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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

마태복음주석(1장-28장)

성 경: [마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계보 개관(槪觀)]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으로 믿고 소개했던 저자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예수께서 혈통적, 법적 자격에 있어서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실로 다윗 왕권이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근 6세기가 흐르는 동안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자라는 법적 근거, 곧 그분의 정통성(royal legitimacy)을 증명하지 않는 한, 절망 속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환영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마태는 혈통과 족보를 중시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진정 참 이스라엘인이자 다윗 가문의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시켜야만 하는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절의 두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머리에 기록한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후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당초 유대 백성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1-3;17:7).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있다(창 22:18;갈 3:16).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히 그를 버리지 않으시며(시 89:29), 그의 자손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나라를 계승하게 하고 나아가서 그 계승한 왕에 의하여 그 왕위와 나라가 영원토록 견고히 보전되게 할 것이라는 메시야 언약을 주셨다(삼하 7:12-16). 한편 이와 더불어. 선지자 이사야는 '한 아기', 즉 인간으로서 생각지 못할 기이한 칭호(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를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인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예언한바 있다(사 9:6, 7). 이 예언에 따라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을 곧 오실 메시야로 더욱 확증짓게 되었다(Berger). 이는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확정적으로 인정되었다(행 13:23;롬 1:3;계 22:16). 여하튼 하나님의 언약이 오랫동안 지연(遲延)되기는 했지만, 이제 예수는 다윗에게 주어진 나라에 대한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방의 모든 세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다윗의 그루터기에서의 햇순으로 그 뿌리의 새싹으로 돋아나신 것이다(사 11:1). (2)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이상적 왕이심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실질적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요, 히브리 신앙 공동체의 창시자이며(창 12:2;15:6), 다윗은 히브리 왕국의 실제적인 창시자요(삼하 7:12-16) 유대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며 위대한 왕이었다. 마태는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혈통을 이은 예수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苦待)하던 절대적 통치자요 진정한 왕,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행 2:30). 이제 다윗의 왕권은 근 6세기만에 영원히 회복된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즉 마태는 이들 믿음의 조상(창 15:6;롬 4:3)들이 유대 백성들을 대표하여 불리워진 바 있듯이(창 18:18;삼하 7:26) 그리스도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구속 사역을 통해 영영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분이심을(히 9:28) 묵시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 자손(*, 휘오스). -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독특하게 사용된 용어로서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밝히는 말(*, 테크논)이 아니라 법적인 측면에서의 정식 후손을 가리킨다. 이 말은 때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왕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 예수 그리스도 - 역사적, 사명적 명칭(예수)과 직능적(職能的) 명칭(그리스도)이 결합된 구세주의 공식적 호칭이다. 이는 '예수야말로 구약 예언에 따라 오신 메시야이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명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복합 명칭이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다가(1, 18절;16:21;막 1:1 등에만 사용됨) 변증적, 교리적 입장에서 기술된 서신서들에서 자주 사용된 것은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수태 고지(受胎告知)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21절) 구세주의 인류 구속에의 사명이 내포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서 히브리어의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언제나 '메시야'란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16:16).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란 말은 어떤 특별한 직무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된 자를 가리키는 데 그렇게 기름부음은 받는 자는 대체로 왕(삼상 16:13)과 제사장(레 8:12)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사 61:1)였으며(그리스도는 이 모든 직무에 임명됨), 드물게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시 105:15),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등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여하튼 다윗의 후손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삼상 2:10;삼하 7:12-16;시 2:2;105:15)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메시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 그리고 약속된 종말론적 통치릍 이 땅에 소개(introduction)시킬 자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서는 특별히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적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23절;2:2, 6;3:17;4:15-17;21:5, 9;22:42, 45;26:64;27:11, 27-37). 더욱이 마태가 1장에서만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되신 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약 18회의 '그리스도' 명칭이 등장하는데 본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직분을 나타내는 칭호로서가 아닌 단순한 이름(name)처럼 사용되고 있다.이는 적어도 예수의 부활을 생동감있게 체험했던 자들에게는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오실 '그분'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또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실존적 존재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 혹은 '그리스도'로 점점 빈도 높게 사용하였다. 세계(*,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는 '탄생의 기록', '역사의 기록','족보의 기록'(a record of genealogy, NIV)등의 뜻이다. 한편 이 말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견해는 (1) '족보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를 때 단지 족보 기록(1:1-17)에 국한된 내용에만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Calvin, Beza, Bruce). (2) 그리고 '탄생(birth or origin)의 기록'이라는 번역을 따르게 되면 본서의 서론(1:1-2:23)부분 전체와 관계된 제목이라 할 수 있다(Plummer). (3) 마지막으로 '역사의 기록'이란 번역을 따르게 되면 마태복음 전체, 또는 복음서 전체의 서두와 연관된 서언으로 볼 수 있다(Eulthy, Zigab, Ebrard). 이같은 표현은 70인역(LXX)의 창 2:4에서 창조의 대략을 설명할 때(창 2:4-25)와 창 5:1에서 계속 이어지는 아담 자손의 족보를 열거하는 문두(文頭)에 사용되었다. 한편 '탄생'(*, 게네시스)이란 명사가 18절에 재언급되기 때문에 1절에 제시된 표제어 형식의 표현은 그 내웅 범위가 족보를 소개하는 이상의 포괄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명사가 책 한 권내지, 어떤 장문의 문서 전체를 포함하는 표제어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말은 1, 2장을 한 단위로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 (2) 번의 주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실로 구약이 세계의 발생 기원에 관한 책(창세기)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신약은 그 세계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탄생 기원에 관한 책'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족보의 위대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성 경: [마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 예수의 족보는 선민 이스라엘의 합법적 조상이자, 처음으로 메시야 언약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창 12:3).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나 기타 자식들(창 25:1-3)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둘째 아들 이삭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언약에 따라 태어난 후손만이 메시야의 혈통을 이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선택적 의지를 반영한다(창 15:4;17:1-22;21:1-7). 한편 이삭의 츨생은 소망이 단절된 죽음의 태(胎)를 열고 출생했다는 점에서(히 11:11, 12) 사망의 권세틀 깨치고 새생명의 환희를 제공키 위해 탄생하신 예수의 출생을 예표(豫表)하기에 적절하다.

⭕ 낳고(*, 겐나오) - 이를 번역하면 '...의 아버지라'(was the father of,NIV)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반드시 친자(親子)를 뜻한다기 보다 그 혈통에 이어지는 직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때로 '...의 조상이다', '...의 조상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장의 족보 내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 이삭은...그의 형제를 낳고 - 마태는 이 이름들에서 족보 이상의 것, 즉 선택받은 나라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삭, 야곱, 유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6절)등이 장자 신분이 아닌 동생들로서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육적 신분의 탁월성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독특한 방식, 즉 '낮은 자를 높이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興起)시키는'(욥 5:11;겔 21:26 )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다. 사실 야곱의 12 아들 중 혈육상의 장남은 르우벤이었고, 야곱의 애정은 요셉에게로 많이 기울어졌지만,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들어 메시야를 일으키셨다. 실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은총은 인간적 혈통을 초월하여 진행된다(요 1:13). 특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이 족보에 이름이 오른 이유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야곱의 예언(창 49:10)대로 그에게서 다윗 왕가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와 함께 열 두 형제를 언급한 것은 (1) 12지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여 천국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 (2) 유다에게서 나신 그리스도가 구약의 언약 공동체인 12지파 전체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메시야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로 모으시는 영적 이스라엘(야곱)의 모든 자손들이 공유(共有)할 것임을 나타낸다.

성 경: [마1: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유다는 다말에게서 - '종려나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다말은 원래 유다의 아들인 엘의 아내였으나, 그 남편이 죽자 그의 시아비 유다를 유혹하여 득남했던 집요(執拗)한 여인이다(창 38:6;대상 2:4). 한편 모계를 무시하는 유대인의 족보 관습상 다말을 포함하여 본 족보에 등장한 네 여인의 이름(다말, 라합, 룻, 밧세바)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물론 예수의 족보 서술상 반드시 필요한 마리아는 제외하고서). 여하튼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은 심대(甚)한 것으로서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이들 중 밧세바를 제외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모든 족속들에게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2) 룻을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이 불륜을 저지른 수치스러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21절)이신 예수께서 죄는 없으시되 '죄 있는 육 신의 모양'(롬 8:3)을 그대로 취하여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빌 2:5-8)이심을 확연히 드러낸다(Meyer, Plummer, Carr). 또한 룻 조차도 근친 상간에서 시작된 모압 여인(룻 3:1-4:12)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의 광대무변하심을 엿볼 수 있다. (3) 이 네 여인은 모든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계시하고 있으며, 이는 마리아의 예수 수태(受胎) 또한 하나님의 불예측적 섭리(눅 1:29)에 기인된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베레스와 세라 - 이 둘은 쌍동이였기 때문에(창 38:27) 동시에 언급된 것 같다. 한편 이들로부터 다윗까지의 혈통은 룻 4:18-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헤스론(창 46:12;대상 2:5), 람(대상 2:9), 아미나답(4절;출 6:23;민 1:7;대상 2:10), 나손(민 2:3;7:12;대상 2:10;눅 3:32), 그리고 살몬(5절;룻 4:20-21;대상 2: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인바, 베레스로부터 모세 당시의 아미나답까지 네 세대가 교체되는 기간이 약 4백년(창 15:13;출 12:40)이나 된다는 사실은 본 족보에서 최소한 몇 명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성 경: [마1: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나손은 살몬을 낳고 - 여기서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서 광야 생활 중 회막 예물 헌상시 제 1일에 예물을 드렸던 자이다(민 7:12).

성 경: [마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아브라함부터 이새까지의 계보]

⭕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 본문에 언급된 라합이 여호수아 2장과 5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기생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한 전승에 따르면 라합이 여호수아의 아내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그녀가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두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인 살몬의 아내라고 전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은 후자의 자료를 따르고 있다. 특별히 마태는 라합의 이름을 통해 그녀가 우상 숭배로 만연(蔓延)된 가나안 땅에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수 2:11)으로 말미암아 선민(選民)의 대열에 동참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룻에게서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시모(媤母)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믿음의 산 증인이다. 한편 신 23:3에 의하면 모압의 후손들은 십대(十代)뿐만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규례조차도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통하여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혤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약속의 자녀(롬 9:8)로 환영 되어진다.

성 경: [마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다윗왕 - '왕'이란 표현에서 본 족보의 주제가 왕위 계승적 혈통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오직 그만이 '왕'으로 기록된 것은 왕권의 언약이 그와 더불어 맺어졌고, 그의 왕권은 메시야 왕권의 예표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왕'이라는 단어는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통일 왕국에 대한 깊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위대한 다윗왕의 자손'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가 다윗의 위(位)를 계승할 자(눅 1:32)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 우리야의 아내 - 하나님의 축복의 광채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수도 있었던 다윗의 부끄러운 범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태는 밧세바를 우리야의 아내(삼하 11:3)라고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혈통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오점(汚點)을 드러냄으로써 왕국 건설에 있어서 여하한 인간의 공로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 솔로몬 - 다윗이 자신의 간음죄를 참회(懺悔)한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다시금) 덧입은'(*, 여디디야,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삼하 12:25) 증표로 얻었던 아들이다. 이는 결국 메시야의 혈통이 인간의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적 회복과 은총이라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에서 두번째의 14대가 시작되며 그들의 명단은 대상 3:10-24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의 족보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눅 3:23-38)이 서로 다르다.

성 경: [마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르호보암은...아사를 낳고 - 사악했던 왕 르호보암이 악한 왕 아비야를 낳고, 악한 왕 아비야가 선한 왕 아사를 낳은 것처럼 이 족보의 혈통에 있어서 선과 악의 명백한 패턴은 없다. 그러나 비록 그들 악한 왕들의 불순종과 배역(背逆)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악한 생각이나 책략들을 지배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그들의 혈통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마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 8:26), 요아스(왕하 12:1), 그리고 아마샤(왕하 14:1) 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서 (1) 마태가 인용한 족보에서 이미 그 이름들이 생략되었기 때문, (2)히브리 원문에 대한 70인역(LXX)의 독법(讀法)의 잘못 때문(Alen, Calvin), (3) 그들이 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과 이세벧(왕하 8:27)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간악한 왕후이자 왕위 찬탈자(왕하 11:1-20)인 아달랴(왕하 8:26)의 자손이므로 3, 4대에 걸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계율(출 20:5)에 따라 생략(Ebrard, M. Henry), (4) 히브리 문학적 기교(技巧)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마태가 고의적으로 생략함(Jerome, Light-foot, Carr) 등이 있는데 마지막 14대에서도 명단을 단축시킨 것으로 보아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17절).

성 경: [마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전까지의 계보]

⭕ 웃시야는 요담을 - 여기 언급된 웃시야는 아사랴(대상 3:12;왕하 15:13, 17-20비교)와 동일 인물이다.

성 경: [마1:1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 히스기야는 29년간 재위하는 동안 남왕조 유다 역사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던 신앙적.민족적으로 탁월한 왕이었고(왕하 18-20장), 그의 아들 므낫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바벨론 포로의 근본적인 원인자가 될 만큼 유대의 운명을 좌초(坐礁)시킨 악한 왕이었다(왕하 24:3). 그럼에도 므낫세가 앞의 족보에서 탈락된(8절) 세 사람과 다른 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크게 회개하여 은혜를 회복하였다는 점이다(대하 33:12, 13).

성 경: [마1:1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고정]

주제2: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 전까지의 계보]

⭕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 - 유다의 3차에 걸친 바벨론 유수(幽囚) 중(B.C. 605, 597, 586년) 본 족보의 기사는 제 2차와 제 3차인 여호야긴(여고냐)과 시드기야(맛다니야) 시기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항목 참조.

⭕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 유다의 왕위 계승의 순서대로 살펴보면 여기에서도 몇 사람의 이름이 누락(漏落)되었다. 요시야의 네 아들(대상 3:15;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중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아김)이 애굽의 간섭에 의해 그의 형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왕에 즉위하였다(B.C. 608년;왕하 23:34). 이 시기에 애굽은 신흥 제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갈그미스 전투에서 대파(大破)당했고(B.C. 605년;렘 46:2-12)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여호야김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여고냐)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고(B.C. 597년;왕하 24:6-16), 바벨론의 2차 침략때 여호야긴과 그 모후(母后) 그리고 신하와 방백 등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2차포로;B.C. 597년). 그리하여 바벨론은 여호야긴 대신에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았다(B.C. 597년;왕하 24:17). 이때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최후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유다를 통치하였다(왕하 24:17-25:7). 한편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세 사람이 빠졌는데, 이것은 8절에서의 경우처럼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형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여고냐에게 두 숙부에 해당하는 여호아하스, 시드기야가 그의 형제로 취급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여고냐, 곧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이란 이름과 혼동하여 사본 기록자가 잘못 기술했다는 학설(Clarke)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보다 오히려 여호야김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으로 보고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욱 환영받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그의 형제'란 말은 히브리 문학 기교상 가까운 친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거나, 아니면 여고냐와 바벨론의 학정(虐政)을 같이 경험한 동족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Gundry). 한편 유다의 마지막 통치자 시드기야가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다윗왕의 혈통이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마1:1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 - 이 말은 다윗 혈통의 왕권이 두번째 포로(B.C. 597)로 인하여 사실상 종말을 고했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마치 무덤 속과도 같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다윗의 혈통을 '남은 자'들을 통해서 존속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라고 야곱이 예언한 그대로이다.

⭕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 예레미야의 기록(렘 22:30)에 따르면 여고냐는 무자(無子)하여 혈통을 잇지 못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의 기록(눅 3:27)에 의하면 스알디엘은 네리의 친아들이었다. 이러한 난맥(亂脈)상을 종합해 본다면 결국 양자의 절차를 통해 세리의 아들 스알디엘이 여고냐의 뒤를 이어 다윗의 혈통를 잇게 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한 대상 3:19에 의해 본 구절은 난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대체로 스알디엘을 스룹바벨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다(스 3:2;5:2;느 12:1;학 1:1;2:2, 23). 마태도 바로 이 기록에 근거해 본 족보를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난점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안은 계대 결혼 제도(신 25:5-10)이다. 스알디엘이 후손 없이 일찍 죽었다면 브다야는 마땅히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위하여 스알디엘의 아내, 곧 형수(兄嫂)에게서 스룹바벨을 낳았을 것이다. 한편 스룹바벨은 제 1차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 중수 사역을 지휘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스 1-5장). 이는 다윗의 혈통에 꺼지지 않고 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케 한다. 그리고 여기 스룹바벨은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예표가 되고 있다(학 2:20-23).

성 경: [마1:13-1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아비훗은...야곱을 낳고 - 여기에 기록된 이름들은 본 족보 이외의 곳에서는 나타난 바 없다. 이에 대하여 건드리(Gundry)는 아비훗과 야곱 사이에 실린 이름들이 변형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름들을 '마태가 보는 관점, 즉 왕적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대상 6:3-14에 기록된 제사장 혈통에 기록된 이름들 가운데 이 이름들을 찾아블 수 있다.

성 경: [마1:16]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야곱은...낳았으니 - 요셉의 왕족 혈통은 밝혀졌다. 그러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헬리의 아들로 보고 있다(눅 3:23). 이 난제에 대해 초대교회 전승들은 (1) 맛단에게 야곱과 헬리,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야곱은 외딸 마리아를, 헬리는 요셉을 각각 낳았는데 여기서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야곱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Chagig). (2) 자손 없이 죽은 야곱의 혈통을 잇기 위해 동생 헬리가 형수를 취하여 요셉을 낳게 했다고 한다(Eusephus). 이러한 전설들 중에 첫번째 견해가 더욱 환영받고 있다(Carr). 이로 보건대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며, 마태는 예수의 왕통에 관심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마태 족보는 예수의 법적 부친으로서 요셉을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혈연적으로는 요셉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 혈통의 왕통을 합법적으로 이어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자손이 아니 신비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22:41-46 참조).

⭕ 마리아에게서...예수가 나시니라 - 여기서는 분명 '요셉'이 예수를 '낳고'로 기록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란 단정 어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식적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예수의 '처녀 탄생'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처녀 탄생을 반박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시내 시리아 사본'(Sinaitic Syriac Version)에 기술된 '처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는 기록은 단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태가 기술한 족보 전체에 걸쳐 '...를 낳고'의 형식, 즉 '인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낳았다'라는 동사 '겐나오'(*)로 일관 되어 오다가 여기서는 그 사용이 그친다. 대신 '나시니라'라는 뜻의 '에겐네대'(*), 곧 능동태인 '겐나오'와는 달리 수동태 동사로서 인간이 낳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단지 출생의 도구 역할을 했을 뿐임을 강조한 말로 전환되고 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분명 예수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인(18절)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족보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확보해 눠은 것처럼 역시 그리스도가 인간의 혈통(씨)을 의지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마리아'란 이름은 '높여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라식 음역이라고도 하고, '괴롭다', '쓰다'는 뜻의 '마라'(*)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룻 1:20). 하여튼 어떤 것이 되었든지 예수 수태(受胎)의 전후 상황과 조화가 되는 이름임에 틀림 없다.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 그리스도는 예수의 제 2명(Second name)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야의 직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드러낸 명칭이다(1, 21절 참조).

성 경: [마1:17]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바벨론 유수 이후부터의 계보]

⭕ 그런즉 모든 대(代) 수가...열 네 대러라 - 이러한 구분은 본 족보의 두 가지 특징, 즉 (1) 숫자에 대한 마태의 뛰어난 감각과 (2) 도식적인 배열을 선호하는 유대인의 성향을 잘보여 준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3기로 분할한다면 제 1의 14대는 신정 정치(Theocracy), 제 2의 14대는 군주 정치(Monarchy), 제3의 14대는 성직 정치(Hierachy) 등으로 편의상 나눌 수 있을 것이다(Wycliffe). 실로 마태는 그가 수집한 명단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분류하여, 어떤 이름은 생략하고(8,11절), 반면에 네 여인의 이름은 의미있게 부가하는 등(3, 5, 6절) 탁월한 예지와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성하였던 것이다. 저자가 본 족보를 14란 숫자에 맞추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특별한 의미가 없이 단지 쉽게 기억토륵 하기 위한 구분(Michaelis)으로 보는 견해와, 14대씩 3기로 나눈 구분을 7대씩 6기로 나누고 예수의 탄생을 제 7기의 7대(완전 슷자의 상징이며, 메시야 시대의 연명으로 간주;외경 에녹1서 91:12-17;93:1-10)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하는 의도적 도식으로보는 견해가 있다(Hendriksen, Goodspeed). 그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해석은 예수가 '다윗의 위'를 계승한 왕이심을 중거키 위함이란 것에서 출발한 견해이다. 즉 '다윗'(*)이란 히브리 알파벱 자모의 수가(數價)가 도합 14(다렐<*>이 4, 와우<*>가 6, 다렐<* >이 4)가 되기 때문이다. 이 족보의 첫번째 14대가 다윗 가문의 여명기(黎明期)와 같다면, 두번째 14대는 대낮 같이 찬란한 번성기(繁盛期))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14에서는 다윗 가문이 쇠퇴기(衰頹期)에 접어 들어 가난한 목수의 가문에 다다르며 그 어둠 속에서 큰 별(2:2, 10)과도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여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족보를 14대를 한 단위로 해서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마태의 기록에는 1명이 누락된 41명만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ksen)은 여고냐를 두 번 족보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옛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4:8-12;렘 22:30), 포로 이후의 새사람으로서의 여고냐(왕하 25:27-30;렘 52:31-34)로 말이다. 그리고 슈바이쩌(Schweizer)는 다윗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건드리(Gundry)는 요셉(족보상)과 마리아(육체상)를 각각 가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로서 포로기도 하나의 세대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 경: [마1:18]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1절과 같이 힘차고 단순 간결한 서술문이다. '나심'(birth)이란 1절의 세계(*, 게네시스)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탄생' 또는 '역사'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서술부인 '이러하니라'(*, 후토스엔)에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기술하려는 그리스도의 기원의 양태(樣態)인 것이다.

⭕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 정혼(약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닌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다. 이런 이유에서 22:23, 24에는 정혼 상태에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不貞)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신 22:23, 24).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말은 단지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동거)을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설명은 아닐 것이다(25:1-13 참조). 따라서 이로써 이미 예수의 법적 혈통은 획득 되어졌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가 본절에서 주어로 쓰임으로 그의 위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 동거하기 전에 - 마태가 이 말을 추가할 때 정혼식에서 실제 혼인식(신부를 데려오는 일)까지의 일정한 기간 사이(대략 1년 소요)로 독자를 이끄는 점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 예식을 끝내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알아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役事)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 잉태는 성령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잉태에 대한 기사를 훨씬 더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눅 1:26-56). 그런데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말속에는 이교도들의 사상처럼 신과 인간이 한몸을 이룬 결과라는 뜻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않다. 그 대신 메시야를 대망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타나리라 기대되었던 지극히 높으신 자, 곧 여호와의 권능이 성령 안에서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God-Man) 것이다(A. T. Robertson).실로 이와 같은 성육신(Incarnation)의 비밀은 '예수는 육신을 입으시고 나셨으나, 육신적 이유 때문에 탄생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데에 있다. 즉 그가 육신의 모양으로 나심으로 육신을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제 3의 하나님이신 성령의 완벽하신 신적(神的) 준비를 통해 나심으로 인간들이 지닌 본원적 죄성(罪性)을 물려받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Plummer). 실로 예수의 처녀 탄생문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이미 실제적으로 선재(先在)하셨음을 믿는 자에게는 의심할 만한 크나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의 성육신은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의 근거요 출발점이 된다(요 1:14;17:5;고후 8:9;빌 2:5-11;골 1:15-19).

성 경: [마1:19]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마리아의 잉태와 요셉의 고민]

⭕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요셉은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다. 여기서 '의로운'(*, 디카이오스)이란 '곧은', '공정한'이란 뜻으로서 청렴 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 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된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McNeile)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가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5:17;롬 10:4)의 법적 부친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법과 사랑을 겸비한 '의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끊고자 하여 - 이 구절에 대한 중요한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1) 요셉은 마리아의 기적적인 처녀 잉태를 알았으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파기하고자 했다(Gundry,McHugh). 이 견해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비밀을 얘기했다는 가정(假定)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요셉에게 결혼 계획을 취소하지 말라고 계시한 주(主)의 사자의 말 속에서(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Lenski). (3)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다(Calvin, M. Henry).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견해를 조화롭게 취합(聚合)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문의 '아니하고'(*, 메델론)가 적극적인 마음의 성향을 뜻하는 말로서 요셉이 마리아를 모세 율법이 정하는 징벌에 처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하고자 하여'(*, 에불레데)란 아직 행동화하지 않은 미미한 마음의 결단을 의미하는 말로서 정혼한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서서히 결심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두 단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限度)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 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하였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마1:20]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여기서 '생각하다'는 원어 '엔뒤메덴토스'(*)는 수동태 제 1과거형 분사로서 생각이 그의 속에 들어오고 있었을 바로 그 상황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황(situation)적 상태를 중요시 여긴 낙스(Knox)는 본 구절을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치기가 무섭게'라고 표현함으로써 요셉의 심각한 내적 갈등의 일면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주의 사자가 현몽(現夢)하여 -개역 성경에 빠진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는 어떤 경악할 만한 사건이나 행동을 예시(indication)하는 도입부로 사용되기도 하고(Schalatter), 또는 독자(讀者)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Hendriksen).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의 출현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단어는 본서에 61회 마가복음에 8회, 누가복음에 56회, 요한복음에 4회 사용된 바 있다. 특히 사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에도 동일한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예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창 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여기서 본문에 언급된 '주의 사자'는 마리아에게 잉태의 소식을 고지(announcement)해 준 천사 가브리엘(눅 1:26)로 짐작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같은 사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기보다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하늘의 계시가 재개된 사실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 다(Bonard). 한편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다(창 20:6;삿 7:13;삼상 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닌 실제에 의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눅 1:26, 27).

⭕ 다윗의 자손 요셉 -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앞에 나온 족보(族譜)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있다. 이 말은 예수의 족보(2-17절)와 성령 잉태(18-25절)를 완벽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 네 아내...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 '무서워하다'는 뜻을 지닌 '포베데스'(*)는 2인칭 단수 제 1과거형 수동태로서 단순히 '두려워했다'는 뜻외에 '그가 주저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두려워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시작한 혼인(정혼)을 완성(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시킬 것을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介意)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淫行)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이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겠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의 출생 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이다.

성 경: [마1:21]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아들을 낳으리니 - 이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눅 1:31). 한편 여기서 '낳으리니'(*, 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닌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내지는 짧은 형태의 '예수아'(*, 느 7:7)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刑)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수1-12장)와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벨(스2:2;느7:7)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그 이름이 '순'(筍)이라 하는 여호수아(슥 6:11-13)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롤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편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待望)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자기 백성(*, 라온 아우투). 이 말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된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결국 이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25), 질병(9:21,22) 또는 죽음(24: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비록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 경: [마1:22]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이루려 하심이니 -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된 것은'(*,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바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되어졌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豫表論的)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그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른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네일(Mc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성 경: [마1:22-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1) 천사와 (2)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15, 17, 23;4:14;8:17;12:17; 13:35;21:4; 26:56;27: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2)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즉,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2:15 참조).

성 경: [마1:23]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천사의 현몽]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여기 23절과 사 7: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수많은 견해들 중 타당성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지었다(Unnik, Hill, Taylor). (2)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Broadus, La Sor). (3)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Alexander, Hengstenberg, Young). (4)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義)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Rice). 이상 네 가지 견해보다 가장 합당한 것은 (5) 사 7:1-9:7은 한 단위이며, 7: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9:7).

⭕ 처녀 - 사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물론 처녀성(處女性)을 잃고난 디나를 창 34:4에서 단 한번 '파르테노스'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 24:43;출 2:8;시 68:25;잠 30:19;아 1:3;6:8)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전의 풋나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삼상 17:56;20:22).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뜻의 '알람'(껍#랗)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 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 임마누엘 -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이다(사 7:14). 한편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마1:24]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 요셉이...일어나서...분부대로 행하여 -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가 주어졌던 현몽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돋보인다. 이는 헬라어 원문에는 행동의 주체인 요셉에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의 행위, 곧 '일어나서'(*, 에게르데이스)에 그 강조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요셉의 순종은 마리아가 행했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하는 수동적인 순종에 비하여, '분부대로 행하여...데려 왔으나...동참치 아니하더니'(24절)는 능동적인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만유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모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겠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이제 정혼 기간을 마감하고 공식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실제로 요셉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

성 경: [마1:25]

주제1: [예수의 족보와 탄생 과정]

주제2: [예수의 탄생]

⭕ 아들을...예수라 하니라 - 마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다. 여기서 본문의 '동침치 아니하더니'는 헬라어 '우크 에기노스켄 아우텐'(*), 즉 '알지 못하더니'라는 히브리 문학적 완곡어법으로 '알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눅 1:34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와 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실이 카톨릭의 마리아 '종신 처녀설'을 옹호하지는 못한다. '아들을 낳기까지'라는 구절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 탄생 후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는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맏아들(눅 2:7)로서 훗날 혈육으로서의 남동생과 여동생을 얻게 된다. 한편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circumcision)를 받으실 때에 공식적으로 명명(命名)되었다. 이로써 예수의 신분은 법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성 경: [마2:1]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 헤롯왕 때에 - 마태는 예수의 탄생 시기가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던 기간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탄생 일자를 기산(起算)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의 왕통이 단절되고 이방인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실현됨으로써 '홀(笏)이 유다를 떠나고, 치리자(治理者)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남으로, 지금은 실로가 오실 때이며, 백성이 그에게 복종할 때'(창 49:10)라는 야곱 예언의 성취를 묵시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본절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있다. 여하튼 여기 '헤롯왕'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Idumean) 안티파터(Antipater)의 아들로서 주전 73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영웅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팔레스틴 인접 지역을 B.C. 55년경부터 A.D. 93년까지 통치한 왕조의 실질적인 중흥자였다. 실로 그는 25세에 이미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했고 그러한 탁월한 정치력으로 로마군의 도움을 받아 그의 반대 세력을 팔레스틴에서 완전히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하여 계속되는 로마 정권의 교체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각종 건축사역(극장. 원형 경기장, 기념비, 우상 제단, 성채<城砦> 등)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고된 부역을 강요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제 3성전) 사역을 B.C. 20년에 시작하여 그가 죽은 뒤인 A.D. 68년에 완성시킴으로써 주위로부터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10명의 아내두었고, 그중 에돔 출신의 첫 아내 '도리스'(Doris)에게서 안티파터(Antipater)라는 아들을 얻어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가 죽기(B.C. 4년) 수일 전에 그의 과대 망상증으로 그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마카비가(家) 출신의 둘째 아내 마리암네(Mariamne)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으나 그들 역시 그 어미와 더불어 살해 당하고 말았다. 또한 대제사장 시므온의 딸이었던 미리암네 2세를 세번째 아내로 맞아 이두메의 분봉왕이 된 빌립 1세를 낳았다. 한편 사마리아 출신의 넷째 아들 마르다게(Malthace)에게서 아켈라오(2:22)와 안티파스(Herod Antipas;14:1)를 낳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출신의 다섯번째 아내 크레오파트라(Cleopatra)에게서 칼시스(Chalsis)와 빌립 2세를 낳았다. 이러한 가족 관계에 대한 도표는 신약 서론 참조하라. 여하튼 헤롯은 B.C. 4년에 매우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70세를 일기로 최후를 맞아야만 했다(19절).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연대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본문이외에는 성경 어느 부분에서도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 일자를 산출하는데 많은 애로점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해롯이 B.C. 4년에 죽었기 때문에(Schurer) 적어도 예수는 그전에 태어났음이 틀림없다고 믿어왔다. 한편 헤롯의 사망 일자에 대해서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죽기 전에 월식(月食)이 있었다고 언급함으로써 B.C. 4년 3월 12-13일로 측정케 했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의 전승은 헤롯이 죽은 후 유월절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이때를 B.C. 4년 4월 11일 경으로 추정케 한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적(政況的) 증거로 보아 예수의 탄생 연대는 B.C. 5년 후반기나 B.C. 4년 초반기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 유대 베들레헴 - 이 베들레헴은 '유대'(in Judea)라는 단어와 함께 쓰임으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위치한 스불론지파의 베들레헴(수 19:15)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 두 단어가 함께 쓰인 것은 2절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에 대한 암시인 듯하다. 한편 구약때 이 지명은 주로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로 불리어졌었다(창 48:7;룻 1:2;삼상 17:12;미 5:2).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 남방 8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서 메시야가 탄생할 곳으로 예언된 장소이자(미 5:2) 유대의 실질적인 건국(foundation lf a nation)을 이룬 다윗왕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 16:1-18). 여기서 히브리어 지명 베들레헴(*, 베트레헴)은 '떡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아마 그 지역이 곡식과 과실이 풍성한 비옥한 곡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이 지명과 걸맞게 온 인류에게 풍족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이곳에서 출생하신 것이다(눅 2:4).

⭕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 본 문장의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이두'(*), 곧 '보라'는 감탄사가 원문에 언급되어 있다(1:20). 이는 저자 마태가 본문이 지니는 중요성과 그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술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내방(visit)한 방문객의 출발지와 그들의 지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먼저 '동방으로부터'의 헬라어 '아포 아나톨론'(*)은 '떠오르는' 이란 뜻의 '아나톨레'(*)에서 유래한 말로서 '동쪽으로부터의'(from the east, NIV)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 '동방'을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향 특정한 땅, 곧 페르시아(Vincent), 바벧론, 메데(Carr), 아라비아, 또는 동쪽에 위치한 모든 곳(Bruce)이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적 해석 이외에 문화가 발달한 지역일 것이라는 관점에서 소아시아, 애굽, 인도, 그리이스 등지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같은 다양한 견해들 중 '동방'이 바벧론이었다는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D.A. Carson). 왜냐하면 바벧론에는 예루살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유대인 포로들이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메시야에 관한 구약 예언을 사전(事前)에 깊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이 유대인과 긴밀한 유대(紐帶) 관계에 있었던 자들임을 암시하며(Wycliffe),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대거 운집해 있던 바벧론에 거주하던 자들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박사(*, 마고이)들의 신원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여기 '박사'로 번역된 '마고이'는 박수나 점장이 등의 엉터리 마술사가 결코 아니었고 꿈을 해석하는 신통력을 지닌 메데, 바사, 또는 바벧론의 제사장읕 언급할 때에 주로 사용되었다(단 2:2, 48;4:6, 7). 특별히 이 용어는 이 때로부터 600년 전에 바벧론의 모든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 어른으로 높임 받았던(단 5:7, 11) 다니엘에게 적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훗날 그리이스에서는 이 용어를 마술사와 박수 등의 의미로 사용하였다(행 8:9;13:8). 한편 터툴리안(Tertullian, A.D. 255년경 사망) 당시의 초대교회 전승에 의하면 '마고이'가 왕들이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것은 왕들이 와서 메시야를 경배할 것이라는 구약예언들(시 68:29, 31;72:10, 11;사 49:7;60:1-6)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듯하다. 여하튼 박사들이 (1) 점성학적 계산에 따라 자극을 받고 베들레헴을 향해 온 점, (2) 디아스포라(Diaspora)의 영향 등으로 다니엘의 예언 및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각종 예언에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볼 때 '동방 박사'는 바벧론 출신의 천문학과 점성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존귀한 자들로 볼 수 있다. 6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이름이 각각 멜콘(Melkon, 후에는 Melchior로 밝혀짐), 발사살(Balthasar) 그리고 가스퍼(Gasper)로 밝혀진 바 있다.

⭕ 예루살렘에 이르러 -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를 찾기위해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성 경: [마2:2]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 유대인의 왕 - '다윗의 자손'(1:1;9:27;12:23;15:22 등)이란 말이 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메시야의 별칭이었듯이, 이 명칭은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메시야의 별칭이었다. 실로 '메시야 대망'은 모든 유대인의 공통된 현실이었거니와 바벧론 유수 사건으로 인해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에 의하여 유대에서 나시는 메시야가 유대를 구하고 온 세상이 그로 인해 축복받는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었었다(Josephus).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이 이름으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으심으로써(27:37) 당신의 메시야성을 직.간접으로 드러내셨다.

⭕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 동방 박사들의 이러한 질문은 그들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 사실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왕이 이미나셨고, 그 사실을 모든 유대인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정작 메시야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ironical)한 일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는 단순히 혈통적 '유대인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영적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것이 분명하다.

⭕ 그의 별 - 별을 통해 인간의 중대사(重大事)를 결정짓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관례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한 자연 현상으로서 별을 이용하셨다. 그런데 이 별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대두되었다. 즉 (1) 자연계의 일반적인 현상과는 무관한 이적적 현상이다(Chrysostom을 위시한 대부분의 초대교회 교부들 및 초기 기독교 문서들), (2) 실재하지 않은 심리적 현상이다(Spinosa 등), (3) 혜성(혜성) 또는 폭발로 인해 엄청난 양의 빛을 몇 주 정도 발하는 초신성(超新星)이다(Kepler, Martin, Schubert 등)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존을 확신할 수 있듯이 이 별의 실제적 현상 역시 인정할 만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코 과학적으로도 모순되거나 결함이 없다는 점에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적절한 것 같다. 한편 본서의 저자 마태는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적어도 민 24:17의 발람의 신탁(神託), 곧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묵시적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염두(念頭)에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태는 초대 기독교 문서들에서 가끔 발견되는 '별'에 대한 무분별한 알레고리칼(Allegorical)한 해석법으로는 본문을 접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본문과 민수기는 둘 다 '별'을 이스라엘의 왕, 곧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약 성경에는 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를 적절히 묘하해 주고 있다(밸후 1:19;계 22:16).

⭕ 경배하러 왔노라 - '경배하다'는 뜻의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는 신약 성경에서 그 대상으로 대부분 하나님과 예수를 두었다(8, 11절). 그러나이 말은 일반 헬라어에서 넓은 의미로 '복종하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 단어를 근거로 지나치게 그리스도론 정립에 적용시켜서는 안된다(Broadus). 따라서 여기서는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알아보고 '경배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여기서 '경배'는 페르샤인들의 전통적 인사법을 연상케 하는 말로서 무릎을 꿇고 상대방에게 경의(敬意)를 표하는 예(禮)를 가리킨다.

성 경: [마2:3]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이 말 초반부에 부드러운 반대 의사를 나타내는 접속사 '데'(*)가 들어 있다. 따라서 본절이 시작하기 전에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 경배코자 한 것과 대조적으로'라는 말이 의미상 첨가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유대인의 왕'의 탄생 소문은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던 70세의 늙은 헤롯왕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와 더불어 메시야를 갈망하던 예루살렘 백성들까지 헤롯의 병적인 정도의 잔인한 학정(oppressive government)과 또는 왕권 교체에 따르는 정변(political change) 등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사실 헤롯은 전에 그의 과대망상증 때문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5명의 마카비 용사들을 살해하기까지 했었다(1절 참조). 한편 백성들의 이와 같은 우유부단한 태도는 예수의 생애 속에서 끊임없는 배척으로도 이어졌고 마침내 '자기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비극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 소동한지라 - '소동하다'는 뜻의 혤라어 '타랏소'(*) 는 '뒤흔들리다', '당황하게 하다', '무섭게 하다'는 뜻을 지닌 말로서 그 당시 예루살렘 성내(城內)의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실로 헤롯은 자기 왕권의 위기 의식 때문에, 메시야의 오심을 마음으로부터 준비하지 못했던 백성들은 사회, 정치적 혼돈과 생존에의 위협 때문에 심각한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곧 평화의 왕이시자 모든 역사의 처음과 끝이 되신(계 1:8) 예수의 도래가 악인들에게 미칠 궁극적인 영향력이 어떠한가를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성 경: [마2:4]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왕이...서기관들을 모아 - 이 모임을 산헤드린 공회(Sanhedrin)로 보는 학자(De Wette)도 있으나 그보다는 주로 종교적 문제들에 대해 헤롯의 자문 역할을 하던 개인적인 성격의 단체(Bruce, Vincent)로 보는 견해가 더 유력하다.결국 이 자문 위원들은 기나긴 역사의 면면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듯이 진리를 외면하면서까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애썼던 권력의 하수인들이라 볼 수 있다.

⭕ 대제사장 - 헬라어 원문에는 '대제사장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이라는 복수로 기록되었다. 이는 그 당시의 대제사장 제도를 반영한 표현으로서 여기 '대제사장'은 헌직 대제사장과전직 대제사장 및 대제사장 가문에서 유력한 인물 등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그러나 원래 대제사장직은 아론의 후손만이 할 수 있는 영구직이었으나, 헤롯이 율법을 어기고 대제사장을 임의로 면직 또는 임명하는 불법을 자행함으로써(Josephus) 종교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 그같은 사실은 솔로몬 성전 이래 바벧론 포수전까지(약 410년간) 18명의 대제사장이 교체된 것에 비해 스룹바벧의 성전 재건 후부터 헤롯때까지(약 420년간) 300명이 넘는 수의 대제사장이 교체된 것으로도 중명될 수 있다.

⭕ 서기관 -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일반 서기관은 주로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였는데(행 19:35) 비해 유대 종교 집단내의 서기관은 구약 율법에 능통하며 구약의 구전(oral tradition)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일종의 율법 해석자요 교사였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율법사(lawyer)로 불리워지기도 했고(22:35) 때로는 랍비로 호칭되기도 했다. 당시 시민법의 상당 부분이 서기관들의 해석에 근거해서 만들어졌을 정도로 그들의 권위는 대단했다. 한편 그들은 대부분 바리새인 출신들이었는데 반해 그들과 경쟁적 관계에 있던 대제사장 계급은 대부분 사두개인 출신들이었다고 한다(D.A. Carson). 따라서 당시 헤롯이 체질적으로 함께 모이기를 싫어하는 이들 두 계급 사람들을 동시에 부른 데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한 학자들도 있다(Schweizer). 그러나 간ry한 헤롯이 이 두 부류의 견해를 동시에 수렴함으로써 '유대인의 왕' 탄생에 관한 사건이 종교, 역사적으로 거짓이 아닌지에 대한 사실 여부를 명확히 알아보고자 했다는 점에서 두 부류를 동시에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D.A. Carson).

⭕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 헤롯은 그리스도(1:1)와 유대인의 왕(2:2)이 동일 인물이며,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자의 칭호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27:37).

⭕ 물으니(*, 에퓐다네토) - 동사시제가 미완료형으로서 질문이 집요(執拗)하리만치 끈질겼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말은 종종 '시험삼아 물어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헤롯이 어떻게든 자신의 의구심을 풀어보려는 깊은 갈증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성 경: [마2:5]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가로되...기록된 바 - '기록된'(*, 게그라프타이)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들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본문의 '선지자로'에서 '로'는 헬라어 '디아'(*)에 해당하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선지자를 '통하여' 기록된 것을 의미한다. 즉 전치사 '디아'는 구약의 예언을 전한 선지자가 말씀의 궁극적인 근원이 아니라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 일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1:22).

⭕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 헤롯의 질문에 조금도 주저치 않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약 미 5:2에 근거하여 예언된 메시야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지적했다(1절). 이는 그들의 해박한 성경 지식을 보여주며 더불어 그 당시 팽배해 있던 메시야 대망 사상을 반영해 준다. 실로 그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참믿음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기록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지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2:6]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유대 땅...목자가 되리라 - 이 부분은 미 5:2의 인용이며, 삼하 5:2(대상 11:2)이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 기자 마태는 히브리 맛소라 사본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았고, 또 70인역(LXX)을 따르지도 않았다. 이처럼 마태가 독자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미 5:2과 차이가 나게 된 점을 살펴보면 (1) '베들레헴 에브라다' 가 여기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것은 '에브라다'가 고전적 표현으로서 시적(詩的)인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변형을 이룬 것 같다(Gundry). (2) 미가서의 '유다 족속 중에'가 '유대 고을 중에'로 바뀌어져 있다. 이 차이는 단지 '족속'이란 용어가 '고을'의 의인화된 표현이란 점에서 큰 무리없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3) '작을지라도'와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가 상반된다. 이 두 구절들의 전체적인 해석을 보면 이 차이가 단지 형식적(표면적)인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즉, 두 구절은 모두 베들레헴이 메시야의 탄생 장소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크게 드러 내놓을 곳이 못되지만, 이제 메시야의 탄생으로 크고 위대한 처소(處所)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Hengstenberg). (4) 한편 마태는 삼하 5:2에서 인용한 '목자'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의 목적은 미 5:2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다름아닌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을 성취하는 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양으로 비유된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먹여주시는 선한 목자(요 10:11) 가 되신다. 이를 가리켜 사도 베드로는 '영혼의 목자', '목자장'(牧者長) 등으로 표현하였다(벧전 2:25;5:4).

성 경: [마2:7]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이에(*, 토테) - 이 용어는 마태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막 9회, 눅 14회, 요 10회) 자주 사용한(약 90여회)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그리고 나서', '그때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적 의미로 사용된 본절 이의에는 대부분 단순히 다음 문장을 연결하는 연결사로 사용되었다(17절;3:5, 13).

⭕ 헤롯이 가만히 - 이는 헤롯이 은연(隱然) 중에 일을 추진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처럼 정치적 술수와 음모에 능통한 자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와 아이를 살리려는 요셉의 의로운 행동 '가만히'(1:19)와 대조적으로 헤롯의 '가만히'는 아이를 죽이려는 음모를 암시하는 사악한 행동을 묘사한 것이다.

⭕ 박사들을...자세히 묻고 - 아마도 헤롯은 박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극진한 예우로 대했을 것이다. 한편 '별이 나타난 때'를 묻는 헤롯의 질문을 통해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아직 감지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질문 속에는 어린 왕의 탄생기점을 알아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16절) 사내 아이들을 살해하려는 무서운 음모가 감추어져 있었다. 헤롯은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훼파된 다윗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간악한 계획은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던 셈이다.

성 경: [마2:8]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궤계]

⭕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 헤롯은 박사들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었다는 자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박사들에게 염탐꾼을 딸려보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이 빗나간 것(16절)임을 뒤늦게 알게되었다. 진정 그는 이 이방의 박사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으로 인한 지시(12절)대로 옴직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헤롯의 비상하고도 교활한 '지혜'를 아기 예수를 찾아가는 박사들의 '발' 밑에 놓이게 하시는(고전 2장) 하나님의 섭리가 명쾌히 드러나게 된다.

⭕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 자신의 추악한 음모를 은폐하기 위하여 경건을 가장한 혜롯의 위선이다. 아기 예수를 살해하기 위한 계략(stratagem)의 겉포장은 '경배'였다. 먼길을 마다 않고 자기 발로 걸어 와서 스스로 드리는 동방 박사들의 진정한 '경배'(2, 11절)와 어두운 데 웅크리고 앉아서 '나도...하게 하라'는 헤롯의 거짓 '경배'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거짓 경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로마 군사들의 모독과 조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27:29)

성 경: [마2:9]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 본서의 기자 마태는 분명히 '별'이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이 10절에서 별을 보고 기쁨을 표한 것은 적어도 별이 계속 보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그 당시 '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던 박사들이 그 '별'이 보이지 않게 되자(Meyer, Bengel) 유대인의 왕이 탄생할 장소는 당연히 예루살렘일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예루살렘을 찾았고, 또 그 당시 유대의 유력자 헤롯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헤롯의 경건하게 보이는 말에 고무(encouragement)되어 있었을 것이다.

⭕ 동방에서 보던 그 별 - 자신들의 지혜에 의해 길을 잘못 들었던 박사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밝 은계시의 별이 다시 나타났다. 실로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참 생명되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계시 뿐이다(시 119:105). 한편 본문은 박사들이 궁(宮)을 떠날때 이미 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낮이 무덥고 밤이 서늘한 중근동 지방에서는 먼길을 가기 위해 밤에 별을 보고 여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Meyer).

⭕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 여기서 '문득'이란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말로서 갑작스런 상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의미상 첨가한 말이다. 이제 박사들은 다시 '별'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앞서 인도하여'라는 헬라어 '프로에겐'(*)은 서술적 미완료 시상으로 동작(인도)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즉 '손으로 이끌듯 계속해서 인도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이다(Chryststom).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 말이, 별이 동방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 옴직였다는 것과 베들레혭 상공에 계속 떠서 움직이고 있는 별을 보고 박사들이 왔다는 것(Bruce)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 말인지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사들은 그 별이 '유대인의 왕'(2절)을 가리킨다고 믿었고, 그 별은 그들을 '아기 있는 곳'으로 인도한 것이다.

⭕ 아기 있는 곳 위에...섰는지라 - 여기서 '있는 곳 위에'(*, 에파노 후 엔)란 '아기가 있었던 베들레헴의 한 특정한 곳 위에'로 볼 수도 있고, 그저 막연히 '베들레헴 동네 위에'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전자를 받아들인다면 이 사건의 초자연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받아들여 일단 베들레헴에 도착한 박사들이 수소문하여 아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할지라도 이 사건의 초자연성을 감소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여하튼 별은 아기가 '있는' 곳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굳게 '머물러' 있었다. 실로 그곳에 바로 인도(leading)와 축복과 그리고 구원이 있었다. 정녕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머물러서'(눅 18:40) 있는 곳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성 경: [마2:10]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저희가 별을 보고...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별을 보고'라는 말은 그들이 새삼스럽게 별의 나타남(7절)을 보았다기 보다, 아기 예수위에 '머물러 서'있는 별이 자신들의 기나긴 여행의 최종적인 목적지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1:23) 탄생을 드디어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는 말이다. 이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맛볼 수 없었던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그러한 그들의 기쁨을 표현한 본문 중 특별히 '가장'에 해당하는 헬라 '스포드라'(*)는 '충만하여 차고 넘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며, '큰'(*, 메가렌) 역시 크고 놀랍고 장엄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두 단어의 만남은 결국 그 기쁨의 실체가 최상에 이르렀음을 암시향다. 그리고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에카레산 카란)는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라는 동일 어근의 중첩(重疊)으로서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기쁨을 기뻐했다'(they rejoiced with joy)가 된다. 이는 어떤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중첩해 사용했던 셈어의 영향을 받은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라 할 수 있다(Moule). 따라서 본문은 박사들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택한 백성들의 소동(3절)에 비하여 얼마나 값진 일인가. 그들은 샛별(벧후 1:19)의 인도를 따라 왔기 때문에 의(義)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뵐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의 기쁨은 자신들에게 닥친 크나큰 행운(메시야를 만나 보는 일)을 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 경: [마2:11]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집에 들어가 - 누가복음에는 '아기가 나신 곳'이 마구간으로 되어 있다(눅 2:7). 그에 비해 본문에는 '아기가 있는 곳'이 집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방 박사들이 방문한 시기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A.D. 14)의 명(命)에 의한 호적, 곧 인구 조사(눅 2:1)가 끝난 얼마 후(아마 수개월 경과 후, Wycliffe) 요셉이 거처를 마련한 다음이었을 것이다(Theophylact, Lenski, Alford등).

⭕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 여기서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헬라나 로마의 예법이 아니라 동방의 예법이다(2절). 동방 박사들이 경배했던 대상은 마리아와 '함께'가 아니고 오직 아기 예수 뿐이었다. 즉 그들은 헤롯에게나 아기의 부친과 모친에게도 경배하지 아니했다. 경배의 대상은 오로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한 분 밖에 없는 것이다(4:10).

⭕ 보배합 - 이 단어는 번역이 애매하게 된 것으로 '귀중품 상자'나 '보물 상자'를 의미한다. 그들의 '보배합'은 그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마음(예물)의 저장소였다(6:20).

⭕ 황금과...예물로 드리니라 - 이 내용은 이방의 왕들이 메시야 앞에 예물을 드리고 복종하게 될것이라는 구약 예언(시 72:10;사 60:6)의 분명한 성취이다. 한편 고대 동양 풍습에서는 왕을 알현(audience)할 때 예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상례(常禮)였다(창 43:1;삼상 9:7, 8;왕상 10:2;Derett, Clarke). 박사들이 헌상(offering to a superior)한 세 가지 예물 중 황금은 동서 고금을 통해 매우 값지고 불변하는 성질의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다. 그릭고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반질반질하고 향내나는 흰색의 액체이며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 껍질에 자국을 내어 얻는다. 또한 몰약은 역시 주로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되는 것으로서 상당히 고가(高價)의 향기를 지닌 액체이다(시 45:8;아 3:6). 이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 내지는 마취제로 사용되었다(막 15:23). 그런데 고금의 많은 주석가들(Origen, Hendriksen등)에 의하면 이 예물 가운데 황금은 메시야 왕권을, 유향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그리고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왕과 제사장과 그분의 장사(葬事)되심을 각각 상징한다고 본다. 어쨌든 동방 박사들의 종교적 동기를 이해한다면 예물들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기서 예물이 세가지라는 사실에서 동방 박사들을 세 사람이라는 교회 전승이 형성되게 되었다. 어떤 전설(legend)에 따르면 완전 수에 해당하는 '12'명의 박사라고도 전한다. 한편 이 세 예물들은 모두가 값비싼 것들로서, 예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신하였을 때(14절)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성 경: [마2:12]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 귀국]

⭕ 꿈에...지시하심을 받아 - 여기서 '지시를 받아'(*, 크레마티스덴테스)란 신탁(神託)으로 의문시했던 사실에 확실한 해답을 얻는 행위, 또는 공무(公務) 수행을 위해 조언을 받거나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앞으로의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치 못하고 주저했던 동방 박사들의 계시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응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Vincent). 그런데 여기 언급된 '꿈'은 본서의 초두에서 두번째로 나오는데, 첫번째(1:20)와는 달리 주의 사자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꿈은 아기 예수를 지키시기 위하여 헤롯의 악한 계획을 무산시키시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로 볼 수 있다(P. Gaechjter).

⭕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서 박사듸에게 헤롯의 눈길을 벗어나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길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정확히 어느 길로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다만 예루살렘을 피하여 사해의 남단으로 돌아갔든지 요단강을 건너 돌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예수를 참으로 만난 자는 지금까지 걸어 왔던 길을 버리고 다른 길, 즉 생명과 진리의 길(요 14:6)로 가게 될 것이다.

성 경: [마2:13]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애굽으로 피난한 예수 가족]

⭕ 저희가 떠난 후에 - 본절의 '떠나다'는 동사는 12절의 '돌아가다'는 동사와 같은 의미로서 본절 이하의 사건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주의 사자를 통한 애굽 피난 지시가 박사들이 떠난 얼마 후에 내려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어쩌면 박사들에게 지시가 임했던 시기에 같이 내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떠난 그 날 밤에 있었을 수도 있는 만큼 매우 근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 주의 사자가...현몽하여 - 요셉은 제 2차로 주의 사자의 계시(revolution)를 접하고 있다(1:20). 그런데 이번 계시의 요지는 당신의 아들인 메시야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나타내는 데 있었다.

⭕ 헤롯이...죽이려 하니 - 메시야에 대한 헤롯의 살해 음모가 이방인의 경배와 예물 바로 뒤에 다가왔다. 실로 이것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계속되는 배척과 수모(受侮)의 전조(前兆)가 되는 셈이다.

⭕ 일어나...애굽으로 피히여 -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겔데이스'(*)는 조금도 여유를 두지 말고 곧바로 행하라는 촉급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실로 유대인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께서 유대 땅의 환영을 받지 못하시고(요 1:11), 마치 도망자의 모습으로 이방 땅에 급히 피하실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애굽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서 헤롯의 통치권밖에 있는 지역이며, 그 당시 약 100만명 정도의 유대인 집단이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한다(Philo, A.D. 40). 애굽 특히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헬라화된 거주민들을 위해 헬라어로 된 구약인 70인역(LXX)이 만들어진 것은 직어도 애굽에서의 유대인 지위가 상당히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例)이다. 한편 유대인의 애굽 피난 역사는 오래 전부터 행해진 것이었다. 그곳은 일찍이 흉년으로 인해 아브라함(창 12:10)과 야곱(창 46:6)이 내려간 바 있으며, 솔로몬 사후(死後)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난하였고(왕상 11:40), 포로 시대에는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이 그곳으로 갔으며(렘 26:21-23;43:7) 특히 신구약 중간기 때는 시리아의 학정에 의해 그곳으로 많은 유대인이 내려가는 등 애굽은 유대인이 피난하기에 적지(適地)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식구들은 쉽게 애굽에 이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팔레스틴 계열의 외경 중 하나인 '예수 유년기의 복음'(Gospel of the Infancy)은 당시 애굽으로 내려간 예수의 각종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 내가...거기 있으라 - 아기 예수를 안은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애굽으로 간 것처럼 돌아와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즉 그들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만이 아니라 다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19, 20절) 애굽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지시는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피난 길 뿐만 아니라 피난 기간과 그 이후까지도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성 경: [마2:14]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애굽으로 피난한 예수 가족]

⭕ 요셉이 일어나서...애굽으로 떠나가 - 여기서 '일어나서'에 해당하는 '에게르데이스'(*)는 수동태 제 1과거 시상으로서 주저함없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취한 것임을 나타낸다. 마치 1:24처럼 요셉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부각되어 있다. 실로 요셉은 그 밤에 출발하여 애굽의 변경까지 약 120km나되는 먼 여행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완전한 믿음이다(히 11:1, 6). '아기와 그의 모친'이란 구절은 본장에서 계속 나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추호(秋毫)도 실수가 없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마2:15]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애굽으로 피난한 예수 가족]

⭕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 헤롯은 추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비참히 죽어 갔다고 전한다(Josephus). 이러한 헤롯의 죽음(B.C.4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지시를 고대하던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와 함께 '나사렛'(23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도 초금욕주의자들인 에센파의 쿰란 종파 사람들은 B.C. 31년에 파괴되었던 그들의 본부에 돌아와 재건할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에서 체류(stay)하는 동안에 그곳에 살고 있던 동족들의 도옴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애굽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유대 회당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유대인들의 접촉이 많았으며, 더불어 직업을 구하는 일이나 각종 생활 정보도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같은 부류의 직업인들끼리는 쉽게 동화(同和)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목수 출신의 요셉은 애굽 생활 중에 쉽게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들을 향해 글을 쓰고 있던 마태의 독특한 문장 표현이다(1:22). 즉 마태는 구약의 예언과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때에 완성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졔시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적 메시지(호 11:1)예수의 생애와 접목(grafting)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 마태는 예수의 애굽 피난 사실을 11:1의 말씀과 일치시키고 있다. 사실 11:1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사건을 언급한 말이다. 그러나 마태는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그 사건을 예수께 적용시켰다. 즉 마태는 이스라엘(하나님의 자녀)의 역사가 예수(하나님의 독생자)의 생애 속에서 재현(reappearance)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구속사 전개의 정점인 예수의 개인적 생애에 신.구약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역사가 다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 것은 예수의 사역이 단순한 민족적 해방에 그친 모세의 사역을 넘어서 전 인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는 신약에서 이스라엘의 원형(原形)으로 종종 나타난다. 몇가지를 예시해 보면 (1)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시험(신 8:2, 3)-예수의 40일 금식 기도(4:2), (2) 이스라엘은 열매 맺지 못한 포도나무(사 5장)-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15장), (3)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장자(출 4:22)-예수는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히 1:6),(4) 이스라엘은 다윗의 골육(삼하 5:1)-예수는 다윗의 자손(1:1) 등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어디에서나 구약의 역사와 율법을 예언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看做)하고 있다. 즉 '예언의 성취'라는 말은 그것이 구약과 연결되어 구약의 예표의 실체(원형)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호 11:1은 단순히 출애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고,그 사랑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진행되는 동안에 펼쳐진 계시, 즉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그려진 그림과 같은 전형적(典型的)인 계시의 일부분을 제공했고, 마태는 그 계시의 '완전한 의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야 대망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민족적, 혈통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데서 결정된다.

성 경: [마2:16]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유아 학살]

⭕ 이에 헤롯이...속은 줄을 알고 - 여기서 '속다'는 뜻의 '에네파이크'(*)는 단순히 속다는 뜻 이상의 의미로서 '희롱(조롱)하다'는 강렬한 뉘앙스(nuance)를 담고 있다(Calvin). 따라서 박사들이 자기에게로 오지 않고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헤롯은 박사들의 태도를 기만(欺瞞) 이상인 자신을 희롱한 사실로 여겼을 것이다. 박사들이 자신의 교활한 음모를 꿰뚫어 보고 몰래 달아남으로 자기를 앉아서 '바보처럼'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이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헤롯을(1절) 못견디게 했을 것이다.

⭕ 심히 노하여 - 여기서 '노하다'는 뜻의 헬라어 '뒤모오'(*)는 거친 숨올 몰아쉬면서 분노하다는 뜻으로서 그당시 혜롯의 활화산같이 꿇어 오르는 극렬한 분노를 예감케 해준다.

⭕ 사람을 보내어...그 모든지경 안에 있는 - 헤롯의 칼날같은 명령이 실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는 약 8km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베들레헴은 조그마한 소도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지경에'는 베들레헴 뿐 아니라 베들레헴 근교의 한적한 오두막까지를 포함한다(Meyer).

⭕ 사내 아이를...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 헤롯은 자기가 찾는 아이의 나이를 정확히 몰랐다. 따라서 그는 장차 유대인의 왕이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모조리 살해하기 위해 살해 범위를 '2살 이하의 사내 아이'로 한정시켰다. 여기서 '두 살부터'는 '별이 나타난 때'(7절)에 근거하는 바, 이에 대한 견해는 (1) 아이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충분한 여유를 둔 것이다. (2) 박사들이 예루살렘까지 근 2년동안이나 걸려 도착했다. (3) 박사들의 귀국 후 2년 만에 살해했다 등이 있는데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2살이하'란 말이 갓 태어난 신생아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회의적(懷疑的)이다. 대신 15개월 내지 20개월까지로(A.T. Robertson) 보기도 하며 좀더 넓게 6개월에서 20개월 사이까지로 보기도 한다(D.A. Carson) 당시의 분노에 찬 상황으로 보아 후자의 견해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당시 살해된 유아의 수효에 대해 대단히 많았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Alford) 있고 심지어 14,000명 정도로 추산(calculation)하는 전승도 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 조그마한 도시요 당시 주민이 1,2천명 정도였다는 점을 들어 단지 수십명 안팎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Farrar, Carr). 그런데 헤롯의 이러한 잔인한 살상극은 '유대인의 왕'에 대한 영적 무지의 결과이다. 즉 예수의 진상 도래는 로마 정복을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키 위해 오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헤롯은 살인마의 탈을 또 한 번 쓰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다루지 않고 있어 진위(眞僞)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마크로비우스(Macrobius)의 저서 '축제'(Saturaalia)에 보면 아구스도(Augustus) 황제가 '헤롯의 명령으로 시리아 지역의 두 살 이하 아이들이 살해 당할 때 그 속에 헤롯 자신의 아이도 포함되었다' 하면서 '차라리 그의 아들이 되기보다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권능과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손에서 예수를 거뜬히 건져내셨고, 세상의 왕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대해서 가소로이 비웃고 계셨을 것이다(시 2:1-6).

성 경: [마2:17]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유아 학살]

⭕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 마태복음에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세 번 나오며(16:14;27:9), 그 밖에는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성 경: [마2:18]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헤롯의 유아 학살]

⭕ 라마에서 슬퍼하며...라헬이...애곡하는 - 예레미야가 이 예언(렘 31:15)을 선포한 시기(여호야김 통치 초기)를 고려해 볼 때(렘 30:1-33:26) 주전 586년에 멸망한 유다와 베냐민의 포로 장면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자, 요셉과 베냐민의 모친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라마(Ramah)는 베냐민 지파 성읍이며(수 18:25)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까우며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하는 곳이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Zelzah)가 있었다(삼상 10:2). 이러한 정황들을 익히 알고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수를 바라보며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포로가 된 자손들, 즉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 40:1, 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은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라마에서 에브라다(베들레헴)로 가는 도중에 자식이 없어 슬퍼했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産苦)로 인해 죽은 사실(창 35:19,20)을 포로됨에 비유하여 예레미야가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마태가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에다 관련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마태가 여기에서 바벧론 포로 장면을 연결시키고 있는지 이해할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사건들의 초점은 베들레헴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어미들(라헬)이 흘리는 '눈물'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바벧론 유수 때에는 다윗의 혈통에서 이어지던 왕권이 물러나고 이방의 속박으로 인하여 흘리던 탄식의 '눈물'이, 또다른 이방인(헤롯은 에돔인이었음)의 학정으로 살해된 베들레헴(다윗성이라고 불리우는, 삼상 16:1)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곧 그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오랜 포로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언약해 주신 새 언약(26:28;렘 31:31-34)이 온 이스라엘에 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마2:19]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헤롯이 죽은 후에 - 헤롯은 그의 통치 38년, 즉 로마 기원 750년(B.C.4년)에 70세의 나이로 병들어 죽었다. 한편 그의 최후를 기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 따르면 그는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며 악취와 경련이 끊이질 않아 백약이 무효하여 죽으니 그 모습은 잔인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의 죽음이었다 한다.

⭕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현몽하여 - 이는 요셉에게 나타난 세번째 현몽(現夢)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관심과 역사가 아기 예수의 생명에 집중되어 있음이 엿보인다. 한편 마태는 요셉이 3차 현몽 당시에도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애굽 체류 기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외경 '예수 유년기의 복음'(Gospel of the Infancy)에는 약 3년간 애굽에서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이때 예수께서 고용 일꾼으로 일하셨고, 각종 이적을 베푸셨다고 전한다(Origen). 여하튼 예수의 가족이 애굽에 머무른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성 경: [마2:20]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요셉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시고 계신다. 여기서 이스라엘 '땅'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오직 20, 21절에서만 나오는 것으로서 6절의 '유대 땅'과 동일한 의미이다.

⭕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 여기서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란 단순히 혜롯을 지칭하는 막연한 묘사이다. 그런데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 호이제툰테스)이라는 복수 형태에 대하여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출 4:19을 인용한 것이다(Hill). (2) 헤롯이 죽기 5일 전에 죽었던 그의 아들 안티파터(Antipater)가 이 학살에 가담하였다(Meyer, Clarke). (3) '그들'이라는 복수대명사는 막연한 지칭일 수도 있고, 3인칭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Turner). 그 중에서 마태가 바로 앞 구절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한 호 11:1을 인용하면서부터 이미 그의 머리 속에, 생애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모세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출 4:19 을 인용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2:21]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요셉이 일어나...들어오니라 - 여기서도 요셉의 절대 순종이 돋보인다. 아마 이때는 어둠을 틈타 행동해야 할 아무런 장애 요소가 없었기에 해가 있는 낮에 본국(本國)으로의 입국을 결행했을 것이다. 실로 '밤에' 떠났던(14절) 그들이 낮에 돌아오게 된 것이야말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절대 의지를 일견(一見)나타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2:22]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아켈라오 - 헤롯 사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63-A.D.14)가 헤롯이 관할했던 영토를 셋으로 분할하여 아켈라오(Archelaus)에게는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주었고,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 I)에게는 바타네아(Batanea)와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를,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각각 주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한편 아켈라오는 그의 부친과 다름없이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로마에서 성장하여(Josephus) 로마 황제에게서 이스라엘의 분봉왕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만약 통치만 잘하면 '왕'의 칭호까지 부여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는 무능한 통치자로 평가되어 A.D. 6년에 폐위당하고 축출되었다. 그런 관계로 유대지방은 로마에서 직접 파견된 총독에 의해 다스려졌다. 바로 그 무렵에 요셉은 식구들을 인솔하여 이스라엘 경내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 유대 사가(史家)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시이저로부터 분봉왕으로 임명받기전부터 잔혹한 살상을 저질렀다 한다. 그 한 예로 그의 부친 헤롯이 죽기 전 자신이 성전에 세워 놓았던 금 독수리상을 훼손시켰던 유다와 맛디아라는 열렬한 애국자 둘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켈라오가 아직 즉위하기 전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여러 사람들이 이 두 순교자들을 위하여 애도(哀悼)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성전을 에워싸도록 하고서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요셉이 들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 아마도 그때 마태의 생각에는 요셉이 헤롯의 음모가 아니었다면 애굽으로 도피하기 직전에 머물렀던 베들레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했으며, 애굽에서 돌아올 때에도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린 메시야가 성장하기에 알맞은 곳은 예루살렘 성도(聖徒) 주변이지 '이방의 갈릴리'(4:15;사 9:1)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는 이곳 나사렛이 원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눅 1:26;2:4, 39) 그들의 나사렛 정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여하튼 이 현몽(現夢)은 그가 받은 네번째이자 마지막 현몽으로 이때 받은 '지시'(*, 크레마티조)는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의미이다.

성 경: [마2:23]

주제1: [메시야 탄생에 대한 반응과 유년시절]

주제2: [나사렛에 정착]

⭕ 나사렛(*) -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유래한 말인데 '싹, 어린 순'이라는 뜻이다. 갈릴리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쪽 약 9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비옥하지 못한 모래 땅, 주위의 산들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빈약한 성읍이었다. 이곳은 구약성경에도 외경(外經)에도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에도 나오지 않고 여기에 새로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실로 나사렛은 경멸받던(요 1:46) 성읍의 하나였으나 주후 4세기 이후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루려함이러라 - 본절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구절은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랜 세월을 두고 다음과 같은 여러 논쟁을 야기시켜왔다. 즉 (1) 구약 이외에 구전되어 오던 구절이거나 분실된 부분이다(Chrysostom, Zigabenus, Theophylact). (2) 나사렛의 뜻이 '싹'이므로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사 11:1)을 가리킨다(Jerome, De Wette, Vincent). (3) 나사렛의 어근은 나사르(*)로서 '구별'을 뜻하므로 '나실인'(민 6:2, 8)에 관련된다(Tertullian, Erasmus, Wetstein). 위와 같은 견해들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보다 타당한 해석은 다음 경우이다. (4) '선지자'(*, 프로페톤)란 용어가 복수 형태인 것은 한 특정한 선지자가 '메시야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리라'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시 22:6-8, 13;69:8, 20, 21;사 11:1;49:7;53:2, 3, 8;단 9:6, Michaelis, Paulus, Rosenmuller, Kuinoel, ol-Shausen). 실제로 나사렛은 멸시당하던 곳이었으며(요 7:41, 52), 심지어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조차 경멸당하던 곳이었다(요 1:46).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이단'(행 24:5)으로 취급되었을 때의 이 '나사렛'이란 단어는 비방과 모욕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다윗의 왕통에서 나온 줄기였고 조룽과 경멸을 받으며 비천한 환경에서 자란 왕이신 메시야였던 것이다.

성 경: [마3: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 세례 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스) -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은 '유앙겔리조마이'(*)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성 경: [마3: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마3: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퀴리오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 여기서 '첩경'(*, 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는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성 경: [마3: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 메뚜기(*,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양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성 경: [마3: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마3: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 요단강 - 히브리어 '야라드'(*,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 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 세례를 받더니(*,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성 경: [마3: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바리새인(*,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 사두개인(*,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 오는 것을(*,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6:16, 17).

성 경: [마3:8]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마3:9]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3:10]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성 경: [마3:1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성 경: [마3:1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성 경: [마3:1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 때에(*,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성 경: [마3:1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말려(*,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성 경: [마3:1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받는 종(사 42:1-9;49:1-6; 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성 경: [마3:1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 하늘이 열리고(*,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성 경: [마3:1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성 경: [마4: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시험 받으시러 광야로 가심]

⭕ 그때에(*, 토테) -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 성령에게 이끌리어 -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성령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 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 마귀(*, 디아볼로스) -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 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장이 (요 8:44)요,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본문 강해참조).

⭕ 시험을 받으러(*, 페이라스데나이) - '페이라조'(*, '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5)일 뿐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 결단(死生決斷)의 시험이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 광야 -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사 13:21;34:14;마 12:43;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성 경: [마4: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새애의 개시]

주제2: [시험 받으시러 광야로 가심]

⭕ 사십 일을 밤낮으로 -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왕상 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수(神性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o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예수께서는 40일 밤낮동안 모든 음식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동안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등). 어쨌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 인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당신의 공생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Godet).

성 경: [마4:3]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본질에 대한 시험]

⭕ 시험하는 자(*, 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 나아와서(*, 프로셀돈) -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단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했다기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야적 권능을 메시야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 문제(허기)를 해결하는대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된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가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단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앙을 하든 그것은 손으로 집어 들을 수 있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 아르토이)은 유대인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loaves)을 가리키는것 같다(Thayer).

성 경: [마4:4]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본질에 대한 시험]

⭕ 기록되었으되(*, 게그라프타이) -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벧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 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다.

⭕ 사람이...말씀으로 살 것이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 에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 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 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단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 생활의 헛점을 파고 드는 사단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원(元)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말씀'(*, 레마 데우)그 자체인 것이다. 이말씀이야말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한다(Trench).

성 경: [마4:5]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충실성에 대한 시험]

⭕ 데려가다(*, 파라람바네이) -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을 가리킨다.

⭕ 거룩한 성...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이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률 뜻하는 '프테뤼기온'(*)이 '작은 날개'를 의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우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위장하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의 메시야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 세우고(*, 에스테센) -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롤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성 경: [마4:6]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충실성에 대한 시험]

⭕ 뛰어내리라 -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심으로써 메시야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익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나꿔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케한다. 이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록 유흑하는 것이었다.

성 경: [마4:7]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직의 충실성에 대한 시험]

⭕ 또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 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Bengel, Calvin, Luther;Scriptura explicanda est). 신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 -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사건에 근거한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을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성 경: [마4:8]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의 순결성에 대한 시험]

⭕ 지극히 높은 산 - 누가복음에는 이같은 기록이 없다(눅 4:5). 어떤 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 내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지켜보았던 느보산(신 34:1-3)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모든 나라를 보실 수 있는 산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천하 만국의 영광'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귀와 시험의 객관적 실재(實在)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 천하 만국과 그 영광 -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Clarke). 사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De Wette, Meyer).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천하 만국'을 지도상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초자연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 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가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實際)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 세상의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고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것이지 '영광'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the former)를 버리고 후자(the latter)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이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6:23).

성 경: [마4:9]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 순결성에 대한 시험]

⭕ 경배하면(*, 프로스퀴네세스) -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 당착(自家撞着)이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奸計)였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bow)이면 된다는 사단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 네게 주리라 -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 만국'의 정당한 소유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14:30;16:11), 공중의 권세잡은(엡 2:2) 타락한 신(고후 4:4)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endurance)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천하 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使嗾)한 사단과 함께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성 경: [마4:10]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메시야의 순결성에 대한 시험]

⭕ 사단아 물러가라(*, 휘파게 사타나) - 시리아 사본(Syrian)이나 서방 사본(the Western)에는 16:23의 영향을 받아 '오피소 무'(*), 곧 '내 뒤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단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여하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단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決然)에 찬 예수의 명령이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단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personal name)인 '사단'(*)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막 1:13;3:23, 26;4:15;눅 22:3;요 13:27 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야 왕국이 사단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 온 것이다(12:25-28;눅 10:1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敵)인 사단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이다(고전 15:25, 26).

⭕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섬기라 -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다. 예수는 사단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한편 여기서 '경배'(*, 프로스퀴네세이스)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禮)를 갖추는 행위이다. 한편 70인역(LXX)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티라'(*), 곧 '경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섬김'(*, 라트류세이스)이란 원래 고용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경배'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 교호적(交互的)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 모노) 하나님만을 섬겨야(shall serve) 되는데 그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마4:1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시험을 이기신 예수]

⭕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위 앞에 마귀는 참패한채 그분에게서 패퇴(敗退)해 갔다. 여기서 '떠나고'(*, 아피에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한다(Hill).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첫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敗走)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 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崩壞)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번역치 않은 '카이 이두'(*)가 문두에 제시되어 이어지는 상황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수종들다'의 '디에 코눈'(*)은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게속적인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8:15;25:44;27:55;왕상 19:6, 7). 따라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氣盡)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에게 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隨從)들었을 것이다(Bengel, Bruce, Alford, Lange 등).

성 경: [마4:1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 '요한의 잡힘'에 대한 상세한 내력은 14:1-12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결심했을 때를 가리키는 대략적 시점을 표시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체포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들으시고'(*, 아쿠사스)는 '들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전후 문맥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히기 전 얼마동안 유대 지방에 머무시면서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17절;막 1:15), 세례를 베풀었다(요 3:22).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요한이 투옥된 때부터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 '물러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코레인'(*)은 종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어떤 위기의식에 따른 장소적 이동과 한적한 곳에서의 '은거'(隱居)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다스렸던 곳으로, 예수의 고향 동네이자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선교지로, 또한 은신처로 적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유대의 중심지인 예루살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의 갈릴리'(15절)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 갈릴리(*) -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히브리어로는 '고리', '주변'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복후 갈릴리 지방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건축 자재들을 공급한 대가로 갈릴리의 성읍 20을 준(왕상 9:11) 이후로 이 지방은 앗수르(왕하 15:29), 바벧론, 바사(Persia),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유행하고 있던 혼합 종교들과 제사가 갈릴리 지방에 유포(流布)되어 유대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웠으며,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요 7:41, 52) 여겨져 왔다.

성 경: [마4:13]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본절에는 이 일에 대한 동기가 분명치 않으나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한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고(눅 4:29-31)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갈릴리 정착에 대한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요 4:45)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버나움에로의 이거(移居)는 예수의 사역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해변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며,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무역 통로에 위치하여 예수의 사역에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참빛을 절대 필요로 하는 흑암의지대로서 예수 선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비쳐졌으며 그들의 눈에는 메시야 사역의 최적지(最適地)가 유대 땅 특히 예루살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거함로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옛 지경(地境)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되었으며(15, 16절), 예수의 이중 사역, 즉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눅 4:18, 19)에 갈릴리 지방이 더 적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가버나움(*) - 신약에만 나오는 곳으로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이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이 성읍의 소재(所在)에 대해서 전에는 '칸 민예'(Khan Minyeh)라고 생각되어 왔으나(Stanley, Carr) 1931년의 유적 발굴 결과 아랍인이 지은 우마야드(Umayyad) 궁전의 폐허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버나움은 칸 민예에서 4km 정도 북동쪽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으로 인정되고 있다(Thomson, Robinson).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에 세관이 있었고(막 2:14)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마 8:5-8). 또한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8:14;막 1:29),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곳이 고향인 듯하다.

성 경: [마4:15]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 사역의 시작]

⭕ 스불론 땅과...갈릴리여 - 여기서 영토의 범위를 표시하는 5개의 고유 명사들은 '백성'(*, 호 라오스)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에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중에,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곳 각각의 지명을 강조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상(上) 갈릴리' '하(下) 갈릴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해변길'(*, 호돈 달라쎄스)이란 70인역(LXX)의 사 9:1 에 언급된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데레크 얌'(*) 곧 '바다쪽으로'란 말을 축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다로 가는 길'이라기 보다 '바다 옆' 곧 갈릴리 해안 지대로 보는 것이 좋다(Turner). 그리고 '요단 저편'이란 갈릴리 동쪽 해안 지대로서 앗수르 침공시 납달리가 곤혹을 치뤘던 곳이다(왕하 15:29).

성 경: [마4:16]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흑암에 앉은 백성 - '백성'(*, 호 라오스)이란 말은 '나라', '이방인'을 의미하는 '타 에드네'(*)와 구별되어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15절에 언급된 지방에 '앉은'(히브리어적 의미로는 '행하던'으로 볼 수 있다) 백성들, 즉 멸시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토 중 '흑암의 지경에 행하던' 땅, 곧 종교적, 정치적 이점(利點)이 없는 가장 어두운 지역이 이제는 참 빛이신(요 1:9)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흑암'이라는 말은 '빛', 즉 '하나님의 진리'의 부재(不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참 복음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들이 놓여 있던, '사망의 땅과 그늘'이 드리운, 곧 죽음과 절대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 카데메노스. '계속적으로 거주하며 살다'는 뜻) 절망 속에 헤매었으나 자신들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한 흑암 속에서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 4:2)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비취다'(*, 아네테일렌)는 '특별한 예언에 따라 특정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찬란히 빛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참빛이 다른 지역에서가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제일 먼저 눈부시고아름답게 '발'(發)했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형식주의와 율법적인 의의 빛이 폐기되어 버리고 본래의 참 빛(요 1:9)이 높이 솟아 가장 어두운 곳을 가장 먼저 가장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4:17]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예수의 사역의 시작]

⭕ 이때부터(*, 아포 토테) -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26:16) 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 전파하여(*, 케륏세인) -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 케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 로고스)과 진리(*, 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 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 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음(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막 1장 강해, '하나님의 나라 개념' 참조).

성 경: [마4:18]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갈릴리 해변 -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수 11:2;19:35;왕상 15: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벧론 포로 귀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막 6:53;눅 5:1)로 불리웠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 얌)라는 말과 헬라어에서의 '바다'(*, 달라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14:24;막 4:37;6:48;눅 8:23;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이 된 성읍들(마 4:13;11:20;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름이다(10:2;16:18;막 3:16;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 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 안드레(*) -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 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 그물 던지는 것 - '그물'(*, 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 '그물들', 4:20)와 '사게네' (*, '그물', 13:47) 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눅 5:2) 반면에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 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

성 경: [마4:19]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나를 따라 오너라 - 예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의 효력을 갖는 '따라 오너라'(*, 듀테)라는 표현은(10:38;눅 9:23;14:27) 예수의 사역 수행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좇아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의 육체를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두 청산(淸算)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이다(10:38, 39).

⭕ 사람을 낚는 어부 -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직업과 새로운 사명을 연결시켜 그들에게 주어질 직무가 사망의 땅과 그늘(16절)에 영원히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성령과 복음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렘 16:16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포로로 삼기 위해 어부를 보냈듯이 이제 예수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어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영광스러운 직책에 대해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전(以前) 직업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주변 환경과 밀접한 일상사를 문학적인 표현(비유)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를 교훈하시고 나타내실 때가 많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종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람'(*, 안드로포이)이란 복수 용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아무튼 이 명령은 28:18-20의 대선교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름지기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마4:20]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곧 -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제자로 부름받는 두 사람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요 1:35-51) 크나큰 영적 감화력(感化力)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들이 내.외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 버려 두고(*, 아펜테스) - 이 용어는 '멀리 내던지다', '포기하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린 제자들의 철저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거나, 그들의 생업을 영원히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자했던 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었고, 전에 이미 알고 있던(요 1:35이하) 제자로서의 소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즉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제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을 미워하고(눅 14:26), 그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10:37)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6:33).

성 경: [마4:2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세베대(*) - '여호와의 주심'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자, 예수의 이모인 살로메의 남편(27:56;막 15:40;16:1)이다. 그의 집에서는 삯꾼을 부리고 있었으며(막 1:19,20), 예루살렘에도 그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요 19:27) 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출신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 야고보(*) - 이스라엘의 조상의 이름과 같은 '발꿈치를 잡았다'란 뜻이다(창 25:26). 야고보와 그의 동생(17:1;막 3:17)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로서 예수와 사촌 형제간(요 19:25)이 된다.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던 제자 중 한 사람이다(17:1;막 5:37;9:2;13:3;눅 8:51;9:28). 후에 그는 해롯 아그립바에 의해 피살되어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 요한(*) - 이 헬라명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란 뜻을 가진다. 그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요 1:35-37),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눅 22:8;요 13:23;19:26, 27), 장수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기록한 자(계 1:1)이다. 또한 그의 성격은 내성적(요 20:1-10)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져(눅 9:49,54)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란 별명(막 3:17)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만큼 남자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주님의 십자가 최후를 지켜보았으며(요 19:26),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의 당부에 따라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극진히 봉양했다 한다(Irenaeus, Polycrates, Clement).

⭕ 배(*, 프로이온) - 모든 배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서 여기서는 서너명이 함께 타고 조업할 수 있을 만큼의 배였던 것 같다(막 1:20).

⭕ 그물 깁는 것 -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깁고'(*, 카타르티조)라는 동사는 '준비하다', '수선하다' 또는 '원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눅 5:1-11의 상황를 고려해 볼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후에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 일'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이같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일선에서의 '복음 전파 활'을, 전자는 배후에서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 부르시니 - 여타의 말씀을 생략하신 채 단지 예수께서 영적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는 부름에 따른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기 보다는 22절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즉각적 순종에 그 초점이 맞춰진 묘사이다.

성 경: [마4:2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 저희가 곧...버려두고...좇으니라 - 베드로나 안드레처럼(20절) 야고보 형제는 지체없는 순종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의 '버려 두고'란 말도 그들이 혈연 관계를 포기하거나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좇아 제자로서의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과(막 1:20) 인정많은 가족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은' 바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제자됨의 필수 요건이다.

성 경: [마4:23]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갈릴리 사역]

⭕ 온 갈릴리 - 예수의 사역 당시 갈릴리는 동쪽은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 서쪽은 지중해, 남쪽온 사마리아, 서북쪽은 베니게로 둘러싸여 남북이 약 80km, 동서가 약 45km정도의 작은 지역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저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Life 235<45>;war , 41-43<iii, 2>)에 의하면 갈릴리는 204개의 대소 성읍들과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비록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는 매우 비옥하여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근처에는 호수가 위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최소한 3백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Josephus, De Bello Jud. iii, 3, 1). 그러므로 이곳을 예수께서 매일 2개의 마을씩 순회하며 모든 동리를 다 돌아보려고 하였다면 안식일도 쉬지 않고 강행한다 하더라도,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이 소모(消耗)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모든 동리를 샅샅이 돌아다녔음을 뜻하기 보다 갈릴리의 전구역을 이리저리 왕래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암시한다(9:35).

⭕ 회당(*, 쉬나고가이스) -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종교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서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신 31:11과 시 74:8을 인용하여 회당이 매우 일찍이 기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바벧론 포로 중에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느 8:1-8, Carolus Sigonius). 예수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유대인 랍비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Winer).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에 이곳 회당에 모여 기도와 율법을 배우는 일에 힘썼다. 특히 구약 율법서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허락에 의해 율법 교육에 합당하며 권위있는 자가 나서서 율법을 해석,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당을 전도 활동의 무대로 활용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나(막 9:5;요 1:38) 백성들에게(막 10:51;요 20:16) '랍비'라고 불리웠다. 이 회당이란 용어는 본서에서 '가르침'과 연결되어 나온다(9:35;13:54). 더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부분을 참조하라.

⭕ 가르치시며...전파하시며...고치시니(*, 디다스콘...케륏손...데라퓨온)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도의 세 가지 특수한 양식(樣式)으로서 모두 천국(메시야 왕국)과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르치다'는 예수의모 든 활동이 근본적으로 '교훈'(*, 디다스코)과 관계가 있으며, '전파하다'는 예수자신이 오심과 함께 천국의 도래가 가까왔다는 '복음'(*, 유앙겔리온)과 관계가 있다. 끝으로 '고치다'는 예수께서 천국이 축복과 더불어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신적인 능력을 행하신 바 이는 흑암의 왕국(16절)이 파괴되고 천국이 '회복'(*, 아포카타스타시스; 행 3:21)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이 세 가지 전도 방법(teaching, preaching, healing)은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선교 역사에 계승되었다.

⭕ 천국 복음(*, 토 유앙겔리온 테스바실레이아스) - 이 용어는 본서 9:35과 24:14에 다시 나타나는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메시야가 임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 말이다. 한편 '천국(의)'은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비교 눅 8:1 '하나님의 나라')으로서 복음이 천국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천국'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고(3:2;4:17), 또한 그것은 산상수훈(5-7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이 '천국 복음'일진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은 이것을 명심하여 그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 병...약한 것 - '병'(*, 노소스)은 일반적인 '질병'(sickness), 그중에서도 만성적이고 중한 질병을 의미하고, '약한 것'(*, 말라키아)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생활적 기능의 쇠약'을 의미한다. 실로 사랑이 많으신(9:36) 예수께서는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그의 사역의 최종 목표였으나 인생의 현세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아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 임하신 사실에 대한 예보(豫報)이자 천국 왕의 신임장(credentials of the King)이다(Walvoord, 사 35:4-6;마 11:2-6).

성 경: [마4:24]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갈릴리 사역]

⭕ 소문(*, 아코에) - '들음'이라는 뜻으로서 '평판'(report, Living Bible) 또는 '명성'(fame, KJV)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당시 예수의 전도 활동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환대(歡待)를 받았으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 수리아(*) - 이곳의 지리적 범위는 불확실하나 예수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에 있는 갈릴리를 제외한 유대 북쪽의 팔레스틴 전체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서로 미워하였으나 이제 그곳에도 예수의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한편 그후 바울 당시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다메섹, 안디옥,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세워지는 등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근거지가 되었다(행 15:41;18:18;21:3;갈 1:21).

⭕ 모든 앓는 자...중풍병자 - '모든 앓는 자'(*, 투스 카코스 에콘타스)는 질병에 대한 보통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고질적인 병에 걸린 자'란 뜻으로 의학적 처방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 '모든'이라는 수식어는 정신적 질환과 구분되는 육체의 모든 질환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이 육체적 질환에는 그 병증에 따라 가벼운 것(각색 병)과 무거운 것(고통에 걸린)으로 나누인다. 여기서 '각색병'(*, 포이키라이스 노소이스)이란 '가지 각색'(various)의 병증이 크게 위급하지 않는 질병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고통에 걸린 자'(*, 바사노이스 쉬네코메누스)란 병들어 거의 기진하다시피 고통당하는 중환자를 의미한다. 이상이 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었다면, 뒤이어 나오는 세가지의 병명은 구체적인 분류이다.

⭕ 귀신들린 자(*, 다이모니조메노이) - 더러운 병(17:18;막 9:25)인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음이나 몸을 혼란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귀신들린 자는 육체적인 기능이 일부 또는 전체가 상실되기도 하고(9:32, 33;막 9:18;눅 11:14), 정신적인 장애 현상(17:15;요 10:19-21)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12:28;눅 10:17;행 16:18)에게 귀신은 굴복당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불못(계 20:14)에 던지움으로 영구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막 9:14-29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 간질하는 자(*, 셀레니아조메노이) - 이 질병에 대한 혤라어의 본래 의미는 '졸도 증세'란 뜻이다. 이 병은 중추 신경 계통이 이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데, 증세는 의식을 잃는 것과 발작성 경련,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의학의 시조라 불리우는 B.C. 4백년 경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간질을 어떤 귀신에 사로잡혀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문에서와 같이 '간질'을 '귀신 들림'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한 '셀레니아조메누스'란 용어는 고대 점성가들의 견해대로 간질이 '달'(*, 셀레네)의 '영향을 받은'(*, 조메누스)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당시의 민간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중풍병자(*, 파랄뤼티코이) - 이 용어는 신약에만 나타나는 용어로서 일반적인 마비 증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질병은 대뇌조직의 손상이나 척추신경의 파괴, 또한 중추신경 개통의 질환으로 인하여 야기된다. 한편,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하시는 예수의 기적들은 그의 메시야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타락된 흑암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불안(8:17 참조)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질병의 근본 원인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메시야의 사명이라는 것이다(1:21).

성 경: [마4:25]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갈릴리 사역]

⭕ 데가볼리(*, 데카폴레오스) - '열 도시들'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요단강 동편과 갈릴리 바다 남쪽, 곧 북쪽의 다메섹에서 남쪽의 빌라델비아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헬라인 도시들의 연맹체이다. 이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B.C. 323) 그의 후계자들과 노장(老將)들이 전형적인 혤라인 도시를 건설한 데서 기원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거점(據點)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는 배타적이었다. 예수 활동 당시 즉 A.D. 1세기에 이 도시들은 크게 번화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이방인들 조차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은 예수사역이 유대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요단강 건너편 -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얍복강과 아르논강 사이'로 단정하는데, 여기서는 이곳이 베레아로 소개된 동부지역 전체를 잎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팔레스틴 경내에 인접한 지역까지 예수의 소문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 갈릴리에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신 예수(15,16절)의 생명의 빛이 갈릴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계시하는 마태의 웅장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갈릴리로 모여 들어 예수를 '좆는' '허다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Christ follower)였지,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참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christan)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았을 뿐, 예수의 영적, 신적 측면, 즉 우리의 왕되신 예수께서 구원자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이적과 축복만 탐하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진리와 사랑, 아니 예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한 기복적이고 현실 지상주의적인 신앙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5: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 제자들이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같이'(출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마5: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 가르쳐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성 경: [마5: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심령이 가난한 자(*,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성 경: [마5: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성 경: [마5: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성 경: [마5: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 경: [마5: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성 경: [마5: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성 경: [마5: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성 경: [마5:1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성 경: [마5:1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성 경: [마5:1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1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성 경: [마5:1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성 경: [마5:1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성 경: [마5:1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성 경: [마5:1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1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amen>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 일점 일획(一點 一劃)(*,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성 경: [마5:1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2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마5:2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성 경: [마5:2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 지옥불(*, 게엔나 투 퓌로스). -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 라가(*,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 미련한 놈(*,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성 경: [마5:2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것이다.

성 경: [마5:2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가 아닌 '디아'(*,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성 경: [마5:2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옥'(*,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성 경: [마5:2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 호리라도(*,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성 경: [마5:2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성 경: [마5:2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 음욕을 품는(*,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마음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성 경: [마5:29,3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성 경: [마5:3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마5:3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 버리면(*,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 간음하게 함이요(*,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성 경: [마5:3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성 경: [마5:3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성 경: [마5:3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옴뉘나이 엔)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다'(*,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성 경: [마5:3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성 경: [마5:3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 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성 경: [마5:3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성 경: [마5:3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성 경: [마5:4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訟査)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성 경: [마5:4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성 경: [마5:4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성 경: [마5:4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성 경: [마5:4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빈(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래동안 은총을 베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 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의 연장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성 경: [마5:4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 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 무슨 상이 있으리요 -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성 경: [마5:4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인'(*, 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Scott).

성 경: [마5:4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라 -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온전'(*, 텔레이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탐밈'(*, 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탐밈'이라는 말은 희생 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한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전 14:20; 엡 4:13;히 5:14; 6:1).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앞의 대립 명제와 관계된 권위있는 율법 해석에서 보여졌듯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할 것이 바로 이런 온전함이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脈絡)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反映)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던 것처럼(레 11:44, 45;19:2;20:7, 26)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서 이같은 특징(벧전 1:16)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France).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있게 예수가, 무제약적인 온전함이 제자들에게 가능 하다고 가르친 거스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들이 영적으로 파산(破産)하였다(3절)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사'(6:12)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던 종말론적인 목표인 아버지의 온전함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추구(追求)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6: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사람에게 보이려고 - 이 구절은 1-18절까지의 서론에 해당된다. 이 단락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세 가지 종교적 의무, 즉 의(義, 2-4절),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 등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제시되고있다. 즉 5장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해석을 설명하시고도 높은 경지의 의(義)를 가르치신 후 이곳에서부터는 율법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전(inheritance)과 관습에 관한 바른 지침 및 그들이 당면할 종교적 위선의 위험성을 계시하고 있는것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外飾)적으로 이 같은 종교적 관행을 하고 있음을 비난한다. 여기서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아데나이'(*)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강조하는 제 1부정 과거 수동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란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처럼 전적으로 인간을 의식하고 그의 판단을 고려하면서 취하는 행동은 항상 위선의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을 익히 아시고, 또 그것을 능히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고려하고 날마다 신전(神前,Coram Deo)의식을 지닐때 인간의 오류와 위선은 최소화 될 수 있다.

⭕ 너희 의를 -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너희 구제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까닭은 아마 '의'란 말이 히브리어로 '체다카'(*)로서 70인역(LXX)에 따르면 간혹 구제를 위한 의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신 6:25).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의'를 '구제'란 의미로 직접 변형하여 사용한 적이 없고, 또 다음 절에는 '구제'란 말이 따로 쓰이기 때문에 이를 구제란 말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구별되는 '너희'라는 말과 더불어 이 '의'(*, 디카이오쉬넨)는 예수의 제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의로운 생활 방식의 배후에 있는 거룩한 동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A. Carson).

⭕ 행치 않도록 - 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실천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바른 행위를 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이를 행하였다. 이에 주께서는 이러한 위선적 행위를 규탄하고 하나님의 실존을 의식하고 그분이 미구(未久)에 내려주실 온전한 보상만을 기대하며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주의하라(*, 프로세케테) - 이는 주로 고대 헬라어에서 종종 발견될 뿐 성경 문학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서(LXX, 욥 7:17), 특히 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는 '마음'을 뜻하는 '눈'(*)이란 말이 생략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의 원의(原意)를 살펴보면 '이것을 항상(생각)하라','오직 이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라'는 뜻이 된다.

⭕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염려했으며, 또 그들에게서 이미 위대하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상(賞)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의 행위 전체를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성 경: [마6: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그러므로 - 이 말의 원어 '운'(*)은 여기서 앞 구절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보충적 설명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예를 들자면',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들자면'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 구제할 때에 - 이 어구가 '구제한다면'이라는 조건문으로 기록되었으면 구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어구는 단순히 직설적으로 '구제할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께서는 구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가 공적(功績)을 쌓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편 중의 하나로 생각할 정도로 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구약 외경 토비트 12:8, 9). 어쨌든 여기서는 공적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하거나 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함에 있어서 과시나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 외식하는 자(*, 호이 휘포크리노마이) - 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 '...인 체하다'는 등의 뜻인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타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 '배우'등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 용어는 주로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형태와 연관되어 본서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5, 16절;7:5;15:7;23:13-15;24:51). 여하튼 '외식'은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속이는 악행으로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단죄될 것이다(고후 5:10).

⭕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 의와 기도 그리고 금식으로 삼대별(三大別)되는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 중에서 아마 '의'의 일부에 속한 이 구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셨던 것 같다. 그러나 외식자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동기(動機)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회당과 거리에서 이러한 종교 의무를 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께 '오직 영광'(Sola Gratia, 전 12:13;롬 11:36)을 돌리는 데는 전혀 무신경했던 것이다.

⭕ 나팔을 불지 말라 -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때 나팔을 불던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Hill, Bonnard). 그리고 칼빈(Calvin)은 구제자들이 성금을 내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자 나팔을 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헌금궤(눅 21:1)의 모양이 뿔피리 모양으로 생긴 데에 이 말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한다(Edersheim, Jeremias).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정적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실제로 나팔을 부는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더불어 '뷔흘러'(A. Buchler, St. Matthew V:1-6)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즉 '공적인 금식 기도는 나팔소리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런 때에는 사람들이 비오기를 탄원하는 기도 등을 길 거리에서 드리곤 하였다(5절).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제 행위가 자신들의 그러한 금식과 기도의 효과를 한층 더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Sanhedrin 35a;P. Tannith 2:6).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제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제 행위가 자기 과시(誇示)적인 행동을 낳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 상을...받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이 원하던 것은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대중의 칭찬이었으므로 그들은 헛된 영광의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여기서 '받다'에 해당되는 원어 '아페쿠신'(*)은 상업 용어로서 자주 쓰이는데, 거기서 이 말은 전액을 영수(receipt)했다는 뜻이다.

성 경: [마6: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이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따라서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자신이 베푼 자선을 도무지 기억지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그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듯이 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들자면, (1) 겸손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말없이 주는 것을 상징한다(Chrysostom). (2) 오른손으로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고 하지 말라(Luther). (3) 선을 행하고는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고기들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리라(동양 격언)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성 경: [마6: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자선에 대하여]

⭕ 은밀하게 하라 - 이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이 어구는 이곳 외에 6절과 18절에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KJV나 Textus Receptus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본절과 6절에 '은밀히'와 대구를 이루는 '드러내 놓고'(openly, *, 엔 토 파네로)란 말이 첨가되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갚으시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실 뿐이다. 여하튼 우리가 우리의 자선을 잊게되면 잊게 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목해 보실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높이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이다.

⭕ 너의 아버지 -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그 위선의 속깊은 내면을 보고 계시는 심판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義)를 드러내지 않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조용하고 따사로은 눈길로 다 하나하나 보시고 기억해 두시는 '아버지'로 다가오실 것이며, 따라서 그 같은 사실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 갚으시리라(*, 아포도세이 소이) - 직역하면 '그에 합당한 양을 어김없이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주실 것인지 또는 그 보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들이 계시하고 있는 여러 증거들을 참고할 때 우리는 그 보답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지고(至高)한 기쁨과 원숙한 인격의 완성으로 주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Broadus).

성 경: [마6: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기도할 때에 -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따라서 이는 구제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에'(*, 호탄)란 말이 가정법 현재 시상과 더불어 사용됨으로써 규칙적인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넌즈시 비추고 있다(Lenski).

⭕ 외식하는 자 -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유형,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2:15-18). (2)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또 타인을 속이는 유형, 이런 유형의 외식자들은 보통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만, 타인을 속이지는 못하고 곧 발각된다(9:1-5). 아마 예수의 책망을 들었던 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유형에 속했던 것 같다. (3)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는 가장 완벽한 위선자이다. 따라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 행위를 보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

⭕ 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한 표현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이 의식적인 기도에 빠지지 않도록 여기서 그 허황된 위선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래 시상의 어구로서 이 경고를 받은 이후부터 절대 그 같은 잘못을 범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 회당과 큰 거리 어귀 - 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서 1차적으로 외식자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단으로서 이 장소를 택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비난한 내용이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눅 18:9-14;행 3:1;10:9). 만약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성을 보였다(M.Taanith 2:1, 2). 이렇듯 그들 행위의 처음 의도는 순수했으나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즉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자아와의 순결한 만남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하는 것은 금을 주고 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창조자의 순결한 사랑을 인간의 음흉한 위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눅 18:1-4). 이처럼 예수께서는 기도의 장소나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책망하였다기 보다는 그들이 기도한 동기와 목적이 불순(impurity)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께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외식적 태도로 장황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 서서 기도하기를 -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몇 가지 언급되고 있다. 즉 기도는 엎드려서(민 16:22;단 8:17;계 11:16), 또는 무릎을 꿇고(대하 6:13;눅 22:41;행 9:40), 또는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막 11:25)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 한 그들의 헛된 동기(motive)인 것이다.

⭕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외식자들은 관례에 따라기도 시간(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맞추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장소에 나아가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로 기도한 것 같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여지(margin)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공적(公的) 기도를 폐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모든 공적기도를 금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는 그것을 오해하지도 않았다(18:19, 20;행 1:24;4:24-30). 실로 공적인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의 구분이 기도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있는사람, 곧 경건보다 경건으로 인한 명성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사적인 기도는 무시한채 공적인 기도만을 추구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식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골방 기도'이다.

성 경: [마6: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 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 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성 경: [마6: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이방인과 같이 -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5:47;6:32), 본문의 이방인은 두번째의 언급이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심지어 그들과 섞여 살기도 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해서 예수는 자연적으로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동을 비난함과 아울러 바른신앙 생활을 가르치셨던 것같이 이들 이방인들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는 기도의 장소와 그 동기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면, 본문은 주로 기도의 내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 중언 부언 -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Erasmus),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 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呪文)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神)을 질리게 만들었다(왕상 18:26, 28)

⭕ 말을 많이 하여야 - 이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 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사 65:24;히 11:6)

성 경: [마6: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기도에 대하여]

⭕ 본받지 말라 -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强化)되어 쉽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신앙관(왕상 18:26-28)에 미혹되어 신앙의 본질을 망각치 말라는 당부이다.

⭕ 구하기 전에...아시느니라 - 이는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이시느니라'(*, 오이덴)는 말은 긴밀한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직관적 인식을 뜻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전부터 그 간구하는 자의 삶에 깊이 개입(介入)해 오신 분으로서 그 필요(necessity)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이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지니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 필요를 구하기를 원하신다(Hill).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기도와 많은 노력을 통해 신에게서 탈취하듯 복(福)과 소원을 앗아옴으로써 그 간구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 경: [마6: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 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 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듸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 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 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 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 우리 아버지(*, 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사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겔 36:23;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성 경: [마6:1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눅 21:27, 28;계 21:1-8).

⭕ 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야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성 경: [마6:1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오늘날(*, 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 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수 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톤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from hand to mouth)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 일용할(* . 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 'Superstantialem'(뜻 '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앙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 ...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막 3:20;살후 3:12;약 2:15).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것은 하나님께서 앙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수 있는 능력은 물른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고전 4:7;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성 경: [마6:1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혼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 우리가...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시제로 보지 않고 현재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성 경: [마6:1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주기도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 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 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 다만(*, 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 악(*, 루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살후 3:3;요일 2:13, 14).

⭕ 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 복음에는 나와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성 경: [마6:1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용서에 대하여]

⭕ 과실(*, 파라프토마타)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한 편에 치우침'이란 뜻으로서 진리나 의(義)로부터의 이탈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는 근본적인 범죄, 곧 '하마르티아'(*)와 구별된다.

⭕ 용서하면 -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함을 받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부적인(conditional) 공적(merit)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단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참된 회개의 자세이다.

⭕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 이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절)라는 다섯번째 갈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강조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이곳 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18:23-35;막 11:25). 이는 예수를 주로 모신 공동체의 성격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성 경: [마6:1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용서에 대하여]

⭕ 용서하지 아니하면 - 내용적 측면에서 14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실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바를 우리는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율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고자 하면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원하면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성 경: [마6:1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금식에 대하여]

⭕ 금식할 때에 - 모세의 율법에는 1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다 금식(禁食)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6:29-31;23:26-32;민 29:7). 그리고 바벧론 유수 기간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셨던 지난 날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할 것을 규정하였다(슥 7:3-5;8:19). 그러나 이런 국가적 차원의금식 외에 각 집단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금식은 때때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는 주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기 위해서(느 9:1, 2;시 35:13;사 58:3;욘3:5 등) 그리고 헤어날수 없는 큰 번민과 위기 또는 절망에 빠졌을때 하나님께 구원을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출 24:18;삼하 1:12;예 4:16;행 14:23 등) 행해졌다. 사실 이금식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적 측면에서 자기 훈련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시대에서부터 금식이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사 58:3-7;렘 14:12;슥7:5, 6). 그중에서도 특히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 구제에 무관심한 사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내려졌었다(사 58:1-7).

⭕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 이는 바로 앞의 '금식할 때에'라는 말이 현재 시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당시에 금식은 어떤 특별한 행사라기보다 유대인들이 늘상 게속해 오던 행사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 경에 금식하였다. 그리고 '안나'와 같은 경건한 여선지는 일상적으로 금식하였다(눅 2:37). 그런데 이러한 금식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배고픔과같은 육체적인 고통통 따르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고통을 자기 의(義)와 경건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적 고통에 인위적인 표정까지 가미(加味)하는 위선을 범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신앙 생활을 결코 자기의(義)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轉落)시켜서는 안 된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뤄져야 하는 참된 경건인 것이다.

⭕ 사람에게 보이려고 - 금식을 할 때에 자연적으로 용모가 흐트러지고 또한 자신의 내적인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중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재(災)를 뒤집어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의 진실된 통회의 표시로써 금식이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종교심을 자랑하고 또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동기에서 외식적인 금식이 행하여졌던 것에 대해서이다.

⭕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 여기서 '흉하게 하다'는 뜻의 원어 '아파니주신'(*)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뜻인 '파노신'(*)은 그 음운상 비슷한 단어로서 헬라 문학에 있어서의 일종의 재담적(才談的)표현이다(Robertson). 한편 '얼굴을 흉하게 하는'것이란 먼지와 재 등을 머리에 뒤집어 씀으로서 본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삼하 15:30;겔 24:17).

⭕ 자기 상을...받았느니라 - 2절 주석 참조.

성 경: [마6:1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금식에 대하여]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어떤 특별한 기름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몸단장을 위한 한 절차로서 사용된 것을 말한다(룻 3:3;삼하 12:20;전 9:8). 그 한 예(例)로써 다윗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병을 위해 금식하다가 그 아이가 죽고 나자 금식을 중단하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발랐다(삼하 12:15-20). 이처럼 기름을 바르는 것은 금식의 행위를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대응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

⭕ 얼굴을 씻으라 - 이 역시 일상의 몸단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지시를 하신 예수께서 금식 그자체를 금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금식의 필요성을 절대 부인하지 않으셨다(9:14, 15). 다만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슬픈 기색을 지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성 경: [마6:1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금식에 대하여]

⭕ 네 아버지께 보이게 -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위이며 육신의 고행(苦行)이고, 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한 일종의 육체적 단절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세상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 거룩, 겸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야지 조금이라도 사람을 대상으로하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4절 참조).

성 경: [마6:1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보물 - 이 말은 본래 소중한 물품을 보관해 두는 장소라는 뜻이었으나, 그 의미가 발전하여 그 장소에 보관해 둔 물품,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2:11). 여하튼 이 보물은 값비싸고 귀중한 귀금속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홋날 최고의 가치를 발하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팔레스틴인들이 자기의 소중한 물품을 땅속에 묻어두었던 전통에 입각해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13:44).

⭕ 땅에(*, 에피 테스 게스) - 하늘과 반대되는 장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영원한 미래가 없는 순간적이며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 쌓아 두지 말라(*, 메 데사우리제테) - 이는 현재 시상으로서 '쌓아두기를 그만 두라'(stop storing up)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Turnur, Syntax, p. 76). 이는 그릇된 행위를 단호히 끊어버릴 때가 왔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에 최선의 가치와 행복을 두지 말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땅에 쌓인 재물과 보화가 최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가는 훗날 큰 화(禍)를 만날 수 있다. (2) 탐욕이 가득한 자들은 지상의 재물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위해 살고 있으나 신자(信者)는 하늘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때 이런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 (4) 재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풍족히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것에도 만족할 수 있어야한다.

⭕ 좀과 동록(*, 세스 카이 브로시스) - 먼저 '좀'(moth)은 옷이나 음식을 해치는 벌레들, '동록'(rust)은 금속의 부식(corrosion)을 기리킬 뿐 아니라 간혹 쥐들이나 곰팡이에 의해 입게되는 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와 반대되는 일시적 재물이나 명예, 보물 등이 이것들에 의해 잠식되고 파괴된다고 기록한다(사 51:8;약 5:2, 3).

⭕ 도적이 구멍을 - 당시 팔레스틴에 건축된 가옥들은 대개 진흙벽이나 흙색돌을 쌓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적들은 주택의 출입구를 통과하지 않고 그 흙 벽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그 집의 귀중품을 훔쳐갈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바로 앞 문구에서는 재물의 내적인 파괴 원인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외부의 손길에 의해 이땅의 재물이 안전하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성 경: [마6:2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하늘에 쌓아 두라 - 지상의 보물에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뒤따른다(19절). 본절에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안전하다는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 특별히 '땅'에 대비되는 '하늘'은 그 안전성의 차이 뿐 아니라 그 영원 '지속성과 거룩성 및 무한한 가치성에 있어서 땅에 쌓아 둔 보물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눅 12:33;유대 문헌중 M. Peah 1:1;Pss Sol 9:9). 한편 '하늘의 보물'이란 이 땅 위에서 행한 선한 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면 그 무엇이나 해당된다. 즉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 남을 용서해 주는것 등, 이 모든 것들은 보상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 된다(5:12;고후 4:17). 또한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10:42;25:40), 자기 소유를 타인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것 등도 하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딤전 6:17-19).

성 경: [마6:2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 신앙인의 영원한 경구(警句)인 본문의 요지는,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 그 사람의 인격의 중심, 즉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지(知). 정(精), 의(義)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의 마음에 틈타서 반드시 그의 행동의 방향과 그의 가치관을 결정짓고 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친 바있다. 그러나 위의 것을 늘 생각하고(골 3:1, 2) 천국의 법에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항상 선한 일에 힘쓰게 되며 또한 그들의 행적(行蹟)이 언제까지나 남아 그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것이다(계 14:13).

성 경: [마6:2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눈은 몸의 등불 - 눈을 통해 몸이 갈길을 찾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눈은 '몸의 등불'이 된다. 물론 본문에서는 이 '눈'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하다(Philo). 그러나 이 '눈'을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의 눈 그 자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과(onerlooking)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육체의 '눈'이 보는 바는 '마음'이 보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육체의 눈이 세상의 것에 심취한다면 그마음 역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며, 반면육체의 눈이 하늘의 것을 바란다면 그 마음은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 성하면(*, 하프루스) - 이 말은 원래 '주름없는'이란 뜻으로서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이차적으로는 '진실한'(고후 11:3), '단일한', '풍부한', '관대한'(약 1:5)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상태를 지칭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눈과 마음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하면'이란 적어도 육체와 마음에 궁극적으로 유익을 얻게할 수 있을 정도로 '건전하다'(is sound, RSV)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두 개의 물체(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를 동시에 바라보는 혼란하고 난시안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한 방향으로 '단일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진실하고 성실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 온 몸이 밝을것이요 - 건전하고 진실한 눈을 통하여 얻어진 밝은 빛으로 인하여 몸은 바른 판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실로 밝은 빛되신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굴절없이, 혼선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신령한 것과 속된 것을 바로 구분할 뿐아니라 그 빛 안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분별하고 평가하며, 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

성 경: [마6:2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나쁘면(*, 포네로스) - 이 말은 분명 22절의 '성하면'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혼히 '악한'의 뜻을 가진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이기적이고 인색(吝嗇)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눈이 나쁘다'는 어구는 문맥상 하나님과 재물 양자에다 관심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볼수 있다.

⭕ 온몸 - 앞 구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빛을 받아들이는 물질적 몸을 가리킴과 동시에 도덕적 차원의 전 인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 어두울 것이니(*, 스코테이노스) - 어둡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대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즉 세상 재물에 현혹(眩惑)되어 영적 세계와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은 온몸에 진리의 세계를 전달해 주는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온몸으로 상징되는 그의 전 인격과 영혼은 아무것도 분간치 못하는 흑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 네게 있는 빛 - 여기서 '빛'은 헬라어로 '토 포스'(*)로서 태양 빛과 같은 일반적인 빛(light)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이는 22절의 등불로 번역된 '호 뤼크노스'(*)와 동일한 뜻의 빛(lamp)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인 진리의 세계를 밝혀주는 마음의 등불이 어두우면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여기서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쁜' 눈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실로 본래의 기능이 밝은 빛을 받아 들여야 하는 눈이 어두움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온몸의 상태는 얼마나 치명적이며 절망적이겠는가! 진정 '성한' 눈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죄와 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성 경: [마6:2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재물에 대하여]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 예수께서는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디에다 보물을 쌓아야 할 것인지 또는 우리의 눈을 그 무엇에 고정(fixation)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선택적 문제를 제시하였다(J. Stott, Sermon on the mount, p. 158).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

⭕ 섬기지 못할것이니 - 누가는 불의(injustice)한 청지기 비유를 설명한 다음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싣고있다(눅 16:13). 이는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야 하고 또 목적이 분명해야 함을 가리킨 내용이다. 사실 '종'이란 오직 한 주인에게 전적으로 매인바 되어 그 주인의 명령에 자신의 전의지를 동원해 순종해야 한다(Tasker). 따라서 그 종이 진실하다면 결단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게 된다. 만약 그가 두 주인을 섬긴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을 자신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얻는 한 수단으로서 그 주인들을 섬긴 것이 된다.

⭕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 한 주인을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다. 즉 두 주인을 섬기려 하는 것은 한 주인도 섬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움'과 '사랑'은 인간이 지닌 본성적 감정을 뜻하기 보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성을 지닌 마음의 현상을 뜻한다. 어찌되었든 이 양자는 엄밀히 말해 겸비(兼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또는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든지 하게 된다고 말한다(롬 6:16).

⭕ 이를 중히 여기며(*, 에 헤노스 안뎌세타이) - '중히 여기다'란 말은 그에 대해 변함없이 성실하다란 뜻이다. 그리고 본 어구에서는 둘 중에 하나인 '이를'이란 말이 강조되고 있다.

⭕ 재물(*, 맘모나) - 이는 나쁜 의미로서의 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서 특정한 부(富)나 재산을 뜻하는 아람어 '마노나'에서 유래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재물과 돈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재물은 하나님과 병기(倂記)되어 의인화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 재물 역시 종의 주인으로 묘사되었다.

⭕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서 '겸하여'(*, 카이)란 원어상 '대등하다'는 뜻의 접속사로서 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물질과 동등한 위치예 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받으시거나 또는 아예 섬김을 받지 않으시거나 둘 중에 하나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양자 모두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주를 따르는 제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며, 또한 이러한 행위는 부분적 죄악이 아니라 근본(根本)적인 죄악으로서 그 원인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재산 소유를 정죄한 것은 분명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재산을 모을 수 있으나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6:2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그러므로(*, 디아 투토)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로써'란 뜻으로서 본절에 언급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을 버려야 할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의 절대적 권위릍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서 그 가르치는 바가 세상의 어떤 진리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 목숨을 위하여( , 테 퓌스케 휘몬) -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10:28).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 염려하지 말라 - 이는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시사한 바 있는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염려'(*, 메림나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실로 이러한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된 자는 생(生)에 있어서 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 음식은 생명체의 존속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 goods)이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준 이상, 이에 필요한 음식과 옷은 우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다.

성 경: [마6:2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공중의 새를 보라 - 누가의 기록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새'라는 말 대신에 '까마귀'로 언급된다(눅 12:24). 본문의 '공중의 새'란 순수한 히브리 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늘을 날으는 새', 곧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한다. 한편 본문의 '보라'(*, 앰브려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있다.

⭕ 심지도 않고 -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거두지도 않고 -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 이는 성경적 우주론(宇宙論)을 전제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떨게 해결해 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를 질서있게 경영하고 계시며 따라서 이 자연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부'에 관해서는 5:16 주석을 참조하라.

⭕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선자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 디아페로)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보다'로 번역된 바로 앞의 혤라어 '말론'(*)은 '심히', '대단히'라는 뜻인 '말라'(*)의 비교급 부사로서 '훨씬 더', '더욱'이라는 강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법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까지도 포착(capture)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6:2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그 키를(*, 텐 헬리키안 아우투) - '키'로 번역된 '혤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키를 '한 자'(*, 펙쿠스 헤나; 한 팔 길이로서 히브리인들의 '규빗'과 비교될 수 있다)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 8인치 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를 뜻할 때는 나이를 더 먹는다는 뜻이 된다. 현대 주석가들은 이를 생명의 길이, 곧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延長)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마6:2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있다.

⭕ 백합화(*, 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 생각하여 보라(*, 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븐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성 경: [마6:2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솔로몬의 모든 영광 - 원문은 솔로몬이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솔로몬 조차도'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 3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고 가장 훌륭한 궁궐에서 그 영광의 극치(極致)를 누렸다.

⭕ 입은것이...못하였느니라(*, 우데 페리에발레토) - 이 말은 헬라어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을 입히지 못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이 꽃 하나만 -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 경: [마6:30]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오늘 있다가(*, 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 아궁이에(*, 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 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 들풀(* 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 '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6:31]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성 경: [마6:32]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 '이방인들'이란 하나님 나라의 의(義)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맡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있다.

⭕ 천부께서...아시느니라 -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이유가 본절에서 몇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 첫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심'은 단순한 지적 인식(recognition)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주되 넉넉히 채워주시는데까지 미치는 완전하고도 전인적인 인식을 뜻한다(8절).

성 경: [마6:33]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 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Stott, Sermon on the mount, p. 172).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 이 모든 것(*, 타우타 판타) -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 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이다.

⭕ 더하시리라(*, 프로스테쎄세타이) -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성 경: [마6:34]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 내일 일을 위하여(*, 에이스 텐 아우리온) -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 다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 새로운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hint)하셨다. 즉 내일의 염려는 내일의 새 은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 한 날 괴로움 - 여기서 '괴로움'(*, 카키아)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적 견지에서 본 '악'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윤리적 측면의 '죄악'을 뜻하지 않고 인간이 감내(堪耐)하기 힘든 고초, 역경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말은 가끔 우박으로 인해 수확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절망적 재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70인역(LXX)은 히브리어 '라아'(*)를 '카키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라아'는 '악한', '불운한', '곤고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각 날(日)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이라고 해석할 수있다.

⭕ 족하니라(*, 알케톤) - 그 날에 주어진 것은 그 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리, 즉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내일에 대한 원리는 결국 염려의 근원적 치유(healing)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넘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실로 내일 일의 염려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오늘로서 끝나야 할 것이며 내일의 불행과 고난(distress)은 오늘 앞당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b. Sanhedrin 100b;b. Berakoth 9a). 한편 본문의 교훈적 말씀을 살전 5:16-18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단순한 권면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 자체가 불신앙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내일'의 주인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 경: [마7:2]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여기 비판이란 말도 역시 평론 혹은 정죄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말한 죄 값의 보응은 누구에게서 받는다는 것일까?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에게서 받는다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를 그 죄대로 갚아 줄 권세도 없고 능력도 없고 또한 죄의 경중을 절대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지혜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 어려운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성 경: [마7:3]

⭕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성 경: [마7:4]

⭕ 의식하는 자. - 이것은 위의 말씀과 같이,(1)자기의 큰 허물을 못보고 남의 작은 것은 볼줄 아는 자 곧, 약대는 통으로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먹는 자요 (2)내부적의 것은 못보고 겉으로 보이는 것은 잘 보는 자를 가리킨다.

성 경: [마7:6]

윗말 1-5절에서는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판단함에 대하여 경계하셨다. 그는 이제 그 듣는자들이 그의 말씀을 오해해서 남을 대하여 분변없는 주의 곧, 맹목적 타협 주의에 흐를까 우려하셔서 여기에 적합한 교훈을 주셨은 곧, 주님의 진리와 거룩한 일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중히 분변하는 태도가 필요함을 말씀하신다.

⭕ 거룩한 것. -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이니, 제사 후에 제사장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서 이것이 영적 제물 곧, 복음을 가리킨 듯하다. 복음이 요점은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로 말미암아 먼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희생제가 십자가에서 거행되었다. 그 다음엔 그의 백성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 곧, 복음을 믿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거룩한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혹은 그것과 관계 있는 성직이라고 생각함이 좋다.

⭕ 개. - 이것은 배교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배로써 하나님을 삼는 거짓 일군들을 가리킨다. 바울도 거짓 일군을 "개"라고 하였다.(빌3:2), 거짓 일군의 특색은 (1)먹는 것과 대접 받는 것을 탐하여 다님이요(빌3:19) (2) 개가 보화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것인 줄만 알고 물고 찢는 것과 같이 거짓 일군들은 복음이 보화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그들의 육체나 치는 길로 삼아 복음을 전한다 하면서 실상은 그 길을 해한다.

⭕ 진주.- 이것은 진리나 지혜로운 말을 비유하는데 고대의 랍비 문학에도 그렇게 사용되어 말하기를, "미련한 자에게 지혜로운 말은 돼지에게의 진주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의 진주는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혹은 교회의 성직을 가리킨다. 이것을 그 윗 문구의 "거룩한 것"과 딴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두말은 동일한 내용의 것을 두 가지 방면으로 관찰하는 것이니 하나는, 그것의 거룩함, 다음 하나는 그것의 귀중성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즈안 박사의 해석이다.

⭕ 돼지.- 이것 역시 위의 개와 동일한 내용의 인물들을 비유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7:7,8]

여기에 다시 기도에 관한 부탁이 나온다. 여기 기도에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1)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말씀들은 기구함에 있어서 모든 노력을 다 함이다. 그런데 이 명령사들이 모두 다 현재 시간의 명령사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다 그 행동의 계속성을 표시한다. (2) 어김 없이 주님을 믿고 기도할 것.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니. - 이 말씀들은, 주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가르치는 동시에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도를 반드시 들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처럼 우리의 기도를 작흥시키고 격려시키는 것은 없다. 의심을 품고 하는 기도는 무력하고 냉정하고 태만한 죽은 의식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성 경: [마7:9-11]

이 귀절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강이유 논법이 다시 보인다. 죄인인 너희도 자식의 청구를 들어주거든 선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니 아버지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사49:15; 시27:10 참조.

⭕ 좋은 것.- 이것은 영적인 것들이니 곧, 셩령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것들인데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물질 아닌 다른 것들일 수도 있다. 누가 복음에서는 간절한 기도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는데 이와 동일한 내용 있는 말씀이다.(눅11:13)

성 경: [마7:12]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칼빈은 이 말씀이 먼저 말씀(7-11)과는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바로 윗말씀과 어떤 관계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다. 이 귀절의 우리말 번역은 너무 의역이 되어 있다. 이 말씀의 원문을 글자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곧, "사람들이 너희에게 행해 주기를 원하는 바의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너희가 저희에게 행하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적극성을 가지는 도덕률이다. (1) 인본 주의에서는 기소불욕을 물시어인하라(내가 원치 않는것을 남에게도 행치 말아라)라고 하여 겨우 악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좋은 것을 남에게도 하라고 하였으니 적극적 도덕이다. (2) 이것은 남들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줄 줄 미리 생각하고 행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남들이야 네게 그렇게 행하건 아니 행하건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행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눅6:30-26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뜻이다. 이것은 사랑의 정신으로 선을 행함이니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롬13:8-10). 세간에는 고래로 이와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소극적인 것이었을 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성 경: [마7:13,14]

여기서 인생의 가는 길에는 "좁은 "것과 "넓은 "것이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1) 고행주의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육체의 소욕대로 방종스러이 살 수 있는 넓은 길과 하나님의 복음 진리대로 따라가는 규범있는 생활의 길을 대립시킨다. 좁은 길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낙이 없고 고통만 있다 함은 불가하다. 이 좁은 길에는 도리어 감추인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는 것이다. (2) 이것은 자력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포함하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여기 이 비유가 포함한 뜻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따라가는 길이 함부로 범죄하는 생활에 비해서는 제한이 있고 절제가 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헤로 구원얻는 길이니 그 길을 가는 도중에도 생명과 희열이 있고 그 길을 다 간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을 받는다.

성 경: [마7:15]

⭕ 거짓 선지자. - 이것은 거짓 선생을 의미하는 바 위에서 말한대로 사람을 좁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 넓은 길로 사람을 꾀어 이끄는 자들이다.

⭕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 - 그들이 외식으로는 겸손하며 사랑도 있고 모든 이익을 그들이 교훈에서 약속하니 그것이 양의 옷과같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생명이 성령님이 없고 다만 자기들을 위하는 야욕만이 가득하였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교회를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것이다.

성 경: [마7:16]

⭕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여기 열매란 것은 이 교훈과 그것의 영향과 및 그의 행위를 의미한다. 혹설에 이것은 행위만을 가리킨다고 하나 이 해석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좋은 행위도 악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이용적으로 나타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 나타났으니(창3:18), 이 둘은 죄악의 상징이다. "포도"와 "무화과"는 의와 선의 비유인 듯하다.

성 경: [마7:19]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이것은 거짓 교훈과 악사상의 무리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악사상의 소유자들로서 심판 받은 일이 많다. 그러나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는 이 무리가 다시 일어난다. 이는 마치 밭에서 잡초를 제하여도 얼마 후에 다시 잡초들이 나옴과 같다.

성 경: [마7:21]

⭕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이 귀절은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시는 듯하다. 이 아래 귀절들이 모두 다 그러한 논조로 흐르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 이 귀절들은, 구원의 이법을 말함이 아니고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정죄의 원리가 있고서 그 후에 사죄의 규례가 생긴 것이다. 이 귀절들이 말하는 심판의 원리는, 후일에 구원의 원리를 말씀하실 준비 계단인 것이다. 이 귀절들의 말씀을 가리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도리에 대한 전제하고 하는것은 가하나, 은혜로 받는 구원의 제도를 부인한 것이라 함은 똑바른 신학적 관찰이 아니다.

성 경: [마7:22]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 여기 "그 날"은 이 세상 끝의 심판날을 이름이다. (눅10:12). 그 때에는 하나님이 일을 한다고 하던 자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약3:1에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 거짓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그리함이 아니고 다만 자기들의 육체를 위하여 그의 이름을 이용하여 그러한다.

성 경: [마7:23]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능한 일을 하였다고 했다. 주님은 어떤 때에 악인들도 이용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에게 일시 이용된 일이 구원 받을 조건은 아니다. 오직 주님은 나를 사랑으로 알아 주시고 나는 주님을 아는 신앙의 관계가 구원받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눅10:22)

성 경: [마7:24]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리니. - 곧, 거짓 선지자들이 말을 듣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행하는 자는 반석에 집을 세움과 같다. 에수님의 말씀은 한개의 반석과 같이 든든하나 거짓 선지자들이 말은 모래와 같이 무너지고 만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하신 하나님이 말씀이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것을 언제나 감시하시며 또 그것을 가지시고 능력을 행하신다.(히4:12,13).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말은 죽은 것과 같아서 생명의 능력이 없고 바람에 불리는 모래와 같다.

성 경: [마7:25-27]

이 부분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의 두 가지 지혜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두가지 우매가 나타났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집을 짓는데 있어서 터가 든든해야 될 것을 알았고 또한 장차 풍우가 그 집에 부딪힐 것을 알았다. 그러나 미련한 건축자는 그 부딪칠 것을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신앙 인격을 건축함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 밖에 기초를 둘데 없는 줄 알아야 되며 또는 장래에 우리의 신앙 인격을 시험하는 환난이 온다는 것을 예감해야 된다.

성 경: [마7:29]

⭕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실 때에 남의 사상을 취급하듯이 하시지 않았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모세에게 주셨던 것이니 곧 그 자신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그의 교훈의 태도가 권위 있게 나올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성 경: [마8: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 산에서 내려 오시니 - 이말은 5:1의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란 어구와 대칭을 이루는 구절이다. 5:1 및 8:5과 연결 시켜 볼 때 예수께서는 유대 산악 지방에서 이제 12제자 임명 및 산악 지방에서의 다소 긴 제자 훈련 기간을 마치시고 다시 일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전도 여행을 잠시 멈추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심신(心身)을 쉬시는 동시에 집중적으로 제자를 훈련시키는 장면은 이 경우 외에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몇번 더 시행되었다(10:5 - 42; 13:11 - 32 등).

⭕ 허다한 무리 - 이 말은 5:1의 '무리'나 7:28의 '무리'보다 숫자가 더 많은 무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5:1과 7:28의 '무리란 말, '오클로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본문의 '허다한 무리'란 말인 '오클로이 폴로이'(*)에는 관사가 사용 되지 않아 그 숫자가 한정되지 않은 불특정 다수란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그에게로 모여 들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8: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새로운 어떤 사실을 도입하고자 할때 주로 사용되는 (*, 카이 이두 - and behold, 그리고 보라) 말로 시작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이 말은 여러가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1) 특별한 의미없이 영어의 'there is(was)'나 'here is(was)' 등과 같은 도입사로 쓰인다.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있었다).12:10, '사람이 있는 지라'(*, 카이 이두 안드로포스). (2) 어떤 예화나 비유를 소개하고자 할때 '가라사대'란 말 다음에 소개될 내용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쓰인다.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이두) 씨를 뿌리는 자가 '. 여기서도 가라사대 다음에 쓰인'이두'('I*, 대문자로 쓰이고 있음)는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되지 않고 있다.(3) 본문처럼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면서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할 때 이 말이쓰인다. 4:11'(카이 이두) 천사들이 나아와서 '(*, 카이 이두 앙겔로이 프로셀돈 ; 그리고 보라 천사들이 나아왔다'). (4) 특별한 주의를 요할때, '갑자기'나 '홀연히'란 의미로 이 말이 쓰인다. 17:5,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이두 네펠레 포테이네 에페스키아센 아누투스). 아무튼 본문의 '카이 이두'는 이제 이야기의 한 단락이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로 진입되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역활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치고 하산(下山)하신 후 새로운 사건과 조우(遭遇)함으로써 예수생애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문둥병으로 표현된 병이 병리학(patholge)적으로 실제 문둥병(leprosy)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문둥병을 위시한 제반의 피부병을 일컫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레 13, 14장). 여하튼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판정(判定)에 따라 문둥병이라 지목된 자를 몹시 꺼려했다. 왜냐하면 문둥병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기도 했거니와 문둥병자와의 접촉 자체를 의식적으로 불결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죄의 악함과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discipline)을 상징하는 것으로(미 12:10, 12; 욥 18:13) 문둥병자는 종교적 위생적 관점에서 일반 대중과 철저히 분리되어 특정 장소에 격리되어 있어야 앴다(레 13:45, 46). 만약 이를 어긴 경우 그 문둥병자는 심한 제재 조치나 돌에 맞아 죽는 수모(受侮)를 감수 해야 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본문의이 문둥병자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 그자체가 이미 파격적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온갖 죄악된 성품을 다 지니고 있는 인간은 모두가 다 영적인 문둥병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습(convention)과 억압을 깨치고 예수께 나아온 사실에서 우리는 세속의 모든 욕망과 죄의 사슬을 깨치고 과감히 예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임을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 절하고 - '무릎을 꿇는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본서에 여러 번 언급된 용어로서(2:2, 8, 11:; 4:9, 10; 9:18; 14:33) 상대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의 외적 표현으로간주되었다. 특히 본문에서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행동의 이면(background)에 담겨진 문둥병자의 적극적 겸손이 강조되었다. 결국 이런 모습은 그가 예수의 절대적 치유성을 확신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 주여 - 당시 유대인들은 현자(賢者)나 율법학자를 높여 부를 때 주로 랍비(rabbi)란 말을 사용하였다. 반면 본문에 사용된 '주여'(K*, 퀴리에)란 말은 종이 주인에게 또는 독립된 집단 내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를 부를 때 사용한 존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 문둥병자가 랍비라는 칭호가 아니라 '주여'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예수를 학자나 설교가로서가 아니라 능력과 위엄을 갖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자신의 주인으로 믿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는 그 뒤에 계속되는 문둥병자의 요청이 선한 가르침을 달라는 것임을 살펴보면 더 명확히 드러난다.

⭕ 원하시면 - 이 말은 예수에게는 자신의 병을 고칠 능력은 분명히 있는데 다만 고쳐줄 의사(意思)가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일 뿐이라는 문둥병자의 강한 믿음을 반영하고있다. 실제로, 한 인격적 주체가 어떤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일을 성취하려는 강한 의지와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문둥병자는 예수의 객관적 능력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능력을 자신에게 베푸셔서 자기를 고쳐주겠느냐고 그는 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3절의 '내가 원하노니'란 어구에서 발견한다. 즉 예수께서는 그에게 은혜 베푸실 의지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이는 매우 충격적인 고백과 동시에 요청이다. 왜냐하면 문둥병은 그 치료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왕하 5:7, 14), 오직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인 것이다(10:8; 11:5).

성 경: [마8:3]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 구약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와 접촉한 자는 문둥병자가 상징하는 죄성(罪性)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되어 의식법상 똑같이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다(레 11:40; 13:46). 율법대로라면 예수는 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부정한 자가 된 것이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이다. 즉, 그는 율법에 갇혀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하신다. 더욱이 구약의 제사장들이 문둥병자의 치유 여부를 판별할 때 그에게 접촉해도 부정하지 않았듯이(레13:2 - 8)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셔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지 않게 된 것은 그분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해 주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는 부정한 자에게 '대심으로'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역(逆)으로 부정한 자가 주님의 '대심으로' 정(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손을 내밀어'란 본문의 표현을 능력 행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는데(J.D. Kingsbury) 이는 잘못 이해한 해석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긴 하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손을 내미신 것은 실제 병자를 만지기 위함인 것으로서 상징적 표현이 아니며 또한 구약의 경우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는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 역시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부연코저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말씀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성경 말씀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방해받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내가 원하노니 - 2절의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문둥병자의 믿음에 찬 간구에 대한 신적 권위 해석의 답변이다. 이는 결굴 당신이 원하시면, 즉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권세와 능력의 말씀이다.

⭕ 깨끗함을 받으라 - 이는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의식적 정결까지를 포함한(문둥병 판별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치유를 뜻한다(Westcott).

⭕ 즉시 깨끗하여진지라 - 치유(healing) 선언과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의 초월성을 입증해준다. 실로 예수는 손(죄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상징)과 말씀(어떠한 장애도 극복 치유시키는 능력)으로 한 생명을 새롭게 탄생 시키신 것이다.

성 경: [마8: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문둥병자 치유]

⭕ 삼가 이르지 말고 - 공관복음서에서 수차 거듭되는 예수의 함구령(12:16; 16:20; 17:9; 막 3:12; 눅 8:56) 중의 하나로서 마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같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에 대해 (1) 이적에 따른 허황된 소문이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방지하시기 위해, (2) 치유받은 자의 교만을 예방키 위해, (3)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견제와 시기를 받고 이로 인해 복음 전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Plummer) 등이 있다. 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허다한 무리가 목격하는 가운데(1절)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당신의 소문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막을 의향(意向)은 없으셨다. 단지 예수께서는 그 치유받은 자가 율법의 예를 따라 제사장에게 나아가기 전에 미리 이적(miracle)의 소문이 전파됨으로써 나타날 제사장의 편견어린 판결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제사장들이 편견없는 순수한 의식으로 그 치유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 치료받은 자가 함구령을 무시함으로써 그후로 복음 전파에 많은 장애를 맞이하게 된다(막 1:45).

⭕ 모세의 명한 예물 - 바로 앞의 구절에서 예수는 율법의 소극적 조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셨지만 그것은 율법을 부정하고 파괴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즉 여기서 보듯이 레 13:4 - 17의 문둥병 규례에 따를 것을 당부하심으로써 예수는 율법을 이기고 극복하시지만 율법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고 완성하는 방법을 택하시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5:17). 한편 문둥병자의 정결 절차는 (1) 신적 권위자인 제사장의 판결을 받고 (레 13:16, 17), (2) 정결의 선언이 주어지면 산새 두 마리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헌상하고(레 14:4), (3) 8일 후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바쳐야 했다(레 14:8). 물론 이런 의식법상의 규례는 예수의 운명시에, 구약의 모든 의식 규례를 집약적(集約的)으로 상징하고 있는 성전 휘장(揮帳)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성도는 구약 의식의 그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그 내용은 존중 해야 하는 것이다(히 10:14 - 18).

⭕ 저희에게 증거하라 - 문둥병자가 율법 의식에 따라 완치(完治)된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율법을 통해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인증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율법은 예수께서 원하기만 하면 어떤 질병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의 역활, 곧 예수의 권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성 경: [마8:5]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 4:13에 이어 예수 선교의 중추지였던 가버나움이 두번째 언급되고 있다. 이는 결국 4:13에 언급된 1차 갈릴리 사역이 5-7장에 언급된 산상수훈으로 중단되고 제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당시 가버나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로마의 군단급(1군단은 700명의 기병을 포함한 3000 - 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은 아니지만 팔레스틴의 분부왕 헤롯 안디바의 보조 부대가 주둔(stationing)했던 곳이었다. 팔레스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는 타국에서 징집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비유대계열, 여기서는 사마리아 정도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Pulpit Commentary), 레바논 또는 시리아와 같은 이방 지역에서 징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쨔든 그들은 이방인들임에 틀림없다.

⭕ 한 백부장이 나아와 - 가버나움이 헤롯의 관활지에 있던 것으로 보아 이 백부장은 이방 출신으로서 아마 헤롯의 용병(傭兵)이었던 것 같다(Bruce). 여기서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중급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을 좀더 자세히 언급하면서(눅 7:2 - 10) 이 사람이 유대인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성 경: [마8:6]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주여 - 예수를 향한 백부장의 돈독한 믿음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말이다(7:21 참조).

⭕ 내 하인이(*, 팡스). - 아들 또는 하인에 해당하는 '파이스'란 헬라어는 신약성경 중에 약 24회 등장한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계급이나 신분상 수하에 있는 자, 또는 피지배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하인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이 백부장은 자신의 부모, 혈육이나 상전(上典)이 아닌 일단 무시해도 좋은 자를 위해 굳이 와서 간구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인은 당시 사회 구조상 천민이었으나 백부장과는 특별한 우정이나 애정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쨔든 자신의 수하 친병(親兵)을 위하여 체면과 만사를 제쳐두고 이처럼 간청하고 있는 이 백부장의 인간성(humanyty)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이처럼 자상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는 로마인이면서도 유대인인 예수에 대하여 선입관을 갖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 중풍병이란 말은 신체의 전체나 일부 또는 얼굴이나 기타 부위에 일어나는 마비 증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서도 완전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대표적 원인으로는 역시 뇌졸증을 들 수 있다. 뇌졸증이란 뇌의 작은 동맥들이 파열되어 뇌 속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경우, 또는 뇌 속에서 혼탁한 핏덩어리가 뭉쳐져서 혈액의 순환이 막히는 경우, 발작이 일어나고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발작과 혼수상태가 발생되는 경우에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며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후에라도 반신불수등에 빠지게 된다. 물론 뇌졸증 이외의 원인으로 생긴 마비 증세도 중풍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쨌든 이 중풍병은 문둥병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병보다 훠씬 광범위하게 일어난 병으로서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기적이 아니면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성 경: [마8:7]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 에고 엘돈 데라퓨소 아우톤) - '고쳐 주리라'의 원어 '데라퓨소'는 개역 성경대로 미래 서술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서 고쳐주랴 ?'라는 뜻의 의문문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헬라어에서는 동사가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흔히 인칭 대명사 주어가 생략되며 또 이것이 생략되더라도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지만 본문에는 주어인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가 특별히 쓰이고 있다. 즉 본문에서는 주어인 '내가'란 말이 강조된 것이다. 어쨔든 예수의 치유 기적 장면을 보면 주로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오거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받음으로 하여 치유되었지 예수께서 직접 병자를 찾아가시겠다고 제안한 것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예수는 여기서 굳이 가시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여기 백부장은 헤롯 용병으로서 그의 혈통적 배경은 로마인이 아닌 다른 이방인일 수 있다. 심지어는 유대인 출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단 로마 식민 체제의 하수인이라는 점에서 로마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 당시 피지배자인 유대인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착취자 내지 종교적 이방인으로서 경멸하였고 또 로마인은 유대인을 편협하고 위험한 피지배자로 멸시하였다. 예수는 이런 벽을, 즉 상대적인 편견과 증오의 벽을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써 허물어 버리려고 한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자신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세계 만민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설사 예수가 병자에게 가시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예수는 이상의 방법을 동원해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성 경: [마8:8]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이때 요한은 자신이 예수께 세례 베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백부장의 이 같은 겸손한 행위를 예수는 유대인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라는 민족 차별적 통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 만약 이러한 이유에서였다면 이 백부장은 예수께 이런 요청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치가 않다. 또한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감당치 못하다'란 어구의 원어인 '우크 하키노스'(*)는 영적, 도덕적 충족성이 몹시도 결여됨을 고백한 말로서(3:11)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무가치함을 느낄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recognition)했음을 반영하는 진술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영혼에게 주의 다함 없는 은혜가 필시 수여될 것이다(시 147:6).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이 백부장은 분명 예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그의 요구는 그가 예수를 전능한 절대자로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실 예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말씀으로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다는 기록은 요 4:46 - 53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였기에 백부장의 믿음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한편 만약 그가 예수를 어떤 비상(非常)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을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고 또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기도나 안수등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씀 속에는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은 때문이며 이것은 그가 예수께 대해 신적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성 경: [마8:9]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의 신앙]

본절은 개역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지만 앞 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가르'(*)란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이 예수께 다만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이유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 안드로포스 휘포 여수시안) - 이것은 권세(여수시안) 아래에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여기서 권세란 것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국가에 속한자란 모두 국가 권세의 정점(頂點)인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 질서 체계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인으로서 황제로부터 권한의 일부를 위임받아 자기 수하에 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이같은 명령체계와 그 개념은 너무도 명확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 체계라는 인위적 차원에서의 상급자와 그 하급자 사이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질병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자연 세계에 적용시킨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결국 백부장이 예수를 인본주의적 통치자인 황제 이상의 존재, 즉 자연과 우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신본주의적 통치자로서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의 신앙의 지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성 경: [마8:10]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 '기이히 여기다'란 말의 헬라어는 '다우마조'(*)로서 본문에는 단순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 등르로 번역된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결코 놀라지 않으실 신(神)이신 동시에, 한편으로는 놀라는 감정적 성정을 지니신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Calvin). 즉 예수가 지닌 신적인 전지성(全知性) 마저도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제어하지 않았던 것이다(Homer A. Kent, Jr.). 한편 본문에는 백부장의 탁월한 믿음에 대해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셨던 반면 막 6:6에는 예수께서 고향에 가셔서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신 기록이 있다. 물론 예수께는 신앙과 불신앙 모두가 무관심이 아닌 일종의 경건한 경이의 대상이 되고있는 것이다(Bengel). 예수께서는 당신과 접촉한 모든 이에게 특별한 관심(부정적이든, 긍적적이든)을 가지고 계신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어구는 다음에 대단히 주요한 내용을 말씀하시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던 말이다(5:18).

⭕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 이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야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적 배경을 거의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어떤 유대인들보다 예수의 인격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여태까지 만나 본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낫겠다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마태는 이 백부장의 위대한 신앙을 누가 보다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 전파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옮겨질 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마8:1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표현 뒤에 나오는 말씀의 엄숙성과 중요성을 일깨우는 문장이다(10절). 예수는 지금 거듭해서 유대인의 신앙관에 일대 변혁을 이루게 될 이방인 선교에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 평행구인 눅 13:29에는 좀 더 포괄적으로 '동서남북으로부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지경 내(內) 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바 있는데(사 45; 6; 49:12), 본문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본문의 백부장이 이방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게 되었음을 예언자의 말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 이는 전 세계 만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확약(definite promise)받은 당사자들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뿌리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세 이름들은 이스라엘의 선민 의식과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할 때에 자주 언급된다. 이어서 '앉다'(*)란 말은 '기대어 눕는다'는 뜻으로서 식사 기간 중 거의 눕다시피 식탁에 기대어 앉는 유대인들의 식사 예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잔치상에 둘러 기대는 상태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이 잔치는 메시야 왕국의 완성을 상징하는 '메시야 잔치'라고 명명되는데, 이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다(사 25:6 - 9; 65:13, 14 등). 그리고 메시야 잔치, 곧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방인인 이 백부장의 예(例)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백부장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은 천국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세상 각처에 살고 있는 이 믿음의 소유자들은 나라가 임할 때 먼 곳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식탁에 앉다'란 말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향연(饗宴)과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상징할 때 흔히 사용된 관용적 표현이다(마 26:29; 눅 14:15 -24).

성 경: [마8:1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나라의 본 자손들은(*, 호아 데 휘오이 테스 바실레이아스). 이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란 뜻으로서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된 자, 즉 나라에 대한 합법적인 상속권을 가진 자를 뜻한다. 여기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3:9, 10), 당연히 천국에 속한 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단순한 혈통적 순수성만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겠기에 결국 나라의 본 자손들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임을 분명히 언급하셨다.

⭕ 바깥 어두운데 - 이는 멸망의 장소, 곧 미래에 '메시야의 잔치'가 배설되는 곳의 외부를 상징한다. 한편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불의한 자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밸후 2:17). 즉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항상 밝은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곳은 어두운 곳으로서 어두움의 권세인 사람이 지배하는 곳 내지 영영한 절망이 있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22:13). 결국 '바깥 어두운데'란 존재론적인 절대 소외와 영적인 절망 및 종말론적인 죽음과 형벌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실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빛을 내는 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요, 진리의 말씀이 없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곳은 사단이 지배하는 어두움과 죽음의 세계임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는 지옥의 장면을 더욱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한 표현으로서(Turner), '운다'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이를 간다'는 것은 심해(深海)의 절망을 의미한다(McNeil). 이와 같은 고통과 절망은 그들을 위해 찾아온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고, 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눈물과 고통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11, 12절의 두 구절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구약의 사상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은 장차 온 땅의 동서남북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구성된다(시 107:3; 사 43:5, 6; 49:12). (2)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사 45:6; 59:19; 말 1:11). (3) 동서남북에 있는 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 것이다(사 2:2, 3; 60:3 - 4; 미 4:1, 2; 슥 8:20 -23).

성 경: [마8:13]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백부장 종의 치유]

⭕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주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이 표현은 마태가 자주 사용한 말씀으로 주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9:22, 29; 15:28). 그런데 '믿은대로'란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뜻이 파생(derivation)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에 비례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2)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지만 그 은혜는 인간편의 믿음의 양(量)에 따라 주어진다. (3) 본문의 기적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었다. (4) 기적이 행사되면서 백부장이 믿고 있는 바병고침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2)와 (4)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 그 시로 - 눅 7:6을 보면 예수와 백부장의 집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백부장의 친구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의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으로 보아 '그 시'란 말은 바로 그 순간, 즉 예수의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란 말씀이 떨어진 즉시 나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문둥병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며 실행이고 창조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8:1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의 장모 치유]

⭕ 베드로의 집에 - 이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4:18-20). 그리고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벱세다였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가 벱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벳세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 그의 장모가 -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이다. 훗날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9:5). 그리고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베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다소 희석(稀釋)시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 열병으로 누운 것을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자면 아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던 것으로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눅 4:38, 39).

⭕ 보시고 -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목격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주의에 사람들이 예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환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目睹) 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8:15]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 장모 치유]

⭕ 그의 손을 만지시니 - 현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열은 어떤 질병에 대한 증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열 그자체를 일종의 병으로 여겼던 것같다(요 4:52; 행 28:8). 이런 이유로 해서 유대인의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생활 방식을 구정하고 있는 랍비들의 율법인 할라카(halacha)는 열병이 있는 자들과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3절에서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 대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접촉이 금지된 환자를 만짐으로써 환자가 깨끗해진 것이다.

⭕ 열병이 떠나가고 -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세번째로 등장하는 예수의 기적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순간적인 치유와 더불어 오랜동안의 건강까지 선사(膳賜)하셨던 것으로 보인다(Chrysostom).

⭕ 예수께 수종들더라(*, 카이 디에코네이 아우토). - 여기서 '수종들더라'는 말의 동사 원형은 '디아코네오'(*, 시중들다, 돌보다, 섬기다)로서 본눈에서는 과거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과거 미완료형이란 것은 과거 어는 한 시점을 전후해서 사건이 계속됨을 가리키는 시제로서 , 본문은 '섬기기 시작했다'(began to serve)는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자신을 구원한 주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구원받은 자는 그를 섬기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8:16]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의 장모 치유]

⭕ 저물매 - 이 사건은 막 1:32 - 34과 눅 4:40, 41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으로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다음에 일어났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온 시점은 저물 때로서, 곧 해가지고 저녁이 된 때인데, 이는 해가 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루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유대인의 시간 개념과 연관이 있다. 즉 사람들은 노동이 일체 금지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레 23:32에는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를 철두철미 안식하였던 것이다.

⭕ 귀신들린 자를 많이 -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단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 말씀으로 - 마태는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기록할 때 이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3,8절).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곧 능력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 여기서 귀신이란 말은 헬라어로 '타 프뉴마타'(*)로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영혼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로 표기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모두 거기서 '귀신들'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신구약 중간사의 문헌들을 조사해 보면 이 '타 프뉴마타'란 것은 병을 가져다 주는 사자를 지칭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보통 악한 존재로 설명한다. 한편 예수께서 귀신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그 질환자의 정신을 맑게 하신 것은, 곧 예수께서 영 육을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 땅에 어두움의 세력을 완벽히 몰아내고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사 11:1 - 5; 35:5, 6).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누가는 본 사건을 어급하면서 "귓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눅 4:41)라고 그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마가복음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막 1:34)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다'(all, NIV)란 표현이 마가복음에서는 '많은'(many, NIV)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상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 고친 것이, 곧 많이 고친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고칠수 없는 질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자신감 넘치는 신앙을 은연 중에 고백하고 있다.

성 경: [마8:17]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베드로의 장모 치유]

⭕ 우리 연약한 것을 짊어지셨도다 - 이말은 사 53:4의 인용으로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고 또 다른 성경 기자들이 인용할 때 자주 사용하던 70인역(LXX)이나 아람어로 된 구약 성경을 직접 인용하여 이를 번역했던 것으로 보인다(Stendahl). 다시 말해서 4번째 '종의 노래'인 사 52:13 - 53:12에 대한 70인역이나 탈굼역은 사 53:4의 이부분을 영적인 의미로 번역하여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마태가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 본문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보다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저인 의미로 더욱 강조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육체적인 질병을 대신 '담당하고' 또 '짊어지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개역 한글 성경 사 53:4와 본문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질고'는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또 '슬픔'은 '병'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질고'와 '슬픔'은 분명히 추상적이고 영적인 의미인 것이다(사 53:4 주석 참조). 그러나 영적 육적인 고통과 슬픔의 원인은 죄에 있다는 점에서, 속죄의 교리를 담고 있는 사 53:4의 영적인 번역은 본질적으로 히브리 본문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담당하시고'(*, 에라벤)란 위치상의 '이동'이나 무엇을 '취하다'(take up)라는 뜻이며, '짊어지셨다'(*, 에바스타센)는 '참다', '들어 올리다', '고통을 참다'는 의미를 지니다. 이는 질병이나 고통이 예수께 그대로 옮겨졌다는 의미이기보다 예수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는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 형벌의 빛나는 열매들인 것이다.

성 경: [마8:18]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무리가 에워쌈을 보시고 - 마가는 여기에 '그 날 저물 때에'란 말을 명기해 놓고 있다(막 4:35). 아마 이때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14, 15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의 병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모여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에워싼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편으로 떠나고자 하셨는데 이는 아마 수면을 취할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예수는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떠나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셨던 것 같다.

⭕ 저 편으로 - 예수는 지금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의 북서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계신다. 그렇다면 저편이라고 하는 곳은 아마 디베랴 바다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마8:19]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한 서기관이 나아와 -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흔히 예수의 적대자들로 등장한다. 그러나 본문의 이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해 예수를 뒤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마 이 사람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백성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데서도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서기관들을 긍정적인 양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더러 있다(13:52; 23:8 - 10, 34). 여하튼 본문에 언급된 '서기관'은 끝내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은 것을 알 수 있다(21절).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R. Walker) 서기관이라는 신분상의 장애 요인 때문에 '나를 좇으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제자로도 부름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받아 들여질 수 없다. (1) 일상의 생활을 포기한 전적 헌신자만이 제자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따른 자도 제자인 것이다. (2) 21절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또 하나'(Another man, one his disciples)가 아니라 본절의 서기관과 연결하여 '제자 중에 또 하나'(Another of his disciples)라고 기록되었다.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의 해석은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3) 예수께로 아무 주저없이 나아왔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선생님' 이라 부르고, 또 어디든 따르겠다는 헌신의 의지를 보인 서기관의 태도는 제자로 부름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4) 예수께서 두번째 사람에게만 '너는 나를 좇으라'(21절) 한 것은 그 사람이 서기관보다 제자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이 즉시 예수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 서기관은 분명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았음에 틀림없다.

⭕ 선생님이여(*, 디다스카레) - 이는 교사 또는 가르치는 자(teacher)라는 뜻으로 서기관이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이는 그가 예수의 제자되기를 원한다는 표현이다. 특히 '좇으리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오'(*)는 '따르다', '닮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는 일이, 곧 그분의 삶을 좇아가고 인격과 모습 닮기를 노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는 절대 순복(obedience)의 자세로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언급하는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주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치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려면 온갖 박해와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성 경: [마8:20]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여우도 굴이 있고 거처가 있으되 -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제자되길 원하는 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됨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제자가 될 경우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이 뒤따름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굴'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굴)를, '거처'는 둥지가 아닌 단지 새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나뭇가지 등의 임시 처소를 의미한다(McNeile). 결국 이 말은 아주 빈약한 거주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지어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비록 엉성하나마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세계에 와서 안식처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쫓김을 당한 방랑자가 되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이다.

⭕ 오직 인자는 -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가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의 신성을 밝힌 칭호라면, '인자'란 칭호는 구약 선지자들에 따르면 종말에 이르러 (단 7:13, 14)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자로 인식되었고, 바로 이 용어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셨다. 자칭(自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행 7:56; 계 1:13; 14:14). 이 인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 대칭을 이루어,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칭호인 것이다(눅 22:69, 70). 특히 본문에 언급된 '인자'는 단순히 거처할 곳조차 없는 바로 '나'라는 말로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인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 하고 앞으로 당신의 당하실 고난을 묵시적(默示的)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하튼 본문에서의 인자란 칭호를 살펴볼 때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이상과 같이 거처도 없는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는 초월적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눅 5:24 주석을 참조하라.

⭕ 머리 둘 곳이 없다 - 이는 머리 놓을 곳, 즉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할 만한 소유나 집 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고 피곤하다는 뜻이다. 실로 이러한 절대적 가난을 통해 예수께서는 온 인류에게 충만한 안식과 풍요한 부(富)를 제공해 주신 것이다(고후 8:9).

성 경: [마8:2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제자 중에 또 하나가(*, 헤테로스 데 톤 마데톤) - 이 어구는 19절에 어급된 서기관 역시 예수의 제자에 속한 자였음을 암시해 준다. 즉 '또 하나'란 말의 원어 '헤테로스'(*, another)는 신약성경에서 '알로스'(*, 다른 하나의, 같은 부류 내의 또 하나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분명, 앞절의 서기관 외에 또 하나의 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자'란 자신의 전(全) 삶을 예수께 헌신하고 다른 모든 생활을 모두 다 내팽개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것(요 6:66)으로 볼 수 있다(19절). 왜냐하면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을 먼저 장사(葬事)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런 요청이 거절당하기 이전에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질문을 던진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 곧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다름 한 사람 곧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예수의 제자에 속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 주여 나로 먼저 - 이 두번째 사람은 예수께로 소명받은 제자가 추구해야 할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욕망, 곧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정과 자시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소망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다. 실로 앞절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삶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였다. 진정 그는 제자의 길이 차선(次善)의 신앙으로써가 아닌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황을 초월하여 예수를 좇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내 부친을 장사하게 - 당시 예수는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제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 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그가 죽으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이라는 학설과 (2) 실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학설이 대립되나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업에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의 척도는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急先務)는 그리스도 복음의 선교 사역이다.

성 경: [마8:2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제자들의 각오]

⭕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부자(父子) 윤리조차 무시하는 불효 막심한 반(反) 도덕적인 종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인륜과 도덕을 초월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이해한 다음, 설명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더욱이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장례 절차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적 윤리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무시해서 이처럼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인 용어를 선택한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우선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 '죽은 자'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뜻을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죽었다는 말을 (1) 어떤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2)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란 말은 세상이나 율법, 죄 등이 우리 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우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내일에 무관심한 자, 곧 영적인 사망자들 그리고 죄안에 죽어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자들'로 하여금(엡 2:1) 죽은 자들을 돌보게 하라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들이 육적인 죽음을 맞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적 근심에서 자유한 상태로 복음 선교에 참여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 제자의 우유 부단한 면을 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라고 재차 가르치신 바 있다. 정녕 죽은 자를 돌보는 일은 좋은 것이나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이보다 더 좋은 더 영원한 일이다(Chrysostom).

성 경: [마8:23]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배에 - 배를 가리키는 본문의 헬라어 '플로이온'(*)은 크기와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배를 가리킬 때 쓰이는 낱말이다. 하지만 이 곳의 배는 돛을 달지 않은 약 12 - 13명 정도의 어부와 잡은 고기를 실을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잡이 배였던 것 같다.

⭕ 제자들이 - 본문의 제자들이란 항상 같이 다니던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마가에 의하면 예수가 탄 배와 함께 그 뒤를 이어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을 실은 다른 배들도 해안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막 4:36).

성 경: [마8:2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 이 구절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카이 이두'(*, 그리고 보라. 그런데 갑자기)란 말로 시작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번역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큰 놀'로 번역되고 있는 헬라어 원어, '세이스모스 메가스'(*)는 지진이나 바다의 폭풍우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으로서 어부 출신 제자들 조차도 심한 두려움을 느낄만큼 강력한 힘의 풍랑을 뜻한다. 한편 갈릴리 바다에는 이 같은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약 240m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주변의 산들은 고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갈릴리 바다의 표면 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기압이 형성되어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거센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이같은 거센 파도를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구약성경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을 것이다(욥 38:8 - 11; 시 29:3, 4; 65:5-7; 89:9).

⭕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 마가는 "물결이 부따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 4:37)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계속되는 풍랑에 의해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킨다.

⭕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 마가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막 4:38)라고 주무시던 곳을 명시해 놓고 있다. 당신이 머리 둘 곳 없는 처지임을 말씀하셨던(20절) 예수께서는 평지의 안식처를 얻지 못한 채 격랑이 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물에 머리를 의지한 채 주무시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렇게 풍랑이 치고 배가 파선될 위기에 처해 있던 시각은 밤으로서 예수는 매우 짙고 피곤하여 깊이 그리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자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격랑이 이는 상황에서 계속 잠을 청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 자신의 자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다(요 7:6).

성 경: [마8:25]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 여기 언급된 제자들 중에는 풍랑과 배를 다루는일에 노련한 어부 출신들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름대로 경험을 살려 위경(crisis)을 헤쳐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는 점점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드디어 현상적으로는 바다에 문외한인 목수 출신 예수께 나아오게 되었다. 한편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본다.

⭕ 주여 구원하소서(*, 퀴리에 소손) - 여기서 '구원 하소서'란 '구출하다', '보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소조'(*)의 제 1 부정 과거형으로서 지급 즉시 구원해 달라는 간구이다. 이는 눈앞에 닥칠 위기의 급박성을 또렷이 나타내 준다. 즉 제자들은 절규에 가까운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를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눅 8:2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인 통일성 가운데서 각 저자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당시 위험에 집면해 있던 배 안에서는 이 말들이 모두말해졌을 것이지만 각 저자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외침만을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여 구원하소서'란 용어는 '우리를'이라는 목적어가 첨가된 상태로(Metzger) 1세기 이후의 예배 의식 중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 우리가 죽겠나이다 - 헬라 원문에 현재시제로 묘사된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죽어가고 있나이다'가 된다. 실로 제자들은 자신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게 되었을 때 비록 조그마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가닥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다. 이는 곧 날마다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이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분노의 폭풍우가 불어 닥칠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줄 자가 없음을 깨닫게 한다.

성 경: [마8:26]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바람과 파도의 지배권 아래만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금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감정적인 공포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재한 불신앙적 성향고 환경 의존적인 미숙한 신앙 상태 때문이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단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준다. 결국 이 불완전한 믿음은 그들이 예수와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 정녕 그들이 예수와 완전히 일치된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들은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 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신 만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올리고피스토이) - 이 말은 믿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 말이 사물의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그 표면만을 보는 경우에 자주 사용된다. 마가는 이 부분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둘은 모두 믿음과 두려움과의 대립된 성질, 곧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려움은 믿음을 몰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뢰는 모든 두려움의 뿌리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요일 4:18).

⭕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 이는 예수의 탁월하고도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행동이다. 혹자(Bruce)에 의하면 이 표현은 실제적 권능의 행사라기 보다 하나의 시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 하여 예수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 진정 예수는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말씀 한 마디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스려가시는 전능자이시다. 한편 본문의 '꾸짖으신데'(*, 에페티메센)란 말은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아직 채 꾸짖는 일이 완결되기도 전에 그 꾸짖음의 효력이 발생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때 바람 뿐만 아니라 바다에게도 명령 하셨다 그러므로 바다의 풍랑은 그 즉시 그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에게네토 갈레네 메가레) - 직역하면 '큰 놀이 일어나'라는 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바로 이같은 극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자연의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그의 말씀은 곧 폭풍우도 굴복시키고 잠잠케하는 신적 권위인 동시에 전우주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태는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예수의 모습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종종 사용하는 방식이다. 사단에 의해 시험받으셨으나 사단을 꾸짖으셨고(4:1 - 11) 귀신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처럼(12:22 - 32) 여기에서도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피곤함으로 인해 잠드셨으나 당신과 제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잠재우셨다.

성 경: [마8:27]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바다를 잔잔케 하심]

⭕ 그 사람들이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본문의 '그 사람들'이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인 것으로 보인다(Meyer, Jerome, Nosger). 그러나 다른 배들도 함께 출항했기 때문에(막 4:36) 제자들 이외에 다른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도(Weiss) '그 사람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전혀 예상치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이는 자신들의 간구가 실제적이고도 전인격적으로 응답됨으로 인해 당황하고 놀란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9:33; 14:33).

⭕ 어떠한 사람이기에(*, 포타포스 에스틴 후토스) -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능력의 예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껏 지녀온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인 것이다.

⭕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 헬라어 원문에는 '순종하는고'란 말 속에 '그에게'를 강조하여 '아우토 휘파쿠우신'(*), 즉 '그에게 순종하는 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자연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자연의 지배는 구약적 배경하에서(시 89:9; 107:25-30) 예수의 신적 탁월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성 경: [마8:28]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가다라 지방 - 마가(마 5:1 - 20)와 누가(눅 8:26 - 39)의 기록에는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표기되고 있다. '가다라'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데가볼리(Decapolis, 팔레스틴에 있는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로서 10개의 도시를 의미함)중의 한 도시였다.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곳이다. 그러나 본문의 가다라 지방이란 표현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과 상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다라'는 베레아 지역의 수도(首都)였으므로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거라사'까지 가다라 지방으로 호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Carr). 더욱이 복음서 기자들은 이 지역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명칭을 통일시키지 않아도 무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다(4:25). 이는 돼지 떼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로(30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돼지를 거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귀신들린 자 둘이 - 마가와 누가는 예수 앞에 등장한 귀신들린 자를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다(막 5:2; 눅 8:27). 이는 아마 이들이 다른 한 삶은 제쳐두고 증세(症勢)가 보다 더 심각한 한 사람에게만 주의를 집중시켜 초점을 맞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ugustine, Calvin). 한편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들은 주로 정신적 결함이나 자폐적 환자로서가 아니라 악한 영의 지배권 아래 놓인 자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대항키 위한 사단의 극렬한 저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Homer A. Kent. Jr).

⭕ 무덤 사이에서 나와 - 마가와 누가는 이들이 무덤 안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가다라 지방에는 석회암으로 이뤄진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위에는 고대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무덤들은 조그만 방이나 굴 식(式)으로 되어 있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유대인의 무덤은 동굴처럼 되어 있으며 성벽 바깥에 흔히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귀신들린 자에게는 이와 같이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동굴같은 무덤이 거처하기에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 사람들이 가까이 갈 경우 그사람은 의식적으로 더럽힘을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 저희는 심히 사나와 - 본절과 평행구인 막 5:2 - 6과 눅 8:27에서는 귀신들린 자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실로 이들은 군대 귀신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광적인 힘을 과시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인격이 파괴된채 오직 마귀의 파괴적 성향만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이 거하는 곳을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친 바다를 잠잠케하셨던 그 주께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곳을 친히 찾아오셨다.

성 경: [마8:29]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하나님의 아들이여 - 이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지칭할 때, 특히 신성을 지닌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칭호이다(3:17). 이 말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학히 알았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영적 감지력(感知力)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행 19:15).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도 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티 헤민 카이 소이) -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와 당신(사이)은 무엇이냐'란 말로서 그 뜻은 '왜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당신이 우리를 괴롭히며 방해하느냐?' '제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냐?'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구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관용어다(삼하 16:10; 왕하 9:18; 스 4:3). 여하튼 사단의 세력들은 영원한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상대적이며, 제한적인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던 것이다(엡 2:2; 6:12).

⭕ 때가 이르기 전에 - 본문의 '때'(appointed time)란 것은 마귀의 최후 운명의 날이요 세상의 종말, 곧 대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 악령들을 미혹하고 괴롭히도록 허용되지만, 심판날에는 모든 악인들과 함께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벧후 2:4; 유 1:6; Enoch 16:1; Jub 10:8, 9). 결국 본문의 이 말은 그들이 예수가 그 심판주이심을 알았음을 시사하며 더욱이 지금, 즉 그 때가 이르지도 전에 혹시 무저갱에 던져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계 20:3). 한편 이 '때'가 이르기 전에 예수께서 귀신들의 활동을 억제하시고, 추방하셨다는 것은 종말의 순간에 예수께서 귀신들을 모두 심판하실 것에 대한 전조적(前兆的) 행동인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이신 것이가(12:28).

⭕ 여기 오셨나이까 - 귀신들린 자의 '여기'란 말은 온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할 종말 개념과 연관된 '때 가 이르기 전에'란 말과 결부시켜 볼 때 미혹과 파괴를 일삼는 귀신들의 활동이 자유로운 이 땅 전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8:30]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위]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많은 돼지 떼가 - 마가는 돼지 떼의 수효가 약 이천 마리라고 밝히고 있다(막 5:13). 한편 마태는 돼지 떼가 '멀리서'(some distance from them) 먹고 있다는 상세한 보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의 사실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돼지 떼의 바다에의 몰사(沒死)가 단순히 사람들의 소동에 놀라 도망치다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적 능력에 따른 결과로서 되어진 일임을 시사해 준다.

성 경: [마8:31]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귀신들이 간구하여 -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이 귀신들린 자를 만나자 마자 귀신들에게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했음을 밤히고 있다(막 5:8; 눅 8:29). 이에 대해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는데, 이는 마귀의 활동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 귀신들이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에 대한 몇 견해가 있다. (1) 귀신들은 육체적인 '거처'(home)를 소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돼지 떼 속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2) 하나님의 피조물을 증오하는 마음에서 돼지 떼에 들어가 그 돼지 떼의 죽음을 초래하려 했다. (3) 그 지방 사람들의 소유인 돼지 떼들을 몰살시킴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세 가지 의견들 중에서 첫번째 의견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돼지 떼를 자기들의 새로운 '거처'(home)로 삼기를 갈구하였다면 어떻게 그 새로운 거처에 들어가자마자 그 거처를 파괴할 수 있겠는가? 두번째와 세번째에 제시된 이유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들 중에 다른 곳에서도 예수에 의해 쫓겨난 귀신들이 난폭한 행위나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17:14 - 20; 막 9:14 - 32). 한편 율법은 돼지 고기를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레 11:7). 그렇다면 이 돼지 떼를 먹이는 주인은 이방인이거나 아니면 이방인에게 팔기 위해 이 돼지떼를 기르는 불경건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마8:32]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가라 하시니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 예수께서 마귀의 요구를 들어주신 사실에 대해 (1) 어떤 이들은 (Plummer, Weiss) 예수가 귀신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 마귀가 무저갱에 떨어질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할 일말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endriksen). 이와 더불어 (3) 예수께서 그곳 주인들에게 귀신들린 이 두 사람의 가치가 돼지 떼보다 더 귀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이해하는 학자들(Rosenmu ler)이 있다 여하튼 귀신들은 모든 생명체, 특히 무인격체에 쉽게 들어가 그 대상을 자유로이 장악할 수 있었기에 돼지에게로 손쉽게 돌입할 수 있었다.

⭕ 온 떼가 비탈로 몰사하거늘 - 이는 귀신들린 자가 귀신들에게 완전히 놓임받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실로 대자연의 주인이신(23 - 27절) 예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구원키 위해 그 천하 중 일부를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귀신들의 난폭성이 두사람에게서 떠나 돼지에게로 옮겨짐으로써 판단력이 결여된 무인격체인 돼지들은 죽음에의 질주(疾朱)를 하게 된다.

성 경: [마8:34]

주제1: [질병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가다라 지방에서의 귀신 축출]

⭕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 이 지방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재산에 입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수를 체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를 만나려고 앴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보자 그 위엄에 제압당하여 단순히 그곳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불러 일으켜 그리스도를 반대하게 한다. 특히 사단은 '온 시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두려움을 크게 주입시킴으로써(눅 8:37) 자연히 온 시내 사람들과 예수 사이를 완전히 결별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2)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곧 가엾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선한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그들은 구세주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으며 세상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실로 물질적 한계 상황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은 진리와 구주를 수용할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 오늘날도 이 가다라 지방 사람들처럼 선한 기적을 보고도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온다는 이유로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요청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성 경: [마9: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배에 오르사 건너가 - 이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달라는 가다라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건너왔던(8:23-27) 게네사렛 호수를 다시 건너 되돌아 가심을 뜻한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본 사건의 평행기사를 다루면서 예수께서 되돌아가기 전에, 귀신들렸던 사람에게 자기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그 지역 사람에게 증거할 것을 당부하시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막 5:18-20; 눅 8:38, 39).

⭕ 본(本) 동네에 - 이는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4:13; 막 2:1),가버나움이 갈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였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문맥을 보면 뒤이은 2-8절의 내용이 마치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돌아온 후에 발생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 광인(狂人) 사건을 살펴볼 때 오히려 다음의 중풍 병자 사건이 가다라 사건 이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막 2:2-12과 막 5:1-20 비교). 이는 이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상, 즉 예수는 귀신과 죄 문제같은 영적 차원에서도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보다는 신학적 주제에 따라 마태가 이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뒤에 언급될 2-8절의 도입부로서가 아니라 앞의 8:8-34의 사건을 마무리짓는 결론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절은 원문상,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새로운 사건을 소개할 때 흔히 등장하는 '카이 이두'(*)란 어구로 시작되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9: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 본 사건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평행 기사에 의하면 예수가 계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자의 친구인 듯한 자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그를 줄에 매달아 예수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되고 있다(막 2:1-12; 눅 5:17-26). 여기서 침상을 뜻하는 '클리네스' (*)란 그것을 들고 돌아가라는 6절의 예수의 명령에서도 암시되어 있다시피 한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메트리스(mattress)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저희'란 것은 데리고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병자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Clarke, Plummer). '저희의 믿음'이란 것은 예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칼빈(Calvin)은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히 11:1, 6).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겔 18:1-4).

⭕ 소자야(*, 테크논) - '테크논'은 연장자가 손 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요일 2:1).

⭕ 안심하라(*, 다르세이) -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으로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파도를 일거에 잠재우시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자는 진정 무서움의 그늘을 벗고 용기의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 (*)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서 진행의 의미보다는 완료의 뜻이 강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그 순간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Burton).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주목할만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는데, 예수께서는 질병 치료에 앞서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했다는 점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있다가, 즉 오랫동안의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후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주목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한 것은 질병의 치유선언과 같은 뜻인 동시에 나아가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해 주신 것이었다. (2)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려는 적절한 기회로 삼았다. 만약 그가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 용서함을 선언했다면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자들까지도 의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 용서함과 아울러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가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이유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중풍병자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 것이고 후자는 예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성 경: [마9: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어떤 서기관들이 - 서기관이란 용어는 바리새나 사두개 등과 같은 종교적 당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중앙 성전 또는 각급회당 등에 속하여 율법 필사 또는 각종 종교 행정을 담당하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서(2:4) 공직을 가리키는 직명(職名)이었다. 이들은 유대 종교의 수구(守舊) 세력으로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가 2절과 같은 예수의 선언을 듣고는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후토스 블라스페메이) - '참람하다'란 말의 '블라스페메이'는 원래 '남을 욕하다', '부당하게 비난한다'(shander)는 뜻이며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다',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하다'로 쓰였다. 그후 이 말은 그 개념이 확대되어 '신성모독'(blasphemy)의 뜻을 가졌다. 즉 어떤 서기관들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예수의 말을 듣고 그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에 그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이시며(사 43:25; 44:22). 그런 이유에서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시 51:4). 이런 점에서 마가는 여기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는 어구를 덧붙이고 있다.

성 경: [마9: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그 생각을 아시고 -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 동료들의 믿음을 직시하셨던(2절) 것처럼 서기관들의 마음의 심연(深淵)을 꿰뚫어보고 계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막 2:8).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을 알고 또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대상 28:9; 렘 17:10; 요 2:25; 롬 8:27; 계 2:23). 따라서 이 같은 일은 예수께서 전지(omniscience)하심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증거인 것이다.

⭕ 악한 생각 -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하신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적을 베푸심과 동시에 이 이적과 함께 주어진 '죄 사함'의 진의를 성실하게 알아 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예수를 불신(不信)하며,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예수를 파멸시킬 근거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마9: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는 죄 사함과 병고침 중에 어떤 것이 더 쉽겠느냐고 질문하셨는데, 후자의 것, 즉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것이 분명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지만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여러 선지자나 사도들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이비 메시야의 경우에는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가시화(可視化)할 수 없는 죄 사함의 명령을 남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유대인의 생각에는 죄 사함보다는 병고치는 능력이 더 쉬울 것이었지만, 이 둘은 모두 권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둘 다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 균일하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여기서 이 두 가지 신적 일을 동시에 행하신 것은 대부분의 예수의 이적이 그렇듯이 자신의 메시야직의 진정(眞正)성과 그에 따른 권능을 보임과 아울러 자신의 메시야직의 궁극적 목적, 곧 죄와 사망에서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더나아가 자신이 메시야로서 죄 사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이라 하겠다.

성 경: [마9: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 - 여기서 '권세'(*, 여수시아)란 '능력'과 '권위의 위임받은 권능'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행하시는 신적 권능을 가리킨다. 또한 본문의 '세상에서'란 말은 미래에 도래할 신천신지(新天新地)나 하나님의 처소로 여겨졌던 하늘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바로 이 지구상에서'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은 죄와 죽음이 현존하는 곳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인류의 죄악을 도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한다(1:21). 실로 죄를 사하는 것은 '인자'된 자의 특권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속죄의 영원한 초석을 마련하신 것이다.

⭕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앞절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사죄하는 권세가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병자에게 '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를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는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려는 방편으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어나 가라'는 명령과 함께 기적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 중풍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곧 예수의 사죄권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성경에 이적이 기록된 이유는 저자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신적 목적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 뒤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병고친 이적의 목적은 예수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문맥을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어"라고 생생히 번역하고 있다.

⭕ 일어나...가라 - 이 명령은 부정 과거 능동,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지체치 말고 일어난 즉시 네 침상을 챙겨 집으로 가라'는 매우 생동감 넘치는 3중의 명령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1) 그 중풍병자의 병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는 사실과 (2) 그의 죄악을 완전히 도말하셨다는 사실및 (3)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완전히 반박하셨음을 나타낸다. 실로 그는 사죄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성 경: [마9: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그가...돌아가거늘 - 병고침 받기 위해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는 의심없는 절대적 순종을 통해(2절) 병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1:21) 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임마누엘(Immanuel)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죄 사함까지도 받은 것이다. 즉 그는 건강한 육체 뿐만 아니라 건강한 영혼도 선사받았다. 영육의 동시 축복,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성경은 영혼을 우선하지만 우리의 육체도 무시하지 않는다. 앞으로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때 우리는 새육체도 가지게 될 것이다.

성 경: [마9: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중풍병자 치유]

⭕ 두려워하며(*, 에포베데산) - 초기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 가이사랴 사본등)에는 하나같이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등의 뜻을 지닌 본문의 원어를 사용했지만 후기 필사자들(copyists)은 이를 그저 '이상히 여겼다', '놀랐다'는 뜻의 '에다우마산'(*)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원래의 뜻을 약화시키고 있다. 실로 죄악에 물든 인간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신 절대적 존재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 직면할 때마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17:6; 28:5, 10). 한편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은 항상 경배와 찬양을 수반한다.

⭕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 공관복음서 3기자 중 유일하게 마태만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기, 즉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도를 나타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편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1) 찬양을 돌린 주체 : 이 구절은 복음서 기자의 생각, 즉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또 부활을 목격하며 성령 세례를 받았던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에서 나온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며 찬양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사람의 정체 : '사람에게' (*,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란 말은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좀 애매하다. 문맥상 '이런 권세', 즉 중풍병을 치유하고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사하신 분은 분명히 예수이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Benoit, Held, Hill, Hummen) '사람에게'란 이 말은 교회를 가리킨 것이며, 교회가 이러한 권세를 부여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16:19과 18:18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이 말은 마태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무리들은 인자이신 예수의 권세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본것이 아니라 한 특수 그룹의 자연인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이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 일부 율법주의자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사죄권에 대해 크게 놀라서 찬양을 드리긴 하였지만 예수의 참 정체,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사실을 이해하는 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한다

는 뜻이다.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죄사함 선포를 신성 모독으로 보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이 문제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원래 단순하고 겸허한 자들의 심령에는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신의 지혜를 믿고 뽐내는 이들에게는 혼돈과 불평거리만 될 뿐이다.

성 경: [마9: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예수께서...지나가시다가 - 본문의 평행구인 막 2:13, 14에는 예수께서 바닷가를 지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아마 이곳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였을 것이다(D.A. Carson). 마태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은 '신실한 자'란 뜻의 히브리어 '에메트' (*)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아마도 레위 소명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하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두개의 이름('사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도의 권위로서 자칭할 경우에는 소명 이후의 호칭인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하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 마태는 12제자들중 한 사람이요 본서의 기록자이기도 하다(Gundry, 본서 서론 참조)

⭕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다. 한편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Van Lennep).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다(5:46; Edersheim).

⭕ 나를 좇으라 - 여기서 '좇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이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한다(4:19; 19:21).

⭕ 일어나 좇으니라 -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낸다. 이 제 2의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한편 누가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다(눅 5:28). 이는 마태의 겸손한 면모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즉 그는 본서의 저자로서,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성 경: [마9:1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이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에게네토' (*, and it came to pass, 그리고 다음과 같이되었다)란 말로 시작되고 있다(7:28, 29). 이는 마태가 독창적으로 사용한 어투로서 어떤 사건이나 내용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device)한 문장이다.

⭕ 마태의 집에서(*, 엔 테 오이키아) - 원문에는 단순히 '그 집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이 집을 분명하게 '마태의 집'으로 규정하고 있다.

⭕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 누가는 이 부분을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자신의 집을 그냥 '그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 자찬(自畵自讚)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성도는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적이어야 하겠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킨다.

⭕ 많은 세리와 죄인들 - 마태가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다. 여기서 세리는 앞에서 설명되었다시피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다. 특별히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prisoner)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 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sinner)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다.

⭕ 함께 앉았더니 -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세상에 오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공동 식사에서 얻는 교훈은 (1) 예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다. (2)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는 오히려 그들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셨다. (3) 주님께서는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준다.

성 경: [마9:1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편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다.

⭕ 함께 잡수시느냐 - 이 말은 예수가 종교적.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한편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할 경우만은 에외였던 것 같다.

성 경: [마9:1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의원이...병든 자에게라야 -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는 그 당시 흔히 통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이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복잡한 대답이 아니었으며 또한 바리새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정확하고도 명쾌한 답변이었다. 즉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롬 3:10) 예수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간과치 말아야 할 사실은 죄인들이 예수를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이다.

성 경: [마9:1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죄인들과의 식사와 의원 비유]

⭕ 너희는 가서...배우라 - 이는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이다.

⭕ 내가 긍휼을 원하고 - 이 말은 구약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 구절이다(호 6:6). '긍휼'(mercy, 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한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예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이다.

⭕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님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언컨대, 제사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 예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하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죄인이긴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이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의 원어 '칼레사이'(*)는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예수는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다.

성 경: [마9:1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그 때에(*, 토테) - 앞뒤 상황의 연속성을 나타낸 말로서 마태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이다.

⭕ 요한의 제자들이 - 여기서 마가는 당시 '혹'(some people)이라고 언급했고, 누가는 질문자를 바리새인으로 적고 있다(눅 5:33). 아마 금식 문제에 있어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한편 이 당시 요한은 헤롯의 일로 투옥된 상태였는데(4:12), 이 상황에서 요한의 몇몇 제자들은 자기 스승보다 권위에 찬 메시지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강력한 증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요한의 금식주의만을 고수했 때문에 정해진 금식일에 금식치 않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요한의 추종자들은 A.D. 3세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유지했으며, 또한 금식과 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 아마 이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인 요한이 메시야의 선구자였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기들과 예수의 제자들 간에는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율법준수, 특히 금식에 관한 외형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로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제자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 규칙적으로 금식하였으며 거국적인 금식일(속죄일, 부림절 전날,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는 아빕월 9일) 금식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금식하곤 하였다(눅 18:12). 이와 같은 금식 규례는 유대 지방에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 당시 요한은 자신이 금식을 폐기시킬 만큼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금식의 전통을 계속 고수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다.

⭕ 당신의 제자들은...아니하나이까 - 이 질문은 아마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헤롯에 의해 수감된 이후 찾아와 질문한 내용으로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투옥으로 인해 대단히 슬퍼하는 중에 있으면서 금식을 준수했던 것 같다. 금식이란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픔에 대한 자연적인 표현이었기에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선구자요 또 세례를 베푼 자인 요한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자기들과 함께 슬퍼하지 아니하는지 대단히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성 경: [마9:1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혼인집 손님들이(*, 호이 휘오이 투 뉨포노스)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신랑방의 아들들'이란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신랑의 혼인 예식을 돕기 위해 온 친구들을 가리킨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는데 이 사람들은 결혼 마지막 날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장인(丈人)의 집에 갈 때 신랑과 함께 동행하는 들러리였다. 한편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에 비긴 반면 예수는 '신랑'으로 생각한 바가 있다(요 3:29). 따라서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은 신랑에 대한 예수의 비유 설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스승인 요한의 말을 상기했을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 예수의 말씀을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 예수의 이 질문은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실로 예수는 신랑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로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은 기뻐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슬픔의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이다. 한편 구약에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으며(사 54:5, 6; 62:4, 5; 호 2:16-20), 특별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와 관련된 비유에서 종종 이 '신랑'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메시야적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는 이 대답을 통해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한 종말의 날에 오실 신랑, 곧 메시야이며 따라서 그 예언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한편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비유한다(25:1; 고후 11:2; 엡 5:32).

⭕ 신랑을 빼앗길 날 -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가리킨 표현이다. 7일 동안 계속되는 잔치 기간에는 설사 그 중에 금식일이 끼여 있다고 해도 금식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잔치 기간이 끝나기 전날 신랑을 떠나 보내고 난 후에는 금식해야 했던 것으로서 영적 신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제자들은 그때부터 당연히 슬픔에 빠져 금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 만약 예수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한다고 한다면 예수의 오신 목적, 즉 병든 자에게 치유함을 얻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함을 주려는 그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고 또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떤 큰 재앙이나 불러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식할 때가 있으리니 그때는 바로 신랑되신 주님을 잃게될 때인 것이다.

성 경: [마9:1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왜 금식하지 않는가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두번째 예화이다. 누가는 이 예화를 비유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눅 5:36).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나포스'(*)는 한 번도 세탁이 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 말리면 줄어든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베를 여러 번 세탁이 된 적이 있고 또 올이 낡은 베에다 대고 기울 경우 생베는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기운 효과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 헤어짐을 더할 뿐인 것이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옛 종교인 유대교 이식에 접붙여질 경우 유대교 의식은 마치 낡은 옷처럼 이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고 말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금욕주의적 의식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예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점점 더 고립되고 악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마9:1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금식 논쟁]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이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세번째 답변이다. 내용상 이 세번째 예화는 두번째 예화와 댓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채로 벗겨낸 후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다 액체를 담아 놓는 데 사용된 용기이다. 근동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가죽 부대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서 생겨나는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 부대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어리석게도 배합하려고 한다면 하나는 파괴되고 만다는 뜻으로서 금식과 같은 생명력이 약한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생명력이 충만한 예수의 가르침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완성이자 그 최종 목적인 것이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여기서 먼저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뜻으로 가장 최근에 제조된 포도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둘째번의 '새'(*,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로 가죽 상태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나타낸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지금 새로이 시작되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조직 속에 부어 넣어져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새로운 조직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16:18; 18:17).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의 교훈과 구약의 율법은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적절한 견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태는 계속해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을 연관시키면서 예수의 사역이란 바로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입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16,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두 비유는 시각에 따라서는 금식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나, 예수의 새로운 교훈이 금식과 같은 유대주의적 의식에 맞게 변형될 수 없으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능가하는 새로운 질서인 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금식에 대한 직접 또는 간접적인 대답인 것이다.

성 경: [마9:1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이 말씀을 하실 때에 - 마태는 이 사건을 예수께서 마태의 잔치에 참석하신 사건(9-17절)과 직결시키고 있으나 마가는 예수가 바닷가에 계실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막 5:21). 또한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마태의 잔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앞에서 지적된 바 있는 가다라 지방(또는 거라사인의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반면에 마태의 잔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모두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 다음에 기록되고 있다.

⭕ 한 직원이 와서 - 여기서 '직원'(*, 아르콘)은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는 뜻으로서 어떤 관직이나 종교 기관의 장급 인사를 일컫는다. 마가와 누가는 이 사람을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유대 회다(synagogue)에는 몇 사람의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회당 건물의 유지.보존과 운용 및 회당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았다(눅 13:14). 본문의 이 직원은 아마 가버나움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 감독이거나 회당장이었던 것 같다(막 5:22; 눅 8:41 참조).

⭕ 절하고 - 원뜻은 '무릎을 꿇고'로서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 존경과 깊은 경의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8:2)

⭕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 누가는 이 직원의 딸이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나이가 12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가와 누가는 그의 딸이 죽기 직전에 있었으며 그후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회당장의 집에서 보냄받은 사람들이 알려왔다고 밝히고 있다. 마태는 이 두 사건을 결합하여 상세한 과정을 생략한 채 예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를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Broadus). 뿐만 아니라 '방장 죽었사오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 에테류테센' (*)은 반드시 '죽어 있다'는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 '죽으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께 와서 '내 딸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지금쯤은 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오셔서...손을 얹으소서 - 선지자들은 은혜를 빌기 위해 병자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였다. 이는 권위의 부여, 인격적인 관계성 설정, 생명과 축복의 전달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담은 행위이다(출 29:1-37 강해, '안수에 대하여' 참조). 아마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외에도 다른 병자들에게 손을 얹었던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회당장은 그 사실을 목격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 그러면 살겠나이다 - 이는 그 회당장의 믿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여태까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몸에 주의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하는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8:8) 만큼이나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성 경: [마9:1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일어나 따라 가시매 - 예수는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장소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의 요구에 따라 즉각 응답하여 따라가서 죽은 자가 있는 곳으로 가셨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영혼의 구원 문제가 달려 있다면 어떠한 위험과 고통도 무릎쓰고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임을 암시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이로'(*)는 전후 문맥상 식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성 경: [마9:2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본문에는 번역되지 않고 있는 '카이 이두' (*)라는 감탄사가 본절의 앞 부분에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을 소개하며 이 여인에게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이란 질병을 육체적으로 뿐아니라 의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공동체 생활에서 그 환자들을 격리시켰다(레 15:25). 마가는 이 여자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였졌던 차에"(막 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그녀의 투병 기간이 '12'년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숫자 개념으로 '12'는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성취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녀는 예수의 영광스런 치유 사역에 의해 치료되기까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고난을 순간들을 보냈음을 암시한다.

⭕ 예수의 뒤로 와서 - 이 여자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자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허비하며 애써왔지만 결국 병을 고치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예수의 뒤로 가서 예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져보면 나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 그 겉옷 가를 만지니 - 여기서 '겉옷 가'(*, 크라스페돈)는 '옷의 가장자리'(edge) 또는 '술'(tassel)로서, 이 '술'은 히브리어로 '치치트' (*)라 부르며 겉옷의 네 모퉁이에 단청색 내지는 보라색의 장식을 가리킨다(민 15:37; 신 22: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는데, 이는 이 술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었다(민 15:38, 39). 예수께서는 한 때 이 '술'의 형식화 현상에 대해 비판하시기도 하셨지만(23:5), 그 역시 율법의 가르침대로 그러한 장식이 있는 옷을 입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의 옷에 장식되어 붙어 있는 바로 이 옷가의 술을 만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9:2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그 겉옷만 만져도 - 그녀의 믿음이 위대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녀는 예수의 만져주심을 받은 사람들의 병이 치료받았다는 것을 알고, 역으로 생각하여 자기가 예수의 겉옷만을 만져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을 해야만이 나을 수 있다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 구원을 받겠다 - 구원이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짐받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었다.

성 경: [마9:2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혈루증 앓는 여인의 신앙]

⭕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 마가는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신 사실과 이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 앞에 나와 모든 일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 5:30-33). 그렇다면 마태는 이 사건을 왜 이렇게 간단히 축약했는가? (1) 짧은 기사가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Hill). (2) 마태는 자신에게 가장 관심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마태는 시간적 순서보다는 주제별로 사건을 결합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2)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 딸아 - 이 말은 중풍병자를 보고 '소자야'(2절)라고 불렀던 것과 유사한 여자에 대한 애칭이다.

⭕ 안심하라(*, 다르세이)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무서워 말라', '용기를 내라'란 뜻으로서 예수께서 이미 그 여자의 절박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치료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께서는 '담대하라'(안식하라)고 격려하신 일이 있다(행 23:11). 뿐만 아니라 예수는 중풍병자에게도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는 자이심을 볼 수가 있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그 여인이 왼치된 것은 예수의 옷 가를 만져서(주술적 방법)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믿음, 곧 전능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될 수가 있었다. 그녀의 질병을 치유한 것은 예수의 능력이었지만 그녀가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영적 구원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이 자신의 죄를 치유해 주실 수 있고 또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때 죄인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이다.

⭕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 예수가 말씀 하시는 그 순간에 그녀의 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 그 시(時)에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평행 구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예수의 옷 가를 만지자마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음을 밝히고 있다(막 5:27-29). 부연컨대, 구원은 믿음과 더불어 주어지며 믿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선행이 있다하더라도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함을 베푸는 능력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도구임을 주목해야 한다.

성 경: [마9:2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피리 부는 자들 -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대하 35:25) 사람이 죽었을 경우 피리부는 자들을 고용해서(잔치 자리에도 종종 초청함, 계 18:22) 떠들게 하여 슬픔의 극한을 표현했다. 이는 빈부와 귀천을 불문하고 당연히 베풀어져야 하는 관습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전반의 규범서라 할 수 있는 '미쉬나'(Mishna)에는 아무리 미천한 자일지라도 죽은 자를 위해 2명의 피리부는 자와 1명의 애곡하는 자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Lightfoot). 한편 예레미야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피리같이 소리하리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것 역시 장례식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다(렘 48:36). 그리고 유대인 뿐만 아니라 그리이스인들과 로마인들도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사람을 고용해서 슬픔을 애도하였다.

⭕ 훤화하는 무리 - 여기서 '훤화하는'(*, 도뤼부메논)이란 '소동을 일으키다', '애곡하다'는 뜻으로 상당히 곡하는 소리가 크고 소란스러웠다는 점을 암시한다(행 17:5). 아마 이들도 역시 피리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인(故人)을 애도하기 위해 고용된 무리로서 이들은 곡을 했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고용 인원 외에 그 슬픔당한 집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자, 술과 고기를 얻어 먹기 위해 모여든 자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흔재(痕在)하여 더욱 소란스러웠을 것이다(Bruce). 이런 풍습은 오늘날, 중근동 지방의 원주민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9:2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물러가라 - 예수의 단호한 명령으로서 그들의 애곡이 더 이상 소용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give place, KJV)것이기 때문이다.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축어적으로 이해하여 회당장의 딸이 실제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假死)상태에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으나(Olshausen), 이는 적절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기 전 회당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의 딸이 죽었음을 통고한 바 있기 때문이다(막 5:35; 눅 8:4).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시체 썬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실 때도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던 것이다(요 11:11).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가 죽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은 것은 사실이나 사망의 권세 아래에는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녀는, 예수의 능력에 의해 정복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자던 사람이 일어나듯이 그렇게 죽음의 권세에서 일어나게 되라라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잠'은 종종 '죽음'에 비견되나 절대적 절망인 '비존재'(nonexistence)의 상황을 일컫지는 않는다(단 12:2; 요 11:11; 고전 15:6, 18).

⭕ 저들이 비웃더라 - 이는 죽은 소녀에 대한 슬픔의 표현으로서 피리불며 곡하기 위해 왔던 자들이 예수의 인격을 모독하며 멸시하였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특별히 '비웃더라'(*, 카테겔론)는 말은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한 번의 조소(嘲笑)가 아닌 계속 반복해서 추근거리며 경멸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란 흔히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좋아하지 않는 그런 진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자기의 나아가야 할 길을 충실히 지키며 주의 사역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9:2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 이 무리들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애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들었다기 보다 의무감에서나 단순히 돈을 받고 울어주는데 지나지 않은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예수가 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고 야유(揶楡)하는 저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속(卑俗)하고 믿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발휘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비웃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악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비밀에 붙이시고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한편 이때 예수께서 무리들을 다 몰아내셨으나 당신의 권능을 신뢰하던 5인의 증인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의 양친)을 대동(accompaniment)하시고 죽음의 현장에 들어가셨다(막 5:40).

⭕ 소년의 손을 잡으시매 - 소녀의 아비인 이 직원은 예수께 손을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신다. 마가는 이때 예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5:41; 눅 8:54, '아이야 일어나라'). 실로 예수의 손길인 것이다.

⭕ 일어나는지라 -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수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이 죽은 소녀의 목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자 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일어난 것이다. 죽음을 이기고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오직 생명 뿐이다. 따라서 죽음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만이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이 죽음 앞에서 무슨 힘을 쓸 수가 있는가? 죄와 범법(犯法)으로 죽은 영혼에게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 안에서 죽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서만 영적인 생명을 회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마9:2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죽은 소녀를 살리심]

⭕ 그 소문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전능하고 주권적인 능력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는 그 사역은 온 사방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 온 땅'이란 저자 마태의 시각이 항상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으로 볼 수 있다(Nosgen). 한편 예수께서 가능하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복음만을 나타내고자 하는 성공적인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워야 하며, 또한 하나님만이 영광을 자신에게로 돌릴 능력과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경계하여 이 이적의 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과 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취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이같이 비밀을 요구하신 것 역시 믿지 않는 패역한 무리를 고려하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성 경: [마9:2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거기서 떠나 가실새 -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후 그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절(28절)에 언급된 '집'이란 말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거처가 아니면 다시 마태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두 소경이 - 복음서에는 소경이 치유함을 받고 눈을 뜨는 장면이 가끔 나타난다(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요 9장). 그런데 마태복음 후반부(20:29-34)에 등장하는 소경 치유 기적은 바디메오라는 소경에게 발생한 것으로서 막 10:46-52과 눅 18:35-4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문의 소경 치유 사건과 요한 9장의 실로암 사건과는 각기 별개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팔레스틴 지방에는 동쪽으로부터의 극심한 모래 바람과 거기에다 지면에 수분이 늘 부족한 관계로 일어나는 석회석의 먼지 등으로 인해 소경 및 안질환자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 다윗의 자손이여 -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1:1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호칭으로 불리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의 특징을 지적하면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이하)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진정 메시야라면 이사야의 예언과도 같이 자기들의 눈을 밝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1) 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것이라는 견해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으며(요 7:42), (2)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다윗의 줄기에서 나온 분임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12:23)라고 하는 점이다.

⭕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이 두 소경이 자기들에게는 메시야의 은혜를 입어 구원함을 받을만한 공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낸 표현으로서 우리는 이 말을 통해 그들이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은 메시야를 식별하고 있었으며, 또 이렇기 때문에 이미 하늘의 빛을 어느정도나마 감지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마9:2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집에 - 이 곳은 마태의 집이거나 아니면 가버나움의 거처 또는 베드로의 집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 두 소경들은 그동안 계속 예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인 참된 메시야임을 믿고 끝까지 자비를 구하며 열심히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아마 이때 예수께서 끈질긴 그들의 호소에도 침묵하고 집 안까지 들어오신 것은 일반인들에게 정치적 해방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는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내가...할 줄을 믿느냐 - 소경들이 더듬거리며 또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집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일반인들의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억누르기 위한 조치(措置)이기도 했거니와 소경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특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소경들에게 자신의 능력, 인격, 권위를 모두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질문을 하신 것이다.

⭕ 주여 그러하오이다 - 이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임을 진실로 믿었던 것이다. 영적 의미에서 우리 역시 이 같은 소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는 (1)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은혜를 믿는 살아있는 믿음과 (2) 이 은혜를 받아 누리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부르짖음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얻게된 구원에 대한 확고한 인식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성 경: [마9:29]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저희 눈을 만지시며 - 이 같은 행동은 병을 치유하는 수단이 아니라 신앙을 북돋우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든 행위였던 것 같다(8:3).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너희 믿음대로(*, 카타 테 피스틴 휘몬) - 문자적으로 '너희 믿음에 따라' 인데, 소경들의 '믿음의 정도에 비례해서'란 의미보다는 '믿고 바라는 바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8:13).

성 경: [마9:30]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에 의해 그들이 가장 소망하던 바 눈이 밝아졌다. 그들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그들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이 믿고 바라는 바대로 그들에게 눈을 뜰 수 있도록 허락하신 때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로 예수를 영.육의 온전한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인식하는 자에게 그의 도래로 인해 실현된 축복의 약속(사 35:5, 6)이 그대로 실현될 것이다.

⭕ 엄히 경계하시되(*, 에네브리메데 아우토이스) - 이는 다소 격렬한 감정적 요소가 있는 자에게 대한 경고의 말을 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단 11:30; 막 1:43; 요 11:33, 38).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기 조국을 독립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릇된 메시야관을 가진 대중들을 부추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 이적을 발설치 못하도록 밝은 세계를 이제 막 봄으로써 환희에 들떠 있던 소경들에게 엄히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군중들로부터 메시야 추대(推戴)를 받는 것이 그가 이 땅에 온 진정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9:31]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두 소경의 치유]

⭕ 나가서...전파하니라 -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이다(삼상 15:22). 따라서 눈을 뜬 이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마 이 놀라운 사건을 당하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예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선전하고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발설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지혜란 것은 이렇게 어리석기 마련인 것이다(Calvin).

성 경: [마9:32]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벙어리의 치유]

⭕ 저희가 나갈 때에 - 이 장면은 앞절과 연결된 것으로 소경을 고치셨던 바로 그 집에서 막 나가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 귀신 들려 - 성경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중풍병자나 소경 또는 벙어리가 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단의 무리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런 질병이나 불구를 이용하여 침투하고는 교묘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감추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사람의 벙어리 병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아시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다고 종종 기록하는 신약성경의 언급들이 조잡하고 원시적인 미신에 근거한 성경 기자들의 우매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적 발병과 귀신에 의한 병증을 구분할 줄 아는 영적 통찰력을 반증해주는 것이다(막 9:14-29,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 벙어리 된 자(*, 코포스) - 이 말의 원어는 '귀머거리'(deaf), '벙어리'(dumb), '귀 먹고 말 못하는 자'(deaf-mute)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귀가 먹어 듣지 못할 경우 자연적으로 말을 배우지 못해 벙어리가 되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는 자, 그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자들 역시 벙어리 귀신에 사로잡혀 말 못하는 벙어리인 것이다.

성 경: [마9:33]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벙어리의 치유]

⭕ 귀신이 쫓겨나고 - 벙어리 된 자의 질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귀신들려 벙어리가 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벙어리의 원인이 귀신들린 데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이 사람의 벙어리를 고치신 것이다.

⭕ 벙어리가 말하거늘 -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 6)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벙어리가 말하게 된 이적은 메시야가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던 것이다.

⭕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귀신을 쫓아냄과 동시에 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구절에 언급되는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부자와 학자들보다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더 쉽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 경: [마9:34]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 바리새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의 사역과 이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9:3, 11, 24) 급기야 여기에 와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 이적에 대해 예수께서 귀신의 왕의 힘을 빌었다고 극단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후의 예수의 가르침, 그중에서도 특히 10:16-28의 배경이 된다.

⭕ 귀신의 왕 - 귀신들의 괴수, 곧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서(4:1-11, 사단과 귀신)이는 바알세불을 가리킨 것이다(10:25; 12:24 참조).

⭕ 빙자하여(*, 엔) - 이는 귀신의 왕을 '통하여' 라는 뜻도 있고 귀신의 왕 '안에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사단을 방편삼았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덧입어 병자를 치유했다고 하는 것이다.

⭕ 귀신을 쫓아낸다 - 이와 같은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악의에 찬 비난이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대표자들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목수의 아들 예수를 통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기와 질투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또한 자기들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 신비로운 메시야의 광채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악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와같이 악한 사단의 말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비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도의 악한 시기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이상 이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하겠다.

성 경: [마9:35]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순회 사역]

⭕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 이는 예수께서 한 곳에 정체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도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 싸인 비교적 큰 성읍을, '촌'은 성곽이 없거나 '성'에 영향을 받는 모든 촌락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모든'이란 수식어에는 단지 '성'에만 제한된다. 따라서 예수는 이때 모든 촌을 샅샅이 다니신 것이 아니라 많은 곳을 두루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태는 잠시 분위기를 바꾸어 예수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잠시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35-38절은, 4:23-25이 첫번째 강론(5-7장)을 위한 전제였듯이, 두번째 강론(10:5-42)의 전제가 된다. 이는 시간적으로 정확히 언제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제별 기사 배열을 자주 사용했던 마태의 기술 방식에 따른 갈릴리 사역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본문은 사도 파송(派送)이라는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 가르치시며...고치시니라 - 이는 마태가 예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한 것을 돌이켜 보고 난 다음 그것을 전체적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정리한 부분이다. 예수는 자기를 환영하는 무리로부터 얼마든지 좋은 안식처와 훌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순회하며 한 시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 천국 복음 -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좋은 소식임과 동시에 메시야가 도래하여 다스리라는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실로 예수 자신은 곧 천국 복음의 실체였으며, 그분의 메시지는 그 복음의 내용들이었던 것이다.

⭕ 병과 모든 약한 것 - 그리스도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증거들이 나타났다. 예수는 오직 유익하고 생명을 주는 기적만을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임하시면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당시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분의 원래 목적은 이적을 행하는 초능력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성 경: [마9:36]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순회 사역]

⭕ 민망히 여기시니(*, 에스플랑크니스데) - 이 말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이다.

⭕ 목자 없는 양 -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주 목자로 비유되어졌다(겔 34장).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눈에는 이들이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떼로 보였던 것이다.

⭕ 고생하며(*, 에크레뤼메노이) - 이 말의 원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로서 극심한 고통이나 걱정, 약탈 또는 탈진한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로 종교적 정황을 묘사한 것으로(A.T. Robertson) 백성을 올바로 지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심지어 천국 입성을 방해하곤 했던(23:13)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바리새인들의 종교 의식이나 교리 등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 유리함이라(*, 엘림메노이) - 술에 만취하거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곤두박질한 상황을 일컫는다. 이는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의 회복 불가능한 정도의 절망적 상태를 나타낸다.

성 경: [마9:37]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일꾼의 필요성]

⭕ 추수할 것은 많되 - 이는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추수가 영혼 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13:49) 추수할 시기 곧 세상 끝과 그때 있을 심판으로 해석된다.

⭕ 일군은 적으니 - 여기서 일군이란 예수 자신, 세례 요한, 예수의 치유 이적을 경험한 산 증인들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로 유대 지방에는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곁에서 방관하는 신사들이었지 직접 나서서 추수하는 일꾼들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참 목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거짓 목자였기 때문에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다.

성 경: [마9:38]

주제1: [죄인과 병자를 치유하시는 왕의 권능]

주제2: [일꾼의 필요성]

⭕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 여기서 '청하여'(*, 데에데테)란 공적 간구라기 보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간청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하나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하늘 일꾼을 보내달라고 친밀히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한편 여기서 '천국 일꾼'이란 10:1 이하에 제시되는 12제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색하다. 오히려 12제자에 구애됨 없이 많은 하늘 일꾼들로 보는 것이 좋다.

⭕ 보내어 주소서(*, 호포스 에크발레) - 이는 강제력이 동원된 상태로 밀어내 달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급박한 상태에서의 절대적 요청을 나타낸다. 실로 그때나 지금이나 천국 일꾼이 시급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스스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택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0: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의 직위와 권능을 부여하심]

⭕ 그 열 두 제자 - 이 어구는 마태복음에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지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열 두 사람의 제자들은 이 이전에 이미 선택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신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예비적 단계들(4:18-22; 요 1:35-51)이 여기에 와서 결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수훈 이전, 예수께서 밤새껏 기도하신 후 제자들은 택하셨고(막 3:13-18; 눅 6:12-16)또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제자 훈련을 실시하신 후에야(막 6:7-13; 눅 9:1-6) 비로소 그들을 선교지로 파송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열 두 제자 임명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갑자기 탄생할 개척 교회를 책임질 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열 둘'이라는 숫자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한 새로운 탄생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12족장이 옛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이들 12명의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2제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갱신(eschatological renewal)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들의 직무는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선생이신 예수로부터 가르침받은 교훈과 그가 세우신 종교의 본질,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열 둘이라는 숫자는 이 목적에 가장 적절한 숫자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한편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큰 숫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을 만큼의 작은 숫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도 같이 배운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또 자기들의 기교나 재주로 이 종교를 전파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상당한 지위나 신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타인에게 강제적으로 이 종교를 강요할만한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고 들은 대로만 전달하는 정직하고 평범한 상식을 소유한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 부르사(*, 프로스칼레사메노스) - 이 말의 원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주춧돌이 될 12제자들을 당신의 구원역사를 쟁취하시기 위하여 불러 모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주권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민족 전체에게 소명(召命)을 부여하신다(막 3:13; 행 2:39; 고전 1:1, 2).

⭕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여기서 먼저 '권능' (*, 여수시안)이란 '권세와 능력(힘)'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F.R. Fay). 실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권능에는 먼저 '귀신을 쫓아내는'것이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란 문자적으로 '더러운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원수가 되며, 직.간접으로 인간의 정신과 도덕과 육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영들이다(12:43). 그런데 예수께서이 같은 더러운 영들을 쫓는 능력을 병고치는 능력과 구별하여 제공하신 것은, 그 일이 병고치는 일보다 탁월하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실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단의 왕국을 허물어뜨리는 직접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다른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소명받은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하는 데 유효한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12족장의 유언, Lev. 18:12)에 의하면 이처럼 악한 영을 정복, 축출하는 일은, 곧 대제사장적 메시야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여하튼 이 일은 메시야와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확실한 증표임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로서(4:23; 9:35 참조) 이제 당신의 권위를 덧입은 12제자들에게도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권능은 일반 성도에게 부여된 '병고치는 은사들'(고전 12:9, 28)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부여된 그 은사는 은사받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고, 그들이 고칠수 있는 병의 종류도 받은 바 은사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신적 권위를 직접 위임받은 12제자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는 특수한 은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적인 충만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도들의 단회적(單回的)이고도 제한적(制限的)이며 유일무이(有一無二)한 특수 권능이었다.

성 경: [마10: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사도(*, 아포스톨로스) - 이는 '내가 보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냄을 받은 자', '사신'(messenger, 요 13:16), '선교사들'(missonaries), '대리자들'(representatives), '전권대사(ambassador, 엡 6:20)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문에는 특별하고도 협의적(狹義的)인 의미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된 특사, 또는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 확장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할 예수의 증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사도직'의 조건에 대해서는 행 1:21, 22에 규정하고 있는데 (1)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 승천시까지 예수와 동행한 자(행 1:21), (2)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자(행 1:22; 막 3:14), (3) 예수의 부활을 목격, 증언할 자(행 1:22) 등이다 <막 3:13-19, '사도직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사도'라는 용어는 예수 부활 이후에 좀더 광의적(廣義的) 의미로 사용되어 단지 12제자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수많은 전도자들(고전 9:1-5; 15:7; 갈 1:17), 바울과 바나바(행 14:4, 14; 갈 1:1),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실루아노(살전 1:1, 6), 예수의 형제들(갈 1:19)등에게도 지칭되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대로 좁은 뜻으로서의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는 훗날 주님을 배반함으로써 여기서 탈락되며 그 자리는 맛디아로 대신 채워진다(행 1:26). 그리고 바울은 물론 넓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의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고전 15:8-10)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좁은 의미의 사도로 이해할 수 있다(롬 1:;1; 갈 1:1). 한편 본절 이하에 제시된 12제자의 이름들에 대한 각 복음서간의 비교 도표에 대해서는 본절의 강해를 참조하라.

⭕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먼저 히브리어로 '듣다'는 뜻인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의 단축형 명칭으로서(창 29:33) 베드로(*)의 본명이다. 이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는 요나의 아들들이자 어부 출신들로서(4:18-20) 갈릴리 벳새다의 토박이였다(요 1:44). 또한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것 같다(요 1:35-42). 한편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아람어로 '게바'(Cephas)라는 새이름을 지어주셨는데(16:18; 요 1:42; 갈 1:18),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된다(요 1:44). 향후(向後) '베드로'라는 이름은 사도로서의 공적 지위를 암시하는 이름으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가 제자 명단에서 늘 첫째를 차지한 것은 (1) 다른 제자들에 우선한 그의 신앙 고백(16:16), (2) 예수의 예언적 인준, (3)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교회 창설의 주역(행 2:14), (4) 이방인에 대한 최초 선교자(행 10장) 등의 이유로 인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와 사명의 대표성이나 우선성을 말한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지위의 선천적 탁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여하튼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중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게 된다(행 2:15 ff; 고전 15:5). 그러나 이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베드로의 수장적(首長的) 권위나 법왕권을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갈 2:11; 벧전 5:1). 실로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던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신실한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한편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장)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바벧론까지 선교 활동을 하다가 말년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어달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 안드레(*) - 이름의 뜻이 '용감한 자', '남자' 등인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요 어부 출신으로서 성경에는 그렇게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막 13:3; 요 1:35-44; 6:8; 12:22). 특히 그의 활동중 두드러진 것은 그가 베드로를 예수께 인도했다는 사실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A.D. 70년경 파트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 야고보, 요한(*) - '발꿈치를 잡다'(창 25:26),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다'가 각각의 이름의 뜻이다. 이들은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 각별히 인정받던 3대 제자에 속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에서 요한 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로 순교함으로써(행 12:2,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당함) 그의 형제 요한 만큼의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출신이자 세베대의 아들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삯꾼을 둘만큼 부자였으며(막 1:20), 그 아내는 예수의 사역을 보조해 주기도 했다(27:55, 56; 눅 8:3). 그런제 12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예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 또한 그의 가족이 대제사장 집안과 어떤 연계가 있었던 것은(요 18:15, 16) 아마도 세베대의 집안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이어받은 듯한데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은(막 3:17; 9:38-41; 눅 9:54-56) 그 별명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불같은 기질(氣質)을 반영해 준다. 여하튼 요한은 베드로와 각별한 우애를 다진 가운데 초대 교회의 한 모퉁이 돌로서의 사역을 감당했으며(눅 22:8; 요 18:15; 20:2-8; 행 3:1-4; 8:14; 갈 2:9),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에베소에 정착하여 선교, 교육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한편 그는 A.D. 95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때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 넬바 황제때 에베소에 돌아와 지속적인 복음 사역을 감당하다가 트라얀 황제 때에 영면(永眠)함으로써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여 폴리캅(Polycarp), 파피아스(Papias), 익나티우스(Ignatius)등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등 초대 교회의 인재 양성에 남다른 공헌을 했다고 한다.

성 경: [마10: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빌립(*, 필리포스) - 순수한 헬라명으로 그 뜻은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를 따랐으며(요 6:5-7; 12:21, 22; 14:8-14) 베드로와 같은 고향인 벱새다 출신이다(요 1:44). 그는 주로 헬라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요 12:20-22)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헬라의 언어와 문화에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12제자 명단 중 제 2그룹의 첫번째에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두드러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A.D. 2세기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빌립이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서 사역하다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바돌로매(*) - 히브리 이름으로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나다나엘'과 동일시 되고 있다(Carr, Ewald, Meyer). (1) 나다나엘은 12제자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요 1:43-51; 21:2). (2)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데려왔다(요 1:43-46). (3)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빌립과 바돌로매가 항상 연결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증거가 확실한 것이 아닐지라도 만일 바돌로매가 곧 나다나엘이라 한다면 그는 적어도 가나 출신이며(요 21:2), 예수께 칭찬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요 1:47). 한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애굽, 인도, 알마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 도마(*) - 도마는 '디두모'(Didymus, 요 11:16; 21:2)라고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서 '쌍동이'(Twins)를 의미한다. 실로 그는 회의론적 신앙인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의심이 많았지만, 그와 더불어 용기있고(요 11:16), 바른 신앙 고백자로도(요 20:28) 널리 알려졌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인도와 파르티아에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성 도마 교회'가 인도에 현존) 그곳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 세리 마태(*, 말다이오스 호 텔로네스) - 그의 본명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과 9:9 주석을 참조하라.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야코보스 호 알파이우) -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어지는 자로서(막 15:4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된다. 한편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에 대해 학자들간에는 '몸이 왜소한 야고보', '동생 야고보'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희박하다. 그러나 그가 만일 27:56; 막 16:1; 눅 24:10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때 다른 여인들과 그곳에 가까이 가 슬퍼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요 19:25에 언급된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보고, 그가 곧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친족이라 보기도 한다(Eusebius).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명확히 확증지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 다대오(*, 닫다이오스) - 베자 사본에 따르면 '다대오'란 이름대신 '여자의 마음'이란 뜻인 '렙바이오스'(*)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대표적인 사본들(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Western)에는 본문과 같이 '다대오'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본서와 마가의 명단에 언급된 '다대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과 비교했을 때 그곳에 나온 '야고보의 형제(아들) 유다' (*, 유다스 야코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형제(아들)'라는 말이 없어 설왕 설래하고 있다. 그런데 유다서의 저자가 자신이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유 1:1), 만약 유다서 저자인 유다가 사도인 '야고보의 유다'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곧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된다. 반면에 혹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예수의 이복 형제이며 동시에 예수의 이복 형제인 야고보의 친 형제라면 '야고보의 유다'는 곧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된다. 한편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the beloved)를 의미하는 어근(語根)으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다대오는 '사랑스런 자 유다' 즉 '유다 다대오'로 불리어졌을 것이며, 결국 이 명칭은 '가룟이 아닌 유다'(요 14:22)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대기를 기술한 외경 '다대오전'에는 그가 시리아, 알마니아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성 경: [마10: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12사도의 명단]

⭕ 가나안인 시몬(*, 시몬 호 카나나이오스) - '가나안인'은 아람어로서 헬라식 표기로는 '젤로테스'(*)인데, 이 둘은 모두 '열심가, 열심당원'이라는 의미이다(눅 6:15; 행 1:13). 이로 보건대 그는 제자로 부름받기 전 유대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정치 단체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이 확실하다. 한편 셀롯당은 가다라 출신 유다가 A.D. 6년 구레뇨 총독의 국세 조사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한 과격한 집단으로서, 예루살렘 패망의 불씨를 당긴 유대 전쟁(Jewish War)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그 활동이 대단치는 않았던 것 같다.

⭕ 가룟 유다(*,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 - 이 가룟 유다의 아비는 '가룟 시몬'(Simon Iscariot)이다(요 6:71; 13:26). 한편 '가룟'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소개되고 있다. (1) '케리옷 출신 사람'(man of Kerioth)이라고 보고, 남쪽 유다의 한 지역인 가룟이라는 동네에서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2) 가룟은 열심당원들의 운동(movement)과 유사한 운동을 의미하는데 사용된 라틴어인 '시카리우스'(sicarius)의 음역이라는 설명이 있다. (3) 가룟은 '여리고의 사람'(man of Jericho)을 뜻한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헬라어와 와전(訛傳)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4) 가룟은 '거짓'(falsehood). '배신'(betrayal)을 뜻하는 아람어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C.C. Torrey). (5) '가룟 유다'는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염색공 유다'(Judas of the dyer)라는 견해가 있다(A. Ehrman), (6) 다섯번째 견해를 약간 수정하여 '머리가 빨간 유다'(Judas the redhead)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Albright). 이중 두번째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나 첫번째와 여섯번째 견해도 주의를 귀기울일만하다. 여하튼 이 유다는 12제자 중 회계를 맡고 있었으나 지나친 물욕(物慾)으로 인해 정직하지 못하였고(요 12:6; 13:29), 그 결과 그는 스승인 예수를 완악한 대제사장들의 손에 넘겨 주는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성 경: [마10: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이방인의 길로도 - 이는 문자적으로 '이방인의 길을 통해서 떠나지 말라'이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향해서 가지 말라'(Do not go in the direction of the Gentiles)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 같은 금지 명령은 어떤 민족적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영원적 엄명으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한시적(限時的)명령으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복음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임받은 바 있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파 되어야 했으며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훗날 예수께서 전세계에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맡기실 것이다(28:19; 행 1:8).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도 구원 역사의 순차성(順次性)을 역설한바 있다(롬 1:16; 2:9, 10). 실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온 인류에게 전파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과 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창 12:3; 사 49:6; 행 3:25).

⭕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 사마리아는 가나안 정복 당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할되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솔로몬 통치 이후 여로보암 때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 패망할 때까지(왕하 17:1-6, B.C. 722)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다. 그런데 정복자 살만에셀은 피지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북이스라엘인을 포로로 끌고 가는 한편으로, 이민족(異民族)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켜 나머지 북이스라엘인과 통혼하게 함으로써 민족을 혼혈화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사마리아는 혈통과 문화와 종교에서까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히브리 공동체에 끼이지 못하였으며, 포로기 이후 산발랏과 므낫세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건축하였다(느 13:28). 이 성전은 B.C. 109년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아 모세 오경을 근간으로 독특한 종교생활을 영위해 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합 족속이라고 경멸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직통거리인 이 지역을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왕래하곤 하였다.

성 경: [마10: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 이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Stendahl). 구약적 배경에서(레 50:6; 겔 34장)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Hill). 예수는 이들 유대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다가 생명과 진리가 결여된 딴 길로 가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였다(9:36). 그런데 이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또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역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 2:9)라는 선교 원칙을 준수하였다.

성 경: [마10: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가면서 전파하여 - 이는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행하고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만나게 되므로 그 순간마다 그들에게 예수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선언해야 한다. 한편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쏘' (*)는 공적 차원에서 '널리 전하다', '선포하다'는 뜻으로서 마치 전쟁의 발발을 알리는 포고문(布告文)같이 긴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 케뤼그마)은 곧 주의 나라의 기습적인 도래였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이 선언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이기도 하며(3:2), 또한 예수께서 친히 전파하신 말씀이기도 하다(4:17). 실로 유대인들은 바로 이 천국의 제 1차적 상속자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도래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천국이 지체하지 않고 구현될것이기 때문에 이 천국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들의 상속권은 이방 세계로 넘겨질 것이다(Quesnel).

성 경: [마10: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병든 자를 고치며...귀신을 쫓아내되 - 이는 천국 도래를 실증적으로 확인시키는 네가지 이적으로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능력에 해당한다(1절). 한편 이 네 종류의 이적을 구분하면 (1) 신체적 치유(병든 자), (2) 존재론적 치유(죽은 자), (3) 종교.의식적 치유(문둥병자), (4) 영적.정신적 치유(귀신들린 자)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결국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능(1절)은 결함이 전혀 없는 전인격적이고도 완전한 능력이었다. 한편 '죽은 자를 살리라'는 이 명령은 대부분의 주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레기우스 사본 같은 2류 사본에는 1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누락시키고 있다. 여하튼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 이전에 죽은자를 살린 일이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라는 권능의 명령을 예수 부활 이후에 전개될 제자들의 사명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행 9:36-41).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이 말의 원뜻은 '선물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한 원칙이다. 사실 복음 사역자들이 받은 복음과 권능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하는 것으로 최상의 만족을 삼아야 했다. 사실 사역자는 재산을 모으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복음을 전파해서는 안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에게 봉사하고서 그 대가를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사역자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10절)은 마땅하지만 본문의 이 말씀은 거저 받은 복음의 권능을 사리 사욕(私利私慾)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며 오직 은혜로 받은 것을 은혜로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 경: [마10: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전대에 - 이는 돈을 넣어 품속이나 허리춤에 넣고 다니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이 전대는 의복의 일부로서 귀중한 것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든 일종의 지갑과 같은 것이다.

⭕ 금, 은, 동 - 로마나 헬라의 화폐는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화폐 가치가 적은 헤롯의 화폐는 동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본문의 이 말들은 모두 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 가지지 말고 -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전도 파송을 앞둔 주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수적이고도 한시적인 선교 방법이었다(눅 22:35, 3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복음 사역자는 돈을 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돈을 탐하여 마음에 두게 되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며 따라서 악으로 빠져들 수 있기 때문에(딤전 6:10) 복음 사역자는 이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당연히 그 보냄받는 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부족함없이 주시리라는 것 또한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 명령은 물질적 욕구의 절제를 명한 것인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이고도 풍성한 후원을 약속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성 경: [마10:1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주머니 - 이것은 음식이나 식량을 가지고 다닐 때 쓰이는 것으로서 가죽이나 결이 거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제자들은 여행하는 도중에 식량 공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이런 주머니는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 두 벌 옷 -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갈아 입을 옷이 하나 더 필요하다. 더욱이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판 팔레스틴을 순회 전도해야 하는 제자들이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경우에 입고 있는 옷 외의 다른 한 벌의 옷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주의 뜨거운 사랑의 후원을 받을 제자들에게 있어 '여분의 옷'은 분명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5:40).

⭕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 당시 맨발로 다니는 것은 유대 전통에 이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발 착용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명령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부분을 '지팡이 외에는...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막 6:8, 9)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마치 서로 모순(矛盾)되어 보이는 것 같으나, 마가는 여행을 위해 제자들이 이미 여행할 차비를 마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저 먹을 것 받는 것 - 이 어구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제자들의 생필품들을 공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피전도자는 받은바 영적 은혜의 감사 표시로 전도자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A.D. 100-120년 경에 기록된 '12사도훈'(Didache)에는 '여러분에게 온 주의 사도는 주님처럼 환영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도가 3일을 머물고자 한다면 그는 거짓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나고자 할 때 여러분은 그가 다음 거처에 이를 때까지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돈을 요구하게 되면 그 자신이 스스로 거짓 사도임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녕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이 결코 사역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없으며 두벌 옷이나 전대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자들이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일꾼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열매를 허락하신다(고전 9:14; 갈 6:6; 딤전 5:17, 18). 그러므로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선한 일꾼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일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Clement of Rome).

성 경: [마10:1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성이나 촌에 - 여기서 먼저 '성'(*, 포리스)이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를 의미하고, 이에 비해 '촌'(*, 코메)은 자연 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을 뜻한다. 이는 예수 제자들의 선교 대상지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기독교가 처음 시작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방랑자들처럼 떠돌아 다니며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 합당한 자 - 이는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Homer A. Kent, Jr.)로서 복음 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있으며 복음을 받아들일 만한 순결한 영혼을 갖춘 자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윤리적으로도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자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자들은 자기가 머문 그곳을 기점으로 그 온 동네를 복음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경건하며 건강한 생활을 하는 자들의 집에 머물러야 했던 것 같다.

⭕ 떠나기까지...머물라 - 누가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눅 10:7)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는 것은 한 집으로 만족하지 않는 듯이 보이며 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게으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어 결국에는 복음사역의 가치를 떨어뜨려 복음 전파에 막중한 지장을 초래(招來)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0:1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평안하기를 빌라(*, 아스파사스데 아우텐) - 직역하면 단순히 '인사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은 '샬롬' (*), 곧 '평화'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자들의 첫마디 인사가 '평화'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이 '샬롬'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의 인사말은 주로 '카이레인'(*, 기쁨, 은혜)이었다. 바울 서신서에는 이 양자를 모두 합한 인사, 즉 은혜와 평강을 동시에 묻는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롬 1:7; 고전 1:3). 여하튼 주께서 이처럼 들어가는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경의를 표하고 또 그들을 정중하게 대하라는 명령이었던 것 같다. 복음 전파자라고 해서 사회 일상의 통념을 무시하고 무례한 행위를 할 권한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일반 사회인들보다 더욱 예절과 상식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0:1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그 집이 - 이는 가정이나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12절의 집과 같은 대상이다. 따라서 이 집은 복음 전도자가 머물러 유하기에 적절한 가정을 뜻하며 이 집의 가장(家長)은 구원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된 자이어야 한다.

⭕ 합당하면 - 이는 그 집이 복음 전파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 거기 임할 것이요 - 제자들은 평안의 인사나 기도 또는 가르침 등을 통해 그 집에 행복과 번영 그리고 화평이 임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복음의 축복이 그들에게 부여되기를 기원(prayer)하였다. 그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순종할 때면 제자들이 한 평화의 기도는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건(關鍵)인 것이다.

⭕ 합당치 아니하면 - 이 말은 제자들이 머물러 유할 집이 복음을 기꺼워하지 않거나 또는 제자들이나 복음에 대해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 다윗은 원수들이 병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한 바 있는데 이때 그의 기도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자기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노래하였다(시 35:13). 제자들이 만나는 이에게 평안을 빌고 복음을 전할 때 만약 그들이 그 평안과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그 평안과 복음을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이 복을 빈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빈 평안과 축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누구에게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족장 시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이미 말하여진 선한 축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체로 존재하여 결코 사장(死藏)될수 없고 그 성취의 순간까지 지속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믿어져왔다(창 27:33 ff; 사 45:23; 55:11). 따라서 누구든 타인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데 주저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실로 타인의 평안을 원하지 않는 자는 주(主)의 제자되기에 적합치 않은 자이다.

성 경: [마10:1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영접도...아니하거든 - 예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축복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것이다. 진정 제자들은 예수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물 한모금 주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를 떠나보내게 하는 것이며, 그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25:40).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입술과 인격을 통해 복 주기 원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복의 근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통로로 복을 받을 수가 있겠는가?

⭕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 이는 상대와의 관계 단절과 의식적 정결례를 상징하는 행위이다(느 5:13; 행 18:6).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문물(文物) 뿐만 아니라 먼지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방인 지역에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그들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의식적 청결을 유지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를 영접치 않고 또 복음을 듣지도 않는 자들을 향한 이 먼지 떠는 행위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의 복음과 무관한 자들로서 이교(異敎)적이고, 심히 부패해 있으며, 끝내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1:9; 눅 17:29; 벧후 2:6). 비시디아 안디옥을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바로 이같은 상징적 행위를 한 적이 있다(행 13:51).

성 경: [마10:1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사도들의 전도 방법]

⭕ 내가 진실로 - 예수께서는 이런 형식으로 당신의 교훈의 각 마디를 종결 지으시며, 또한 주의를 환기시키셨다(23, 42절).

⭕ 심판 날에 - 여기서 심판 날은 복음과 그 사역자들을 배척한 자들이 맞을 멸망의 순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

⭕ 소돔과 고모라 땅이 -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독한 범죄로 인해 아브라함 당시 여호와가 보내신 불과 유황에 의해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며(창 19장), 그 이후부터 모든 부패와 최후 심판의 대명사가 되었다(신 29:23; 사 1:9; 3:9; 렘 50:40; 유 1:7).

⭕ 견디기 쉬우리라 - 앞에 언급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배척함과 동시에 그들의 사역을 방해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보다는 약한, 단지 예시적(豫示的) 기능을 할 뿐이다. 복음 사역자들을 맞이하지 아니한 죄가 이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복음 그 자체를 배척한 자들의 심판(11:20; 눅 12:47) 또 얼마나 무서운것이 되겠는가? 이처럼 복음은 결과론적인 이중성을 띠고 있다. 즉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영생과 축복, 아니면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뒤따른다.

성 경: [마10:1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보라(*,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 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성 경: [마10:1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사람들을 삼가라 - 먼저 '삼가라'(*, 프로세케테)란 말은 '...로부터 떨어져 마음을 지키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이리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불필요하게 위험 속으로 달려들어 가지 말고 분별력과 지혜를 적절히 활용하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사람들'이란 불신자(Calvin, Weiss) 또는 적극적인 박해자(Bruce)를 가리킨다(33절).

⭕ 저희가...공회에 - '공회'를 뜻하는 원어 '쉬네드리아'(*)는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인 '쉬네드리온' (*)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본문의 '공회'는 지방의회들(local councils)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당시 이 지방 의회들은 공공 질서와 치안(治安) 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신 16:18). 따라서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 지방 의회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본문의 '저희'란 말은 '공회'란 말과 연결된 것으로 보아 동족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 저희 회당에서 - 어떤 이들은 '저희 회당'이란 말 속에는 교회와 회당의 개념이 구분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예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훗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가 시작된 뒤 마태에 의해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저희'란 말은 비난의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것인 까닭에 이것 역시 이 구절이 훗날 삽입된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참 신앙을 버린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해서 비난의 어감이 담긴 '저희'란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특히 마태는 구약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적어도 예수 또는 본서 기자인 마태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역과 진리 거부를 일삼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용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채찍질 하리라 - 채찍질이란 것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체형(體刑)의 일부로서 모세의 율법에는 채찍질의 수가 40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5:1-3). 이 같은 체형을 선고 받은 죄수는 재판관이 보는 앞에서 땅 바닥에 엎드려 누워야 했고 그런 다음 그의 등에 채찍질이 가하여졌다. 채찍질을 가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매는 회초리와 같은 막대기였는데 그후에는 막대기에 가죽끈이 부착된 도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채찍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 가죽끈에다 쇠조각 같은 것을 박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막대기에 가죽끈을 세줄로 달아 놓고 한 번에 세 대의 채찍질로 계산하여, 13번 때려 도합 39번의 채찍질로서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고후 11:24). 한편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처벌이 넓은 의미의 구타(beating)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채찍질(flogging)인 것을 볼 때,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위협적 핍박은 동족의 비난이나 폭력보다 사법적 절차에 이해 내려지는 형벌이 더욱 컸던 것 같다(Hare). 여하튼 회당에서 회당 회원들이 채찍질하는 것이 빈번했음을 잘 알고 계셨던(23:34; 행 22:19; 고후 11:24, 25) 예수는 교회가 조성(助成)되어 회당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의 제자들이 채찍질당할 것을 예견하셨다.

성 경: [마10:1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총독들과 임금들 - 여기서 총독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등급에 위치한 통치자들이나 지방 행정 장관을 가리킨 표현으로서 갈리오(Gallio), 베스도(Festus), 가리사랴의 벧릭스(행 23:26)나 데살로니가의 읍장(행 17:6)등과 같은 이들을 생각할 수 있고, 왕들이란 팔레스틴의 통치자들인 분봉왕(행 12;1)이나 로마제국의 비호(庇護) 아래 있는 지방 토호(yeoman) 세력들 및 로마 황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17절의 종교지도자들과 비교되는 세속의 통치자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표현들을 통해서 제자들이 세상 법정에도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복음이 갈릴리 지역과 유대 민족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파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이와 비례해서 이들에 대한 반대 세력들 역시 그만큼 증가할 것이란 점도 예상할 수 있다.

⭕ 끌려가리니 - 예수께서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알고 계셨다. 그의 예언에 따라 베드로는 네로 황제 앞에 끌려갔던 것으로 보이며 사도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 앞에,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여러 다른 임금들 앞에 끌려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 여기서 '저희'라고 하는것은 유대인을 지칭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 사역자들을 끌고 간 총독과 임금들로 보아야겠다. 여기서도 다시 암시되어 있다시피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리란 것이 명확하게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 증거가 되게 - 제자들은 동족들의 교권주의적, 문화적 핍박과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통해 복음, 즉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와 구세주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폭발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증거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순교는 곧 복음의 위대성과 진리의 무한한 생명력을 확증해 주는 최고, 최선의 증표(證票)가 될 것이다.

성 경: [마10:1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넘겨 줄 때에 - 넘겨 주는 주체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훗날에 가서 주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곳곳에 전파했을 때 이 복음을 가장 방해한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의해 제자들은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 어떻게...말할까 염려치 말라 -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염려와 불안 등은 모두 하나님을 신뢰치 않고 자신의 힘으로 당면한 위기를 처리하고자 할 때 나오는 것이다. 즉 미리 앞서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근심어린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에 위선과 허위의 탈을 덧씌우는 위험성을 낳게 한다. 따라서 답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제공해 드리는 것인 동시에 본인으로서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일이된다.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처럼 그 염려의 원인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6:25).

⭕ 그 때에 -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in that same, KJV)이다. 이는 결국 인간편에서 준비하기 전에 이미 그 인간의 대변자되신 성령께서 모든 답변 준비를 완벽히 해두고 계셨음을 암시해 준다.

⭕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 이는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가장 시기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나 서민 출신으로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고 또 위풍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위층의 세련된 관리나 총독 또는 임금 앞에 섰을 경우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대단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마10:2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너희가 아니라 - 이 말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이나 이성적 판단 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말은 복음의 변증(辨證)과 신앙의 순수를 보존하는 일이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고별 강화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 사역을 진척시켜 나가게 되리라고 에언하셨던 바가 있다. 그러나 고별 강화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본문은 주의 제자 당대에만 적용되는 성령의 특별 사역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사역은 고별 강화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현저하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오순절 이후에 행해질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오순절 이전 주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행하심으로써 예수를 증거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그들의 처지를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로 복음 사역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 이는 성령의 인격성과 사도적 기록의 영감성을 대변해 주는 구절이다. 실로 성령께서는 구술(口述)과 기술(記述)을 통해 복음 증거자들의 내면에 인격적으로 임재하셔서 충만한 영감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요 15:26, 27).

⭕ 너희 아버지의 성령 - 예수께서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 지칭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녀로서의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로서의 보호로 인해 그를 더욱 신뢰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혈연 관게에 있고, 나를 조성(造成)하신 '나의 아버지', 나의 고통과 죄악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나의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하는 이는 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행 4:8; 13:9; 고후 13:3).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인격들 속에 영원히 안주(安住)하시며(요 14:16, 17), 또한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혜와 선한 변증을 허락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삼위 하나님의 유기적 역사를 통해 보호하시는 은혜이다. 즉 성부 하나님의 부권적 보호의 약속과 성자 하나님의 그 약속에의 보증 및 성령의 실제적 보호와 후원이 그것이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아버지의 성령을 단순히 '성령'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 말이며, 성령의 호칭에는 이 외에 그리스도의 영(롬 8:9), 주의 영, 하나님의 신(사 11:2) 등이 있다.

성 경: [마10:2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 제자들에게 미칠 박해의 양상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뼈아픈 지경, 곧 혈연관계에서 조차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실로 종교와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가장 원초적 생활 공동체인 가족 상호간에 반목(反目)과 적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체험해온 바이다. 실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란 참 종교를 대적할 때는 모든 인륜의 사슬을 끊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악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의 갈등 상황은 혈육으로 치장된 피비린내 나는 영적인 싸움으로서 결단코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원인은 바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죽게 하리라 - 유대 묵시 문학에는(4 Ezra5:9; Jub23:19, 2 Baruch 70:3) 말세에 가족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란 사실을 예언하고 있는 부분들이 흔히 발견된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아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5, 6)고 예언하였다. 한편 미가의 예언과 맥을 같이하는 예수의 이 예언은 실제로 네로와 같은 로마의 폭군하에서 복음을 믿는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제자들과 신자들은 화형(火刑)을 당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육체적 혈연보다는 영적으로 결합된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혈연이 절대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악의에 차서 복음을 핍박하는 가족들의 만류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과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켰던 것이다.

성 경: [마10:2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내 이름을 인하여(*, 디아 토 오노마 무) -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벧전 4:14), 또는 '그리스도로 인해'(5:10-12)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 제자들이 세상 관원(官員)과 자기 가족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분의 삶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배척받은 데 그 근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이 같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 개인의 실수로 인한 고난과는 구별된다.

⭕ 모든 사람에게 - 여기의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all men without distinction), 곧 인종, 피부색,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는 좀더 축소된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이란 박해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을 가리키며 제자들을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로 인간의 마음이란것은 본질상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부패된 것으로서 이 때문에 인간은 어느 위치,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모두다 멸망치 않을 수없는 것이며(롬 3:10) 또 그렇기 때문에 의(justice)를 향하여서는 부패한 본성에 따라 분노와 적의를 품는 것이다.

⭕ 나중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 '나중'이란 말은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즉 길든 짧든 간에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필요치 않게 될 때까지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나중'이란 말은 다른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칼빈(Calvin)은 이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지배하는 때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을(Clarke),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세상 끝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Beza, Weiss)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전체 문맥상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를 생명이 끝날 때까지, 또는 인내가 더이상 요구될 필요가 없는 때까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께 충성하려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배교(背敎)하지 않고 끝끝내 예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의심없이 믿는 행위이다(갈 6:9).

⭕ 구원을 얻으리라 -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획득이 약속되었다(눅 21:19). 즉 예수께서는 육체적 생명의 잠정적 손실에 대한 전인격적 생명의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신 것이다. 정녕 신앙인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상실케 되는 것이 사실이나 그와 더불어 완전한 회복과 보존을 받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성 경: [마10:2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핍박에 대한 인내]

⭕ 핍박하거든...피하라 - 이 말은 이기적인 자기 보존을 장려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목적으로 합리적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말은 비굴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권고이지만 이는 오히려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또 사려깊도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미련한 아집과 우직한 자아(自我)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끝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 주를 부인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곳으로 피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주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목숨을 잃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 소유된 자의 올바른 생사관(生死觀)이다(롬 14:7, 8).

⭕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 이는 예수께서 선언하신 바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방문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때부터 단지 40년후에 발생하기 때문에 다음 어구에 언급되는 인자의 오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석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것을 지리적 측면에서라기 보다 복음 선교의 충만성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전해져서 그들이 개종하게 되는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 인자가 오리라 - 이 어구는 대단히 난해한 어구 중의 하나로서 이에 대한 몇가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자의 오심은 12제자들을 파송한 후 주께서 그들을 뒤따라가서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다(J. Dupont). (2) 이는 예수의 부활이나 또는 예수가 메시야로 널리 인정될 때를 가리킨다(Sabourin). (3) 인자의 오심은 곧 성령의 오심을 말한다(Chrysostom, Calvin). (4)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Agathangelus). (5) 예수 당신이 지상에 있을 때 종말이 임한다고 착각하여 잘못 내뱉은 말이다(Schweitzer). (6) 이는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일을 말한다(Walvoord). (7) 인자의 오심은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France). 이상과 같은 여러 학설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다들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보여지나 본문의 문맥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자의 오심'을 '천국의 도래(到來)'와 연결시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즉 인자의 임하심은, 곧 천국의 임재를 뜻하며 이 천국은 현재 이미 임해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종말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를 메시야로 깨닫고 영접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에게 그 실패로 인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거듭 말했던 예수의 경고는 바로 이 '인자의 오심'과 관계가 있다(Feuilet). 이런 견지에서 예수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으나 그분의 경고는 그 선지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심판자이며, 메시야의 통치는 이제 축복과 진노 속에서 모두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8:11, 12; 21:31, 32). 결론적으로 본절의 '인자의 오심'은 거듭 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천국이 임함으로써 유대인에게 떨어지고야마는 종말론적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전에서의 구약적 예배와 혈통적 선민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 포도주는 필연적으로 새 부대에 담겨져야 했다(9:16, 17). 이로써 천국은 이제 그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5:17-48).

성 경: [마10:2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제자가 그 선생보다 - 이 어구는 그당시 유행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분명하다. 사실 제자가 선생 이상의 지식을 얻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제자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도리는 불변하며 제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선생인 자신이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는다면 적어도 너희는 더 큰 핍박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냐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본문의 이 격언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자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종이 그 상전보다 - 이 말은 앞의 문구와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격언의 말씀을 통해서 윗사람이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 아랫 사람은 두말할나위 없다는 점을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제자들도 똑같이 당했으면 당했지 결코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마10:2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고난이라는 차원에서 당신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음을 역설하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이 받는 박해와 고난 보다는 제자나 종이 받는 고통이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을 것이므로, 따라서 선생의 고통만큼만 되어도 만족할 것이었다.

⭕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의에 찬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12:24). 예수는 이들의 빈정거리는 어투을 역이용(逆利用)하셔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또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그들이 제자들은 더욱 더럽고 악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 사단에 해당되는 명칭인데(12:24-27; 막 3:22-26; 눅 11:18, 19) 다른 곳에는 바알세붑(왕하 1:2, 3, 6)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방 에그론의 신인(왕하 1:16) '파리대왕'이란 뜻을 가진 구약의 '바알세붑'(*)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똥의 왕' 또는 '교만의 왕'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혹자는(E.C.B. McLaurin) 이말이 '집의 왕'(head of the house)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데스포테스'(*)를 직역한 것으로도 본다. 여하튼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관하는 집 주인을 고의적으로 마귀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fall)시킨 것으로서 이는 참으로 괘씸한 신성 모독의 범죄였던 것이다. 선생이 이 정도의 모욕을 받았다면 하물며 그 제자는 과연 어떤 욕을 당하게 될 것인가?

성 경: [마10:2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그런즉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에 대한 결과절을 유도(guiding out)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승이 핍박받는다면 제자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므로 두려워 말라는 뜻으로 다음의 어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속사는 앞 어구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문장을 도입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다음 어구의 이유,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숨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저희를 - 이것은 접속사 '그런즉'이란 말의 의미와 관계없이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말씀으로서 세번씩이나(26, 28, 31절) 강조되어 있다. 이는 완전한 보호와 위로에의 약속인 동시에 제자들의 험난한 핍박이 필연(必然)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이러한 분부를 하신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즉 박해자들이 설령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 하여도 그들은 결코 제자들의 영혼까지는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불신의 세계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가서 그들을 정복해야 한다. 한편 두려움이란 것은 사단이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준비해 둔 무기들 중의 하나로서 사단은 언제나 신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한다.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 먼저 '드러나다'란 뜻의 헬라어 '아포칼류토'(*)는 원래 '벌거 벗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깊이 숨겨둔 인간의 가장 수치스런 죄악까지도 낱낱이 파헤치실 것을 암시한다. 한편 본문의 이 어구는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흔히 통용되던 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막 4:22; 눅 8:17; 12:2). 즉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격언을 통해서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설령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무죄함을 입증시켜주실 것이고 또 진실을 밝혀주실 것임을 설명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전 12:14; 롬 2:6; 골 3:3, 4; 계 20:12, 13).

⭕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이 말 역시 앞 어구와 대구를 이루는 동일한 표현이다. 주님의 이 격언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언제인가는 이해될 것이고 또 그들이 당한 고난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확신하에서 기꺼이 멸시 천대를 받았고 또 핍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마10:2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 - 이는 상징적 표현으로서 주의 계시(revelation)의 발전 과정 중 그 시초에 해당하는 묘사이다. 한편 이것은 신비스러운 이상한 밀의(密意) 교리로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진리, 즉 주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 우선하여 제자들에게만 비유와 같은 숨겨진 말로 가르치신 비밀스러운 교훈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은 제자들이 이를 전파하기까지는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 광명한 데서 말하며 - 예수로부터 사적인 교육이나 은거(隱居)된 언어로 전해받은 것을 아무런 두려움없이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게 선포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 귓속으로 듣는 것을 - 유대 율법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율법을 설명할 때 가운데 통역자를 두어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통역자의 귀에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속삭이듯이 전달했으며, 이 통역자는 히브리어로 율법에 대해 들은 설명을 대중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꾸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우리 주 예수께서도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이러한 방법을 따라 은밀한 방법으로 전달된 진리를 제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하다(Lightfoot, 'Hor. Hebr.' 4:23; Talmud. Bab., 'Berach'., 22a).

⭕ 집 위에서 전파하라 - 유대의 집 지붕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평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바람을 쏘이거나 기도 또는 묵상 등을 하는데 이용했다(행 10:9). 이사야는 모압에 대한 심판의 에언을 하면서 모압 사람들이 지붕위에서 통곡하리라고 하였으며(사 15:3), 예레미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손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였음을 지적하였다(렘 32:29). 그리고 회당의 관리는 안식일 전날 밤에는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신호로서 대단히 높은 집의 지붕 위에서 나팔을 여섯번 불었는데,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 같은 안식일 준비 나팔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셨던 것같다(Lightfoot). 여기서 잠시, 안식일 준비를 알리는 6번의 나팔 중에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나팔은 밭일을 중단하라는 신호이며, 두번째 나팔은 성(城) 중에서의 작업을 멈추라는 것이고, 그리고 세번째 나팔은 안식일 촛불을 켜라는 신호였다. 여하튼 본문을 살필 때 제자들은 예수보다 더 광범위한 공중(公衆) 전도의 책임을 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먼저 은밀히 개인적으로 가르쳐야만 했는데,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전까지만해도 그 가르침의 대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요 16:12-15). 그러나 예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저수지처럼 강력한 음성과 몸짓으로 공개적인 선포 사역에 주력하게 되었다.

성 경: [마10:2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 이는 유한한 능력, 그것도 현세에서만 발휘할 수 있는 인간들을 가리킨다. 한편 예수께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로 육(肉)과 영혼(靈魂)을 제시하셨는데(전 12:7; 롬 8:10; 고전 5:5; 히 12:9) 그중 영혼은 비물질적인 것이요 불멸의 것이므로 영혼을 해(害)할 권세를 가진 자는 하나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셨다. 이에 비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몸이란 영혼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시적인 육의 죽음은 영원한 영혼의 멸망과 비교했을 때 역시 그 가치가 극히 약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 두려워하지 말고(*, 메 포베데테 아포) - 이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탈피하라'는 뜻으로 단 한 순간의 공포마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미를 품고 있다. 실로 영.육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지니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Bengel). 일찍이 베드로는 의를 위한 고난은 두려워하지 말고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는 두려움을 가질것을 당부한 바가 있다(벧전 3:14, 15). 인간이란 고난이나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예견할 때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하나님 한 분만을 생각하고 그 만을 두려워할 때, 또 영원한 생명과 의를 생각할 때, 이 같은 두려움은 사라지고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 몸이 물질적이요 현재적이라면 영혼은 비물질적이요 영원적이다. 따라서 몸과 영혼의 동시적 멸망은, 곧 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파멸을 뜻하며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동시적 멸절(滅絶)을 암시한다. 실로 하나님은 전우주적이며, 초시간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관할하고 계신다. 인간으로 인한 두려움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능히 극복된다(Cramer). 한편 본문에 언급된 '지옥'(*, 게엔나)이란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의 전인격이 사후(死後)에 거하면서 심판의 고통을 당하는 장소로 이해되고 있다(5:22, 29, 30; 18:9; 23:15; 약 3:6). 이에 대해서는 막 9:43-50 강해 '지옥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멸하시는'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레사이'(*)는 완벽하고도 철저한 멸망을 뜻하기보다 영벌(永罰)의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5:46; 막 9:47, 49; 살후 1:9). 바로 그런 점에서 누가는 '지옥에 던져 넣다 -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맛보게 할 의사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 12:5).

⭕ 두려워하라(*, 포베이스데) - 이는 앞의 '두려움'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항상 두려워하라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하는 자에게 세상은 더 이상의 두려움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정녕 여호와를 두려워(경외)하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예비하는 참지혜가 아니겠는가? (잠 9:10)

성 경: [마10:2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약간의 푼돈에 두 개의 생명이 팔릴만큼 가치가 없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여기서 '앗사리온'이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의 1/16의 가치를 가진 적은 돈이다. 그리고 랍비들의 문헌에도 이 앗사리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이사르), 이때 이 금액의 가치는 네 개의 은(銀) 알맹이에 해당되며, 최저의 금액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Clarke).

⭕ 참새(*, 스트루디아) - 새의 종류를 가리키기보다 일반적으로 매우 작은 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아주 작고 또 매우 흔해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새로, 가난한 유대인들의 식량이 되기도 하였고 또 슬픔과 고독의 상징(symbol)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매매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값싼 것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참새와 같은 몇몇 조류들이 예루살렘과 욥바 등지의 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 너희 아버지께서 - 이는 매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표현이다. 즉 예수는 우주만물(宇宙萬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6:26).

⭕ 허락지 아니하시면(*, 아뉴) - 이는 적극적으로 참새를 죽지 않게 했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참새의 생존과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깊숙히 관여하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참새가 붙잡히고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나님이 지정하는 곳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모든 문제는 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보살핌과 자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서도 창조주로서 그들을 지키시는 것이다.

⭕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이는 사냥군의 화살이나 돌팔매에 의해 땅바닥으로 추락(墜落)하는 돌발적인 죽음을 의미한다(F.R. Fay). 혹자는(Chrysostom, Origen) 이를 사냥군의 올무에 걸리는 상황으로 이해하나 적절한 해석이라 볼 수 없다. 한편 누가는 이 상황을 새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잊어버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하찮은 생명체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하고도 자상한 배려를 더욱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눅 12:6).

성 경: [마10:3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예수께서는 앞의 '참새'와 대조적으로 '너희'를 강조하심으로 그 보살핌의 강도(强度)를 더욱 깊게 하셨다. 한편 '세신 바 되었나니'(*, 에리드 메메나이 에이신)란 분사형태의 완료 수동형을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이미 옛날부터 셈을 하신바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관심의 시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으로 그때부터 우리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머리털은 너무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루 평균 약 50개 정도의 머리카락이 빠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러한 일까지도 세밀히 관찰하시며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들에 피었다 지는 들꽃과 공중에 나는 보잘것없는 새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한 문제와 보이지 않는 일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성 경: [마10:3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두려워하지 말라 - 이 말씀은 이곳에서 세번째 언급되고 있다. 첫번째는 모든 진리가 드러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 두번째는 박해자들이 아무리 성도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그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또 우리의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번째로 언급된 이 말씀은 앞의 두개의 내용보다 더 고무(鼓舞)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긔까지 다 세시고 간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불필요성을 언급하신 것이다.

⭕ 많은 참새보다 - 한 앗사리온에 둘씩 팔리는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감찰하시거늘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시겠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와 생명을 주고 구속하신 한 심령의 가치를 감히 어느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고통이 오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멸망 중에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며 설령 핍박 중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과 의(義)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0:3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 (*,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시인하면'으로 예수와 연합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시인하면'이란 말은 오히려(신앙을) '고백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자신이 예수와 생명적 연합을(갈 2:20) 이룬 존재로서 예수 그분이 바로 자신의(主)이심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는 것이란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시 66:16). 이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시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마음으로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영(靈)을 받고 또 그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생활로 표현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하는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7:21) 사람 앞에서도 그와 같이 고백하는 담대한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 먼저 '하늘에 계시 내아버지'란 성부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와 무궁한 사랑을 암시한 표현인 동시에 성자 예수와의 지극한 친밀감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아버지앞'이란 모든 인간으 종말적 귀결(conclusion)지점, 곧 심판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심판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셨으며(요 5:22), 바울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 하였다(고후 5:10).

⭕ 저를 시인할 것이요 -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是認)하면 주께서는 심판날에 우리를 그와 똑같이 시인해 주실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의 충성을 기쁘게 여기고(25:34-36, 40; 계 2:10), 또한 그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中保)의 간구를 아끼지 않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히 7:25).

성 경: [마10:33]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복음 전파의 담대함]

⭕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 사람앞에서 주를 부인한다는 말씀은, 곧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솔직히 인정치 않고, 그분을 주(主)로 여기지 않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그결과 하나님께 지켜야 할 약속과 의무보다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며 하늘의 신령한 것보다는 지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더 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영교(靈交)를 단절한 채 세속적 인간 관계를 더 좋아하게 된다. 한편 이것은 베드로와 같은 순간적인 부인(否認)이 아니라(26:69-75) 전생애와 전인격을 통해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이러한 차이를 명확히 판가름하실 것이다(Homer A. Kent, Jr.).

⭕ 저를 부인하리라 -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메시야로 인정치 않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날, 심판장이시며 대속자이신 만유의 주로부터 부인당하고 버림받게 된다(7:23; 딤후 2:12). 왜냐하면 예수를 부인하는것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과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들은 자신의 열매(입술과 행위)를 자신이 거둬들여야 하는 것이다. 실로 현세에서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와 운명이 결정된다.

성 경: [마10:34]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내가...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예수당시 많은 사람들은 메사야가 와서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야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는 바로 이 같은 그릇된 기대들을 일거(一擧)에 거부하시면서 당신이 이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피력(披瀝)하셨다.

⭕ 화평이 아니요 - 이 어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순전히 불화(不和)와 반목(反目)을 일으키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평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인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로 번역된다. 유대인들은 영적 문제이든 세속적 문제이든지 간에 온갖 종류의 복을 기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번영이 유대 땅을 중심으로 해서 꽃피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문에서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이를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바로서의 화평, 즉 현상적(정치, 경제 등)이고 외적인 평화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로 예수는 본질적(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요일 4:10)이고 내적인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검을 주러 왔노라 - 이사야는 메시야의 탄생을 '평강의 왕'이라 예언하였으며(사 9:6), 예수 탄생시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그의 탄생을 두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사실 예수는 평화의 실체이자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다(눅 1:79; 요 14:27; 롬 10:15; 골 1:20). 따라서 이곳에서 예수께서 '화평'이 아니라 '검'(sword)을 주러 왔다고 하신 것은 메시야의 임하심으로 야기되는 그 영향력과 결과들 중의 하나가 불의를 정복하고 악을 제거하는 투쟁일 것임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주다'는 뜻의 원어 '바레인'(*)은 '던지다'는 뜻으로 긴박하고도 급작스런 전투적인 상황을 암시하는 문구로서 본문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高潮)시켜준다. 여하튼 검이라고 하는 것은 적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며, 무기로서 검을 준다는 것은 적대감을 유발시켜 투쟁과 분열과 전쟁을 발발케 한다는 것이다. 실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신국(神國)을 건설키 위해 오셨는데(5:9), 이 신국은 곧 땅 위의 죄악된 질서를 척결(剔抉)함으로써 그 위에 세워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상은 메시야와 그의 통치를 완강히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사생 결단의 치열한 혈전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요 14:27; 16:33). 한편 그 전투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성 경: [마10:35]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내가 온 것은 - '내가 왔다'(*, 엘돈)는 표현은 예수의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자의식(自意識)을 반영해 준다.

⭕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 본문은 미 7:6의 인용으로써, 미가는 아하스 왕 시대의 죄악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예수는 복음이 빚어낼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복음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모 자식 간의 가족적 분쟁을 일으키는데 자신이 오신 목적이 있다고 천명(闡明)하셨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는 아주 사악하고 이기적인 종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분명 예수의 참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즉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지금 게속해서 제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그러한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오셨다는 점을 상기(想起)해야 한다. 즉 제자들의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될 때 수많은 박해가 예상되지만 그들을 가장 많이 핍박할 자는 이방인이 아닌, 예수 자신의 경우처럼(13:53-58; 요 7:3-5), 자기 가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그를 가장 핍박한 자들은 로마인이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여기서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적대감을 갖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젊은 세대(결혼한 아들 - '사람', 미혼의 '딸', '며느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언급되었으며, 이들이 늙은 세대에 항거할 것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1) 복음의 생동감 넘치는 침투력과, (2) 고답적(高踏的) 사상에 물들지 않은 여린 신앙인들의 복음에의 열정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불화하게'(*, 다카사이)란 '둘로 나누다'는 뜻으로 신앙 문제에 관한한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마치 기름과 물처럼 결코 연합(聯合)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어떤 불신자들은 이 구절을 보고 기독교는 가정을 파괴하는 종교라고 비난하고 또 일부 신자들은 가족까지도 무시하거나 원수 취급을 해서라도 주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앞장 서서 가족의 불화와 반목을 야기시키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본문의 말씀을 그릇되게 이해한 데서 나온 엄청난 파행(跛行)적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는, 당신을 신앙하며 헌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많은 사람들과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招來)하는 일임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다.

성 경: [마10:36]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주는가 하면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케 한다. 그 까닭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지녔다거나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접한 각인(各人)의 부패한 심성(心性)과 반항적 기질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 경: [마10:37]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 이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연적인 성품에서 나온 혈연적, 인본적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시는 장면이다. 즉 예수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계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문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된자의 제일의 의무요 본분임을 나타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개념을 명확히 정의(definition)해 둘 필요가 있다. 즉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여럿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자연적인 애정의 표시, 즉 혈육간의 사랑에는 흔히 '필레오'(*)란 말을 쓰고, 차원 높은 신(神)적이고 윤리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는 '아가파오'(*)란 말을 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남녀간의 육적인 사랑이나 가족간의 애정을 넘어선 절대적 신뢰와 모든것을 초월한 종교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주로 이 용어가 쓰인다. 그리스도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차선(次善)이나 여분으로서가 아닌 최고(最高)의 우선적 사랑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은 특정한 평가 기준에 알맞다는 뜻이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 자신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자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로 예수의 제자란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이다.

성 경: [마10:38]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써 관례에 따라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刑場)에까지 가야 했다(27:32),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 반란군들이 대량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당한 사건이 이전에 여러번 있었다. 특히 갈릴리를 중심한 유다의 반란(행 5:37)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 형틀의 이슬로 사라져 간 적이 있었다(Jos, Antiq. XVII, 10:10). 때문에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이 십자가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 당시 십자가란 대단히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러한 시련까지도 감내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否定)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였다. 한편 예수는 그때까지도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발설(發說)하신 적이 없으셨지만, 적어도 당신께서는 곧 지게 되실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Bengel).

⭕ 나를 좇지 않는 자도 -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즉 가장 무가치해 보이고 또 억울해 보이는 시련과, 또 죽음의 아픔까지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뒤따라야 한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는 질적으로나(인류 대속 - 헌신과 충성), 시간적으로(영원 효력을 지닌 단회적 사역 - 계속적 사역) 큰 차이가 있다. 여하튼 제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받은 희생과 죽음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동참하는 충성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성 경: [마10:39]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참된 제사장 상(像)]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 목숨에 해당한는 원어 '프쉬케'(*)는 혼(soul)이나 생명(life)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 '프쉬케'는 또한 본문처럼 일시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모두 함축한 단어이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시한부(時限附)적인 생명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영원한 참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내동댕이 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해와 관련된 이 문맥에서 우리는 이 구절의 내용을 처참하고도 굴욕적인 순교(殉敎)까지도 각오하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순교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의 참 신앙을 버리면 그의 영혼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목숨을 잃는 자는 -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박해에 대한 제자들의 자세를 당부한 말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삶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되 생명까지 희생하는 자는 다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바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조금도 상실(loss)되지 않는다.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칠 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며,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즉 생명은 주 안에서 거듭 태어날 것이고 재물과 시간은 축복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성 경: [마10:40]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너희를 영접하는 자 - 보냄을 받은자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눅 10:16; 요 12:44, 45; 13:20; 행 9:4; Mishna, Berach, V.5).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는 자기를 보낸 자를 믿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자는 자기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44, 45). 따라서 제자들은 단순 대리인(代理人)으로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한 지체(肢體)로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아가 자기들의 생각과 뜻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이다.

성 경: [마10:41]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선지자의 이름으로 - 먼저 '선지자'(*, 프로페테스)란 히브리어 '나비'(*)를 번역한 말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그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자를 가리킨다(삼상 10:10; 렘 1:9). 그리고 '이름으로'란 '뤠쉠'이라는 랍비적 아람어의 전치사로 보아 '...때문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Moffatt). 즉 본문은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로 번역한다. 문맥상 이러한 번역도 가능하며, 이름과 그 인격의 본체 및 지위와 결부시켜(6:9) 해석해도 무방하다. 여하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선지자를 단순히 인간적 동정이나 연민의 차원에서 떠나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 곧 선지자로서의 지위에 합당하게 대우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의 상급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 선지자의 상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선택된 자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이 다 선지자의 일을 할 수는 없다. 한편 하나님의 권위를 덧입은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것은 결코 작은 영예(榮譽)가 아니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은 선지자를 우대함으로써 그의 거룩한 사업에 동참하여 그가 받는 은혜와 보상을 다소나마 받을 수 있는 것이다(왕하 4:8 ff).

⭕ 의인의 이름으로 - 본문과 유사한 구절인 13:17; 23:29에서의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이전(주로 마카비 시대)의 인물이나 구약 시대의 의인을 지칭함인 듯하다. 그러나 문맥상 '의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행 22:14; 약 5:6). 한편 다니엘은 의인들의 최후 승리를 예언하면서 구원을 얻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의롭다고 묘사한 바 있다(단 12:1-4). 여하튼 이 말을 제자 파송(派送)사건을 계속 다루고 있는 본문에 적용하면 이 '의인'은 결국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치는 훈도(薰陶)를 따르며, 그들이 제시한 예수를 온전한 믿음으로 수용(受容)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5:20), 이러한 해석이 적절한 듯이 보인다.

성 경: [마10:42]

주제1: [전도자의 자세와 각오]

주제2: [영접자의 상(賞)]

⭕ 제자의 이름으로 - 40-42절은 제자들을 격려, 위로하는 강화의 결말부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병렬(竝列)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동일한 대상 즉, 12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으로 해석하고 있으며(Allen, Manson), 다른 이들은 이들 모두가 각기 신분과 직책이 다른 구별된 특수 계층이라고 이해하고 있다(Hill). 아마도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뒤이어 나오는 '소자'란 말과 연결시켜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더욱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소자'라 부르셨던 것이다(25:40).

⭕ 소자 - 소자는 흔히 배우는 자(사 60:22; 슥 13:7; A. T. Robertson)나 미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의미하지만(18:6, 10; 막 9:42) 본문에서는 선지자, 의인, 제자가 모두 포함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나 사도들 그리고 의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작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가치관에서는 섬기는 자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이들 선지자나 의인, 사도들은 모두 이 소자의 신분에 있다고 본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 - 실로 찬물 한 사발의 제공은 선행의 가장 초보(初步)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메마르고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하에서 한그릇의 냉수란 곧 생명력 넘치는 환대(歡待)를 의미할 수 있다. 이처럼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정성어린 대접은 제공하는 편에서는 별 것(a rarity) 아닐지라도 제공받는 자와 그를 그곳에 보낸 자의 편에서는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사역자들과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자들의 봉사를 단순한 도덕적 선행 이상의 가치로 평가하신다(25:35-40)

성 경: [마11: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제자 파송]

⭕ 예수께서...마치시고 - 마태는 예수께서 특별한 강화를 끝맺으실 때마다(7:28; 13:53; 19:1; 26:1)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결 문장을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10장과 이 구절을 나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즉 본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훈련과 각종 선교 지침을 가르치셨던 가버나움 근처에서의 장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사건에 뒤이어, 마가나 누가의 기록에는 제자들이 각처에서 전도하고 돌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막 6:30; 눅 9:10) 마태의 기록에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사건의 진행 과정보다는 예수의 공적 사역에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고 조금 전의 제자 파송이 예수 자신의 일을 덜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천국을 널리 선포하기 위한 조처(management)였음을 보여주려는 집필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저희 여러 동네 - 여기서 '저희'(*, 아우톤)라는 대명사는 '파송된 제자들'과 연관시킴으로써 (1) 제자들의 출생지(Zigabenus), 또는 (2) 제자들이 전도한 각 동네로 보기도 하고(Fritzsche, Meyer), 그 당시 예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관시켜 (3)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로 해석하기도 한다(D.A. Carson). 이 견해들 중 (2), (3)번을 조화시킨 것이 가장 무난한 듯하다. 즉 예수께서는 파송된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시고 갈릴리 근방의 성읍들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던 것 같다(Bruce, Chrysostome).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예수께 보고(report)하게 된다(막 6:30).

⭕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사적(私的)으로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음을 공개적(公開的)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의 주임무가 신자들을 교육시키는 것(*, 디다케)과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케뤼그마)임을 추론할 수 있겠다.

⭕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 여기서 '거기'란 제자 훈육(discipline)과 파송을 했었던 가버나움 주변의 한 곳을 가리킨다.

성 경: [마11: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이 옥에서 - 헤롯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다가 세례 요한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일이 있다(14:3, 4). 한편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때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사해 동쪽의 마카이루스(Machaerus) 성에 감금해 두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XVIII, 119<2절>). 이러한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이 있자 예수께서는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시게 된다(4:12). 한편 세례 요한은 이곳에서 1년 정도 감금된 후 사악한 헤로디아의 요구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지게 된다(14:1-12). 여하튼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성령과 불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언어로 선포했었다.

⭕ 그리스도의 하신 일 - 마태는 이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란 칭호로는 부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회의(懷疑)하고 있는듯이 보이는데, 아마도 마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있는 그분 예수가 확실한 그리스도, 곧 오실 메시야이심을 깨우쳐 줌으로써 불필요한 회의를 막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마태는 그의 책 서두(1:1)와 서론에 해당하는 1-2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해 놓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서는 (1) 세리들 및 죄인들과의 은혜스러운 교제(9장, F.R. Fay), (2) 예수의 이적과 교훈, 제자 파송 등의 사건들(5-10장), (3) 특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일(눅 7:11-17, A.T. Robertson), (4) 큰 이적과 기사를 베푸셨음에도 자신의 선구자요 친족이었던 세례 요한의 투옥에는 무관심했던 일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들이 있다.

⭕ 제자들을 보내어 -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9:14). 그때 제자들은 요한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였으며 요한의 사후(死後)에도 무리를 이루어 약 3세기까지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었다고 한다.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앞에 전치사 '디아'(*, 통하여)가 들어 있어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께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KJV에는 '디아'를 '뒤오'(*, 둘)로 번역하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둘만을 예수께 보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눅 7:19). 그런데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왜 예수께 보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들어보면 (1) 메시야에 대한 회의 때문에(Tertullian, Bruce), (2) 자기 제자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Chrysostom), (3) 예수가 과연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전날의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4)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Holtzman)등이 있다. 그중 첫번째의 견해가 환영받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이에 비해 어떤 학자는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낼 형편에 처해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어 본문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내고 있다(D.F. Strauss). 그러나 마가의 기록에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막 6:20)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과 만나지도 못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마11: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오실 그이(*, 호 에르코메노스) - 몇몇 랍비들은 이 말이 메시야 왕국의 선구자라고 주장하지만(McNeile), 이 말은 분명 메시야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다(막 11:9; 눅 13:35; 히 10:37).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인자'(막 9:12),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시 118:26), '왕'(시 2:6), '정한때에 오시는 자'(합 2:3)등이 있다. 여하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대망하여 왔과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그의 오심이 에언되어 왔다(창 49:10; 사 9:1-6; 11:1-5; 35:4; 단 9:24-27 등). 따라서 메시야가 '오실 그 이'로 묘사될 수 있었다. 한편 누가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도했을 때 예수께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소경을 보게 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눅 7:21). 아마도 누가는 요한의 의심에 대한 해결책으로 '오실 그이'가 왔을 때 일어날 메시야적 이적을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 같다.

⭕ 당신이오니이까 - 헬라어의 어법상 주어가 없더라도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인칭을 나타내기 때문에 대명사는 흔히 생략되는데 본문에서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 '당신'(*, 쉬)이란 대명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신이 바로 오실 그이오니이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이 질문은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전체 신앙의 의심에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호에르코메노스'(*, 그 오시는 자)인지에 대한 역사적 진실에의 의문인 것이다.

⭕ 우리가 다른 이를 -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은 견해들이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요한이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한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면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던 그가 왜 이런 회의를 품게 되었는가? (1) 아마도 그가 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Bruce). 즉 시간이 갈수록 요한은 감옥에 갇혀 마음이 조급해진 반면 메시야로부터는 어떤 격려의 메시지도 없었던 것이다. (2)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예수의 제자와 요한의 제자들 간의 경쟁 의식에서, 예수의 명성이 높아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질투심을 느낀데 그 원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3) 그러나 주된 원인은 예수가 그 당시 흔히 이해되고 있었던 민족적 차원의 메시야 사역을 충족시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은 자기가 선포한 바와 같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찍혀 불에 던지우리라"(3:10; 요 3:36)는 심판을 기대했으나 예수는 심판보다는 사랑의 사역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Dunn). 즉 그는 적어도 예수가 오실 메시야라면 엘리야와 같은 메시야적 표정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여야만 하지 않는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말 4:5; 요 1:19-21). 따라서 그는 예수의 행위가 메시야로서는 합당치 않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 기다리오리이까(*, 프로스도코멘) - 이는 막연히, 수동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을 읽을 수 있다.

성 경: [마11: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 듣고 보는 것을 - 예수의 답변으로, 간결하고도 권위에 차 있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변호(辯護)를 일찌감치 접어두시고 단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메시야적 실재(實在)를 증거하셨다(사 29:18, 19; 35:5, 6; 61:1). 한편 누가는 "마침 그 시(時)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눅 7:21)고 기록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고 계시던 때에 도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기 전에 이미 온몸으로 답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듣고 보는 것'이란 그 당신의 관용구인 '경험한 것'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즉 (1) 예수의 증거는 말과 행동이 완전 일치(一致)됨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요 (2) 듣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진리의 영적 의미에 대한 해석이고, 보는것은 영적 진리의 진실성과 권위에 대한 증거로서, 결국 예수의 증거는 완벽한 권위(權威)를 갖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같이 답변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겠다. 실로 예수께서는 수감(收監)된 요한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재고(再考)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나 기타 유대인들이 기대한 바와 같이 급작스럽고 난폭한 심판보다는 사랑과 구원과 회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드러내놓고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발표할 수가 없다는 점을 요한에게 깨우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 요한에게 고하되 - 예수의 답변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요한에게 주신 것이었다. 한편 예수께서 내세우신 이적들은 사실 선지자들도 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또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으며, 요한은 이 사실을 듣고보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어렵지 않게 추론(推論)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마11: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 소경이 보며 -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다(사 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세계(new world)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야직을 적절히 선포하셨다(Jeremias). 한편 예수께서는 당신의 메시야 이적 중 '소경이 보는 것'을 육체적 회복의 시작으로 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영적 사역을 그 절정으로 보이셨다. 그런데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사 61:1에 언급된 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에 대한 사실은 의도적으로 인용치 않으셨던 것같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 사역의 정치적 측면을 개인 회복 내지는 전인(全人)적인 해방으로 그 초점을 맞추게 하시려 했던 까닭이다.

⭕ 앉은뱅이, 귀머거리 - 메시야의 이적이 주로 현상(現象)적인 측면에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받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적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된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할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죽은 자를 살리신 적이 있는데(9:18-26; 눅 7:11-15) 이는 메시야 사역 중 가장 탁월한 징표요 복음의 핵심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메시야의 표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일 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소경은 모든 죄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죄로 인해 눈이 어두워 참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의(義)의 길로 다니지 못하는 앉은뱅이이며, 죄로 오염된 문둥이로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며 또 자기의 병을 전염(傳染)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 모든 질병과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회개하는 심령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요체(要諦)가 아닌가.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 여기서 복음이란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아름다운 소식'(사 61:1)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말한다. 즉 그가 소경의 눈을 보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온작 부정(不淨)한 것으로 오염된 문둥병자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가난과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메시야가 임했다는 기별(奇別)이고 통보였던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학자들에 따라 (1) 물질적 빈곤자(Robertson, De Wette), (2) 심령이 가난한 자(Meyer), (3) 영.육이 모두 빈곤한 자 등으로 이해한다. 이중 (2)의 견해를 취하는 주석가들이 많으나 그 견해가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성 경: [마11: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예수의 답변]

⭕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 여기서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스칸달리스데(*)는 '길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것에 부딪쳐 넘어지다', 또는 '그것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 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인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다. 실로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라면 적어도 제한적 사고와 인식을 할수밖에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의 한 과정에 걸려 실족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조명(illumination)이나 그분의 능동적인 배려가 없이는 인간은 결단코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복이 있도다 -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이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참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의 약하고 볼품없는 모습과 그의 탈(脫)유대적 인간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과 능력으로 인해 그를 오실 메시야로 믿고 따르른 자는 그분의 나라에 속한 참으로 행복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는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진리의 한 측면이 아니라, 안 믿으면 영원한 심판과 형벌, 믿으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이 보장되는 진리요 생존의 근거가 된다(요 20:31).

성 경: [마11: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저희가 떠나매(*, 투톤 포류오메몬) - 현재형 독립 속격 분사 구문으로서 '저물어 막 떠나가고 있을때'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있을때로 보는 것이 좋다.

⭕ 예수께서...말씀하시되 - 이를 직역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Jesus began to speak, NIV)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가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손상된 세례 요한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씀을 꺼내셨던 것이다(F.R. Fay). 한편 혹자(Plummer)는 이때의 메시지가 바로 세례 요한을 위한 장례사(葬禮辭)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요한에 대하여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을 기회로 삼아 요한의 참된 사명에 관하여 무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가 외치는 말씀을 들었으며 특이한 그의 외양(外樣)과 가르침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1-12).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그를 보러 나갔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도 요한에게 나아갔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께서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여 그들이 과연 요한에게 나아가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하신다.

⭕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여기서 먼저 '광야'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3:1). 실로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우뢰와 같은 메시지 앞에 유대 군중들은 구름떼처럼 그곳 광야로 몰려들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요 충동적이었을 뿐(요 5:35) 더 깊은 영적 진리에로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 같이 질문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의도는 그들이 세례 요한을 신(神)적 권위를 입은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가 안내한 바 있는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먼저 여기 나오는 '갈대'(*, 칼라몬)는 집합적인 단수로서 커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을 의미하며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라고 있다. 이 갈대(calamus)는 가볍고 길어 글씨를 쓴 도구(요삼 1:13), 지휘대(27:29), 측량자(계 11:1) 등으로 많이 사용 되었다. 한편 이 '갈대'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정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방황하는 유대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도(Grotius, De Wette) 있으나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Allen, Bruce, D.A. Carson). 즉 갈대란 오늘은 이것을 믿고 이렇게 말하다가 내일은 저것을 믿고 저렇게 말하는 불안정하고 변덕이 심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너희가 과연 요한을 그렇게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 자로 이해하고 있었더냐'는 것이다. 실제로 요한은 수차에 걸쳐 예수가 메시야란 사실을 증언하였으며(3:11-14; 요 1:19-36; 3:27-30), 자신의 증언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일단 받아들인 진리를 계속해서 믿고 선포했던 것이다.

성 경: [마11: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부드러운 옷 - 여기 '부드러운'(*, 말라코스)이란 부드럽다는 뜻 외에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눅 7:25; 고전 6:9).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 풍자적인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 주로 입던 가볍고 얇은 장식용 의류를 말한다. 이 옷은 올이 가는 린넨 실로 만들어진 고가품(高價品)이었다.

⭕ 입은 사람이냐 - 요한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옷차림을 하였다(3:4).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한 이 질문은, 그들이 광야에 요한을 보러 나간 이유는 훌륭한 옷이나 외모를 보러나간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는 점층법적인 수사법을 쓰면서 마지막에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 왕궁에 있느니라 - 이는 헤롯 궁정을 뜻한다. 즉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만날 곳은 헤롯 안디바스의 궁정 같은 곳이지 요한이 있던 광야는 아닌것이다. 이런 옷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요한이 이 같은 부귀와 영화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요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야생(野生)의 투박하고 천한 생활을 하였으며 고난을 겪었지만 확고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고난 당하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성 경: [마11: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어찌하여 나갔더냐 - 사람들이 광야로 나갔던 이유는 세상의 부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과연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가?

⭕ 선지자를 보려더냐 - 사실 그 당시는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늘의 음성이 단절된 침묵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때로서 모든 백성들은 마음에 선지자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런점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광야에서 권위에 찬 메시지를 전하는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인정이 정당했음을 지적하셨다.

⭕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무리들에게 세가지 질문(7, 8, 9절)을 던지시고 또한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셨다. 이는 10, 11절의 진리를 확실히 제시하시기 위해서 취한 문답식(問答式) 강론이었다. 특히 예수는 당신의 독자적 권위(내가...이르노니)로써 말씀하신 것이다.

⭕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 - 여기서 '나은 자'에 해당하는 원어 '페리쏘테론' (*)은 남성형이라기 보다 중성형 단어로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자체가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 뜻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즉 '페리소테론'이란 '무엇보다 더욱 탁월하다'(more excellent)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구약의 최후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선구자란 점에서 그 이전에 왔던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주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말 3:1). 이사야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예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선지자란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으며, 더욱이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보다 나은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이사야보다 더 분명하게 그의 오심을 선포했고 또 메시야를 백성들 앞에 소개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성 경: [마11:1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탁월한 선지자적 성격에 대해 구약의 권위를 빌어 인준(認准)하신다.

⭕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 이는 말 3:1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의 인용인 것으로 보인다(70인역과는 다른 표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어구는 말 3:1의 내용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와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메시야, 곧 자기를 위해 사자(messenger)를 보내 메시야 앞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계신반면,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를 보내 당신 앞에서 길을 예비하게 할 것이며 또한 당신이 친히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에언하고 있다. 즉 말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분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이 차이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사실 예언서에 의하면 성자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칭해졌던 것이다(사 9:6). 여하튼 세례 요한은 여호와의 나라를 예비하는 선지 엘리야로서(말 4:5, 6; 눅 1:76), 성육신(Incarnation)하신 하나님의 선구자인 것이다.

⭕ 예비하리라(*, 카타스큐아조) - 원뜻은 '세우다'로서 어떤 일을 위해 미리 기반(base)을 닦아두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특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전(全)사역을 의미한다. 실로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에 주 예수를 영접하도록 준비시킨 도구였다. 아마도 그는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이 일을 했던 것 같다.

성 경: [마11:1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내가 진실로...말하노니 - 마태에 의해 독특하게 기록된 이 권위에 찬 선언은 세례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에 얼마나 지대(至大)한 공헌을 했는가를 단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메시야적 증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권위와 한계가 정확하게 규명되었다.

⭕ 여자가 낳은 자 - 직역하면 '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이는 고난받는 자 (*, 엘루드 이솨, 욥 14:1) 욥에 의해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 죽음과 고통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 이는 단수로 표현된 '한 여인에게서 나신 자'(창 3:15; 갈 4:4). 즉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과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없도다 - 이는 세례 요한의 인격, 권능, 종교적 지위 등이 타(他) 선지자들보다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이것은 천국의 주체이신 예수와 관련해서 생각되어져야 한다. 즉 구약의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같이 메시야 왕국을 멀리서 고대하고, 메시야의 선구자를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반면 요한은 그 나라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선구자, 예언의 대상이 되었다(사 40:3; 말 3:1). 또 친히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으며,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를 만 백성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 중 최고의 위치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자였던 것이다.

⭕ 천국에서는 - 천국(Kingdom of heaven)은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되는 모든 영역으로서 시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는 현존하는 이 땅의 나라들과는 다른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그리고 천국은 현존하는 질서와 세계를 심판한 후 이와는 질(質)적으로 차원이 다른 영원한 새 세계의 실현을 의미하기도 한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 개념' 참조). 따라서 그 나라에 입참(入參)하는 자는 단순한 인간적 평가를 훨씬 초월하는 신적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주(主) 내용은 바로 이 천국의 도래를 예비하고 선포하는 것이었다(3:2).

⭕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먼저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 자질이나 윤리적 우수성과 연관되지 않고, 계시의 발전적 측면 및 천국의 전혀 새롭고도 신적(神的)인 측면과 연관된다. 한편 본문의 '작은 자, 큰 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1)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한 것으로 인해 요한을 작은 자로 보는 견해(Weiss), (2) '작은 자'를 그리스도로 보아, 당시 요한의 인기와 영광에 의해 그 영광이 침해받은 작은 자는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될 것이라는 견해(Luther, Chrysostom, Origen), (3) '작은 자'는 예수 이후의 모든 신약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큰 자'는 세례 요한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Alford, Bengel, Calvin, Plummer)등이 있다. 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평가되고 있다. 실로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의 실체를 경험한 자들, 혹은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단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데 그쳤던 세례 요한보다 더욱 크며, 더욱이 천국 계시의 종합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구약의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탁월하다. 한편 이 어구를 이상과 같이 이해하게 되면 예수의 선구자로서,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이 3절에서 '오실 그 이가 당신이냐'고 묻게 된 배경을 또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救贖史)의 감추어진 의미를 아직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에 신약 시대의 성도는 세례 요한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마11:12]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세례 요한에 대하여]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 이말은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점부터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한 때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lbright, Mann). 그러나 이보다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란 아람어적 표현으로, 그 의미하는 바는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동안에 비록 예비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며(Jeremias), '지금까지'란 표현은 한정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천국의 확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 (*)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이 어구는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한다(Meyer, Lightfoot).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이다. 이를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땅에 기습적(奇襲的)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dynamic)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Ridderbos, Chilton, Hendriksen).

⭕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 혹자는 본문의 '침노하는자'를 해석함에 있어서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자로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란 의미로 해석한다(Hill, Meier, Hobbs 등).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함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Pamment, Kummel)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있는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빼앗느니라'(*, 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지으며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craving)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눅 7:28-30). 실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성 경: [마11:13]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 -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5:17; 7:12; 눅 16:16). 여기서 먼저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을 뜻한다.

⭕ 요한까지니 -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 침묵의 기간이 흘렸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다. 이제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서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이제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특히 마태는 구약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마11:14]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즐겨 받을진대 - 먼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는 '좋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로서, 결국 진리를 수용하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며,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에언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 '즐겨 받지' 못했던 것이다.

⭕ 오리라 한 엘리야 - 엘리야에 대해서는 열왕기상.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시피 큰 권능을 가졌던 유명한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왕하 2:11). 그런데 수백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3:1; 4:1, 5).

⭕ 이 사람이니라 -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告知)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비하리라"(눅 1:17)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요 1:21).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그런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적 도래라기 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messenger)였던 것이다.

성 경: [마11:15]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말은 예수께서 빈번히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으로서(13:9, 43; 눅 14:35; 계 2:7)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나 복음의 영적인 진리에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데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들을지어다'(*, 아쿠오)란 말이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라'는 강한 의미의 요청으로서 직면한 상황에 대해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앞에서 선언한 내용의 말씀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듣고 확신해야만 함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들을 듣고도 이를 경시(輕視)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빛에 가까이 나아가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귀를 막고 악의에 찬 방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진리를 수용하고 믿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가 복있는 자일 것이다.

성 경: [마11:16]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이 세대를 - '세대'(*, 게네아)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요한과 그리스도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킨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이 세대'란 말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는데(12:41, 42, 45; 23:36등),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부인(否認)하는 내용과 함께 쓰이거나 예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때 사용되었다.

⭕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 이는 비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교육기법이다(눅 7:31). 그런데 '비유할꼬'(*, 호모이오소)의 원뜻은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로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곁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영적인 지혜를 일상 생활의 사건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심으로써 무지한 백성들에게 깨달음을 제공하시고자 했던 것이다(Stier). 이처럼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목도(睦睹)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아이들의 놀이까지 빠뜨리지 않고 비유로 사용하여 이 세상의 성격을 규명하신 것이다.

⭕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 여기 '장터'란 말의 원어 '아고라'(*)는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차 '모이는 곳'이란 의미를 가지게 된 낱말로서,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란 의미보다는 오히려 대중들이 드나들며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물론 이곳에서 여러 보임 외에 상거래(商去來)가 형성되기도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지금껏 무관심 속에 버려졌었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예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아이들의 불일치하고 모순되며, 각자의 투정 때문에 함께 놀만한 어떤 놀이를 결정치 못하는 것(눅 7:31-35)을 예의 주시(銳意注視)하셨던 것이다(Wycliffe, A.T. Robertson).

⭕ 제 동무를 불러 - 장터에서 아이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이 다른 쪽에게 어떤 놀이를 제안하는 모습이다.

성 경: [마11:17]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피리를 불어도...춤추지 않고 - '피리'와 '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인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로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Buxtorf). 이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imitation)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던 것 같다.

⭕ 애곡하여도...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 곡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을 말한다(23:30; 겔 24:16). 즉 아이들은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그 놀이에 참석하여 어른들처럼 춤을 추라고 권유하였으나 동무들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같이 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놀이를 바꾸어 장례식 놀이를 하며 애곡(哀哭)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이 애곡에 맞추어 가슴을 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무시(無視)요 무관심과 불일치를 암시한다.

⭕ 함과 같도다 - 예수께서 이 세대의 성격을 규명하신 말씀이다. 즉 아이들이 제 동무들을 불러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피리를 불었으나 춤추지 않고, 애곡하였으나 가슴을 치지 않았다. 적어도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은 회개와 애통해 할 것을 역설(力說)한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구원과 해방과 기쁨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는 무감각(insensibility)중에 빠져 있었다. 실로 그들은 내심 그 두 분을 모두 멸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즉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기쁨도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도 없는 것이다.

성 경: [마11:18]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이었으며(3: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쉽게 응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리고 요한은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눅 1:15; 7:33). 즉 그는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에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 귀신이 들렸다 -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즉 주의 선구자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잡혀(F.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던 것이다.

성 경: [마11:19]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요한과 예수의 관계]

⭕ 인자는 와서 -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히 사용하는 말로서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야란(단 7:13)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5:24 강해 '인자'참조).

⭕ 먹고 마시매 - 이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한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9:10, 11; 눅 15:1, 2 등). 이는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되며,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에 분명하다.

⭕ 먹기를 탐하고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운다. 즉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성별(聖別)시킨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인 것이다.

⭕ 죄인의 친구로다 -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세례 요한의 절제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 누가의 평행구에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평행구가 이런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원래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대(古代)의 많은 필사자들은 이 부분을 누가의 기록대로 고쳐 '그 행한 일'을 '자기의 모든 자녀'로 표기하였다(레기우스 사본, Vulgate역 등). 아마 누가의 기록이 원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점에서 본 구절은 '지헤의 요구 사항들은 모든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 진정으로 입증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란 지혜의 사자(messenger)들(세례 요한과 예수)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했다(눅 7:29, 30; Marshall).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행한 일'(행위들, actions, NIV)로 변형되어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혹자(Suggs)는 본문의 '그 행한 일'이란 것은 지혜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지혜는 그 지혜의 행위들에 의해 옳다고 입증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한편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으며(욥 28장; 잠 1:8등), 유대 전승들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어떤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 반인적인 존재(a guasi - personal hypostasis)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그러나 본문의 지헤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잠 8:12-16, 22-31; 눅 11:49)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혜와 관련된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것 같다.

⭕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 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 경: [마11:20]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권능(*, 뒤나미스) - 이말은 원래 자연의 물리적인 힘(롬 1:4)이나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이적'또는 '초자연적인 행위와 사건'을 가리킨 말로 쓰이고 있다. 한편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적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흔히 이 '권능'이란 말을 쓰고 있다.

⭕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 먼저 '고을'이란 신앙과 인격의 주체로서의 전체 성읍을 가리킨다. 실로 고을의 운명은 그 거주자들의 신앙 유무(有無)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이었다(창 18:22 ff).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을들이 당신을 배척하거나 비난했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곧 메시야시라는 신적(神的)인 이적들을 도시들에서 행하였음에도(5, 6절)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다(3:2; 4:17). 이로써 확인하건대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이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이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것이다. 만일 주께서 그 고을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고와 이적들을 다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주님은 그들의 완고한 태도에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때에 - 11:20-24의 내용은 눅 10:12-15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본문을 70인 전도파송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후기에 해당하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마태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온 사건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중 누가의 시간 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이는 마태가 연대순(chronological order)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그 때에'란 표현은 마태가 이를 엄밀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간 부사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책망하시되 - 이 말의 원어 '에릍사토 오네이디제인' (*)을 직역하면 '(비로소) 책망하기 시작하시다'로서 그릇된 종교관을 지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 질책(叱責)이 드디어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23장에 이르러 예수의 책망은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께서는 그 고을들이 자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책망했던것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입증해 주는 대부분의 이적들을 다른 곳이 아닌 그곳에서 보여주었는데도 그 도시가 회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또 은혜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즉 '새 언약, 곧 복음을 얻게 될 그리스도 이후의 신약 시대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적 메시지를 들었던 자들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거나 아니면 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Bengel).

성 경: [마11:21]

주제1: [배척받으신 메시야의 질책과 권유]

주제2: [저주받은 마을들]

⭕ 화가 있을진저 - 이 말의 원어 '우아이'(*)는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일종의 감탄사이다.

⭕ 고라신 - 이 도시는 신약에서 본문과 눅 10:13에만 등장하는 지명(地名)으로서 그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 떨어진 오늘날의 '키르베트 케라제'(Kirbet Keraze)에서 옛날에 파괴된 고라신의 유물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여하튼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복음서에는 '고라신'과 '벳새다'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나 예수의 선교 중심지였던 가버나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고을 선교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割愛)하셨을 것으로 본다.

⭕ 벳새다 - 이 지명의 문자적인 뜻은 '사냥집'이며, 이곳은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서(요 1:44) 갈릴리 호수와 강둑 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했던 것 같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알 텔'(al-Tell), 또는 '마사디야'(Masadiya) 등으로 여겨지며 일찍이 분봉왕 빌립이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딸인 줄리아(Julia)를 기념하여 뱃새다 줄리아스라고 명명했던 것 같다(눅 9:10).

⭕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 뵈니게(페니키아)의 항구도시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끔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곤 하였다(사 23장; 겔 26-28장; 욜 3:4; 암 1:9, 10). 한편 솔로몬이 성전에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供給)을 받았을 만큼 두로는 고대로부터 문물(civilization)이 번성했던 것 같다(대하 2:11-16). 그리고 시돈은 아셀 지파의 구역에 위치해 있었으나 아셀 지파는 시돈을 한 번도 점령해본 일이 없었다(수 19:28; 삿 1:31). 여하튼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에도 이 도시들은 이방 우상 숭배와 더불어 대단한 부(富)와 향략을 누렸던 것같다.

⭕ 베옷을 입고 - 베옷(sackcloth)은 낙타의 짧은 털로 짜 만든, 올이 거친 직물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비탄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맨살에다 이 옷을 입곤 하였다(삼하 3:31; 왕상 21:27; 욘 3:5-8).

⭕ 재에 앉아 - 사람들은 슬픔을 표하는 방법을 베옷을 입은 것 외에 재(ash)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삼하 13:19; 애 2:10), 재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