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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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레미야 주석



성 경: [렘1:1]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베냐민 땅 아나돗...예레미야의 말이라 -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으로서 예루살렘 북동쪽 약 4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오늘날은 '아나타'란 지명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기업이 없는 레위 지파 아론 자손 제사장에게 할당되었다(수21:13-19). 한편 제사장 엘리 가문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은 다윗을 이을 후계자로 아도니야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솔로몬에 의해 이곳 아나돗으로 추방된 바 있다(왕상2:26). 한편 에레미야는 제사장 사역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돗의 제사장'이란 말은 그의 부친 힐기야를 수식하는 말인 것으로 보이며, 만약 예레미야가 제사장이었다면 그의 메시지와 예언에는 어느 정도 그의 제사장 직분의 배경이 반영되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Nicholson).

성 경: [렘1:2]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요시야의 다스린지 삽삼 년에 - 이는 B.C.627년을 뜻하며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때를 가리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임하였고 -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렘1:3]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시드기야의 제 십 일 년 말까지 - 이는 예루살렘 함락 때인 B.C. 586년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40-44장에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 함락 이후 몇 년 동안에도 예레미야가 사역 활동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이는 본서의 표제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구절로 이해된다.

성 경: [렘1:4]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도 포함하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실제로 설교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13,18,19장;51:59-64).

성 경: [렘1:5]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 이는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게 보내어질 하나님의 사자로 선택받은 것이 걸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롬 8:29,30참조).

(주); 너를 구별하였고 - '구별하였고'의 원어 '카다쉬'(*)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다른 것들과 구분해서 따로 두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 장소, 시간 등이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되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마음대로 그것을 처분하는 것은 참람한 행위이다.

(주);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 이는 예레미야의 특별 임무를 암시하는 내용으로서, 그의 예언은 유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본서의 많은 부분이 열방을 상대로 한 예언이다(46-51장).

성 경: [렘1:6]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나는 아이라 - '아이'(*, 나아르)는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경험이 없고 무지한 젊은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된다. 바벨론, 애굽 등과 같은 대제국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예레미야에게 대단히 두렵고 떨리는 임무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압이나 에돔, 다메섹, 블레셋, 암몬과 같은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투쟁해 온 긴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는 역시 힘겨운 상대로 느껴졌을 것이다.

(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 그의 이런 주저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과 유사하다. 모세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고사(苦辭)하는반 응을 보였던 것이다(출3:11; 4:1).

성 경: [렘1:7]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시점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의 시작임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레미야에게는 청중을 선택할 권한이 없었다. 그는 여호와께서 보내는 곳이면 어디나 가서, 누구를 막론하고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변형시키지 말고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렘1:8]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보호하시는 이상 두려워 할게 없다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출애굽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애굽에서 구해내셨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에서 '구원하리라'에 해당하는 원어는 '나찰'(*) 동사의 히필형 부정법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말도 이 동사로 기록되었다(출18:8).

성 경: [렘1:9]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 이 말씀은 신 18:18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이것을 통해 예레미야는 자신이 모세의 후계자로 약속된 바 있는 선지자임을 자각했을 것이며, 더욱 확고한 믿음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1:10]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여기서는 예레미야의 특수 임무가 언급되고 있다. 그가 전달할 선포의 내용은 크게 파멸과 회복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는 사역 초기에는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강도 높게 설교하였고, 후기에 가서는 회복에 대해 말하였다. 또한 본절은46-51장에 언급된 이방 민족에게 고하는 심판의 예언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는모두 여섯 개의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네 개는 파괴적인 측면을, 두 개는 건설적인 측면을 가진 동사이다.

성 경: [렘1:11]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소명받는 예레미야]

(주); 네가 무엇을 보느냐 - 본절과 13절에는 두 가지 환상이 기록되고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소명을 받은 직후인 것 같다.

(주);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 여기서 '살구나무'에 해당하는 원어는 '솨케드'(*)로서 아몬드나 밤, 호두 등의 견과(堅果)나무를 가리킨다. 야곱이 애굽 총리가 된 요셉에게 선물로 보내는 품목 중에 이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파단행'으로 번역되었다(창43:11). 그리고 '가지'에 해당하는 '마켈'(*)은 '막대기', '지팡이'란 뜻으로 주로 쓰인다. 이 아몬드나무는 봄이면 가장 먼저 싹을 내고 봉오리를 맺는데, 오늘날에도 아나돗 지방에는 초봄에 수많은 아몬드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볼 수 있다.

성 경: [렘1:12]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네가 잘 보았도다...이루려 함이니라 - 예레미야가 본 아몬드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몬드나무가 봄을 가장 먼저 알리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신속하게 성취된다는 내용이다. 한편 칼빈은 '살구나무 가지'를'파수꾼의 막대기'로 해석하면서 선지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파수꾼처럼 지켜볼 것이란 의미로 설명하고 있으며,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전달한 심판의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깨어서 지켜볼 것이라고 해석한다.

성 경: [렘1:13]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끊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面)이 북에서 부터 - 두 번쩨 환상은 첫 번째 환상보다 더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Thompson). '끓는 가마'란 알맞은 바람이 아궁이의 불을 지펴 가열되어지고 있는 큰솥을 말한다. 겔 24:3이하에서 이 끓는 가마는 전쟁과 그 결과 야기되는 황폐를 상징하였다. 어떤 학자는 이 '끓는 가마'가 유다 북방에 있는 갈대아인의 침입으로 동요하는 유다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블레이니(Blayney) 박사는 다음 절에서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재앙이 북쪽에서 나오며 그 끓는 물의 흐름이 재앙을 상징하고있기 때문에 이 끓는 가마는 유다 불방의 바벨론 군대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Clarke).

성 경: [렘1:14]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환난들은 거의 다 불방 민족인 앗수르, 아람, 블레셋에 의해 일어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방'이란 말은 종종, 그 기원이 불분명한 암흑 세력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사역이 요시야 통치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보면 이 북방의 원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벨론이다(Thompson).

성 경: [렘1:15]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 이는 유다에 미칠 재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훗날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의 성이무너졌는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는지 깨닫지 못하였다(애 4:12참조).

(주);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자리를 정하고 - 이는 예루살렘 성문에 왕좌를 세운다는 뜻으로서 그곳에 대한 정복과 그에 따르는 압제를 상징한다. 이런 내용의 예언은 그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엄청난 비난과 반감을 샀다. 심지어는 B.C. 597년 두 번째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통치를 거부하였으며, 그 이후 바벨론의 지배가 확고하게 수립되었을 때에도(B.C. 586년) 그들의 멸망을 일시적 패배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성 경: [렘1:16]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 유다 백성이 앞에서 언급된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하고 또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에 경배했던 것이다. 언약 파기로 인한 재난은 본서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중심 사상이다.

성 경: [렘1:17]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 문자적으로는 활동에 방해가 되는 긴 옷을 졸라 매라는 것이지만 온갖 위험에 대비해서 전투 준비를 해야 하는 군인처럼 마음을 굳게 하고 준비하라는 뜻이다.

(주); 그들에게 고하라 - 이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하라고 명령하신 것만 말하라는 뜻이다.

(주); 두려워 말라 - 이는 신 31:6-8과 수1:6-9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하는 내용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라고 고백하였으며, 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담대히 말했다.

성 경: [렘1:18]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너는...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 여기서 하나님은 군사적 상징어를 사용하여 강하고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왕이나 고관 또는 제사장 등과 같은 기득권층일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그의 주장을 비난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실 예레미야의 전사역을 살펴보면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층 인사들과 대치해야 했으며 일반 시민들조차 그를 박해했다. 심지어 아나돗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다(11:18-23).

성 경: [렘1:19]

주제1: [예레미야의 소명과 하나님의 격려]

주제2: [환상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

(주);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니리 - 영적 승리의 비결을 제시하는 구절이다(C.L.Feinberg). 곧 영적 승리는 성도들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주님을 바라봄으로써(히 12:2)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R.K. Harrison).

성 경: [렘2:1]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지적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메시지가 선지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영적 교제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선지자를 통해 전달되어었지만 성령의 감동 덕분에 선지자 개인의 인격이 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결코 훼손시키거나 경감시키지 않게 된 것이다(Harrison).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성 경: [렘2:2]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네 소년 때의 우의 - 이는 이스라엘이 오래 전 애굽에서 나와 여호와의 주권을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던 때를 가리킨다. 여호와께서는 그 당시 정치적으로 유아기에 있던 이스라엘의 순수했던 신앙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 네 결혼 때의 사랑 - 이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언약을 받아들이며 신혼의 기쁨 속에서 충성을 맹세하였던 것이다(출24:6-8). 한편 이스라엘에는 유월절, 장막절, 초실절 등 많은 종교 축제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언약, 이적 등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호1-3장에 언급되고 있는 호세아와 고멜 사이의 관계를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

성 경: [렘2:3]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이스라엘은...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 여기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물(聖物)', '소산', '처음 열매' 등으로 지칭되어 있다. '성물'이란 것은 오직 거룩한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따로 구별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수확의 첫 소산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할당되어야 했다(출23:19). 이는 모든 토지의 소산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수확 중 첫 열매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증표인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몫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백성다운 거룩한 자태를 나타냄이 마땅하였다.

(주);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 예레미야 당시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당했고(B.C. 722년), 그 백성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히스기야 이후 남유다 역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며, 특히 기나긴 므낫세 왕 통치 기간에는 엄청난 배도(背道)를 자행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섭리를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다.

성 경: [렘2:4]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그 왕국에 소속해 있던 지파들 중 남은 자들이 있었던 바, 요시야 임금 당시 이미 그의 통치권은 이들에게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이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는 이들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는 남유다 왕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성 경: [렘2:5]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 이 표현은 선지자들의 특성있는 상투어로서, 그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에 의거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배교(背敎)를 지적해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최근 므낫세치하의 배교뿐만 아니라(왕하 21장) 멀리 가나안 정복 때부터 계속 되어온 배교 행위까지 거론한다.

(주);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 '허탄한 것'의 원어는 '헤벧'(*)인데 원래는 '증기', '김', '숨'이란 뜻으로 쓰였다. 잠 21:6에서는 '속이는 말로 제물을 모으는 것'을 이 '헤벨'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안개'로 번역하였다. 한편, 본문에서 이 말은 가나안 종교의 주신(主神)이었던 '바알'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Harrison, Thompson). 그리고 그 당시의 국제 조약 문헌을 참고하면,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따라 행하다'란 말은 '어떤 군주를 봉신으로 섬기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긴 것을 뜻하는 것이다.

성 경: [렘2:6]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 이 말은 8절에서 한 번 더 반복되고 있는데, 아마 종교행사나 제사 때에 사용되던 공식적인 기도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Thompson). 본절에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시고 광야 길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여호와의 구속 사역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런 은혜를 망각한 것은 배도 때문이라고 선지자는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헛된 것을 좇는 행위는 지난날 감격스러웠던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망각해 버리는 것과 같다.

성 경: [렘2:7]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기름진 땅 - 이 말의 원어는 '에레츠 하카르멜'(*)으로서 '그 갈멜의 땅'이란 뜻이다. 이 '갈멜'이란 것은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벌인 산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부근의 기름진 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아마 청중들은 이 말을 듣고 그 당시 번성하던 갈멜 산 일대를 상기하였을 것이다(암 1:2; 9:3; 미 7:14).

(주);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 '가증히'에 해당하는 원어 '토에바'(*)는 유다 왕 아하스 당시의 이방인들의 종교 행사를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왕하 16:3).

성 경: [렘2:8]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회상과 한탄]

(주); 제사장들...범 잡은 자들...관리들...선지자들 - 네 종류의 지도자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백성들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이들이 도리어 우상 숭배와 같은 악영향을 미치는 일에 앞장 섰다는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제사장들'은 제사 직무를 맡았을뿐만 아니라 율법 해석자 역할을 하였고 또 우림과 둠밈을 적절히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일을 하였다(출28:30; 민27:21; 삼상28:6). 그러나 당시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직무들에 태만하거나 혹은 자신의 직분을 남용, 오용했던 것 같다. '법 잡은 자들'은 '율법에 능숙한 자'란 뜻으로 레위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들의 직무 중에도 율법 해석의 일이 포함 되는데(말2:5-8), 본절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단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체험을 통해 획득하는 보다 깊은 차원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관리들'의 히브리어 '로에'(*)는 '목자'란 뜻으로서 정치적 지도자를 주로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그래서 아사 왕이나 히스기야 시대의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가나안 종교의 신과 의식을 뒤따랐다. 예레미야는 그의 전 사역 기간에 이들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다.

성 경: [렘2:9]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다투고...다투리라 - 본절은 소송 용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언약 파기를 문제 삼아 제소하는 내용이다. 당시 근동 국가에서는 조약을 파기하는 봉신들은 그들의 주권 군주들로부터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청중들은 예레미야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잘 이해했을 것이다. B.C.597년,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징벌하러 온 것도 유다의 정치적 변절에 대한 심판이었다(왕하 24:1,2).

성 경: [렘2:10]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깃딤 섬들에...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 -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본문의 '깃딤섬'은 오늘날의 키프로스 섬을 말한다고 한다. 구약 외경 마카비 1서 8:5에는 이 섬이 마게도냐 영토로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게달'은 팔레스틴 동쪽의 사막 지역에거주하던 아랍 부족을 뜻한다(49:28-33).

성 경: [렘2:11]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는 점을 선언한 후에(9절) 이스라엘 주변 나라 중 그 어떤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다. 즉, 고유의 민족 신으로 섬겨 왔던 신을 바꾼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신들은 참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일관되게 섬김을 받아 왔지만,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살아계시며 그들의 영광이신 하나님을 '무익한 것'과 바꾸어 버린 것이다. 한편, '무익한 것'에 해당하는 원어 '벨로 요일'(*)이란 말은 '바알'을 언어 유희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Thompson).

성 경: [렘2:12]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너 하늘이...떨어지다 - 이 백성의 행위가 참으로 악하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조차도 그런 방탕스럽고 부정한 일을 바로 보지 못할 정도라는 뜻이다.

성 경: [렘2:13]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생수의 근원...웅덩이를 판 것 -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심각한 죄악성이 지적되고 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물을 담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구원 혹은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생수에 비유된 예는 종종 나타난다(사12:3; 55:1; 요4:10-14; 7:37-39). 그리고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이 귀했으므로 수원(水源)을 확보해 놓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웅덩이에 석회를 발랐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석회에 균열이 가서 속에 든 물이 새어 나가 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본문에서 유다 백성이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결국 터져 버리고 말, 즉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긴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렘2:14]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씨종이냐 - '씨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리드 바이트'(*)는 주인의 집에서, 노예의 부모 사이에 태어난 종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주인의 개인적인 재산 취급을 당했다.

성 경: [렘2:15]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어린 사자들이 - 이것을 앗수르 군대로 해석하는 것이 주석가들 사이의 지배적인 견해이다(Thompson, Clarke, Nicholson등). 이 구절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8절에 앗수르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앗수르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있었던 것 같으며, 그렇다면 본절은 앗수르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기 전인 예레미야 사역 초기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앗수르의 붕괴는 B.C.626년 앗술바니팔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주);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 어린 사자가 앗수르를 상징한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멸망상을 묘사한 것이며, 디글랏 빌레셀 3세로부터 시작해서 살만에셀5세, 사르곤 2세, 산헤립, 에살핫돈, 앗술바니팔의 이스라엘 점령을 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에게 충분한 경고가 될 만했다.

성 경: [렘2:16]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놉 - 하애굽(Lower Egypt)의 고대 수도였던 멤피스를 말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1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주); 다바네스 -오늘날 '텔 데프네'로 알려진 곳으로서 애굽 북동부의 만절레 호수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주);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 이는 B.C.609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왕이 죽은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된 사건(왕하23:29,30; 대하35:20-24)을 암시한다. 그런데 본절에는 애굽 대신에 그곳의 두 도시인 놉과 다바네스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 한때 애굽이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이곳 두 도시가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이 이끄는 앗수르 원정군에 의해 가장 처참하게 정복되었던 일이 있음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인 것 같다.

성 경: [렘2:17]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네가 나를 떠남으로 - 유다가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과 야합함으로 고난 받는다는 것이 본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거듭 이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참변도 자기 백성에게 내리는 여호와의 심판인 것이다.

성 경: [렘2:18]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시흘의 물 - '시흘'(*, 쉬호르)은 문자적으로 '검음'이란 뜻으로 나일강을 가리킨다(수13:3; 대상13:5). '시흘'이라는 명칭은 우기(雨期) 때 흙탕물을 흘려보내는 애굽 '와디'(wadi)의 특성을 보여주며, 여기서는 아마도 우상 숭배국인 애굽의 부패성을 암시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말인 듯하다. 실제로 이 나일 강은 애굽의 주요 신들 중의 하나로 인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Harrison).

(주); 하수 - 이는 유브라데 강을 뜻하는데, 구약 성경 곳곳에 이 유브라데 강을 '큰 강' 또는 '하수'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신1:7; 11:24; 왕상4:21; 느2:7; 사7:20등). 예레미야는 여기서 애굽이나 앗수르 또는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런 주제는 다른 선지자들도 곧잘 지적하던 내용이다(사30:1-5). 선지자는 유다 내 애굽파와 앗수르파가 정치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국내 사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두 강대국이 근동 지방에서 이처럼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예언의 말씀은 그의 사역 초기의 것임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성 경: [렘2:19]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유다의 악과 그 결과]

(주); 네 악...네 패역 - '패역'에 해당하는 '메슈바'(*)는 '돌아가다', '물러서다'의 뜻을 가진 '슈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돌아섬', '배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본서만큼 '이스라엘의 배도'를 자주 지적하는 책도 없다(2:19; 3:6-8,11,12,14-22;5:6; 8:5; 14:7; 31:22). 앞으로 닥칠 유다의 참변은 궁극적으로 유다가 자초한 것이며 앗수르 등의 열강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유다는 언약 파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고 여호와를 버린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쓰라린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성 경: [렘2:20]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나는 순복지 아니하리라 - '순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노동하다', '타인을 위해 일하다', '하나님을 섬기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삼상11:1에서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이 침입자들을 향해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는 항복 의지를 밝히는 대목이 나온다. 따라서 이 말속에는 봉신으로서 대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주); 높은 산 위와...행음하도다 - 유다의 행음은 영적으로 이교의 신에게 제사라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론 이교의 제사 의식에 포함된 혼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간 것은 우주의 신으로 여겨지던 바알이나 다른 가나안의 제신(諸神)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함이었다.

성 경: [렘2:21]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 본절은 사 5장의 소위 '포도원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비유이다. 여기서 '귀한 포도나무'란 예루살렘과 지중해 사이의 '와디 알-사랄'에서 자라는 극상품의 붉은 포도를 말한다(사5:2). 하나님은 좋은 종자를 선택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더러운 냄새가 나는 이상한 야생 포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성 경: [렘2:22]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잿물로...비누를 쓸지라도 - 유다의 범죄에 대한 세번째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들의 죄악은 어떠한 세제를 사용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그 뿌리가 아주 깊다는 내용이다.

성 경: [렘2:23]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 '바알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은 가나안 요소 요소에서 바알 제사가 수행되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선지자는 바알을 좇은 일이 없다는 뻔뻔스러운 주장에 반박하여 두 가지 비유를 제시한다.

(주);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 - 힌놈의 골짜기에 대한 언급으로 보인다. 거기서 사람들은 암몬 족속의 우상인 몰렉에게 자기 자녀들을 제사한 바 있다. 한편 왕하 23장에 따르면, 요시야 당시의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산당 제사나 몰렉에게 바쳤던 인신 제사 등이 철폐되었다. 그러나 본절의 내용으로 볼 때 그 종교 개혁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우상 숭배가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Nicholson).

(주); 암약대 - 이는 성욕(性慾)이 발한 암낙타가 수컷을 찾아 이리 저리 날뛰는 것을 가리키며, 유다가 우상 숭배에 집착하여 억제하지 못하는 것을 상징한다.

성 경: [렘2:24]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動)하므로 - 이는 암나귀가 길에서 수컷의 냄새를 찾아내어 달려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아랍 속담에는 '암나귀는 수컷의 오줌 냄새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을 야생 암나귀로 묘사하고 있는 이 내용은 바알을 갈망하는 이스라엘의 음란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 헐떡거림 같았도다 - 성욕이 동할 때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암나귀가 그 입과 코를 크게 벌리고 헐떡이는 것을 가리킨다.

(주); 그것의 달에 만나리라 - 이런 짐승들이 성욕이 동할 때는 맹렬하여 극도로 위험하지만 수컷을 만나 그 욕망이 채워지면 예전처럼 다시 얌전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짐승들은 일정한 시기에 성욕을 발하지만, 헛된 우상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의 갈망은 한도 끝도 없었다.

성 경: [렘2:25]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네 발을 제어하여...목을 갈하게 말라 - 이는 헛된 신들을 좇아가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즉 신이 헤어지고 목이 탈 때까지 이들 헛된 신들을 뒤쫓아 가보았자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이다.

(주);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마약 중독자이나 알코올 중독자처럼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유다는 결국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과 같이 신도 신지 못하고 목이 갈한 상태로 바벨론에 끌려가고야 만다.

성 경: [렘2:26]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도적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같이 - 예레미야는 택함받은 백성이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리면서도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수치'라는 용어로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있다(3:24; 호9:10). 한편 8절에서 이스라엘을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 책임으로 경고를 받은 네 그룹의 지도층이 제시된 바있는데, 예레미야는 여기서 한번 더 그들을 경책한다.

성 경: [렘2:27]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 예레미야는 나무와 돌을 예로 들어서 우상 숭배 관행을 비웃고 있다. 여기서 '나무'라고 하는 것은 아세라 목상 또는 가나안 여신을 상징하는 나무 막대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또한 '돌'이라고 하는 것은 가나안 남신을 상징하는 돌기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틴 발굴에서 이 돌기둥들을 찾아낸 바 있다(G.E.Wright, Shechem, theBiography of a Biblical Cily).

(주); 우리를 구원하소서 - 이는 이스라엘이 참변을 당할 때야 비로소 가나안의 신들이 허탄하며 그것을 의지했던 것이 헛되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성 경: [렘2:28]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뇨 - 예레미야는 유다의 미련한 행위를 비웃으면서 백성들이 자기들 손으로 만든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해보라고 경멸조로 말한다. 이것들은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사40:19,20; 44:9-20).

성 경: [렘2:29]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너희가 나와 다툼은 어찜이뇨 - 여기에는 다시 법정에서 사용되는 말이 쓰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재개하려고 하나 여호와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죄를 다시 공격하신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자신의 범과를 반성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본문의 이스라엘의 불평과 똑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 경: [렘2:30]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징책을 받지 아니함이라 - 대군주가 봉신의 잘못을 책망하기 위해 오게 되면 봉신은 몸가짐을 가다듬고 조심하기 마련인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방문조차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교정(矯正)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인 선지자들을 내쫓고 죽이려고 하였다.

(주); 사자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 이 구절은 비유 이상의 어떤 역사적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므낫세 치하에서 선지자들을 포함한 많은 무죄한 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 생전에도 여호야김은 우리야라는 선지자를 살해한 바 있다(26:20-23).

성 경: [렘2:31]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보라 - 본 구절은 '이 시대의 너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70인역(LXX)은 이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 이스라엘의 반역적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와께서 당신이 이스라엘을 냉대한 일이 있는지 반문하신다. 여기서 사용되는 비유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하던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위험하고 메마른 광야를 지나 여행하는 중에 여호와의 인도하심 덕분에 약속의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신 8:15).

(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않겠다 - 여호와께서 승리의 원천이며 희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의 행위를 자기가 결정하는 자유를 갈망하여 여호와에게서 돌아섰다. '주께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만한 말은그 당시 언약 백성의 전체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들의 그런 무지하고도 완고한 태도는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여호와의 의도를 정면으로 무시한 것이었다.

성 경: [렘2:32]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 유다의 배은 망덕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베푸셨던 모든 은혜와 이적들을 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이스라엘 선지자들과 구약의 기자들이 거듭 지적하는 주제였다(신8:11; 시78:11; 사17:10등). 한편 여호와께서 과거에 큰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불렀던 것은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이며 또 그들이 누구인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서도 이를 중요한 목적으로 두었으며, 그들의 과거사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해주시는가 하는 점을 그들은 언제나 새롭게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주);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 - 여호와의 언약을 잊고 육신의 정욕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했던 기간이 오래 되었음을 말한다. 므낫세는 5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다를 통치했는데 그 기간 동안 유다는 우상 숭배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그의 손자인 요시야 왕의 개혁으로도 완전히 정화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렘2:33]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 여기서는 인칭의 수가 복수에서 2인칭 여성 단수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33-37절의 내용은 예레미야의 다른 독립된 설교인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2인칭 단수가 때로는 보다 보편적인 대중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런 식의 이해가 가능하다.

(주);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 이스라엘의 바른 행위는 그녀의 참된 남편인 여호와를 위해 정조를 지키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정부(情夫) 곧 이방의 허탄한 우상을 찾아 헤맸다.

(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 이스라엘이 악한 짓을 하는 데 아주 능숙해 있어서 도리어 악한 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다.

성 경: [렘2:34]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 -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았은 아합의 행위(왕상21:16)와 예루살렘 거리를 무죄한 자의 피로 범람케한 므낫세의 행위(왕하21:16)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주);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 율법에는 도적이 집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현장에서 쳐죽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출22:2,3). 그러나 이들의 범죄는 현장범에 대한 살인이 아니라 직언과 선의의 책망에 대한 보복살인이었다.

성 경: [렘2:35]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나는 무죄하니 그 진노가...떠났다 - 유다 백성의 죄질의 심각성은 그들의 영적 무감각과 그로 인한 뻔뻔스러움으로 인해 한층 더해졌다. 그들은 34절에 언급된 바와 같은 끔찍스러운 죄를 범하고서도(영역 성경 NIV와 RSV는 34절과 본절의 연결을 강조하기 위해 Yet in spite of all this, 곧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도리어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공의의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자들이었다(요일 1:8,10).

성 경: [렘2:36]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네 길을 바꾸어 - 이스라엘은 변덕스럽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손을 내밀고 추파를 던졌으나 정작 신뢰할 만하고 또 진실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지적하고 있다.

(주); 앗수르로 인하여...애굽으로 인하여 -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앗수르나 애굽에 의지하려고 하나, 그들은 변덕스럽고 의지할 만한 자들이 못되며, 오히려 유다에 수치와 굴욕 그리고 절망만 안겨다 줄 것이다. 앗수르는 이미 북왕국에 수치를 안겨다 준 바있으며, 당시에는 유다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한편 본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의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1) 앗수르는 더 이상 유다를 후원해줄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에 애굽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왕하24:4)을 지적한 것이며, 본절의 기록 연대가 요시야 시대의 것이긴 해도 훗날 여호야김 시대에 예레미야가 직접 이 부분을 부가적으로 편집해 놓었을 것이라는 견해. (2)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정치적 중립 상태를 견지했던 요시야시대 초기로 보는 견해. 이중 후자가 더 타당할 듯하나, 어떠한 견해를 취하든 간에이 구절이 말하는 내용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치 않을 때는 침울한 재앙과 저주가 임한다는 것이다.

성 경: [렘2:37]

주제1: [유다의 죄악에 대한 고발]

주제2: [심판과 책망의 근거]

(주); 네가 그들을 인하여 형통치 못할 것임이니라 - 여호와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지배하시는 이상, 유다가 어떤 나라를 신뢰하든 간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시면 그들 나라들은 유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나라들은 반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선택하여 자기 백성을 돕기로 결정하면 이스라엘은 복을 받을 수 있다(사44:28-45:7). 그리고 본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전체적으로 이를 정리하자면, 본장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예레미야 사역 초기의 설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때 본자의 메시지가 전파된 때는 대체적으로 요시야의 개혁이 점차 무르익어 갈 때이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은 B.C.622년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에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개혁은 예레미야의사역 전인 B.C.629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대하 34:3-7). 따라서 예레미야는, 그 전총이 모세 시대로 소급되는 언약 사상으로부터 강한 동기를 부여받았다. 이 언약 사상은 예레미야 사역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이다.

성 경: [렘3:1]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우선 본장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앞에서 2장의 배경을 살펴보았던 바, 그것은 주로 요시야의 개혁이 무르익어 갈 때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됨과 동시에 크게 증폭된 회개 운동이 선지자의 예리한 통찰력에는 너무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비친 듯하다. 즉 유다는 개혁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호와로부터 등을 돌렸던 것이며,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 경우 첫 남편과 다시 결합하지 못한다는 율법의 금지 조항(신24:1-4)을 내세워 유다의 잘못을 징책하고 있는 것이다.

(주); 다시 받겠느냐 - 70인역은 이 부분을 '그 여자가 그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라고 번역하고 있는 반면 맛소라 사본에는 '그가 그녀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24:4의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前夫)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란 내용에 비추어 맛소라 사본의 기록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성 경: [렘3:2]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이 땅을 더럽혔도다 - 유다 민족의 배도에 대해서는 높은 산 어디에서나 그 증거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산 위로 올라간 것은 신들과 더 가까이 접촉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우상 숭배의 부도덕한 의식에 빠져드는 모습을 사막의 아랍인 대상을 이 숲 속에 숨어 약탈하려는 행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보다 직접적으로는 음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창녀의 모습과 닮은 것이었다(창 38:14; 잠 7:12-15). 예레미야는 이같은 더러운 범죄 행위를 가리켜 땅을 오염시켰다고 지적한다(thompson, Clar-ke, Codvia).

성 경: [렘3:3]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단 비가 그쳐졌고...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창녀의 전형적인 모습과 그 행위에 대한 처벌로서 가뭄이 든 것을 말하고 있다. 단 비는 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토지 경작의 준비에 필요하였으며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였다. 그 이후 여름 기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는 그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팔레스틴 지역의 가뭄을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3:4]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나의 아버지여...소시의 애호자시오니 -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가뭄이 닥쳐오자 비로소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에 사용했던 다정한 말로 여호와께 호소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애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원어 '알루프'(*)는 흔히 '친구'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길들여진 짐승', '황소', '남편', '가장'등의 다양한 의미로도 쓰였다. 아마 예레미야는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 이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말속에는 여호와의 자비를 악용한 이스라엘이 마치 응석과 고집만 늘어난 아이처럼 제멋대로 가증스러운 길로 나아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Thompson).

성 경: [렘3:5]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 이스라엘의 얄팍한 신앙의 일면이 엿보인다. 즉 그들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와 항의만 하면 자기들의 무수한 악행을 눈감아 주시고 재빨리 구원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번지르르하게 말만 할 뿐 악행을 그치지 않고 있다.

성 경: [렘3:5,6]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 이스라엘의 얄팍한 신앙의 일면이 엿보인다. 즉 그들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와 항의만 하면 자기들의 무수한 악행을 눈감아 주시고 재빨리 구원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번지르르하게 말만 할 뿐 악행을 그치지 않고 있다.

성 경: [렘3:7]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오히려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 이 구절에는 이스라엘이 이방 제사 의식에 깊이 중독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인해 몇가지 시련을 당하고 난 후 여호와께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한편 남유다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멸망에 넋을 잃고 흥미 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다의 반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성 경: [렘3:8]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내가 그를 내어 쫓고 - 여기에는 B.C.722년에 사마리아 성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함락되는 역사적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왕하17:1-6). 그러나 사마리아 멸망 전에도 이미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의 침공에 시달렸다(왕하15:19). 디글랏 빌레셀 3세(B.C.745-727년) 당시의 앗수르군은 이스라엘 대부분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15:29). 이는 북이스라엘의 배도에 대한 값비싼 대가였다. 그러나 유다는 언약을 어진 이스라엘의 심판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에 빠져든 것이다.

성 경: [렘3:9]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 본절의 주체는 8절과의 연관 속에서 보면 유다인 것 같고, 10절과 관련지어 보면 이스라엘인 듯하다. 문맥상 전자로 보는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유다의 배도는 아주 심각한 것이어서 여호와의 언약 조항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편 가나안 종교에 있어 주요 관심사는 풍요와 성(性)에 있었는데, 따라서 그 제사 의식도 주로 땅, 짐승, 여인의 다산(多産)을 빌기 위한 목적에서 수행되었다(Feinberg). 본절에 언급된 돌과 나무 역시 그들의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

성 경: [렘3:10]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패역한 유다]

(주); 진심으로...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 이스라엘이 언약 파기로 인해 심판을 초래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다는 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이키지않고 그 흉내만 내었다. 아마 예레미야는 여기서 요시야의 개혁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B.C. 622년 이후와 관계된다. 유다는 므낫세 통치 이전 즉 사마리아 멸망 때까지는 이스라엘보다는 우상 숭배에 덜 물들어 있었다. 그 이후 유다의 종교적 타락은 급속도로 심각해졌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과 더불어 유다는 다소 바른길로 들어서는 듯하였으나 예레미야에게는 이것이 피상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종교적 행사는 활발했을지 모르나 참된 회개는 부족했던 것이며 예레미야는 이에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5:20-31; 6:16-21; 7:1-15). 이 구절의 연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 즉 요시야가 그의 개혁 운동을 강화하기 이전에 나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보다는 종교 개혁 조치의 초기 실패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고 이 구절을 B.C.622년 이후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 경: [렘3:11]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배역한 이스라엘은...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 여기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비교 논쟁이 언급된다. 즉 배역한 이스라엘이 패역한 유다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범죄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당한 사건으로 경고를 받았음에도 자기 길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렘3:12]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언어 유희가 쓰였다. 그래서 이를 살려서 번역하면 '돌아선 이스라엘아 돌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자기 백성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내용이다. 여호와는 자비하시고 그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한편, 여기에는 사마리아에 임한 심판이 너무 심했다거나 또는 적절치 않았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따라서 유다가 더 악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용서받는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핵심은 유다의 오랜 죄악에도 하나님이 참고 기다렸다면,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 용서함을 받지 못하겠는가 하는 내용이다(Thompson, Harrison, Nicholson).

성 경: [렘3:13]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서 세 가지 회개 사항이 지적되고 있다. '듣지'에 해당하는 '솨마'(*)는 그냥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지적의 배경에는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는 신명기적 언약관이 자리잡고 있다(신28:1,2,15). 여호와의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사항은 그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외 다른 방식에 의해서는 언약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Harrison, Nicholson).

성 경: [렘3:14]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 '남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알'(*)은 '주인(남편, 주)이 되다'라는 뜻으로 가나안 신 바알과 음가가 같은 동사를 사용한 언어 유희인 바, 하나님만이 참된 보호자가 되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 아노키)이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아주신 것이다(2:2; 호2:2).

(주); 하나와 ...둘을...데려오겠고 - 이 말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한 지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체적인 귀환을 가리키지 않고 각 성읍에서 하나와 각 족속 중에서 둘을 데려오는 정도의 극히 부분적 귀환이다.이는 곧 하나님의 가장 자비로운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하는 자들이 소수에 불과할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여기서 북이스라엘 사림들의 귀환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온'은 통일 왕국 시대에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다. 북쪽 포로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면 이스라엘 전체가 다시 통합될 것이며 성소 역시 하나가 되어 정치적, 민족적 분단이 제거됨과 동시에 하나의 백성, 한 분 하나님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렘3:15]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주리니 - 회복 시대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처럼(삼상13:14) 여호와의 마음에 합하는 통치자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23:1-6; 겔34:23; 37:24). 한편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을 선포하다가 여기서는 은혜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엄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인기를 누리던 낙관적 선지자들은 심판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심판 이후에 도래할 은혜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란 없었고 오직 '값싼 은혜'만 있을 뿐이었다(27:16; 28:2-4).

성 경: [렘3:16]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회복시대의 그림이 이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주의 백성이 '이 땅에서 번성하는 것'이요, 둘째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도 생각지도 만들지도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후의 상황에 관한 내용으로 보기도 하지만, 예언의 복합 성취라는 관점 및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로 볼 때 메시야 시대의 상황에 관한 언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 구원받은 남은 자의 증가와 번영은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 묘사되는 사항이다(23:3 참조). (2) 언약궤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상징이었던 바 그것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은, 옛 신앙의 청산과 새로운 예배(요4:23)의 시대가 열림을 암시한다. 언약궤는 B.C.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 소실되었거나 바벨론에로 탈취되어 갔을 것인데, 52:17-23의 전리품 목록에서 빠진 것으로 보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성 경: [렘3:17]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 16절에 이어, 선지자는 예전에 언약궤가 지녔던 의미 곧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보좌(왕하19:14,15; 시80:1)로서의 의미를 예루살렘 자체가 갖게 될 것임을 예언한다. 이 또한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 후 재건될 예루살렘 성전에 언약궤가 없지만 예루살렘이 여호와 신앙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에언한 내용이며, 더 나아가서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영적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하겠다(갈4:26;히12:22).

성 경: [렘3:18]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회개할 때 받을 축복]

(주);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이르리라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재통일에 대한 약속은 이미 B.C.8세기 선지자들이 선포한 바 있는 주제이다(호3:5; 미2:12). 이러한 재통일은 두 왕국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고난을 겪은 후에야 마침내 이루어질것이다(사11:1--16; 겔37:15-28).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보아 후대인 포로기 이후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용어나 사상이 예레미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23:1-8). 한편 본절의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선택하신 바 메시야의 은혜로운 통치하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사11장; 겔37장; 슥8장 등).

성 경: [렘3:19]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바는 당신의 백성이 여호와께 순종하며 언약 규정의 한도 내에 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그들에게 축복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신28:1-6; 30:9,10).

(주); 나의 아버지라 -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구약의 주요 주제이다(호11:1).

성 경: [렘3:20]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 이스라엘의 죄악이 다시 배도와 간음으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남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사상은 19절과 동일하다. 이 백성은 재앙을 만나면 구원을 호소하지만(4절), 그 순간만 모면하면 부르짖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5절).

성 경: [렘3:21]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소리가 자산 위에서 들리니 -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한탄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기 위해 높은 곳에 모여있는 것으로 설명한다(Clarke). 그러나 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을 맞아 화급하게 부르짖는 장면을 조롱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Thompson).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울부짖으면서도 바알 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한때 그곳에 산재해 있던 바알의 단들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신들을 그리워하며 이곳에 모여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이 있을리 만무한 것이다.

성 경: [렘3:22]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 이 구절은 앞 단락이 끝나고 뒷 단락이 시작되는 중간부분이다. 여기에는 죄에서 돌아오라는 여호와의 의미 심장한 부르심이 기록되어 있고 본절 하반절에서는 25절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회개 장면이 시작된다.

성 경: [렘3:23]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이스라엘의 구원은...여호와께 있나이다 - 이스라엘의 첫 번째 고백 장면이 묘사된다. 이 고백에는 현재 당하고 있는 그들의 곤경이 무엇 때문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여호와가 그들의 유일한 참하나님이란 고백은 그들이 근본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는 것으로서(출20:2-6; 신5:6-10; 6:4), 이제 여호와를 그들의 주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런 고백은 여호와의 언약 갱신과 다름없다. 이는 여호와의 언약 사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 경: [렘3:24]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부끄러운 그것이 - 이는 바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죄의 고백과 더불어 여태까지 섬기던 바알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말의 원어는'보쉐트'(*)로서 구약 성경 곳곳에 나타난다. 사울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스보셋이라 불렀는데(삼하2:8) 이는 틀림없이 이스바알이란 이름 대신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그는 에스바알로도 불리웠다, 대상8:33; 9:39).

(주); 우리의 어렸을 때로부터 - 이는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던 출애굽 사건 이후를 가리킨다. 바알을 '수치'로 여긴 회개자들은 그들 조상들로부터 시작해서 가꾸고 수고하여 온 모든 것을 이 부끄러운 것이 삼켜버렸다고 선언한다. 즉 바알 숭배로 그들이 멸망하여 양떼와 소떼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을 다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 경: [렘3:25]

주제1: [불신실한 유다의 모습]

주제2: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

(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본절에 서술되는 회개 장면은 순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회개의 내용은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서 예레미야가 거듭 지적하는 주제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했다는 자각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자각은 여호와의 주권과 언약의 요구 사항을 거부했다는 고백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시내 광야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마음의 회개가부족하였다. 즉 회개에 대한 외적 고백과 그들의 신체적인 행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4:1-4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성 경: [렘4:1]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 본문은 당시 이스라엘의 처한 상황이 매우 어렵고 절박하였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은 안팎의 여러 문제들이 직면하여 이제까지 취해오던 노선을 변경시켜 다른 방도를 따르고자 나름대로 모색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의뢰할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특히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나타났던 그런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그들이 가담하고 있는 모든 의존적 외교 조약과 우상을 타파하고 오직 여호와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실질적인 회개를 통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주); 가증한 것을 버리고 - '가증한 것'에 해당하는 원어는 '쉬쿠츠'(*)로서 구약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이다. 이것은 불결한 의복(나3:6), 우상에게 바친 음식(슥9:7), 그리고 이교도의 신들(왕상11:5; 왕하 23:13; 대하15:8)을 가리키며, 때로는 거짓 신들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호9:10). 여기서는 가나안의 거짓 신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런 가증한 것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와 다른 신들은 양립될 수 없고 화합될 수가 없다.

성 경: [렘4:2]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 때로는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란 말로도 번역되는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맹세할 때에 사용하는 상투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출20:7; 신5:11).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맹세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 예언서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단어들이다.

(주);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 여호와의 주권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이스라엘이 약속된 축복의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다른 민족들도 축복의 참된 근원이 여호와께 있으며 그의 언약에 순종할 때 축복을 받게 됨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참된 회개는 이스라엘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되는 것이다(사42:6; 49:6).

성 경: [렘4:3]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 - 본절의 유다가 1절의 '이스라엘'의 일부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진다. 어떤 주석가들은 1절의 '이스라엘'이 현재 포로로 잡혀가 있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본다(Streane, Welch). 그러나 문맥상 본절과 4절은 1,2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본절의 '유다'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변방 주(州)로 편입된 이후 남하한 백성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주); 묵은 땅을 갈고 - 여기서 '묵은 땅'(*, 니르)은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된 바가 없는 '새 토양'을 뜻한다. 결국 분문은 개혁 기간 동안의 형식적, 피상적 회개가 아닌 근복적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으로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마9:17; 막2:22) 예수의 비유와 일맥 상통한다.

(주);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라는 토지가 과거, 특히 므낫세 통치 이후에 악행이라는 가시덤불로 만연되어 있으며,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새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임을 지적한다. 즉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기된 온갖종류의 폐단들, 곧 가시덤불을 회개와 순종이라고 하는 쟁기로 갈아서 온전히 제거해버리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C.L. Feinberg).

성 경: [렘4:4]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할례를 행하여...마음 가죽을 베고 - 할례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창17:1-14 주제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참조). 이 의식은 언약의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으며(창17:10-14) 단순히 외적인 표징이 아니라 여호와의 주권에 전혹적으로 순종한다는 내적 실체에 대한 증거였다(신10:16; 30:6). 한편 선지자는 여기서 남자 성기 표피 끝을 잘라내는 할례를 말하지 않고 마음 가죽을 베어낼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마음'이란 지성과 의지, 감정 등을 다 포함하는 내적 삶의 전체를 뜻한다. 즉, 마음이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한 물리적인 할례 의식으로는 언약의 취지를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 언약 파괴의 결과를 강조하고 있다. 고대근동의 종주국과 봉신국 간에 체결된 언약에도 축복과 저주가 뒤따랐다. 언약을 배반한 봉신은 대군주의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권 군주이신 여호와는 자기와의 언약을 깬 이스라엘을 징벌하고야 마신다. 그리고 그 징벌을 예레미야는 '끌 자가 없는 불의 심판'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런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7:20; 사1:31; 암5:6등).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응징했던 것과 똑같이 이제 유다도 심판하실 것인 바, 유다는 이미 그의 주인 이스라엘보다 더 범죄해 있었다(3:11).

성 경: [렘4:5]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 여기서부터는 심판의 상세한 내용이 묘사된다. '나팔을 불라'는 것은 사자(使者)의 가슴 아픈 전달 사항을 유다와 예루살렘에 알린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은 호세아가 외친 경고의 말씀과 유사하며(호5:8), 후대의 요엘 선지자도 이와 비슷한 경고를 고하였다(욜2:1).

성 경: [렘4:6]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 '기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스'(*)는 '표준', '기준', '신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무슨 신호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위급한 상태를 알리기 위해 먼 지역까지 전달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봉화와 같은 것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라기스(Lachish)의 발굴에서 나온 편지 중의 하나는 B.C.586년 느브갓네살 침략 당시 남유다에 긴급 사태가 발생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왕께서 지시한 대로 우리는 리가스의 기호('네스')를 지켜보고 있나이다.'

성 경: [렘4:7]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 여기서 사자에 비유된 침략자는 바벨론을 가리킨다. 51:38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혼비 백산하는 바벨론 거민들을 부르짖는 사자새끼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 백성은, 마치먹이를 찾아 나온 굶주린 사자에게 찢기듯이 처참한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당시 바벨론은 B.C.612년에 앗수르를 점령한 데 이어서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잡기 시작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주변 열국들을 초도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성 경: [렘4:8]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굵은 베를 두르고 - '굵은 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킴'(*)은 거칠고조잡한 삼베류의 옷을 뜻하는데 흔히 슬픔과 애곡을 표현할 때 입었다(사15:3; 겔7:18등).

성 경: [렘4:9]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던 왕과 방백, 제사장, 선지자 등의 지도층 인사들이(2:8,26) 이 소식에 놀라 공포에 사로잡히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왕과 방백 등의 정치 지도자들은 안전과 희망의 근거를 잃었기 때문에 쓰러진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내세운 희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며 배도한 제사장들이 내세운 공허한 안전 역시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성 경: [렘4:10]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슬프도소이다...주께서...크게 속이셨나이다 - 이는 예레미야가 받은 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계시에 대단히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다(19절). 이것은 또한 예레미야의 성품이 어떠한지 그 일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과 많은 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얼핏 보면 예레미야의 이런 항의는 참람되어 보인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레미야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히 믿고 있었고 언젠가는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이 실행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자기 자신의 삶이든 아니면 타인의 삶이든 간에 비극적인 처지를 보고 깊은 슬픔을 느낀 데서 나온 일시적인 한탄인 것이다.

(주);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 본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본 구절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혹자는 '이르시기를'을 '그들이 이르기를'이라 번역한 70인역(LXX)에 근거하여,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Cheyne, Hyatt). 그러나 이는 원문 독법상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보다 적합한 해석으로는,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의 감언 이설을 허용하신 하나님께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인간의 자의적 악행을 하나님이 허용하거나 내어 버려두신 것을 마치 하나님이 그 악행에 개입하신 것처럼 표현한 사례가 종종 나온다(출9:12; 살후2:11).

성 경: [렘4:11]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에서 - '뜨거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흐'(*)는 문자적으로 '맑은', '깨끗한'이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하라 사막의 열풍으로서 파멸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맑은 바람이 '파멸'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바람을 막아줄 나무나 그 어떤 방파제 같은 것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그리고 이 바람은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오는데, KJV, RSV에서는 이를 '내 백성의 딸'(the daughter of my people)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내 딸'과 '내 백성'은 동격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내 딸=내 백성'으로 이해함이 무난할 것이다. 비록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상황이긴 해도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를분명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주);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 하려함도 아니며 - 이는 타작 마당의 키질하기 위해 부는 바람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인데, 앞으로 유다에 임할 바람은 알곡을 추리기위한 키질용 바람이 아님을 선포한 것으로서 이들을 몽땅 날려버리는 엄청난 파멸의 바람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CALVIN, J.Bright, Nicholson, Clarke).

성 경: [렘4:12]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나를 위하여 오리니 - 유다에 임할 심판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나왔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태까지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았던 것에 대한 보응으로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사 유다의 범죄 행위에 대한 형을 선고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Thompson, Clarke, NIcholson).

성 경: [렘4:13]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구름같이...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 심판의 도구로서 유다에 밀어닥칠 적군의 진군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환상을 통해 유다를 침략할 적군이 마치 빽빽한 구름과도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고뇌에 찬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의 고통스러운 심정은 심판 장면을 묘사하는 12-18절이 끝난 다음에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한 백성의 반응은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란 것이었는데, 이는 온 땅이 황폐화 된 것에 대한 백성들의 자책과 후회의 한탄을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비록 더딘 것 같아도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때는 그 어느 누구도 이를막을 수 없고 또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J.Bright, Nicholson).

성 경: [렘4:14]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 예레미야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들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상하게 하다', '깨뜨리다' 등의 뜻인 '라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구약에서 흔히 쓰인 단어이다(창6:5; 출32:22; 민32:13; 신1:35; 삿9:56; 삼상25:21등). 3장에서도 예레미야는 이와 유사한 회개로의 부르심을 촉구하였다. 아마 예레미야는 심판이 문앞에 이르렀다고 해도 회개로의 부르심이 늦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Thompson).

성 경: [렘4:15]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 '단'은 팔레스틴 북부 변방의 한 도시로서 오늘날의 '텔엘-카디'인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의 발굴에 의하면 예레미야 당시 이곳은 정치,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에브라임 산은 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예루살렘의 전방 기지와 같은 곳이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적의 침략을 알리는 소리가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4:16]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에워싸고 치는 자들 - 클라크(Clarke)는 본문에 해당하는 원어 '노체림'(*)을 '지키는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유다 성읍을 점령하고 파멸시킬 느부갓네살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Calvin).

성 경: [렘4:17]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밭을 지키는 자같이 - 본절의 장바변은 시골 농부가 곡식단을 돌보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 둔 오두막에서 들짐승이나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보던 것에서 따온 예화인데, 아마 이런 알기 쉬운 예화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Nicholson, J.Bright).

성 경: [렘4:18]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임박한 심판의 경고]

(주); 네 길과 행사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 예레미야는 고통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에 밀어닥친 심판의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는 너의 악함이라'는 말은 심판이 백성들의 악으로 말미암았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렘4:19]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 본절에서부터 21절까지는 갈대아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멸과 유다의 황폐를 내다보는 에레미야의 내적인 고통과 근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마 그는 앞에서 예언한 그 모든 환난의 내용을 환상을 통해 직접 목격했던 것 같다. '슬프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에'(*)의 뜻은 '창자'인데, 아마 정신적인 충격이 대단히 심각하게 주어졌을 경우, 신체 내부 기관이 이를 감당할수 없어 어떤 방응을 나타냈던 데서 유래한 단어인 것 같다(Thompson).

성 경: [렘4:20]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 재앙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 결과성들이 불타고 거민들이 내어쫓기고 학살당할 것이다.

(주); 나의 천막...나의 휘장 - 이는 유목민 시대의 천막 생활에 대한 잔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튼튼한 요새들이 아무런 방어 수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성 경: [렘4:21]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저 기호를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 예레미야의 내면에서는 재앙으로 인한 전쟁의 함성과 나팔 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귀는 이미 이러한 소란스러운 고함 소리에 지쳐 있었으며, 그의 눈에는 자기 동족의 비극적인 고통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를 막을 수 없다는 깊은 절망감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성 경: [렘4:22]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아의 슬픔]

(주); 나를 알지 못하는 우둔한 자요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지침이나 교훈에 대한 앎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 대해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하실 때, 이 말속에는 그 백성들의 불신과 반역 및 계명에 대한 불순종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Mckkane).

성 경: [렘4:23]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혼돈하고 공허하며 - 본절에서부터 28절까지는 임박한 파멸에 대한 심판의 참상이 환상을 통해 표현된다. 본문의 히브리어 '토후 와보후'(*)는 창1:2에서 땅이 창조되기 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묘사할 때 쓰인 말이었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이 마치 땅이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은 혼돈을 초래할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성 경: [렘4:24]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진동하며...요동하며 - 클라크(Clarke)는 본절의 '산들'과 '작은 산들'이 '왕과 방백들'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놀라서 달아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물론 이 해석도 무난하겠지만 앞 구절과의 연결을 중시할 때, 산들이 진동할 정도로 유다에 밀어닥칠 바벨론 군대의 공세가 무시무시할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산들'과 '작은 산들'은 흔히 힘과 안정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안정의 상징이 모두 흔들리고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J.Bright).

성 경: [렘4:25]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새가 다 날아갔으며 - 파멸과 황폐함의 철저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한편 하나님은 악인을 멸하실 때에 짐승과 새와 물고기도 함께 멸하신다고 말씀하셨다(습 1:3).

성 경: [렘4:26]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본절에서는 쓸쓸함과 파멸이 그 이전의 풍성한 결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황무지로 변해버린 '좋은 땅'의 원어는 '카르멜'(*)인데, 이것은 어떤 특징 지역을 가리키기보다는 풍요로웠던 그 지역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Cheyne).

성 경: [렘4:27]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앞 구절들에서는 이 땅 전체가 황폐해질 것으로 지적했으며, 이어지는 28절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을 타개하기 위해 혹자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로'(*)를 생략하거나, 이를 강조의 '라멕'(*)으로 보기도한다(Soggin). 그러나 우리는 이땅이 비록 황무지가 된다 하더라도 23-26절에 묘사된바와 같이 완전한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를 심판 중에도 남은 자가 이 재앙에서 살아 남게 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R.K.Harrison).

성 경: [렘4:28]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땅이 슬퍼할 것이며... - 여기서는 땅과 하늘에 대한 의인법이 쓰이고 있는데,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도 흔히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혹자는 '땅이란 그 땅위의 거민들을 가리킨다고 하나, 땅의 멸망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더 깊은 선지자의 내면에 접근할 수 있겠다. 즉 감각이 없는 땅조차도 슬퍼하는데, 정작 슬퍼해야 할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점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Calvin).

성 경: [렘4:29]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시온의 극심한 고통을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침략자들의 진군 소리에 놀라서 달아나며, 안전한 곳으로 숨는다. 또한 사람들은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한다. 한편, 이사야도 하나님의 심판이 교만하고 자고한 자들에게 임할 것임을 예언하면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사2:19-21).

성 경: [렘4:30]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네가 붉은 옷을 입고...꾸밀지라도 - 고운 옷으로 차려 입고 온몸을 황금으로 장식하고 눈썹을 그리는 이 같은 행동은 창녀가 손님을 맞을 때 하는 행위를 암시하는데, 이는 우상 숭배자들이 갖추던 장식(사3:18-23)을 비유하기도 하며 약소국이 대국의 침략을 당하여 제3국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예물을 바치는 모습을 비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 곧 바벨론의 침입을 당한 유다가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 경: [렘4:31]

주제1: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레미야의 슬픔]

(주);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 창녀의 행위를 예화로 들었던 선지자는 여기서 그 표상을 바꾸어 첫 아기를 해산하려고 울부짖는 여인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여인의 고통하는 소리를 딸 시온의 소리로 설명한다. 유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자기의 진정한 남편을 거부하고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과 같은 정부들과 놀아났었다. 그리고 이제 음란한 유다의 악행은 그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성 경: [렘5:1]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페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여기서부터 9절까지는 다시 예루살렘의 죄악상과 도저히 용서받을수 없는 도덕적 타락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되돌아간다. 아마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함인 것 같다. 이런 내용은 2장에서도 이미 다루었던 것으로서 그 전체적 주제는 여호와의 주권과 그의 언약을 거부한 결과 그들이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쉬파트'(*)이며 '진리'는 '에무나'(*)인데, 이 두 용어는 구약의 주요 사상인 '의'(*, 체다카)와 '사랑'(*, 헤세드)과 함께 연결되어 여호와의 언약 사상을 구성하는 주요한 용어들이다. 즉, 선지자는 이를 통해서 여호와와의 언약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만악의 뿌리가 바로 이 언약을 배반한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의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게 되면, 심판을 면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 조건이었던 의인 열 사람보다 훨씬 더 쉬운 것이었다(창18:22-32).

성 경: [렘5:2]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어떤 약속이나 의무에 대해 여호와를 그러한 약증의 증인 또는 보증인으로 불러낸다는 뜻을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이나 의무를 파기할 경우는 여호와의 심판을 자청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맹세가 남용되었으며, 또한 거짓 맹세의 표상이 되고 말았다.

성 경: [렘5:3]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 어떤 관점에서 보면, 본절이 2절 앞에 위치하는 것이 더 논리적인 것 같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바꾸지 않아도 본문은 전후 문맥상 자연스러운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본다. 즉 1,2절과 관련하여 본문은 유다 백성의 타락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실을 구하시나 그들 중에는 한 사람도 성실히 행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본절 하반절과 관련하여 본문은,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성실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징계라는 방편을 사용하셨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C.W.E. Naegelsbach).

성 경: [렘5:4]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 - '비천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달림'(*)인데, 원문에는 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다음 어구인 '우준한 것'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다음절의 '귀인들'(*, 하그돌림)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런 구조적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이 말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옳겠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응징에 대한 시대 감각이 없었으며, 그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렘5:5]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일제히 그 멍에를...끊은지라 - 정치적, 종교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온갖 속박을 벗어던지고 모든 도덕법들도 짓밟아 버린 사실이, 황소가 멍에를 꺾고 주인에게 반발하는 예화로 소개되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선포하던 시기는 요시야의 개혁이 있은 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른 때가 아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지적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분명히 요시야 통치 시절에는 왕의 명을 받아 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그의 명을 시행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성 경: [렘5:6]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사자...이리...표범 - 본절에서는 유다 백성이 언약을 파기하고 마치 황소가 주인의 멍에를 부순 것과 같이 달아난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황소가 자기 주인의 멍에를 꺾고 달아났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수풀에서 나온 사자나 또는 사막의 이리, 또는 그 주위를 배회하는 표범의 공격을 당하고 만다. 하나님을 버린 유다 백성의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들 야생 동물은 4,6장에서 지적되고 있는 침략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용맹성과 난폭함에 있어서는 영락없이 사자와 같았으며, 탐욕과 욕심에 있어서는 이리와 같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재빠른 활약상에 있어서는 표범과 같았다(Thompson, Clarke).

(주);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 이는 유다가 짐승의 공격을 받게 된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적하는 부분이다.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반역된 행위들을 가리키며, '패역'에 해당하는 '메슈바'(*)는 베도를 가리키고 있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언약에 명시된 의무 조항들을 거부하였으면서도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성 경: [렘5:7]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 여호와를 거역하고 신이 아닌 것들 곧 허탄한 우상을 의뢰하고 경배하였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아마 므낫세 당시의 극단으로 치닫던 배도 행각이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고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주);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 이방어 종교의 신전 매음 행위가 요시야의 개혁으로 일망 타진된 이후, 그것에 참여했던 창녀들과 포주들은 은밀한 곳으로 숨어 그들의 사업을 계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창기의 집'이 우상을 숭배하는 곳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겠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행음이란말을 종종 사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상 숭배와 함께 의식 순서 중의 일부로서 육체적 행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도 무난할 것이다.

성 경: [렘5:8]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주);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 같은 죄악이긴 하나 율법 정신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범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아내된 여자를 범하는 것이 훨씬 더 중한 죄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것은 간음과 함께 타인의 것을 탐하는 죄가 추가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아내를 탐하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고 또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근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성 경: [렘5:9]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당위성]

하나님의 심판은 여호와를 무시하고 또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반기를 들고 나오는 이런 행위들에 대한 반드시 임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새 언약하에서도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를 범하는 이런 자들에게는 반드시 같은 처벌을 내리고 말 것이다(엡5:5; 히13:4). 한편 벌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님의 방문은 여기서처럼 징계를 위함일 수도 있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일 수도 있다.

성 경: [렘5:10]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그 가지만 꺾어버리라 -본절에서부터 19절까지는 적의 침략이 임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다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뒤엎고 북쪽의 적이 심판의 대행자로 올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유다 백성은 하늘의 농부로부터 극상품의 포도 품종으로 심기워졌으나 그 열매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들포도가 되고 말았다(2:21).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의 대적을 불러 하나님 소유가 아닌 나쁜 포도나무의 가지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맡기셨다. 한편, 70인역(LXX), 수리아역(SyriacVersions of the Bible) 등은 이 부분을 '그 근본은 남겨 두라. 그것들이 주의 것임이니라'고 해석하였다.

성 경: [렘5:11]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심히 패역하였느니라 - 솔로몬 사후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중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중 더러 본토에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들마저 심히 패역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패역하다'에 해당하는 '바가드'(*)란 말은 '속이다', '가증하게 행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대단히 심각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들은 유다인들은 예레미야를 몹시 핍박했을 것이다.

성 경: [렘5:12]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보지 아니할 것이며 - 백성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겨도 아무런 처벌이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근복적 이유는 여호와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데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상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거부하는 인생의 추악한 모습을 다시금 보게 된다(롬1:28). 결국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칼이나 기근의 심판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런 그들의 말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백성들은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이 가동되어 그들에게 심판이 닥칠 것이란 점을 새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렘5:13]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처럼 공허한 것으로 여기고, 그 대신 거짖 선지자들의 감언 이설(甘言利說)을 좇아 갔다는 내용이다. '바람'의 히브리어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는 점에서 저자의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람으로 간주하는 중죄를 범했다는 것이다(C.L. Feinberg).

성 경: [렘5:14]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하고 -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 의해 바람으로 취급되어버린, 바로 그 말씀을 무서운 불로 화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서 이것은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전투의 하나님'이란 개념을 가졌다(출7:4 참조). 여기서는 천체와 천사의 무리까지 포함하는 '하늘과 땅의 무리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시103:21; 사40:26 참조).

성 경: [렘5:15]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 유다를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 대한 묘사이다. 바벨론은 예레미야 당시에 이미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였으며 나보폴라살 왕(B.C.625-605년) 때부터는 팔레스틴의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성 경: [렘5:16]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열린 묘실이요 - 바벨론 군사들은 모두 다 능한 궁수들이어서 결코 표적을 놓치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화살 하나는 한 사람의 목숨과 같은 것이며, 장병들 어깨에 걸려 있는 전통은 마치 뭇사람의 무덤을 짊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성 경: [렘5:17]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16절이 전쟁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본절은 전쟁의 결과를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추수 곡물, 양식, 양떼, 소떼, 아들과 딸 등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말것이다. 그들은 성이 튼튼하다고 자랑하였으나 이것들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때가 되면, 예레미야의 예언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게 되는 셈이다. 차라리 자신의 예언이 틀리기를 바라는 예레미야가 이런 종말적인 상태를 에언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성 경: [렘5:18]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 본절의 앞 구절들은 운문체로 기록되었으나 본절과 그 다음절은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여태가지 참혹한 심판의 결과를 묘사해 왔으나, 그것이 이 민족의 완전한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뜻인데, 이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이 임하기는 하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철저한 심판 중에서도 긍휼과 위로의 메시지가 함께하는 것은(4:27),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멸에 있지 않고 그들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Feinberg, Harrison).

성 경: [렘5:19]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성격]

(주); 여호와를 버리고...이방인들을 섬기리라 - 유다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이방신들과 연합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그 이방인들에게 속박당하며 이방인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본절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임을 지적하는 예언으로서 범죄에 대한대가는 반드시 치르어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한다.

성 경: [렘5:20]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야곱 집에 선포하며 -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반역적이고 자만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 경: [렘5:21]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들을지어다 - 하나님은 이들 미련하고 무감각한 백성들에게 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들으라고 초대하신다. 이들은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많은 증거들이 있었음에도 그굿들에 전혀 무감각했으며 징계의 채찍을 맞고서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눈이 있다고는 하나 보지 못하였으며, 귀가 있다고는 하나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사6:9,10; 마13:14,15).

성 경: [렘5:22]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여호와 앞에 떤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을 존중하고 경외한다는 의미이다.그러나 이들 백성은 앞절에서 지적되었다시피 우준하고 무감각한 백성들이었던 까닭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界限)을 삼되 - 예레미야 선지자는 설명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여기서 바다를 예화로 사용한다. 거대한 산이나 바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집력이 없는 모래에 의해서 거대한 파도가 땅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기묘함을 한층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의 무감각 상태가 심각하였던 관계로 선지자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성 경: [렘5:23]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 '패역하는'에 해당하는 원어는 '소레르'(*)인데, 이것은 반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로 작심을 하고 돌아섰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강력한 힘을 가진 바다라도 하나님이 설정해 두신 계한을 넘지 않고 순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2절) 그들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유다 백성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경: [렘5:24]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이른 비와 늦은 비 - 이것은 가을비와 봄비를 말하는 것으로서, 때를 따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했다(호6:3; 히4:16).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바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주);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 '추수 기한'이란 것은 초실절과 오순절 사이에 끼어 있는 7주를 말한다.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의 초실절에는 하나님께 소산의 첫단을 바쳤다(레 23:15,16). 이는 여호와께서 곡식을 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 경: [렘5:25]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너희 허물이...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 땅의 가뭄을 화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언약 파기를 가리키는 데 흔히 사용되었던 두 용어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허물'(*, 아온)과 '죄'(*, 헤트)이다.'허물'은 '방황하다', '빗나가다'란 말에서 파생되었으며, '죄'는 '표적을 놓치다'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유다는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로부터 멀리 떨어져 방황함으로써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것이다.

성 경: [렘5:26]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에는 7:2-15의 성전 설교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을 요약해 놓은 것이란 느낌을 받는다. 본절에서는 동료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악인들이 새 사냥꾼에 비유되어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이들 사냥꾼은 유다 백성들을 노예로 끌려가도록 하는 데 일조한 자들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성 경: [렘5:27]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 악인들의 집에는 사기나 속임수를 사용하여 부당하게 얻은 소득이 가득하였다는 말이다.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던 아모스도 당시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내용의 비난을 하였다(암2:6 이하). 그들이 거부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재산을 강탈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였기 때문이었다(Clark, Calvin).

성 경: [렘5:28]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않고도 어찌 번영을 누리려느냐'란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Clarke). 선지자는 여기서 악인들의 악행이 끝도 없고 한계도 없음을 지적하려는 것 같다. 그들은 고아의 송사에 대해서는 변론하기를 거부하였고 가난한 자들의 주장을 묵살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사리 사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한 사회는 이같이 악이 만연하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고 만다(Harrison).

성 경: [렘5:29]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이같은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 모세의 율법은 궁핍하고 사회적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피지배층의 보호에 대단히 관심을 두고 있다(출22:25-27; 23:3,6; 레25:35-37;신14:28,29; 24:12,13).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직.간접적으로 압박하고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유다의 주권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이상 이러한 악행이 결코 용납될 수는 없었다. 심판을 앞둔 유다 사회의 상황은 심판받지 않을 수 없는 극도의 악행이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렘5:30]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기괴한 죄악과 엄청난 범법 행위가 이 땅에서 저질러지고 있었다'(Dahler)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죄사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낱낱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은 다음절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Clarke).

성 경: [렘5:31]

주제1: [유다의 전적 부패와 심판의 도래]

주제2: [심판의 원인]

(주);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은 사회적 불의에 편승하여 온갖 부당한 특권을 누리던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심정을 전달하며, 사회 악을 고발하는 참선지자의 예언을 대적할 수밖에 없었다.

(주);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 거짓 선지자들이 제사장들과 야합하여 그들의 기득권 옹호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대표적인 계층인 선지자와 제사장이 이처럼 불의를 위해 공모한다는 것은 앞절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참으로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제사장의 권위를 내세워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로만 충성을 다할 뿐 그 당시의 유행에 편승하여 죄악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스리며'(*, 이르두)를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자기 손으로 박수를 쳤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어떤 이는 '그들과 연합하였다'(Blayney)라고 해석하였다.

성 경: [렘6:1]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는 북방의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이다.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베냐민 지파는 예레미야가 소속해 있는 지파이며 그의 고향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적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선지자는 경고의 나팔을 울릴 것을 촉구하면서 무장하고 침략자들을 맞아 싸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들이 호명된 것은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드고아는 아모스의 고향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벧학게렘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도상에 위치해 있었는데, 여기서는 봉화불을 올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성 경: [렘6:2]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아름답고 묘한 딸...멸절하리니 - 시온이 아리따운 소녀에 비유되었다. 70인역(LXX)과 탈굼역(Targum)은 본절을 '아름답고 상냥한 자여, 어떻게 해서 네 길이 더러워졌는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딸 시온을 이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로 여겨왔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수치와 불명예가 뒤따를 것이다(Calvin).

성 경: [렘6:3]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목자들이 그 무리 양을 몰고 와서...먹이리로다 - 여호와로부터 심판받게 될 예루살렘이 여기서는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해오는 목자들의 목축지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이곳을 지배하며 자기 군사들을 먹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각자 지역을 분할하여 장막을 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장시간에 걸쳐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것임을 암시한다(Thompson, Clarke).

성 경: [렘6:4]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준비하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다쉬'(*)는 '봉헌하다', '성결하게 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바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떤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킨다.

(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그늘이 길었구나 -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이 주로 아침에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정오에는 햇빛이 내리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이 전쟁을 개시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시간인 정오에 전쟁하러 올라가자고 한 것은 적군들이 정오라 할지라도 결코 공격을 늦추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또한 적들은 날이 기울어진 것을 아쉬워한다. 이는 밤이 되어도 계속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Harrison).

성 경: [렘6:5]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우리가 밤으로 올라가서 - 전쟁 때라도 저녁이 되면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침략해 들어온 적들은 밤에도 공격을 감행하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적군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이 구절을 낮에는 기회를 놓쳤지만 밤에는 기회를 잡자는 의미로 보고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자는 것으로도 해석한다.

성 경: [렘6:6]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나무를 베어서...흉벽을 쌓으라 - 이는 앞으로 일어날 싸움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에루살렘 사람들은 성을 지키고자 노력할 것이며, 북방의 대적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을 부수려고 할 것이다. '흉벽'(*, 솔레라)이란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쌓아올린 거대한 공성퇴를 말한다(삼하20:15; 왕하19:32; 겔4:2; 26:8).

성 경: [렘6:7]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샘이 그 물을 솟쳐냄 같이 - 예루살렘이 악을 계속 만들어낸다는 뜻에서 샘에 비유되었다. 그리고 만연해 있는 사회악은 결국 심각한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켰는데 본절에서는 이것이 질병과 창상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질병에는 위대한 의사의 진료와 치료가 요청되지만 유다는 여호와의 훈계를 저버리고,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6:8]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재앙의 선포]

(주);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 유다가 여호와의 훈계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주께로 돌아선다면, 아직 기회는 있다는 암시이다. 이와같이 심판이 선고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기회를 찾고 계신다. 이는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간 아들의 귀향을 간절히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과도 유사하다(눅15:11-32).

성 경: [렘6:9]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 침략해 들어오는 갈대아인들에게 예루살렘 점령 이후 포로로 잡혀 가고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마저 잡아가라는 권고의 말씀이 주어진다. 남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크게 뉘우쳐야 할 것인데, 이들조차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음을 암시한다. 한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확할때 남김없이 거둬들이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두라고 명하셨으나(레19:10; 신24:21), 당시 유다인들은 탐욕에 이끌려 이러한 규례를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절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죄악들을 장차 받게될 심판과 연관시켜 언급하고 계신셈이다.

성 경: [렘6:10]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 이는 유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완고하게 거부하였음을 가리킨다.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다'(*, 아렐라)는 표현은 다소생소하다. 다른 곳에서는 입술의 할례(출6:12,30)나 마음의 할례(레26:41)란 표현이 쓰이고 있다. 닫혀있는 귀에는 그 어떤 훈계나 가르침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성 경: [렘6:11]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 예레이먀의 전인격은 여호와의 계시를 온전히 수용하는 편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의 분노에 항의하거나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는 유다에 임할 심판을 막을 수 없었다. 한편, 클라크(Clarke)는 이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유다에 임할 무섭고 끔찍한 심판의 광경을 예레미야에게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이 예언을 힘써 전하기 위해 뜨겁게 불타 올라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성 경: [렘6:12]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 유다인들의 모든 소유가 타인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손을 그들에게 펴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자신들을 쫓아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모세가 경고한 바이기도 하였다(신28:30 이하).

성 경: [렘6:13]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 이 백성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탐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군다나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고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할 종교 지도자들까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작은 자'와 '선지자'가 대구를 이루고 있고 '큰 자'가 '제사장'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지자가 제사장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모든 성직자를 다 포괄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J.Bright, Thompson). 그리고 탐남으로 번역된 원어 '바차'(*)인데, 끝부분의 거짓과 대칭을 이루며,이와 유사한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가 어떤 경우에는 '이득을 얻다'란 의미로 쓰일때도 있지만, 대체로 '부당한 이익을 탐하다', '탐심에 빠지다'는 뜻으로 쓰였다.

성 경: [렘6:14]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 백성들의 상태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는데도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평강만을 외쳤다. 여호와와 백성 간의 언약 관계는 파괴되어 심판이 목전에 다달았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팔요한 것은 허황된 빈 말로써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였다. 한편 심상히(*, 네칼라)란 말은 원래 '무가치한 것으로', '하찮은 것으로'란 뜻인데, 70인역(LXX)은 이를 '여수데눈테스'(*)라고 번역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경멸하며'로 해석하였다. 심각한 상처에 대한 경각심 없이 이렇게 처치한다는 것은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성 경: [렘6:15]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부끄러워하였느냐...않았느니라 -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을 속이고 사기치는 더러운 행위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얼굴을 붉히는 법도 알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민족 전체가 잠겨 있는 그 악행에 대해 완전히 감각을 잃고 말았다. 더욱이 그들은 단순히 무감각한 정도가 아니라 악을 향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와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저들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의식 준수만으로도 항구적인 평화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는지도모른다(Thompson, Harrison).

성 경: [렘6:16]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옛적 길 곧 선한 길이...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조들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았던 것을 가리킨다(창4:4;5:24; 6:8,9; 12:4등 참조). 그러나 당시 유다의 상황은 그들이 지난날 걸어온 행적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데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형편에 처해 있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안식과 번영의 길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멸망과 죄악의 길을 택하였다.

성 경: [렘6:17]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결코 자기 백성의 멸망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서의 '파숫군'이란 백성들이 반역과 불순종의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거나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가리킨다(겔3:16-21; 33:1-19, Nicholson).

성 경: [렘6:18]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열방아...회중아...알라 - 이제 하나님은 열방을 불러 그의 백성에게 내려지는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라고 하신다. '회중'의 히브리어 '에다'(*)는 구약에서 대체로 이스라엘 회중을 뜻하나 여기서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말을 '증인들'(Witnesses)이라 옮긴 NIV의 번역이 좋다. 말하자면, 만방에 신앙의 모범을 보여야 마땅한 제사장 나라가 오히려 배도의 길을 걸음으로써, 오히려 이방 민족들이 증인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심판과 수치를 당케 되리라는 말씀인것이다.

성 경: [렘6:19]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본절은 앞절에서 증인들을 소환한 후 유다 백성에게 내리는 선고문의 내용이다. 그리고 또한 처벌의 이유가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지적된다. 여기서 '법'(*, 토라)이란 모세의 율법을 뜻하며 여호와의 율법이 여호와의 말씀과 평행을 이루며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8:8,9). 아마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와 바른 길을 제쳐 두고 단순히 형식적 종교의식을 통해서 언약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20절).

성 경: [렘6:20]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행악에 대한 책망]

(주);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달게 여기지 않노라 - 여기서 선지자는 앞절의 내용을 보충하면서 하나님은 순종이 결여된 향기로운 예물을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지적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사1:11-14; 암5:21,22; 미6:6-8). 유향은 그 당시 무역 중심지였던 서남부 아라비아의 시바에서 들어왔으며(겔27:22), 향품은 인도에서 들어왔던 것 같다. 이 구절은 성전의 모든 제사 체계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순종과 언약의 준수이지 이에 대한 폐지가 아니었다. 즉, 믿음과 말씀, 순종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에게 짐이 될 뿐이다(삼상15:22; 사1:14).

성 경: [렘6:21]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해악에 대한 책망]

(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멸망하리라 -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마련해둔 '거침'이란 것은 본절에는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자초한 장애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대적의 침략을 뜻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이 거침에 의해 아비와 아들들 그리고 이웃과 친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걸려 멸망하게 된다.

성 경: [렘6:22]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 본절에서부터 26절까지는 북방에서 침략해 들어올 적에 대한 묘사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부분은 운문체로 기록되고 있는데, 본절과 23절의 내용이 50:41,42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바벨론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혹자는 이어지는 '땅 끝에서부터'라는 말에 근거하여 이 민족을 스구디아인으로 본다(Hitzig). 그러나 '땅 끝'이라는 말은 북방의 특정한 나라를 가리키는 지리적 언급이라기보다는 단지 매우 먼 거리를 나타내는 표현일 따름이다(Delitzsch).

성 경: [렘6:23]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그들은...딸 시온 너를 치려하느니라 - 그들이 진군해 들어오는 소리를 흉흉거리는 바다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적의 군사 배치 목적은 시온을 멸망시키기 위함이었다.

성 경: [렘6:24]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손이 약하여졌고...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 적의 침략으로 인한 백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어서 그들의 정신적 불안이 아이를 낳는 여인의 고통에 비유되었다. 완전 무장한 군인 앞에 아무런 저항의 수단이 없는 여인이 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처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23절의 '딸 시온'이라는 익숙한 용어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성 경: [렘6:25]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너희는...길로도 행치 말라 - 유다에 임할 심판에는 아무런 보호 수단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밭이나 길로 달아난다는 것조차 무모한 도피가 될 것이다. 한편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니라는 말의 원어는 '마고르 밋사빕'(*)으로서 급박한 위기 상황을 시사하는 암호와 같은 표현이다(20:10; 46:5; 49:29).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핍박했던 바스훌에게 이 말로 이름을 지어주셨다(20:3,10).

성 경: [렘6:26]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굵은 베...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 유다가 할 일은 이제 굵은 베를 두르고 제를 뒤집어 쓰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를 잃음같이 슬퍼하고 애통하게 될 것이다. 독자의 죽음은 후손이 끊겨버리는 것을 뜻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엄청난 재난으로 여겼다. 이제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 걸쳐 이런 재앙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 경: [렘6:27]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 여기서부터 30절까지는 하나님의 호된 징계에도 불구하고 정화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의 패역함이 금속의 제련 과정에 비유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금속을 제련할 때는, 먼저 제련하고자 하는 금속을 납과 함께 풀무나 용광로에 넣은 후 뜨겁게 불을 지핀다. 그러면 납은 금속의 이물질을 품은 채 밑으로 가라앉는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는 예레미야를 '살피는 자'로 임명하셨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행위를 검토하고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본서 초반부의 내용을 참고한다면, 그는 열방들에 대한 '감독관'(1:10)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감정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성 경: [렘6:28]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그들은 놋과 철이며 - 본절에서 30절까지는 예레미야가 살피는 자로서 여호와께 보고하는 내용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27절에 계속 이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27,30절 등의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쨌든 본절은 유다인들을 가리켜 '심히 패역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문자즉으로는 '패역한 자 중에 패역한 자'라는 뜻이다. 앞서 예레미야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도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5:1), 그것과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을 가리켜 '놋과 철'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의 임무가 은을 정제하는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예언의 불로써 은을 정제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불순물과 찌꺼기뿐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 경: [렘6:29]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 광석의 성분이 워낙 불순하였기 때문에, 광석속의 비(卑)금속들이 제거되지 않아 결국 제련 과정이 무위로 끝났다는 것이다(J.Bright). 이는 유다의 죄악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렘6:30]

주제1: [유다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주제2: [심판날의 참상]

(주); 내어버린 은이라 - 제련 관정은 바르게 진행되었지만, 상습적인 언약 파기자들은 앞에서는 이런 정제 과정이 아무런 효과를 낼 수가 없어, 결국 내버릴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제련 과정이 실패했다는 이 말 속에서 심판이 불가피해진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성 경: [렘7:1]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말씀이 임하니라 - 본절부터는 성전에서의 설교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은 긴 산문체의 연설문 형식을 띠고 있으며, 다소 공식문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두드러진 패턴이 엿보이고 있는데, 다른 설교에서도 나타난다. 이 패턴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의 선언, 민족의 배도에 대한 묘사, 심판의 공표(公表)가 그것이다.

성 경: [렘7:2]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베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 이 말씀은 여호야김이 왕이 된 직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것 같다. 그는 '여호와께 경배하러 들어가는' 유다인에게 말씀을 선포하는데, 여기서 '경배하다'란 말의 원어는 '솨하'(*)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래 이 말은 높은 신분에 있는 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부복하여 엎드린다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유다인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러 왔다면, 그것은 그에게 충성과 언약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행동으로 그것을 뒷바침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었다.

성 경: [렘7:3]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너희 길과 행위를...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 5~7절에서 보다 상세히 부연 설명되고 있는 본문은, 성전에 들어가는 자의 합당한 조건을 제시하는 입당송(入堂頌)과 같은 인상을 준다(시15,24편; 사1:16,17; 미6:6-8 참조). 이런 맥락에서 벌게이트역(Vulgate)은 본문 후반부를 '그리하면 내가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거할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이곳'에 해당하는 '마콤'(*)을 '성전'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7절의 '이곳'이 가나안 땅을 명백히 가리킨다는 점에서 다소 애매한 감을 준다. 어떤 해석을 따르든 간에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그의 주권과 언약 요구 사항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는 결코 성전과 예루살렘의 보호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축복과 보호의 약속은 오직 그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다(신7:12-15).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가 보장되므로 유다는 멸망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으며, 또한 모든 백성이 이를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 성전 자체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 숭배일 뿐이다. 예레미야 역시 성전 예배를 무시한 적은 없다(31:6' 33:11).

성 경: [렘7:4]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탈굼역(Targum)은 본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경배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찬양할지어다. 그리고 일 년에 세번 그 앞에 나아올지어다 라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여기에 근거하면, '여호와의 전'이라는 말이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미혹되어, 성전 예배가 계속되는 한 안전할 것으로 보았다. 즉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을 예배하는 이런 제도를 이방인들의 손에 내맡겨버리겠느냐 하는 것이었다(Clarke).

성 경: [렘7:5]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계속 살 수 있는 조건들이 지적된다. 그리고 다음절에도 이어서 세 개의 조건문들이 제시된다.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첫째 조건은 공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십계명 중 제1-4계명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지켜야 할 의무 사항들이고 제5-10계명은 이웃간에 지켜야 할 의무 사항들인 바, 그들은 이미 첫 번째 언약 조항들(제1-4계명)을 파기한 결과 이제는 필연적으로 두 번째 의무 조항들(제5-10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 경: [렘7:6]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 이 명령은 이미 모세 율법에서 규정하였던 사항이다(신10:18). 하나님은 특히 약자들의 권익에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 이들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뜻에 대해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였다.

(주); 무죄한 자의 피를 - 이는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에 벌어진 살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형이 흔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통치자의 악의로 말미암아 부당한 살육이 자행될 소지가 다분했다(D.R.Jones). 한편, 31절에는 무죄한 유아들을 우상 제물로 바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성 경: [렘7:7]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 백성들이 5,6절에서 제시되고 있는 조건절들을 충족시킨다면,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살 수 있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이 곳'이란 예루살렘성이나 성전을 포함한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성 경: [렘7:8]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여부가 파국을 막아주는 면제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하나님은 마음의 회개를 요구하셨던 바, 그것만이 평화와 안전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사26:3,Harrison).

성 경: [렘7:9]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도적질하며 살인하며...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 유다가 범하고 있는 죄악의 목록들이 상세히 열거되고 있다. 이 범죄들은 시내 산에서 주어진 언약 규정 조항들과 대단히 유사하다. 첫번째 네개의 죄목들, 즉 도적질과 살인, 간음, 거짓 맹세 등에 관해서는 출20:13-16에 언급된 바와 같다. 그리고 '바알'과 '다른 신들'이란 말도 출20:3-5의 내용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십계명 전체에 대한 위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Thompson, Calvin).

성 경: [렘7:10]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 유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언약의 규정 사항들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서도 하나님 앞에 나섰다. 그들의 위선된 행위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본절의 '앞에 서다'의 히브리어 '아마드 리프나'(*)는 복종과 굴복을 시사하며 한 봉신이 군주 앞에 나아가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Thompson).

성 경: [렘7:11]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에배에 대한 책망]

예수의 성전 숙정(肅正) 장면을 연상 시키는 구절이다(마21:13). 유다 백성들은 악행과 온갖 가증한 일들을 범하면서도 성전이 있는 한 무사할 것이라는 미신 속에서 마침내 여호와를 무시하고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고 말았다. 강도들은 외진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약탈을 감행하는데, 추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들은 바로 이러한 강도들과 같이 성전에 숨어 있다가 나와서는 다시 언약을 범하곤 하였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성전에서의 종교 의식을 통해 해소하고 또다시 범죄 행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성전이 어찌 죄악의 온상이 될 수 있겠는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전(殿)일지언정, 그것을 파괴해서라도 그들을 찾아낼 것이다.

성 경: [렘7:12]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실로에 가서...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 여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지역이나 어떤 구조에 얽매여 있지 않으심을 생생한 예화를 사용해서 설명한다. '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 여호와의 성소가 있던 곳으로서 그 당시 백성들은 이곳 실로를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께 제사하였다(삼상1-4장). 그러나 이 실로는 B.C.1,050년에 불레셋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벧엘과 세겜 사이에 있었다(삿21:19). 하나님의 법궤는 무려 백년 이상이나 이곳에 있었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반환받은 이후 다시는 실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다 사람들은 이 실로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역시 예외가 되지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이라 하더라도 백성 중에 죄악이 있는 한 그것이 결코 불가침의 수호자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성전과 성전에서의 모든 종교 행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한 수단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언약을 대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표시였다(Calvin, Harrison, Clarke).

성 경: [렘7:13]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어나서 자식을 교훈하는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세워서 열심히 그리고 빈번하게 경고하고 호소하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강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성 경: [렘7:14]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면서 여호와께서는 그곳이 다름아닌 자신이 그들의 열조에게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1) 여호와께서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파괴시킬 수도 있음과, (2) 하나님의 은총은 열조들과의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한편, 그 당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방 세계의 조약 문서들을 참조해보면, 우선 군주는 봉신에게 그를 위해 보여주었던 여러 가지 은혜로운 일을 지적한 다음에 봉신이 군주의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약속했음을 볼 수 있다. 유다 백성도 이와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으며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었다.

성 경: [렘7:15]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 '실로의 파멸'이라는 분명한 예화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경고를 뒷받침하는 명백한 사건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것이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지만, 죄악으로 인한 결과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열 지파도 아낌없이 멸망시켰는데 숫적으로 훨씬 더 열등한 유다가 과연 어떻게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성 경: [렘7:16]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 본절에서부터 20절까지는 유다 백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른 장에서도 여러번 나타나는데(11:14; 14:11), 본절에서는 세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적 의미를 전달해준다. 그리고 분절에서부터 20절까지에서 지적되고 있는 죄상을 참조하건대, 이 같은 당부는 이 백성에게서 이제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고집스럽게 지속되는 우상 숭배에 대한 처방책은 언약의 저주 조항을 가동시키는 것뿐이었다.

성 경: [렘7:17]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너는...보지 못하느냐 - 본절에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들을 위한 기도를 금하신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성 경: [렘7:18]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하늘 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 '하늘 황후'에 대해서는 '달'(Clarke), '별'혹은 '샤파쉬'(Dahood)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앗수르-바벨론의 여신 '이쉬타르'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44:17, Thompson, Harrison, J.Bright). 므낫세 당시에는 유다 내에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신들과 함께 이 '이쉬타르'를 경배하는 일이 유행하였다(왕하21장; 23:4-14 참조). B.C.5세기 경에는 애굽에서도 이 여신이 숭배되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의 발굴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본절에는 이 여신 숭배에 관한 몇가지 두드러진 양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나무를 주워 모으고 아비들이 불을 피우고 여인들이 과자를 만든 데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 종교 행사가 가정 단위로 행해지기도 했다는 사실이다(Clarke).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여인들의 은밀한 활동에 대해서는 요시야의 개혁 당시에도 규제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설명을 통해 우리가 본서 초반부에서 언급했다시피 요시야의 개혁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으며, 그 영향력이 대단히 미약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렘7:19]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자기 얼굴에 수욕을 자취함이 아니냐 - 언약 백성 유다가 하늘 황후에 대한 제사에 몰두하는 것은 언약의 최고 주권자이신 여호와의 배타적인 권한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다. 이들의 이런 도전적인 행위는 여호와께 큰 고통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상 숭배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닥치고 말 것이다. 결국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머리 위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Calvin).

성 경: [렘7:20]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책망]

(주); 불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 이 백성의 부도덕하고 언약 파괴적인 도전행위는 결국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하고 만다. 그래서 여호와의 진노의 불길이 필연적으로 부어질 것이다. 즉, 그들은 성전을 신뢰하여 왔지만 그 성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며, 아울러 전민족과 사람과 짐승, 그리고 들나무와 땅의 소산까지 심판을 받게 된다. 이 백성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런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회개의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였다. 우리는 훗날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장면을 목격하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완고해질 대로 완고해진 그들의 심령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유다 멸망 후 일부 잔민들은 애굽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들은 거기서도 이 하늘 황후에 대한 제사를 그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Thompson, Harrison).

성 경: [렘7:21]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들로부터 제사를 받지 않겠냐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상 그들은 희생 제사를 여호와께 바치지 않고 자신들을 위한 잔치의 일종으로 바쳤을 뿐, 그것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번제는 희생 제물을 모두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그 고기를 먹으라는 것은 그들이 드렸던 번제가 단순한 고깃덩어리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신 말씀이다(D.R.Jones).

성 경: [렘7:22]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였으며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희생 제사의 참뜻을 더럽힌 이상, 그것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나님은 희생 제사의 규례를 명하실 때부터 영적인 예배를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율법 정신이 살아 있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말씀하신 바 있다.

성 경: [렘7:23]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 여기서 제사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다시금 강조된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의식 절차만 거치면 그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성 경: [렘7:24]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멸시와 반항에 이어 고집과 방자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순종을 요구하였으며, 사회 저의를 역설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주);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그들은 뒤를 향하고 앞을 향하지 않았으며'인데, 하나님의 길을 거슬러 자신들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앞 구절의 '악한 마음'이란 말과 연결지으면,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로 아예 작심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김을 암시하고 있다. 고대 역본들을 참조하면,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후회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지적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종의 근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애굽으로 가서 종살이하고 싶어했던 것(출17:3)과 똑같은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성 경: [렘7:25]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 출애굽한 그들의 조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모세를 비방하고 모세에게 원망한 바 있으며(출14:11,12; 15:24; 17:3등) 그 뒤를 이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었지만 유다인들의 사악한 행위는 근절되지 아니하였다.그리고 원문에는 '매일'을 나타내는 단어 '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찍 일어나다'란 뜻의 '솨캄'(*)이란 말이 또한 쓰이고 있는데, 이를 종합하여 재번역하면,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매일 일찍 일어나서 보내었으나'가 된다(Calvin).

성 경: [렘7:26]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목을 굳게 하여 - 유다인들의 완악한 행위를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백성들의 부패한 행위를 지적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포하였는데, 당시 유다 백성의 영적 실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의 마음속은 정직하지 못하고 교만하면서, 종교 행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합2:4).

성 경: [렘7:27]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을 파국의 길에서 끌어내려는 것이었으나, 그들의 불행은 이에 대한 완고한 불순종으로 피치 못할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성 경: [렘7:28]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불순종에 대한 책망]

(주);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 이제는 하나님이 유다에 대한 경고의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그 어떤 권고나 경책이 무의미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2:30; 5:3; 17:23; 32:33; 35:13등에도 나오며, 잠1:3; 8:10;24:32; 슥3:2,7에서도 나타난다. '교훈'의 히브리어 '무사르'(*)는 때때로'정책'이란 뜻으로 사용되며 일반적으로는 '(도덕적) 훈계', '교훈', '교정' 등의 의미이다(D.R.Jones).

성 경: [렘7:29]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

(주);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호곡(呼哭)할지어다 - 본절에서부터 34절까지는 한놈의 골짜기에서 자행되었던 극악 무도한 더러운 행위에 대한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죄상에 대해서는 본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호곡해야 마땅한 것이다. 머리털을 베어버리는 것은 슬픔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미가 선지자는 유다에 임할 심판에 대해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미1:16)라고 선포하였다. 한편 '머리털'에 해당하는 '네제르'(*)는 '화관', '왕관', '면류관'이란 뜻도 있는데, 이는 머리카락이 면규관으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나실인의 머리 카락에 비교해서 살펴보면, 나실인은 여호와께 헌신하였음을 나타내는 표로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으며, 이들이 머리털을 베어버리는 것은 헌신을 포기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이다.

성 경: [렘7:30]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

가증한 것에 대한 원어는 '쉬쿠츠'(*)로서 구약에서 약 28회에 걸쳐 쓰인다. 대부분 이 말은 제사나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모욕하고 더럽히는 모든 것을 지칭하였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받는 성전에 그 더러운 것들을 두었던 바, 이 같은 행위는 여호와를 모독하는 최고의 행위였다.

성 경: [렘7:31]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

(주);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 성전의 악행 이외에 또 다른 더러운 행위들이 지적되고 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란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도벳'이란 사당을 건축하였다. 이 '도벳'이란 이름은 '태우는곳'을 의미하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태워 죽인 바가 있는데, 아하스와 므낫세 통치 기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왕하16:3; 17:31). 이처럼 인간을 제물로 바쳐 태우는 끔찍한 관행은 몰렉 신에 대한 제사와 관련이 있는 절차였다(레18:21; 20:2-5; 왕하23:10).

성 경: [렘7:32]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

(주); 날이 이르면 이 곳을...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 이는 반역된 무리들이 모조리 살육당해 이곳에 버려질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 그들의 시체를 모두 매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 시체들을 태워버리거나 또는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의밥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9:6-15에서는 이 말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의미를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다. 한편, 이처럼 특정한 대상에다 의미 심장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에언적 상징으로서 사1:26; 56:7; 58:12; 60:14; 61:3,6; 62:4,12 등에서도 나타난다(D.R. Jones).

성 경: [렘7:33]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

(주);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사후(死後)에 자신의 시체를 매장해주는 자가 없다는 것은 큰 저주로 여겨졌다. 에루살렘의 멸망을 고통스럽게 회고하는 시편 중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흐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79:3). 그리고 율법은 죄인의 시체라도 매장하도록 명하였다(신21:23). 그러나 패역한 유다 백성은 성전 파괴와 함께 매장해주는 자 없이 멸망해야 했던 비참한 종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저주는 신 28:26에 그대로 예언된 바의 성취로 이해될 수 있겠다(Delitzsch).

성 경: [렘7:34]

주제1: [위선적인 성전 예배에 대한 질책]

주제2: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

(주); 기뻐하는 소리...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당연히 흘러나올 이러한 소리들이 심판의 결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예루살렘에는 즐거움이란 것이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혼도 끊겨질 것이고 땅도 완전히 황폐해버리고 말 것이다. 엄청난 죄악이 엄청난 형벌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Clarke).

성 경: [렘8:1]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유다 왕들의 뼈와...묘실에서 끌어내어 -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유다에 침략해 들어온 자들은 패배자들을 더욱 모독하기 위해서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선지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뼈들을 끄집어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시체가 매장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것은 큰 저주와 수치로 간주되었는데,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 또한 이와같은 선상에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본장 1-3절은 앞장 내용의 연속인 바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저질러질 만행에 대한 예언이며(Calvin, Venema). 바벨론은 유다 백성을 능멸하기 위한 목적 외에 무덤속에 묻힌 귀중한 패물들을 약탈할 목적으로 무덤을 파헤쳤을 수도 있다(Lowth).

성 경: [렘8:2]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그들의 사랑하며...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분토같을 것이며 - 백성들이 사랑하고 섬기며 경배하던 이러한 천체의 우상들은 그들의 흩어진 뼈들을 무관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내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뼈들을 주워모아서 장사지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뼈들은 지면의 분토처럼 내버려지는 것이다.

성 경: [렘8:3]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 본절이 지적하고 있는 요지는 도처에서 살육이 자행되고 죽은 자의 시체가 무덤에서 끌어내어 팽개쳐지는 등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남은 자들에게 내리실 징벌에 비하면 이는 경미하다는 내용이다. 즉, 살아 남은 자들의 생은 죽은것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다(왕하 25:5-7 참조). 하나님의 수많은 권고와 견책을 무시한 결과는 참으로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심판이란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며, 온갖 악행을 통해 육신의 배만 불리던 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임할 영원한 심판은 아마 이보다 더욱더 참혹할 것이다.

성 경: [렘8:4]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 예러미야 선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선 완악성을 지적한다. 즉, 누구든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만 유다 백성은 그릇된 길에 빠져들어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엄숙하고도 가혹하게 예언했으며 그들을 회개로 인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구제 불능 상태에 빠져 있는것이다.

성 경: [렘8:5]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 실수와 과오는 때로 한 인간의 심경을 변화시켜 더 나은 상태로 인도할 수 있다. 또한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라 자신의 오류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니느웨 백성처럼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렘8:6]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그들이...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과 경고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정밀하게 살폈다. 그러나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말을 한마디라도 내뱉는 자는 없었다. 이런 광경은 우리가 5:1-3에서도 이미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장(戰場)에서 날뛰는 말같이 제멋대로 행하였는데, 여기서 '행하다'는 본서에서 아주 빈번하게 쓰이는 '슈브'(*)로서 '돌아가다'가 기본 뜻이다. 그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서지 않고 그들의 익숙한 행위로 돌아섰다(Thompson).

성 경: [렘8:7]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 예레미야는 여기서 조류의 생태를 예화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연계의 새들로 하여금 그 시기와 때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도록 지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연계의 법칙에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주); 내 백성은...알지 못하도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법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마치 그것을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 알지 못한 자들처럼 행동했다. 여기서 '알다'(*, 야다)란 동사는 단순한 지적 인식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 여기에는 감정적, 의지적 차원을 포함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 체험의 개념을 담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8:8]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 그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여호와의 율법이 그들과 함께 있다고 주장한 근거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종교 의식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에 대한 반론으로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들이 내세우는 '여호와의 율법'이란 것은 분명히 '기록된 율법' 즉 성전에서 발견된 바 있는 언약의 책 또는 신명기서와 같은 책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행위와 실천보다는 기록된 책 그자체에 무슨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미신에 젖어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책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경우와 똑같이 오히려 선지자의 메시지를 방해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본절에는 서기관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 성경에서 서기관이 어떤 직책을 맡은 특정 계층으로 언급되는 곳은 이 부분이 처음이다. 대상 2:55에 따르면, 서기관들의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하 34:13에 따르면, 그들의 활동은 요시야 통치 때에 대단히 두드러졌던 것 같다. 아마 그 이전에도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역대 왕들의 사적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 및 가르치는 자로서의 소임도 맡았던 것 같다.

성 경: [렘8:9]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경황 중에 잡히리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하투 와일라케두'(*)는 번역하기가 다소 난해하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하투'를 '크게 놀라다'는 뜻으로, '와일라케두'를 패전의 결과 포로로서 이송될 사실에 대한 경고 의미로 각각 이해했다. 반면에 페쉬타역(Peshitta)과 탈굼역(Targum)은 전자를 '흩어지다'는 뜻으로 옮겼다. 어쨌거나 본절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혼비백산하게 될 상황을 가리킴은 분명하다(McKane).

성 경: [렘8:10]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다 거짓을 행함이라 - 여기서는 전쟁 이후 저질러지는 범행이 예화로 사용되었다. 침략군은 유다 여자들을 빼앗아 가되 심지어 유부녀까지 그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소중히 여겨졌던 약속의 땅 가나안마저 유린당하고 적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런 참변에 대한 이유는 작은 자로부터 큰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으로 눈이 멀어져 있었고 심지어는 그들의 악행을 발벗고 나서서 말려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거짓과 사악한 행위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렘8:11]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범죄한 유다가 받을 재난]

(주);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 70인역(LXX)에는 10-12절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부분은 6:12-15과 유사한 내용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민족 전체가 중병을 앓으며 파국 직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사할 것이라는 헛된 확신만을 심어 주었다.

성 경: [렘8:12]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 그들은 이런 거짓 위안으로 백성들을 속이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얼굴색도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뿐이다. 설령 심판을 조금 연기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유익될 것이 조금도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죄악은 더 커지고 그 형벌이 더욱 혹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렘8:13]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 포도나무 비유는 본서에서 2:21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는데, 거기서는 극상품의 선택된 포도가 야생포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으며, 이어서 6:9에 포도나무 비유가 등장하였는데, 거기서는 예레미야가 포도를 수확하는 자로 묘사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포도나무에 열매가 전혀 없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언약의 말씀을 준행할 때 따르는 번영, 축복(신29:9; 시37:9)과는 대조적으로 언약을 파기한 자들에게는 온갖 저주가 임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성 경: [렘8:14]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 - 절망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자구책을 강구하며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만, 그 모든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견고한 성읍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성읍은 단지 파멸의 순간을 조금 지체시키는 역할을 해줄 뿐, 파멸은 이미 기정 사실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 '독한 물'에 해당하는 원어 '메 로쉬'(*)는 '쓴 물'로도 번역된다. 즉 '로쉬'(*)는 신32:32에서 '쓰다'는 의미에서 '쓸개'로 번역되었는데,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쓴 것'과 '독'은 유다인들에게 있어 밀접하게 연관된 의미를 시사했던 것 같다(민5:18 참조, Delitzsch).

성 경: [렘8:15]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 일말의 희망도 없어진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명시하는 자들은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면 그때는 뉘우쳐도 이미 늦어버리게 되는 것이다(롬 2:4; 벧후 2:10).

성 경: [렘8:16]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바벨론의 마병이 노도처럼 내달아오는 것을 직접 보게 해주는 것 같은 생생한 예언이다. 이런 맥락에서 벌게이트역(Vulgate)과 페쉬타역(Peshitta)은 '들리고'를 '이미 들려온다'라고 옮겼다(McKane).

성 경: [렘8:17]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 13절에 이어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등장한다. 13절과 본절 사이에는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절에는 심판이 닥쳐오는 것이 독사가 달려드는 것으로 비유되었는데, 이 독사에 대한 예화는 민21:6-9의 내용을 상기시켜 준다. 그들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한 죄악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불뱀들로부터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불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손길이 있었지만, 지금 이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전혀 없다(Thompson).

성 경: [렘8:18]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 본절에서부터 22절까지는 예루살렘 파멸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픔과 한탄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레미아의 이 고통스러운 한탄 속에는 여태까지는 그나마 버틸 만한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슬픔에 짓눌려 힘을 쓰지 못할 지경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였으며, 그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충성심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과 맞물려 있었으며, 그 결과 그는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렘8:19]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여호와께서...그 왕이...격노케 하였는고 - 여호와의 왕권 사상은 구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본절에서처럼 여호와를 왕으로 직접 호칭하는 것은 비교적 잘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질문 사항은 구약의 다른 슬픔의 시에서도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시44:24-26; 73:25-28 등). 그러나 예레미야가 선호하였던 애도의 표현은 비애와 놀라움을 뒤섞어서 나타내는 형식이었다(2:14; 8:4,5; 14:19; 22:28). 한편, 문맥상 본절에 등장하는 세개의 의문절 중 첫 번째 두 개의 질문은 백성들이 제기하는 물음이고 세 번째 것은 여호와의 질문으로서, 앞의 두 질문은 '그렇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라는 긍정의 대답을 전제한 물음이다(Thompson).

성 경: [렘8:20]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 백성들의 불안과 고통의 울부짖음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추수'(*, 카치르)는 밀수확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추수 때가 지나갔고 또 여름 과실을 수확하는 시기가 지나갔다. 추수는 흔히 4월에서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밀 추수가 흉작으로 끝날 경우는 포도나 무화가 또는 감람 열매등의 수확이라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매조차 수확하지 못하게 되면,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바로 이런 상황을 예화로 사용하였다. 유다 백성들은 반역된 길에서 돌아서서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것들을 차례차례 다 놓치고 말았으며 그래서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받을 기회를 영영 상실하고 만 것이다.

성 경: [렘8:21]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주);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에 대한 책음이 그들의 극악한 죄악에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여기서는 침략군의 발굽에 짓밟히는 동포의 모습을 생생히 보고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성 경: [렘8:22]

주제1: [완고한 백성의 비극적 파멸]

주제2: [진멸당함으로 인한 고통과 후회]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으나 치유받지 못한 환자에 비유된다. 그런데 정작 치유받지 못한 이유는 명의나 명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질병을 인정하지 않고 또 치유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치유 계획과 은혜에 순종하고 고질적인 병폐인 죄악들에 대해 회개하였다면 그들에게는 건강과 축복이 주어졌을 것이나, 그들은 정반대의 태도를 고집하였던 것이다(Clarke).

성 경: [렘9:1]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얘기]

(주);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 예루살렘 멸망의 상황이 너무나도 비참하여서 아무리 울어도 충분하지 않다. 즉 유다 백성의 죄와 파멸을 바라보자니 슬픔이 극에 달해 이미 눈물 근원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또 다른 눈물 샘이 터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밤이고 낮이고 동포의 살육을 한탄하며 울 수가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런 심정으로 노래하고 있다(Calvin).

성 경: [렘9:2]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그렇게 되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 고대 근동에는 여관이나 유숙하는 집이 없었다. 다만 대상들이 유숙하는 공공 건물들이 더러 있었는데, 나그네들은 보통 여기서 유숙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가구나 음식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때로는 지붕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의 야수들의 침입 정도를 막아주는 벽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처럼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면 거기로 피신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백성에게 내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상과 같은 설명에서 보다시피 예레미야 선지자가 한탄조로 내뱉은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Clarke).

성 경: [렘9:3]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그들이 활을 당김같이 그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 활을 당긴다고 하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해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거짓말이 여기에 비유되고 있다. 혀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본절은 참으로 적절한 비유이다(시64:3). 거짓 선지자들은 수없이 심판이나 파멸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혀를 잘못 놀려왔다. 백성들은 그들의 거짓을 참인 줄로 착각하고 그들을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칼이 그들에게 임하였으며 그들을 모조리 파괴하였던 것이다.

성 경: [렘9:4]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이웃을 삼가며 아무 형제든지 믿지 말라 - 이웃을 믿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속이기 때문인다. 속인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진리(*, 에메트)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당시 유다 사회에 만연되었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불신 풍조를 반영해 준다.

성 경: [렘9:5]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이웃을 속이며...악행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 혀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을 격려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그들은 거짓을 가르치고 타인을 모함하는 일에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켰다. 또한, 그들은 파멸을 얻고 지옥에 가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

성 경: [렘9:6]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네 처소는 궤휼 가운데 있도다 - 인간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보시며(삼상16:7), 그들의 악을 지적하신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의 처소가 궤휼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은 그들이 악한 자들과 함께 악을 공공연히 자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척하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렘9:7]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 여기서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예화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이미 유다인들은 제련되지 않는 불량 금속에 비유된 바 있다(6:27-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녹여서 유용하게 만들어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가 표명된다. 택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를 엿보게 한다.

성 경: [렘9:8]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그들의 혀는 치명적인 화살과 같고 그들의 입은 속임과 사기로 가득 차 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웃들에 대해 겉으로는 다정하게 인사하면서도 그 내심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해할꼬 하는 생각뿐이다. '해를 도모하는도다'라는 표현 중 '해'에 해당하는 원어 '아라브'(*)는 맹수가 먹이를 노리며 숨어있는 것 혹은 복병이 상대의 접근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 경: [렘9:9]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애가]

(주); 벌하지 아니하겠으며...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 백성들의 이 같은 악행에 대해 여호와께서 이 백성들을 처벌할 것이며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나라'(*, 고이)에 보복하실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고이'란 용어로 지칭한 것은, 이 용어가 이방 나라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매우 참혹하다. 즉, 그들은 지금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아'의 복수형인 '고임'(*)으로 지칭되는 이방나라들은 언약과 상관없이 족속들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 밖에 있었다. 아마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용어를 선택한것은 그 당시 유다인들이 표리 부동하게도 여호와의 언약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인것 같다.

성 경: [렘9:10]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대가로 이 배도한 민족에게 닥치게 될 끔찍한 재앙으로 인해 예레미야의 감정은 극히 동요되고 있다. 새와 짐승마저 도망가고 없다는 표현 속에서 철저한 파괴와 황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죄와 전국토에 미치는 이 민족의 참변이 서로 결속되어 있다는 내용은 여러 선지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주제이다(암4장; 미6:10-16;학1:9-11 등 참조).

성 경: [렘9:11]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예루살렘이 폐허 더미가 될 것에 대한 예언은 26:18에 인용된 바 미가의 예언과도 동일한 내용이다(미3:12). 또한 예루사렘은 시랑의 굴이 될 운명으로 설명되고 있다. '시랑'(*, 탄님)은 자칼(jackal)을 뜻하는 것 같은데, 이것은 이리나 늑대등과 같은 짐승들인데, 이것들이 폐허가 된 도시에 굴을 만든다고 하는 설명은 예레미야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표현이었던 것이 틀림없다(10:22; 49:33;51:37; 사13:22; 34:13 참조). 본절과는 대조적으로, 메시야의 날에는 시랑이 눕던 곳도 옥토로 변하게 되리라는 예언도 있다(사35:7).

성 경: [렘9:13]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이는 그들이...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 그들이 처참히 멸망당하고 말 이유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불신자들의 눈으로 보면, 유다의 패망은 당시의 국내외적 정세(情勢)에 따른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요 한 민족이나 개인의 흥망 성쇠를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는 이들은 본문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성 경: [렘9:14]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그 열조가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 가나안 신화에는 엘 신이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배우자로서 아세라(또는 아티랏)가 있었다. 바알은 바로 이 두 신들에게서 태어난 자식으로서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바알이 가나안 신들의 계열상 최고의 신이었다. 구약과 근동의 고대 문헌을 보면 이 바알이란 이름이 지역 신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지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즉, 바알-하솔, 바알-브올, 바알-시돈, 바알-레바논, 바알-하람 등이 있다. 바알이란 이름이 포함된 이러한 지명들은 바알이 그 지역의 수호신으로 인식되었음을 말한다. 우가리트의 종교 문서와 전설 등을 참조하면, 그 당시 수많은 종교 의식들이 바알 신과 결부되어 있었고 또 다산 제사가 성적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종교 행사들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던 것이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그런 활동에 가담하는 것에 대해 맹렬하게 경고하였다(왕상18:20-40; 호2:13,17; 습1:4). 여호와 외의 다른 신들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이것만으로도 심판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Thompson, Harrison).

성 경: [렘9:15]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 그들은 가장 처절한 슬픔을 맛보게 될 것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음식과 음료 대신에 독을 마시게 될 것이다(Clarke). 한편 '쑥'에 해당하는 '라아나'(*)와 '독한'에 해당하는 원어 '로쉬'(*)가 신29:18; 애3:19; 암6:12 등에서도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쓴 것과 돌이 같은 맥락에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C.W.E. Naegelsbach).

성 경: [렘9:16]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알지 못하던 열국 중에 그들을 헤치고 -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언약 파기의 결과라고 말하였으며(사1:4-9), 마모스는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암4:1-3). 그리고 신 28:36에 기록된 저주 목록 중에도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이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때문에 당시 유다 백성들은 본문과 같은 예언이 성취되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렘9:17]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 곡하는 부녀들은 댓가를 받고 초상집에 가서 소리내어 울어주는 일을 하였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에도 근동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아일랜드에도 이 관습이 대단히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의 조상들이 동방에서 건너왔기 때문일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한 첫 번째 애도는 갑작스럽게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터뜨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성 경: [렘9:18]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 예레미야는 이들 직업적인 애곡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일을 빨리 진행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상황이 그만큼 긴박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 경: [렘9:19]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이로다 - 70인역(LXX)은 이를 '우리는 우리 집들을 포기해야(내어버려야) 한다'고 옮겼으며, 어떤 주석가들은 레 18:25에 근거하여 이를 '우리의 처소가 우리를 내어던졌다'라고 해석하지만(Hitzig, Kimchi) 이는 맛소라 본문에 충실하지 못하다.

성 경: [렘9:20]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 아울러 이 말에는 자자 손손 애곡이 이어지게 되리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렘9:21]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멸절하려 하느니라 - 여기서는 사망이 의인화되어있다. 이 사망이 창문을 타고 요새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자기의 희생자들을 내어놓으라고 주장한다. 사망은 거리의 아이들과 공공 장소의 청년들을 멸절시키고 말 것이다. 한편, 사망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는 내용은 고대 근동의 가나안 신화에서도 발견된다(Thompson).

성 경: [렘9:22]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유다인들이 대량 학살당할 뿐 아니라 그 시선조차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질 것에 대한 비유이다. 분토(*, 도멘)는 썩는 냄새를 풍기는 거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반절은 유다인들의 시체가 밭에 흩뿌려진 거름처럼 버려져서 온 땅이 악취로 가득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그리고 뭇(*, 아미드)은 추수를 하면서 여기저기 흘려놓은 곡식 이삭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반절은 이미 추수가 끝나 내팽개쳐진 채 돌볼사람이 없는 뭇처럼, 유다인들의 시신 또한 미처 장사지내지 못하게 되는 치욕을 당할것을 가리킨다(신21:22,23 참조).

성 경: [렘9:24]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본절 내에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 세개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인애'(*, 헤세드), '공평'(*, 미쉬파트). '정직'(*, 체다카)이다.이 세 단어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 함축된 의미를 다 드러내면서 적절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첫 번째 낱말인 '인애'에 해당하는'헤세드'는 구약에서 약 245번 쓰이고 있다. 이 용어는 '진실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충실함', '다함없는 헌신', '자비' 등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활동은 그의 백성의 불성실함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진실하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공평'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의를 행하는 자를 격려하고 악을 범하는 자를 징계하는 '공의' 혹은 '정의'를 의미한다. 심판자로서 여호와는 행악자들의 활동을 제한하시고 그를 처벌하신다. 반면에 의인을 구원해 주시고 그를 위해 변호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압제받는 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러 그들사이에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었다(창16:5; 출5:21; 시26:1; 사2:4). 하나님은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며, 이것은 그가 '미쉬파트'를 세우고자 하심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단어인 '정직'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흔히 '의'가 그의 백성 중에,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 중에 편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6:33).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메시야께서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9:6).

성 경: [렘9:25]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다 벌하리니 - 할례받은 자는 유다인들을 지칭하고 할례를 받지 못한 자란 이방인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똑같이 여호와의 공의의 심판아래 있다. 마음의 할례가 없는 단순한 의식에 의한 육체적 할례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지는 않는다. 다음절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서 할례받지 않는 자들이란 애굽의 주도로 결성된 반바벨론 동맹을 우선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같다.

성 경: [렘9:26]

주제1: [유다의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주);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 그들의 신전에서 머리털을 밀어버리는 관습을 가졌던 아랍의 어느 부족을 가리키는 듯하다(Harrison). 그러나 히브리 율법은 이같은 행위를 금지하였다(레19:27). 바벨론 군대가 아랍인들을 원정한 바 있는 것으로 보아(49:28-33), 이들 역시 반바벨론 동맹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짙다.

성 경: [렘9:23]

주제1: [유다의 파멸에 대한 애가(哀歌)]

주제2: [배교자의 결국]

문맥의 흐름상 본절과 24절은 독립된 신탁의 말씀인 듯하다. 하나님은 모든

축복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그로부터 또는 그를 통하여 나오지 않는 지혜와 용맹 그리고 부(富)란 무의미하다. 부(富)란 것은 죽는 날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힘과 용맹도 사망에 대항할 수가 없다.

성 경: [렘10:1]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1-16절은 운문체로 기록된 한편의 시이다. 그 내용은 우상들에 대한 통렬한 공격과 풍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직 창조주만이 만민으로부터 경배받을 자격이 있음을 명시하는 내용이다(Thompson). 한편 이 시는 여호야김 통치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전달된것으로 짐작된다(Dr. Dahler).

성 경: [렘10:2]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 여기서 '길'이란 것은 그들의 풍습 또는 종교적 관습을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J.Bright). 또한 '배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틸마두'(*)는 '제자가 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근동 종교들의 주요한 양상들 중의 하나는 해, 달, 별 등의 천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이런 관행에 대한 유다의 답습 행위는 이미 당시로부터 1세기 전의 아모스 선지자도 지적한바 있다(암5:25,26). 또한 이것은 므낫세 당시(B.C.697-642년)에 유행했었던 것(왕하21:5,6)이며 요시야는 특히 이런 제사 관행을 타파하는 데 주력하였다(왕하23:5,11,12). 아마 열방들은 이러한 천체 현상들을 두려워하여 경외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혜성이나 일식, 월식과 같은 비정상적인 천체 현상에 대해 무서워하였던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천체 현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나타나는 것들로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런 형상들을 경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인것이다(Thompson).

성 경: [렘10:3]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 '규례'에 해당하는 원어 '후코트'(*)는'판결하다', '기록하다'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헤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일종의 재판상의 판결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Calvin). 한편 이 '규례'는 그들이 '믿는 것'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우상이나 종교적 가르침 등을 뜻할 수도 있다(J.Bright).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우상 숭배에 대한 예레미야의 지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절 후반부는 '삼림에서 벤 나무요...도끼로 만든 것'으로 우상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로써 전반부의 '규례'를 '우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상에 대한 본절의 묘사는 구약의 여러 다른 부분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유사한 형태를 따르고 있다(시115:4; 사2:20; 44:9-20). 또한 본절에는 우상들이 생명없는 무익한 것임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던 수세기에 걸쳐 사용된 격언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주석가들은 본절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본서에는 포로 후기의 내용이 많이 삽입되었다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희박하다.

성 경: [렘10:4]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은과 금으로...못과 장도리로...요동치 않게 하나니 - 우상이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동상으로, 금이나 은과 같이 귀한 것으로 장식하였다고 하나, 고꾸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못이나 망치 등으로 고정시켜야 하는 그런 물건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삼상5:1-4 참조).

성 경: [렘10:5]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두려워 말라 - '갈린 기둥 같다'는 말은 종려나무처럼 꼿꼿이 서 있다는 뜻이다(Clarke). 그러나 이것들은 말도 못하며,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재앙을 내리거나 복을 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예레미야는 지금 이런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도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도 역시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는 무기력한 존재인 것이다.

성 경: [렘10:6]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주는...크시니이다 - 예레미야는 우상의 무능함을 지적한 뒤 이제 하나님을 소개한다. 그가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는한, 우상을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교육만이 우상과 미신을 타파하고 추방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Calvin). 구약은 여호와를 다른 것과 감히 비길 수 없다는 점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우상들이 인간에게 의존하는 존재이며 그것들의 위상과 권위를 인생에게서 이끌어 내는 것과는 정반대로, 여호와께서는 그 자신으로부터 그의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신다(Thompson).

성 경: [렘10:7]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 '누가 감히 만유의 창조자이시요 수여자이신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수 있나이까?'란 뜻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참 종교의 근본 실체인 것이다(A. Clarke).

(주); 이는...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 -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의 유일하심과 위대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열방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나 또한 가장 높은 자라 할지라도 여호와와는 비길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왕권 사상을 진하게 드러내 놓고 있긴 하지만, 이처럼 여호와를 왕으로 직접 묘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장면이다(Thompson).

성 경: [렘10:8]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 여기서 예레미야는 다시 우상에 대한 묘사로 들어간다. 이 내용은 3-5절의 우상에 대한 서술임을 더욱 확대시킨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상에 의해 생산해 낸 그것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고 있으며, 또한 왕권을 가진 자들 역시 생명없는 인간의 작품을 그들의 종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들의 생산품만큼이나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다. 이 구절은 해석하기에 좀 난해한 두 동사를 내포하고 있는데, 먼저 '무지하고'는 우상을 경배하는 이방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로 또 '어리석은'이라는 동사는 그 다음의 어구와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에서 본절 후반부를 다시 해석해보면, '없는 것들(우상들)의 도(종교)는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의 연결 여부를 별개로 하더라도 그 의미는 분명한데, 우상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교훈이란 우상그 자체 만큼이나 무가치하다는 점이다(Thompson). 한편 블레이니 박사(Dr. Blayney)는 본절 후반부를 '나무 그 자체가 헛된 것들의 비난자이다'라고 번역한다. 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것이 나무란 사실은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증명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 경: [렘10:9]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다시스에서 가져 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 온 금 - 어떤 이들은 '다시스'를 스페인의 타르테수스로 보고 있는데, 그 당시 페니키아인들은 여기서 많은 은을 수입했다(Clarke). 아마 고대인들은 이곳을 서쪽 세계의 끝으로 보았던 것 같다. 한편, 최근에 이 '다시스'란 말을 지명으로 보기보다는 '제련된'(혹은 제련소)이란 뜻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바스'는 위치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곳을 비손 강(Clarke) 혹은 인도나 아라비아 등지로 본다(Nicholson).

(주); 청색 자색 감으로 - 이는 고대 당시에는 극히 귀한 염료로서 대단히 값비싸고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성 경: [렘10:10]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오직 여호와는...왕이시라 - 여호와께 대한 세 가지 선언이 담겨 있는데 이들 각각은 우상들에 대한 단언들과 대조되고 있다. 즉, 그것들은 거짓 신이고, 생명이 없는 신이며, 단 한순간도 신으로 존재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 그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자연 현상들을 들자면 폭풍, 지진, 천둥, 벼락 등을 꼽을 수 있다. 여호와의 진노의 표로 상징되는 이런 것들이 덮칠 때 열방들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성 경: [렘10:11]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망하리라 - 이 구절이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본서의 저작 연대를 후대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당시 아람어는 서방 아시아와 이스라엘 변방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다. 아무튼 이 구절은 거짓 신들과 또 이를 숭배하는 자들 모두가 결국에는 망하고 말 것임을 지적한다. 창조주가 아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들 우상들은 그들의 만든 사람들과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성 경: [렘10:12]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여호와께서는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 이곳에는 여호와의 권능과 지혜와 명철이 언급되고 있는데 우상들의 무능, 어리석음, 무지와 대조되고 있다. 특히 본절과 13절은 열방들의 생명없는 우상들에 대한 비난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위치를 높이 찬양하고 있다(Nicholson). 한편 12-16절의 내용은 51:15-19에서 나타난다.

성 경: [렘10:13]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 하나님이 창고 속에 바람을 넣어두고 계시다가 임의적으로 내어 보내시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곧 자연의 기상마저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시사한다. 또 바람뿐만 아니라 눈과 우박도 이러한 비유로 다루어진 바 있다(욥38:22,23; 시135:7).

성 경: [렘10:14]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금 장색마다...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 본절에는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언급된다. 이곳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는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위치에 놓여있는 것이다(벧후2:1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메시야 때에 가서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 것이라고 예언하였다(31:34).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우상에 매달려 있는 자들은 그 우상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성 경: [렘10:15]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멸망 할 것 - 우상에 대한 간결한 묘사가 세 가지로 압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무가치하고 공허한 것(*, 헤벨)이다. 둘째, 그것은 망령되이 만든 것으로서, 착각의 소산 또는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만한 것을 뜻한다. 셋째는 징벌하실 때에 멸망하고 말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바, 인간스스로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어찌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Calvin).

성 경: [렘10:16]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우상 숭배의 무익성]

(주);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 여기서 예레미야는 본시(1-16절)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여호와는 우상들과는 정반대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분깃'(*,헬레크)이란 어떤 사람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왕하9:10)이나 또는 전쟁 후의 전리품에 대한 몫(창14:24; 사53:12)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산업의 지파란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셔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셨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는 이처럼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이었기에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보호하심은 극진하였다. 이스라엘의 순종과 감사는 바로 이런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바, 그들이 다른 신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한, 여기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야훼 체바오트)임을 다시 밝히고 있는데, 이 칭호는 원래 별들과 천체 위에 지배하고계시는 여호와의 주권을 염두에 둔 칭호로서, 이방인들의 해, 달, 별 등의 천체 숭배와 극명하게 대립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렘10:17]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에워싸인 가운데 앉은 자여...수습하라 - 어떤 주석가들은 17-25절의 내용이9:17-22에 이어졌던 것이란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런 견해는 대단히 임의로운 주장일 뿐이다. 여기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에 대한 극명한 대조에 이어 오랫동안 예언되어 왔던 참변이 이제 예루살렘 성문 앞에 이르렀음을 나타내고 있다. 본절은 아마 예루살렘이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적들의 침입에 직면하여 피난 보따리를 꾸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습하라'(*, 아사프)란 말은 9:22에서 수확물을 '거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말이다. 앗수르인의 고분 벽화를 보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의 장면이 보인다(thompson).

성 경: [렘10:18]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이 땅에 거하는 자를...내어던질 것이라 -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다(Nicholsosn). '내어던지다'의 원어 '칼라'(*)는 원래 투석기에 돌을 담아 내어던지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대단히 생동감 있는 내용을 전달한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오랫동안 참으시고 인내하셨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심판의 시간인 것이며, 눈물과 호소의 때는 지나간 것이다.

성 경: [렘10:19]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고통스러운 역할을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심판과 파멸을 예언해야 했으며, 이와 동시에 그는 그들의 운명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한탄은 그 민족의 한탄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그의 고뇌는 그 민족의 질병이 이제 치유될 수 없는 상태란 점에 있었다.

성 경: [렘10:20]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내 장막이 훼파되고...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 예레미야는 유목민들이 이주하기 위해 그들의 장막을 철수하는 것을 예화로 사용하여 그의 슬픔을 표현한다. 여기서 '장막'이란 유다인들이 거주하던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던 말이며, 그 자녀는 예루살렘 거민을 말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쫓겨나서 다시 장막을 치지 못하고 말것이다.

성 경: [렘10:21]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 이제는 목자와 그들이 치는 양떼를 비유로 하여 슬픔을 토로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목자'는 흔히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말이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킨 일차적 책임이 있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우준한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야수나 다름 없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탁받고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언약이나 율법을 따르지 않고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언약이나 율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 임의대로 처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번영이나 형통함이 있을 수 없었고 이에 대한 결과가 결국 백성들에게까지 돌아가고 만 것이다.

성 경: [렘10:22]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風聲)이 오니 - 이것은 북쪽 적들이 큰 함성을 지르면서 밀려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유다 성읍들을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짐승들의 거처가 되도록 할 것이다. 이 예언은 B.C. 586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성취되었는데, 전국토가 거의 초토가 되고 말았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B.C.6세기 초에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으며, 그 후 대다수가 복구되지 못한 채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thompson).

성 경: [렘10:23]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 이는 인간의 운명이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통제하에 있다는 내용이다(Nicholson). 유다의 형편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예레미야의 관심은 계속해서 자기 동포의 운명에 쏠려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그의 탄원의 요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이 점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이 연약하여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죄악에 빠지기 쉬운 도덕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탄원한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개척할 수 있다고 큰 소리친다한들, 결국 그것은 인간의 한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임할 재앙을 걱정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10:24]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 백성들 편에 서서 드리는 예레미야의 중보기도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유다 백성이 징벌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있었지만, 견딜 수 없는 처벌을 받아 결국 완전히 파산되어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빠지지 않기만을 탄원하는 것이다(C.L. Feinberg). 한편, '징계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동사 '이사르'(*)는 구약의 여러 다른 용례들을 보면 교육적 의미에서 징벌을 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 경: [렘10:25]

주제1: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

주제2: [임박한 멸망의 고통]

(주); 주를 알지 못하는...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대적들에게는 엄격한 공의의 심판을 적용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외부에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오직 정복을 위한 정복, 살육을 위한 살육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주); 그들은...황폐케 하였나이다 - 적들의 잘못된 행위를 열거함으로써 에레미야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호소를 더욱 뒷받침한다(Thompson). 이러한 예레미야의 기도는 갈대아인들에게서 그대로 성취된다. 느부갓네살은 훗날 미쳐버리고, 그의 아들은 반역자들에게 살해된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은 결국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 구절은 종종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불경건한 족속들에 대한 저주문으로 인용되어 왔다.

성 경: [렘11:1]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여기서부터 12:17까지는 언약의 요구조건에 충실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는 단락으로서, 이 단락의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느부갓네살이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무찌르기 얼마 전인 여호야김 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고, 두 번째 견해는 B.C.622년 요시야 당시 힐기야에 의해 율법책이 발견된 후의 것으로서 종교 개혁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왕하 22,23장).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는 모세의 율법과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촉구와 함께 이교도의 제사 형식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하 34장에 따르면, 율법책의 발견에 앞서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지역 신당에서는 가나안 종교 의식이 중단되었다.

성 경: [렘11:2]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 여기서 '언약의 말'이란 것은 시내 산에서 체결되었던 언약을 말하는 것으로서(신 5:2) 하나님은 그들의 일치된 예배와 순종의 대가로서, 민족 초기 단계에 있었던 그들에게 물질적, 영적 필요품들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근거는 이러한 조건들을 수납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신 29:9).

성 경: [렘11:3]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 언약의 규정 조항들은 무시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지도록 촉구된다. 고대 근동 지역의 국제 조약문에도 계약의 이행과 불이행에 따른 축복과 저주 조항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Harrison).한편 본절은 모세가 선포했던 것을 다시 부각시킨 내용이다(Calvin).

성 경: [렘11:4]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구약의 거의 대부분의 용례에서 순종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전반절의 '쇠풀무'란 말은 그들의 비참했던 노예 생활을 상징하는 말로 그 문자적 의미는 쇠를 녹이는 용광로나 화덕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노예 생활하던 그들을 주권적 권능으로 이끌어 내셨다. 따라서 그들의 불신앙은 참으로 심각한 것이며, 배은 망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방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성 경: [렘11:5]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 예레미야는 언약 관계의 핵심이 순종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음, '아멘'이라는 익숙한 말을 사용하여 그 당시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에 대한 동의의 핵심을 다시 요약해서 지적한다. 물론 이 '아멘'이란 말은, 비록 언급이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3절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신 27:15-26).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충실히 지킨 반면에(신 6:3;11:9;26:9), 정작 언약에 따른 축복에 모든 존재를 의존하고 있는 그 백성은 그들의 의무를 등한히하여 왔었다(Harrison).

성 경: [렘11:6]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준행하라 -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이 있는 만큼, 저주 조항 역시 있다는 점을 모든 백성들이 다 알고, 그들의 의무가 무엇이며, 또 그들이 받아 누릴 특권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야 했다(Clarke).

성 경: [렘11:7]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 본절과 8절은 70인역(LXX)에는 누락되어 있고, 다만 '그들이 순종치 아니하였다'란 어구만 있다. 여호와를 대신하여 전달하고 있는 이 예레미야의 요구 사항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순종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다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광범위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과거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당시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성 경: [렘11:8]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이 언약의 모든 말로 응하게 하였느니라 - 사람의 깊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있어서는 온 마음과 정성을 수반하지 않은 채 외적인 형태만을 갖춘 그런 순종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배도를 통해 시내 산 언약 규정을 파괴하였었기 때문에 이미 실제적으로 저주 조항의 가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직 진정한 영적 회심만이 소멸되어가는 언약 규정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나, 이런 조건이 충족될 수가 없었으므로 이제 선지자는 재앙의 도래 외에는 달리 선포할 것이 없었다(Harrison).

성 경: [렘11:9]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 여기서 '반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쉐르'(*)는 다양하게 번역되어 '폭동', '반항' 등으로도 쓰인다. 이 말은 원래 숨겨진 음모에 의해 야기된 폭동을 가리킬 때 쓰이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모든 완악한 행사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쓰였다. 특히 우상숭배는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명백한 거부였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 의무 조항에 대한 극단적인 파괴 행위였다.

성 경: [렘11:10]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 여기에는 본서에서 거듭거듭 나타나는 '슈브'(*)란 동사가 쓰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여호와께 등을 지고 돌아섰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여호와의 언약 요구에 순응하길 거부하였다. 지나간 역사의 사례들로부터 제시되는 경고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전철을 되밟는 이 같은 유다 백성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타락한 인간 본성의 구체적 실례라 하겠다(롬 1:28).

성 경: [렘11:11]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 '부르짖다'는 뜻으로 쓰인 '자아크'(*)는 단순히 외치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맹렬하게 울부짖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절규와도 같다 하겠다(Calvin).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부르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시 50:15).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은 이미 회개의 가능성마저 없는 상태였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불러 보았자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서 나온 것이 될 수 없었다.

성 경: [렘11:12]

주제1: [유다의 언악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 앞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리라고 단언하셨던 바, 이제 부르짖을 데가 없어 그 거짓 신들에게 부르짖게 되었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문의 접속사 '와우'(*)는 '그 다음에'란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 부르짖기만 하는 무지 몽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을 반성하거나 진실로 돌아오지 않고 부르짖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Blayney).

성 경: [렘11:13]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효와 같도다 -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바알을 위해 쌓은 제단들이 각 시도의 거리 수만큼이나 많았으며, 그들이 섬긴 신들의 수효가 그들의 성읍 수효만큼이나 많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아마 바알이란 이름이 합성되어 있는 지명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인 바, 그들은 온갖 상상의 미신을 신격화하여 인간 존엄성을 망각하고 또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내팽개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레미야 사역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요시야의 개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Thompson).

성 경: [렘11:14]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 백성들이 곤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가 이제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이 같은 금지령은 7:16;14:11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성 경: [렘11:15]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예디드)로 묘사하고 있는 이런 내용은 12:7에서도 보이며, 또한 사 5:1에도 등장한다. 본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처럼 극진하신 대우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영적 간음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 당시에도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희생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그 제물들을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희생 제물은 짐승의 더러운 시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Calvin). 여호와께 대한 순종과 충성이 결여된 그런 제사는 아무리 풍성하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속이 빈 것이다. 이런 외형적 산물을 여호와께서 만족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라는 신앙에서 출발한 위선적 희생 제사는 종교를 미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Thompson, Harrison).

성 경: [렘11:16]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그 가지는 꺾였도다 - 이스라엘을 감람나무에 비유한 예는 시 52:8;호 14:6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기롭고, 결실을 맺는 싱싱한 감람나무처럼 만들어 주었으나 그들은 약해지고 부패해지고 말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의 침입과 방화를 허용하셨다는 뜻이다(Clarke). 이 구절에도 여러 가지 본문상의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분명하다. 아름답던 나무 잎사귀 위에 이제는 불이 놓여 있고 나뭇가지는 꺾여졌다. 이는 분명히 여호와의 백성들을 삼키게 될 임박한 파국의 참혹한 장면을 서술한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11:17]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언약 파기에 따른 재앙 선포]

(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심으셨던 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며, 또한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 이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에는 '재앙'과 '악'에 해당하는 원어가 모두 '라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악'이란 뜻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이른바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성 경: [렘11:18]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예레미야 살해 음모]

(주);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언한다는 이유로 그의 생명을 해(害)할 음모를 꾸몄다. 하나님은 이런 음모를 비밀스러운 경고를 통해 그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며, 그 결과 예레미야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Clarke). 한편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예들은 솔로몬시대부터 계속 아나돗에 살아왔었다(왕상2:26). 솔로몬 왕위 계승시에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탓으로 솔로몬에 의해 추방, 낙향당했던 것이다.

성 경: [렘11:19]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예레미야 살해 음모]

(주); 나는 알지 못하였나이다 - 아나돗 사람들은 마치 그 주인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나무')를 처치함으로써 그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예언의 말씀('과실')을 단절시키고자 계획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레미야가 화(禍)를 면하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고향 마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상 크나큰 낙담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었다.

성 경: [렘11:20]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예레미야 살해 음모]

(주); 공의로 판단하시며 여호와여 - 무죄한 자의 누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의 기도는 시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다(시17:1-9). 그리고 적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해 달라고 하는 것 역시 시편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르짖음이다(시17:13,Nicholson).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정당하게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도 검토하신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엄청난 이 문제, 즉 자기 고향 전체가 그와 맞서고 있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중재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주);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 이 같은 보복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의 압제당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할 때 쓰던 다소 일반적인 표현이었다(시17:13,14;99:8;149:7;사34:8;35:4 등 참조).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할 때 그는 오직 하나님께 원정(寃情)을 호소할 뿐이었던 것이다. 이 '원정'(*, 리브)이란 말은 구약의 여러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적인 소송 절차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법적 소송의 의미를 담고 있다(12:1;미6:1).

성 경: [렘11:21]

주제1: [율의 언약 파기]

주제2: [예레미야 살해 음모]

(주);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 그들이 이처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해리슨(Harrison)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찬동하고 나선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톰슨(Thompson)은 이보다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종교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마 요시야나 예레미아의 대적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모두 그 당시의 종교 생활에 어떤 위험한 요소가 있을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과거나 현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하는 예레미야의 강도 높은 비난은 아나돗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죄악을 선언한 예레미야는 그를 출생시킨 마을의 명예를 매우 손상시킨 자로 여겨졌던 것이며, 이런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었을 기능성이 높다 하겠다.

성 경: [렘11:22,23]

주제1: [유다의 언약 파기]

주제2: [예레미야 살해 음모]

자기 종을 해하려는 이런 악한 음모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살육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아나돗 사람들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으로 그치지않고 수차례나 더 계속되었다(20:1-3;38:6,1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와주시리라는 확약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아나돗에 대한 심판 예언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성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 경: [렘12:1]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예레미야의 항변]

(주);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무슨 연고니이까 - 예레미야 선지자는 악한 자들의 번성에 대해 탄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끊임없이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악이 그처럼 종종 맹위를 떨칠 수 있는지,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아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모든 것이 다 바르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듯한 일들이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는 바로 이 주제를 놓고 하나님과 쟁론을 벌이고자 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성 경: [렘12:2]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예레미야의 항변]

(주);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뿌리가 박히고 - 예레미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자들을 심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의구심은 욥 21:7 이하에서도 표명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는 말씀을 통해 찾아질 수 있겠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한 인과 응보의 법칙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악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종국적으로 엄청난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악인을 번성케 하셨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악인이 번성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 두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차원 높은 공의와 자비의 실행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다 하겠다.

성 경: [렘12:3]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예레미야의 항변]

(주);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그들을 끌어내시되 - 예레미야는 자신의 항변의 근거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서 찾고자 한다. 즉 악행 중에서도 번영을 누리는 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오직 주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주께서 잘 아신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행악자들을 도살당할 양을 끌어내듯이 끌어내실 것을 탄원한다. '끌어내시되'에 해당하는 '하티켐'(*)은 '잡아떼다', '근절하다', '당기다'는 뜻의 '나타크'(*)의 히필형으로서 완전하고 철저한 파멸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Delitzsch).

성 경: [렘12:4]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예레미야의 항변]

(주);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 혹자는 본절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 역시 1절 이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확실하다. 예레미야는 창궐하는 악한 새력들로 말미암아 그 땅의 모든 거민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재앙이 미치게 되었음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C.L. Feinberg) 이런 맥락에서 존 브라이트(J. Bright)는 이 부분을 다음 구절과 연결시켜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짐승들과 새들이 모두 멸절하였습니다.'

성 경: [렘12:5]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느닷없는 대답을 볼 수 있다. 아마 하나님은 '현재의 이런 고난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더욱 험난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고 타이르시고자 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또한 두 가지 은유법이 쓰이고 있는데, 첫 번째 것은 보행자와의 경주가 힘이 드는데, 어찌 말과의 경주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박해나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가 장차 임할 재난과 파멸에 비하면 은유는 요단 강의 창일함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이 평화로운 땅을 덮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12:6]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 5절 말씀에 대한 하나의 실례로서, 집안 사람들에게마저 핍박을 당하는 고통스럽고 다급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Delitzsch).한편, 예수께서도 성도들의 당할 핍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셨다(마 10:21).

성 경: [렘12:7]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내 집, 내 산업, 내 마음의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는 내용상 정반대되는 동사들이 쓰이고 있는데 버리며, 내어던져, 대적의 손에 붙였노니란 말들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의 애정과 보호의 대상이었던 백성이었지만, 이제 심판이 불가피한 것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성 경: [렘12:8]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발하는 고로 - 이는 유다 백성들의 뻔뻔한 반항심을 묘사한 말이다. 그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악의에 찬 교만한 행동을 보였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참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Calvin).

성 경: [렘12:9]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 '무늬 있는'의 히브리어 '차부아'(*)에 혹자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육식조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Blayney). 그러나 이 단어가 분사형인 점을 중시할 때, 이것은 단지 '매'를 수식하는 말로 이해됨이 더 낫겠다.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은 이를 '다채로운', '변색된' 등의 의미로 옮겼다. 결국 '무늬 있는 매'란 포학하여 길들이기 힘든 완고함(Calvin), 우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종교적 혼합주의, 가증스러운 변절성 등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렘12:10]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 이 구절은 빈정대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즉 이제 유다 백성은 주변 열국들의 약탈과 유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적들에는 모압, 블레셋, 암몬, 앗수르, 애굽 등과 함께 특히 갈대아인들까지 포함될 수 있겠다(Clarke). 한편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원에다 비유하는 표현은 이사야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사 3:14;5:1-7).

성 경: [렘12:11]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온 땅이 황무함은 - 대적들의 침입으로 유다 땅 전체가 초토화되리라는 예언이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B.C. 7세기 말경 유다의 어떤 도시들, 예컨대 라기스 같은 도시는 두 단계에 걸쳐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성 경: [렘12:12]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훼멸하는 자들이 광야 모든 자산 위에 이르렀고 - 이들 '훼멸하는 자들', 곧 파괴자들은 여호와의 손에 있는 도구로서 그의 심판의 목적을 성취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 중에는 느부갓네살(34:2, 3)과 앗수르 군대(사 10:5, 6)도 들어 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실행에 옮기시는 날이면, 그 누구도 환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편, '혈육 있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사르'(*)는 창 6:12의 용례에서 미루어 볼 때 죄악된 인생을 암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성 경: [렘12:13]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우리가 말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 본절은 7-12절에 언급된 파멸 상황에 대한 결론 역할을 하는 바, 유다 백성의 죄악된 행위는 결국 그들의 기대와 노력과는 정반대의 불운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Delitzsch). 그리고 구체적으로 본문은 애굽을 의지했다가 도리어 낭패에 봉착하게 될, 혹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할 사실에 대한 언급이라 하겠다.

성 경: [렘12:14]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 유다를 황폐화시키려고 작당한 주변의 모든 이웃 나라들은 이제 그들 차례를 맞이하여 황폐화되고 말 것이란 내용이다. 그들 역시 사악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들을 공의의 집행인들로 삼았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똑같이 공의의 집행이 시행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종종 한 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악한 민족을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그런 다음 다른 민족을 불러 그 악한 민족을 응징하셨다(Clarke, Harrison).

성 경: [렘12:15]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 이것은 포로에서부터 귀환과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서, 여기에는 또한 적들 중에서도 얼마정도는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Clarke).

성 경: [렘12:16]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 원문상 이 구절은 '그들이 배우고 또 배우면'이라는 강력한 조건절로 시작된다. 또 이 구절뿐만 아니라 10:2에도 언급되고 있는 '도'(*, 데레크)란 '길', '여정', '양식' 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종교적 관행, 곧 여호와 신앙을 뜻하는 것 같다. 이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이웃이 하나님의 관심의 테두리 내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따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본문에서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맹세를 주장하는 자가 여호와를 섬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창 31:51-53 참조).

(주);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 전에는 그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으며 또한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가르쳤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고 여호와를 그들의 주권적인 주시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장성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 중에 들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약속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놀라운 우주적 구원의 성격을 띤 분명한 서술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하더라도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유용한 것이다.

성 경: [렘12:17]

주제1: [악인의 궁극적 종말]

주제2: [하나님의 응답-징벌과 회복]

(주); 그리하지 아니하면 뽑으리라 -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면, 이스라엘이든지 이방이든지 간에 재앙을 받아 끝장이 날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가능성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13:1]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 이 구절은 여호야김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여고냐(B.C. 598년)의 통치하에 전달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 즈음에 갈대아인 장군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왕하 24:8-11). 그러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 느부갓네살이 그 주력군을 이끌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던 것이며, 썩은 띠를 허리에 두르는 상징적 행위로써 그들에게 임할 파국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Clarke).

성 경: [렘13:2]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 '띠'란 일반인들의 허리띠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특히 제사장들이 에봇 위에 두르던 띠를 가리키는 듯하다(출 28:8). 이 띠는 에봇, 흉패, 관과 함께 거룩과 영화로움을 상징했다(출 28:40-4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유다를 상징한다 하겠다.

성 경: [렘13:3]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지는 두 번째 지침이 하달되었다. 한편, 1-11절까지는 본장에 들어 있는 다섯 개의 경고들 중의 첫 번째 것으로서, 비유적 행위에 의한 메시지로 전달된다(R.K. Harrison).

성 경: [렘13:4,5]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이 두 번째 지침의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브라데'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라트'(*)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아나돗에서 북동쪽으로 약 25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유브라데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다(46:2;창2:14;15:18;신1:7;11:24;왕하23:29;24:7). 이처럼 이 말이 유브라데 강을 의미하면서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수세대에 걸쳐 많은 주석가들은 예레미야가 왕복 500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두 번에 걸쳐 여행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4, 6절 참조). 첫 번째 여행은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를 피해 석 달 동안 은거 했을 때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두 번째 여행은 내버린 그 띠를 되찾으러 갈 때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나님이 그토록 먼 거리를 왕래하게 하셨던 것은 아마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Clarke). 한편 어떤 학자는 '페트라'를 아나돗 북동쪽 4마일에 위치한 '와디 파라'(Wadi Farah) 혹은 '에브랏'(베들레헴, Hitzig) 등으로 보거나, 아예 본문의 내용을 우화나 알레고리로 해석하기도 한다(Graf, Rudolph).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그다지 풍부하지 못하다.

성 경: [렘13:6,7]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여호와의 세 번째 명령과 예레미야의 실행에 관한 내용이다. 물가에 숨겨둔 천이 썩었다는 것은 처음 숨기던 때와 그것을 찾으러 갔던 때 어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한다. 아무튼 유브라데의 진흙이 그 '띠'를 썩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은 어떤 특별한 상징을 나타낸다. 이는 유다인들의 현상황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썩은 띠처럼 비참하게 연명해 가야 할 것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Clarke, Delitzsch).

성 경: [렘13:8]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여호와의 말씀이 - 유다인들의 치욕스럽고 비참한 상태에 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그들은 바위 틈에서 썩어짐과 같은 유배지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Calvin).

성 경: [렘13:9]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유다의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교만'이나 '오만'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탁월함'이란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역본들중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ate), 그리고 시리아역(Syriac Version) 등은 전자로 번역하였고, 아람어 탈굼역(Targum)은 '힘'이라고 번역하여 후자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이 단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유다의 교만을 징벌하신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반면에, 이를 '힘', '영광', '탁월함' 등의 긍정적 의미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나(사 60:15) 그들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Blayney, Calvin, Horsley).

성 경: [렘13:10]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 예레미야는 앞에서도 유다가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존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2:18). 이처럼 유다는 주변 열강들의 틈새에 끼여 때로는 이쪽을 또 때로는 저쪽을 의뢰하면서, 정녕 의뢰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앙을 저버리는 형태를 거듭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외세 의존 정책은 이방 신들이 국내로 유입되어 들어와서 악하고 부패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며, 하나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을 더욱 확장시켰다. 아마 선지자는 이런 사실을 본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성 경: [렘13:11]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본절과 10절에 대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앞의 행동화된 비유를 입증하고자 하는 후대의 편집자 해설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부분의 배경상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단정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으로 종종 판명되며 설령 앞의 내용이 포로기에 대한 언급이라고 하더라도 이 구절이 포로기 작품임을 나타내는 단서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살던 고대 근동 전역에는 이미 이 같은 파국적 사건의 가능성이 잘 알려져 있었고, 더구나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굳이 후대의 기술(記述)로 볼 이유가 없다 하겠다.

성 경: [렘13:12]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는 말은 그 당시 유행하던 속담이었던 것같다(Thompson).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다 알고 있는 뻔한 소리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70인역(LXX)은 '그러므로 이르기를'을 '그들이 너에게 이른다 할지라도'라고 읽고 있다. 즉, 그들의 대답은 조소 섞인 투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라고 말할 것은 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술취한 사람이 흥청거리면서 내뱉는 농담 같은 대답을 볼 수 있다.

성 경: [렘13:13]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잔뜩 취하게 하고 - 클라크(Clarke)는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 '너희들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너희들과 왕 그리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들 병들로 대표되고 있다. 그리고 포도주는 너희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성 경: [렘13:14]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비유를 통한 경고]

(주);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 하나님의 영광이 일단 유다에게서 떠난 이상, 이제 이 백성은 아무 쓸모가 없는 빈 항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선택하사 은혜를 주셨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 스스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특권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제 무책임한 이 백성이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들은 불순종과 방종, 또 교만과 배도로 인하여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결국 그들의 멸망은 갈대아인들의 주도 면밀한 침략 계획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야기시킨 사건이다.

성 경: [렘13:15]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너희는 들을지어다 - 수세기에 걸쳐 선지자들에 의해 전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였던 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백성에게 다시 한번 순종할 것을 호소한다(Nicho lson). 본절에는 두 동사, 즉 '듣다'(*, 솨마)와 '귀를 기울이다'(*, 아잔)란 동사가 대칭적인 위치에 놓여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두 가지 비유에 이어 임박한 심판에 관한 세 가지 경고를 싣고 있다. 그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15-17절은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자만심을 버릴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성 경: [렘13:16]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흑암'의 강도가 점차적으로 심해져가는 묘사를 통해 유다의 멸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는 사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여기서 '흑암'은 재앙의 전조적인 현상임과 아울러, 유다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어둠과 빛의 대립은 성경 전체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인데, 이러한 대립 속에서 어둠은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1) 중생하지 않은 자에게 내재한 자연적 어둠(엡 4:18). (2) 의도적으로 빛을 거부하는 고의적 어둠(요 3:19, 20). (3) 완고한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어둠(Feinberg).

성 경: [렘13:17]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통곡하리라 - 신약 성경은 교만을 인생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죄성(罪性)들과 나란히 기술하고 있다(막 7:22).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온유나 겸손과 정반대된다(약4:6;벧전5:5:). 바울에게 있어서 교만이란 타락한 이교 사회에서 오염되는 전형적인 산물로 여겨졌으며, 예레미야가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이다(R.K. Harrison). 한편,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너희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제책이 없다. 그리고 파멸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제 나에게는 너희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은밀히 슬퍼하고 곡하는 것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성 경: [렘13:18]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본절과 19절은 두 번째 경고의 말씀으로서 왕과 왕후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주조를 이룬다.

(주);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 이는 여고냐와 그의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고냐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친의 섭정을 받았던 것 같다(Clarke). 그녀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의 어린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다의 왕후란 것이 공식적인 직책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왕후 역시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상 2:19에 의하면 왕좌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Nicholson). 한편 본절의 역사적 정황에 관해서는 왕하 24:8-12을 보라.

성 경: [렘13:19]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 남방이란 원어로 '네게브'(*)인데, 아마 유다 남쪽의 메마른 넓은 광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Nicholson). 원어의 원래 뜻은 '건조하다'인데, 그 위치는 가사-브엘세바에 이르는 도상에 있었고 시내 반도 고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성읍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유입해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차단될 것이다(R.K. Harrison). 반면에 클라크(Clarke)는 이를 유다의 남쪽까지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말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파괴될 것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성 경: [렘13:20]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유다의 처벌이 그들의 죄에 대한 완고한 성향에 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임을 최종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내용이다.

(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냐 -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달되고 있다. '거기 살던 수많은 부유한 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양떼들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슬프게도 그들은 바벨론 군대 앞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 가버린 것이 아닌가 ?'(Clar ke)

성 경: [렘13:21]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너의 친구삼았던 자 - '친구'에 해당하는 '알루핌'(*)을 영역 성경 KJV는 '두령'(captains)으로 번역한 반면, '친구'(friends)로 '각별한 동료'(spe cial allies)로 각각 옮겼다. 실제로 이 단어는 '족장'(창 36:15) 혹은 '두목'(슥 9:7 )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가족'이나 '친한 벗'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잠 16:28;미7:5). 여기서는 문맥상 후자의 뜻이 자연스럽겠다. 유다는 바벨론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기 전, 당시 중근동을 주름잡았던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이들과 동맹을 맺은 적이 있다(왕하 20:12-15). 그리고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애굽을 격파했을 때에도, 유다는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며 동맹을 맺은 바 있다(왕하 24:1).

성 경: [렘13:22]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 자기 만족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자들의 물음이다. 그들은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구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파멸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이스라엘의 적이나 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질문으로 언급되어 있으며(22:8,9;애 2:15, 16;겔 5:14, 15 등), 예레미야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언약 파기'란 말을 사용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22:9). 한편, 유다에 임한 심판이 본절 하반절에서 치마를 걷어올려 치부를 노출시키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는데 이는 곧 민족의 참사를 벌거벗고 강간당한 육체에다 비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치마가 들린다'는 말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성폭행 당한 것에 대한 완곡 어법으로 쓰였다(레 20:17;신 22:30;사 47:3 등).

성 경: [렘13:23]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있느뇨 - 굳어질 대로 굳어지고 패역할 대로 패역하여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유다의 죄악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검은 피부가 원한다고 해서 흰 피부로 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 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이 유다의 죄악은 이제 변할 수 없는 제2의 천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죄악에 익숙해 있었으며, 습관화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취득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Cla rke).

성 경: [렘13:24]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사막 바람 - 이 바람은 광야에서 유다 남쪽으로 불어오는 폭풍우를 동반한 광풍이다.

성 경: [렘13:25]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이는 네 응득(應得)이요 -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진 유다의 분깃이며,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며 몫이다(Thompson).

(주);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 '거짓'이란 바알을 위시한 이방 신들 혹은 유다가 의뢰했던 이방 열강들을 지칭한다.

성 경: [렘13:26]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 유다가 거짓 것에 골몰하고 집착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배신이며 영적 간음 행위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이제 여호와는 유다의 수치스러운 부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 경: [렘13:27]

주제1: [다가올 심판에 대한 비유적 경고]

주제2: [회개의 촉구]

(주);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 유다의 가증스러운 죄악을 지적하는 세 가지 어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언덕과 공개된 장소에서 이런 가증스러운 일들을 하여 왔다. 이 구절은 전체적 내용은 이교신들에 대한 종교 의식과 그 의식에 수반되는 부도덕한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 요시야는 B.C. 622년의 개혁 운동을 통하여 이런 악습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였다(왕하 23:1-20; 대하 34:1-7). 그러나 그의 개혁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이내 예전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며, 요시야 이전의 아사 왕(왕상 15:9-15)이나 히스기야 왕(왕하 18:1-6)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외적인 개혁만으로는 결코 인간의 내부에 있는 부패한 심령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자발적이고도 전폭적인 회개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외적인 압력을 사용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렘14:1]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가뭄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

(주); 가뭄에 대하여 - 팔레스틴 땅에는 강우량의 부족으로 원래 가뭄이 잦기는 하였으나, 성경에서 가뭄은 기근과 함께 언약적 저주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예가 많다(신 28 :23, 24 참조). 본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겠다(R.K. Harrison).

성 경: [렘14:2]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가뭄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

(주);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애통하니 - 여기에서는 네 가지의 짤막한 서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문의 무리'의 문자적 번역은 '성문들'로서 유다의 전 도시들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예루살렘에서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소리가 백성들 중에서 올라온다. 우리는 민족 재앙 때에 볼 수 있는 민족적 애도의 장면을 소개받고 있는것이다. 이런 애도의 장면은 대개 곤경, 가뭄, 적의 침략과 그에 대한 패배 등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2-9절을 시편에 등장하는 애도가들과 같은, 예배석상에서의 애도가로 이해하고 있으나(시 70, 74편 ; 욜 1, 2장) 근거가 불확실한 견해이다. 클라크(Clarke)는 '애통하니'에 해당하는 '카다르'(*)를 '검다'라고 번역하며, 슬픔과 재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머리에서 발까지 검은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Clarke).

성 경: [렘14:3]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가뭄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

(주); 그 머리를 가리우며 - '가리우며'의 히브리어 '하파'(*)는 '덮다', '가리우다'는 뜻이지만 브라이트(J. Bright)는 본문을 '고개를 떨군 채'라고 번역하였다. 어쨌든 이는 당황과 비탄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4절 끝부분에도 나온다. 70인역(LXX)에는 4절 후반부에 이것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성 경: [렘14:4]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가뭄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

(주);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 '갈라지니'(*, 하타)는 '낙담하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메마른 땅이 쩍쩍 쪼개짐으로 인한 농부들의 비통한 심경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말이다(Feinberg). 한편 심한 가뭄시에 팔레스틴 땅의 균열은 어떤 곳에서는 폭이 한 규빗 정도 되는 곳도 있으며, 또 때로는 깊이가 사람의 키만큼 이를 때도 있다고 한다(Clarke).

성 경: [렘14:5]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가뭄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

가뭄으로 인해 들의 야생 동물들도 고초를 격는다. 암사슴이 새끼를 낳았지만 새끼를 먹일 풀이 없으므로 그 새끼를 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렘14:6]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가뭄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

(주);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 '시랑'으로 번역된 '탄님'(*)은 때로는 하마와 같은 물 속에서 사는 짐승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것은 보통 물 속에 있다가 건조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하였다. 그리고 들 나귀는 갈증이나 굶주림을 오래도록 견뎌내는 강한 체질을 가진 짐승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재앙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본문의 '들 나귀'는 굶주림에 지쳐 있음은 물론 뜨거운 열기로 인해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Calvin).

성 경: [렘14:7]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Thompson).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J. Bright).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렘14:8]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 주께서는 이 백성의 유일한 희망의 대상이라는 호소이다(Clarke).

(주);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 어찌하여 이 곤궁한 때에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손처럼 이 땅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지를 묻고 있다. '행인'이라 하는 것은 밤중에 잠시 투숙하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급히 떠나가야 하는 여행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성 경: [렘14:9]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 여호와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다시금 반복된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사안은 갈대아인의 진군에 의한 임박한 재난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구원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땅에 영원히 관심이 없는, 하룻밤 유숙하는 나그네처럼 멀리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괴리를 자초한 측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주권을 거부하였으며 또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았던 이런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로우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같은 소외의 감정은 오직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이며, 설령 그들이 이론적으로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오직 그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로 국한될 것이다.

성 경: [렘14:10]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 '어그러진'에 해당하는 '누아'(*)는 '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헛된 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변덕스러움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한 방황과 변덕의 구체적인 예는 그들이 이방 열국이나 이방의 우상들을 의지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위기가 닥쳐올수록 이 백성은 사 30:15의 말씀처럼 잠잠하고 여호와를 신뢰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으나 정반대로 행동하였다(Calvin).

성 경: [렘14:11]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 7:16;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성 경: [렘14:12]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 형식에 치우친 종교 제사의 무익함이 재강조되고 있다. 순종이 결여된 '금식', '번제', '소제' 등은 여호와께 수납되어질 수 없다. 그리고 '칼', '기근', '염병' 등의 세 항목은 전쟁 때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들이었으며,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5:12;14:15 ;29:18;삼하 24:13 등). 이러한 재난들은 B.C. 586년 예루살렘 파괴 때 적나라하게 임했다.

성 경: [렘14:13]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클라크(Clarke)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보고자 하였다 : '오, 여호와여. 그들은 참으로 지나치게 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서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처벌을 완화해주옵소서.'

성 경: [렘14:14]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 여호와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밝히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설교했었지만 그들이 설교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고 아무런 가치없는 복술, 혹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불과했다. 예레미야와 같은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구별은 그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Thompson).

성 경: [렘14:15]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 여호와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자들은 제일 먼저 '칼'과 '기근'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쉽게 현혹되었던 불충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며,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주의를 두다가 묻어줄 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16절). 땅에 묻히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결말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성 경: [렘14:16]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그들의 악을 그 위에 - '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는 도덕적인 악이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다 가리킨다.

성 경: [렘14:17]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내 눈이 밤낮으로 - 본문의 1인칭 주어인 '나'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다. 여기서 선지자는 반대 감정 병존 상태(ambivalence)인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멸 선고를 받은 백성들의 대표자인 입장에서는 가슴이 녹아 내리는 듯한 비애감을, 아울러 그 백성을 징벌하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큰 아픔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D.R. Jones). 한편 '파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는 단순한 부상(wound, NIV) 정도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분쇄', '파멸', '파괴' 등의 뜻인 바, 개역 성경의 번역이 정확하다 하겠다.

성 경: [렘14:18]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 가는 곳곳마다 끔찍하고 무서운 광경이다. 상처입은 자, 죽어가는 자, 기아에 허덕이는 자, 살해당한 자들뿐이다. 죽은 자를 묻어 줄 자도 없으며, 죽어가는 자를 위로해줄 자도 없다. 구원과 희망이 될 만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주);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그 성읍들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다닌다(Clarke). 블레이니(Blayney) 박사는 이 어구를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행상들처럼 거짓 교리나 잘못된 예언을 퍼뜨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라고 이해하였다.

성 경: [렘14:19]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창 18:23-33) 모세의(출 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버리지 마옵소서'(9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절),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절)라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성 경: [렘14:20]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우리가 우리의 악과 인정하나이다 - '우리 조상의 죄악'이란 말 속에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지금까지 축적된 민족 공동의 죄가 포함된다. 선지자는 지금 이 백성을 대신해서 그리고 자신과 백성을 동일시하여 죄악을 고백하였다. 그렇지만 선지자의 고백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Clarke). 이처럼 당대의 죄악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을 인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식을 반영한다(레 26:40;시 79:8,9; 106:6, D.R. Jones)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이 언약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듯이(창 18:1-8). 그것을 상실하게끔 만든 죄악과 거기에 대한 책임 또한 양자에게 속하는 것이다(3:24;7:26 ;11:10;16:12,13 참조).

성 경: [렘14:21]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마옵소서 - 이 백성의 곤경에 대한 묘사와 자비를 구하는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열방은 여호와를 유다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의 신용과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말것이라는 호소이다(Thompson).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오해와 목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백성의 죄악을 철저히 징계하신다.

(주); 주의 영광의 위 - '당신의 영광스러운 보좌'란 뜻이다(J. Bright). 여호와는 성전 안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 보좌가 유다 민족의 안전에 대한 보증인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 실체가 결여된 채 형식적 종교 행사만 치르어지는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었다(마 24:2 참조).

(주);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 이 '언약'은 출 24:7, 8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Clarke).

성 경: [렘14:22]

주제1: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제2: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주);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 예상되는 심각한 기근 상황과 관련되는 호소인 듯하다.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사 비를 주시는 것은 참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인 것이다(Clarke).

(주);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 이 어구는 '우리는 주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라고도 번역된다(J. Bright). 따라서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거부한다면 철저히 망하고 말 것이라는 애절한 탄원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인정하면서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해도 이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황되고 속이 빈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뿐이었다(Thompson).

성 경: [렘15:1]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탄원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탄원을 들으사 그들을 용서하셨으며(출 32:11-14;민 14:13- 20), 사무엘 역시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을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삼상 7:9). 그러나 이제 이러한 위대한 중보자들이 기도하고 탄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죄악은 워낙 뿌리가 깊고,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였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모세와 사무엘에 대한 언급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이 두 선지자들에게서 그의 사역의 모형을 볼 수 있었던 것이며, 그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성 경: [렘15:2]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 '사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웨트'(*)는 '멸망', '염병'으로도 번역된다. 본절에서처럼 하나님의 징벌에 따른 재앙이,'사망', '칼', '기근', '포로', 혹은 '염병' 등으로 묘사되는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14:12;43:11;겔 14:21;33:27).

성 경: [렘15:3]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네 가지로 벌하리니 - 이 네 가지 심판의 도구들은 (1) 죽이는 칼 (2) 칼에 맞아죽은 시체를 찢어 놓을 개들, (3) 죽은 시체를 먹고 사는 새들, (4) 시체를 먹는 새들이 남기고 간 것을 먹어 치울 짐승들 등이다(Clarke).

성 경: [렘15:4]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행한 바를 인하여 - 유다의 반역과 배도를 부채질했던 열왕들 중 대표적 인물로서 므낫세가 지적되고 있다. 왕하의 여러 구절들에는 이 므낫세 왕의 악행에 대한 내용이 곳곳에 지적되어 있다(왕하 21:10-15;24:3). 므낫세는 다윗계 열왕들 중에서 종교 혼합주의를 가장 많이 도입한 자였으며, 민족에게 대단히 깊은 악영향을 끼쳤다(왕하21장). 한편 본절과 앞절의 어투는 신 28:25, 26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이 부분은 예레미야의 사상에 동조하던 그의 동료나 신명기 학파 학자들의 주석인 것으로 가끔 이해되기도 했으나(Nicholson) 다소 지지하기 어려운 견해이다.

성 경: [렘15:5]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물을 자 누구뇨 - 예루살렘의 심각한 운명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내용이다. 본절의 세 가지 질문 사항들은 예루살렘을 동정하거나 위로할자가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B.C. 586년의 엄청난 파국을 반영하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서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상기할 수 있다(애 1:1, 12;2:13, 20, Thompson).

성 경: [렘15:6]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 히브리어 원문상 '아호르 텔레키'(*)는 '네가 계속적으로 뒷걸음질 친다(타락해왔다)'는 뜻이다. 또 여호와를 버리고 뒷걸음질 친 자가 바로 '너'라고 표현하면서 너란 대명사를 강조하고 있다(Thompson).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오래도록 참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미루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자비로우신 배려가 아무 쓸모 없었기 때문이다(Clarke).

성 경: [렘15:7]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어 - 이런 장면은 타작 마당에 수확한 것을 모아두고 매년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알기 쉬운 예화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곡식을 키질하여 겨를 날려 보내듯이 이스라엘을 키질하여, 그들을 다 흩어버리실 것이다. 본절의 예언은 세차례에 걸친 바벨론의 유다 침공을 통해 성취되었다.

성 경: [렘15:8]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그들의 과부가...모래보다 - 남자들이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에 과부가 여인들이 많아졌음을 지적한다(Nicholson).

(주); 청년들의 어미를 - 칠십인역(LXX)은 '어머니(와) 청년들'로, 벌게이트역(Vulgate)은 '청년의 어머니'로, 또 수리아역(Syriac Version)은 '어머니와 청년들이 다 함께'로 각각 번역한다. 문맥상 '어미'를 수도나 대도시로 이해하여, 본절을 예루살렘 거민들의 모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Clarke).

성 경: [렘15:9]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불가피한 파멸]

(주); 일곱 자식을...기절하게 하며 - 아들들이 모두 전쟁에서 몰살당했음을 가리킨다(Nic holson). 클라크(Clarke)는 이 '여인'을 예루살렘으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 예루살렘은 수많은 자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땅의 수많은 도시들과 마을들, 그리고 가문들의 어미였다. 그리고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수를 뜻한다. 한편, 일곱 아들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룻 4:15; 삼상2:5). 그러나 그들이 백주에 몽땅 멸망하고 말 때에는 일곱 자식의 어미가 된다는것은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만다. 이들 젊은이들은 한창 피어날 나이에 전쟁에서 죽게되어 대를 상속할 자손마저 없어져 버린다.

성 경: [렘15:10]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나의 모친이여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 깊은 절망감 속에서 내뱉는 부르짖음이다. 이런 애도는 20:14-18의 날카로운 비명속에서도 나타난다. 이곳의 주제는 자기 동포의 손에 핍박받는 것에 대한 것이다(11:18-12:6 참조, Nicholson).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불안과 고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욥 3:3-10). 그러나 그의 부르심은 어미의 태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1:5), 그렇기 때문에 그의 탄생날에 대한 이 같은 한탄은 맡은 바 사명을 차라리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는 '온 땅을 향해 법적인 투쟁과 변론을 벌일 자로'라고도 번역된다. 그는 아마 자기 민족을 향해 계속 소송을 거는 자로 보였던 것같다(J. Bright).

(주); 내게 뀌이지도 - 또 예레미야는 여기서 자신이 마치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다.

성 경: [렘15:11]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네 대적으로...간구하게 하리라 - '간구하게'의 히브리어 '파가'(*)는 '간청(요청)하다', '만나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동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절의 해석도 달라진다. (1) '내가 네 대적을 만나 은밀한 영향력으로써 그로 하여금 네게 선대하도록 만들어 주겠다'(KJV, Calvin). (2) '이제까지는 네 대적이 너를 조롱하고 대적하였으나 그날에는 오히려 네 대적이 네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NIV). 이 두견해 중 어느 한 쪽만을 지지하기란 어렵다. 다만 (1)의 견해를 따를 경우 이 예언은 40:1 이하에서 성취되었으며, (2)의 견해를 따를 경우 그 예언은 38:14에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절과 12-14절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제시되고 있다. 혹자는 11절만을 선지자에게 적용시키고 12-14절은 유다 백성에게 적용시키는가 하면(Calvin, Grotius, Henry, Scott), 또 어떤 학자는 11-14절 전체가 유다 백성에게 선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Venema). 그러나 가장 지지받는 견해는 11-14절 전체를 선지자에게 선포된 말씀으로 보되, 11절은 다분히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또 12-14절은 백성들과의 동일선상에서 말씀하신 내용으로 보는 것이다.

성 경: [렘15:12]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본절은 난해 구절들 중의 하나로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이는 17:1의 내용이 잘못 표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Rudolf, Bright). 그런가하면 '유다의 미력한 군대로 어찌 강대한 갈대아 군대를 맞아 싸울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Clarke). 그러나 이를 우선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이러하다. '철이 북방으로부터의 철과 놋을 깨뜨릴 수 있는가?' 또한 이를 다른 각도에서 읽으면 '철과 놋이 북방으로부터의 철을 깨뜨릴 것인가?'로 볼 수도 있다. 문맥을 살펴보면, 예레미야에게 지금 유다에 닥쳐올 적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지 설명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유다로서는 그 어떤 확신과 자신감도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 '유다인들의 의지가(혹은 무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마치 철이나 놋과 같다 할지라도 북방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적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렘15:13]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유다를 침공할 적군들이 모든 값진 재물들을 노략해 갈 것을 뜻한다.

성 경: [렘15:14]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앞 구절과 본절은 17:3, 4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에 착안하여 어떤 이는 '이르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웨하아바르티'(*)를 '섬기게 하다'는 뜻인 '웨하아바드티'(*)로 이렇게 수정해도 뜻은 통하지만, 굳이 수정하지 않더라도 포로로 잡혀가는 것에 대한 본절의 의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성 경: [렘15:15]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이 말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여호와께 기억해 주십사 하고 간구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인정하심을 얻기 원할 때이다(느13:14;시25:7;106:4등). 마지막 어구들을 살펴보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박해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대변자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즉 여기서 예레미야가 여기서 호소하고 있는 내용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사사로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할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Thompson).

성 경: [렘15:16]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면 기꺼이 받아들였다. 에스겔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겔2:8-3:3).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공히 처음에는 입에 맞지 않는 것 같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예레미야는'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였고 에스겔은 '꿀처럼 달게' 받아들였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말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신 12:5)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곳'(신 12:11)이란 어구와 같은 맥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다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천명이다.

성 경: [렘15:17]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기뻐하는 자의 회(會)에 앉지 아니하며 - 원문상의 직역은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지 않았으며'이다(J. Bright).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것도 누릴 수가 없었다. 본절에서는 그의 사명에 대한 이 같은 헌신적인 성실성이 상세히 지적되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15:18]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시내 같으시리이까 - 여기에는 박해받는 중에 있는 하나님의 종이 터뜨리는 애절한 탄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질문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토로하는 울부짖음이 들어 있다(시 22:1 참조). 예레미야에게는 그의 고통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며 그의 상처는 절망적이어서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참기 어려운 고난으로 인해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께서(2:13) 마치 '물이 말라 속이는 시내'인 것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속이는 시내'란 여름철에는 말라버려 물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시내를 말한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많은 비가 왔을 때만 물이 흘렀던 수많은 와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 예화였을 것이다. 여행자들은 물을 찾기 위해 종종 와디에 다가가지만 대부분 물을 찾지 못하고 만다.

성 경: [렘15:19]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 앞에 세울것이며 - 클라크(Clarke)는 본 문구를, '만일 네가 회개하면 다시 유다 따응로 돌려 보내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선지자 직분에 관련된 내용으로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문구는 '네가 돌아오면 나는 너에게 선지자의 직무를 돌려주겠다'란 의미로 볼 수 있겠다(Feinberg,Thompson). 여기서도 '돌아오다'(*, 슈브)란 동사의 언어 유희가 쓰이고 있다. 예레미야의 쓰라린 경험은 선지자로서의 그의 입을 거의 봉해 버렸으며 자기를 보낸 이에 대한 확신과 신적 소명에 거의 눈을 감아버리게 했다(20:7-9 참조).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의 반응에 개의치 말고 다시 돌아와서 오직 당신만 신뢰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불평을 비난하면서도 우선 천한 것에서부터 귀한 것을 취할 것을 권면하신다. 즉 백성들의 속이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에게로 돌아서라고 만든다. 그렇게 할 경우 그는 하나님의 입 같이(출 4:16)될 것이며, 그의 말은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 역시 그 말씀을 그러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 경: [렘15:20]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구하여 건짐이니라 - '네가 나에게 충실한 이상, 그 어느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Clarke). 이것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다시 부르시는 재확인 절차이다(Nicholson). 이 내용의 어투는 1:8, 18, 19의 내용을 강하게 상기시켜 준다. 본절의 약속은 구약에서 구원과 관련해서 흔히 등장하는 세 동사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본절의 '구하다'(*, 야솨), '건지다'(*, 나찰)와 다음 절의 '구속하다'(*, 파다)이다, 이 동사들은 모두 출애굽 사건을 묘사하는 상당히 비중있는 구절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때때로 보다 일반적인 상황에도 적용되었다. 이들 각 동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제작기 다름 면을 강조하고 있다. '구하다'에 해당하는 '야솨'와 그 관련 명사들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압제받고 있는 자들은 구해낸다는 점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그리고 '건지다'에 해당하는 '나찰'은 강한 자가 자기 먹이를 빼앗아 가려고 할 때 그것을 와락 붙잡는 자의 적극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본절에서는 특히 죽음, 무덤, 죄악, 고통, 공포 등으로부터 건짐받는 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동사인 '파다'는 대부분 어떤 사람의 소유에서 속전을 지불하고 그를 해방시켜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Thompson).

성 경: [렘15:21]

주제1: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제2: [예레미야의 탄식과 하나님의 위로]

(주);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 이 악한 백성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며.

(주); 무서운 자의 손에서 - '갈대아 군대의 손에서'의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것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취되었다(Clarke).

성 경: [렘16:1]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주); 여호와의 말씀이 - 본장의 말씀은 여호야김 통치 기간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Dahler).

성 경: [렘16:2]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주);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 예언의 계시는 직접적인 설교나 상징적인 행위에 의해서 전달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한 선지자의 생애나 또는 그의 가족 생활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였다. 이사야의 가족(사 8장), 에스겔 아내의 죽음(겔 24:15-27),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호 1-3장) 등은 다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지 말라는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역시 후자의 경우를 통한 말씀 선포의 본보기 중 하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독신 생활을 명령하는 이 같은 부르심은 대단히 독특하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대가족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으로여겨졌다(창 2:17;시127:3-5등 ). 이런 반면에 자식이 없는 것은 저주로 간주되었다(창 30:1;삼상1:6-8 등). 그리고 동정(童貞)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애곡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것으로 여겨졌다(삿 11:37), 따라서 독신을 명하는 본문의 상황은 유다의 종말이 가까이 와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징조였다. 수많은 백성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땅에서 죽거나 사로잡혀감으로 생이별을 당해야 하므로 자식과 아내를 둔 자들보다는 오히려 더 나을 것이다.

성 경: [렘16:3,4]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유다 백성에게 임할 환난이 묘사되고 있다(15:1-4 참조).

(주); 독한 병으로 죽고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 본절에는 '역병(독한 병)', '칼', '기근' 등의 모티브가 쓰이고 있다. '독한 병'은 문자적으로 '질병의 죽음'이라 번역되며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치명적인 병을 가리킨다. 또한 죽은 시체들의 수효가 하도 많아서 애곡하거나 매장할 겨를조차 없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성 경: [렘16:5]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주);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애곡하지 말라 - 온 백성에게 미치는 재앙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죽음이란 미처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가 없음을 나타낸다(Clarke). 본절의 핵심은 민족적 참사가 임박해 있는 상황에서 친지와의 사별에 대한 애도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제함이니라 - '평강'이란 말은 가장 폭넓은 의미를 가진 행복의 총체를 말한다. 이제까지 변함없는 사랑과 동정을 그들애게 베풀어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제 그것을 거두어가실 것이다. 본절에 쓰이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세 단어인 '평강'(*, 솰롬), '인자'(*, 헤세드), '긍휼'(*, 라하임)에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이것들이 전부 몰수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남은 것은 재앙뿐이다. 이 같은 저주와 최종적인 재앙은 모두 언약 파기의 결과이다. 에스겔은 그의 아내의 사망에서 이와 비젼되는 파멸 상황을 보았다(겔 24:15-27).

성 경: [렘16:6]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본절에는 장례 의식과 관련되는 여러 항목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이교도 의식과의 연관성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것도 있다(레 19:27,28;21:5;신 14:1). 특히 '자기 몸을 베거나'라는 표현은 유다 내에 만연해 있었던 이교적 관습에 대한 언급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습은 슬픔의 표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달래주는 의식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Clarke).

성 경: [렘16:7]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본절에 언급된 바 '떡을 떼고 위로의 잔을 마시운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대략 두가지로 해석된다. (1) 죽은 자의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이 부정하게 여겨졌으므로 초상집에 모인 고인의 친척들을 위해 이웃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해 왔던 것을 가리킨다(삼하 3:35;겔 24:17;호 9:4). (2) 죽은 자와 관련되는 애도가들의 금식이 끝났을 때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을 가리킨다(신 26:14;겔24:17;호9:4).

성 경: [렘16:8]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주); 잔치집에 들어가서 마시지 말라 - '잔치집'을 대연회장이나 선술집을 가리키는 용어일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아무튼 이것은 앞의 상가와는 대조적인 위치에 있다(Bright). 클라크(Clarke)는 이를 장례 후의 연회로서 죽은 자를 달래고 생존한 친척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류의 연회는 전세계에 걸쳐 널리 알려져 있는 보편적인 것이긴 하다. 그러나 다음 절에 언급되어 있는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라는 내용을 고려하건대 결혼 축하연 따위의 흥겨운 잔치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나을 것이다(7:34;25:10;33:11 참조).

성 경: [렘16:9]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세 가지 행위의 상징-재앙 선포]

짧은 주제들로 연결되어 있는 2-8절의 내용이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고 있다. 민족적 파멸에 대한 신탁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사사로운 결혼 금지 명령에 대한 메아리로서 모든 결혼식이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임을 언급한다.

성 경: [렘16:10]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이 모든 큰 재앙을 광포하심은 어찜이며 - 이 백성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하나님께 전혀 악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처럼 자기들에게 그토록 심한 분노를 벌하느냐고 항의하려 든다는 암시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미 교정의 차원을 넘어서 있었으므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알려주심으로서 그들의 입을 아예 막아버리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Calvin).

성 경: [렘16:11]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그들을 섬기며 - 하나님은 이미 출애굽 당시부터 조상들의 죄악을 그들 후손에게 내리실 것이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출 20:5;34:7;신 5:9).그러나 그들이 선하고 바르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조상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상에게서 나쁜 본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가 죄인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들의 쓸데없는 핑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악행을 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 바른 길로 가야 마땅했던 것이며, 이에 대해 하나님은 율법을 받았음에도 율법에 반한 행동을 한 그들에게는 이방인보다 더 큰 심판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렘16:12]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 그들이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면 조상들의 죄악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의 전철을 답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더 큰 죄악을 저질러왔다(Clarke).

성 경: [렘16:13]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 유다인들은 참되신 하나님보다 그들이 발견하고 만들어 낸 우상들을 더 좋아했으므로, 그들돠 그들의 조상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땅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마음껏 더럽고 타락한 예배를 드리도록 허용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과 참된 종교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런 결과만 야기될 뿐이다. 더구나 그들은 유다 땅에서와 같은 자유로운 상태에서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 가운데서 우상 숭배를 하게 될것임을 말한다. 참자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으며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 사악한 우상을 섬기는 것은 노예 상태와 속박을 자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Calvin).

성 경: [렘16:14,15]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이 두 구절은 23:7, 8과 거의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이 구절들이 유다 백성에게 닥칠 심판에 관한 서술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갔던 곳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땅과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로기의 저작이거나 아니면 좀 후대의 어느 편집자의 삽입구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포로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포로기에 기록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좀은 명백하다. 하나님은 약 한 세기 전에 이미 포로로 끌려갔던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유다 또한멸망과 포로 생활로 이어지는 쓰디쓴 좌절을 겪고난 다음에 다시금 귀환케 될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것이다.

(주);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 갈대아로부터 해방시키실 여호와의 크신 권능과 주권을 시사한다. 그곳으로부터의 구원은 애굽 땅에서 그들의 조상들을 구원했던 것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Clarke).

성 경: [렘16:16]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본절에 어급되는 어부와 포수(捕手)의 비유는 대적들에 의해 당하게 될 여러 참상들을 적절하게 밝혀준다. 여기서 어부는 유다인들을 그물에 잡듯이 하여 포로로 잡아갈 대적들을 비유하며(암 4:2;합 1:15 참조), 사냥꾼은 폐허화된 성읍들을 떠나 산속이나 계곡에 피신한 이들까지 찾아내어 살육하거나 잡아가는 대적들을 비유한 말이다(4:29;삿6:2;삼상13:6 참조, Delitzsch).

성 경: [렘16:17]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은폐되지 못함이라 - 숨거나 피난하려고 하는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눈이 그들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악한 행위나 죄악도 여호와로부터는 숨겨질 수 없다(Thompson).

성 경: [렘16:18]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난 갚을 것은 - '배나'(*, 미쉐네)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유다에게 임할 징벌이 그들의 악행보다 배나 더 심하다는 뜻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Peake). 그러나 히브리적 용례상 이는 '충분한', '완전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사 40:2 참조 Harrison, Wiseman).

(주);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 유다 백성은 그들의 우상과 가증스러운 것들로 여호와의 땅을 더럽히고 오염시켰다. 여기서 '미운 물건의 시체'란 우상 숭배에 사용된 짐승의 시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생명없는 우상들 자테를 똑같은 것으로 보셨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레 26:30 참조,Feinberg). 한편 본절의 '내 땅'과 '내 산업'이라는 두 표현은 가나안이 궁극적으로여호와의 땅이요, 여호와의 산업이라는 믿음을 반영한다(출 15:17;수22:19;시 79:1).이 땅에 우상과 가증스러운 것들이 존재함으로 해서 여호와의 주권은 모욕을 당하게되었으며 이는 곧 언약 파기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럽히며'에 해당하는 '할랄'(*)이라는 동사는 '성전', '안식일', '내 거룩한 이름','내 집', '언약', '제단' 등과 같은 명사와 빈번하게 함께 쓰였는데, 그 어떤 경우든지 여호와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시체와 같이 부정한 것이나 언약 밖의 사람들, 그리고 우상이나 그밖에 여호와의 특별한 거룩하심에 바쳐지지 않은 것은 모두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의미를 지녔다.

성 경: [렘16:19]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열방이 땅 끝에서 - 심지어는 이방인들조차도 그들의 신앙에 수치심을 느끼고 그들의 우상을 내버릴 날이,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을 믿었으며 헛된 것에 경배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부르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둠 속의 빛인것이다. 이런 음침하고 우울한 심판의 문맥 속에서도 온 세계가 완전히 회복되어서 빛과 같이 밝아지는 때가 있으리라는 은혜스러운 약속이 담겨 있다(Clarke).

성 경: [렘16:20]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인생이 어찌 신 아닌 것을 - 19절에 이어 본절 또한 메시야 시대의 비전을 암시한다. 그때에는 회심한 모든 자들이 우상 숭배의 헛됨을 분명히 자각하게 될 것이다(Feinberg).

성 경: [렘16:21]

주제1: [심판의 전조(前兆)와 궁극적 회복]

주제2: [재앙의 원인과 목적]

(주);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 이번에는 여호어가께서 직접 열방들을 가르치는 과업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가 가르치실 내용은 그의 '손'(*, 야드)과 그의 '능력'(*, 게부라)이다.

(주); 내 이름이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 '이름'에는 그 사람의 특성이 내포되어 있는데 여호와란 이 이름에는 압제받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의 속성이 내포되어 있다(출 3:13-17 참조). 출애굽 사건은 이 같은 여호와의 능력이 발휘되었던 사건이었다. 언젠가는 열방들이 여호와란 이름 속에 포함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을 행하시는 주이심을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Thompson). 한편, 클라크(Clarke)는 이 구절을 유다 백성에게 주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확정하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 경: [렘17:1]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주);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 본문을 통해 우리는 비문을 새겨 넣는 과정을 엿볼수 있다. 이런 도구로 새기는 대상물은 대개 바위였는데, 요기서는 유다의 죄악을 새겨 넣을 매개물이 그들의 마음 판인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들의 죄악은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본서 후반부에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이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변화(31:31-34)가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박멸될 수가 없었다(Thompson).

성 경: [렘17:2]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정형 동사(finite verb)가 없는 관계로, 본절은 해석하기 어렵다. 대략 다음 다음두 가지 정도로 해석이 갈린다. (1) 사람들이 그 자식들을 간절히 생각하듯이, 그들의 우상 제단들을 생각한다(NASB). (2) 유다의 자녀들이 그 부모들에 의해 우상 숭배에 너무 물들어 있어서, 조그마한 부추김에도 쉽사리 그러한 욕구가 발동된다. 문맥상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이해된다(Feinberg). 아세라들이란 아세라 우상을 새긴 목상(木像)들을 가리킨다. 아세라는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 특히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한 여신(女神)으로서 '아낫'(Anath), '아스다롯'(Ashtaroth)과 더불어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였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일찍부터 등장한 우상이다(신 16:21).따라서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우상 숭배에 대한 암시가 나타난다 하겠다.

성 경: [렘17:3]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주); 들에 있는 나의 산아 - 여기서 예레미야는 유다 땅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데, 거기는 산이 많은 지역이었다(신 3:25). 그리고 예루살렘이 부분적으로 언덕 위에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다 땅의 대표격으로서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17:4]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유다 백성이 유업으로 받은 땅을 상실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 백성은 여호와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함으로써 여호와의 분노를 격발시켰던 것이다. '손을 떼다'는뜻으로 번역된 '솨마트'(*)를 '안식년'을 의미하는 '솨바트'(*)의 어근으로 보고, 본절이 시사하는 바 안식년 규례를 지키지 않는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지나친 해석이다(Feinberg).

성 경: [렘17:5]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본절에는 사람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히브리어가 세 개 등장한다.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맨 처음 '사람'으로 번역된 '아담'(*)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뜻하며, '혈육'으로 번역된 '바사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대조되는 인생의 연약성과, 결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사람'에 해당하는 '게베르'(*)는 '강한 자', '용사'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성 경: [렘17:6]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주); 사막의 떨기나무 - 가지만 앙상한 작은 관목이나 두송(杜松)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나무는 메마르고 무익함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 언급되고 있다(Clarke).

성 경: [렘17:7,8]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앞의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축복받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여호와를 언약의 주로 인정하며, 그에게 복종한다. 내용상 시 1:3과 다소 유사한데 거기서는 복있는 사람이 물가에 심기워 과실을 맺는 나무에 비유되었으며, 여기에는 보다 더 능동적이고 동적인 차원에서 언급되어 있다.

성 경: [렘17:9]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마음'이란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위의 원천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모든 것보다 거짓되다고 묘사되어 있다. 본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더 더럽고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이다.

성 경: [렘17:10]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주);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이 마음을 하나님은 꿰뚫어 보시며 그것을 살피신다. 한글 개역 성경은 9절의 '레브'(*)라는 히브리어를 '마음'으로 번역하였고 본절의 '켈레요트'(*)를 '심장'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둘을 서로 바꾸어 번역해도 무방하겠다. '마음'으로 번역된 '레브'는 앞으로 살펴보았듯이 생각과 의지의 중심으로 그리고 본절의 '켈레요트'는 다소 감정적인 요소의 중심으로 대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두 낱말은 공히 인간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내는 내면적 요소들을 총망라할 때 쓰였다. 인간에게는 숨겨진 것이라 하더라도 여호와께는 숨겨진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17:11]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심판의 필연성과 대비된 두 가지 길]

여기서는 불의로 재물을 축적하는 자가 자기 알이 아닌 것을 품는 새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비유의 핵심은 불의하게 모은 재물은 그만큼 쉽게 허비되며 상실되어지고 만다는 데에 있다(잠 23:5 참조). 더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모으는 데에만 혈안이 된 자는 이미 영적, 도덕적 파산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겠다.

성 경: [렘17:12]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주); 영화로우신 보좌 - 이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 혹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불의로써 치부로 재물이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보좌는 영원하므로 참된 의지처가 된다.

성 경: [렘17:13]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본절에는 이스라엘의 소망(*, 미크웨 이스라엘)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단어가 쓰이고 있다(14:8;50:7 참조), 이스라엘은 위기의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그들의 희망의 근거로서 여호와께 의지하여야 했다. 따라서 여호와를 배신하는 자들은 스스로 그 희망의 근거를 무너뜨리며 또 언약을 거부하는 셈이 되었다(Thompson).

(주);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 여호와를 버리는 자는 결코 참된 영예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먼지 중에 기록될 것이며, 바람이 불기만 하면, 그 이름은 몽땅 날려가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Clarke). 이는 그 이름이 영원히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 대조된다(빌 4:3).

성 경: [렘17:14]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선포된 메시지는 동족들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어서, 때때로 그는 심각한 위기와 고통에 처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했다(15:18). 오직 여호와만이 자신을 구해내시며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본절에서는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치유와 구원에 관한 예레미야의 갈망은 대적들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서 흔들리고 허물어져 가고 있는 자신의 영적 질병에 대한 치유까지 포함하고 있다 할 것이다.

성 경: [렘17:15]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 여기서 예레미야는 예언 성취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대라고 조소하는 자들의 말을 인용한다(Thompson). 이는 또한 '여호와의 위협과 공갈이 성취된 것이 어디 있느뇨? 너는 이 성과 성전이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증거가 전혀 없다'라는 조롱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된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하고 말았으며, 그 모든 심판 선언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Clarke).

성 경: [렘17:16]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동족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맡은 바 사명을 내어버리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이런 맥락에서 클라크(Clarke)는 계속 이렇게 지적한다 : '예언을 신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앙이 속히 닥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나는 오히려 재판을 잠시 연기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당신의 진리를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선지자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주께서 명령했으므로, 나는 순종했을 뿐입니다.' 한편 '목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를 '라'(*)로 보고 '악', '재앙'의 뜻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RSV, NEB, JB). 그러나 이는 맛소라 본문상의 히브리어에 모음 변화를 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더 나을 것이다(KJV, ASV, NASB, NIV).

성 경: [렘17:17]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주);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 예레미야는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두려움이 되지 마시고 그의 '피난처'(*, 마하세)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피난처란 말과 이 말의 동사인 '피난하다'(*, 하사)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강렬한 신뢰와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로 쓰였다(시 16:1;사 14:32;30:2 등 참조). 그리고 하나님이 무죄한 자를 변호할 것이라는 믿음은 애도의 시에서 종종 나타난다(시 17장 참조,Thompson, Harrison).

성 경: [렘17:18]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예레미야의 탄원]

(주);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 적에 대한 보복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이 같은 형식의 애가는 시편의 애가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한다(20:12;시 17:13, 14 참조). 예레미야는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지자적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백일 하에 진실이 드러나게 될 때까지 대적들의 박해를 멈추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 때가 되면, 그가 믿음으로 선포해 왔던 메시지가 단순히 그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을 분명히 입증될 것이다(Harrison).

성 경: [렘17:19]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 - 안식일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레미야가 서서 외쳤던 '평민의 문'이 어디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맛소라 사본은 이곳을 '백성들의 아들들의 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런 명칭의 문이 다른 곳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고 또 어딘지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베냐민의 문에 대한 필경사의 오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Nicholson, RSV). 이곳을 베냐민 문으로 주장하는 견해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문서상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브라이트(Bright)도 이를 부인하고 있으며, 베냐민문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안일한 독법이라고 지적하였다. 아무튼 이 문은 예루살렘 성벽 북쪽에 있었던 것 같으며, 베냐민 영토로 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붙어 있는 '유다왕들의 출입하는 '이란 수식 어구에서 '유다 왕들'은 왕과 그를 보좌하였던 방백들을 포함하는 말인 듯하다.

성 경: [렘17:20]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어떤 특정 계층을 지목하지 않고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된,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만약 이곳의 내용을 하나 하나 특정인을 향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각 계층을 찾아다니면서 말씀을 선포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자들은 최고위층에서부터 최하위층에까지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다 여호와의 언약 규정 조항에 포함되어 있었다(Thompson).

성 경: [렘17:21]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안식일에 짐을 지고 들어오지 말며 - 이 구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절들을 보면, 유다인의 멸망의 근원중에 하나가 안식일 규례의 파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일은 결국 희생 제사와 공적 예배에 대한 무성의와 태만으로 이어졌을 것이며 온갖 부도덕한 행위를 촉발하고 말았을 것이다(Clarke). 한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은 이미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었던 명령이다(출 20:8-11;신5:12-15).

성 경: [렘17:22]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 십계명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던 안식일율법 규례에 대한 표현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안식일에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은 출 20:9, 10과 신 5:13, 14에서 볼 수 있으며, 또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출 20:8, 11과 신 5:12에서 보인다.

성 경: [렘17:23]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그들은 목을 곧게 하여 -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뿐만 아니라 현 세대의 유다 민족 역시 여호와의 교훈을 듣지 않고 순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완악성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깊이 뿌리 박힌 고질적 병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성 경: [렘17:24]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 여기서는 언약 준수를 통한 축복이 '너희가 만일 청종하면'이라는 조건절로 도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조건절은 '너희가 삼가 하면'이라는 강조형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두 가지 조건의 내용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면'이란 조건과 '안식일을 거룩히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이다. 얼핏보면, 예레미야는 이 민족의 생존이 안식일 율법에 대한 문자적 준수 여부에 조건적으로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런 맥락에서 본문에는 포로 후기 유다 종교가 강조하였던 안식일 문제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느 13:15-22 참조) 그러나 이 문맥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선지자에 못지 않게 고대부터의 언약 전승과 밀접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마음에 새겨질 새 언약에 대해 말했을 때도 그는 여호와의 '법'을 생각하고 있었다(31:33). 현 문맥에서는 다만, 십계명의 한 계명을 강조하였을 뿐이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너희가 진실로(삼가) 언약을 준수하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7:23-26;11:6-8 참조). 그러므로 이것은 언약 요구 사항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식일과 같은 언약 요구 사항들 중의 하나를 도전적이고 공개적으로 파기하는 행위는 언약 전체를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렘17:25]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여기서는 조건절(24절)에 대한 귀결절이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다의 주권이 회복될 것이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들이 또한 회복될 것이며, 성전의 의식들이 회복될 것이다. 이러한 회복은 여호와께서 순종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언약의 축복 사항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신 28:1-14 참조).

성 경: [렘17:26]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여호와로부터 주어지는 축복의 또 다른 양상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이 백성이 온 땅에서, 즉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지역과 서쪽으로 평지, 그리고 산악지대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앞절과 결부에서 보면, 다윗 왕가와 성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거명되었는데, 이 세 가지 요소는 언약 백성의 종교적, 정치적 존립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언약의 주께 충성을 다하고 언약의 요구 사항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성 경: [렘17:27]

주제1: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

주제2: [안식일을 거룩히 하라]

(주);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 여기서는 앞의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반드시 언약의 저주 조항이 발동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저주는 궁전을 사르게 될 끌 수 없는 불로 상징되었다(49:27;암1:3-2:1). 본절에는 이렇게 될 경우 왕좌나 성전, 그리고 성(城)도 다 태워져 없어질 것이라는 암시도 들어 있다 하겠다.

성 경: [렘18: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 이 설교는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 그 어느때, 아마 그의 첫 통치 삼 년 이내의 어느 때에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Clarke).

성 경: [렘18: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토기 파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에서 판단하건대, 토기는 많은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기들은 디자인이나 형태 면에서 시대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유적지에 대한 연대를 추측케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기 또한 이를 통해서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토기를 소재로 사용한 비유는 19장에도 기록되어 있다(Nicholson). 한편, 이 예화는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다루심을 보여준다. 인생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Clarke).

성 경: [렘18: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 여기서 '녹로로'란 말을 직역하면, '돌 두 개를 가지고'가 된다. 이것은 수직으로 된 굴대 위에 두 개의 돌로 된 바퀴가 놓여 있는 장치를 말한다. 밑의 바퀴를 발로 돌리면 위의 바퀴도 돌아가는데, 이때 토기장이는 이 윗바퀴에서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리 토기장이의 바퀴는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Bright, Clarke).

성 경: [렘18:4]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 본절과 7절 이하의 보다 특정적인 적용 내용에서 유추하건대, 그 당시 바퀴 위에 있던 그 특정한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토기장이가 만들고자 의도하였던 그릇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진흙의 질이 좋지 않아 그가 만들고자 하는 그 그릇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흙은 토기장이의 원래의 의도를 좌절시켜 버리고 말았으며,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는 지기 목적에 저항하는 이 진흙을 그에 맞게 처리하실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진흙에 대한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능력이 초점으로 부각되며(사 64:8;룸 9:19-24), 아울러 자신이 원했던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인내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사항이다(Feinberg, Harrison).

성 경: [렘18: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본절 이하에서는 앞의 상징적 내용에 대한 해설이 상세히 설명된다.

성 경: [렘18:6]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 여호와는 인간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절대 주권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존귀하고 부유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기도 하시고 반대로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도 한다(시 113:7). 따라서 장래사에 관한 한 아무도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다(Calvin).

성 경: [렘18: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민족적,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언급하는데, 이는 1:10에 표현된 사상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 구절은 용어면에서도 1:10의 내용과 유사하다.

성 경: [렘18:8]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그 악에서 돌이키면 뜻을 돌이키겠고 - 한글 개역 성경에 똑같이 '돌이키다'로 번역된 원어는 각각, '슈브'(*)와 '나함'(*)이다. 본문에서 전자는 인간의 회개를, 후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돌이킴심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악'으로 번역된 말과 '재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일하게 '라' (*)이다.

성 경: [렘18:9]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한 국가의 흥망 성쇠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자동적으로 축복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사 시대로부터 유다왕국의 멸망 때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빠졌을 때 하나님은 질병, 사망, 기근 등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셨으며(삿2:11-15;3:7,8;6:11;왕상16:7;왕하24:9-20 등 참조),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유다는 패망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성 경: [렘18:1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주); 이제 - '아타'(*)란 표현은 어떤 변론의 결말 부분을 도입할 때 종종 쓰였던 말이다(신4:1등). 문맥상 본절은 1-10절에서 진행되어 왔던 내용의 논리적 귀결점이 되고 있다.

(주); 재앙을 내리며 선하게 하라 - 유다 백성은 거듭되는 회개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그 완악한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당할일만 남겨 놓고 있었다. 그들의 패역한 생활은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을 요청하는 그런 것이었다. 오직 근본적인 변화만이 그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나, 그러한 변화에의 기대는 어렵게 되었다.

성 경: [렘18:1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토기장이 비유]

그들은 패역의 길을 너무도 멀리 걸어가 버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토기장이에게 소용도 없는 거칠고 뻣뻣한 진흙과 같은 것이 되어 더이상 토기장이가 의도했던 고귀한 형태로 빚어질수가 없었다. 오직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알맞는 진흙으로 다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온갖 악한 행위와 계속 되어온 언약 파기가 어떤 결말로 인도되고 있는가 하는 슬픈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성 경: [렘18:1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 '처녀 이스라엘'이란 말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신부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이 그에 합당하게 순결해야 된다는 의미를 암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남편 맞을 준비를 하는 처녀와 같이 영적 순결을 지켰어야 했지만, 이방 종교 관습에 빠져 자기 몸을 더럽히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사 다른 어떤 민족보다 사랑스런 존재로 여기고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원하셨으나(호2:16참조),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배도의 길로 가버렸다. 이스라엘의 외도행각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고 열방중에서도 볼 수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는2:10-13의 내용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성 경: [렘18:14]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 여기에는 유다 민족의 신이 없는 행실이 자연의 불변성과 대조를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Bright). 한편, 아담 클라크(AdamClarke)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하기도 한다:' 레바논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로 농작하던 땅을 버리고 메마른 돌짝 밭을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은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레바논을 버리고 박토를 택하였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몰두해 있는 것이다.' 이는 '떠나겠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자브(*)의 주어를 지나치게 의식한 듯한 인상을 주는 해석이나, 이 동사는 '버리다', '거절하다' 등의 뜻 외에도 '떨어지다', '늦추다' 등의 의미도 지닌다. 그러므로 본절은 자연의 불변성을 들어 이스라엘의 변덕스러움과 대조시키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겠다(Feinberg).

성 경: [렘18:1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여기서는 배도의 내용이 자세히 설명된다. 여호와의 백성은 이미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말았으며 허무한 것에 분향하였다. 이 '허무한 것'(*, 솨웨)이란 어떤 우상을 가리키며 아마 바알을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결과로서, 또는 이런 짓을 하는 도중에 우상과 더불어 그들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옛길이란 6:16에서 '선한 길'로도 표현되었는데, 여호와를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축복의 길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따랐어야 할 길은 우상에게 분향하는 길이 아니라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고 그의 언약에 순종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이방인들조차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쉽게 여호와를 거역하고 배신하였다(2:10, 11).

성 경: [렘18:16]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머리를 흔들리라 - 이곳에는 배도의 결과를 중에 하나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민족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땅이 황폐화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암 4:6-10 등). 이런 재앙으로 그 땅은 영영한 치소가 되고 말 것이다. '치소'(*, 쉐레카)란 '휘파람이나 휘유하고 내뱉는 소리'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 땅이 너무나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하여서 지나가는 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긴 한숨을 내뱉게 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19:8, Thompson). 한편 클라크(Clarke)는 이를 조소와 멸시의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성 경: [렘18:1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간결하지만 대단히 힘있는 어투로 언약을 유기한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이 선언되고 있다. 동풍이라고 하는 것은 동쪽 광야 또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열풍(4:11;13:24 참조)을 말하는데, 여호와의 심판이 바로 이 열풍에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동쪽 바벨론의 침략을 상징적으로 동풍이라 표현하였다고도 볼수 있겠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바벨론의 침략이 임박했으며 또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서 다 흩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은 구속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렘18:18]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본절은 백성들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완악한 자세가 한결같아서 개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6:13;23:9-40). 백성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하였다. 더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짓되고 참람한 언행을 하지 못하도록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이곳에 지적되어 있는 세계층, 즉 제사장과 지혜로운 자, 그리고 선지자에 대해서 무자비하고 신랄한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음모를 선동하고 일을 꾸몄던 자들이 바로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추측된다. 그들의 이와같은 자기 만족적 응답이나, 눈이 감겨버린 의식의 마비,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려드는 모습(마 15:14)은 12절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지도자나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현 처지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계속 그대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지도자들이나 오도된 길을 가고 있는백성들의 의식을 뒤집어 놓으려는 시도는 오직 심각한 반발만을 초래할 뿐이었다. 진리에 대한 비진리의 핍박 양상은 왜곡되고 부패한 사회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가 진리 족에 확고히 보장되어 있음을 맏는 자는 이러한 핍박을 오히려 기쁨으로 수용할 수 있다(마 5:10-12).

성 경: [렘18:19]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들어보옵소서 - 예레미야의 반응은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돌보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순되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 공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반응이다(시 5:3;10:17;17:1;55:2;61:1;66:19;86:6;142:6 참조), 그런데 앞 구절의 해석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70인역(LXX)은 18절의 끝 구문을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의 번역과 70인역의 번역은 본문의 의미 전달에는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만약 70인역의 번역을 따를 경우,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란 다름 아니라 그의 말을 책잡기 위함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러한 상황을 여호와께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성 경: [렘18:20]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 예레미야의 딜레마가 대단히 깊은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동족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내려는 뜨거운 열정, 바로 그것 때문에 핍박을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악으로써 선을 갚는 잔인 무도한 행태는 시35:12;109:5 등에서도 폭로된 바 있다.

(주);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 자기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 우리는 이 내용과 17:16에서 보여준 선지자의 항의를 함께 상고해보는 것이 좋겠다(Nicholson).

성 경: [렘18:2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이 구절의 저주 조항은 예레미야의 악의에 찬 저주라기보다는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한 선지자적 선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Clarke).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저주를 보고서 대단히 충격을 받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다른 말들과 대단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 어떤 이들은 이것이 전적으로 다른 저자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보복에 대한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은 본서 내내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것을 그의 어록에서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Thompson). 기근과 전쟁의 칼에서의 죽음, 남편과의 사별 등 계속적인 공포는 모두 적의 침략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었다. 예레미야는 북방으로부터 닥쳐올 적에 대해 종종 언급하여 왔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북방의 작은 점차 더 분명한 윤곽을 띠게 되었다.

성 경: [렘18:2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 파멸에 대한 전체 양상 중에 그 일부를 구성하는 내용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 이제 살육당하는 곳이 전쟁터(21절)가 아니라 집이다. 집 속에 피신한 자들조차 침략군에 의해 색출, 처형당하는 살벌한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같은 재앙 역시 단순한 선지자 자신의 사사로운 보복이 아니라 예레미야 자신이 여호와의 메시지와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핍박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언약 요구 사항을 무시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선지자를 조롱하며 핍박하였던 적들의 태도는 여호와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던 셈이다.

성 경: [렘18:2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주제2: [심판의 선포와 백성의 반응]

(주);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아시오니 -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15:15 참조). 여기서 '알다'(*, 야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지식적인 앎보다 뜻을 전달한다. 자신에 대한 여호와의 지식이 대단히 깊은 것이며, 그래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경험을 꿰뚫어 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에서 예레미야는 소망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한편 11:20;12:1-4; 15:14-18 등에는 예레미야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던 반면에, 이곳과 17:14-18에는 구체적인 응답이 주어지지 않고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종의 모든 말에 일일이 다 대답해주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살펴보면, 때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던 반면에(11:21-23), 때로는 책망의 말씀을 주셨다(12:5, 6;15:19).

성 경: [렘19:1]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 '오지병'이란 목이 좁고 오짓물을 발라서 구어 만든 것으로서 윤이 나는 병이다. 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박부크'(*)는 목이 좁은 오지병에서 물이 쏟아져 나올 때 들리는 소리에 착안한 말인 듯하다. 한편, 일단 구어진 오지병은 부분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토기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게 구어진 것은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의 병이 고고학 발굴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종류에 따라 높이가 약 10-25cm 정도되었다.

(주); 백성의 어른들 - 백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급 장로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증인으로 동반되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탄압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런 막강한 위치에 있던 자들을 설득시켜 자기와 동행하게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마 그들은 예레미야에게서 어떤 책잡을 만한 것을 찾고자 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성 경: [렘19:2]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 예레미야의 행동화된 예언이 진행되는 무대에 관한 언급이다. 고대 예루살렘의 하시드 문이란 곳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이름은 그 일대의 토기장이들의 작업장이 있는 데서 연유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문 근처에다 깨어진 토기들을 내버렸을 것이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 아래에 가파른 지역에 있었으며,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렇다면 하시드 문 역시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10, 11절에 묘사되어 있는 상징적 행위를 연출하는 데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탈굼역(Targum)은 이 하시드 문을 본문(느2:13;3:13, 14)과 동일시하였다. 만약 이하시드 문이 이미 잘 알려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면, 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말은 부가적으로 쓰여진 것임에 분명하다. 어떤 주석가들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말을 편집 과정상 추가된 설명 어구라고 보기도 하나 히브리 저자들은 이처럼 부가적으로 덧붙이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였다.

성 경: [렘19:3]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 여기서부터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시작되고 있다. 그 대상은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다. 이 설교는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고하는 공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청중은 예레미가 데리고 간 어른들과 제사장들 뿐이었다(1절).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이고 그 실제적인 청중은 작은 그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민족 전체를 두고 설교하였던 것이 보통이었다. 복수로 언급된 '유다 왕들'이란 표현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유다 통치자들을 전체적으로 보고 연설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살아생전에 모두 네 명의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았다. 현문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칭의 보다 완전한 형태들 중의 하나인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다가올 재앙으로 인해서 귀가 진동할 것임을 지적하였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했던 표현이다(삼상 3:11;왕하 21:12).

성 경: [렘19:4]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이 곳을 불결케 하며 - 이 문구는 '이곳을 이방인의 땅으로 만들었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방 신들을 예배함으로써 그곳을 이방인 문화와 종교가 놓인 그런곳으로 변질시켜 놓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땅이 이제 이스라엘 땅인지 이방 땅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J.Bright). 한편 클라크(Clarke)는 '이곳'을 성전으로 보고 여호와의 성전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설명한다.

성 경: [렘19:5]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바알을 위하여 불살라 드렸나니 - 이 백성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것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과의 절대적 언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겔 8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묘사되고 있는데, B.C. 597년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갈 당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형태의 이방 종교의 종교 의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의 중요한 내용인 인간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제사는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특히 베니게(폐니키아)와 가나안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악한 풍습은 이스라엘에서는처음부터 금지되었지만(창 22:1-19 참조), 아하스(왕하 16:3)나 므낫세(왕하 21:6) 당시에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왕하 23:10에는 요시야 당시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행해졌던 인신 제사가 철폐되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악습이 여호야김 시대에 되살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여호와를 정면에서 모욕하는 행위였다. 자기들의 연약의 주를 거부한 방자한 행위에 대한 결과는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Thompson).

성 경: [렘19:6]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이 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 3-9절의 내용이 오지병을 깨뜨리는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으나, 이는 극적인 문맥 전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리라 본다. 예레미야를 따라갔던 몇몇 청중들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오지병이 분명히 어떤 상징적인 행위 예언의 일부일 것으로 예측하면서 과연 그 오지병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궁금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이 백성과 이 성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이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10, 11절 참조). 한편, 이곳의 '도벳'이란 말은 '불의 장소', '불이 타오르는 곳'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인 '테파트'나 '타파'란 말에서 유래되었던 것 같다.또한 이 '도벳'의 자음을 변경시키면, '치욕', '수치'란 뜻의 '보셋'(*, 보쉐트)이란 말이 된다. 아무튼 그 어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사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이는 힌놈 골짜기에 있었던 이교 사당을 지칭하는 듯 하며, 이곳이 살육의 처소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에서 임박한 심판의 처절함이 시사되기에 족하다.

성 경: [렘19:7]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謀計)를 무효케 하며 - 여호와의 분노는 여기서 더욱 상세히 설명된다. '모계'로 번역된 원어 '에차'(*)는 '계획', '방책'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노력하며 애쓰는 모든 계획과 자구책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다 무너뜨리실 것이다. 또한 '무효케하다'로 번역된 원어 '바카크'(*)는 '비우다', '실패하다', '공허하게 하다'는 뜻으로서 용기나 오지병의 뜻으로 번역된 '박부크'란 명사와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는 동사이다(Thompson).

(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 적들의 칼에 죽임당한 그들의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여 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동일한 장면이 7:33;16:4;34:20 등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모두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신28:26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어떤 이들은 이런 점을 들어 이 장이 신명기 학파 어느 편집자의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자신이 신명기의 내용에 익숙하였음을 반영하는 구절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성 경: [렘19:8]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이 성으로 놀람과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 '놀람'에 해당하는 '솽마'(*)는 '멸망', '경악'이란 뜻으로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모욕거리'에 해당하는 '쉐레카'(*)는 깜짝 놀라거나 경멸의 뜻을 나타낼 때 내는 소리에서 유래한 말이다(Feinberg).

성 경: [렘19:9]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하고 - 참혹한 저주의 결과가 계속 묘사된다.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은 자기 자식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며,서로 잡아 먹게 될 것이다(레26:29;신28:53;겔5:10 참조). 인육(人肉)을 먹게 되는 장면은 북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 때(왕하 6:24 이하)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 때(애 2:20;4:10), 그리고 A.D. 70년 로마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입증되었다.

성 경: [렘19:10]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 이제 오지병을 깨뜨릴 적절한 때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의 내용을 앞의 구절들과 독립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아리를 깨뜨려서 어떤 질병을 쫓는다거나 또는 어떤 조약을 어긴 자들에 대한 저주를 불러온다거나 하였던 앗수르인, 헷인, 아람인들의 주술적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주술적 의미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이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신탁의 말씀과 똑같은 상징적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볼 수있겠다. 예레미야에게는 선포된 말씀과 상징화된 행위가 같이 수반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성 경: [렘19:11]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 항아리를 깨뜨린 이 사건은 여기서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비록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이들은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서 예레미야의 말과 행동을 널리 퍼뜨려 문제시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며, 그에게 적절한 처벌을 가할수도 있었다. 아무튼,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백성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것은 또한 토기장이가 용기가 깨뜨리는 이야기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쓸모없다고 인정된 병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는데, 이것이 한번 깨어지고 나면 그것을 다시 붙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예레미야가 다른 곳에서 심판이후의 희망에 대해 언급한 바있긴 하지만(24:4-7;31:31-33;32:13-15) 그의 행위는 가장 참혹한 용어로 전달된 심판선고였다.

(주); 그들을 매장할 도벳에 장사하리라 - 이 문구는 그 뜻이 명확하지 않다. 어떤 번역 성경은, 다른 곳에는 그들의 시체를 묻을 여지가 없기 때문에 도벳에 장사할 것이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Men because there will be no place else to bury,RSV). 그러나 '자리가 없도록'에 해당하는 '메엔 마콤'(*)이란 말은 '그곳에 남는 여지가 없을 때까지(도벳이 장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렇게해석할 경우 도벳이 남아도는 시체를 받아들이는 장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공동 묘지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곳이 완전히 차버리면, 다른 묻히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이 매장되지 못하게 되어 썩은 고기를 먹는 야생 새들과 짐승들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7:33 참조, Clarke, Nicholson).

성 경: [렘19:12]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이 성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 이 곳을 살육과 파멸의 장소로 만들겠다는 뜻이다(Clarke). 이 성에 시체가 가득하다는 것은 성이 부정케 되었음을 암시한다(레 21:1이하;민 5:2 등). 그러나 이 성이 부정하게 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절에 언급되고 있다시피 이교도의 우상 숭배가 이곳에서 자행되었다는 데 있었다.

성 경: [렘19:13]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더러워졌은즉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여기서 동사로 번역되어 있는 '더러워졌은즉'이 명사로 기록되어 '더럽혀진 곳'이란 의미이다(J.Brigh). 한편 '하늘의 만상'이라고 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천체 신들을 가리키는데, 그중에서 아스다롯(아쉬타르)이 특히 유명하였다(7:16-20). 그리고 유다인들은 이 신들에게 번제를 바쳤으며 술을 부어 전제로 바쳤다. 라스 솽라 토판(RasShamea Tablets)에는 지붕에서 천체 신들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언급되어 있다. 예레미야 뿐만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스바냐도 이런 관행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습1:5). 한편, 구약에는 시체와 접촉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더러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와 같은 관념이 이들 이교도 제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있었다.즉 요시야는 벧엘에 있는 산당과 이교도 제단들을 더럽히고 모욕하기 위해 무덤에서 뼈들을 끄집어내는 그 위에 흩은 바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들에게도 이러한 관념이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성 경: [렘19:14]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 본절에서부터 전기체 기사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다. 예레미야는 도벳에서 성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전 뜰로 나아갔다. 본절에서부터 20:6까지는 1-13의 단락과는 대조적으로 3인칭 화법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중 후반부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전 뜰의 청중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제사장들과 백성의 어른들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의 내용을 압축했다 뿐이지 동일한 사항이었다.

성 경: [렘19:15]

주제1: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주제2: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한 유다의 파멸]

(주); 이 성과 그 모든 촌락 -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은 이를 '이 도시와 그 모든 성읍들'(*, 하이르 칼 아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좀 특이한 표현으로서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다의 성읍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표현은 '우세비보테하'(*)로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들'이라는 뜻이다(Feinberg). 한편, '목을 곧게 한다'는 표현은 말은 잘 듣지 않고 멍에메기를 거부하는 황소로부터 취한 은유이다. 이 백성은 율법대로 사는 삶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스스로의 정욕과 충동이 이끄는 대로 좇아갔던 것이다(Clarke).

성 경: [렘20:1]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핍박자들에 대한 파멸 예언]

(주);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라 - '유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키드'(*)는 '감독관'이라는 뜻으로서 성전내의 질서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에 '열방의 감시자'로 임명되었다(1:10).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전의 '감독'이 하나님의 '감독'을 방해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Bright). 한편, 본서에는 바스훌이라 이름한 관리가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그하나는 이곳에 언급된 바스훌로서 38:1에 언급되고 있는 그다랴의 아비인 바스훌과 동일 인물인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사람은 21:1과 38:1에 언급되고 있는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그 사람이다. 이 이름의 기원은 애굽에 있었던 듯하다(Nichoson). 본절의 바스훌은 성전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것을 그의 임무 중 하나로 맡고있었음에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서기 바룩을 보내 두루마리를 읽게 했던 것 같다(36:5).

성 경: [렘20:2]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핍박자들에 대한 파멸 예언]

(주);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 맛소라 사본은 '바스훌리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게 했다'라고 사역형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70인역(LXX)은 그가 직접 때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주); 베냐민의 윗문 - 37:13과 38:7에는 베냐민문이란 명칭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곳의 베냐민 윗문과 혼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Nicholson).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이 문은 성전 경내에 이르는 문들중의 하나였던 것이 분명하며 요담이 지은 바 있는 '여호와 전의 윗문'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왕하 15 :35;겔 9:2). 이 이름에서 우리는 이 문이 성전 북쪽 편에 있었을 것이며 베냐민 땅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성 경: [렘20:3]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핍박자들에 대한 파멸 예언]

(주); 네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 바스훌이 다음 날 아침 예레미야를 놓아주자 예레미야는 그에게 '마골밋사빕'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주었다. 이것은 '사방의 두려움'이란 뜻으로 6:25에는 북쪽의 무자비한 적을 가리키는 데 쓰였던 말이었다. 이말은 10절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46:5;49:29;시 31:13;애 2:22 등에서도 쓰였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이 '마골밋사빕'이란 이름은 바스훌이란 이름의 뜻과 언어 유희(wordplay)의 관계에 있었던 같다. 아무튼 이 새로운 이름이 명명된 것은 이 이름에 걸맞는 처지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스훌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는 감독의 위치에 있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두려움이 그와 이 민족을 사로잡게 될 때 크고 두려운 심판에 처하게 될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0:4]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핍박자들에 대한 파멸 예언]

(주);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칼로 죽이리라 - 여기서 예레미야는 바스훌에게 붙여준 이 새 이름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여호와께서는 바스훌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그의 친구들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그 메시지를 거부하는 일에 앞장 섰던 바스훌과 같은 인물 때문에 유다가 참경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의 이새 이름은 결국 그에게 내리는 저주가 되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져서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온 유다에 임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와서는 북방의 적이 더 이상 모호한 존재로 명시되지 않고 바벨론 왕과 그 군대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렘20:5]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핍박자들에 대한 파멸 예언]

(주); 이성의 모든 부와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붙이리니 - 이 예언은 B.C. 597년 이전에 주어졌던 것이다. 본절에는 적들에게 빼앗기게 될 여러 종류의 전리품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네 가지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 말들에 이어 세 가지 동사가 쓰이면서 철저한 약탈의 의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그것은 '붙이다, 탈취하다, 가져가다' 등이다. 이러한 말들로 보아 재앙의 참혹한 상황에는 사정 봐주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것이란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성 경: [렘20:6]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핍박자들에 대한 파멸 예언]

(주);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 바스훌 개인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내용은 그와 그의 가족이 바벨론으로 이주되어서 그곳에서 죽을 것이고 거짓 예언을 전달하면서 사귀어 왔던 친구들과 함께 거기서 묻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B.C.597년에 그가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성취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B.C. 597년 이후에는 마아세의 아들 스바냐가 그의 직책을 떠맡은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29:24, 26, 29). 바스훌은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민족에 아무런 재앙에 해도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선지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14:13).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으며 죽어 마땅한 죄악을 범한 짓이었다(26,28장 참조). 또한 본절에는 '거짓'이란 명사가 쓰이는데, 이 말의 원어는 '쉐케르'(*)이다. 예레미야는 이말을 매우 많이 사용하였던 바(6:13;7:4;8:8;9:3;13:25 등) 이 말을 통해 예레미야는중요한 뜻을 전달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즉 유다의 지도자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사장들 또 지혜있는 자들과 왕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거짓 예언이라는 깊은 오류에 빠져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0:7]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이기셨으므로 - 여기서 '권유하다'에 해당하는 '파타'(*)는 '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출 22:16에는 이 단어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신성 모독적인 어감을 피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설득하다', '부추기다' 등으로 약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속이다', '꾀다'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신성모독적 감정을 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소명 당시부터 그 소명을 감당하기 두려워했으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그 일에 전념하였으나(1:4-10) 점점 심각해오는 핍박의 양상을 맞아 다만 깊은 갈등에 사로잡혀 역설적 항변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Feinberg). 이는 그가 15:18에서 여호와를 가리켜 속이는 시내라고 말한 사실과 일맥 상통한다.

성 경: [렘20:8]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치욕과 모욕거리가 - 예레미야가 줄곧 외쳐왔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심판 선언이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Brigh). 한편 전반절의 '외치다'(*, 자아크)란 동사와 '부르짖다'(*, 카라)란 동사는 공격적이고 큰소리로 선언한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약을 위반했다고 하는 비난과 예루살렘의 멸망 선포는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거센 반발과 핍박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성 경: [렘20:9]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예레미야는 더 거세어져가는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불과 같아서 속에다 담아둘 수가 없었다. '답답하여'의 히브리어 '라아(*)는 '기진하다'의 뜻으로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고백하였다.

성 경: [렘20:10]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 이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저기 마골밋사빕이 지나간다'라고 수근거리며 비난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 '마골밋사빕(사방의 두려움)'이란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바스훌에게 붙여준 이름이었지만, 이제 예레미야의 별명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당했던 고뇌는 친한 벗들처럼 예레미야의 반대 편에 서서 그가 잘못된 길로 가기글 바랐던 데서 한층 심화되었다. 그들은'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그때가서 그를 때려 잡자'라고 수군거렸다. 여기서 '유혹을 받아'라고 하는 동시에 7절 상반절에 언급된 '권유하다'란 말과 같은 히브리어(*,파타)이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미혹된 길에 빠져 반역죄로 몰아 붙일 수 있는망언을 내뱉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Feinberg). 이처럼 선지자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단절감과 소외로 말미암는 이런 고독은 예레미야에게 참으로 처량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성 경: [렘20:11]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 선지자의 절망과 낙심에 대한 묘사의 한가운데 이르러서 다소 문맥의 흐름과는 벗어난 듯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즉 여호와로부터 받은 소명조차도 회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여호와를 찬양하는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회의와 갈등 속에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의 신앙의 최종적인 영역에 도달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다시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두려운 용사와 같고 또 자기와 함께하신다'라고 하는 고백은 시 24:8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박해자들이 강한 것 같아도 자기를 쓰러뜨릴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위기의 순간을 맞았을 때 예레미야는 1:18,19의 여호와의 약속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전의 위기 상황에서도 이 약속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힘을 얻은 적이 있다(15:20).

성 경: [렘20:12]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 이 구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11:20이 반복된 내용이다. 여기서 '폐부와 심장'이라고 하는 말은 '은밀하게 감추어져있는 생각'을 뜻한다. '폐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켈라요트'(*)는 감정이나 감추어진 동기 등이 들어있는 장소로, 그리고 '심장'(*,레브)은 생각과 의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각각 간주되었다. 한편 사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브'(*)는 법정 용어로서 논쟁, 소송, 변론 등을 의미한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은 그를 치려고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수집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10절;18:18). 그러나 재판이 열리면 여호와께서 그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이다.

성 경: [렘20:13]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 본절은 예레미야의 깊은 내적 고백이라는 문맥상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고 또 본 단락의 분위기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에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후대에 삽입된 찬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의 애가들도 종종 본문과 같은 신앙과 믿음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결론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시 6:8,9). 더군다나 본절의 용어는 예레미야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행악자의 손에서'란 표현은 15:21과 21:12 그리고 23:14 등에서도 나타나며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다'란 표현은 이곳과 23:14에등장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표현은 본서 외에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 않고있다. 한편, '가난한 자'(*, 에비욘)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빈곤에 처한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특히 신앙이 돈독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는 세상적으로 가난한 경건자일 수밖에 없을것이다. 박해자의 위협을 받는 시련의 때에 한 사람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결코 재산이나 부가 아니라 영적 힘인 것이다.

성 경: [렘20:14]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 여기서 예레미야의 갈등과 고뇌가 극한에 치닫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낳아준 것에 대해 탄식한 때도 있었다(15:10). 그러나 그는 거기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이나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범법 행위였다(레 20:9;24:10-16). 본절에서 선지자는 비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저주와 원망은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은 사실과 그가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1:5). 한편, 소망과 믿음의 고백(11-13절)에 이어 곧바로 이처럼 침울하고 절망적인 탄식이 토로되는 것에대해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구문의 위치 변경이 가해졌다고 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본절 이하가 바스훌의 말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견해들은 지나친 추측에 근거하였을 뿐이다. 우리는 당시 예레미야가 직면했던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고려할 때, 이처럼 갑작스런 심리 상태의 전환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Myers).

성 경: [렘20:15]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 예레미야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하지 않고(부모를 저주하는 이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인 출 21:17 참조) 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해 준 그 사람에게 저주를 돌리고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네가 생남하였다"라고 알려주었는데, 여기서 '아들'에 해당하는 '벤'(*)은 때때로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다만 '아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본절에서는 아들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카르'(*), 즉 '남자 아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스라엘 남자에게 있어서 아들이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가통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딸들도 유산 상속에 참여하긴 했지만(민 27:8), 그래도 가문의 머리는 남자였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아버자가 아들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였을것이 당연하다.

성 경: [렘20:16]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 이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뒤집어 엎으신 성읍'들로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평원에 있던 다른 성읍들을 가리키는 말이다(Brigh, Thompson, 23:14;창19:24-28;사1:9 참조). 예레미야는 극에 달한 낙심과 고뇌 가운데 자신의 출생 소식을 전한 자에게 소돔과 고모라에게 임했던 저주와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는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사람에게 실제로 저주를 퍼붓고 싶어한다는 식의 문자적 해석을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극도의 곤경에 처하여 차라리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렬한 어조의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 경: [렘20:17]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 이런 표현들은 특정 대상에 대해 실제적으로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분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포자기적 고통을 나타내기 위한 다분히 문학적 기교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절망이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러웠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렘20:18]

주제1: [핍박 속에서의 기도]

주제2: [연약한 인간의 신앙적 고투(苦鬪)]

(주); 어찌하여 내가 태어서 나와서 - 이 구절은 예레미야의 고뇌의 시의 결론에 이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였던 자로서 어찌 이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심각한 탄식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이런 비탄의 부르짖음과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해 아무런 용담도 주시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당신의 약속과 뜻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회복하기를 침묵함으로써 기다리고자 하셨을 것이다.

성 경: [렘21:1,2]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본문에서 시드기야는 B.C. 588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당황하여 예레미야를 부르고 있다. 그는 본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반바벨론파의 듯세로 인하여 애굽, 암몬, 두로, 모압, 시돈 등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반란을 꾀하였다(겔 17:15).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다급해지자 그는 자신이 투옥시켰던(32:2) 예레미야에게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등장하고 있는데, 20:1-6에 언급된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는 동명 이인이다. 이곳의 바스훌은 더욱더 악랄하게 예레미야를 반대했었으며 훗날에 가서는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처형하려고도 하였었다(38:1-13). 그 뒤에 등장하는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스바냐는 본장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에게 왔지만 훗날에도 예레미야를 찾아오게 된다.(37:3). 그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9:25-27에서 예레미야를 징책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는 유사(有司)로 언급되고 있다.

(주); 여호와께 간구하라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 여기서 '간구하라'(*,다라쉬)고 하는 말은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찾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다양한 문맥에 산재해서 나타난다(창25:22;출18:15;신4:29;삼상9:9;사31:1;호10:12 등). 시드기야는 그때로부터 약 1세기 전, 즉 B.C.701년 예루살렘이 산헤립과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 당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왕하19:35 ,36;사 37:36,37). 그때 여호와께서는 기사를 행하사 산헤립을 물러가게 했었다. 현 상황 역시 그때와 대단히 비슷한 상황으로서 어떤 기적이 없이는 도저히 극복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갈대아인들과 느부갓네살(히브리어 음역은 '네부카드레차르'<*>이며, 아카드어로는 나부-카두리-우추르임)이란 이름은 보다 완전한 형태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장에서만도 수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 이름이 '네부카드네차르'(*)로 쓰였다(27:6,8;28:3,11;29:1,3등). 그는 B.C. 605년에서 562년 사이에 바벨론을 통치했으며, 나보폴라살(B.C. 625-605년)의 아들이며 후계자였다.

성 경: [렘21:3,4]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했으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응답은 약간의 희망마저도완전히 꺾어버리는 그러한 것이었다. 약한 병기를 가지고 강력한 갈대아 군대와 맞서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나마 있는 그 병기도 되돌려 버리실 것이고 침략자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이제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함락을 들이키기 위한 하나님께로부터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범죄한 유다를 징벌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유다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에 대한 원문의 해석은 다소 분명하지 않다. 이는 성 밖에서 갈대아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유다의 방위 군대가 침략자들과 더 이상 맞붙어 싸울 힘이없어 다시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성안으로 불러 모아 갈대아 군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함락 당시의 상황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성 경: [렘21:5]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든 손과 강한 팔 곧 대노로 -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갈대아인들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든 손과 강한 팔'(*, 베야드 네투야 우비즈로아 하자카)이란 표현은 32:21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형용사의 순서가 바뀐 형태로 나타나 있다. 구약에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을 치르실 때 주로 쓰였다(주로 모세 오경에서).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하나님이 유다에 대하여 성전(聖戰)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이른바 신명기와같은 고대 전통의 계승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등장하는 이런 어구를 자주 사용하였을 것이다.

성 경: [렘21:6]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큰 염병에 죽으리라 - 성경에는 '염병'(*, 데베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지만, 그 증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대체로 흑사병(pest), 티푸스(typhus), 콜레라(cholera), 천연두(smallpox) 등이 성경에서 염병으로 지칭된 질병들로 짐작된다. 이 염병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던 병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이 병에 걸리면 거의 죽음을 면치 못했기때문이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결과 염병의형벌의 네 차례나 받았으며(민11:33;14:37;16:46;25:9)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불순종에따른 하나님의 징벌로서 임할 염병에 대해 수차례 예언하고 있다(14:12;24:10;겔7:15;12:16).

성 경: [렘21:7]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시드기야의 그 신하들과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 염병에서 살아남고 또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왕들과 신하들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신하'에 해당하는 '에베드'(*)는 원래 '종', '노예', '하인'을 뜻하나 여기서는 유다왕 시드기야를 보좌했던 근신(近臣)들을 말한다. 왕하25장을 참조하면 이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 역사적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할수 있다.

성 경: [렘21:8]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 여기에서 일반 백성 전체에게 주어지는 간략한 서술이 언급되어 있다. 내용상 이것은 38:2,3과 유사하다. 아마 예레미야는 같은 내용의 충고를 수차례 걸쳐 반복했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었다. 이런 표현은 지혜 문학과 그밖의 다른 문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신 30:15-20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가 표현되어 있는데, 그 선택의 주제는 언약에 대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하는 것이다. 한편 본서는 산문과 운문으로 번갈아가며 표현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산문체이다. 어떤 학자들은 운문만이 예레미야 작품이고 산문체 서술들은 후기 신명기학파 저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곤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산문체를 예레미야의 작품이 아닌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 경: [렘21:9]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여기서 예레미야는 백성들은 향하여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그러나 적에게 항복하라는 이 같은 조언은 그의 정치적 동기를 의심하게끔 만들었고, 감상적 이미지를 띤 정치 지도자들에게 핍박의 명분을 제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반역자로 여겨지기도 했었다(28장). 그러나 B.C. 586년 이 민족이 멸망했을 때 그는 이곳에 남아 민족의 갱생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결코 개인적 이익을 탐하는 그런 매국노가 아니었던 것이다.

성 경: [렘21:10]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 예레미야가 주장하는 원리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불의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이 민족을 버리셨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항복할 것을 권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의 갱생을 위하여 오히려 전일보하는 선택임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성 경: [렘21:11]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 - '유다 왕의 집'이란 유다 왕가(王家)를 가리키며, 그 왕가의 기원을 연 다윗을 대조적으로 상기시키는 말이다(12절 참조). 그들의 선조 다윗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공의롭게 통치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이스라엘을 번영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열 왕국 시대의 대다수 왕들은 다윗과는 달리 불순종과 배도의 길을 멸망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성 경: [렘21:12]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 여기서는 왕의 근본적인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서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공의'(*, 미쉬파트)를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마다'(*, 랍보케르)란 표현은 낮의 더위를 피해 아침 시간에 성문에서 열리던 소송 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인 것 같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왕들의 주요 임우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정의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이란 정의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으며, 솔로몬은 하나님께 다른 그 무엇보다도 선과 악을 분별할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왕상 3:9).

성 경: [렘21:13]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 공동번역은 '계곡을 굽어보는 예루살렘아, 벌판에 우뚝 솟은 바위야'라고 번역하여 요새로서의 예루살렘의 지형적 이점을 시각적으로 잘드러내었다. 유다 백성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예루살렘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다분히 조소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의 자만을 꼬집고 있다. 한편 본절의 '너희'는 2인칭 단수 여성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도시나 성들은 흔히 그곳 주민들의 '어미'로 표현되었으며 그 주변의 마을들은 '딸들'로 불리었다(왕하 19:21;사 37:22).

성 경: [렘21:14]

주제1: [시드기야의 요구와 예레미야의 거절]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70인역(LXX)에는 본절의 첫 행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 이 부분을 포함시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앞 구절과는 달리 여기서 '너희'는 2인칭 남성 복수로 표현되고 잇는데, 이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수풀'(*, 야아르)이란 명사에 대해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이 왕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근거로서 왕상7:2에 있는 '레바논 나무로 궁(레바논 수풀 궁)을 지었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아마 이 궁을 건축하는 데는 엄청난 백향목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예루살렘 혹은 유다의 온 땅을 암시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수풀을 불에 사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이다(사 9:18;10:18, D.R. Jones).

성 경: [렘22:1]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주);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 이 단락의 말씀 역시 시드기야 때에 작성되어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트'(*)는 '궁전'을 뜻한다.

성 경: [렘22:2]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주);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 여호와의 말씀은 왕뿐만 아니라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도 전달된다. '네 신하와 네 백성'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네 종들과 네 백성'이다. 그러나 이곳의 '종'이란 말은 왕의 신하들이나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Bright).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매일같이 궁궐문을 드나들었다고 함은 국사나 재판 등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21:12 참조). 한편, 클라크(Clarke)는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반역을 도모하도록 부추겼음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성 경: [렘22:3]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주);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이며'공평'은 '체다카'(*)인데, 이들은 대단히 중요한 용어로서 때로는 구약에서함께 연결되어 쓰이곤 한다. 이 두 용어는 모두 언약의 율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미쉬파트'는 사사나왕들이 시행하여야 할 언약 율법과 규례와 관련하여 주로 쓰였고, '체다카'는 여호와의 규범과 표준에 맞추어 바르게 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왕과 모든 백성은 항상 모든 사실을 다 고려한 후 정의롭고 공평하개 행동할 것이 항상 요구되었다. 특히 왕이 하여야 하는 주요한 임무는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의를 세우고 타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이었다(Thompson).

(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며 - 이들 세 계층에 대한 보호는 언약 규정 조항의 일부였었다(출 22:21-26;23:9;레 19:33. 34;신 10:18, 19;24:17). 왕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시내 언약 요구 사항을 충족 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윗 언약(삼하7장)은 이런 관점에서 모세 언약과 그 근본적인 취지 면에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Thompson).

(주);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 이 지적은 재판상의 불공정이나 권력의 남용에 따른 무죄한 피흘림뿐만 아니라 도벳에서의 인신 제사와 관련된 극악한 관행도 가리키는 것 같다(7:31;19:3-15).

성 경: [렘22:4]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 예레미야는 이제 왕가의 존속 여부가 어디에 달렸는지를 지적한다. 그것은 왕들의 여호와 율법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번영과 왕조의 존속을 의미한다.

성 경: [렘22:5]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주);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이 집이 황무하리라 -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거부했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에 기초를 둔 백성이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는 번영이 있을 수 없었다.

성 경: [렘22:6]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 본절과 다음 절은 시어체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후 산문체 단락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여기 언급된 '길르앗'과 '레바논'은 숲이 울창한 것으로 유명했다. 왕의 궁전은 이들 지역에서 나온 목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레바논 숲의 집'이라고 불리었다 한다(왕상 7:2;사 22:8 참조). 그러나 그토록 웅대하고 위엄어린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한, 여호와는 그곳을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레바논은 가장 기름지고 생산량이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들은 왕가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Clarke).

성 경: [렘22:7]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본절에서 바벨론 군대는 벌목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시 74편은 바벨론 사람들이 도끼와 철퇴 등을 가지고 성전을 파괴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준비하리니'의 히브리어 '카다쉬'(*)는 '성결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을 지니는바,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구별하심을 나타낸다.

성 경: [렘22:8,9]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악한 왕들에 대한 경고]

이 두 구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체결할 당시 주셨던 경고의 말씀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신 29:24-26). 여기서 특별히 주의를 끄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한 결과 파멸에 이르자 도리어 이방인들의 지적과 조롱을 당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할 성도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가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지탄과 경멸을 당하게될 뿐이다.

성 경: [렘22:10]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여기서 단수로 표현되어 있는 죽은 자란 요시야를 가리킨다(Delitzsch). 요시야는b.c. 609년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9,30). 그리고 잡혀간 자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말한다. 그는 요시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애굽의 바로느고에 폐위되고 석달 후 애굽으로 잡혀갔다(왕하23:31-35). 살룸(11절)은 그의 개인적 이름이었으며 그의 왕명은 여호아하스였다. 대상 3:15에 따르면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의 네 번째 아들이었고 그의 부친 사후 '국민'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대하 36:1). 여기에는 아마 백성들의 반애굽 성향과 같은 정치적 동인(動因)이 배후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성 경: [렘22:11,12]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예레미야는 다른 그 어떤 왕보다 더욱 더 가혹하게 여호아하스를 단죄한다. 성경상의 기록으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대하 36:1-4 참조) 여호아하스는 3개월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선왕(先王) 요시야와는 정반대의 패역한 정치를 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첫 번째 유다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Feinberg).

성 경: [렘22:13]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주);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 - 유다 역대 왕들의 범죄와 그 결과를 논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여호아하스에 이어 여호야김의 패역상에로 초점을 모은다. 그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여호야김에 의해 건축된 화려한 건물들이었다. 그는 21:12과 3절에서 지적되었던 '체데크'(*, 공평)와 '미쉬파트'(*, 정의)에다 부정의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불변사 '로'(*)를 첨가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 점을 강조한다. NEB는 이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와 '부정한 수단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RSV는 '불의로'와 '부정으로'라고 번역한다. 아마 여호야김은 백성들의 무임 노동을 통하여 이 일을 완수하였을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예루살렘과 그 밖의 다른 곳에다 자신을 위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던 바가 있는데. 이것은 언약의 율법을 위반하는 중대한 범죄들 중의 하나였다(레 19:13;신24:14,15;왕상5:13,14;12:3,4). 왕의 의무는 바로 이 율법을 지키고 보전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스스로 그것을 위반하는 죄를 지었던 것이다. 한편, 여호야김의 건축에 대해서 언급하면, 최근에 라맛라헬(Ramat Rahel) B.C. 7세기 말경으로 보이는 세련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며 또 어쩌면 그것이 여호야김의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제5단계의 발굴은 B.C.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세련된 석조 건물로 만들어진 외벽과 대문 그리고 내부의 거대한 건물이 있는 이스라엘 후대의 성이 서 있었다. 인간이 찍힌항아리 손잡이 등의 귀중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어떤 것은 두 개의 날개가 달린 왕의 인장과 '왕의 소유 헤브론'이란 글씨를 담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발굴자는 그의 보고서에서 13-19절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여호야김은 왕위에 올랐을 때 겨우 25세밖에 되지 않았고 또 36세에 죽었던 바(왕하 23:36) 엄청나게 타락하고 자기 도취에 빠졌던 젊은 독재자였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2:14]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주); 창을 만들고 - '만들고'의 히브리어 '카라'(*)는 일반적으로 '쪼개다'나 '찢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4:30에서는 '넓히다'나 '확장하다'란 뜻으로 쓰였다(한글 개역 성경은 눈을 크게 하기 위해 '그리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창을 넓히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성 경: [렘22:15,16]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여기서 여호야김은 그의 아비 요시야와 대조되고 있다. 여호야김은 자신의 왕적 권위를 근사한 궁궐을 지음으로써 과시하고자 했다. 반대로 요시야는 왕으로서 지녀야할 진정한 가치 기준과 수행해야 할 책무를 바로 깨달았다. 그는 압제나 허장 성세라고 하는 불의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공평과 정의를 먹고 마시는 음식처럼 소중히 여겼으므로(요 4:34 참조) 고통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설 줄 알았다. 요시야의 이러한 공평과 정의의 정치 철학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하고 진솔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가능했음은 물론이다(Feinberg).

성 경: [렘22:17]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여기에는 여호야김의 악행이 통렬하게 지적된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이기적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으며(왕하24:3,4), 또 독재와 강탈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3절 참조). 한편 무죄한 피를 흘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재판상의 부당한 판결을 통해 무죄한 자로 극형에 처해지게 넘겨준다는 의미(Hyatt). (2) 무죄한 자를 살해한다는 의미.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26:20-23에 언급된 바 선지자 우리야의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성 경: [렘22:18]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여기서는 이 불경건한 통치자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이 선고되고 있다. 그것은 '슬프다'란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화로다'(*, 호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히브리어 본문상으로는 네 번 등장한다. 그에게는 장례식장에 따르기 마련인 조의의 표시나 애곡마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참한 최후가 예고되고 있다(왕상13:30 참조, Bright)

성 경: [렘22:19]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주);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 이 구절 끝 부분에는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약간의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다. 36:30에는 여호야김의 시체가 낮의 뙤약볕에 그리고 밤의 서리에 노출되어 내던져진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으나, 왕하 24:6에는 '여호야김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의 장례가 정상적으로 치르어졌음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열조와 함께 잔다'는 말은 죽음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는 여호야김의 최후에 관한 정확한 언급이 나오지 않으므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곤란하나, 본무에 나타난 예언의 성취를 믿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겠다. (1) 갈대아 연합군의 칩입 당시(왕하 24:2), 여호야김은 전사당하여 급히 매장되었으나 침략군들에 의해 그 시신이 훼손되었으리라는 견해. (2) 궁정에 반란이 일어나 바벨론 정책으로 돌아선 여호야김이 살해되고, 그 시신이 갈대아 연합군에게 내던져졌다는 견해(Cundall). (3) 갈대아 연합군이 침략할 즈음에는 이미 여호야김이 죽어 매장된 뒤였으나, 침략군들이나 일부 유다인들에 의해 그 무덤이 파헤쳐졌으리라는 견해(Hyatt).

성 경: [렘22:20]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대화의 상대방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파국을 멀리 선포하고 슬퍼할 것을 명령받는다. 레바논은 유다의 북쪽 국경, 바산은 북동쪽 국경, 그리고 아바림은 남동쪽 국경으로서, 이들 지역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맥에 위치하여 유다 땅 전부를 관망할 수 잇는 높은 곳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란 패배한 유다의 정치적 동맹국들을 말한다(호 8:9 참조). 아마 이 애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27장에 언급된 반바벨론 반역을 기도하였던 서쪽의 여러 세력들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B.C.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한후 이들을 다 진압하였다(46:2-12).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스글론이 진압되었으며(47:2-7) 이어서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느부갓네살의 속국이 되었다(왕하 24:1, 2참조)

성 경: [렘22:21]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주); 네가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 예루살렘 파국의 원인은 이 백성이 처음부터 여호와께 순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2:31;3:24, 25:7;24-26;11:7-10 참조). 이제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하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였다(Thompson).

성 경: [렘22:22]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주);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 '목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실제로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B.C. 597년)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다(왕하 24:22-25:7). 그런 다음 예루살렘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또 그녀의 '악'으로 인하여 '욕'을 당할 것이다. '악'의 히브리어 '라아'(*)를 '재앙'으로 번역할 경우, 본절 하반절은 이렇게 번역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재앙으로 인하여 수치에 알맞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욕을 당할 것이다.'

성 경: [렘22:23]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아하스의 범죄]

(주);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 예루살렘의 궁전과 각종 건물들에는 엄청난 양의 백향목 재목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예루살렘 거민들이나 지도층 인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되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유다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도 문맥상 자연스럽다. 높은 가지 위에 깃들인 새처럼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였다(6, 7절;21:13 참조, D.R. Jones).

성 경: [렘22:24]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야긴의 범죄]

(주); 고나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할지라도 - '고니야'란 이름은 여호야긴에 대한 단축 명칭이다(52:31). 그의 또 다른 단축형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요고냐이다(24:1;27:20;28:4;29:2). 한편, '인장 반지'란 것은 어떤 문서에 자신의 서명을 표할때 쓰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징세용 곡식과 기름을 수집하는 데 쓰였던 토기항아리들에는 두 개의 날개로 상징되는 왕의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또한 '왕에게 속함'이란 말과 징세가 이루어진 도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Thompson). 유다의 왕들은 여호와의 인장 반지로 쓰이는 여호와의 공식적인 대변자들로 간주되었다. 동일한 비유가 요호야김의 손자인 스룹바벨에게도 적용되었다(학 2:23). 그러나 고나야는 여호와의 인장 반지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함으로 더 이상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존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렘22:25-27]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야긴의 범죄]

고니야와 그 모친인 느후스다가 함께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이다. 고니야가 왕으로 즉위할 때 불과 18세였으므로, 그모친인 느후스다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본문의 예언은 바벨론의 2차 침입으로 인해 그대로 성취되었다(왕하 24:8-16).

성 경: [렘22:28]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야긴의 범죄]

여기에는 버림받고 깨어진 그릇에 대한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서 언급된 깨어진 오지병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19:1-13). 백성들은 여고냐를 원했던 것 같으나(28:1-4 참조)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여고냐의 말로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예레미야는 본절에서 여고냐뿐만 아니라 그 자손까지 언급함으로써 다윗 왕가 자체에 대한 징벌을 암시하고자 했다(Feinberg).

성 경: [렘22:29,30]

주제1: [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

주제2: [여호야긴의 범죄]

세 차례에 걸쳐 '땅'을 호출함으로써 시작되는 본문은 징벌의 철저함과 엄숙성을 상기시킨다. 고니야가 무자할 것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그가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대상 3:17, 18). 그러나 여호야긴의 자손 중 다윗 왕위에 앉힐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 무자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겠다. 그의 손자 스룹바벨(대상 3:19)은 포로 후에 총독의 직책으로 귀환하였지만 왕은 아니었다.

성 경: [렘23:1]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목자에게(*, 르임) - 다른 곳에서도 이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유다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글 개역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원문상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왕을 포함하여 그의 주변에서 불의와패역의 길로 인도하는 조언이나 정책을 제시했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말이다(Birght). 한편 히브리어 본문에는 '화 있으리라'는 말이 문두에 놓여 있는데, 이 말은 왕을 비롯한 지도층의 죄악에 대한 단순한 단죄와 비난의 정도를 넘어서는 심판 선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유다의 마지막 네왕의 죄악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절의 목자들에는 이스라엘 양무리를 흩어지게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는 이들 왕들이 우선적으로 포함될 것이다.

성 경: [렘23:2]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 우리는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우두머리들이 범죄했을 때 그 악한 영향력이 백성들에게 미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귀족들의 범죄와 우상 숭배로 인하여 민족 전체가 파국을 맞게 되었으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것이다(Clarke).

(주);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 이 말의 히브리어는 '파카드'(*)인데, 본 어구에서 번역된 바와 같이 '돌보아주다', '보살피다'란 뜻이 제 일차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말이 언어 유희에 의해 본절 후반부에서 다시 한번 쓰이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보응하리라'고 번역하였다. 두 번째 의미는 '책임을 묻다', '처벌하다'란 뜻이다(Bright). 원래 목자의 임무는 양떼를 지키고 돌보는 것인데, 이들 이스라엘 자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히려 흩어지게 하고 몰아내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성 경: [렘23:3]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번성할 것이며 - 여기서는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으는 장면이 등장한다. 1절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양떼를 모으는 일을 하는 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천명하신다. 그 백성은 그릇된 목자들의 길을 좇음으로써 언약을 거부하였고 범민족적으로 반역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지만,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귀환의 은혜에 참여케 되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포로기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이 구절은 포로기의 신명기 사상을 가진 저자의 작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추방과 포로라고 하는 말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 단락이 포로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포로 이후의 결실과 번영에 대한 내용은 포로기에도 있었지만9겔 36장;슥 8:9-13) 포로기 이전에도 흔히 등장한다(호 2:21-23;암 9:11 등). 또한 이곳에는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24장;40-44장). 이 주제 역시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다(사 1:9;37:4;미4:7;7:18).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본 단락이 포로기 이후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무모성을 보여준다.

성 경: [렘23:4]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그들이 다시는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축이 나다'(*, 파카드)는말은 2절에서 언급되었던 히브리어 동사 '파카드'(돌아보다)에 대한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는 말로서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Bright). 양떼는 보살핌을 받고 일일이 계수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축이 나지 아니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회복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포로 이전과 동일한 상황으로 되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나 이는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여호와로부터 임명받은 목자들이 그들을 충실하게 돌보아줄 것이고 또 그 땅에서 공포와 두려움을 다 제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이후의 상황을 겨냥하지만 나아가 메시야 시대를 아울러 함축하고 있다.

성 경: [렘23:5]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이 구절은 다윗 혈통의 이상적인 왕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을 실현하게 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직접적인 언급으로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메시야에 관한 기사 중의 하나이다(Frost). 여기서 '의로운 가지'라고 하는 말은 훗날에 가서는 대망의 앙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정확한 어구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은 사 11:1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리고 '의로운 가지'(*, 체마흐 차디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음가는 현재 왕위에 있는 시드기야란 이름과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시드기야 통치 초기에 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Bright). 그리고 '때가 이르리니'란 말은 엄숙한 선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쓰였다(Feinberg).

성 경: [렘23:6]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구약과 후대 랍비 문헌에는 두 가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가르침과 메시야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5절에서는 메시야 개인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졌고 본절에서는 메시야 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사 11:1-5, 6-16 참조).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가 온갖 제한과 속박에서 해방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외부의 대적들이나 내적인 긴장이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그날에 이스라엘 모든 가족들도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남북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이 앞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주제는 30, 31장에서 더욱 자세히 언급된다. 한편, 본절 하반절에 언급된 이상적인 왕이 유다 역사에 등장한 일이 없기 때문에, 즉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기다리던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 바 없으므로, 이는 주 예수께 적용될 수 밖에 없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는 메시야이며, 정의의 심판을 행하는 의로운 왕이시다(Clarke).

성 경: [렘23:7]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본절과 그 다음절인 8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16:14, 15과 동일하다. 메시야와 그의 시대에 이루어질 일들을 묘사하는 문맥을 고려하건대, 본문의 내용은 단지 포로 귀환에만 국한시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성 경: [렘23:8]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의로운 왕의 출현과 유다의 회복]

(주);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방 땅 그 모든 쫓겨났던 거하리라 하시니라 - 여태까지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왔으나 이제는 새로운 출애굽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러나라에 흩어졌던 여호와의 백성은 이상적인 왕이 통치를 시작하게 되면, 포로된 상태로 그냥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북쪽 땅에서, 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사 내어 쫓았던 그 모든 땅에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신약 시대에만 백성이 죄의 올무로부터 벗어나 교회에 편입될 사실을 예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고국으로 남은 자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장면은 사 11장과 겔 34, 37장 등에서도 나타난다.

성 경: [렘23:9]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본절 이하에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하며 경고하고 있다. 백성들은 미혹시키는 이 악한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선지자들도 경계한 바 있지만(사28:7-13;겔13:1-16;미3:5-12) 특히 예레미야가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던 대상이다(2:8;5:30,31 ;6:13,14;8:10, 11;14:13-15;18:18-23;26:8, 11;27:1-16). 한편,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 간의 대치는 시드기야 시대에 가장 극심하였던 바, 이는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사항이기도 하다(Bright, Feinberg).

(주); 내 중심이 상하며 - 유다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고 여호와의 말씀은 조롱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으므로, 이런 사실이 그를 몹시도 괴롭혔음을 시사한다. 한편 브라이트(Bright)는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단순한 사색 차원이 아니라 극도의 혼란 속에서 어지러이 동요되고 있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렘23:10]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그곳이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가득찼음을 말한다(5:7, 8).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 숭배는 풍요의 결실을 가져오기는 커녕 오히려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저주로 인하여 땅은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슬퍼하며 불모지가 되어 버렸다. 이 땅에 좋은 결실을 허락하시는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뿐이신 것이다(호2:5-8;암4:4-9 참조). 여기서 광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바싹 마른 사막과 같은 지역이 아니라 스탸 지역의 사람이 살지 않는 초지(草地)정도를 뜻하고 있다.

성 경: [렘23:11]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 '내 집'은 성전을 가리키는데, 제사장들은 그곳에서 이방 종교 의식과 부도덕한 관행들을 시행하여 오염시켜 놓았던 것이다(왕하 21:3-7;23:4-7). B.C.622년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성전과 그 경내에서 이교의 종교 의식들을 뿌리 뽑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C. 609년 그가 전사하자 이러한 관행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시대에 다시 시행되었던 것이다. 겔 8장에는 그 당시 성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점이 잘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중심을 상하게 하고 그의 온 육체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성 경: [렘23:12]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 '미끄러운 곳'이란 미끄럼길을 뜻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은 파멸 상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인다(시 35:6;73:18).즉 앞에서 언급된 배도자들은 사악한 동기에 의해 스스로 이 길로 들어섰으며 이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성 경: [렘23:13]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그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 여기서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의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가 그들보다 더 악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볼 수 있겠다(Bright). 우매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티플라'(*)는 '범죄 행위', '위반되는 것'이란 뜻도 내포한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으며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거짓 선지자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자들이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민족이 언약의 주이신 여호와께 전폭적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알고 있다.

성 경: [렘23:14]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범죄 행위가 지적되고 있다. 그들이 북왕국의 거짓 선지자들보다 더 악한 이유는, 그들이 (1) 북왕국의 배도와 파멸의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돌이킬 생각조차하지 않았으며 (2)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도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또한 (3) 그들의 타락상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될 정도로 노골적이며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행동과 삶으로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의 악한 일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격려하였다.

성 경: [렘23:15]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쑥'(*, 라아나)이란 '저주하다'는 뜻을 추측되는, 잘 사용되지 않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맛이 쓴 식물이다. 이 말과 함께 독한 물이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종종 이 두 낱말이 짝을 이루며 쓰인다(9:15).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임할 처벌의 고통이 쓰라리고 치명적이 될 것임을 나타낸다.

성 경: [렘23:16]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 이들은 백성들에게 안전과 태평성대를 약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죄악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로 돌아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더 적극적으로 죄악에 가담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멸망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주);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것을 주된 본분으로 삼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나온 생각, 즉 스스로 유도해 낸 생각을 예언이라고 주장하였다는 말이다(Clarke).

성 경: [렘23:17]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들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였지, 악과 범법 행위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는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무슨짓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뒷바라지 해주고 지켜 주실것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공의와 거룩함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계셨으므로 비록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언약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을 경시하고 거역하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수 없었다.

성 경: [렘23:18]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 이 구절은 누구도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한 자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여호와의 회의를 알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는 욥 15:8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수사 의문문이 아니며 예레미야 자신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평화를 외치는 자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Bright, Nicholson). 그리고 '여호와의 회의'(*, 베모드 야훼)란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참된 종들과 깊은 교제를 통해 진리를 계시해주시는 것과 연관지어 이해되어야 하겠다(암 3:7, Feinberg).

성 경: [렘23:19]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 '회리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악취를 풍기는 사막의 열풍을 말하는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권능과 심판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종종 등장한다(시 58:9). 한편 본절과 다음절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30:23, 24의 내용과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후대에 삽입된 내용이라고 주장하나, 문맥상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선지자가 같은 내용을 다른 상황에 적용하여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섣부르게 삽입론을 펴서는 안 될 것이다.

성 경: [렘23:20]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여기서 우리는 잠시 예레미야가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큰 박해를 받았으며 또한 그의 메시지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상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같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또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내버린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Nicholson). 그러나 본절은 범죄에 따른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말일에(*, 베아하리트 하야밈)란 말은 직역하면 '종말의 때에'란 뜻으로서 메시야 시대에 관한 서술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단순히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Bright, Feinberg).

성 경: [렘23:21]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인 일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어낸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웠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감각이 없는 반면에 자신의 권위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아전 인수격으로 적용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성 경: [렘23:22]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참된 선지자의 표적들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세움받은 백성은 그에 합당하게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의 주된 사역은 그들이 죄악에 빠져있을 때 그것을 꿰뚫어 보고 그들을 하여금 죄악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23:23]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다 보고 계시다. 하나님은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재해 계시고 우리들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계시며, 새들을 먹이시고 식물에게 옷을 입히신다(Nicholson, Clarke).

성 경: [렘23:24]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 본절의 질문은 앞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는 수사 의문문의 형식으로서 그 대답은 부정문을 유도하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갔던 일이 있으나, 하나님은 지역 신이 아니신 고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들이 비록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전부 하나님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렘23:25]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몽사를 얻었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람'(*)은 '꿈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종종 꿈이나 환상을 통해 전달되었다(창 37,41장; 민 12:6;삼상28:6;단 2:7;욜 2:28;슥 1:7-6:8). 본절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받은 계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꿈꾼 사실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들의 편익을 취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일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이비(似而非)나 이단은 많은 부분에서 참종교와 외형적인 면에서 유사한 면을 보이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하고 그 말씀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가감한다는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성 경: [렘23:26]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 히브리 원문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구절이다. 혹자는 '언제까지'에 해당하는 '아드 마타'(*)를 '몽사를 얻었다'(25절)에 해당하는 '할라메티'(*)의 오기(誤記)로 보거나(Duhm), '이 마음을 품겠느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예쉬 벧레브'(*)의 '하'(*)를 27절 서두(히브리어 원문상의)의 '하'(*)에 연결시키거나(Rudolf) 혹은 '하예쉬 벧레브'를 '하야슈브 레브'(*)로 고쳐 읽기도 한다(Brockington).그러나 굳이 히브리어 원문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본절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게 이해된다. 즉 거짓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자기 예언의 근거와 기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조만간 그 거짓됨이 드러나고 만다는 말씀이다.

성 경: [렘23:27]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여기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끼치는 해악(害惡)이 우상 숭배로 말미암은 것과 다름바 없는 것으로 거론된다. 한편 내 이름이란 단순한 칭호 이상의 의미, 곧 하나님의 인격과 본성을 함축하는 말이다.

성 경: [렘23:28]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 하나님의 진리와 거짓 선지자들의 꿈은 본질적으로 서로 달라서 엄격히 분리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참된 메신저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 영의 양식이 되지만 , 거짓 선지자들의 말들은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도리어 해악만 끼칠 뿐이었다.한편, 성경에 언급되는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들로는 시드기야(왕상 22:11, 12), 하나냐(28:1-17), 스마야(29:30-32), 바스훌(20:6), 노아댜(느 6:14), 이세벨(계 2:20) 등을 들 수 있겠다.

성 경: [렘23:29]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본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된 불과 방망이는 공히 불법과 죄의 세력을 멸하는 파괴적인 힘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을 철저히 소각시키며(5:14참조), 인생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 그러므로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오직 철저한 파멸만이 기다릴뿐이다.

성 경: [렘23:30,31,32]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이 세절은 원문상 공히 '내가 에 대항하여 본다'(*, 힌네 알)는 말로 시작되며,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상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한 죄이다(30절). 그들은 참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마치 자신을 통해 계시된 것처럼 착복, 도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기에 편승하는 말을 교묘히 섞어 진리를 왜곡시켰다. 둘째는, 혀를 함부로 놀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이다(31절). 그들은 그들의 거짓 예언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거짓된 생각을 늘어놓았다. 셋째로는, 백성들을 미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한 죄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인기에만 편승하여 죄를 정확히 지적하거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결국 영적,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성 경: [렘23:33]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요 - '엄중한 말씀'에 해당하는 '마사'(*)는 '(짐을) 들어 올리다'는 뜻인 '나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말씀'(oracle, NIV) 혹은 '짐'(burden, KJV, RSV) 으로 번역된다.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빠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배도의 길로 걸어감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마치 무거운 짐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RSV는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대답인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를 '너희가 짐이니라'(You are burden)고 옮겼다(LXX, Vulgate). 그리고 본절의 '마사'는 이렇듯 패역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무서운 심판의 신탁을 베푸신 것으로도 이해된다. 이런 측면을 중시한 고대 역본으로는 탈굼역(Targum)과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을 들 수 있다. 결국 본절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경멸조로 비웃는 말이라 하겠다.

성 경: [렘23:34]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벌하리라 하셨다 - 본절 이하에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해서는 명확한 규명이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정도의 뜻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1) 여호와의 심판 메시지에 대해 조롱조로 하는 말, (2)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짐스러운 존재이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메세지를 짐스럽다고 말하는 것, (3) 특히 거짓 선지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서(37절 참조),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의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 그들의 예언을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도용한 것 등이다.

성 경: [렘23:35,36]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조롱조로 받지 말고, 겸허히 순종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라는 권면이 나타난다.

(주); 망령되이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파크'(*)는 '변질시키다', '왜곡시키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렘23:37]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 허탄하고 망령된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겸허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즉 그것은 인생이 악한 정욕과 탐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완고해지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렘23:38]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34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렘23:39]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본절의 '잊어버리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솨'(*)는 '잊어버리다', '제거하다'는 뜻이며 '엄중한 말씀'이라 번역된(38절) 히브리어 '마사'(*)의 어근'나사'(*)와 그 음역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언어 유희(word play)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한 대가로 그들은 징벌에 처해지고 마는 것이다 (D. R. Jones).

성 경: [렘23:40]

주제1: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승리]

주제2: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파멸가 수치가 임할 수밖에 없음을 확정하는 구절이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에 통해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왕하 25:8-12). 한편, 수치(*, 켈리마)는 치욕(*, 헤르파)과 거의 같은 뜻이나 어감이 더 강한 말이다(Parkhyrst).

성 경: [렘24:1]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1-3절에는 무화과의 환상이 나오고, 4절이하에는 이 환상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본문의 환상은 그 내용면에서 암 8:1-3의 '여름 실과 환상'과 유사하다.

(주);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 이 환상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기 전에 우선 역사적 연대를 나타내는 어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구문상 괄호로 묶어두어야 할 부분이며, 그 연대가 명확하게 지시되어 있다. 이 연대에 따르면 이 환상은 B.C.597년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여고냐는 다른 곳에서는 고니야라고도 불렀으며, 또한 왕명(王名)으로는 여호야긴으로 불렀다.

성 경: [렘24:2,3]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성전 앞에 놓여 있는 무화과 두 광주리 중 하나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들어있었다. 이 광주리들이 성전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를 성전 제단에 바쳐진 예물(Graf) 혹은 여호와께 드리는 수확의 맏물 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환상에 대한 묘사인 까닭에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이해함이 나을 듯하다(Delitzsch). 그렇다면 이 무화과들은 여호와께 나아오는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며, 좋은 무화과란 여호와께서 인정해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자들로서 여기서는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5절).

성 경: [렘24:4,5]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본문은 여호와께서 포로로 이미 붙잡혀 간 자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고자 하심을 보여주신다. 그들은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여호와의 자비를 구하며 회개할 것이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선한 존재들로 보신다는 것이다(Clarke). 물론 이들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주시는 분도 바로 여호와시다(7절). 이제 미래는 그들에게 있다. 한편B.C. 597년에 바벨론으로 옮겨진 자들은 이 나라의 지도층이었으며, 핵심되는 인사들이었다(왕하 24:14-17).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부하였으나, 막상 그 예언이성취되는 것을 경험하자 많은 이들이 뉘우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반면에 끝까지 유다땅에 남아 있던 자들은 예레미야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그는 이 기간 곧 B.C. 597-586년 사이에 심각한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Thompson).

성 경: [렘24:6]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세우고', '헐고', '심고', '뽑는다'는 동사들은 1:10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12:14-17;31:27, 28). 이들 동사들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적 주제의 메세지에 주로 등장하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에서는 그의 설교의 핵심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쓰였다(1:10). 물론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심판 선포에 할애되었으나 군데군데에 회복과 갱신의 메세지도 나타나고 있다.

성 경: [렘24:7]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주);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며, 그들은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본절 내용은 신 30:1 -10에 나타난 약속,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추방당할지라도 다시금 회개하면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언약을 갱신하실 것임을 암시한다(Clarke). 또한 그들은 '전심으로'(*, 베칼 레브) 그에게로 돌아올 것인데, 이러한 전인적인 돌이킴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누차 강조된 바이다(29:13;31:33;겔 36:26,27;37:13, 14, 27 28;슥 13:9 등).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심판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시작이 임하고 있음을 알리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포로 중에 있던 자들과 B.C. 586년 이후의 사람들은 이런 메세지에 굉장한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성 경: [렘24:8]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 '악하여 먹을 수 없는 무화과'는 이 땅에 남아 있거나 애굽에 거주하는 자들에 비유되고 있다. 우리는 백성들이 언제 애굽으로 도망쳤는지에 관한 충분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친애굽들은 여호아하스가 B.C. 609년 그곳으로 잡혀갔을 때 함께 건너가 그곳에 거주했을 수도 있을 것이며(왕하 23:34), 아니면 여호야김이 느부갓네살의 봉신이 되었을 때(B.C. 609년경) 또는 느부갓네살이 B.C. 597년에 유다를 침공했을 때 애굽으로 피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기록이 잇는 것은 보다 후대에 일군의 유다인들이 애굽으로 달아났던 사실에 관한 언급이다(43, 44장).

성 경: [렘24:9,10]

주제1: [무화과 두 광주리 비유]

주제2: [좋은 무화과와 악한 무화과]

여호와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유다 땅에 남거나 애굽으로 피신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더욱더 마음이 완악해져서 회복 불가능의 상태에 처한 가운데 파멸당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 이들 중에 많은 자들은 갈대아인들과 벌이는 전쟁의 칼과 기근으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먼저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은 훗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중에 잡혀가는 이들은 먼저의 사건에서 교훈을 받고 돌이켜야 마땅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전보다 더욱더 마음을 굳게 하고 완악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에 대부분은 결코 귀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방 민족들과 뒤섞이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렘25:1]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 년 - 여호야김 통치 제4년은 B.C. 605년으로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등극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고(왕하 24:1, 7)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침입함으로써 유다는 바야흐로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사를 맞기에 이르렀다(단 1:1-5).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이러한 수난이 유다의 끝없는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해 초래되었음과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렘25:2]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선지자 예레미야가 - 예레미야가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자신은 이를 대언하는 자임을 자신있게 밝히고자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Calvin).

성 경: [렘25:3,4]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요시야의 십 삼 년 - 1:2에 따르면 이 해는 예레미야가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던 때로 B.C. 627년에 해당한다. '부지런히 일렀으나'의 문자적 번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 하쉬켐) 일렀으나'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말씀을 전했음을 알 수 있다.

(주);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이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종들을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Thompson).

성 경: [렘25:5]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거하리니 -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호소하였던 내용이다(겔 14:6).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된바 있는 이 땅에서 계속 살려고 한다면,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그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바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달려 있었다.

성 경: [렘25:6]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 하나님의 심판을 야기시킨 가장 근본적이고도 치명적인 죄악인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우상 숭배는 제1계명에 대한 파기를 의미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가증스러운 범죄이다. 한편 본문은 다분히 경멸조, 비난조의 표현으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사용되었다(사 37:19; 미 5:13).

성 경: [렘25:7]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 유다 백성이 당하는 고통은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밝힌다. 그들은 유익을 위해 우상을 만들었으나 도리어 재앙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나의 노를 격동하여'라는 말은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패역의 길을 걸어갔음을 암시한다(Calvin).

성 경: [렘25:8,9]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포화 상태에 이른 죄악으로 인해 여호와의 심판이 선포되는 내용이다.

(주);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 '북방 모든 민족'을 유다 멸망에 일조한 대적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보고 이러한 일반적인 표현과 특정인 느부갓네살이 같이 언급되는 것은 예레미야의 원래 말(북방 모든 족속)에다 구체적인 특정인(느부갓네살)의 등장을 목격한 자기 후대에 이를 첨가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Thompson).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북방 모든 민족'이란 다양하게 이해되는데, 이에 대한 견해로는 (1) 느부갓네살과 동맹을 맺은 민족들 (2)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들 (3)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바벨론인들등이 있다 이중 문맥상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Feinberg). 또 느부갓네살이 '내 종'(*, 에베드), 즉 여호와의 종이라 지칭된 것은(27:6;43:10),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과 그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막중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위함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사 44:28;45:1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켜, '나의 목자',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70인역(LXX)에는 느부갓네살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아마 번역자는 이교도 왕을 가리켜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수도 있다. 한편 이 '종'이란 용어는 고대 근동에서는 군주와 봉신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특히 조약 문서에서는 규범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봉신은 군주를 위해 자기 군대를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느부갓네살은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의 봉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자로 사용되었다 하겠다.

성 경: [렘25:10]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유다의 국내적 혼란상이 묘사되고 있다. 유다 백성은 끔찍한 환난으로 인해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삶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한 채 캄캄한 좌절의 늪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렘25:11]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 포로 예언]

(주);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 '칠십 년'이라는 기간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유다 백성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제1차 포로로 잡혀갈 때(B.C 605년)로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환하던 해(B.C. 537년)까지의 기간 (2)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던 해(B.C. 586년)로부터 성전이 재건되던 해(B.C. 516년)까지의 기간(3) 예루살렘 함락 때(B.C. 586년)로부터 제1차 포로 교환이 이루어진 해(B.C. 537년)까지의 기간 (4)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시작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이 점령당한 때(B.C. 539년)까지의 기간.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적으로 지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듯이 보인다. 첫 번째의 경우는 바벨론에게 유다가 종속된 기간을 의미하는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각각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고 네 번째 견해는 12절과의 문맥적 지지를 받는다.

성 경: [렘25:12]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 유다의 죄악에 대해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원칙은 바벨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바벨론은 자신의 특별한 장점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지만, 그 역시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에 처해지고 마는 것이다(50:11-13; 사 13:19). 이러한 예언은 B.C.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바벨론 정복을 통해 성취되었는데, '영영히 황무케하되'라는 표현은 다분히 종말론적 의미를 암시한다 하겠다(Cunliffe-Jones).

성 경: [렘25:13]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 70인역(LXX)은 '이 책'이란 말로서 이 단락의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그 이후 부분으로 46-51장의 내용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15-38절에 대한 제목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성 경: [렘25:14]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으리라 - 이는 고레스 통치 하에서조공을 바치던 여러 왕들을 포함한 페르시아인들과 메대인들을 지칭한다. 그들이 한때 바벨론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이제는 역으로 바벨론인들을 역군(役軍)로 부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성 경: [렘25:15]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 '진노의 잔'이라는 비유적 표현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옛 성례적 전통에 그 근원이 있는 듯하다(Weiser). 즉, 이 임박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독한 음료를 마시게 하여 만일 그에게 죄가 있을 경우에는 그 독한 음료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관습과 관계되었을 것이다(민5:11-31).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이를 처형대상이 되는 죄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마시게 하였던 마취제와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Bright). 아무튼 이 '진노의 잔'은 하나님의 분노를 상징하고 있는데 49:12과51:7에도 이에 대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본장 내에서 하나님의 진노란 주제가 27-29절에서 더욱 발전되어 서술되고 있다.

성 경: [렘25:16]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 주석가들은 본절을 27절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꼭 그렇게 보아야 할 증거는 없다(Bright). 한편 술취한듯이 비틀거리는 이미지는 심판을 요청하는 죄악된 상태에 대한 상징으로도 쓰였다(13:12-14;사19:14;28:7-13).

성 경: [렘25:17]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그 잔을 받아서 모든 나라로 마시게 - 예레미야는 이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보내는 곳으로 가 모든 열방들에게 그 잔을 나누어 준다.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그의 중요한 임무중에 하나였다. 이 잔은 여호와께서 보내실 징벌을 뜻하는데, 그들은 이 잔을 받고 비틀거리게 될 것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27절).여호와의 징벌을 받게될 나라들의 명단이 다음절에서부터 열거된다. 46-51장에 언급된 모든 나라들이 이곳에 포함되며, 다만 다메섹만이 누락되어 있다(Thompson).

성 경: [렘25:18]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 특이한 사실은 예루살렘과 유다 각 성읍들에 사는 여호와의 백성이 심판을 받게되는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29절참조).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용어들은 본서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들이다. 끝부분의 '오늘날과 같으리라'는 어구는 이 글이 기록될 당시에 이 심판의 양상들 중에 얼마가 분명하게 나타났었음을 암시하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25:19,20]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본절의 역사적 상황을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본 단락 처음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여호와김 통치 제 사 년, 곧 느부갓네살 통치 원년, 곧 B.C. 605년이었다(1절). 이 해에 애굽은 갈그미스에서 패하였으며 갈대아인들의 추격을 받아 남쪽으로 달아났다. B.C. 605년 8월에 느부갓네살은 자기 부친의사망 소식을 듣고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B.C. 604년 말경에 갈대아 군대는 다시 팔레스틴 평원으로 침입해 들어왔으며 아스글론을 파멸시켰다(47:5-7).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재빠르게 진행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파국이 임박했으며 70년간을 바벨론에 노예로 있게 될 것을 선포하였다(11절). 그러나 여호와의 분노의 잔은 이제 이스라엘을 지나서 열방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 잔을 마신 후에는 바벨론에게로 그 잔이 넘어갈 것이다(26절).

(주); 애굽 왕 바로와 모든 잡족과 - 이는 바로느고를 가리킨다. 그는 주변 나라들을 부추켜 반바벨론 동맹을 결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Clarke). 한편, 본절에는 바로와 함께 그의 신하들 그리고 그 방백들 또 그 백성, 그리고 애굽에 살던 잡족들이 한께 열거되고 있다. 이 잡족들이라는 것은 바로의 통치하에서 애굽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말한다. 또한 본절의 우스땅은 욥의 고향이기도 하였던 곳으로서(용1:1), 팔레스틴 동쪽 어디에 있었던 것 같다. 애 4:21에는 우스가 에돔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주); 아스글론과 아스돗의 남은 자 - 블레셋 다섯 성읍은 아스글론, 가사, 아스돗, 가드인데, 가들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읍이 다 언급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이 즈음 가드는 이미 멸망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암 1:6이하 참조). 현대 고고학은 아스글론과 가사 그리고 아스돗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데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리스 역사가 헤도로투스(Herodotus)에 다르면 아스돗은 바로 삼메티우스 1세(PharaohPsammeticus I, B.C. 663-609년) 오랜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정복되고 무너졌다고 한다. '아스돗의 남은 자'란 어구가 이 사건에 대한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Bright).

성 경: [렘25:21,22]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에돔, 모압, 암몬 등의 나라들(48:1-49:22)과 두로와 시돈의 왕들 그리고 그들의 식민지들은 모두 바벨론에 항거했으며(27:1-3) 느부갓네살에 의해 고초를 겪게 된다.

(주); 바다 저편 섬의 왕들과 - 이는 두로와 시돈의 식민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바다'라 함은 지중해를 가리키며, '바다 저편 섬의 왕들'이란 표현은 해변 지역의 왕들 또는 바다와 인접한 지역의 왕들이라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Clarke).

성 경: [렘25:23]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드단은 아브라함이 그둘라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창 25:3). 그리고 데마는 아라비아 북부에 살았던 이스마엘의 아들들 중에 형제인 나홀의 자손으로서 우스의 형제이며 아라비아 사막에 거주하였다(창 22:21, Clarke). 부스의 정확한 지역은 고대의 도시명은 족장들의 인명과 대체로 동일하였다. 한편, 털을 모지게 깎은 (모든)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추체 페아'(*)란 말의 정혹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그들의 머리털의 모서리를 깎은 자들'이라고 번역하고있는데, 이는 사막의 몇몇 아랍족들 중에서 볼 수 있는 관습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외에도 한가지 설득력 있는 해석은 '사막의 변두리를 유랑하는 자들'인데, NEB가 이런 해석을 취하고 있다(9:26;49:32 참조).

성 경: [렘25:24]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원문상 '광야에 거하는'이란 말로 끝맺고 있는데, 이는 23절과 본절을 요약하는 표현이라 볼 수 있다(Thompson).

성 경: [렘25:25]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시므리의 모든 왕과 - '시므리'란 이름은 민 25:14;왕상 16:9-20;왕하9:31;대상2:6;8:36;9:42 등에도 나오지만 그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므리를 엘람을 가리키는 암호인 시므키라고 읽어야 좋을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으나(49:34-39), 이렇게 될 경우 엘람이 두 번 언급되고 만다. 어쩌면 시므리는 아브라함과 그두라 사이에서 난 시므란과 관련될지도 모른다(창 25:2). 시므란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 사이에서 살았다(Clarke, Feinberg).

성 경: [렘25:26]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 - 세계의 모든 열국들 다음으로 잔을 마시게 될 최후의 왕은 세삭 왕인데(51:41 참조), 이 '세삭'이란 '바벨론'에 대한 히브리어 알파벳 철자의 위치를 뒤에서부터 세어 만들어진 암호와 같은 명칭으로서, 바벨론을 가리키고있다. 아마도 바벨론을 이렇게 암호로 표기한 것은 그 당시, 즉 이 글이 기록될 당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Bright, Thompson). 한편, 이런 철자법은 소위 아트바스(Atbash)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자인'알렙'(*)의 위치에 알파벳 마지막 자인 '타우'(*)를 대입하고, 그리고 두 번째 글자인 '쉰'(*)을 대입하여서 전체를 이런 식으로 순서를 뒤바꾸어 놓는 것을 말한다.

성 경: [렘25:27]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너희는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 - 예레미야는 술취한 자의 상태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하여 진노의 잔을 마신 자들이 희생 불능의 상태에 처하게 될 것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성 경: [렘25:28]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 지상 거민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있다.

성 경: [렘25:29]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부터 - 이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이 파멸의 첫 번째 대상이 될 것이다(Clarke).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선고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열방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렘25:30]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시며 외치리니 - 이는 그의 목소리가 거룩한 처소 곧 하늘에서 들려온다는 뜻이다(욜 3:16;암1:2). 이런 표현 속에는 여호와께서 사자같이 부르짖고(호 11:10;암 3:8), 천둥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하시고(출 19:16), 폭풍 중에 말씀하신다(23:19)는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여호와의 부르짖는 소리의 효과를 고조하기 위해 그것이 포도 밟는 자들의 외침에 비유되고 있다. 이 크고 두려운 소리는 땅 끝까지 울려 퍼진다.

성 경: [렘25:31]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 여기서는 또다시 소송 장면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죄인들을 고발하는 기소자 및 그들에게 판결을 선고하는 재판장으로 묘사된다. '다투시며'의 히브리어 '리브'(*)는 법정에서의 논쟁과 관련되어 자주 쓰이며, '심판하시며'에 해당하는 '솨파트'(*)는 '소송을 제기하다', '판결을 선고하다'는 뜻이다.

성 경: [렘25:32]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 재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는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다. 이는 재앙과 이를 야기시킨 죄악 및 그 재앙으로 말미암은 폐허의 결과를 함께 나타내는 말이다. 이 재앙은 광범위하게 임할 것이며, 마치 강력한 폭풍이 지구 먼 끝에서 불어오듯이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갈대아인들의 공격에 나라들이 하나씩 차례로 멸망할 것임을 가리킨다(Clarke).

성 경: [렘25:33]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이 구절은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심판의 효과를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 땅 위에 시신들이 딩굴고 있는 소름끼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렘25:34,35]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목자들이나 양떼의 인도자들은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애곡하고, 재에서 뒹굴 것을 요청받고 있는데 이는 슬픔과 굴욕에 대한 표인 것이다. 그릇에 해당하는 '켈리'(*)를 70인역(LXX)은 '숫양'으로 번역했다(rams, RSV).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에처럼 번역해도 뜻이 잘 통한다(vessel, KJV ; pottery, NIV). 한편, 클라크(Clarke)는 귀한 수정 그릇, 또는 마노 그릇이 깨어지는 것처럼,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임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 경: [렘25:36]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나 여호와가 황폐케 함이로다 - 열방의 통치자들이 파멸로 인하여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제시된다.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에게 심판을 가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나거나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성 경: [렘25:37]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 여호와의 심판에는 그들의 평안한 목자들까지 포함되었다. 그 위에서 풀을 뜯던 목자들까지 모두 약탈자의 손에 넘어갔고 또 철저히 유린되고 황폐화될 것이므로 그 지역에 거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성 경: [렘25:38]

주제1: [바벨론 포로에 관한 예언]

주제2: [바벨론과 열방의 패망]

(주); 그가 사자같이 그 소혈에서 나오셨도다 그들의 땅이 황량하였도다 - '소혈'(*, 소크)이란 '숙소'나 '거처'를 뜻한다. 여기서는 사자의 굴을 뜻하는 것으로 봄이 좋겠다. 사자의 사냥감이 된 것처럼 그들의 당은 여호와의 불타는 진노와 칼 앞에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이는 또한 요단 강이 강둑으로 흘러 넘치는 것처럼 여호와의 분노가 노도와 같이 흘러 넘침을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Clarke).

성 경: [렘26:1]

주제1: [유다 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 맛소라 사본의 본절 서두에는 '레쉬트 맘레쿠트'(*)란 어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왕의 등극과 다음 연도가 시작되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연대 계산의 체계상 어떤 방식에서는 이 부분을 일년으로 계산하고 있으면 또 다른 방식에서는 무시되거나 또는 왕의 통치 전(前)시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즉위 연도를 빼버리는 체계를 사용했고 유다에서도 이런 계수법을 주로 사용했으나 여러 방식이 혼용되기도 했다. 여호야김의 즉위 연도는 B.C. 609년 9월경에서B.C. 608년 4월경 곧 니산월 사이가 된다. 한편, 혹자는 이 예언이 전달된 때가 이상과 같이 여호야김 치세 초였기 때문에, 이 예언이 이곳에 위치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설명한다(Blayney, Clarke, Dahler). 그러나 본서는 기록 의도상 연대순에 충실히 따르지 않고 있으므로 그러한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성 경: [렘26:2]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한 말도 감(減)하지 말라 - 7절까지에서 언급된 성전 설교의 개요는 만약 이 백성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언약의 율법을 준수한다면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여호와께서 중지시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철저한 파멸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서서 예언을 선포한 '여호와의 집 뜰'이란 성전 내부의 마당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7:2에는 그가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설교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그는 금식일이나 절기에 백성들이 모여들었던 바깥뜰과 안뜰의 경계 지역 근처에 서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 말도 감하지 말라'고 하는 표현은 예언의 엄중성을 시사함과 아울러 그 예언 선포에 따르는 핍박을 암시한다. '감하다'에 해당하는 '가라'(*)는 종종 수염을 깎아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48:37;사 15:2 참조).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적대감을 보일 것이고 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며, 그랬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 중 어떤 부분을 가감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6:3]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그들이 듣고...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 여기서는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한번 더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고 있다. '뜻을 돌이키다'라는 뜻의 동사 '나함'(*)은 '뉘우치다', '동정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로서 18:8에서도 쓰였다. 그리고 '재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는 재앙과 그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 악행이란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성 경: [렘26:4]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 이 부분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절들은 7:13의 내용과 거의 같다(Clarke). 여기서 잠시 본장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적 상황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여호야김의 등극은 B.C. 609년 가을이나 늦은 여름으로서,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붙잡혀 감으로써(왕하 23:32-34) 가능했었다. 유다에서는 대체로 왕의 치세를 왕의 통치 원년이 다 채워지고 난 다음의 니산월부터 계수하였다. 따라서 이 기사는 예레미야의 전기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중에 첫번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본장은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전 설교와 예레미야의 체포 등의 사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또 그렇게 거부됨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심판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본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지만, 포로기가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성 경: [렘26:5]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백성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참된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알리셨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귀는 달콤한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에서 현혹되었다. 27-29장에는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사이의 뚜렷한 대조가 잘 제시되어있다. 한편, 언약의 요구 사항은 율법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7:5,6에는 특정 율법들이 명시되고 있으며, 백성들을 향하여 순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왕하17:15 참조). 여호와께서 자기 종들, 곧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필경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성 경: [렘26:6]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 성전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실로의 옛 성소가 파괴된 것과 같이 파괴되고 말 것이란 내용이다(삼상 4장). 백성들은 여호와의 전이 심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의 법궤가 있던 실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라 하더라도 파괴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실로는 B.C. 1075년경 블레셋의 침입으로 무너졌던 것이 분명하다.이 사실은 삼상 4장에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시78:60, 61 참조). 실로는 훗날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시 무너졌다. 예레미야 당시에는 그 폐허만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파멸을 예상시켜 주는 생생한 본보기였던 셈이다. '저줏거리'로 번역된 '켈랄라'(*)는 '가볍다'는 뜻의 형용사'칼랄'(*)에서 유래한 말로서 '비방', '조소' 혹은 '저주'를 뜻한다. 한편, 성전을 가리켜 저줏거리가 된다고 하는 설교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언사였으며, 신성 모독이나 참람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선지자의 말은 총체적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신성 모독으로 고소받기에 이르렀다.

성 경: [렘26:7]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 예레미야의 말이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바로 성전 경내에서 그러한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 업무를 관장하던 자들이었으며, 그곳에 참석했던 백성들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집단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Thompson).

성 경: [렘26:8]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제사장들과...그를 붙잡고 이르되 - 맛소라 사본에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본절에 '모든 백성'이란 말이 있으나 70인역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브라이트(Bright)는 이 말이 7절에서부터 삽입된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이를 빠뜨려야 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9절에 근거해서 보면, 백성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의 선동에 의해 예레미야에게 달려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자신의 발언 내용으로 인해서 중대한 범법 행위로 체포되고 고소당하였다.

(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 고 하는 표현은 원어로 '모트 타무트'(*)인데, 출 21-23장 내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모트 유마트'(*)란 말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어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는 말이다. 이로 볼때 예레미야는 자신을 체포한 자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성 경: [렘26:9]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 고소의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즉 성전이 실로와 같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황무지처럼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이 예언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다고 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죄명이었다. 고소자들은 예레미야가 말한 예언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예레미야는 이중의 범죄를 범한 것이 된다. 즉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서 참람한 것을 말했으며, 또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거짓된 유언 비어를 퍼뜨렸던 셈이다.

(주);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 '모여드니라'에 해당하는 '카할'(*)은 보통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의례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때로는 전쟁 때문에 소집되는 것과 또 어떤 공통의 적이 있어 그를 응징하기 위해 군중이 에워싸는 것을 의미할 때도 쓰였다. 성전 경내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군중들이 대단히 분노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Bright).

성 경: [렘26:10]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유다 방백들이 이 일을 듣고 - 유다 방백들이라 함은 왕의 궁정 관리들이나 측근 참모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Clarke). 왕궁은 성전에 인접해 있었다. 이들은 소요 소식을 듣고 급히 조사하러 나왔으며, 그들 스스로 재판관의 위치에 앉아 심문하였다(Bright).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적절한 재판과정을 거치게 되었드며, 분노한 군중의 손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 새 문어귀에 - 재판은 보통 성문에서 열렸다(창 23:10-20;룻 4:1;잠 31:23). 왕의 관리들은 새문 어귀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이 문이 어떤 문인지를 정확히 알 길은 없고 다만 그것이 윗문에 있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20:2, Thompson).

성 경: [렘26:11]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이 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니 - 기소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재판관으로 행사하던 방백들에게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틀림없이 고소의 내용을 자세히 고하였을 것이고 예레미야에게서 들은 말은 하나도 빠뜨리지않고 말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6:12]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예레미야가...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예언은 스스로 꾸며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직접적이고도 가장 적절하게 변호한 담대성을 보여준다. 그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이미 선포한 바 있는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기소자들에게 동정을 구하려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자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성 경: [렘26:13]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주);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뜻을 돌이키시리라 -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심판이 중지될 수도 있다는 조건적인 요소이다. 오직 회개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회개할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보내려고 작정하셨던 심판과 재앙을 돌이킬 것이다. 18:1-12에도 이런 조건적 원리가 선언되어 있는 바, 이런 원리는 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돌이킬 생각을 하지않았다. 한편 '고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야타브'(*)는 '선을 행하다', '은총을 입다'는 뜻도 내포한다.

성 경: [렘26:14,15]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심문받는 예레미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극한 위기의 순간에 예레미야의 담대한 신앙은 더욱 돋보이고 있다. 그는 범죄자들과 타협하거나 그들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여호와의 말씀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길을 택하고자 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자신의 생명이 대적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가 반드시 치르어질 것 또한 분명히 믿고 있었다(마 27:24, 25;행 5:28).

성 경: [렘26:16]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 왕의 관리들은 분노한 군중들을 뒤로 물리치고 선지자의 변호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견해와 반대되는 위치에 섰다. 이 같은 평결을 얻어낸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될 몇몇 장로들의 예레미야 지지 발언 때문이라기보다는 거침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종교적인 일에 가장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진리를 대적하는 반면, 오히려 정부 고관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진리를 두둔하고 나서는 광경은 매우 역설적이라 하겠다(Feinberg).

성 경: [렘26:17]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 19절까지는 이 사건을 지켜보던 장로(왕하 23:1-3 주제 강해, '장로가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 참조) 몇 사람이 예레미야를 웅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훌륭한 변호였다. 변론은 이들의 지지발언으로 인해서 완벽하게 결말지어진다. 어떤 이는 선지자의 변호를 맡았던 자가 아히감(24절)이라고 생각한다(Clarke).

성 경: [렘26:18]

주제1: [유다 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모세렛 사람 미가 - 장로들은 유사한 판례로서 모레셋 사람 미가의 경우를 제시하였다(미 1:1;3:12). 그 당시 왕이었던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과 비슷한 메시지를 미가 선지자로부터 들었지만, 그의 말을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호와를 두려워하였으며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였다. 아마 미가는 이사야와 더불어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짐작된다(왕하 18:3-6). 한편, '모레셋'은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하면 예루살렘 남동쪽 37Km 정도의 지점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주);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 이는 미 3:12의 인용인데, 미가 선지자의 말이 인용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선지자들의 신탁들이 보존되고 있었으며 또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시온이 밭같이 경작함을 당한다고 하는 것은 밭을 경작할때 땅을 뒤집어 엎듯이 시온이 철저히 유린 될 것임을 뜻한다(Thompson).

성 경: [렘26:19]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 맛소라는 '그들'을 단수로 기록하고 있으나 70인역은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번역이나 문맥의 흐름상 복수로 표현되는 것이 더 적적하다. 그러나 이를 단수로 표현하게 되면 히스기야를 백성의 공식적인 대표로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성 경: [렘26:20]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 - 선지자 우리야의 경우가 소개되고 있다. 그도 역시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다소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선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야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의 멸망을 전한 선지자가 예레미야 혼자뿐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8마일 가량 떨어진 기럇여아림 출신이었다.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아살(Tellel-Azhar)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기브온 네 성읍들 중의 하나였고(수 9:17), 기럇바알(수 18:14) 또는 바알라로도 알려져 있다(수 15:9). 법궤가 블레셋에서부터 되돌려졌을 때 그것은 기럇여아림에 보존되었으며 그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었다(삼상 7:1, 2;삼하 6장).

성 경: [렘26:21]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우리야는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으로 달아났다. 이는 담대히 대적들 앞에 나선 예레미야에 비해 나약한 선지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예레미야와는 달리 애굽으로 쫓아온 자객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성 경: [렘26:22]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 엘라단이란 사람이 애굽으로 달아난 우리야를 인도(引導)받기 위해 애굽으로 파견되었다. B.C. 2천년대의 조약문에는 정치적 망명자를 인도하는 협정이 종종 삽입되곤 하였다. 느고가 B.C.609년에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혔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과 유다 사이에 군주-봉신 조약같은 것이 맺어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느고는 여호야김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왕하 23:34, 35). 어쨌든 정치적 망명자를 인도하는 것은 상호간에 협조하도록 되어있으며 국제법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한편, 애굽으로 파견된 악볼의 아들 엘라단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가 읽혀질 때 그것을 들은 관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워 없애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기도 했다(36:11-26). 엘라단은 또한 유다왕 여호야긴의 모친인 느후스다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왕하 24:8). 아마도 그는 우리야 문제에 대해서는 왕의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26:23]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여호야김 왕께로 데려 오매...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 우리야가 예루살렘으로 호송되자 여호야김은 그를 칼로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선지자가 처형되는 장면이 구약에는 우리야 외에 스가랴 선지자의 경우가 한 번 더 기록되어 있다(대하24:20-22).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보낸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또 예레미야 같은 사람을 핍박하였던 것 등으로 볼 때 비록 구약의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수많은 선지자들이 순교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이다. 한편 우리야의 시체는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골짜기의 평민의 묘실에 던져졌다(왕하 23:6 참조, Thompson). '평민의 묘실'이란 일종의 공동 묘지와 같은 곳으로짐작된다. 부유한 자들이나 명망있는 자들은 자신의 개인 무덤에 묻혔으나 빈천한 자들은 후미진 곳의 공동 무덤에 묻혔던 것 같다(Calvin). 그렇다면 우리야는 죽은 후에도 수치를 당하였던 셈이 된다.

성 경: [렘26:24]

주제1: [유다백성의 타락성]

주제2: [예레미야를 위한 변호]

(주); 예레미야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 아마 예레미야는 아히감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우리야의 운명과 같은 끔찍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아히감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느부갓네살에 의해 그곳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의 부친이었던 것 같다(40:5). 예레미야가 비록 최고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긴하나 여전히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예레미야에 대한 편견은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던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아히감의 보호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27:1]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여호야김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 본절에는 연대기적 상황이 언급되고 있는데, 26:1의 연대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3, 12절;28:1등을 참조할 때, '여호야김'은'시드기야'를 필사자가 오기(誤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건은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른 이후인 B.C. 597년의 포로 사건을 전제하고 있다. 수리아역과 아랍어역, 그리고 몇 개의 다른 맛소라 사본들 및 영역본 KJV, RSV, ASV등도 이를 '시드기야'로 읽고 있다.

성 경: [렘27:2]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 예레미야의 청중들은 상징적 행위에 대해 익숙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13:1-11;19:1-13;사 20장;겔 4:1-3;12:3;24:3-5). 그는 여기서 황소'멍에'를 그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멍에'라고 하는 것은 소의 목에다 가죽 끈으로 매단 나무 막대기이다. 예레미야는 이 멍에를 자기 목에다 걸었으며, 이것을 예화로 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Thompson). 이러한 상징은 앞으로 언급될 몇몇의 왕들이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일 것임을 의미한다(Clarke).

성 경: [렘27:3]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붙여 - '그것을 붙여'(*, 쉴라흐탐)란 말은 '그것을 보내어'라는 의미이다. 이는 본절에 열거되어 있는 왕들에게 멍에가 하나씩 보내졌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혹자는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멍에를 하나만 사용했으며, 그것을 그의 목에다 걸었음을 근거로 하여 아마도 이것은 사신들이 자기 왕들에게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보고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이곳에 등장하는 사신들은 반바벨론 동맹의 결성 문제를 두고 시드기야와 의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파견된 특사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유다의 수도에 모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시드기야가 반바벨론 음모의 주동자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정복 후 시드기야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기 1년 전, 아마 B.C.594년 또는 593년경, 바벨론 국내에서는 반란과 소요 사태가 있었는데, 시드기야를 포함한 느부갓네살의 여러 봉신국들은 이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의논과 모의는 무위로 끝났다(B.C.588년, 겔 17:1-21).

성 경: [렘27:4]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 예레미야가 이들 이웃 왕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절대 주권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호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백성과 그 안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이들을 정복할 임무를 주신 역사의 주인이시기도 하다(Thompson).

성 경: [렘27:5]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본절에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권능이 서술된다. '나의 든 팔'(*, 제로아 한투야)이라는 표현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출 6:6;신 4:34;시 136:12). 한편 이 백성들 중 일부가 이미 B.C.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에 비추어 여호와의 권능을 이와같이 선포하고 있는 것은 다소 의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조차 여호와의 능력으로 인함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은 온 세계에 미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의아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성 경: [렘27:6]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 '내 종'(*, 아브디)이라는 표현은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선지자(민 12:7, 8). (2)모든 이스라엘 백성(사42:19). (3)이스라엘의 남은 자(사 41:8-10). (4)이방인을 포함한 경건한 자(욥 1:8). (5)메시야(사 42:1;49:3;52:13). (6)다윗 왕가의 계승자(학 2:23). (7)열방의 통치자들(사 45:1). 여기서는 제일 마지막에 해당하는 용례인데,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해서 그가 여호와를 잘 섬겼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여서 자신의 신적(神的) 작정을 성취하는 데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앞 구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의 표현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열방의 운명을 통제하시는 분은 당연히 그들에게 자신의 신적 의지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야 만다. 7절에는 바벨론 자체도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Nicholson).

성 경: [렘27:7]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이었다(52:31;왕하 25:27). 그러나 에윌므로닥은 자기 아들에게, 곧 느부갓네살의 손자에게 왕위를 계승시키지 못하였다. 아마도 쿠데타가 일어난 때문인지 에윌므로닥의 처남인 네르갈사레셀(B.C. 560-556)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만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열방들이 오랫동안 바벨론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렘27:8]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벌하리라 - 예레미야의 충고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사실상 동일하였다. 유다 백성들로서는 하나님의 징벌이 하필 이방 세력에 의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을 들어서 유다와 기타 열방들까지 징계하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큰 섭리를 목도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선임자였던 이사야 앗수르가 여호와의 목적을 달성시키고 난 다음에는 그들의 임무가 끝날것이라고 했던 바 있는데(사 10:5-12), 예레미야도 이와같이 바벨론의 임무를 엄격하게 한정시켰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와의 종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가 그를 필요로 하는 한 그는 그 요구에 저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7:9]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여기에는 다양한 직책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가증스럽게 여겨서 금지된 것들이다(신18:9-13,Nicholson). 연구를 종합해 보면, 이곳의 '선지자'(*,나비)는 하늘에서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거짓으로 주장하였던 자들이며, '복술자'(*,카삼)는 제비나 화살 등의 여러 수단을 사용하여 어떤 징조를 받아 미래를 알아 맞히는자들로 통하였다. '꿈꾸는 자'(*, 하롬)는 구름의 형태나 밀도 등을 통해서 점을 치는 자를 가리키고 '술사'(*, 아난)란 구름이나 별을 보고 장래사를 예언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내는 자를 말한다. 그리고 '요술객'(*, 카솨프)은 신비로운 것이나 초자연적 결과 등을 마법의 방법으로 알아내는 자를 뜻한다(Clarke,Venema). 그러나 이곳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직책들을 엄격히 서로 구별하기란 힘들다. 다만 당시 백성들이 여호와의 메시지를 거부하면서도 이방의 온갖 거짓 사술들에 미혹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Delitzsch).

성 경: [렘27:10]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서 -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는 대다수 지배 계층의 주장에 편승하며 또 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바벨론에 대항하도록 선동하고 다녔다. 비단 유다뿐만 아니라 그 주변국에도 신흥 세력인 바벨론의 조기 패망설이 나돌고 있었으므로, 거짓 선지자들의 감언 이설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성 경: [렘27:11]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 바벨론에 항복하면 그 순간은 괴롭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모든 평화와 환난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으므로 당신께서 반드시 도우사 과거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뜻이다. 느부갓네살의 임무는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들을 파멸시키는 것에 국한되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던 그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며, 그런 후 포로로 잡혀 갔던 자들은 회개하게 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느부갓네살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치밀한 정치적 선견지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역사적 필연에 관한 계시였다.

성 경: [렘27:12]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이방 민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던 예레미야는 이제 유다 백성에게로 그 방향을 바꾼다. 사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이방이 아니라 바로 유다에 있었다. 한편, 이방에 선포되었던 경고의 예언이 유다에게도 동일하게 선포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을 한결 부각시키고 있다.

성 경: [렘27:13]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는 나라에 대하여 -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바벨론 왕에게 굴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임을 알고 이러한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여서 생명을 보존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은 바벨론에 대한 저항에 사기를 떨어뜨릴 만한 것이었고,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예레미야는 반국가적 선동을 야기시킨 반역자로 여겨졌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7:14]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마소서 -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경고가 계속 주어지고 있는데, 이는 왕을 위시한 대다수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꾐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었음을 반영한다. 한편 이방 왕들에게 주는 메시지에서 언급된 바 있는 복술자, 꿈꾸는 자, 술사, 요술객 등에 대해서는 전혀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바알을 섬기고 하늘 황후에게 제사를 바치던 사람들이(7:17, 18) 이러한 금지된 행위로 돌아서지 않았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신 18:9-13 참조).

성 경: [렘27:15]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명령하심]

(주);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 거짓 선지자들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왔었다(23:15-40 참조). 그들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예언과는 반대되고 모순되었다.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선호하였는데, 이 같은 행위는 자신의 추방과 멸망을 스스로 앞당기는 것이었다. 실제로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다가 B.C. 586년 느부갓네살에게 붙들렸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살해했으며, 그런 다음 시드기야의 눈을 뽑았고, 그를 쇠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데려갔다(왕하 25:1-7). 시드기야는 거기서 죽었다.

성 경: [렘27:16]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

(주); 제사장들과 그 모든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말을 듣지 말라 - 시드기야 왕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도 주어지고 있다. 이 구절에는 또한 성전의 기구들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있다. 성전 기구들중 대부분의 품목들은 정복자들에 의해 이미 옮겨져 있었기 때문에(B.C.598년, 왕하 24:13) 현재로서는 성전기구라 불리울 만한 물건이 남아 있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소도구들 밖에 없었을 것이다(19절 참조).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빼앗겨 버린 성전기구들이 머잖아 모두 되돌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Bright, Nicholson). 그러나 그 주장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남아 있는 성전 기구들마저 예루살렘 함락 후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성 경: [렘27:17]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

(주); 너희는 그들을 듣지 말고 - 거짓 선지자들이 이들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들려준 예언이란 것은 실제로는 거짓이었으며, 헛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용납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고 심판을 자초하는 행위였다. 거짓 선지자들은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이 이제 곧 돌아올 것이며, 재앙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설교는 바벨론에 대한 저항과 반역을 자극하고 선동함으로써 유다의 패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성 경: [렘27:18]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

(주);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구하여야 할 것이니라 - 여기서 선지자는 유다의 조속한 회복을 주장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래서 그는 남아 있는 것이라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말로 그들을 공박한다. '구하여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가'(*)는 '만나다', '탄원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중재의 의미로 쓰였다.

성 경: [렘27:19]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

(주); 기둥들과 놋바다와 받침들 - 바벨론인들은 이것들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기구들이었다. 여기서 '받침들'(*, 메코노트)이란 왕상 7:27-37에 언급된 바퀴가 달린 기구였을 것 같다. '기둥'은 왕상7:15-22에 언급된 내용과 같은 것이고, '놋바다' 역시 왕상 7:23-26에 언급되어 있다.

성 경: [렘27:20]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

(주);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 - '여고니야'의 축약형 명칭은 22:24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고니야'이며, 왕명으로 '여호야긴'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Nicholson). 느부갓네살은 1, 2차 예루살렘 침공에서 성전의 보배들 중 일부를 가져갔었다(왕하24:13;단 1:2). 그렇지만 그 이후에도 어떤 기구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며(왕하25:13-17 참조), 빼앗겨 버린 기구들 중에 어떤 것은 규칙적인 성전 예배에서 사용되었던 중요 항목이었기 때문에 새로이 만들어져서 대체되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7:21,22]

주제1: [바벨론에의 항복 요구]

주제2: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대립]

(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기구에 대하여 - 여호와의 마지막 말씀은 성전의 부수적인 소기구들과 왕궁의 기구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주); 그것을 옮겨 이곳에 다시 두리라 - 용기와 기구들이 비록 바벨론으로 옮겨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복귀될 것이다. 이것은 눈여겨볼만한 또 다른 주제로서, 이 민족이 비록 심판하에 놓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심판너머에서 하나님이 이 백성의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고 있음을 나타낸다(Nicholson). 어떤 주석가들은 회복에 대한 이와 같은 예언이 파국을 말하는 신탁에는 걸맞지 않은즉, 이것이 훗날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심판 가운데 나타나는 희망의 메시지는 본서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오직 심판과 절망의 메시지만을 전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선지자의 궁극적 관심사는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과 섭리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렘28:1]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본장의 사건은 예레미야가 주변 국가의 사실들과 조우한 지(27:3) 얼마 되지 않은 때인 B.C. 593년에 발생하였다. 10절에서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걸린 멍에를 빼앗아 꺾었던 것으로 보아 그 멍에는 여전히 예레미야의 목에 걸려 있었던 것 같다. 하나냐는 베냐민 땅 기브온 출신이었는 데 기브온이란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6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서 오늘날의 엘-집(el-Jib)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최근에 이 고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이곳은 수많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결부되어 있던 곳이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속이고 파멸을 모면한 바 있으며(수 9:1-15), 다윗 시대에는 사울의 군사와 다윗의 부하 사이에 대결의 장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2:12-17). 또한 이곳에서 요압은 아마사를 살해한 바 있다(삼하 20:8-10). '하나냐'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이다. 비록 하나냐가 잘못된 신앙을 가졌긴 하였으나 이 이름은 유다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이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이름이었다(Thompson). 그는 자칭 선지자로서 자신이 여호와와 교통하고 있고 또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성역 도시인(수 21:17) 기브온 출신인 것으로 보아서 그는 제사장이었을 것이다(Clarke). 한편 시드기야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 년 오 월이라는 연대는 양력으로 B.C.593년 8월 초순에 해당된다. 또한 본장은 27장의 계속으로서, 앞 예언의 정확한 연대를 제시해주고 있기도 하며 또한 27:1에 언급된 여호야김이란 표현이 잘못된 표기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Clarke).

성 경: [렘28:2]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비유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과 반대되는 예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을 고국으로 속히 돌려보내실 것이며 또한 바벨론인들에 의해 빼앗겼던 성전 기구들을 복수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3, 4절). 하나냐는 여기서보는 바와 같이 27장에 언급되어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28:3,4]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여호와로부터 임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냐의 예언 내용은 두 해가 되기 전에 바벨론의 멍에가 꺾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예레미야가 그때까지 계속해서 걸고 있었던 그 멍에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하나냐는 그 결과 성전의 신성한 기구들과 물건들이 왕을 위히한 포로민들과 함께 다시 복귀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은 여고니야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희망사항은 그 당시 백성들 중에 일부가 아직도 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고로 바벨론 성문에서 발견된 문헌 중 바벨론의 기름 수납 영수증을 보면 여호야긴이 유다의 왕으로 언급되고 있다(Thompson). 한편, 하나냐는 두해가 차기 전이라고 말했는데 바벨론이 멸망되기는 커녕 두 해가 되기 전에 하나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다(17절).

성 경: [렘28:5]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선지자 예레미야가... -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은 본장에서 예레미야와 하나냐란 말이 언급될 때마다 시종 일관되게 선지자란 말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70인역은 이를 오히려 일관되게 생략하고 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 두사람의 이름 앞에다 계속 반복해서 선지자란 말을 붙이는 것이 불필요하고 어색한 듯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서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가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서로 대치하고 반박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Bright).

성 경: [렘28:6]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 하나냐의 거짓 신탁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같은 반응과 응답이 단순히 빈정거리고 풍자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냐의 예언 내용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는 '준비하다', '시행하더', '성취하다' 등의 뜻을 내포하는 바, 애초부터 작정된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심을 의미한다.

성 경: [렘28:7]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그러나 너는...이 말을 들으라 -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힌다. 이는 곧 하나냐와 같은 자의 축복예언은 백성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뜻을 암시한다(Calvin).

성 경: [렘28:8]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예언하였느니라 - 선지자 하나냐와 선지자 예레미야가 맞서고 있는 이 당시에는 참선지자가 누구이고 또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기가 힘들었다. 두사람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말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시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형상으로는 이 둘 중에 누가 참선지자인지 식별해낼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더 깊이 내려가서 살펴보면 그들 사이에는 분명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즉 한 사람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하였다(23:18, 22). 또한 한사람은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이 백성의 거룩하고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만 내세우고 그 특권이 왜 있는가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다. 이런 엄청난 잘못은 소위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범하여 왔던 비극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냐와 같이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해버리곤하였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이다(Nicholson). 한편 예레미야 이전의 선지자들이라고 함은 요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스바냐, 나훔, 하박국 등의 선지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 부패한 민족에 대한 회개의 촉구와 심판 선언에 관한 것이었다(Clarke).

성 경: [렘28:9]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 시간이 지나면 하나냐의 낙관적인 청사진이 거짓이고 예레미야가 제시한 청사진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부인할 수 없는 기준은 그의 예언 성취 여부에 달려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순종과 거룩한 행실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Thompson). '진실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세우다', '확고하게 하다'는 뜻인 '아만'(*)에서 유래한 말로서, '확실함', '진리', '진실로' 등으로 번역된다.

성 경: [렘28:10]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선지자 하나냐가...멍에를 취하여 꺾고 - 하나냐는 여태까지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로써 반박하고 있었으나 이제와서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내고 그것을 꺾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반박하고 나섰다. 즉 하나냐의 행위는 단지 예레미야 예언에 대한 모독과 멸시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되는 예언과 또 정반대되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Clarke,Nicholson).

성 경: [렘28:11]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거짓 선지자 하나냐]

(주);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꺾어 버리리라 - 25:11, 29:10에는 70년간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냐는 이를 정면으로 공박하기 위해 자신도 2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그 예언의 성취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칠게 행동하였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그 당시로서는 반바벨론 동맹과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주); 자기 길을 가니라 -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심판 예언을 계속 선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단순히 그곳을 피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본절에서는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자리를 뜬 이유에 대해 혹자는 하나냐의 동조자들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혹은 하나냐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장래의 구체적 사건을 통해 예레미야 자신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해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Feinberg).

성 경: [렘28:12,13]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하나냐의 말로]

하나냐의 대립된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없었으며, 그냥 침묵 속에서 자기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이 바벨론인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임을 다시 선언하러 돌아온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종속이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라는 내용이 이제는 보다 더 강조되어 표현된다. 즉 여태까지는 나무로 된 멍에를 상징으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이제는 쇠로된 멍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Nicholson).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은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여호와께로부터 응답이 왔다. 참선지자는 몽상가나 공상가가 아니다. 그는 재치가 넘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며, 더군다나 자신 스스로의 생각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며 전에 그가 전했던 것과 내용이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용되는 어휘가 더 강경해졌다는 것뿐이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상징적 기구를 꺾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꺾여지지 않는 쇠 멍에가 주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공박하고자 했던 하나냐의 상징적인 행동은 더 강한 멍에의 등장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Bright).

성 경: [렘28:14]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하나냐의 말로]

(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 본절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예레미야는 쇠 멍에를 목에 걸고 꺾어진 그의 나무 멍에에 의한 상징적 행위를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Nicholson). 결국 하나냐의 방해 행위는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뿐이다.

성 경: [렘28:15]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하나냐의 말로]

(주); 하나냐여 들으라...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냐의 거짓 예언을 선호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예레미야의 이런 단호한 선포는 대단히 담대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Clarke). 예레미야는 여기서 하나냐가 거짓 선지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단죄한다. 하나냐는 백성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도록 하였으며 여호와의 뜻과 계획에 정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반역을 범하였다. 29장에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동일한 단죄와 비난의 내용이 있는 것을 볼 수있다(29:32, Thompson).

성 경: [렘28:16]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하나냐의 말로]

(주);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리 - 여호와는 하나냐를 예언하라고 보내지 않았으나 그는 여호와의 보내심을 빙자하였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죽음으로 보내실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하는 것은 죽을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이는 신 18:20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향해 거짓예언을 이유로 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26장등). 그러나 여기에와서는 하나냐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직접 집행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Bright). 하나님은 그를 끊어버리실 것이며, 이 예언은 2년 내도 아닌 바로 금년 내로 성취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사건이 있은지 두 달만에 그는 죽었다(Clarke). 신 13:5에는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는 자를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본절의 '패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라'(*)는 신 13:5의 '배반'과 같은 용어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저주가 두 달 후에 하나냐에게 발생하였다.(왕하 1:17;7:19, 20;8:10-15 참조).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 사건은 분명히 예레미야가 참선지자란 사실을 입증하는 데 일조(一助)하였을 것이다.

성 경: [렘28:17]

주제1: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주제2: [하나냐의 말로]

(주); 그 해 칠 월에 죽었더라 - 1절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하나냐에 대한 저주 예언이 5월에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두 달만에 일어난 것이다. 하나냐는 2년 내로 유다가 회복되리라고 예언했으나 자신은 두 달 내로 죽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선지자의 말을 성취시킨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레미야의 다른 예언들도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만했다.

성 경: [렘29:1]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보내었는데 - 본장은 긴 산문체 단락인데 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간의 편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네 통의 편지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보낸 것이고(1-14,21-23절), 다른 하나는 바벨론에 있는 스마야가 스바냐에게 보낸 것(26-28절), 그리고 또 하나는 예레미야가 스마야에게 보낸 것(24절), 마지막 것은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두 번째 서신(30-32절)이 그것이다. 정확한 연대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본장의 역사적 상황은 바벨론의 2차 침입(B.C. 597년, 왕하 24:8-16) 직후인 것으로 보인다(Thompson). 그리고 본절의 '남아 있는 장로들'이란 표현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장로들 중에 일부가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처형의 이유는 본장에서 언급될 바벨론에서의 선동과 폭동 때문이었을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29:2]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여고니야 왕과 국모와 환관들과...떠난 후라 - 예레미야의 서신이 바벨론으로 보내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왕하 24:12-16). '환관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리심'(*)은 아마도 궁정 내에서 활동하던 관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52:25;삼상 8:15 등 참조). 창 39:1에는 보디발이 이 단어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내시와 같은 결혼할 수 없는 관리를 뜻한다고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사리심'으로 명명되고 있는 직책이 원래는 왕궁의 내실을 관리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차츰 그 기능이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백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레'(*)는 아마도 왕가의 귀족들을 포함한 관리들의 또 다른 명칭이었을 것이다.

성 경: [렘29:3]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의 손에 - 어떤 학자는 본절의 엘라사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26:24)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형제였을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는 요시야 왕 때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대하 34:9-22)의 아들일 것으로 설명하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Bright). 아무튼 예레미야가 편지를 보낸 경로는 외교적 임무를 띤 자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이들 사신들은 요시야의 개혁 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설교에 아마 큰 감동을 받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내진 임무는 단순히 연례 행사로 바치는 조공 문제 이상의 보다 더 복잡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여호야긴이 유다 주변 국가들과 반바벨론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조기에 실패로 끝나고 만 일이 있은 다음에 느부갓네살에 대한 시드기야의 충성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보내졌을 공산이 더 크다(27장). 그렇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은 봉신과 군주 간의 통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고대 세계에 비교적 먼거리에 떨어져 있었으면서도 외교적 문서가 자주 왕래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되어 애굽의 바로 왕에게 전달된 B.C.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Thompson).

성 경: [렘29:4]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만군의 여호와...이같이 이르노라 - 이것은 이 서신의 서두였다(Clarke).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종 느부갓네살을 대행자로 사용하여서 포로들을 그곳으로 옮겨놓으셨다는 내용이 다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3인칭에서 1인칭으로 화법이 바뀌는 것은 예언적 서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Thompson).

성 경: [렘29:5]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 예레미야가 제시하고 있는 충고는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곧, 집을 짓고 열매를 심으며 포로지에서 정착하라는 권고이다. 에스겔서에서도 암시되고 있다시피, 그들에게는 정착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들의 공동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겔 8:1;14:1). 어쨌든 정착 생활에 대한 예레미야의 권면은 포로기가 2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던 낙관적인 선지자들의 말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유다 땅이 아닌 포로지에서라 하더라도 정착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했고 성전과 희생 제사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7:1-15, 21, 22).

성 경: [렘29:6]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 예레미야의 이 같은 당부의 말은 포로로 잡혀 간 곳에서 그들이 이제 오랫동안 체재(滯在)할 것이므로 그에 대해 준비를 갖추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땅에서 번성하여 강한 민족이 되라는 뜻이었다(Clarke). 그런데 비교적 자유가 보장된 포로 생활이었지만 이에 대한 예외도 있었다. 예컨대 여호야긴은 갇혀서 지내야 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에윌므로닥의 즉위 때, 곧 B.C. 562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2:31-34;왕하25:27-30, Nicholson).

성 경: [렘29:7]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본절에서는 또한 그들이 체재하고 있는 나라 바벨론의 번영과 평안을 위해 노력하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벨론 왕권의 번영을 구하고 또 그들의 평안을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는 포로민들에게 납득되기 힘든 말이었다. 이것은 유다 민족이 자신들의 행복과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국가, 왕권, 군대, 국경, 성전 등을 내버리고 표류하라는 것과 사실상 동일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더라도 여호와에 대한 바른 신앙을 확보한다면, 여호와께서 이 민족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것이며 그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곳에 있는 자들은 바벨론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끌려왔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 충고에 대해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러나 이 충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였으나 실제적이고 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사건의 결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어떤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에 회복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Thompson).

성 경: [렘29:8,9]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어떤 주석가들은 본 두 구절이 7, 10절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15절 다음에 놓이는 것이 적절하게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앞 구절들에 대한 보다 확대된 강조 설명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불필요하다. 거짓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잠시 잠깐일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예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니며, 그들이 주장하는 예언이 거짓임을 확신시켜주고자 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하나냐와 같은 자들로서 그는 이들 부류의 대표자였었다. 그들은꿈꾸는 자, 복술, 술사, 요술객들과 접맥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어떤 헛된 예언의 정보를 받았던 것 같다(27:9 참조). 이러한 선지자들 중에 몇몇은 반란을 주도하였으며, 민족에게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본장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21-23절).

성 경: [렘29:10]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본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와 의도가 무엇인지가 언급되고 있다. 바벨론에서의 70년이란 기간이 차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한편, 근동의 패자로 급부상하였던 바벨론 제국의 권세가 불과 70년만에 몰락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본절의 예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7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굳이 엄밀하게 계수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25:11 주석 참조). 니느웨의 멸망이 B.C. 612년에 일어났고 이때로부터 바벨론 권세가 시작된 것으로 한다면 바벨론 멸망이 B.C. 539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73년간이 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즉위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 멸망 때까지 66년간이란 기간이 된다.

성 경: [렘29:11]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너희 장래에 소망(*, 아하리트 웨티크와) - 이에 대한 직역은 미래와 희망이란 의미이다. 이는 두 개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하는 증언적 표현법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너희가 바라던 미래, 대망하던 미래,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란 뜻이다(Bright, Feinberg).

성 경: [렘29:12]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 자기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생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곧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재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래에 이 백성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이전에 누리던 특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마 예레미야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는 여호와를 향한 원망과 그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또 그에게 기도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에는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암 5:4-6;호 2:16-20). 반면에 여호와는 패역한 길에서 돌이키지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언약의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겔 2:3-5; 33:17-20).여호와의 축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에는 순종과 충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우선적으로 요청되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 33:10)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백성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백성에 대해서 여호와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성 경: [렘29:13]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 여기서 '전심으로'(*, 베칼레바브켐)라는 말은 '네 마음을 다하여'란 뜻으로서 감정적인 면보다는 의지적인 측면에 더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성 경: [렘29:14]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돌아오게 하리라 - 13절에 제시된 약속이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다. 즉 언약의 축복이 유용하게 될 것이란 내용으로서 신 30:3-5에 언급된 약속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Delitzsch).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여호와를 거부하고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절로 허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성 경: [렘29:15]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 메시지의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은 15절에서 21절로 넘어간다. 본절만을 가지고 살펴보면 16-19절은 회복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유다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70인역에서는 16-20절의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성 경: [렘29:16]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다윗의 위(位)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 본절에서는 메시지의 대상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 당시 다윗 계통의 왕인 시드기야와 이들 백성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설사 그들이 B.C. 597년의 심판에서 벗어나고 화를 모면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여전히 심판 아래에 놓여 있었던 것이며, 그들에게 임할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

성 경: [렘29:17]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 여기 언급된 징법 수단들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도 누차 발견된다(17, 18절;15:2, 3;24:10;42:17;44:12 등). 그리고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란 표현은 24장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24장과 이곳은 둘다 아직 유다에 살고 있는 자들을 공격하는 논쟁이며 그와 함께 B.C. 597년 이후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의 말씀이다(Thompson). 또한 선지자는 현재 다윗의 왕자에 앉아 있는 시드기야를 부러워하지 말고 더군다나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왜냐하면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은 유다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형편보다 더 참혹한 운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렘29:18,19]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B.C. 597년 이후에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종을 통하여서 말씀하셨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행위를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재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고집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은 불가피했던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9:20]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 - 여기서는 다시 화제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블레이니 박사(Dr. Blayney)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가 두 개였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게 사신으로 보낸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가 귀환했을 때 예레미야는 자신의 충고가 그들에게 적절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바벨론의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포로들 중에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허황된 설교에 속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두번째 서신을 기록해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21-23절 내용을 14절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

성 경: [렘29:21]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 이 두 사람은 바벨론의 포로들 중에 있었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설교에 반기를 들고서 유다의 번영과 평안을 주장하였던 허황된 예언이B.C. 597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한 파멸에도 불구하고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던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낙관주의는 엄청난 고통을 자초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계속해서 거짓을 예언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역시 악하고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23:9-15). 그들은 동료, 이웃의 아내들과 간음을 행하였다(23절).

성 경: [렘29:22]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불살라 죽였는데, 이러한 화형은 바벨론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시행되었던 처형법이었다(함무라비법전 25, 110, 157;단 3:6). 이 두 거짓 선지자의 죽음은 저주를 나타내는 하나의 속담같은 것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저주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29:23]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바벨론 포로에게 보낸 편지]

(주); 그들에게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 예레미야는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의 처형을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거짓 예언에 대한 징벌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처벌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범죄 때문이 아니라 국가 반란과 선동죄로 처벌하였을 것이다.

성 경: [렘29:24]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결말]

본절을 26-28절에 포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예레미야가 스마야 개인에게 보낸 경고 서신으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에레미야의 서신을 보고서, 포로지에서는 심한 반발이 일었으며 그 반발을 부추킨 중심 인물이 바로 스마야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스마야에게 경고조로 개인 서신을 보내었다고 이해할수 있다. 이 서신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되어 있으며, 곧바로 스마야가 예레미야를 고발하는 내용의 편지가 이어진다(26-28절). 한편 스마야란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마야를 수식하는 말인 '느헬람 사람'에 대해서는 (1)출신지로 보는 견해(Calvin, Thompson), (2)가계명(family name)으로 보는 견해(Harrison), (3)'꿈꾸는 자'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1)이 보다 무난한 듯하다.

성 경: [렘29:25]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결말]

(주); 네가 네 이름으로...스바냐와 모든 제사장에게 - 예레미야는 여기서 스마야가 스마야 자신의 이름으로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유사이기도 하였던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비난한다. 스마야가 마치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처럼 가장했지만 실상은 자기 임의대로 편지를 썼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Delitzsch). 이런 비난은 3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 뒤에는 이곳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29:26,27,28]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결말]

여기서부터는 스마야의 편지의 내용이 요약되어 설명된다. 스바냐는 당시 여호야다의 직위를 물려받은 성전의 제사장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 자리를 바스훌이 차지하고 있었다(20:1-6). 이 사람은 B.C. 597년에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잡혀갔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시드기야의 특사로서 예레미야를 방문하여 두번씩이나 그의 조언을 구한 바 있다(21:1;37:3). 그는 예루살렘 멸망 후인 B.C. 586년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52:24-27;왕하 25:18-21).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들이 확실하게 발생되었고 또 성취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여전히 '미친자'로 취급당하고 있다.

성 경: [렘29:29]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결말]

스마야의 지적은 스바냐가 아나돗사람 예레미야를 자유 상태로 내버려 둠으로써 성전 유사로서 해야 할 바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이며 미쳤고 또 자칭 선지자이기 때문에 마땅히 착고에 채워져야 하며 칼을 씌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드러난 스바냐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Delitzsch). 스바냐가 예레미야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는 어떤 경고 조치를 취했는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예레미야가 스마야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던 점에서 어떤 특별한 경고 조치는 없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렘29:30,31]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결말]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여호와의 메시지를 포로민들에게 써 보낸 내용이 소개된다.

(주);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 예레미야는 하나냐를 상대로 했던 말과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여 거짓 선지자 스마야에 대한 예언을 포로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다(28:15, 16). 즉 스마야는 거짓을 예언하였으며 또 그것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그를 처벌하실 것이고 또 그의 후손들도 징계하실 것이다.

성 경: [렘29:32]

주제1: [바벨론 포로민들과의 서신]

주제2: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결말]

스마야에 임할 저주로 끝맺고 있는 본장의 마지막 절은 본장의 끝일 뿐만 아니라 26-29장에 달하는 하나의 단락의 결말이기도 하다. 26-29장의 각각의 장들은 여호와의 종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 백성이 거부하고 있다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장 내에서는 이러한 거부에 대한 심판 선언의 내용이 뒤따랐다. 당신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하고 또 언약에 순종치 않는 것은 언약의 파기였으며, 그 결국은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성 경: [렘30:1]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여호와께로서 말씀이...이르시니라 - 이 예언은 바벨론의 2차 침입으로 인한 포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전달되었던 것 같다(Dahler, Clarke). 본장과 31장이 70년이 지난 후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될 것에 대한 예언을 싣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블레이니 박사(Dr. Blayney)는 본장과 31장을 유다와 이스라엘의 복음 시대에서의 회복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를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예언함과 동시에 종말론적인 해방과 궁극적 회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Clarke).

성 경: [렘30:2]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 본절과 앞 구절은 한 단락에 대한 서론에 해당한다. 이 단락은 30-33장까지로서, 전체적으로는 갱신과 복구에 대한 메시지가 요약되어 있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는 위임 명령은 36장에서도 나타난다(36:2, 4, 17, 18, 28-32). 아마 예레미야는 그의 개인 서기 역할을 했던바룩(36:4)에게 대필시켰을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한 민족에게 있어서 그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심판에 관한 신탁의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렘30:3]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 예언적 서술에서 '때가 이르리니'라는 표현은 때로는 종말론적인 사건을 뜻하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항상 종말론적인 사건을 가리켰던 것은 아니다. 이 말과 함께 주어진 예언과 약속은 종종 보다 짧은 적당한 시기에 성취되었다. 그리고 '돌이키다'란 말의 히브리어는 '웨솨베티...쉐부트'(* ... )인데, 구약에서 빈번하게 쓰이며 재산 따위를 '회복시키다'란 의미로도 해석된다(욥 42:10;겔 16:53). 여기서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포로를 돌이키다'라고 번역하는 편이 가장 타당하리라 본다(KJV, NIV). 아울러 이는 여호와의백성들의 재산이 회복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겠다(I willrestore the fortunes, RSV). 한편 본절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란 말로써 여호와의 백성을 이중적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곧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이 모두 여호와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는 표현이다. 실제로 본장의 많은 부분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주대상으로 하고 있다.

성 경: [렘30:4]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 이 구절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5-24절의 운문 단락의 제목 역할을 하고 있다. 본서에는 이런 형태의 제목들이 빈번히 쓰인다(7:1;11:1;14:1;18:1;21:1 등).

성 경: [렘30:5]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 여기서 예레미야는 앞에서 언급된 회복의 약속이(3절) 성취되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중한 시련 속에서 연단되어질 것을 시사한다(Feinberg). '떨리는 소리'(*, 콜 하라다)란 극심한 환난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종종 등장한다(4:31;6:24;13:21;22:23;49:24;50:43). 여기서는 바벨론 포로기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거나, 특히 고레스가 바벨론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백성이 느끼게 될 공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30:6]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해산하는 여인같이 손으로 각기 허리를 짚고 - 이와 비슷한 내용이 사 13:8에 언급되고 있다. 이는 평화와 번영이 끝났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성 경: [렘30:7]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본절의 신탁은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로 끝난다. 그런데 이것이 희망에 대한 서술이냐 아니면 풍자적인 말이냐 하는 문제가 제시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본시의 서두에 묘사되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를 '그가그 고난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문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Bright).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구두점들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가 매우 모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희망을 나타내는 자료의 서두에 쓰이고 있기 때문에 절망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라고 보기는 무리일 것 같으며, 오히려 시련과 고난 끝에 마침내 도래하는 회복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로 봄이 더 타당하다(Thompson, Nicholson).

성 경: [렘30:8]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본절과 다음절(9절)은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구절이 5-7절과 10, 11절의 운문의 연결을 차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곳의 히브리어 원문이 비록 산문체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운율이나 박자 등은 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 문장의 흐름을 어색하게 할 절오는 아니라 하겠다(Thompson). 한편, 멍에(*, 올)란 느부갓네살을 위시한 모든 이방의 압제자들로 인한 억압 상황을시사하는 말이다(27:2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자유와 해방을 노래하고 있다. 또 본절과 9절에는 메시야 시대에 있게 될 위대한 해방에 관한 암시가 매우 뚜렷이 나타난다. 본절에 언급된 바, 이방인의 모든 멍에를 꺾어버릴 분은 오직 메시야 한 분 밖에 없을 것이다(겔 34:23;호 3:5). 이러한 압제의 멍에가 꺾어지면,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메시야의 은혜로운 멍에를 메게 될 것이다(마 11:29,30).

성 경: [렘30:9]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 회복의 목적은 이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깨달아 경배하게 하는데 있었다. 너희 왕 다윗 - 이는 대망의 메시야,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겔 34:23, 24;37:24, 25;호 3:5 등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나타난다(Bright).

성 경: [렘30:10]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구원하리니 - 본절과 다음절(11절)은 46:27, 28에서 반복되고 있다. 70인역(LXX)에서는 이 구절들이 46장에서만 언급되나 문맥상 여기서도 잘 어울리는 내용이다.

성 경: [렘30:11]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구원받을 유다]

본절의 내용은 본서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다'란 표현은 1:8;15:20에서,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이란 표현은 9:16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4:27;5:10, 18;46:28 등에서 나타난다.

성 경: [렘30:12]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징계와 회복]

(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 절망적인 상황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형태의 본 단락(12-17절)은 본절의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로 시작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는 말로 끝맺는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의 상처와 고통이 스스로 지은 바 죄악때문임을 밝히며,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회복 불가한 그때에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 단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비슷한 말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본절의 '상처', '창상', '고칠 수 없고', '중하도다', 13절의 '송사', '상처','변호할 자가 없고', '약이 없도다', 15절의 '상처', '고통'등을 들 수 있다. 본절의 '상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쉬브레크'(*)란 말의 '레'(*)는 다음에 이어지는 좋은 용례일 것이다. 이런 용례는 9:3에도 쓰이고 있는데, 거기서는 '레무나'(*), 곧 '진실 그 자체'로 번역될 수 있다(Thompson).

성 경: [렘30:13]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징계와 회복]

'변호할 자가 없고'는 모든 친구와 동맹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Bright). 그리고 '싸멜'이라 번역된 '테알라'(*)는 '붕대', '치유' 또는 상처 위에 새로운 피부를 형성시키도록 하는 '치료 약'을 말한다.

성 경: [렘30:14]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징계와 회복]

(주);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 여기서 '사랑하던 자'란 유다와 정치적으로 동행을 맺었던 나라들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유다를 잊어버렸고 더 이상 돌보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 동맹국들 중의 대표적인 나라는 애굽과 애돔이었다(27:3;옵 1:7-14). 애굽은 수차에 걸쳐서 바벨론에 대항하여 반역할 것을 부추겼다(37:5-7). 비록 애굽 군대가 B.C. 588년경에 예루살렘을 포위해 오는 바벨론 군대와 맞서서 싸우려고 하였던 적이 있으나 그들은 이내 철수해버렸으며, 결국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37:1 이하). 그러나 유다를 치신 분은 궁극적으로 여호와 자신이었다.

성 경: [렘30:15]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징계와 회복]

본절과 유사한 내용이 14절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이를 여분으로 삽입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후렴구와 같은 것이었을 수 있다(Thompson).

성 경: [렘30:16]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징계와 회복]

(주);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 본절에서는 앞 단락의 장면과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이제 파국의 날이 지난 다음의 희망적인 장면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유다에 해(害)를 끼쳤던 자들은 심판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유다의 적들이 유다를 '먹어 버린다'는 표현은 2:3;5:17;8:16;10:25등에서도 발견된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을 자신의 종으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한 다음, 그 후에는 친히 갈대아인들에 대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보다 한세기 이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에 대한 예언에서 이와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 바 있다(사 10장). 앞뒤 문맥을 따져보면 이곳에 제시되고 있는 유다의 적들에 대한 심판의 약속은 분명 주제의 급전환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종종 심판 메시지에서 갑자기 구원 메시지로 주제를 옮겨가며 예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5절에서 본절로의 주제 변화와 진전은 결코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성 경: [렘30:17]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징계와 회복]

(주);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 때가 무르익게 되면 12, 15절에서 언급된 '고칠 수 없는'것이 '치유할 수 있게'될 것이다. 한편 본절의 '시온'이란 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북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유다의 상징인'시온'이란 말이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문은 남북 왕국의 백성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룬다는 포괄적 의미로 이해함이 더 자연스럽다.

성 경: [렘30:18]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주); 내가 포로 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 본절에는 갱신의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제까지는 다소 일반적인 언급이었음에 비해 여기서는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킨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말로 표현되고 있다. '장막'이란 말은 '족속'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장막에 사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Thompson). 한편 '야곱의 장막'이란 말은 출애굽 당시 발람이 예언하였던 신탁에서 쓰이고 있다(민 24:5).

(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 '자기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텔'(*)은 '흙 무덤'으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파괴되고 내버려진 성읍의 폐허가 묻혀 있는 언덕'을 뜻한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지명에 이런 '텔'이란 말이 복합어로 종종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 때문이다(Bright). 또한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성읍'과 '궁궐'이란 말은 유다의 총체적 회복을 암시하는 집합적 의미를 띤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것이 단수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대표적인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왕궁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

성 경: [렘30:19]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웃는 자들의 소리'이다. 이제 포로 당시의 애가와 고통 대신에 평화와 번영으로 인한 즐거운 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겔36:33-38;암 9:11-15;슥 8:4-13).

성 경: [렘30:20]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주); 그 자손은...굳게 설 것이며 - '그 자손'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앞으로 그들은 옛 상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회중'으로 번역되고 있는 히브리어 '에다'(*)는 종교적 예배를 위해서나 또는 전쟁과 같은 어떤 정치적 목적에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12:20 참조). 따라서 이는 그들이 자주 독립 국가로서 정치적 제도를 완비하게 되며 아울러 민족 단위의 성전 예배를 회복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암시한다.

성 경: [렘30:21]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주); 그 왕은 그 본족(本族)에게서 날 것이요...접근할 자가 누구뇨 - 이는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브라이트(Bright)는 이를 다윗 시대의 영광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클라크(Clarke)는 느헤미야와 스룹바벨과 같은 후대의 통치자가 다름 아닌 그 족속 유다인임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를 다윗 계통에서 일어날 메시야적왕으로 한정시켜서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Feinberg). 이 견해는 본절 하반절에 의해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구약적 용법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갖는다는 것은 제사장적 사역과 신분을 소유함을 의미한다(슥6:13). 본문의 왕은 아무 중보자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 멜기세덱처럼 제사장적 사역까지 담당하게 될 것이다(시 110:4;히 5:4-10).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본절은 수사 의문문으로 끝나고 있다. 한편 탈굼역(Targum)은 '왕'을 아예 '메시야'로 의역해 놓고 있다.

성 경: [렘30:22]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주); 너희는 내 백성이...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이것은 언약 체결 때에 흔히 나타나는 공식 문구이다. 70인역(LXX)에는 이 말이 빠져 있으나 이것은 회복 약속 전체에 대한 최종 목적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구절이다. 즉, 이스라엘은 마침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형태로 여호와와 결속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부르심의 참된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택된 백성이 되도록 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출 19:5,6). 언약 체결은 '너희 하나님'과 '내 백성'이라는 말로 압축된다(7:23;11:4;레 26:12등).

성 경: [렘30:23]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주); 여호와의 노가...폭풍과 회리바람처럼 - 본절과 다음절(24절)은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23:19, 20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현문맥에서 이것은 다른 각도에 적용되고 있다. 다시말해서, 이는 11절과 16절에 언급된 바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임할 심판 약속에 대한 강조적 의미에서 다시 덧붙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Thompson, Bright). 아울러 본절은 악인이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되며 오히려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적, 윤리적 목적은 앞에 언급된 희망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렘30:24]

주제1: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회복의 구체적 내용]

(주);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 이는 여호와의 의도와 목적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이 올 때에 확연히 이해되어질 것이다. 여기서 '말일'을 굳이 종말론적 개념을 가진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된 후를 뜻하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

성 경: [렘31: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30:22의 약속이 다시금 반복된다. 그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모든 회복과 갱신의 약속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30:3).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30:1-24의 내용을 결론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소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31장의 제목으로서 쓰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성 경: [렘31: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은혜를 얻었나니 - 본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오던 사건으로 소급되고 있으며 특히 바로 군대가 홍해까지 뒤쫓아온 위급한 상화에서 구출된 것을 말하고 있다(출 14:5-23). 또한 광야에서 방황하는 동안 여호와의 보호하심과 은혜로 생존할 수 있었음도 아울러 거론된다. '은혜를 얻었나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차 헨'(*)은 출 33:12-17의 기사에서 무려 5번이나 나타난다. 한편 '곧 내가 이스라엘로...갈 때에라'에 대한 맛소라(M.T.)의 문자적 번역은 '이스라엘, 그를 위하여 안식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서 절대 부정사로 표현되고 있다. 이 구문의 주어를 여호와로 볼 것이냐(KJV, NIV) 아니면 이스라엘로 볼것이냐(NEB, RSV)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였으며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별 차이를 주지 않는다(출 33:14;신 28:65). 결국 이스라엘의 포로는 여기서 새로운 광야에서의 방황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호 2:14, 15).

성 경: [렘31: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옛적에'라고 번역된 '메라호크'(*)는 시각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공간적 의미에서 '멀리 떨어진'이란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후자의 의미를 취할 경우, 이는 이 백성이 시온을 떠나 이방 포로지 멀리에 있는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을 의미한다(Delitzsch). 또한 본절에는 언약과 관련된 두 개의 중요한 낱말인 '사랑'과 '인자함'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 특히 '인자함'에 해당하는 원어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245회나 나타나고 있으며, 대부분 언약과 관련된 상황에서 쓰이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31: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여기에는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에서 등장하였던 '세우다', '심다'란 말이 쓰이고있다(1:10). 그리고 2-6절이 북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지라고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다른 곳에서 흔히 처녀 시온이란 말로서 등장하는 것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처녀 이스라엘아'란 어구를 대단히 강조해서 설명한다. 이는 5, 6절에 언급되고 있는 사마리아와 에브라임이란 말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물론 본장에는 메시지의 대상이 북이스라엘과(1-22절) 남유다(23-26절)로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6절의 '시온'이란 말이 분단된 민족적 현실에서 통일 시대, 더 나아가 메시야 시대를 예견하는 예언에서주로 사용되었음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사 2:3;미 4:2).

성 경: [렘31: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 이 문구는 번역하기가 대단히 난해하다. 문자적으로는 아마 '심는 자가 심었고 일상 용도로 사용하리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구의 의미는 '할랄'(*)이란 동사의 의미에 의존하게 된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거룩한 것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세속적 용도로 사용하거나 또는 일상사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레 19:23-25에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농산물을 거둘 때, 제 3년째까지는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겼으며 제 4년째 거둔것은 여호와께 바쳤고 제 5년째의 것을 비로소 일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문자적 번역에 의존하더라도 본 문구의 의미는 한글 개역성경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이제 회복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다시금 돌아가 자신의 경작한 수확물을 일상 용도로 사용하며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Delitzsch,Feinberg). 아울러 여기서는 대적들에 의해 포도원이 훼파되는 불행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약속도 엿볼수 있다(사 62:8, 9;65:21-23 참조).

성 경: [렘31: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나아가자 -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던 솔로몬과 그의 선친 다윗 시대에 이 '시온'은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다윗에 의해 옮겨진 법궤가 거기에 안치되었다. 그 후 여로보암이 다윗 왕조에 반발하여 북쪽 왕국을 건설했을 때 그는 북쪽의 벧엘과 단에 예루살렘에 필적할 만한 종교 중심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새로이 회복될 그때가 되면 옛 북쪽 왕국의 사람들도 시온으로 모여들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31: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만국의 머리 된 자 - 앞의 '야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혹자는 이를 '산들의 최정상'이란 뜻으로 번역하나(Hyatt), '이스라엘'을 가리켜 만민 위에 뛰어나다고 언급하는 내용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므로(신 26:19;암 6:1)개역 성경의 번역이 더 타당하다. 본절은 장차 회복될 이스라엘로 인한 감격과 기쁨을 여러 동사로써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기쁨과 환호의 외침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사 12:6;14:7;54:1등).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해서는 사 4:1-6 주제 강해 '남은 자에 관한 역사적 이해'를 참조하라.

성 경: [렘31: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 여호와께서는 지상의 모든 지역에서부터 자기 백성을 모으실 것이고 이러한 구원을 훼방할 장애 요인은 모두 극복될 것이다. 특히 '소경과...해산하는 여인'등과 같이 장거리 여행에 큰 부담이 되는 자들까지도 이 행렬에 끼게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권능이 함께하실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Feinberg).

성 경: [렘31: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 이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신 32:6에서 아버지란 말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의 밀접한 유대 관계를 묘사하는 데 쓰이고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여호와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표현한 바 있다(호 11:1-4). 예레미야도 이 말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다.

성 경: [렘31:1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본절의 단어와 어구들은 이사야서 후반부의 내용을 강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사 40:11과 비교해보자.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또한 본절의 '열방'이란 말과 '섬'이란 말은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대단히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Nicholson).

성 경: [렘31:1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 '구속하다'로 번역된 '파다'(*) 역시 이사야서 후반부를 특징지워주는 말이다. 그리고 본절 앞 부분의 '속량하다'로 번역된 '고엘'(*)과 더불어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람이나 재산과 관련되어 흔히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해서 자기 토지나 재산을 팔지 않으면 안 될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그것을 구입하고 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속량이었다(레 25:25, Nicholson). 한편 이러한 낱말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사건을 나타낼 때도 자주 쓰이고 있다(출 6:6;15:13;신7:8;9:26).

성 경: [렘31:1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이곳에 언급되어 있는 곡식이나 포도주 등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생산되었던 주요산물들이었다(호 2:5, 8).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러한 산물들은 시적 은혜를 가리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또 '물댄 동산 같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즐거움과 기쁨으로 노래하게 될 것이며 항상 기도하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할 것이다(Clarke).

성 경: [렘31:1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처녀는 춤추며...즐거워하리니 - 70인역(LXX)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읽고 있다: '처녀들은 청년들의 무리 속에서 행복할 것이고 노인들은 청년들의 무리 속에서 행복할 것이고 노인들은 결혼할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맛소라 사본에서 다소 이탈된 의역이긴 하지만 문맥과는 잘 어울린다. 슬픔과 눈물은 이제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위로를 주실 것이고 슬픔 대신에 즐거움을 베푸실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1:1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하며 - 이는 백성들이 제단에 바치게 될 제물에 의해 제사장들이 받게 될 몫을 가리키는 표현이다(Nicholson). 여호와 신앙과 예배가 새롭게 회복됨으로 해서 백성들이 성전에 가져오게 될 희생물 중에서 그들에게 할당된 것을 넉넉히 가지게 될 것이다.

성 경: [렘31:1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애곡하는 것이라 - 본절로부터는 북이스라엘의 귀환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B.C. 722년에 포로로 잡혀갔었다. 그리고 본절의 라헬은 북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지파였던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선조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들 지파는 북쪽 이스라엘 영토 중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라마'라는 지명의 문자적 의미는 '높은 곳'인데 이스라엘과 유다 국경지대의 베냐민 영토에 있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8km 가량 떨어진 오늘날의 엘-람(er-Ram)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삼상 10:2, 3에 따르면 라헬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었다. 한편 라헬이 자기 자녀로 인해 통곡한다는 내용은 마 2:16-18에서 헤롯이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살해시킨 사건에 적용되었다.

성 경: [렘31:16,1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앞절에서는 라마에서의 통곡소리를 언급한 후, 이제 여기서는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가 제시된다. 결국 15절은 본문에 언급된 소망의 메시지를 보다 극적으로 전달함과 아울러,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공의를 깨닫게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위로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보여준다(Calvin). 시련과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겸배해진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는 새로이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인내로써 기다려야 한다는 사상은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구절 속에 잘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최후'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하리트'(*)는 '마지막'(KJV), '장래'(RSV, NIV), '후손'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성 경: [렘31:1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앞으로 하게 될 고백과 심경의 토로를 담고 있다(Nicholson).

(주);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 이것은 에브라임이 뉘우치며 내뱉는 통한의 부르짖음이다. 에브라임은 포로에서의 고난을 통해 겸손해지고 낮아졌다. 따라서 이제 에브라임의 귀환이 허용될 때, 그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다.

성 경: [렘31:1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 고로 - 과거의 죄와 어리석음, 그리고 우상 숭배를 부끄럽게 여기고 회심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회개에 있어 자신의 잘못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인 절차이다.

성 경: [렘31:2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자식이 아니냐 - 회개의 부르짖음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에브라임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 자신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위로의 말로써 주어진다. 이 구절의 사상은 호 11:1-4, 8, 9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하면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자녀들에게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인해 연단받은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히 12:11).

성 경: [렘31:2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 여기서 '길표'란 돌무더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돌무더기들은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지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이처럼 길표를 만들어 둠으로써 그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이다(Clarke). 이는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해 실의와 좌절에 빠진 자들에게 귀환의 확신을 심어주는 메시지였다.

성 경: [렘31:2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이는 본서 전체에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에 속하며, 해석도 가지 각색이다. (1)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이다(Jerome). (2) '처녀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Hyatt). (3) 전쟁시에 여인들이 대적들을 무찔러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게 되리라는 말이다(Cundall).(4) 이제까지는 주께서 이스라엘(여인)을 사랑으로 안으셨으나, 새 날이 이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것이라는 의미이다(Jenson). (5) 이스라엘이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이방 열국들을 제압하게 된다는 의미이다(Ironside). (6)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능가하는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Calvin). 이러한 제 견해들 중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선택하기는 힘들다. 다만 우리는 본절 내용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새 일'이 하는 점에 근거하여,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킨다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성 경: [렘31:23,24,2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에브라임의 귀환과 회복이 예언된 후, 여기서는 그것과 동일하게 강한 확신에 찬 어조로 유다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유다 백성이 돌아오면 그들도 엄청나게 번영할 것이다. 경건과 근면함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때 여호와는 그들의 진정한 안식처가 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또 예루살렘은 의로운 성이 될 것이고 그 성전은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약하고 지친 자들이 거기서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며, 슬픔을 당한 자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Clarke).

성 경: [렘31:2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 본장 2절에서 시작되어 25절에서 끝나고 있는 예언이 예레미야에게 꿈으로 전달되었던 것 같다(Clarke, Feinberg, 단 10:9;슥 4:1). 혹자는 이것을 꿈, 곧 그의 소망과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해 보기도 한다. 즉 이스라엘의 번영을 목격하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그때가 되면 무덤에서 깨어나서라도 그러한 번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Dahler).

성 경: [렘31:2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주);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과 가축을 번성케 하실 것임을 말한다(Clarke). 공동 번역은 이를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고 쉽게 번역하였는데, 결국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창 22:17)에 대한 확증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성 경: [렘31:2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이 구절은 심판과 심판 후의 갱신이라는 이 책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1:10참조).

성 경: [렘31:29,3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

여기서는 범죄에 따르는 형벌이 각 개인의 책임으로 주어지게 됨을 강조한다. 이는 아마, 조상들의 잘못으로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포로민들의 잘못을 염두에 둔 말씀인 듯하다.

(주); 아비가 신 포도를...아들들의 이가 시다 - 이 말은 당시 유행하던 속담인 것 같으며, 어쩌면 출 20:5, 6에서 착안되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이 지은 죄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일관되게 교훈한다(신 24:16). 에스겔도 이와 유사한 언급을 하고 있다(겔 18:2-4).

성 경: [렘31:3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구역에서 '새 언약'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비록 짧은 내용이긴 하지만 본절로부터 34절까지는 본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훗날 쿰란(Qumran) 공동체는 여기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새 언약의 사람들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새 언약은 강력한 율법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서 모세 언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분명 본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이 피언약에 대한 예언이라 할수 있다(눅 22:20;고전 11:25;히 8:8-9:28).

성 경: [렘31:3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이 언약은...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 새 언약의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 간에 시작된 언약이 제시되고 있다(출19:1-24:11). 언약의 계속적인 존속 여부는 여호와를 계속적으로 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 곧 언약에 규정된 조항과 약속에 대한 계속적인 순종 문제에 달려 있었다(11:1-8). 이러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면 심판과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이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반면에 순종은 언약의 축복을 가져왔다. 그러나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언약 규정 조항에 순종하는 데 언제나 실패했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강력한 구원의 능력으로써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첫 번째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다(Thompson, Bright).

성 경: [렘31:3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 이제 여호와는 백성들의 내적인 성품의 변화를 주실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선언하신다. 즉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기록할 것인 바 이는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전인적이고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롬8:1-11). 한편 옛 언약은 돌 위, 혹은 책에 기록되었었다(출 24:7;31:18;신 4:13). 그리고 기록될 장소로서의 '마음'이란 표현은 17:1에서는 죄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

성 경: [렘31:3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 여기에는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일어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이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 중보(仲保)가 필요없이 작은 자에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여호와를 알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사 54:13에도 나온다. 이 말은 신약의 성도가 믿음의 선배로부터 전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체험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외부의 지시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신령한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Cunliffe-Jones). 한편,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깊고 친밀한 인격적 앎이라는 대단히 심오한 개념을 담고 있다.

성 경: [렘31:3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 이 구절은 창 1:16, 17의 내용으로 소급해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도 이곳에서 쓰이고 있는 '주다'란 뜻의 히브리어 '나탄'(*)이 해, 달, 별들과 관련해서 쓰였다. 또한 바다와 파도를 소용돌이치게 한다는 서술도 다른 곳에서 나온다(사 17:12;51:15;시 46:3 등).

성 경: [렘31:3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 이는 해가 낮에 빛을 내고 달이 밤에 빛을 내는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리라는 예언이 기필코 성취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다음 절에서 다른 표현으로 재차 강조되고 있다.

성 경: [렘31:3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주);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 하늘을 측정하고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향해 지니신 하나님의 계획도 절대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라 식언치 아니하시며 한번 이루고자 작정하신 것은 그대로 성취하신다(민 23:19).

성 경: [렘31:38,39,4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새 언약]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언급함으로써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마감하는데, 재건될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다윗의 전성기의 그것에 비추어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시사한다.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북동쪽에 위치하였다(느 3:1;12:39;슥 14:10). 가렙 산은 예루살렘내에 있는 남서쪽 언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고아란 곳은 예루살렘 교외의 남동부의 어느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두 장소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또한 말 문이란 곳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었던 문으로서 기드론 골짜기를 향해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32:1]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시드기야의 제 십 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 십 팔 년 - 시드기야 제 십 년은 B.C.587년으로서, 이 연대와 비교해보면 느부갓네살은 B.C.605년 가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계산된다(25:1;52:12;왕하 25:8 참조).

성 경: [렘32:2]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뜰에 갇혔으니 - 2-5절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37, 38장과 거의 같은 연대에 속한다. 37, 38장에서는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잠시 철수하고 전진해오는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우러 가던 때에 예레미야가 체포되었으며, 왕의 관리들 몇사람에 의해서 적들을 이롭게 한다는 혐의로 고소되어 예레미야가 옥에 갇히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렘32:3,4,5]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유다 왕 시드기야는...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 바 되리니 - 이것의 문자적 해석은 '그리고 시드기야 왕의 입은 그의 입과 말하고 시드기야 왕의 눈은 그의 눈을 볼 것이니라'이다(Bright). 여기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에게 넘겨지게 될 것임을 선언한다. 시드기야 왕은 달아나지 못할 것이며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 나오게 될 것이다(왕하 25:4-7 참조).

(주); 시드기야가 나의 권고할 때까지 - 어떤 주석가는 '여호와께서 시드기야를 위하여 간섭할 때까지'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있게 될 것이라는 다소 보호적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이 예언은 시드기야 통치 초기 곧 반바벨론 입장을 노골화하기 이전의 상황과 관련되는 것이 된다(왕하 24:17, 18 참조). 그러나 여기서 '권고하다'로 번역된 동사 '파카드'(*)는 '돌보다'란 의미 외에 '멸하다'란 의미로서 부정적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다(Bright).

성 경: [렘32:6]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 본절은 2-5절에 의해 분리되었던 1절과 연결되고 있으며, 7절에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시작된다(Nicholson).

성 경: [렘32:7]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 바벨론 군대의 포위로 말미암아, 하나멜은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져 자기 밭을 팔아야 할 상황에 처한 것 같다. 레 25:23-28에는, 근족(近族)끼리는 위기와 곤경을 당할 때 상호간에 서로 무를 책임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아마도 하나멜은 이런 율법에 입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밭을 팔기 이전에 사촌간인 예레미야에게 선매권(先賣權)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Feinberg). 기업을 무를 권리에 대해서는 레 25:8-55 주제 강해, '근족의 의무'를 참조하라.

성 경: [렘32:8]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하나멜의 방문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이미 여호와로부터 어떤 확신에 찬 말씀을 받은 바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일상사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어쩌면 예레미야는 바로 이 문제로 아나돗으로 가는 도중에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37:11-14). 그리고 그의 사촌 하나멜은 갈대아인들이 애굽을 치기 위해 철수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와서 공격 하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레미야를 만날 수있었을 것이다.

성 경: [렘32:9]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은 십 칠 세겔을 달아 주되 - 그 당시 밭을 구입하는 데는 법적 절차에 따라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또한 당시에는 화폐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을 달아서 지불하였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은 십 칠 세겔을 달아 주었는데, 이 금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멜이 제공할 밭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한 세겔은 약 11.4g 정도 되는 무게인데, 그렇다면 십칠 세겔은 약 194g 정도 되었을 것이다(창 23:16 참조).

성 경: [렘32:10]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 예레미야는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제 매입 증서에 도장을 찍고 은을 달아 주었다. 한편 B.C. 5세기말경, 이집트의 엘레판틴(Elephantine)에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의 경우에 계약서는 파피루스에 기록되고 여러 번 접었으며 그리고 묶어져서 인봉되었다. 그리고 인봉되지 않은 복사본 한 통은 열람용으로 사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행이 있었다. 토판에 기록된 공식 계약서가 토판으로 된 봉투에 싸였던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2:11]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법과 규례대로 - 직역하면 '규정과 규칙'이다. 이것은 재산 소유권의 이전(移轉)과 관련된 규정과 매매에 관한 조건들을 말한다. 한편, 본절에는 봉인된 것과 봉인되지 않은 두개의 서류가 언급되는데, 봉인되지 않은 것이 정본의 요약서일 수 있으나, 정본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Bright). 하나는 보관용이었고, 또하나는 훗날 불법적인 계약 변경 따위에 대처하기 위해 매입자가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32:12]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시위대 뜰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 봉인된 것과 봉인되지 않은 두 개의 서류가 하나멜과 증인이 보는 앞에서 바룩에게 넘겨졌다. 이것은 정상적인 사업 관행에 따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시위대 뜰 앞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다소 예외적인 상황으로서,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한 순간에 있었던 계약 체결이었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기 때문(2절)인 듯하다.

성 경: [렘32:13]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바룩에게 명하여 이르되 - 이 행위 예언은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어떤 임무를 주는것으로 결론지어지고 있다.

성 경: [렘32:14]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토기에 담아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 - 여기서 '토기'(*, 켈리)란 것은 옹기 항아리를 가리키는데, 흔히 귀중한 문서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엘레판틴 유대인 공동체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도 모두 항아리 안에 담겨 있었다(Bright).

성 경: [렘32:15]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토지 매입을 통한 회복의 약속]

(주);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 이는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다시 이루어질 것임을 말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예레미야의 토지 문서는 대단히 귀한 값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는 바벨론 군대가 눈앞에 잇는 긴박한 시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력하게 말해주는 역설적인 소망의 메시지라 하겠다(Thompson).

성 경: [렘32:16]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 여기서부터는 예레미야의 기도가 시작되고 있다. 이 기도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황한 서술로 시작되고(17-23절), 이어서 적들이 예루살렘 성문에 가까이 와 있음에 대한 여호와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내용으로 결론지어진다(24절). 그리고 여기서 예레미야는 또한 전국토가 갈대아인의 침략에 황폐화될 시점에 여호와께서 밭을 사라고 명한 것에 대한 회의를 표명한다(25절, Thompson).

성 경: [렘32:17]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능치 못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팔라'(*)는 '너무 어렵다' 혹은 '경이롭다'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하나멜의 밭을 샀지만, 갈대아군이 포위하고 있는 풍전 등화와도 같은 당시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놀라운 권능으로 말미암아 15절의 말씀이 성취되리라는 소망을 간절히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본절은 보여준다.

성 경: [렘32:18]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주는 은혜를 천만 인에게 베푸시며 - 여호와의 무궁한 사랑인 '헤세드'(*)가 이제 수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성 경: [렘32:19]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주는 모략에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 '모략'은 히브리어 '에차'(*)에 해당하는 말인데, 그의 목적이나 계획을 뜻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크고 방대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사는 강력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관심과 계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성 경: [렘32:20]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주께서 애굽 땅에서 징조와 기사로 행하셨고 - 여호와의 강력하고 위대한 행사와 능력이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회고되고 있다. 출애굽때의 여호와의 강력한 능력은 그 후 이스라엘 문학과 종교에 깊이 새겨졌다. '징조'에 대해서는 왕하 20:1-11 주제 강해, '징조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성 경: [렘32:21]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본절의 어법과 말투는 출애굽 이야기와 그 외 다른 많은 구절에서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리고 '큰 두려움'(*, 우베모라 가돌)은 애굽인들의 마음속에 심어 놓았던 공포를 가리킨다(Nicholson).

성 경: [렘32:22]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그들에게 주시기로...맹세하신 바 -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역사적 사실이 회고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회고는 이어지는 내용 곧 이스라엘의 배은 망덕한 행실과(23절)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성 경: [렘32:23]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주의 도에 행치 아니하며 - '도'에 해당하는 '토라'(*)는 율법을 가리키는데, 이는 종종 인생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바른 길에 비유된다(신 5:33;사 30:21 참조). 이스라엘의 죄악이 보다 심각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생의 정로(正路)를 제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였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렘32:24]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이 성을 취하려 하는 자가 와서 - 이 기도를 하던 때에는 이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성 경: [렘32:25]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예레미야의 기도]

(주);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 여기서는 기도의 결말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밭을 사라고 지시하신 이는 다름 아니라 여호와이시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다시 한번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2:26]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여호와의 말씀이...임하여 - 예레미야의 기도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문학적 배역이 이곳 여호와의 말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의 응답에는 신명기적 사상을 가진 문체가 삽입구로서 포함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삽입구도 예레미야를 통한 신탁의 연장임은 분명하다.

성 경: [렘32:27]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여기서는 17절에서처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란 말이 다시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회복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어구로서 재차 언급되었다(Nicholson).

성 경: [렘32:28,29]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예루살렘의 패망의 주원인이 바로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주대상도 바로 우상 세력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주);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며 - 바알을 섬기든 자들은 지붕을 바알 제사의 장소 중의 하나로 선택하였다. 지붕은 평평하였으며 분향하기에 적절하였을 것이다(대하33:1-11 주제 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성 경: [렘32:30]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이스라엘의 반역 행위가 일과성(一過性)이었던 것이 아니라 초기의 역사에서부터 계속 반복된 것임을 지적하는 내용이다(Clarke). 따라서 여호와의 분노는 이스라엘 유년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한편,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향해서 유년기에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셨던 그러한 은혜를 보여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2:2 참조,Thompson).

성 경: [렘32:31]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본절은 '이 성이 건설되었던 날로부터 오늘날 그것이 내 눈앞에서 제거될 때까지 나의 분노를 유발시켜 왔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Bright). 이는 역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롬 2:4).

성 경: [렘32:32]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이는...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다 그러하였느니라 - 성도(聖都)로 택함받은 예루살렘 그 자체가 이미 수많은 악한 관행이 저질러졌던 무대가 되어 왔다. 그리고 왕, 방백, 제사장, 선지자, 시민 할 것없이 모두가 다 그런 악한 관습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Thompson). 이처럼 그들의 범죄상은 지속적이요 총체적이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불가피하였다.

성 경: [렘32:33]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그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고...받지 아니하고 -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훈계하셨으나 그들은 언약의 주 여호와를 무시하고 거부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알과 몰렉에게 충성을 바쳤다. 본절에는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것의 문자적 번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르쳤다'이다.

성 경: [렘32:34]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 아마도 이러한 가증한 물건들이 성전 경내에 세워져 있었던 것 같다(왕하 21:4, 5;23:4;겔 8장 참조).

성 경: [렘32:35]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 '불에 지나가게 하다'는 뜻으로 번역된 '아바르'(*)에는 '불'이란 뜻이 들어 있지 않지만, 몰렉 제사에는 이처럼 어린 아이를 번제로 바치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었다(7:30-8:3;19:5). 이러한 행위는 참으로 극악하고 잔인한 범죄로서, 유다로 하여금 엄청난 죄악에 물들게 하였던 것이다.

성 경: [렘32:36]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이 성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 여호와의 응답은 이제 미래의 약속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25절에서 예레미야가 제시한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인 셈이다. 예레미야는 이 성의 멸망 때에 칼과 기근과 염병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언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이제 언약 파기로 인한 그 저주와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2:37]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여 - 여호와의 계획은 단지 그들을 추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친 후 포로로 잡혀가게 된 땅에서 그들을 다시 불 모아 들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Clarke).

성 경: [렘32:38]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어떤 세력도 갈라놓지 못할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성 경: [렘32:39]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 우상 숭배로 인해 분열된 마음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마음과 이러한 바탕위에 놓여질 참다운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겔 11:19).

성 경: [렘32:40]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여호와께서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는 본절 내용은 31:31-34과 대단히 유사한데, 그 차이점은 '새 언약'이 여기서는 '영영한 언약'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란 자리에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2:41]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나의 마음과...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 본문의 이미지는 하나멜의 밭을 산 상징적 행위와도 어울리나 보다 근원적으로는 소명 기사 중의 일부(1:10)와 맥을 같이 한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뽑을 것이라고 하신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듯이, 이들을 다시 심으리라고 하신 약속 역시 반드시 성취되고 마는 것이다(31:28 참조).

성 경: [렘32:42]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 유다인들이 귀환한 이후에도 이처럼 약속하신 복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복음 시대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Clarke).

성 경: [렘32:43]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본절과 다음절은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밭을 산 것에 대해 가졌던 회의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일 수 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2:44]

주제1: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한 예언]

주제2: [심판과 회복]

(주); 남방의 성읍들에 있는 밭을 은으로 사고 - 이것은 본장 서두에 언급된 바 밭을 사는 상징적 행위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이런 상징적 행위는 그 어떤 예언 못지않게 그들에게 미래의 회복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해주었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33:1]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예레미야가...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 본장의 사건 역시 32장과 같은 해에 일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 이곳은 장로들이나 왕의 관리들이 예레미야에게 조언을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한편 본장은 일려의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30-33장)의 결론부에 해당하며, 최대의 민족적 위기를 맞은 유다 백성에게 다시 한번 소망의 빛을 확신시키고자 하는 내용이다.

성 경: [렘33:2]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여기서는 여호와를 가리켜 '일을 행하는 자'(*, 오사흐), '그것을 짓는 자'(*, 요제르)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창 1장의 내용으로 소급되어 올라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서는 '아사'(*, 만들다), '야차르'(*, 짓다), '바라'(*, 창조하다) 등의 동사가 쓰이고 있다. 이런 동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Thompson).

성 경: [렘33:3]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내게 부르짖으라...응답하겠고 - 이는 미래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계시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뿐이므로, 그분께 간절히 매어달려야 함을 상기시킨다. 특히 '부르짖으라'의 히브리어 '카라'(*)는 '절규하다'는 의미로서, 심한 갈증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삼손의 모습이나 자식의 잉태를 위해 간구하던 한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15:18;삼상 1:10-16).

성 경: [렘33:4, 5]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구하려는 모든 인위적 노력들이 무용함을 밝히고 있다. 성읍의 가옥과 왕궁은 폐허화될 것인데, 그것은 대적의 파괴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포위당한 예루살렘 백성들 자신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으로 묘사된다(4절). 즉, 백성들은자기 집과 왕궁을 헐어서라도 포위 공격하는 갈대아 군대를 막아 보고자 애쓰지만, 이러한 자구책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여호와의 도우시는 손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5절).

성 경: [렘33:6]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 '치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루카'(*)는 원래 상처 부위에 돋아나는 새 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범죄로 인해 심한 상처를 입게 되지만, 그들을 연단시켜 새로이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치 피부에 새 살이 돋듯이 치유함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 경: [렘33:7]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본절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갇혀 언급되고 있는데, 이로 보아서 이곳의 회복의 약속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해당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이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 왕국과 앞으로 멸망할 남유다 왕국 모두에 대한 미래의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33:8]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사할 것이라 - 여기에는 회복의 날에 있을 가장 중요한 양상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범하였던 죄를 용서하고 악한 죄에서 정하게 할 것이란 사실이다(겔 36:25, 26 참조). 이는 결국 이스라엘이 당한 파멸과 시련의 근본 원인이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사죄의 은총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한 근원적 처방임을 시사한다. 아울러 이는 복음 시대의 새언약을 향한 암시적 언급으로도 이해될 수 있겠다(31:34;50:20 참조).

성 경: [렘33:9]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이 성읍이...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 그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열방들 앞에서 기쁨과 찬양의 원천이 될 것이고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곳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여호와 앞에 바르게 서는 것은 전세계적인 의미를 띠는 것이다. 즉, 지상 모든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그 모든 선한 일들을 듣고는, 그들의 엄청난 축복을 부러워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모든 열방들 위에서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에 대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Thompson).

성 경: [렘33:10, 11]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7:34;16:9;25:10 등에서는 심판 때에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와 신랑, 신부의 소리가 끊어질 것에 대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정반대로 회복의 때에 이러한 소리들이 다시 들리게 될 것을 말한다. 한편 11절의 후렴구는 시 100:5;106:1;107:1;136편 등과 대단히 유사하다.

성 경: [렘33:12]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의 거할 곳이 있으리니 - 이는 31:24의 약속과 비슷한 말씀으로서(Nicholson), 평화와 안정과 번영의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성 경: [렘33:13]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유다 회복에 대한 보증]

(주); 양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 이는 날이 저물 때 그들이 울타리로 돌아오는지 그리고 혹시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하는 것을 목자가 세는 장면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탈굼역(Targum)은 본절을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예언으로 보고 '계수하는 자'를 아예 '메시야'라는 말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본절은 일차적으로,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탈굼역의 단도 직입적인 번역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성 경: [렘33:14]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여기서부터 마지막적까지는 칠십인역(LXX)에서 누락되었으며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즉 이 부분은 예레미야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삽입되었다는 것이다(Hyatt). 그러나 이 부분은 23장, 30:1-33:13장에 수록된 내용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음에 분명하다. 여기 수록된 바, 다윗 왕조와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의 영원한 존속에 대한 약속은 포로 귀환으로 말미암아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며(스 1:8;2:2, 40-54;8:15-20), 궁극적으로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Feinberg).

성 경: [렘33:15]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주);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 본절과 16절은 23:5, 6의 내용과 유사하다. 여기서 '의로운 가지'란 다양하게 번역되기도 하나 분명히 정의롭고 바르게 다스릴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싹'(사 4:2), '순'(슥 6:12), '뜨인 돌'(단2:34), '머릿돌'(벧전 2:7) 등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 메시야의 통치가 도래하면 유다는 구속함을 입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3:16]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주);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 23:6에서는 메시야에게 주어졌던 '여호와 우리의 의'(*, 야훼 치드케누)라는 이름이 여기서는 예루살렘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어떤 역본은 '그 성'을 '그에게'로 번역함으로써 23:6과 일치시키고자 한다(Aramaic, Vulgate, Syriac 등). 그러나 개역 성경처럼 번역해도 별다른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전히 새로워질 예루살렘은 메시야의 의를 반영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칭함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Bewer, 고후 5:21 참조).

성 경: [렘33:17, 18]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여기에서는 다윗 왕조와 레위계통의 제사장직이 영구히 존속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이를 단순히 역사적 안목에서만 보면 이 예언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포로 귀환 후에도 다윗 왕조가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 역시 줄곧 이어져 갔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왕적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어짐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물론 그리스도는 레위 계통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히7:11). 그렇다면 레위 계통에 관한 언급은 민 25:13에서의 비느하스에 대한 약속과 마찬가지고 제사장직의 영원한 존속에 대한 말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성 경: [렘33:19, 20, 21]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새 언약에 대한 확실한 보증으로 사용했던 31:35-37의 내용을 여기서 재차 언급하여 확신을 더해 주고 있다.

(주);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 낮과 밤은 하나님에 의해 태초에 설정되었다(창 1:5;8:22). 여기서는 낮과 밤의 교차가 하나님과의 계약과 관련되어 표현되고 있다(Bright). 이런 표현은 여호와 약속의 신뢰성과 영속성을 입증하기 위해 쓰였다.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것은 자연 질서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 질서가 파괴되고 낮과 밤의 기능이 제때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 자기 종 다윗과 레위 제사장직에 대해 맺으신 언약이 파괴될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3:22]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 자손을 셀 수 없이 많게 해주리란 약속은 아브라함을 위시한 족장들에게 주어진 바 있다(창 13:16;15:5;22:17 등). 그런데 이제 이것이 다윗 자손들의 숫자와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숫자에 적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족 이스라엘로서 모두 다 왕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벧전2:5, 9;계 1:6;5:9, 10).

성 경: [렘33:23, 24]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결론적으로 다시금 강조되고 있다. 두 족속에 대해서는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2) 야곱과 다윗(26절 참조) 혹은(3) 야곱과 레위(왕직과 제사장직을 염두에 둔 구분) 등으로 보는 견해로 갈리지만, (1)이 가장 무난할 듯하다. 그리고 또한 24절 초반에 나오는 '이 백성'이란 여호와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Bright). 민족의 절망적 현실에 부딪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선포된 메세지를 믿지 못하는 자들은 공포에 질려 완전한 파멸만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은 그들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성 경: [렘33:25,26]

주제1: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

주제2: [메시야 예언]

B.C.597년의 포로 사건이 있은 이후, 그리고 B.C.722년의 사마리아 함락이라는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고 믿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다 B.C.586년의 예루살렘 함락 사건은 그들의 비관적인 태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해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다시 야곱 자손들의 통치자로서 다윗 자손 통치자를세우시는 데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이 실패하게 될진대 차라리 낮과 밤이 바뀌고 말 것이다. 한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고 하는 족장들에 대한 삼중적 언급은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졌던 모든 언약들을 강조하여 지칭하기 위함이다(Feinberg).

성 경: [렘34:1]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주); 바벨론 왕 느부간세살과...칠 때에 - 바벨론 제국 내의 여로 속국에서 온 원정군들이 예루살렘 공격에 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종주국 왕이 봉신 국가들로부터 온 파견대를 거느리고 진군하고 있는 모습이다. 봉신국이 군대를 지원하여 그 종주국의 원정을 돕는 것은 종주국과 봉신국 간의 조약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성읍'이란 예루살렘 주위의 성읍을 말한다(Bright).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성읍들에 대한 공격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유다 군대는 수세에 몰려 튼튼한 성벽이 있는 성읍들로 후퇴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읍들은 하나씩 침략자들의 공격에 무너졌으며, 마침내 철벽 같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던 예루살렘만 남았던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4:2]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본절에는 새로운 내용이 덧붙여져 있는데, 그것은 이 성을 불태운다는 것이다. 고대 국가들은 전쟁 때에 시체들을 불태우곤 하였다. 또 때로는 그 재를 모아서 용기에 담아 땅에 묻기도 하였다(Clarke). 아무튼 예레미야의 위협의 말씀은 이전의 것보다훨씬 더 강한 것이었다(21:4-7 참조). 그러나 시드기야는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성의 멸망이라는 실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Thompson).

성 경: [렘34:3]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주);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 충성 서약을 위반하고 바벨론 왕에 반역한 속국의 왕으로서 시드기야는 느부갓네살의 자비를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Bright). 이제 그는 배반한 속국의 왕으로서 종주국의 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겔 17:11-21). 그는 엄청난 처벌을 받을 것이 뻔하다. 한글 개역 성경은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고 있는데, 본문과 같은 장면은 고대 근동의 현존하는 문헌에도 잘 명시되어 있다.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과 대면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내용은 왕하 25:6, 7에도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성 경: [렘34:4]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 브라이트(Bright)는 이를 단순한 예언적 약속으로 보지 않고 이를 조건적 의미로 해석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주의해 듣고 항복하면 너의 생명만은 구해줄 것이다'라고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톰슨(Thompson) 역시 이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어쨌든 시드기야는 장님이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살해당하지는 않았으며 감옥에서 죽었다(52:11).

성 경: [렘34:5]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끝까지 항복할 것을 촉구하였다(38:17, 18). 시드기야가 지금 곧 항복하면, 그의 생명은 구제될 것이고 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21:8-10참조).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면 왕과 백성과 그 성이 모두 참혹한 비극의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다만 본절에서는 그러한 비극 가운데서도 시드기야가 '평안히'(*, 베솨롬), 곧 큰 고통없이 임종을 맞게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주); 분향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라파'(*)는 '불이 나다', '태우다'는 뜻의 '사라프'(*)에서 유래한 말로서 '연소', '화장'(火葬)으로도 번역된다.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화장이 금지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왕의 장례식 때 분향하던 것을 뜻하는 듯하다(대하 16:14; 21:19 참조).

성 경: [렘34:6]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주);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 예레미야는 그의 메시지를 생명을 걸고 왕에게 고하였다. 그는 여호와를 두려워하였을 뿐 다른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Clarke).

성 경: [렘34:7]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시드기야 왕에 대한 경고]

(주); 라기스와 아세가라...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 바벨론 원정군의 진행 과정에 대한 세부적 사항의 일부가 언급되고 있다. 그들의 작전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성읍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성벽을 갖춘 성읍들로는 오직 라기스와 아세가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공격은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라기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37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텔 에즈-두웨이르'(Tellez-Duweir)로 알려진 곳이며, 아세가는 라기스 북쪽으로 약 17Km 떨어져 있고, 예루살렘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29Km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텔에즈-쟈카리야'(Tellez-zakariyah)이다. 이 성읍들에 대한 그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흥미있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라기스 서신(Lachish Letter)이다. 이것은 B.C.586년이 성을 불태울때 생겨난 재가 가득히 덮여 있는 어느 한 방에서 발견되었으며, 깨어진 토기 파편 위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 21편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초 기지의 야전 지휘관으로부터 라기스 주둔군 지휘관에게 급파된 전문이었다. 특히 제4서신에는다음과 같은 말이 담겨 있다. '각하가 지시한 대로 우리는 라기스의 신호를 지키고 있음을 주시하소서. 우리는 아세가의 신호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세가가 이미 멸망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서신은 예레미야가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 직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4:8, 9, 10]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여기서부터 예레미야가 전한 예루살렘 종말에 대한 본장에서의 두 번째 담화가 시작된다. 이것은 앞의 것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달되었을 것이다.

(주);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 시드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맺은 언약의 내용은 9, 10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맺은 이유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계속되는 적군의 침공 위협으로 인해 성 밖에서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가난한 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노예로 전락하는 사례가 빈발하였따. 이런 상황에서 바벨론의 공격 이전에 노예 해방을 통해 그 주인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다는 견해. (2) 본문의 언약은 일종의 개혁조치의 일환으로서, 이를 통해 하나니의 은총을 받고자 했다는 견해. (3) 노예를 해방시켜 전투에 참여케 하고자 했다는 견해. 이중 두번째와 세 번째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성 경: [렘34:11]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 시드기야가 제안한 언약은 모든 방백과 백성들에게 수납되었다. 그리고 노예들은 자유인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들이 풀려난 것은 잠시였다. 포위 공격이 잠정적으로 풀려지자 그들은 그들의 결정을 번복하여 그들의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시 노예로 끌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정말 예레미야가 수시로 언약 파기자라고 지적했던 바와 같은 그런 행동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성 경: [렘34:12]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여호와의 말씀이 여호와로부터'라고 중복되어 있어서, 거칠게 들린다. 그러나 이런 중복은 예레미야 산문 문체의 특성 중 하나로 볼 수 있다(Bright).

성 경: [렘34:13]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 이것의 문자적 표현은 '애굽 땅에서부터, 노예들의 집에서부터'이다. 이런 표현은 모세 오경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Bright). 이들의 이와같은 번복과 배신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이를 여호와와 이스라엘간에 맺어진 언약과 결부시켜서 설명한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다(출 19:4-6). 그들 역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능력에 의해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를 다루는 문제는 언약 율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항목이었다(Thompson).

성 경: [렘34:14]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너희 형제...칠 년 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 형제 히브리 사람이 팔려서 6년 동안 섬겼으면 7년이 되는 해에는 그를 놓아주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라는 명령은출 21:2-6;신 15:12-18에 명시되어 있다. 출애굽기의 내용은 일반적인 언급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자 노비에 대한 사항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 15장의 내용은 각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노예 해방이 제 7년으로 명시된 것은 그것이 7년 주기의마지막이고 또 안식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율법에는 제 7년에 농부들은 밭을갈거나 밭에서 나는 산물을 수확하지 말도록 규정되었다(출 23:10, 11;레 25:3-7, Thompson). 그리고 본절의 '칠 년 만에'란 말의 문자적 번역은 '매 칠 년 끝에'인데, 실제로는 '만 육 년끝'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칠 년째가 되는 때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네게 팔렸거든'(*, 이마케르 레카)은 '그 자신을 너희에게 팔지 않을 수 없었던' 또는 '팔려지지 않을 수 없었던'으로도 번역된다. 그들이 팔려햐 했던 이유는 빚 때문이었다(Bright).

성 경: [렘34:15]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되 - 그 당시 백성들은 일시적이나마 회개하고 여호와께 수납될 수 있는 행위를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 해방을 선언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노예 해방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 곧 성전에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한 언약이 곧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위 공격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나자 금방 태도를 바꾸어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힘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죄악을(출20:7) 범했던 것이다.

성 경: [렘34:16]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삼았도다 - 어떤 주석가들은 B.C. 622년 요시야 당시에 있었던 언약 갱신(왕하 23:1-3)이나 또는 느헤미야 당시에 있었던 그것(느9:38)과 같은 그런 보다 일반적인 언약 갱신 의식이 노예 해방 선언과 함께 치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Nicholson). 시드기야와 그의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고 또 그의 율법에 순종하기로 맹세하였으며, 그 율법에는 안식년에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언약 갱신의 외형상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징할 수도 있는 이런 노예 해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문맥에는 이에 대한 암시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Thompson). 어쨌든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음으로써 여호와를 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여호와가 증인으로 참석한 그 언약이 파기됨으로 해서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혀졌으며 여호와의 율법은 철저히 무시당했다(Clarke).

성 경: [렘34:17]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 여호와의 이름이 먹칠된 이 시점에서 이제 여호와는 그들에게 칼을 내리실 것이다. 여호와는 칼과 염병과 기근의 '자유'를 내려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Clarke). 그들이 노예 해방을 다시 번복하였기 때문에 이제 여호와는 그들을 보호하여야 할 의무에서 그들을 해방할 것이다. 그들이 이제 불순종과 반역으로 인해 여호와의 보호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칼과 염병과 기근으로 넘겨질 것이다. 언약을 파기함으로 해서 그들은 그 언약의 저주 조항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다음절에서부터는 언약 의식에 대한 흥미있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성 경: [렘34:18]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 송아지를 둘로 갈라서 그 사이로 지나는 언약 의식은 창 15:10, 17에 나타나는데 이 의식의 의미는 언약 당사자들에게 언약 파기시의 저주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즉, 둘로 갈라진 이 짐승의 운명이 언약을 어긴 자에게 임하게 될 것이란 의미였던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언약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한 짐승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어 언약 파기자에 대한 징벌의 상징으로 보였다고 한다.

성 경: [렘34:19]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쪼갠 송아지 사이로... - 쪼갠 송아지 의식에 대해서 클라크(Clarke)가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희생의 제물로 쓰이고 있는 송아지는 하나님께 바쳐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동의와 지지를 확보하였다. (2)희생물은 척추뼈를 세로로 절단시켜서 코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정확히 양분되게 하였고, 그리고 양편에 갈라져서 놓여야 했다. (3) 양분된 그것은 서로 마주보이도록 놓여야 했으며 그 사이로 지나가게 했다. (4) 언약에 참여한 양 당사자는 한쪽 끝에서 그사이로 지나가서 그 가운데서 만나며 그리고 거기서 언약을 맺고 만약 언약을 어기게될 경우 희생물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저주 의식을 거행한다. (5) 마지막으로 양 당사자는 희생물을 먹으면서 잔치를 벌인다. 하나님은 (4)의 경우를 근거로 해서, 20절에서 언약을 어긴 이들 유다 백성들의 시체들로 하여금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 경: [렘34:20]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너희 원수의 손과...식물이 될 것이며 - 언약을 위반한 자들은 적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그 시체는 새들과 야생 짐승들의 밥이 되도록 매장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참혹한 광경은 본서 앞 부분에서 자주 언급되었다(7:33;16:4;19:7). 이런 저주를 받을 사람은 노예를 소유했던 모든 계층의 사람들, 곧 유다와 예루살렘의 방백들, 궁정 관리들, 제사장들, 그리고 토지 소유자들이 포함되었다(Thompson).

성 경: [렘34:21]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 시드기야가 비록 언약을 주도했었고 또 노예를 해방시키긴 했지만, 그는 다른 여러면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 저주에서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바벨론 군대가 포위 공격을 풀고 물러갔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다시 돌아올 것이고 또 예루살렘과 모든 유다 성읍들은 폐허가 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애굽 군대가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 공격을 풀고 애굽 군대를 치려고 물러났다. 이 예언이 전달된 것은 바로 이런 막간의 때였던 것 같다(Clarke).

성 경: [렘34:22]

주제1: [시드기야 왕과 백성에 대한 경고]

주제2: [백성들에 대한 경고]

(주); 그들이 이 성을 쳐서...불사를 것이라 - 유다의 멸망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하는 점은 최근에 조사된 고고학적 자료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올브라이트(Albright)는 '팔레스틴의 고고학'(Archaeology of Palestine)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B.C. 6세기 초에 대부분의 성읍들이 파괴되고, 그 이후 다시는 건설되지 않았으며, 또 그 당시 어떤 성읍들은 파괴된 지 얼마 후 다시 사람들이 거주했다...포로기 동안 파괴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던 성읍은 단 하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성 경: [렘35:10]

주제1: [레갑 족속의 교훈]

주제2: [레갑 족속에 대한 시험]

(주);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대로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방황하던 때를 바람직한 기간으로 보았다(2:2, 3).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 백성은 명색만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하나님의 임재와 뜻을 거부하는 완악한 심령을 지니고 있었다. 본문에서 레갑 족속에 관한 이야기를 등장시키는 것은 당시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와 비교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레갑 족속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려는 열심에 집착해 있었고 또 그들의 조사인 요나답이 명령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준수했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렘35:11]

주제1: [레갑 족속의 교훈]

주제2: [레갑 족속에 대한 시험]

(주); 느부갓네살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 레갑 족속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 이 성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의 신조를 버린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했다. 즉 군사적 위협 때문에 그들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성 경: [렘35:12, 13]

주제1: [레갑 족속의 교훈]

주제2: [레갑 족속의 순종을 통한 교훈]

(주); 너는 가서 유다 사람들과...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 - 레갑인들의 삶을 상징적 의미로 거론한 목적은 순종과 배도를 분명하게 대조시키기 위함이었다. 물론 예레미야 자신도 레갑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방식을 따르길 원했는지, 아니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보았는지 하는 점은 본 문맥과 관계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전통적인 신조에 변함없이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다 사람들에게 본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율법과 계명을 그들이 불순종하고, 또 종잡을 수 없이 왔다 갔다하는 이들의 태도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잘못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가 되었던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35:14, 15, 16]

주제1: [레갑 족속의 교훈]

주제2: [레갑 족속의 순종을 통한 교훈]

이스라엘은 레갑인들이 선조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여호와는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선지자들을 수세기에 걸쳐서 계속하여 그들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제 레갑인들의 생활 지침이 그들을 정죄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레갑인들은 인간, 선조에게서 명령받은 신조를 종교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준수하여 왔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도 지키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수없이 순종과 회개를 외쳤었다(7:23-28;11:1-17 ;25:3-8;26:2-6;29:17-29 등).

성 경: [렘35:17]

주제1: [레갑 족속의 교훈]

주제2: [레갑 족속의 순종을 통한 교훈]

(주);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 레갑 족속의 모범과 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도와 반역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의 배도와 반역이 더욱 더 돋보이고 있는 만큼 그들에게 임할 형벌과 재앙이 선포된다(Clarke).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호소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듣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처벌이 주어질 것이다. 레갑인들을 불러 행위 예언의 일부로 나타내고 있는 이 사건은 B.C. 602년경에 일어났던 것인데, 이미 이때부터 이스라엘에서는 회개의 기운이나 증표가 전무한 상태였었다.

성 경: [렘35:18,19]

주제1: [레갑 족속의 교훈]

주제2: [레갑 족속의 순종을 통한 교훈]

이스라엘에 대한 재앙 선포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레갑 족속들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주); 내 앞에 설 사람 - 이는 흔히 성전에서 제사장 직분을 맡아서 여호와를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던 표현이다(7:10;15:19;신 4:10;10:8). 레갑 족속 사람들에게 어떠한 직분이 맡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그들이 성전 봉사의 직분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즉, 유대인들의 성격 주석의 일종에 해당하는 미쉬나에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들'이 매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성전 제단에 사용되는 나무를 가져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물과 관련된 분야에서 요나답의 후손들이 봉사하였다고 한다(Thompson). 아무튼 우리는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후 레갑 족속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느헤미야 당시로 넘어가면, 그들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는데, 즉 레갑의 아들 말기야란 사람이 분문을 수리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느 3:14). 그는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기록은 그가 더 이상 이전의 레갑 족속 사람들의 유랑민 생활 방식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도 강요에 의해서거나 또는 부득이한 환경때문에 수많은 레갑 족속들은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포기하거나 바꾸어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인 생활을 버렸다고 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존중하고 거기에 철저한 순종을 해야 한다는 고귀한 원칙을 포기한 것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성 경: [렘36:1]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주); 여호야김 사 년에 - '여호야김 사 년'은 B.C. 605년에 해당된다. B.C. 605년은 고대 근동 지역의 국제적 상황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해에 바벨론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변 갈그미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시킴으로써, 명실 공히 근동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굽 군대를 격파하고 난다음에 바벨론은 곧이어 수리아- 팔레스틴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예레미야의 신탁을 담은 두루마리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두루마리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바벨론이 될 것이며, 그리고 여태까지 선포해왔던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성 경: [렘36:2]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주); 너는 두루마리 책을 취하여 - 이 '두루마리 책'이란 표현은 본절 외에 4절과 시40:7 ; 겔 2:9에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책으로 만들어진 긴 두루마리인지, 아니면 기록할 용지로서의 두루마리인지는 확실치 않다(Bright). '두루마리'(*,메길라)는 '굴리다'는 뜻의 '갈랄'(*)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에는 오늘처럼 종이 제조 기술이나 제본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까닭에 주로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을 대신 사용했으며, 그것을 여러 장 연결한 후에 끝 부분 에굴림대가 있는 막대기를 부착시켜 양편에서 말 수 있도록 만들었다. 탈무드(Talmud)에 따르면, 공적 집회에서 낭독용으로 사용되는 토라 사본은 정결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에 기록했다 한다. 바룩이 사용했던 두루마리는 파피루스였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이 따르고 있는 맛소라 텍스트는 본절에서 이스라엘 이라고 읽고 있지만, 70인역(LXX)은 이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그러나 문맥상, 맛소라를 따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왜냐하면 뒤에 '열방'이란 말이 있어서, 하나의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함께 표현할 때는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란 순서를 취하였다. 아무튼 여기서 '열방'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 메시지가 유다를 넘어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선포된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한 흥미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예레미야가 왜 두루마리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말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살펴보면, 그는 제사장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만이 백성들과의 교신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5절). 또다른 요인을 든다면, 바벨론 군대가 금방이라도 이 민족을 멸망시킬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흔히 있던 바와 같이 구전(口傳)으로 전달하면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곧 잊혀질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가 계속 살아 있고 또 사회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었다면 백성들은 언제라도 선지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예레미야의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었고 민족 전체가 부패한 상황에서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분위기도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루마리에 기록으로 남겨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B.C. 622년에 요시야 당시 성전에서 두루마리 책이 발견된것 역시 하나의 선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성 경: [렘36:3]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주); 유다 족속이...돌이킬듯 하니라 - 이 예언의 일차적 관심은 '유다 족속'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근거로 해서 2절의 '이스라엘'이란 말을 70인역(LXX)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읽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특정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단락에서도 유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의 주장이 반드시 옳지는 않음을 말해 준다(3:6-11). 아무튼 하나님은 바로 이 시점까지도 유다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셨다. 회개의 기초는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같이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었다(7절 ; 26:3 참조).

성 경: [렘36:4]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주); 바룩이...기록하니라 - 예레미야의 개인 비서 혹은 서기 역할을 하였던 '바룩'은 유다의 명문(名門) 집안 출신으로 짐작된다(51:59). 한편 바룩의 대필(代筆)에 관해, 우리는 하나님이 바룩에게 영감을 주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을 때 예레미야가 영감을 받았을 뿐이며, 바룩은 그 영감받은 말씀을 단순히 받아적었다고 보아야 한다(Feinberg).

성 경: [렘36:5]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주); 감금을 당한지라 - 여기 해당되는 히브리어의 기본형 '아차르'(*)는 종종 유체적 감금 상태를 말할 때도 사용되었다(33:1 ; 39:15). 그러나 이는 '에워싸다', '제지하다', '억제하다' 등과 같이 여러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본문에서도 문자적으로 감옥에 갇힌 상태를 말하지 않고, 여호야김과 방백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성전 출입이 금지되었음을 뜻하는 것 같다(Bright, Nicholson). 왜냐하면 19, 26절에서 처럼, 예레미야와 바룩은 스스로 몸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렘36:6]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본절에 언급된고 있는 금식일은 어떤 고정된 절기에 따라 소집된 것이 아니고 특정한 사안이나 위기가 닥쳐서 소집된 것이었을 것이다(Bright). 예레미야는 금식일에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 것을 계산했으며, 이때 두루마리를 읽게 함으로써 큰 효과를 거두려고 하였다(Nicholson). 그러나 여기서 지적되었던 바와 같이 금식일로 소집되어야 했던 긴급한 안건이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은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틴 평원에 도착한 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성 경: [렘36:7]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금식의 날에 백성들은 여호와께 현재의 고통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탄원할 것이다. 본절에서는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의 회개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3절). 여호와께서 엄청난 분노로 예고하셨던 그 심판을 돌려 놓으려면 회개가 필수 불가결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백성은 돌이킬 줄 몰랐다.

성 경: [렘36:8]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기록된 두루마리]

(주); 바룩이...낭독하니라 - 비슷한 내용이 10절에 언급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본절이 후대의 필사자들에 의해 삽입된 해석이나 설명일 것으로 보고 있으나(Bright),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성 경: [렘36:9]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여호야김의 오 년 구 월에...금식을 선포한지라 - 본절에는 백성들이 금식을 선포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안일과 교만에 빠진 정치.종교 지도자들보다 백성들이 더욱 신앙적 , 국가적 위기 의식을 절박하게 느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금식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금식을 행하였다는 실천적 의미로 보기도 한다. 또한 백성들이 금식 선포의 주체가 아니라 금식 선포의 주체를 당국자로 보고 당국자들이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여 모이게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Bright). 아무튼 여기서 금식이 선포된 날짜는 여호야김 오 년 구 월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양력으로 B.C.604년 11, 12월에 해당된다. 이때의 날씨는 추웠다(22절).

성 경: [렘36:10]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바룩이...그마랴의 방에서...낭독하여 - 바룩이 두루마리를 읽어 낭독한 것은 국가의 공식 서기관인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방에서였다. 이것은 요시야 시대에 성전에서 두루마리가 발견된 이야기와 관련시켜 볼 때 흥미롭다(왕하 22:3-23:3). 요시야 당시 그마랴의 부친 사반은 요시야의 국가 서기관이었으며 그 역시 두루마리를 읽었던 것이다(왕하 22:3). 25절에는 그마랴가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상당히 공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반의 다른 아들이 26:24에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아히감이었다. 아히감 역시 예레미야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Nicholson). 아무튼 바룩이 그마랴의 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마랴가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한편, 바룩이 백성들에게 두루마리를 낭독해주었던 그 방은 성전 윗뜰에 있었다(26:10). 그렇기 때문에 바룩은 성전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고 또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그의 낭독하는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다만 고위 관리들의 반응만이 다음절에서부터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렘36:11]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미가야가 그 책에 있는...듣고 - 여기서부터는 예레미야의 말씀이 낭독된 이후에 일어나는 급박한 사태의 진전이 언급되고 있다. 미가야는 두루마리의 말씀을 듣고 그 사실을 궁정내의 여러 장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장관들은 바룩을 그들 앞으로 데려오도록 명령하였으며, 그들이 직접 그 두루마리의 말씀을 경청한다. 그 내용이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이 문제를 왕에게 가져가기로 결정하는 것이다(16절).

성 경: [렘36:12]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서기관에 엘리사마와...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관리들은 내각을 구성하는 장관의 지위에 있던 사람들로 보인다.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그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Bright). 엘라단의 부친인 악볼은 요시야 당시 성전에서 두루마리책의 발견 기사에 등장한다(왕하 22:12).

성 경: [렘36:13]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들은 모든 말로 그들에게 고하매 - 본장 내용은 요시야 당시와 지금 여호야김 당시 사이의 여러 유사한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부각 시키고 있는 듯하다. 특히 요시야 때의 두루마리 책과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는 둘 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것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경위에 대한 서술이 양쪽 다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36:14]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구시의 증손...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어 - '여후디'란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데 그에 대한 소개는 흔히 2대 곧 '누구의 아들 아무개'란 형식으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구시의 증손 셀레먀의 손자 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로 표현되고 있다. 즉 그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까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다소 예외적인 표현이다. 이에 대한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의 사자, 곧 '구시의 아들 셀레먀와 또 느다냐의 아들 여후디'를 잘못 표기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아무튼 장관들은 여후디를 시켜서 바룩을 불러 다시 한번 자기들에게 그 두루마리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성 경: [렘36:15]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바룩이 그들의 귀에 낭독하매 - 바룩이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이들 장관들은 그를 아주 정중하게 대우 했었다. 아마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바룩에 대해서 우호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Bright).

성 경: [렘36:16]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그들이...왕에게 고하리라 - 장관들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곤경에 처하게 하려는 의사가 없었으며, 그들을 죽이고자 고자질하려는 의사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두루마리의 내용이 참으로 심각하고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왕에게 보고하려고 했을 뿐이다.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그들은 이 사안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와 바룩에게 빨리가서 숨어 있을 것을 권고하였다(Bright).

성 경: [렘36:17]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그 구전(口傳)하는 이 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뇨 - 방백들이 바룩에게 이렇게 물어본 의도는 두루마리의 내용이 실제로 여호와의 말씀인지, 그리고 예레미야에게서나온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36:18]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바룩이 대답하되...책에 기록하였노라 - 방백들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바룩이 받아 적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바룩이 예레미야의 글을 받아 적은 이사건은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있게 될 긴 협력 관계의 시작일 뿐이었다. 예루살렘이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약 18년이란 기간 동안 이들은 협조와 교우 관계를 가지게될 것이며,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 예레미야는 아나돗 밭을 사서 그에게 위탁하기도 한다(32:12, 16). 바룩 역시 마지막에는 예레미야와 함께 애굽으로 가게된다(43:6). 아마 이런 긴 세월 동안에 걸쳐 바룩은 예레미야의 어록과 활동 상황을 정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 본서가 현재의 형태로 있게 된데는 바룩의 공로가 결코 배제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명기 사상의 산문체라고 알고 있는 그런어떤 산문체도 어쩌면 바룩의 손에서 나왔을 수 있을 것이다. 바룩 역시 그러한 문체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사람이었겠기 때문이다.

성 경: [렘36:19]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너는 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고 - 방백들은 선지자의 두루마리 내용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과 확신을, 여호야김 왕이 공감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그들의 이런 주도 면밀한 배려는 곧 정당했던 것으로 밝혀진다(26절). 본장의 사건의진행을 이끌어 가고 있는 저자는 여기서 다시 한번 호기심을 자극시켜서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다(Nicholson). 아무튼 이 방백들은 왕이 예레미야와 바룩의 생명을 해할 것으로 보고 이들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와 함께 사안이 극히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왕에게 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Clarke).

성 경: [렘36:20]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 여호야김은 이미 선지자 우리야를 사형에 처한 바가 있다. 우리야가 애굽으로 도피했었는데도, 그를 끌어와서 죽였다(26:20-24). 방백들은 왕에게 보고하러 가면서 두루마리를 엘리사마의 방에 안전하게 남겨놓고 떠나갔다. 아마도 이는 왕의 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렘36:21]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 왕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지키려고 한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여후디가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왕과 왕의 곁에선 모든 방백들 앞에 낭독하게 된 것이다.

성 경: [렘36:22]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때는 구 월이라...화로가 있더라 - '겨울 궁전'이라 함은 겨울에 사용하도록 별도의 궁전을 지어 놓았다는 것이 아니라, 궁전 내에 난방 시설을 갖춘 곳을 의미한다(암 3:15 참조, Feinberg). 유대력으로 구 월은 양력 11, 12월에 해당되는데, 이때는 눈이 내리기도 하였으나 오랫동안 내리지는 않았다. 여기서 '화로'란 것은 석탄이나 나무로 불을 치운 청동 화로였는데,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자들은 추운 날씨에는 이 화로에다 불을 피워 방 한쪽에다 두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마루에서 불을 피웠다고 한다(Clarke).

성 경: [렘36:23]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왕이 소도(小刀)로...두루마리를 태웠더라 -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조각내어 불태웠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레미야와 그의 메세지를 모욕하고 무시하고자 했다. 어쩌면 그러한 행동은 단순히 모욕의 차원을 넘어서, 이 선지자가 선언하고 있는 저주문들의 힘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포함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왕하 22:11-20에서 여호와김의 부친 요시야가 율법책의 낭독을 들을 때 자기 옷을 찢은 것과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찢은 것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 경: [렘36:24]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두려워하고 옷을 찢으며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던 요시야의 반응과는 달리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 정반대되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 그 당시 국제 정치적 관점에서 여호야김은 북방 적에 대한 예레미야의 경고의 예언을 무시하고, 명목상의 대국에 지나지 않는 애굽이 그들의 봉신된 유다를 도우러 올 것이라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던것 같다. 한편 본절의 '신하'에 해당하는 '에베드'(*)는 '하인', '노예', '종'등의 뜻이며, 여기서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신하를 뜻하는 듯하다.

성 경: [렘36:25]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주);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간구하여도 - 에랄단은 유다 방백의 한 사람으로 예언자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던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12절 ; 26:22). 들라야는 여기서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없다. 그러나 본절을 통해 볼 때 어느 정도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마랴는 사반의 아들로서 서기관이며 바룩으로 하여금 성전 새 문 어귀 곁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백성들에게 두루마리를 낭독하도록 허락해준 자이다(10절).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잘못된 행동을 막으려고 애썼는데, 이로 보아 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참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성 경: [렘36:26]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두루마리의 낭독과 소각]

여호야김은 두루마리를 소각시킨 것도 모자라서, 그것을 기록한 저자를 색출하여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여호야께서 이미 그들을 숨기셨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운명은 26:20-23에 언급된 우리야의 경우와 같은 그런 처벌을 받고 말았을 것이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얼마나 오랫동안 숨어 있었는지 하는 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오래지 않아 예레미야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철회한 것 같다. 왜냐하면 연대상 이때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레갑 사람을 시험할 때에 그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5장).

성 경: [렘36:27]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

(주); 예레미야의 구전(口傳)으로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 여호야김은 두루마리를 불태움으로써 유다 멸망에 대한 예언의 능력을 소멸시켰다고 믿었을지 모르나, 두루마리를 불태운다고 해서 여호와의 말씀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성 경: [렘36:28]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

(주);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 여호와의 말씀은 다시 기록된다. 그러나 그것이 기록으로 남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호와의 말씀은 굳건히 설 것이고 또 성취되고야 말 것이다. 바룩은 전과 같이 다시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새로운 기록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로 기록되는 이 두 번째 두루마리에는 첫 번째 내용도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영감에 의한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었을 것이다(32절).

성 경: [렘36:29]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

(주); 그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 히브리어 원문에는 '너'라는 2인칭의 의미가 2회 반복되어 강조 용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를 살려서 표현하면 '네가 감히 두루마리를 태웠도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렘36:30,31]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

왕은 두루마리를 직접 불태웠으며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 선포의 권한을 탄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의 후손들이 다윗 왕위에 앉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불과 석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앉았기는 하나, 곧장 폐위되고 포로로 잡혀가서 죽었다(왕하 24:8, 9 ; 25:27-30). 여호야김은 이 예언대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였고(22:18, 19참조), 그 시체가 매장되지도 못하고 낮에는 햇볕에, 밤에는 서리에 노출되었다(30절). 불 옆에 편안히 앉아서 여호와의 말씀을 찢어 불속에다 던졌던 이 사람의 시신은 낮에는 더위에, 밤에는 추위에 내던져질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6:32]

주제1: [두루마리에 기록된 심판 예언]

주제2: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

(주);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더 하였더라 - 여호야김의 두루마리 소각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끈질긴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말씀에 영감을 불어 넣으신 하나님은 또한그 말씀을 친히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모세 당시 백성들의 가증스러운 범죄로 말미암아 십계명이 깨뜨러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시금 십계명을 새겨 주셨다(출 32:19 ;34:1-9).

성 경: [렘37:1]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 본절과 다음 절은 본장과 38장의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앞장(36장)에서는 여호야김 시대의 사건들을 다루었으나 여기서는 다시 시드기야 재위 당시의 사건으로 넘어오고 있다(Bright).

성 경: [렘37:2]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유다가 민족적 파멸에 봉착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영적 차원의 것이었다. 한편 본문은 왕하 24:17-20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야에 대한 기사를 압축해서 옮겨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왕하에서의 주된 취지는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후 그 역시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자기 신하들과 방백들이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배척했기 때문에 시드기야도 거기에 끌려다녔던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7:3]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 - 시드기야는 다급한 상황에 처하자 예레미야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본절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보내진 제사장 스바냐는 예루살렘 포위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에도 시드기야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를 방문한 적이 있다(21:1-10). 그리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스마야란 거짓 선지자로부터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라는 편지를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2:24-32). 그러나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중에는 들지 않았다(38:1). 반면에 그의 동료 관계에 있던 여후갈과 바스훌(21:1)은 예레미야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20:1, 2 ; 38:1-6). 한편, 본절에 언급된 왕의 요구 사항은 아마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철수하였던 그런 기적을 여호와께서 다시 베풀어주시지나 않을까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였을 것이다(왕하 19:32-37). 그러나 1-7절에서는 시드기야의 운명과 또한 포위 공격이 시작될 것에 관해 선언되어 있다.

성 경: [렘37:4]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출입하는 중 - 이 표현은 구약의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는데 , 본절에서처럼 백성들 중에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녔다는 의미이다. 13, 14절에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때로부터 그는 B.C. 586년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까지 옥에 갇혀 있어야했다.

성 경: [렘37:5]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 애굽군대가 팔레스틴 평원으로 들어온 것은 B.C.588년 여름이었다. 그들은 아마 시기드야의 응원 요청에 응답하여 출병하였을 가능성이 많지만 또한 바벨론군의 애굽 침입을 사전에 방어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라기스 서신(Lachish Letter)에는 유다군의 지휘관이 애굽에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어째든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풀고 그들과 접전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

성 경: [렘37:6,7]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애굽 군대는 갈대아인의 군대에 패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그들이 출병한 것도 사실 유다를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즉각 자기들 나라로 철수했으며, 이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는 데는 방해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Clarke).

성 경: [렘37:8]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갈대인이 다시 와서...불사르리라 - 본 단락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21:1-7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여태까지 예고되고 경고되어 왔던 유다에 대한 심판의 불가피성이 이제 완전하게 실행되고 말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중단된 것은 단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예루살렘 멸망을 방어해 줄 것이 없는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37:9,10]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느부갓네살에게 비록 부상당한 병사만 있다고 해도 그가 승리할 것이므로 헛된 기대를 버리라는 내용이다. 이런 수사적 과장법은 예루살렘의 패망과 파멸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선지자의 대답은 그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분명하고도 단호하였다. 오히려 유다 멸망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 이전보다 더 강렬했다. 바벨론군의 철수로 인해서 백성들의 사기가 크게 고조되어 있던 그 시점에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은 심각한 반발과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단락에서 그가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 '스스로 속여 말하지 말라'고 하는 어구는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인데, '너희 영을 높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성 경: [렘37:11]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갈대인의 군대가...예루살렘에서 떠나매 -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사건은 바벨론의 포위 공격이 중단되고 백성들이 성밖으로 다닐수 있던 그 어간에 발생했다. 본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렘37:12]

주제1: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기드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베냐민 땅에서 백성 중 분깃을 받으려고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1)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세습 토지를 유산으로 분배받고자 했음을 가리킨다는 견해(Clarke), (2) 32:1-15에 언급되어 있는 땅 구입 사건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Bright), (3)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아나돗으로 피신하고자 했다는 견해(Lewis). 이 중 세 번째 견해는 유다 민족의 파멸을 선포하면서도 그 운명에 끝까지 동참하고자 했던 예레미야의 소신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연대기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만일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멜에게서 산 땅을 취하기 위해 아나돗으로 가고자 했다면, 이때가 32장보다 이후의 시점이 되어야 하나 사실은 그 이전이다. 왜냐하면 32장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뜰에 갇힌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굳이 두 번재 견해를 취하려면,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미 사둔 땅을 보러갔던 것이 아니라 그 땅의 매매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아나돗으로 가고자 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32:8 주석 참조). 어째든 히브리어 본문은 명확하지 않으며, 우리는 위의 여러 해석들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것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성 경: [렘37:13]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네가 갈대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 문지기 두목 이리야는 예레미야를 이탈자나 도망자로 보고 그를 체포하였다. 아마 그가 예레미야를 그렇게 오해한 데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즉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에게 항복할 것을 촉구해 왔었으며(12:9 ; 38:2), 많은 유다인들은 실제로 적에게 투항하였었다(38:19 ; 52:15). 더군다나 바벨론이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었다.

성 경: [렘37:14]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투옥된 예레미야]

(주); 망령되다...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 '망령되다'에 해당하는 '쉐케르'(*)는 '허위', '거짓된', '기만하다'는 뜻으로, 애매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히려고 획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복하려'의 히브리어 '나팔'(*)은 원래 '떨어지다'는 뜻이며, 상징적으로 '배반하다', '(다른 편으로) 기울어지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Calvin).

성 경: [렘37:15]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투옥된 예레미야]

(주);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 요나단의 집을 왜 감옥으로 사용했는지 하는 점은 알 수가 없다. 아마 유다 관리인들의 집에는 임시로 죄수 등을 감금할 수 있는그런 방이 있었던 것 같다(Ciarke). 그들은 공정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예레미야를 때리는 등 아예 흉악범 취급을 하였다.

성 경: [렘37:16]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투옥된 예레미야]

(주); 예레미야가 토굴 옥 음실에 들어간지 - 이 구절의 해석이 다소 어렵긴 하지만, 예레미야가 갇힌 곳이 지하 감옥이었으라고 짐작된다. '토굴'(*, 하하누요트)은 우물과 흡사한 구덩이로서 그 바닥은 작은 방처럼 움푹패인 형태라고 하는데(Blayney), 본절에서는 이 움푹한 곳을 가리켜 '음실'(*, 보르)이라 칭하는 듯하다. 38:6, 13을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지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마 여기서도 예레미야는 이 집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될 경우 결국 죽게 되고 말 비참한 장소였다(20절). 그는 시드기야가 그를 불러들였을 때까지 이곳에 상당 기간 동안 갇혀있었던 것 같다.

성 경: [렘37:17]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투옥된 예레미야]

(주);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있느뇨...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 본절의 장면은 시드기야의 소심한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왕이 자기 신하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밀히 자문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메세지는 이전과 같은 것이었다. 즉왕의 운명이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감금된 상태에 있었으나 진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성 경: [렘37:18,19,20]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투옥된 예레미야]

본문은 그토록 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했던 예레미야가 위경에 처해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동정을 구한 것이 아니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판결을 받기 원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죽이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만(신 13:1-5), 상황은 전혀 반대였다. 예레미야는 진리를 전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켰음에도 오히려 활개를 치고 다녔던 것이다.

(주);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당신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속았습니다'라는 의미의 역설적 표현이다.

성 경: [렘37:21]

주제1: [시위대 뜰 안에 갇힌 예레미야]

주제2: [투옥된 예레미야]

(주);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두고...떡 한덩이씩 - 이 비밀 회담은 결국 왕이 호의에 베푸는 것으로 끝났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서 구출되었으며, 시위대 마당으로 옮겨졌다. 아마 시위대 뜰은 요나단의 암굴보다는 상태가 휠씬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시위대 뜰은 왕궁 곁에 위치해 있었으며(32:2 ; 느 3:25), 감옥과 같이 죄인들을 가두어 격리시킨 곳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행동이 제한당한 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그의 사촌 하나멜의 밭을 샀던 것도 바로 그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32:1-15). 더군다나, 이제는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다. 물론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식량이 남아 있을 때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포위 공격이 점점 압박해 들어옴에 따라 지금까지 선지자가 예언하여 왔던 그 기근이 이제 실제로 닥치게 된다.

성 경: [렘38:1]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본장은 예루살렘 함락이 가까와 옴에 따라 예레미야에 대한 핍박의 정도도 더욱 심해져감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유치(留置)되어 있으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을 계속하였음에도 분명하다. 여기 언급되고 있는 그다랴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착고에 채운 바스훌(20:1-3)의 아들이며, 유갈은 여후갈(37:3)과 동일인이다. 그리고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를 찾아갔던 자이다(21:1, 2). 이들은 모두 시드기야의 심복으로 당시 유력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친애굽파를 대표하는 자들이었으리라 짐작된다(Feinberg).

성 경: [렘38:2]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본절 내용은 12:9에 언급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어떤 이는 이를 후대의 필사자에 의해 삽입된 해설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렇게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은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칼', '기근', '염병'과 같은 용어들은 예레미야가 빈번하게 사용하던 말이다. '항복하는 자'(*, 하이체)의 원래 의미는 '밖으로 나가는 자'란뜻이다. 포위 공격이 감행되고 있던 이런 시점에서 항복을 권유한다는 것은 반역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를 체포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Thompson). 그리고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는 말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그의 목숨은 그의 전리품이될 것이다'이다.

성 경: [렘38:3]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이 성이 반드시...손에 붙이우리니 -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일신상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이 예언을 선언하는 데에 있어서 주저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Clarke). 한편, 이 예언의 요지는 34:2, 22 ; 37:8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 말을 반복해서 선포했던 것이 분명하다(Bright). 아무튼 이 두번째 선언도 그 당시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반국가적 소요를 야기시키는 선동적 발언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이 성이 반드시...붙이우리다'란 말에 놓여져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의 절대 부정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성 경: [렘38:4]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방백들은 반역죄 내지는 선동죄를 적용하여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이 약하여졌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투항 권고로 인해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라기스 서신 제6편에 등장한다. 라기스 서신에서 군대 지휘관은 예루살렘 관리들 중에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패배주의자들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내용이 파손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휘관이 비난의 대상으로 삼은 자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라기스 서신 제3편에 '경계하라'고 선언한 어느 선지자가 언급되고 있긴 하여도 지휘관이 지목하고 있는 자가 예레미야인 것으로 규정할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예레미야가 여기서 반역적 패배주의자로 몰리고 있음은 분명하나, 민족 지도자들 중에도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8:5]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 이는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자기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의미이다. 시드기야는 이를 통해서 그가 그들의 조언대로 시행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힌 셈이다. 시드기야는 참으로 나약한 군주였다. 그는 선지자를 존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죄한 자를 희생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Clarke). 어떻게 보면 당시의 실세는 왕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백들에게 있었으며, 이들은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25-27절 참조). 물론, 그의 등극 자체부터가 이미 정통성을 상실케 하였을 것이다. 즉 그는 여호야긴이 포로로 붙잡혀가고 난 다음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위에 오른 꼭두각시 왕이었으며, 또한 국민 대다수에 의해서 진짜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야긴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왕의 무능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이를 '왕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런 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성 경: [렘38:6]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 맛소라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예레미야를 붙잡아 넣은 구덩이를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26절의 내용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주석가 니콜슨(Nicholson)은 왕의 아들 말기야란 말을 누락시키고 있으며, 또한 영영 성경 NEB도 이와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니콜슨은 이곳의 구덩이를 37:11-16에 언급되고 있는 구덩이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 37장의 요나단의 집이 시위대 건물에 포함되어 있었던 복합 건물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어떤 해석자는 24-28절의 내용을 끝부분으로 옮겨다 놓고 이를 무마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한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설명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고대에는, 건조한 여름 날씨에 대비하기 위해 겨울비를 받아둘 우물이 예루살렘에는 많았다.그러므로 본문의 우물을 굳이 37:16의 '토굴 옥 음실'과 일치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예레미야를 깊은 우물속에 넣어 저절로 죽게 함으로써 피를 흘리게 하는 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같다(창 37:18, 19 참조). 한편, 전형적인 구덩이는 석회암을 파내고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직경 약 90cm 정도의 좁은 입구와 물을 퍼내는 곳의 깊이가 대개 90-120cm 깊이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물을 담아 두고있는 곳은 상당히 깊었다. 이곳에서 예레미야를 밧줄을 이용해 집어 넣고 꺼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안으로 출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13절).

성 경: [렘38:7]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왕궁 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이...들으니라 - '환관'에 해당하는 '사리스'(*)는 구약에서 흔히 왕궁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곤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문자 그대로 환관이었던 것 같다. 70인역(LXX)은 이 '환관'이란 단어를 생략하고 있다(Bright).

(주);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 우리는 구약에서 흔히 성문에 앉았다는 기록을 보게되는데, 이 성문은 공개 재판이 열리던 곳이었다(Clarke).

성 경: [렘38:8]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에벳멜렉이...왕께 고하여 가로되 - 예레미야의 구출은 바로 이 친절한 구스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사람은 확실한 죽음의 운명에 처한 예레미야를 구출하기 위해 신속한 행동을 취하였다. 예레미야는 훗날 다가올 예루살렘 파멸 때에 그가 구원받게 될 것임을 약속한다(39:15-18). 에벳멜렉은 급히 왕에게 찾아가 호소하였는데, 왕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사건의 전말을 호소하기에 아주 적합했을 것이고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8:9]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이는, 그가 죽은 자나 다름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그곳에 던졌을 때는 조만간 진흙에 빠져 질식해 죽지 않으면 굶어서 죽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따라서 에벳멜렉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다급한 상황을 전달함으로써 갈등에 사로잡힌 왕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성 경: [렘38:10]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 여기서 시드기야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설령 방백들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Clarke). 맛소라 사본(MT)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30인으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70인역(LXX)은 이를 세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브라이트(Bright)는 한 사람을 구출하는 데 30명이란 사람을 동원하는 것이 불필요한 인원 동원이라고 보고 70인역을 따라 세 사람으로 설명하고, 30이란 숫자를 히브리어 자음이 하나 중복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어떤 히브리어 사본에도 3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방백들의 저지나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30명이 할당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시드기야의 대응책은 신속하고도 또 실질적이었다.

성 경: [렘38:11]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주); 헝겊과 낡은 옷을 취하고...내리우며 - 왕궁에는 의복이나 전투복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으며, 사절에게나 또는 공신들에게 선물로 줄 의복을 보관기도 했다. 그러나 에벳멜렉이 바로 이러한 창고에서 이것들을 취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는 왕궁의 광에서 낡아 버린, 그래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그런 의복들을 취하여 그것들로 밧줄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선지자에게 내려 보내 그것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였다.

성 경: [렘38:12,13]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예레미야의 위기와 구출]

에벳멜렉은 대단히 사려가 깊고 또 지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밧줄을 예레미야의 겨드랑이에 대고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림으로써 기진 맥진해 있을 예레미야에게 힘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37:17-21에는 예레미야가 구출되어 시드기야 왕과 밀담을 나누는 거사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구출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양쪽 모두에 그가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다는 기록이 담겨 있다(13절 ; 37:21 참조).

성 경: [렘38:14]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집 제 삼 문으로 -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구출된 후에 이어지는 왕과 예레미야 간의 비밀 회담이 기록되고 있다. 37:17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본문에서는 비밀 회담이 이루어진 장소가 여호와의 집 제 삼 문으로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 이 문에 대해서는 다른 곳의 언급이 없어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추측컨대 왕궁과 성전을 직접 연결하는 것으로서 왕이 개인적으로서 출입했던 그런 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38:15]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지라도 - 예레미야는 왕의 성품이 나약하고 또 그의 신하들에게 끌려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게 여호와로부터 온 말씀을 전해준다고 해 봐야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임을 알았다. 시드기야는 앞서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한 바 있으며 또한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었다(32:1-5). 그러나 지금은 사태가 대단히 심각하였기 때문에 그는 예레미야를 죽이지도 않을 것이고 또 방백들의 손에 넘기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6절).

성 경: [렘38:16]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사시거니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피조물들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 곧 근원적이며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Calvin). 또 본문에서처럼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것은, 그 맹세 사항을 어겼을 경우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맹세한 자의 생명을 빼앗아 가셔도 좋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 경: [렘38:17]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 왕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이 성의 안전 여부가 달려 있었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바벨론 왕의 방백들은 애굽군의 진격을 차단하고 다시 예루살렘 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바벨론군 장군들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리아의 립나에 있었다(39:5, 6,Clarke).

성 경: [렘38:18]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 시드기야에 대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이전과 동일하였다(2, 3절 ; 21:8-10 참조). 왕과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항복이었던 것이다. 항복을 권유하는 이 메시지로 인해서 그는 방백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던져졌었다. 한편 유다 방백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히브리어'사림'(*)이란 말을 갈대아인들의 장군들에게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유다 방백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였으나, 적국인 갈대인들의 방백들은 그의 생명을 구해주게 될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8:19]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 하였노라 - 여기서도 시드기야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다시 노출된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드기야의 말에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갈대아인들에게 투항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의 충고에 의해 투항했을 수도 있겠다(Bright). 아무튼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따를 용기가 없었다(5절 참조). 그는 방백들을 두려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바벨론에 투항한 자들의 적대감이나 푸대접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성 경: [렘38:20]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 이는 결국 시드기야의 모든 두려움의 원인이 여호와께 대한 불신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시드기야가 참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게 하고 그래서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예상할 수 있는 온갖 두려운 상황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거기에 기우(杞憂)를 더하고 있었다.

성 경: [렘38:21,22]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예레미야는 이어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항복하기를 거부할 때 생겨날 참혹한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 이는 친구들에게 배반당했음을 나타내는, 익히 알려진 관용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20:10 ;시 41:9 참조). 진흙에 빠짐을 보고도 물러갔다고 하는 내용은 시 69:14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먼저 투항했던 자들의 조롱을 두려워 했다. 그러나 자신의 후궁들로부터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더 수치스러울 것인가! 당시에는 정복국의 왕이 패전국의 궁녀들을 모조리 취해가는 것이 상례였다(삼하16:21, 22 참조). 한편 이 짧은 내용의 노래는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게 될 때의 시드기야에게 적용될 것이긴 하지만, 이는 또한 예레미야가 최근에 겪었던 사건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6절).

성 경: [렘38:23]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인에게로 끌어냄을 입겠고 -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시드기야의 운명은 구덩이에 던져지게 된 예레미야의 운명과 평행을 이루며 기록되고 있다(6절 참조). 여호와께서는 에벳멜렉을 사용하여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어'(13절) 죽음을 면케하여 주셨으나, 여호와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시드기야는 그를 해할 갈대인에게로 '끌어냄을 입을'것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여자들은 왕의 자식들을 낳은 왕비들이었을 것이고 앞절의 여자들은 젊은 궁녀들이었을 것이다. 아마 전자는 나이가 많고 또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방백들에게 환영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38:24]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주); 너는 이 말을...알게 하지 말라 - 우리는 시드기야가 선지자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선지자의 충고에 대한 시드기야의 말은 예레미야에게 침묵을 지키고 있기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예레미야의 말이 진실됨을 깨닫게는 되었으나 여전히 신하들의 반발 등의 여러가지 걱정거리들 때문에 그 충고를 실행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바벨론의 포위 공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를 논의한 것 자체를 방백들에게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시드기야의 바람이었다.

성 경: [렘38:25,26]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여기서도 신하들을 두려워하는 시드기야의 유약한 심성이 드러난다. 그는 한편으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언급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였지만, 그것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신하들의 입장에 굴복되어 있었다. 그는 항복하고 싶어도 신하들이 행여나 반역을 꾀하여 자신을 살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득세한 신하들은 대부분 친애굽 내지는 반바벨론 정책을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렘38:27]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예레미야는 왕이 명령한 대로 말했으며, 방백들은 더 이상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도록 왕이 명한 사실은 이미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듯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레미야의 대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도 당파적이면서도 강력한 권세를 형성하고 있던 방백들에게 불필요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약한 왕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렘38:28]

주제1: [예레미야의 위기]

주제2: [시드기야 왕과 예레미야의 대면]

예레미야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고 다만 자신의 구출 문제만을 그들에게 말함으로써 그 사건의 일말은 끝났다. 이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도록 허용이 되었던 것이며,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실행할 용기가 부족하긴 하여도 돌아와서 과연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를 고심하게 되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39:1]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시드기야의 구년 시 월에 - '시 월'은 에 2:16에서 데벳월로 기록되어 있다. 이 데벳월은 양력 정월 초승달이 뜨는 날에서부터 시작 되었다(Clarke). 이곳의 연대적 서술은 52:4과 연결지어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이달 10일째라고 날짜를 덧붙이고 있다. 본절과 2절은 52:4-6의 내용을 축약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애 의해 함락된 것은 B.C. 586년 7월이었다(52:5 이하 참조). 성이 함락되고 한 달 후 느부갓네의 경호 사령관인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 B.C. 588년 1월에 시작되어 B.C. 586년 7월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사이에, 즉 B.C. 588년 여름에 일시적으로 포위 공격이 풀렸었다. 물론 그것은 애굽 원정군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 경: [렘39:2]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사월 구일에 - 히브리 종교력으로 4월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담무스월이라고 불리었다. 이 달은 오늘날의 7월 초승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Clarke).

성 경: [렘39:3]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바벨론 왕의 모든 방백이 이르러 중문에 앉으니 - 본문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방백들이 중문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달아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마 왕은 어떤 방어 조치가 취해질 것을 기다리지 않고 성이 파괴되는 그날 밤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여기서 '중문'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오직 이곳에만 언급된다. 어쩌면 이것은 성을 두 구역으로 갈라놓고 있던 벽의 출입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Thompson). 예루살렘은 두 개의 언덕, 곧 남쪽의 시온과 북쪽의 아크라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중문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쉽게 짐작되다시피, 이것은 아마 예루살렘의 두 언덕 사이의 계곡 한가운데에 있던 통로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언덕은 때로는 상 예루살렘, 하 예루살렘으로도 불리었다. 갈대아 군대는 북쪽 편에서 성을 파괴하고 진입해 들어왔을 것이고 진군하여 이 중문을 장악함으로써 성 전체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드기야는 이 사실을 알고 그 반대편에 있는 남쪽의 문으로 달아났을 것이다(Clarke).

(주); 네르갈사레셀...박사장 네르갈사레셀 -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은 바벨론 군대의 주요 지휘관들이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환관장과 박사장이라는 두 직명이 소개되는데, 이들도 역시 인명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가하면 블레이니(Blayney)박사는 이를 세 사람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직행명과 그 뒤에 이름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제견해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한편 여기에는 '네르갈사레셀'이 두 번 언급된다. 바벨론군 총사령관은 느부사라단이었는데, 아마 첫 번째 네르갈사레셀은 느부사라단이었는데, 아마 첫 번째 네르갈사레셀은 느부사라단에 대한 오기에 의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동명이인의 다른 군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Clarke).

성 경: [렘39:4]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유다 왕 시드기야와...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 어쩌면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나 지하통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들키지도 않고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성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달아날 수있었다(Clarke).

(주); 아라바로 갔더니 - '아라바'란 요르단 계곡을 망라하는 지역을 가르키는데, 사해 남쪽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리고 지역인 요르단 계곡을 가리키는것으로 쓰였다(Thompson). 클라크(Clarke)는 이를 광야길로 번역한다. 아무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감람산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산을 넘는 것은 시간을 지체할 것이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다른 길인 광야길, 다시 말해서 아라바를 택했던 것이다. 아마도 시드기야는 요르단을 건너 애굽으로 도망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렘39:5]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하맛 땅 립나에 있는...느부갓네살에게로 - '립나'는 팔레스틴 지역 북쪽 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하맛' 역시 수리아에 속해 있던 대도시였다(창 10:18 참조,Clarke). 또한 오론테스 강변에 있었는데, 가데스 남쪽의 수리아 고도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도시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직통으로 연결시켜주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느부갓네살은 수리아의 심장부인 립나의 사령부에 머물러 있고 그의 군장은 유다에서 전쟁을 수행했었다. 포로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심판을 받기 위해 압송되었다(Thompson).

성 경: [렘39:8]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왕궁과 백성의 집을 불사르며 - 니콜슨 (Nicholson)은 왕궁과 백성의 집 사이에 여호와의 집이란 말을 덧 붙이고 있다. 물론 본절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52:13에는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여호와의 집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날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벽 남쪽 지역의 동쪽 비탈을 발굴한 결과 그 당시 백성의 개인적인 집들에까지 파멸이 미쳤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서 '헐었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추'(*)는 성을 헌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예레미야의 소명 장면에서도 나타났다(1:10).

성 경: [렘39:9]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시위대장 느부사라단 - '시위대장'은 히브리어로 '라브 타바힘'(*)인데, 여기서 히브리어 동사 '타바흐'(*)는 (짐승이나 사람을)'학살하다', 살해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탈굼역(Targum)은 '살해자의 방백'이라고도 번역하나, '시위대장'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주);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 혹자는 이를 '남아 있는 장인들'로 번역하는데 이는 같은 말의 반복을 피하고자 함이다(Nicholson). 그러나 본문은 예루살렘내의 백성을, 또 본절 말미의 '남은 백성'이란 유다 지경내의 백성들을 포함하는 말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Calvin).

성 경: [렘39:10]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함락]

(주);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그들에게 주었더라 - 여호야긴 당시의 예루살렘 함락때와 같이(왕하 24:10-14),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사로 잡아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는데, 특히 유력한 인사들이나 재능있는 장인들을 잡아갔다. 반면에 빈민들은 유다의 땅을 할당받아 포도원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는 바벨론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Feinberg).

성 경: [렘39:11,12]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구원]

바벨론 왕이 예레미야에 대해서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는 내용이 언급된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정부에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루살렘 멸망 전에 바벨론에 투항한 유대인들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Thompson). 즉 느부갓네살은 그들로부터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반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곤 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Clarke).

성 경: [렘39:13,14]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레미야의 에벳멜렉의 구원]

여기에는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 박사장 네르갈사레셀 등을 포함한 바벨론 왕의 주요 관리들이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데려다가 그를 그다랴에게 넘겨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그달리야'라고도 불리우며 유다에 남은 자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왕하 15:22-24). 한편 기자는 여기서 예레미야를 '집으로 데려 가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소 불명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이라고 표현되지 않고 그냥 '그 집'(*, 하바이트) 즉 정관사가 사용된 '집'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집'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흔히 성전을 뜻할 때 쓰였으며, 때로는 왕궁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집은 예레미야의 집이나 또는 그다랴의 집인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이는 바벨론 군대가 사령부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정부 청사, 곧 그다랴 행정부 건물이나 또는 총독 관저 정도되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와 관련된 기사가 40:1-6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이 다소 다르다. 40장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가량 떨어진 라마의 포로 행렬 중에서 예레미야를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느부사라단은 그를 포로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솔직하게 담화하고 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본장의 11-14절의 내용은 사건의 세부 사항을 생략한 채 그 결과만을 간단히 기록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아마 그는 1차 심문을 당한 후에 석방되었다가 그 후 다시 병사들에게 붙잡혀서 사슬에 묶이게 되었을 것이며, 그런 다음 리블라를 거쳐 바벨론으로 압송되기 위해 라마의 수용소로 보내졌을 것으로 추론된다.

성 경: [렘39:15,16]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구원]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 파멸에도 불구하고 에벳멜렉이 살아남게 되리라고 하는 약속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38:13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아마 이 내용이 이곳에 기록된 이유는 예레미야 자신과 함께 예레미야를 구출한 에벳멜렉 역시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 같다(Nicholson).

성 경: [렘39:17]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구원]

(주);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 에벳멜렉이 두려워하는 자들이란 아마 38:1에 언급된 유다 고위층 인사들을 말하는 것 같다. 예레미야를 구출했던 자는 바로 이 에벳멜렉이었고 또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왕에게 고소하였던 자가 바로 이 용기 있는 에벳멜렉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유다 방백들의 위협에 늘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렘39:18]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의 구원]

(주);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공감을 표했던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믿었던 다른 관리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결국 에벳멜렉의 목숨을 건 대담한 행위는 왕이나 방백들 보다 여호와를 더욱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그는 선지자의 편에 서서 중재하였고 그로 인해 여호와의 보호하심이 함께했던 것이다(Clarke).

성 경: [렘40:1]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자유의 몸이 된 예레미야]

(주);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 본절부터 6절까지는 그다랴에 대한 이야기의 서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다랴는 유다의 총독으로 소개되고 있다(5절). 이곳의 무대인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오늘날의 엘-람(er-Ram)이란 곳이다. 포로들은 여기에 집결, 수용되었다가 바벨론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예레미야도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사슬에 묶여 이곳에 등장한다. 이는 분명히 포로들에 대한 취급상의 어떤 잘못이 있었음을 말한다. 즉,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에 대해서 상당한 대우를 해주라고 명령했었으며 그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이미 석방 되어 있었다(39:11-14).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을 잡아들이는 책무를맡았던 병사들의 착오에 의해 예레미야는 다시 포로로 잡혔던 것이며, 다른 포로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위해 사슬에 묶여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를 발견했으며, 그 즉시 예레미야를 석방했다.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 파괴 이후 한 달만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서 그 성에 대한 파멸을 더욱 철저히 시행하였고 또 포로들을 끌어가는 대열을 조직하였다(왕하 25:8-12).

(주);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 이 어구는 흔히 어떤 신탁을 선포할때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다음에 신탁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불분명하다. 다음 절에서부터는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예레미야 설교의 개요가 등장한다. 아마도 느부사라단의 입에서 나온 내용들과 이어지는 사건들이 본절에 언급된 신탁 서론(말씀이 임하니라)에 대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Thdmpson). 그렇다면 본 구절의 '말씀'이란 꼭 예언의 말씀 그 자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계시된 메시지라는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겠다(Feinberg).

성 경: [렘40:2]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자유의 몸이 된 예레미야]

(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선포하시더니 - 본 구절 말씀을 여호와께 대한 느부사라단의 신앙의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본 구절의 화자(話者)가 느부사라단임을 굳이 부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앗수르인들은 심리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전쟁 상대국의 종교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바 있다(왕하 18:22, 33-35). 어쨌든 바벨론 당국은 유다의 종교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수집하였을 터이며, 특히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예레미야에 관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구절에서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요점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는 바를 인용조로 언급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렘40:3]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자유의 몸이 된 예레미야]

(주);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임한 것이니라 - 여기서도 우리는 갈대아 군대의 장군인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선포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느부사라단은 여기서 예레미야가 전환 메시지의 대략적인 내용을 지적하면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이 이미 예언된 대로 발생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성 경: [렘40:4]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자유의 몸이 된 예레미야]

(주);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 이제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든지 아니면 유다 땅에 남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Clarke). 예레미야에 대한 안전 배려는 이미 느부갓네살이 명령했던 것이기도 하다(39:12).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예레미야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이미 보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바벨론의 '친구'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보다 궁극적인 관심사는 바벨론에 항복하여 안전을 누리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회복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선대하리라'의 히브리어 '아심 에트 에니'(*)는 문자적으로 '내 눈으로 (너를) 주시하리라'라는 뜻으로 좋은 대접을 해주겠다는 의미이다.

성 경: [렘40:5]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자유의 몸이 된 예레미야]

(주);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 전에 그가 다시 이르되 - 이 어구에 대해서 니콜슨(Nicholson)은 '예레미야가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을 때 느부사라단이 계속 말하였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가능한 해석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남는 것이 네뜻이라면' 너는 그다랴에게로 가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주);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 - 그다랴의 조부인 사반은 요시야의 대신이었으며,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왕에게로 가져갔던 사람이다.(왕하 22:3-13). 사반의 아들이자 그다랴의 부친이기도 한 아히감은 요시야가 파견한 특사의 일원으로서 여선지 훌다를 방문한 바 있다(왕하 22:12-14). 예레미야가 성전 설교를 하고 또 그가 위험한 상태에 있었을 때 아히감은 예레미야를 보호하기도 하였다(26:24). 이제 유다의 새로운 총독이 된 자는 바로 이 아히감의 아들 그댜라인 것이다. 그는 아마 시드기야의 내각에서 상당한 행정적인 경험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B.C. 6세기 초로 연대가 추정되는 라기스의 인장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그댜라에게 속한 것' 그 집전체에 대해서'라는 어구가 새겨져 잇었다. 이런 표현은 왕의 총리 대신에게나 사용될 수 있던 어구였다(Thompson).

성 경: [렘40:6]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자유의 몸이 된 예레미야]

(주);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댜라에게로 - 그댜라의 행정부는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다. 아마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것이다(애 2:13; 4:1). 미스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3km 가량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텔 엔-나스베(Tel en Nasbeh)란 곳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도시는 수세기에 걸쳐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삿 20:1-3 ; 삼상 7:5-14 ; 10:17). 한편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의 위치를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오늘날의 네비 사무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의 견해가 보다 우세하고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갔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41:17에서는 그가 미스바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옮겨 갔음을 암시하는 내용도 보인다(Nicholson).

성 경: [렘40:7]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총독이 된 그다랴]

바벨론 군대의 소탕 작전을 피해 달아났던 유다군 패잔병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바벨론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본절의 '빈민'이란 아마 대부분 시드기야 이전 왕조의 특권 계층에서 소외되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J. Bright).

성 경: [렘40:8]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총독이 된 그다랴]

(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그들의 사람들 - 얼핏보면 그댜라는 그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던 것 같이 보인다. 그는 숨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폐허를 복구시키는 작업에 협조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유다 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 군대를 피해서 달아났던 군대 장관이나 방백들이 있었다. 유다 지역은 지리상 많은 언덕과 구릉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안전하게 숨겨줄만한 그런 은밀한 장소가 많이 있었다. 한편 이들 지도자들의 이름들이 여기서 거명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을 주도할 자들이 이들 중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들 중에는 왕가의 일원이기도 하며 또한 그다랴를 암살하게 될 '이스마엘'이란 자가 포함되어 있다.

성 경: [렘40:9]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총독이 된 그다랴]

(주);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 그다랴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지휘관들을 무마시키고 그들에게 안전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그다랴는 그들에게 맹세하면서 말했다. 즉, 그들이 지금이라도 반바벨론 입장을 확실하게 철회하면 바벨론 사람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왕하 25:24).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안전은 이 땅에 거주하고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었다.

(주); 유익하리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야타브'(*)는 '더 잘되다', '은총을 입다', '즐겁다' 등의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암시 한다.

성 경: [렘40:10]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총독이 된 그다랴]

(주); 나는 미스바에 거하여...갈대아인을 섬기리니 - '갈대아인을 섬긴다'고 하는 말의 문자적 번역은 '갈대아인들 앞에 선다'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한 법적 처리 절차를 위해 그다랴가 유다 백성들과 갈대아 관리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Bright). 본 구절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건대, 여기서는 특히 이스마엘 일행과 같은 패잔병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나서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Feinberg).

성 경: [렘40:11,12]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땅 총독이 된 그다랴]

모압이나 암몬, 그리고 에돔과 그밖의 지역으로 피난갔던 유다 난민들은 그다랴가 유다 총각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남은 자들과 합세하여 황폐해진 땅을 경작하고 좋은 실과들을 거두게 되었다. 황폐해진 이 땅은 다시 평정을 찾으며 일이 예전처럼 잘 진행되고 있었다. 생업이 재개되었고 정상적인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다. 이런 판국에 갑자기 그다랴를 암살하려는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성 경: [렘40:13,14]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땅 총독이 된 그다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은 그다랴에게 합세했던 군대 장관들 중 하나였다. 그는 이들 군대 장관들의 대표로서, 이 새 총독에게 나아가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경고해주었다. 즉 암몬 왕 바알리스가 왕가의 일원인 이스마엘을 부추겨서 그다랴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겔 21:18-32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B.C. 587년 서방 원정을 계획했을 때 그는 유다 뿐만 아니라 암몬도 공격하고 했는데, 아마 이들 두 나라 모두가 느부갓네살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시드기야는 애굽보다는 암몬으로 달아나려고 했을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39:4, 5 참조). 또한 여기에는 이스마엘이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는 것으로 암시되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음모에 연루되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수가 없다. 그가 왕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41:1) 어쩌면 그는 유다에서 정권을 장악하려고 계획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행을 저지르고 난 직후, 그가 정권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암몬으로 달아났던 것으로 보아서 이는 그다지 설득력을 지닌 것같지 않다. 이보다는 그가 어떤 정치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바벨론을 자극하고 괴롭히려는 동기에서 그러한 짓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낫겠다.

성 경: [렘40:15]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땅 총독이 된 그다랴]

(주);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남은 자로 멸망을 당케 하랴 - 요하난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임명된 유다 총독이 살해될 경우 얼마나 큰 위험이 닥칠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그다랴 주변으로 모여든 유다인은 다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또 남은 자마저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스마엘이 꾀하고 있는 이런 야만적 행위는 이 땅의 남은 자들을 근거로 해서 수립될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을 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살려 놓아서 국가의 장래를 그르치게 하기보다는 비밀리에 그를 살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40:16]

주제1: [예레미야의 석방]

주제2: [유다 땅 총독이 된 그다랴]

(주); 네가 이 일을 행치 말 것이니라 - 그다랴는 요하난이 잘못 알고 있었거나 또한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자기 동족을, 그것도 국가의 패망으로 인해 상처받은 동족을 추호도 의심하고 싶지 않은 연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화해와 단결을 솔선 수범하여 국토 재건에 매진하고자 하는 생각에 깊이 사로 잡혀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성 경: [렘41:1,2]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주); 칠 월에 - 연도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해는 예루살렘이 함락 되던 연도(B.C. 586년)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함락은 사월로 명시되어 있다(39:2). 그리고 히브리 종교력의 칠 월은 현대력으로는 양력 10월경에 해당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이전에 40:7-16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다랴에 대한 암살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년이나 7년 후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유다인들은 그다랴에 대한 암살을 큰 사건으로 여겼으며, 그후 칠월을 이에 대한 기념의 달로 예식을 거행하였다(슥 7:5 ; 8:19).

(주); 이스마엘이...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암살하는 사건의 배경은 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다인의 관습에 따르면, 주인은 손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또 손님은 주인에게 신뢰를 가지고 그에 맞는 답례를 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다랴는 이스마엘을 손님으로 정중히 대접했을 것이고, 이스마엘을 믿고 무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Bright). 이에 대해 클라크(Clarke)는 보다 더 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즉 본절에서와 같이 함께 떡을 먹는것이 단순한 식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지리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다랴를 살해한 행위는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한 갈대인들에 대한 공격이고 도전이었다(Thompson).

성 경: [렘41:3]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거기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 첫 번째 살인에 이어 또 다른 살인이 이어졌다.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몇몇 유다인들이 곧이어 살해 되었다. 이들은 미스바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의 대표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던 갈대아 군사들 중 몇몇도 살해되었다. 아마 이들도 식사에 참석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곳에 참석해 있던 갈대아인 주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하지 않고는 그 음모를 실천할 수 없엇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고 기습을 당해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바벨론 군대의 보복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이 사건에서 살해된 갈대아인들이 총독 관저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었으며, 일시적으로 미스바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 경: [렘41:4]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본절은 그다랴 살해 사건이 사전의 각본에 따라 주도 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렘41:5]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팔십 명이 그 수염을 깎고...몸을 상하고 - 북이스라엘의 옛 종교 중심지였던 세겜과 실로, 그리고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미스바에 도착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제사하기 위해서 가던 중이었다. 이 사실은 소제물이나 유향이란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때가 칠월이었으니 이들은 가을의 큰절기인 초막절에 참석하고자 했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 7월은 신년도와 같은 것이었다. 한편 순례자들이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실은 북 이스라엘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에 적어도 얼마 정도는 B.C. 622년의 요시야의 개혁을 받아들이고 그때까지 계속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어쩌면 이

들은 중앙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는 신명기의 규례들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신12:5, 6). 또한 순례자들은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을 상하는 등 슬픔과 회개의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16:6 ; 48:37 참조), 이는 틀림없이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한 애곡의 표시였을 것이다. 전체 포로기에 걸쳐서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시 74, 79편 ; 사 63:7-64:12, 애가서 등). 많은 주석가들은 성전 파괴이후에도 성전의 존엄성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성전 지대에서의 종교 행사도 계속되었으리라 본다(Bright, Feinberg, Nicholson 등).

성 경: [렘41:6]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서 - 이스마엘은 극악 무도한 위선 행위로 위장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역시 이들 순례자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눌 사람들에게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Clarke).

(주); 그다랴에게로 가자 - 이를 '그다랴의 이름으로 환영한다'라고 의역해 볼 수도 있겠다(Bright). 이런 이스마엘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정중한 초대였다. 한편 이스마엘이 이들조차 살해한 원인이 본문상에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 이들이 유다 총독 그다랴를 방문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발각되지 않게 하려는 동기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그러나 8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들에게서 양식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성 경: [렘41:7]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이스마엘이...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니라 - 순례자들의 시체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구덩이'는 시체들을 감쪽같이 처분해 버리기에 적절한 장소였다(38:6). 한편 이 '구덩이'는 물이 귀한 팔레스틴의 곳곳에서 볼수 있었던 것인데, 여기다 시체를 던져 넣는 것은 매우 몰지각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시체에 오염된 물은 부정하여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렘41:8]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 본절에는 이스마엘이 숨겨 놓은 양식을 얻기 위해 이들 순례자들에게 어떤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암시가 엿보이긴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어쩌면 이스마엘은 이들 순례자들을 볼모로 잡아서 그들 가족들에게서 양식을 갈취 하려고 했었을 수도 있겠다. 이스마엘이 이 열명의 순례자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양식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마 이것도 원래 약속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인명이 살해된 이런 사건의 전말은 조만간에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때문에, 이들 열 명의 순례자들도 나중에는 피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이스마엘은 분명히 유다 땅에 남아 있을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절에는 그가 암몬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장면이 언급되는 바, 그는 이 여행을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고자했을 법하다.

성 경: [렘41:9]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아사 왕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 약 300년 전에 유다 왕 '아사'가 미스바를 요새화하려는 일환으로 이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왕상15:22에 따르면 아사는 북쪽 이스라엘 '바아사'왕의 영토에 있던 라마의 성벽을 허물고 거기서 얻은 재목을 가지고 미스바에 요새를 건축하였다. 오늘날의 텔 엔 나스베(Tell en-Nasbeh)를 발굴한 결과 이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다(Thompson). 이 구덩이는 원래 그 지역의 물을 공급하기 위한 저장소였으나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전쟁을 치르는 시기에 요새화의 일환으로 활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Clarke).

성 경: [렘41:10]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이스마엘의 반동]

(주); 왕의 딸들 -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바벨론 군대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이들을 붙잡아가지 않았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윗 왕족이나 방백들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딸들이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재빨리 도피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Calvin). 한편, 예레미야에 대한 언급이 여태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는데, 어쩌면 예레미야는 이스마엘이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포로들이 요하난의 도움으로 베들레헴 근처로 돌아올 수 있었을 때 예레미야가 이들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42:2 이하).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따름이다.

성 경: [렘41:11,12]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남은 자들의 방황]

여기서는 요하난과 다른 군대 장관들이 이스마엘의 악행 소식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은 기브온 큰 물가에서 이스마엘 일당과 마주치게 되는데,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9.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큰 물가'라고 하는 곳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사이의 거대한 웅덩이 정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 기브온은 미스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4.8km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미스바로 추정되고 있는 텔 엔-나스베에서부터 기브온까지의 방향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암몬 방향과는 각도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틸 엔-나스베가 미스바의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마엘이 추적을 따돌리려는 이유에서 우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Bright).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삼하 2:12-17에 기록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발생한 곳이 바로 이 큰 물가였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5km 떨어진 오늘날의 엘-집(el-Jib), 곧 고대 기브온 지역에서 깊이 약 25km 정도되는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했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저장하거나 모아두기 위한 구덩이였던, 그 내부로 내려가는 계단이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까지 닿아 있었다.

성 경: [렘41:13,14]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남은 자들의 방황]

이스마엘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던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잔인성과 장차 암몬에서의 노예살이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을 징벌하러 온 가레아의 아들 요나단과 그 군대 장관들을 대했을 때 매우 기뻐하며 달아날 수 있었다(Clarke).

성 경: [렘41:15]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남은 자들의 방황]

(주); 여덟 사람과 함께 - 이스마엘을 끝까지 따라갔던 자들은 아마도 그다랴 살해 사건에 처음부터 연루되었던 골수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성공적으로 치르었기 때문에 그를 사주 하였던 암몬 왕 바알리스에게로 곧장 되돌아갔다.

성 경: [렘41:16,17,18]

주제1: [살해된 그다랴]

주제2: [남은 자들의 방황]

여기에는 요하난이 인솔하는 무리가 그다랴 살해 사건으로 인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애굽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약 6마일 가량 떨어진 베들레헴 근방에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행로를 멈추고 예레미야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42:1, 2). 한편 게롯김함이란 말이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김함이란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함은 바실래의 아들이었는데, 이 바실래란 사람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하던 중 다윗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중에 다윗을 호위하여 요단 강을 건넜다. 다윗은 바실래를 귀족의 일원으로 초대했지만, 바실래는 연로한 이유를 내세워 그의 아들에게 그 영예를 허락하도록 요구하였다(삼하 19:31-40).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져 왕가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베들레헴 근처의 땅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로부터 이곳은 게롯김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게롯김함'이란 말의 뜻은 '김함의 소유'이다.

성 경: [렘42:1]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중보 기도의 요청]

(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 - '여사냐'는 40:8의 '여사냐'가 아니라 43:2에 나오는 아사랴와 동일인이다. 따라서 칠십인역(LXX)은 43:2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샤라'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지는 예는 드물지 않았다. 웃시야도 왕하15:1에서는 '아사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성 경: [렘42:2,3]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중보 기도의 요청]

요하난의 무리들은 애굽으로 가려는 뜻을 이미 굳히고 있었다(41:17). 그래서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나아온 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 결심에 동의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요청에 내심 응하기로 마음을 정하고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했던 발람의 망령된 태도와 다름없었다(민 22:21 이하).

(주);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여호와께 기도하소서 -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를 직역하면, '우리의 탄원이 당신 앞에 있기를 기원하나이다'로서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는 관용적 표현이다(36:7 ; 37:20 ; 38:26 ; 42:9). 이 말은 어떤 절실한 문제를 탄원하거나 간구할 때 쓰였다.

성 경: [렘42:4]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중보 기도의 요청]

본절을 전후하여서 여호와를 가리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또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란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차이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떤 반어법적 상황에서 비꼬는 의도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70인역(LXX)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당신의 하나님'이란 말을 생략하고 있다(Bright). 한편,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아주 조심스럽게 응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여호와의 뜻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들이 여호와의 말이라면 그 어떤 것이나 쉽사리 거부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또한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짐작하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애굽으로 가겠다고 결정을 내린 이상, 여호와의 신탁도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42:5]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중보 기도의 요청]

(주);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 이들이 순종하겠다고 맹세하는 엄숙한 선언이 강조된 것은 그 뒤에 일어날 불순종의 의미를 강조하고 고조하는 역할을 해준다(Nicholson).

(주); 우리 중에 진실 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 유다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제멋대로 파기하고 또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망령된 행실로 말미암아(출 20:7)징계를 받았는데, 본장에서도 그와 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어쨌든 이제부터 그들은그들의 행위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진실 무망한 증인으로 입석하셨기 때문이다(Clarke).

성 경: [렘42:6]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중보 기도의 요청]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선언한 것이 세 번씩이나 반복된다. 여기에는 또한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란 관용구가 쓰이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을 청종할 것이란 의미이다. 본절 끝에는 '키'(*)라는 히브리어 접속사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강조적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예, 정말 그러하나이다'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42:7]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십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 것은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렇게 응답 기일이 지체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점차 불안해져 갔을 것이며, 더군다나 바벨론 군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기도와 중재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입을 열게 되었을때 그것은 자기의 심중에서 생겨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참된 예언적 영감은 인간적인 통찰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23:18). 이런 과정을 거칠 경우 10일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10년이라고 하더라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뿐 이들의 요구가 있은 그 즉시로 예언할 수는 없었다. 이는 마치 제자들이 원한다고 해서 주님이 즉석에서 이적을 행하시지 않은 것과도 같다. 예언과 이적의 능력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Clarke).

성 경: [렘42:8,9]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요하난을 위시한 군대 장관들과 모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또 그들이 간구와 맹세 사실을 다시금 주지시킨 후 여호와의 메시지를 들려 주고자 한다. 특히 이들을 낱낱이 불러 모은 것은 그들의 불순종에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었으며 따라서 아무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성 경: [렘42:10]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 예레미야는 전에 그가 선지자적 소명을 받을 때 사용했던 두드러진 동사들을 사용해서(1:10), 아주 강하게 여호와의 응답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백성들이 심기고 뽑히지 아니하며, 또 세우고 헐리지 않으려면, 그들은 이 땅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절의 조건부 약속은 본토에 남는 자들도 바벨론에 잡혀가 있는 자들과 동일한 갱신과 회복의 약속을(14,29장) 받고 있다. 이 무리들이 여호와께 스스로를 맡기고 순종한다면, 이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

(주);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 '뜻을 돌이킴이니라'에 해당하는 '니하메티'(*)는 '뉘우치다', '후회하다'(repent, KJV, RSV)는 의미로도 번역되나, '슬퍼하다'(grievend, NIV), '측은히 여기다'(LXX)는 뜻으로 이해할수 있다. 결국 이는 백성들이 여호와께 계속해서 반역을 도모하였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으나 이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이상, 그 처벌을 멈추실 것이라고 하는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의지가 표명되어 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돕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바벨론 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그들에게 자비를 보이실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그치게하실 것이다(Clarke).

성 경: [렘42:11]

주제1: [백성들의 애굽의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 요하난의 무리들로서는, 바벨론 왕이 그다랴 살해 만행을 저지른 자가 누구인지 또 누가 무죄한지를 식별하지 못하고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처리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느부갓네살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42:12]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너희 본향으로 돌려 보내게 하리라 - 혹자는 본절을 포로 귀환에 관한 약속으로 확대 해석하고자 본서 원문이 포로 기간중에 편집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미 어떤 사람들은 고국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고 또 이곳의 무리가 애굽으로 도망하려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여호와께서 현재 베들레헴에있는 이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평화롭게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더 나을 것이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스마엘 한 사람으로 인한 죄로 자신들이 처벌받게 되리라고 염려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권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건지실 것이다.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총독 암살사건으로 인해 보복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는 B.C.582년에 포로를 더 잡아갔을 뿐이다(52:30). 그것이 총독 살해 사건의 보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면, 그것은 시기적으로 너무나 늦은 보복이었다. 아마 그것은 다른 소요 사태로 기인될 것일 가능성이 높다(Thompson).

성 경: [렘42:13]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너희가...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 하고 - 이 구절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백성들이 애굽행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고 거역하는 일이나 다름 없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애굽에 의존하거나 그곳을 동경하는 것은 율법서와 선지서 등 곳곳에서 비신앙적 심성의 발로로 지적되고 있다(신 17:16 ; 사 30:2 ; 31:1).

성 경: [렘42:14]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애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전쟁의 나팔 소리나 식량 부족 등이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여겨졌다. 요하난과 유다 백성들은 그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신탁을 말하는 중에도 그들의 이러한 반응이나 응답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42:15,16]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본 단락의 서론격인 4-6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따르겠다는 순종의 맹세가 강조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순종하지 않게 될 때에 그들에게 임할 파멸의 정도가 어떠하리라는 점을 간접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들이 이 땅에 거하게 됨으로써 맞게 될 불행한 일이나 재앙이 오히려 애굽에서 일어날 것임을 말씀하신다(Clarke). '급히 따라 가서'(*, 이드바크 아하레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근과 칼이 '그들의 발꿈치에 있을'것이란 뜻으로 그들이 두려워하여 피해갔던 전쟁의 기근과 칼이 그들을 파멸시키고 말 것임을 나타낸다(Clarke).

성 경: [렘42:17]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본절에는 '칼', '기근', '염병'이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가 파국을 선언할 때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이제 이렇듯 엄청난 재앙이 여호와의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고 애굽으로 건너가려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다.

성 경: [렘42:18,19]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불과 얼마전에 절실하게 체험된 바 있던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예로 들어 예언의 확실성을 강조, 확증하는 내용이다. 이 백성은 거듭되는 역사의 산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는 얄팍한 인간적 계산을 더 중시하는 완악한 자들이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했던 결과 여호와의분노가 예루살렘에 쏟아졌던 것과 같이, 그들이 불순종하면 여호와의 분노가 애굽에서도 임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있을 파멸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로 묘사되고 있다(44:12 등).

(주); 부은 것같이 - '부은'에 해당하는 '나타크'(*)는 '흐르다', '녹이다', '쏟다' 등의 의미로서, 범람하는 홍수 혹은 용광로에 녹은 쇳물 등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저주라고 번역된 '알라'(*)는 '서원', '맹세'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맹세하는 자가 그 맹세를 어길 경우 당하게 될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Calvin).

성 경: [렘42:20]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이 백성은 참으로 천하고 표리부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마음 속에는 배은 망덕, 위선, 반역, 잔인함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만큼 심판을 받고 그만큼 여호와의 말씀이 전달되었건만, 그들은 목이 곧고 마음이 굳어져서여호와의 말씀을 또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우상 숭배에 길들여져 있어서 인격적이고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다(Clarke).

성 경: [렘42:21]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 이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않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요구하였고 또 그 계시에 순종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레미야를 하나님앞에 보내어 구하게 하였던 그것을 하나도 행치 않음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심히 모욕하였던 것이다(Clarke).

성 경: [렘42:22]

주제1: [백성들의 애굽 이주와 하나님의 경고]

주제2: [하나님의 응답]

(주);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 - 이 마지막 구절들에서는 애굽으로가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하겠다. 예레미야의 경고는 이상에서보는 바와 같이 대단히 강렬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애굽으로 가려는 계획이 여호와께 용납되고 승인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이런 잘못된 판단 속에서 예레미야를 찾아왔었고 또 그를 여호와께 보냈던 것이다. 또한 확실한 순종을 약속한 것도 그들의 계획이 여호와께 용인될 것이라는 판단하에서였음이 드러났다.

성 경: [렘43:1]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남은 자들의 불순종]

(주); 예레미야가...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 42:19-22의 내용은 예레미야의 말이 거부되었음을 간접적으로만 보여주고 있고 본장(1-3절)에서는 공식적인 거부가 나타난다. 이렇듯 유사한 내용에 대한 반복된 서술은 불필요하게 장황한 듯이 여겨질 수도 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레미야의 어록에서 부가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이해하곤 하였다. 그러나 반복을 통한 강조는 히브리 어법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성 경: [렘43:2,3]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남은 자들의 불순종]

아사랴와 그의 동료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을 얼버무리고 관심을 다른 데로 전환시키기 위해 오히려 예레미야를 거짓말장이로 매도하며 바룩의 궤계에 말려든 것이라고 공박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여호와가 그들의 애굽행 계획을 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적인 편견과 뿌리 깊은 영적 우매성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옳은 것으로 착각하고서는 진실에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성향이 있으며 그래서 진리에 입각한 참다운 해결책에 눈을 감아버리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들의 행위가 바로 대표적인 본보기일 것이다. 한편 바룩이 여기서 주 공격 목표로 등장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바룩이 예레미야의 서기일 뿐만 아니라 뭔가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사상을 가졌고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바룩의 관계를 깊이 연구해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왕 앞에서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전했던 예레미야가 바룩에 의해 조종당했을 리는 없다.

성 경: [렘43:4,5,6]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남은 자들의 불순종]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의 수효가 어느정도 되는지는 여기서 분명히 암시되고 있지않다.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다랴와 함께 미스바에 집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의 '남은 자'란 표현은 베들레헴으로 도피했었던 특정한 무리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트랜스요르단 지역에 피난해 있다가최근에 유다로 돌아온 자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40:11, 12). 또한 미스바 일원에 거주하던 모든 유다인들이 이 애굽행 대열에 동참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즈음에는 유다 지역에 상당수의 유다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한편,본문에서 나타나는 이 무리는 중요한 인물군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을 보면 군대 지도자들, 왕의 딸들이나 예레미야 또는 바룩과 같은.영향력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이들 난민들 무리에 포함된 경위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 보았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2:6-15 ; 40:1-6 ; 42:13-18 참조).

성 경: [렘43:7]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남은 자들의 불순종]

(주); 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 '다바네스'란 하 이집트 극단인 헬리폴리스 부근에 위치해 있던 펠루시안 다프네(Pelusian Daphne)라고도 불리었다. 또한 이곳은 아랍과 아시아 쪽으로부터의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때 그리스 용병들을 주둔시킨 지역이기도 하다(Herodotus). 제롬(Jerome)이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충실하고 온 생애를 다바쳐서 자기 민족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요청했던 예레미야가 이들 난폭한 반역도들의 돌에 맞아 숨진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예레미야는 이들의 행복을 보기 원했고 또 그렇게 기도했었지만, 도리어 그들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Clarke).

성 경: [렘43:8]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애굽에 임할 심판]

(주);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임하여 - 예레미야는 애굽 땅 '다바네스'에서 42:15이하의 말씀을 최소한 한 번 이상 반복해서 말했을 것이다. 즉 애굽으로의 피난이 칼과 기근과 염병에서 그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다시 선언 했을 것이다. 본절에서부터는 보다 더 상세하고 특별한 내용이 제시된다. 그리고 이들을 심판할 대행자는 이들이 무서워하여 피해왔던 바로 그 바벨론 군대가 될 것이다(42:11,12).

성 경: [렘43:9]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애굽에 임할 심판]

(주); 큰 돌들을 가져다가...벽돌 깔린 곳에 진흙으로 감추고 - 본절의 '바로의 집'이란 바로의 왕궁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국경 도시인 이곳 다바네스에 왕궁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곳은 바로가 이 도시를 방문할 때 숙소로 사용했던 별궁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겠다. 엘레파틴 파피루스에는 애굽 남쪽 국경에 있던 왕궁에 대한 언급이 있다(Bright). 이 부분의 설교, 또는 상징적 행위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 약 1년 정도 지난 때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리들은 갈대아인들을 두려워해서 유다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으로 건너왔지만,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이 그의 정복지를 애굽에까지 확장할 것이며, 이 '큰 돌'이 놓이는 곳에 느부갓네살의 군막이 설치될 것임을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44장 끝부분에 가면 이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밝혀 줄 것이다(Clarke).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곳에 와서도 유다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그런 상징적 행위로써 호소하였다. 그것은 예언의 메시지와 동일한 능력이 있었으며 성취되고야 말것이다. 비록 본문의 텍스트 판독에 어려움이 있긴 하나, 이 상징적 행위가 보여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이 '큰 돌'은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했다는 증표로써 세우게 될 그의 보좌의 주춧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 경: [렘43:10]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애굽에 임할 심판]

'큰 장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솨프루트'(*)는 여기서만 쓰이는 표현으로서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다. 이는 '아름다움'이란 뜻의 '쇠파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며 '무기'(Syrlac, LXX), '보좌'(Vulgate), '장막'(Targum)등 다양하게 번역되나 문맥상 대형 천막, 곧 느부갓네살이 거하게 될 둥근 지붕의 천막을 뜻한다(Bright).

성 경: [렘43:11]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애굽에 임할 심판]

본절 이하에는 10절의 예언을 확증하는 예언이 나온다. 애굽은 사방이 요새화되어 있었고 나일 강과 홍해 및 호수들로 둘러싸여 천혜의 방벽을 보유하였으므로, 갈대아 원정군들에 의해 점령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의 흥망 성쇠를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때는 그러한 방벽들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Calvin).

성 경: [렘43:12]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애굽에 임할 심판]

(주); 내가 애굽 신들의 집에 불을 놓을 것인즉 - 애굽 신들의 일부는 나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불에 탈 수 있었다. 그리고 금속으로 된 신들은 탈취당할 것이다. 더욱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은 약탈자들의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부와 영광이 모두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Clarke).

(주);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 느부갓네살은 애굽을 정복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애굽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는 데도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다(Clarke).

성 경: [렘43:13]

주제1: [애굽으로 끌려간 예레미야]

주제2: [애굽에 임할 심판]

(주); 애굽 땅 벧세머스의 주상들을 깨뜨리고 - 느부갓네살의 활동은 애굽 신전과 그 신들을 모욕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렇게 피정복지의 신들을 모욕하는 것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잘 알려져 있던 관행이었다. 엘레판틴 파피루스는 페르시아의 통치자 캄비세스가 애굽을 정복했을 때 애굽의 신전들을 황폐화시켰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본절의 '벧세메스'란 곳은 '태양의 집'이란 뜻을 가진 신전이었는데, 신성한 기둥들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의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약 8km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고 한다(Nicholson). 한편, 느부갓네살은 B.C. 572년과 568년 두 차례에 걸쳐 애굽을원정하였다(겔 29:19 ; 40:1-48:35). 단편 조각으로 발견된 비문들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항구적으로 정복하여 통치하려는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주며 단지 아시아 지역에서의 애굽의 간섭이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였음을 시사한다. 그 당시 애굽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했으며, 그 이후에는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예언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여호와의 진정한 선지자였음을 증거로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Thompson).

성 경: [렘44:1]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과 바드로스 지방에 거하는 - 본절은 그 당시에 애굽의 여러 지방에 우다인 이민자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믹돌'이란 곳은 출애굽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나온 곳으로 언급되며(출 14:2 ; 민 33:7) 겔 29:10과 30:6에는 이곳이 애굽 북부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믹돌의 뜻은 '탑'인데 이것은 아마 셈계 언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애굽 사람들이 이를 빌어 사용한 것 같다(Nicholson). '놉'은 그 당시 애굽의 수도로서 지금의 카이로 부근에 있었으며 멤피스라고도 불리었다. 그리고 '바드로스'란 곳은 애굽의 나일 강 상류 지방을 가리킨다(Bright). 아무튼 여기서는 다바네스의 유다인 공동체들도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곳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엘레판틴이란 곳에도 한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이곳은 애굽 남쪽 나일 강 상류의 섬이었으며, 이곳에는 수많은 파피루스 문헌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B.C. 526년 페르시아 군대가 애굽을 정복하기 이전까지는 그들이 그곳에서 무사히 살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들이 언제 그곳으로 이주해 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B.C. 7세기 후반이나 또는 6세기 초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 경: [렘44:2]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보라 오늘날 그것들이 황무지가 되었고 - 하나님이 선택하사 구별하신 거룩한 성읍마저 아끼지 않고 황폐하게 만드셨다면, 애굽의 성읍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애굽으로 도피해 간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내용인 것이다(Calvin). 미스바로부터 애굽에 이주해 온 이들은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눈으로 목격했엇다. 그 당시 애굽에 이미 살고 있던 유다인들은 단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 정도만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그 아름답고고귀하던 성과 모든 성읍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사람이 살지 못하는 그런 곳이 되고 만 것이다.

성 경: [렘44:3]

주제1: [애굽의 유다인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그들이...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 히브리어 '케테르'(*)를AV, RV, RSV 등 영역 성경들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분향하다'(burn incense)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이 이 같은 뜻으로 자주 쓰이고 있긴 하지만, 동물의 기름을 번제로 태워드리는 제사와 관련해서 쓰이기도 한다(레 1:9, 17 ; 3:11, 16 ; 삼상 2:16등). 본절에서 선지자는 유다 멸망의 근본 원인이 바로 우상 숭배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애굽으로 도피한 자들 역시 우상 숭배로 파멸에 직면하고 말 것에 대한 간접적 경고로 이해된다.

성 경: [렘44:4]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내가 나의 모든 종...부지런히 보내어 - '부지런히 보내어'(*, 하쉬켐 웨솰로아흐)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일찍 일어 나서 보냈다'이다. 이 말은 본서의 산문체 단락에서 수차례 등장하였다(7:25 ; 25:4 ; 26:5 ; 29:19 ; 35:15).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이들 선지자들의 임무는 모세의 후계자 입장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권고하고 견책하여서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케 하고, 여호와와 그의 언약에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은 일종의 언약의 수호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과 같았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파괴되고 황폐해져 쓸모없는 곳이 되어 버린 이유도 여호와의 말씀을 제마음대로 취급하고 거부했기 때문이었다(Thompson).

성 경: [렘44:5]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클라크(Clarke)는 이 구절에 열거된 죄악성을 몇 가지로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여호와의 권위를 무시 하였다. (2) 그들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호소와 간청에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3) 그들은 가증스런 일을하는 것에 몰두해 있었으며, 그것을 기쁘게 여겼다. (4) 이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사랑했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성 경: [렘44:6]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마'(*)는 원래 '열', '뜨거움'이란 뜻으로서 맹렬한 진노를 나타낸다.

성 경: [렘44:7]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과거 유다 백성의 죄악과 이에 따른 심판을 회고한 예레미야는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애굽의 유다 사람들에게 동일한 경고를 발한다. 우상 숭배는 자신 뿐만아니라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를 멸절시킬 정도로 그 파급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수 7:1-26 ; 삼하 24:1-15 참조). 한편 본절 초반부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고 있지 않은 히브리어 '웨아타'(*)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그 의미는 '그리고 이제'란 뜻이다. 이 말은 구약에서 번번히 쓰이고 있는 접속사인데, 주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때 쓰이곤 하였다(출 19:5 ; 신 4:1 ; 수 24:14 ; 삼상 8:9 등).따라서 본절부터 10절까지는 예레미야 메시지의 소결론부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상 숭배는 예루살렘과 유다 멸망에서도 그러했듯이 전공동체의 파멸로 인도될 위험이 있었다.

성 경: [렘44:8]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세계 열방 중에서 저주와 모욕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 이들은 마치 그들의 목적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악을 행하고 있었다(Bright).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한 심판을 근거로 해서 이들 난민들에게 거기서 교훈을 받고 우상숭배에서 돌이킬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성 경: [렘44:9]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왕비들과 아내들을 함께 거론하는 것은, 여자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관행과 제사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음을 (15-19절) 암시하기 위함인 듯하다.

성 경: [렘44:10]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그들이 오늘까지 겸비치 아니하며 - 이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거부한 이상, 그들 앞에 요구되고 있는 율법과 규례에 따라 살지 않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귀결이었다. 본서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여호와의 율법과 언약 규례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다(7장 ; 11장 ; 17:19-27 ; 34:8-22). 한편 '겸비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다카'(*)는 '부스러뜨리다', '상처를 입히다'는 뜻을 내포하는 바, 마음속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을 뜻한다.

성 경: [렘44:11]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여기서부터 14절까지는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게 심판을 선고하는 내용으로서 42:17, 18과 유사하다.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 이들의 완고한 결심은 여호와의 뜻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Bright).

성 경: [렘44:12]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애굽 땅에 우거하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 1절에 언급된 바 있는 다양한 무리의 유다인들이 여기서는 모두 '유다의 남은 자'로 통합되어 지칭되고 있다. '우거하기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르'(*)는 '(손님으로서)거주하다', '움추리다' 또는 '두려워하다'는 뜻으로서, 낯선 애굽 땅에서 눈치를 보며 전전 긍긍하는 모습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 내용은 40-44장의 주된 주제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B.C. 586년의 예루살렘 함락 직후에 유다 땅에 남게 된 사람들의 역사와 운명을 묘사하는데, 배도와 불순종 그리고 기어코 애굽으로 도망가는 행위등으로 인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미래의 약속에서 배제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제는 유다에서나 또는 애굽의 공동체에서나 부흥과 갱신의 희망은 없게 되는 것이다. 미래의 회복은 바벨론에 붙잡혀가 있는 포로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44:13]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벌하리니 - 유다인들이 애굽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 자체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결과였으며(43:7) 더구나 그들이 애굽 땅에서 우상 숭배를 계속하고자 한 이상, 여호와는 그들을 끊어버릴 것이며 그들 모두를 벌할 것이다. 그들은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모두 칼과 기근을 통하여 멸망하게 될것이며, 조소거리와 모욕거리 그리고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다. '벌하다'의 뜻으로 번역된 '파카드'(*)는 원래 '방문하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방문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 경: [렘44:14]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 관한 예언]

주제2: [애굽으로 도피한 유다인들에 대한 예언]

(주); 도피하는 자들 외에는 돌아올 자가 없으리라 - '도피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은 맛소라 사본에만 있고 70인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NEB영역 성경은 이를 난외주로 번역하였다. 11-14절, 26-28절의 엄청난 비극과 전면적인 파멸이라는 심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문구는 후대의 필자들의 설명구가 원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 있다(Nicholson, Thompson). 한편, 브라이트(Bright)는 이를 '유랑민 몇몇을 제외하고는'이라고 번역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일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이를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게 될 자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Calvin).

성 경: [렘44:15]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백성들의 완악함]

본절에서 19절까지는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에 대한 애굽 이주민들의 항변이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선지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본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본서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나타난 백성들의 반응을 사실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곁에 섰던 모든 여인에 관한 언급은 우상 숭배에 있어 여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한다(Feinberg, Streane). 그리고 모든 백성의 큰 무리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의 대부분이 우상 숭배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 함락을 여호와의 무능(無能)의 소치로 여기고 새로운 신(神)을 찾아 동분서주하였을지도 모른다.

성 경: [렘44:16]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백성들의 완악함]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전하는 말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완강한 거부로 나타났다. 그들의 반응은 완강한 거부로 나타났다. 그들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이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B.C. 622년의 요시야 개혁 이후 일련의 재앙이 요시야의 전사를 필두로 해서 유다를 강타했었다(B.C. 609년). 그리고 마침내는 애굽 군대가 유다를 정복하여서 유다의 여호아하스 왕이 폐위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B.C.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 군대를 격파한 바벨론 군대의 등장과 함께 바벨론의 유다 침공으로 인해 여호야김은 애굽의 바로느고를 섬기던 상황에서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그런 급작스러운 변화를 겪어야 했다(왕하24:1). 그러던 중 B.C. 597년에는 제2차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이 있었고, B.C. 586년에는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다랴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과 재앙의 연속이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언약 위반으로 인한 저주의 발동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하늘 왕후 대한 제사와 정성이 부족했던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같다(17절이하).

성 경: [렘44:17]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백성들의 완악함]

(주);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 '하늘 여신'으로 번역된 '멜레케트 하솨마임'(*)은 문자적으로 '하늘의 왕후'란 뜻이다. 앗수르-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던 여신인 이쉬타르를 가르키는 것 같다(가나안에서는 아스다롯이라 불리워짐, 삿 2:13 ; 10:6 ; 삼상 12:10 ; 왕상 11:5). 이 여신은 전쟁과 사랑의 신으로서 다산과 풍요를 대변한다고 믿어졌다. 이 여신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는가 하는 것은, 바벨론에만 해도 이쉬타르를 섬기기 위한 성소가 무려 180개 정도나 되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요컨대, 이 여신에 대한 숭배는 고대 근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셈이다(Feinberg). 한편 보다 후대의 엘레판틴 문서(아마B.C. 5세기 말경의 문서)에는 애굽 지역에 혼합주의가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아낫-야후' 곧'여호와의 아낫'이란 여신이 숭배되었다는 것도 언급되어 있다(Thompson).

성 경: [렘44:18]

주제1: [애굽의 유다인에 관한 예언]

주제2: [백성들의 완악함]

(주);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폐한 후부터는... - 앞에서도 암시되었다시피, 그들의 이런 주장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모든 이교도 제사와 우상 숭배를 폐지시키려고 하였던 요시야의 개혁을 가리키는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유다에서 진행되던 이런 이교적 관행과 하늘 왕후에 대한 제사 관행이 철저히 제거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개혁 초기 단계에서는 우상 숭배를 근절하려는 노력이 대단히 활기차게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이런 개혁의 원리를 지지했던 것 같다. 특히 종교 개혁이 민족 독립과 갱신이라는 대의 명분과 함께 연결되어 진행되었을 때는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B.C. 609년 므깃도에서 요시야가 전사한 비극적인 사건과 그 뒤에 이어졌던 일련의 재앙들은 개혁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러한 실망과 환멸은 광범위하게 퍼졌던 것 같다(Nicholson).

성 경: [렘44:19]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백성들의 완악함]

(주);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전제를 드렸느냐 - 하늘 왕후 숭배 의식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이들은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번제를 드리고 술을 따라서 하늘 왕후에게 바쳤다. 7:17-19에는 이 하늘 왕후에 대한 제사를 보다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를 보면 가족 전체가 이 제사에 연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나무를 모으고 아비들은 불을 지폈으며, 여자들은 하늘 왕후를 위한 과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곡식, 떡, 과자등을 신들에게 바쳤다고 하는 사실은 잘 알려진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이런 제사의 특징들 중 하나는 다음의 25절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신들에게 서원하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율법에 따르면(민 30:7-16) 남편 있는 여자가 서원을 할 때에는 남편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상을 섬기면서, 우상을 가증한 것으로 여겨 극도로 증오하시는 여호와의 율법의 규정을 여기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괴한 혼합주의적 색체라 하겠다(Thompson).

성 경: [렘44:20]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주); 예레미야가...모든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 본절에서부터 끝절까지는 나름대로 한단락을 이루고 있고, 이것은 다시 두개의 소단락으로 나뉜다. 그 첫 소단락은 20-23절로서 15-19절에 묘사되고 있는 백성들의 주장에 대한 예레미야의 논박을 다루고 있고, 두 번째 소단락은 24-30절로서 애굽에 거하는 유다인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더 확장된 내용의 선언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소단락은 신명기의 사상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며, 이에 근거해서 B.C. 586년의 유다 패망을 해석하는 내용으로 보이며, 또한 그 재앙이 백성들의 오래되고 뿌리 깊은 배도와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심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은 애굽에 있는 그들에게도 그러한 심판이 닥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 경: [렘44:21]

주제1: [애굽의 유다인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땅 백성'(*, 암 하아레츠)이라는 표현은 지주(地主) 등과 같은 유다 내의 어떤 특정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흔히 쓰였는데, 여기서는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Harrison).

성 경: [렘44:22]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주); 여호와께서...더 참으실 수 없으셨으므로 - 유다 백성의 가증스러운 죄악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가 한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가리킨다(벧후 3:9 참조).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으며 동정을 받을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성 경: [렘44:23]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주); 너희가 분향하여...이 재앙이 오늘과 같이 - 맛소라 본문에는 본절의 분향이 어떠한 것인지 지시되어 있지 않으나 앞에 언급된 그 제사를 가리킴이 분명하다(Bright).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던 우상 숭배 행위를 기억하셨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거기에 연루되어 있었다. 이 백성에게 심판이 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들의 배도와 우상 숭배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본절에는 여호와의 '법'(*, 토라)과 그의 '율례'(*, 호크)와 그의 '증거'(*, 에두트)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무시하였던 언약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는 표현이다. 언약 파기는 언약 조항에 규정되어 있는 저주의 발동을 가져오고 마는 것이다.

성 경: [렘44:24,25]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여기서는 애굽에서의 우상 숭배 행위를 여자들이 주도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모든여인 혹은 너희 아내들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 주석가는 '모든 백성'이란 말을 생략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브라이트(Brlght)는 이를 '모든 백성들, 특히 여자들'이라고 번역하여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성립하며(*, 아소)는 '행한다'는 뜻으로, 우상에게 서원한 바를 이행하려면 해보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내버려 둬 보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 경: [렘44:26]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주); 다시는 내 이름을 일컬어서...하는 자가 없게 되리라 - 혹자는 본절을 애굽에 도피한 자들 전원을 멸절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Bewer). 그러나 14, 28절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재앙에서도 살아 남은 자가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언약 백성의 특권을 빼앗아가실 것을 선언하고 계시는 듯하다(Streane).

성 경: [렘44:27]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주); 경성하여 - 히브리어 '쇼케드'(*)는 원래 '밤새도록 잠자지 않고 경계한다'는 의미로서, 애굽 땅의 유다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보여준다.

성 경: [렘44:28]

주제1: [애굽의 유다인들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주); 소수의 사람이... - 사 4:1-6 주제 강해 '남은 자 (the remnant)에 관한 역사적 이해'를 참조하라.

성 경: [렘44:29,30]

주제1: [애굽의 유다인에 관한 예언]

주제2: [최후의 경고]

여호와께서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표징'(*, 오트, 출 7:8-13 주제 강해 참조)을 주신다. 백성들은 이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표적은 바로 '호브라'라고 하는 애굽의 왕(B.C. 589-570년)이 그 대적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B.C. 588년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에 반란을 일으키면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그 약속에 따라 그는 유다에 군사를 파견했었다(37:5). 예레미야는 호브라가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여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원수의 손에 붙여진다고 말했다. B.C. 570년 그의 통치 말년에 리비아에서의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자기 군대의 일부 무리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마시스란 장군이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으나 아마시스는 자신이 왕임을 선포하였으며 호브라와 함께 일부 지역을 분활 통치 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호브라는 처형되었다.

성 경: [렘45:1]

주제1: [바룩에 관한 메시지]

주제2: [바룩에 대한 예언]

(주);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 본절에는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 적은 사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여기서 '이 모든 말'은 36장에서 기술된 두루마리 속의 말씀을 의미한다(Bright). 또한 본장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여호야김 제 사년, 곧 예루살렘이 갈대아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기 전인 B.C. 605년에 전달된 말씀이었다. '바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축복받은'이며, 성경에는 본절의 바룩과 동명 이인이 두사람 더 언급된다(느 3:20 ; 11:5).

성 경: [렘45:2,3]

주제1: [바룩에 관한 메시지]

주제2: [바룩에 대한 예언]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여 의기 소침해 있는 바룩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책망과 격려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 바룩은 유다내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의 조부인 마세아는 요시야 당시 예루살렘 성읍을 관장하던 왕의 고관이었고(32:12 ; 대하 34:80, 그의 동생인 스라야는 시종장이었다(51:59). 따라서 바룩 역시 높은 관직을 향한 욕구를 가졌음직 하며, 예레미야를 따를 때에는 자신도 선지자로 세움받기를 소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면 바룩에게도 역시 고난이 찾아왔다. 이런 와중에서 바룩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와 좌절감을 맛보았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Feinberg).

성 경: [렘45:4]

주제1: [바룩에 관한 메시지]

주제2: [바룩에 대한 예언]

(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 1:10에 언급되고 있는 예레미야의 소명 장면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진행되므로 일신상의 영달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불 순종과 배도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 재앙에서 피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선택받은 언약백성으로서 원래의 귀한 부르심에 응답했어야 했다. 그들은 선택된 극상품의 포도 종자로 심기워졌으나, 이상하고도 괴이한 악취를 내는 들포도가 되었던 것이다(2:21).한편 '온 땅'(*, 칼 하아레츠)이란 유다 온 땅만을 국한시킨다고 보기도 하나(Hyatt), 그보다는 '모든 육체'와 함께 세계만민을 뜻한다고 봄이 나을 것이다(Delitzsch). 즉 만유의 주(主)시며 인류 역사의 흥망 성쇠를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이다.

성 경: [렘45:5]

주제1: [바룩에 관한 메시지]

주제2: [바룩에 대한 예언]

(주);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경영 하느냐 - '대사'(*, 게돌로트)란 문자적으로 '위대함', '큰 일'을 뜻하며, 여기서는 아마 바룩이 큰 일로 여기고 있었던 것, 곧 사회적 명성과 지휘에 대한 욕구를 암시하는 것 같다.

(주);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같게 하리라 - 이것은 그 당시 흔히 쓰이던 속담과 같은 표현이었다. 우리는 이 표현을 21:9 ; 38:2 ; 39:18 등에서도 보았다. '노략물'이란 것은 적을 정복하고 얻게 되는 물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영예의 증거나 승리의 보상을 뜻하였으며, 따라서 소중히 간직되곤 하였다. 바룩의 생명도 이와 같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위험한 고비를 맞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이 무사히 통과시켜 주실 것이고 또 자기가 맡고 있는 그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할 것이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온갖 위험을 극복한 바룩의 생명은 노략물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Clarke).

성 경: [렘46:1]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 나타나는 이방 민족은 모두 10개 족속으로, 이처럼 열방을 향해 심판을 예언하는 것은 사 13-23장과 겔 25-32장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열방을 향한 심판 예언은 하나님께서 유다에 국한된 민족신이 아니라 온 우주와 역사의 참 주권자가 되심을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렘46:2]

본절은 본장 예언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즉 애굽의 바로느고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패한 직후인 것이다. 이때는 B,C,605년이다. 갈그미스 전투는 남하 정책을 추진한 바벨론과 근동 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애굽이 갈그미스에서 일전을 벌인 것으로, 바벨론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근동 지역에서 명실 상부한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되었고 애굽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게 되었다. 한편 바로느고는 B,C,609년 므깃도에서 요시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요시야를 이어 분봉왕르로 앉힘으로써 팔레스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했다(왕하 23:34). 그러나 그 역시 갈그미스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에게 패함으로써 그의 패권도 꺾이고 말았다.

성 경: [렘46:3,4]

본문은 애굽의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하는 말이다. 이중 3절은 주로 보병과 관련하여 주어진 명령이다. 여기서 "큰 방패와 작은 방패"는 방어용 무기, 전자는 전신을, 후자는 상체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데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4절은 기병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당시 기병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했던 공격 수단으로, 본문은 당시 애굽의 전력이 매우 막강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적도 능히 분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렘46:5]

본절과 다음절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장차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시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애굽의 패전에 관한 것이다. 그중 본절은 애굽 군대가 그들의 기대와 달리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군대에 패하여 도망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애굽 군대는 너무도 다급한 나머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줄행랑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도 바벨론 군대에 패하여 도망한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개입하여 그들을 두렵게 하신 까닭이었다.

성 경: [렘46:6]

계속해서 애굽 군대의 패전 당시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도망하는 자의 퇴로가 막힘으로써 애굽 병사들이 생명을 부지하는 것도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합 1:6-8에 의하면 바벨론 군대는 발이 매우 빨랐다고 한다. 결국 애굽근은 발빠른 바벨론군의 신속한 퇴로 차단으로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주); 북방에서 유브라데 하숫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 이는 애굽 군대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유브라데 하숫가"란 갈그미스를 가리킨다.

성 경: [렘46:7,8]

전력을 소유한 애굽군의 교만한 기세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나일 강은 해마다 여름이면 범함하여 주면 평야 지대를 휩쓸었다. 그와 같이 바로느고 치하의 애굽 군대는 마치 주변 국가를 완전히 휩쓸 것처럼 막강 전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주); 내가 일어나 땅을 덮어 성읍들과 그 거민들을 멸할 것이라. - 애굽 왕 바로느고의 호언 장담이다. 즉 그는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이미 승리를 얻는 듯한 교만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46:9]

애굽 왕 바로느고의 진격 명령이다. 여기서 당시의 전투 진용을 볼 수 있는데 먼저 기병이 나가고 그 뒤를 병거가 따르고 그 뒤를 방패와 창을 잡은 보병과 활쏘는 자들이 따르는 것이다.

(주); 방패 잡은 구스인과 붓인은 활을 당기는 루딤인이여.--- 이는 애굽의 군대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고용했던 용병들이다. 여기서 "구스인"은 나일 상류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애굽 제25왕조를 창겅했던 이디오피아인들을 가리키며, "붓인"은 약간의 논한이 있으나 홍해 연안에 살던 푼트(Punt)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리고 "루딤인"은 애굽 서쪽에 위치한 리비아(Lybia)인을 가리킨다.

성 경: [렘46:10]

이는 애굽이 막강한 병력과 전술에도 불구하고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즉 애굽 군대는 승리를 의심치 않을 만큼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 날을 교만한 애굽 군대를 궤멸시키는 복수의 날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이 복수는 마로느고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한 경건한 왕인 유다의 요시야 왕을 므깃도에서 죽인데(왕하23:29) 대한 보복을 의미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애굽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다.

성 경: [렘46:11]

이는 애굽의 비참한 몰락을 은유적 표현을 통하여 예언한 것이다. 여기서 유향은 당시 외상에 대한 치료약으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유향을 취하라"는 것은 건강하고 부유한 처녀같은 애굽이 이 전쟁에서 만시창이가 될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길르앗"은 요단 동편 지역으로(신 3:8,10) 유향과 약초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렘 8:22 주석 참조.

성 경: [렘46:12]

애굽이 당한 피해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중하여 그 패전 소문이 먼 이방 민족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전파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애굽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 패배함으로써 수치를 당함은 물론 수리아, 팔레스틴 등의 지역에서 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런 애굽의 패배는 아무리 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부유한 국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렘46:13]

본절에서 26절까지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애굽 본토 원정에 대한 예언이다. 이러한 본단락의 예언은 렘 43:8-13의 내용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Keil, Lange, Hyatt).

성 경: [렘46:14]

바벨론의 애굽 침공이 임박했다는 말이다. 여기에 언급된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는 애굽의 대표적인 도시인 동시에 유다인 피난민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렘 44:1 주석 참조. 따라서 바벨론의 애굽 침공을 이들 도시들에 선포한 것은 애굽의 멸망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밝혀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네 사방이 칼에 삼키웠다"는 것은 애굽의 이웃 나라들 곧 베니게,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유다 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는 애굽 역시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할 것을 강력히 암시해 준다.

성 경: [렘46:15]

여기서 장사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비르"로 용감한 또는 황소같은이란 의미가 있다. 전자를 취하면 "아비르"는 막강한 전력의 애굽 군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후자를 취하면 "아비르:"는 애굽의 수호신으로 황소의 형상을 지녔던 아피스(Apis) 신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양자 모두를 함축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본문은 애굽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했던 군대나 신들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신 연고니라. - 전력면에서 패배할 이유가 없었던 애굽 군대가 패배한 까닭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에 기인했다는 진단이다.

성 경: [렘46:16]

이 문장은 원래 히브리 원문에서 주어가 명확하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추풍 낙엽처럼 쓰러뜨리시겠다는 것이다.

(주); 우리 민족에게로, 우리 고토로 돌아가자. - 이런 말을 하는 주체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앞서 언급된 애굽의 용병으로 불 수 있다. 대개 용병들은 돈으로 고용된 군인들이기에 전세가 불리하면 언제든지 도망갈 태세를 갖추기 마련인데, 애굽의 용병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보다도 전세의 형세에 예민했던 용병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면 애굽의 패배는 움직일 수 없는 기정 사실이라고 하겠다.

성 경: [렘46:17]

막강한 전력으로 인해 국민과 주변 국가의 주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가 이제는 조롱의 대상으로 뒤바뀌게 되는 신세가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여기서 "그가 시기를 잃었다."는 말은 그 의미가 불분명한데, 일부 학자들은 애굽 왕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부시함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놓쳤다는 의미의 말로 이해한다(Calvin, Cheyne).그러나 그보다는 "바로의 때가 다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성 경: [렘46:18]

이는 특별히 자신을 신격화한 바로 왕에게 절대 신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가 온 우주 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된 왕이심을 계시하신 말씀이다(민 23:21 ; 33:5 ; 사 6:5 ; 습 3:15 ; 14:9 ; 말 1:4). "만군의 여호와"에 대해서는 삼상 17장을 참조하라.

(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 렘 22:5주석 참조

(주);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같이, 해변의 갈멜같이 오리라. - 여기서 "그"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기리키는 말로, "다몰 산"이나 "갈멜 산"은 다같이 애굽을 향해 진격하는 그의 위용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다볼산은 이스르엘 평원에 위치한 해발 550m의 산으로 주변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매우 웅장해 보인다. 그리고 갈멜산은 지중해변에 위치한 해발 518m의 산으로 여기 수목이 수려하여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성 경: [렘46:19]

애굽의 백성들이 더 이상 비옥한 자신들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주); 높이 황무하여. - "높"은 하애굽의 수도인 "멤피스(Memphis)"를 가리킨다. 따라서 높이 황무할 것이라는 것은 애굽의 멸망을 암시한다.

성 경: [렘46:20]

"아름다운 송아지"는 애굽의 부요함과 방탕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풍요 속에서 쾌락에 빠져있는 애굽의 북쪽에서부터 침략해온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애굽은 이런 사치와 방탕 속에서 자신들의 멸망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애굽을 징벌하심으로써 세상의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가 당신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이다(엡 1:21-23).

성 경: [렘46:21]

여기서 "고용군"이란 9절에 언급된 구스인과 붓인 그리고 루딤인과 같은 용병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들 역시 애굽의 방탕과 사치에 물들어 용병으로서의 용맹이나 특성을 상실함으로써 바벨론의 침공 소식을 듣고 놀라 도망치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성 경: [렘46:22]

이는 패배한 애굽 사람들이 뱀과 같이 숨을 죽여 사는 신세로 전락할 것임을 은유적으로 편현한 것이다. 즉 뱀이 쉼터를 찾아 은밀한 소리를 내며 다니듯 애굽인들은 더 이상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주); 벌목하는 자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니라. - 이는 애굽인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이유이다. 바벨론 군대를 마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 "도끼를 든 벌목하는 자"에 비유한 것은 애굽의 처지가 벌목꾼의 도끼 앞에 꼼짝없이 서 있는 나무와 같았기 때문이다.

성 경: [렘46:23]

이는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바벨론 군대의 위력과 무수한 병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주);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 여기서 "수풀"은 애굽의 군대를 뜻하는데, 이는 그 병력이 결코 적지 않은 수임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바벨론 군대는 셀 수 없는 많은 애굽 군대를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더 많은 병력을 지닌 까닭에 그들을 무차별 살륙하는 것이다.

성 경: [렘46:24]

다시금 바벨론 군대에 의한 애굽의 멸망과 애굽인들의 포로가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애굽이 북방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은 현재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을 그들의 구원자로 믿는 유다의 완고함을 깨기 위함이다.

성 경: [렘46:25]

본절에서는 애굽의 신들을 비롯하여 왕과 고위 관료들이 징벌을 당할 것을 예언함으로써 애굽의 멸망이 기정 사실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특별히 본문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까지 심판하실 것임을 나타냄으로써 오직 사시는 참된 신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뿐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노"는 애굽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상애굽의 수도 "테베(Thebes)"를 가리킨다(Keil, Rosenmuiller). 나 3:8에는 노아몬으로 나타난다.

"아몬"은 본래 테베의 수호신이었으나 B,C. 1900년경부터는 애굽 전체의 주신(主神)으로 부각도었다. 따라서 노의 아몬의 멸망은 곧 애굽의 멸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렘46:26]

애굽의 멸망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주도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내가"라는 주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애굽의 멸망이 군사력의 미약함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명백히 보여주시고 있다. 한편 이는 애굽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동시에 바벨론의 자만까지도 경계하시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바벨론의 애굽에 대한 승리가 단지 군사력의 우위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 역시 교만하여 애굽과 같은 전철을 밟는 어리석을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 그럴지라도 그 후에는 그 땅이 여전히 사람 살 곳이 되리라. - 애굽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즉 애굽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할 것이나 훗날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말이다. 에스겔은 그 기간이 40년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겔 29:11-13). 물론 여기서 40년은 바벨론이 바사에 의&#34721;해 멸망항 때(B,C. 539)까지이다. 그렇다면 애굽의 멸망한 때가 B,C 579년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애굽이 멸망한 것은 B,C. 567년이다. 따라서 우리는 40년이란 기간을 애굽 왕 호브라(B,C 587-570년)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침공하여 애굽의 세력을 무력화시킨 때로부터 보아야 할 것이다(렘 44:30).

성 경: [렘46:27,28]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렘 30:10,11과 문자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때문에 이를 편집상의 오류로 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편집상의 오류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당신의 택한 백성을 중심으로 섭리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즉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애굽의 흥망 성쇠까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바 이스라엘의 회복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짧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의 논리를 타파하고, 주면 강대국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예비적 조치임을 여기서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방 민족의 세속사가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위한 배경적 역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주변의 어떤 놀랄만한 사건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렘 30:10. 11 주석 참조.

성 경: [렘47:1]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바로가 가사를 치기 전에 - 본 구절은 뒤에 이어지는 2-7절의 신탁이 언제의 것이었느냐 하는 연대기적 내용을 암시한다. 70인역은 본절의 대부분을 빠뜨리고 그냥 '블레셋에 대하여'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절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바로가 가사를 공격한 때가 언제인지 하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이 B.C. 609년의 바로느고의 원정과 연계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원정에서 바로느고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므깃도에서 유다 군대를 패배시키고 또 요시야를 전사시킨 후에(왕하 23:29, 30) 앗수르를 응원하기 위해 하란으로출병하였다.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서술은 헤로도투스(Herodotus)의 기록에등장한다. 즉 헤로도투스는 느고가 B.C. 609년 요시야 군대를 패배시킨후 카디티스란성(이곳은 가사로 밝혀져 있다)을 정복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교되는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러한 것 중 몇 개를 참조 삼아 살펴보기로 하자.(1) 애굽의 가사에 대한 공격이 바로느고와 느부갓네살 사이의 전쟁, 곧 B.C. 605년의전투와 연계되어 있다는 견해. (2) 블레셋에 대한 공격이 시드기야 제 4년(B.C. 593년)경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견해(Blayney). (3) 이 예언이 요시야 통치 그 어느 때에 주어졌을 것이라는 견해(Dahler).

성 경: [렘47:2]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물이 북방에서 일어나 창일하는 시내를 이루어 - 본 구절은 바벨론 군대의 등장을 묘사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사야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앗수르 군대에 적용하였다(사8:7, 8). 어쩌면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프라테스 강의 범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멜로'(*)는 '가득함', '충만함'이란 뜻으로서 풍요로운 수확이나 부(富)를 가리킨다(Calvin).

성 경: [렘47:3]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아비의 손이 풀려서 그 자녀를 돌아보지 못하리니 - 문자적인 번역은 '아비들이 손에 힘이 빠져서 자식들을 위해 되돌아가지 못하리라'이다(Bright). 이는 어린 자식들이 뒤에 처져도 되돌아가서 데려올 경황도 힘도 없는 상황을 시사한다. 또한 본절에는 '굽 치는 소리'와 '병거 바퀴의 울리는 소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말 발굽소리 그리고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를 말하며 원문은 아마도 이 같은 소리를 의성어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데, '굽 치는 소리'의 '치는'에 해당하는 '솨아타'(*)는 덜거덕 덜거덕하는 말발굽 소리를 나타낸다. 한편 이 구절의 어감은 대단히 생생하고 또 짧은 스타카토로 이어지고 있다. 적군의 진군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47:4]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두로와 시돈에 남아 있는 바 도와 줄자를 - 블레셋과 함께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함께 연계되어 언급되고 있다. 이는 모든 조력자마저 끊겨버렸음을 나타내는데, 아마도 블레셋과 페니키아의 도시들 간에는 어떤 동맹이 맺어져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블레셋을 점령한 것은 어쩌면 페니키아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을 수도있다. B.C. 605년경에 블레셋과 페니키아 도시들 간에 그런 동맹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충분히 가능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의 주요 두도시인 두로와 시돈은 B.C. 594년과 B.C. 587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바벨론에 저항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두로를 포위 공격하였다(Bright).

(주); 갑돌 섬 - 이 지명에 대해서는 (1) 지중해 해변을 따라 뻗어 있는 블레셋에 속한 지역, (2) 갑바도기아, (3) 크레테 등으로 보는 견해들 등 분분하지만, 크레테 혹은그 주변의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곳은 블레셋의 원 고향에 해당하는 곳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와 팔레스틴 연안에 자리를 잡게된 것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보면, 블레셋의 멸망 이후 두로와 시돈도 최종적으로 항거하다가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성 경: [렘47:5]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가사가 삭발되었고 - 가사에 거하는 주민들이 깊은 슬픔과 곤경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그들이 그러한 슬픔과 곤경 속에서 머리털을 깎았다는 뜻이다(Clarke). 또한 자기 몸에다 깊은 상처를 내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으며,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 행위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겠다(왕상 18:28, Bright).

(주);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멸망되었나니 - 아스글론은 가사,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과 더불어 블레셋 다섯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에리트 임캄'(*)은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는데, 니콜슨(Nicholson)은 '그들 힘의 빈약한 남은 자'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역본 KJV는 이를 '그들 골짜기의 남은 자'(the remnant of their valley)라고 번역하였고 RSV는 70인역의 독본을 채택하여서 '오 아나킴의 남은 자여'(O remnant of theAnakim)라고 번역하였다. '평지'로 번역된 '임캄'(*)은 '평지' 혹은 '계곡'이란 뜻도 있지만, 우가릿어의 '힘'을 뜻하는 말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우가릿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언어로서 한때는 고대 수리아에서 사용되었다. 1928년에 우가릿어로 기록된 토판이 최초로 발견된 바 있는데, 오래지 않아 곧 해독되었다. 거기에는 히브리어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Nicholson). 즉 이 두 블레셋 마을들이 남은 힘과 병력을 다 소진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70인역의 '아나킴'이란 표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살았다고 하는 거인들을 가리킨다(민 13:22, 23; 신 1:28).

성 경: [렘47:6]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의 칼이여 - 이것은 여호와의 칼과 선지자 간의 대화를 나타내고 있는 장엄한 의인법적 표현이며 돈호법적 표현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숭고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클라크(Clarke)는 이를 '오, 너 여호와의 칼이여'라고 번역하였다.

(주); 네가 언제까지 쉬지 않겠느냐 - 이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분노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만큼 블레셋의 재난이 끔찍할 것임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한 것이라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Clavin).

성 경: [렘47:7]

주제1: [블레셋을 향한 예언]

주제2: [블레셋에 대한 예언]

(주); 여호와께서 이를 명하셨은즉 - 그러나 여호와의 칼의 심판을 억제시키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실제로 이 예언은 B.C. 604년경에 성취되었는데, 그 해에 느부갓네살이 해안 평원에 나타나 아스글론을 포위 공격하고 그 성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현재의 사카라(멤피스)에서 고대 서신이 한 통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아스글론의 왕 아돈이 바로 왕에게 보내는 서신으로서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편지는 바벨론 군대가 아펙으로 진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아돈은 바로느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 바벨론에서 발견된 영수증과 같은 문서에는 아스글론에서 잡혀온 왕의 아들들과 어부들, 그리고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같은 묶음 내의 다른 영수증들에는 유다의 야우킨(여호야긴)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런 점들로 보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어간의 어느 시기에 아스글론에서 포로들이 붙잡혀 왔던 것이 분명하다. 아스글론에서 멀지 않은 아스돗 지역에서 유적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서도B.C. 7세기말경의 파괴상을 보여주는 어떤 층이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아스글론 원정지에 아스돗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 경: [렘48:1]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모압에 대한 말씀이라 - 모압은 사해 동편에 위치하였는데, 남쪽으로는 세렛(Zeret)강가에 닿고 북쪽으로는 아르논 강, 그리고 서쪽으로는 사해, 동쪽으로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로는 이 작은 왕국의 경계가 아르논 강을 넘어갈 때도 있었다.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이 도시들은 아르논 북부에 있던 도시들로서, 모압의 팽창기에 속했던 지역이다. 민 21:21-31에는 출애굽 당시 아르논 북부 지역은 아모리 족속 시혼 왕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 후 이 지역은 르우벤과 갓 지파에 의해 정복되었다(민 32:33-38). 모압 왕 메사 당시(B.C. 9세기 중엽)에는 이 지역이 모압의 영토로 넘어갔다. 본시의 서두에는 모압 멸망에 대한 예언이 소개되고 있다.

(주); 슬프다 느보여...기랴다임이 수치를 당하여 - 느보는 르우벤 지파의 한 도시였으나(민 32:3, 38), 모압의 도시가 되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해 북단에서 동쪽으로 약 19km 떨어진 느보 산 부근이었을 것이다. 기랴다임 역시 르우벤 지파의 도시였으나, 그곳에서 발굴된 모압 비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모압의 도시가 되었었다(Thompson).

성 경: [렘48:2]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헤스본에서 무리가 그를 모해하여 - 헤스본 역시 북부 모압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다. 적의 침략에 의해 이곳이 파괴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역사적인 언급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맛멘의 지명의 뜻은 '오물 더미'인 것 같다. 어떤 학자는 이 도시가 모압 비문에 나타나 있는 아르논 북부의 디본이란 도시에 대한 언어 유희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Bright). 한편 다후드(Dahood)는 우가릿 문서에 근거해서 '맛멘이여 너도 적막하게 되리니'란 어구를 '맛멘이여 큰 목소리로 울지어다'라고 번역하였다.

성 경: [렘48:3]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 모압 비문(Moabite Stone)에는 호로나임이 호로넨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재 이곳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 경: [렘48:4]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영아들의 부르짖음이 - '영아'(*, 체이레하)의 문자적인 뜻은 '작은 것들'이며 '비참하게 된 것들'로도 번역된다. 여기서는 모압의 평지 도시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영역 성경 RSV는 이를 소알(Zoar)로 번역하고 있다.창 13:10에는 이 평지 도시들 중에 소돔과 고모라가 포함되어 있다. 이 평지 도시들은 사해 바다 남쪽 끝, 수면이 앝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사해 북부에 있었을 것이라고도 설명한다(Nicholson).

성 경: [렘48:5]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루힛 언덕으로 올라감이여 - 본절은 사 15:5의 후반부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아마 그것은 손상된 이 부분의 텍스트를 복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루힛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아마도 소알과 라밧모압 사이에 위치한 도시일 것이다.

성 경: [렘48:6]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떨기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로에르'(*)는 모압 지경에 있는 한지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주경 학자들은 이를 개역 성경의 본문처럼 해석한다. 수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여 고사(枯死)직전에 있는 떨기나무의 초라함과 같은 상황에 빠진 모압의 비참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한편 시 102:17에는 이 말이 '빈궁한 자'로 번역되어 있다.

성 경: [렘48:7]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모압이 의뢰하고 있는 그들의 기술과 부(富)는 적의 침략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지못할 것이다. 그모스는 모압의 신이었는데, 그것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압 비문에는 그모스가 이쉬타르-그모스로 언급되고 있다. 가나안의 이쉬타르 신이 새벽별 신이었던 것을 참조하면, 그모스 역시 별과 관련된 신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솔로몬은 모압 출신의 후궁들을 위하여 그모스 산당을 건축한 일이 있다(왕상 11:7)

성 경: [렘48:8]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모압은 골짜기와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약탈자 앞에서 파괴되고 말 것이다. 본절의 골짜기는 요르단 계곡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평원은 헤스본 북부 아르논 강 위에 펼쳐져 있는 트랜스 요르단 고원을 말하는 것같다(Thompson).

성 경: [렘48:9]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날개를 주어 날아 피하게 하라 - '날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치츠'(*)를 70인역은 '치운'(*)으로 보고 '푯말', '비석'이란 뜻으로 독본하였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모압을 위해 비석을 세우라, 모압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로 번역한다. 이에 대해 모란(Morna)이란 학자는 우가릿 문서에 근거해서 이 말을 '소금'으로 설명하였다(salt, NIV). 그렇다면 이것은 그 도시에 뿌리도록 소금을 주라는 뜻이 된다(Bright). 고대 근동에서는 파멸의 징조로 소금을 뿌리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처럼 '날개'로 번역해도, 인력(人力)으로 피할 수 없는 파멸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무난한 해석이 된다(wings, KJV, RSV).

성 경: [렘48:10]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모압을 향한 심판의 의지를 천명하셨으므로, 그 심판을 대행할 자

들이 받은바 소임을 부지런히 완수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렘48:11]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다른 지역에 비해 풍부한 수자원과 기름진 땅을 소유한 모압인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렸으며, 또한 고원 지대에 위치한 덕택에 외적의 침략도 별로 받지 않아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러한 모압은 오래 묵혀진 맛이 좋은 포도주로 비유된다. 모압에 많은 포도원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대단히 적절한 비유이다(사 16:8-11 참조, Bright).

성 경: [렘48:12]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그 그릇을 기울일 자를 - '그릇을 기울일 자'란 포도주를 다른 그긋에다 옮겨 붓는 일꾼을 말한다(Bright). 지형상 모압은 중동의 침략자들의 주요 노선에서 외곽 지역에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별로 파괴된 일이 없었지만 이제 그들의 평온도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성 경: [렘48:13]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에언]

그모스에 대한 신뢰에서 환멸을 느끼는 것이 북이스라엘에서의 벧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은 환멸에 비유되고 있다. 벧엘은 왕국 분열 당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 우상이 안치된 곳이었다(왕상 12:25-33).

성 경: [렘48:14]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우리는 용사요...맹사라 - 이는 젊고 용감한 사람들 중에서 선별되어 선택된 사람들을 뜻한다. 따라서 '군대의 꽃'으로도 번역된다(Nicholson). 그러나 이들 역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성 경: [렘48:15]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 여호와가 왕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사상은 구약 곳곳에 산재해 있으나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은 그렇게 흔치 않다. 46:1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렘48:16, 17]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여기서는 모압 주변 국가들을 향해서 모압 멸망에 대한 애도의 노래를 부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언급된다.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라고 하는 말은 모압이 주변 국가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던 때를 소급해서 지적한 표현이다(27:3; 왕하 1;1; 3:4, 5등). 모압은 B.C. 582년경에 멸망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영원히 그 독립을 상실하고 말았다.한편, '재난이 가까왔다'는 표현은 신 32:35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48:18]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디본에 거하는 딸아 - 디본이란 말은 모압 비문에서도 발견된다(Nicholson). 그리고 거만한 군주들일 메마른 땅에 앉게 된다는 상징법은 그 당시 잘 사용되었던 것이다(사 47:1). 46:19에는 딸 애굽이란 말이 있는데, 형식상 이것과 비슷하다. 예레미야는 유다 주민을 의인화해서 '내 딸 - 내 백성'이란 말을 흔히 사용했다. 이 디본은 사해에서 동쪽으로 21km, 그리고 아르논에서 북쪽으로 6.4km 정도 떨어진 오늘날의 디반(Diban)이란 지역에 위치했었다.

성 경: [렘48:19]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아로엘에 거하는 여인이여 - 본 구절의 아로엘은 디본에서 남서쪽으로 얼마 떨어져있지 않았던 아르논 북부의 아로엘을 가리킨다.(Nicholson).

성 경: [렘48:20]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본절에서 24절까지는 19절의 아로엘이 도망하는 자에게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주어지고 있다.

성 경: [렘48:21]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본절 이하는 산문체로 언급되고 있는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세 박자의 콜론을 가지고 있는 시적 구조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홀론과 야사의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모압 비문에는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렘48:22]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벧디불라다임 역시 모압 비문에 언급되고 있다. 이 단락의 도시들 중에 모압 비문에 언급된 도시들을 열거하면, 앞 구절의 두 도시와 벧므온, 본절의 벧디불라다임 그리고 그리욧, 보스라 등이다(Nicholson).

성 경: [렘48:23]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주); 벧가물 - 디본에서 동쪽으로 13km떨어진 오늘날의 '기르벱 엘 제메일'(Khirbet elJemeil)인 것 같다. 그리고 벧므온 - 메드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민 32:38에는 바알므온으로 나타나 있다.

성 경: [렘48:24]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그리욧은 암 2:2에 언급되고 있으며 보스라는 신 4:43; 수 20:8; 21:36의 베셀인것 같다. 어떤 이는 이곳을 49:13, 22에 언급되는 에돔의 보스라라고 생각하기도 하나 앞의 설명이 더 적절할 것이다.

성 경: [렘48:25]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에 대한 예언]

뿔과 팔이란 말은 구약에서 힘의 상징으로 종종 표현되었다(삼상 2:1, 10; 시89:17; 겔 30:21-25).

성 경: [렘48:26]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모압이 파멸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교만이었음을 지적한다. 한편 모압이 술에 취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비유법은 구약시대에 잘 알려져 있었다(사 51:17). 예레미야는 25:15-29에서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마시므로 비틀거린다는 예화를 사용하였는데, 거기서는 진노의 잔을 마신 자들의 명단이 제시되었다.

성 경: [렘48:27]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느냐 - 모압이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이유가 제시된다. 이스라엘이 곤경에 처했을 때 모압은 같은 혈족에서 유래된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조롱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는 곧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성 경: [렘48:28]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바위 사이에 거할지어다 - '바위 사이'(*, 바셀라)는 '구덩이 입구 곁에'로도 번역된다(Bright). 모압은 조롱의 표적이 되어 그들의 도시에서 도망쳐서 산악 지대에 숨어지내야 한다.

성 경: [렘48:29]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그 자고와 오만과 자긍 - 모압의 교만과 자만에 대한 일련의 동의어들이 나열되고 있다. 모압의 교만은 익히 알려진 속담이 되어 버렸던 것 같다(사 16:6; 25:10, 11;습 2:8-11).

성 경: [렘48:30]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아무것도 성취치 못하였도다 - 스스로를 자랑하며 이웃 민족의 환난과 고통을 비웃던 모압은, 패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아무런 힘도 쓸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수치와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 경: [렘48:31]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길헤레스 - 이곳은 아르논 강에서 남쪽으로 약 27km 떨어져 있으며 사해에서 동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엘그락(el-Kerak)인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이 도시의 명칭이 '새도시'란 뜻의 길하레셋이었던 것 같다(Nicholson).

성 경: [렘48:32]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십마의 포도나무여...야셀 바다까지 - 야셀은 암몬족의 영토 내에 있던 도시인데, 이 지역 내의 다른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도 모압 왕 메사에 의해 정복되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모압 비문에는 이곳의 명칭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포도산지로 유명했으리라 짐작되는 십마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출애굽 당시 시혼왕의 영역에 속했던 곳으로서 헤스본에서부터 북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성 경: [렘48:33]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주);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 여기서 외치는 소리는 포도를 수확할 때의 기쁨의 함성이다. 그러나 이제 그 함성은 파멸당하는 용사들의 위급한 함성으로 바뀔 것이다.

성 경: [렘48:34]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본절에서 39절까지는 다시 산문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들여다보면, 그 배후에 시적 구조가 내재해 있기도 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절에는사 15:4-6과 평행을 이루는 어구가 발견되고 있고 또 36절은 사 16:11과 그리고 37절은 사 15:2, 3과, 38절은 사 15:3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일면을 볼 수 있다. 엘르알레는 헤스본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에글랏셀리시야는 '세 번째 에글랏'이란 뜻으로서, 같은 지역 내에 위치는 알려져있지 않은 동일 지명과 구별하기 위한 명칭이었을 것이다. 즉 제일 에글랏, 제이 에글랏이란 지명이 또 있었을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48:35]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교만]

모압이 사랑하던 모든 것이 멸망당하였고 특히 종교적으로 의지 대상으로 삼아왔던 모든 우상들마저 파괴되리라는 예언이다.

성 경: [렘48:36]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피리같이 소리하나니 - '피리'란 것은 고대 중동 지역 전역에서 잘 알려져 있었던 갈대 피리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기쁨을 표하거나 슬픔을 표할 때 사용되었다(Thompson).

성 경: [렘48:37]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것은 슬픔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41:5주석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언급되어 있다.

성 경: [렘48:38]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모압을 재미 없는 그릇같이... - 같은 표현이 22:28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여호야긴에게 적용되었다(Bright).

성 경: [렘48:39, 40]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거리의 공공 기관에서나 개인의 집에서도 애도의 소리가 들린다. 교만하던 모압이 조롱거리가 되고 온 이웃에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독수리에 대한 예화(욥 9:26; 잠 30:7; 합 1:8)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겔17:3-5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거기서는 바벨론 왕을 가리켜 독수리로 표현했고 또 겔17:7, 8에는 애굽 왕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다. 본절의 독수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B.C. 605-562)을 가리키는 듯하다.

성 경: [렘48:41]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 70인역은 40절에서부터 42절까지를 생략하고 그 대신에 본절의 상반부를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성읍들이 취함을 당하고 요새가 함락됨'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략된 이 부분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49:22에서 반복되고 있다. 70인역은 중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것이다.

성 경: [렘48:42]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로다 - 모압은 결국 더 이상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제로 모압은 멸망 이후 국가로서의 존재가 사멸되어 버렸다.

성 경: [렘48:43, 44]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 본문은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면 사 24:17, 18과 동일하다. 왜냐햐면 이것들이 전통적으로 모압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그 당시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예레미야가 여기서 그것을 다시 적용시키고 있을 뿐인것이다. 암 5:19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성 경: [렘48:45]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화염이 시혼의 속에서 나서 - 환난날에 헤스본으로 도피하려고 해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뜻이다(Feinberg). 70인역은 본절에서부터 47절까지의 내용을 생략하고 있다. 민 21:28; 24:17에 보면 본절과 관련된 사항이 나타나고 있다. 시혼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당한 아모리족의 왕이었고(민 21:21-30) 그 수도는 헤스본이었다(Bright).

성 경: [렘48:46]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그모스 백성이 망하였도다 - 모세 당시 발람은 모압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는데(민 24:17) 우리는 여기서 그의 예언이 발동되고 있는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렘48:47]

주제1: [모압에 대한 예언]

주제2: [모압의 수치]

(주); 말일에 모압의 포로로 돌아오게 하리라 - 파멸과 죽음에 대한 예언과 함께 선지자는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미래의 어느 날을 바라보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 예언과 같이 이들에 대해서도 회복의 약속이 동반되고 있다. 한편 '말일'이란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Freedman, Harrison).

성 경: [렘49:1]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암몬에 대한 예언]

(주); 암몬 자손에 대한 말씀이라 - 암몬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신의 딸에게서 낳은 벤암미의 후손이다(창 19:38). 요단 강 동편에서 농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민족신 밀곰(Milcom)을 섬겼으며, 일찍부터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삿 3:13, 14; 암 1:13; 습 2:8-10).

(주); 말감이 갓을 점령하며 - 암몬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사실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말감'에 대해서는 본절 하반절의 '백성'이라는 말에 근거하여 이를 왕의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모압신 '그모스'란 용어의 용례나(48:7) 3절 내용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는 암몬의 민족신 '밀곰'에 대한 별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칠십인역(LXX), 수리아역(Syriac),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이를 '밀곰'(Milcom)이라 옮겼으며, 왕상 11:7에 의하면 밀곰은 몰록과 동일시되는 듯하다. 결국, 몰렉, 몰록, 밀곰, 말감등은 같은 말이다. 이 우상에 대한 숭배 의식중에 인신 제사가 유명하다(7:31;왕하 23:10).

성 경: [렘49:2]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암몬에 대한 예언]

랍바는 요단 강 동쪽 약 37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암몬의 수도였다.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과 동일 지역이다. 촌락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기본형 '바트'(*)는 '딸'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처럼 성읍(혹은 그 성읍의 백성)을 가리켜 딸이라 표현하는 예는 성경에서 종종보인다(4:11; 왕하 19:21; 사 1:8).

성 경: [렘49:3]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암몬에 대한 예언]

헤스본은 아모리 왕 시혼의 지배 하에 있다가(민 21:25-30, 34) 후에는 모압의 지배에 들어가기도 했던 성읍이다. 그리고 아이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된 곳이 아니라(수 8:1-29 참조) 여기서만 언급되는 암몬의 한 성읍이다.

(주); 울타리 가운데서 앞뒤로 달릴지어다 -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는 죽은 이를 위해 여인들이 애곡하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이해되기도 하나(Clarke) 그보다는 대적들의 침탈을 피할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황급히 뛰어 다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성 경: [렘49:4]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암몬에 대한 예언]

(주); 네 흐르는 골짜기로 자랑하느냐 - 암몬땅은 동으로 아라비아 사막을 접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얍복 강을 국경으로 하고 있어서 천연의 요새라 할 만한 곳이었다. 이같은 자연 환경을 본 구절은 마치 첩첩 산중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다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흐르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주브'(*)는 '흐르다'라는 뜻도 있으나 자동사로 쓰일 때는 주로 '쇠약해지다'라는 의미이다(애 4:9). 따라서 본 구절은 이렇게 의역해볼 수 있겠다 : '너희가 깊은 골짜기들을 자랑하도다. 그러나 그 골짜기들은 더 이상 방패막이 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성 경: [렘49:5]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암몬에 대한 예언]

(주); 바로 나갈 것이요 - 좌우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도망가기에 바쁜 다급한 상황을 암시한다.

성 경: [렘49:6]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암몬에 대한 예언]

(주); 그러나 그 후에...돌아오게 하리라 - 모압을 향해 선포되었던 것과 동일한 회복의 예언이 암몬에게도 주어진다(48:47 참조).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회복시키신다는 이러한 메시지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구속사의 전반에 걸쳐 언급된다(창 12:1; 사 56:6, 7).

성 경: [렘49:7]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 '데만'은 북부 에돔에 위치했으며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고향이기도 했다(욥 2:11). 또 이곳은 에돔 족속 가운데 유력한 한 부족이 거주하던 성읍으로서, 여기서는 에돔 전역을 가리키는 시적 명칭으로 사용되었다(암 1:12; 합 3:3). 이들 부족 가운데는 지혜자가 많았던 것 같으며 그로 인해 교만해졌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의 명철과 지혜가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성 경: [렘49:8]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드단 거민아 돌이켜 도망할지어다 - '드단 거민'은 아브라함이 첩 그두라에게서 낳은 아들 드단의 후손으로서, 에돔 남부 지역에 살았으며 상거래로 잘 알려졌다(25:23;겔 25:13). 본 구절은 에돔과 긴밀한 상거래 관계에 있었던 그들이 에돔의 재난에 함께 휩쓸리지 않도록 피할 것을 말한다. 한편 이들 중 상당수는 에돔 족속에 동화되어그들과 함께 살았다(대상 1:9, 37).

성 경: [렘49:9]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본절을 의문문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남기지 아니하겠느냐? 또 밤에 도적이...멸하겠느냐?'(KJV, NIV, RSV). 즉 포도를 거두는 자들은 그중 얼마를 남기기 마련이며, 도둑이 침입해도 모든 재산을 다 훔쳐갈 수는 없다. 그러나 에돔은 대적들의 침탈로 인해 깡그리 빼앗김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Calvin). 따라서 본절은 옵 5절과 동일한 내용이라 하겠다.

성 경: [렘49:10]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내가 에서로 적신이 되게 하여 -이는 침략군의 말발굽을 피해 숨은 에돔인들이 모조리 그 앞으로 끌려나오게 될 것을 뜻한다. 아울러 그들이 의지하던 재물이나 지혜등 모든 것이 빼앗김을 당하며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만다는 예언이다. 본 구절을 주로 탈취당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이는 옵 6절과 평행을 이루는 셈이다(D.R.Jones).

성 경: [렘49:11]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이 구절을 오히려 철저한 심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본절 역시 9절처럼 의문문으로서 '네 고아들을 남겨두겠느냐?...'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 자체는 굳이 의문문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한글 개역 성경이나 영역본 KJV, NIV, RSV등과 같은 번역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본절은 극심한 진노 가운데서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엿보게 한다. 특히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으로 언급된다(Clarke).

성 경: [렘49:12]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겠거늘 -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도 공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늘, 어찌 이방 족속인 에돔이 지은 바 죄악에 대한 심판에서 피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는 벧전 4:17 말씀과 통한다. 또한 에돔은 예루살렘 함락에 일조(一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옵 10-14절).

성 경: [렘49:13]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보스라가...저줏거리가 될 것이요 - '보스라'는 페트라(Petra)와 사해의 사이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예레미야 당시 에돔의 수도 성읍이었다(Feinberg). 또 이곳은 삼면이 가파른 암석으로 된 계곡인지라 어떠한 외세의 침입에도 견딜만 했던 에돔의 여러 성읍 가운데 가장 견고한 요새이다. 따라서 여기서 '보스라'는 에돔의 모든 성읍들을 대표하는 의미에서 언급된다(Clarke). 한편, 모압이나 암몬의 경우와는 달리 에돔에 대해서는 회복과 관련된 위로의 메시지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이스라엘과 혈연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돔인들의 잔인함이 다른 족속보다 더했음을 암시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시 137:7).

성 경: [렘49:14]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여기서 예레미야는 에돔에 멸망이 임하게 하시는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천명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에돔 족속이 순식간에 멸망되리라고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면 가능하다는 것이다(Calvin).

(주); 사자를 열방 중에 보내어 - 하나님이 실제로 사자(使者)를 보내셨다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열방들로 하여금 에돔을 침공하도록 허락하셨다는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의미로 이해된다(Clarke).

성 경: [렘49:15]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내가 너를...멸시를 받게 하였느니라 - 많은 주석가들은 이를 장차 에돔이 당하게 될 수치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것도 가능한 해석이겠으나, 16절 상반절과 말 1:2, 3을 참조할 때 이는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던 사실을(창25:29-34) 암시하는 듯하다. 에돔인들은 하나님의 미움을 사서 황무한 산간 지대에 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잘나서 그처럼 교만해 하는가 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Calvin).

성 경: [렘49:16]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바위 틈...산꼭대기 - 이는 에돔의 지형이 험해서 외적의 침입을 천연적으로 방어해 주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이러한 천연적 방파제를 믿고 교만해졌으나, 오히려 그 교만으로 인해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성 경: [렘49:17, 18]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에돔의 멸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구절이다.

(주); 소돔과 고모라와...멸망된 것 같이 - 소돔과 고모라 및 그 주변 성읍들의 파멸이 너무도 끔찍하였던 관계로(창 19:24, 25),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은 종종 본절과 같이 소돔 등의 경우에 비유되었다(Clarke). 이사야 선지자가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사 1:9)고 말했던 것을 보더라도, 본절의 심판 선언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성 경: [렘49:19]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여기서부터 21절까지는 50:44-46과 매우 유사한 내용인데, 거기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언급되고 있다.

(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 같이 - 요단 강은 매년 우기가 되면 나일 강이나 유브라데 강처럼 범람하였다. 요단 강 주변의 평지에 서식했던 사자들은 강물이 범람하면, 산이나 기타 높은 지대로 피해 올라간다.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본 구절은 에돔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마치 사자의 먹이가 되듯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으로 비유한다. 이 예언은 B.C. 582년경에 성취되었다.

(주);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 여기 '택한 자'란 에돔을 보호하고 인도할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추방할 외부의 권세자를 일컫는다.

성 경: [렘49:20]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양떼의 어린 것들을...끌어가고 - 19절의 '목자'라는 말과 함께 본 구절은, 에돔의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천연의 요새를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강한 자로 자부하였지만, 맹수의 공격 앞에 자기 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양떼에 불과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보호해줄 목자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양떼의 어린 것들'을 주어로 보고, 심지어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에돔인들을 끌고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Calvin). 영역 성경 중 KJV가 이를 따랐다 : 'Surelythe least of the flock shall draw them out.'

성 경: [렘49:21]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그 부르짖는 소리는 홍해에 들리리라 - 에돔에서 홍해까지는 200km가 넘는 거리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에돔의 멸망이 당시의 국제 사회에 커다란 파장과 충격을 일으킬 것을 나타낸다. 한편, '홍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베얌 수프'(*)는 '갈대의 바다'라는 의미로서 그 주변에 갈대를 비롯한 풀들이 무성했음을 암시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적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 바다를 건넌 사건은 너무도 유명하다(출 15:4 이하).

성 경: [렘49:22]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에돔에 대한 예언]

(주); 보라 원수가 독수리같이 날아와서 -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독수리'에 비유한 예는 48:40에서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갑작스럽고 신속한 공격을 암시하기 위해 독수리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다고도 생각된다(Calvin). 당시 상황에서 에돔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 137:7에도 암시되듯이, 당시 에돔은 바벨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성 경: [렘49:23]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다메섹에 대한 예언]

여기서부터 27절까지는 다메섹을 향한 예언이다. 다메섹은 아람 왕국의 수도로서 아람 영토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 안티 레바논(Anti-Lebanon) 산맥의 동쪽 기슭에서 남서쪽으로 헬몬 산을 내려다 보고 있는 '다메섹'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옛부터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다메섹'은통일 왕국 시대부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경쟁 상대로 존재했으며(왕하 5:12;6:24), 한때는 유다 침략을 위해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사 7:1; 암1:3-5).

(주); 하맛과 아르밧 - 이 두 성읍은 다메섹과 함게 아람의 주요 성읍으로서 자체 내에 지역왕이 존재했다(왕하 19:13). '하맛'은 다메셋 북방 약 176km 지점에 위치했으며, 아르밧은 하맛보다 약 152km 북부에 위치했다.

(주); 바닷가에 슬픔이 있고 - '바닷가'에 관한 언급은 다분히 상징적 의미를 띠는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아람의 영토를 보면 해변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불안과 동요 그리고 혼란에 휩쓸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겠다(Freedman).

성 경: [렘49:24]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다메섹에 대한 예언]

(주); 해산하는 여인같이...그를 잡았도다 - 본서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런 파멸이 임하게 되는 상황을 이처럼 표현하는 예가 종종 눈에 띈다(6:24; 13:21;22:23; 50:43 참조, D.R. Jones).

성 경: [렘49:25]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다메섹에 대한 예언]

(주);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 - 혹자는 본 구절의 문자적 의미가 다소 어색하다는 이유로 '나의'(히브리어상의 * 즉 '요드')를 오기(誤記)로 본다(Targum,Grotius). 그러나 본 구절은 파멸에 직면한 다메섹에 대해 비꼬는 투의 풍자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된다(Calvin). 공동 번역은 이를 '이름난 수도, 흥청대던 도시'로 옮겨, 아람인들이 광대한 국토와 경제적 풍요로 인해 쾌락에 탐닉했던 사실을 지적하고자 했다.

성 경: [렘49:26,27]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다메섹에 대한 예언]

다메섹이 패망할 절망적인 상황을, 청년과 군사 및 성벽의 멸절과 파괴를 통해 부각시키는 내용이다. 이 예언대로 다메섹은 B.C. 605년경 멸망하여 바벨론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바벨론은 서진(西進) 전략에 있어 결정적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벤하닷은 B.C. 9, 8세기에 다메섹을 통치하던 왕조를 지칭하기도 하며, 왕들 개개인의 이름을 지칭하기도 한다(왕상 15:18, 20; 왕하 13:24 참조).

성 경: [렘49:28]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게달과 하솔에 대한 예언]

(주);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 '게달'은 다메섹 남동쪽 곧 팔레스틴 동부의 아라비아 사막에 거주했던 이스마엘 계통의 유목민으로서(창 25:13; 사 21:16; 겔27:21). 대규모로 양을 치고(사 60:7) 인접한 항구 도시인 두로, 시돈과 교역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능숙한 궁수(弓手)들을 많이 보유했기 때문에(사21:16, 17) 작은 부족이면서도 큰 영향력을 떨쳤다. 그리고 '하솔'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북부 팔레스틴의 요새였던 하솔 - 수 11:1-13-과는 다른 지역임), 팔레스틴 남부의 아랍 족속(Cowles) 혹은 반유목의 아랍인들이 거주했던 마을들에 대한 집단 명칭으로 이해한다.

성 경: [렘49:29]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게달과 하솔에 대한 예언]

여기 언급되는 '장막', '양떼', '휘장', '약대' 등은 그들의 생활 방식을 보여줌과아울러 가장 긴요한 재산들이 깡그리 빼앗기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Calvin).

성 경: [렘49:30]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게달과 하솔에 대한 예언]

(주); 멀리 가서 깊은 데 거하라 - 이는 바벨론을 통한 멸망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그들이 아무리 멀리 피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뜻하는 반어적(反語的)표현이다. 아마 이들 부족은 넓고 넓은 아라비아 사막에 거주하였던 터라 외부 침입자의 공격을 쉽사리 따돌릴 수 있다고 자신해 왔을 것이다.

성 경: [렘49:31]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게달과 하솔에 대한 예언]

(주);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거하는 국민 - 장막에 거하며 넓은 사막 지역을 무리지어 다니는 유목 생활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성 경: [렘49:32]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게달과 하솔에 대한 예언]

(주);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는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추츠 페아'(*)에 대해 칼빈(Calvin)은 하솔 백성이 바벨론의 침공을 당해각처로 추방당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즉 '머리털'에 해당하는 '페아'(*)가 '끝', '구석'이란 뜻을 지니므로, 더 이상 피신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른 하솔 백성이 마침내 사면 팔방으로 추방당하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상 숭배와 관련된 행위로서 머리털을 깎는 것과 연관지어 본 구절을 이해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 본다(9:26 참조).

성 경: [렘49:33]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게달과 하솔에 대한 예언]

(주); 영원히 황무하리니 - 하솔은 B.C. 598년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멸망되어 역사 가운데서 그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 경: [렘49:34]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엘람에 대한 예언]

엘람은 바벨론 동부 산악 지대에 위치한 고대 왕국이었다(창 14:1 참조). B.C. 8세기경 막강한 힘을 자랑했으나 앗수르 왕에 의해 정복당한 후(B.C. 640년경)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후에 엘람은 메대, 바사에 병합되었으며, 수도 수산은 바사 제국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느 1:1; 단 8:2, Myers).

성 경: [렘49:35]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엘람에 대한 예언]

(주); 엘람의 힘의 으뜸 되는 활 - 엘람 군사력의 핵(核)이 궁수(弓手)들의 능수 능란한 활솜씨에 있었음을 보여준다(사 22;6).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작정 앞에서는 그것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성 경: [렘49:36,37]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엘람에 대한 예언]

엘람의 철저한 파멸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주);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 '사방 바람'이란 막강한 군사력의 파상적(波狀的)인 공격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 겔 37:9; 단 8:8; 슥 6:1-8등에도 나온다. 특히 '하늘의 사방'이란 말은 이 심판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뜻한다(Thompson).

성 경: [렘49:38]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엘람에 대한 예언]

(주); 내가 나의 위를 엘람에 베풀고 - 정복한 왕이 정복당한 땅 위에 보좌를 둔다는 말은 1:15; 43:8-13에도 나오며, 정복하여 굴복시킨다는 뜻의 상징적 표현이다. 여기서는 그 정복자가 다름 아닌 바로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 경: [렘49:39]

주제1: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 엘람에 대한 예언]

주제2: [엘람에 대한 예언]

애굽, 모압, 암몬 등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엘람에게도 회복의 약속이 주어진다. 특히 '끝날에'는 다분히 종말론적 의미를 띤다(Feinberg, 행 2:9-11).

성 경: [렘50: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본절은 본장과 51장 전체 신탁 예언의 서두에 해당된다. '갈대아인'은 우르 남부에 정착해 있었던 반유목민 부족의 후손이었다. 그들의 땅을 지칭하는 '갈두'란 말이B.C. 10세기 경의 비문에 등장한다. B.C. 9세기경에는 갈대아 족장들 중에 몇몇은 앗수르의 통치자 아닷니라리 3세(B.C. 811-782년)의 봉신이었다. 느부갓네살의 부친인 나보폴라살은 갈대아 원주민이었으며 B.C. 625년에 바벨론 왕좌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통치를 시작으로 해서 B.C. 539년까지 지속되는 신 바벨론 왕조기를 이끌게 된다. 느부갓네살(B.C. 605-562년)은 이들 바벨론 왕들 중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이었다. 한편, 70인역을 보면 맛소라 본문보다 내용이 훨씬짧은데, '바벨론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다(J. Bright).

성 경: [렘50: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는 내용이며 특히 그들이 섬기던 우상도 함께 파괴되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말한다. 한편 본절과 3절은 시(詩)의 형태를 띤다.

(주); 벨...므로닥 - '벨'은 셈어인 '바알'과 연관되는 명칭으로서 '주', '주인'(lord)이라는 문자적 뜻을 지니며, 수메르의 주신(主神)인 '엔릴'(Enlil)과도 같은 말이다. 바벨론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할 무렵에 그 주신(主神)인 '므로닥'(말둑)은 '벨'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Feinberg). 따라서 벨은 말둑에 대한 별칭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벨과 말둑은 시적 평행법으로 표현된 동일한 신이었다. 한편 바벨론 창조 신화에 따르면 말둑은 창조의 신이었고 또 '신들의 왕'으로 등장한다. '우상'(*, 길룰림)과 '신상'(*, 아차빔)은 동상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던 신상을 가리킨 표현이다. 이러한 명칭들은 모두 이방의 우상들을 가리키는 데 적용되었다(레 26:30; 신 29:17; 왕상 15:12등). 특히 우상을 가리키는 '길룰림'이란 말은 '똥덩어리'란 뜻을 가진 야유적인 표현이다. 에스겔은 이 말을 거의 40회에 걸쳐서 사용하고 있다(겔 6:5; 14:4, 5; 18:6, 15등).

성 경: [렘50: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한 나라가 북방에서 나와서 그를 쳐서 - '북방에서 나온 나라'가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예레미야는 이말을 자주 사용했는데(41절; 1:14;4:6; 6:1; 15:12; 46:20; 47:2) 초기의 장들에서는 이 나라의 정체가 분명치 않았으나 후반부에 들어와서는 그 나라가 바벨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이 용어가 이곳에서 다시 그 대상이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페르시아를 가리킨다고 본다. 물론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북방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가 북방에서 임하는 것으로 종종 언급됨을 보건대(사 14:31; 41:25), 본 구절의 '북방'은 다분히 상징적 의미를 띤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렘50: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 이스라엘의 회복과 위로에 대한 말씀인데, 이러한 미래의 회복에 참여하는 자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다 왕국이 다 포함될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50: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 '영영한 언약'이란 것은 31:31 이하와 32:40에 언급되어 있는 새 언약까지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Nicholson). RSV, NEB등의 영역 성경과 그밖의 다른 역본들은 4-7절을 산문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 전체를 살펴보면, 이를 운문으로 보아야 할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평행법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으로 지칭되고 있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이 울면서 여호와를 찾을 것이고 또 여호와와 다시 영영한 언약을 맺게 될 것이다(32:40, Thompson).

성 경: [렘50: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여기에는 이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또 그렇게 부추겼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왕들에 대한 비난이 언급된다. 구약에서 왕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이 종종 목자로 불리웠던 것이다. 문맥상 여기서는 백성들을 높은 산위로 인도하고 거기서 바알을 제사하게 하였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이 우선적으로 포함되는 것 같다(2:20; 3:2 등). 한편, 언약 파기에 대한 본절의 내용은 5절의 영영한 언약의 갱신과 대칭되고 있다.

성 경: [렘50:7]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본절은 이스라엘을 삼키는 자들은 모두 죄를 면치 못했다고 하는 2:3의 내용을 반영한다(J. Bright).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것으로 거룩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이상 그들은 여호와께 거룩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적들은 이스라엘을 삼키고도 '우리는 무죄하다'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렘50:8]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갈대아인의 땅에서 나오라 - 바벨론의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제 포로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될 것이며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의 귀환 대열에서 앞장서게 될 것임을 뜻한다.

성 경: [렘50: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큰 연합국으로 북방에서 일어나 나와서 - 예레미야의 예언 선포 당시 바사는 앗수르 제국이 멸망하자 메대 남부 엘람의 한 지방인 안산(Anshan)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바사가 강대국 바벨론에 대항할 연합국의 주체 세력이 될만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아실 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당신의 계획하시는 방향으로 이끄셨다.즉 B.C. 640년 고레스 1세가 안산의 왕으로 옹립되면서부터 안정된 기반을 구축해 가던 바사는 캄비세스 1세의 뒤를 이어 고레스 2세가 등극하면서 메대를 점령함으로, 중근동의 대권을 이어받을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B.C 550년). 이후 바사는 바벨론의나보니두스 왕과 동맹을 맺었으며, B.C. 539년 나보니두스가 아랍 원정을 간사이 당시 섭정 왕 벨사살이 치리하고 있던 바벨론을 침략하여 완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성 경: [렘50:1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그를 약탈하는...만족하리라 - 앞절에서 설명된 숙련된 용사들은 바벨론 파괴를 즐길 정도까지 될 것이라는 뜻이다.

성 경: [렘50:1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산업 - 이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산업'으로 묘사되었다(Nicholson). 한편, 원문에서 본절의 동사들은 모두 남성 복수로 표현되어 있으며, 12절에 대한 조건절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 접속사 '키'(*)는 양보의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를 12절과 연결시켜 직역하면, '너희가 즐거워하며 기뻐할지라도...수치를 당하리라'이다(J. Bright).

성 경: [렘50:1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너희의 어미나 너희를 낳은 자'란 말은 모두 바벨론을 뜻하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흔히 도시들은 그 주민들의 어미로 의인화되었다(Bright). 바벨론은 여호와의 산업을 노략질하고 그로 인해서 즐거워했지만, 그리고 열방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지만, 이제는 형편없이 왜소해지고 말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어법은 예레미야의 다른 신탁에서 여러 번 사용되고 있다(6:8; 9:10; 18:16 등).

성 경: [렘50:1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온전한 황무지가 될 것이라 - 이스라엘을 약탈한 데 대한 여호와의 진노와 그 보복이 암시되고 있는데, 이는 본자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Nicholson). 하나님은 바벨론을 열방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지만, 바벨론은 스스로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탐욕에 사로잡혀서 각국을 멸하고 유린하였을 뿐이었다. 한편 본절의 표현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가리킬 때 자주 쓰였던 것이지만(19:8), 여기서는 바벨론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렘50:14,1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바벨론을 공격하는 군사들에게 사방으로 공격의 고삐를 죄어 들어가라는 명령이 하달되는 장면이 나타난다. 바벨론 군대가 예전에는 다른 도시들의 성벽을 허물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여기서 바벨론의 패배는 그들의 교만에 대한 여호와의 보복으로 표현된다. '항복하였고'를 직역하면, '손을 주었다'이며, '손을 들었다'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성 경: [렘50:1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파종하는 자와 추수 때에 낫을 잡은 자 - 바벨론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서 농장을 파괴하고 또 그 농부들을 살해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일이 바벨론에서 일어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본절 마지막 부분은 사 13:14 하반절의 내용과 비슷하다. 바벨론 멸망과 함께 그들에 의해 잡혀갔던 유다인들과 같은 포로들은 그들의 고국으로 귀향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성 경: [렘50:17]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B.C. 722년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과,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맹수에 의해 쫓기는 흩어진 양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목자 없는 양떼의 비참한 모습과 상통한다(민 27:17; 왕상 22:17).

성 경: [렘50:18]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내가 앗수르 왕을 벌한 것같이...벌하고 - 본문이 기록될 당시 앗수르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임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B.C. 612년 이후에 기록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레미야는 미래에 있을 바벨 의 멸망을 이미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에 비유함으로써, 그 예언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강조한다.

성 경: [렘50:1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그가 갈멜과 바산에서 먹을 것이며 - 여호와는 여기서 자신의 양떼 이스라엘을 그의 목축지로 다시 데리고 오는 목자로 묘사되고 있다. '갈멜'은 '동산', '포도원'이란 뜻으로 지중해 연안 아크레만 남단에 솟아 있는 540m의 산으로 나무가 많은 기름진 땅이다(사 33:9; 35:2; 암 1:2; 미 7:14). 그리고 '바산'은 '부드러운 땅'이란 뜻으로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넓고 비옥한 땅이다.

성 경: [렘50:2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주);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赦)할 것임이니라 - 본절은 31:31-34의 새 언약에서 선언된 약속이 반영되고 있다.

성 경: [렘50:2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본절에 언급된 므라다임과 브곳에 대해서는 고유 명사로 보는 견해와 단순히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보통 명사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므라다임'은 남부 바벨론 지역을 지칭하는 '마트 마라티'를 가리키며, '브곳'은 '푸쿠두'라 일컫는 동부 바벨론 부족을 가리킨다고 본다(Feinberg). 하지만 이 두 단어가 나타내는 문자적 의미를 중시할 때, 이는 예레미야에 의해 자주 사용된 언어 유희적 표현으로 이해됨이 보다 무난할 것 같다. 즉, '므라타임'(*)은 '불순종하다', '반역하다'는 뜻인 '마라'(*)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매우 반역적임'을 뜻하며, '브곳'(*)은 '심판하다', '처벌하다'는 뜻의 '파카드'(*)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두 단어는 바벨론의 패역함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원인과 결과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50:2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싸움의 소리와 큰 파멸의 소리 - 이 '소리'는 갈대아 지역이 패망하면서 들려오는 전쟁과 엄청난 파국의 소리이다(Thompson).

성 경: [렘50:2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온 세계가 방망이가...꺾여 부숴졌는고 - 바벨론은 이전에 마치 온 세상을 두드려 부술것만 같았던 거대한 해머와도 같았다(J. Bright).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꺾이고 부숴져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렘50:2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네가 깨닫지 못하고 걸렸고 - 바벨론은 새를 잡으려고 덫을 놓았던 사냥꾼과 같이 열방들을 점령했었으며, 그 중에는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바벨론이 그 올무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전인류에 대한 여호와의 목적과 의도가 이미 질서정연하게 계획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세력도 여호와의 신적인 의도를 좌절시킬 수 없는 것이다. 포로들이 석방되기 위해서는 바벨론의 권세가 부너져야 했다. 예레미야는 아직 이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된 것처럼 예언을 전하고 있다.

성 경: [렘50:2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그 병고를 열고 분노의 병기를 냄은 - 여호와께서 무기고에서 꺼내올 '분노의 병기'는 다름 아니라 사 44:28-45:1에 언급되어 있는 페르시아라고 하는 병기이다. 즉 하나님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자신의 목자요 기름부음받은 자로 세우셨던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50:2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먼데 있는'의 히브리어 '미케츠'(*)는 그 의미가 다소 불확실한데, '사방에서' 혹은 '끝에서부터'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J. Bright).

성 경: [렘50:27]주제1: [바벨론의 멸망]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도수장으로 내려가게 하라 - 여기서는 바벨론 군사들이 '황소'에 비유되고 있는데'황소'는 힘, 권력, 부 등을 상징하는 은유적 용어로 쓰였다(시 22:12; 사 34:7, 8).그러나 그 날이 이르면, 즉 여호와의 심판의 때가 이르면, 그들은 모두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한편, 본절은 에돔에 대한 심판 상황을 싣고 있는 사 34:6, 7 내용을 상기시킨다(Delitzsch).성 경: [렘50:28]주제1: [바벨론의 멸망]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그 성전의 보수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소리로다 - 바벨론 땅에서 달아나는 도망자들은 여호와의 보복이 바벨론에 행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한다. 이들은 아마도 바벨론에서 달아난 유다인 도망자들을 뜻하는 것 같다. 성전(聖殿)은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였으며 또한 희생과 제사를 드리도록 하나님이 지정한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전을 훼방하고 모욕하는 것은 참람한 행위였으며, 여호와의 보복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성 경: [렘50:2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여호와를 향하여 교만하였음이니라 - 바벨론의 패망 원인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교만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호와를 모욕했다'라고도 번역되며 또한 '반역된 행위를 했다'란 뜻으로도 설명되고 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약소국의 패배한 신(神) 정도로 보고 교만하게 굴었던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50:3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청년들이 그 거리에 엎드러지겠고 - 이와 같은 내용이 49:26에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서는 다메섹에 적용되었다.

성 경: [렘50:31,3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바벨론의 교만이 거듭 지적되고 있다. 바벨론은 그 나라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자만에 사로잡혀 있었고, 결국 이러한 교만이 몰락을 불러왔다.

(주);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놓으리니 - 이 구절은 21:14 하반절과 비슷한 내용이다. 거기서는 바벨론 대신에 '예루살렘'이, 그리고 성읍이란 말 대신에 '수풀'이 언급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목적이 다른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J. Bright).

성 경: [렘50:33,3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바벨론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주체자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주);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니 - 출애굽 당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되어 주셨던 것과 같이 바벨론으로부터 구속해 주실 것이라는 내용이 암시된다. '구속자'(*, 고엘)란 친지를 살해한 자를 대신해서 보복해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법정용어였다. 그는 또한 친지를 보호하고 그의 자유를 확보해 주었으며, 재산을 지켜 주기도 하였다(레 25:25, 47-55; 민 35:21 등).

성 경: [렘50:35,36,37]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여기서는 '칼이 임한다'는 말이 무려 5회나 언급되고 있다. 칼이 임한다는 어구는 바벨론 전쟁의 패배를 통해 가혹한 심판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바벨론 거민, 또 그 관리들과 지혜로운 자들, 그들의 거짓 선지자들, 그 용사들 등이다. '자긍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딤'(*)은 문자적으로 '거짓된 자'를 뜻하는 말로서, '허풍쟁이'(Bright), '거짓 선지자', '점쟁이'(Vulgate, Syriac,Targum)등을 가리키며 35절의 '지혜로운 자'와 같은 부류를 지칭한다(Calvin). 그리고 잡족이란 아마 바벨론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여러 나라로부터 소집된 외인부대 정도를 가리킬 것이다.

성 경: [렘50:38]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 한글 개역 성경은 맛소라 사본을 따라서 '가뭄'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70인역은 가뭄 대신에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칼이란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가뭄'(*, 호레브)이나 '칼'(*, 헤레브)이란 말은 히브리어 원어상, 자음이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음이 없던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이 둘이 동음이의어로 쓰였을 것이다. 아무튼 본절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 나라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수로가 폐쇄되고 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J.Bright).

성 경: [렘50:3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사막의 들짐승이 시랑과 함께 - '사막의 들짐승'과 '시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치임'(*)과 '이임'(*)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각양 각색이다. (1) 숲속의 새들과 짐승(Calvin), (2) 유령들과 악귀(Bright), (3) 사티로스(희랍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숲의 신)와 요정, 이중 어떤 것이 옳은지를 정확히 결정하기란 어려우나,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될 것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성 경: [렘50:4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파멸의 최종적인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인근 도시들이 심판받은 것에비유된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한 심판의 본보기로 언급된다.

성 경: [렘50:4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본절에서 43절까지는 약간의 변형을 제외하고는 6:22-24의 내용과 동일하며 그 어투 또한 동일하다. 그리고 그 어투는 예레미야 특유의 어법을 담고 있다. 6장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유다였으나 여기서는 바벨론이다.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이 이제 유다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지는 역설을 보여준다.

성 경: [렘50:4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활과 창을 가진 자라 - 예레미야가 이 신탁의 예언을 선언했을 당시에는 바벨론을 침략할 자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사실이 밝혀졌듯이 그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페르시아(바사)왕 고레스였다. 고레스의 군대 역시 여러 봉신국의 파견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Thompson).

성 경: [렘50:4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고통에 잡혀 해산하는 여인의 구로함 같도다 -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또 그들을 파멸시킨 북방의 두려운적이 되었던 것과 똑같이 이제 바벨론 그 스스로가 북방의 두려운 적으로부터 그와 같은 운명을 당하게 될 것임을 나타낸다(Nicholson).

성 경: [렘50:4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같이 - 본절에서 이 내용은 바벨론에 적용되고 있지만, 같은 내용이 49:19에 반복되면서 거기서는 에돔의 운명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라고 하는 질문은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이지상의 통치자인 이상 하나님의 권능과 경쟁할 수 없고 또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성 경: [렘50:4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여호와의 도모와...여호와의 뜻을 들으라 -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은 해방되리라는 희망을 가질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절망의 시기에 그들의 해방에 대한 예언이 전달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회복이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었던 자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단히 분노했을 것이고 또 그들의 죄와 반역을 인정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다.

성 경: [렘50:4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비유]

(주); 바벨론이 함락하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며 - 이 시점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역할과 사역을 바벨론 멸망이라는 사건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정당하시며 또한 그들에 대한 심판이 옳았다는 것을 역설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다(겔 33:10, 11). 그랬기 때문에 에스겔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회복의 메시지를 설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가 선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은 적국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설사 우리들의 죄악으로 심판과 채찍질을 가하신다고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51: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멸망시키는 자의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마쉬히트'(*)는 '광풍'(violent gale)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는 바벨론을 응징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바사왕 고레스를 상징한다. 그리고 나를 대적하는 자에 해당하는 '레브 카마'(*)를 직역하면 '나에게맞서는 자의 마음'인데, 이는 갈대아를 가리키는 별명과 같은 것이다. 브라이트(Bright)는 이것이 포로기 당시 바벨론 당국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할 수단으로서 이런 암호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바벨론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는 설득력이 없다.

성 경: [렘51: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내가...키질하여 - 앞절의 '멸망시키는 자의 마음'이란 말이 '광풍' 혹은 '멸망시키는 바람'으로도 번역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이 같은 상징법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본절에 키질한다는 말과 조화를 이룬다(49:32,36, Calvin).

성 경: [렘51:3]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활을 당기는 자를...선 자를 향하여 - 본 구절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1) '활을 당기는 자는 활을 당기게 하라. 갑옷을 입게 하라.' (2) '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여, 갑옷을 입는 자를 향하여.' (3) '궁수가 활을 당기지 못하게 하라. 갑옷을 입지 못하게 하라.' (1)의 경우는 궁수나 갑옷 입는 자가 바사 군대가 되며, (2), (3)의 경우는 바벨론 군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2), (3)의 차이는 을 부정 불변사인 '알'로 읽느냐 아니면 '...을 향하여'의 뜻인 '엘'로 읽느냐에 따른 것이다. 이중 어느 한 견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는 힘들 것 같으나 만일 (3)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바벨론인들이 화살을 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으며, 또한 갑옷을 입을 수가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을 당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렘51:4]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갈대아인의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 예레미야는 여기서 분명히 예루살렘 최후의 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예루살렘이 멸망 당할 때 그들은 바벨론의 급습에 아무런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유다의 젊은 용사들이 쓰러지고 바벨론 무기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거리로 몰려들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도 이와 유사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51:5]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버림을 입지 아니하였나니-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 이스라엘은 거기서 면제된다. 한편 본 구절의 의미는 다소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개역 성경에 따르면, '(그들의) 땅'이란 말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땅을 가리키고 있는 듯이 보이나, 사실은 바벨론 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핏 보면 원문에서 '아레참'(*)도 그것이 이스라엘에 속한 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운명과 바벨론의 운명이 대조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땅'이란 갈대아인의 땅을 뜻하고, 그곳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거역하는 죄악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이러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향하여 죄악이 가득 찬 바벨론 땅에서부터 달아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렘51:6]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 본절에는 이 같은 명령이 누구에게 하달되고 있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0절을 보면 그 대상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유다인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Nicholson).

성 경: [렘51:7]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하는 금잔 - 이곳의 예화는 25:15 이하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벨론 그 자신이 여호와의 수중에 있는 분노의 잔으로 묘사되고 있다(Nicholson). 그 전에 바벨론은 여호와의 분노의 심판 도구였으며 특히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이다(13:12 이하 ; 사 51:17).

성 경: [렘51:8]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유향을 구하라 - 많은 나라로 하여금 취하게 하였던 그 금잔이 이제는 갑자기 깨어져 버리고 만다. 이스라엘이 비록 심각한 상처를 입긴 했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상처가 치유될 것이고 또 새로운 살이 돋아날 것이지만, 바벨론의 상처는 고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한편, 히브리어 '차리'(*)를 '발삼'으로 이해하기도 한, '유향'이라는 번역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유향을 이용한 약물 치료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렘51:9]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본절에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하는 것 같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8절의 '유향을 구하라'는 말이 외국의 지원군이나 용병을 요청하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볼 때, 본절은 바벨론 군대에 합세하기 위해 모여든 용병(혹은 지원군)들이 한 말로 이해됨이 나을 것 같다. 또한 '각기 고토로'(*, 이쉬 레아레추)는 원문상 '각기 그의 땅으로'라고 직역되므로, 여러 나라에서 온 군사들을 암시한다 하겠다.

성 경: [렘51:10]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 이는 시온으로 돌아가는 남은 자들의 무리가 외치는 감격의 탄성이다. 여기서 '우리 의'란 특별한 자격이나 공적으로서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정되는 '의'를 암시한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제 그들은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에서 자유로운 새 생활을 시작할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70년 후 놀라운 회복의 날을 맛보며 귀환하게 될것이라고 이미 예언했었다(29:10).

성 경: [렘51:1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화살을 갈며 방패를 굳게 잡으라 - 바벨론을 공격할 적들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다. 본절의 메대인들은 이란 북서부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며 그들의 수도는 에크바타나(Ecbatana)였다. 이들은 B.C. 550년 고레스의 침략을 받고 그에게 정복되었다. 메대가 단독으로 바벨론을 침략한 일은 없지만, 고레스의 모친이 메대인이었고, 메대는 바사에 병합되었으며 그래서 메대와 바사는 구약에서 여러 번 함께 결부되어 언급된다(단 5:28; 6:8, 12 등).

(주); 그 성전의 보수하시는 것이라 -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이(왕하24:10-13) 바벨론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성전이 이스라엘의 마음을 한 곳으로 응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는 점에서, 본절은 포로 귀환에 대한 강력한 암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성 경: [렘51:1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파숫군을 세우며 - '파숫군'에 해당하는 원어 '쇼메림'(*)은 '지키다', '울타리를 치다', '잠복하다'는 뜻인 '솨마르'(*)에서 유래한 말로서, 단순히 경계를 위한 파수꾼이 아니라 적의 침입을 사전에 막기 위해 병사들을 배치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 경: [렘51:13]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주); 많은 물가 - 유브라데 강과 바벨론 평원에 물을 공급하는 여러 수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J. Bright). 유브라데 강에는 수많은 운하들이 있었으며 바벨론 도시는 그 주변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은 비옥한 농토를 바탕으로 하여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물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나 호수를 통해서 그 인근 지역에 흘러들어 갔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적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망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Nicholson).

(주); 한정 - 히브리어 '카츠'(*)는 '극단', '막다른 골목'이란 뜻으로 피할 수없는 심판의 엄중성을 상기시킨다.

성 경: [렘51:14]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파멸 선포]

이제 적들이 이 도시에 구름떼와 같이 모여들 것이며, 메뚜기 떼가 먹어 치우듯이 그렇게 그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말 것이다. 이곳에는 또한 여호와의 맹세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표준적인 어구로 소개되고 있다(22:5; 44:26; 49:13). 그리고 이들 침략자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본절의 '소리'란 말은 25:30과 48:33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포도 수확기의 노래를 뜻하였다. 즉 적들이 바벨론으로 입성하는 장면이 마치 농부들이 포도즙을 짜는 것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으깨진 포도들이 인간을 위한 음료를 제공하듯이, 이들 바벨론 사람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잔을 채울 포도주가 될 것이다.

성 경: [렘51:17]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하나님의 권능과 헛된 우상]

(주);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 여기서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신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호와는 무능하시지 않다. 그는 앞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 그 안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계시며 따라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려는 자신의 의도를 실행할 권세와 능력이 있으신 것이다. 신상(*, 페셀)은 '새기다', '조각하다'는 뜻인 '파살'(*)에서 유래한 말로서 '조각한 형상' 혹은 '우상'을 의미한다.

성 경: [렘51:18]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하나님의 권능과 헛된 우상]

(주); 그것들은 헛것이요 - 바벨론의 우상이나 유다 땅의 우상이나 할 것없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인간을 구원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우준하고 무식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롬 1:22).

성 경: [렘51:19]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하나님의 권능과 헛된 우상]

(주);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 '야곱의 분깃'이란 말은 야곱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인간의 편에서 볼 때, 한 사람의 '분깃'(*, 헬레크) 또는 '몫'이란 것은 자기 부친이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말한다. 그 유산에는 자신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리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절은 이스라엘이 소유한 놀라운 특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셨으며 나아가 당신을 우리의 유업이 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시 16:5).

성 경: [렘51:20]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나의 철퇴...너로 열방을 파하며 - 여호와의 '철퇴'로 언급되고 있는 이 나라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대다수 주석가들은 이것이 바벨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Bright, Calvin, Thompson). 바벨론은 예레미야 초기 설교에서 종종 여호와의 심판의 대리자로 명시되었다(50:23 참조). 예레미야 당시 열방을 흩으며 나라를 파멸시킬 수 있었던 세력은 오직 바벨론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했을 때 그것은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동의 패자로서 열방을 차례 차례 정복해갔던 바벨론이 그토록 쉽게 멸망 당하리라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본 단락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면 자신이 심었던 것을 언제든지 뽑아버리실 수 있음을 단언하고 있다(45:4).

성 경: [렘51:2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여호와께서 역사의 주관자로서 온 열방으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신다고 하는사상은 다른 선지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이사야는 앗수르를 여호와의 '막대기'(사10:5-19)로 보았고, 또한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을 여호와의 '종'으로 표현하였다(27:4-11). 그런가 하면 고레스가 여호와의 '목자'와 '기름부음 받은 자'로 언급되기도 했다(사 44:28; 45:1). '부수며'의 히브리어 '나파츠'(*)는 '산산히 때려 부수다', '흩다'는 뜻으로서 바벨론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나타낸다.

성 경: [렘51:2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본절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바벨론이 열방들을 부수는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완성했을 때, 이제는 교만한 바벨론도 처벌하실 것이다. 처녀(*, 베툴라)는 '분리하다', '숨겨지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여자를 가리킨다.

성 경: [렘51:23]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본절에서는 왕과 그 백성이 함께 처벌되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왕은 심판의 도구의 역할을 넘어서 교만하고 무례한 행동을 했었던 것이며, 그래서 시온에서 자행한 그 모든 악을 되갚음 받게 될 것이다. 보복에 대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부터 다시 나타나고 있다.

성 경: [렘51:24]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너희 목전에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 본절은 20-23절의 결론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25, 26절을 도입하는 도입구의 역할도 하고 있다(J. Bright).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로서 열방을 파하는 권세를 얻었던 바벨론은 이제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파멸당한다.

성 경: [렘51:25]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 본절의 '산'이란 말은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이는 바벨론을 가리키고 있다. 바벨론은 평지에 위치했으므로 여기서 '산'이란 표현은 바벨론이 떨쳤던 국제적 위세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벨론은 여태까지 열방들 위에 군림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산'은 여호와의 손에 붙잡힐 것이고 또 불타 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니콜슨(Nicholson)은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는 이미 아무런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도시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면서, 이곳의 바벨론 황폐가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멸망 이전에 일어난 사건일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바벨론 패망 이후의 잇달아 일어난 전화(戰禍)들을 염두에 둔 표현인 듯하다(Calvin).

성 경: [렘51:26]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집 모퉁이 돌이나 기촛돌을... - 불타 버리고 바위가 굴러내리는 산에서는 모퉁잇돌이나 기촛돌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멸망한 바벨론은 마치 폭발된 화산처럼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렘51:27]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본절에는 바벨론을 공격할 전투에 열방이 가담하게 되는 내용이 암시되고 있다(J. Bright).

(주);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 - 이들 세 나라는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에 속했던 나라로서 그 당시 메대의 속국이었다. 그리고 대장(*, 티프사르)은 아카드어로는 '서판의 저자'란 뜻이지만, 이곳에서는 군 고위직 장성을 뜻하고 있다. 이 말이 나 3:17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거기서도 황충과 관련하여 쓰였다(J. Bright).

성 경: [렘51:28]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메대인의 왕들과 그 방백들 - 예언선포 당시 메대는 바벨론 제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대국(大國)이었다. 메대는 원래 작은 나라였으나 점차 힘을 키운 후, 바벨론의 나보폴라살(B.C. 626-605년)과 동맹을 맺어 앗수르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아스티아그스(Astyages)왕 때 고레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B.C. 549년) 바사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성 경: [렘51:29]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땅이 진동하며 고통하나니 - 여호와의 심판에 직면한 나라의 땅이 진동하고 뒤틀린다고 하는 이런 표현은 구약에서 흔히 나타난다(삿 5:4; 나 1:2-6; 합 3:1-15).

성 경: [렘51:30]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 50장과 본장에는 바벨론 용사들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내용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32절; 50:30, 36, 37).

성 경: [렘51:3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보발군이 달려...그 성읍 사방이 함락되었으며 - 고대 세계에서는 달리기를 잘하는 병사들이 특별히 훈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전장에서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삼하 18:19-33 참조). 바벨론 사방의 성읍이 무너졌음을 왕에게 고하고 있는 보발군도 바로 이러한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로 전한 소식은 인근 도시들의 방어망이 붕괴되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방어망은 거대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우선 거대한 성벽이 이중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내부의 성벽은 두께 약 6.4m 정도가 되었으며 그 바깥으로 두께가 약 3.7m 정도 되는 외부 성벽이 있었다. 또한 수도인 바벨론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요새가 띠를 이루고 있었다(Thompson).

성 경: [렘51:3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갈밭이 불탔으며 - '갈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감'(*)은 '늪'이나 '연못'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났으므로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에는 별 무리가 없다. 이러한 곳은 복병들을 매복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성 경: [렘51:33]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미구에 추수 때가 이르리라 - 추수때가 되기 전에 타작 마당을 밟아서 땅을 단단하게 굳히곤 하였다(J. Bright). 바벨론은 지금 이렇게 발로 짓밟히는 타작 마당에 비유되고 있다. 바벨론의 멸망이 아직 몇 십년 지나야 현실화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구절의 내용은 대단히 생생하여서 마치 예언이 선포된 그 당시에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Thompson).

성 경: [렘51:34]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거듭된 예언]

여기에는 시온 거민이 바벨론에게 당한 잔혹한 처벌을 고발하는 내용이 여러 동사를 사용하여 강조되고 있다. 멸하며의 히브리어 '하맘'(*)의 일반적인 의미는 '혼란시키다', '동요시키다'이며, 여기서는 사 28:28에서처럼 '부수다', '산산조각내다'는 뜻으로 번역되는것이 자연스럽겠다(Calvin).

성 경: [렘51:35]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느부갓네살은 결국 살을 찢어놓았고 또 피를 흘렸다는 의미이다. 이제 예루살렘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바벨론에 대한 보복을 호소하고 있다.

성 경: [렘51:36]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바다를 말리며 - 보복을 요구하는 그들의 탄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응답하고 계신다. 그는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보복하실 것이다. '바다'란 말은 바벨론의 수원(水源)인 유브라데 강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Nicholson).

성 경: [렘51:37]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바벨론이 황폐한 무더기가 되어서 - 유사한 말이 9:11에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적용되었다(Nicholson). '놀람과 치소거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솽마 우쉐레카'(*)로 문자적인 뜻은 공포와 한숨의 광경이 된다는 뜻이다. 이 상황은 예전의 바벨론의 영광과 비교하면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바벨론은 엄청난 부귀를 누렸으며 또 제국의 수도로서 엄청난 도시였다. 거기에는 말둑 신을 섬기는 사원이 있었고 주변 도시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었다(Thompson).

성 경: [렘51:38]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어린 사자같이 부르짖으며 - 사자와 그 새끼들은 먹이를 얻게 되었을 때 만족하여 포효하는데, 한때 바벨론이 이와같이 열방들을 짓밟고 만족하여 부르짖었던 것이다.

성 경: [렘51:39]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참사를 당하고 만다는 본절의 비유는, 바벨론의 야욕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갑작스런 멸망에 처할 것을 잘 나타낸다.

성 경: [렘51:40]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어린 양과...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 - 여호와의 진노의 잔으로 인해서 사자와 같은 그들이 희생되는 어린 양과 수염소가 되어 살육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렘51:4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세삭이 함락되었도다 - '세삭'은 바벨론을 가리킨다(25:26). 이 이름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던 시기에 바벨론을 가리켜 사용된 암호라는 견해가 있는데, 50장과 본장에 바벨론이 명시적으로 빈번히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견해는 설득력이 없는것 같다. 이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바벨론인들 스스로가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 견해가 보다 더 가능성 있어 보인다.

성 경: [렘51:4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바다가...그 많은 파도가 그것에 덮였도다 - 바벨론의 적들이 태고적 바다의 혼돈된 물결처럼 바벨론을 덮친다는 뜻이다(J. Bright). 바벨론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말둑(Marduk)은 혼돈의 바다 티아마트(Tiamat)와 싸워서 그것을 격파했다고 한다. 현재의 구절은 아마도 이러한 바벨론의 신화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를 유브라데 강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성 경: [렘51:43]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마른 땅과 사막과 거민이 없는 땅 - 여기서 사용된 몇몇 단어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들, 특히 유다를 모욕하고 파멸시켰지만 이제 그들이 그와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선지자는 아마 의도적으로 유다 파멸 예언에서 사용되었던 그런 어구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성 경: [렘51:44]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에 대한 거듭된 예언]

(주);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입에서 끌어내리니 - '벨'(*)은 말둑에 대한 별칭이었으며 그 뜻은 신들의 '주'였다. 바벨론인들은 아누(Anu)는 하늘 위를, 벨은 공중과 땅을, 그리고 이아(Ea)는 땅 아래의 물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한편 본절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삼킨 괴물로 묘사되고 있는 34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벨'은 자신이 삼킨 그것들을 다시 토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 경: [렘51:45]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구원하라 - 파멸이 임박한 바벨론에서 곧 떠날 것을 요구하는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배려가 언급된다.

성 경: [렘51:46]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이 땅에서 들리는 풍설 - 유다인들이 해방되기 전에 바벨론에서 겪었던 반역과 혁명들을 의미하는 본 구절은 그리스도 재림 전에 있을 전쟁과 소요의 소문에 적용되기도 한다(마 24:6; 막 13:7; 눅 21:9). 이러한 전쟁과 소요는 바벨론인들에게는 고통을 주는 것(47절)이나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징조가 된다. 왜냐하면 전쟁과 소요의 숨겨진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당신은 그것을 통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상을 파멸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풍설'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해졌으니 그것은 오직 여호와의 언약(11;4)만을 신뢰하며 바벨론 포로 기간을 회개의 기회로 삼고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 가운데서 재림을 준비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살전 5:16-18).

성 경: [렘51:47]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내가...벌할 것이라 - 본서에는 복속된 민족들 중에서 바벨론의 권세를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27:9, 10; 29:20-23, 29-32).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도 원래는 어느 지역의 반역에 대한 진압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바벨론 제국 내에는 반기를 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엘람인, 메대인, 애굽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궁정 내에서도 싸움과 반역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바벨론 멸망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성 경: [렘51:48]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바벨론 멸망으로 인한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광경이다. 특히 하늘과 땅과 그 중의 모든 것이 기뻐한다는 것은 바벨론의 죄악이 극에 달했었음을암시한다(계 19장 참조).

(주); 파멸시키는 자가 북방에서...옴이니라 - 바벨론을 심판한 여호와의 대행자는 '북방에서 온 파멸자'였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본 구절에 밝혀져 있지 않으나 11절과 28절의 메대와 그 동맹국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다.

성 경: [렘51:49]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여기서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한 보복의 내용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성 경: [렘51:50]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칼을 면한 자들이여 서지 말라 - 바벨론인들의 살육에서 벗어난 포로들은 바벨론 심판 때에 거기 머물러 있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되고 있다. '서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남다', '머무르다'는 뜻으로서, 바벨론에 미련을 두고 망설이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렘51:5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혹자는 본절을 예레미야가 신실한 자들에게 포로 귀환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해석한다. 즉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내야 한다는 권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은 다분히 자괴적인 절망감에 빠진 포로민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내용으로 이해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Calvin). 포로들의 이와 같은 절망과 신앙의 결핍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다. 포로들의 이와 유사한 심경은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 33:10)라는 절망의 말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Thompson).

성 경: [렘51:5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보라 날이 이르리니 - 그러나 이러한 절망의 때가 지나고 이제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신들을 모두 쓸어버리실 것이다. 그것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 경: [렘51:53]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 느부갓네살은 거대한 건축물을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또한 바벨론 시에다 그것을 실제로 건축했었다. 그러므로 본절에는 바벨론의 교만과 더불어 그 거대한 건축물에 대한 암시도 들어 있다(Nicholson). 한편,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높아진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말로서 자주 언급된다(계 14:8; 16:19; 17, 18장).

성 경: [렘51:54,55]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바벨론을 침략해 들어오는 적들의 군대가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주석자는 '물의 요동함'을 바벨론 세력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J. Bright). 아무튼 이런 비유는 42절에서도 나타난 바 있는데, 그 거대한 파도는 마치 태초의 혼돈의 물과도 비견된다.

성 경: [렘51:56]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 다시 여호와의 보복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같은 내용은 50장과 본장 전체에 걸쳐서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성 경: [렘51:57]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본절에서는 39절의 사상이 반복되고 있다. 바벨론 제국을 떠받드는 기둥 역할을 했던 자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에 취해 죽음의 잠으로 곯아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성 경: [렘51:58]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이스라엘을 향한 권면]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거대한 성벽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뢰는 헛될 것인 바, 합 2:13은 이런 경우에 알맞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 "민족들이 불 탈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수고'로 번역된 '야아프'(*)는 '피곤케 하다', '지치다'는 뜻으로 바벨론인들이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강구하나 모두 부질없는 헛수고가 될 뿐임을 나타낸다.

성 경: [렘51:59]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 예언의 결론]

(주); 유다 왕 시드기야 사 년에 - 시드기야 사 년은 B.C. 593년에 해당되는데, 아마도 2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과 연결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는 반바벨론 음모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또 시드기야가 그 주동 인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느부갓네살에게 알려지게 된다. 시드기야가 바룩의 아우인 시종장 스라야와 함께 바벨론에 간 것은 바벨론 왕에게 화친을 청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Calvin).

성 경: [렘51:60]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 예언의 결론]

(주); 바벨론에 임할 모든 재앙 - 예레미야가 기록한 문서는 두루마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50장이나 본장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이지만, 그 부피는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렘51:61]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 예언의 결론]

(주);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 이 말씀을 들은 청중이 누구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인들이었을 것이다.

성 경: [렘51:62]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 예언의 결론]

(주); 이 땅을 멸하여...황폐케 하리라 - 예레미야는 이전에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땅에 정착하여 살 것을 권고한 바 있다(29장).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렀으므로 과감히 그 땅을 떠날 준비를 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렘51:63,64]

주제1: [바벨론 심판의 필연성]

주제2: [바벨론 멸망 예언의 결론]

책에 돌을 담아 던지는 것 역시 상징적인 행위 예언으로서, 바벨론의 영원한 파멸을 강조하여 전달해 준다.

성 경: [렘52:1]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시드기야가...나이 이십 일 세라 - 시드기야란 이름은 그의 왕명이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의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였다(왕하 24:17 참조). 그는 조카인 여호야긴이 폐위되고 난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 되었다(B.C. 597년).

성 경: [렘52:2]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 이것은 시드기야 통치의 결산에 해당되는 말이다. 아울러 이는 유다의 패망에 대한 주요 원인을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성 경: [렘52:3]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여호와께서...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 유다에서 일어난 일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으며, 결국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이유다 땅에서 쫓겨나는 여호와의 진노가 성취되었던 것이다(왕하 24:20 참조). 한편, 본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며, '실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쫓아낼 때까지 그것이(죄악이) 여호와의 진노에 대해 유다와 예루살렘 안에 있었도다'이다. 한편, 일반 역사가들은 유다의 멸망이 주변 상황에 따른 것이지 여호와의 진노로 인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이시고 또 유다 멸망의 변수를 만드신 분이 여호와이시란 것이 신앙인의 역사에 대한 관점일 것이다(Bright).

성 경: [렘52:4]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시드기야 구 년은 현대력으로 B.C. 588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히브리 종교력 시 월은 바벨론식으로 데벱월(에 2:16)에 해당하며, 양력으로는 12-1월에 해당한다. 바벨론 군대는 겨울의 혹한을 이용하여 기습적 공격을 감행했던 것 같다.

성 경: [렘52:5]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십 일 년까지 에워싸였더니 - 앗수르 고분 부조를 연구해 보면, 예루살렘 성의 포위공격의 형태가 어떠했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전투 양상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성을 포위하여 진을 치고, 그리고 성벽 파괴용 무기들을 가동했으며, 또한 임시 망루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불화살이나 돌 따위를 성안으로 던지는 그런 전략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포위 공격은 시드기야 제 11년 넷째 달(6절) 즉, 현대력으로 B.C. 586년 6-7월경까지 계속되었다. 넷째 달이라고 하는 언급은 70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은 약 18개월동안 계속되었던 셈이다.

성 경: [렘52:6]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 성중의 기근에 대해서 39장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서와 애 4:1-10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다(Nicholson). '심하여'의 히브리어 '하자크'(*)는 '달라붙다', '지속되다'는 뜻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포위당함으로 인해 기근의 상태가 극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렘52:7]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 본절의 내용은 39:4에도 언급되고 있다. 시드기야와 그의 근신들은 삼엄한 바벨론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달아났을 것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서와 같이 맛소라 사본은 시드기야의 탈주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서, 그리고 39장에 언급된 사실로 보아서도 왕의 탈주는 분명하다(Bright). 아라바는 사해(死海) 남쪽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넓은 광야 지역이다.

성 경: [렘52:8]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 왕의 호위대가 왕을 혼자 내버려두고 흩어지게 된 상황이 언급되는데, 어쩌면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일사 불란하게 왕을 호위하지 못했을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갈대아인들이 왕을 목표로 해서 추적해왔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39:1-10에는 이같은 내용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사건은 애 4:19, 20에 반영되고 있다.

성 경: [렘52:9]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신하들에 관한 내용은 39:5-7과 왕하 25:5-7에 기록되어 있다. '하맛 땅 립나'는 오론테스 강가에 있는 가데스 남쪽 고대 수리아의 한 도시였는데, 느부갓네살은 여기서 원정군의 전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립나는 또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여러군사 도로가 마주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하였으며, 느부갓네살의 임시 본부가 위치해 있던 곳이었다(Thompson).

성 경: [렘52:10]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예레미야의 권면을 끝내 거부함으로써, 그 목전에서 자녀가 살해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한 아픔을 자초하고 말았다. 이곳의 모든 방백이란 립나에 죄수로 수용되어 있던 유다 방백들을 말한다. 왕하 25장에는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송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이들에 대한 처형은 예루살렘 함락 후 몇 주가 지나서 행하여졌을 것이다.

성 경: [렘52:11]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 겔 12:13의 성취이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옮겨져 거기서 죽을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상세한 설명은 39:7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 성의 함락 전후에 겪었던 그 쓰라린 육체적, 정신적 고초를 감내하면서 그 이후 그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짐작컨대, 아마 그는 그 이후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옥에 해당하는 '베트 하페쿠드트'(*)는, '감옥'이란 뜻으로 본서에 자주 언급되는 '마타라'(*)와 비교된다(32:2, 8, 12; 33:1; 37:21등). 문자적으로 '징계의 집'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혹자는 시드기야가 삼손처럼 맷돌을 돌려야 했다고 해석하나(Hitzing) 확실한 근거는 없다.

성 경: [렘52:12]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본절의 내용은 39:1-10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오 월'은 현재의 7-8월에 해당되며, '십 일'은 왕하 25:8에서는 7일로 나타나 있다. 아무튼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약 한 달이 지난 때였다(Bright). 한편 그의 도착 연대로 언급되고 있는 느부갓네살 십 구 년은 B.C. 586년에 해당된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실제적으로 왕위에 등극한 때가 B.C. 605년이었다는 연대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성 경: [렘52:13]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을 불사르는 장면이 언급되는데, 그 불길은 전도시를 휩쓸었을 것이다(Thompson). 한편 어떤 이는 '귀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돌'(*)을 그다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음가가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나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성 경: [렘52:14]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 중에 기드론 계곡이 탐사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황폐가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헐다'(*, 나타츠)라고 하는 말은 본서에서 빈번하게 쓰였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열방을 헐어내리는 임무를 맡기셨으며(1:10), 또한 여호와 자신이 한 나라를 헐어내리실 것이라고도 말씀했다(18:7), 그리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이미 헐어내리셨던 것이다(31:28).

성 경: [렘52:15]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본절은 느부사라단이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언급한다. 백성 중 빈한한 자에 대한 언급이 왕하 25:11; 렘 39:9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맛소라 사본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사본에는 수록되어 있다. 본절의 '빈한한 자'나 16절의 '빈천한 국민'은 히브리어로는 모두 '달로트'(*)이다. 결국 느부사라단은 유다의 지도층 뿐만 아니라 빈부 귀천을 막론한 일반 백성들까지 상당수를 잡아갔던 셈이다. 무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몬'(*)은 '하몬'(*)의 어미 변화로 보고 '군중', '무리'로도 번역되나, '공교한 기술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성 경: [렘52:16]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예루살렘의 멸망]

(주); 빈천한 국민을 남겨 두어 - 정치적으로 비중이 없는 자들은 남아서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힘이 없고 빈천한 자들이었다. 갈대아인들은 유다를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킬 만한 충분한 포로들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람들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한편, 40-41장의 내용을 보면, 미스바 지역 공동체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듯이 보인다. 아마 그들은 바벨론 군대를 용케 피했던 자들에 의해 인도된 집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성 경: [렘52:17]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놋바다 - 본절에 언급되어 있는 성전 기구들은 왕상7:15-39에 나온다. 이 '두 놋기둥'에는 기둥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하나는 야긴이었고 좌편에 세워진 기둥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그 꼭대기에는 백합화 형상이 있었다. 상세한 설명은 왕상 7:15-22을 참조하라. '놋바다'는 왕상 7:23-26에, 그리고 '받침'에 대해서는 왕상 7:27-39에 언급되고 있다. 이 기둥의 용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제단의 불이나 화롯불을 담아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기둥들은 수리아 신전 벽화를 보건대 B.C. 10세기경에 대단히 유행했던 것 같다.

성 경: [렘52:18]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가마들과 부삽들과 불집게들... - '가마'는 조그마한 물건들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아무튼 이곳에 언급되고 있는 여러 기구들은 크기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놋바다의 직경은 약 456cm 정도되었다. 이런 기구들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바벨론으로 옮겨갈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Thompson).

성 경: [렘52:19]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 갔는데 - 이를 직역하면, '금이었던 것 - 금, 은이었던 것 - 은'이다. 아마도 이 말은 본절의 잔들, 화로들, 주발들, 솥들 등이 모두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금으로 만들어진 제기들이 출25:29 이하에 언급되고 있고, 왕상 7:49 이하에는 이들 항목 중 대부분이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렘52:20]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열 두 놋소 곧...놋 중수를 - 왕하 25:16에는 본절에 언급된 항목들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놋으로 만들어진 열 두 소들이 한세기 반 전에 이미 앗수르의 공물로 보내졌기 때문에 본절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설령 앗수르로 보내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그 이후에 다시 되돌려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Bright).

성 경: [렘52:21]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한 기둥의 고가 십 팔 규빗이요 - 70인역(LXX)은 대하 3:15과 같이 기둥의 높이를 35규빗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왕상 7:15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렘52:22]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며 - 기둥의 장식이나 조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왕상7:16-20에 언급되어 있다. 이런 류의 장식은 대제사장의 의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출 28:33). 한편 라스 삼라(Ras Shamra)에서 발견된 용기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이런 장식은 이스라엘 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변 나라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성 경: [렘52:23]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성전 파괴와 성전 기물의 훼손]

(주); 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구십 륙이요 - 몇몇 세부적인 사항들은 왕상 7장의 내용과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 여기서는 예루살렘 함락 당시 바벨론으로 약탈되어 간 성전 기물들에 대한 대략적인 요약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본장의 기록 목적도 세부적인 사실 전달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아름답고 귀중한 것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Thompson).

성 경: [렘52:24]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여기서 다시 느부사라단이 등장한다. '스라야'는 요시야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의 손자였다(대상 6:13-15). 스라야의 아들은 여호사닥으로서, 포로기 이후 성전 재건을 주도하였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부친이었다(스 5:2; 학 1:1 등 참조). 그리고 '부제사장 스바냐'는 29:24-32과 37:3에 언급되었던 스바냐와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 명의 문지기는 성전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이는 높은 직책의 제사장들이었다.

성 경: [렘52:25]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군사를 거느린 장관 하나와...왕의 시종 - '장관'으로 번역된 '사리스'(*)는 '거세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로 환관을 의미한다. 본서 중반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환관이란 직책은 처음에는 왕의 내실을 관리했던 직책이나, 그 이후 보직(補職)의 범위가 확장되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브라이트(Bright)는 이 사람이 군대 장관이 아니라 대민 관계를 맡았떤 공직자였던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어쩌면 군대와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야전에서 전투를 하던 사람이 아니라 국방 장관 정도 되는 직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왕의 시종'(*, 로에 페네 하멜레크)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왕의 얼굴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들은 왕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어 빈번하게 왕과 접촉했던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들의 숫자가 본절에서는 칠 인으로 되어 있으나 왕하 25:19에는 다섯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군대 장관의 서기관'이란 것은 부사령관이나 부관 정도 되는 그런 위치였을 것이다. '국민'(*, 메암 하아레츠)의 문자적 번역은 '그 땅의 백성'으로서 일반 서민을 가리킨다(Bright).

성 경: [렘52:26]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 시드기야가 압송되어 갔던 립나로 이들 선발된 무리들 역시 이송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그곳에서 처형 당하기 위해서 붙잡혀 갔을 것이다(27절).

성 경: [렘52:27]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이들 포로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바 있으며(50:17-20;51:45-49 등) 이런 내용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서도 나타난다(사 52:1-12; 겔 37장등). 반면에 바벨론에 투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나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성 경: [렘52:28]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제 칠 년에 유다인이 삼천 이십 삼이요 - 바벨론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여기서의 제 칠년은 B.C. 597년이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등극 년도인 B.C. 605년부터 계수한 것이 아니라 이듬해인 B.C. 604년부터 그의 즉위 년도를 계수한 방법이다. 열왕기하도 이와 같은 연대 계산법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때 잡혀간 유다인 삼천 이십 삼인은 유다 전역에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숫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왕하 24:14, 16에 언급된 포로들의 숫자와는 틀리는데, 아마 열왕기하에서는 이미 국외로 추방당해있던 사람들의 숫자를 모두 합하였던 것 같다. 혹은 본절의 숫자는 성인 남자만을 센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성 경: [렘52:29]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느부갓네살의 십 팔 년에 - 바벨론 연대 계산법에 따르면 B.C. 586년에 해당되며, 열왕기에 따르면 그의 즉위 19년에 해당된다.

성 경: [렘52:30]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유다인이 칠백 사십 오 인이니 - 28절에서부터 본절까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무리가 세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B.C. 597년, 두 번째는 B.C. 586년, 그리고 세 번째는 B.C. 581년의 사건이다. 본 절에는 세 번째로 끌려간 무리들의 숫자가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사건 이후에 발생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친 패배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또다른 반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면 그다랴를 암살한 범죄에 대한 처벌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포로로 끌려간 전체 숫자가 4600명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가던 중에 죽었을 수도 있다. 비록 적은 숫자로 보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자들이 바로 이들 중에 있었다(Thompson).

성 경: [렘52:31]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십 이 월 이 십 오일 - 에윌므로닥은 느부갓네살의 아들로서 B.C. 561-56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그의 원 이름은 '아멜-마르둑'으로서 '마르둑의 사람'이란 뜻이다. 반면에 에윌므로닥은 '어리석은 므로닥'이란 뜻이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변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Bright). 그리고 '이십 오일'이란 말은 70인역(LXX)에서는 24일로, 그리고 왕하 25:27에는 27일로 표현되어 있다. 날짜가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떤 세부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시드기야 이전에 잠시 왕위에 있었던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석방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유다에서는 시드기야보다 여호야긴을 합법적인통치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여호야긴이 돌아오게 될 것으로도 믿고 있었다(28:1-4). 바벨론의 고고학 발굴에 나타난 그 당시의 기름 영수증에는 그가 '유다의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머리를 들게 하고(*, 나사로쉬)는 창 40:13, 20에 처음 나타나는 표현인데, 여기서처럼 '석방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Feinberg). 특히 '나사'(*)는 '높이다', '명예롭게 하다'의 뜻을 내포하므로, 여호야긴이 석방된 뒤에 후한 대접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성 경: [렘52:32]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주);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 '바벨론에 있는 왕들'이란 말은 여호야긴처럼 볼모로 잡혀온 피정복국의 왕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를 단순히 포로로서 잘 대우해 주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바벨론 왕실에서 특권을 지니고 생활하도록 배려하였음을 뜻한다고 봄이 좋을 것 같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윌므로닥은 어떤 연유로 인해 선왕(先王)인 느부갓네살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이때 여호야긴과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성 경: [렘52:33]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그에게 특별한 혜택이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왕의 면전에서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은 왕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이다. 여호야긴은 적어도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사실은 앞에 언급된 기름 영수증에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은택은 그의 평생 동안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에윌므로닥을 몰아내고 그 후 왕위에 올랐던 네리글리살 때에도 그런 특권을 계속 누렸음을 짐작케 한다(Thompson).

성 경: [렘52:34]

주제1: [예루살렘의 함락]

주제2: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의 말로]

본장의 마지막 네 구절(31-34절)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오랫동안 살았으며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하는 사실은 회복의 때를 예언한 예레미야의 약속이 성취되는 하나의 징후였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미래가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이나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있다는 예언의 성취에 관한 전조(前兆)이기도 하였던 것이다(Thomp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