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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주석

성 경: [갈1:1]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머리말]

⭕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이암은 것도 아니요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수단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처럼 자신의 사도권을 편지의 서두에서 강조하는 것은 당시 바울이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다는 이유를 들어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로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심하게 미혹(迷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바울은 실제로 예수의 열 한 사도들처럼 예수의 지상 사역을 목격하거나 맛디아처럼 공식적으로 선출되지 않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였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소명을 받았으므로 조금도 사도의 자격에 부족한 것이없었다(행 9:1-17;26:14-18).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고전 4:1-5 주제 강해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인식과 고린도 교회의 오해'를 참조하라.

⭕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은 '알라'(*,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어 바울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사도권의 기원을 언급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하였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전제하였음을 보여준다.

⭕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起源)이 부활하신 주님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더욱 그의 논지를 분명히 한다. 주의 부활은 당시 초대 교회성도들의 신앙의 근거요 '다메섹의 경험'(행 9:1-18)을 통해서 회심한 바울 자신의 신앙의 근거였다(Longenecker).

⭕ 사도된 바울 - '아포스톨로스'(*, '사도')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사도 바울 자신만이 유일한 사도인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예수의 열두제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도'라는 칭호는 사용되었다. 원래 '아포스톨로스'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이나 단체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표자를 의미했으나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Boice). 한편 초대 교회는 사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행 1:21-26). (1)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과 부활하신 주를 목격하고, (2)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 사역자로 택함받은 자가 그것이다.

성 경: [갈1:2]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머리말]

⭕ 함께 있는 모든 형제 - 바울은 보통 그의 서신서의 서두에서 인사말을 할 때에 동역자들의 이름을 밝히지만(고전 1:1;고후 1:1;빌 1:1;골 1:1 등), 단지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경우도 종종 있다(살전 1:4). 여기서 '형제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1) 혹자는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의 무리라고 한다(Lenski). (2) 혹자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 중에 있는 선교단 전체를 의미한다고 한다(R.E. Howard). (3) 혹자는 바울을 지지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4) 혹자는 이 편지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남쪽 갈라디아에 보내는 것이라고 보고 '형제들'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Longenecker).(5) 혹자는 이 편지가 고린도에서 북쪽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라면 고린도에 선교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을 통틀어 가리킨다고 본다(Hendricksen). 위의 견해들 중 (4),(5)번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 다른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수신자에 대한 칭찬과 존경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 그의 불편한 심기(心氣)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교회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교회냐 하는 문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1차 전도 여행 때(A.D. 47-48) 복음을 전했던 곳으로서 바울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들었던 교회들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곁길로 가고 있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해 본서를 쓰고 있다.

성 경: [갈1:3]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머리말]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 파트로스)로 부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주'(*,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붙여 쓰고 있다. 이 두 칭호는 사도 바울의 신앙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히브리어의 '아도나이'(*)와 같은 뜻으로 70인역에서는 '야웨'(*)를 읽을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예수의 호칭 가운데 하나인 '주'의 헬라어 '퀴리오스'는 구약의 '야웨'와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상 동일함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주'로 섬김으로써 유일한 믿음의 대상(행 5:14;9:42;11:24)으로 여겼으며 또한 그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분으로(행 7:59, 60:고후 12:8) 믿었다.

⭕ 은혜와 평강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에게 자유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게속적인 선물을 뜻하며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의 '샬롬'(*)으로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이루어진 평화를 뜻한다.

성 경: [갈1:4]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머리말]

⭕ 이 악한 세대에서 - '세대'(*, 아이온)의 시간적 개념은 현재적인 시점과다가오는 시점을 포함한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악한 세대'는 '다가오는 세대' 즉 영원한 축복의 세대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 세대'를 의미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기준으로 이전 시대를 가리켜 '이 세대'(*, 하올람 하제)라 칭하였고 메시야가 도래한 이후의 시대를 '올 세대'(*, 하올람 합바)라고 하였다. 결국 '세대'에 대한 신약의 개념은 구약에서 유래(由來)된 것이다. 바울은 본절에서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 세대'를 언급하면서 '악한'(*, 포네루)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여 '이 세대'가 갖는 특성을 강조하였다(Longenecker).

⭕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돈토스 헤아우톤'(*)은 앞 구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형용사절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는 예를 다른 서신들의 서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있는 오류가 독특하였고, 따라서 바울이 이를 시정해 주기 위해 본 구절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Mare). 즉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시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외에 다른 것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율법을 섬긴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시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임을 경고한 것이다.

성 경: [갈1:5]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머리말]

⭕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는 흔히 인사말 뒤에 나오는 부드러운 송영(頌詠)의 의미라기보다는 롬 1:25절에 나타나는 송영과같이 하나님과 아들 예수에 대한 헌신과 충성다짐하는 의도를 지닌다.

⭕ 아멘 - 헬라어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에서 유래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아멘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나 서신서의 결미어로 사용되었다(롬16:27;빌 4:20 등). 본절에서 '아멘'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영광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악한 세대'의 일시적이며 덧없는 속성과 선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성 경: [갈1:6]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

⭕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 '부르신 이'는 3절에 나오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며(엡 1:3-5;벧전 1:2) 또한 계획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분이시다(고전 1:9). 바울은 이처럼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분이 삼위 중에 제일 위격인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번 강조했다(15절;롬 8:30;9:24;고전 7:15, 19;살전 2:12 등).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시는 것은 명백한 계획으로 되었고 그 계획은 완전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갖는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1)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케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고전1:9). (2) 성도들로 하여금 부정한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살전 4:7). (3) 평화를 위하여 부르셨다(고전 7:15;골 3:15). (4)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서 부르셨다(살전 2:12). (5)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얻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다(살후 2:13). 이와 같이 성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구원을 얻게하셨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는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자들이 있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거짓된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을 빙자(憑藉)하여 율법의 교훈들을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같이 속히 떠나 - '이같이'(*, 후토스)라는 말속에는 바울의 깊은 탄식과 안타까움이 있으며 '속히'(*, 타케오스)라는 표현 속에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상황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복음을 좇은 것도 이상한데, 상상외로 빠르게 복음을 떠나는 모습들을 보았을때 더욱 의아해 하고, 안타까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유대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한 삶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진리를 버리고 구원에서 떠나는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성 경: [갈1:7]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

⭕ 다른 복음은 없나니 - '다른'(*, 알로)은 6절에 사용된 '다른'(*, 헤테론)과 차이가 있다. 즉 '알로'는 많은 것들이 있는 가운데 다른 것을 지칭하고,'헤테론'은 단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가리킨다(TDNT). 이렇게 볼 때 본절에 '헤테론'대신 '알로'가 사용된 것은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수 있다. 한편 6절의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라 왜곡된 복음을 의미한다(Cole). 왜곡되어 그릇된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 너희를 요란케 하여 - 헬라어 '타랏손테스'(*)는 문자적으로 '소란케 하는 자들'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 이단어는 행17:8에서 바울을 시기하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던 일에 사용되기도 했다.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소란케 하는 내용은 (1) 복음을 변질시키며, (2) 교회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성 경: [갈1:8]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

⭕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의 율법을 강조하면서 천사에 대해서도 가르쳤는지 모른다(Cole).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천사를 율법의 중보자(仲保者)로 생각했다. 특히 이러한 사상은 후기 유대교의 이단들에게서 부각되었다. 아무튼 바울은 그릇된 사상을 가지고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것은 도무지 용납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설명한다.

성 경: [갈1:9]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

⭕ 누구든지...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8절에 이어 저주를 반복한다. '저주'의 헬라어 '아나데마'(*)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우상이 파멸되는 것과 갈은 저주를 뜻한다(신 7:26). 바울은 이 단어를 같은 의미를 가진 '카타라'(*)와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카타라'는 3:10, 13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았던 저주는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저주를 대신 지신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은 저주를 부인하고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려고 하는자는 우상의 파괴와 같은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누구든지'라는 말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자들'을 의미하는바 앞절의 '어떤 사람들'(7절),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8절), 심지어는 사도 바울 자신까지 포함하는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否認)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저주를 받을 것임을 바울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성 경: [갈1:10]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오직 하나밖에 없는 복음]

⭕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적인 배경을 갖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한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율법의 요구들을 포기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얻으려는 인간적 야심을 결코 갖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종'(*, 둘로스)은 한 주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였으나 이제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복종한다.

성 경: [갈1:11]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형제들아 - 헬라어 '아델포스'(*)가 신약성경에서는 '같은 조상을 가진 사람'(행 3:22;롬 9:3), '믿음으로 연합한 가족'(마 23:8;롬 1:13). '그리스도의동역자'(고후 1:1)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포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참된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여 이 말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의 '뜻'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고 다만 '사람을 따라'(*, 카타 안드로폰)로 되어있다. 그러나 문맥상 4절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카타 토 델레마 투데우)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사람의 뜻을 따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처럼 바울은 반대되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의 전승이나 인위적인 교육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갈1:12]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에서 유대교의 사도로 일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사도의 개념은 산헤드린이나 여제사장 등 높은 직위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명령을 받아 임무를 완수하는 자들을 칭하기도 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향할 때에 그의 임무는 이러한 성격의 것이었다(행 9:2). 그러나 바울 사도는 지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이전에 사람들의 명령에 따라 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한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바울은 반복적으로 부정어를 사용하여 사도권의 근거를 피력하다가 이제 접속사 '알라'(*, '그러나')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전한 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예수와 함께하는 삶을 통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사도적 권위에 도전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주님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사도의 사명을 받았다(행 9:4-26). 또한 열 두 제자들이 비록 바울보다 먼저사도가 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성령에 대한 약속(요 14:16;16:13)이 오순절 사건으로 성취된 이후에야 비로소 사도가 되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아 비로소 사도로서 활약했듯이 바울은 다메섹의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성 경: [갈1:13]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유대교에 있을때에 행한 일 - '행한'의 헬라어 '아나스트로펜'(*)은 역사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일들과 근본적인 삶의 태도와 방식을 포함한다(Huxtable). 바울이 여기서 '유대교'(*, 유다이스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비록 바울이 이전에 유대교에 속하여 모세 율법을 삶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지만, 유대교가 단지 '인간 종교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제 유대교에서 벗어나 객관적 입장에서 자신이 과거에 유대교를 위해 일했던 사실을 회상(回想)하고 있다.

⭕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있어서 가히 광신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편견과 교만으로 교회를 핍박했다. 본절에서 '하나님의 교회'(*, 엑클레시아 투 데우)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1)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2) 구약 시대에는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아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참 이스라엘로 전이 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되었다.

성 경: [갈1:14]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 바울이 과거에 유대교를 신봉했던 정도를 나타내는데, '지나치게'의 헬라어 '프로에코프톤'(*)은 '길을 밝히다', '숲에서 앞서서 길을 개척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Robertson). 유대교의 대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뛰어난 제자였고 유대교에 속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나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유대교에 대해 열심이었던 바울은 율법과 랍비들의 전승에서 해방되어 복음으로 말미암은 완전한 자유를 선포하게 되었다. 만약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자가 되지 못했다면 할례와 율법을 돌아보는 자(행 15:5)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12절) 그 높은 율법의 벽을 훌쩍 넘어설 수 있었다.

⭕ 내 조상의 유전 - 유대인의 율법은 두 가지 형식을 취했는데 하나는 정언적(categorical) 또는 절대적(absolute)이며 또 하나는 결의법 또는 판례법 형식이다. 전자는 십계명과 같이 예외가 없는 지상 명령의 성격을 띤 것으로 운율을 가지고 있어 예배시에 낭송되거나 암송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반면에 후자는 실제 생활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관습법과 같은 것으로 본절의 '유전'(tradition)은 후자에 가깝다. 랍비들은 613개 조항의 법 조문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전자를 실생활에 확대 적용하여 세분화(細分化)한 것이다(Lenski). 결국 '유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만든 유전의 울타리에 갇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다.

성 경: [갈1:15]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 '택정하시고'의 헬라어 '아포리사스'(*)는 '어떤 경계로부터 떨어지게 한다'는 뜻으로서 어떤 특정한 직분이나 사역에 관련하여 성별(性別)됨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2:12;행 19:9).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부르심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사 49:1;램 1:5). 바울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과 예정을 선지자나 사도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된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롬 9:11).

성 경: [갈1:16]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때에 - 예수께서 바울의 영혼과 마음속에 내적 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냈음을 말한다. 바울은 내적 계시를 통하여 예수가 누구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본절은 또한 역사적으로 다메섹 도상의 체험(행 9:1-9)을 시사하며 아울러 바울이 성령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Chrysostom, Huxtable). 이렇듯 바울이 내적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말씀을 소유한 것은 자신의 이해를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이방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갈1:17]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직'(*, 알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구태여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16절)을 언급하고 있는것도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아라비아'는 매우 광범위한 지역이기 때문에 바울이 갔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하개 알수 없다. 사실 다메섹도 아라비아에 속한 곳이므로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으로 갔으리라 추측된다(Cole, Huxtable). 혹자는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여 이곳을 시내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foot). 그러나 이 견해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 의미상 '아라비아'는 예루살렘과 상관없는 장소이며 또한 바울 자신이 개인적으로 예수의 계시를 체험하고 이해한 장소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그의 삶과 가치관이 변화되었지만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체계화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준비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 기도하신 것과 유사하다. 바울은 광야에서 혈육과 분리되고,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 즉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사역을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을 가졌다.

성 경: [갈1:18]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그 후 삼 년 만에 -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바울이 회심하고 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회심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oice, Huxtable,Lenski).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바를 만나기 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9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장에서 바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때 '아라비아로 간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묵이 바울의 아라비아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며, 그 반면에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것이다.

⭕ 게바를 심방하려고 - '심방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9: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1)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양자가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아니한 자신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5일 동안 머무르며 게바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그때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과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설명하였을 것이다.

성 경: [갈1:19]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주의 형제 야고보 -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마 10: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것을 분명히한다. 예수의 선교 초기에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 여겼다(막 3:21;요 7:5).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며(행 1:14)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2:9, 12;행12:17;21:18 등).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지도자인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성 경: [갈1:20]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 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진정한 사도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지난 날에 그들을 핍박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멀리하고 복음에서 떠나지 말라고 엄숙하게 권고하고 있다.

성 경: [갈1:21]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행 9:30) 갔다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수리아 지방으로 갔다(행 11:25,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 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수리아는 팔레스틴 북부 지역으로 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2)또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 경: [갈1:22]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유대에...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얼굴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프로소포'(*)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8장에 나타난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구체적으로 아는사람은 예루살렘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구분짓기 위함인 것 같다(Cole). 또한 이러한 표현은 살전 2:14의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용어로 보인다(Longenecker). 그러므로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교회로 모이는 것을 시사한다거나, 유대 지역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의 형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편 '교회'를 복수인 '엑클레시아이스'(*)로 사용하는 것은 단지 유대 지역에있는 교회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교회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행 9:30).

성 경: [갈1:23]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 '지금'(*, 뉜)은 현재 사실을 과거 사실과 대조하여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바울로부터 직접 핍박을 받았던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되고도 남았다.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이 변화된 바울을 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다(Ernst Bammel).

성 경: [갈1:24]

주제1: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기원]

⭕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돌리니라 - 본절의 이면(裏面)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메시지를 부정하면서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 모습과 바울의 초기 선교 사역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인 사 49:3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Longenecker).

성 경: [갈2:1]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첫번째 방문은 그가 회심한지 삼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행 9:26), 두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행 11:29,30), 세번째 방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러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행 15:1 이하).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차 방문인지 삼차 방문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라진다. 먼저 두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Bruce, Calvin)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행 15장의 세번째 방문은 공적 회의에참석한 것이지만, 2절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를 만났으므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행 15장에는 디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절에는 디도와 바나바가 동행(同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구절의 방문은 세번째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본절의 '다시'를 두번째 방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1:18에 기록된 방문이 첫번째 방문이라면 문맥상 본 구절의 방문이 두번째 방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진다. 다음으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Berkhof, Eerdman, Findlay, Robertson). (1) 행 15장과 본장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인데, 두곳 모두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다루고 있다. (2) 행15장에서 지도자들간의 연합을(행 15:8,9) 강조하고 있는데, 본장에서도 동일하게 연합을 서술하고 있다(9절). (3) 행 15장이나 본장이 모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주장하고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본절이 말하는 바울의 방문이 세번째 방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공의회의 연대를 A.D. 49년경으로 보고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연대를 추정하면 1차는 A.D. 35년, 2차는 A.D. 46년(행11:30;12:25), 3차 방문은 A.D. 49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만일 본장의 방문을 2차 방문과 연결시킨다면 바울의 1차 방문은 A.D. 46년에서 14년 전인 A.D. 32년의 되며 또한 그가 회심한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A.D. 29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때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이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2) 두번째 방문을 주장하는 자들은 디도에 대한 언급이 행15장에 없다는 이유로 세번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디도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락되어 있다.(3) 바울이 두번째 방문을 생략한 것은 무슨 속임수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는 본장에서 다른 주제,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취급한 두번째 방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4) '다시'(*, 팔린)는 두번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요 18:27에서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두번째'를 의미하는 헬라어 '듀테론'(*)을 쓰지 않고 '팔린'을 사용한 것은 단지 방문의 반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 바나바 - 그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행 11:22).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바'로 불렀다(행 4:36).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소(행 11:24) 초대 교회의 헌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바울의 체험을 변호하며 함께 사역하였으나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결별(訣別)하게 되었다(행 15:36-41).

⭕ 디도 - 그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이다(고후 8;23;12:18). 본절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등장하는 그는 바울이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 갔다는 것이다(딤후 4:10).

성 경: [갈2:2]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계시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아포칼립신'(*)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떠한 인간적인 동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한편 행 13장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을 위해 파송되는과정이 안디옥 교회의 결정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이 교회의 결정에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본절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선교 사역의 동기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결정 배후(背後)에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Hendriksen)

⭕ 달음질하는 것 - 바울은 개종 이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당시의 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어 묘사하였다. 그의 달음질은 향방없는 것이 아니라(고전9:26)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향한 것이었다.그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나는 면밀한 계획을 갖기도 하였으며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결국 변하거나 바울의 달음질을 헛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으므로 본절에는 바울 자신이 유대주의자들의 모든 거짓된 것들을 반드시 고치고야 말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갈2:3]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하셨다(창17:10-14).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의 언약적인 의미보다는 종족적이며 문화적인 우월감의 상징으로서 외적인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급기야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조했다. 할례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구약 호크마 창 17:1-14의 주제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창 34:25-31의주제 강해 '할례 실시에 따른 제반 사항'을 참조하라. 한편 '억지로...아니하였으니'의 헬라어 '우데...에낭 카스데'(* ... )는 할례를 주장하는강한 압력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굳건한 의지를 나타낸다. 당시 갈라디아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회유(懷柔)에 말려들어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한 상황에서 바울이 할례받지 않은 디도를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디도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성 경: [갈2:4]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 '거짓 형제'의 헬라어 '프슈다델푸스'(*)는 '프슈데스'(*)와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 '프슈데스'는 '거짓 사도'(고후 11:13),'거짓 선지자'(벧후 2:1)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파레이사크투스'(*,'가만히 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 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바울이 1:11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본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속에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나타낸다.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자들이거나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다(행 15: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에는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은 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고후 11:26;벧후 2:1).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가운데서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 잃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성 경: [갈2:5]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 복종을 요구하던 자는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했던 무리들로 국한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대주의화를 꾀하던 '거짓 형제'들이 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도 바울 일행은 위의 할례를 주장하는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어떤 서방 사본들에서는 '호이스우데'(*, '...한 자들에게 조금도...않다')가 생략되어 본 구절이 '잠시동안만 복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본에 의하면 바울이 잠시 동안만 평화를 위하여 타협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자(Bezae) 사본을 제외한 모든 언셜(Uncial) 사본과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46), 그리고 고대 헬라교부의 번역에서 '호이스 우데'는 생략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장의 문맥상 바울이 거짓 형제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할례는 초대 교회의 최대 논쟁이며 또한 복음에 대한 최대의 도전(挑戰)이었다. 이 논쟁 앞에서 바울이 진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Lenski).

⭕ 복음의 진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알레데이아 투 유앙겔리우'(*)는 본절과 14절에만 나오는 것으로 '결함이 전혀 없는 복음'(Lightfoot) 또는 '진리가 담겨 있고 진리에 속해 있는 복음'(Burton)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복음을 들어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할례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문제에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 경: [갈2:6]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바울은 세 번에 걸쳐 '호이 도쿤데스'(*, '유력한 자들')를 사용하여(2절)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예루살렘의 사도를지칭하였다(9절). 이러한 호칭 후에 곧바로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이 호칭을 풍자적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Cole).

⭕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헬라어 본문에 나와 있는 후치사 '가르'(*)는 선행 구절을 보다 충분하게 설명해 주는 삽입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선행 구절에서 제시된 '외모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어떤 유명한 자들일지라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성 경: [갈2:7]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내가 무할례자에게...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여기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롬 4:9;엡 2:11 등).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Lenski). 그러나 바울은 사역상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복음의 내용은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대표로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있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Lenski, Huxtable). 그러나 전자는 타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와 다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그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행 15:7). 바울 역시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바 있다(행 23:11). 그는 또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행 26:20ff.)보아,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신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 경: [갈2:8]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 - '사도로'의 헬라어 '에이스 아포스톨렌'(*)은 베드로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명확하게 인정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베드로보다 가문이나 학문에서 뛰어난 자로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을 베드로보다 우월한 자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함이 포함되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바울이 이와 같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사도로 세우신 이가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과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동일시함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하고 있다. 두 사도 중에 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또 하나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사역했으나 그들의 사역의 내용은 같은 것이었으며 둘 다 동일한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고전15:9,10) 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도 무할례자이거나 할례자이거나 동일한 것이었다.

성 경: [갈2:9]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기둥같이 여기는 - '기둥'(*, 스튈로이)이라는 표현은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암무딤)이라 하였고 이스라엘의 계약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들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Longenecker).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기둥'에 비유한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는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을 도입해 논리를 펴나가면서 세 사도가 갖는 비중(比重)을 강조하였다.

⭕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적 입장에 서 있었던 사실에 역점을 둔 것이다(행 15장). 먼저 야고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은 1: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냥 '야고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본장의 전체 맥락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다(1:19 주석 참조). 바울이 다른 두 사도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의장으로서의 야고보를 설명하기 위함인 것 같다(Boice). 그러나 다른 사도들의 이름이 뒤에 나왔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 속에서 이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모두 아홉 번에 결쳐 베드로를 언급하는데 일곱번은 '게바'라고 불렀으며(14절;1:18;고전 1:12;3:22;9:5;15:5) 두 번은 '베드로'로 칭하였다(7,8절). 특히 유대주의자들과 논의할 때 게바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없이 설명하려 한 것 같다(Huxtable). 끝으로, 요한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여러 곳에서 함께 등장하며 또한 사역하였다(행 3:1;4:13;8:14 등)

⭕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덱시아스 에도칸 코이노니아스'(*)는 '교제의 오른손을 주었다'라고 직역된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우정을 돈독하게 하고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였다(Longenecker). 본절에 언급된 다섯 사람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즉 야고보와 게바,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에 협력하였다(행 15:25,26).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사적(私的)인 장소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의미보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식 석상에서 결의한 사항을 실행할 때에 함께 협력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손을 잡았다는것을 의미한다(Lenski).

성 경: [갈2:10]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바울의 사도됨의 인정]

⭕ 가난한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에 '톤 프토콘'(*)은 '가난'을 뜻하는 일상 용어로서 돈이나 재산이나 생활 수단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뜻으로 쓰인 단어이다. 신약에서 이 말은 '거지'에게도 사용되었으며 (눅 16:20) 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자들에게 사용되었다(마 19:21;눅 19:8;요 13:29). 당시 가난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주요 대상이었다(마 11:5).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으며 자신을 찾아온 부자들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 19:21) 자신과 제자들이 함께 거하는 공동체 속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준비된 공동궤를 가지고 있었다(요13:29). 사도행전에 와서는 '엔데에스'(*)라는 말이 등장하는데(행 4:34)이는 초대 교회 안의 '가난한 자', '궁핍한 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나누어준 덕분에 살아가는 자들을 뜻한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는 할례와 같이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히 행하여야 되는 임무로 인식되어 있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임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요 13:29), 또한 초대 교회의 출발부터 교회가 감당했던 사명이다(행 24:17).

⭕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 바울은 믿음과 구제 문제를 믿음과 할례 문제처럼 대립시키지 않는다. 바울의 힘써 행하는 구제는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적인 것이 아니다. 본절의 구제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생애 가운데 구제의사건은 여러 번 등장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가 모은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행 11:29,30) 여러 서신서에서 구제에 대하여 강조하였다(행 24;17;롬 15:25-27;고후 8:1-5). 또한 그는 구제에 대한 교훈을 남겼으며(롬12:13;엡4:28;딤전 6:18)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그 일을 위하여 정직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엡 4:28). 이러한 삶의 요구는 선행이 신앙의 살아 있는 증거요(약 2:14-17) 신앙 고백의 진실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요일3:17,18)

성 경: [갈2:11]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게바를 책망함]

⭕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 여기서 베드로의 행위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더욱 뚜렷해진다. (1)'면책하였노라'의 헬라어 '안테스텐'(*)이 문자적으로 '대항하다', '저항하다' 혹은 '반발하다'라는 의미로 베드로의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훼손(毁損)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2) '안텐스텐'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바울이 베드로를 성공적으로 책망했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에 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Lenski). (3) 더욱이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아니고 공개적으로 면책하며 저지했다는 사실로 베드로의 잘못의 심각성이 더해간다(Hendriksen). 이와 같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와는 달리 안디옥에서는 베드로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성도들을 대하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잘못이 너무도 명백하여 견책거리가 되기 때문이다(Robertson).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이, 신자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완전한 동등권을 항상 공격하며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좁고 치우쳐 있는 유대 중심적 신앙관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며(Huxtable) (2) 예루살렘 교회의 그 어떠한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에 대하여 책망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Cole).

성 경: [갈2:12]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게바를 책망함]

⭕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 본 구절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식탁 교제나 성찬을 가리키는 것같다. 이것이 정식 예배였는지 아니면 비공식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과의 식사를 꺼린 사실이 나와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레 11장에 있는 정함과 부정함에 관한 규례를 철저히 지켜왔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준수하려 하였다(민 25장, 31장;단 1:8;토비트 1:1-12;마카베오상 1:62).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는 레 11장의 정결(精潔) 규례에 위배되는것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부연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한 규정들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그 종류가 대단히 많고 다양했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 못지않게 존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로 장로들의 유전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위생상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손으로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15;1-20;막 7:1-23). 위와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이 굳어져왔다.이러한 것은 사마리아인도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요 4:7-9). 따라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죄악된 행동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Hendriksen).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며 삶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해 몇가지 제한 사항을 제시하고 다른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행 15:14-21).

⭕ 저희가 오매...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자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의 동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Hendriksen).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이나 자기 확신에 의해 나온 행동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를 책망했다.

성 경: [갈2:13]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게바를 책망함]

⭕ 남은 유대인들도...외식하므로 -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공적인 위치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尖銳)하게 대립되고 있는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순히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 다른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같은 지도자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근거가 되며 (2) 예루살렘 공의회(A.D.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고 (3)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위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행동의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막 7:1-23).

성 경: [갈2:14]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게바를 책망함]

⭕ 모든 자 앞에서 - 바울은 베드로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다. 이는 (1)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러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잘못을 했으며(2) 공적인 잘못은 사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고(Lenski) (3) 그러한 실수를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Hendriksen).

성 경: [갈2:15]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 본절에서 바울이 '본래 유대인'임을 밝히는 것은 그도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을 지녔음을 보여주어 다른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반감을 줄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Cole).

⭕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이방인들에게 '죄인'(*, 하마르톨로이)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인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유대인의 독선에서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통상적인 언급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권을 자랑하거나 또는 이방인들을 조소하기 위해 '죄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비록 바울이 유대교 내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죄인'으로 표현하였지만 이 말 속에는 매우 반어적(反語的)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된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을 하찮게 여기며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Cole).

성 경: [갈2:16]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 본절에는 법정 용어인 '디카이오스'(*, '의로운')에서 파생된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본절에서도 이 용어가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지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다(롬 3:20). 그러나 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인간의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며 신적 표준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율법'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와 본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의'(*, 디카이오쉬네), '행위'(*, 에르곤) 등과 함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때마다 '믿음'(*, 파스티스)과 관련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된 '노모스'는 모세의 율법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의'를 위해 구축한 규범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유대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거짓된 규범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게 되는 수단일뿐 절대적인 자격이나 요건이 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롬 5:18,19). 죄악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은 생명력이 있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역동적(力動的)인 삶을 살도록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믿음에다가 할례와 같은 율법적이요 외적인 조건을 더 하려고 하였다.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본절은 시 143:2(LXX, 142:2)의 인용이며 아울러 롬 3:20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편의 '파스존'(*, '모든 생명') 대신에 로마서에서는 '파사 사륵스'(*, '모든 육체')를 사용하였고, 로마서와 본절에서는 시편에 없는 '율법의 행위'를 부가(附加)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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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143:2 +------------------------------------------------------

| | 우 디카이오데세타이 에노피운 수 파스 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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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생명이 당신 앞에 의롭다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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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3:20 | 엑스 에르곤 노무 우 디카이오데세타이 파사 사륵스 에노피운 |

| | 아우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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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법의 행위로 모든 육체가 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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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절 | 우 디카이우타이 안드로포스 엑스 에르곤 노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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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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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갈2:17]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예수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전파하는 것과 미래 세계에 대한 거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롬 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유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회심을 독려하는 문구로 해석한다(Cole). 이 견해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고 율법을 폐기했다면 그들은 스스로 이방인과 같이 율법을 도외시하는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보다 저급한 수단의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마저 '죄를 위한 봉사자'(*, 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죄악된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역설이다(R.E. Howard).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다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킬 때 후자가 보다 타당할 것 같다.

성 경: [갈2:18]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 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의 헬라어 '파라바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 '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이단자'를 뜻하며 본절자서는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성 경: [갈2:19]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폐다논'(*)은 다음 절에 나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이 두 표현은 모두 단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고백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든다. 율법은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성 경: [갈2:20]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성 경: [갈2:21]

주제1: [바울의 사도권과 이신득의]

주제2: [이신 득의의 원리]

⭕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린'(*)은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은 '연고없이','이유나 목적이 없이','불필요하게'등의 의미를 지닌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잘못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신 행위이다.

성 경: [갈3:1]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어리석도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에토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것이다(롬 1:14;딤전 6:9;딛 3:3). 본절과 3절에서 두 번에 걸쳐 사용되는 이 단어는 매우 도전적이고 통렬한 어투로 진술되고 있다. 바울은 앞으로 전개될 결론에 대하여 보다 준엄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밝히 보이거늘 - '밝히 보이거늘'의 헬라어 '프로에그라페'(*)는 '공적 선언으로 발표하다' '미리 기록하다' 등의 뜻으로부정 관계형이다. 이는 이미 과거에 편지를 통해서나 직접 방문하여 복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이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선포하였던 복음의 진리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에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전파하였음을 강조한다. 그 의미는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공공 계시판이나 그림과 같이 육안으로 볼수 있게끔 제시했다는 뜻이다. 특히 바울은 본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에스타우로메노스)를 분사 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밝히 보인다'고 하는 것은 그 십자가의 공효(功效)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전 2:2,10). 그 효과의 지속성은 갈라디아 교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의 핵심을 듣고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작용한다.

⭕ 누가 너희를 꾀더냐 - '꾀더냐'의 헬라어 '에바스카넨'(*)은 '거짓된 칭찬이나 음흉한 눈으로 악을 가져오다' 또는 '악한 술책으로 타락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신약에서는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거짓 교사들이 누구냐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에바스카넨'은 '시기하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즉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부러워하여 '너희를 시기 하느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전체적인 문맥이 의도하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Cole).

성 경: [갈3:2]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 '율법'의 헬라어 '노모스'(*)는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24절)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지만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은 오히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양자 택일의 문제를 던진다. 이것은 곧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들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여기서 '들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롬 10:14-17). 또한 베드로는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주장하며 전파하는 자의 소명을 강조한 바 있다(행15:7). '들음'은 전파하는 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행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방편이다.

성 경: [갈3:3]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육체로 마치겠느냐 - '성령'과 '육체'가 또하나의 상대적 개념으로 등장한다. '육체'(*,사륵스)는 본서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할례를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이 내어보이는 인간의 신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6:13) (2) 본절에서와 같이 성령의 하시는 일과 대조를 이루는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두번째 의미로서 육적인 자아(自我)를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가(2:20) 어떻게 다시 그 육체적 자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성숙한 신앙의 열매(5:22, 23)를 맺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며 다시는 율법의 종으로 돌아갈 수 없다(Howard).

성 경: [갈3:4]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괴로움을 - 헬라어 '에파데테'(*)는 '파스코'의 부정 과거 형태이며 '파스코'는 '선한 또는 악한 경험을 하다'라는 뜻이다. 개역 성경은 '악한 경험을 했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으나 NEB는 '영적인 놀라운 일' 즉 영적인 축복들을 의미하는 '선한 경험'으로 번역하였다.'파스코'가 성경에서 주로 '고난당하다', '괴로움을 받다'(마 27:19;막 9:12;눅 22:15;24:46;고전 12:26;빌 1:29;히 2:18;9:26)의 의미로 사용되나, 본절에서 선한 영적 경험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악한 의미에서의 괴로운 경험과 선한 의미에서의 영적 경험이라 해석하는 두 견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악한 경험, 즉 박해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본문이 바울과 바나바가 남갈라디아 지방에서 교회를 세울 때에 받았던 고난을(행13:50;14:2, 5, 19, 22 등) 의미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Lenski, Robertson). 비록 본절의박해가 남갈라디아에서의 박해(행 14장)를 의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울은 지금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받았던 모든 박해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다(Cole). (2) 축복된 영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너희가 그렇게 풍성한 영적 축복들을 받았는데 그것을헛되게 하려느냐?'라는 의미로 본문을 해석한다(Boice).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의 풍성한 능력을 받았다고 말하는 5절과 본문을 연결시킨다. 또한 이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소욕(所欲)을 따라 행하려느냐는 3절과 본문을 연결시킨다. 사실 본절과 긴밀하게 연결된 문맥을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 성령 주심(3절),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 능력행하심(5절)등 긍정적이고 영적인 경험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 과연 헛되냐 - 바울은 여전히 '아니오 헛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수사의문문을 사용한다. '헛되냐'의 헬라어 '에이케'(*)는 '아주 보잘것 없는 무가치한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Lenski). 진정 그들이 믿음에서 떨어져나간 상태에 거하게 된다면 그들을 부른신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의 풍성한 은사와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가졌던 사랑과 수고한 모든 열심이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4:11).

성 경: [갈3:5]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너희에게...행하시는 이 - 본절은 형식상 2절과 유사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몇가지의 차이점을 가진다. (1) 2절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즉 2절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던 근거가 무엇이냐에 관심을 두는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기준에 따라서 성령을 주시느냐는 물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2) 2절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던 과거 사실에 역점을 두어 과거 시제로 표현했지만 본절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 특히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고'(*, 에피코레곤), '능력을 행하시는'(*, 에네르곤) 두사역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도 사역하셨지만 지금도 사역하시는 현재적인 의미를 보다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지속적(持續的) 의미를 나타내는 두개의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회심할 때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메이스'(*)는 '에네르게오'(*, '행하시는')와 연결되어 현재적 의미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질 수 있다는 제한성을 보여준다.

⭕ 성령을 주시고 - 바울 서신에서는 보통 '주다'라는 의미로 '디도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전 12:7;고후 1:22).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용어인 '디도미'를 사용하지 않고 '에피코레곤'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21절에서 '율법을 주셨다'는 의미로 사용된 '디도미'와 구별하기 위함인 것 같다. 또한 '에피코레곤'은 '값없이 제공하다' 또는 '지원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 '에피코레곤'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보혜사 성령이 율법과는 달리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갈3:6]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본절은 바울이 4:7까지 믿음과 율법을 번갈아가며 전개하고 있는 순차적(順次的)인 논증의 첫번째 항목이다(Boice).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전제하고 구약의 내용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의로 정하셨다 -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의'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로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롬 4:10). 바울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논쟁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 디카이오쉬네)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1) '법률적인 칭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Boice). 아브라함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인정받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의' 역시 선언적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다. (2) 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그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E.D. Burton, Cole). 창 15:6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것이 하나님께 의로 인정되었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두 견해들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롭다하시는 이는 바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의' 역시 신약 백성이 우리의 의와 같이 대속하신 구세주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며 단지 아브라함은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선취(先就)된 '의'일 뿐이다(고후 5:21). 시간상으로 아브라함의 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인정되었으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기 이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기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할례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갈3:7]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 바울이 할례받지 아니한 믿음의 무리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바울이 '아들'(*, 휘오스)이라고 한 것은 '아이'(*, 테크논)라는 말과 의미상 차이가 크다. '아들'은 일차적으로 육신을 통하여 태어난 자손들을 의미하지만,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조직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가계(家系)와 상관없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마 12:27에서는 종파의 일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절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들을 동격으로 취급하기 위함이다(Lenski). 그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로서 아브라함에게 부여된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9절;롬 4:13;엡 3:6)

성 경: [갈3:8]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정하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롬 3:21). 하나님의 작정은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세워져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것이다(엡 1:11). 따라서 한번 작정된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거나 죄인의 반항에 의하여 실패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사 46:10). 하나님의 포괄적인 작정은 아브라함의 구원 계획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셨다.

⭕ 성경이 미리 알고 - 보통 구약을 인용할 때에는 '말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레게이'(*)나 '에이페'(*)등이 사용되나 본절에서는 '알다'(*,프로이두사)라는 보다 의인화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인법(擬人法)은 22절의 '다두었느니라'는 단어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성경을 의인화시키는 것은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더 밀접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며, 또한 두 개의 주어, 곧 하나님과의 말씀이 동격에 있음을 보여준다.

⭕ 복음을 전하되 - 아브라함에게 작정되고 전하여진 복음은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주된 내용은 '너를 통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으리라'(창18:18;22:18)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며 그것이 곧 복음의 내용임을 보여준다.

성 경: [갈3:9]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성령과 성경의 증거]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일반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복'(*, 베라카)은 말로써 부모가 자녀에게 빌어주는 것으로, '건강', '장수', '재산' 등 다분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지만(신 28:6), 본절에서의 '복'(*, 율로기아)은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구원을 의미한다(벧전 3:9). '복'은 어느 개인이나 특정한 민족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방 민족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롬 4:24)

성 경: [갈3:10]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저주 아래 있는 자라 -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레 19:2)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7:24).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롬 4:15;5:16, 18).

성 경: [갈3:11]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바울은 이제보다 긍적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으로 칭의에 접근한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 본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같이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필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Boice).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할 것이다.

성 경: [갈3:12]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한다.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27:26).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시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이다(딛 3:4,5).

성 경: [갈3:13]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 속량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엑세고라센'(*)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본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사 53:6).

성 경: [갈3:14]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믿음]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2)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고(9절 주석 참조), 성령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다(요 14:16-18;행 1:4). 이처럼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눅 24:49).

성 경: [갈3:15]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 '언약'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주로 '유언이나 유언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나 70인역에서는 몇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분분 '언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말이 '유언'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으나 본절에서 '유언'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유언은 유언자가 죽어야 그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유언이 되려면 하나님의 죽으셔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죽으심을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단어를 '유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바울은 본절에서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견고성(堅固性)을 예로 들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불변성(16절)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이 맺은언약과 큰 차이가 있다. 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정황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계약자들을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주권자로서 기필코 하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히 6:13-15).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의 언약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 경: [갈3:16]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 '자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르마티'(*)는 복수형인 '스페르마신'(*)과 함께 집합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바울이 '오직 하나'라는 강조 문구를 덧붙인 것은 바울이 헬라어를 잘 몰랐다거나 바울 자신이 랍비적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랍비적 배경을가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스페르마티'를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한 예도 있지만(롬 4:16-18;9:6-8), 본 구절에서는 단수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궁극적인 메시야의 축복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Boice).

⭕ 곧 그리스도라 - 바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온다.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언약은 당대의 육신적인 자손들이나 율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본절을 궤변적인 랍비적 논쟁 방법에 의한 삽입구로 간주하려고 한다(Howard, Cole).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주장하는 바는 약속의 성취는 그리스도에게 집약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성 경: [갈3:17]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 - 이것은 출 12:40에 근거한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은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된다. (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기간으로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히브리어 본문을 기초로 한 번역본들에서 나타나고있다(Boice). (2)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헬라어사본(LXX)에 근거한 견해이다(Hendriksen). (3) 아브라함의 언약이 확정된 야곱때로부터 시내산 율법을 주신 때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2)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 와서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지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는 사실이다(Lenski, Howard, Cole).

성 경: [갈3:18]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킴으로 율법이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17절)을 강조한다. 율법과 약속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이유는 율법이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행함은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저주를 초래할 뿐이다. 한편 '은혜로 주신'의 헬라어 '케카리스타이'(*)는 '카리스'(*, '은혜')에서 온 말로 구원이 값없는 은혜임을 보여주며, 이 말이 완료형인 것은 구원의 영원 불변성을 나타낸다(Boice). 또한 '유업'(*, 클레로노미아)이 약속에 의하여 주어졌다는 사실은 구원이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율법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 경: [갈3:19]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지금까지 율법이 약속을 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이제 바울은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한다. 율법의 목적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한다. 공동 번역은 '범법함을 인하여' 대신에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지 않고 '파라바시스'(*, '범함')를 사용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율법의 목적을 논하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에서는 '하마르티아'를 사용했고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에서는 '파라바시스'를 사용하였다. 본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들은'죄'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롬 5:20 주석 참조).

⭕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 율법이 주어질 때 천사가 함께 했다는 암시는 신 3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스데반은 율법을 천사가 전한 것으로 언급한다(행 7:53). 바울은 스데반이 따랐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천사가 중보자가 되었다는 사상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에 의하여, 즉 최소한 천사와 모세에 의하여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Boice).

성 경: [갈3:20]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 본절은 본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들은 견해도 250-300여개 정도로 너무 많이 있어 하나의 견해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수많은 견해들을 세 가지 부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보'(*, 메시테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앞절에서 제시한 중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중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주어졌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보를 내세우지 않고 직접 세우셨다는 것이다(15-18절). (2)'중보'를 모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문맥에 비추어본 해석으로서 앞에서 줄곧 모세 율법에 관해 언급한데다가 본절에서는 정관사 '호'(*)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정관사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꼭 한 개인을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Boice). (3) '중보'를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바울이 딤전 2:5에서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에 관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Jerome,Chrysostom, Cole).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에 비추어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위의 여러 견해들이 일치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중보에 의하여 전달된 반면 약속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는 약속의 직접적인 전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언약 체결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또한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었든지, 천사나 모세가 중보자가 되었든지 간에 율법이 직접 주어지지 아니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바울은 약속이 창15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일방성(一方性)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성 경: [갈3:21]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율법이 약속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율법과 약속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율법과 약속이 서로 대립된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내부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되고 만다. 약속과 율법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필요한 요건이 되었다.

성 경: [갈3:22]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율법과 약속]

⭕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그라페'(*)는 '율법'(*, 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Bruce,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보여준 뒤 본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 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는 중성으로 쓰였는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타락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적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될 자들의 옛 상태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성 경: [갈3:23]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 '매인 바 되고'의 헬라어 '에프루루메다'(*)는 '프루레오'(*)의 미완료 수동태로서 '점진적으로 조여오다'는 의미이며 때로는 '보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시상이 미완료인 것은 매여있던 상태가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갈3:24]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 율법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몽학 선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아이를 돌보는자', '어린아이에게 시중드는 자'라는 의미로 원래 6세에서 16세까지의 아이들을 돌보는 노예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몽학 선생은 가정 교사로서 가정의 예법(禮法)을 가르치기도 하며 아이가 학교에 오고 갈 때에 길을 인도하는 노예로 이해 되기도 하였다. 몽학 선생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교사'(*,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몽학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

성 경: [갈3:25]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믿음이 온 후로는 - 믿음이 오기 전까지(23절) 율법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에 의하여 율법의 임무는 끝났다. 율법으로부터 믿음으로 옮겨지는 역사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표가 성취된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숙한 자녀들을 지배하지 못한다(롬 7:6).

성 경: [갈3:26]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곧 '양자'(*, 휘오데시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1) 죄 아래 놓여 있던 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만드신 자이시며(행 17:28)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시나, 죄 아래 매인 인간들을 이제 죄로 부터 해방되어 회복된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14절).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롬8:14-1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곧 성령의 약속이 성취된 증거이다.

성 경: [갈3:27]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세례를 받은 자 - 본서에서 '세례주다'(*, 밥티조)는 본절에서만 등장한다. 세례는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본절에서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구원의 방편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세례는 믿음을 통해서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외적 의식(儀式)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연합하게 되고 이로써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약속된 성령의 사역으로서 구원의 인치심을 확증한다.

⭕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 '세례받는 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옷 입었느니라'의 헬라어 '엔뒤오'(*)는 일반적으로 '겉옷을 입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나 바울서신에서는 새로운 인격과 연합한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였다(롬13:14).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세상 가운데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세상의 정욕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며(엡 6:11,14) 구원의 옷을 입는 것이다(사 61:10).

성 경: [갈3:28]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하나가 된다. 즉 '믿음'을 공통 분모로 하는 자들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에 상관없이 하나이며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 헤이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교회가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혼란과 분쟁 가운데 빠져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의 독선적인 우월주의(優越主義)를 의식하였을 것이다.

성 경: [갈3:29]

주제1: [율법과 복음]

주제2: [몽학 선생]

⭕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 -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통해서만 유업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유대인이 되려면 먼저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할례를 행하는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율법이 갖는 역할과 의미를 아브라함의 약속과 견주어 설명하고 나서 지금까지의 논쟁을 결론짓는다. 곧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나 인종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主)로 영접한 자를 가리키는 관용구였다.

성 경: [갈4:1]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내가 또 말하노니 - 이것의 헬라어 '레고데'(*)는 바울이 새로운 진술을 시작할때 앞서 언급된 사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할때 일반적으로 사용된 형식이다(롬 15:8; 고전 1:12). 그는 3장 마지막 부분(3:23 - 29절)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하여 비유를 사용하여 계속 설명하고 있다. 즉,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상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변화를 마치 다른 사람의 보호를 받던 유아기로부터 스스로 선택권과 자유를 가지는 성년으로 변화되는 것에 비유한다.

⭕ 어렸을 동안에는 - '어렸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오피스'(*)는 '말을 못하는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네오피스'라는 단어를 기독교 진리의 장성한 분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젖'을 먹어야 하는 연약한 자들을 비유하는데 사용하였다(고전 3:1, 2). 본절에서는 성년과 대조하여 미성년의 상태를 가리킨다. 유대에서는 만 12세까지를 미성년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었으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 경: [갈4:2]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까지 그의 아버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다. 그러나 명확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Lightfoot). 아마도 이들이 성년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재량권(載量權)에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아이들은 매년 3월 17일에 열리는 '리베랄리아'(Liberalia)라는 가족들의 잔치에서 성인이 되었고, 그 아이는 공식적으로 아버지에 의해 인정되는 아들이자 상속자로 받아들여졌다(Boice).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언급하는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는 말은 로마의 관습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바울이 비유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율법의 종된 상태에서 믿음으로 자유자가 되는 것은 그 작정한 때를 따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있음을 선명하게 알 수있다.

⭕ 후견인과 청지기 - 앞에서 바울은 율법을 '파이다고스'에 비유하였고 여기서는 '보호자'(guardians), '어린 아이를 책임지는 자' 등의 뜻을 가진 '후견인'(*, 에피트로푸스)과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청지기'(*, 오이코노무스)에 비유했다. 바울이 몽학선생보다 더구체적이고 법률적인 지위를 가진 직책들을 비유로 사용한 것은 율법 아래 매인 자들의 종속 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비록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율법의 청지기와 후견인에게 매인 자들로서 실제적인 권한은 없고 참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상태에 처한 것과 같았다.

성 경: [갈4:3]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 '초등 학문'의 헬라어 '스토이케이아'(*)는 '차례', '질서', '순위' 등을 의미하는 '스토이코스'(*)에서 유래한 말로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1) 헬라 사회에서 세상을 구성한다고 하는 기본적인 네 요소, 즉 물, 불, 흙, 공기 등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2)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초보적 영들'(elemental spirits)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믿었던 점성술에서의 천체 숭배를 가리킨다(Ambrose, Augustine, Chrysostom). 점성술에 대한 내용은 구약의 유다 왕 므낫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유대인들 중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므낫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별 숭배'때문이라고 믿었다(Cole). 초대 교회 당시에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이 혼합주의적인 신비 종교를 만들면서 '스토이케이아'를 하늘과 땅의 모든 공간에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영과 천사들과 마귀들'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3) 종교적지식의 미숙한 단계 또는 어떤 분야에 있어서의 초보 단계(행 15:10; 골 2:8, 20; 히5:12 등)를 의미한다(Jerome, Tertullian, Calvin, Lightfoot). 본절에서 '스토이케이아'는 (2)와 (3)의 뜻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렇게 볼때 바울이유대인의 율법주의나 천체 숭배 및 그리스도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의식과 사상들을 ' 초등 학문'이라는 독특한 개념 속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9, 10절;롬 8:38). 즉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 이외의 모든 다른 것들을 우상적이며 유치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성 경: [갈4:4]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때가 차매 - '때'에 해당하는 '크로노스'(*)는 2절의 '아버지의 정한때'(*, 프로데스미아)와 연관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작정한 기간이 지났음을 시사한다. 또한 때가 차기 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 율법에 매여 있었던 암담한 상태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한편 NIV는 본문을 '시간이 충만하게 임하였을 때'(When the time had fully come)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함으로 그들이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무기력과 곤고함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바울 서신에서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세가지가 있다. (1) '아포스텔로'(*)는 특별한 임무를 주어 보낸다고 하는 데에 역점을 주고 있다(요 17:18). '사도'(*, 아포스톨로스)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2) '펨포'(*)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다는 의미로 (롬8:3)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의미로 (요 14:26) 쓰였다. 이는 단지 보낸다고하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3) 본절에서 사용된 '엑사포스텔로'(*)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를 보낸 사람이나 장소, 사회적 지위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다(눅 1:53; 행 7:12; 11:22). 이에 본절의 '엑사포스텔로'는 아들이 하나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를 보낸 실존적 공간, 즉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으로 본다(E, Huxtable).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본절에는 바울의 기독론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다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묘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다(빌 2:5, 6: 고 1:15, 16). 반면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즉 '여자에게서'라는 말은 메시야의 계보인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하고(롬 1:3) 따라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13).

⭕ 율법 아래 나게 하신것 - 본 문장 또한 앞 문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조점에 있어서 단지 '사람'으로 오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Longenecker).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삶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마5:17, 18) 죽음으로 율법의 진노를 짊어지셨다(3:13; 빌 2:8).

성 경: [갈4:5]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아들의 명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오데시안'(*)은 '양자됨'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사용하였다. 바울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됨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TDNT).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제도와 율법을 순종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눅 2:21), 유월절 절기를 지키셨으며(눅 2:41; 요 2:13) 그밖의 모세 율법을 지키면서 자라나셨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하나님이 그들들을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주고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8).

성 경: [갈4:6]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아들의 영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영'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영'은 '하나님의 영'(롬 8:14)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약속대로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이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자됨'을 증거한다.

⭕ 아바 아버지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출 4:22; 사 63:16; 렘 3:19). 그러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을때 불경하다고 말한 것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성령의 내주(內主)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고 그 새로워진 관계를 '아바'라고 표현했다(Longenecker). '아바'는 아람어로서 '아버지'를 뜻하며 탈무드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Jeremias). 이는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더욱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말을 사용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것임을 증거한다.

성 경: [갈4:7]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유업을 이을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모스'(*)는'상속자', '후사' 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에서 이말은 '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소유한 자를 의미한다(롬 8:14-17).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의 내적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디아데우)는 본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3:24, 26), '약속으로 말미암아'(3: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3:26)등의 모든 방편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양자됨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상기시키려 하고 있다(Longenecker).

성 경: [갈4:8]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교도로 있을 때의 상태를 지적한다. '하나님이 아닌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우신 데오이스'(*)는 문자적으로 '신이 아닌 자들'(those who bynature are not gods, NIV)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를 '귀신'(고전 10:20) 또는 '신이라 칭하는 자'(고전 8:5)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것들은 제우스, 아폴로 등과 같이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의미한다(E. Huxtable). 이처럼 인간이 만든 형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분명하게 금지하셨다(출20:4; 신 7: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우상의 노예가 되게 마련이다.

성 경: [갈4:9]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 '이제는'(*, 뉜 데)은 8절의 '그 때에는'(*, 토테)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 변화를 설명한다. '알다'의 헬라어 '그노스덴테스'(*)는 '기노스코'(*)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오이다'(*, '사실적으로알다') 등과는 달리 보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앎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은혜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 - 본 구절은 율법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으로 3절에서 언급한 '초등 학문'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약하고'의 헬라어 '아스데네'(*)는 히 7:18에서 율법은 무력하고 빈곤하여서 인간을 대속하고 속량할 능력이 없다. 또한 '천한'의 헬라어 '프토카'(*)는 원래 사람들이 절대적인 궁핍으로 인해 구걸할 수 밖에 없는 '결핍 상태'를 의미한다(TDNT). 본 구절에서 이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초등 학문인 율법은 항상 결핍이 있고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율법이 갖고 있는 초라함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의 초라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다.

성 경: [갈4:10]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있다. 본절과 유사한 문구는 골 2: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이방인 교회속에는 거짓된 외식적 율법에 의하여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지켰던 율법의 규례들은 다음과 같다. (1) '날'(*,헤메라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금식일과 안식일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루만 지키는 절기가 포함된다. (2) '달'(*, 메나스). 매월 초하루에 지키는 월삭(삼상 20:5, 18; 사 66:23)과 달의 반복적 운행과 관련된 절기들,즉 정월로서 추수가 시작되는 아빕월(출 13:4), 2월이며 꽃의 계절인 시브월(왕상6:1), 비의 계절인 7월과 8월, 즉 에다님월(왕상 8:2)과 불월(왕상 6:38)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있어서 달에 대한 절기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월력이 달랐으므로 그들의 문화권에서 혼란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E. Huxtable). (3) '절기'(*, 카이루스).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레 23장)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추가된 나팔절(레23:23 - 25), 수전절(마카비상 4:52 - 59), 부림절(에 9:24 - 32) 등을 말한다. (4)'해'(*, 에니아우투스).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레 25:2 -7)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레 25:8 - 55)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상에서 언급한 종교적 절기들을 충실히 지킨 사실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참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왜곡된 신앙을 소유함으로 더 큰 멍에와 굴레에 빠져 헛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책망한다.

성 경: [갈4:11]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자유]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바울의 '헛될까'라는 표현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 치우쳐 있음을 염려한 데서 나온 것인지 그들이 완전히 율법주의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당시의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직 할례를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들 중에 절기와 날들을 지키는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9,10절).

성 경: [갈4:12]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나와 같이 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스데 호스 에고'(*)는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서 직역하면 '계속 나와 같이 되기를'이라는 의미이다. 이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몇가지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과 정직으로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내앞에서 솔직하라'는 의미로 본다(Cole).(2) 혹자는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의 모든 의식주의(儀式主義)를 폐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나와 같은 자유자가 되라'고했다고 본다(E. Huxtable). (3)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입장에 선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내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권면했다고 본다(NEB, Boice). 이상의 세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지만 문맥상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와 유대인이 갖는 우월감을 초라한 것들로 인식하고 참된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 경: [갈4:13]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너희가 아는 바라 - 바울은 처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를 구체적으로 회상하고 있다. '너희가 아는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는 사적(私的)인 역사의 배경을 설명할 때에나(고전16:15; 빌 4:15)또는 이미 확정된 교리들을 진술하려 할 때에(롬 2:2; 3:19; 딤전1:8) 자주 사용되었다. 본절의 배경이 되는 행 13:13, 14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바보와 버가를 지나 속히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당시 버가는 저지대로서 해안의 습지로 인한 유행병들이 많이 돌았는데 특히 말라리아가 심했다. 바울은 여기서 얻은 유행병으로 인하여 하루 속히 버가를 떠난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서 겪은 육체적 핍박으로 인하여(행 14:19; 딤후 3:11)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갈라디아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추정한다(Boice). 어쨋든 바울의 계획에 차질을 주었던 그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상당히 '약한 몸으로'(고전 2:3) 갈라디아에서 목회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갈4:14]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버리지도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셉튀사테'(*)는 ' 퇴짜 놓다', '침 뱉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70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경에서도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자를 만나면 그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침을 뱉는 관습이 있었다(Lightfoot).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대했다. 과거에 바울은 신과 같이(행 14:12, 13) 환영받았지만 자신이 신처럼 존경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반면에 본절에서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환영받은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다. 이처럼 자신을 후대(厚待)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이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환영이 참된 것이었기 때문이고,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가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과거의 상태를 기억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갈4:15]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모스'(*)는 '축복'(blessedness), '행복'(happiness), '기쁨'(joy) 등을 뜻한다. 한편 소유격 '너희의'(*, 휘몬)는 단순 용법으로 쓰였든지 재귀 용법으로 쓰였다. 더욱이 이 말은 주격 소유격이나 목적격 소유격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단순 대명사로 보이며 그 기능상 소유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 그래서 본절은 '너희들이 갖고 있는 바 축복된 내용들(앞에서 언급한)이 어디 있느냐?'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는 바울 서신에서 항상 칭찬할 때 사용되었다(5:3; 롬 10:2; 골 4:13). 신중하고도 엄숙한 이 표현은뒤에 나오는 구체적인 내용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한다. 본절에서는 바울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해주기를 원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의 헌신적인 생활을 생생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성 경: [갈4:16]

주제1: [믿음의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참된 말을 하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듀온'(*)은 진리를 뜻하는 '알레데스'(*)에서 나온 동사 '알레듀오'(*)의 능동태 분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과 엡 4:15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엡 4:15에서는 참말을 신실하게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진리를 열심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생활 습관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바울의 삶에 있어서 진리는 단순히 말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의 모든 삶의 모습과 습관에서도 반영되었다(고후 4:2; 딤후 2:4).

⭕ 원수가 되었느냐 - '원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스'(*)는 능동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개역성경에는 번역 되어 있지 않은 소유격 '휘몬'(*,'너희의')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원수가 되겠느냐는 반어법적 문장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너희와 원수되기 위함인줄 아느냐'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수 관계는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바울이 본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내가 너희와 그토록 감격스러운 기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어찌하여 원수의 관계가 될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갈4:17]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의 간사함을 지적한다. '열심 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신'(*)은 '시기, 증오, 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차다', '열렬히 바라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위장된 열심을 폭로하고 자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열심을 증명하려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열심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접붙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지체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거짓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와해(瓦解)시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것을 파괴시키려고 열심을 다한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열심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역시 거짓된 진리에 지나친 열심을 가진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1:13, 14).

성 경: [갈4:18]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으니라 - 열심으로 사모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본절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1) 열심의 주체가 바울일 경우, 바울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에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선한 열심으로 서로 돕기를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Burton). (2) 열심의 주체가 갈라디아 교인일 경우,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좋은 일에 열심을 내었듯이 지금 진리를 말하는 (16절) 자신에게도 다시 좋은 열심을 보이기를 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Cole). (3) 열심의 주체가 율법주의자들일 경우, 바울은 참 복음을 전하는 사도답게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을 어느 정도 용납하겠다는 겸손과 사랑의 뜻으로 해석될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이 선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뜻이다(Lightfoot, Ridderbos). 세 견해 중 우선 (2)와 (3)의 해석이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사모함을 받음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스다이'(*)는 수동태나 중간태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동태로 볼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환심을 샀다'는 것이되며, 중간태를 취할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전처럼 지금도 열심으로 선한 일을 추구하기를 사도 바울이 바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지 문법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2)와(3)의 해석이 타당성을 갖지만, 전후 문맥상으로나 본절의 내용상으로 볼때 (3)의 해석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즉, 앞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들의 간사하고 교활한 특징을 기술하였고 계속하여 본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섬김의 동기가 선하지 않은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본절에서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복음의 적(敵)인 그들에 대해 바울이 연속적인 비난을 가하고 있는 것은 본절의 '좋은 일에 대하여'(*, 엔 칼로)와 '언제든지'(*, 판토테)라는 반어적 의미를 가진 부사어에 잘 드러난다(Longenecker).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번역은 본절을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성 경: [갈4:19]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나의 자녀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나 무'(*)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미성숙한 사람들을 칭하는 '네피오이'(*, '어린 아이들')와 구별된다(고전 3:1). 바울이 디모데를 부를 때에도 '테크논'(*)을 사용한 것을 보면(딤전 1:18; 딤후 2:1)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서 양육받았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이말을 처음 사용하여 교회를존속시키려는 자신의 헌신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Ridderbos).

⭕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해산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디노'(*)는 단순히 임심해 있는 오랜 기간보다는 분만하는 고통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양육하는 것을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에 비유하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는 의미라기보기는 중생한 자가 가야 할 성화의 과정을 전제하고 바울이 그들을 계속하여 양육함의 수고가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성 경: [갈4:20]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

⭕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음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강경한 어조로 말해 왔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부드럽고 온유한 말로 격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직접 그들과 만나서 말로 가르치는 것이 서신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Ridderbos).

⭕ 의심이 있음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루마이'(*)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를 뜻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므로 당혹스럽다는 표현이며 그들을 직접 만나 그 의문을 풀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어떠한 일로 인하여 직접 갈라디아를 방문할 수 없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깊이 타락하지 않고 바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성 경: [갈4:21]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 본절의 '율법'(*, 노몬) 역시 4절과 3:23등과 같이 정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율법적 제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여졌다.따라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자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자들을 가리킨다. 특히 '...하고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론테스'(*)는 '원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델로'(*)의 현재 분사형으로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 의도적으로 율법주의를 따르며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성 경: [갈4:22]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두 아들이 있으니 -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한 여섯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 25:1,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자녀만 언급한 것은 그들의 탄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약속과(3:6 - 14) 관계된 반면,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신을 따라 난 것이다.

⭕ 계집 종에게서 - '계집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는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노예로서의 여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눅 12:45; 요 18:17;행 12:13). 본절에서 이 단어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지시하며 나아가 그녀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신분'과 '율법의 신분'을 암시한다.

성 경: [갈4:23]

주제1: [믿음의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육체를 따라 났고 - '육체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사르카'(*)는 수태의 방법이 육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인해 태어났음을 보여주고 그 아들을 잉태한 어머니의 신분을 시사한다. 여기서 '육체'는 보통 '영'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사용되는데 그것은 때때로 평범하고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육체'는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세계와 대조되는 세상의 현실적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롬 1:3; 4:1; 고전 1:26; 고후 1:17; 5:16).

⭕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팡겔리아스'(*)는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되었다. 관사가 있는 경우에는 명백하게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3:19), 관사없이 사용된 본절의 '약속'은 이삭이 태어난 원인이며 수단이다. 이 출생의 신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구할 수 없는 가운데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 경: [갈4:24]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이것은 비유니 - 비유를 뜻하는 헬라어 '알레고루메나'(*)는 '알레고레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는 '알로스'(*, '다른')와 '아고류오'(*, '말하다')의 합성 동사로 그 문자적인 의미는 '다른 뜻으로 말하다'이지만 보통 '우의적(禹意的)으로 말하다' 또는 '어떤 사물을 비유로 설명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과거의 교훈을 현재상황에 적용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을 논증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살펴볼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 경: [갈4:25]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 개역성경의 '하가'라는 번역은 '하갈'의 잘못된 표기이다. 헬라어 사본들과 다른 영역본들은 한결같이 '하갈'('*, Hagar)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본절에서 이름과 연관지어 논쟁이 되는 것은 '하갈'을시내 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 때문이다. 수많은 주석가들이 '하갈'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절을 바울이 사용한 우화로 푼다면 그 의미는 보다 쉽게 상징화된다. 시내 산을 하갈 산이라고 불렀든지 '하갈'이라는 말 자체가 시내산을 의미하는 단어인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갈과 시내산 및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 지금 있는 예루살렘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들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종됨은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 경: [갈4:26]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위에 있는 예루살렘 - 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그곳은 율법에게 종 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예루살렘이다. 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로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히 12:24)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도성이기도 하다(빌 3:20).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현재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며 성령이 친히 이 일을 증거할 것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계 21:2).

성 경: [갈4:27]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기록된 바 - 바울은 본절에서 사 54:1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이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를 선포하고 영적인 평화의 상태가 도래할 것을 묘사하면서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과 믿음의 자녀들이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믿음의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다.

⭕ 홀로 사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무'(*)는 '과부된 자'라는 뜻으로 남편 잃은 한 고부의 고독하고 불행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 구절이 이사야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는 바,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90세가 넘어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서술한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란 직접적으로는 자손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26절)를 통하여 복음을 주시며, 그 복음으로 교회가 크게 확장된다는 계시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교회의 확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롬 14:11; 빌 2:9 - 11). 한편 이 말이 꼭 이방인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유하는 여인이 낳은 아들 중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분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태어난 모든 양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성 경: [갈4:28]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비유에 적용시키고 있다. 약속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통하여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자의적(自意的)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육체의 족보를 따르지 않는다(롬 9:8).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은 믿음을 통하여 태어나며,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유하는 여자'와 '이삭'과 '약속의 자녀'들과 갈라디아의 교인들을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포함될 모든 자들을 약속의 자녀로 선포하고 있다.

성 경: [갈4:29]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핍박한 것같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오켄'(*)은 '핍박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오코'(*)의 미완료 능동태형이다. 바울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을 계속적인 사실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의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창 21:9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사실을 묘사한 히브리어 '차하크'(*)는 '경멸하며 비웃다', '희롱하다'의 뜻으로 이스마엘의 시기는 단순한 조소에서 그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바울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가 하갈을 내쫓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거짓된 이복 형제들, 곧 율법주의자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다.

성 경: [갈4:30]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 유업을 이을 자는 오직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뿐임을 강조한다. 이는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믿음이 선택되어야한다는 것이다(Lightfoot). 유대주의자들은 유업을 이을 자가 유대인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입장을 반전시킨다. 유업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해방되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이다(7절). 율법의 정죄 아래 계속 머물러 있는 자들은 육신의 신분을 따라 죄의 종으로 머물게 되며(롬 3:23; 6:16; 7:14), 결굴 아버지의 유업으로부터 제외된다.

성 경: [갈4:31]

주제1: [믿음의 자유와 율법의 노예]

주제2: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 그런즉 - 바울은 21절부터 서술한 하갈과 사라에 관한 이야기의 비유적인 재해석을 결론짓고 있다. 그 결론은 앞서 3:6-9에서 제기되었던 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상속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귀결된다. 특별히 바울이 지금까지 사용한 '너희' 또는 '저들'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 에스멘)라는 1인칭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모든 자들은 더 누리는 약속의 자녀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성 경: [갈5:1]

⭕ 그리스도께서 우리도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여기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놓인(롬( 8:1-1)영적 자유를 말한다(요 8:36). 영적 자유란 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1)사람이 율법 하래서 행복을 도모하는 동안은 우선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된다. 자신의 욕구는 무수한데 그것들을 그 자신의 힘으로는 만족하게 실현시킬 수 없다. 그는 평생 기쁨 없이 그것들의 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자기의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된다. (2)금생 내세에 율법의 정죄에서 그는 해방된다. 롬8: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이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은 진실히 믿는 우리를 용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르 마얼마든지 용서하신다. 그렇지만 용서를 빙자하여 범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짐짓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이 용서하하시지 않는다. 히 10:26-31 참조, 이 자유는 자유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자유를 가지고 감심(甘心)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기독 신자가 율법에서 놓인 줄 모르고 아직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줄 안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의 종이 됨이다.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적이 없는데 여기서 "다시는(* )...메지 말라"라고 경계한 것이 그들에게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인류의 첫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니 만큼, 이방인들도 그 점에서는(그들이 복음을 믿기 전에는) 율법의 멍에 아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은 본래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 주셨던 행위 계약(율법)을 확장한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여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행위계약 혹은 율법의 조종(祖宗)이다.

성 경: [갈5:2]

⭕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리 - 여기에 "나"란 대명사와 "바울"이란 고유명사를 붙여 기록함으로 사도 바울은 그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대성을 나타낸다(Greijdanus).

⭕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 곧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공로로 (의를 얻으려고)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로 믿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성 경: [갈5:3]

⭕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 누구든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에 이르는 의를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율법의 일부분인 할례만 지켜서 될 것인가? 인간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킴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로 받는 믿음밖에 없다.

성 경: [갈5:4]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율법은 그 의식적 부분이든지 도덕적 부분이든지 그 행하는 자에게 구원의 의를 주지 못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의(義)의 최소(最小)부분도 율법 지킴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율법 지킴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은혜를 포기하는 자이다(Calvin). 2:21 참조.

성 경: [갈5:5]

⭕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리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의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다. 진정한 의를 얻는 소망은 율법이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공로(功勞)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저 받아지는 것이다.

성 경: [갈5:6]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이것은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진정한 신앙의 소유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랑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 신앙의 증표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이 내어주는 열매이니, 선한 행위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약 2:21-26). 물론 사랑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는 아니지만 참 신앙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신앙 그것도 구원의 공로를 받는데 있어서 믿음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성 경: [갈5:9]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 이것은 여기서 거짓교훈을 가리킨다. 고전 5:6 참조, (1) 적은 죄악을 용납하면 큰 죄악으로 확대되는 법이다. (2) 누룩이 소리 없이 은근히 떡반죽에 퍼짐과 같이, 적은 죄악도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기까지 은근히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된다. 마귀의 장난은 이렇게 암암리에 죄를 퍼뜨린다. 마 13:24-25;딤후 2:16-17 참조.

성 경: [갈5:10]

⭕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다른 마음"은 바울이 이때까지 가르친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以信得救)교리가 아닌 다른 사상을 의미한다. 그는 이때까지 그들에게 엄하게 훈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표시한다.

성 경: [갈5:11]

⭕ 십자가의 거치는 것 - 여기 "거치는 것"이란 말(* )은 넘어지게 하는 돌 같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고전 1:23)이 된다고 하였다. 그들의 메시야상(象)은 이 세상에서 큰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 자라고 깊이 믿어 왔다. 그런데, 미천하게 살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메시야 자격을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넘어진다.

성 경: [갈5:12]

⭕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 "스스로 베어 버림"이란 말(* )은 몇 가지 해석을 가진다. (1)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2)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주장할진대, 이방의 풍속대로 아주 생식기를 수술하는 데까지 철저히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이 풍자적으로(諷刺的)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구주자격을 무시하고 할렐를 구원받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복음을 "어지럽게 하는 하는"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풍자적으로까지 그들을 공격한다.

성 경: [갈5:13]

⭕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여기 "너희가"(* )란 말은 헬라 원어의 어순(語順)대로 강세형(强勢形)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비교하여 그들의 특수한 처지를 지적함이다. "자유"란 말(* )은 종들을 놓아줌에 대하여 흔히 사용된 말이다(Greijdanus). 인간은 죄악의 종이었음에 따라서 거기 심판자로 임한 율법에도 종이 된것이다(요 8:34; 갈 4:1-3, 5: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었고,율법에서도 놓였다(요 8:32,36; 롬 8:1).

⭕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삵스(* )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켜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죄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실제적 경험의 사실이다. 롬 3:31 참조.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로서 죄악에 접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속죄 사업의 본의(本意)를 무시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가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율법과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성령에 의하여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한다. 이렇게 행함이 곧, 사랑이다. "종노릇 하라"란 말(* )은 "섬기라"(serve)고 번역되어야 한다. "섬긴다"는 개념과 "종이 된다"는 개념는 다르다.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돕는 행위이고, 그의 의지(옳은 소욕이나 옳지 않은 소욕)에 맹종함은 아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불의한 소욕에는 응종하지 않음이 그를 사랑함이다. 그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행하고 노예적 심리로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율법을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이 밝힌다.

성 경: [갈5:14]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 신구약 성경에 인간의 행위의 법칙에 관하여 "하라" 혹은 "하지말라"라고 한 명령들은 모두 다 율법에 속한 말씀이다. 이런 명령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온 율법은 이웃 사랑에서 그 완성을 본다. 만일 누가 사랑의 동기 없이 율법을 행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누가 사랑을 행하면서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실행은 사랑 없는 기계적 동작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법 없는 무질서(無秩序)가 아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나 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 경: [갈5:15]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율법주의자들은 실상 사랑을 제외하고 율법을 본다. 드들은 육체적 방법, 또는 사람의 힘만으로 율법을 기계적으로 순종하려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유에서 얻어지는 사랑의 동기로 참되이 행할 줄은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네세우면서 율법을 잃어버렸고, 이웃을 해롭게 하는 불의한 싸움을 교회에 가져온다. 그들은 사랑의 정신으로 살지 못하는 것만큼, "서로 물고 먹는"악행을 연출한다.

성 경: [갈5:16]

⭕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유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율법주의자들은 인력으로 조문(條文)을 하나 하나 실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기독신자는, (1) 사랑의 동기로 행하면서 율법을 괴로운짐으로 여기지 않고 순종하며, (2) 성령님의 도우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실행력이 강하고, (3)그의 행실에도 약점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신자 육체의 욕심대로 따라가는 자는 아니다.

성 경: [갈5:17]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첫머리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이유를 보여준다. 성령을 좇아 행함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육체를 거스려 싸워 육체의 야욕을 이루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움으로 인하여 육체(인간의 부패한 성질)의 소원이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영전(靈戰)은 참된 기독신자에게만 있다. 영전이 있으므로 죄악에 대한 승리가 온다. 이 세상 전쟁에 있어서는 언제나 필승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전에 가담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이다. 요 16:33 참조.

성 경: [갈5:18]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성령의 인도하시는바가 되"는 것은 무엇으로 식별할 수 있는가? 루터는 다음고 같이 말한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감심으로 육체(옛 사람)를 죽임이니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버림이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친구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허탄한 이 세상 쾌락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패하고 더러운 열매를 내어 버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좋다는것들을 버리고 그 대신 고난(환란)을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이다."(Vorlesung ber den R merbrief, 1965, s.270). 루터의 이 말은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된 자들의 그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위의 표준에 맞지 않는 행동 곧, 결점이 전연 없다는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결점이있으나 그들에게는 회개(悔改)가 있다. 칼빈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자기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벧후 1:21). 양이 목자를 따르는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한다. 이런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정죄를 면한 자이니(롬 8:1),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실에 허물과 결점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허물 없는 것과 같이 보아주신다."

성 경: [갈5:19]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육체"란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부패성을 의미한다(롬 8:7). 이런 괴악한 것의 움직임이 우리의 눈에 감취어서 보이지 않느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히 나타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지적하여 멸절할 방침을 세울 수 있다.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 이 세 가지는 성적 죄악(性的罪惡)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육체(인간의 부패성)는 무엇보다 먼저 성적 죄악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힌다. 고전 3:16-17,6:13-20참조 성경은 사람의 성적 죄악이 자기 몸에 대한 범죄라는 의미로 말하기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라"(고전 6:18)고 하였다. 곧, 그 성적 죄악은 몸이 주님의 성전된 거룩한 소속임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다른 죄악은 외계(外界)의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지만, 성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특히 그 손해는 종교적인 면이 더욱 크다. 고전 6:15-17에 말하기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성적 죄악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범성죄(犯聖罪)이며, 주님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안셈(Anselm)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움으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함으로야 이긴다"고 하였다.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그러하였다. (창 39:1-18). 안셈의 말은 물론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 중에는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성적 죄악이 거기에 속한다. 성적 죄악은 외모의 미(美)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넘어뜨리는 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사(毒蛇)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독(殺人毒)과 같다. 또 그것은 마치 알프스산의 아름다운 잔디 언덕과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디디고 발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음행은 멸망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자를 가리켜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려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고 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게 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잠 7:27)고 하였다. "음행"(* )은 특수한 범행(犯行)으로서의 성적 죄악이고, "더러운 것"(* )은 일반적인 성적 불결의 행습을 의미하는 바,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고 한다. "호색"(* )은 방종스러운 노골화한 불결의 행습을 의미한다고 한다(Trenchm Syn New Testament).

성 경: [갈5:20]

⭕ 우상 숭배와 술수 - 이것들은 종교적 죄악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은 하나님늘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 섬기려는 동기에서 생긴 행동이나.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거나, 혹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그것에게 돌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육안(肉眼)으로 보고 야 믿겠다는 마음이 역시 우상 숭배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교만이요 어리석음인 것이다. 보이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상 속성인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 얼마나 교만한 행위인가? 죄 없는 스랍들도 두 날개로 그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사 6:2). 출 33:20에 말하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욥 9:11에는,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라" 하였고, 딤전 6:16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안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라고 하였고, 요일 4:12에는 말하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하였다(시 18:11;골 1:15 참조). 히 11:3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하였으니, 보이지 않으시는 그가 모든 보이는 것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의 보이지 않으시는 성질은 더욱 우리의 신앙을 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다. 보지 못하나 믿는 그 신앙은 더욱 고상하다. 그 이유는 ,(1) 보이는 감각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참 신을 그대로 믿는 까닭이며, (2) 신앙을 방해하는 감각주의(感覺主義)의 마음을 이기며 믿는 까닭이다. "술수." "우상 숭배"가 제사적(祭祀的)인 방면의 범죄라면, "술수"(* )는 예언적(豫言的)인 방면의 범죄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나온 예언은 천국을 중심한 하니님 말씀이지만, "술수"(術數)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다. (2) 예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케 함을 목적한다. 그러나 "술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낙심케 하든 지 혹은 요행수를 바라보게 하여 도덕적 반성을 잊어버리게 만든다.(4) 예언은 그것을 받는 자가 거의 뜻밖에 자주 의식(自主意識)에 의하여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를 받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술수하는 자는 솔선적으로 공교히 만든 소위 예언으로써 사람들을 속인다. 기독신자들 중에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미명(美名) 아래 숨어서 "술수"의 죄를 범하는 자들이 적지 아니하다. 예를 들면,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자기의 육적 야욕을 위하여 성령을 구하며 이용하려 하는 것, 신자가 지식에 절제할 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고급 영계(靈界)의 깊은 지식까지 알고자 하여 분수에 넘치는 사색을 일삼는 것, 하나님을 신종(信從)하고 일상 생활의 평범한 책임을 다함에 주력하지 않으면서 기이(奇異)한 것만을 탐하여 그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적(異蹟)을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적을 믿는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표준 이적들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에 따라 그런 이적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바로 살기만 하면 주님의 뜻인 경우 특별 섭리의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술수"의 잔재(殘滓)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 이유는, "술수"는 우리의 신양을 해롭게 하며 또한 하나님께 욕을 돌리기 때문이다.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 이 여덟 가지 죄악은 육체적으로 범하는 불화(不和)의 죄악이다. "원수르 맺는 것"(* )은 성경이 여러 가지로 금한다. 사람이 원수를 맺음은 자기와 충돌된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기인된다. 신자는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출 23:4-5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고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하였고, 욥31:29에는,"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자의 멸망으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라고 하였고, 잠 24:17에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빠하지 말라"고 하였다.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 우리가 원수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몇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된다. (1) 하나님의 완전성이 나타남(마 5:48). (2)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심판장이 되는 참람한 죄를 면함(롬 12:19). (3) 용서하는 자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옴(잠 19:11). 원수를 갚는 자는 상대편의 악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대적하는악을 더 많이 만들어 놓는다. 요한 번연은 진리 파수를 위해서는 강경하였으나, 진리의 적들이 그를 욕할 때에는 온유하게 참았다고 한다. "분쟁"(* )은 "원수를 맺는"일에서 나오는 법이다. 분쟁은 언제나 그것이 확대될 위험성의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잠25:8에,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하였고, 잠17:14에는 "다누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하였고, 잠18:19 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였다. "시기"(* )는 남이 나 자신보다 웃해진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은 마땅히 남이 자기보다 우수함을 볼 때에 기뻐해야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나보다 우수한 자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쁨을 가지게 됨.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과 같다. (2)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쳤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인하여 억울하게 탈직을 딩하였으며, 마침내 사막에 망명하여 종신(終身)하였고, 유명한 사무엘 루더포드(Ruderforth)도 사이드 셀프라는 교권자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하였다. 예수님은 대제 사장들의 시기로 인하여 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분내"(* )에 대하여 성경에 여러가지 훈계가 있다. 잠12:26에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라고 하였고, 잠 16:32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하였고, 잠27:33에는,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하였고, 전7:9에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였고, 잠 27:4에는,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라고 하였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분노"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손해를 당한다. 고대(古代)의 유명한 학자 제럼(Jerome)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공적이 있으나, "분노"하는 성질이 과도하여 어거스틴(Augustine)에게 보낸 편지에도 분노를 나타냈다. 그것은 그의 업적에 커다란 오점(汚點)이 아닐 수 없다. "당 짓는것"이란 말(* )은 어원적(語原的)으로는 '임금 노동자'(賃金勞動者)를 의미한다(Greijdanus). 이 의미에서, 이것은 육체의 유익으로 매수되어 단결해서 진리를 항거(抗拒)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진리를 위하여 성령으로 하나되게 된 단결은 작든지 크든지, 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그것은 당을 지음이 아니다. 다만 비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육체적 수단으로 서로 단결한 것은 작당(作黨) 행위이다. 고대의 제2에베소회의는 당파를 짓는 악한 사람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주회(主會)한 회의인데, 그 회는 비상하게 경건한 플라비아누스(Flaviaus)를 축출하였고, 이단자(異端者) 유두게를 포용하였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회의는 성령이 주장하시기 않았다. 나는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 BK. 4. chap. 10).교회사(敎會史)에 나타난 대로 교황 그레고리(Gregory) 11세가 죽은(1378 A. D.)후에 교황권 쟁탈전으로 인하여 울반(Urban) 6세는 로마에서, 클레멘트 7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각각 교권을 가지고 근 30년을 분립하였으니, 이것은 순전히 권리를 위한 당쟁이다. "분리함"이란 말(* )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화합성(和合性)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참됨과 거짓됨은 그 교회의 공동 고백과 권징 실시 여부(與否)로써 판별되고, 그 교회의 성원인 개인 신사들의 사생활의 완전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다. 만일 누가 교회의 개인 신사들의 결점으로 인하여 교회적 생활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그것은 혹시 "분리"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만일 누가 교회의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義)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抑壓)으로 축출을 당한다면 그는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을 것뿐이다.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derforth)는 16세기의 영국인으로서 건전한 개혁교의 정신을로 신앙생활을 했던 신앙 위인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경 작성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기 어느 교직자의 시기를 받아 수감(收監)되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가 옥중에서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이 땅의 목사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1637년 7월 14일 아벧딘 옥에서).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가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떼로 하여금 이리와 같은 거짓 스승들에게 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요,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뿐이다. 마 7:15 참조 "이단"이란 말(* )은 "채택함"을 의미한다. 곧, 이것은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진리와 표준에 위배되는 의견을 채택함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이단"이란 칭호가 타파(打破)에 대한 편견으로 사용되니 실례(實例)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옳은 편에서 그릇된 편을 향하여 부른 파명(派名)인 동시에,그릇된 편을 향하여서도 사용하였다. 공정한 의미에서 "이단"은 역사적으로 고백해온 성경적 교리를 위반하고 다른 의견을 채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잘못된 다른 의견을 채택하였다가도 조만간 그것을 버렸으면 그는 이단자가 아니다.

성 경: [갈5:21]

⭕ 투기 - 이것은 "시기"가 좀더 약화된 것이다. 이것은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하여 심술이 나서 그것을 빼앗으려고까지 생각하는 악심(惡心)이다.

⭕ 술취함 - 신 구약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을 금한다. 잠23:29-35;엡 5:18 참조. 술을 약으로 사용함이 허락되었는데 (딤전 5:23), 그것을 빙자하여 술을 탐해 먹는다면, 그것은 속이는 죄까지 범함이다. 신자가 술에 취하는 것이 불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할 때에 알 수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니(벧전 2:9),술에 취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실수하게 된다(레 10:9;겔 44:21), (2) 술에 취하면 일반적 행동에도 실수하게 된다.(잠 23:29-35). 신자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진리를 다 준행하지 못하는데, 술에 취하여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으랴? (3) 술에 취함은 건강을 해하는 것이다.

⭕ 방탕함 - 이것은 음란 이외의 모든 무절제(無節制)한 향락주의를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 진리를 악용(惡用)하여 이 세상 향락을 방종스러이 취할 수 있다고 생가하면 안된다. 신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나 이제는 감심으로 율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순종할 자유인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을 감심으롤 섬겨야 할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향락을 자기 마음껏 취할 처지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극기(克己)하며 사랑의 수고를 해야만 한다.

성 경: [갈5:22]

⭕ 성령의 열매 - 여기 "열매"란 말(* )은 단수명사 되었다. 그것은 신자의 여러가지 덕행(德行)이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노력을 주로 하고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 사랑 - 이 "사랑"은 믿음과 함계 있는 사랑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한다.고전 13:13에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신자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믿는 데서 반영된 사랑이니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원천으로 하고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요일 4:10-11참조.

⭕ 희락 - "희락"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喜樂)이 있나니, 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법이다. 언제든지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희락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고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려는 것이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친다.

⭕ 화평 - 이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인데, (1) 서로 사과함으로 이루어지며(마 5:24-26), (2) 서로 용서함으로 성립된다.(엠4:2-3).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자(힘쓰는 자, 히 12:14)에게 주시는 선물이다.(약3:17-18). 마 5:9; 막9:50 참조.)

⭕ 오래 참은(* ) - 이것은 '따가움을 멀리함'이란 뜻이다. 사람은 대인관계(對人關界)에 있어서 혹은 무엇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 그 심령이 따갑게(안타깝게) 되기 쉽다. 이런 떼에 이기는 방법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림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떼에는 침착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림이 우선 안식의 복이 아닌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홍해까지 따라 올 떼에 모세는 말하기를, "다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하였고, 모압과 압몬 족속이 큰 무리로 유대에 육박하였을 떼에 여호사밧 왕이 말하기를, "이 전젱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7)고 하였다. 히 10:36에 말하기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갈6:9에는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

⭕ 자비. - "자비"란 말은(* ) 남에게 주는 '친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친절은 행실로만 아니라 말로도 나타난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다. 잠 12:18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과 같으니라"하였고, 잠15:1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였고, 잠15:4에는,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영시(英詩)에 말하기를 , "노여운 말 한마디가 한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失言)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말 한 미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한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다. 남의 마음을 섭섭케 만드는 것은 네가 발표한 말뿐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아니하는 그 때에 많은 마음들이 아픈 상처를 받는다. 네가 말했더면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사림들이 언필칭(言必稱) 공평을 부르짖으며 사람에게 사납게 행한다. 그러나 격분된 말로 의(義)를 말할진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 양선. - "양선"(* )은 자선 행위를 말하는데 성령께서 주신것이니 만큼, 질적으로 선하다. 이 세상에는 자선 사업이나 적선(積善)을 말하는 자들도 많고 실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흔히 질적 선미(善美)를 지니지 못한 외부적 행동에 그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선이 아니라 생명없는 사업 혹은 외식(外飾)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선은 끝날의 심판 때에 그대로 다 드러낼지라도 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행해지는 것이다.

⭕ 충성. -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의 부탁을 지킴이다.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새로운 공의(功義)를 기증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성"이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함이다. 충성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다음고 같은 자들이다. (1) 주님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영웅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겁약한 자라도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주님께 충성하는 자가 된다. 이 세상에 속한 충성을 살펴보면, 생래적(生來的)으로 영웅적 기질을 가지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헬쿨라네움(Herculaneum)이 함락당할 때에 로마 파수병이 죽기까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당(唐)나라의 충신 장흥(張興)이 역적(逆賊) 안록산(安祿山)의 부하에게 잡혀서도 항복하지 않고 톱에 키워 죽으면서 끝까지 원수를 꾸짖은 것 등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력을 가지고 썩을 것에게 충성한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반드시 호걸이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 호걸은 자기의 잘난 것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주님 앞에 진실한 자. - "충성"으로 번역된 말(* )은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님께서 원하신다.(시51:6). 주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지식인이나 모사는 하나님의 교회에 해를 끼치지만, 무식하여도 주님의 복음을 그대로 진실해 전하는 자는 주님의 일에 유익하다. 사람이 거짓되게 행하기는 어려워도 진실히 행하기는 쉽다. 거짓되게 행하는 자는 계속적으로 거짓을 꾸미며 또 그렇게 처신하게 된다. 그것은 양심에 괴로움을 주는 어료운 길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히 행하면 양심이 평안하고 그 길도 단순하다. (3) 주님을 위한 의로운 생활(혹, 사업)에 변절하지 않는 자. - 그는 언제나 한결같으며 유종의 미(有終之美)가 있다. 누구든지 선미(善美)한 길을 가다가 변하면 그는 썩은 뒤에 그들의 존재는 교회에 해가 된다. 그러나 썩기 시작할 때에 서둘러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은 시급히 회개함이다. 회개는 신자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인류 역사는 부패로 이어져서 보기도 싫은 역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역사는 모든 부패를 막아 역사를 미화(美化) 시켰다. 그 역사는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패했던 적이 없었던 역사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는 역사이다. 우리는 변절로 인한 허물된 인격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역자들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점점 잘못한 예(例)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명예심, 혹은 물질에 대한 탐심, 혹은 시기심, 혹은 정욕, 혹은 혈기 등으로 잘못되어 타락하고 만다.

성 경: [갈5:23]

⭕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온유"란 말(* )은 특히 대적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가리킨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덕을 소유하였다. 모세는 그 시대에 가장 온유의 근본이시다. (마 11:28-30,12:17-21). 크렌머(Cranmer)에 대한 후세(後世)의 속담은, "캔터베리의 감독 크렌머와 충돌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영원히 그의 친구사 되리라"고 하였다. 중세대의 성자 버나도(Bernard)는 그 눈이 비둘기 눈같은 온유한 인물이었고, 보나벤츄라를 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것다"고 하였다. 오리겐(Origen)은 말하기를, "우리는 남을 위해서 지음이 되었고, 남을 저주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하면서 논쟁에 있어서도 온유를 주장하였다.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 정치가로서 권위를 존중히 여기면서 온유를 실천하였다. "절제"란 말(* )은 '자기 자신을 분잡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지 못하게 자기를 제재함이다. 바울은 자기를 "쳐 복종하게"한다고 하였는데(고전9:27), 그것이 바울의 자기 제재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율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그기스도 신앙으로 행하는 자의 행실(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행실)은 율법을 이루는 것뿐이다. 롬 3:31,13:8-10참조. 이 점에 대하여 다음 귀절이 도욱 밝혀준다.

성 경: [갈5:24]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유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본절부터 26절까지는 앞 부분(13-23 "육체"대로 범죄하지 말고 사랑을 행하라고 한 보든 말씀)에 대한 결론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속죄하여 그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을 가리킨다. "육체"는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 "정"(* )은 의지적(意志的)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죄악의 심리를 가리키고, "욕심"(* )은 따갑게 일어나는 죄 되는 욕구를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함은 ,(1)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떼에 그들과 정욕 사이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끊어졌다는 것이고(고후 5:14-17), (2)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은 영적 새 생명은 부단히 정욕과 싸워 그 정욕이 주장하지는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함은, 그것을 현세에서부터 아주 없애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세에 기독신자에게서 정욕이 아주 없어진다는 교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없다.(갈 5:17;요일 1:8)

성 경: [갈5:25]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으로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아 성령님의 역사가 신자들을 중생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도록 함을 가리킨다(고후 3:17). "성령으로 행할지니." 여기 "행함"이란 말(* )은 행렬(行列)을 지어 서거나 가거나 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이것은 신자들이 한 단체의 행렬처럼 성령님의 인도대로 규율 있게 순종함을 가리킨 듯하다. 빌 2:12-13 참조

성 경: [갈5:26]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교회생활에 있어서 분쟁은 허영을 구함에서 일어난다. 교회의 단체 생활에서 누구든지 높아지기를 원하면, 그것은 허영심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언제든지 헛된 까닭이다(벧전 1:24). 천국에서는 낮아지는 것이 실상 높아짐인데, 그와 반대로 높아지기를 원함은 어리석은 생각(마구적)이다(눅 18:14). "서로 격동함"은 서로 노엽게 함이고, "서로 투기함"은 남의 잘됨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

성 경: [갈6:1]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무슨 범죄한 일 - '범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프토마티'(*)는 문자적으로 '넘어지다', '따로 떨어지다'등의 의미로 '타락하다'라는 개념을포함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죄의 개념을 제거하고자 한다(Ridderbos, Lenski). 본절의 범죄는 어떤 유혹에 의하여 부지중에 저질러진 '실수'나 '허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파라프토마티'가 무지와 연약함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이라 할지라도 범죄에 대한 책임마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의 책임을 나누어 질 것을 권고한다(2절). 한편 바울이 본절에서 '범법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파라바테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취급하고자하는 범죄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偶發的)이거나 육신의 약함을 인하여 범한 것임을 시사한다.

⭕ 드러나거든 - '드러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롤렘프데'(*)는 '발견하다', '놀라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롤람바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어떤 사람이 부지중에 범죄한 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범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때에 느끼는 당혹감과 놀라움을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범죄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단어가 범죄의 수단이나 원인보다는 단순히 범죄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현장성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Ridderbos). 그러나 '프롤렘프데'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언급할 때에(요 8:4) 사용된 '카탈람바노'(*)란 단어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카탈람바노'는 사건의 현장성, 곧 범죄의 증거를 강조하는 한편 '프롤렘프데'는 사건의 진위성(眞僞性) 곧 범죄한 사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사실 관계를 강조한다.

⭕ 온유한 심령 - 이것의 헬라어 '프뉴마티 프라위테토스'(*)는 '온유한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고전 4:21). 물론 '프뉴마티'는 본절에서 '인간의 영'을 뜻하며 성령의 열매인 온유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 특별히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온유'를 언급한 것은 '프라위테토스'가 교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겸손'을 의미하며 또한 '화내지 않고 관용하는 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R.E. Howard)

성 경: [갈6:2]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짐을 서로 지라 - '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제테'(*)는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관계성을 갖고 돕는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는 '알렐론'(*, '서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들이 나누어져야 할 '짐'(*, 바로스)은 '가혹하여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짐'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영광과 충만'의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고후 4:17). 본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범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뜻한다(Huxtable). (2)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시험이나 인생의 좌절을 뜻한다(Boice). (3)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영적으로 억압하려는 세력을 뜻한다. 이경우 '짐을 서로 지는'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범죄의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예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세 견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지체들의 유기적(有機的)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적합한 것은 없다. 성도는 이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

성 경: [갈6:3]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동일한 주제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의 무거운 짐들을 함께 나누어지지도 못하면서 의식적인 율법의 구조속에 빠져 스스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지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경고한다.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재능이나 역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무시하고 율법을 자신의 유익과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켰다는 것이다.

성 경: [갈6:4]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앞절이 영적교만에 빠져 자기를 기만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적용된 것이라면, 본절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라고 볼 수있다. 의식하는 자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인간적인 규범으로 이웃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범죄에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상대적인 의로움에 절대적인 가치를 둠으로써 이웃의 짐을 나누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웃의 짐을 가중시키는 불법을 행하였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그릇된 자존심에서 탈피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한편 본절의 '살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제토'(*)는 제련소에서 순금을 정련(精鍊)하는 것처럼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것을 의미한다(test, NIV). 성도들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살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하여 엄정하게 해야한다. 이렇게 할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갖게 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참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상대방의 실수와 견주어 평가했던것 같다(Ridderbos). 그러나 자신의 업적이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자랑(고후 1:12;빌 2:13)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자랑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눈을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시사하며 이로써 성도는 자신의 무익함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깨닫게 될 것을 보여준다(Boice).

성 경: [갈6:5]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를 가르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이다. 바울은 본절에서 '짐'을 뜻하는 단어로 '포르티온'(*)을 사용하여 2절에서의 '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로스'(*)와 구별하고 있다. '포르티온'은 신약에서 배에 싣는 화물을 가리키기도 하였으나(행 27:10 ), 어원적으로 '포르티온'이 '바로스'보다 더 가벼운 짐을 뜻한다든지 더 무거운 짐을 뜻한다는 것을(마 23:4)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Ridderbos). 그러나 '포르티온'은 '바로스'와 달리 한 사람의 '짐 꾸러미'를 의미한다. 이 '짐꾸러미'는 본절에서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맡기신 직무를 가리킨다(고전 12:5). 모든 성도는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하며 그 일에 대해책임을 져야 한다. 한편 '질 것임이니라'의 헬라어 '바스타세이'(*)는 미래 시제로 미래의 심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감당하는 정상적인 의무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의 책임성을 강조한다(Ridderbos, Huxtable). 하나님의 심판 날에 각사람의 모든 행위가 드러나므로(벧전 1:17)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성 경: [갈6:6]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가르침을 받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쿠메노스'(*)의 동사형 '카테케오'(*, '가르치다')는 원래 '이해하게 하다', '귓가에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좋지 않은 소리를 귀에 따갑도록 반복해서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행 21:21, 24). 혹자는 본절에 언급된 자들이 유료(有料)교사들의 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Boice). 그러나 본절 '카테쿠메노스'는 어떤 특정한 단체나 조직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훈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Boice, Cole).

⭕ 말씀을 가르치는 자 -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듯이 '가르치는 자'들의 신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다른 서신서에서는 '디다스칼로이'(*)라고 표현되었으며 '교사'라고 번역되었다(고전 12:28;엡 4:11). 이들 '교사들'이 본절에 기록된 '가르치는 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나뉜다. (1) 혹자는 이들이 초대 교회 안에서 목회자적인 신분을 가진 자들로서 '디다스칼로이'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라 한다(Ridderbos). 그러나 본서가 다른 서신들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볼 때 '가르치는 자' 즉 '카테쿤티'(*)가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2) 오히려 본절에서 '가르치는 자'들은 보다 초기의 직분자들로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바나바와 디도같은 사역자들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을(행 14:23) 가리킨다(Huxtable). 이들은 '교사'들과는 달리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전도 여행자들을 뜻하는 것같다. 문맥상 (2)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성 경: [갈6:7]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스스로 속이지 말라 - '속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나스데'(*)는 3절에 '프레나파타'(*)와는 차이가 있다. '플라나스데'는 '길을 잃게 하다',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다', '잘못되게 유인하다','미혹하다' 등을 뜻하는 '플라나오'(*)의 현재 수동태 명령법으로 '어떤 유혹에 미혹되어 믿음을 잃게 되다'는 뜻이다.

⭕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만홀히 여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 취급당하다'(to be fooled,NEB)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그릇된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이기적본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절에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시 139:1-6;겔 11:5)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며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바울은 인간의 행위를 자연 법칙에 비유한다. 이렇듯 행위와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씨 뿌리고 거두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혤라 문화와 성경에서 자주 발견된다(마 7:16;막 4:26;눅 19:21;고후 9:6). 바울은 고후 9:6에서 적게 심는 것과 많이 심는 것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의 '질'에 대하여 논한다. '심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이레'(*)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로 미래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에안'(*, '...하든지')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 가정법은 동작의 계속적 반복을 나타내므로 본절에서 묘사된 행위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각각의 행위를 말한다. 또한 미래조건절임을 나타내는 '에안'이 사용된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미래의 결과, 곧 하나님의 심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어떻게 실생활에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미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떠한 결과를 거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 경: [갈6:8]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일반적인 법칙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경우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장에서 육체와 성령을 비교한 논리(5:16-18)와는 차이가 있지만 세상끝의 추수를 바라보는 시간은 동일하다.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없이 생활한다면 육체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게 되며 영적인 성품들을 잃게 될 것이다.

⭕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성령에게 맡기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롬 8:14). 이러한 삶은 인간 내면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게될 것이다. 이는 육체적인 생명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화(榮華)로운 생명을 의미한다(Ridderbos).

성 경: [갈6:9]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 본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 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될 것이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 3:13의 내용과매우 유사하다. 본절과 살후 3:1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절'(*, 토 칼론 포이운테스 메 엥카코멘), '살후 3:13'(*, 메 엥카케세테 칼로포이운테스). 살후 3:13에서는 '메'(*)와 연결된 부정 과거 가정법 '엥카케세테'(*)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형'을 뚜렷하게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현재 가정법 '엥카코멘'(*)과 '메'(*)의 구문이 앞에 있는 '포이운테스'(*, '행함')와 함께 사용되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성 경: [갈6:10]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선행에 대한 권고]

⭕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은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때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 기회 있는대로 -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에코멘'(*)을 가정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Westcott, Hort).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때 언졔나 '안'(*, if)을 썼다. 본절에서는 '안'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한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 착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은 9절의 '칼론'(*, '선') 대신에 쓰여졌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 본절의 '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한편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 '좋은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단수로 쓰이긴 했어도 '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집합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때 '아가돈'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가도이스'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본절의 '아가돈'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리스타'(*)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의 최상급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가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엡 2:19;딤전 5:8).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 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한 '형제'(*, 아델포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성 경: [갈6:11]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내 손으로는...큰 글자로 쓴것 - 바울은 이제 본 서신 전체에 대한 결론을 맺는다(11-18). 본절은 '큰'의 헬라어 '펠리코이스'(*)와 '쓴'의 헬라어 '에그랖사'(*)의 시제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1) '펠리코이스'를 '긴' 또는 '많은' 등의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이 지금까지 쓴 많은 내용의 편지를 가리키고 있는것으로 해석한다(Calvin, Luther). (2) '펠리코이스'가 시각적으로 '큰'을 의미한다고 볼 경우 바울이 쓴 글씨체를 가리킨다. 이렇게볼 때 본절은 바울이 오랜 여행 기간 둥안의 박해와 노동으로 인하여 적당한 글씨체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호소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Deissmann).(3) 혹자는 바울이 글쓰는 사람에게 대신 쓰도록 하고 바울은 자신의 서명만 스스로했다는 점(고전 16:21ff.;골 4:18;살후 3:17)에 착안하여 본 구절에서 바울 자신이 직접 쓰는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이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본서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직접 펜을 들었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특별히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idderbos).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는 부정 과거로 발신자가 수신자의 편지를 읽는 시점을 염두에 두어 집필 시점을 과거로 묘사하는 서신적인 용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현재적인 의미로 '쓰고 있는'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 경: [갈6:12]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양을 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로소페사이(*)는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다.

⭕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관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할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눅 2:21)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받게 했던(행 16:3)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행하였다. 본절의 '육체'는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자만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받은 한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로서(Ridderbos)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때문이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Boice). (2)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전파하게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효력을 증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할례의 정당성(正當性)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성 경: [갈6:13]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할례 받은 저희라도 - '할례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템노메노이(*)는 '할례를 행하다'는 뜻을 가진 '페리템노'(*)의 현재 중간태로서 '스스로 할례를 받은' 또는 '할례를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이다. 어떤 사본(P ,B, F)에서는 완료 수동태인 '페리테트메메노이'(*)를 취하여 이미 할례를 받은 거짓 교사들을 선명하게 지시한다(Ridderbos). 혹자는 본문이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들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제를 현재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Huxtable, Howard). 또한 보다 오래된 사본(*, A, B)에서는 현재형을 취한다. 이처럼 현재형을 취하면 모든 거짓 교사들과 추종자들 다 지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듯하다.

⭕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지키지 아니하고'의 헬라어 '우데 퓌랏수신'(*)은 고의적인 율법 파기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12절).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도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

⭕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사람들이었다.

성 경: [갈6:14]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결코...없으니'에 해당하는 '메 게노이토'(*)는 70인역에서 주로 사용된 용법으로(수 22:22;24:16)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소원을 나타내는 화구법이다. 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서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삶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세상이 보기에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고전 1:25)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가졌던 진리의 본질과 삶의 동기와 목적을 선명하게 대변한다. 한편 '내게는'(*, 에모이)이라는 표현은 온갖 불의를 무릅쓰고 끝까지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열정을 나타낸다.

⭕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빌 3:3-6). 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自我)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 '세상'(*, 코스모스)이란 인간들의 자기 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증거한다(Ridderbos).

성 경: [갈6:15]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는다. 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5:6;고전 7:19). 바울이 앞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전황이다. 이 말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Ridderbos). '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피조물'을 뜻하는 '크티스마'(*, 약 1:18)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크티시스'는 본절에서 '새로'의 헬라어 '카이네'(*)와 함께 쓰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강조한다(엡 2:10).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도는 현재의 삶 속에 미래에 이루게 될 종말의 삶을 도입하며 살아간다.

성 경: [갈6:16]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는 바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새 언약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처럼 본절에서는 본서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한편 '행하는'의 헬라어 '스토이케수신'(*)은 '행렬에 맞추어 나가다', '규칙을 굳게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스토이케오'(*)의 미래 직설법으로 5:25에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의미할때 사용된 것처럼 새 규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된 것임을 보여준다.

⭕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새 언약의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축복은 본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참된 이스라엘 족속이 될 수 있다(3:29;4:28, 29). 참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음을 믿어 순종케 된 자들로 구성된 '새이스라엘' 곧 '약속의 자녀'를 말한다(롬 9:7). (2)'평강'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진다.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5:22에 제시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축복과 행복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는뎨(눅 2:14) 본절에서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함축한다(Ridderbos). 한편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오스'(*)는 구약의 '헤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은혜'등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큰 은혜를 가리킨다. 특히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을 특정한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않은 무리들에게도 같은 축복 속으로 초대하고있다(Huxtable).

성 경: [갈6:17]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26:10;눅 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행 20:24).

성 경: [갈6:18]

주제1: [최후의 권면과 끝맺는 말]

주제2: [마지막 권고와 인사]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모든 형제들에게 거룩한 인사를 함으로 시작했던(1:2)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 구원을 함축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으로서저들의 구원이 자의적(自意的)인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메타 투 프뉴마토스)라고 표현한 것은 외형적인 모양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내적인 존재 전체에 영향을 끼치길 기원하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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