 모세보다(5:21-28), 아브라함보다(요 8:58) 성전보다 더 큰 이임은 당연하다.

성 경: [마12: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미 앞에서(9:13)인용된 바 있는 호 6: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서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는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 제물이나 제사행위를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비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를 배겨고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 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너희가 알았더면 - 예수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즉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빈(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게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성 경: [마12: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노동에 관한 논쟁]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눅 6:1-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 참조>. 막 2:27에는 안식일 제정(制定)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워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야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성 경: [마12: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 거기를 떠나 - '떠나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메타바이노'(*)의 일상적 의미는 '자리를 바꾸다'이지만 특별한 본문에서는 이야기를 화제나 그 이야기가 진행되던 장소와 시간 등이 전면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 5:24 ; 요일 3:14에서는 사마에서 생명으로 옮기웠음을 나타낼 때 이 '메타바이노'를 사용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평행구인 눅 6:6에 의하면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고친 사건이 일어난 날은 밀밭에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이 바로 그 안식일과는 다른 인식일 날로 보고(report)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가 사용한 '메타바이노'란 말과 누가의 기록에 의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신 날이 같은 안식일이 아니라 또 다른 안식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공백과 장소 변경이 예수께서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고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되돌아가신 여정(旅程)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그레스웰). 물론 '메타바이노'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11:1 ; 15:29) 이미 '되어진 한 여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요 7:3에서도 '여기를 떠나'의 뜻인 '메타베디 엔튜덴'(*)이라고 하는 유사한 표현이 갈릴리에서 유다로 간 여행에 사용되고 있다. 여하튼 비록 이동된 장소가 과연 어디였는지 또 시간적으로 1-8절과 얼마만큼의 간격이 있는지는 확정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논쟁이 발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 저희 회당에 들어 가시니 - 본장에서의 두번째 사건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과 그에 따른 논쟁의 무대(setting)가 된 '저희 회당'이란 표현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A.D. 50-70년경) 이미 세워져 있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유대교 회당 간의 거리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저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대를 이루게 되었던 바벧론 포로기와 학사 에스라 통치 시기에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유대인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파멸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안에서 약 480여개의 회당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경우 그는 매일 회당을 방문하였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 때에는 반드시 회당을 방문하곤 하였다. 한편 유대교 회당은 초기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최초의 설교와 말씀전파를 행하였던 선교의 매체(媒體)라고 하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행 9:20). 그런데 예수께서 '저희 회당'에 들어가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은 더욱 더 분명해 진다. 회당에 대한 좀더 풍부한 이해를 위해서는 죽 4:15-30의 주석, 주제 강해 '유대교 회당과 초대교회'를 참조하라.

성 경: [마12:1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 한편 손 마른 사람 - 이 사람은 뇌의 손상으로 인한 중풍이 아니라 피의 순환이 불순함으로 손의 근육기능을 상실한 자를 가리킨다(왕상 13:4). 한편 눅 6:6에 의하면 마른 손은 더구나 오른 손이었다. 그리고 외경 가운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가 사용한 복음에서 제롬(Jerome)이 인용한 것(Wordsw. & White's edition of the Vulgate, A.D. 383)에 의하면 이 사람은 예수께 지신은 '손으로 벌어먹고 사는 석공이 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랑케(Lange)에 의하면 이 사람은 우연히 그 회당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를 모함하고 송사하기 위한 '악의적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특별히 불려왔다고 한다.

⭕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 사회의 중심지로서, 결정짓거나 특정한 사실을 발표, 공표하거나, 서약을 행하거나, 재판을 행하거나 죄인을 석방하는 등의 공적인 일을 위한 회합(會合) 장소였다. 즉 회당은 율법을 연구, 가르치는 학교와 기도의 처소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방 법정으로서의 역할까지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한 것은 곧 예수를 의식적으로 음해(陰害)할 목적으로 지방 법정에 고소하고자 한 것이 된다. 실로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를 고소할 증거와 명분을 찾아 기회만 있으면 그를 정식재판에 회부(reference)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을 이용한 저들의 이번 모략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직접 살해할 음모를 꾸미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14절).

⭕ 물어 가로되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송사할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그의 행위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울법을 연구하는 곳이며 기도처로서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회당 안에서 저들은 회당의 목적과는 반대로 악의에 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마태는 마가와 누가로 보고(막 3:1-6 ; 눅 6:6-11)와는 달리 바리새인들이 보다 진취적이고 공격적으로 손 마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를 이용해 예수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가 먼저 그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갈채를 받게 되는 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고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의도에 의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께서 병자를 고침으로써 고의(故意)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도 없고, 또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외면하심으로써 제사보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지난번 가르침을 스스로 파기(破棄)할 수도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실로 저들은 예수를 위선적이고 편파적이며 일관성이 없는 자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려 이 같은 교묘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이 질문은 눅 14:3에서 예수가 저들에게 한 질문과 똑같다.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것이 자비로운 것인가'가 아니라, '여세스티'(*), 즉 합법적(lawful, KJV)인가 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그들 조상의 유전에 의하면 만일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라면 안식일일지라도 의사는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Mishnah, Yomah 8:6 ; Mek Exod 22:2 ; 23:13). 그러나 문제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경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경우 , 즉 중풍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손에 힘이 없어지거나 손이 말라버린 상황은 그것이 결코 시각을 다투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위급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제기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A.D. 1C경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하는 율법에 대해서 상세히 논의한 바 있었다고 한다(Mishnah Eduyoh 2:5 ; M. Sabbath 6:3 ; Mek Exod 22:2 ; 23:13).

성 경: [마12:1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 양 한 마리...안식일에...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 이 논쟁은 눅 13:15 ; 14:5와 유사성이 있다. 비록 쿰란 공동체는 기껏해야 동물 스스로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널판지를 넣어 줄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더 적극적인 보호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일차적으로 웅덩이에 빠진 동물이 그 웅덩이에서 안식일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넣어주면 2차적으로는 그 동물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사람이 직접 그 동물을 끌어낼 것을 규정하고 있다(Maimonides, Talmud).

성 경: [마12:1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 예수의 답변은 또 다시 '칼 와호메르'(qal wahomer)의 성격을 띠고 있다(6절). 즉 한마리 양과 한 인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 144:3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생각되어지는 존재이다. 본문에 나오는 손 마른 사람은 웅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보다 물론 귀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진 양은 건져낼지언정 손 마른 사람에게 자비(mercy)를 베풀려는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송사하려는 것의 도구로 삼았을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예수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동물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훨씬 의롭고, 보다 당연한 처사(conduct)임을 주장하셨다.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옳으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대답하셨다. 저들은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규정된 법규만을 지키려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규정을 뛰어 넘으셨다. 예수의 관심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악을 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기서 선은 바로 불쌍한 자들에게 자비(mercy)를 베푸는 일과 연관된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행위를 무죄한 것으로 선언하신 7절의 말씀을 연상(association)시킨다. 즉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행위나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예수 자신의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 선한 것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막 3:4 ; 눅 6:9에서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을 주제로 한 예수의 반론(反論)에도 역시 저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함으로써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비록 안식일에 이뤄진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자명(selfevidence)하게 인정되었다. 실로 안식일에는 세속적 관심에 대해서는 쉬어야 하겠으나 하나님과 인간 생명과 관련된 선한 일에 대해서는 열심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2:1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

⭕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 마태는 지금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하고 불신앙적인 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손이 마른 자가 예수에 대해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병자 약한 자를 고치셨을 때와는 달리 병자의 몸에 손 조차 대지 않으시고 다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대로 즉시 존재케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는 창 1:3의 말씀처럼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의해서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다. 이러한 기적과 치유 앞에 우리는 예수의 권위에 찬 말씀과 더불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예수의 말씀이 옳은 것임을 확신케 된 손 마른 자의 즉각적 순종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안식일에 대한 랍비들의 유전에 의하면 손 마른 자는 결코 병고침을 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악을 꾸미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뻔했던 그는 안식일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임을 깨닫고 자신을 예수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선한 도구로 기꺼이 제공했다. 실로 그러한 순종과 결단에 의해서 그는 부자연스러운 육체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부여받게 되었다.

⭕ 회복되어 성하더라 -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밀이삭 사건을 통해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손 마른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는 사람을 온전케(육체와 영혼 모두를) 하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여기서 '회복되어 성하더라'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포카디스테미'(*)의 과거형이 사용되어 '완전하게 나았다', 즉 이미 완치(完治)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치유의 순간이 손을 내밀기 이전이었는지 이후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손을 내미는 것은 바로 손이 낫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행위'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Alford). 예수께서는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께 간청하는 환자들의 병을 고치셨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손을 내밀라고 하는 당신의 명령에 대해 순종과 믿음의 고백으로서 그가 손을 내밀므로 그의 병을 고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은 듯싶다. 그리고 한편 병자의 믿음의 고백은 치유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치유의 병행 조건이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주장한 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진리와 부합(符合)된다. 진정 예수로 말미암아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참으로 낫고자하는 깊은 열망을 동시에 가졌었던 손 마른 자는 예수의 창조적인 능력 앞에 온전케 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성 경: [마12:1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모의]

⭕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 이는 예수를 율법 위반자로 규정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동일한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건물 내에 있기 조차 꺼려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결별 선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랍비가 아닌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 되는 한낱 부정(惡)한 자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 안식일에 예수께서 선(善)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악을 꾀하여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한다는 것이참으로 아이러니킬(ironical)하다. 시갈(Sigal)은 여기서 사용된 '죽일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레소스'(*)이 '죽이다'의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회당의 결의에 의해서 파문시키다'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이 단지 할라카식의 논쟁(율법규정에 대한 해석 문제)으로, 그들의 견해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고 해서 사람을 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떠한 행동들을 해야만 율법의 주장과 일치하는가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한 것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율법의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만물의 주요, 성전의 주이시며,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 자신에 의해서 무죄로 선고받고 그 정당성을 부여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살해 의지를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한편 막 3:6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더불어 예수를 죽일 모의(conspiracy)를 하고 있다고 기록한 반면에 마태복음은 헤롯당(Herodians)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학자들의 많은 이견(異見)이 있다. 어떤 학자는 바로 그 점이 마태복음이 A.D.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이론을 입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A.D. 70년 이후에는 헤롯당이 유대 땅에 존대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유일한 적대세력을 바리새파이기 때문에 굳이 헤롯당이 거론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태가 이 말을 생략한 것으로 이해된다(Hummel, Hill). 그러나 이것은 마태의 기록 의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즉 마태는 율법의 위반(unlawfulness)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하고자 했던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살의(殺意)를 실천키 위해 정치적인 세력(헤롯당)을 이용했던 것이다. 본문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 예수 살해 의도는 이후로 예수의 선교 사역이 더욱 빛을 보면 볼 수록 노골화, 구체화 되어간다.

성 경: [마12:1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 '아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그누스'(*)는 '알다'는 뜻인 '기노스코'(*)의 제 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벌써부터 확연히 인지(認知)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예수의 신적(神的) 능력의 탁월성을 암시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색(梗塞)되고 분노에 찬 모습이 노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거기를 떠나가시니 - 헬라어 '아나코레오'(*)는 '철수하다', '물러가다'(KJV, withdrew)의 뜻으로 이는 바리새인들의 의논이 예수를 죽일 모의와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의가 당장 실천의 차원으로 직접 예수를 배척하거나 죽이려고 시도했던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예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를 기다려 물러나시곤 하였으며 또한 마태도 예수의 물러나심에 대한 기록 뒤에 반드시 구약의 인용문을 첨가하여(2:22, 23 ; 4:12) 예수의 이 행위 마저도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 그대로의 모습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더욱이 예수의 이 피신(避身)은 당신이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지혜로운 위기 극복법(10:23)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기도 했다.

⭕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 '좇는다'고 하는 동사가 제자됨(fellowship)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이 날이 비록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많은 병자들이 속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시도(attemot)하고 있는 소수의 바리새인들과 대조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 20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에 의하면 예수가 많은 병자들을 고친 행위가 바로 심판에서 이길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의 긍휼과 사랑의 역사(役事)임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과 수고하여 무거운 짐진 자들(11:28), 그리고 연약한 자들에게 결코 냉담하지 않으시고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그들의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마12:1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은 그가 행하신 치유 기적이 그를 사람들의 눈에 더욱 더 강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흥분이 더욱 더 고조되고(W. Argyle), 따라서 그 일이 반대자들의 적대감을 더욱 더 크게 부채질하게 될 것임을 염려하여 내려진 명령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보다는 이미 네번에 걸쳐서(8:4 ; 9:30 ; 16:20 ; 17:9) 행해진 바대로 예수 자신을 단순히 기적행하는 자로 나타내시지 않기 위해서 내려진 함구령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상(像)은 그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서 신적(神的) 권능을 소유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 이외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불치(不治)의 병들을 치유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당장 그에게 몰려들어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당신의 메시야 사역을 감당치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려지는 이 함구령(緘口令)의 시한(時限)은 막 9:9에 의하면 부활 때까지인데 이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2:1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 이하에 인용된 사 42:1-4은 70인역(LXX)에 의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한편 이사야의 인용구는 바로 앞의 예수의 함구령과 연관해서 성령과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두 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ope, Hill). 즉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19절) 성령부음을 받은 그가 공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이방인들은 그의 이름을 바라게'(21절)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행위자(agent)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 예언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는 무엇보다 무리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예수의 사역이, 곧 이사야가 예언한 바 메시야 사역과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전파하신 천국을 영적이고도 의로운 관점에서 가르치고 계셨으며,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격앙된 분위기로 군중을 선동(煽動)하거나 폭발적인 소문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exposure)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는 당신으로 인해 약한 영혼들을 거스리기를 원치 않으셨다.

성 경: [마12:1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나의 택한 종...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 사 42:1 ; 43:10 ; 44:1의 인용으로 특별히 '나의 택한 종'이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신 나의 종'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한 이상적(理想的) 종을 붙잡으셨는데, 그런 점에서 '붙잡다'는 말은 선택한 자를 내밀(內密)하게 기억하시면서 지극히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는 표현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들려왔던 소리(3:17 ; 17:5)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만족과 인정과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서로 밀접(密接)하게 관련된 것이므로, '마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주(category)안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역활까지도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킹스베리(Kingsbury)의 견해는 부적절하다. 오히려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막 3;11)을 생략하고, 본문에서는 다만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힐(Hill)의 견해가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예수는 아들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께 선택된 바의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설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의 위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특별한 선교 목적을 갖고 선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부은 자이다. 한편 본분의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명사 '파이스'(*)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종종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종'이라고 불리웠다(사 41:8). 따라서 이 '파이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통용되고 있는 '둘로스'(*)와는 달리,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임을 분명히 나타내주고 있는 말이다.

⭕ 내 성령을 줄터이니 - 하나님이 당신의 영(spirit)을 주신다는 것은, 곧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활동하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참여 의사(will)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 초월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한 것이 되며, 이같이 주어진 능력과 권위의 실현은, 곧 이 땅에 하늘 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28절).

⭕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이방에 심판을 알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인 메시야의 독특한 직무에 해당된다. 한편 이 직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들이 있다. 여기서 '심판'의 뜻인 헬라어 '크리시스'(*)가 '율법', '판결', '정의', '결정하는'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미쉬파트'(*)에 해당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심판'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에 대해 (1) 델리취(Delitzsch)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생(生)의 규범과 표준으로서 종교의 실제적인 면을 보인 '진실한 신앙'으로, (2)헨드릭슨(Hendriksen)은 죄인들의 회개하고 주 예수께 나아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복음'으로, (3) 칼빈(Calvin)은 심판이라는 말을 통해 공평과 의(義)의 충만함을 정체(正體)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의 한 구석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 메시야의 임무라고 하였으며 (4) 알포드(Alford)의 경우, 심판은 바로 최후 심판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며, (5) 카슨(D.A. Carson)의 경우,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심판 혹은 공의란 하나님이 모든 이방 나라들을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계시하시는 것(사 51:4)인 동시에 사람들이 계시(revelation)된 하나님의 본성, 즉 공의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제견해들에 비해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계시되고,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공의,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 재천명하시고 그의 제자들이 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經綸)의 대강(大綱)으로서 예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전파 경로가 암시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원래 목적하신 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우선 복음이 전파될 것이지만(10:6 ; 15:24), 그들의 핍박과 배척으로 그 대상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이었다(8:10 ; 15:28). 이러한 사실은 선교의 지상 명령 부분(28:19-20 ; 행 1:8)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성 경: [마12:19]

주제1: [바리새인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 이는 메시야의 직무에 이은 그 이행 방법 또는 태도 중의 하나이다. 한편 아사야의 예언에서는 '그는 외치지도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사 42:2)로 묘사되어 원래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제시된 '다투다'는 말은 언쟁이 심화된 상태를 뜻하는 말로 아사야의 의도처럼 '큰 소리로 외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함께'들레다'의 뜻인 '크라우가조'(*)는 '부르짖다', '야단스럽게 떠들다'(cry out, KJV)를 의미하는데 이는 종교적 기쁨이나 소리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외침이 아니라,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전 9:17)과 대조(contrast)를 이루는 '우매(愚昧)한 어른의 호칭'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크라우가조'는 신약이외에서는 마술과 악마의 영역에서 지하 세계의 신들을 불러내는 소리로 이해되었다. 신약에서도 이 말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귀신들이 지르는 것으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막 5:5 ; 9:26)를 말하며, 행 19:28에서는 왁자지껄하는 폭도들의 소란으로, 계 21:4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부터 쫓겨난 분노를 나타내는 외침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으나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歎願)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역시 고난과 섬김의 종인 메시야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메시야가 논쟁하지 않고 외치지 않고 길거리에서 소리 드높여 선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침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메시야로서의 그의 모습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메시야가 16절에서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얼마든지 그의 메시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금하고 계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참다운 종이란 그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함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자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12:2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상한 갈대...꺼져가는 심지 - 이 표현은 종이 자비심이 많고 오래 참으시며, 온유하신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 표현에서 사용된 두 상징에 대해 카슨(D.A. Carson)은 상한 갈대는 고생하며 유리(流離)하는 자들(9:36)을 꺼져가는 심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11:28)을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제롬(Jerome)은 전자는 이스라엘을, 후자는 이방인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한 갈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유대 사회에서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육체를, 그리고 꺼져가는 심지란 그들이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두 비유는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상징하낟고 봐야할 것이다. 즉 '상한 갈대'란 연약한 인간(왕하 18:21 ; 겔 29:6), 고통과 좌절로 인해 심령이 산산히 부서져 쇠잔해 있는 영혼을 가리키며, '꺼져가는 심지'는 마지막 한가닥 소망마저 다 없어져가는 인생, 양심의 빛을 상실해 심령이 어두워져가는 영혼 등을 의미한다. 실로 상한 갈대는 오직 하늘의 기원으로 소생하고, 꺼져가는 심지는 신령한 기름을 흡수(absortion)함으로써 회생(回生)할 수 있다(Clarke).

⭕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 사 42:4에 의하면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로 메시야 직무 수행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심판하여 이길 때'란 월리암스(A. Williams)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의 계시를 인간의 마음에서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KJV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그가 심판을 승리로 몰고 갈 때까지'(until he expel to victory the judgment)로서, 고난의 종인 메시야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의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도(道)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의 악의 세력 위에 세우게 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는 긍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 위에 굳게 세우셨다.

성 경: [마12:2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심]

⭕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 사 42:4에 의하면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다. '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이'(*)의 기본 개념은 '거주 가능한 땅'으로, 이사야 본문에서는 내륙지방과 구별되는 해안지방(coast)을 의미한다. 해안지방은 부분적으로 뵈니게인과 블레셋인과의 교역(交易)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섬'이란 말이 가끔은 '이방'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또한 마태는 70인역(LXX)을 따라서 '율법' 대신에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바라리라'(will put their hope, NIV)는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기대한다', 또는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실들에서 결국 이방이 바라고 소망하는 바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랑게(Lange)에 의하면 메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의 진리를 요약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는 말이다.

성 경: [마12:2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비방]

⭕ 그 때에(*, 토테) - '그 때'가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9-21절 사건보다 훨씬 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 다이모니조메노스 뒤플로스 카이 코포스) - 헬라어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 사람은 귀신이 들리게 되었으므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자'이다. 마태는 그 사람의 병을 원인이 특별히 '귀신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이 귀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함(謀陷)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이심을 알지못한 바리새인들이 바로 '영적으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 마태를 위시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 사건이 이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충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본 치유 이적을 간략히 소개하는데 그쳤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었던 영적 장애(귀신들림)에 대한 근원적인 치유를 하심으로써 육체적인 장애(시각, 언어)를 제거해 주셨다. 실로 그분은 영. 육의 온전한 구세주이시다.

성 경: [마12:2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비방]

⭕ 무리가 다 놀라 -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죽어버린 교훈에 이미 익숙해 있었던 무리들은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이적 앞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실재하는 천국은 기습적으로, 각 사람들의 마음에 돌입한다.

⭕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 예수의 치유의 기적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의 말이다. 이 물음은 헬라어'메티'(*)로 시작되는 부정 의문문으로서 부정(不定)하는 답을 예상하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아직 없기 때문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래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그들 자신들이 메시야가 오면 표적을 행하리라고 하는 사실(38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기적이 혹시 메시야의 징표(徵表)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예수가 권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과 같은 권세를 행사(行使)하지 않고 지금껏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하게 되었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상(像)과 유대 국가의 멸망이후 포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유대인의 정치적 메시야상(像)이 근본적으로 불일치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파생된 저들의 메시야니즘(Messianism)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난과 섬김의 삶을 통한 인류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길을 걸으셨다. 한편 그곳에 모든 사람들, 즉 병고침을 받은 자나 그 사건을 지켜본 자들은 예수가 메시야이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나 그곳에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감히 단정(decisive)적인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메시야의 상(像), 즉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왕국을 재현(再現)시켜줄 이상적인 왕에 대한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마 1장의 주석,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마12:2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바리새인들의 비방]

⭕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 예수의 치유 능력을 보고 놀란 사람들 중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난 반응 속에서 나온 말이다. 첫번째 부류의 삶들이 품고 있는 일말(一抹)의 희망, 즉 예수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축(一蹴)하고 그 확신을 제거키 위한 노력에서 나온 적대적 표현으로, 실제로 예수와 그들 사이의 바알세불 논쟁의 계기가 된 문구이다. 사단이 예수의 영(靈)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막 3:30 ; 요 8:48). 한편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간혹 바알세붑으로도 불리우는데(왕하 1:6), 이 말은 땅의 주인인 '바알'이라는 뜻으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에 그 기원이 있다. 후에 유대교에서는 귀신들의 두목인 사단을 가리키는 수 많은 명칭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였다(10:25).

성 경: [마12:2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저희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품고 있는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시점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동네...집 - '나라'(*, 바실레이아)는 영토적 지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전체를 움짖일 수 있는 힘으로서 왕권, 주권(主權)을, '동네'는 정치적 사회, 즉 이웃 공동체 집단을, '집'은 건물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위시한 질서 체계가 바로 잡힌 가족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일수록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세력에 의해서는 하나로 결집되어 그 세력을 막아내지만 내부에서 발생되는 싸움에 의해서는 완전히 파멸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사단이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조종(操縱)하는 사단의 나라도 동일한 것이다(H. Kruse). 즉 만약 귀신들(demons)의 군주인 사단이 그의 부하들을 쫓아낸다면 그는 사실상 자신을 쫓아내는 것과 다를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부하들은 바로 그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Broadus). 한편 여기서 귀신들은 흔히 역사의 전면에서 실제적으로 활약하는 악의 세력으로, 사단은 그 실제적 활약자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궁극적 악의 실체로 이해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4장 강해 '사단과 귀신'을 참조하라.

성 경: [마12:2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 이 말은 사실상 모순(contradiction)이다. 사단의 나라에는 사단만이 귀신들의 왕이므로 따라서 이말은 사단이 그의 부하세력인 귀신이 사람을 사로 잡고있는 상태에서 그를 축출해 내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는 그들 나라의 파멸을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된다. 실로 사단은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 행동은 삼가 할 것이다. 그러나 엡 6:12 ; 계 20:7-10에 의하면 사단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분명히 존재하게 됴마 것이다.

성 경: [마12:2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너희의 아들들 - 단순히 '너희(바리새인) 사람들'(your peoele, NIV)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자들, 즉 제자들이나 그 당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너희늬 아들들'이란 표현이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의미로서 옛부터 가나안과 유다에 족속해 있던 마술사(삼상 28:7-14, 신접한 자 혹은 박수)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들을 히브리어로는 '오브'(*)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풀무같은 도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접(新接)한 자가 그것을 가지고 기체와 같은 영(靈)을 구멍에서 불어내는 동작을 취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행위를 금지(禁止)시킨바 있다(레 19:31 ; 20:6, 27 ; 신 18:11).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이방 문물과 종교의 수입으로 인해 이러한 행위와 이에 대한 미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21:6; 23:24 ; 대하 33:6). 물론 본문에서의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혹은 추종자들 역시 그들 역시 조상의 영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몇몇 그릇된 상황과 관습에 의존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행 19:13 ; 외경 Tobit 8:2,3 ; Justin Martyr 85). 특히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보고에 따르면(Josephus, Antiq. VIII, 45-48 ; id., Wars VIII, 185) '솔로몬은 귀족 축출(逐出)법을 터득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후대에 전하였는데, 그 방법에 의해 치료받은 자가 다시 그 귀신의 지배를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치료법을 구사(驅使)했다. 이 치료법은 오늘날 까지도 효과적이다. 내가 목격한 바로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 때 엘리아살(Eleazar)이라는 사람이 황제와 그 아들, 지휘관들과 군중들 앞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치료법은 솔로몬이 창안한 것 중 하나로 한 식물 뿌리로 된 반지를 귀신들린 자의 코에 꿰고 그것으로 귀신을 끌어내어 그 사람이 졸도하면, 그때 솔로몬의 이름과 솔로몬이 만든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귀신에게 다시는 그 사람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솔로몬의 지혜와 기술이 매우 명확히 증명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의해 전수(傳受)된 주술이나 마술들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질병과 슬픔과 악에서 구원받으려 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 는 그의 '이단 교서'(2권, 4:2)에서 유대인들이 사술(black magic)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는 습관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 바리새인들이 말한대로 예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 역시 바알세불의 도움에 의해 귀신을 축출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요지였다.

⭕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 예수께서는 저들이 제자들의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일체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등의 말씀은 없으셨다. 다만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서 따라서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즉 '너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면 그들은 너희들이 내게 대하여 잘못된 말을 한 것, 즉 바알세불의 힘을 입었다고 한 것 때문에 너희를 위선자요 죄인으로 선고하리라'고 하는 표현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았다면, 유독 예수만을 바알세불의 능력하에 있다고 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임에 분명했다. 예수의 이 반론에 의해서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의 귀신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예수의 행위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성 경: [마12:2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 평행구절인 눅 11:20에 의하면 '하나님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출 8:19 ; 31:8 ; 시 8:3)으로서 '성령을 힘입는'것과 결과적으로 동일한 묘사이다. 예수의 귀신축출행위와 사단과의 연관성은 논리적 모순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시기심을 밝혀내신 예수께서 이제 자신의 행위가 성령의 임재와 사역에 의한 것으로 역(易)으로 그리스도의 권세가 지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임을 주장하셨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임하다'의 뜻인 '프다노'(*)는 '뒤따라 잡다'(overtake)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제 1과거형으로 어미변화가 되어서(*, 에프다센) '이미 임한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웨슬리(Wesley)와 스티어(Stire)는 본문을 '하나님 나라는 너희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너희 앞에 전개되어 있다'로 해석하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친 것은 분명히 사단의 왕국이 괴멸(壞滅)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령이 현재적(現在的)으로 역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던(Dunn)은 '이미 실현된 종말'(the 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종말론적인 성령'(the eschatological Spirit)은 예수에 의해서 이 땅에 강림했으며 또한 종말론적인 나라(the eschatological Kinddom)도 역시 예수에 의해서 그 시작이 알리어졌다. 종말론적인 성령이 활동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활동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 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의 현장 그 한 복판에서이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전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형태로 도래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은 이미(alredy) 도래하였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 경: [마12:2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 이 구절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구절은 종말의 완성으로 이해될 필요없이 순수히 예수의 사역(work)을 나타내는 것으로, 즉 기독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몇몇의 유대 문헌에는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메시야가 사단을 결박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Moses, 10:1 ; 계 20:2). 여기서 '강한 자'란 사단을 가리키는데 예수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통해 (1) 자기가 이미 사단을 결박하고 있다고 함과 (2) 따라서 자신이 귀신의 왕인 사단 보다도 더 강한 자('능력이 더 많으신 이', 3:11)라는 사실과 (3) 이 세대의 종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여 악의 권세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으로 인한 완성된 종말의 날이 될 때까지 그 강한 자인 사단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예수에 결박되어 있는 존재이다. 한편 '강한 사람'의 뜻인 '이스퀴로스'(*)가 손과 관련된 기능, 수완이 좋은 사람을 나타내며 특별히 사단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견해(Campbell)가 있으나 본문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 '세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퀘에'(*)의 문자적 의미는 '그릇들'(vessels)이다. 이는 결국 사단에게 사로 잡힌 자, 즉 귀신들린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늑탈하다'의 뜻인 '디아르파조'(*)는 약탈을 하되 모두 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KJV에 의하면 특별히 이 '늑탈하다'(plunder)라는 말은 전시(戰時)나 내란(內亂)때 적들로부터 물건을 샅샅이 약탈당한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전복자 예수께서 지금껏 사단이 마음대로 지배하던 이 세상에서 영혼과 육체 모두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물건을 빼앗아 악의 세력에서 건져질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빼앗은 그들 모두를 다시 인생의 원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되돌려 보내시어 하나님이 주시는 힘, 즉 성령에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사역은 십자가, 부활 사건 이전에 부터 이미 활발히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은 사 49:24, 25의 예언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지금은 이미 도래된 메시야의 시대이고 예수께서 사단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품으로 회수(回收)하시는 기간이다. 따라서 지금은 예수에 의해 사단의 집이 약탈(掠奪)되어 가는 과정이며 사단의 집이 모두 털린 후에, 즉 악의 세력에서 모든 사람이 풀려난 후에 예수의 재림으로 결박된 사단은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될 것이다. 눅 10:17, 18의 칠십 명의 전도인들에 의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그들에게도 항복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사단이 하늘로 번개같이 떨어짐을 목격했다고 하였다. 사단이 권세의 무너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전파와 그 실천적인 삶에 의해 점차 진전(development)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성 경: [마12:3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 - 여기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의 반대적 의미는 막 9:40과 눅 9:50에 의하면 '우리'(마가) 또는 '너희'(누가)를 '위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무관심한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누가복음에선 예수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비해 본문의 논지는 매우 직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서로 투쟁하는 와중(渦中)에서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함께 아니하는 자'에 대해 크리소스톰은 '마귀'로, 벴겔과 네안더는 앞에서 나온 '유대 마술사' 등을 언급한다고 본다. 이 중에 크리소스톰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함께 아니하는 자'란 단순히 예수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무관심한 자, 예수와 연합(union)하기를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처럼 '공공연히 예수를 비난하고 서로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 -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이 추수하는 분으로 묘사되었듯이 신약에서 예수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모으고 또한 추수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3:12 ; 13:3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기적행위를 보고 그를 메시야로 고백하려는 자들에 대해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라고 거짓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려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확산을 막기 위해 예수로 부터 사람들을 흩으려는 자들이 바로 '모으지 아니하는 자', 곧 흩어버리는 자들인 것이다. 실로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모으고 또 모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사단은 되찾은 양 조차도 다시 빼앗고 될수 있는 대로 그들을 흩으려는 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본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결단코 중간적 입장에 머무를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정녕 예수의 사역에 적극 동참치 않는 자들은 예수의 나라를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인 것이다.

성 경: [마12:3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공동번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역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죄와 비방은 사하심을 받게 될 수 있으나'의 뜻으로 이래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 풍성하므로 인간의 모든 죄악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는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입증해 준다(시 63:3 ; 86:5 ; 130:3,4 ; 사 1:18 ; 미 7:19 ; 요일 1:7). 더욱이 이 진리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속사역은 완전, 충만하여 그 어떤 죄악일지라도 능히 용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 언급된 '훼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심한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9:3) 또는 어떤 대상은 '반대하여 말하다'(32절)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blasphemy) 행위에는 매우 심각하게 대처(reaction)했다(26:65). 그러나 예수는 이 부분에서 인자, 곧 자신을 거역하는 행위와 심지어 암묵(unspokenness)적 의미에서이지만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위 조차도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시사하셨다.

⭕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던 것이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단순히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요 15:26 ; 16:7 ' 롬 8:9 ;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딤전 1:13),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를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遮斷)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요 3:36). 한편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민 15:30 ; 히 6:4-6 ; 10:26-32 ; 요일 5:16).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不知中)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이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분명한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들어오셔서 감동, 감화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곧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아 된다. 결국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시킬 수 없는 일로서, 죄를 깨닫게 하고 참회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성령에 대항하려는 고집스럽고도 악의에 찬 심령과 그 모든 활약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Alford, Plummer, Robinson 등).

성 경: [마12:3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누구든지 말로 - 앞 구절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훼방', 곧 '블라스페미아'는 의지적 범죄로서 특별히 '말'에 의한 성령이 가르침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사실 '말'이란 인간 내면을 외부로 표출(表出)시키는 통로로서 '말에 의한 훼방'은, 곧 전인격적 훼방을 암시한다(24절).

⭕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 본문에서 나오는 '인자'라는 칭호가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를 막 3:28의 평행구와 연관시켜 복수 개념('인자들')으로 읽음으로써 단순히 사람들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자'란 마태가 일반적으로 사사한 바대로(8:20)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Origen). 한편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한 견해는 (1) 인자의 성령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2) 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기 이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세례받은 이후에 관련된 문제라고 하거나, (3) 또는 전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후자는 그리스도인 예언자들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것, (4) 또 전자는 예수의 인성을 후자는 예수의 신성을 가리킨다 등등 많은 견해가 있으나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5) 스텐달(Stendahl)과 보링(M.E. Boring)의 견해로서 인자를 거역하는 자들을 불신앙인들로서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성령이 거역하는 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로서 후에 배교(背敎)하거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결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 견해 역시 일면 타당한 점은 있으나 전적으로 환영할 수는 없는 주장이다. 이러한 제 견해들에 비해 다음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6) 인자를 거역한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것을, 그리고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예수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과 같은 놀라운 사건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등)이나 성령의 내적인 감동이나 회개에 역사가 분명히 하나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해석이 정당하다면 인자와 성령의 차이는 어느 정도 부수적인(relatively incidental)것에 해당한다. 요컨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곧 예수 자신의 주장들을 거역하는 셈이 된다. 실로 '인자를 거역하는 데'서 전진하여 '성령을 거역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죄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녕 성령을 거역하는 일은 종말론적인 범죄로서 영원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 최고(最高), 최후(最後)의 죄가 된다.

⭕ 거역하면(*, 카타) - 일반적인 의미로서 무엇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성령의 제 사역과 그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을 통한 훼방한 행위는 이 거역 중에 한 부분에 속한다.

⭕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 이 말을 단지 관용적 표현으로 취급하여 결단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Plummer). 그러나 이것은 너무 안이한 해석이다. 한편 '세상'의 뜻인 헬라어 '아이온'(*)은 '세대'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이 세대', 즉 구약의 우대인 세대(율법시대)로, '오는 세상'은 '오는 세대', 즉 신약의 그리스도인 세대(은혜시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Clarke). 그러나 대체로 현존(現存)하는 세상과 예수의 재림으로 이뤄질 미래의 영원한 세계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Calvin). 한편 유대인들은 전 역사를 메시야 이전과 이후 세계로 양분하여 생각하고 있다(에스라드마 2서 5:47,50).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는 '오는 세상에서의 사하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 '오는 세상'을 현 세상과 마지막 세상 사이의 중간 기간으로 이해 함으로써 이 구절을 그들의 연옥(purgatory)설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즉 회개치 않고 죽은 불신앙인도 세상 끝날에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이 그분의 미래적 강림(*, 파루시아)의 기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미래에 다가오는 세상의 역사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죄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바로 성령 훼방의 죄를 범한 사람은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위치, 즉 마귀들과 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마12:3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 열매에 의한 나무 판단의 교훈은 이미 7:17, 18에서 본 바 있다. 한편 본문을 이중적 구조로 이해하여 첫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살과를 성령을 힘 입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치유에 의한 선한 결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등장하는 나무와 실과를 스스로 악히기(나무)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열매)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각(行脚)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lford). 실로 나무는 필연적 인과(因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좋으면 둘다 좋고 나쁘면 둘 다 나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내고 정의를 외치는 예수의 실과(fruit)는 결국 그 근본 나무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분명한 예수의 실과를 부인하지 못하였으니까 대신 예수의 나무를 비방했는데, 그들의 허구성(虛構性)이 이제 논리로 격파당한 것이다. 예수는 근본과 결과를 모두 선한 교사이신 동시에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소개,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의 교사이기도 하셨다.

성 경: [마12:3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독사의 자식들아 - 바리새인의 본성을 지적하시는 엄한 표현으로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 말이다(3:7). 바리새인들은 예수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도 '귀신이 들렸다'(11:18)고 했는데 결국 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을 똑같이 정죄(condemnation)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 바리새인들은 이제 열매를 맺지 않은 그들의 사악함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되는 운명에 이르른 것이다(3:10). 그들은 종국(終局)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고 말 사단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 본질과 외부로 표출된 현상이 동일할 수 밖에 없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실체(독사의 자식)를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악의적 모함(예수를 바알세불이라 한 것)의 거짓말을 확증하셨다.

⭕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 '가득한'을 뜻하는 원어 '페리스슈마'(*)는 충일(充溢)함', '(식사의) 남은 찌꺼기'등의 뜻으로 비의지적이고, 체질적이며, 생산적인 넘침을 암시한다. 실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자연적이고 체질적으로 '말' 또는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마음의 참된 변화였던 것이다.

성 경: [마12:3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아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 '쌓을 선'을 새 번역에서는 '선한 마음의 곳간'으로, 공동번역에서는 '선한 마음을 쌓아 두었다가'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마음이란 그 사람의 모든 사상과 생각과 의지와 도덕률의 총체적(總體的) 창고이다. 선악의 창고인 사람의 마음에서 선한 말 혹은 악한 말이 나오는데 선한 창고, 즉 착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에게 좋고 유익한 말이, 악한 창고, 즉 악한 마음씨에서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말들이 나온다. 결국 이 표현은 '그 실과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33절)하는 진리와 일맥상통한다.

성 경: [마12:3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 여기서 '무익한'(*, 아르곤)이란 부정 접두어 '아'(*)와 '공적'(功積), 또는 '일'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부주의한', '쓸모없는' 등을 뜻한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근거없는'(unfound, JB)이라는 의미보다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나타내지 않은 채 '무가치한, 무의미한'(insignficant, Stendahl, Peake) 말, 곧 생명력이 결여된 도덕적으로 무익한 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모든 말을 일일이 아신다.

⭕ 심판 날에...심문을 받으리니 - 전우주적 종말이 이를 때, 곧 심판 날에(10:15) 심판주이신 예수께서는 각인의 사소한 행동까지, 특히 그 사람의 '무익한 말까지 심문하실 것이다(갈 6:7 ; 엡 6:8). 실로 인간의 현재적 언어 생활은 종말의 영욕(榮辱)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다(엡 5:3, 4 ; 골 3:17 ; 약 1:19 ; 3:1-12).

성 경: [마12:3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정죄받은 바리새인들]

⭕ 네 말로 의롭다...정죄함을 받으리라 - '의롭다 함'과 '정죄함'의 기준은 선한 말을 하였느냐, 악한 말을 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말과 행위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선한 말을 할 수 있고 또 진정한 의미의 선행을 베풀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수준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에서 판단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심, 정죄하심을 인간의 말에 의해서 판단하신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이'(*)는 단순한 음성으로서의 말이 아니라 발화자(發火者)의 의식과 내재적 지식을 담고 있는 언어라는 뜻이다. 이는 결국 심판 대상이 되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입술만으로서의 화려한 말이 아니라 그 원칙적 동기인 속마음으로 부터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는 인간의 속깊은 생각을 익히 알고 계신다(22:18 ; 요 2:24, 25).

성 경: [마12:38]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요나의 표적]

⭕ 그 때에...말하되 - 여기서 '말하되'의 원어 '아페크리데산'(*)은 '대답했다'는 뜻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표적 보여 주시기를 - 여기 '표적'(*, 세메이온)이란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통해 초자연적인 사실이나 진리를 나타내 주거나 어떤 예언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증거로써 즉시 또한 신속하게 발생되는 어떤 증표(somemiraculous token)를 의미한다. 이들이 요구하는 눈에 뵈는 표적은 적들의 메시야 상(像) 에 근거한 이적적 사건, 즛 예수께서 로마에 물리치시고 다윗의 통일왕국을 건설하는 것, 또는 천군천사의 대군을 몰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그들의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 등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야 상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만이 발생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예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춘분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모든 것을 바알세불의 영향력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의 이 표적(sign) 요구는 뻔뻔스럽고도 무례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악의에 찬 불신앙적 내면을 여실히 내보인 것이었다.

성 경: [마12:3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요나의 표적]

⭕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불충실하기 때문에 음란하다고 정의하셨다. 이는 렘 3:6-13 ; 겔 16 ; 호 1:2-2:15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결혼으로 결속한 부부와 같은 관계이므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우상숭배 행위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간음(adultery)으로 인식됨을 의미한다. 이 영적 간음은 유대인들이 그동안 범한 우상숭배 행위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렘 3:10), 하나님을 향한 내적 적개심(호 7:13-16), 세상과 벗을 삼는 것(약 4:4) 등등으로부터 예수가 제시한 구원의 길을 버리고 다른 것을 좇는 불경건 및 예수의 사랑과 은혜의 표적을 경멸하고 자신들의 기준에 적합한 표적을 요구하는 등의 불신앙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으로부터 불충실한 위선적 행위 전반을 내포한다.

⭕ 선지자 요나의 표적 - 요나의 표적(the sign of Jonah)이란 말은 요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요나에 의해서 주어진 어떤 표적을 말하지 않는다(Zerwick, Turner). 요나는 일종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니드웨 사람들 앞에 나타났으므로 요나 자신이 그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Jermias, E.H. Merill).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구원 받은 것같이 예수도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사흘동안 그의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었다가 제 3일에 부활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수가 어떤 표적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메시야의 표적이 된다고 함을 의미한다.

성 경: [마12:4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요나의 표적]

⭕ 요나가...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 이는 욘 1:1-2:10에 나오는 바다 속 경험과 예수 자신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사건을 비교하신 부분이다. 한편 본문의 '큰 물고기'(*, 투 케투스)란 바다의 괴물 또는 거대한 불고기란 뜻으로, 이 물고기 배 속에서 구출된 요나의 경험은 곧 예수의 땅속 3일간의 묻힘과 그 3일후의 부활을 예시하는 예언적 모형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목요일 수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W.G. Scroggie)은 '밤낮 사흘'을 문자적인 의미로 취급하여 목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만 72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수난 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보고(26:17-30)에 의하면 예수는 무덤속에 불과 36시간 남짓 있었던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그러므로 '밤낮 사흘'이란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에 따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랍비들은 한 날(a day)과 한 밤(a night)을 하나의 묶음으 생각했다. 그들은 한 묶음의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단위상 전체 묶음으로 이해하였다(삼상 30:12, 13 ; 에 4:16 ; 5:1 ; SBK, 649). 따라서 그들의 전통적 해석법에 따르면 '밤낮 사흘'은 단지 '세 날들'(three days)을 의미할 수도 있고 밤이나 낮이 셋으로 결합된 것, 곧 2박 3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하튼 예수는 '제 3일'(on the third day)에 무덤에서 일어났던 것이다(16:21).

⭕ 땅 속에(*, 엔 테 카르 디아 테스 게스) - 문자적으로 '땅의 심장에'로서, 욘 2:2의 '스올의 뱃속'이 문자적으로 '음부의 심장으로부터'란 뜻이므로 아마 이 표현 양식을 따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 '땅의 심장에'라는 표현은 예수가 지옥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의미(Meyer)가 아니라 단지 예수의 시체가 땅 속 무덤에 안치(安置)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마12:41]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 심판 때에 니드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요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라면, 요나의 절도로 회개의 자리에 섰던 니드웨 사람들은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요나와 예수 모두는 죽음에서 구원받음으로써 자신들이 전파한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하였으나 그들의 전도를 받은 대상자의 반응은 서로 정반대의 것이었다. 즉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드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으나(욘 3:1-10),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이신(요나는 심판과 복음을 선포하는 자, 예수는 심판자요, 그 선포의 대상자이셨다. 그리고 요나는 친히 세상 죄를 지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을 마련하셨다<5:21ff ; 12:6ff>. 예수의 전도와 이적을 보고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심판 날에 하나님은 니드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입증된 이 세대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일어나서 증거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여기서 '심판 때에 일어난다'는 것은, 곧 심판 법정의 증인으로서(욥 16:8)최후 심판 때에 이 세대의 잘못을 송사(頌辭)한다는 의미로서 셈어의 법률에 관한 관용적 표현이다(Black, Wellhausen).

성 경: [마12:42]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 남방(아라비아 반도)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루살레미로 왔다(왕상 10:1-13). 왕상 10:1에 의하면 본문의 '남방'을 구체적으로 '스바'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곳 '스바'는 유대인들이 '땅끝으로'(at the ends of the earth, 렘 6:20) 알고 있던 아라비아 서남부의 한 왕국이었으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에디오피아의 여왕이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VIII, 165). 여하튼 남방 여왕은 열정적인 탐구열을 가지고 '땅끝에서', 곧 아주 멀고 먼 이스라엘 밖으로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왔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그들과 함께 계시는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교만과 율법적 허영에 가득찬 나머지 귀기울이지 않고 그의 거부함으로써 마지막 날에 남방 여왕으로부터 송사당할 것이다. 한편 예수는 자신이 솔로몬보다 극히 탁월한 존재임으로 선포하셨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진리이다. 즉 예수는 신.구약을 통틀어 모든 지혜자, 예언자보다 또한 모든 지혜 문학보다 더 큰 감회와 영향을 온 세상에 미쳤다. 그리하여 솔로몬이 단지 진리를 간파(看破)할 줄 아는 한 여왕을 이끄는 것이 큰 화재가 되었던 반면 예수는 빈부귀천을 망라(網羅)한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이끄셨던 것이다(요 12:32).

성 경: [마12:43]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때 - 이 가분은 22-37절의 바알세불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 한편, 많은 학자들은 눅 11:24-26의 평행본문 가운데서의 이 비유는 개인에게, 마태복음에서는 나라(nation)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두 가지 측면으로 분리해 볼 수 있는데, (1)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바벧론 포로에가 돌아온 유대인들은 학사 에스라와 느헤미야 등 선지자들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 종교혼합주의, 잡혼(mixed marriage) 등의 불결한 모든 관습을 제거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은 더러운 영이 이스라엘에게서 나간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2)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식과 바리새주의에 신음하던 유대민족이 예수의 복음 사역(귀신을 쫓아내는 치유, 이적에 비교), 곧 바알세불 논쟁과 요나의 표적, 강한 자가 집에 들어가 귀신을 축출하는 기사 등을 전해듣고 예수에게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던 시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 사막 혹은 광야를 뜻하는데 흔히 이런 곳을 귀신이 좋아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예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4:1) 나가셨던 것은 이에 대한 한 본보기일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물없는 곳'은 거주지가 없는 곳(욥30:3 ; 시 107:4-7 ; 바룩서 4:35)이요 원기(元氣)를 회복할 수 없는 척박한 곳(시 63:1)이라는 의미로 이해할수도 있다.

⭕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 귀신은 인간의 마음속에 거하며 그 인간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의 거처가 될 곳은 맑고 깨끗한 영혼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 진실과 불의의 중간에서 회색빛 태도를 취하는 영혼이다. 그곳을 찾기까지 그는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 찾아 헤맬 것이다.

성 경: [마12:44]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특히 '내 집으로'(*, 에이스 톤 오이콘 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귀신은 전에 자기가 거하던 인격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곳이 여전히 자기의 소유임을 확신하고 있다. 적어도 귀신은 자신이 옛날 거했었던 그 인격의 본질적 특성이나 신앙, 의지적 특질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 집이 비고 소제되고 -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로 쓸어 깨끗케 되고'이다. 이는 (1)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비록 이방의 우상 신상들을 파괴하였으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부재(不在)하고, 그들 종교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음을 나타내며 (2) 영적으로는 예수의 전한 복음에 솔깃하기는 했으나 단지 예수에 대한 악의적 대항을 삼가하고 중립적 태도를 취했을 뿐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불의와 적극적 악의가 없는 상태를 경건하고 거룩한 상태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Hendriksen). 오직 전적 헌신이냐 전적 부인(否認)이냐만 있을 뿐이다.

⭕ 수리되었거늘(*, 케코스메메논). 헬라어 동사 '코스메오'(*)의 완료 수동분사로, 정확한 뜻은 '장식되어졌다'이다. 바벧론에서의 종교 혼합주의 등과 같은 더러운 악령의 영향력이 제거된 이스라엘이 (1) 주의 회복케 하시는 은혜에 의해 장식(裝飾)되었다고 보는 견해(De Wette, Chrysostom), (2) 또 다시 새로운 죄 또는 악령으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견해(F.R. Fay. Origen), (3) 바리새파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과 위선 및 랍비들에 의한 율법주의로 장식되었다고 보는 견해(Alford)가 있다. 일반적으로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집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알포드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율법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의 참 정신이 가리워진 상태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본다. 한편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그 집은 악한 영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참된 영적 변화가 아직 발생되지 않은 상태를 암시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율법 규정들에 대한 맹목적 추구와 열심으로 그의 영혼의 문제, 즉 영생과 구원의 열망을 이루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성 경: [마12:45]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

⭕ 더 악한 귀신 일곱 - 여기서 '귀신일곱'이라는 말의 '일곱'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숫자로 완전한, 더 이상은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의 양(quantity)과 질(quality)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곱 귀신이란 가장 강하고 악한 귀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역사적 측면에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the Great Alexander, B.C. 356-323) 왕의 침략과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타네스(Antiochos IV)에 의한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Hellenize)를 상징할 수도 있다. 실로 안티오커스 4세는 페르시아 시대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보증되어 있던 종교상의 특권을 박탈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 제의(祭儀)를 거행, 참여토록 하였다. 이 같은 사악한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서 안티오커스는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전락(轉落)시켰다고 한다.

⭕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 비유에 대한 전체 결론으로 악한 세대로서의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저주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저들의 자랑이며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했다.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가 쉬우리라"(10:15)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 그들의 형편은 전보다 더욱 더 비참해졌다. 이와 더불어 종말에 처할 유대인들에게는 귀신의 강력한 역사로 인해 더욱 큰 고통이 기대된다(계 9:1-11).

성 경: [마12:46]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 예수께서 무리하게 말씀하실 때에 - 문자적으로 '예수께서 무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고 있는 동안' 이다. 이는 앞 구절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집안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막 3:20, 21).

⭕ 그 모친과 동생들 - 13:55-56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모친 마리아와 그 형제들 야보고,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이 있었다. 여기 언급된 형제들은 같은 어머니에서 출생한 예수의 동생들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이나 초대교회 교부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마리아의 평생 처녀설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펼친다. 즉 로마 카톨릭은 '형제들'이 요셉의 전처(前妻)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들이거나(Hillary, Epiphanius) 아니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똑같은 이름을 지닌 동생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아들들이라는 견해이다(Lange, McHugh, Jerome, Lightfoot). 사실 '형제들'이란 남자 친척들이라는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행 22:1). 그러나 이런 광의적 의미에 근거하여 '형제들'을 전처 소생으로 본다면 예수는 법적 측면에서 다윗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름이 동일한 마리아의 여동생의 아들이라고도 볼 수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견해로서(Tertullian, Heggesipus) '형제들'은 예수의 친동생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한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훗날 예수가 최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무리에 함께 가담하여 예수의 처형장면을 지켜보았으며(요 19:25)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는 오순절 사건에 참여하였다(행 1:14). 또한 주의 형제 야보고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행 15:13 ; 21:18 ; 고전 15:7 ; 갈 1:19 ; 2:9, 12 ; 유 1:1).

성 경: [마12:47]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 예수께 여짜오되...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 본절은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등)과 역본들(시리아역, Vulgate역)에는 생략되어있기 때문에, 46절과 48절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후대 필사자들이 의도적으로 첨가한 설명구로 보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절은 분명히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행구절(막 3:32 ; 눅 8:20)에서 그 타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원문(the Original Text)에는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D.A. Carson). 한편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한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예수가 전통적 권위를 지닌 바리새인들의 대적자(對適者 )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2) 예수의 발빠른 선교사역으로 인해 그의 건강상 어려움을 직감했기 때문에(막 3:21), (3)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의로의 이사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4:13 ; 눅 4:16-31 ; 요 2:12) 등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들은 수없이 운집한 무리들 때문에 예수와의 접촉이 심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눅 8:19).

성 경: [마12:48]

주제1: [바리새인드르이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존재, 즉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요 19:26, 27). 이 말은 출생과 유전(遺傳)으로 이뤄지는 혈연 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보다 더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노력으로 이 땅의 한 가정에 태어나 혈연 관계를 맺으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한 선언과 긴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로 본문의 이 구절이 예수의 '로암미(Lo-Ammi) 선언'에 해당한다.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개별적으로 영원히 선택된 각각의 인격들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는 비록 혈연적 가족일지라도 예수가 선언하시는 하늘나라의 영적 가족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성 경: [마12:49]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베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 여기 손을 내뻗은 것은 예수의 애정어린 마음의 표현인(Hendriksen) 동시에 최대의 겸손(Bengel)이며 확신에 찬 행동 언어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몸짓과 더불어 자신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성(聖) 가족'이라는 영광스런 선언을 하셨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신앙으로 아뤄지는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신 동일한 가족의 일원이 됨을 보여주셨다. 비록 이들 중 나약한 본성에 의해 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를 향하여 가족됨을 선언하실 것이며, 그들을 내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 아니하실 것이다(롬 8:17, 29 ; 히 2:11).

성 경: [마12:50]

주제1: [바리새인들의 메시야 배척]

주제2: [예수의 거룩한 가족]

⭕ 누구든지 - 이는 성(聖) 가족의 개방성과 포괄성 및 무한대성을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실로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여 이뤄지는 영적 가족은 빈부의 차이나 지역, 문화, 사상 및 계급 간의 차이없이 그리고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 이는 만유(all thing under the sun)의 주인이시요 만유보다 크신 분이 바로 이 가족의 친부(親父)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는 무조건적 개방성을 띤 것만은 아니다. 이에는 철저한 제한성과 배타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함과 동참하는 자'라는 절대적 제한이 바로 그것이다.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 이는 신령한 가족을 정의하는 말로 눅 8: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眷屬)이요(엡 2:19), 믿음의 식구들(갈 6:10)이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초자연적인 차원의 신비를 함축한 말로써 예수께서 절대적 존재자로서의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곧 부자(父子)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다'는 것은 어떤 의롭고도 선한 일을 몸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구원 의지로서, 예수를 신앙하고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애쓰는 일을 의미한다(요 6:29).

성 경: [마13: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그 날에 - '그것' 또는 '그 사실' 등 바로 앞 내용을 가리키는 말인 '에케이노스'(*)가 첨가된 '그 날'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한 사건 또는 일이 발생된 바로 그 날을 뜻하는 말로, 과거의 어느 막연한 시기 혹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 '그 무렵 쯤'의 뜻을 가진 '그때에'(*, 토테)와는 구별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에 이 말은 천국 비유를 베푸신 그날은 자신의 육적(肉的) 모친과 그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온 바로 그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즉 예수 자신의 참 형제 자매와 참 부모는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임을 가르치셨던 날과 같은 날로서, 예수가 바로 이날 자신의 육적 가족을 만나 대접하는데 힘쓰지 않고 영원히 영적 가족이 될 이런 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비유를 가르치는데에 먼저 힘쓴 것은 결국 예수가 죄인들 모두를 당신의 가족으로 여겨 주시며 그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시느라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 마태가 굳이 '에케이노스'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 이유이다.

⭕ 집에서 나가사 - 예수께서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과 잠시 집으로 들어가셨다가 다시 집 밖 바닷가로 나오시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일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는 집안에서는 비교적 구원된 무리들, 즉 12제자를 중심한 그 가족과 동료들을 위한 제자훈련에 힘을 쓰셨던 것이다. 한편 옥외(屋外)에서는 많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장소는 산(5-7장의 산상수훈), 바닷가, 길가, 뽕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 등 다양한 여러 곳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지 그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하셨다.

⭕ 바닷가에 앉으시매 - 갈릴리 바다 혹은 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리우는 이곳의 해변가는 예로부터 레바논 산과 어우러진 푸른 물로 인해서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어업(fishery)이 성해 소금에 절인 어류들이 멀리 스페인에까지 수출되었으며 전 국토가 메마르고 험한 팔레스틴에서는 비교적 기름진 곳으로서 디베랴, 벳새다, 가버나움, 고라신 등의 많은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예수께서 비교적 한적한 시간과 때를 택하여 이곳에 앉아서 둘러싼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단순한 목가풍(牧歌風)의 수채화적 감상을 넘어 일상생활의 타성(楕性)을 깨는 진리에 귀기울이는 구도자(求道者)들의 기쁨과 진실함을 느끼게 해준다.

성 경: [마13: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부리는 자의 비유]

⭕ 무리 - 원어 '오클로스'(*)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플레도스'(*)나 '데모스'(*)와는 달리 천민 집단, 속(俗)된 무리라는 뜻으로 일종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 말이다. 또한 '오클로스'는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준수치 않고 또 그럴 능력조차 갖고 있지 않는 낮고 천한 지위나 형편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말인 히브리어 '암 하아레츠'(*), 즉 '땅의 백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예수께로 달려나온다거나(13:2), 예수를 찾아다닌다거나(눅 8:40), 예수의 전도여행에 줄곧 동행하던(막 5:27; 눅 7:9) 무리들을 지칭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종교의 상류층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다. 어떤 경우에 '오클레스'는 예수의 친족보다도 더 그와 가까운 관계가 되기도 하였으나(막 3:31 ff)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구원자로서만 이해하고, 인간의 영원함과 관련된 영혼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메시야로서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천국비유를 전파하시던 그 당시에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 배 -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소형 어선은 보통 하나의 돛대와 두 개의 노(櫓)가 달렸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를 타시게 되었는데, 이 배는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므로써 순식간에 형성된 군중집회에서 하늘나라의 새 소식이 조용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선포되는 설교강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대개의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육성(肉聲) 이외의 특별한 기계설비가 없던 때였으므로 비록 군중집회였다 하더라도 예수의 이 호반(湖畔) 설교의 분위기는 매우 고요하고 진지했을 것이다.

성 경: [마13: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비유 - 예수께서 비유 교수법(method of teaching)을 창시한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비유를 활용하여 영적 진리를 유효 적절하게 가르친 사실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 탁월하다. 여기서 '비유'(*, 파라볼레)란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던지다'는 뜻의 '발로(*)의 합성어이다. 즉 이는 '옆에 던지다'는 뜻으로 한 사물을 또 다른 사물 곁에 놓아두고 대조, 비교함으로써 그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는 진리 교육의 한 방법이다.

⭕ 씨를 뿌리는 자(*, 호 스페이론) - 여기 사용된 정관사 (*)는 대표 단수로서 어떤 계층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씨 뿌리는 자'란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 즉 농부를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농부라면 일반적으로 다 경험하듯이'라는 뉘앙스가 은근히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씨 뿌리는 자'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밭에 씨를 뿌릴 때 농부가 직접 손으로 갈아놓은 이랑에 뿌리기도 하고 가축을 이용하여(가축의 등에 씨앗 담은 주머니를 달아 이동할 때마다 주머니에 뚫린 구멍으로 조금씩 씨앗이 떨어지게 함)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본문의 비유는 그러한 씨뿌리는 방법에 대한 관심보다 씨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씨 뿌리는 자'란 다음 세가지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예레미야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예언하면서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렘 31:27)라고 선포했다. 실로 남은 자들의 거룩한 씨는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심기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자신. 예수 이전에도 선지자와 많은 교사들이 율법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으나 많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자신은 밭의 종류에 따라 엄청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랑과 복음의 씨를 뿌리신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직접적으로 표현된 37절에 따라 예수를 씨뿌리는 자로 이해하는 이러한 경우에 이 비유는 바로 자서전(自敍傳)적 요소를 갖고 있는 셈이다(Buttrick). (3) 모든 기독교인들. 귀중한 복음의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먼저 믿은 자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로 하여금 신령한 씨를 뿌리도록 권고하였다(고전 9:11).

성 경: [마13: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길 가(*, 파라 텐호돈) - 이를 직역하면 '길을 따라'가 된다. 이는 밭고랑 사이를 따라 만들어진 길을 가리키는데 이 길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의해서 단단하고 반질반질하게 다져진다. 본문에서는 이 길이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청중(audience)을 의미한다. 본 비유에서 '길가'의 결정적 특징은 마음이 굳어져 새로운 씨가 자신의 내부에 뿌려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결국 인간 영혼이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진리에 대하여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배격, 거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 두가지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의식적 원인 :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학식만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 (2) 무의식적 원인 : 이 땅에서의 삶이나 목숨보다는 영생의 문제라고 하는 복음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채 깨닫지 못하여 아예 처음부터 복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솔한 무지와 부주의한 태만에 의한 것이다.

⭕ 새 - 팔레스틴에는 약 삼백여 종(種) 이상의 새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흔한 새가 바로 '참새매'이다. 레 11:16과 신 14:15에서 부정한 새로 분류된 이 새는 유대 땅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특별히 이 새를 염두에 두셨는지는 정확치 않다. 그러나 새에 의해 상징되는 악한 자, 즉 사단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복음의 씨앗을 그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放置)하고 있거나 나중 일로 미루어 지체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는 진리를 경험할 가능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은 복음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의하여 신속히 제거된다고 하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받을 수 있다. 실로 길가 밭과 같은 사람은 씨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천국과 멸망의 길이 판가름나는 결정적인 것이다. 사실 복음의 반대 세력은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거부된 씨앗을 앗아가기 위해 혈안(血眼)이 된 채 적극 활동하고 있다.

⭕ 먹어 버렸고(*, 카테파겐) - 이는 '철저하다'는 뜻의 '카타'(*)와 '먹다'는 뜻의 '에스디오'(*)의 합성어로 조금도 남김없이 완전히 먹어치워버렸음을 나타낸다.

성 경: [마13: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흙이 얇은 돌밭 - 팔레스틴에서는 매우 흔한 지형으로, 석회석 지층 위에 얇은 지표가 형성되어 있어서 자연히 바위의 온기(溫氣)에 의해 뿌리가 쉽게 나오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가 계속 성장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인식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돌밭의 경우와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단순하고도 피상(皮相)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대표한다. 흙의 얕음은, 곧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 인격의 천박성 또는 경박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형상화시켜 주는 표현이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그 행동은 빠르나 지속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물질문명과 기계의 발달로 극도의 속도와 거대한 분량만을 추구함으로써 대부분 인간의 심성이 표피화되어가며 또한 기계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돌밭 유형의 사람들을 더욱 빈번하게 만나고 발견할 수 있다. 실로 복음의 진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영적 토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선한 목적을 추구한다해도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표피화(表皮化)된 인간 심성과 경박함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성 경: [마13: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해가 돋은 후에 - 식물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영양분도 필요하지만 태양열 또한 필요한 것이다. 태양열은 탄소동화 작용등을 통하여 식물의 생장에 결정적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흙이 씨로 비유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상태를, 뿌리가 씨(복음) 자체에서 나온 생장력을 가리킨다면 여기 해는 그 복음의 씨가 계속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종 연단과 훈육을 가리킨다 하겠다. 즉 씨 뿌리는 행위가 단회적인 반면 여기 해는 계속적인 에너지 공급 행위, 즉 일반적 신앙 생활을 통한 신앙 훈련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니면 여기 해가 돋은 후에는 순간적 감격이 끝나고 이제 신앙인이 되어 일상적 신앙생활이 시작된 후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7절의 가시와 비교하자면 둘다 땅위에서 연단(鍊鍛)을 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해가 응당 치러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면 가시는 제 욕심, 염려에 의한 불필요한 시련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여기서 밭은 곧 인간의 영혼 상태의 상징이며, 얕은 돌밭은 결국 껍데기는 부드럽지만 그 속은 아직도 채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상태의 심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즉 겉마음은 경박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 속마음은 성령에 의하여 부서지지 않고 자기 아집과 주장으로 가득찬 상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밭으로는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관성과 성실성 그리고 끈기가 요구되는 신앙 생활이 시작되어 해, 곧 시련이 봉착하게 되면 곧 그 복음의 씨는 말라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자에게는 영적 소망을 기대할 수 없다.

성 경: [마13: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 -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칸다'(*)는 '열매가 없어서 쓸모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기후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는 거의 사계절에 다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도 약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가시는 주로 약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 이스라엘의 적(민 33:55; 수 23:13; 겔 28:24), 저주(창 3:18), 황폐함(사 9:18) 등으로 상징되고 있는데 본문에서의 가시떨기는 천국복음에 대한 신앙적 장애요소로서, 복음의 씨의 기운을 꺾어 버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시떨기 밭은 가시가 자랄 수 있을 정도의 지력(地力)이 감춰진 곳이지만 생장력이 강한 가시나무 외에 다른 채소나 곡식은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거친 땅이다. 팔레스틴 땅에서는 개간(開墾)된 밭 옆에 흔한 가시떨기가 자라는데 이곳에 밀이나 보리 씨가 떨어져 같이 자라는 수가 있다고 한다. 이때 곡식 낟알의 푸른 껍질까지는 생기지만 내용물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를 알고 믿은지 상당히 오래 되었으나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이 세번째 부류의 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 기운을 막았고 -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숨을 막아 질식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영적인 의미로는 이 '숨' 또는 '기운'은 프뉴마(*)를 번역한 말로 '성령'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았다'함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모든 영적생활을 훼방하거나 혼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길 가 밭과 돌밭의 경우는 주로 밭내부가 문제였으나 여기 가시밭은 밭 외부가 문제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앞의 경우들은 마음 밭이 아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마음 밭 자체는 쓸만한데 그 마음 밭에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될 만한 부정적 씨앗이 더 많은게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 밭 내부도 좋아야 하지만 외적으로 각종 신앙적 장애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기운찬 영적 생명력과 진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 경: [마13: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좋은 땅 - '좋은'의 뜻으로 사용된 '칼로스'(*)라는 말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도덕적으로 선한 상태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땅이란 땅이 기름지고 수분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위치하며, 적절한 지력(地力)이 보존되어 있고(레 25:4, 5), 그리고 또 잡초들과 같은 씨앗의 성장에 불필요한 것들이 미리 제거된 순수한 땅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이 비유의 원래 의미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혼의 심지가 깊고 성실한 자, 신앙적 줏대(fixed principle)가 있고 진리에 대해 순박한 자를 가리킨다 하겠다.

⭕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의 놀라운 수확량은 4분의 3의 상실, 즉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으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손실을 충분히 보상하고서도 남음이 있었다. 한편 결실의 창이에 대해서 포세트(Pausett)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십 배는 가장 적은 결실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며, 육십 배는 중간 정도의 결실이며, 백 배라고 하는 것은 한 개의 곡식 낟알이 맺을 수 있는 최고의 결실을 나타내기 위한 예로서 사용된 숫자이므로 모든 결실이 항상 30, 60, 100배의 숫자로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 200배 혹은 300배 까지도 결실을 맺을 수 있다(Herodotus).

⭕ 어찌되었든지 이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데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듯이 결실을 맺는 데에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 결실을 하였느니라(*, 에디두 카르폰) - 헬라어 원문은 미완료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결실이 어떤 한계점에 도달할 만큼 겨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명력 넘치게 결실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한편 여기 결실은 (1) 내적으로는 복음 씨앗을 받은 각 성도의 영적 진보를, (2) 외적으로는 구속사 전개에 따른 천국 시민의 숫적 증가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성 경: [마13: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성경의 여러 용례에서 '귀'는 복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자주 등장한다. 즉 귀는 이해력과 아울러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던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물로 대치시켜 표현하는 것은 특히 히브리인이 즐겨쓰던 표현법이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함이며 따라서 그 말씀을 욕으로 여겨서 즐겨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렘 6:10). 이러한 경우에 그들은 영적인 귀머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귀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요 그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준비하는 자를 의미한다. 한편 이는 비유 자체가 갖는 이중 목적,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욱 뜻을 명료하게, 순종할 의사가 없는 자에게는 오히려 참 진의를 숨기기 위한 목적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다.

성 경: [마13:1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 여기서 제자들이라고 해서 '12사도'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평행구절인 막 4:10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 묻자오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예수께 나아온 제자들의 정체(正體)는 그렇다 해도 이들이 예수께 나아온 시점은 분명치 않다. 36절의 표현과 연결지을 때에는 군중집회 중 잠시 틈을 내었을 때의 일로 볼 수 있고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마태의 기본적 편집 태도로 보면 아예 군중 집회가 완전히 파(罷)한 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일반 군중들 중에서 소수 제자들이 특별히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만은 중요하다. 그들은 예수 앞으로 나아오기까지 먼저 예수의 계신 곳을 찾는 수고의 과정을 겪었으며(연단), 바닷가에서 만난 예수의 비유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참고 기다린 이후에(인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위해 예수께 나아와 질문을 하였으며(적극성), 그 결과 그들은 천국 도래의 비밀을 알게 되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 어찌하여 ...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 이 물음은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비유의 사용 목적에 관한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11-17절까지는 비유 사용의 목적에 대하여 가르치시고, 18-23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해석해 주시고 있다.

성 경: [마13:1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천국의 비밀 - 여기서 먼저 '비밀'(*, 뮈스테리온)은 원래 '닫다', '가두다'는 의미의 '전수(傳授)받은 자'란 뜻인 '뮈스테스' (*)가 파생되었고, 이 '뮈스테이'에서 바로 '뮈스테리온'이 파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Robertson) 이 용어를 단순히 동방의 신비 종교의 입문, 교리 교육 등에 관계된 용어로만 단정짓지만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인 비밀을 지닌 셈족어의 '라즈'(*)라는 말과 연관짓는 것이 좋다(R. E. Brown).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단 2:18, 19, 27, 28, 30),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징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소드'(*, 비밀)를 반영하는데, 이 '소드'는 사해사본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듯이,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다(Brown). 결국 '뮈스테리온'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으로서, 때로 은밀한 말로 전달되기도 하며, 선택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항상 종말론적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한편 '천국의'라는 말이 비밀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은 천국에 관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닫아 둔 것'(*)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일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그것을 닫아 둔 것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진리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본문에 있어서 천국비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천국의 비밀이란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못한 천국이 역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의미한다(Ladd).

⭕ 너희에게는 ... 저희에게는 - '너희'는 12제자와 함께 주님에게로 모여든 소수의 무리, 즉 영적 의미로는 남은 자(remnant)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희'는 외인들(*, 토이스 여소)로서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저희에 속하는 자들은 당장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비유를 깨닫는 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므로 비유를 못 알아 듣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밖에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주시기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후 3:9),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할 때 우리는 신학의 한 핵심인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엡 1:3-13강해 참조). 그리고 '저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주어진 은혜의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 (2)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모여든 군중들로, 결국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치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25:30).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밖에 있는 '저희'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자리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3:1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있는 자 ... 없는 자 - 이 말은 격언적 교훈으로서 마치 비정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예수가 동조(同調)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는 물질계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심으로써 영적 차원에서도 진리를 깨달은 자는 더욱 더 깨닫게 되고 진리를 거부한 자는 오히려 더욱 더 비참해 진다는 사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조소(嘲笑)가 아니라 경고의 말인 것이다. 여기에서 있는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하며,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있는 자나 없는 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것'이며 그가 행한 기적들을 '본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그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오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이다. 깨닫고 믿는 자에게는 그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에게 베풀어졌던 천국복음 마저도 악한 자들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멸망에 처해 질 수 밖에 없다.

성 경: [마13:1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 11절이 비유를 사용하는 궁극적 원인이라고 한다면 본 구절은 그 현상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사실 그대로 말해도 그들을 수동적으로 보자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적극적으로 보자면 아예 알아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보는 것(seeing)이 그대로 아는 것(knowing)이 되지 못하며, 듣는 것(hearing)이 바로 깨닫는 것(perceiving)이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영적 불구자의 심령 상태, 곧 영적 소경(사 59:10; 막 4:12; 요 12:40; 롬 11:25), 영적 귀머거리(렘 6:10; 겔 12:2; 슥 7:11; 행 28:26)인 죄인의 영혼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 경: [마13:1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이사야의 예언이 -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의 예언은 사 6:9, 10에 해당하는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이 문장은 이사야 본문에서는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직접적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선지자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의 완악성(頑惡性)을 꾸짖는 말로 주신 간접적 예언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씀이 당시의 비유를 듣는 무리들의 심령 상태에도 잘 적용되었기 때문에 동질성(同質性)이란 측면에서, 즉 이사야의 말이 당시의 무리에게도 잘 적용된다는 측면에서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이하 인용된 14, 15절의 말씀은 70인역(LXX)의 번역을 옮긴 것으로서 문맥이 조금 불분명한 감(感)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사야서의 해당 본문 자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도 11절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만 살펴서 형식논리로만 생각한다면 백성이 악하기 전에 마치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악하게 만드신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실(其實)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free will)에 따라 완악해진 인간을 하나님이 그대로 방치해 두시겠다는 구체적 의지를 강조 표명한 것으로서, 즉 사태에 대한 당신의 주권적 작정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는 11절에 인용된 바대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의지란 심오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 이루었으니 -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 '아나프레루타이' (*)의 시제는 현재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사야의 해당 본문이 예수 자신의 시대에까지 적용되고 있음으로 해서 예언적 본문이 된 것이라는 예수의 해석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동사를 진행형으로 보면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계속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부 사람들이 복음 선교에 대하여 거부하고 있는 현상적 원인(13절)과 그렇게 된 궁극적 원인(14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13:1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 '완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퀴노' (*)는 살이찌고 둔하여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에 제 스스로 살찐자가 되어서 영적 감수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실로 인간이 자기(육체적 삶) 중심적일 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영적 생명력)과의 관계는 단절, 상실되고 만다. 이것은 곧 허무와 절망의 제 1 보(步)이다.

⭕ 듣기에 둔하고 - 여기서 '둔하고'란 말의 원뜻은 '눌러 내리다'(oppress), '짐을 지우다'(burden), '가리우다'(curtain)로서 가는 귀가 먹거나 말귀를 못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함을 알 수 있다.

⭕ 눈은 감았으니 - 여기서 눈을 '감다'로 번역된 '캄뮈오'(*)는 원래 '내리닫다'의 뜻으로서 눈에 밀납이나 기름 등을 바름으로써 억지로 감기게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실지로 고대 사회에서는 누에 밀납을 칠해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스스로 눈을 감아 진리 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자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 돌이켜(*, 에피스트려소신) - 이 말은 하나님 보다는 죄된 세상을 더 사랑하던 사람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행위라는 뜻으로서 '회심' 혹은 '회개'(*, 메타노이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돌이킴'은 신앙 생활로 들어가는 제 1단계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5:7; 고후 7:10)과 제 2단계로서의 새생활에로의 전반적인 변화(막 1:15; 눅 13:3, 5; 행 2:38)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물론 제 1단계의 자각은 죄된 인간 자신의 반성과 회개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제 2단계의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께 '고침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일차적인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돌이킴(자각)이다(눅 15:17).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자각 조차 하지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길로 그대로 가도록 허락하심은 그들을 벌하시고자 결정하신 연고이다.

⭕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접속사 '메포테'(*)의 지배를 받아 '내가 고치다, 내가 낫게 하다'의 뜻인 '이아오마이'(*)가 미래형으로 변형되었다. 이 문장을 영어로 고치면 'lest ... and I should heal them'으로, 주절과 합쳐진 전체 문장의 주어는 그들(they)이 된다. 따라서 이사야 본문에서는 두려워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는 달리 본서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은 백성들 스스로가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될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증거를 접하고서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은 행위를 말함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유대인에게, 나중에 이방인에게 전해야 하나, 유대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멸망받을 자로 자처한 행위를 말한다(행 13:46). 이것은 그들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상 최대의 실수였다.

성 경: [마13:1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너희 눈은 ... 귀는 -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를 탐구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문장을 '너희 눈은 보니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으니 복이 있다'로 보다 정확히 번역해 보면 15절의 닫힌 눈과 막힌 귀와 잘 대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이나 천국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평히, 객관적으로 제시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주관에 따라 그야말로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옴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역(逆)으로 보면 천국 복음은 들으면 좋고 안들으면 그만인 선택(option)의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를 가늠하는 필수(obligation)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 봄으로 ... 들음으로 - 여기 보고 듣는 대상은 11절에 전제한 천국의 비밀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 비밀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껏 구약에서는 예언으로만 존재하던 천국, 즉 메시야의 나라가 이 역사 안으로 들어 와서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주권)에 의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들(국민)을 규합하여 이 세상에서 새 하늘과 새 땅(영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16절은 단지 개인적 관점에서 지금 주어진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복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지만 17절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너희들은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보고 또 들으려고 원해도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었는데 이것이 너희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음을 새삼 강조하면서 예수 이후 시대 사람들의 구속사적 특권과 책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이) -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행복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었다(5:3). 성경적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듣는 자들, 이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눅 1:45), 헛된 요구를 하지 않는 자들(요 20:29),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깨닫는 자들(요 13:17)이 각각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웠다.

성 경: [마13:1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진리를 아는 축복]

⭕ 내가 진실로 - '진실로'라는 뜻의 헬라어 '아멘'(*)은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 즉 축복이나 저주 등의 수락(受諾)을 확증하는 것으로서(대상 16:36), 또는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입증(대상 16:36)하기 위하여 기도와 송영의 끝에 붙여서 사용하였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말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이 타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구속력이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말을 당신이 특별히 강조하고 싶으신 내용에 앞서 사용함으로써 이하 전개되는 말씀의 진정성(verity)과 진실성(truth)을 미리 확증하시면서 우리를 각성시키고자 하실 때 사용하셨다.

⭕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 못하였느니라 - 많은 선지자와 의인(righteous men)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뤘던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밖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苦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메시야를 영접했던 사람들 또는 그 이후의 우리들이야말로 단지 예언을 통해 메시야를 대망했을 뿐이며(히 11:13, 39)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열망했던 그 영광스런 특권의 실질적인 수혜자(受惠者)인 것이다(벧전 1:10-12, Homer A. Kent, Jr). 한편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 자질이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뒤졌거나 또는 그들이 듣고 보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세워진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질적 차이 때문이었다. 신약 시대의 우월성은 그 신약 시대에 속한 우리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1) 더 큰 감사와 (2)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원해서 신약 시대의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많이 받은 자가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개 때문이다. 한편 이런 구약과 신약의 질적 차이에 대한 언급으로는 11:11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그 위대한 구약의 이사야와 다니엘, 아브라함과 다윗도 보고 듣지 못한 천국의 위대한 비밀을 알게된 큰 축복을 받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성 경: [마13:1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그런즉 ... 들으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 안된 '너희'(*, 휘메이스)란 단어가 특히 강조된 구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이해하라'는 정도(De Wette)의 의미 이상의 뜻으로서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갖기를 원하고 완악한 자들이 단호히 거부했던 영적인 진리를 알 특권이 '너희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측면에서 '너희는'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는 강조적 구절이다.

성 경: [마13:1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아무나(*, 판토스) -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파스'(*) 속격으로, 본문에서는 '들으면서'(*, 아쿠온토스)도 '깨닫지 못하는'(*, 쉬니엔토스)의 뜻인 두 분사를 취하여 '누구든지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Ereryone hearing ... and not understanding)의 뜻으로, 말씀을 듣고도 현재 깨닫지 못하여 그 말씀을 잠시 유보하거나(행 24:25), 또 다른 말씀, 즉 거짓 진리에 대해서도 귀기울이며 이것 저것을 망서리는 사람은 누구나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천국 진리의 말씀을 잃게 된다고 하는 말이다.

⭕ 천국 말씀 - 막 4:14과 눅 8:11에 의하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씨는 기록된 말씀들로서의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직 기록되지 않은 말씀, 즉 예수의 복음이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천국이 도래했다는 벅찬 내용으로 전파되고 있는 말씀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요 1:1) 그분 자신이 바로 보이지 않는 씨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신 그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요 5:39).

⭕ 악한 자 - 마가는 이를 '사단'이라고 (막 4:15) 했으며, 누가는 '마귀'라고(눅 8:12) 표현하였는데 이들의 역할은 모두 사람의 마음에 뿌리워진 씨앗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직접적 개입이나 그 하수인(새들)을 통해 복음의 청취자가 지닌 영적인 은혜를 즉각 앗아간다(Homer A. Kent, Jr., 렘 5:26, 27). 실로 악한 자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가 하면(벧전 5:8)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진리의 말씀에 회의하고 외면하는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 길 가에 뿌리운 자(*, 호돈 스파레이스) - 이는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3절에서의 '씨 뿌리는 자' (*, 호 스페이론)와 대구를 이룬다. 즉 '뿌리운 자'는 씨를 받는 자, 즉 선포하는 말씀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며, '씨 뿌리는 자'는 선포자로서의 예수, 혹은 제자들, 혹은 전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이 씨가 뿌리워진 길가와 같은 사람은 아직 말씀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로서, 말씀에 대해 전혀 반응하거나 응답하지 않는 청중(the unresponsive hearer)이다. 그 사람들은 '새'로 비유되고 있는 사단에 의해 결국 말씀에 응답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성 경: [마13:2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 '씨가 뿌리워진 돌밭'과 같은 사람이라 함은 흙이 얇은 관계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싹과 비유하여 '심지가 굳지 못하며 경박한 마음의 청중'(the shallow hearer), 또는 철저히 감정적인 청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들(태양)에 대해서 인내로써 대처하지 못하고 그 시련에 의해 넘어지는 자이다.

⭕ 기쁨으로 받되 - 말씀을 들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귀기울이거나 또는 말씀을 기쁨의 대상, 즉 은혜나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인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로 알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agree)하면서도 그들은 확신(assurance)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 경: [마13:2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 여기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대한 그 개인의 인격적 확신이 결여(缺如)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누가는 '잠깐 믿다가'라는 연결구를 덧붙임으로써(눅 8:13) 복음에 대한 즉각적 수용 뿐만 아니라 인격적 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 환난이나 핍박 - 환난을 뜻하는 말인 '들리프시스'(*)는 '밀어대다, 몰려대다, 답답하게 하다'의 뜻인 '들리보'(*)에서 나온 말로서, 삶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을 뜻하는 말인 '디오그모스'(*)는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해서 개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디오코'(*)에서 나온 말로서, 본문에서는 종교상의 '박해'를 가리킨다. 결국 이 두 낱말은 한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거침돌을 의미한다.

⭕ 넘어지는(*, 스칸달리조) - 함정, 올가미, 덫 또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뜻하는 '스칸달론'(*)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서는 죄에 빠지다, 배반, 배교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또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인해서 생겨난 갈등으로 어리둥절하거나 휘청거리는(stumble)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 경: [마13:2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환경, 물질 등의 외부적 요소가 가져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방황하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가시떨기 밭은 그 토양 자체는 비옥하나 밭 위가 손질되지 않아 유익한 곡식과 가시떨기가 함께 자라난, 즉 순수와 세속이 혼재(混在)된 자아의 분열된 심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의 재물을 겸(兼)하여 섬기려는 사람이며, 세상의 유혹에 귀기울이므로써 말씀이 그 마음 안에서 질식(窒息)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해서 '세속에 물든 청중'(the worldly hearer)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인격은 결단코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다.

⭕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 세상의 염려란 내세(來世)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6:25-34). 즉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눅 12:22)하는 현세 위주의 생각으로 영원한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와 용기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염려'라는 뜻의 헬라어 '메림나' (*)는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라는 뜻이다. 실로 감정과 생각과 판단이 세상을 향한 욕구로 혼탁해지고 나누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정(淨)함이 없다(약 1:8).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즐거움'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부요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하는 욕망에 빠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리'란 '많다', '풍성하다'의 뜻에서 나온 '플루토스' (*)라는 말로서, '풍성한 재물' 혹은 '부요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재리의 유혹이란 재물 자체에 대한 필요 욕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필요 이상의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오류(誤謬)에 빠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주께서 그 쓸 것을 미리 알고 채워주시므로 현재의 삶에서 겪게 되는 물질의 빈곤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부'보다는 하나님께 부요함으로써 영원한 기쁨과 세상이 주는 거짓 기쁨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 말씀이 막혀 - 여기서 '막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프니게이' (*)는 '질식시키다', '숨막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세상 욕심이 영혼의 양식과 청결한 공기 및 거룩한 햇빛을 날마다 공급받아야 하는 우리의 영적 숨통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정녕 말씀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주는 환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세상이 지닌 파괴적 영향력으로 인해 거룩한 신앙적 성품과 영적 생명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 결실치 못하는 자 - 천국 복음을 수용한 자의 궁극적 목적은 한 인격에 내재한 복음의 넘치는 생명력으로 인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열매 맺는 전(前)단계(싹, 잎, 줄기 등)가 아무리 탁월하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 경: [마13:2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 - 이는 귀기울여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갈 5:22, 23) 성공적인 청중들(the successful hearer)의 상태를 일컫는다.

⭕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 철저한 자기 부인과 겸손한 수용의지를 통해 복음을 듣고, 수납(受納)하고, 그에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풍성한 영적 결실을 이루게 된 자를 가리킨다.

⭕ 혹 백 배 ... 혹 삼십 배 - 소출(所出)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사의 다양성 및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25:24-30).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결실을 한 땅이라 해도 결실했다는 그 자체로서 '좋은 땅'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데 유의해야만 한다.

성 경: [마13:2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천국은 ... 사람과 같으니 - 여기서 ' ... 과 같다'는 말은 아람어의 관용적 표현인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Jeremias). 따라서 본 구절은 '천국은 ... 한 사람의 상황(경우)과 같으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 좋은 씨 -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한 종류의 좋은 씨앗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반면 본문의 좋은 씨는 마지막 주님의 심판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제 밭에 뿌린 사람 -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하는 설명(37절)에 따르면 본문의 구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하여 그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다. 주의 몸된 교회만이 그의 것이 아니라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다(시 24:1). 따라서 '제 밭'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말과 의미상 동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그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나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사람의 거듭난 탄생을 위하여 세상을 보호하시고 가꾸신다.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악이 만연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좋은 땅이다.

성 경: [마13:2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사람들이 잘 때에 - 여기서 '잘 때에'란 농부의 태만함을 꼬집는 말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악한 어두움의 세력은 주로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경계(警戒)도 하지 않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인 밤에(at night) 활동한다. 여기 농부의 원수도 농부가 휴식을 취한 밤에 몰래 들어와 악한 씨앗을 뿌리고 간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로마에서는 보복하기 위해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잡초들을 뿌리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 가라지(*, 지자니온) - 독보리(lolium temulentum)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아주 흡사하여 실제로 이삭이 패기까지는 얼른 식별하기 어렵고, 잘못해서 먹었을 경우 급한 설사와 구토 등의 여러 증상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예수의 설명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로서(38절), 사람들을 의의 자리에서 넘어지게 하는 자이며, 또한 불법과 부정을 행하는 자들이다(41절). 그들의 특징은 (1) 위장성(僞裝性). 곡식과 가라지가 싹이 난 초기부터 결실을 거둘 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잘 분별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끝이 올 때까지는 성도들과 잘 분간되지 않도록 위장되어 있다. (2) 잠복성(潛伏性). 이삭이 나오기까지 평상시에는 곡식과 마찬가지의 외형과 생장 과정을 보이는데 일단 이삭이 패면서부터 알곡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가라지들이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그 감춰진 마각(馬脚)을 드러내 놓고 알곡에게 해를 끼친다. (3) 해독성(害毒性). 가라지는 알곡 뿐 아니라 인체에까지 큰 피해를 안긴다.

⭕ 덧뿌리고 갔더니(*, 에피스페이로) - '위에'를 뜻하는 말인 '에피'(*)와 '씨를 뿌리다'의 뜻인 '스페이로'(*)의 합성어로서, 뿌린 씨 위에 한 번 더 씨를 뿌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레 19:19과 신 22:9에서는 다른 종류의 씨앗을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다. 이는 두 씨앗 중 어느 한 씨앗의 열매조차도 올바로 수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조항인 동시에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과 비타협성을 상징하는 교훈적 율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과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나안의 이방신앙과 그들과의 혼혈 결혼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악한 씨앗, 곧 가라지의 씨앗을 곡식의 씨앗 사이에 덧뿌려 놓은 원수의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모두 부정한 것이었음이 명백해진다.

성 경: [마13:2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결실할 때에 - 열매로써 그 나무나 씨앗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다(7:17). 여기 가라지도 생장기에는 그 악한 실체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그 결실기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결실의 때는 영적으로 최후심판이라고 하는 마지막 추수기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악의 세력과 죄악의 관영이 그 절정에 달한 시기를 상징한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이 때는 고난의 때이고 신앙의 시련을 통과하는 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과 영생이라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곧이어 실현되려고 하는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10:22).

성 경: [마13:2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집 주인 - 씨뿌리는 자의 비유(3-23절)에서는 예수를 비롯한 12제자들과 많은 복음전도자들이 씨뿌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가라지 비유에서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오로지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비록 종들이 가라지의 연유(緣由)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집 주인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원수의 방문에 의한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과 악의 구별 및 그 기원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신 한 분은 오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뿐이시다.

⭕ 주여(*, 퀴리에) - '주'라고 하는 호칭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다. 예수를 부를 때 '주'라고 하는 호칭과 '선생'이라고 하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주로 제자들(8:25; 14:28; 16:22) 또는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8:8; 20:30)이며, 예수를 '선생'으로 부르는 자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유대 지도층을 중심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주'라 함은 예수를 하나님으로서, 즉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선생'이라고 함은 그를 다만 예언자들중의 하나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시므로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 할 호칭은 '랍비'(선생)가 아니라 '퀴리오스'(주님)이다.

⭕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사실은 바로 '좋은 씨 사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악이 이 세상 혹은 교회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물음이다. 악은 인간의 생명과 삶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유형, 무형의 부정적 실재로서 이는 현상학적으로 말하는 선(善)의 부재 혹은 결핍의 상태(Augustine) 이상을 의미한다. 아무튼 '인류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사상을 괴롭혔고 신앙을 시험한 이 악의 기원에 관한 악명높은 물음'(John S. Whale)에 대해서 성경은 종말의 날에 모든 악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파멸당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16:20; 요일 3:8; 계 20:2, 10).

성 경: [마13:2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원수 - '미움', '증오'의 뜻인 '에크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의미로는 '원수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부정하는 자이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이다.

⭕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 종들의 이 두번째 질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밭에 있는 가라지를 지금 당장 모조리 뽑아 버리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성급함과 경솔은 추수(秋收)의 '때'(*, 카이로스)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영적 우둔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성 경: [마13:2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가만 두어라 - '그대로 가만 두고 지켜보도록 하라'는 의미로서, 이는 바로 이 세상의 악의 세력들에 대한 주님의 지혜롭고 여유있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악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악의 근절(根絶)을 아예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악행을 허락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층 더해지기 위한 도구로 사단이 이용되는 때 뿐이다(욥 2:4-7; 눅 13:16).

⭕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 곡식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과 염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악을 멸하시지 않고 있다. 가라지는 보통 곡식보다 더 강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리지를 뽑을 때는 종종 어리고 약한 곡식이 함께 뽑힌다. 따라서 곡식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 가라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 종들의 열의 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성 경: [마13:3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 추수 때에(*, 엔 카이로 투 데리스무) - 추수는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비유이다. 심판이 행해지는 종말의 때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시간적 의미를 가짐과 함게 성취, 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나버리며 최후의 대심판에 의해 악한 자는 영원히 멸망할 곳으로, 의인은 추수가 끝난 마당에서의 축제와 같이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 함께 자라게 두어라 - 여기서 '두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테' (*)는 '완전히 포기하여 버린 상태대로 방치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집 주인의 주권적 명령으로서 '내가 그대로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정했으니 너희들은 관여치 말라. 너희들의 소관(所關)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 수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낼 수밖에 없었던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에서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박해때 어쩔 수 없이 배교(背敎)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박해가 끝나자(A.D. 4C경)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도나티스트파) 한 번 배교하여 파문(破門)을 당한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하여지자 성(聖)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교회는 완전히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자들을 함부로 제거해서 교회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실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16:17, 18)토대로 하여 세워진 하나의 거룩한 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교회는 절대 완전한 천국 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세상 끝날까지 알곡과 가라지, 즉 의인과 악인의 복합체(複合體)의 상태로 존속(存續)할 것이다.

⭕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 결실기에 이르게 되면 가라지는 알곡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로써 추수 일꾼은 손쉽게 가라지를 수거(收去)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알곡보다 먼저 가라지를 거두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곡이 가라지보다 많이 수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와 더불어 가라지를 단으로 묶는다고 하는 표현은 가라지의 숫자도 꽤 많은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일상적인 추수 방법, 즉 알곡을 먼저 단으로 묶어 곳간에 들인 다음 쭉정이는 한 곳에 모아서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가라지를 먼저 추수하는 독특한 방식은 재림하신 예수께서 그의 대적 마귀의 우두머리를 먼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처넣기 위에 결박하는 것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이 완전히 도말되는 것으로부터 완성될 것이다.

⭕ 곳간(*, 아포테케) - '위'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와 '두다', '쌓다'의 뜻인 '티데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거하실 안전한 처소, 곧 하늘에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집으로 의인(義認)된 성도들만이 들어가기를 허락받는 곳이다.

성 경: [마13:3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겨자씨 비유]

⭕ 겨자씨(*, 시나피) -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은 것(32절)이지만 생장력(生長力)이 대단하여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 가량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F.R. Fay).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께서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성 때문이다. (1) 은밀성. 겨자씨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확연히 노출되지 않은채 조용히 성장해 간다. (2) 확장성.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중은 창대해질 것이다. (3) 변화성.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마 17:2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Dahl)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과로서의 교회는 예수 - 12제자 - 120문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현재는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 경: [마13:3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겨자씨 비유]

⭕ 모든 씨보다 작은 것 -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검은 겨자씨(sinapis nigra)는 비교급 '미크로테론'(*)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보다 작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 유대 격언에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할 때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그 크기는 매우 작은 것으로 공동 인식하고 있었다(Buxtorf). 더욱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씨의 크기가 아니라 씨의 결과인 나무의 크기이다.

⭕ 공중의 새들 - 겔 31:6과 단 4:12에서의 '공중에 나는 새'는 하늘까지 닿은 나무로 상징된 '대제국 앗수르'의 속국들과 '대제국 바벧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많은 나라와 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서의 공중의 새들은 겨자 나무, 곧 천국의 실체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를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영적으로 좀더 확대 해석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통에 지쳐 평안과 안식을 갈망하며 쉴만한 곳을 찾는 인생들. 이들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깃들이느니라(*, 카타스케노오) - 천막을 가리키는 말은 '스케노마'(*)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살다' '거주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스케노오'(*)와 '아래', '밑'을 가리키는 전치사인 '카타' (*)의 합성어로서,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 민 14:30; 신 33:12; 시 16:9에 의하면 안전하고도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행 2:25에 인용된 시 16:8에 의하면 부활 이후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겨자씨 비유에서의 새의 깃들임도 역시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 새와 같이 겨자나무에 떼를 지어 지속적으로 깃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마13:3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누룩 비유]

본 누룩 비유는 해석상 여러 견해가 전해진다. (1) 부정적 측면에서, 여자를 악한 존재(슥 5:7, 8), 곧 이세벧(계 2:20), 큰 음녀(계 17:1) 등으로 이해하여 가루로 표현된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는 누룩으로 보는 것이다(랍비전승). (2) 긍정적 측면에서, 교회의 지역적 확장 내지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 등으로 이해한다. 물론 두 견해 모두 그 타당성이 있으나 두번째 견해가 더욱 적절할 것 같다.

⭕ 여자가(*, 귀네) - 누룩의 헬라어인 '쥐메'(*)와 대구를 이루도록 선택하신 예수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단어이다. 한편 남자의 활동이 앞의 겨자씨의 비유에서 처럼 외적(外的)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본문에서의 누룩의 역할과도 같이 집과 교회와 다른 여러 사회공동체 속에서 그 활동이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그 사회를 놀랍게 변혁, 성장시키는 내적(內的)인 변화를 가져온다.

⭕ 가루 서말(*, 사타 트리아) - NIV성경은 가루 서말을 '많은 양의 가루'(a large amount of flour)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마도 가루 서말이란 여인이 하루에 빵을 구울 수 있는 최대한의 양을 의미하는 데서 표현된 말일 것이다. 여기서 '말'을 뜻하는 '사타'는 히브리어로는 스아(*)이며 에바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따라서 '서말'은 1에바로서 약 22-23리터에 해당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 세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준비한 분량(창 18:6)이나,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무교전병(無교煎餠)을 만들어 드린 양(삿 6:19),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그를 여호와께 드릴 때 제물로 가져가던 소제의 양(삼상 1:24)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 1오멜(Omer 약 2.34l)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던 것(출 16:33, 36)에 비추어 볼 때 하루서말의 분량 1에바는 10오멜에 해당하므로 아마도 가족 9-10명의 하루 세끼 분량의 음식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누룩과 같으니라 - '끓어 오르다', '끓이다'의 뜻인 '제오'(*)에서 유래한 말인 '쥐메'(*)는 누룩, 효모(yeast)를 가리킨다. 성경에서의 누룩은 보통 교만이나 죄된 욕망(고전 5:6), 또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대적자들의 가르침 속에 있는 부패하고 썩게 하는 요소(16:6; 막 8:15; 눅 12:1)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의 예수의 비유 속에서의 누룩의 의미는 그것의 부정적, 긍정적 결과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낳는 놀라운 변화력과 정복(征服) 능력에 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보잘 것 없이 시작된 천국 복음은 세상 곳곳을 묵묵히 정복해 들어가 그곳의 많은 사람들을 죄된 욕망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진정한 변화의 요인이 되었다.

성 경: [마13:3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 강화의 의미]

⭕ 비유가 아니면 ...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 말씀하지 않았다는 뜻의 동사 '엘랄레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과거의 단 한 번의 동작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과는 달리 습관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말이 ' ... 을 제외하고', '밖에'라는 부사 '코리스'(*)와 연결됨으로써 본문이 예수께서 오로지 비유로만 이야기하고 다른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비유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문은 단지 그날은 '천국'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기 위해 특별히 비유로만 말씀하셨다고 하는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성 경: [마13:3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 강화의 의미]

⭕ 선지자로 -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라는 의미로, 어떤 사본(시내 사본, 에티오피아 사본 등)에 의하면 선지자라는 말과 더불어 '이사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인용문은 시 78:2에서 인용한 것으로 (70인역에서는 시 77편으로 기록) 저자는 '아삽'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선지자는 이사야가 아닌 아삽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사실 대하 29:30에 의하면 히스기야왕은 아삽을 선견자로 부른 적이 있었다. 한편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찬송의 책임을 맡았던 베레갸의 아들로서 시편 중 12편의 뛰어난 시(시 50, 73 - 83편)를 지었다. 그의 이름은 헤만과 여두둔과 함께 다윗의 세 악사로서 언약궤를 에벧에돔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여두둔과 아삽은 왕의 선견자(先見者)라고 불리웠다(대상 25:5, 6; 대하 35:15).

⭕ 내가 ... 비유로 말하고 - 이를 원문에 좀더 가깝게 해석하면 '내가 다른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말하고'가 될 것이다.

⭕ 창세부터(*, 카바볼레스) - 이는 '밑으로'의 뜻인 '카타' (*)와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로서 '기초', '창건', '시작'을 뜻하는 말인 '카타볼레'(*)의 소유격이다. 따라서 '창세부터'라는 말은 '세상(코스모스)의 기초가 놓여지던 때부터'의 의미를 나타낸다. 구약에서의 이 말은 '옛부터'(민니 -케뎀)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70인역(LXX)에서는 '태초로부터'(*, 아프 아르케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에 의하면 시 78편의 문맥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창세부터'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nation)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은 바로 전(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와 뜻이므로 어느 특정된 한 민족과는 관계없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되었던 것일 것이다.

⭕ 감추인 것들(*, 케크륌메나) - '수수께끼', '가려진 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히도트'(*)와 같은 말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소극적 의미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숨긴 것이라고 하는 적극적 의미가 잇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 또는 '옛 비밀한 말'(시 78:2)은 바로 구속(救贖)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들(Lindars)이며 과거의 사건들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영적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밝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시는 계시자(啓示者)인 동시에 자신에 대해서 이미 예언, 선포되었던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는 완성자가 되신다.

⭕ 드러내리라(*, 에르소마이) - 감추인 것을 가리키는 말인 '케크뤼메나'가 본래 사람이 은밀하게 선언한 것을 의미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르소마이'는 '선포하다', '크게 말하다'의 뜻으로 거칠고(rough) 큰(aloud) 한 마디의 '말을 토해 내다', 강물이 콸콸 소리내어 흐르듯이 열정적인 마음으로 '연설을 하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삽이 비유를 통하여 유대의 지나간 역사와 사건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발표(發表)했듯이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시대'(*, 카이로스)의 비밀을 군중들에게 밝히 계시하셨다. 더구나 이 비밀들은 서기관이 율법을 가르치듯이 말씀되지 않았고 마치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 감동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듯이 권위에 찬 음성으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13:3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무리를 떠나사 - KJV에 의하면 예수게서 무리들을 해산시킨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RSV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떠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이스'(*)는 '아피에미'(*)의 현재 수동형으로서, '가게 하다'(let go), '보내 버리다'(send away) 또는 '버려두다'(leave), '포기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께서 들을 귀와 볼 눈을 갖지 못한 많은 무리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그의 비유속에 무엇인가가 숨기워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앞서 떠났던(13:1)집으로 다시 돌아오셨음을 나타낸 장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36절 이후의 3개 혹은 4개의 비유들(보화, 진주, 그물, 서기관)의 청중들은 일반 무리들이 아닌 소수의 제자들로 바뀌었으며 비유의 목적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기 위해, 밝히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알려진 천국 도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제자들의 계속적인 노력을 촉구(促求)하기 위하여 베풀어졌다.

⭕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 '설명하여 주다'의 뜻인 동사 '디아사페손' (*)은 '뚫다', '통하다'의 의미인 전치사 '디아'(*)와 '맑은', '깨끗한'의 뜻인 '사페스'(*)의 합성으로 되어진 말로서, '철저히 말하다', '분명히 가르치다' 또는 '밝히 말하다'의 의미이다. 한편 18:31에서 이 동사는 '낱낱이 고하다'(report)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아무튼 이 단어는 제자들이 예수의 비유 중 그 어느 하나도 자신들의 힘으로는 풀거나 해석할 수 없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든 예수의 말씀을 철저히 알기를 원했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신령한 말씀은 신령한 영의 도움으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겸손하고도 열정적으로 진리를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비밀스런 진리들을 가르쳐 주신다(10절).

성 경: [마13:3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인자 - 복음서 중에 나타나고 있는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들은 그 칭호와 관련된 주제에 따라 (1) 종말의 날에 영광 가운데서 임재하실 묵시적인 의미의 인자 (2) 고난받다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는 인자 (3) 현재 이 세상 안에서 자신이 위탁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인자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본문에서의 씨 뿌리는 자로서의 '인자'의 의미는 세번째 유형으로서 복음의 첫 선포자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참조, 누가복음 5장 주제 강해).

성 경: [마13:3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밭은 세상이요 - 이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미칠 것을 암시한다. 이같은 사실은 본문의 헬라어 표현, 곧 '밭'과 '세상'이라는 명사 앞에 각각 동일한 관사(*, 호)가 붙어 있음으로써 양자는 서로 위치를 바꾸더라도 의미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지나칠 정도의 출교(excommuication)를 강조하는 도나티스트들(Donatists)과 싸우기 위해 '밭은 교회'이며, 또한 그곳에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표적'이라고 말한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은 자신이 살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 협의적(狹義的) 해석으로 볼 수 있다.

⭕ 천국의 아들들 - 인자에 의해(37절) 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메시야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언약의 권리를 포기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인 '그 나라 자손들'(8:12)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으로 메시야의 왕국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백성들로서, 법적권리, 즉 상속권을 소유한 아들의 신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5:9). 특히 '천국의 아들들'이란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그들이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국에 어울리는 속성이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성품이며 성령의 여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소유한 것을 가리킨다.

⭕ 악한 자의 아들들 - 악한 자에 의해 세상에 흩뿌려진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멸망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며 그 나라의 특성에 맞게 사악한 속성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사악한 근성을 가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성 경: [마13:3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원수는 마귀요 - '원수', '대적자'를 뜻하는 말인 '에크드로스'(*)는 '적의', '불화', '이간', '분리'를 가리키는 말인 '에크드라'(*)에서 유래한 말로서, '분리되어 나온 자'를 의미한다. 한편 마귀를 가리키는 말인 '디아볼로스'(*)는 '사이에'를 뜻하는 '디아'(*)와 '밀어넣다', '끼어넣다', '던지다'의 뜻인 '발로'(*)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상(中傷)하는 자', '비방, 거짓 고소하는 자', '밀고자'의 의미이다. 따라서 원수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버린 자로서의 악의 기원과 그 정체성(正體性)을 나타내며, 마귀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비방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를 조성(助成)하는 그들의 사악한 행위(work)를 드러내 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나간 자는 마귀의 역할, 즉 사악의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일을 담당한다(4장 강해 '사단과 귀신' 참조).

⭕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 여기서 '세상 끝' (*, 쉰테레이아 아이오노스)이란 문자적으로 '이 시대의 완료(결말)'를 의미한다. 결국 이때가 이르면 현존하는 이 시간들이 완료되고 동시에 영광스런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이때는 예언된 다니엘의 70이레(Seventy Weeks)의 끝(단 9:24-27; 계 11:1-13), 곧 예수의 재림의 때를 암시한다.

⭕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 천사들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창 18:2-15; 출 3:2; 삿 13:6-21)을 하는 것으로서 묘사되었다. 그런데 신약에서,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중의 천사의 중대한 역할과 책임은 종말에 인자와 함께 세상에 와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며 악임을 멸망의 장소로 인도하여 영원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마 24:31; 25:31-46; 막 13:27; 계 14:17-20). 더 자세한 내용은 히 1장 강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마13:4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불에 사르는 것 같이 - 세상 끝날 곧 종말에 있을 가장 놀라운 사건 중에 하나는 가라지(악한 자들)의 묶음이 영영한 멸망의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계 14:9-11). 이는 단지 상징적, 교훈적 차원에서의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來世)를 가늠하는 존재론적 심판이다(42절).

성 경: [마13:4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보내리니(*, 아포스텔로) - '앞', '미리', '전에'를 뜻하는 말인 '아포'(*)와 '차례로 놓다', '준비하다'의 뜻인 '스텔로' (*)의 합성어로서, '사명을 띠고 목적한 장소로 가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위임받은 자',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인 '아포스톨로스' (*)는 특별히 예수께서 선택하신 12제자를 일컫는 말로(10:2),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문의 천사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 그 나라에서 -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왕국 안에서'(in his kingdom)의 뜻으로, 하늘 나라는 바로 아버지의 나라(the kingdom of the Father)이며, 인자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Man)로서 예수의 지상 사역(ministry)에 의해서 이미 시작된 종말의 나라이며 그의 뜻이 실현되고, 통치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분명 '그의 나라'는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Bornkamm). 왜냐하면 부활과 재림 이후의 예수의 통치 영역은 온 우주에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28:18).

⭕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 - 이 말은 습 1:3의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 이라는 원문을 완곡하게 번역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습 1:3에서의 '거치게 하는 것'은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악에 빠져들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마태의 표현도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걸려넘어지게 하는 함정이나 미끼 또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악을 행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문자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7:23). 한편 바울은 불법의 사람을 가리켜 멸망의 아들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했는데(살후 2:3-4), 이는 그가, 곧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성 경: [마13:4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풀무 불 - 이는 마태의 기록 중 본절과 50절에만 언급된 말로서 직역하면 '화덕',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킨다.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무서운 불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것은 흔히 '불못' 또는 '지옥'으로도 일컬어지고 있다(렘 29:22; 단 3:6; 계 20:15; 에스드라서 7:36). 모든 불의한 것들이 징계되고 일소(一掃)되는 이곳에서 악인들은 종말적인 영원한 운명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울다'의 의미인 '클라우드모스' (*)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哀悼)를 가리키는 말로 라마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우는 것이나(마 2:18), 회당장의 집에서 훤화 하는 것(막 5:38) 등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를 갈다', '이를 악물다'는 뜻인 '브뤼그모스'(*)는 '물어 뜯다'란 뜻의 '브뤼코'(*)에서 나온 말로 굶주림에 계속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모습이나, 분노로 씩씩대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행 7:54에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를 갈거늘' 이라는 표현에도 사용되었다.

성 경: [마13:4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비유의 해석]

⭕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 본문의 말씀은 단 12:3의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으나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다니엘서의 기록과는 달리 '지혜있는 자들'(이해하는 자들, *, 호이수니엔테스)이란 말이 생략되고 단지 '의인들' (*, 호이 다카이오이)이란 말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 당시 당신의 메시지를 지혜롭게 이해하는 자들이었던 제자들만을 이상화 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의인들'이란 복음의 빛을 수용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의인들은 바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아버지의 나라' 곧 영원한 본향으로 삼고 있다.

⭕ 해와 같이 빛나리라 - 여기서 '빛나리라'에 해당하는 '에크람프수신' (*)이란 '...로부터'(from)의 뜻인 '에크'(*)와 '등불'이란 뜻인 '람파스'(*)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결국 의인들의 빛남이 마치 어둠가운데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밝히 볼 수 있게 하는 등불과 같이 빛나게 된다는 의미로 세상 끝날에 성도들이 덧입게 될 영광의 광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말이다. 한편 의인들의 해같이 빛나는 모습의 예표는 바로 변화산에서의 변형된 예수의 모습(17:2), 또는 예수의 무덤 속에 앉아있던 주의 천사의 모습(28:3)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모든 만물이 다 해처럼 빛날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던 처음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것이다.

성 경: [마13:4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밭에 감추인 보화 - 팔레스틴 지역은 약탈(plunder)이 빈번하고 오늘날의 은행과 같이 재물을 맡길만한 공식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은 자기의 소유를 땅에 감춰두는 예가 흔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처럼 보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일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Huffman). 이처럼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최상의 가치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랍비 율법에 따르면 만일 일꾼이 밭에서 일하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파내었으면 그 보물은 당연히 그 밭 주인의 소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Derrett). 그러나 본문의 사람은 매우 신중하여 자기가 그 밭을 살 때까지 보물을 파지 않았다. 따라서 이 비유는 법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보화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것임을 가르치는데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사실 그 사람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그 밭을 삼으로써 결국 치른 대가보다 훨씬 더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러면 보화는 왜 감춰져야만 했는가? 이는 (1)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가치한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기 위함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서 천국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같다. (2)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근면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보화는 감추어졌다. 부지런히 말씀을 사모하는 자만이 천국복음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3) 보화가 밭에 감추어진 까닭은 그것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천국복음의 진리는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계속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그러면 밭에 감추인 보화는 어떤 사람들이 발견하기 어렵게 숨기워져 있는가! (1)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하여 보물을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물이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소유한 사상이나 철학, 종교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들은 결국 멸망으로의 길을 안내받고 있는 셈이다. (2) 그 보화는 진리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며, 감각적인 쾌락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다. 이들은 영원한 삶과 부활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기 때문에 밭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아무리 열심히 권고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보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생명을 찾으려는 자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일상의 삶속에 감추어져 있다. 한편 보화라는 말은 귀하고 값진 모든 물건들을 총칭(總稱)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이 보석이든 금괴이든 간에 보화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을 상징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예를 들어 부귀, 명예, 자기의 이상과 주의등)는 비록 사람에 따라 다르고 다양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사죄(赦罪)의 은총과 죄에서의 해방된 삶, 곧 천국의 삶이다. 이러한 값진 진리를 발견한 사람의 기쁨은 족히 비교할 것이 없을 것이다.

⭕ 돌아가서...다 팔아...샀느니라 - 여기 제시된 세 동사의 시제는 모두 현재형으로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행동의 일면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 가치 앞에 상대적 가치를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용기있는 진리 추구자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사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돈 없이, 값 없이 사는 것이며(사 55:1, 계 21:6), 둘째는 본문에서처럼 모든 소유를 다 투자하여 사는 것인데, 이는 얻고자 하는 것에 비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무익하거나 오히려 해(害)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빌 3:7, 8). 이에 비해 마 19:21, 22에 나오는 청년은 보물이 무엇임을(온전하여지는 것) 알고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이미 획득한 가치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성 경: [마13:4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좋은 진주 - 진주는 그 당시 페르시아만과 인도양 등지에서 채취한 것이 가장 고가품(高價品)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만 해도 부자가 아니고서는 이 지역들에서 '진주'를 구입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흔히 성경에서는 이 '진주'를 고결한 것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취급하고 있다(7:6; 잠 3:15).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장사는 바로 이러한 '좋은 진주'를 구하고 있었다. 즉 그는 결코 흠이나 티가 있거나, 모양이 좋지 않은 저가품을 구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값나가는 진주에만 관심이 있었다.

⭕ 장사(*, 엠포로스) - 여행을 뜻하는 말인 '포로스'(*)에서 나온 말로, 주로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부유한 도매 상인을 가리킨다. 밭에서 우연히 보물을 발견한 평범한 농부와는 달리 진주장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전문적인 안목(眼目)을 갖고 진주가 나올만한 곳을 찾아 다닌다고 하는 점에서 인생의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진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찾아 얻을 수 있는가에 유념치 않고 그냥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애써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진리를 찾아 다니는 구도자(求道者)이다.

성 경: [마13:4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극히 값진 진주 하나 - 여기서 '극히 값진'에 해당하는 '폴뤼티몬'(*)은 45절의 '좋은'을 뜻하는 '칼루스'(*)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값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실로 그 상인은 자신이 목적하고 소망했던 것보다 더 좋은 진주를 만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위해 자신의 전 의지(意志)를 불사르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헤이다. 더불어 본문에서 '하나'(*, 헤나)란 여럿 중의 하나란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the only)라는 의미로서 그 진주의 희귀성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한편 하나님과 죄된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대속(代贖)의 피값은 결코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크고 귀한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여기의 '극히 값진 진주'와 비교될 수 있다.

성 경: [마13:4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각종 물고기 - 예수께서 비유를 베푸셨던 곳은 갈릴리 주변 동리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적어도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갈릴리 어부 출신 제자들과 갈릴리의 어족(魚族)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약 22종 이상의 물고기들이 생존한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는 결국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국한(局限)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여러 인종과 민족이 이에 포함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각종 물고기'라는 말은 비유의 의미상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모두 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며 밀과 가라지와 같이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살아가는 상태를 암시한다. 그러나 비유 자체 내에서 좋고 나쁨의 구분은 도덕적 의미에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먹기에 좋고 크기도 알맞은 고기와 그렇지 못한 고기를 가리키는 말로, 좋은 고기란 가치가 있는 것, 그리고 나븐 고기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고기를 말한다.

⭕ 그물(*, 사게네) - 이는 4:18의 그것과는 크기와 사용법에서 차이가 난다. 여기의 그물은 두 배 사이에 묶어서 끌고 다니거나 아니면 한 쪽 끝은 해안가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 쪽 끝은 배에다 달아매어 긴 밧줄로 끌어당겨 밖으로 끌고 나올 수 있게 만든 것으로서, 무거운 납을 달아 바다 밑바닥까지 훑어 대량으로 고기를 잡는 대단히 큰 그물이다. 욥 19:6과 시 66:1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그물속에 들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한편 이 그물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계 도처에 복음이 확산되는 것과 더불어 그 확산의 결과로서의 신앙 공동체, 곧 교회를 상징한다. 실로 그 교회는 종말의 심판 때까지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함께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를 영적 혼미(stupefaction)의 와중에 처한 세상 족속들을 상징한다(단 7:3; 눅 21:25).

성 경: [마13:4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물가로 끌어내고 - '물가'란 시간적인 개념으로서, 종말의 심판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완성 사이의 중간 시기를 의미한다. 그물에 걸린 고기가 물가에서 버리워진든지 아니면 그릇에 담기워지든가 하듯이 종말에 악인들은 영영한 형벌의 처소로, 성도들은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천년 통치를 경험하는 자리고 영원히 분리된다. 이런 의미 속에서 물가의 장소적 개념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심판의 현장이라 할 것이다.

성 경: [마13:49]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 여기에서 '갈라내어'(*, 아포리우신)란 완전한 격리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날에 실행될 의인과 악인에 대한 분리 작업의 냉엄한 장면을 예감케 한다.

성 경: [마13:50]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세 가지 천국 비유]

⭕ 풀무 불에...울며 이를 갊이 - 이 비유의 초점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악인들의 영원한 형벌의 상황(the situation)에 대한 경고적 메시지이다(42절; 8:12; 22:13).

성 경: [마13:51]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천국 제자된 자의 도리]

⭕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 '영적 이해력을 소유하게 되었는가'하는 뜻이다. 이같은 예수의 말씀은 비유 설명을 요구하던 제자들의 의문점을(10절) 깨끗이 해소시켜 주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 즉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Filson, Plummer, Schweizer, Schmid)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Grundmann, Bonnard, Hill, Fenton)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잘못 이해하면서 나머지 것들은 제대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그러하오이다 -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고 그들 스스로 확신(確信)하며 강한 자부심에 따라 대답한 것이다. 이는 결코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한 확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Alford).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얼마 안 가서(15:16) 예수로부터 어리석다고 하는 책망을 듣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튼 그 당시 제자들은 분명히 무리들보다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성 경: [마13:52]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천국 제자된 자의 도리]

⭕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 이 난해한 비유에 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즉 (1)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이라고 말하는가하면(Jeremias), (2) '기독교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유대 서기관'(Hummel), 또는 (3) 교회 안에서 마치 유대 서기관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율법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Kilpatrick). 그러나 일반적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란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의 역할, 즉 율법 및 경전에 대한 해석과 율법 교육은 물론하고 그 이외에도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을 깨닫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한 가지 더 붙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서기관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그에 준하여 생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발 아래서 겸손히 배우고 소박한 마음으로 그 진리를 수용한 자들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해를 겸비(combination)한 랍비가 유대인들의 서기관보다 더 탁월하고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일 것이다.

⭕ 새 것과 옛 것 -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으나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신 새 진리가 새 것이라고 한다면 오래 전부터 알려지고 깨우쳐진 옛 진리, 곧 구약의 율법을 옛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자구(字句)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전체 율법 속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간과(overlooking)해 버렸으며 다만 교조적(敎條的)으로 옛 것(율법과 전승)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암송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자는 이러한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예수로 인해 시작된 새 것과 전해오던 옛 것을 동시에 취합(聚合), 활용할 수 있는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계시는 오직 하나이며 그 계시의 초점은 "옛 것"을 성취하며 새롭게하는 '새 것'에 있다는 점이다(Bonnard). 실로 구약의 율법과 신앙은 물론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들도 모두 '새 것'을 이끄신 예수의 인격안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새롭게 변화된 시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꺼내어 온다.

⭕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여기서 '곳간'(*, 데사우로스)이란 말은 주로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말이다(12:35). 따라서 본문은 천국 제자가 된 서기관이 그의 마음, 곧 그의 지각과 인격과 그 존재 자체 내에서 그 무엇을 꺼내어 온다고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본문의 곳간은 진리가 전수되고, 보관되어 오는 곳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사건의 역사가 쌓인 마음의 창고이다. 따라서 집주인과 같은 주의 제자들은 주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비밀들을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끄집어 내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고 그 의미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성 경: [마13:53]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의 설교들을 매듭짓는 다섯개의 형식적인 결론들 가운데 하나이다(7:28; 11:1; 19:1; 26:1). 특별히 본문에서는 지금까지의 천국 비유가 종결되고 이제 새로운 사건, 곧 예수의 고향 주민들의 배척에 대한 사건으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을 나타내 준다.

성 경: [마13:54]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 고향으로 돌아가사 - 예수의 공생애 중에 있었던 세차례의 갈릴리 전도 사역 가운데서 제 2차의 갈릴리 사역(8:5-13:58)을 종결(終結)하시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처음 고향으로 귀환(歸還)하시는 모습이다. 예수의 고향은 물론 나사렛을 가리킨다(눅 4:16).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그의 말씀 전파 사역을 감당하셨고, 따라서 그에게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反感)이 한층 더 고조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예수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대립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그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마태는 유대교인들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임을 구별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희'라고 하는 표현을 회당 앞에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제자들의 집단이나 이적을 바라며 찾아다니는 무리들의 모임에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모함(謀陷)하고 해하려는 무리들이 공식적으로 모이는 회당에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이는 예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그의 사역, 즉 가르치심(teaching), 복음을 전파하심(preaching), 병을 고치심(healing)에 최선을 다하시려고 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순전히 회당에서만 가르치시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주로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소개하셨으며,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던'(*, 에디다스켄)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의 강해 '유대교의 회당'을 참조하라.

⭕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 묻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의문점은 예수가 권위자이심을 증명해 주는 그의 지혜와 능력, 즉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기적을 행하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인지 바알세불에게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 자신도 예수의 지혜와 가르침이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나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결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예수의 출신과 배움의 정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신적 권위가 초경험적이며 지적 이해를 초월한 초이성적인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마13:55]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 목수의 아들 - 예수는 실제로 목수였다(막 6:3). 사실 당시의 유대 관습에 의하면 자녀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繼承)했다고 전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도 공생애 이전까지는 목수의 일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의 주택들은 대부분 흙벽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목수'란 넓은 의미에서 건축 기술자 또는 목공 기술자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A.D. 150년)은 예수가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도 증언한다. 한편 본문의 '목수'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투'(*)가 사용됨으로써 나사렛 동네에는 오직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의 목수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 그 형제들 - 이들이 예수의 이복(異腹) 형제 또는 사촌들이라는 견해들이 있으나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아들들, 곧 예수의 친 동생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2:46 참조). 여기서 '야고보'는 후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자(행 15:13) 야고보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을 위시(爲始)한 그외의 형제들(그들의 신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음)은 예수의 공생애 때만 하더라도 예수를 구주로 신앙치 않았으나(요 7:5)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 이후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여진 것 같다(행 1:14).

성 경: [마13:56]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 예수의 형제와 모친은 일찍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주한 것 같고(4:13), 그의 누이들은 결혼을 하여 나사렛에 계속 정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예수의 누이들이 복수로 표기된것으로 보아 적어도 2명 이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외에 그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막 6:3)

성 경: [마13:57]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 배척한지라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 '그들이 적대시했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매우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예수를 도무지 용납치 않을 태세였음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는 고향방문 때마다 모두 거절되고 배척당하였다(눅 4:29). 고향에서 조차 배척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첫째, 장차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거부 당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구속 사건을 예고한다. 둘째, 예수의 지혜와 권능이 저희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어 저들이 예수의 말씀을 거부함에 따라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셋째,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로부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의 질병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loss)하게 되었다.

⭕ 선지자가...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 이는 유대 뿐 아니라 그리이스와 로마의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격언구이다(Logia of Jusus, Oxyrincus Papyri). 그런데 구약 선지자 중에 예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배척을 당한 선지자는 바로 예레미야이다. 아나돗의 제사장의 아들(렘 1:1)이었던 그에 대하여 그곳 사람들은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고 하였다. 한편 평행구절인 막 6:6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움과 경악을 금치 못하셨는데, 이는 6절 하반부에서 드러나는 대로 나사렛을 제외한 모든 촌에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는 일이 가능했으나 고향에서만큼은 그에 대한 불신과 시기가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선지자의 자연적 속성을 익히 알고 있는 자는 그 선지자가 지닌 초자연적 속성(신적 권위에 의한)을 소극적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적극적으로는 배척한다(Bengel).

성 경: [마13:58]

주제1: [천국에 관한 비유들]

주제2: [고향에서 배척받으심]

⭕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 이 구절과 평행 대조되는 막 6:5의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말의 뜻은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권능을 행하실 능력이 없다거나 행하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기간에 많은 기적을 행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오천 명을 먹이심, 풍랑을 잠잠케 하심등등). 따라서 마가가 행하실 수 없다고 표현한 것도 예수의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 자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전파의 사명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나타내시며 전파하시고자 할 때만 그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자신이 하늘로서 난 자이며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하시는 자라고 하는 사실과 천국이 이미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말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적을 행치 않으셨던 것이다. 계시(믿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자들에게는 기적과 치유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성 경: [마14: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헤롯의 예수에 대한 견해]

⭕ 그 때에 -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시킨 A.D. 39년 이후이며, 갈릴리 전도의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로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선구자로서, 구속사적으로는 구약의 종말과 신약의 출발을 증언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름받은 세례 요한은 세례 행위와 예수에 따른 메시야의 등의 직접적 방법으로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삶을 예표하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그 전체가 예수의 모형(模型)이었다. 즉 그의 투옥(14:3)을 통해서 예수의 수난의 삶이,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예표(豫標)되었다. 한편 이 세례 요한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예수의 사역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선구자라고 지칭하였다. 요한의 죽음 이후, 즉 의로운 말을 외치다가 세상 권력자에게 당하는 죽음에서 조차 당신의 예표의 역할을 한 요한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예수는 본격적으로 스스로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수차의 수난 예고를 하시는 등 당신의 메시야직의 절정인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시게 된다. (2) 당시 팔레스틴 북부, 즉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 지역은 물론 전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회.종교적 이슈(issue)의 주제이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예수 한사람에게 전 사회적 억압에 시달리던 일반 대중들은 예수에게 정치적인 기대를, 주로 정치 기득권층은 예수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1),(2)의 사실을 종합래 볼 때, 예수는 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역을 행하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의 행위의 참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부단히 자신들만의 편협한 시각으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런 오해는 예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 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 테트라아르케스)이란 '네 개로 이뤄진 한 벌'을 뜻하는 '테트라스'(*)와 '통치'를 뜻하는 '아케르'(*)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뜻은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의 정복지역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괴뢰 정부의 왕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신약 개론 중 '정치적 배경'란을 참조하라. 본문의 헤롯은 헤롯대왕이 죽은 B. C. 4년 부터 A. D. 39년까지 네 개의 통치지역으로 나뉜 유대 땅 가운데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주무대로 활동하셨던 세례 요한 및 예수와 관계가 깊었던 사람으로, 예수로부터는 그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여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눅 13:3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그에게 심문(審問)을 받으심으로써 그는 세례 요한 및 예수의 처형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다(눅 23:7).

⭕ 예수의 소문을 듣고 - 막 6:14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며, 눅 9:7에 의하면 예수의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헤롯에게 보고(報告)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마가와 누가의 두 복음서에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은 모두 그의 '제사 파송'과 관련된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러나 대략 A.D. 29년경, 즉 아무리 빨리 잡는다해도 주께서 죽기 1년전에 있었던 제자들의 전도 파송의 결과, 제자들이 행한 사역과 능력에 의해서 예수에 관한 소문이 더욱더 멀리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헤롯이 지금 처음으로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일년 이상 헤롯의 통치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갈릴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어 놓았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있었거나 또는 사치와 향락에 심취해 있었으므로(F.R.Fay, Homer A. Kent, Jr.) 갈릴리 지방에서는 그가 예수에 관해서 가장 나중에 알게된 사람 중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신하들이 예수의 소문에 관해 언급하고 그 일을 문제삼으려고 하는 일은 예수의 사역이 예수의 진의(眞理)와는 달리 그들에게 얼마나 큰 정치적 위협(威脅)으로 다가오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정의와 진리는 그것이 굳이 불의와 비진리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해도 물과 기름이 서로 갈라지듯이 서로 서로를 밀어내기 마련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 경: [마14: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헤롯의 예수에 대한 견해]

⭕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해 먼저 신하 중 몇몇이 보고하고 헤롯이 곧 그 사실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으로 기술하고 있다(눅 9:7-9). 이에 비해 마가는 헤롯이 신하들의 말에 동조(alignment)한 것으로 기술했다(막 6:14-16). 아마 이러한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튼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누가는 헤롯이 신하의 말을 듣고 난 즉시 일어난 상태를, 마태와 마가는 시간이 조금 더 경과한 뒤에 헤롯의 감정이 가라일은 후 헤롯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판단할 때의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오해한 원인은 (1) 그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2) 예수의 사역과 세례 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유사점, 곧 설교에 있어서의 회개 촉구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임박성 강조,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책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실 헤롯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를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이해(16:14)는 예수를 유일무이(有一無二)한 메시야로 고백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이러한 결론을 내린 사실에서 적어도 헤롯은 미신적이며 절충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바리새적인 부활관에 영향을 받은 듯,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부활하여 죽기 전보다 더욱 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는 미신적 사고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그는 훗날 예수를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하는데도 묵시적 동조를 하게 된다. 한편 유대인들의 부활관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정립된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에도 이미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몇몇 구절들(욥 14:13-15;단 12:2-3;호 6:2)이 있다. 그러나 부활사상이 훨씬 다양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신구약 중간시기를 거친 신약 시대였을 것이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신앙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사상을 전면 부정(否定)하였다(행 23:8). 실로 여기서 죽은 자는 모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할은 의로운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차이점이 있다.

⭕ 이런 권능이 - 세례 요한이 그의 사역 중에 비록 어떠한 표적도 해하지 않았다(요 10:41) 하더라도 헤롯의 이 말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그를 권세(*, 여수시아)와 능력(*, 뒤나미스)을 갗춘 자로, 즉 적어도 그는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구러나 요한의 권위에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런 자 심지어 11:11에 묘사한대로 여자가 낳은 자, 즉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 중 가장 큰자가 예수에 대한 선구자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마태는 이를 부각시킨 것 같다.

⭕ 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는 헬라어 '에네르게오'(*)는 '활기를 돋우다', '움직이다'의 의미인 영어의 'energize'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무엇인가 초월적 힘이 한 인격에게 영감(靈感)과 (動力)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른 초자연적인 힘(바알세불 등)의 도움으로 행한다고 생각했듯이 헤롯도 죽은 세례 요한의 영(靈)이 예수 안에서 그 권능들을 행하게 생각하였다.

성 경: [마14: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전에 - 이 말은 3-12절의 내용이 적어도 1, 2절의 시점 이전에 일어났던 일의 회상(回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관복음 모두 이 헤롯의 공포와 세례 요한 살해의 사건을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2제자 파송을 즈음하여 요한 살해가 있었고 12제자 파송으로 전국이 예수 소문으로 들끓자 헤롯이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동생 빌립 - 헤릇 빌립 1(Herod Philp 1)세를 말한다.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의 딸 마리암네(Mariamne 2)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며 살로메의 부친이다. 한편 그와 헤롯 안티바스와의 관계는 이복 형제간이었다<헤롯왕가의 가계 도표 참조>.

⭕ 헤로디아의 일 - 여기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Aristobolus)의 딸이었다. 그녀는 헤롯 빌립, 곧 자신의 삼촌과 결혼하여 살로메를 낳았다. 그런데 사바티안(Sabatian) 왕인 아레타스(Aretas)의 딸과 이미 결혼한 바 있는 또다른 삼촌 헤롯 안티바스가 그녀를 유혹하여 남편 빌립을 버리고 자신과 불법적인 재혼을 하게 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아레타스의 딸은 본국으로 도망가게 되고 끝내 두 나라 간에 전쟁이 발발 하게 된다. 결국 안티바스는 이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때가 세례 요한을 참수(斬首)시킨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참패의 원인을 의인의 살해로 말미암은 징벌이라고 간주한다. 한편 본문의 '헤로디아의 일'이란 헤롯 안티바스와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한 세례 요한의 책망을 가리킨다. 이 일로 인해서 헤로디아는 신약의 엘리야인 세례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고자 계획하였는데(막 6:19), 이는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던 이세벨의 경우와 좋은 대조가 되는 사건이었다(왕상 19:1,2).

⭕ 옥에 가두었으니 - 요한은 유대인의 3대 요새(要塞) 중의 하나인 마케루스에 있는 감옥에 갇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주로 거처하는 베레아의 남부를 방어하는 요새로, 표고 736m의 사해 동편 황량한 사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한의 투옥 이후에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별개의 집단으로 계속 존속하고 있었으며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았던 것 같다(11:2).

성 경: [마14: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헬라어 동사 '엘레겐(*)은 과거 미완료시상으로서 '그가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한이 헤롯을 직접 만나 그를 책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교 하는 중에 혹은 세례를 주는 등의 여러 행위속에서 헤롯과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에 대해 공공연히 비난하였음을 의미한다.

⭕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광야에서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의 '고발 내용'이다. 요한이 헤롯을 책망한 것은 그가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다(고후 11:32)의 딸을 버림으로써 외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몰고온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출신(헤롯대왕은 이두매 사람이었다)인 헤롯이 자신이 유대인이 되었음을 자처하면서도 유대의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레 18:16;20:21)에는 형제의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조건은 그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뿐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첫 남편인 헤롯 빌립 1세는 여전히 살아있었으므로 그들은 간음죄를 범한 것이며, 또한 헤롯파 헤로디아는 삼촌과 조카(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또 다른 아들 아리스 토블루스의 딸이다) 사이로 이들은 근친상간(近親相姦)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성 경: [마14: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그 이유는 두 가지, 즉 (1) 도덕적 이유, 즉 요한이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에, (2) 정치적 이유, 세례 요한이 민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심각해졌기 때문에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상호 연결된 것으로서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 사가(historian) 요세푸스(Josephus)등은 정치적 이유에 초점을 두고, 성경 기자들은 비교적 전자에 기울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게 있어 헤롯 가문이나 로마의 식민체제 등을 비판하는 것이 임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구속사적 입장에서 구약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인한 신약의 시작을 증언하는 것이 그의 주(主) 임무였다. 또한 그가 세속 정치인에게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정치적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과 연결되어 다시 한 번 세례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막 6:20에서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이때 헤롯이 요한을 단번에 처형치 못한 것은 백성들의 폭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제외한 민중의 태도는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매우 호의(好意)적 인 것이었다(3:5, 6;11:7-4).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을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2) 적국(敵國)인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헤롯왕가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며, (3) 예수께서도 그를 크게 칭찬하셨으므로 예수를 따른 자들도 세례 요한을 참선지자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로서 인식하고,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며, (4) 헤롯이 세례 요한을 불법적으로 감금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동정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인기가 더욱 더 고조되고 전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4: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헤롯의 맹세로 - 살로메의 육감적 독무에 심취한 헤롯 안티바스는 탐욕스럽고 권세있는 제왕(帝王)으로서의 기분을 맘껏 누렸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담을 늘어 놓았다(에 5:3, 6;7:2). 헤롯은 자기 어리석음에 도취되었던 것이다.

⭕ 허락하거늘 - '호몰로게오'(*)는 '확언하다', '공언하다' 등의 의미로, 맹세와 다짐을 동반한(*, 메타) 허락으로서 반복될 수 없는 약속이다. 물론 왕이 기쁜 날을 맞아 신하에게 훌륭한 선물을 내리는 것은 일상의 일이었지만 헤롯은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에 도취된 채 호언 장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過誤)를 저지르게 된다.

성 경: [마14: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그 당시 살로메는 육체적으로는 뭇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만큼 성숙했는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제 어미에게 의존해야 할 만큼 미숙한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시킴'에 해당하는 원어 '프로비바스데이사'(*)는 '선동하다', '권면하다'는 뜻으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준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사주(使嗾)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요한의 죽음은 그녀의 간계(奸計)에 의한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분명히 요한의 처형에 대해 끊임없이 헤롯을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결심을 못하는 헤롯의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던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이용하여 눈에 가시와 같이 자신의 부정(不貞)을 고발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하였다.

⭕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헤로디아의 흡혈귀적인 완악상을 드러내 준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한 결혼을 고발하던 요한의 칼날같은 혀가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요한을 마음껏 저주하고 조롱하기 원했기 때문에 참수(斬首) 당한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한편 여기 언급된 '소반'은 타원형으로 된 얇고 큰 접시를 가리킨다.

⭕ 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라는 말은 유대의 정치, 종교지도자와 로마시의 군관들이 모인 잔치 자리로서 연회석이자 공식적인 모임의 장소이다. 헤로디아는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 것을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擔保)로하여 그(헤롯)를 위협하고 요한의 처형을 더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 실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성 경: [마14: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왕이 근심하나 -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를 민란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그의 근심은 '양심의 최후 투쟁'(plumptre)이었으나 그는 의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 집착, 선택함으로써 악에게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자기의 맹세한 것 헬라어 '호르쿠스'(*)는 맹세의 뜻인 '호르코스'(*)의 복수형으로, 맹세가 여러 번 반복되었거나 아니면 그 맹세가 확정적일만큼 강력했던 것임을 의미 하는 말이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단하도록 허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는 율법에서도 평시되어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특히 성경적인 맹세는 하나님앞에서 거짓없음과 약속이행의 의지를 엄숙하게 맹세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할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향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異意)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신약 시대에 이르러 맹세는 하나님 대신에 신의 인격, 예배에 관련된 물체, 우주만물, 성전 등을 가리켜 맹세가 행해졌다. 그러나 맹세의 남용(남용)으로 인해서 예수께서는 일체(일체)의 맹세를 반대하시기도 하였다(마 5:34-37). 한편 구약의 인물 중에서도 경솔한 맹세로 인해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으로 입다(삿 11:31-39), 사울(삼상 14:38ff)등이 있다. 둘째, 헤롯은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말은 곧, 국법이었다. 그 예로 다니앨을 사자굴에 집어넣었던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의 금령을 들 수 있다(단 6:14-15).

⭕ 그 함께 앉은 사람들 - 막 6:12에 의하면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듸이다. 이 사람들은 왕의 잘못을 제지하는 엘리야김의 방백들과는(렘 36:25) 달리 헤롯의 불의를 조장하고 촉구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함께 모이듯' 헤롯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헤로디아와 같이 부정하고 사악 한 자들로서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에 그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참수를 결단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어리석은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었고 사악한 헤로디아의 살인에 동조자(同調者)가 되었다.

성 경: [마14:1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사람을 보내어...옥에서 목 베어 - 심문이나 재판의 판결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것과 더구나 모세 율법에 따르면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종교적, 신앙 공동체에 대한 공적 범죄이외에는(출 32:27;신 13:6-18) . 참수헝은 그리이스나 로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헤롯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이방적 태도를 반율법적이고 반민족전인 것이어서 그가 아무리 유대인임을 자처한다고 하더라고 민중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성 경: [마14:1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 헤로디아는 그녀의 부정과 불의를 끝없이 고발하던 세례 요한의 혀가 잠잠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의 머리를 요구한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처형이 정의를 부르짖던 그의 '소리'를 결코 잠재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 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 코라시온)란 혼기(婚期)가 가까운 처녀를 가리킨다. 사실 그 당시 증근동 지방에서는 조혼(早婚)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십대 중반에 이른 살로메에게 이 용어를 붙인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을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 실로 악인은 피흘리기를 좋아하며, 그것을 신속히 행한다. 한편 루핀(Rufin)의 제롬(Jerome)은 이때 헤로디아가 뽀족한 바늘로 피로 젖은 세례 요한의 혀를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한다. 한편 무고(誣告)한 피를 흘리게 한 헤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써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Josephus). 정녕 하나님은 요한이 아닌 헤롯과 그 일당의 목을 요구하신 것이다.

성 경: [마14:1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세례 요한의 순교]

⭕ 요한의 제자들이...장사하고 -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이 살아있을 때에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11:2) 스승의 참수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들은 머리없는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후 곧 예수께 나아갔다. 즉 그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35-40)이라는 말을 듣고 점차 예수를 신뢰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 스승이 죽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예수에게로 와서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요한은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는데, 그 결과로서 요한의 제자들은 팔레스틴을 벗어나 지역에서 여전히 작은 분파로서 존재하였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를 중심한 복음의 충만한 지식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편협한 신앙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다(행 18:24-19:7).

⭕ 예수께 고하니라 - 막 6:30에 의하면 이 보고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 대한 보고였다. 그러나 마태는 이 보고가 요한의 처형에 관한 것임을 서술하는 가운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옥에 있는 요한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고한(11:4 ff) 제자들이 요한의 처형 소식을 주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자들이 많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성 경: [마14:1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예수께서 들으시고 - 본문에서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 내용은 '요한의 처형'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의 권능에 대한 소문이 신하들에 의해 헤롯에게 보고되었고 헤롯이 그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소식이다(1절). 따라서 3-12절의 내용은 부록적(附錄的) 설명임에 분명하다. 3절에 보면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헬라어 '가르'(*,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 '가르'는 어떤 사실에 덧붙여 설명하고자 할 때 쓰이며, 반면에 3절의 초두에 나타나는 '데'(*, 그리고)는 어떤 일을 새롭게 전개시코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L. Cope).

⭕ 따로 빈들에 가시니 - 세례 요한의 사후(死後) 헤롯이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것과 헤롯의 미신적인 두려움과 그가 자신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눅 9:9)는 사실을 아신 예수께서는 해롯의 관할지역을 떠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벳새다 광야로 가셨다.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길이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주위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과 이적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 절정에 속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사건들은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갖는다.

⭕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 예수께서는 전에도 바리새인들의 적의(敵意)를 피해 떠나신 적이 있는데(12:15), 이제는 헤롯 안티바스를 피해 안식과 묵상을 위해 떠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피하신 또 다른 이유는 12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했기 때문이다(막 6:30;눅 9:10). 그 제자들은 영.육의 휴식기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선교 방법에 대한 검토 및 예수께 복음의 비빌을 좀더 깨우침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는 예수가 가신 빈들이 벱새다(눅 9:10). 즉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벳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 지방에 속한 곳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 해변을 따라서 도보(徒步)로 예수를 좇아갔을 것이다. 무리들은 선지자로 여기던 세례 요한의 처형소식을 듣고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다가 예수 계신 곳을 듣고 그분에게서 영혼의 쉼을 얻고자 찾아 나선 것 같다.

성 경: [마14:1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예수께서 나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이 공개됨으로써 대적자들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자들과 조용한 무리를 향해 나아오셨다. 이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해 선택,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의지가 응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큰 무리 - 직역하면 '많은 무리'라 된다. 한편 이 사람들의 수(數)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숫자 계산에 들지 않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다면 이 무리는 적어도 만 오천내지 이만 명은 넘었을 것이다.

⭕ 불쌍히 여기사 - (*, 스플랑크니조마이). 헬라어의 이 동사는 유대인듸이 참으로 애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디아스포라(Diaspora)상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생겨났다고 한다. '불쌍히 여기다'라고 하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내장'(*, 스플랑크나)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에 대한 긍휼'은 예수의 전인격성을 대표하는 속성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간절한 정(情)이상의 애틋한 긍휼의 마음이다. 한편 예수의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긍휼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행위로써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 사람의 믿음을 보고서 행하시는 적도 있지만 흔히는 그 자신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고침의 이적을 행하셨다.

성 경: [마14:1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저녁(*, 옵시아스)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제 1저녁은 늦은 낮, 주오후 3시부터 시작되고, 제 2 저녁은 일몰 이후 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의 구절은 제 1저녁을, 23절에서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 이곳은 빈들이오 - 빈들을 가리키는 말인 '에레모스'(*)는 광야 혹은 한적한 곳으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던 곳도 이러한 곳이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와 메뚜기로 매일의 양식을 삼았던 곳도 바로 이러한 곳이었다. 따라서 마을이 없고 인적이 드문 이러한 곳에서 자연식품인 메뚜기와 석청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에 의해서 마련된 만나를 제외한 다른 떡이나 음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롯은 그의 찬란한 궁전에서 귀족들과 연회릍 벌렸지만 그 연회는 살인과 범죄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제자와 큰 무리들과 함께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빈들'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의 땅이며, 천국잔치의 전례(前例)가 행해진 곳이다.

⭕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때가 벌써 지났으니'가 된다. 그렇다면 이 '때'란 어떤 상황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칠 때, 식사할 때, 무리들을 돌려보낼 때, 밝은 시간이 지나는 때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여러 견해들은 모두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거의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 무리를 보내어...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 어쩌면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금전만능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처럼 들리는 제자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다. 사설 제자들 중에는 (아마 가릇유다일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에게 필요한 돈이 얼마쯤 남아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그 돈으로는 약 2만여명의 무리를 먹이기에 역부족임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무리를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 밖에 다른 방도(方途)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마14:1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갈 것 없다 -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어 '우'(*)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꽤 합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이 한 마디의 말로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보고,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실로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결코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 들이고 게신다(요 14:1).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듸은 '스스로 사 먹게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명령에 쓰인 동사 '도테'(*)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 한다. 실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거의 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듯이(요 21:15-17)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굻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할 책임이 있다.

성 경: [마14:1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내게 가져 오라 -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끝없는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그것은 발생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실로 제자들의 이러한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예수의 '내게 가져오라'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로, 교회 자체에게로가 아니라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마14:1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잔디 위에 앉히시고 - 눅 9:14에 의하면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셨다고 하였고, 막 6:40에 의하면 혹 백씩 혹 오십씩 알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았다'의 뜻인 '아나클리노'(*)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의 보통의 식사 때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신령한 이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그 이적에 참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셨다. 한편 본문의 '잔디'에 관한 언급으로 보아 이때는 대략 3, 4월 경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우기(雨期)가 막 끝나가는 2월 중순 경부터 빈들에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요 6:10). 더욱이 요한은 이때가 유월절(니산 월 14일)이 가까운 때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6:4). 참고로 유월절 기간이 다한 이후로는 잔디가 푸른 기운을 잃고 시들기 시작한다.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다(롬 14:6; 딤전 4:5).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日常化)를 가르쳤다. 바로 예수께서 이 날의 잔치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그의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이다. 여기서 '축사하다'의 뜻인 '유로게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다. 본분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도의 내용 역시 그들 앞에 적은 양이나마 음식이 놓여진 것에 대한 감사이지, 그 음식의 무한정한 증가를 간구한 기원에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때 드리던 기도 그대로였을 것이다(26:26;눅 24:30).

⭕ 떡을 떼어 - 떡을 떼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의 손이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과 여자, 어린아이가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의 근원지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며, 떡을 떼시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러한 기적이 발생한 시점(時點)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呪文)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덩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이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영적 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와 그분의 육체의 모형이라고 하는 점에 그 큰 의의가 있다(요 6:26, 27). 예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주신다.

⭕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의 사건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가까이, 더 먼저 경험한 목격자들이며 그 목격한 사실들을 전달해 주는 증인들이다. 떡과 물고기가 전해지는 이러한 과정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세상에 전달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성 경: [마14:2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다 배불리 먹고 - 겨우 목을 축이고 한 끼니를 때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자신의 집을 찾아 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떡과 물고기가 배급(配給)되었다는 말이다. 특히 '배불리 먹었다'고 하는 말은 아마도 미래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잔치의 풍성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사(赦)할 수 있는 큰 사랑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남은 조각 - 기름으로 모든 빈 그릇을 채운 이적(왕하 4:1-7)과 스무 개의 보리떡과 자루에 담은 채소로 100명을 먹인(왕하 4:42-44) 엘리사의 기적과 신약에서 나오는 예수의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사용하고도 남았다'고 하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에서도 병자는 그 자신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몸이 완전히 건강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이러한 차고 넘치도록 후히 주시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남은 조각들은 바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조각들이며 주님의 사랑의 파편(破片)들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조각'은 단지 먹다가만 부스러기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께서 나눠주시기 위해 손으로 떼 놓은 조각듸까지를 포함한 말일 것이다.

⭕ 열 두 바구니 - 열 두 제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 남은 조각들은 12제자들의 계속되는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바구니를 뜻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버들가지로 만든 음식담는 그릇으로서 여행자들의 휴대용 주머니로 활용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일급 광주리는(15:37) 헬라어 '스퓌리스'(*)로,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는 갈대로 만든 광주리였다. 그리고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슷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4천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가 생명이 됨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 경: [마14:2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오병 이어의 기적]

⭕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 오병 이어의 기적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만 1년전인 유월절이 임박한 기간에 베풀어진 것으로 보인다(요 6:4). 따라서 그 당시 무리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운집(雲集)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때 모인 무리는 성인 남자만을 계수(計數)하는 유대인의 계산법에 따라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 (*, 파이디온, 조그마한 아이란 뜻)까지를 합산하면 1만 5천명에서 2만명 정도로 추산(推算)된다. 예수의 공생애 중에 최대의 군중이 운집한 것이다.

성 경: [마14:2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즉시...재촉하사 - '재촉하다'의 헬라어 '에낭카센'(*)은 '억지로 시키다'의 뜻이다. 예수께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하신 후에 급히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멀리 떠나가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갈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 주님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기를 위하셨다(23절). (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동요하고 있는 무리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잠시 쉬시기를 원했다(막 6:31-32). (3)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먼저 해산시킴으로써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하는 백성들의 의도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하였다(요 6:15). 왜냐하면 그의 제자들은 주님을 도와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를 올바로 잡아줌으로써 주님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대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들이 남아있는 일이 예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막 8:27-9:1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 전개' 참조).

⭕ 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 - 음식을 먹은 벱새다 광야의 건너편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네사렛일 것이다(34절). 할편 요 6:17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와 모리스(Morri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벱새다 율리우스에 근접해 있는 동쪽 해안에서 자신을 기다리라는 당부와 함께 제자들을 보내어 호수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내는'이라는 가정법 과거 동사와 함께 쓰인 '동안에'란 뜻의 '헤오스 후'(*)는 '때까지'(until)로 번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건너펀으로 가게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주님께서 무리들을 해산시킬 때까지만 제자들이 앞서 가다가 그 후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고 다시 제자들과 만나 건너편으로 건녀가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마14:2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무리를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이제부터 그와 함께 하려는 많은 군중들을 집으로 돌려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1) 여러가지 이적, 특히 오병이어 사건에서 그가 참 메시야이심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에게 옹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며(21장), (2) 비록 그가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참 메시야이시라고 하더라도 메시야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을 시켜 생선과 육류를 준비하여 잔치를 배설(排泄)할 것으로 생각하던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고대하는 구원자로서 오히려 유대인듸에게는 배척당하고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리들의 갈채와 소란은 마귀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여기서 '산'은 혼잡한 무리들과 격리된 영적 교제의 장소이다. 더불어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注視)할 수 있었을 것이다(막 6:48).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행한 기적을 둘러싸고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종종 한적한 곳을 찾아나섰으며 그곳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곤 하셨다(막 1:35;눅 5:16;6:12). 예수의 능력의 비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눈 것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역을 가눙케하는 예수의 내적인 삶의 본질이었다. 기도와 이적 행위 사이의 바른 관련성은 행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기도로써 그 행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최고로 중요한 것이며 행위는 그 기도를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Archbishop William Temple).

⭕ 저물매 - 두번째 저녁을 의미한다(15절 참조).

성 경: [마14:2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헬라어 성경에서 이 표현은 '메손 테스 달라세스'(*)로, '바다 한 가운데'를 의미한다. 이곳과 평행구절인 요 6:19에는 '십여 리'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25-30 스타디온쯤 되는 거리이다. 그렇다면 1스타디온(stadion)은 184.85m 이므로 따라서 육지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4.6km 내지 5.5km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란 참조).

⭕ 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오수에서 부는 바람은 폭퐁우를 동반한 돌풍으로 급격한 기후 변동과 고난의 위험성이 있다(막 4:37;요 6:18).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바람은 생의 덧없음(시 78:39), 하나님의 심판(렘 18:17),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재난(렘 49:36), 사람을 미혹하는 교훈(엡 4:14)등을 상징하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은 환호, 열광하는 군중들을 뒤로하고 예수로부터 떠밀려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마귀가 가져다 주는 시험, 즉 세상 권력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그들을 괴롭혔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다. 실로 그들의 배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거슬리고, 그들의 영혼은 그들을 향해 불어 오시는 성령의 바람을 거스렸다.

⭕ 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바사니조'(*)는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케 하다'등의 뜻으로,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의 급격한 위기에 봉착(逢着)했음올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제자들이 이러한 곤란을 경험하는 이 시간에 예수께서도 협곡(峽谷)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면서 역시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셨다. 물론 예수에게 있어서 고난은 바로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 사이의 음모 구상과 박해 공작(plot)에 대한 예견(foreknowledge)과 자신을 이 세상의 왕으로 삼으려는 군중들의 오해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 등등의 사유로 인해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그 시간에 함께 고통을 당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기도틀 통하여 그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시고 능히 물리치셨다. 그에 반하여 제자들은 주남님 도우심으로써만 그 고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배 가까이 오신 예수 주님으로 확신할 때까지 배에서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친히 목격하고 계셨으나 즉시 그들을 찾지 않으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조처로서(Chrysostom), 예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더불어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보호하시는 능력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8:23-27)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시련의 기간을 두셨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성 경: [마14:2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밤을 3경으로 아누었으나(일경을 4시간씩, 막 6:48) 그리이스나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 마태는 로마식을 따른 것 같다. 따라서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이며,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그리고 본문에 묘사된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 바다 위로 걸어서 - 예수의 만유의 주재로서의 초자연적 위상(位相)을 나타내주는 부분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기 위해서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결 및 지구의 중력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의 사슬들을 지배하시고 그 위에 우뚝서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사건은 그 결과가 바로 제자들의 최초 신앙고백, 즉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하는 참 신앙적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생략된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요한복음의 서술이 모두 오첨 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다음에 기술되어 출애굽 사건을 연상케 함으로써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다를 건넜지만 예수는 스스로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바다 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 즉 모세보다 탁월하신 예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로 예수(복음)의 새시대는 모세(율법)의 옛시대를 포함할 뿐 아니라 크게 능가(surpass)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4:2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유령(*, 팥타스마) - 이는 꾸며서 나왔다는 뜻인 '판타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 곧 망령 또는 귀신을 의미한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기(寄)현상 앞에 제자들은 그것을 하나의 환각 내지는 미신적 현상으로 오판(misjudgement)하였다. 적어도 그들은 '유령이라' 외치면서 그들의 눈 앞에 직면한 죽음의 위기에 몸이 굳어버렸을 것이다.

성 경: [마14:2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안심하라 내니 - 여기 '안심하라'(*, 달세이테)는 말은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는 뜻이며, '두려워 말라'(*, 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즉시 '두려움에서 헤어나오라'는 뜻이다. 즉 두 용어는 결국 안심하라는 의미의 중복적 권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는 예수의 권고의 말씀은 '나다'(*, 에고 에이미)라는 확신을 주는 말씀에 의해 더욱 밑받침이 되고 있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기도 하며(출 3:14),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셨으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셔서 권능을 주신 분으로서의 예수 자신을 저들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참으로 친근한 말씀이다. 이 위대한 위로의 말씀은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이 파선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듸 뿐만 아니라 압제자들로 부터 대박해를 당하여 신앙과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며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힘을 주는 것일 것이다.

성 경: [마14:2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베드로가 - 물 위를 걸은 기록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이 부분은 14-17장 가운데서 베드로가 예수께 특별한 취급을 받는 세 경우(16:13-23;17:24-27) 중의 하나로서, 베노이트(Benoit)는 이 기사에서 이미 베드로가 수석 제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만일 주시어든(*, 에이 쉬 에이) - 앞에 '에이'는 접속사이며, 뒤에 '에이'는 '...이다, 있다'의 뜻인 '에이미'(*) 동사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형태이다. 그런데 접속사 '에이'는 가정적 조건문에서는 '...인지, 아닌지'의 뜻을 갖지만, 본문의 경우와 같이 결론이 확실한 내용에서 도출(導出)되어 직설법 동사와 연합되는 경우에는(Յד + 직설법) 토론적으로 사용되어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주시어든'이라는 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베드로의 일면을 보여준다.

⭕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하셨으며, 말씀(*, 로고스)이신 예수께서 육신이 되셔서 그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천국 비밀을 선포해 주심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경: [마14:2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오라 하시니...배에서 내려 - 예수의 '오라'는 명령에는 이미 당신을 믿고 오는 자에 대해 보호와 안전을 마련해 두고 계신 권위에 찬 명령이다. 한편 신앙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 아브라함도 그의 나이 75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오라' 부르시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히 11:29).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믿음으로 알지 못하는 세계(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로 나아갔다.

성 경: [마14:3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바람을 보고 -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가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믿음'의 고갈(枯渴)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험에도 침착히 인내할 수 있을 만큼의 더 큰 믿음이 없었다는, 즉 믿음의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정녕 그는 예수(앞)만 바라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람(밑)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을 삼킬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워 하게 되었다. 정녕 온전한 믿음의 눈은 결코 두 개의 초점 (예수와 세상의 풍파)을 가질 수 없다.

⭕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와 그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믿음의 빛을 잃었을 때, 그 즉시 예수의 보호권에서 벗어나 중력에 의해 빠져드는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실로 신앙 세계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물 위(완전한 믿음)가 아니면 물 아래(완전한 의심), 둘 중 하나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퀴리에 소손 메) - '구원하소서'의 뜻인 '소손'은 '구원하다'란 의미인 '소조'(*)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그때의 상황이 매우 긴박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본문에서의 이 말은 물에 빠지게 된 베드로 자신의 몸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혼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이 그 죄악의 구덩이에서 헤어나오기를 원할 때 부르짖는 소리이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한계를 깨닫고 절망 가운데서 비로소 주님께 돌아설 때 하는 첫 마디에 해당한다.

성 경: [마14:3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 주님의 신속한 구원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물에 빠지는 그를 건지기 위해서는 단 한 마디의 명령으로 충분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붙잡으셨다고 하는 이 말은 특별히 주의 '붙잡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로 거친 죄악의 세상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즉시 붙잡아 주시는 주 손님에 의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존, 유시될 수 있을 뿐이다.

⭕ 믿음이 적은 자(*, 올리고피스토이) - 이 표헌은 신약성경에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6:30;8:26;16:8;눅 12:28), 항상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는 막 4:30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표현을 '믿음이 적은 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제자들이 이미 예수의 제자가 된 사실 자체가 어느 정도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비록 충동적이나마 그리스도와 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던 터였다(28절). 한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책망은 믿음의 양(적다, 많다)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영속적 신앙을 간직하는 것, 곧 그 믿음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 왜 의심하였느냐(*, 에이스 티 에디스타사스). - '왜'(*)라는 말은 히브리어 '레마'(*)에 상당 하는 말로 대개의 일반적인 표현인 '디아 티'(*)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디아 티'는 '무엇 때문에'(because of what)라는 의미의 '새'이며 '에이스 티'(*)는 '무엇을 위하며'(in order to wher)라는 의미의 '왜'이다. 즉 '에이스 티'는 '디아 티'의 물음에 비해 보다 호의적인 의도에서의 물음이다. 즉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왜(because of what) 의심하였는지 그 의심의 원인을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즉 '무엇을 위하여'(to what end) 의심하였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예수가 손을 내밀면 잡을 듯한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한 베드로는 무엇을 의심하였는가(Turner)? 한편 여기서 '의심하였느냐'란 말의 원뜻은 '이중적으로 하다'는 의미로서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다혈질적인 베드로의 심히 당황해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표현이다.

성 경: [마14:3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풍랑 중의 첫번째 기적이라면 배에 오르자 마자 즉시 바람이 그친 것은 두번째 기적이다. '수고', '고통', '피곤'을 의미하는 '코포스'(*)에서 나온 '그치다'라고 하는 동사는 바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와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은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막 4:41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표현하였다. 정녕 예수는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만유의 주이신 동시에 모든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시는 질서와 평화의 왕이시다(요 14:27). 그가 거하시는 장소, 그가 머무시는 인격에는 영원한 샬롬만이 있을 것이다.

성 경: [마14:3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물 위를 걸으심]

⭕ 절하며(*, 프로스퀴네오) - 헬라어의 이 말은 제자들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경배하였다고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아 알므로써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전적인 신앙 고백(16:16)의 준비가 마련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 - 이는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상당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칭호로 예수를 불렀던 첫번째 경우이다(16:16;26:63;27:40, 43, 54). 물론 이 칭호는 3:17에 나타난 하늘의 성에서 계시된 바 있고, 광야 시험 중 사단도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4:3, 6). 또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아들'이라 부른 경우도 있다(11:25-27).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흑암의 세력과 또한 땅의 무리들 및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시는 완전한 구주요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6장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참조).

성 경: [마14:3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 게네사렛 - 갈릴리 호수 서안(西岸)에 자리잡고 있는 기후가 온화(溫和)할 뿐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한편 게네사렛 사람들이 즉시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여 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의 사역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가를 말해준다.

성 경: [마14:3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 '통지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아포스텔로'(*)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뜻으로 게네사렛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 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리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마침내 예수의 공적인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성 경: [마14:3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1]

주제2: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 옷가에라도 손을 데게 하시기를 - 예수의 신성에 대한 엄청난 소문은 9:20의 혈루증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그분이 입은 옷을 손으로 대기만 하여도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므로 예수께서 한 사람씩 차례로 만져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비록 예수께서 만져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병자 자신이 그분에게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을 소유하였던 것 같다.

⭕ 나음을 얻으니라(*, 디에소데산) - '완전히(*, 디아) 구원을 받다(*, 소조)' 의미로 병자들이 육신의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 즉 죄된 세상의 여러 욕망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마15: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그때에(*, 토테) - 마태가 즐겨쓰던(약 90회) 표현으로 다음 문장을 이어주는 연결사의 기능을 하는 말이다(2:7 참조).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장들은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접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종교 회의로부터 갈릴리로 파견된 일종의 종교 조사단이었다. 그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예수의 병고침과 가르침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목적은 예수의 소문에 대한 실체를 조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모해(謀害) 하려고 하는 목적을 띠고 그 모함의 구실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유대 교권주의자들과 예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날로 더해가도 있었으며 예수의 공생애 후반기로 가면서 이러한 갈등은 격렬한 신학 논쟁(神學論爭)을 통해서 더욱 더 첨예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파견은 예수에 대한 예루살렘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예수에 대한 박해가 공공연히 모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마15: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장로들의 유전 - 여기서 먼저 '장로들'(*, 톤 프레스뷔테론)이란 문자적으로는 연세가 많은 어른들을 일컫지만 구중에서도 특별히 율법에 능통한 자나 랍비 등의 종교 지도자를 가릴킬 때 흔히 사용되었다. 이들은 율법 해석의 권위를 공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일르의 해석은 구전(口傳)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러한 해석이 기록된 율법보다 더 존중되었다. 여기서 '유전'(*, 파라도시스)이란 '넘겨주다', '전해주다'는 뜻의 원어 '파라디도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조상적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일종의 행위법(行爲法)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법은 '장로들의 육전'이란 말 외에 '사람의 유전'(막 7:8; 골 2:8), '너희의 유전'(15:3)', '조상들의 유전'(갈 1:14)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오경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하나님이모세에게 말로 주신 구전 율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성경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세세하고 복잡한 현실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규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바벧론 포로 생활 이후부터 유명한 유대교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들을 중심으로하여 세세한 생활규칙들을 정비, 집성(集成)하기 시작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었다(Rabbi Judah the Prince C. A. D. 135-200). B. C. 300-A. D. 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을 집대성하여 문서화한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내용상 (1) 율법의 세부 규정을담은 '미쉬나'(반복이라는 뜻)와 (2) 율법 규정의 교훈적 풀이 곧 미쉬나의 주석서격인 '게마라'(보완이라는 뜻) 등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그 문체면에서는 (1)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규범이라는 뜻)와 (2) 각종 이야기를 통한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이야기)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또 본래 탈무드라는 것이 구전, 곧 입으로 전해져 오던 율법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집자에 따라 약간씩 내용상 차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현재 유명한 탈무드로는 '바벧론 탈무드'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있다. 특히 매우 미미(微微)한 점에 이르기 까지 상세히 사람의 행위를 규제한 '할라카'는 율법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라는 뜻으로서 일부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되었고, 일부는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서 전부 613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장로들의 유전은 외형상 별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다는 점과, 율법의 목적과 그 정신을 저버리고 외형적인 세부 규칙들을 번거로울 정도로 상세히 규정해 놓음으로써 결과적 으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인간의 위선과 교만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점에서 장로들의 유전은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비록 탈무드가 여호와 신앙이라는 대전제하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유대교적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이를 명확히 파악하고 대해야 할 것이다. 한편 더 자세한 이해는 막 7장 강해 '탈무드의 이해'를 참조하라.

⭕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 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에 대한 신학적 농쟁이 계기가 된 말이다. 식사 때에 손을 씻는 예법(禮法)은 먼지가 많은 팔레스틴의 풍토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풍속에 의해 위생(衛生)적 필요에서 마련 되었다. 또 한편은 이방인들과의 모든 접촉, 예를 들어 길이나 시장에서 이방인들과 스치거나 이방인의 물건에 무의식적으로 닿는 일 따위는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예배에 의시적인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데서 나온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야다임'(Yadaim)이라는 소책자응 효과적인 정결 의식을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술하고 있는 '손'(hands)에 관한 행위법을 다룬 책자이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만일 한 사람이 한 그릇의 물로 한쪽 손에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하다. 그런데 만일 한 그릇의 물을 두 손에 붓는다면 그 손이 불결하나 1/4통 이상의 물을 더 붓는다면 그의 손은 정결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마15: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어찌하여...범하느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장로들의 유전과의 근본적인 권위의 차이를 분명하게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를 계기로 삼아 여호와 신앙의 정수(essence)를 선언하셨는데 이는 율법을 인위적으로 해석한 유전보다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형식보다는 내용을, 율법의 의식보다는 그 정신을 더욱 더 중요시하시는 것이다. 실로 유전의 형식을 어기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을 어기는 일은 근원적인 죄악의 문제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범하느뇨'에 해당하는 원어 '파라바이네테'(*)는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바다'는 뜻의 '바이노'(*)의 합성어로서의 정도(政道)를 벗어나 '곁길로 빗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벗어나 곁길로 가게하는 오류(誤謬)를 포함하고 있다는 강렬한 질책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15: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 본절과 평행구인 막 7:10에는 '모세가 말하기를'로 기술되었다. 이런 차이는 계명의 원계시자와 그 계시의 전수자를 상호 교호적(交互的)으로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 즉 계명은 그것을 전수받고 기록한 기자(記者)의 말인 동시에 그 기자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한 것이다.

⭕ 네 부모를 공경하라...훼방하는 자는 - 이는 출 20:12에 기록된 율법의 제 5계명과 출 21:17에 기록된 제 5계명의 실천적 법규이다. 예수께서 특별히 부모 공경의 율법을 거론하신 이유는 손을 씻지 않는 일이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부모를 거짓으로 공경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문제임을 지적하심으로써 제자들의 잘못을 힐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약점을 확연히 드러내고자 하셨기때문이다. 사실 제 5계명은 대인(對人) 계명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약속 있는 첫 계명(엡 6:2)로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보다 더 중한 계명이다. 한편 훼방하는 자에 해당하는 '카콜로게오'(*)는 '욕하다', '악의로 말하다', '비난하다'등의 뜻으로 결국 부모를 훼방하는 자란 자신의 부모의 은혜와 권위를 무시하고 나쁘게 말하거나, 저주하는(curses)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패역(悖逆)한 자들은 예외없이 돌로 쳐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잘못을 보상해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불경한 말을 하는 것(레 24:16)과 더불어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 극한 형벌을 당하는 두 가지 죄 가운데 하나이다(레 20:9).

성 경: [마15: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내가 드려...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 유대인들의 서약의 한 형식으로 부모를 부양할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는 뜻이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은 부모보다 더 크시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는 면제가 된다. 막 7:11에는 히브리어 '고르반'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제물)을 가리키는 말 이었다. 그러나 이 봉헌의 맹세는 후대로 가면서 차차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되었다. 즉 사람이 만일 고르반이라는 말을 써서 맹세한 경우 가령 그 가리켜 맹세한 것이 부모의 부양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취하(取下)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고르반' 맹세 후 그 맹세한 것의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의 탐욕을 채우는데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부모를 부양할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났다. 진정 이는 출 20:12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違背)되는 것이다.

성 경: [마15: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하나님의 맡씀을 폐하도다 - 여기서 먼저 '폐하는도다'(*, 에퀴로사테)는 말은 '권리를 빼앗다'라는 의미의 법률 용어로서 어떤 명령이나 유언을 취소 또는 무효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3절의 '범하느뇨'라는 말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렬한 범죄상을 일컫는 말이다. 즉 조상의 유전을 절대시하는 것은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뜻을 말살시키는 악행인 것이다.

성 경: [마15: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외식하는 자들아 -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불렀던 첫 번째 기록이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 휘포크리테스)란 원래 '대답자'란 뜻이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배우'란 의미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자신의 본모습과 겉모습이 다른 위선자란 의미이다(6:2). 한편 예수께서는 특별히 의식에 대해 단호히 책망하셨는데 이는 당시 형식주의와 의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교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외식이며 위선이었기 때문이다. 외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원인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소극적 의미의 외식 : 이는 자신의 외식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대개 선조들의 유전이나 인습 등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종교적 의무를 완성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江水)같은 기름 보다도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여호와를 더 기쁘게 하는 것" 임을(미 6:7,8)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2) 적극적 의미에서의 외식 : 이는 자신의 행위가 외식인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旣得權) 수호나 기타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종교적 행사나 규례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 정부와 밀착되면서부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종교적 허울 만을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수호하기에 급급하였다.

⭕ 이사야가...잘 예언하였도다 - 예수께서 70인역(LXX)에 따른 사 29:13을 다순히 기계적으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묘사를 나타내기 위해 단지 4행(行)만을 선별하여 축약 인용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종교를 형식주의 종교로 잔락(轉落)시켰다. 바로 이러한 점에 예수를 성경의 증거를 들어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왜 이 말씀을 인용하셨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이사야 당시나 예수 시대나 경고를 받은 사람은 유대인들이었다. (2) 그들은 예루살렘(종교 중심지)에서 왔다. (3) 그들은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적 종교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4) 더욱이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固守)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은 실제로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이사야가 예리하게 비판을 하였던 위선과 가증한 것에 얽매인 조상들의 정신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성 경: [마15: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 이는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이율 배반적(二聿背反的)인 신앙 형태를 꼬집는 말이다. 이런 신앙 형태는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간교한 위선. (2) 율법의 근본 정신이자 원목적인 진정한 회개와 사랑 없이 율법의 문자적 규정만을 지키고서는 마치 의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형식적인 위선 등이 그것이다.

성 경: [마15: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계명'에 해당하는 '엔탈마타'(*)는 종교 생활의 실천적 규칙 모두를 말한다. 따라서 '사람의 계명'이란 인간 자신의 방법에 의해 즉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발상애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롤 무시한 채 아무리 외형이 화려한 경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헛될 뿐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히브리 성경의 원의미는 '그들이 나를 경외하는 것은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혹은 기계적으로 배운 사람의 계명에 의한 것이다'인데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여기서 '헛되이(*, 마텐)란 '열매가 없는', '아무런 목적이 없이'란 뜻으로 그릇된 목표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처음부터 목표가 없었던 것과 같이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로 여호와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외식적 경배 행위는 종교적, 윤리적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허무한 경배일 뿐이다(말 1:6-10).

성 경: [마15:1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 예수께 질문하러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에 대한 존경과 계층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었음이 분명하다.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그의 파격적(破格的)인 말씀에 의해 당황하고 있는 무리들을 가까이 불러 더이상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말에 미혹되지 않도록 종교와 윤리의 본질, 즉 내적 정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성 경: [마15:1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

⭕ 입에 들어가는 것...입에서 나오는 그것 - 입에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의미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을 통해 밖으로 표출되는 인간의 정서(情緖)와 사상을 가리킨다(17-20절). 이러한 측면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불결함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도덕적 의의릍 가질 수는 없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형(형식)적인 불결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발산되는 부도덕한 언행과 인격 등 영적인 요인으로 그 해독은 오히려 아주 치명적인 것이다.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더럽게 하다'는 헬라어 동사 '코이노이'(*)는 '저속하게 하다', '품위를 떨어뜨리다'(makes common)란 의미로 부정하다고 취급된 음식을 구분해둔 레위 제사법에서 유래한 종교적 용어이다. 한편 저속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계는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이기 때문에 '더럽게 하는것'으로 번역됨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레위 제사법상 부정한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발생하는 더럽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 음식 자체가 지닌 더러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을 어기는 불순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음식은 인간의 영적 순결과 도덕적 청결는 무관하다(딤전 4:3, 15). 실로 인간의 부정은 오직 인간의 불순종에 있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에 연유하지 않는다. 한편 11절의 말씀은 초대 교회 당시 이방인에 대한 선교 과정에서 야기(惹起)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중요한 척도로서의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행 10:9-16:11;롬 14:13;고전 8:10).

성 경: [마15:1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께 말씀을 드린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크계 화가 났음을 보여준다. 즉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제자들 역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을 존경했었으므로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그렇게까지 분노케 한 예수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시 듣고 싶어 한 것 같다.

⭕ 바리새인들이...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 공동 번역에는 그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듣 비위가 상한 것을 아십니까?"로 번역하여 분노한 종교 지도자들의 상태를 더욱 생동감(生動感)있게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한 예수의 말씀을 참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터뜨리고 실족하여 진리의 대적자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진리를 말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다음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1)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오던 것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자신에 대한 배반감으로 인해서 생성된 분노, (2) 자신의 판단이 거짓이었으며 불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끝까지 거부하고 진리를 말한 사람을 오히려 이단(異端)시하는 태도에서 오는 분노로서, 이러한 왜곡된 모습은 진리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오히려 두려워하고 외면하려는 마음에서 나타난다.

성 경: [마15:1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심은 것 - 이스라엘 민족은 종종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심으신 식물(植物) 혹은 물댄 동산(사 58:11), 하나님의 밭 혹은 토지(고전 3:9), 하나님의 포도원(사 5:7)으로 생각하여 왔다. 또한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을 나무로 묘사하곤 했는데(사 5:1-7) 특별히 포도나무로서 비유되었다(시 80:8). 어떠한 상징이든지 중요한 것은 심기운 것이 무성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심은 이가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 위선자들의 종말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따른 모든 그릇된 교리는 근절되어 버릴 것을 시사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암시적으로 말씀하셨다(3:9;8:11,12). 따라서 그들은 악한 자가 심은 가라지(13:25, 39)와 같이 절망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녕 하나님은 당신의 말쏨을 왜곡, 변조(變造)시킨 그들을 자신이 심으신 식물로서 인정치 아니하신다(사 41:19;요 15:2). 한편 모든 거짓 식물은 대심판의 날에 의인의 자리에서 내어 쫓겨 최종적인 파멸을 당할 것이다(13:19, 40).

성 경: [마15:1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그냥 두어라(*, 아페테 아우투스) - 직역하면 '그들을 가게하다'(let them go), '포기하다', '버려두다'는 말로, 13:30의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이는 지대한 사랑의 관심에서가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에서의 유기(遺棄,abandonment)를 뜻한다. 더욱이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일반적인 태도로서 결국 그러한 자들은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게 된다.

⭕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 - 이는 그 당시 널리 알려진 속담적 경구(警句)였던 것 같다(23:16;요 9:39). 이와 유사한 헬라 속담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가르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여기서 진리를 분간치 못하는 영적 '소경'으로 일컬어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영적 소경이라 할 수 있다. (1) 율법의 문자와 그 정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만 문자적인 해석에 매어 달려 일평생 살아 간다. (2)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러 오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그를 대적했다. 따라서 그들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녔다고 해도 영적인 안목(眼目)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거짓의 길과 파멸의 길로 나아 갈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영적 무지(靈的無知)는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교사요 지도자라고 하는 데에 결정적이며 비극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 죽음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의(義)와 진리(眞理)로서 받아 들이는 백성들까지도 위험한 인도자요 멸망케 하는 자들이다. 영생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만이 그리고 그 예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망이 안전한 인도자에 해당한다.

⭕ 구덩이(*, 보뒤논) - 들짐승을 잡기 위해 들판에 파놓은 웅덩이와 같은 함정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하트'(*)와 동일한 의미이다. 따라서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불신케 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함께 파멸당할 운명이 되게 하는 것이며 지옥 불을 던져지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말이다.

성 경: [마15:1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이 비유를 - 가장 충동적이며 적극적이었던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께 11절 말씀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햇다. 여기서 '비유'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서 '이해하기 곤란한 말', '불가사의한 말'이란 뜻이다.

⭕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 즉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계명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는데에 익숙한 일반 백성들은 물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의 가르침을 비난한 예수의 말씀을 즉시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수수께끼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예수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의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께서 지나친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시거나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깊은 전통과 반(反)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부터 젖어온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영(靈)적인 것과 의식(儀式)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15:1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 제자들이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깨달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 다니며 그분의 이적과 교훈과 행동들을 직접 보고 확인했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는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대해 바리새인은 걸림이 되어 분노하였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눈 먼 장님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의 마지막 순교 때까지도 완전한 영적 진리의 지식(知識)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신 후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의 사람들이 된다(요 14:26).

성 경: [마15:1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 예수는 영적 둔감(鈍感)상태에 놓인 제자들을 향해 유치하리만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식물은 배로 들어가서 소화 작용을 거친 후 결국 배설되어 버리므로 사람의 마음(인격)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한편 마가는 모든 식물이 그 식물 자체로만 볼 때 깨끗하다고 기록하였다(막 17:19). 그렇다고 하면 이 말이 식물에 관한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 율법의 폐기(abolition)를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진정 더러운 것이 무엇이며 깨끗한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면서 율법과는 다른 수준에 서서 말씀하고 계셨다'(Banks). 초대 교회는 특히 음식물에 관한 유대의 율법에 대해 처음에는 주저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였으나(행 10:9-16), 본문에서의 예수의 행동 즉 형식에 사로 잡힌 유대인의 식사 예법을 질책하신 것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까다로운 음식 규례를 폐지하는 것이 점차 보편적 동의를 얻었으며, 이 본문의 교훈이 기존의 유대 율법에 대한 문제에 접근하는 전혀 새로운 길잡이가 되었다.

성 경: [마15:1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근원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들은 그것이 비록 무형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더럽게 하고 결국 멸망에로 이끄는 것이다.

⭕ 마음에서 - 마음은 인간이 지닌 지(知) . 정(情) . 의(意)의 핵심적 좌소(座所)로서 인간은 바로 이것이 있기에 비지성적이고 무책임한 짐승과는 구별된다(롬 9:2;10:6, 8;고전 4:5).

성 경: [마15:1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 악한 생각의 목록(list)은 본문에서는 6가지로, 막 7:21, 22에서는 12가지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대체로 십계명의 후반의 계명들을(제 6-9 계명) 예로 들었는데 이는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은 쉽게 지키면서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함을 빗대어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 악한 생각 - 문자적으로는 '나쁜 의견' '불건전한 대화'를 의미하는 말로, 살인(제 6계명), 간음과 음란(제 7계명) 도적질(제 8계명), 거짓 증거(제 9계명), 그리고 신성 모독의 죄에 해당하는 훼방(12:31) 등의 죄를 짓게 하는 근본 요소가 된다(5:21-48).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피력한 바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전제하예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7:11).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적 순수만을 추구하고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 가치를 모두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궁극적으로 더럽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구약을 단지 영적으로만 해석하시는 데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참된 종교는 인간의 본질(本質)을 다루어야지 외형적인 것만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셨다.

성 경: [마15:2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참된 정결에 대해서]

⭕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 예수께서 외면(外面)보다 내면(內面)을 그리고 형식보다는 내용을 강조하신 것은 본문에서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8절;5:28;12:34). 예수께서는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으나(마 5:17),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극도의 매너리즘(mannerism)과 위선에 빠져 있었기 때문애 율법의 형식과 내용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으며, 내면적인 죄악보다는 늘 외형적인 더러움만을 씻어 내려고 하는 일에 급급(汲汲)해 있었다. 이것이 새롭게 변화받지 못한 인격들이 지니는 한계이다.

성 경: [마15:2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거기서 나가사 - 여기서 '거기'란 지금껏 영적 부정과 물질적 부정에 관해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였던 가버나움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욱 고조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긴장을 직감하시고 유대인의 거주지와 헤롯의 관할권에서 벗어난 안전한 처소로 피하셨다.

⭕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예수의 활발했던 갈릴리 전도 사역은(4:12-15:20) 이제 끝나고 은거(retirement) 및 베레아 사역이 이때부터 시작하여 20:34까지 계속된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수로부터 50-6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가셨다. 한편 막 7:24에 나타나 있는 '두로 지경'이라는 말때문에 예수께서 실제 그 지역내에 들어가셨느냐(Chrysostom)이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땅을 더럽게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경계선 지역에만 가셨느냐(Bengel)하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21절과 막 7:31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지역으로 돌아가셨음이 분명하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따히신 예수께서는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셨다.

성 경: [마15:2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명령형 '이두'(*, '보라'는 뜻)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이어지는 사건의 독특함과 돌발적인 성격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 가나안 여자 하나가 - 막 7:26에는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해서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그녀를 페니키아에 복속(服屬)되기 전의 고대명인 가나안족으로 언급하였는데 이는 마태가 그녀의 옛 조상을(민 13:29;삿 1:30, 32, 33)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옛 원수의 자손이 축복을 받기 위해 유대인의 메시야에게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2세기말 콜레멘트(clement) 설교에 의하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요, 그의 딸은 '베레니케'(Berenice)였다고 전한다.

⭕ 그 지경에서 나와서 - '나오다'라고 하는 의미의 헬라어 '여셀두사'(*)는 가나안 여인이 자기가 살던 이방 땅에서 나와서 주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집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녀가 고향을 잠시 등지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Lohmeyer, Bonnard).

⭕ 주 다윗의 자손이여 - 여인이 '주'란 말을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결합시킨 것을 보면 이 여인은 '주'를 보다 고차적 의미 즉 메시야적 칭호((:27;12:23)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소망(所望)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 말들이 다윗왕의 약속된 후손으로서의 예수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소문이 벌써 이곳까지 전파되어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부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들로 경멸하던 육체적인 불구자들(9:27)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아보고 순종(順從)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이 유대교의 개종자였다고 할 만한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가나안 여인은 고통당하는 딸과 자신을 동일시(identity)하여 애끊는 심정으로 예수의 '자비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민족적 특권이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었다. 단지 예수의 자비한 성품(性品)에만 기대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채아온 것도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이처럼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한 것은 더더욱 놀라운 사건이다. 실로 참된 구원을 소망하는 자는 이러한 인위적 장벽을 넘는 용기와 열심이 요구된다.

⭕ 흉악한 귀신 들렸나이다 - 여기서 '흉악히'에 해딩히는 원어 '카코스'(*)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라는 뜻으로 딸의 치명적 병세를 나타내 준다. 그녀는 아마 주위로 부터 질병과 귀신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 들은 바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마15:2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본뮨에서는 예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의 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중요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본문의 경우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요구했을 때의 두가지 경우이다(요 8:6). 본문의 경우에 예수의 침묵은 다음의 네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뒤 따르는 말씀(24절)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불신과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2)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신을 부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다만 예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阿諂)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참으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시고 싶었을 것이다.(3) 구속사의 전개는 분명히 유대인 중심이다. 즉 구약성경이 유대인에게 주어졌고(요 4:22-26) 예수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리고 천국 복음도 유대인에게 먼저 전파되었다(10:5-40).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굴레를 벗어나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시게 됨으로써 잠시 침묵이 필요하시게 된 것이다. (4) 이방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더욱 깊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문의 예수의 침묵을 통해서 우리는 귀중한 영적 교훈을 깨달을 수 있는데 (1)예수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는 우리의 복음과 열성을 시험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간구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좌절(挫折)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2) 우리의 소망하는 바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잘못된 간구야 당연히 거부되는 것이지만 올바로 구한 간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심에 따라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 보내소서 - 제자들의 이 말이 '그녀의 요구를 늘어 주지말고 그냥 보내소서'라든가 아니면 '그녀의 요구를 빨리 들어주고 보내소서'(Meyer, Benoit)였든지 간에 이 말은 귀찮은 그 여자를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었다. 따라서 침묵하는 예수 앞에 그들이 중재자로 나선 것은 그 여자에 대한 진정한 동정심(同情心)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 경: [마15:2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 이 구절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선교 명령의 반복으로서 예수께서 맡으신 사명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 결코 유대인에게서만 영원히 국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요 4:22 말씀처럼 (1)예수께서는 자신의 민족의 구원 문제를 일차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중심으로한 구속사의 전개는 하나님이 직접 작성하신 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도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10)고 하였다. (2) 유대인은 예수를 배척했어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준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주로 유대인 사역에 힘쓰시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할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는 바, 제자들은 예수의 뒤를 좇아 힘써 선교해야 할 것이다(요 10:16;행 1:8). 한편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표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이라 표현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지어서(겔 34:6) 유래한 것으로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목자되신 예수를(요 10:11) 오히려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성 경: [마15:2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와서 예수께 절하며 - 가나안 여자는 예수 자신의 무시(無視)와 냉대(冷待)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무릎을 꿇고(2:2; 8:2) 예수께 경배하였다. 22절과 관련하여 언급된 두 가지 즉 그 여자의 경건한 자세와 쓰라린 고통은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마태는 '절하다'(*, 프로세퀴네이)의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써 그녀가 예수의 발앞에서 계속 연이어 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저를 도우소서 - '도우소서'의 헬라어 '보에데이'(*)는 '부르짖음'의 뜻인 '보에'(*)와 '달리다'의 뜻인 '데오'(*)에서 합성된 '보에데오'(*)의 명령형으로 긴급한 구조를 요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침묵하시면 하실수록 예수의 침묵하시는 의도를 알지 못하는 가나안 여자는 더욱 더 간절하게 그의 도움을 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15:2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자녀가 떡을 취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서'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그 우선권이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러한 배타적(排他的) 특권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하였다(호 1:9, 10). 그러나 복음 전파의 순서는 먼저 유대인에게였고 그 다음은 이방인에게였으며(롬 2:9, 10), 본격적 이방 전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한편 바울도 이스라엘 민족(民族)은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남보다 먼저 받은 종교적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였고, 민족적 구원의 문제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였다(롭 3:1, 2;9:1,2).

⭕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성경에서 '개'(*, 퀴온)라고 하는 말은 모두 악한 것을 상징하고 그것을 야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서(출 11:7;삿 7:5;마 7:6;빌 3:2),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인 이방인이나 이단자를 가리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시 59:6). 그러나 예수께서 사용하신 '개'라고 하는 말인 헬라어 '퀴나리온'(*)은 경멸적 의미에서의 '들개'나 거리를 어슬렁 거리며 다니는 사납고 악한 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나 '강아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개'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경멸적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이방인들이 '자녀' 곧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성 경: [마15:2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 반의 접속사(but even) '마는...도'(*, 카이 가르) 는 '그러나...조차도'의 의미로, 본문에서는 앞사람의 딸을 일단은 긍정하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승복(submission)하지 않고 또 다른 의견을 개진(改進)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인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한 족속이요 권리를 갖지 못한 자, 즉 개들임을 인정했다. 이처럼 자신을 개로서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가장 큰 겸손의 행위로 여겨졌다(삼상 24:14;왕하 8 :13). 특히 사람들은 자신을 극도로 비하(卑下)시켜 표현할 경우 바로 '죽은 개' 또는 '개 같은'이란 말을 사용하였다(삼하 9:8;16:9).

⭕ 제 주인의 상에서...먹나이다 - 팔레스틴근방의 지역들에는 식사하는 주인 곁에서 부스러기를 얻어 먹기 위해 개들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특별히 그 지역들에서의 식사법을 보면 주로 손으로 찢어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 부스러기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가나안 여인은 사실상 자신이 개의 취급을 받는 이방인 으로서 메시야가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예(參預)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최소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의 일부를 힘입을 수는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tasker, Schlatter). 실로 그녀는 자신에게 적용된 비유를놓치지 않고 유효 적절히 선용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내용을 의역해 보면 "주님 당신이 저를 개로 취급한 것은 결국 저의 요구를 당신께서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정녕 당신은 당신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충분히 저의 요구를 채울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정당한 일에 따를 뿐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아무런 권리 주장도 못할 뿐 아니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다만 가장 비천한 피조물의 몫으로 할애(割愛)된 것만을 위하겠습니다. 진정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해도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Pulit Commentary)로 풀어볼 수 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헤가 비록 적으나마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임을,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독점된 하나님이 아니라 만민의, 열방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다(롬 3:29).

성 경: [마15:2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가나안 여인의 신앙과 치유]

⭕ 여자야 - 헬라어 성경에는 '여자야'라는 말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있다. 이는 눅 22:57;요 2:4;4:21과같이 '오'(*)없이 단순히 호격으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호격과 함께는 드물게 사용되는 '오'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 주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예수의 놀람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 네 믿음이 크도다 - 여기서 '믿음'이란 그녀의 신뢰(trust), 확신(confidence)과 아울러 겸손(modesty)과 인내(patience)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칭찬을 받은 두번째 이방인이다(8:10).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이야기는 몇가지 공통되는 요소가 있는데 (1) 두 경우 모두 이방인에게(백 부장의 하인, 가나안 여자의 딸) 예수의 병고침의 능력이 베풀어졌다고 하는 점 (2) 두 경우 모두 이방인 자신의 큰 믿음이 예수에게서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점인데 앞에서는 이스라엘 중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한 것이 없으며, 이곳에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강조가 되어 있다. (3)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병치료는 병자를 현장에서 만나보지 않은채 멀리서 말씀으로 고치신 '원거리 치료'였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방인 백부장과 가나안 여자의 기사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배척했으나 오히려 이방인들은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약적 개념이 신약적 개념으로 옮기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 국한되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광의적이며 영직인 선민론(選民論)을 암시하고 있다(행 7:6).

⭕ 네 소원대로 되리라 - 여자의 첫번째 말에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두번째 말에는 냉정한 말로 그녀를 무시하셨으며, 마침내 세번째 말에 이르러 칭찬과 함께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신 예수께서는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처럼 끈질긴 간청에 못이기어 그녀의 소원(所願)을 마지못해 이루어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그녀의 큰믿음을 알고 계셨었다. 그러나 (1)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조차도 부정한 메시야를 참메시야로 올바르게 인식한 그녀 자신의 내면의 지혜와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냄으로써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며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2) 유대인들이 거부한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이방인들도 그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외면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녀를 위허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소원대로'(*, 호스 델레이스)란 직역하면 '원하는 만큼'으로 각종 난관(難關)을 인내로 극복한 그 여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겠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마15:2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갈릴리 사역]

⭕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 막 7:31은 예수가 두로에서 나와 북쪽에 있는 시돈으로 가선 다음에 다시 헤롯의 통치 영역의 밖, 즉 갈릴리 호수 남동 쪽에 위치해 있는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정(旅程)은 예수께서 사악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관할 지역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셨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곳은 아직까지 유대 지경이 아닌 이방인의 땅이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곳에서의 병고침과 4천명의 급식(supply of food) 사건은 가나안 여자의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는 부스러기, 즉 한정된 축복 밖에는 돌아갈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예수께서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전과되었고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시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 이는 산상수훈의 장면(5:1)을 연상케 한다.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자로서의 여독(餘毒)으로 인해 잠시 휴식 하셨다. 그러나 이 휴식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동적(動的)인 휴식이었다. 즉 본 기사를 영적으로 살필 때,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예수는 모든 자의 바라 볼 소망이시며 만인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앉으신 것은 당신 찾아오시는 자를 은혜롭게 맞아 주시기 위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안정되게 자리를 잡으심을 의미한다.

성 경: [마15:30]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갈릴리 사역]

⭕ 큰 무리가...여럿을 데리고 - 평행 구절인 막 7:31-37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사설 그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慢性的)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 퀼루스)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비된 자를 가리킨다. 아무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위대한 의사로서 영.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예수의 발앞에 두매 - '두다'라고 하는 헬라어 '마토'(*)는 사람이나 무거은 물건을 마치 경쟁하듯이 서둘러 내려 놓는다고 하는 말이다. 본문의 경우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해 와 진지한 열성(熱誠)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더구나 '두다'의 미완료형 '엘마산'(*)은 병든 사람을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행위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 앞에 앉아 그의 만져심과 고쳐주심을 기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15:31]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갈릴리 사역]

⭕ 벙어리가 말하고...소경이 보는 것 - 마태는 이사야가 언급했던(사 35:5, 6) 병의 종류들 즉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와 그 완치(完治)를 그대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예수의 병 치료도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며 따라서 '이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사 9:1, 2)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예언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현재 예수께서 머물러 계신 곳이 바로 유대인들이 잘 지나 다니지 않는 곳인 이방 땅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점과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을 통해서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이방인들과 함께 계시고 그 이방인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들도 역시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에 예수의 권능은 바알세불 등의 힘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5:32]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 5천명을 먹일 때는 제자들이 나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반(反)해서 여기서는 예수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다.

⭕ 내가...불쌍히 여기노라 - 이번 이적의 동기를 보여 준다. 즉 예수는 무리들에 대해 뜨거운 동정심으로 인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헬라어 '스프랑크니조마이'(*)는 '내장', '심장'이란 뜻의 '스프랑크논'(*)에서 유래한 것으로 피부 깊숙이서부터 표출된 깊은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 준다. 실로 바로 이 예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간 구원과, 인생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원인이 된다(14:14;눅 7:13).

⭕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 '함께 있다'라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메노'(*)는 '함께 머물다', '집착하다' 등의 의미로, 행 11:23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고하는 말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갈릴리 호숫가에 밀집해 있는 무리들은 그들이 비록 예수를 영혼의 질병을 구원하는 참메시야로서 알지 못하고, 단순히 굶주림과 병(病)에서 놓여나게 하는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에 대한 그의 기대와 신뢰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 이미 사흘이매 - 이는 예수의 병고치는 사역이 그 각각의 병자듸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팔레스틴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露宿)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다.

⭕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헬라어 성경에서 쓰인 '메포테'(*)는 '혹시 '하지나 않을까'라는 뜻으로, 조건문을 이끄는 종속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예수께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한편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민족적 축제로 인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는 그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지쳐 기진하거나 심하면 객사(客死)했다고 한다.

성 경: [마15:33]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어디서...떡을 얻으리이까 - 제자들의 이 물음이 필요한 양의 떡을 공급하는 일은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 달린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요 6:7)라는 오천 명 먹일 때와 같은 식의 계산도 하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의 배부름을 예상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오천 명의 급식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였다는 평가가 있다(R. C. H. Lenski). 반면 제자들의 이 물음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여전히 무지하고 불신앙적이라고 하는 비판이 있다(D.A. Carson, William Handriksen). 그중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듯하다. 즉 제자들은 고질(痼疾)적인 불신앙으로 예수의 무한하신 권능과 과거의 이적들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5:34]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태도를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예수의 이 물음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1) 현재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재능, 소질에 대한 참된 가치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현재 가진 것을 변혁을 위한 놀라운 가능성(可能性)으로 바라보셨는데 이는 말씀만으로도 친지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信賴)에서 생겨난 것이다. (2)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 영혼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지금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것 혹은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에는 절대 부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을 기초로 하여 더 큰 믿음을 이루시겠다고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 일곱 개 - 이 '일곱' 이라는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하나님의 수, 승리의 완전수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영적 측면에서보다 그 당시 실재했던 물고기의 숫자에 관심을 집증시키는 것이 좋다.

⭕ 작은 생선(*, 잎뒤디온)- 이 말은 당시 주식으로 사용했던 건조한 조그만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적어도 하찮은것,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조금은 과소평가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성 경: [마15:35]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땅에 앉게 하시고 - 이 때의 계절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14:19에서 푸른 잔디(막 6:39)에 앉게 하셨을 때의 계절이 우기(雨基)가 막 지나고 유월절이 가까와 오는 봄이었다면 이방 땅에서의 전도 여행을 끝맺음하려는 이때는 유월절이 훨씬 지난 건조기의 여름에 해당한다.

성 경: [마15:36]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축사하시고(*, 유카리스테사스) -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화(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이러한 감사의 기도를 습관처럼 드렸다(14:19).

성 경: [마15:37]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배불리 먹고 - 같은 동사 '코타조'(*)가 5장의 산상수훈(山相羞訓)에도 나온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5:6). 이 동사는 주로 '만족을 채우다'라는 의미로, 각 사람들이 각자 만족한 만큼의 넉넉한 음식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 광주리 - 유대인들이 여행시에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가게 되더라도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음식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인 바구니(코피노스 ;14:20) 와는 달리 광주리 '스퓌리스'(*)는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 그릇이다. 어떤 것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것도 있었다고 한다(행 9:25). 따라서 본문의 남은 떡 조각은 5,000명 급식 때보다 더 많은 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롤린슨(Rawlinson)에 의하면 최소한 유대인들도 정결한 음식물을 나르기 위해서는 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코피노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광주리'라고 하는 표현도 이무리들이 역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성 경: [마15:38]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사천 명이었더라 - 이는 예수의 이적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구(未九)에 그가 베푸실 메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준다. 향편 여기서 사천 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 사방 (天地四方)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4,000(4⁓1,000)이란 영으로 세게성, 보편성, 및 광대성을 암시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전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필요로 하고 주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게하고도 남을 만큼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마15:39]

주제1: [이적적 권능과 고조되는 핍박 2]

주제2: [사천 명을 먹이심]

⭕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 주님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던(프로스메노;32절) 사람들을 이제 '풀어 보내시다'(*, 아폴뤼오)는 의미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곁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제로 집에 돌려 보낸다고 하는 뜻이 들어있다. 예수께서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사실에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1) 우선 이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집이나 전토(田土),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christian)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 행위만을 기대하며 그를 좇아 다니는 사람들(Christ follower)이기 때문이다. (2) 이들이 광야에 남아서 예수릍 그들의 임금으로 옹위(擁衛)하려는 정치적 모의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강제로 집에 가게 하셨던 것이다. (3) 더욱이 이들이 집이나 마을로 돌아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더욱 더 크게 퍼져나갔고 혼히 이들은 이방 교회 구성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 마가단 지경 - 막 8:10에는 '달마누다지방'으로 되어 있는데 유대의 어떤 사본(바질 사본, 오전시스 사본)에는 '막달라 지경'으로(KJV에도 이를 따름) 나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라틴 벌게잇 역(Vulgate)에는 '마게단'(Magedan)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하튼 '마가단'의 이름의 뜻은 '망대'로 그 위치는 불명확하나 아마도 디베랴의 북쪽5km 지점의 게네사렛 평야의 남단에 있었던 성읍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 경: [마16:1]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 이들은 종교, 정치, 사회적인 사상 및 의식면에서 서로극단적인 대립 관계를 띠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이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함께 온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이 어떻게 그들의 모든 것을 저버리고 연합할 수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시 2:2). 특히 본문 '호이 파리사이오이 카이 사두카이오이',(*)로서 두 집단을 지칭하는데 관사(*, 호이)가 하나만 사용되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온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12:28-45과 1-20등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비교적 객관적 자세로 예수의 능력이나 율법에 대한 예수의 진리를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들과 사상 및 이념, 주의, 주장이 전혀 다른 사두개인들과 연향하여서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해 시험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적대감이 더욱 더 깊어지고 노골화되었음을 암시한다.

⭕ 예수를 시험하여 - '시험하여'의 헬라어 '페이라조'(*)는 '조사하다', '입증하다', '유혹하다'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 광야에서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4:1). 그들은 예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좀 더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1) 처음부터 자기들의 기존 신앙 체계만 고집하는 선입관을 가졌던 동시에 (2) 예수를 무조건 음해(陰害)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하늘로서 오는 표적 - 그 당시 랍비들은 지상에서 연출되는 각종 이적들은 사단과 그 수하의 졸개들에 의해서도 능히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대신 하늘로부터 전해진 이적들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그들은 예수에게 모세의 때에 내려졌던 만나 사건(출 16장;요 6:32)이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인해 허와 달이 멈춰졌던 사건(수 10:12-14), 사무엘 시대의 우뢰 사건(삼상 7:10) 및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 사건(왕상 18:30-40)과 같은 초자연적인 하늘의 기사들을 요구했던 것이다(chrysostom). 이러한 요구에 응할 때에만 그들은 예수의 신적(神的) 진정성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속깊은 저의는 그러한 이적의 유무(有無)와는 관게없이 어떻게든 예수를 넘어지게 하려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눅 16:31). 따라서 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과연 하늘로부터 오신 메시야인지 당신 스스로 입증해 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표적'(*, 세메이온)이란 '표시', '이적' 등의 뜻으로서 결정적이고 놀라운 증거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12:38에서도 예수께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했었다, 그러나 진정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하고도 온전한 믿음이었다(고전 1:22,23).

⭕ 청하니(*, 에페로테산) - 이 말의 원형 '에페로타오'(*)는 요청하다는 뜻외에 '심문하다', '갈망하다'는 뜻도 있다. 더욱이 이 '에페로타오'는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어떤 중요한 판단을 위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그리스도를 판단하는데 결정적인 근거로 삼을 자료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심문하듯 예수를 다그쳤던 것이다.

성 경: [마16:2]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대답하여 가라사대 -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2는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And he sighed deepiy in his spirit, and saith, KJV)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하고도 편협한 질문의 저의(底意)를 깨달으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 탄식하신 것을 가리킨다.

⭕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 이처럼 저녁 하늘이 붉으면 맑은 아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열대와 극 지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통된 현상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늘의 변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변화들을 통해 때의 징조를 예측했다고 한다(Virgil, Pliny). 그리고 심지어 랍비들은 기상의 변화에 따른 각종 생활의 지혜를 교육했으며, 신년(新年)에는 그 해의 강우량을 예측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연계의 제현상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성 경: [마16:3]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흐리면(*, 스튀그나존) - 이 말은 주로 침울한 감정이 얼굴로 표출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막 10:22). 그런데 가끔 분위기나 기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어 매우 짙은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어둠침침한 상태를 나타낸다.

⭕ 날이 궂겠다 - 이를 표현한 원어 '케이몬'(*)은 단순히 찌푸린 날씨가 아닌 폭풍우치는 날씨를 Emt한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날씨의 궂은 정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궂은 날씨가 어김없이 찾아들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 있다.

⭕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 '천기'(* ... ,토 프로소폰 투 우라누)란 '하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the face of the heaven)을 의미한다.

⭕ 시대의 표적(*, 세메이아 톤 카이론) - 여기서 시대를 뜻하는 '카이론'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초림 내지는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관한 비밀한 정보들을 여러가지 표적들(signs)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때에 대한 긴박한 선포(막 1:15),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의 마지막 주간의 도래(단 9:1-27장), 유대 전방에 걸친 메시야 도래에 대한 기대감 고조(눅 2:26, 38), 예수께서 친히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자신을 증거하고 이적을 베푸신 사실(12:8,32;13:37;24:30;눅 17:22-35) 등을 통해 시대를 분별할만한 중요한 표적들을 제시하셨다. 한편 본문에서 '시대의 표적'(signs of the times)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 등을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으로 전자는 단순한 물리적 차원의 현상을, 후자는 그 이면에 신적(神的) 목적이 있는 영적 차원의 현상을 가리킨다. 특히 후자, 즉 표적이란 성육신하신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새시대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들의 세계는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박식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결코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마16:4]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악하고 음란한 세대 -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동의어를 반복하여 강도의 뜻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음란자라는 말이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범죄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점에 착안하여 악하다는 말은 각 개인의 심성이 츙악하고 추하게 타락된 상태를 가리키고 음란하다는 말은 그런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충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Watchman Nee).

⭕ 표적을 구하나 - 표적을 구한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러 기회에 순전한, 즉 공정하고 진실한 심령을 가진 자들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각종 표적을 때에 맞게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즉 이미 그 마음에 순결성을 상실하고 편견과 독단에 의하여 진리를 통찰할 능력을 상실한 자들이 이미 충분한 표적과 가르침이 주어졌음에도 악한 의도로 표적만 계속 구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 요나의 표적 박에는...없느니라 - 표적을 보여 달라는 자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구체적 표적을 당장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례다고 표적을 안 보여 주신 것도 아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었을 것이므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표적을 안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모든 표적 중의 표적, 즉 요나처럼 자신도 3일동안 죽으셨다 살아날 것을 강력히 암시한 것으로서(욘 1:17) 분명 결정적 표적을 제시하신 것인데, 다만 그것이 미래형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는지 간에 예수의 이 대답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일종의 파라독스(paradox)처럼 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 표적은 예수께서 어려움에 직면하실 때마다 제시하신 것으로서(12:38-40;요 2:18-22), 믿는 이에게는 구원과 부활의 확실한 증표가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필연적으로 주어질 심판의 전조(前兆)가 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당장 보여주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만을 언급하신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들어줄 경우 잘못된 그들의 비신앙적 욕구와 호기심을 들어 주는 것이 되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과 사역을 행하시는 뜻, 즉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되심과 당신이 전하신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다는 뜻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2) 스스로 죄의 길에 서서 마음의 눈을 닫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표적은 그들의 비신앙적인 욕구와 호기심을 일시적으로 채워주는 표적이 아니라 그듸의 인습적 관념을 극적으로 깨뜨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줄 결정적 표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 저희를 떠나 가시다 - 이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교제를 끊으시고 멀리 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런 교제의 단절은 1차적으로는 인간 관계의 단절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축복 교훈의 기회의 박탈이라는 측면도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어 가르치셨지만 그들이 끝내 거절할 때에는 3년 밖에 안 되는 공생애의 특수성을 고려하시어 곧 그들을 떠나시곤 했다.

성 경: [마16:5]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표적에 관한 논쟁]

⭕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건너편으로 갈새 - '마가단' 지경(15:39)의 반대편 또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13절) 가기 위해 '벳새다'가 있는(막 8:22) 갈릴리 호수 북동편으로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15:39;16:13). 이에 제자들만 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더불어 동행하셨다(6절).

⭕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마가단에서 황급히 출발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 당시 마가단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긴장 상태가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제자들의 수중에는 배 안에 있었던 오래된 한덩이 떡만 있었을 뿐이었다(막 8:14).

성 경: [마16:6]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 누룩(malt)란 다른 음식물에 들어가 그 음식물을발효시키는 효소이다. 즉 누룩이 들어가면 음식물은 본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한다. 성경은 이점에 착안하여 주로 나쁜 관점에서 타인에게 강한 정신적 전염을 시키는 것을 누룩으로 묘사하고 있다(출 12:5;레 2:11;고전 5:6-9;갈 5:9). 여기서 누룩은 율법과 계명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일반 백성을 인습적으로 오도(misleading)하는 당시 교권주의 자들의 잘못된 교훈을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12절). 한편 본문에서 누룩이 단수로 쓰였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두에게 걸린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이란 측면에서 한 통속(通俗)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다각의 특징상 바리새인의 누룩은 전통과 외적 시식에만 치중하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야성(性)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모세 오경 외의 모든 성경과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특히 사단의 실체와 부활 교리를 부인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함으로써 철저히 현실 지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부류의 누룩은 시대를 초월하여 극단의 보수와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 실로 참 신앙인은 이 두 양극 우(愚)를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신앙과 끝임없는 자기 개혁을 통하여 그리스도 복음의 순수성을 확립해가야 한다. 한편 본문과 평행 구절인 막 8:15에는 '사두개인' 대신 '헤롯'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정치, 경제적으로 우위(優位)를 점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헤롯당원으로 활용했던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성 경: [마16:7]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사실을 알 수 있다. (1) 예수 말씀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의 어리석음 (2) 예수께서 가르치신 영적 교훈을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셔서 깨달았다는 것(8-11절) 등이다.

⭕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 지금 영의 눈이 어두워진 재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친 교훈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실수로 빚어진 현상적인 문제에 집착하여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반적인 떡의 모양과 크기는 둥글며 지름이 약 15cm, 두께가 약 1.5cm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보통 밀기울을 빻은 소맥분(小麥分)으로 만들어졌으나(삿 6:19;삼상 28:24;왕하 4:41), 때로는 보리 가루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민 5:15;여하 2:10;요 6:9). 한편 이는 6절의 예수의 영적 교훈을 이 땅의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아직 이들이 예수의 참 정체, 즉 예수께서 신적 메시야이시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이 예수께서 4천명을 먹이신 사건에 연이어 일어난 것임을 고려할 때 예수의 능력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는 아직도 심각한 상태이며, 더 나아가 예수께서 영원과 절대의 구원 문제에까지 권능과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의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는 이 당시 제자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자들 중에도 많음을 발견한다. 즉 예수께 영원한 절대적 구원이 아닌 이 땅의 빵과 권력의 축복만 요구하는 기복(圻福)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어리석음과 오해를 재현시키고 있다.

성 경: [마16:8]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예수께서 아시고 - 여기서 '아시고'(*, 그누스)는 체험적 앎보다 직관적으로 인식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예수는 제자들의 대화를 전해 듣거나 였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 있는 생각들을 직관적으로 통찰하시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끔 사용하신 독특한 표현이다(6:30;8:26;14:31). 이는 '믿음이 없는'(17:17)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그들이 예수의 인격과 신분을 믿긴 믿되 그분의 능력 또는 역사(役事)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14:31) 잊고서 생각치 않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Clarke).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온전하고도 전적인 믿음을 바라고 계신다(히 11:6).

⭕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 예수께서는 그들의 물질 중심의 사고를 질타(叱咤)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바른 시각을 지니도록 인도하시려 하셨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진리를 조금도 파악할 수가 없다(히 11:1,2).

성 경: [마16:9]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에서 깨달음이란 이성적 깨달음 또는 지적 인지(認知, perception)를 가리킨다. 이는 곧 제자들이 예수께서 베푸신 교훈과 각종 이적을 접하고서도 아직 이성적 지식으로 완전히 수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한 말이다(15:16). 이는 곧 이적을 경험하는 그 자체가 전인적인 지식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진정 성령의 내적 조명(illumination)없이는 진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요 14:26).

⭕ 몇 바구니 - 여기 '바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여행자들이 지니고 다녔던 조그마한 손바구니를 가리킨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적 급식(給食) 사건(14:13-21) 뒤에 제자들이 그 남은 떡 조각을 거둬들일 때 사용했던 용기이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광주리'(10절)란 말과 대조되어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이 본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두 이적이었음을 확연히 보여준다.

성 경: [마16:10]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몇 광주리 - '광주리'에 해당하는 원어 '스퓌리스'(*)는 장년(壯年)이 그 속에 들어가 웅크릴 수 있을 만큼의 큰 바구니이다(15:37;행 9:25). 이는 9절에서 말하는 '바구니'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칠병이어 사건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15:32-38).

⭕ 기억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 제자들을 질책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기억'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 과거의 이적적 체험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은 예수의 두 이적 사건 흘러간 과거의 일로 간과해버렸지 그것을 산 경험, 산 지식으로 수용하여 현실 성활에 재현, 재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과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기적 사건들을 대대 후손에게 전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종교 교육을 시행했었다(신 7:18,19;32:7;대상16:12,13:시 77:11;78:4,11;105:5, 6;106:7,13,21).

성 경: [마16:11]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어찌 내 말한 것...깨닫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거듭해서 제자들의 잘못된 인식과 무지를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미 주어진 수많은 증거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인위적인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교훈'을 질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지금 예수와 그가 베푸신 이적을 믿지 않는 바로 그러한 불신앙적 태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들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그 이적들이 지닌 중요한 의미들을 확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두 급식 사건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다시 기억토록 촉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16:12]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 그제야 제자들이...깨달으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가들에게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하나 설명하며 진리를 깨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대신 당신이 주신 계시를 그들이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영적 훈련을 통해 성슥한 제자로 자라게 하셨다.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 이는 위로부터 내려온 참계시와는 반대되는 인본주의적 교훈을 가리킨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바리새인들은 형식적 율법주의자요 전통주의자들로서 자기 힘으로 얻는 의(義)를 강조하였다. 특히 그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인 무지와 전인적인 죽음을 초래하게 만든다(눅 12:1). 이에 비해 사두개인들은 모세 5경시 권위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 세계 및 귀신의 실재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이었다(행 23:8). 특히 그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언행이 불일치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제사장 계급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교묘한 합리주의적 교훈을 통해 백성들을 미혹했다(6절).

성 경: [마16:13]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견해]

⭕ 가이사랴 빌립보 -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방,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가이사랴'와는 구별된다(행 10:1). 따라서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나 갈릴리 호수 북방 약40km 지점, 헬몬산 기슭 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답고 조용한 마을이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조그마하였으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 확장되었다. 한편 그는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가이사랴'라 하였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 불렀다. 이곳 주민들은 데부분이 이방인으로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중 원주민들은 바알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野獸)의 신(神)인 '판'(pan)의 산당을 지었으며 헤롯은 가이사 아우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의하여 이곳에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러한 우상의 땅에서 예수 제자들에게 당신이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곳에서도 무리들을 위해 봉사하시기도 했지만(17:14;막 8:34) 주된 사역은 12제자에게 국한되었다.

⭕ 물어 가라사대(*, 에로타) - 여기 헬라어 '에로타'는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묻기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중간 결산하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수난 사건을 위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킬 필요성을 느끼시고 그들에게 제자로서의 핵심적 사항을 문답식으로 교육시키셨다. 그 첫째 질문이 예수 자신, 곧 인자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같은 질문에 앞서 먼저 성부 하나님께 자신의 앞 일을 의탁하시는 기도를 드리셨다(눅 9:18). 실로 중요한 시점이 이를 때마다 예수는 이처럼 마음을 하늘로 향하시었다.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이를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를 인자로 부르는 이, 사람들은 나를 무엇이라 표현하는가 ?'이다. 이에 비해 마가와 누가는 '인자'란 용어를 생략하고 있다(막 8:27;눅 9:18). 여기서 어느 형태의 질문이 본래의 것인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만이 이 칭호를 사용하신 것과, 이 칭호로서 예수 자신의 칭호로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서의 형태가 원형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아마 마가와 누가는 이방 출신 독자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이 칭호를 삭제하고, '나'라는 1인칭 칭호만을 쓴 것 같다. 한편 여기서 인자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실 때 즐겨 표현 하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 말씀은 사복음서에 81번, 공산 복음서에만 69번 나오는이, 단 두번의 경우(눅 24:7;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인자'라 표현하신 데에는 (1)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위격과 성품을 가지신(요 5:26), 즉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완전한 사람이심을 암시한다. (2) 예수께서 단 7:13, 14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구약에서 예시하고 있는 구원자이신 메시야 또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키 위해 오신 이심을 암시한다(21절;20: 18, 19,28). 더 자세한 내용은 눅 5:24의 강해 '인자의 개념'을 참조하라. 여하튼 예수께서 하신 이 질문은 당신의 생대를 마감하시면서 당신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던진 신앙 고백적이며, 종말론적인 물음이다. 실로 이 물음은 예수를 믿든 믿지않든 호흡이 있는 인격들이면 예시없이 대답해야만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담은 곧 그의 현재와 미래를 영원히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마16:14]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유대인들의 예수의 대한 견해]

⭕ 더러는 - 백성들이 '인자'이신 예수께 대하여 온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비록 대부분이 다시 오기로 약소된 예언자적 인물이나 메시야와 연관이 있는 인물로 이해하고는 있었었만 아무도 예수의 메시야성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이하를 살펴보면 제자들은 사람들의 견해가 '예수께 호의적이다'라는 사실을 보고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인상을 준다. 그 예로 그들은 예수를 소의 '바알세불' 또는 죄인의 친구(11:19)라는 일부 극단적인 견해들은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세레 요한 - 하나님을 위해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과 능력(눅 1:17, 80)으로 일한 자이며 그의 메시지가 예수의 천국 선교 메시지와 거의 일치했던(4:17) 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분봉왕 헤롯 빌립처럼(14: 1, 2) 예수의 능력과 행하신 역사를 보고 과거 세례 요한의 능력과 복음 전파의 폭발적인 영을 기억한 데에서 기인(起因)되었다. 이것은 또한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부활 신앙관에서도 비롯되었다(14:2).

⭕ 엘리야 - 구약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백성들의 타락과 종교적 불의를 꾸짖었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왕상 19:10), 말라기에서 바로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이 그분의 선구자로서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되었다(말 4:5, 6). 특히 그는 죽음을 경험치 않고 승친(昇天)했기 때문에(왕하 1:11) 이러한 기대는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11:14). 한편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오해한 것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보지 못한 비신앙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듯하다.

⭕ 예레미야 -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리며(렘 9:1;14: 17;31:16;애 1:2, 16) 애쓴 선지자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지으셨던 예수와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눅 19:41). 또한 예레미야의 죽음과 연관된 유대인의 후기 전승 및 구약 외경 마카비 하(下) 2:1-12;15:14, 15 등에 의하면 그가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에 그분의 신구자로 와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저희를 다시 긍휼로 받으시기까지 장막, 언약궤, 분향단 등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할 자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카미그낙(J. Carmignac) 같은 학자는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예수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정적 예언을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예레미야와 같은 비운(悲運)의 선지자로 보였을 것이라 주장한다.

⭕ 선지자 중의 하나 - 이 말은 그 당시 종말론적 기대들이 매우고조되어 있었음을 입증한다. 그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모세(신 18:15), 이사야(에스드라하 2:18), 에스라(에스드라하 14:9)처럼 다시 부활하여 일련의 종말을 예비하는 큰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행구인 눅 9:19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위의 분위기를 더욱 확중적으로 제시해 주고있다.

성 경: [마16:15]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는 헬라어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 이(*)로서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이다. 이는 분명 예수께서 앞의 견해들(14절)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정확히,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가라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이다. 특히 여기서 '너희는'( , 휘메이스)은 2인칭 복수 형태의 강조적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한 두 제자에게만 질문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12제자들 각자에게 관심을 두시고 강조하여 질문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신앙의 주관성과 구원의 개별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볼 수 있다(겔 18:20). 베드로의 고백은(16절) '너희'라는 복수 인칭으로 질문하신 예수의 물음에 대해 자신을 위시한 12세자 모두를 대신한 예언적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성 경: [마16:16]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시몬 베드로 - 사실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은 이후 그의 적극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에 따라 예수 앞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남보다 앞서 나서는 등의 열성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베드로는 다른 동료 제자들이 주저하며 마음속으로 베드로와 동일한 신앙 고백을 준비하고 있는 순간에, 담대하고도 신속하게 천금(千金)갈은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한편 '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있다(4: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신앙고백 사건을 통해 시몬에게 '게바'(수리아 명칭으로서 반석이라는 뜻), 곧 '베드로'(게바와 동일한 의미어인 헬라어 명칭)란 이름을 새로이 부여하셨다. 한편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까지 자신의 인간적 열성을 나타냄으로써 게속 실패했으나(23절;17:4, 5;26:31-35, 69-75),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에는 제자들 가운데서 항상 우선이 되어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며(행 2:14;3:3-7;4:8;8:14)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은 역할을 하였다(갈 2:9).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기독교 신조(信條)의 핵심을 이른다. 이 고백 가운데에 예수의 인성('그리스도')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다. 물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전혀 새롭고 획기적인 내용이 아니라, 일전에 몇몇 제자들(요 1:41, 49)과 가버나움에서 무리가 예수를 떠나갈 때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것이다(요 6:69). 그러나 예수의 초기 사역 당시(4장)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단순히 정치적 측면에서 받아 들이려 했던 대중들의 기대를 회피하시기 위해 그러한 신앙 고백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특성 및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오류들(14절)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 요구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 쉬)는 단순히 2인칭 대명사인 '당신'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여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의 인성(人性)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21절;20:28;눅 24:7).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제사장, 왕, 선지자들이었다(출29:29;30:30;삼상 16:13;26:11;왕상 19:16;시 89:20;사 45:1). 따라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왕,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실 참 메시야이셨던 것이다(1:1;눅 1:32, 33;행 3:22, 23;히 4:15;5:6,10). 한편 본문에는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가 붙어 있는데 이는 예수, 바로 그분이 일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대망해 오던 구원자, 곧 메시야가 되심을 힘주어 강조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분의 절대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살아계신'(*, 토 조온)이란 '내재적 생명이 충만하신', '영원히 생존하시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표현은 오직 영원 자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요 5:26;살전 1:9) 과거와 더불어 지금과 미래에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탁월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분의 신성(神仙)을 강조하는 말로서 그분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으신 분(요 7:28, 29;8:18,19)이요, 하나님과 하나되신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점(요 5:17,18;10:29,30 33)등을 나타낸다.

성 경: [마16:17]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바요나 시몬아 - 여기서 '바'(*, 바르)는 아람어로서 '아들'을 뜻하며, '요나'(*)는 시몬 베드로의 아버지로 히브리어 '요하나'(*, John, 요한으로도 부름, 요 1:42)의 축소형이며, '비둘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베드로의 원래의 이름을 부르신 것, 즉 새 이름인 '베드로'(요 1:42)라 부르시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신 것은 뒤의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매우 의미가 크다 하겠다. 실로 그의 천연적인 신분인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서의 시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 신분, 지식 등과 같은 탁월성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그의 옛 이름을 그의 아비의 이름과 더불어 사용하신 것이다.

⭕ 네가 복이 있도다 - 신약성경에서 유일회적(唯一回的)으로 한 개인에게 국한시켜 사용된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의 정도를 뛰어 넘어 탁월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이다. 한편 베드로가 받은 축복의 종류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이러한 사실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원문이는 바로 뒤이어지는 말 앞에 축복의 이유를 밝히는 '호티'(*, 왜냐하면, for)가 첨가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여기서 '알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계시하다', '보여주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실로 하나님의 이러한 계시의 산물(産物)로서의 영적지각 능력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온건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 혈육(*, 사르크스 카이 하이마) - 이를 직역하면 '육신과 피'를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된 인간 그 자체와 그의 본성적인 재능, 지식, 지혜 등을 뜻한다(갈 1:16;엡 6:12;히 2:14). 베드로의 이러한 천연성으로서는 도무지 영적 진리를 간과(看過)할 수 없어 것이다. 즉 타락한 이성, 거듭나지 못한 분별력으로는 복음의 비밀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 이는 베드로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의 대구이자 그가 말한 고백의 진정성을 인정하신 것이다. 여하튼 영적 진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영적 능력의 소지자에게 한정적(限定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고전 2:11-14). 이러한 영적 분별력이야말로 베드로가 받은 '복'의 핵심적 요소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본질적 관계성 및 그 각 위의 상호 교호적(interaction)인 인격성 그리고 각 위(位) 사이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내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하셨다(11:27;20:23:26:39, 42).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신분 강조키 위해 '하늘이 계신'이란 말로 수식하고 있다(5:34).

성 경: [마16:18]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또 내가 네에게 이르노니(*, 카고 데 소이 레고) -이를 직역 하면 '또한 나도 네게 이르노니'이다.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요...'라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거나 하신 것처럼 나도 베드로 너에게 한 가지 진리를 말하겠노라는 의미로 이해할수 있다McNel).

⭕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란 헬라어로 '페트로스'(*)로서 '돌' 또는 '반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돌멩이, 돌덩이' 등을 의미한다. 이는 아람어 '게바'(요 1:42; 고전 15:5;갈 1:18)에 해당하며, 이 '게바'는 예수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이름이다(4:18). 예수께서는 일전에 그를 향해 이같은 이름을 주실 것이라 예언하셨는데(요 1:42), 이제 그것을 실현하시고 계신 것이다.

⭕ 내가 이 반석(盤石) 위에 -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 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 2:5-8) 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전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 2:9;엡 2:29;벧전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 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16-19절 강해 '베드로의 신앙고백 해석'부분을 참조하라.

⭕ 내 교회 - 이는 헬라어로 '무 텐 여클레시아'(*, the church of me)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 나와서 다시 아담에게 돌아가 둘이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산출되어서 다시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을 시사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창 2:20-25;엡 5:22-32). 한편 여기에서 '교회'란 '에크'(*, ...로부터)와 '칼레오'(*, 부르다)의 합성어로서 교회가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구성되었음을 암시한다(요 1:16,19). 한편 70인역(LXX)의 '에클레시아'는 '집회', '회의', '모임' 등의 뜻인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으로, 이 히브리어 명사는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나(Munchen), 점차 하나님의 백성, 곧 여호와의 성별된 무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졌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카할'은 매우 광의적(廣義的)으로 사용되어서 반드시 '에클레시아'로만 번역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가끔 '회당', '군중'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70인역에서 일반적으로 '회당'에 한정되어 번역되는 용어로는 '에다'(*, 연합된 회중이란 뜻)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 적이 없다. 따라서 본문에 '에클레시아'가 사용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및 회당에 대한 강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문의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과 같이 넓은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사실 뒤에 이어지는 '세운다'는 개념 조차도 구약에 연유된 것이다(룻 4:11;삼하 7:13;시 28:5;118:22;렘 1:10;암 9:11). 이와 관련해서 래드(G. E. Ladd)는 자기의 에클레시아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선언은 예수에 의해 확립된 공동 단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관계임을 시사해준다. 바로 이 공동 단체가 장차 새계시와 연관을 맺게 되는 '믿음의 눈을 지닌 신실한 남은 자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이제 자신이 메시야로 인정되자, 자기의 에클레시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한편 본문의 구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을 은연(隱然) 중에 드러내고 있다는데 그 중요점이 있다. 실로 여호와의 백성은 이제 이 땅에 오시고, 신앙 고백되어진 메시야의 백성이 된다.비록 당시 쿰란 공동체가 스스로를 언약 백성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는 오직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자기의 백성, 곧 자기의 에클레시아라 말씀하신다, 정녕 예수를 믿고 그의 피로써 확립된 새 언약의 백성만이 그의 에클레시아라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26:28). 이와 더불어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교회'와 그의 '나라'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Hill). 이 두 단어는 서로 상이한 개념, 즉 전자는 '백성', 후자는 '지배', '통치'의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닌다(13:28-30, 36-43).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를 완전히 구별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Walvoord). 왜냐하면 메시야의 통치는 메시야의 백성을 불러내어 구분하기 때문이다. 메시야의 나라는 메시야에 의해 세워지고, 그 백성은 바로 그곳에 모이게 된다. 또한 예수의 에클레시아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최종의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는 역사에 나타난 전초 기지이다. 실로 그 나라가 최종 완성될 때 메시야의 백성은 그 나라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풍성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세력도 메시야가 친히 세우신 교회를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세우리니(*, 오이코도메소) - 헬라어 원문에서는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가 행한 신앙 고백의 실체 위에 장차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암시한다. 사실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기원을 가진다. (1) 근원적인 기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는 이미 창세 전부터 하나님 자신의 은헤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 조직이 이루어졌다(엡 1:3-6).(2) 역사적 기원. 그리스도의 예언(8절)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신약 교회가 성립되었다(행 2:2-4;4:32). 구약에 이미 '교회'라 불리우는 광야의 이스라엘 무리가 있었지만(행 7:38) 이는 장차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의 예표(豫表)였고, 실제는 주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도들 위에 임하신 오순절 때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근거하여 새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즉 교회가 되게 하셨다(행 2:1-4;4:32;고전 12:13).

⭕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여기에서 '음부'란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지하 세계, '죽은 자의 거처'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히브리어로 선인과 악인이 구분없이 들어가는 '죽은 자의 영역'이란 뜻의 '스올'(*)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어둡고 소외된 장소로서 매우 높고 단단한 성벽과 문으로 둘러처져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한 번 받아들이면 다시는 내어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권세'(*, 퓔라이)란 문자적으로 '대문'이란 뜻이다. '음부의 권세'란 '음부의 문'(gate of Hades)이라는 의미로서, 음부로 들어가는 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 및 이와 유사한 표현들은 정경(욥 17:16;38:17;시 9:13;107:18;사 38:10)이나, 유대인의 외경에서(솔로몬의 지혜서 16:13;마카비 3서 5:51;솔로몬 시가서 16:2), 또는 이방 문서에서도(Homer, Iliad 9. 312;Odyssey 11. 277; a Schylus Agam 1291;Euripedes Hecuba 1) 자주 나타나는데, 쓰일 때마다 이 말은 사망과 임종을 의미한다. 따라서 RSV는 본문의 구절을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the powers of death shall not prevail)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이기지 못하리라'를 나타내는 '카티스퀴수'(*)은 '대항하여 힘을 겨루다'는 뜻의 '카티스퀴오'(*)의 직설법 미래 3인칭 형태로서 결국 죽음의 세력이 교회의 한 부분도 이길 수 없거나, 비록 잠시 이긴다 하더라도 곧 패망하여 영원히 굴복할 것이라는 강한 암시(暗示)를 제공하고 있다. 실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육체적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을 깨뜨리시고 죽음의 정복자로서(롬 6:9;계 1:18) 군림하시기 때문이다(Alford).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생존하셔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保證)이 되실 뿐 아니라 교회의 영속성의 영원한 지지자(支持者)가 되신다(고전 15:50-58).

성 경: [마16:19]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계 3:7).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별(大別)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J. McClain). (3)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Plummer). (4) 12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Wycliffe, Hendriksen).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천국(교회)은 궁극적으로 유대인들(행 2:14)과 이방인들(행 10:1-11;15:7, 14)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28:18-20). 그렇다면 '천국의 열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그것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회가 계시에 의혜 점차 깨달아지는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써(4:23)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열어 주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행 2:14-39;3:11-26;4:11, 12:8:20-23) 바로 이런 방법으로 주께서는 교회에 구원 받은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행 2:45), 자기 교회를 강건하게 세우시는 것이다(18절). 이와 더불어 '천국의 열쇠'가 매고 풀 수 있는 통제권이 따르는 것으로 보아 공개적이고도 심각한 범죄를 범한 자에게 교회를 통한 천국의 축복을 금할 수 있는 치리 및 입법 통제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행 8:21;고전 5:1-13). 실로 이 땅의 교회에서 치리(18:17;딛 3:10)는 천국의 통제권과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8:12). 이로써 원소유자이신 예수께서 인간에게 위탁하신 '천국의 열쇠'는 사도들을 위시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함께 자신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그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 땅에서...매면 히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 이처럼 대치되는 전통적인 랍비들의 용어 사용법에 의하면 '매다'(*, 데세스)란 '금지하다' 또는 '금지하여 불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풀다'(*, 뤼세스)란 '허락하다' 또는 '허락하여 합법임을 선포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 용어를 어떤 행동의 규율을 부가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대치되는 두 용어를 응용해 유대인들은, 인도적이고 자유스러운 힐렐(Hillel) 학파의 랍비들과 엄격하고도 보수적인 샴마이(Schammai)학파의 랍비들의 '묶은'것들을 '푼다'는 말을 통해 두 학파간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본문의 '풀고', '맨다'는 말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를 베드로의 수장권(首長權)과 절대적 권한을 가리킨다고 한다. (2) 특별히 죄를 면제하는 권한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3) 단순히 교회에서 행동의 규범, 곧 허락과 금지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4)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교회 치리권과 그의 권위의 탁월함을 근거로 해서 그가 제정하는 규칙과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게 권면하고 실행한 내용들이 하늘에서도 인정되고 비준(比準)될 것이라는 견해이다(Josephus). 물론 이 견해는 베드로의 권세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그리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요, 처음으로 놓인 돌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견해이다. 결국 베드로는 '구원사적 수위직'(salvation historical primacy)을 차지하게 된 것이며, 그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이 놓여지고 또한 매고, 푸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 제도나 사제주의 및 성직자의 독재 개념은 본문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의 종말론적 백성인 교회가 천국의 열쇠, 곧 매고 푸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 일의 하나는 앞에 언급된 대로 진리 선포와 사도적 권위예 의한 권위와 권면 이외에 신앙 고백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징(權懲) 일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사를 추적해 보면 분명 권징은 사도들, 장로들, 나아가서 온 교회의 특수한 임무임을 알 수 있다(고전 5:1-13;고후 13:10;딛 2:15;3:10 ,11). 더욱 이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 고백을 근거하였을 뿐 아니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대망하는 무리들로 구성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스스로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사실 교회가 담당한 진리의 참된 선포는 이 권징을 전제한 것이며 또한 이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6:20]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이에(*, 토테). - '그리고 나서', 그 때에'(then)를 의미한다.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 제자들을 경계하사...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야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1)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은 스승이 스스로를 나타내신 방법과 한계성 안에 머물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을 회심케 하고 천국 시민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이같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의 욕망에 찬 생각들을 잠재우시기 위해서였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어졌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야 상(像)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야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3)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요 6:14, 15).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經綸)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는 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서 예시된 메시야를 그의 정치적인 욕구, 즉 현재 외부(로마)의 압제(壓制)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혁명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요 12:34;행 1:6).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웅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이다(막 3:12).

성 경: [마16:21]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첫번째 수난 예고]

⭕ 이때로부터 -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부터라는 말씀이다. 한편 이 표현은 여러 학자들(Lohmeyer, Stonehouse, kingsberry)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서 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두 부분(4:17)가운데 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力說) 하심으로써(17:12, 22, 23;20:19;26:12) 제자들로 하여금 '그 때'를 준비하게 하셨다.

⭕ 예루살램에 올라가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증심이요, 구약 율법 교육과 각종 종교적 의식의 중심지이다.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곳이 당신의 수난의 현장이 될 것엄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이 준비되고 있는 예루살렘에 욜라 가셔야만 했던 것은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한 바였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26:54;눅 24:26, 46). 즉 예수께서는 예비된 고난의 잔을 능등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인류의 구원자요 소망이 되실것이었다(막 10:45;요 1:29;고후 5:21).

⭕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이들은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부류의 무리들이다(2:4). 그런데 마태가 특별히 이들 각각을 여기에 언급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즉 '장로들'이란 유대의 열두제자들 가운데에서 재덕(才德)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행정 지도자들이며, '대제사장들'이란 일반적으로 구약 솔로몬 시대에 대제사장으로서 나오는 '사독'(왕상 2:35)의 후예들로서 사두개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어지는 선민 이스라엘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들이었고, '서기관들'이란 '율법사'(22:35;눈 7:30;10:25;11:45, 46, 52) 또는 '교법사'(눅 5:17; 행 5:34)로 불리우는 자들로서 율법 보존과 백성의 종교교육을 담당했던 무리들이다. 따라서 이 세 부류의 공회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 종교를 대변하는 무리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계 전체가 예수를 배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Nosgen).

⭕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의 내용을 일컫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백성 대신 죽음의 형벌을 맛보셔야만 했다. 그러나 죽으심 그 자체가 당신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만약 성경의 복음이 예수의 대속 희생에서 그쳤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의 복음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구원과 승리의 복음은 못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제 삼 일에'란 '사흘반에'(막 8:31)란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서 반드시 72시간(24⁓3) 꽉찬 때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하루 중 일부를 하루로 계산하여(Hendriksen) 이뤄지는 사흘째 되는 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비로소(*, 에릍사토) - 이는 '시작하다'는 뜻의 '아르코'(*)의 부정과거로 예수 생애가 새로운 국면(局面)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마16:22]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질책받은 베드로]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 예수를 위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붙들고'(*, 프로스라보메노스)란 '프로스'(*, 옆으로 )와 '람바노'(*, 손에 취하다 , 사로잡다 )의 합성어의 중간태 분사로서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잡고 강권하는 모습을 나타내준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8:32의 수리아 시내 사본(Syriac Sinaitic)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기나 하듯이'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이며 정적(靜的)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문에서 '간하여'(*, 에피티마오)란 '꾸짖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rebuke)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베드로가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후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듣자 책망조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訓育)한 사실을 보여준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히레오스 소이 퀴리에) - 본문은 헬라어 '히레오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히레오스'를 '호의를 가진', '자비로운', '은혜로운' 등으로 보아 '주여 이 일이 당신에게 정녕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여, 당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Gracious to you, Lord)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히레오스'가 히브키어 '하릴라'(*, 결코...않다)와 같은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이는 70인역(LXX)에서 흔히 쓰는 용법으로서, 누구와 맞서는 상황에서 '결코'(never),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 없을 것입니다', '하나넘이 금하실 것입니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메시야되신 예수를 인류구속을 위한 고난의 종(사 53장)으로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 것이다(Wycliffe). 결국 베드로의 이 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예수에 대한 열정적이고도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거스리는 인간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구속 사역의 참의미와 영원한 메시야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혈기방자한 인간의 감정을 내세울 때 사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 이 일이 결코...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우메 에스타이 소이 투토) - 이틀 직역하면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this never shall be to you)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 자신이 그 일의 발생을 미연(未然)에 방지할 수 있는 자인 것처럼 단호한 부정의 의지를 피력(披瀝)한 것이다.

성 경: [마16:23]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질책받는 베드로]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 혹자는(B.F.Meyer) 이를 '예수께서 베드로를 외면하시며(등을 돌리시며)'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문맥 전개상 조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기 위해 그를 향해 돌아서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갈은 세 가지의 호된 비난을 하신다.

⭕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 이 명령은 예수께서 사단과 직접 대면(對面)하셨을 때 이미 하신 바 있다(4:10). 한편 이는 베드로 자신이 사단이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단에게 이용받은 도구, 즉 사단이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사단은 살아있는 생물, 특히 사람들을 매개체(媒介體)로 자신이 목적하는 바에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창 3:1-5;요 13:27;행 5:3;계 12:9). 한편 이 꾸짖음은 단순히 사단의 도구가 된 베드로가 예수의 시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헛된 생각이 예수가 추구하는 길에 놓인 장애물이 되므로 그 길에서 즉시 제거되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베드로로 하여금 제자의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제자란 따르는 존재이지 주의뜻을 거스리고, 이끄는 자가 아닌 것이다(막 1:17, 20;8:34).

⭕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스칸다론 무 에이) - 이를 직역하면 '너는 나에게 장애물(방해물)이다'(you are an offense to me) 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를 결코 넘어뜨리게 할 수는 없으나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조금전만해도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이라 부르셨다. 그러나 사단의 도구로 전락(轉落)한 지금 그를 다른 종류의 '반석', 곧 장애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벧전 2:8). 마치 사단이 예수에게 고난없는 영광과 왕권을 제공하려 했던 것처럼 메시야가 승리자요 정복자로 오실 것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기대감을 그대로 지닌 채 이제 사단과 똑같은 방해 요소로 등장하고만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오해함으로써 예수에게 넘어지는 자가 되었던 그 고난의 메시야 개념은 예수의 부활 후에는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리끼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고전 1:23).

⭕ 하나님의 일...사람의 일 -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21절)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다(Chrysostom).

성 경: [마16:24]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제자직의 본질]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 좇을 것이니라(*,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 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성 경: [마16:25]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제자직의 본질]

⭕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여기서 '목숨'(*, 프쉬케)이란 '영혼'(soul), '생명' 등을 의미한다. 이는 목숨이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및 인격의 중심 또는 그 사람의 자아까지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나친 애착을 갖고 육체적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거나(히 2:15) 인격적 자아, 곧 지성, 감정, 의지 등을 고수(固守) 보존함을 뜻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위배되는 일로서 종말에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상실(喪失)하게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종말론적이며 존재론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10:39).

⭕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아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우면 그는 오히려 종말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의 환희를 맛보게 될 것이다. 정녕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께서 참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 역설적 진리가 가능한 것이다(요 11:25, 26;15:1-7). 예수의 참제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일시적 생명을 단호히 버릴 줄 아는 신앙의 용기가 필요하다. 한편 본문예서 '찾으리라'는 말은 '구원하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는다'는 말보다 더욱 완전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암시한다. 즉 이 '구원'은 뜻밖의 구원을 의미한다(외경 지혜서 5:2).

성 경: [마16:26]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제자직의 본질]

⭕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 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왕상 18:21;히 11:25).

성 경: [마16:27]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재림 예고]

⭕ 인자가...오리니 -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24절;10:24, 25) 장차 있을 당신의 재림과 심판을 제시함으로써 제자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도록 다시 한 번 고무(鼓舞)시키셨다. 한편 여기서 예수와 더불어 오게 될 천사들은 예수의 사자(使者)들이며 종말적 추수 때에 심판의 대행자들(agents)로서 수종들 것이다(13:41;24:31;25:31, 32).

⭕ 아버지의 영관으로(*, 엔 테 독세투 파트로스,아투루) - 이를 직역하면 '그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거하실 때도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골 2:9)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당신의 십자가(24절)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된 분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안에 거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아버지의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란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말인 동시에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부여하신 초월적 특권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진 것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것에 대한 확실한 중거이다.

⭕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 여기에서 '행한'(*, 프랖시스)은 '행한 일(행 19:18), '기능', '활동'(롬 12:4)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개인에게 주어진 직임을 온전히 수행했는지(눅 12:47, 48;고전 3:12-14;계 20:13)에 관한 평가가 근거가 되는 실천적 삶을 일컫는다. 한편 비록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할지라도(엡 2:8) 각 개인은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서 현세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고후 5:9). 즉 예수께서는 형벌과 더불어 행위에 따른 적절한 상급을 주실 터인데, 이는 각 사람의 일한 대로 주어지는 차등적(差等的)이며 조건적인 것이다(고전 3:8;딤후 4:6-8;계 22:12).

성 경: [마16:28]

주제1: [메시야의 자기 공개]

주제2: [재림 예고]

⭕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 본문은 인자, 곧 예수의 오심과 그분이 지닌 왕권의 실재성을 강조한 것으로(Wycliffe) 임박한 예수 자신의 수난과 또한 각 제자들의 수난의 현장에서도 결코 두려움 없이 제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본문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여겨져 왔으며, 그런 만큼 그 해석이 다양하다. (1) 막 9:1과 연관시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가 말할 때 이미 도래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C.H. Dodd). 그러나 이것은 '보다'는 말을 왜곡 해석함으로써 생겨난 견해이다. 더욱이 마태는 마가의 표현인 완료분사(*, 엘레뤼뒤이안, '이미 왔다')와는 달리 현재분사(*, 에르코메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 해석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2) 부활 사건 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Calvin, Grotius). 이 해석이 설득력이 있기는 하나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죽기 전에 설명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문맥상으로 충분치 못하다. (3)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Gaechter, Clarke, Westein). 그러나 바로 앞절(27절)이 예수의 졔림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4) 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본다(Allen). 그러나 예수의 선교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으로(마28:20), '여기 섰는 자들'이 죽기 전에 그 선교적 사역이 완수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급하다. (5) 얼마 후에 있을 변화산 사건을 예고한 것이라 본다(Bengel, Chrysostom, Hilary). 그러나 이 사건이 불과 얼마 후에 일어날 것이라면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진지한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나 '여기 섰는 자들중 죽기 전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터무니 없다. 더욱이 변화산상에서의 3제자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과 본문의 공개적 가르침과는 문맥상 일치를 이룰 수 없다(17:9). 이상의 견해들 보다 (6) 본문을 좀더 일반적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갈다. 즉 본문은 부활, 오순절 등의 특수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 후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나타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것이다. 그 예로 제자들의 급증과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거기 섰던 자들'중 다수는 예수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확산되는 것과 개종자들을 풍성히 거두어 들이는 수확의 현장을(9:37,38) 목격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공관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의 유연성(flexibility. 3:2;10:23;12:28)과 본문의 문맥에 잘 어울린다. 한편 본문에서 '그 왕권을 가지고'(*, 엔 테 바실레이아 아우투)란 직역하면 '그의 왕국으로'가 된다. 이 말은 결국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왕국에 속한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지니시고 오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특별히 '왕국'에 해당하는 '바실레이아'(*)라는 말이 '왕국', '나라'라는 뜻 외에 '왕권', '왕의 통치' 등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해 영광과 위엄을 지니시고 오실 것을 강조한 말이라 볼 수 있다(Hendriksen). 이는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시고, 또한 오순절 성령을 통해 각 심령들에 영원히 임재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늘 우편에 거하시며 당신의 교회를 친히 다스려가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해 가고 계신다(엡 1:19-23;빌 2:9;벧전 1:3;계 12:10).

성 경: [마17:1]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엿새 후에 - 이는16: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16)과 그의 수난 예고(16:21) 및 도래할 심판(16: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지금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9:28). 이는 마태가 예수께서 앞 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째 날을 뺐는데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일과 본 번형 사건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더욱이 누가는 '팔일 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 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은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실로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완전한 수요, 일상과 노동에의 숫자로 볼 수 있으며,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 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슷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안식과 천국이라는 새지평을 이제 여시고 계신 것이다.

⭕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 이 세 사람은 전직(前職) 어부 출신들로서(눅 5:10) 예수께서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시던 자들이다(26:37;막 5: 37;13:3;눅 8:51). 물론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시었다. 실로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된 중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신 19:15;요 8:17;고후 13:1). 더욱이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혹시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9절). 한편 이들 3인의 제자는 이제 12제자 중 에서도 핵심 구성원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3인의 제자들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10: 2의 주석을 참조하라.

⭕ 따로(*, 카트이디안) - 문자적으로는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 높은산 -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라고 하며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近距離)라는 점에서 '예벨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W. Ewing).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의 근접성을(16: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하고 있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신 3:8;대상 5:23), 시료(신 3:9)등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해발 약 2,850m로 그 산 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참조, 시 133:3). 이 산은 구약에서는 '시온산'(신 4:48)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벧후 1:18)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벨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벨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성 경: [마17:4]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서 '주'(*, 퀴리오스)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주존칭이었다. 한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선생, 막 9:5) '에피스타테스'(*, 곁에서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33)로 각각 묘사되었다.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 순서에 대한 이유와 같은 것 같다. 한편 눅 9:33에는 베드로의 강력한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어떤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말은 그가 다음 몇가지 점에서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 준다. (1) 예수께서 아직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즉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미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는 점(히 2:9, 10).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는 점(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는 점(24:14;행 1:8) 등이다.

⭕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심히 육신 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21-23).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얼마나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 초막 - 이는 헬라어로 '스케나스'(*)로서 '장악', '천막' 등을 의미한다. 당시에 아랍인들은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를 표하기 위하여 장막을 쳐주곤 했다 한다(왕하 4:9,10). 만약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아마 이 안전한 산상에서 지금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그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아예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램에서 이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의 하나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라는 점이다(레 23:42, 43).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짓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CARSON).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전체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 하나는 주를 위하여...하리이다 - 이는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시 취급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자의적 판단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 경: [마17:6]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제자들이 듣고...심히 두려워하니 - 본 구절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께서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영광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의 절대적인 공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죄악된 인간의 통상적인 느낌이다(사 6:5;마 14:27;28:5,10).

성 경: [마17:7]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변화산 사건]

⭕ 예수께서 나아와...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 이는 예수의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 보이는 행동이다(사 6:5-7;단 10:9, 10:계1:17).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음성은 깊은 공포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의 산란(散亂)한 심령을 넉넉히 회복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 사랑과 신적 권위에 입각한 예수의 이중 명령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공포의 자리를 떨고 일어날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버릴 것을 말씀하셨다(14:27). 이 이중적 명령은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사랑의 표현이자 오직 당신만이 인간이 지닌 심연의 공포를 제거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성 경: [마17:10]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엘리야와 세례 요한]

⭕ 그러면 어찌하여 - 여기서 '그러면'(*, 운)은 논리적 연결사 또는 추정(推定) 불변사로 사용되어 앞의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질문의 내용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앞의 함구령과 연관된 제자들의 질문을 이끄는 말로 사용되었다.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제자들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출현과 계속되는 예수의 함구령에 그 근원이 있다. 사실 그 당시 서기관들은 말 3:1;4:5 등에 근거하여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었다(M Eduyoth 8:7; M Baba Metzia 3:5). 따라서 엘리야가 출현하지 않는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진정성은 의심받게 마련이었다. (1) 변화산상에서의 엘리야 출현은 에언된 말 4:5의 성취인지, (2)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마땅히 공표해야 하는데도 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7:12]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엘리야와 세례 요한]

⭕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임의로 대우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삶을 예표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하셨다. 즉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1)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기울였다. 또한 그를 (2) '임의(任意)로 대우하였다'. 즉 그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까닭은 자명한 것이었으니, 그것은 세례 요한이 그 맡은 바 소임을 성실히 완수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맡으신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예수께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되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요 1:9-11) 오히려 배척하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임의로'(*, 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성 경: [마17:15]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귀신 들린 아이 치유]

⭕ 주여 - 이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인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2;17;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이때의 호칭을 단순히 '디다스칼로스'(*,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막 9:17).

⭕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막 9:21과 눅 9: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그 아비의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않고 있었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실로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 간질 - 이는 헬라어 '세레니아조마이'(*)로서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으로서,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막 9:20)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 심히 고생하여(*, 카코스 파스케이) - 문자적으로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한편 막 9:22에 따르면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실로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 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 하곤 한다.

성 경: [마17:16]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귀신들린 아이 치유]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남은 아홉 제자들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10:1;눅 10:17).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실패는 13:54-19: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1416-19, 26, 23, 33;16:5, 22;17:4, 10, 11). 결국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14:26, 27, 31).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 경: [마17:20]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믿음의 능력]

⭕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 '믿음이 적은'은 사본들에 따라 어떤 사본은 '아피스토스'(*, 믿음이 없음, unfaith) 또다른 사본은 '올리고피스토스'(*, 믿음이 부족함, little-faith, poor-faith)로 각각 표기하고 있다. 이 중 17절에 제시된 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는 책망과의 조화를 위해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비록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해도 본문에서는 믿음이 적음을 지적한다기 보다 그들의 믿음이 결핍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Bonnard). 실로 적은 믿음은 아무리 하찮더라도 겨자씨와 같이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게 마련이지만 믿지 않는 불신앙은 그 어떠한 결과도 산출해 낼 수 없다. 한편 마가는 본문과 기도의 관련성을 기술하고 있다(막 9:29). 사실 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섭리를 믿고 인정하는 자의 특권이요 의무라는 점에서 마가의 보고는 적절하다 하겠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예수께서 새릅고도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실 때,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5:18).

⭕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팔레스틴 지방 또는 지증해 연안 등지에 많이 자라며 최대로 성장하면 약 3-4.5m의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한다. 이것은 '니코티아나 그라우카'(Nicotianaglauca) 혹은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겨자나무는 원줄기와 몇개의 곁줄기로 자라는데 원줄기는 새가 앉아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국 믿음이 지닌 생명력과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녕 믿음은 무한한 자생력을 지닌 것으로,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하찮을 정도일망정 그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그 뜻을 믿는 것으로서(Wyciffe) 자기 신뢰나 신념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따라서 겨자씨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가시화(可視化)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믿음일 때에만 가능하다. 한편 공관복음에서는 겨자씨에 대한 언급이 다섯번 나온다(13:31;17:20;막 4:31;눅 13:19;17:6).

⭕ 이 산을 명하여...옮길 것이요 - 겨자씨와 산은 표면적으로는 크나큰 대조를 이루며 '옳기는 것'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지속하면 그 믿음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주권적인 방법에 의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이뤄내고야 만다. 즉 겨자씨 믿음은 그 소유자로 하여금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을 이 땅에 실현하게 한다. 한편 여기에서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21:21, 22:사 40:4;49:11;54:10;막 11:23;눅 17:6;고전 13:2).

⭕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카이 우덴 아뒤나테세이 휘민) - 문자적으로 '그리고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and noting shallbe impossoble to you)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전능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그 효력은 지금도 유효(有效)하다(19:26;빌 4:13;히 11:1).

성 경: [마17:22]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두번째 수난 예고]

⭕ 갈릴리에 모일때에 - '모이다'(*, 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현현 분사다. 이는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틴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이었다. 한편 막 9: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할 것 같다(24절;막 9:30).

⭕ 예수께서...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더해 말씀하신 두번째 예언이다(16:21). 여기서 '넘기워'(*, 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 모호(曖昧模糊)하다. (1)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2)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 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여하튼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한편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16:21)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20:19)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죽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눅 24:6).

성 경: [마17:23]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두 번째 수난 예고]

⭕ 죽음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하셨다. 즉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詭計)와 포악(暴惡)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결국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막 9: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런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에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요 16:16-22).

성 경: [마17:24]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성전세(聖殿稅) 납부 문제]

⭕ 가버나움 - '나훔의 마을'이란 뜻으로서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위치한 성읍이다. 오늘날에 이 성읍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텔 훔'이란 곳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곳은 예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으나(8:5-15;9:2-8;18:1-5), 회개하지 않고 교만함으로서 인해 예수의 책망받는 지역이기도 하다(11:23). 이제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리 방문하셨다.

⭕ 반 세겔 받는 자들이 - '반 세겔'이란 헬라어로 '디드라크마'(*)로서 '두드라크마'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 드라크마는 헬라어인 하루 품삯을 나타내는 동전 명칭으로서 유대인에게도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1/4세겔로 취급되었다. 한편 이 '반세겔'은 유대인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인구 조사를 한 직후에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내었던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여호와께 바쳤던 양과 같은 것이다(출 30:11-16).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의무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바벨론 포로 후 그 의무는 20세이상된 자로서 3/1세겔로 조정되었다(느10:32). 예수 당시에도 느헤미야의 수정된 의무조항에 따라 매년 유월절 전인 봄에(아달월 15일) 모세 당시의 환율에 의해 계산, 부과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반세겔을 바꾸려는 환전상으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이 환전상들은 그 수수료로 인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여하튼 이 반세겔은 로마에 바치는 공공의 세금이라기보다 당시 주로 성소의 유지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 호이 타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those receiving the didrachmas)은 일반적으로 국세를 거두는 '세리'(*, 텔로나이)와는 다르다(9:10). 이것은 반 세겔을 거두는 자들이 신분상 로마 위해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전을 위해 거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 이는 세금 징수자들이 이미 예수와 베드로 등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성전을 대하시는 예수의 태도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들은 예수께로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성 경: [마17:27]

주제1: [예수의 영화로우신 변형]

주제2: [성전세(聖殿稅) 납부 문제]

⭕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히나 데 메 스칼달리소멘 아우투스) - 직역하면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실족지 않게 하기 위하여'(But that we may not offend them)가 된다. 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율법 위에 계신 분으로서 율법이 정한 바 그 의무 조항을 능히 초월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인의 유익을 우선 생각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 겸비(兼備)해지기를 원하셨다(3:15). 한편 본문의 '오해케 한다'는 '스칸달리소멘'은 단순히 넘어뜨린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함정에 빠뜨려 치명적인 피해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성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야기될 상황, 곧 예수가 왜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을 율법으로 파괴하고 성전과 예배를 무시하는 자들로 오해하여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먼저 배척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방적 조처로서 성전세 납부를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겸비의 모범을 따라 훗날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절제와 겸비의 도를 가르치게 된다(고전 8:13;9:12, 22).

⭕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 성전세 조달을 위한 예수의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다. 이로써 우리는 동전 한 닢이 고기 입 속에 있음을 미리 아시는 예수의 전지성(全知性)과 그 동전을 이미 있게 하신 다자신의 전능성(全能性)을 알 수 있다(Wycliffe). 한편 신약에서는 낚시 기사가 이곳 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물을 사용하는 것으로 언급된다. 여하튼 예수의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요구에서 면죄되시지만, 율법에 순종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에 대해서도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 방식으로 예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수난 예고(22, 23절) 바로 뒤에 위치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겸비를 다시 생각케 한다. 즉 그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능력자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쓸데없이 남으로 오해케 하지 않으시려고 이러한 이적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11:28-30;12:20). 이같은 겸손의 교훈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및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 한 세겔(*, 스타테르) - 그리이스에서 통요되던 금화로서 대략 4드라크마, 곧 한 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것이면 1인당 반세겔요구되는 성전세의 두 사람분을 납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적은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장 정확한 은혜로 채워진다.

⭕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 '나와 너'란 예수와 베드로가 비록 하나같이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셔도 됨에도 불구하고 내시는 것이며, 베드로는 그 근본이 죄인된 인간이요 사망에 처한 자로서 생명의 속전 곧 성전세를 내야 할 자였던 것이다.

성 경: [마18: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 경: [마18: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다.

성 경: [마18: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겸손에 대하여]

⭕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는 '스스로 돌이키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성 경: [마18:8]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실족케 한 자의 화(禍)]

⭕ 네 손...찍어 내버리라 - 여기서 '손' 이나 '발'은 문자 그대로의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5:29).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해당 부위를 즉각 찍어 내버리면 우리의 신체 중 지금까진 남아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손과 발은 유혹의 도구, 수단 및 그 죄악의 실천적 기능에 불과한 것일 뿐 죄의 원인과 동기와 그 근원은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 즉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찍어 버리라고 하는 이 경고의 말씀은 악한 생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마음의 썩은 생각을 잘라내야 한다는 말씀이며, 이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고 무자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씀이다.

⭕ 영원한 불 - 9절에 의하면, '지옥 불' 이다 지옥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헨나'(*)는 히브리어 '게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힌놈의 골짜기는 우상 몰렉에게 자기들의 자녀를 제물로 바쳤던 곳으로 (대하 28:3;33:6),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불결한 곳, 부정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왕하 23:10). 그러나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은 사 66:24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다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묵시 문학의 등장으로 '지옥'이라는 개념이 차차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신약의 가르침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헨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고는 거의 예수에 의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8:12, 바깥 어두운 데 ;13:50, 풀무 불 등). 묵시 문학적 종말 사상, 즉 임박한 세계 종말종과 심판 사상에 충만해 있던 예수는 이러한 사상을 사람들에게 고취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곧 실현하기 위해 진리와 공의로써 행동하게 하였다. 한편 지옥에 관한 여러 표상들, 예컨데 '영영한 불', '바깥 어두운데' 등은 지옥에 대한 상징과 비유로서, 죄를 지은 영혼이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성 경: [마18:1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 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생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18:1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18:1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성 경: [마18:1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망)은 이 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극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마18:15]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이 아니라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렝코'(*)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 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 19:17).

⭕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음으로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와 조심성과 사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성 경: [마18:17]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듣지 않거든(*,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 세리처럼 되게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성 경: [마18:19]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가 '어떤 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오'(*)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성 경: [마18:2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권면에 대하여]

⭕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마'(*)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말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성 경: [마18:21]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제의 죄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용서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체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페소'(*)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성 경: [마18:2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McNeile).

성 경: [마18:2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벌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의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늬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둘로이)이란 문자적으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성 경: [마18:2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 빚진 자(*,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령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지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성 경: [마18:25]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할 종도리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마18:26]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엎드리어 절하며(*,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와 '강한 감정,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랫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성 경: [마18:27]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 11:30-32).

⭕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빚'(*,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 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성 경: [마18:28]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 빚을 갚으라(*,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8:29]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엎드리어 간구하여(*,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느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관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전의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성 경: [마18:30]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허락하지 아니하고 - 브장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성 경: [마18:32]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도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 네가 빌기에(*,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성 경: [마18:33]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불쌍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 (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의미한다.

⭕ 마땅치 아니하냐(*,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성 경: [마18:34]

주제1: [천국 시민의 윤리관]

주제2: [용서에 대한 비유]

⭕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 그 빚을 다 갚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는 '...까지'의 뜻으로, 제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개한 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퓔라크스'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대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

성 경: [마19:1]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

⭕ 이 말씀을 마치시고 - 마태븍음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 다섯 설교의 다섯 종결 문구(ending formula)중의 네번째 것으로 앞장(18장)의 설교가 끌났음을 의미하는 문구이다. 이로써 공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셨던 갈릴리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뒨다. 이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시기 약 한달전으로서 대략 A.D. 29년 2-3월경의 일로 추정된다. 한편 본서에 언급된 다섯 종결문구는 본문 이외에 7:28;11:1;13:53;26:1에 나오고 있다.

⭕ 갈릴리에서 떠나 - 3차에 걸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수난 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사마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유다와 베레아를 순회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신 기사이다. 따라서 19-20장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입성까지 도중의 기사로, 보통 '베레아 전도'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이 전도사역은 갈릴리에서의 출발(1절)로 시작되어 베다니에서 왜 마리아의 기름부음(26:6 ff.;막 14:3)으로 끝난다. 이 기간 동안에도 예수는 역시 계속해서 민중들로부터는 기대와 환호를 받았으며, 유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로부터는 질시(疾視)와 모함과 배척을 받으셨다.

⭕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 - 이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이는 평행구절인 막 10:1에서는 분명히 이 지방이 베레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눅 9:5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땅을 통과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도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1) 요단 동편 베레아로 가셨다(Plummer, D.A.Carson, Carr). (2) 요단강 서편 사마리아를 지나 가셨다(Delitsche, Weiss)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대체로 베레아 방문설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잔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른 수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베레아를 지나(유대인들은 '거룩치 않은 땅'으로 생각한 사마리아를 피하여 대신 베레아로 통과하곤 하였다,요 4:9) 예루살렘에로의 순례여행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요단강 동편이 베레아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은 유대땅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건너편'이라는 표현인 '페란'(*)이 바로 뒷 단어인 '유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페란'과 '유대' 사이에 접속사 '그리고'(*, 카이)가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여 '요단강 건너편과 유대에 이르시니'로, 각각 독립 구문으로써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2) 유대 지경이라는 표현은 그 '구역'을 의미하는 코우스트(coast)가 아니라 '경계'를 뜻하는 보오더(border)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요단강 건너와 유대지경(사실은 '경계')은 동격으로 베레아가 유대지방이 아니라 그 경계임을 드러내는 정확한 보도가 될것이다. 한편 베레아란 이름의 뜻은 헬라어 문자그대로 '건너편'(*, 페라이아)으로, '요단 저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 베레아는 그 남쪽 경계가 헤롯의 요새인 마케루스(Machaerus)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이며(14:1-12), 북쪽의 경계는 야르묵(Jarmouk)강까지로 비교적 넓고 비옥한 지역이었으며 예수 당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통치하에 있던 구역이었다.

성 경: [마19:2]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유대 지방에서의 사역]

⭕ 큰 무리가 좇거늘 - 마가의 평행 구절에서는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막 10:1)이라고 표현한 것에 비해서 마태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동사 '좇다'(*, 아콜루데오)를 통해 그 무리들이 보통의 군중들이 아니라 예수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임을 시사하고 있다. 보통 이 동사는 '따르다', '제자가 되다' 등의 의미로 갈릴리에서 베레아까지 예수를 따라온 무리들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까지 계속 예수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제자무리'들 임을 나타낸다. '제자됨'을 나타내는 이 동사는 21절과 27절에서도 다시 사용되고 있다.

⭕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 이적기사가 많은 마가복음에 오히려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라고 되어있고, 설교기사를 선호하는 듯한 마태복음에 도리어 '병고침'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마태의 19장 본문의 내용이 설교가 아니라 주로 설화 부분이기 때문에 마태가 의도적으로 마가의 본문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A.W.Argyle).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의 주요 세 사역인 가르치심(teaching)이 갈릴리 뿐만 아니라 이 베레아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함으로써, 선포자(18장의 설교), 예언자의 모습을 갖춘 메시야로서 예수의 완전한 사역을 설명하려는 마태의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Gerhardson).

성 경: [마19:3]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 예수의 소문이 헤롯과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전해짐으로써(14:1) 그곳의 산헤드린에서 급파된 진상조사단인 이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전지역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시험하고, 비방(誹謗)했으며, 모함(謀陷)할 요소를 찾기에 분주했다(9:1-13; 12:1-21; 15:1-20). 그리고 본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와 로마 당국에 고소할 거리를 찾아 신학 논쟁을 벌이고있었다. 한편 지금 예수가 머물고 있는 베레아 지역은 땅이 비옥(肥沃)하고 경제력이 타지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참으로 평화로운 전원풍의 지역으로서 유대적 교권주의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의 선교 활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곳에까지 찾아와서 적대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무리를 충동질하여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현재 위치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의 문제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이 제기한 이혼문제는, 곧 바로 예수의 처형을 획책하려는 음모(陰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처럼 보이는 이혼법에 관한 난제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정치적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였다.

⭕ 시험하여 -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시험당하거나 유혹받은 것은 맨 처음 사단에 의해서이고 그후에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에 의해서였는데(4:1, 3;16:1;22:18, 35), 이는 모두 그의 메시야적 권위를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시험의 형식은 언제나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가', '불가'를 묻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만일 '옳다' 하여도, 아니면 '그르다' 말씀하셔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변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양자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고 논제의 본질을 그대로 파헤치심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 이는 문자적으로 '어떠한 원인으로든지'라는 뜻이다. 이같은 물음은 규율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하고 있는 힐렐학파가 취한 태도와 학설에 근거해서 제기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힐렐과 쌍벽을 이룬 샴마이학파는 일정한 이혼사유가 규정되어 있었으며, 계약을 맺고 들어간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J.R.Muller). 새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이유가 있으면', 공동번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번역이 본문 해석상 적절한 것 같다. 한편 NIV의 'for any and every reason'이란 번역은 공동번역의 표현과 잘 어울린다.

⭕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는 특히 이혼 문제로 해서 크게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데, 물론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였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 24:1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와트 다바르'(*), 곧 '수치(羞恥)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치'(indecency)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즉 샴마이학파는 수치를 '간음'(姦淫)과 갈이 엄청난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혼이 아니기 때문이다(신 22:22). 마찬가지로 '수치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에 대한 의심'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을 경우에는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물을 아내에게 마시우게 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민 5:5-31). 따라서 '수치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과 같은 상대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한편 힐렐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실제의 죄든 아니면 상상속의 범죄이든지 간에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다든지 또는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에 의해서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앞에 제기된 물음은 바로 신 24:1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였다. 만일 예수가 힐렐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은 샴마이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비록 엄격한 샴마이학파라 할지라도 이미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19:4]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사람을 지으신 이가...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유대인들은 신 24:1을 이혼의 합법적 근거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創造)하셨는가를 환기시킴으로써 창조의 원리(창 1:27)를 통해서 이혼의 절대 불가성과 아울러 결혼의 신성함과 영구성을 강조하시고자 하였다. 특히 본문의 '본래'라는 말은 남.녀의 근본적인 창조 목적을 소개하고자 하는 강한 암시가 내포된 말이다. 실로 결혼의 법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 유지의 법이었다(고전 7:25-38).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한다'고(말 2:16) 선포한 말라기 선지자와 같이 예수는 창 1:27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것인 동시에 창조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하나의 몸에서 잠시 분리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으로 다시 한 몸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 경: [마19:5]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이러므로 - 창 2:24에서의 이 말(for this reason, NIV)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은 짝으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임'을 아담이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남자와 여자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관계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정녕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창 1: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合)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남녀 한 쌍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구 조건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淸算)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창 2:24).

⭕ 합하여(*, 콜레데세타이) - 이는 '아교로 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지닌 원어 '콜라오'(*)의 단수 미래 수둥태로서 '완전히 달라 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이는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이다.

⭕ 한 몸이 될지니라 -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 씨릍스)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有機的)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한 몸'이란 결혼을 단순히 정신적인 결합(한 정신)으로 봄으로써 구체성(육체리 합일)을 상실한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 자체, 곧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영혼이 전제되지 않는 육체는 순전히 쾌락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한 몸'이란 육체를 근간으로 한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루이스 에이 바비에리(Louis A. Barbieri Jr.)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였다.

성 경: [마19:6]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결혼에 대하여]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 한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짝지어주다'란 말은 '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는 말의 헬라어 '쉬쥬그뉘미'(*)가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는 부정 과거형 직설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번의 과거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이미 발생되어 버린 일이므로 어떤사람도 그 연합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더욱이 이는 무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짝지어 주신 그 일이 영원히 진리(眞理)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관계대명사 '호'(*)의 중성 단수형이 사용됨으로써 부부는 벌써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단수 관계대명사 '호'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확히 짝지어 주신 '것'(What)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입법(立法)하신 결혼법을 말하는 동시에 그 법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녀의 결혼 관계에 적용됨을 암시하고 있다.

⭕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당위론적인 진술이다. 맥네일(A.H. McNeile)은 말하기를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結合)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이혼이란 인간의 사악한 의지의 반영일 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유대 용어로 결혼을 나타내는 말은 '키두신'(*)인데, 이 말은 성별(性別), 헌신의 의미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쳐진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W. Barclay).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이요 계속해서 헌신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키두신'이다. 그러므로 헌신된 제물로서의 부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둘로 나뉘어진 '키두신'은 이미 '키두신'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 분리된 부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정죄를 받는다. 정녕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남자)과 아내를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떠한 분열 의사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반(反)하는 것이다.

성 경: [마19:7]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이혼에 대하여]

⭕ 어찌하여 모세는 -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신 24:1을 들어 다시 한 번 예수께 공격하였다. 실로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 가치기준이며 원리였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성적 판단이 정지된채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2, 28, 32)라고 하심으로써 매번 모셰에 대해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하며 율법 정신을 왜곡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셨다. 구속사의 전개상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실체(實體)이신 예수의 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며 그분의 말씀도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어리석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최소한의 규정을 담고 있는 모세 율법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한 것인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에서 모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 그 당시 히브리인 남편들은 단지 구두(口頭)로 아내와의 이혼을 합법화(合法化)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혼 사유가 발생하면 신 24:1-4의 율법 조문에 근거하여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줌으로써 그 이혼을 공식화할 수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이혼 사실에 대한 공적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간 이혼 사실을 공중예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혼을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실제적인 목적은 (1) 합리적 이유를 들어 아내 내어 버리기를 쉽게 생각하는 남편의 방종(放縱)을 막고, (2) 신실치 못한 아내에 대한 자비의 수단, 즉 그 아내에게 미칠 각종 불이익과 공개적 형벌을 미리 예방하고 아내로 하여금 자유케 하려는 데 있었다. 사실 당시만해도 법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던 남자가 이혼 증서를 준비할 권한과 그 약정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종이가 흔하지 않았던 고대에서는 나무잎 위에 '자신의 아내가 이제는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라는 내용을 적어 여자에게 주었으나 나무잎이 시들게 되면 그 내용이 희미해져서 잘 알 수 없게 되는 폐단이 있어서 후에는 작은 돌, 양피지, 종이의 순으로 이혼 증서의 재료가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혼의 허용은 점차 이혼의 남용(濫用)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게 됨으로써 이 이혼 문제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큰 고민 거리가 되었다. 유대의 어떤 랍비는 성전의 제단 앞에서 초혼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를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성 경: [마19:8]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이혼에 대하여]

⭕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허락하였거니와 -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 스크레로카르디안)이란 '거칠고 잔인하며 완고한 마음' 또는 '말라붙은 마음'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타락한 심성(心性)을 반영해 주는 말이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결혼법을 지킬만큼 순수하다거나 신앙적 열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내를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거나, 살해할 의사까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모세는 그러한 '큰 죄악'을 범하면서 남녀가 함께 기거하느니 차라리 갈라서는 '작은 악'을 허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 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묵허(默許)한 것이었다. 따라서 허용된 이혼을 빌미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은 '작은 악'을 스스로 인정하는 수치였다.

⭕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결혼법에는 '본래' 이혼의 허용이나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아내의 수치되는 일(*, 에르와트 다바르, 신 24:1)을 보았을 경우에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허용했을 따름이다. 이혼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아니다. 따라서 이혼이 성립될 것인가 말것인가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기본 입장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혼은 모세에 의해서 허용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혼 자체가 이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이혼은 본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상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혼에 대한 모세의 본래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에 대해 빈센트(Vincent)는 말하기를 '최초에 제정된 결혼법은 결코 폐지되거나, 또다른 법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한 바 있다.

성 경: [마19:9]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이혼에 대하여]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모세의 권위를 초월한 예수께서 친히 당신의 권위(權威)로 절대적 윤리(倫理)를 가르치셨다.

⭕ 음행한 연고 - 음행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포르네이아'(*)이다. NIV에서는 음행을 '결혼한 사람들 간의 성적(性的)인 관계에서의 부정'(marital unfaithfulness)으로, KJV에서는 미혼 상태의 남녀간의 '사통'(私通, fornica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학자들은 이 음행이라는 말을 (1) 결혼이 금지된 촌수 내에서의 결혼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하면(Baltensweiler) (2) 겔다드(Mark Geldard)와 같은 사람은 KJV의 번역과도 같이 결혼 전의 부정으로 본다. (3) 또한 플레밍(Fleming)과 시갈(Sigal)은 '포르네이아'가 단순히 간음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4) 또 다른 견해로는 '포르네이아'가 무분별(無分別)하고 방종하며 집요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문란한 성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 한번의 잘못된 부정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게속되는 이러한 부도덕(不道德)한 아내의 성생활도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결혼의 연합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의 근친상간의 결혼은 이미 합법적인 결혼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으며, (2) 결혼 전의 부정이나 간음으로 보는 것은, 첫째, 간음(adultery)란 말의 '포르네이아'가 아니라 '부부간의 성실성이 없음'이란 의미의 '모이케이아'(*)란 말로 분명히 달리 쓰이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둘째, 간음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한다면 예수의 의견은 샴마이학파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막 10:11-1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어떠한 연고에 의해서도 이혼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찬성하시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10절의 제자들의 불평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은 (4) 번의 견해와 같이 결코 고칠 수 없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아내의 경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한 여자가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 받던 죽음의 형벌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고, 이제부터는 이혼함으로써 부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의 절대 금지에서 예외적인 조항을 밝힌 이 부분은 바로 앞 (4-8절)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수께서는 분명 4-8절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구약이 가르치고 있는 참된 방향을 제시하셨을 뿐이다. 더욱이 성적인 죄악은 창 1:27;2:24의 결혼법에 관한 예수의 관점(4-6절)과 특별한 관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창조 기사에서 인용한 구절들(창 1:27;2:24)이 예수가 옹호하고 있는 결혼의 영구 불변성인 성적인 결합, 곧 한 몸됨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인 부정은 이혼 금지에서 제외되는 예외적 행동에 속한다. 실로 성적 부정이 반드시 이혼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혼과 재혼을 허용한 모세의 정신은 예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되고있다. 마하니(Mahaney)는 '포르네이아'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흔한 근친상간을 의미하는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태가 이들이 점점더 교회에 들어오게 됨을 염려하여 그들이 예수의 절대 이혼 금지(음행한 연고 외에는)를 그들 이방인들의 부정한 결혼을 묵인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하여 이 구절을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이 예수의 절대적 윤리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점차 상대적 윤리로 전향(轉向)해 가는 과정을 반영해 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성 경: [마19:10]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독신의 조건]

⭕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 직역하면 '만일 사람의 연고가 아내에 대해서 이같을진대'로, 개역 성경에는 '연고'(*, 아이티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여기서 '사람의 연고'란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올 요구할 수 있는 이유,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조건의 까다로움 또는 더 나아가서 이혼불가라는 예수의 너무나도 엄한 결혼관에 대해 불평하는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에 해당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사회가 이혼과 재혼 또는 축첩(蓄妾)의 제도가 성행(盛行)하고 있던 시대이므로 예수의 말씀은 실현뷸가능의 이상으로써만 이해되었을 것이다.

성 경: [마19:11]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독신의 조건]

⭕ 사람마다 이 말을...타고 난 자라야 - 예수의 답변 중의 '이 말'은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인 '장가들지 않는 것(독신)이 좋삽나이다'(10절)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받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코레인'(*)은 그릇이 일정량의 빗물을 받듯이 '어떤 것을 위한 공간(空間)의 자리에 담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지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그와 상응하는 도덕적 의지가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말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말 그대로를 전의지적으로 따른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나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 내지 금욕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타고난 자'란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에 의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름받고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결혼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자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으로 번역하고있다. 예수께서는 12절에 새 유형의 고자(鼓子)를 예시함으로써 이 말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소개해 주셨다.

성 경: [마19:12]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독신의 조건]

⭕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 - 선천적인 성불구자나 성욕이 완전히 핍절(乏絶)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고자'(*, 유누코이)란 원래 '침실을 맡은 자'란 뜻으로 고대 동양에서 왕의 침실에 수종들던 내시(內侍)가 모두 거세(去勢)당한 자들인 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고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레 21:20)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신 23:1).

⭕ 사람이 만든 고자 - 고대 동양에서는 왕의 아내들에게 수종드는 남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식기를 거세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게 왕의 부인과의 성적 접촉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 여자가 사제인 이교(異敎)에서도 그들을 돕는 남자들도 역시 거세되었는데, 예를 들면 에베소에 있는 다이아나(Diana) 신전에서 봉직하는 자들도 그러했다. 선천적인 고자나 내시나 환관 등의 특수 계급의 고자는 모두 장가를 들수 없도록 만든 사람들로서 성욕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욕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절제자들이다.

⭕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 대표적인 사람으로 동양의 오리겐(Origen)을 들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천국을 위하여'란 '천국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천국의 요청과 천국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독신 생활(獨身生活)을 하는것을 가리킨다(J. Blinzler). 이 구절에 대해 결혼한 사람이 천국을 위하여 결혼 안한 사람같이 된다고 하는 페이(F.R. Fay)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7:32, 33에서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아내를 기뻐할 일에 골몰하고 장가를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주께서 기뻐하실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말하기를 '참된 고자는 육체적인 쾌락(快樂)에 빠질 수 없도록 된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쾌락을 거부하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결혼을 천박하게 본 것이 아니라 결혼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 즉 하늘 나라 봉사를 위해 결혼을 희생하는 것이 고귀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이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규범이나 명령이 아니라 영적고자로 부름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선택적 규범이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받은 바 은사의 다양성에 따라 되어진 자발적인 선택의 일로 보고 있다(고전 7:7, 26).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나 그의 제자들은 독선 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보지 않았을(딤전 4:1-3;히 13:4)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차원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8:14;고전 9:5).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더 유용하게 쓰임받기 위하여 특별한 소명(召命)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만약 스스로 이러한 생활이나 훈련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우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고전 7:9) 바울의 권면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9:13]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 때에 - 결혼과 이혼에 관계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 말이다(2:7). 결혼의 신성함을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이제 그 결혼 생활의 고귀한 열매(아이들)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계신다.

⭕ 사람들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랍비들과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안수(按手)라는 관례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축복받게끔 하였다(창 48:14;민 27:18;행 6:6). 그런데 원래 이 안수는 상징성이 강한 행위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나, 길을 떠날 때 혹은 죽음이 임박하여 자손에게 특권과 축복을 시여(施與)할 때 주로 행해졌는데, 대부분 축복의 기원이 그 내용이었다. 이 안수의 축복은 유대교에서 전례되어 초대 교회에 정착되었고(행 6:5-6;딤전 4:14), 또한 오늘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병고침과 필요만을 위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의 축복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에서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하면서 안수받는 대상에 대해 마태가 7세 이하의 '작은 아이들'(*, 파이디아)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반해서 누가는 눅 18:15에서 신생아 또는 젖먹이 아이, 즉 유아(乳兒)를 가리키는 말인 '브레페'(*)를 사용하였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온 아이도 있었고 품에 안거나 어머니 등에 업혀 온 아이들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18:1-10의 말씀에서 당시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귀히 여긴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데서 나온 행동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 제자들이 꾸짖거늘 - 여기서 '꾸짖다'는 뜻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경고하다' 등의 의미로 엄히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온 자들(NIV, those who brought them)이었다(막 10:13). 이 때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어린아이들이 많이 몰려옴에 따라 예수의 권위가 손상된다거나 예루살렘으로 가던 여행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고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보다는 많은 병자와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나왔으므로 여전히 아이들에 대해서 귀한 보배라고 하는 인식(認識)이 없었던 제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이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고 축븍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priority)은 어른(남자)이며, 그 다음(secondary)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신체적으로 미숙하며 지적인 발달이 미진한 어린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여기며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성 경: [마19:14]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 용납하고...금하지 말라 - 예수께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기뻐 달려오는 일을 용납(容納)한 것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이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납하고'(*, 아페테)란 능동태 명령형으로서 '상관치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의 강한 요구이다. 그리고 '금하지 말라'의 원어 '메콜뤼에테'(*)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 '메' + 현재 명령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지금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을 제재하는 일을 당장 포기하라', '당장 허락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오스카 쿨만(O. Cullmann)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 말이 쓰인 것은 원시 기독교의 세례식(洗禮式) 용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 동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세례와 관련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14;행 8:36;10:47;11:17). 그러나 쿨만은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서 예수가 유아 세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신약의 교회가 이 기사를 기록하여 전하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린이 축복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부모의 믿음과 관련된 유아 세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당신의 나라를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그 마음과 믿음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순결하고 순수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다(18:3). 따라서 지금 신경질적으로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제어 하는 제자들은, 무엇보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습을 떨쳐버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이들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맞아들여야만 한다.

성 경: [마19:15]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13절). 그런데 그 소원들 중 '기도하심을 바란' 소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는데,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축복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는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도 하셨으나(요 11:42;12:30) 본 시점에서는 당신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기도없는 축복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어린아이 축복과 유아 세례의 기원이 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유아 세례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시대 때부터 큰 반발없이 자연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유아 세례에 관해 처음 증언한 사람은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겐(Origen) 및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다. 그 중 아레니우스는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180년경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과 어린이들과 소년들과 젊은이들과 노인들 등 자신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Hoer. *, xxii, 4)고 자신의 글에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자신도 유아 시절에 세례받은 경험이 있는 오리겐은 분명히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 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특히 롬 5:9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으며 유아 세례는 일종의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말했다(Hom, On Lev. viii, MPG,ii, 496). 한편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새로 회개하고 구원받은자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유아세례의 가능성을 확실히 예시하고 있다(행 2:38;16:15;고전 1:16). 더욱이 앞절(14절)에 언급된 바 있는 '메 콜뤼에테'란 말이 초대 교회 당시 빌립 집사의 선교 사역 중 구스 내시(內侍)의 세례 장면에 나와 있는 관계로 보아(행 8:36) 적어도 70년경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종교 개혁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 사람들에 의해 유아세례가 거부되기도 했지만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시행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유아 세례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의 신앙은 성인들보다 훨씬 직관적이요, 순수하다. 따라서 그들을 유아 시기부터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신앙고백할 때까지 거룩히 훈련시키고 죄를 씻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에 동참케 하기 위해 마땅한 바이다". 더욱이 개혁자(改革者)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성과 유아 신앙의 특이성 등에 근거하여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여하튼 유아 세례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을 일깨워 주는 것과 더불어 육아의 인격적 독립성및 신앙적 의속성(依屬性)에 의지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유아 세례를 집행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실로 교회는 마치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안수,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큰 사랑과 부족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훈육(訓育)하고 성결히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 거기서 떠나시니라 - 베레아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行步)를 재촉하셨다.

성 경: [마19:16]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본절의 문장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감탄사 '보라'(*, 이두)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의 돌발성 및 중요성을 일깨우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20). 아마도 본 사건은 유아 축복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발생했을 것이다.

⭕ 어떤 사람이 - 2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며, 막 10:17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에게로 달려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한 열정적인 구도자(求道者)였으며, 눅 18:18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관원'으로 알려졌다. 물론 '관원'이란 유대인들의 회당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징부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새번역에 의하면 그는 의회원 중 한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눅 18:18). 이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나날이 회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불신 세대(不信世代)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모두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13-15절) 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자 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분명히 깨우치기 위한 목적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 먼저 이 청년이 예수를 '선생'(*, ,디다스칼레)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예수를 율법 교사인 랍비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물론 이말은 '랍비'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한 것보다는 그 존칭의 의미가 약하지만(막 10:51;요 20:16), 어쨌든 그 청년은 예수를 자신의 문제를 능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마가복음(10:17)과 누가복음(18:18)에서는 질문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을 시작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고 대답하고 있다. 마태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오직 한 분이시니라"(17절)고 하였다. 여하튼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도스'(*)가 문장 어디에 붙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암 5:4, 6, 14).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의 도(道)에 의해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공적(公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분에 의한 선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 영생을 얻으리이까 - 청년이 지닌 치명적(致命的)인 과오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사실 '영생'이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지적이고 선택적이며 개방적인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떠한 선행을 쌓아야지만 메시야의 나라에서 그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 청년이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한 데는 그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구원관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있다. 랍비들 가운데는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는가하면 영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계명(어겨도 별 상관없는)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또는 노인들에 대한 공경(恭敬) 등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법을 예수께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은 바리새인들 처럼 규율을 준수하는 데에 있는것(doing)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절대 선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영혼과 순종의 마음을 지니는 겸손한 존재가 되는 데(being)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9:17]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평행구를 이루는 막 10:1과 눅 18:19 및 에브라임 사본에는 본문을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몇몇 학자들(Hoskyns, Allen)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와 연관지어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론적(存在論的) 차별로 인해 예수의 신성이 부정될까 하는 염려에서 의도적으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등)과 라틴 벌게잇 역(Valgate) 등에는 예외 없이 본서의 읽기를 따르고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차이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본 기사의 핵심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본 기사에는 예수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년에게 그의 질문을 되받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선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대상 16:34;대하 5:13;시 106:1;118:1, 29). 따라서 본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인 '선'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共有)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는 지금 선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짓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지니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본 대화를 기술한 마태의 표현은 세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마태의 표현은 마가-누가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중심 문제에 근접해 있으며, 앞의 기사들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청년은 천국에 속한 자들과는 엄청날 정도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막 :10:18이 예수의 무죄성(sinlessness)을 묻고 있지 않듯이 본절도 역시 예수께서 선한 것을 판단할 합법성(合法性)을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지 않다. 한편 마태, 마가-누가 그 어느 기자도 다른 전승을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D.A. Carson). 그렇지만 마가 우선설 때문에 만일 예수가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가능성(可能性)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고 마태를 비난할 수는 없다. 실로 마태는 마가복음을 의존하여 본문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본 사건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갖고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재구성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보고 문학 형식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독자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묻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수 없고 자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예수의 신성과 절대 무흠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자신과 연관시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의 잘못된 신앙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그 관원은 예수를 하나의 '선생', 곧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사고(思考)와 신앙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정녕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만 믿음을 통해서 의인(義認)된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여기서 '생명에 들어가려면'이란 16절의 청년의 질문과 짝을 맞추기 위한 예수의 의도적 문구로서 '영생을 얻으려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본문의 말씀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받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구약을 통틀어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그 속에 생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해 오고 있다(레 18:5;롬 10:5;갈 3:12).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다 지킴으로써 인간은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바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그 계명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모세의 십계명을 맹목적(盲目的)이고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계명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원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하신대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계명의 참 순종(순종)은 생명에 들어가는 참믿음의 결과요 증거이다.

성 경: [마19:18]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청년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게명이 이미 자신이 다 실천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계명인지를 예수께 묻고 있다. 관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수 많은 조항들을 덧붙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보편적이지 않고 실행하기 매우 힘들어 그 계명을 준수(遵守)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성 경: [마19:19]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살인하지 말라'부터 '부모 공경'까지의 다섯 계명은 출 20:12 이하와 신 5:16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이다. 그런데 마태는 막 10:19의 '속여 취하지 말라'는 말을 생략했는데, 이는 구약의 본문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의 본문은 출 20:1-16의 히브리 본문에 일치하도록 변형되었다. 또한 마태는 레 19:18의 '이웃 사랑'을 새계명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바울도 롬 13:8에서 십계명의 네 계명(6, 7, 8, 10)과 더불어 '이웃 사랑'의 계명을 덧붙였으며 그 당시 랍비들도 이웃 사랑의 계명이 율법을 요약한 것이라 가르쳤다. 예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페이(F.R. Fay)에 의하면 본절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두돌판의 계명들을 각각 요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즉 부모 공경은 제 5계명까지, 이웃 사랑은 제 6-10계명까지의 요약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 조항들이다. 즉 인간관계와 이웃에 대한 태도들을 규정(規定)하는 계명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 1-5게명보다 5-10계명을 더 강조하신 이유는 (1)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5-10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根菜)의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계명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행치 않았다(23:23). 따라서 당시의 율법주의에 빠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자세를 비판하신 것이다. 이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이 청년도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2) 영생이란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원'(*, 아이오니오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것 또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W. Barclay).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상태이며 이는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모두 낱낱이 준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하나님의 본체(本體)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마19:20]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 막 10:20에 의하면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붙어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의 종교적 행습(行習)은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의 이 대답을 통해서 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찾아볼 수있다. (1) 긍정적인 측면 : 세상의 열락(悅樂)에 빠질 만한 여러 조건들을 다 갖추고서도 그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지 않은 건전하고도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 실로 그가 완벽한 율법 준수자라고 자처한 것도 과장이나 위선에서가 아니라 열정(熱情)에서 실토한 순수한 자기 주장이었다. 마가의 보고(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이를 잘 됫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물은 것은 바로 그가 지닌 내면적 공허함을 해결하고 외형적 율법 준수로는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平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 '영적으로 철저히 고갈한 상태'였던 것이다. (2) 부정적인 측면 : 율법과 계명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의 사고 방식은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을 일일이 다 지키었으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정신은 잘 알지 못하였다. 즉 그는 율법의 의(義)로는 전혀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빌 3:6). 따라서 그는 율법의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얽매임으로써 아무런 의심없이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의'(自己義)를 주장했던 것이다. 실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 자기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 막 10:21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장담(壯談)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한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계셨다. 바울도 그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빌 3:6). 그러나 본문에서의 그는 자신이 계명을 다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유대 랍비들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일을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는 확실히 선한 일이란 율법에 명시된 계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율법 교육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다. 율법교육은 끝없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적(功績)이 되고, 영생한 삶으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여전히 영혼의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다(롬 7:24).

성 경: [마19:21]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온전하고자 할진대 - 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지(自意志)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依托)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5:48;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Banks). 왜냐하면 구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6:19-24).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本性的)으로 탐욕(貪慾)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 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 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다(6:19-21).

⭕ 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 따르라고 말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世俗的)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一體的)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갈 2:20).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성 경: [마19:22]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 청년의 질문]

⭕ 재물이 많으므로 -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로는 그는 현재에도 재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그 풍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로 인한 풍요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청년에게 있어서 재물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가치로서, 그의 미래와 희망과 운명이 걸려 있는 절대적 가치였다. 이처럼 영원한 세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들을 절대화(絶對化)하는 것은 영생과 천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 근심하며 가니라 - '조심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스 '뤼페오'(*)는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 하다' 등의 뜻으로, 막 10:22에 의하면 심각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띤 것'을 의미한다. 한편 16:3에서 이 동사는 궂은 날씨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연관하여 '못 마땅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lowering)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재물과 예수 사이이다(6:24). 사실 구약의 전통적 개념으로 보자면 부자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에 속향다(욥 42:10-12;잠 18:11). 그 청년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대로 물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함에 따라 영생을 보장하는 방법으로써의 물질포기에 대한 예수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장된 현재 때문에 보장될 미래와 영생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실로 이같은 선택을 한자에게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 중에 '근심하며' 또다시 영원한 허무(虛無)와 갈증만 있는 형식적 율법 준수의 길로 되돌아서 가고 말았다. 정녕 참된 평화는 자기의 소욕을 극복하고 예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만 주어진다(요 14:1).

성 경: [마19:23]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재물과 탐욕이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가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막 10:23에 의하면 부자는 바로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부자나 빈자(貧者)나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고 부자라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들일 경우에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정도가 지나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영생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나온 '어렵다'의 뜻인 부사 '뒤스콜로스'(*)는 소화되기 어려운 나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힘들게나마(with difficulty)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방법은 꼭 한가지, 즉 모아두었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것 뿐이다.

성 경: [마19:24]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 비유는 극단의 상징성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상징된 단어의 완곡한 이해가 종종 시도되었다. 그중 바클레이(W. Barclay)에 의하면 우선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짐승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약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한편 칼빈(Calvin)은 약대를 가리키는 말의 헬라어가 '카멜로스'(*)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의 헬라어는 '카밀로스'(*)인점으로 미루어서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벧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지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성 경: [마19:25]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 유대의 지혜사상(智慧思想)에 의하면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 그 실례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욥 5:17).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다(잠 19:7, 23). 그러므로 예수의 부자에 대한 경고(警告)와 재물 포기와 가난으로의 권유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 관원들 보다 못한 자신들 역시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염려로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다. 여기서 본문의 '심히 놀라'(*, 여세플레쏜토)란 말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는 뜻으로 제자들의 지금까지의 통념(通念)을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천국과 천국의 진리는 기습적이고도 충격적으로 각 개인의 심령에 돌입한다.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이는 제자들의 심각한 회의에 휩싸인 질문이다. 즉 만일 천국 입성이 부자에게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 이외의 사람들은 더더욱 어렵지 않겠느냐는 투의 놀람과 불만 섞인 물음이다. 사실 (1) 유대인의 통념상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Carr, Plummer), (2)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과 욕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De Wette, Homer A. Kent, J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강제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마19:26]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부자와 천국]

⭕ 저희를 보시며 - '보다'의 뜻인 헬라어 '엠브레포'(*)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과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제자들의 불안(不安)을 완전히 씻어버릴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가리킨다. 구원에 대한 염려로 떨고 있는 제자들의 내면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시는 구원자요, 참 스승이신 예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 여기서 먼저 '사람으로'라는 말은 (1) 사람의 판단으로(Frizsche, Edward) (2)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De Wette, Meyer)등의 뜻으로 사람의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의 행함, 즉 도덕적 선행과 자유 의지(自由意志)의 결행 등으로는 구원이 절대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는 약대비유의 참 의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을 공언(公言)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엡 2:8-10).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재물에 대한 의존력을 과시하시고 하나님 그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격려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제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은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대답에 의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로 이끌어질 수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구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약대를 바늘귀에 꿰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강권과 그분의 능력에 의해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적(意志的) 선택으로 인해 심지어 구원의 문에 들어가기 거의 불가능한 부자들 조차도 천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9:9;27:57;눅 19:9;행 4:32-37).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초월적인 경륜(經綸)에 따른 부르심을 믿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재물로 인한 장애요인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성 경: [마19:27]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 감탄사 '보라'(*, 이두)는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문구로, 인칭 대명사 '우리'(*, 헤메이스)와 더불어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는 가버린 부자 청년에 비해 예수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 자신을 주목해 보십사고 하는 말이다. 더불어 제자들이 말한 '모든 버린것'은 바로 부자 청년이 거절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써, 사실 제자듸은 예수의 부름을 받으면서 세상적인 욕구나 생존(生存)의 터전및 자신들의 친족과 옛 생활까지 모두 갈릴리 해변에 버려두고 예수의 고난의 길을 좆아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이다(4:20, 22;9:9;눅 5:11).

⭕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이 보상을 기대하는 잘못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Calvin, Carr),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이 영생에 대한 확증(確證)을 얻고자하는 마음에서 제기된 물음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Homer A. Kent. Jr).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본다. 만약 이 견해에 의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것들이 부자 청년의 재물과 명예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일이 과연 예수의 말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를 물은 부자 청년의 잘못된 구원관과는 달리 '행함'으로가 아니라, '버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생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버림으로써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 지닌 신비한 역설(Paradox)이다.

성 경: [마19:28]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발언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시는 그 언약(言約)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다. 즉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적은 기대를 가진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심으로써, 선을 행함으로 자신의 의(義)를 쌓아가는 바리새파나 엣세네파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제자 집단만이 올바른 것임을 인식하게 하신 것이다.

⭕ 세상이 새롭게 되어 - 심령이 거듭난 상태, 즉 중생(重生)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딛 3:5) '팔링게네시아'(*)는 만물의 재탄생(renewal of all things), 재창조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의 '새롭게 됨'이라고 하는 말은 RSV에 의하면 '새 세상이 와서'(in the new world)의 의미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참예(參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이 완전히 '중생의 과정'(rebirth)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실로 예수의 초림으로 만물의 변화(빛이 어둠을 몰아냄)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으로 그 변화는 완성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被造物)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설파하였다. 한편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1) 현존의 질서와 우주의 종말(24:35)과 (2) 자연의 대파국(大破局)(24:6; 7)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벅찬 사실은 모든 세대가 고대하고 바라던(사 65:17;66:22;벧후 3:13;계 21:1, 5) 세상종말에 도래할 만물의 변화(갱신)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현재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 이는 최후 심판의 비유의 서두(25:31)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정확한 시점이 명시된 이때는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 그가 '심판주로 보좌 위에 앉으실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의 '앉음'은 단순히 막연한 의미에서의 착석(sit)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judge)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좌에 인자가 앉으실 때는 메시야가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고 공의(公義)와 불의를 가르실 때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영광의 보좌'란 단순히 재림의 주이신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내실 보좌라는 뜻이 아니라 그 보좌 자체가 영광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F.R. Fay). 실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요, 만유의 주이신 예수께서 앉으실 보좌는 그분의 영광의 중심이요, 그분의 충만한 영광의 광휘를 나타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 '앉다'라는 말인 '카디조'(*)는 '앉게 하다'의 의미로, '임명되다', '승진하다'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심판주로서의 취임과 더불어 그의 제자 열 둘도 심판과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의 보조 심판자로서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인자와 함께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눅 22:30;고전 6:2). 한편 예수의 사도와 이스라엘 족속의 '열 둘'이 일치하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예수의 사후, 가룟 유다의 자살로 공백이 된 사도의 자리는 반드시 메꾸어 져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열 두지파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즉 (1) 열 두 사도들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 두 족속을 심판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2) 새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교회 전체(계 21:12-14)에 대해 심판을 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혹시 (3) 열 두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할 메시야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점이다(계 20: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야 되신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Baumgarten, France). 한편 본문의 '심판하리라'는 말은 선악(善惡)을 구분하고 형벌을 선언하는 심판의 주체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의 주권(主權)은 오직 예수 한 분만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심판하다'는 말이 '판결하다'는 뜻 외에 '통치하다'(시 9:4, 8) 또는 '감독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문의 이 말은 12제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덧입어 그분의 심판의 모든 절차를 보좌하고 대행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성 경: [마19:29]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내 이름을 위하여 - 막 10:29에 의하면 '복음을 위하여'로 또 눅 18:2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표현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이름에 해당하는 원어 '오노마'(*)는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즉 계시 또는 복음, 하나님 나라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이다.

⭕ 집이나...전토를 버린 자마다 - 여기서 예수의 권고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헌신(獻身)하는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당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세 가지 차원 (1) 광의적 의미의 가정(집) (2) 친족(자매, 부모, 자식) (3) 소유(전토) 등으로 구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하셨던 3중적 포기(창 12:1)와 비교할 만하다. 실로 예수 자신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그의 모친과 동생을 떠나시었다(12:46-48). 정녕 이러한 떠나는 믿음은 얻는 축복으로 넉넉히 보상될 것이다.

⭕ 여러 배(倍)를 받고(*, 헤카톤타플라시오나) - 문자적으로 '일백 배'를 의미한다(막 10:30). 이에 비해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을 '폴라플라시오나'(*), 즉 '여러 배'로 표현하였다(눅 18:30).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라고 할수 없다. 여하튼 예수의 이 언약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백 배 또는 여러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수를 먈한다. 실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집, 부모, 형제를 버린 자는 신앙 공동체(信仰共同體)의 일원으로서 영적 가족이 되어 수많은 신앙의 형제 자매를 얻게 될 것이다(12:49, 50). 또한 그는 비록 물질은 상실했지만 물질보다 더 영원하고 가치있는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 영생을 상속하리라 - 마가에 의하면 백 배의 축복은 이생에서 핍박과 더불어 받는 것이며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막 10:30). 성도가 이세상에서 자기 희생의 대가로 받는 축복은 물질적인 차원의 풍족함이며, 내세에서 받는 축복은 영적인 차원의 풍성함, 즉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 한편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그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5:5;21:38;25:34). 그러나 분명히 인식할 사실은 영생은 가정과 재산을 버린 것 그 자체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핍박받은 것에 대한 공로의 보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된 삶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성 경: [마19:30]

주제1: [천국 시민의 생활 규범과 영생의 조건]

주제2: [구원과 최후의 상급]

⭕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대한 교훈의 결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유대의 격언으로, 다음 장에(20:1-16)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서론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이 교훈과 비유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이격언은 메시야 왕의 통치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역전(大逆轉)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된 자, 나중된 자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날에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이 그러한 윤회(輪廻)로서의 역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2) 많은 교부(敎父)들은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Clarke).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본 장에서 그렇게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3) 어떤 학자는 서로가 먼저 된 자라고 주장하며 논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주장은 오히려 18장에서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하 두 견해가 가장 적절한 해석인듯하다. (4) 카슨(D.A. Carson)에 의하면 이 격언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낡은 유대식 관념(觀念)을 모두 부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5) 한편 또 다른 학자는 이 격언이 사용된 막 10:31과 눅 13:24-30에 의하면 나중이라는 의미가 천국 안에서의 '나중된 자'가 아니라 '그 나라밖에 있는 자'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먼저된 자'는 그 나라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은 이미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마지막 날 그 나라에서 쫓기움을 당할 것이요, 세리와 창녀등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를 따른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적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을 철저히 경계하시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온유와 순결한 영혼을 인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시민관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20:1]

⭕ 포도원.- 여기 "포도원"을 천국(교회)에 비유함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법이었다. 왜 포도원은 그렇게도 많이 천국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는가? 그 이유는, (1)팔레스틴 지방에는 무엇보다도 포도원이 많은 까닭이며, (2)또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을 심은 자 곧, 농부가 있음이, 마치 교회의 설립자(하나님)와 관리자(그리스도)가 계심과 같기 때문이다. (3)포도원은 목재를 얻으려 함이 아니고 열매를 얻기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영적 열매를 얻으려고 하시는 까닭이다.

성 경: [마20:2]

⭕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한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니 노동자의 하루 품 값이 될만한 돈이다. 약속을 받고 천국 노동에 들어간 자는 복음의 초청에 선참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천국 노동에 선참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노동을 독점하게 된 것처럼 교만해지면 안될 것이었다. 그들이 비록 고용 관계로 천국 노동에 들어간 듯하나 그것 역시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여 그들을 고용하심이 아니고 그들을 그런 노동으로 훈련시켜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며, 또 안주셔도 될 보상을 사랑으로 주시기 때문이다(눅 17:7-10).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진리를 모르고 교만하였으니 그릇된 것이다.

성 경: [마20:3]

⭕ 제 삼시. - 이것은 현대의 오전 9시를 이름이다.

⭕ 놀고 섰는 사람들. - 하나님 나라의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좋은 일을 하는 중에 있을지라도 놀고 섰는 사람과 같다. 그 이유는, 천국 노동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앙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무슨 일이든지 무용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요 6:28-29). 아! 시장같은 이 세상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본절에 관설된 "놀고 섰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가리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늦어도(세상 끝이 가까울지라도) 계속하여 사람들을 천국으로 불러 들인다(5-7 참조).

성 경: [마20:4]

여기 이른바 "너희도"라는 말은, 힘 있게 하는 말이니 그 주인이 저희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게 하는 주권을 보인다.

⭕ 상당하게 주리라. - 이것은, 적어도 그들이 일하는데 비례하여 공정하게 주겠다는 말씀이다. 그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이상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이 역시 그의 은혜로운 태도이다.

성 경: [마20:5,6]

"육시"는 오늘날 우리 시간의 12시를 가리키고, "제 십일시"는 오후 5시를 가리킨다. 이렇게 그 주인은 여러 차례 나아가서 포도원 일군을 얻으려고 애썼다. 이것은, 복음을 사람에게 주시어서 일을 시키시는(믿게 하시는)하나님의 사역을 비유한다. 혹이 말씀을, 전도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적용시키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은 어떤 일정한 시기에만 일군을 세우시는 것이 아니고, 그 어느 시기에든지 계속적으로 세우시어 그 일군의 충성하는 것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 경: [마20:7]

⭕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 과연 모든 사람들이 천국 노동 이외에 그 무엇을 하든지 수고한 값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수고하여 어떠한 수입을 가진다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보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세의 생명을 얻는데 하등의 효과도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성 경: [마20:8,9]

⭕ 저물매...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 누구든지 세상 끝에 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이름이다.

성 경: [마20:10-12]

⭕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원망하여. - 이것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상으로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을 시기하였으니 사도 행전을 보면 그 사실이 드러난다. 눅 15:25-32을 보면, 거기에도 역시 유대인의 시기가 비유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눅 15:25-32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성 경: [마20:14,15]

이 두 귀절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공의, 그의 무상권, 그의 자비 이 세 가지 성질에 대하여 말한다.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심이고,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 란 말씀은 그의 무상권의 표시이고, "내가 선함으로네가 악하게 보느냐" - 란 말씀은, 그가 후에 온 자(이방인)도 누구보다 못지 않게 대우하시는 자비를 가리킨다.

성 경: [마20:16]

나중되었던 자가 하나님의 후한 은혜를 받는 경우는, 교회 역사상에 많이 있다.

성 경: [마20:17]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하실 때에 -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신 때를 가르킨다. 한편 29절을 참고해 보면 이 순간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머물럿던 곳은 여리고였음을 알수 있다.

성 경: [마20:20-21]

마가복음에 따르면 (10:35),예수님께서 요청한 자는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머지 열 제자가 그들에게 분개한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24절).

성 경: [마20:22]

⭕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성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폭력과 정복을 통하여 이 땅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나라는 사람들의 눈에 실패처럼 보이는 에수의 죽으심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밀히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물론 예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영광과 권능으로 임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에 예수님이 심판주로 임하실 때를 말한다. 잔을 마실수 있느냐는 말씀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할 수 있나이다" 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말은 스승을 위해 수치와 박해를 견디어 내겠다는 어느정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성 경: [마20:25-27]

여기서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다.하나님을 모르는 세속 사회에서의 세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부패하게 되어 지배자들은 쉽게 폭군이나 압제자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그러한 권력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는 지배자이신 예수 자신이 섬기는 종이시다(28).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위대하다는 말은 예수의 성품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사람에게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성 경: [마20:28]

예수는 일생을 봉사받기 보다는 봉사하시면서 사셨다. 남을 섬기는 삶의 가장 감동적인 실례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장면이며 봉사의 극치는 그 분의 죽으심에서 보여 졌다.

성 경: [마21: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 갈릴리와 베레아 지경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3차에 걸쳐 자신도 이미 예고한 바대로의 수난(受難)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두 소경의 눈을 고치신(20:29-34)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24Km로,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룻동안에 걸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나 예수께서는 해발 약 900m의 이 군사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에 도착, 하루 밤을 보내신 후에 그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보낼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의 메시야되심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끝내는 고난의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바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과 대속의 길이라고 하는 비장(悲壯)한 각오를 더욱 깊이 마음에 새기는 장엄한 순간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 감람산 - 해발 약 800m에 위치해 있고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이 감람산(혹은 올리브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 정도 그리고 시온 언덕(the hilof Zion)보다 약 30m 정도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을, 남쪽으로는 넓은 유대 광야를,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성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주요 통행로(즉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감람산은 슥 14:4에서 메시야 대망과 연관이 되고 있는데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가 그 내용이다. 그래서 24:3에서는 감람산이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개림이 예언되는 장소로 등장하고 있다.

⭕ 벳바게 - 마가와 누가의 본문에는 '벳바게와 베다니'가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벳바게와 베다니가 동일한 지명(地名)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Barcley). 그러나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시기 전날 밤에 이미 베다니에서 기숙(寄宿)하셨으므로(요 12:1, 12) 이곳은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다. 즉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인근 마을이며, 감람산 동편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곳은, 아직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케프르에트 투르'(Kefret Tur)가 이곳과 동일시 되고 있다.

⭕ 두 제자를 보내시며 - 이 두 제자가 (1) 베드로와 요한(눅 22:8), (2) 야고보와 요한, 혹은 (3) 고침을 받고 예수를 따랐던 여리고의 두 소경, 혹은 (4) 두 제자중의 한사람이 나귀의 임자일 것이라고 하응 추측(Zahn) 등이 있으나 어느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어 나귀를 끌어 오게 하신 이유에 있다. 즉 두 제자를 보내신 이유는 (1)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나귀를 구하러 갔을때 이미 준비된 나귀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하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장래 일을 예견(豫見)하시는 예수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2) 거리상으로는 예루살렘까지 약 3Km가 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유의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슥 9:9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들의 선생인 예수께서 바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더욱 더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3) 지금까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숨겨왔던 자세와는 달리 이제 그 사실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 공개하심으로써, 이미 3차에 걸쳐 예고한 바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게 될 인류구속의 사역이 임박해왔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성 경: [마21: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나귀와 나귀 새끼 - 두 마리를 언급하고 있는 마태의 본문은 70인역(LXX)을 참조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서의 슥 9:9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 표현되고 있고, 마가와 누가에서도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하여 한 마리의 나귀만을 언급하고 있다. 모든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나귀 새끼를 탄 것을 증거하고 있으므로 마태의 본문에서의 어미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탄 사람이 없는 그 나귀 새끼가 순순히 따라오게 하기 위한 용도로서 언급되었을 것이다. 한편 나귀와 나귀 새끼에 대한 마태의 표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이 있다. (1) 나귀는 오랫동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온 유대 백성들을 그리고 나귀 새끼는 이러한 멍에를 메지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이방인을 상징한다(Jerome, Justin, Alford). (2) 나귀는 예수 이전의 모세를 통한 신정정치(Theocracy)를, 나귀 새끼는 예수 이후의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해 형성된 어린 교회를 상징한다. 또한 예수께서 나귀를 탔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나귀는 1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이 구약 (창 49:10-12;민 24:17;사 9:6;11:1 이하;미 5:2)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해온 메시야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슥 9:9의 메시야 예언을 완성시키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 동물이다. 또한 2차적인 의미로서의 나귀는 초라한 짐승이어서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일(왕하 9:13) 이외에 이것을 탄 유대왕이 별로 없었던 점과, 세속적인 통치자들은 본래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한다고 하는 점과 비교해서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바대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분의 순결한 품격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속성의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바로 순결한 평강과 겸손과 섬김의 왕이며 이는 예수가 참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 경: [마21: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본문의 경우처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 호 퀴리오스)라고 칭하신 것은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말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1) 마가와 누가에도 나타나고 있는 이번 경우의 '주'(Lord)는 '소유주'(owner)를 의미할수도 있다. 그러나 눅 19:33에 의하면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그 임자들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나귀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2) 여기서의 '주'(主)는 '주 여호와'를 암시하는 말로 나귀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소유주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가장 친한 짐승이라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온 해석은 (3) '주'라는 말이 나귀의 소유주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주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서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신적 속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기 위한 자기 계시의 하나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점점 더 명백히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한 그의 후기의 사역기간의 특징과도 잘 부합(符合)된다(D.A. Carson). 예수는 수난의 일주간을 앞두고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주이자 왕이며 따라서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의 권위에 순복(順服)해야 함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써, 자신을 '주'로 부르시고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게 하셨다.

⭕ 즉시 보내리라 - 예수께서 이미 나귀를 예약해 놓으셨기 때문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에 따라 나귀를 즉시 보냈다고 하는 추측(Lange)은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벱바게와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베다니에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친구가 있었을 뿐더러(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등) 그 나귀의 주인도 역시 예수의 숨은 제자로 예수께서 나귀를 쓰시려는 용도(use)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보냈다고 하는 견해(Carr)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즉시 보내리라'는 말씀은 공생애의 후반기를 보내는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성과 신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또 하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성 경: [마21: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선지자로 이루려 하심이라 - 마태가 예수의 사건이 구약성경의 본문의 성취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한 문구이다(1:22;2:15;4:14;8:17; 12:17 ;21:4;27:9). 여기서도 마태는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일이 바로 예수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實現)하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예수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바로 그 예언을 성취시킨 일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다. 몇몇 사본에는 '선지자'라는 말 다음에 '스가랴'나 '이사야'가 덧붙어 있다.

성 경: [마21: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본절의 상반부 '시온 딸에게 임하나니'는 이사야 62:11를, 후반부는 슥 9:9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예언서들에 대한 정확하고 자구적(字句的)인 인용이 아니라 다분히 신학적 관심과 의도가 첨가된 것으로, 예수의 나귀 입성을 사 62:11와 슥 9:9에 담긴 상징적인 두 의미로써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이 깃들인 마태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사 62:11의 구원 선포에 의하면 구원자는 마치 개선장군이나 정복군주 또는 강력한 통치자의 모습으로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 입성하고 있다. 한편 슥 9:9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 온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겸손히 입성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사사(士師)들과 평화를 전하는 전령(傳令)들이 사용하던 짐승인 나귀(삿 5:10;10:4)를 타고 오신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가 모든 피조물(被造物)들의 고대하던 진정한 구주이며 평화를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 시온 딸 - 예루살렘 및 그 주민 전체를 가리키는 구약의 시적(詩的) 표현이다. 특히 '딸'이라고 하는 표현은 예루살렘이 이미 적(敵)으로부터 침입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당한 것에 대해서 수치와 모욕을 당한 처녀의 심정으로 그곳 주민들을 상징한 것에서 유래된 말로 '바벧론의 딸'(사 47:1), '두로의 딸'(시 45:12)의 표현도 있다. 한편 '시온의 딸'을 거론하고 있는 사람의 의도에는 시온의 딸이 '누가 오는가를 알았을 때 크게 기뻐하리라'고 하는 생각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멸망의 참담한 폐허(廢墟) 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과 평화의 소식을 가지고 다가오는 메시야를 무관심과 신앙의 상태에서 깨어나서 일어나 환영하라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또한 시온의 딸이 신약에서의 새이스라엘, 즉 교회에 적용되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곧. 헬라어 '카이'(*)는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이다. 어떤 사람은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여 예수께서 '나귀 그리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번갈아 타시고 입성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곧'으로 해석된 '카이'는 본래 '그리고'의 뜻인 히브리 접속사 '와우'(*)를 직역한 것으로 히브리어 '와우'는 '그리고'(and)의 뜻도 있지만, 보다 상세한 내용은 부연(expatiation)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히브리적 병행법)에 대해서 랑게(Lange)는 본문의 경우의 '곧'(카이)의 용법은 '보다 자세한 묘사를 위한 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더구나 출발지인 벱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3K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 나귀를 갈아 탈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예수께서는 한 마리의 나귀만을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셨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 헬라어 '휘포쥐기온'(*)은 '짐을 나르는 짐승'을 의미하는데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나귀(donkey)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막 11:2에는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으로 되어 그 순결성과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마태는 그 나귀가 아직 멍에를 메고 있지는 않으나 곧 무거운 짐을 메야 할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귀는 평화와 고난을 동시에 상징하는 짐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시(豫示), 상징하고 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멍에를 메야 할 나귀와 참으로 유사한 것이었다.

성 경: [마21: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제자들이 명하신 대로 하여 - 이 구절은 제자들의 전체적인 순종을 보여주는 부분으로서 평행구절인 막 11:4-6에서는 이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성 경: [마21: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 본문에서의 문제는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아우톤'(*)이라고 하는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과연 그 지시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우톤'이 (1) 나귀의 복수, 즉 나귀와 나귀새끼(donkey and her colt)를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와 (2) 나귀 위에 쌓아 놓은 겉옷들(garments)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전자를 지지하는 스트라우스(Strauss)는 예수께서 두 마리의 나귀를 함께 타셨다고 주장하며 프릿체(Fritzsche), 플렉(Fleck#8), 알포드(Alford) 등은 예수께서 두 마리의 짐승을 번갈아 타셨다고 주장한다. 후자를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워즈워드(Wordsworth), 메이어(Meyer), 카스탈(Castal), 베자(Beza), 플루머(Plummer)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두번째 견해가 설득력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성 경: [마21: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무리의 대부분(*, 호 데플레이스토스 오클로스) - 정관사가 붙은 절대 최상급(最上級) 명사로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의 의미이다. KJV, NIV는 모두 '매우 큰 무리'(very great multitude;KJV, very large crowds;NIV)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9절에 의하면 예수의 앞에서 가고 또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데, 요 12:12,13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 순례의 길을 나선 무리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 구분될 수 있는 두 무리들이 모여 환호의 물결을 이루었으며 또한 이들은 메시야를 대망(大望)하는 열정이 가장 고조된 상태에서 예수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 겉옷을 길에 펴며 - 7절에서 제자들이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은 것은 안장(鞍裝)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심히 부끄러운 가난의 표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J. Calvin). 그러나 제자들의 이 행위, 즉 겉옷을 나귀에 얹어 놓는 것은 나귀를 탈 사람에게 대한 엄청난 경의와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8절에서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편 이와같은 사례는 왕하 9:13에서 예후를 왕으로 선포할 때의 경우가 있었다. 여하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온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찬 이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壓制)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정권을 잡을 통치자로서 환영하였던 것이다.

⭕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편 이와 같은 선례(先例)는 B.C. 165년에 성전을 재봉헌하고 시몬 마카베오가 입성하던 때에도 있었다(마카베오상 13:51;마카베오하 10:7).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막절에 야외에 초막을 짓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Lightfoot), 또 어떤 사람은 이 나뭇가지가 초막절기에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축제용의 작은 가지, 즉 '룰랍'(lulab)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막을 만들기 위한 나무는 달개지붕(lean-to)을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큰 가지들이며 나귀 앞에 깔아논 가지들은 길가에 심어놓은 종려나무의 잔가지에 해당한다(요 12:13). 여기에서 '베다'의 뜻인 '에코프톤' (*)과 '펴다'의 뜻인 '에스트론뉘온'(*)은 모두 미완료형태의 동사로, 이 동사가 나타내고 있는 동작이 단 한 번에 끝나버린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를 옹위하는 무리들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어 나귀가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는 것에 따라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나무에서 가지들을 꺾고 그것들을 자꾸 길에 깔아놓는다고 하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낸다.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고대의식중의 하나였다. 한편 가지를 흔든 이날을 기념하여 초대 기독교도들은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불렀다.

성 경: [마21: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소리 질러 가로되 - 무리의 환호 소리는 시 118:25,26에서 인용된 말이다. 시 118편은 대찬양시(the Great Hallel), 즉 시 113-118편의 일부로서, 장막절, 수전절, 유월절 때 사용되었다. 또한 무리들의 이 환호 소리는 예수 탄생시 천군 천사들이 불렀던 찬양과도 흡사하다(눅 2:14). 한편 이들이 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질러'(눅 19:40) 인류 대속(代贖)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삼하 14:4;왕하 6:26)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간절한 간구로 사용되었다(Gundry, use of O.T.pp. 41-43). 차차 이 말은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기쁨, 환호등의 의미가 함축된 일종의 구호(口號)가 되어 찬양의 송영이나 기쁨의 환호로 이해되게 되었다(렘 31:7).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쁜날에 해당하는 장막절의 일곱째 날을 '호산나의 날'(Hosanna Day)이라고 부른다.

⭕ 다윗의 자손이여 - 마태에 의해 삽입된 호칭으로 그의 유대독자들을 의식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어떤 사람도 결코 부정할수 없는 확고한 메시야에 대한 표현으로서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대망(待望)해 온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야 만세'의 뜻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말을 예수에게 대해서 사용한 것에 대해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15절).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3절의 `주'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시는 이'라는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이 시 118:26은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서로를 향해서 하는 인사말이었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보일 무렵부터 기쁜 마음으로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성 경: [마21:1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장면(눅 19:41)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아마도 현재 '성 스데반의 문'이라고 불리우는 곳, 즉 성전 바깥 뜰로 들어가는 북쪽 입구의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을 것이다.

⭕ 온 성이 소동하여 - 마태만이 언급한 이 소동에 대해 요 12:19에서는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고 표현하여 예수에 관한 소문으로 온 성이 들끓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큰 명절을 지키기 위해 각 도시들에서 올라온 순례자의 무리가 약 200-300만명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혼잡한 생활 가운데서 예수의 갑작스런 출현은 예루살렘을 극히 혼돈스럽게 했을 것이다. 전에 박사들의 예기치 않는 방문으로 소동한 적이 있는(2:3) 이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군사지도자들은 '뜻하지 않은 왕의 출현'으로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고 마음이 동요(動搖)되었으며 불안에 떨게 되었다.

⭕ 이는 누구뇨 - 이 말은 예수가 실제로 예루살렘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Bonnard). 이 말은 이런 큰 소동을 불러 일으킬 만한 사람인 이 사람의 정체(正體)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성 경: [마21:11]

주제1: [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 무리가 가로되 - 예수의 정체성(正體性)에 관한 잘못된 대답, 즉 '선지자 예수'를 말한 것으로 보아 그 무리들은 갈릴리나 베다니로부터 예수를 좇아온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종려가지를 흔들고 예수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행렬 밖에 있던 사람들로 예수를 메시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 이들의 대답에는 결코 선지자가 나올 수 없는 천한 곳인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선지자가 종말론적인 선지자(the eschatological prophet)를 의미한다고 하는 암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대답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은 저를 메시야로 받들고 있으나 실제로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는 강한 부정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적(異蹟)을 행하고 그 가르침에 권세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7:29)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만 또 한 사람의 선지자로 이해했을 뿐 고대(苦待)해 온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성 경: [마21:1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성전에 들어가사 - 마태와 누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에,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입성하신 그 다음 날, 즉 월요일에 행해졌던 사건이다. 이 성전은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歡心)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벧의 제 2성전을 개축한 것으로 주전 19년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에 헌당되었고 주후 64년에 이르러 완전히 새성전으로 완성되었으나, 얼마있지 않아(주후 70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멸되었다. 한편 예수께서 들어가신 곳은 '지성소'(*, 나오스)가 아니라 '성전'(*, 히에론) 가운데서도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셨다. 이방인의 뜰은 지성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는 특별히 먼 곳에서부터 와서 예배를 드리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필요한 짐승, 나무,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賣買)되고 있었다.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 예수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권위를 위임받고 있었다. 시장이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려는 예수의 정화 행위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1) 대제사장 등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칼빈(J. Calvin)에 의하면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도입되었다고 한다. 상인들은 장사할 장소를 얻기 위하여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데, 이 돈 중의 일부는 최종적으로 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돈궤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따라서 이 소매 상인들과 제사장들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그들의 상행위는 제사장들의 묵인과 권장 아래서 점차 커져갔는데, 특히 큰 명절 때에는 부당하게 가격을 매겨서 비싸게 물건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2)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희생제사를 거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전 정화 행위를 통해서 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의 경배가 얼마나 구역질 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셨으며 성전이 물건 판매대와 환전대가 놓인 장터로 변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묵인할 수 없는 신성 모독(冒瀆)임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을 드릴 경우 그것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 대부분 성전에서 파는 제물을 산 경우는 의심할 바 없이 깨끗하고 완전한 제물로 인정되는 반면에 집에서 가져온 제물들은 흠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실제로 성전에서 파는 제물들이 흠이 있고 잘못된 제물일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까다로운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하여 흠이 있는 제물을 그대로 제단에 바치곤 하였다.

⭕ 돈 바꾸는 자들 - 출 30:13;레 27:3에 의하면 속죄제물의 값으로 다른 나라의 돈을 가져오는 것은 불법이었다. 돈 바꾸는 자들은 로마와 헬라의 표준 화폐를 성전의 화폐로 바꾸어 주었는데 이 화폐로 그들은 반 세겔(shekel)의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17:24-27).

⭕ 비둘기 파는 자들 - 비둘기는 문둥병자가 치료를 확증받기 위해서(14:22)또는 여인이 해산한 후 정결례를 행하기 위한 속죄제물로(레 12:6-8) 이용되었다. 그리고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드리는 제물이었다(레 5:7). 여하튼 비둘기 등의 제물은 주로 여인들에 의해 판매되었다고 한다.

성 경: [마21:1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 사 56:7의 인용으로 `만민의'라는 용어가 빠진 문구이다. 이사야의 본문은 이방인의 구원과 그들의 천국에서의 동참을 선포한 것으로 민족주의적인 패쇄성이 극복된 문맥이며 하나님께서 성전을 이전 영광으로 회복하셔서 세계 도처의 온 민족들이 그곳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의 문구에서는 성전의 본래적인 모습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와 예배 등이 행해지는 경건의 장소라고하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 일컬음을 받으리라(*, 클레데세타이). - 이는 `부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칼레오'(*)에서 유래한 말로 공공연히 선포되어 이젠 공식적으로 선언된 사실을 뜻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와 인준으로 인해 영원한 진리로 인정되었음을 시사한다.

⭕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 렘 7:11의 인용으로, 예레미야는 성전이 악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 형벌로서 성전이 멸망당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유대에 있어서 강도의 굴혈은 보통 광야의 암벽에 있는 것으로 약탈자 혹은 열혈당원 등의 피난처가 되는 곳이다. 렘 7:10에 의하면 사람들은 도적질과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우상숭배를 일삼으면서도 여호와의 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 주민들 중에도 예루살렘 안에서의 자신들의 부당한 행위는 성역(聖域)이라는 미명 하에 영원히 보호되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모든 장사꾼과 결탁한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여질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도 또한 멸망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성 경: [마21:1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소경과 저는 자들이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 마태만이 성전 안에서 아이들이 호산나를 다시 외치게 된 치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눅 19:47에서는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쳤다고 보고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는 예수께서 영적 소경이며 불구자들인 매매하는 모든 자들은 내어 쫓으시고 육신의 불구자들은 맞이하여 영을 고쳐 주는 기이한 일을 행했다고 보고하였다. 즉 예수께서는 고침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성전을 기도하고 찬양하는 집으로 만들게 하셨다. 또한 출입이 제한된 신체장애자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고침을 받게 함으로써 성전에 대한 그의 우위권, 즉 자신이 '성전보다 큰 이'(12:6)임을 입증하셨다.

성 경: [마21:1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 - `이상한'의 뜻인 '다우마시아'(*)는 비상한, 놀라운, 찬양할 만한 일들의 복수형으로서, 예수가 육체의 불구자들을 고치신 일 뿐만 아니라 성전을 숙정하신 일까지도 백성들에게 찬양받을 만한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가 행한 이러한 일련의 기이한 일들은 마땅히 메시야의 할 일들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전에서 소리질러 하는 아이들 - 성전의 경내(境內)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성전의 거룩함에 대한 모독이므로 즉각적으로 성전의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승리의 입성시의 '호산나' 찬미소리를 다시 한번 재현(reappearance)하기 위하여 마태에 의해 특별히 첨가되었다. 예수를 반대하는 대적자들이 아이들이 소리지른 것 그 자체를 제지하지 않고 다만 외쳐진 말의 내용에 대해서 분노한 사실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W. Argyle). 한편 소리를 지른 '아이'의 뜻인 '파이디온'(*)은 젖먹이 아기인 `네피오스'(*)와는 달리 성전에서 율법과 탈무드를 배울수 있는 5세 이상의 아이들을 가리킨다. 잠 20:11에 의하면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이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호산나 찬미를 기쁘게 여기셨다. 이미 소경들(9:27;20:30)과 무리들(12:23), 이방 여자(15:22), 예루살렘의 무리들(9절)로부터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 칭호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이제 아이들에게까지도 찬미 받으심으로써 명실공히 전유대인으로부터 왕이시요, 메시야라고 하는 고백을 받으셨다.

⭕ 보고 분하여 -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분노는 예수가 성전을 숙정하신 일과 성전안에서 불구자들을 고치신 일 때문에 발생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이적으로 인해서 예수가 사람들로부터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수난 예고(16:21;20:18)에서 언급된 소위 산헤드린(sanhedrin) 공의회원들로 종교, 경제, 사회, 교육 등의 각 방면에서 고유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들의 감정을 자극시킨 성전에서의 이 사건은 곧 예수의 수난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마21:1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 시 8:2의 인용이다. 일부의 해석자들은 시 8편이 메시야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는 견해를 피력(披瀝)하기도 하지만 이 시 8편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적용, 해석하심으로써 분명히 메시야적성격을 가진 것으로 취급(고전 15:27;엡 1:21;히 2:6)하셨다(F.J. Maloney). 다윗의 이 시에는 원래 모든 혀가 침묵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빠는 젖먹이들을 들어 당신의 능력을 선포하실 것이기 때문에 따로 대변자가 필요 없다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J. Calvin). 이처럼 이 시 8편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삼은 고백이었으나 예수는 이것을 자신, 즉 메시야에 대한 온전한 찬미로서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한편 앞 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들 및 서기관들과 대조되고 있는 이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이라는 말은 11:25의 예수의 말씀('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을 상기시킨다. 한편 히브리어로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인 '올랄'(*)은 노닐 수 있을 만큼의 큰 아이를 의미하며 `야나크'(*)는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 여인들은 아이가 3살이 될때까지 젖을 먹인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본문에서 나온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을 간신히 노래할수 있는 나이인 3살이상의 아이들로 보려는 델리취(Delitzsch)의 의견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들의 찬미는 그들이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부를 찬양을 암시하며 예수는 이들 속에서 유대의 오랜 불신앙을 버리고 참된 신앙 즉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새이스라엘을 본다고 하는 어떤 학자들의 의견은 적절하지 못하다. 예수의 말씀은 성숙한 어른의 찬양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 19:40) 자기 스스로 찬양을 준비(準備)하시고 완전케 하신다고 하는 의미이다. 또한 젖먹이 아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면 이미 말할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호산나' 찬양이 노래되어야 함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분히 여겨 이를 갊'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 구약의 본문(시 8:2)에 의하면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報髓者)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다'이다. 이 중에서 '권능을 세우다'(founded strength)이란 말씀이 70인역(LXX) 헬라어 성경에서는 `찬송을 완전케 하다'(perfected praise)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마태의 본문에서는 구약과는 달리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힘찬 그리고 확신있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큰 찬송은 무지하고 불법한 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으나 동시에 예수에 의해 그들의 말을 잠재우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여기서 `온전케 하셨나이다'의 뜻인 헬라어 `카타르티조'(*)는 본문에서 중간태형으로 쓰여서(스스로를 위한 찬미를) `온전케 하다' 혹은 `준비하다'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고 있는 레위자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로 하여금 당신만을 찬양하시도록 준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젖먹이 아이들로 하여금 그의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시편 8편의 본문에서는 아이들의 합창이 대적자들의 입을 잠잠케 하지만 본문에서는 예수의 말씀이 그들을 침묵하게 하셧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찬미를 기쁘게 받으심으로써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찬양(`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사실, 곧 그들의 영적 무지를 들어 그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성 경: [마21:1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성전 정화(淨化)]

⭕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유하시니라 - 아마도 예수는 감람산 동쪽 기슭의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의 집이 위치한 베다니에서 그의 수난의 마지막 며칠 밤을 유하셨던 것 같다(26:6;막 11:19;눅 21:37). 그가 예루살렘 성밖에서 숙박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1) 예루살렘성이 순례자들의 방문(訪問)으로 무척 붐볐기 때문에 베다니로 나오셨다고 하는 설이다. 로마 식민 시대 당시 유대 예루살렘의 명절에는 사람들이 약 270만명 정도나 모였다고 한다. (2) 하나님이 정하신 때 즉 그가 체포, 구금되고 사형의 시간이 될 때까지 유대 산헤드린이 그를 체포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위험한 예루살렘 성 안 보다는 성밖에서 유하셨다고 하는 설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베다니에서 밤을 보내셨을 것이다.

성 경: [마21:1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 시장하신지라 - 이 구절 때문에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이른 새벽에 나왔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와 베다니의 한 집에서 유숙하신 것이 아니라 길에서 노숙(露宿)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또한 '시장하다'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의 '인성'(人性)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께서는 신(神)이시며 인간의 육체는 임시로 취하셨기 때문에 아픔, 배고픔, 죽음등의 고통을 느끼시지 못한다고 하는 가현설(Docdtism)을 반박할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성 경: [마21:1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 유대 율법에 의하면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다고 하면 그 열매를 따먹는 일이 허락되어 있었다(신 23:24,25). 또 톰슨(Thomson)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길가의 무화과나무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대로 취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이 열매를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Hendriksen). 여하튼 무화과나무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왕상 4:25;왕하 18:31)으로 나무 자체가 우람하고 보기에 아름답다. 밑 둘레의 굵기가 약 1m, 높이가 5-6m나 되며 가지가 8-10m의 너비까지 뻗기 때문에 그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휴식의 장소로 이용되곤 한다(요 1:48). 또한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었을 때 그 열매도 함께 열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그 열매를 일년에 두번(태양력으로 6월과 9월) 혹은 세 번(6월과 8월과 12월) 딸 수 있다고 한다.

⭕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 푸른 빛깔을 띤 무화과열매들은 대개 6월까지는 먹을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익지 않아서 6월에 먹기에는 매우 껄끄럽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다. 따라서 보통잎이 있다는 것은 비록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매는 맺혔음을 암시한다. 마태는 이런 모든 것들을 그의 유대인 독자들이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라고 간결하게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막 11:13에 의하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본문의 해결점이 된다. 즉 그때가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왜 예수가 이 특별한 나무, 곧 잎이 무성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나무에 갔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 나무의 '잎들'은 바로 그것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자신의 시장기를 메울 수 없으셨던 예수께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실물 설교의 기회를 포착(捕捉)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했는데, 그것은 제 철이든 아니든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마치 열매가 있는양 무성한 잎만 자랑했지 실상은 아무 열매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6월에야 비로소 열매맺는 무화과나무임에도 불구하고 4월에 벌써 그 잎을 냄으로써 '열매'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리게 했던 이 나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1) 선민이라고 하는 자의식(自意識) 속에서 형식에 불과한 희생제사를 위해 부지런히 성전을 오고 갔지만 단 한 번의 진정한 희생제사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2)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신앙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이율 배반(二律背反)적인 생활 태도를 상징한다. 이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3) 크리스찬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사랑의 계명들은 실천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를 찾는(7:21) 오늘날의 수 많은 교인(churchman)들을 가리킨다.

⭕ 이제부터 맺지 못하리라 -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에 있는 여러 나무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애용되고 있는 나무였으며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곤 했다(호 9:10;율 1:7). 또 이 나무는 언약의 땅을 가리켜 '무화과나무의 땅'이라고 하는 표현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며(신 8:8), 그 열매는 가나안으로 정탐(偵探)갔던 사람들이 그땅의 비옥함과 번영을 증명하기 위해 가져온 산물(産物) 중의 하나였다(민 13:23). 그리고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평화와 안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왕상 4:25;미 4:4;슥 3:10). 그러나 여호와께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시고 쳐서 죽게 하실때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해당한다(시 105:33;렘 8:13;호 2:12). 따라서 예수의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바로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박해 왔음을 알리는 선포이다. 그가 삼년을 이곳 예루살렘에 와서도 열매(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제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나무(예루살렘)를 찍어버리겠다고,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던 것이다(눅 13:7).

⭕ 곧 마른지라 - 마가복음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그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곧 마르지 않았다. '곧'의 뜻인 부사 '파라크레마'(*)는 물건을 살때 그 물건과 함께(`파라') 돈('크레마')을 지불한다고 하는 즉각적인 현금지불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 무화과나무는 예수의 저주가 말해지는 동시에, 비록 그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연장일뿐 이미 그 본질상 마른 나무로 바뀌었다(교환)고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사실은 결국 예수께서 지니신 신적 능력과 위엄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에 인류의 심판 주로 오셔서 그 외모(잎)가 아닌 내면(열매)의 유무(有無)를 관찰하시고 그에 준해 심판하실 것이다.

성 경: [마21:2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

⭕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 막 11:21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을 생각해 내었다. '이상히 여기다'의 뜻인 '다우마조'(*)는 1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異常)하고 의아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워하거나 찬양한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Moule, Idiom Book, p. 207).

⭕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부사 '포스'(*)는 왜(why)의 뜻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how)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마를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과 찬미가 섞인 물음이다. 그들은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주에 의해서 그 나무가 그대로 말라버린 눈 앞의 사실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마21:2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

⭕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믿음이 있고'는 가정법 현재시상이며 '의심치 아니하면'은 가정법 부정과거시상의 중간태로,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계속적인 결단을 의미하며, 의심은 스스로와의 싸움이 과거의 단 한 번의 행동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 눅 17:6에는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로 나타고 있는 이 실례는 마 17:20에도 등장하고 있다. 17:20에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적은 믿음의 분량을 강조한 것에 반해서 본문에서는 의심을 물리치고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Hill). 이 산이 뽕나무를 상징하는 것인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인지 혹은 감람산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관한 여러의견이 있으나 감람산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런데 혹자는(Lane, Mark. p. 410) 이 감람산이 사해와 붙어있다는 이유로 예수의 이 말이 슥 14:4과 관련 있다고 보면서, 도래하는 종말론적 통치를 위해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예수로부터 요청받고 있다고 하는 견해를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스가랴가 감람산을 바다에 던지우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마21:2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응답받는 믿음의 기도]

⭕ 기도할 때에 다 받으리라 -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사건을 통해서 종말이 임박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하는 한편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A. W. Argyle) 21절과 본문이 무화과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작업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성전이 기도하는 집일 경우 그들이 준비한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다 받고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나 믿음없이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희생제사도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며,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희생제사의 형식을 갖추지는 못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하시어 그분과 우리와의 화해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믿음'이란 결코 우리 스스로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 하나님의 뜻의 분별 및 그 뜻에의 순종과 관계된다(19:20).

성 경: [마21:2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 막 11:27에 의하면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이며 눅 20:1에 의하면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로 시간적인 배경은 마가에 의하면 화요일이 된다. 성전 곧 이방인의 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그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점 때문에 그 주민들을 위한 본격적인 복음전파 행위가 되는 한편 또한 그곳이 유대인 남자와 여자, 아이들 그리고 이방인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전세계인을 위한 복음전파의 사역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는 종교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이들 이외에도 서기관이 섞여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산헤드린(Sanhedrin)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의 기이(奇異)한 교훈과 소문이 전파됨에 따라 그 소문의 진위(眞僞)를 파악하기 위하여 갈릴리까지 파견되었던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종교 진상조사단과 같은 임무를 띤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권위를 문제삼는 이들의 메시지는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도전이었고 이들의 숨겨진 의도는 예수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라고 하는 선언을 하도록 유도(誘導)하려는 것이었다.

⭕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이 첫번째 질문은 그리스도의 권세가 신적(神的)인 것이냐 혹은 인간적인 것이냐 하는 것으로 10절에서 제시되었던 질문, 즉 '이는 누구뇨'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그들은 '이런 일'에 포함되고 있는 많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더이상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라고 묻지 않고 대신 예수의 자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은 '이런 일을 하는 예수 당신은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내신 백성들의 선생이나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는가'의 뜻으로, 많은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종교적 지위를 갖지 못한 예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강한 반발이 내포되어 있다.

⭕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 두번째 질문은 권세의 출처를 묻는 질문으로 첫번째 질문 보다 본래적이며 그것을 포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의 경우 백성들을 교훈할수 있는 권한의 위임(委任)은 대개 산헤드린이나 탁월한 랍비가 그들의 정통적 교리의 정신에 입각하여 랍비가 될 사람의 교훈의 타당성을 시험하여 그 정통성이 입증된 후에야 허락되었다고 한다(Edersheim). 물론 이 둘째 질문은 권세의 출처가 산헤드린이냐 스스로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냐 사람에게서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도 이 두번째 질문, 곧 하늘에게서냐 예수 자신, 즉 사람에게서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성 경: [마21:2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이 질문은 동문서답도 아니며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저희들에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묻는 바를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마21:2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요한의 세례 - 세례 요한의 사역과 세례 요한과 예수와의 관계를 이중적으로 암시하는 말로, 세례 요한은 그의 사역을 통해 참된 예언자로 대중적 인정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그를 믿어야할 것을 가르쳤다(요 1:29-37;3:26-30).

⭕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여기서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로서'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완곡한 표현이다. '하늘로서'라는 말은 저들이 용납해야 할 참된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사람에게로서'는 저들이 무시할 만한 거짓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출처는 동일한 곳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로서'였다.

⭕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 예수의 권위에 정면 도전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의 반격을 받아 스스로 딜레마(dilemma)에 빠지게 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 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저희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연구하는 모습을 '서로 의논하여'의 뜻인 '디엘로기존토'(*)의 미완료시제가 잘 드러내고 있다.

⭕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 이는 예수가 대답할 것까지 미리 연구해 낸 말이다. 즉 `요한의 세례'를 언급한 예수의 의도가 요한의 세례 및 사역의 주목적이 바로 예수 자신에 대한 증거에 있다고 하는 점에 있다. 따라서 요한의 권위의 출처가 '하늘에게서'라고 한다면 (1)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치 않았다는 질책이 따를 것이며 (2) 그 다음에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의심까지도 책망받을 것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1:2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백성이 무섭다 - 이 구절에서는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은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위해야 할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상대적 존재인 인간들의 눈을 무서워했다. 백성들의 목소리는 종교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헤롯 궁전 내부에도 영향을 끼쳤다(14:5).

성 경: [마21:2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 가(可) 부(否)를 정하지 않고 모르는 척하는 이들의 위선적인 태도는 참으로 악한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위선을 극복하는 답변 방법으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고 가르치신 바 있다. 사실 국내의 종교 문제를 완전히 관장(管掌)하고 있는 산헤드린의 직무 중의 하나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의 태도는 직무유기(職務遺棄)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고 있는 계시와 세례 요한의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책임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 것이다.

⭕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그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제기(提起)했으나 예수는 그들이 그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를 문제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께서 그들의 답변을 거부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성 경: [마21:2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 `그러나'의 뜻인 접속사 '데'(*)는 앞의 문장에 대한 반대 내용(역접)을 연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알라'(*)와는 달리 앞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내용(전환)을 전개해갈 경우에 사용된다. 따라서 이 문구는 '한편 다음과 같은 비유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확증시킬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는 말은 마태가 예수의 비유를 소개할 때 혼히 사용하는 표현(17:25;18:21)이다. 본 비유에서 이 말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역할 뿐만 아니라 비유의 내용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므로써 이 산헤린의 공회원들로 하여금 비교적 객관적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다.

⭕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두 아들과 포도원을 가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아버지'가 세리들과 창기들이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후에는 믿고 따랐던 세례 요한을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전자가 더욱 적절한 해석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법적 상속권이 강조된 용어 '휘오스'(*)가 아니라 이 보다 훨씬 부드러운 단어인 '테크논'(*)을 사용함으로써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비유의 이 두 아들들에 대해서 (1) 맏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과 그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한다는 견해(Bruce, Calvin), (2) 맏아들은 이미 선민으로 선택받았음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새이스라엘 백성이 되려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하는 주장(Plummer)이 있다. 어찌되었든 본문에서 마태는 이 두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서로 상반(相反)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구약에서는 흔히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 되었는데(사 5:1;렘 12:10), 신약에서는 교회 혹은 세상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지 간에 그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다. 한편 '오늘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은 긴박성(緊迫性)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이미 어떠한 계획(schedule)이 있든지간에 이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할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웃 사랑을 통한 복음전파의 사역은 그 일을 맡은 주의 성도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부여(附與)되고 있는 긴급명령이다.

성 경: [마21:2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이 표현되고 있는 이 대답에는 '내가(*) 틀림없이 가겠다'고 하는 확신과 자발적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맏아들은 부르심이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응답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래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마21:3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예수님]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싫소이다 - 아버지의 면전에서 그 명령을 단호히 거절하는 이 표현은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공공연한 죄를 짓는 것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명령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명령은 다른 모든 해야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것이므로 '싫다'고 거절한 태도는 어쨌든 잘못된 것이었다.

⭕ 뉘우치고 갔으니 - 뉘우친 것에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다. '뉘우치다'라는 말에 사용된 '메타멜로마이'(*)는 마음과 생각과 의지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 '메타노에오'(*)보다 약한 의미로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후회, 뉘우침, 나중에 유감(遺憾)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타멜로마이', 즉 '뉘우치고'가 꼭 회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도 뉘우쳤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어 버렸다(마 27:3-5). 그러나 본문의 둘째 아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장소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 전체, 즉 '뉘우치고 간' 바로 그 행동 자체가 올바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가 되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에 의하면 '뉘우침'이란 말에는 '때늦은 지혜와 병 치료 후의 몸조리'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성 경: [마21:3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 두 아들은 모두 죄인이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으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은 완전히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다. 맏아들은 예의바른 자이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이고,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세다. 예수께서는 이 물음을 유대교권주의자들에게 제기하심으로써 그들이 답변을 통해 스스로의 정죄를 선언하게 하셨다.

⭕ 세리와 창기들이 - 일종의 이스라엘의 천민 계층으로 그들은 완전히 죄인들이요 소외받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사회의 쓰레기들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이다. 한편 '세리'라는 말인 '텔로네스'(*)는 '통행세 등을 착복하는 자들'(RSV, tax collector)로 보통 '강도'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될 정도였다.

⭕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앞서가다', '앞으로 인도하다'의 뜻인 '프로아고'(*)를 '너희 보다 먼저 들어가리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너희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Bonnard, NIV도 이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말이 유대종교지도자들, 율법주의자들에게도 여전히 소망이 되는 말씀이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먼저 회개하는 자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따라서 나중에 회개하는 자들은 나중에라도(시기가 너무나 늦은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21:3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두 아들의 비유]

⭕ 요한이 의(義)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 두 아들의 비유와 23-27절의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과 연결시키는 구절이다. 요한은 회개한 죄인들이 지금 들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쳤었다. NIV는 '요한은 의의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고 번역하였으나 '의의 도로 왔다'(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righteousness)고 함은 아마도 (1)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의미와 (2) 요한은 의로운 일을 행한 자, 즉 '의인'이었다고 하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사실 `의'를 뜻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실행되는 의'(rightousness that is peacticed),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을 의미한다(Hill, Przybylski). 따라서 요한이 의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요한의 사역과 죽음을 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요한이 증거한 예수의 사역조차도 의로운 것임을 믿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의'는 좁은 의미의 윤리(倫理)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넓게는 예수를 믿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성 경: [마21:3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산울 즙 짜는 구유 망대 - '산울'은 야생동물이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가시나무와 같은 식물로 두른 울타리나 또는 돌담을 가리킨다. 또 '즙 짜는 구유'(winevat)란 돌이 많은 땅을 원형으로 판 한 쌍의 웅덩이로 크고 깊은 것은 포도를 짜는 틀(히브리어로는 '갓'이라고 부름)로 사용하고 그 보다 작고 긴 것은 도관을 통해 흘러나온 즙을 받아 놓는 (히브리어로는 '예케브'라고 부름)로 사용한다. 한편 '망대'는 파수꾼이 약탈자와 이리, 여우의 침입을 막고 경고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것으로 때로는 포도나 포도즙을 저장해 놓는 창고 역할도 하였다. 구약 시대의 경우 포도원의 망대는 그 당시의 세워진 명물 중의 하나로서 때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곤 하였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비해 놓은 이 시설들에 대해서 칼빈(J. Calvin)은 백성들의 신앙을 율법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보강(補强)하기 위해 덧붙여진 제사와 기타 다른 여러 의식(儀式) 등과 같은 '보조수단'이라고 보았다. 한편 벵겔(Bengel)은 산울은 율법을, 즙 짜는 구유는 예루살렘성을, 망대는 성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각 이해하였다.

⭕ 세(貰)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 - 예수 당시에는 외지(外地)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인이 팔레스틴의 경작지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이 부재지주(不在地主)로 인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상황 설정(設定)은 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소작지대'(小作地代)의 경우 주인과 소작인이 나누는 비율은 보통 반반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본문의 '타국에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데메오'(*)의 문자적 의미는 '멀리 떠나있다' 혹은 '여행하다'로 본문에서는 집주인이 당분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집주인이 모든 설비를 구비해 놓고 가꾸던 포도원을 그 농부들에게 맡기고 오래 떠난 것으로 보아 그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가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주인의 오랜 여행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포도원의 나무들은 갓 심은 포도나무들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갓 심기운 포도나무일 경우 첫 열매가 열리기까지는 적어도 2, 3년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성 경: [마21:3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실과(實果) 때가 가까우매 - 과실을 얻을 만한 때를 가리키는 말로, 팔레스틴의 포도는 대개 7월부터 포도송이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다음달 8월이면 작은 포도송이가 완전한 포도알이 되어 보통 9월에 따게 된다. 본문에서의 이 말은 성도들이 부지런히 성결의 삶을 살므로써 '성령의 열매(갈 5:22)를 얻게 되었을 때' 혹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게 되었을 때'등을 의미할 수 있다.

⭕ 그 실과를 받으려고 - 마가복음에는 '포도원 소출 중 얼마'(막 12:2)로 표현되고 있으며, 소작료를 지불할 때는 계약에 따라 돈이나 생산물 중의 일부로 지불하는데, 계산 방식은 (1) 수확량의 일정비율로 서로 나누거나 (2) 풍작이든 흉작이든 정해진 양의 소출(所出)을 바치는 경우가 있다.

⭕ 자기 종들을 보내니 - 마가와 누가는 한 번에 한 명씩의 종를 보냈다고 기록했으나 마태는 한 번에 여러명의 종을 보내었다고 하였다. 아마 마태는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같은 복수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렘 35:15에 의하면 여호와는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려 하였다.

성 경: [마21:3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심히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거늘 - 마가와 누가는 심히 때리고 소작료도 주지 않고 거져 보냈다고 표현한데 반해서 마태는 매를 맞은 사람, 죽임을 당한 사람, 돌로 맞은 사람 등등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농부들의 악행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세 가지 행악이 거론된 것에 따라 처음 주인이 보낸 종들이 다만 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떤 사람은 때리는 것은 예레미야가 당한 것에(렘 20:1,2), 죽인 것은 이사야에(히 11:37), 돌로 친 것은 스가랴(대하 24:20,21)에게 관련시키지만 이러한 고통을 당한 선지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따라서 각각의 행악들은 모든 선지자들이 각각 당하였던 행악(行惡)과 박해(迫害)의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거론된 것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본문과 연관시켜 심한 채찍질하는 것(문자 그대로는 가죽을 벗겼다는 말로 피가 흐르도록 때리는 태장(苔杖)을 가리킨다. 고후 11:24 참조), 살해하는 것, 죄인처럼 돌로 치는 것 등의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1:3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니 -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마21:37]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 이 비유의 클라이막스(climax)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아들을 보내기까지의 주인의 태도는 자신이 고용한 악한 농부들에 대한 지극한 인내심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농부들의 철저한 사악함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는 문구이다.막 12:6에 의하면 이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이며 최후로 보낸 사자(使者)'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인이 보낸 같은 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종으로, 예수는 아들로서 비교되었다.

성 경: [마21:38]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는 상속자니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 악한 농부들은 마땅히 주인에게 갚아야 하는 소작료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 뿐만 아니라 포도원의 소유권을 빼앗으려고 모의하였다. 예수께서는 여섯달 동안이나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종교당국자들이 자신을 죽이리라고 하는 예언을 해 오셨는데(16:21;17:23;20:18), 이제 당사자들 앞에서 그들의 속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셨다. '자 죽이고'라는 표현은 요셉의 형들이 그의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할 때 사용하던 용어를 연상케 하는 것(창 37:20)이다. 특별히 이 용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불법적으로 모인 공회에서 예수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밀때 그대로 사용되었다(요 11:47-50).

성 경: [마21:39]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마가복음의 경우 포도원 안에서 죽이고, 밖에 내던졌으나 마태와 누가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바뀌었다. 이는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요 19:17;히 13:12) 예수의 수난사건과 이 비유를 좀더 연관되게 하기 위해서 마태와 누가가 각색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A. W. Argyle), 또한 알포드(Alford)는 예수께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넘겨져 심판받은 사실을 암시한다고 본다.

성 경: [마21:40]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주인이 올 때에 - 주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성령 혹은 부활하신 성자의 재림), 또는 그 시기가 언제인가(예루살렘 멸망때(<A.D. 70년> 혹은 최후심판 때)하는 물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징벌의 때가 임했음을 알리는 표현이다.

성 경: [마21:41]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 악한 자들을 진멸(殄滅)하고 - 비록 이 결론은 예수의 비유를 듣는 종교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으로, 예수와 그들은 동일하게 악한 농부를 정죄하고 있다. 한편 '악한 자들을 진멸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헬라어 '카쿠스 카코스'(*)의 뜻은 '악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파멸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NIV에서는 유사음을 사용한 헬라어의 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비참한 종말을 당하게 하다'(wretches wretched end)의 의미로 번역해 놓고 있다.

성 경: [마21:42]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너희가 성경에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이 표현은 신약성경 중에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표현이다(12:3;19:4;21:16;막 12:10). 예수께서 이러한 말을 하시는 경우는 모두 성경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경우이다. 본문의 내용은 시 118:22를 인용한 것으로, 행 4:11;엡 2:20;벧전 2:7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이방인들이 오히려 그를 영접함을 표현하는 증거로서 사용되었다.

⭕ 건축자들의 버린 돌 - 시 118편은 다윗이 모든 건축자들, 즉 사울과 그 추종자들의 세력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견고케 하셨다고 하는 내용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시는(118편)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된 것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여러 강대국으로부터 학대와 핍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퉁이의 돌, 즉 선택받은 민족으로 삼으시고 축복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당시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등의 지도자들은 다윗의 원형(原形)이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되신 예수를 내어 버렸다. 예수는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본 비유에서 당신께서는 악한 농부로 비유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람들에 의해 새이스라엘을 건설할 그들의 메시야로서 적합치 않다고 하여 버림을 받은 돌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지붕이나 건물 바깥계단 혹은 성벽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돌(Derrett)로, 건물의 상부구조를 유지하고 그 모양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다른 모든 돌들은 이 돌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과 예수, 모든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가 건축물과 모퉁이 돌과 같음을 시사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건축의 비유는 교회의 그것에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분명 예수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신 동시에 교회의 머리, 즉 교회의 주인(골 1:18)이시다. 따라서 모퉁이 돌의 비유는 교회론적인 것인 동시에 기독론적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의해 배척당하신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사 영광받게 하셨으며 신령한 건물로 지음을 받는 영적 공동체인 성도들의 모임에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다(엡 2:20-22)

성 경: [마21:43]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가 유대 지도자들의 권세 밖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혈통상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행 13:46;18:5, 6;벧전 2:9).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의 권세로 율법을 전달하던 특권을 가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그 권한을 박탈당하고 그 나라의 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이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특권과 사명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너희'는 율법사, 서기관 등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1:44]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이 구절은 사 8:14, 15와 단 2:35의 내용을 그 배경으로 한다. 실로 예수는 모퉁이의 돌로서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지만 악한자들에게는 멸망을 가져다 주는 돌이 되신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칼빈(Calvin)은 이 돌을 유대 백성들의 외고집의 돌멩이로 이해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견고하심으로 그돌을 파멸케하시고 더욱 더 영광을 얻으실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와 '이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의 경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견해들이 있다. (1) 전자를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자라고 보고, 후자는 그리스도예수의 비천한 출생과 지위 때문에 실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해 공격적으로 대적해 오는 자라고 하는 견해(A.C.Williams)와 (2) 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歪曲)된 지식으로 인해 그를 용납치 않는 자, 후자는 예수와 그의 말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자라는 견해(Bruce)와 (3) 전자는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해 모의를 꾸미는 사악한 자들이며, 후자는 그리스도를 넘어 뜨리려고 질주(疾走)해 오다가 그분께 떨어지는 자, 즉 그 분의 강력한 반격(反擊)을 받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Calvin)와 (4) 전자는 그돌에 대해서 반항하는 자, 후자는 그 돌이 추궁하여 심판한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Barclay)가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의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예수의 심판 선언의 맥락 속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 '돌 위에 떨어진다'고 함은 예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앙이 스스로에게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박살내다'로 번역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가 의미하는 바는 그대로 해를 당하여 파멸에 이르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의 뜻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종말의 때를 예언하시는 것으로, 그날에 악한 자들은 키질의 결과로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와 같이 구별되어 영원한 불구덩이로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3:12;시 1:4).

성 경: [마21:45]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비유를 듣고 - 지금까지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신 두 비유는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경고의 말씀이다. 두 비유를 통해 드러난 사악한 인물들이 바로 종교 지도자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듣고 아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완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마21:46]

주제1: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메시야]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지금 예루살렘 성안에 있으므로 성전 경비원을 불러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경우와도 같이 예수를 의의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 하여 공식적인 석상에서 체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훗날 가룟유다의 배반에 의해 산에 계신 예수를 밤에 은밀히 체포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이것은 백성들에 대한 예수의 지지도(支持度)가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요 11:53에 의하면 산헤드린 공의회원들도 나사로가 부활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謀議)하고 그 명분을 찾기 위해 계속 예수를 따라다녔음을 보게 된다. 실로 그들에게는 이미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를 체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예수를 죽일 죄목과 명분이 구상, 모의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2: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다시' 라는 말로 이 비유는 21장의 두 비유(21:28-32;33-34)에 연속된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그들에게'(*, 아우토이스)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인가? 23:1에 '무리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여'라고 새롭게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1장의 비유를 듣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21:15, 23, 45)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전의 두 비유에 대한 그들의 반응(21:45,46)을 아시고 유대 지도층의 죄악에 대한 지적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예언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시켜 결과적으로는 예정된 죽음의 길을 재촉하셨던 것이다.

⭕ 비유로 - 비유는 랍비들의 일반적인 교수법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옳고 그름이나 특정한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할 때 실생활에서 쉽고 분명하게 가릴 수 있는 경우를 대비시켜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유대인들이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 왕국을 기대하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정통세력으로 여기는 교만과 편견에 대하여 예수는 천국의 실상을 비유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여기서 비유(*, 파라볼라이스)는 복수인데 그것은 이 비유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이지만 크게 두 부분(2-10절, 11-14절)으로 나눌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13:1-30 주제 강해, 예수의 비유).

성 경: [마22: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 이것은 예수의 천국 비유 서두의 정형(定型)이다. 여기 `과'에 여격이 쓰이는데, 이것은 `에서와 같은 그런 상황이다'라는 말의 간결한 표현이다(Jeremias). 그러므로 여기서는 천국이 어떤 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천국은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와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 자기 아들을 위하여 - 그 임금에게 자기의 아들은 그 나라의 상속자이자 자기의 모든 것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은 아버지인 임금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 아들이 다 커서 혼인도 하고 이제는 나라를 맡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왕궁에는 행복과 권세와 명예가 가득했다. 왕은 이 혼인과 잔치의 성사에 정성을 다하며 친히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것을 본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곧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로 말씀하신 것이다.

⭕ 혼인 잔치 - 원문에는 `가무스'(*)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마 여러 날 계속되는 잔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결혼 축제는 대개 7일이나 그 이상 밤낮으로 계속된다. 성년이 된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것을 축하하는 그 잔치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축제이다. 천국이 이런 '혼인 잔치'로 비유 된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인 남편으로 말씀하셨다(사 54:5). 거기에 상응(相應)하여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으로 남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엡 5:23-32). 그리고 혼인 잔치로서의 천국 묘사는 계 19:7-9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메시야 왕국의 사랑과 기쁨을 혼인과 결부시키는 것은 신.구약에서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첫 이적의 영광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한 일이다(요 2:1-11).

성 경: [마22: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종들을 보내어 -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두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당일에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다시 종들이 나가서 인도하여 오는 것이 관습이었다(에 5:8;6:14).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종들을 구약의 선지자들로 보나, 천국의 임박함을 처음 선포한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종들은 바로 구약의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던 신앙의 선조들과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는 천국 시작의 선포였다. 특히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는 비유(요 3:29)에서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하였다.

⭕ 그 청한 사람들을 - '초청을 받은 사람들을'(*, 케클레메누스)에서 '청하다, 부르다'(*, 칼레오)의 현재완료 수동분사로서 그 초청이 과거에 단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종들을 보내는 그 시점까지 계속 유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구약에서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져 왔고 그것이 결코 취소되거나 잊혀지지 않았다가 때가 되매 실제로 시작되고 초청이 온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왕궁의 행사에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초청을 받고 참석한다(막 6:21). 마찬가지로 천국의 약속과 초대의 말씀도 이스라엘의 선생들과 지도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초청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백성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던 자들로서(요 1:19-28) 지금 예수와 논쟁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 오기를 싫어하거늘 - `싫어하다'(*, 우크 에델론)는 미완료형으로서 그들이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지극히 완고한 마음으로 왕의 초대를 거절했다.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내분(內紛)의 조짐이 있거나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은 나라의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이 그들은 반드시 응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기다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잔치가 임박하자 그들은 태도를 돌변하여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 거절의 이유를 그 왕궁의 혼사에 걸맞는 중한 선물을 바치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Derrett), 그것이 고유한 관습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본 비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것은 예수 자신의 비유 해석대로(21:32) 유대의 지도층들이 끝내 세례 요한을 믿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세리와 창녀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메시지(3:7-10)는 그들의 전통과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경: [마22: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 왕의 영적인 의무이다. 그런데 그 명(command)을 무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또 한 번 간청(懇請)하다시피 청하러 종들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 종들'은 바로 예수 자신과 그의 사도들로 시작된 신약 시대의 전도자들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이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셨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12사도와 70인 전도대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11)는 메시지를 주어서 파송하셨다.

⭕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 여기서 오찬(*, 아리스톤)은 유대인들이 들던 하루 두 끼니 가운데 첫번째 끼니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통 늦은 아침(midmoming)쯤에 갖는 식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며칠을 계속되는 성대(盛大)한 혼인 잔치의 풍습으로 볼 때, 이 '오찬'은 잔치가 시작되는 식사이이었을 것이다(Meyer).

⭕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 그런데 그 오찬은 친히 왕이 자기의 소유물로 정성껏 풍성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그 잔치를 위해서 양(量)과 질(質)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다. 이것은 왕의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분하고 실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천국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신랑이시면서 신부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으로(요 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요 4:14) 말씀하셨다.

성 경: [마22: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 이것은 '도외시하다' 혹은 '개의치 않다'는 의미로서(A.T.Robertson)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들의 이 큰 무례함은 교만과 무지 때문이었다. 유대의 지도층은 요한과 예수의 천국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은 자신들의 전통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다윗의 뒤를 이은 용사로서 군사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자기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고 로마와 열방을 정복해 나가 천하의 왕국을 세워야할 자인데, 예수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회개하라고 대적(對敵)하니 고려할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도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해방과 현세적인 이득을 가져다 줄 것같지 않자 나중에는 다 예수버리고 만다.

⭕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 그들 가운데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소극적인 자들이 있었다. 예들 들어 예수의 천국초청과 명령을 뒤로 하고 크게 고민하면서 자기의 신(神)인 재물을 향하여 갔던 젊은 부자관원(눅 18:18-23)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보다 자기들의 밭과 상업을 더 가치있게 여긴 것이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 준수(observance)에서 얻은 자기의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다(눅 16:14).

성 경: [마22: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그 남은 자들은 죽이니 - 헤롯왕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무고(無辜)한 어린아이들을 죽였다(2:1-16). 자기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위험한 세력을 근절(根絶)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잡아 죽였다(막 6:17-29). 그리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27:18)로 가득차서 예수께 대한 적대감과 살의(殺意)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했다(요 11:47-53).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다. '능욕하고'(*, 휘브리산)라는 말은 학대하다는 말보다 더 혹심한 모욕과 처벌을 뜻한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선지자 노릇해 보아라"며 침뱉고 주먹으로 쳤었다(26:65-68). 이와 함께 그들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죽였던(23:35) 선례가 있고, 이어서 예수의 사도들을 투옥하고 죽일 것이었다(행 4:1-3;5:17,18;8:1).

성 경: [마22: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임금이 노하여 불사르고 -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왕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왕 자신에게 대한 모욕이요, 반역이기 때문이다. 이제 왕은 종들을 보내지 않고 군대를 보낸다. 그 '군대'(*, 스트라튜마타)는 대군이 아니라 한 무리의 군인들을 가리킨다. 전란(戰亂)이 심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떤 도시를 왕이 군대를 보내 파괴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끝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시작된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살인자들이었고, 예루살렘 성도 더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아니라 그 살인자들의 동네(*, 텐 폴린아우톤)였기 때문이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대에 의해 문자 그대로 응하였다. 이 부분을 후대의 가필(加筆)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실 것(20:17-19)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24:2)을 예언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는 아니나, 고레스와 다른 경우들처럼(사 10:5;45:2) 간혹 하나님은 이방의 군대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성 경: [마22: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처음 초청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 초청은 이제 무효화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이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Lenski).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방인과 죄인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권리를 갖는다.

성 경: [마22: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사거리 길에 가서 - 사거리 길(*, 타스 디여소두스톤 호돈)은 성읍 경계에서 지방으로 통하는 길들이 시작되는 넓은 광장으로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왕래하는 곳이다.

⭕ 사람을 만나는 대로 - 그곳의 사람들은 처음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눅 14:21에는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로 드러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혐오하던 죄인들이었다. 왕의 분노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갑절의 호의(好意)로 나타났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는 세리와 사마리아인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성 경: [마22:1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바리새인에게는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의 개념이 뚜렷했다. 그들은 자칭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 악인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으로 세운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서는 참고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

성 경: [마22:1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 이 부분부터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청한 손님들이 다 참석하면 잔치가 시작된다. 이들 문화권에서는 잔치에 주인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서 손님들을 환영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Jeremias). 이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러'(*, 데아사스다이)라는 말은 대상의 참된 성질과 특성을 의도적으로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왕은 이 잔치에 부적격(不適格)한 사람을 즉시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후 5:10).

⭕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 고대 동방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라고는 하나(왕하 10:22), 1세기의 혼인 잔치에서는 그것이 확실하지않고, 본 비유에서도 그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길에서 바로 온 사람들에게 알맞는 예복이 있을 리도 없고 자기의 것을 가지고 올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궁정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왕을 알현(audience)하려는 자에게 왕으로부터 예복이 주어지는 관습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문제되지 않고, 원래의 신분과 처지를 가리고 그 잔치에 합당한 예의와 함께 왕께 대한 예(禮)를 갖추는 예복이 문제였다. 이 예복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구원의 옷(사 61:10)이며,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롬 10:9,10)이라는 옳은 행실이다(계 19:8). 이렇게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외형적인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그리는 심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신 예복을 입은 것만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하나(Tasker), 오히려 예수의 답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받은(16:6-12)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이들은 교회에 함께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멸시하다가(고전 15:12-19) 종말에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마22:1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친구여 - '친구여'(*, 헤타이레)라는 말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20:13)에게와 가룟유다(26:50)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애정이나 특별한 선의가 담긴 말이 아니라 손아래 사람에게 하는 그저 무관심한 투의 말이다.

⭕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 남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그것을 입지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음을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가라지들이고(13:24-30), 염소들이며(25:41-46), `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7:21-23).

성 경: [마22:1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사환들에게 말하되 - 1-10절에는 `종들'(*, 둘로이)이 사용되었고, 11-14절에는 `사환들'(*, 디아코노이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비유가 원래는 독립된 두 비유였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왕의 밑에서 전령으로 일하는 자들과 잔치를 담당하고 수종드는 자들이 달리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이 사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마 13:41,49) 영원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일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이다(8:12;13:42,50;24:51;25:30). 그것은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서 더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른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단지 경고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진정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유치한 신앙이 아니다.

성 경: [마22:1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혼인 잔치의 비유]

⭕ 청함을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 -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왜냐하면'(*, 가르)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끄는 말이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어 '택함을 입은 자들'(*, 에클레크토이)은 소수였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 거의가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한다(눅 14:24).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뿐이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 갈 수 없다(16:17;요 6:65).하나님의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결어를 마태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중과 논적(論敵)을 향한 결론적 경구로서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부인(否認)하기 어렵다.

성 경: [마22:1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상론하고 - `이에'(*, 토테)는 때로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앞뒤의 사건을 논리적으로 연결해 주는 접속사로 쓰이는 마태의 독특한 용법이다(90회). 예수를 잡아야 하나 예수께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막 12:13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저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거의가 바리새인들이었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예수께 대한 올무를 놓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표로 쓴 것이다.

⭕ 말의 올무에 걸리게(*, 파기듀소신) - `올무에 걸리게 하다'는 말은 본래 사냥에 사용되는 말로서 한 대상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모든 종교적인 지식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는 생생한 표현이다.

성 경: [마22:1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 당원들과 함께 가도록 했다. 사실 그 양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견해로 잦은 충돌을 일으켰던 사이였으나 예수에 관한 문제만은 일찍부터 협력하여 일을 꾸몄었다(막 3:6). 평행구인 눅 20:20은 헤롯당원들을 동행시킨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로마의 총독의 손으로 예수를 처지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로(年老)한 바리새인들은 연소(年少)한 제자들을 보내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워 진실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 학파가 있었다. 누가는 그들이 정탐(spying)했었다고 말하는데, 정탐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이며, 그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온갖 최고의 칭찬을 시작한다. 그 첫째가 '선생님이여'(*, 디다스칼레)이다. 이것은 랍비와 같은 의미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라고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 세우는 전략을 사용한다. 둘째는, '당신은 참되시며'(*, 알레데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이 듣도록 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같이 그들로서는 파격적인 높임이었음이 틀림없다. 참되신 선생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여 가르칠 수 있다. 다시 한 번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하여 강조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또한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 할지라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관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식인데, 그처럼 사람이 가진 권세나 사람들의 평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렬한 지지자로서 진정으로 해답을 앙망하는 자세로 가장한 것이다. 이는 비록 겉에 꿀을 바르고 속에는 독을 넣은 인사말이지만 이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를 바리새인 스스로가 내린 것이다. 이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이런 과분한(?) 칭찬에 걸맞게 어떤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시원한 해답을 두려움없이 제시해야 했다. 그러면 당연히 로마당국의 정책에 대항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답할 것이고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헤롯당원들이 증인이 되어 그들이 로마 총독에게 고소(告訴)하면 되는 것이다.

성 경: [마22:1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예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눅 2:1). 이스라엘에서는 바벧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다(F.F.Bruce).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다. 어쨌든 지금 예수는 궁지에 빠졌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를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 세 -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다. 여기의 '세'(*, 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주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하였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다.

성 경: [마22:1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예수는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외식함', 누가는 '간계'라고 표현했다(막 12:15;눅 20:23). 그들의 입으로 말한 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는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다. 예수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이다.

성 경: [마22:1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셋돈 데나리온 하나 -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다. 고대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다.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다(W.Barclay).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되던 화폐였고, 거기에는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어서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냈다. 그 가치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 군인의 하루 품삯이었다. 세금은 매년 일인당 한 데나리온을 내야 했다.

성 경: [마22:2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Pontifex Maximus, 폰티펙스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적인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혐오감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이 화폐를 쓰게 함으로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게 하고 인각시키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은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Beasley-Murray). 초기의 헤롯가에는 유대인의 종교관 때문에 이러한 형상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왕 빌립이 이것을 유대 주화에 도입했다. 그 뒤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 일을 행했던 것이다(Robertson).

성 경: [마22:2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가이사'(*, 카이사르)는 최초의 로마 황제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 B.C. 100-44)의 성(姓)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식 직함 명칭이 되었다. 예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무해(無害)하게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내셨다.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온 같은 말로 대답하신다. 데나리온의 화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면, 그 주화는 가이사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다니던 데나리온 주화는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입으로 그 주화가 황제의 소유임을 말하게 하셨다. 한편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폐 주조(鑄造)의 권리가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통치 권력의 증거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셨다. 예수의 이 첫 대답은 문자적으로는 반민족적이고 친로마적인 입장이었으나 뒷 말씀과 연결될 때는 참으로 기이하고 심오한 도(道)가 되는 것이다.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하던 관례대로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화가 황제의 소유이므로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인각되어 있는뎨( 롬 1: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실만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있는가? 예수는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합법적인가를 물은 그들이 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나님께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던 것이다(23:23).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로 바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만다. 결국 주후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세겔까지 로마 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 바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그 영역과 경계를 정하신 말씀이시다.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영역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가 나타나 있어서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통치권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것이 최초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제외한 당신의 것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주시고 받으시는 것에 비하면 가이사가 주고 받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질서이고, 시민 생활은 가이사에게 받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질서이다. 어느 요구도 다른 요구를 방해하지 않는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만을 요구할 때는 그에게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이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롬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 생활을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는 가이사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했을 때는 육체를 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가이사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이다. 바치라(*, 아포도테)는 17절의 '바치다'(*, 두나이)와는 다르다. 이것은 마땅히 돌려 주어야 할 것을 돌려 준다는 의미이다. 똑같은 동사가 21:41에서 농부가 제때에 주인에게 소출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D.A. Carson은 가이사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준 것이 없기 때문에 '돌려주다'(pay back), 혹은 '지불하다'란 의미보다 그냥 '주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이사가 눈에 보이게 준 것은 없어도 그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 받아서 하는 일이어서 거기에 해당하는 존경과 두려움과 세를 마땅히 바쳐야 하기 때문에(롬 13:1-7) 어떤 대가를 '지불하다'는 의미로는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2:2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인두세 납부에 대한 논쟁]

⭕ 기이히 여겨 - 그들은 예수에게 이런 류의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압도당하여, 즉 '기이히 여겨'(*, 에다우마산)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2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왜곡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agitation)했다고 고소한다.

성 경: [마22:2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 사두개인(3:7, 주석 참조)들은 숫자상으로는 많지 않았으나 부유한 귀족들이며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적 근거로서 모세 오경은 인정했으나, 기타의 구전, 문서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을 배척했다(Winer).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의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개속되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유대교는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건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 31:16;32:39을 인용하여 오경에서 몸의 부활을 증명하려 했다. 그리고 오경외에 사 26:14에서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몸의 부활을 원칙적인 교리로 고수했어도 그들의 논의는 필요없는 상상과 억측으로 흘렀다. 한 예로 그들은 부활했을때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는 삼상 28:14(죽은 사무엘이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에 근거하여 죽을 때 가졌던 모양 그대로, 불구자는 불구인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유대인들은 성지 팔레스틴에서 부활한다고 믿고 외국에서 죽은 자들은 지하의 공로(空路)를 통해서 팔레스틴에 이르러 부활한다고 했다(W. Barclay). 그들에게도 부활은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교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 때문에 그것을 비웃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자라고 규정했다.

⭕ 그 날에 물어 가로되 - 마태만이 그 질문이 같은 날에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다. 유대 지도층의 세 파가 예수를 시험한 그 날(화요일)은 질문의 날이었다(Tasker).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실패를 보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로 예수를 굴복시킴으로 예수와 함께 경쟁자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예수와 직접 관계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들은 예수가 바리새파의 전통적인 부활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그 교리의 모순된 점을 공격하여 백성의 인기가 최고도에 달한 '선생님'이신 예수로 대답할 수 없게 만들어 망신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성 경: [마22:2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선생님이여 - 그들도 바리새파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위엄으로 자신들의 악의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에 대하여 가졌던 우월감 때문에 아첨까지는 하지 않는다.

⭕ 모세가 일렀으되 -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론의 근거가 모세에게 있음을 은연(隱然)중 강조한다.

⭕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장가들어 - 이것은 신 25:5,6의 요약 인용이다. 그들은 신명기를 모세의 말로 인용한다. 신명기까지의 첫 다섯전을 모세의 저작으로 받는 것은 유대인의 정설(定說)이었다. 원래 레 18:16;20:21에서는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는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신 25:5에서는 형제가 자식이 없이(원문: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형제가 형수(제수)를 취하여 아내 삼도록 했다. 여기 `아내에게 장가들어'(*, 에피감브류세이)는 무자(無子)한 과부인 형수에게 장가드는 자에 대해서 쓰였다(창 38:8;신 25:5). 신약에는 이곳에 한 번 나온다. 모세 이전에도 이 수혼(嫂婚)의 풍습은 있었다(창 38:8). 그리고 고대에서 근세까지 여러 동양 민족들에게서 그 관습을 찾을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관습을 이스라엘의 법으로 정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수혼법이 적용되는 무자한 과부를 취할 수 있는 이웃 친척도 같은 지경에 사는 형제에게 국한되었다. 그리고 그 의무는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증인들 앞에서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침 뱉고, 저주했다(신 25:7-10). 그러나 이것은 예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조문이었다고 한다.

⭕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 `형을 위한'은 원문에 `그의 형제에게'(*, 토 아델포 아우투)이다. `후사'(*, 스페르마)는 원래 파종(播種)을 위해 보관해 둔 씨를 뜻한다. 그리고 `세울지니라'(*, 아나스테세이)는 `일으키다'(raise up)는 뜻이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가문이 끊기는 것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고대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었다(Speaker). 형수와의 새로운 결혼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은 형제의 법적인 아들로 간주되어 죽은 형제의 이름을 물려 받고 그의 족보에 오르고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성 경: [마22:2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우리 중에 칠 형제가 - 이 말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예수께 제시한 예증이 대단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한다.

⭕ 끼쳐두고 - `아페켄'(*)은 '남겨 두었다'는 의미이다.

성 경: [마22:2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 모든 결혼이 아이를 생산하는데 실패했다. 아이가 있었다면 부활 때에 아이를 낳은 형제의 아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므로 끝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인지, 논쟁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실제 있었던 어떤 경우를 확대하여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가 실제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해도 법적인 가능성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사실성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성 경: [마22:2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최후에 죽었나이다 - 사두개인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여인의 죽음은, 곧 지상에서의 삶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가능성도 바랄수 없는 완전한 종결로 보았다(신약 총론 '신약의 종교적 배경'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여인은 여전히 존재하며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해 언젠가는 죽음의 문을 열고 일어나야할 잠재적인 부활체였다. 이 신앙에 입각하여 바울은 부활의 영광을 확신했으며(고전 15:19), 또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에 대한 뜨거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2:2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사두개인들의 질문]

⭕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이것은 철학적인 토론을 하기 좋아하는 사두개인들이 바리새파와 부활을 믿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수수께끼였던 것 같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분명했다. 부활 후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정확히 대응된다면 부활한 그 여인은 근친상간의 결혼의 죄의 책임을 지든지 그 형제들 중의 한 아내로 지목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여인이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그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의 개념은 불합리한 것이 될 뿐이다. 사두개인들은 이 수혼법(嫂婚法), 계대(繼代) 결혼법이 모세의 법인데 모세가 그런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면 율법을 준수했을 때 그런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되는 그런 계명을 명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교리는 모세도 알지 못했던 것이며, 솔로몬 시대 이후에야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Lenski). 이 문제는 과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바리새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었으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존재와 운명을 아시는 하나님만이 대답하실 수있는 것이었다.

성 경: [마22:2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 '성경'(* 하이 그라파이)은 구약전체의 문서를 가리킨다(눅 24:27, 44;요 5:39). 예수는 부활 교리가 전 성경(선지자와 시편을 포함)에 걸쳐 지지(支持)를 받고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데, 만약 부활 교리가 모든 성경에서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에는 모세오경을 잘 믿는다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교훈(욥 19:25-27;사 26:19;단 12:2)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 헤 뒤나미스 투데우)이란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이다.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영혼과 흙이 된 육체를 통하여서 영적인 몸을 만드시는 것(고전 15:42-44)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사람을 현생에서의 육체적 상태로 만드신 것에 하나님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경시하는 큰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 알지 못하는 고로 - 원문은 '메 에이도테스'(*)로서 문자적으로는 '보지 못하므로'이다. 이 말씀은 눈으로 성경과 피조계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바른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의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이다(요 3:10;9:41). 사두개인들은 세상 철학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판단한 것이다. '오해하였도다'(*, 플라나스데)는 중간태로서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기만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를 지적한다.

성 경: [마22:3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원문에 제시된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란 뜻의 `가르'(*)가 생략되어 있는데,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설명의 도입부인 것이다. 예수는 먼저 부활의 성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부터 언급하고 다음에 성경으로 입증하신다.

⭕ 부활때에는 시집도 아니가고 - 현생에서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식시키기 위한 창조 법칙이다. 그래서 결혼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출산이다. 그러나 부활 때는 창조의 목표가 완성된 마지막 때이므로 더 이상 출산이 필요없고, 그러므로 자연히 성적 만족을 요구하는 본능도 없어진다. 부활의 몸은 이렇게 존재의 규모와 질(質)이 달라지므로 결혼관계가 해소(dissolution)되고, 결혼이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과는 다른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만족이 있게 된다. 이 대답으로부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는 그 이전의 삶이나 여러 관계들에 대한 기억조차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선한 어머니는 그녀의 모든 자녀를 다 사랑할 수 있고 또한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듯이, 일곱 형제들의 아내는 틀림없이 모든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 모두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D.A. Carson).

⭕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는 부활체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천사들과 비교해서 가르치신다.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이듯이 부활한 인간의 몸도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천사 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존재 특성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부활한 몸은 무성(無性)이라고 했으나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혼이 필요 없다고 하셨지 남녀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남녀의 구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는 증거로 존속될 것이다. 천사들과 비교해서 말씀하신 것은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또 한 번의 공격이며, 천사들의 실재와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계시하신 것이다.

성 경: [마22:3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예수는 이제 성경의 증거를 들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신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출 3:6)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라엘 청중에게도 하신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영원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으므로 그 말씀을 늘 읽고 바로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성 경: [마22:3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로라 - '나는 의 하나님이다'(*, 에고 에이미 호 데오스)라는 이 말씀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소개의 정형이다. 하나님은 언약의 상대방인 아브라함의 이름을 들어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대개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드러냄으로 우리 자신을 높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연약한 피조물의 이름에 즐거이 자신의 존재를 결부시킴으로 그와 맺은 언약의 소중함과 그것에 대한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하나님으로서 틀림없이 약속을 지켜오신 분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조성되는 기반으로 쓰임을 받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렇게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후손됨을 구원의 보장(保障)으로 여겼던 것이다(3:9;요 8:39). 한편 본 구절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노라'고 과거 시제를 사용해야 문법적으로 옳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신 의미를 예수께서는 간과하지 않으셨다.

⭕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누가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는 예수의 해석을 첨가했다. 실로 예수는 부활과 영혼의 존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신다. 하나님께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셨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더이상 죽은 자가 아니다. 그들은 존재가 소멸되어 버린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썩어 흙이 된 지 오래지만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죽어 멸절(滅絶)되었다면 그들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이 참여할 수 없고, 지켜 볼 수 없는 언약의 성취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그 말씀을 들었던 모세와 백성들도 만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멸절되었다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용한 그 본문은 이 논증의 맥락에 있어서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증명하는데는 충분하지만 부활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은 물론 천사의 존재와 영(靈)의 존재도 부인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영혼의 불멸성과 부활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모든 것의 멸절로서의 죽음과 사후의 생명 사이의 선택이었다(D.A. Carson).영혼의 불멸이 육체의 부활을 암시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오경의 기록자인 모세의 권위에 호소하여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오경에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교리를 확증하신 것이다.

성 경: [마22:3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부활에 대하여]

⭕ 무리가 놀라더라 - 누가는 바리새파로 거의 확실시 되는 어떤 서기관들이 '선생이여 말쏨이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0:39).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상적 반대파인 사두개파를 예수께서 완전히 격파하신 것을 기뻐한 것이다. 대부분의 백성들도 유대교 안에서 날카로운 대립을 일으켰던 신학적 난제를 단지 성경만으로 해결하신 예수의 신적 지식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성 경: [마22:3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고, 소수는 그 자리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벙어리가 되어 다 물러갔다. 그들로서는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패(敗)하지 않은 것이 일단은 안심이었다. 헤롯당원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물었던 것은 유대의 정통성에 벗어나 있는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켰던 이론들로서 예수께서 이 논쟁에서 패했다면 그 반대 편에서 모든 면에서 정통성이 있다고 믿었던 바리새파도 잘못하면 함께 넘어지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자기들이 예수를 넘어뜨리면 정통성은 더욱 확실해지고, 예수를 신임하나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백성들로부터(요 7:49) 예수를 분리시켜 처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여기 '모였다'(*, 쉰에크데산)에 `에피 토 아우토'(*)가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행 2:1처럼 '같은 장소'를 의미한 것이다. 이 문구는 사 2:2의 인용이며(26:3에 반복사용),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Tasker). 바리새인들은 마치 총회로 모이는 것처럼 무리를 지어 모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책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첫번째 질문이 바로 그들이 짜내고 짜낸 유일한 묘책(妙策)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모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적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알 수 있다.

성 경: [마22:3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마가는 '한 서기관'(*, 그람마튜스)으로 기록했다. '율법사(*, 노미코스)는 '교법사'(*, 노모디다스칼로스)로도 불리우는데, 율법의 해설자이고 가르치는 박사들로서 넓게는 서기관에 속한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신학자들이며 법률 전문가들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는 성경 뿐만 아니라 성경 해석과 유전들이 방대했고, 실제 생활의 민사(民事)적인 일들에 적용하는 데는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막 12:28-34에는 그 서기관이 질문을 하는 것을 책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을 논박하여 물리치신 것을 기뻐하며 나왔으므로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점 때문에 마태의 기록과 상충되지는 않는다. 마태는 바리새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의도를 표현하고 있고, 마가는 그들 중에서도 내심 예수께 호의적인 소수가 예수의 사두개파를 이기신 것을 기뻐하고 더욱더 자기들과 일치하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물었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눅 10:25-37에는 율법사가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의 입으로 두 큰 계명을 말한다. 그리고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연결된다. 이것은 같은 내용이 다른 상황에서 다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것을 생략할 수 있다.

성 경: [마22:3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마가복음에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이다(막 12:28). 이는 동일한 의미이다. 한편 본문의 '크다'(*, 메갈레)는 말이 정도나 계급에 대하여 사용될 때 최상급으로 '제일 중요한'이라는 의미가 된다(Arndt Gingrich). 유대인들이 계명들을 크고 작은, 곧 중요하거나 사소한 법들로 구별했던 것은 철두철미한 율법 준수의 정신에서 그리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탈무드에 나오는 랍비 아키바의 이야기이다. 한쪽 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율법 전체를 설명하라는 이방인의 도전에 부정적 황금률-너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이 '율법의 전체'이며 그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하다고 답했다. 또 한편 랍비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나누어서 율법 중에 613(십계명 글자의 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중에 248(사람 몸의 지체 수)조는 적극적, 365(일년의 날 수)조는 소극적인 금지 계명으로 분류하였다. 그 중에는 중요하여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15:4-6의 예). 이러한 변론의 정당한 근거로 그들은 다윗(시 15:2-5, 11계명), 이사야(사 33:15, 6계명), 아모스(암 5:4, 2계명), 미가(미 6:7, 3계명), 하박국(합 2:4, 하나의 계명) 등의 율법 요약 선례를 들었다. 어떻게 하면 율법을 더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학문적이고 실제적인 중요한 문제였다. 더욱이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성경에는 명백하게 기록되지 않은 유전은 인정하지 아니함으로 바리새인들과 자주 충돌했었던 것이다. 눅 20:39, 40의 증거를 보면 이미 예수의 답변은 존경받는 율법사들에 의해 유대인 중에서 우세한 견해였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율법을 연구함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행치 아니하였고(23:2-4), 구약의 목표요 정점인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데 실패하였다.

성 경: [마22:37]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라 - 신 6:5의 인용이다. 이것은 가정이나 성전에서 매일의 예배에 사용한 신앙 고백문인 '쉐마'(*)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십계명의 전반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의 포괄적인 요약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이 구절을 외우는 것으로 교육이 시작된다. 바리새인들은 신 6:8, 9에 따라 '쉐마'를 문의 오른편 기둥에 기록하고 또 이것을 기록한 작은 양피지를 상자에 넣어 끈으로 이마와 왼팔에 잡아 매었다(경문, 23:5).

⭕ 마음(*, 카르디아)은 외식이 아닌 진정한 의지를 강조한 말이다.

⭕ 목숨(*, 푸쉬케)은 육체적 생명을 뜻하며, 이는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 뜻(*, 디아노이아)은 지적 능력을 뜻하는 말로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 다하여(*, 엔 홀레)는 '전부 안에서, 전체로써'라는 말이다. 신 6:5의 원문은 '뜻' 대신에 '힘'이고, 마가와 누가에는 '힘'이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서로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중복되는 개념들로서 강조하는 것이지 의미상의 별 차이는 없다. 결국 전 인격을 기울여, '존재의 전 기능을 다하여'(Tasker), 전 생애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 사랑하라 - 원어 (*, 아가페세이스)는 미래 시상인데, 이것은 명령어의 대용어로서 법조문에 쓰이는 방식이다(Lenski). 이것은 단순한 애정이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과는 엄격하게 다르다. 자기 이해를 초월한 순수하고 무목적,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 사랑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요일 4:1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과 율법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이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사랑을 풍족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 13장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요 13:43).

성 경: [마22:38]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크고 첫째 되는 - 원문상(*, 헤 메갈레 카이 프로테) '가장 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카이'는 설명적 용법으로서 가장 크기 때문에 첫째라는 말이다. 막 12:31에는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다'는 말로 표현된다.

성 경: [마22:39]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둘째는 그와 같으니 - 분명히 이웃사랑은 두번째이다. 하나님은 항상 처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둘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요,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다'(*, 호모이아 아우테)는 문자적으로 '그녀와 동일하다'인데, 이 3인칭 여성 대명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 헤 엔톨레; 여성 명사 단수)을 가리킨다. 즉 둘째도 첫째 계명과 같이 큰 계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은 하나의 계명으로 보신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웃에 대한 의무, 부모를 돌보는 것까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15:1-9). 더욱이 그들은 원수는 미워했으며, 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했고, 죄인들을 미워했다(5:43-47).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케 하신 율법은 사람의 유전을 배제하고 두 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결하여 하나로 만드신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요일 4:20, 21에서 설명하고 있다.

⭕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이것은 레 19:18의 인용으로서, 본서에서는 이미 5:43;19:19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사람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약이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결실된다. 이 두 계명의 결합은 '12족장의 언약'에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문헌이 기독교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렇다해도 누가복음의 평행구가 보여주듯이 이 두계명을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서기관들의 형식적인 일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행위는 잘못되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고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여 주를 죽였어도,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지키는 데는 열심인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이 이웃의 개념이 레 19:18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 땅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을 포함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원수(5:44)를 비롯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눅 10:29-37)에게까지 확대된다. 사실 누가복음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이웃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이웃 사랑 개념은 온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요 11:52).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언약공동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온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의 반영인 것이다(5:48).

⭕ 네 몸과 같이 - 원문은 '호스 세아우톤'(*)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네 자신처럼'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시인되면서 이웃 사랑의 표준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억지 해석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돌본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서 그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용납하고 잊어버리고,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미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랑이 너무 과해서 우리는 이기적이고 타락하고 부패한다. 그러나 우리 이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인가? 예수는 먼저 내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도 그 만큼 사랑하라는 순서나 정도가 아니라 이웃과의 형제적인 연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웃에 대하여 그가 마치 '내 자신'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새계명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성 경: [마22:40]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가장 큰 계명]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이 말씀은 그 뜻을 바로 알기가 무척 힘들다. 문자적으로는 이 두 계명에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강령'(*, 크레마타이)라는 말이다. 먼저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처럼, 뿌리와 열매처럼 연결되어 있다(사 1:17;58:6, 7). 그리고 그 모든 율법과 그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또 구약성경의 요체는 율법이라 할 수 있다. 율법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법조문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그 계명들의 근본 정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사랑이다. 모든 법은 항상 그 법을 만드는 근본 정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근본 정신이 무시되면 법조문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전구약의 계시와 역사의 목표와 의의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법은 그 나라의 성격과 형태를 결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위한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요구하신다(신 10:12). 마음으로부터의 하나님 사랑은 다른 모든 종교적 의식들의 기둥이다(삼상 15:22;호 6:6;암 5:21-24;미 6:6-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적 질서로서 연합과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질서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이 사랑은 십계명의 전문에 나타난 바 이미 충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에, 또 공동체 내부에서 나라가 설 수 없으니 성경과 민족과 역사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물론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계명이어서 다른 계명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구체적인 법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다른 계명들이 준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랑의 계명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모든 율법 준수가 헛된 것이다. 율법에 열심인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가 오히려 비판을 받는 것은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희생과 관용이 없고 보이기 위한 행위만 무성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긴 것이다. 예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모든 율법 준수의 동기와 그 자세를 규정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현신과 자기 희생과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상보훈(5:17-20)의 의미하는 바이다. 예수께서 7:12에서 똑같은 표현으로 '황금율'을 말씀하셨다. 바울은 롬 13:8-10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한편 랑게(Lange)는 예수의 신성 주장이 신 6:4의 유일신 사상과 충돌하도록 해서 책잡고자 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음모가 이 질문에 있다고 하나,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예수의 입을 통해 사두개파보다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물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의 율법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두개파에 비해서 옳은 점을 칭찬하시면서도 그들의 치명적인 헛점을 다음의 질문(22:41)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성 경: [마22:41]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물으시되 - '모였을 때'(*, 쉰에그메논)라는 완료분사는 '그들이 여전히 예수 주위에 모여 있을 때'라고 번역할 수 있다(Knox). 공관복음의 평행구들(막 12:35-37;눅 20:41-44)은 본문을 예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질문과 그들의 답변으로 구성하지 않고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거나, 혹은 서기관들에게 일방적으로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서기관들의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바리새인들에게만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문답을 통해 모여든 유월절 축제의 순례자와 모든 백성들을 가르치시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음을 평행구들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로 기록된 것은 그들의 기록 목적에 따른 편집자의 권한이다.

성 경: [마22:42]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 지도층과의 공식적인 논쟁의 출발이 된 그들의 질문-'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1:23)-에 대한 예수의 역습(counterblow)이다. 예수는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시는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서 그들의 판단의 한계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 이 견해는 가장 보편적으로 수납되었던 것이고 선지자와 시편에 근거하는 것이었다(삼하 7:13,14;사 11:1, 10;렘 23:5). 장차 오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예수 자신도 예루살렘 입성시에 기쁘게 받아들인 적이 있다(21:15,16). 마태는 거듭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호칭(9:27;15:22;20:30;21:9,15)과 족보(1:1-16) 뿐 아니라 유대인의 왕(2:2;21:5;27:11,29,37,42)이라는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메시야 개념이 세속화되어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개념으로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16:20).

성 경: [마22:43]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 예수는 시 110편(LXX역에는 109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주가 되는 사실을 밝히신다. 먼저 예수와 바리새인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들 사이에 시 110편이 메시야 예언이라는 점과 그것이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또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엔 프뉴마티)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이 없이 일치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조상인 다윗 자신에 의해서 이미 성령이 깨닫게 하심으로,'주'(*)로 불리워졌음을 지적하심으로 메시야의 초월성을 조상인 다윗의 입의 증거로 입증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유대의 지도층으로부터 책잡힌 유일한 항목은 당신의 신성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요 5:17, 18;8:56-59;10:24-38). 즉 예수의 신성 주장은 메시야의 초월성 예언을 응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메시야 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도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가르침과 기적이 가능했다고 인정한다(요 3:2). 그러나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요 10:33). 유일신 야웨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방 문화와 정치 질서 속에서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와 신격화는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문제였고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의 초월성 주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해했으며 그 이유로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용사, 다윗의 전투적인 용맹을 물려받은 한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되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가 굉장한 능력과 권세로 일하여 그의 존재와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기대까지는(요 12:34) 있었지만, 영원한 선재(요 8:58),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부르고, 아버지와 '하나'라는 주장(요 8:54;10:30)까지 소화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점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윗의 수많은 자손들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이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어찌 그리스도가 되겠느냐? 다윗의 자손이면서 그의 주이신 자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다윗의 주이시다.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참람죄로 죽이려 하지만, 너희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도 다윗의 주이니 그도 참람하다 하여 죽이겠구나"라는 말씀이다.

성 경: [마22:44]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주께서 내 주께 - 윈문은 '야웨(*)께서 내 주(*, 아도나이)께'로 되어 있다. 70인역(LXX)이 모두 '야웨'(*)를 '주'(*, 퀴리오스)로 번역한고로 우리말로는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신구약에는 종이 주인에게, 백성이나 신하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주'(*, 아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된 다윗이 '나의 주'라고 불러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린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이미 자기의 후손인 메시야가 한낱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오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신관(神觀)이 이미 메시야 예언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결코 철학적 사고의 반영이 아님을 볼 수 있다.

⭕ 이르시되 - 원문(*, 느옴)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비밀한 통첩(通牒)을 의미하여 하나님께만 쓰인다(Lenski).

⭕ 내가 네 원수를 앉았으라 - 그리스도의 '원수'(*, 에크드로이)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다. 처음부터 거짓말하고 살인한 마귀와 그의 부하들이며,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당신을 믿지 않고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으며(요 8:44), 가룟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요 6:70). 마귀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비방하며, 백성들로 그 통치를 받지 않도륵 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 일을 훼방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원수가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부활시키심으로 죄와 죽음의 악의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니 우편에 앉으셨다. 고대의 왕들은 정복당한 왕들의 목을 발로 밟음으로, 그들의 승리의 기개를 드높였다(수 10:24). '발 아래 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즉 완전한 폐배와 굴복인 것이다. 이는 모든 악의 세력을 근절(eradication)하기 위한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에 동참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모든 일들이 야웨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소개된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린양처럼 원수들의 죽음의 함정으로 무기력하게 끌려가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세로 원수를 결박하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성 경: [마22:45]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다윗이 자손이 되겠느냐 -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그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는 성경의 예언(사 9:6,7;미 5:2)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요 8:41,42).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에 관한 예언(단 7:13;말 3:1)을 들어 갈릴리 출신 인간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요 7:27).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신 증거를 권세있는 가르침과 표적과 기사로 이미 충분하게 나타내셨다(요 7:31;10:24-38).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전통과 왜곡된 성경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기들과 상관없이 오시고, 또 자기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도층은 늘 예수를 시험한다(12:38;막 8:11;눅 11:16). 그러나 예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그들의 요청에는 한 번도 응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다윅이 주로 알았다면 누구도 주이신 그리스도를 심사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주께서는 사람의 증거를 받으실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스스로 증거하시고 아버지의 증거로서 행하셨다(요 8:18). 그리고 오히려 주께서 그 백성들을 심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첫 선포가 '회개하라'였다는 사실이 바로 이를 반영한다. 또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 와서 회개를 선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3:7-12). 그러나 유대의 지도층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입장을 표명(表明)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의 전통적 질서와 배치되었으나 백성들로부터는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잡지 못했을 따름이다.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를 '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이요, 서기관들이었다. 그들, 권위자들이 '주'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의 지도층은 예수를 칭할 때 보통 2인칭 호격으로서의 '당신'이라고 했으며, 호의를 가지고 경의를 표할 때 조차 반드시 `선생님'(*, 랍비)이라는 칭호만 사용했다(19:16;요 3:2). 이 공식적인 논쟁의 시작에서 그들은 예수께 '네가'라고 했다(21:23).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고 회의에서 요한처럼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과 일반 백성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고백하고 '주'라고도 칭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 지식이 아버지로부터(16:17) 왔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다(11:25). 이처럼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또한 예수는 당신의 남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 사실을 증명하셨고,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계 22:16)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셨다.

성 경: [마22:46]

주제1: [혼인 잔치 비유와 일련의 질문들]

주제2: [메시야의 신분]

⭕ 한 말도 능히 묻는 자도 없더라 -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동시에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이시라는 영감된 말씀을 감히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들이 문제로 삼을 수도 없었던 사실이었다. 결국 그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심사할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지식의 열쇠를 가진 책임자들로서 자신들과 이스라엘 전체를 기만(期瞞)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눅 11:52). 마태는 이 해설로 논쟁 기사 전체(21:23-22:45)를 종결짓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미 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그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음을 밝힌다(막 12:34;눅 20:40).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다 대답하셨으나 그들은 예수의 질문에 한 번도 바르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유대 지도층과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대화는 끝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아는 잘못된 지식으로 자기들의 주를 죽이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불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 거짓으로 고소하는 일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날은 수난주간의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즐겁게 들은(막 12:37) 예수의 이말씀이 나중에,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후에 다윗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베드로에 의해서 오순절 설교(행 2:34-36)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찌른다. 그리고 그 답변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한 바리새인에 의해서-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이루어진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시라"(롬 1:3, 4).

성 경: [마23: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이에 - 본장 초두에 언급된 `이에'(*,토테)는 마태복음에서 독특하게 사용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상관적 부사이다. 그런데 `이에'란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서의 `그 때'(then)를 의미하기도 하고, 단지 막연한 한 시점인 '그 때'(at that time)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시점이 지난 '그 후', 또는 '그 다음', `그리고' 등의 뜻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맥상 '그 다음', '그리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23장은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장면을 다룬 22장에 바로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무리와 제자들에게 - 이 구절은 예수께서 누구를 상대로 하여 설교를 시작하는지 말해준다. 여기서 '무리'(*, 오클로이스)란 군중 이외에 민중, 백성, 평민, 서민(the common people)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리'란 특수 계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및 헤롯 당원들과는 구분되는 일반 평민들의 군집(群集)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22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와의 대화에서 곤경에 처하여 더 이상 예수에게 질문을 하지 못했음을 미루어(22:46) 볼때,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를 떠나 갔을 가능성이 많다.

성 경: [마23: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 예수께서 질책하실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특히 '서기관들'은 구약 율법을 연구, 교육하는 일을 전담(專擔)했던 자들이었으며(2:4), 바리새인들은 독선적일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 자들이었다. 바로 이 바리새인들 중에서 서기관들이 주로 배출되었다. 한편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선생'(teacher)과 같이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신학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런데 서기관이라는 말과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바리새인으로서 서기관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지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질책(叱責)하신다기 보다 하나의 왜곡된 신학적, 신앙적 입장을 비판했으며 또한 그것을 신봉(信奉)하고 전파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계신 것이다. 실로 바리새인들(서기관들)은 율법에 남다른 열정과 열심있는 연구를 통해 요한 힐카너스 시대(B.C.135-105) 이후, `150년 간 백성들에게 최고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아 왔지만 그들은 위선과 형식주의적(形式主義的)신앙 형태로써 이스라엘 종교 전반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먼저 '모세의 자리'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공식적인 율법 교사의 석재(石材)로 만든 자리를 가리킨다. 그 당시 유대의 바리새인 또는 서기관들 중 가장 유력한 자가 회당에 마련된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E.L. Sukenik). 예수께서도 이 관례에 준하여 가르치신 적이 있다(눅 4:20-22).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일반적 관념으로는 '어떤 사람의 자리에 앉다'라는 것은 보통 '어떤 사람의 권위를 계승(繼承)하다'는 의미로 이해 되어졌다고 전한다(왕상 1:35,46;시 132:12;Jos.,Antiq. VII, 353, XVII,2). 따라서 율법 강론(講論)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았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모든 권위를 전수받은 공식적인 모세의 법적 계승자들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권위의식을 통박(痛駁)하시면서 계속해서 언행(言行)이 불일치한 그들의 허구성을 고발하셨다(3절 이하).

성 경: [마23: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 이 구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교훈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힐책(詰責)하신 것은 단지 가르침과 행함이 일치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율 배반적(二率背反的)인 삶의 태도였을 뿐이다. 사실 그들이 가르치는 바 율법 그 자체는 그들의 실행 여부와는 상관없이 참된 진리요 신앙인의 실천 강령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행하고 지키되'라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을 빌어 강력한 어조로 그들의 가르침을 준수하라고 명하셨다. 한편 '행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사테'(*)는 상세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실행한다는 뜻이며, '지키되'의 원어 '테레이테'(*)는 거의 몸에 배듯이 자연스럽고도 완벽하게 지킨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 땅에 율법의 폐기자(廢棄者)가 아닌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인간이 마땅히 습관처럼 지켜야만 될 절대적인 진리임을 천명(闡明)하셨다. 실로 참 진리는 어떤 구조적 모순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며 모든 인간의 삶을 인도하는 등불이 된다(시 119:105).

성 경: [마23: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되 - 이 구절은 3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바리새인들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에 의한 위선적인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엄격성이나 막중한 의무(Alford)라 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바리새인들의 자의적 율법 해석에 따른 각종 규범과 전통적인 계율들 및 아주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세분화된 규칙과 예법 등을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율법의 생활 규범을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토록 강요했었다. 즉 그들은 마치 운반하기 곤란할 정도의 무거운 나무단이나 곡식단처럼 성가시고 귀찮고 감당키 어려운 규칙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백성의 어깨에 지움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을 율법의 보지자(保持者)가 아닌 곡해된 율법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자기들의 의(義)에 도취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첫번째 잘못이었다.

⭕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두번째 잘못이다. 즉 그들은 성가신 규칙들을 고의적으로 회피하거나 복종하기를 거절했던 것이(Born-Kamm,Josef Schmid,Schweizer, Sand) 아니라 그들이 만든 힘겨운 규칙들에 눌려 쓰러져가는 자들을 위해 그 의무 규정을 가볍게 해주거나 실천 가능하도록 그 짐들을 경감(輕減)시켜주는 등의 도움주기를 거절했던 것이다(Manson, McNeile, Filson). 여기서 '손가락'이란 앞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사람의 어깨'와 대조되는 말로서, 결국 '손가락으로 움직인다'는 표현은 아주 사소한 도움이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배려를 뜻한다. 진정 그들은 율법이 근본 명하는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에 대한 관심은 멀리한채 오히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같은 미세한 규범을 크게 부각시켜 백성들의 어깨에 종교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짐을 부과하였다(23절;행 15:10;갈 5:1). 진정 그들은 가르치고, 부과하고, 제한만을 일삼았을 뿐 그 짐을 대신 지거나, 나누어지거나, 가볍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짐을 대신 지시고, 나누어지셨다. 그분은 단호한 어조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30) 말씀하시며 당신의 가르침에 동참하기를 요구하신다.

성 경: [마23: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 6:1에 이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허영적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위 전체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짓임을 선언한다. 그들은 은밀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일종의 가증한 연극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영광과 찬사와 인정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요 12:43). 결국 이러한 비판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잠재적 심리를 정확히 찌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숨겨져 있는 잠재적인 욕망까지 모두 제거하는 근본적 인간 변화를 암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여 - 신약성경에서 경문(phylactery)이라는 단어는 여기서만 나타난다. 헬라어로 '퓔랖테리온'(*)이라고 하는 이 '경문'은 본래 '보호물', '호신패'(護身牌), '부적' 등의 뜻으로서 '표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타포트'(*)라는 말에서(신 6:8) 유래한 것인데 예수 당시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도의 끈'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테필로트'(*) 또는 '테필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퓔랖테리온'은 바로 이 '테필로트'의 번역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기 이후부터 이것을 차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율법을 기억하고 경건에 힘쓸 목적이었으나, 차차 자기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혹은 이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 이교도들의 부적 같은 것으로 믿고 착용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경문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율법서에서 취한 네 부분들(출 13:2-10;11-16;신 6:4-9;11:13-21)을 써 넣은 한 조각의 고급 피지(皮紙)를 담은 사각형의 상자였는데 묶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가죽이나 양피지로 덮혀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 13:9,16;신 6:8;11:18을 여자적(如字的)이고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왼팔 안쪽 부위에나 앞 이마에 가죽끈으로 부착하였다. 이 두 부분은 심장과 가까운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한편 처음 이것을 부착하기 시작했던 때는 아침 '쉐마'(신 6:4,5) 기도 때 뿐이었으나 점차 하루 종일 차는 것이 관행(慣行)으로 되었고 심지어는 취침 때에도 부착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경문'의 크기는 주로 랍비들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극단의 경건주의자들(사실은 외식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건을 과시할 목적으로 크고 눈에 잘 띄는 경문을 만들었으며 그와 더불어 묶은 끈을 푸는 법과 매는 법에 대한 세세한 규정(規定)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 옷술을 크게 하고 - '옷술'이란 민 15:38;신 22:12등에 명한대로 '심라'(*)라는 겉옷의 네귀에 단 '술'(tassel)을 가리킨다(9:20). 그런데 이 '술'은 석류 문양의 장식으로 된 것이며, 주로 단청색실로 짰다고 한다. 여기 이 청색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 및 순결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청색의 '술'을 달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자기의 거룩성을 자랑하는데 힘썼다. 더욱이 그들은 이 옷술을 크고 길게하여 될 수 있는한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려 했다. 사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자신의 의복에 '술'을 다는 예를 취하셨지만(9:20;14:36)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의 탈(mask)로서 착용하신 것은 아니었다.

성 경: [마23: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 - 막 12:39에서는 어순이 바뀌어 나온다. 즉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으로 어순이 짜여 있다. 강조점을 우선하여 표현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마가복음은 회당에 강조점을, 마태복음은 잔치에 강조점을 더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여기서 '잔치'(*, 테이프나)란 많은 손님을 초대하며 밤이 맞도록 즐기는 저녁 식사(supper)를 가리킨다. 이 잔치 자리의 '상석'(上席)은 상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댄 채 식사하는 유대 또는 헬라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출입구에서 제일 안쪽에는 잔치의 주역이, 그리고 그 오른쪽 끝에는 가장 귀한 손님이 앉는다. 이 우측 상단 끝이 바로 '상석'으로서 이곳에서는 몸을 틀거나 고개를 좌우로 하지 않아도 식탁 전면을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 상석을 매우 원했기 때문에 연회마다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소한 시비(是非)가 발생했다고 한다(눅 14:7). 이같은 상석 차지는 결국 세상의 명예와 영광에 심취해 있는 바리새인들의 타락한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이와 함께 '회당의 상좌'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배치된 회당 내부 중 사람들을 정면으로 바라볼수 있는 회당 관리자 옆, 곧 궤 앞의 우측상단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존경받는 자들 및 회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앉아 지혜를 설파하곤 했다고 한다(Lenski). 바리새인들은 참다운 예배보다는 바로 상좌 차지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그들의 추악한 종교적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약 2:2, 3). 실로 그들은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허영적 욕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적 즐거움(잔치)과 신앙적 희열(회당)을 놓쳐버린 채 메마르고 배타적(排他的)인 삶에 찌들어 있었다.

성 경: [마23: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

⭕ 시장에서 문안(問安) 받는 것 - 시장 역시 공공장소이다. 공공장소에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월성을 인정받는 것이 된다.

⭕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 랍비(*)는 히브리어(*, 랍비)를 음역한 말로서 '나의 주', '나의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물론 이 용어는 존경의 표시이지만 때로는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랍비 학교에서는 흔히 이 용어를 반복(랍비여, 랍비여)하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보다 한 시대 이전 시대인 힐렐(Hillel, 당시 유대교 율법 주석가 중 한 사람, A.D. 10.년경 사망) 때부터 사용 되었다. 그런데 이말이 공식적 직책으로 사용된 시기는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말은 존경의 표현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었는데 예수에게도 사용된 바 있다(26:25,49;요 1:38;3:26). 물론 이 용어는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떤 특수한 신분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한편 탈무드 시대(Talmudic times, A.D.3-5C)에는 랍비의 지위가 상당하여 랍비의 제자는 그의 명령에 어떤 이의(異議)도 제기할 수 없는 절대 복종만이 가능했으며, 그의 앞이나 옆에서 걸어갈 수도 없었고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Moses, Aberbach).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랍비의 지위가 그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성 경: [마23: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그러나 너희는 - 여기서 이야기가 전환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율법 학자들을 향한 비판을 일단락 짓고 '너희는'(*, 휘메이스)이란 말을 강조하시어 청중과 제자들에게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설교가 단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 이는 겸손에의 요청인 동시에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는 한 하나님, 한 주님을 모신 교회구성원 안에서 단지 하나님의 일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허영심(虛榮心)이나 계급 의식을 버리고 오직 섬김의 자세를 취하라고 말씀하신다(20:25-28). 특별히 '받지 말라'(*, 메 클레데테)란 부정 과거형으로서 어느 때라도 칭함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이 금지 조치가 바리새인의 교만을 지적하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 당시 특권 의식을 지니고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하던 특수 교권주의자들의 권위를 철저히 분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금지 조치는 제한적이며 정신적인 교훈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 내의 지도자들이나 교사들에 대한 존경 의식마저 금지시키신 것이 아니었다(고전 11:1;12:28;엡 4:11-13;딤전 1:2). 교직에 대한 합당한 칭호는 지나친 공명심(功明心)이나 사사로운 명예욕에 근거하지 않는 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 너희 선생은 하나요 - 시내산 사본이나 베자사본 등에는 본문의 '선생'(*, 디다스칼로스) 대신에 '지도자'(*, 카데게테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의 흐름상 '지도자'란 말은 10절 이하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본절에서는 바티칸사본이 제시한 바대로 '선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한편 본문의 '너희 선생'이 과연 누구냐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다. 즉 (1)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Carson). (2) 하늘에 계신 모든 존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Bengel, The Puplit Commentary). (3) 각 개인의 내면에 내주하셔서 가르치시는 성령이시다(Alford). 이 가운데 (1)의 견해는 비록 후대에 수정된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본문의 표현이 추구하는 바가 예수로 보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많다. 이에 비해 뒤이어지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에 근거해 성도들은 모두가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자연스럽다고 본다(16:17;요 6:45;행 10:28).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 유언적 메시지로 성도들의 영원한 안내자요 교사이신 성령(聖靈)을 약속하셨다는 점에서(요 14:26), 그리고 뒤이어지는 성부(聖父, 9절)와 성자(聖子, 10절)에 대한 각각의 권위에 대한 삼위 일체(三位一體)하나님의 탁월함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3)의 견해도 무시는 할 수 없다.

⭕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단 한 분, 영원한 랍비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라는 이 선언은 (1) 인간중에는 하나님의 권위를 능가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2) 지금껏 누려왔던 종교상의 독재나 특권을 모두 폐지(廢止)하시는 것이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므로 어떤 직책이나 전통(傳統)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갈 수는 없음을 명시하신 것이다.

성 경: [마23: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 여기서 '땅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가 대비 되고 있다. 먼저 '아비'(*)란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는 용어로서, 특히 '땅의 아버지'라 함은 그 시대 이전의 율법선생, 또는 위대한 스승, 원로 교사. 어떤 학파의 태두(泰斗) 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Prike,Aboth). 유대인들은 위와 같은 자들을 절대적으로 숭상(崇尙)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요 4:12). 한편 예수께서는 '땅의 아비'를 '하늘의 아버지'와 대비시켜 종교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사람의 영광과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에 미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사람으로부터 찬양받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암시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종교적 특별 대우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실로 초대고회 성도들은 오직 종교상의 아버지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인정하였었다(고전 8:6;고후 6:18). 그러나 이 교훈은 광의적,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즉 이 '아비'란 육친적으로도 능히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로, 디모데의 아버지로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전 4:15;딤전 1:2).

성 경: [마23:10]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지도자 -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서 헬라어로 `카데게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앞서간다', `안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카데게테스'(*)의 복수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은 '교사', '스승'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특히 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완전한 모범이 되며 그 각각의 제자들을 책임지는 전인적인 스승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감히 자신들에게 이 용어를 붙이곤 했다(롬 2:19,20). 실로 자기를 추켜 세워 선생이요, 지도자라 하여 사람들은 끌어 모아 이끌어가는 교만한 사람들이 많았던 그 혼란의 시대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한 분만 참된 스승이요, 참된 지도자라고 못박는다. 실로 예수께서 앞서(2-7절) 자칭 '지도자'라는 자들의 모순됨을 파헤쳐 비판한 바와같이 그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들이었다. 진정 전인격적인 면에서 모든 이를 바르게 인도하실 분은 예수 한 분 밖에 없다(히 12: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전인격을 그분께 맡기고 오직 그분의 가르침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앞서 가시는 그 분만을 바라며 좇아가야 할 것이다(11:28).

성 경: [마23:1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너희 중에 큰 자는 - 이는 예수께서 질서상 인간 사회(교회 포함)에는 계급이 형성될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큰' 것이 한 개인의 영광과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겸손과 신뢰와 헌신으로 아래 사람을 섬기는데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26,27).

⭕ 섬기는 자(*, 디아코노스) - 타인의 유익만을 위해 성심껏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자를 가리킨다. 실로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며 사람들이 존경하는 '큰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정녕 이들의 권위와 능력은 오직 섬김과 봉사와 헌신과 겸손을 통해 드러난다.

성 경: [마23:1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성도의 바른 자세]

⭕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 본문의 역설적 교훈은 자연법(natural law)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법을 반영한다. 즉 종말의 심판에서는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고, 낮아진 자를 높일 것이다(겔 21:26). 그리고 본문이 전하는 것은 겸손과 봉사이지 겸손과 혼성된 노예적 봉사 행위나 바보스러움은 아니다. 한편 이러한 형태의 구절은 복음서에서 여러 군데 발견된다(18:4,눅 14:11;18:14). 빌립보서 2:8, 9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낮추시고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20:26-28에서는 예수 자신이 섬기러 왔음을 선언하고 있다. 실로 그가 보여준 겸손이나 타인에의 봉사는 굴욕적이고 노예적인 봉사 행위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그가 행사하는 최고의 권위와 완벽히 조화되었다. 예수는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의 최고의 겸손과 최상의 희생을 완수하신 후, 그 누구보다도 높임을 받으셨다(빌 2:8-11). 한편 이 역설적인 의미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1)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는 섬김의 자세이다. 다시 말해 훌륭하고 성숙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 섬김과 겸손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이다. (2) 참된 지도자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3) 이러한 진리는 명령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명령문이 아니다. 따라서 누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며 자발적 양심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다.

성 경: [마23:1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첫번째 저주 선언]

⭕ 화 있을진저 - 헬라어 '우아이'(*),는 '오, 슬프다', `아이고'하는 탄식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내리는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2중적 심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즉 현재적이며(24:1,2) 또한 종말적(미래적)이다(계 20:7-15). 여기서부터는 계속하여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되는 저주문이 7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주 선언문을 흔히 7화(禍)선언이라 한다. 이 7화 선언은 예수의 신적 인격이 총동원될 만큼 중엄하며,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조용하고도 진실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自肅)과 회개를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었다(Lenski). 예수께서는 이 7화의 대상이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임을 말한다.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헬라어 '휘포크리타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위선자'로 번역 되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호칭은 '위선자'라는 아주 모욕적인 언어이다. 이같은 과격한 말은 6:2, 5,16;7:5에 그리고 22:18에도 나온다. 이렇게 위선자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앞부분(2-7절)에서 열거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이다.

⭕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여기서는 위선자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 천국 문 - 천국에 들어가는 표현을 '천국 문'으로 표현한 것은 7:7,8,13,14; 25:10에도 나타난다. 평행구절인 눅 11:52에서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서술한다. 이 말은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의 만용을 부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4절). (2) 진리를 독점(獨占)하고 있으면서 실천을 하지 않아, 자신 마저도 천국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열쇠를 독점하여 들어 가고자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 (3)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적극적으로 천국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곧 그들의 천국 문까지 닫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로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 문을 막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성 경: [마23:1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첫번째 저주 선언]

본절은 권위있는 고대사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일부 사본들(8,9세기의 모스코, 아도스 사본 등)에는 개역 성경의 13절이 14절에 실려있고 대신 13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심판이 더욱 무거우리라'(KJV)로 되어 있다. 이는 막 12:40과 눅 20:47에서 보충한 후대 필사자들의 인용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3:1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두번째 저주 선언]

⭕ 교인 하나 지옥 자식이 되게 - 두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먼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란 13절의 소극적인 면과는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활약상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교인들은 선교에 적극성을 띠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XX 2,4; Calvin, Bengel). 물론 그들 유대인들의 전도 활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갖는 파당적인 종교적 성격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 여기 교인(*, 프로세뤼토스)이란 공동번역 성경과 같이 '개종자'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개종자들은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든 전통과 규범을 따름으로써 유대화해야만 했다. 이런 절차상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방사람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을 더 지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람어로는 게힌남(*) 히브리어로는 '게힌놈'(*)이라고 음역되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라고도 말한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의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3절;5:22). 한편 본문에서는 더 지독한 위선자를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강조 하기 위해 개종한 자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그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이교적 습속(習俗)에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덧입힘으로써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종자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종자들이 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욱 완고한 위선자들을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참으로 전도할 대상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간다거나 섬김의 자세 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을 갖고 나간다면 도리어 교회 문을 막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피 전도자가 비록 교인이 된다 하여도 잘못 배워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잘못된 성경관과 신앙은 제거되어야지 재생산 되어서는 안된다.

성 경: [마23:1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소경된 인도자여 - 세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 저주의 대상은 13절이나 15절과는 달리 '소경된 인도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진리에 눈이 먼 완고한 무지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10절;15:14).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뜨린다.

⭕ 성전으로 맹세(盟勢)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 이 말은 성소나 지성소 또는 제단등의 건물로서의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이를 기필코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맹세의 구속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다.

⭕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 여기서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서의 금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성전 안에 비치된 금장식 또는 성전 금고에 간직된 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사나 하나님보다 성전 제물에 더 큰 관심을 지닌 바리새주의자들(교권주의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나 실로 율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과 맹세했을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장).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效力)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황금보다 낮추어 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라면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5:33-37).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에 근거하여, 실천 의지가 전혀 깃들지 않은 맹세를 철저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성 경: [마23:1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 여기서 다시 16절에서 지칭하였던 '소경된 인도자'를 우맹(愚氓)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우맹을 가리키는 헬라어 '모로이'(*)라는 말은 지각과 판단력이 결여된 '어리석은'(foolish)이라는 뜻으로서 5:22;고전 3:18,딤후 2:23등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점증시킨다.

⭕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은 16절에서 묘사한 행위에 대하여 반문하면서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즉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그 답이 너무도 자명(自明)한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명쾌한 질문을 통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극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셨다. 이와 같은 질문의 의미는 신앙의 척도가 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로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들(하나님, 성전)에 의해 부차적으로 거룩한 것(성전의 금)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성 경: [마23:1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너희가 또 이르되 지킬지라 - 여기서 다시 16절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다만 '소경된 자'가 '너희'로 바뀌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고, '성전의 금'이 '그 위에 있는 예물'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17절과 19절도 서로 대칭되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태복음의 특징인 대칭적 구조이다.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운율적 반복형태는 호소력이 강하다. 실로 거룩과 생명의 근원적인 실체를 외면한 모든 종교 행위는 허식이요 우상 숭배일 뿐이다.

성 경: [마23:1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 역시 17절과의 대칭적 구조로서 반복되는 형태의 문장이다. 17절과의 차이점은 17절의 '우맹'이라는 칭호가 빠졌다. 또 18절과 마찬가지로 '금'이 '예물'로 바뀌었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다. 여하튼 예물은 제단으로 인해 거룩해지는 후속적 성물(聖物)이다(출 29:37).

성 경: [마23:20]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그러므로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 이 구절은 맹세에 대한 결론적 선언이다. 내용은 제단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이나 예물을 제단위에 두고 맹세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맹세는 어떻게하든 무조건 정직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5:33-37에서는 결단코 맹세는 하지말라고 선언하셨는데 그 내용과는 상호 모순(矛盾)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9절 주석참조). 표면상으로 볼 때 상호 모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각각 그 언급 내용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오히려 모순이 아니라 상호보완(補完)적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5:33-37의 내용은 엄격하게 맹세를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외에 다른것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그 모든 맹세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맹세 할수 있는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뿐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본문의 내용은 모든 맹세는 어떤 물질적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정직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은 이미 5:33-37에서 언급된 맹세에 대한 교훈을 보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이 21-22절에 계속 점증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 경: [마23:2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 앞의 20절에서는 제단 위의 예물이 제단에 속하여 있음을 밝히고, 예물과 제단을 대비시켜 제단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높인 것에 이어서 본문에서는 그 제단이 있는 성전을 하나님과 대비시켜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물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그리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정직하게 지켜야 함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그 안에 계신 이 - 공동번역에서는 '그 안에 계신 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계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케산티'(*)는 '카토이케오'(*)의 과거분사이다. 그 뜻은 '산다', '거주한다', '자리잡는다'(live, dwell)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초자연적 존재가(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등)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서 '거하다' 등으로 쓰인다. 따라서 특정한 장소에 대해 쓰여지기도 하며, 사람과의 인격적관계의 의미로 쓰여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카토이케산티'(*)라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분사형이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를 나타낸다(1회적 의미).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계신다는 의미로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을 솔로몬이 완성하여 헌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는 전통적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대하 6:2;7:1-3). 그러나 이러한 성전 중심 사상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보편적 하나님 임재 사상(臨在思想)으로 바뀐다. 즉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이 실현되는 곳,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속에 계신다(요일 4:16). 따라서 본문의 강조점은 성전이나, 제단 위의 제물, 또는 제단과 같이 장소나 물질적인 것을 두고 맹세의 근거를 삼아서는 안된다는데 있다. 그 맹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人格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실로 예수에게는 특정한 장소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내면적 신실성이 문제인 것이다.

성 경: [마23:2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하늘로 맹세하는 자 - 이 구절 역시 20절과 21절에 이어 똑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그 강조점을 점증(漸增) 시키고 있다. 즉 헬라어로 '우라노스'(*)는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heaven)을 말한다. 그리고 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지며(22절;행 7:55;히 8:1;벧전 1:12) 인격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21:25;막 11:30, 31;눅 15:18, 21;20:4,5). 이 본문에서는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졌다. 5:34에서도 역시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와 같은 의미로 묘사한다.

⭕ 하나님의 보좌 -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행위를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헬라어로 '드로노스'(*)라고 하는 보좌(寶座)는 '왕좌' 또는 '옥좌'(공동번역)로 해석한다. 이 단어는 왕이나 지배자의 권자로 사용되기도 하고(눅 1:32,52;행 2:30), 하나님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히 12:2;계 7:15), 그리고 하늘과 동등하게( 5:34;행 7:49) 또는 그리스도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19:28;25:31;히 1:8;계 22:1, 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보아 장소적 의미의 '하늘'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보좌를 두고 맹세한 것은 하나님과 맹세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 그 위에 앉으신 이 - 이 구절은 20절의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과 21절의 '그 안에 계신 이'라는 구절과 같은 형식을 취하여 '그 위에 앉으신 이'라고 문장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단과 성전 안에 있는 이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에 대한 관계성이 옮겨가고 있다. 여기서 '그 위'란 앞에 나온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따라서 '앉은 이'는 하나님이 된다. 20-22절은 세번째 저주 선언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 결론은 22절이 된다. 그런 점에서 20, 21절은 마지막 결론인 하나님에게로 이끌기 위해 서술한 잠정적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이 3단계에 걸쳐서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 비판의 내용이 (1) 맹세에 대한 무조건 거부가 아님을 차근 차근히 밝혔고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맹세에 관한 가르침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그리고 (3) 성전 중심이나 예물 중심 사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와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삼단논법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즉 제단-성전-하늘로 옮겨가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그 안에 계신 이-그 위에 앉으신 이의 형식으로 관점을 옮겨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제단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의 관계를 옮겨갔다.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마23:2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네번째 저주 선언]

⭕ 박하와 십일조를 드리되 - 여기서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그 저주의 대상이 13절과 15절의 형식과 똑같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창 14:20;28:22)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레 27:30;신 14:22-27).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수자됨의 규준(規準)으로 삼았다.

⭕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 27: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 율법의 더 중한 바 - 여기서 '더 중한 바'(*, 바뤼테라)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De Wette)이 아니라 지엽적(枝葉的)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Ridderbos) 또는 '더 중요한 일'(Meyer, NIV)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차등(差等)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right)와,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신 16:19;사 1:17;렘 5:13).

⭕ 인(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신(信)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히 11:6)와 이웃에 대한 신뢰(시 15:3,4)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 인(仁), 신(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義), 신(信), 인(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 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마23:2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세번째 저주 선언]

⭕ 소경된 인도자여 - 이 구절은 3번째 저주문의 시작인 16절과 똑같은 문구이다.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실에 대해 또다른 형태의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다음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 비유적이면서 상징적이고 과장된 표현이다. 하루살이와 약대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과장법은 19:24에도 나타나고 있다(5:29,30:17:20,21:21,특징적인 과장법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하루살이는 팔레스틴 기후에서 흔한 곤충(昆蟲)이자 가장 조그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하루살이는 담근 포도주통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사용하기 전에 채로써 포도주를 걸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나마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부정을 덧입을까 해서이다(레 11:20,23;17:10-14). 그리고 약대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으로 취급되었으나 이것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다(레 11:4). 이와같이 부정한 곤충과 동물을 비유로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더욱이 그들이 삼킨 약대는 곧 그들의 무한정(無限定)한 탐심과 육체적 향락 및 무절제한 죄악을 암시한다. 여하튼 이 비유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 요약하고 있다. 즉 하기 쉬운 일에는 생색을 내며 자랑하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하여 책임을 피해가는 위선적인 종교인에 대한 비판이다.

성 경: [마23:2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다섯번째 저주 선언]

⭕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될 의식적(儀式的) 정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너는 그릇을 통칭(通稱)한 말인데, 이것을 정결히 한다함은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율법적 청결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의식(儀式)보다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함이다. 따라서 물론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이 해야 할 부분은 그릇 안쪽일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릇 안을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다. 다시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속마음인데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하면서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번째 저주 선언문인 23,24의 내용과 비슷하다.

⭕ 탐욕과 방탕으로 -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라고 하는데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주로 물질적인 측면의 죄악을 암시한다. 그리고 '방탕'은 헬라어로 '아크라시아'(*)인데 그 뜻은 '자제력 상실', '무절제'이다. 이는 주로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암시한다. 한편 이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 구절이 7:15의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음 속에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실제로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악한 마음과 동시에 그 악독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성 경: [마23:2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다섯번째 저주 선언]

⭕ 소경된 바리새인아 깨끗이 하라 - 이 본문은 진지한 충고(忠告)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소경된 바리새인'라는 호칭은 24절의 형태를 따랐지만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을 지칭하였고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강렬한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이 24절과 다르다. 눅 11:41의 평행구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즉 "안에 있는 것을 '구제하라'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이다. 여기서 '구제하라'는 말은 아람어로는 '깨끗하다'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는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본문의 전체적 의도는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이 갖는 목적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 목적은 속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물론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의'(義), '인'(仁), '신'(信)에 입각하여(23절) 행실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결국 위선된 자기 생활로부터 전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즉 회개하고 거룩에 이르라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과 행실을 바꾸는 것은 먼저와 나중이 없다. 실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知行合一). 그러나 여기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겉치레와 외식에만 치우쳐 있는 그들의 편협(偏狹)한 생활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성 경: [마23:2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여섯번째 저주 선언]

이 본문은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25절과 같은 형태의 문장 구조를 가졌다. 즉 '겉'과 '안'을 대칭적으로 묘사하면서 비판하고 있으며 특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드러나지 않은 악한 영향력들을 집중 공박(功駁)하고 있다.

⭕ 회칠한 무덤 -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무덤은 겔 39:15에 근거한 랍비들의 명령에 따라 우기(雨期)가 지난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다. 그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특히 유월절 순례자들)이 쉽게 식별하여 피해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한편 행 23:3에서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대제사장을 '회칠한 벽'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당시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대제사장의 위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어법으로 나타내려한 의도를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그들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죄악성은 뒤로 하더라도 사람만을 의식하는 그들의 허영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형태에 대한 극히 독설적인 책망이다. (2)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극히 부정하다고 단죄(斷罪)하는 율법 조항에 의해 비판받게 하여 그들에게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고자 함이었다. 실로 그들은 회칠한 '무덤'에 비교될 만한 무가치하고 반신앙적 인물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곧이어 함으로써 이해를 보충시키고 있다. 즉 '겉'과 '안'을 대조(對照)시키고 다시 '아름답게'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대조시켜 위선자의 양면성을 밝힌다. 27절의 내용은 사실 25절의 저주 선언문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 -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창 3:9;요일 3:14,15). 따라서 주검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누구든지 그것과 접촉하면 역시 부정에 전염(傳染)된다고 규정하였다(민 5:2;6:6). 한편 그러한 주검이 안장되어 있는 유대인의 무덤 속에는 송장의 뼈와 시체의 악취와 기타 오물로 가득하여 의식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위생학적으로도 더럽고 추한 몰골을 형성하였다. 실로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실체요 내면의 부정이었던 것이다(행 23:3). 한편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독선과 가식의 겉포장일 수 있다.

성 경: [마23:2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여섯번째 저주 선언]

⭕ 겉으로는 안으로는 - 여기서도 '겉'과 '안'으로 나누어 27절에서 상징적으로 비유했던 위선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겉으로 옳게 보이되'가 27절의 '아름답게 보이나'와 대응되고 의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가 27절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로 대응된다. 이것은 마태 특유의 묘사 방법으로써, 강조적 표현이다.

성 경: [마23:2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이 본문은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다(29-36절). 여기서도 역시 저주 대상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 전체 내용상 그릇된 율법주의에 심취(心醉)한 모든 유대인들이라 볼 수 있다.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성 경: [마23:30]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아니하였으리라 -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보강(補强)하는 것이 34절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조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즉 자신들이 조상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다면 결코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조상보다 도덕적(道德的)으로나 종교적(宗敎的)으로나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 (2) 자신이 선지자들의 활동을 조상들과는 달리 용납하고 따르겠다는 말이거나, 지금 선지자들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고백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였고 미화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선지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역시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과 같이(26, 27절) 묘비와 무덤을 세우는데 관심갖는 그릇된 종교인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는 그들의 업적을 통해 비판을 가하여 비판효과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영예를 통해 자신들이 이득(利得)을 보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멀리 있는 일일수록 자신있게 말할 수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과 같지 않다고 호언장담(濠言壯談)한 것이다.

성 경: [마23:31]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 조상을 비난하는 자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을 가리켜 '우리가 조상의 때에'라고 말함으로써 그 조상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실로 셈족 언어에서는 누구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과 본질적(本質的)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조상의 죄를 이어 받아 같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원죄라는 의미와 다르다. 또 죄의 유전적인 전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필시 운명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죽은 자의 자손됨'에 대한 증거는 선지자를 죽인 자들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신들이 스스로 말한 점이다. 따라서 십계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通念)에 따라서 그 가문의 죄과(罪過)에 대한 책임은 대(代)를 이어져야 했다(출 20:5). 진정 이러한 사실은 죄가 한개인의 돌발적 사고나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과 함께 전달됨을 뜻한다. 즉 죄의 사회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실로 죄악된 환경에서는 죄인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자손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의 자손이라면 더욱 자숙(自肅)하고 남보다 선행에 힘쓰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일곱가지의 저주문을 통해 폭로한 바 처럼 도리어 위선이 절정에 다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조상의 죄까지 소급(溯及)하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이미 간파하신 바 있듯이, 당신을 모살(謨殺)하려는 그들의 음모가(21:46;22:15;요 11:47-53)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23:32]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 이 구절은 매우 도전적이고 역설적이면서 '화 있을진저'와 같은 암시적 저주가 담겨있는 문장이다. 여기서 조상의 양(量)은 30, 31절의 내용을 참고하며 이해해야 한다. 즉 조상이 저질렀던 죄의 양(量)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은 분량을 재는 척도를 나타내는 말로서(quantity, number, measure), 본문은 결국 그 채우는 양에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여하튼 본문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했던 죄의 잔을 채우는 일을, 너희들이 그 충만한 데까지 채우라는 냉소적인 명령이다(살전 2:16). 한편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서는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조상들이 저질러온 죄악을 이어받아 더 많은 죄를 저질러 죄의 포화 상태까지 채워 보라는 말이다. 물론 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데 필요한 마지막 한 방울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일이다(Meyer). 이러한 어투에서 몇가지 의미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선지자를 죽였던 자들의 자손들이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조상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대한 탄식이다. (2) 그들에 대한 희망의 포기이다. 즉 아무리 권면하여도 듣지 않는 그들에게 너희 멋대로 해보라는 투의 말이다. 물론 채워진 이후에는 곧 징벌(徵罰)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창 15:16). (3) 역설적 의미이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려고 하다가 해보라고 포기해 버리면 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처럼 저주섞인 포기 선언을 통해 그들이 돌아서기를 바라는 충격 요법적인 어투이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께서 얼마나 죄인들에 대하여 연민(憐憫)의 정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연민의 정에서 무서운 저주 선언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이 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노하며 경멸적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사랑에 바탕이 되지 못한 비판과 저주는 분쟁만 낳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바탕을 둔 비판은 회개의 촉구가 되고 양심에 감동을 주게 된다.

성 경: [마23:33]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이 구절은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어투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이 어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퍼부었던 내용과 일치한다(3:7).

⭕ 뱀들아 - 공동번역에서는 '이 뱀같은 자들아'로 번역하여 그 의미하는 바를 좀더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적인 동물로서의 예로 든 것도 있고(7:10;막 16:18;눅 11:11;고전 10:9 등) 상징적 존재로서 악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고후 11:3;계 12:9,14;20:2). 여기서는 타락하고 저주받을 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뱀이 간교(奸巧)하여 죄악의 씨앗으로 여기는 생각(창 3:1-5)과 저주받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통념 때문이다(창 3:14,15).

⭕ 독사의 새끼들아 - 먼저 독사란 독을 품은 뱀이라는 의미보다, 여기서는 사단의 기질과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함이 좋다. 그리고 새끼란 문자적으로는 '산출된 것', '탄생된 것', '자식',`자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독사라는 동물을 취급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비유된 것이므로 '자식'이라는 말이나 '족속'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 비유에서 독사와 그 새끼는 똑같이 한 가지의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조상들의 죄를 비난하지만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조상들의 족속이므로 똑같이 악한 족속이라는 뜻이 된다.

⭕ 지옥의 판결 - 이같은 표현은 랍비들에 의해 자주 사용된 바 있는데(Wetstein) 직역하면 '지옥에 떨어질 심판' 또는 '지옥(게엔나)에 위탁된 심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게엔나'에서의 심판은 영영한 멸망에의 판결이다(5:22). 한편 이와 같은 번역은 모두 종말적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영원한 절망에로 결정된 것이다.

⭕ 피하겠느냐 - 가정법적 표현이면서 반문하는 형식이다. 심판이 피할 수 없이 자명하게 닥칠 것이라는 강조적 표현법이다.

성 경: [마23:34]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내가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 여기서 '선지자'란 구약의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들과 동등한 권위와 영적 감화력(感化力)과 자질을 갖춘 복음의 선포자로서 소위 순회 복음 전도자 정도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엡 4:11). 그리고 '지혜있는 자들'이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덧입고 지혜있는 가르침으로 교회에 유익을 주는 자를 가리킨다. 또한 '서기관들'이란 유대교 인사가 아닌 그리스도 복음의 휼륭한 교사들을 뜻한다(13:52). 한편 이들은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울 등과 같은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산 증인들을 위시한 많은 교회의 역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히 예수께서 하신 '내가 보내매'(*, 에포스텔로)라는 말은 현재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회적 파송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파송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계속적 파송으로 인한 당신의 사람들의 지속적인 박해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계시다. 그중 '죽임당하는' 박해는 스데반(행 7:59)과 야고보(행 12:2)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박해는 베드로(요 21:18,19;벧후 1:14)나 시므온이나 안드레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은 많은 사도들이(행 5:40;22:19;26:11;고후 11:24,25), '구박당함'은 수많은 복음 전파자들이(10:23;행 13:50;14:6,20;26:11) 감수(甘受)해야 했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이해될 수 있다. (1) 30절에서 언급된 바리새인들의 호언장담에 대한 반박(反駁)으로서. 그들의 조상들이 지혜자와 선지자들에게 행했던 악행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들도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절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31절의 내용과 더불어 바리새인들도 조상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암시한다. (2)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직접 예수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장차 예수께서 파송할 자신의 제자와 전도자들에게도 그들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조상들을 비판한 것처럼 그들도 다시 그런 일은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적인 의도로 볼 수 있다. (3) '죽이다', '십자가에 못박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 자신이 앞으로 당할 고난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예언은 예수께서 자주 해왔다(10:23;16:21).

성 경: [마23:35]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 이 구절 역시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아벨이 성경에 나타난 첫번째 살인의 희생자인 것은 분명하다(창 4:8). 그러나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Zechariah son of Berekish)가 누구인가는 문제가 된다. 몇 가지 견해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1) 이 사람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으나(Chrysostom) 그가 순교했다는 증거는 없다. (2) 이 사람이 바리스(Baris, 또는 Baruch 또는 Bariscaeus, 이 이름들은 사본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두 열심당원들(Zealots)에게 죽임을 당한(Jos. Wars, IV, 334-44<4절.) 사가랴(Zechariah)였다는 설이 있다(Penn). 그러나 그가 선지자이거나 순교자(殉敎者)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비록 그가 성전 경내 한 가운데서(*, 엔 메소, in the mist) 죽임을 당했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증거도 없다. (3) 이 사람이 구약에서 베레갸의 아들(son of Berekish)인 선지자 스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다(슥 1:1)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 기록은 없다. (4) 이 사람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가랴였다는 설이 있는데(Albright and Mann) 이런 견해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증거가 없다. (5)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사람이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Zecharish the son of Jehoiada)일 것이라는 설이다. 이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건은 히브리 정경(正經)에서 마지막 책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 곧 히브리 성경의 첫 책(창 4:8)에서 마지막 책(대하 24:20-22)에 기록된 모든 순교자들이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한다면 이 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순교자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가 말하는 사가랴(Zechariah)가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Zechariah)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야다'라는 부칭(父稱)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슥 1:1에서는 선지자 스가랴의 아버지인 베레갸의 이름이 언급되는 한편 스 6:14에서는 그의 할아버지인 잇도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여호야다가 대하 24장에 나오는 스가랴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호야다가 130세까지 살았던 사실(대하 24:15)은 이런 견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데, 왜냐하면 스가랴는 여호야다가 죽은 직후부터 그의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알수 없는 바라갸(Berekiah)는 스가랴를 낳고 평온한 세월을 살다가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그의 아버지의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본절)라고 말할 경우 바라갸가 사가랴(대하 24장에서는 스가랴)의 아버지라는 것도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 의로운 피 - 이는 '의인의 피'(애 4:13), '무죄한 자의 피'(왕하 21:16;24:4)라는 표현과 흡사한 의미로서 의롭다 인정받는 자의 죽음 및 그 피흘림과 관련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자(犯罪者)의 선고를 받은 것 까지를 포함한 넒은 의미이다(히 11:4). 즉 이것은 아벨과 마지막 순교자 스가랴까지 의(義)를 위해 순교당한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번역에서는 '땅에서 흘린 무죄한 피값'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러왔던 불의한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는 형벌의 선언인 것이다. 한편 조상들이 저질러왔던 악행은 예언서들과 시편에 잘 나타나고 있다(시 94편).

⭕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공동번역에서는 '피'를 '피값'으로 번역하여 본문의 의미, 곧 악행에 대한 그 대가를 지불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한편 이 35절은 27:24, 25을 예언한다. 즉 그때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回避)한 데 비해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그 끔찍한 일에 대한 책임을 소리지르며 자청하여 떠맡았다.

성 경: [마23:36]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일곱번째 저주 선언]

⭕ 다 이 세대(世代)에게 돌아가리라 - 주목할 점은 29절에서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될 때 그 대상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리고 35절에서도 '너희'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한 말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값을 받아야 할 대상이 이 세대(世代)로 지목되고 있다. 즉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집단적, 사회적 책임성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31절 주석).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을 오늘 이 세대에서 회개하고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 조상의 악의 양을 충만히 채우면(32절) 바로 이 세대가 멸망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예언을 한 후 A.D.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그들은 경험하였다. 실로 과거의 죄악을 오늘 청산(淸算)하지 못하면 오늘 이 세대는 과거의 죄악을 용인(容認)하고 반복하는 것이 되며 결국 과거와 마찬가지로 멸망의 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본절은 일곱 가지 저주 선언문의 최종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마23:37]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

이 절은 23장 전체의 내용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감정을 첨가하여 마무리 짓고 있다. 문장 형태는 탄식문 형태이다.

⭕ 예루살렘 -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두 번 부름으로써 애절하고 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이 부분에는 마태가 다른 곳에서 흔히 사용하였던 헬라식 발음으로서의 `예로솔뤼마'(*)가 아닌 히브리식 발음으로 민족적 동질성과 연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할 수 있고 종교적 중심지로서 상징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 탄식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을 향한 애정어린 부름이다.

⭕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 이는 평화의 성읍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였던 도성이 살인자와 반역의 도시로 변한 사실에 대한 예수의 엄숙한 개탄(慨嘆)이다(34절). 한편 모세 율법은 사술(레 20:27), 우상숭배(신 17: 5, 7)등을 위시한 가증스런 범죄자를 돌로 쳐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미쉬나(Mishnah, M. Sanhedrin 7:4)는 한발짝 더 나아가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돌로 치는 일은 분노한 폭도(21:35;행 7:57,58)나 사전에 계획된 공모(共謀)에 의해 이뤄지기도 했다.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이와 같은 표현은 36:7;사 31:5;36: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에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격언구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격언구는 사랑과 애정과 보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는 강렬하고 순결한 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을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

⭕ 내가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초월적으로 돌아보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요 8:58). 그러나 본문의 '몇번이냐'(how often)라는 말은 주어(主語)가 예수자신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기간 중 마치 암탉이 독수리의 침입을 예상하고 자기 새끼를 바삐 모으듯이 예루살렘(모든 유대인들을 뜻하는 환유법적 표현)을 모아서 보호하려고 노력하셨다(신 32:11;렘 48:40).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 심판과 화를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처럼(겔 18:32) 누구든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단 1회만이 아니라 집요(執拗)하고도 끈덕지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이 의미는 단지 그들이 원치 않는 수동적인 배척 뿐만 아니라 비난과 공격 등의 적극적인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앞의 '죽이고', '돌로 치는'이라는 표현과 연관시켜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무모하게도 자신들의 멸망의 날을 앞당겼던 것이다. 정녕 하나님의 사랑을 영속적으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정한 때에 극렬하고도 단호한 심판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사 28:1, 2).

성 경: [마23:38]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

⭕ 너희 집이 - 헬라어로 '오이코스'(*)라는 단어는 '집'이라는 뜻 외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일반적인 '집'이나 '거처'를 뜻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신령한 성전으로서 기독교인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딤전 3:15;벧전 2:5;4:17). 또 '나라'나 '가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집'을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며(24:1),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이기 때문이다(렘 12:9). (2)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여하튼 예수를 끝까지 배척함으로써 버림받은 성전이나 국가는 '나의 집'이 아닌 '너희 집'이 되는 것이다.

⭕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몇몇 고대 사본들에는 '황폐하여'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이 말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한편.이 '황폐한'(*, 에레모스)이라는 단어는 '한적한', `사막', '버림받은' 등의 뜻으로 바로 뒤이어지는 `버린 바 되다'(*, 아피에타이)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실로 예루살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1:23)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정녕 생명(生命)과 복(福)의 근원이신 예수가 '버린 바 된' 곳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영영히 '황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사 5: 5, 6).

성 경: [마23:39]

주제1: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哀歌)]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시 118:26을 인용한 문구로서 얼마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호산나'의 연호와 함께 사용된 구절이다(21:9). 아마 이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러 온 자들에게 인사할 때 사용했던 말로 추측된다. 그런 점에서 성전의 주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도 존귀한 승리자로 오셨으므로 마땅히 모든 이들로부터 인사와 존경을 받아야 했다(France). 한편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배열됨으로써 '까지'라는 말을 예루살렘 입성 때 곧 종려 주일(Palm Sunday)까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이 말을 외쳐된 일은 여전히 종말의 완성을 고대하는 역설적인 성취(ironic fulfillment)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 예수께서 있다. 특히 `이제부터'(*, 아프 아르티)란 말은 대부분 종말의 완성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26:29, 64) 의해 더욱 확실해진다. 이와 더불어 본절의 '나를 보지못하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 후의 예수의 출현(出現)을 가리키지 않고(행 10:41) 그의 종말적 도래(Parousia)를 가르킨다고 본다. 그런데 문맥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예수의 재림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24:30, 31;빌 2: 9-11;계 1:7). 한편 인용된 시 118편의 구절, 즉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고려할 때, 예수는 심판자로서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 왕으로도 재림할 것임을 알 수 있다(Benoit, Bonnard, Sohlatter).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지금껏 메시야를 배척해 온 잘못을 회개하며, 전민족적으로 그들이 거절했던 메시야를 '호산나' 찬송하며 그분의 절대 권위를 승인(承認)할 것이며(롬 11:26;슥 12:10), 그로 인해 선민의 영광스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호 3:4, 5).

성 경: [마24:1]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 여기서 '성전'(*, 히에론)은 문자적으로 성전 경내, 곧 거룩한 경내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셀돈'(*)은 제 2 과거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뒤이어 나오는 '가실 때에'(*, 에포류에토, 서술적 미완료 시상)보다 앞선 시제로 볼 수 있으나 전체 문맥상 두 행동이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떠나고 계셨으며(여셀돈) 그렇게 나아가실 때 성전 건물 옆을 지나가셨다(에포류에토). 따라서 1, 2절의 내용은 성전 뜰에서 나눈 대화로 볼 수 있다. 즉 21:23에 예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성전을 '나왔다'함은 21:23 이후 행해진 모든 가르침은 줄곧 성전 뜰 안에서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7화(禍) 선포(23장) 직후 영영히 성전 밖으로 나와 그 곳을 떠나가셨다.

⭕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 평행구인 눅 21:5에서는 '제자' 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킨 것으로 표현한다. 더구나 같은 평행구인 막13:1에서는 '제자들 증 하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이 성전을 가리켜 보인 것은 앞서 23:38에서 언급한 예수의 선언과 관계가 있다. 즉 당시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그 웅장한 성전은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있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선언한 성전의 '황폐와 버림 받음'에 대한 예언은(23:38)쉽게 믿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성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정말 황폐하고 버림받게 됩니까? '라는 말없는 물음을 했을 것이다(막 13:11).

⭕ 성전 건물들(*, 타스 오이코 도마스 투 히에루). - 이 성전 건물은 원래 B.C.19년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에(2:1) 의해 착공된 것으로 비록 제 2성전을 개축할 의도로 시작한 것이기는 하나 거의 신축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제 3성전이라고 불리운다. 즉 이 건물은 솔로몬에 의한 제 1 성전(왕상 6:1-8:11, B.C. 959-586)과 스룹바벨에 의한 제 2성전(포로기 이후 B.C. 520년경에 재건)에 이은 새 성전 건물이었다. 이 제 3성전은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근 80여년의 기나긴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그 중간에 봉헌식(착공 9년만에)을 하는 등 나름대로는 화려(華麗)한 외모로 치장되기도 했다(요 2:20). 실로 제 3성전은 유대 출신 제자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으며 마치 눈덮인 산처럼 아름다움 것이었다(Jos, Wars 5, 6). 그도 그럴 것이 이 성전은 거대한 대리석으로 둘려졌으며 지붕과 같은 특별한 부분들에는 금으로 꾸며졌다고 한다.

성 경: [마24:2]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 대답하여 가라사대 - 새번역과 공동 번역 성서는 '말씀하셨다'로 이 부분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절에서 질문 내용이 전혀 언급 되지 않았는데 '대답'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1절 주석 마지막 부분의 내용과 같은 질문을 제자들이 던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2절에서 답변하신 내용이 1절 주석 끝 부분에 가정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적절하다.

⭕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지금 화려하고 장엄한 자태를 자랑하는 성전 건물의 외형을 사실 그대로 긍정하셨다. 그리고 이같은 인정을 통해 뒤이어지는 당신의 경고를 더욱 강렬한 뉘앙스(nuance)로 대비시키셨다. 한편 공동 번역 성서는 이러한 대비적 표현에 맞추어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 성전 건물에 사용된 돌을 가리킨다. 여기에 사용된 돌 하나의 크기는 25⁓12⁓8 규빗 (1 규빗은 약 45.6cm)의 상당히 큰 것으로서 누가 복음에서는 '미석', 즉 '아름다운 돌'이라고 묘사한다(눅 21:5). 그런데 이러한 돌들이 돌위에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회복 불가능의 완벽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서 구약에도 여러번 언급된 바 있다(렘 26:6, 18; 미 3:12; 학2:15). 그런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는 심판은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는 A.D. 63년에 제 3성전이 완공된 후 겨우 7,8년 후의 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성전의 허무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한편 이렇게 성전 파괴에 대한 단호한 표현을 통하여 24장에 소개될 종말에 관한 메시지의 긴박성과 그 파멸적(破滅的)인 성격을 웅변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러한 언급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있을 극렬한 심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시고 있다.

성 경: [마24:10]

주제1: [역사의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시험에 빠져(*, 스칸달리스데손타이)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 '죄를 짓게 하다' 또는 '노하게하다' 등의 뜻을 가졌다. 새번역에서는 '믿음을 잃고'라고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결국 박해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말이다(살후 2:3). 이처럼 종말의 때가 가까워오면 교회의 외적인 풍랑과 더불어 교회 내부로부터의 분란이 발생하게 될것이다. 이때는 인내와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벧전 4:12).

⭕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새번역과 공동 번역 모두 '서로 배

반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분열의 모습이다. 여기서 '서로'(*, 알렐루스)는 상호대명사로서 쌍방간의 행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똑같이 배신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의 간교(奸巧)하고 악의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되면 사랑과 하나됨의 공동체인(요 15:17) 교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이같은 교회 내부의 분란이야말로 성도가 맞는 가장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징조이다.

성 경: [마24:11]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거짓 선지자(*, 프슈도프로페타이) - 여기 이들은 비록 초자연적인 이적과 능통한 언변(言辯)을 지녔을지라도 그 가르침과 행위가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들이다(계 13:11 ff). 실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주의는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 여러 번 주어져 왔는데(7:15; 24:5; 고후 11:13; 딤후 2:17, 18), 그들 거짓 선지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 등의 모습으로 교회의 질서와 진리를 와해시키는데 힘을 쏟았다(행 20:30; 갈 1:7-9; 골 2:18-23). 실로 기독교회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수없이 유린(蹂躪)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들의 사특(邪慝)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중병을 앓고 있다(살후 2:8-12).

성 경: [마24:12]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불법(*, 아노미아) - 부도덕성과 무질서적인 방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전통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 기준이 상실됨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진리와 신앙이라는 미명하의 온갖 비신앙적 작태(作態)와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살후2:3, 7, 8). 한편 오늘날 이러한 부도덕적 사회 현상을 가리켜 '아노미현상'이라고 지칭한다.

⭕ 사랑이 식어지리라 - 여기서 '식어지다'(*, 프쉬게세타이)는 '숨쉬다', '싸늘해지다'는 뜻의 '프쉬코'(*)에서 나온 말로서 '싸늘한 숨을 쉬다' 또는 '차가워지다', 그리고 좀 더 심층적으로 '해로운 바람으로 인해 영적 열성이 식어지다'(Vincent)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아노미 현상', 곧 불법으로 인한 내적인 불화와 균열(龜裂)때문이다. 실로 이 구절은 9-11절까지 나타난 교회분열로 인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결국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8절의 내용처럼 세상의 끝날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사랑'(*, 아가페)이라는 명사는 공관 복음서에서는 눅 11:42과 여기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명된 데 비해 본문은 형제상호간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가 추구해야만 하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사랑에 그 기초와 뿌리를 두어야 하는것이다(요일 4:10, 19). 그리고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발로인 것이다. 여하튼 모든 율법, 모든 의식(儀式), 모든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도 사랑이 식어지면 끝이 되고 만다(고전 13장).

성 경: [마24:13]

주제1: [역사의 종말과 예언]

주제2: [말세의 징조]

⭕ 끝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의 '끝'은 5절부터 나열한 여러가지 재난과 박해 그리고 공동체의 분열이 있을 고난의 기간이 끝날 때를 말한다. 그리고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굳게 서다', '참아내다'는 뜻으로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적 신앙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텨나감으로써 끝내 승리, 쟁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사람들의 배신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뢰하며 온갖 실망이 겹쳐 절대 절망에 이르렀어도 희망을 갖고, '아노미 현상'과 같은 혼란의 시대에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곧 견디는 자이다.

⭕ 구원을 얻으리라 - 끝까지 견디는 자의 보상은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세상의 끝날에 얻게 되는 천국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끝은 곧 세상의 완성이므로 그때까지 견딘 자는 완성된 하늘나라에서 천국 백성의 자격을 갖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것은 종말적 심판의 때에 얻는 최종적 구원을 의미한다. (2) 현세의 구원에 대한 의미도 생각할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세상 끝에 나타날 종말적 징조는 예수 시대에도 이미 나타났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갖고 살았고, 또한 종말의 징조는 역사 속에서 꾸준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지적했던 그런 징조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은 종말적 최후의 날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현실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이 성도에게 매일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process)으로 볼 때 날마다 겪는 새로운 여러가지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매일 구원을 고대(苦待)하며 필요로 하는 자는 날마다 종말적 자세로 사는 것이다.

성 경: [마24:14]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말세의 증거]

⭕ 천국 븍음(*,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 이는 마태복음의 특징적 표현이다(4:23 ;갈9:35; 24:14). 여기서 '복음'이란 예수께서 지금 전파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자신을 지칭한다(요 1:14; 고후 5:18). 한편 복음의 요체는 '천국' 곧 모든 나라와 모든 인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이다(3:2; 4:23).

⭕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 혈통과 민족을 초월한 천국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보여 준다(고전 1:24). 여기서 '증거'(*, 마르튀리온)란 신앙에의 부름을 위한 유일한 근거이자 복음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정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복음 증거의 양면성이다.

⭕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 여기 '온 세상'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종말이 이 때, 곧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올 것이라는 사상은 사도들이 계승한 사상이었고 신약 성경 안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눅 :1; 4:5; 행 11:28; 17: 6, 31; 19:27; 롬 10:18; 계 3:10; 12:9; 16:14). 한편 당시 '온 세상'을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영역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행 1:8; 롬 15;23). 그러나 본문에서의 '온 세상'이란 좀 더 포괄적이고 광의적(廣義的)인 의미로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지역, 곧 전세계의 모든 곳이라는 뜻으로 봄이 좋다. 어쨌든 다른 민족들에게도 이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의 끝'이라는 말은 세상의 심판과 멸망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세상의 완성이라는 말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8절, 13절 주석 참조). 실로 세상이 완성되는 날, 그날은 모든 민족이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끝은 절망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무한한 기대가 된다.

성 경: [마24:15]

주제1: [역시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다니엘의 말한 바 - 본문은 단 9:27; 11:31; 12:11의 70인역(LXX)에 의한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 멸망의 가증(可憎)한 것 - 이는 단 11:31; 12:11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은 여호와 경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사를 폐하고 우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즉 성전을 더럽히겠다는 말이다.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가증한 것'은 여호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신성 모독과 연관된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의미의 헬라어는 '브델뤼쏘마이'(*)로서 원뜻은 '악취로 인해 구토를 일으키다', '혐오스럽다'이다. 실로 하나님께 우상과 거짓 사술 등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멸망의'란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다니엘서의 이 말은 분명 .B.C.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을 의미한다(마카비 서 1; 54-64, Josephus, Antiq., 5:4).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통해 위와 비슷한 모습으로 거룩한 곳이 황폐되고 치욕당할 것이라 하셨다. 이런 사실로 인해 (1) 혹자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우스 갈리굴라(Caligula) 황제(A.D.37-41년)가 그의 상(像)과 기(旗)를 성전에 세우려 했던 계획을 본 예언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과 예수가 말씀하신 내용과는 잘 조화가 되지 않는다. (2)또다른 학자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군대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눅 21:21, Bengel, Bruce). 사실 로마 황제의 가슴 위에는 은이나 청동으로 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군대는 바로 그같은 독수리 깃발을 앞세우고 전선에 나아갔고, 그의 경배와 동일한 차원의 경의를 그 기에 표해야 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ephus, B.F.,Ⅵ. 6) A.D.70년. 예루살렘을 훼파(毁破)한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로마군기를 성전 동편 문쪽을 향해 세우고 거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미 수년간 로마 군대의 기를 보아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말(一抹)의 새로운 징조가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예언과 본 견해를 연관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A.D.70년 이전 열심 당원들(Zealots)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Alford). 그 당시 열심 당원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하고 매일의 제사를 훼방했으며,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제사장을 임명하였(Jos., Wars , 147-57, 162-92, 334-44). 요세푸스는 그들의 만행(蠻行)이 바로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한편 당시 그들의 만행 동안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곳을 달아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Lane, Gaston). 그러나 이 견해 역시 확정적으로 인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믿을만한 한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남으로써 처참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의 예언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가증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이 내용이 갖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9-12절) 교회 분열의 혼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때 신앙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전(殿)인 인간의 내면을 공격하며 파괴하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살후 2:4, 8).

⭕ 거룩한 곳(*, 토포하기오) - 앞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예루살롑 성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사 6013; 2 Macc 1:29; 2:18). 그러나 본문에는 정관사가 없는 관계로 단순히 한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 회당까지도 포함한 신앙의 중심지들로 보기도 한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都城)인 예루살렘으로 볼 수도 있으며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앙인의 마음속이 될 수도 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평행구를 이루는 눅 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표현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대신 거룩한 성전에 대한 유린을 멸망과 연결시킨다.

⭕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나, 즉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에 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을 조화시키고자 하셨으며, 더불어 당신이 예언한 바를 어떤 영적 긴장과 분별력이 없이는 도무지 감지(感知)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은 후대 편집자들이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나 그 보다는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고지(告知), 즉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단 9:25; 12:10)는 말처럼 예수께서 친히 경고적, 교훈적 메시지로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성 경: [마24:16]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유대에 있는 자들은 - 닥쳐올 재난이 단지 예루살렘에만 국한(局限)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암시한 구절이다.

⭕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유대인들에게는 산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들은 산을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의 근원지로 생각하였다(시 11:1). 또한 구약시대 때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고(출 19:1-2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었다(출 3:1-12). 그리고 예수의 핵심 설교인 산상 수훈도 역시 산에서 이루어졌다(5-7장), 지금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는 곳도 바로 산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산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반영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여하튼 이 경고에 의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한 적이 있다. 즉 A.D.68년 로마의 베스파시안(Vespasian)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성내(城內)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경고를 기억하고 모두 요단강 계곡에 위치한 베레아 지역의 펠라(Pella)라는 곳으로 피신함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Euesebius, H.E. , 5:3). 한편 본문의 이와같은 의미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면 거룩한 곳이 더럽혀지고 성전이 유린당했을 때, 즉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 속히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도망은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24:17]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지붕 위에 있는 자는 - 유대인들의 가옥은 대부분 지붕이 평평하여, 주로 기온이 서늘한 저녁 시간에 휴식과 묵상과 대화의 장(場)으로 활용되었다(신 22:8; 막 2:4 행 10:9). 그리고 이 지붕에는 지상과 연결된 두 통로가 있었는데, 그하나는 지붕에서 집 외부로 바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붕에서 그 집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 집 안에...내려가지말며 - 이는 재난을 만난 사람이 취할 태도로서 결코 집 안 귀중품에 미련을 두지 말고 먼저 천하보다 귀한 생명부터 보존하라는 교훈이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각종 난리와 폭란이 겹쳤는뎨(6절), 이때 민첩한 도피가 필요했었다고 한다. 적어도 재난을 만난 자는 롯의 처를 생각해야만 한다(창 19:26; 눅 17:32)

성 경: [마24:18]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거처가 있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성 밖에 마련하였다. 그리고 일터에 나갈 때는 두터운 외투는 집 안에 두고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의복으로 나섰다고 한다. 재난의 때에는 그 겉옷을 취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입고 있는 그대로 재빨리 피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을 맞는 자세는 매우 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급박(急迫)한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원을 향한 단호한 결단만이 요구될 뿐이다. 악으로부터의 확연한 갈라섬, 비신앙에서 돈독한 신앙으로 돌아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성 경: [마24:19]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아이 배 자들(*, 가스트리 에쿠사이스) - 여기서 '가스트리'는 배를 나타내기도 하고 자궁(Womb)을 뜻하기도 한다(1:8, 23; 막 13:17; 눅 1:31; 21:23; 살전 5:3; 막 13:17; 눅 1:31; 21:23; 살전 5:3; 계 12:2). 그리고 '여쿠사이스'는 '소유', '보관', '결혼', '사랑의 소유', '즐긴다', '필요하다', '궁핍하다' 등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자궁'(*)이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임신하다'는 말로 사용되었다(1:18, 23; 눅 21:23; 계 12:2 등). 실로 임신한 사람과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이는 홀몸이 아니다. 즉 자신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기 어렵다. 그래서 남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확연하다. 이는 여자에 대한 저주도, 임신부와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날의 고통이 남을 돌볼 만큼 여유있게 대처할 만한 것이 못되기에 미리 미리 종말의 때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날이 오면 민첩하게 구원의 일에 몰두하도록 하기 위해 준비를 할 것이며, 다른일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A.D. 8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 미처 도피하지 못한 유아와 어머니들이 예루살렘을 가득 메웠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아사자(餓死者)와 고통받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한다(Jos, Wars, V 10:3).

⭕ 화가 있으리로다 - 여기서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표현은 저주 선언이 아니라 동 정을 표시하는 탄식문이다. 즉 '아 ! 안되었도다'라는 뜻으로 쓰이거나 또는 '오 ! 슬프도다'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본래 '우아이'(*)라는 뜻은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화를 입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불쾌하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의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성 경: [마24:20]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 겨울과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활동하는데 가장 어려운 때이다. 즉 겨울에는 비가 오는 계절이라서 땅이 질고 식량 확보도 어려워 유대인들에게는 취약(脆弱)한 계절이다. 또 안식일에는 종교적 행사에 주력해야 했으며, 율법적으로 1.8Km이상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산으로 오른다거나 피신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이 경고로 미루어보아 안식일을 그 당시에 철저히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도 바로 이러한 때에 환란날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신다. 역사적으로 볼 때 B.C 168년 수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공이 있던 날도 안식일이어서 유대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살육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성 경: [마24:21]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이는...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 본절은 '이는'(*, 가르, '왜냐하면')이라는단어를 사용하여 17-20절에 걸쳐 피난하라고 권면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여기 제시된 '환란'(*, 둘립시스)은 단 다니엘의 내용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즉 다니엘은 '건국 이래로 없었던 환난'이라고 표현한 것에 견주어 예수께서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 후무한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것은 피상적 예고가 아니라 역사롤를 통해 밝혀진 진실이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는 예루살렘의 함락(陷落)에 관한 보고에서 예루살렘 함락 당시 유월절 절기에 참석키 위해 수많은 민중이 그 성내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로마군 침략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10만명,포로가 9만 7천여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Wars, 9:3). 그에 덧붙여 그곳이 각종 질병과 기근(饑饉)으로 고통당할 뿐 아니라 진쟁의 참화로 너무나 참혹하여 장례식도 치릍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여인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끔찍한 참변(慘變)은 미래의 역사에 도래할 마지막 대환난의 전조(前兆)이자 예표가 된다(계 11:3, 11; 12:6, 14).

성 경: [마24:22]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 '그날들' 앞에 나열한 환난의 날에 겪게 될 고난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감하지'에 해당하는 원어 '에콜로보데산'(*)은 '지다'는 뜻인 '콜로보오'(*)의 제 2조건문으로서 비록 미래와 시점에 와 있으나 이미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특질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고통의 양을 큰 묶음으로 줄여 주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한 공동 번역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이다. 여기서 그 환난의 날에 대한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마지막 날에 준비된 환난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 환난의 기간을 줄이지 않는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여기서 '모든 육체'는 단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전 인류로도 보아야 한다. 이는 예언의 이중성(현재, 미래)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에서는 본문을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재난의 혹독성과 파괴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감하시리라 - 이 말은 '택하신 자들'을 위한 약속이다. 그렇게 무서운 환난이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환난은 유동적(流動的)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약속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상기시킨다. 즉 의인 열명만 있어도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비슷하다(창 18:32). 한편 여기서 '택하신 자'(*, 에클레크토스)란 '뽑혀진'(chosen, selected)의 뜻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 모두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혈통적 선민 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앞의 13절의 내용처럼 환난속에서 끝까지 견디며, 12절의 역설적인 의미처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고 변치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들로 인해 비록 세상이 파멸로 달음질 칠지라도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이 도리어 완성과 완전한 구원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항상 개방적으로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앞에서 교회의 파괴를 말하면서 13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기서도 세상의 환난을 가장 무섭게 묘사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난의 예고는 멸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세상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암시하는 희망의 예언이라고 볼 수있다.

성 경: [마24:23]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그 때에 - 이 말은 앞 내용과 직접 연결되어지나, 곧바로 무슨 사건이 발생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처한 시점에 과연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한 서언적 표헌이다(Chrysdstom). 한편 여기서부터 35절까지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제 현상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번째 묶음이다. 특별히 이 세째번 묶음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지금까지의 초점에서 발전하여 세상 종말이라는 큰 흐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물론 예수의 예언은 항상 이중적(현재, 미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을 절대시할 수는 없다.

⭕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 환란의 때에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다(5절). 자칭 메시야가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에 재난이 많을수록 더욱 기승(氣勝)을 부린다. 한편 본절은 5절의 표현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5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그리스도라 자칭하는 현상을 언급한 것인데 비해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소문에 의해서 여기저기 혼란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에게 안내하는 자들의 무리가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발걸음이 바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소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찾아 산으로 계곡으로 모여들 것이나 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의적이 구원 개념과 유사한 절대자를 찾아 헤맬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의 재림으로 모든 것을 밝히실 예수께서는 여기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성 경: [마24:24]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교활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의 권위와 이름과 능력을 도용하여 그 영광을 차지하려는자들이며(5절 참조), 거짓 선지자는 그릇된 영적 탁월성과 거짓 사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는 자를 가리킨다(7:15 참조). 이런 자들에게는 선택받은 자들 조차도 속을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표적(標的)과 기사(奇事)를 통해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적'(*, 세메이온) 말은 '표징', '표시'(sign), '증거', '상징'(indication), '전조', '징조'(protent) 또는 '놀라운 일'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증명하는 각종 이적을 가리킨다. 또한 '기사'(*, 테라스) 역시 '경이', '놀라운 일'등의 뜻으로 '표적'과 거의 흡사한 의미이나 '표적'이 주로 인간과 관계된 외형적 증거라면 '기사'는 주로 자연 만물과 관계된 내면적 능력이나 영향력 등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주로 같이 연결하여 쓰여졌다(요 4:48; 행 2:22; 4:30; 살후 2:9; 히 2:4). 물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이같은 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 자체가 하나님의 그것과 비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잡은 자, 곧 사단도 악의적 측면에서 이런 능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이 말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활동함을 암시한다.그리고 가능하면 택하심 받은 이들도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공동 번역 성서는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하다. 즉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고...'라고 번역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을 속이려하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할 수만 있으면'(*, 에이 뒤나톤)이란 미혹하는 이들의 의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만약 가능 하기만 하다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심지어 선택받은 자도 미혹(迷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성도들을 '반드시' 미혹시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택한 자, 곧 예수의 참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공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엡 6:10-18).

성 경: [마24:25]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내가...미리 말하였노라 - 예수께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신 것은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그들로 담대하게 하려고 할뿐 아니라(요 16:4) 자기 자신에게 있는 초월적 권위를 소개하기 위함이다(신 13:1-4; 요 14:29).

성 경: [마24:26]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 광야 - 여기서는 23절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여기저기에 있을 것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구체적인 장소를 제시하고있다. 이 의도에 대하여는 27절의 주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향편 '광야'는 전통적인 유대 관념에 의하면 메시야 도래의 공개적 장소로 이해되었으며, 예언자들의 활동무대가 되어 왔고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 외치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3:3). 또 광야에서 수도원 운동과 같은 엣세네파 공동체가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요세푸스의 보고에 의하면(Jos., Wars, 5.7) 많은 사기꾼들이 광야를 주무대로 백성들을 미혹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골방은 좁고 밀폐된 비밀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대중적이고도 집단적인 단체나 집회에 주의 재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은밀한 개인이나 특정한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 경: [마24:27]

주제1: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

주제2: [대환란의 도래]

주의 재림이 어떻게 임할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신다.

⭕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 이 비유는 세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주의 재림이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는 도저히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돌발적인 재림 시기는 44절에도 언급되고 있다. 또 25장의 비유들 속에서도 재림시 급작성과 돌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2)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번개가 순식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나타나듯이 주의 재림도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Weiss, Broadus). (3) 재림의 선명성(鮮明性)이다. 은밀하거나 교묘한, 그리고 모호하여 아리송한 형태로 재림하지 않고 번개의 섬광처럼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엄격한 방법으로 모두가 공히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와같은 재림에 대한 선언은 앞에서(5, 23, 24, 26절) 묘사된 거짓 그리스도나 선지자의 소문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거짓된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5절에서 자신있게 그리고 선언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속지 말라고 권면하셨다(26절)

성 경: [마25: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그 때에(*, 토테) - 마태복음에서 자주(약 90회) 사용되는 단어이다.(2:7; 24:9). 특히 본서에서는 이 용어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나 시점을 나타내기 보다는 대략적 시간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본문의 '그때에'라는 것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를 말한다. 그 종말적 심판의 때에 대한 묘사는 이미 24장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24:29, 31, 36, 50, 51).

⭕ 천국은 마치...같다 하리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친국의 극히 제한된 일면을 제시하고 계신다. 여기서 '천국'에 대해서는 3:2; 4:17; 13:11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 등(*, 람파다스) - 접시 모양의 그릇 한쪽 끝에 등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불을 밝히는 기름등인지 아니면 계속 불을 밝히기 위해서 기름을 가끔 묻혀 사용하는 횃불인지는 본문을 통해 알 수 없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기름을 넣어 사용하는 등잔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유대인들은 이 등을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그것을 치켜들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신랑의 행로를 밝게 했다고 한다. 이때 이러한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받았다. 한편 여기서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성도가 주의 재림을 맞아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도의 외형적인 신앙 생활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쳐녀 - 유대인의 결혼식에는 몇가지 절차(節次)가 있었다. 즉 일반적으로 신랑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을 떠나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에 간다. 그리고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비롯한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해가 질 즈음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그들을 배웅한다. 한편 잔치는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랑의 집이 매우 먼 경우에는 신부의 집에서 모든 예식이 치러지기도 헹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자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아버지여야 함에도 본문에는 신랑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공식적인 잔치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결혼은 성립되었다. 여기서 '처녀'(*, 파르데노스)란 신부가 아닌 결혼 잔치에 초대된 신부의 들러리(bridesmaid)를 가리킨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부를 데려오는 신랑을 기다렸다가 그들 일행을 혼인 잔치에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10이라는 수치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출 20:3-17; 시 33:2), 특히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중에서 '10'이란 숫자를 자주 언급하셨다.(28절; 눅 15:8; 19:13-17). 이와 더불어 '10'명은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의 인원이었으며, 여러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定足)인원이었다. 그리고 유대의 풍속에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Talmud).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열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Lenski). 특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역사적 교회를 예시(豫示)하는 주의 순결한 처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과 신랑 예수의 인격적 유대 관계는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Lange).

성 경: [마25:2]

주제1: [종말을 대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그 중에 다섯은 - 여기서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5명씩 양분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련하다'로 번역된 원어 '모라이'(*)는 '우둔한', '얼빠진'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두 부류의 대별되는 처녀들의 모습 중 이 말이 앞서 언급된 것은(3, 8절) 어리리석은 처녀들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와 함께 '슬기 있다'로 번역된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수 있으며, 또한 매사에 신실한 것을 가리킨다(24:25). 실로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처녀, 함께 초대된 들러리 모두 등을 가짐) 하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나 신랑이 올 때 그들의 감추어진 내면과 그 사실성 여부가 극명히 노출되고 말 것이다(7, 8절).

성 경: [마25: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불을 밝힐 때 사용할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로 묘사한다. 그런데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인지 전혀 기름을 등에 넣지 않았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Robertson, Hendriksen). 한편 '기름'이란 등불을 밝히는 근원적 요소로서 만약 등을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1절) '기름'은 그 신앙 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졔하는 생명력 넘치는 내면적 생활과 성령, 믿음등이라고 할 수 있다(사 61:1 ; 슥 4장 ; 히 1:9). 특히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령의 역할 중 중생케 하시며 내주(內住)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役事)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체험조차 얻지 못한 외형적 신자(church-man)로 볼 수 있다. 실로 형식적인 교회출석, 봉사, 선교 등의 외면적인 신앙 생활이 아니라 성령의 사로잡힌 바 되고 믿음과 사랑의 역동적인 힘에 의해서 나타나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야말로 기다리는 바른 성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한편 4절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였다는 표현과 8절의 '등불이 꺼져가니'라는 표현에서 기름이 여분의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등불의 기름을 담는 용기가 작았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tary).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처음부터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양의 기름을 등잔에만 준비해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신앙 생활 역시 중단없이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한다.

성 경: [마25: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슬기 있는 자들은...기름을 담아 - '슬기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2절) 그들은 신랑이 늦게 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을 맞으려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가 늦게 올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실로 일회적인 은혜 체험이나 행함이 결여된 믿음,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성 있는 신앙 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그분을 맞을 수 있다.

성 경: [마25:5]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신랑이 더디 오므로 - 이 구절은 24:48의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예언과 같은 내용이다. 이 표현은 심판의 주이신 예수께서 다시 온다고 한 때가 늦어짐을 암시한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처럼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비록 종말이 지연(遲延)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셨던 것이다.

⭕ 졸며 잘새(*, 에뉘스탁산 가이 에카듀톤). - '졸며'라는 단어(에뉘스탁산)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일시적인, 또는 단지 앉은 자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깐 조는 상태를 나타낸다. '잘새'(에카듀돈)는 서술적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인 행동 곧 잠에 완전히 취해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이 표현은 종말 지연으로 나타난 교회의 어려움에 직면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졸며 자는' 것이 모두('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또한 그것에 대한 책망(責望)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졸며 자는 것이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구분시켜 적용한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재림의 주께 책망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일에 의해서 초래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와 더불어 종말이 지연됨으로써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를 역설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즉 예수 재림이 졸며 자는 것과 같은 참기 어려운 때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어려울수록 신앙 생활을 견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고있다.

성 경: [마25: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밤중에(*, 메세스뉴토스) - 유대인들의 혼례식은 초저녁 경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신랑이 도착할 시간을 훨씬 넘겨 열 처녀가 잠에 떨어진 것으로 보아 깊은 한 밤중(at midnight)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처럼 주께서 재림하는 때, 종말의 때가 한 밤중으로 표현되는 것은 (1)24:42-44; 살전 5:2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음과, (2) 예수 재림의 때가 어떤 정해진 시각이나 예고가 없이 예상치 못했던 시점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3)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한 밤중에 오신다고 믿는 믿음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전통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한 밤중에 구출된 경험 때문이었다(출 12:29).

⭕ 소리가 나되(*, 크라우게 게고넨) - 본문의 시제는 현재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드라마와 같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Moule). 즉 이것은 그 소리침의 돌연성(突然性)과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의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를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가 될 것이다. 이 소리의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소리의 내용은 신랑이 오니 마중 나오라는 즐거운 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5절에서 신랑을 기다리다가 한 밤중에 잠이 든 장면과 급작스런 소리의 외침 그리고 뒤이어지는 기름이 떨어져 다급히 기름 구하러 달려가는 소란스러움이다. 이것과 서로 대비되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 때가 얼마나 돌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인지를 긴장되게 묘사하고 있다.

⭕ 보라 신랑이로 다 맞으러 나오라 - 돌발적인 외침의 내용이다. 실로 그렇게 고대하던 재림(parousia)이 이 외침과 더불어 실현된 것이다. 이로써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이 나고 영원한 심판과 상벌(賞罰)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변화에 자신있게 대처할수 있는 자만이 '신랑올을 맞으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5:7]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다 일어나 - 외형적으로 볼 때 일어나 주를 맞이하려는 것은 미련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같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 일어나 모두 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도 역시 심판의 사건까지는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함께 구분없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확정된 사실이다(13:24-30).

⭕ 등을 준비할 새 - 여기서 '준비할 새'(*, 에코스메산)란 '정렬시키다'는 뜻으로 지금껏 타고 있던 등불 심지의 까맣게 탄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금 돋우는 동시에 예비한 기름(4절)을 등잔에 채워넣는 일련의 작업을 완비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준비 작업이 슬기로운 처녀에게는 손쉬운 것이었으나 준비한 기름이 없던 미련한 처녀에게는 당혹스런 것이었다. 마침내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성 경: [마25:8]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로서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그 준비한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꺼져가니'(*, 스벤뉜타이)는 중간태 현재직설법으로서 동작의 지속성(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준비한 등불의 마른 심지가 공급되는 기름이 전혀 없어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어리석은 처녀의 내면의 상태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枯渴), 은혜의 결여(缺如), 새 힘을 주시는 성령과의 단교(斷交) 등을 암시하는 동시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기름을 좀 나눠 달라 - 앞 구절에서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과 제발 기름을 좀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심정이 극적으로 연결되고있다. 여기서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이 종말의 때에 겪는 당황한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있다.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은혜와 신앙의 기름을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심판의 평가는 자기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어다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름의 결핍(缺乏)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과 생명 문제가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릭석은 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성 경: [마25: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따라서 이같은 거부 의사는 결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종말론적이고 존재론적인 평가 대상이 될 뿐이다. 정녕 슬기로운 자들은 여분의 기름을 예비하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꾸어주면 꾸어준 사람도 꾸어 쓴 사람도 모두 다 부족하여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부족할까 하노니'(*, 메포테우 메 아르케세)란 말 속에 이중의 부정어('메포테', '우 데')가 첨가됨으로써 그 뜻은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다. 즉 함께 쓰기에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성령과 은혜와 신앙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즉 아버지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들도 아버지의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각각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심판과 구원이 있는 것이다(겔 18:2-4; 요 14:16).

⭕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역꾼들을 암시한다(Lenski). 그들의 메시지에는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눅16:29).

⭕ 너희 쓸것을 사라 - 이는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사 55:1; 계 3:18).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획득키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甘受)하듯 어떤 값을 치르고 얻는 것이다(13:44-46). 물론 그 값은 인간의 자의적 노력에서라기 보다 하나님편에서 제공하신 것으로서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한 기도와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신실한 마음 등일 것이다.

성 경: [마25:1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 '사러 간 동안에'(*, 아페르코메논 데 아우톤)는 현재 분사구문으로서 행동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즉 저희가 '사러 가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미련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다시 한번 극명(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미련한 자들은 신랑이 올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살 수도 없을 때 그것을 사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 이 구절에서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가리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분명 천국이 예비한 자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기다리는 공동체'의 궁극적 목표, 더 나아가 신랑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인내하며 기름을 준비하는 등의 예비 작업이나 다시 오심 그 자체가 아니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신다. 따라서 '기다리는 공동체' 곧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다.

⭕ 닫힌지라(*, 에클레이스데) - 이 단어는 동작의 완료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다. 따라서 문이 이미 굳게 닫혀버려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1)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예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2) 이제부터의 기도와 회개와 눈물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심판의 엄격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 비유는 잔치가 시작되면 문을 닫아 손님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팔레스틴의 관습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눅 13:25).

성 경: [마25:1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그 후에 남은 처녀들 - 여기서 '그후'(*, 휘스테론)는 종말적 심판이 완결(완결)된 때를 가리킨다. 즉 심판이 끝나 슬기로운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 때인 것이다. 따라서 '남은 처녀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하여 기름을 사러갔다가 돌아온 미련한 다섯 처녀로 보아야 한다.

⭕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여 주여'(*,쿠리에 퀴리에)라는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구절은 7:21, 22절 절에서도 나오는데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혀진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적인 간구를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제 더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 경: [마25:12]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 여기서 바로 앞의 문장 '주여 주여...열어 주소서'라는 애절한 간청과 대비시켜 심판의 엄격하고 준엄한 성격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의 '알지 못하노라'에서 '알다'는 뜻인 원어 '오이다'(*)는 단순한 지적인 앎을 넘어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 그리고 관계를 통해 깨달은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노라'란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 만한 이유가 전혀없다는 엄정(嚴正)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은 곧 돌이킬 수 없는 심판 선고와 같은 것이다. 실로 심판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오심을 믿음으로 준비한 자만을 '아시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신다(창 18:19; 요 10:14). 여하튼 이와 같은 형식의 냉정한 대답이 7:21-23; 눅 13:25에도 나오고 있다.

성 경: [마25:1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열 처녀의 비유]

⭕ 깨어 있으라 - 이 구절은 본 비유의 주제를 강조하는 말로서(24:36, 42, 44, 50) 예수의 비유 뒤에 자주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다(막 13:34). 여기서 '예비하고 있으라'는 어구는 24:44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미련한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졸고 있다는 5절의 내용은 본구절과 모순되므로 예레미야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후대의 삽입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3절이 의도하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영적으로 '깨어있으라'(Keep watch)는 말은 육신적으로 '자지 말고 눈을 뜨고 있으라'(Keep awake)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후자는 졸음을 쫓아내고 전혀 잠자지 말라는 뜻이므로 본 구절의 의미에 부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유들이 뜻하는 바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이 강화(강화)에 말씀하시는 주요한 권고를 반복한 것이다.

⭕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와 같은 문장은 24:36, 42, 44, 50에 똑같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어투는 마태복음 기록자가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일관된 방법이자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5, 6절 주석). 결국 13절은 열처녀 비유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압축, 요약하고 있으며,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상 긴장되고 항상 예비되어야만 될 삶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25:1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또(*, 가르) - 이 등위 접속사는 새롭게 시작되는 달란트 비유가 바로 설명한 열처녀 비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즉 종말적 심판에 관한 열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내용이 같은 것이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다.

⭕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때 - 이 구절은 막 13:34의 문장과 같은 형식이다. 막 13:34은 마가복음서의 종말론에 대한 결론부로서 그것이 본 달란트 비유의 도입부가 되고있다. 또 막 13:35는 마 25:13, 즉 열처녀 비유를 통해 암시한 종말 교훈의 결론이 되는'깨어 있으라'는 구절이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막 13:34,35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어떤 사람'은 같은 평행비유인 눅19:12-27을 보면 왕위를 받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는 귀인(귀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헤롯이 분봉왕(분봉왕) 책봉을 받기 위해 오래도록 로마에 있었던 사실이나, 아니면 당시 상업을 하던 부호들이 먼 무역 여행을 위해 오랜 기간 집을 떠났던 사실에 근거한 비유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같은 일상적 사실을 암시한 것이기 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 땅에 성육신(Incarmation)하셨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할 일을 맡기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이 땅에 심판의 주로 오실것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타국에 갈제'(*, 아포데몬)란 문자적으로 자기가 살던 곳에서 '막떠나려 할 제' 또는 '해외로 가려 할 시점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눅 19:12은 이와 유사하게 '먼 나라로 갈 때에'로 번역되어 있다.

⭕ 그 종들을 불러 - 여기 '종들'(*, 둘로이)은 그 주인의 전적인 소유였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인격적 친근감을 주는 그야말로 주인과 동등한 위치로서의 신분을 암시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 '종들'은 여전히 주인의 권위아래 놓여 있다. 한편 이 '종들'은 상징적으로 주의 승천 이래로 당신의 교회를 책임질 복음사역자들 및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

⭕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 고대 사회에서 종들은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권한과 책임이 있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종들에게 자기의 동업자처럼 각각 소유를 나누어 준다. 한편 여기서 '소유'(*, 휘파르콘타)란 '재산', '소유물'이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주로 '돈'을 가리킨다. 이 '돈'은 그들 각자에게 적당하게 '맡겨'질 것이지만 여전히 그것에의 원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즉 비록 '종들'의 노력과 지혜로 많은 이윤(이윤)을 남긴다 하더라도 그것의 법적 소유권은 여전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필연적으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성 경: [마25:15]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각각 그 재능대로(*, 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 -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종들에게, 소유를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배분하였음을 말해 주는데 이것은 불공평에 의한 공평의 원리를 실현하시는 그분의 지혜를 반영한다(민 7:4-9). 이러한 재능에 따른 배분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인은 맡김을 받은 청지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소유 곧 물질적 소유 뿐 아니라 성격, 지식, 교육, 의지, 환경 등은 근본적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최선을 다해 잘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2) 사람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소유가 맡져졌다는 것은 저마다 고유의 인격과 역할이 있다는 말이고, 또한 그것은 각각 소중하고 존귀한 것임을 말한다. 각 사람마다의 개성과 창조적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것은 각각 독특하게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적합한 소유가 맡겨졌다는 믿음은 각각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그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 '달란트'(*)라는 말은 구약시대에는 무게의 단위로 쓰였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무게와 화폐의 단위로 동시에 쓰여졌다. 본문의 경우에는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무게 단위가 화폐 단위로 발전된 것은 금이나 은을 저울로 달아서 상품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달란트를 화폐 단위로 취급했을때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엄청난 가치가 된다(1 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에 해당). 이것은 눅 19:11-1에 언급된 '므나'(1므나 = 약100 데나리온)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한편 본문의 비유를 통해 '달란트'는 보통 상징적 의미로 '재능'을 뜻하게 되었다. 실로 각자의 독특한 재능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인 것이다.

⭕ 떠났더니 - 주인은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써 분배를 마친 후 더 이상의 염려나 망설임 없이 자기 길을 떠났다. 이것은 주인의 그 종들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행동인 동시에 그 종들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는 행동이다.

성 경: [마 25:16,17]

주제1: [종말의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의 비유]

⭕ 바로 가서(*, 유데오스 포류데이스) - 헬라어 원문에는 '바로'(유데오스)라는 말이 15절 끝에 붙어 있지만 오히려 개역성경의 방식대로 16절 초두에 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하튼 이 말은 종이 소유를 맡고 즉시 또는 재빨리 그 소유를 사용하여 어떤 일에 착수(着手)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과 일에 대해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지체없이 그 일을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로서의 바른 자세이다.

⭕ 그것으로...남겼으되 - 여기서 '그것으로'란 제한 문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그 종은 주인이 제공한 재능(달란트)에 근거해, 주인의 분부와 소망에 따라,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받은바 '그것으로' 일한 것이다. 여기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돈을 투자하여 이윤을 남긴다는 뜻이다. 즉 그것은 단지 은행에 안전하게 넣어두고 이자(利子)나 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알다시피 장사에는 확정적인 이윤이 무조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래 갖고 있던 소유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일이다. 따라서 장사를 하는데는 위험 부담을 안고 모험을 해야 한다. 이러한 모험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1)주도 면밀(周到綿密)한 계획과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2) 장사를 할 종목과 상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신용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3) 항상 진취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청지기로서의 마음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가 이윤을 남기었다는 것은 자기 맡은 바에 최선의 노력을 성실하게 기울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람의 종 가운데서 두 사람을 성실하고 층성된 종으로, 한 사람을 불성실한 종으로 묘사한 것은 숫자적인 비율로써 선한 종에 대해 강조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그보다 적게 받은 사람이 똑같이 성실하게 장사하였음을 말함으로써 (1)소유하고 있는 양의 차이에 따라 성실성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나타내며 (2) 주인의 주관심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적게 남기는 데에 있지 않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성실히 노력함으로써 주인의 기대에 부응(副應)하는 자세에 있음을 알 수있다. 실로 그들은 100% 충성과 성실을 통해 100% 결실과 만족을 주인께 돌려 드렸다.

성 경: [마25:18]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의 비유]

⭕ 땅을 파고...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 돈을 땅에 파묻어 두는 것은 그 당시의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즉 13:44에서 천국 비유를 말할 때 '밭에 감추어진 보배'라고 묘사하는 바와 같이 땅 속 보관은 당시 안전하게 재산을 보관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앞서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위험을 안고 장사를 한 두 종에 대비시켜 모험을 두려워하는 안전 제일 주의의 소심한 종을 묘사하고 있다. 실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범죄나 사취(詐取)가 아니었다. 그는 1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의 도를 정확히 간파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고의(故意)로 그 재능을 묵혀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주인을 위한 적극적 충성과 봉사를 등한히 한 것이다. 실로 진취적인 봉사 의식의 결여는 곧 소극적인 범죄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또한 그의 불충한 죄의 동기(動機)를 언급하자면 적어도 그는 상대적 빈곤 의식 때문에 주인이 맡긴 '1달란트'의 가치를 무시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5:1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의 비유]

⭕ 오랜 후(*, 메타 데 포륀 크로논) - 여기서도 종말적 심판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표현은 5절과 24:48의 '더디 오다'(*,크로니조)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쓰여졌다. 물론 이같은 '오랜 후'라는 시간적 감각은 순전히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실로 천년이 하루같으신(벧후 3:8, 9) 그 분께는 영원한 경륜(經綸)의 한 부분일 뿐이다.

⭕ 주인이 들어와 - 이 말은 '너희 주가 임하다'(24:42), '인자가 오다'(24:44), '주인이 오다'(24:46)라는 표현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 것이다.

⭕ 저희와 회계할새(*, 쉬나이레이 로곤) - 18:23에서와 같이 종말적 심판을 상업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Deissmann). 이 상업적 용어는 종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장사로 비유하였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실로 심판과 재림의 주께서는 종말의 심판 때에 지상에 거하는 모든 종들의 사역 결과를 놓고 회계(會計)하실 것이다(고후 5:10; 계 20:11-15).

⭕ 주여 내게...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처가 주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 보소서 내가...남겼나이다 - 이는 '내가(*,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일 뿐이다(고전 15:58).

성 경: [마25:2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주여 내게...주셨는데 -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가 활용하여 두배의 소득을 올린 그 소유의 출저가 주인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준 주인을 항상 의식하며 성실히 일해 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소유의 어느 하나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힌 겸손한 고백이기도 하다.

⭕ 보소서 내가...남겼나이다 - 이는 '내가'(*,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단지 주인의 맡긴 바 임무를 성실히 감당한 종이 자신의 성실성을 인정해 줄 주인에게 그 이윤을 펼쳐 놓으면서 외친 기쁨의 탄성(歎聲)일 뿐이다.(고전 15:58)

성 경: [마25:2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더란트 비유]

⭕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더 이상의 칭찬을 기대할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주인의 칭송(稱頌)이다. 특별히 '잘 하였도다'는 뜻의 헬라어 부사 '유'(*)는 종의 지난 노력에 대한 주인의 다함없는 만족과 인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26절의 '악하고 게으른 종'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그 종의 온 인격이 무흠(무흠)하거나 완전하다는 뜻이기 보다 그 주인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특히 '착하다'(*, 아가도스)는 기능적 측면에서의 올바름을, '충성되다'(*, 피스티스)는 윤리적 측면에서의 신실성을 강조한 칭찬들이다. 정녕 선(善)과 충성은 주인의 시험을 감당할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이었다(Wycliffe).

⭕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 이 구절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이후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말은 역시 주인의 관심,즉 회계(會計)의 내용이 투자에 대한 이윤이 얼마나 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일에도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세임을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주인이 맡긴 5달란트는 상당히 많은 액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미미(微微)한 것이었다. 여하튼 종말적 심판의 때에 성도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을 했고,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에 있지않고, 순간순간 매사에 얼마나 성실했는지에 있어야 한다.

⭕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 이 구절은 작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돌아가는 보상 내용이다. 물론 이 보상은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이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이 분명하며, 또 그 보상이 돈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이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가 더욱 신뢰감으로 깊어졌다는 것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參豫)할지어다(*, 텐 카란투 퀴리우). 여기서 주인의 '즐거움'(*,카라)은 (1)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10절) 주인이 와서 벌이는 천국 잔치로 볼 수 있다(계 19:9). 따라서 이 견해를 따르자면 우선 그 종이 천국 또는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그 주인의 초대를 받을 만큼의 영화로운 신분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천국은 잔치와 같은 축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2) 또 '즐거움'은 주의 영광스런 현현(顯現)이 제공하는 넘치는 기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충성된 자로 인정된 사람은 주의 영광에 참예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뜻이다(시 16:11; 21:6).

성 경: [마25:22,2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참예할지어다 - 셈어의 특징인 반복 기법을 사용하여 20, 21절의 내용과 거의 흡사한 칭찬과 약속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동일 내용의 보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주의 회계 기준은 은사와 능력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맡은 바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도에 있다는 점이다. 한편 주인은 두 종에게 모두 '많은 것'을 맡길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두 종이 똑같은 양의 '많은 것'을 맡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천국은 획일적인 평등주의(equalitarian)의 실현장(實現場)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과 충성이 모두 인정되는 곳이다.

성 경: [마25:2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한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 주인이 주관하는 회계의 현장에는 충성된 자이든 불충분한 자이든 모두가 나아와 주인의 판결에 응해야 한다(고후 5:10). 한편 여기 '한달란트 받았던 자'(*, 호토 엔 탄란톤 에이레포스)의 시재가 완료능동태 분사로서 아직 그에게 '한 달란트'만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여기 '굳은'(*, 스크레로스)라는 말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다'는 뜻으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같은 평행 비유 눅 19:21에서 나오는 '엄한 사람'(*, 아우스테로스)이라는 단어보다 더 강경한 뜻으로 쓰인다(요 6:60; 행 26:14; 약 3:4; 유 1:15). 여하튼 종은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세워 결국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遺棄)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주인의 인격을 매도하는 더 큰 죄를 주인 앞에서 범하였다.

⭕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 주인을 매우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면서 투자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아마도 이 비난 속에는 자신이 다른 두 종들보다 훨씬 적은 양을 받은 것에 대해 주인에게 은근한 화를 분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Derrett).

⭕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호덴 우디에스코르피사스) - 이는 추수한 곡식을 마당에 늘어 놓고 말린 후 키질을 하여 겨를 헤쳐서곡식을 모으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즉 좋은 주인을, 키질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알곡(재산)을 모으려고 하는 불로 소득자로 비난한 것이다. 이와같이 좋은 주인을, '굳은 사람', '심지도 않고 거두는 사람',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 등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 비난이 한 달란트를 받아 아무일도 하지 않고 주인 앞에 나온 게으른 종 자신에 대한 묘사이다. 즉 이 본문은 자기 변명을 통하여 자기 모습을 묘사하는 우화적(寓話的)인 문학적 표현 방법이다. 그러므로 종의 주인에 대한 비난은 모두 종 자신의 게으르고 완악한 심성의 고백적 표현으로 보면 된다(26절; 눅 19:22).

⭕ 내가 알았으므로(*, 에그논 세) - 이는 제 2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경험을 통해 익히 알아오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로 그는 자신의 왜곡된 판단을 근거로 주인의 품격을 극도로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5:25]

주제1: [종말을 대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두려워하여 -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즉 너무 엄격한 주인이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여 본전도 돌려 주지 못할 때 엄격한 주인에게 당할 벌이 무서웠던 것이다. 실로 이 종은 소심하고 진취적이지 못한 용기없는 사람인 동시에 자기 생명과 안녕에 대해 강한 집착을 지녔던 자이다.

⭕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 종은 자기 나름대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돈을 보관한 것이다(18절). 평행 본문인 눅 19:20에서는 수건에 싸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두 표현 모두 맡겨진 돈을 아무일에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기서 게으른 종이 무엇을 하여 모험을 감행할 의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 이는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의 원금(元金)에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고 잘 보존해왔다는 뜻이지만, 실상은 '내 할 바를 다했으니 당신은 내게 아무런 꾸중도 할 수 없습니다'는 뜻의 무례하고도 원망 섞인 불평이었다. 즉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을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이 보관을 위해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여 그에 따른 이윤을 남기라고 맡겼음을 알지 못했다. 소유를 맡겼을 때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께달아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이 성실하게 애정을 갖고 그 달란트를 맡아야 했었다.

성 경: [마25:2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악하고 게으른 종아(*, 포네레 둘레 카이오크네레) - 여기서 '악하고'(*, 포노스)는 '성가시게 굴음', '무가치한', '악독한'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게으른'(*, 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둔하다', '머뭇거리다'의 뜻을 가졌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는 주인의 의도에는 전혀 무신경하고 자기 안일에만 심취하여 결국 주인에게 해(해)가 된 무익하고 무가치한 종에 대한 묘사이다. 이는 21, 23 절에 이미 제시된 바 '착하고 충성된 종'과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 나는...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 이 구절은 앞서 종이 주인에게 변명한 내용에 대해 반문하는 것이다(24절). 이 반문의 의도는 주인인 자기 자신이 절대로 종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악질적인 구두쇠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님을 밝히는데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게으른 종에게 그렇게 반문함으로써 도리어 그 내용이 종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문장을 끊지 않고 게속 연장시켜 본다면, '그렇게 악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는 말이 나을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평행 구절인 눅 19:22은 이와 같은 의미를 분명하게 해준다. 즉 누가복음에는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라는 문장이 삽입되어 종의 변명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심판 선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5:27]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그러면 네가 마땅히(*, 에데이 세 운) - 이 구절은 앞서 게으른 종이 한 변명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종의 변명대로 주인이 매정할 뿐만 아니라 원금을 손해볼까 해서 그것을 이용하기가 힘들었다면 적어도 안전하고도 손쉬운 방법으로 이윤을 불릴 수 있는 일이 또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 취리(取利)하는 자들(*, 토이스 트라페지타이스) - 돈을 맡아 보관하면서 이자를 주거나 수수료를 받고 돈을 교환해 주는 환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의 은행이나 돈놀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돈놀이가 금지되었고(신 23:19; 시 15:5). 다만 이방인과의 거래에만 인정되었다(신 23:20). 그렇지만 이같은 율법적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느 5:10-12).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 유대 랍비들은 '변리(邊利)로 돈을 빌려주는 것'(lending at interest)과 '고리 대금업'(usury)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변리로 돈을 빌려주는 무리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 변리(*, 쉰 토코) - 이 뜻은 원래 '이자'로서 여기서는 높은 이윤 곧 고리 대금(usury)을 가리킨다. 한편 이 단어는 '낳다', '생기게 하다', '자손' 등의 뜻을 지닌 '듸크토(*)에서 유래된 말로 본전(本錢)에 이자가 증식하는 대금업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는 부당한 이익이나 억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통상적 관례에 의한 이자로 보아야 한다. 한편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합법적 이자율이 8%였으나 차츰 12, 24, 48%의 고이자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Vincent, W. W. Bukland).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변리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찬성하시거나 폐기하셨다는 이론을 전개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이자놀이에 대한 도덕성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으셨다. 다만 당신의 선한 의지를 설명하실 목적으로 융통성 있게 세상에 있는 제현상들을 활용하여 설명하셨을 뿐이다(눅 16:1-9; 181-8).

성 경: [마25:28]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해 단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은 정도의 심판이 아니라 그에 따른 물리적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은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진 보상(21절)에 극한 대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더 큰 것을 맡기면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더욱 깊은 신뢰감으로 형성되는 착한 종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악한 종의 경우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악화되고 그 모습은 더욱 처참하게 된 것이다. 실로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과 은혜를 성실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그 주어진 것은 그대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어 버린다(계 12:5).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타인을 부요케함으로써 고통의 강도(강도)를 배나 더하게 된다.

⭕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불성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비록 게으른 자에 의해 조금 지연되었다 하더라도 당신이 정하신 때, 정한 목적에 따라 당신의 일을 맡을 만한 자를 통해 끝내 성취하시고야 마신다. 한편 열 달란트를 맡은 자는 주어진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던 자로서, 결국 주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를 활용하면 할수록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마25:2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 이러한 격언 구절은 막 4:25에서도 사용되고 13:12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된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달란트 비유와는 전허 다른 내용에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독립적으로 전해져 사용되는 격언구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유를 마무리 짓는 결론적인 말을 대중이 익힌 사용하고 있는 격언구로 맺으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일에 성실하게 충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종말적 심판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료(明瞭)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정녕 영적 세계에서도 물질적 세계에서처럼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삼상 21:3, 4)

성 경: [마25:3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달란트 비유]

⭕ 이 무익한 종(*, 톤 아크레이온) - 이 말은 '유익하다(*, 크레이아스)라는 단어에 부정 접두어 '아'를 붙여 '유용하지 않은', '쓸모없는'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실로 능동적으로는 선한 일에 매진(매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는 주인이 맡긴 일에 소홀히 하는 종은 그 주인에게 아무 쓸모없는 자인 것이다(눅 17:10). 이처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외에도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께 페역한 죄가 된다.

⭕ 바깥 어두운 데로(*, 토 스 코토스) - 이 구절은 앞의 21절과 23절에서 착한 종에게 했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말과 반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바깥 어두운 데'는 주인과 영영한 관계 단절(斷絶)을 암시하는 동시에 어둠의 세력인 사단이 거할 최종적 심판 장소로 익혀 알려진 표현이다(8:12; 계 20:10-15).

⭕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와 같은 구절은 종말에 관한 비유를 제시한 24:51외에 8:12; 13:42, 50; 22:13 등에도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서 끔찍하고도 영원한 징벌을 나타내는 상투적 문구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25:3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안드로푸)의 아들(휘오스)이 된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명백히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문맥상(24:3) 종말의 때에 심판주로 구속주로 임하시기로 약속된(단 7장; 율 3:1-12; 슥 14:5)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셨다(8:20; 눈 5:24. '인자 개념' 참조).

⭕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 심판의 주께서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16:27; 24:30; 살전 4:16; 살후 1:7, 8). 여기서 특별히 '영광으로'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신적) 광휘가 충만한 예수가 오시는 모습을 바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붙여진 형용구이다(Broadus).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은 예수 재림의 장면이 전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장엄한 것임을 암시한다(24:31; 살후 1:7, 8; 계 14:14-20). 한편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수난당하시기 전 단지 3일전에(26:5, 17)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예언적 메시지가 지니는 신적 탁월성과 차고 넘치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심판자로서 뿐 아니라 왕으로서(34절)오실 것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19:28 ). 특히 그의 '보좌'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28:18; 고전 15:25; 히 12:12).

성 경: [마25:32]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모든 민족을(*, 판타 타 에드네) - 똑같은 구절이 24:14과 28:19에도 나온다. 여기 '모든 민족'은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이방 세계의 모든 민족까지 가리키는 것으로서(행 17:26) 보편적 심판의 의미를 주고 있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이 보편적 심판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실로 천국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2:1-12; 3:15, 16; 8:11) 모든 민족은 왕 앞에 서야 한다.

⭕ 모으고(*, 쉬나크데세타이) - 수동태로서 번역하면 '모여지고'가 된다. 이는 모든 인류를 주 앞으로 모으는 추수꾼 천사의 사역이 역력히 암시된 표현이다(24:31).

⭕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볕하는 것같이 - 종말적 심판의 때에, 열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례지 못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을 비유의 서두(序頭)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없이 섞여 지낸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틴에서는 잠을 잘 때에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다. 또 낮에도 서로 구분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틴 염소들은 대부분 검은 계통인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짐승인지라 저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여기서는 목자가 직접 무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앞에서 '모든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보아 양과 염소를 심판의 대상이 되는 모든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마25:3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양분함로써 심판의 명료성(明瞭性)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제 3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정녕 최후 심판의 순간에는 옳거나 틀린 것만 있을 뿐이다.또 여기서는 오른편에는 양을 세우고 복받은 자로 칭찬하고 왼편에 선 염소를 저주받은 자로 경멸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오른편'을 의로운 자리로 표현하고 '왼편'을 저주받은 자리, 곧 불의한 자리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 떠부터 '오른편'을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해 온 사실에서 비롯된다(출 15:6; 왕상 2:19; 욥 30:12 ;시 45:4). 그리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의 상실로서 이해되어 왔다(삿 3:15; 삼하 20:9:10; 전 10:2). 따라서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의 이같은 구분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1) 염소보다 더 가치있고 값비싼 짐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 양이 흰색인 반면 대부분 검은색으로된 염소를 대비시켜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정적으로 대비하고자 했을 것이다.(3) 하나님을 목자로 보고 그의 벡성들을 양떼로 보는 당시의 유목민적 사고를 빌어왔기 때문인 것이다(18:10-14; 겔 34:11, 12; 막 6:34; 눅 15:3-4; 요 10:1-21; 히 13:20). (3) 염소는 풀밭을 못쓰게 만들고 나무를 상하게 하여 초목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염소를 왼편에 세워 불의한 짐승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성 경: [마25:3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임금 - 여기서 심판의 주체가 임금으로 바뀐다. 즉 31절에서 심판의 주체가 '인자'(인자)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으로 달리 표현함으로써 인자를 임금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서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하는데, 그러한 비유는 2:2; 21:5; 27:11, 29, 37, 42에서도 나타난다. 여하튼 이같은 칭호는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통치권(통치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롬14:9; 계 19:16).

⭕ 내 아버지께 -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아버지와 연관시키고 있다(10:32, 33; 11:25-27; 15:13; 16:17, 27:18:10 ;20:23; 26:29,5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행자(대행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의 궁극적 시여자(施與者)는 아들을 통해 전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 복 받을 자들이여 - 오른편에 선별된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다. 여기서 특별히 '복 받을 자들'(*, 호이 율로게메노이)은 완료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이는 한번 시여된 축복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결국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축복의 영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말은 41절의 '저주를 받은 자들아'와 대비되는 문구로서 단순히 축복의 말씀 이상의 실제적인 복의 전달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 나와라 - 이 단어 역시 41절의 '나를 떠나라'와 대조되는 말로서 '나아온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친밀)한 만남을 의미한다. 같은 형식의 비유인 열처녀 비유에서 '잔치에 들어가고'라는 구절과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라는 구절(10, 21, 23절)에서도 표현한 바와 같이 구원은 주님과의 만남이고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있다(요12:26).

⭕ 창세로부터(아포 카타보레스 코스무). - '세상올 창조한 이래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Bengel)는 `...로부터'라는 뜻인 '아포'를 '그 이전부터'(*, 프로)라는 뜻으로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일치시키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올 창세 전부터 미리 선택해 두시고 그 유업을 상속케 하셨다는 것이다(요 17:24; 엡 1:4; 벧전 1:20).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오한 예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과 성실성을 대변해 준다.

⭕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이 귀절은 앞에서 '복받을 자'라는 말에서 나온 '복'의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예비된 나라'는 하늘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계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비된'(*, 헤토이마스메넨)은 완료 분사 형태를 취함으로 해서 그 동작이 이미 오래 전부터 성취된 상태에 있었음 보여 준다. 즉 하늘나라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의 입국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11). 한편 '상속하라'(*, 클레로노사테)는 말의 원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체치 말고 즉시 네 분깃올 얻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라를 '상속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 피명령자에게 당연히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상속이라는 말은 본래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것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있는 권리(권리)로서 하늘나라를 물려받는 것을 뜻한다. 실로 아무도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이 상속물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즉 영원한 자기 소유인 것이다. 구원 받은 성도는 창세 때부터 준비된 하늘나라를 영원한 소유로서 상속받게 된다. 여하튼 '예비된 나라'라는 구절은 41절의 '예비된 불'과 대칭적으로 앞에 나온다. 이것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대칭 구조속에서 반복 어투를 사용하는 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 경: [마25:35,3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이 두절은 복받은 자들이 하늘나라 상속권을 소유한 까닭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환영을 받고 유업을 상속하도록 초대받은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왕의 형제들을 섬겼기 때문이다(사 58:7). 그런데 이 섬김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섬김이 곧 그들 의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약 2:20-26). 즉 이는 순결한 믿음, 참된 신앙만이 표출할 수 있는 선행인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선행을 상기시키는 왕의 대답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의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37-39절). 정녕 의인들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과 기대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엠 2:10). 여기서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선행 중 35절에 제시된 세 종류는 율법적 의무 조항에 근거한 선행이며(창 19:1,2; 출 23:9; 신 10:18; 14). 36절에 제시된 세 종류의 선행은 율법의 의무 조항 이상의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 식. 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고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사실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옥에 갇힌 자 방문'은 복음시대 기간 중에 복음과 그리스도로 인해 공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고난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고난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행(善行)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6절).

성 경: [마25:37-39]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의인들(*, 호이디카이오이) - 여기서 '복받은 자들'이 '의인들'이라는 호칭으로 바뀐다. 즉 마치 '인자'가 '임금'으로 호칭이 바뀌어 그 인격에 대해 더욱더 구체성을 띠게 하듯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 자들을 가리켜 의인으로 선언함로써 그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의인들'이라 함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므로써 결국 이 땅에서의 온갖 자기 만족의 유혹과 고초를 이겨내고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앞에 선 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선언에 근거한 것일 뿐 사람들의 인격이 절대 순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의인들의 대답은 앞서 임금이 조목조목 나열한 항목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지금껏 행해왔던 선행이 결코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며 또한 커다란 상금을 바라고 선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의 최상의 겸손을 나타내보였다. 이러한 자기 선행을 부인하는 모습은 외식하고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그 당시 위선적 종교인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여호와 경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외식하며 겉치레적인 신앙 생활에 몰두하던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을 여러 기회들을 통해 격렬하게 비판하셨다(23:1-36; 12:38-40; 눅 11:37-52; 20:45-47). 결국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해 주며 당시의 비실천적인 이론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6:1-4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남을 구제할 때에는 오론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묵묵히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마25:40]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내 형제(*, 아텔폰무) - 여기서 형제(*, 아멜포스)는 일차적으로 임금의 형제 곧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12:47-50)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형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32절). 따라서 여기서의 형제는 광의적인 뜻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하는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35, 36절).

⭕ 지극히 작은 자 하나 - 이와 비슷한 문구가 10:42; 18:6, 10, 14에서 '소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18:5에는 '어린아이 하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즉 '작은 자'를 '지극히'라는 단어로 더 축소하여 강조하며 '하나'라는 최소 단위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극한 대비를 이뤄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라는 단어는 막연한 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암시한다. 실로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그 진수가 있다.

⭕ 내게 한 것이니라(*,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 35, 36 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의인이 반문한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고있다. 여기서 특별히 '내게'라는 뜻의 '에모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하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깨서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미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同參)하셨다(빌2:6-8). 또한 그는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보시었다(8:17; 사 53:4; 63:9). 정녕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다(히 4:15). 따라서 그분은 자신있게 고난받는 자와 '하나'라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22:34-40; 히 13:2).

성 경: [마25:41]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 이 구절은 34절의 '복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문구이다. 한편 7:23에는 본문과 비슷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자들'이란 문구는 34절의 '복받은 자들'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관사(*, 호이)가 생략됨으로 하나의 독립적 문구라기보다 종속적 분사로 보아 '저주를 받아 나에게서 떠나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Wycliffe). 이는 결국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 된다.

⭕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 이 구절은 34절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와 대칭적으로 대비되는 문구이다. 즉 의로운 자들을 위해 그 나라를 창세 전부터 준비하였지만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된 것이 서로 다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영한 불'이 염소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계 20:10). 실로 영영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마귀'(*,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비방자'(Slanderer)를 의미한다. 새 번역에서도 '악마'(the devil)로 번역한다(4:1; 눅 4:2 요 13:2; 옙 4:27; 히 2:14; 딤후 2:26 등). 그런데 여기서의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주동자(主動者) 곧 어둠에 속한 세력의 주관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자'(*, 앙겔로스)라는 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messenger),'사절'(envoy), 또는 '천사'(angel), '보냄을 받은 사람'(one who is sent)을 뜻한다. 여기서는 '메신저'(messenger)로 보는 것이 옳으며 새번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그의 사자'(*,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마귀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된다.

⭕ 영영한 불(*, 토퓌르 토 아이오니온) - 이 말은 영영히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심판의 불(fire)라는 뜻이다. 이 말은 46절의 '영원한 형벌'과 같은 표현이다. 실로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한편 '불'이라는 묘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다(3:12; 5:22; 18:8; 유 1:7; 계 20:10-15).

성 경: [마25:42,43]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의 정죄받은 이유를 35,36절의 문장 형식을 빌어 고발하고 있다. 특히 '아니하였고'(*, 우)라는 부정어구를 5번에 걸쳐 후렴구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심판 기준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 하고 있다. 즉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19:19). 한편 예수께서 이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은 적어도 말세, 종말의 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荒廢)해 질 것을(딤후 3:3) 익히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마25:44]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이 구절 역시 37-39절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다만 놀랄 뿐 이다. 실로 그들은 양들이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리듯, 자신들의 악행(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Bengel). 한편 그들이 놀란 이유는 (1)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는 사실 때문이다.(2) 심판의 임금으로 오신 주께서 굶주리고 나그네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고난받는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무엇보다 양들이 마지막 날에 보답받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닌 것처럼, 염소들은 마지막 날 보웅(retribution)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냉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필시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성 경: [마25:45]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40절과 구별되게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염소에게 있어서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받는 자에게 대해 무신경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인 것이다.

성 경: [마25:46]

주제1: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주제2: [양과 염소의 비유]

⭕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여기서 저주받은 자들의 벌과 의인들이 받은 보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먼저 영벌(*, 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영원한 징벌(punishment)을 뜻한다. 여기서 '콜라시스'는 원래 '잘라내다'의 뜻의 '콜라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죄인의 교화와 훈육을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징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혹자는 본문의 '영벌'이 궁극적으로는 염소들을 구원키 위해 내려진 교정적 차원에서의 벌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어느 곳에서도 지옥에 처한 자의 회개나 교회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최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의 '벌'을 이야기할 때 이 '콜라시스'보다는 공의에 입각한 엄격한 보복이라는 뜻의 '티모리아(*)가 더 적합할지 모를다. 그러나 이 '콜라시스'는 본문에서 목적적 차원에서의 해석보다는 집행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통해 '지독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히 10:29). 특별히 '콜라시스'가 영원성을 강조한 '아이오니온'과 결합됨으로 형벌의 영원성, 곧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18:8; 살후 1:9; 유 1:13). 이와 더불어 의인에게 약속된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물론 이 생명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을 뜻하기 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향유하게 되는 지복(至福)에 달한 생명으로서(trench),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이 현세에서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활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살전 4:14-17). 한편 '형벌'과 '생명'을 각각 수식하는 형용사 '아이오니온'은 시작 또는 종결이 없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가 없는 시간 개념으로서, 묵시 문학이나 종말론과 연관된 구분들에서는 항상 '메시야의 도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재림한 이후에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영원한 구별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끊임없는 긴장(緊張)과 그 나라와 주의 재림에 대한 성실한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네번째 수난 예고]

⭕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 마태복음에는 다섯개의 설교가 나오는데, 매 설교마다 이종결 문구가 나온다(7:28; 11:1; 13:53; 19:1). 여기서는 마지막 다섯번째 감람산 설교가 모두 끝났다는 의미에서 '마치시고'라는 말 앞에 '다'(*, 판타스)라는 복수 형태의 수식어가 첨가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시고 드디어 십자가 제단에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희생당하시는 제사장적 사역에로 발길을 옮기셨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때는 시작된 것이다(1:21; 20:18, 19).

성 경: [마26: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네번째 수난 예고]

⭕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 마가는 이 부분을(막 14:1) 하나의 보고 형식으로 기술한 데 비해 마태는 예수의 직접적인 언급으로 표현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는 말을 첨가시킴으로써 수난의 때가 분명히 도래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마태는 본서에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유월절이란 시간적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3번(요 2:13; 6:4; 13:1)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3년간이었다는 확실한 중거를 찾기도 한다. 여하튼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절기로서 출애굽 사건과 밀접(密接)한 연관을 맺는다(출 12장). 이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아빕 월, 곧 니산월 14일인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7일간 계속된다.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이틀'이란, 시간적으로 정확히 48시간이 채되지 않는 기간일 것이다. 특히 본서에 기술된 사건의 시간대를 살펴볼 때(21:23-22:46; 23:1-36; 24:1-3),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지금의 시각이 화요일이 아직 지나지 않은 때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화요일 늦게 감람산에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날은 해질녁(오후 6시경)에서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유대인의 요일 계산법에 의하면 수요일이 시작되는 때이다.

⭕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미 여러 번 예고해 오신 바 있다(16:21; 17:22; 20:18). 그런데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죽음 사건이 유월절 기간 중에 발생할 것이라 비로소 말씀하고 계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연결시킴으로 해서 당신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양'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을 통해 바로의 압제 아래서 고통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자유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 예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츨애굽, 즉 새로운 구원의 때를 열어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나(고전 5:7), 요한(요 1:29)의 신앙관과도 일치한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구약의 유월절이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거룩한 성찬으로 대체(代替)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유월절은 죄의 저주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 의지에 근거하고 있다(요일 4: 10). 그리고 그 성격상 화해하신 하나님 자신의 유일회적 죽음이었므로 그때로부터 영원토록 속죄제를 위한 제물로서의 양은 필요없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팔리우리라(*, 파라디도타이)는 수동태의 현재 직설법을 취하고 있다. 즉 본문은 현재 시제가 지니는 명확성과 긴급성 및 예언된 미래와 필연적인 성취 등을 내포하고 있음으로 인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임박했으며, 또 그것이 유월절 기간 내에 필연코 이뤄질 것임이 예시되고 있다. 또한 수동형을 취함으로해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접 시사해 준다. 한편 이 '팔리움'은 유다의 배신 행위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완악한 고소를 모두 염두에 둔 말씀으로서, 사형권을 지니고 있던 로마 정부 또는 그 파견 근무자에게 제소(提訴)될 것임을 의미한다.

성 경: [마26:3]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 그때(*, 토테) - 시간적 부사로서 본문에는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자신이 팔리우리라던 예수의 말씀과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모임 사이를 '그때'라는 말로 연결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과 급박함을 강조하고 있다.

⭕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 본문과 평행구릍 이루는 마가복음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율법학자들)'이라고했는데, 본문에서는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대신에 '백성의 장로들'로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학자는 마태가 '서기관들'을 '백성의 장로들'로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백성이 떠맡았다는 것을(27:25) 미리 예시하기 위함이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재판소 역할을 했던 산해드린(Shanhedrin) 공회원들로서 예수를 못 박기 위해 소집되었던 자들의 면면들을 각자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16:21 ;21:23).

⭕ 가야바라하는 대제사장 - 마태복음과 요한복옴(요 11:49)에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라고 언급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눅 3:2; 행 4:6) 안나스가 대제사장이라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기록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야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라고 하는데, '가야바'와 '안나스'의 관계는 '장인', '사위'의 관계이다. 가야바에 앞서 그의 장인 안나스는 총독 구레뇨에 의해 A.D. 6년에 대제사장이 되었다가 9년만인 A.D. 15년에 해임되었다. 그 자리를 이스마엘, 안나스의 아들인 엘르아살, 시몬 등이 차례로 승계하다가 A.D. 18년에 가야바가 빌라도의 전임 총독인 '발레리오 그라토'(Valerius Gratius, A.D. 15-26)의 후원으로 대제사장이 되어 A.D. 36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대제사장에 머무른다. 그런데 가야바의 대제사장직은 유대법에 의하면 불법이다. 왜냐하면 유대법은(민 20:25, 26) 대제사장직을 종신제, 세습제로 규정하는 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는 그의 장인 안나스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점령한 후 자기들이 통치하기에 편리한 인물로 피지배국의 종교 지도자들을 임의(任意)로 선출하고, 정치적 목직에 따라 자주 교체했기 때문이다. 실로 종교적 자주권을 상실했던 B.C. 37년부터 성전이 파멸되기 전 마지막 대제사장이 임명되었던 B.C. 67년 사이에 무려 28명 이상의 제사장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나타내 준다. 여하튼 사람들은 대제사장 가문에 소속된 자들을 모두 대제사장이라 칭했던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안나스와 가야바를 모두 대제사장이라고 불렀고 가야바의 장인으로서 안나스는 사임 뒤에도 그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 아문에 모여 - 산헤드린 의회가 열렸음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사실 대제사장의 아문에서 열리는 회의는 유대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의 공식회의가 아니라 비공식 회의이다. 이곳 '아문'은 대제사장 집 안 뜰(atrium)로서 그 주위에 궁전 건물들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열리는 회의는 비공식 회의이고, 공식 회의는 대제사장 궁전의 뜰 남쪽에 있는 다듬은 돌로 건측된 공회당(Gazith,Chanujoth)에서 열렸다. 한편 산헤드린의 구성을 볼 것 깊으면 총 72인의 공회원으로 구성되는데, 대제사장, 서기관, 족장급의 장로 등 세 계층에서 각 24인씩 차지한다. 이 회의의 의장은 '나시'(Nasi, 방백)라 불려지는데, 로마 총독의 임명을 받은 대제사장이 이 직을 맡았으며 그 아래 심판 장관급인 '압벧딘'(Ad Beth Din)과 대변인격인 '차참'(Chacham)이 있었다. 이 회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의결 기관으로 형식적으로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졌었으나 실제로는 로마 총독의 인준하에서 그 권력이 행사되었다.

성 경: [마26:4]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 궤계로 잡아 -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궤계'라는 단어를 '흉계'로 번역하고 있는데 어떻게 번역이 되었든지 저들이 예수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당한 명분없이 음해하려했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려고 준비하시는 예수의 모습과 궤계로써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거짓된 종묘인들의 권모 술수(權謀術數)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는 예수의 정정당당한 발걸음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영적으로, 정신적로 깊은 병에 든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대비되고 있는 것0]다.

⭕ 의논하되(*, 쉬네불류산토). - 이는 '협의하다', '계략을 짜다'는 뜻인 '쉼불류오'(*)의 부정과거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그들의 모의가 상당히 다급하고 긴장된 상태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실로 그들은 비밀리에 죄인 아닌 죄인을 극형에 처하기 위해 몹시도 당황했었던 것이다(Robertson).

성 경: [마26: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 민요가 낱까 하노니 -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 Wars 12:1-2) 메시야 대망 사상이 심히 고조되었던 A.D. 1세기를 전후하여 백성들의 봉기와 소란이 빈번히 발생했다고 전한다(행 21:34). 사실 유월절 기간에는 각 지역, 특히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갈릴리 지역 주민들이 예루살롑으로 많이 모여들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처형할 경우 민란의 위험성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 명절에는 말자 - '명절',곧 유대 최대의 절기인 유월절(2절)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은 수많은 인파와 고조되는 종교적 열기, 여기에다가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메시야 사상의 고조 등으로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커다란 폭동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는지는 역사가 요세푸스가 잘 알려 주고 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총독 케스티우스(Castius) 때에 유d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엄청난 숫자의 유대 군중들이 통치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가를 네로 황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유월절에 제물로 드리기 위해 잡는 양의 수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때 조사한바에 의하면 256,500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이다. 양 한 마리 당 대개의 경우 10정도가 한 무리가 되어 제물을 드리며, 어떤 경우에는 20명이 한무리를 이룰 때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숫자는 약 200만명을 훨씬 능가하는 숫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갈릴리 사람들을 비롯해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공개적으로 예수를 체포하거나 위해(危害)하려는 시도는 폭동이나 민란을 일으킬 것은 뻔한 일이므로 명절을 피해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저들의 의도는 너무나 당연하다. 즉 그들은 7일간의 유월절 공식 기간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 운집했던 무리들이 각기 고향으로 흩어질 때 예수를 처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예정은 유다의 배반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단지 유다의 배반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며, 사람들의 계획은 그 앞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성 경: [마26: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 본절 이하의 예수 도유(unction)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가 기술한 이야기(막 14:3-9; 눅 7:37-39; 요 12:1-8)이다. 그중 요한복음의 경우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상 주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가족들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렇다면 마태, 마가, 요한복음이 모두 '베다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시간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으로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데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사실 본문 이하의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하루 전,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보내실 때(21:1-11)인 유월절 엿새전에(요 12:1, 니산월 8일로 추정) 일어난 일로서 마태가 시간상의 순서를 무시하고 이곳에 수록한 까닭은 예수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속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였다(12절). 한편 누가복음과는 사건, 장소, 시간, 인물 등의 차이때문에 같은 사건으로 볼 수 없다(Calvin, Bruce, Meyer). 그러나 혹자는(Robinson, Chrysostom)시몬이라는 이름의 일치를 이유로 동일한 사건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에 시몬이라는 이름은 워낙 흔한 이름이었다. 그 실례로 신약성경에만 '시몬'이라는 이름이 10회 가량이나 나오는데, 그들은 열심당 시몬 (눅 6:15), 마술사 시몬(행 8:9, 24), 구두장이 시몬(행 10:6) 등 별명과 함께 불리어졌다. 따라서 누가복음의 '시몬'과 마태복음의 '시몬'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예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은 당신의 생애중에 두 차례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Plummer, Bengel). 한편 '문둥이 시몬'이라고 해서 '시몬'이라는 사람이 문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예수와 그 일행이 종교적 의식법에 개의치 않고 집에 들어갈 때는 이 사람이 문둥병 환자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추측컨대 일전에 그는 예수로부터 병고침을 받았을 것이고 그 답례로 이같은 잔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Roberson, Wycliffe, lange). 따라서 문둥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더이상 그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울 때마다, 예수의 은총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이는 사도가 된 후에도 세리란 명칭으로 불리웠던 마태의 경우와 그 의미를 같이한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이 문둥이 시몬은 나사로의 아버지, 또는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 보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성 경: [마 26: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한 여자 - 본문과 평행 구절인 요 12:3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이자 마르다의 동생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본문과 마가복음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마태와 마가가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당시에 생존해 있던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유대인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성을 은연중 경시(輕視)하는 이스라엘의 문화를 반영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재산 목록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출 20:17).

⭕ 매우 귀한 향유 - 마태는 그 향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단지 '매우 귀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평행본문인 막 14:3에 의하면 이 향유는 '나드'향이었다. '나드'향은 인도산 식물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휘발성이 강한 향인데,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하신분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캄비새스가 에디오피아 왕에게 보낸 다섯 가지 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나드향이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향유 한 옥합의 가격이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300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간 벌어들이는 소득과 맞먹는 액수였다. 요한복음에서는 계산에 밝고 재물에 욕심이 많은 유다를 강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여인의 해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귀한'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함으로써 여인의 행위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 옥합 - '옥합'으로 번역된 헬라어 '알라바스터 병'이라는 뜻인데, '알라바스터'(alabaster)는 석회 또는 황산 석회 성분을 띤 부드러은, 반(半) 투명의 대리석 비슷한 광물이며 그 주산지(애굽)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런 병들은 값비싼 기름이나 향을 넣어두기 위해 사용되는데, 몸체가 둥글고 목이 긴 모양을 하고 있어 사용할 때는 인봉(印封)한 주둥이를 깨고 그 안에 든 모든 향유를 꺼내어 쓰게 되어 있다.

⭕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식사 도중에 그 잔치의 가장 귀한 예빈에게 향유를 부음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유대의 전통적 관습이었다(시 23:5). 한편 본문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요 12:3)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실 기름을 부은 곳은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몸 전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복음서 제자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하튼 발이든, 머리이든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기름을 부은 부위가 문제가 아니라 기름부음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한편 향유를 붓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성경에 나타난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게 하는 고대적 예식으로 향유를 붓는다(창 28:18), (2) 제사장들의 의식적 성별에 사용되었다(레 8:12). (3) 선지자로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왕상 19:16). (4)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붓는다(삼상 10:1; 왕상 19:16). (5) 손님을 환대하는 데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6) 전통 장례법에 따라 시신에 바른다(요 19:40). 이중 본문에서 묘사하는 바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은 위에서 열거한 도유식(塗油式, 머리에 기름을 븟는 예식) 가운데 왕의 취임식을 시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육신적 조상인 다윗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왕이 되었고(삼상 16:13), 그의 후계자들은 하나님이 '기름부은 자들'이었다(시 45:7; 89:20). 이 고대 의식에서 유추하여 다윗 가문의 메시야도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의식에 의해서 임명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베다니에서의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은 다윗의 임명식의 모든 국면들을 극적으로 뒤엎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전 밖'에 그리고 '한 평범한 처소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또한 예수의 즉위식은 왕이나 사제가 임명을 받을 때의 그 화려함과 장관 속에서의 축하가 아니라 '한 초라한 집'에서의 식탁 친교에서이다. 그리고 예수는 사제나 대제사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익명의 여인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더욱이 예수의 기름부음 받음은 환영과 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8절). 따라서 본문의 도유식은 예수께서 인정하신 바대로 장사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12절) 보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비록 그 여인은 순수하게 예수께 대한 다함없는 헌신과 사랑의 표로 기름을 부었다 할지라도 그 도유는, 곧 예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구속사에 있어서 크나큰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되었다.

성 경: [마26: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 요한복음에 의하면(요 12:4)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제자들이 분을 낸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들은 두로의 이방여인에게도 분을 내었고(15:23), 어린 아이들을 주께 데려왔을 때도 그러했으며(19:13),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의 제안에 대하여도 분을 내었다(20:24). 이것은 자기들의 생각이 나타난 현상들과 배치될 때 일어나는 성급하고 악향 감정이었다. 실로 타락한 인간 본성(本性)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을 받아들이기에는 장애와 반발 요인이 너무 많다. 진정 누구보다도 사태의 진전을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할 제자들이었건만 그들은 이 기름부음 사건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인격과 십자가를 향한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허비하느뇨 - '허비하느뇨'로 번역된 헬라어 '아폴레이아(*)는 일말의 생산적인 결과조차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한 낭비, 즉 값진 것을 무용(無用)하게 모두 소모해 버린 것을 뜻한다. 결국 이 말은 제자들의 관심이 오직 노동자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그 물질에 집착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실로 그들의 물질 중심의 평가는 신앙 중심, 사랑 중심의 '한 여인'의 순수한 마음을 무참히도 짓밟아버린 것이 되었다. 정녕 신앙적 무지는 자기 만용과 이웃과의 관계 파괴라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낳곤 한다.

성 경: [마26: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많은 값에 팔아 -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설명하여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다.

⭕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하나의 관행(慣行)이었다. 사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누누이 전하셨다(19:21; 25:35). 실제로 이 도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부터 수십리 안팎에 수천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로 위선적이고 가증한 유다가 가지고 있던 동기(요 12:6)가 무엇이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의로운 분노 때문에 그 여인을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기에 저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요 물질 중심적인 것이었으며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정녕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곁에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성 경: [마26:1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아시고(*, 그누스) - '알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제 2 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그 정확한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음을 뜻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관적(直觀的)인식이야 말로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16:8).

⭕ 괴롭게 하느냐 - 여기서 '괴롭히다'는 뜻의 헬라어 '코포스'(*)는 '때리다', '치다', '자르다'를 뜻하는 '코페'(*)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거의 폭력에 가까운 압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 당시 이 여인이 제자들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앞에 얼마나 괴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알수 있다.

⭕ 내게 좋은 일 - 이는 그저 선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기쁘게 받으실만하며 영원히 기억하고 인정할 만한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의 이같은 신적 인준에 의해 받아들여진 이 일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비난받을 수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막 14:7) 선행이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향유로 삼아 쏟아 부은 모든 수교자들에게도 이같은 아름다운 변호를 해주실 것이다.

성 경: [마26:1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가난한 자들은 항상... 함께 있거니 -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께서 세계의 가난을 뿌리뽑을 수 없다고 말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과 자신에게 사랑을 표시한 것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항상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다시는 그런 선행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땅위에 존재할 것이다(신 15:11). 이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다. 따라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할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맞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매우 특수한 것이며, 이 여인은 이 순간을 올바로 포착(捕捉)한 것이다. 곧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는 그 순간의 중요성을 포착하여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음으써 그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다. 적어도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결단코 다시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300 데나리온의 돈은 매우 많은 것이며 그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300 데나리온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놀라운, 곧 인류 구속의 위업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 여인은 바로 그 값진 일에 자신의 사랑을 쏟아부은 것이다.

성 경: [마26:1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내 장사를 위하여 -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례에 의하면 장례 절차 가운데 도유하는 의식이 있었다(대하 16:14). 그런데 막 16:1에 의하면 첫 부활절 아침에 세 여인이 예수의 몸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에 찾아갔으나 예수께서 이미 부활했기 때문에 기름을 바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 받음이 예수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기름부음이었고, 예수는 죽음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여인이 자기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예수 자신의 '장사를 위해' 자기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누차 공개하셨다(16:21; 17:22; 20:18). 그런데 오직 그 여인만이 예수께서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되풀이하여 말했던 바를 이해하며 그 운명의 시간을 준비(準備)해 왔던 것이다. 즉 그 여인은 나름대로의 영적 안목으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장례 예식으로서의 도유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으로 알고, 미리 예수께 찾아와 관례에 따라 기름을 부은 것이다(Wycliffe).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정치적 왕국에 대한 자기들의 그릇된 관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해 있는 예수와 조그마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1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향유를 부은 여자]

⭕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다 기념하리라 - 이렇게 귀중한 약속이 담겨져 있는 13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예레미아스(Jeremias)에 의하면, '어디에서든지'라는 의미의 헬라어 '호푸'(*)를 '... 때로' 해석하여 이 구절은 재림때 온 세상에 복된 소식이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 당당하게 선포될 때에 이 여자의 행위도 기억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따르면 '복음'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사용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이 제자들의 전도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갈 것을 예견하셨고(8:11),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임도 예언하셨다(24:14). 13절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 여인과 이 여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More). 정녕 예수의 복음은 그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죽음을 장식한 이 여인의 행위는 복음과 함께 없어지지 아니한다. 또한 이 여인의 행동은 사랑, 믿음, 용기, 그리고 자기 희생 등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적 자질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된다. 실로 한 사람의 평범한 여인이 베푼 사랑의 행위가 이처럼 구속사의 한 모퉁이가 될 만큼 인정되고 기억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편 '저를 기념하리라'는 말은 그 여인의 행적이 영영히 기억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지금 그대로 성취(成就)되고 있다.

성 경: [마26:1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신]

⭕ 그 때에 - 향유 도유에 관계된 예수의 말씀이 막 끝난 때이자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간 때를 지시한다. 결국 이 장면은 대제사장들이 가야바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잡기 위해 모의하던 내용(1-4절)과 연결된다.

⭕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 - 거룩한 만수(滿數)인 '열 두' 사도의 목록에는 대부분 맨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가 언급된다(10:4). 한편 이 말석에 위치한 제자 가룟 유다는 베다니 도유 사건을 기화(奇貨)로 예수를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길 것을 결심하게 된다. 즉 가룟 유다는 예수의 장사라는 암울한 예고와 무모한 물질의 허비 등으로 인해 예수 제자의 길을 포기하고 배반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물론 가룟 유다 배반의 근본 동인은 사단이지만(눅 22:3)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었다. 한편 3절에서는 당국자들의 행위가 전혀 부각되었다면, 여기서는 유다의 배반이 '그 때 그가 갔다'는 마태의 전형적인 표현과 더불어 기름부음 직후에 일어난다. 특히 '열 둘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준다. 즉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마저도 이런 죄에 빠지시는 것을 보아도 우리 성도는 한층 더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사단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 가장 신뢰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능히 우리를 실족시킬 수 있다(10:36; 미 7:6).

⭕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 가룟 유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언제 대제사장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배반 의지가 어떤 장애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매우 적극성을 띤 것이었다는 점이다.

성 경: [마26:1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신]

⭕ 내가 예수를...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 유다는 요 12:6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의 욕심이 많은 자였다. 이제 그는 그러한 탐욕스런 본성을 분명히 노출시켜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정식으로 팔려고 그 값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같은 사악한 흥정에 대해 마가복음에서는 간접 화법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직접 화법으로 묘사함으로써 돈을 탐하는 유다의 죄성이 더 강조되고 있다.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약속만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돈을 직접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물욕에 가득찬 행동을 더욱 생생히 보여 준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넘겨 준다'는 말은 그가 직접 예수를 묶어 공회에 넘긴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불의한 죄목(罪目)을 뒤집어 씌워 고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예수가 피소(被訴)된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그들 수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였다(57-68절). 따라서 '넘겨 준다'는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적기(適期)를 마련하고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파송된 무리에게 예수가 손쉽게 체포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16, 47-59절). 여하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놓고 벌어진 흥정은 순식간에 완결되었다. 실로 죄악된 계획은 죽음의 화살처럼 빨리 진행되는 것이다.

⭕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기로 하고 받은 돈은 은30 세겔이다. 출 21:32에 의하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삼십 세겔을 배상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예수는 노예의 값어치에 불과한 적은 액수로 불의한 자들의 손에 거래된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적은 액수에 거래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이것은 단지 '그들은 은 삼십으로 그를 팔았다'는 슥 11:12의 예언을 자구적으로 맞추기 위해 그 액수의 양을 축소하여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Meyer).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해석인 듯하며 오히려 그 당시 공회와 유다 양자간에 예수를 노예 정도의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고 멸시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Robertson). 정녕 예수는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가장 고통받고 멸시받는 존재로 이 땅의 마지막 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 비하(自己卑下)를 통해 예수께서는 이 땅에 멸시받고 고난받는 자들과 죄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던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것이다(히 4:14-16). 한편 가룟 유다가 예수를 은 30세겔에 팔아넘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특이한 견해가 있다. (1) 예수에 대한 실망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게 되었다. 유다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즉 민족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했었는데 반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는데, 바로 이 점이 유다의 기대에 어긋났다. 결국 실망 속에서 유다의 헌신은 미움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마침내는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2) 유다가 예수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봉기하게 만들려고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주었다고 생각한다. 즉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게 되면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봉기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다의 배반 동기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적어도 그의 배반 동기는 탐욕과 예수에 대한 실망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유다의 배반 동기는 그렇게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유다의 배반 사건이 성경의 예언(슥 11:12)의 온전한 성취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성 경: [마26:1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신]

⭕ 기회 - '기회'의 헬라 원어인 '유카이리아'(*)는 본래 '좋은 시기를 뜻한다. 아마 예수를 넘겨주기에 '무리가 없을 때'를 찾는 것이리라.

성 경: [마26:1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무교절의 첫날에 - 이는 문자적으로 '누룩없는 떡의 첫번째 날에'가 된다. 무교절은 본래 유대력으로 니산월(태양력 3, 4월경) 15일부터 그달 21일까지 7일동안 지키는 유대인들의 큰 절기이다(출 12:15-20; 레 21:6; 민 28:17). 그러나 유대인들은 니산월 14일인 유월절 저녁부터(출 12:6) 무교병을 먹는 바 흔히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말을 상호 교호적(교호적)으로 사용하였다(출 12:18). 그리고 그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13일경부터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하였는데 이날을 준비일로 본다. 여기서 가리키는 '무교절의 첫날'이란 '유월절', 곧 '양 잡는 날'(출 12:6)이 아니라 하루전 날인, 니산월 13일인 준비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의 평행구인 막 14:12과 눅 22:7에는 이 날을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잡는 날', '유월절 양잡을 무교절 일'등으로 각각 기술함으로써 이때가 니산월 14일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Lange, Hengstenberg, Anddrews 등 ). 그리고 본 장 19절에 그들이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공관복음서보다 대체로 시간적으로 엄격, 정확한 요한복음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즉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밤을 세워 기도하시고 그 다음 새벽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서로마 관정으로 끌려갔을 때를 기록한 요 18:28부분에서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유월절 잔치'는, 곧 '유월절 양을 먹는 것'을 가리킨다(Dods, Godet, Bermasd 등). 따라서 이때는 니산월 14일 ,곧 성(聖) 금요일 새벽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께서 심문당하시고 십자가 형을 당하신 때를 '유월절의 예비일'(요 19:14, 31),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인 니산월 14일(출 12:6)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는 이같이 심문과 죽음이 있기 전날인 니산월 13일, 곧 목요일('무교절의 첫날')에 최후의 만찬을 준비토록 하셨던 것이다. 이 만찬은 정규 유월절 식사보다 만 하루 앞선 날에 베풀어졌다. 유월절 최후 만찬의 시간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요 13,18,19장 강해를 각각 참조하라.

⭕ 유월절 잡수실 것 - 유월절 식사는 원래 니산월 14일 해지기 전에 양을 잡아 쓴 나물과 함께 준비해 두었다가 해가 지는 시점(P.M.6t시)을 전후로 하여 식사를 개시한다. 물론 본문의 사건은 이 정례적 행사일보다 만 하루 앞선다. 한편 유월절 식사의 순서를 살펴보면 (1) 먼저 손을 씻고 결례(潔禮)를 행한 후 가장이 축제에 대한 감사(유월절 키두쉬,kiddush)를 드리고 네번에 걸쳐 마시게 되는 물을 탄 포도주 중 그 첫째 잔을 마실 때 기도함으로써 시작된다. (2) 계속해서 채소와 쓴나믈을 전체로 먹은(양념에 찍어 먹음) 뒤에는(애굽에서의 고역 상징) 유월절 학가다(Haggadash)와 할렐(Hallel) 찬양의 첫 부분(시 113편 또는 113, 114편)이 이어진다.(3) 유월절 학가다에서는 집안의 자녀들이 이 예식의 의미를 묻고(출 13:8) 가장(家長)이 출애굽 사건에 비추어서 이러한 상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주게 된다(M. Oesahim 10:4-5). 그 다음에 이어지는 순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4) 대체로 포도주를 두번째 마심으로써 본 만찬이 시작되고, 이때 양고기가 식탁에 오른다. (5) 그 뒤에는 세번째 포도주 잔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축복의 잔'(고전 10:16)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 잔을 마실 때 또 한번 감사의 기도가 있게 된다. (6) 그때 참석자들은 할렐 찬양의 나머지를 부른다(시 114-118편 또는 115-118편). 그리고는 네번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유월절 식사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상당히 많았다.

⭕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었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 날을 성전에서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 장소를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와 더불어 그 식사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어린양, 무교병, 포도주, 쓴나물, 등불 등)이 여간 손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식사 장소에는 누룩이 모두 제거되어야 했기에(출12:15) 미리 청소도 해야만했다. 이러한 복잡한 준비 작업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의 의사를 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적어도 정규 식사일인 금요일 곧 니산월 14, 15일 걸치는 저녁보다 하루 앞에 먹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하루 앞서 행하신 유월절 식사에는 율법에 정해진대로 내일까지 양을 먹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양 고기는 식탁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19절, the Pulpit Commentary). 이것은 결코 우연(偶然)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정한 것이 아닌,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양잡는 날, 곧 니산월 14일 오후에 당신이 친히 십자가라는 유월절 식탁에 오를 예정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1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성 안 아무에게 가서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이 상당히 이적적인데 반해(막 14:2-16; 눅 22:7-13) 마태복음에서는 마지막 만찬이 이적적으로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공동 번역 성경에서는 '성 안에 들어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있을 터이니'라고 번역되어 있고, 새번역에는 '성안에 있는 "그" 사람에게 가서'로 번역되어있다. 더구나 '아무'라는 뜻의 혤라어(*, 톤 데이나)에는 관사가 붙어있어 예수가 이미 인지하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음이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마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당시의 정황에서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그 당시 예수께서는 당국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으며 살해 음모가 진행되고 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와 그 일당에게 만찬 잔치를 제공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만찬 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을 보호해 주기 위혜서 예수께서는 '아무개'라고만 말할 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예수일행에게 장소를 제공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예수의 무명 친구라는 견해도 있다. 이 무명친구가 예수에게 비밀 장소를 공급하였는데, 이 친구는 큰 다락방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하고 종들도 있었으나 매우 겸손하여 만찬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Zahn) 이 사람이 요한 마가의 아버지라는 견해를 펼치기도 하고, 개심한 니고데모 또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라고도 하나 모두 확실한 증거가 없다.

⭕ 선생님 말씀이 -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해들을 사람이 적어도 당신을 '선생님'(*, 디다스칼로스)이라고 호칭해도 깨달을 정도의 안면이 있고, 또 신앙이 성숙해 있는 자임을(Lenski) 암시한다.

⭕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언으로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문구이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정해진 때' 곧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때를 의미한다(옙 1:9).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이나 그 집의 주인이 듣기에는 그 말이 유월절 식사에 예수께서 시간을 맞추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하려 한다는 의미로 들렸을 것이다. 후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서 예수의 그 말씀이 그 당시 임박한 십자가, 즉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적(代贖的) 죽음의 성취를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본문을 기록 할 때, 그는 예수의 죽음과 순차적 사건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한 구속사의 순차적 사건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했을 것이다.

성 경: [마26:1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예언한 바대로 모든 것이 되어 있음을 제자들이 발견하였다는 말 대신에(막 14;16)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는 말로 대신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식사가 준비된 곳은 큰 다락방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만찬이 준비된 곳이 다락방이라는 암시는 없다. 유월절 행사에 있어서 양을 잡는 일은 가장 핵심이 되는 일이었다(17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월절 양을 잡은 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유월절 준비를 위해 '집', 곧 '방'만을 준비하고 정작 유월절 식사에 필요한 '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유월절 양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깨서 친히 유월절 양이 되므로 또다른 유월절 양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17절).

성 경: [마26:2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물 때에 - 유대력에 의하면 니산월 13일이 끝나고 14일이 막 시작하려는 시간(오후 6시 전후), 곧 성(聖) 목요일에서 성(聖) 금요일로 접어드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따져서 예수 최후의 만찬은 니산월 13일에서 시작하여 14일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앉으셨더니 - 여기서 '앉으셨다'(*, 안나케이마이)는 말은 '기대어 앉았다'는 뜻이며, 이것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식탁쪽으로 기대어 오른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유대인의 식탁 자세에서 연유한다(8:11). 여하튼 예수께서는 모든 외부 인사를 물리치시고 오직 당신의 12제자들과 더불어 내밀하고도 뜨거운 교제를 나누시고 계신 것이다(눅 22:14, 15; 요 13장).

성 경: [마26:2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희가 먹을 때 - 역사적인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었다(유월절 식사 절차는 17절과요 13장을 참조하라). 예수께서 제자들로 더불어 나누신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잔치였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최후의 유월절이었다. 즉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가 예표하는 바 '구속'은 그 다음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완성된 것이며, 여기서부터 유월절의 지위는 우리 주의 성만찬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성례가 되었다(막 14:22-25, '유월절과 성만찬' 눅 22:19, '성만찬과 성찬식' 참조).

⭕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 당신이 친히 선택한 사랑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이 선언은 마태, 마가, 요한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다는 은밀한 중에 예수를 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미 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되어가는 일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만약 제자들이 그 계획을 알았다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으며, 유다에게는 예수께서 자신의 배반적인 거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것은 물론 그 죽음에 이르는 절차(節次)까지도 은연중에 예견하신 바 있다(2절; 17:22; 20:18). 한편 예수께서는 유다의 악행을 아셨으나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말로 마지막까지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것을 권고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완곡한 사랑의 호소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을 위압, 강요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회개를 호소하신다.

성 경: [마26:2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 요한은 이때 '서로 마주보며'라고 기록함로써(13:22) 제자들의 의아한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과 새번역운 '저마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본래의 뜻은 '각자가 한 사람씩'이라는 뜻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각자가 한 사람씩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주여 내니이까(*, 메티에고 에이미 퀴리에) - 여기서 의문사 '메티'는 질문자 쪽에서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를 달리 번역하면 "저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죠? " 정도의 질문이 될 것이다. 사실 11제자들은 이러한 본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질문을 통해 적어도 자신들의 연약함을 직시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부지 불식간(不知不識間)예수를 해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자들은 '주여'라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즉 신앙의 주(主)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는 '랍비여'라는 말로 부름으로써(25절) 예수를 단지 '선생님'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2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 이 '그릇'은 과일이나 식초를 혼합하여 만든 소스를 담은 '대접'으로서 도구를 사용치 않고 주로 손으로 취식(取食)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쓴 채소와 함께 음식을 여기에 담갔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때가 구운 양고기를 먹는 시간이었다면 '그릇'에는 나물과 과일 그리고 퓨레(puree)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누룩없는 떡과 함께 그것을 먹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있는 대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라는 말로만 가지고는 그 당사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유월절 식사 때에는 함께 자리한 사람들 각자가 그 그릇에 손을 넣어 찍어먹기 때문에 예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사람이 함께 손을 넣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에 대한 설명도 여러가지가 있다. 즉, 이말은 (1) 예수와 동시에 찍어 먹는 자(Bengel), (2) 예수가 말씀하실 그 순간에 그릇에 손을 넣은 자(Plummer)등의 견해가 있다. 이외에도 휀샴(Fensham)이라는 학자는 쿰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서 유다가 예수와 함께 손을 그릇에 넣은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릇에 손을 넣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계급에 따라서 차례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유다가 예수의 지도자적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반역의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체 분위기상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단지 예수와 함께 같은 접시에서 먹는 한 사람이 그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할 뿐인데(막 14:18), 마태복음에서는 방금 그의 손을 예수와 함께 접시에 넣은 자가 배반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사자에 대한보다 구체적인 암시이다. 더욱이 예수 자신이 떡 조각을 찍어다가 유다에게 주는 것을 기록한 요 13:26, 27에서는 배반자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가장 친근한 사람끼리 마음을 터놓고 식사하는 유대인의 풍습에 비춰볼 때 식사 중에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를 한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시 41:9). 그것은 곧 예수께서 다함없는 사랑을 베푼 바로 그가 예수에게 가장 해로운 배신(背信)을 한 것이었다.

성 경: [마26:2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인자는...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구약 예언에 대한 일반적 언급이다('인자'에 대해서는 눅 5:24 강해를 참조하라). 그러나 본문에 있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해 줄 수있는 구약 성경 인용구는 찾을 수 없다. 혹 고난받는 종을 노래한 이사야 53:7-9이나 다니엘 9:26과 같은 구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예언적 유형론(2:15; 5:17-20)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말을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대로 되어진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간다'는 말은 죽음을 향하여 갈 길을 간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요 7:33; 8:21, 22) 이 단어의 직접적 의미는 죽는다는 뜻이기보다 차라리 '떠나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대하여 예언한대로 고난의 길을 '갈'뿐 아니라 그 길을 통과한 후 영광을 받아 아버지께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예정된 대로 죽음을 겪게 되지만 그를 파는 자의 죄는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따라서 유다는 결국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의 형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그런 종류의 형벌인 것이다. 아뭏든 이는 유다의 배신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모두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고 구속사가 성취되도록 한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악한 마음의 유혹에 넘어간 잘못에 대한 것이다. 그 결과로 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하여 메시야의 백성이 죄에서 구원받게 되고(1:21), 인간이 유혹에 빠짐으로 인해서 영원한 심판이 다가오는 것이다.

⭕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 가룟 유다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비참하게 될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는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적 표현으로 욥기(욥 3:2, 10, 11)와 외경(에녹 38:2)에서도 발견된다. 한편 배신하여 절망적 운명에 처하는 것보다 차라리 세상 햇빛을 보지 않은 자가 훨씬 좋았겠다는 이 비극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 자신의 반역 의지를 실천해 갔다. 그리고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이때 유다가 밖으로 뛰쳐나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요 13:30).

성 경: [마26:25]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유월절 준비]

⭕ 랍비여 내니이까 - 이 문장 앞에 나오는 '예수를 파는 유다'라는 문구는 마태가 열두 제자의 명단(10:4)을 제시할 때마다 덧붙였던 형용구였다. 여하튼 이미 예수를 팔기로 공회원들과 내통하고 있었으며(14-16절), 더욱이 예수의 회개에의 권고성 발언에도(21절) 불구하고 그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양심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위선(僞善)이다. 더구나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랍비'라는 호칭으로 예수를 부른다(22절). 이것은 유다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의 메시야성을 철저히 무시한 언사이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유다 역시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적대자들의 반열에 서고 있는 것이다. 유다는 이 칭호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배반하는 순간에 또 한 번 사용할 것이다.(49절).

성 경: [마26:2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저희가 먹을 때에 - 본절 이하 사건의 시간적 위치를 말해 주는 기록이다(21절). 아마 이때는 유월절 본 식사가 끝나기 전, 곧 '축복의 잔'인 세째번 잔이 비워지기 전으로 추정된다(17절 참조).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떡기 '떡'은 무교병 큰 덩이일 것이다(출 12 :15; 13:3, 7). 그리고 '축복하였다'는 것은 마치 '오병 이어'에서처럼 감사와 찬양의 평이한 식기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식탁의 전통적 관례에 따라 감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떡'이라는 단어는 (1) '들어'(took), (2) '축사하시고'(blessed), (3) '떼어'(broke), (4) '주셨다'(gave)는 네 동사와 연결되는데 본래 이 동사들은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감사드릴 때 하는 동작을 나타내 주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17절). 아마 이때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던 공식 문구인 '우리 주 하나넘, 우주의 왕이시여, 땅에서 떡을 내신 당신께 영광이 있기를'과 같은 말로 축사하셨을 것이다.

⭕ 떼어 - 떡을 떼는 행위는 공동식사에서 혼히있는 일로 식탁의 주체자의 고유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떼는 행위는 단순히 먹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이 떼내어진 떡은 곧 선민 이스라엘의 뼈아픈 과거의 고통을 상징했었다. 그러나 이제 새 시대의 문을 여선 예수께서 친히 떡을 또시며 당신과 연관시킴으로써 장차 고난받아 찢기실 당신의 몸을 예시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 제자들을 주시며...받아 먹으라 - 떡을 떼어 건네는 것은 상호간의 신뢰와 두터운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받아 먹으라'는 명령 문구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혜방(解放)과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간주할 수 있다.

⭕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바울과 누가는 여기에 '너희를 위한'이라는 수석어를 첨가시켰고 더불어 '이것을 행하며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눅 22:19; 고전 11:24)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육체로는 더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예수 자신을 기억하도록하며 또 그들을 위해 대속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를 기념하도록 가르치고 계신다. 이에 비해 마가와 마태는 그냥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만 말하면서 '떡'을 곧 죽게 될 예수의 몸과 나란히 연간시키고 있다. 이로써 앞에서 암시했듯이(19절) 예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어 그들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즉 떡이 여러 조각으로 떼어진 것처럼 예수의 몸도 찢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구원을 하나넘이 정해 주신 유월절 식사와 관련시키듯이, 메시야의 백성들도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그분의 권위로 제정된 성례와 연결시킬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이니라'(*, 에스티)는 말은 주어진 술어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계사(繫辭, 영어의 is에 해당)로서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진정 실제적 동질성을 언급한 것인지, 단지 상징적인 대비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성령에 의한 결과론적인 임재를 뜻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친히 화육(化肉)하신 분으로 당신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르치신 성체(聖體, 살과 피)를 근거한 성만찬을 통해 당신이 주시고자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전달하시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주의 말씀에 경청했던 그당시 제자들은 이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예수께서 주신 이 거룩한 성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영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능히 알았을 것이다(요 6:53). 따라서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단순히 기념 예식일 수 없으며, 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의 절차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희생과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그들이 과거에 얻지 못했던 것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순하고도 순수한 열정으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성체를 기념하기만 한다면 말로 다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the Pulilit Commentary). 한편 본문의 성만찬과 관련된 제견해들을 역사적 변천 과정을 따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성 경: [마26:2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이것이 유월절 식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잔'은 세번째 곧 '축복의 잔'이었을 것이다(17절 참조).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다시 추사하시고 '오 우리 주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포도의 열매를 창조하신 당신에게 영광 돌리럽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한편 여기 사용된 '사례하다'는 뜻인 원어 '유카리스테사스'(*)는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테오'(*)의 분사로서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Eucharist )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 저희에게 주시며 - 여기 '주시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도켄'(*)은 부정 과거형으로 단 1회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는 사례하신 후 단 한번만 잔을 주셨을 것이다. 따라서 잔을 받은 제자들은 그 잔을 받고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을 것이다.

⭕ 다 이것을 마시라 - 마가는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 14:2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이 본문을 '너희가 다 이것을 먹으라'고 명령한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더욱 이 장면을 생동감있게 전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다'라는 말이 강조된 것은 떡을 먹은 사람이면 '모두' 잔을 마시는 일에 참여해야 할 것을 암시한 것이다.결국 이 말씀은 사제들만을 잔 마시는 행사에 참여시키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예전(禮典)의 그릇됨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실로 그들은 사도들에게 돌려진 잔은 오직 사제들만이 계승한다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일반 신도들의 성찬 예식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살과 마찬가지로 주의 피는 우리 모든 신자의 신령한 음식이요 음료가 되어야 한다.

성 경: [마26:2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 구약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 죄용서를 얻게 하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실로 피 없이는 하나님께 속죄받을수 없었다(히 9:22)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짐승으로서의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요, 단편적이며, 불완전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주께서는 그 대속제물의 궁극적 완성자요 영원한 표상으로서 친히 십자가 제단에 오르시려 하신 것이다(요일 1:7). 정녕 당신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즉 예수께서 어떤 특정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으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세상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는 의미이다(20:28). 그러나 이 죽음의 선한 영향력이 각자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흘리는 바'에 해당하는 원어 '에크퀸노메논'(*)은 현재수동태 분사를 취한 단어로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확정적 사실이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흘려질(상징적임) 당신의 피흘림으로 인해 그 대속의 효력이 영속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의 이같은 선인은 구약의 출 24:8; 렘 31:31-34; 슥 9:11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특히 바울과 누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렘 31:31-34의 내용과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다(눅 22:19; 고 전 11:25).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 테스디아데케스)이란 말은 '둘'(*, 디아) 사이에 무엇을 '세우는 것'(*, 티데미), 곧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 언약(계약)은 피흘린 생명을 근거로 맺는 그야말로 전존재론적 약속을 의미한다(창 24:5-8; 히 8:6-13).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곧 십자가 회생을 담보로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계신 것이다. 즉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고(출 24:5-8; 히 8:6-13), 이제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온 인류와 교회 앞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여 이 예수의 흘린 피를 마시는 자는 개별적으로 내밀(內密)하게 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마26:29]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마시지 아니하리라 - 먼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란 유대인들이 기도 중 포도주를 가리키는 통상적 표현이다(M. Berakoth 6:1).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유월절 식사 중 마지막 네번째 잔을 마신 후(17절 참조)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이 최후의 만찬의 마지막 잔을 들이키심으로써 구약 술법에 의한 유월절 식사가 최종 마감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 자신의 관점에서는 이 지상에서 오직 '고난의 잔'만을 남겨놓고 계신 것이며,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이 마감되고 새언약에 따른 성찬 예식이 새롭게 제정된 것이다. 한편 유월절 식사 중 잔을 네 번 마시는 것은 출 6:6, 7의 네 가지 약속에 대응된다. 따라서 예수가 성례 제정에서 말씀한 세번째 축복의 잔은 구속과 관계되는데 비해(출 6:6), 네번째 잔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출 6:7)라는 약속에 대응되는 것이다(Lane, Dauble). 이제 예수께서는 이 네번째 잔을 드시며, 더 이상의 잔을 물리치심으로써 제자들의 관심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자로서의 시각에 의한 '아버지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기쁨의 잔치'에로 돌리게 하신다.

⭕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 예수께서는 유월절 예식을 마감하시는 자리에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한 예식 곧 '그 나라'에서의 잔치를 고대(苦待)하고 계신다. 이 종말론적 기대감 속에서 '하나님 나라'(막 14:25)를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진정 이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의 나라이기도 하다(16:28; 눅 22:16, 18). 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마실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완성의 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질 영속적이고도 친밀한 교제와 운명적 연대성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오늘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적용되고 약속되는 바이다. 한편 본문의 '새 것'(*, 카이노스)이란 옛 것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지 단지 시간적으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 네오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벧후 3:13). 이는 아버지의 나라 곧 새하늘과 새 땅은 현세의 기존 질서와 차원을 달리하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임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단지 작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것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야의 축제에 다같이 참여하리라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 즉 첫번째의 유월절이 애굽에서의 구원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정착할 것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 최후의 만찬도 앞으로 이루어질 나라에서의 구원과 삶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결코 실패나 영원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영광에의 진입로였다. 결국 그의 갈보리로의 행로(行路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3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저희가 찬미하고 - 이 찬미는 유월절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 노래하는 할렐(Hallel)의 후반부(시 114-118편 또는 115-118편)이다(17절 주석 참조). 이것은 보통 교송(交頌)으로 불려지는데, 이때 식사의 인도자이신 예수께서 찬송을 부르면 제자들이 '할렐루야'로 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찬미 직전에 요 14장 강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 예수께 있어서 감람산은 묵상과 기도의 처소인 동시에 시련과 고통의 장소였다(눅 21:37 ;22:39). 그러나 주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승직의 찬미를 부르면서 이 형극(形棘)의 장소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원 형태에 따르면(출 12:22) 유월절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침까지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나아가신 이유는 원 율법을 어기셨다기보다, 오히려 율법의 전수 과정에서 많은 변천을 통해 통상적으로 바깥 출입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어두운 밤길을 헤치고 나아가셨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6:3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찬 예식의 제정]

⭕ 때에 예수께서...이르시되 - 31-35절 부분은 평행 구절을 대비시켜 볼 때(막14:27-31; 눅 22:31-38; 요 13:36-38) 예수의 무리가 감람산으로 이동하시기 전(30절), '한'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 마태가 이 사건을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예수의 체포 장면이 다뤄져 있는 36-56절 앞에 수록한 것은 참으로 예수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또렷이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오늘밤에'라는 문구는 마태복음에 만 나오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특별히 '오늘밤'이라고 못박음으로써 임박한 운명의 시간을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의해 직역하면 '너희가 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걸려 넘어지다'는 뜻의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13:21; 24:10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말로서 여기서는 '실족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께 일어날 사건과 연관하여 그들이 함정에 빠져들 것이라는 의미이다(Lenski). 실로 그들 11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실족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가룟 유다의 적극적 배신 행위에 대비되는 11제자들의 소극적 배신 행위를 지적한 것이다(56절).

⭕ 기록된 바 -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 의한 슥 13:7의 자의적 해석구이다. 실제로 문자적 일치는 부족하지만 그 본래의 의도하는 내용은 그대로 담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배신 행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成就)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스가랴의 예언을 빌어온 것이다. 한편 9:36과 25:32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양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본문에서의 '양'은 제자들에게 한정된다.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철저하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됨으로해서, 곧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게 될지라도 그 근본에 있어서는 양자간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이 예수를 로마인들에게 넘겨주고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예시한 부분이다. 그러나 스가랴 본문에 의거하건대 여기서 예수를 죽이는 궁극적인 동인은 '내가', 곧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소망적인 사실은, 스가랴 13장의 전후 문맥을 보면 참 목자가 해를 받음으로 대부분의 양떼가 사라져 버리나(슥 13:8, 9) 양떼의 3분지 1은 남아서 연단을 받은 후에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희망찬 메세지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를 팔고(48절), 버리고(56절), 부인함으로써(69-75절)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연단을 통과한 후 분연히 일어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만방에 담대하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행 2:14-36 ;4:10; 18:5, 28)

성 경: [마26:3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 이 말씀은 수난에 들어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부활 예고이다. 실로 예수의 메시지의 근본 취지는 당신의 수난과 제자들의 배신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과정 이후에 있게 될 당신의 부활을 밝히는데 있었다. 진정 당신의 부활은 '흩어짐'을 '모음'으로, '배신'을 '회개와 충성'으로 바꿔 놓을 것이었다. 한편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은 '너희를 갈릴리로 인도하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리로다'(*, 프로앝소)는 말의 본래 뜻은 목자가 양을 '앞서서 인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프로앝소'라는 동사를 이처럼 적극적 행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전체 문맥상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이 동사를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이 좋다. 즉 목자가 공격당하여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제자들이 상심(喪心)하여 예수를 유대 지경의 무덤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갈릴리의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앝소'를 그들 실망한 제자들이 갈릴리에 닿기 전에 부할하신 예수께서 '그들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Stonehouse).

성 경: [마26:33]

주제1: [메시야의 최후의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다 주를 버릴지리도 나는 언제든지 - 여기서 '언제든지'(*, 우데포테)는 원래 '결코 아니', '절대로 아니'라는 강한 부정의 뜻을 담고 있는 부사로서 '너희가 다' '오늘밤'에 버릴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에 대해 그것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결의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다 넘어질지라도 나는 결코 넘어지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자신에 찬 선언은 직선적이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비록 당시의 그의 심정이 진정한 충성심에 불타고 있었고 그것을 순수하게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그 배후(背後)에는 지나친 교만이 숨어있다. 그는 은연중 다른 제자들을 가볍게 보면서 '다른 제자들은 주를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라고 소영웅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신앙적 절개는 인간의 의지력도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에 의하지 않고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어야 했다.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가장 강해지는 비결인 것이다. 여하튼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는 예수의 중요한 질문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본문의 이 자신 만만했던 결심을 회고(恢古)했을 것이다.

성 경: [마26:3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유월 의식에 젖어있는 베드로의 자만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권위에 찬 선언이다. 실로 베드로의 변절(變節)은 바로 눈앞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 닭 울기전에 - 마가복음에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막 14:30) 되어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닭은 밤 12시30분경, 1시30분경, 2시30분경에 각각 우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Hans Kosmala). 따라서 새벽 12시부터 3시까지를 '닭우는 시간'으로 부르기도 했다. 여하튼 본문의 '닭 울기 전'이란 적어도 새벽 동이 트기 이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부정한 짐승에 속하는 닭 기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닭 울기 전'이라는 말은 이른 아침을 나타내기 위한 속담적 표현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기르는 닭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기르는 닭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고 이른 아침에 로마 경비병들의 당번 교환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을 확실히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 한편 베드로의 선언이 강한 만큼 예수께서도 '진실로' 네게 이른다는 강조적 표현으로 베드 로의 배반을 다시금 예언하신다. 더구나 하늘의 숫자인 '세 번'을 사용하여 베드로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부인을 예시한다. 이 예언은 69-75절에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

성 경: [마26:3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성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예언]

⭕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 마가복음에서는 '힘 있게 말하되'라는 표현을 곁들여(14:31) 강한 결의를 거듭해서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문은 '결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중부정 구문(*, 우 메)이 첨가되어 반대 의사를 더욱 크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초두에 아주 드문 경우의 가정법(*, 데이)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베드로는 아직 예수의 죽음을 믿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자들도 동의한 바 베드로의 강력한 장담은 예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의중(意中)을 드러낸 것이었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화려하게 왕위에 등극(登極)하실 것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태의 진전에 대한 제자들의 완전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은 장래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고통이었고, 제자들은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였다.

성 경: [마26:3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겟세마네 - 기드론 골짜기 너머 감람나무가 우거진 감람산 기슭에 있으며 예루살렘의 동쯤 벽으로부터 약 1.1Km 정도 떨어져있다. 이 '겟세마네'라는 지명은 아랍어 명칭로서 '기름 짜는 틀'(olipress)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서 감람산의 감람 기름을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자주 들른 곳이었다(눅 22:39; 요 18:1, 2). 이처럼 감람기름을 짜는 곳에서 예수께서는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연유로해서 오늘날 그곳에는 '땀흘린 교회'(The Chple of the Sweat)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 내가...기도할 동안에...여기 앉아 있으리 - 이때 예수의 정확한 장소 지정에 따라 여덟 제자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게 되었고 세 제자는 예수와 더욱 가까이 있게 되었으며 그들과 조금 떨어져 예수가 위치하여 속깊은 마음을 제자들에게 꺼내보이지 않으시고 오직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호소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26:3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막 14:33)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로 이 세 제자들은 예수께 가장 신임받던 자들로서 변화산에서도 예수의 영광을 목격했었다(17:1).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곳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민과 슬픔'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영광의 증인이요, 고난의 증인으로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마지막 행적을 전해 주고 있다.

⭕ 고민하고 슬퍼하사 - 마가는 이 장면에 대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라는 말로 그 감정의 폭을 더욱 심도 깊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고민하고'(*, 아데모네인)란 극심한 불안과 근심을 뜻하는 말이며(빌 2:26), '슬퍼하사'(*, 뤼페이스다이)란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다. 바야흐로 예수의 수난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 있어서 죽음의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이 되는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는 것이었다(갈 3:13). 정녕 이 고통이야 말로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27:46)라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그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성 경: [마26:3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예수의 최후의 기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 70인역(LXX)에 의한 시 42:5을 인용한 문구이다. '마음'의 헬라어 '프쉬케'(*)는 '바람' 또는 인간의 '영혼'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특히 본문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의 인간적 고뇌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즉 인간으로 비하하신(빌 2:5-8) 예수의 심적 갈등이 이 단어 속에 침통히 새겨져 있다. 실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는 신적 노여움의 잔을 마셔야 하는 그의 인성의 고통을 철두철미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 죽게 되었으니 - 혹자는 본 구절을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구약중의 말투(사 38:1; 욘4:9)를 받아들여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Taylor, Hill).

⭕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나와 함께'라는 문구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인데 마태는 이를 '함께'라는 말과 더불어 부각시켜 스승과 제자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보여 준다.즉 예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연민(憐憫)과 격려로써 그 제자들이 자기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것이 주의 인간적인 고민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근심은 오직 혼자만 아는 근심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류 대속의 죽음의 그림자를 분명하게 보고 계셨다. 한편 예수께서 긴히 당부하신 바 '깨어있으라'(*, 그레고레이테)는 현재형 동사로서 계속적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으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말씀은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경계(警戒)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성 경: [마26:3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조금 나아가사 - 누가복음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거리는 30-50m 사이의 짧은 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시는(히 5:7) 예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 것이며 그 애타는 심정은 그들 제자들의 마음에 넉넉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 유대인의 기도 자세에는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도(막 11:25), 무릎 꿇어서 하는 기도(행 7:60; 엡 3:15)등이 있다. 실로 주께서 머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 겸손의 표시로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표현이다.

⭕ 내 아버지여(*, 파테르 무) - 마가는 아랍어적인 표현인 '아바(Abba) 아버지여'로 기술함으로써 그 호소의 뜨거운 호소의 뜨거운 정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진정 최후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예수가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대상은 당신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으며 또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게 하실 성부 하나님 밖에는 없었다.

⭕ 만일 할만하시거든 - 평행 구절인 막 14:36에는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지'를 나타낸 말로서 예수의 전적 순종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자신의 죽음 이외에 또다른 그 무엇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뤄 달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고 계신 것이다.

⭕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잔'은 구약 성경에서 축복이건(시 23:5) 저주이건(시 11:6; 75:8; 사 51:17, 22)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잔'은 분명 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는 잔을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요 10:17, 18; 18:11). 한편 예수께 있어서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야심에 찬 요청을 하려고 왔을 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20:22)이라고 하신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생물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영적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27:46). 이와 더불어 본문의 '지나가다'라는 동사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출 12:23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라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지나가다'는 말은 죽음의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소망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의 인성(人性)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갈등의 시간이 다하고 신성(神性)에 의한 전적인 순복(順服)이 이뤄낸 궁극적 결론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그잔을 마시기로 결연히 다짐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이 '잔'을 마실터인데 충분히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사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눅 22:43).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이 순결한 호소에 '부활'로 응답하신다(히 5:7, Homer A. Kent Jr.).

성 경: [마26:4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의 기도]

⭕ 제자들에게 오사...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 예수는 당신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당부하셨던(38절) 세 제자에게로 돌아왔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는 이 장면에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다는 말을 첨가함으로(눅 22:45) 그들의 수면을 좀더 동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은 비록 베드로에게 향했지만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들 세 제자 모두를 포함한다 하겠다(16:15, 16).

⭕ 너희가 나와 함께...깨어 있을수 없더냐 - 제자들은 얼마전 주와 함께 죽겠다고 단호한 어조로 맹세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와 함께 깨어 기도조차 하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녕 그들은 육체와 감정이 모두 인내의 도(道)를 넘어서고 있는 터에 영적 긴장마저 헤이해져 있었기 때문에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처럼 조그마한 당부마저 너희들이 감내할 수 없느냐는 투의 연민에 찬 질문을 그들에게 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홀로 외로이 서야 하며 홀로 결정해야 하셨다.

⭕ 한시 동안도 - 이는 문자적으로 정확히 한시간 동안을 뜻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 제자들이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적절한 시간동안으로 보는 것이 좋다. 정녕 '깨어 있음로써' 오는 시점을 직시할 수 있고 '기독함로써' 그 시점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깨어있으라'는 명령은 이미 24:42절과 25:13에서 강조된 바 있다. 특히 오늘밤에 제자들이 배신할 것이라는 조금 앞서의 예고(31절)는 그들이 기도해야 한다는 시급한 요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직 기도만이 다가오는 '시험'에서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늘 깨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대같이 약한 우리의 뜻은 쉽게 꺾이고 말 것이다.

성 경: [마26:4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 기도]

⭕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이는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 프뉴만)은 뒤이어 나오는 '육신'과 반대 개념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신의 형상, 곧 '영혼'과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사 31:3 롬 7:25). 진정 '육신'적 유혹과 충동은 이 '마음'의 선한 의지를 무참히 짓밟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유약성(柔弱性)이다. 여하튼 닥쳐올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어려움보다 훨씬 덜한 제자들의 어려움을 염려해 주셨던 것이다. 실로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당면한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육신의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하는'길 뿐 다른 대안은 없다.

성 경: [마26:4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 기도]

⭕ 아버지의 원대로 - 두번째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39절) 내용이 유사하지만 분명 새로이 아뢰어진 것이다. 특히 이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는 달리 고난의 잔은 당신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것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의 인성(人性)의 갈등은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즉, 철저한 자기 부정과 완전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는 주기도문(6:10)과 표현이 일치한다. 헬라어 원문에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 기도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의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낸 것이며(빌2:8), 예수 공동체의 모든 기도의 모범과 근거가 된다. 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자신이 가르친 순종의 교훈을 가장 잘 실천한 모범을 보이셨다. 처음으로 창조된 인간이 살던 동산에서 '당신의 뜻이 아닌 나의 주장함으로써 낙원이 광야로 변하였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겟세마네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함으로써 광야같은 세상을 천국(天國)으로 바꾸셨고, 그 결과 고통의 갯세마네 행로는 영광으로의 문이 된 것이다.

성 경: [마26:4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마지막 기도]

⭕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 죽음을 눈앞에 둔 채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졸음에 겨워 잠에 빠져 있었다. 여기서 '눈이 피곤함일러라'는 헬라어로 과거 완료 수동태로 그들의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내려 감겨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제자들의 영적 게으름을 반영하고 있는 문구이다. 한편 마가는 이때의 상황을 좀더 세밀하게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 14:40)를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잠에 취한 상태가 얼마나 깊었으며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해 있었던가를 넌지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성 경: [마26:4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마지막 기도]

⭕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후 - '동일한 말씀'은 두번째 기도의 반복이었을 것이다(42절). 이때 예수께서 기도하신 예수에 대해 복음서들 간에 조금씩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마태븍음에서는 예수께서 세번 기도하신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 세번의 기도는 (1) 예수의 기도의 간절성과 (2)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 상황의 긴박감 및 (3) 예수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절대성과 적극성등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 그 자체의 중요성이 은연중 강조되고 있다.

성 경: [마26:4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마지막 기도]

⭕ 이제는 자고 쉬라 - 본문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 이 문구는 직설법으로 또는 명령법으로 번역될 수 있어서 그 해석도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다. (1) 이 말씀을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여 주께서 체포당하시기 전까지 잠을 자둠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여 고단한 몸의 피로를 풀라는 권면으로 해석한다(A.L. William). 이례게 해석할 경우 다음 절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2) '나로서는 너희들이 이제는 무한정 자고 쉬어도 상관치 않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녀희들의 주의 깊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Bruce). (3) '기도하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구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cneil). (4) '이 후에 자고 쉬라', 즉 지금은 말고 나중에 다른 때에 쉬라는 것이다(Knox). 이중 어떠한 견해만을 취하기는 힘들지만 (2)의 견해가 가장 적절할 것 같다.즉 예수께서는 이 부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비꼬는 투의 풍자적(諷刺的)인 명령을 하고 계신 것이다. 즉 수난의 시간이 가까왔고 기도하거나 닥쳐올 시험에 대비하여 힘을 얻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이제는 잠을 자도 무방한 것이다.

⭕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 예수의 갑작스런 이 선언은 완료 시상으로서 바로 그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 원수의 손에 잡히어 최악의 순간을 맞을 그 수난의 때가 이미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등불을 들고 기드론 시내를 걸어 겟세마네로 통하는 길을 따라 당신을 잡으러 접근하는 무리들의 험악한 발자욱소리를 멀리서부터 듣고 계셨을 것이다.

⭕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 여기서 '죄인'은 배신과 고발의 첫 행위자인 가룟 유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 '죄인'은 산헤드린 공회원, 백성의 지도자, 일반 백성, 그리고 로마 행정 당국자들 모두를 내포한다. 더욱이 이 '죄인'은 미래적 관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형을 필요로 했던 거의 모든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다.

⭕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복의 한 단면이었다.

⭕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노니 - 6절에서는 '때가 가까왔다'고 말하셨었다. 여기서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 것이다.

성 경: [마26:4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최후 기도]

⭕ 일어나라 함께 가자 -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의연(毅然)하게 맞으시려 하셨다(요 18:4). 그리고 그들 세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의연함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담대한 태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복의 단 한면이었다.

⭕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 45절에서는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었다. 여기서도 완료시상이 사용되어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주께서는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번민 중에 기도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는 당신의 '때'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침착하게 일어나셔서 자신을 팔 자를 맞으러 나가신 것이다.

성 경: [마26:4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말씀하실 때에 - 예수의 체포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대화를 막 끝마치는 것과 더불어 체포자들이 예수의 무리 모인 곳으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 - 공관복음서 모두가 유다를 '열 둘 중에 하나'로 기술하고 있다(막 14:43; 눅 22:47). 아마 이것은 당시에 일반화된 유다의 별칭이거나 아니면 배신 행위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불충(不忠)한 것인지를 드러내보이기 위한 표현인듯하다. 실로 '열 둘'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명예로운 대명사였지만 그 중의 '하나'는 지극히 저주스러운 대명사가 되었다. 마태는 유다가 언제 제자들 사이에서 빠져 나가 예수를 잡으려하는 자들과 어울렸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요한은 유다가 마지막 만찬 때에 떡조각을 받은 후 제자들의 무리로부터 이탈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요 13:30). 아마 유다가 대가를 받고 알려 주기로 한 것은 민란을 일으키지 않고 어느 조용한 곳에서 예수를 체포할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주로 어떤 곳을 자주 찾으시는지를 익히 알고 있던 유다는 그분이 유월절 식사 후 감람산 겟세마네로 가실 것을 알고 나가서 무리를 끌고 그 곳으로 왔던 것이다.

⭕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 이때 유다를 따라온 '큰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 곧 산헤드린의 서기관들과 평의원들이었다(21:23). 이와 더불어 녹 22:52에는 '성전의 군관들'로, 요 18:3에는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로 되어 있다. 특히 요 18:3, 12에 사용된 군사용어로 미뤄볼 때 성전 경비대 및 기타 고용된 건달패 그리고 로마 군인들도 다수 있었던 것같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이때는 아직까지 로마군인들이 개입치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로마 병사들은 명절 기간의 치안 유지를 중요시하였다. 따라서 산헤드린으로부터의 병사 파견 요청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 음모의 내막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해줬다고 가정한다면 그 아내가 꾸었던 꿈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27:19). 한편 '검'은 로마 군인을, '몽치', 곧 곤봉은 유대인 성전 수비대의 사병들을 지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태는 '큰무리'라는 표현으로 예수를 잡으러온 사람들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때에 예수를 잡으러 파견된 자가 약 200명에 달했으며, 그 주위의 구경꾼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Lenski). 그리고 55, 56절에 비추어볼 때, 예수께서 스스로 기꺼이 고난의 잔을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그렇게 많은 무리는 사실 필요가 없었다.

성 경: [마26:4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예수를 파는 자가...군호를 짜 - 당시는 사진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거진 감람나무 사이의 어두운 밤이었므로 요주의(要注意) 인물을 찾아내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예수가 있는 곳에 도달하기 전에 무리들과 신호를 맞추어 손쉽게 체포하도록 했다.

⭕ 입맞추는 자 - 당시 유대인들에게 입맞춤이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인사법이었다(삼하 20:9). 정상적인 인사 형태인 입맞춤이 어둠 속에서 체포의 군호로 사용됨으로써 마침내 배신과 위선의 상징으로 굳혀지고 말았다. 아마 이곳에 몰려온 무리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그의 말을 들었던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 맞춤에 의한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49절에서 다시 반복해 사용된 '입맞추다(*, 카타필레오)는 동사는 본절에서 사용된 '입맞추다'라는 동사와 어근은 같으나 형태가 약간 다르다. 즉 본절의 입맡춤은 단순한 인사로서의 한 형식을, 49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의미는 '반복해서 거듭 입맞추다' 또는 '친밀하고도 뜨거운 포옹' 정도의 뜻이다. 여하튼 제자와 스승 사이에 있어서 제자가 먼저 스승에게 입맞추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한다. 제자가 스승에게 먼저 입맞출 수 없는 이유는 제자와 스승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와의 사제(師弟) 관계가 최종적으로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유다의 이 행동은 일종의 모욕적 행위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장면은 다읫시대 요압이 아마사에게 입맞추려는 체하면서 칼로 그를 찔러 죽인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삼하 20:9, 10). 바로 이러한 야누스(Janus)적인 성격이 사단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악인의 전형적 속성인데 그들은 겉으로는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파멸과 불의와 탐욕을 획책한다(고후 11:13-15).

성 경: [마26:4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 이는 통상적인 인사말이었는데, 여기서는 예수께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보다 따라온 무리들에게 확연히 들리도록 하는 또 하나의 신호였다. 한편 마태복음 전체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여', 즉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경우는 본절과 25절에 두 곳 뿐인데 두 경우 모두 예수를 팔아넘길 가룟 유다에 의해서 불리어진다(25절 참조). 보통 제자들이 예수를 부르는 호칭은 '주님이여'이다.

성 경: [마26:5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친구여 - '친구'의 헬라어 '헤타이로(*)는 동의어 '필로스'(*)가 개인적 친분을 뜻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직업적인 동료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따사서 그 말 속에는 적의나 반감이 없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애틋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유다를 '배신자' 또는 '악한 자'로 비난하지 않으시고 정중한 예의로 인내하신다.

⭕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 이 말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이고, 누가복음에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헬라어 표현인 '에프 호 파레이'(*)의 의미는 확실치가 않다. 새번역에는 '네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느냐 ? '라는 의문형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의문형보다는 오히려 생략적인 명령형으로 이해하고 있다(사실 원문에는 '행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어서 할 일이나 하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하고있다. 즉 '네가 온 목적을 행하라'는 뜻이다. 한편 요 13:27에서는 예수께서 '네가 할 일을 어서 하라'(새번역)고 말씀하시는데, 의미는 일맥 상통한다. 결국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의연히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즉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服從)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 저희가...손을 대어 잡는지라 - 이때 성전 수비 대장 또는 로마의 하위급 장교의 명령에 의해 예수께서 결박당하셨을 것이다(요 18:12). 그리고 예수는 그 어느 죄인보다 더 손쉽게 그들이 결박에 응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마26:5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 - 다른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도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다치게 한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장본인은 바로 베드로였다(요 18:10). 더불어 요한은 베드로에게 귀를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이 '말고'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혹자는(Robertson) 마태복음을 비롯하여 공관복음서가 베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A.D. 68년까지 생존했었던 베드로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베드로의 행동은 심리적으로 보아도 수긍이 간다. 예수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변절(變節)하리라는 경고를 들은 그로서는 자신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때가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폭력 행위를 말리고, 또 순순히 결박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충동적인 용기가 사그러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극히 감정적인 충성심의 표현은 사실상 주께서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베드로가 참다운 충성심을 보여 줄 수 있기 위해서는 하직은 더 많은 연단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한편 베드로가 체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즉시 상황을 진정시켰을 뿐 아니라 떨어진 귀를 원상 회복시켜 주었으므로 더이상의 문책(問責)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눅 22:51). 한편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 '검'을 휘둘렀던 점과 눅 22:49에서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라고 '우리'를 언급한 것을 근거로 제자들 모두가 '검'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열심당의 극좌파인 '시카리'파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10:34; 눅 12:49-51; 22:36).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해석인 듯하다. 오히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 예고가 있은 후부터 예수의 신변을 보존할 목적으로 단검을 준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성 경: [마26:5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 이 명령은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리라 - 52-54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평행구가 없다. 한편 계 13:10에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는 말이 나오며, 창 9:6에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하나의 격언구로 사용된 듯 하며 예수에 의해 영원한 진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와 흡사한 맥락에서 5:39 이하에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바 있다. 적어도 이 말씀 속에는 생명예 대한 존엄 사상이 들어있는 바,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신성하며 그것을 해하는 자에게 징벌이 주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意志)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단순한 평화주의에의 호소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한 것이지 내어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며 검의 사용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려 한다. 두 가지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나 본문의 직접적인 뜻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본문의 문맥상 검의 사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근거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무력 앞에서의 무기력한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몇 가지 저의는 (1) 칼을 사용함으로써 불의한 판결을 일삼는 사악한 집단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며(Luther), (2) 칼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에 반하는 세상 국가들의 힘의 통치력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칼의 사용을 금하신 것이다.(요 18:36). 이와 함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해하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올라온 무리와 그 무리의 배후 세력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신다. 즉 너희들이 '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고귀한 생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너희 자신들이 '검'앞에 거꾸러짐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성 경: [마26:5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 이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성부께 대한 성자의 귀속이나 의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성부와 하나된 자이신 성자께서 마치 동맹군의 원조를 호소하듯 성부께 청원하는 것을 의미한다(the Pulpit Commentary).

⭕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 - '열 둘'이라는 숫자는 제자들의 수와 일치하고 열 두 지파의 수와도 일치하는 매우 의미깊은 슷자로서 성경 문학적으로 '완전수'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은 로마 군대의 일개 군단(軍團)을 뜻하는데 예수 시대를 전후하여 팔레스틴에는 상당수의 로마군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이들은 주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당시의 일개 정규 군단은 보병 6100명, 말 726필 규모였다(Robertson). 따라서 ' 열 두 영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호출하기만 한다면 그 힘은 불과 몇백명에 불과한 체포자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께서 저들에게 잡히신 것은 자기 자신을 막아낼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에 열 두 영도 넘는 천사를 보내셔서 원수들을 쳐부술 것이었다. 이것은 왕하 6: 17처럼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도움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지식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불병거(왕하 6:17), 스랍(사 6:1-3), 그룹(창 3:22-24), 천천 만만의 천사(단 7:10)의 통치권자로서 광야 시험 후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으며(4:11),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천사의 도움을 받으셨다(눅 22:43). 다만 예수께서는 성경들에서 가리킨(54절) 바와 같이 아버지의 뜻 곧 인류 대속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혀 주신 것이다(히 1:14장 강해 '천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마26:5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만일 그렇게 하면 - 베드로가 휘두른 '검'으로나 하늘 천군 천사의 도움을 빌어 저들에게 잡히지 아니하면, 즉 순간적인 인간의 충동대로 행동하면이라는 뜻이다(Bruce).

⭕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철저한 마태의 신학, 즉 예수께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누가복음의 경우,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예는 드물다. 그리고 마가 역시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막 14:49)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마태의 거듭되는 강조적 표헌(표현)보다는 그 강도가 약하다. 여하튼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당하는 배반과 체포, 그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은 결코 단순히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경륜)에 당신의 전 관심과 의지를 집중시키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은 예수의 수난과 관계된 구약의 여러 예언들로서 가룟유다의 배신(시 41:9), 은 삼십에 팔림(슥 11:12), 죄인들과 함께 못박힘(사 53:12), 수족이 찔리심(슥 12:10)등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장면에 대한 예언으로서 사 53:7에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기록듸어 있다.

성 경: [마26:5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 강도를 잡는 것 같이 - '강도'(*, 레스테스)라는 말은 조직적이고 폭압적인 강탈자라는 뜻 외에 극단의 민족주의자들의 추앙을 받는 혁명가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Josephus). 사실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이 겨우 몇몇의 동지를 규합해서 로마나 유대 당국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은밀한 곳에서 모의를 하는 흉기를 든 '강도'와는 전혀 다른 분이셨다. 늘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며, 그 가르침의 내용도 '사랑과 평화'였다. 물론 그분은 악한 세력에 대해서는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원수들을 무서워하지 않으시고 성전을 정화(정화)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타락한 무법자요 강도의 행동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흉악한 두 강도 사이에 달리심으로((27:38) 로마와 유대 당국으로부터 끝까지 강도 취급을 당하고 마셨다.

⭕ 날마다 - 이 문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르치신 기간이 공관복음이 말해 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오랜기간이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공생에 기간을 길게 잡고 있는 요한복음은 이같은 사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성전에 앉아 -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고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다섯 설교가운데 세 설교가 예수께서 앉아서 하신 설교이다(5:1; 13:1, 2; 2:3). 실로 마태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를 그가 '앉아' 가르쳤음을 말함으로써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 랍비들이 교훈을 베풀 때 대개 앉아서 하기 때문이다.

⭕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문구이다(1:22, 23; 2:15-18; 2:23; 13:34, 35; 21:3-5 등). 마태가 여기서 '선지자'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 스가랴나(슥 13:7)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4절). 그러나 '선지자의 글'이란 율법서와 성문서를 완전히 배제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는 모세와 다윗도 '선지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예언들을 베푼 자가 왕이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주로 예언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이로써 31절에서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이 성취되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35절) 주님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가 버렸다. 특별히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벌거벗은 채 도망간 청년의 행적을 기록하여여(막 14:51, 52) 그때 제자들의 도피 행각이 얼마나 신속하고도 황급히 진행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하튼 이제 주님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침묵하시는 동행(同行)만을 기원하며 체포자들의 손에 끌려가게 되신 것이다(요 18:12, 13).

성 경: [마26:5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 13)을 생략하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 같다(Wycliffe). 여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 모임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오자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을 받으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 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음, (3) 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원절, 장막절 등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닌 가야바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의 직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5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으심]

⭕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 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 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23)을 생략하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 같다(Wycleffe). 여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테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 모임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오자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그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을 받으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음, (3)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월절, 장막절 등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님. 가야바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의 직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6:5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음]

⭕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 57-75절은 예수에 관한 장면과 베드로에 관한 장 면이 한번씩 번갈아 나오는 교체 편집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57절의 예수의 장면에 이어 베드로가 등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용기와(51절) 비겁(56,70절) 사이의 망설임 속에서, '멀찍이' 예수를 따랐다(Brngel). 한편 요 18:15, 16에는 베드로가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안뜰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여하튼 수제자로서 예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비록 처음은 도피했었지만,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려 예수의 신변을 돌아보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 그 결국을 보려고...하속들과...앉았더라 - 베드로는 마당에 피워놓은 숯불에 둘러선 '하속들', 곧 산헤드린의 관원들과 대제사장의 시중들 틈에끼어 들어 예수에게 되어지는 '결국', 곧 심문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려고 하였다. 아마 이때 요한은 예수의 심문 장소에 좀더 접근(接近)해 있었음이 분명하다(요 18:16). 바로 그 요한이후에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말씀을 남겠는데(요일 4:18), 이는 베드로의 안절부절한 행동에 대해 무언가를 지적해 주는 듯하다.

성 경: [마 26:5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음]

⭕ 온 공회 - 이 공회가 불법적 공회였다는 견해와 법적으로 공회가 밤에야 열릴 수가 없었으므로 이 모임이 밝은 다음에 모일 정식 공회를 위한 예비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자의 견해에서 산헤드린은 세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도급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전체 회원수는 72명이나 회의의 정족수는 23명이면 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온 공회'는 모든사람이다 참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헤드린이 어떤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정족 인원이 모였을 뿐 아니라 그 회의의 핵심적(核心的) 인물들과(대제사장 등)이 모여 그 심문에 있어서 하나의 주체로서 관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이와 함께 후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한밤중에, 그것도 유월절 밤에 온 산헤드린 공회가 다 모였을 가능성은 없다. 랍비들의 법에 의하면 범인을 심문하는 것은 낮에 해야 하며 낮 동안에 끝내야 한다. 밤에 모인 그 모임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정식으로 의회를 소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차하게도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모여 예비 심문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중 두번째 견해를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으나 첫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성 경: [마26:6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받으심]

⭕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 예수를 옭아매기 위하여 여러 거짓 증언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의 증언에는 일치된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마태는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막 14:56)는 마가의 평행구를 축소하는 대신 마가에는 없는 '두 사람'의 증인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하튼 이 두 증인들은 추측컨대 공회에 매수된 자였거나 아니면 윗 사람의 비유를 맞출 목적으로 증인의 자리에 선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마 26:6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수 있다 - 드디어 두 증인의 일치된 증거가 나왔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다. 분명히 이 언급은 예수의 생애의 사실들에 부합되게 보인다. 실로 예수께서는 성전을 실격시키고 삼 일 후에 자신의 부활할 것을 고지하신 바 있다(요 :19). 확실히 주님은 성전을 비난하고 그 건물의 무너짐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증인들은 성전을 정죄한 예수를 성전 파괴를 직접 감행할 범법자로 혼동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직접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가 이 성전을헐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일밖에는 없다(요 2:19-21). 더욱이 그 말씀의 참 뜻은 자신이 죽은 후 사흘만에 있을 그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지 옛 성전이 몰락한 후 사흘만에 성전을 짓겠다는 예언을 한 것은 정녕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인들의 말은 순전히 오해에 의한 증언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두사람의 증거는 서로 일치하지 못함으로써(막 14:59) 그 증언의 신빙성마저 결여되고 있었다. 한편 렘 26:1-19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성전 멸망을 예고(豫告)한 것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

성 경: [마26:6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대제장이 일어서서...아무 대답도 없느냐 - 예수께서는 법적으로 자기를 변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러한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어떻게든 예수를 해하려고 하는 교활한 가야바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예수의 진술에서 무언가 또 다른 걸림돌을 찾아내려는 조급한 상태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저들의 비겁한 공작 (工作)은 예수의 위엄있는 침묵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 한편 예수의 침묵하는 모습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 53:7)라는 구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진정 때로는 거짓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거짓을 이기는 방법일 수도 있다. 진리는 거짓 증거에 대하여 굳이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그 진실성을 밝힐 뿐이다.

성 경: [마26:6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받으심]

⭕ 잠잠하시거늘(*, 에시오파)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예수의 침묵이 순간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진정 침묵의 시간이 계속됨에 따라그 무겁게 내리깔린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악한 산헤드린 회원들의 가슴마다에 웅변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거짓된 증언을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되었을 것이다.

⭕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 이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또는 판단하시고 보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맹세 형식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태만의 독특한 것인데, 재판석에서 피고에게 서약시키는 형식이었다.

⭕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 이것은 예수께서 과연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어 왔었다(12:28-42; 16:1-4; 21:1-11, 14-16, 23). 그런데 이 질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죄책(罪責)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예수를 판 자는 가룟 유다였지만 율법의 교묘한 올가미와 교권주의자들의 사악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처형할 합법적 이유를 구체적으로 마련한 자는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이다. 실로 가야바는 이 적나라한 질문을 통해 율법적으로는 신성 모독의 범죄를 찾고자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반란 음모죄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여하튼 가야바가 던진 질문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은 네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신적 속성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물음은 네가 이 세상을 구원할 사역을 지니고 온 메시야이냐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구약 시대 이래로 메시야를 대망해 온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결국 그 질문으로써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64절).

성 경: [마26:6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네가 말하였느니라(*, 쉬 에이파스) - 예수의 이 대답은 마가복음 '에고 에이미'(*), 즉 '내가 그니라'는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약하다(14:62). 즉 '네가 말했다'는 예수의 말씀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긍정하는 말이다(25절 주석 참조). 한편 이러한 답변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5:33-37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 '맹세하지 말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실행하신 것이다.

⭕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것...너희가 보리라 - 이 말씀은 예수 자신에 관한 가장 은밀한 신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비록 지금은 죄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지만, 당신의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변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변화산상에서 그 전조(前兆)를 보이신 바 있다(17:2-13). 진정 그 당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 이후에 전개될 영광스런 장면들을 선취적(先取的)으로 보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영광스런 광휘(光輝)의 장면, 곧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같은 선취적인 고백은 대제사장을 깊이 당황케 했을 것이며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진정 '네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는 볼 것이다'는 예수의 권위에 찬 응답은 그의 현재의 권위를 확인하고 장차 있을 그의 영원한 왕권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이란 표현은 시 110:1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행위와 통치권을 전해받으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의 동격을 이루실 예수의 신적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단 7;13, 14)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위엄과 영광으로 임하실 예수의 최고의 자기 계시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사실상동일시하신 이 말씀은 자신이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이전의 주장 만큼이나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들에게 확실한 고소거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26:6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문 받으심]

⭕ 옷을 찢으며 -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로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한편 본문의 '옷'(*, 히마티아)은 겉옷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예복을 가리킬 것이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에는 속옷올 가리키는 '키토나스'(*)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이때 가야바는 속옷과 겉옷을 동시에 잡고 자기 목 부위에서 가슴이 노출될 만큼 찢어 내렸던 것 같다. 여하튼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에 직면했거나 의로운 분노의 한 표현으로 행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동이었다(왕하 1:37; 1 Macc 11:71). 특히 랍비들이 규정한 바에 의하면 율법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했을 때 법관은 일어나 옷을 찢도록 했다. 그리고 그 찢는 부분이나 길이 등의 세밀한 면까지 제시하고 있다.

⭕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에블라스페메센) -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께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가 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이제 신성 모독의 가장 중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레 24:16).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의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중한 범죄로 인정되었지만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성 경: [마26:66]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생각이 어떠하뇨 - 대제사장 가야바는 귀중한 한 생명의 생사가 달린 시점에 정식 재판 과정을 거치는 신중함을 보이지 않고 마치 군중을 선동하듯이 분위기를 이끌므로써 거의 환호에 가까운 사형 판결을 이끌어 냈다. 아마 이때 산헤드린을 위시한 군중들은 만장 일치로 예수의 사형을 연호(연호)하였을 것이다(막 14:64).

⭕ 사형에 해당하니라 - 오직 마태복음만이 사형 판결을 직접 화법으로 보도함으로써 그 당시 고조된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소개한다. 그 대신에 마태복음에는 '모든 사람'이 거기에 찬성하였다는 부분이 없다(막14:64). 한편 공의회의 사형 판결은 아마 신성 모독의 법조문에 해당하는 레 24:16을 근거로 한 것 같은데, 이 판결은 여러가지로 불법이었다. 사실 탈무드에 가르치기를 '산헤드린은 생명을 구할 것이지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밖에도, 궐석(闕席) 판결을 하지 말 것, 다수의 동의가 아니면 판결을 내리지 말 것, 사형 선고 받은 자는 판결 당일에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 원칙이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법규는 죄인에게 가급적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것인데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그 선한 정신이 전혀 준수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산헤드린 법 4:1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1) 범죄인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 또 해지기 전에 끝마칠 것, (2) 만일 선고가 무죄일 때는 심문의 날에 선고할 것이나, 유죄일 때는 다음날에 선고할 것이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이와 같은 법규를 어기고 예수의 심문을 유월절 절기와 안식일의 임박으로 인해 조급하게 행했다. 즉 그들은 예수를 심문한 당일에 선고를 내리고 당일에 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아니다. 악한 통치자와 타락한 종교와 의식이 없는 백성들이 만날 때는 항상 이렇게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

성 경: [마 26:67]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사 50:6의 예언, 곧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메시지가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불법 판결이 끝나자 주위에 기다리고 있던 하속들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와 학대와 조롱을 일삼은 것이다(막 14:65). 정녕 그들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최악의 수치를 예수께 안겨준 것이다. 여기서 남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더할 수 없는 모욕이다(민 12:14; 욥 30:10).

⭕ 주먹으로 치고...손바닥으로 때리며 - 도무지 반격할 수 없는 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은 더더욱 야만적이다. 한편 누가는 이때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구타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웠다고 증언하고 있다(눅 22:64). 이와 함께 본문의 '손바닥으로 때리며'(*, 에르라피산)는 '몽둥이로 때리다' 뜻하는 '라피스 마'(*)에서 유래한 단어로 그 당시 하속들은 손바닥 뿐 아니라 몽둥이로도 예수를 심하게 구타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신성 모독자를 구타한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범죄를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적 무지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성 경: [마 26:68]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공회에서 심판 받으심]

⭕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 여기서 마태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은 상호보충적이다. 즉 각 기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포함하고있다. 그중 마가와 누가는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의 눈을 가리고 나서 그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도륵 강요하며 조롱했다고 한다(막 14:65 ; 눅 22:64). 한편 마태는 눈을 가리웠다는 말을 생략하는 대신 그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야'라고 불렀으며, 눈을 가리운 채 구타한 후 '너를 친 자가 누구냐'는 조롱조의 질문을 함으로써 메시야의 신적 통찰력과 능력을 보이라고 빈정거렸다고 한다. 사실 유대인의 그리스도(메시야)관은 불의를 정복하고 각종 능력을 행사하며 민중을 압도하는 어떤 탁월함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보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침묵(침묵)으로 일관하는 자가 그리스도 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여기서 '선지자 노릇 하라'는 말은 장래의 일을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지식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즉 메시야라고 하면 비록 눈이 가리워져 있어도 자기를 친 자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이다.

성 경: [마 26:69]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번 부인]

⭕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 이 구절은 본래 58절의 연속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게 연결해보면 자연스럽다. 다시 장면은 베드로의 부인(否認) 이야기로 돌아가고 있다. 베드로는 요한의 도움으로 가야바의 궁 내로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전 수비대의 경비에 의해 예수가 심문받고 계신 궁전의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궁궐이 둘러싸여 하늘을 볼 수 있는 궁전 안 마당에 앉아 산헤드린의 판결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 한 비자가...가로되 -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한 비자'(a servant girl, NIV)는 베드로를 궁내로 들어가게 한 여자 문지기임을 알 수 있다(요 18:16, 17). 그 여자 문지기는 아마 베드로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막 14:67)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추궁한다. 결국 이 두 표현(나사렛, 갈릴리)은 지리적 문화적 우월감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심히 멸시적인 용어이다(요 :46). 여하튼 그 '비자'는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이 불빛에 노출되자 그가 심히 당황하고 초조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자기와 안면이 있는 요한과 그가 함께 궁내로 들어왔음을 보아 적어도 그가 예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라는 추론을 하게 된 듯하다.

성 경: [마 26:70]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라는 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수의 말씀 곧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는 말씀과 연관지어 이 장면을 기록했을 것이다. 진정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장면에 직면한 베드로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공개적으로, 크고 단호한 음성으로 예수와 자신의 관계성을 부인했다. 이 베드로의 부인은 마치 공식적인 법정에서의 선서와 유사한 형태이다(M.Scebuoth 8:3).

⭕ 네 말하는 것이 무엇언지 알지 못하겠노라 - 결정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베드로는 자기와 예수와의 관계를 부인한다. 이처럼 자기 안전을 도모하려고 거짓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한 제자이자 기독교 교회의 반석이라고 할 만한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실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될 장면인 것이다. 한편 이 베드로의 치욕스러운 자기 부정적 패배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연단의 기회였을 수 있다. 베드로는 매사에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신의 유약함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을 간구할 수 있다.

성 경: [마26:71]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앞문까지 나아가니 - 여기서 '앞문'은 가야바 궁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불빛이 그곳까지 잘 미치지 못하는 출구였을 것이다. 이때 베드로는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아마 피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른 비자가...말하되 - 두번째 부인(否認)은 '다른 여종' 앞에서였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첫번째 부인과 두번째 부인이 같은 '여종' 앞에서 진행된 듯한 암시를 준다(막 14:69). 요한복음에는 '여종' 앞에서 부인한 적이 없으며, 누가복음에서는 세 번 부인한 것 가운데 맨 처음만 '여종' 앞에서 했을 뿐 나머지 두번은 다른 사람(남자) 앞에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이 여러 사람에 의해 집중적으로 추궁되어진 뒤에 되어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여하튼 베드로는 불가의 밝은 곳을 피하여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도 괴로운 질문을 피하기에는 안전한 곳이 못되었다. 한편 마가는 이러한 와중에 자정이 지났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울렸다고 전하고 있다(막 14:30).

성 경: [마26:72]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 여기서 '맹세'(oath)는 어떤 자기 진실을 고백하기 전에 먼저 선언하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습관으로서(Robertson), 이는 베드로 자신이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주(詛呪)내리시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어떤 거룩한 것에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5:33, 34; 23:16-22). 어쨌든 베드로는 첫번째 부인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다.

⭕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스승을 '그 사람'이라는 경멸적 표현으로 부인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성 경: [마26:73]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조금 후에 - 누가복음에는 '한 시쯤 있다가'라고 기록하고 있다(눅 22:59). 이 시간동안 예수는 공회에서 사형 언도와 하속들에게서 수치를 당하고 나신 후 안 뜰을 바라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이송된 듯하며, 어쨌든 거듭되는 위험의 증대와 부인 가운데서도 아직 예수의 신상이 염려되어 떠나지 못하는 베드로의 인간미가 엿보인다.

⭕ 곁에 섰던 사람들 -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이 무리 중 감람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졌었던 말고의 친척이 있었다고 전한다(요 18:26). 아마 그 친척은 불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대며 예수와 한 통속인자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말고의 일로 조금은 흥분된 감정으로 베드로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 진실로 그 당이라 - 헬라어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가 된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단순한 추측에서 확신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더욱이그의 말투는 그가 갈릴리 사람임을 감출 수 없게 한다.

⭕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 북부 갈릴리지방의 말과 발음은 잘 다듬어진 남쪽 유대지방의 말과 현저하게 달라서 금방 구별될 수 있었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갈릴리 사람들은 히브리 알파벳 중 '알렵'(*), '헤트'(*), '아인'(*)같은 후두 문자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으며 '쉰'(*)을 '타우'(*)로, '베트'(*)를 '페'(*)로 발음했다고 한다(the Pulpit Commenatary). 베드로는 '내가 그 사람을' 할때 '사람'의 '이쉬'(*) 발음을 '아투'(*)로 발음하였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사 시대 때 있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발음하여 자기의 출신지를 나타냄으로써 죽임을 당했던 예가 있다(삿 12:6).

성 경: [마26:74]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저주하며 맹세하여 - 처음에는 부인, 다음에는 맹세로 부인, 그 다음에는 저주로 부인한다. 이는 죄악과 위선의 가속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베드로의 반(反) 고백들은 예수의 결정적인 고백에 맞서 있다. 즉 예수의 진실한 고백은 사형을 초래했으나, 반면에 베드로의 세 차례 거짓 고백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다. 정녕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키 위한 신성 모독의 중한 죄악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다(16:25).

⭕ 닭이 곧 울더라 -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과 더불어 닭 울음 소리가 베드로의 귓전을 때린다. 새벽이 되기 전 그 밤동안 닭은 두번 울어댔다(막 14:72). 한편 이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의 혼란스럽고 완악해진 마음을 돌이켜 참회의 눈물로 변화시킨 일종의 신선한 경종이었다.

성 경: [마 26:75]

주제1: [메시야의 최후 만찬]

주제2: [베드로의 세 번 부인]

⭕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생각나서 - 34절에 나온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실로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의 경고를 개의치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2:61)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그의 스승 예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한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도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 주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35절)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의 예언은(34절) 완전히 성취되었다.

⭕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베드로는 더이상 자신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닫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에로 무겁고도 어렵게 내리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회개로 인해 그는 서서히 참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즉 그는 유다와 같이 약하여 주를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몇날 후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막 16:7), 오순절 때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설 수 있었다(행 :2:14). 한편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사실 이같은 전설을 빌지 않더라도 베드로의 비통(悲痛)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27: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에게로 이송]

⭕ 새벽에 - 본장 초두에 제시된 '새벽에'의 원문 '프로이아스 데'(*)를 직역하면 '그리고 (이른) 아침에' 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산헤드린 공의회가 해가 떠오른 후에야 비로소 공식 회의를 열 수 있다는 관례에 따라 이미 지난 밤사이에 비공식적으로 예수의 사형을 결의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해가 떠오른 때'를 기다려 그 결의안올 정식 회의에 상정한 것을 묘사한 문구이다(눅 22 : 66). 실로 이것은 자신들의 불법을 위장하기 위한 합법적인 노력이었다.

⭕ 예수를 죽이려고 -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는 없는 문구로서 마태는 26:59, 즉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마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에 관한 소송을 어떻게 제출할 것인가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심중에 있는 주된 소송 이유는 예수로 인해 자기를의 종교, 사회적인 각종 기득권을 잃게될 위험성 때문이었지만 저들이 내세우는 형식상의 이유는 예수께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었다(26:65,66). 그러나 신성 모독은 단순한 종교적 문제로서 그 당시 각 피지배 지역 주민들의 종교, 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로마의 한 행정관인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들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결정적인 사형죄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메시야의 왕권을 공소(公訴)의 주제로 삼아 예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사형 판결을 내리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행 17 : 5-4).

⭕ 함께 의논하고(*, 쉼불리온 에라본). - 이 말은 함께 숙의적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기 보다 어떤 '결의안을 통과시키다'라는 라틴어법적 표현과 유사하다(Consillium Ca-pere). 결국 재차 산헤드린 공의회로 모인 그들이이미 제 1차 야간 회의에서 결안된 예수의 사형 선고를 합법적 절차에 따라 새롭게 인준해 준 것이었다.

성 경: [마27: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리도에게로 이송]

⭕ 결박하여 끌고 가서 - '결박'은 두손을 뒤로 모으고 포승으로 묶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인도받은 자들을 언도할 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부터 결박당하셨던 것 같으며(26 : 57) 재판과정 동안 풀렸다가 재차 포박당하신 듯하다.

⭕ 총독 빌라도 - '총독'으로 번역된 '헤게모니'(*)는 지도자, 총독권자, 또는 통치권자를 뜻하는 일반적인 칭호이다(10 : 18). 이 직분의 더 특별한 명칭은 '총독', '행정 장관'이란 뜻의 '에피트로포스'(*)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전자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한편 그들은 가이사에게 직접고소하지 않고도 식민지인의 생사 여탈권(生死 與奪勸)을 가질만큼 권한이 컸다. 여하튼 사태는 '빌라도'라는 이름 앞에 '총독'이라 명칭을 덧붙여서 빌라도가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행정 책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빌라도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를 관할한 여섯번째 총독으로서 디베리오(Tiberius) 황제로부터 A.D. 26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하고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신의 수하에 있는 유대인 관리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매우 외골수적인 지배자였던 것 같다 (Jos.Antiq.XVIII,35,55-62;Wars II,169-177). 또한 그는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고르반) 돈을 훔쳐 수도가 설비로 유용(流用)했으뗘, 이에 에루살렘 주민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군대를 파견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더럽힌 적도 있었다(눅 13 : 1). 그런데 복음서에 제시된 그의 인물됨이 위와는 크게 대조되는, 그야말로 심약하고 기회적 주의적인 성경으로 묘사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점을 제시하곤 한다. 이에 대해 '훼넌'(Hoehner, Ch-ronological, Aspects , pp. 104-105)는 빌라도가 그 당시 곧. A.D. 33년에 예수를 처형할 시점에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에게 신임을 잃고 있었으며, 자신의 구원자이며 반유대주의자인 세아누수(Sejanus, A.D. 31.10. 19 사망)가 죽음으로써 그가 상당히 위추된 상태였으므로,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그가 이 예수 처형건에 대해 연약한 모습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견해는 연대기적 차원에서 성경 기록과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으므로 전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심리적, 정치적 측면에서 빌라도의 고도의 정치술에 의한 후기 생존의 한 방법으로 이렇게 유익한 모습을 보였였다 보는 학자도 있다. 여하튼 A.D. 33년까지의 빌라도의 행정은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며, A.D. 36년에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프랑스 지방에서 귀향살이를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한다. 어쨌든 예수 처형당시 빌라도는 가이사랴에 자기 관저가 있었으나 유월절 등과 같은 큰 명절 때는 예루살렘에 입경하여 그곳 치안을 관할하곤 했다. 아마 그당시 빌라도는 자기 아내와 함께 안토니아 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때 산헤드린의 공식 회의에서 예수를 사형 선고한 후에 곧장 이곳 빌라도의 처소로 끌고 온 것은 비록 그들이 자의적으로 사행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사형 집행권은 오직 총독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법에 따르면(1:1;7:2) 예루살렘 멸망(A.D.70)약 400여년 전에 집행권 유대의 자치적 권한에서부터 로마 정부 당국으로 이양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선 때는 금요일 아침, 곧 유대력 니산월 14일 아침이다.

성 경: [마27: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다의 자살]

⭕ 때에(*, 토테) -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그 때에', '그다음에', '그리고나서' 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문맥상 예수가 산헤드린의 고소로 빌라도에게 제소(提訴)된 직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의 정죄됨을 보고 - 여기서 '보고'(*, 이돈)란 '쳐다보다', '조심하다', '주목하다'는 뜻의 원어 '오라오'(*)의 제 2과거행 분사이다. 이는 결국 유다가 예수의 재판 사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문구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로 번역된 공동번역과 새번역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유다는 아마 예수께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기까지 전 과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 보인다.

⭕ 스스로 뉘우쳐 - 헬라어 '메타멜레데이스'(*)는 마음과 삶의 전적인 번화(*, 메타노이아)를 뜻하는 '메타노에인'(*)보다는 상당히 약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고 단순히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앞에서의 죄 청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단지 인간적 후회의 차원에서만 바꾸는 것이다. 여하튼 '뉘우치기'까지 하는 유다의 마음의 상태를 보건대 그는 예수께서 설마 사형에 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은 듯하다. 이렇게본다면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긴 것은 돈을 탐하였다기 보다는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수를 배반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악한 일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볼 때 순간적인 양심의 가책을 받을수도 있다는 점에서 꼭 전자의 입장이 옳다고만 볼 수도 없다. 유다의 배반 의도가 무엇이었든간에 예수의 죽음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임은 분명한 것이다.

⭕ 은 삼십을...도로 갖다 주며 - 26:1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유다는 악한 자기 행위의 결과요 침묵하고 있는 증인이라 볼 수 있는 은 삼십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되돌려 주어 양심의 가책을 가볍게 하고자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의 무죄함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환불(還拂)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그 행위의 결과만을 씻어버림으로써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그들이 한 부류, 곧 산헤드린의 회원들임을 암시하기 위해 두 단어를 묶은 하나의 관사(*, 토이스)만을 사용하였다(21:23)

성 경: [마27: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다의 자살]

⭕ 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 문맥과 잘 조화를 이룬다. 즉 19절절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께 사용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죄한 피'와는 동일한 맥락을 이룬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람의 전존재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이다.

⭕ 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백하나, 하나님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으로 매정한 결별 선언이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언인 것이다.

⭕ 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번 나온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어 '와세이'(*)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 번역에서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성 경: [마27: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다의 자살]

⭕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 여기서 '성소'(*, 나오스)가 성전 구내 전체를 뜻하는지, 이방인의 뜰과 막연히 구별된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소(sanctuary)를 뜻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구구하나 대체적으로 후자를 택하고 있다. 적어도 그렇다면 이때 유다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양으로 율법의 규례를 무시한 채 성소 뜰로 뛰어들어 열린 성전문으로 은 삼십이 든 주머니를 던져 넣었을 것이다.

⭕ 물러가서 - 마치 단말마(斷末魔)의 그것처럼 필사적으로 자기 절망감을 극복하려 했던 유다는 성소에서 뛰쳐나와 곧장 힌놈 골짜기의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The Pulipit Commentary).

⭕ 스스로 목매어 죽을지라 - 그러나 본문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18). 이는 양 기사간의 모순을 드러내기 보다 조화로운 장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가룟 유다는 자살 장소로 가파른 바위 언덕 위로 올라가 그곳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는데, 후에 그 무게를 이기지못해 그 가지가 부러짐으로 해서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어 갔을 것이다(행 1:18,19 주석 참조). 한편 '목 매어 죽은' 사건은 이곳 외에 70인역(LXX)의 삼하 17-23에서 나온다. 이를 근거로 하여 어떤 학자들은(B,F, Meyer, McNeile) 다윗을 배신한 친구인 아히도벨과 다욋의 자손을 배신한 가룟유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기 위해 마태가 의도적으로 본 장면을 첨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가 이같은 비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두 배신자를 비교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Moo, Use of O.T. pp.189-91). 결국 유다는 끌내 멸망에 이르는 자기 길로 가고 말았다(행 1:25).

성 경: [마27: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이것은 피 값이라 -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인 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갈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인한 것이다.

⭕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런 피값으로 얻은 돈은 창기나 개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신 이런 류의 돈들은 자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자에게 되돌려준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 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성전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르바나스'(*)는 거룩한 물건과 고르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서(15:5;Jos. Wars II,IX.4), 이곳의 재물들은 주로 각종 제사와 성전 관리를 해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전에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은 삼십은 이곳에서 지출된 것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에도 의식상으로는 깨끗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12:9-14;15:1-9;23:23).

성 경: [마27: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의논한 후 - 구체적인 토론을 한 것이기 보다 신속하게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을 암시한다(1절). 그들의 믿음은 악을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가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행1:18). 분명 그 제사장이 밭을 샀다고 하여도 그 돈의 원(原) 주인은 유다이었으므로, 사실상 슈다가 산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Roberton). 한편 이밭의 소재지는 점토지대인 예루살렘 남쪽, 곧 힌놈 골짜기 맞은편에 있다고 전해지며, '악한 회의의 언덕'( the Hill of Evil Counsel) 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더이상 토기 굽는 장소로서 효율 가치가 없어진 불모지(不毛地)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매우 싼 가격으로 쉽게 이곳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결정을 신속히 하게 된것은 아마도 벌써부터 '나그네의 묘지'에 대한 필요성올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일로 인해 즉 11:12, 13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나그네의 묘지 - 여기서 '나그네'란 이방인들이 아니라 타 지방에 사는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따라서 '나그네의 묘지'란 그들이 명절 등의 일로 예루살렘에 입경했다가 죽는 경우 묻어 주는 묘지를 말한다. 한편 이곳은 한편 이곳은 현재에도 가난한 예루살렘 주민이나 치욕스런 자들의 뼈무덤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성 경: [마27:8]

주제1: [매시아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오늘날까지 - 이 한정적 표현은 본서가 기록된 그 시점에 이르기 까지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 말은 본서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화되어 버린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이미 기록되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자살 사건과 본서 기록 시점과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 피밭 - 마태복음에 의하면 '피밭'이라는 이름은 피값을 주고 그 땅을 산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유다의 피가 거기에 흘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진다고 한다(행 1:18, 19). 그래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땅을 '아겔다마', 곧 '피의 땅'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차이의 극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즉 만약 유다가 제사장들이 산 밭에서 죽었다고 가정(假定)한다면 마태복음과 사도행진의 이야기는 일치되는 것이다. 아마 제사장들은 반드시 바로 그 날은 아니었지만 지체하지 않고(아마 예수의 부활이 있을 일요일로 여겨짐<Carson>) 밭을 샀을 것이다. 그리고 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또 극심한 후회로 절망에 잠겨 있던 유다가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라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삼은 그 밭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유다가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 나가서 즉시 자살했다면 그 시기는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사기 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다의 시체를 그곳에 옮겨 묻었다면 앞의 이야기는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27:9,1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피밭이 된 토기장이의 밭]

⭕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맡씀이 이루었나니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마태의 문구이다.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리는 이 문구는 예레미야에서 온 것처럼 되어 있는 본문과는 달리 사실은 스가랴의 예언으로 보아도 좋을만큼 대부분이 슥 11:12, 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렘 18:3에서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렘 32:6ff. 에서는 밭을 산 것에 대해 하고 있어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여하튼 '예레미야'란 이름을 후기 편집자들이 첨가했다거나, 순전히 렘32:8-14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차이를 해명하는 학설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선지자의 이름이 '예레미야'로 제시된 이유로는, 스가랴서를 위시한 모든 예언서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 foot;Talmud, Baba Bathra 14b). 그러나 예레미야 대신에 '이사야'가 예언서의 대표격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즉 마태가 렘 18:2;19:1,2;32:8-15의 내용을 종합하고, 즉 11:13과 결합시켜 하나의 문장을 만든 후 그 구절을 대표적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인용하였다는 학설이다(Bruce, Meyer, Gundry). 이러한 예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2:23;막 1:2, 3). 실로 마태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예수께서 사형(死刑)에 이르는 이모든 과정(은 30에 팔리우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이 사들여진 일 등)이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즉 스가랴서에 기술된 예언이 목적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목자되신 여호와께 삯은 삼십 은을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것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같이 예언이 예수의 팔리우는 사건으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27:1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며 - 이 문구는 2절에 연결하여 있으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마태가 자기만의 독특한 기사인 유다의 사망 이야기를 2절과 11절 사이에 삽입시킴으로써 이같은 시간적 중단이 생겼다. 본문 이하부터 계속해서 '빌라도'라는 이름대신 '총독'이라는 직책명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15. 19, 21절)예수의 사형이 정치적 문제에 따라 이방인의 손에 의해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때 빌라도의 심문은 총독 관저(praetorium)에서 진행되었다.

⭕ 유대인의 왕 - 당시 로마의 재판 과정은 먼저 집행관이 원고측의 고소 이유를 듣고 피고에게 몇 마디 질문을 한 뒤 피고의 자기 변론을 듣는 과정을 필요에 따라 몇번 거듭하다가 배심원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판결을 내렸으며, 그렇게 확정된 판결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집행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고발 내용(아마 세금 문제에 관해 언급하신 것을 예수에게 불리하게 적용시키는 것과 함께 그가 열심당(theZealot)과 같이 반역을 꾀하여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는 죄목이었을 것이다. 눅 23:2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께 본문의 내용으로 질문하였던 것이다. 사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서 점령군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법과 질서의 문제에 민감했다. 만일 빌라도가 예수의 범죄의 정치적 성격을 확신할 수 있다면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여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의 관심은 '예수가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가했는가' 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묻는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한편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은 일찍이 2:2에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께 사용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역사적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십자가의 명예에도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곧 유대인의 왕이라는 확신 아래 세워진 기독교 신앙의 서장(序章)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시라는 문제는 이미 본서 초두에서부터 부각되어 왔던 주제이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메시야가 곧 유익하고 정당한 우리의 주이신 것이다(N.A. Dahl, The CrucifiedMessiah, pp. 10-36)

⭕ 네 말이 옳도다(*, 쉬 레게이스). - 직역하면 '네가 말했다'로서 굳이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긍정적 답변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위의 질문에 대해 26:25, 64 등에서 이미 긍정하신바 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세상의 구세주로서의 메시야 됨을 긍정한 것이지, 정치적 의미에서의 왕됨을 긍정한 것은 아니다. 물른 이때 빌라도는 과연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셨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예수께서 지니신 왕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8:34-37에 자세히 정의되어 있다.

성 경: [마27:1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고소를 당하되 - 마가복음에는 고소하는 이들이 대제사장들로만 국한되는더 반해 마태는 '장로들'을 첨가하고 있다. 이처럼 마태가 '장로들'을 첨가한 것은 백성의 대표들이 예수를 고소한 일에 분명히 관여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26:65,66 에서는 산헤드린이 사형 판결을 내린 이유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유대법에 의해서는 성립되지만 로마법에 의해서는 유죄 판결의 이유가 안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저들이 예수를 고소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을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고소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눅 23:2 에 의하면 고소 내용이 예상했던 대로 정치적인 죄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절 참조).

⭕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 이 시야가 예언한 바 있는 '고난받는 종'(사 53:7)의 침묵을 연상시켜 준다. 예수께서는 앞서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서도 침묵을 지키셨다(26:62, 63). 그리고 이후 요19:9에서도 마지막(세번째) 침묵을 지키셨다. 사실 저들의 고소 내용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신 진실 말고는 모두 거짓 고소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침묵으로써 저들의 허위에 찬 거짓 고소를 부정하실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마27:1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저희가 너를 쳐서...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 한 두마디의 거짓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고소 앞에서도 예수는 흔들리지 않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가 분명 무죄(無罪)함을 직감했고 사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반감을 사지 않은 상태로 예수를 풀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께 자기 변호의 기회를 준 것이다.

성 경: [마27:1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혤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단 한마디의 고소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않으셨다'가 된다. 실로 예수의 침묵은 무언(無言) 중에 자신의 무죄성욜 강조하신 동시에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20:28) 기꺼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 심히 기이히 여기더니 - 이 말은 가끔 초자연적인 사실 앞에서 경이감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9:33)실로 죽음 앞에서 조금도 혼들림 없이 자신을 구재(救災)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한 마디' 대답 없이 침묵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다변(多辯)의 수사학으로 길들여진 빌라도가 그런 일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겠는가 ? 그는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이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 예수께 있어서는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성 경: [마27:1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명절을 당하면...죄수 하나를 - 명절에 죄수를 풀어 주는 전례가 역사적으로 언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이 관습이 유대인을 무마하기 위한로마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졌다고 한다(Gro-tius) (2) 로마와 헬라에서는황제의 생일이나 명절에 죄수들을 석방했던 관습이 있었는데, 공적 축일(祝日)에 로마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석방한 것은 빌라도 이전 시대부터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Braune). (3) 유대인의 풍속에 관한 고대 문서(M, Pesahim)에는 '그들은 그들이 감옥에서 석방해 주고자 하는 자를 대신하여 유월절 앙을 죽일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어 유대 지방에서 매년 유월절에 대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4) 앞의설명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복음서 연구가의 브랜스콤(B.H. Breanscomb)은 그 전례에 대해 '여기 설명된 것과 같은 그런 전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유월절 절기에 로마의 총독들이 정규적으로 죄수 한명을 석방했으며, 또 그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무리들이 개인을 지명했다는 관례는 전혀 아무런 확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틴을 다스리던 로마 통치의 정신과 방법에 전혀 모순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로마 제국의 행정관은 아직 정죄되지 않은 죄인을 사면해 주거나 이미 정죄된 죄인을 용서해 줄 권리가 있었다는 점에서 본문의 풍속의 기원이 보호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로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유대 지역에서 실행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Moule, Idiom Book, p 59).

성 경: [마27:1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빌라도의 바리바리 하는 유명한 죄수 - 하위 그룹에 속하는 헬라어 사본들(아도스사본. 8-9세기경)과 시리아역, 그리고 고대 교부들의 문헌들에서는 '바라바'를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에 '예수'라는 이름이 삭제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고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시 되면서 '예수 바라바'에서 '예수'라는 명칭이 생략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이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덧붙인다. 즉 마태는 17절에서 바라바라와 예수를 구분하기 위해'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라는 문구로 '예수 바바라'와 '그리스도 예수'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오늘날 크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형편이다. 한편 '바라바'(Barabbas)라는 말의 의미는 '바르 아바'(bar Abba) 곧 '아바의 아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랍비의 아들'(Ewald), 또는 '마귀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적 그리스도를 뜻한다고도 한다(Theophylact). 이와는 반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련되고, 바로 그것에서 하나님 거룩한 섭리의 일면을 발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Olshausen).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 중에 어느 것을 단정적으로 주장하기란 사실 힘들다. 한편 본문의 '유명한'(*, 에피세모스)이란 '탁월한', '눈에 띄는'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특혀 '악명(惡名)높은'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실 바라바는 평범한 죄수는 아니었다(막 15:7;)눅 23:19;요 18:40). 즉 그는 단순한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라 적어도 사행에 처해질 정도인 것으로 보아 아마 반란 음모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울 당시 유대 전역에도 게릴라에 의한 반란과 유혈사태가 빈번하였었다(Jos.Antiq. XVIII, 3-10,3-10,60-62;눅 13:1). 아마 바라바도 그러한 유혈 사태에 관련되었을 것이며, 거기에다가 반도덕적 악행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유대 백성에게 있어서 그는 악명 높은 강도로서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영웅'적 행동을 한 자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성 경: [마27:1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빌라도가 물어 - 마가복음과는 달리 전례대로 해주기를 구하는 무리의 요구가 본문에는 빠져 있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막 15:9)고 묻고 있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빌라도가 백성들에게 요구하기를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사실 그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종교적 열성이 강한 유대 백성이라면 적어도 선한 선생으로 이해되었던 예수를 선택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무모한 살인의 책임을 회포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맞은 양 이렇게 다급히 백성들에게 물었으며, 이 방법으로 산헤드린의 악한 계책(計策)을 깨뜨려 버리려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빌라도가 선택을 요구한 '저희'는 예수를 고소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특사로 사면될 죄인을 선택함에 있어서 빌라도가 의견을 물었던 무리들이었다(막15:8).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군중들은 혁명 투사였던 '예수 바라바'의 이름을 외치면서(8, 9세경의 아도스 사본이 신빙성이 있다면 그의 사면을 요구하였을 것이고, 이때 빌라도는 이 외침을 예수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함성으로 잘못 알아듣고(왜냐하면 빌라도는 내심으로 바라바보다는 예수를 석방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라 하는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라고 군중들에게 질문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Lane, Mark P. 554).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한편 본문의 '그리스도라 하는(불리우는) 예수'란 표현은 예수의 신적 존재를 무시하고 경시하여 부르는 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마27:1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이는 저가 ...앎이러라 - 여기서 '앎이러라'(*, 에데이)는 말은 제 2과거완료 시상으로서 이미 충분히 납득한 상태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즉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 결함이 있음과 그들의 불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가 스며 있음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는 21:15, 16;21:45 에서도 이미 보여진 바 예수의 가르치는 권위나 능력과 언행이 저들의 위선과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저들의 종교, 사회상의 고유한 권위를 상당히 침범하였기 때 문에 그들의 마음에 생겨났을 것이다. 빌라도의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저의(底意)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실로 사람이 알지 못한 채 죄를 짓는다면 그 실수 한 가지만 책망 받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짐짓 죄를 지었을 때는 죄를 지었다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거스렸다는 사실까지도 아울러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잘못은 결단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마27:1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 - 요 19:13에서처럼 마태는 빌라도가 총독 관저 앞에 마련된 돌로 만든 단상, 곧 재판석에 앉았다고 기록한다. 물론 그가 이 자리에 알은 것은 유대인들의 선택(17절)을 귀담아 듣고 그에 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이 빌라도의 태도는 그의 제도적 권위와 그의 실제적 무능력 사이의 대조를 심화시킨다.

⭕ 그 아내가..가로되 - 빌라도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에서만 나온다. 전설에 의하면 빌라도의 아내의 이름은 '프로클라 클라우디아'(Procula Claudia)였는데, 유대교에 귀의했을뿐 아니라(외경 니고데모 복음서 2장), 그리이스와 에디오피아교회에서는 그녀를 심지어 성자(聖者)의한 사람으로 숭배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여하튼 A.D. 21년에 로마상원 의회에는 어떤 지방 행정관도 그의 아내를 부임지까지 동반할 수 없다는 법이 제안되었었다(Tarcitus, Annals III.33-35). 그러나 그 제안은 아직 입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도의 부인이 그와 함께 총독 관저에 머물러 있었던것 같다.

⭕ 저 옳은 사람(*, 토 디카이오 에케이노) - 여기서 '옳다'는 말은 '전혀 무흠하다'(innocent)라는 뜻으로 결국 이 말은 거룩한 예언자나 메시야에게만 국한되어 표현되는 유대인의 관용어이다. 따라서 그 아내는 예수의 절대 무죄성과 함께 예수의 신적 속성을 어느정도 이해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꿈에서 얻어낸 신령한 지식이었다.

⭕ 꿈에...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 그녀는 초자연적인 한 꿈 때문에 정신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로도 상당히 고통당했다고 실토했다. 한편 빌라도의 아내의 '꿈'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상기시킨다(1, 2장). 사실 꿈에 대한 강조는 마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마태에게 있어서는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다(1:20;2:12,13,19,22) 어쨌든 그녀의 꿈이 신적 계시로 이해되든 아니면 단순한 예수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염려한 심리적 갈등에 의한 마음의 표상이었든지간에 마태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돌이킬 수없는 책임과 예수의 무죄를 밝히고자 하는데 있다.

성 경: [마27:2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대제사장과 장로들이...권하여 - 산헤드린은 빌라도가 확신에 찬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서 때마침 찾아온 아내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백성들을 충동하는데 성공한다. 특별히 본문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일치된 한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에 관사 (*, 호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들 각자가 군중들 틈에서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사주(使嗾)를 매우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었음을 간접 시사한다.

⭕ 예수를 멸하자. -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문구로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와 그들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다.

성 경: [마27:2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둘 중에 누구를 - 마가복음과는 달리 본서에서는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는가'하고 다시 한번 결정을 묻는다. 그러나 백성의 대답은 단호히 산헤드린의 결정을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 이때 내심으로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는 빌라도는 가능한한 분위기를 예수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유도해 보려고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성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인것은 이해할만하다. 즉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선택의 문제 앞에 그들은 로마 총독의 의도보다는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의도를 찬성했을 것이다. 식민지의 억압받는 상황에서 점령군 사령관의 말을 듣느니 차라리 밉지만 자기들의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이(Jos., Antiq. ,XVIII269-272). 더구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퍼뜨리면서 선동(煽動)했다면 순진한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예수의 사형을 지지했을 것이다. 훗날 베드로는 이같은 군중 심리에 의한 어리석고도 불의한 결정에 대해 통렬히 비난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행 3:14,15).

성 경: [마27:2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그러면...내가 어떻게 하랴 - 빌라도는 비록 유대 백성들이 산헤드린의 충동질에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또 한번 예수의 석방도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런 질문올 덧붙인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는 예수에게 십자가형이 아닌 좀더 가벼운 형벌이 요구되기를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태도는 매우 무책임하고 결단성이 없는 것으로 재판의 판결에 있어서 고유한 판결권을 가진 그로서는 마땅히 자신의 양심적 소신에 따라서 판결을 내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고 판결권을 백성들에게 이양하고 있다.

⭕ 십자가에 못박혀야 - 이 외침의 주동자는 물론 산헤드린 공회원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무리'들은 적극적 동조자로서 예수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사실 그들 중에 최소한 몇몇은 바로 며칠 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찬미했던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21:9). 한편 이 십자가 처형 요구는 곧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단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32-4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가장 불명예스러운 난동으로 처형할 것, 곧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형을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실로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 무감각과 자기 파괴적 열광으로 그들 자신의 메시야를로마의 십자가로 제거(除去)한 것이다.

성 경: [마27:2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누가복음에는 '무슨 악한 일을 했는가 ? 나는그 죽일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라'(눅 23:14-16)고 기록되어 있어, 가능하면 예수를 극형으로 처형하지 않으려는 빌라도의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1-16 에서도 예수를 용서하려는 빌라도의 노력이 잘 묘사되고 있다. 요컨대 빌라도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그가 상식과 선의를 갖추고 있는 행정관이기는하지만 정의에 서서 소신껏 행동치 않는 기회주의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음을 보여 준다.

⭕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소신없는 태도는 오히려 군중들의 주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즉 자신들의 주장에 결국 빌라도가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군중들은 흥분과 열광으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사5:7).

성 경: [마27:2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아무 효험도 없이 - 이는 빌라도의 완전한 굴복을 뜻한다.

⭕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 여기서 '나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타이(*)는 현재 시상으로서 지금 군중들이 마치 폭도로 변할 듯한 장면을 확연히 관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즉 더이상 지체할수 없는 급박한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민란'은 로마의 지방 행정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로서 이 일이 로마 정부에 전달되면 자기 신상에 크나큰 해가 되었다. 따라서 어떠한 생을 치러서라도 민란을 사전에 예방해야만 했다.

⭕ 물을 가져다가...손을 씻으며 - 이 문구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이다. 한편 신명기 21:6,7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살해되었을 때 그 부근에 있는 성(城)의 장로들은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은 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것을 나타내어야 했다. 그리고 시편 26:6과 73:13은 이 법이 거의 금언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처럼 무죄의 표시로 손을 씻는 행위는 철저히 유대적인 것으로서, 몇해 동안 유대를 통괄하던 빌라도에게는 익숙한 풍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유대 풍습을 따름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유대인들을 은연 중에 경멸했던 것이다. 물론 손을 씻고 난 후, 손바닥을 마주침으로써 자신의 결백과 무흠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빌라도는 행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자기가 최총 결정권자였음에도 뷸구하고 이 간단한 상징 행위를 통해 자기 무죄를 선언하는 대신 모인 무리들에게 그 죄책을 전가(imputation)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온몸으로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역사는 오늘도 그의 죄책을 묻고 있다(사도신경 中).

⭕ 이 사람의 죄에 대혀여 - 사본(시내, 레기우스 등)에 따라 본문을 '이의인(*, 디카이온)의 피에 대하여'로 읽기도 했다. 적어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라도는 분명 자기 아내가 전해 준 말(9절)을 신중히 기억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의 비겁한 행동은 공의의 관점에서 더욱 지탄(指彈)받아야 마땅했다.

⭕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빌라도는 의식적(손씻음)으로 뿐 아니라 윤리적, 사법적으로도 자기의 죄책을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양심의 법,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영영히 그 허물을 단죄받을 것이다.

성 경: [마27:2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백성이 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 이같은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용적 어구로서(출 20:5;삼하 1:16;3:28; 행18:6),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심지어 자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백성'을 원문의 의미에 충실하려면 '모든 백성'(*, 파스 호 라오스)이라고 번역함이 옳다.'모든 백성'이 법적 양식에 따라서 예수의 회가 부당하게 흐르는 것에 대한 책임을 자신과 자기의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했던 것이다. 특히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배척하는 완고한 태도가 들어있다. 한편 마태는 15:32; 17:14 등에 사용했던 '무리들'(*, 라오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백성'(*, 라오스)이라고 함으로써 단순한 군중이 아닌 하나님의 친 백성이 그런 말을 했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한편 무죄한 메시야의 죄를 흘리게 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한 저들의 말대로 유대인들은 A.D.70년 예루살렘의 끔찍한 최후를 겪어야 했으며, 이후에 끝없는 유랑 생활, 그리고 2차 셰계 대전을 전후한 20세기에는 유대인 600만명이 학살당하는 민족적 참극(慘劇)을 당해야 했다.

성 경: [마27:2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제의]

⭕ 바라바는...놓아주고 - 빌라도는 군중들의 위압적 호소에 굴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에 내어주었다. 본문은 특히 이 인물의 운명의 극명한 대조가 부각되는데, 이 대목에서의 본래적인 초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고난받고 범죄자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대속의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다.

⭕ 채찍질하고 십자가에...넘겨 주니라 - 예수께서 당하신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즉 유대의 율법에 있어서 매질은 40대로 제한되어 있으나(신 25:3; 고후 11:24) 로마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힘이 있는대로 때리고 싶을 때까지 때렸다. 특히 매질에 사용되던 채찍은 유대인들처럼 막대기가 아니라 여러갈래로 된 동물의 가죽 끝에 뼈조각이나 납덩이를 붙여 만든 손잡이가 짧은 형태의 것이었다. 죄인은 옷이 벗겨진 후 기둥에 꽁꽁 묶여졌다. 매질이 얼마나 심하였든지 그 매질이 가해지는 동안 죄인의 몸에서는 회가 분수같이 뿜어 나도고, 뼈가 드러나 보일 뿐 아니라 내장(內藏)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고 한다(Josep-hus, war II 612; VI,304) 심지어 매질만으로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매질은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기에 앞서 힘을 빼는 데 사용되곤 하였다. 예수는 판결이 나기 전에 이미 뼈질을 당하셨다(눅 23:16,22;요 19:1-5). 따라서 판결이 내려진 뒤에는 반복되지 않았다. 만일 매질이 반복되었다면 예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여하튼 빌라도는 몇 마디 더 심문한 뒤에(요 19:1-16)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념겨 주었다(16절)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사 53:6,12).

성 경: [마27:2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총독의 군병들이 - 빌라도는 자기 수하에 있는 로마 출신 군사들에게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할 것올 명령하였다. 따라서 '총독의 군병들'은 이후부터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모멸적언 조롱을 하게 된다(막15:16-20;요 19:2,3). 이는 이사야 예언의 온전한 성취였다(사 53:3).

⭕ 관정 - 헬라어로 '프라이토리온'(*)으로 불리워지며 라틴어 '프레토리옴'(Preatorium)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본래 장군의 본부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총독의 공식 거주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유대 총독의 본거지는 가이사랴였지만 파종 명절의 치안 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에 주둔할 때는 특별 거주지가 마련되었었다. 예수 당시 빌라도 총독은 자신의 예루살렘 특별 거주지를 안토니아 요새에 정하고 있었고, 로마 군대를 그곳에 함께 주둔시키고 있었다. 한편 공동번역 성서는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총독 관저'로 번역하고 었다.

⭕ 온 군대 -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로 '스페이라'(*)인데 26:53.54에 언급된 '영'(*, 레기온)을 10등분한 한 부대이며, 천부장의 지휘 아래있는 3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부대이다. 이 '군대'가 소집된 것은 무죄한 죄수이신예수를 놀이삼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주위에 모여 예수의 왕권을 마음껏 놀리고 조롱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책임자 빌라도의 묵허(默許)하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빌라도의 죄책은 더욱 가중된다 하겠다.

성 경: [마27:2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홍포를 입히며 - 사실 예수께서는 26절에서 채찍질을 당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옷을 벗기웠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계속 옷올 벗기는 데 이곳까지 끌려와 희롱당하셨는지, 아니면 채찍 후 그 입던 옷을 다시 입으신 후 여기서 다시 옷을 벗어왔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예수는 걸레처럼 찢기어진 당신의 어깨 위에 '홍포'를 걸치게 된것이다. 여기 '홍포'(*, 클라뮈스)는 아마도 로마의 군인들이나 시장관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또였을 것이다(28절). 그런데 이 홍포의 색상에 대해 '진흥색'이라 한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자색 옷'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색'으로 된 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고(Macc 10:20, 62;11:58;14:43,44) 군인들은 옷을 착용했다는 점에서 예수가 입은 '홍포'는 군병들의 망또였던 것으로 추적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군병들이 예수께 입힌 옷은 헤롯왕의 옷장에서 버려졌던 븜은 왕의 의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Elsner). 어찌되었든 여기서 마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로마 병사들이 예수께 왕을 상징(象徵)하는 옷으로 갈아 입힌 후 그분을 조롱하려 했다는 점이다.

성 경: [마27:2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당시 면류관을 엮어 - 당시 사용되던 동전에 보면 디베우스가이사(TiberiusCaesar)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새겨져 있는데, 그 면류관 위에는 빛나는 못들이 달려 있었다. 군인들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변에서 자라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의 머리 위에 씌웠다. 이 가시나무에 관해서는 야자나무나 아칸더스(acanthus)나무, 또는 아랍의 나바(naba)나 나브카(nabka)심지어 선인장 종류나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여하튼 가시나무와 가시덤불이 쉽게 자라는 팔레스틴에서 흔한 종류의 것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그들이 가시관을 씌운 원래 목적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결국 그들은 고난의 왕관을 혜수께 씌웠던 것이다. 따라서 그 가시에 의해 찢어진 예수의 머리에는 검붉은 핏방울이 쉴새없이 흘러내렸음에 분명하다.

⭕ 갈대를 그 오른손에 - 동전에 새겨긴 황제의 오른손에는 통치권의 상징인 황제의 홀(笏)이 쥐어져 있는데, 로마 군병들은 이것을 모방하여 예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다. 이 '갈대'는 등나무 종류의 평범한 풀이나 줄기가 꿋꼿한 갈대였음이 분명하다.

⭕ 무릎을 꿇고 - 마가복음에서는 '예배하다'를 뜻하는 '푸로스퀴네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마태는그 단어 대신 단순히 '무릎 꿇다'는 뜻인 '고뉘페테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의미상동일하게 언급됨이 마땅하다. 즉 군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마치 자신들의 군주인 '가이사'에게 경배하듯 예수를 경배하며 심히 우롱했던 것이다.

⭕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이는 '가이사 만세'라는 로마인들의 황제에 대한 찬사의 외침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이를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하찮은 로마군병들에게 치욕스러운 조롱을 당하신다. 그러나 마태는 저들의 조롱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시사해 주고 있다. 군인들은 조롱의 차원에서 예수께 황제에게 대한 모든 예를 갖춤으로써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께 경배하리라'는 시 22:27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군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가운데 진리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는 면류관을 쓰시고, 흘을 들고,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동시에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진리의 선포인 것이다.

성 경: [마27:3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침 뱉고...머리를 치더라 - 로마 군인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표로 입맞추는 대신 가장 모욕적인 행동으로서 그에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 왕을 위하여 목숨바쳐 싸우는 대신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 결과 그분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는 더 깊이 그분의 피부 속으로 박혀 들어갔을 것이며 얼굴은 더욱 검붉게 물들어 갔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치더라'는 말은 어쩌면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접(待接)이었는지 모른다. 한편 마태는 조롱과 육체적 학대를 구별하여 먼저 조롱한후에 학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성 경: [마27:3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병사들의 희롱]

⭕ 희롱을 다한 후 -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 완료의 시제를 의미하는 부정과거형로 씌어졌다. 따라서 마태는 그 어간에 되어진 세세한 내용을 어느 정도 생략했음을 보여 주고있다. 그러므로 그 회롱과 학대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 군병들이 자신들의 기분을 마음껏 푼 정도로 예수는 육체적으로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요한의 중언(요19:4-6)에 따르면 이때 빌라도는 다시 한번 예수의 석방을 해 노력한 흔적이 발견된다.

⭕ 그는 옷을 입혀 - 대개 옷을 벗기은 채로 형장을 향하며, 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비웃음과 매질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이 예수께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마 그가 너무 많은 매질올 이미 당했기 때문에 더 매질을 당하게 되면 아예 죽게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때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신경을 너무 자극하지 않도록 삼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예수께서 다시 입으신 '옷'(*, 히마티온)은 주로 겉옷을 뜻하지만 군병들이 제비뽑은 사건에(시 22:18;요 19:23) 비춰볼 때 분명 속옷까지 포함한 표현일 것이다.

⭕ 십자기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리라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대 시간으로 '제 3시', 곧 오늘날의 오전 9시였으므로(막 15:25), 본문은 아직 오전 9시가 되기전의 일이라 본다. 여하튼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서부터 로마 당국의 사형 언도에이르기까지 예수에 대한 판결은 밤새 급속히 진행되었고 급기야 아침에 르러 십자가형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유대인의 습관을 좆아 그 사형 집행은 성문밖에서 이뤄졌는데(민 15:35, 36;행 7:58; 히 13:11, 12), 이때 예수는 관례를 따라 자신이질 십자가를 친히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 형장으로의 이동은 원래 죄수처형을 전담했던 부총독이 맡아야 했으나 그 부총독(Li-ctor)이 빌라도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말탄 백부장이 형장 이동을 진두 지휘(陳頭指揮)하였으며, 네 명의 군병들이(요 19:17,23) 예수의 신변 호위를 했고 그 뒤에 군병들이 따라 나섰다고 전한다(Lange, The pulpit Commen-tary).

성 경: [마27:3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나가다가 -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었던 것으로 보아(막15:20, 21) '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왕상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 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에(요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히 13:13).

⭕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Antiq.,XIV.7,2;Cont.Apion., 제 2권)소속된 일원이었던것 같다(행 11:22;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때에 (막15:21;롬16:13), 시몬 역시 이 사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흘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그는 피흘리며 죽어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으며, 그후로 전가족이 구원얻는 크나큰 측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 '억지로'(*, 엥가류산) -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증앙정부로부터 특명을 받은 진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 측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막 15:21-34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 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뀌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 '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이고 따라서 본문상'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원문에는 '그를 십자가에'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심히 원했던 유대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셨다'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성 경: [마27:3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골고다 즉 해골의 곳 - '골고다'라는 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의 '길갈타' 또는 '굴골토'(*)를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해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그곳이 많은 시체가 버려짐으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Jerome, Hieronymus)도 있고, 그곳이 해골 모양의 언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학자들(Bengel, Cyril, De Wetty)도 있는데, 후자의 견해가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한편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는 '갈보리'(Calvary)는 고든(Gordon)이라는 한 장군에 의해 명명되었으나 아람어와는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보리'라는말은 원뜻과 조화되는데 그 이유는 '갈보리'가 '해골'을 의미하는 라틴어 '칼바'(Calva)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골고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않다. 아무튼 가장 가능성 있게 생각되는 것은 그곳이 '성에서 가까운'(요 19:20), '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29절), '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변'(32절)에 위치한 오늘날의 '성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가까운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 외에도 모든 장군이 주장하는 '고든 갈보리'(Gor-don's Calvary)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 경: [마27:3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에 달리심]

⭕ 쓸개 탄 포도주 - 이는 시편 69:21을 반영하고 있으며 48절에서 비슷한 구절이 다시 반복된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물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는데 이같은 차이는 아람어의 '물약'(morah)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의 '담'(marrah)과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쓴맛이나 독성에 있어서도 유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사건에서 마태복음이 중언하는 '쓸개 탄 포도주'란 말이 구약 시편에 더 가깝다. 여하튼 본문의 '쓸개'(*, 콜레)란 진짜 '쓸개'나 '담즙'을 뜻하기 보다 쓴 맛이 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carson, Lenski). 그리고 '포도주'는 매우 센 독주(毒酒)로서 취기가 속히 들고 마취 성분이 강한 술을 가리킬 것이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1)십자가 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순간적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거나, 그 고통을 참아낼 힘을 주려했기 때문인 동시에 (2) 술로 인해 거의 마취되다시피 한 죄수들은 사형 집행관들이 손쉽게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독한 포도주를 최후의 순간에 이른 자에게 제공된 것은 잠 31:6, 7의 교횬에 근거한 관습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더불어 이때 예수께 드려지는 포도주는 예루살렘의 어느 부유한 여인의 자발적인 헌납에 의해 자비의 선물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Li-ghtfoot).

⭕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 예수께서는 자비의 선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일단 맛을 보시는 정도로 그치셨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 포도주에 마취 성분이있음을 익히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여기서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우크 에델랜)는 말은 계속적인 거부 의사를 내포한 말로서, 예수는 그 당시 몇번에 걸쳐 마실 것을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마시지 않을 것을 고사(固辭)하셨음을 보여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마취제의 도움으로 고통을 덜어보려 하기보다는 모든 감각을 지닌채 맑은 정신으로 끝까지 다가오는 뼈저린 고통에 맞서고자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 순전히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그 십자가가 제공하는 아주 세미한 고통조차도 친히 감수하시며 인성(人性)으로서 당하셔야 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체험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당신의 '잔'을(20:22;요18:11)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고자 하셨다. 한편으로는 이같은 행동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26:29)는 당신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27:3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에 달리심]

⭕ 예수를 십자기에 못박은 후에 - 십자가 형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형벌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단지 이방 점령 지역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되었던 형벌이다(Jos.,Judoll,1). 한편 로마법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1) 먼저 공식적 선고를 받은 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향한다. (2) 형장으로 행하는 길에 자기 죄목이 적힌 명패를 가슴에 달아 지나가는 통행인들에게 인격적 모독을 받게 한다. (3) 형장에 도착한 죄수의 옷을 벗긴다. (4) 독한 술로 육체와 정신을 혼미케 한 후 십자가에 못을 박거나 묶어 그것을 반듯이 세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미세워둔 십자가 위에 죄수를 끌어 올려 못박는 경우도 있음). (5) 그런 상태로 계속 버려두어 죄수로 하여금 서서히 죽어가게 한다(이때 건강한 남성의 경우 3일 정도 경과해야 숨이 끊긴다). 이때 각종 야수(野獸)나 새들이 죄수의 몸을뜯어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6) 어느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죄수의 다리를 꺾고 치명적인 외상(外傷)을 가함으로써 어떠한 소생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물론 이때 외관상 죽은 것이 확인되면 다리는 꺾지 않고 창으로 몸을 찔러 확인 사살만 한다). 여하튼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형에 선언된 사형수는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도록 그 손목과 발이 묶이거나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는 못박혀 달리신 예이다. 그런데 로마법에 따르자면 죄수들은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예수의 경우 그들이 유대인들의 규정(M. Sanhedrin 6:3)에 따라 허리 아랫 부분을 가리는 옷을 예수에게 걸쳐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십자가의 형태는 X자형(Crux decussata) 또는 T자형(Cruxcommi-ssa), + 자형(Crux immissa)과 같이 여러 가지였으나 전통적인 형태는 +자형이었다.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그 머리 부분에 명패가 부착된 것으로 보아 십자형임이 분명하다(37절). 죄인이 십자가에 달리는 높이는 몇 십 센티에서 단 몇 센티까지 다앙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게 달리셨던 것 같다(48절:요19:29). 여하튼 예수께서는 그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신 21:22,23) '나무 위에 달린 저주받은 자'(갈3:13)로서 최후의 순간을 맞으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엄청난 참혹의 현장을 단순히 한 분사 구문('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으로 취급하고 오히려 뒤이어지는 군병들의 제비뽑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은 그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적어도 그 당시 사람이면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이거나 아니면 기자(記者)가 더이상 떨리는 붓끝으로 예수의 참혹한 절규를 추적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뿐이다.

⭕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가 갖는 것이 통례였다. 이때 4명의 로마 군병들은 아마 예수의 겉옷과 속옷 그리고 허리띠와 신발을 나눠갖기 위해 제비뽑았을 것이며, 이것은 요 19:23, 24에 기록되 있는 바처럼 시22:18의 말씀을 성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가는 이때를 제 3시, 곧 오전 9시로 기록함으로써 (막 15:25) 예수의 처형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성 경: [마27:3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거기 앉아 지키더라 - 마가복음 평행구인 막 15:25의 '때가 제 삼 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를 생략하고 마태는 그 자리에 이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 저들이 지키는 까닭은 못 박힌 자의 고통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누가 구해내지 못하게 지키기 위함이다. 죄수가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까지 지키는 것은 그들의 고유 업무였던 것이다. 하여튼 예수는 분명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호흡을 멈추신 것이 확실하다.

성 경: [행27:3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로 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요 19:19, 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다(막 15:26; 눈 23:38; 요 19:19 조). 그중 요한복음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反)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간의 반목(反目)상태를 조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다(요 19:20). 그런데 이 세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흑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 유대인을 위한 선언(히브리어), 법적 선언(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저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다.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뻬앗고, 옷을 벗기운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있으면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요 19:21).

성 경: [마27:3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의 달리심]

⭕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 처형되는 죄수의 죄목을 밝히는 내용의 패(주로 나무 위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붉은 글씨내지는 검은 글씨를 새겨 넣음)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매달고 형장에까지 가서 십자가를 세우고 그 죄패를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이 로마 처형법상 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의 죄패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요 19:19,23) 각 복음서간에 약간의 차이를 이룬다(막 15:26; 눅 23:38; 요 19:19). 그 중요한 복음의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빌라도는 이 죄명(罪名)을 통하여 자신의 반(反)유대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그는 로마의 지배 아래있는 유대인들의 처지와 그들 서로간의 반목(反目)상태를 조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죄패는 각 지방에서 오는 순례자를 위해 히브리어(아람어), 헬라어(당시의 보편적 언어), 라틴어(로마의 공용어)로 각각 기록되었다(요 19:20). 그런데 이 세가지 언어의 패에 대해 흑자(Westcott)는 그리스도를 위한 종교(히브리어), 문화(헬라어), 사회(라틴어)적 예비 활동의 총체적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는(Robertson)유대인을 위한 선언(히브리어), 법적 선언(라틴어), 만인을 위한 공표(헬라어)등으로 세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저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나아가 유대 민족을 조롱하려고 그런 죄패를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전리를 고백하는 것이 되었다. 실로 복음서 초두에 동방 박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예배했었고(2:2) 그에게 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었다. 이제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에 로마의 군인들은 그의 옷을 뻬앗고, 옷을 벗기은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그의 십자가 아래 달아있으면서 처음에 붙여진 그 칭호를 마지막으로 달아 주고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묘하게도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방인들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민족들은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라고 요구한다(요 19:21).

성 경: [마27:3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 십자가형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분명히 목격할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역설적으로나마 '십자 가의 증인'이 될 수 있었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시편 22:7에 언급된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쪽거리고 머리를 혼들며 빈정댑니다'(공동 번역)의 반영이다. 여기서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의 사형언도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 성내(城內)의 주민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혼드는' 것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행동이었다(시 109:25; 애 22:15). 여하튼 유대인들은 다시 산헤드린 재판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26:67,68) 사악한 장면을 보여 준다. 비록 그들이 예수의 적대자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조롱과 멸시를 퍼붓는 잔인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더욱이 그들은 예수를 모욕하여(*, 에불라스페문). - 즉 예수의 '신성을 모독하여'(blasphemabant. Vulgate) 돌이킬 수 없는 참람한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9:3;12:31;26:65).

성 경: [마27:4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성전을 헐고 사흘에 다시 그것을 지으려 했던 자여'가 된다. 이는 조 26:61에서 이미 비난한 바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 당시 비난하는 무리들은 적어도 산헤드린에 동조했던 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예수의이 말씀은 성전을 문자 그대로 헐고 다시 3일만에 복원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요2:19-22).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이는 이미 가야바의 질문(26:63) 중에 물어진 것인 동시에 시험자 사단의 질문이기도(4:3, 6)했다. 이처럼 지나가는 행인을 통하여 사단은 여전히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고통을 회피(回避)하도록 유혹하였던 것이다(Lohmeyer;16:21-23). 실로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가장 연약한 상태에 있는 자에게 쉽게 접근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미혹하려드는 것이 사단의 속성이다(벧전 5:8).

⭕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그릇된 메시야관에 짙게 물들어 있던 유대인들의 어리석은 요구였다. 즉 그들은 적어도 메시야라면 각종 이적과 영웅적 활동을 전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26:5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두신 자기 희생을 통한 만인 구원에의 길을 지금 가고자 하신 것이다(16:23).

성 경: [마27:4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처음에는 로마 군인들이(37절), 그 다음에는 군중들이(39, 40절), 그리고 이제는 산헤드린의 중추적 인물들, 곧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나선다. 이로 보건대 산헤드린은 이제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라는 그들의 요구는 40절에 나온 행인들의 사단적 요구와 일치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믿기 위해 이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대변자로서 예수의 신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의혹과 또 그런 자를 처형시킨 승리감에 도취되어 또한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이같은 자신에 찬 요구를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는 저들의 비난은 결코 조롱받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남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 이방인에 의해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불려진데 대한 유대인들의 대구적(對句的) 비난이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 속에 언약적인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비난은 자신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격이 되었다.

⭕ 우리가 믿겠노라 - 물론 거짓과 악의에 찬 약속이다.

성 경: [마27:4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 39절에 인용했던 시편 22:7에 이어 본절에서는 그 다음절인 시편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를 그 깊은 뜻을 완전히 파악치 못한 채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기뻐하시면'(*, 델로)이란 말은 70역(LXX)에 따른 번역으로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세세한 데까지 돌보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하튼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때 그것이 그가 메시야로써 동시에 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임을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만일 예수께서 메시야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모든 일을 성사시켜주실 것인데 그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가 단지 자신을 메시야로 가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사악하게도 구속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고 단정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혹심한 시련, 곧 하나님의 버리심과 마음이 젖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부활케 하심으로써 예수가 메시야되심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현존(現存)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7:4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유대인들의 모욕과 희롱]

⭕ 함께...못박힌 강도들도...욕하더라 - 주위를 둘러싼 모든 군중들이 적어도 한 마디씩은 예수를 비난한 것을 보고 있던 강도들은 상대적인 우월감에 그들마저도 예수를 희롱하게 되었을 것이다(Robertson). 이러한 가능성은 '욕하더라'(*, 오네이디존)는 말이 미완료 시상으로서 뒤늦게나마 이제 막 그 일을 시작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 왜 보고에 의하면 이렇게 비난했던 두 강도중 하나가('데스마이', 38절) 잠시후 예수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거룩하심과 또한 끝까지 인내하심에 강한 감동(感動)을 받아 멸망의 벼랑 끝에서 구원받게 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눅 23:39-43).

성 경: [마27:4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제 육 시로부터...제 구 시까지 - 본문의 '제 6시', '제 9시'는 유대인의 시간 단위로 오늘날의 시간과 6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제 6시'는 오늘날의 정오(낮 12시)를, '제 9시'는 오늘날의 오후 3시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오전 9시경부터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막 15:25) 오후 3기경까지 근 6시간여 동안 찢어지는 듯한 육쳬적 고통과 더불어 어둠보다 더 짙은 영적, 정신적 고뇌(46절)를 맛보시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당신의 죽음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계셨다.

⭕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 제 6시에서 제 9시까지 약 3시간 동안의 '어두움'은 마치 애굽에서 첫 유월절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재앙시에 나타났던 3일 동안의 어두움을 상기시킨다(출 10:21-23). 따라서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은 심판 또는 비극을 알리는 표적이었음이 분명하다(암 8:9, 10). 한편 이때의 어두움이 '온 땅에' 임했다고 하는데 그 '온 땅'이란 의미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해 혹자는(D.A.Carson) '온 땅에'를 뜻하는 헬라어 '에피 파산 텐 겐'(*)이 온 지구(the earth)전체를 뜻하기보다, 국한된 지역으로서의 모든 '땅'(the land)을 의미한다고 보아 '유대 지경 전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같은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시 유대 땅에 임한 어두움은 예수의 죽음과 유대 민족에게만 관계된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과 연관을 지닌 출 10:22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던 하나님의 심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다', 결국 이 기록은 본문의 '온 땅'을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이때의 어두움에 대하여 사막의 열풍에 의한 천기 조건의 이상으로 발생한 우연 발생적이고도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단지 '일식' 현상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날은 음력 보름이 다 된 시간이었으므로 천문학적 상식로 월식이 될 가능성은 있으나 일식(日蝕)은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법칙상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찬송가의 시구처럼 영혼의 신령한 태양되시는 예수께서십자가에 달리실 때 물질 세계의 태양이 밝은 빛을 잃어서(눅 23:44) 캄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상징적 의미들도 도출해낼 수 있다.(1)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준엄함(26:24; 사5:30). (2) 인류의 무거운 죄짐을 대신 지신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지를 보임. (3) 전우주적 통치자의 고뇌에 찬 죽음에 대한 자연계의 순응(롬 8:22) 등의 뜻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27:4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 마치 기름이 동난 등블이 마지막 자기 심지를 태우며 희뿌연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듯, 예수께서는 더이상 항거할 수 없는 죽음에의 기운과 영적인 고독 앞에서 마지막 기운을 돋우어 성부 하나님께 절규(絶叫)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 히브리어와 아람어 음역에 따른 시 22:1의 인용으로서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중에 네번째 말씀에 해당하며(요 19:28-30강해 '가상 칠언' 참조), 마태와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엘리'(*)를 그대로 음역하여 '엘리(*)'엘레이(*)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이것을 '나의 하나님'(*, 엘로히)라는 아람어 음역에 근거하여 '엘로이'(*)로 표기하고 있다(막 15:34). 그 다음에 이어지는 '라마 사박다니'는 분명 순수 아람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경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에는 '엘리'를 '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능력'(my power)으로(*, 헤 뒤스나미무; 이는 히브리어 ,'헬리'의 뜻임) 번역하여('나의 능력이며 나의 능력이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치 가현설(Docetism)에 입각한 듯한 하소연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베드로 복음서에 따르면 인간 예수만이 고틔 당하고 죽은 것이 된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말쏨하셨기 때문에 '엘'라는 말이 쉽게 사람들에게 '엘리야'를 부르는 듯이 잘못 들려질 수 있는 것 같이, '엘리'가 '헬리'로 잘못 들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다윗이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 22:1의 말씀이 당신의 찢어지는 듯한 영적 절망감을 예언적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이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悽絶)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절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1)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고후:5),(2)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점이(빌 2:6-8), (3) 죄를 향한 하나님의 증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라는 점, (4) 성부로서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눅23:46) 죄악을 징벌하시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은 예수가 죄인의 자리에서 영, 육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이상 그를, 철저히 포기하고 그에게 무간섭하셔야 했다는 점, (5) 하나님께 버림받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인간 구원을 소망하신 예수의 지극한 사랑(요 3:16)등이다.

⭕ 나의 하나님(*, 데무) -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서, 비록 '하나님'이 예수 자신에게서 떠나가셨다 하더라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으시고 그분을 '나의' 하나님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仁性)으로 인류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그 인성은 신성(神性)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 호소하신 것이라고 볼 수있다(Lenski).

⭕ 어찌하여(*, 히나티) - 직역하면 '어떤 목적을 두시고'과 된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계신 것이다. 이는 분명 신성으로서의 예수가 지적(知的)결함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와의 직임상의 차이를 보여 주는 동시에 성부께 대한 성자의 절대 겸손과 완전한 순종의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24:36).

⭕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이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버려두셨다는 뜻을 내포하는(Hend-riksen)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류 죄악을 위해 마련해 두신 '잔'(진노와 심판)을 그에게 마시우게 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같은 절규에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충만한 댓가를 자신의 온 몸으로 친히 치르고 계신 예수의 뜨거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말씀이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 밖에도 여섯 마디의 말씀을 더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한 가상 칠언을 정리하면 (1) '저희를 사하여 주소서'(눅 23:34) (2) '나와 함께 낙원 있으리라'(눅23:43) (3) '저가 아들이니이다'(요 19:26) (4)본문 (5) 본문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요 19:28) (7)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등이다.

성 경: [마27:4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 - 이를 로마 군인들 중 몇몇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으나(Zigabenus, Euthym), 적어도 구약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Theophy - lact).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면 '엘리'의 정확한 발음을 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헬라와 유대인일 가능성도 높다.

⭕ 엘리야를 부른다 - 엘리야는 녹지 않고 살아서 승진한 의인으로서(왕하 2:9-12)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께서 '엘리엘리...'하는 절박한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즉 그를은 '옐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옐리야후'(*)로 잘못 듣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70인역은 이를 '*, 엘루우'로 기록함). 40절에서 예수에게 조롱하여 말하기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었다. 이렇게 말하는 저들의 심정은 신성 모독죄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들의 마음속에 비록 그 대상이 눈앞의 예수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애타게 고대해왔던 메시야 대망(待望)이 담겨져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들의 메시야 대망은 예수의 말씀 '엘리 엘리...'를 듣는 순간 곧 오해를 하여 엘리야가 와서 도와 주나 보자고 하게 하였다. 아마 그들은 엘리아가 와서 예수를 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여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자신보다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조롱하고 있는 자기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성 경: [마27:4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한 사람이....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 아마 이 일이 발생한 동기는 예수께서 '목마르다'(요 19:28)는 맡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이같은 행동은 예수에 대한 동정심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延長)시켜 과연 엘리야가 그를 구해주는지를 보려고 한 악한 의도(47, 49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어 그것을 갈대에 꿰어 예수께 마시우게 한 행동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구약 예언(시69:21)을 다시 한번(34절)더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한편 여기서 '해융'이란 일종의 스폰지(sponge)같이 다량의 액체를 빨아들이는 도구로서 바다 생물의 뼈대 같은 것에서 추출한다. 그리고 '신포도초'(*, 와소스)란 원래 '식초'란 뜻으로서 정확히는 '포스카'(posca), 즉 신포도주와 계란, 물을 섞어만든 로마 군인들의 음료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예수께 최후의 음료를 제공한 것은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성 경: [마27:4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그 남은 사람들이...가만 두어라 - 여기 '가만 두어라'는 말은 '지금 혼자 내버려두라', '조용히 물러서라' 등의 말일 것이다. 이는 예수를 향한 더욱더 조롱적인 어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에 의하면 이 말을 한 자는 예수에게 방금 신 포도주를 준 로마 군병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임에 비해 마가복음에서는 신 포도주를 마시우게 한 후 자신의 행동을 금하는 군중들에게 선 포도주를 예수께 먹인 바로 그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막 15:36). 이에 비해 요한은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발설되었는지, 그리고 조롱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에만 관심을 두고있다 (요 19:28,29). 따라서 어느 것이 정확한 보고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예수의 절규하는 소리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은 떠들고 그 와중에 로마 군병들은 심정적으로 합세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 엘리야가 와서...구원하나 보자 - 적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가 지금 도저히 희생 불가능한 죽음의 문턱에 이르른 것이라고 자신해 하며 이같은 조롱을 거듭하고 있다. 한편 어떤 사본에서(시내, 바티칸 등) 본절과 다음절 사이에 요 19:34 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는 이야기를 추가시키고 있다. 대신 요한복음과는 반대로 '물과 피'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물과 피를 통하여 상징되는 성례전과의 절차상의 일치를 위함인듯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Robertson) 이 이야기가 후대의 필사가에 의해 기계적이고도 무모하게 베껴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위의 몇몇 사본은 역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신학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삽입구라 본다.

성 경: [마27:5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임종]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로 목을 축이신 후 아마 '가상 칠언'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제 6,7번째 말씀(눅 23:46;요19:30)을 외치신 것 같다. 특히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크게' 외칠 수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당신에게는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눙동적이고 자발적(自發的)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에 의해서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생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지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요 10:17, 18).

⭕ 영혼이 떠나시다(*, 페켄 토 프뉴마). -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의를 설명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의 사실만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한편 예수의 죽음을 묘사할 때 '생명, 목숨'을 뜻하는 '프쉬케'(*)의 떠남으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을 뜻하는 '프뉴마'(*)의 떠남으로 표기한 것은 물론 당신의 죽음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영, 육의 분리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영혼이 떠나가시다'(he gave up his spirit)란 담담한 표현은 정해진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강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여 깊은 심연(深淵, gulf)으로 떨어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잔인한 조롱을 받고 숨지시던 바로 그 순간이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ransom for many)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때이다(20:28). 한편 본문의 이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분은 당신이 원하셨기 때문에, 원하시던 때에, 원하시는 대로 떠나가셨다.'

성 경: [마27:5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과 동반된 표적]

⭕ 성소 휘장이...찢어진 둘이 되고 - 성소에는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와 성소(the Holy Place)를 나누는 휘장과, 성소와 안뜰(the court)을 나누는 휘장이 각각 있었다. 여기서 찢어진 휘장이 단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둘 모두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바깥 휘장이 찢어져 나간 것은 어쩌면 성전의 임박한 멸망을 암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안쪽 휘장이 찢어진 사실이다. 이 안쪽 휘장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1년에 단 1회만 열렸다(히 9:7). 혹자에 따르면 이 휘장은 높이 55규빗(1규빗=약 45.6cm), 너비 16규빗 크기의 문에 드리워졌었는데, 그것은 바벧론 제(製)로서 고급 린넨(linen)의 직물에 갖가지 색을 입혔으며, 또한 그 위에 아름답게 여러 모양의 수를 놓았다고 한다.(Josephus, Wars V 5.4). 실로 이같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일임) 분명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즉 하나님의 임재 처소를 의미하는 지성소를 드리우고 있던 휘장은 분명 하나님과 인간의 죄로 인한 단절과 불완전한 교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짐은 (1)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 20).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2) 혈통적 선민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옛 언약의 신비가 벗겨지는 동시에 구속의 온전반 성취를 이루게 되었음을 상징한다(5;17-20;히 6:19;9:6). 이와 함께 (3) 유대교와 유대교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성전의 멸망을 상징한다. 물론 이 멸망은 A.D. 70년의 예루살렘 패망을 의미한다기 보다 차라리 '믿음이 온 후'에는 '믿음이 오기 전'의 모든 것이 멸망케 된다는 신학적 의미에서의 멸망이다.

⭕ 땅이 진동하여 비위가 터지고 - 이것은 마태복음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성전 휘장이 찢어짐과 동시에 땅이 무너진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진정 백부장의 탄성(54절)과 함깨 이 모든 사건은 예수의 죽음직후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D.Wenham, 'Resurrection' pp. 42-46). 아마도 마태는 지진 그 자체를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신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왕상 19:11;사 29:6; 렘 10:10;겔:18). 좀더 발전적으로, 이 지진과 바위의 갈라짐은 당신의 독생자의 죽으심으로 인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시 18:7;사5:25; 욜 2:10)를 뜻한다. 즉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자에게는 새 언약과 새 창조의 하나님으로서의 임재를, 끝까지 불선하는 자에계는 진노와 영원한 심판의 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암시한다. 한편 성전이 서있는 지반은 지질학상으로 결함이 있는 곳이다. 오늘날 그곳에 모슬렘 사원이서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번 지진에 의해 손상을 입어 왔다고 한다(D.Baly, The Geography of the Bible. p 25;Cyril.Cateches. Cateches. 13권 33).

성 경: [마27:5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과 동반된 표적]

⭕ 무덤들이 열리며 - 이 구절 역시 마태복음만의 기록이다. 앞부분에서의 지진의 결과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문이 열리게 되었다. 이는 팔레스틴의 무덤들이 대개 천연 동굴이나 아니면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조동굴에 시체를 안치(安置)하고 그 출구에 큰돌을 굴려놓아 봉함으로써 의식적 부정을 방지하고 야수에게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게 한 사실에 비춰 생각할 수 있다.

⭕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 마태복음에만 기륵되어 있는 본문은 수많은 의혹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적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다. 실로 이 사건은 메시야가 오실 때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9:25;22:23)이 현실화한 것인 동시에 예수 재림 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증해주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이 사건은 53절 증언하는 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강조하고자 했던 마태의 저작 의도에 따라 이곳에 옮겨져 기록된것 같다. 한편 성경에서는 본 사건 이전에도 몇번의 기사가 소개되었는데(왕상 17장: 왕하 4:32-35; 마9장 눅 7장; 요 11장) 이 모두는 한결같이 자연적인 몸으로서의 부활이었다. 본 부활 사건을 두고 학자들 중에는 썩지도 아니하고다시 죽지도 아니한 영체(spiritual body)를 입고 부활한 사건(고전 15:53)으로 보기도 하며, 앞서의 부활 사건과 같이 단지 육체적으로 죽었던 자들이 소생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부활이 다시 땅위에 살게 하려는 것이기 보다는 예수의 부활과 그 능력을 중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영화(榮華)의 몸'으로 부활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쨌든 죽었던 자의 몸이 무덤에서 일어나 예수 부활 후 무덤에서 나온 것은 (1)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 승리가 성도들에게 가져다 주는 생명력 넘치는 영향력을 상징한다(고전 15:55-57). (2) 예수께서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생생히 중거한다(고전 15:23). (3)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상징한다(엡 4:8,9). 한편 본문의 '성도들'(*, 하기오이)은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 시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함)이라고 보기도 한다(벧후 3:4).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구약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서 활약한 자들이거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순교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사 4:3; 단 7:18; Tobit 8:15;1 Enoch 38:4, 5)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성도들'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여 생존시 메시야를 대망하던 자들로서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 소망하는 바가 성취된 자들이라 보는 것이 좋을 둣하다. 만일 부활한 성도가 이러한 사람들이라면 예수 이전에 살던 사람들 역시 예수 이후의 사람들과 같이 예수의 승리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들의 부활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27:5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과 동반된 표적]

⭕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 여기서 '부활'(*, 에게르신)이란 말은 특수 동사로서 예수께서 무덤에서 일어난 '그들을 부활시켰음'을 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능동태로 취급하여 '예수 자신이 부활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볼 때(고전 15:23)'예수의 부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예수께서 먼저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영향력(影響力)에 의거해 저희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마태가 성도의 부활장면을 이곳에 배치한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의 부활이 가져다주는 생명력 넘치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정상적인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이 사실을 이곳에 앞당겨 왔던 것이다. 한편 부활한 성도들이 '거룩한 성' 곧 '예루살렘'(4:5)에 들어가 행하였던 모든 행적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 현상 중인이 되었다는 점이다(겔 37:12). 그리고 덧붙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신약 교회가 폭발적으로 이방 세계에 그 세력을 떨치기 전까지 여전히 성도(Holy City) 예루살렘은 복음의 중심지였다는 점이다(행 1:8).

성 경: [마27:5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의 증인들]

⭕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 -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문의 신앙고백을 백부장 혼자하는데(막15:53) 반해 본서에서는 백부장 외에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도 같이 그런 고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마가복옴에서는 백부장이 예수의 '운명하심'을 보고 그런 고백을 하는데, 본서에서는 '지진과 그 되는 일', 즉 흑암과 지진과 예수의 부르짖음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고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백부장과 군병들은 예수의 처형이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기이한 사건들은 그 군병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고 아마 그들은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들이 가담한 그 범죄에 대한 하늘의 진노였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두려움'(*, 에포베데산)은 단순한 공포심 이상의 것으로 아마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장면에서 혼히 발견되는 일종의 종교적 두려움 같은 것임에 분명하다(사 6:5). 한 전설에 따르면 이러한 경건한 두려움에 휩싸였던 본문의 '백부장'은 '론지누스'(Longinus)이며 (외경 베드로 복음서에는 '페트로니우스'<Petronius> 예수의 죽으심을 친히 목격했던 그 십자가 아래서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누구에 의하면 백부장을 위시한 군병들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아마 누가에 의한 고백은 예수를 죄인으로 고소한 유대인들의 판결이 정녕 잘못된 것으로서 예수는 무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기술(記述)된것 같다. 어쨌든 그 당시 백부장과 군병들은 죽어가신 예수에 대해 그분은 과연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고백한것이 분명하다. 실로 그들의 고백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즉 그것은 약속의 메시야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가장 분명히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혹자는 '아들'(*, 휘오스)이란 말 앞에 관사가 붙지 않았다는 점을들어 단순한 영웅적 인물 정도로 고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이 호칭은 메시야 개념이 내포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임이 분명하다. 이같은 사실은 그들이 고백한 '진실로'(*, 알레도스)라는 강조적 표현에서 더욱 확신 할 수 있다. 분명 이 부사는 유대인들이 조롱한 내용(3:5-13;15:21-28;27:39-44)과 정반대의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의 입술에서 이같은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이방 선교의 신호탄인 동시에, 십자가의 효능이 즉시 발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마27:5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예수를 섬기며...좇아온 많은 여자 - 마태는 또 한 부류의 십자가의 산 중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인습으로 볼때 천한 신분에 속했던 몇몇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 중에는 예수의 무덤을 맨 처음 찾아간 여인도 있었다. 특히 마태가 그 여인들의 이름과 행적을 이곳에 기록한 것은 십자가의 사건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낮고 췬한 자들을 들어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고전 1:27-31). 한편,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온 자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소유로 제자들과 예수의 쓸 것을 돕고 또 천국복음을 듣기 위해 예수를 따라다니곤 했다(눅 8:2, 3). 실로 예수께 대한 그들의 헌신적 노력과 사랑은 죽음도 불사(不辭)하는 것이였다. 진정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이다(요일 4:18). 예수가 체포되자 죽기까지 예수를 쫓겠다던 제자들은 하나같이 달아났고(26:57), 특히 가장 열심있는 자로 자처(自處)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를 부인(否認)하고 말았다(26:69-75). 그런 와중에 갈릴리 전도 사역 때부터 예수의 쓸 것을 돕기 위해 예수를 따라 다니던(눅8:2, 3) 여인들은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旅程)에 동참했으며. 또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두려음을 극복하고 처절한 예수의 최후를 타는 가슴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실로 그 여인들은 예수께 대한 숨은 봉사자들이었으며 예수의 생(生)과 사(死)의 조용한 증인들이었다.

⭕ 멀리서 바라보고 - 이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당시 십자가 현장 주변에 접근하기가 용이(容易)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마27:5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임종의 증인들]

예수의 최후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여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로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을(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천한 신분으로 간주함)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 광경이라 볼 수있다(고전 1:29-31). 한편 이 네 여인들의 프로필(profile)을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성 경: [마27:57]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저물었을 때 - 이때는 금요일이 끝나고 안식일이 막 시작되려는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신 21:22, 23에 명한 바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屍身)은 밤새도록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바로 다음날이 안식일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모습을 만인들이다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 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그대로 십자가에 달아 놓는 것이었다. 만일 그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의 용인(容認)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죽은 자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었으며 그나마 대역(大逆)죄로 죽은 경우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 아리마대 부자 요셉...그도 예수의 제자리 - 여기서 '아리마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대개 '리다'(Lydda)나 '라마다임'(Ramathaim;삼상 1:1)으로 간주한다. 한편 마가(막 15:43)와 누가(눅 23:50,51)는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직(要職)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그가 '의로은 사람'로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마태만이 그가 '부자'임을 의식적(義識的)으로 밝힌다. 사마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측면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던 마태는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사 53:9-12의 예언을 상기(想起)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다는 것(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함)과 요한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요셉은 재물이 넉넉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 곧 그의 추종자라 한다(13:52;28:19). 비록 요셉이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은밀(隱密)하게 예수를 좇았다고는 하나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받고 예수의 삶을 좇아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성 경: [마27:58]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빌라도에게 가서 -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요 19:38) 요셉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재차 확신하고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그 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본문의 '가서'(*, 프로설돈)란 긴급히 달려왔음을 암시하는 말로서,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 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貫澈)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철저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 명절에 즈음하여 이방인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했고 또 시체와의 접촉을 멀리 해야만 할 입장이었다(요 18:28).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儀式的)부정보다 예수의 장사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진정 신앙의 바른 도리에 입각한 자는 다른 어느 것보다 예수 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둔다.

⭕ 예수의 시체를 달라 - 마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요셉은 '당돌히'(용감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한다(막 15:43). 실로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요셉이 이같은 간청을 한 때는 아마 요 19:311에서 보듯이 일단의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접견(接見)하고 난 직후일 것으로 판단된다.

⭕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먼저 십자가 형장(形場)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막 15:44, 45)시체를 내어주었다.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없이 시체를 내어준 사실은 적어도 그가 예수는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공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절 참조).

성 경: [마27:59]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 요셉 혼자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시체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박힌 십자가를 뽑아 뉘운 다음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어야 했고 시체를 옮기는 채비를 갖춰야 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옮기는일, 씻는 일, 몰약을 썩는 일 등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 안에 요셉 혼자하기에는 사실상 벅찬 일이다.

⭕ 정한 세마포로 싸서 - 여기 '정한 세마포'란 질 좋고 깨끗한 아마(linen)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정한 세마포는 주로 시체를 싸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요한복음에 의하면 일찍이 예수를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와서 요셉을 도왔다고 한다(요 19:39). 또한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성 경: [마27:60]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 59절의 '정한'이라는 단어와 '자기의 새 무덤', 그리고 '큰' 돌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복음에서만 강조어로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서 '새'무덤이란 아직 죽음에 영향력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신 예수의 시체를 안치(安置)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행 2:27). 실로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의 휴식처였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의 위치는 갈보리 언덕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묘 교회(The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된다(Parrot). 그곳은 암석들로 구성되어 있어 돌로 깎은 무덤들을 쉽게 만수 있는 장소이다. 요셉은 모든 것을 '놓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진정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의 신앙의 성격을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헤드린의 결정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形言)할 수없이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실로 이같이 주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인일 것이다.

성 경: [마27:61]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예수의 장사]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가리킨다(56절 주석 참조). 실로 이 두 여인들은 예수의 장래를 주도하던 요셉과 일단의 무리들, 그리고 56절에 언급된 동료 여인듸이 모두 떠난 이후 어둠이 깔리는 그 무덤가에서 예수께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지을 길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로마법에 의하면 처형된 자들을 위하여 애곡(哀哭)하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하여 여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지로 참으며, 예수의 장사(藏事)를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진정 예수의 처형과 매장의 증인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인들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당시의 상황에서(M.Roshha-Shanah, 1:8)이 여인들의 증거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매장 장소에 두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것은 '두사람' 이상의 증언이 법적인 효력을 지녔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으심 내지는 부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3:1; 히 10:28). 이 증거와 기록은 모든 가현설(Docetism)의 도전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성 경: [마27:62]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예비일 다음 날 - 이 날은 안식일을 뜻한다. 그런데 왜 그냥 안식일이라 하지않고 예비일 다음날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1) 마태가 안식일이라는 말 대신에 '예비일 다음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25:57 에서 생략한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이다(Bonnard, Hill, 막 15:42 참조). (마태가 '예비일 다음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반적인 안식일(the last day of week)과 유월절 기간 중의 안식일(a feast-Sabbath)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안식일이 유월절 중의 안식일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표현을 썼다(D.a.Carson)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예비일'을 의미하는 헬라어 '파라스큐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날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보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안식일 가리켜 '파라큐에' 의 다음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나 세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 서로 반목(反目)과 질시의 대상인 양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있는데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 일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 18:28에 의하면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에는 궁전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않는다. 아마 그때는 그들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군중들의 눈을 피하며 하나둘씩 빌라도의 관정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의 부활 문제를 대두시킨 것은 부활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22:23) 사두개인 출신들인 대제사장들이 아니라 부활 교리를 확신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마27:63]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하되 - 여기서 '주여'(*, 퀴리에)란 총독에 대한 정중한 어법에 불과하다. 한편 '저 유혹하던 자'이란 유대 군중들이 고대했던 바, 예수가 해방자요 정치적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제(前提)로 한 말로서 진정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했기 때문에 '유혹하는 자'(deceiver)로 농락당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초대교회 당시에까지 지속되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세상을 미혹하던 사람'이라고 악선전(惡宣傳)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께서 사사로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고난과 부활 대한 예고(12:40;16:21;17:23:30:19)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그들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저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제자들은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잊어버렸는 데 반해 적대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그 무리들을 완전히 와해(瓦解)시켜 놓고도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공포 속에서 예수의 능력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가 기억하노니(*, 엠네스데멘). - 이 말은 기동적(起動的)부정과거 직설법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그 뜻은 '지금 막 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의미이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즐기다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체가 장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혹시 부활을 조직하여 거짓을 유포(流布)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돌연 예수의 말씀이 기억났을(12:40)것이다.

성 경: [마27:64]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그러므로 분부하여 - 당시 유대인은 로마 제국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 보존을 간청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치 능력을 인정받은 성전 수비대가 따로 있었지만 그 활동 범위는 성전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이다.

⭕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 여기서 '사흘까지'란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평소에 자주 예언하시기를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16:21;17:23;20:19)고 하셨으니 만일 사흘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한갖 사기꾼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動員)하여 예수 부활을 저지(沮止)함으로써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인간적 장애를 초월하시고 부활하셨으니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는 부활의 도(道)와 하나님의 권능, 기독교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고전 15:12-28).

⭕ 그의 제자들이...시체를 도적질하여 - 이는 그때의 정황으로서는 도무지 생각조차하기 힘든 억측이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은 죽음으로 끝난 예수께 대해 깊은 회의(懷疑)와 절망에 빠져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모두 숨어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예수의 부활로 인한 소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또 자신들의 말대로 예수의 시체 도난을 예방하기 위해 조급히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예수의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 여기서 먼저 '유혹'(*, 프라네)이란 63절'유혹하던 자'란 말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말로서 타인을 적극직으로 미혹하는 일종의 '사기'를 뜻한다. 실로 유대 지도자를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함으로써 '첫번째 사기'를 쳤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예언로써 '두번째 사기'를 칠 것으로 믿어 자신들을 보호하고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덤 파수(把守)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선동(煽動)보다 친히 부활함으로써 백성에게 끼칠 영향력을 더욱 두려워했던 것이다.

성 경: [마27:65]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비]

⭕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에케테쿠스토디안). -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현재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 지키라'고 해석한다(Roberrson, Lenski). 그러나 이에 비해 혹자는(D.A, Carson). 무덤을 지킨 자들이 대제사장들에게만 보내하고 빌라도에게는 보고 하지 않는 28:11 에 근거하여 본문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그같은 주장의 연장으로 본문에 나오는 '파숫군'은 로마 군인들이기 보다 오히려 레위인으로 구성된 성전수비대원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빌라도의 대답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의 허락이 아니라 냉소적인 말로 '너희들은 그 예수가 살아있을 때 두려워하더니 지금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구나 그렇게도 두려우면 너희들 힘으로 지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여라'의 의미로 해석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으나 본문을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명령법적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란 말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목적하는바 무덤 수비를 위해 자신의 부하 곧 로마 군인들을 활용하도록 하라는 지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파숫군'(*, 쿠스토디아)은 '네 명으로 구성된 군인'(러시어로 Custodia)이라는 뜻으로 유대 성전 수비대가 아니라 로마 군병으로 이뤄진 보초대, 경비대를 가리킨다(행 12:4). 어찌되었든 저들의 말대로 사람들이나 미혹하는 사기꾼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왜 그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마 저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를 탁월한 예언자정도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기득권(旣得權)을 위협할 때 저들은 지체없이 제거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완전히 반역(反逆)하는 경우이다.

⭕ 힘대로 굳게 하라(*, 이스팔리사스데 호스 이다테). - 이를 직역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스스로 그것을 튼튼히 지키라'이다. 즉 온갖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의미이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기의 권위롤 확실히 세우는 동시에 더이상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골머리를 앓지 않기 위한 처방(處方)을 내린 것이다.

성 경: [마27:66]

주제1: [메시야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무덤의 경과]

⭕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印封)하고 - 본문은 마치 '왕과 대신들은 사자 우리의 문을 막은 돌에 봉인을 하여 아무도 다니엘을 건져 내지 못하게 하였더(단6:17)는 다니엘의 체험을 연상케 한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다니엘이 갇혀있던 사자굴에서 무사히 나온 것을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시다가 그것을 뚫고 나와 부활하신 것에 대한 모형(模型) 또는 비유로 생각했다. 한편 유대 지도자들은 서둘러 무덤 봉쇄(封鎖)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큰 돌을 굴려 무덤 출구를 막은 다밧줄로 그 돌과 무덤 출구 양쪽에 동여맨 후, 밧줄의 중심부와 돌과 무덤벽 사이에 얽혀 있는 밧줄에 초나 흙으로 밀봉(密封)했다. 따라서 만약 출구에 조그마한 이상이 있더라도 이 인봉이깨어지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의 헛소문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용이했다. 실로 로마 제국의 추악한 정권의 인준(認儁) 하에 유대인들의 치밀한 간개(諫疥)로 포장, 인봉된 꾸밈이었지만 모든 노력은 얼마 후 수포(水泡)로 돌아가고 말았다. 안식 후 첫날 동시에 밝은 기운이 이는 동시에 메시야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구속하라는 무대에서 제거해 버리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부활의 항거(抗拒)할 수 없는 승리로 말미암아 하늘의 비웃음(시 2:4)을 사고 말았다.

성 경: [마28:1]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 `다하여 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읖세 데'(*)는 일반적인 시간 지시사로서 `이제...후에'(after)라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본문을 좀더 정확히 묘사하면 `이제 안식일이(완전히) 지난 후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막 16:1, 2; 눅 24:1; 요 20:1). 그렇다면 저녁 해질 때(오후 6시경)를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으로는 본 상황이 깊은 밤을 거의 다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의 문턱에 이미 들어선 때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대교회 신도들은 전통적으로 부활의 이 날을 기념했고 점점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요 20장 주제 강해 `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를 참조). 이제 길고 무거웠던 율법의 시대는 마감되고 부활의 주를 중심으로한 새 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은 오늘날의 일요일, 즉 주일을 뜻한다. 즉 이날은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라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요 20:19,'주일의 기원과 그 의미' 참조).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안식일을 한 주간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른 표현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답습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안식일 대신 `주일' 곧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발점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포스코'(*)의 원의미는 `날이 새다', `날이 밝아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적 어법으로 사용 되었을 때 그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시작되는 해질 때를 뜻한다. 눅 23:54에서도 금요일 저녁을 표시하기 위하여 `에피포스코'가 동일한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유대적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즉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막 16:2에 보면 `아나테일란토스 투 헬리우'(*) 즉 `해 돋는 때에'로 되어 있어 저녁이 아닌 아침 시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눅 24:1에서도 `오르드루'(*), 즉 `새벽'으로 되어 있어 그 시각은 마가복음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아피포스코'는 분명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새벽, 먼동이 트는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공관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활 사건이 안식일이 완전히 끝난 그 다음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아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이미 예수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는(27:61) 두 여인이 무덤을 찾아 왔다. 그 여인들은 안식일 동안에는 멀리 걷고자 아니했을 것이므로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간에는 무덤을 찾은 사람들을 기록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논의가 분분하다. 앞의 도표에서 보여지는 바 무덤을 방문했던 여자들의 명단이 복음서 간에 차이가 있는 것에 대해서 메이어(Meyer)같은 학자는 이 기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랑게(Lang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덤을 방문한 것은 2회에 걸쳐 있었는데, 일차 방문자는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세 여인들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세 여인 중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를 `다른 마리아'로 표현하고, 살로메를 생략하였다. 요한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곧 이차 방문자들이 었었는데 누가복음의 `여자들'은 이차로 무덤을 찾은 사람들이다. 랑게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많은 논의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이 전해 주고자 하는바가 구체적인 인명이나 숫자가 아니라 예수의 빈무덤을 분명히 목격한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임을 생각한다면 복음서들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각 복음서마다 무덤 방문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마가와 누가는 유대인의 관습 중 시체에 향료를 발라 냄새를 제거하려 했던 것, 특히 마가는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직후에 향품(香品)을 구입했던 것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마태와 요한은 산 사람을 생매장했을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장사한 지 삼일후 그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유대인의 전승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설도 있다(Thomas R.W Longstaff, The Women at the Tomb: Matthew 28:1 Reexamined). 어쨌든 예수의 무덤을 보고 그분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여인들의 예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은 그분이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변함없다. 이 초월한 사랑은 결국 예수 부활의 최초 증인이라는 영광스런 경험을 낳게 한다. 한편 예수의 부활로 인해 그녀들이 준비한 향품은 쓸모없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향유 도유로 인해 당신의 장례 절차를 마쳐두고 계셨던 것이다.

성 경: [마28:2]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큰 지진이 나며 - 2-4절은 마태만의 특수한 기록들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빈 무덤'의 발견만을 언급하지만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큰 지진'과 천사가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성경에서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것으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27:51; 출 19:18; 시 68:8; 행 16:26; 히 12:26). 따라서 여기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부활의 이면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엡 2:5,6). 27:51에서의 지진이 하나님의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이자 더 나아가 그한계를 드러내고만 율법 구세대(舊世代)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본문에서의 지진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 질서의 구원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하나님의 개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진과 돌의 굴림은 예수의 부활의 시점을 알려 주거나 부활한 예수를 무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이적들이라기보다 오히려 여인들과 다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알게 하며 더 이상 죽음 아래 머물러 있을 수없는 예수의 부활의 혼적을 친히 목도하게 하기위함이었다(McNeil). 실로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떨치시고 생명이 충만한 상태로 부활하시어(벧전3:18)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무덤을 막은 돌의 유무(有無)에 상관없이 무덤벽을 조용히 통과해 나가셨던 것이다요 20:19).

⭕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 여기 언급된`천사'(1:20-23; 18:10)에 대해서는 마가(`하얀 옷을 입은 한 청년')보다 마태와 누가가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천사적 존재들은 자주 구약 성경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으로, 그같은 표현상의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언급한 `청년'은 `천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Lane, Jos, Antiq.V,277).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천사가 `하나'인 데 비해 누가와 요한에서는 `둘'로 묘사되었데 이 차이 역시 본 사건이 초자연적 기사라는 점에서 각각의 경험과 그 기술하고자 하는 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봄이 적당하리라고 생각된다.

⭕ 그 위에 앉았는데 - 여기`앉았는데'(*, 에카데토)란, 미완료 시상으로서 마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게속 앉아있는 모습을 묘사한(실로 그 천사는 예수 부활의 산 증인으로 예수의 빈 무덤을 확증, 보존하는) 일을 수행했던 일종의 영광스런 도구였던 것이다.

성 경: [마28:3]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 천사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번개 같은 행상'이라는 묘사는 천사의 몸에서 매우 밝고 환한 광채가 나 있었다는 것과 `눈 같이 희 옷'에서는 그 존재의 순결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변형되신 모습(17:2; 막 9:3)을 연상케 하며 그 밖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묘사한 것과 흡사하다(단 7:9; 10:6; 계 1:13,1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초자연적인 천사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천사에 대한 묘사가 복음서마다 다양하게 되있는 마가복음에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16:5)으로, 누가복음에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사람'(24:4)으로, 요한복음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24:4)로 되어 있어 천상적(天上的) 존재의 신비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성 경: [마28:4]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수직하던 자들이...무서워하여 떨며 - 무덤을 지키도록 배치된 자들(27:64-66)이 지진과 더불어 일어난 천사의 임재 앞에 너무큰 충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들이 예수의 처형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직,간접적의로 듣고 보고 하여 무덤에 묻힌 자의 실체(實體)가 큰 의미를 둘 만큼 대단치 않은 존재라고 방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보호벽(무덤)을 뚫고 예수는 부활하셨던 것이다. 진정 그들의 두려움은 죄인이 성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포였다(창 3:10). 한편 본문의 `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세이스데산'(*)은 `흔들다'는 뜻의 `세이오'(*)의 제 1과거수동형으로 `흔들리게 되었다'는 뜻을 가지는데 27:51에서 땅의 진동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재앞에 선 죄인들의 실존적 모습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사 6:4,5). 이와 더불어 본문에는 수직하던 자들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보고하는데, 아마 그들은 상상을 초월한 눈 앞의 이적들에 압도당하여 잠시 혼절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갈은 잠시간의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 곧장 성내로 달려가 그들의 목격담을 전하게 된다(11절). 진정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훼방꾼이 아니라 너무도 확실한 증인의 역할을 하고 만것이다. 참고로 계 1:17에는 사도 요한이 부활의 주님을 볼 때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마28:5]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너희는 무서워 말라 - 천사는 먼저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한다. 여기서는 `너희는'(*, 휘메이스)이라는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권능 앞에 사색이 되어있는 무덤지기들은 배제된 채 여인들 에게만 무서워 말라는 말이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두려움에 방치되어 버려질 사람이 있고 두려워 말라고 하는 선택적 위안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못 박히신 예수를...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천사는 여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천사의 말에서 강조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이다. 즉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강조는 분명한 죽음이 분명한 부활의 전제(前提)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함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이 결코 외롭게 고립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함께 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함이 인정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 경: [마28:6]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는 계시의 중개자로서의 임미를 띠고 있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뜻을 전달시켜주기 위해 천사가 꿈에 나타났었는데(1:20 ff). 이와 평행을 이루어 복음서의 마지막에 계시의 중개자로서 또다시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리며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는 예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으로 12:40; 16:21; 17:23; 20:18, 19절에서 예언한 `부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여기 계시지 않고'라는 말은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므로 예수가 죽어서 무덤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제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바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그가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은 예수의 자력(自力)적인 행위를 강조한 말로서 예수의 신적 전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의 진리를 설명하는 몇몇 성구들(16:21; 17:23; 롬 6:4; 8:11)에는 부활이 성부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공동 협력에 의한 신적인 승리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 `빈 무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대목으로 `빈무덤'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의 `빈 무덤'을 인정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28:11-15). 사실 예수가 죽어서 누웠던 자리에 있지 않음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즉 예수가 부활했거나 아니면 적대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는 적대자들의 주장은 모순을 드러내는 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된다(13절 주석참조). 그렇다면 유일한 하나의 가능성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분은 확실히 자신의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죽었던 그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다(빌 3:21).

성 경: [마28:7]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빨리 가서 - 예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그 무덤 앞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천사들은 그 여인들에게 예수 부활의 메시지를 가지고 황급히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었다. 이는 분명 권유가 아니라 촉급한 명령이었다.

⭕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 본문과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7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을 분리시켜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가 마가보다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부활의 예언을 망각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에 대한책망의 말씀일 수 있기 때문인데 마가는 베드로를 따로 분리시켜 그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베드로의 대표적 불신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26:69-74). 실로 베드로는 세번에 걸쳐서 예수를 부인하기까지 했었던 것이다(14:66-72). 그에 반해 마태는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지 않고 제자들 속에 포함시켜 말함으로써 제자들 모두의 공동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것이다. 혹 이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실망 가운데서 고독해하고 있을 제자들에게 보내는 기쁨의 소식이라고 해도 베드로에 대한 특별성이 언급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주의 부활'이라고 하는 기쁨의 소식은 각각의 제자들 모두에게 동일(同一)한 기쁨이 됨을 말해 주는 것일 수 있다.

⭕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 천사가 여인들에게 거듭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제자들이 이 말씀을 전해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26:32의 말씀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를 회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말씀에 따른 성취에 앞서 유대 지경에서 여인들과 엠마오의 두 제자 및 소그룹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공식적인 현현은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갈릴리에서 두 번 나타나시게 된다(16-20장; 요 21장). 이제 갈릴리는 더 이상 어둠과 소외의 현장이 될 수 없었고 복음과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대두되게 된 것이다(행 10:37).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딩신의 제자들을 대부분 부르셨던 갈릴리를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행 1:11) 처소로 만드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가시나니'(*, 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아니라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로써 예수께서는 약속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이다(10절).

⭕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 특별히 본문의 `일렀느니라'(*, 에이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선언시에 흔히 사용하던 문구이다. 따라서 천사의 이 말은 계시의 중개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종결 문구인 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확증적임을 선포하고 있다.

성 경: [마28:8]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무덤을 지킨 천사의 증언]

⭕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전해들은 여인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묘사해 주고 있다. 평행 구절을 이루고 있는 막 16:8에서 여인들의 상태를 `놀람', `두려움'의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본문에서는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대비(對比)시킴으로써 한편은 천사의 임재를 위시한 초자연적인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 소식에 접하여 `큰 기쁨'을 느끼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체험할때 생겨나는 심리 상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 초자연적 사건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으나, 그 사건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자각할 때 한없는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통일되면서 인간은 진정한 신앙적 희열을 느끼게 된다.

⭕ 제자들에게 알게하려고 달음질할새 - 이 부분도 막 16:8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천사가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7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에서는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들은 후 `큰 기쁨'에 차서 천사의 고지(告知) 사항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달려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와 마태의 교훈적 강조점이 다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마가는 예수의 측근들에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로마의 혹독한 탄압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날 위기에 처해있는 마가의 공동체에게 제자들처럼 나약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동시에 신앙을 지키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제자들도 실패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신앙인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한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반면 마태 공동체의 경우는 마가에 비해 덜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어두운면보다는 예수의 부활의 기쁨을 기념하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기쁨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 경: [마28:9]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여인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 예수의 부활 증거로 '빈무덤'에 이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현현(顯現)하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현현을 최초로 목격하는 행운을 부여받은 것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여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며 단지 재산 목록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던(출 20:17)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께서 부활 후 처음으로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이자 부활의 증인으로 인정 하셨음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서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서 여인을 택하심으로 최초의 범죄자 하와의 후손들이 겪은 슬픔과 고통을 변하여 큰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셨다(Chrysostom). 한편 예수의 인사말 `평안하뇨'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말인 헬라어 `카이레태'(*)의 번역으로 `기뻐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사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때 제자들이 근심하게 될 것이나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고 하셨던 예언을 생각나게 해주며 예수 부활 소식을 들었던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었듯이(8절) 예수의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 에게 있어서도 근심과 기쁨의 감정을 교차케 해주는 역설적 사건임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이 말씀은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여자들이...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와 같은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절대인 존경과 경외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즉 이 여인들의 이 갈은 행위는 결단코 공포나 어떤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취한 피동적인 경배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방금 전해들은 그 여인들이 변화된 예수의 영광스런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신적인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심히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경배였다. 이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불잡고자 했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요20:17,17)이 여인들의 행위(온전한 경배로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짐)를 기쁘게 용납해 주셨던 것 같다. 이로써 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눈으로 보고 또 손으로 만지는 가장 확실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성 경: [마28:10]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여인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문은 표면상으로 5-7절의 천사의 말을 다시 예수께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예수께서 천사의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천사가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지진이 일어나며 무덤문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 앞에서 무서워하는 여인들을 안심(安心)시키는 것임이 자명하다(5절). 그것에 비해 지금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인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안심을 했고 이제는 오히려 `큰 기쁨'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한 여인들이 예수를 보았때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사건 앞에서 마냥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반가움과 기쁨이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인들에게 전해진 `무서워 말라'는 말은 무덤에서의 사건과 갑작스러운 예수와의 대면에 의한 여인들의 공포를 일소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그녀들의 주를 잃은 절망이라고 볼 수있다. 그리고 주를 잃은 절망과 두려움은 아직도 예수의 부활을 모르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더 넓게는 마태의 공동체에게 더 심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무서워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직접적 대상인 여인들을 넘어 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위로(慰勞)의 말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하였다(7절).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Lange, Wycliffe)은 `내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11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형제들'에 대한 본서의 용례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태는 5:22-24; 18:15; 23:8 등에서 `형제들'이라는 말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친교적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했었다. 그리고 12:49, 50 에서는 `내 형제'라는 표현을 11사도를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네 형제들'은 11제자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예수의 부활 소식은 11제자들 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으로 확대되어 전해져야 했던 것이다(Stonhouse, Witness of Matthew, pp. 176-177). 한편 마태는 무엇때문에 갈릴리의 부활 현현에 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마태복음 전체를 꿰뚫는 두 가지 주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메시야는 천대(賤待)받는지역에서 나와(2:23) 그 천대받는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4:15, 16).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5:3).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유대인 중에서도 무시당했던 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1,5-7절; 27:55, 56). 둘째,이방의 갈릴리(4:15)는 마태복음에서 이방 선교라는 차원높은 주제와 잘 조화된다는 것이다(1:1; 2:1-12; 4:15,16; 8:5-13; 10:18; 12:21; 13:17;15:21-28; 24:14).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위대한 지상 명령 즉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것이다(18-20절).

성 경: [마28:11]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여자들이 갈제 - 본 구절은 4절 내용과 연결된다. 즉 여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전하러 가는 동안, 잠시 혼절했던 무덤 경비대원들은 황급히 지금껏 되어진 일을 고하기 위해 성내로 내리달렸다.

⭕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 여인들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대비되어 무덤지키던 자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중요한 일을 빌라도에게 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파숫군들이 로마의 병사라기 보다는 성전 소속의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Carson). 그러나 27:65에 언급하였듯이 이들 파숫군들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도록 유대인들에게 인계된 빌라도 휘하의 로마 군병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실로 그들은 산헤드린의 명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곧장 산헤드린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지금껏 경험한 사실을 대체적으로 객관적 입장에서 보고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보고는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이기 보다 지진, 천사, 빈무덤등 능히 부활이라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목격했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Bonnard). 한편 대제사장들은 파슷군들로부터 무덤에 있었던 신비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들었을 것이고,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지각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이기도 했으므로(12:38; 26:67, 68),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했어야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전혀 반대의 양상을 나타낸다.

성 경: [마28:12]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 파숫군들의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은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예수의 부활을 은폐(隱蔽)하고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릴 계략을 펴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예수를 죽이려고 유다를 은 삼십에 매수했던(26:14, 15) 저들은 이제 또 부활한 예수를 다시 매장시키려고 `많은 돈'으로 파숫군들을 매수하고 있다. 여기서 그 돈의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총독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가 만족할만한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Wettstein)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은 진리에 있지 않았고 오직 편법(expedience)과 백성들의 여론에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8:13]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그의 `제자들이...도적질하여 갔다하라 -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소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러나 저들의 조작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즉 잠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인데, 무덤지키는 파숫군들이 엄격한 규율을 어기고 잠잤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잠이 들었다 하더라도 잠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믿기는 더욱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겁많고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공포에 떨던 제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무덤을 열어 젖힐 용기를 가졌겠는가? 또한, 가정해서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의 범죄 사실을 입증해 주는 어떤 증거를 갖고 있었다면 왜 기소하지 못했단 말인가? 한편 고대 세계에서 무덤에 해를 입히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고. 때로는 사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편이었다. 가이사(Caesar)의 나사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은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물론 이 비문과 예수의 사망과의 관계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무덤 보호 규율은 상당히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B.M.Metzer). 여하튼 저들이 퍼뜨린 소문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잔꾀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난다.

성 경: [마28:14]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총독에게 들리면 - 이는 군인 의무규정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빌라도 총독의 심문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Meyer).

⭕ 우리가 권하여 - 문자적으로`우리가 설득하여'가 된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이 일이 어렵게 되면 무덤 파수 임무를 맡았던 군병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임무에 충실했노라고 말로써 설득할 뿐 아니라 빌라도의 마음을 뇌물로 설득(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 실로 파숫군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빌라도가 안다고해서 그다지 심각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무덤을 지키는 일은 빌라도가 지시한 일도 아니거니와(27:64,65), 대제사장들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돈으로 빌라도를 매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방법은 그 당시에 유효하고도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마28:15]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매수된 병사들의 거짓 소문]

⭕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본문에서 `오늘날까지'라 함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인 A.D.50-70년경을 뜻한다. 그런데 A.D. 150년경에 초대 교부 저스틴(Justine Martyr)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cum Tryph., 108)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한 거짓말이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니 이 거짓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위 `도적설'이라는 부활 이설(異說)로 남아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한편 A.D.165년 경에 기록된 베드로 복음서 11:46-49에 의하면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 유대인 -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유대인'이라는 표현법을 마태가 사용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여기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구분이 될 정도로 갈라져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서 마태는 기독교인과 대별되는 말로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성 경: [마28:16]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열 한 제자 - 27:5에서 보도된대로 열 둘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가 죽었으므로 열한 제자만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릴리.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나타내 보이셨는데 마지막선고 명령이 주어지는 곳으로 갈릴리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복음서는 본서 뿐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의 상징이자(4:15), 예수의 주된 관심사인 소외(疏外)된 사람들 즉, 로마제국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유대교의 거짓된 종교인들로부터 기만당하는 민중들의 도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쨌든 마태는 갈릴리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명령(7,10절; 26:32)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의 유대현현 등과 같은 다른 기사들을 모두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 이 산은 예수께서 이미 명하셨던 곳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과연 그 산이 어떤 곳인지(혹 다볼 산 또는 팔복산이라고도 하나 확실치 않다) 복음서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예수께서는 분명 부활 이후 몇번의 현현 중에 이미 제자들과 당신이 익히알고 있는 산을 지명하셨음에 틀림없다. 실로산은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곳으로 하늘의 대명령을 땅에 선포하신 지상 명령에 (the Great Commission)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사실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예수의 가르침이 베풀어지며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장소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이다(5:1; 8:1; 17:1,9; 24:3; 26:30). 구약에서도 산은 매우 중요한 곳으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고(출3:2이하)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다(출 32:15). 여하튼 예수의 지상 명령(18-20절)과 갈릴리의 한 특정 지역이 관련된것은 예수의 비참한 배경과 이방 선교라는 본서의 대주제와 함께 연결된다(10절). 한편 많은 권위있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이 장면을 고전 15:6에 바울이 기술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이곳 소집에 대하여는 3회에 걸친 예고가 주어졌으며(7, 10절; 26:32) 그것은 지상 대명령을 (18-20절) 전달하신 회집이었고 갈릴리는 로마 정부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간섭을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곳으로서 500여명의 군중이 일거(一擧)에 모이기에 적합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성 경: [마28:17]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 예수를 뵈옵고 - 물론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모인 500여명의 형제 가운데 많은 수가 예수의 부활체를 처음, 그리고 경악에 가까운 상태로 목도하였을 것이다.

⭕ 경배하나 -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9절; 2:8; 4:9). 또한 이 단어는 `절하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9:18; 14:33; 15:25)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을 `절하다'로 번역하고있다. 본문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패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승리하신 분으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은 다른 곳(눅 24:10,11; 요 20:24-29)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보고도' 의심한 본절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난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첫째 난제는 그 의심하는 자가 11제자 중에서인지 아니면 500명 형제 중에서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여기서 `경배하나'에 해당하는 `프로스쮜네오'가 단순히 `무릎을 꿇다',`...에게 경의를 표하다'는 약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경배(敬拜)하다'는 뜻 으로 사용되었다면 `11제자들'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는 다른 두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배(예배)하는 자가 예수가 누구였는지 몰랐을 리가 없고, 또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을리 없겠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의 확실한 목격자였던 마태는 그가 그때 그곳에 없었던 본서의 독자들이 의심을 제기할지도 모를 위와같은 사항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실들에만 기억을 돼살려 생생히 묘사했던 것으로 보인다(8절).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오히려...있더라'(*, 호이데)의 읽기를`...자는 없더라'(*, 우데)는 읽기로 고침으로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는 큰 무리가 있는 읽기이다(Beza 사본, Bornemann). 두번째 난제는 의심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제쳐 놓고라도, 도대체 왜 의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에디스타산'(*, <더러는> 의심하였다)은 신약에서 이곳과 14:31에서만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불신앙이 아닌 망설임을 뜻한다(`비록 더러는 주저하였으나',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I.P. Ellis). 어쨌든 주저한 자들이 11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이었을 지라도 그들이 왜 의심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여기에 대해 혹자는 (Hendriksen, Grosheide, Filson, Walvoord) 부활을 의심한 것이아니라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시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부활후의 현현에서 항상 즉시로는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생시(生時)와 변화상태와의 너무 큰 차이 때문에 그 무리들이 `과연 그가 예수인가?'하고 의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파르쿠르스트(L.G.Parkhurst,Matthew 28:16-20 Reconsiderd, p. 179)는 의심한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나 혹은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경배함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18절의 말씀으로 그러한 주저하는 마음을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건드리(Gundry)는 말하기를 17-20절은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의심을 쫓아낼 수 있다(심지어 부활 현현조차 의심을 쫓아내지 못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마태의 근본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18절은 17절이 아니라 19절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18절이 17절의 의심을 쫓아버린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Dunn,Jesus p.124).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기 본문이 눅 9장이나 요 21장에서처럼, 모든 의심이 제거되었다고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여하튼 마태의 기사가 간결하기 때문에 마태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11제자가 아니라 그밖의 다른 제자들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불신앙과 공포에서 신앙과 기쁨에로의 변화는 주저하는 중에 서서히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미 두번이나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베드로는 적어도 3번, 도마는 1번) 11제자는 이 새로운 현현에 마주쳐 즉시 경배할수 있었겠으나 다른 제자들은 머뭇머뭇 주저(躊躇)했다. 실로 그들은 거듭된 예수 자신의부활에 대한 예언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는 절망에 휩싸였고, 당분간 완전한 신앙에로 복귀하기까지 의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마태는 다음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태의 간결한 기사는 이 사실을 이미 전제한다. 왜냐하면 어떤 복음서 기자도 그 구속사의 획기적인 사건을 간과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의 주제적 관심들을 오직 주님의 선교 지상 명령에 집중시키고자 그 사건을 생략한 것이다.

성 경: [마28:18]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지상 명령]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먼저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수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마28:19]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지상 명령]

⭕ 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 세례를 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세례' 또는 `침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Beasley-Murray, Baptism pp.90-92).

성 경: [마28:20]

주제1: [부활하신 예수]

주제2: [지상 명령]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 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 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 - 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 볼지어다(*, 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 `항상'(*,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의 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