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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마가복음

마가복음주석

성 경: [막1: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복음의 시작]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책의 제목으로 여겨지는 이 선언적인 문장은 마가가 본서를 기록할 때 죽음을 각오해야만 고백할 수 있었던 신앙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간단한 구절은 아무 뜻 없이 상투적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의식하에서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의 서론격으로 자신의 책의 첫 머리에 배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론적 문구가 본서 전체와 연관되는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만 국한(局限)되는 서론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마가는 행 1:21에 나오는 복음의 출발점이 '요한의 세례로부터'라는 표현에서 착안하여 세례 요한에 관한 기사의 문두에 이 같은 문구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편 마가가 70인역(LXX)의 총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아르케')이라는 말로 본서 기록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복음의 계시(revelation)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 문구는 본서 전체의 제목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본서의 신적 기원을 명확히 밝히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 하나님의 아들(*, 휘우 데우) -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3:11;5:7;9:7;12:6;13:32;14:36,61;15:39). 특히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와 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욥 1:6;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렘 3:19;호 1:10;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 예수 그리스도 -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 예수 크리스투)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주석 참조).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주석 참조).

⭕ 복음 - 여기서 먼저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케뤼그마'(*, '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 시작이라 -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 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막1: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 저자 마가는 우리에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먼저 출 23:20과 말 3:1을 인용하고 난 다음에, 3절에서 비로소 70인역(LXX)에 의해 사 40:3을 인용하였다. 이처럼 마가가 모세나 말라기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단지 선지자 이사야만을 거론한 것은 마가의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아니라 상세한 기술을 피하고자 하는 마가의 저작 의도에 따라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사야의 이름만을 언급했다고 본다. 두 구절은, 2절의 사자가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의예수에 대한 임무를 말했다면, 3절의 '소리'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보다 강조점을둔 것으로서, 서로 상관되며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에 대한 구약의 예언적 문구이다. 한편 마가는 이처럼 복음서 초두에 구약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과 본질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히브리어 성경 말 3:1에서 인용되었으나, 히브리어 성경과70인역은 '네 길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강조하는 '내 앞에서 길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메시야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도적 변용(變用)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랍비들도 말 3:1의 엘리야와 출 23:20의사자(使者)를 동일시하여 이 두 부분을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이는 고대 근동에서 군주가 행차할 때 도중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교육, 군지 숙식을 준비하던 풍습 등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구야과 신약의 분기점이 되시는 예수의 등장에 앞서 지금껏 진행되어 온 구약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심령을 먼저 준비시키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완벽히 예언된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예비하리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스큐아조'(*)는 '준비하다'는 의미뿐 아니라 '돌이키다'는 뜻도 함의(含意)하고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메시야 도래를 위한 준비 사역중 사람들의 타락하고 부패한 심령을 돌이켜 오실 예수를 영접하도록 하는 회개에의 사역에 가장 큰 비중이 주어짐을 시사한다(마 3:1-12,주제강해 '세례요한의 인물 연구' 참조).

성 경: [막1: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본 절은 사 40:3의 70인역의 인용으로서, 70인역과 본문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70인역의 '우리 하나님의'라는 말 대신 여기서는 '그의'라는 말이 사용된 점이다. 이는 마가의 의도적 변용일 수도 있고, 마가가 참조한 사본의 원문이 이미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여기서 '그의'라는 말의 선행사는 '주'(*, 퀴리오스)가 되는데, 이 칭호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할 때 부르던 것이므로 본 구절은 분명 주 예수에 대한 기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광야에 - 여기서 '광야'(*, 에레모스)란 문자적으로 반드시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버려지고 황량한 처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곳은 개간되어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는 곳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한편 마 3:1에서는 이것을 '유대 광야'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유대 산지와 동쪽으로 요단 저지대, 남쪽으로 사해, 북쪽으로 얍복강과 요단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 광야 지역은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복이 심한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 지대로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곳 부근에는 쿰란(Qumran) 공동체의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영향력이 요한에게 어떤 양상으로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금욕생활과 엄격한 자제력 등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사역이나 복음 전파 내용과 종말론적 사고 등에 관해 전반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눅 3:1-20 주제 강해, '세례요한의 세례' 참조). 그런데 세례요한의 활동무대는 이곳 유대 광야 지역뿐 아니라 요단강 동편 지역에까지 확장되었던 사실이 마 3:5에서 분명히 밝혀진다(요 1:28 주석 참조). 한편 출애굽 당시(출23: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사자(使者)를 앞서 보내심으로 그들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받게 하셨다. 본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제 2의 출애굽 때에 다른 한 사자(즉 세례 요한)을 광야에 앞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파하고 예비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신령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눅 7:24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셨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이다. 실로 우리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참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행복을 구가(謳歌)할 수 있을 것이다.

⭕ 예비하라(*, 헤토이마사테) - 이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 '예비'하는 그 행위의 긴급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듣는 즉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예비하라는 것이다.

⭕ 첩경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유데이아스...타스 트리부스'(*)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말로서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에서 왕들과 그의 측근들을 위해 건설해 놓은 특별한 도로망을 의미한다. 즉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와 죄악으로 일그러지고 구부러진 심령들이 회개함으로 그들 속에 쉽게 들어오시도록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마3:2, 3;눅 3:8).

⭕ 기록된 것과 같이 - 헬라어 원문에는 본 문장이 2절 초두에 제시되어 2, 3절에 언급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포괄하고 있다. 문장 어순이 다른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무시하고 3절 하반부에 서술적 형태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록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그라프타이'(*)는 완료형 시제로서 어떤 행위가 과거에 완성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본문은 '기록되어 현재도 효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은 성경의 변함없는 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강한 신념을 내비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경우 이러한어법(語法)을 자주 사용한다. 한편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된 것은 요한 자신만의 어떤 깨달음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이 반영된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그대로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는 또한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구속 사건 역시 우발적으로 일어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고 기록된 대로 전개되는 것임을 암중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특히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마 2:5;4:4;11:10 등).

성 경: [막1: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세례 요한이 이르러 - 마가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적만을 말하나, 요한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란 사실을 요 1:6에서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누가는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에 그에게 주어졌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눅 1:76, 77) 앞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소명의신적 기원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이미 1장에서부터 마가복음은 예수시대의 배경이나 그시대의 사실보다 시대 자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마가 복음의 특징이다. 이에 많은 주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단순 명료하게, 즉 주관적 가감(加減)없이 예수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 이 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죄 사함에 관련된'이라고 되어야 한다.바로 그런 취지에서 흠정역에서는 이것을 '죄 사함을 위한'(for the remission ofsin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에이스'(*)의 용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대부분이 목적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후 문맥상 마10:41;12:41 등에서와 같이 그러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에 관련된','...때문에'(because of)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세례' 자체가 죄를 사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해 사죄를 받기 위한 하나의 공식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회개의 세례(*, 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 이는 회개를 중심으로 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회개'(*, 메타노이아)란 어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사용되어 생각과 의지와 인격의 변화, 곧 전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신중한 전환'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이 진실한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은 죄사함이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죄사함에 대한 예비적 단계로서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당시 극도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일깨워 주고그들의 몸의 외적 정결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깨끗함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 세례와 예수의 성령 세례(8절 주석 참조, 행 1:4, 5;19:2에서 각각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주제 강해를 다루기로 한다)는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의 긍휼을얻을 단계로 진일보(進一步)하게 되었다. 여기서 '세례'(*, 밥티조)는 '물 속에 잠기다'는 의미로서 일종의 침례 예식을 뜻한다(마 3:6 주석 참조). 그런데이 세례는 기독교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의식이라기 보다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정착(定着)되어 온 것이다(G. F. Moore). 그러나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통적, 의식적으로 내려왔던 그 세례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즉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고백에 관한 기본 원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울이 나중에 롬 6:4에서 설명한 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일찍이 헬레니즘(Eleusinian cult), 이시스 숭배(Isis worship) 등 여러 밀의 (密意)종교들 가운데서도 시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회개하고 죄를 자복함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일종의 이교도들로 다루고있다.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베풀어진 요한의 세례는 유대 민족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 행위로 그들에게 비추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요한은 나중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그가 외친 '회개의 세례'에 대한 음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역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례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데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교의(dogma)에 의해 세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써 교인(church man)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자(christian)는 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의 회개, 즉 세례 요한이 강조하였던 '회개의 세례'에 있다.

성 경: [막1: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 마가는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거족적(擧族的)이고 대대적인 호응이 있었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지만 마태와 누가는 이들 무리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마 3:1-12;죽 3:7-14). 즉 그들 중에는 형식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오만한 바리새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되어버린 사두개인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에는 일반 민중들을 노략하고 약탈하는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착취하다가 경멸받고 증오받던 세리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신선하고 생명력있는 설교(즉 회개에 대한설교)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즉각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본 구절에서 특별히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all)란 표현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은 요한의 회개 운동은 예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수백년 동안 진정한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 혹은 그 이상으로, 그들이 대망해왔던 메시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눅 3:15). 특히 그가 전파했던 메시지의 내용이 메시야의 임박한 도래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휩쓸렸을 것이 자명하다.

⭕ 나아가(*, 엑세포류에토) - 원문상 미완료 시제로서 백성들이 요한에게 '계속해서 나아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마가의 이같은 보고는 조금 과장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의 선포가 전국민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나아가 상당한 기대와 동요(動搖)를 초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성 경: [막1: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약대털을 입고...가죽띠를 띠고 - 이는 마태와 마가, 두 기자가 동시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부분으로서 세례 요한의 의식주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마 3:4).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그리고 청빈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입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데뒤메노스'(*,havingbeen clothed with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말로서 기자는 요한이 줄곧 그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했음을 보여 준다. 성화(聖畵)를 그리는 화가들은 종종 요한의 광야 생활을 나타내고 그림으로 요한의 옷을 약대 가죽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옷은 길게 축 늘어진 약대털로 짠 볼품없는 옷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입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러한 옷에는 자연히 허리에 가죽띠를 맬 수 밖에 없었다. 이 허리띠는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급히 달려갈 때에도 옷이 펄럭거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특히 활동성이 요구될 때에 필요한 유대인 의상의 필수품이었다. 한편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때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히 상징하기 위해서였으며 심지어는 거짓 선지자까지도 자신을 참 선지자로 가장(假裝)하기 위하여 이 털옷을 입었다고 하였다(슥 13:4).그리고 아하시야 왕의 사자들이 왕에게 엘리야를 설명할 때(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라고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주된 관심인 의식주 생활에서 과감히 탈피(脫皮)하여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그들 자신이 청빈한 삶을 하나님 말씀의 '소리'가 되기에 필요 충분 조건이 될 수 있었다.

⭕ 메뚜기 - 철저히 율법에 입각한 경건주의자였던 요한은 레 11:22에서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허용하신 곤충 중의 하나인 메뚜기를 먹었다. 이 메뚜기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용했던 평범한 음식이었다고는 하나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 재해로 인해 소출(所出)이 줄어든 해에 먹는 일종의 대용 식품이었으나 이 메뚜기는 특별히 봄철에 많이 생겼으며 때때로 큰 떼로 몰려다니곤 했었다(출 10장;욜 1:1-12). 오늘날에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것의 다리와 날개는 잘라버린 뒤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소금에 절여 두어 저장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원래 제사장의 아들로서부요한 자였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자가 먹는 음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부지해 나갔다.

⭕ 석청 - 어떤 주경학자는 이 석청을 그곳에서 서식하던 여러 나무들에서 채취(採取)한 수액일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 말의 헬라어 '멜리'(*)는 야생의 벌꿀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중에서도 특히 이 광야에서의 야생의 꿀은 달기로 유명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세례 요한의 생활 양식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지향하는 나실인(Nazirite)으로 특징지어진다(민 6:8;삿 16:17 주석 참조;눅 1:15). 실로 그는 오직 회개의 세례와 임박한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육적인 욕망을 절제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식주 생활에서의 극기의 삶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의 귀감(龜鑑)이 된다.

성 경: [막1: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오시나니 - 마가는 여기에서 매우 장엄하고도 위엄에 찬 동사 '오사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그 당시 극도로 고조되고 있던 유대인의 메시야 대망 사상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표현 양식이다. 이런 표현 양식은 창 49:10에서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基盤)으로 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동사 '에르케타이'는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그분이 지금 막 오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주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시각은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종말적 역사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가는 이 동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위치시킴으로써 메시야 오심의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하지만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어법상 문장 끝에 나와 있음).이 '오실'이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설명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라는 것인데, 이는 그분의 전지 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 요한 자신은 그분의 종의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광야에 모여든 유대 백성들 사이에는 요한이 '능력 많은 자'(the mighty man)란 소문이 만연되어 있었을 것이며, 혹시 이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에(요 1:19, 20;3:25-36), 이러한 그릇된 오해를 간단한 이 한 마디 말로써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사역의 시작에 있어서도 세례 요한 뒤에 오셨다(눅 1:26,36). 하지만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무한과 유한, 영원과 순간, 그리고 태양의 원(原) 빛과 달의 반사광이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요 1:15-17).

⭕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 세례 요한은 자신과 곧 임하실 '능력이 많으신 이' 사이의 강한 대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관습들 중에서 한 가지 실례를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주인이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종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먼지로 더러워진 주인의 신발끈을 풀어 신을 벗기고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이었다. 마태는 단지 신의 끈(영어의 'latchet'는 오늘날의 구두끈에 해당하는 말임)을 푸는 데만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지만(마 3:11), 마가는 이것을 풀기 위하여서 굽히는 행위까지를 첨가하여 표현하였다. 이것은 곧 임하실 메시야의 위대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세례 요한은 가까운 미래에 임하실 그분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오실 메시야는 영원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역사속에 오셔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이러한 표현은 조금도 자기 비하나 미사 여구(美辭麗句)나 과장이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 충만한 한 선지자로서 절대 불변한 진리를 사실 그대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성 경: [막1: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선구자 세례 요한의 선포]

⭕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성령으로...세례를 주시리라 -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외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 사죄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은 도구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 마치 물과 같이 세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각각의 효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태는 여기에다가 흔히 성경 문학적으로 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불과 같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 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자들에게는 종말적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어쨌든 메시야의 선구자로서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집례(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하셨다(Lenski). 이 같은 성령 세례는 예수의 승천 이후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써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후원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름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은 요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 에밥티사)인 부정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세례를 주시리라'(*, 밥티세이)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말에 대해 예수께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재차 확증해 주셨다(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및 한시성(限時性)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요 16:7;행 2장).

성 경: [막1: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그 때에(*, 엔 에케이나이스 타이스헤메라이스) - 이 말에 대한 문자대로의 번역은 '그 날들에'이다. 이는 분명한 시기곧 앞에서 계속 언급되어왔던 세례 요한의 회개에의 세례 사역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고 있던 그 기간을 지칭한다. 더욱이 이 표현은 역사상에 위대한 한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주의를 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는 배경적 설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배경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심대한 사건이나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이 예고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던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실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하시고 이제 곧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시기를 맞고 계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관해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즉시 오시지 않고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실 바로 '그 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장중한 포고령이요 대서사시의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 갈릴리 나사렛 - 이곳은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 다시 귀국하여 정착하고 유아기부터 청년기를 거치면서 계속 살아오셨던 예수의 실제적인 고향으로서(마 2:23;눅 4:16 주석 참조) 예루살렘 북방 약 120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약 488m의 구릉지의 분지이다. 이곳은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과 더불어 기독교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매우 뜻깊은 곳이다(마 2:23 ; 3:13 주석 참조). 한편 마가는 '나사렛'이란 지명을 첨가시킴으로써 이방인 독자들에게 그곳의 지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이 지명을 아예 생략했으며 마태는 '갈리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마 3:13)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수만리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신자들 곧 예수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바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역사성을 입증해 주기 위한 마가의 노력의 한 표현이다.

⭕ 요단강에서 - 헬라어 원문에 제시된 본문의 전치사(*, 에이스)는 '안에서','안으로'(in, into)란 뜻으로 예수의 수세(受洗)가 요단강 안에서 베풀어졌음을 암시한다. 특히 이 표현은 다음에 언급될 '세례'라는 어의(語義)와 10절의 '물에서 올라오다'는 말과 조화를 이뤄 예수의 수세 방법이 침례(侵禮)였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세 방법의 절대적 원칙을 고수하는 일은 또하나의 독선이 될가능성이 있다.

⭕ 세례를 받으시고(*,에밥티스데) - 이 단어의 원형 '세례를 주다'(*, 밥티조)라는 말은 '물에 잠그다'(70인역-왕하 5:14; 시 68:23), '물로 씻는다'(7:4;눅 11:38;딛 3:5)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세례'혹은 '침례'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세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물에 잠그다'는 침례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고, 구약 율법의 제사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속죄를 위한 뿌림(레 14:7;16:14,15)등의 관점에서(민 8:7) 정결례로 볼 때는 '물로 씻는다'는 세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세례와 침례의 효력과 그 중요성은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그 외적 형식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의도하고 있는 바 구원의 확신과 그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을 떠난 의식만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논쟁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성 경: [막1:1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곧(*, 유뒤스) - '곧바로', '당장에'라는 긴급성을 강조한 부사로서 이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지니는 한 특징인데(약 41회). 이 단어는마가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박진감을 더해 준다.

⭕ 물에서 올라오실새 - '...에서'를 뜻하는 원어 '아포'(*)는 '완전히 잠긴 물속에서부터'라는 의미이기 보다 오히려 신체 어느 부분에 적용되는 단지 '물 안에서'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세례의 형식(세례, 침례)에 관심을 둔 것이기 보다 세례 예식이 모두 종결되고 예수께서 육지로 발을 내디디시는 순간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 하늘이 갈라짐 -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초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다'(*, 스키조, '찢다'는 뜻)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 '열다')를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우주적 전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 64:1의'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을 반영하고있다고 본다.

⭕ 성령이 비둘기같이...내려오심을 - 초대 교회 이단자들은 영원한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인격적으로 잠시 거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본 사건을그 논거로 채택하였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 주의'<Gnosticism> 참조). 후에도 성서 비평가들은 예수의 영원한 신성(神性)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Incanation)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견해를 인용하곤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세례시에 그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실 때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영원한 그리스도에게 본문에서 특별히 가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대선지자로서의 권위와 직무의 전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는 성령께서 예수에게 임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복종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눅 3:21). 한편 본문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통치와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사실은 공생애 시작에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기름 부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이 기름 부음에 관한 사실을 주장하셨기 때문이다(눅 4:18). 특별히 본문의 이 같은 장면은 구약 시 45:7;사 61:1 등에서 이미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예수께 대한 성령의 영원한 은사 부여를 보여 주고 있다.

⭕ 보시더니 -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곧 기도하셨는 데(눅 3:21) 바로 그 순간 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이때 이 기이한 현상은 자연계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supernatural appearance)으로서 그곳에 모인 우리들이 함께 목격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 경: [막1:1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 이는 분명 말라기 선지자 이후 단절되었던 계시의 맥을 잇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뜻한다. 랍비들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목소리의 울림', 곧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는 구별되는 '소리의 딸'이라는 하급 계시가 말라기선지자 이후에도 계속 전해져 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본문의 '하늘로서의 소리'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마 3:17 주석 참조). 한편 하늘에서 들려진 소리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의 즉위 개념(시 2:6)과 고난받는 주의 종의 개념(사 42:1)이 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마 3:17 주석 참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늘 소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바있다(1: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이다. 즉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됨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신다. 한편 레인(Lane,William L.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 58)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씀의 첫 구절("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은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을 보여 주며, 둘째 구절("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은 부정과거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역사상의 어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에 선택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 내 사랑하는 아들(*, 호 휘오스 무 호아가페토스). -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의 그 사랑하는 그 아들' 이라고 되어야한다. 여기에서는 정관사 '그'가 명사와 형용사에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어의(語義)를 점차로 높이며 강조하는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이렇듯 성부 하나님께서부터 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 지고한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가페토스(*)는 사랑의 최고 형식을 지시하는 말로서(Lenski)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고자 도성 인신(道成人身)하신 것이다(요 1:1,14).

⭕ 너를 기뻐하노라 -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사랑하는'이란 말의 이유도 아니며 귀결이나 결론적인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메사'(*)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역성경의 '내가 그를 아주 기뻐하노라(KJV, in whom I am well pleased)란 번역이나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되었다. 물론 이러한 문법구조가 영원한 현재에 관려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과거의 시상은 요단강변에서 성육신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선포의 증거로서 예수 위에 아버지의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이다.

성 경: [막1:1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광야에서의 시험]

⭕ 성령이...몰아내신지라 - 공관 복음의 세 기자들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음에 대하여 모두 기록하고 있다(마 4:1;눅 4:1). 여기서 '광야'란 성경 문학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결별된 곳, 또는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생각된다(사 13:21;마 12:43;계 18:2).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실제로 금식하셨던 광야가 과연 어디였던가에 대해서 의견이 구구하다. 즉 혹자(Alford)는 모세와 엘리야의 금식 장소였던 호렙산으로, 또는 외경 '히브리인의 복음'에서는 다볼산으로, 그리고 또 다른이는(De Wette)여리고 근처의 한 곳으로 보기도 한다. 그중에서 이곳이 세례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제일 마지막 견해를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을 확증하기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을 '콰란타니아'(Quarantania), 곧 예수의 40일 금식장소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세례와 시험 사건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특징적인 표현인 '유뒤스'(*, '즉시')를 사용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의 겸손하고도 강한 인류애의 마음을, 전혀 죄가 없으신 그분이 죄인된 자로서의 세례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신 것과 사단의 시험을 한시적으로나마 인정하신 이 두 가지 연속된 사건으로써 표출시키고 있다. 한편 본서의 강한 이미지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완곡한 동사를 사용하였다. 즉 그들은 이 시험 사건을 보고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서'(was ledby the Spirit '성령에 인도되어서', NIV) 광야로 나아갔음을 묘사한 것에 비해 마가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에크발에이'(*, '내쫓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됨)를 사용해서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의 이 기록은 전자의 두 기록보다 더욱 역동적이며 생생한 현장감(現場感)을 나타내 주고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협박과 강압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역동적인 이끄심에 대해 예수께서 적극적인 의지로써 호응하신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예수의 뜻과 성령의 뜻이 완전히 합치되어 있었으므로 장차 40일 금식 동안 사단과 더불어 싸울때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마 4:1-11;눅 4:1-13)

성 경: [막1:1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광야에서의 시험]

⭕ 사십 일을 계셔서 - 마가는 단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나 마태는 이 기간 동안 금식하셨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마4:2). 그리고 마가에 있어서는 시험의 종류도 언급되지 않고 사단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기사도 없다. 아마 그 이유는 예수의 사역 전체가 사단과의 대립으로 일관된 것이지, 40일간의 광야 생활에서 있었던 단 몇 가지 시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마가가 강조하기 원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마가의 복음서 전체에서 마가는 이 계속적인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이 '40일'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즉 이 40일은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때 그곳에서 유한 기일이며(출 34:28),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아 광야를 유랑한 기간이다(왕상 19:8). 또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의 시일도 40일이었다(행 1:3). 위에서 언급한 모세나 엘리야의 경우 40일의 기간은 그들의 사명 수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광야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40일' 기간의 전후(前後)를 한결같이 광야의 연단과 위험 속에 살아 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또 시험받으셨던 이 '40일간'의 의미는 그의 공생애 시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 사역과 관련되는 것으로 일종의 연단의 기간이자 공적 사역의 준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시험을 받으시며 - 이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는 '시도하다', '시험하다', '증거를 진술하다'라는 뜻으로서 인간을 실족케 하는 유혹(temptation)과 인간을 더욱 성숙케하는 하나님의 연단(test)이라는 이중적 의미를갖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이 '시험'은 그 양자의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실로 이 시험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집요한 유혹인 동시에, 예수께서 시험과 고난받는 온 인류의 모범이시자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실 대제사장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이시며 또한 그 같은 자격을 공적으로 선언하시기 위한 일종의 하나님의 뜻에 따른 연단이었던 것이다(히 2:18;4:15). 이 시험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마 4:1-11;눅 4:1-13을 참조하라.

⭕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 이는 단적으로 영전(靈戰)을 치르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인간 관계를 단절하신 채 철저히 홀로 되셔서 고독에 찬 역경을 감래하고 계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당시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하이에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한다. 진정 예수는 내적이고 외적인 공포와 고독 그리고 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대하심으로 더욱 큰 시험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받으신 장소는 첫 사람 아담이 시험받은 낙원(창 3장)과 정반대가 되는 위험 천만스러운 현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함으로 징벌과 사망을 받았던 바로 이 광야에서 예수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다.

⭕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 모든 천사들의 주된 임무는 예수와 구원얻을 모든 자들을 섬기는데 있다(히 1:14). 이 천사들이 예수께 수종든 때에 관해서는 마 4:11에 나와있는 대로 예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후였다. 성경상에서는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종들었는지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하늘로부터 전해진 영적 위로를 전달하고 또 40일 동안 금식하시느라고 주리신 예수께 육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단의 시험을 물리쳐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유혹의 떡(마 4:3) 대신에 천사가 공급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셨고 그릇된 공명심(마4:5, 6) 대신에 영광스런 영적 존재들의 보필을 받으셨으며 또 헛된 영광(마 4:8,9)대신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며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게 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사단의 왕국을 파멸시키는 실제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으셨다. 마가복음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여기서 일단락된다.

성 경: [막1:1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사역의 시작]

⭕ 요한이 잡힌 후 - '잡힌'에 해당하는 '파라도데나이'(*)는 제 1 과거 수동형으로 '넘겨졌다', '양도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세례 요한이 그를 시기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헤롯의 군병들에 의해 무참히 체포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만일 마가가 어떤 역사적 순서보다 신학적인 면에 좀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면(사실 마가는 6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언급한다). 여기서의 '잡힌'것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가는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에 든든한 고리를 엮어두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두 사람은 모두 불의한 자의 손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최후를 맞는다. 따라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막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십자가의 짙은 피내음이 풍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의로운 요한이 잡혔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의 불의(不義)한 시대상을 반영해 준다. 예수는 나중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가 바로 그라고 평하셨다(마 11:11). 그러나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지 그의 위대성을 인정받고 들림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마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공히 예수의 공생애 시작은 세례 요한의 투옥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마 4:12;눅 3:19, 20). 즉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요한의 사역이 종결된 후 당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마가는 선구자 요한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임무를 완수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생애에 있어서 공생애 초기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본서의 기자 마가의 시각은 그리스도의 전체적 생애를 설명적으로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날까지 인간들을 위해 어떻게 사역해 오셨는가를 부각시켜 종으로서의 예수의 진면목을 밝히려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처럼 공생애 초기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을 생략하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저작 의도에 따른 결과라 할 것이다(본서 서론 참조). 한편 광야 시험과 요한의 잡힌 사건 중간에 발생한 내용에 대해서는 요1:35-4:42를 참조하라.

⭕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 그리스도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오신 때는 세례요한이 잡힌 사건과 관련이 있다(요 4:1-3, 43 주석 참조).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사실과,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임을 알게 되셨을때,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셨다(특히 가버나움을 중심함, 마 4:13). 예수께서는 자신이 유대지방에서 그처럼 크게 알려진다면 그것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급기야는 그들의 증오심으로 말미암아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적절(適切)한 죽음의 순간이 오는 즉시 자기 목숨을 버리실 준비를 갖추고 계셨지만(요10:11,15,18;13:1) 아직 그 때(*, 호 카이로스)는 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갈릴리 지방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우리(cage) 안으로 인도해 들여야 할 잃은 양들이 많이 있었다(요 10:16).

⭕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내내 전파하신 메시지의 주내용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다른 사본에는 이를 '천국 복음'이라 일컫기도 한다(마4:23). 여기서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쏜'(*)은 현재 능동태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그 행위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복음의 원천(주어소유격)이시며 더불어 복음의 대상(목적 소유격)이심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또 이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실로 복음은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들어볼 최고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과 구원 및 영원한 복락을 그 주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5:17).

성 경: [막1:1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사역의 시작]

⭕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엘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 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R.C. Trench).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특히 본문의 이 표현은 사 9:1,2의 말씀이 성취될 시간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엄숙한 포고령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단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초월적인 주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과 외경에는 직접 쓰이고 있지 않으나 그 사상은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다(출 15:18 ;시 29:10 ;사 43:15). 이런 사상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하나님의 왕권은 현재적 실재이면서(하나님은 현재 당신의 주권으로 통치하심) 더불어 종말적 완성임을 (하나님은 최후의 날 당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것이다)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그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가 상존함을 보게 된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 초두에그 나라가 '가까왔다'(15절)고 선포한 데 대해 바알세불 논쟁시에는 그 나라가 '이미'임하였다고(마 12:28;눅 11:20) 말씀하신 바 있다. 즉 예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지배가 이 땅에 임하신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의 또 다른 가르침에서는 그 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인 것임을 보게 된다(마 8:11;20:21).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tension) 관계의 해소는 어느 한쪽을 거부함으로써 이뤄지지는 않는다. 사실 그에 대한 양극단의 논리인 실현된 종말론은 그 나라의 미래성을, 철저 종말론은그 나라의 현재성을 각각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함축한 개념이다( Bruce Metzger, The New Testament, p. 148 ). 어쨌든 본절에서는 그 나라의 도래가 대단히 강조되어 있다. 즉 그 나라는 공간적으로 (예수 안에서), 또 시간적으로(그 나라는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가까이 왔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가까와진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Lane). 한편 마태복음에는 일반적으로 '천국'으로 되어 있으나(마 3:2;4:17;5:3, 10,19, 20등) 마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 사실에(4:11, 26, 30;9:1, 47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미상으로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미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음의 네 가지 개념들에 주목할 필여가 있다. (1)하나님의 왕권, 통치권혹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이라는 개념이다(마 6:10;눅 17:21).(2)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개념이다(눅 18:30). (3)교회,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의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거의 동일한 것이다(마 16:18, 19). (4) 구속받은 우주, 곧 모든 영광으로 가득찬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 이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의미한다(마 25:34). 좀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이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과 동일하다(4절;마 3:2).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복음은 동일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 예비자였다. 여기서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대면하고 있는 자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이자 구원의 핵심적 요소이다. 특히 이 중에서 '회개'는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요,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성자 예수와의 긴밀한 신뢰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이 양자중 어느 하나의 결핍은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우리 말의 '회개하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헬라어 '메타노에이테'(*)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한일에 대하여는 슬퍼하는 한편, 앞을 바라볼 것도 의미하고 있다. 즉 그것은 '변하여새 사람이 될 것',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완전한 생활로의 전환'까지를 모두 내포한 포괄적 의미이다.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고 덧붙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회개의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면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즉 '믿으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메테'(*)는 앞에 나온 '메타노에이테'와 동시적으로 작용을 하며 함께 역사한다(Lenski). 즉 진정한 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본문에 나타난 두 동사는 미완료 동사로서 계속적인 현재를 의미하며, 전자가 계속될 때 후자로 계속됨을 나타낸다.

성 경: [막1:1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갈릴리 해변 - 갈릴리 바다는 보통의 담수호(淡水湖) 중의 하나이지만 성경에서는 흔히 바다로 불리우고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 '게네사렛 호수'(눅 5:1) 또는 '디베랴바다'(요 6:1, 23;21:1)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아름 다운 바다는 길이 약 20km, 너비 약 10km, 수면은 해발-240m정도이며, 가장 깊은 곳이 약 50m가량 된다고 한다. 이 곳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업이 번창했다. 그리고 이 바다 서쪽과 북쪽 해변에는 많은 읍과 어촌들이 밀집해 있었다(Josephus,Wars. III, x).

⭕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 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에 있어서 최초로 이 어촌을 '지나가시다가'(따라 걸어 가시다가) 갈릴리 어부 출신 형제인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어부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 형제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요단강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이 메시야라고 가르쳐 준 세례 요한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요 1:35-39).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소개하였다(요 1:29). 따라서 그들 두 형제는 그때부터 예수를 따라다녔으며 인격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인격적 관심의 결과는 그들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게 된다(3:13;마 10:1 등).

⭕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 먼저 여기 제시된 '그물'(*, 암피블레스트론)은 예수께서 비유 중에 흔히 거론하셨던 큰 그물, 즉 '예인망'(*, 사게네)이 아니라 손 그물, 즉 '투망'(投網)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안드레 형제의 모습을 매우 생동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이 손 그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도중에 예수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사실을 현장감 있게 긴박감을 더하여 기술해 주고 있다.

성 경: [막1:1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나를 따라 오너라(*, 듀테 오피소 무) - 원문에서'오너라'(듀테)는 말앞에 '이리로...' 또는 '다라'(오피스)라는 부사어가 첨가되어 있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가 이때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리로' 혹은 '이 새로운 방향으로'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calling)에는 '...되게하리라'(*, 포이에소)는 목적이 수반되어 있다. 즉 그분의 부르심은 허황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대한 주역의 역할을 맡기시리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역의 위업을 맡게 될 것이었다.

⭕ 사람을 낚는 어부 - 주님의 부르심은 부름받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기 보다 오히려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었다. 실로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들을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해내어야 하는 긴급한 임무를 맡기시기 위함이었으며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즉각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심판과 관련해서 '낚는다'는 말이 사용된 경우를 볼 수 있다(렘 16:16겔29:4, 5;38:4;암 4:2). 한편 본문의 '사람'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단수형으로 나와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나 흠정역에서는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안드로포이)이란 이 말은 단순히 갈릴리 주변 사람들이나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범 인류적이고 보편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Lenski).

성 경: [막1:1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곧 그물을 버려 두고 - 여기에서 '곧'(*, 유뒤스)이란 마가의 표현은 긴급하고도 생생한 장면을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시몬과 그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에는 종말론적인 긴박성(緊迫性)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모든 삶을 과감히 청산(淸算)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진정 어부들에게 있어서 '그물'은 배와 더불어 그들의 생존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버리는 데에는 과감한 의지적 결단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한편 두제자의 이 같은 즉각적 순종의 배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의 절대적 능력과 권위이다. 실로 그 분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은 순종할수밖에 없는 것이다(빌 2:10).

⭕ 좇으니라 - 헬라어 '아콜루데인'(*)은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의미상으로는 (1)예수를 따르는 것, (2)예수의 부르심에 자원하여 순복하는 것, (3)예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뜻한다(8:34;마 4:25;9:38 등). 이 말에 대한 문자적인 뜻을 세분하여 살펴보자면 '아콜루데인'은 접두어 '아'(*, 여기서는 '일치', '닮음'이란 의미)와 '길'이란 뜻의 '켈류도스'(*)의 합성어로서,'같은 길을 함께 가다'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선포에 대한 증인으로서 주님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성 경: [막1:1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조금 더(*, 올리곤) - 이 부사는 마가의 세밀하고도 정확한 사건 묘사 기법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요한 -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 다음으로 중요한 제자들로서 이들의 어머니는 살로메였다(마 10:2 참조). 한편 여기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이름의 서열상에 있어서 야고보가 언제나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형으로 보인다. 후에 그는 12사도 가운데 최초로 순교하게 되는데(행 12:2), 이에 비해 요한은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교회를 파수(把守)하고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등 여러 서신들을 기록하였다. 한편 이들은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에 들어갔으며 사도로서의 훈련을 받게 된것이다. 사실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소지(素地)는 얼마든지 있었다. 즉 그들은 마 13:55;요 6:42 등의 경우처럼 그들도 "이는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왜 우리는 이 사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거부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을 더 큰 근거가 될 수 있었다(요 19:25). 실로 예수와 이종 사촌간이었던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의구심을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예수의 형제와 친척들은 심지어 예수를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았던가(3:21). 이러한 불리한 가정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위엄과 능력과 사랑의 부르심에 조금도 주저않고 따라나섰다.

⭕ 그물을 깁는데 - 베도로와 안드레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와중에 부름받은 것과 짝을 이루기나 하듯이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 출어(出漁)를 위해 그물을 수선(修繕)하고 있던 상황에서 부름을 받는다. 실로 이것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마가의 묘사 기법이다. 즉 그들은 어떤 종교적 분위기나 헌신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에 충실하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보통 저녁 이후시간에 고기를 잡고 낮에는 그물 수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본문을 베드로 형제의 소명받음이 있은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Bultman).

성 경: [막1:2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처음 네 제자를 부르심]

⭕ 곧 부르시니(*, 카이유데오스에칼레센) - 예수께서는 마치 단거리 육상 선수의 그것처럼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긴급하게 두 제자를 부르셨다. 실로 예수의 선교사역은 이처럼 신속하고도 민첩하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당신께서 항상 다가올 종말에 대한 기대와 예비를 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 삯군들과 함께...버려두고 - '삯군들'에 대한 언급은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서 '삯군'(*, 미스디오스)이란 임금(賃金)을 받고 고용된 일꾼들을 가리킨다. 적어도 이러한 삯군들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따라서 세베대의 가정이 비교적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삯군들이 있었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주저함없이 그들에게 아버지 돕는 일을 맡기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예수의 부르심에 의해 이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온전한 헌신의 길에 나섰음에 틀림없다. 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떠남의 결단이 요구된다(창 12:1-3). 이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마 19:29).

성 경: [막1:2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 '저희'라는 말이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들어가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이스포류온타이'(*)가 삼인칭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들은 예수와 예수께 선택된 처음 네제자를 가리킨다(29절). 한편 '나훔의 동네'란 뜻을 지닌 '가버나움'은 호수가에 위치해 있었고, 제자들이 부름받은 갈릴리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특히 이곳은 다메섹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要地)이자 세관이 있던 곳으로서(2:14) 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이곳은 오늘날 갈릴리 해안 서북쪽에 있는 텔 훔(TellHum)으로 확인되고 있다(마 4:13 주석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 이곳을 공생애 사역의 주활동 무대로 삼으신 것 가운데 한 이유는 바로 이곳이 세리 마태를 위시한 다섯 제자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 안식일에 -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바로이때 안식일 예배 중 첫번째 예배가 진행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때 안식일이 되기전 금요일에 이미 회당 안으로 들어가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 회당에...가르치시매 -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초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여기 '회당'(Synagogue)이라는 말은 한 지방에 모인 회중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이들 회중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회당의 기원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율법을 연구하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회당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유대인이 살던 곳이면 헬라 세계 어디서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회당은 유대교를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켜 준 제도가 되었으며 기독교 초창기에 복음도 이 회당을 근거지로 삼아 전파되어 나갔다(마 4:23;눅 4:16-30 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 회당에 들어가시자마자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묘사하는 '에디다스켄'(*)은 미완료 동사로서 매 안식일이면 예수께서이곳에 나오셔서 가르쳤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당시 가버나움 회당은 활짝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이곳을 초창기 복음 전파의 근거지로 삼고 계속적으로 가르치셨다. 물론 이때 '회당의 자유'는 회당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방문 교사들 또는 권위 있는 선생들에게 허용되는데, 그들은 주로 그 회당에서 율법이나 선지서를 읽으며 그 읽은 바를 풀이하고 설교하기도 했다. 한편 그때 회당에서 이루어지던 의식은 오늘날의 예배 의식과 비슷한 것으로서 기도, 찬양, 성경 봉독, 그리고 랍비(Rabbi)나 이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 의한 설교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성 경: [막1:2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레쏜토'(*)는 '밖으로'를 뜻하는 '에크'(*)와 '친다'를 뜻하는 '플레쏘'(*)의 합성어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움과 경이에 가득차서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다'를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그들이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도 이렇게 표현되었다(마 7:28). 한편 청중들 편에서 볼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토록 놀랍게 하였던가? 이에 대해 마가는 그 '교훈'(*, 디다케)에 놀랐다고 보고한다. 이 '교훈'은 능동적 측면에서 가르치시는 행위 또는 방법을, 수동적 측면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각각 의미하는데, 본문은 이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 실로 목수 출신이었던 그가(6:3)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을까하는 것이 그들의 깊은 의문점이었으리라.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마가는 '교훈'이란 말에 덧붙여 특별한 이유, 곧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는 설명구를 달았다(마7:28,29). 다음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방법과 내용및 서기관들의 가르치는 방법과 내용 사이의 차이점들이다. (1)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에(요 14:6;18:37) 반해 서기관들의 설교는 대부분이 와전(訛傳)된 것이었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思辯的)인 것들이었다. (2)그리스도께서는 중대한 의미가 담긴 문제들, 곧 생명과 사망 그리고 영원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하셨지만 서기관들은 하찮은 문제들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였다(마 23:23;눅 11:42). (3)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는 내용에는 체계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탈무드(Talmud)경이 그렇듯이 서기관들은 자주 중언부언(重言復言)하였다(마 6:7). (4)그리스도께서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례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지만 서기관들의 설교는 고류하고 형식적인데만 얽매여 있었으므로 메마른 심령들의 갈급함을 채워줄 수 없었다. (5)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요, 그들의 영원한 축복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자로서 말씀하셨으며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6)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본 구절에 진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전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실행 능력을 겸비한 탁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요 8: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곧 아버지의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다. 그러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그들의 스승들의 유전에서 온 것으로서 고작 스승들의 교훈을 인용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었다(7:8,13;마 15:2,3). 그들은 마치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퍼내려고 헛되이 노력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생수의 근원'(렘 2:13)이 되시어 자신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셨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기르침과 당시 종교지도자를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의 차이는 근본적인 면에서 상이(相異)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듣고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성 경: [막1:2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마침(*, 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으로 회당 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이다.

⭕ 더러운 귀신(*,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본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8:27;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 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성 경: [막1:2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나사렛 예수여 - 문자적으로 '나사렛 사람' 혹은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서, 회당에 들어왔던 귀신은 예수에 대하여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큰 소리로 떠들어 대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따라서 천한 신분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術策)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반 사람들의 통념 속에서는 '나사렛'이라고 하면 경멸의 뜻으로 인식되어졌다. 왜냐하면 그곳은 종교, 문화적으로 선민적 특권을 누리던 예루살렘 및 유대 지경과는 동떨어진 이방의 초라한 고을이었기 때문이다(사 9:1,2). 이런 관점에서 심지어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언급하셨던 나다나엘까지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였던 것이다(요 1:46,47).

⭕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이 말은 귀신이 그 사로잡은 자의 성대(聲帶)와 입술을 사용하여 한 말로서 의미상으로는 '당신이 왜 우리를 괴롭히려 합니까'라는 뜻이다(마 8:29). 여기에서 귀신이 말한 '우리'란 복수형의 칭호에 대해 (1)말하는 사람과 귀신을 함께 일컫는 이중 인격을 함의한 말로 보는 학자도 있고(Robertson), (2)이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그의 나머지 동료 귀신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 W. Wessel). 이중 예수의 신성을 직시하고 또 그분에 대한 두려움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더 적절할 것이다. 실로 이 귀신은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지금 자신에게 닥칠 일이 다른 귀신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였던 것이다. 즉 더러운 귀신은 예수의 일을 방해하려 했으나 예수 앞에서 예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귀신은 자기뿐 아니라 악령의 세계 전체에 닥친 파멸과 심판의 위기를 직감하고 공포와 경악에 휩싸이고 말았다.

⭕ 하나님의 거룩한 자(*, 호하기오스 투 데우) - 이는 23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 프뉴마티 아카다르토)과 대조되는 말로서 원래는 하나님께 구별된 일꾼들, 선지자들을 가리켰으나 본문에서는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가리킨다. 이와 함께 예수에 대한 귀신들의 표현을 살펴보면 마 8:2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Most High God)로 나타나는데, 이것이 모두 귀신이 어떻게든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자기방어적 측면에서 한 고백으로서 그 모두가 진실한 진술이었다는 데 주목을 끌게 한다. 이 귀신은 예수의 '거룩한'(*, 호 하기오스) 신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불결한'(혹은 '더러운)(*, 아카다르토) 본성을 갖고 있는 자신들은 그 앞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에 의해 이러한 용어가 무의식 중에 실토(實吐)되고 만 것이다(34절 주석 참조).

성 경: [막1:2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 예수께서 귀신을 상대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꾸짖는 것'이다. 이 '꾸짖다'(*, 에피티마오)는 말은 '말로써 엄하게 경고하다'는 뜻 외에 '벌하다','책망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그 꾸짖음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 실로 귀신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협이나 회유(懷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다.

⭕ 잠잠하고...나오라 - 예수께서는 완전히 타락한 귀신에게서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한 증거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귀신과 사단은 이 거룩한 증거에 끼어들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잠잠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모데티'(*)는 '피모오'(*)의 부정 과거 2인칭 단수 명령형으로 원뜻은 '입에 자갈을 물리라'로서 더 이상 소리치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소에게처럼 입에 망을 덧씌울 것이라'는 말로서 번역하여 더욱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오라'는 명령 역시 더 이상 지체치 말고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엄한 명령인 것이다.

성 경: [막1:2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스파락산 아우톤) - 이것은 마치 위경련을 일으키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을 치게 하고'라는 보다 강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흠정역(KJV)에서는 이 구절을 '그 때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상하게 하고'(And when the unclean spirit had torn him)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원문에 있는 경련으로 보아야 할 간질병(마 17:15)에 대한 언급도 없음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에 보다 근접해 있다.어쨌든 귀신(사단)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신은 마지막 쫓겨나가는 순간까지도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것이 마귀의 본성인 것이다.

⭕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큰 소리'(*, 포네 메갈레)란 어떤 크나큰 충격에 의해 강렬한 음성으로 내뱉는 비명을 가리킨다. 이는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이기 이전에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만 하는 귀신의 최후의 일성(一聲)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그 귀신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가운데 귀신 축출(exorcism) 기사를 첫번째로 기록하였다. 이 이적의 기록은 마가의 복음서 기록 의도와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예수의 교훈(22절)과 이적이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한편 교회사가 하르낙(Harnack)은 이 귀신 축출이 A.D.3C까지 초대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한 개인의 치유뿐 아니라 사귀(邪鬼)로 인한 공포에 휩싸였던 한 사회를 치유하는 크나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진정 이것은 귀신의 왕국을 멸절하시고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예수의 권능에 찬 역사의 단면이 아닌가(9:14-29, 주제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참조).

성 경: [막1:2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다 놀라 - 마가는 회당에서 일어난 생생한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또 하나의 극적인 동사를 사용하였다. '다 놀라',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담베데산'(*)은 수동형이지만 능동의 뜻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매우 충격적으로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놀란 이유는 그들 모두 이제까지 경험해 왔던 교훈 및 이적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즉 22절에서 '뭇 사람들이 놀란'것은 종래의 서기관들의 틀에 박힌 고루한 가르침과는 판이한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가르치심으로 인한 것이었고, 본 구절에서 '다 놀란'것은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명령에 귀신이 즉시 쫓겨난 사실로 인한 것이었다.

⭕ 서로 물어 가로되...어찜이뇨 - 차분한 어조로 '서로 말하여'(눅 4:36)라고 기록한 누가의 보고보다는 좀더 긴장되고 호기심이 충천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 하는 어구(語句)이다.

⭕ 새 교훈(*, 디다케 카이네) - 주님의 새로운 가르치심과 그로 인한 뭇 사람들의 놀라움은 계속 되었다. 실로 예수의 가르침은 진부하고 장황한 랍비의 교훈과는 완전히 판이한 것이었으며, 이는 마치 새봄의 꽃내음처럼 신선하고 '새로운'(*, 카이네) 가르치심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 '새로운'(*, 네오스)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을 말한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새 교훈'은 고루한 가르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음을 연상케 한다. 특히 이 '새 교훈'은 '권세있는'(*, 카트 엑수시안) 교훈으로서 사람들의 심령에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새로운 창을 열어 진리를 발견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교훈이었다. 한편 보통 대부분의 독법(讀法)에서는 '권위있는'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읽는다.

성 경: [막1:2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교훈과 귀신 축출]

⭕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 예수 사역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가버나움을 뛰어 넘어 갈릴리 온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누가의 보고와 관련시켜 본 장명을 연상한다면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도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눅 4:37 주석 참조). 한편 여기 제시된 '갈릴리 사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페리코론 테스 갈릴라이아스'(*)에 대해서 '갈릴리'가 소유격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비단 갈릴리 지역뿐만 아니라 고보다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William L.Lane)고 보는 이도 있다(마 4:24). 이처럼 예수의 소문은 가히 폭발적일 만큼 갈릴리 전역에 퍼져나갔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경: [막1:2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 회당에서 나와 - 앞 사건과의 연속성과 예수 사역의 생동감 넘치는 지속성을 강조한 마가의 표현 기법 중 하나이다.

⭕ 시몬과 안드레의 집 - 예수와 그의 네 제자들은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직행했다(마 8:14;눅 4:38). 베드로는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30절;고전 9:5) 그의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집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시몬의 형제 안드레도 베드로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했을 것이다. 한편 이 집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이 초청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마도 베드로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았다. 이쨌든 이곳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예수께서 선교 여행을 하시고 나서 이곳으로 돌아오셨던 것이다.

성 경: [막1:3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 시몬의 장모 -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서 그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분명코 결혼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말이다. 고전 9:5은 베드로의 부인이 그 당시 살아있어서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동행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강조함은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인정할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제들의 독신주의(celibacy)는 베드로가 독신이었음을 가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도 어긋날 뿐만아니라(창 1:27) 너무 인위적인 독신주의를 고집함으로 인해 또다른 우월 의식과 비신앙적인 편협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초대 교회 시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베드로와 빌립이 자녀를 낳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특히 베드로가 전도할 때에는 항상 그의 아내를 대동(帶同)했다고 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마찬가지로그의 아내도 순교당하였는데, 그 아내가 베드로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어갔을 때 베드로는 아내를 향해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라고 권면했다고 전한다(Clement of Alex.,Storm. 3:6). 그리고 또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의 아내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 또는 페페튜아(Perpetua)라고 전한다.

⭕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 마가는 단지 시몬의 장모가 병들어 누워있는 사실만을 언급하지만 의사 출신이었던 누가는 그녀가 '중한 열병'(눅 4:38)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녀의 병명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습한 기후의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그 지방에서 흔히 발병하던 풍토병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웠는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이토'(*)가 과거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 병이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된 만성적 질병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 그녀의 열병이 아무리 장기적이었고 또 극심했다고 할지라도 만병의 대 의사이신 예수께서 못 고치실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성 경: [막1:3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예수께서 병을 치유하실 때 취하시는 특징적인 행동으로서(41절;5:41) 환자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누가는 이 장면을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눅 4:39), 이는 의사 출신인 누가가 그 열병의 원인을 사단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눅 13:16)

⭕ 열병이 떠나고...수종드니라 - '떠나고'에 해당하는 '아페켄'(*)은 부정 과거형으로서 이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즉각적으로 단번에 나은 사실을 가리키고, '수종드니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계속하여 수종드는 현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같은 확실한 구원의 확증을 받은 자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성 경: [막1:3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 저물어 해 질 때에 -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토요일 오후,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운반해 와 예수께 고침받기를 원하였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으며, 이 시간내에서는 일체의 노동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렘 17:21). 특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정신은 배격(排擊)한 채 그 율법의 조목만을 지키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든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 모든 병자...데려오니 - 폭발적인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져나가자 '모든(각양)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인 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특별히 본문의 '데려오니'(*, 에페론)는 미완료 시제로서 병자들을 계속 연이어서 데려왔음을 보여 준다. 한편 마가는 누가의 경유처럼 각 환자들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다만 '모든'(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그 어떤 질병도, 또 아무리 많은 환자라도 다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막1:3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 온 동네가...모였더라 - 마태와 누가는 병자들의 큰 무리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지만(마 8:16;눅 4:40), 마가는 온 동네, 즉 가버나움 지역의 무리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시간은 대충 안식일이 끝나는 일몰 직후(日沒直後)라고 보아야 한다. 그날 아침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이적으로 고치신 사실이 소문으로 신속히 퍼져 군중들은 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 계신 곳으로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33절은 특별히 생동감을 더해 주며, 이 동사의 시제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수효(數爻)가 늘어가고 있음을 일러 준다. 한편 본문의 '문 앞'이란 베드로의 집 문 앞을 가리키며 바로 이 문을 통과한 자들, 곧 문을 통과하여 예수를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회복과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성 경: [막1:3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 각색 병든 많은 사람 - 이는 예수께 나아온 병자들의 양상을 보여 주는 말로써 그 병증이 매우 다양했음을 알려주며,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대별(大別)하면 귀신 축출, 질병 치유, 죽은 자를 살림, 피조계(被造界)를 당신의 의지로 다스림 등이 있으나 특히 마가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귀신 축출이었다.

⭕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영적 감지력(感知力)이 뛰어난 귀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4:41). 사실 귀신들은지적인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마 1:24), 자신의 운명(마 8:29) 그리고 구원의 계획(약 2:19) 등을 알았으며, 그들 나름대로 잘 발달된 지적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딤전 4:1-3). 이 사실은 이미 24절에서도 잠깐 밝힌 바 있다.

⭕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실로 귀신들도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다. 그런 관점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에게 말을 못하게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귀신의 말을 허용 혹은 묵과하셨다면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24절에서와 같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서슴없이 외쳐대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의 신적인 존재에 대해 인지(認知)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나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포하는 것을 금지시키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악한 존재에 의해 그 신분이 밝혀지기전에 먼저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가를, 즉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오직 구원받은 자기의 백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온 천하에 전파되기를 원하셨다(16:15;행 1:8).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존재를 공개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침묵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막1:3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새벽 오히려 미명에 -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교훈과 치유 사역으로 몸이 퍽 고단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가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엔뉘카 리안'(*)을 흠정역에서는 '날이 밝기 이전'(agreat while before day)이라 하였고, NIV역에서는 '아직 어두울 때'(while it wasstill dark)로 번역하고 있다. 이때는 아마도 오늘날의 새벽 3-4시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나가셨을 뿐 아니라 그 성읍에서도 나가셔서 갈릴리 가버나움 교외의 광야 지대로 추정되는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셨던 것이다. 본서에는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같은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당신의 사역 중 매우 중대한 일을 눈 앞에 두었음을 볼 수있다. 지금 예수는 갈릴리 전역에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서 그 어떤 준비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내밀한 교제를 통한 영적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한적한 곳에, 이른 시간에 홀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 기도하시더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토'(*)는 미완료 시제로서 예수께서 기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열심히 기도하셨음을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사역,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완수해야만 하는 갈릴리 사역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요구하셨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기도의 모본(模本)을 통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는 세례 받으실 때(눅 3:21), 열 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눅 6:12), 오병 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와그 일 후에(6:41,46),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에(눅 9:18), 변화산에 계실 때에(눅 9: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도 오라"고 하신 사랑의 초청 직전에(마 11:25-30),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 부인하기 전 그를 위하여서(눅22:32),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날 밤에(요 1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 35,36, 39), 십자가 위에서(눅 23:34), 그리고 그의 부활 후(눅 24:30)에 기도하셨다. 위의 기도의 경우들은 예수의 기도 생활이 얼마나 진지했으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실로 기도는 그분이 지니신 능력의 원천이요 또한 영적 양식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막1:3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뒤를 따라가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디옥산'(*)은 단순히 추종(追從)하는 것이 아닌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샅샅이 뒤지고 성가실 정도로 찾고 또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증거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가가 '제자들'(*, 마데타이)이란 말를 쓰지 않고 '시몬과 및 그와 함께있는 자들'이라 묘사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제자들처럼 행동치 못하고 단지 무지한 인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막1:3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있었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를 찾아 뵙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예수의 외적인 능력, 곧 병 고치는 능력에 혹(惑)하여 열광적으로 예수를 찾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기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실로 그들은 아직 온전한 메시야관을확립하지 못한 채 정치적이고 인기에 영합(迎合)하는 그릇된 메시야관(8:27-9:1)에 집착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막1:3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각 동리와 마을들로 다니시며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시고자 결단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이적이나 일으켜 군중들에게 인기나 얻고 세상적인 부귀 영화나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셨다(마 4:6-10). 그의 목적은, 비록 이세상에서는 머리 들곳조차 없을지언정(마 8:20;눅 9:58) 고난의 길을 택하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마을들'(*, 코모폴레이스)이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규모를 갖춘 마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 갈릴리 상류 지역에는 수천명을 군락(郡落)으로 하는 약 200여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수는 이 200여개의 마을을 다 돌아다니시고자 하셨다기 보다 가버나움 근방의 여러 마을들을 돌으시며 전도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지 단지 기적이나 베풀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다. 물론 병고침과 귀신 축출은 중요한 일이지만(39절) 그것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했다. 실로 마가가 그의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를 기적 베푸는 자로서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단적 기독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면 분명히 본문의 말씀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왔노라'(*, 엑세르돈)는 말은 '...에서 나아왔다'는 뜻으로서 베드로의 집에서 기도하러 광야로 나아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고(Mayer),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나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Bengel). 그런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4:43)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에 왔노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성 경: [막1:3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 이는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전도 여행을 요약한 말이다. 사실 마가의 '온 갈릴리'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기보다 매우 방대한 지역을 활보(闊步)하였음을 강조하는 말로서, 예수의 전도 여행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여러 회당 - 그 역사의 시작이 포로 시대로 믿어지는 이 회당은(21절 주석 참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는 매우 긴요(緊要)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The Jerusalem Talmud)의 한 구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때(A.D.70)에 팔레스틴에는 480여개의 회당이 산재(散在)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의 초창기 사역도 이 회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눅 4:16-30,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여러 회당'에서 설교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현재 남아있는 회당들의 옛 터를 보면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갈릴리 지방의 회당들은 남쪽을, 예루살렘 남쪽의 회당들은 북쪽을, 예루살렘 서편의 회당들은 동편을 각각 향하고 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그가 어느 회당에 들어가시든지 간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동안에는 항상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다. 주님은 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이다(빌 2:8).

성 경: [막1:4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먼저 본문 이하부분(40-45절)과 바로 앞 부분의 기사는 접속사 '카이'(*, '그리고')로 연결되었으며, 또 뒤따라 나오는 기사(2:1-3:6) 역시 '카이'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40-45절 부분은 1:21-39과 2:1-3:6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마가복음에서 이 부분이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단위임이 틀림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본문은 갈릴리 전도 여행 도중에 발생한 것임이 분명하다.

⭕ 문둥병자 - 문둥병(혹은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박탈당한 채 그들의 공동체 밖으로 소외되었다. 한편 성경에서의 문둥병이라는 말은 문둥병(leprocy)을 비롯한 광범위한 유형의 심한 피부병을 지칭하는 병명으로 쓰였다. 이는 흔히 의학 용어로 한센씨 병(Hansen disease)이라 일컬어지는 나병에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라 피부와 모발의 이상 등에도 사용되던 피부 질환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피부병이든간에 그것이 일단 문둥병으로 단정지어지면 그 사람은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한다. 율법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여 육체적 고통과 함께 대사회적 고통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운 질병이다.

⭕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 율법에 의하면 사회 활동이나 대인 접촉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둥병자는 율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주께 나아오는 자의 담대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 예수께 경배했다. 이에 대해 누가는 '엎드려'(눅 5:12)라고 했으며,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각각 묘사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진정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전부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경의(敬意)를 표했던 것이다(시10:17;약 4:6).

⭕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문둥병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히 고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신앙 지식(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무엇이든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이리만큼 놀라왔다. 주께 모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간구자의 참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 문둥병자는 예수께 '고침'을 바라기보다 '깨꿋케됨'을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둥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법상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레 13:1-3).

성 경: [막1:4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민망히 여기사(*, 스플랑크니조마이;filled with compassion,NIV) - 그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동인(動因)이 묘사되고 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예수의 문둥병자를 향하신 긍휼과 사랑과 동정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이다(히 4:15). 한편 본문의 '민망히 여기사'라는 독법(讀法)을 일부 사본들에서는 '분하게 여기사'라는 의미의 '오르기스데이스'(*)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변용에 대해 혹자(W. W. Wessel)는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말을 쓰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에 의해 '오르기스데이스' 독법 대신에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독법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하게 된다해도 그 더러운 병이 마귀의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로하여금 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삼을수 있다. 즉 예수의 분냄은 병자나 그가 앓고 있는 병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파멸로 이끈 사단에게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사단은 또 한번의 충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사안이다. 그러나 비록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한다하더라도 그 병자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 연민의 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 손을 내밀어 -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는데, 이는 모세법에 근거해 볼 때 부정을 자초(自招)하는 일이었다(레 13:45, 46). 사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看做)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행위는 초월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예수는 인류 구속의 메시지를 단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시고,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는 두려움과 그릇된 관념을 실현해 보이셨다. 실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고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시며 병을 고쳐주셨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마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그리고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기도 하였다(3:10;5:27-31;6:56). 이처럼 어느 편에서 손을 대었든지간에 모두 병이 낳았다. 즉 분명히 그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치료의 능력이 구주에게서 나와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하여졌던 것이다(5:30;눅 8:46).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마술이 아니었다. 또한 그 치료의 능력은 결코 주님의 손가락이나 옷자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히 4:15) 그 손으로 병자를 만지실 때 치료의 능력은 발하여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시는 구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로 이뤄진것이었다.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응답이었다(원하시면 - 원하노니,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깨끗함을 받으라.) 사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너무도 적절한 응답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그 문둥병자에게 '더 큰 믿음과 온전한 영혼'까지 덧붙여 응답해 주신 것이다.

성 경: [막1:4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곧...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 문둥병 증세가 약간의 차도(差度)가 생긴 것도, 일시적인 회복도 아닌 영원히 그 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이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복음서의 각 평행구 중에 마 8:3은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눅5:13은 '문둥병이 곧 떠나가니라'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곧 문둥병이...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두 가지 면을 다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장모는 앓던 열병이 완전히 회복되는데 다음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마 8:14, 15). 중풍병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침상를 들고 걸어 나갔다(눅 5:24, 25). 한편 손 마른 사람도 그 자리에서 즉시 회복되었다(3:1-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41절)와 그 목적 하신 바의 성취(42절)는 절대적으로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전능성과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본 이적은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식법을 범하신 사건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생명의 성령의 승리'였던 것이다(롬 8:2).

성 경: [막1:4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엄히 경계하사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는 원래 '말처럼 코를 푸르릉거리다', '콧소리를 씩씩내며 분노를 터뜨리다'로서 매우 격분한 상태를 나타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경계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성냄과분개(憤慨)의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처럼 분노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44절)을 그 사람이 불순종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예수는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던 것이다(45절). 진정 예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이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곧 보내시며(*, 유뒤스 엑세발렌)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체없이 억지로 쫓아 보내시며'가 된다(12절). 이는 앞의 '엄히 경계하사'라는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의 격렬한 감정을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다.

성 경: [막1:4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예수께서는 간곡한 어조로 본 치유 이적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기를 그 문둥병자에게 당부하셨다(3:12;마 12:16;16:20;27:9;눅8:56).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신통력있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던 터인지라 여차하면 능력 많으신 예수께 몰려와 그러한 능력으로 세상 권력을 장악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당신의 사역의 본질적인 목적(복음 전파와 인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 문둥병자는 제사장앞에서 깨끗함의 선언을 얻기 전까지는 대사회적으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고 또 자신의 몸이 공식적으로 완쾌되었음을 확정짓지도 못할 것이다.

⭕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 문둥병자에서 고침받은 이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깨끗케 된 것을 보임으로 정결 의식을 행하고 그 깨끗케 됨을 제사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받아야 했다(레 14:1-20). 그런데 여기 정결 판정을 내리는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제사장 그룹에서 가장 우두머리격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형식적이나마 정결 선포 권한을 제사장이 가졌다고 인정하신 것은 지금껏 진행되었던 율법 제사의 유효성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와 더불어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그 문둥병이 율법의 교훈에 따라 치유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의 사랑과 능력에 찬 역사(役事)로 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 문둥병을 치료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모세의 명령(레 13,14장)은 (1)제사장에게 판정을 받고(레 13:16,17), (2)산 새 두마리(two clean livingbirds)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드리고(레 14:4), (3)8일후 재차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드리는 것(레 14:10)으로 이뤄진다. 이처럼 예수는 모세의 명한 것, 즉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조언을 완수하고서야 비로소 문둥병자였던 그 사람은 법적으로 회복되어 자유인이 되고 성전 예배 등이 가능한 종교적 사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실려고 오신 것임이 명백하에 입증되었다(마 5:17).

⭕ 저희에게 증거하라 - 모세의 명령한 것을 드리는 것은 결국 '증거를 위한' 것이었다. 즉 제사장과 사람들에게 병고친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그 명한 것을 행해야했던 것이다. 실로 당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종교의 책임자인 제사장의 치유 판결보다 더욱 확정적인 판정은 없었다.

성 경: [막1:4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그러나 그 사람이...전파하여 - 예수께서 아주 엄격하게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인간의 본성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사실 인간적 측면에서 그가 지금껏 억압받고 있던 문둥병으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억제하고 끝내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솟구치는 생명에의 환희에 도취되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의 조목조목을 '많이'('크게'란 뜻), 더욱 열정적으로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 결국 이는 예수의 복음 사역에 크나큰 장해(障害) 요인이 되고 말았다. 실로 복음의 참 일꾼이되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절제, 인내의 덕 및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 다시는...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 여기서 문둥병자가 병고침을 받은 이후의 실수가 나타난다. 그는 예수의 침묵에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비한 체험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의 사역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즉 그는 예수로 인한 자신의 치유 사실을 가는 곳곳마다 소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예수께서는 공공연히 마을에 들어가셔서 사역의 주된 목표인 '말씀 전파'를 못하게 되셨던 것이다. 즉 이제 사람들은 오진 신비한 이적에 온 정신이 빼앗김으로써 예수의 전하는 메시지에는 귀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고치시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신 것이다. 여기서 '바깥 한적한 곳'이란 인적이 드문 동네 바깥이나 광야 지역 같은 곳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한동안 흥분한 그들로 하여금 냉정을 기하게 하셨으며, 수일 후에 가버나움 동리로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파하신다(2:1). 한편 바로 그런 이유에서 본문의 '다시는...들어가지 못하시고'라는 말이 지닌 의미에 의구심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해결하자면 원문이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즉 '다시는...못하다'(*, 메케티)란 그 이후 영원히 못하다는 뜻이기 보다 오히려 '더 이상 계속해서 못하다'(no longer), 즉 복음 전파 사역을 지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하고 잠시나마 중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처럼 침묵, 은신하시고 계신 때에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대가 점차 넓혀지며 커져만 가고 있었다.

⭕ 사방에서...나아오더라 - 여기서 '나아오더라'(*, 에르콘토)는 미완료 시제로서 갈릴리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실로 생명은 강한 흡입력이 있어서 뭇 심령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다.

성 경: [막2:1]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수일 후에(*, 디 헤메론) - 이는 정확한 날들의 수를 지시하는 말이기 보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셨을 때와 돌아오셨을 때 사이의 빈 기간을지칭하는 표현이다.

⭕ 다시 가버나움에...소문이 들린지라 -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신 뒤에 갈릴리의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셨다. 앞서 이야기된 바에 따르면(1:21)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은 갈릴리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해서였으나 치유받은 문둥병자의 인간적인 열성에 의해 잠시 그곳을 떠나셨다가 다시 팔레스틴 북쪽 지역, 특히 갈릴리 사역의 활동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간혹 '다시', 즉 헬라어로 '파린'(*)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보도한 상황과 지금부터 전개될 상황과의 긴밀한 연관성을(13절;3:1, 20;4:1;5:21;7:14, 31) 보여주려는데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난 '집'은 1:29에 나타난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 오시자 그 소문은 곧 인근 각처에 퍼지게 되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진다는 것은 마가의 전형적인 표현이다(3:8, 21;5:27).

성 경: [막2:2]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많은 사람이 모여서...도를 말씀하시더니 - 1:33에서 이미 주어진 인상이 보다 확대된다. 즉 예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베드로의 집 앞에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에 대해 특별히 마가는 그집 문 주변이 거의 통행 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욱 현장감있게 묘사했다. 한편 예수는 이런 상황에 처하여 그들이 기대하는 바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오직 천국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셨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말을 전하심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도(*, 톤 로곤)를 말씀하시더니'라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마가는 4:14-20에서도 다시 한 번 구체적인 설명 없이 '말씀'을 전하신 것을 담백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도'(道)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 성경에서는 흔히 이 말이 '구원의 메시지', '복된소식', '복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Lane),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thesecret of the Kingdom, 4:11)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기에 영합한 일시적 문제 해결로서의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참생명의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성 경: [막2:3]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 중풍(paralysis)은 뇌일혈(cerebralhemorrhage)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병이다. 그래서 중풍 환자는 말하는 것을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없었기에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여기 등장하는 '네 사람'에 대해 그 환자의 친구인 상전의 명령을 받은 종들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그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이 네 사람은 그 환자를 위해 아낌 없는 헌신을 다하는 참된 의미의 동료요 형제요 친구였다. 누가의 보고에 따르면 이때 네 사람은 환자를 침상에 뉘고 그 침상의 네 모퉁이를 네 사람이 메고 왔음을 곧 알 수 있다(눅 5:18). 실로 침상을 운반하는 일에 적극 동참한 자들의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협력과 진취적 노력및 아름다운 협동은 그리스도께 넉넉히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다.

성 경: [막2:4]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무리를 인하여...데레갈 수 없으므로 - 헌신적인 4명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병자가 예수께서 계신 집에 당도했으나 수많은 군중들이 입추(立秋)의 여지도 없이 그 문 앞에 둘러서 있었기 때문에 정작 만나 뵈어야 할 예수께는 도무지 다다를 수가 없었다.

⭕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달아내리니 - 4명의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즉 바깥 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가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내렸다. 한편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이다. 그리고 바깥은 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다(2:1-28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따라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온 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내고(이때 분명히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막 드러난 들보(the now exposed beams) 안으로 그환자를 달아내렸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상'(*, 크라밭톤)은 일반 서민들의 짚으로 만든 자리나 담요 같은 누울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막2:5]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기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명함과 또 열심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란 단지 침구를 메고 온 4명의 동료만이 아니라 중풍병자까지를 포함한 5명을 함께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Cranfield, Robertson). 사실 본 사건을 통해 중풍병자의 믿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예수께서 바로 그 환자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는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대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우리는 여기서 그 환자가 필요로 했던 바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바로 중풍병의 치료였다고 피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 환자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던 것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환자의 경우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또한 모든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기인되었다는(사 59:1, 2) 구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진리가 예증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병을 고쳐 증거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뚜렷한 이적에 관한 내용으로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Schweizer). 어쨌든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온 자에게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신 사실을 통해 (1) 육신의 병고침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 영혼의 죄사함은 영원하며, (2)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인류 최초 범죄 이후 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육신의 질병보다 그 본질적인 원인인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3) 전자는 부분적이요 조건적이고 후자는 전체적이요 절대적이고, (4) 전자는 인간의 방법으로도 가능할지 모르나 후자는 오직 예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본문의 '소자야'(*, 테크논)란 말은 흔히 랍비들이 제자들을 향해 쓰는호칭인 동시에 친근한 손아래 사람에게 칭하던 매우 부드럽고 따사로운 호칭이다(마9:2).

성 경: [막2:6]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서기관들이...마음에 의논하기를 - 저자 마가는 이미 1:22에서 '서기관들'을 언급한 바 있다. 눅 5:17에서는 그들이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즉 그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어떻게든 책(責)잡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예리한 칼날같이 모든 상황을 점검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성 경: [막2:7]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이 사람이...참람하도다 - 전통주의적이요 사변적인 비평가들의 판단은 명백하게 옳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속성과 메시야의 특질이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야조차도 죄를 사할 수 없었고 오직 야웨 한 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그들은 야웨와 메시야의 일체성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땅에 메시야로 강림하신 예수께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하나님의 아들(聖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 행하시는 바는 다른 두 위격이 행하시는 바와 함께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서로가 매우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세 위격은 홀로 또는 서로가 독특한 일을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세 위격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세위격 중 어떤 한 위격이 행하는 바는 불가분적으로 다른 두 위격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 1:1, 2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성령, 두 위격이 창조 역사를 주도하신 것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창 1:3 및 요 1:3에 비추어 볼때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자 예수에 의해서도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이 내용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위격의 입장에서 형성된 진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사죄의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구별되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聖父)의 능력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온전히 거룩하셨다. 그러나 그의 거룩한 본성은 그가 자원함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요 1:14;빌 2:5-8;요일 4:2, 3) 인간 본성의 한계 내에서 국한되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 행하셨던 능력있는 사역은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NIV,Disciple's Bible).

⭕ 참람하도다(*, 블라스페메이) - 이 말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주제넘고 건방지며 사악하게 타인을 비방, 중상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의 특권을 탈취하거나 그분을 불경스럽게 모독한다는 뜻이다. 한편 율법(레 24:16)에서는 참람 죄를 범한 사람은 예외없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다. 사실, 후에 스데반은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게 된다(행 7:54-60). 따라서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갈릴리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의 사죄 선포는 분명 참람한(blasphemous)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한 대로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에 불과했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던 자들로서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춰졌지만 감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불행에 처하고 말았다(요 1:5).

성 경: [막2:8]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속으로...의논하는 줄을...곧 중심에 아시고 -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동에 관한 그들의 오해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마가는 단지 '그들은 마음에 의논하였다'고 했다. 실로 그들의 마음의 표정은 얼굴과 분위기로써 넉넉히 표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내면의 요동을 '중심에 아시고', 즉 '당신의 영으로 감지(感知)하시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다(마 9:4;눅 5:22). 이처럼 예수께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은 분명 직관적으로 상대의 심령을 읽어내시는 당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연유한 것으로서,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그리스도론적 사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이시며(롬 9:14;빌 2:6;딛 2:13)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계 19:16)로서 전능하시며(마 28:18) 전지하시고(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 신적 속성을 지니셨으며, 창조(요 1:3)와 보존(골 1:17), 죄의 용서(눅 7:48)와 심판(요 5:27)의 신적 사역 및 성령을 보내시고(요 15:26)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요 5:25) 완전한 신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와 함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마11:27;요 17:1),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셨다(요 5:18, 21;12:44, 45) 따라서 학자들은 이것을 신적 인간 개념(*, conception, 데이오스-아네르-컨셉숀)과 결부시켰다. 즉,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표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인간이어야 했으며,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했다. 참 신성과 참 인성을 동시에 가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었으나 통일된 인격을 가지셨다. 한편 이러한 신적 능력을 행하시는 행위자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그분의 신적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고(왕상 8:39),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삼상 16:7;시 7:9;렘 11:20)분,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성 경: [막2:9]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중풍병자에게...어느 것이 쉽겠느냐 -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지 구두(口頭)로써의 사죄 선언과 현상적으로써의 완전한 치유 이적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으로 그들의 답변을 구하셨다.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로는, 그 질문중 어느 것도 더 쉽다고 답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똑같이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이다. 아마도 서기관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실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더 어렵게생각되었을 것이다.

성 경: [막2:10]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인자가 땅에서...알게 하려 하노라 - 서기관들은 9절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선택적 질문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신(神)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 편, 곧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죄 사함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와 권능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신다(Robertson).

⭕ 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이다(눅 5:24 주제 강해 '인자'참조).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 칭호이다. 그런데 이 호칭은 구약성경과 경외전(經外典)인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默示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서,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8:4;겔 2:1, 3, 6, 8;단7:13, 14). 그리고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날 곧 종말에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메시야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Taylor, Grant).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바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다(2:28;14:62). 즉 그분은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職權)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Robertson).

⭕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이제 서기관들이 아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삽입구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의 대상이 바뀌는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어떤 몸의 동작 변화로 이야기의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본 사건의 종합적인 상황을 알고 있던 저자 마가가 상황의 급격스런 변화라는 어색한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독자들에게 본 사건의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자연스럽지 못한 문제로 해결이 된다(Wessel).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서기관들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고 중풍병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성 경: [막2:11]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내가 네게 이르노니(*, 소이 레고) - 이는 예수가 지니신 신적 권위를 대변하는 말이다(마 5:22, 28). 즉 이는 의학적 기술이나 귀신들의 힘을 빌리는무술적(巫術的) 치유와는 달리 예수 자신이 죄의 결과인 질병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공언하시는 절대 권위자로서의 선언이다.

⭕ 일어나...집으로 가라 - 동료 4명의 도움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던 그 환자에 대한 완전한 치료를 선언하시는 3중적 명령(일어나, 가지고, 가라)이다. 실로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그 자체 내에 역동적 능력이 있어 그 명령하신 바가 그대로 성취되도록 한다(12절). 한편 이러한 완전한 치료는 바로 죄 사함을 입증했다. 예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병 고침이 일어난 것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의 결과로 이제 죄 사함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헌터(Hunte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이 볼 수 없는 다른 일도 자신이 행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볼 수 있는 이적을 또한 베푸셨다.'

성 경: [막2:12]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중풍병자를 사하시고 고치심]

⭕ 그가 일어나 곧...나가거늘 - 중풍병자에게는 '곧'(*, 유뒤스) 반응이 일어났다. 실로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특히 '모든 사람앞에서', 즉 모든 무리와 죄를 사하시는 예수의 권위에 대항했던 서기관들 앞에서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나갔다. 이에 대해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먼저는 상이 그를 들고 왔으나 이제는 그가 상을 들고 간다'는 말로써 엄청난 그 변화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로써 예수는 서기관들에게 항변 없이도 그들의 비뚤어진 심사(7절)에 일침(一針)을 가하신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확증을 위해 필요한 2, 3인의 증인보다 더 많은 증인들이 예수의 탁월한 능력을 확신함으로써 더 이상의 변론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었다.

⭕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 먼저 '놀라다'(*, 엑시크테미)는 말은 '이탈하다', '제 정신을 잃다'는 뜻으로 그 충격의 여파가 매우 큼을 보여 준다. 한편 예수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 각 복음서 기자들은 무리들이 '두려워하며'(마 9:8), 또는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표현으로 그 상황을 푹넓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이는 그 무리들이 크나큰 충격 앞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충격과 공포는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본원적인 죄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사 6:5). 그러한 사실은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실로 이 송영(頌榮)은 그들이 마침내 그들 앞에 계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의 능력을 대변하는 자, 다시 말하면 메시야로 믿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모습이다.

⭕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 누가의 평행구(눅 5:26)에서는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묘사함으로써 표현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근본 의도는 그들이 과거에 이런 일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제 처음으로 이런 일을 본다는 것이다. 실로 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그야말로 잠자던 유대인들의 심령에 들어닥친 하나님의 기습(attack)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기사의 중요성은 예수께서 절망에 빠진 불구자를 긍휼히 여겨 그의 중풍병을 고치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 강조점은 바로 죄 사함에 있는 것이다. 중풍병자가 지닌 문제의 근원은 바로 죄였다. 예수께서 주로 관심을 기울이신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죄 사함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임했음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막2:13]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심]

⭕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 본문 이하는 예수께서 다섯 번에 걸친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동 사건 중 두번째로 해당한다. 특히 본 사건은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였던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가는 본 구절의 연결어로 '다시'(*, 팔린)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본 사건이 독립된 단위의 전승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독립된 구절이라 보지만 내용상으로는 최초 4제자를 부르시는 1:16 이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사건의 장소는 갈리리 해변, 곧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해변 지역으로 추정된다.

⭕ 예수께서...가르치시니라 - 여기서 그 가르치심에 대해 미완료 시제인 '에디다스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이 지속적(持續的)으로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탁월하고 중심되는 것은 이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은 4:1에서도 반복된다. 바닷가에서의 설교가 예수에게 고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예수께서 교육의 장(場)으로 바닷가 주변의 지방을 상당히 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실이나 주간 계획표에 따른 정확한 교육 시간에 한정되기보다는 어떠한 장소, 어느 시간에도 항상 이뤄져야 하는 전인적이고 전(全) 공간적인 것이어야 한다.

성 경: [막2:14]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심]

⭕ 또 지나가시다가(*, 카이 파라곤) - 이 말의 원어는 1인칭 주격 현재 분사로서 예수의 활발하고도 능동적인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이때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 지역에서의 가르치심을 마치고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그 행보를 옮기고 계셨을 것이다.

⭕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 여기서의 레위는 일반적으로 마태와 동일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마 9:9의 동일 사건에서 그를 마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레위'는 그의 본명(本名)이고, '마태'('하나님의 선물'이란 뜻)는 그의 사도명(使徒名)일 것이다. 그는 갈릴리 분봉왕이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 의해 세리로 고용되었다. 그런데 마태가 거주하던 가버나움 근교의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다메섹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큰 도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행하던 대로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Donald W. Burdick). 특히 이곳은 헤롯 빌립의 관할지인 데가볼리로부터 오는 여행자들이 안디바 관할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곳,즉 가버나움을 통해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곳이었다. 한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세를 징수하는 곳에 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신분이 세리였음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유대인의 자료에 의하면 이 세리는 두 계층의 세무 관리로 구별된다고 한다. 즉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와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인데, 후자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세금 부과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통행료를 징수하던 곳에서 일하였던 듯하다. 실로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했던 자였다고 볼 수 있다.

⭕ 나를 좇으라(*, 아코루데이 모이) - 이 명령은 현재 미완료형으로서 단 한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좇을 것을 명령한 제자에의 부름이다. 더욱이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직업(사람낚는 어부)를 선택하라는 생(生)의 변화에의 요구이기도 하다(1:16, 17). 한편 경제. 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득권을 가진 레위가 예수의 부르심을 순응하는 데는 주저할 요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어부는 쉽게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몇몇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레위로서는 그의 직업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비록 인격적, 도덕적으로는 비난을 받던 직업이지만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유망(有望)한 직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한다(W. W. Wessel).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위대한 결단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의 유업과 더불어 예수의 위대한 복음 선교의 동역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때 마태는 일반적으로 12제자 중 가장 나중에 예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Lenski).

성 경: [막2:15]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심]

⭕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 먼저 여기서 '앉아'(*, 카타케이스다이)란 '기대다', '식사 자세를 취하다'는 뜻으로 유대 전통에 따라 기대어 눕다시피한 자세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의 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제 집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베풀어진 송별회였을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레위가 자기 친구들에게도 예수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해 베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함께 앉았으니 - 여기서 '예수와 함께 앉았으니'를 뜻하는 헬라어 '쉬나네케인토 토 예수'(*)라는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음식을 들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의 주인역은 레위가 아니라 예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동 식사는 인습적인 장벽을 허무시고 죄인들과 교제하기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사랑이 담긴 뜻깊은 자리였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혹자(Lane)는 이 구절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한다. "이 구절의 관심은 메시야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집중된다. 예수께서 그 나라로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17절의 말씀과 관련지어 보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는 메시야의 죄 사함인 것이며, 또한 식사 자체도 메시야적 잔치를 암시하는 것이다."

⭕ 세리 - 세리들은 특히 지배자로부터 세금 징수를 청부받아 이미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온갖 수탈(收奪)을 일삼던 자를 가리킨다. 레위와 같은 경우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모든지방은 각기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고유한 관세 구역을 이루었다. 특히 로마 정부에의해 인정된 피지배인 단체들과 피지배 국가들도 징세권을 행사했다. 한편 조세(tax)와는 달리 관세(customs)의 수입은 황제의 국고가 아니라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에서는 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들어갔다. 그런데 관세의 징수는 국가 관리가 아니라 세금 청부업자(pubicani)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년 동안의 일정한 세금액을정해서 일정한 지역의 관세를 청부 맡았다. 그리하여 여분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고, 대신 모자라는 부분은 보충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부하들의 징세를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일반 백성에게 부과될 세금액이 거의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용하거나 문란하게 될 소지가 매우 컸다. 아니나 다를까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액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멋대로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마구 짜내어 갔던 것이다(Gnilka).

⭕ 죄인들 - 이 말은 모세의 율법과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의 해석대로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도덕률을 범한 자들'이라고 하는 일반적 통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마가가 그것을 의도하였다고 하면 '세리와 또 다른 죄인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낱말은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자기들의 서기관적 전통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므로 천민들이라고 비하하여 가리키는 사람들의 계층적 통칭인 전문어이다(요 9:24;Lane). 예수께서 자신의 핵심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포함시킨 것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고대 사회에서는 친분을 나타내는 표시)은 '서기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16절).

⭕ 저희가 많이...예수를 좇음이러라 - 세리와 죄인들은 그의 동료 레위가 초대한 식사에 기꺼이 응했을 뿐 아니라 레위의 앞선 바대로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과 친화력에 쉽게 동조되었다. 실로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써 영혼의 의사요, 친구요, 진리되신 예수를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성 경: [막2:16]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심]

⭕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호이 그람마 테이스 톤 파리사이온) -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이 된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평민 계층의 종교 집단으로서 율법과 유전에 있어서 철저한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이며, 특히 그들은 의식법에 강조점을 두었다(Donald W. Burdick).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 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이었고 정죄하기 일쑤였다(요 7:49). 한편 이 종파의 기원이나 선조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마카비 시대에 맛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아들들과 힘을 같이 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인 하시딤(Hasidim)의 후예였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한 뒤에, 그들은 정치적 독립도 요구하면서 대부분 마카비 일가를 떠났다. 바리새는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뜻은 '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은 흔히 '분리주의자'로 취급되었다. 한편 그들이 '바리새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하던 때로 여겨진다(B.C. 135-104).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바래새인들이란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종교적 항목들을 준수함에 있어 자신의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한 무리들의 유대인들'이라고 했다(Jos., Wars I. 110V. 2). 실로 그들중에 많은 사람들은 경건하고 믿음이 깊었지만, 예수와 충돌을 일으켰던 자들은 전통적 종교의 가장 나쁜 요소들, 예컨대 시기, 위선 및 종교적 형식주의 등에 집착(執着)한 그릇된 종교관을 보여 주었다. 이에 대해 메츠거(Metzeger)는 이야기하기를 '바리새주의는 종교의 존재의 의의를 율법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보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만 약속된다는 식의 종교 개념을 가질 때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이다'라고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가장 격렬한 논쟁의 초점은 죄의 정의에 관한 것에 모아졌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정의에 따라 예수가 계율에 정한 바 죄인들과의 교제 금지를 무시했기에 그가 바로 죄인이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르게 죄를 정의했다. 예수는 가르치시길 비록 인습적으로 죄인의 부류에 속한 자이지만 겸손히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예수의 초대에 응한 자는 더 이상 죄인으로 남아 있지 않고 '용서받은 죄인', '구주 예수와 친구된 자'로 그 존재가 변하였다고 하셨다. 이에 덧붙여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에 대해서 눈먼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의 외식을 정죄하셨다.

성 경: [막2:17]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심]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 이는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행하던 격언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육신(Incarnation) 목적을 이 격언을 통해 단정적으로 선언하셨다. 한편 여기 '건강한 자'란 타인에게 그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느끼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자를 빗댄 말이다. 특히 치료자되신 예수의 치유 은혜를(출15:26) 거부하는 자, 그는 자칭 건강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기 의(義)를 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특히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말 4:2)의 치유사역에 자신의 온 인격을 내놓을 수 있는 병든 자, 곧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진정 예수의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분의 초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이요(요 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이다(사 1:18). 그런데 이 일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병자 의식(病者意識), 곧 자신이 결함이 있는 자로서 반드시 치료 받아야만할 존재라는 자기 존재의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눅 18:13). 실로 예수의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을 나타낸 것이라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신다는 교리는 기독교에서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됨을 진솔히 고백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죄인임에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참된 기독교의 진정하고 영광된 교리이다(Hunter).

성 경: [막2:18]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금식에 대한 논쟁]

⭕ 요한의 제자들...금식하고 있는지라 - 먼저 본 금식 논쟁이 발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앞절에 베풀어진 세리 레위의 잔치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일에 베풀어짐으로써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의 준수와 전통의 고수라는 점에서 바래시인들과 그 정신을 같이 한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을 한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때 세례 요한은 헤롯의 궁이 있던 '마케루스'(Machaerus)에서 감금 생활을 하는 상태였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부재 중에도 금식을 계속 실천해 온 것은 결국 세례 요한의 평소 가르침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것은 세례 요한의 금식은 그야말로 참경건과 금욕과 절제 생활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금식을 한 것이다. 한편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나타난다(레 16:29, 31;23:27-32;민 29: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Purim),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 등 매년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傳統)을 세웠음을 볼 수 있다(슥 7:5;8:19).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엄격한 바래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눅 18:12) 금식을행했다. 어떻게 이 매주 2회의 금식이 전통이 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것은 경건과 자기 헌신의 표현으로 행하는 것인 듯하다. 본문이 전하는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에 관한 기사는 추측컨대 앞서 이야기한 자기 경건과 자기 헌신의 외적인 표시로서 행한 것인 듯하다(Lane).

⭕ 바리새인의 제자들 -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경우이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교사가 아니므로 제자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다소 어색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서기관 계열에 소속되어 나름대로의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또한 이 용어가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의식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전문적인 용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란 표현은 후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Wessel).

⭕ 금식하는데 - 왜 이 두 무리들이 금식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 마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요한으로부터 철저한 경건(敬虔) 생활을 교육 받았던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그 당시 요한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금식을 했거나, 또는 메시야 시대를 기다리는 의미에서(Lane) 금식했을 수도 있다. 또한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날이 그들이 일 주일에 두 번 지키는 금식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금식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경우 다 그들은 금식을 해야 참된 경건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혹이'(마태는 마 9:14에서 이때 질문자가 요한의 제자들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예수께서 와서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통하여 참된 종교적 경건을 보여 주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성 경: [막2:19]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금식에 대한 논쟁]

⭕ 혼인집 손님들이...금식할 수 없나니 - 예수께서는 그릇된 금식관에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비유로 답변하신다. 본 비유의 강조점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에 있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슬픔의 표시인 금식은(삼상 31:13;삼하12:11-23;눅 5:35).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부적절한 것이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 경사스런 행사였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주간이나 계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처럼 즐거운 잔치 중에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직 그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극락(極樂)의 시간들로서 심지어 율법에서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신 20:7). 한편 본문의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 '혼인집 아들들'로서 신랑의 친구들 및 신랑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칭한다 하겠다. 본절에서는 특히 그들을 예수의 제자들 및 예수와 함께 천국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구속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신랑으로 자처하신다(호 2:19, 20). 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기뻐하며 금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빼앗길 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이다.

성 경: [막2:20]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금식에 대한 논쟁]

⭕ 신랑을 빼앗길 날...그 날에는 - 이 말씀의 근본 의도는 미구(未久)에 닥쳐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암시하려는 데 있다. 사실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제자들을 떠나가신 이후부터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며, 또 금식을 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의 '빼앗길 날'에서 '날'(*, 헤메라이)은 복수인데 반해, '그 날에는'의 '날'(*, 헤메라)은 단수인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날은 여러 날에 해당하나 그의 죽음 이후로부터 있게 될 종말의 날은 확실히 한 단위로 취급되어야 했기 때문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날'의 변화는 곧 닥쳐올 종말의 때를 예언,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 빼앗길(*, 아파르데) - 이 단어는 원형 '아파이로'(*)에서 온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만(마9:15;눅 5:35) 나타난다. 그 의미는 (매우 격렬하게) '빼앗다', '제거하다'로서 어떤고통스럽고 미어지는 듯한 이별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해 혹자(Bracher,Nida)는 '이와 같은 동사는 그 빼앗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인지 혹은 돌발적이거나 억지에 의한 것인지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이는 슬픔을 유발시키는 억지에 의한 빼앗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시초부터 그의죽음에 직면했다. 예수의 제자들의 삶은 바로 이 같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3년간의 모습은 바로 그들 제자들이 지니는 기쁨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어쨌든 자신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수의 사역은 모든 죽어 있는 종교와 심령들에게 새로운 진실과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고 한다.

성 경: [막2:21]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옷과 포도주 부대의 비유]

⭕ 생베 조각을...더하게 되느니라 - 예수께서 도래하심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의 자세는 결코 옛 형식들안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비유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새로운 복음을 상징하는 '생베 조각'은 헬라어로 '라쿠스 아그나푸'(*)라 하여 '표백 처리하지 않고, 제단하지 않은 천', 즉 새로 짠 천, 사람의 손을 거치기 전의 올을 촘촘히 한 천을 뜻한다. 이에 비해 옛 율법주의 구조와 낡은 형식 위주의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낡은 옷'은 거의 헤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찢어져 버릴 참으로 생명력이 결여된 천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명력이 결여된 것들에 생베 조각처럼 그 활동력과 생명력이 왕성(旺盛)한 예수의 새로운 교훈과 복음을 붙이려고 하면 그 헤어짐이 더하게 되는 것이다(마9:16).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진리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형식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는 것이다(Lenski). 오직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형식이 요구될 뿐이다.

성 경: [막2:22]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옷과 포도주 부대의 비유]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 고대, 특히 유목 생활을 하던 팔레스틴에서는 물이나 포도주를 염소 가죽 부대에 보관하여 이동 중에 취식했었다. 그런데 이때 새 가죽은 부드럽고 유연해서 비록 발효가 덜 된 포도주를 담더라도 신축성 있게 그 변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축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터뜨려지기 쉬웠다. 즉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긴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어리석은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옛 유대주의에 물든 사고와 생활 양식에다가 무한한 생명력과 폭발적 운동력이 깃든 예수의 복음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다.

⭕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본문은 5, 6C의 것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과 옛 라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간혹 본문은 눅 5:38에 있는 원문을 후기에 인용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본문이 언급되어있으므로 특별히 본문의 후기 첨가설을 인정할 만한 이유가 없다. 한편 본문에 두번 언급된 '새'라는 말 중 첫번째 '새'(*,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두번째 '새'(*,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이는 가장'최근에' 만들어진 포도주는 전혀 이상이 없이 탄탄하고 실한 '최상의'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심령과 삶에 구약 율법의 완성이요, 형식적 율법주의를 능가(凌駕)하는 새 시대의 새진리가 결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성 경: [막2:23]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안식일에...밑발 사이로 지나가실새 - 먼저 '밀'(*, 스타퀴스)이란 밀이외에 보리, 옥수수 등을 통틀어 일컫는 '곡식'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본 사건은 유월절(4월에 해당)과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5-6월에 해당) 사이에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한 마가는 예수와 그 일행의 모습을 더욱 박진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즉 본문의 '지나가실 새'(*, 파라포류에스다이)는 마치 밀밭 가장자리에 있던 예수 일행이 밀밭 중심으로 들어가서 계속 지나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 여기서 '길을 열며'(*, 호돈 포이에인)란 (1) 단순히 '길을 가다'는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고, (2) 마치 귀빈의 행차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던 고대 세계의 풍습처럼 예수가 지나가시기 편리하도록 제자들이 길을 여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2)의 견해를 취한다면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자른 것이기 보다 오히려 길을 만들기 위해 이삭을 잘랐다고 하는, 마태의 보고와는(마 12:1) 다른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분명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잘랐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 이행한 일은 율법에는 분명히 허용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굶주린 이웃이 타인의 곡식 밭에 들어가서 그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은혜로운 규정이다. 그러나 아울러 율법은 땀흘려 농사 지운 타인의 소유가 지나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굶주림을 채우는 것 이상의 반출(搬出)이나 절취는 엄격히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그야말로 조화롭고 온전한 생활 규범이다. 즉 하나님을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배려하셨고 모두의 권리를 인정하고 공익을 보호하시려고 하셨다. 여하튼 이러한 은혜로운 규범에 따라 마침 시장했던 제자들이 타인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비어 먹은(눅 6:1) 그때가 바로 안식일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는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이된다. 첫째, 이삭을 잘랐으니 이는 안식일에 추수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된다. 둘째, 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이는 안식일에 타작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힐델 학파와 샴마이 학파간에는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내에서는 안식이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개로 규정해 놓고 있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이날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 율법 준수를 가장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성 경: [막2:24]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바리새인들이...못할 일을 하나이까 - 제자들의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비판적 시비에 걸려든 까닭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이 안식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이삭을 자르는 동작을 일종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추수작업이라고, 또 누가의 보고에서 보듯이(눅 6:1)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타작하는 행위로 해석하였으며, 제자들의 단순한 그 행위를 안식일의 규례를 깨는 불경건한 노동 행위라고 본 것이다(출 20:10).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곡식 거두는 일을 공적으로 금지하고 있다(출 34:21). 그리고 '미쉬나'에 보면(M. Sabbath 7:2) 안식일의 금지 사항 39개 항목 중에 세번째로 금하고 있는 것이 곡식의 수확 행위이다. 한편 서기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제자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선생에게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직접 항의하였다. 저희들은 법적으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고 있는가의 할라카(Halakha)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짐작컨대 그들이 이처럼 예수께 분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안식일을 범한 사실에 대한 처벌에 앞서서 법적으로 반드시 경고해야 한다고 하는 조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Lane).

성 경: [막2:25]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예수께서 가라사대 - 예수께서는 반대로 질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처하셨다. 여기서 예수의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시려 한 것이다.그가 언급하신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이다.

⭕ 다윗이...핍절(乏絶)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 다윗과 그 무리들은 사울왕의 살해 위협에 쫓기며 핍절하고 시장할 때에 진설병, 곧 고운 가루로 구원 성결한 상 위에두 줄로 진설한 12덩이의 떡을 먹었었다. 본래 율법에는 매안식일에 새로운 떡을 성소에 들임으로써 이전것과 교체하였으며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출25:30;35:13;39:36;레 24:5-9;Jos., Antiq. III. 255-56. X. 7). 따라서 다윗의 행동은 엄연히 율법에 반(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인해 구약 어느 곳에서도 정죄받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안식법에 위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고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러한 위반도 용납되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좀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법률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핍절과 배고픔은 종교의 의식주의보다 상위(上位)의 법에 해당한다'(Earle)는 사실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원초적인 필요가 단순한 모든 의식 규범과 형식적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 읽지 못하였느냐(*, 우데포네 아네그노테) -'읽다'에 해당하는 '아네그노테'는 원형 '아나기노스코'(*)의 제2 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다시', '새로운' 등의 뜻을 나타내는 '아나'(*)와 '배우다', '알게 되다' 등의 뜻을 나타내는 '기노스코'(*)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정확히 알다', '이해하다', '구별하다' 등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구약에 기록된 바 다윗의 일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성 경: [막2:26]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 에피 아비아다르 아르키에레오스) -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내용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기록된 내용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아비아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아비아달의 부친인 아히멜렉(아비멜렉)이 대제사장이었고 다윗이 진설병(陳設餠, 거룩한 떡)을 얻었던것도 아히멜렉에게서였다. 이 구절과 평행되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이 기록되지 않았고 또 상당수의 사본에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려움을 더해 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제사장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Grotius),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브루스(Bruce)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데, 아비멜렉의 아들은 두 가지 이름 곧 아비멜렉과 아비아달로 혼용하고 있다(삼상 22:20;삼하 8:17;대상 18:16;24:3, 6, 31). 그리고 또 다른 추론을 해 본다면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함께 그곳에 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다. 그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代)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R. C. H. Lenski). 따라서 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 하나님의 전 -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으로서 예루살렘 근처 놉에 있던 성막, 곧 회막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명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라는 의미에서 신.구약을 통틀어 자주 사용되던 용어이다(대하 5:14;딤전 3:15).

⭕ 진설병을 먹고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사울을 피하여 놉에 갔을 때 매우 굶주려 진설병을 먹었었다. 진설병은 문자적으로 '그 얼굴(앞에 놓여진)의 떡'(*, 레헴 판님)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처소인 성소에 진설되는 떡 곧 제단의 떡을 말한다(출 25:30;35:13). 이는 곧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헌상(獻上)하는 예물로서 궁극적으로 생명의 떡(요 6:35)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상징한다. 성소 안에는 금으로 입힌 탁자 위에 새로 구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을 두 줄로 매 안식일마다 진열하도록 율법에 규정하고 있다. 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은 향과 함께 봉헌되고, 그 다음 주의 진설병이 제단에 놓여질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놓아 둔다. 다시 새로 구운 진설병을 바꾸어 놓고, 먼저 봉헌했던 진설병은 성소에서 물려 제사장들이 먹는다(출 25:30;레24:5-9). 따라서 이러한 이유에서 진설병을 먹는 것 자체는 위법이 아니다. 예수께서 주안점을 두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령을 닮은 인간인 다윗이 기근으로심한 고통을 받을 때 그는 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진설병을 얻었다. 사실 속인들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레 24:9). 그러나 하나님에게 바치는 거룩한 떡을 먹어서라도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당시 다윗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꺼이 용인(容認)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실증법이었던 율법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자연법이 바르게 적용된 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에서, 아니 그 이상의 이유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인 일이며, 그들이 손으로 비비어 먹은 그 곡식 낟알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켜 생명을 보호해 주는데 참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성 경: [막2:27]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또 가라사대 - 마가는 예수의 독립적인 말씀을 어떤 주제와 관련시켜 삽입하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4:2, 11, 21, 24, 26;6:10;7:9 등). 여기서의 진술도 그런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 본구절의 배경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그 내용의 방향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곳의 논쟁 기사에는 특별히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셨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당시로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은 아니었다. 예컨대 랍비 시므온 벤 메나샤(Simeon ben Menasya)도 '안식일이 너희에게 맡겨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MelkitaShabbata I;출 31:14). 한편 이 교훈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란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안식일의 완전한 휴식이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와 상처를 입힌다면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생명과 구원에 크나큰 촉매제가 된다면 차라리 휴식을 포기하고 소매를 걷어 붙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 휴식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삭을 비비어 거두어 들이는 일종의 작은 노동을 용인하시고 묵허하셨던 것이다. 실로 사람이 안식일만을 위하다 멸망하는 것보다는 생명 보존과 새 생명 탄생을 위해 안식일 굴레를 벗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에 찌들게 하지만 예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또 궁극적으로 생명과 환희를 맛보게 한다(마 11:30).

성 경: [막2:28]

주제1: [종에 대한 핍박의 대두]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먼저 '이러므로'란 안식일 논쟁의 비약적 결론구를 제시하기 위한 접속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신이 가르치시는 진리에 대해 단정적이고 선언적으로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 보이신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전생활 영역을 안식일 규정으로 얽매어 놓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안식일 관행은 이제 당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새롭게 규명(糾明)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특히 이 같은 선언은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시겠다는 자기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 규정을 새롭고도 온전하게 주석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당신의 자격과 신분을 선언하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한편 본문의 '인자' 선언은 마가가 관심을 가진 바 '인자 기독론'에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10절 주석 참조) 드러난 바 영광스런 하늘의 인자는 지금 바로 이곳에 나타나셔서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실 뿐 아니라 특히 안식일 논쟁의 결론을 내리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Grant, Taylor). 자세한 것은 눅 1:3-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참조하라.

성 경: [막3:1]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안식일 치유와 고조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

⭕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 이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의 충돌 기사 중 마지막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가는 시기(時期)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사용된 또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란 2장의 직접적인 반복을 일컫지 않는다. 다만 내용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가 의도적으로 붙인 연결구라 할 수 있다. 한편 본구절은 1:21, 39에서와 같이 예수가 회당에 들어가셨음을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묘사를 통해 본구절은 예수가 자주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는 분이심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본문은 어떤 안식일에 만난 특별한 사건이 이야기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눅 4:16 주석 참조).

⭕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 여기서 손 마른 상태를 묘사한 헬라어 '엑세람메넨'(*)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서 이는 그의 신체 장애가 선천적인 것이기보다 후천적인 것으로, 어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고 손이 말라 버려 활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Robertson, Vincent). 한편 누가는 힘의 상징인 그의 오른 손이 마른 것이라 표현함으로써(눅 6:6) 그 처지가 절박했던 사실을 더욱 세밀히 묘사해 주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중풍병이라 보기도 한다(DonaldW. Burdick). 어쨌든 말라 비틀어진 이 손은 결국 그의 삶의 위축과 장애 상태(Gebrauchsun fahigkeit)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제롬(Jerome)이 언급한 바, 나사렛파(the Nazarenes)와 에비온파(the Ebionites)에서 쓰는 묵시 복음서(Apocryphal Gospel)와 외경 히브리 복음서(Hebraerevangelium)에는 이 병자가 미장이로서 손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자 자신이 수치스럽게 구걸하지 않도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병자의 처지가 그렇게 다급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안식일 개념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성 경: [막3:2]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안식일 치유와 고조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

⭕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 마가는 여기에 등장하는 반대편 사람들의 신분을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가 막연하게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정체는 분명하다. 6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언급되고, 평행 구절인 눅 6:7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예수께서는 이미 율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비정통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고, 특히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매우 위험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안식일 논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 있었으므로 큰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직접 파기하기 직전 상황에 있었으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수의 행동 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빛을 내고 있던 그들의 목적 의식에 대해 '송사하려 하여'(a reason to accuse, NIV)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마 12:10;눅6:7). 이는 결국 그 적대자들이 예수를 고발하기로 이미 작정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그 당시 회당은 지방 법정 역할까지도 수행하던 곳이었다는 점에서(마12:10) 예수의 회당 안(內) 치유 사역은 어쩌면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 안식일에...고치시는가 엿보거늘 - '엿보거늘'(*, 파레테룬)은 '지켜보다', '주시하다'는 뜻인 '파라테레오'(*)의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고소거리를 찾기 위해 계속적으로 예수 주변에 머물면서 적의에 찬 눈으로 면밀(綿密)히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눅 14:1;20:20). 사실 당시 안식일 규정에는 매우 세밀한 조항까지 만들어 가며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있던 터였다. 한 가지 실례로써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질 경우 생명이 위협을 받으므로 구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밑에 깔린 자가 이미 죽은 것이 판명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구조 작업이 연기되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그 '손 마른 자'는 긴급한 생명 구조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치유 사역은 부당한 것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이란 말씀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능력을 가지셨음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관심은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할 것인가'에 있었다(Gnilka).

성 경: [막3:3]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안식일 치유와 고조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

⭕ 예수께서...일어서라 하시고 - 예수께서는 마치 적대자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병자에게 '한가운데 일어서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 요구는 안식일의 참 의미를 주위에 앉은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실로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찬 창조 사역을 기리고 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날이다(창 2:2;출 16:23;20:8-11). 바로 이날에 지금껏 하나님의 창조 원형에서 어그러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하며 참평안을 몰랐던 손 마른 사람에게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주는 것처럼 안식일을 참되게 보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본 기적의 시위적인(demonstrative) 성격은 2:1-12에 제시된 중풍병자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 주며, 동시에 은연중에 예수의 안식을 규정 파기를 기대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던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행동에 크나큰 충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가만히 엿보던 비겁함과는 대조적으로 그 손 마른 자를 일으켜서 한 가운데 나가게 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초월적인 권능을 공개적으로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참된 의원이요 오실 메시야이심을 강력히 내비치셨다.

성 경: [막3:4]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안식일 치유와 고조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

⭕ 안식일에...어느 것이 옳으냐 - 당신의 고소를 전제한 적대자들의 예민한 촉각을 향해 예수께서는 병행 구조로 된 이중적인 질문으로 그들의 불타오르는 적개심에 오히려 도전하셨다. 한편 이 같은 예수의 질문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에 대한 필요성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다(Donald W. Burdick). 실로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을 제공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일은 그것이 곧 최상의 선(Summum bonum)이요, 타인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더 나아가 법조문에 얽매여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것이 곧 악(惡)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다른 사람을 돕는 선한 행위를 생명을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심으로써 안식일에 그러한 일들이 허락될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간주하심으로써 적대자들의 견해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위해 정열적으로 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지한 노력을 단순히 도덕적인 선행으로 평가 절하(平價切下)해서는 안 된다. 진정 예수의 이 같은 노력은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고 인생들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한 신적(神的)인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반립(反立)명제를 요약하면(1) 살인 행위와 곤궁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하지 않는 행위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볼 수 있다(Calvin). 실로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살인과 같은 악행을 간접 조장하는 것이다(약 4:17). (2)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구하는 것, 즉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이지 6절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살인 음모를 꾸미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마음을 간파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 (3) 여기에는 사단의 음모를 멸하시는 예수의 사명(使命)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병과 상처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멸하러 오셨다. 한편 사단은 1주일 내내 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른 엿새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에도 사단과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T. W. Manson).

⭕ 저희가 잠잠하거늘(*, 호이 데 에시오폰) - 이는 3인칭 미완료 시상으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욥 5:16;시 63:11;행 4:14;딛 2:8;벧전 2:15). 실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형식주의적 율법관에도 자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참 진리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는 무기력한 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막3:5]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안식일 치유와 고조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

⭕ 저희 마음의 완악(頑惡)함을 근심하사 - 여기서 '완악함'(*, 포로세이)이란 마치 대리석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진정 유대인의 개념으로 볼 때 '마음'은 인간의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의 좌소로서 마음이 굳어버리면 예수가 전하고 보여 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완고함을 목도하시고 '근심하셨다'. 여기'근심하사'(*, 쉴뤼푸메노스)란 '함께'란 뜻의 '쉰'(*)과 '걱정하다'는 뜻의 '뤼페오'(*)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함께 염려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의미한다. 특별히 이 '뤼페오'는 현재 시상을 이루고 있어 예수의 근심하시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한 무지(無知)를 애끓는 심령으로 바라보시는 예수의 이 같은 모습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한계와 아픔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뜨거운 인간애(人間愛)를 보여 준다.

⭕ 노하심으로...둘러보시고 - 여기 '노하심으로'(*, 메트 오르게스)란 마치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듯이 매우 분노하신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이 바로 마가의 복음서가 지닌 특징이다. 즉 마가는 전혀 숨김 없이 예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10:14). 사실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1:41). 그런데 그가 노하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감정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표현된 적은 결코 없다. 이 '분노'는 곧 부정과 부패에 대한 정의의 분노 곧 의분(義憤)으로서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기본 덕목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를 이룬다(Grant). 실로 예수는 당신의 적대자들이 지닌 그릇된 마음, 죄악에 가득찬 눈길에 분노를 터뜨리셨지만 그 영혼에 대해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근심해 주셨던 것이다. 한편 '둘러 보시고'(*, 페리블렙사메노스)는 주로 많은 목격자들이 있음을 보여 줄 때 사용된 용어로(34절;5:32;9:8;10:23;11:11) 순간적으로 쭉 한번 둘러보셨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곧 예수의 분노의 대상이 주위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간접 시사해 주고 있다.

⭕ 네 손을 내밀라...회복되었더라 -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고자 하셨다(4절). 그리하여 병자에게 명령하셨고 그 병자는 즉시 순종함으로써 완전한 회복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때 예수는 오직 '말씀'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 이 '말씀'은 곧 당신께서 친히 태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의 그 능력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것이다(요1:1-3). 따라서 예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그 어떤 비뚤어지고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원래의 모습으로 온전케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은 예수의 명령에 오직 순종으로, 오직 신앙으로 대답하는 자에게만 창조 원형으로의 완전함을 제공한다.

성 경: [막3:6]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안식일 치유와 고조되는 바리새인들의 음모]

⭕ 바리새인들이...헤롯당과 함께 - 병고침의 결과는 놀람도 환호도 아니고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시켰을 뿐이다(H. Van der Loos, The Miracle of Jesus, p. 438). 바리새인들은 이제 헤롯당과 함께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했다. 헤롯당은 종교적 집단이기보다 해롯가문에 정치적으로 봉사하는 정치적 당파였다. 즉 헤롯당은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를 중심으로 하여 헤롯 왕가의 부흥을 꾀한 집단으로서 사회. 종교적 기존 질서와 법률의 고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Grant, Taylor).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로마 제국의 지배에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소위민족적으로 비애국적 집단이었다. 이에 비해 철저한 애국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는 보수주의자들인 관계로, 헤롯당과는 평소에도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로서 양자간의 동맹(同盟)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자신들의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위험성이 다분한 예수 제거에 있어서만은 생각이 일치함으로써 참으로 어색한 동맹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갈릴리를 관할하던 헤롯 안디바 추종자들과의 제휴를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 바리새인들은 조금 전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에 대한 예수의 질문에 대해 예수를 안식일 파기자(破棄者)로 단죄하고(출 31:14)'어떻게 죽일꼬'하는 사악한 답변을 세속적 집단(헤롯당)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하고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생겨나는 필연적인 발상이다. 실로 참진리에 대한 세속 집단의 반응은 이처럼 항상 진리 파괴적 성향을 띠지만 겸손한 영혼의 반응은 항상 자기 파괴(자기 부인)적 경향을 띠게 된다(행 2:37). 어쨌든 이로써 예수의 적대 세력은 노골적으로 예수를 처형키 위한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성 경: [막3:7]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각 처에서 예수께 몰려든 군중]

⭕ 예수께서...바다로 물러가시니 - 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로 물러가셨는가 ? 마가는 그 이유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마 12:15에 헬라어 '그누스'(*, '아시고', 즉 예수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라는 말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예수께서 계셨던 곳(가버나움)에서 떠나신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잡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죽음의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다 어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던 것이다(6:31, 46;7:24, 31;9:2;10:1;14:32). 그러나 거기서 예수께서는 또 다시 무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성 경: [막3:8]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각 처에서 예수께 몰려든 군중]

⭕ 유대와...시돈 근처에서...나아오는지라 - 예수께서 몰려들었던 무리들은 가버나움 근방에서 뿐 아니라 남쪽 지방(예루살렘, 이두매), 동쪽 지방(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두로와 시돈) 등 온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마가가 여러 지방 이름을 여기서 언급한 것은 팔레스틴 전역에서 무리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곳이 갈릴리(1-6장), 두로, 시돈, 데가볼리(7장)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과 예루살렘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지리적 범위의 윤곽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여기에는 예수께서 직접 활동하시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두매 곧 헤브론 남쪽 지역이다. 이곳에 언급되어 있는 지명 가운데 몇몇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이두매 지역은 유대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이두매'(*)는 구약 '에돔'(*)의 헬라 음역이다. 에돔은 본래 요단.아르바의 동쪽 모압 남쪽의 산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광야의 아랍 족속의 세력에 눌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후자의 지역이 '이두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이두매인들을 공략하여 여러 번 성공하였다. 그 후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할 무렵에 이두매인들은 유대교(Judaism)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 당시에는 헤브론 주변 지역을 모두 이두매에 포함시켰다. 헤롯 대왕이 바로 이 이두매 출신이었는데(마 2:1), 그의 여러 아들들은 유대의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한편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명은 사실상 팔레스틴의 북서쪽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요단 건너편'이라는 말은 갈릴리와 같이 헤롯 안디바의 통치름 받던 베레아와 데가볼리 지방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Wessel).

⭕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 여기서 '그의 하신'에 해당하는 원어 '에포이에이'(*)는 미완료 능동태로서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수 많은 이적과 사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듣고'의 원어 '아쿠온테스'(*)는 현재 분사 능동태로서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예수의 신비한 사역을 수없이 들어왔으며 그 소문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지니는 역동적(力動的) 특성이다. 복음의 소문은 인습의 장벽과 지역의 장벽을 넘고 또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롬 10:15-18;히4:12). 한편 이때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은 어느 한정된 시점에 급히 모여 들었다기보다 오히려 꾸준히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모여들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성 경: [막3:9]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각 처에서 예수께 몰려든 군중]

⭕ 예수께서...면키 위하여 - 오직 마가만이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배에 오르신 목적은 무리들에게 밀리는 것을 면키 위함이었다. 실로 예수를 향하여 육신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우성치는 무리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 접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1차원적인 무리들의 심성에도 구애치 않으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하셨을뿐 아니라 그들의 필요도 만족시켜 주셨다(마 4:23). 즉 예수는 무리들의 생각과 기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마가는 예수께서 무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본문과 같은 이러한 방법을 취하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마 14:22;요 6:15-25).

⭕ 작은 배를 등대(等待)하도록(*, 히나 프로이아리온 프로스카르테레 아우토) - 먼저 '작은 배'란 몇 명밖에 탈 수 없는 조그마한 보트를 가리킨다. 그리고 '등대하도록'에 해당하는 헬라어'프로스카르테레'는 '꾸준히 시중들다', '충성하다'는 뜻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의 가정법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을 위해 항상 대기하다', '집착하다', '지속적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 표현은 제자들의 성실하고도 발 빠른 헌신과 봉사를 예감케 해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께서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지 움직일 준비를 갖추고 그 준비한 배를 해변 가까이 놓아 두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능수 능란한 준비 작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막3:10]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각 처에서 예수께 몰려든 군중]

⭕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 당시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는 행위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으려고 너도나도 그를 만지고자 밀어댔다. 마치 그 무리들은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마 9:20-22;14:34-36;눅 6:19).

⭕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호소이 에이콘마스티가스) - '병'(diseases, NIV)에 해당하는 '마스티가스'는 원형 '마스틱스'(*)의 복수 목적격의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채찍', '고문' 등의 뜻을 갖고있다.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채찍질(욥 21:9)이나 징벌(시89:32)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비유적인 용법으로 '병'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병'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거나 징벌을 받아 생긴다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비유적인 용법으로 본 구절의 이 단어는 예수께서 고쳐 주신 여러 병들로 특별히 매우 만성적이거나 치명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눅 7:21). 5:29, 34에서도 혈루병 걸린 여인의 특수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편 그 당시 유대인들은 병을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 귀신의 권세가 활동하고 있다고 보며, 또 간혹 죄와 병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마 12:22). 그러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초월하시는 예수께서는 그 병의 원인이 어떠하든간에 그 모든 소원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용서를 베푸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자요 의원으로서 병자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신다.

⭕ 핍근(逼近)히 함이더라(*, 에피피프테인 아우토) - '핍근히'를 뜻하는 '에피피프테인'은 '...에 떨어지다', '몸을 던지다', '달려들다' 등의뜻인 원형 '에피피프토'(*)의 부정사 현재형으로서 저돌적(猪突的)으로 달려드는 무리들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해 주고 있다. 즉 병자들이 위험한 정도로 예수에게 몸을 던지고, 달려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적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각자가 자신의 병 때문에 예수의 치료를 받고자 맹렬하게 애쓸 뿐이었다.

성 경: [막3:11]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주의를 주심]

⭕ 더러운 귀신들도...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 여기서 예수는 또다시 귀신들린 자들과 마주친다(1:23, 24, 34). 그 무리들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1 주석 참조). 즉 예수의 메시야성을 알고 소리친 귀신들의 외침은 '자신들을 해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호소'(Wessel)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덧붙여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 본 귀신들의 이러한 외침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정확한 이름이나 인격을 잘 아는 것이 그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볼 때(Lane), 자기들을 능히 제어하실 수 었는 그분의 능력을 어떻게든 없애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외침이라고볼 수도 있다. 한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이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당시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어도 영적 존재인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 보았으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1:24;마 8:29;눅 4:41;행 19:15). 둘째, 그러나 귀신들이 예수를 알았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단의 수하(手下)로서 끊임없이 성도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장차 멸망의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마 25:41;계 20:10).

성 경: [막3:12]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주의를 주심]

⭕ 예수께서...많이 경계하시니라 - 본문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많이'(*,폴라)란 부사는 예수의 꾸짖음이 지닌 엄중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을 대하실 때마다 예외없이 타협이나 부드러운 청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꾸짖고 징책(懲責)하시는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하신다. 한편 위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1:1)이라는 표현은 비록 예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는 원수인 귀신들에 의하여 고백되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께 주어진 매우 정확한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귀신들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 것이다(1:43 주석 참조).

성 경: [막3:13]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열 두 제자의 선택]

⭕ 산에 오르사(*, 아나바이네이 에이스 토오로스) - 원문을 볼 때 예수께서 산에(갈릴리 호수 근방의 구릉지대로 추정) 오르시는 장면을 현재 직설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 특유의 생동감과 역사성이 넘치는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전승에 의하면 이곳은 '하텐산'(Mt.Hatten)이라고도 하고 가버나움 북부 지역의 벌판을 가리킨다고도 하나 어느 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 산 사건(출 19:20), 구약의 시온(호렙) 산에 대한 빈번한 언급(왕상 19:8), 산상 수훈, 변화산 사건 등 중요한 성경적 사건이 산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산이 인간에게 엄숙하고 고요한 심성을 마련해 주고 또 절대자에 대한 외경을 일깨워 주는 영성(靈性)의 훌륭한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때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를 기도하려 오르셨다고 함으로써(눅 6:12) 이 같은 사상을 더욱 강조해 주고 있다.

⭕ 자기의 원하는 자들 -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이나 그들 각자의 열정적인 자원 의사에 따라 당신의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따라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이는 예정 교리(doctrine ofpredestination), 선택 교리의 근간이 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원하시는 그분의 의지에 따라 되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소명에는 인간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동의가 요청되기는 하나 그것은 부차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 눅 6:12에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는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하셨다(14:32). 한편 예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주저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다(1:18, 20;2:14). 이제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관심과 소망을 접어두고 오직 예수의 삶과 뜻을 절대 헌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성 경: [막3:14,15]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열 두 제자의 선택]

⭕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 만 구성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12제자 선택은 이스라엘이 종말의 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두 지파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터잡은 기대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 11:11, 16;27:12;35:8-10;49:22;60:4, 9;66:20;겔 39:27;미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 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시킴으로써 그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 과제는 분명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해 파송되고 또한 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구별된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16절;4:10;6:7;9:35-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두제자'로 번역하였다.) 마태는 '열 두 사도'(마 10:2) 또는 '열 두 제자'(마10:1;11:1;20: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 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셨으니'로 번역하기도 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로 번역하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다. 특별히 본문에서 목적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 '...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 선택에 있어서 예수께서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다. 마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 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으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성 경: [막3:16]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열 두 제자의 선택]

⭕ 이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의 명단이 기록된 데는 본문 이외에 세 곳이 더 있다(마 10:2-4;눅 6:14-16;행 1:13). 여기에 나타나 있는 12제자의 이름들은 대부분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즉 첫번째 부분은 베드로가 예외 없이 맨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에서는 빌립이, 세번째 부분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다른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유다의 이름이 등장한다(사도행전에는 그가 이미 자살한 것으로 묘사되어 그 이름이 생략됨). 한편 마가는 각자의 이름 앞에 접속사 '카이'(*, '그리고')를 삽입하여 연결시킴으로써 이러한 네 부분의 구별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상이다(더 자세한 내용은 마 10:2-4 주석 및 강해 그리고 본장 13-19절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 시몬에게는 베드로 - 이 부분에서는 베드로(반석)란 별명을 얻은 시몬이 맨 처음에 언급된다(마 16:18). 여기서 '베드로'(*)란 이름은 헬라명이며, 요 1:42에 나오듯이 '게바'(*)는 아람명으로서 그 의미는 '반석'이다. 이는 그의 성품의 강직성(强直性)에서라기보다 교회사적 의미에서 그가 수행해 가야 할 사명과 연관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의 복음서에는 어떤 점에서 시몬이 반석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도 베드로가 비록 굳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인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미래에 사역하게 될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일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붙여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실로 그는 예수 생전에는 과격하고 또 비겁한 좌충 우돌형의 미성숙한 인격자에 불과했으나 예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초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의 탁월한 사명을 완수한 반석같은 일꾼이었다(행 2:14).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그의 역할은 첫 제자로 부름을 받은 데서 시작하여 무덤에서 천사의 위탁(委託)을 받는데까지 이른다(16:7). 한편 위에서 보듯이 그가 문자적으로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하고(고전 15:5) 그분에게서 사명을 새롭게 부여 받은 후(요 21장)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서부터 일 것이다(행 2장). 어쨌든 그는 열 두 제자 가운데, 그리고 위에 서술한 그들의 과제(14, 15절)에 있어서 모범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

성 경: [막3:17]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열 두 제자의 선택]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 요한보다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행 12:2) 그의 형제 요한보다 큰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어부 세베대의 아들이었는데, 세베대는 사업이 번창하여 삯꾼들을 고용할 정도였으며(1:20), 그의 부인 또한 예수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마 27:55, 56;눅 8:3). 열 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서 있을수 있었던 것이나, 세배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요18:15, 16)은 아마도 세베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로 추정되는데(15:40;16:1), 예수를 섬기는 그녀의 동기가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다(마 20:20, 21). 한편, 이들이 얻은 이름은 '보아너게'라는 이름으로 헬라어로는 '보아네르게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나는 이들 형제의 별명이다. 이 단어의 어근(語根)은 분명치 않으나 히브리어 '브네 레게쉬'(*, '우뢰처럼 쉴새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에서 온 것 같다.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의 성급하고도 직선적인 성격때문에(9:38;10:35-37;눅 9:54) 얻게 된 듯하다.

성 경: [막3:18]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열 두 제자의 선택]

⭕ 안드레 -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서(요 1:40,41)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였다(1:16-18;마 4:18-18;요 1:44).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 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다(마4:19, 20).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안드레의 행동은 세례 요한에 대한 배반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의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 증거하는 진리였기에 스승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진리에로의 발전이며 본래 추구하던 진리를 좇은 것이었다.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를 인도하고도 이름의 기록은 베드로가 항상 앞서는데(요 1:44), 그는 이에 대해 하등의 시기심이나 불만을 갖지 않았다. 안드레는 함께 동역하는 아량을 가진 형제애의 진수를 보여 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 빌립 - '말(馬)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빌립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요 1:44-51;12:21)으로 안드레와 나다나엘의 친구였다. 그는 예수께 발견되어 제자에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로 그를 따르게 된다(요 1:43, 44). 그는 예수를 만난 후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45, 46). 그리고 그는 12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오병이어(요 6:8-13)의 기적에 앞서서 주께 시험을 받는다(요 6:1-7). 그후 예루살렘 입성 때 헬라인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요12:20-22). 또한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아버지(하나님)를 보여 달라고 주께 요청하기도 했다(요 14:7-12). 전승에 의하면 히에라 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바돌로매 - '톨마이의 아들'(Son of Tolmai)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아마 개인적인 다른 이름이 따로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 1:46에 등장한 나다나엘(Nathanael)과 동일 인물이 아닌가 하는데, 그럴만한 적절한 이유는 (1) 나다나엘은 12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며(요 21:2), (2)빌립이 그를 찾아서 예수께 인도했기 때문이다(요 1:43-46). (3) 공관 복음에서 빌립과 바돌로매는 사도들의 명단에 항상 함께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출생지가 역시 갈릴리의 가나(Cana)라는 것은 같은 결론을 뒷받침한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 나다나엘이란 이름은, 베드로를 지칭하는 시몬(Simon)이란 이름과 바요나(Bar-Jona)란 의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돌로매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The Pulpit Commentary). 어쨌든 교회의 한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애굽, 인도, 아르메니아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끝내 순교했다고 전한다.

⭕ 마태 - 그는 분명 레위와 이명 동인(異名同人)이로서(2:14) 마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한편 마 10:3에서 마태는 사도들의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 앞에 '세리'라는 형용어구를 덧붙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옛날에 온 백성으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결코 숨김없이 드러내 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용사받은 죄인의 떳떳함이요, 일꾼된 자의 진실과 겸손이다. 한편 마태라는 말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의미의 '맛다디아'(Mattathias)의 준말로서, 헬라어로는 '데오도르'(Theodore)가 된다(Gesenius).

⭕ 도마 - 도마는 '디두모'(요 21:2)라고도 불리우는데, 디두모는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이름 때문에 알려지기도 했지만 또한 그의 용기(요 11:16)나 그의 의미 깊은 고백(요 20:28)으로써 더 알려졌다. 실로 그는 의심하는 자의 대명사인 동시에(요 20:25) 예수를 가장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알기를 소원했던 이성적인 신앙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작은 야고보'로도 불리어졌다(15:40;마 27:56). 이는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 곧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보다 그가 늦게 부름받았거나 나이가 연소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것이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글로바(Cleophas)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되며(15:40;요 19:25), 그의 부인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 자매간으로 여겨진다(Jerome).

⭕ 다대오 - 어떤 사본에는(Diatessaron Version) '렙바이오스'(*)와 '다대오'가 함께 불려지고 있다(Origen). 이 다대오는 아마도 누가복음의 명단에 나와 있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그의 본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눅 6:16;행1:13). 한편 '렙바이오스'와 '다대오'는 어휘상 유사성을 갖고 있다. 즉 '렙바이오스'는 '심장 깊은 곳', '다대오'는 '가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그를 배신자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 가나안인 시몬 - 시몬은 '열심당'(the Zealot)이라 불리어졌다. 이러한 별칭은 단지 그의 종교적인 열성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가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에 광적인 국수주의자 그룹인 셀롯당(열심당)의 일원임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좋다. 열심당은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에 폭력으로 대항하여 싸웠던 유대인들의 애굽 집단이었다.

성 경: [막3:19]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열 두 제자의 선택]

⭕ 가룟 유다 - 유다의 성은 '가룟'(Iscariot)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마 '가룟(Karioth)이라 불리우는 지방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가룟(Karioth)지방은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는 '케리옷 헤즈론'(Kerioth Hezron) 지방(수 15:25)이거나 모압 땅 케리옷(Kerioth) 지방과 동일시 될 수 있다(렘 48:24). 따라서 그는 12제자 중 유일하게 남쪽 출신의 제자였다고 보겠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로서 성경에 나타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성경에는 단지 제자들의 돈궤를 맡아 회계(會計)를 보고 베다니에서의 향유 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하는 것으로만 유다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로 선택하신 12명의 사람들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던 복음의 밑거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4명은 어부였고, 또 한 명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던 세리요, 또 한 사람은 과격한 독립 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이었다. 나머지 6명 제자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 인물들이었다. 즉 그들 가운데는 설교가도, 성경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게 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12 사도의 명단을 대할 때마다 그들의 위대성이나 탁월한 봉사에 주목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그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고 세계 복음화를 주도해 가시는 예수의 초월적인 권능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막3:20]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에 대한 가족들의 불신]

⭕ 집에 들어가시니...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 예수는 다시 무리들에게 둘러싸였다. 예수께서 들어가셨던 집은 1:29과 2:1에서 언급된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되며 그 집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 집에는 예수의 관심을 얻고 또 예수의 이적을 체험코자하는 무리들이 수없이 몰리는 바람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2:2;5:24;눅 5:1;8:19, 45). 이는 다음 절에 이어지는 예수의 친속의 힐난(詰難)에 대한 배경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무리들의 예수께 대한 열심있는 신앙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라 본다.

성 경: [막3:21]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에 대한 가족들의 불신]

⭕ 예수의 친속(親屬)들이 듣고...미쳤다함일러라 - 여기서 '친속들'(*, 호이 파르 아우투)이란 문자적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 '그 곁에서 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떻게 보면 '그의 친구들' 또는 '그의 제자들'로도 이해할 수있다. 그러나 31-35절과 연결시켜 볼 때 이는 분명 예수의 '가족들'이다. 즉 예수의 쉴새없는 활동을 심히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나사렛의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다(Donald W. Burdick).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의 많은 능력을 인하여 크게 소문이 나 식사할 겨를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께 와서 그를 붙들려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다시 나사렛에 억지로 데려가고자 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일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를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얻기 위하여 몰려드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갈 의도였던 듯하다. 특히 '붙들러'(take chargeof, NIV)의 헬라어 '크라테사이'(*)라는 동사는 어떤 사람을 체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본문의 긴장스런 장면을 더욱 고조시켜 준다(6:17;12:12;14:1). 한편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께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예수가 과로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았을 것, 즉 그가 미쳤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쳤다함일러라'(* ...*, 엘레곤...엑세스테)란 문자적으로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는 뜻으로 결국 비정상적 정신 상태, 불안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말이다. 한편 본문은 주격이 없는 제 2단순 과거 3인칭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미친 상태를 풍문으로 전해 들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라볼수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당신의 적극적인 헌신 때문에 오히려 가족 내의 긴장에 직면했다. 심지어 그분의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조차 자신의 아들은 특별한 소명을 위해 운명지워졌다고 익히 들어온 바였음에도 불구하고(눅 1:26-38), 그녀의 자녀들과 함께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심지어 예수의 형제들은 그를 비웃었다(요7:2-5). 이것은 분명 예수의 실체를 철저히 오해한 가족들의 관심의 수준을 대변해 줄뿐 아니라(C. L. Mitton), 근본적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 대한 그들의 불신앙을 반증해 준다(요 7:5). 이처럼 불신앙은 진리를 왜곡, 오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진리를 훼방하고 말살하려 들기까지 한다.

성 경: [막3:22]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바알세불 논쟁(論爭)]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의 언행을 세밀히 살펴 그 범법(犯法) 여부를 알아 보도록 보내진 일종의 종교감시단이었을 것이다(7:1;마 15:1). 한편 여기서 '내려온'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내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수를 핍박하고 처형한 참으로 적대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급파된 서기관들(7:1 주석 참조)은 그야말로 극악한 무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예수의 소문이 유대 온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급기야는 중앙에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 적대자들의 비난은 친속들의 언급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지만 그것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실로 적대자들은 공개적인 공격을 가하며 예수를 모독했다. 그들의 첫번째 비난은 예수가 바알세불을 '지폈다'(is possessed by, NiV)는 것이다(요 10:20). '바알세불'은 헬라어로는 '베엘제불'(*)로 표기되며, NIV와 KJV는 '베엘제붑'(Beelzebub)이라 표기한다. '베엘제붑'은 라틴어 성경(Latin Vulgate)의 표기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헬라어 '베엘제불'은 '바알 왕자' 또는 '고귀한 존재 바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가나안 신의 이름인 셈족어 '바알제불'(Baal-Zebul)의 음역이다. 한편 이 말은 '집주인', '파리들의 주(主)'라는 뜻으로서 모두 제의적(祭儀的)인 의미를 지닌다. 즉'집 주인'이란 제전(祭典)의 주인을, '파리들의 주'란 귀신의 격하된 신분을 지칭하는용어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시기 적절하게 사단에 대한 동의어로서 그 이름을 사용했다. 즉 유대인들은 이 '바알세불'을 귀신들의 왕 곧 사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거의 고정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곧 예수가 사단이라는 엄청난 모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비난은 '귀신의 왕을 힘입는다'는 것이었다. '귀신의 왕'(the prince of demons, NIV)은 어둠의 세력 가운데 최강자, 또는 마귀들의 통치자란 의미로서 결국 사단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과 귀신' 참조). 한편 바알세불이 귀신들의 세계를 통치한다는 사실은 정통 유대교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까닭은 선.악을 무론하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욥 1:6-12). 그런데 간혹 구약의 위경이나 쿰란 공동체의 기록들에 따르면 선.악의 세계가 확실히 구분된다는 사실이 발견되곤 한다. 더욱이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 문화와 교류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를 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Grant, Taylor). 특히 당시 유대에는 이방에서 주입된 유사치료적 마술(homoopathisch)이 있었는데, 이 마술에서는 귀신 축출자가 자기에게 예속된 귀신들의 힘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는 새로운 교훈과 지금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이적을 행하심으로 마치 유사치료적 마술의 전문가인 것처럼 주술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Gnilka).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는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었다(요7:20, 21;8:48;10:20). 어쨌든 예루살렘에 급파된 종교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인도로써 역사하시는 예수를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바알세불과 사귀(邪鬼)와 결탁한 자로 매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그들은(1) 예수의 메시야직을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하였지만 (2) 예수의 가르침의 순수성과순결성을 알고도 자기들의 사악한 정치, 경제적 이권이 침해당할까 하여 예수를 고의적으로 배척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 사역의 동기와 목적, 능력의 근원까지를고의적으로 모독함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성령의 사역을 부인한 셈이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영원히 스스로 막은 셈이 된 것이었다(마 9:1-34;15:14).

성 경: [막3:23]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바알세불 논쟁(論爭)]

⭕ 예수께서...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감정을 폭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불러모으시고 대면하신 채로 비유를 들어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하나하나 깨우치셨다. 한편 여기서 '비유'(Parable)란 예수의 교수법 가운데 두드러진 한 특징으로서 심오한 진리 옆에 평범하고 친숙한 상황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에 도움을 주게 하는 것이다. 실로 비유는 하늘의 의미를 지닌 땅의 이야기로서 비록 이야기의 내용이 땅에 뿌리를 박았으나 하늘을 향해 열려진 창을 가진 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마 13장 주제 강해 '예수의 비유' 참조).

⭕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 어둠의 세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인 사단은 그의 휘하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활약하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않는다.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으로서 자기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단이나 바알세불과는 적대 관계에 있으며(창 3:15), 또한 그들보다 더 강력(强力)하시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는 귀신들을 만나실 때마다 두려워하거나 주저함 없이 책망하셨다.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은 특별히 그의 치유 역사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각 복음서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치료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시는 것으로 항상 묘사되었다. 그러기에 진정 사단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러 가지 파괴와 고통과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우리의 삶과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패배는 너무도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세력을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중 이미 책망하시고 몰아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그 목덜미를 짓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성 경: [막3:24]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바알세불 논쟁(論爭)]

⭕ 만일 나라가...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예수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실례를 사용하신다. 분쟁하는 나라는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극히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 상식에도 못 미치는 발상으로 예수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나라'(*, 바실레이아)는 흔히 '왕국'으로 번역하는데, 실로 이 왕국이 건실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왕과 신하된 백성이 혼연 일체(渾然一體)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어느 한 쪽이 불신하고 파괴적 성향을 띠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 실례에서 예수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요, 예외없이 사단의 나라에도 적용되는 진리인 것이다(눅 11:17;고전1:10;3:3;11:18).

성 경: [막3:25]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바알세불 논쟁(論爭)]

⭕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설 수 없고 - 예수의 보편 타당한 논리는 좀더 구체적이고도 실감있게 적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집안의 분란(紛亂)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집'(*, 오이키아)이란 어떤 건축 구조물을 뜻하지 않고 혈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집합체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나라'라는 집합체보다 더 결속력과 동질성 면에서 뛰어나다 할 것이다. 실로 이 두번째 비유는 결국 사단의 왕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즉 어떤 단체로 그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스스로 망하고 만다(Lenski).

성 경: [막3:26]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바알세불 논쟁(論爭)]

⭕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망하느니라 - 24, 25절의 결론구에 해당한다. 요약하면 사단의 왕국도 역시 분쟁하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사단의 왕국은 스스로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할 조짐은 없었고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왕국이 지속될 것이었다(요 12:30, 31;살후 2:8). 바로 그런 이유로 예수의 귀신 축출은 사단의 내분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오직 사단의 적대자요 심판주로서의 권세있는 사역에 해당하는 것이다(요 14:30;요일 3:8;계 20:10).

성 경: [막3:27]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바알세불 논쟁(論爭)]

⭕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늑탈(勒奪)치 못하리니 - 더 자세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는 눅 11:21, 22과 평행을 이루는 본문은 사 49:24, 25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강한 자'란 막강한 힘을 소유한 약탈자나 도적의 이미지(image)를 제공하는 자로서 본문에서는 사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마 12:29). 그렇다면 '강한 자의 세간'은 사단이 소유하고 관할하는 그 휘하의 마귀들내지는 사단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그리고 '강한 자의 결박'이란 사단과 그휘하의 마귀들을 축출하는 일과 사단의 왕국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이같은 강한 자 결박 장면은 유대 문헌들에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계 20:2;외경 에녹서10:4, 5;레위의 유훈 18:12) 악의 최후 멸망을 기대하게 한다. 한편 본문에 암시된 '그 강한 자를 결박할 자'는 사단의 왕국을 괴멸(壞滅)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 실로 예수는 사단을 결박시키고 그 사단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병고침과 귀신 축출 등을통해 이미 점진적으로 사단의 세간을 늑탈해 가고 계신 것이다. 물론 비록 사단이 결박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긴 사슬에 묶은채 최후의 발악을 할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강조하신 바는 (1) 당신은 사단과 결코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과 (2) 당신은 현실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파괴해 가고 계시며, 그렇기에 당신은 사단보다 더 강한 분이시라는 점이다.

성 경: [막3:28]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용서받지 못할 죄]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레고 휘민)- '아멘'(진실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진실하신 품성과 약속을 보증으로 말씀하시는 공식적이고도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하실 때마다 특징적으로사용하신 권위문(權威文)이다(마태복음 31회, 누가복음 6회, 요한복음 25회, 본서에는 13회 기록됨-8:12;9:1, 41;10:15, 29;11:23;12:43;13:30;14:9,18,25,30).

⭕ 사람의 모든 죄...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원문은 '사람들의 아들들'(*, 토이스 휘오이스 톤안드르폰)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인자'(人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마12:32와 그 언어적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모든 죄'(*, 판타...타 아마르테마타)는 문자적으로 '모든 죄악된 행위'를 뜻하며, '훼방'(*, 블라스페미아미)은 '모든 죄'의 한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의 일에 적극적인 장애 역할을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개개의 죄악 행위조차 궁극적으로는 용서를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이 미래 시상임에 유의) 받을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이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서 예수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또 모든 죄를 사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이시다.

성 경: [막3:29]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용서받지 못할 죄]

⭕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영원한 죄에 -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럼에도 본문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통해이 난해를 극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모든 죄는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결국 삼위 일체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 성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구속 사업을 실현하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하신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의 감동 감화를 통해 구원받는데, 이를 부인하면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이 영원히 막히게 된다. 즉 '인자'는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고의적(故意的)인 일이고 또 회개를 거부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사63:10;행 5:3;엡 4:30;살전 5:19). 더 자세한 내용은 마 12:31, 32 주석 및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해진다는 이 말씀은 교회 역사상 크나큰 불안과 고통을 야기시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였는지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해왔다. 실로 예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고자 한 것은 그죄의 일시적 경향이 아니라 반복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고질적이고 뿌리깊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한된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마음의 완악함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라일(Ryle)의 다음과 같은 말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죄로 인해 마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J. C. Ryle,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 2:59). 반면에 실제로 그 같은 죄를 범하는 자들은 완악한 심령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이 그 같은 범죄자요 또 미래에까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성 경: [막3:30]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용서받지 못할 죄]

⭕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본절에 언급된 서기관들의 말 자체가 위에 언급한 영영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직접적인 원인이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범죄라 할지라도 회개가 있고 돌이킴이 있을 때에는 분명 하나님의 용서가 따를 것임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행에 대한 예수의 교훈과 또 사단의 왕국이 분열할 때 그 왕국이 패망하리라는 사려깊은 예수의 설명을 듣고서도 오히려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이적을 모독(冒瀆)한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편견이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선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셨다(마 12:22;눅 11:14). 예수께서는 그 일을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통하여 행하셨으나 서기관들은 그것을 사단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그 사람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심령의 자세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진리에로의 인도와 성령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커녕 깊은 적의와 거듭되는 의지적 반항을 함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는 치명적인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Donald W. Burdick). 이에 대해 미톤(C.L. Mitton)은 말하기를 '당신이 선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는 데도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편견과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자인한 까닭에,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완악함(3:5) 때문에 이와 같은 죄악을 범한다'고 했다.

성 경: [막3:31]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의 참된 새 가족]

⭕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예수를 부르니 - 마가는 다시 21절과 연결하여 예수의 가족에 대하여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가는 서기관들과의 바알세불 논쟁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킴으로써 위기감(危機感)을 고조시키고 더불어 예수의 가족들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있다. 가족들이 예수께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그들은 그가 계신 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특히 형제들과 그 모친이 언급되어 있으나(본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이 구절 한 군데밖에없다) 요셉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아마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었던 것같다. 한편 '동생들'에 관해서는 6: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막3:32]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의 참된 새 가족]

⭕ 무리가...어짜오되...밖에서 찾나이다 - 예수께서 들어가 계신 집은 입추(立錐)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무리들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를 중심으로 빽빽이 둘러 앉아 있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2:47) 본문의 '무리' 대신 어떤 한 사람이 예수께 이야기했다고 기술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마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바깥 사정을 전해듣고(31절) 무리를 헤집고 들어와서 예수께 이르러 이야기를 전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두 복음서 간의 차이 이외에도 마가는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마 12:47)라고 전하고, 누가는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눅 8:20)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각 기자의 관심사가 달랐을 뿐 아니라 각 기자들이 지닌 독특한 기록 방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 기자들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함께 보완적으로 조화롭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본 구절에서는 가족들이 현장에 나타나 예수를 계속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명확히 알고 계신가의 여부가 표면상 드러나 있지 않다. 측측하건대 예수께서는 그의 동생들의 불신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은 다음 절에서 보듯이 예수의 영적 가족에 관한 가르침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순종하기 위해 때로는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실로 이것은 예수께서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집이나 가족까지 버리는 복음에 대한 절대 순종을 주저없이 말씀하시게 된다(10:28-30). 어쨌든 본문에서 예수가가족들의 면회 요청에 즉각 응하지 못하셨던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La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누이들'이란 용어는 여러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에브라임등)에는 빠져 있다. 아마도 31절과,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마태복음, 누가복음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생략된 듯하다. 그러나 이 용어가 생략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성 경: [막3:33]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의 참된 새 가족]

⭕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근본 의도는 인간 관계를 전면 부정해서가 아니다. 예수는 바로 이 기회를 통해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고자 하셨을 뿐이다. 실로 예수께서 평가하셨듯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성(복음을 전하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일등)이 지상에 계시는 어머니와의 관계성(인간적 교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마 6:33). 따라서 예수는 비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시한 가족들이 당신을 혈연으로서의 끈으로 연결코자 노력하였으나, 당신은 하늘의 영적 관계성으로 대답하셨던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反人倫的) 처사이기 보다 초인륜적(超人倫的) 처사였다.

성 경: [막3:34]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의 참된 새 가족]

⭕ 둘러보시며...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 여기서도 세밀하고도 생동적인 문장 기법을 사용하는 마가의 특징이 돋보인다. 예수께서는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내밀한 감격의 음성으로 '내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추측컨대 이들은 예수의 12제자일 것이다(마 12:49). 특히 이들을 지칭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와 함께 있는(14절) 자의 각별한 위치를 뜻할 것이다. 진정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기준과 제약에도 구애됨 없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 인정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따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예수와의 그깊은 영적 가족 관계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보내 주신 당신의 행위에 대한 저들의 공개적 결단을 기뻐하시고 육친적 관계(肉親的關係) 이상으로 저들을 예수와 결속시켜 주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들에서 혈연적 가족들을 제외시켰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예수와 성(聖) 가족이 되는 것이다.

성 경: [막3:35]

주제1: [확장되는 종의 사역과 고조되는 핍박]

주제2: [예수의 참된 새 가족]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 예수의 참된 가족은 비단 열 두 제자만 아니라 '누구든지'(whoever, NIV)될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개방성과 영적 가족의 보편성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은 한 가지 필연적인 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친속 관계를 맺게 해주는 핵심 요소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마 12:50;눅8:21). 한편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하신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란 과연 어떤 사람인가 ? 라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듣고 받아들이며, 또한 그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요 1:21).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의 인격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대한 전폭적(全幅的) 순종이라 할수 있다. 실로 예수와 더불어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인간에게 돌연 나타나고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순종에 대한 요구에 그 긴박성이 더해진 것이다(Lane).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면서부터 존재하게 된 새가족에게는 마땅히 예수께서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보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순종과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이 주의 부르심에서 보여준 그러한 철저한 순종이 요청되고 있다.

성 경: [막4: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계속되는 갈릴리 사역]

⭕ 다시(*, 파린)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비법이 돋보이는 표현이다. 헬라어 '파린'은 '간다', '보낸다'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여 다시 그 행위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또 과거의 어떤 사건이 다시 반복하여 일어날 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음에 이어 나오는 '바닷가'라는 말과 연결하여 생각할 때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것이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2:13에 보면 '바닷가'에서 무리에게 설교하신 적이 있고, 3:7에는 바다로 물러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2:13의 가르침에 이어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신다는 뜻이다. 3:7의 경우는 가르친다는 말이 없고 단순히 '바다'로 물러간 것이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활동하신 현장 묘사라는 점에서는 3:7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킨다.

⭕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을 '큰 무리'(*, 오클로스 폴뤼스),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의 매우 혼잡했던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군중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큰 무리'라고 한 개역성경의 표현보다 상황 묘사가 더 실감 있다.즉 예수께서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르셨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본장에서 다루는 여러 비유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의 많음을 통해 당시 예수의 말씀의 권위(權爲)와 그분의 영적 영향력 등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처럼 참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있다.

⭕ 바다에 떠 앉으시고 -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마 13:2)라고 표현한다. 공동번역 역시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신'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현이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3:9) 위에 올라 거기 앉으시고 해변가에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강론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막4: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계속되는 갈릴리 사역]

⭕ 예수께서... 가르치시니(*,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이는 미완료 과거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계속적으로 가르치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 여러가지를 비유로 - 여기서는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절을 장소적 상황 묘사라고 한다면 여기서의 표현읕 방법론적 설명이다. 즉 이때까지의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비해 여기서는 우회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비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본장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비유(21절;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가 더 있어 9개의 비유가 사용된다. 더욱이 마가는 본장 후반부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본장이 다루고 있는 비유 이외에도 상당수의 비유들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음을 시사한다.

⭕ 가르치시는 중에(*, 엔 테 디다케) - 직역하면 '그 가르침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서 몇가지를 소개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기 소개되지 않은 비유도 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성 경: [막4: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들으라(*, 아쿠에테) - 이 말은 '듣는다'(hear), '순종한다'(obey), '말을 듣는다'(listen), '깨닫는다'(understand)의 뜻인 헬라어 '아쿠오'(*)의 명령형이다. 여기서는 의미상 '깨닫는다'의 뜻으로 이해하여 '깨달을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이러한 표현은 미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문형이다. 이러한 어법은 (1)비유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라는 간청을 위엄 있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이제까지 가르쳐온 방식과는 다른 비유적 방법이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켜 잘못된 이해가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알 수 있다. (3)이러한 경고형의 명령형은 이제까지 가르쳐 온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청중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 암시된다. 따라서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警告)일 수도 있다. 이 말은 9절의 표현,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표현과 함께 이 경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씨를 뿌리는 자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비유의 소재가 씨뿌리는 농부로부터 얻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형식, 즉 씨뿌리는 자를 소재로 한 문구는 구약 성경에서도 많이 발견된다(욥 4:8;시 126:5;잠 22:8;사 61:3;호 8:7;10:12). 한편 여기서 씨뿌리는 자(farmer, NIV)는 예수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비유의 동기는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훈계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더불어 그 훈계의 주체자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게 된다. 물론 본문의 '씨뿌리는 자'를 오늘에 재해석하면 곧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으로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막4: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뿌릴새 더러는 - 본문은 팔레스틴 농부들의 파종(播種) 장면을 연상케 하는 구절로 농부들은 보통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10, 11월에 비가 온뒤 밭을 갈게 된다. 그런후 나귀등에 씨를 담은 큰 자루를 싣고 밭에 나아가, 그 씨를 다시 허리춤에 찰 수 있도록 만든 가죽 주머니에 적당히 옮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이미 기경해 놓은 밭 이랑을 돌면서 그 씨를 손으로 여기저기 흩뿌리면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르며 쟁기로 흙을 덮음으로써 파종을 마치게 된다(Fred H. Wight). 따라서 여기서 '뿌릴새'란 정확히 표현하면 '흩뿌리새'가 된다(창 26:12;레 25:3).

⭕ 길 가(*, 텐호돈) - 길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 삶의 자세로서의 행동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자주 다녀 단단히 굳어진 길을가리킨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요즈음과 같은 넓고 곧은 도로가 드물었고 대개가 여행자나 나귀 등이 자주 다님으로써 생겨난 자연적인 오솔길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이 오솔길은 공유(公有)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밭 주위나 혹은 그 밭을 가로질러 길이 날 경우 그 밭주인은 그 길을 남겨두고 개간해야만 했다(2:23;마 12:1;눅 6:1). 한편 말씀이나 교훈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비유 중 첫번째가 '길'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사실 길은 땅이 굳고 통행인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싹틔어 열매를 맺도록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땅이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눅 8:5)이러한 점을 좀더 강조하기 위해 '밟히며'가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즉 길에 떨어진 씨앗은 밟히어못쓰게 된다는 말이다.

⭕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길가에 떨어진 씨는 흙으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방임되기 때문에 새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만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은 그 씨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씨를 담고 있는 땅의 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뿌리면 도리어 사단의 좋은 먹이감이 되고 또 복음이 밝히어 모욕을 당하게 된다.

성 경: [막4:5,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흙이 얇은 돌밭에... 말랐고 -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평행구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만(마 13:5)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눅 8:6)라고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과 누가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깊은 상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흙이 얇은 돌밭'이란 돌이 약간 섞여 있는 농토가 아니라 거의 돌로 이뤄진 밭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곳은 수분을 쉽게 취할 수 있고 마치 온실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빨리 싹이 트게 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연한 뿌리는 더 이상 깊게 박히지 못하고 거의 지면에 노출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열에 견디지 못하여 곧 말라 죽고 만다. 여기에 대해 누가는 '습기가 없어 말랐고'라는 표현을 통해 태양열로 인한 고사(枯死)를 말한 본문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 경: [막4: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 타스 아칸다스) - 이 말은 '첨단', '뾰족나온 끝'(apoint)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가시가 돋은 나무(thorn plant)를 가리키는 말이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가시덤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오히려 이같은 번역이 어울릴 것이다. 팔레스틴에는 밭주위에 이러한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며 때로는 곡식과 함께 자랄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이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주변 곡식은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만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가시떨기 '위에'로(마 13:7), 누가복음은 '... 속에'로(눅 8:7) 각각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각각 다른 상황을 표현하기보다가시 덤불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땅에 씨앗이 뿌려지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라 본다. 사실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의 토양자체는 어쩌면 매우 기름진 곳인지 모른다. 그러나문제는 그곳에 가시덤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기운(氣運)을 막으므로(*, 쉬네프닢산) - 이 말은 '함께'라는 뜻의 헬라어 '쉰'(*)이라는 말과 '질식시키다', '억누르다'는 뜻의 '프니고'(*)라는 말이 결합된 합성어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함께 억눌렀기 때문에 질식하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숨이 막혀'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함께 억눌렀다'는 뜻은 가시나무의 여러 줄기들이 힘차게 자라나므로 그 속에 뿌려진 씨는 공기나 햇빛을 적당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잎이나 가지가 뻗어 나갈 수도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숨이 막혀'라는 표현으로 적절히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가시덤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식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가시덤불을 소재로 택한 것은 상징적으로 씨앗이 자라날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 결실치 못하였고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다. 이 비유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 즉 첫째는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된 점, 둘째는 싹은 틔었으나 뿌리를 못내린 점, 세째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점으로 보아 다음절(8절) '결실하였으니' 라는 말과 대조되면서도 문맥상 잘 어울리는 구절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의 무가치함을 잘 가르치고 있다.

성 경: [막4:8]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여기서 '좋은 땅'은 위의 세 경우의 흠이 모두 제외된, 농부가 정성껏 경작한 옥토를 가리킨다. 이 땅은 씨앗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며 열매를 잘맺게 한다.

⭕ 결실하였으니(*, 에디두카르폰) - 이는 미완료 능동태를 취하고 있어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음을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에서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본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Lane). 비록 온갖 역경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필코 자라서 궁극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할 점이다. 한편 여기서 '30배, 60배, 100배'라는 숫자의 점진적 증가는 옥토를 만난 씨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능동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특별히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이 상당히 미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양의 결실은 매우 감격적일 만큼 풍성한 결실인 것이다.

성 경: [막4: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자의 비유]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비유를 시작할 때 '들으라'라는 경고적 어투로 했던 것처럼 비유를 마치면서도 시작 때처럼 경고적 어투이면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23절;마 11:15; 눅 14:35). 이 경고적 어투는, 비유를 통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이는 오해하며 잘못 알아듣는 현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경고가 주는 의미는, 첫째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 달라는 촉구이다. 둘째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적 의미가 담겨있다. 결국 이 두 가지 의미모두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성 경: [막4:1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 홀로 계실 때 -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본절의 상황 설명은 1절의 상황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즉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예수께서 홀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때'는 비유를 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라고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소는 같은 장소, 즉 배 위가 틀림없다(36절 주석 참조).

⭕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만 언급하여(마 13:10;눅 8:9) 진리 탐구에 대한 제자들의 열의를 은연중에 나타내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무지를 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는 달리 마가복음에서만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비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이 편협하게도 12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지적해 주기 위한 본서 기자 마가의 진지한 노력을 넌지시 보여 준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성을 거부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기 원하셨다.

⭕ 비유들을 묻자오니 - 여기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질문을 하고 있지만 '비유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비유 이외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언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는다. 그리고 본 마가복음은 이 양자 모두를 묻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비유만을 통한 진리 교육이 예수께서 이제까지 가르쳐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였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꼈을 것이다(2절 주석 참조).

성 경: [막4:1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 '비밀'(*, 뮈스테리온)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에서만사용된 말이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 바울서신에는 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 계시록에는 4번 쓰였다(계 1:20;10:7;17:5,7). 이 말은 '전수받은 자'란 뜻을 가진 헬라어 '뮈스테스'(*)와 '폐쇄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뮈에오'(*)로부터 파생된 말로서 '알려지고 전수되는 것이 폐쇄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이 용어는 당시 흥행하던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내에서 외부로 전혀 노출되지 않는 어떤 의식을 통하여 그들만의 비밀한 가르침을 전수하던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비밀'은 단지 허락된 몇몇 사람만을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비밀은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된다. 그러나 그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앙을 가진 자들이다. 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에 관해 래드(G. E. Ladd)는 말하기를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예언된다(단 2:44;12:12,13)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에 도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A theology of the N. T. p. 94). 한편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1:15 주석을 참조하라.

⭕ 외인(外人)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 이 구절을 12절에 붙여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본절에서 지칭하는 '너희들' 즉 질문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 불신앙의 완악(玩惡)한 마음을 지닌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비유'(*, 파라볼레)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로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다는 말과 대칭을 이루어 천국에 대한 비밀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계속 남아 있게 했다는 말이 된다.

성 경: [막4:1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 이는 저희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 70인역(LXX)에 의한 사 6:9, 10의 자유스런 인용이다. 그런데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는 사 6:9, 10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셈어에 있어서 명령형은 곧 결과를 표현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70인역에서 이사야의 글과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 구절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마가는 본문에서 보고 아는 것을 먼저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을 나중에 배치시키지만 사 6:9은 듣고 깨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먼저 언급된다. 또한 사 6:10의 첫 부분과 같은 강한 표현인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70인역의 본문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형시켜 단순히 '돌이켜'(*, 카이 이아소마이 아우투스),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카이 아페데 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마가는 아람어의 역본인 탈굼역(The Targum)을 따르고 있다. 이는 마가복음의 신빙성을 보증해 준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외인)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이 신학적으로 매우 난해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 내용을 기록한 각 복음서간의 차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히나'(*, '하기 위하여', NIV성경은 모호하게 '히나'를 '이는'<so that>이라고 번역함) 대신에 '호티'(*, '그 결과')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누가는 '메포테'(*, '... 하지 않도록')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접속사 '히나'의 뜻과 관련하여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해석이 분분하다. (1) '히나'는 문법상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데, 이는 마가가 나름대로 목적어적 용법으로 예수의 말씀을 해석해 놓았을 때의 경우이다. 이에 따르면 이 비유의 목적이 '외인들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마가가 원래의 아람말 '데'(*)를 오역하여 '히나'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 '데'는 '... 하기 위하여' (in order that)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하는 자'(who)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즉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외인에게는 ...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해석되어야 한다(W. W. Wessel). (3)'히나'는 마태복음의 '호티'(*)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는 비유의 목적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유의 결과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히나'는 '... 때문에'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본문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상의 해석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합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외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로 비유로 말하고 그 비유를 알아보고 듣기만 하면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시험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쨌든 본절 말씀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한 가지 이유가 진리를 '외인(완고한 불신자)에게는' 감추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마샬(Marshall)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시는 방법을 통하여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표면적인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그 실제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도하셨으며, 동시에 어두운 눈과 둔한 귀를 가진 자가 돌이켜진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Commentary on the Luke, p. 323)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완악한 맹목성과 복음의 거부에 관한 정죄 및 그로 인한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선포한 것(Roberts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완고한 불신자에게는 비유가 심판을 지향하는 가리워진 비밀에 속하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그같은 심판과 형벌의 메시지를 제공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충격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은 마13:11-1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막4:1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너희가... 알지 못할진대 -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무지를 가볍게 책망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이미 입문한(11절)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의미가 명백하여 깨달음이 있는 자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지 않은가? 만일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더 어려운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고 실망섞인 책망을 하신 것이다. 한편 이같은 사실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덮여 있는 어두움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제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고 했다.

성 경: [막4:1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여기서부터는 3-8절까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의미가 해석된다.

⭕ 뿌리는 자 -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지만 그는 분명 말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 마태복음에서는 간접적으로 '씨'가 '천국 말씀'임을 밝히고 있는데(마 13:19) 비해 누가 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서술한다(눅 8:11).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비유의 '씨'는 '말씀'을 의미하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말씀', 곧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확실한 소식인 것이다. 사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11절) 이러한 해석은 적절하다. 한편 본 비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말씀을 뿌리는 일'(the sowing of the Word)이었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the reception of theWord)임에 유의해아 한다(15-20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그 비유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사실 예수는 이미 당신의 '말씀을 뿌리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의 부정적 측면을 경험하신 바 있다(2, 3장).

성 경: [막4:15]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 본문은 4절의 중복으로서 매사를 신중하고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는 마가 기록의 특징이다. 물론 여기서 '길가'란 자신의 능력과 경험과 선입관과 주의 주장으로 인해 굳어질대로 굳어진 완악한 심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는 어떤 영적 감화나 감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이들이니(*, 후토이 데 에이신) - 이를 좀더 상세히 번역하면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다음에 나오는 종류의 사람들이다'라는 뜻이다. 길바닥에 씨앗이 뿌려진 것에 비유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으나 자기의 것이 되지못하고 사단에게 빼앗기는 사람이다.

⭕ 사단이 즉시 와서 - 여기서 '사단'( , 사타나스)이란 인간의 내면에 흩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는 악의 실체로서, 4절에 언급된 '새들'을 이 사단으로 보기도 하고(Lenski) 또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기도 한다(Donald W. Burdick).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단'이라는 말 대신 사단의 별칭(別稱)이라 할 수 있는 '악한 자'(*, 호 포네로스)로 묘사하고(마 13:19) 누가복음에서는 '마귀'(*, 호디아볼로스)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누가 어떻게 빼앗아 가느냐에 있지 않다. 핵심은 자기에게 들려진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천국의 비밀이 자신에게 주어졌어도 자기의 영혼의 양식과 신령한 지혜로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이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알았으면서도 즉시 자기 삶으로 옮겨 천국을 이루어가지 못하면 그 말씀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특히 자기 삶으로 옮기는 결단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말이 '즉시'이다. 말씀을 내면 깊숙이 뿌리박지 못하면 '즉시'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간다.

⭕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 - 여기서 '저희에게 뿌리운'은 원어로 완료 수동태 분사형을 취한 단어로서 그들에게 넉넉하고 적절히 뿌려져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마음에 뿌리운'(마 13:19)으로 묘사하여 그 씨앗이 단지 주변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뿌려졌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막4:1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본절은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에 대한(5절) 해설이다.

⭕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 15절과의 차이점이 있다. 15절에서는 말씀을 들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직접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본절은 15절의 상태보다 좀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受容)하였음을 밝힌다. 15절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비유는 비록 순간적이라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나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는 사람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신앙 생활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성 경: [막4:1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 뿌리가 성장할 수 없는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을 '그 속에 뿌리가 없어'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이런 자들은 그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그 말씀이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커가 끝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인 뿌리가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력은 일시적이요 그 본질은 경박하고 유약하다.

⭕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 - 6절에 언급된 태양열이 여기서는 '환난'(*, 드립시스)과 '핍박'(*, 디오그모스)으로 묘사되었다. 먼저 헬라어 '드립시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는 압박'을, '디오그모스'는 '뒤에서 바짝 추격하는 듯한 위협'을 의미한다. 결국 이 양자는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가리킨다. 실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따라 살고 진리를 따라 살때, 외부로부터나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여러 가지 갈등과 유혹이 있게 마련이다. 또 불의한 세력들이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려고 하면서 공격해 오기도 한다(롬1:25;2:8;약 3:14;벧후 2:2). 15절의 '사단'을 마태복음에서 '악인들'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치된다. 사단은 천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이다. 이러한 환난이나 핍박을 견디어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6절에 언급된 '태양'은 이처럼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생장(生長)의 크나큰 장애물로 대두된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에게 있어서는 그 생장에 있어서습기 만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태양의 빛과 열기없이는 '씨'는 결코 푸르게 성장하여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그 '씨'는 '말씀을 인하여'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핍박과 환난('태양')없이는 결단코 풍성한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Lenski).

⭕ 곧 넘어지는 자요 - 여기서 '넘어진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는 원형 '스칸달론'(*, '동물들을 잡기 위해 설치한 덫에 있는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지칭)에서 유래한 현재 시상의 단어로서결국 계속 그 함정에 빠져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실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식물은 아무리 그 외모가 화려하고 푸르르다 하더라도 강렬한 태양 앞에 쉬 쓰러지고 말듯이 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심령은 환난과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더 이상 활동력을 상실한 짐승처럼 죄의 올무, 절망과 좌절의 올무, 온갖 고통의 올무에 걸린 채 더 이상의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다(딤전 3:7;6:9).

성 경: [막4:18,1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가시떨기에...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 - 가시덤불에서 싹을 틔웠으나 가시덤불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의 비유이다. 앞절과의 차이점은, 17절에서는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 곧 배반자를 말하나(눅 8:13) 여기서는 비록 뿌리(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실성과 이해력)은 있으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끝내 결실치 못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결과적 측면에서 17절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본다. 실로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훨씬 뛰어난 옥토임에 분명하다(7절). 따라서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그 씨앗은 뿌리를깊게 내리게 되고 또 싹이 돋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장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가시로 인해 방해를 받다가 종내 결실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이 가시를 세경우로 묘사하고 있다. (1)'세상의 염려'이다. 여기 '세상'(*, 투 아이오노스)은 문자적으로 '그 시대'로서 일정한 기간 내지는 인간에게 부과된 한 세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의 염려'란 인간의 생명이 끝내 종말을 고하게될 현세대에 국한된 근심(Lenski), 현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열심과 걱정거리(Donald W. Burdick),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일어나는 불안(Taylor)등이다(마6:25, 31;눅 8:14;21:34;고전 7:33). (2)'재리(財利)의 유혹'이다. 재리와 가시를 연결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기 때문이다(The Pulpit Commentary , 딤전 6:10). 이 '재리의 유혹'은 재물이 지닌 기만성, 곧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Taylor,Lenski, Burdick, 마 11:21-23). (3)'기타 욕심'이다. '씨'(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는 모든 장애 요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 8:14에는 이 말 대신에 '이 생의... 일락(逸樂)'이라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인 관심과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 이같은 욕망들은 마치 기운찬 가시떨기처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의 성장을 철저히 제어해 버린다.

성 경: [막4:2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을 하는 자 - 이 비유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의 경우를 언급한 것으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결실'에 관한 내용이다. 실로 '씨'(말씀)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은 인간의 심령에 그 씨가 뿌려져 그 인간의 온 인격과 삶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다. 이같은 결실을 맺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즉 그는 말씀을 경시하지도,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어지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실행하며, 온전히 간직하는 데 힘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그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 커다란 결실, 곧 진리와 은혜와 덕이 충만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듣고'(*, 아쿠우신, '순종하다','깨닫다','이해하다'는 뜻도 지님)와 '받아'(*,파라데콘타이, '영접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는 뜻도 지님) 그리고 '결실을 하는'(*, 카르포포루신)이라는 말이 모두 현재 시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또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계속적으로 결실을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실로 앞에 언급된(15-19절) 세 종류의 밭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듣고 인정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착념함으로써 끝내 많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마 13:23;눅 8:15).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소출은 그 밭(사람)의 능력보다 오히려 그 씨(말씀)가 지닌 역동적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라 본다. 실로 한 인간에게 뿌려진 씨는 그 내부에서 풍성한 성장을 함으로써 회개와 겸손과 온유함 등의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러한 변화는 그 속에서만 머무는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타인에게도 옮아가는 것이다. 한편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마 25:14-30).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등의 다양한 숫자 나열을 통해 그 결실의 종류가 다양함을 암시해 준다. 이는 주의 말씀을 실천하여 천국을 이루어 갈 때 각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결실 각각을 존중해야 한다.

성 경: [막4:2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등불에 대한 비유]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 21-25절은 두가지 내용이(21-23, 24-25절) 한 데 어우러진 일종의 삽화 형식의 메시지로서 예수께서 여러 기회들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들이다. 특히 누가복음은 본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눅 8:16-18),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을 근간으로 본문과 연결되고 있다(21절-마 15:15;23절-마 11:15;13:9,43;24절-마 7:2;25절-마 25:29등).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예수의 가르침에 접한 자의 책임성(責任性)이다. 즉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사람이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 다른 복음서의 평행구와는 달리 오직 마가만이 '등불'(*, 호뤼크노스)을 '가져 온다'(*, 에르케타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등불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본 비유를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즉 등불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그 등불' 곧 세상에유일 무이한 등불이신 '오신' 예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가져 온다'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함축한 표현이다. 즉 지금까지 감춰져 왔던 계시를 종말의 시점에 이른 이제 만인에게 알리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앞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 개념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Taylor). 한편 본문에 언급된 '등'은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토기로 된 납작한 등잔으로서 그 속에는 감람유(olive)가 채워지며 그 기름에 심지를 넣고 불을 켜게 된다. 이 등잔은 주인이나 종에 의해 방 안으로 옮겨지며 옮겨진 등잔은 주로 기다란 등대 위에 안치되어 주위를 밝게 한다.

⭕ 말 아래... 두려 함이냐 -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하는 헬라어 '메티'(*)로시작되는 본문은 결단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간접적인 명령이기도 하다. 여기서말은 가루나 곡식을 되는 도량형기구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뒷박'이라고 번역하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8:16)는 등불을 덮는 '그릇'으로 묘사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등불을 켜지 않을 때 이 그릇으로 등잔을 덮어 두거나, 침상 아래 그 등잔을 내려놓는다고 한다. 어쨌든 이 '말'(bushel)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 단절시키게 만드는 세상적인 부와 이익을 암시한다. 그리고 평상은 침상(공동번역)을 뜻하며 상징적으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평온함과 쾌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이처럼 '말'과'평상'으로써 '등불'을 가리우듯이 주께로 받은 복음 곧 빛나는 그 계시를 결코 세상의 유익과 쾌락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 여기서 '등경'은 등잔을 올려 놓는 받침대로서 가난한 유대인의 가정에서는 이것 대신 흙으로 된 바람벽에 돌출구를 만들어 그곳에 등잔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본 구절의 의도는,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마 5:15 주석 참조) 빛이 가장 잘 퍼져나갈 수 있는 장소인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등경은 상징적으로 복음의 빛을 세상에 널리 전파해야 할 사명을 맡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계 1:20). 여기서 등불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죄악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의 세계를 건설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참 빛 곧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다(요 1:9). 둘째로 복음이다. 그 복음의 빛이 세상을 속속히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이 세상 한 가운데 선포하여야 한다(대상 16:23;시 66:16;행 20:24;롬 15:19;골 1:23).

성 경: [막4:2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등불에 대한 비유]

⭕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 이 구절을 번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이 마 10:26과 눅 12:2에도 나오지만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8:17이 가장 적절히 본뜻을 밝혀주고 있다고 본다. 이 비유는 '숨긴 것은 언제나 드러나게 마련이다'는 뜻의 속담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 아래 모든 사물이 밝히 드러난다는 경험적 상식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의미는 21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즉 (1)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이나 부정직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한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2)심판 사상과 연결된 것으로볼 수 있다. 즉 최후 심판의 때에는 모든 감추어졌던 사실들이 다 드러나므로(고후5:10)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기의 죄를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회개하는 삶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5:31-46). (3)'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있다. 즉 비유가 천국의 비밀에 관한 것이라면(11절 주석 참조) 그 천국의 비밀은 감추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밝히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천국의 비밀은 언젠가는 모두 밝혀질 것이라는 말이다. (4)'메시야 비밀' 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었지만 현재 그 사실을 숨기려 한 의도(9:9)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비밀이 현재는 숨겨져 있으나언젠가는 밝히 드러 날것이라는 암시와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된 사건에서 그분의 메시야성이 밝히 드러났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예수 재림(*)시에 모든 영광으로 예수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

성 경: [막4:2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등불에 대한 비유]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와 똑같은 구절이 이미 9절에서 언급되었고 같은 의미의 서두가 3절에서도 언급되었다(3,9절 주석 참조). 여기서도 역시 '내 말은 중요한 말이니 더욱 마음을 써서 그 의미를 깊게 되새겨 보라'는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적 문구로 생각하면 된다(마 11:15;13:9;눅 14:35).

성 경: [막4:2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헤아림에 관한 비유]

⭕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누가복음의 평행구는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눅 8:18)로 표현한다. 새번역에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번역되어 있다. 이 말은 23절의 격언구와 비슷하게 반복하여 사용한 경고적 어투로 보면 된다. 즉 똑바로 들어 비밀을 깨달으라는 촉구이다.

⭕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또 더 받으리니 - 이와 비슷한 문구가 마 7:2과 눅 6:38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구절들에서는 주로 타인을 비방하는 일을 삼가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반해, 21절부터 이어지는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복음을 수용하는 마음 자세(그릇)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된다. 즉 복음을 들을 때 깊고 넓은 영적 통찰력으로써 받아들인다면 그 마음 그릇에 풍족히 채워질 정도로 이해될 것이고계속해서 더 크게 이해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한편 본 구절을 단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너희가 남을 재는 그 그릇의 크기로 너희의 크기가 측정될 것이다'이다. 공동번역에서는 '너희가 남에게 달아주면 달아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전체적인 의미는 남에게 행한 것에 따라 보상되는 응보의 개념, 즉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의미가 짙게 깔려 있다(갈 6:7;고후 9:6).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본문은 사람이 영적 지각력을 갖고서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예수에 관한 진리를 밝히 알게 된다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실로 각자가 지닌 각각의 그릇(이해력, 지각력 등)에 따라 예수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을 많이도 받고 적게도 받을 것이다(고후 9:6).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복음을 수용하는 데 따른 보상적 응보는 대등한 보상이 아니라 '더 받으리'라는 표현을 덧붙여보상의 풍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영적 세계에서의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現狀)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마 13:12).

성 경: [막4:25]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헤아림에 관한 비유]

⭕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격언구로 보인다.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8:18)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구절이 발견된다(마 13:12;25:29;눅 19:26). 이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갈래로 할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과 관련시켜 해석할 수 있다. 즉 천국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하며 애쓰는 자는 더 많은 비밀을 알게 될 것이고 관심을 갖지 않고 듣지도 않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는 남에게 베푸는 사람을 베풀수록 더 많이 보상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세째는 많은 열매를 맺게하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지만 나쁜 땅의 씨앗은 열매를 못맺는 것처럼 겸손하고 말씀에 성실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풍성한 말씀의 열매를 맺어 기쁨을 누리지만 반대로 편견과 비뚤어진 마음과 생각을 소유한 자는 오히려 현재 지니고 있는 조그마한 행복까지 빼앗긴다는 심판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사 3:10; 렘 32:19). 물론 본문에서는 천국 복음과 진리에 대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의미하는 첫번째 견해가 적절하다.

성 경: [막4:2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하나님의 나라는... 뿌림과 같으니 - 여기서 또다른 비유가 시작되는데 본 비유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3-8절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는 다르다. 즉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의 성장에 좋은 토질과 풍성한 수확이 강조되었으나 본 비유에서는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한편 이 비유의 제목을 붙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즉 '몰래 자라는 씨의 비유',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비유'등이다. 공통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는 씨앗을 소재로 택하여 인간의 시각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그 역동적 활동력으로 인해 조용히, 점진적으로 성장해 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이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현재적이고 영적이라는 데 본 비유의 주안점이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되고 성장한다(Donald W. Burdick).

성 경: [막4:2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성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알맞은 장소에 씨를 뿌리는 일 뿐이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등의 일은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게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땅과 비와 공기와 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점이다(고전 3:6). 둘째, 씨뿌린 농부가 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나님께 맡긴다.

⭕ 씨가 나서 자라되... 알지 못하느니라 - 농부는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지 그 원인적 이유나 과정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씨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자연의 생명력과 내밀한 성장 과정은 우리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 성장 과정은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도 역시 그 과정이 신비한 비밀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원인적 힘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確信)을 가져야 한다(15:43).

성 경: [막4:28]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 여기서 열매를 맺게 하는 주체가 땅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땅 그 자체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기보다 그땅과 생명있는 씨앗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능력'을 암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땅이 스스로'란 표현은 곧 농부의 힘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스스로'(*,아우토마테)란 '자동적'이라는 뜻이다. 즉 열매맺는 것은 농부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땅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의미를 26절에서 씨뿌리는 자를 '사람'(*, 안드로포스)이라고 밝힌 점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 힘이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인간에 의해 김을 매거나 경작하는 일이 진행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씨앗을 결실케 하는 결정적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잊지 말아야 한다. 이 같은 점을 구원의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다(엡 2:8).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것이 중요하다(요 6:28, 29;히 11:6;요일 3:23).

⭕ 처음에는 싹이요... 충실한 곡식이라 -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연의 법칙처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도 천국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미완성 단계의 과정, 즉 '싹'이나 '이삭'은 '충실한 열매'가 되기 위한 가능태이다. 하지만 그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가능태를 관찰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나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J. Jeremias)는 말하기를, '열매는 씨의 결과이다. 즉 마지막이 처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이미 무한하게 작은 것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은(11절) 이미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본다'(The parables of Jesus, pp 152-153)라고 하였다. 한편 본문의 이러한 비유는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던 것을 추측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보려고 하는 불신앙적 사람들에게 이 교훈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철두 철미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야함을 가르치고 있다(창 18:14;신 10:17; 시 24:8;눅 1:49).

성 경: [막4:2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

⭕ 열매가 익으면... 추수때 - 이 구절은 욜 3:13의 인용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때 곧 세상의 종말이 이르는 때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익으면'(*,파라도)은 제2 단순 과거 가정법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열매가 '스스로 영글어 익어갈 때면'으로서 결실의 상황을 가정한 단순한 설명적 해석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통치가 스스로(28절)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영글었을 때를 의미한다. 이는 앞절의 '충실한 열매'와 같이 긍정적인 완성에 대한 그림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28절의 표현과 함께 생각하여 미세한 하나의 씨앗이 뿌려져서 충실한 곡식이 되고 그것이 익어지는 신비한 과정을 전개함으로써, 씨뿌릴 때 과연 이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 하는 의아심 혹은 확실성이 없는 기대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씨앗을 뿌린 뒤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곡식이 결실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은 모호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Cranfield). 즉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그런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면서 현재적 과정이다.

⭕ 낫을 대나니...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 이는 종말적 최후 심판을 표현한다. 이처럼 종말적 심판을 '추수'로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잠25:13;렘 5:24;51:33;욜 3:13;마 3:12;13:30;눅 3:17;계 14:14-16). 특별히 여기서 '낫을 댄다'는 것은 '낫을 가져 간다'는 뜻으로 씨를 뿌린 후 자기 일에 열중하던 농부가 (27절) 추수의 시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밭에 보내지는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요4:38) 무서운 심판의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낫'은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한 환유적(換喩的)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추수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추수를 하는 것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고 추수하는 일은 농부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의 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추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추수의 주체자는 하나님이다. 즉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며 추수에 투입되지만 그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하고 잘 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땅, 곧 신비한 자연의 힘이다(하나님의 이면적인 섭리).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빠지는 일이 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성 경: [막4:3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

여기서 또 다른 비유가 시작된다. 주제는 앞에 나오는 비유에 이어 계속 하나님 나라이며 소재는 겨자씨이다. 역시 청중과 장소변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 13:31, 32과 눅 13:18, 19에는 공히 바로 이어서 누룩 비유를 첨가하고 있으나 본문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어쨌든 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사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고 보잘것 없으나 그것이 강하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크게 나타날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어떻게 비하며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 이 비유의 시작은 다른 비유와 달리 어떻게, 무엇으로 비유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주로 히브리인들이 즐겨 쓰는 수사법으로서 생생한 물음을 통해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고 생각할 여유를 갖게 한다.

성 경: [막4:3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

⭕ 겨자씨 한 알 - 겨자씨는 당시 유대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이며, '사람이 땅에 심는 가장 작은 씨앗'(the smallest seed you plant in the ground)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아주 작은 씨앗으로 비유되는 겨자씨를 '한 알'이라 한정함으로 그 작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하는 설명구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표현은 조금 과장된 듯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의 실체는 마치 겨자씨의 성장 과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즉 천국은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작아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미한 시초성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미미함은 능력있고 흥왕한 모습으로서의 천국의 미래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겨자씨의 생명력 넘치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실로 가장 작은 것 속에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막4:32]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천국에 관한 겨자씨 비유]

⭕ 자라서...큰 가지를 내니 - 이 구절은 '가장 작은 것'을 강조한 31절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 구체적 표현을 살펴보면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새들이...깃들일 만큼'이라는 비교 문구를 각각 사용한다. 여기서 '모든 나물'을 공동 번역에는 '어떤 푸성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겨자씨의 본질(나물)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본질을 훨씬 뛰어넘는 변화(나무로서의)를 암시한 것이라 본다. 즉 겨자씨는, 그 실제는 '나물'(푸성귀)이지만, 그 키가 3-4m(심어어 7m까지 자라는 경우도 있다고 함)까지 성장하며 그 줄기의 굵기가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라므로(Donad W. Burdick) 가히 '나무'라 봄직하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변화와 성장을 이뤄놓는 것이다. 실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폭발적인 확장성과 현재와 미래의 대조적인 모습을 적절히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가장 큰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된 천국 비밀처럼(26-29절) 지금은 보이지 않는듯 하지만 씨앗이 자라듯 그 작은 것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며 반드시 완성된 형태로 성장할 것이라 확신을 갖게 하는 가능태이다(29절). 따라서 천국을 대망하는 사람은 작은 것에 대한 중요성을 알고 있어야 하며(Nineham)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 완성된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욥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마 25:21, 23의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를 생각나게 한다.

⭕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 여기서 '공중의 새'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기 보다 오히려 자라난 겨자나무의 크기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마 13:31). 혹자는 성경에서 흔히 '새'가 사단의 대리인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확장되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해치기 위해 힘쓰는 존재들로 이해하기도 하나 본 문맥에서는 적합치 못한 해석이라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영적으로 이 '공중의 새'는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이방인들로 보기도 한다. 한편 여기서 '깃들인다'(*, 카타스케눈)는 말은 단순히 비나 바람을 피해 잠깐 쉬어간다는 의미이기보다 거주지로 정하고 장막을 세우듯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도처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깃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이다.

성 경: [막4:33]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많은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

⭕ 비유로...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 비유들은 예수께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즉 예수 자신의 인격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용하신 방법 중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진리를 비유로 말씀함으로써 무리들의 이해를 돕고자 하셨다. 즉 비유(parable)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력을 일깨워주는 은혜로운 진리 전달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유는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즉 듣는 이의 영적 감지력과 진리에 대한 이해력 여부에 따라 쉽게 또는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막4:34]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많은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

⭕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 이 말은 비유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비유를 통해 가르쳤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11,12절 주석을 참조하라.

⭕ 혼자 계실때에...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이 문구는 10절의 시작과 비슷하다. 다만 질문을 했다는 언급이 없고 10절에서는 청중이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하고 있다. 결국은 앞에서 가르친 여러가지의 비유들은 일반 청중을 상대로 한 것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비유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13,33절 주석 참조). 사실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조차로 예수의 거듭되는 설명과 상세한 해설이 필요했었다. 사실 본문의 '해석하시더라'(*, 에페뤼엔)가 미완료 시상으로서 단 한번이 아니라 계속 설명해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진정 예수께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33절) 진지하고도 쉽게 가르쳤지만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비유는 여전히 어렵게만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고적 격언구와 내용의 일치를 갖는다(3, 9, 23절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들은 예수를 배신하거나 십자가 처형에 침묵으로써 간접 동조했던 것이다(114:50).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으로써 사람들은 예수를 비로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쪽의 잘못이다. 이것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 할 수 있다(3-20절).

성 경: [막4:35]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그 날 저물 때에 - 이렇게 자세한 시간적 묘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없다. 여기서는 앞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시간과 공백을 두지 않고 있다. 즉 '그 날 저녁때'라고 명시하여 예수께서 천국 비유를 가르치신 그날 많은 양의 활동을 하신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오르시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비유를 베푸신 날과 전혀 다른 사건으로 다룬다(마 8:23). 누가복음 역시 '하루는'이라는(눅 8:22) 단어를 사용하여 막연한 어떤 날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1절에서 묘사된 바닷가 풍경을 그대로 그려주는 듯한 배경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매사를 예민하고 세밀하게 취급하고자 하는 마가의 특징적인 문장 기법에 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계속 갈릴리 바다 곁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는데 그것은 36절의 '배에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여기서 '그 날'은 분명 바닷가에서 많은 비유들을 가르치신 날이다.

⭕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 이 제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바쁜 일과로 인해 피곤하셨기 때문에 모인 무리들을 피하여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자 이런 제안을 하셨을 것이다. 한편 '저편'은 배를 타고 가야할 목적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바다 건너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5:1의 사건과 연결시킨다면 이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일 것이다.

성 경: [막4:36]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저희가 무리를 떠나 -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는 일행이 제자들과 예수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 1절에서 시작했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끝난 직후 곧바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배에 계신 그대로'란 '떠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채로'(Bengel), '해변에 내려가지 않고'(W. W. Wessel)라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올라 앉으셨던 바로 그 배를 타고 지체없이 건너편으로 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어부 출신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과 실행이 뒤따랐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생동감과 현장감 넘치는 마가의 문장 표현법에 의해 눈에 선명히 다가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상황 묘사가 없다.

⭕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 이는 마가만의 특종 기사이다. 여기서 '다른 배'란 예수와 제자들이 탄배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탄 배를 말하는 데 이 배가 어디로 갔는지, 또 왜 함께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전체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있을 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날 저물 때에(35절) 같이 출발했을 것이며 또한 예수 일행이 만났던 풍랑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10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제자들외에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께 대한 관심은 낮이나 밤(35절), 그리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성 경: [막4:37]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큰 광풍이 일어나며(*, 기네타이 라일랖스 메갈레 마네무) - 회오리처럼 밀어닥치는 바람을 최대한 확대 표현한 말로서 현장감과 긴박감을 더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다. 갈릴리 바다는 대체로 고요하고 음산한 기후를 이루고 있는데,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난다. 즉 지중해 수면보다 약 2oom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이상 기류가 흐를 때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같은 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가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걸맞게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긴박하고 급격한 상황 변화를 묘사해 주고 있다.

⭕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 여기서 '부딪혀'(*, 에페발렌)는 미완료 시제로 '물결'(*, 퀴마타, '큰 파도')이 배를 계속해서 때려 정신없는 상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같은 위험 상황은 극에 달하여 물이 '배에 가득하게'되는 절명의 순간에 이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마태는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4), 누가는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 지라"(눅8:23)고 기술하여 한결같이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침몰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한편 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집단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약A.D. 70) 교회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적 해석은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는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

성 경: [막4:38]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 이 표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더 섬세한 표현으로 37절에서 묘사된 급격한 상황 변동과 극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께서 '고물'(*, 프륌나, '배 뒤편')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신다는 묘사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상황과는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한편 혹자(Lange)에 따르면 '당시 배들 안에는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여 고물에 작은 의자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양탄자나 베개가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어쨌든 이 '베개'(*, 프로스케파라이온)라는 단어앞에 정관사(*, 토)가 쓰여진 것으로 보아 그 배에는 단 한개의 베개만이 있었음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는 이 베개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풍랑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온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로 예수께서 잠이 든 이유는 물론 밤에 수면을 하는 일상의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낮 동안 내내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지니신 참 인간이심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잠드신 본 장면은 침몰 직전에 있는 배 안팎의 혼란상과 대비하여 절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안정성은 우주 만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근본으로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롬 8:39). 한편 앞절(37절)에서 침몰하는 배를 교회나 개인의 삶과 신앙의 위기로 상징한다면 예수의 평온한 모습은 교회와 개인의 위기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자로서의 모습이라 본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은 광경을 소개하면서 교회와 개인의 이같은 일시적 혼란은 예수에게로 돌아감으로써 영원한 평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요 14:1).

⭕ 제자들이 깨우며 - 여기서 '깨우며'에 해당하는 원어 '에게이루신'(*)은 현재 시제를 취하여 매우 다급한 모습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의 현장성(現場性) 짙은 기술 특징이 돋보인다.

⭕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제자들이 원망섞인 어투로 예수를 불러 깨운다. 이러한 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은 진정 그들이 예수가 누구이신지 아직 완전히 파악치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서 원망섞인 볼멘 소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주여'라고 부름). 이같은 마가의 표현은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구주와 죄인과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이 무례하게 예수를 대한 사실에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다고 보겠다. 실로 우리가 예수를 향하여 어떤 호칭으로, 어떤 외침을 부르짖는가에 따라 우리 신앙의 수준이 간접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막4:39]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바람을 꾸짖으시며...이르시되 - 여기서는 37, 38절에서 묘사되었던 대혼란과 대조되는 아주 평온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그 이유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타일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꾸짖으시며'(*, 에페티메센)와 '그치고'(*, 에코파센)등이 부정 과거시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즉각적이고단 일회적인 사실을 암시하고 표현이다. 즉 예수께서는 권위에 찬 음성으로 한 번 꾸짖으셨고 이에 견주어 더 이상의 반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풍랑이 잔잔하여진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잠잠하라 고요하라 - 문자적으로 '침묵하라'(조용하라), '말하지 말라'(재갈을 물어라)는 뜻이다. 특별히 '잠잠하라'(*, 시오파)는 바람을 향한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당장) 그 부는 것을 그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고요하라'(*, 페피모소)는 풍랑이는 바다를 향한 완료 명령형으로 '(더이상의 활동을 중지하고) 그냥 그 상태로 조용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문자적으로 '크나큰 잔잔이 형성되다'는 뜻으로 마치 언제 풍랑이 있었느냐는 듯이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실로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이 자연을 지배하시고 곤궁에서 구원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74:13, 14;107:28, 29 등). 지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막4:40]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어찌하여...무서워 하느냐...어찌 믿음이 없느냐 - 공동체든 개인이든 위기에 처하면 누구나 당황하고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불신앙적 언행(38절)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마태복음에서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기 전에 나온다(마 8:26). 즉 먼저 제자들을 꾸짖고 바람을 꾸짖는다. 아마도 마태는 '풍랑'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결여된 것에 대한 꾸짖음에 더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에 이같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한편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본문이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바티칸)에는 '아직까지'(*, 우포)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이에 근거해 공동번역에서는 '아직도...'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의미로 이 꾸짖음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풍랑이 일어났을 때의 지나간 일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즉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에 대하여 원망어린 말투로 구원을 요청한 사실에 대한 책망일 수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한 기적을 보여준 후 '아직도 두려운가?'하고 반문하는 어투와 '아직도 믿음이 없는가?'하고 반문하는 형태의 말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기적을 보았으니 믿음을 굳게 가지라는 의미로 예수의 꾸지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타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예수께는 제자들의 몰이해와 믿음의 결여에 대해 여러 번 책망하셨는데, 여기 기록된 것이 최초의 사건이다(7:18;8:17,18,21,33; 9:19).

성 경: [막4:41]

주제1: [종의 비유]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 문자적으로 '크나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는 뜻으로 히브리인들의 강조적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대하여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놀라움 곧 일종의 종교적 경외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로 '두려워 한다'는 것은 예수의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과 일치시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대하듯이 예수를 대하는 제자들의 심적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 표현이 다음에 나오는 반문하는 형식의 문구이다. 즉 '저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이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암시적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시89:9;107:25-30). 그 대답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렇게 하신다'일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논한 것으로 예수께 대한 본질적이고도 존재론적인 물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마가는 이와 같은 기적 사건을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한편 박해와 순교의 현장에 놓여 있던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이 마가복음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가히 상상할 만하다. 이 사건은 시련과 박해의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평안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사 63:9;벧전5:7).

성 경: [막5:1]

⭕ 바다 건너편. - 이 말은 4:35에서 예수께서 언급한 "저편으로 건너가자"를 받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건너편"이란 호수 동쪽편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와 제자들은 항해 도중 한 차례 큰 풍랑을 통해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 뒤 예정했던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 거라사인 지방에. - 여기서 "거라사"는 지명에 대한 논란이 많다. 실제로 거라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방은 갈릴리 호수에서 약 30마일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 땅이기 때문에 과연 예수께서 그곳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성읍이 아닌 갈릴리 호수 가까이에 있는 한 작은 지방(地方)으로 이해할 수 있다(Donald W. Burdick). 더욱이 이곳은 호수 근처의 "가다라"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다라"지방이라고 표기한다(마 8:28). 한편 이 지역의 지명에 대해서는 세 종류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즉 마가의 기록대로 "거라사"(게라세논), 그리고 마태의 기록대로 "가다라"(가다레논), 또 오리겐(Origen)이 주장한대로 "걸게사"(게르게세논)가 있다. 이에 대해 테일러(Taylor)는 말하기를 "이처럼 지명상의 차이점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거라사(갈릴리 동남쪽으로 48km 지점)와 가다라(갈릴리 동남쪽으로 9.6km 지점)가 갈릴리 호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이며 깎아지른 산들이 갈릴리 호수로 이어져 있다는 기록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마가는 이곳을 분명히 "가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못박고 있으며, 이것은 그 도시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미치는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마 8:28의 "가다라"지방이라는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음). 그리고 또 다른 한 가능성은 "거라사"라는 지명이 갈릴리 동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 즉 "케르사"(Kersa)와 동일 지역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40km 높이 정도의 절벽과 옛 무덤들이 있다고 한다(W. W. Wessel). 어쨌든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20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막5:2]

⭕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무덤 사에에서 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성 경: [막5:3]

⭕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 3-5절은 귀신들린 자의 현상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팔레스틴에서는 죽은 자의 무덤으로 자연 동굴이나 석회암을 깎아 만든 무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만 없다면 이곳을 거처로 삼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더구나 공동 무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곳이라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볼 때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는 안성 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때 귀신들린 자는 아마도 동네에서 쫓겨나 절대적인 고독과 죽음과 같은 극악한 환경에 처하면서 내.외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같다. 특히 "(거처)하는데"(에이켄)와 뒤에 나오는 ".....맬 수 없게 되었으니"(에뒤나토)라는 말이 모두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그의 최악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 아무나....... 맬 수 없게 되었으니. - 사람들은 그 광인을 심히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묶어두기 위해 쇠사슬까지 동원하였다. 즉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불안을 극복하고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그 광인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무지 거친 그를 부드럽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파괴적이고 무진장한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한편 여기 사용된 "쇠사슬"은 일종의 수갑 내지는 쇠고랑과 같은 것으로 보통 사람이 풀 수 없는 매우 단단한 것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광인은 이러한 결박을 떨쳐버릴 정도로 괴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우데이스)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묘사함 헬라어 본문에는 세 개의 부정어(2개의 ou와 1개의 a가 소개됨)가 들어 있어 그 어려운 상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성 경: [막5:4]

⭕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 "여러 번 ....매였어도"(폴라키스....데데스다이)는 완료 수동태 부정사 구조로 되어 있어 그가 과거에 완벽한 상태로 ꚃ여져 있었던 것이(Robertson) 사실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고랑"(페다이스)은 발을 의미하는 "폐자"에서 유래한 말로서 발을 옭아매는 형구(形具)를 의미한다. 실로 그 광인은 이같이 발에 ꚃ인 사슬과 손에 묶인 사슬을 모두 끊어버릴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그의 처지에 대해 혹자(Jdhnson)는 "조울병 환자의 조증(躁症)의 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해 준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 끊고....깨뜨렸음이러라. - 여기서 "끊고"(디에스파스다이)란 문자적으로 "당기다"는 뜻의 "스파오"와 "둘"이란 뜻의 "디아"의 합성어로서 잡아뜯어 두조각 내버린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깨뜨렸음이러라"(쉰테트리프다이)는 말은 "비벼서 부수어버리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두 표현은 그 광인의 행동이 얼마나 거칠고 무지막지했는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 아무도 ....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 3절에 이어 거듭 그의 괴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마치 그는 야생의 포악한 짐승처럼 흉포하게 굴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힘으로는 그를 꺾을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실로 그는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가장 무서운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막5:5]

⭕ 밤낮 무덤.... 산에서나. - 광인(狂人)의 발작은 "시간"(밤낮)과 장소(무덤, 산)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여기서 "밤낮"이라 한 것은 단지 시간으로 특정할 수 없는 길고 긴 하루들의 연속을 암시하며, "무덤"과 "산"은 그의 비정상적인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는 정신 분열증적 증세로서 뜻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계속 고함쳐댔으며(미완료 능동태 분사), 또 "제몸을상하고 있었다"(카타코르톤 헤아우톤 리도이스) 여기서 "상하다"는 말은 완료적 의미로 사용되어 마치 부숴지게라도 하듯 자기를 짓이겨 깊은 상처를 입혔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막5:6]

⭕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 광인은 예수를 최초 목격했을 때 거의 발작적으로 적의를 품고 예수께로 질주해 왔을 것이다(눅 8:27). 그러나 그가 예수께 당도했을 때 직감적으로 그분의 초월적 권능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절하며"란 엄밀히 따져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즉 그 귀신은 자기 앞에 서신 이가 자기보다 더 탁월한 분이심을 알아보고 경읠글 표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앙적 경배가 아니라 단지 지적인 굴종에 불과하다(약 2:19). 이로써 예수는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4:35-41) 당신의 권위로 영계(靈界)도 능히 지배하시는 초월자이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성 경: [막5:7]

⭕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 예수께 접근폁는 귀신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1:23).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귀신은 예수의 신성을 믿는 신앙 고백으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를 자기와 떼어 놓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의 저의(底意)가 불순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로 확신한 것은 그의 영적 감지력이 상당히 탁월했음을 보여 준다(1:24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같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이다(눅 1:32, 35, 76 ; 행 7:48 ; 16:17 ; 히 7:1).

⭕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티 에모이 카이소이). - 히브리인들이 대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으로서 "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1:24). 이에 대해 공동번역에서는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같은 표현은 귀신이 예수에게 간청하는 부르짖음이다. 그 간청은 귀신이 예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다. 귀신은 이미 예수께서 자기를 위협하고 압도하는 무서운 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귀신의 간청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할 때 쓰던 표현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오니"라는 뜻이다. 그런제 이것이 귀신을 내어쫓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을 들어 귀신이 예수를 조롱하는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귀신의 이 말은 조롱을 위한 조롱이 아니라 예수의 등장으로 파멸의 위리글 인식한 자신이 절망적 패배감으로 하는 발악적 부르짖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귀신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사람을 괴롭히고 파괴하며 무서운 힘으로 다른 사람까지 위협하던 존재가 이제는 예수 앞에 파멸적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간청한 것은 귀신이 자기 생활의 안전을 극도로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편행 구절인 마 8:29에는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로, 눅 8:31에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지금 귀신들이 받을 괴로움은 종말적 심판날에 있을 징계를 의미하며, 바로 그 순간이 이를 때까지 그 귀신들은 무저갱 행(行)에 처해지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막5:8]

⭕ 예수께서 이미.... 이르시기를. - 본절은 7절의 상황에 대한 마가의 보충 설명이다. 즉 귀신이 예수 앞에 절망적 부르짖음으로 간청하는 이유가 예수께서 이미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6절과 7절 사이에 귀신이 예수의 만남에 대한 상황 묘사가 행략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이르시기를"(에레겐)은 미완료 시제를 이루고 있어 예수께서 이미 계속해서 말씀해 오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의 명령은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지연은 그 귀신의 항거라고 볼 수도 있으나(마 8:29-31) 오히려 "당신의 때"를 정확히 맞추어 행하시고자 하는 예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인한 지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더러운 귀신아.....나오라. - 예수께서 귀신 축출 선언은 곧 인간 해방 선언이다. 사실 귀신은 지금껏 그가 차지하고 있던 그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향해 그 사람으로부터 떠나 나오라 명령하신 것은 그 사람의 본래적 품성과 인격으로의 회복을 원하시는 당신의 지극한 사랑과, 그 모든 회복을 홀로 주관. 명령하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함께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욥 24:22). 실로 예수의 주권이 인정되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현장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으나 사단의 권세로 그 형상을 손상입은 영혼들의 건강하고도 완전한 회복이 뒤따르게 된다.

성 경: [막5:9]

⭕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 말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에게 묻는 질문이다. 이러한 귀신과의 대화는 고대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고대 전쟁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적운의 장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준비 요건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다. 본절도 귀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힘으로써 귀신의 본성을 보여 주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주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 귀신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앞에서는 "나"라는 단수 인칭을 사용한 데 비해 뒤에서는 "우리"라는 복수 인칭으로 말하여 어법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귀신 중 우두머리가 대표로 예수와 대화했디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귀신의 이름은 "군대"이다.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인데, 이것은 로마 군대의 군사 용어로서 6,000명으로 구성된 1개 군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사 용어로서 "레기온"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를 "귀신의 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맑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의 수효가 많이 있는 집단적(集團的) 의미로서 표현하기 위해 "레기온"이라는 집단적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 광인에게 침입한 귀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을 족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귀신을 죽은 뒤에 안식을 얻지 못하는 원한을 갖고 있는 영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한 배경 설명으로 귀신이 무덤 사이에서 살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집단적인 의미의 군대 용어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로마와 투쟁하며 저항하다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일면의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설득력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사건들은 결국 귀신들을 몰사시키는 것인데(13절) 그렇다면 로마에 저항했던 사람들에 대한 저주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은 매우 많은 숫자를 가진 집단으로서 하나의 집합된 힘을 발휘하고 있던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실로 사단은 한 사람의 건강한 영혼을 지배하기 위하여 수많은 자신의 부하 귀신들을 동원하는 집념과 무자비함이 있다(마 12:45 ; 눅 8:2).

성 경: [막5:10]

⭕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 여기서 귀신이 예수께서 다시 간청을 하고 있다. 마가는 "간절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간청하는 귀신의 자세가 7절의 모습과는 다름을 보여 준다. 즉 귀신의 자세는 그 기세가 모두 꺾인 모습이다. 귀신의 요구는 자신을 이 지방으로부터 추방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은 7절의 반항, 즉 간섭하지 말라는 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 지방에만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부터는 나오겠다는 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예수에게 항복하는 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방"이 과연 어디냐는 점이다. 이는 분명 거라사라는 특정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런제 누가복음에서는 귀신이 "무저갱"(無低坑)으로 보내지 말라고 간청한 것으로 묘사한다(눅 8:31). "이 지방"에 무물기를 원한다는 뜻이기 보다 "다른 지방" 곧 자신들이 최후 심판 전에 감금당하는 무저갱에로 쫓겨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실로 귀신은 최후의 순간이 이르기 전까지 계속하여 활동할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다.

성 경: [막5:11]

⭕ 마침....돼지의 큰 떼가. - 이 절은 삽화적이다. 즉 배경 그림같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내리신 호수 가까이에 산이 있고 무덤도 있으며 많은 돼지를 방목시키는 비탈진 넓은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기 때문에(1,20절 주석 참조) 돼지를 많이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여 먹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으므로(레 11:7 ; 신 14:8) 좨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돼지의 주인은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주인이 로마인들(로마 군대)을 위해 돼지를 사육하는 불경스런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성 경: [막5:12]

⭕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 11절에서 돼지떼에 대한 풍경 묘사를 한 이유가 밝혀진다. 귀신은 이 지방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간청과 함께 사람으로부터 나오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들은 돼지 무리에게로 옮겨 갈 것을 예수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허락을 간청하고 있은 것이다. 그래서 "보내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돼지에게 들어가고 안 들어감도 예수께 그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귀신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귀신들은 그 사람을 파괴할 수 없데 되자 이제 돼지 떼를 파괴하고자 한다.

성 경: [막5:13]

⭕ 허락하신대. - 귀신들이 돼지에게 자신들이 들어가게 해주면 계속 활동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예수께 간청한 부탁을 예수께서 들어 주셨다. 이로 보건대 돼지의 몰사 사건의 원인자가 외관상으로는 그 군대 귀신들이었음과 돼지 몰사 사건의 궁극적 결정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재물을 고의로 손상시킨 예수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이다. 물론 그 소유주가 유대인어었다면 그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에 그를 징책(懲責)할 목적으로 이 같은 큰 손해를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유주가 이방인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돼지 떼를 몰살시킨 주 원인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 군대 귀신이었음을 보게 된다. 즉 예수는 적극적 요구를 "허락"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께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이외에 또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는 마 8:32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예수이 "허락"이 지닌 재산상의 피해보다 그 피해를 딛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計劃)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러한 재산상의 피해를 통해 영적, 정신적, 사회적 회복과 건강을 허락하셨던 것이다(15, 19, 20절).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경륜은 동방의 의인 욥에게서도(욥 1, 2장) 발견된다(Dona;d W. Burdick). 한편 예수께서 귀신을 돼지 떼로 옮기게 허락한 사실에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사람의 존귀성 문제이다. 예수는 사람과 돼지를 두고 사람 안에서 귀신들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시는 권위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8절 주석 참조) 사람을 높이셨다. 반대로 돼지 떼에게는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하락함으로써 그 어떤 피조물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강조하셨다. 둘째는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게 허락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귀신의 활동 영역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 사실 당시에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있었다(11절 주석 참조). 이러한 돼지에게 귀신들이 들어가도록 예수께서 허락하심으로써 귀신의 활동 장소가 부정한 곳으로 한정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귀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부정한 곳이다(벧후 2:22).

⭕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 사람의 온 인격을 지배하던 귀신들이 영혼 없는 돼지에게로 들어가 그들을 조정한다는 사실은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실로 귀신은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영향력을 직. 간접 행사한다.

⭕ 이천 마리 죄는 떼가....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 이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dramaric)하다. 파괴자 사단의 사자인 귀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소인 돼지 떼를 죽음에로 질주하게 했다. 특히 이 사건의 급받함은 "비탈길을 내리달아 갔다"는 펴현과 2,000마리나 되는 돼지의 숫자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 실로 귀신은 2,000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각각 그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거의 발작적으로 행동하게 했고 곧장 몰사시킴으로써 그 사악한 위력을 과시했다. 실로 예수는 그 시점에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귀신의 최후 목적이 인간과 자연 파괴라는 엄숙한 진리르 암묵적으로 보여 주고 계셨던 것이다. 한편 "몰사(沒死)하거늘"(에프니곤토)이란 말은 미완료시상을 취하고 있어 2,000마리의 돼지 떼가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 죽어가는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성 경: [막5:14]

⭕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 여기서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돼지 몰사 사건"에 대한 반응들을 묘사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경험한 돼지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현장에서 "도망"하였다고 묘사한다. 이 말은 당시에 벌어진 사건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고 상상을 초월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주채할 수 없는 놀라움을 묘사하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말은 무서워서 달아났다기 보다는 놀라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급히 달려간 사실을 긴박(緊迫)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읍내와 촌. - 여기서 "읍내"(폴리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을 가리키며(히 12:22), 대체로 발달된 도시, 변화한 마을 정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촌"(아그로스)이란 원래 "들", "밭"(fiekl)등으로 이해되나 흔히 시골로 번역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양자를 합하여 "도시와 시골"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돼지 몰사 사건"이 그 지방 전역에 알려졌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 마태는 "온 시내"(마 8:34)로 언급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삽시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갔고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막5:15]

⭕ 예수께 이르러...보고 두려워하더라. -여기서는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바라보는 현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마가는 "이르러"와 "보고"라는 말을 현재형으로 기술함으로써 그 현장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돼지 묘사 사건을 듣고서는 지체없이 이곳에 달려와서 뚫어지게 그 상황을 확인하며 여러 관점에서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장면은 13, 14절에서 나타난 연속적인 사건의 급박성과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5절에서 험악하게 묘사되었던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을 되찾고 예수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은 폭풍우가 걷힌 다음 쏟아지는 햇살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옷을 입고", "앉은 것"이란 표현은 그의 상태가 건강한 정상인으로 되돌아왔음을 확증케 하는 외적인 증표이다. 실로 그는 오랫동안 옷을 벗어 던진채(눅 8:27)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등의 극히 불안정한 심적 상태를 유지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려 인간성을 상실했던 사람이 이제는 온전한 제정신으로 회복되었다(고후 5:13), 여기 "정신이 온전하여"(소프로니조)란 건전한 마음과 올바른 자각 및 바른 판단 등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제 그에게는 평화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면을 면밀히 검토한 사람들은 그 귀신들렸던 자가 그 처절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였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표현은 사건의 놀라움에 대한 강조적 묘사인 동시에 이 사건의 궁극적인 주체자인 예수에 대한 경외감(敬畏感)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온전한 신앙 상태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의 본질적 특성(공의와 사랑의 주)을 이해한 자는 감정적으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데서 해방되어 그분의 사랑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요일 4:18).

성 경: [막5:16-17]

⭕ 이에 귀신들렸던......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다른 목격자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현장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반응은 예수에게 이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5절). 즉 그들은 자기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감히 지신들로서는 제어할 수도 없는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좨지 2.000마리를 몰사시키셨다면 다음에 그보다 더 심각하고 두려운 일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능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무지와 경제적 이기심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적 상상력과 물질적 욕심 때문에 생명의 주를 거부(拒否)하고 말았던 것이다(4:19).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원대로 그곳을 떠나시게 된다. 진정 그분은 당신을 원치 않는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성 경: [막5:18]

⭕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 예수는 배를 타시고 동쪽 지경에 오셨다가(2절) 이제 다시 뱃머리를 돌려 자신의 곳으로 돌아가시려 한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지방을 떠나라고 하는 그곳 주민들의 제안을 즉각(卽刻)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 이에 대해 새번역 성서에서는 "함께 가기를"원했다로, 공동번역 성서에도 역시 예수를 "따라 다니게"해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함께 있기를" 간구한 것은 그곳에 머물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감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Bengel). 사실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는 고백은 제자가 되어 주님의 길을 같이 가겠다는 뜻이고 자기 몸을 다 바쳐 주님을 섬기겠다는 표현이다. 또 그 자신이 따라 나서겠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마을에서 자기를 용납해 주지 않을 것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또는 다시 귀신이 자기를 억누를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장도 많지만 그보다는 진실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장면은 17절에서 보여 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자신을 구원해 주고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 분에게는 타산적인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 다만 전적인 헌신이 있을 뿐이다.

성 경: [막5:19]

⭕ 집으로 돌아가.......네 친속에게 고하라. - 귀신들렸던 사람의 간청은 예수로부터 거절당한다. 그 이유는 첫째,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새 삶을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고, 둘째, 이와 같은 구원 사건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1:44에서 문둥병자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는 아마도 이번의 사건은 이방 지역에서 일어났기 째문에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하더라도 무방했기에 그렇게 한 것같다. 사실 유대 지경에서 예수 자신의 메시야 주장은 아직까지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히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명령은 곧 당신의 귀신 축출에 대한 깊은 의미를 알게 한다. 첫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한 인간의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구원이 한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복귀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람은 병으로 인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 째문에 다시 그러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둘째는 기적적인 놀라운 구원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정과 사회, 즉 삶의 현장(現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삶의 현장과 가정 안에서 구원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과제이다. 즉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속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속 사회 안에서 주님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한편 마가는 이 일을 행하신 분을 "주님"(퀴리오스)으로 표현한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눅 8:39)으로 표현한다.

성 경: [막5:20]

⭕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 예수는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지만 이 사람은 데가볼리 전역에 알리게 된다.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동편과 요단강가에 인접한 10개 도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10개 도시란 거라사(Gerasa) 와 가다라(Gadara) 및 다메섹(Damascus), 빌라델비아(Philadelphia), 스구도볼리쓰(Scythopolis), 힙보스(Hippos), 벨라(Pella), 라바나(Raphana), 디오스(Dios), 가다나(Kathana) 등이다. 이중 스구도볼리쓰만은 요단 서편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들은 자치적인 연맹 도시였다. 1절에서 언급한 "거라사"도 이 10개 연맹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도시들은 B. C. 3세기경 수리아의 셀류시드(Seleucid)의 통치 기간에 헬라화 정책의 시험 도시들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유대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하스몬(Hasmonian) 왕조 때 힐카누스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로마의 폼페이(Pompey) 장군에 의해 로마 관할로 편입되었되었다. 이와 같이 광역 도시에 예수께서 행하신 "미친 돼지 몰사 사건"과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 사건"이 퍼져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 여기서 예수의 선교 활동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진행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체험(體驗)으로 그리고 거듭난 한 인간이 자기 사건을 전한으로써 10개 도시의 넓은 지역에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파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성 경: [막5:21]

⭕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 돼지 몰사 사건이 발생했던 위치가 갈릴리 호수 동편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할 때 서쪽 해안 곧 가버나움 지경으로 추측된다(마 9:1). 이곳은 바로 갈릴리 선교의 전진 기지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이 표현은 4:1의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고 "거라사"지방과는 대조적이다. 즉 거라사 지방에서는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갈릴리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인기를 보증해 준다.

⭕ 바닷가에 계시더니. - 이 표현은 바닷가에 도착한 시각과 22절에 나오는 다음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가 많은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용이한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을 자주 당신의 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하셨다.

성 경: [막5:22]

⭕ 회당장 중 하나. - 이는 "한 회당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 이해된다.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특별히 "집회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는 회당장은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증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다(눅 4:13 ; 8:41 ; 행 18:8,17). 실로 이들은 제사장 계급의 상대적 실추(失墜)로 인해 소위 종교 민주화를 통해 등장한 평신도 계급(the laymen classes)들로서 이들의 등장은 곧 종교적 관심을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예배를 주관하고 회당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때로 "회당장"이라는 명칭은 명예직으로서 행정적인 의무는 없으나 회중 가운데 탁월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야이로(Jairus)는 바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야이로 역시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보는데는 의심할 바 없다.

⭕ 야이로. - 이는 "깨달은 사람" 내지는 "그는 빛난다"는 뜻의 히브리어 이름 "야일"의 헬라식 발음으로 이해된다(민 32:41 ; 삿 10:3).

⭕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장의 신분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면 이 장면은 ①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이다. 사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② 예수의 치료이적이 그 지방에 아주 신빙성있고 믿을 만한 소문으로 알려져 있음을 암시한다. 즉 그 지방의 존경받는 회당장이 기적을 요청한 사실은 예수의 이적 행위에 대한 공적인 신뢰감을 증명하는 것이다. ③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취한 회당장의 신앙적 행동을 보여 준다.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왔고 그러한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 경: [막5:23]

⭕ 많이 간구하여. - 회당장은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必死的)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달렸다.

⭕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 회당장이 예수께로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어린 딸이 다 죽게 된" 때문이다. 여기서 "어린 딸(뒤가트리온)이란 조그마한 여아를 깊은 애정으로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다. 이를 통해 야이로의 자식에 대한 애끊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었사오니"(에스카토스 에케이)란 지금 즉음이 문 앞에 서 있을 만큼 그 병세가 최악의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딸의 병명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누가 복음에서는 회당장이 직접 말하지 않고 기록자 누가가 담담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린 딸의 나이가 12살임을 밝히고 있다(눅 8:42). 그리고 회당장은 다만 예수께서 자기 집으로 가주기만을 간청한다(눅 8:41).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마 9:18)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즉 마가와 누가복음은 "죽게 된 지경"을 말하고 마태복음은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마태가 마가복음에도 뒤에 기술되고 있는(35절) 이미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본시점과 종합하여 서술한 본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어쨌든 세 복음서의 공통된 점은 사태가 매우 급박(急迫)하다는 것이다.

⭕ 손을 얹으사. -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실로 회당장의 간청은 확신적이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병 치유에 대한 전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바라는 행위이자 치병을 이한 일반적 행위로 알려져 있다(6:5 ; 8:23, 25 ; 약 5:14-16). 따라서 회당장의 이 같은 안수에서 요청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 여기서 "구원을 얻어"(소데)란 "구원하다", "보전하다", "놓아주다", "병을 고치다"는 뜻을 지닌 (소조)의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 예수로 인한 병의 회복, 곧 건강을 기원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재해석하면 "(당신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계속) 살게 하소서"가 된다.

성 경: [막5:24]

⭕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에워싸. -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출발하는 장면 묘사이다. 여기서 "가실새"(아펠덴)란 부정 과거 시제를 취하여 예수께서 곧바로 출발하셨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는 즉각적 응답으로써 그의 간청에 호응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급히 이동하자 바닷가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의 행동을 표현한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는 표현은 각각 미완료시제를 사용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좇으며, 더욱이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장면은 그 당시 예수를 중심한 분위기가 매우 열기가 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예수의 명성과 인기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막5:25]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여기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야이로 회단장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12년동안 혈루증(血漏症)을 앓는 여인이 등장한다. 여기서 혈루증(subject to bleeeding, NIV)은 현대의학 용어인 "혈루병"이 아니다. "혈루병"은 여자에게 유전 인자로 잠재할 수는 있어도 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에게는 유전으로 잠재성과 병으로 모두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혈루증은 만성 하혈증(下血症)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궁(uterus) 안에 종기가 생기거나 어떤 이상이 생겨 불규틱적으로 피가 흐르는 중세일 것이로 간주했다(레 15:25). 따라서 종교 생활 뿐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이 여인의 병이 12년("12"는 완전수 또는 하나님의 계회과 성취를 나타내는 수로 상징됨)이나 된 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병이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병임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이 여인이 병으로 받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처참(悽慘)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은 25절에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녀가 파네아스 출신의 이방인 베로니카(Veronica)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성 경: [막5:26]

⭕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한 노력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적 노력을 더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의원들은 그녀에게 더 심한 고통만을 안겨 주었다. 이에 대해 의사 출신인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눅 8:43)는 말로써 동료 의사들의 한계 상황을 깊이 배려하며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Robertson). 한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는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이제는 가난한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은 더 악화되었다는 묘사는 25절에서 12년 동안 병을 앓아왔다는 표현과 함께 ① 병의 불치성과 ② 의술의 무력함을 나타내 보이고 ③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 갔다는 절망적인 상황 묘사와 ④ 그 여인이 받고 있는 고통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절박(切迫)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재산을 치료비로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병든 몸 하나이고 그나마 병은 더욱 악화되고 병의 부정함 때문에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인의 모습은(레 15:25-28)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은 4장의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과 2-5절의 귀신들린 사람과 2,23절의 죽음 직전에 이른 야이로의 딸과 함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유한성과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서 진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이다.

성 경: [막5:27]

⭕ 소문을 듣고.... 옷에 손을 대니. - 절망의 벽에 부딪힌 이 여인은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소문을 상세하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의 옷에만 손을 대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앞에서(23절) 언급된 야이로 회당장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다. 야이로의 믿음처럼 예수께서 주체가 되어 환자와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자가 예수에게 접촉을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형태는 3:10 ; 6:56에서도 나타난다. 즉 예수를 만지게 해 달라거나 옷에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는 간청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확신에 찬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치유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을 강조하는 점이다. 이 여인은 직접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소문을 통하여 믿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를 만지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녀의 담대함(간절함)과 겸손함을 대변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몰래 감추고 자신의 병을 가만히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예수의 "뒤로" 온 것이다. 한편 마태는 그녀가 예수의 "겉옷 가"(the edge of his cloak, NIV)를 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9:20). 즉 그녀는 예수와 접촉함으로써 율법적으로는 예수를 부정케 만든 결과가 되었다(레 15:19-27). 그러나 생명의 주께서는 이 모든 의식적 부정을 초월(超越)하여 그녀의 믿음을 받아 들이셨다.

성 경: [막5:28]

⭕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얻으리라 함일러라. -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그녀의 이 같은 심정에는 미신적(superstitious) 요소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막5:29]

⭕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 여인의 믿음대로 병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증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이 상황을 공동번역은 "출혈이 그치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특히 "혈루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병의 치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치료의 즉각성과 치료의 완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诅의 정신적 고통이 함께 해결된 것이다. 이러한 치료는 예수와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접촉(교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더 높이는 것이었다.

⭕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병이 나았다는 것을 자신이 직접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그녀는 혈루의 근원이 근절되자 곧 자신의 치유를 자각(自覺)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자각은 곧 그 치유가 몸으로 직접 느낄 정도로 완전하고도 신속하게 치유되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즉각적이고 근원적인 치유 기적이 발생한 놀라움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27절에서 묘사된 여인의 행동이다. 그녀는 환자의 연약한 몸과 여자라는 핸디캡(handicap)을 갖고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겨우 예수의 뒤쪽에서 손을 옷에 대었다. 간청을 한 적도 없고 믿음을 예수께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이 갖고 있는 믿음이 공개된 사실은 없지만 이미 숨겨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암시한다(히 11:6). 실로 예수는 인간의 심령을 살피는 분으로서 그 소원의 깊이를 조용히 알아보고 계셨던 것이다(마 6:6).

성 경: [막5:30]

⭕ 능력이......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 치유 기적이 예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사실 그 치료받은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27절) 했었다. 물론 이 같은 그녀의 생각은 심히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겸손하고도 조용한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는 사람들이 혼잡한 다운데서도(31절) 당신의 전지성(全知性)으로써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이미 알고 계셨고 또 그녀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지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그녀의 치유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여기 "스스로 아시고"(에피그누스 엔헤아우토)란 완전하고도 초월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위의 동기와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이 나간 줄 아신 것이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라 곧 그 여인이 치료된 사실을 예수께서 뒤늦게 아신 것이 아니었다. 이는 예수께서 그 치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능동적인 깨달음, 곧 당신이 그 능력을 능동적으로 계획하셨고 또한 발휘하셨음을 보여 준다.

⭕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예수께서 그 간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내밀한 이적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하시기 위해 이 같은 빌문을 의도적으로 하셨을 것이다(Calvin Donald W. Burdick). 그와 더불어 생각되는 바는 33, 34절의 내용으로 보아 치료받은 사람과 인격적(人格的)인 관계를 ꒘기 위함인 것으로도 보인다. 병의 치료는 단순히 물리적인 치료만이 완전 치유가 아니다. 병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신체적 고통 못지 않게 큰 것이므로 인격적 만남 속에 병이 치유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졍을 고침받은 것이 미신적 신앙 때문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손으로 당신의 옷자락만 잡기보다 그 영(靈)으로 당신의 거룩한 인격을 잡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성 경: [막5:31]

⭕ 제자들이 여짜오되.....물으셨나이까.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대하여 불만 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식의 반문이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와 환자 자신밖에 므른다는 사실과 제자들의 영적 무지(육체적 접촉만 생각하고 영적 교감(靈的交感을 도외시함)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치유받은 여인은 즉각 나타나 고백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상당히 큰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 경: [막5:32-33]

⭕ 예수께서......둘러 보시니.....여자가.....사실을 여짜온대. - 예수께서는 바로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직접 찾으신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 보는 치유받은 여인은 더 이산 사실을 숨긴 채 있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몹시 두려워하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백한다. 여기서 두 가지 강조점을 결견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여인을 찾으시는 행위이다. 제자들의 충명스런 변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치유된 여인을 찾고 있는 장면("둘러 보시니"는 미완요시제)은 치유받은 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힘도 아니고 치유를 확인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직 치유받은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녀로 하여금 바른 신앙을 갖게끔 하기 위힌 것이다(30절 주석 참조). 이것은 예수께서 고난받고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관심과 뜨거운 사랑 및 다함 없는 연민을 갖고 있음이 암시된다. 둘째는 치유받은 여인의 행위이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 하고 있었다. 이유는 ①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여들였다는 것을 공개하기에는 두려운 사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② 또 그런 부정한 몸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사실이 특히 여자의 신분으로서 불경건한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③ 그녀는 자신이 지금 받은 은혜를 예수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을 가졌을 것이다. 즉 그녀는예수 몰래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이용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④ 마지막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경외감(敬畏感)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여인이 예수 앞에 엎드린 모급은 22절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즉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 여인은 예수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초월적인 능력을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경외감이 두려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예수의 강권적인 요구로(내밀한 요구였음) 자신의 만성적인 몹쓸 질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무리들 앞에서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소위 신앙간증오로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크나큰 은혜에 부응하여 그분께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으며, 또 그녀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다. 실로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가 주어진 것이다.

성 경: [막5:34]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예수께서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원 선언이다. 여기서 "딸아"(뒤가테르)란 성숙한 여자나 소녀를 향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친밀히 부르는 호칭으로서(23절) 예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곳은 복음서 가운제 본문이 유일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떼문에 완전한 회복(구원)을 얻은 것임을 주지시키셨다. 그 "믿음"은 그녀가 예수에게 치유의 능력이 충만함을 확신한 것이다(27, 28절 주석 참조). 그리고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겼을 때 이 여인의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이 완전히 치유된 것이다. 여기서 "구원하였으니"(세소켄)란 완료시제를 취하고 있어 그 구원이 이미 그녀에게 확실히 주어졌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구원은 현상적으로는 육체적 구원과 영적 구원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묘사되고 있다(2:1-12). 따라서 이 치유의 체험은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25절 주석 참조). 이와 같은 구원 선언을 예수께서는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이 여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는 이 여인을 소외 당했던 사회로 다시 복귀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유와 회복을 허락하시려고 그 여인을 그렇게 찾았던 것이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니다. 한 사람의 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 풀려나는 것 뿐만 아니라 건강과 평화로운 사회 공동체에 복귀하여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구원 선언을 한 다음

⭕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라고 감동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히 가라"(Go in pease, NIV)는 문자적로 "평화를 향하여 가라"는 뜻보다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이다. 이 평안은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인사말인 "샬롬"(삿 18:6 ; 삼상 1:17)을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공하신 것이다(요 14:27). 이 "평안"에 대해 혹자(Anderson)는 말하기를 "여기서 꼭 내적인 고뇌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의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여하틈 모든 인류가 이와 같이 평화로운 은총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다. 이러한 구원 선언은 눅 7:50 ; 17:19 ; 18:42 등에도 나타난다. 이렇듯 예수의 병치유의 기적은 내면적인 구원 문제와 연결된다. 따라서 치유의 목적이 단순한 병치유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 경: [막5:35]

⭕ 아직 말씀하실 때에. - 현장감 넘치는 서술 기법이 또 한 번 돋보인다. 여기서 이야기는 급전환된다. 혈루증 치유 기적으로 무리들과 함께 멈추어서 지체하는 사이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전강이 왔다. 물론 지금껏 예수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야이로의 마음은 탈대로 다 타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한 애타는 상황 가운데 전해 진 내용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혈루증 치유와 예수의 구원 선언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잠재우는 소식이었다.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 여기서 "죽었나이다"(아페다넨)는 제 2과거 직설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죽음이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임을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손 쓸 필요가 없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 - 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전한 자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인 발상으로써 예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 것을 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괴롭게 하다"란 뜻의 원어 (스퀼로)는 원래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의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하던 말로서 가혹하리만치 혹독한 고통이나 쓰라림을 뜻한다(마 9:36). 따라서 이 말은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매우 단호한 요청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막5:36]

⭕ 곁에서 들으시고. -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심부름꾼이 야이로에게 하는 말을 "엿들으셨다"(파라쿠사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다. 실로 예수의 생명을 충성하게 하시는 사역 앞에서 이같은 절망적 소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속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추진해 가셨고, 더불어 딸의 죽음 소식 앞에 절망하고 있는 야이로를 격려하셨다. 이에 예수는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를 향해 희망을 선언한다.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메 포부 모논 피스튜에). -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이 이중 명령은 모두 현재형을 취하고 있어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엄명이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이다(롬 4:20, 21). 실로 예수는 당신의 신적 본성을 의지하고 죽음을 훨씬 뛰어넘는 당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계속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두려움과 믿음은 항상 적대적 관계이다. 따라서 극한 절망 속에 있을 바로 그 시점에 모든 부정적 요소(두려움)를 떨치고 절대적 존재이신 예수를 절대 신뢰하는 것은 참 용기요 참믿음이다. 예수께 지속적 신뢰를 갖는 이 믿음이야말로 곧 생명의 유일한 열쇠이다.

성 경: [막5:37]

⭕ 베드로와 야고보와...요한. - 여기서부터 예수의 동행인이 제한된다. 즉 베드로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예수와 동행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곧 일어나게 될 생명의 이적을 직접 확인하고 후세에 전할 증거자로 3인의 가장 친밀한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신 19:15). 이 외에도 변화산 사건 때에도 이 세 제자가 언급되었고(9:2 ; 마 17:1 ; 눅 9:28),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제자의 이름이 거론된다(14:33 ; 마 26:37). 이 사실로 미루어 예수는 제자들 중에 이 세 제자를 가장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께서 이 세 사람 외에 다른 여타의 사람을 물리신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당신의 사역의 진지함을 더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거나(구경거리로 삼게 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방해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혹자(Robertson)는 야이로 가정의 주택 구조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재미있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나 당시 야이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택이 내우 협소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성 경: [막5:38]

⭕ 훤화함과.....울며.....통곡함. - 여기서 "훤화함"이란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러이 떠드는 것을, "심히 통곡함"이란 마치 꽹과리가 울려 대듯이 크게 울어대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집안은 초상집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며 통곡하고 있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피리를 불고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음을 묘사한다(마 9:23).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흔히 정중한 분위기 보다는 조금 격앙스럽게 피리를 불고 통곡하며 소란하다. 또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피리를 불고 울게도 하였다. 이처럼 직업적으로 울어 주는 자들은 주로 여인드로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대성통곡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통곡 소리는 가슴 또는 손바닥을 치며 함창 혹은 교창(交昌)으로 이뤄륵다. 한편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사였던 야이로 집안이었기에 이러한 고용 통곡꾼 뿐 아니라 많은 조문객(弔問客)과 가족 친지들을 합한다면 야이로의 집은 참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풍경은 죽음의 절망감과 함께 정신 못차릴 정도의 소음과 호란스러움으로 인해 또다른 절망감으로 들어가세 한다. 어쨌든 야이로 집에 모여든 사람들은 다만 슬퍼하거나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길 뿐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야일로 집안에 궁극적인 평안을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성 경: [막5:39]

⭕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이를 축어적(逐語的)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Olshausen). 그러나 누가의 기록(눅 8:55)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靈)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창 47:30 ; 단 12:2 ; 요 11:11 ; 행 7:60 ; 고전 15:18 ; 살전 5:10). 특별히 생명과 부활(Resurrection)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限時的)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고전 15:51).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욥 19:25-27).

성 경: [막5:40]

⭕ 저희가 비웃더라. -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즉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카테게론)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現象的)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둁하고 희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향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Benger, Robertson). 실로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성 경: [막5:41]

⭕ 아이의 손을 잡고. -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23절). 이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출 3:20 ; 7:5 ; 시 37:24 ; 눅 1:66 ; 행 11:21 등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시 23:2, 4)..

⭕ 달리다굼(탈리타 쿰). - 이 말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소녀야란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일으키시는 행동만 기록)과 누가복음(번역문만을 기술)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生動感)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즉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 소녀야........일어나라(토 코라시온.....에게이레). -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生命)과 부활(復活)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면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

성 경: [막5:42]

⭕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아네스테)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페리에파테이)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실로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元氣)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Swete). 한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눅 8:42)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결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창 49:28 ; 겔 43:16 ; 계 21:12, 14).

⭕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눅 8:56).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恍惚之境)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郭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둔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격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성 경: [막5:43]

⭕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1:44 ; 3:12 ; 마 12:16 ; 16:20 ; 17:9 ; 눅 8:56).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19절)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34절)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마 16장) 이를 때까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당신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問題化)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Messianjc-secret motif)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마 9:26).

⭕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34절 주석 참조). 아야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말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

성 경: [막6:1-6]

갈릴리에서의 설교와 치병 기적을 통한 예수의 분주했던 활동(제 2차 갈릴리 사역, 마 8:5-13:58)은 갈릴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옵으로써 새로운 국면(局面)을 맞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선교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또는 휴식 시간을 갖고자 하는 의도에서라는 등의 여러 주장들이 있다. 어쨌든 예수의 활동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다. 예수가 고향에 돌라왔을 때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받고 있는 장면은 평행구인 마 13:53-5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예수는 가버나움 중심의 갈릴리 사역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이방인의 거주지를 위시한 각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선교하시는 제 3차 갈릴리 전도 사역의 계기를 마련하신다.

성 경: [막6:1]

⭕ 거기를 떠나서. - "거기"라는 말은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이야기를 옮겨갈 때 사용하는 장소적 부사로서 7:24 ;9:30 ; 10:1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가리키는 "거기"는 가버나움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5장의 이야기와 전혀 무리없이 본 사건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 고향으로 가시니. - 예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1:9, 24 ; 요 1:46). 이곳은 가버나움의 남서쪽에 있는 한적한 지방이다(마 2:23 주석 참조). 한편 "고향"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트리스"는 원래 "조상으로부터 살아온 곳", "자기의 원(原) 출생지"등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나사렛이란 장소가 예수의 출생지(베들레헴)는 아니라 해도 이곳 나사렛에서 30여년 간 자라났으며 또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예수가 자라난 곳은 나사렛이라고 장소명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눅 4:16). 여기서 예수가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처음인가 아니면 두 번째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 계속되는 박해 장면이 공생애 기간 내내 있었던 관계로 각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였기 때문에 본 사건은 눅 4:16 이하 기사는 분명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사역 중에 발생했던 것이며 그 방문 내용도 본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예수는 공생애 후기에 제 2차 고향 방문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맥상으로 보나 전체적인 예수의 활동상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마태의 기록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 제자들도 좇으니라. - 예수의 고향 방문이 단순한 휴가나 가족 상봉만을 목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즉 예수는 일종의 랍비(Rabbi)로서 당신의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 방문길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실을 다루지 않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 수행 장면을 분명히 기록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좇으면서 계속 제자로서 필요한 훈련을 받고 있었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Cranfield).

성 경: [막6:2]

⭕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예수는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회당을 방문한 선생에게 회당장이(5:22)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편 예수는 이 회당을 통한 선교 사역에 매우 익숙했었다(1:21). 따라서 누가는 "규례대로"라는 말로 예수의 가르침이 지극히 상례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가 읽은 성경의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그 성경은 사 61:1, 2이었다. 그런데 본문의 회당 설교 이후 예수의 회당을 통한 선교는 큰 어려움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어찌됨이뇨. -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이다. 우선 청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의 받은 지혜....어찌됨이뇨"하며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의 30여 년 성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왔던 터라 예수의 탁월한 성경 교수를 경악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천박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로서냐 사단에게로서냐?"하는 의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이다. 즉 예수의 초월적 권능에 대해 신앙인은 "무릎"으로, 비신앙인은 "놀람과 의심"으로 맞아들인다.

성 경: [막6:3]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청중들의 입을 통해 예수의 신원이 밝혀지고 있다. 물론 이 말의 저의는 "이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신분이 아니냐?" 또는 "이 자가 랍비라 칭하면서 이적을 행하고 돌아다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라는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이쨌든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족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여기서 비로소 예수의 신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다. 즉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목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언급되고(13"55),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요셉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4:22). 즉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쨌든 마가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소시민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임을 밝힌 것은 예수 탄생 설화, 즉 처녀 탄생과 간접적으로 연결지으려는 마가의 의도에서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즉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의하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하지 않은 때에라 하더라도 그 자녀를 그의 어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용인(容認)되지 않았다(Taylor).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호칭하는 것으로써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 표현이라는 점을 들어 예수를 경멸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Orgen). 이 주장은 당시 나사렛 사람들이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잔제한다면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와 같이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때 비록 예수의 설교와 능력이 놀랄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를 용납하지 못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별히 그들의 말투("아니냐.....아니냐...아니하냐")로 볼 때 그들은 고의적이고도 맹목적으로 그리고 천박한 시기심에 따라 예수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야고보와 요셉과...그 누이들. - 이들은 예수의 사촌(Jerome)이나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낳았던 자녀들(Epiphanius)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예수의 친 형제요 자매들이다. 사실 제롬과 에피파니우스의 견해는 모두 마리아가 죽기까지 순결(virginity)을 지켰다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더욱이 제롬의 견해는 심지어 요셉의 동정성(童貞性)까지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위의 두 견해는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한 그릇된 가설에 불과하다. 실로 여기 언급된 형제. 자매들은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출산 후,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자연스런 성관계로 인해 출생한 예수의 친동생들인 것이다(Helvidiys).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여겨지며, 초대교회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행 12:17 ; 15:13 ; 21:18 ; 고전 15:7 ; 갈 1:19 ; 2:9, 12)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약 1:1)/ 그는 유대사가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변사(變死)한 것으로 나온다. 한편 "유다"는 공동 서신 가운데 유다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요셉과 시몬 및 기타 자매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회심하여 초대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1:14).

⭕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 먼저 여기서 "배척하다"는 뜻은 "넘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뿐 아니라 "배척당하다", "....와 말다툼하다", "...을 공격하다" 등 다양하다. 어쨌든 본문을 직역하면 "그에게 걸려 넘어지다"는 뜻이다. 즉 마치 그들이 덫에 걸리듯 예수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는 의미이다. 실로 그들은 예수를 현상적, 육신적, 신적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불신앙함으로써) 결국 그분을 통해 실족하고 또한 그분을 배척하게 된 것이다.

성 경: [막6:4]

⭕ 선지자가...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 이 구절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한 예수의 반응으로서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격언구를 인용한 것이다. 속담형의 이 인용구는 유대, 헬라 문헌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철학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어렵게 산다" 또는 "친밀함은 오히려 경멸을 낳는다"는 등의 격언구들이 있다. 그러나 유대 및 헬라 문헌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선자자"(영감받은 선생 정도로 이해됨)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선지자"라는 말은 유대 및 이교도들의 속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진정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 의 평범한 모습, 곧 자신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본문에서 마가는 "친척"과 "자기 집"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가족까지 예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자로 묘사한다. 당시 예수 추종자들도 많았지만 반대자들도 많았음을 상기한다면,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까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의 활동에 대한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위협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마가는 이와 같이 고조된 긴장을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고독성과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막6:5]

⭕ 거기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사할 수 없어. -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표현은 예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치명적 표현이라고 몰 수 잇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한계성(限界性)을 강조한 것이기 보다 예수의 능동적인 절제를 이끌어낸 근본적인 원인을 은연중에 시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평행구인 마 13:58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고 표현함으로써 예수가 의지에 따라 행치 않으셨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행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예수의 능력 결여 때문이 아니라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인 것으로 암시되고 있다. 즉 예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이 권능을 행할 수 없었던 상황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권능이 일어날 수 있는 큰 변수가 청중의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즉 당신에게 치유의 은총을 덧입고자 하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실로 사람의 믿음 없이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법이다. 예수의 권능과 사람의 믿음이 서로 만나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마 8:5-13). 따라서

⭕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라는 표현은 고향에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극소수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마가는 이와 같은 묘사를 통해 예수의 권위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만나는 신앙인의 책임있는 자세를 강조하려 한 것이다. 진정 예수의 권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① 당신의 백성에게 확고한 사랑의 증거를 제공하고 ② 신앙인의 최종적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능의 발현에 앞서 무엇보다 그 대상인 인간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권능 베푸실 구속론적인 근거를 스스로 거부한 자들에게는 그 어떤 은혜의 시여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 경: [막6:6]

⭕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더라 .- 이 묘사는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예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또한 무척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고향과 자기 집이라는 친근한 의미와 기대는 그들의 골 깊은 불신앙으로 인해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이러한 실망은 4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반응과 연관지어 본다면 회당 안에서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으로 인한 실망보다는 권능을 행하지 못한 실망감이 훨씬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4절에서는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기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로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실망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장면이 마 8:10에 나온다. 즉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로마 백부장의 진실한 믿음을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기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경탄하는 장면이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의 거부로 인해 오히려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극적인 장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역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의 중요성이다. 또 한 가지 이 두 사겅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은, 예수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로 당황하는 제한적인 인간성을 지닌 철저한 인간이시라는 점이다(Robertson). 물론 이같은 모습이 예수의 거룩한 신성(神性)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실로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신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빌 2:6) 놀라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신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시었다.

⭕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 다시 예수는 전도 여행을 떠나고 있다. 결국 이 장면은 고향에서 예수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고 고향을 떠나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특별히 "두루 다니시며"란 미완료 시상을 지니고 있어 예수의 "가르치시는" 사역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지속적 가르치심의 대상인 "모든 촌"이 구체적으로 어디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갈릴리 지방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문은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 기간의(6:66-9:50) 실질적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예수는 제자 훈련에 박차를 가하셨으며,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관한 비밀을 서서히 공개 하시게 된다.

성 경: [막6:7-13]

이제 새로운 형태의 활동이 시작된다. 12제자의 파송은 ① 예수의 선교 활동이 조직화, 저변화되어감을 보여 주며 ② 그 활동영역이 확장되고 장기화됨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본문 이하에서부터 예수의 선교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됨을 알 수 있다.

성 경: [막6:7]

⭕ 열 두 제자를 부르사. - 예수는 제자 파송 직전에 그들에게 선교에 관련된 유의 사항을 설교하시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다. 평행 구절인 마 10:1ff.에서는 이같은 표현에 좀더 보충적 설명이 가해지고 있다. 예수는 이미 3:14에서 12제자를 선택하신 바 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선택된 원래 목적(3:14, 15)을 실현키 위해 그들을 파견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 둘씩 둘씩 보내시며. - 예수께서 당신이 훈련한 사람들을 똑립적으로 파송한 첫 번째 경우이다. 한편 눅 10:1에서 70명을 불러 파송할 때도 둘씩 둘씩 짝지어 파송한 이유는 유대인의 풍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1:1 ; 14:13 ; 행 13:2, 4 ; 16:40). 즉 이것은 신 17:6에 나타난 바와 같이 증인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세우라는 관습에 근겋산 것으로서 예수도 역시 천국 복음 전파 활동에 관한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와 같은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6쌍의 제자들은 갈릴리 전역에 여섯 방향으로 산개(散開)되어 천국 확장 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보내시며"(아포스텔레인)란 말 속에는 "보내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대표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신 후 파송하셨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보냄받은 자로서 예수의 권위에 힘입어 그분의 거룩한 뜻만을 각 지역에 펴야 했다.

⭕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 이 구절은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주는 직무이다. 평행 본문인 눅 9:1에서는 병고치는 능력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파송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다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준 것은 12, 13절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복음 전파와 병의 치유를 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실로 사단의 권세가 정복되는 그곳에 주의 복음이 생명력 넘치게 자라나며 모든 부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소멸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건설되는 것이다.

성 경: [막6:8-9]

이 구절은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는 여행 지침이다.

⭕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 평행 본문인 마 10:10, 눅 9:3에서는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명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지팡이는 보호를 목적으로 한 복자들이 소지하는 몽둥이고 마가복음의 지팡이는 보행에 도움을 주는 여행용 지팡이라고 보면서, 보행에 도움을 주는 것만 허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구애됨 없이도 예수의 의도는 계속 이어지는 명령들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양식"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다 포함되며, "주머니"는 양식이나 생필품을 넣고 다니는 여행 가방을, "전대"는 일종의 허리띠로서 동전 등을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돈"(칼로스)은 로마와 헬라에서 통용되던 작은 구리 동전으로서 소량의 잔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은 일종의 샌달(sandal) 같은 매우 간편한 여행용 신발을 가리킨다. "두 벌 옷"은 "여벌의 옷"이라는 뜻으로 이 같은 여분의 옷은 여행자가 노숙(露宿)할 때 밤의 한 기운을 막아주는데 매우 요긴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조차 금하셨다. 한편 지팡이와 신을 신는 것만 허용된 것이 출 12:11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출애굽과 광야에로의 여행을 앞두고 내려졌던 명령과 일치시켜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출애굽적인 긴박감과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螡존하는 출애굽 신앙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U. Mauser). 이 주장은 앞에서 두 사람씩 짝지어 보내는 전통과 더불어 가치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명령을 이해하면 ① 먼저 자신들이 전파하는 복음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자기 신변에 대한 염려는 일체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② 제자들이 매일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신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③ 복음 전파나 병자 치유를 위해 부름 받은 전도자는 청빈(淸貧)해야 한다는 규범적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절대 의존할 수 있도록, 즉 자기소유에 의존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화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명령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12제자들에게 위임하려는 사명이 매우 긴박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이해서일 것이다.

성 경: [막6:10]

⭕ 뉘 집에 들어가거든....거기 유하라. - 평행 본문 마 10:11에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곳에 유(留)"하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신세를 질 만한 집을 찾으라는 말인데, 그 조건은 아마도 경제적 여건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전도 활동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거처할 집을 정하면 떠날 때까지 옮기지 말고 한 집에 머물라는 이유는 제자들의 행동이 주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최초 거주지에 만족치 못하고 더 편한 안식처를 찾아 여러 집으로 옮겨 다니게 되면 주민들 간에 불화를 조성하고 또 좋지 않은 소문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여러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면 주민들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됨으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배려(配慮)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한 집을 정했으면 많은 불편이 있다 해도 참고 떠날때까지 거처를 옮기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곧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명자의 태도인 동시에 이웃에게 선한 이미지(image)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께 영광돌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태도인 것이다.

성 경: [막6:11]

⭕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듣지도 아니하거든. - 이 구절은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제자들에게 전도 활동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암시를 주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암시는 심지어 당신의 고향에서조차 배척받은 바 있는 예수 자신의 경혐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복음 증거자로서 배척당하게 될 상황에서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계신다.

⭕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으라. -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생활 습관 중의 하나이다. 즉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방 땅을 밟거나 여행하고 돌아올 때는 발과 옷에 묻은 이방 땅의 먼지를 모두 떨어내는 관례가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요구하신 것은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은 마치 이방인 지역과 같이 멸망의 자리에 놓이게 됨을 알리고 또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에 대하여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즉 어떤 의식주의(儀式主義)를 고수하거나 편당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하는 경멸적 행위를 유대인들에게 함으로써 반대자들에게 복음을 거부(拒否)하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잘못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 같은 행동을 명하신 것이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진리를 선명하게 밝히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서 그들이 급기야 구원의 가능성에서 단절됨을 선언하는 한 증거이다. 이는 개인적 원한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복음과 그 권위를 거부했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성 경: [막6:12]

⭕ 회개하라 전파하고. - 제자들의 선교 주제가 스승인 예수의 선교 주제와 일치하고 있다. 즉 예수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1:15). 다른 평행 본문에는 이런 묘사가 없으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 그리고 세례 요한의 선교 메시지를 일치시킴으로써 천국 복음 전파의 대주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1:4).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의 활동까지 "회개"라는 말로 묶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실로 천국 입성의 전제 조건은 과거의 죄악된 삶의 길과 방식을 전격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참된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 "회개"와 "믿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병행된다.

성 경: [막6:13]

⭕ 귀신을 쫓아내며....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 제자들의 복음 전파와 병행되는 정신적(영적), 육체적 치유 사역의 대표적 행위가 각각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치유 이적은 복음의 진실을 확증하고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한 궁극적 목적하에 이뤄졌다. 한편 이를 통해 볼 때 제자들의 활동이 설교내용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치병 기적까지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활동이나 제자들의 활동은 주 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즉 하나는 복음 선포 즉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진리 선포이다. 다른 하나는 치병 활동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참으로 온전한 인간 구원은 사람의 영과 육이 모두 구원을 얻는 전인적인 구원임을 보게 된다. 결국 지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선교 활동은 인간의 영. 육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됨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들의 치료 방법은 예수의 방법과 차이점이 있다. 즉 기름을 발라 치유한 점이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복음서 중 이곳과 눅 10:34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치유 방법은 당시 유대교와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당시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 같은 방법의 치유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같은 기름 바름은 단지 그것이 치료 효과가 있다는 의학적 측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약 5:14, 15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병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도움 곧 신유의 은혜와 그 능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하여 로마 카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에서 도유(Unction)라는 성례전을 제정하여 환자에게 기름 바름을 통한 죄사함과 병나음을 소원하게 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9세기 카톨릭 개혁 시대에는 병든 자가 아니더라도 죽음에 직면한 자에게 교회가 베풀 수 있는 최종 예식으로 이 도유를 행하게하여 그로 하여금 죽음을 예비하게 했다. 흔히 이것을 부유식(傅油式) 또는 종유식(Extreme Unction)이라 부른다.

성 경: [막6:14-29]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하는 선교 활동(6:13 ; 30-45절) 사이에 삽입된 일종의 중간 삽화이다(마 14:1-12 ; 눅 9:7-9), 따라서 13절과 30절을 곧바로 연결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마가는 예수의 활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아 성공적인 성과를 올릴 때에 이 삽화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죽음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게하여 예수의 본질과 그 사역의 혼동을 불식시키고 메시야의 선구자에 불과한 세례 요한과 메시야 되신 예수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막6:14]

⭕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 13절의 내용과 무난하게 연결되는 듯하다. 즉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예수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문은 예수의 제 3차 갈릴리 사역 중간에 발생한 일로 볼 수 있다.

⭕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 헤롯대제(Herod the Great)와 부인 말타스(Malthace) 사이에 태어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를 가리킨다. 그는 헤롯 대제 사후 분봉왕으로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한 나라의 1/4 영주)이 되었다. 그는 왕의 신분을 얻지 못한 군주였는데 로마의 칼리굴라(Galigula) 황제 시절에 로마로부터 왕의 신분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하여 A. D. 39년에 실각(失脚)하였다. 그럼에도 여기서 왕이라는 칭호를 쓴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헤롯을 왕이라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마가가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한 것 같다(Taylor). 어쨌든 헤롯은 아버지보다 유능하지 못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는 아라비아 왕인 아레타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ꂥ 자신의 동생 처인 헤로디아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때문에 본처는 친정으로 가버리고 이에 불만을 품은 아라비아는 전쟁을 일으켜 헤롯을 패전시켰다. 한편 당시 헤롯이 "들은"것은 12제자들의 전도 사역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 해변 위에 있는 디베랴(Tiberias)까지 먼 전도 여행을 했는데, 이 디베랴는 헤롯이 그의 수도를 세운 곳으로 당시의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로 부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헤롯이 "들은"것은 이러한 제자들의 활동 이상으로 예수의 권능 있는 사역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오히려 앞의 견해보다 이 견해가 더욱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14-16절의 주된 관심이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 세례 요한이....... 살았났도다.- 헤롯은 자신의 비윤리적 행동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죽인 후 늘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던 중 예수의 활동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 안에서 되살아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로 범죄자는 심리 상태가 늘 불안하며 항상 피해 의식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과 결부시켜 생각하거나 큰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경우가 많다.

⭕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 이는 헤롯의 종교관을 반영한 말로서 헤롯은 세례 요한이 살아 생전에는 이적을 행하지 못했으나(요 10:41) 그가 부활함으로써 이제 이적을 행하게 되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능력"(에네르구신)이란 "활동적인 능력", "힘찬 역사" 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당시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가 헤롯에게 얼마나 큰 이미지(image)로 다가갔는지를 예상케 한다. 여하튼 헤롯이 이 미신적인 발상은 결국 예수의 활동 자체가 자신에게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안겨 줄 것이라는 불길(不吉)한 예감을 느겼음을 반영 하는 것이라 본다.

성 경: [막6:15]

⭕ 어떤 이는 .... 엘리야라 하고......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 아마도 헤롯의 신하가 헤롯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세례 요한이 되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엘리야나 아니면 선지자로 여긴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로 보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활동을 선지자의 활동이나 엘리야가 와서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이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한 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중의 하나가 여호와께서 심판의 날에 앞서 엘리야를 보낼 것이라는 약속(말 4:5)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바 있는 "오실 이"(1:7)가 엘리야 이외에 다른 특정 인물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예수의 활동이 당시 유대인들이 설화를 통해 알고 있는 엘리야의 활동과 비슷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언급되는 "선지자"는 신 18:15-19에 예언된 "그 선지자"(the prophet)와 같은 어떤 특정한 선지자가 아니라 조상들의 시대에 활동하였던 많은 예언자들과 같은 반응들을 살펴 볼 때 당시 부활 사상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다른 사람의 몸 속에서 활동한다는 헤롯의 말은 매우 흥미있다. 이것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윤희설과 비슷하다. 이로 보건대 당시에는 영혼 불멸 사상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막6:16]

⭕ 내가 목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 여기서 헤롯의 불안한 마음이 간접적으로 강하게 표출된다. 신하들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만 헤롯은 틀림없이 예수의 활동이 죽은 세례 요한의 활동이라고 본다. 여기서는 자신이 직접 "내가 목베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적인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복수하러 올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예수가 부활한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단정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막6:17-18]

⭕ 전에 헤롯이 ...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 여기서부터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4-16절은 이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세례 요한을 헤롯이 직접 목을 베었다는 언급과 세례 요한의 부활이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은 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 의문을 겨기서 밝히고 있다. 이제 이야기는 14-16절의 시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가는 "전에"라는 시간부사를 사용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헤롯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들은 것이 비판의 이유이다. 그 행위는 출 20:14, 17의 간음 금지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근친 상간(레 20:21) 금지를 범한 것이다. 사실 헤롯 가문의 가계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살인과 치정(癡情)이 뒤엉킨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olos)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의 아내 였으나 그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하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지도자의 범죄로 보고 과거의 예언자들처럼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즉 다윗왕의 간음에 대해 나단이 비판하였던 것처럼(삼하 12:1-15) 또 지도자들의 죄악을 무섭게 비판했던 엘리야처럼(왕상 18:1-15 ; 21:17-29 ; 왕하 1:1-16 ; 대하 21:12-15) 세례 요한 역시 그렇게 했다. 특히 18절의 "말하되"(엘레겐)는 미완료 시상으로 세례 요한이 거듭해서 헤롯의 불의를 직고했음을 보여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의 힘도 개의치 않고 직언(直言)과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이것은 그의 소명 의식에서 발동된 것이라고 본다(1:3). 이러한 세례 요한의 행동에 대한 헤롯의 첫 반응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의 투옥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요한이 베레아 지방에 속하며,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 마케루스(Machaerus) 산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의 투옥 이유가 "그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즉 헤롯이 헤로디아를 위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24절에서 헤로디아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죽이고자 마음 먹었음을 밝히고 있고 20절에서는 역시 요한을 죽이는 것에 헤롯이 반대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해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음이 분명하다. 한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의 투옥 이유 가운데 또다른 이유는 그가 민중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 정적(政敵)을 이찌감치 제거할 목적으로 투옥시켰다고 전한다. 어찌되었든 세례 요한은 경건하고 의로운 메시야의 선구자이자 그 시대 정신으로서 끝내 불의한 정치 집단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성 경: [막6:19]

⭕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 문자적으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계속(미완료 시제) 품고 있었다." 더나아가서 "헤로디아가 반드시 그를 처벌받게 할 것이다" 등의 뜻으로 헤로디아의 깊디깊은 적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깊은 죄악(살인)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막6:20]

⭕ 헤롯이.....두려워하여 보호하며.......달게 들음이러라. -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20절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 곧 아무런 범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요한을 "보호하려는"(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헤로디아의 간청에 대해 헤롯이 거듭하여 요한의 신변을 보호해왔음을 암시) 사람으로 묘사되어 두 사람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헤로디아를 상대적으로 매우 악한 여자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묘사가 평행 구절인 마 14:5에서는 없고 다만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했다고만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의 비판을 긍정하면서("달게 들음이라") 내적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매우 심약하고 우유 부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가는 이와 같이 헤로디아와 헤롯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헤로디아의 악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헤롯의 선함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요한으로부터 공격받은 헤롯이 직접 요한을 가리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요한의 의로움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성 경: [막6:21]

⭕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잔치 할새. - 이 구절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헤로디아임을 암시한다. 즉 "기회 좋은 날"이란 헤롯의 보호 장벽을 뛰어넘어 세례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날이라는 것이 문맥상 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좋아할 사람은 헤로디아가 된다. 헤로디아가 왜 좋아했는지는 24절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요한을 죽이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거절할 수 없도록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좋은 날"은 헤롯의 생일이다. 그날은 매우 큰 기념 잔치로서 대연(大宴)을 베푼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교적 관습으로 치부하여 이 생일 지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헤롯은 자기 생일에 이교도들 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생일 잔치를 펼치고 있으니 이것이 문제였다(Lenski). 한편 본문의 "잔치"(데이프논)는 가장 친근하고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큰 만찬(晩餐)을 가리킨다. 한편 마가는 이 생일에 초대되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그 첫째가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헬라어로 "메기스타네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대한", "큰"(great, large), "중요한"(important)의 뜻을 가진 "메가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고위 관리자나 유력자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봉왕 아래에 있는 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직속 고위 관료로 부는 것이 타당하다. 두 번째로 "천부장"들이다. 이들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교로서 군사적으로 고위 계층의 인물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갈릴리의 귀인들, 즉 갈릴리 지방의 유지 및 상류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나열한 사람들의 성격을 보아 헤롯의 권세가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비판(20절)과 요한의 능력에 찬 활동(14-16절)을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을 통해 마가는 비록 세례 요한이 그의 정치적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에게 대한 요한의 심대한 힘을 은연중에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성 경: [막6:22]

⭕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 헤로디아와 그의 전남편 빌립 사이에서 태어난 여아로서 이름은 "살로메"라고 하였다(Josephus). 그 당시 그녀의 아니는 14-15세 또는 17세 아니면 20세 이하 정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그 이유는 마가가 사용한 "그 여아"를 뜻하는 헬라어 "코라시온"이라는 말이 이제 막 어린 소녀 티를 벗어나 결혼기에 이른 처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살로메가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게 된다. 아마 그녀가 자청해서라기 보다 그녀의 어미 헤로디아의 지시로 연석에 앉은 손님들이 어느 정도 취기가 돌았을 때에 무대로 나아갔을 것이다(Marrher). 한편 본문의 정황, 곧 모두가 흡족했던 것으로 보아 춤솜씨가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분봉왕의 딸이면 공주라고 부를 수 있는데 과연 그런 신분으로 연회장에서 춤을 추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술자리에서 춤추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용된 무희들(일종의 위안부)로서 대개 천한 신분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더욱이 당시 연회석상에서 추던 춤은 노출이 심한 옷에 매우 외설적이고 음란한 몸짓으로 남성들의 말초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는 춤이었던 관계로 감히 왕족의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런 춤을 춤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헤롯 궁전의 도덕이 땅에 떨어질 만큼 문란(紊亂)하고 퇴폐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녀의 음란한 몸짓은 능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로디아와 그의 딸을 아주 부정한 자로 강조하고 있는 마가의 의도대로라면 헤로디아는 요한이 비판했던 부도덕한 결혼의 책임을 져야 하는 간교하고 음란한 여자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그런 여자라면 자기의 딸을 공중의 눈요기감으로 능히 춤추게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무엇이든지.....내가 주리라. - 당시 특권 계급의 專橫)과 무소 불위(無所不爲)한 그들의 횡포 및 정치, 사회 전반에 걸친 헤이한 기풍을 감지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 과시적인 헤롯의 인간성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성 경: [막6:23]

⭕ 맹세하되. - 이는 구두로 제시된 왕의 인준 및 서약으로서 결코 변경을 할 수 없는 절대 약속인 것이다. 따라서 헤롯은 그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한편 율법에는 이 같은 맹세의 불변성이 강조되고 있다(민 5:21).

⭕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 헤롯은 딸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고 있다. 즉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땅의 절반을 딸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무엇인가를 후히 주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속담과 같은 말이다(왕상 13:8 ; 에 5:3 ; 7:2). 사실 이러한 약속은 헤롯의 신분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자기 영토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주권을 지닌 통치자가 아니라 로마의 명령을 받는 하급 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솜씨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허풍스럽고도 과장된 반응을 표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자기 맹세의 올무에 걸려들고 말았다.

성 경: [막6:24]

⭕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 여기서 헤로디아의 음모(陰謀)가 드러난다. 그런데 헤로디아와 그의 딸이 공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가정할 수 있다. 먼저 공모했을 가능성은 딸이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는 대답에 조금도 놀라는 기색도 없이 돌아가 덧붙여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은 충분히 사전모의를 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전 모의를 했으면 왜 그 어미에게로 찾아가 물었겠는가 하는 점이 의문시 된다. 따라서 딸은 어머니와의 사전 모의 없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가능성을 포함할 수 있는 제 3의 가정은 모의는 하되 헤로디아의 결정적인 문제, 즉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은 헤로디아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막6:25]

⭕ 저가 곧....급히 들어가. - 헤로디아의 딸은 헤롯의 약속 의지가 옅어지기 전에 그리고 그 고조된 분위기가 식기 전에 잽싸게 자신들의 음모를 수행할 생각으로 "곧", "급히" 헤롯에게 달려가 소청했다.

⭕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 세례 요한의 최후가 심히 비극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케 하는 소름끼치는 요구이다. 여기 "소반"은 대형 접시(charger)를 가리킨다(마 14:8).

성 경: [막6:26]

⭕ 왕이.....자기의 맹세한 것. -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에 대해서 몹시 후회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맹세"(디아 투스 호르쿠스)란 복수로 표기되어 있어 그의 맹세가(23)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같은 맹세가 잔치에 참속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한 것이라서 자신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진퇴 양난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2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헤롯이 요한을 지금껏 계속해서 두둔해왔기 때문에 헤롯의 딜레마(dilemma)는 더욱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체면 유지는 한 사람의 의로운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보다 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22, 23절에 이미 묘사된 바 있듯이 헤롯이 치밀하지 못하여 지도자로서 판단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무능하고 마음이 여린 것으로 비춰진다. 물론 이 같은 기질은 그의 심성 자체가 온유해서라기보다 그가 진리와 정의에 대해 용기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결국 그는 간교한 헤로디아의 올무에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었다.

성 경: [막6:27]

⭕ 시위병(스페쿨라토라). - 라틴어 "스빼꿀라또르"(speculator)에 해당하는 말로서 "정탐꾼", "정찰병", "감시자" 혹은 "사형 집행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시위병 곧 궁을 지키며 왕의 신변 경호를 위해 있는 병사를 가리킨다. 한편 이때 헤롯은 마케루스 궁 안에 머물렀으며 그 사형 집행 장소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막6:28]

⭕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주니. - 시위병이 명령에 따라 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담아 오는 동안 헤로디아의 딸은 침착하게 그 연회 석상에서 기다렸던 것 같다. 참수된 요한의 머리는 그 냉혈적(冷血的)인 딸에게 주어졌고 그 딸은 다시 어미에게 그것을 건네 주었다. 여기서 헤로디아의 악마성이 부각된다. 살인을 공모. 교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머리를 직접 받아들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어떤 전승에 따르면 이때 요한의 머리을 전해 받은 헤로디아는 그의 머리 핀 끝으로 진실과 정의를 부르짖었던 세례 요한의 혀를 찔러보고 또 그의 혀를 뽑아 내기까지 했다고 전한다(마 14:10, 11).

성 경: [막6:29]

⭕ 요한의 제자들이....장사하니라. -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마무리된다. 당시 요한과 긴밀히 소식을 교환하고 있었던 그의 제자들은(마 11:2) 스승의 죽음을 전해듣고 살의(殺意)가 채 가라낮지 않은 마케루스 성에 찾아가 담대히 스승의 목없는 시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한편 요한의 죽음으로 헤롯은 자기와 요한과의 관계가 모두 끝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같은 헤롯의 만행을 깊이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A. D. 30년 나바티아 족(Nabataeans)과의 전투에서 참패했을 때 그것이 헤롯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징벌이었다고 단정할 만큼 헤롯과 그 가족의 만행을 두고두고 되새기고 있었다. 한편 마태는 본 사건을 기술하면서 요한의 제자들이 장사(葬事)를 마친 후 그 모든 일을 예수께 고했다고 전한다(마 14:12). 이로써 결국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하게 된다. 실로 세례 요한이 생존시 고백했듯이 그 자신은 쇠하여야 하겠고 오실 그분, 곧 예수는 흥하여야 했던 것이다(요 3:30).

성 경: [막6:30-44]

이 사건을 오병 이어(五餠二漁)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평행 본문은 마 14:13-21과 눅 9:10-17에 있다. 정소는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지대일 것이다. 마가의 기록에서 특징적인 것은 서론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8:1-10) 그 후편으로 다루고 있으며 제자들과의 대화가 좀더 많은 점이 돋보인다. 또 삽화로 나온 헤롯의 잔치 곧 헤롯 궁전의 현란하고 호화로운 분위기와 예수가 일개 서민의 주식에 불과한 음식으로 배부르게 해야 했던 일반 백성들의 궁핍한 형편을 극적으로 잘 대비시키고 있다(Lane). 한편 본 이적은 사복음서(요 6:1-15) 모두가 소개 되는 유일한 기사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성 경: [막6:30]

⭕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고하니.- 이 구절은 13절에 이어지는 것이다. 즉 제자들이 파송받아 복음 전파와 치병 기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가는 제자들의 활동 기간이나 그 활동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예수의 위임을 받아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 선교 사명을 완수하고 동아온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마가는 "모여"라는 말을 현재 시제로 묘사함으로써 그 장면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라는 말 대싱에 "사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마가는 본절에서만 유일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토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특수한 사명을 띠고 파송받은 사신"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복음 전파와 치병 활동을 위해 특별히 파송받은 것이므로 적절한 단어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Gould). 어쨌든 예수께서는 그들이 감격어린 음성으로 전하는 모든 선교 활동의 보고를 하나하나 귀담아 들으시는 성실함을 보이셨다(눅 9:10).

성 경: [막6:31]

⭕ 따로 한적한 곳에...쉬어라. - 제자들의 활동 보고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한적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배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도 활동을 하는 동안 상당히 피로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제자들을 아끼는 스승으로서의 애틋한 마음의 펴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휴식은 새로운 내일을 위한 영. 육의 재충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생각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쉬어라"(아나파우사스데)는 말은 중간태 명령형으로서 "충분히 휴식을 회복하라"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장소가 매우 분주한 장소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의 전형적인 묘사법으로서 예수가 가는 곳에는 항상 군중이 쉴새 없이 모여들고 있는 생동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이와 같은 장면 연출을 통해 예수 활동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려 하고 있다. 즉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예수의 열정적 모습과 그를 좇는 수많은 무리들을 통해 당시 예수의 영향력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모여든 군중들 중에는 유월절이 다가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그 명성을 듣고 모여든 주총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한적한 곳"(에레모스)이란 외롭고 적막한 "광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광야에서의 휴식"이란 주제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셨던 곳이 광야였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선지자 이사야(사 63:14)와 예레미야(렘 31:2) 때에 이르러, 하나님의 새 백성이 제 2의 출애굽 때에 받기로 약속된 제 2의 휴식(a seoind rest)에 대한 모형으로 발전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했다. 왜냐하면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의 임재이며, 만나 대신 예수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떡, 곧 생명의 양식이 되셨기 때문이다.

성 경: [막6:32]

⭕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예수와 제자들이 무리들을 피하는 방법으로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아마도 그들은 호수 북동쪽으로 갔을 것이다. 이때 예수를 좇던 무리들은 황급히 요단강 본류에서 갈릴리 호수로 물이 흘러 들어가는 얕은 곳을 따라 요단강을 횡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한적한 곳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호숫가에서 배를 이용하여 다른 호숫가로 이동하는 점이다. 그러나 눅 9:10을 참고하면 행선지는 이름이 "어촌"이라는 뜻을 지닌 "벳새다"라 하는 광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5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건너편 벳새다"로 가라고 지시한다. 그렇다면 33절에서의 도착 지점은 "베새다"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모순은 갈릴리 해변에는 이 지명을 지닌 곳이 두 곳(갈릴리 북동쪽과 갈릴리 서안쪽)이었다고 봄으로써 어느 정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갈릴리 북동쪽 벳새韁는 헤롯 빌립이 도시(city)로 승격시키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스(Julias)의 이름을 따서 그곳에 명명함으로써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성 경: [막6:33]

⭕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 이 구절로 보아 군중들이 배가 떠난 뒤 뒤늦게 야 배에 탄 자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배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호수 주면에 있는 여러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마을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가는 배를 보고(아마 당시 역풍으로 인해 배의 진행이 지체된 듯함)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호숫가에 위치한 여러 마을 사람들이 멀리서도 예수의 일행을 알아보았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한 명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로 보여진다.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곧이어진다.

⭕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徒步)로....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 이는 마가의 현장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는 예수의 일행과 그 일행을 따라 달리는 군중들의 모습을 대비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 시각에서 보면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시달리며 피곤해 하는 예수의 일행을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휴식하러 떠나는 예수의 일행을 조보(徒步)로 좇아가는 군중들의 열성을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 대한 기대로 충만했던 무리들의 열정은 대韅했다. 그들은 수십km가 넘는(가버나움에서 벳새다까지는 약 30km) 먼거리를 지칠 줄 모르고 걸어 예수의 일행보다 먼저 당도했던 것이다. 예수께 대한 무리들의 기대 심리는 이제 최고조에 달했음을 알게 한다.

성 경: [막6:34]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 앞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둁이 군중들이 예수가 탄 배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 예수 일행이 도착하기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는 배를 대고 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이것 역시 마가의 특유한 묘사이다. 항상 배, 바다, 군중이 함께 등장한다(3:7-9 ; 4:1,36 ; 5:2, 21).

⭕ 목자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 자신을 만나려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보고 예수는 휴식의 장(場)을 빼앗긴데 대한 불쾌한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와 제자들의 피곤함을 모두 잊고 깊은 감동과 연민의 정을 강하게 느끼셨다. 실로 예수의 이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야말로 모든 구원과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마 14:14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이같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목자없는 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민 27:17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간혹 사용하신 표현이다(마 9:36). 이 말은 먼저 자기 의무를 잊은 거짓 목자에 대한 비판적 이해할 수 있다(왕하 22:17 ; 겔 34:5). 왜냐하면 당시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 증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무리들이 예수를 이렇게 열성적으로 따르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 행위가 당시 종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무리들에게 진리를 공급해주지 않았음으로 무리들은 진리에 심히 굶주려 있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반대로 예수 자신이 지금부터 민중의 새로운 목자로 나선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가 배에서 내려 자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며 여러 가지로 가르친다고 표현하였다. 사실 양보다 더 그의 인도자를 필요로 하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목자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도, 꼴도, 안식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처럼 그의 백성을 인도하며(사 40:11), 다윗처럼 그들에게 휴식을(겔 34:23-25) 제공하심으로(Lane Mauer) 그들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셨던 것이다(요 10:1ff).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무리들과 굶주려 있는 무리들을 향한 예수의 인간애는 애절한 것이었다. 8:2에 나오는 4.000명 급식 이적에서 보여준 예수의 감정은 무리들의 영적인 굶주림만 아니라 육체적 굶주림까지 걱정하며 애통해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인간 사랑은 인간의 영. 육 구원, 즉 전인(全人) 구원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가 뒤에 나오는 급식 이적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이 그르침의 주 내용은 천국 복음일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다(눅 9:11). 그리고 마태와 누가는 각각 병고치시는 장면을 더불어 기록하고 있다(마 14:14 ; 눅 9:11). 이로 보건대 예수는 모인 무리들의 모든 필요(영. 육간)을 채워 주셨음을 보게 된다. 진정 그 무리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주어진 것이다(시 23:1).

성 경: [막6:35-36]

⭕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 급식 이적의 치밀한 도입부를(30-34) 거쳐 이제 본론부에 들어선다.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언제쯤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동안 예수가 가르쳤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시각은 일반적으로 저녁 먹을 시간 곧 초저녁 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가르치느라고 시간이 지난 것을 못느끼는 듯하며 그 시간의 경과를 제자들이 예수에게 보고하며 제안하고 있다. 그 제안은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사람들을 해산시키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이 "빈들" 곧 보통 때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광야이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베새다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이었따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벳새다 남쪽의 "엘바디하" 평야가 동쪽으로 뻗어 있는 구릉의 중간 지역이라고 한다. 여하튼 실로 현상적으로 볼 때에 시간적, 장소적으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가까운 마을로 나가 각자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안을 통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이 31절의 묘사와 같이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열정적(熱情的)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그리고 식사 시간을 지나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청중들의 태도가 진지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설교 현장은 빈 들이었지만 그들의 진지함과 열정은 빈 들을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촌"(아그루스)은 들판에 자연 발생적으로 이뤄진 조그마한 촌락을, "마을"(코마스)은 조금 발달된 소읍을 가리킨다.

성 경: [막6:37]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준비하여 청중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는 강조적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너희가"(훼메이스)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능력을 과시한 명령이기 보다 오히려 제자들의 절대적 무능을 일깨우고 또 그들의 당신께 대한 영적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라 본다.

⭕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의 명령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가 필요하다는 조로 예수께 반문을 한 것이다. 제자들은 청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이 파악한 청중의 숫자를 통해 식사에 필요한 예산을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200데나리온은 당시 한 사람의 하루 임금을 한 데나리온이라고 할 경우 한 사람이 약 8개월 정도 벌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혹자(Bruce)의 주장대로 당시 제자들에게 이만한 돈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제자들에게는 매우 큰 돈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요 6:7에서 빌립이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 부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계산에 밝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이는 명령을 내리고 계신 그분의 뜻과 그분의 초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無知)했다는 사실이다.

성 경: [막6:38]

⭕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예수는 직접 문제 해결에 참여한다. 먼저 예수는 즉시 구할 수 있는 떡이 몇 개인지 제자들에게 알아보라고 명한다. 제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신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①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예수께 전적인 의뢰를 하는 참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② 비록 하찮은 존재이나 예수의 도구로 사용 되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롬 4:17),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27).

⭕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떡과 물고기의 숫자는 4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요한 복음에서는 떡이 구체적으로 보리떡이고 소유자가 어린 아이임을 덧붙이고 있다(요 6:9). 이 음식의 양은 37절에서 제자가 어림잡아 산출한 예산과 대비되어 엄청나게 부족한 것임을 강조한다. 거기 모인 5,000명 이상의 군중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양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처럼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고 더군다나 어린 아이가 먹으려고 소유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의 식사 양으로 충분한 것이 못되었을 것이다(마 14:17 ; 요 6:9, 13 주석 참조). 이로 보건대 마가는 아주 적은 양으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사실에 강조점을 두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밝힌 음식의 양은 기적의 효과를 고무시키기 위한 배경이 된다.

성 경: [막6:39-40]

⭕ 명하사....떼를 지어...앉게 하시니....앉은지라. - 예수의 행동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청중들을 무리지어 앉게 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떼를 지어"(쉼포시아 쉼포시아)란 마치 집안에서 식탁 주위에 앉은 것처럼(주로U자형으로 앉음) 옹기 종기 모여 앉은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게 모여 앉은 한 때가 50명 혹은 100명씩 되는 규모였다. 한편 마가는 그들이 앉은 장소가 "푸른 잔디"위임을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50명씩 앉게 하라고 명하나(눅 9:14) 푸른 잔디라는 말은 없다. 마태와 함께 "푸른 잔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마가는 이 단어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있다. 먼저 35절에서 언급한 "빈들"이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들판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식사를 위한 준비와 함께 한층 더 희망적인 분위기를 창출한다. 또 "푸른 잔디"에 앉게 하는 예수의 지시는 시 23편을 연상케 한다. 즉 목자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듯한 모습을 이 구절에서 보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설교도 하시고 푸른 초장 위에서 음식까지 먹임으로써 민중의 손색없는 목자가 된다. 이는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탄식과 잘 어울린다. 또 "푸른 잔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편히 "쉼"과 평화로운 풍경이다. 참으로 예수 앞에서 쉼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마가는 그려내고 있다. 그와 더불어 "푸른 잔디"는 그 때가 팔레스틴의 우기가 막 끝난 후인 3,4월경이었음을 보여준다(마 14:19). 특히 요한은 이 때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니산월 14일, 태양력으로 3, 4월경)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요 6:4). 그렇다면 이때는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잡하시기 만 1년 전의 사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0명 또는 100명 단위로 무리를 지어 앉는 것은 식사와 교제를 위한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의 야영(野營)생활을 연상케 한다(출 18:21).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와 더불어 제 2의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새 공동체를 경험폁게 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급식 기적의 최고점이라고 할 수 있는 41-44절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이끌어들인다. 한편 40절에 언급된 바 있는 "떼로"(프라시아이 프라시아이)에서 "프라시아이"란 "작은 정원", "꽃밭"이나 "정원"같은 인상을 주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 이러한 인상은 무리들이 매우 질서있게 앉아 있었고, 또 그들이 입은 옷들의 색깔이 매우 다양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Donald W. Burdick).

성 경: [막6:41]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제자들에게 주어. - 예수는 유대의 전통적인 공동 식사 관습에 따라 자신이 가장의 위치에서 그리고 그 모인 무리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고 먼저 하늘을 향해 감사와 찬양을 한다. 특히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상징한다(요 11:41 ; 17:1). 그리고 이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찬송하리로다! 땅에서 양식을 내신 만유의 왕이신 주 우리 하나님이시여 !"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성만찬과 연결시키는 해석들도 있지만 적절하지 못하다. 여기서는 포도주도 없고 또한 성만찬에는 없는 물고기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동 식사의 전통적 관습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한 다음, 직접 떡을 떼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고 또 물고기도 그렇게 하셨다. 이것 역시 유대 공동 식사의 관습 곧 가장 또는 그 식탁의 주빈이 음식을 떼어 나누어주는 전통적 관례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떼어"(카테크라센)란 직설법 부정 과거 시상으로서 그 행위의 사실성의 장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뒤어어 언급된 "주어"(에디두)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눠주어 분배케 하셨음을 암시한다. 실로 그 떡은 떼시는 예수의 손 안에서 계속 커져서 예수께서 무리들을 모두 먹이실 때까지 불어났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을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 아직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를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단어는 기적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가 골고루 돌아갔음을 밝힘으로써 창조의 능력으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예수의 초월적(超越的)인 군능을 단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성 경: [막6:42]

⭕ 다 배불리 먹고. - 이 표현은 매우 함축적 의미를 시사한다. 우선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이야기를 총 마감하고 있다. 즉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사실상 불가능했던 환경, 그리고 궁여 지책(窮餘之策)으로 등장한 아주 작은 양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38절 주석 참조)의 빈약함에 대조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되었다는 말로 기적을 완결짓는다. 또 다른 의미는 배부르다는 말은 충분히 만족해 하는 표현이다. 즉 더 이상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충분한 식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세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식사가 공동체 안에서 교제의 장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50명, 100명 단위로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더불어 나눔을 뜻하고 모두 하나됨을 뜻한다. 그들 모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주 마리로 큰 이적을 이루신 예수를 중심으로하여 모두가 함께 배불리었으므로 하나의 공동 식사를 한 셈이다(40절 주석 참조). 마지막으로 모두가 배불리었으니 풍요와 여유가 있고 따라서 공동체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이 장면은 31절의 분주함이나 33절의 군중 이동과 같은 긴박감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휴식을 연상케 한다(39절 주석 참조). 따라서 마가가 묘사하는 기적의 장면은 이 이야기의 서론부에서 표현된 상식 밖의 기대와는 달리 소박(素朴)하게 처리된다. 그 기적에 대해 놀라거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사의 평화로움이 깃드는 조용한 잔치로 인상지워진다. 이것은 마가가 표현한 예수의 이상적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 경: [막6:43]

⭕ 남은 떡 조각..... 열 두 바구니에 차게. - 앞절에서 밝힌 기적의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 즉 모두가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남았다는 말은(그것도 최초의 음식 양보다 훨씬 많게) 넉넉한 공동 식사였음을 확인해 준다. 여기서 남은 떡과 물고기를 거두어 담은 "바구니"(코피노스)는 유대 사람들이 평소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으로서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휴대용 작은 바구니이다. 요즈음으로 말한다면 손가방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바구니에 점심 식사와 몇 가지 생필품을 넣어 가지고 여행을 했다고 한다(W. W. Wessel). 한편 남은 떡과 물고기를 담은 바구니가 12개인 것은 제자들의 수가 12명인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음식을 각 사람에게 날라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남은 음식을 거둔 사람도 제자들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특히 요 6:12에서는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수가 "12명"이었으므로 떡과 물고기를 담은 수효는 12 바구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12"란 숫자는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남은 것"은 구약에서 누누이 강조해온 "남은 자" 사상(스 9:8)을 은연중에 암시 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Talor Grant). 더욱이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생명의 떡으로 오신 당신이 기갈(飢渴) 중에 있는 뭇심령들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셨을 것이다(요 10:10).

성 경: [막6:44]

⭕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 - 식사가 끝났을 때 군중의 수효가 밝혀진다. 아마도 50명 또는 100명씩 모여 앉았었꼬 식사 동안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천 명의 수를 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마 14:21에서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으로 그들은 남자 장정만을 공식적인 통계에 넣는다(민 1:3). 따라서 본문에서 가리킨 "남자"는 청중이 모두 남자로만 구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남녀로 구성된 청중 중 남자만 수효를 센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급식 대상이 된 사람의 수효는 약 2만 명 정도로 훨씬 불어나게 될 것이다. 마가는 이러한 암시를 통해 독다로 하여금 예수의 권능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아운 것인지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물온 이 이적은 단지 "떡"이나 "오천 명"이라는 현상적 사실에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의 "인류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적에로 모든 독자들의 눈길을 이끈다.

성 경: [막6:45-52]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의 평행 본문은 마 14:22-33 ; 요 6:16-21에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평행 본문이 없다. 이 기적 사건은 앞서 급식 기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52절에서 급식 이적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물 위에서 일어난 기적이 본문 이외에 4:35-41에서 나오는데 그 기적의 주제는 자연 현상까지 제압(制壓)하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도 같은 주제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은 4:35-41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예수가 자발적으로 제자들과 합유하기 위해 취하신 행동이었다.

성 경: [막6:45]

⭕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급식 기적 직후 예수는 친히 무리들을 서둘러서 해산시키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배로 떠나보내고 있다(32절 주석 참조). 그 상황은 매우 급한 것처럼 비춰진다. 특히 본문에서 "즉시"(유데오스)와 "재촉하사"(에나그카센, '억누르다', '강권하다', 강요하다'는 뜻)란 말은 예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몰아세우셨는지를 짐작케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금 전까지 고조되었던 급식 기적의 분위기와는 달리 서둘러 군중을 해산시키고 장소를 옮기려 한 까닭이다. 마가는 그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요 6:14, 15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급식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그 선지자"곧 메시야라고 하면서 그분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비록 당신을 메시야로 알되 인간들의 궁극적인 구원자로 알기 보다 정치적(政治的) 성격의 메시야로 오해함으로써 극도의 흥분 상태로 이끌리던 무리들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 위해, 예수는 그들과의 교제를 잠시 중단하기를 원하셨다.

⭕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 -제자들에게 가라고 지시한 장소는 "벳새다"이다. 평행 본문 마 14:22-33에서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물 위의 기적 직후 닿은 곳이 "게네사렛"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요 6:17에서는 가버나움을 향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기적을 언급하고 있는 3복음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행서지가 "벳새다", "가버나움", "게네사렛" 등으로 나타나는 것은 서로 비슷한 방향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타난 착오 때문일 수도 있고 또한 도착한 곳과, 육지 도착 후 다시 재개된 사건과 그 발생한 곳이 각 복음서간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불일치는 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엄급된 "벳새다"는 32절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급식 기적 사건이 일어났던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ias, 눅 9:10)가 아니라 갈릴리 서안의 가버나움 근처에 위치한 또 하나의 벳새다일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 선교의 활발한 전개를 위해서 뿐 아닐라 무지한 민중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훼파(毁破)하기 위해 갈릴리 해안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의 목적을 수행해 가셨다. 진정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가장 많이 모여 당신께 가장 극진한 칭송을 할 때가 바로 당신께 가장 위험한 위기적 상황임을 자각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막6:46]

⭕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예수는 군중들을 다 해산시키고, 제자들을 떠나 보낸 후 혼자 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간다. 문자적으로 볼 때 예수는 기도하실 목적으로 "산속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단순히 외견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예수 자신에게 삼한 갈등이나, 고민 또는 밀려오는 고독감을 이기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요 6:14, 15에서의 보고(報告)처럼 그때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31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 곧 고통과 배척당함과, 죽임당해야 할 사명 완수를 방해하는 바로 이 같은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들의 무지에 대한 염려를 해결하시기 위해 산속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가 함께 예수께서는 헤롯왕의 박해가 임박해옴을 예감하시어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혼자 조용히 하나님과의 깊은 영교(靈交)를 하시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예수가 활동 초기에 지신의 기적 사건을 비밀에 부치도록 지시했던 사실과(1:44), 지금의 공개된 대규모 대중 집회를 서둘러 해산시킨 점, 그리고 6:14에서 묘사된 헤롯의 불안을 종합해보면 헤롯의 공격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로 예수는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는 이와 같이 큰 사건을 전후하여 혼자 기도하는 경우가 어려 번 있었다(1:35 ; 14:32-36 ; 눅 3:21 ; 5:16 ; 6:12 ; 9:18, 28 ; 11:1 ; 22:41, 44). 이렇듯 어려운 일, 위험하고 힘든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분이 지니신 능력과 권위와 지혜가 과연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가를 조용히 증거해 주고 있다. 실로 혼잡한 곳을 피하여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산")에서 그분과 속깊은 영적 교제를 하신 예수에게 그 어떤 어려운 난관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성 경: [막6:47]

⭕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뭍에 계시다가. -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 기법이 돋보이는 장면 묘사로, 본 사건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급식 이적이 있었을 때 이미 저녁 때가 되었으므로(35절)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는 것은 아주 긴 시간이 아닌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음을 보여준다. 이때의 시간은 계절적으로 본 사건이 유월절 기간에 있었던 것으로 단정한다면(31절) 오후 6시가 넘어가는 늦은 저녁으로 본다. 그렇지만 유월절의 보름달 아래서 해변에 있는 사람은 능히 호수 한 가운데 있는 배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지금 기도하러 들어가셨던 산에서 내려오셔서 해변의 평지에 계신다. 즉 예수는 "산"(오로스)에 계신 것이 아니라 "뭍"(게), 곧 바다에 대칭되는 육지 위에 계신 것이다. 그리고 배의 위치는 갈릴리 바다의 가운데이다. 이것은 예수가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이 얕은 곳을 걸어 온 것이 아니라 깊으 곳을 그것도 한 가운데까지 걸어왔음을 암시해준다. 또 예수가 뭍에 서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가 뭍에서부터 바다 가운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설정(設定)이 될 수 있다. 마가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예수의 기적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성 경: [막6:48]

⭕ 바람이 거스리므로, -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보다 200m 아래에 위치하여 주변의 협곡을 통해 회오리같은 바람이 가끔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4:37 주석 참조). 이 바람은 제자들이 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역풍(逆風)으로, 배를 목적지에서 자꾸만 이탈시켜 항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었던 것같다. 이 묘사는 첫 번째 바다 위의 기적에서 묘사된(4:37) "광풍"과는 성격이 다른 은근하고도 끈덕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먼저 "괴로이"(바사니조메누스)란 "시험하다", "고문하다", "지치게 하다"는 뜻을 지닌 수동태 현재 분사로서 비록 제자들 중에 어부 출신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을 느끼고 심히 고통 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보시고"(이돈)는 "주목하다"는 뜻인 "호라오"의 제 2과거형 분사로서 예수께서 그 광경을 지속적으로 예의 주시하셨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갈릴리 바다의 폭이 약 10km 라고 할 때 배의 위치가 바다 한가운제이므로 뭍으로부터 약 5km 정도 떨어진 거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과연 뭍에서 먼 거리에 있는 제자들의 노젓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적어도 보통 사람의 시야밖에 있었거나 조그마한 형체로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또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상태에서 식별(識別)이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추측도 가능하다. 예수는 이미 배를 타고 떠나는 제자들을 보았을 것이고 조그마한 점같은 물체만 보아도 제자들이 탄 배로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 유월절 즈음이었다면 비록 바람이 세차게 물었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호수 전체를 비추고 있었을 것이므로 시야가 그렇게 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바람이 불고 있었으므로 멀리서도 항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직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부정한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전히 제자즐의 현재 당하고 있는 고초를 신적인 직관(intuition)으로 조용히 응시하고 계셨을 것이다.

⭕ 밤 사경 즈음에. - 유대인들의 시간 구분법으로는 밤을 3등분하는 것이(초경-해질때부터 오후 10시까지, 이경-오후 10시부터 오전 2시까지, 삼경 곧 새벽-오전 2시부터 해 뜰때까지) 상례였으나 그들이 로마 통치하에 편입됨으로써 밤을 4등분하는(일경-오후 6시에서 9시, 이경-오후 9시에서 12시, 삼경-새벽 12시에서 2시, 사경-새벽 3시에서 6시) 관례가 생겨났다. 마가는 바로 이 로마인의 시간 부분법에 맞추러 본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 예수는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갔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처럼 보인다. 여기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는 그들의 곁을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가 된다. 이 말은 예수의 의도를 표현한 것이기보다 그 순간 막 일어나려는 일을 목격한 사람이 받은 독특한 인상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W. W. Wessel). 그렇지 않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다면 곧장 지나치기라도 할 듯이 그 배를 향해 곧장 걸으신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스치듯 걸어가셨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 구절은 결코 예수께서 그들의 고난을 간과하고자 하심이 아니요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당신을 향한 믿음을 보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기들 배로 초청하여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며 예수를 향한 전적인 신뢰를 보일 것을 원하신 것이다(히 11:6). 즉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에 근거한 초청(招請)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Lenski).

성 경: [막6:49]

⭕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온 예수를 보면서 놀라고 있다. 특히 "소리지르니"(아네크鱺산)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거함치며 두려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제자들의 심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모습을 실체가 없는 환영으로 보았던 것이다(마 14:26 주석 참조). 여기서 "....인가 하여"(에閺산)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내린 자연적인 결론으로 이해된다(Robertson). 즉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경험에만 따른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한계(限界)였다. 한편 이 장면은 당시 유령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민담 형식으로 널리 소개되어 있었던 것임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인상은 심히 두려운 존재로 퍼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제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그분의 실체로 여기지 못한 것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 즉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으로 믿었던 예수가 갑자기 시. 공을 넘어 물위로 나타난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4:35-41에서 광풍 제압 기적을 경험한 제자라면 적어도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 침착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는 바람불고 혼란스런 밤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을 분명히 식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유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심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체온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막6:50]

⭕ 안심하라(다르세이테). -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는 뜻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용기와 위로를 더하는 강한 명령이다. 그들은 이제(현재형) 더 이상 바람과 유령의 악몽에 짓눌리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고 담대히 떨쳐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한편 이 위로의 말은 치유 이야기 속에서도 자주 나온다(10:49 ; 마 9:2, 22). 따라서 이 단어의 사용 의미는 분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미의 문제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는 바람으로 인해 향해가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령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니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고 있다. 여기서 "내니"(에고 에이미, It is I)라는 말은 마치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의 표현인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표현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출 3:14). 따라서 예수의 "나" 선언은 곧 신의 현현(theophany)으로서의 당신의 존재 계시로 이해된다(요 8:58). 이러한 예수의 자계시(自啓示)는 심한 두려움에 놓여있던 제자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즉 바람과 풍랑과 지구의 중력까지도 정복하시고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그분이 바로 제자들이 믿고 따른 자신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지닌 모든 공포와 유혹을 물리쳐주실 수 있는 만유의 주이심을 "내니"라는 그 한 마디를 통해 전달하신 것이다. 한편 "두려워 말라"(메 포베이스데)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무서워하는 상태를 중단하라(stop fearing)는 참으로 단호한 명령이다. 이제 나 예수가 너희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께서 그 험한 바다 위를 친히 걸어오신 이유이며 목적이었다.

성 경: [막6:51]

⭕ 바람이 그치는지라. - 예수의 기적이 물 위로 걷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바람을 잠재우는 권능까지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는 무언의 명령으로서 바람의 기운을 지치게 만드셨던 것이다. 결국 이 기적의 주제는 자연을 다스리는 신적(神的) 권위가 예수에게 있음과 그러한 권능의 모든 귀결점은 바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마가는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 사실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마 14:28-31). 이는 아마도 마가에게 예수의 행적에 관한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베드로가 자신의 철없이 날뛰던 모습을 통한히 여긴 나머지 물에 뛰어든 장면에 대해 침묵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마음에 심히 놀라니. - 이 말은 내색하지 않고 놀란다는 말인데 예수가 물 위로 걸어오심과 당신께서 배위로 오르시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잠잠해진 사실을 보고 놀라와하는 표현이다. 평행 본문 마 14:33에서는 제자들이 그들 앞에 서신 예수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느끼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마태의 장면에 비하여 마가의 묘사는 제자들이 기적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것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차이는 마태가 제자들의 외면적 행동에 그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 숨겨진 내면적 상황을 주시했던 데서 비롯된다. 즉 마가는 비록 제자들이 예수께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마음속 깊이에서는 여전히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잠재해 있었음을 여실히 노출시켜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뒤이어 일관된 표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영적 감각이 무디고 현명치 못한 것으로 제자들의 실체를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막6:52]

⭕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마가는 물 위에서 일어난 두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놀란 일을 제자들이 급식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만약 그들이 앞선 오병이어의 이적의 의미, 곧 우주의 주관자와 참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이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가 물 위로 걸으실 뿐 아니라 물결을 잠재우신 것을 보고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의 가장 큰 과오는 험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과연 누구이신지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기족론적 지식(知識)의 결핍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마 14:33 ; 16:16 ; 요 6:68, 69) 등에서 자신들의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전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해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모히려 "마음이 둔하여져"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막6:53-56]

게네사렛에서의 활동을 요약하여 치병 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평행 본문은 마 14:34-36에만 나온다. 내용도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두 본문 모두 의도적으로 압축된 묘사를 하고 있다. 즉 본문은 수많은 사건을 요약한 일종의 삽화로서 "치료자"되신 그분의 이미지를 강렬히 부각시키고 있다.

성 경: [막6:53]

⭕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 이야기가 앞절과 무리없이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52절에 이어 계속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또 문제가 생긴다. 즉 출발할 때 "벳새다"를 향하라고 예수가 지시한 것으로 45절에 언급되었었는데 그렇다면 예정지와는 다른 곳에 도착한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45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 예수의 일행의 운 목적지는 갈릴리 서안의 벳새다였으나 온 밤 동안의 심한 바람 때문에 그 벳새다에서 몇 km 떨어진 게네사렛에 도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 이하 내용은 바람을 잠잠케 하신 이적과 약간의 시차를 둔 독립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 일행은 호수 건너 게네사렛에 도착하셨는데 그곳은 호수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Magdala) 북쪽의 광야이든지 아니면 광야에 있는 한 도시였을 것이다(Dalman). 게네사렛은 한 도시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갈릴리 서안의 한 평야지대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게네사렛 평야의 토양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많은 촌락들이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s)는 이곳에 대해 "이곳은 자연의 야심작(野心作)이라 불리울 수 있다. 그 까닭은 이곳이 근본적으로 서로 섞여 살 수 없는 식물들까지도 함께 섞여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다.

성 경: [막6:54-55]

⭕ 예수신 줄을 알고...달려 돌아다니며. - 예수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낮 시간일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뭍에 나와 있었고 사람들은 곧 예수라는 사실을 알아 본다 그 사람들은 그 지역 여러 곳에 다니며 소식을 알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환자들을 메고 예수 앞으로 달려오는 장면을 마가 특유의 분주하고 생동적이며 긴박감 있는 묘사로 처리하고 있다. 특히 2:4에서도 한 번 언급된 바 있는 "침상"의 이동 장면은 가히 예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예수에 대한 명성이 "게네사렛"에서 아주좋게, 특히 병고치는 기적으로 신뢰있게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장면을 급식 기적의 결과와 함께(45절 주석 참조) 생각해보면 예수의 인기와 명성, 그리고 영향력은 마치 어떤 크나큰 변화를 예감케라도 하듯이 민중들 사이에 놀랍게 퍼져가고,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정치가들에게도(헤롯처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결국 더욱 짙게 다가오는 핍박(逼迫)의 그림자를 예감케 한다.

성 경: [막6:56]

⭕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열정적 활동과 사람들의 열관적인 추종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활동 영역이 어느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조그마한 "마을"이나 잘 발달되고 붐비는 "도시"나 한적한 들판 위에 세워진 "촌"이나를 불문하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 어디나 선교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보호자들이 환자들을 "시장"에 두고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예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 시장을 당신의 복음전파 대상지로 택했던 것 같다. 이 "시장"(아고라)은 한 마을 어귀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이곳에는 마을 법정과 공공 기관이 형성되며, 또 사람들의 상거래와 교제의 장소로 활용된다. 이러한 분주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에서 예수의 선교 사역이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손을 대게. - 먼저 "옷가"란 "옷가에 다는 술" (5:27)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이 명한 바에 따라(민 15:37-39 ; 신 22:12) 옷가에 술을 달고 다니셨던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기라도 허락할 것을 바라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간구하니"(파레칼룬)는 능동태 미완료 시상으로서 무리들의 간곡한 요청이 거듭거듭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믿음이었다. 이와 같은 장면이 혈루증 여인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5:27). 마가는 이와 같은 열광적이고 열정적이며 생동감있는 예수의 치병 활동을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는 말로 끝맺는다. 물론 사람들이 완전한 치유의 은총을 입은 것은 그들이 예수의 옷가를 만졌기 때문은 아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 근저에는 당시 팽배(膨湃)해 있던 미신적 의도가 곁들여져 있었다고 할망정, 예수가 그들을 치유하신 것은 분명 예수의 옷가라도 만지기를 열망했던 그들의 순수한 믿음 때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법이다(히 11:6). 여하튼 본문의 마지막 글귀는 예수의 활동은 성공적이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열기가 높아짐을 느끼게 하며 갈릴리 사역이 거의 절정에 다다랐다는 조용한 암시를 남기고 있다.

성 경: [막7:1]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바리새인들...예루살렘에서 와서 - 본절은 시간. 장소의 배경 설명에 충실한 마가의 독특한 문장 기법과는 조금 예외적으로 전장(6장)과의 아무런 관련성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또 이야기의 배경인 장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다만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중앙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예수를 찾아옴으로써 본 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한다. 그런데 여기서 장소는 갈릴리의 가버나움 지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곳이 예수의 주(主)활동 무대였고 또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은 갈릴리선교 기간 중에 발생한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중앙에서 지방까지 예수를 찾아왔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1) 중앙에서 그들이 내려온 것은 지방의 율법학자들이 요청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유는 예수의 열성적인 활동과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높아가는 예수의 인기에 대한 불안 때문에 중앙의 권위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예수에 대한 열기를 식혀 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의 활동은 사회.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굉장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특히 기적의 행위나 죄사함을 선언하는 행위는 종교적 전통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소문으로 전해오는 예수의 도전적 행위를 직접 살피고 확인하여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몇 사람의 대표를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앞에 언급한 두 가지의 가능성 모두 수용하는 것이다. 즉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파문이 그들의전통과 종교적 질서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그 대책으로서 증앙의 권위 있는 학자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예수와의 직접적인 논쟁을 통해 파문을 진정시키려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증앙에서 파견된 그들의 소임은 단순히 예수의 활동에 대한 피상적인 조사였다기 보다 오히려 예수의 권위와 인기를 일구에 무너뜨릴 수 있는 모함(謀陷)의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사실 당시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예수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본문의 조사 단원들은 편견과 적의로 가득 찬 눈으로 예수와 그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숨죽여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상황은 3:22에서 이미 한 번 발생한 적이 있다.

성 경: [막7:2]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부정한 손...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 중앙에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온 뒤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 같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모였다가'로 문장이 끝나 시간 차의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다가 문제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이제 포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문제의 초점은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행위'였다. 여기서 '부정한 손' 과 '씻지 않은 손'이 동등한 의미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후자는 전자의 설명적 첨가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방인(로마)를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던 마가의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배려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정하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의식적(意識的) 부정(不淨)을 말하는 것이고 '씻지 않은 손'은 그 부정한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 조상이 정한 결례 의식을 거치지 않아 성결에 이르지 못한 '부정한'( *, 코이나이스, '보통', '일반'을 의미) 일반 세상의 손을 가리킨다. 사실 중근동 지방의 식사 예법은 주로 손사용하며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에서는 이 손 씻는 일이 단지 위생적 측면에서 보다 오히려 의식적 측면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에 있어서 위생적 부결이 종교적 부정으로 공식 율법화된 것은 출애굽 당시의 일이었다('월경하는 여인'. 레 15:19-31;'시체를 만지는 것',레 21:11;민 19:13;'문등병자', 레 13:3, 44-46;14:44-57 등). 이와 같은 구분은사람, 짐숭, 물건, 일 등에있어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종교 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관습은 모세의 율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제사장의 제의적 관례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미쉬나(Mishnah)의 한부분 전체가(Tohoroth, 'cleanness') 바로 이 '정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음을 볼 때 유대인들의 의식적 정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결례를 행하지 않고 식사를 한 것을 가만히 주시하면서 그들을 부정한 자로 단죄한 것이었다. 한편 혹자(Swete)에 따르면 이때 제자들이 먹었던 음식은 지난 번 벳새다 율리아스에서 5병 2어의 기적후에 거둬들인 12광주리에 담겨 있었던 것이라는 재미있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성 경: [막7:3]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괄호안에 묶여 있는 3, 4절은 유대인들의 전통과 관례에 전혀 생소한 이방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가가 친절히 설명해 놓은 해설구이다.

⭕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 여기서 먼저 '모든 유대인들'이란 특정 계층의 종교 지도자들을 제외한 일반 유대 백성들을 가리킨다. 한편 종교걱 특권을 누리며 남다른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적 규범준수와 각종 규제 조항들을 가르치며, 지키게 하는 등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었다.

⭕ 장로들의 유전(遺傳) - 마가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않고 식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그것이 유대적 전통 속에서 전승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장로' 혤라어로 '프레스뷔테로스'(*)인데, '나이 많은 사람' 또는 '조상' 등의 의미와 함께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지방의회 의원(눅 7:3)이나 '산헤드린'이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 최고회의 회원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권위 있는 율법교사와 종교 지도자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조상'으로 번역하여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고 본다. 그리고 '유전'(*,텐 파라도)이란 말은 '...로부터 손으로 건네주다'는 뜻의 '파라디도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문 율법(토라)뿐 아니라 구전 율법을 함께 전해 주셨는데, 그 구전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모세, 그리고 아론, 기타 자손들에게 순서대로 전해졌다고 믿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반영한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유전'은 유대인들의 조상 때부터 구두로 전승되어온 행위법 내지는 각종 판례법을 가리킨다고 보겠다. 사실 유대인들의 관습은 이러한 구전율법과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조상의 전통에 관한 깊은 관심과 구체적인 체계화 작업은 바벧론 포로 시대를 거치면서 산헤드린의 모체였던 대 회당(Great Synagogue)과 더불어 점차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통들은 후대에 서기관들에 의해서 법적인 권위로 높여졌고 '구전 율법'이라는 말처럼 성문화된 율법의 권위와 맞먹을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강조되었다. 이것은 A.D. 200년 경에 일차 집대성 작업이 이뤄졌으며 그러한 작업은 A.D. 800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작업은 B.C. 300-A.D. 800년 사이의 긴 기간이 소요됨). 따라서 예수 당시에는 이러한 유전들이 대개 구전의 형태로 존속되어오고 있었다. 이 유전의 목적은 인간 생활의 유익에 관심두기보다는 인간을 규제, 억압하는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실로 성문 율법은 원칙론적 입장에 서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듯하지만 유전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들에게까지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랍비들이 만들어 반포했던 수많은 유전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더 큰 권위와 함께 좀더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고 심지어는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로들의 유전'에 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본장 주제 강해 '탈무드의 이해'란과 마 15 :2의 주석을 참조하라.

⭕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여기서 '부지런히'라는 말은 휄라어 '퓌그메'(*)의 번역인데 해석하기 매우 어려워 어떤 영역본(RSV)에서는 번역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번역으로서 '꼭 쥔주먹'. '팔뚝까지의 손으로', '펼쳤다 접었다 하는 손', '물을 손으로 잔뜩 움켜쥔 상태'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읽기를 아예 '퓌크나'(*) 또는 '퓌크노스'(*) 둥으로 변경하며 '가끔', '더 자주'란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사실 라틴 벌게잇(Vulgate)역에서 이러한 변형을 따르고 있다(crebro,'빈번히'란 뜻).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과 같이 '부지런히'로 해석한 데도 있다(Syriac Peshito Version). 어째든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통해 추론해 볼 때 유대인들의 결례로서 행하는 손씻음은 양손을 주먹으로 꽉 뀌었다 폈다 하면서 팔꿈치까지를 물로 씻어내거나 양손을 부지런히 잽싼 동작으로 부벼대어 씻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특히 주먹을 꽉 쥐는 행위는 어떤 굳은 의지와 힘과 활발함올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Pulpit Commentary). 실로 그들에게는 식사 때마다 꼬박꼬박 부지런히 씻되 매우 깨끗하게 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음을 볼 수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먹지 아니하며'라는 말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그 관습을 철저하게 지켰는지 알 수 있다.

성 경: [막7:4]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 여기서는 그들의 생활 습관 속에 있는 정결에 관한 의식(儀式)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시장'은 부정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시장이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고 혼잡한 곳에서 부정한 여러 사람들과 접촉 가능한 대중적 장소이기 때문에 불결해지기 쉽다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인들 시장에서 이방인들이나 심지어는 율법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유대인들과 흑시 접촉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의식적 정결에 힘썼던 것이다.

⭕ 물을 뿌리지 않으면 - 이 말은 '배티손타이'(*)라는 훼라어의 번역인데, '씻다', '적시다'라는 뜻인 '배티조'(*)의 복수 3인칭 중간태로서 번역하면 '그들 자신을 씻다'가 된다. 때문에 '물을 뿌린다'는 것을 목욕을 하거나 물에 몸을 잠그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즉 '배티조'(*)는 물에 담그고 적신다는 뜻과 씻는다는 뜻을 갖고 있으므로 오히려 목욕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물론 이것을 세례와 침례의 차이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혹자(Meyer)는 본문의 점층법적 표현을 강조하면서 '유대인은 먹기 전에 항상 손을 씻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 먹기 전에는 항상 몸을 씻었다'고 그 의미를 명확히 표현했다. 물론 이 모든 행위는 그들이 종교적 부정을 탈피하기 위한 의식적 행동이었다. 실로 그들은 전인격적인 거듭남이나 내면적 자기 성찰보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의식적 정결에 더 큰 종교적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 잔과 주발(周鉢)과 놋그룻을 씻음이러라 - 마간는 음식먹을 때 사용하는 식기들까지 씻는 철거한 관습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정결 관습에 대한 철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잔'(*, 포테리온)은 음료를 마시는 그릇을, '주발'(*, 크세테스)이란 로마인들의 액체를 재는 도구 또는 작은 그릇, 항아리 등을 뜻하며, '놋그릇'(*, 칼키온)은 구리로 제작된 각종 용기들로서 주로 취사 도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이러한 도구들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구입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결례가 요구된다고 한다. 한편 수리아사본 등에서는 위의 세 종류 이외에 '침상'(*, 클리논)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첨가가 마가의 본 의도를 그르치기 않는다면 '씻는다'는 뜻의 훼라어 '배티스무스'(*)의 활용도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된다. 즉 여기 '씻는다'는 말은 물에 완전히 잠그다는 뜻 외에 단순히 잠그지 않고 '씻어낸다', '닦는다'는 등의 의미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정결례는 다양하게 이뤄졌음을 짐작해 볼수 있다.

성 경: [막7:5]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예수께 묻되 -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문제의 내용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 즉 조상들의 전통에 따른 정결례를 어겼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묻는 것은 이유를 알고 싶어 묻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제자들의 행위가 중대한 잘못을 범했다는 전제아래 제자들의 행위에 대혜 정죄하고 그 책임을 예수에게 추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첫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결 관습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자부심과 아울러 자신들이 그 전통적 관례의 파수꾼임을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예수를 집중 공격함으로, 제자들의 부정한 행위가 종교적이건 비종교적이건 모두 스승에게 그 책임이 물어져야 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제자들을 책잡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인 예수를 종교,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보내졌었다.

성 경: [막7:6]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잘 예언하였도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예수의 첫번째 응답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사 29:13). 실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일행을 책잡기 위해 그들의 전통적 유전을 세웠지만 비수는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응대하셨다. 따라서 이러한 응대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도외시하는 그들 유대 지도사들에 대한 정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들을 향해 '외식(外食)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외식한다는 말은 예수가 자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하여 부르는 말로서 마 23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뜻은 원래 휄라어 '휘포크리테스'(*)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무대에 서는 '연극 배우'라는 뜻으로 결국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또는 위선자란 의미이다.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주장과 현실적 행동 사이에 있는 객관적 불일치를 비판하는 말이다. 그리고 본문의 '잘 예언하였도다'에서 '잘'(*, 칼로스)이란 '정확하다', '우수하다'는 뜻으로서, 9절에서도 한번 언급되는데, 그곳에서는 일종의 비아냥거림조로 사용되고 있다.

⭕ 이 백성이...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예수께서 인용하신 사 29:13은 70인역(LXX)의 기계적 인용이 아니라 당신의 의도에 따라 선별한 자의적 인용이다. 따라서 희브리 본문(맛소라 사본)과는 그 의미상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나 본질적으로는 그 의미하는 바가 동일하다. 즉 그들은 비록 각종유전들과 전통들을 철저히 고수하지만 실은 진실과 경건의 내적 눙력이 결여된 위선자들이었다(딤후 3:5). 실로 그들의 외적인 경건은 거짓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종교적 경건의 진정한 대상이신 분에게 그들의 삶 진체를 온전히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Anderson). 실로 그들은 형식적 신앙 생활로 인해 B.C. 7C경 이사야에게서 책망받았던 그들 조상처럼 입술만의 신앙 고백과 위선적인 생활 및 참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거듭거듭 수행하던 형식 위주의 예배 의식 등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말씀은 이사야가 원래 그의 글을 기록할 때 A.D. 1C에 존재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사야의 비판이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의미이다(마 15:7 주석 참조).

성 경: [막7:7]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여기서 예수는 소위 '구전 율법'이라고 하는 '장로들의 유전'을 사람이 만든 계명이라고 규정한다. 이 '사람의 계명'은 8절에서도 '하나님의 계명'과 대조를 이루어 강조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이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권위에 절대성이 없음을 선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장로들의 유전이 생겨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율법만으로는 방대하고 복잡한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 목적과 계명의 핵심에서 이탈된 개개의 구체적인 규범들은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는 허망한 것으로 변질될 소지가 다분하였으며, 특별히 조상들의 권위와 민족적 우월감에 도취되었던 유대인들의 심성으로는 그러한 위험에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예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 '사람의 계명으로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는 말에 의해 그 권위가 완전히 부정된다. 즉 예수께서는 그들이 율법처럼 믿고 지켜 왔던 정결 의식이 결국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된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마 15 :9참조) 그것을 지키며 자랑하거나, 그것을 지킴으로써 거록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그릇된 자만심을 철저히 해부(解剖)하셨던 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그러한 자만심을 가지고, 정결 의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며 또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던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과 그 권위 및 그 가르침의 내용 등을 모조리 무시하고 거부하신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보이는 사람의 규범에 의해 무시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위선적인 종고 형태를 찬양하는 지도자에 대한 예수의 준엄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막7:8]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 앞절에서 언급한 '사람의 계명'과 대조되고 있으며, '버리고'와 다음에 나오는 '지키느니라'가 대비를 이루어 예수의 비판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이란 인간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직접적인 메시지로서, 이 메시지는 인간의 그 어떤 인위적 규범보다 우위에서며 또 모든 인간 활동은 그 메시지에 온전히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 관계를 무시한 일체의 규범과 판단은 철저히 인간 중심의 것이 될 수 밖에 없으며, 거기에는 형식과 위선만이 남을 뿐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19:18과 신 6:5 등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12:28-34). 결국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배척한 것으로 천명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종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법을 어긴 자들임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당시 그들이 갖고있던 철저한 하나님 신앙과 종교적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 같은 표현이 체제 도전적인 발언으로 들려지기에 충분할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예수는 단순한 체제 도전적인 저항을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적인 관습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함을 천명하심과 아울러 그러한 관습이나 율법들이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나 이웃에 대한 고통으로 나타날 때에는 단호하게 도전하고 맞서 싸운 것이다.

⭕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게명을 '버리고'와 대립되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계명을 더 중요하게 여김을 비판하고 있다. 즉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고 오직 인간의 말과 인간의 칭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막7:9]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 여기서는 앞절에서 언급된 문장의 어순을 바꾸어 다시 한번 그들이 중요시하는 정결 관습이 사람이 만든 것, 곧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구속력을 가질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과 대립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유대인들의 유전은 원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에워싸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전이 도리어 율법을 왜곡하고, 경화(硬化)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이 구절은 9-13절에서 말하고 있는 유전들과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되는 구체적 예증 제시를 위한 문제제기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단정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 잘 저버리는도다 - 이 구절은 6절에서 언급된 '잘 예언하였도다'와 대응되는 표현으로서 그릇된 종교라서 집착해 있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비웃는 독설적 발언이다. 즉 이말은 그들이 너무 쉽게, 간단히 하나님의 게명을 포기향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전통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거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을 피해가는 수단으로서 사람의 전통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 앞에 경건해지려는 위선자들의 특징이다.

성 경: [막7:10]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 예수는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사람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언행을 구체적 예증을 통해서 반박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고 있는 모세의 계명을 예로 들고 있다. 즉 예수는 그들의 주장에 내적 모순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말과 그들의 믿음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출 20:12과 신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제 5계명으로서 예수는 70인역(LXX)과 히브리성경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는 바로뒤에 이어지는 내용과 동일한 강조점을 두고 있으나 후자가 효(孝)에 대한 소극적.강압적 명령이라면 본문은 적극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마 15:4)라고 본 내용의 초두를 장식하고 있어 본문의 '모세는...하라 하고'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원저자(하나님)와 그 저자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에게 반포한 기자(모세)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신적 권위를 내포한 말이라 할수 있다.

⭕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이 구절은 제 5계명(출 20:12)을 보충 설명한 규례로서 출 21:17에 나오는 '효'를 주제로 한 저주문이다. 이는 맛소라 사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본문은 앞에서 언급한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과 부모에 대한 불공경의 대가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강조하고 있다. 즉 비록 부모를 '훼방'(욕하고 저주하는 것)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며 심지어 사형까지 시키도록 명하셨다는것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범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을 통한불효롤(11-13절) 죄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당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막7:11]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 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 고르반(*, 코르반). -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레 2:1, 4, 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즉 '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이다(J.A. Fitzmyer, Derrett).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 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

성 경: [막7:12]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제 아비나 어미에게...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 이 구절은 10절에서 언급된 계명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꼭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했을 때, 11절의 논증을 통해 그들이 모세가 준 계명을 어겼음이 명백함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돌아갈 대가는 10절에서 언급한바처럼 반드시 죽게 될 것 뿐이다.

성 경: [막7:13]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결례에 관한 논쟁]

⭕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여기서 먼저 '폐하며'(*, 아퀴룬테스)란 9절에 언급된 '저버리다'는 뜻보다 그 의미가 더욱 강하며 '파기하다'. '아예 무시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실로 예수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말은 그들의 언행에 대한 결정적 모순을 지적하는 말인데, 즉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충성을 위해 만들어내고 지킨 율법적 관습이 결과적으로는 10-12절에서 논증된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하여 파기시킨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이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뭇했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음을 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실로 사람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분명해지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봉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가 율법주의자들의 언행을 비판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오늘날에도 교회 전통이나 교리 그리고 권위에 집착하여 교회가 실천해야 할 이웃 사랑, 사람에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소홀히 하거나 관심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교회들은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위선되고 거짓된 종교 형태가 단지 부모 공경에 관한 제 5계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고 밝히신다. 특히 '행하느니라'(*, 포이에이테)는 말은 능동태 현재 시상으로서 그들의 행동이 습성화되고 중복되고 있음을, 즉 그들의 그릇된 신앙 행위가 거듭 노출되고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성 경: [막7:14]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부정(不淨)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 여기서 이야기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즉 1-13절까지는 제자들의 식사 현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논박(論駁)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는 다시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제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정결에 관한 주제가 계속되고 있으므로(5절에 제시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15절에 직접 답변되어짐) 연속적인 이야기로 보아도 좋다.

⭕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이 말은 예언자적 발언으로서 각성을 촉구하는 호소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논증된 바처럼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올바른 신앙 실천을 촉구하는 호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문일 수도있다. 즉 이제까지는 잘못된 관습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청중들을 불러모으고 자신의 이야기 곧 내적 성결이라는 대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경청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성 경: [막7:15,16]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부정(不淨)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여기서 언급되는 두 절은 원래 한 절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즉 NIV에서는 16절이 없고 15절의 하반부에 16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16절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본에는(모스코,베자 등) 16절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필사자들이 4:9이나 4:23의 모형에 따라 인용하여 첨가시킨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Metzger, Textual Commentary, p.95). 공동 번역에서는 전자의것을 선택하여 16절을 생략하고 16절의 내용은 15절에 통합시키고 주(主)를 달아 후자에서 언급한 첨가문을 소개한다. 한편 여기서는 1-23절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참으로 부정(不淨)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표현기법은 물질적 부정과 도덕적 부정을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대구법(對句法)형태로서 마가 특유의 어휘력이 구사되고 있다(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p. 343). 즉 사람밖에 있는 어떤 것(물질)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것과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심성을 대변하는 말, 생각, 의지, 영적 반응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딴절에서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참으로 부정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표현은 종교 지도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던 정결 예식을 모조리 부인하는 결과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부정한 음식, 부정한 물건, 또는 부정한 짐숭에 의해서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키는 정결 예식은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레위기 법전(레 11-15장)이 명하는 바 정.부정의 규례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그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진정 예수가 말하는 참으로 부정한것은, 물로도 씻을 수 없는 부정의 근본 원인이되는 사람의 마음이다. 따라서 참으로 부정한것은 자기 안에 있으며, 부정한 것이 밖에 있는 양 정결 예법에만 관심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부정한 것을 은폐시키려하는 모든 위선적인 정결 예법은 부정한 것이다. 실로 예수는 여기서 철저한 자기 변혁, 자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결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儀式)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양심과 영혼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15:11 주석 참조).

성 경: [막7:17]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부정(不淨)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 무리를 떠나...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 여기서도 역시 이야기의 장소적 배경이 바뀌고 있다. 이야기를 듣던 청중들과 헤어지고 제자들과 예수가 한 자리에 있을 때(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으로 추정) 제자들이 15, 16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가 즐겨 쓰는 묘사법으로서 마치 4:10의 장면을 보는 듯하다. 여기서는 '제자들'이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질문한 것으로 나온다(마 15:15). 마태는 특정한 제자 곧 베드로를 자주 내세워 부각시키는 반면 마가는 전체 제자를 등장시키면서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도 제자들이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쩌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중요한 증인 역할을 했던 베드로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간과해 버렸는지 모른다. 한편 여기서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비유'에 대한 것이었는데, 예수가 한 이야기는 '비유'라기 보다는 오히려 격언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막7:18]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부정(不淨)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 너희도 이떻게 깨달음이 없느냐 - 이와 같은 표현은 마가의 특징적 의도와 결부되어 있다. 즉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8:17에서도 같은 형태의 말로 예수가 직접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함'을 꾸짖고있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제자들의 무지를 꾸짖는 경우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4:13), 물위를 걸으신 기적(6:52) , 부활 예고에 대한의문(9:10) 등이 있다. 여기서 예수의 말 뜻을 제자들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반 청중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너희도'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즉 청중도 제자들도 모두 예수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몰이해에 대한 예수의 실망감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함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특히 제자들에 대한 실망의 표시이다. 이와 같이 청중과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비유와 같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의 모든 배경을 생각할때 너무나 과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너무 뜻밖의 신인이기 때문에 고정 관념을 벗어나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인간을 더럽게 하는 본질적(本質的)인 원인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 곧 '식물'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셨다.

성 경: [막7:19]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부정(不淨)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 예수는 먹어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먹은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아니라 '위'와 '창자'로 소화되어 베설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이 먹어서 들어간 것은 배를 통해 다시 배설됨으로써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마음'은 인간활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지.정.의'의 좌소(坐所)이며 비물질적인 내면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배'는 순수히 물질적 개념을 나타내며, 또 인간 육체의 신진 대사를 이루게하는 전과정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현상적으로 볼 때에도 '마음'은 물질적인 것과는 무관하며 도덕적, 영적 측면에서만 더럽혀질 수 있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소화 기능을 적나라하게 설명하심으로써 음식과 인간 부정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천명하셨다. 이로써 예수는 레 11장, 신14장 등에 언급된 식물의 정.부정 관계법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시고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 계신다.

⭕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식물을 깨끗이하면서'이다. 이 구절은 예수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마가가 첨가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In saying this, Jesus declared all foods "clean", NIV). 즉 예수의 말을 종합하여 결론적인 해석을 언급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음식의 정결에 관한 논쟁이 많았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인의 관습과 이방인들의 식사 관습과의 차이에 상호충돌이 생겼기 때문이다(롬 14장; 고전 8, 10장; 갈 2:11; 골 2 :16). 특히 이방 선교를 한 바울은 이 같은 문제에 부딪혀 그의 서신을 통해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한 것 때문에 위신적 행동을 취하다가 바울에게 책망받은 적이 있다(갈 2:11-14). 이러한 논쟁에 결정적 쐐기를 박는 사건이 베드로의 욥바 체험이다. 즉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 된다(행 10:1-16). 그리고 곧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이방인의삶과 구원에 대하여 긍정적 판단을 하게 된다. 아마도 마가 역시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정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결론적 핵심어로 '식물은 깨끗하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도 롬 14:13-17에서 무엇이든 더러운 것은 없고 더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문제이며, 음식 문제로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며, 롬 14:6에서 먹는 것도 주를 위해 먹으며 먹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입장은 정결에 관한 유대 전통을 거부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허식에 짖눌려 있던 유대인과 더불어 이제 막 복음의 문을 들어선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Martin).

성 경: [막7:20-23]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부정(不淨)한 것에 대한 예수의 교훈]

⭕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청중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같은 말, 즉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더럽히고, 또 더럽히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 또는 '사람 속'이라는 말은 곧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음이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등의 근저(近著)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의 대표격으로 악한 생각(evil thoughts)을 지칭하신다. 여기 '악한 생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음모가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1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롬 1:29-31;갈 5:19-21에서도 나온다. 평행 본문인 마 15:19에서는 6가지만 언급되고 있는데, 십게명의 제6. 7. 8. 9계명의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반면 마가는 그러한 전통 계명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음란, 간음, 음탕이다. 이 세 종류는 서로 비슷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한편 그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음란'(*, 포르네이아이)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게를 뜻하는 말로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고, '간음'(*, 모이케이아이)은 기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며, '음탕'(*, 아셀게이아)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말로 압축시킬 수있다. 여기서 '악독'(*, 포네리아이)이란 말은 노동, 아픔, 고통이란 뜻의 '포노스'(*)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되고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를 말한다. '흘기는 눈'(*, 오프달모스 포네로스)은 악의적인 비읏음과 빈정거림으로 응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시기한다는 셈어적 표현이다. '훼방'(*, 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적인 욕설과 험담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광패'(*, 아프로쉬네)는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foolishness; AV, RSV). 그리고 도덕질(*, 클로파이)은 제 8계명, 속임(*, 돌로스, '을가미', '덫'이란 뜻)은 제 9계명, 탐욕(*, 플레오시아이), 곧 좀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은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십게명에 사람과 판련된 6가지의 계명 중 부모와의 관계만 빼고 5계명 모두 포함되어 있어 마가 역시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이다. 본절은 이와 같은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통해서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도 못한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개뿐이다(욜 2:13).

성 경: [막7:24]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 여기서 먼저 '거기를 떠나'란 문자적으로 '이곳에서부터'(from here)가 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인가? 아마도 이곳은 '집'(17절) 또는 '게네사렛'(6:53)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장소를 가리킬 것이다. 이중에서 '게네사렛' 곧 갈릴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즉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는 일단 갈릴리 활동을 증단하시고 그곳을 떠나 북쪽 두로 지경으로 그 거처를 옳기셨다. 이 같은 활동 무대의 이동은 벳새다 율리아스 이후 두번째 경우이다. 한편 '두로'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서 '뵈니게'(Phoenicia)라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도시는 원양 항해술과 예술이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지역에 얼마만큼 진입해 들어갔는지에 관해 본서는 침묵하고 있다. 혼히 마가는 이런 세부적인 사실들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경향이 있다(W.W. Wessel).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들의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셨던 것이다.

⭕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여기서 예수가 왜 두로에 왔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수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이곳에 올 때에 자기의 신분을 숨기고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선교나 치병 활동 또는 가르침을 위한 공적인 목적에서가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휴식과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를 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방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 자신이 숨어 지낼 수 없을 만큼 당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눅6:17에 의하면 산상수훈 당시에 이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를 만난 사실을 지적해 주고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조용하게 피신하여 쉬려 했으나 그 명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병과 선교 활동을 하게 된 사례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6:30-34;53-56). 한편 본문에 제시된 '한 집'이란 그곳 원주민의 집인지, 유대인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예수께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집임이 분명하다(Meyer). 이러한 모호한 사실들과 더불어 또 한가지 여기서 분명치 않은 것은 예수가 제자들과 동행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두로까지 왔는지이다. 이에 대한 답이될 만한 근거를 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평행 본문인 마 15:23에서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제자들도 예수와 동행하였다고 단정할 수있다. 다만 마가는 이 여행에서 제자들의 역할이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고 판단되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막7:25,26]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그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찻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오신 소문을 듣자 마자 '곧'(*, 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 :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이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Greek)은 유대인콰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Gentile) 에 해당하는 말이거나,'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행 18:4;롬 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는데, 여기서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시리아'에 야한 '뵈니게'(Phoemicia)지방을 말한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보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오 보니게'(Liobyo-Phoemicia)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 붙여 '수로 보니게인'(SyroPhoemicia)이라 이름하였을 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 분명 헬라화된 이방사람 이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Josephus).

⭕ 간구하거늘(*, 에로타). - 미완료 시제로서 그 어미가 자기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예수께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로 그녀는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께 매어달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막7:27]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개들에게 - 예수는 은유적인 표현을 빌어 유대 민족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자녀'(*, 테크논)란 하나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상황에서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좀더 포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한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결코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서 비롯된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전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우선 선택된 것일 뿐이었다(창 12:2, 3). 이러한 특수한 유대인의 선민적 위치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선교 여행의 지침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고(마 10:5),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롬 2:9 ff).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개'는 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시 59:6),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와 악한 존개를 상징할 때 사용하던 말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를 뜻하는 헬라어 '퀴나리온'(*) 야생의 들개가 아닌 가정에서 기른 애완용 또늘 귀여운 강아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은 부드러운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마 15:26) 그러나 '개'라는 사실 그 자체는 본질상 비천하고 속된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 같은 '자녀'와 '개'의 대비(對比)를 통해 신적 특권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구한 숙명론적 차이로 볼 수는 없다. 그에 대한 증거로서 마틴(Martin)은 본문의 '먼저'(*, 프로톤)라는 말에 주의를 환기시고 있다. 즉 그는 13:10 주석에서처럼 이 말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음과 같은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프로톤)'이 삽입된 것은 이스라엘의 배타적 특권이 한 때 뿐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교회가 생긴 직후의 기간까지는 자녀들(이스라옐)이 '(먼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이 특권이 영원히 유대인에게만 속하는 배타적인 특권일 수만은 없었다. '후에는'(*, 휘스테론) 이방인 개들 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여인에 관련하여 사용된 '후에는' (이 말은 성경 본문에는 없는 것이며 임의로 붙인 것임)이라는 시간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간구에 응답하고 게시기 때문이다".

성 경: [막7:28]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 주여 옳소이다마는 - 본서에서 예수가'주'로 불리운 곳은 이곳 밖에 없다. 여기 언급된 '주여'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신앙이 마음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옳소이다마는'이라는 말은 상대의 말을 일단은 인정하나 그 말에 대한 또다른 자기 이견(異見)을 피력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반의 접속사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그녀는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비천한 자신의 존재('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이 같은 불굴의 답변은 그녀에게 내재된 강한믿음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재치있게 예수의 말을 받았다. 즉 그녀는 마치 상 아래서 꼬리를 혼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한 입장에서 당신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이다. 실로 그녀가 간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특별히 허락된 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블과했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뒤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과 편견에 대해 극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습은 극한 겸손(謙遜)의 표시이다.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어 이방 여인의 믿음이 높여진다. 마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통을 무효화하고 이방인의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복음을 수용하는 모델을 제공하며 예수의 언행에 대해 사사 건건 시비를 거는 유대인들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자 한다.

성 경: [막7:29]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 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다. 즉 예수는 그 여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로써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본문에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기록하고 있다.

⭕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이제 이방 여인이 안고 시름해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된다. 예수는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히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 NIV)고 말한다. 이것은 치병 기적을 행한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투로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이다. 즉 육체적, 정신적 소명 뿐 니라 가정 복귀 또는 사회복귀를 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선언을 통해 그녀의 믿음에 확실히 응답하셨다. 특히 여기 '나갔느니라'는 말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어 그 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치병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그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권능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성 경: [막7:30]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

⭕ 집에 돌아가 본즉...귀신이 나갔더라 - 예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선사하셨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아마도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오면서 최후의 발악을 함으로써 그 딸을 기진 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9:26, W.W. Wessel). 이와 더불어 마가는 '귀신이 나갔더라'(*, 다이모니온 여세레뤼도스)는 말을 완료 능동태 분사로 기록하여 그 딸에게서 귀신의 존재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매우 깨끗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막7:31]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심]

⭕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 물론 이'갈릴리 호수'는 이방 지역에 속한 땅을 지칭한다. 사실 본문에 제시된 예수의 여행로를 지리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예수는 두로 지경에서 북쪽으로 약40km 올라기시돈 지역의 이방인 거주지를 통과하며 레온테스 강(the Leontes)을 건넌 후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가 헤롯 빌립의 영토를 통과하여 갈릴리호수의 동쪽에 이르러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으로 들어가셨을 것이다(가이사랴, 알럭산드리아, 서방 사본 등.)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해서 마가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예수는 지금 이방인 구역에 거하고 계신다. 여기 언급된 데가볼리(10개의 헬라 도시들의 연합체 및 그 영토)에는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했으나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성 경: [막7:32]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심]

⭕ 귀먹고 어눌한 자 - 사람들이 예수앞에 데리고 온 환자는 귀먹고 말을 하기 곤란한 사람인데 귀머거리는 자연히 말하기 곤란해지거나 아예 무의미한 소리만 지을 줄 아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본문에 사용된 '어눌하다'(*, 모기랄로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한 곳에만 나오며 70인역(LXX)에서도 단 한 곳에만 제시되있다. 특히 70인역의 상황은 본 기사와 깊은 상관 관계를 맺는다. 즉70인역의 사 35:6은 메시아시대를 제시한 것으로 '그 때에 저는 사나 사슴같이 살 것이며 벙어리('모기랄로스')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듯이, 마가는 이 같은 사실을 분명 염두에 두고 본 사건을 기록했을 것이다.

⭕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이미 5:20주석에서 언급된 바처럼 이 지방에 예수의 치병 기적이 널리 알려져있다. 그리고 안수하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치병 행위였다(5:23;6:5).

성 경: [막7:33]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심]

⭕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환자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피해간 이유로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36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병고치는 기적을 비밀로 하려 했기때문이다. (2) 예수가 한자와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 환자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 인물이었고 자신의 치유 의지가 거의 없던 상태였을 것이다. 이에 예수는 그 무감각하고 피동적인 인격에게 당신의 존재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5:40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 이러한 은밀함을 요구하신 바있다.

⭕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 이와 같이 환자의 취부에 직접 접촉하면서 침 사용하는 치료법은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의 민간요법으로 많이 활용되었던 것 같으며 특히 침이 치유의 효과와 화를 막아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형태로 치병 활동을 했다는 고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A.D. 69-79)이 소경에게 침을 눈에 발라 치료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Tacitus, Hist, iv. 81) 그외 플리니우스(Plinius),슈톤(Sueton)등의 기록에도 나온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치유 행위는 당시 혤라와 유대인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으로볼 수 있다(Taylor).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환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게셨음에도(2:3-12;3:5) 이러한 행동, 그것도 미신적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치유법을 선택하셨을까? 이는 참으로 신비한 장면으로서 다만 추측하건대, (1) 예수는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셨고,(2) 그를 위해 당신께서 지금 힘쓰고 게신다는 사실 행동으로 보여 주셨으며, (3) 귀먹고 어눌한 자가 능동적으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도와 주시기 위해 이 같은 행동 언어를 취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 양 귀에 손가락을 넣은 것은 그의 귀가 열릴 것을 암시하며.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의 혀가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성 경: [막7:34]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심]

⭕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 같은 행동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6:41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한 모습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탄식'이라는 말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신음 소리를 나타내는 행위는 고대의 기적 설화에서 초인적인 힘을 끌어들이는 형식적 표현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본너(Bonner)는 능력있는 발언이나 기적능력을 나타내기 전에 예언자나 기적행위자가 하는 준비 동작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물론 마가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의 행위를 이해했을 리는 없을 깃이다. 오히려 그는 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예수의 애정의 탄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예수가 하늘을 보며(요 11:41;17:1) 탄식한 것은 단순히 당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간구한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탄식은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당신의 지극한 애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혹자(Van der Loos)에 따르면 '예수의 탄식은 기도의 탄식이었으며 성부와 성자 예수의 감추어진 교제에 따르는 탄식이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것이 늘상 예수의 기도 방법이었다면 초대교회도 역시 이런 기도의 자세로 병을 치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단지(예수의 이름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라고 이 장면에 관해 언급한 바있다.

⭕ 에바다(*, 여파다) - 이 말은 아람어의 음역으로서 마가는 그 뜻을 열리라(*, 디아노이크데티)로 밝히고 있다. 즉 마가는 자신의 이방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노력 으로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아람어를 언급한 후 그뒤에 헬라어로 설명구를 덧붙이고 있다(5:41). 그런데 이 '열리라'는 말이 단지 닫혀진 귀에만 관련된 말이 아니라 혀에도 그영향이 미치는 명령어로 보아야 한다. 어떻든 예수의 이 같은 명렁은 그 환자의 심령 뿐 아니라 그 닫혀진 귀를 뚫고 들려졌다. 이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는 사 35:5 말씀의 완전한 성취로서 지상에 돌입한 메시아 왕국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막7:35]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심]

⭕ 귀가 열리고...곧 풀려 - '열리라''는 명령과 함께 즉시 귀가 열리고 말문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말이 분명하더라'(*, 엘라레이 오르도스)는 그가 적어도 완전한 벙어리가 아니었으며(그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언어에 장애(障碍)가 있었을 뿐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가 미완료시제로서 그의 말의 호전된 상태가 점점 구체적으로 또렷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막7:36]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심]

⭕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 이렇게 치병 기적에 대하여 비밀로 침묵하라는 명령은 마가가 자주 묘사하는 내용이다(1:43, 44;3:12;5:43). 침묵을 요구한 대상은 환자 자신에게만 아니라 그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명성이 치병 기적과 함께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문제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5:43 주석 참조). 특히 여기서 '경계하사'(*, 디에스테이라토)란 당신의 금지 의사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반영한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는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적어도 그들이 흥분된 상태로 당신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보다 오히려 조용히 그들 스스로가 예수의 명령에 순복(順服) 하고 또 그들 각자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 이 구절 역시 마가의 공통된 언급으로서 침묵 요청 다음에 목격자들은 침묵으로 비밀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널리 소문을 내어 전파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다(1:45). 이 같은 언급은 침묵 명령과, 그 명령을 어기고 전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감격적 기적의 체험을 잘 대비시켜 그들의 후분된 환호가 지닌 부정적인 모습을 은연중에 제시해주고 있다. 사실 그들은 막상 예수께서 로마세력에 의해 체포, 처형 당하실 때 극한 조롱으로 그 환호를 대신했던 것이다. (마 27:22, 23). 이는 인간적 판단과 기대가 하나님의 생각과 배치(背馳)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 준 단적인 예라 하겠다.

성 경: [막7:37]

주제1: [종의 이방 사역]

주제2: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심]

⭕ 심히 놀라...그가 다 잘 하였도다 - 예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놀라 경탄하는 것이다. 여기서 '심히'(*, 휘페르페리쏘스)는 헬라어 문헌들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서 '심히 이상의', 곧 '극도로', '측량할 수 없이'란 뜻이다. 이것은 적어도 그 이방지역의 주민들이 예수의 존재와 능력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느꼈고 또 그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보여 준다고 본다. 이와 함께 마가는 사람들이 예수의 행위를 '그가 다 잘했다'고 하는 말로 칭찬하며, 또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평행 본문인 마 15:31에서는 그 감격의 표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로 하면서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접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가 다 잘하였도다'란 말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왜냐하면 깊은 의미에서 예수의 이 같은 기적은 메시야 왕국의 현존을 알리는 메시지일(사 35:5, 6)뿐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예수의 메시야적 활동의 분명한 표시임과 동시에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가 폭발적으로 확장(擴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막8:1]

⭕ 그 즈음에. - 문자적으로 '그 날들 동안' 으로서 본 사건을 앞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유한 사건(7:31-37)과 연결 시킨 것이라 본다. 마가는 지금의 장소에 관해 침묵하고 있으나, 대개 이곳이 갈릴리 호수 동편에 위치한 데가볼리로 인정되고 있다.

성 경: [막8:2]

⭕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먹을 것이 없도다. -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이유와 본 이적의 근본 동기를 말하고 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을 불쌍히 생각하여 그 대책을 마련코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버리기 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다.

성 경: [막8:3]

⭕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여기서 군중들을 향한 예수의 애정과 책임 의식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자상한 어머니처럼 군중들의 굶주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기며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막8:4]

⭕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 예수의 제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기력했으며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유는 5,000명 급식 기적때의 금전 문제와는 달리 장소 문제 였다. 즉 집회 장소가 '이 광야' 곧 내륙 한가운데로서 인가와 마을로 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는 외진 광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막8:5]

⭕ 일곱이로소이다. - 제자들의 불가능한 대답을 듣고 예수는 희망적인 암시를 갖고 남아있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있다(6:38주석 참조). 여기서추측할 수 있는 것은 군중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다면 음식이 남아있을리 없기 때문이다. 7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수, 완전한 숫자로 보아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충만한 축복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 경: [막8:6]

⭕ 땅에 앉게 하시고... 축사 하시고. - 예수는 6:41에서와 같은 형식으로 급식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6:39,40과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6:39에서는 무리들을 푸른 잔디위에 앉도록 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냥 땅에 앉게 했다고만 한다. 이는 분명 장고적 차이뿐 아니라 시간적 차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라 본다.

성 경: [막8:7]

⭕ 작은 생선 두어 마리.- 여기서는 6:41과 달리 물고기 숫자가 불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생선 두어마리'는 헬라어 '랺뒤디아 올리가' 를 번역한 것으로서 '생선 몇마리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공동번역).

성 경: [막8:8]

⭕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 - 이처럼 주님께서는 필요한 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눅6:38).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만우의 주로서(대상29:11)지극히 충만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요1:16)성도의 필요를 먼저 아시기 때문이다(마6: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난과 궁핍에 처했을때, 하나님께 의뢰하여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좌절하는 등 매우 근시안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성 경: [막8:9]

⭕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 6:44에서는 남자가 오천명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구분이 없고 사람이 4,000명 이라고 말한다.

성 경: [막8:10]

⭕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지방으로. - 6:45에서는 벳세다로 갔다고 언급하지만 여기서는 '물통'이란 이름의 뜻을 지닌 '달마누다'지방으로 갔음을 밝히고 있다.

성 경: [막8:11-13]

이 이야기의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고 앞에서 언급된 급식기적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어 전혀 다른 사건의 이야기가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8:1-10주석에서도 언급했듯이 6:31-7:37에 포함되어 있는 7:1-23과 평행을 이루는 부분을 8:1-30에 서도 만들기 위하여 마가가 이곳에 본사건(11-13절)을 하나의 독립된 부분으로 기록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7:1-23과 본사건은 모두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본 사건의 주제는 하늘의 표징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논쟁이 복음서에서 여러 곳 나타나고 있다(마12:38-42;16:1-4;눅11:29-32)

성 경: [막8:14]

⭕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떡이 어디에 필요한 떡인지 또는 어디에 있는 떡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본문을 1-10절의 급식 기적과 연결시켜 이해한다면 4,000명을 먹이고 남은 떡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활동에 필요한 식사였을 것이다.

성 경: [막8:15]

⭕ 경계하여 가라사대. - 여기서 '경계하여'란 미완료 중간태를 취하고 있어, 예수께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지시하시고 당부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막8:16]

⭕ 이는...없음이로다. - 헬라어 원문상으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왜냐하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의 말을 직접 인용문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옮기면,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이 된다. 그리고 이를 보다 자연스럽게 옮기면, '하지만 우리에게는 떡이 없는 걸'로 된다.

성 경: [막8:17]

⭕ 의논하느냐. - 평행구인 마16:8에서는 '서로'라는 말을 추가 함으로서, 본절의 의미를 더욱 명확히 드러 내었다. 즉 제자들은 근심되거나 의혹스렁遁 문제에 봉착하여 먼저 주님께 진실하게 의뢰하기 보다는 그들끼리 왈가왈부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놓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형제들끼리의 교제가 신앙생활에 있어 필수적이긴 하지만, 자칫하면 서로를 비신앙적인 방향으로 흐지부지 하게 끌고 가는 합리화의 도구로, 전락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후자의경우에 직면했을 때에, 우리는 혼자서라도 과감히 진리를 위해 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잠4:27)

성 경: [막8:18]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말인데 이 구절은 4:12 에서 군중들을 향해 했던 말과 비슷하다. 아마도 이 구절은 사6:9,10을 인용하여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택망은 17절의 책망보다 더 강도 있게 들리는데 제자들에게만 내리는 책망이기 보다는 미련하고 돌이킬줄 모르는 백성과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기를 일삼는 유대 백성들을 향한 심판적 탄식으로 들린다. 아마도 예수는 제자들을 나무라면서 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탄식적인 책망을 하였을 것이다.

성 경: [막8:19, 20]

⭕ 몇바구니...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예수는 격한 책망과 더불어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 그들의 깨닫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치셨으며, 또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주시기 원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육적인 해방과 함께 7광주리, 또는 12광주리의 떡만큼이나 넉넉한 영적 풍요함을 준다는 암시적인 메시지를 제공하고 있다.

성 경: [막8:21]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여기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되묻는 말로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데(제자들이 깨달았는지 못깨달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평행 본문인 마16:11,12에서는 예수의 반문이 더 친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즉 제자들에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반문한 후 자신의 이야기가 단순히 누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관한 것임을 밝히면서 급식 기적과 15절의 교훈을 연결 시키고 있다.

성 경: [막8:22-26]

벳세다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본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소개 되지 않은 마가만의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가 7:31-37과 비슷한 점이 많다. 즉 환자의 환부에 침을 바른다거나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점,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치유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이 두 이야기는 같이 전해져온 이야기라고 보면서 오히려 이 본문이 7:31-37보다 앞선 이야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위치가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성 경: [막8:27]

⭕ 가이샤랴 빌립보. -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방에있는 헤르몬산 기슭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수원지가 있는 경치 좋고 비옥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성 경: [막8:28]

⭕ 세례요한...선지자 중의 하나. - 제자들이 파악한 여론을 통해 대중들은 예수에 대해서 다양하면서도 신화적 인물로 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6:14에서 헤롯의 입을 통해 밝혔고, 뿐만 아니라 예수를 엘리야나 선지자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는 평을 6:15에서 대중들의 여론으로 밝힌 바 있다(6:14,15주석 참조).

성 경: [막8:29]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지금껏 던지신 질문들은 바로 본문의 이 질문에 귀착되고 있다. 즉 예수는 비록 당신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믿을만한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누구라 생각하고 믿고 있느냐는 것을 묻고 싶으셨던 것이다.

성 경: [막8:30]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여기서 예수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하는 일체의 반응 없이 늘 하던 것처럼 침묵을 지시 하고 있다. 예수의 침묵 명령은 아직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공개적으로 노출시킬 시기가 아님을 말하면서 한 쪽으로는 간접적인 암시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낸다고 볼 수있다.

성 경: [막8:31]

본절은 본서 가운데 유일하게 '메시야적 비밀'이 공개 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시의 메시야임을 좀처럼 밝히려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메시야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난. 죽음, 버림받음등의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이 고대 하던 메시야관은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 받는 메시야상을 제쳐놓고 오직 영광의 메시야상만을 고대해 왔기 때문에 만약 예수가 자신의 메시야성을 공개 하게 된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메시야적 사역을 성취하는데 방해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막8:32]

⭕ 드러내놓고 이말씀을 하시니. - 여기서 드러내놓고 라는 말은 '파르레시아'인데 '숨김없이'. '명백하게' 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자유롭게 말하는 언론의 자유라는 의미도 있다.

성 경: [막8:33]

⭕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 마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로 돌아서신 것만을 언급하는데 비해(마16:23) 마가는 베드로 이외의 제자들까지를 향해 서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마가는 예수께서 꾸짖으시고자 하신 대상을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제자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심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막8:34]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 27절에서는 길가는 중에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제자들과 무리에게로 그 대상이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그 대상은 12제자들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모든 신자들에게로 확장 되는 것이다.

성 경: [막8:35]

⭕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 역설의 극치를 아루는 이문장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는데 34절의 선언을 설명하기 위한것으로 보인다. 즉 자기 부인과 고난과 죽음을 요청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집착이나 이기심에차 자기 존제 보호에철저히 집착해 있다면 궁극적 측면에서 그는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져 있다는 뜻에서 자기 목숨을 살리려하면 잃게 될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성 경: [막8:36]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여기서는 문장이 반문하는 형태로서 격언적인 어투인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거나 당연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형태의 질문을 통해 34,35절에서 언급한 내용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성 경: [막8:37]

⭕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 말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앞절의 결론구, 즉 이 세상에서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 대답은 35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기 때문에 자명해진다. 즉 참으로 목숨과 맞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와 '복음'이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질문의 내용은 죽지 않고 사는 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참된 삶을 위한 참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촉구하는 것 이다. 결국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결단을 촉구 하고 있는 것이다(마1:38; 눅9:23).

성 경: [막8:38]

⭕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 예수는 자신의 입장을 결정적으로 밝히면서 이 시대를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과 죄는 예수와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독하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세대를 말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33-37에서 언급한 제자됨과 그리스도인됨을 위한 예수의 요구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종말에 임할 심판묘사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희망찬 종말 언급을 통해 박해받는 제자들과 추종자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기와 믿음으로써(요16:33)예수 자신의 길을 따라오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성 경: [막9:1]

⭕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 말은 8:38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원문에 보면 등위 접속사 카이 가 있어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과 대등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내용상으로 볼 때 8:38 과 본절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여 이 두 절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본절을 8:28-38의 구조 속에 포함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걸하다.

성 경: [막9:2]

⭕ 엿새 후에. - 평행 본문 마 17:1과 함께 구체적인 날짜가 제시되는데 눅 9:28에서는 '8일 쯤'이라고 약간 부정확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수치에 있어 정확치 못하고 대체로 조금 느슨한 유대인들의 표현법에 근거한 것이라 본다.

성 경: [막9:3]

⭕ 그 옷이 광채가... 희어졌더라. - 마가는 예수의 옷이 광채가 날 정도로 희어졌다고 하는데 비해마태는 예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묘사 하면서 얼굴과 옷이 동시에 변화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성 경: [막9:4]

⭕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 예수의 변형과 함께 구약성경의 두인물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는 '모세'와 '엘리야' 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엘리야'와 '모세' 라는 순서 보다 더 자연스런 표현일 것이다.

성 경: [막9:5]

⭕ 예수께 고하되. - 베드로가 예수에게 신비적 장면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고하되'는 헬라어 '아포그리데이스'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대답하다', '응답하다'의 뜻을 가진 '아포크리노마이'의 제1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동은 주체적인 것이라기 보다 베드로가 목격한 변화된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에 의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성 경: [막9:6]

⭕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 본문은 베드로의 어리석은 간청(5절)을 변호하는 표현으로서, 마가가 베드로에게 매우 사려깊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가는 당시 베드로를 위시한 세 제자 모두 신적 현현 앞에 압도된 채 심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했으리라는 암시를 제공한다.

성 경: [막9:7]

⭕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 여기서는 산상 변형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묘사되고 있다. 구름이 몰려왔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엄숙한 장면을 나타내 준다.

성 경: [막9:8]

⭕ 문득 둘러보니. -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마17:6) 이때 제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땅에 엎드려 있었는데 예수께서 손을 대시어 그들을 일으키셨다고 한다. 그 순간 제자들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이러한 순간 동작은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는 마가의 표현 기법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막9:9]

⭕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이르지 말라. - 산에서 내려오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적 사건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 위에서 보았던 신비적 체험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성 경: [막9:10]

⭕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 제자들이 침묵을 지시하는 예수의 말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제자들을 예수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즉 예수 자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일반적인 부활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성 경: [막9:11]

⭕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 제자들은 인자의 부활에 관해 상당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나(10절)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예수께 직접 묻지 못하고 대신 엘리야와 관계되는 일반적인 종말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당시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종말론의 내용인 말 3:1과 4:5,6에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되어있다.

성 경: [막9:12]

⭕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 예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다. 예수가 말하고 있는 '회복하다'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성 경: [막9:13]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인 권위로 엘리야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피력하시고자 하셨다. 실로 엘리야에 관한 예수의 진술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 엘리야 왔으되. - 예수는 이미 앨리야가 왔었다고 말하는데 마태는 본 장면에서(마17:13)제자들이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메시야의 고난을 엘리야의 종말적 사역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12,13절에 제시된 예수의 말씀은 엘리야가 인자(메시야)보다 먼저 와서 그의 종말론적 사역을 완수할지라도 인자는 고난받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사해 주고 있다..

성 경: [막9:14]

⭕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 여기서 '이에'는 접속사 '카이' 를 번역한 것으로, 바로 앞의 산상변화 사건과 계속 연결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와 앞절과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본 장면에 관해 변화산 사건 '이튿날'이라고 밝히고 산으로부터 내려 왔다는 사실도 언굽하고 있는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눅9:37) 본문은 산상 변화 사건과 그렇게 큰 시간 차이가 없이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막9:15]

⭕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문안하거늘. - 군중들 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출현에 모든 군중이 놀라와 한 이유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성 경: [막9:16]

⭕ 예수께서 물으시되. - 이 본문 역시 마태와 누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가는 같은 묘사를 하면서 누구에게 질문을 했는지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다만 그 물음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논쟁을 벌리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서기관들이었다면(14절) 예수는 상식적으로 제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 무엇을...변론 하느냐. - 제자들은 서기관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야유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같은 무기력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자들과 더불어 언쟁을 하는것은 그것이 적극적 측면에서든 소극적 측면에서든 간에 헛된 일일 뿐이다(딛3:9). 진정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을 따름이다(고전4:20).

성 경: [막9:17]

⭕ 무리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 예수의 질문에 대해 선뜻 대답하는자가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런 책임을 못느꼈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자들은 지금껏 다투어온 언쟁 과정을 예수께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영적 무기력과 무능력을 폭로 하는 것이었기에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정황을 깨고 나선 것은 바로 무리 중 가장 답답한 지경에 놓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리를 헤집고 달려나와 숨김없이 그간의 되어진 일을 설명하게 된다.

성 경: [막9:18]

⭕ 귀신이 어디서 든지... 파리하여 가는지라. - 그 아비는 자기 아들에게 대한 귀신의 만행을 그 아이를 사로잡아 넘어뜨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의설명을 비추어 볼때 그 아이는 분명 간질병 질환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특히 그 각 증세를 살펴 보면 '거꾸러져'란 '부셔버리다', '소리지르다', '잡아 찢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로서 괴성을 동반한 심한 경련과 뒤틀림을 의미한다.

성 경: [막9:19]

⭕ 믿음이 없는 세대여. -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말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믿음 없음에 대한 탄식이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믿음이 약한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고 '세대'란 '족속' '자손', '동시대 사람들'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다.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상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막9:20]

⭕ 귀신이 예수를 보고...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 여기서도 역시 귀신은 1:24;5:7에서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정복하고 추방 시킬 분으로 알아차리고 환자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 이 같은 묘사는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그 원인 자인 악령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다.

성 경: [막9:21]

⭕ 언제부터...어릴 때부터. - 이 같은 표현은 환자의 상태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점과 환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질문이다. 한편 그 아버지의 대답은 '어릴 때부터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태어날 때 부터는 아니지만 그 아이의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할 때부터, 즉 그의 지금까지의 생애 동안 계속되어 온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막9:22]

⭕ 귀신이 죽이려고... 자주 던졌나이다. 귀신의 본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영. 육을 죽이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귀신이 한 아이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그를 물과 불에 몰아넣어 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마가가 언급한 '물'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물'이 연못이나 시내 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주'란 말은 그 아이에 대한 귀신의 악한 영향력이 한 두 번에 그친것이 아니라 빈번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막9:23]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이는 22절의 아비의 말 곧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을 받는 말로서, 그 아비가 강조한'...있거든' 이라는 표현에 특별한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서 믿음의 결핍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22절에서 아버지가 간청한 말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구절인데 환자의 아버지는 예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께 할 수 있다면 해 달라고 요청 했지만 예수는 전혀 반대로 예수 자신의 능력의 유무와는 별개로 환자 아버지의 예수께 대한 신뢰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 치병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로 믿음은 병 고침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기보다는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능동적인 힘인 것이다.

성 경: [막9:24]

⭕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 사건의 긴박성과 생동감을 더해 주는 '곧'이란 부사로써 본문이 시작되고 있다(1:10). 시로 그 아비는 예수의 믿음 없음에 대한 질책을 듣자마자 그 즉시 격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여기서 '소리를 질러' 는 제 1 과거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외침은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터져나왔음을 암시한다.

성 경: [막9:25]

⭕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 이 구절은 15절의 내용과 모순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이미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달려나와 문안한 것으로 묘사된 반면 어기서 또다시 무리들이 달려온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서로 모순이 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 모인 무리들은 15절에서 보여진 무리들과 함께 새로 모여든 또다른 무리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막9:26]

⭕ 귀신이...죽었다 하나. - 이 장면은 마가만이 언급하고 있는데 귀신이 그아이에게서 쫓겨나기 직전 최후 발악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소리 질렀다는 표현은 귀신이 도망치며 지르는 비명소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같은 귀신의 행동 때문에 환자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다시 발작을 하였으며 마침내 죽은 듯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환자가 처참한 모습으로 치료된것은 다른 치병 기적과 독특하게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막9:27]

⭕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기진맥진한 환자를 예수가 직접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장면은 19절에서 묘사된 바 있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깊은 동정심과 연대 의식이 넘치는 사랑과 권능에 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사실은 문맥상 새로운 인간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 경: [막9:28]

⭕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이야기는 군중들과 헤어져 예수와 제자들만 한적한 곳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말해 주는 것인데, 본서에는 이와 같은 활동 후 집으로 들어가 제자들에게 보충 설명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4:10; 10:10;1:17은 집이 아니라 한적한 곳).

성 경: [막9:29]

⭕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즉 '기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어떤 초능력적 힘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이루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성 경: [막9:30]

⭕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 여기서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앞절과 무리없이 이야기가 연결된다면 산상 변화 사건과 그 산 아래에서의 치병 기적이 일어난 그 사건 현장으로부터 떠나 갈릴리 지역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막9:31]

⭕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 이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가르'로 연결되는데, 앞절에서 언급된 이야기, 즉 아무에게도 자신의 여행을 알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즉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동안 이 일에 거의 전념하시게 된다.

성 경: [막9:32]

⭕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언급하는데, 평행 본문 마 17:23에서는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말하며, 눅 9:45 에서는 예수가 일부러 어렵게 말하여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무튼 마가의 표현은 제자들에게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무지를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10절; 4:13; 8:17-21등).

성 경: [막9:33]

⭕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 예수의 일행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셨는데, 30절에서 언급한 갈릴리 지역의 동쪽 호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동리로서(1:21; 2:1), 머문 집은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아마도 예수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을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들러보고 싶었을 것이 틀림 없다.

성 경: [막9:34]

⭕ 저희가 잠잠하니. - '잠잠하니' 란 말 역시 미완료 시제를 취하고 있어 계속적인 침묵을 넌지시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의 질문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기보다 그들 내부에 깃든 어리석고 추악한 욕망을 여실히 파헤치고 지적하신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당황과 수치로 뒤덤벅이된 채 침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더 높은 자인가 하는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문제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본다.

성 경: [막9:35]

⭕ 예수께서 앉으사. - 이런 자세는 유대교의 랍비가 흔히 취했던 것으로(마13:1;눅5:3; 요8:2), 이때 예수께서는 양쪽다리를 주욱 뻗으시고 앉으셨을 것이다.

성 경: [막9:36]

⭕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 에수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 으로 어린이를 통헤 가르치고 있다, 어린아이는 당시 헬라적 무화권내에서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이해됐고 유대 문화권 내에서도 어린아이를 방자하고 무분별하며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요, 전쟁이나 노역에 별가치가 없는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마가는 어린아이를 상징적으로 가장 낮은 자로 이해했고 더욱이 낮고 작은 자를 강조하기 위해 '하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가 섬김의 모델로서 어린아이를 내세운 것은, 그 시대에 그들이 가장 낮은 자로 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막9:37]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난를 영접하면. -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자로 상징되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를 대하는 일이 곧 예수를 대하는 일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과 가장 낮은 자를 동일시한 이야기는 마25:31-46에도 나오는데,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가장 낮은 자에게는 마치 예수를 대하듯이 하라는 말이 되는데, '내 이름으로'라는 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 경: [막9:38]

⭕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은 앞에서 언급한 섬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나타낸 반응으로 보인다. 즉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다. 요한이 '우리' 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상황에서 그가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 경: [막9:39]

⭕ 금하지 말라. - 예수의 대답이 간결하고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한 마디로 '금하지 말라' 는 것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을 중단하라'는 뜻이 된다. 즉 그가 비록 너희제자 집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행위를 막지 말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사람은 예수의 치병기적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자들의 치병활동에 대한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보았기 때문에 모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성 경: [막9:40]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 - 예수께서 막지 말라 명령하신 두번째 근거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요 언젠가는 우리의 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성 경: [막9:41]

⭕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 본절은 39,40절에 언급된 관용의 정신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물론 본절은, 40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40절은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편이라는 소극적인 언급인 반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로 물 한그릇을 대접한 사람은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서 동조자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막9:42]

⭕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이 말은 우선 37절의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소자'는 분명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 세상에서 천시와 멸시를 받는 자, 무엇하나 떳떳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자(고전1:28)등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언급한 '나를 믿는'이라는 단서 조항은 지금 예수 공동체에 속해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의 신앙공동체까지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구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본문은 38절에서 요한에 의해서 언급된 질문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성 경: [막9:43-48]

여기서 부터는 42절에서 언급한 실족케 하는자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좀더 발전적으로 생명, 곧 영원하면 서도 종말론적인 생명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제하기 위해서는 철두 철미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본절의 표현 방법과 그에 부과된 의미와, 또 예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신 본질적인 의도 등에 대하여 대략 일곱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1) 이야기의 형태는 사람의 신체 중 제일 민감한 감각 기관인 '손'과 '발'그리고 '눈'을 들어 사람의 범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2) 이야기의 전개는 3단계로 진행되는데, 범죄 - 찍어버림 - 영생의길을 말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버리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다. 3) 여기서 크게두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범죄 요인이 되는 손,발,눈을 제거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길이다. 즉 철저한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된다. 4) 여기서 말하는 영생이란 '영원한'이라는 형용사'아이온' 없이 단순한 '조엔'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직역하면 '생명이 된다. 물론 이'조엔'은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을 뜻하는 '프쉬케'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관된 영원한 특성을 지닌 초월적인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옳다고 생각된다. 5)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로 '지옥'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지옥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에게 보편화된 개념이다. 6) 44절과 46절이 생략되었는데, 여러 후기 사본(알렉산드리아,모스코,베자 사본 및 벌게잇 역 등)에는 이 두 절이 각각 48절의 내용과 동일한 문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7)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형벌과 심판이 중심을 차지한 듯 하지만 사실상 강조점은 사람의 현재적 행동 윤리에 관심하는 것이다. 즉 저세상에 가서 편안하게 살기 위한 도피적 암시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책임성과 윤리적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채의 일부에 대한 잔혹스러운 표현, 즉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라는 말은 육체에 대한 무가치 또는 문자적 측면에서의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회개의 철저성과 전인격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 경: [막9:49]

⭕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 본절과 50절은 본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로 취급되며, 그런 까닭에 그 해석들도 구구하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1)헬라어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아니한 '가르'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 48절과 본절을 자연스레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불을 앞절에서 언급된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 재물에 뿌리는 소금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보는 방법이다(민18:19) 3)여기서의 불을 예수의 제자들이 겪는 시련과 박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견해는 그 모두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48절과 연결성을 고려한다면 1)의 견해를 가장 타당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막9:50]

⭕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성 경: [막10:1]

⭕ 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면 - 즉 베뢰아지방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이시기의 지리적배경이 베뢰아인 것을 밝히는데 있어 본서가 가장 명확하다. 마19:1에는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으로 되어 저자가 강 동편에 거주 했다면 바로 요단강 서편 유대 지경이되므로 혼란이 되기도한다. 당시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들은 유대로 갈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요4:9) 강동편 베뢰아를 우회한 것이 관례였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셨으나 사마리아인의 반항으로 베뢰아 지방을 택하신 사정을 누가는 전한다(눅9:51-56) 하여튼 이때 유월절을 맞이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순례자의 행열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신 것이다.

⭕ 무리가 모였거늘 - 제자들에게 주신 사적 교훈(6:33-50)이 끝나고 다시무리에게 에워싸여 공적 광장에 나서신 것이다.

성 경: [막10:2]

⭕ 그를 시험하여 - 당시 바리새인들은 신24:1-2(사람이 아내를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의 해석에서 대립되는 논쟁을 계속하였다. 엄격파인 샴마이파는 위의 "수치되는 일"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이유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고,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슨조건이든(가령아내가 밥을태웠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리새인의 시험한 목적은 몇가지로 추리할수 있을 것이다(1)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주의자보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켰으므로(마5:27-32)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알고싶어서 (2)이와같은 논쟁에 예수를 끌어내어 어느 편에 가담시키려고 (3)당시 헤롯이 이혼하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가 죽었으므로 예수를 같은운명에 빠뜨리기 위해서 등으로.

성 경: [막10:3-4]

⭕ 모세가 어떻게.....이혼증서를 써주어 - 예수께서는 대답에 앞서 반문하시므로 질문자의 입장부터 밝히셨다.그리고 그들의 대답으로 대답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앞서 인용하신 신24:1-2을 들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줌으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 회답은 곧 저들 자신의 이혼관이었다. 저들은 모세의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의 말의 근원을 캐서 밝히신 것이다.

성 경: [막10:5]

⭕ 마음의 완악함 - 합성어으로 "완고한 마음"이다. 앞서 제자들에게 실물교수하신 어린아이와 (9:36)는 대조적으로 감수성이없는 굳어진 마음이다. 모세의 율법은 정상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완악한 것을 전재로주신 차선의 길이었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계명과 모세의 계명을 대립시키거나 성경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21:1의 참뜻을 밝히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들어낸 것과 인간의 실제적인 죄성과 그로 말미암아 어떤 제한이 불가피한 사실과의 구별을 명백히 하셔야만 했던것이다"(Cranfield)

성 경: [막10:6-8]

⭕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 창1:27 및 2:24의 인용으로서 모세를 거슬러 올려 창조에 시작 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원시적인 뜻과의 차이점을 지적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귀절은 문자적으로"한남자와 한 여자로"다. 하나님은 부부의 제도를 창조하시되 일부 일처의제도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일처의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혼한것에서는 벌써 파괴된 것이다.

⭕ 그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 "...한육체가 될찌니라"(몸 ՓՙՌՁ 가 아니라).그러나 이는 히브리용법으로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몸"으로 또 나아가 "한인격"으로 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로 성장하거나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아담과 하와는 떠날부모가 없었지만) 이성을 만난 새로운 가정을 형성한다. 가정은 한몸이요. 한인격인 것이다.

성 경: [막10:9]

⭕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 여기 관계대명사는 단수로 부부는 둘이아니요 벌써 하나인 것을 표시하고, 동사는 부정과거형으로 단번으로 영영 짝지워 주신 것을 말한다. 여기 영원 불변한 부부의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 부부는 창조적인 원리에서 또 개인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있는 곳에 이혼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그 기원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있으므로 피조물인 사람이 이를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 경: [막10:10]

⭕ 집에서 제자들이 - 밖에서 무리에게 공적으로 가르치시고 집에 들어가사 제자들에게 그 교훈을 되새겨 주는 것이 예수의 관례였다.(4:10, 7:17. 9:33 등).이때에도 이혼 문제에 관해 제자들은 질문하였고, 그 질문에 대답하셔서 보충설명을 하신 것이다.

성 경: [막10:11-12]

⭕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 마태에서는 산상보훈의 일부로 인용된다.(마5:32).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창조의 원리는 불변의 원리 이므로 가령 이혼증서를 써주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승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부관계는 불변이며 따라서 아내를 두고 다른여자에게 중요한 셈이되므로 본처에게 간음죄가 되고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남자가 유부녀와 간음했을 경우 그남편에게 간음죄가 되고 아내의 경우는 남편에게 간음죄가 되나 남편이 아내에게 간음죄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하신 것은 랍비들의 교훈을 초월하는 것이라 하겠다.

성 경: [막10:13]

⭕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마태와 본서의 낱말은 갓난 어린아이를 가리키나 누가의 용어는 약간 큰아이를 뜻한다. 또 이 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데리고 오던 것을 묘사한다. 저들을 데리고 오다가 제자들의 꾸지람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납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Carr). 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머리위에 손을얻는 풍속도 있었다(창48:14). 예수를 숭앙한 추종자들이 예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것도 제자들의 자연스런 행동이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 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성 이었다. 스팔타에서는 자녀의 생살여탈권은 아비에게 있었고, 고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돈받고 파는 수도 있었다.

성 경: [막10:14]

⭕ 분히 여겨 - 본서에만 보이는 첨가로 감정묘사에 예리한 저자의 필치를 보이는 것이다. 제자들의 당치않는 행동을 강하게 제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순수하였고, 그들의 오는 것을 가장 반가왔는데 이런 스승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실망과 의분을 표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이의 위치를 높여줘 주 자신과 같이 두셨다(9:36-37). 여기에서 다시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이는 물론 문자적인 의미보다 어린이의 성품이 하나님의 시민의성품인 것이다. 어린이의 성품은 여러 가지로 지적되나 중요한 것은 순결과 겸손과 신뢰(신앙)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나라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하여튼 부모들은 단순한 축복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나라 시민에게까지 그들을 올리시고 또 축복하신 것이다.

성 경: [막10:15]

⭕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눅18:17과 문자적으로 같으나 마태에서는 다른경우에 다른 말씀을 주셨다(마18:3). 여기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 귀와 더불어 (3:28주참조)또 이중의 부정사와 더불어 뜻은 극히 강하다. 전절을 받고 이를 부정적으로 반복하시면서 강조 하신 것이다.

성 경: [막10:16]

⭕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 부모들의 요구(13절)보다 훨씬 더많이 하셨다(Bengel).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의 그림자인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신 것이다. 축복하심은 미완료형이므로 얼마동안 계속된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하나씩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Bruce)그러므로 그시간은 한참이나 걸리셨을 것이다.

성 경: [막10:17]

⭕ 한 사람 - 그는 마태에 의하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마19:22) 누가에 의하면 관원이었다.(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편이든 나이는 30세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 30세가 겨우 지난 청년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서 (10절)나와길에 나가실때에 그가 달려와 생의 도를 물었다. 부자요.관원이요. 또청년인 그가 현세를 살기위하여는 최고의 조건들에 만족하지 않고 영생의 도를 물은 것은 장한 일이었다.

⭕ 달려와서 꿇어앉아 - 본서에만 보이는 상세한 묘사다. 달려온데 그의 구도의 열심을 볼수 있고 꿇어 앉은데 그의 겸손을 엿볼수 있다. 실로 그는 여러면으로 좋은 점들을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가 부족하여 영생의 길에서 탄락된 것이었다.(21절)

⭕ 선한 선생님이여 - 독특한 칭호로 랍비에게도 부른 적이 없다. 마태에는 "선한"이 다음 어귀에 붙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되어 있다. 두책을 종합하면 그의 의도를 추측할수 있을 듯하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일을 행하여야 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 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질문에 율법주의적 근본 과오가 들어났다.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같이 되는데(to be)있기 때문이다

⭕ 영생 - 본서에는 이절과 30절에 두 번나타나고 마태에 3회 누가에 3회만 보이나 요한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된다.

성 경: [막10:18]

⭕ 하나님의 한분이외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 여기 명사는 "선한"이로다(마가.누가)(선한일으로도(마태) 번역할수 있다. 여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유니테리안의 주장처럼) 그 부자청년의 구도적 자세의 과오를 고치시려는 것이었다. 첫째는 그를 인간적 선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선으로 전환 시키려는 뜻이다. 그는 예수를 인간적 의미에서 선한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은 진보적이고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다. 둘째는 율법적 선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돌이키시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율법외에 선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관념에서 그를 깨우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이끄시는 말씀일 것이다.

성 경: [막10:19]

⭕ 살인하지 말라...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제5.6.7.8.9.계명. 즉 둘째 돌비의 계명들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마태에는 결론으로 "네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맺는다. 본서에는 제10계 대신 "속여 취하지 말라"를 첨가하고 있다. 제10계를 반영하면서도 위의 계명들의 결론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제5계를 마지막에 둔다. 이 청년이 특히 이계명에 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Bengbl) 그리고 여기 인륜에 관한 계명만을 제시하신 것은 첫째 돌비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계명보다 중하기 때문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현하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막10:20]

⭕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 허위도 아니고 (다음절,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하신 것으로보아), 예수의 진의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종래 탄식하여 물러간 것으로 보아).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붸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또 준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범위에서 였고 율법의 참뜻을 안 것은 아니며 따라서 중심으로 준수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성 경: [막10:21]

⭕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 주의깊게 응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역시 마가 톡특한 묘사다. 예수께서는 진실된 구도자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또 사랑하시는 것이다.

⭕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가지 남은 것"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다. 전절의" 나 지키었다이다"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한 것이 있나 보아 달라"는 말이 있다.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게는 무상이었고 영생의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처였다.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 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한가지 부족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 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으며,강압적이었으나 이 영혼의 성격을 따른 개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명령을 같이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것이고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것과,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 문제는 후자였으나 전자는 그 조건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성 경: [막10:22]

⭕ 슬픈 기색을 띠고 - 마16:3에는 하늘에(하늘에 얼굴을 흐리면)적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그 부자 청년의 얼굴색을 묘사한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냐.재물이냐.(마6:24)는 선택에 있어 후자를 택했고, 그 결과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만일 그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왈드의 상인 베드로(Peter of Waldo. 1170-1217)는 이때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명하신 "네게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붸으라"하신 말씀을 읽고 감격하여 문자적으로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리온의 성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 부자 청년이 근심하여 간 것은 그에게 아직 회개의 소망이 있는 표시가 될것이다.(Cranfield)

성 경: [막10:23]

⭕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 본서의 특징어로 6회 나타난다(3:5주참조) 감정적 표정 묘사에 능숙한 마가의 솜씨인 것이다.

⭕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 구약에서 부에대한 개념은 상반적인 두가지 였다. 하나는 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고,다른 하나는 가난한자가 경건하고 부자는 불경건한 자로 지탄된 것이다. 첫째가 일반적 개념이었고 (제2계의 성취로)둘째는 특수한 개념이었다(합1:4처럼) 하여튼 이런 구약적 배경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의말씀은 또하나의 그리고 전연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이다. 부자는 개인에 한하지 않고 사회나 시대에도 적용될수 있을 것이다. 재물이 많은 부자가 경건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재물이많은 시대나 사회역시 신앙에서는 후퇴한다. 현재의 서구 제국이나 미국의 경향이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부는 반드시 재물에 한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나 지위 등에 부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성 경: [막10:24]

⭕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 구약적 개념에 젖은 제자들은 부자에대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견해에 더구나 부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조건이 너무 무거움으로 놀랐을 것이다.

성 경: [막10:25]

⭕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것이 - 약대는 "밧줄"의 뜻이있고 바늘귀는 "바늘문"이라 불리우는 성의 작은문으로 볼수 있으므로 이를 (1)밧줄을 하늘에궤는 것처럼 어려운 것 (2)약대가 바늘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것등으로 조화하는 설명들이 있으나 수락되지 않는다. 이는 문자적이며 또 동양적 과장법으로 극히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랍비들이 인용한 바벨론 탈무드에 절대 불가능한 일을 "코끼리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것"이란 말이 있다. 탈무드의 다른귀에 바늘귀는 두 친구를 위해서는 좁지않고, 온세계도 두 원수를 위해서는 넓지 않다라는 말도 있다" 또 코란경에는 "불경건한 자에게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을것이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까지는 그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귀가 있다.

성 경: [막10:26]

⭕ 제자들이 심히 놀라 -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엄격해지고, 제자들의 놀람은 더욱 심해졌다. 누가에 의하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일반 군중들에게서 나왔다. 제자들도 일반 군중도 다같이 예수의 엄격한 교훈에 놀랐을 것이다. 회당을 지배하던 관원이며 따라서 일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부자청년의 구원이 그렇게 어렵다면 다른사람들이야 누가 감히 구원을 얻을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 경: [막10:27]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하나님으로는 다하실 수 있느니라 - 구원론의 대강령이다. 구원은 사람편에 있지않고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각성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그것은 부자의 구원에만 한하지 않는다. 부자도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고 가난한 자도 스스로 구원 하지는 못한다.

성 경: [막10:28]

⭕ 보소서 우리가 - 두낱말이 모두 강조적이다. 첫째는 감탄사며 둘째는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우리다,역시 제자들의 대변자격인 베드로의 발언 이었다. 예수와 부자 청년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타락해가는 부자 청년에 대해 저들은 예수의 요구대로 행하였다는 자각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의 요구하신 것처럼 모든 길을 버리고 예수를 붸았다(1:18. 20. 2:14). 이와같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과연 확실한지를 보장 받고 싶었던 것이다.

성 경: [막10:29]

⭕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 3복음서에 모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되어 있다. 결국 예수.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 것에 대해서도 누가는 "아내"를 첨가하고 "전토"를 생략하나 뜻에는 차이가 없다. 마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를 삽입시킨다.

성 경: [막10:30]

⭕ 금세에 있어...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 본서의 특색은 "핍박을 겸하여 받고"에 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 없이 받은 축복은 마귀의 선물인 것이다(욥42:12-16).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라고 보장하신다.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치 못하면 주의 깊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성 경: [막10:31]

⭕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 마태에는 이 병행귀 외에 21:16에 다시 나타나 일종의 격언조로 되어 있다. (1)전자는 베드로이하 신도들, 후자는 그외신도들(Gould, Plummer, Cranfield), (2)유대인과 이방인(Clarke) (3)바리세인과 세리 (4)부자와 가난한자들 등으로 해석된다. 첫째가 일반적인 견해다. 하여튼 이는 종말적 원리요. 하나님의 세계의 순서다. 종말적원리는 현세적원리와는 상반되며, 하나님의 순서는 인간의 그것과 는 모순된다. 이런사실을 통해 신앙적 우월감에 잠긴 제자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성 경: [막10:32]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 아직 요단강 동편 베뢰아에 계시는 것인지(Bruce). 이미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 가셨는지(Meyer)는 밝혀지지 않으나 여리고에 가까운 지점까지 당도한 듯하다.(46절). 이 여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서 밝혀진다.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붸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 - 감정묘사에 정밀한 본서의 특징이 여지없이 나타난 장면이다. 예루살렘의 지명과 더불어 예수의 수난을 향해 감연히 앞서가시는 예수의 자세는 엄숙했다. 그리고 이와같이 엄숙한 주의 모습에서 심상치않는 정세를 감지하면서 제자들은 놀라고 일반 추종자들은 오히려 두려워한 것이었다.

⭕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 "곁으로 취한"것이다. 놀라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들이셔서 수난의 예고를 다시 주신 것이다.

성 경: [막10:33-34]

⭕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그들이 능욕하며 침ꒈ으며, 채찍질하고 죽일것이니 - 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리고 수난의 예고도 처음 두 번에 비해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축자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이었다. 예수의 고난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유대 유권자들이 주동이되고 이를 이방인인 로마 정권자들의 힘을 빌어 모욕과 폭행을 가한후에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리고 3번의 예고에 빠짐없이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첨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승리로 끝날 것을 확인하신 것이다.

성 경: [막10:35]

⭕ 야고보와 요한이 - 마태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 모자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 예수의 신임을 받은 제자였다. 또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 (16:1)는 성모 마리아와 자매간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들이 이런 특청의 근거가 되었을지 모른다.

성 경: [막10:36]

⭕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한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으나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유도하시기까지는 그 소원을 진술하지는 못하였다.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머뭇거렸를 것이다.

성 경: [막10:37]

⭕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리였다. 우편과 좌편은 왕과 가장 친근하고 왕다음가는 영광의 자리였다. 베드로가 예수께 모든 것을 버린 보상을 요구 했을때(28절) 예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나를 붸는 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리라(마19:28)하셨다.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다. 또 메시야가 오시면 곧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는 유대인의 일반적 개념이었다(행1:6)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새롭게되는 때는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종말 이전에 메시야의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야고보 형제나 유대인들의 오해는 종말적 메시야 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지 못한 것이 었다. 하여튼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무한 공명심을 비치는 밝은 거울이었다(Calvin)

성 경: [막10:38]

⭕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 근본적으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구하는바를 알지 못한다. 자기자신을 바로 알지못하며 자기의 하는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눅23:34)자기의 구하는 것을 알수 없는 것이다(롬8:26) 구체적으로 말해 이때 야고보 형제는 그들이 구한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그곳은 두강도가 달린 십자가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행진 하시는데 저들은 왕의 보좌를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착오에서 모든 견해나 구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 나의 마시는 잔을...받는 세례를 - 구약에서 하나님의 총애도 뜻했으나 (시23:5,116:13)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았다(시75:8, 사51:17-23, 렘25:15-28, 49:12, 51:7,겔23:31-34, 합2:16, 슥12:2). 본문의 배경은 물론 후자다. <세례>는 본서에만 첨가된 것이다. 이 낱말의 동사형은 물이 넘치는 것이나 거리에 사람들이 쇄도하는 것으로 넘치는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잔이나 세례는 다같이 그의 받으실 고난을 상징한 것이다.

성 경: [막10:39]

⭕ 할 수 있나이다 - 이 자신에 넘치는 회답은 저들이 아직 예수의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한 증거였다. 그들의 오해는 두길로 추측할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를 영광으로 착각하고 이와같이 혼연히 대답할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령 그것을 고난의 잔으로 알았다해도 메시야왕국을 건설을 위한 충신들의 고난 정도로 알았을것이고 십자가의 수치고 극심한 순교의 고난으로는 상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편이든 저들은 예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단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 그리스도는 높고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대답을 긍정하신다. 이와같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이상하게 진전된 문답을 관찰할 것이다. 과연 야고보 형제가 장차 그리스도의 참뜻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뜻대로 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본절에 의해 야고보와 요한이 다같이 초기에 순교하였다는 교회의 오랜 전승이 성립 된 것이다.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조기의 순교한 것은 분명하나 (행12:21. 44년경) 요한의 경우 그가 천수를 누리면서 도미시안 황제때 밧모섬에 귀양가서 계시록을 기록하고 100세가 지나 죽었다는 전설이 유력한 것이다. 순교만이 주의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며 주를 위한 이와같은 고난의 생애 역시 주의 잔을 마신 것이었다.

성 경: [막10:40]

⭕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 - 마태는 보다 분명하게 :내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라한다. 종말적인 메시야 왕국에서 메시야 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이 있을 것은 부정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는 이제 새삼스러히 예수께서 주실 것이 아니라 이미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사람이 얻을 것을 밝히신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복종하는것만이 성도들이 취할 태도인 것이다.

성 경: [막10:41]

⭕ 열제자가 듣고...분히 여기거늘 - 그들도 야고보 형제와 꼭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러므로 시기에 차서 분히 여길 것이다. 두사람이 예수의 좌우편 같은 가장 좋은 지위를 독점하게 되면 저들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므로 두사람에 대해 노여워한 길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와같은 불순한 욕망 때문에 분규에 빠지는 것이다.

성 경: [막10:42]

⭕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고 - 전자는 주로 행세하는 자로 왕을 말하고 후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백급의 중신을 가리킨다. 세속적 체계에 있어서는 왕이 백성을 임으로 주관하여 종으로 삼고, 왕의 권력을 맡은 방백들 역시 백성들위에 세도를 부리는 것이 상징적 일이다. 그러나 교회력 체계에 있어서는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이하 교훈은 야고보 형제에 대해 분히 여기는 제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주신 것이다.

성 경: [막10:43-44]

⭕ 크고자 하는 자는....섬기는 자가 되도 으뜸이 되고 자 하는 자는....종이 되리라 - 일종의 히브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같은 교훈은 제자들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 났을 때 이미 주신바 되었다(9:35, 36, 눅22:25-27) 세속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같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이다. 남의 으뜸이 되고 위대해지는 자는 오히려 남을섬기는 종의 자세에 서는 것이다.

⭕ 섬기는자. 종 - 전자는 "집사"로 번역되었고 (딤전3:8) 후자는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빌1:1). 전자는 일의 성격에서, 후자는 일하는 자의 신분에서의 표현이나 결국 같은 뜻이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섬기는 자)으로도(고전3:5, 엡3:7), 그리스도의 종으로 롬1:1 불렀다.

성 경: [막10:45]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여 섬기려하고 - 접속사 "왜냐하면Ԉ(ՃՁՑ)으로 시작하여 전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섬기는자가되고 종이 되어야할 것은 스승되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 되었다.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논한 중요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도 취급된다. 더구나 본절이 복음서의 일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라는데 그 의미는 큰 것이다. 우선 본귀절의 본문 비평적인 문제부터 취급해야 할 것이다. 여러 학자들은 본절의 진정성을 거부하여 왔다. 그 근거로서는 (1)본문이 전후내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 것 (2)대속물이란 낱말은 이곳이외는 신약 전체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 (3)인자의 온 것은 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끝난 후를 암시하는 것 (4)사상적 내용은 바울의 영향이 현저한 것. 등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눅22:27(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가 원형이었고 본귀절은 후대의 신학적 첨가라는 결론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요한 발언은 언제나 어떤 기회를 따라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문의 위치를 의심할 필요도 없을듯하다.

⭕ 대속물 - 가장 중요한 구절의 가장 중요한 낱말이다. 신약에서 이곳에서 (마태의 병행귀와 더부어) 한번만 나타나고 바울서신에는 합성형이 한 번(딤전2:6)보인다. 이 낱말의 동사형 대속함은 3회(눅24:21, 딛2:14, 벧전1:18). 대속물을 주고 성취된사실인 "대속"이 역시3회(눅1:68, 2:38, 히9:12)나타난다. 이 낱말의 어근은 "푼다"이며 구약의 제사법전에서 출발하였다.

즉 (1)이스라엘남자들이 받쳤던 반세겔의 생명의 속전(출30:12)(2) 소가 사람을 죽였을 때 지불한 은 30세겔의 속전(출21:30) (3)처음난 아들을 위해 바친 대속전(민18:15) (4)팔린 친족을 속량하기위해 지불한 속전(레25:47-53) (5)팔린 토지를 무르기위해 친족이 지불한 대가(레25:25-27)등의 배경을 고찰할수 있다. 이 낱말의 고전 그릭의 배경은 보통 복수로 사용되고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위한 속전을 뜻했다. 이와같은 구약적 및 고전 그릭의 배경 아래 이 낱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즉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값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교회역사를 통해 논의되어 (1)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 (2)마귀에게 인간의죄값을 지불하셨다 (3)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었다. 등의 학설로 발전되었다. 3번은 속죄론과 방향이 어긋난 것이다. 2번에 있어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와 구원에 관해 마귀를 징벌하실일이지 그에게 값을 치루셔야 할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지불하신대상은 범죄한 인간은 죽으리라(창2:17)는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법도이다. 결국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족하게 성취하므로 인류를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 많은 사람의 -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다. 여기 역시 전치사 중요한 것으로 "을 위해 (On behaif)"가 아니라 "의 자리에서 (대신하여)in the Place of"다. 즉 이와 동의어인 ՀՐԽՑ "단수이"...의 유익을 위한 것"을 표시함에 대해 이는 엄격히 남의 자리에서 그를 대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여기<많은 사람>은 오히려 "모든 사람"all"으로 이해된다. 딤전2: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에는 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으며 그외 명사나 전치사등도 본절과 대조가 되는 것이 주목된다. 아마 본절은 사53:11(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의 반영으로 보인다.

성 경: [막10:46]

⭕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시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서편의도시오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당시 북방 갈릴리인의 일반적 순례길이기도 했다. 여리고는 지중해면에서 2500미터나 낮은곳이며 따라서 해발 762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에서는 내림길이 있다. 사해 북쪽 요단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며 현재는 엘리하(Er -Riha)라 불리운다. 일찍부터 주민이 많아 융성한 산업도시였고 헤롯대왕이 궁전을 건축하여 이 도시를 미화시켰고 이곳에서 사망 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여호수아 때부터 관련되었고 지금도 구도시의 유적에는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곽이 남아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이다.

⭕ 디메오의 아들인 거지 소경 바디메오 -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본서 뿐이다. "바디메오" 역시 "디메오의 아들"을 뜻함으로 결국 겹말이 된셈이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한 이방인 수신자를 위해 주해적 설명을 부친 것이다. 그의 부친 디메오는 당시 여리고에 알려진 인물같다.

성 경: [막10:47]

⭕ 나사렛 예수시란.....다윗의 자손 예수여 - 본서에는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전자는 1:24이후 처음이고, 후자는 이곳에만 나타난다(48절 및 간접적으로는 12:35). 전자는 비하하신 주의 인성을 가리키고 (요1:46), 후자는 바로 메시야의 별명이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윗왕국을 재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일반 군중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쳐 줄때에 즉각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데 이 소경의 위대한 신앙이 엿보인 것이다. 아마 그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고 이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신 것도 믿어 그를 만나기를 소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막10:48]

⭕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 짖궂게 돈을 구하는 것은 거지의 본성이었고 또 이런 거지를 무조건 제지하는 것은 일반의 군중 심리였다. 그러나 입전만은 사정이 달랐다. 거지는 상대를 바로 알았고 또 바른 것을 구했고 군중은 그런 것을 모르고 무조건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지는 굴복하지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신앙에는 언제나 장해가 있고 그 장해를 극복하므로 신앙은 성숙해 지는 것이다. "군중이 이적 행사를 막기위해 거지를 제지한 것은 부당한 것이다. 저들은 거지의 성급한 "다윗의 자손을 제지했고 그것을 입성하실때까지 (11:10)마21:15. 보존하기를 원했던 것이다(Gould) 아마 Gould의 견해 역시 정당하게는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때 군중은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다윗의 자손)에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막10:49]

⭕ 머물러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른다 - 같은 동사의 세변화가 주목된다. 이 부근의 묘사는 본서에 독특하고 또 정밀하다. 목격자의 증언을 받아 거룩한 본서의 특징인 것이다. 군중은 이제 약간의 동정을 나타내어 거지 소경을 도와 예수께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하여튼 예수의 관심은 약한 자, 그리고 진실된 구도자에게 쏠리신 것이다.

성 경: [막10:50]

⭕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 역시 본서만이 간직하는 생생한 묘사다. 소경은 기쁨과 열정 때문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와왔다. 천재 일우의 기회를 잃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수한 구도자를 주는 또한 환영하신다.

성 경: [막10:51]

⭕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보기를 원하나이다 - 직접적 질문에 솔직한 회답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흔히 이와같은 질문을 하셨다(5:9, 30, 6:38, 9:21).병자에게 용기를 주어 신앙을 고백을 시키시려는 것이었다. 소경의 회답은 솔직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돈을 구하지는 않았다(행3:2).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근본적 해결을 구해야한다.

⭕ 선생님이여 - 이곳과 요20:16(부활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부른)에만 나타나며, 선생에 대한 최고 존칭어다. 일반적인 용어 "랍비"(9:5, 요1:38).는 "나의 큰 자"의 뜻으로 "선생"을 가리키나 이는 "나의 증인, 또는 나의 선생"을 뜻한다. 앞선 "다윗의 자손이여" 와 더불어 칭호에서도 이 소경 거지의 큰 믿음이 보인다.

성 경: [막10:52]

⭕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 5:34주 참조.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흔히 하신 말씀 이었다.(마7:50, 8:48, 9:22, 17:19, 18:42 등). 그리스도의 이적적 권능을 유도하는 것은 믿음이다. 본문의 경우 소경의 믿음은 그의 간곡한 태도와 메시야적 칭호를 부른데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소경이 고침을 받은 후 예수를 쫓는 것이 특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 자는 주의 뒤를 따라살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 경: [막11:1]

마가복음의 다섯 번째 주요 부분은 예루살렘 안과 그 주변 안에서의 예수의 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들 특히 최후의 사자인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였다.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성 경: [막11:1상]

예루살렘 남쪽 1마일 앞에는 벳바게 마을이 있었고 약 2마일 밖 감란산 동편에는 많은 감람나무로 유명한 약 2마일 정도 넓이의 베다니가 있었다. 예루살렘 여리고까지 사람이 살지 않고 위험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있는 베다니에는 예수가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다.

성 경: [막11:1하-3]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냈다.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귀를 풀어 예수께로 끌고 왔다. 마태는 그 나귀의 어미까지 언급하고 있다. "만약 누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쓸 것이며 곧(지체없이) 다시 여기로 돌려보내리라" 라고 말해야 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주"(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나귀 소유주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막11:4-6]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을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그의 예고가 자세하고도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2-3절 참조) 이것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강조한 것인데 이 어린 나귀는 예수의 메시야적 표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나귀의 주인과 미리 약속해 놓은 것인가? 아니면 이 사건이 그의 초자연적 지식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후의 상황을 볼 때 아마 첫 번째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귀를 얻어 오는 마가의 상세한 묘사의 많은 부분을 볼 때 분명히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귀의 주인은 아마 예수와 사전에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마가가 기록한 많은 상세한 기사는 직접적인 목격자의 보고를 통하여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심부름에 보냄을 받은 두 제자 중의 하나가 아마 베드로 였을 것이다.

성 경: [막11:7-8]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등에 걸쳐 안장을 대신했다. 예수께서 전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에 오르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즉시 그들의 겉옷을 먼지 투성이의 길 위에 깔고서는 환호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싱싱하고 푸른 나뭇가지들(스티바스, 잎사귀들 혹은 우거진 가지들)을 깔았다. 종려나무 가지는 요한 복음 12:13에 언급되어 있다.

성 경: [막11:9-10]

이 구절들의 교차 대구 법적 배치는 두 그룹이 -예수의 앞서 가는 그룹과 그 뒤를 따라 가는 그룹- 서로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시편 118:25-26을 노래했다. 해마다 유월절 축제가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기원을 나타내는 여섯 편의 순례 시를 노래하였다.

히브리어(호시아나)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음역한 호산나라는 말은 원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기도였다. 이후에 이 말은 큰 소리로 외치는 찬양으로 사용되었고 순례자들이나 유명한 랍비들을 열렬하게 환영할 때 사용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소서"와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군중들의 성겨 때문에 이런 모든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성 경: [막11:11]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 가셨다.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성전이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보기 위하여 성전 주위를 관찰하셨다. 이것이 다음 날 그의 행동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는 해질 무렵이어서 성문이 닫혀졌기 때문에 예수는 12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셔서 그날 밤을 지내셨다.

성 경: [막11:12-13]

다음날 이른 월요일 아침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떠나신 후 도중에서 시장하셨다. 멀리서 예수께서는 길가에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셔서 나무에게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쳐다보셨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무성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가는 "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더라" 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 때는 니산월(4월) 중간인 유월절 절기 때였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렸고 뒤이어 4월이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다. 이러한 일찍 열리는 푸른 "열매"가 지방 소작농을 위한 일반적인 식물이었다. 이러한 작은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들이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를 낸다는 것을 그 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징조였다. 이러한 작은 열매들은 정상적으로 무화과가 열려서 무화과 철인 늦은 5월이나 6월에 익게 되면 마침내 떨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4월중) 직전에 비록 그때가 무화과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무화과나무에서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찾기를 기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 경: [막11:14]

그 무화과나무에 대해 예수께서 강하게 저주한 것은 예수께서 시장하셨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극적이고도 예고적으로 보여준 표징이었다. 잎은 많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불모성을 상징한 것이었다.

성 경: [막11:15-16]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뜰인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어떤 이방인도 이 뜰을 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순결한 품목들을 그 곳에서 사고 팔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자리에는 돈을 바꾸는 일들이 성행했으며 그 돈에는 우상적인 모습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거래는 보통 강탈과 사기 속에서 행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물건을 싣고 성전을 두루 돌아 다녔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이곳 저곳을 다니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방인들이 사용하도록 구별해 놓은 성전 뜰을 무시하고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둘러엎으시고 아무도 성전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성 경: [막11:17]

예수의 이러한 대담한 행동은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았고 그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서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무감각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노하신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속이는 장사꾼들에 대한 예수의 거절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대제사장들보다 성전에서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셨다.

성 경: [막11:18-19]

종교적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들었을 때 큰 소요 없이 예수를 잡아죽일 최선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군중들과 예수는 그를 체포하려는 유대인의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성 경: [막11:20-21]

이 구절은 12-14절의 계속이다. 다음날 아침 즉 화요일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때 그들은 어제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어 뿌리로부터 완전히 말라 시들어 있었다. 비록 예수께서 그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의 생생한 묘사였다고 믿고 있다.

성 경: [막11:22-24]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성 경: [막11:15:26]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는 기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서서 기도하다가 믿는 자들에게든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든지 누구에게든지 악의를 기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그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한 관계는 서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는 하나의 결속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요구된다. 만약 그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막11:27-28]

화요일 아침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갔다. 성전 뜰에서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대표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감시인인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1)너의 권세가 무엇이냐? (2)너의 권세는 근원이 누구이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할 권세를 주었느냐? 는 것이다.

성 경: [막11:29-30]

랍비들의 일반적인 논쟁 기술인 예수의 반문은 그에 대한 대답을 그들 스스로 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는 그 자신의 권세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상대할 자가 없었던 요한의 권세와 출처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셨다. 요한에 관한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예수에 대한 결론도 달라지게 된다.

성 경: [막11:31-32]

예수의 질문은 이러한 종교적 지도자들을 궁지에 빠지게 했다. "사람에게서"라는 후자의 대답이 그들에게는 더 타당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두려워 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성 경: [막11:33]

따라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시도로 변론을 했던 그들은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의 권세가 요한처럼 하늘에서 왔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요한과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성 경: [막12:1상]

이 간결한 요약적인 말은 마가가 여기에서 기록한 단 하나의 비유를 소개하는 말이다. 예수는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산헤드린을 대표하여 질문 해 온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적의에 가득찬 그들의 의도를 폭로한 것이며 그 결과에 대하여 경고한 것이다.

성 경: [막12:1하]

포도원 건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사야 5:1-2에서 온 것으로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알려진 표상이었다.

⭕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산 울을 두르고"-포도즙을 짜서 모으기 위한 구유 자리를 파고 보호와 저장고 안전을 위해 망대를 세웠다. 이것은 좋은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주인의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작농 즉 포도원 재배자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타국에 나가 살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성 경: [막12:2-5]

주인은 추수 때가 되어 소작료로 그 과실을 받기 위해 종들을 차례로 그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난폭한 행동으로 종들을 때렸고 마지막 종은 죽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의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몇 번이고 거듭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능욕을 당하고 상처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성 경: [막12:6-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한 사람 즉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소작농들은 자기 아들은 존경하리라고 기대하면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상속자인 것을 알고 음모를 꾸며 그를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땅의 일부분이 어떤 기긴 내에 상속에 대한 요구가 없는 주인 없는 재산이 될 때에는 그것을 먼저 주장하는 자가 합법적으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만약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버린다면 포도원을 자기네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 경: [막12:9]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그 주인이 어떤 행동을 했겠는가를 결정하는 데 청중들을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는 것은 실제로 주인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강한 권한을 갖고 와서 악한 소작인들을 죽인 후에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버릴 것이다. 예수에 대한 배척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배척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넘겨주게 되었다.

성 경: [막12:10-11]

예수는 이 비유를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그 비유를 확대시켰다. 소작인이 비유에서 시편에 나오는 돌과 건축자의 비유로 바뀌었고 그것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비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건축자가 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돌은 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돌로 간주되었다. 건축자들의 버림과 버림받은 돌의 귀히 쓰임은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적인 행동이었다.

성 경: [막12:12]

산헤드린을 대표하던 그들은 예수께서 그 비유를 자기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흥분하기 쉬운 유월절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갔다. 예수의 대적자들이 이 비유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며 그의 진정한 정체의 비밀을 자신하여 공공연하게 선언하심으로써 예수의 주권 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성 경: [막12:13]

바로 전에 나오는 비유로 예수께서 산헤드린에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몇 사람을 보내어 그의 말을 책잡으려 하였다. "책잡는다"고 번역된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사로잡는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성 경: [막12:14-15상]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면서도 예수께서 자기들의 어려운 질문을 피하지 못하도록 머리를 짜낸 질문을 조심스럽게 예수께 던졌다. 그들은 예수가 참되시며 편견이 없으시고 사람들의 외모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는 그가 사람의 현재의 모습에 관심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세"는 인구조사를 의미하는 라틴어였다. 이것은 유대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A.D. 6세기 이래로 모든 유대인들이 해마다 바치는 인두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돈은 곧바로 로마 제국의 국고로 들어갔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정복되었다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질문을 예수께 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수단이었다.

성 경: [막12:15하-16]

예수는 즉시 그들의 정직한 체 하는 질문의 이면에 그들의 위선이 가려져 있음을 간파하였다. 예수는 그들이 왜 자신을 책잡으려 하는지를 수사적인 질문으로 폭로하셨다.

성 경: [막12:17]

가이사가 새겨진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권위와 정부의 유익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결국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선언하셨다. 이 세금은 가이사의 돈을 사용했다는 데 대한 빚이며 그가 통치함으로써 백성들이 유익을 보았음으로 내는 빚이었다. 예수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은 성전 세를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황제를 신성시하는 데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즉 황제가 신적인 영예와 숭배를 결코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영광과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 경: [막12:18]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깎아 내리기 위하여 또 다른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 왔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주로 제사장과 상류 계급 출신인 유대의 귀족 당이라고 믿어졌다. 그들은 산헤드린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대 최고의 법관이며 주로 로마 권력자들과 협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 미래의 심판,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들은 모세의 책만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 들였고 바리새인들이 수집하여 지키고 있는 구전은 거부하였다. 이것이 사두개인들에 대한 마가의 유일한 언급이다.

성 경: [막12:19-23]

그들은 공식적으로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형사 취수에 관한 모세의 규례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가족의 혈통을 잊고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취해지던 전통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식 없이 죽어 버린 7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불활 신앙을 믿고 있지 않으면서도 "부활했을 때에 과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성 경: [막12:24]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두 가지 반문을 하시면서 예수는 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를 두 가지 이유로 말씀하셨다. 먼저 그들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두 번째 이유와 더불어 그 첫 번째 이유를 각각 보충 설명하였다.

성 경: [막12:25]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결혼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정혼도 결혼도 없다. 다만 하늘에 잇는 천사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질문은 부당한 것이다.

성 경: [막12:26-27]

사두개인들은 알지 못하여 부활에 대한 이해가 오경에는 없는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시면서 모세의 책 즉 모세 오경에 호소하셨다. 그리고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출3:1-6)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확언하시면서 모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그들은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이해한 사두개인들의 이해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지 않거나 죽음이 끝이라면 그는 진실하지 못한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이 바로 육체적 부활을 보증해 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살에 대한 사실을 확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육체적 부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부활과 죽음 후의 삶을 부인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이었는가를 강조하신 것이다.

성 경: [막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의 사두개인과의 변론을 듣고 그들에 대한 그의 훌륭한 답변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서기관들 사이에 토론되던 주제에 대해 예수의 답변하는 솜씨를 평가하기 위하여 어떤 적대감이나 숨겨진 저의 없이 찾아왔다. 전통적으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에 관한 613가지의 개별적인 율법(365가지는 부정적인 것이요 248가지는 긍정적인 것이다.)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도 더 무거운 것과 가벼운 법령을 구분하여 생각하였고 전체의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쟁의 견지에서 이 서기관은 이 모든 율법 주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성 경: [막12:29-31]

예수의 대답은 어느 것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를 뛰어넘어 전체 율법을 요약해 주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가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인격적으로, 포괄적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음, 뜻, 힘등 반복되어 사용된 말들이 이 계명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뜻"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70인역에서는 "마음"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두 낱말을 모두 포함시켜서 계명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예수는 첫 번째의 계명과 분리 할 수 없는 그리고 첫째 계명에 보충이 되는 두 번째 계명을 인용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헌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왜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성 경: [막12:32-34상]

이 구절은 마가에 독특한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히 영적인 것과 예식 적인 예배 사이의 관계와 싸우는 그의 독자들을 훈계한 것이었다. 서기관은 예수의 답변이 정확함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뛰어난 선생으로 보았다. 신의 이름을 지나치게 존중하여 신의 이름을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예수의 대답을 다시 표현하였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신명기 4:35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또한 마음과 듯에 대하여 그가 이해한 말로 대신했다. 그는 대담한 말을 했는데 사랑의 두 가지 명령은 모든 번제나 기타 제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는 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선언을 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 사람은 영적인 이해와 예수에 대한 개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 경: [막12:34하]

예수는 그를 깎아 내리려는 모든 시도를 효과적으로 좌절시키고 적대자들의 악의에 찬 의도와 잘못을 능숙하게 드러내셨으므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였다.

성 경: [막12:35]

그 후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기다리던 메시야를 그리고도 즉 승리의 구원자가 될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서기관들에게 예수께서는 물으셨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 확고하게 그 기초를 둔 기본적인 유대인의 신앙이었다. 예수는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사실이 옳다고 덧붙였다. 서기관들의 견해도 옳은 것이었지만 불완전하였다. 성경의 견해는 바로 그들의 좁은 민족주의적인 희망보다 훨씬 더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성 경: [막12:36-37상]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다윗 자신이 시편에 선포해 놓은 것을 인용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이 시편이 다윗의 저작이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공격할 수 없는 것은 다윗이 메시야를 "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 시켰다. 그러면 어떻게 그는(메시야) 그의(다윗) 자손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수사적인 질문은 청중들로 하여금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주"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메시야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는 이 지상에서 미래의 다윗 왕국을 회복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자기와 연관시켜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문제를 신중하게 부각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 경: [막12:37하]

교묘한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하고자 했던 유대 지도자들과는 달리 많은 유월절 군중들은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기쁨으로 처음부터 그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성 경: [막12:38-39]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를 원하고 또 그들의 특권을 남용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경고하셨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많은 서기관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들은 긴 옷 즉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이 입었던 길고 흔 술 달린 가운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공적인 명칭인 랍비, 주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좋아했고, 연회에서도 영예의 자를 차지하여 주인 다음의 좌석에 앉아 특별 대우를 받기를 원하였다.

성 경: [막12:40]

1세기의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직무에 대하여 급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바치는 자선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용하는 면이 있었다. 과부의 밭을 삼킨다는 비난이 바로 한정된 재산을 가진 사람들 특히 과부들의 호의를 악용하고 있는데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그들은 비윤리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을 착복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장시간 기도를 드렸다. 예수는 그들의 화려한 행동, 탐욕, 위선을 꾸짖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강조하지 않고 경건한 척 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그런 위선을 요구하였다.

성 경: [막12:41-42]

예수께서 그의 공적인 가르침을 행하시던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이 뜰 벽 맞은 편 벽에는 예배 자들의 자발적인 제물과 헌금을 거두기 위하여 나팔 모양을 새겨 놓은 13개의 연보궤들이 있었다. 맞은 편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시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어떻게 성전 금고에 그들의 돈을 넣는가를 살피고 계셨다. 한 불쌍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한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유대인의 청동 동전이었다. 두 렙돈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었던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읠 가치였다. 마가는 자기 로마인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로마 화폐 단위로 그 가치를 말했다.

성 경: [막12:43-44]

엄숙한 서론적인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이 여인이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과부는 어려운 중에서 모든 것을 넣었기 때문이다. 비례로 따지면 그 여인이 가장 많이 바쳤던 것이다. 그 여인은 희생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하여 동전 하나를 간직해 둘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녀의 예를 사용하셨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은 곧 시험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전적으로 죽음에 내어 주심을 예증하여 주는 것이다.

성 경: [막13:1]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그를 선생이라고 호칭한 다음 놀라움과 감탄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 뜰과 발코니, 콜로나레와 행각으로 된 성전의 거대한 돌들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호의를 얻고 헤롯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헤롯 왕조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의 놀라운 건축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크고 흰 돌들과 광택이 있는 풍부한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것이었다. 그것은 옛 예루살렘 땅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성전만큼 장엄하고 굉장한 것은 없었다.

성 경: [막13:2]

예수의 대답은 이 엄청난 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무너질 것이다." 예수께서 강한 이중 부정을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은 그의 말씀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불길한 예언은 성전을 잘못 사용한 데 대한 예수의 심판의 결과이다. 이 예언은 말 그대로 한 세대 내에 성취되었다. A.D. 70년 티투스는 성전을 불태우고 나서 전 도시를 파괴하고 그 건물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성 경: [막13:3-4]

기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 바라보며 앉았다. 감람산은 바다의 수면보다 약 2700피트 높이 솟아 있었지만 예루살렘보다는 약 100피트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감람산 서쪽에 성전과 예루살렘 시가 위치해 있었다. 제자들은 예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질문은 두 부분으로 표현될 수 있다(1).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2)그것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일어날 징조가 무엇인가? 제자들은 구약 성경의 예언의 관점만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성전의 파괴와 인자가 다시 재림하는 그 종말 시간 사이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 현 시대의 끝이 일어날 사건이며 그때에 비로소 메시야 왕국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 경: [막13:5-6]

"주의하라"(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는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라고 주장할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성 경: [막13:7-8]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막13:9]

"너희는 주의하라"라는 훈계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박해 아래서 사악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정신을 차리도록 경고하셨다. 그들은 재판을 받기 위하여 회당에서 열리는 지방 유대인의 법정인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회당에서 이교도들처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것이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증거한 그 증거가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하실 때 그들을 박해한 자들의 고소하는 증거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성 경: [막13:10]

복음이 반드시 먼저 모든 민족 즉 전 세계 민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자들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나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최우선 적으로 해야 될 일이며 또 그의 목적에 따라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 것은 가 세대의 책임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 세계에 선포한다는 것이 곧 이 시대에 혹은 이 시대의 끝에 가서 복음을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마25:31-46)

성 경: [막13:11]

제자들이 체포되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질 때에 변명하기 위해서 염려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도움이 꼭 석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성 경: [막13:12-13]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반대가 공공연하게 일어날 것이며, 또한 가까운 자기의 친척들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반대는 매우 심각하여 가족들이 서로 대적자들에게 넘겨 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처형당하게 될 것이다. 경고에 관한 이러한 말씀은 예수를 위한 충성 때문에 박해로 고통 당하는 로마에 잇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고통을 전 세계적인 복음 전도와 변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게 될 때 더 한층 그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있게 된다.

성 경: [막13:14]

"가증한 것"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을 가리켰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표현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 너무 가증하여 성전을 버리게 하고 황폐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뢰아 요단강을 건너 산으로 도망하라는 신호이다. 요세프스는 A.D. 67-68년에 유대 열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가증한 것"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장래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막13:15-18]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될 우기인 겨울철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

성 경: [막13:19]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에도 해당되지만 거기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을 넘어서 재림에 앞서 있을 마지막 대환란 이기도 한 것이다.

성 경: [막13:20]

"만약 주께서 그이 구언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된 그날들을 감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13:13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택하신 그 택한 자들 때문에 마지막 때 환난 기간을 감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A.D. 70년에 간접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마지막 때의 대환란인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막13:21-22]

"그 때에" 즉 심한 고통과 도망하는 그날 중에 만약 누가 그리스도가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고 주장하여도 예수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말고 계속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의 목적은 선택받은 자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구절은 그들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막13: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기의 날에 거짓 함정에 바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다시 교훈하셨다.

성 경: [막13:24-25]

"그러나"라는 말이 기적적인 이적들을 베푸는 거짓 메시야의 출현과 재난 이후의 때에 참 메시야의 극적인 오심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표현은 14-23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리킨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무질서가 바로 재림보다 먼저 일어날 것이다. 예수는 정확하게 어느 한 편의 구절만 인용하지 않고 이사야 13:10과 34:4 둘 다를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물리적인 우주 속에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천체 변화를 언급하신 것이다.

성 경: [막13:26]

방금 언급한 우주적인 사건이 발생한 그 때에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은 신이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그는 큰 권능을 행하실 것이며 하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성 경: [막13:27]

또 그때에 인자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그의 택한 자들을 모을 것이다. 사방이란 세계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모든 방향으로부터를 의미한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한 사람도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언급은 없지만 이 말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대환란 동안 순교한 신자들이 부활을 언급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성 경: [막13:28]

제자들이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로부터 교훈을 얻으라고 그들에게 충고하셨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는 여기에서 그런 의미를 의도하지는 않았다.

성 경: [막13:29]

이 절은 28절의 교훈을 응용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너희 제자들은 14-23절에 언급한 이러한 일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은 임박한 위기가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임박한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상징인 것이다. 만약 이런 사건들을 방심하지 않고 경계한다면 제자들은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막13:30-31]

엄숙한 서론적인 말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까지" 이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의 주장은 그의 예언(30절)의 성취를 보증한다. 현재의 우주는 대변동으로 종말이 올 것이나 이 예언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말씀들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은 영원히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의 말씀과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막13:32]

비록 위기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은 식별해 낼 수 있으나 다가오는 그 날과 그 시의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천사들이나 아들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지식의 한계는 그가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육신 속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예수는 자발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성 경: [막13:33]

"그 때" 즉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정한 때가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라고 거듭 훈계하셨다.

성 경: [막13:34-37]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는 비유를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다.

성 경: [막14:1상]

마가는 수난 사화에서 시간 측정의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일련의 사건을 열거시키고 있다. 고난 주간의 사건들의 시간표는 당시 시간 계산법이 하루를 자정에서부터 계산하는 로마식과 해질 무렵부터 계산하는 유대식이 다같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계산하기가 좀 어렵다. 유월절은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지켜야 했으며 이 절기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유월절 식사 준비는 유대식으로 계산하면 수요일 저녁으로 추정되는 니산월 14일 저녁에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을 포함한다. 유월절 음식은 니산월 15일이 시작될 때 곧 수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자정 사이에 먹게 된다.

성 경: [막14:1하-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회원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봉기할까 두려워 그를 공공연하게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활한 방법으로 예수를 은밀히 체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수한 유월절 군중 속에 있을 예수의 보이지 않는 지지자들 특히 총동적인 갈릴리 인들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명절 곧 니산월 14-21일까지의 8일 동안에는 체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유다의 예기치 않은 제안이 상황을 촉진시킨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시간 계획대로 이루어 졌다.

성 경: [막14:3]

배다니에 잇는 동안 예수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유월절 음식을 대접받으셨는데 그는 분명히 이전에 예수께 치료를 받은 사람이며 일찍이 제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였다.

성 경: [막14:4-5]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유다를 따라서 이 분명한 낭비적 행위에 분노를 표시했다. 그들 생각에는 이 향유가 1년분 품삯보다 더 비싸게 팔 수 있었고 가난한 자들에게 그 돈을 나눠 줄 수 있었다. 이것은 합당한 관심이기는 했으나 그 이면에는 제자들의 무감각함과 가룟 유다의 탐욕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녀를 책망하였는데 이는 마가의 독특한 언급이다.

성 경: [막14:6-8]

예수는 마리아에 대한 비난을 꾸짖으시며 그 행동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녀를 변호하였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것을 그의 메시야로서의 환영받음 뿐 아니라 그의 다가오는 죽음의 빛 아래서 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으로 보셨다. 그녀는 예수의 몸의 장례를 위해 미리 기름 부은 것이다.

성 경: [막14:9]

엄숙한 서론적 말씀으로 예수는 마리아에게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녀의 사랑의 행위가 복음 선포와 함께 증거 되어 "그녀를 기념하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성 경: [막14:10-11]

이 구절들은 1-2절을 보충하면서 3-9절과 강하게 대조된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영향력 있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제안했다.(눅22:6) 이는 군중들로 인한 분쟁을 피하려는 것이었고 제사장들이 가장 염려하고 잇는 것이었다. 그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이 뜻밖의 제안을 환영하였다. 왜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로 했는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 여러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첫째로는 유다만이 열 두 제자 중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회의 명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둘째로 그는 예수가 정치적 왕국을 세우지 않는데 실망했고 또 물질적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배반했다. 셋째로 돈에 대한 사랑이 그를 옭아매었다. 결국 그는 사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성 경: [막14:12]

여기서 무교절의 첫날은 니산월 15일(금요일)이 되지만 그러나 유월절 양을 잡는다는 언급이 있음을 볼 때 엄격히 말하여 니산월 14일(목)을 마가가 말하는 것 같다. 유월절 음식은 예루살렘 사면 성벽 안에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가 어디에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그들은 이 가족 축제의 음식을 그와 더불어 먹으려 한 것 같다.

성 경: [막14:13-15]

이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11:1절하-7과 병행한다. 이는 예수께서 초자연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음에 대한 또 하나의 예증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또한 안전에 대한 필요와 제자들의 질문 그리고 거기에 따른 예수의 지시를 볼 때 예수께서는 유월절 음식을 아무런 방해 없이 다같이 들기 위하여 미리 용의 주도하게 준비하셨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타당하다.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던 사람은 아마 동문 근처에서 두 제자를 만났을 것이다. 이런 특별하고도 시선을 끄는 광경을 볼 때 이는 미리 준비된 신호임을 보여준다. 보통은 오직 여자들만이 물동이를 이며 남자들은 가죽 부대를 가지고 다녔다. 제자들은 하인임이 틀림없는 이 남자를 따라 들어갔고 하인은 이들을 인도했다.

성 경: [막14:16]

아마도 유월절 음식 준비는 양고기를 굽는 것과 무교병과 포도주를 배열하는 것 그리고 식초와 포도주 및 그 외 양념에 적신 마른 과일 사이에 쓴나물을 배열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막14:17]

그 날(목) 저녁 곧 니산월 15일이 시작되었을 때 예수와 12제자는 해질 때 시작되어 한밤중에 끝나는 유월절 식사를 먹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마가는 빵과 쓴 나물을 양념 그릇에 같이 찍어 먹는 사람 중에 자기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의 선언과 식사 후 빵과 포도주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의미 부여를 강조하기 위해서 식사 중의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성 경: [막14:18-20]

절기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음식은 먹어야 했다. 이 자리에서의 배반은 다윗이 그와 함께 친밀한 식탁 교제를 나누던 이히도벨(삼하16:15-17:23)이 그를 배신했을 때 시편 49편에서 한탄한 그 한탄을 상기시켜 준다. 어떤 사람과 더불어 식사하고 즐긴 다음 그를 배신하는 것은 가장 큰 변절이었다. 제자들은 심히 슬퍼했다. 제자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자기가 결백하기를 원했다. 예수는 배신자의 배신 행위를 강조하면서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성 경: [막14:21]

여기에는 가슴을 울리는 한탄 스러운 어조가 울려 퍼지고 잇다. 배신자는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 무서운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 차라리 나지 않았더면 좋을 뻔하였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행동을 했으나 그는 그의 행동에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유다에게 내려진 저주는 마리아에게 내려진 축복의 약속(9)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성 경: [막14:22]

분명히 식사의 주된 시간 전에 그리고 유다가 이미 떠나 버렸을 때 떡을 가지사(납작하게 구원 무교병)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예수는 문자 그대로의 물건들을 말씀하셨으나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성 경: [막14:23]

식사가 끝난 뒤 예수께서는 물과 혼합된 포도주 잔을 들고 "사례하고 저희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를 마셨다." 예수께서 기존의 유월절 의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본다면 이 잔은 준비된 네 잔의 포도주 잔 중 세 번째 잔이며 식사의 주된 시간을 마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아마 그는 완성의 잔인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막14:24]

"언약"이란 서로 대등한 당사자들끼리의 합의에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어느쪽의 주도하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설정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이 약속 된 모든 물질적인 축복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그 땅에서 천년 왕국의 통치를 하 때 성취될 것이다.

성 경: [막14:25]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있는 것과 연관을 시켜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질적으로 새롭게 된 삶 속에서 식사의 교제를 즐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땅 위에 세워질 천년 왕국을 말한다.

성 경: [막14:26]

유월절에는 찬양 시편을 부르거나 연주하였는데 두 시편(113, 114)은 식사 전에 나머지 넷은(115, 116, 117, 118) 식사 후에 저녁 예식의 끝 순서로 불려졌다. 식사 후에 있었던 예수의 선언과 기도가 끝났을 때는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을 것이며 예수와 열 한 제자는 다락방과 마을을 떠났다. 그들은 기드론 계곡을 지나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 서쪽 기슭으로 갔다.

성 경: [막14:27]

"버리리라"로 번역된 동사는 어떤 사람을 외면하고 죄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열 한 제자 모두가 그의 수난과 죽음에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성 경: [막14:28]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의 도망에 대한 예언을 부활 후 재결합한다는 약속으로 완화시키고 있다. 다시 살아나신 목자로서 그는 그들이 살고 있었으며 제자로 부름 받아 위탁 명령을 받았던 갈릴리로 제자들 보다 먼저 가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그들의 미래의 사역을 위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했다.

성 경: [막14:29-31]

이전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의 전반부에 관심을 기울이고 후반부는 무시해 버렸다. 모든 제자가 예언처럼 예수를 버리더라도 자기는 예외이며 자기는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베드로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라고 강조하여 말했다. 바로 그 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는 도망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세 번 부인까지 했다. "새벽"은 해뜨기 전의 이른 새벽을 뜻하는 속담적 표현이다. 오직 마가만이 수탉이 두 번 울었다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베드로의 직접적 증언을 명확하게 들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막14:32-34]

예수와 열 한 제자는 겟세마네로 갔다. 그곳은 감람산 기슭 근처에 올리브 나무로 사방이 둘러싸인 곳이었다. 이 고립된 장소는 유다도 알고 있던, 그들이 즐겨 모이던 장소였다.(눅22:39, 요18:2) 네 명이 "동산"안에 들어갔을 때 예수는 심히 놀라며(깜짝 놀라다) 슬퍼하셨다. 그는 세 제자에게 그의 영혼이 슬픔으로 압도당하여 거의 죽기까지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했던 것이다. 그 앞에 닥친 고난과 죽음의 무게 앞에서 예수는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다.

성 경: [막14:35-36]

기도의 중심은 "가능하다면 이 때가 그냥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탄원이 근거하는 구체적인 전제였다. "이 때"란 예수가 고난 당하고 죽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말한다. 이것과 관계된 비유인 "이 잔" 역시 똑같은 사건을 가리킨다. "잔"이란 육신을 입은 자로서 받을 수밖에 없는 고난이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보다 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육체적일 뿐 아니라 고통과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성 경: [막14:37-41상]

이제 마가의 이야기의 초점이 예수의 기도에서 깨어 있는 데 실패한 세 제자에게로 옮겨간다. 예수는 세 번이나 기도를 중단하고 제자들에게로 갔으나 그 때마다 그들이 잠든 것만을 볼뿐이었다. "아직도 쉬느냐?"고 하신 말씀은 죄를 깨우쳐 주는 말일 수도 있고 역설적이나 애정 어린 명령일 수도 있으며 갑작스런 책망의 외침이라고 할 수도 있다. 37절 40절에 비추어 볼 때 첫째번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성 경: [막14:41하-42 41절]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잇는 것 같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라는 말로 인해 제자들은 일어났다. 그 때 예수께서는 때가 왔음을 알린다. 그리고 예수의 배신자가 도착하였다. 예수와 세 제자들은 도망치는 대신에 유다를 맞으러 앞으로 나갔다.

성 경: [막14:43]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곧 유다가 단검을 가진 로마 병사들과 몽둥이를 든 성전 지키는 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유다는 밤에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에게로 그들을 인도하여 왔다. 그래서 아무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예수를 잡을 수 있었다. 산헤드린이 예수의 체포를 위해 영장을 발급했을 것이고 대제사장은 로마 군대의 협조를 얻어 왔을 것이다.

성 경: [막14:44-47]

유다는 동산에 들어가자 즉시 예수께 나아가 랍비여라고 인사하면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뺨이나 손에 입 맞추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그의 스승에게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통상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유다는 그것을 배신의 표로 사용했던 것이다.

성 경: [막14:48-50]

예수는 은밀하게 행동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분명한 종교 지도자 였다. 그 주간 내내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 모습을 드러내어 가르쳤으나 그들은 그를 잡지 아니하였다. 마치 죄인처럼 한적한 밤에 인적인 드문 곳에서 그를 체포한 것은 그들이 겁에 질려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를 버려두고 도망쳐 버렸다.

성 경: [막14:51-52]

마가복음에만 있는 이 독특한 구절은 제자들이 모두 완전히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는 50절을 보충해 주고 잇다. 이 "청년"은 (24세에서 40세 사이의 한창 때의 나이)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주석가들이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이 청년은 잠을 자다가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자 그는 옷 입을 틈도 없이 황급히 이 소식을 예수께 전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까지 뛰어 올라 갔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예수께서 체포되신 후 였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가 그만 발각되자 그는 홑이불을 팽개친 채 도망가 버렸다.

성 경: [막14:53]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체포한 자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집으로 예수를 끌고 갔다. 그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그는 A.D. 18-36넌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다.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 산헤드린 회원들은 야간 회의를 위하여 급히 다락방으로 모였다. 이것은 비공식이었는데 낮에만 재판을 허락하는 유대인들의 엄격한 법적 재판 과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벽 이후에 공식적인 인가를 받아야 했다.

성 경: [막14:54]

베드로는 다시 용기를 내어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갔다. 이 곳은 제사장 관저 앞 사각형의 정원이었다. 그는 예수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알고 싶었다.

성 경: [막14:55-56]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에게 사형을 내릴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지만 그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서 그들의 증언을 증거로 삼을 수 없었다. 아마 이들은 예수의 체포 이전에 이미 예비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고소 내용을 서로 조화시킬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유대 재판에서 증인은 기소자 역할을 할 수 있으나 그들의 증언은 각각 따로따로 행해야 했다.

성 경: [막14:57-59]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대한 것으로 죄목을 삼았다. 여기서 말해지는 성전은 예수의 편에서 보면 그이 몸 된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말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배 처소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고대 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범죄였다.

성 경: [막14:60-61상]

대제사장은 죄를 찾기 위해 질문을 했으나 예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예수의 침묵은 재판정을 좌절시켰고 재판의 과정을 벽에 부딪치게 했다. 14:61하-62 대제사장은 전술을 바꾸어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나?"라고 예수께 물었다.(문자 적으로는 계속해서 묻다의 뜻) 신약 성경 중에서 여기서만 발견되는 "찬송 받으실 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용할 수 잇는 유대 칭호였다. 예수는 명확하게 "내가 그니라" 곧 "나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마가복음에서는 이곳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는 자기가 메시야임을 공적으로 천명하였다.

성 경: [막14:63-64]

대제사장이 그의 옷을 찢었다고 할 때 그의 예복보다는 오히려 속옷을 찢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자기가 예수의 담대한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옭아매는 대답을 함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그는 또한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성 경: [막14:65]

산헤드린 회원 몇 명이 그들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를 모욕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며 엄청난 인격적 모욕을 뜻하였다.

성 경: [막14:66-68]

대제사장의 비자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임을 알아본다. 그 여자는 분명히 베드로의 신분을 파악하였으나 베드로는 그것을 부인하였다. 그는 자기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을 부인했다. 더 이상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 그는 길거리로 통하는 포장된 길 곧 앞뜰로 나아갔다.

성 경: [막14:69-71]

동일한 계집종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폭로하였다. 다시 그는 부인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고소하여 "확실히 너는 그들 중의 하나니 너는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아람 방언을 말할 때 그 발음에 있어서 현저히 구별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자인 예수의 제자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말은 그가 신성 모독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며 법정에서처럼 부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맹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막14:72]

두 시간이 채 못되어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를 부인하자 그 즉시 닭이 정확히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통곡하였다.

성 경: [막15:1]

날이 밝아 오자 그 즉시 대제사장의 인도에 따라 예수를 정죄하고 로마의 판결을 얻기 위해 예수를 로마 법정으로 끌고 갔다. 비록 산세드린 공회가 사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나 사형 집행은 직접 할 수 없었다. 판결을 받은 죄수는 로마 정부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어야 했다. 로마 정부는 공회의 사형 판결을 재가할 수도 있고 기각할 수도 있었다.

성 경: [막15:1하]

산헤드린은 예수를 결박하여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가 다시 거기서 나와 헤록 궁궐로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사형 판결을 얻어내기 위하여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다. 그는 유대인을 멸시한 다소 거친 총독이었다.

성 경: [막15:2]

빌라도는 로마 정부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산헤드린이 내린 사형 선고를 확정 시켜 주는 대신 빌라도는 이 사건을 좀더 상세히 듣고 싶었다. 예수가 자기를 "왕"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엄청난 반역이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빌라도에게 여겨졌을 것이다.

성 경: [막15:3-5]

예수의 답변으로 볼 때 사형 선고의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 빌라도는 다른 정보를 더 얻기 위해서 예수를 고소한 사람에게로 갔다. 대제사장들은 그 사이 예수를 고소할 전략과 근거를 더 많이 찾아 놓고 있었다.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빌라도는 이 귀찮은 재판을 피하기 위해 역시 그 때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갈릴리의 영주 헤롯 안티파스에게 예수를 보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곧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는데 오직 누가만이 중간에 있었던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막15:6]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백성들이 환심을 얻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백성들이 선택하는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주는 관습이 있었다. 빌라도는 백성들이 예수의 석방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예수를 풀어 주는 대신 유월절 사면 관례를 이용해 예수를 놓아주려 하였다.

성 경: [막15:7]

바라바는 민중 선동가였고 강도며 살인자로 기록돼 있다. 아마 그는 로마에 대해 혁명을 일으킨 민족주의자인 열심당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체포되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 경: [막15:8-11]

많은 무리들이 재판 장소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관례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6절 참조) 이마 그 중의 상당수가 바라바의 추종자였을 것이다. 군중들은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충동질하였다.

성 경: [막15:12-14]

빌라도는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마침내 십자가 형을 선언하게 되었다.

성 경: [막15:15]

빌라도는 군중의 요구에 이끌려 결국 정의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을 선택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남자는 처형되기 전에 잔혹한 매질을 먼저 당하는 것이 당시 로마의 관례였다. 죄수는 벌거 벗기워지고 때로는 나무에 묶인 채로 날카로운 금속이나 뼈 조각을 박은 짧은 가죽 채찍을 든 로마 병사들에게 사정없이 등에 매질을 당하여야 했다.

성 경: [막15:16]

예수를 매질 한 후 로마 군병들은 예수를 데리고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뜰 안에서 모든 군대를 모았다.(약2,300명)

성 경: [막15:17-19]

예수를 조롱하는 행위는 단순히 예수 한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들의 왕을 기다려 온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성 경: [막15:20]

조롱을 다한 후 백부장의 휘하에 있는 4명으로 된 사형 집행조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성밖으로 끌고 나갔다.

성 경: [막15:21-22]

정죄 받은 죄수는 자기 십자가의 파티불룸 즉 150파운드 정도의 십자가의 가로 목을 직접 지고 시내를 거쳐 처형 장소까지 가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군병들은 예수를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골고다로 끌고 갔다. 골고다는 해골의 장소라는 아람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음역이다. 골고다는 사람의 두 개골을 연상시키는 둥근 바위 언덕이었다.

성 경: [막15:23-24]

마가는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만 기록하였다. 로마에 있는 그이 독자들은 상세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것도 제기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먼저 극도의 피로와 고통과 갈증이 엄습해 왔고 2,3일 후에 천천히 죽었다. 때로는 희생자의 두 다리를 부러뜨림으로 죽음이 빨리 찾아오게 하기도 하였다.

성 경: [막15:25]

해뜰 때부터 계산하는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을 사용하면서 오직 마가만이 예수의 십자가형이 제 3시 즉 아침 9시경에 이루어 졌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요한 복음 19:14의 제 육시 라는 말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요한의 시간 계산을 로마 식으로 한다면 요한이 말한 시간은 오전 6시가 된다.

성 경: [막15:26]

죄인의 이름과 그의 죄목을 판에 써서 조인의 머리 위에 매다는 것은 당시 로마의 관례였다. 복음서에서 죄패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죄패가 세 가지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인 듯하다. 빌라도가 이 말을 쓰게 한 것은 유대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모독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 경: [막15:27-28]

예수와 함께 처형을 당한 두 명의 강도는 예수의 죄목을 잘 아는 것으로 보아 예수와 함께 재판을 받은 것 같다. 빌라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사야서 53:12의 예언을 성취시키게 되었다.

성 경: [막15:29-30]

군중들은 예수를 다시 모욕하였다. 성전을 사흘만에 지을 엄청난 능력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먼저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고 예수를 비웃었다.

성 경: [막15:31-32]

유대인의 지도자들도 군중들과 함께 예수를 조롱하였다. 그들의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 진 것이다.

성 경: [막15:33]

예수는 낮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제6시에 완전한 어둠이 온 땅에 내려 덮혀 제9시까지 계속 되었다. 이 어둠은 예수 위에 내려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우주적 표상이다.

성 경: [막15:34]

마가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 말씀 중 오직 한 마디 말씀만 기록해 놓았다. 이 외침은 예수가 단순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 것도 아니다. 예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법적인 의미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성 경: [막15:35-36]

곁에 섰던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의 부르짖음을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잘못 들었거나 조롱하기 위하여 잘못 해석하였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의로운 수난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예수는 땅에 2-3피트 떨어져 매달려 있었다. 구경꾼 중의 하나가 그 예수께 신 포도주를 갖다 주어 마시게 하였다.

성 경: [막15:37]

그가 그때 십자가에 달린 일반 죄인들과 똑같이 죽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 직전에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의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이 빌리도의 놀람에 대한 설명이다.

성 경: [막15:38]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그 행위가 하나님의 행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순간 유대 저녁 봉헌을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의해 관찰되고 보고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성 경: [막15:39]

예수의 곁에 서서 이 모든 이상한 일들을 관찰했던 백부장은 사형 집행관의 일을 맡았던 이방 로마 관리였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에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다.(44절 참조)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백부장이 고백은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것 중 핵심 부분이다. 이것은 비웃는 자들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성 경: [막15:40-41]

헌신적인 여인들 몇몇은 멀리서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있을 때 이 세 여인들이 이곳 저곳으로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그의 물질적 욕구를 돌보곤 하였다. 예수를 정기적으로 따르지 않았던 여인들도 거기에 있었다.

성 경: [막15:42-43]

예수의 매장 당하심은 그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확증하여 주는 것이며 초대 교회의 선포 내용 중 중요한 것이었다.

성 경: [막15:44-45]

예수가 벌써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놀랐다. 그는 백부장을 불러 예수가 정말 죽었는지 확인을 해보았다.(39절) 이 백부장은 십자가 처형을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빌라도는 요셉에게 시신을 내 주었다. 요셉의 요구에 빌라도가 선뜻 응한 것은 예외적이었다.

성 경: [막15:46-47]

요셉은 틀림없이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해지기 전 약 두어 시간 동안에 장례를 마쳤을 것이다. 요셉과 같이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니고데모 역시 장례식을 거들었다.(요19:39-40) 그리고 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되었다. 무덤의 입구는 산 위에서 굴러 온 둥글고 평평한 돌로 막아 침입자들로부터 예수의 시신을 보호하였다.

성 경: [막16:1]

"안식일" 곧 토요일 자정이 지나고 유대인의 새 날인 일요일이 시작되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했다. 향료는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서 시신 위에 뿌려졌고 이는 사랑의 헌신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성 경: [막16:2-3]

그 주간의 첫날 아주 이른 아침해가 뜨기 바로 전에 여인들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새벽 어둠 속에 집을 나서서 해가 뜬 직후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분명히 그들은 무덤 위에 있는 공식적인 인봉이나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성 경: [막16:4-5]

누가와 요한은 합법적인 증인을 위해서 필요한 수인 두 천사가 나타났음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한 사람만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 이것은 대변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 여인들은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자 깜짝 놀랐다. 강한 감정을 나타내는 이 복합 동사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에 부딛칠 때 압도당하는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성 경: [막16:6]

여인들은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예수의 몸이 없었다. 천사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며 동일한 역사적 한 인물임을 밝혀 주었다. 또한 빈 무덤이 그것을 증거해 주었다. 부활의 확실성은 하나님께 받아 천사가 전해 준 이 증언에 근거하며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결단 앞에 서게 한다.

성 경: [막16:7]

여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부활의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말은 베드로를 구별하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이다. 이것은 마가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베드로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영한다. 베드로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아 열 한 제자의 무리 속에 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 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신빙성이 있는 증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성 경: [막16:8]

여인들은 두려웠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두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의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경외감과 두려움에 압도되어서 침묵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막16:9]

이 구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그날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 온 것에 갑작스럽게 관심을 돌린다. 전에는 이름만 세 번 언급되었지만 여기서는 처음으로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준 마리아라고 설명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즉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부활 상태의 예수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막16:12-13]

이 구절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한다. "저희 중 두 사람"이라는 말을 볼 때 이들이 마리아의 보고를 믿지 않았던 무리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내셨다. 그들도 역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의 사실을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역시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의 환영을 본 것으로 여겼다.

성 경: [막16:14]

그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막16:15]

후에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위대한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셨다.

성 경: [막16:16]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보통 믿는 자와 세례 받는 자를 동일시 하지만 세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 후반부는 복음을 믿는 자와는 대조적으로 믿지 않는 자는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 정죄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막16:17-18]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이다.

성 경: [막16:19-20]

이 구절은 두 개의 상호 밀접히 관련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주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 거기서 예수는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 사실은 스데반이 본 환상에 의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증명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지상적 사역은 끝난 것이다. 또 하나는 어떤 다른 의미에서 이 땅 위에서의 지상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나가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되었다.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힘 주고 그의 말씀에 수반하는 표적들을 통하여 자기의 말씀을 확증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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