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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주석

성 경: [고후1:1]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문안 인사]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 바울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 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힘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택함받은 열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막 3:14-19), 그가 개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에 근거하여(행 9:15) 열 두 졔자들과 동등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11:5;12:11;갈 2:6, 7). 그런데 바울이 본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 서신에서 바울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그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해오는 것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도됨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14-7:4).

⭕ 디모데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고전 1:1)과 달리 디모데를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본서신의 공동 저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고린도에 파송되어 사역 감당했던 일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젊고 담대하지 못하였고(딤전 4:12;딤후 1:7;2:1),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미미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였거나 거의 실패했었다(고전 4:17;16:10, 11). 이런 일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신앙의 아들이자 가장 절친한 동역자로서 자신과 함께 계속 사역해야 할 디모데의 권위를 다시금 세워주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을 것이다(Harris). 또한 비록 과거에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바울 반대파로 인해 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일이 있지만(고전 16:10, 11), 그럼에도 블구하고 바울이나 디모데는 그들에 대하여 여전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 서신의 서두에서 보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젊은이였으며(행16:1, 2), 바울에게는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딤전 1:2;딤후1:2),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될 만큼 절친한 동역자이기도 했다(행 16:1-3;빌 2:19-22).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교회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바울의 권위를 깍아 내리고 추천장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란을 일으켰던 적대자들과(3:1;4:2;10:7),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교회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했다. 한편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가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 해당함을 암시한다. 즉 이 표현은 여러 수신처를 포괄(包括)하는 대표적인 언급이라 하겠다.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신의 초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에 이어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지지될 수 있다(Tasker). 바울은 두 개의 고린도서신이 고린도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읽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 아가야 -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로마는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에피루스(Eqirus), 데살리(Thessaly), 갈시디스(Chalcidice)를 포함하는 중북부 지역이 마게도냐에 속하고 아덴(Athens)과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아가야에 포함되었고 아가야의 행정 수도는 고린도(Corinth)였다. 바울이 본 서신을 보내면서 고린도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포괄하는 아가야 전지역의 성도들이 읽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덴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행 17:34의 기록과 겐그레아에 한 교회가 있었다는 롬 16:1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니, 아덴과 겐그레아는 모두 아가야 지역 내에 위치한 곳이었다.

⭕ 성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원래 '분리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다쉬'(*)에서 유래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고(민 23:9;시147:20),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직분의 삶이어야 했다(레11:44;신 7:6). 신약의 성도는 성별된 구약 이스라엘의 영적 계승(繼承)자로서(벧전2:9,10) 소극적으로 죄악으로부터 분리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헌신, 봉사해야 할 자들이다.

성 경: [고후1:2]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문안 인사]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 본절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불리며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로 불리는데, 이는 '주'(*, 퀴리우)가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것임을 고려할때(*, 아도나이) 예수는 곧 하나님이심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절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구절이다. 본절과 동일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구절이 고전 1:3에도 나오는데 이는 전통적인 헬라식 문안 인사말과 히브리식 문안인사말을 결합한 바울 특유의 전형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은혜'(*, 카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근거인 하나님의 선재적(先在的)인 행위로, 받는 자의 행위나 자격에 의해 정당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호의' 또는 '선물'이다. 특히 여기서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께 지우신 것을 의미한다(5:19,20). '평강'(*, 에이레네)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롬 1:7;빌 4:7).

성 경: [고후1:10]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큰 사망에서...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큰 사망'(*, 텔리쿠투 다나투)은 '어려운 죽을 고비'(공동번역)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과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바울은 그것을 현재와 미래에 있을 환난에서의 구원을 확증해 주는 예표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경험적 신앙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위로할 수 있었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교훈을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회수에 제한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전 3:14;딤후 4:18).

성 경: [고후1:11]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간구함으로 도우라 -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빌 1:19). 여기서 바울은 커다란 힘을 갖는 중보 기도를 부탁함에 있어 자신이 사도로서 일방적으로 사역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치를 이루자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도우라'로 번역된 헬라어 '쉬뉘푸르군톤'(*)은 '함께 도와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강력하게 부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살후 3:1-3).

⭕ 많은 사람의 기도로...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바울에게 은혜가 내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론프로소폰'(*)에서 대명사 '폴론'에 첨가된 '프로소폰'은 '얼굴'을 뜻한다. 이 말이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체적으로는 '얼굴'을 뜻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 예로 본서에 이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최소한 여덟번은 '얼굴'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음을 볼 수있다(3:7, 13, 18;10:1, 7;11:20). 반면 본서 2:10과 4:6에서는 '사람' 또는 '얼굴'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Robertson). 그런데 본문의 '프로소폰'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것에 대해서 헨헨(Hacenchen)은 '프로소폰'이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는 대명사 '플론'(*)만으로 충분한데, 여기에 또다시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프로소폰'을 첨가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이 본래적 의미인 '얼굴'로 쓰였다고 보아 많은 얼굴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아니면 연극에서의 의미 즉 연극에는 다양하고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그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결말(結末)을 위해 협력하며 그때 생겨나는 좋은 결과에 대해 다같이 감사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성 경: [고후1:12]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진실성을 굳게 단언함으로써 자신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 비난에 대해 윤리적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함'은 헬라어 '하기오테티'(*)를 번역한 것인데 어떤 사본에는 '하플로테티'(*) 즉 '솔직함'으로 되어 있어학자들 간에는 전자가 본래적(本來的)이라고 보는 입장(Farrar)과, 후자가 문맥상 본래적이라고 보는 입장(Cowery, Barrett, Harris)으로 갈린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이 바울의 윤리적 성실성을 주장하는 대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후자의 의미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바울이 '하기오테티'라는 용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솔직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Barrett).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철저한 솔직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 앞에서는 윤리적 측면에서 진술했다면 여기서는 신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육체의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가 대비되어 제시된다. '지혜'(*, 소피아)라는 말은 본서보다는 고린도전서에 많이 나오며 본문의 '육체의 지혜'에 해당하는 병행구로 '세상의 지혜'(고전 1:20;2:6;3:19), '인간의 지혜'(고전 2:5) 등이 나온다. '육체의 지혜'는 자신을 신뢰케 함으로 사리사욕에 빠지게 하기 쉽고 결국은 자기 파멸로 이끌고 간다(롬 8:5, 6).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끊임없는 보살핌이다(6:1).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역은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 바울의 행위가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온전한 것이었음을 그의 양심이 증거한다. '양심'(*, 쉬네이데시스)이라는 말은 당시 고린도 지방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을 것이다. 즉 고린도인들은 그들의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을 증언할 때 '양심'에 호소하였던 것이다(고전 8:7, 10, 12;10:25,27-29, Jewett).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양심'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그의 행위가 참되다는 것을 증언해준다고 말하였을 것이다(Pierce). 한편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공명심(功名心)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잘못된 방식으로 자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올바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고전 1:31;고후 10:17, Barrett).

성 경: [고후1:13]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 본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바울의 서신이 진실하지 못하고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적대자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성 경: [고후1:14]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본절은 다소 완곡어법적(婉曲語法的)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목회가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즉 지금은 완전한 상호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에의 기대를 바울이 본절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 여기서 '대강'(*, 메루스)이라는 표현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수를 나타내는지(Farrar), 아니면 바울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지(Barrett) 분명치 않으나 후자의 의미가 정확하다고 본다. 그들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온전히 알지 못했다.

⭕ 우리 주 예수의 날에 - 이 날은 모든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될 날이다(5:10;고전 1:8;5:5;빌 1:6;2:16;살전 5:2;살후 2:2).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심판의 날에는 바울의 진실됨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 - 이는 심판의 날에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간에 상호신뢰의 관계가 형성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본구절은 장래에 고린도 교인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임을 바울이 이미 믿고 있고 또한 그렇게 될 때에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은 바울의 피땀어린 사도적 사역에 힘입은 것임(고전 4:4-10;11:1)을 암시한다.

성 경: [고후1:15]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이 확신을 가지고 - 바울은 자신의 여행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여 그의 신실성을 비난하였던 고린도인들에게 먼저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존경과 애정의 관계성을 확인시키고 있다. 바울과 고린도 교인 사이에 생겨난 모든 오해들은 이 전제를 토대로 하여 풀어져야 했다.

⭕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 `두 번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듀테란 카린'(*)에 대해서는 '두번째의 은혜'(a second benefit)로 해석하는 견해와(KJV, Barrett) '두번의 기쁨'(a double pleasure)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RSV, Moffatt, Harris). 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고후 12:14을 보면 바울이 본절을 쓰는 시점 이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하였으므로 전자의 견해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 본절의 '먼저'라는 단어는 바울이 마게도냐를 가기에 앞서 고린도를 방문할 것임을 시사하고 16절 내용 또한 마게도냐 방문 전후에 각각 고린도 방문이 있을 것을 보여주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마게도냐를 다녀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성 경: [고후1:16]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너희가 보내줌으로 - 여기에는 배에 승선하는 곳까지 동행해 준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가는 길에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이 자기와 함께 동행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Martin).

⭕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 '경영하였으니'(*, 불로메노스)는 '계획을 했다'는 뜻이다. 최종 목적지가 유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롬 15:26;고전 16:3, 4)을 가지고 가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고후1:17]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경홀히 있었겠느냐 - 앞절에 언급된 바울의 여행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고린도 교회의 바울 적대자들은 그것을 바울을 비난하는 빌미로 삼았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진실되지 못하고 경솔하며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다(12절).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비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는 대적들의 비난과 중상(中傷) 가운데서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홀히'(*, 엘라프리아)란 말과 두 번 거듭 언급된 '예'(*, 나이),'아니'(*, 우)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바울의 반박은 반어법적인 수사법으로 되어 있다. 바울의 어조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하면,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할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공동번역)가 된다. 바울은 '육체'(*, 사륵스), 곧 자기 이익을 따라 임의로 계획을 변경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고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였다(2:1-3;행 16:6;고전 16:7).

성 경: [고후1:18]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 '미쁘시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사업의 거래나 공적 의무의 수행에 있어서 `신실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란 뜻이다. 구약에서 '신실하신 하나님'(*, 하엘한네에만)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명칭이기도 하다(신 7:9;사 49:7).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함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사2:2-4;눅 1:68-79;고전 1:9), 이것이 바울의 신실함의 근거가 된다면 그의 신실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은 매우 효과적이고도 담대(膽大)하게 자신을 변증하고 있다.

⭕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에게 한 말은 그의 여행 계획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까지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13절).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그의 사역을 수햄함에 있어 매사에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신실함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 경: [고후1:19]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실루아노 - 이는 '실라'(*)의 로마식 이름이다(살전 1:1).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행 15:22),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에 동참했던 동역자이자 친구였다(행 15:36-41).

⭕ 너희 가운데 전파된...예수 그리스도 -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가 고린도에 복음을 증거한 것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기간이었는데 먼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고(행 18:1-4),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나중에 합세하였다(행 18:5). 이들 세 사람은 고린도에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행 18:7-11).

⭕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 세 사람의 삼중 증거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결코 모순과 우유부단함과 이중성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넨'(*)은 강조적 현재 완료형(Intensive Perfect)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현실로서 동일한 효력을 나타냄을 보여준다(Harris).

성 경: [고후1:20]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이나 당신의 종들을 통해 주신 약속의 성취자이고(롬 1:3;갈 3:16). 이스라엘의 전역사가 지향해 온 목적을 완성하신 분으로 모두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이러한 사실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실현되었고(눅 5:17-26;7:18-23), 성도들과 교회는 그것의 증거이다.

⭕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라는 의미를 갖는 말로 구약성경에서도 사용되었고(*, '아멘', 신 27:15, 16;렘 11:5;시 41:13) 유대교를 거쳐 기독교에서도 예배시에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성도들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가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아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된다. 바울의 헌신적인 사도적 수행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아멘'의 한 전형(典型)이라 할 수있다.

성 경: [고후1:21]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견고케 하시고 -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관계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세우신 분이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실진대,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욱 풀요롭게 하실 분이 하나님이실진대 양자 사이에 사소한 일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본문에 함축된 의미이다.

⭕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기름을 부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사스'(*)는 `기름을 붓다', '신성하게 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크리오'(*)에서 온 말로 구약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 크리스토스)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또한 구약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을(선지자, 왕상 19:16;왕, 왕상 1:39;제사장, 출 29:7) 구별하여 소명을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하는 것은 위의 두 경우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의 기름부음 받음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사명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음 즉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이나 개인적인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증받는 것이다.

성 경: [고후1:22]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우리에게 인치시고 - `인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사메노스'(*)는 '공문서의 효력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즉 이 인(印)은 봉인된 서류가 변조되거나 수송 중에 내용물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며또한 소유권의 표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것은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확인하셨다는 것이며(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NIV) 성도들에게 구원의궁극적인 확실성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이다(엡 4:30).

⭕ 보증으로 성령을 -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라본'(*)은 히브리어 '에라본'(*)에서 유래한 상업적인 단어로(창 38:18) 어떤 물건을매입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금의 총액 중 '첫번째 분납금'(down payment)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보증금을 지불하셨다. 사람에게 있어서 계약을 체결하고 보증금을 지불하는 것이 반드시 소유를 확정지어 주는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형편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며 또 그 마음도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보증금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곧 그분의 완전한 소유(所有)가 되는 것을 뜻한다. 성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것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성령께서 증거하신다(롬5:5;8:9;갈 4:6).

성 경: [고후1:23]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 바울은 자신의 여행 계획이 어떠했고 그 계획이 왜 바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가(15-17절) 자신의 여행 계획이 근거하고 있는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기의 진실성을 먼저 확인시킨 뒤(18-22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여행 계획을 재변경시킨 사유를 밝히고 있다. 먼저 그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거의 맹세에 가까운 표현으로 자신의 진실성을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가끔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데(롬 1:9;빌 1:8;살전 2:5, 10), 이러한 문구는 당시 헬라 문학에서 사용되던 저주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바울의 문구는 구약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맹세문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룻1:17;삼상 14:44;삼하 3:35). 여기서 바울이 감히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맹세가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나 있다는 그의 신앙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 바울이 계획을 바꾸어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결코 바울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다. 만약 바울이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이 본래의 계획대로 고린도를 찾아갔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마음 아픔뿐이었을 것이다(2:2, 3).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벌을 받아야 할 만큼 바울을 근심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2:5-7). 바울은 그들을 징계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러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2:7). 이것은 목회자로서의 바울이 매우 지혜롭고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린도의 문제 교인들은 바울의 인내와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왜곡(歪曲)하여 도리어 그를 비난하였다.

성 경: [고후1:24]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여정 변경에 대한 답변]

⭕ 믿음을 주관하려는...기쁨을 돕는 자 - 여기에는 바울의 목회관이 나타난다. '주관한다'(*, 퀴리유오멘)는 것은 '지배한다'는 뜻이며(lordover, NIV), 이는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도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신앙적 기쁨을 위해 돕는 봉사자로 나아가기를 원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그의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 대하여 일정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기는 하지만(10:2-8;고전 5:4, 5;딤전 1:20), 궁극적으로 신앙인의 실존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만 규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신앙은 지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인 만큼 바울은 그들 스스로가 신앙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최선의 목회라고 보았다. 이처럼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육체적 이익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성 경: [고후1:3]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찬송하리로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토스'(*)라는 '칭찬하다'는 뜻의 '율로게오'(*)에서 온 말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어 '바룩'(*, '찬양하다')과 같은 의미이다. '바룩'은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 자료, 특히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는 열 여덟 개의 축복문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Barrett).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 이 말은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더이상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유대교 찬양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형식이 기독교적인 형태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Barrett). 즉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는데(갈 4:4)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인 기독교적 어법인 것이다(벧전 1:3).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는데(Backmann),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 자비의 아버지시요 - 이 문구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 형식의 표현이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 '오, 우리의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여'(*, 압 하라하밈)라는 말로 시작한다(A. Marmorstein). 이처럼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 오이크티르모스)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한다(시 86:15;미 7:18).

⭕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여기서 '모든'(*, 파세스)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으나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로'(*, 파라클레세오스)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냄을 받은 것을 포함한다(8-10절). 바울은 그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다(롬 8:35).

성 경: [고후1:4]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본절의 '우리'는 일차적으로 본 서신의 발신인인 바울 자신을 가리키며 넓게는 본 서신을 읽게 되는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Barrett, Lowery). 본서에서 바울이 아홉 차례나 사용하고 있는 '환난'(*, 들립세이)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8절;2:4;4:17;6:4;7:4;8:2, 13).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요 15:19,20). 그러나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진다. 본절의 '위로하사'(*, 파라칼론)는 '안위하다', `위로하다'는 뜻의 '파라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없이 계속됨을 뜻한다. 연속되는 환난과 그에 상응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다(행 14:19;16:19-26).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2:10)고 고백하였다. 한편 본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고 위로하기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培養)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벧전4:10).

성 경: [고후1:5]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그리스도의 고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가 한결같이 받는 고난'을 의미한다(Martin, Ewald). 모든 고난이 다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에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고난이며(눅 22:52,53;23:22-24), 그 고난의 결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 헤블레 함마쉬아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했고(골 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롬 8:17). 사실상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당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행 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고, 유대인 자객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었다(행 23:12-15).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수 없는 위로를 받았으므로 고난에 비례하는 위로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성 경: [고후1:6]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견디게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한 숱한 고난과 고린도 교회가 받은 위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인 것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고난도, 비록 동질(同質)의 것은 아니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로 또한 그의 서신을 읽게 될 고린도 교인들과 아가야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그가 환난을 당하든지 위로를 받든지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됨을 확신한다(4:8-12, 15).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먼저 고난을 경험한 바울의 예로부터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목격하고 위로를 받으며 지혜롭게 처신해 나감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나갈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1:7]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 -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고린도 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소망'때문이었다. `소망'(*, 엘피스)은 문자적으로 '강한 확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소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그것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아마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여러 가지 문제들 즉 이단의 문제, 바울의 사도권에 관한 문제(3:1;4:2;5:11,12;7:2;10:7, 11;11:6), 교회의 분열에 관한 문제에 대해(1:10이하) 다소의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울과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소망이 있었을것이고, 이러한 확신은 고린도를 다녀온 디도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들음으로써 더욱얻게 되었을 것이다(7:6, 7). 바울이 이러한 소망을 굳게 갖게 된 것은 적어도 본서의 독자들인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였다고 보았고 그것은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주어지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參預)하는 자들에게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것이고 결국 거기에는 확고한 소망이 있게 될 것이다(벧전 5:9, 10).

성 경: [고후1:8]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 본문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아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하는 것과 '환난'이 어떤 종류의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자의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1)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고 본다(Haenchen, Robertson, Farrar 등).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고전 15:32의 맹수와의 싸움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행 19:23-40에 언급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에 두고 있다. (2) '아시아'가 리쿠스 계곡을 가리킨다고 본다(Harris, Duncan). 이렇게 보는 이유는, 바울이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일에 대해 기록한 고후 11:24을 이곳에서 있었던 일로 보기 때문이며(Lowery), 또 다른 이유는, 만약 '아시아'가 에베소를 가리킨다면 고전 15:32나 16:8에서 처럼 '에베소'라는 지명을 밝혔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나 모두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오히려 본절에서 '아시아'가 가리키는 곳은 에베소와 리쿠스 계곡을 제외한 다른 어떤 장소 일지도 모른다(Charles, Hodge, Tasker). 바울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여러차례 시련을 겪었고, 이러한 사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고난을 당한 장소가 아니라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인 만큼 이에 대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바울이 당한 극심한 '환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전 15:32과16:9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Harris). (2) 심한 질병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Knox, Ruckert).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바로 다음 절의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9절)라는 내용이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고 본다. 그러나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시스'(*)는 심한 질병에 적용하기에는 적합치 않으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3)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 이후에 있었던 새로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행 19:23-40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Theodoret, Calvin). 위의 견해 중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바울의 첫번째 편지에 대한 고린도 교회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바울이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것을 지칭한다는 파라(Farrar)의 견해가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마치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가라앉듯이 바울에게 가해지는 고난의 무게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견디어내기 어려운 혹심(酷甚)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적인상 태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끊어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포레데나이'(*)는 급작스러운 고뇌로 모든 소망을 상실케 되며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강렬한 경험을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성 경: [고후1:9]

주제1: [바울의 문안과 순수성에 대한 변론]

주제2: [환난 중의 위로]

⭕ 사형 선고 - 이 문구(*, 토 아포크리마 투 다나투)에 대한 해석은 분분(紛紛)하다. (1) 행 19:23-41에 기술된 에베소의 데메드리오 폭동 사건(Silanus, Duncan). (2) 법과 질서를 어긴 사람을 원형 경기장의 맹수들에게 주어 생명을 빼앗게 하는 심각한 위험(Malherbe, Warfield). (3) 법정에서 내려진 사형의 판결(Deissmann, Stanley). (4) 복음을 증거하다가 겪는 육체적고난(Strachan, Martin). (5) 12:7의 '육체에 가시'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Clavier, Barrett). 이중에서 (3)과 (4)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용어상 재판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며 전후 문맥상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 및 8절의 '환난'과 긴밀하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울은 본문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절망감의 최종적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 받은 줄 알았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케카멘'(*)은 `가지다', `소유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에코'(*)의 완료형이다(hadreceived).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1)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생한 회상으로 보는 견해와(Robertson), (2) 단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넘어 현재에도 효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바울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아직 집행만 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유일한 희망이 부활에 있음을 뜻한다고 본다(Haenchen). 위의 두 견해 중 첫번째가 더 타당한 듯하다.

⭕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 - 바울이 절망하여 사형 신고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은 더이상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구원에의 능력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뢰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바울도(빌3:4), 고린도 교회에서 맛본 좌절, 신체적인 질병, 거듭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11:23-27)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위로와 구원과 신뢰가 인간의 한계 상황인 죽음 너머로부터 역사해 오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抛棄)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것을 알게 되기를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교훈은 철저한 환난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며 이것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었음에 틀림없다.

성 경: [고후2:1]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여정 변경의 이유]

⭕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 본문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기 이전에 두 번 고린도를 방문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설립을 위해 첫번째로 그곳을 방문한 이후에(행 18:1-8) 쓴 고린도 전서에는 슬픈 방문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는 반면 본문에는 '가슴 아픈 방문'에 관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의해 야기될 바울에 대한 오해와 교회에 발생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두번째로 그곳을 방문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발송한 이후에 있었던 이 두번째 방문은(12:4;13:1,2)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더욱 큰 불신과 마음의 상처만 남긴 방문이었기에 가슴아픈 방문이었다. 이 가슴 아픈 방문이 1:15,16절의 여행 계획과 관련이 있다고 보며,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방문한 것이 바로 이 방문이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되돌아오는 길의 방문은 피차간의 가슴 아픈 만남이 되지 않기 위하여 여행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변경시킬 때 상당한 고심(苦心)을 한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는 그가 계획의 변경을 서술할 때 '결단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성 경: [고후2:2]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여정 변경의 이유]

⭕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 본절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내용은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공동번역)의 뜻이다. 이 말 속에는 바울이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암시되어 있다. 즉 원래의 계획대로 고린도 방문을 강행하여 지금까지 저지른 성도들의 잘못을 엄단한다면 그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큰 근심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지 않고 계획을 변경하여 그들에게회개(悔改)할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훗날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했던 바울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이렇듯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는 세심한 목회적 배려를 행하였다.

성 경: [고후2:3]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여정 변경의 이유]

⭕ 이같이 쓴 것은 - '쓴 것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간체의 과거형으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썼던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이거나 전서와 후서 사이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눈물의 (준엄한) 편지'일텐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Lowery, Harris). 이 편지는 현존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바울이 가슴 아픈 방문을 한 후 기록한 것으로 믿어지며 A.D.56년 봄 디도를 통해 고린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 바울이 씨를 뿌려 거둔 열매인 고린도 교인들은 당연히 바울에게 기쁨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관계가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바울에게 기쁨을 주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형편이 되었다. 바울이 진정으로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순히 오해에서 비롯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 사도들에 현혹되어(11:1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직접 방문하여 책망하고 문책(問責)하는 것이 피차에 마음만 상하게 할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고린도 방문 계획을(1:15, 16) 취소하고 대신 눈물의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냄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줄 확신함이로라 - 바울이 겪는 모든 회노 애락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6-12). 지금은 관계가 많이 악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그들의 기쁨이 된다는 확신을 표하는 것이다. 혹자는 본문에서 고린도에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5, 6절;11:13) 대부분의 교인들은 여전히 건전했다고 추론한다(Barrett).

성 경: [고후2:4]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여정 변경의 이유]

⭕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 - 이것은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이유와 그때의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립세오스'(*)는 `압박', '괴로움'을 뜻하며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노케스'(*)는 '억압', '고통', '고민'의 뜻이 있어 바울의 심정이 매우 심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이토록 깊은 심적 고통을 당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안에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반(反)바울적 논리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동조(同調)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 많은 눈물로 - 바울이 겪고 있는 심적 환난과 애통은 눈물로 씌어진 편지에서 절정을 이룬다. 바울은 가끔 눈물의 편지를 쓰거나 는물로 호소했는데(빌 3:18;행 20:19,31) 이것은 눈물 흘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 참았던 스토아의 학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 이것은 바울의 눈물의 편지가 부분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음을 말해준다(7:8). 바울이 눈물로 써보낸 편지의 핵심은, 비록 그들이 바울을 슬픔 가운데 빠지게 했지만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넘치는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혹자는 이처럼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인들을 남달리 사랑하는 데에는 문제아(問題兒)들을 더 사랑하는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Farrar, Barrett). 자기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전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회개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7:9).

성 경: [고후2:5]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 본절에서 거론되는 핵심적인 논리의 주제는 '바울을 대적하여 문제를 일으킨 자가 누구였으며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이다. 이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에서 찾아낼 만한 근거 자료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먼저 5-7절과 7:12에 근거할 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사람이 고린도 교인 중 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고린도로 여행 온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음은 이 문제의 인물이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과거에는 고전 5:1 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 근친상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Tertullian),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런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는 3, 4절에 언급된 서신이 고린도전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전제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 학자들은 이 적대자의 행위가 바울의 두번째 고린도 여행 즉 가슴 아픈 방문과 관련하여 바울을 모욕하고 바울의 권위를 무시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Barrett, Lowery,Harris). 그런데 이 행위가 바울 개인에 대한 도전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대한 문제 행위로 여겨지는 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전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 사역과 그의 인격과 사도적 권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도전은 그의 인격과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교회 전체에 대한 적대 행위였던 것이다.

⭕ 어느 정도 너희 무리 - '어느 정도'라는 표현은 대적자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상당히 완화되었음을 반영한다. 바울은 대적자의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가능한 한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너희 무리'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휘마스'(*)는 문자적으로 '너희 모든 무리'라는 뜻이다(all ofyou, NIV). 이것은 바울을 대적했던 자가 고린도인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流入)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성 경: [고후2:6]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많은 사람에게서 -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 적대자를 반대하여 바울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본문에 표현된 `많은 사람'(*, 톤 플레이오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소수의 사람들은 적대자의 처벌을 반대하는 그룹과 더 엄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격한 그룹으로 나뉘었거나 아니면 중징계를 주장하는 하나의 그룹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Harris).

⭕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 여기서 '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티미아'(*)는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고 외경 지혜서 3:10에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법적인 의미에서의 '처벌'을 뜻하는지 아니면 단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망' 또는 '비난'을 뜻하는 것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혹자는 전자의 의미를(Farrar), 혹자는 후자의 의미를 주장한다(Barrett). 그런데 '에피티미아'와 어원을 같이하는 '에피티만'(*)이 신약에서 30회 사용되는 중 한 곳에서만(유 1:9)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고 나머지에서는 '비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과(Barrett), 소수의 교인들만이 엄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점을 고려할때(7절)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고후2:7]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저를 용서하고 - 바울은 앞에서(5절) 적대자가 끼친 근심을 '어느 정도'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묘사함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용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바울이 적대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그의 명예를 존중해 주는 것으로 바울이 이제 그를 용서했음을 말해준다. '용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사스다이'(*)의 뜻은 `선물을 주다', '은혜를 베풀다'이며 이는 '용서'라는 행위의 무조건성을 잘 나타내 준다. 즉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의에 대한 급부(給付)가 아니라 인간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서 주어지는 선물인 것처럼 바울이 지금 말하는 용서도 그런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 바울이 적대자를 용서하라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이 끝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그 적대자는 고린도 교회의 많은 교인들로부터 책망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반성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지 않고 엄한 징계를 내린다면 그는 좌절하여 영영 교회에서 낙오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가 비록 바울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고 교회에 해를 끼쳤지만 가능한 한 용서하고 권면하여 회개하고 새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고(눅 17:3) 교회가 따라야 할 도리였으므로 바울은 이것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고후2:8]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그러므로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 바울은 적대자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 당위성을 한 영혼이 지나친 낙심 가운데 좌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목회적(牧會的)이유에서 찾고 있다. 이제 고린도 교인들은 그 적대자에게 사랑을 공개적으로 확인시켜 줌으로써 그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를 용서하였음을 확증해 주어 그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했다.

성 경: [고후2:9]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하여 - 본문은 바울이 '눈물의 편지'(3, 4절)를 썼을 때 주요 관심사가 적대자를 처벌하는 데 있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바로잡아 주려는 데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알고자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과 그들이 적대자로 말미암은 시험에 얼마나 잘 견디어 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본절의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메'(*)가 '시험'(試驗)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나타내준다(the test, NIV).

성 경: [고후2:10]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너희가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 이것은 바울이 용서를 권면하면서도 결코 강요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바울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도 피해자였으므로 적대자를 용서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용서해 주기를 바랐고 그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자기 자신은 이미 용서를 했다. 본문의 '네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가정이 아니라 이미 용서한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할 것이라고 진술하고서 곧이어 자신은 이미 용서했음을 말하는 데엔 분명 모순된 부분이 있는 듯하나 여기에는 적대자를 용서해야 하는 당위성과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의 뜻에 순종하여 용서하리라는 확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더욱이 바울이 용서한 것은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기 위함이나 순간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의 교인들을 위하여 한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증인으로 보시고 인정하는 가운데 행한 진실된 것이었다.

성 경: [고후2:11]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잘못한 자에 대한 용서]

⭕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회개하고 있는 적대자를 용서해야 할 또하나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 곧 사단에게 속는 것이므로 속지않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의 목적은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본문의 경우, 범죄한 자의 마음을 낙담케 하여 완전히 좌절에 빠지게 하는 것이나, 피해자인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복수심을 유발시켜 범죄자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그리하여 용서하라고 권하는 바울과 용서하고자 하지 않는 교인들 사이에 분란을 야기시키는 것도 모두 사단이 꾀하는 것이다.

⭕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 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사단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단이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 사악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그 궤계를 저지(沮止)시키는 것이 사도로서의 직무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2:12]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그리스도의 향기]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이후 에베소에 되돌아와 '눈물의 편지'를 디도에게 주어 고린도를 방문하게 하였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마게도냐에서 만나기로 한 듯하다(13절).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한 것은 이 약속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나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발생한 은장색들의 소동 때문에 다소 약속보다 일찍 왔을 것으로 보인다(행 19:23-41).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드로아 방문의 목적은 디도와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 했다.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후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내 그 결과가 상당히 궁금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물론 디도를 만나지 못한 불안 때문에 끝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적 과제로 여기는 바울의 사도적 소명은 대단히 강한 것이었다.

⭕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결정적인 기회를 얻게 된다(행 16:6-10).

성 경: [고후2:13]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그리스도의 향기]

⭕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 아마 드로아에서 몇일 동안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디도가 도착하지 않자 바울의 심령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복음을 전할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바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음의 두가지 일 것이다. 첫째, 고린도 교회에 대한 불안이다. 바울의 고린도 방문은 그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고 그리하여 두번째 방문을 취소하고 대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의 결과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직접 방문을 피하고 편지로 대신하였는데(1-3절)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거나 지난번 방문 때 있었던 가슴아픈 일들이 치유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불행한 일이 될것이다. 둘째, 디도의 도착이 지연되는 것이 혹시 디도의 신변에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닌가 염려되었다. 더구나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전하는 일 외에도 당시 기근으로 빈핍(貧乏)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강도들의 위협에 처할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로 인해 바울은 더 이상 드로아에 머무를 수 없어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이다.

성 경: [고후2:14]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그리스도의 향기]

⭕ 이기게 하시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리암뷰오'(*)는 로마의 황제나 장군들이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면서 군중들에게 구경시키는 개선행진을 가르킨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공동번역)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을 승승 장구하는 장군의 영광에 참여하는 병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 여기서 '냄새'는 로마 황제가 개선할 때 길가에 향을 피워 냄새를 내는 것이나 쥬피터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 신전까지 개선 행진을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관례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을 향기에 비유하고 있다. 자기가 복음을 증거하였으나 사실상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바울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도구로 삼아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성 경: [고후2:15]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그리스도의 향기]

⭕ 그리스도의 향기 - `향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오디아'(*)는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창 8:21;출 29:18;레 1:9;민 15:3).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삶은 그가 롬 12:1에서 말한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자 예수의 삶을 연장하여 사는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였고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행21:13;23:12-15;골 1:24).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전해진 바울의 복음 전파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부분적으로는 거부되었다(행 17:32). 이러한 받아들임과 거부의 차이는 종말론적 차이로 나아간다.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나 거부하는 자들은 망하게 된다.

성 경: [고후2:16]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그리스도의 향기]

⭕ 사망에 이르는 냄새...생명에 이르는 냄새 - 바울에 의해 선포된 하나의 설교가 두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의 향기인 바울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된다. 예수의 죽음이 평범한 한 인간의 죽음이며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그들의 생각에 따라 죽음을 맞게 될것이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자기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롬 8:34). 하나의 실재가 선과 악, 생명과 죽음과 같이 두가지 효력(效力)을 발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었다. 그 한가지 예로 '토라'를 들 수 있는데 혹자는 소개하기를 "꿀벌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간직하고 다른 자들을 위해서는 독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토라의 말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약이고 세상 민족들에게는 죽게 하는 독약이다"라고 하였다(Manson).

⭕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이것은 바울이 적대자를 염두에 두고하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자신만만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름하는 중대한 사역을 인간적인 자격이나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성 경: [고후2:17]

주제1: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주제2: [그리스도의 향기]

⭕ 혼잡하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펠류온테스'(*)는 행상인이 과일의 좋은 것을 맨위에 놓아 전체가 좋은 것인양 판매하는 '부도덕한 상행위'를 가리키거나 포도주에 물을 타 양을 많게 하여 질 낮은 포도주를 판매함으로써 '과도한 이익을 얻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거짓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나타낸다(Barrett). 이것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가리켜 자신들의 지적 상품을 돈으로 파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던 것과 유사한 것으로, 거짓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품으로 팔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시사하고 있다(11:4,13).

⭕ 순전함으로 말하노라 - 거짓 전도자들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바울의 복음 전파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도 않고 사람에게 인기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자기가 행하는 능력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과 말씀만을 전하였다. 또한 그의 모든 선교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것이므로 조금도 개인의 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의 증거이며 그의 진실성(眞實性)의 증거인 것이다(1:12).

성 경: [고후3:1]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일꾼]

⭕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 본절의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의 이면에는 바울에 대한 두 가지 비난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지나치게 되풀이하여 선전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이 천거서를 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바울에 대한 이런 도전은 적대자들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가리켜 자기를 칭찬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천거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거짓됨을 은폐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바울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어떤 사람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선교사들로서 누가 보아도 현혹당하기 쉬운, 찬사로 가득찬 추천서를 소지(所持)하고 있었고, 바울과 아무런 상관없이 고린도에 와서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하였던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 이들은 2:17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자들의 범주에 들 것이다. 혹자는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적인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일 것이라고 본다(Harris).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된 후에도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근본이라고 믿었던 자들로, 율법보다 믿음을 중요시했던 바울을 못마땅히 여겼을 것이다.

⭕ 천거서 -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일종의 소개장으로 어떤 사람의 직분과 권한에 대한 위임장 또는 신임장 역할을 하였다(행 9:2;18:27;고전 16:3, 10).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울이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위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행 26:12-18). 여하튼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추천서를 가지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악선전을 하고 다녔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이 추천서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필요에 따라서는 추천서를 이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8:16-24;롬 16:1, 2;고전 16:3, 10,11).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칭찬과 승인과 위임보다 하나님의 승인이 훨씬 더 우위에있고 또한 한통의 추천서보다는 사도 자신의 깨끗한 양심과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에 사도로서의 그의 진정성(眞正性)이 확인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어디서 추천서를 얻어다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거나, 그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성 경: [고후3:2]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일꾼]

⭕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고전 9:2에서 이와 유사한 의미의 구절이 발견된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무시한 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자신의 전도사역의 열매임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사도권을 논증한 바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본절에서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앞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추천서와 자신의 마음속에 고린도 교인들로 인해 새겨진 추천서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몇가지 점에서 비교된다. (1) 적대자들이 지니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마음에 쓰여진 것이다. (2) 적대자들의 추천서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하나님의 영(靈)으로 쓰여진 것이다(3절). (3) 적대자들이 가진 추천서는 종이에 쓰여진 것이므로 몇몇 제한된 사람에게만 보여질 수 있으나 바울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 마음에 썼고 - 혹자는 이 구절에서 렘 31:33의 새 계약 즉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가 암시되어 있다고 본다(Barrett). 이것은 다음 절(3절)의 '돌비'와 '육의 심비'의 대조와 연관시켜 볼 때 적절한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천거서에 대한 논쟁을 `율법과 복음', '육과 영'이라는 신학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성 경: [고후3:3]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일꾼]

⭕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 본절은 적대자들의 천거서가 사람에게서 유래한 반면 바울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바울의 사도직이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가시적(可視的)인 증거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사역(事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 세움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그리스도의 편지'(*, 에피스톨레 크리스투)에서 '그리스도의'는 표면상 소유격이지만 실제로는 주격의 의미를 갖는다. 즉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는 점을 말해준다(R.Martin).

⭕ 돌비...심비 -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먹으로 쓰인 천거서를 가지고 율법을 강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추천서를 가지고 있고 복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서 모세에게 수여한 옛 계명에(출 24:12) 매여있는 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심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즉 새 계명을 새겨 넣은 것이다(렘 31:33;겔11:19;36:26). 이로써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제기된 추천장 문제는 바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적대자들은 율법을 강요했으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과, 적대자들은 분열이라는 악한 열매를 맺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해진다.

성 경: [고후3:4]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일꾼]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 본문은 바울이 결코 자화자찬하거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였으나 자신의 확신의 근거가 자신의 재능이나 성결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심령 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그것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주 대하여 말한 심정에서의 확신이요, 비판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확신이다"고 하였다(F. G. Carver).

성 경: [고후3:5]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일꾼]

⭕ 우리의 민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확신이 자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자기를 통해 일어난 모든 능력의 원천(源泉)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의식하여 자기의 겸손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빌 4:13). 한편 혹자는 본절이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랴'(욜 2:11)는 구약의 구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Martin). 실로 하나님 존전에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유한성을 인식하게 되며 그때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운명을 가진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전능자(룻 1:20;욥 21:15;겔 1:24)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3:6]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일꾼]

⭕ 새 언약의 일군 - '돌비와 심비'의 대조(3절)가 '율법과 복음'의 대비를 나타낸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옛 언약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적대자들과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키고 있다.

⭕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 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 말이 본문에서 뜻하는 바는 '율법'이라고 할 수있다. 반면 '영'(*,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복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들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 시킬 수 있다.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의문'과 '영'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의 대비로 이해하기도 한다(Barrett). 전자는 삶의 중심을 인간에 둠으로 인해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후자는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둠으로써 생명을 얻는것이다. 또한 칼빈(Calvin)은 '의문'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적인 설교'를 뜻하고, '영'이란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사람의 마음 속에 실제로 작용하는 '생명력있는 가르침'을 뜻한다고 본다.

성 경: [고후3:7]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의문의 직분 없어질 영광 -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석판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34:29-35의 장면이다.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즉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롬 7:10-12)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의문'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도의 전이해(前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본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관한 유대교의 전승(Targum Ongelos)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유대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Martin).

성 경: [고후3:8]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 의문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거기에 비취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는 빛'(4:6)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명을 가져다 주는빛이다. 한편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는 구절은 미래형이나 이를 시간적인 미래로 보아 주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서는 안되며 다만 논리적인 미래로 보아야 한다. 영의 직분이 현재적인 것이듯이(1:22) 그 영의 영광도 현재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 경: [고후3:9]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정죄의 직분...의의 직분 - 본절에서는 '의문의 직분'(7절)이 '정죄의 직분'으로 '영의 직분'(8절)이 '의의 직분'으로 대체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한다(롬 3:19, 20).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 얼마만큼의 영광이 있느냐하는 것은 더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의'(*, 디카이오쉬네스)의 개념은 바울이 그 말을 사용할 때의 용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 바, 윤리적인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기인한다(Barrett). 의의 직분 속에는 그것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것이다(Kasemann).

성 경: [고후3:10]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더 큰 영광을 인하여 - 본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부각되고 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바울으로 인해 율법의 직능이 무효화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도들은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다(히 8:7-13).

성 경: [고후3:11]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만 시한부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뿐(롬 10:4) 천국에는 없어질 것이었다. 그에 반해 복음은 영원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대체(代替)되지 않는 것이다(막 13:31).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이제 시작되는 영원한 것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성 경: [고후3:12]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이같은 소망 - 바울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새 언약의 불변성과 절대 탁월성에 근거한다.

⭕ 담대히 말하노니 - 바울의 소망의 근거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바울은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솔직하고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본문의 '담대히'로 번역된 헬라어'파르레시아'(*)는 원래 '말을 함에 있어서의 솔직함' 또는 '두려움없는 정직함'을 뜻하였으나,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의 '솔직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성 경: [고후3:13]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본절은 7절부터 시작된 바, 출 34:29-35에 관한 바울의 미드라쉬(Midrash)적인 해석의 연속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Harris). (2)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Hughes).(3)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랬을 것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일 가능성이 많다. 이중에서 첫번째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경우, 모세의 떳떳치 못함과 바울 자신의 떳떳함을 비교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울이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바울이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봐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므로 사람들의오해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고후3:14]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완고하여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 모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이 곧 사라질 한시적(限時的)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함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이 완고함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건이 씌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수건'(*, 칼륌마)은 유대인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등을 상징한다.

⭕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유대인들의 눈을 감싸고 있어 그들로 하여금 영적 맹아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실(마 5:17) 하나님의 은혜와 참된 영적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3:15]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모세의 글 - 바울이 앞에서는(14절) '구약'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모세의 글'이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것은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하기 위함이다.

⭕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 본구절은 유대인들이 계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 (*, 카르디아)은 지적 활동의 중심이며 인간의 인격과 애정이 자리잡는 곳이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수건이 덮여있으므로 여전히 옛 것만 보고 새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성 경: [고후3:16]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본절은 당시 초대 교회에 자리잡은 기독론적 교리를 엿보게 한다. 왜냐하면 본절에 '주께로 돌아가면'이란 문구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먼저, '주'(*, 퀴리오스)는 과거 모세가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현재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초청하시는 동일하신 주님이시다. 즉 구약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주'(Lord)로 불렸던 바, 동일하신 분이시다(Hughes). 바울은 본절에서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유와 영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니라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돌아가면'(*, 에피스트렙세)은 '돌이키다', '회개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회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면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없어지게 되며(롬 10:4) 새로운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대가 열려지게 된다.

성 경: [고후3:17]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않은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본절의 내용이 삼위 일체론의 교리를 뒷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Bousset, Scott),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본절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초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다는 사실이다(Hughes). 이렇게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자유함이 있느니라 - 주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복음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자유가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옛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종의 자녀'로, 새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자유자의 자녀'로 비유한 적이 있다(갈 4:24-31). 여기서의 '자유'는 율법의 지배 하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던 '자비'에 대한 언급이(고전 9:1, 19;10:29) 후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언약이 영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구속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데 이 자유는 확신(4절)과 담대함(12절)을 주는 자유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자유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적인 추천서에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1절).

성 경: [고후3:18]

주제1: [새 언약의 일꾼된 바울]

주제2: [새언약의 영광]

⭕ 우리가 다 - 바울은 본장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주제를 언급하였으나 이제 본장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는 출 34:29-35에 대한 그의 미드라쉬적인 해석을 배경으로 하여 새 언약의 우월성을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 본문은 새 언약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은, 수건으로 덮인 마음(15절)을 가지고 아직도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벗은 얼굴로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르니 -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들의 존재가 신격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마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도들의 얼굴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서도 안된다. 본문의 의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에 대한 지식을 받고 그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할때 성도들은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진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재림이 실현될 때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완전한 영광의 형체(形體)를 얻게 될 것이다(빌 3:21). 그런데 이렇게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의문의 율법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성도들의 영광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롬 8:29, 30).

성 경: [고후4:1]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사도직의 의의]

⭕ 이러하므로 - 본절이 앞장에 이어짐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므로'라는 뜻이다(3:12-18).

⭕ 이 직분을 받아...낙심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능가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이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행 9:1, 2).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사 복음을 증거하는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직분이 정죄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이므로(3:8)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자기를 향한 모든 적대적인 비난과 시련에 대해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Bruce). 혹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한다(Barrett). 실제로 바울은그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직무를 이행함에 있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려는 각오로 매진(邁進)하였다(행 20:24).

성 경: [고후4:2]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사도직의 의의]

⭕ 숨은 부끄러움의 일 - 본절은 바울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적 상황에서 바울이 변증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의 뜻은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공동번역)이다. 어떤 이들이 모종의 행위를 숨어서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드러날 경우 수치가 돌아온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과 논쟁자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은 그런 일을 버렸다고 선언한다. '버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아페이파메다'(*)는 부정과거로서 이미 버렸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와 논쟁하는 자들이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그 부끄러운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더러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은밀한 곳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적대자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 '궤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누르기아'(*)는 '교활', `속임수'라는 뜻이며, 11:3에서는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근본적 의도를 묘사하는 것으로 '간계'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적대자들에 의해서 악선전을 당한 일이 있었다(12:16). 바울은 본절에서 이런 악선전에 대하여 자신은 결코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 '혼잡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룬테스'(*)는 '불순물을 섞다'는 뜻으로, 마치 약에 이물질을 섞어 약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순수한 복음에 필요없는 것을 첨가시킴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혹자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음으로 해서 복음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Barrett). 본문은 이런 비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보기에 도리어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거짓 전도자들(2:17)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다.

⭕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 바울이 여기서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개념인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가해졌던 또다른 비난 즉 `바울은 어떤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비교적(秘敎的)인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가 본절에서 계속하여 하나님앞과 모든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자신을 천거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도를 지지해 준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는 대상으로서 하나님 외에 '양심'(*, 쉬네이데신)을 든 것은 주목할 만하다. A.D. 1세기경의 유대인 주석가 필로(Philo)가 '양심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인간의 양심은 비록 인간의 타락 이후로 무디어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선한 양심은 여전히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롬 2:15). 결국 바울이 양심에 호소하여 자신을 변증한 것은 인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한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한편 바울이 '스스로 천거한다'는 말이 3:1 내용과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을 증거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Harris).

성 경: [고후4:3]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사도직의 의의]

⭕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 여기에서도 바울이 모호한 말을 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음이 시사된다. 즉 바울은 소수의 영적인 마음을 가진 선택된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한다고 비난받았던 것으로 보인다(Barrett). 바울은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만일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멸망의 길을 걷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공개된 방식으로 설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씌워져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고전 1:18;2:14). 여기서 '가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칼륌메논'(*)이 수동태로 되어있는 것은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임을 시사한다(Bruce).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영광에 참여하고 직분을 부여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듯,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부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다는 계시의 이중적 측면을 보여준다.

성 경: [고후4:4]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사도직의 의의]

⭕ 이 세상 신 -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오노스'(*)는 고전1:20;갈 1:4에서와 같이 '세대'의 의미이다(age, NIV). 따라서 '이 세상 신'보다는 '이시대의 신'이라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 이름은 사단에 대한 별칭이다(Harris). 이외에도 사단은 `이 세상의 임금'(요 12:31),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요 악한영'(엡 6:12)으로 불린다.사단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 천사였으나 지고하신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을 품었기 때문에(사 14:13, 14),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고(사14:12, 15)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눅 4:1-12). 그런데도 사단이 계속해서 성도를 타락시키려고 애쓰며, 믿음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성도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활동을펴는 것은, 하나님께 종말까지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 '혼미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튀플로센'(*)은 '눈을 멀게 하였다'는 의미이다(has bilnded,NIV). 따라서 '마음을 혼미케 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 즉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뜻이다. 사단은 사람들의 영안(靈眼)을 멀게 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하고 빛되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만든다(요 3:19;벧전 5:8).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바울은 여기서 태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Bruce). 본절의 '형상'(*, 에이콘)은 원형(archetype)은 그대로 그린 초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초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원형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과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해준다(빌 2:6).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함 자체가 아니라, 하나니의 현시(顯示)인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 경: [고후4:5]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사도직의 의의]

⭕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 바울이 자신을 자랑한다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은혜로 직분이 주어졌다는 것과(1절), 그 직분의 사명이 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인간적인 지위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는 그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울은 몸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종의 직분을 다하신 예수(빌 2:7)의 발자취를 따랐다. 한편 본문의 '주'(*, 퀴리온)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주라는 진술은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오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자 신앙 고백이다.

⭕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사도직의 본질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져다주는 것이 죽음인(3:7) 반면,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라고 했다(3:17). 그런데 지금 바울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복음의 자유로 옮기워진 것의 또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종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다(롬1:1;빌 1:1).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도 종이 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것이다(12:15). 본절에서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고 있다. 이는 사 40-48장에 나와 있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보여주듯이 비록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기쁘게 여기는 것과 같다(Martin).

성 경: [고후4:6]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사도직의 의의]

⭕ 어두운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바울은 자신의 구원받음과 사도직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신 하나님의 첫번째 빛의 창조(창 1:3)와 인간의 영적 무지을 몰아내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에 구원의 빛을 비춘 두번째 빛의 창조를 병행(竝行)시키고 있다. 첫번째 창조의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바울의 영혼에 비친 구원의 빛은(행9:3, 8;22:6, 9, 11;26:13) 그를 덮었던 영적 무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였다. 이 지식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복음에 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아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심을 아는 자이다(Harris).

성 경: [고후4:7]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보배 -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가리킨다.

⭕ 질그릇 - 성경에는 질그릇에 대한 비유가 종종 사용된다. 가령 64:8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도공과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질그릇이 스스로를 빚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고, 애 4:2에서는 질그릇의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묘사되고 있으며, 딤후 2:20, 21에는 금그릇이건, 은그릇이건, 나무그릇이건, 질그릇이건 간에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것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질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질그릇은 앞에서 언급된 '보배'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가치없는 것으로 비유되어서 바울 자신과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육체가 갖는 한계성과 연약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복음의 무한한 영광과 숭고함에 비교된 인간의 상대적 무가치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존귀함과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에 대한 대조는 (1) 복음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고, (2) 인간의 연약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이 나타남을 보여주며, (3)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성 경: [고후4:8]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우겨쌈을 당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리보메노이'(*)는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는 뜻으로 바울을 비롯하여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절에서 언급된 대로 성도는 질그릇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즉 '능력의 심히 큰것'의 원천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 때문에 질그릇은 결코 깨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자기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적 이론이나 관념적 논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그의 사역에서 전인격적으로 경험한 데서 기인한다(6:3-10;고전 4:9-13;15:30, 31). 실로 바울에게 있어 자신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切感)하는 것이 그가 가장 강해질 수있는 비결이었다(1:8, 9).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이 은유적 표현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전투적인 표현이다. 그 의미는 대적들이 포위하여 한곳에 몰아넣는다 하더라도 결코 움직일 틈이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지는 못한다는 것이다(Tasker).

성 경: [고후4:9]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핍박을 받아도...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바울이 계속해서 성도들이 당하는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사실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이것을 영지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Barrett). 즉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이 육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에 반대하여 육이 당하는 고통을 사실화하고 도리어 육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과 앞절을(8절) 통해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 어떠한 고난도 성도들을 궁극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주의 영이 있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3:17).

성 경: [고후4:10]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예수 죽인것을 몸에 짊어짐은 - 본절과 11절은 바울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난을 통한 영광이고 죽음을 통한 생명이다. 한편 혹자는 바울이 '죽음'에 관해 언급할 때, 일반적으로 헬라어 '다나토스'(*)를 사용하는데 비해 여기서는 '네크로신'(*)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것이 단순한 죽음 외에 '죽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Barrett). 그렇다고 볼 경우 본문은 성도로서 신앙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할 때 예수의 죽음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은 이것을 육체로 경험했고 그의 실존에는 이런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다(6:5;고전 4:11;갈 6:17).

⭕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는 성도들에게 부활을 통한 궁극적인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시가 나타나고 있다.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승리하게 된다(롬 8:36;골 1:24).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패배의 표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승리의 표징이다(엡 3:13).

성 경: [고후4:11]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우리 산 자가...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 산 자'라는 표현은 죽음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기워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죽을 육체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고전 15:35-49). 여기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육체적 생존'이 주의 재림에 확실히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재림에의 확실한 참여를 보장한다.

성 경: [고후4:12]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죽음 가운데서의 생명'이라는 논지를 1:6, 7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고난'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곧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심할수록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더 좋은 영적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다(Harris).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메시야적 고난을 감내(堪耐)했던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본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혹자는 본문이, 바울 자신은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을 것이지만 그의 성도들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고 본다(Dodd). 또 어떤 이는 바울의끝없는 고난과 시련을 보면서도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에 젖어있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냉소적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나(Calvin), 이 두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본문은, 예수께서 만인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던 것처럼 바울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골 1:24).

성 경: [고후4:13]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것같이 - 이 문구는 시 116:10의 인용이다. 그런데 시 116:10의 히브리어 본문 '헤에만티 키아답베르'(*)는 다음 세가지로 해석된다. (1) 나는 믿었다. 고로 나는 말할 것이다. (2) `나는 굉장히 고난받고 있다'고 말했을 때조차 나는 나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3) 나는 믿는 고로 말하였다. 이상에서 바울이 의도한 것은 (3)의 해석으로 여겨진다. (3)은 본절의 맛소라 본문(Massora Text)에 해당하는 70인역(시 115:1)에 대한 해석으로서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에피스튜사 디오 엘랄레사'(*)의 의미를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I be-lieved;therefore I have spoken.", NIV). 결국 바울은 본절에서 70인역의 시 115:1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되는 낙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헤아리며(시 116:1-11) 어떻게하면 하나님께 가장 적절하게 헌신할 수있을까를 고려하였다(시 116:12-19).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서도 복음을 굳게 믿었고 항상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 바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Harris).

⭕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 혹자는 본문의 '같은 믿음'이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믿음을 뜻한다고 보지만(Calvin) 그보다는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편 기자가 가졌던 믿음, 즉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이 바로 바울 자신의 믿음이며 그것이그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사도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단지 바울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개인적 차원의 믿음을 넘어 만인을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다.

성 경: [고후4:14]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 바울의 사도적 삶은 철저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께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십자가의 고난을 본받았다. 바울이 온갖 죽음의 위협과 시련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진 것처럼 바울 자신도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11:2;엡 5:27;골 1:22).

⭕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 종말론적 구원의 날 바울과 그의 성도들은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누며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날 바울을 비롯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겠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정죄(定罪)의 심판대가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열어주기 위해 온갖 비방과 오해와 육체적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사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성 경: [고후4:15]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질그릇에 담긴 보배]

⭕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다시 1:6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과 전도, 이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다. 여기에는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 경: [고후4:16]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크고 영원한 영광]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제시되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1절). 둘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 때문이다(14절).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윤택(潤澤)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15절).

⭕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여기서 '겉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를 가진 이 세대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대조되는 '속사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데(5:17;엡 2:5;골 3:9, 10;벧전 1:3), 장차 다가올 새로운 세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겉사람'이 낡아져 가는 것은 이 세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생성 소멸의 원리이다. 그러나 '속사람'이 도리어 새로와지는 것은 중생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식이 새로와지며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엡 4:15;골 3:10). 이 '새로와짐'은 종말론적 재림의 때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이미 현재화되어 있다. 바울은 이것을 '날마다 새롭도다'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바울 자신에게도 적절하게 적용되는 바, 그의 육체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난들(1:7-9;4:8-11)과 세월의 흐름으로 하여 점점 쇠약해지지만 그의 영적 실존은 나날이 새로와지는 것이다.

성 경: [고후4:17]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크고 영원한 영광]

⭕ 환난의 경한 것이...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본절에서는 두 가지 사항이 강조된다. 하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환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그 환난은 오히려 가볍다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와 '영원' 그리고 '경한 것'과 '능한 것'의 극명(克明)한 대조로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당한 환난은 사실상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1:8에서 고백한대로 그가 당한 환난은 너무 심하여 살 소망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것을 '경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하늘에서 받을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축복에 대한소망을(골 1:5)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 경: [고후4:18]

주제1: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

주제2: [크고 영원한 영광]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여기서 '돌아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페오'(*)는 '주목하다', '소망하다'의 뜻이다. 바울과 성도들이 소망하는 것은 이 세대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영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보이는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자신이 후자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물질과 영, 현실과 이상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구별을 말하는 것으로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만약 육체적인 것이 무의미하다면 그가 당한 육체적 고통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하였다(1:6). 다만 바울이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며 결국 없어질 것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종말론적 구원의 날에 도래할 그 영원한 세계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보이지 않는 것을이미 보며, 미래의 종말론적인 것을 이미 현재적인 것으로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히 11:1). 이런 바울의 모습은 유한한 육체를 입고 환난이 현존하는 이 세대에 살고 있지만 이미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누리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의 한 모범이며, 마찬가지로 어떤 성도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과 동일한 영적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고후5:1]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우리의 장막 집 - '장막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누스'(*)는 천막을 가리키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천막(天幕)이 일시적인 것이듯이 인간의 육신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의 한계성을 천막에 비유한 것은 아마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행 18:3).

⭕ 무너지면 - 이 표현은 (1) 육신의 죽음, 또는 (2)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혹자는 바울이 이렇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글을 쓰는 당시 심경(心境)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바울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성도들 가운데 자신도 포함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최근에 겪은 아시아에서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통해서(1:8-11),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견해이다(Harris). 그러나 이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그보다는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음으로써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 구절의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썩고 낡아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질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5:38-54).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성도들을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처소(處所) 즉 하늘나라(요 14:2)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Hodge, Harris, Tasker), 또한 집단적인 몸 즉 고전 3:16;6:16에 언급된 '성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E.E. Ellis). 이 두 견해에 대해 혹자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 구절의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본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일시적인 집과 영원한 집의 비교이지 몸과 몸의 비교가 아니다(Hodge). 성도들은 현재 유한한 장막에 거하나 나중에는 영원한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강조점이다.

성 경: [고후5:2]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 본문에서의 탄식은 인간의 실존적 유한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고난 때문에 튀어나오는 신음 소리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의 고뇌를 표출하는 것이다. 즉 이 탄식은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무기력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갈구(渴求)하는 것이며, 썩어질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는 염원의 소리이다(롬 8:18-2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대한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1절에 의하면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 즉 육신이 죽는것으로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육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빨리 맞고 싶어하는가 ? 이에 대한 대답은 4절의 "벗고자 함이 아니요"라는 표현에서 얻을수 있다. 그렇다면 그 탄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대를 여는 때, 즉 주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소리라고 할 수있다. 그것도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을 때까지 땅 속에서 기다리지 않고 살아서 그 몸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이다(Barrett). 따라서 본 구절은 바울이 살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성 경: [고후5:3]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 본문의 '벗은 자'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본절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육체에서 분리된 영으로 형체와 활동의 능력이 없는 지옥의 영이라고 본다(Plummer). (2) 중간 상태 즉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이 상태에 대해서 다시 두 가지 해석으로 구분된다. 첫째, 죽은 신자들은 육체가 없이 의식만 남아있는 상태가 되어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둘째, 죽은 신자들은 의식과 함께 '중간적인 육체'를 갖는다.그런데 이것은 부활의 육체와는 다르다. (3) 죽어야 할 운명을 가리킨다(Lowery). (4)주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되는 심판 때에 죄악이 폭로됨으로써 당하는 수치감이라고 본다(Ellis). (5) 죽은 후 재림을 기다리는 몸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데(Barrett, Tasker) 여기에는 (2)의 '중간 상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데에는, 바울이 죽어서 몸이 없는 상태로 부활을 기다리기 보다는 살아서 주의 재림(再臨)을 맞기를 원했다는 전 이해가 고려되어 있다(고전 15장). 여기서는 마지막 해석이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성 경: [고후5:4]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이 장막에...탄식하는 것은 - 본절의 내용은 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육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 육체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장막을 벗어버리면 가능해진다. 그러나 바울은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늘의 집을 덧입는 방식으로 벗어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것은 앞절(3절)에서도 다루었던 바 죽지않은 상태에서 바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기를 바울이 소망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고전 15:44, 51). 그렇다고 이것이 죽은 성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죽은 자도 산 자와 동일하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바울 자신이 말했기 때문이다(살전 4:15). 다만 바울은 살아서 영화로운 몸을 입기를더 원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를 가지고 부활에 참여하고자하는 소망을 피력하는 것은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고 어떠한 육체적 부활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성 경: [고후5:5]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이것을..이루게 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육체나 죽은 자의 영혼이 부활의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준비해 주셨다. 이것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셨다. 여기서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라보나'(*)는 최종적인 지불을 보증하는 담보, 또는 환납(還納)하지는 않았지만 상품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 첫 할부금이나 보증금을 뜻한다. 성도들의 심령에 내재해 있는 성령은 비록 성령 주신 하나님의 행위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거래로써 설명될 수는 없지만 영적인 몸으로 썩을 육체를 대체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령은 성도들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고후 3:18;4:16 엡 3:16),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로 성도를 도움으로써(롬 8:26, 27) 참다운 보증이 된다.

성 경: [고후5:6]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 바울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여전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본 구절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즉 비록 그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지만 그리스도와 실제로 함께 살고 있지는 않다. 바울의 현재적인 거처와 예수님의 거처는 분명하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단절(斷絶)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고후5:7]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믿음으로 행하고...아니함이로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인 것이다(고전 13:12).

성 경: [고후5:8]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차라리 몸을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을 경험하고자 희망했던 바울이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깨달아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성 경: [고후5:9]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영광스러움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확신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超然)하게 하며 오직 모든 관심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집중하게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핵심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거나 그들을 위한 봉사자가 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이다(4:5, 15). 또한 바울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있을 때 당하는 모든 환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고(4:8, 9),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희망을 버릴 수 있었다(빌 1:21-24).

성 경: [고후5:10]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영원한 집]

⭕ 그리스도의 심판대 -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의 심판을 가리킨다. 이 심판은 본래 하나님의 심판으로 표현되지만(마 25:31, 32; 롬 14:10) 본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표현된 것은 심판에 있어서 일차적 기준이 그리스도이며, 또한 이 심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문의 이 심판이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세번째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하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최후의 심판대는 일차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구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마 13:36-43;25:31-46;살후 1:6-10). 그러나 그 심판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상의 크고 작음을 가리는 자리가 될 것이다(롬 14:12; 살전 1:3).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기쁨인 동시에 도전이기도 하다. 바울이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 이 표현에 대해 혹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기본 교리와 모순된다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율법의 행함을 부인했을 때, 그것이 뜻하는 바는 율법의 요구 자체를 폐기(廢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의로 내세우려는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율법이 명하는 바 선에의 투신은 오직 그리스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기초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 3:10-15).

성 경: [고후5:11]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 여기서 '주의 두려우심'은 절대자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키는 공포(창 35:5)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 즉 미래의 심판자로서의 주님(10절)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 곧 경외심을 가리킨다. 한편 '알므로'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도테스'(*)는 단순히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영적 비밀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체험적으로 인식된 것임을 말해준다. 아마 여기에는 다메섹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권하노니...바라노라 - 혹자는 본 구절과 관련하여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혹은 진실되지 못한 동기로 그들을 자기 편에 끌어들인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Barrett). 이런 추측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즉 본 구절에서 강조되는 바울의 진술은 위의 비난에 대한 답변으로서 바울 자신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결코 진실하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자신을 전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고전 2:4)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확정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4:1-5).

성 경: [고후5:12]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 바울이 자신의 진실된과 순수함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또다시 그것을 가리켜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전에 그런 문제의 소지(素地)를 없애고자 이 말을 하게 되었다. 이미 앞에서 천명한 바 있지만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천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못밖고 있다(3:1).

⭕ 우리를 인하여...대하게 하려하는 것 - 이는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외부적인 자랑거리를 내세우며 자기들을 과시하였으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비난을 반박할 어떤 내용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거짓 사도들을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거짓 선지자들을 비교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직접적으로 접했다는 것(16절),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추천을 받았다는 것(3:1), 환상을보았다는 것(12:1-7) 등을 자랑하지만 그 자랑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들은 무익한 자랑(12:1)을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지만, 바울은 어떠한 외적인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으며(3:1-6), 대접을 받거나 군림(君臨)하기 위하여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스스로 종임을 선언했다(1:24;3:5;4:2, 5).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사도인 바울을 자랑거리로 삼아도 되며 그것으로 대적자들을 반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 경: [고후5:13]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미쳤어도...정신이 온전하여도 -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결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쳤어도'와 '정신이 온전하여도'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란 사실에 있다. 먼저 '미쳤어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스테멘'(*)은 '황홀경'(ecstasy)의 뜻을 가지고 있는 '엑스타시스'(*)에서 파생된 말로 종교적 무아경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막 3:21). 이에 반해 '정신이 온전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누멘'(*)은 '분별력 있는', '자제하는'의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언어적 분석을 배경으로 학자들은 위의 두 문구가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먼저, 전자는 개인적인 황홀경의 체험 중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고전 14:18), 또는 환상을 보는 것(12:1-7)등을 가리키며, 후자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성으로 깨달은 바를 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Kasemann, Denny, Harris). 이 해석을 취할 경우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후자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유익한 것으로, 이 둘은 결국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달리 혹자는 '미쳤어도'란 표현이 바울의 영적인 긴장(stress of great spiritual emotion) 상태를 가리키는 바 항상 지니고 활동했던 긴장이라고 본다(Tasker). 그러나 본 구절에서 이 표현은 그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한 특수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래서 알로(Allo)는 '엑세스테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는 밝히지 않으나 적어도 그것이 과거의 한 특정한 사건을 가리킴에는 틀림없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바크만(Bachmann)은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이거나 12:7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슴 아픈 방문을 했을 때 일어났던 '분노'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로 변화된 것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성 경: [고후5:14]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여기서는 바울이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헌신적인 사랑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해 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롬8:39). 한편 '강권하시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케이'(*)는 '둘러싸고 밀어낸다', '붙든다'는 뜻으로 이는 바울의 현신적인 행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 한 사람이...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이 표현은 롬 5:15, 16과 매우 유사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 원리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이 그 원리에 따라 살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 경: [고후5:15]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본 구절에서는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사상이 잘 부각되어 있다. 이 사상이 그의 사역의 원동력이며 또한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산 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역시 동참한 자이다. 그의 부활에 동참한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이기에 '산 자'이다(요 5:24). 따라서 이 체험이 있는 성도는 마땅히 아담 이후 창조자를 거역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주인 행세하던 삶에 대해선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로써 바울은 자기 중심적 삶을 사는 거짓 사도들과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고후5:16]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이제부터는...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 본 구절에서 바울이 '이제부터'라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의 의미는 바울이 편지를 쓸 때부터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깨닫고 난 후부터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성도는 육체적인 판단 기준을 버리게 된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사람과 그리스도를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났고(5:17;롬 6:3,4;갈 2:20), 결과적으로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인식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만 그것이 육적인 인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육체적인 것은 왜곡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자기 중심적인 아집(我執)과 이기적인 태도가 그것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랑했던 것, 예수를 가리켜 사람들을 현혹케 하는 거짓 메시야라고 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을 탄압했던 것 등은(행 26:4-11) 바로 이 육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 그 때부터 더이상 과거와 같이 육체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성 경: [고후5:17]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 새로운 피조물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고전 5:12, 13;갈 3:28;엡2:11-22;골 3:11).

성 경: [고후5:18]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믿는자들의 실존에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다(16, 17절). 구원 섭리에 있어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성(主導性)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 신앙의 출발점이다.

⭕ 화목하게 - 본 구절에서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 가운데 하나인 '화해'에 대한 내용이 진술되고 있다. 여기서 '화목하다'란 표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범죄함으로 양자 사이가 분리되었고(사 59:2), 원수와 같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롬 5: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담이 무너지고, 적대 감정이 해소 되었다(롬 5:10;골 1:15-22). 이 엄청난 화해의 작업은 일방적 관계의 파기자(破棄者)인 인간이 할 수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에 의한 주도권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총이기도 하다.

⭕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 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누구라도 하나님과 화해 했다면 그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자로서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화목해야 하고 수직적으로는 아직 화해의 은총을 모르는 자에게 그리스도 사건을 전해야 한다(20절).

성 경: [고후5:19]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새로운 피조물]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특별한 한 인간의 죽음을 넘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예정된 사건임을 강조했다.

⭕ 저희의 죄를 아니하시고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 적대적 관계 또는 화목한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죄'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문제에 직접 간여(干與)하셔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을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 화목하게 하는 말씀 - 18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성도에게 부여하셨듯이 본구절에서는 그 직책 수행의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 경: [고후5:20]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된 바울]

주제2: [그리스도의 사신(使臣)]

본절에서는 바울의 사역과 복음의 내용이 함축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 사신이 되어 -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화평의 메시지(엡 2:16, 17)를 전파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뿐 바울 자신은 말씀과 비견(比肩)되는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할 뿐이다.

⭕ 하나님과 화목하라 -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당파와 시기, 질투로 인해 분열되어 있으며 또한 거짓 사도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된 고린도 교인들이 화목한 관계로 돌아갈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화목에 의해서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질병을 치유시키고자 했다. 한편 바울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성 경: [고후5:21]

주제1: [그리스도의 사신된 바울]

주제2: [그리스도의 사신]

⭕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덕을 끼칠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이 유대교에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사상 이상을 진술하고 있다. 즉 예수는 상대적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로운 것이다(롬 8:33, 34).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이 대속의 원리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증언된다(히 4:15;7:26;벧전 2:22;요일 3:5).

⭕ 죄를 삼으신 것 -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의 뜻을 함축한다. (1)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즉 죄있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롬 8:3). (2)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인 죄인으로 취급되어 죄의 삯인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마 27:46).

⭕ 하나님의 의 - 본문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이 의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 경우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의 아래 있는 자들이다(Kasemann). (2) 이 의를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성실성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성실성이 실현된 것을 말한다고 본다(Stuhlmacher). (3) '칭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가 짊어진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게됨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갈 3:13, 14:빌 3:9; Hodge, Barrett, Harris, Lowery). 앞의 두 해석도 의미론적으로 참고할 수 있으나 세번째 것이 가장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원리에 대해 진술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대속의 원리와 관련되어 언급된 '의'는 칭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 경: [고후6:1]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군테스 데 카이'(*)는 문자적으로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쉬네르군테스'는 현재 분사로서 '누구와 함께 일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그 대상을 필요로 하나 헬라어 본문에는 이 대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다른 교사들이다(Plummer).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1인칭 복수 주어 '우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그 자신을 다른 교사들과 구분하려 했다면 여기서 1인칭 단수 주어인 '내가'를 사용했을 것이다. (2) 고린도 교인들이다(Chrysostom,Allo).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하지 않다. 바울은 바로 앞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복음 사역자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고(5:11-13), 이제 다시 이러한 권면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3-12절;7:2-7). (3) 하나님이다(Calvin, Hodge,Tasker). 전후 문맥상 이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고전 3:9), 5:20에서 그 자신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고 고백하였으며 본절 하반절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Martin).

⭕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본문의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케논'(*)은 '빈', '공허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5:15-17), 개인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본문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어졌을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항이 추론(推論)된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영과 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에(7:1;12:20, 21)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전했을 때, 그들 중 일부가 그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11:4, Bruce).

성 경: [고후6:2]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사 49:8의 인용이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성 경: [고후6:3]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거리끼지 않게 하고 - 바울은 5:12에서 언급한 바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훼방(毁謗)받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에 거리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기서 '거리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코펜'(*)은 '실족할 계기', '범죄할 기회', '걸려 넘어짐'의 뜻을 갖는다(stumbling block, NIV) 바울은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바울은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가령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자라거나(3:1), 어리석은 자라거나(11:16), 미쳤다는 오해를 받았다(행 26:24).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발생한 모든 문제들은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고전 1:23) 바울의 인격적인 문제나 그의 잘못된 신앙 생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절의 '훼방을 받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메데'(*)는 '조롱을 받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 '모마오마이'(*)의 가정법으로서 '의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동사가 본래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비난', '책망'이었다. 이 동사의 어근인 '모모스'(*)는 헬라의 조롱과 냉소의 신(Momus)을 가리켰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迷惑)되어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행위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Martin).

성 경: [고후6:4]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감히 '자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자기를 천거(薦擧)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3:1)과 모순되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증 받고자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이나 인간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사역하며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가 견디어 낸 무수한 고난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은 앞의 언급과(3:1) 모순되지 않는다. 특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당한 곤경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에 대한 천거는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적 행동으로 보여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 많이 견디는 것 - '견디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네'(*)는 일반적으로 '인내'를 뜻하나,이 말 속에는 시련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어 낸다는 뜻이 있다. '많이 견디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홉 가지로 열거되는데(4, 5절), 이것들은 세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Bruce, Harris). 첫번째로 본절에는 일반적인 시련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환난과 궁핍과 곤난이 그것이다. 환난(*, 들립세신)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1:4,8;2:4;4:17;7:4;8:2, 13),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받는 체험을 말한다(1:4-11). 궁핍(*, 아낭카이스)은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한다(행 20:34). 곤란(*, 스테노코리아이스)은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 상황을 가리킨다(1:7, 8;4:8).

성 경: [고후6:5]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 - 이것은 두번째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이다.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은사도행전에 상세히 나타나는데 사실상 그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행 13:50;16:19,22;20:34).

⭕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 이것들은 세번째로 분류되는 것으로,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짊어진 것들이다. '수고로움'은 열성적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한 일과, 바울이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을 했던 것(행 18:3;살전 2:9)을 가리키고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영적인 내핍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고 살고 먹고 싶은 상태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11:27). 바울이 이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쳐 견디어 나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렇게 했다(5:13).

성 경: [고후6:6]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5절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시련들을 견디어 나간 것이 사도의 외적 자질이라면 본절과 7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사도의 직분을 이행하는 동안 줄곧 지향했던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 깨끗함(*, 하그노테티) -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킨다(살전 2:10).

⭕ 지식 - 여기서 '지식'(*, 그노세이)의 의미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구원에대한 지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20, Hughes).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구속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다(5:16, 18-20).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가진 성도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분별하여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삶과 그 앎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 모두를 포괄한다(Barrett,Kelly).

⭕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 -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傷害)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한다(Plummer). 또한 혹자는 본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 '견디는 것')와 구별하여 '견디는 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Hughes). 실제로 바울은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숨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불신, 분란과 열매 맺지 못함등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하도록 가르쳤다(엡 4:2;골 1:11;딤후 4:2).

⭕ 자비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갈 5:22;엡 2:7). 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을 '오래참고 온유하며'라고 묘사했던바 실제로 그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절의 '자비함'을 '행동에 있어서의 선함'으로 보았던 바(Tasker),이는 성령께서 주신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되는 삶을 변화시키는 증거이다(Martin).

⭕ 성령의 감화 - 혹자는 본절의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를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으로 이해하나(Barrett) 이는 '감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를 동반하므로 타당치 않다. '프뉴마티 하기오'는 그 용법상 '성령'(Holy spirit, NIV)을 의미하며, 여기에 특히 정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NEB)를 암시한다(Hughes, Tasker). 바울이 본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변증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삼고 있는 그의 인간적 유약함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로 바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점철된 삶이었다(롬 15:18,19).

⭕ 거짓이 없는 사랑 - 이는 성령의 사역의 최대 열매이다(Bengel). 여기서 '거짓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는 부정 접두어'아'(*)와 '가장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토스'(*)가 합성된 단어로 '위선됨이 없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전적으로 위선이 아닌 순수한 것이었다(12:15;고전 8:1).

성 경: [고후6:7]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진리의 말씀 - 복음 곧 화해의 말씀(5: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바울은 적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다(4:2).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된다(롬 15:19;고전 1:18;2:4,5).

⭕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정비가 완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잘 사용하는 로마 군대의 무장법(롬 13:12;엡6:13-17)을 비유로 들고 있다. 여기서 '의의 병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고결한 인격,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포괄한다고 본다(Harris, Tasker). '좌우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덱시온 카이 아리스테론'(*)은 문자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에'라는 의미이다(in the right hand and in theleft, NIV). 이는 양손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언제라도 적의 공격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한다(Barrett). 이 묘사는 마치 적군의 화전(火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 겹의 나무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서 만든 방패를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든 로마 병사를 연상케 한다. 바울은 엡 6:16,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다.

성 경: [고후6:8]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갈 4:14)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10;11:23-33;고전 4:10;빌 1:15-18;살후 2:2).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18)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었다.

⭕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공동번역)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誹謗)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이끌 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마 27:63;요 7:12).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고(고전 15:15),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다(12: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한다(4:2;5:11;11:31).

성 경: [고후6:9]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바울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고전 9:1;15:8, 9).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시키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다(10-13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 한 사도들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다(갈 1:1, 12, 16).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 (갈 2:7, 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았음이 틀림없다(5:11).

⭕ 죽는 자 같으나...살고 - 본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고(행 14:19;고전 15:30)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1:8, 9). 또한 그는 예수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4: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5:14, 15;롬 6:1-14;갈 2:20). 본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Martin).

⭕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 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이해되었다(욥 5:17;시 94:12;119:67;잠 3:11, 12;렘 31:18, 19등).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다(1:9;4:11;고전 11:32).

성 경: [고후6:10]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사도의 수고와 기쁨]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고(2:3;7:4;롬 12:12;고전 16:17)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이다(Barrett).

⭕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바울은 세상의 부(富)를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고린도 교인들의 영육이 부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보수받기를 피했지만(5절;11:7-10;고전 9:12, 15, 18),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의 가난이다(Collange).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였는가 ? (1)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빌3:8).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신예수는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다(8:9).

⭕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고전 3:21, 22).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 3:23)라는 의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간다(Barrett). 한편 본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준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성 경: [고후6:11]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바울의 관용]

⭕ 고린도인들이여 - 혹자는 이 칭호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고 하나(Chrysostom), 그 용법상 이는 타당치 않다. 오히려 바울이 편지를 쓸때 독자들의 칭호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매우 격한 감정의 상태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Collange). 가령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유대주의 교사들에 미혹되어 율법으로 회귀하는 가슴 아픈 상황에 직면하여(갈 3:1),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친절을 칭찬할 때(빌 4:15) 독자들의 칭호를 직접 불렀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인들이여'라고 불렀을 때, 그의 심정은 아마 진리의 영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충만하여 어떤 문제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 우리의 입이 열리고 - 그리하여 바울은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본문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로 번역하고 있다. 실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공개적이었고 신실했다(1:12-14;4:2).

⭕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들을 향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다. 또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어떠한 잘못도 자비로 덮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7:3).

성 경: [고후6:12]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바울의 관용]

⭕ 너희가...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 본절은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는 뜻이다(공동번역). 분명히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가 소원(疏遠)해졌다. 이는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11:11). 아무튼 문제는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좁아진데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자신이 여전히 예전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드럽게 호소하고 있다(Barker).

성 경: [고후6:13]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바울의 관용]

⭕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Hughes, Tasker).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Plummer).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심이나 권위를 내세워 옹졸해지는 법이 없듯이 바울 자신도 단순히 가르치는 자로서가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바울은 오해를 하고 불평을 한 고린도 교인들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사도의 권위로써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주는 호소였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직 '공정하게 행동할 것'(fair play)을 요청하고 있다고 본다(Bruce).

성 경: [고후6:14]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불신자와의 분리]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13절)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 갑자기 서신의 주제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과의 관계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믿지 않는 자'(*, 아피스토이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적대자들을 가리킨다(Rensberger, Collange).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근거로서 본서의 주제는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2) 문자 그대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Filson, Barrett). (3)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가리킨다(Hughes). (1), (2), (3)의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아피스토이스'의 어의상, 그리고 전후 문맥상 (2)와 (3)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한편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 22: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와 레 19: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멍에'는 믿음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불신자와의 결혼(고전 7:39), 우상숭배(고전 10:14), 도덕적 타락(고전6:8),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11:4)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 '불법'(*, 아노미아)은 불신자와 적그리스도의 특징이다(롬 6:19;살후 2:3,7). 반면에 '의'(*, 디카이오쉬네)는 신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칭의의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Martin, Collange).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이 쿰란 문헌에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직면한 문제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불의'였다고 추론하기도 한다(Schlatter). 그러나 바레트(Barrett)는 이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바울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며(7절;11:15;롬 6:13-19;빌 1:11), 바울이 '의'를 윤리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쿰란 문헌의 영향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영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바울은 신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극단적인 대조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귀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던 말이다(9:13;고전 1:9;10:16). 빛과 어두움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구원 얻는 자들과 멸망하는 자들(2:15)이 동반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의 빛'이시며(요 8:12;9:5) 세상은 멸망으로 귀착할 어둠에 속하기 때문이다(마 8:12;25:30).

성 경: [고후6:15]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불신자와의 분리]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 '벨리아르'(*)은 히브리어 '벨리야알'(*)의 음역으로 본래는 '무가치함', '악함'을 뜻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매우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불량하거나, 방탕하고, 거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고(삿 19:22;삼상 10:27),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는 '벨리알의 말'(신 15:9;시41:8;101:3), '거짓 증언자'를 뜻하는 '벨리알의 증인'(잠 19:28), '음모를 꾸미는 자'를 의미하는 '벨리알의 충고자'(나 1:11) 등으로 적용되었다. 이 말이 사해 사본에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Barrett).

⭕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찌 상관하며 - '믿지 않는자'(*, 아피스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이다(14절).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상충하지 않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병립할 수 없으며, 운명을 같이 할 수가 없다(2:16).

성 경: [고후6:16]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불신자와의 분리]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14절)는 주제에 대한 논증이 본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본문에서 '일치'로 번역된 헬라어 '슁카타데시스'(*)는 '함께 찬성의 투표를 하여 승인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동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언급한 바 있다(고전 3:16;6:19).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 구약 시대의 성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우상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한다(고전 10:14).

⭕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 바울은 자기가 진술한 것들에 대한 정당성을 더 강화시키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레 26:11, 12이며 같은 내용을 가지는 구약의 구절들은 출 25:8; 29:43-46;삼하 7:14, 27;사 52:4,11;겔20:34 등이다. 이와 같은 구절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결을 강조하는 것들이며 새로운 관계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사실상 바울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가 거하도록 허락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성 경: [고후6:17]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불신자와의 분리]

⭕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 본문은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떠나 그곳의 이교주의와 단절하라고 권고한 사 52:11의 인용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는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려면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고전 5:1-13).

⭕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본구절 앞에 '그러면'(*, 카이)이 있다. 이는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된다.

성 경: [고후6:18]

주제1: [화해와 분리에 대한 권고]

주제2: [불신자와의 분리]

⭕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 본절은 바울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삼하 7:14;사 43:6;렘 31:9).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삼하 7:14과 사 43:6을 나름대로 수정 인용함으로써 '남자'(*, 휘우스, '아들')와 '여자'(*, 뒤가테라스, '딸')를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때 남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갖게 된다(갈3:28;4:5, 6;엡 2:18).

⭕ 전능하신 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는 삼하 7:8;렘 51:7등에 나오는 '야웨 쉐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70인역(LXX)의 인용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절에서만 발견된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Martin).

성 경: [고후7:1]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를 요청함]

⭕ 이 약속 -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시겠다는 약속(6:16-18)이다. 이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이 거하는 성전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 여기서의 '두려움'(*, 포보)은 더러움과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두려움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 두려움, 즉 경외심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성도들이 성결(聖潔)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바울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그의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아울러 사도로서의 그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성을 변호해준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유대 지혜 문학에서 발견되는 삶의 원리이다(시 2:11;5:7;잠 1:7, 29;8:13;전 12:13).

⭕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성도에게 요청되는 것

은 거룩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기 때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할 성전도 마땅히 거룩해야 하기 때문이다(레 19:2). 본문의 '거룩함'(*, 하기오쉬넨)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형용사 '하기오스'(*, '거룩함')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무려 229회나 나오고, 동사 '하기아조'(*, '거룩하게 하다')는29번, 명사 '하기아스모스'(*, '거룩')는 10번 나온다는 분석(Robertson)은 '거룩'이라는 덕목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말해준다. 그런데 이 '거룩'은 일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향한 노력을 끊임없이 함으로써 얻어진다. 이것은 '온전히 이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텔룬테스'(*)가 계속 반복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현재 분사형이라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 여기서 '육과 영'이란 그리스도인의 전인격적 자아를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고전 7:34, Plummer). 따라서 어느 한쪽이 더러워지면 그것은 다른 쪽도 더러워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온갖 더러운것'은 무엇이었을까 ? 혹자는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더럽혀졌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본다(Harris). 이 경우 '더러운 것'(*, 몰뤼스무)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것, 이방인들의 사원에서 열리는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어떤 특정한 이교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전 8:10;10:14-22 주석 참조). 이와 더불어 갈 5:19-21에서 언급되고 있는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본절의 '더러운 것'에 해당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성결하게 해야하며 그것이 곧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결국 본절은 성도의 성결을 다음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성결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는 것이며 (2)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생겨나고 또한 (3) 성결은 영과 육, 즉 성도의 전인격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가령 영적 성결만을 중요시할 때는 쾌락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육체적 성결만을 강조할 때는 율법적 금욕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성 경: [고후7:10]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각각의 결과들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앞절 내용과 연결하여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근심을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하여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하였다(M. Henry). 이에 비해 '세상 근심'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이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발전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종류의 근심에 대한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에서와 다윗이다(Hughes). 그 이후에도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히 12:16,17). 그러나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시 51:1-19). 둘째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타락하였던(마 26:24)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하였다(마 26:75). 고린도 교인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이렇게 바울의 사랑('준엄한 편지')에 응답한 그들은 결과적으로 '영적 사망'을 낳는 죄의 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Martin).

성 경: [고후7:11]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근심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구체적 증거들은 다음의 7가지로 정리된다.

⭕ 간절하게 하며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 변명하게 하며 - 이에 대해서는 대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歎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분하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들에게 동조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하였었다.

⭕ 두렵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 사모하게 하여 - 7절에서처럼,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타낸다.

⭕ 열심있게 하며 - 이는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한다.

⭕ 벌하게 하였는가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며 처벌하였음을 말해준다.

⭕ 깨끗함을 나타내었으니라 - 본문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의 본래적인 무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있던 잘못이 용서된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본문의 '나타내었느니라'(*, 쉬네스테사테)가 '입중하였느니라'를 뜻한다고 본다(Barrett).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무죄함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한 것(9, 10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범한 잘못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Calvin)도이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는 바,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편한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들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으며 이에대해 그들은 분명하고도 진심에서 우러난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과도 일치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Harris, Lowery)은 '고린도 교인들은 전에 실제적인 잘못을 했으나 지금은 회개하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본절을 해석한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고린도를 향한 '가슴아픈 방문'이었다. 그런데그 방문이 가슴 아픈 방문이 되었던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준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는지 아니면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바울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보여준 행동에 대해 회개를 하였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자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의 두견해는 다 참조할 수 있으며 굳이 어느 하나 선택할 필요는 없다.

성 경: [고후7:12]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불의 행한 자...불의 당한 자 - 여기서 논점이 되는 것은 바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불의를 행한 자와 그가 저지른 불의는 고전 5:1이하에 기록된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 사건, 즉 아비의 아내를 취한 패륜아 사건이었다고 보는 견해이다(Farrar). 이럴 경우 불의를 당한 자는 아들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비가 될 것이다. (2) 불의를 행한 자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이며 이들이 저지른 불의한 행위는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Fallon, Martin). 이 경우 피해자는 바울이다. 전자의 견해는 2:5을 볼 때 다소 타당성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2:5에 의하면 피해자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전개되는 상황에 더 잘 부합된다.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외부에서 온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며(3:1) 바울의 권위를 무시하는 언동을 하고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했을때 생겼을 것이고, 그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기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그의 편을 들지도 않고 그 적대자들을 제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회개해야 하고 해명해야했던 이유가 된다(9-11절). 또한 바울이 적대자들로부터 무시당한 것은 곧 적대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수 방관했던 그들의 행동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11절).

⭕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엄한 편지'를 보낸 목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준엄한 편지'를 보냈던 것이고 혹시나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근심하지 않을까 걱정하였었다(8절).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쓴 것은 불의한 자들이나 직접적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성도들간의 교제를 회복토록하기 위함이며, 아울러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열정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고후7:13]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 바울이 편지보낼 때 목적했던 바 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므로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 어떤 이유에서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디도가 바울이 건네준 '눈물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로 향할 때 다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 디도가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 마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했을까'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과거에 고린도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바울이 당한 쓰라림을 자기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도는 전혀 예상 밖의 환대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마음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동역자인 디도의 이런 모습은 바울의 기쁨을 더욱 배가(倍加)시켰던 것이다.

성 경: [고후7:14]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자랑한 것이...참되게 되었도다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신뢰를 굳게 가지고 있었고 비통한 심정으로 편지를 써 보내면서도(2:4)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믿을만 하고 사랑이 풍부하다고 자랑을 했다. 참다운 목회자로서 바울의 넓은 마음과 신실함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디도가 환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자신의 확신을 배반하지 않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만을 말했다(1:17-20). 그리고 지금은 디도에게 한 말이 진실임이 증명된 것이다.

성 경: [고후7:15]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 바울 자신이 편지를 보낸 후 상당한 심적 조바심을 내었던만큼 디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와 자기가 가져온 편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나타낸 반응은 바울과 디도의 염려가 기우(杞憂)였음을 보여주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디도를 영접하였고 더 나아가 순종하기까지 하였다. '두려위함', '떪' 그리고 '순종' 같은 단어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바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바울의 대리인인 디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태도로 예우해 주었음을 말해준다.

⭕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 '심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나'(*)에는 '애정', '사랑', '긍휼'의 뜻이 담겨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겸손하게 대접하고 그가 하는 말들에 대해 순종하였을 때 그는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을것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선하고 훌륭한 신앙인들이라고 한 바울의 말(14절)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것도 물론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디도의 마음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실망시킨 것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가 사라지고 대신 그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깊어진 것이다.

성 경: [고후7:16]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에 표현되는 바울의 신뢰와 기쁨은 자신이 애써 수고한 모든 사역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확인한 데서 느끼는 목회자로서의 신뢰와 기쁨이며,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 상태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이어진다. 바울은이 모든 위로와 기쁨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실패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게 한 중요한 이유였음에 틀림없다.

성 경: [고후7:2]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를 요청함]

⭕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 바울은 매우 솔직하게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6:13과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거듭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1절의 '온갖 더러운 것'이 '분쟁', '시기', '분냄', '분리' 등이 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영접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레사테'(*)는 장소를 나타내는 '코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을 위해 장소를 마련하다'의 뜻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마음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라'로 직역할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바 '영접하는' 것은 상대를 위해 마음에 장소를 만드는 것 즉 상대를 자기 실존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Strachan).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구할 때 그 자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6:11-13).

⭕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 본절에서 바울은 다시 그의 사역의 동기가 순수하고 그에 대한 중상(中傷)은 잘못된 것이라고 변호하고 있다(4:2;5:12, 13;6:3). 그러나 본문에서는 앞에서 제기된 문제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한다든가 스스로를 천거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에 비해 윤리적 차원의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보면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며 속여 빼앗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해진 그러한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오해는 복음의 진리에 눈먼 거짓 교사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2:17;4:3). 사실 바울은 언제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영적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6:13) 모든 일을 그들을 위하여 행했다(1:24;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허황된 거짓 가르침에 현혹(眩惑)되고 바울을 불신했을 때그의 심정은 큰 애통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2:4). 그러나 바울은 넘치는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스스로 회개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목회자적 모범을 보였다(2:7-10;7:9).

성 경: [고후7:3]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를 요청함]

⭕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바울의 사랑에 상응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이 식은 것을 지적하는 것은(2절;6:12) 그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울과 그들이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는데, 그는 이미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나 그 문제에 동조한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용서하였다(2:7-10).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케하고 구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면을 할 때 그것이 정죄의 차원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노력하였다(고전4:14;6:5;15:34)

⭕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6:11 내용이다(Bruce,Martin). 혹자는 본문에서 바울의 화제가 급작스럽게 전환된 것을 보고 다시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을 하기 위해 6:11-13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옳다면 그것은 6:14-7:1 부분이 다른 서신에서 가져온 삽입부라고 주장하는 견해(Gnilka)를 반박하는 것이 된다.

⭕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 바울이 자기가 돌봐야 할 성도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한 그 자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일관하는 목회자적 신념이었다(살전 2:8). 한편 본절은 권면의 목적과 바른 자세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하며 선을 지향하는 것이다. 본절 외에도 성경에는 다양한 권면이 나오는데 그 권면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회개에의 인도(눅 3:17, 18). (2) 믿음을 유지하게 함(행14:22). (3) 순종할 것을 권고함(딛 3:1). (4) 거룩한 생활의 독려(살전 4:1-6).

성 경: [고후7:4]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를 요청함]

⭕ 담대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어떤 비밀도 없이 다 말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 바울은 14절에서 디도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디도에게 교인들을 자랑하였었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좋은 소식을 들었으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이길 것이라는 그의 확신(13:8)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재회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은(5-16절) 후에 더욱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자랑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 본절에서 표현되는 바울의 기쁨은 디도가 가지고 온 기쁜소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Harris,Lowery). 즉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신뢰가 배반당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에서 바울은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기쁨을 누리는 것은 고난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계속해서 고난을 당할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위로와 넘치는 기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었다.

성 경: [고후7:5]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하면서 앞절에서 언급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고있다. 본절의 '육체'(*, 사륵스)는 신학적인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Bruce). 바울은 12:7에서 '육체에 가시'를 언급했던 바, 여기서 자신의 신체적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 바울은 마게도냐에 도착한 후 그들이 신자든 불신자든간에 많은 적대자들로부터 줄곧 박해를 받는 역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울은 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분쟁에 말린 고린도 교인들을 치유(治癒)하기 위해 디도를 파견했던 바,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염려요, 부차적으로는 예정된 시점에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야기 되었던 염려에서 비롯되었다(Plummer, Martin).

성 경: [고후7:6]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 바울은 그가 디도를 통해서 전달한 편지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반응하는 상태의 여부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있어 심적으로 커다른 근심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Harris). '비천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누스'(*)는 본래 '지면상 낮은 위치'를 가리켯다(겔 17:6). 그런데 후대에와서 '상태의 낮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12:16;빌 3:21;약 1:9). 이 말의 좀더 깊은 신학적 의미는 세상에서 지위가 낮고 천한 자들로서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인간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철저하게 당신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로하신다. 한편본절의 '위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1:3,4에서 강조된 바이며, 이는 사 49:13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상기케 한다. 본절과 사 49:13 말씀과의 연관성은 바울이 6:2에서 역시 같은 장(章)인 사 49:8을 인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의미 심장하다.

⭕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 디도가 바울에게 돌아온 것이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디도가 돌아옴으로써 바울은그의 조력(助力)을 받을 수가 있었다. (2) 디도에게 준엄한 편지를 주어 고린도에 보낼 때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바울과 디도 두 사람 모두 불안해 했었다(13-15절).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의외로 디도를 환대했기 때문에 디도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3)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가 매우 고무적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애정, 그를 보고 싶어하고 그와 화목하기를 사모하는 마음, 그를 실망시켰던 행위들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그리고 다시금 그를 따르고자 하는 열심 등에 관한 소식은 바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7절).

성 경: [고후7:7]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사모함 - 바울이 고린도에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을 한 후 양자 사이는 심각하게 냉각되어 갔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할 때 서로가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이 야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문을 피해야 했었다(2:1).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몹시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애통함 -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슬픈 방문 때 보여준 그들의 행동, 즉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바울을 옹호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갖게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울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Barrett).

⭕ 열심 있는 것 - 고린도 교인들은 놀랍게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바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는 열심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변화된 고린도 교인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을 때 그가 느꼈을 위로와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에 대해서는 다음의 견해를 고려하면 능히 짐작이 된다. 즉 바울은 가슴 아픈 방문 이후 디도를 통해 준엄한 편지를 보내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장래가 그 편지의 권위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 여하에 달려있다고 보았다(Harris). 그리하여 그는 디도를 만나기까지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5절). 바울의 기쁨은 잃었던 고린도 교인들을 다시 찾은기쁨에 더하여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기쁨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6절).

성 경: [고후7:8]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편지로 - 이 편지에 대해서 혹자는 '고린도 전서'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나(Farr-ar) '고린도전서'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편지를 소위 '눈물의 편지' 또는 '준엄한 편지'로 본다(Barrett, Harris, Robertson). 이 편지는 바울이 A.D.55년경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가슴 아픈 방문'을 끝내고 돌아온 후 A.D.56년 봄 디도 편으로 보낸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쓸 때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을 정죄하려 하거나 고통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3절). 도리어 그는 자식을 생각하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2:4;6:13).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를 받고는 마음의 고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잠시나마 그 편지에 대해 후회를 하였었다. 아마 그는 너무나 강한 어조로 편지를 쓴 것에 대해 후회했을 것이다.

⭕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 다행스럽게도 고린도 교인들의 고통과 근심은 지속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더 이상 '준엄한 편지'를 써 보낸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았다. 만일 편지를 보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었더라면 그때 바울은 그 편지를 쓴 것을 계속 후회하였을 것이다.

성 경: [고후7:9]

주제1: [상호 신임의 회복]

주제2: [화해로 인한 기쁨]

⭕ 기뻐함은...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의 준엄한 편지는 잠시 동안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근심을, 바울에게는 후회를 가져다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바, 근심에서 회개로 후회에서 기쁨으로의 반전(反轉)은 바울이 쓴 편지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개입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일이니 결국 여러분이 우리로 해서 손해 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근심이 회개로 이어졌을 때 그것을 단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아니라 그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 넘는다. 그러기에 때로 하나님께서는 근심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성 경: [고후8:1]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모범]

⭕ 마게도냐 교회들 - '마게도냐'는 현재의 그리이스 북쪽에 있는 발칸반도로서 서쪽으로는 아볼로냐로부터 동쪽으로는 빌립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B.C.148년 이후부터 로마의 영토였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들'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교회를 가리킨다(행 17:10-15, Bruce).

⭕ 은혜를...알게 하노니 -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유는 그 말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극이 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으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헌금에 관한 문제를 '은혜'(*, 카린)의 관점에서 접근해가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금을 기꺼이 그리고 분에 넘칠 정도로 한 것에 대해서(2-4절) 하나님깨 은혜를 받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레트(Barrett)가 말하는 대로 '은혜'는 관대함을 뜻한다고 볼 때, 죄인으로서 심판(審判)을 받아야 마땅하고 아무런 용서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마게도냐 교인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관대함을 입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결국 마게도냐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 경: [고후8:2]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모범]

⭕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 마게도냐 교회들이 당한 시련에 대해서는 빌 1:29, 30; 살전 1:6;2:14;3:3, 4; 살후 1:4-10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다만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환난과 같은 것을 마게도냐 교인들도 받았다고 언급될 뿐이다(살전 2:14).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한 것이었으며, 아마 유대인 적대자들에 의해 난동꾼들로 모함을 받았거나 유대인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행 16:20;17:5, 13). 또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피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시련도 있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속에 살았다고 바울은 전해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기쁨은 마게도냐 교인들 자체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대함의 결과'라고 말한다(Schlatter). 아무튼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시련을 당할수록 오히려 넘치는 기쁨을 누렸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매우 성숙한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마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6:10)과도 같았다.

⭕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당시에 마게도냐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금광이나 은광, 선박용 나무를 베는 권리 등의 수입원들을 모두 로마인들에게 빼앗겨 구조적인 가난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도냐는 전체적으로 농업, 광업, 목재 산업 등이 번성하였기 때문에 '극한 가난'의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Barrett).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형편을'극한 가난'으로 표현한 것은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또한번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토스'(*)는 '소박', '단순', '순수함'이라는 뜻으로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는 마음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본문은 '가난'이라는 상황이 남을 돕거나 하나님께 드리는데 인색함의 동기가 되서는 안됨을 말해준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마치 자신의 전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한 가난한 과부처럼 극한 가난속에서도 자기들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으니 그것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모습이었다(6:10).

성 경: [고후8:3]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모범]

⭕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 바울이 보기에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연보를 드렸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가 요청이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원(自願)해서 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오히려 물질적 원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들에게 재정적 협조를 요청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라고 본다(Lowery).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고 바울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원하여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으로 놀랍도록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고린도의 교인들은 상당히 마음의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성 경: [고후8:4]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모범]

⭕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곤경에 처한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는 일이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특전'(공동 번역)이라고 보았고 그 특전을 나누어 달라고 바울에게 간청하였다. 여기서 곤경에 처한 성도들이라 함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당시 유대 전역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4)가 통치하던 때에 있었던 심한 기근으로 대단히 궁핍한 생활을 했었다(행 11:27-30). 더구나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천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도 종교적인 탄압을 받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친밀한 형제애(兄弟愛)로 굳게 뭉쳐 서로를 돕는 것이었다. 마게도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헌신적으로 나선 것은 그들도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8:5]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모범]

⭕ 자신을 주께 드리고 -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위들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신앙적 행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단지 동정적인 행위나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마음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의 소유도 필요시에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Bruce).

⭕ 우리에게 주었도다 - 본절의 의미는 '우리에게도 헌신하였습니다'(공동번역)이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신 사도로 존중하였고 따라서 그를 헌신적으로 잘 섬겼다. 그들은 사도에 대한 이런 마음이 곧 주님께 헌신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성 경: [고후8:6]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성취케 하라 - 본절은 바울이 디도를 고린도에 보낸 목적이 '눈물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한 헌금 모금에 고린도 교인들도 참여케 하려는 목적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린도에서의 모금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도를 재차 보내 헌금 모금을 성취케 하라고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을 내는 일에 기대에 못미쳤음을 본절이 또한 간접적으로 암시해준다. 여기서 '헌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끝내라'는 말을 '은혜를 성취케 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고린도인들이 헌금 모금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일 수 있고, 또 마게도냐의 교회들이 즐거이 헌금을 내어줌으로써 주님께 헌신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성취하는 것처럼 고린도의 교인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러므로'는 마게도냐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헌신이 바울로 하여금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모금 사업을 완성하게 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외부적인 박해(迫害)와 내부적인 극한 가난의 상황에서도 능력 이상으로 헌신한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나아가 상대적으로 박해도 받지 않고 가난에 시달리지도 않는 자신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요청받고 있다(Harris).

성 경: [고후8:7]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고전 12:9;13:2, 13), 말과 지식이 풍부했으며(고전 1:5), 바울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다(7:7).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 사도 앞에서는 바르게 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형제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 사랑을 '은혜'(*, 카로티)로 표현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고자 함이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을 제공하도록 요청한 것은그들에게 어려운 짐지워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더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고후8:8]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었고(10:8;13:10) 따라서 그의 성도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코 명령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이끌지 않고 다만 방향만을 지시하며 권유하거나 호소할 뿐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1) 마게도냐의 교회들 이행했던 행동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자발적인 사랑을 행하도록 촉진하고, (2)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진 연보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내적 헌신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구제헌금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리새인의 외식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눅 21:1-4).

⭕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증명코자 함이로라 - 본절의 정확한 의미는,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것인가를 증명해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신적 사랑은 다른 교인들의 신앙과 사랑의 표준이 되고 있다(Martin).

성 경: [고후8:9]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부요하신 자로서...가난하게 되심은 - 앞에서 구제 헌금의 동기를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模範)으로 유발시켰던 바울은(1-7절) 보다 더 차원 높은 연보의 동기 및 근본 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 즉 성육신하심(incarnation)과 만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들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희생의 최고 모범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해야만 하는 신학적 당위성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빌 2:6)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선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어 머리 둘 곳조차 없을만큼 희생적인 고난의 삶을 사셨고(마 8:20; 눅 9:58)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것은 절대적 가난의 한 모습이었다.

⭕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 루터(Luther)는 본절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난한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늘에서 부요하게 하시며, 당신의 사랑하는 천사들과 같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같은 은혜를 주신 것은 그은혜를 받은 자도 그분이 하신 일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부요함을 포기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유익하게 해야만 했다.

성 경: [고후8:10]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 바울은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 명령할 수 있을 만큼 당위성이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령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 좋겠습니다'(공동번역)라는 말로 정중하게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보여주는 목회자로서의 모범인 바,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대의 명분이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명령이나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며 오직 행하는 자 스스로의 온전한 결단에 의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 유익함이라 - 이 말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이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왕에 시작한 일인만큼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두가지가 다 해당될 수도 있다.

⭕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적어도 1년 전에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과, 그 일이 지지부진하여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이제는 속히 완성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 (2) 그들이 구제 헌금 사업을 시작한지가 1년이나 되었지만 그들의 헌금은 그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시련과 극한 가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보다도 미흡했기 때문이다(3절). (3) 적어도 그것이 선한 일이라면 빨리 끝을 맺는 것이 신앙적으로 유익하다. 그렇지 않고 중도에 그만둔다면 그것은 진실한 신앙이 아니며(8절) 앞으로도 승리하는 생활이 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4) 구제 헌금을 빨리 완성하여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속히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Harris).

성 경: [고후8:11]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행하기를 성취할지니...있는 대로 하라 - 고린도 교인들은 말과 지식이 풍부하고 마음의 열정도 넉넉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함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대로' 즉 '소유하고 있는 대로', '드릴 수 있는대로' 성의(誠意)만 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교인들에 비해 빈궁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마게도냐 교인들보다 많은 구제 헌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 경: [고후8:12]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 여기서 '받으실 터이요'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이 가시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할 때 누구를 돕는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다만 하나님께 드린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실 때 드려진 것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며 또한 드려진 헌금과 드리는 자의 소유의 관계에서 평가하신다는 것이다(막 12:41-44). 그러므로 많이 소유한 자가많이 드리는 것과 적게 소유한 자가 조금밖에 드리지 못한 것 사이에는 어떠한 가치의 차이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성 경: [고후8:13]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 구제 헌금에 대하여 말하기를 '남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자기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고 불평한 이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Bruce). 그러나 바울은 있는 자의 재물을 거두어 그를 가난하게 하고 그에게서 거둔 재물로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중요한 것은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강제도 물리적 알력도 배제된다. 다만 넉넉한 자가 자원(自願)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여 가난한 자에게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다.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전개하는 논리는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의 논리이며(14절) 이것은 로마서에서 사용한 논리와는 다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로부터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 관한 한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롬 15:27). 한편 혹자는 본절에 "너희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사치품을 제공하기 위해 너희를 가난하게하려는 친유대인적 경향이 나에게 있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

성 경: [고후8:14]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이 본절을 통해 예루살렘과 고린도의 상황이 뒤바뀔 것을 예견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당시의 경제 상황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만일 그런 뒤바뀐 상황이 도래한다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기꺼이 자기들의 소유를 나누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이미 평균하게 사는 방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행 2:44, 45).

성 경: [고후8:15]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연보의 원리 및 목적]

⭕ 기록한 것 같이 -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평균의 원리에 더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출 16:13-3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실 때 많이 거두어 들인 자나 적게 거두어 들인 자나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많이 거두어 들인 자의 남은 것은 썩어서 저축될 수 없었다는 점과 적게 거두어 들인 자는 모자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광야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될수 있는 경제의 원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과거 광야에서 직접 개입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되 남은 것의 축적(蓄積)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간의 경제적 평균을 이루게 하셨다. 이제 지금은 직접 개입하시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원리를 지켜 서로 풍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즉 물질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그 물질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쓰고 남은 여분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고후8:16]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본절은 "내가 여러분에게 기울이는 것과 같은 열성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이 신뢰하는 동역자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그 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고린도에 가서 구제 헌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수 있는 인물을 찾던 바울에게는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디도의 열정을 상기시킴으로써(7:13-15), 고린도 교인들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주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유익을 위함이지 헌금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10절).

성 경: [고후8:17]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저가 권함을 받고...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 바울이 처음에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을 성취케 하기 위해 이 일을 권한 것은 사실이다(6절). 그러나 디도는 권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깊은 열정 때문에(7:15) 자원하여 나섰다. 본문에 대해, 혹자는 디도가 종종 바울의 전도와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일했다는 암시가 있다고 보지만(Harris) 이는 타당치 않다.

성 경: [고후8:18]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복음으로서...칭찬을 받는 자요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 외에 두 사람을 더 보냈다(22절). 본문에 '복음으로서 칭찬을 받는 자'(공동번역에는 '복음을 전하는데 명성을 떨친 사람'으로 되어 있다)라고 소개된 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누가'나 '디도의 형제'일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 사람이 바울의 신뢰를 받았고 여러 교회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자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성 경: [고후8:19]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 본문은 방금 바울이 소개한 사람이 바울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들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이 선택의 방법은 교회들에 의한 공식적 투표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택함을 입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이로토네데이스'(*)는 '거수(擧手)로써 투표하여 선택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선택된 사람이 공신력있는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이 사람이 마게도냐의 교인들로부터 뽑힌 대표자일 것이라고 보는데(Barrett), 이렇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왜냐하면 이미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모금은 끝이 난 상태였으므로 모금된 돈을 디도와 함께 운반하고 보호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8:20]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이것을 조심함은 - 바울이 구제금을 모금하고 관리하기 위한 실무자를 그의 측근인 디도 한 사람으로 국한하지 않고 두 명을 더 참여시킨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려깊은 행위였다.

⭕ 거액의 연보로...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거액의 연보'에 해당한는 헬라어 '하드로테티'(*)는 '살진', '큰', '부유한'의 뜻을 가진 '하드로스'(*)에서 파생된 말로 단지 '심정적(心情的) 많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액수의 헌금'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훼방하지 못하게'가 뜻하는 바는 그 모금된 돈을 도둑질 당하거나 분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액의 연보가 바울과 관계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길 수 있는 의혹이나 인간적인 의심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훼방하지 못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메 모메세타이'(*)가 문자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다'를 뜻하는데서 알 수 있다(be no accusations, JB). 당시 복음 전도자들이 대개 받았던 비난처럼 바울도 자신의이익을 위해 선교활동을 한다는 비난을 예견한 만큼, 바울은 오직 주의 영광과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한 것이(4:12), 도리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켜 선교하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의 이런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악의에 찬 오해를 면할 수는 없었다(12:16-21).

성 경: [고후8:21]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주 앞에서만 아니라 - 사실상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서 깨끗하다 인정받는 것이다(고전 4:4). 그러므로 그는 결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 않은 평판이 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6:3;고전 9:12;10:32). 한편 본절은 바울이 70인역 잠 3:4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Barrett, Harris).

성 경: [고후8:22]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동반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 사람은 여러차례에 걸친 시험에서 증명될 만큼 열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였으므로 이번 일에 동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 사람이 아볼로나 두기고일 수있다고 추측하나(Farrar, Robertson)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 바울이 디도와 함께 보낸 두 사람에 대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디도가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서 읽을 때 그들을 소개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두 사람의 대표자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에 의해 선출된 자로서 이미 고린도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Harris).

성 경: [고후8:23]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동역자요 - 고린도에서 보내진 디도 일행에 대한 신임장(信任狀)이 서술되고 있다. 디도는 다른 두 사람과 구별될 만큼 다소 특별한 존재였다. 여기서 '동무'라는 표현은 바울과 디도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주며 '동역자'라는 표현은 디도가 복음 전파의 사역에 한 주체로서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말해준다.

⭕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여기서 '여러 교회'는 19절에서의 주석처럼 '마게도냐의 교회들'을 지칭하고, '사자들'(*, 아포스톨로이)은 '사신' 또는 '사절'을 뜻한다. 이 형제들은 바울이나 디도처럼 사역자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번의 구제금 사업을 위해 여러 교회들로부터 선택된 사람들로 사도에 준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구제금 모금 사업의 재정적인 면을 담당하는 지역 교회들의 대리인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이러한 구별이 바울이나 디도와, 여러 교회들에서 선택된 '사절'들 사이에 지위의 차별을 암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나 후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디도를 비롯하여 두 형제들은 바울이 인정하고 신임하는 자들이었으며, 다른 교회들로부터도 신임받는 사람들이었다.

성 경: [고후8:24]

주제1: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헌금에의 권면]

주제2: [동역자 디도]

⭕ 여러 교회 앞에서...보이라 - 공동번역은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여 우리가 여러분을 자랑한 점이 사실이라는 것을 모든 교회에 드러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보내는 사절단을 따뜻하게 환대(歡待)할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대는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자랑한 것을 확증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의 요구는 고린도교인들이 참으로 성숙하고 훌륭한 성도임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성 경: [고후9:1]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준비된 연보]

⭕ 성도를 섬기는 일 - 이는 8장에서부터 계속 다루어 온 문제로(8:4)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 때 몰아친 심한 기근으로 인해 생활이 몹시 궁핍해졌기에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한 구제 헌금 내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새삼 이 일에 대하여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절(2절)에 제시된다.

성 경: [고후9:2]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준비된 연보]

⭕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쓸 필요가 없는 까닭은 그 일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원했기 때문이다.

⭕ 아가야에서는...자랑하였는데 - 아가야는 마게도냐의 남방에 있는 헬라 전토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바울 당시 아가야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고린도가 그 수도였다. 따라서 아가야와 고린도는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에서 가장큰 도시였으며 고린도 교회 역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고린도 시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지명으로 겐그레아나 아덴을 들 수 있는데 이 도시들에도 교회가 있었다(롬 16:1). 한편 본문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사실은 바울이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구제금을 준비하였다고 자랑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8:2, 6, 10과 본절의 연결에 대해, (1) 8장과 본장이 한 편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씌어졌다고 본다. (2) 8:10, 11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요구한 것은 그들의 모범을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헌신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3) 바울이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헌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에 관해 말한 것처럼 본장에서는 과거에 마게도냐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을 소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세가지 견해 중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첫번째 견해, 즉 8장과 본장이 한 편지에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견해는 학자들 사이에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3절 주석 참조), 두번째 견해는 이미 마게도냐 교회에서의 모금이 끝났다는것을 생각할 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 격동시켰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디센'(*)은 보통 나쁜 의미로서 '자극하다', '분내게 하다'를 뜻하나에서는 좋은 의미로 '건전한 경쟁의식을 조장(助長)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J. Hering).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에 대한 사업을 먼저 시작한 것은 사실인 듯하며(8:10) 이 소식이 마게도냐에 전해졌을때 그들에게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음도 사실인 듯하다(8:2, 3).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범을 보고 늦게 시작한 마게도냐인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8:2) 불구하고 이미 구제 연보를 마쳤던 반면, 먼저 시작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끝을 맺지못하고 있으며 이제는 도리어 마게도냐인들에 의해 자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구제 연보를 끝내지 못한 사실을 마게도냐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바울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3-5절).

성 경: [고후9:3]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준비된 연보]

⭕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 여기서 '이 형제들'은 8:18, 22에 언급된 두 형제만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디도까지 포함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전자라고 보는 견해(Lowery)보다 후자라고 보는 견해(Barrett, Harris)가 유력하다. 바울은 앞에서 디도와 나머지 두 형제를 구분하여 소개했었다(8:23). 그것은 아마 양자의 역할이나 위상(位相)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디도는 바울의 대리인 자격으로 간 것이고 두 형제는 헌금 사업이 아무런 의혹을 일으키지 않고 공정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견된 일종의 증인들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는 구별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이들 모두를 '형제들'로 표현한다. 이 호칭 속에서 디도 일행은 모두 고린도 교인들의 형제들로서 그들에게 다가가며 그들의 구제금에 대한 열심을 격려하게 될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되는 '형제들'이 디도와 마게도냐 교회에서 선출된 두 형제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것은 8장과의 연결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8:18, 22). 그렇지 않고 본장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 형제들'이 누구를 지시하는지 설명할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8장과 본장은 한 편지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이 분명해진다(2절 주석참조).

⭕ 이 일에...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 '이 일'이라 함은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자랑하였던 바 고린도 교인들이 일 년 전부터 구제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한 자랑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을 보낸다고 말한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모금 운동이 바울의 자랑에 비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성 경: [고후9:4]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준비된 연보]

⭕ 마게도냐인들이...두려워하노라 -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시작과는 달리 구제금을 다 모으지 못했음이 틀리없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로 걱정을 한다. 첫째는, 만약 바울이 마게도냐인들과 함께 고린도를 방문할 때까지도 구제금 사업이 지지 부진(遲遲不進)한다면 마게도냐인들이 보기에 고린도 교인들은 형제된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주님께 대한 헌신이 없는 형편없는 성도들로 보일 것이다. 둘째는,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바울의 신뢰가 실추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며 더 나아가 고린도교인들을 믿었던 바울 자신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일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성 경: [고후9:5]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준비된 연보]

⭕ 형제들로...미리 준비케 하도록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의지가 다시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 일행을 보내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고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참연보 - 디도 일행이 해야 할 일은 단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한 약속을 상기시켜주는 일뿐이다. 그 이상 고린도 교인들이 심리적으로 압력을 받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구제 헌금에 관한 모든 결정은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에 대한 약속을 스스로 지켜주리라 믿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본절의 내용을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 있다가 바울과 고린도교인들이 간 다음에 마지 못해 연보를 한다면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보가 아닌 것이다. 본문의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기안'(*)는 '좋은 말', '찬양', '후한 선물', '축복'의 의미를 갖는다. 본문과관련하여 주목되는 의미는 '축복'으로서 '참연보'는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Bruce)는 것으로 '참연보'는 의무에 의해서나, 체면 때문에,또는 자랑이나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책임 의식과 신앙적 사랑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참연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으며, 이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고후9:6]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적게 심는 자...많이 심는 자 - '연보'가 '축복'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본절과 관련하여 더 분명해진다. 본절은 잠 11:24, 25;19:17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뿌리는 것에 비례해서 거둔다'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적극적인 헌금의 필요성 및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이 베푸는 사람은 그 만큼 많은 것으로 축복을 받지만, 적게 베푸는 사람은 그 아낀 것이 모아지지도 않을 뿐더러 돌아오는 것도 적어 늘 가난할 뿐이다. 이것은 내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곧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므로 그렇게 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지만,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은 그 쌓아둔 것이 없으므로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마 6:19-21; 눅 12:33, 34; 갈 6:7)

성 경: [고후9:7]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 여기서는 연보의 액수가 많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 내적인 결심에 의해 즐거운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누가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또는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이 바쳤다면 그것은 참다운 연보가 아닐 것이다.

⭕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주기 싫은 것을 아까워하면서 연보하거나, 대의 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연보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a cheerful giver, NIV)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즐겁게 주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70인역 잠 22:8의 인용이다(Bruce).

성 경: [고후9:8]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 6절부터 시작된 동일한 주제가 점차 발전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주실 능력이 있는데 이는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의미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복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 이것은 많은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필연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불행에 처한 형제들을 위하여 구제금을 내는 것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선행은 그가 그토록 반대하는 바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주의에 대한 반대와 모순된다고 볼 수 있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단 율법주의와 다른 것은 선한 행위를 하되 의롭게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결과로 한다는 것이다. 셋째, '넉넉하여'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안'(*)은 스토아 철학의 견유학파에서 '자족', 또는 '충족'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자족' 또는 '충족'의 스토아적 개념은 인간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는 존재, 즉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만으로서 완전한, 독립적인 인격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스토아적인 '넉넉함'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적 '넉넉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다. 바울은 이스토아적 단어를 사용하되 스토아적 개념이 아닌 기독교적 의미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TDNT).

성 경: [고후9:9]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 본절은 시112:9(70인역 시 111:9)을 인용한 것으로 가난한 성도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에 적극적으로참여할 수 있도록 신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의는 영원히 기억되어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런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수 있는 방법은 즉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의'(*, 디카이오쉬네)에 대해서는 마 6:1, 2에서 나타난 '의' 개념과 동일하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와(Lietzmann), 바울이 말하는 법적 의미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Barrett). 여기서는 바울의 교리적 '의' 개념인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성 경: [고후9:10]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 - 바울은 본절에서 앞절과 같이 직접 인용 형식을 취하지도 않고 구약의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지만 사 55:10과 호 10:12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Martin). '씨와 먹을 양식'은 본래부터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수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심을 것을 주시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신다.

성 경: [고후9:11]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부요하게 해주시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고린도 교인들이 후한 구제 연보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의'가 되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는 유익이 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 왜냐하면 구제 연보의 수혜자들이 그 연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있기까지에는 '우리로 말미암아' 즉 바울 일행의 매개 역할이 중요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구제 연보 사업의 최초 입안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들이 끝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9:12]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이 봉사 - 이 말의 의미는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를 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봉사'라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기아스'(*)는 '공중(公衆)'을 뜻하는 '레이토스'(*)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로 '공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말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롬 15:27).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구제 연보 행위를 '봉사'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에 대한 선행의 의미를 넘어 예전적(禮典的)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행위는 하나님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사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는 구제 연보가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그 도움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다는 표현에서 분명해진다. 이것은 성도들의 구제 연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의미 부여라고 할 수 있는바, 이에 대해 혹자는 '바울이 실천없는 신학을 전개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교회들로 하여금 신학적인 맥락으로부터 벗어난 자선 행위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Barrett).

성 경: [고후9:13]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의 직무(12절)를 잘 수행해 내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나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것이 바로 참 믿음이다(롬1:5).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연보 행위는 그들이 가진 바 복음 안에서의 믿음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보여준 것이다.

⭕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으로 예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신들을 도움으로써 고린도 교인들과 형제애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방 땅에도 복음을 통한 참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과 덕행이 복음의 본토인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까지 인정을 받을만큼 보편성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성 경: [고후9:14]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 고린도 교인들의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섬김은, 위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했고 자신들로서는 중보의 기도를 받을 수있는 동지를 얻는 결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중보(仲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형제애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와 같이 두 교회가 민족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가 더 넓게 뻗어 나가는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변화는 할례를 받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었을 만큼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 사이에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들(행 15:1-21)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사모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포둔톤'(*)은 '그리워하다', '애정을 보여주다'의 뜻으로 바울이 그의 개종자들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다(롬 1:11;빌 1:8; 살전 3:6).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형제애를 나누기 원한다는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기꺼이 구제 연보를 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의 행위를 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成就)하는 것이었다(8:6).

성 경: [고후9:15]

주제1: [헌금의 바람직한 태도와 그 결과]

주제2: [연보의 유익]

⭕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고린도 교인들이 베푼 은혜는 그들 스스로에게서 온전한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그 참된 의미가 발견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 도울 수 있는 물질적 여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은사'(*, 카리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고린도 교인들의 풍성한 연보와 그것으로 말미암는 예루살렘 성도들과 고린도 성도들 간의 화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14절)를 의미한다(Calvin, Tasker). (2)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을 의미한다(Martin, Bruce). 연보에 대하여 언급하는 전후 문맥상으로 볼 때 (1)의 견해가 적합한데 '은사'에 대한 바울의 용례나(롬 8:32) 이 말 앞에 '말할 수 없는'(*, 아네크디에게토)이란 수식어가 있는 것을 보면(2)의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Harris)고 할 수 있다.

성 경: [고후10:1]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 - 공동번역이나 RSV에는 주어 '나 바울'이란 표현이 문장 맨 앞에 나와있다. 그것은 이 부분이 강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여 말을 시작하는 경우는 갈 5:2와 살전 2:18 뿐인데 이 두 부분에서는 바울의 강하고 확신에 찬 진술이 이어진다. 한편 본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타낸 표현이 아니라 바울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이 그에 대해 비난한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어 편지를 쓸 때는 담대하고 강한 어조로 말하지만 막상 얼굴을 대면하고 있을 때는 비굴하고 우유 부단하다는 비난을 받았는데(10절; 고전 2:3), 본문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 바울이 사람들과 마주 대할 때 자신의 태도 및 요구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비굴한 사람이라는 평은 사실 바울의 온유와 관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이 온유(溫柔)와 관용(寬容)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온유한 자로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마 11:29)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5). 혹자는 예수에게 있어서 '온유함'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보았다(Lowery). 또 혹자는'온유함'을 기독교의 특징적인 덕목 또는 은사로 여겼다(Barrett, 갈 5:23;6:1; 골3:12).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든지 간에 이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한 태도로 나타난다. 바울 자신의 삶이 예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때 그는 예수를 본받아 '온유함'과 '관용'의 덕목으로 규정되는 삶을 살고자 했고 인내와 용서의 삶을 살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삶이 적대자들에 의해 오해된 것이다.

성 경: [고후10:2]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 - 여기서 드러나는 바 바울에게 가해진 또 하나의 악의적 모함은 그가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이기적인 욕망과 육체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1:17;2:17;3:5;4:2;7:2).

⭕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하고 관대하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에 대해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하여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담대(膽大)하게 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만큼은 그렇게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로 하여금 강경한 태도로 대하는 일이 없도록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들 스스로 잘못을 고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 경: [고후10:3]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육체에 있어 - '육체에 있어'(*, 엔 사르키)라는 표현은 바울이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거나 육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기 때문이다(롬 8:9). 다만 그 말을 '속된 세상안에서'(공동번역, 고전 5:10), 또는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상황 안에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이 비신앙인들 혹은 가짜 신앙인들과 다른 점은 그가 육의 제한성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울이 싸움을 하는데 있어 자기 중심적인 동기나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권세(權勢)를 확립하기 위하여 싸우지 않음을 뜻한다.

성 경: [고후10:4]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강력이라 - 앞절에서 말할 바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바울이 싸우기 위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하는 강력한 것이다(엡 6:11-17).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육체에 속한 병기 즉 세상적 학문, 인간적인 영향력, 권위있는 추천서(3:1), 사람을 현혹시키는 수사학적 달변(고전 2:1)등 인간적인 것들을 가지고 맞서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병기 곧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온유하고 관대한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대응(對應)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때 바울의 무기는 약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전능으로 덧입혀질 때 그 어떤 대적도 당할 수 없게 된다(고전 2:4, 5).

성 경: [고후10:5]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모든 이론을 파하며 - 본문에서 '이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스무스'(*)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도모(圖謀), 사고 등을총칭하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허황된 이론'이나 '궤변'을 뜻한다. 이럴 경우 바울이 지금 공격의 초점으로 삼는 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이라기 보다는 외부에서 침입한 거짓 사도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 본 구절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공동번역)을 의미한다. 이 교만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이고(롬 12:16)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롬 1:18-23). 그리고 교만의 가장 치명적인 불행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복종케 하니 -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에마'(*)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빌 4:7),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2:11;3:14;11:3).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 공동번역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계략'으로 번역하여, 본절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라고 해석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위압적(威壓的) 권능이 암시되어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사로잡아'(*, 아이크말로티존테스)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를 '복종케 하니'와 합하여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써 적대자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따르려는 바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 함은 육체의 병기를 가지고(4절) 육체의 방식으로(3절) 싸우는 자들이 상대를 완전히 파탄(破綻)시키는 것과 달리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10:6]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 - 여기서 '너희'는 고린도 교인들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대리자인 바울에게 복종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 모든 복종치 않는 것 - 이 말에 해당되는 자들은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나 끝까지 이들에게 동조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들이 복종치 않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것인가 ? 혹자는 이것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맺어진 선교 영역에 대한 약속(갈 2:1-9)에 불복종하고 자신들이 침범해서는 안될 사도 바울의 선교 영역에 침입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이것은 당시 초대 교회의 상황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그렇지만 5절과의 관계에서 볼 때 선교 영역에 관한 합의에 대한 불복종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에 대한 불복종이 더 강조되어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본절의 진술을 하게 된 배경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일단의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합의된 바 있는 선교 영역의 구분을 무시하고 바울의 선교지인 고린도에 침입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언동을 하였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5절). 그리고 어느 정도는 고린도교인들이 이들에게 동조하였을 것이며,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인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은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디도가 그곳을 다녀가 바울에게 보고할 때에 비해 그리 나아진 것이 없는 상황임을 말해준다(8-9장).

성 경: [고후10:7]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외모만 보는도다 -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여러분은 사실을 똑바로 보십시오'로 의역했다. 즉 본문은 바울의 의모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바울의 행위에 대한 적대자들의 근시안적 판단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외모'는 외형적인 것으로(5:12) 천거서(3:1), 수사학적 언변(11:6), 권위에 찬 태도(11:20),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12:1-7)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Harris).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외부적인 징표(徵表)들에 쉽게 현혹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들에 현혹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 본 구절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빈디쉬(Windisch)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네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단순히 그리스도인됨을 의미할 수 있다. (2) 역사적인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킬 수 있다. (3) 사도적 신분을 가리킬 수 있다. (4) 천적(天的)인 그리스도와의 신비주의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관계를 가리킬 수 있다. 이 가운데 첫번째 견해에 의해서 절의 요지를 파악하면, 바울의 적대자가 틀림없는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자부한다면, 우리도(물론 바울을 가리킨다) 그에 뒤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적대자가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확신에 찬 선전을 했다면 그것은 은연중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대해 적대자들이 논한 적이 없다. 따라서 첫번째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연합에 대한 것도 아니기에 네번째 견해도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특수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사도의 권위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있다. 고린도에 들어온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했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권위있는 사도라는 것을 과시했으며 그에 비해 바울은 권위있는 사도가 아니라고 말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암시를 주었을 것이다.

성 경: [고후10:8]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주께서 주신 권세는...부끄럽지 아니하리라 - 진정한 권위는 성도들을 망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양육(養育)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주님께 받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적대자들이 자랑하는 것처럼 자랑하자면 아무리 지나쳐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1:6;11:21-23). 하나님의 진리만을 전하였고(2:17), 항상 공평하게 행하였으며(11:1-15),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했다(7:3). 만약 누가 사도라고 자처하면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면서 자신의 권세를 내세운다면 그 사람은 결코 사도가 아니다. 도리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3:17).

성 경: [고후10:9]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편지들로...않게 함이니 - 본절은 앞절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본문의 뜻은 바울이 편지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협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앞에서(8절)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말한것과 본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 이것은 바울이 보낸 편지에 대해, 그가 편지를 쓸 때는 강하고 담대한 것 같으나 만나서 말할 때는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이 있었다는 10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아마 그 편지는 '가슴아픈 방문' 후에 쓴 '준엄한 편지'였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적대자들은 바울이 면전(面前)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편지로 위협하려 한다고 악선전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비난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바울은 미리 해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에게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으나 편지를 통해 위협하는 것과 갈은 방식으로 그 권위가 행사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결코 그는 그런 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권위는 성도를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위해서는 행사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10:10]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그 편지들은...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 바울이 위협용 편지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랐던 그 편지는 곧 '준엄한 편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편지를 쓸 때의 상황이 그랬던 만큼 그 내용이 매우 강한 어조로 쓰여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나 그렇게 강하게 말할 뿐 직접 만나보면 그의 외모가 약해보일 뿐더러 말도 시원치 않다는 악선전을 하였다. 본문의 표현대로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바울의 풍채가 나약해 보였음을 말하는데 실제로 바울은 고질적이고 만성적 질병을 갖고 있었다(12:7; 갈 4:13-14) 또한 초대 기독교 전승(傳承)에 따르면 바울은 병을 갖고 있는 것 외에도 외모가 그리보기에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그 한 예로 2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울과 데클라 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작은 키와 왜소한 체형, 'O'자형 다리와 양쪽 다 찌부러진 눈썹, 그리고 매부리 코를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이 얼마만큼의 사실성을 지녔는지 분명치 않으나 바울의 외양이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듯 하다. 이런 외부적인 것들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었겠으나, 그것이 바울의 세련되지 못한 행동과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한 말솜씨(11:6) 등과 연결되어 그의 사도적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한 악선전의 재료로 사용되기에는 충분했다.

성 경: [고후10:11]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사도권 변호]

⭕ 이런 사람은...알라 -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깎아 내리려고 악선전하는 자들은 바울이 결코 이중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언제나 온유하고 관대한 면에서(1절)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편지로 쓴 말에 대해서는 만났을 때에도 그대로 실행할 것이다(6절;13:2, 10).

성 경: [고후10:12]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없노라 - 본문에서 바울은 적대자들을 가리켜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찬(自讚)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아마 자기들을 내세우기 위한 추천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적대자들은 추천서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기들이 진정한 사도임을 과시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추천하지도 않고 추천서에 의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3:1;5:12). 적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사도라고 자랑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도이다(갈 1:1). 그들은 비교를 통해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자기로서...헤아리고...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 사실 적대자들이 만든 표준이나 척도 즉 인간적인 지혜, 사도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위압적인 태도, 수사학적인 웅변술 등은 당시에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갖는 것이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은 그런기준들을 이미 오래 전에 하찮은 것으로 버렸다(4:5; 고전 2:1-5). 바울이 보기에 그런 척도들은 천박한 것이었고 그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추정하고 과시하는 것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 경: [고후10:13]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 - 바울은 적대자들의 자랑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의 영역을 무시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노노스'(*)는 '길이를 재는 막대기', '줄자'라는 뜻인데 규범이나 표준의 의미로도 쓰이고(갈 6:16), 일정하게 한정된 영역을 가리키기도 한다(10:14-16). 본절에서 이 말은 후자의 의미이며 바울이 여기서 문제삼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 영역의 준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행 9:15; 롬 1:5;15:18), 그에게 이방(異邦)을 선교영역으로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합의된 바 있다(갈 2:9). 이런 한계에 입각하여 바울은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롬 15:20).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지키면서 행한 것이었다.

성 경: [고후10:14]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미치지 못할 자로서...이른 것이라 - 본절에는 두 가지 요점이 제시되어 있는데 첫째는 바울이 고린도에 갈 자격이 있고 고린도는 바울이 정당하게 선교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고린도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바울 자신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남의 선교 영역에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참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들어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11:4).

성 경: [고후10:15]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남의 수고를 가지고...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 바울은 결코 남이 수고한 것의 결과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롬 15:20). 고린도 교회는 다른 어느 누구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때 바울이 최초로 복음을 전하여 설립되었기에 고린도에 교인들이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신 결과였다.그러나 적대자들은 남의 선교 영역에 들어와서 바울의 업적이 자기들의 것인 양 자랑하였다.

⭕ 믿음이 더할수록...바라노라 - 바울이 바라는 것은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여 믿음을 갖게된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비례하여 자신의 선교영역이 더욱 확장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롬 15:23, 24), 그것과 더불어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의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했다. 이로써 그는 자기에 대한 성도들의 존경도 심화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그의 선교 영역을 준수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도록 할것이다(16절).

성 경: [고후10:16]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너희 지경을 넘어 - 본문의 의미는 고린도 지역을 넘어 로마와 서바나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복음을 증거하려 한다는 것이다(행 19:21; 롬 15:19, 22-24). 그 지역들은 남의 선교 영역이 아니며 그 누구도 복음을 증거하지 않은 불모지(不毛地)였다.

성 경: [고후10:17]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 본절은 고전 1:31에서와 같이 렘 9:22-24를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바 지혜나 용맹이나 부함을 자랑치 말고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자신을 자랑하기보다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누구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참된 사도라면 그는 자기를 자랑하기보다는 자기를 통해 섭리하신 주님을 자랑할 것이다(공동번역, RSV). 바울은 적대자들의 허위적 자랑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정당화하였지만 그는 그런 것이궁극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절은 바울이 자랑하는 자가 된 것은 주를 더 자랑하기 위함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성 경: [고후10:18]

주제1: [사도권의 참목적]

주제2: [바울의 객관적인 자기 사랑]

⭕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 본절 '자랑'에 관한 주제의 핵심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진정으로 자신을 통해 인정받아야 할 분이 누구인지 알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자기들이 만든 기준을 가지고 자신들을 자랑하는 행위가 어리석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결코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12절). 참으로 주님께 인정받는 사도는 자신이 언젠가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알아(5:10) 자중하는 자이며 사람들로부터 안정받기보다는(마 6:2 ,6, 16)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이다(고전4:5; 롬 2:29).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 앞에 전개되는 일들을 똑바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기준에 의해 바울과 적대자들 중 누가 진정으로 권위있는 사도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성 경: [고후11:1]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말해온 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주장(3:1;5:12;10:12)에 모순되게도 자기의 공로를 나타내려 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전제 하에 고린도 교인들의 용납(容納)을 요청하고 있다. 본문의 '용납하라'(*, 아네이케스데)에 대해서는 직설법으로 보는 견해와(Lietzmann, Martin) 명령법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Barrett) 직설법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이 동사가 실현 불가능한 소원을 나타내는 동사 '오펠론'(*) 다음에 사용되어 부정사적 용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용납하기를 바란다'란 의미이다. 아무튼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사실 이것은 그의 표현대로 고린도 교인들이 억지로 시킨 일이었다(12:11).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고린도 교인들의 수준이 턱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현혹되는 정도였으므로(10:7) 그들에게 바른 것을 보여주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바울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 반복되는 요청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업적과 권위를 예증하는 일을 결코 쉽게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고 어렵게 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 경: [고후11:2]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하나님의 열심으로...열심내노니 -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는 '열심'이라는 말보다는 '시기'나 '질투'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Farrar, Martin, Barrett).그리고 영역 성경 중 RSV, NIV 등도 '시기'나 '질투'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 구절시 내용이 하나님의 질투하심과 동일한 질투를 가지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온 적대자들을 대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 관계의 유비(사50:1-2;54:1-8;62:5;호 1-3장)를 고린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관계의 유비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질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바울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그에게 해롭게 행동하는데 대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질투는 바울 자신이 애써 전도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유혹된 것에 대한 질투였다.

⭕ 정결한 처녀로 중매함이로다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 질투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기쁨과 고린도 교인들의 행복을 그들이 훼방했기 때문이며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중매시킨 장본인으로서의 바울은 그 사실을 과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 구절의 '중매함이로다' 는 '약혼시켰다'(betrothed,RSV)또는 '정혼시켰다'(공동번역)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바울은 순결한 처녀인 고린도 교인들을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약혼시켰다(엡 5:27;요일 3:2, 3). 혹자는여기서의 '약혼'이 실질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개종', '회심'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Farrar, Barrett), 엡 5:25-27을 참조할 때 어느 정도 타당한 해석이다. 그리스도와 약혼한 당사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은 순결을 계속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마치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이스라엘이 이방의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되며 오직 남편인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불신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만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고후11:3]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 바울은 적대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했던 행위를 뱀이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행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창3:13). 사단의 대리인인 뱀에 해당하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그곳의 교인들을 미혹하려 한다. 특히 여기서 '미혹한다'(*, 엑세파테센)란 표현은 '완전히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바울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음을 암시한다.

⭕ 너희 마음이...두려워하노라 - 사단의 대리인으로서의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감쪽같이 속여 그리스도를 저버리도록 유도하려 하기에 바울은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로서(12:14;고전 4:15) 그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만약 바울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배반한다면(4절)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불행을 뜻할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쏟아부은 바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아울러 고린도 교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일을 해야 했다(1절).

성 경: [고후11:4]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누가 - 이들은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즉 바울의 적대자임에 틀림없다. 본절만으로 이들이 정체를 밝혀내기는 어렵다. 적어도 이들이 팔레스틴에서 온 자들로서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사이비 기독교인들이라 볼 수있다.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인 이었다는 사실(11:22), (2) 열두 사도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 다른 예수 -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열 두 제자를 거느렸던 예수를 부인하고 또 다른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본질에 관해 달리 해석하는 것을 가리키다. 가령 예수의 인성(人性)을 인정하지 않는 영지주의적 기독론, 즉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pneumatiker)또는 신적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Goudge).

⭕ 다른 영...다른 복음 - 이것은 '다른 예수'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다른'이란 말이 게속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른 복음'에 대해서는 갈 1:6-9 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대속의 도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갈 1:4). 그리고 '다른 영'이 평강과 자유의 영(3:17;롬 14:17)에 반대되는 두려움과 종의 영( 롬 8:15;딤후 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Harris).

⭕ 잘 용납하는구나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실망스러운 행위에 대한 풍자적 비난일 수도 있고(Robertson),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의 말에 대해 잘 들어주는 관용을 보였던 만큼 바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의 관용을 보여달라는 요청일 수도 있다(Barrett, Harris).

성 경: [고후11:5]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지극히 큰 사도...생각하노라 -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다른 사도와 비교하려는 의도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다만 굳이 비교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조금도 뒤지지 않기에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확실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어리석음을 용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Harris). 한편 본문의 '지극히 큰 사도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학자들간에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진다. (1)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지칭한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Bruce, Hering, Harris) (3) 13,15절에 나오는 거짓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Lowery, Robertson,Farrar). '지극히 큰 사도'가 거짓 사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바울은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볼트만(Bultmann)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하기 위하여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며 그 근거로 6절의 '말과 지식'에 관한 바울의 진술을 인용했다. 그러나 캐제만(Kasemann)은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자신을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인데 반해 거짓 사도들은 사단의 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바울이 이미 첫번째 서신에서 자신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교한 적이 있으며(고전9:1;15:5-8, 10) 또한 갈 2:9에서 예루살렘의 기둥 같은 세 신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성 경: [고후11:6]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말에는 졸하나 - '졸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디오테스'(*)는 '평범한'의 뜻으로 특별한 재주를 갖지 못하고 특별히 훈련받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비해 보잘것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본문을 "나는 말재주는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을 잘하는것' 즉 수사학적 웅변술(雄辯術)이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적대자들의 기준이냐 아니면 고린도 교인들의 기준이냐 하는 점이다. 혹자는 바울이 바로 앞절에서 자신의 '부족하지 않음'을 말해놓고 금방 하나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보아, 고린도 교인들이 웅변술에 따라 사도들의 권위를 평가했던 것으로 본다(Harris, Barrett). 그런데 10:10을 참고할 때 자기가 지극히 큰 사도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외형적인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 외형적인 것에 있지 않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 한편 본 구절은 지나친 겸손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며 사실과 관계없이 적대자들이 내린 결론을 단지 인정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 자신이 말로 사람을 사로잡으려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고전 1:17;2:4) 사실상 달변(達辯)으로 청중을 사로잡으려하는 거짓 사도들에 비해 뛰어난 언변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울은 자신이 능숙한 말솜씨를 가지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의 사도됨에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이란 외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사도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그가참다운 지식을 소유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은 박학 다식(博學多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 지식'을 가리킨다. 거짓사도들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박학 다식을 소유했으나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받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에 그들의 지식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소유한 것이다.

⭕ 우리가...나타내었노라- 바울이 참다운 자식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단지 자기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 교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방 교회들에게 이미 나타내 보인 바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외적인 기준에 집착했기 때문에 바울이 지닌 지식의 본질 및 능력을 보지못한 데 있었다(10:7).

성 경: [고후11:7]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나를 낮추어 - 이 표현은 포괄적인 의미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인 태도, 즉 헌신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자세를(4:12) 나타내는 것일 수 있으나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례비를 받지않은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다.

⭕ 하나님의 복음을 값 없이 -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되 그 교회로부터 아무런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듣는 자들로부터 물질적인 생활을 위한 보조(補助)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어쩌면 권리일 수도 있다(신 25:4;눅 10:7).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지않고 스스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행 18:1-3;살전 2:9;살후 3:8). 바울은 첫번째 서신에서 밝힌 바대로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서 생활을 위한 보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했다(고전 9:4-18). 그것은 순전히 고린도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바울이 내린 목회자적 판단이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이런 자세를 공격의 소재로 삼았던 것 같다. 본절에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이 바울을 공격한 논리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즉 사도라면 그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로 생활비를 받아야 한다. 자신들이 그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데 비해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곧 그가 참다운 귄리를 지닌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선생들은 돈을 받고 가르침을 베풀었고 그런 문화에 익숙해 있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논리에 쉽게 현혹(眩惑)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의 본질, 즉 자기를 낮춰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알아야 했다. 바울은 철저하게 이 복음을 따라 살았다. 그가 복음을 전하며 값을 받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대신 고린도 교인들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 자신은 육신적으로 빈곤하게 살더라도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바울의 목회자적 관심이었다(4:12).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이러한 행위에서 드러나는 사도적 삶과 메세지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했어야 한다.

⭕ 죄를 지었느냐 -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성 경: [고후11:8]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탈취한 것 - 본절은 "나는 다른 교회들이 주는 삯을 받아 가지고 여러분에게 봉사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교회들의 것을 빼앗아 여러분을 도운 셈입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본문에서 요(料)는 헬라어 '와소니온'(*)의 번역인데 이는 '보수' 또는 '급료'를 뜻하는 말이다(고전 9:7). 그러나 바울이 '여러 교회들' 즉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9절)로부터 일정한 급료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아마 비정기적으로 그 교회들로 부터 후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 후원금 받은 것을 '탈취한 것'이라고 한 표현이 좀 이상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마게도냐 교회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할 때(8:2), 그들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것이 아마 그에게 마치 '탈취'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요를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들에 대해 암시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그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성 경: [고후11:9]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부족하되...폐를 끼치기 않기 위하여 - 바울은 나름대로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행 18:3). 그러나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본업으로 하고 '장막 만드는 일'을 부업으로 했으므로 생활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생활비 보조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그의 수입이 넉넉하였기 때문도 아니요 그가 권리를 요구할 만한 사도가 아니어서도 아니다. 오직 그에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돕고자하는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지원해 준 후원금(後援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사도적 권위와 권리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생활비를 요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사실 끝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도 비본질적인 것에 현혹되어 왜곡된 시각으로 바울의 사도됨을 평가하므로 불가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1절).

성 경: [고후11:10]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그리스도의 진리...막히지 아니하리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려 하지 않은 자신의 처신이 오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 것임을 결의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 것임을 결의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로서의 마땅한 권리인 생활비 보조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울이 자신의 청렴함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복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아마 그는 물질의 부요가 복음 전도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약화시키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멀어질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연약함에 처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 속에서 온전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12:9).

성 경: [고후11:11]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애정의 결핍을 증명하는 결과가 된다는 오해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성 경: [고후11:12]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함이로라 - 바울이 오해를 받아가면서까지 대가를 거부한 것은 거짓 사도들과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바울처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도라고 주장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본절은 거짓 사도들이 내심으로 바울도 자신들처럼 복음의 삯을 받기를 바랐고 또한 그렇게 된다면 자신들도 바울처럼 복음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전심 전력(全心全力)하는 사도로 인정되리라고 믿었음을 암시해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그렇거니와(10절 주석 참조), 거짓 사도들에게 그들 스스로 합리화시킬 기회를 주지않기 위해서도 고린도 교인들의 재정 지원을 사양할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성 경: [고후11:13]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 - '거짓 사도'라는 말은 당시에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적대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본다(Robertson). 바울의 적대자들이 '거짓 사도'인 까닭은 그들이 복음과 그리스도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희생보다는 보수를 탐하는 자들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바울과 같은 참사도를 가짜라고 매도하는 거짓된 행위를 서슴지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속여서 참사도인 바울의 사도성과 그의 능력을 의심하게 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다.

⭕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 - 거짓 사도들은 자칭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것과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해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는 사단과 다름이 없다(3, 4, 14절). 바울이 이토록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한 자신을 거짓 사도들이 부정했기에 그들이 바울 자신과 동일한 복음과 성령을 받지 않은 것으로 간단했기 때문이다.

성 경: [고후11:14]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사단도...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사람들이 보기에 뛰어난 웅변술로 인해 참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양의 탈을 쓴 이리인 경우는 초대 교회 당시뿐 아니라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여러 번 있었기에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사단과 광명의 천사'란 단어를 등장시킨 것은 뱀과 하와의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사단이 천사로 가장하는 것은 당시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였다. 묵시 문학 작품 중 모세의 묵시록 17:1에는 하와의 회상이 나오는데 '천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올라갔을 때 사단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천사처럼 찬송을 불렀다.'고 되어있다. 또한 다른 작품 중 아담과 하와의 생애 9:1에는 '사단은 분노해서 빛의 천사로 변장했다. 그리고 티그리스강의 하와에게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암시된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거짓 사도를 단순히 그의 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시키는 자로 규정하고 있음과 동시에 거짓 사도들의 기원이 사단에게 있다는 것이다.

성 경: [고후11:15]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거짓 사도들]

⭕ 사단의 일꾼...의의 일꾼 - 사단이 천사로 변장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사단의 일꾼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도'(13절)로 가장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로 행세하지만 그들의 실제 행동과 메시지는 그것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복음 자체보다는 복음의 삯, 즉 보수를 탐하는 자들이며 믿음의 의가 아닌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며 또한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자들이다(4절).

⭕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사심도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파했으며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종이 되는 자리에까지 이르도록 신실(信實)한 행위를 한것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4:5). 즉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역했던 것이다. 반면 거짓 사도들은 그들이 선포한 메시지뿐만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사단의 종이라는 사실이 결국에는 폭로될 것이었다.

성 경: [고후11:16]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 바울은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다(10:12;11:1).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사도직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도 자신의 정당한 업적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을 자랑하고 있다. 본절은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진술(1-6절)한 이후 잠시 다른 주제를 다루다가(7-15절) 다시 본절의 주제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일을 결코 쉽게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말한 1절과 모순되게도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설득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1)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자랑은 자랑을 위한 자랑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사도들의 거짓된 자기 자랑을 폭로하여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2)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을지라도 그 자랑은 자신의 지혜와 권위를 스스로 과시(誇示)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 만일 그러하더라도...받으라 - 바울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여기지만 선한 목적을 위해 불가불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 차원에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성 경: [고후11:17]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서 자랑을 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도적인 것도 아님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 거짓 사도들의 자기 자랑이 어리석으며 그것에 현혹되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은 것처럼 바울도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신을 자랑한다. 그래야만 이야기가 서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어리석은 자와 동일하게 자랑을 하자면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 비교가 안될 만큼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업적이 있다(22-33절).

성 경: [고후11:18]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 본절은 혈통(22절), 업적(10:13-16), 외적인 권위의 표징(3:1)과 같은 것을 자랑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한 것들이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어서 그동안 고린도 교회 앞에서 자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도가 취할 행동이 아니며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 뿐이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상황의 요청에 따라서 자신의 업적을 과장됨 없이 자랑하겠다고 선언한다.

성 경: [고후11:19]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 어떤 주석학자도 본절의 '지혜로운 자'라는 표현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풍자적 표현으로 사실상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간접적으로 꼬집는 것이다. 이로 보아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를 지혜있는 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성 경: [고후11:20]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종을 삼거나 - 이 표현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상전으로 행세하며 그들을 노예나 종으로 부렸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갈 2:4;5:1의 내용과 같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자유를 빼앗아 율법의 종 노릇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지 분명치않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 잡아 먹거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디에이'(*)는 '삼키다'(막 12:40)란 의미가 있는데 이는 마치 기생(寄生)하는 동물처럼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남의 피와 땀의 결과를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거짓 사도들은 실제로 바울이 씨를 뿌려놓은 곳에 와서 그 결실을 가로채는 자들이었다.

⭕ 사로잡거나 - 이 말은 미끼를 던져 함정에 빠뜨리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수사학적 달변(6절)으로 교인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만들려고 하였다(3절).

⭕ 자고하다 하거나 - 이 말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한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넓은 의미에서 가짜 복음을 가지고(4절)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행세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킨 것이 무시하는 행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좁은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의(異議)를 제기할 때 무시당한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 빰을 칠지라도...용납하는도다 - 이것이 은유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실제적으로 빰을 친 것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어리석게도 거짓 사도들을 용납한 결과로써 그들에게 당한 무시와 수모의 극치를 보여준다. 플루머(Plummer)의 표현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을 짓밟고 착취하는 자들에게는 관대하고 인내와 동정심을 가지고 바울에게는 완고하게 하는 아이러니(irony)를 보여주었다.

성 경: [고후11:21]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우리가 약한 것같이...말하노라 -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하며 비록 허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행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한 자였다. 그는 이 약함을 스스로 시인한다. 그러나 이 인간적 약함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끄러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12:9-10).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바울은 오히려 강한 자이다. 또한 누가 정말 강한 사도인가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언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23-27절).

⭕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나도 담대하리라 -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수준에서 자랑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본문의 '누가'로 표현된 인물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혹자는 이들을 단지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않고 이들의 배후에서 이들에게 권위를 부여해준 사람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거나(Barrett), 더 구체적으로 '지극히 큰 사도들' 즉 예루살렘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Lowery). 그러나 여기서는 거짓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성 경: [고후11:22]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히브리인이냐...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 본문의 '히브리인'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대인으로서의 혈통(血統)의 순수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즉 바울은 자신이 혈통상으로 완전한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Barrett). (2) 언어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모국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아니라 모국어인 아람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Bruce, Martin, Harris). 그런데 본절 전체가 혈통상의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 자신의 유대인됨을 강조하므로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한편 '히브리인'이 인종적인 측면에서 진술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인'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기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Barrett).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서, 보호의 대상으로,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히 택하신 백성을 의미한다(롬 9:4).

⭕ 아브라함의 씨 - 바울은 태어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빌 3:5). 하나님의 백성이나 종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육의 혈통으로 나는 것은 아니지만(롬 9:6-13) 유대인 거짓 사도들이 주장하는 기준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그들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그는 혈통상으로 순수한 언약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며 또한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의 유대인됨을 강조적으로 반복한 것은 바울의 대적자들 즉 거짓 사도들이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고후11:23]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 여기서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공동번역)라는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업적을 말함에 있어서 거짓 사도들과 달리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혹자는 본문이 적대자들의 사도됨을 긍정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 이들은 13절 이하의 거짓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이라고 보기에 결국 바울은 이중의 적대자들과 싸웠다고 한다(Barrett). 하지만 그러한 해석보다는 본절을, 적대자들과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하고 인정하는 것을 백번 양보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바울 자신은 더욱 확실하고 뛰어난 사도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 이러한 바울의 고난은 그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사도 행전에도 충분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에 의하면 바울이 옥에 갇힌 횟수는 모두 일곱 번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클레멘트 1서 5:6)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투옥은 빌립보에서 있었던 것이었다(행 16:23-30).

⭕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매를 맞은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절부터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대해서는 1:8,9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바울이 열거하는 그의 업적은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업적이 승리의 사례가 아니라 패배와 고난의 사례라는 점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道)와 일치하는 것이며 인간의 약함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과도 일치되는 것이다(11:30;12:5, 9, 10).

성 경: [고후11:24]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 죄수에게 매를 때리되 사십대에 한해서 때리게 하는 형벌은 신 25:1-3에 의거한 유대인들의 태형 집행 관습이었다. 그런데 서른 아홉대를 때린것은 때린 횟수를 잘못 계산하여 사십을 넘기게 되는 잘못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고후11:25]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세 번 태장 - 태장(笞杖)이란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로마식 태형으로 채찍 끝에 납을 매달아 치는 무서운 형벌이며 이 태장을 맞는 중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행 16:22, 37).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선교적 목적을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로마 관리들이 죄수된 자의 신분을 먼저 물어보는 법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행 16:37, 38).

⭕ 한 번 돌로 맞고 - 이것은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되는 사실이다(행 14:5, 19).

⭕ 세 번 파선...일 주야를 깊음에서 - 이 일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증거가 될만한 구절을 찾을 수 없다. 예수의 행적이 그러했듯이 바울의 행적도 모두가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행 27:14-44에 바울이 탄 배가 파선(破船)한 사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그 사건은 본 서신을 기록한 후의 일이었다. 한편 본절에서 배가 파선되어 일주일을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은 살 소망마저 끊어진 상황을 회상했던 1:8과 연결될 수 있다.

성 경: [고후11:26]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여러 번 여행에 - 여행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도이포리아이스'(*)는 해상 여행과 구별되는 육로 여행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다.

⭕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 바울의 육로 선교 여행은 때로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 당시 반쯤 말라 있던 강물이 갑작스런 폭우로 인해 순식간에 급류로 변해 여행자에게 큰 위험이 되기도 했다. 바울도 아마 이런 위험을 당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당시의 헬라와 아시아의 산악 지방에는 산적들에 의한 약탈 행위가 있었는데 아무런 호위 병력도 없이 선교 여행을 하는 것은 이런 위협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 바울은 선교를 함에 있어서 유대인 동족들로부터는 배교자로 낙인 찍혀 죽음의 위협을 당했고(행 9:23, 29; 14:19; 18:12) 이방인의 토착 종교인들로부터는 훼방자로 죽임을 당할 뻔 했다(행 16:16-40;19:23-41). 아마 바울은 이런 역경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가면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는'(4:8,9)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 - 시내의 위험이라 함은 에베소, 빌립보, 베뢰아 등의 도시에서 당한 환난과 핍박을 가리킨다(행 16:21;19:27). 광야의 위험이라 함은 비시디아의 버가와 안디옥 사이에 있는 험악한 광야를 통과할 때 또는 안디옥에서 루스드라와 더베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지날 때 있을 수 있는 추위와 뜨거움과 배고픔 등의 위험 그리고 갈라디아의 도시들에 이르기 위해 다루스 산맥을 넘어가는 지역에서의 위험등을 가리킨다.

⭕ 바다의 위험 - 이는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파선의 위험을 가리킨다(25절).

⭕ 거짓 형제 중의 위험 - 거짓 형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과도 구별되는 자들로 아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고린도 교회의 거짓 사도들과도 연관이 있는 유대적 기독교인들이라고 본다(Barrett, Bruce, Harris). 그런데 혹자는 단순히 기독교내에 있는 배교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Tasker, Martin) 또 어떤 학자는 이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권위자들(가령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바울에 대해 나쁘게 고자질했을 것이라고 본다(Hering). 그러나 바울이 배교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 2:4을 참조해 볼 때 거짓 형제란 유대적 기독교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들에 의해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성 경: [고후11:27]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수고하며 애쓰고 - 이 두 단어는 중노동을 나타내는 말인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육체의 심한 노동으로도 몹시 피곤한 생활을 했다(살후 3:8).

⭕ 여러 번 자지 못하고 - 육신의 병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 일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외부의 위험 때문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가 의도적으로 자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고자 해도 잠을 잘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은 육신으로 감당하기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음에 틀림없다.

⭕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은 광야의 위험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의 굶주림이 자발적인 금식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그가 복음을 선포하고 그 권리로 얻을 수 있는 재정 보조를 마다했기 때문에 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굶주림에 처했을 것이다.

⭕ 춥고 헐벗었노라 - 이는 바울의 재정적인 빈약함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러한 그의 삶은 참으로 자신은 가난해지지만 다른 사람들은 부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었다.

성 경: [고후11:28]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 늘 바울의 마음에 고통이 되는 것은 자신의 생(生)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목회적 관심, 즉 교회에 관한 염려였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로부터 들려오는 분쟁과 타락의 소식을 들은 때마다 그것의 해결을 위해 고심했으며(행 20:29,30), 교회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애썼다(롬 14:1;고전 9:22).

성 경: [고후11:29]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약하면...약하지 아니하며 - 바울이 당한 고난은 교회 밖에서 오는 것(23-27절)과 교회 안에서 오는 것의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오는 고난은 근본적으로 그의 성도들이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거짓 사도의 가르침에 현혹된 것이나 바울 자신에 대한 사도적 권위에 대한 도전 등도 결국 이러한 고난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 오는 고난은 23-27절에 언급된 것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의 핵심적인 단어는 '약해지다'(*, 아스데네이)라는 말인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Barrett). (1) 이 말은 율법과 조문(條文)에 매여 믿음이나 양심이 약해진 사람에 대해서 사용된다(롬 4:19;14:1-2;고전 8:11,12). (2) 이 말은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힘이 약하고 허약한 사람을 가리킨다(11:21;12:10;13:3,4,9;롬 8:3). 그런데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본문에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굳이 연관을 시키자면 전자와 관련될 수 있겠으나 본절의 약함은 율법이나 조문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신앙과 믿음이 연약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신앙이 강건하지 못하고 연약한 성도들에 대해서 결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 대해서 동정하고 함께 아파하는 입장을 취하였다(고전 8:13;9:22). 본절은 바울의 이런 기본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본다. 한편 바울의 이런 태도는 그의 유기체적(有機體的) 교회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엡 1:22,23). 즉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교회의 특징이다.

⭕ 실족하게 되면...애타하지 않더냐 - 여기서 '실족'은 '죄에 빠진 것'(공동번역)이나 '걸려 넘어져 믿음을 잃게 된 것'(Barrett)을 가리킨다. 그리고 '애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로오'(*)는 '불'을 뜻하는 '퓌르'(*)에서 나온 말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심정이 가장 안타까울 때 쓰는 말이 '속이 불타오른다'라는 표현임을 생각할 때(렘 20:9) 바울의 이 말은 그의 사도적 인격에 깊이 내재해 있는 목회자적 열정을 잘 나타내 준다고 본다.

성 경: [고후11:30]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부득불 자랑할진대...약한 것을 - 바울은 비록 자신에 대한 자랑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어 자랑했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간적인 자랑을 해야하는(16-27절) '어리석음'을 멈추고 다시 본질적인 주제로 돌아왔다. 바울이 말하는 약함이란 육체의 풍모나 신체적인 면에 있어서의 허약함, 세상적인 것을 가지지 못한 약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의 여정을 걸어야했던 것 등이라고 본다(11:23-27;사 53:4). 그리고 이러한 연약함이 그에게 자랑거리라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인간적인 면에서 약하면 약할수록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기에 그 연약함이 그에게 자랑거리라는 의미이다(1:8-10;3:5;4:7,10,11; 12:5,9,10).

성 경: [고후11:31]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주 예수의 아버지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의심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고(1:12-14) 그가 한 말에 대해서 그들이 계속 의심하려고 한다면 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경험한 사건들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의 말이나 행위에 대한 진실성을 호소하는 수단 중 가장 강하게 되었다.

⭕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 - 이 말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라는 유대교의 찬양 문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온 그 하나님이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주 예수의 아버지와 동격으로 사용되어(갈 4:4)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엡 1:3; 벧전 1:3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된 점을 미루어 보아 당시에 그러한 찬양문이 기독교인의 예배나 기도에서 너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Barrett).

성 경: [고후11:32]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 - '아레다'(Aretas)는 B.C. 9년에서 A.D. 40년까지 아라비아의 나바데아(Nabataea)를 다스렸던 왕이었다. 이 아레다 왕이 다메섹을 다스렸다는 표현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다메섹은 B.C 63년부터 A.D. 34년 까지 로마의 영토에 편입(編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Harris). 그러나 A.D. 34-62년 사이에 로마의 황제였던 갈리굴라(Galigula A.D. 37-41)와 클라우디오(Cludius A.D.41-54)의 동전이 다메섹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고고학적 결과를 가지고 아레다가 다메섹을 통치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러한 추측을 부정한다. 그래서 혹자는 다메섹이 이중의 통치를 받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아레다'가 로마의 봉신(封臣)으로서 다메섹을 통치했다는 것이다(Tommsan). 또 어떤 학자들은 다메섹이 여전히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으나 다메섹에는 나바데 아인들의 반자치 구역으로 허용된 영역이 있었고 바울이 당한 사건은 거기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Bruce, Tasker, Hughes, Meyer, Harris).

⭕ 방백 - 이는 지방의 '행정 장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혹자는 행 9:23, 24을 근거로이 행정 장관이 유대인 출신으로 다메섹의 유대인을 담당했던 사람이었고 그 휘하(麾下)의 경비병들도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 한다(Hughes). 그러나 바울이 정확한 묘사를 하지 않았으며 역사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기에 단정할 수 없다.

⭕ 잡으려고 - 이것은 행 9:23-25에 나오는 사건을 말하는데 본 구절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단순히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었다(행 9:24).

성 경: [고후11:33]

주제1: [참사도와 거짓 사도]

주제2: [바울의 수고와 열심]

⭕ 광주리를 타고 벗어났노라 -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바울로서는 그 사건이 그다지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체험을 고백하는 것은 이미 바울 자신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광주리를 타고 들창 밖으로 몰래 도망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약함과 비천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다.

성 경: [고후12:1]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무익하나마-자랑하노라 - 바울은 이미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11:1, 16-18). 그러나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오도(誤導)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주의 환상과 계시 - 여기서 '환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타시아스'(*)라는 단어는 바울이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할 때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하다(행 26:19). 이 말은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으로 어떤 실체를 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처럼 보는 것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인지 아니면 무의식의 상태에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것을 잠을 자는 상태라기보다는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한다(Farrar). '계시'(*, 아포칼류세이스)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환상이 직접적으로 보여진 현상이라면 '계시'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감지(感知)하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상은 대부분 계시이지만 모든 계시가 환상인 것은 아니다(Harris, Tasker). 이런 점에서 계시를 경험된 환상의 이해 가능한 내용과 전달이라고 설명한 바레트(Barrett)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바울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지금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의 자랑은 적대자들의 자랑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자랑이다. 적대자들은 자기들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했고(11:13), 자칭 권위있는 추천서를 내밀면서 자기들의 자격을 자랑했다(3:1). 그리고 그들은 신비적인 경험을 자랑했을 것이다(Barrett).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발하는 것은 그의 적대자들이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자랑한다면 바울 자신도 그런 것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의미로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진술하게 되었다.

성 경: [고후12:2]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한 사람을 아노니 - 바울은 오래 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이 있어, 자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나'라는 말대신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랍비적 표현법이 영향이었거나, 또는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십 사년 전 - 바울은 매우 오래 전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특히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증언의 신빙성(信憑性)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갈 2:1과 연관지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지만(Martin)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경험이 다메섹에서의 경험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정적이다. 이 경험이 본서가 집필도기 14년 전이라면 A.D. 43년 경이었을 것이고 수리아의 길리기아에서 보냈던 '침물의 세월'(약 A.D. 35-43년)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Harris). 그렇지만 혹자는 행 22:17에서 엄급된 바 대로 성전에서 본 환상을 가리킨다고 추정한다(Hughes).

⭕ 세째 하늘 - 본문에 대해서는, 그 개념상의 특이성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된다. 먼저 '세째 하늘'이 유대인들의 하늘 개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Salmond). 즉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2족장의 유언). 그 중 세번째 하늘은 의롭게 죽은 자들이 머무는 처소라고 한다(에녹서 8:1-13;42:3). 그렇다면 바울은 바로 이 죽은 의인들의 처소에 다녀온 것이 된다. 이 경우 바울이 당시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다. 오히려 본문은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지말고 바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래서 언어로는 정확히 묘사할 수 없는 곳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체험을 환상 중에 했다는 것으로 이해함이 무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째 하늘'의 개념은 엡 4:10의 '모든 하늘 위에'란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혹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본문의 표현이,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들어갈 하늘 혹은 천국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고 본다(Barrett).

⭕ 이끌려 간 자라 - '이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르파겐타'(*)는 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의나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힌 바 되었음을 뜻한다. 즉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 몸 안에...아시느니라 - 본 구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여 자아가 몸과 분리될 수 있음을 바울이 생각했다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다만 그 환상의 경험이 인간의 오성(悟性)과 관념의 범주로는 포착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아시느니라'는 진술에서 바울은 계시나 한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임을 암시적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만약 적대자들이 그들의 환상 경험을 자랑하되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성 경: [고후12:3]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그가 몸 안에...아시느니라 - 환상과 계시는 경험하는 자가 자의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일상사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초월하는 경험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간적인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 경: [고후12:4]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낙원으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낙원'이라는 말은 '세째 하늘'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유대인들의 '세째 하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낙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데이손'(*)은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동산'을 뜻했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다(Bruce). 구약성경에서 '낙원'은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 동산(창 2:8;사 51:8) 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겔 28:13;31:8).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눅 23:43) 또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계 2:7)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낙원'은 유대 랍비들의 견해와는 달리 구원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구약에서 보여지는 봉인(封印)된 계시에 관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사 8:16;단 12:4). 이와 달리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그 체험이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Lowery)는 타당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바울은 묵시 문학이나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체험을 자세하게 진술하는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더 이상 그 환상에 대해 진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성 경: [고후12:5]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이런 사람을...자랑하겠으나 -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의 당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은폐(隱蔽)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절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나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자는 여기서 묵시 문학자로서의 바울과 인간 사도로서의 바울을 구별하여 생각하기도 한다(Lietzmann). 다른 학자는 교회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바울의 기본적 관점에서 이해하기도 한다(Kasemann). 즉 바울은 '방언'이나(고전 14:9) '황흘경 체험'에 대해 말할 때(5:13) 교회의 유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과 바울 자신만의 일을 말하는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일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그런 자랑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그가 취할 영광은 그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곧이어 언급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 약한 것들 - 바울은 매우 현명하게 자신의 논리를 진전시켜 이제 정말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시실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다만 적대자들이 그들의 사도직의 증거로서 황홀경 체험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사도직의 증거라면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말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상 체험을 진술했을 뿐이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로서의 자랑이 오직 자신의 약함이 있다는 것을 적대자들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周知) 시키는 것이다.

성 경: [고후12:6]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참말을 함이라 - 바울이 지금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도 또 하려고만 하면 앞으로 할 자랑도 모두 참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경험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의 적대자들이 보지도 않은 환상에 대해 말했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지나치게 생각할까...그만두노라 - 바울은 얼마든지 더 말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곡해(曲解)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 또한 바울은 과거에 그가 미쳤다고 악평하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5:13) 이번에도 그런 것을 염려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절은 자기가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소극적 의미에서 보다는 자기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또는 다른 평범한 성도들에게 시험이 될 수도 있었음이 우려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도모한다는 바울의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높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받고 자신은 오직 사도적 봉사를 통해서만 인정받기를 바랐다.

성 경: [고후12:7]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자고(自高)하지 않게 - 바울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엄청난 계시를 경험했다. 그에게만 주어진 이 특수한 은총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그런식으로 실족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을 통해 바을 자신이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속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 육체에 가시 - 이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가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콜롸스'(*)는 '가시'라는 말 외에 '파편', '말뚝'등의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이 가시를 육체에 지닌다고 할 때 이것을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자로 보거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Calvin).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갈 4:13-15)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마 17:14-18;행 9:9;갈 4:14). 이 밖에 참고로 바울이 '복음을 위한 유대인 동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Menoud)와 '언어의 장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로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첫 인상이 나쁘고(갈 4:13) 외모나 언변이 보잘것 없다는 것을(10:1, 9-11;11:6)언급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견해들이 많으나 모든 것이 추측에 의한 진술들이다.

⭕ 사단의 사자 - 이렇게까지 표현한 데에는 바울이 그 '가시'로 인하여 당한 고통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해 사용됨이 나타난다.

성 경: [고후12:8]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세 번'이라는 숫자는 일정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자적 의미의 세 번을 뜻할 수 있다(막 14:32-42).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주께'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헬라어 '호 퀴리오스'(*)를, 하나님을 지칭할 때 관사없이 단순히 '퀴리오스'(*)를 사용했는데 본 구절에서는 전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기도한 것은 질고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사 53:4) 구체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거론하여 기도했음을 암시한다.

성 경: [고후12:9]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이르시기를 - 이에 해당하는 '에이레겐'(*)은 최종 판결문에 쓰이는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상당히 선언적이고 종결적이다.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주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으로 나타난다.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매우 친절한 거절'이라고 해석한다(Bengel).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만족해야 했다. 향편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은혜'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본 구절에서의 '은혜'는 그가 사도가 되고 또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매개(媒介)로 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헤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머물게 - 여기서 '머물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노세'(*)의 의미는 '장막에 확고히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하는 적대자들은 결국 주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된다.

성 경: [고후12:10]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 그리스도를 위하여...강함이니라 -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강해지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는 감추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가 영광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영광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도록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의 결과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약하고 비천(卑賤)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던 것이다.

성 경: [고후12:11]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사도의 표]

⭕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 이제 바울은 그의 어리석은 자랑(1절)을 끝맺음하면서 자기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결국 고린도 교인들의 침묵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적대자들이 여러 가지로 자랑을 하고, 상대적으로 바울을 비난했을 때,당연히 바울을 옹호했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했으므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었다.

⭕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하여 "사실 여러분은 나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로 되어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어리석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스스로를 자랑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먼저 바울을 인정했어야 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해주는 산 증거였다(고전 3:6, 10;4:3, 4, 15). 그러나 그들이 사실을 망각하여, 당당하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한 거짓 사도들(11:20)에게 바울이 보잘 것 없고(11:7-11) 언변이 모자라는 자임을(10:1, 10;11:6) 침묵을 통해 그들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 아무것도 아니나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 '아무것도 아니나'란 표현은 혹 적대자들의 비난을 인정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에서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그런 존재로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사도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11:5 주석 참조).

성 경: [고후12:12]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사도의 표]

⭕ 사도의 표 - 이는 사람이나 어떤 인간의 권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도로서의 초자연적인 자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행위도 포함된다. 바울은 이전에 이미 몇 달 동안 적대자들의 훼방을 참으면서 고린도 지역에 선교(宣敎)함으로써 사도된 증거를 남겼다(행 18:6).

⭕ 참음 - 이것은 육체적인 피곤함과 외부로부터 오는 극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내력을 가리킨다(6:4-6).

⭕ 표적과 기사와 능력 - 이것들은 각각 다른 유형의 능력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된 능력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표적'은 복음을 확증하는 능력이며, '기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는 능력이고, '능력'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예수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행 2:22, 43). 이는 바울의 사도직을 더욱 확증해준다.

성 경: [고후12:13]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사도의 표]

⭕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 바울은 사도직에 관한 논의에서 사도직의 권리에로 그 초점을 옮겨가고 있는데, 이는 부드러운 풍자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독특한 표현법이다(11:5-12;고전 9:1-18). 그리고 이 풍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11:9). 바울은 사도에게 요구되는 모든 자격을 구비했으나(1-4절, 12절) 복음 전도자에게 부여되는 재정 지원에 대한 권리는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아마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긴 오해였을 것이다. 하나는 바울이 재정적 권리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혹시 정당한 사도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도록 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만은 받지 않음으로써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이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미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으리라는 추측이다. 바울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재정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바울의 불공평한 사랑의 표현으로 오해되었기에 바울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성 경: [고후12:19]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염려]

⭕ 우리를...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 10장에서부터 본장에 이르도록 바울이 여러 모로 자신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적대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말한 것이 혹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자기 변호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결코 그는 배심원들 앞에 선 초라한 피고처럼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 이 표현은 2, 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는 말보다 더 강조적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로 자신의 결백성을 증거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임을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입증해 주실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 바울이 때로는 오해롤 받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교회의 덕 세우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바울이 자신을 변호한 것처럼 보인 것도 바울 자신에 대한 오해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오해로 이어겨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설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한 데서 비롯되었다.

성 경: [고후12:20]

주제1: [바울의 환상과 육체의 가시]

주제2: [바울의 염려]

⭕ 나의 원하는 것...너희의 원치 않는 것 - 만약 바울이 사전에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와 잘못된 가르침과 소문에 의해 오도된 상태를 바로잡지 않고 그들을 대면한다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피차 기대에 어긋난 상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결국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기의 개인적인 오해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가르침에서 떠나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 다툼 - 이느 경쟁이나 불화를 뜻하는데 다른 사도를 매장(埋葬)시키면서 자기를 높이려는 거짓 사도들의 영향이 원인일 수 있다.

⭕ 시기 - 이는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지향하는 그릇된 경쟁심에 근거한 미움의 감정이다(갈 5:20).

⭕ 분냄 - 이는 이성없는 짐승과 같이 일시적인 흥분으로 분노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 사도들에 의해 고린도 교회가 미친 자들처럼 절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당짓는 것 - 개인적인 이기심의 발로로, 편협한 당파심으로 파벌을 조성하고 음모 꾸미는 것을 뜻한다. 당파에 대한 문제는 이미 첫번째 서신에서 언급되었는데(고전 3:4) 이는 다툼, 시기, 그리고 분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전 3:3).

⭕ 중상함과 수근수근 하는 것 - 이 말은 남을 욕하고 험담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당파로 인해 고린도 교회내의 사랑이 식어졌음을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 거만한 - 이는 자신만이 최고라고 하는 우월 의식으로 당파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서로 자기의 당이 옳다고 주장함을 지적한 표현이다.

⭕ 어지러운 것 - 공동 번역에는 '난동을 부리는' 것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모임에서 조차 보기 힘든 폭력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이는 아마 자기가 속한 왕이 그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 경: [고후13:1]

주제1: [마지막 경고와 축복 기도]

주제2: [마지막 경고]

⭕ 두 세 증인 - 이 표현은 특별히 어떤 인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율법이 정한 바 범죄자에 대한 재판 시 두 세 증인의 증거가 필요한 것처럼(신 19:15), 바울이 전통적인 율법에 따라 합법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엄격하게 시행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경고를 할 때 그의 심중에 이미 처벌에 대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고 본문의 경고도 그것을 위한 절차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런 처벌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미리 각성하여 회개함으로써 서로 웃는 낯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바람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바울은 이제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성 경: [고후13:4]

주제1: [마지막 경고와 축복 기도]

주제2: [마지막 경고]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하나님의 능력으로 - 약함이 곧 강함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역설적 진술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 이시지만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약함을 나타내셨다. 정확하게 표현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약함을 선택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함이 결코 육체적 정선적 나약함이나 무기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약함은 자신을 낮추어서 분노하지 않고 복수하지 않는 약함이며 하나님께 복종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약함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약함은 그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부활의 승리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우리도...약하나...살리라 - 그리스도가 약함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으로 능력을 나타내었던 것처럼 바울도 그리스도의 약함과 강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강함'을 '살아남'의 개념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약함을 통해 가장 강한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름을 의미한다. 따라서 약한 가운데서 나타나는 능력의 최절정은 부활 생명인 것이다.

성 경: [고후13:8]

주제1: [마지막 경고와 축복 기도]

주제2: [마지막 경고]

⭕ 진리를...위할 뿐이니 - 여기서 '진리'(*,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복음'을 뜻한다고 본다(Harris). 그리고 불트만(Bultmann)의 해석대로 '다른 복음'에 반대되는 참된 교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도 타당성이 있다. 바울은 사실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끝내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리'가 자신의 명예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甘受)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격없는 사도라는 혹평을 받고 버림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바울이었다.

성 경: [고후13:11]

주제1: [마지막 경고와 축복 기도]

주제2: [격려와 인사]

⭕ 형제들아 -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부를 때에 이런 칭호를 사용한다(1:8;8:1). 바울에게 있어 고린도 교인들은 여전히 '형제들'이며 장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 기뻐하라 - 이 말은 헬라어법에 따른 일반적인 인사말로 '안녕히 계십시오' 정도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체험하라'는 온전한 신앙에로의 초대로 볼 수도 있다. 공동번역은 전자로 해석하고 있으나 뒤에 이어서 나오는 다른 명령어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후자의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 온전케 되며 - 고린도 교인들은 정말 온전케 되어야 한다. 환자의 몸이 건강하게 회복되듯이 그들은 무질서와 방탕함에서 벗어나서 다시금 영성(靈性)을 회복하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 위로 받으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이스데'(*)는 '격려하다', '위로하다', '탄원하다', '권면하다' 등의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공동번역은 '내 권고를 귀담아 들으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가능한 해석이다. 한편 좀 다른 차원에서 이 말은 '서로 서로 격려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다툼'과 '분냄', '당짓는 것', '중상'등과 같은 요소들을 모두 갖춘 그들로서는 사랑을 회복하여 더욱 '서로 격려함'의 미덕이 필요한 것이다(12:20).

⭕ 마음을 같이 하여 - 이는 '동일한 생각과 사상을 지니라'는 의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의 복음',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하나님'이 라는 사상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화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있음으로써 거짓 사도들의 미혹에 속지 않으며 분열하지 않을 것이다.

⭕ 평안할지어다 - 칼빈(Calvin)은 이 말을 '갈은 마음'을 가진 결과라고 보고 있다(롬 12:18;살전 5:13).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표현은 바울이 대부분의 서신서를 끝맺으면서 평강(평안)을 비는 인사말에 쓰는 상투적인 끝맺음에도 해당된다.

⭕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 -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신약성경에서 많이 발견된다(롬 15:33;16:20;빌 4:9;살전 5:23;살후 3:16;히 13:20). 그리고 바레트(Barrett)에 의하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 중에서 본 서신에만 유일하게 언급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만이 고린도 교인들을 하나로 화목하게 하고 온전하게 할 것이다.

⭕ 거룩하게 입맞춤 - 입맞춤은 원래 고대 근동에서 행해지던 인사의 한 형식이었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서는 여기에다 성(聖)스런 의미를 부여했다(롬 16:16;벧전 5:14).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에서는 '입맞춤'이 제의적 의미까지 지녔다는 것이다(Barrett). 입맞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고 한 가족으로 연합함을 뜻한다. 그뿐 아니라 주의 만찬이 있기 전에 상호간의 용서와 화해의 표시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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