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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누가복음주석(1장-24장)

성 경: [눅1: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우리 중에 - 본절에서 '우리'는 구체적로 누구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리 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에 관한 나름대로의 산 체험과 증거들을 보호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저자 누가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문의 '우리'와 접촉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 확대하기도 하며 또한 특정 종파의 교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의 기록은 모두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해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개연성(蓋然性)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가 여기서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기록에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witnesses)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나오는 2절과 함께 연결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 분명하다(Alford).

⭕ 이루어진 사실(*, 톤 페플레로포레메 - 이 단어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플레레스'(*)와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페로'(*)가 결합된 '플레로포레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accomplished) 일이라는 뜻이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때 이 말은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Merrill C. Tenney).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취된'(딤후 4:5, 17) 그리고 '확인된'(롬 4:21;14:15;히 6:11;10:22)으로 사용됨으로써 위의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실로 예수의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서두에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KJV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앞으로 소개될 이 누가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실로 본서를 통해 누가는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성 경: [눅1: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처음부터(*,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부터'(3:1, 2;행 1:21, 22;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 말씀의(*, 투 로구) -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 로고스)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된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 1:14에서는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incarnation)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Lenski).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요 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요 1:14). 이에 비해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요성 강조했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Liefeld).

⭕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 아우토프타이 카이휘페레타이) -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격자되고 일꾼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은 사도적 증거(witnesses)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와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eyewitnesses, 목격자)라는 뜻이 된다(Robertson).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minister of the wor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의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Written tradition)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 파레도산)은 제2 부정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킬 수 있으나(고전 11:23;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24:20;행 1:20;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 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 내력을 저술하려고(*, 아나태사스다이 디에게신) -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라는 뜻을 가진 '아나'(*)와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타쏘'(*)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가 원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력을'에 해당하는 '디에게신'은 '디에게오마이(*, '완전히 인도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8:39;막 5:16;9:9;행 8:33;히 11:32) 이는 곧 내용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함을 말한다.

⭕ 붓을 든(*, 에페케이레산) -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다(Robertson). 이로 보 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Written tradition)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記者)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다(5:1-11;7:11-17, 36-50;8:1-3;10:25-37;15:1-32;19:1-11; 24:13-53).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사람이 많은지라 -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4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톡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행 16:10-17, 20:5-14;21:1-18;27:1-22). 렌스키(Lenski)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 어미에 해당하는... 지라(*, 에페이데페르)고 하는 이 접촉사는 '...이므로'란 뜻의 '에페이'(*)와 '확연히 알려진 것'이라는 뜻의 '데'(*), 그리고 뜻을 깊이하거나 강조하는데 쓰이는 후접사 '페르'(*) 등이 합성된 단어로서 '...이므로', '참으로...이니까', '생각해 보건대'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으로 보아 앞선 사실이나 기존의 잘 알려진 일에 대한 회상과 확인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 곳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 헬라 문학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헤로도투스(Herodotus)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역사서의 서두에서도 이 단어가 전통적인 문체로 사용되고 있다(Robertson). 누가는 헬라인이었다. 그래서 헬라문학의 전통 양식에 따라 가장 격조높은 고전 헬라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1:1-4). 이에 대해 바클레이(Bacl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마치,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성 경: [눅1: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그 모든 일을...자세히 -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한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그 모든 일'(*, 파신)을 나타내는 원어는 중성 복수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근원부터'(*, 아노덴)는 '처음부터',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닌다. 아마 누가는 이 팔을 쓰면서 분명 본서 1, 2장에 언급된 탄생 기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자세히'(*, 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에서 나온 말로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 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 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진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미루어 살핀(*, 파레콜루데코티) -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서,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 나도(*, 카모이) -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서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 데오빌로 각하(*, 크라티스테 데오필레) - 누가가 기록한 두 책(본서,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혹자에 따르면 누가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였을 것으로도 추정한다(Streeter).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a proper name)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통해 볼 때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리펠드(Liefeld)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E. J. Goodspeed, Grevdanus). 여기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 '하나님')와 '필레오'(*,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명칭을 듣고 혹자는(Origen, Bruce) 이것이 B.C. 3C 경에 흔히 사용되딘 이름으로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할 뿐 상징적 이름이나 가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로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4절). 한편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비록 본서는 데오빌로가 그 대표적 수신자로 밝혀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獻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다(Julicher Fascher). 더욱이 본서의 전반적인 기류는 탈(脫)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누가의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각하'(*, 크라티스테)라는 말은 '지존하신',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서 형식적이고 친근하게 인사치례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례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고 있다(행 23:26;24:3). 따라서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Noval Geldenhuys, Ramsay).

⭕ 좋은줄 알았노니(*, 에돝세 카모이) -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3절 문장 서두에 온다. 여기서 '에돝세'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도케오'(*)의 과거형이다. 실로 예수에 관해서 기록을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KJV와 NIV를 통해서 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NIV는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 'since'를 이 구절 문장 서두에 사용하고, KJV는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구문을 사용해 성경을 기록하는 일이 왜 좋은지를 밝히고 있다(It seemed good to me also).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경: [눅1: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배운 바(*, 카 테케데스 로곤) - '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데스'는 '카테케오'(*, '귓가에 울리게 하다', '말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다(Henry, Liefeld, Geldenhuys). 한편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로곤'은 '로고스'(*, '말씀', '사건')의 소유격 복수 형태이다. NIV와 KJV는 이 단어를 '사실들', '일들'(things)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알포드(Alford)는 이 단어를 '말씀에서 표현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버운바'는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의미한다.

⭕ 확실함(*, 텐 아스팔레이안) - 이 단어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와 '미끄러 넘어지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스팔로'(*)의 합성어이다. 즉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견고히 서는 것이다. 실로 우리가 믿고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신을 같게 한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挑戰)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협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이단자들이 성행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엡 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Liefeld).

⭕ 알게 하려 함이로라(*, 에피그노스) - 이 단어는'...에 부가하여', '...에 더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와 '알려고 배우다', '알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기노스코'(*)의 합성어 '에피기노스코'(*) 의 부정 과거 형태로 사용되었다. 즉,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 경: [눅1: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유대 왕 헤롯 때에 -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라는 의미가 된다.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함으로써 유더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 아비야 반열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여기서 먼저 '반열'(*, 에페메리아)이란 '...동안', '때마다', '만큼' 등의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와 '날', '하루' 등의 뜻인 '헤메라'(*)의 합성어로서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 사가랴요 엘리사벳이라 -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벳(Elizabeth)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성 경: [눅1: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이 두 사람이...의인이니 - 이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에게 붙여진 관용구였다. 여기서 '의인'(*, 디카이오이)이란 '옳은', '똑바른', '정직한' 등의 뜻을 지닌 '디카이오스'(*)의 변화형으로서, 특별히 이 말이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是認)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앞에'(in the sight of God, NIV)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시된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의인'이란 말이 '순전히 윤리적인 측면의 인격에 대한 평가이기 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했다. 사실 인간이 그 인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나설 수 없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카이오스'의 의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시다(Wuest).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 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간주되었었는데 (창 6:9;7:1;18:23-28;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한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이것은 유대인의 이상형이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義人觀)관에 따른 표현이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Robertson).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겠는가?

⭕ 계명과 규례(*, 타이스 엔톨라이스 카이 디카이오마신) - 여기서 '계명'을 나타내는 '엔톨라이스'는'명령', '교훈' 등의 뜻을 지닌 '엔톨레'(*)의 복수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 '엔톨라이스'를 주로 '계명'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롬 7:8-13). 그리고 '규례'를 가리키는 '디카이오마신'은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 '공의를 행하다'는 뜻인 '디카이오오'(*)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혹자(Bengel, Calvin)는 이 양자를 분리하여 '계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종교, 도덕적인 법령(法令)을, '규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의식적이고 제의적인 예법(禮法)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또다른 학자들(Bruce, Lenski)은 이 양자를 대조시키지 않고 히브리인들이 즐겨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두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이(*, 아멤프토이)란 '비난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성 경: [눅1: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엘리사벳이...무자(無子)하고 -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카도티'(*)란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2:45;4:35). 이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만큼', '왜냐하면' 등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17:16-17-사라;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눅1: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마침...할새(*, 에게네토 데) - 이 말은 이야기를 상호 연결시켜 주며 무엇을 소개시켜 주는 문구로서 히브리어의 '와에히'(*, '때마침 그것이 일어났나')와 유사한 표현이다. 특히 이 문구는 타복음서보다 본서에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때 흔히 사용된다. 그리고 이 문구와 비슷한 '기노마이'(*) 역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쓰여진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본서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를 기술할 때 자신의 문학적인 역량에 덧붙여 자신이 참고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편집해갔음을 알 수 있다(Gaston).

⭕ 반열(班列)의 차례대로 -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가 되고, 이들은 종가(宗家)에 따라 24반열(division, 각 반열에 천명 정도)로 나눠진다. 이러한 제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라 할 수 있는 다윗 때에 정비된 것으로, 다윗은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가족(반열)으로 나누고 그각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씩 2차로 성전봉사를 하게 했다 (대상 23, 24장 ;대하 8장).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바벧론 포로 당시에 일시 끊어져 포로 귀환하면서 4반열만(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훌) 귀국하게 된다(스 2:36-39). 그 후, 이 반열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가능한한 본래의 모습대로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그 중에 아비야의 반열로 여덟번째 반열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제사장의 직무를...행할새 - 각 제사장 가족들은 그 해(年)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성전 봉사의 책무를 맡게 된다. 즉 제사장들 중 그해에 봉사할 임무를 맡게 되는 지사장 가족은 일주일 동안씩(8일간;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년에 두 번 성전을 섬기게 된다(J. Jeremias). 그러나 다음과 같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한 제사장 개인이 상번제(the daily sacrifice)를 위해 분향단에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조차 큰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의 수효(일설에는 약 2만명 정도였다고 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혹자(Farrar)에 따르면 한 제사장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제비가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있어 이 일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본문에는 직무를 맡은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에난티 투 데우)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성전이 곧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 이해되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에 의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합 2:20).

성 경: [눅1: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 이 말은 내용상 원래 8절에 부속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의 읽기대로 '제비를 뽑아...분향하고'라는 표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의 전례' 곧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관습(*, 에도스)'이란 8, 9절에 명시된 내용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 제비를 뽑아(*, 엘라케) -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다(신 18:10-12;수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삼상 14:42), 첫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난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 주의 성소에 들어가 - 여기서 '성소'(*,나오스)란 성소(Holy Place)와 지성소(the Holy of Holies)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 구별된다. 결국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된다.

성 경: [눅1:1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모든 백성은...기도하더니 -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는 '운집한 경배자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 '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한다(Liefeld).

성 경: [눅1:1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의 사자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는 '사자', '천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마 2:13), 또는 '천사'(마 24:36;막 12:25;롬 8:38;고전 4:9;1:13, 14)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1:26;2:9, 13, 21;12:8;15:10;16:22;22:43;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행 10:4, 7;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 향단 우편 - 향단과 번제단은 다르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한다. 매일의 분향은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른다(Alford).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게 된다(출 30:1-10;40:2-27, 아래 그림 참조).

성 경: [눅1:1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놀라며 무서워하니 -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타라크데'(*)는 원형인 '타라쏘'(*)의 수동태 과거형이다. 그 뜻은 '요동하다', '내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이다(마 2:3;막 6:50;요 11:33). '무서워하니'에 해당하는 '포보스'(*)는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다(삿 6:22;13:22).

성 경: [눅1:1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와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는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천사의 응답은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한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사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 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 대상 3:24), '요아네스'(*, 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벧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성 경: [눅1:1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너도 기뻐하고...기뻐하리니 -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와 '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가 연이어서 나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는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성 경: [눅1:1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 앞에 큰 자 - '큰'에 해당하는 '메가스'(*)는 '위대한', '덕스러운','권위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0:25;딤 2:13).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민 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소주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장에서 4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고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1:1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이스라엘 자손을...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렘 3:7, 10;겔 3:19;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눅 3:3)

성 경: [눅1:1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원'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는 '물려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즉,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사 40:1;말 3:1-5;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마 17:12;막 9:13).

⭕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돌아오게 하고 - 이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한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당(Zealots)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 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이다.

⭕ 주를 위하여...예비하리라 -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는 공관 복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와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마 21:26)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성 경: [눅1:1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어떻게 알리요...나이 많으니이다 - '어떻게'에 해당하는 '카타 티'(*)는 '무엇에 의하여'라는 뜻이다(in what way, MLB).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사가랴의 겸손이 아니고 불신의 소치임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마리아의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는 질문은(Haw shall this be, RSV) 45절로 미루어 천사의 메시지를 믿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늙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는 나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민 4:3;8:24, 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성 경: [눅1:1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천사가...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단 8:16;9:21)과 '미가엘'(단 10:13, 21;12:1; 유 1:9; 12:7) 둘 만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Book of Enoch)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미가엘(Michael), 라파엘(Raphael), 우리엘(Uriel), 가브리엘(Gabriel) 등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 좋은 소식(*, 유앙겔리사스다이) -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유앙겔리조마이(*)에서 왔다. '유'(*)는 '좋은'(good)을 뜻하며 '앙겔로'(*)는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합성어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된다(Wuest). 그리고 '유앙겔리조마이'는 공관복음에서 모두 11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본절;2:10;3:18;4:18, 43;7:22;8:1;9:6;16:16;20:1). 따라서 누가에게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Liefeld).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의 이 부분의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천사의 대답은 사가랴의 불신의 질문에 뒤이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성 경: [눅1:2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내 말이 이루리라 -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는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사용하는 불변사이다. 이 단어는 말을 강조할 때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팔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된다.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 또한 62절과 비교해 보면 사가랴는 벙어리뿐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성 경: [눅1:2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백성들이...기이히 여기더니 -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Alford). 탈무드(Talmud)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Lenski). 따라서 제사장들은 가능한 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 이 구절에서 보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이다(레 10:1, 2).

성 경: [눅1:2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 이상(異像) -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이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모두 3개가 된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에 해당하는 '와타시아'(*), '보여지는 것'을 나타내는 '호라마'(*), '봄', '외관', '자태'에 해당하는 '호라시스'(*)등이다. 이구절에서는 '와타시스'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한다.

⭕ 형용(形容)으로 -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성 경: [눅1:2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직무(*, 레이투르기아스) - 이 말은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고후 9:12;빌 2:17, 30;히 8:6;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를 나타낸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한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성 경: [눅1:2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엘리사벳이...숨어 있으며 - 엘리사벳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삿 13:13, 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할 듯하다.

성 경: [눅1:2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 이 구절에는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내 부끄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창 30:23;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 부끄러움(*, 오네이도스) - 이 말은 '비난', '불명예', '모욕'이라는 뜻을 갖는다. 신약성경 중에는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심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으로 빠뜨리는 치욕을 뜻한다.

⭕ 없게 하시려고(*, 아펠레인) - 이 단어는 원형이 '아파이레오'(*)로서 '치워버리다', '가져가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이다.

성 경: [눅1:2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천사 가브리엘이...동네에 가서 -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본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 갈릴리 나사렛 - 나사렛(Nazareth)이라는 동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갈릴리 지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받아볼 데오빌로나 그 외 이방 사람들은 작은 나라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이 어느 지방의 어떤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사렛은 앞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요 1:46에 기록된 나다나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취급받던 동네가 나사렛이다. 예수는 공생애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 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Geldenhuys).

성 경: [눅1:2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요셉이라...마리아라 -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 처녀(*, 파르데논) -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1:5-38의 주제 강해 참조.

성 경: [눅1:2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은혜를 받은 자여...함께하시도다 -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나타난 것(8-24절)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사가랴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안과 주의 임재의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24절) 마리아의 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난다. '은혜를 받은 자'에 허당하는 헬라어 '케카리토메네(*)는 그 어원이 '은혜'를 뜻하는 어근 '카리스'(*)에서 온 말로서 완료 분사형으로 쓰였다. 이 완료 분사는 강한 현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은혜를 받은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Lenski). 한편 천사와 마리아 간의 대화는 세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1차 대화에서는(28, 29절)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나며, 2차 대화(30-34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그리고 3차 대화(35-38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성 경: [눅1:2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생각하매(*, 디엘로기제토) - 이 말은 원래 '별개의 논거(論據)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3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천사가...무서워 말라 - 사가랴의 경우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나(12절)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다. 역시 두 상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얻었느니라(*, 휴레스) - 이 말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의 단순 과거형이다. NIV는 이를 '발견했다'(have found)라는 현재 완료형으로 번역했고 렌스키(Lenski)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는 채 주어진다(엡1 :6). 그러나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기서 헬라어의 단순 과거형이 사용되었음을 보아 마리아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1:3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예수라 하라 -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출 24:13;삼상 6:14;왕하 23:8;대하 31:15;학 1:1;슥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행 13:6;골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21:11), '다윗의 자손'(마 27:37;막 10:47-48;요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성 경: [눅1:3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큰 자 - 이 구절은 15절과 대구를 이룬다.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께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다분히 제한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께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Liefeld).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휘오스 휘프시스투) - 예수께서 신적 기원(divine origen)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씀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35절에서도 나오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명칭, 특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아홉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일곱번을 누가가 사용했다(본절, 35, 76;2:14:35; 8:28; 19:38).

⭕ 그 조상 다윗의 위(位) -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은 '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골 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시 89:29;132:11;사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성 경: [눅1:3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영원히(*, 아이오나스) - '시대', '영원' 등의 뜻인 '아이온'(*)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절), 혹은 '창세 이후로'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인다(55절;요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마 6:13;롬 1:25;히 13:8;유 1:25, H. Sasse, TDNT. I, 197-209).

⭕ 야곱의 집(*, 오이콘 야콥) - '집'에 해당하는 '오이콘'은 '오이코스'(*)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집',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마 3:9;롬 10:10-13)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Lenski, Geldenhuys, 이상근).

⭕ 왕 노릇 -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계 11:15).

⭕ 그 나라(*, 바실레이아스) - '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으로 가득한(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 무궁하리라(*, 우크 에스타이 텔로스) - '무궁'을 나타내는 '텔로스'는 '끝', '목표','정지' 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 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과 '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시 45:6;단 2:24;7:14;요 12:34;계 11:15).

성 경: [눅1:3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는 히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4:1;19:8;삿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라고 번역한다. 즉,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 카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12:46;막 3:31, 32).

⭕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절)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 경: [눅1:3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장,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절;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 능력(*, 뒤나미스) - 신체적, 지적, 영적 '힘' 혹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약의 여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개념 또한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메시야가 밀접한 연관을 나타낸다(시 110:2;사 9:5;미 5:5). 이러한 능력은 일차적으로 왕적 능력이지만 선지자의 능력도 포함된다(17절;24:19;미 3:8;행 7:12).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라는 점에서 능력있는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해 보이셨다(4:14, 36).

⭕ 덮으시리니(*, 에피스키아세이) -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피스키아조'(*)의 직설법 미래형이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출40:38의 영광의 구름(the shekinah glory)을 암시한다(Robertson). 또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산 관련 기사에서도 구름이 덮힌 사실이 묘사되었다(9:34;마 17:5;막 9:7). 이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 하나님의 아들 - 이 칭호는 예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막 1:11;9:7) 들린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의해(마 16:16), 귀신들에 의해(막 5:7) 그리고 로마의 한 백부장에 의해(막 15:39) 불리워졌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부자(父子) 관게를 암시하신 적이 많다(마 11:27;막 13:32). 하지만 예수는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다(요 20:17).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요 4:34;6:38;7:28;8:42;13:3) 행위와(요14:10) 영생 수여의 면에 있어(요 10:30) 하나이다(요 5:19, 30). 이런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야적 칭호임과 아울러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한다(요 3:16;히 1:2).

성 경: [눅1:3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네 친족 - '친족'에 해당하는 '슁게네스'(*)는 '동족' 혹은 '친척'이란 뜻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엘리사벳은 레위인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 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출 6:23;삿 17:7).

성 경: [눅1:3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없느니라 -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는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어인 '로고스'(*)에 비해 '계속적인' 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3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주의 계집종 - '계집종'을 뜻하는 헬라어 '둘레'(*)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의 단수 여성형이다. 이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非難)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절)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성 경: [눅1:3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마리아가...빨리 - 본절에 이르러 엘리사벳과 마리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요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의가 집중된다(43절). 여행길이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여행했는지, 누구와 함께 찾아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그녀는 엘리사벳을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여행길을 재촉해 '빨리' 갔다고 전한다. 아마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도 이적적 은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하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전에 마 1:18-25의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 산중에(*, 오레이넨) - 이 단어는 해안에 접해 있는 유대 산지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팔레스틴을 해안 지대, 평원 지대, 계곡 지대 그리고 고원 지대로 구분할 때, 사가랴의 집은 이 고원 지대에 위치했던 것 같다(이 상근).

성 경: [눅1:4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문안하니 - '에스파사토'(*)의 기본적 의미는 '껴안다'인데, 여기서 파생된 의미가 '...을 좋아하다', '...에게 경의를 표하다', '...를 환영하다' 등이다. 즉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H. Windisch, TDNT., I, 496-502, Lenski).

성 경: [눅1:4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아이가...뛰노는지라 - 임선 6개월에 복중(腹中)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이다(창 25:22).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의 태동(胎動)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포스'(*)는 이 구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태아(胎兒)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15에서는 예수로부터 영적 축복을 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벳에게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벳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난 바이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벳,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다(15절 주석 참조)

성 경: [눅1:4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 오랜 산중생활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중 마리아를 만난 데서 온 기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는 사실에 대한 감동 그리고 성령의 계시 등에 의한 복합적 감정의 표시로서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물론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마리아가 찾아와 인사를 하자 그 순간 계시에 의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Lenski).

⭕ 여자 중에...복이 있도다 -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 성령의 계시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본절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아람어적 표현으로서(삿 5:24;아 1:8) 마리아가 세상의 모든 여자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임을 가리킨다. 물론 마리아의 축복은 그녀의 복중에 든 아기 곧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 때문이지 마리아 자신의 특별한 장점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마리아를 성모로서 숭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4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내 주의 모친 -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한 곳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신성(Deity)을 인성(人性)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리아는 메시야요 주이신 예수의 어머니였지,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다. 한편, 본서에는 '주'(Lord)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공관복음에 이 명칭이 166번 나오는데 그 중 95회가 누가복음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기사를 보면 이곳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주'로 불리워졌다(76절 ;2:11). 여기서 이 말은 유대인들이 대망해 오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칭한다.

⭕ 내게...어찌 된 일인고 - 엘리사벳의 이 말과, 후에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신 예수께 한 말,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는 맥을 같이한다. 엘리사벳의 이 겸손함이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겸손으로 이어진다.

성 경: [눅1:4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네 문안하는 소리가...뛰놀았도다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서두에는 '이유'를 설명하는 헬라어 '가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엘리사벳 자신에게 임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 마리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복중의 태아도 기쁨으로 뛰어놀았다. 한편 자신에게 있었던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벳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이 낳을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자신의 아이에게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경: [눅1:4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믿은 - '피스튜사사'(*)는 원형이 '피스듀오'(*)로 단순 과거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느 한 순간만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온 여인임을 알 수 있다.

⭕ 주께서...이루리라 - 이 문장에는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문두에 있는 '호티'이다. 이것은 '...하는 것'(that) 또는 '...이기 때문에'(for because)라는 뜻이며 이 후자의 뜻으로 옮기면 더욱 생생한 의미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믿은 여인 곧 마리아가 복되다는 의미이다.

성 경: [눅1:4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마리아가 가로되 - 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이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역 성경에서 이 시의 앞 부분 첫단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삼상 2:1-10의 한나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한다. 플루머(Plummer)는 이 시를 한나의 시와 그 외에 다른 12개의 구약성경 구절들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 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해당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 찬양하며(*, 메갈뤼네이) - '위대하게 만들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문장 제일 서두에 놓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에 대해 본문 비평학상이나 문맥상의 이유로 마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러는 라틴어 사본의 이 부분이 엘리사벳의 노래로 되어 있어 이를 엘리사벳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삼상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상황과 자식이 없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던 엘리사벳의 상황이 유사하며, 노래를 지은 사람의 처지와 48절의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엘리사벳이 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한나와 엘리사벳의 처한 상황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8절의 말씀은 마리아에게도 역시 적합한 말씀이다.

성 경: [눅1:4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내 마음(*, 토프뉴마 무)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46절의 '프쉬케'(영혼)와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히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생의 중심부를 말하며 때로는 '영혼' 혹은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굳이 그 의미를 구분하자면 '프쉬케'가 개인의 생리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된 반면에 (벧전 2:11), '프뉴마'는 프쉬케보다 더 고등한 면을 나타냈 을 때 사용되었다(롬 8:16). 여기서는 이 두 용어가 별다른 의미의 구별없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바, 이는 반복을 통해 강조를 꾀하는 히브리식 관용법에 해당한다.

⭕ 하나님 내 구주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에 비교될 수 있다(합 3:18).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그 순간부터 원죄(Original Sin)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이 마리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따름이다.

성 경: [눅1:4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 계집종의...돌아보셨음이라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후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여기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식과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을 만한 별다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데 대한 감격과 겸손을 표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사 57:15).

⭕ 보라 이제...일컬으리로다 -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42절). 그리고 후에도 한 여인에게서 '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27). 또한 마리아는 성도들을 통해 대대로 복있는 여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비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소원을 간구하고 축복을 부탁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 경: [눅1:4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능하신 이(*, 호 뒤나토스) - '능하신 이'는 구약성경에서 '엘 쇄다이'(*)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7:1;욥 5;17;8:3등). 야훼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얻기 위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신 8:17, 18;시 46:1;86:16;사 41:10). 하나님의 능력은 변덕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일관된 당신의 뜻과 공의로운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사 5:16).

⭕ 거룩하시며(*, 하기온) - 구약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그분의 초월성을 뜻하며(출 3:4, 5) 또한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뜻한다(레 11:44;벧전 1:16). 그리고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의식상의 존엄성과 관련되어 쓰인다(출 29:1). 특히 신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인 혤라어 '하기오스'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轉嫁)받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뜻하거나(고전 1:30)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특성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롬 6:22;고후 7:1).

성 경: [눅1:5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토스'(*)는 '힘', '권능', 또는 '권능의 표현', '전능한 행위'등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인간의 힘(신8:17), 활의힘(시 76:3), 심지어 바다의 힘(시 89:9)에까지도 관련되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시 62:11;엡 1:19, 20;6:10;골 1:11;딤전 6:16)에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한편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여기서 마리아는 과거에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출 15:1, 22;단 4:24-27)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창 41:16;단 1:8-21)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天上)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 흩으셨고 - '디에스코르피센'의 원형 '디아스코르피조'(*)는 '흩다', '낭비하다', '탕진하다'의 뜻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원수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22:15).

성 경: [눅1:5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원어상 '권세 있는 자'는 '주권자', '통치자'를 뜻하며 '위'(位)는 '왕좌', '보좌'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압제자들을 그들의 보좌에서 쫓아내셨으며'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마리아는 본절과 다음절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징계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바로(출5:1-11), 고라와 그의 동료(민 16장), 하만(에6:6-14), 느부갓네살(단 4:24-37), 벧사살(단 5장), 아마샤(왕하 14:1) 그리고 웃시야(대하 26:16)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며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리라는 이 사상은 예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표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 5:3-6 주석 참조).

성 경: [눅1:5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주리는 자를...배불리셨으며 -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15:1-32), 당시의 특권층과 기득권자들에로의 부의 집중으로 인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임할 축복과 부자들에게 미칠 화에 관한 설교(6:20-2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등이 그러하며 본절 또한 그 중 한 예에 속한다. '배불리셨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플레센'(*)의 원형은 '엠피플레미'(*)로서 '가득 채우다', '만족케하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 넒은 용어이며 그릇에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음을 의미한다.

⭕ 부자를...보내셨도다 - 본문에서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속은 그만큼 텅비케 된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이 모든 공의의 실현이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에 마리아는 이 찬송시(讚頌詩)에서 계속 과거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성 경: [눅1:5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 '종'에 해당하는 '파이도스'의 원형 '파이스'(*)는 '어린아이'(소년, 소녀)란 뜻이며 혈통과 관련하여서는 '아들', 사회적 신분과 관련하여서는 '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택하심받은 언약 공동체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지닐수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러한 언약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긍휼'과 '도움'이 원칙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끊김으로써 소위 암혹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던중 이 암흑을 뚫고서 구원의 새로운 빛이 임하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메시야가 마침내 도래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의 대상은 이제 민족과 혈통의 구별을 초월한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된 것이다(롬 9:6;갈 3:16;6:16). 사실상 이방인 구원은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 등).

⭕ 기억하시되(*, 므네스데나이) - 이 말의 헬라어 원형 '밈네스코'(*)는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등의 뜻으로서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창 9:15이하;출 2:24).

성 경: [눅1:5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우리 조상에게...영원히 하시리로다 - 마리아의 찬양은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과(창 12:3) 이삭과(창 26:3, 4) 야곱에게(창 28:14) 맺으신 약속대로 언약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들어 장래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하시리라는 강한 확신(確信)을 표명하고 있다.

성 경: [눅1:5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마리아가...돌아가니라 - 36절에 의하면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이 이후에 마리아가 방문하여 3개월을 함께 보내었으니 엘리사벳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마리아가 3개월이나 함께 있다가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지 않고 돌연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해산을 보고 돌아갔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않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해산 이전에 돌아갔을 경우, 그 이유 또한 확실히 제시할 수 없다. 여하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으로 요셉 과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게 된다(2:4).

성 경: [눅1:5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엘리사벳이...낳으니 - 앞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본절은 5-25절에 이어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성 경: [눅1:5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함께 즐거워하더라(*, 쉬네카이론 아우테) - 지속적인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엘리사벳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으로 옮아갔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앞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하다.

성 경: [눅1:5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할례(割禮)하러(*, 페리테메인) -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는데,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였다. 1.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 2.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삼상 17:26). 3.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 4. 신약 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등.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다(신 10:16;30:6;렘 4:4;겔 44:7).

⭕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하더니 -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다(59절;2:21).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곱이 이스라엘로(창 32:28), 혹은 사울이 바울로(행 13:9) 칭하심받게 된 때는 그들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릇 4:17)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했으며(창 2:19, 20)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와 동일시되었다(삼하 12:28).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사 4:1),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함받다'라고 표현되었다(사 63:19).

성 경: [눅1:6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아니라 요한이라 - 엘리사벳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 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는 '정말로, 절대로 아니다'는 뜻이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는 그녀가 남편 사가랴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다(Meyer, Bengel). 그러나 그보다는 엘리사벳이 필담(筆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받아 알았을 거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Bruce, Plummer, Lenski). 원문에는 '우키' 다음에 바로 '알라'(*)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이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오히려'라는 뜻이며 부정어 '우키'와 함께 사용될 때는 '정반대로'의 뜻을 나타낸다. 한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2.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64절). 3.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다(3:10-14;마 3:5-6).

성 경: [눅1:6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저희가 가로되...이름한 이가 없다하고 -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롬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지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15절)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성 경: [눅1:6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그 부친께 형용하여...물으니 -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20절 주석 참조). 22절에서 누가는 '사가랴가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말하지만 사용된 단어 '코포스'(*)는 '벙어리'뿐만 아니라 '귀머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7:22).

성 경: [눅1:6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서판(書板) -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little-tablet)으로서 그곳에 첨필(尖筆)로 글을 썼다.

⭕ 그 이름은...기이히 여기더라 -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라'였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것은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가랴가 귀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벳과 주위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벳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 경: [눅1:6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이에 그 입이...찬송하니 - 사가랴의 믿음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sign)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다. 아마 그는 장장 10여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이다.

성 경: [눅1:6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다 두려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는 '공포'가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이다(12절 주석 참조).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진 일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본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다. 유대는 특히 '산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다(헤브론의 북쪽).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다. 한편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성 경: [눅1:6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마음에 두며 - 헬라어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이다(47, 51절 주석 참조).

⭕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 이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은 구절 '주의 손'이 이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의 손(*, 케이르 퀴리우) - 구약은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왕상 18:46).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것은 곧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한다.

성 경: [눅1:6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본장 원문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관사를 계속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을 계속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 역시 성령의 세밀하신 역사 아래 진행되어질 것을 시사하고 있다(15,41절 주석 참조).

⭕ 예언하여 가로되 - 예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지를 엿보게하는 구절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이하로부터 전개되는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는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역과 역사하심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훈과 예언의 형식을 빌어 표현했다. 내용상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는 메시야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축가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찬가와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구절을 엮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시 105:8, 9;106:45;111:9;사 42:7;렘 11:5;겔 29:21).

성 경: [눅1:6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찬송하리로다(*, 율로게토스) - '율로게토스'란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을 베푸신 사람에게(42, 45절에서처럼 '복되도다'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64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68-79절은 찬송의 말씀이자 축복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Liefeld).

⭕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이스라엘이란 말은 17절과 77절에서 언급된 '주의 백성'과 같은 말이다(54절 주석 참조).

⭕ 돌아보사(*, 에페스케프사토) - 이 단어는 원형이 '에피스케프토마이(*)로서 3인칭 과거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도움을 주시기 위해 살펴보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 개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보사 그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는 사상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여러 의미 가운데는 '방문하다', '탐구하다', '찾아내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방문하시거나', '돌아보신다'는 의미는 7:16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영적인 의미가 강화된다(H.W.Beyer, TDNT., II, 599-622)

⭕ 속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트로시스'(*)는 '구속', '구원', '해방', '자유' 등의 뜻이며 그 동사형인 '뤼트로'는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이다. 신약 시대의 한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가 '속죄금을 치르다'는 전문적 법률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한 특정인이 죄인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인생의 죄값을 십자가상의 저주로써 대신 치르시고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해내신 것을 나타낸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값을 치르고 구원함', '구속'(자)의 뜻인 '아폴뤼트로시스'(*)가 주로 쓰인다(21:28;롬 3:24;8:23;고전 1:30;엡 1:7등). 한편 구속의 개념은 신.구약을 통털어 성경 전체에 폭넓게 깔려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구속(속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파다'(*)와 '가알'(*)의 번역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속건(贖錢)으로 돈 지불을 요구할 때 사용했으며(출 13:2, 11-16),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출 21:8). 후자는 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땅을 회복하는 것이나(레 25:26;룻 4:4) 서원한 것을 도로 물리는 것을 말한다(레 27:13). 특히 이 말을 신학적 내지는 교리적 의미로 이해할 때, 구약에서의 구속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다.

성 경: [눅1:6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구원의 뿔 - 근동 지역에 사는 뿔가진 짐승들은 매우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단 8:3)과 왕권(단 7:23;8:20-22)을 상징하는 것이니 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야를 가리킨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일종의 힘으로 생각한듯하며, 구약적 개념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이 구원자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 그 종 다윗의 집 - '집'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족'과 '종족'으로서의 뜻을 나타내기도한다(33절 주석 참조). '다윗의 집'은 27절과 2:4에서처럼 가문이나 자손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이 사가랴 당시에 유대 전역에 있던 메시야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와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위협에서 건져내었던 다윗 왕가 중에서 나타난다는 사상이 유대 민족 사이에 팽배했었고 또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종 다윗'이라는 표현은 오실 메시야의 선재성(先在性)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처럼 위대했던 다윗도 그의 종이었음을 보아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위치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은시 132:17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메시야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눅1:7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거룩한 선지자의...말씀하신 바와 같이 - 이 문구는 단순한 삽입구가 아니라 히 1:1과 같이 예수의 메시야 역활이 구약에 기원을두고 있음은 물론 구약의 지지를 받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문구이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서 등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된다(마 1:18-2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과 그 성취'의 도표 참조).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에서의 '선지자'라는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선지자라기보다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iefeld Geldenhuys).

성 경: [눅1:7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원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드로스'(*)가 형용사로 쓰이면 '적개심 있는', '미워하는'이란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이 대부분 민족적이고 정치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가랴는 원수라는 말을 로마 세력 혹은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에 빗대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축가가 구속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측면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원수'는 곧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단과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마 13:39).

성 경: [눅1:7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긍휼히 여기시며...언약을 기억하셨으니 - 본절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언급된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성으로 인하여 오래전에 이미 파기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73절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칭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도 아담(창 3:15), 노아(창 6:18), 이스라엘 백성(신 29:1-30:20), 다윗(삼하 7:5-16) 등과 더불어 구속사의 중요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하사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심과 아울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고 또한 성취되어졌다.

성 경: [눅1:7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창 22:16-18의 내용으로서 그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고 하는 정치적 해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소위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맹세'는 72절의 '언약'과 더불어 교차 대구법적으로 구성된 본 축가의 중심 위치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에서 언약과 맹세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밝혀주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시 106:45).

성 경: [눅1:7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원수의 손 - 71절 주석 참조.

⭕ 건지심을 입고(*, 뤼스덴타스) - 이 단어는 원형이 '뤼오마이'로서 과거 수동형으로 쓰였으며 '글어내다', '구출하다', '구원하다'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 세계의 불멸의 신들(Gods)과 또 그들과는 대조되는 유한한 인간 존재들과 같이 존재론적 법칙들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느 9:8), 자기 이름을 위하여(시 79:9),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바로 그의 이름이 구원자이시다(사63:16). 본절과 75절 내용은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따라 언약을 주권적으로 성취시키시는 이유 혹은 목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 또한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알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77절) 더욱 확연해진다. 한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 가운데에서의 보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편에서의 믿음 혹은 신뢰가 요구된다(시 22:4, 5;34: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아끼지 않으신다(W Kasch, TDNT, VI. 998-1003).

성 경: [눅1:7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종신토록(*,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헤몬). 헬라어 '파사스'는 원형이 '파스'(*)로서 복수 목적격으로 쓰였으며 '모든', '온', '모두'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헤메라스'는 원형 '헤메라'(*)의 복수 목적격으로 '날', '낮', '때'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우리의 모든 날들' 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생을 의미한다. 주의 앞에서(*, 에노피온 아우투). 헬라어 '에노피온'은 '...앞에', '...의 목전에', '...가운데'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문구의 의미는 '그의 목전에서' 또는 '그의 면전에서'가 된다. 이는 제의적인 용어로서 이 어구에 담긴의미 가운데는 제사장적 섬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된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Lenski).

⭕ 성결과 의(*, 엔 호시오테티 카이 디카이오쉬네) - '성결'에 해당하는 '호시오테티'는 원형 '호시오테스'(*)의 단수형이다. 이 단어는 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신약성경에서 '거룩함과 의로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2회 나타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하며, 엡 4:24에서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킨다. '의'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사 5:7)로 사용되었으며,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로는 '성결과 의'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시 5:8, 9).

성 경: [눅1:7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 중의 하나이다(32절 주석 참조). 그리고 '선지자'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선지자보다 큰 자(마 11:11)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시대적인 위치의 면에서, 그는 신약과 구약의 가교적(架橋的)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즉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2) 사역의 내용면에서,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구약에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평탄케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뿐이었다. 한편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서 표현이 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서 표현이 되는 것은 현격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서로가 중요하고도 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 앞서 가서...예비히여 - 이 말씀은 사 40:3;말 3:1;4:5 말씀의 성취이며, 이 구약 말씀과 비교할 때 누가는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1:17)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선구자였던 것이다(3:3-6;마 3:1-6).

성 경: [눅1:7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주의 백성 - 17절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 54절 '그 종 이스라엘' 주석 참조.

⭕ 죄사함(*,아페세이 하마르티온) - '사함'에 해당하는 '아페세이'는 '용서', '해방', '탕감'의 뜻을 나타낸다. 성경상에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죄사함'이라는 말이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의 대속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므로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다. 그러나 흠없고 완전한 희생 양이신 예수는 단 한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죄사함을 이루셨다(히 9:25, 26). 또한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치도 않으심으로써(사 43:25), 죄에 대한 앙금이나 미련을 갖지 않으시며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시지 않으시며(시 103:12;미 7:19), 완전하고도 무한한 죄사함을 이루신다(Lenski).

⭕ 구원을 알게 하리니 - 구원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행되어 나온 '죄사함'이다. 즉 회개와 함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넘어선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며 참생명을 누리도록 피조되었으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가 둘 사이를 갈라 놓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오직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기 때문이다(사 59:1,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요한은 후에 그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3:3).

성 경: [눅1:78,7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돋는 해가...인도하시리로다 - 캄캄한 어둠을 물리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관한 이미지는 이미 말 4:2에 나오며 사 9:2;60:1에는 '빛'으로 그리고 민 24:17에는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로 등장한다.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케 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 임하여(*, 에피스케프세타이) - 이 단어는 68절에서는 '돌아보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야의 도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뜻함을 암시한다.

⭕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 이 구절은 사 9:2을 인용하고 있다(마 4:16). 이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제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1) 전쟁이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14:32;행 12:20), (2) 하나님과 인간간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화목(고후 5:19), (3) 심령의 평화(골 3:15)등을 의미한다. 이 평강은 신.구약을 통털어 풍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있다. 특히 본절에서 메시야와 평강의 길은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사 9:6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언된 바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였다(롬 14:17).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끼치노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14:27).

⭕ 인도하시리로다(*, 카튀뒤나이) - 원형 '카튜뒤노'(*)는 '곧게 하다', '똑바로 하다', '바로 안내하다' 등의 듯을 나타낸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 하는 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서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평강의 길은 주께서 가시는 길이며 그분께서 예비하신 길이다. 구원의 빛이 길을 잘못가지 않도록 우리의 앞을 비추어 평강의 길로 나가게 한다. 한편 이렇게 하므로써 사가랴의 찬가는 끝을 맺는다. 사가랴 찬가는 첫말이 '찬송하리로다'로서 시작되어 '평강'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는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과 '평강'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찬송을 드림으로써 그분과 인격적 교류를 갖고 그의 구원의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평강을 얻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시는 것은 평강이다.

성 경: [눅1:8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자라며(*, 유크사넨) - 신체적 성장을 뜻하는 말이다. 요한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나타낸다.

⭕ 심령이 강하여지며 -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이 성장 과정은 예수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고(2:40, 52), 어린 사무엘이 성장할 때와도 유사하다(삼상 2:26).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린아이의 자라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는 것이다.

⭕ 빈 들에 있으니라 - 혹자는 요한이 사해(死海)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에세네파(Essenes)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별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요한은 에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야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했다. 또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세네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아울러 요한이 민족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집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에세네인들은 개인 구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또한 쿰란(Qumran)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한다(3:2, Geldenhuys, Liefeld).

성 경: [눅2: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이때에 - 2장을 시작하는 이 말은 1:80의 언급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 가이사 아구스도(K* A ,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 세바스토스, 행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 영(*, 도그마) -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이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그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행 11:28;17:6).

⭕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는 '등록하다', '기록하다'(2:3, 5;히 12:23)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 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눅2: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구레뇨 -B.C. 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다.

⭕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 :27)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 첫 번 한 것이라 -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행 5:37과 요세푸스의 저서(Antiq. , 26.1)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번째'로 '시리이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할 수 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문의 기록의 역사성이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리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써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되었을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성 경: [눅2: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모든 사람이...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1:1-4)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눅2: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다윗의 집 족속...다윗의 동네로 - '집'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창 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성 경: [눅2: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으며, 또한 그가 왜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마 1:24).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 까지는 분명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은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이 정혼은 항상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한편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그 장거리(약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길)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요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시 136:8-26).

성 경: [눅2: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이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한편 이 구절에서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인지는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는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다. 12월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Epiphania manifestation, 1월 6일)에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날로 지킨다.

성 경: [눅2: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맏아들 -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여러 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8:19, 20;마 12:46, 47;13:55, 56;막 3:31, 32;요 2:12;7:3, 5, 10;행 1:14).

⭕ 사관(舍館)(*, 카탈뤼마) - 이 단어는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22:11) '객실'(guest room)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22:12에는 그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판도케이온'(*, '주막', 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르다(10:34).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보잘 것없는 가족에게 허락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 있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 구유(*, 파트네) - 신약에서 이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7, 12, 16절;13:15).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 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계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1, 11, 14절), 아무데도 머리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한다(9:58). 어쨌든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성 맞춤이었다. 그리고 마굿간밖에 내어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H. Hengel, TDNT. , 49-55).

성 경: [눅2: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자들이 하는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져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요 1:29) 넌지시 암시한다. 한편,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시 23:1;사 40:11;렘 23:1-4;히 13:20;벧전 2:25;5:2).

⭕ 밤에...지키더니 - '지키더니'에 해당하는 '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의 뜻인 '퓔라쏘'(*)의 복수 현재능동태형이다. 그리고 '밤에'에 해당하는 '테스뉴토스'는 '밤 새워'란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귀절은 밖에서 여러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하는 일련의 행동을 묘사한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했다. 한편 본문상으로는 예수가 어느 철에 태어났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느 철에 태어나셨나 하는 점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그 자체이다.

성 경: [눅2: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주의 영광 - '영광'(*, 돝사)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양식 중 하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독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한다(9절;9:31, 32;행 22:11;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리워 지셨고(딤전 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신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진다(2:14;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사 40:5)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요 1:14;2:11;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요 13:31).

⭕ 두루 비추매(*, 페리엘람프센) - 이 단어는 '페리'(*, '주위에')와 '람포'(*, '비취다')의 합성어로서 '빛에 완전히 쌓인 상태'를 뜻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 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출 24:16;왕상 8:10;사 6:1-3;행 7:55).

성 경: [눅2:1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온 백성 -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擴大)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 좋은 소식을...전하노라(*, 유앙겔리조마이) - 이 단어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바사르'(*)에 해당한다.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을 나타냄은 물론이나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삼하 4:10;왕상 1:42).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사 40:9; 41:27;52:7). 한편 본문에서의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

성 경: [눅2:1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이다.

⭕ 구주(*, 소테르) - 헬라어 '소테르'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행 5:31;엡 5:23;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삼하 22:3;시 49:26), 예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한다.

⭕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 명칭이며, '주'(헬, 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3:11;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성 경: [눅2:12]

주제1: [8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강보에 싸여...표적이니라 -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부터 보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다. (1)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2)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한편 겔 16:1-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거니와, 예수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이다.

성 경: [눅2:1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허다한 천군이...찬송하여 - 두 세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천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티아'(*)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체(henvenly bodies)를 가리키나(느 9:6), 여기서는 일군(一群)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시 103:21).

성 경: [눅2:1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이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윈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요 14:9). (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0). (3)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 땅에서는...평화로다 -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 NIV) 것은, (1) 그리스도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된다(요 14:27). (2)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다.

성 경: [눅2:1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하늘로 올라가니 - 누가는 천사들이 단순히 사라졌다고 언급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자세히 묘사한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다(24:51;행 1:10). 물론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수직 상승의 뜻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처소 곧 하늘 나라는 이 우주속의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의 승천장면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지각 가능 상태로부터 지각 초월 상태에로 변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 이제(*, 데) - 강조를 위한 접두사로서 특히 명령형 문장과 더불어 사용되며 여기서는 긴급성을 강조한다.

성 경: [눅2:1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빨리 가서 -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장면을 연상시킨다(1:39).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양떼를 두고 마리아처럼 서둘러 찾아 나선다. 목자들이 양떼를 다른 동료 목자들에게 맡기고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존에 맡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결단이 요구된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믿음과 겸손하고 완전한 섬김으로써 주를 찾을 때에 주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인도자 되신다.

⭕ 찾아서(*, 아뉴란) - 원어상으로 '끊임없이'(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다'라는 뜻이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렇게 노력하여 찾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강의 왕 아기 예수를 발견한 것을 말한다.

성 경: [눅2:1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보고...말한 것을 고하니 -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굿간에 모여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고, 목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된다.

성 경: [눅2:1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기이(奇異)히 여기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는 '이상히 여기다', '놀라다'는 뜻 외에 '찬양하다'는 뜻도 내포한다. 즉 이 말은 초자연적인 혹은 신적인 사건과 접한 자의 외경스러운 감동을 시사한다. 누가는 메시아에 대하여 선포하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는데 본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리아와 요셉도 시므온이 예수께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으며(33절) 47절에 보면 성전에서 답변하는 어린 예수의 말을 들었던 모든 이들이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또한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수가 사 61장의 어떤 부분을 읽고 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4:22;8:25;9:43;11:14, 38;20:26;24:12). 이외에도 사람들이 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을 설명해주는 여러가지 어휘가 사용되었다(4:15, 36;5:26). 사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충만히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롬 1:20).

성 경: [눅2:1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지키어 생각하니라 - '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 '쉰테레오'(*)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의 주격 분사 현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성 경: [눅2:2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목자가...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 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5:25;7:16;13;17:15; 18:43;23:47). 그리고 본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성 경: [눅2:2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 성경에는 아기가 출생하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지어진 예가 여러번 나온다.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요한(1:13,60-63), 예수(마 1:25)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한편 예수라는 이름이 명명된것은 마리아나 요셉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아기 탄생 전에 천사가 지시한 바를 따른것 뿐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이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진행되어온 일이라는것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 역시 성령께서 진행시켜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 경: [눅2:2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결례(潔禮)의 날 -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명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찬(레12:1-5)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Marshall). 여기서 아기 예수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다(히 3:1).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성 경: [눅2:2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주의 율법에...아기를 주께 드리고 -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규정하였다(출 13장;22:29;34:19;민 3:11-13;40-51;8:16-18;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슷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시다(히 4:15). 따라서 예수가 주께 바쳐진 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한다(딤전 2:5). 실로 예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이었다.

성 경: [눅2:2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둘로 제사하려 - 누가는 계속해서 산모의 정결예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앞서 기술했듯이 레 12장에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들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눅2:2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시므온 - 이러한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구절의 시므온은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이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으며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메시야가 바로 그의 위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경건된 삶을 준비하여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마 25:1-13).

⭕ 의롭고 경건하여 - 1:5, 6에서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스벱이 소개될 때처럼 의로음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는 '공정한', '정의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신정 사회(神政社會)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로운' 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율라베스'(*)는 '경건한', '독실한' 등의 의미외에 '주의', '신중함' 혹은 '두려워하다', '경계하다' 등을 뜻하며,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된다. 따라서 시므온이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 이스라엘의 위로 -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받는 위로를 가리킨다(사 40-55장). 말라기선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소위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우리는 눈앞에 전개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透視)하는 신령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눅2:2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논'(*)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본 구절에서 이 단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메시야를 대망하며 그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을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보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다.

성 경: [눅2:2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성령의 감동으로(*,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성 경: [눅2:2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찬송하여 - 아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시므온은 그를 알아보고 안아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시므온은 율법에 따라 결례와 번제와 속전을 드리러오는 많은 사람, 많은 아이 가운데(그 중에는 품위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 출신의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를 보자 곧 그가 메시야임을 알게되었다. 이는 오직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에 분명하다. '찬송하여'에 해당하는 '율로게센'(*)은 '좋게 이야기 하다', '축복하다'(bless, KJV) 등의 뜻을 나타낸다.

성 경: [눅2:3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시므온은 히브리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한 특징으로서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1:69,71,77)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embodied)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현될 인간구원의 역사를 예견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 사역은 벌써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던 메시야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야를 맞이함으로 신약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序言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갓난아기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시므온이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나타내어야 하겠는가!

성 경: [눅2:3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만민 앞에 -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세상 끝에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세게 만방에로 확장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한편 이방인의 구원 혹은 복음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사실들 중 하나이며(15장),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었다(사 43:5,6;45:6;49:12;미 4:1,2;슥 8:20-23). 이점에 관해서는 마8:1-17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관계'를 보라.

성 경: [눅2:3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그의 온전히 의로우신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시 27:1;요 1:5;딤전 6:16) 또 하나님의 계시와(시 34:5) 생명의(요 1:4) 상징으로서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고 되어있다(사 42:6).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참빛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障壁)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비추이신다(요 1:9).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고(마 5:14)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5:16).

⭕ 주의 백성...영광이니이다 - 예수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세력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특권을 바로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메시야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로 내몰아 버렸다.

성 경: [눅2:3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기이히 여기더라 - 마리아와 요셉이 기이히 여기며 놀란 것은 단지 시므온의 찬송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보다는 천사들, 목자들, 동방박사들,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 등 사방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아기 예수에 관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부처는 애초 그들에게 임했던 천사들의 계시를 거듭 상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깊게 다져 나갔을 것이다.

성 경: [눅2:3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많은 사람의...세움을 입었고 - 이 구절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는 반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석이 되기도 하는 돌(사 8:14;28:16)에 관한 사상을 반영한다. 예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며 멸망에 이르게하실 것이요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초석(礎石)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는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해와 곤욕을 치러야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받으셨던 각종 모욕과 비방(4:29;22:63-65;23:11, 34-39)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시 32:6-8;사 50:6;53:4-12)임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의 이러한 예언은 엘리사벳의 노래나(:42-45) 사가랴의 예언(1:68-79)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과는(2:10-14) 반대로 예수께 드리워질 어두운 면을 증거한다. 예수의 영광에 관한 기쁨의 증거와 더불어 이러한 비탄스러운 증거는 앞으로 전개될 메시야적 사역의 진면목이 어떠한지를 암시해 준다.

성 경: [눅2:3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칼'을 나타내는 헬라어 '롬파이아(*)는 드라키아인들의 대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큰 칼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1:42) 곧 메시야의 어머니라는 영광과는 또 달리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다. 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나사렛에서 함께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이 가장 행복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과 그의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유대교 지도가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을 띠어 갔으며, 이로 인해 혈육의 정을 떨칠 수 없었던 마리아로서는 예수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 드러내려 함이니 - 여기서 헬라어 '아포칼뤼프도신'(*)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워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성 경: [눅2:3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는 지파명까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창 30:13).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벧론 포로지로부터 귀환(歸還)한 자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 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창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히브리식으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에 해당한다(삼상 1:2). 즉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삿 4:4)와 훌다(왕하 22:14)와 같이 휼릉한 여성 예언자였다.

성 경: [눅2:3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과부 된 지 팔십 사 년이라...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야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년 동안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다.

성 경: [눅2:3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하나님께 감사하고 -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는 '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백하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1:68)을 노래하고,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절)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사 52:9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롬 3:24;엡 1:7;골 1:14).

성 경: [눅2:3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주의 율법을 좇아 -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차례 강조되고 있다. 22절(모세의 법대로), 23절(주의 율법에 쓴 바), 24절(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절(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갈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 갈릴리로...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40, 52).

성 경: [눅2:4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 -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눅2:4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그 부모가 해마다...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 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다(신 16:16). 그러나 바벧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수가 있다. 어린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져 갔던 것이다.

성 경: [눅2:4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그 날들을 마치고 -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다(출 12:15;레 23:6-8;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 아이 예수는...알지 못하고 -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행했을 것이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서로가 착각한 사이에 하루가 끝나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碩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게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해맨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계속해서 염두에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2:4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동행 중에...아는 자 중에서 찾되 -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저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아 나섰다.

성 경: [눅2:4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찾으면서 - 헬라어 '아나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마리아 부처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한다.

성 경: [눅2:4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다.

⭕ 선생들 중에 앉으사...묻기도 하시니 -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한다. 대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한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된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외경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다. 아무튼 어린 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성 경: [눅2:4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듣는 자가 다...기이히 여기더라 - '기이히 여기더라'(*, 여시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는 '이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성 경: [눅2:4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너를 찾았노라 -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먼저 다가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마리아 부처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 대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성 경: [눅2:4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어찌하여...알지 못하셨나이까 -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씀이다. 이는 혈육상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다. (1) 혈육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 순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8:29;신 33:9;마 6:33). (2) 예수는 자신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을 강조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 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간의 양자 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 내 아버지 집에 -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23:46;마 11:25;막 14:36;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된다. New KJV는 본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라고 옮겼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성 경: [눅2:5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양친이...깨닫지 못하더라 -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깨닫지 못함이 훨씬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눅2:5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예수께서...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는 이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이 죽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한 것으로 생각된다.

⭕ 그 모친은...마음에 두니라 - 1장의 주석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가는 이 복음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하다. 그녀는 여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얘기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말'이란 본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한다.

성 경: [눅2:5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예수는...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하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빌 2:6, 7). 한편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된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인 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鑑)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다(행 2:47).

성 경: [눅3: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디베료 가이사가...열 다섯 해 - 이 구절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소 다르다. 그것은 디베료 가이사의 통치 연대 때문이다. 디베료는 전임 황제이자 양아버지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A.D. 14년 8월 19일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즉위했다.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왕위에 즉위한 때부터 연대를 계산하지 않고 통치한 햇수에 의해서 연대를 계산했다. 율리우스력에 의하면 디베료는 A.D. 28년 8월 19일에서 12월 사이에 즉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 다섯 해'는 로마의 일반적인 연대계산법으로 계산할 때 A.D. 28년 8월에서 A.D. 29년 8월까지가 된다. 그러나 안디옥 태생인 누가가 시리아의 연대 계산법(군주의 통치 연대를 셀루시드(Seleucid)시대부터 사용해온 방법에 따라 계산하는 법, 통치의 기원을 9, 10월로 잡음)을 따랐다면 '열 다섯 해'는 A.D. 27년 9월 21일부터 A.D. 28년 10월 8일까지가 된다. 그렇지만 저자 누가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적 배경이나 이 책의 독자들을 고려하건대 로마의 계산법을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본디오 빌리도 - 이 빌라도는 A.D. 26-36까지 유대의 제5대 총독으로 있었다. 이 '총독'(*, 헤게모뉴온토스)은 고대의 로마 지방 장관(procurator)을 가리킨다.

⭕ 헤롯 - 이 헤롯은 보통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로 알려졌다. 그는 아켈라오의 친형제이며 헤롯 대제의 아들이다. 헤롯 안디바스는 아켈라오의 유언에 의해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지내다가(B.C. 4-A.D. 39) 고울 지방의 리용으로 추방당하여 폐위된다(Hendriksen). 사복음서 상에 나타나는 헤롯은 대부분 안디바스를 가리킨다.

⭕ 빌립 - 빌립 역시 헤롯대제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이다(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아님). 그는 팔레스틴의 북서부 지방 이두래(Iturea)와 드라고닛(Traconitis ; 바위돌로 된 마당이라는 뜻)을 B.C. 4 - A.D. 33/34까지 통치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빌립은 훌륭한 인격자이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왕이라고 한다. 그는 바네아스를 고쳐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명하고 벳새다를 고쳐 벳새다 쥴리아스로 명명했다.

성 경: [눅3: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안나스와 가야바 - 안나스는 A.D. 6년로마 황제 구레뇨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A.D. 15년 로마 황제 발레리우스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 해임되었다. 안나스가 해임되고 파비(Pabi)의 아들 이스마엘과 엘르아살(Eleazar)과 가미데스(Gamithes)의 아들 시몬(Simon)이 A.D. 18-19년 사이와 A.D. 25-26년 사이에 그 뒤를 바로 계승했다. 그리고 그후 안나스의 조카 요셉이 그 뒤를 계승했는데 이 대제사장이 바로 가야바(Caiaphas)이다(Jos. Antiq. 20, 198). 가야바는 A.D. 18-36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직(민 35:25)이었으나 로마인들에 의해서 정치적 목적에 맞게 통제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계속해서 종신직으로 여겼다. 따라서 유대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에서는 로마정부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推仰)되는 대제사장과 로마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이 함께 남아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제사장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Jeremias, Jerusalem, 157). 안나스는 봉직 기간이 길었고 권력과 영향력이 산헤드린에 강력하게 미쳐, 그는 이스라엘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바는 또한 안나스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안나스가 행사했다(요 18:13-29).

⭕ 빈 들 - 세례 요한은 황량하고 거친 빈 들에서 기거했다(1:80). '빈 들'은 유대의 황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쪽의 유대산지와 동쪽의 사해 그리고 요단 저지대 사이에있는 기복이 심한 지형을 일컫는다. 이 지형은 석회질로 이루어져 땅의 굴곡이 심하고 자갈과 암석 조각이 많이 있다. 특히 이곳은 광야 특유의 잡목들이 많고 독사들도 많이 있다. 이 '빈 들' 북쪽으로 길게 뻗으면 요단강과 합류하게 된다(Hendriksen). '빈 들'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애굽을 탈출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방랑했던 장소로 연상되는 곳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빈 들'(광야)이라는 말을 들을 때 종말과 연관된 것을 연상하기도 한다(사 40:3;호 2:14). '말씀'을 나타내는 헬라어 '레마'(*)는 실제로 말하여진 말씀(the actual words spoken)을 의미하는 바 세례 요한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였다. 결국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사역을 시작하게도 하셨지만 사역을 끝마치게도 하실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이다(계 22:13).

성 경: [눅3: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요단 강 부근 - 하나님은 수세기 동안의 침묵을 깨시고 요한에게 임하여 당신의 말씀을 대언케 하셨다. 그런데 요한이 주로 요단 강변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은 '빈 들'의 특성상 땅이 메마르고 바위가 많으며 물이 귀하였으므로 세례를 베풀기에 적합한 물을 찾아 요단강으로 나왔기 때문이다(요 3:22). 한편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요한은 한 곳에서만 머물러 전도하지않고 각 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저자 누가 역시 다른 복음서 저자보다 요한이 순회 전도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한다.

⭕ 회개(悔改)의 세례 -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의 동사형 '메타노에오'(*)는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라는 뜻이다. '회개'는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으로서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불세례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부언컨대, '회개의 세례'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가 죄사함을 얻는다는 약속의 구체적인 표시였다. 왜냐하면 그 세례는 바로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기 때문이다(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 참조). 그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권고는 종말론적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긴박성을 보여준다.

성 경: [눅3: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 세례 요한의 출현과 그의 사역은 사 40:3 말씀의 예언 성취이다. 이 이사야서의 인용은 사복음서가 모두 공통적이다. 그러나 누가만이 사 40:3-5 전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쿰란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광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로서 사 40:3을 제시했다. 그들은 광야에 격리되어 율법을 계속해서 연구함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와 마찬가지로 누가는 사 4-:3이 분명히 세례요한의 사역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책'을 나타내는 헬라어 '비블로스'(*)는 구약의 개별적인 낱권의 책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비볼리온'(*)은 '두루마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평탄케 하라 - 이 인용 구절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실 구속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바벨론과 유대 땅 사이에는 시리아 사막이 있다. 이 사막을 통과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게 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구속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그 곳에 길이 닦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일을 전담할 하나님의 사자가 행차를 위한 준비를 외치게 된다. 따라서 '...예비하라...평탄케 하라'라는 이 말은 좀더 정확한 의미에서 위대한 자유와 평강의 시대를 도래케 할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게 될 때 세례 요한은 당연히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하나님은 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 모든 백성들을 준비시키고 그를 맞을 채비를 갖추도록 촉구하신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했다'고 외쳤다(사 59:1, 2). 그렇다면 주의 오심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죄이다. 왕의 행차를 위해 왕의 사자가 먼저 길을 예비하고 평탄(平坦)하게 하듯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고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했다.

성 경: [눅3: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모든 골짜기가...평탄하여질 것이요 - 은유적 표현으로, 누가는 세례 요한과 메시야 예수를 잘 대비해 메시야의 탁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고대에 왕의 행차가 골짜기나 높은 산, 굽고 험한 길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행로를 평탄하게 만들었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마샬(Marshall)은 '평탄하여지다'는 말이 교만한 이들의 낮아짐을 암시하며 '굽은'이라는 말은 비뚤어진 인간들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렌스키(Lenski)는 '굽은'과 '험한'이라는 말에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비유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즉 '굽은'은 히브리적 표현으로는 '속이는'(*, 아크자브)을 뜻하고, 이것을 곧게 하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정의'와 '공정'(*, 미쇼르)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험한 곳'은 모든 종류의 악이 모여 있는 곳(*, 르카심)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풀핏(Pulpit) 주석에서는 낮추어야 할 산을 바리새인들의 교만으로 비유하고 있고 메워야 될 골짜기들을 사두개인들의 도덕적.종교적 무관심(無關心)으로 비유한다. 결국 이 비유들을 종합해 보면 이 구절은 인간의 죄된 심성의 교만과 거짓과 불의와 불신 등을 회개하고 정의롭고 순결한 심성으로 구속의 메시야를 맞이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 경: [눅3: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 누가는 이 부분을 70인역(LXX) 사 40:5 에서 인용하였는데 그 전반부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란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위에서 모든 육체(즉 유대인들만이 아닌 세계 만민)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는 것은 메시야로 인한 세계적 구원의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incarnation)사건 및 공생애로써 구체화되며, 사도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온 세상의 모든 육체를 향해 그 복음의 소식이 계속 전파되고 있고, 궁극적으로 마지막날 큰 구원에서 그 절정을 맞이할 것이다(Lenski). 이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을 현저히 드러내보이는 본서의 신학적 특징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성 경: [눅3: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무리 - '무리'를 가리키는 헬라어 '오클로스'(*)는 '백성'을 가리키는 '라오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리펠드(Lifeld)는 '오클로스'가 '라오스'와 달리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것을 말한다고 한다. 누가는 여기서 이 무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 3:7과 요 1:19, 24은 그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다고 밝힌다.

⭕ 독사의 자식들아...진노(震怒)를 피하라 -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지자의 경고성 선포처럼 매우 날카롭고 엄하다. 이 설교는 마 3:7-10과 동일하다. 여기서 '독사'는 사단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악인(시 58:3-5;사 59:5)과 메시야를 적대하는 자(시 91:13)에 대한 표현이다.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기는 했지만 진실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와 세속적인 명예심 등으로 부패한 마음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은 8절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후에 예수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힐난(詰難)했다(마 12:34). 그리고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요한의 질문에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 나아오는것이 마땅하지만 세례를 받으려는 마음의 동기에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30회 이상 언급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도 수차례 언급이 되었다. 이것은 불의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반응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때마다 일마다 표현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벧후 3:9).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반드시 엄한 심판을 행하신다. 또한 마샬(Marshall)은 지적하기를 이 질문은 수사적 질문으로서 종말에 있을 마지막 심판이 이러한 형태의 외적 종교예식(religiousrite)으로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임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세례는 심판을 모면하기 위한 방도가 아니라 회개의 표현으로서 촉구되었던 것이다.

성 경: [눅3: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회개에 합당한 열매을 맺고 - 성경에서 '열매'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선악간의 결과들을 표현하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시 1:3;렘 17:8;행 26:20). 나무는 그 나무에 맞는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그 구체적 결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물론이 열매는 가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내적변화에 의해 외적으로 표현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전인적(全人的)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회개란 죄에 대한 단순한 외적 고백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격적 변화, 곧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품성의 변화들이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한다.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돌들로도...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종교적 특권이나 혈연적 계보나 의식(儀式)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유대인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이유로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패역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요구하는 진정한 회개에서 자신들을 제외시키려고 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해 칼날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은 첫인간 아담을 흙에서 취하셨다(창 2:7). 그렇기 때문에 빈 들이나 강 가의 돌들을 통하여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실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가리킨다(갈 3:7). 렌스키(Lenski)와 슈어만(Schurmann)은 이 '돌들'이 바로 이방인들을 나타낸다고 한다. 어쨌든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주권적 권능을 강조한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실된 회개이다. 우리의 구원은 외적조건에 있지 않고 진정한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에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는 바로 삶에의 결단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인내하시면서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벧후 3: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성 경: [눅3:9]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 8,9절에서 요한의 설교는 두 가지의 이미지(image)로 묘사된다. (1)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찍혀서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후에 예수도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해서 언급한다(6:43-45). 그리고 예수는 비유로써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를 찍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13:6-9). 요한은 아마도 '나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을 연상케 했을 수도 있다(사 5:1-7). (2) 이미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당장에 어떤 급격한 행동이 취해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나무 전체가 찍혀서 곧장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Liefeld). 이 구절에서는 상황의 긴박성과 다급함이 강조되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일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찍혀 넘어가게 되고 만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구약의 선지자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의 앞날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활동했던 시기는 A.D. 30-32년 사이이다. 결국 세례 요한의 경고의 메시지가 있은 지 약 40년 후 A.D. 70년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운명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경고를 경히 여겼다. 그들은 회개하고 믿기에 적합한 때를 놓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회개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는 커녕 악의 싹을 계속해서 키우고 있었다.

성 경: [눅3:10]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무리가 물어 가로되 -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리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구원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이 질문을 한 무리는 세례 요한에게 질문한 세 무리중 세리와 군인들을 시시한 나머지 사람들로 짐작된다.

성 경: [눅3:1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옷 두 벌 있는 자는...그렇게 할 것이니라 - 세례 요한은 진정한 회개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좋은 열매'란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나타난다. 본문에서 '옷'을 나타내는 '키톤'(*)은 기다란 겉옷 '히마티온'(*)안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팔레스틴 지방은 일교차가 심해 밤에 기온이 떨어질 때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여벌 옷을 가지고 다니거나 껴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요한은 이러한 여벌 옷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삶의 결단과 실천으로써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한다. 또한 음식물에 대한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이 주어졌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주변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정황들을 보고서 그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이미 율법 시대 때부터 가장 중요한 규범 중 하나로 규정되어 왔었다(레 19:18). 그리고 '나눠줄 것이요'를 나타내는 '메타도토'(*)는 '함께 나누다'라는 뜻이며 '복음을 나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올바른 물질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재물은 축적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서도 안 되고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사용되고 남은 몫은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될 때 그 재물은 귀한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마 25:31-46;딤전 6:18;약 2:14-16).

성 경: [눅3:1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세리들 - 세리들은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었으며 심지어 '죄인들'이라 지칭되었다. 이들은 로마 정부로부더 관세나 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위탁받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의 주머니를 털어갔다(막 2:14 주석 참조).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로마에서 요구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징수하였고 그 일을 위해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 세리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금 관계등의 일로 그들의 압제자인 로마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마 11:19) 요한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주었다. 세례 요한은 세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해 정죄하는 입장에 서는 대신, 기존 상황을 직시하여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되 다만 가능한 한 최선의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성 경: [눅3:1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정한 세...말라 - 요한은 사회 제도 자체를 전복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인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사회적 폐단은 개인의 탐욕스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세리들은 그들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리들이 그들의 직업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요한의 요구는 그들이 지위를 남용하거나 개인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서 지나친 과세(課稅)를 하지 말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현대에 있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공정하고 정직하게 법을 지키며 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레 19:35, 36;잠 11:1).

성 경: [눅3:1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군병들도...족한 줄로 알라 - 본문에서 '군인'을 나타내는 헬라어 '스트라튜오메노이'(*)는 아마도 로마 군인이 아니라 국내 정세를 담당하는 유대의 군인들을 언급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군인들은 업무상 특정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소지가 많았다. 예컨대, 그들은 세리들의 징세 업무를 도와 수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포'(强暴)를 나타내는 '디아세이오'(*)는 '맹렬히 흔들다', '협박하다', '강탈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또 '무소'(誣訴)를 가리키는 '쉬코판테오'(*)는 '억압하다', '착취하다'라는 뜻이다. 즉 이들은 강압적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강탈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군인들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군인들은 월급이 매우 적어 생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따라서 그들의 부정은 갈수록 심화되었다고 한다. 한편 원어상 '우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이스'(*)는 강조 어구로서 군인들의 심한 도덕적 갈급함을 암시해 주고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역시 요구되는 바는 정의롭고 공평한 회개의 열매이다. 이와같이 요한이 각 집단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선을 위해 일을 해야지 악을 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로 세 무리의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사랑은 각자가 처한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맺혀져야 할 회개의 열매들인 것이다.

성 경: [눅3:1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요한을...의논하니 -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야가 곧 도래하리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 가운데에 메시야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선포되자 그들의 메시야 대망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고조되는 메시야 대망의 분위기 속에서 세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에는 그만큼 능력과 확신이 있었으며 그의 세례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유다 지파 출신도 아니었으며 또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사 11:1;29:18,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백성들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게 만들었다. 요 1:19-25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눅3:1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나는 물로...세례를 주거니와 - 요 1:20 에서는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님을 스스로 강하게 부인하는 내용이 나오는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사역과 메시야의 사역을 비교함으로써 메시야의 탁월성을 밝히 드러내 보인다. 고대 세계에서 물은 흔히 정결케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물은 정화(淨化) 의식, 예를 들면 제의적으로 정결함을 인정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이 의식에서는 가능한한 흐르는 물이 사용되었다. 한편 정화 의식 외에도 물은 때로는 특별한 형태의 의식의 집행 과정에서 신성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적인 예식이 죄를 씻어 버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전까지의 예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 참조).

⭕ 신들메를 풀기도 - 근동과 그리이스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맨발로 다니거나 샌달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예배나 애곡, 금식 등을 할 때는 보통 샌달을 벗었다. 이때 노예들은 주인들의 샌달을 묶거나 풀어주며 또 필요하지 않을 때는 샌달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렇듯 주인이나 주인의 방문객들의 신발을 풀고 묶어주며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가장 낮은 노예의 의무였다. 요한처럼 이렇게 능력있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발에 신기운 하찮은 신발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는 얼마나 위대한 분이란말인가?

⭕ 성령과 불로 - 성령 세례와 불 세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문을 보면 헬라어 전치사 '엔'(*, '...안에' 혹은 '...로써')이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세례 요한의 이 예언이 바로 욜 2:28의 성취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1:5)을 뜻함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한다. 성령이나 불과 같은 사역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화(purification) 작업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사 40:3;겔 36:25-27;욜 2:28, 29) 성령은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불은 심판과 새롭게 함(refinement)이나 정죄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문에서도 성령과 불은 이러한 복합적 의미로 쓰인 듯하다. 또한 그렇게 자주는 아니더라도 성경에서 성령은 분명히 메시야와 관련되어 언급되었다(사 11:1, 2).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었다. '불세례'에 대해서는 행 1:4, 5의 주제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자.

성 경: [눅3:1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손에 키를 들고...불에 태우시리라 - 성령과 불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요한은 농사 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든다. 농부들은 키를 가지고 곡식의 열매를 키질한다. 그러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구별되어진다. 무거운 것(알곡)은 키에 남게 되어 타작 마당에 쌓이게 되고 가벼운 것(쭉정이)은 모아져 불살라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구분하실 것이다. 즉 그가 재림하실 때 타작 마당을 정(淨)하게 하듯이 심판의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가리킨다(욥 20:26;사 34:9, 10;66:24;마 5:22;13:42, 50;막 9:43-48). 그리고 이러한 추수와 타작이 심판과 관련되어 묘사된 예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바이다(시 1:4;잠 26장;사 41:15;렘 15:7;계 14:14-20). 요한의 이 경고는 매우 엄중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심판이란 자신들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이방인들에게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왜곡된 특권 의식을 지적하고는 회개를 통하여 타작 마당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경고한다. 이와같은 요한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날에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서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시고 악인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던지실 것이다(벧후 3:7).

성 경: [눅3:1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 요한의 메시지는 신랄한 경고와 책망이었음과 아울러 '좋은 소식'이었다. 타작 마당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제토'(*)는 사복음서에서 줄곧 '복음을 전파하다'는 내용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통한 절대적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자신의 사역을 마감하게 된다.

성 경: [눅3:19]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분봉왕 헤롯은...책망을 받고 - 여기 헤롯은 1절에서 등장한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이다. 요한은 백성에게는 '권하여' 말씀을 전하였지만 헤롯에게는 '책망'을 했다. 요한의 책망은 헤롯의 무분별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헤롯은 A.D. 26년경 그의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Aretas)의 딸을 버리고 그의 조카이자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悖倫)이었다(레 18:16;20:21). 또한 헤롯의 난잡한 생활과 악행은 유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요한의 헤롯에 대한 공공연한 책망은 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만과 요한의 직선적인 공격은 헤롯의 권력 구조에 위기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에 대한 반감 분위기의 진원지(震源地)라고 생각한 세례 요한을 체포하게 된다. 이로써 헤롯의 악행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성 경: [눅3:20]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한 가지 악을 더하여...옥에 가두니라 - '더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티데미'(*)는 '더하다', '첨가하다'등의 뜻 외에도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행동을 하다', '계속해서 하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칠 줄 모르고 더욱 큰 죄악으로 빠져들어갔던 헤롯의 타락된 심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세례 요한의 활동이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되는 한 자신의 행동에 여러가지 제약이 따를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헤롯은 악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탄압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에는 헤로디아의 농간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됨으로써 헤롯 정권의 윤리적, 도덕적 상황은 참담할 지경에 이른다. 누가는 본서에서 요한을 체포한 죄를 헤롯이 저지른 악행 중에서 가장 악한 죄였다고 기록하였다. 그것은 헤롯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에게 손을 대어 그의 복음 전파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한편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는 9:7-9과 막 6:17-29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눅3:2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받으신 예수]

⭕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예수는 12살때 예루살렘에 와서 랍비들과 변론한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성장 기간을 보내셨으며(2:52) 그후 착실히 성장하여 마침내 공생에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이 물러가고 예수께서 나타나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인은 아니다(히 4:15). 따라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은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이어서가 아니다. 다만 예수는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 3:15에서 예수는 자신이 세례를 받으므로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며 세례를 받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백성들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사역의 정점에 위치하였다는 뜻이다.

⭕ 기도하실...열리며 -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언급한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첫번째 기도 모습이다(6:12;9:18, 29;22:41). 예수는 일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사셨다. 그의 혼신을 다하는 기도는 하늘을 열리게 한다. 마가의 경우는 누가보다 하늘이 열렸다는 사건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술한다(막 1:10).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금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이는 예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암시한다.

성 경: [눅3:2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받으신 예수]

⭕ 성령이...비둘기 같이 -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출 24:10, 11;33:11;신 5:4).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전한다.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오직 예수만이 그것을 의식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별다른 보도를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비둘기 같은 형체가 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비둘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학자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온유하고 평화스런 속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한편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모습과 그 의미를 도표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령의 모습 의미

신자의 삶에서 죄를 소멸시키며 성결케 불

하는 능력(사 6:1-7;행 2:3)

깊이 감추어져 있으나 강력하며 중생케하는 바람

힘(요3:8)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평화스런 속성(막1:10) 비둘기

영적인 삶을 충만하게 넘치도록 채우시는 물

힘(요 7:37-39)

신자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셔서 완전하게 인침

영원한 교호(交互)를 약속하심(엡 1:13)

사역을 위해 부여되는 능력(행 10:38) 기름

한편 이러한 성령 임재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 하신 약속(사 42:1)과 성령이 그 새로이 생겨난 가지에 임할 것이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사 11:2). 또한 예수가 하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하기 이전의 준비 절차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너는...기뻐하노라 -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직접적으로 공표하신 말씀이다. '사랑하는'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페토스'(*)는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아듸'이나 '딸'을 붙여 사용할 때는 '외아들', '외동딸'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아가페토스'는 예수가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편 이 구절은 변화산에서 들려진 음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포함하고 있다(사 42: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천사들(욥 1:6;2:1)과 이스라엘 국가와 이스라엘의 왕들(출 4:22;삼하 7:14;호 11:1)에 적용시켰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될 것이라는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에서도(1:32)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사랑하는...기뻐하노라'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의 유일무이하고도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요컨대, 예수께서 받으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사역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공생애를 시작하고, 성령도 성자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협동하여 힘을 공급해 주시며, 성부도 그 일을 시작한 아들에게 하늘을 열고 땅을 향해 기쁨과 승인의 음성을 발하였던 것이다.

성 경: [눅3:2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예수께서...삼십 세쯤 되시니라 - 예수의 나이가 기록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이다. 누가가 공생애 시작 당시 예수의 나이를 '30세 쯤'으로 밝힌 것은, 30세라 하는 나이가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는 시기(민 4:3)인 점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해 마침내 예수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실 시점에 이르신 것이다(히 5:10). 즉, 예수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죄(無罪)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죄악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여실(히 10:20) 시점에 이른 것이다. 한편 그리고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고(창 41:46)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랐다(삼하 5:4). 또한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도 30세가 되어야만 주어졌다. 따라서 누가는 이러한 여러 배경을 감안하여 예수의 나이를 밝혔을 것이다.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연륜을 감안해볼 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사역을 하기에 충분한 시기에 이르러셨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때'를 잘 알았다(요 7:6).

⭕ 헬리 - 학자들에 따라 요셉의 의붓 아버지이거나 마리아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 경: [눅3:2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맛닷 - 이는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또 나타나고 '맛다다'(31절)와 '맛다디아'(25, 26절)라는 이름과 비슷하다.

⭕ 레위 - 이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 하나 히브리어 '레위'(*)의 뜻을 따라 일반적으로 '점착(粘着)하다', '연합하다'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 멜기 - 이 이름은 아마도 '말기야'( ,말키야, '나의 왕은 야웨이시다')의 축소형인 것 같다(G.Kuhn). 이 이름은 28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 안나 - 이 이름의 뜻은 '조롱하다'이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성 경: [눅3:2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맛다디 -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26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 아모스 - 이 이름의 인물은 성경 상에서 이사야의 아버지로(왕하 19:2) 혹은 선지자(암 1:1)로서 나타난다. 이 이름은 '짐지는 자' 또는 '강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나훔 - 예수의 조상으로서 그리고 선지자로서 성경에서 언급된다. '위로하고 돕는 자'라는 뜻이다.

⭕ 에슬리 -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를 가까이 함'이라는 뜻이다.

⭕ 낙개 - 대상 3:7에 나오는 '노가'(*)와 비슷하다. '빛나다'라는 의미이다.

성 경: [눅3:2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마앗(*) - '끊는 것'을 뜻한다. 대하 29:12;31:13에서 나오는 마핫과 비교된다.

⭕ 서머인 - 히브리어로 '시므이'(출 6:17등)가 된다. '몰약성'이라는 뜻이다.

⭕ 요섹 -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인물인 듯한데 이곳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 요다 - 바벨론 포로기 때의 인물이다.

성 경: [눅3:2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요아난 - 히브리어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이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1) 유다 왕 요시야의 장남(대상 3:15) (2) 다윗의 여덟번 째 용사(대상 12:8-12) (3)느헤미야 당시 도비야의 아들(느 6:14)등에게도 붙여진 바 있다.

⭕ 레사 - '황태자'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원래 스룹바벨의 칭호로 소개된 말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스룹바벨이 유대의 지도자로 바벨론에서 포로들을 인솔해 유대 땅으로 귀환하자 백성들은 그를 유대 왕의 계승자로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황태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스룹바벨'과 '스알디엘'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도 나타난다(마 1:12).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뒷받침된다(스 3:2;학 1:1).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앞서 설명되었듯이 수혼(嫂婚) 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다. 대상 3:17, 18를 보면 스알디엘과 브다야는 여고냐의 아들로서 서로가 형제지간이었다. 따라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법적 아버지이며 브다야는 그의 원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여고냐라고 대상 3:17에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본문은 그의 아버지를 네리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 역시 수혼 제도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 즉 여고냐가 아들이 없이 죽자(렘 22:30) 네리의 친아들이 여고냐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Machen, Plummer).

성 경: [눅3:2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멜기 - 스룹바벨의 증조부로서 '왕'이란 뜻이다.

⭕ 앗디 - 스룹바벨의 5대조이며 그 이름은 '붙들다'라는 뜻이다.

⭕ 고삼 - '나누다'라는 의미이다.

⭕ 엘마담 - 창 10:26의 '알모닷'이라는 이름과 비교된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광대'라는 의미이다.

⭕ 에르 - 이 이름의 인물은 구약성경에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난 유다의 장자이며(민 26:19) 다른 하나는 겔라의 자손이다(대상 4:21).

성 경: [눅3:29]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예수(*, Jesus) - 구약의 '여호수아'(수 1:1)와 같은 이름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여호와의 구원' 혹은 '구세주'라는 뜻이다(마 1:21).

⭕ 엘리에서 - 이 이름은 '엘리에셀'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이는 창 15:2;출 18:4에 나타난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이다.

⭕ 요림 - '여호와의 칭찬'을 뜻한다.

성 경: [눅3:30]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유다 - 역시 이스라엘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이다. 본문의 인물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다.

⭕ 요남 - 다윗 이래 약 200년 후의 인물로 추정된다.

⭕ 엘리아김 - 왕하 18:18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름이다. 이 사람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성 경: [눅3:3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멜레아 - 이 이름은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다윗의 고손(高孫)이며 이름의 뜻은 '충만'이다.

⭕ 멘나 - 이 이름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는 다윗의 증손이며, 이름의 뜻은 '큰 고통'이다.

⭕ 나단 - 다윗의 셋째 아들로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다(삼하 5:14;대상 3:5;14:4). 이 이름은 '양심' 또는 '주는 자'라는 뜻이다.

⭕ 다윗 -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이며 이새의 막내 아들이다. 이스라엘의 세 임금이며 지혜와 용맹과 많은 시편의 저작들로 유명하다(삼상 16장-왕상 2장). 이름의 뜻은 '사랑함'이다.

성 경: [눅3:3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이새 - 다윗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는 마 1:2-6에 나오는 족보와 거의 같다. 이새는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으로 다윗왕의 아버지이다(삼상 17:12). 사 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 오벳 - 보아스와 룻의 아들이다(룻 4:17, 21, 22;마 1:5).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룻 1:4) 다윗과 예수를 잇는 가계(家系)의 한 역할을 담당했다.

⭕ 보아스 - 룻의 남편이며 살몬의 아들이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의 큰 부호였다. 보아스는 룻이 모압땅에서 시모 나오미와 함께 돌아왔을 때 그녀를 다방면에서 돕고 그녀의 효성에 탄복하며 그녀와 결혼하게 되기까지 이른다(룻기)

⭕ 살몬 - '그늘'이란 뜻.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다(마 1:5 비교).

⭕ 나손 - '점쟁이'란 뜻. 보아스의 조부이다(룻 4:20). 마 1:4과 비교.

성 경: [눅3:3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아미나답 - 유대 헤스론 계통인 '람'의 아들이다(룻 4:19;대상 2:10). 그리고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부친이기도 하다(출 6:23).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친척은 고귀하시다'이다.

⭕ 아니 - '높은 땅'이란 뜻. 룻 4:19과 대상 2:9에 히브리 이름 '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 헤스론 - '닫힌'이란 뜻. 유다의 손자로 창 46:12;민 26:21;룻 4:18;대상 2:5;마 1:3 등에서 언급된다.

⭕ 베레스 - '파괴'란 뜻. 유다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동이의 형이다(창 38:24-30;46:12). 베레스에게서 두 종족이 생겼다(민 26:20, 21;대상 2:4, 5).

⭕ 유다 - '찬송'이란 뜻.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소생이다(창 29:35;마 1:2). 그는 밧단아람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쌍동이 베레스와 세라 두 아들을 얻었다.

성 경: [눅3:3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야곱 - '발 뒤꿈치를 잡다'란 뜻.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동이의 동생이다(창 25: 21-26). 그는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 대한 축복을 가로챘다. 야곱은 하단의 외삼촌댁 라반의 집으로 피하여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 두 부인과 부인들의 하녀 빌하와 실바를 통하여 12아들을 얻었으며 이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12 지파가 형성되었다(창 29장). 야곱은 애굽 근교 고센 땅에서 살다가 14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 이삭 - '웃음'이란 뜻.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아들이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태어났으며 그때 그의 아버지가 100세, 어머니는 90세였다(창 17:17;21:2, 3, 5). 이삭은 어렸을 때 아브라함에 의하여 하나님께대한 믿음의 증거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창 22:1-18).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 리브가와 결혼하며 쌍동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그는 노후에 기럇아르바 마므레에서 살다가 180세에 죽었다(창 35:27, 28).

⭕ 아브라함 - '열국의 아버지'란 뜻.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며 나홀과 하란의 형이다.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으며 이복 누이 사라와 결혼하였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100세에 얻었다. 그의 신실한 삶은 성경에서 믿음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25:1-9).

⭕ 데라 - '표백'이란 뜻.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이다. 그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하며(수 24:2),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단으로 이사가서 205세에 죽었다(창 11:24-32).

⭕ 나홀 - 아브라함의 조부이다.

성 경: [눅3:3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스룩 -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며(창 11:20-23;대상 1:26) 이 이름은 '활'이라는 뜻이다.

⭕ 르우 - '친구'란 뜻. 셈의 6대손이다(창 11:19).

⭕ 벨렉 - 셈의 자손 에벧의 아들이다(창 10:25-29;11:16). '나뉘다'는 뜻의 이름은 그가 태어날 즈음 세상 사람들이 나뉘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정확히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정화 운동 혹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다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 헤버 - '과거'라는 뜻. '헤벧' 또는 '에벧'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그는 노아의 6대손이다.

⭕ 살라 - '보내다'는 뜻. 노아의 고손이며 창 10:24;11:13;대상 1:18, 24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눅3:3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가이난 - '철공'이란 뜻. 셈의 손자이나 창 10장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 아박삿 -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을 가리킨다(창 10:22, 24;대상 1:17, 18), 그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출생했으며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후 403년을 더 살다가 438세에 사망했다(창 11:10-13).

⭕ 셈 - 노아가 500세에 낳은 아들로 3형제 중 맏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을 피해 아내와같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다(창 7:7;벧전 3:20). 또한 그는 술 취한 아버지의 실수를 조심성있게 덮어주어 축복을 받기도 했다(창 9:20-27). 또한 그는 셈족의 조상이다. 그의 이름은 '이름' 또는 '명성'이라는 뜻이다.

⭕ 노아 - 아담의 10대 손이다. 이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 대해 창 5:29은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설명한다. 그는 의인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며 그 심판을 피할 방주를 건축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직 그의 가족과 동물 암수 한 쌍씩만이 구원받았다. 노아가 대홍수를 만났을 때가 600세였으며, 그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죽었다(창 9:28).

⭕ 레멕 - 구약성경에 '라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는 182세에 아들 노아를 낳았다. 그는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고 777세에 사망했다(창 5:25, 28-31;대상 1:3).

성 경: [눅3:3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므두셀라 - 셋의 후손 에녹의 아들이다(창 5:21-27). 그는 969세까지 산 것으로 기록되 성경상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대확장' 또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에녹 - 아담의 7대 손이며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이다. 그는 65세에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最長壽者) 므두셀라를 낳으며 그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365세를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으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전한다(창 5:18-24;히 11:5;유 1:14). 그의 이름은 '교수' 또는 '시작하는 자'라는 뜻이다.

⭕ 야렛 - 에녹의 부친으로 마할랄렐이 65세에 낳은 아들이다(창 5:15-20;대상 1:2). 그는 므두셀라 다음가는 자로(962세) 알려져 있다.

⭕ 마할랄렐 - 아담의 5대손이며 셋 계통의 한 조상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뜻이다.

성 경: [눅3:3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에노스 - 아담의 손자이다. 셋은 109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으며 905세를 향수했다. 가인의 시대가 폭행으로 표현된 반면 에노스의 시대는 경건으로 표현되었다.

⭕ 셋 - 아담의 셋째 아들로 맏아들 가인이 죽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창 4:25).그는 아담이 130세 때 태어났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다(창 5:3-8). 그의 이름은 '대신 주다'라는 뜻이다.

⭕ 아담 -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다. 그는 타락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만드신 아내 하와와 낙원 에덴 동산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을 잃어버리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해산의 고통을 맛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아담은 막내 '셋'을 130세에 낳고 그후 800년을 더 살다가 930세에 죽었다. 그의 이름은 '사람' 또는 '붉다'라는 뜻이다.

⭕ 하나님 - 하나님을 아담의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제시된 족보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담의 아들로서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불순종한 첫째 아담과 대조하여 비록 암시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하나님께 순종했던 둘째 아담으로 묘사해 준다(고전 15:47). 이와같이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다.

성 경: [눅4: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차례의 시험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런 흠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세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이었다(행 2:4;10:44;13:4).

성 경: [눅4:2]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에게(*, 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슥 3:1). 한편 이와 유사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 '대적자' *, '적')를 들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유래하였다(삼상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막 3:27;요 6:70;8:44;행 13:10;26:18;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단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 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되며(10:18;요 12:31;계 12:9) 그 결과 사단은 더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엡 4:27).

⭕ 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출 16:4).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 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고픔을 더욱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 경: [눅4:3]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가...떡덩이가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었다(요 6:30).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테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성 경: [눅4:4]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예수께서...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 14-16;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성 경: [눅4:5]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가...천하 민국을 보이며 - 이 두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성 경: [눅4: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이 모든 권세와...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지도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은 성도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마 6:24).

성 경: [눅4: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성 경: [눅4: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주 너의 하나님...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려는 사단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경: [눅4: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은 '날개'라는 뜻의 '프테류스'(*)에서 온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 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 경: [눅4:1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18:20;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我田 引水)격으로 짜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성 경: [눅4:1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는 본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성 경: [눅4:1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4:1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도의 시작]

⭕ 성령의 권능으로...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행전(행 1:8;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 반응들(22, 28, 32, 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막 1:14).

성 경: [눅4:1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도의 시작]

⭕ 가르치시매...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9:35;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 33;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서에는 병자 치유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눅4:1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예수께서...자기 규례(規例)대로 -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있다.

⭕ 회당에 들어가사 -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 다음 '쉐마'(*, 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 성경을 읽으려고 -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법의 자귀 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성 경: [눅4:1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찾으시니 -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 에피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성 경: [눅4:1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자유케 하고 -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한다(6:20, 21;7:18-23). 본문의 '임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킨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눅4:1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타난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성 경: [눅4:2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책을 덮어...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나고 만다.

성 경: [눅4:2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오늘날 - '오늘날'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성 경: [눅4:2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성 경: [눅4:2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성 경: [눅4:2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 아멘 레고 휘민)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A )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엡 3:21;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 선지자가 고향에서...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이다.

성 경: [눅4:2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성 경: [눅4:2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엘리야가...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성 경: [눅4:2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미 4:1, 2;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성 경: [눅4:2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성 경: [눅4:2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성 경: [눅4:3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 경: [눅4:3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 가르치시매(*,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성 경: [눅4:3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성 경: [눅4:3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4:3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아(*,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성 경: [눅4:3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성 경: [눅4:3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성 경: [눅4:3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소문이...퍼지니라(*,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성 경: [눅4:3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확증해준다.

⭕ 붙들린지라(*,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성 경: [눅4:3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눅4:4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해질 적에 -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 :2, 3;출 34:21).

⭕ 손을 얹으사 -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등을 전가시키거나(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행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번째의 의미로 사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눅4:4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4:4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한적한 곳에 가시니 -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여겨 보지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성 경: [눅4:4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하나님의 나라 -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9: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 전하여야 하리니 - '...해야 한다'(*, 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13:33;24:7, 26, 44).

성 경: [눅4:4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갈릴리(*, 테스유다이아스) -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틴 전부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 경: [눅5: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게네사렛 호숫가 - 갈릴리 바다의 별칭이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웠다.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달한다.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에워싸고 있는 계곡들은 비옥한 충적토(沖積土)로 덮여 있으며 날씨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하여 밀, 보리, 무화과, 포도, 야채 등의 농작물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 이 바다는 하아프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높은 산들이 둘러 서 있으므로 바다 한복판에서 이따금씩 돌풍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8:22-25;막 주제 강해 4:35-41, '갈릴리 호수 조감도' 참조). 또한 이 바다는 예수 사역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이곳이며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이적을 행하신 곳도 이곳 해변가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동안에 수 많은 군중들이 그를 에워쌌다. 군중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예수의 말씀은 잘 전달되지 않았고 또 군중들은 예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자 자연히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리와 함께 서있던 예수는 말씀을 가르치는데에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성 경: [눅5: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호숫가에 두 배 - 예수께서는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배를 이용하기로 하셨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배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선다.

성 경: [눅5: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호숫가는 단구(段丘)로 둘러싸인 평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썩 훌륭한 강론(講論)의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시몬의 배에 올라 시몬에게 청하여 호숫가에서 약간 떨어진 다음 배를 설교 연단으로 삼아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함으로 1절에서보다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무리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누가는 이 배가 시몬의 배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결국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만 한 사람은 다름아닌 전문 어부 시몬이었다.

성 경: [눅5: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깊은 데로...고기를 잡으라 - 시몬은 바닷가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다. 반면 예수는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번도 그물을 던져보지 못한 분이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예수께서 무슨 연유에서인가 전문 어부인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다.

성 경: [눅5: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말씀에 의지하여 - 예수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본 어부라면 누구나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불합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1) 예수는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다. (2) 고기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3) 그물을 내리는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신다. (4) 시몬은 고기를 잡기 위해 지난 밤을 새운 까닭에 몹시도 지쳐 있었고 게다가 깨끗하게 씻어 놓은 그물을 다시 내려 간밤의 헛수고를 다시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불합리한점을 모두 알고 있는 시몬은 전문 어부답게 예수의 가당찮은 명령을 조목 조목 지적하며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말씀을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한다. 시몬의 어부로서의 경험과 지식과 경력은 예수 앞에서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은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 경험과 지식등이 한끼니의 양식을 해결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죄와 구원의 문제는 결코 해결해 주지못한다. 사실 복잡한 삶의 정황들을 몸으로 부딪쳐가며 체득한 경험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노 하우(konw-how)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경험들과 스스로 설정한 원리나 기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케 되는 경우가 있다. 성도들의 삶이란 단순한 자연 법칙이나 합리적 상식의 선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역설적이고 이적적인 차원 또한 강력히 요청된다. 특히 베드로와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는 끝없이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하는 신앙 훈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 경: [눅5: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이다. 결국 기적은 예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진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된다.

성 경: [눅5: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예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이였다. 고기는 그 무게와 양에 의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지경으로 많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시몬은 지난 밤에 함께 고기를 잡다가 헛수고만 한 다른 배의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했다. 저자 누가는 이러한 상세한 기술을 통하여 이 이야기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부각시킨다. 한편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 배가 잠길 지경에 이르렀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6:38;빌 4:19). 이러한 일련의 장면은 시몬이 사람낚는 어부로서 부름을 받은 후에 감당할 사역들을 미리 예시(豫示)해 준다. 후에 그는 예수 부활 승천후 말씀을 증거하고 한번에 3,000명 또는 5,000명의 회개하는 신자들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다(행 2:41;4:4).

성 경: [눅5: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시몬 베드로 - 지금까지는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이 되다가 이 구절에 와서야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온다. 시몬과 베드로라는 이름이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에 덧붙여 기록한 것은 중대한 상황의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삶에 중대한 전환기(轉換器)를 맞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 하는 이름은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예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것이다(마 16:18;요 1:42).

⭕ 무릎 아래 엎드려 -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거나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으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수치로 여겨지기도 하고 비굴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무릎 아래 엎드리는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존심의 마지막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종 삶의 내용이나 삶의 질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 그것은 포로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됨이나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릎아래 엎드리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 그리고 모든 삶을 상대방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된다. 그러나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본래 자아와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된다. 그것은 당연한 회귀(回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고 본래의 우리의 형상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이나 자아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본래의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의 질그릇에 담긴 것을 쏟아 내고 하늘로부터의 것을 담아야만 한다. 대단한 역설(paradox)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포기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 주여 - 베드로는 5절에서 '선생이여'라고 부르던 호칭을 바꾸어 이제는 '주여'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호칭은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말이다. 70인역에서 '퀴리오스'(*, '주')는 하나님과 동의어로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한 선생이란 표현보다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가 이순간에 예수를 신적 존재로 감지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로서의 권능과 권위를 수반한 예수의 탁월성을 감지했음이 분명하다.

⭕ 죄인(*, 하마르톨로스) - '죄인'을 나타내는 이 용어는 누가에게 있어서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들 중 하나이다(7:37;15:7;19:7등). 누가에 의해서 경멸적이 아니라 동정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공공연한 죄와 용납하기 어려운 직업 및 생활 방식 또는 이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집단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누가는 이런 죄인들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탁월하신 신적 권능을 목격하고서 상대적으로 나약하고 비천한 자신의 죄성마저 돌아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1)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이적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연의 정체를 깨달아야 마땅하며(사 6:5) (2) 그 같은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성 경: [눅5: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놀라고(*, 담보스) - 놀라움을 나타내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하며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경심을 내포한 말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궁극적으로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으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눅5:10]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동업자(*, 코이노노이) - 이는 '공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7절에 나타난 '동무'라는 단어와는 다소 다른 뉘앙스를 준다. 특히 '교제'를 나타내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친교' 뿐만 아니라 공동 협력을 통한 상호 봉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무서워 말라 - 이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난 다음에 흔히 등장하는 어휘(1:13, 30;2:10)로서 베드로가 신현현(神顯現) 장면과도 같은 상황에 압도당해 있음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단어가 용서의 선포의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베드로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예수는 '무서워 말라'며 그의 죄인됨을 용서하신다.

⭕ 취하리라 - 이는 궁극적으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한 말이다. 70인역(Septuagin)에서는 이 말이 '위험에서 생명을 건져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본 구절에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한다. 특히 누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널리 퍼져 모든 인류에게 이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라는 환상을 보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데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예시(豫示)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행 10:9-48).

성 경: [눅5:1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저희가...좇으니라 - '저희'는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10절에서 이미 이야기되었듯이 하나의 일에 있어서 공동 협력을 행하는 '코이노노스'(*)의 삶의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 공동체의 삶이다. 이들의 결단과 헌신은 예수 공동체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결단이 무분별한 희생이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다.

성 경: [눅5:1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 - 구약에서 문둥병은 오늘날 정확한 의학 용어로 '한센씨병'(Hansens Disease)이라 불리는 질병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인 피부병을 모두 포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레 13:1-59). 문둥병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에 문둥병자들은 육체적, 사회적 및 심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레위기 13장에는 피부병의 일곱 가지 증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문둥병자들은 의식상(儀式上) 부정하였므로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다' 소리쳐야 했고, 동리 밖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랍비들은 문둥병자가 치유받는 일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다. 만일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희생 제물을 바친 후 정상적인 사회로 복귀되었다(레 14:1-32). 한편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a man came along who was covered with leprosy, NIV)이라는 누가의 표현은 의사로서 병의 특성과 범위에 대하여 세심히 관찰하여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 원하시면 - 이 문둥병자 역시 문둥병의 불치성(不治性)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더럽고 부정한 문둥병을 치료하실 의사(意思)가 있으실까'하고 다소 의구심을 지녔던 듯하다. 즉 이 문둥병자는 주께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믿고 있었으나 병을 고칠 의사가 있는지를 몰라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문둥병자의 의심을 일순간에 종결시키신다.

성 경: [눅5:1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손을 내밀어 - 문둥병자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특별히 격리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댄 것은 의미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예수께서는 관(棺)을 만지기도 하셨는데(7:14) 이것 또한 의식적(儀式的)으로 금지된 행동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손수 만지신 것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고통받는 이의 추하고도 뼈아픈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시는 구세주의 크신 긍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사회와 겪리되어 폐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부정한 문둥병자와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인 예수 자신과의 사이에 막혀 있던 장벽을 예수께서 무너뜨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릇된 통념(通念)과 잘못된 전통들을 뒤엎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막힌 것을 허시고 끊어진 것을 이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 경: [눅5:1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예수의 명령은 4:41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공식적으로 선포되기전에 먼저 메시야로서 할 일을 하고 '희생적 고난'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다. 문둥병자들을 고치는 일은 감옥에서 세례 요한이 상기(想起)받은 바도 있는(7:22) 메시야적 표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이 백성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예수의 이러한 기적적 행동들을 보고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내세우는 것을 방지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 제사장에게...보이고 -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가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은 레위기 4장에 규정된 의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문둥병자를 치료한 예수의 메시야적 행동이 '저희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7:21-23의 주석 참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처럼 명약 관화한 메시야적 권능을 보고서도 예수를 영접하기는 커녕 도리어 핍박함으로써, 그 완악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성 경: [눅5:1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 예수의 함구령이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과 함께 사람들이 그 함구령을 위반하는 사례도 자주나타난다. 실로 문둥병은 완쾌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스스로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 질병이 치료되었다는 것은 만성고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곧 복음이었다. 한편 누가는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몰려 왔다고 강조한다. 마샬(Marshall)은 이것을 누가가 예수의 선포 활동을 치유 활동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 경: [눅5:1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한적(閑寂)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 NIV는 이 구절의 문장 속에 '종종'(oft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러 가는 행동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원문의 '엔 휘포코론'(*, '물러가시고 있었다')도 완곡한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귀찮아서 물러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시기 위해 잠시 물러가셨다가 또 다시 나오셔서 말씀도 가르치시고 병자도 치료하시는 사역을 계속해서 반복하셨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이유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됨으로 오는 폐단을 없애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즉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 지역 사람들의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예수 자신도 그곳에 안주하려 든다든지 아니면 그곳에 매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위험을 피하여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던 것이다. 하지만 더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그 교제 가운데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삶의 주 원동력이 있는 것이다.

성 경: [눅5:1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바리새인 - 누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교법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파라쉬'(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불리워진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전통을 지켰다(막 7:3). 종교나 세속의 영역에서 세부적인 율법 규례들을 제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와함께 제사장없는 회당에서 바리새인들이 평신도 예배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성전과 제사장 직제가 없어진 후에도 바리새적인 합리주의가 계속하여 유일한 종교적 교육을 전담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세상의 종말에 있을 부활(행 23:6)과 천사의 존재를 가르쳤고, 부활 후에는 인간이 보상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메시야적 소망, 민족주의, 반로마 제국주의를 고취하였지만 그렇다고 열심당과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반목은 극에 달했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의 교훈을 무시한데 대하여 그들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죄사함이나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허영과 위선을 질책하셨고,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데 실패했음을 힐난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에 얽매여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쳐 매우 극단적이고 위신적으로 변해버렸다.

⭕ 교법사(敎法師) - 교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나 말로 NIV는 '율법 선생들'(teachers of the law)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율법(written tradition과 oral tradition을 포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석학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경 연구와 율법 연구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을 '교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일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대의 법적 전통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존경을 받았다. 요 5:16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이미 충돌한 바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해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된다.

⭕ 병을 고치는...함께하더라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의 사역에서 치유의 사역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누가에게 있어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말씀과 치유의 능력이라는 이 두 요소는 본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육간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출 15:26;렘 30:17;호 7:1).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도 위대한 치료자로 묘사된 바 있다(말 4:2). 본문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음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지닌 메시아이심을 아울러 증거한다.

성 경: [눅5:1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한 중풍병자 - 중풍병은 뇌일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팔다리 등 몸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환자를 메고 온 저들의 열심과 노력이 결국 환자를 치유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이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믿음의 세계란 결코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성 경: [눅5:1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지붕에 올라가...달아 내리니 - 팔레스틴의 가옥은 대개가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집 한쪽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따라서 지붕에서 약간의 일상 생활을 할 수가 있었고 외부인이라 하더라도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 용이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메고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내고 구멍을 내었다. 이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행동을 감행한 것은 먼저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도 컸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병자를 사랑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 경: [눅5:20]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저희 믿음을 보시고 - 확신있고 열심있는 믿음은 끝내 결실을 얻게 된다. 예수는 그 믿음에 확실히 반응하신다. 예수는 행위 보다도 먼저 믿음을 보신 것이다. '저희의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저희'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말함이 분명하나 그 가운데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돌보는 다른 자들의 중재(仲裁)에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남의 신앙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구원은 그와 예수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그가 믿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그를 치료하기로 선택했으며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긴박한 필요성에서 절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예수가 그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그 명령대로 행한것은 그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이 사람아...받았느니라 -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 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sins are forgiven, NIV)고 말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겸손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있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자신들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언은 죄가 그의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은 아니다. 예수 당시에는 흔히 병의 원인이 죄라고 여겼는데 예수의 제자들 조차 그러했다(요 9:2).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는 죄와 병을 연결시키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는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병 곧 죄의 문제에로 관심을 집중토록 유도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그 구원은 영적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육적구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예수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육간의 전인적(whole personal)인 구원이다. 예수의 치유 또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성 경: [눅5:2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참람(僭濫) - 이것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이다.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犯過)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일 수도 있고(계 13:6), 그의 이름, 그의 말씀(딛 2:5), 혹은 천사적 존재(유 1:8-10;벧후 2:10-12)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야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또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대법은 이렇게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신을 모독하는 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죽이는 벌을 내렸다(H. W. Beyer, TDNT. I. 621-625).

성 경: [눅5:2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무슨 의논을 하느냐 -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비상한 통찰력으로 그들의 의논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omniscience)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성 경: [눅5:2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어느 것이 쉽겠느냐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되물어보는 예수의 질문 속에 내포된 전형적인 '가언적 양도논법'(假言的 兩刀論法; hypothetical dilemma)의 뿔에 찔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6:9).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들이 말하기에는 모두 똑같이 쉽고, 행하기에는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언급이 표면적으로는 더 쉽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반드시 외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데 반해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외적 증거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어쨌든 이 물음의 핵심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둘다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해보이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에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데에 있다.

성 경: [눅5:2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인자(*, 호 휘오스 안드로푸) - 복음서에서는 이 용어가 90여회 나온다. 그 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다. 요 12:34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11:30;마 8:20;막 14:41;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11:53, 54;20:20;22:63-65;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본절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 참조).

성 경: [눅5:2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하나님께 영광을...돌아가니 - 중풍병자가 치료받은 것은 예수께서 난언한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주어진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따르는 일은 신앙에 바탕을 둔 순종으로써만 가능하다. 병자가 치료를 받자 그 사람 자신과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메시아의 사역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다(2:14).

성 경: [눅5:2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은 본서에 여러번 나타난다(25절;2:20;7:16;13:13; 17:15; 18:43;23:47).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누가의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기이한 일을 보았다 - 원문은 '기이한 일'을 '파라돝사'(*)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기대와는 반대되는', '기대에는 어긋나는'(contrary to expectation)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주목할 만한'(remarkable)이라 번역한다. 영어의 '역설'을 나타내는 paradox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를 보건대 예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풍병자를 그 즉시로 치료하시자 무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던 것이다.

성 경: [눅5:2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세리(*, 텔로넨) -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censor)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서 위탁 형식으로 조세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 유대 고위층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금 조세 징수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세리이다. 이들 세리도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곧 세관에 근무하면서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이다. 아무튼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창녀와 같은 죄인 취급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이고 (2) 이들이 동족들에게 그것도 가난한 자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잔액을 자신들이 착복하였기 때문이다.

⭕ 세관 -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세관이다. 가버나움은 로마 군대가 상주해 있을 정도로(7:1-10;마8:5-8) 중요한 도시였는데 특히 북쪽으로는 수리아 지방으로, 남쪽으로는 유대와 애굽 지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통관세를 징수하는 로마의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레위'(마태)는 이곳에서 근무하던 세관원이었다.

⭕ 보시고(*, 에데아사토) - 이 동사는 관찰자가 주의깊게 보는 것, 즉 '눈여겨 보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레위를 주의깊게 살펴보아 그를 특별히 골라 내셨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5:2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버리고...좇으니라 -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직접적인 명령에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로 그를 따라 나섰다. 레위가 예수를 따라나선 것이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았으리라고 짐작된다. 레위의 이런 행동은 후에 상세히 밝혀지게될 제자도(discipleship)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레위의 행동의 두 가지 면, 즉 모든 것을 버리는 소극적인 면과 그를 따르는 적극적인 면을 모두 보여준다(9:23-25).

성 경: [눅5:2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큰 잔치 - 신약성경에서 잔치는 기쁨을 상징하며, 때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베푸실 종말론적인 천국 잔치를 암시하기도 한다(13:29;14:16). 레위가 예수를 모시고 잔치를 배설한 것은 접대와 송별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신들의 옛친구들도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었을 수도 있다.

성 경: [눅5:30]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세리와 죄인 - 29절에서 '다른 사람'이라고 언급된 사람들은 결국 '죄인들'이었다. '죄인들'을 나타내는 '하마르톨로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규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막 2:16).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율법의 준수 여부였다. 이는 곧 율법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거룩하며 반면에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방인)은 본래 죄인임을 의미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그들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마 12:1;15:2)을 죄인으로 간주했다(K. H. Rengstorf, TDNT. I, 317-35). 특히 압제자인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의 고혈을 짜는 세리는 죄인중의 죄인이요 극단적 경멸의 더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경스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계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을 범하는 행위였다. 이들 바리새인들은 특히 유대교적 신앙과 생활을 고수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으로 그들은 도덕적, 의례적 순결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여기서 분리된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가 되어 반드시 정결 예식을 거쳐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갈릴리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그러한 율법의 조항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 먹고 마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 비난한 것은, 식탁에서의 교제가 그들의 사회에서는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5:3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건강한 자에게는...쓸데 있나니 - 예수는 속담이나 비유를 만들어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퍼져있던 속담이나 비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셨다. 이 구절에서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대비는 32절의 '의인'과 '죄인'의 대비와 연결된다. 한편 영혼의 의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아픔을 호소하는 모든 병자를 진단하시고 치료하신다. 그러나 의사의 몫까지 자처하여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진단내리고 처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의 처방이 적용되어질 수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자신의 오진(誤診)으로 인한 죽음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성 경: [눅5:3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죄인을...왔노라 -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의인인체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무지와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실상 이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물리치시며 자신의 무가치함과 구원의 필요를 깊이 느끼는 자들에게 구원의 초대를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구원의 초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회개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누구든지 회개에의 호소에 진실로 응답하려면 먼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행 구절인 마 9:13과 막 2: 17에는 빠져있는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예수께서 인용한 속담의 신학적 의미를 밝혀준다. 또한 이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도입한다. 그것은 은혜와 용서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은 사실이지만(2:10)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3, 14에 나오는 세리는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시켰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18:11, 12). 한편 본 구절의 '회개'라는 주제는 15:7, 10, 22-27, 32에서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고 있다.

성 경: [눅5:3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금식의 문제]

⭕ 금식하며 기도하고 - 예수 당시에 금식은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다. 원래 유대 민족은 금식을 속죄일(7월 10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다(레 16:29). 이것은 히브리어로 '이나 네페쉬'(*, '영혼을 괴롭게 하다')라 하여 율법으로 엄히 명한 것이었다. 이외에 유대인들은 금식을 국가적 재난이나(삿 20:26), 병들었을 때(시 35:13), 애곡할 때(삼상 31:13), 회개할 때(왕상 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 20:3), 재앙을 기념할 때나 기근때에 실시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바벧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재앙에 대한 애도와 회개의 뜻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시작했다. 이 금식은 예루살렘 파멸과 관련하여 나흘을 했는데 (1) 성전이 불탄 날(5월 7일 ;왕하 25:8, 9), (2) 그달리야 피살일(7월 2일;왕하 25:23-25), (3) 성전 포위 개시일(10월 10일;왕하 25:1), (4) 성전 함락일(4월 9일;왕하 25:3, 4)등 이었다. 이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금식일로 지켰고 경건한 사람은 더 자주 금식했다(외경 유딧서 8:6). 그러나 이 금식의 의미는 갈수록 개인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시 행위로 전락하여 외적인 자기 과시와 위선이 많이 개재되어 예수의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마 6:16;9:14). 예수는 강제적이고 의식적인 성격을 띤 자기 과시나 종교적 공적을 쌓는 행위로서의 금식을 단호히 배격하시고 금지하셨다. 예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 형태로서의 영적 훈련으로 실시하셨던 것이다(마 4:2;6:16-18).

⭕ 바리새인의 제자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7:18;11:1;막 6:29;요 1:35, 37;:25).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당시 대다수의 랍비들처럼 제자들을 두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요세푸스와 렝스토르프의 견해처럼 '바리새인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때때로 '예언자의 아들들'(왕하 9:1, 개역성경에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로 표현)이라는 표현을 '...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먹고 마시나이다 - 예수께 바리새인들이 하나의 질문 형식으로 묻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형식으로 묻는 것은 교묘한 질문 방식이다. 30절에서 대적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으며 이에 대해 예수는 당신의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 구원에 있노라고 대답하셨다(31절). 이제 여기서는 대적들이 '먹고 마시는' 일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대적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반대 입장에 둠으로써 예수를 배타적으로 소외시키려 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요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특정한 날을 정하여 금식하는 형식적행위에 연연한 나머지 그러한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금식에 관한 형식적 틀을 초월하셨으며 진정 필요할 시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35절;마 9:15).

성 경: [눅5:3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금식의 문제]

⭕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신랑이라는 표현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사 54:5, 6;렘 2:2;겔 16장;호 2:16, 19).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것을 혼인잔치와 비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써 비교한다(마 25:1;요 3:29;고후 11:2;엡 5:32;계 19;7;21:9).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다. 이 잔치 마지막 날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주고는 잔치집을 떠난다. 이 일주일 동안의 잔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매우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이때 금식일이 닥치어도 금식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준 연후에 집에 돌아와서 금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실로 금식은 강제적이고 형식적 절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점을 경고하셨다. 그가 함께하여 자비로운 사역을 베풀고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현재는 결혼 잔치와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기 때문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금식의 실행 여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성 경: [눅5:3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금식의 문제]

⭕ 신랑을...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결혼식을 비유로 들어 금식에 관한 자기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신랑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일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위경 제4에스라 10:1에 나타나는 사상으로 "내 아들이 결혼식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나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내가 죽을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하기를 작정하노라"는 내용이다(Jeremias, Theology I, 283). 이러한 사상을 예수께서 염두에 두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이 비유는 분명히 예수가 죽어서 제자들과 이별하게 되어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눅5:3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비유(譬喩) - 이 단어는 '곁에', '옆에'를 나타내는 '파라'(*)라는 단어와'두다', '놓다'라는 뜻의 '발로'(*)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옆에 두다', '정도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특히 수사학에서는 '유사', '비유'라는 뜻을 나타낸다. 비유는 친근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상 생활 중 많이 접하는 친근한 것들을 예로 들어 비교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마솰'(*, '비유')을 번역한 것인데 지혜 문학에서 이 단어는 현명한 말을 나타내며, 생활로부터의 본보기, 신중함과 정중함의 원칙들, 직업적인 충고, 도덕적 훈계들, 종교적인 지도들을 포함한다. 또한 묵시문학에서 비유들은 종말론적 가르침을 주는 방법들이다. 지상의 사건들은 하늘의 사건들을 설명해 준다. 하늘과 미래의 신비들에 대한 환상(심판, 부활, 축복받은 자들의 거처)도 역시 비유들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는 물론 많은 비유를 베푸셨는데, 이 비유는 알려지지 않은 것(그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행위) 안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알려진 세계의 분명한 진리를 사용하는 유비법(類比法)이다. 막 4:33, 34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더디기 때문에 비유들을 많이 사용한다고 언급한다.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일, 인간의 운명 등을 취급한다. 랍비들의 비유나 율법을 상술하지만, 예수의 비유들은 대부분이 종말론적(묵시적은 아닐지라도)이다. 대부분의 예수의 비유들은 교훈적인 문맥으로 짜여져 있으나 어떤 것들은 베일 뒤에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도록 청중을 자극한다(막 12:1). 그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빛이요 구원이지만, 응답하지 않는 대중들에게는 어두움이요 심판이다. 그들은 동일한 말을 들으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 6:9, 10의 예언 아래 있게된다.

⭕ 새 옷에서...합하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또다시 새 옷과 낡은 옷이 대비를 이루어 나타나고 37, 38절에 가서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부대가 대비되어 등장한다. 이는 누가의 독특한 기술 방식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의 의미의 선명성 부각에 적절한 효과를 나타낸다. 한편 '새 옷'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낡은 옷'은 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말로서 율법을 오해하여 가르친 유대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로 합쳐질 수 없음을 나타낸다. 특히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폐단은 복음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기까지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 자체를 버리게 됨은 물론이고, 또한 빨면 새 옷 조각이 줄어들어 낡아빠진 헌 옷을 잡아당겨 뜯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는 유대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마 5:17).

성 경: [눅5:3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낡은 가죽 부대 - 고대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그 속에 여러 가지 액체를 보관하였다. 이 가죽 부대는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그 가죽을 벗겨낸 다음 털이 나있는 쪽을 바깥쪽으로 하여 목 부분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멍을 꿰맨 다음 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 기간 손질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팔레스틴은 물론 유럽, 남미에서 최근까지도 사용되던 방법이다. 한편 이 가죽 부대는 오랫동안 사용하게 되면 주름이 잡히며 그 탄력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게 되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하는 강하고 독한 가스가 가죽 부대를 부식시켜 그 부대를 이내 터뜨리고 만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항상 새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경우 그 부대가 이내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못쓰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의 가르침을,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롤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 형식 위주의 율법의 낡은 형태 속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사실을 비유로 사용하신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이며 기쁨이 없는 금식은 그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5:3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원칙론적으로 유대교의 형식주의적 의식과 종교 체제로서는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담지 못함을 가르시기 위해서였다. 원어상 (1) 새옷, 새 가죽부대에서의 '새'(*, 카이노스)는 '질(質)과 그 신선함'을 강조하고 (2) 새 포도주에서의 '새'(*, 네오스)는 '시간'을 강조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비유한 본문의 '새 포도주' 를 (2)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옛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추이를 보게 된다. 예수는 옛언약을 온전히 성취시키는 완성자로 오셨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이제 예수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정신과 생활 방식을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따르는 낡고 형식적인 종교 형식으로는 보존될 수 없다.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할 수 있는 것 같이 역동적 생명이신 예수와 그 복음의 수용을 위해선 이미 고착화된 낡은 형식주의적 신앙 형태가 아닌 신선한 새 부대 즉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심령과 새로운 신앙 형태가 요구되는 것이다.

성 경: [눅5:3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여기서 예수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논지를 뒤집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그의 새로운 교훈이 옛 것만큼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강조점은 옛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옛 것을 원하고 새 것을 배척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항상 묵은 포도주만 마시던 사람들은 새 포도주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묵은 포도주만을 고집하며 새포도주를 무시하며 거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통하여 전해지고 제시되는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느끼지를 못했다.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맛보며 새복음에 참여하려면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옛 종교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통해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 대하여 율법이 계시한 그 메시야가 곧 당신 자신임을 드러내셨으며 자기를 통해 성취될 새 언약으로 돌아오길 촉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눅6: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안식일에(*, 엔 사빠토) - 다른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두번째 중 첫째"(*, 듀테로프로토)라는 단어가 있는데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번째 중 첫째"라는 단어는 고대의 권위있는 대다수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 중 어느 것도 확실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원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은 "두번째 중 첫째 안식일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1)7년의 안식년 중 두번째 안식년의 첫번째 안식일(Wieseler), (2)유월절 후 둘째 날 후의 첫 안식일(Lange,Ewald, De Wette), (3)두번째 달의 첫 안식일(Wetstein), (4)오순절의 안식일(유월절 안식일을 첫번째 안식일로 보고, a Lapide).

⭕ 제자들이...비비어 먹으니 - 마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마 12:1)란 말을 첨가하였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도 분명히 허락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2절).

성 경: [눅6: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나그네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에서 곡식따는 것은 위법(違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삭을 잘라 비비는 것은 추수하고 타작한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규정했다. 당시에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된 사항들을 제외하고도 문자 그대로 수천가지의 명령에 대한 미묘한 조항들을 규정해 놓았다.그 결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완전히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원칙과 형식을 고집하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준수의 참된 의미를 중요시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성 경: [눅6: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는 문자적인 율법보다 율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삼상 21:1-6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다윗과 그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에게만 먹도록 허용된 진설병을(레 24:9) 먹었다는 사실은, 율법의 더 중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적 예라 하겠다. 마태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정곡을 찌르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곧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마 12:7).

⭕ 읽지 못하였느냐 -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전하는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유전에만 집착하고 형식으로 치우쳐 허탄한 일만 일삼는데 대해 성경 자체에 기록된 사례를 통해 일침을 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께서 다윗의 예증을 사용하신 것은 다윗이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율법 내용 가운데서 예외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성 경: [눅6: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 '진설병'(showbread)은 히브리어로 '레헴판님'(*)이라 하여 '면전의 떡', '누군가의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을갖고 있다(출 25:30). 이 떡은 모두 열 두 덩이로 성소 안에 있는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상 위에 진설되었다가 제사장이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먹었다(레 24:5-9).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였다(삼상 21:2,3;마 12:4). 또한 이 열 두 덩이의 떡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였으며(레 24:8) 민족의 통일을 상징하였다(왕상 18:31,32;겔 37:16-22). 한편 예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만을 위한 음식으로 율법에서 지정한 진설병을 먹은 사건(삼상21:1-6)을 인용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보다도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과 공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6: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그리고 인자로서 안식을 어떤 정신과 방법으로 준수하셨는가를 분명히 밝혀준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창 1:26) 제 7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며(창 2:1-3),첫 사람 아담의 타락 후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을 다시금 회복시키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자이기 때문이다(히 4:1-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같은 안식일 제도를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로 주신데(출 20:8-11;신 5:12-15)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다. (1)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다.(2)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성별시켜 주신데 대한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이다(출 31:13). (3)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신 5:15). (4)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출 20:10). 이상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아울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같은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제 7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금기조항에만 연연한 나머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주신 선한 규례를 오히려 인간의 행동을 제어(制御)하는 악법으로 변형시키고 말았으니 그 어리석음과 잘못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수의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 준수가 신자들의 신앙 성장에 장애가 되는 외적인 형식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주일 성수는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의 자세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 경: [눅6: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또 다른 안식일에 -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준수가 엄격한 형식적 규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신다. 이 구절에서 '다른 안식일'이란 반드시 그다음 안식일로 볼 필요는 없다. 누가가 이 부분에서 의도하는 바는 어느 안식일이냐가 아니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의 오른손을 고쳤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 예수께서 자주 드나드시던 가버나움의 회당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회당이나 성전이나 노천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관복음 전체에 걸쳐 입증된다(21:37;마 13:54;막 1:21 등).

⭕ 오른손 마른 사람 - '오른손'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곳은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 가운데서 오직 여기 뿐이다. 이는 여러 방향에서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문가적인 직업 의식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문 의사로서 환자의 정확한 병명과 정확한 환부(患部)의 상태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그 진찰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사례 수집이라는 차원에서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환자의 마른 손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다는 것은 이 환자의 상항이 보다 심각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환자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손으로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었다면 일반적인 대부분의 오른손 잡이처럼 오른손의 마비는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보도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환자에게 그간 손이 말라 있었던 기간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간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성 경: [눅6: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서기관과 바리새인 - 서기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제사장 계층에서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등장한 서기관들은 문필가로서 이스라엘의 성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도 몰두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필사자들, 편집자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대단한 신망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헬라의 세속 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순수히 보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난 소위 '하시딤' 혹은 '하시디안'이라는 경건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의 선한 동기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형식과 위선에 치우치게 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앞서 안식일 논쟁에서 패배하고 예수의 정곡(正鵠)을 찌르는 지적으로 인해 망신을 당했던 터라 예수를 궁지에 빠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 엿보니(*, 파레테룬토) - '엿보다'의 미완료형으로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엿보고 있었던 것은 송사할 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행동은, 오늘날 성경을 보되 그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를 헐뜯을 근거를 찾기 위해서 말씀과 씨름하는 자들의 사악한 행위와 일맥 상통한다. 이들은 공히 예수나 성경 말씀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방 일변도로 흐르게 마련이다.

성 경: [눅6: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라고 한다(막 3:5). 따라서 '저희 생각'이란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들의 생각을 어떻게 아셨는지에 관해서 누가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실 수 있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방법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 일어나 한 가운데서라 - 예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무리가 잘 보이는 가운데 일어서라고 공개적(公開的)으로 명령하셨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엿보니'와 대조되는 말로서 완악한 마음을 갖고 송사할 구실을 찾으며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다시 한번 반격하실 예수의 당당한 행동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께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악한 의도를 물리치기 위해 그의 병고치는 이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셨음을 의미한다.

⭕ 저가 일어나 서거늘 - 손마른 사람은 예수의 말씀에 곧 복종했다. 그는 권위있는 예수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를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들이 치료의 행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병고침이 손을 만짐으로써가 아니라 말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으리라.

성 경: [눅6: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예수께서...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며 책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바리새인 등에게 예수는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여기서 '묻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타오'(*)는 '질문하다', '요구하다'는 뜻인 '에로타오'(*)보다 훨씬 강한 표현으로 '심문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따라서 이말투 속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편견(偏見)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자 하는 메시야의 권위가 스며있다 하겠다.

⭕ 안식일에...어느것이 옳으냐 - 이 질문은 병든 사람이 죽을 처지가 되었을 경우에만 안식일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신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은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해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라해서 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도외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과감히 실행하려고 하셨다. 특히 우리는 예수의 이 반문에 담긴 예리한 풍자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러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지 않고 '안식일에 선행(혹은 생명 구함)이 옳으냐 아니면 악행(죽임)이 옳으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형식과 위선의 허물을 쓰고 사람의 진정한 아픔과 필요를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의 비정함을 이미 악행 내지는 살인 행위로 규정하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예리한 질문 속에는 거룩한 안식일에 예수를 '멸하려고' '악'을 꾀하는 대적들의 음모에 대한 질책이 시사되어 있다. 마태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 예수의 말씀은 더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화를 사용했는데 그 주인은 안식일일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확실히 건져내어야 한다. 하물며 인간은 양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고 결론지으셨다(마 12:11,12).

성 경: [눅6:1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무리를 둘러 보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리를 둘러 보시는 예수님은 근심하시고 노하신 상태였다(막 3:5).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가하신 후에 그들의 태도를 살피신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중(意中)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다. 사실 이 질문은 상식적인 선에서 모든 사람이 답할 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묵묵 부답, 유구 무언이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질문이든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쪽도 택일할 수없는 난처한 처지에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 예수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는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시며 곡해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쇄신하려고 하신다.

⭕ 네 손을 내밀라 - 이 명령은 사실상 그 손 마른 자가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다. 공관복음 어디에도 그 병자가 믿음을 가졌다거나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예수를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그리하매'는 손 마른 사람의 신앙적 행위를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께서 힘이 없고 마른손을 내밀라고 명하셨고,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을 때 즉시 그 손이 회복되었다. 세 공관복음서 기자가 모두 '회복되다'는 말인 '아페카테스타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상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병자의 병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방치해 두는 것은 오히려 '태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을 '멸하는' 악행을 범하는 것이고 결국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성취시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예수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입법자이심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셨다.

성 경: [눅6:1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분기가 가득하여 - '분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이아'(*)는 모든 감각과 이성을 잃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이성을 잃고 덤비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 마태와 마가는 이 구절에 '죽이다'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더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마 12:14;막 3:6).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처치 하다'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른 기자들보다 완화된 어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예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이 완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교묘하고 은밀한 술책으로 예수를 모해(謨害)하려고 한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다.

⭕ 서로 의논하니라 - 마가는 그들이 회당을 나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를 죽일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기술한다(막 3:6). 그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예수를 모함하고 그를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음모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를 죽일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성 경: [눅6:1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이 때에 - 예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는 동안, 특히 5장과 6장 11절까지의 사건들이 있은 후를 가리킨다. 11절과 관련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들의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 12:15) '이 때'는 예수께서 그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때가 정확히 어느때인지는 알 수 없다.

⭕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 이 구절에서 산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나(Conzelmann)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한다(Farrar). 아무튼 여기서 '산'(*, 토 오로스)에는 관사가 있어서 예수가 늘 오셨던 친숙한 산임을 암시하고 있다.

⭕ 밤이 맞도록 - '디아뉘크테류오'(*)는 '밤을 새다'의 미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오랜 지속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의학적 용어로(Vincent)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나오지만 70인역 등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의학적 용어로 쓰는 경우에는 밤을 새워 병 간호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의 삶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의 생애에서 모든 중요한 사건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수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끝임없는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막 1:35).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능력의 공급선이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죄인을 구속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애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그가 선택하려고 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성취할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이러한 기도는 남에게 과시(誇示)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빌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는 현격히 대조된다(막 12:40).

성 경: [눅6:1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열 둘을 택하여 - 열 둘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완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12제자의 선택은 예수의 복음 사역의 초기 단계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종말론적 의미에서 복음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구약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유대 민족의 형성 과정상의 12지파가 암시하는 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의미한다. '택하여'는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주권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요15:16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입증해 준다. 거기서도 예수는 선택의 주체는 분명히 예수인 것을 밝히고 있다.

⭕ 사도(*, 아포스톨로스) - 이는 '아포스텔로'(*, '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특별한 명령과 권세를 받아 보냄을 받은사절을 말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열 둘을 택하여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사도의 정의와 용법 및 사도직 계승의 문제등에 관해서는 막 3:13-19 주제 강해 '사도직에 대하여'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성 경: [눅6:1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베드로 - 14-16절은 사도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네 곳에 나타난다(마10:2-4;막 3:16-19;행 1:13). 베드로는 비록 맨 처음으로 예수께 부름받은 자는 아니라 할지라도(요 1:42) 열 두 사도의 목록 중에서 항상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그가 사도들 중에서 인정된 수제자(首弟子)였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은 그의 본명으로서 '듣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신 후 붙여 주신 이름으로서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이다. 또한 요 1:42에서 그에게 붙여진 '게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서 역시 '베드로'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 그 형제 안드레 -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로서(막 1:16-18;요 1:44) 세레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다(마 4:19,2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후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2:20-22).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주의 제자로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일들을 했다(요 6:8,9;12:20-22;행 1:13,14). 안드레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남자'라는 뜻이다.

⭕ 야고보와 요한 - 이들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던 세 제자 중의 두 명이다. 마가는 이들에게 더 자세한 말을 덧붙여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더했다(막 3:17). 그러나 누가는 아무런 수식이 없이 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이미 5:10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로 언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의 뜻이고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이다.

⭕ 빌립 - 안드레나 시몬의 고향과 같은 벳새다 출신이다. 주를 처음 만난후 친구 나다나엘을 주께 인도했던 자이다(요 1:45,46).

⭕ 바돌로매 - 히브리식으로는 '바르-탈매'(*)인데 이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바돌로매는 요 1:46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Herbert Lockyer)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성 경: [눅6:1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마태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그는 '레위'로 소개되는데(5:27-29;막 2:13,14) 그 의미는 '연합하다'이다. 아마 예수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히브리식 이름인 '레위'에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로 바뀐 듯하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예수의 은혜에 감사하고픈 심정에서인지 자신을 '세리 마태'로 숨김없이 표현한다(마 9:9,10).

⭕ 도마 - 세 번에 걸쳐 이 이름 다음에 '디두모'라는 헬라식의 이름이 따라 나온다(6:14-16;마 10:2-4;막 3:16-19). 이것은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바로 이 '디두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도마'는 히브리명으로 '쌍동이'라는 뜻이다.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작은 야고보'로 불리운다. 그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이름만 언급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10:3;막3:18). 다만 전설에 의하면 그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다는 것과 십자가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전해질 뿐이다.

⭕ 셀롯이라 하는 시몬 -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했다. 마태와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 사람'이란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인'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나'(*)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따라서 누가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셀롯'이라는 헬라 명칭은 '열심당원'(Zealot)을뜻하는데 시몬이 열심당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셀롯'이라는 이한 마디 속에서 열심으로 불타는 열광적인 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열심당은 유대의 반로마적 애국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을 감행 했었다. 이들은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는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곤 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몬은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18,1,1;6;Wars,2,8,1).

성 경: [눅6:1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야고보의 아들 유다 -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Thaddaeus)라고 부른다. RSV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Judas thebrother of James)라고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 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이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 졌다(요 6:71;13:2,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에 있다(수 15:25). 그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다. 그는 공관복음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예수를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게 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겼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것이었다(출 21:32).

성 경: [눅6:1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예수의 치료하시는 능력]

⭕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 '저희'는 이미 택하신 열 두 사도들뿐 아니라 그외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까지 지칭한다.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신예수께서 계속해서 산에만 계실 수 없었다. 이제 택한 제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서 죄악에 빠진 영혼들을 구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셔야 했다.

⭕ 평지에 서시니 - 여기 언급된 '평지'는 마 5:1의 '산 위'(mountainside)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평지'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 토푸 페디누'(*)는 반드시 저지(低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지를 뜻하기도 한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께서 산 위의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고 12제자를 선택하신 뒤 산 아래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오신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마태의 기록은 사방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를 향하여 올라간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두 일행이 산 언저리의 어느 한 평평한 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해결될 수있다.

⭕ 유대 사방과...많은 백성도 있더라 -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5:1)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구절에서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온 많은 백성들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평지에 멈추어서 가르치실 때 그 주위에 몇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택하신 열 두 사도들, 그들 보다 좀 많은 제자들의 무리, 그리고 일반 군중들이었다. 백성들이 허다하게 몰려든 목적은 예수의 권능있는 말씀을 듣고 또 그의 치유 능력을 보고자 함이었다. 한편 여기서 각 지방의 이름은 곧 팔레스틴 지역을 뜻한다. 앞 페이지의 지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치유 사역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 각처에서도 행해졌다. 여기서 '유대 지방'이라함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남쪽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동북쪽으로 베니게에 속한 항구 도시이며 이방 지역이다. 따라서 팔레스틴 남.북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사방 각처에서 예수의 말씀과 병고침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요단강 건너 지방까지 언급함으로써 팔레스틴 전지역을 서술적 형태로 표현해 의미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성 경: [눅6:1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예수의 치료하시는 능력]

⭕ 더러운 귀신에게...고침을 얻은지라 - 누가는 귀신들린 자들과 단지 육체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자들을 구별한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더러운 귀신에게'가 '고난받는'과 연결될 수 있고 둘째는 '고침을 얻은지라'와도 연결될 수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고치다'(*, 데라퓨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치유를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서술적인 반복의 뜻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 에데라퓨온토)로 쓰였다. 본절과 19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이적적 권능(power)과 고침(healing)에 관한 강조는 누가복음의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이 기사는 평지 수훈 직전에 위치함으로써 그 가르침의 권위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성 경: [눅6:1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예수의 치료하시는 능력]

⭕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 예수의 치유 능력이 알려지게 되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기만이라도 하려고 모여들었다. 병자들은 예수의 권위와 능력에 압도되어 예수에게 감히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지 못했다. 예수를 만짐으로 병을 고치는 기사는 8:43-46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예수의 옷자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예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병자들이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께 몰려온 병자들의 무리 개개인이 예수를 통해 병이 나을수있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만진 병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은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의 주권적인 은혜를 시사한다.

성 경: [눅6:2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눈을 들어 - 이같은 표현은 마 5:2의 '입을 열어'라는 말과 비교된다. 두 복음서 모두 어떤 한 행동을 취하기 전 예비 동작을 갖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예비동작의 표현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있게 전달해 주며 동작의 주체자의 의지적이고 결단력있는 모습이나 엄숙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인다(마 5:3).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두표현 간의 의미상에 큰 변화는 없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 항상 예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로 예수 앞에 몰려온 자들을 보면,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빈곤한자요 병약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이러한 사회적 소외층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 의지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한다. 특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사람들로서 압제를 당한다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자들을 가리키고 때때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외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경건한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한다.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로 묘사된다(단 4:27).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 하나님의 나라가 - 마태복음 평행 구절의 '천국'이라는 표현과 비교되는데 그 뜻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향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것을 꺼려하여 '천국'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 바실레이아)란 구약의 용어로는 '말쿠트'(*)인데이 말은 본래 왕의 지위, 왕의 권위, 왕이 행사하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예수는 이 단어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하셨다(마 6:10;10:7;12:28).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이 말은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는 믿음이 수반되는 곳에 '바로 지금' 임할 뿐 아니라 장차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 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기 바란다.

⭕ 너희 것임이요 - '너희 것이 될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은 완성되지 못한 축복의 영역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성 경: [눅6:2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여 영적 의미를 강조한다. '주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논테스'(*)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일시적인 주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영적인 것에 항상 주려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할 때 주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이다.

⭕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 육체적 주림이 해결된다 해서 영적인 주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림이다. 육체적 주림은 이 땅에서 음식물로서 배가 부를 수가 있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다. 이러한 영혼의 기갈 상태에 관하여 아모스 선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대언한 바 있다(암8:11). '배부름을 얻다'는 것은 능동적인 획득의 의미가 아니라 미래 수동태로 쓰인 것으로 주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서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클라이오'(*, '울다')는 통곡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도 현재 분사로서 지속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마태는 이를 '애통하는'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한다.

⭕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마태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웃음은 영적인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특성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해 보라(롬 14:17).

성 경: [눅6:2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인자를 위하여 - '인자'(*, 투 휘우 투 안드로푸)는 본서 중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예수의 칭호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였다(9:26;11:30;17:2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인자)이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로'너희가 나를 인자 메시야로 믿고, 나를 고백하고,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제자들로서 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이 문구를 '나를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칭호와 관련되는 의미를 상세히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자'라는 칭호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것은 그의 신인적(神人的)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사이다. (1)인자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의미한다(19:10;마 9:6). 예수가 그의 메시야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17:24;18:8),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정치적,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므로 이 말을 당신께 적용하기를 삼가셨다. (2)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자란 말과 연결된다. 인자는 인간의 형체를 띠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오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신인적인 성육신의 본성은 그의 사역 활동의 목적과 성격을 반영한다. (3)인자는 그리스도가 온전히 구원의 승리를 거두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이다(요 3:14).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의 부활 및 승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이와 같이 대속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승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완전히 승리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기 위해 예수는 인자의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다. (4)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Lordship)을 나타낸다(막14:62).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은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의 말씀과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5)인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 되심을 의미한다(마 13:41,42;19:28). 그리스도는 만민의 재판관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육신을 통해서 모든 인간과 동등하게 되었으면서 여전히 신성을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너희를 미워하며...버릴 때에는 -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곧 피로 얼룩진 역사라 할 수 있다. 이 박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이 박해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바이다. 이 박해는 참 신앙인과 거짓 신자를 구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연단을 가져다 주고 믿음의 인내를 가르쳐 준다. 사도행전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내적으로 충실했고, 선교는 더욱 활발했다. 따라서 박해를 이기고 난 뒤의 결과는 영광과 기쁨의 승리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멀리하다'(*, 아포리조)는 '경계를 구분하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사회적 교제 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나타내었다. 또한 '버리다'(*, 에크발로)는 연극 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단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악하다 하여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종종 있었듯이 경멸과 조소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투옥이나 재판, 사형에까지 이르도록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눅6:2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 마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반면에 여기서는 '뛰놀라'로 되어서 더 적극적이고 격렬한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앞절의 박해와 고난을 당할 바로 그때에 기뻐하고 뛰놀라는 의미이다. 이는 주님 때문에받는 박해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극적(dramatic)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 박해를 받는 자들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상이 예비되어 있다. '하늘에서의 큰 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 참예함'을 의미한다(마 5:10 주석 참조). 여기서 예수께서 '하늘의 큰 상'을 말씀하신 것은 박해를 피해가거나 박해로 인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주를 배반하지 말 것을 격려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박해 만큼이나 사람들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명예나 물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일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처럼 살기 힘든 세상에서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는 하늘 나라가 큰 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성 경: [눅6:2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 여기서 '부요한 자'는 20절의 '가난한 자'의 반대개념으로서 등장한다. 본문의 의미가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상징적 의미로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자신만을 신뢰하고 자만하며, 자신들의 교육, 학문, 지혜만 자랑한다. 더욱이 이들은 마음이 심히 완악하고 강퍅하여 그리스도의 경고의 메시지에 귀기울일줄 모르며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기업이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삶의 모든 의미를 두고 허탄한 일만 일삼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심판 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 부요한 자들은 미래의 영원한 축복 대신 현재의 육신적 만족을 스스로 택하였고 더욱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대가로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축복받은 자들과 잘 대조된다(23절). 여기서 '받았도다'란 의미의 원어 '아페코'(*)는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또는 '완전하게 수령했다'를 뜻하는 상업적 용어이다.

성 경: [눅6:2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배부른 자 -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영혼의 굶주림을 외면한채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여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이는 21절의 '주린 자'와 대조가 된다.

⭕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여기서 웃는 자의 웃음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서 오는 육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심판 때 대가로 받을 울음은 영원한 것이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한편 이 '웃는 자'는 21절의 셋째 축복 '우는 자'와 대조된다. 이처럼 20절로부터 계속 묘사되는 일련의 역전(逆轉) 상황들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 인간의 완악한 본성에서 기인하는 진리의 역설(paradox)을 선명하게 노출시킨다. 이와 같은 역전 상황 내지는 역설의 논리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를 테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이나(마 10:3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는 말씀이 바로 그러하다(고후 6:10).

성 경: [눅6:2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 일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자들을 칭찬하기 쉽다. 예로부터 거짓 선지자는 항상 그들의 간사한 행위를 인하여 칭찬을 받지만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함으로써 핍박을 받아 왔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칭찬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빛가운데 백일하에 드러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22절의 넷째 축복 '핍박을 받는 자'와 대조된다.

⭕ 저희 조상들이...하였느니라 - 본문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 당시의 왕실 선지자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아합왕과 왕후 이세벨의 귀에 즐거운 거짓예언을 일삼은 대가로 부를 누리며 칭찬을 들었다(왕상 18:19).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달콤한 통치자와 예언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며 나아가 그들을 우상 숭배에 빠뜨리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레미야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득세를 애통해 했다(렘 5:31). 예수께서도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로 표현하며 경계하셨다(마 7:15).

성 경: [눅6:2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그러나(*, 알라) - 원래 '알라'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이나여기서는 앞에서 나온 주제와 병행하는 다른 주제를 소개하는 연결사로 쓰인다. 본절로부터 36절까지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 5:21-48에는 주님의 가르침 다섯가지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 누가는 그 가운데서 한 가지(마 5:43-48)를 택하여 이를 보다 확대시켜 상세히 기록하였다. 누가는 구약의 구체적 계명을 꼬집어 말하면서 예수의 교훈과 대조시키지는 않는다(마 5:42,44 비교). 단지 그는 적극적인 사랑의 계명을 직접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마태는 황금률(黃金律)을 의도적으로 뒷쪽으로 옮겨 앞의 교훈들에 대한 결론적 요약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 7:15) 누가는 자연스럽게 문맥을 따라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한다(31절).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재산, 지위 등에 상관 없이 그에게 참된 관심을 나타내고 먼저 사랑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 중에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요 기독교의 가장 큰 교훈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몸소 실천하심으로써(23:24) 본을 보여 주셨다. 이 구절 하반부에서부터 30절까지는 사랑의 행위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롬 12:14-21). 평행 분문인 마 5:43-48은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의 차원 높은 새 계명들이 열거되는(마 5:21) 가운데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본문에는 앞 뒤의 연결이 다소 어색하지만, 앞의 내용이 완악한 유대교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비추어 본문은, 독선적 정죄에 급급하였던 당시의 폐단을 염두에 두고 이해됨이 자연스럽다.

성 경: [눅6:2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을 금하시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사면해 주는 권한만을 부여하셨다(요20:23). 여기서 '저주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라오마이'(*)는 전치사 '카타'(*)와 '소원', '간구'라는 뜻의 '아라'(*)의 합성어이다.따라서 이는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며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진 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 불가능해 보이는 숭고한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하고 원수들을 용서하신 십자가상의 외침에서 문자 그대로 실천되었으며(23:34), 스데반의 순교시에도 생생히 증거되고 있다(행 7:60). 사실 예수께서 죄있는 인간 세상에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바로 원수 사랑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이 놀라운 교훈을 인간의 합리적이고 산술적인 계산의 안목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억만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해질 인생이 예수의 대속으로 용서함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성도는 도저히 갚을 길없는 큰 사랑의 빚을 예수께 지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원수 사랑의 도(道)까지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눅6:2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 '뺨'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아곤'(*)은 턱이나 턱뼈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모욕의 행동뿐 아니라 폭력적인 행위까지 포함된다.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단순히 참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행위로 덮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폭력은 그보다 더 큰 폭력을 부르며 그때까지 참아 왔던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수반되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를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핍박에 직면하였을 때가급적이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자청하여 핍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요 18:22,23;행 23:3).

⭕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 출 22:26과 신 24:13은 다른 사람의 겉옷을 전당잡거나 압류한다면 그날 해가 지기전에 돌려보내도록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겉옷이 생필품으로서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의 역할을 하고 먼지가 많이 이는 낮에는 겉옷으로 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옷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추위 속에서의 굉장한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때로 중요하게 여기는 겉옷을 전당잡히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겉옷의 현물가치 때문에 노상 강도들은 겉옷을 걸친 사람들을 약탈하는 수가 다반사였으며 심지어는 겉옷과 함께 속옷까지도 빼앗아 가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감내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까지도 희생할 줄 아는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몸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보여주셨다(23:34).

성 경: [눅6:3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이것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던져 주는 것이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의 정신에서 주는 것을 의미한다(마 5:42).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계명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도 없이 어리석은 맹목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도는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다. 계산된 행동과 숨은 의도로서 다시 받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처럼 주는 것을 뜻한다. 잠언 기자는 이를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갈파한다(잠 19:17).

⭕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 본절 상반절의 내용과 비슷하지만더 강화된 표현이 사용되었다. 즉 '구하는'에 비해 '가져가는'은 보다 강압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주며'보다는 '다시 달라지 말며'라는 말이 한층 사랑의 밀도를 더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강도의 폭행을 방관하라거나 절도자의 손을 제지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지는 않았다. 다만 물질의 손실이나 이해 타산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소중한 영혼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를 우려하시며, 더 적극적으로는 궁핍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헌신적으로 구제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들을 반복하신 것이다.

성 경: [눅6:3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른바 황금률(黃金律)로서 기독교 윤리의 적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주석은 이 황금률이 원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랍비 힐렐(Hillel)이 이미 사용한 규범을 예수께서 사용하여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B.C. 5세기 후반 헬레니즘 세계에서 소피스트 운동의 결과로써 이와 유사한 교훈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유대의 저명한 랍비인 힐렐(Hillel)은 '네가 싫어하는것은 타인에게도 행치 말라'고 하였고 헬라의 스토아 철인(哲人)들은 '네게 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치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이 같은 교훈들이 예수의 황금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사람들의 교훈이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으나 그것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이고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올리신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 중 황금률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황금률을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예수의 교훈은 보편 윤리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차원 더 앞선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이 담긴데에 그 독창성과 특징이 있다.

성 경: [눅6:3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가 만일...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 마태는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고 말한다. 마태가 의미하는 '상'(*, 미스도스)은 그들 자신의 일이나 고생에 의해 얻어지는 상이 아니라 무조건적 은혜로 주어지는 상을 말한다. 본문의 '칭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또한 '은혜' 혹은 '선물'의 뜻으로 자주 쓰인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암시한다. 결국 이제껏 언급된 차원높은 새 교훈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의 은혜에 근거하여 실행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소위 탈리오의 법칙을 율법의 정신으로 받들고 있었으나 예수는 인과 응보적 보복의 차원을 넘은 희생과 사랑의 온전한 모랄(moral)을 제시하신 것이다.

⭕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 '죄인 들도'(*, 카이 호이하마르톨로이)란 '그 죄인들 조차도'란 뜻이다. 마태는 '세리'(마5:46)라고 말한다. 여기서 죄인이란 이방인들(5:47)과 세리(5:46) 그리고 창기와 기타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았던 소외된 모든 계층을 의미한다. 이처럼 버림받은 사람들 조차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이다.

성 경: [눅6:3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 이 구절은 앞절(32절)의 반복으로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한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는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처세에 급급한 나머지 기껏해야 '주는 만큼 받는'(give and take)식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개도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든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듯이, 그러한 단계는 그리 수준 높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자연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야 할 위치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할 능력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6:3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무엇이뇨 - '빌리다'(*, 다네이조)는 상업적인 거래에서 이윤을 목적하고 빌려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받기를 바라는'것은 대부(貸付)의 이자를 포함한 최종적인 총액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리대금업자처럼 이윤 목적으로 남에게 무엇인가를 빌려주는 자는 결국은 자신의 치부를 위한 것이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예수의 의도는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남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지만 그러나 그것을 되돌려 받기를 바라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의수히 받고자 하여 - 문자적으로는 '똑같이 돌려받기 위해'란 뜻이며 계산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빌려준 것을 다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반드시 돌려 받을 것을 전제하고 빌려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 경: [눅6:3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 다시 27절의 원래적 명령으로 돌아가 원수 사랑의 계명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여기서 '원수'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크드로스'(*)는 '증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우상 숭배자들이나 계약 관계를 깨뜨린 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낼 때 사용했다. 신약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적들을 나타내게 되었다. 어쨌든 여기서는 그들이 설사 계약 관계를 위반하였든 개인적인 해를 끼쳤든 간에 그들을 정죄하거나 재판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사랑의 행위여야지 단순한 보복의 동기에서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파오'(*)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나타내지만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까지도 수반된다(마 22:39). 아울러 이웃에 대한 사랑에는 원수에대한 사랑도 분명히 포함된다(마 5:43-44). 따라서 이 '아가파오'의 사랑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하게 된다. 즉 자신의 불이익이나 고난과 어려움을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감당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이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 바라지 말고 - KJV는 "아무 것도 다시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hopingfor nothing again)라고 번역한다. 이 부분에 대해 여러 번역본상의 차이들이 있으나 KJV의 번역이 가장 적절한 듯 하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빌려주든 무조건적으로 줄 것이며 다시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 1:32에서 이미 예수님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칭한 바 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을 할 때 얻는 상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누가의 표현에 비해 마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마 5:45). 이는 둘다 절대적인 권위(authority)와 지존(majesty)의 개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성 경: [눅6:3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 마태는 '온전'이란 말을 사용하지만(마 5:48) 누가는 그대신에 '자비'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누가는 글을 읽을 자가 율법에 능한 유대인(바리새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하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은혜를 모르는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신다. 그것이 곧 '온전'일 것이다.

⭕ 너희도 자비하라 - 이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 (1)이 명령은 죄인인 인간의 절망을 시사한다.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이 시행될 수있음을 뜻한다. 이 고차적인 명령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면 인간은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계명을 완수하신 예수께서 우리속에 거하시면 그분의 인도와 간섭 그리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3)성도의 신분과 위치가 실로 고귀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성도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그러한 교제를 위해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을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사(히 2:11) 이른바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하신다(벧후1:4).

성 경: [눅6:3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27절의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이 28-35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듯이 36절의 자비의 정신은 이제 본절과 38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먼저 '...말라'는 부정 명령이 두 차례 언급되며 이어 '...하라'는 적극적 명령이 또한 2회 나온다.

⭕ 비판치 말라 - 이 말은 단순히 윤리적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다음 구절의 "정죄하지 말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종교적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정죄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이 말은 합당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참과 거짓 그리고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수있는 판단력을 강력히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만 편견을 가지고 무분별하고 성급하게 의견을 제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판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습관적인 비판 성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을 보면 누구든 그를 비판하고 잘못을 찾아내어 정죄하려는 것을 나타낸다.

⭕ 정죄하지 말라 - 어떤 사람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은 법정에서 재판을 하거나 선악을 구별하는 일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재판관으로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금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선악의 분별을 가져야 하지만 심판이나 판결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고유 권한이다(롬 2:1,2;14:10;고전 4:3,4). 우리가 타인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할 가능성을 얼마든지 내포하고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며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참되고 유일하신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롬 12:18,19).

성 경: [눅6:3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주라 - 이 명령형은 다른 사람들의 곤궁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급할 수 있는 모든 선물을 주라는 뜻이며 또한 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이 동사(*, 디도미)는 요 3:16'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에도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거니와(행 20:35), 그 이유는 서슴없이 베푼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영광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 후히 되어...주리라 - '후히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 칼론'(*)은 '분량', '척도'(메트론)라는 말과 '좋은'(칼로스)이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좋은 분량으로 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준다는 의미이다. 즉 굵은 콩 사이로 작은 조나 깨를 섞듯이 조금도 빈틈없이 누르고 흔들어서 채울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채워서 준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임한다.

⭕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안티메트레데세타이) - 이 단어는 '다시', '반복'을 나타내는 단어 '안티'(*)와 '재다','측량하다'는 뜻의 단어 '메트레오'(*)의 합성어로서 '다시 측정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는가에 따라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눅6:3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비판에 대한 교훈]

⭕ 비유로 말씀하시되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일상 생활에서 비롯된 네가지 짧은 비유로 끝맺는다. 주께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을 무리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든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군중들에게 설교하든지, 서기관 및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하든지 간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비유가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내용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고 착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수수께끼조차 환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이 A.D. 20-30년대 팔레스틴 변방의 생활 환경을 잘 밝혀준다는 사실이다. 비유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 중 일부는 청중이 그 비유 속에 묘사되어 있는 상황에 이미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본장에 나타난 비유들에서 청중들은 모두 동전 하나를 잃는 일이(15:8-10) 어떻게 집을 발칵 뒤집어 놓는가를 잘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먼 나라로 자기의 행운을 찾아 떠난 방탕한 아들을(15:11-32)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여리고 도로의 위험은(10:30) 그 소문이 자자했다.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 이 구절은 팔레스틴의 지형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곳의 땅들은 바위들이 많고, 많이 패여서 소경이 안전하게 보행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길을 소경이 또다른 소경을 인도한다면 어찌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소경이 영적 소경을 인도하고 지도한다면 인도한 자는 물론 인도함을 받은 자까지 영혼의 멸망을 당하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경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빛되신 예수를 반대하였고, 빛보다 어두움을 택하였으며, 보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본다고 말하였다(요 3:19;9:40,41). 그리고 그들은 제자를 얻기 위해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결국에는 그 제자를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말았다(마 23:15).

성 경: [눅6:4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비판에 대한 교훈]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 마태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10:24)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이, 핍박의 상황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어,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이 예수께 닥친것보다 더 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절에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진 소경들이 바리새인들을 가르킨 것이라면 지금 이 구절에서도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 볼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소경인 제자는 소경인 선생보다 못할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여전히 그 거짓된 교훈의 틀에 속박당하고말 뿐이라는 의미이다.

⭕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 선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좇게 된다면 그 선생과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는 예수의 다른 의도, 즉 '나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 사람보다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온전케 되어 나와 같이 되라'는 권고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생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는 없지만,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범사에 자라가야 한다(엡 4:15;골 1:18).

성 경: [눅6:41,4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비판에 대한 교훈]

⭕ 어찌하여 형제의...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이 두 구절은 39, 40절과 연결되어 잘못된 선생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이다. '티'와 '들보'는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인간성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티'(*, 카르포스)는 원래 '조각'이란 뜻인데 조그마한 나무조각, 즉 '나무 부스러기'를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지셨던 목수 일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리고 들보는 건물의 서까래로 쓰기에 적절한 무거운 목재를 가리킨다.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범죄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생활 속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비판하는 거짓 선생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예수께서 작은 나무 부스러기와 커다란 들보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은 대개 다른 이의 잘못에 관심이 많으며 그것을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 단체의 개선이나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개혁이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냉철히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래서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당시 바리새인들의 심각성은 그들 속에 들보가 박혀 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개선이나 회개는 자신의 처한 형편을 직시하는 데서 비롯되거니와 그들은 위선과 외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 어찌하여(*, 포스) - 이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사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자신의 눈 속에는 들보, 즉 온갖 위선과 죄악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형제의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이다.

성 경: [눅6:4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나무와 열매]

⭕ 못된 열매 맺는...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 가시적 결실, 곧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들의 인격 혹은 마음을 묘사하며 열매는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 즉 태도, 말, 행동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1)사람의 영적상태는 자연스럽게 외적으로 나타남을 가르친다. 물론 당시 바리새인과 같이 위선으로써 철저히 은폐하는 자들은 표리 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의 궁극적 관심사(예컨대, 재물욕, 명예욕 등)는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역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를 발한다(고후 2:15). (2)구체적 결실을 맺는 신앙이 되어야함을 가르친다. 입으로만 온갖 경건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냉담하다면 이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으며, 이런 나무는 찍혀 불붙은 아궁이에 던져지게 된다(마 7:19).

성 경: [눅6:4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나무와 열매]

⭕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는 나무의 가치나 중요성이 그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나니'(*, 기노스케타이)란 본질적인 것까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 가시나무에서...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 마태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로 기록한다. 각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들이 서로 바뀌어져 열릴 수 없듯이 사람의 경우도 그 심령의 상태 대로 외적 행실이 드러나게 마련임을 거듭 강조하는 말씀이다. 한편 본 비유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있는 광경에서 취해진 것이다. 즉 무화과나 포도를 재배하는 곳은 대개 가시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 무화과나 포도 열매가 가시 덤불과 섞여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 되었던 것이다.

성 경: [눅6:4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나무와 열매]

⭕ 마음의 쌓은 선에서 - 이 말은 문자적으로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로부터'라는 뜻이다. 이는 마음이 선이나 악이 쌓이는 창고인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잠 4:23은 특별히 마음을 지킬 것을 훈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성경에서 지(知), 의(意), 정(情)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적 생(生)의 근원으로 또 나아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되는 인격의 가장 깊은 원천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신 20:14;시 27:8;잠 6:18). 말과 행실은 마음의 창고에서 나오는 산물이다(마 12:34,35). 속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악한 것을 말하고 그것을 행하여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 경: [눅6:4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본절로부터 49절까지는 평지 수훈 전체의 결론으로서, 참된 신자의 표는 번지르르한 말이나 종교적인 의식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모든 가르침들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 주여 주여 하면서도...행치 아니하느냐 - 마태는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하였다(마 7:21). 본 구절은,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도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예수의 신령한 교훈을 깨달아 실천에 옮기는 일에는 무관심하였던 많은 무리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넓게는 소위 외형상으로 종교 생활을 해나갈 뿐 실제적으로는 신앙의 결실을 맺지 않는 일부 맹목적 신자들 전체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수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맺어야 할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재림시에 '도무지 알지 못하는'자로서 제거되고 말 것이다(마 7:21-23 주석 참조).

성 경: [눅6:4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내게 나아와...행하는 자마다 -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 동사가 제시되는데 곧 '나아와', '듣고', '행하는'이다. 이는 곧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원리를 순서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1)'나아와'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곧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 나아와 그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된다(요 1:12). (2)'듣고'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롬 10:17). (3)'행하는'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다(약 2:17).이 세 가지 사항을 모두 지키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곧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선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다.

성 경: [눅6:4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집을 짓되 깊이 파고 - 예수의 이 비유는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와 건축 양식을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으로서 일단 비가 왔다 하면 보통 사나운 폭풍을 동반하여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쏟아졌고 그로 인해 산에서 탁한 급류가 흘러내려 기초가 약한 건물들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집을 지을 때는 폭우가 쏟아져 흘러 내릴 때를 대비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기 때문에 깊이 파들어 가야 했다.

⭕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 지혜로운 건축자는 기초를 세우기 전에 반석까지 깊이 파들어가 그곳에다 기초를 세운다. 이 말이 바로 전체적인 요점이기도 하다. 예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의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는 것이다. 주초를 반석 위에 튼튼하게 세운 집이 온갖 폭풍에도 잘 견디어 내듯이, 예수의 말씀을 머리 속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구체적 삶 가운데 실천해 나감으로써 크고 작은 난관들을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축적하게 되며 결국에는 큰 환난에 처하더라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수 있다는 말씀이다.

성 경: [눅6:4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일대일 만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듣는 일도 행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경우에 설령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흔한 윤리적 교훈 중의 하나정도로 여길 따름이며 그 속에 내포된 생명력있는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므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 마태는 '모래 위에'라고 한다(마7:26). 모래가 흙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긴 하지만 흙이라고 그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이 주초 없이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탁류가 부딪히매...파괴됨이 심하니라 - 탁류가 흘러 내릴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내릴 것임에 분명하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로서 환난과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며 그때 믿음이 없고 견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환난과 시련에 멸망하고 말 것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탁류'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시련과 궁극적으로 맞게 될 마지막 시험을 의미한다(고전 3:11-15).

성 경: [눅7: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예수께서...마치신 후에 - '모든 말씀'은 앞장에서 행하신 평지 수훈(平地垂訓)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서두의 말씀을 단순히 앞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로센'(*)은 '성취한'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반면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전환될 때 마태복음에서 주로 사용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마치다'는 뜻인'텔레오'(*)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성취되어 갈 것이다.

⭕ 가버나움 - 갈릴리 바다 북서안의 성읍으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음역이다. 이 가버나움이라는 말은 '나훔'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지만 선지자 '나훔'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그의 선교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 였으며 예수의 공생애의 중심지였다(5:23,31-37;마 8:5-13;17:24-27;막 1:21-28;2:1-12;요4:46-54;6:16-59).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마음이 강포하고 완악하여 예수의 복음 전파에 무감각하고 또 그들의 죄를 회개치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진노(震怒)를 사고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당했다(10:15;마 11:23).

성 경: [눅7: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백부장 - 본래 백부장이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를 말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백부장의 군대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로 구성되었고 헤롯 안디바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장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기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백부장의 지위에 선택되었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성실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격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된 백부장들이 모두 인격자였다는 것과 일치한다(23:47;행 10:22;22:26;23:17;24:23). 이 백부장이 반드시 이방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께 보내었던 것(3절)과 예수의 말씀(9절)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 사랑하는 종 - 마태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파이스'(*, '하인')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마 8:6) 누가는 분명히 '둘로스'(*,'종')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종'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자신에게 없고 주인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종과 상전이라는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를 손수 찾아가 예수께 부탁을 올릴 것을 간구한 사실은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반영한다. 아울러 이 종이 그의 상전인 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 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반증하기도 한다.

성 경: [눅7: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한다(마 8:5).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오셔서...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 '구원하시기를'(*, 디아소세)이란 폭풍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백부장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터라 감히 예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눅7: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이에...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다. '간절히'란 원어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께 열심히 간청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구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파레칼룬'(*)은 미완료형으로서 간구하기를 시작한 후 계속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성 경: [눅7: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저가 - 이 구절은 앞에서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원래는 '가르'(*, '왜냐하면')가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저가'(*, 아우토스)는 문법적으로 '그 자신이'란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회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없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7: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주여 - 이는 단순한 호칭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9절) 신앙 고백적 측면까지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성 경: [눅7: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말씀만 하사 -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11-16절)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다(8:22-25). 예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창 1:1-31).

⭕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인'(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들'을 지칭하기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성 경: [눅7: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저도 - 원문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으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낸다.

⭕ 남의...사람이요 -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underauthority, NIV)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다.

⭕ 이더러...하나이다 -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도 어떤 권위로 말씀만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백부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왕하 6:17;시 34:7;68:17;103:20;마 26:53).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수와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케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이시다(요 17:2).

성 경: [눅7: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예수께서...기이히 여겨 - 예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다(막 6:6).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그의 겸손함(humility)이다. (2)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 4:50에서도 발견된다. (3)예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 이스라엘...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이다(5:20;마 8:2,3). 예수께서 놀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 중에 쓰인 부사 '우데'(*)는'...조차도...않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을 늘상 접하며 여호와 신앙에 삶의 기반을 두는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방인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아직 유대인 중에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시는 예수의 책망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준다.

성 경: [눅7:1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집으로 돌아가...강건하여졌더라 - 마태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7:1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성에서 엔돌(Endor) 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다. 한편 '나인' 성은 오늘날까지 '네인'(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한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葬禮行列)과 마주치셨다. 아마 그 지역의 사람들은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왕하 4:8-37).

성 경: [눅7:1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 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화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르었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금 성문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때 예수의 일행은 성문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 이는 그 어미의...과부라 -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 생활을 입증한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성 경: [눅7:1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주께서(*, 호 퀴리오스)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낸다.

⭕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 불쌍히 여기사(*, 스플랑크니조마이) -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다(마 14:14;15:32;20:34). 이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다(마 15:32;20:34;막 1:34;8:2). 그리고 이는 곧 죄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으시게끔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이다.

⭕ 울지 말라(*, 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울다'는 동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클라이오'(*)와 '다크뤼오'(*)이다.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눅7:1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가까이 오사...대시니 -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레 22:4;민 19:11).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다. 여기서 '관'(*, 소로스)은 호머(Homer)의 글에서 나타난 바대로 원래 죽은자의 유골이나 재를 넣어 두는 항아리를 의미했으나 나중에 시체를 넣는 함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 일어나라 - 예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8:54;요 11:43).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 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왕상 17:21;왕하4:35;행 9:40;20:1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이다(롬 8:2;고후 1:10;딤후 1:10).

성 경: [눅7:1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죽었던 자가...하거늘 -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된다.

⭕ 예수께서...주신대 - 그 과부를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이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비로우신 예수를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이다.

성 경: [눅7:1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 누가는 또다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5:26;18:43;23:47).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진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을 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독사존'(*)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예수의 크신 권능에 압도당한 무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나타낸다.

⭕ 큰 선지자가...일어나셨다 -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대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왕하4:35)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이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으나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부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다.

⭕ 하나님께서...돌아보셨다 하더라 -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룻 1:6;삼상2:21)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원래 '돌아보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의사가 왕진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동사 '에피스켑토마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말 4:2)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성 경: [눅7:1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이다(Meyer).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것은 유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땅 전체, 즉 실질적인 팔레스틴을 말한다(1:5). 물론 유대 지방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보통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다.

성 경: [눅7:1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의 제자들이...고하니 - 마 9:14;요 3:26 등으로 비추어 보건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따른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열 두 제자들처럼 철저하게 예수를 따르지는 못했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들이 감옥 밖에서 되어가는 일들, 특히 예수의 활동에 대해 세례 요한에게 수시로 알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7:1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 그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헤롯은 자신의 부정에 대한 요한의 책망을 괘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그의 교훈과 회개의 세례에 동조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位相)에 도전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를 투옥하게 되었다(3:18-20). 이로 인해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통해 외부의 소식을 들으며 예수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곧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행적에 대한 관심이 그 누구보다 컸다 하겠다.

⭕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오실 그이'는 메시야를 의미하는데 이 칭호는 시40:7;118:26;단 7:13등에서 유래한다. 원문에 의하면 '당신'(*, 쉬)이 강조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요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라면 빨리 어둠의 세력을 멸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은 옥에 그대로 머물렀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에 요한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정말 메시야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성령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깨달았다(마 3:13-17).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제지하기는 커녕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오히려 예수께로 적극적으로 인도하였다(요 3:30). 따라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하여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가 메시야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오랜 옥살이에 지쳐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의심이 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즉 요한은 유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헤롯과 같은 악한 세력을 제거하여 이스라엘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줄 메시야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요한의 제자 파송이 예수의 권능과 명성을 시기하는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직접 듣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Clavin,Jerome). 어쨌든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그가 참수형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사역에 충실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의 메시야성을 오해하거나 의심했었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의 사역을 극찬하셨다.

성 경: [눅7:2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하더이다 하니 - 요한의 보냄을 받은 두 명의 제자가 예수께 나아가 요한의 지시대로 질문하였다. 여기 사용된 의문형은 화제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용법은 신.구약을 걸쳐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 32:27;33:5;삼상24:16;요 1:19,25;4:11,12;6:5 등).

성 경: [눅7:2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예수께서...많이 고치시며 -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유는 먼저 그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대가나 칭송을 받으려 하신 적이 없으며 어떤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기 이전에 병마에 신음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자체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아울러 이런 치료 행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는 애곡하는 것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암시가 들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치료 행위에 나타나는 그의 이적적 권능을 통해 그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시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눅7:2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병고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현재 시제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말하는데(마11:4)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말한다(NIV역은 완료형으로 번역되었다). 누가가 여기에서 과거형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의 병고치는 일과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시차를 분명히 하려는 정밀한 표현으로 보인다.

⭕ 요한에게 고하되...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께서는 여기서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사 35:5,6;61:1). 이 여섯가지 표적들은 모두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이적으로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들이었다(고전 1:22). 따라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것을 피하고 이와 같은 표적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본절과 관계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

| 내 용 | 예 언 | 성 취 |

+--------------------------------+---------------------+-----------+

| 소경이 보며 | 사 29:18;35:5 | 마 15:31;막 10:46-52 |

+--------------------------------+---------------------+-----------|

| 앉은뱅이가 걸으며 | 사 35:6;61:1 | 마 15:31;행 3:6 |

+--------------------------------+---------------------+------------

| 문둥이가 치유되며 | 사 61:1 | 17:14;마 8:3 |

+--------------------------------+---------------------+------------

| 귀머거리가 들으며 | 사 29:18;35:5 | 막 7:34,35;9:25-27 |

+--------------------------------+---------------------+------------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 14,15;8:54;요 11:43,44 |

+--------------------------------+---------------------+------------+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 사 61:1 | 4:18 |

+--------------------------------+---------------------+------------

성 경: [눅7:2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누구든지...아니하는 자는 - '실족하다'(*, 스칸달리조)는 동사는 '걸어 넘어뜨리다', '함정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어떤 목표물이 걸려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를 범하고 결국은 영혼이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런 뜻에서 이 말은 신약에서 '죄를 범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는 그 누구든지 자신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여 거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예수를 생명의 주로 바로 알고 받아들이면 복이 있다는 말이다.

⭕ 복 - 여기에서 '복'은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거나 육적(肉的)인 복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원한 축복을 뜻한다. 한편 본절이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바, 세례 요한을 위시한 그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여 예수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경원(敬遠)시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귀 기울이라는 경계와 당부의 말씀으로도 이해된다.

성 경: [눅7:2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무리에게...말씀하시되 -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이는 주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다.

⭕ 너희가 무엇을...나갔더냐 -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때 많은 무리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였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였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다.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있는 흔하고 하잘 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의 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될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눅7:2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그러면(*, 알라) -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이다(R.C.H. Lenski).

⭕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다.

⭕ 보라...자는 - '사치하게 지내는'이란 원어상으로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는 의미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린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고관 대작들이 호의 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만일 세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 왕궁에 있느니라 -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다.

성 경: [눅7:2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그러면 너희가...나갔더냐 - 예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 자답 형식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있다.

⭕ 선지자냐 - 이 말은 선지자를 본다는 것은 '보려고 나갔더냐'는 의미이며 '선지자를 그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이다(R.C.H.Lenski).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이다.(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위함이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6)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3:2).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다.

⭕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 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적 예로 사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말 4:5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2)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문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27절).

성 경: [눅7:2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셨다. 완료형 '게그랖타이'(*)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written)는 의미이다.

⭕ 보라 내가...보내노니 -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음에 유의하자. 그것은 여기에 인용된 '네 앞에'(*, 프로 프로소푸 수,)란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는 '내 앞에'(*, 레파나이)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도 '내 앞에'(*, 프로 프로소푸 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주님께서 이처럼 '내 앞에'란 말을 '네 앞에'로 바꾸어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친히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자기 계시(self-revelation)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야 할 사람이었다. 원문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가 쓰여서 사자의 역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3:7-14;마 3:2). 또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성 경: [눅7:2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여자가 낳은 자 중에 -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한다(시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하나님의 나라에서는...저보다 크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the Old Dispensation)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서를 늘 묵상할 수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사 영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딤후 1:14). 한편 이 구절을 하나님 나라에서 요한을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면 13:28(마 8:11)의 내용과 상반된다. 따라서 예수의 의도는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성 경: [눅7:2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2,13;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두워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죄인들'로 언급된다(5:30;7:34;마 9:10;11:19;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다.

⭕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3:12 주석 참조.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이다(20:4;행 18:25;19:3). 요한의 세례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 세례를 시행하였다(마 3:11). (2)세례 받는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이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다(마 3:7-9).

⭕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이다.

성 경: [눅7:3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율법사 - '율법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는 '서기관'(*, 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다(5:21;10:25;11:45,46,52,53;14:3;마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각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예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율법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 속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이다.

성 경: [눅7:3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이 세대의 사람 - 류만(Luhrman)에 의하면 '세대'(*, 게네아)란 이스라엘 전체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세대'라는 말 속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 말이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마 11:20-24;13:53-58 참조).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때문에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암시되어 있다.

성 경: [눅7:3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춤추지 않고...울지 아니하였다 - 예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신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哭)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다.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의(義)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를 경멸하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를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다.

성 경: [눅7:3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원문에는 '왜냐하면'(*, 가르)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은 앞절에서 말씀하신 아이들의 비유가 이 세대를 적절히 묘사하는 이유를 제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이 구절과 다음 절을 통해서 요한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 떡도 먹지...마시지 아니하매 - 마태는 떡과 포도주를 말하지 않는다(마 11:18).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었다(눅1:15;막 1:6). 또한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민 6:2-4)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다.

⭕ 너희 말이...들렸다 하더니 - 유대인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난했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들의 사악한 잔치와 사치한 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앞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싸움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눅7:3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인자는...먹고 마시매 - 예수께서는 요한이 하는 것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막2:19)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진리의 본질과 참된 생명의 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예수의 사역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세리들과도 상종(相從)하신 것을 보면 예수는 인위적인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셨다(5:27-32).

⭕ 보라 먹기를...즐기는 사람이요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처럼 율법적인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다. 요한에 대해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 하여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오히려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그 반대 이유를 들어 비난한다. 그들이 비난한 대로 만일 예수께서 탐식가요 술주정꾼이셨다면 율법의 기준대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의 항목에 속했다(신 21:20,21).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은 곧 예수를 정죄할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I. Howard Marshall).

⭕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이러한 비난은 특별히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치 때에 예수께서 참여하신 사실과 관련된다(5:27-32). 예수는 세리 마태의 경우 외에도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관심은 특히 잃은 양(15:1-7), 잃은 드라크마(15:8-10), 돌아온 탕자(15:11-32)등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 경: [눅7:3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지혜 -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다. 특히 잠언의 경우는 지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며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잠 1:20;8:22-31). 그리고 특별히 사 9:6과 11:2는 메시야를 지혜와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여기서 '지혜'란 곧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전 1:23,30). 성경은 지혜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부터 찾는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 28:12)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하였다(잠 1:7).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때 그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특별히 성령과 관계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행 6:3;고전 2:6;12:8;엡 1:17;골 1:9;3:16;약1:5;3:15-17).

⭕ 자기의...옳다 함을 얻느니라 - 마태는 '그 행한 일로...'라고 묘사했다(마11:19). 여기서 '자녀'란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롬 9:7,8). 그리고 '옳다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는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는 뜻이며 원문상으로 이 말은 문두에 나와서 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의 의미는 쉽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와그 복음이 대적들에 의해 곡해되고 비난 받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위로와 기쁨이 되며 그들에 의해 세계 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눅7:3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한 바리새인이 -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던 이례적(異例的)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었으나 그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유대에서의 '시몬'은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다.

⭕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한 일은 일견 용기있는 태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였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이유가 예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하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께 대해 고소할 빙거(憑據)를 찾기 위해 초대했으리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다. 누가는 이 구절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초대한 예를 두 곳에서 들고 있다(11:37;14:1).

성 경: [눅7:3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죄인인 한 여자 - 이 여자를 창기(娼妓)로 보는 견해(Meyer, Bruce)도 있으나 성경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다. 그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향유담은 옥합 - 이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다. 이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Pliney)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다. 이런 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눅7:3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는 그녀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아울러 예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자기 머리털로 씻고 -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수를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된다.

⭕ 그 발에 입맞추고 - 이는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며 특히 헬라어 원문상 '카테필레이'라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는데(*, '입맞추고') 이것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인바, 예수께서 들어 오신 후 계속해서 예수의 입을 맞췄다는 의미이다(Robertson).

⭕ 향유를 부으니 -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가지 살필 수가 있다. (1)복음을 듣고 알아야 한다(37절, 알고). (2)예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예수의 뒤로...서서 울며). (3)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자기 머리털로 씻고). (4)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한다(그발에 입맞추고). (5)최선의 봉사를 해야 한다(향유를 부으니).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 수 있다.

성 경: [눅7:3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시몬은 여인의 도유(塗油)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같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는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다(5:32). 한편 원문의 가정법 형식은 사실이 아님을 단정짓는 표현이다.

성 경: [눅7:4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다. 바리새인은 마음 속에 예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는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된다.

⭕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다.

성 경: [눅7:4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빚진 자가 둘이 있어 - 예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다(17:10;마 6:12;18:23-35). 그런데 마 6:12의 경우에는 죄가 구체적으로 빚과 동일시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빚의 탕감 여부가 죄 용서 문제와 동일시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상응되는 의무를 부과해 주며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마 6:12).

⭕ 데나리온 -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었다.

성 경: [눅7:4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탕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카리사토'(*)는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이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이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니다.

성 경: [눅7:4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시몬이 대답하여...받은 자니이다 - 예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예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 네 판단이 옳다 - 예수는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신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이다.

성 경: [눅7:4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다(창18:4;19:2;24:32;삿 19:21 참조). 그러나 시몬은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다.

⭕ 이 여자는...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 예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를 시사한다.

성 경: [눅7:4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게...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다(창 29:13;45:15;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께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는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께 묵언(默言)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 경: [눅7:4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치 않았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머리'와 '발' 그리고 '감람유'와 '향유'는 극명한 대조를 더해준다.

성 경: [눅7:4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 여기서 '많은'(*, 폴라이)이란 강조하기 의한 말인데 '모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하여졌다'(*, 아페온타이)는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사랑, 즉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언뜻 보기에 여기 사용된 접속사 '호티'(*, '이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카톨릭의 공덕설(ontritio caritate formata) 같은 교리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이유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접속사 '호티'는 그녀의 죄가 사해진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체 비유와 50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Lenski). 둘째, 성경 전체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은 억측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이다(엡2:8,9). 셋째, 그러한 해석은 예수께서 비유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점(42절 참조)과 상치된다. 비유의 요점은 두 채무자가 그들의 빚을 은혜에 의하여 탕감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녀의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Bengel,Meyer, Farrar, Ellicott 등)로 봐야 한다.

성 경: [눅7:4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신다. 이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7:4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정죄하였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성 경: [눅7:5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하였다'(*, 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 것이다(8:48 주석 참조).

⭕ 평안히 가라 - 이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령형은 평안 상태의 항구성(恒久性),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시사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를(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행 2:28;엡 6:23;몬 1:20 ;히 9:22).

성 경: [눅8: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섬기는 여자들]

⭕ 이후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카덱세스'(*)는 '후에', '순서대로'(1:3), '뒤를 이어서' 등의 뜻이며 반드시 시간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7:36-50의 사건이 있은 후라는 정도로 생각할 수있다.

⭕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 앞에서 시간에 관하여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은 것처럼 장소에 관해서도 정확한 정보를 말해주지 않고 단지 '각 성과 촌'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 지역들은 갈릴리지방에 있는 고을들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4:15와는 달리 본문에서 '회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들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마 12:9-14, 13:54-58;요 18:20을 볼 때 예수께서는 회당에서도 가르침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고 '각 성과 촌'이라는 축소(縮小)된 표현 속에는 '회당'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두루 다니시며'(*, 디오듀엔)는 누가만의 독톡한 언어로서 이곳과 행 17:1에만 나오며 '디오듀오'(*)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이다. 이 단어가 미완료 능동태인 점과 또한 이 단어 속에는 '이리 저리 길을 만들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예수의 사역이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progress)되었으며, 성읍이나 촌, 또는 집이나 회당에서, 심지어는 노천이나 길 등에서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셨음을 말해준다.

⭕ 하나님의 나라...복음 -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요약된다(4:43).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 하였던 일들을 보건대(7:22,48) 죄의 결과로 인해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왜곡된 인간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복음이란 바로 이런 일들이 예수로 인해 현재에 실현되기 시작했으며 장차 완성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 참조).

⭕ 열 두 제자 - 이들은 6:12-16에서 예수의 정규 제자로 선택된 자들이었으며 예수께서는 이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밤을 세우며 기도하기까지 하셨다. 이제 이들은 공적인 예수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언급되고 있는 바 이들은 예수의 선교를 수행하면서 스승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는 진정한 사도로 설 수 있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성 경: [눅8: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섬기는 여자들]

⭕ 악귀를...병 고침 받은...여자들 - 예수를 수행하여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는 열 두제자 외에도 다수의 여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유대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몇몇 신실한 여인들을 전도 여행에 합류(合流)시킴으로써, 천국의 일꾼될 자격이 외적 조건에 달려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본서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며 과연 천국이 어떤 자들의 것인지에 관해서도 암시하고 있다. 곧, 천국은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시인하고서 주님의 은혜만을 겸손히 간구하는 자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18:13,14).

⭕ 막달라인...마리아 - 마리아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으므로 이 특정한 마리아를 구별하기 위해서 '막달라'라는 지명을 이름 앞에 붙였다 '막달라'는 '탑' 또는 '망루'라는 뜻의 지명으로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다. 이 마리아를 특징지워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녀가 과거에는 일곱 귀신에 들려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였으나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지금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는 점 뿐만 아니라 일곱 귀신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도(마 12:45) 이 여인에게 임한 고통이 얼마나큰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은총을 입었으므로 그녀가 예수에게 전적인 헌신을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인 바 예수를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짐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의 수난사에서 독보적(獨步的)인 증인이 된 점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할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마 27:55,56;막 15:40;요 19:25), 예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장에도 있었고(마 27:61;막 15:47;눅 23:55), 주일날(안식 후 첫날)이른 아침에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고(마 28:1;막 16:1;눅 24:10),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도 바로 그녀였다(막 16:9;요 20:1-18).

성 경: [눅8: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섬기는 여자들]

⭕ 요안나 - 이 여인은 24:10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두 천사로부터 통고 받은 인물로 나오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본절에서 그녀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라는 사람의 아내로 소개된다. 여기서 헤롯은 당시 갈릴리를 지배하던 헤롯 안티파스로 보이며 구사라는 이름은 이곳에서만 나오므로 그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청지기는 그 직책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청지기'의 헬라어 '에피트로포스'(*)가 '넘겨 준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재산을 넘겨 받아 관리하는 재정 담당관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책을 가진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매우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고뎃(Godet)과 같은 학자는 '구사'라는 관리가 다름 아니라 그 아들을 예수께서낫게 하였던 요 4:46이하의 관리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그의 아내 요안나가 예수를 따르며 섬겼던 이유는 각별(恪別)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를 대비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낮은 계층의 여성과 요안나와 같은 부유한 계층의 여성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이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의 보편성(universality)을 보여 주었다는사실이다.

⭕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 - 수산나라는 이름의 뜻은 '백합'인데, 그 이름대로 매우 친절한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름이 언급된 세 명의 여인들 외에도 수명의 여자들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도 전하여 주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면에서 여자를 남자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던 유대인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해주었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여자들에게서도 남자들에게서와 똑같이 구원의 가능성과 복음의 증언자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 자기들의 소유로...섬기더라 - 이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원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일부분의 자료가 된다는 점과 예수의 선교 사역 배후에는 이와같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었음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요 13:29에 의하면 예수와 제자들 일행에게는 공동의 '돈 궤'가 있어서 그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도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돈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이와같이 예수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신들의 소유를 헌금한 것에 의해 충당(充當)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대의 순회 설교자들이 부유한 여인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경우는 혼히 있었던 일이나, 본문의 여인들이 예수를 헌신적으로 섬긴 것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며 그들이 예수와 참된 정신적 영적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더구나 이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 '섬기더라'이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에코눈'(*)이 '디아코네오'(*)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임을 감안할 때 여인들의 재정적인 섬김은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도움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성 경: [눅8: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큰 무리를 이루니 - 누가는 현재의 시점과 장소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지 않으나 마13:1-23;막 4:1-20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제, 자매, 모친이 누구인가에 대한 교훈을 하고 난 후 가버나움의 어느 해변에서 배를 타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 동네에서 모여 들었는데, 이들은 아마 예수의 교훈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 비유로 말씀하시되 - 디아 파라볼레스(*)는 '비유의 방법으로'라는 뜻으로 비유로 말하는데에는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10절주석 참조). 여기서 비유는 헬라어 '파라볼레'(*)에 해당하는데, 이 말은 '곁으로'를 뜻하는 '파라'(*)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로 한 물건을 다른 물건 곁에 두고 비교함으로써 그 실체(實體)를 정확히 아는 방법을 뜻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어려운 이치를 다른 것에 빗대어 쉽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모든 세대에 걸쳐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존해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비유는 그 단순성으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며 또한 복음의 의미를 학술적이기 보다는 일상적으로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유는 복음의 원뜻을 너무 과도하게 노출(exposure)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위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실수를 막아주는 보호막 구실을 한다.

성 경: [눅8: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씨를 뿌리는 자 - 원문상으로는 씨를 뿌리는 자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있다. 이는 씨를 뿌리는 전체를 대표하거나 또는 예수께서 본 비유를 베푸실 당시 주위에 씨를 뿌리는 특정한 사람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아무튼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대다수의 청중들은 농경 문화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말씀의 표면적인 의미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5-8절은 씨뿌리는 비유에 관한 말씀으로서, 씨뿌리는 자나 씨앗 자체보다도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토질(土質) 곧 성도들의 마음밭에 강조점이 있다.

⭕ 길가에 떨어지매 - 밀이나 보리 등을 사람이 손으로 뿌리는 일은 통상적이었다. 팔레스틴의 토지는 보통 가늘고 길게 분할되어 있고 분할된 밭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다. 씨를 뿌릴 때는 이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으며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 그 발에 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게 마련이었다.

성 경: [눅8: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바위 위에 떨어지매 - 마태(마 13:5)나 마가(막 4:5)는 '돌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돌로만 이루어진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 간혹 바위가 있어 그 바위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땅에서는 씨에서 싹이 나서 조금 자라기는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가 뜨면(마 13:6) 곧 말라 죽게 된다.

성 경: [눅8: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다. 헥커(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을 의미하는 용어가 22종류나 된다고 한다. 아무튼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성 경: [눅8: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충분한 습기와 자양분을 구비하고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성장하여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나 마가의 경우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나(마 13:8;막 4:8), 누가는 나머지 두개는 생략한 채 백 배의 결실만을 언급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강조하고 있다.

⭕ 들을 귀 있는자 - 들려 준 이야기의 표면적 의미 외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으로, 이러한 표현은 종종 예수께서 중요한 교훈의 종결 어귀로 사용하신 것이다(14:35;마 13:9, 43 등).

성 경: [눅8: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제자들이...물으니 - 유감스럽게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비유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한 청중도 없었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톤'(*)은 '심문하다'의 뜻을 가진 '에페로타오'(*)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집요한 질문을 하였음을 뜻한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알려고 하는 열정적인(passionate)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성 경: [눅8:1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하나님 나라의 비밀 -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아'(*)는 '가둔다'의 뜻을 지닌 '뮈오'(*)에서 온 말로 숨겨겨 있는 사실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 비로소 알 수있는 참다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부여받을 때 뿐이다. 그런데 그 선물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열 한 제자들과 그밖의 제자들(막 4:10)에게는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 즉 군중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닫혀 있음을 말해준다.

⭕ 이는 저희로...함이니라 - 본문은 사 6:9,10의 내용을 축약적으로 인용한 것인데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던 목적을 설명해 준다. 한편 마태는 사 6:9,10을 보다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데(마 13:13-15),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본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이 두 복음서들의 기록은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마태의 문장은 '호티'(*)절로 되어 있어 '왜냐하면...'의 구문으로 이해되는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완악(wicked)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 13:15). 사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원하지만(마28:19,20;요 3:16;딤전 2:4;벧후 3:9)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5:21,30;6:2,7,11;7:30;마 23:37)증거한다. 한편 누가의 문장은 '히나'(*) 구문으로 되어 있어 '...하기 위하여'로 이해되는데 이는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사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성 경: [눅8:1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하나님의 말씀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어귀로 본서에 네번(11,21절;5:1;8:11,21;11:28)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12회나 사용되고 있으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한 차례씩만 사용되고(막 7:13;요 10:35), 마태복음에는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9절) 예수의 답변은 '씨를 뿌리는 자'보다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 자신일 것이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천국 말씀(마 13:19)이라면 그것은 예수 자신이고(요 1:14) 복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8:1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길가에 - 계속되는 설명은 씨가 뿌려진 밭(5-8절)이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 자신임을 말해준다. 좁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전인격적인 인간을 말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길가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에 대해 냉담(冷談)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 마귀 - 마태는 '악한 자'(포네로스, * )로, 마가는 '사단'(*, 사타나스)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누가는 '마귀'(*, 디아볼로스)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길가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데 그치고 받아들이기를 보류(保留)하고 있을 때 그 말씀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5절과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씨앗은 밟히기도 하고 새에게 먹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훼방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 뿐이다(엡 6:13-17).

성 경: [눅8:1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바위 위에...시험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 말씀이 심령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께서는 뿌리없는 믿음이라고 규정하는바 이들의 믿음은 일시적이며 잠정적이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에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검증(檢證)되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듣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한편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믿음이 참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시험'이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마치 뿌리없는 식물과 같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 과실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것이 된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약 1:12).

성 경: [눅8:1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성 경: [눅8:1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성 경: [눅8:1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등불의 비유]

⭕ 등불 - 여기서 '등'은 한쪽 끝에 손잡이가 달리고 다른 한쪽에는 심지를 꽂도록 구멍이 나있는 대롱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접시모양의 적갈색 그릇이었다. 등의 윗부분에는 기름 공급용과 공기 소통을 위한 두개의 구멍이 있었다.

⭕ 그릇으로 덮거나 - 마태복음 5장 15절이나, 마가복음 4장 21절에는 '말'(*, 모디오스) 즉 '되'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해 본문에는 단지를 뜻하는 '스큐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곡식이나 밀가루 등을 넣어서 보관하는 용기를 뜻한다. 등불을 피워놓고 이 그릇으로 덮어 버린다면 당연히 빛은 아무 곳도 비출 수가 없을 것이다.

⭕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 이 말은 침상을 의미하는 바 등불을 켜서 침상밑을 밝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등경 - 이 기구는 등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를 말한다. 이것은 방 중앙에 있는 기둥에 부착된 쪽선반이거나, 벽에서 방 안쪽으로 돌출(突出)되어 있는 돌받침이거나 또는 이와 동일한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금속 토막일 수도 있다.

⭕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 16-18절의 말씀이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와의 연관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본 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만일 숨겨진 것이 악이라면 이 말씀은 10절과 12-15절에 언급되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으로 임하게 될 것임을 말하며 둘째, 만일 숨겨진 것이 선이라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이 장차 제자들에 의해 밝히 드러나리라는 말씀이다. 셋째, 본문의 말씀이 앞의 비유와 무관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라면 빌 2:15의 말씀처럼 좁게는 제자들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진리의 빛으로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마 5:16).

성 경: [눅8:1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등불의 비유]

⭕ 숨은 것이...감추인 것이...없느니라 - 마치 '비밀은 없다'는 뜻의 속담과 같은 것으로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 말씀이다(마 10:26;눅 12:2). 빛이 있는 한 감추이거나 숨겨진 것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서의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동시에 어둡고 부정적인 국면들을 드러내고 밝혀내야 한다. 여기서 사실상 중요한 것은 신앙인들이 빛으로 온전히 서느냐의 여부이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이 참다운 빛으로 선다면 그 빛에 의해서 숨겨지고 감추인 것이 드러나기란 필연적(inevitable)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8:1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등불의 비유]

⭕ 어떻게 듣는가...삼가라 -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겸손하며 진실되게 말씀을 새겨 듣는 사람은 있는것 위에 더욱 풍성한 것을 받게 되지만 교만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기게 된다. 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와는 전혀 무관(無關)한 것이며 영적 생명의 법칙에 관계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 풍성한 생명의 결실을 거두기를 원하시지만, 이러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예수의 달란트 비유 중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장시켜 버리는 자는(마 25:24-30)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성 경: [눅8:1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가까이 하지 못하니 - 마태와(마 12:46-50) 마가(막3:31-35)도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이 이야기를 바알세불 논쟁의 결론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과 다르다. 마태와 누가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마가에 의하면 이들이 찾아온 이유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되어 예수를 데려가기 위함이었다(막 3:21). 그러나 19-21절의 말씀은 예수께 대한 친속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방문을 또 다른 차원의 교훈(敎訓)을 위한 동기로 활용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편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를 만나려 하였으나 무리로 인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는 데서 우리는 당시에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리들은 예수께서 일으키는 갖가지 이적들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의 가르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마13:13).

성 경: [눅8:2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 고하되 - 막 3:31,32은 이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즉 먼저 마리아 일행이 한 특별한 전달자를 보내어 면회를 신청하고 그 사람은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면회를 요청하였으며 그리고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예수에게 친속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 되어 있다.

성 경: [눅8:2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 내 모친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 마태(마 12:48)와 마가(막 3:33)는 이 부분에 대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는 예수의 반문을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이를 생략한 채 바로 교훈적 답변을 기록한다. 먼저 우리는 '내 모친과 내 형제'(*, 메테르 무카이 아델포이 무)라는 표현이 관사없이 쓰여져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죄를나눈 실제의 모친과 형제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친과 같은 사람, 형제와 같은 사람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Plummer). 이는 피를 나눈 육신의 혈육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요 19:26,27) 영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암시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은 '피를 나눔'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 얼마든지 보편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혈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요 1:13의 말씀은 이것을 밑받침해 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마 12:50;막 3:35)에온전히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서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의가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불분명한데, 마태에 의하면(마 12:49) 제자들을 가리키고 마가에 의하면(막 3:34) '둘러앉은 자들'을 가리킨다.

성 경: [눅8:2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하루는 - 본문에 의하면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가 앞의 이야기와 상당한 시차(時差)를 두었던 것처럼 보이나 막 4:35에 의하면 이때는 그날 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려주신 날 저녁 해질 무렵이었다.

⭕ 호수 저편으로 - 마태(마 8:24)와 마가(막 4:39)는 '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 유대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누가는 '갈릴리 바다'라는 말이 이방인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될 것으로 보아 '호수'라는 표현을 사용한듯하다.

⭕ 떠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고'(*)는 항해 용어로 '출항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특히 사도행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13회).

성 경: [눅8:2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잠이 드셨더니 - 예수께서는 쉴새 없이 진행되는 선교 사역으로 인해 매우 피곤해 있었으므로 배에 오르자 깊은 잠에 빠져들어가셨다. 한편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 비해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사실이 더 일찍이 언급되어져 있다. 이는 폭풍의 흉흉함과 예수의 평화로운 휴식을 대조시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 광풍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일랖스'(*)는'돌풍'(突風) 또는 '회오리 바람'을 뜻한다.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갈릴리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면보다 200m가량 낮고 주변에는 높은 협곡들이 둘러싸여 있다. 높은 곳에 있던 차가운 바람은 깔떼기 역할을 하는 협곡(ravine)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내려와 호수면에 있던 더운 공기와 충돌하여 폭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 광풍은 배에 몰아쳐 배의 조종을 불가능하게 할뿐 아니라 마태의 표현처럼 '큰 놀'을 일으켜 배를 전복시키거나 가라앉힐 수 있을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 배에 물이 기득하게 되어 - 게속해서 몰아치는 높은 파도는 배 안에 물을 퍼부었고 그 물을 제자들이 퍼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은 점점 배를 채워 마침내 배는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성 경: [눅8:2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주여 주여...죽겠나이다 - 제자들 가운데는 배를 다루는 일에 전문가인 사람들도 있었으므로(눅 5:1-11),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대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고 마침내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를 깨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주여' '주여'라는 반복된 외침은 그들이 처한 다급한 상황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마가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곤경에도 불구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께 대해 원망하는 투의 말을 기록하고(막 4:38), 마태는 탄원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8:25),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단지 제자들의 급박한 보고만을 언급한다. 이는 예수께서 깨어나기만하면 제자들을 구해주리라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 꾸짖으시니 - 마치 바람과 물결에 인격이 있는 것처럼 꾸짖었다는 이 표현에 대해 혹자는 예수께서 바람과 물결 배후에 있는 악령(惡靈) 또는 악마적인 세력을 꾸짖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Tyndale).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꾸짖었던 것처럼(눅 4:39), 본문에서도 바람과 물결 그 자체를 꾸짖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Hendriksen). 이는 자연계를 한마디 말씀으로써 제어하시는 예수의 신적 권능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 잔잔하여지더라 - 마태(마 8:26)와 마가(막 4:39)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여 잔잔해진 상태를 부각시킴으로써 예수의 권능을 강조한다.

성 경: [눅8:2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다소 위급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함께 있는 한 안전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을 질책하신 말씀이다(막 4:40). 두려움에 떤 제자들의 불신앙은 예수의 평안한 모습과 대조되며, 시험의 때에(13절) 마땅히 취해야 할 인내의 태도를 망각하였음을 보여준다. 막 4:40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는 강한 어조의 책망과 비교된다.

⭕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놀란다. 여기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이함은 조금전에 자연력의 위력 앞에서 느꼈던 죽음의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신적인 능력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敬畏心)을 가리킨다(7:16).

⭕ 저가 뉘기에...순종하는고 -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6:8) 귀신을 쫓아내며(6:18),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을 목격하였다(7:11-17). 그럴때 마다 그들은 놀라기만 할 뿐 예수를 선지자중 한 사람으로 여겼었다(7:16).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경험한 사건은 너무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예수의 정체에 대한 물음을 묻는다. 자연 현상을 지배하시는 예수의 권능에서 신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놀라운 감정에 사로잡혀 '저가 뉘기에'라는 물음만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되지 않은채 하나의 강한 의문으로 남는다. 도대체 자연 현상을 한 마디의 명령으로 순종시키는 예수는 누구인가?

성 경: [눅8:2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거라사인의 땅 - 이 지명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 마가와 누가의 기록상으로는 지명이 일치하지만 마태는 '가다라'(*, 가다레논)라고 기록함으로써 불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까지 거리가 무려 40km이상 떨어져 있어서 예수께서 육지에 내린 직후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기록한 27절과 부조화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가다라'는 호수에서 9km정도 떨어져 있어 거리상 거라사 보다는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9km의 거리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역시 지지받기 힘들다. 한편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제 3의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오리겐(Origen)이 주장한 것으로 본래의 지명은 게르게사(Gergesa)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복음서 기자들이 이 지명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들이 알고 있는 부근의 마을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견해는 가다라 지방의 가파른 동쪽 제방에 위치한 '게르사'(*)라는 지명이 바로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곳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만난 곳이 갈릴리 호수 근처인데 그곳을 '거라사' 지방 또는 '가다라'로 표현한 것은 그곳이 이 지명들의 지배권(支配權)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서는 없으며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성서의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 마지막 견해를 지지할 수 있다.

성 경: [눅8:2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귀신들린 자 하나 - 누가와 마가는(막 5:2) 귀신들린 자 한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에 의하면 둘이었다(마 8:28).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귀신들린 자의 수가 아니라 이방 땅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사실 자체였다.

⭕ 오래 옷을...거하지도 아니하며 - 이 귀신들린 자는 집을 나가 자신을 정상 생활로부터 격리하였으며,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모두 잃어버린 채 벌거벗고 산 지 이미 오래되었다. 표면적인 증상으로 미루어 볼 때는 악성 정신질환을 앓은 것 같으나 누가는그가 분명히 귀신에 들려있다고 확증한다. 이 귀신들린 자는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일도 하였다(막 5:5).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보는 듯한 이 모습은 죄인의 영적인 상태를 형상화(刑狀化)한 것인지도 모른다.

⭕ 무덤 사이에 - 무덤이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 묘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팔레스틴에는 바위에 동굴이 많아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은거하는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무덤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귀신들린 자의 모습은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는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있다.

성 경: [눅8:2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 귀신들린 자가 엎드려 절한 것은(막 5:6) 결코 경배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능력에 굴복한 표현이다. 눅 4:33-37에서나 그 밖의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처럼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신의 고백은 예수와 화해를 하기 위한것도 아니고 예수께 대한 복종과 신앙 고백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수의 마음을 약하게하여 적절한 타협을 얻어내려는 본능적 자기방어의 술책(intrigue)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귀신의 고백은 정확한 사실을 말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으며(25절), '저가 뉘기에'라는 의문만을 제기했었다. 결국 귀신의 고백은 제자들과 복음서 독자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질 수 있다.

⭕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히브리인들의 관용어로 '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 귀신은 예수의 명령을(29절) 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고백을 하고 그 앞에 엎드려 굴복(屈服)의 표시를 하여 예수의 마음을 누그려 뜨려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귀신은 예수께서 자기를 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요일 3:8). 그리하여 귀신은 예수에게 피차에 상관말자고 말한 것이다.그러나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적대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마귀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을 하고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이다(8:12;요 3:16).

⭕ 괴롭게 마옵소서 - 마태에 의하면(마 8:29) 귀신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했다. 귀신의 최후가 괴로움과 멸망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점을 암시한다(계 20:1-3).

성 경: [눅8:2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귀신이...광야로 나갔더라 - 귀신이 한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귀신들린 자는 늘상 정신 이상의 상태로 있었고(27절) 때로 귀신의 특별한 작용에 의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마 8:28).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매어 두곤 했지만 귀신들린 자는 번번히 그것을 끊고 광야로 나갔다(막 5:4). 이처럼 마귀는 사람의 주체적 의지를 파괴하고 마귀의 의지대로 통제하고 조종함으로써 사람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마 8:28-34;9:32;12:22;15:22;막 1:23-26;16:9). 그러나 이처럼 강한힘을 가지고 있는 귀신이 예수 앞에서는 순한 양같이 꼼짝못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성 경: [눅8:3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네 이름이 무엇이냐...군대라 -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묻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대의 민속 신화에는 귀신 축출자가 귀신의 이름을 물어서 귀신에 대한 우위(優位)를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하튼 귀신의 이름은 '군대'로 드러났는데, 이 이름은 많은 귀신이 들어갔음을 뜻한다.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기온)는 군대 용어로 6,000명의 단위 군대를 뜻한다. 한 귀신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경우와 한 사람에게 여러 귀신이 있는 경우를 찾아볼수 있다. 가령 2절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한때는 일곱 귀신에 들려 있었음을 전해주는 보도가 있고 11:24-26에는 한 사람이 한 귀신에 들렸을 때보다 일곱 귀신에 들려 더악화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에 비추어 볼때 군대 귀신에 들린 이 사람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받았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눅8:3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무저갱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뷔쏜'(*)은 부정 접두어 '아'(*)와 '깊은'의 의미를 가진 '바두스'(*)의 합성어로 바닥이 없는 깊은 장소를 뜻한다. 이는 끝없이 깊은 곳이며 마귀가 일시적으로 갇힐 곳이다(계 9:1;20:3). 또 마 25:41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 표현되어 있다.

성 경: [눅8:3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많은 돼지 떼가...이에 허하신대 - 막 5:13에 의하면 이 돼지 떼는 무려 2,000마리에 달했다. 귀신은 이제 예수의 명을 거역하고 그 사람에게 계속 있을 수 없음을 알게되었다. 그러자 귀신은 자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는 이를 허락하셨다. 결국 2,000마리에 달하는 돼지떼의 몰사로 말미암아 돼지떼의 주인에게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돌아갔고 이 사실은 혹자들에게 도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 사람의 영혼이 2,000마리의 돼지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는 점이다. 예수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16:26).

성 경: [눅8:3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비탈로 내리달아...몰사하거늘 - 사건 발생 지점은 분명히 호수에 근접한 곳이었다. 갈릴리 호수 동편에는 급한 비탈이 있고 비탈 위에는 평지로 되어 있어 그곳에서돼지를 먹였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자 이천여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비탈길을 내리달아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沒死)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에 대해서 혹자는 왜 예수께서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여 보내 다 몰사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하셨느냐고 문제를 제기하기도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짐작해 볼 수 있는것은 다음과 같다. (1)앞절 주석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어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이천 마리의 돼지는 오히려 하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그 귀신들에 붙잡혀 무수한 고통을 당할 제2, 제3의 피해자는없을 수 있게 되었다. (3)율법상 돼지는 그 고기를 식탁에 올릴 수없는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다(레 11:7,8). 따라서 이들을 몰사시킨 예수의 처분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4)예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로서 세상에 있는 사물을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과 권능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예수의 판단과 행위는 정당하며 실수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눅8:3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치던 자들이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unclean)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물론 먹지도 않았다(레 11:7). 또한 탈무드에는 '돼지를 기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라'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주변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돼지를 치던 자들은 이방인으로 짐작된다.

⭕ 도망하여...고하니 - 돼지를 치던 자들은 예수와 귀신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목격(目擊)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치던 돼지 떼의 손실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고 또 다른 한편 예수의 권능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도망'하였다는 표현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이 신기하고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놀라운 사건에 대해 동리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성 경: [눅8:3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 옷을 입었다 함은 그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완전한 정상인이 되어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의 경배를 드렸을 것이다. 불과 조금전만 해도 발가벗은 몸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며 때로는 괴성과 괴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하였던 사람이 이제는 옷을 단정하게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그들이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지금 그들에게 직면된 상황이 매우 파격적(破格的)임을 뜻하며 인간의 논리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또는 신적 사건이었음을 입증한다.

성 경: [눅8:3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구원받은 것을...이르매 - 아직 사건의 자세한 전모를 모르던 상황에서 돼지치는 자들이 자세한 사실을 증거하자 몰려온 사람들의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어 간다. 한편 '구원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데'(*)는 '구원하다', '안전하다' '견실하다'의 뜻을 가진 '소스'(*)에서 유래한 '소조'(*)의 제 1 부정과거수동태 직설법이다. 귀신들린 상태에서 원상 회복된 상태를 구원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먼저 그는 귀신에 붙잡힌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더 나아가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적인 구원을 받기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 결국 구원은 육신과 영혼이 죄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성 경: [눅8:3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시기를 구하더라 - 예수께서 일으키신 귀신 축출 사건은 그곳 주민들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크게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은 신적인 능력에 접한 인간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25절에서도 제자들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예수의 권능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거니와, 거기서의 두려움은 '신적인 능력'에 대한 경이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저들이 느낀 두려움은 미신적인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이천여 마리의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몰사한 사건은 자기들이 믿었던 미신의 재앙(woe)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은 더없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돼지 떼에 대해서는 감히 아무런 불평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떠나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죽은 것과 다름없던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을 보았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의 손실만을 생각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실수를 범한 셈이다. 예수께서는 그 지방에서도 구원 사역을 펼치실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 무리들로부터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신다. 이것은 예수를 알아보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와는정반대의 일이었다(요 4:40).

성 경: [눅8:3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귀신 나간 사람이 - '귀신 나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렐뤼데이'(*)는 '엑세르코마이'(*)의 과거 완료 능동태로서 과거 시점에서 완료된 상태를 뜻한다. 즉 귀신이 나간 것은 이제 이미 과거의 일이며 이제는 완전히 정상인임을 말한다.

⭕ 구하였으나...저를 보내시며 - 이 구문은 미완료과거 중간태로 되어 있어(*, 에데이토 아우투) 몇번이고 반복해서 계속 구하였음을 뜻한다. 이 사람은 너무나 귀한 은총을 체험했으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거듭되는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그를 위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처지(處地)와 재능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당신을 섬기게끔 하신다(요 21:21,22).

성 경: [눅8:3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하나님이 네게...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 예수께서는 그를 단지 귀신의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증거자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전파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일을 일일이 전하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주님이 귀신 축출 사건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일과 자기의 일을 동일시(同一視)하는 놀라운 계시가 있다. 이것은 예수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제자들이 제기한 바 있는 예수의 신분에 관한 물음에 대한(25절) 명확한 대답이 되는 것이다.

⭕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하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성내에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온 성'을 다니며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직접 예수를 따르던가 아니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마다 은총을 나누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 경: [눅8:4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환영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덱사토'(*)는 '기쁨으로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무리들이 예수를 진심으로 환영하였음을 뜻한다. 이들이 그렇듯 환영한 이유는 아마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다 기다렸음이러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성 경: [눅8:4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회당장인 야이로 - 회당장은 회당의 수반(head)으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보존, 운용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또한 토라(율법)를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사람을 선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회당장은 지방에서는 최고의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사회적 지위가있고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경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경의를 표하며 자기 집으로 가주기를 간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대한 사건이 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8:4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열 두 살 먹은 외딸 - 야이로의 의외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식인 외딸이 그것도 열 두살의 젊은 나이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열 두살이라는 나이가 유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바야흐로 결혼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나이를 뜻하므로 이제 막 피어 나려는 한 여성의 인생이여기서 마감 된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죽어감이러라'의 헬라어 '아펠네스켄'(*)은 미완료 과거로 되어 있어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외동딸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야이로의 애타는 심정은 체면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 무리가 옹위하더라 - 아마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예수의 도움으로 회생하게 되기를 바라는 동정의 마음으로 또는 과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수히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몰려든 무리들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이 살아있는 동안에 도착하시지 못하게끔 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가는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만난 일 때문이었다(43-48절).

성 경: [눅8:4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이 여인이 병을 앓았던 햇수와 야이로의 딸이 살아온 햇수가 우연히도 일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혈루증'(血漏症)이라는 병은 대개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만성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 벽에 종기(boil)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병은 의식적(儀式的)으로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병에 걸린 자를 멸시 천대하였고 완쾌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시켰었다(레 15:1-12, 25-27).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 여인은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끝임없는 투병 생활을 해왔으며, 마침내는 예수께 구원을 얻고자 무리들 틈에 끼어 예수에게 접근하여 온 것이다. 만약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가 발각되는 때에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은 대단한 결단력과 의지를 보여준 행위였다.

⭕ 고침을 받지 못하던 - 열 두해를 통하여 병고침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갖고 있는 가산(家産)을 다 탕진하였지만(막 5:26)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절망의 상황에서도 여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성 경: [눅8:4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옷가에 손을 대니...그쳤더라 - 여인은 매우 은밀히 예수의 뒤로 접근하여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그렇게 은밀히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병이 부정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예수께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것은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이었다(막 5:28). 여인이 손을 댄 옷은 유대인들이 입는 겉옷, 더 정확하게는 이 겉옷에 달린 술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네모 반듯한 정방형의 천인데 가운데는 머리를 내어놓을 구멍이 있고 그옷의 네 귀에 술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하였다. 이 술은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민 15:37-41) 바리새인들은 과시하기 위하여 이것을 크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 비난을 받기도 했다(마 23:5). 하여튼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은 그녀의 믿음대로 혈루증이 즉시 그치는 이적을 경험했다. 한편 '그쳤더라'(*, 에스테 헤 뤼시스)는 '흐르기를 그쳤더라'는 뜻으로 누가에게 볼 수있는 독특한 의학적 표현이다.

성 경: [눅8:4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 예수의 이 물음은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각 사람의 심중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요 13:21-30).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런 질문을하신 까닭은 다음의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여인의 병이 나았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증거하기 위함이다. (2)만약 그녀가 예수의 옷을 만진 이유가 미신적 기대 때문이었다면 그녀의 믿음 속에 들어 있는 미신적(迷信的) 요소를 제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다. (3)사람들로 하여금 여인의 병 나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4)그녀에게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주시기 위함이다.

⭕ 옹위하여 미나이다 - 예수 주변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들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밀치며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예수의 옷에 손을 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제자들이 듣기에 조금은 의아스러울 수도 있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점잖게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예수의 질문을 무시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막5:31에 의하면 제자들은 강한 어조로 예수의 질문이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였음을 알게된다. 이는 누군가 예수의 권능을 힘 입고자 의도적(意圖的)으로 그의 옷에 손을 댄자가 있음을 인지하고 물으시는 예수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 경: [눅8:4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 이 표현은 예수의 몸에 있던 일정량의 능력이 빠져나가 소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옷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에게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사건의 장본인을 밝히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눅8:4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떨며 나아와...고하니 -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은 사실과 그것을 알고 있는 예수의 능력에 깜짝 놀란 그 여인은 자신의 은밀한 시도가 공개되고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당혹감과 긴장으로 떨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옷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부정한 병에 걸린 자가 다른 사람의 옷에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부정이었으므로(레 15:1-12, 19-27) 여자는 그 사실에 대한 추궁이 두려웠을 것이다. 마태는 여인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보도하는데(마 5:33) 비해, 누가는 초점을 증언의 공개성에 맞추어 '모든 사람 앞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인의 병 나음은 공개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예수의 신적인 권능 또한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되었음이 강조되는 것이다.

성 경: [눅8:4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딸아 네 믿음이...평안히 가라 - 예수께서는 먼저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딸아'하고 매우 부드럽게 부르고 있다. 여기서 '딸아'(*, 뒤가테르)는 다정한 목소리로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바,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소유한 예수의 신성을 엿보게 한다. 다음에 예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 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믿음 그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녀의 믿음은 치유가 성취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의 역할을 한 것이다. 즉 그녀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의해 자신이 치유될 수 있도록 사용된 도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여인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께서는그 적은 믿음을 귀중히 여기셨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신다. 아마 이 평안은 영혼과 육신의 안녕을 동시에 뜻하는 온전한 의미의 샬롬이었을 것이다.

성 경: [눅8:4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당신의 딸이...괴롭게 마소서 - 예수께서 여인에게 마지막 축복의 말을 하고 있을 즈음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비보(sad news)가 날아들어와 이제 막 병에서 치유된 여인에 대한 축하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뒤바꿔 버리는 장면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의 태도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취하였던 태도(요11:21-32)와 흡사하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인으로서 표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서 이미 죽은 자를 살리신 권능을 행하셨던 것을(눅7:11-17) 기억하였다면 그렇게 쉽사리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눅8:5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믿기만 하라...구원을 얻으리라 - 누가는 마가에는 없는(막 5:36)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첨가시키고 있다. 야이로는 한 혈루증 환자가 예수의 권능으로 치유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가득했을 터이나 집으로부터 전해져온 딸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는 한없는 절망에 빠져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먼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는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신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며 그러할 때 야이로의 딸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성격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를 통해 볼 때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같이 뵈는 상황에서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던 사실을 익히 발견할 수 있다(시 22:4;사26:3,4;43:2). 또한 이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직한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사 42:3).

성 경: [눅8:5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예수께서는 집에 데리고 들어가는 수행원의 수를 세 제자로 제한하고 있다. 이 세 제자를 따로 구분하여 데리고 간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였는데, 지금이 처음이고, 변화산에 오르실 때(9:28)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대 결산을 하실 때였다(막 14:33).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특별히 긴요한 역할을 감당할수 있도록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께로부터 각별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8:5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울며 통곡하매 - 집 안에서는 이미 집안 식구들이 딸의 죽음을 인하여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장례식에는 모인 사람들이 같이 우는 풍속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업적인 애곡꾼들을 고용하여 울게 하기도 하였다(렘 9:17). 마 9:23에 의하면 그들 중에는 피리를 부는 이들도 있었다.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딸 아이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누가의 문맥에서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1)53절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을 밝히고있다. (2)55절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그 영'(Her spirit)이 돌아왔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 곧 죽음 상태를 전제로한 표현이다. (3)요 11:11에서도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잠든 것이라고 표현했던 일이있다.

성 경: [눅8:5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비웃더라 - 아이의 죽음을 분명히 확인했고, 예수의 신적 권능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 호곡자(號哭者)들의 비웃음은 아이의 분명한 죽음과 또한 분명한 부활을 증거해 주는 간접 자료가 된다. 막 5:4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 비웃는 무리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아이를 일으키셨다.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성 경: [눅8:5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손을 잡고...일어나라 하시니 -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람어(Aramaic)로 말씀하셨다(막 5:41). 예수는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율법에는 시체에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 규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찬가지로 율법이 금하고 있는 나환자에게도 손을 대었던 일이 있다(5:13).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그의 뛰어난 사랑을 표현해 주며 율법을 초월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르는 소리는 너무나 다정하여 마치 엄마가 아이를 깨우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성 경: [눅8:5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영이 돌아와...일어나거늘 - '영이 돌아와'라는 말은 누가만의 섬세한 표현으로 생명이 즉시 회복되었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부드러운 음성은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조용히 살려냈다. 막 5:42에 의하면 아이가 일어나 걸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아이가 완전히 회생했음을 증거해 준다.

⭕ 먹을 것을 주라 -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너무 흥분되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을 섬세하게 배려해 주는 예수의 자상하심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의 회생을 공식적으로 확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질적 도움도 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성 경: [눅8:5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말하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緘口令)은 여러모로 보아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애곡하던 자들에게 딸 아이가 살아났으니 더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해주어야할 것이고 딸 아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닐 때 그 사연을 묻는 자들에게 설명도 해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 9:26에 의하면 실제로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단지 기적이나 일으키는 마술장이 정도로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2)일찍이 예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해 보이라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 일이 있었다(4:9).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대중들 앞에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여 영웅으로 행세하고자 하거나 자신의 그리스도됨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예수의 지상 사역의 궁극 목적이 결코 사람들의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4)아이의 부모들이 지나치게 흥분하여 나타난 사건에만 집착하여 본질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망각하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떤것이든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성 경: [눅9: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엑수시아)에 능력(*,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성 경: [눅9: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으로 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케뤼쎄인)와 '고치는'(*,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 경: [눅9: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4)돈(*,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지막으로 두 벌 옷(*,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9: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 경: [눅9: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성 경: [눅9: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는 '디에르 코마이'(*)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코마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9: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와 '길'을 뜻하는 '포로스'(*)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성 경: [눅9: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성 경: [눅9: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현 '에제테이'(*)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성 경: [눅9:1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다.

⭕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 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갖고자 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성 경: [눅9:1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9:1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은 '곡식'을 뜻하는 '시티온'(*)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성 경: [눅9:1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 경: [눅9:1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포시아'(*)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스'(*)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호세이)이라는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9:1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눅9:1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는 '디도미'(*)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다.

성 경: [눅9:1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성 경: [눅9:1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할때에'라는 '엔토'(*)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성 경: [눅9:1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성 경: [눅9:2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 41-56; 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성 경: [눅9:2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성 경: [눅9:2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마조'(*)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데이'(*)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프레스뷔테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아르키에류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그람마튜스)은 '랍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다. 유대 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성 경: [눅9:2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성 경: [눅9:2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자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9:2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성 경: [눅9:2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성 경: [눅9:2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성 경: [눅9:2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 기도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성 경: [눅9:2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눅9:3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성 경: [눅9:3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성 경: [눅9:3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결과를 초래했다(22:42-46).

⭕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다.

성 경: [눅9:3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성 경: [눅9:3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 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성 경: [눅9:3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성 경: [눅9:3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막 9:9).

성 경: [눅9:3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이 밤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성 경: [눅9:3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9:22)의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다'(*,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하는 '에피'(*)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9:3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눅9:4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9:4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성 경: [눅9:4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엘렉센 아우톤)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성 경: [눅9:4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성 경: [눅9:4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 18:31-34;22:21-23). 여기서 '넘기우다'(*,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 경: [눅9:4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성 경: [눅9:4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디알로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 경: [눅9:4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성 경: [눅9:4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 주기 위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 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9:4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성 경: [눅9:5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성 경: [눅9:5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아날렘프세오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성 경: [눅9:5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성 경: [눅9:5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성 경: [눅9:5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야고보와 요한이...원하시나이까 -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Sons of Thunder, NIV)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데(막 3:17), 그 까닭은 본절에서 보는대로 그들의 성격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하나의 보복 조처를 제안하는데 그 내용은 아하시야 왕 당시 엘리야를 모욕했던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사른 사건(왕하 1:10-12)을 반영한다. 어쨌든 제자들은 복음이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구원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19:10;요 3:17;12:47)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눅9:5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꾸짖으시고 - 구체적인 내용없이 간략하게 언급된 '꾸짖으시고'는 제자들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하셨음을 말해준다. 제자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보복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구약적 대응방식 즉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꾸짖고 있다. 제자들은 엘리야의 방식 즉 '보복의 방식'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의 방식을 말씀하심으로써 엘리야를 능가하는 분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여기 나타난 예수의 태도는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에 대한 하나의 복선(伏線)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9:5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다른 촌으로 - 누가는 지리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다른 곳으로 갔다고만 하여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한 사실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보복적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먼 길로 돌아가는 비효율적 방식을 택하셨고 폭력이 아닌 평화의 길을 택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삶의 방식,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예수의 방법을 따를 때 모든 난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함께 간 '다른 촌'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추측하는데, (1)사마리아에 있는 다른 마을(Klostermann, Zahn, Plummer), (2)사마리아로부터 다시 돌아간 갈릴리의 어느 촌(Bruce, Gilmour, Farrar), (3)베레아 접경의 촌 등이 그것이며 이중 어느 견해가 정확한지 단정 지을수 없으나 9절과 10:10과 17:11의 본문을 참고할 때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눅9:5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혹이...좇으리이다 - 여기서 '혹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22절 주석 참조)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모습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의 답변(58절)의 빛에서 볼 때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의 권능(마 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성 경: [눅9:5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여우도...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23절).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성 경: [눅9:5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부친을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레 21:1-3).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성 경: [눅9:6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죽은 자들로...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 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9:6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왕상 19:20). 그러나 뒤이은 예수의 대답을(62절) 통해 유추하건대,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며 작별 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성 경: [눅9:6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손에 쟁기를...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 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유데토스'(*)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눅10: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이후에 - 이 표현은 단락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 주께서 - '주'의 헬라어 '호 퀴리오스'(*)로 7:13 이후 처음 사용되며 제자들을 세워 사명을 부여하는 경우에도 이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9:1). 리펠트(Liefeld)같은 학자에 의하면 이 칭호는 이하의 교훈이 바로 예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또 헨드릭슨(Hendriksen)같은 학자는 이명칭이 구세주의 소유권, 권위,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 외에도 여기서 주어지는 예수의 제자 파송이 전세계의 열국에 대한 처음의 전파를 의미한다고할 때 이 중요한 사역을 지시하시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칭호가 사용된 듯하다.

⭕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 여기서 '달리'(*, 헤테루스)는 앞에 있었던 열 두 제자의 파송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된 듯하며 '70인'은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것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사본에 따라 어떤 것에는 72인으로, 어떤 것에는 70인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70인을 뒷받침해 주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1)이스라엘의 장로가 모두 합하여 70인이었다(출 24:1;민 11:16-17;24-25). (2)산헤드린의 구성원이 70인이었다. (3)세계에는 70개의 민족들이 있다고 여겨졌다(창 10장). 다음으로 72인을 주장하는 근거는 (1)이스라엘의 장로는 70인 뿐 아니라 72인으로 보는 견해도있다(민 11:26의 엘닷과 메닷을 포함하여) (2)창세기 10장에 대한 70인역(LXX)은 세계의 민족을 72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3)70인역을 준비한 장로들은 모두 72명이었다. (4)세계에는 72명의 왕자들과 72개의 언어가 있다고 여겨졌다(위경 에녹 3서 17:8;18:2-3;30:2). 이러한 논거(論據)들 중 앞의 (3)과 뒤의 (2)가 본문의 맥락에 가장 잘 적용된다고 본다. 즉 창세기 10장에 대한 해석에서 히브리 원문을 택하느냐, 70인역을 택하느냐에 따라 70인도 될 수 있고 72인도 될 수 있으나 그것들이 세계의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뜻을 갖는다고 보아 예수께서 70(72)인을 선택한 것은 후대 교회가 세계 모든 나라들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 것을 예견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세우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데이크센'(*)은 '공식적으로 임명하고 선포하사'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번에 파송하는 70(72)인의 제자들 역시 지난번의 12제자와 동일한 권위로 보내어졌음을 의미한다.

⭕ 둘씩 - 열 두 제자를 파송할 때처럼(막 6:7) 이번에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떠나게 하신다. 제자들을 둘씩 파송한 것은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유효한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민 35:30;신 19:15;전 4:9;마 18:16;딤전 5:19). 이것은 후에 제자들의 설교나 초대교회 선교의 모델(model)이 되기도 하였다(행 3:1;4:1,13,19;13:1-3;15:40;15:27,39,40;7:14-22).

성 경: [눅10: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추수할 것은...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 본절은 마 9:37,38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으로 마태복음에서는 12제자들을 파송하기전에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70인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틈나는 대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시급함을 말씀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구약적 이미지에서 볼 때 흔히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며 이런 경우 추수를 하는 자는 주로 천사들로 묘사된다(욜3:13;계 14:15-20).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이 아니라 은혜의 측면에서 복음의 전파를 말하며 그 임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또한 본절은 일꾼이 부족한데서 오는 안타까움과 그나마 있는 일꾼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꾼들은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동시에 주인에게 일꾼을 증원(增員)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며 일꾼들은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임의대로 일꾼을 부를 수 없다. 다만 일꾼을 보내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으며 그분이 보내주는 일꾼만이 진정으로 그분의 추수를 돕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성 경: [눅10: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 마 10:16에는 '양'(*, 프로바톤)이라고 되어있는데 본문에서는 '어린 양'(*, 아렌)이라고 하여 제자들의 연약함이 지적된다. 양은 용감하고 능력있는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은 선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제자들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수행해야 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영적인 선한 싸움을 할때 절대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방심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도 전혀없다. 왜냐하면 강하고 능력있는 목자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들은 자기들의 연약함을 늘 확인하여 겸손해져야 하며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엡 6:10-17). 한편 마샬(Marshall)은 '보내다'(*, 아포스텔로)라는 동사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점을 주목하여 사도직의 기원(起原)이 '선교'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 경: [눅10: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전대(纏帶)나 주머니나 신 - 마태는 금이나 은 또는 돈을 넣어다니는 '허리띠'(*, 조네)로 표현하는데 누가는 '지갑'의 의미인 '발란티온'(*)을 사용하고 있다. 허리띠에 돈을 넣어 묶는 관습 보다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더 후대의 관습이라고 볼 때 누가는 도시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단어를 바꾼 것이라 하겠다. 주머니(*, 페라)는 일용품을 넣는 가방이며(9:3)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맨발로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여분의 신을 지참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9:3에서 처럼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 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전적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문안하지 말며 - 동양에서는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의 인사를 금한 것은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한 것이다(Marshall).

성 경: [눅10: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먼저 말하되...평안할지어다 - 지금까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 혹은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이웃의 안부를 물을때(삼하 8:10;11:7;왕하 4:26),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 때(삼상 1:17;삼하 15:9) 하던 '샬롬'(*)에 상응하는 인사말로 샬롬의 의미가 '평강을 빕니다'(스 4:17), '평안하냐'(왕하 4:26;5:21), '평안히 가시오'(삼상 1:17)인 만큼 '에이레네'도 같은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인사 내용 자체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사법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자들에게 '먼저'(*, 프로톤) 인사의 말을 하라고 하여 그들이 친절하고 공손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인데 아마 이것은 예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이 그 권위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의 인사가 일반적인 인사말이라 해서 일반적인 의미의 단순한 바램이나 기원을 뜻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주시해야 한다. 앞으로 제자들이 흩어져 선교(mission) 활동을 할 때 하게 될 '평안'이라는 인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함을 뜻하는 차원에서의 '평안'을 의미하며(요 14:27;행 10:26), 하나님께 기원을 둔 하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성 경: [눅10: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평안을 받을 사람 - 헬라어 '휘오스 에이레네스'(*) 즉 '평안의 아들'(Son of Peace, R S V)은 히브리식 용법으로 '부활의 아들'(눅 20:36), '빛의 아들'(눅 16:8), '지옥의 아들'(마 23:15), '멸망의 아들'(요 17:12) 등과 같은유형의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사람의 성품과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태도에 따라서 겪게될 응분의 운명을 말해주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평안의 아들'은 '평화에 합당한 사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마 5:9). 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의 인사가 단순한 기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선물로 주어지게 된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말이 지니는 힘에 대한 히브리식 믿음이 깃들어 있는 바, 구약에서 족장들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유산(遺産)으로 여겨졌었다(창 27:37). 그러나 제자들의 축복은 수용자의 태도 여하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 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책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성 경: [눅10: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그 집에...옮기지 말라 - 여기서 '그 집'이란 물론 '평안의 아들'이 있어 제자들을 영접해 주는 집을 뜻한다. 여기서 '그 집에'(*, 엔 아우테 테 오이키아)는 강조적 표현으로 직역하면 '그 집 자체에서'(in the houseitself)이며, '바로 그 집에'(in that very house)란 뜻이다. 제자들은 대충 아무 집에서나 유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의 아들'이 있는 바로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열 두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9:4) 70(72)인의 제자들도 여러 집을 옮겨다니지 말고 한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열 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옮겨다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편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 받을 권리가 있다(갈 6:6). 말씀의 사역자들이 그들이 섬기는 성도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딤전 5:18;고전 9:3-18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질적 제공을 받는것이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일꾼'으로서의 삯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겸손해야 함과 그들이 받는 물질적 대가는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 경: [눅10: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차려 놓는 것을 먹고 - 본문의 말씀은 단지 앞절에 대한 동의어적 반복으로 보기보다는 고전 10:2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Marshall,Hendriksen). 즉 제자들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으로 지켜내려오던 음식에 대한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라도 이방인의 동네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때 그들 앞에는 유대적인 음식 규정에 의하지 않은 음식상이 차려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상황에서 음식물에 대한 유대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주어졌다고 보아야한다는 것이다(행 10:9-16). 그렇다고 할때 이 말씀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막 7:15,16) 예수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성 경: [눅10: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병자들을 고치고...하나님의 나라...가까이 왔다 - 여기서도 열 두 제자들에게처럼 병을 고치는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대한 사명이 주어지고 있다(9:2). 예수에게 있어서 각종 질병을 고치는 일은 자신의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임재(臨在)하는 것에 대한 표상(表象)이었다(마11:5;눅 7:21-22). 그런데 본문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헬라어'엥기켄'(*)에 대한 해석이 '가까이 다가오다'로도 '당도하다' '이르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막 1:15에서는 아직 당도하지 않고 가까이 이른 상태를 묘사하는 한편 눅 11:20(마 12:28과 평행)에서는 이미 당도한 것으로 쓰여진다. 눅 11:20에서는 귀신 축사(逐邪)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표시로 제시된다. 그리고 귀신들림에서 해방되고 병으로부터 온전해진다는 것은 인간이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상태로부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와졌다고 선포할때 그 말의 의미는 시.공간 속에 도래하는 완성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효력들이 발생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가시화(可視化)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엥기켄 에프 휘마스)는 구문이 문법상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아직'(not yet) 완성된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10:1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 이번에는 영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의 행동 지침을 일러주고 있다.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코마이'(*)는 사신들(ambassadors)을 환영하거나 그들이 전달해 주는 통지문을 환영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제자들 개인의 자격이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또한 '거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테이아'(*)는 '넓은 길' 또는 '노천의 넓은 거리'를 뜻하는데 이것은 거절하는 사람 또는 동네에 대한 제자들의 행동이 공개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성 경: [눅10:1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 복음을 거절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하는 행위로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것이다(9:5 주석 참조). 결국 이런 행위는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한 행위로 인해 필연적으로 결과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경고성 행위는 반대나 불이익을 뜻하는 여격이 사용된 '너희에게'(*, 휘민)로써 더 강조되고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 이 말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마지막까지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행위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2)복음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엄연한 사실로서 다가오며 어떤 악한 세력에 의해서도 지연되거나 저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눅10:1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저 날에 소돔이...쉬우리라 - '저날'은 마태복음의 병행 본문에 기록된대로(마10:15) '심판의 날'을 뜻함이 분명하다(21:34;마 7:22;살후 1:10;딤후 1:12,18). 또한마태는 구약적 표현에 일치되게 '소돔과 고모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고모라를 생략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악의 상징이며(사 1:9;렘50:40) 본래 이 두 성읍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한 도시였다(창 19:24-28). 한편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의 강약을 뜻한다기 보다는 그들의 심판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정지우며 그 심판의 준엄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눅10:1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 여기서 '화 있을 진저'는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 보다는 불행한 운명을 맞게될 대상에 대한 슬픔과 유감을 표시한다(6:24). 고라신은 마태복음의 병행본문(마 11:21)과 이곳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지명이다. 고라신은 당시의 가버나움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인데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예수께서 이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관심과애정을 기울이셨으리라 추측된다.

⭕ 벳새다 - 이 곳에 대해서는 9:10의 주석을 참조. 예수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하신 기록은 9:10-17에 나와 있다.

⭕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 - 이 문구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장소에서 행하신 사역들이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많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권능'(*, 뒤나미스)은 4:14과 9:1에도 나오는 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곳에서 두로와 시돈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갈릴리 북방에 있는 베니게의 항구도시로 두로는 B.C.2750년 경에,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 유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암1:9;욜 3:6)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사 23장;겔 26-28장).

⭕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 베옷(*, 삭코스)은 염소털로 만든 거친 옷으로 회개나 애도의 표시로 입었다(왕상 21:27). 재(*, 스포도스) 역시 애도의 표시였고(욥 2:8;욘 3:6;마 6:16) '삼베'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에4:2,3).

성 경: [눅10:1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심판 때에...쉬우리라 - 12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패역한 도시에 비유하여 고라신과 벳새다의 심판이 얼마나 중할 것인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도 심판을 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대해서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성 경: [눅10:1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가버나움 - 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이름은 결국 '자비의 마을'이 되는 셈인데(Hendriksen) 예수의 심판의 말씀에 비추어 볼때 이 마을의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완악한 마을'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튼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중심적 제자들이 그곳에서 선택되었고(5:10), 많은 이적과 교훈이 그곳에서 베풀어졌다(4:23,31-37;7:1-10). 그리하여 마태는 가버나움을 예수의 '본 동네'라고 하였다(마 9:1). 그러나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는데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역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는 표현에 의해 그들이 매우 교만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 하늘에까지...낮아지리라 - 이는 이사야가 포로후기 시대에 오만불손했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씀(사 14:13,15)을 가버나움에 적용한 것이다. '네가...높아 지겠느냐'(*, 메 휩소데세)에서 '메'(*)는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조사로서 결코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준다. 하늘의 영광과 음부의 파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이 당할 파국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음부'(*, 하데스)는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신약 시대에는 그 의미가 조금 변하여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Marshall).

성 경: [눅10:1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너희 말을...것이라 - 제자들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함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권위를 존중해주지 않고 거역할 때 그 행위는 예수를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권위가 자생적(自生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인식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했다.

성 경: [눅10:1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기뻐 돌아와 - 제자들의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이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자기들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 주의 이름으로...항복하더이다 - 제자들의 이 보고는 귀신을 쫓아낸 일이 예상 외의 놀라운 경험이었음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원하고 이와 더불어 예수에게 그러했듯이 자기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구할 때 놀라운 이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마 21:21).

성 경: [눅10:1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사단이 하늘로서...떨어지는 것 - 본절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1)70인의 제자들이 사역할 때 사단이 추방당했다는 견해. (2)사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제자들로 하여금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신 말씀이라는 견해. (3)예수께서 광야 시험을 이겨내셨을 때 사단이 하늘에서 추방되었다는 견해. (4)70제자 뿐만 아니라향후 전도자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결국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게 될 것을 뜻한다는 견해 등이다. 어쨌든 70제자들의 귀신 축사(逐邪)는 악의 세력의 패배를 보여주는 명백한 표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0:1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뱀과 전갈 -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제자들이 뱀과 전갈을 밟아 죽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바울이 뱀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인데(행28:3-6)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성경에서 뱀과 전갈은 주로 사단의 세력을 상징한다(창 3:1-15;고후 11:3;계 9:3,5,10). 본문의 출처라고 보여지는 시91:13의 맥락에서도 갈은 의미를 갖는다. 결국 이 말씀은 앞절(18)과 같은 맥락에서 사단의 세력이 제자들에 의해 짓밟힌다는 의미이나 다만 여기서는 사단의 실체가 더구체화되며 제자들에게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보다 강조된다. 창 13:15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처음 나온다. 이제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며 그 제자들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케 된 것이다.

성 경: [눅10:2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귀신들이...기뻐하라 -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때문에 기뻐하라'는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 형식이다. 이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이 생명서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귀신 축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이는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참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수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마 7:22,23). 만약에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거나 성취한 업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기록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게그랖타이'(*)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엥그라포'(*)의 완료 수동태로 하늘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유대교의 문헌에는 하늘의 책에 대한 사상이 많이 발견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는생명의 책을 가리킨다(출 32:32,33;시 69:28;단 12:1;히 12:23;계 13:8;20:12).

성 경: [눅10:2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이 때에 - 예수께서 제자들의 성공적 사역을 치하하신 바로 '그 때'(at thattime,NIV)를 가리킨다. 또한 이 표현은 누가가 즐겨쓰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된다(2:38;7:21;12:12;13:31;24:33;행 16:18;22:13).

⭕ 성령으로 기뻐하사 - 마태의 병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마 11:25)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기뻐하사'(*, 에갈리아사토)는 '기뻐하다'는 뜻의 동사 '아갈리아오'(*)의 과거형으로 1:47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사용된 동사이다. 지금 예수께서 느끼는 기쁨임을 뜻하며 계속 이어지는 감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일종의 계시임을 암시한다.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천지의 주재'라는 호칭은 다분히 구약적인 표현으로(창14:19,22) 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위엄을 나타내며 '아버지'(*, 파테르)라는 호칭은 아람어의 '압바'(abba)에 해당하며 따뜻한 부자 관계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온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영적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롬 8:16).

⭕ 이것을 지혜롭고...나타내심 - '이것'이란 아마 예수의 사역 즉 그가 베푼 이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방금 70(72)인의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대조되고 있는 데,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후자는 세상적 지혜나 율법적 지식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상 즉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위경제 4에스라 12:35-38)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으로서 바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상이다(고전 1:18-31). 또한 본절은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애정을 암시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성 경: [눅10:2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여기서 '모든 것'(*, 판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계시(Jeremias), (2)(본문이 단 7:13,14;마 28:18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았을 때) 예수께서 위임(委任)받은 하나님의 권한(Lagrange, Schniewind), (3)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Weiss), (4)모든 사람(Bengel), (5)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것(Holtzmann), (6)그 하나님의 뜻(Plummer), (7)모든 교리(Harnack) 등. 그런데 본문에서 '모든 것'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주셨다'(*, 파라디도미)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주셨다'는 동사는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 교리, 전통과 같은 것을 물려주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막 7:13;고전 11:2,23), 권력이나 권위를 위임하는 데도 사용된다(4:6). 이렇게 볼 때 앞에 열거한 제 견해들은어느 것이 틀리거나 어느 것이 정확하게 맞다기 보다는 종합적으로 취해질 세상의 것이라 하겠다. 결국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 아버지 외에는...아는 자가 없나이다 -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상호 인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또한 본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관계 즉 복음서들이 한결 같이 증거해 주는 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증거한다. 물론 성도들도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아버지를 안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의 중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식이 너무도 부분적이라는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성 경: [눅10:2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너희는 보는...복이 있도다 -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것'(what you see, NIV)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넓은 의미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4:6)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을 보는것을 의미한다(22절). (2)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굴복시킬 때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언급한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13:16) 전자에 가깝고, '듣는 것'을 생략한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10:2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많은 선지자와 임금 - 제자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옛 선지자와 임금들을 제자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본절의말씀에는 과거에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선지자)과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왕)조차 보지 못한 것을 지금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상을 말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되기를 대망한 사람들이고(사 52:15) 왕들 가운데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옛계약을 신뢰한 자들로서 선지자들의 계시를 받아들여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를 열망했었다(시 110:1).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 아닐수 없다(2:30;히 11:13;벧전 1:10,11).

성 경: [눅10:2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율법사가 일어나 - 마가는 '서기관'으로 기록한(막 12:28) 반면 마태와(마 22:35) 누가는 '율법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율법사는 유대 율법의 전문가를 말한다(9:22 주석 참조). 이 율법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 장소, 어느 시점에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막12:28-34) 마태복음과(마 22:35-40)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이 이야기가 24절에 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막 11:27을 고려하여 이 이야기가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그룬트만(Grundmann)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 시험하여...영생을 얻으리이까 - 마가복음에서는(막 12:28)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한 나머지 진지한 물음의 자세로 질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서의 '시험'(test, NIV)은 강한 악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교 지도자가 공식적 직함을 받지 않은 예수께서 올바른 대답을 줄 수 있는가를 보려고 물어본 것으로 이해된다. 계속되는 질문 가운데 '영생'(eternal life, NIV)은 '내세에 적합한 생명'(Tyndale) 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가리킨다(18:18,24,25,29;요 3:3,5,15,16,36). 한편 여기 율법사의 질문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선행을 물은 어떤 부자 관원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18:18).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율법의 자구적(字句的) 해석과 적용에만 몰두했던 사람으로서는 본절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러울 따름이었다.

성 경: [눅10:2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율법에...어떻게 읽느냐 - 결국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마 22:36;막 12:28)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태복음(마 22:37-40), 마가복음(막 12:30-31)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반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 형태로 전개된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율법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율법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이는 율법사의 이해의 범주에 맞도록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율법사들은 모세 오경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는데, 아마 예수는 이 경문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성 경: [눅10:2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네 마음을 다하며...사랑하고 - 이 말씀은 신 6:5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전반부 즉 대신(對神) 관계에 관한 내용을 주석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유대교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일편 단심의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것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 관계에 의해 피차간에 충성과 사랑의 관계를 지켜야함을 주장하는 신명기 학파의 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율법사들은 신 6:7-9에 의거하여 이 중요한 말씀을 소가죽에 기록하여 호부(護符)처럼 늘 지니고 다녔다.

⭕ 네 이웃을...사랑하라 - 이 말씀은 레 19:18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후반부 즉 대인(對人) 관계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이웃'(*, 플레시온)이라는 단어는 유대적 어법상 집단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동족, 같은 종교권에 있는 사람, 혹은 같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배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을 이 단어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뒤에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대교적 관점을 파기하는 의미가 있다.

성 경: [눅10:2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이를 행하라"(*, 투토 포이에이)는 현재 명령법으로서 행위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행함에 대한 결과는 '살리라'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레 18:5;갈 3:12에도 있다. 혹자는 여기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을 구분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인정(認定)과 행하라는 명령이 행위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Tyndale) 본문의 문맥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이 율법사가 요약한 율법의 핵심은 옳다고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으며(마 22:37-39;막 12:30,31)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바 있기 때문이다(마7:21,24;25:31-46).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이 율법사의 율법 지식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가 물음을 묻는 저의(底意)와 그의 위선을 아셨다. 그렇기때문에 예수의 대답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한 의미에서 충족시키기란 불가하며 따라서 율법 준수를 위해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교훈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0:2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소위 율법사가 사람들 앞에서 제기한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자 2단계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웃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아마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의 개념을 과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 경: [눅10:3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하(海面下) 250m의 저지대로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A.D.4세기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떼들이 횡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길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말씀은 시작된다. 그 사람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민족적 구분을 초월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

⭕ 옷을 벗기고...거반 죽은 것을 - 길을 가던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심지어 강도들은 옷까지 빼앗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심한 폭행을 가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버려두고 떠나갔다. 혹자는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했으나 사마리아인들로부터는 영접받은 예수라고 하고 주막은 교회를 뜻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해석(Allegory)일 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의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였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성 경: [눅10:3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 카타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 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로 돌아가는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성 경: [눅10:3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성 경: [눅10:3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9:52,53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성 경: [눅10:3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 사마리아인은 먼저 응급 조치를 취하고 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대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Robertson).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른 후 싸매어 주었다. 이 여행자가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다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 '짐승'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테노스'(*)는 타고 다니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짐승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이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Lenski). 그리고 '주막'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도케이온'(*)은 '모든'을 뜻하는 '파스'(*)와 '영접하다'를 뜻하는 '데코마이'(*)의 합성어로 많은 사람을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의 여관을 말한다. 탈진한 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온 사마리아인은 계속해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 '돌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딤전 3:5에서 교회를 돌보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책임적으로' 돌보아 주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눅10:3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이튿날에 - 시리아어 시내역 본(Syraic Sinaitic)에는 "그 날 새벽에"(at dawn ofthe day)로 되어 있어 더 정확한 시점을 전해 주고있다. 이렇게 일찍 떠났다는 것은 그 여행객이 결코 제사장이나 레위인 보다 할 일이 없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실 그는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만큼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바쁜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던 것이다.

⭕ 데나리온 둘 - 마 20:2에 의하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며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동시대 이탈리아(Italy)에서 하루 숙박비가 로마 제국 화폐로 1/32 데나리온이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가치가 동일하였다고 볼 때 이 금액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 갚으리라 - 이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이웃 사랑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되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져서는 안되며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 의식(責任意識)을 가지고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온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요 13:1).

성 경: [눅10:3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누가...이웃이 되겠느냐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두 질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는 이웃의 개념을 범주적으로 제한하려는 의도(意圖)가 숨겨져 있는 반면 후자에는 전자의 제한적인 이웃 개념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질문의 의도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를 미리 설정해 두기 보다는 스스로 이웃을 만들어 나가는 자세가 은혜받은 자들의 바른 태도이다.

성 경: [눅10:3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이니이다'로 대답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는 표현으로써 핵심을 피해가고 있다. 예수께서는이 비유를 통해 민족적, 인종적 제한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을 타파하고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 너도 이와같이 하라 - 이웃의 개념을 따져 묻는 율법사의 현학적(衒學的)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너무도 단순 명료하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는 예수의 권위있는 명령은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버리는 위엄있는 말씀이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실천이다.

성 경: [눅10:3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길 갈 때에...한 촌에 - '길 갈 때에'라는 모호한 표현은 장소와 시점 그리고 앞부분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 촌'이라는 표현 역시 누가가 장소에 대한 정확성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개괄적인 표현이다. 이 '한 촌'은 요 11:1과 12:1에 의하면 '베다니'라는 마을이며 이 마을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마을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 사역한 것에 관해서는 이후에 언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13:32,33; 17:11; 19:28).

⭕ 마르다...영접하더라 - 마르다의 자연스러운 영접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와 그들이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요 11:5). 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동생이다(39절;요 11:19,20;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이 있으며(요 11, 12장)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는데 그 만큼 이들 가족은 예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주체로 마르다가 등장하는데 우연히도 '마르다'(*)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어의 여성 명사이다. 성경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단지 마 26:6에 근거하여 그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일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할수 있을 뿐이다.

성 경: [눅10:3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주의 발 아래 앉아...말씀을 듣더니 -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요 12장에서의 모습과 병행을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도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고(요 12:2) 마리아는 예수 곁에서 그에게 향유를 붓는다(요 12:3). 여기서 '아래 앉아'(*, 파라카데스데이사)의 문자적 의미는 '곁에 앉다'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행 22:3). 이것은 마리아가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예수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묘사한 '듣더니'(*, 에쿠엔)가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그녀는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열심히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가리켜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의 발 아래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본절),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요 11:32),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에게 향유(perfume, NIV)를 부었기 때문이다(요12:3).

성 경: [눅10:4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마르다는...분주한지라 - 마르다의 바쁜 모습은 그녀가 예수께 대단한 정성을 쏟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주한지라'(*, 페리에스파토)는 '사방에서 끌어당기다'는 의미로 그녀의 바쁜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이렇게 바쁜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분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 명하사...도와주라 하소서 -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에 너무 열중인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난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마르다의 이의 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1)자신이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도우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이 있을 것이고,(2)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있으며, (3)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가장 옳다고 하는 확신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 비해 자기가 지금 얼마나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은연중 과시하려는 마르다의 생각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10:4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마르다야...염려하고 근심하나 -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는 이중 호격의 사용은 예수께서 마르다의 정성스런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염려하고'(*, 메림나스)라는 표현은 '흩어지다''나누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에서 파생된 것으로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근심하나'(*, 도뤼바제)는 '문제를 야기시키다'는 뜻으로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 말하면 마르다(Martha)나 마리아(Mary)가 매일반(每一般)이었다. 하지만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 보다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했다(시 119:103-105).

성 경: [눅10:4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몇 가지만...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본문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로서 각 사본들에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가지'와 '한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둘 다 음식의 가지 수로 보는 견해.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마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이다. (2)전자는 물질적인 것을, 후자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는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2)의 견해(見解)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 좋은 편을...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며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대답이 주어진다. 예수를 섬기는 적절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물질로써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동참함으로써 섬기는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여인들의 위치가 가사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자들도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성 경: [눅11: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3:21;6:12),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행 10:3,9).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성 경: [눅11: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 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10:21 주석 참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준다(요 20:17;롬 8:14-17).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마 6:9).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레 22:32;시 79:9;사 8:13;29:23).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9:1;10:17).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성 경: [눅11: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 에피우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1)'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2)'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 16:4;신 8:9)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성 경: [눅11: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용서하오니...사하여 주옵시고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 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성 경: [눅11: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밤중에...내게 빌리라 -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이다(11절;12:25;14:28;15:4;17:7). 한 친구가 찾아온 시각은 '밤중'이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이 모두 잠 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눅11: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여행 중에...먹일 것이 없노라 -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된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마 2:9).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하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하다.

성 경: [눅11: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이다. 첫째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Easton). 이 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성 경: [눅11: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한 것을 준다. 여기서 '강청함'(*, 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는 두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둘째,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살전 5:17).

성 경: [눅11: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구하라...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10:13;마 18:19;막 11:24;요 11:22;엡 3:20).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찾으라...찾을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 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신 4:29;삼하 21:1;호 5:15;행 17:27).

⭕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다.

성 경: [눅11:1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구하는...열릴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킨다(시 91:15;사 58:9;슥 13:9;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이다.

성 경: [눅11:1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생선을 달라하면...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비유의 말씀이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11:1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알을...전갈을 -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이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계 9:3,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인다.

성 경: [눅11:1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 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3:19;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 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천부께서...성령을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문이다(요 16:7).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4-11). 실제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에로 확산되어갔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히 9:11;10:1)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성 경: [눅11:1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한 벙어리 귀신 -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는 귀신 축출에 관한 기사가 없고(막 3:22), 마태복음(마 12:22)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눈까지 멀게 했다. 귀신을 좇아내는 과정은 일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고 그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기사(奇事)만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이어지는 바알세불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고 묻는 모습이 나온다(마 12:23).

성 경: [눅11:1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그 중에 더러는 -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단의 무리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고(마 12:24),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다(막 3:22). 서기관의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기원과 '바알세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이 다만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왕하 1:2에 근거하여 '바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공동 번역의 '베엘제불'(Beelzebull)에서 'Beel'은 'Baal' 즉 '주'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뒷 부분인 'Zebull'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1)'집', '높은 곳'을 뜻한다고 보면(왕상 8:13;사 63:15) '거주의 주' 또는 '높은 곳의 주'가 된다(Foerster). (2)발음이 유사한 '똥'이라는 의미의 Zebel로 보면 '똥의 왕'의 된다(Hendriksen). (3)이를 '파리'로 해석하여 '파리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Bengel, Tyndale). 이 가운데 비교적 많이 인용되는 것은 (1)의 설명이다. 아무튼 본문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좁게는 교권자들)이, 예수가 귀신을 좇아낸 사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무능력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진리를 매도하려 했던 것이다.

성 경: [눅11:1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마가는 여기서도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2:38). 이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담당할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귀신 축출 사건을 신적 권위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하여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NIV)에 대해서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류의 이적을 요구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1).

성 경: [눅11:1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아시고(*, 디아노에마타) - 이는 '깊이 생각하다', '구분하다'의 의미를 갖는 '디아노에오'(*)에서 나온 말로 의도나 목적을 간파하였다는 의미이다.

⭕ 스스로 분쟁하는...무너지느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나라나 집은 없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비유 앞에 적대자들의 논리는 산산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성 경: [눅11:1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 앞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일반 논리로 이끌어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 일반 논리를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나라와 집이 그러하듯이 사단도 자기들 끼리 싸우면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이며,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만 있을 뿐이다(고후 10:4).

성 경: [눅11:1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너희 아들들은...재판관이 되리라 - 적대자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반대 논리는 매우 철저하며 집요하다. 이제는 적대자들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 행위(逐出行爲)를 사단의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그들의 추종자들의 귀신 축출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followers, NIV)로 번역된 '휘오스'(*)는 '추종자', '제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히 12:5;벧전 5:13), 예수 당시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행 19:13).

성 경: [눅11:2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다크튈로스'(*)는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46절)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8:19;31:18;신 9:10). 그러나 더 흔하게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출 7:4,5;9:3,15). 한편 마 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삶의 초기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의미에서(3:22;4:1,18) 마태의 서술도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영'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였다고 할 때(대상 28:12,19) 누가와 마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적대자들의 비방은 완전하게 부정되며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었다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임하였느니라 - 예수의 말씀은 단지 적대자들의 비방을 반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함을 말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임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프다센'(*)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앞서 오다'의 뜻도 있고(살전 4:15), '방금 도착했다', '도달한다'는 뜻도 있다(Lenski). 이 동사의 의미를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되고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보게 된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더 결정적인 단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