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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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열왕기상 주석



성 경: [왕상1:1-4]

본문은 다윗 왕의 노환(老患)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본서 저자가 본서 초두에 다윗 왕의 노환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다윗 왕이 노환으로 인해 더이상 국정(國政)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아도니야가 다윗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반란을 꾀하게끔 되는 배경을 제공해 준다. (2) 같은 맥락에서 다윗 왕의 서거(逝去) 이전에 솔로몬이 급히 즉위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제공해 준다(J. Hammond). 한편 노환으로 인한 다윗의 나약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 본문은 인생의 무상감(無常感)을 느끼게 해준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목동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윗은 실로 파란 만장한 세월을 경험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이된 이후에도 다윗은 많은 날들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하고 성정 건축의 기반을 다지는 등 명군(名君)과 성군(聖君)으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그러나 그 영화로웠던 세월들도 유수처럼 흘러 지나가고, 이제 다윗은 칠십 노인이 되어 바야흐로 인생의 황혼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왕상1:1]

(주);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 다윗은 30세 왕이 되어(삼하 5:4,5)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므로(2:11;대상29:27).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한편 히브리 원문상 '나이 많아'(*, 바 바야밈)와 '늙으니'(*, 자켄)는 종종 같이 연결되어 나타나는 관용어이다(창18:11;24:1;수 13:1).

(주); 이불 - '이불'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가드'(* )는 원래 '덮개'(covering)란 뜻을 가진 단어로서 의복, 겉옷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창39:12;왕상 22;10) 침상이나 탁자를 덮는 이불로 사용되었다(Hammond, Keil). 왜냐하면 다윗은 쇠약하여 침실의 침상에서 줄곧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15, 47절).

(주);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 몸의 온기가 떨어진 것은 단순히 나이 많음에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다윗의 젊은 날의 고생 때문이기도 하다(Keil). 혹 병이 들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Hammond). 여하튼 다윗은 초기에는 외부적으로 망명 생활, 숱한 전쟁 등으로 인해 온갖 풍파를 겪었으며, 말년에는 내부적으로 집안의 불화, 반란, 살인, 음모 등으로 인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 더욱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징계로 겪었던 집안의 불화는 결정적으로 다윗을 노쇠케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이 말년에 노환(老患)이 되어 다윗을 쇠약케 만든 듯하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한편, 본서 초두에서 이처럼 다윗의 몸의 증세를 상세히 알리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너무 쇠약해졌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성 경: [왕상1:2]

원문에는 초두에 '그러므로'(*, 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하의 내용은 앞의 다윗의 노쇠를 해결하려는 의도 외에 다름 아니다. 즉 향락이 목적이 아니라 치료가 목적이다.

(주); 그 신복들이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 원문에는 단수, 즉 한 사람의 말로 되어 있다. 곧 '우리 주' 대신 '내 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상 그의 말은 다른 모든 신하들의 견해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수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다윗의 상태가 다윗의 모든 신하들을 근심케 하는 심각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당시 뚜렷한 후계자가 부각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윗 왕의 쇠약은 국가적인 중대사였던 것이다. 한편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여기서 신복들은 왕의 궁중 시의(侍醫)들을 가리킨다고 한다(Antiquities of the Jews, , - ).

(주); 고하되 구하여 봉양하고 - 히브리 원문에서 이 말은 허락을 요청하는 형태이다. 즉 '구하도록, 봉양하도록 허락하소서'란 뜻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를 허락하였다(3절). 이것은 신하들 뿐만 아니라 다윗 자신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봉양하고'(*, 소케네트)란 말은 '친숙하다', '일하다'란 뜻의 기본 동사 '사칸'(* )에서 파생된 말로 곧 곁에서 간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주); 젊은 처녀(*, 나아라 베툴라) - 남자 관계가 전혀 없는 나이 어린 동녀(童女)를 가리킨다. 이처럼 특별히 젊은 처녀가 요구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다윗 왕의 체온 저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젊은 동녀의 온기(溫氣)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2) 또한 그녀는 다윗 왕의 후궁(後宮)으로 간주되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처녀여야만 했다(Hammond, Pattersonm, Austel).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 젊은이의 온기를 받아 늙은 몸의 기운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대 치료 의술 중 하나로서 갈렌, 그로티우스 등 고대 의사들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고대 헬라의 명의(名醫) 갈렌(Galen)에 의하면, 젊고 건강한 사람의 체온으로 노쇠한 사람의 체온 저하를 방지하는 치료 의술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다(Galen, Mathus medicus, 8.7). 그러므로 젊은 처녀로 다윗의 품에 눕게 한 것은 분명 눕게 한 것은 분명 그같은 치료 방법을 통하여 다윗의 원기를 회복시켜, 그로 하여금 통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목적한 것이 확실하다.

성 경: [왕상1:3]

(주); 동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라'(* )는 '젊은', '나이 어린'이란 뜻의 '나아르'(* )에서 파생된 말로, 곧 젊은 처녀를 가리킨다. 2절 주석 참조. 수넴 - 수넴(Shunem)은 나사렛에서 대략 11.2Km 떨어진 소(小) 헬몬산(Mt. Little Hermon)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잇사갈 지파의 고을로 현재의 '술렘'(Sulem) 또는 '솔람'(Solam)이란 곳이다. 한편 에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지대에 위치한 이 곳은 넓고 비옥한 농토와 숲으로 둘러싸인,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다(수 19:18;삼상28:4).

(주); 아비삭(* ) - 간호와 온기(溫氣)로써 다윗 왕의 봉양할 의무를 띠고 이스라엘 중에서 뽑힌 수넴 출신의 아리따운 동녀이다.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방랑자'이다. 여기서 '아브' 또는 '아비'는 '아버지'란 의미로서, 히브리인들의 이름 중에서 흔히 발견되는 합성어이다. 예컨대 아비야, 아비아달, 아비멜렉, 아비가일, 아비새 등이 있다. 한편, 여기의 '수넴 여자 아비삭'이 솔로몬의 애인 '술람미 여인'(아6:13)과 동일하다는 설(說)이 있으나,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성 경: [왕상1:4]

(주);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 다윗이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으로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1) 아비삭은 다만 간호의 역할을 하는 시녀였으므로 다윗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견해(Bahr, Keil). (2) 다윗이 노쇠하여 무기력했기 때문에 동침할 수 없었다는 견해(Michaelis, Josephus) 등이다. 첫째 견해의 경우, 이 구절은 후에 솔로몬의 이복형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구할 수 있었던 배경을 제공해 준다(2:13-18). 그러나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요구를 부왕(父王)의 후궁을 요구하여 왕위까지 노리는 불측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죽인다(2:22-25). 한편 70인역은 아비삭의 봉양을 '함께 누워 흥분케 하는 것'으로 번역하므로 두번째의 견해를 지지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느쪽으로 해석하든 본문은 다윗의 노쇠함이 심각할 정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왕상1:5]

(주);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 - 아도니야(Adonijah)는 헤브론 통치 시절에 다윗이 학깃(Haggith)을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다. 첫째는 암논(Amnon)인데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을 통해 낳은 아들이며, 둘째는 길르압(Chileab)인데 갈메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셋째는 암살롬(Absalom)인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를 통해 낳은 아들이며, 넷째가 바로 이 아도니야(Adonijah)인 것이다.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부로부터 37세 때까지 헤브론 통치 시절 도합 6명의 아들을 낳았다(삼하 3:2-5). 따라서 아도니야 역시 헤브론에서 태어났으니(삼하3:5;대상3:4). 당시 아도니야의 나이는 33세로부터 40세 사이였을 것이다(Hammond).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 3:1-9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주); 스스로 높여서 - 히브리어 '미트나세'(* )는 분수에 맞지 않는 교만한 행동, 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독자적 행동을 가리킨다(민 16:3;잠 30:32). 그런데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인 까닭은 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중 장자의 권리가 가장 기초적인 이유였다. 왜냐하면 암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는 아도니야가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이다(삼하3:2-5;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때마침 다윗이 늙고 무기력해졌으므로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욕심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있어서는 장자권 보다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었다(신17:15).그리고 이 선택은 이미 솔로몬에게 주어졌었다(삼하 7:12-17; 12:24,25;대상22:6-10). 또한 아도니야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Keil, Bahr, Patter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한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왕의 찬탈 시도에는 '스스로 높여서'라는 부정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주); 내가 왕이 되리라 - 당시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했던 동기는 다음과 같다. (1) 왕자 중 아도니야의 연장자였던 암논은 다말 사건으로 인하여 피살되었고(삼하 13:29),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을 반역했을 때 군대 장관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18:24), 길르압(다니엘)은 어렸을 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대상 3:1). 따라서 아도니야는 당시 생존한 왕자들 중 최연장자였으므로 순서대로라면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2) 또한 아도니야는 용모가 준수한 자로 다윗의 총애를 받도 있었다(6절). (3) 그리고 아도니야는 주위의 인물들 특히 군대 장관 요압이나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같은 사람들을 포섭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고, 또한 그 같은 사람들에 의해 사주(使嗾)를 받았다(7절).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아도니아는 교만해져서 왕이 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과 다윗 왕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의 모든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시 107:10, 11). 하물며 메시아의 가계로 선택받은 다윗 집의 사건에 관해서야 더 말할나위 없는 것이다.

(주); 전배 - 직역하면 '앞서 달리는 자'란 의미인데, 이는 곧 왕이나 방백의 행차에 앞서 달리면서 호위 및 길을 정리하는 일종의 경호원을 가리킨다. 일찍이 압살롬도 반역에 앞서 이처럼 병거와 기병과 전배를 준비한 적이 있다(삼하 15:1). 한편 A.D. 1세기 경의 유명한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따르면, 수리한 용모하며 야심만만한 기질, 그리고 용의 주도한 정치력 등 모든 면에서 아도니야는 형 압살롬을 닮았다고 한다.

성 경: [왕상1:6]

아도니야가 교만해져 왕이 되고자 한 원인이 설명된다.

(주);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 - 이 말은 당시 아도니야가 다윗의 아들들 중 최연장자임을 밝히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다윗의 맏아들 암논은 근친 상간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죽고(삼하 13:28), 셋째 아들인 압살롬 역시 반역하다 죽었다(삼하 18:14,15). 그리고 둘째인 길르압(혹은 다니엘, 대상 3:1)은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어려서 일찍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Keil, Hammond). 따라서 이제 남은 아들들 중에 최연장자는 아도니야 자신이었던 것이다.

(주);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 -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도 준수한 용모를 가졌으며(삼상 9:2), 아비 다윗 왕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도 그러하였다(삼하 14:25). 그리고 다윗도 준수한 용모를 가졌던 것으로 나타난다(삼상 16:12). 사실 지도자에게 있어 준수한 용모는 백성들의 인기를 끄는 데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요인이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 보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더 중요한 자격이다(삼상 16:70.

(주);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더라 - '한번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야마우'(* )는 '그의 모든 날들로부터'(from his all days)란 뜻이다. 즉 아도니야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책망을 들은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5절의 방자한 행동에 대한 감시 소홀 내지는 후계자로 생각해서 내버려 둔 것이다. 다만 아도니야의 교만한 행위의 원인 중 하나가 다윗이 그를 적절히 훈계치 못한 데에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잠 22:6). 여기에 더하여 다윗이 노쇠해지자 아도니야는 부친을 무시하고 동의도 없이 멋대로 왕이 되려 하였던 것이다(18절).

성 경: [왕상1:7]

(주); 스루야의 아들 요압 -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전공을 많이 세운 인물이다. 비록 요압은 다윗에게 충실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자주 다윗을 거스렸다(2:5;삼하 3:27;20:10). 그래서 다윗에게 잘못 보인 그는 다윗과 선지자 나단의 영향하에서 자란 경건하고 온유한 성격의 솔로몬 보다는 야심 만만하고 준수한 용모의 아도니야에게 가담하여 다윗 사후에도 계속 권세를 확보하려 했다. 즉 요압은 다윗의 바램이나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실리를 좇아 행동했던 것이다.

(주); 제사장 아비아달 -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할 때 피하여 다윗의 보호를 받다가(삼상22장), 이후 다윗 통치 하에서 사독과 더불어 대제사장이 된 인물이다(삼하20:25). 오랜 역경의 세월 동안 다윗과 동거 동락해 온 그가 다윗의 뜻을 거스리고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아비아달은 당시 공동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을 시기한 끝에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해석된다(Keil, Rowland). 즉 성경 기록상 엘르아살 계통의 사독의 이름이 항상 이다말 계통의 아비아달의 이름보다 앞서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삼하8:17;15:29,35;20:25). 당시 사독이 아비아달 보다 주도적인 위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Keil, Bahr). 따라서 아비아달은 자신의 대제사장적 가문의 회복을 위하여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 같다(Hammond). 그러므로 혹자(Thenius)의 견해처럼, 군대 장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왕위 찬탈 음모 가담은 아도니야가 최연장자로서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이라는 대의 명분을 좇아서가 아니다(Keil). 다만 그들은 다윗 사후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강화하기 위한 실리적 목적으로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했다. 결국 요압의 처형(2;28-35)과 아비아달의 추방(2:26,27)이라는 비극적 결과가 이들의 그러한 사욕을 입증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왕상1:8]

(주); 제사장 사독 -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가담한 무리 중 한 사람으로(대상12:28),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 아히둡의 아들이다(삼하8:17). 압살롬의 반란 때 그는 다윗을 편들어 왕궁에 머물면서 후새를 도와 첩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삼하 15:28,29;17:15). 한편 사독(Zadok)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Abiathar)과 더불어 공동 대제사장으로 있었는데, 이처럼 다윗 시대에 2명의 대제사장이 있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다윗은 도피시절에 사울의 손을 피해 에봇을 가지고 자신에게로 도망쳐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삼상23:6). 그런데 이후 사울 사후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 이미 아론의 집 족장 여호야다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사독이 사울의 나라를 다윗에게 돌리기 위해 헤브론의 다윗에게서 나아왔다(대상12:23,27,28). 그리고 이때 다윗은 또한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맞아들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다윗의 통치하에서는 2명의 대제사장이 존재케 된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 브나야(Benaiah)는 다윗의 전성기에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했던 인물이다(삼하8:18).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은 외국인 용병으로 왕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었고(38절), 브나야는 이들의 대장이었다(대상 18:17). 본래 브나야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서(대상 27:5) 레위인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인해 다윗 왕의 시위대장으로 발탁된 것 같다(삼하 23:20-23;대상 11:22-25). 그러다가 브나야는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의 반란 사건에 가담한 요압을 죽인 후 대신 군대 장관이 된다(2:28-35).

(주); 선지자 나단 - 다윗의 신임을 받는 왕궁의 조언자였다. 당시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나단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솔로몬에게 넘겨주도록 하였고(삼하 7:4-170, 밧세바를 취한 일로 다윗을 꾸짖기도 하였다(삼하 12:1-14). 그리고 나단은 솔로몬 출생시 하나님의 명으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Jedidiah,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라는 이름을 붙여 준 일이 있으므로, 일찍부터 나단은 솔로몬이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받은 바 있었다(삼하 12:24,25).

(주); 시므이 - 이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학자들(Keil, Bahr)은 솔로몬의 열두 관장 중 하나로 임명받은 엘라의 아들 '시므이'(4:18)와 동일시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발트(Ewald)와 같은 학자는 시므이를 다윗의 형인 '삼마'(삼상 16:9;삼하 21:12) 도는 '시므아'(삼하 13:3)로 보기도 하나 근거는 희박하다.

(주); 레이 - 역시 미상의 인물이다. 요세푸스는 '다윗의 친구'로 보기도 하고, 에발트는 '다윗의 형제'로 보기도 하나 타당성은 없다(Hammond).

(주);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 - '용사들'의 히브리어 '깁보림'(* )은 두목, 수령의 뜻을 갖는다. 특별히 다윗의 37인의 용사들에게 사용되었다. 그들은 주로 가드 족속, 그렛 족속, 블렛 족속 등으로 구성된 용병들로서 다윗의 직접적인 통솔하에 있던 다윗의 오랜 전우들이다(삼하 23:8-39;대상 11:10-12:18).

(주);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 요압과 아비아달이 구세력의 세력이라면, 사독과 나단등은 후기 예루살렘에서 기반을 잡은 신흥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브나야를 비롯한 다윗의 용사들은 요압의 영향권하에서 벗어난 다윗의 친위 세력이었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이들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고, 이들 역시 다윗의 뜻을 좇아 예루살렘에서 자라난 새 인물 솔로몬을 지지하는 것이 옳을 뿐 아니라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에 가담치 않았다.

성 경: [왕상1:9]

(주);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 '에느로겔'(삼하17:17) 또는 '엔로겔'(수15:7)은 '정탐의 우물'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기드론 골짜기에 있다. 이곳은 잔치를 벌이기에 적당하며 지금도 예루살렘 주민의 휴양지이다(Robinson, Schultz). '소헬렛'은 '뱀'이란 뜻인데(Gesenius), 느헤미야 2:13의 '용정'(龍井)과 동일시된다(Benzinger). 이곳 소헬렛의 돌은 자연 그대로 제단이 될 수 있었다(Hammond).

(주);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고 - 이것은 단순히 잔치 음식이 아니고 제사에 쓰이는 희생 제물이다(참고, 민 28-29장), 그런데 일찍이 사울이 왕이 될 때도 제사를 드렸고(삼상11:15), 압살롬도 제사를 가장하여 반역을 자행한 바 있었다(삼하 15:7,12). 마찬가지로 아도니야 역시 제사 잔치를 베풂으로써 반역 거사를 도모한 것이다. 이처럼 반역 거사에 제사 형식을 도입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제사 형식을 갖춤으로써 종교계 및 군부 실력자들의 회합 의도를 자연스럽게 은폐시킬 수 있으며 (2) 자신들의 거사 행위에 신적(神的) 근거 및 정통성을 부여하고 (3) 거사에 가담한자들 상호간에 정신적, 종교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한편, 거사 장소로서 아도니야는 수도 예루살렘 남동쪽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에느로겔 근방을 택했는데, 이로 미루어 아도니야는 자신의 거사에 상당히 많은 세력의 지지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군대 장관 요압의 동조와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아도니야는 그러한 확신을 굳혔던 것 같다. 하지만 아도니야는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하나님의 뜻'에는 유념치 않았다.

(주);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 - 다윗은 여러 왕비로부터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상 3:1-9에 의하면 아들만 대략 19명 가량 되는데, 그중 아도니야는 넷째였고, 솔로몬은 열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첫째 암논과 둘째 길루압(혹은 다니엘)과 셋째 압살롬 모두 죽었다(6절 주석 참조). 따라서 당시로서는 아도니야가 최연장자였으며, 솔로몬을 제외한 그의 동생은 모두 14명이었다(이외 많은 다윗의 첩의 아들들도 있었다). 이들 아도니야의 동생들도 아마 솔로몬 보다는 최연장자인 아도니야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이들도 자신의 거사 잔치에 참여시켰다.

(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 - 다윗 왕의 근친이거나 또는 다윗 왕의 신복으로서 궁중에 출입하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일찍이 이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는 이들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거사 잔치에 초대한 것 같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아도니야의 음모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없이 초대에 응한 자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삼하 15:11, J. Hammond)

성 경: [왕상1:10]

(주);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 아도니야는 의도적으로 솔로몬을 초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것은 아도니야가 솔로몬이 약속된 왕위 계승자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을 뜻한다(Keil, Bahr, Hammond, Patterson). 즉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명을 좇아, 다윗의 범죄에 대한 사죄의 징표로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 솔로몬에게 붙여준 이름 '여디디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삼하 12:24,25). 그러므로 이 이름이 암시하듯 다윗의 왕위 계승자로 일찍부터 솔로몬이 선택받은 자임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삼하 7:12;대상 2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연장자임을 내세워 왕위를 노린 행위는 하나님과 부왕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린 모반(謀叛)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정적(神政的) 왕정 국가인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위의 정통성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이다. 한편 아도니야가 솔로몬과 더불어 선지자 나단, 시위 대장 브나야, 데제사장 사독, 그리고 다윗의 (삼십)용사들을 초청해서 제외시킨 것은, 그가 다윗의 의중(意中)을 따르고 있는 솔로몬의 핵심 추종 세력을 익히 간파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왕상1:11]

(주); 나단이 밧세바에게 고하여 가로되 - 선지자 나단은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음모를 분쇄하고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데 나단이 곧장 다윗에게 달려가지 않고 먼저 밧세바에게 찾아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1) 노약한 다윗 앞에 반역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가지고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고, (2) 따라서 아도니야의 반역이라는 충격적인 보고를 다윗에게 전함에 있어서 당시 다윗의 총애를 받고 있던 밧세바가 그 적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아울러 밧세바는 다윗의 침실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왕비의 신분이고(15절), (4) 또한 친아들인 솔로몬의 일에 가장 헌신적일 수 있는 인물이며, (5) 그리고 다윗의 맹세를 받았던 당사자로서(17절)다윗에게 행동을 촉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도니야의 반역 인물을 진압하고 분쇄하는 데 있어, 선지자 나단의 역할은 결정적일 뿐 아니라 나단의 주도면밀한 지혜가 드러나는 바, 나단은 매우 지혜롭고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단의 지혜는 일찍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관련된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고 일깨우는 데 있어서도 잘 나타난다(삼하 12:1-150.

(주);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 부왕(父王)인 다윗 조차도 모르게 은밀히 아도니야가 왕위 계승식을 추진한 것으로 보아 아도니야의 행위는 분명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인 솔로몬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코자 시도한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왕상1:12]

(주); 당신의 생명과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자 -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에게 한 이 말은 단순히 위협적인 말이 아니다. 고대 근도의 군주체제하에서 반란, 찬탈, 쿠데타 등으로 왕권(王權)을 잡은 자는 자시늬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변의 위험 인물들을 가차없이 처형시키는 예가 허다하였다. 특히 전왕(前王)이나 경쟁자의 왕족들은 참회를 면할 길 없었다(15:29;삿9:5;왕하10:7,14;11:1). 다라서 만일 이번 아도니야의 반역 거사가 성공할 경우, 제일 먼저 솔로몬과 솔로몬의 인척들 및 그의 추종 세력들이 진멸될 곳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나단은 바로 이 사실을 정확히 지적함으로써 소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사태의 긴박성을 각성시킨 것이다.

(주);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 '계교'(計巧)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 )는 '모략', '흉계' 등의 부정적인 뜻을 지니기도 하나, 여기서는 '상담', '의논' 이란 의미가 짙다. 즉 '에차'는 남을 해하는 계교(욥 5:13) 등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니잠, 노인의 가르침(12:8)이나 지혜로운 자가 듣는 권고(잠 12:15) 등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아도니야의 반역 거사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행해지는 나단의 계교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행해지는 긍정적인 의미의 계교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왕상1:13]

(주);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 본절에 나타난 것처럼 다윗이 구체적으로 밧세바에게 맹세한 내용을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일부 고등 비평가들은 나단의 이 말을 늙어 기억이 희미한 다윗에게 덮어 씌우려는 계략의 일환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즉 (1)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이미 있었음을 분명하고(대상 22;9), (2) 또한 다윗의 즉각적인 수긍과 대응 태도(28-30절)로 볼 때 당시 다윗은 그렇게 흐리멍텅 하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언제인가 다윗은 본절과 같은 내용의 맹세를 밧세바에게 한 바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그러한 맹세를 나단을 비롯한 궁중의 다른 사람들도 익히 듣고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위기의 상황에서 나단은 그러한 왕의 맹세를 재확인하며, 동시에 그 사실이 공식 선포되도록 밧세바를 통해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 솔로몬이 정녕 내 위에 앉으리라 - 다윗은 솔로몬을 낳기 전, 성정 건축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이미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대상 22:9), 솔로몬을 낳은 후 밧세바에게 그 말씀대로 솔로몬에 대하여 맹세한 바 있다(30절). 그러므로 선지자 나단이 신앙의 사람 다윗으로 하여금 이 약속을 회상하게 하도록 지시한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근거하여 호소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응답을 받는 길이라고 하겠다(창 32:9, 12;출 32:13, 14).

성 경: [왕상1:14]

(주); 증거하리이다 - '증거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말라'(* )는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의 뜻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한 것을 더 보충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응하다'(2:27), 또는 말씀이 '이루어지다'(8:24)란 용례에서 보듯 결과로 확정짓는 것(fulfillment)을 뜻한다. 그러므로 나단의 이 말은 밧세바가 다윗에게 한 말이 사실로 확정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1:15]

(주); 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 이는 다윗이 어전(御殿)에서 집무를 보지 못하고 항상 침실에만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이를 통해 (1) 다윗이 바깥 소식에 어두웠던 까닭과(11절) (2) 나단이 먼저 밧세바를 통하여야 했던 까닭이 설명된다.

(주); 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종하였더라 - 왕의 거동이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였음이 나타난다. 따라서 다윗이 침실에 머문것이 일시적이 아니고 장기간이었음을 알 수있다(47절). 한편 본문과 같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다윗 왕의 궁중 기록의 전거(典據)는 분명 '선지자 나단의 글'(대상 29:29)이었을 것이다(J. Hammond).

성 경: [왕상1:16]

(주); 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 이것은 왕궁의 예절임과 동시에, 비록 늙고 쇠약해졌지만 아지고 다윗이 엄연한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말해 준다. 그런데도 아도니야는 다윗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된 후 다윗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자 했다.

(주); 어찜이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 라크'(* )는 의미상 '무엇을 원하느냐'(what do you want?. Living Bible;what do you desire?, RSV)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관심은 그가 여전히 밧세바를 총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왕상1:17]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시기를 - 다윗은 왕이지만 그 보다 높은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밧세바의 이 말은 다윗에게 그러한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음을 일깨우는 말이다. 한편 이것은 (1) 신정적(神政的) 왕정 국가 체제인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왕은 단지 하나님께 임명받은 대리자일 뿐이며, (2) 따라서 이스라엘의 절대적 군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는 말이다.

성 경: [왕상1:18]

(주);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 왕비인 밧세바 조차도 '내 주 왕'(*, 아도니 하멜렉)이라는 경칭을 사용할 정도로 당시의 왕은 신하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J. Hammond). 또한 다른 왕들에 비해 이 표현은 자주 사용되고 있다(참고, 12:4;13:8;20:8). 그러므로 이 경칭이 거듭 반복됨(18, 21, 24, 27절)은 상황의 긴급성과 호소의 간절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존경받는 지도자 다윗의 엄연한 위치를 상기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므로써 최고 통치자 다윗의 뜻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아도니야의 방자함과 불법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왕상1:19]

본절의 내용은 나단의 지시 사항(11-14절)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이 역시 밧세바가당시 나단으로부터 권고받은 내용일 것이다. 아무튼 본절의 증언에서 보여지듯, 아도니야의 모반 행위는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즉 그는 (1) 병거와 기병과 전배 50인을 예비하고(5절), (2)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거사 핵심 인물로 포섭하고(7절), 93) 에느로겔 근방에서 대관식(戴冠式)을 하려고 거사 장소까지 에비하며(9절), (4) 제사 잔치를 빙자함으로써 거사 모임을 은폐하는 한편(9절), (5) 자신의 추종 세력과 솔로몬의 추종 세력과 정확히 분간하여 차질없이 행동하였다(9, 10절). 하지만 이같이 치밀한 준비를 통한 아도니야의 거사도 결코 하나님이 예정하신 왕 솔로몬의 즉위를 막지는 못했다. 인간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대적할지라도 그의 예정하신 뜻은 호리(毫釐)도 어김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단 4:35).

성 경: [왕상1:20]

(주);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었어도 백성들은 최종 판단을 보류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연장자가 반드시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믿음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희박했음을 알 수 있다(Bahr). 오히려 그들은 다윗의 공식 선포를 기다린다. 이것은 단순히 동방의 왕들에게는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와 관습이 있었기 때문(J. Hammond)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임명권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 때문이었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다윗을 통해(17절) 다윗의 아들들 중 하나님이 뽑은 인물이 선포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편 이것은 압살롬의 반역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삼하 15:13,14).

(주); 반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 여기서 밧세바는 자신의 진술을 확대시켜 다윗이 왕위 계승자를 지목하는 일은 자신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대한 관심사라고 밝힌다. 사실 밧세바의 이 말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밧세바가 이 사실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능변가(能辯家)였다.

성 경: [왕상1:21]

(주); 열조와 함께 잘 때에 - '열조와 함께 잔다' 도는 '열조에게로 돌아간다' 등의 표현은 통상 위대한 인물이나 어진 왕 또는 지혜로운 자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종종 사용하는 성경의 독특한 관용어이다.

(주); 죄인이 되리이다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핫타'(* )는 영적, 도덕적 과오를 나타내기도 하지만(창 20:9;애 5:7)읽거나 놓침, 또는 틀림이나 빗나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욥 5:24;삿20:16).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왕위 경쟁에서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몰리게 될 역적 또는 반역자를 뜻한다(Clericus, Bahr, Hammond). 이것은 역설적으로 이미 솔로몬이 왕위 후보자로 알려져 있었음을 입증한다(13, 17절). 그런데 그것은 다윗에 의해 생긴 위협이므로(17절) 다윗이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의무였다. 지금 밧세바는 그러한 점을 다윗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1:22]

(주); 밧세바가 왕과 말씀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 히브리 원문에서는 이 장면이 "보라, 나단 선지자가 들어오는 것을!"과 같은 식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아연 긴장과 활기가 다윗의 왕궁에 감돌게 되었다.

성 경: [왕상1:23]

(주); 혹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성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 선지자 나단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윗 왕의 부름을 받기 전에 다윗 왕에게로 나아왔다. 그러자 밧세바는 물러갔다(28절). 즉 충격적인 소식의 사실 여부가 문제일때 나단은 약속대로(14절)적절히 밧세바를 이어 곧 들어왔다. 한편 여기서 '혹이'는 원문상 복수이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일 수 없다(15절). 아마도 침실로 들어가는 문 입구에 대기하고 서있는 궁중 신하일 것이다.

(주); 얼굴을 땅에 대어 왕께 절하고 - 이것은 왕비 밧세바의 인사와는 좀 차이가 있다(16절).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들이 이토록 예의를 다하고 있음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다른 왕들의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찾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자세는 일찍이 나단이 다윗을 책망하기 위해 왔을 때와도 판이하게 다르다(삼하 12:1). 아마도 이는 다윗 왕에게 존엄한 통치자로서의 직무를 다할 것을 호소하려고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왕상1:24]

(주);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 원문상 이 말은 오히려 강한 긍정문이다. 즉 "앉으라고 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그렇지 않고서야)"라는 의미이다. 다라서 이 말은 실제로는 그렇게 한일이 없는 다윗의 강한 부인을 이끌어 내려는 선지자 나단의 역설적 긍정의 말인 것이다(J. Hammond). 이처럼 역설적 긍정, 의문, 비유와 같은 말로써 상대방의 의견을 이끌어내는 형식은 선지자 나단의 독특한 메세지 전달 방식이었다(삼하 12:1-6).

성 경: [왕상1:25]

(주);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나이다 - 여기서 '만세'에 해당하는 히브이러 '예히'(* )는 직역하면 "살게 하소서"(Let live !)란 뜻이다. 이것은 왕의 즉위식 때 왕을 찬양하는 일종의 기원문이다(39절;삼상10:24;왕하 11:12;대하 23:11). 한편, 그런데 아도니야에게 이러한 만세가 불리워졌음은 밧세바의 말(15-21절) 속에서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단이 그것을 말함으로써 아도니야의 반역 사실이 보다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성 경: [왕상1:26]

(주); 왕의 종 나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사오니 - 나단이 자신을 표현한 말은 히브리어 원문상 "나 곧 당신의 종인 나"와 같이 강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솔로몬 역시 "솔로몬 곧 당신의 종" 하는 식으로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이는 24절의 강한 역설적 긍정과 연결되어 "(왕이) 틀림없이 그랬는데도 우리를 제외시켰단 말입니까" 하는 항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도니야의 초청의 불법성과 반역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아도니야의 초청에서 제외된 자들(나단, 사독, 브나야 등)과 특히 솔로몬을 다윗의 편으로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왕상1:27]

(주); 내 주 왕이 하신 일이니이까 - 선지자 나단은 이미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를 간파하고 있었다(11절). 그러나 지금 다윗 왕 앞에서는 아도니야의 사건을 전혀 모르는 자처럼 오히려 다윗 왕에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단은 만일 그렇다면(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줄 알고 있지만) 그러한 결정에 자신을 도외시한 다윗 왕의 처사에 대해 지극히 섭섭한 감정을 표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 같은 맥락에서 이 말 역시 사실 여부를 묻는 의문(Keil)이 아니라 나단이 뛰어난 화술이다. 즉 나단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알면서도 다윗 앞에서는 그 자초지종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므로써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예언을 전한 바 있는(삼하 7:12) 자신을 제외시키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는 투의 항의조로 다윗을 자극한 것이다. 이러한 나단의 화술은 즉각적이고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성 경: [왕상1:28]

(주); 다윗 왕이 명하여 가로되 - 이제까지 줄곧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던 다윗이 갑자기 명령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15절의 늙고 무기력한 인상의 다윗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한편 27절의 선지자 나단과의 말 사이에 아무런 설명 없이 곧장 다윗의 행동을 기록함으로써 다윗의 결정이 단호하고도 신속했음을 보여 준다.

(주);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 나단이 말하는 동안(22-27절) 밧세바는 물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밧세바가 온 다음엔 나단이 물러가 있었다(32절), 이것은 혹자들(Clericus, Thenius)의 견해처럼 나단과 밧세바가 상호 공모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취한 행동이 아니라, 왕이 허락 없이는 제 삼자가 함께 할 수 없는 궁중 예법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성 경: [왕상1:29]

(주);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실을 가리켜 -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형식이나(J. Hammond), 특별히 여기서 다윗의 이러한 맹세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즉 (1) 평생동안 겪은 수많은 환난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 고백이며(삼하 4:9), (2) '여호와의 사심'(*, 하이 예호와)이 변할 수 없이 확실한 것처럼 솔로몬이 왕이 될 것도 확실하다는 후계자 선언이기도 하다(30절). 물론 다윗의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엄연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다(대상 22:9).

성 경: [왕상1:30]

(주); 내가 이전에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 솔로몬의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하여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13, 17절) 다윗 왕은 성전 건축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대상 22:6-19). 그 사실을 소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언젠가 맹세로써 약속한 것 같다.

(주);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 여기서 '오늘날'(*, 하욤하제)은 단순한 시간적 의미의 오늘(today)이라기 보다는 특별한 성취의 날로서의 오늘(this today)의 의미가 크다(참고, 신 6:6;9:3). 한편 히브리 원문상 '키'(* )란 말이 본절에서 세번 나오고 있는데, 이는 '정녕', '진실로'(surely)란 뜻으로서, 곧 진술하는 내용에 강조를 주고 있다(Ewald). 또한 '그대로'(*, 켄)란 말은 다윗의 행동이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지시된 내용을 따르는 순종의 행동임을 보여준다.

성 경: [왕상1:31]

(주);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며 - 16절과 비교할 때 여기서의 밧세바의 절은 왕의 아내로서가 아닌, 왕께 최대의 예의를 갖춘 왕의 신하로서의 모습이다(23절).

(주); 만세수를 하옵소서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히 레올람'(* )은 직역하면 '영원토록 사시옵소서'(Let live forever, KJV ; May live forever, NIV)란 뜻으로서, 이 역시 신하가 왕께 드리는 기원문이다(25절). 이 같은 형식의 기원문은 히브리 왕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 사용되었으나, 바벧론과 페르시아에서는 그들의 왕들에 대해 자주 사용하고 있다(단 2:4;3:9;5:10;6:21;느2:3 등). 한편 본절에서 밧세바의 이 말은 다윗 왕의 내린 명령에 깊은 감사를 표시함과 동시에 그것이 존엄한 왕명으로 받들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Keil).

성 경: [왕상1:32]

(주); 다윗 왕이 가로되 내 앞으로 부르라 - 이 장면은 앞의 내용과 비교할 때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준다. (1) 사람들이 찾아가야만 했던 상황에서(15, 22절) 이제 다윗이 능동적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으며, (2) 또한 아도니야에게 청함 받지도 응하지도 않았던 인물들(8, 10, 19, 26절)이 이제 청함받고 또 이에 응하고 있다.

(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 - 이들은 솔로몬의 대관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인물들이었다. 즉 제사장은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자로(39절),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로서 대관식을 진행해야 했다. 또한 군부 실력자인 브나야는 그 예식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했을 것이다. 한편 로린슨(Rawlinson)교수는 위에 열거된 이름의 순서가 곧 왕국 내 지위의 차서(次序)라고 보나 확실치는 않다.

성 경: [왕상1:33]

(주); 너희 주의 신복들 - 이들은 구체적으로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로 구성된 다윗 왕의 근위대를 가리킨다(38절).

(주); 나의 노새에 태우고 - 히브리 원문상 '나의 노새'에 해당하는 '하피르다 아쉐르 리'(* )는 직역하면 "나에게 속한 그 노새"이다. 구체적으로 알 순 없으나 누가 봐도 그것이 다윗 왕의 노새인 줄 알아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그 노새에 솔로몬이 탔다는 것은 솔로몬이 곧 다윗 왕의 후계자임을 널리 알리는 상징적 표시인 것이다(Keil, Bahr, Hammond). 한편 여기서 '노새'(*, 피르다)는 여성형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암노새를 가리키는데, 이는 숫노새 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다윗 당시에만 해도 노새는 수입해 들여온 것으로서(10:25;겔27:14). 귀족 계급들이 주로 사용했던 교통 수단이었다.(삼하 13:29;18:9). 일반 평민은 대부분 나귀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에는 노새가 보다 일반적으로 보급되었고, 동시에 운송 수단으로써도 널리 사용되었다(W. S. McCullogh).

(주); 기혼으로 - '기혼'(Gihon)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1) 본문에서 기혼이 예루살렘 보다 낮은 지형으로 나타나고 있고(33, 40절), (2) 이러한 표현은 흔히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론 골짜기를 지칭할 때 사용되며, (3) 갈대아 사본, 수리아 사본 등 여러 고대 사본 등이 기혼을 이 골짜기의 실로암 못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기혼은 곧 실로암일 것으로 추정된다(J. Hammond). 당시 이곳은 예루살렘성의 주요 수원지(水源池)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Patterson). 더구나 이곳은 아도니야의 잔치 장소인 에느로겔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분쇄하려고 일부러 기혼을 택하였을 것이다. 한편 데니우스(Thenius)는 여기 '기혼'(* )을 '기드온'(* )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대제사장 사독이 기브온 성막에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순한 추측일 뿐 타당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과 기브온과는 약 3시간이나 떨어진 먼 거리이므로 아도니야의 대관식보다 늦게 거행된 솔로몬의 대관식이 아도니야의 대관식이 다 마치기 전에 벌써 끝나 예루살렘까지 돌아오기에는 (41절) 시간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 p. 23).

성 경: [왕상1:34]

(주); 저에게 기름을 부어 - 당시 '기름 부음'은 주로 통치의 직분에 취임하는 왕의 대관식 의식에서 행해진 공식 행사였다(삼상 10:1;삼하 12:7). 그리고 이 기름 부음의 의식은 (1)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그에게 권위가 주어지며, (2) 도한 이 권위를 부여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속에 내포된 사상은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린다는 사상이다.

(주); 양각을 불며 - '양각'(*, 쇼파르)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로 갑작스럽게 찢어지는 듯한 높은 소리가 난다. 이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나(레 25:9;암 3:6), 특히 왕의 즉위식 때에 사용되었다(삼하 15:10;왕하 9:13;11:14). 따라서 다윗 왕은 소로몬의 대관식 때에도 이것을 무리들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도록하여 솔로몬의 왕위 즉위가 만천하에 공식 선포되고 드러나도록 조처하였던 것이다.

성 경: [왕상1:35]

(주);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 - 여기서 특별히 '이스라엘'과 '유다'로 표기된 것은 당시 국가의 세력 판도가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하는 '유다'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처음 다윗도 얼마동안은 '유다'만을 통치하다가 나중에 사울 가문을 추종하던 '이스라엘' 지파들을 통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삼하 5:3-5). 그러므로 다윗의 여기 이 말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은 현재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지파들을 통치하는, 명실 상부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것이라는 선포이다. 한편, 그러나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을 다시금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로 분리되고 만다(11:43-12:20).

성 경: [왕상1:36]

(주); 아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 '참으로', '진실로'의 뜻을 갖는 '아멘'(*, Amen)은 보통 이미 말한 것에 대한 확언, 응답을 나타낸다<신 27:11-26 강해, 아멘 연구>. 그러므로 브나야의 이 말은 하나님의 사후 승인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말씀하시면 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시 33:9)처럼 다윗의 말이 그대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Keil).

성 경: [왕상1:36,37]

이 부분에 나오는 브나야의 말은 3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1) 다윗의 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원한다는 것(36절), (2)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함께 계시기를 바라는 것(37a절). (3) 솔로몬의 왕위가 다윗의 그것보다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는 것(37b절)등이다. 이와 같은 브나야의 3가지 소원은 결코 아첨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경건한 소원으로서, 그가 비록 무관(武官)이었으나 매우 투철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왕상1:37]

(주); 내 주 다윗 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 이 말은 일종의 기원문 형식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 뿐만이 아니고 이 말 속에는 브나야의 경건한 소원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Keil, Hammond). 즉 다윗 왕의 위(位)가 영원토록 보다 견고하게 되기를 소원한 브나야의 이 바램은 하나님의 약속과 맞아(3:10) 실제로 솔로몬의 통치는 이스라엘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3:13;대하 9:22).

성 경: [왕상1:38]

(주);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 - 이들의 명칭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 해석이 있다. 즉 (1) '그렛'을 그레데 섬으로 보는 해석으로서, 블레셋 사람이 유래하였다는 '갑돌'(암 9:7;신 2:23)이 바로 이곳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다(J. Hammond). 따라서 그렛 사람들(the Cherethites)은 대부분 이방인들인 블레셋 사람들일 것으로 본다. (2) '그렛'과 '블렛'의 어근이 각각 '자르다'(*, 카라트)와 '신속하다'(*, 펠레트)란 의미일 것으로 보고 곧 이들이 사형 집행인과 전령일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Gesenius, Keil). 한편, 그러나 이들의 직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치된다. 즉 이들은 외국인 용병들로 구성된 왕의 친위 부대라는 것이다.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이들을 '소마토퓔라케스'(*,'왕위 근위병' 혹은 '신변 보호자'란 뜻)라고 불렀다(삼:18;15:18;20:23). 자세한 내용은 삼하 8:18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39]

(주);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 여기서 '기름 뿔'(the horn of oil)은 불로 만들어진 기름을 담는 뿔 그릇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름'은 제사장, 선지자, 왕,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거룩히 구별할 때 특별히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sacred oil, Living Bible) 곧 '관유'(灌油, 출 30:22-33)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거룩한 기름은 언약궤(법궤)가 보관된 성막 안에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 이 성막은 시온산에 있었다(대상 15:1;삼하 6:17). 한편 만일 아도니야가 제사장 아비아달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그때 기름 뿔은 응당 에느로겔에 가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본절에는 그것이 시온 산 위의 성막안에 그대로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추측케 한다. (1) 아도니야가 도유식(塗油式)을 거치지 않고 왕위 즉위를 선포했다. (2) 성막에 기름뿔이 여러 개 비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당성이 많은 것으로 짐작되는데, 본서 기자는 솔로몬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도니야의 도유식을 생략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비록 사독이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장으로 임명받았지만, 그의 신분상 시온 성막의 출입도 자유로었을 것이기 때문에(keil), 당시 다윗의 명을 좇아 시온 성막에 비치되어 있었던 여러 개의 기름 뿔 중 하나를 취하여 솔로몬의 도유식을 거행했던 것 같다. 그리고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기름 뿔은 바벧론 포로 전까지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J. Hammond).

(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 이 기름 부음의 의식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성별하셨다는 의미(34절 참고) 외에도 하나님께서 또한 여호와의 신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Bahr ; 삼상 16:13). 실제로 사울과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곧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삼상 10:9,10;삼상 16:13).

성 경: [왕상1:40]

(주); 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올라와서 - 솔로몬의 대관식에 참석한 모든 백성이 만세를 부른 이후(39절) 솔로몬은 명실 상부한 저들의 왕이 되었다(25절과 비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명과 뜻을 좇아 솔로몬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순종과 신하들의 충성을 통해 결국 백성들의 환영에서 완성된 것이다.

(주); 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 듯하니 - 여기서 '갈라지다'(*, 바카)란 말은 '찢다', '쪼개다', '부수다' 등의 뜻을 가지는 바, 위의 표현은 그 소리가 땅을 진동시킬 만큼 솔로몬을 추종하는 백성들의 무리가 많았고 또한 즐거움으로 사기 충천한 사실을 가리키는 과장법적 표현이다(45절).

성 경: [왕상1:41]

(주); 함께 한 손들 - 여기서 '손들'은 '초청받은 자들'이란 뜻으로서, 곧 왕위 찬탈을 위한 아도니야의 제사 잔치에 초대받아 응함으로써 반역 거사에 가담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 핵심 인물은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이다(7, 19절).

(주); 요압이 양각 소리를 듣고 - 전쟁터를 많이 경험한 노련한 군인 요압이 특히 민감하게 나팔 소리에 반응하고 있다(Hammond, Bahr). 일찍이 요압은 압살롬이 반역하여 왕이 될 때에 이러한 나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삼하 15:10). 그러나 지금은 반역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에게 들린 나팔 소리로 인해 요압은 그 의미를 예감하고 불안해 하였을 것이다.

성 경: [왕상1:42]

(주); 말할 때에 요나단이 오는지라 - 성경 기록에서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은 특별한 일의 전달자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삼하 15:27;17:17). 한편 그는 아버지 아비아달과는 달리 아도니야의 잔치에 참석치 않았다. 그 이유는 (1) 아직 연소하여 초청을 받을 만한 지위가 되지 못했거나 (2) 궁중의 전령자(傳令者)로서 항시 바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당시 아도니야 측에서 왕궁의 동정을 탐지키 위해 요나단을 대기 시켜 놓은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Bahr).

(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 -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삼하 18:27에서도 나타난다. 즉 '좋은 사람은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이라는 다윗의 말이다. 아마도 이 같은 말은 그 무렵 속담처럼 통용되었던 것 같다(삼상 24:13). 따라서 여기서 '용사'란 말은 '좋은 사람'의 의미를 가진 인사말일 것이다(J. Hammond). 한편 성경에서 '용사'와 '아름다움'은 흔히 결부되어 등장한다(참고, 삼하 1:17 이하의 다윗의 노래). 여하튼 아도니야는 성중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와 나팔 소리에 내심 불안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짐짓 자신과 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처럼 허세 섞인 말을 한 것이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1:43]

(주); 과연 솔로몬으로 왕을 삼으셨나이다 - '과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발'(* )은 '그러나', '오히려'와 같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대하 19:3;33:17). 따라서 여기서의 사용도 내용상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Not at all, NIV), 혹은 '아니올시다'(No, RSV)라는 부정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왕이 된 소식이 아도니야에게는 결코 아름다운 소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은 앞에서 아도니야가 한 말(42절)이 그 표현과는 달리 짙은 불안과 의혹을 담은 말이므로 불행히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의미에서의 '과연'이기도 한다.

성 경: [왕상1:44,45]

본문은 38, 39절 내용의 반복으로서, 곧 솔로몬의 즉위식이 거국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었음을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본문은 19절과 25,26절에 나타난 바 아도니야의 즉위식 장면과 비교된다. 비교해 보면, 아도니야에게 결핍된 요소들이 솔로몬의 즉위 장면에는 많이 나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왕의 노새, 기름 부음, 백성의 환영 등이 그것이다.

성 경: [왕상1:46]

(주); 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 여기서 '위'(*, 키세)는 '왕위'(王位)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 말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한 나라의 주권자임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출 11:5;삼하 7:13;대하 29:1 등). 한편 솔로몬은 부왕(父王)인 다윗이 아직 죽기 전, 왕으로 여전히 있을 때 왕위에 즉위했다. 이처럼 노환, 질병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선왕(先王)의 생전에 후왕(候王)이 왕위에 올라 외형상 두왕이 한 나라를 공동 통치하는 경우를 '섭정 제도'(the system of Co-regency)라고 하는데, 이 제도는 당시 애굽, 앗수르, 바벧론 등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 흔히 발견되는 제도였다. 이스라엘에서는 다윗과 솔로몬 때를 기점으로 후대 왕국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나게 된다<서론, 11. 열왕기서의 연대기 문제>.

성 경: [왕상1:46-48]

본문은 솔로몬의 즉위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요나단의 보고이다. 히브리어 원문상 여기서 요나단의 말은 '그리고 또한', '더욱이'와 같은 부가, 축적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웨감'(*, and also)이 매절 초두에 거듭됨으로써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요나단이 전하는 사실의 확실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아도니야의 거사는 실패하였음도 점점 확실해져 간다. 한편 여기서 본문이 보여 주는 구도(構圖)는 솔로몬이 확실히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성 경: [왕상1:47]

(주); 왕의 신복들이 원하나이다 하매 - 나단과 밧세바로부터 아도니야의 반역 거사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이 즉각 그에 상응하는 조치(33-35절)를 취하자 거의 대부분의 신복들이 급속히 솔로몬 지지 쪽으로 기울어져 솔로몬을 축원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축원(祝願)의 내용은 37절에 나타난 브나야의 축원과 거의 동일하다. 한편 브나야를 비롯한 다윗의 신복등의 이 축원은 후일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그대로 이루어졌다(4:20-34).

(주);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 다윗 왕의 이 동작을 신하들의 축복 인사에 대한 답례로 보기로 한다(Thenius). 그러나 48절 초두의 '웨감'(*, and also)은 47절 동작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침상에서 몸을 굽혀 절한 다윗 왕의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 행위인 것이다(Hammond, Keil, Bahr). 한편 이처럼 침상에서 경배하는 행위는 노년의 야곱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행위는 또한 어떤 맹세나 선포에 대한 확증의 의미를 띠기도 한다(창 47:31).

성 경: [왕상1:48]

(주); 여호와께서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 왕이 생존해 있는 동안 양위(讓位)하는 일은 매우 특이한 예에 속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왕들은 죽을 때까지 통치를 했고, 따라서 그 후계자들은 선왕(先王)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즉위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생전에 솔로몬의 즉위식을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성전 건축과 더 큰 번영을 이룰 약속된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었으니, 다윗으로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크게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3:13;대하 9:22).

성 경: [왕상1:49]

(주); 아도니야가 함께 한 손들 - 여기서 '손들'(*, 하케루임)이란 말은 직역하면 '초대받은 자들'(those who were invited)이란 뜻이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과 다윗 왕의 뜻이 솔로몬에게 있는 줄을 알면서도 아도니야의 역모 책동에 솔깃하여 훗날 한자리 차지해 보려는 얄팍한 계산 하에 몰려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이 그르치게 되자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황급히 도주해 버렸던 것이다.

(주);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 아도니야의 불의한 반역 거사 초대에 응했던 무리들(9절)이 솔로몬의 즉위 소식을 듣자 생명에 위협을 느껴 뿔뿔이 해산하는 광경이다. 여기서 (1) 그들이 그토록 쉽게 공포에 사로잡힌 것은 애초부터 확신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2) 또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당황하여 급히 일어남은 용기가 없었음을, (3)그리고 각기 제멋대로 처음부터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모인 무리들인 것을 보여 준다.

성 경: [왕상1:50]

(주); 제단 뿔을 잡으니 - 제단 뿔은 곧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튀어나온 돌기 부분이다(출 38:1-7 주석의 그림을 참조하라). 제사를 드릴 때 여기에 짐승을 매기도 했고, 또희생 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하였다(출 29:12;시118:27). 그런데 성경에서 '뿔'(*, 케렌)은 주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신 33:17;삼상2:10;시18:2;75:10;112:9). 그러므로 제단의 뿔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아울러 그러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약자와 억울한 자 및 죄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제단 뿔을 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하는 상징적 행위이다(Keil). 그런데 이처럼 제단 뿔을 도피처로 삼는 행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단지 출애굽 이후 오살자(誤殺者)의 도피 제도(출 21:13)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왜냐하면 출애굽 시대 이후부터 성소의 제단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범죄자의 피신처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출21:12-14). 이후 모세 율법은 이러한 자들을 위한 사회적 보호제도로 도피성(逃避城) 규례를 만들었고(민 35:9-34), 그 규례는 가나안 정착 후 그대로 실시되었다(수 20:1-9). 여하튼 그때 이후 성소의 제단은 도피성과 아울러 범죄자가 하나님의 보호와 긍휼을 호소하고 바라는 피신처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반역 거사를 주도한 아도니야도 사형 집행을 두려워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로 이처럼 제단 뿔을 잡은 것이다(Bahr). 한편, 그런데 아도니야가 피신하여 붙든 제단 뿔은 분명 예루살렘의 시온 성막 내에 있는 번제단 뿔일 것이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1:51]

(주);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 여기서는 5절과 관련하여 아도니야이 성품이 교만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도 함이 나타난다. 만일 아도니야가 자신의 왕위 계승 자격을 굳게 확신했더라면 이토록 비루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신념이 있었다.

(주); 솔로몬 왕이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그의 '종'으로 인정함으로써 이제 왕위(王位)을 포기했음을 고백한다. 아울러 목숨만을 구걸하는 허울좋은 겁장이로 나타남으로써, 그의 오만함이 솔로몬의 권위 아래 여지없이 부숴진 사실이 적나라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교활했다. 일단 대세가 솔로몬쪽으로 완전히 기울자 이처럼 굴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역모를 계획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2:13-25).

(주);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 히브리인들 맹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호가 들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맹세의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맹세를 하고도 그 맹세를 어기면 그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범한 자가 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맹세는 그 엄숙함과 불변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아도니야도 자기의 생명 보장에 대해 솔로몬이 맹세로써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성 경: [왕상1:52]

(주); 솔로몬이 가로되 - 아도니야의 요구와 달리 솔로몬은 맹세는 하지 않고 다만 말로써 약속할 뿐이다. 오히려 조건부로 약속한다. 그러므로 다음장의 아도니야의 죽음(2:25)은 이러한 조건부 약속을 어긴 결과인 것이다.

(주); 선한 사람이 될진대 - 문맥상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이제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불의한 욕심을 버리고, 더이상 선동적인 역모를 꾀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사적인 생활을 보낸다면 그의 생명은 확실히 보장될 것이란 뜻이다(Patterson, Bahr).

(주); 악한 것이 보이면 - 여기서의 '악함'(*,라)이란 도덕적 악함이라기 보다 왕이 되려는 '불측한 의도'를 말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악함의 성격은 '비겁함'이다. 왜냐하면 본절에 '악함'에 대비되는 '선함'(*, 벤 하일)의 원어적 의미는 '용감성'이기 때문이다(공동 번역은 실제로 '용감한 사람'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는 처음부터 떳떳하지 못하게 몰래 솔로몬과 그의 세력을 해치우려 했던 비겁한 행위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솔로몬은 만일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다시 비겁한 역모를 꾀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엄중히 경고하면서 조건부로 아도니야의 목숨을 살려 주었던 것이다.

성 경: [왕상1:53]

(주); 네 집으로 가라 - 솔로몬의 이러한 처분은 그의 관용을 나타낼 뿐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크다(J. Hammond).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명령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면 언제나 징계, 연금의 의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36;삼하 14:24). 그러므로 최소한 왕궁을 노리던 아도니야에게 사적(私的)인 개인으로서 이제 제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앞으로는 분수에 넘는 짓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가 충분히 담겨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2:1]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임명한 때로부터 그에게 최종 유언을 하는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가 어느 만큼의 기간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상당 기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대기에서는 솔로몬 즉위 후 다윗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성전 예배의 새로운 규례 제정, 제물 봉헌, 그리고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공포하는 의식을 성대히 행하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대상 23장-29장).

(주); 명하여 가로되 - 다윗이 공식적으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남기는 명령은 대상 28-29장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절 이하의 내용은 다윗이 왕위 계승자인 아들 솔로몬에게 사적(私的) 유언의 형태로 은밀히 당부하는 말이다. 한편 본서가 솔로몬 즉위 이후의 다윗의 활동을 생략하고 있는 것은 역대기와 달리 열왕기는 솔로몬의 통치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2:2]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 직역하면 "나는 모든 땅에 속한 자들의 길로 가고 있노니"(I am going in the way of all the earth)란 의미로서, 곧 임종(臨終)이 가까왔음을 나타내는 성경적 표현이다. 일찍이 여호수아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서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수 23:14)라고 말한바 있다.

(주);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웨하자크타 웨하이타 레이쉬'(*)를 직역하면 '너는 강하게 되어라! 그리고 남자가 되어라'란 의미이다. 이러한 다윗의 권면은 모세 사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권면해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수 1:6-4). 한편 혹자는 다윗의 이 말을 통해 당시 솔로몬의 나이가 매우어렸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Rawlinson). 그리고 사실 즉위식 이후에도 다윗은 솔로몬을 '어리고 약한 아들'로 말하기도 한다(대상 29:1). 이런 맥락에서 유대 사가 요세푸스는 당시의 전통으로 미루어 즉위시 솔로몬의 나이를 14세 정도로 보았다. 혹자는 12세로 보기도 한다(Eupolemus). 아무튼 20세가 채 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Hammond). 그러나 여기서 대장부가 되라는 다윗의 말이 결코 나이의 문제만은 아니다(삼상 4:9). 오히려 이 말은 여호와의 율법 준수의 임무를 행함에 있어 담대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Keil, B hr). 왜냐하면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에게서도 '담대한 것'과 '율법 준수'는 상호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수 1:7).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키도록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한 것이다. 따라서 데니우스(Thenius)의 견해처럼, 다윗의 이 말을 부친의 죽음을 남자답게 용감히 견디도록 위로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은 문맥상 타당치 않다(Keil).

성 경: [왕상2:3]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 여기서 '지키라'는 '파수꾼이 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파수꾼이 되라는 말이다. 이 같은 용어는 특별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직무 수행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레 8:35;18:30;민 1:53;3:7).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도 이들처럼 신적(神的) 직무를 위임받은 여호와의 통치 대리자로서,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의 율법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B hr).

(주); 그 길로 행하여 - 여기서 '길'(*, 데레크)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의 도(道)이다. 구체적인 일례로, 신 32:4에 의하면 하나님의 길은 공평(公平)의 길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통치할 때 '공평'을 기본 강령으로 삼아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도로 다스려야 했다.

(주);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 여기서 '법률'(*, 훅카)과 '계명'(*, 미츠와)과 '율례'(*, 미쉬파트)와 '증거'(*, 에두트)를 각각 개별적으로 다른 대상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구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으나, 불가능하고 또한 불필요했다(Hammond).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모세 율법 그 전체를 강조하여 제시하려는 중언법(重言法)적인 표현인 것이다(Keil).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비슷한 어휘가 반복되어 나란히 등장하는 예를 종종 찾아 볼 수 있다(신 5:31;8:11;시 119편).

(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켜라 -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백성을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인간이 세운 법과 제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칫 소수의 집권층만을 위한 악법이 될 우려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거룩하고 선하므로(롬 7:12), 그 법대로 통치하는 자나 통치를 받는 자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공의와 평강의 나라인 것이다(계 11:15).

(주); 형통할지라 - 사전적 의미에서의 형통(亨通)은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형통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 '타스킬'(*)은 '지혜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지혜롭게 되는 것이고 또한 지혜로운 그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형통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B hr). 그러므로 '형통'(*, 사칼)이란 말 속에서 뜻한 바대로 잘되는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지혜'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성 경: [왕상2:4]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일찍이 나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삼하 7:12-16)을 이제 죽음을 앞둔 다윗이 솔로몬에게 전해주고 있다.

(주); 만일 네 자손이...행하면 - 이 조건절은 원래 나단의 메시지 (삼하 7:8-16) 속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다(8:25;9:5 등). 그런데 애초 이 내용은 신명기에 기록된 바(신 6: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에게 위탁한 교육적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도 이러한 의무에서 면제되고 있지 않다(신 17:18-20).

(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 신 6:5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5]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스루야의 아들 요압 - 스루야는 다윗의 누이이며, 요압은 그녀의 맏아들이다(대상2:16).

(주); 내게 행한 일 곧...네가 알거니와 -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일에 대해서는 삼하 2-3장과 19-20장을 각각 참조하라. 한편, 그런데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대 장관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기심 때문이었다(삼하 3:6-39;20장). 여기서 특기할 것은 요압의 그러한 살해 행위를 다윗은 마치 자신에게 행한 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것은 다윗의 권위에 대한 멸시와 도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B hr;삼하3:26;20:11). 적어도 요압은 다윗 왕에 대해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방자하고(삼하 18:5,14) 거칠었던 것 같다(삼하 3:27;18:14). 그래서 끼친 공(功) 못지 않게 자주 다윗 왕가를 괴롭혀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행위는 도저히 묵과될 수 없었던 요압의 치명적 실수로서, 다윗은 그 사실에 대해 아들 솔로몬에게 응분의 조치를 내릴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 다윗은 아브넬과 협상하여 평화적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려 했었다(삼하 3:21). 또한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등용한 것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재정비를 도모하려던 때였다(삼하 19:13;20장).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평화의 노력이 요압의 살해 행위로 인해 크게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요압이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과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를 계략으로 살해한 행위는 다윗을 심히 분노케 했다(삼하 3:29).

(주); 전쟁의 피로...띠와...신에 묻혔으니 - 여기서 '띠'와 '신'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 때 갖추어야 할 것들로서, 주로 전쟁에 임하는 전사(戰士)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필수 도구였다(Keil, B hr). 만일 요압이 전쟁 중에 정정 당당히 싸워 그들을 죽임으로 그들의 피를 띠와 신에 묻혔다면, 그것은 결코 책할만한 일이 못될 것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태평한 시대에, 곧 다윗이 탕평책을 쓰고 있는 즈음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 및 복수심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전쟁터에서나 묻혔어야 할 피를 명분없이 흘리게 했으니, 그것이 곧 요압의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다.

성 경: [왕상2:6]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네 지혜대로 행하여 - 요압은 그때까지도 군대 장관이었고(35절),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당대의 세도가였다. 그러한 인물을 명분없이 처단한다면 민심의 동요와 같은 어려움이 생길지도 몰랐다(Starke). 그러므로 이 말은 나쁜 술수로 요압을 처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납득이 갈 만한 처벌의 정당성과 적절한시기를 가려 시행하도록 충고하는 말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불측한 시도가 재차 드러나자 그의 동조자였던 요압도 함께 처단한다(19-25절,28-34절).

(주); 그 백발로 평안히...내력지 못하게 하라 - 그 무렵 요압도 고령기에 접어들었던 것같다. 그런데 백발의 평안한 죽음은 죄 없는 자의 죽음으로서, 요압 같은 자에게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B hr). 왜냐하면 요압은 까닭 없이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31절). 히브리인들은 무고한 자가 흘린 피는 그 피값이 보상될 때까지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믿었고(창 4:10), 또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는 현세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다(수 2:19;마 27:24,25). 한편, 이처럼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창 9:5,6)는 피의 보상 원리에 입각하여 다윗은 요압이 그 피 흘린 죄를 반드시 감당해야할 것이라고 솔로몬에게 권고한 것이다. 그러면 왜 다윗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요압을 처단하지 않고 아들 솔로몬에게 그 일을 위임했는가? 카일(Keil)은 당시 다윗으로서는 군대 장관인 요압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즉 다윗은 적어도 자신에게는 충실했을 뿐 아니라 많은 전공을 새운 요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것은 오히려 득보다 실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또 혹자는 생각하기를, 다윗은 요압과 공모하여 밧세바의 남편이자 신실하고 용감한 신하인 우리아를 죽게 한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른 경험이 있으므로(삼하 11:14-25), 그 일로 인해 양심이 찔려 요압을 직접 처리하지못했다고 보기도 한다(Leon Wood). 아무튼 다윗은 요압의 불의한 살해 행위를 잊지 않고 있다가 결국 솔로몬을 거스려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에 가담한 요압을 솔로몬이 처리하도록 그에게 위임하는 것이 오히려 솔로몬 왕국의 강화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 실현 차원에서 더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요압의 처리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부터 솔로몬에게 넘겨준 것 같다(R. Patterson, J. Hammond).

(주); 음부(*, 쉐올) - 죽은 자들의 사후 거처 또는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식 표현. 창 37:35;민 16:30;신 32:22;삼상 2:6;삼하 22:6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7]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바실래 - 바실래 및 그가 다윗에게 베푼 선행에 대해서는 삼하 17:27-29;19:31-39부분의 주석을 참고하라.

(주);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 다윗의 이 부탁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왕 자신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Keil), 왕궁에서 음식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B hr).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형태로 결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식탁을 보고 놀랐으며, 솔로몬 왕궁의 매일 음식 소비량이 굉장히 많았다는 기록이 있기 매문이다(4:22,23;10:5). 어쨌든 이 일은 원래 다윗이 한때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어려음에 처한 자신에게 음식물로 공궤한(삼하 17:27-29) 바실래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해왔던 것인데, 이제 솔로몬에게도 그 선행 보답을 계속하도록 부탁하고있는 것이다(삼하 19:33, 37).

(주);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다윗이 정처없는 피난 길에 나서는 극도의 곤경에 빠졌을 때, 바실래는 여러 가지 식물로 다윗과 그의 일행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선행을 베풀었었다(삼하 17:27-29). 따라서 후일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고 다시금 환궁 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바실래에게 그의 후손들을 보살피겠노라고 약속했다(삼하 19:31-39). 본절은 다윗이 바로 그러한 바실래의 선행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바실래와 맺은 약속을 솔로몬 역시 계속 지켜 나가도록 요청하고 있는 장면이다.

성 경: [왕상2:8]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바후림 - 시므이가 살던 '바후림'(Bahurim)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약 9km 가량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고을로, 베냐민 지역에 속한다(삼하 16:5).

(주); 게라의 아들 - '게라'(Gera)는 베냐민의 손자이므로(창 46:21;대상 7:6) 시므이의 아버지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므이보다 약 300년 전의 인물인 사사 에훗도 '게라의 아들'로 불리웠던 것으로 보아(삿 3:15) 이 말은 '게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J.H-ammond).

(주);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 여기서 '너와 함께 있나니'(*, 임메카) 란 말은 곧 너와 가까이에 있다는 뜻으로, 이는 솔로몬이 거주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과 가까운 곳에 시므이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Keil, B hr). 그러므로 이 말은 혹자(Starke)의견해처럼 시므이가 솔로몬의 권력하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시므이'(Shimei)에 대해서는 삼하 16:5 주석을 참조하라.

(주);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 직역하면, '그는 지독한 저주로써 나를 저주하였다'란 의미인데,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은 삼하 16:7, 8에 나타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여기서 '독한 말'(*, 켈랄라 니므레체트)을 '강렬한 말'(Gesenius), '거친 말'(Keil), '악한 말'(Thenius) 등으로 번역한다. 여하튼 시므이의 그 저주 까닭에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혹 은총을 베풀어 주실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 정도로 시므이의 독한 말(저주)은 다윗에게 깊이 원통함을 심어준 말이었다(삼하16:12).

(주);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 압살롬의 난이 평정된 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환궁할 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생명의 위험을 느낀 시므이는 급히 환영단 일천명을 이끌고 요단으로 내려가 다윗 왕을 영접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삼하 19:16-23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주); 내가...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 당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막 환궁하는 시점에서 사울 왕의 지파인 베냐민 기파 소속의 유력자 시므이를 처형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시므이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다윗의 이 용서는 시므이의 범죄를 용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징계를 보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하 19:21,23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9]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유언]

(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 압살롬의 반란 때 시므이는 피난가는 다윗에게 혹독한 저주를 퍼부었으나, 후에 다윗은 그를 용서한 바 있다(삼하 16:5-13;19:19-23). 그 까닭은 시므이가 사울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유지였고, 또 그 무렵은 압살롬 내란 이후 회합책으로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삼하 19:23). 그러나 아들 솔로몬에게는 그러한 맹세의 책임이 없는 것이다. 한편 원문은 '무죄'를 '벌하지 않은 상태'로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나'는 원문상 '그리고 지금'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제까지 벌하지 않은 상태로 보류해 온 시므이에 대한 처벌을 지금 집행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J. Hammond).

(주); 그 백발의 피를 흘려...내려가게 하라 - 다윗은 시므이의 행위(삼하 16:5-13)를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저주와 모욕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시대에는 비록 민심(民心) 수습이란 현실적 문제로 그를 처단하지 않았지만 끝내는 처단해야할 존재로 작정했다. 사실 시므이와 같은 기회주의적 인물은 때가 되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었으므로, 다윗은 솔로몬의 견고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므이와 같은 암적(癌的) 존재가 반드시 제거될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용서받은 후 시므이의 행동이 신실한 회개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하에 다윗이 이처럼 명령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Richard D.Patterson). 또한편 일부 학자들(Stanley, Harwood)은 주장하기를, 시므이를 처형시키라는 다윗의 명령은 '뿌리 깊은 증오심' 내지는 '끝내 참을 수 없었던 복수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윗의 명령은 결코 개인적 차원의 원한이나 복수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실현' 내지는 '하나님 왕국의 강화'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모욕하고 저주한 자에 대해 개인적인 용서의 차원을 떠나 신적 심판은 반드시 집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2:10]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죽음]

(주);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장사되니 - '열조와 함께 누워 자다'란 표현은 '열조에게 돌아가다'(창 25:8;35:29;49:33)란 표현과 동일한 표현으로서, 곧 '죽음'을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이다. 이리하여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聖君) 다윗도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2절) 가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의 남은 마지막 재임 기간을 새 왕 솔로몬과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일로 보냈다(대상 22:6-19;28:1-21;29:1-22). 이처럼 다윗은 죽는 그 순간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하에서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대상 29:28) 죽어 예루살렘의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 실로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요 의로운 왕이었다. 이런 맥락하에서 다윗이 세운 도시 예루살렘은 '다윗 성'으로 간주되었다(3:1;8:1;느 3:15).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이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의(義)의 척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가증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하지 않은 것은 바로 다윗을 생각해기 때문이었다(왕하 8:19). 무엇보다도 다윗은 장차 그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그 뚜렷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지칭했으며(마 1:1), 백성들 역시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다윗을 기렸던 것이다(마 21:9).

(주);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은 성채로 시온 산성과 동일시 된다(8:1;삼하 5:7;댜허 5:2). 그런데 시온 산(Mt, Zion)은 두로포이온 계곡과 기드론 계곡 사이의 산을 가리킨다. 이곳은 종종 예루살렘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Wycliffe). 유대 사가 요세푸스도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루살렘은 다윗 성이 보다 확장된 것이다(IDB). 그리고 역대 유다 왕들의 무덤은 시온 산 곧 다윗 성에 있었다(11:43;14:31;15:8). 한편, 다윗의 묘는 느헤미야 시대를 거쳐(느 3:15, 16) 후일 사도시대까지 존재하고 있었다(행 2:29).

성 경: [왕상2:11]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죽음]

(주); 다윗이...치리하였더라 -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B.C. 1010년 경에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라 그의 나이 70세 때인 B.C. 970년경까지 40년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한 후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그의 통치를 마감하였다.

(주);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 다윗의 헤브론 7년 통치는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서 통치한 기간이다. 이후 다윗은 사울 왕국을 통합하여 명실 공히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서 33년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한편, 다윗의 헤브론 통치기간에 대해 역대기는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7년으로 나타내고 있지만(대상 29:27), 사무엘서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7년 6개월로 나온다(삼하 5:5).

성 경: [왕상2:12]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다윗의 죽음]

(주);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 이는 1:46과 중첩되나 본절은 다윗이 죽고 이제 본격적인 솔로몬의 통치기가 시작됨을 나타낸다. 따라서 솔로몬의 즉위(1:46) 이후에도 다윗은 죽을 때까지 얼마동안 일종의 섭정 자격으로 통치를 계속했던 것 같다. 한편, 솔로몬의 즉위 연대는 대략 B.C. 970년 경으로 추정된다.

(주);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 대체로 이 부분은 앞으로 이어져 나올 내용의 요약으로 보고 있다(Keil, B hr, Hammond). 그리고 여기에 상응하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대상 29:23-25 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것은 일찍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삼하 7:12).

성 경: [왕상2:13]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방자한 소청]

(주);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 - 1:5 주석 참조.

(주);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 70인역(LXX)에는 아도니야가 절을 하였다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한편 1:11의 밧세바는 왕비였으나 지금 그녀는 태후(太后)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에서 태후의 위치는 대단히 유력한 위치였다(J. Hammond). 그러므로 실제 열왕기에는 왕들의 모친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14:31;15:10,13;왕하11:1;12:1;14:2;15:2 등). 그중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의 전횡(專橫)은 특기할 만하다(왕하 11:1-3). 분명 이런 맥락하에서 아도니야 역시 밧세바를 움직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밧세바에게 접근한 것이다.

(주);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 - 화평에 해당하는 '샬롬'(*)은 보통 인사말로서 주로 사용된다(창 43:27;출 18:7). 그러나 궁금증이나 의혹을 담은 물음에서도 종종 사용된다(삼상 16:4;왕하 5:21;9:11,17). 의당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방문이 의아했을 것이다(Keil, Hammond). 왜냐하면 아도니야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들 솔로몬과 왕위를 놓고 다투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아도니야가 이제 다윗이 죽고난 후 솔로몬이 본격 통치를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밧세바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밧세바는 경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므로 경계심을 품은 질문을 한 것이다.

성 경: [왕상2:14]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방자한 소청]

(주); 내가 말씀할 일이 있나이다 - 원문은 "내가 말씀을 드려도 괜찮은지?"하는 은근함이 담긴 의문문의 형태이다. 이처럼 비교적 상세하게 그들의 대화 내용이 보도되는 것은 그 자리의 분위기를 전달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도니야에게 호의를 가질 리 만무한 밧세바가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18절).

성 경: [왕상2:15]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방자한 소청]

(주); 왕위는 내 것이었고 - 원문상 '내 것이다'(*, 리)란 말이 앞서 나오기 때문에 문법상 '내 것'이란 말이 강조적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Burney). 아무튼 아도니야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다윗의 생존한 아들들 중 그가 최연장자였기 때문이다<1:6>.

(주);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 이것은 분명히 상황 판단 착오로서, 사실 자체의 반대되는 곡해이다(1:20,40). 물론 아도니야의 유력한 추종 세력이 있었지만(1:7,9), 온 이스라엘의 지지가 자신에게 있었다는 주장은 아도니야의 교만한 성품과 왕위에 대한 미련이 빚은 착각이다<1:5>. 여하튼 교활하게도 아도니야는 본래 왕위가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지 못한 사실을 과장하여 상기시킴으로써, 은근히 밧세바의 마음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 돌이켜 - 영역본 KJV는 'turned about'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본래의 원칙에서 벗어난 변칙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도니야가 이 말 다음에 그러한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는 말로 돌리고는 있지만(Keil), 역시 내심으로는 왕위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떨치지 않고 있음과 아울러 솔로몬의 왕위를 인정치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J. Hammond, Patterson).

성 경: [왕상2:16]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방자한 소청]

(주);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 원문은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Do notturn away your face)란 뜻이다. 즉 외면하여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이다.

성 경: [왕상2:17]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방자한 소청]

(주);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 아도니야의 이 간청은 다만 아비삭의 미모를 탐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도니야의 이러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왕위를 노리는 행동으로 해석한다(Keil, B hr,Smith 등). 왜냐하면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의 첩(후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Patterson). 그런데 파사 제국을 비롯한 고대 근동에서늘 선왕(先王)의 첩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후왕(後王)이 자신의 왕위를 널리 인정받는 관습이 있었다(Herodotus). 이런 맥락하에서 압살롬도 백성들의 목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왕권 쟁취를 널리 선언한 바 있있다(삼하 16:20-23). 따라서 비록 밧세바는 이러한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고 쉽사리 그의 청을 들어 중재자의 자격으로 나섰지만, 지혜로운 솔로몬은 밧세바의 말을 통해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아도니야를 처형시키고 만다(25절). 그 이유는 솔로몬이 아도니야에게 일찍이 주지시켰던 바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1:52)라는 말대로 아도니야의 아비삭 요구 속에는 다시금 왕위를 노리는 '악한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 경: [왕상2:18]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방자한 소청]

(주); 좋다 내가...왕께 말하리라 -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까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대두된다. 즉 밧세바는 별 생각 없이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견해, 즉 사사로운 애정 문제가 정치적 연관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뜻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해석(Wycliffe, B hr), 왕위 경쟁에서 탈락한 아도니야에 대한 일종의 위로와 동정의 대가로 쉽사리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는 견해 (C. Dentan), 밧세바는 자신이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서 아도니야의 청을 수락했다는 견해(J. Hammond) 등이 논의된다. 그러나 아마도 이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19]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 솔로몬이 모친 밧세바를 태후(太后)로 존중하여 최대의 예우와 존경으로 맞이하는 모습이다. 70인역에는 왕이 입맞추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스라엘 왕국에서 태후의 지위는 매우 유력했던 것 같다(J.Hammond, Exell). 그런데 성경 기록상 밧세바는 최초의 공식적인 태후인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즉위에 큰 공헌을 한 밧세바(1:15-21)에 대향 예우가 이후 왕실의 태후에 대한 예우 확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주);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 우편(右便)의 자리는 특히 고대 근동 사회에서 존대와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였다(Keil). 그리고 그러한 관례는 성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시 110:1;ak 20:21;25:33;행 7:56;롬 8:34 등). 한편 본문이 이처럼 솔로몬의 극진한 예절을 소상히 기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솔로몬은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음을 알리고, 동시에 그러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모친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결코 괄시가 아니라 아도니야의 요청이 역모에 관련된 탓임을 나타내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성 경: [왕상2:20]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한 가지 작은 일로 - 아도니야의 "한 가지 소원"(16절)이 밧세바에게 이르러 "한가지 작은 일"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부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었었음을 나타낸다. 분명 밧세바는 그러한 부탁을 단순한 '애정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B hr, Hammond). 한편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있다. 즉 솔로몬이 아비삭을 좋아했기 때문에 밧세바가 일종이 질투심에서 아도니야의 청을 적극 수락했다는 견해이다(Grove). 이 견해는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을 수넴 여자 아비삭과 동일시 가설에 기초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그 가설을 입증할 만한 기록이 전혀 없고, 설령 그렇더라도 밧세바가 질투하거나 반대할 까닭이 없으며, 그리고무엇보다도 문제의 핵심은 아도니야의 역모(逆謀) 여부에 주어지고 있으므로(22절), 그러한 견해는 지나친 비약이다.

성 경: [왕상2:21]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 분명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이 부탁을 단순한 남녀간의 애정 문제로 인식하고, 이처럼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밧세바의 생각으로는, 수넴 여자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 않았으므로(1:4), 그녀는 한낱 수종드는 시종에 블과할 뿐이라고 간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Keil). 여기에 덧붙여 밧세바는 왕위 경쟁에서 실패한 아도니야에 대한 일종의 동정심도 작용하여 이 문제를 '한 가지 작은 일'로 보았던 것이다(20절). 그러나 당시 일반 백성들은 분명 아비삭을 다윗의 첩(후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Patterson). 그리고 당시의 관례상 선왕(先王)의 후궁을 계승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왕좌를 계승한다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였다(삼하 3:7;12:8;16:20-22;Herodotus, -68). 그러므로 만일 아도니야의 뜻대로만 된다면, 그는 왕권회복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되고(Rawlinson), 또한 아도니야의 추종 세력들은 크게힘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삼하 16:21). 이러한 모든 배경하에서 밧세바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솔로몬은 이전에 아도니야의 반역죄를 용서해 주면서 한 말, 곧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고 경고했던 일이 떠올랐을 것이다(1:52).

성 경: [왕상2:22]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 처음의 다정했던 분위기가 일순간 깨어지는 순간이다. 이때 솔로몬은 분명히 격노했을 것이다. 현명했던 그는 아도니야의 '한 가지 소원'(16절)의 저변(底邊)에 깔려 있던 역모의 흉계를 곧 간파했다. 그리고 그 흉계를 모르고 중개 역할을 한 모친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주); 저를 위하여 왕위를 구하옵소서 - 결과적으로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구한 것이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왕위를 요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밧세바의 '한가지 작은 일'이 사실은 아도니야의 역모(逆謀)임을 단정하는 부분이다. 한편 본절 전체에서는 '위하여'에 해당하는 '로'(*)가 세번 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거듭될 때마다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면서 하찮게 보이던 작은 부탁이 결국은 왕위를 노리는 의도였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즉 선왕의 후궁과 다름없는 아비삭을 요구하는 것은<17절> 원래 장자권을 가졌던 아도니야가<15절> 애초 자신의 1차 거사 세력과 재차 역모를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따라서 21절의 밧세바의 말과 본절의 솔로몬의 대답은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지만, 사건을 보는 시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주); 아비아달과...요압도 위하여 - 여기서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의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1차 거사 실패 이후(1:7,49)에도 이들 핵심 세력 3인은 왕권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암중 모색해 왔던 것 같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과거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을 취하라고 권면한 자가 아히도벨이었던 것처럼(삼하 16:21), 이번에 아도니야에게 아비삭을 요구하라고 권면한 자가 혹 아비아달 또는 요압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Theodoret).

성 경: [왕상2:23]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별울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 이것은 맹세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반드시 맹세의 내용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즉 변경할 수 없는 결심을 나타내는 맹세의 관용적 용법이다(룻 1:!7;삼상 3:17;14:44 등).

성 경: [왕상2:24]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나를 세워...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다윗의 맹세(1:29)에서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일반적인 맹세의 형식에다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을 결합시켜 결연히 맹세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것은 곧 여호와의 살아계심이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자신의 맹세 내용 역시 결코변하시 않을 확고 부동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주); 허락하신 말씀대로...집을 세우신 -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바이트'(*)는 때때로 '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창 50:22;수 2:18;렘 38:17). 따라서 혹자들은 '자손'을 주신 것으로 보고, 곧 솔로몬은 여기서 자신의 왕위를 이을 아들 르호보암을 낳은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Keil, Wordswoth). 그러나 솔로몬의 결혼은 이 일 뒤에 있었으므로(3:1). 그러한 견해는 따르기 곤란하다(B hr). 오히려 솔로몬의 이 말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견고한 왕위'를 허락해 주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12절;삼하 7:11-16).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허락하신 말씀대로(삼하 7:11-16;12:@4,25;대상22:6-10), 왕위가 다윗에 이어 솔로몬에게 주어짐으로써 그 왕위를 더욱 견고케 하셨다는 뜻이다.

성 경: [왕상2:25]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도니야의 죽음]

(주); 브나야를 보내매...쳐서 죽였더라 - 원문상 '브나야의 손으로 쳐서 죽였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왕의 친위 대장인 브나야 자신이 직접 행동한 것인지 아니면 그렛사람과 블렛사람<1:38>의 우두머리인 브나야의 감독하에 사형을 집행한 것인지 확실치않다. 아무튼 당시 왕의 친위(경호) 대장은 사형 집행관의 역할도 겸하였기 때문에, 솔로몬 왕의 명을 받은 브나야의 책임하에 아도니야에 대한 처형이 공식 집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혹자들은 이유야 어떻든 솔로몬이 자신의 이복 형인 아도니야를 처형시킨 것은 당대히 세속적인 왕권 쟁탈 싸움과 다를 바 없는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비난한다. 사실 얼핏 보면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구태여 처형시킨 일은 가혹한 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혈연 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은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공의를 구현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1차 경고(1:52)에도 불구하고 재차 반역을 시도함으로써, 신정(神政) 왕국 이스라엘의 근간 질서를 문란케 한 아도니야의 죄는 엄중히 다스려져야 마땅하였다(Keil, Hammond, Patterson). 즉 솔로몬의 아도니야 처형 사건은단순히 '왕권 도전 세력의 제거'라는 정치적 차원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신정 왕국의 확립 및 강화'라는 신적 공의 실현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이 자기 형 아도니야를 처형시킨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정당했고,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었다.

성 경: [왕상2:26]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비아달의 파면]

(주); 아나돗 - 베냐민 지파에 속한 고을로 제사장의 성읍이다(수 21:18;대상 6:60).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5.6km 정도의 거리로서(Robinson), 선지자 예레미야의 부친 힐기야의 고향이기도 하다(렘 1:1).

(주); 죽을 자로되...죽이지 아니하노라 - 혹자는 이것을 제사장의 목숨은 왕이 결정하는 법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나, 사울의 예로 미루어 합당치 못하다(삼상 22:!6-19). 따라서 솔로몬의 이러한 조치는 역시 본문이 알리는대로 부친 다윗을 도왔던 아비아달의 공로가 참작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비아달의 공로는 다음 두 가지이다.

다윗 앞에서 여호와의 궤(언약궤 또는 법궤)를 메어 올린 일 - 제사장 아비아달은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대상 15:11-15)와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피난할 때(삼하 15:24-29) 법궤를 맡아 책임짐으로써 다윗을 도운 적이 있었다.

다윗과 환난을 같이 받은 일-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삼상 22:20-23;23:6)와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도피할 때(삼하 15:24,35) 다윗의 입장에서 동고 동락했었다.

성 경: [왕상2:27]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아비아달의 파면]

(주); 아비아달을 쫓아내어...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 이러한 솔로몬의 조치는 제사장을 세우고 폐하는 일이 왕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비아달의 경우,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왕에 대항하여 계속 반역을 모의함으로써 스스로 제사장직으로부터 이탈하였으므로, 솔로몬은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B hr). 한편, 추방 당한 이후의 아비아달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추측컨대, 추방당할 때의 나이가 80세 가량의 노령이었으므로, 이후 오래 살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Keil & Delitsch, op. cit. p.34).

(주); 엘리의 집...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 일찍이 하나님께서 익명의 선지자를 통하여 엘리의 집에 선포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삼상 2:27-36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죄악으로 말미암아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이 폐하여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런데 여기서 열왕기 저자는 아비아달의 제사장직 파면 사건을 그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아비아달은 이다말과 엘리 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제사장 중 마지막 제사장이된 셈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론의 네 아들들(나답, 아비후,엘르아살, 이다말) 중 나답과 아비후는 잘못된 분향 사건으로 인해 일찍 죽었기 때문에(레 10:1,2),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유력한 제사장 계열로 남는다(레 10장;민 3:4;대상 24:3). 그런데 아비아달은 엘리 집안 소속으로서 이다말 계열에, 사독은 엘르아살 계열에 각각 속한다(IDB;삼상 14:3;22:9;eotkd 24:3). 그러므로 아비아달이 역모죄로 말미암아 솔로몬에 의해 파면된 것은 곧 대제사장직이 엘르아살 계통으로 완전히 일원화 되었음을 의미한다(Keil;35절;대상 6:1-8). 아울러 다윗 시대의 2명의 대제사장 문제<1:8>가 해결되었고, 결국 엘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역사의 시종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섭리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성 경: [왕상2:28]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주);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단 뿔을 잡으니 - 아도니야와 아비아달의 운명을 전해들은 요압은 다음은 자기 차례일 것을 직감했다(Keil, Patterson, C. Dentan). 그리고 아마 요압은 아도니야의 전례를 기억하고는 이렇게 단 뿔을 잡았을 것이다(1:50).그런데 요압의 이러한 행동은 솔로몬에 대해 스스로 떳떳치 못함을 증명한다(Hammond,B hr). 그러나 그것이 곧 2차 거사의 음모가 있었음을 확증하진 않는다. 오히려 오압은 이전의 살인 행위와 관련되어 처벌되고 있다(31-33절). 따라서 요압이 제단 뿔을 잡은 행위는 별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출 21:13, 14의 규례에 의하면, 제단을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려 자기의 야욕과 복수심으로 이스라엘의 두 장수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던 것이다(삼하 3:23-27;20:4-10).

(주); 여호수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 요압이 급히 도망친 '여호와의 장막'은 이전에 아도니야 역시 도망친 곳으로서, 이곳은 기브온에 있던 성막이 아니라(대하 1:3), 시온산 위에 있던 장막이다(대하 1:4;Keil).

(주); 압살롬을 좇지 아니하였으나 - 갈대아역(the Chaldee)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LXX, Vulgate, the Arabic)은 여기서 '압살롬'(*) 대신 '솔로몬'(*)을 취한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Thenius, Ewald)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잔다. 그러나 여타 히브리어 사본들을 참조할 때, 그리고 문법적으로 고찰해 볼 때 그러한 본문 수정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Keil,B hr).

성 경: [왕상2:29]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70인역은 본절의 솔로몬의 말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고 있다. 즉 "솔로몬이 사람을 보내어 왜 도망하였느냐고 묻자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피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70인 역자의 보충적인 설명일 뿐이지만, 이같은 내용은 요압의 도주가 스스로 제 발 저린 행동이란 사실을 파악케 하는데 도움을 준다(J. Hammond, B hr).

성 경: [왕상2:30]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주);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 브나야가 신성한 성소에서 피 흘리기를 주저하는 것을 보면서 요압이 대답한 이 말의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즉 요압은 솔로몬이 감히 신성한 성소에서 자기를 죽이지는 못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라는 견해(B hr, Barlow, Keil), 아니면 성소에서 죽음으로써 요압은 솔로몬에게 성소 모독의 오명을 끼치고 죽으려했다는 견해(M. Henry), 그 밖에 제단 곁에서 죽음으로써 사후에 어떤 공덕을 얻으려는 일종의 미신적 심리가 작용했다는 견해(J. Hamm-ond) 등이 있다. 그러나 요압이 이 중 어느 것을 심중에 두었더라도 결정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즉 그것은 비록 요압 자신은 과거지사로 잊고 있었을런지몰라도, 분명 그는 사악한 계교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자로서, 곧 이웃을 모살한 자라는 점이다(출 21:14). 그리고 이런 살인자는 성소의 보호 규정에 해당되지 않을뿐 아니라, 성소의 그 어떠한 은총도 전혀 누릴 수 없다는 점이다(신 19:11-13).

성 경: [왕상2:31]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주); 저를 죽여 묻으라 - 솔로몬이 여기서 특별히 '묻으라'(매장하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신 21:23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죽은 자를 그날로 매장하라는 규정에 따르려는 것(J. Hammond), 또는 이전에 세운 요압의 공로를 예우해 주려는 것(B hr, Keil)으로 이해된다. 여하튼 이것들은 모두 솔로몬이 율법을 준수할 뿐 아니라 공평무사한 왕임을 강조해 준다.

(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제하리라 - 민 35:31-34의 율법에는 고의로 살인한 자는 결코 용서치 말 것과, 또한 그 죄값은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로써만 오직 갚을수 있다는 율례가 나온다. 그러므로 이런 맥락에서 아브넬과 아마사의 죽음에 책임을 갖고 있는 다윗 왕가는 그들의 피를 흘리게한 요압의 피로써 그 죄값을 속량할 의무가 있었다(삼하 21:1-9;창 4:10;9:6). 따라서 다윗은 임종시 이 사실을 유언으로 남겼고(5,6절), 솔로몬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요압을 처형함으로써 마침내 무고히 피흘리게 한 죄값을 속량받아, 결국 피흘린 죄를 자신의 집으로부터 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왕상2:32]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요압의 처형에 대한 판결문이다.

(주); 저가 자기보다 외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 이 때문에 요압은 비록 성소에서일지라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므로, 솔로몬의 처사는 위법이 아닌 것이다<30절>.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요압보다 의롭고 선한 인물로 보고 있는 까닭은, 비록 아브넬과 아마사도 다윗을 적대하긴 하였으나(삼하 2:8-29;17:25) 그것은 전쟁시였고 후에는 오히려 화평을 도모했었기 때문이다(삼하 3:21;19:13;20:4). 반면 요압은 평화시에 개인적 복수심과 질투로 다윗 왕을 거스려 그들을 살해했던 것이다(5절).

(주); 아브넬과...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이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과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를 개인적인 복수심과 질투로 인해 평화시에 무참히 살해한 내용은 각각 삼하 3:22-27과 20:4-12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 일을 내 부친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 즉 요압은 다윗 왕 모르게 독단적으로 아브넬과 아마사를 살해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비록 요압의 행위가 독단적 행위였더라도 그 사건들은 다윗에게 좋지 못한 오해가 생기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윗은 아브넬의 장례를 성심껏 치러 준 바가 있었고(삼하 3:31-37), 솔로몬도 여기서 다윗왕은 전혀 무관한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새삼 변명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J. Hammond)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이미 그 당시에 다윗 왕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삼하 3:37).

성 경: [왕상2:33]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주); 저희의 피는...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 솔로몬의 이 말은, 아브넬의 살해 소식을 듣고 다윗이 요압에게 내린 저주와 비슷하다(삼하 3:28, 29). 히브리인들은 무고히 흘린 피살자(被殺者)의 피는 그 피값이 속량될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믿었으며(창 4:10), 반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한 살해자(殺害者)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당대 또는 자손들에게서라도 반드시 그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었다(출 20:5;34:7;레 20:5;26:39;수 2:!9;마 27:24, 25). 이런 점에서, 여기 솔로몬의 말은 오늘날 요압이 죽임당하는 것은 그 자신이 흘리게 한 피의 당연한 대가로서, 이제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요압 역시 죽임당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러한 피의 보응 원리(창 9:6)에 대한 성경적 일례로, 무고히 기브온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사울의 범죄로 후일 사울의 후손 일곱 명이 처형당함으로써 그 피값을 치른 사건(삼하 21:1-9)을 들 수 있다.

(주); 다윗과 그 자손...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 요압을 처형함으로써 이제 솔로몬은 다윗 집안에 여호와의 평강이 영영히 깃들 것으로 확신한다. 왜냐하면 요압을 처형함으로써 그동안 다윗 집안에 드리워진 무고한 자의 피흘린 죄책을 말끔히 제거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31절). 이로 보아 우리는 다윗 혹은 솔로몬이 결코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원한으로 요압을 처형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성경적 '죄의 보응 원리'(창 9:6;출 21:14;레 17:11)에 입각하여 공의롭게 요압을 처형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J. H-ammond), 즉 다윗 혹은 솔로몬은 무고한 피값을 갚을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다윗 왕가로 돌아와 저주가 되는 것으로 믿었다. 반면 그 피흘린 죄책을 제거하면, 다윗 왕가는 여호와의 평강의 상태에 들게 될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Wycliffe). 그런데도 일찍이 다윗이 즉시 이를 행하지 못한 것은 당시에는 요압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삼하 3:39). 그러나 이제 솔로몬이 마침내 그 의무를 행한 것이다.

성 경: [왕상2:34]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주); 올라가서 - 요압이 피신한 곳은 언약궤가 있던 시온 산 위의 장막이었으므로(28절), 솔로몬의 왕궁보다 고지대에 위치했다(Keil). 따라서 이처럼 표기한 것이다.

(주); 거친 땅 - '유다 광야'를 말한다(Keil, Hammond). 이곳은 베들레헴과 드고아에서 가까운, 돌이 많은 지역이다(수 15:6;삿 1:16). 그런데 여기에 요압 조상들의 무덤이있었다(B hr).

(주);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에 딸린 정원에 무덤을 마련하기도 했다(Keil). 그런데 이처럼 넓은 정원 딸린 집은 귀족들의 거처였으므로, 집에 장사되는 사람은 주로 귀인(貴人)들에 국한되었다. 성경에는 사무엘이 이처럼 집을 장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삼상 25:1). 따라서 비록 요압은 피의 보응 원리에 따라 처형은 당했지만, 생전에 그가 다윗을 위해 세운 많은 전공(戰功)이 참작되어 이처럼 용사의 죽음으로 예우받은 것 같다(J. Hammond).

성 경: [왕상2:35]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요압의 최후]

왕국이 솔로몬의 인물들로 새롭게 체제 개편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 핵심 내용은 군대 장관에 '브나야', 대제사장에 '사독'이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브나야는 시위 대장에서 군대 장관으로 영전된 것이며, 사독은 명실 공히 단독 대제사장으로 지위 격상된 것이다.

(주);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 이것은 이제 대제사장직이, 다윗이 부득이 세웠던 이원 체제에서(삼하 8:17) 사독 가문이 주도하는 일원 체제로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때로부터 세워진 사독 계열의 제사장직 정통성은 후일 선지자 에스겔에 의해 인정되기도 했는데(겔 44:15,16),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직은 B.C.171년, 안티오쿠스(Antiochus)에 의해 짓밟혀 메넬라우스(Menelaus) 가계로 넘겨질 때까지 계속 수행되었다. 따라서 쿰란(Qumran)동굴을 거처로 삼았던 엣센파(The Essenes)는 오직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만을 유일한 합법적 대제사장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회복을 기대했었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성 경: [왕상2:36]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시므이 - 이 인물이 앞의 세 사람 (아도니야, 아비아달, 요압)과 같이 솔로몬 왕권을 위협하는 장애로 여겨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므이는 사울의 근친으로서 강력한 반(反) 다윗 인사였고(삼하 16:5-8,13), 또한 소속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지도급 인사였기 때문이다(B hr; 삼하 19:17 주석 참조).

(주); 너는 예루살렘에서...나가지 말라 - 일종의 주거 제한 및 감시를 위한 조치이다. 그리하여 베냐민 지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반란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J. Hammoan). 한편 본래 시므이가 살던 '바후림'<8절>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약9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베냐민 지파의 요충지였다.

성 경: [왕상2:37]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기드론 사내 - 유다 지파의 베냐민 지파의 영토를 구분짓는 예루살렘 동편의 경계천(境界川)이다. 우기(雨期)의 폭우 때를 제외하곤 거의 물이 흐르지않는 시내(brook), 곧 '와디'(wady)이다(IDB). 이 시내 건너편에 시므이의 본 거주지인 '바후림'이 있었다(삼하 15:23).

(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 당시 사형 선고의 일반적 형식이다(B hr;레 20:9;수 2:19). 그 의미는 '너 자신의 잘못(죄) 때문에 네가 죽는 것이다'란 뜻으로서, 곧 죽음(피흘림)에 대한 원인과 책임이 바로 죽임당하는 자(범죄자)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형 집행자는 그 피흘림과 전혀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성 경: [왕상2:38]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이 말씀이 좋사오니 - 다윗의 맹세(삼하 19:23)와 관계없는 솔로몬<9절>은 부친의 유언(8, 9절)을 지키되, 그러나 곧장 시므이를 처벌하지 않고 일단 충성을 시험하는 명령(M. Henry)을 내렸다. 그러므로 이를 아는 시므이는 자신의 과거 소행(삼하 16:5-8)을 생각할 때 솔로몬의 주거 제한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39]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삼년 후 - 시므이에 대한 주거 제한 명령(36절)은 분명 솔로몬의 즉위(B.C. 970)초에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때는 솔로몬 즉위 3년째인 B.C.967년 경으로 추정된다.

(주); 시므이의 두 종이...도망하여 간지라 - 혹자는 종들이 주인 시므이와 사전에 짜고, 주인을 예루살렘 밖으로 인도하기 위해 도망쳤다고 추측하기도 하나 근거가 없는 무리한 추측이다. 아마도 두 종은 주인 시므이에게는 주거 제한 명령(혹은 금족령)이 떨어진 상태이므로, 자신들을 쫓아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도망친 것 같다. 아무튼 두 종의 도망 사건 배후에는 다윗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본다(8, 9절;삼하 16:12).

(주); 가드 -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삼상 21:10)로, 이스라엘과는 때로는 적대적이고 때로는 친교를 맺는 등 많은 정치적 연관을 갖고 있었딘 블레셋의 주요 성읍이다(삼상 5:6-10;17:4,52;삼하 15:18-22;대상 18:1). 여호수아 11:22 주석 참조.

(주);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 - '마아가'(Maachah)는 삼상 27:2의 '마옥'(Maoch)과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기스'(Achish)는 일찍이 사울을 피해 망명한 다윗을 보호해준 인물이다(Keil). 삼상 21:10;27:2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40]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그 종을 찾으려고 일어나 - 도망한 노예를 되찾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권리로서, 그 자체로서는 합법적이다(C. Dentan).

(주); 가드로 가서 - '가드'는 그 위치상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곳이므로(37절), 어쩌면 시므이는 별 탈 없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므이가 자신의 맹세에 대해 철저한 사람이었다면, 예루살렘을 벗어나 가드까지 먼길을 여행하기 전에 먼저 왕의 허락을 요청했어야 옳았다(Patterson). 만일 그러한 절차를 밟았다면, 시므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망간 종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은혜를 가볍게 여겼고 맹세를 소홀히 함으로써, 스스로 온전히 회개치 못한 심정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주); 아기스에게 나아가 - 시므이는 직접 아기스 왕과 교섭하여 종들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 모든 행동은 충분히 정치척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이었다. 즉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망령이나 동맹 반란의 시도로 비칠수 있었다(삼상 27:1,2;29:1,2). 여하튼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나가지 말라는 솔로몬 왕의 명령(36절)을 정면으로 위배하였다.

성 경: [왕상2:41]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혹이 솔로몬에게 고한지라 - 시므이의 움직임은 감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시므이가 밤에 몰래 다녀온 것으로 보나(M. Henry), 문맥은 오히려 그가 태연히 행동했음 보여 준다. 아마 맹세 후 3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난 탓으로 부주의해졌던 것일 수도 있다(39절). 여하튼 시므이의 가드 행은 솔로몬에게 기다리던 합법적 기회를 주었다<9절>.

성 경: [왕상2:42]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시므이의 최후 왕이...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 시므이는 이전에 맺은 계약(36-38절)을 위반한 죄로 고발되고 있다. 그런데 그 계약은 당사자 간의 합의(솔로몬의 명령, 시므이의동의)와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결국 그 계약은 하나님과 솔로몬 왕과 시므이 사이의 계약으로서, 곧 맹세로 확증된 계약이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그 계약을 깨뜨린 자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맹세한 대로 만일 시므이가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다면, 솔로몬 왕 역시 부친의 유인(9절)을 따르고 싶어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시므이가 먼저 그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성 경: [왕상2:43]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맹세와...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느냐 - 시므이는 다만 왕의 명령 뿐 아니라 여호와를 가리켜 한 맹세를 어긴 것으로 추궁된다<42절>.

성 경: [왕상2:44]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네 마음의 아는 모든 악 곧 내 부친에게 행한 바 - 여기서 시므이의 악은 현재의 죄와 이전의 죄가 결합된다. 현재의 죄는 여호와를 가리켜 한 맹세를 파기한 죄요, 또한 왕의 엄명을 어긴 죄이다(43절). 그리고 이전의 죄는 압살롬의 반란시 도피 중인 다윗 왕을 모욕하고 저주한 죄이다(삼하 16:5-8). 그런데 그 죄의 성격에 있어 둘은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던 것은 왕의 능멸인 동시에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모욕함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삼하 16:12;삼상 26:9). 그러므로 시므이의 처벌은 다만 지금의 죄 뿐 아니라 이전의 죄에 대한보응도 되는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 보내시리라 - 압살롬의 반란시 도피 중인 다윗을 향하여 시므이는 혹독한 저주를 퍼부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 16:7, 8). 이때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흥분한 아비새는 시므이를 단칼에 쳐죽이려 했다(삼하 16:9).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를 만류하며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삼하 16:11, 12).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왼통함을 돌아보시고 시므이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오늘날 공의롭게 보응하셨다(롬 1:18;살후 1:5-9).

성 경: [왕상2:45]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그러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위는...견고히 서리라 - 히브리인들은, 저주는 말 자체의 신비로운 힘 때문에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믿었다(IDB). 따라서 일단 다윗을 향해 뱉어진 시므이의 저주(삼하 16:7, 8)를 솔로몬은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그런데 마침내 시므이가 하나님과 왕에게 맺은 서약을 스스로 어김으로써, 시므이의 저주는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42, 43절>. 그러므로 다윗 왕가는 시므이의저주에서 벗어나 복과 번영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었다. 한편 이것은 솔로몬이 시므이를 다른 사람들(아도니야, 아비아달, 요압)과는 다른 방식으로 처벌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울러 시므이의 처형을 놓고 솔로몬이 한 이 말은, 시므이에 대한 처형 집행이 결코 사사로운 구원(舊怨)이나 보복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의 공의로운 법 집행이란 사실을 떳떳이 밝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J. Hammond).

성 경: [왕상2:46]

주제1: [솔로몬의 왕권 확립]

주제2: [시므이의 최후]

(주); 브나야에게 명하매...시므이를 쳐서 죽게 한지라 - 결국 시므이는 그 죄의 대가로 브나야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된 요소들이 일시적으로는 영원히 존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이르면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될 것이다(말 4:1;살전 5:3). 무죄한 자를 향한 악인의 정죄와 능욕은 필경 그 자신에게 돌아갈 뿐이다(욥 34:11;시 141:10;잠5:22).

(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 여기서 '이에'는 12절 이후의 일련의 사건을 지시한다. 한편 성경에서 '손'(*, 야드)은 보통 권세, 힘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IDB;출 13:3;시 78:72;히 10:31). 그러므로 본절은 '모든 장애와 위협을 제거하고 나니 솔로몬의 권세가 막강한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12절과 함께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그의 왕권 확립에 대한 총평인 것이다.

성 경: [왕상3:1]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초기 행적]

(주);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 여기서 '인연을 맺어'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하탄'(*)은 '결혼으로 인척 관계를 형성하다'란 뜻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장인과 사위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솔로몬과 바로의 딸과의 결혼이 국가적인 정략 결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Patterson). 이처럼 솔로몬은 내부의 적들을 제거한 뒤(2장)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왕국을 강화하려 했다. 그래서 왕국 강화의 일환으로서 솔로몬은 정략(政略) 결혼을 통해 애굽과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바로 왕은 애굽 21대 왕조(Tanitic)의 마지막 왕으로서 35년간 애굽을 통치한 프수센네스 왕으로 추정된다(Ewald, Winter),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22대 왕조(Bubastic)의 초대 왕 쉐숑크(Sheshonk)는 르호보암 5년에 예루살렘을 침략했던(14:25) 시삭(Shishak)이 틀림없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onthe Old Testament, Vol. , p. 38; B hr). 그러므로 적대적 관계인 22대 왕조 이전에 상호 동맹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당시 애굽이 왜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으려 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당시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이 매우 강력했던 사실이 그 주요 이유일 수 있다(L.Wood).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대국의 왕인 애굽왕들이 다른 국가에게 딸을 주는 일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Patterson).

(주); 그 딸을 취하고 - 솔로몬이 애굽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 자체가 율법에 위배된다고는 볼 수 없다(B hr, Keil등). 즉 일찍이 요셉과 모세에게서도 그러한 전례(前例)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창 41:45;민 12:1), 모세 율법에 명시된 바 가나안족과의 혼인 금지 조항에 접촉되지도 않기 때문이다(출 34:16;신 7:3). 오히려 율법은 전쟁시에 취한 이방 여인과 결혼도 허용했다(신 21:13).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솔로몬의 결혼을 타락행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는 후일에 솔로몬에게 우상 숭배의 악영향을 끼친 왕비들 중(11:1-7) 바로의 딸이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Edersheim, Keil). 그런고로 본절은 다만 솔로몬의 위세가 바로의 딸을 취할수 있었으리만치 강력했다는 점과 함께 이후 계속되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이 시작되었음을 소개하는 구절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주); 다윗 성에 두고 - 여기서 바로의 딸이 자신을 위한 궁(宮)이 지어지기까지 임시적으로 거주한 '다윗 성'(*, 이르 다윗)은 일찍이 요새화된 고대 예루살렘성을 가리킨다(Keil, B hr, Patterson). 이는 여호와의 궤가 위치한 영역으로 보이는 '다윗 궁'(*, 베트 다윗)과는 구별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대하 8:11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역대하 8:11에 따르면, 바로의 딸은 다윗 궁에 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궤(법궤)가 안치된 장막이 다윗 궁 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다윗 궁은 특별히 거룩한 곳으로 선포되었고, 따라서 솔로몬은 이방 여인인 바로의 딸이 그것에 거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바로의 딸은 다윗 성으로 불리우던 예루살렘성에 거주하기는 했지만, 다윗 궁 안에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그러던 중 궁전 공사가 필역된 후,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위해 지은 궁으로 그녀를 인도했던 것이다(9:24).

(주);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필역(畢役)되기를 기다리니라 - 솔로몬은 즉위 4년 즉 B.C. 966년 경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즉위 11년 B.C. 959년 경에 완공하였다( 6:1,38). 이처럼 7년에 걸쳐 성전 건축을 필역한 다음 솔로몬은 바로 궁전 건축에 착수하였다. 즉 솔로몬은 즉위 11년 즉 B.C.959년에 궁전 건축을 시작하여 즉위 11년 즉 B.C. 946년에 궁전 건축을 완공하였다. 따라서 궁전 건축에는 13년이 걸렸다(7:1). 결국 솔로몬의 주요 건축 공사는 도합 20년의 세월에 걸쳐 완공되었다.

성 경: [왕상3:2]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초기 행적]

(주);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 혹자는 본절의 산당(山堂) 제사를 백성들의 종교적 결함으로 해석한다(Rowlinson). 그런데 원문을 순서대로 번역하면 '다만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이 아직 건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의미는 아직 유일한 제사 성소인 성전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불가피하게 산당 제사를 했던 당시 형편을 알리는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Hammond). 이런 점에서 여기 '산당'(*, 바마)은 우상 숭배 장소인 가나안 족속들의 산당과는 구별되는 곳으로, 단순히 제사와 기도의 장소일뿐이었다(Keil). 드보(De Vaux)는 당시 산당의 형태는 흙무덤 같은 작은 언덕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하나의 '제단'(*, 미즈베아흐)으로 구성되었지만, 때로는 제단 곁에 여러 개의 부속 시설을 갖추는 등 꽤 정교하게 구성된 산당도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이처럼 솔로몬 시대에 산당 제사가 보편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엘리 시대에 블레셋 족속들에게 법궤를 탈취당한 이후(삼상 4:11), 그 법궤가 실로 놉(삼상 21:1-9) 기브온(대상 16:37-40) 예루살렘(삼하 6:16) 등으로 옮겨다닌 결과 백성들은 제사의 구심 장소를 상실하고 각자 나름대로 산당을 만들어 제사드렸기 때문일 것이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성 경: [왕상3:3]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초기 행적]

(주);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 율법의 첫째가는 계명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일이다(신 6:5;30:16;마 22:37;눅 10:27). 솔로몬의 번영과 업적은 이처럼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2:3).

(주);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 다윗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도록 특별히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이다(8:16). 그리하여 다윗은 그 자신의 시대를 넘어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의 가치를 인정받아, 향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의(義)의 척도로 등장한다. 그런고로 백성들은 하나님을 다윗의 하나님으로 알았고, 이후 이스라엘 왕들은 축복을 받으려면 다윗의 행함을 본받지 않으면 안되었다(PEB;9:5;왕하 20:5;대하 21:12). 결국 본절은 솔로몬 치세의 번영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한다.

(주);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 대부분이 주석가들이 본질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한다(Hammond 등).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와께로부터 가나안 족속의 '산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민 33:52), 이후 열왕기에서 '산당'은 우상 숭배와 밀접히 관련된 부정적 의미로 나타남을 기억할 때 그것은 타당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역사의 황금기를 회상하며 기록했을 열왕기 사가는 여기 본절에서 솔로몬 왕국의 번영 이유와 타락 이유를 나란히 기록했음직도 하다. 그러나 당시 여호와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고(2절), 다음 장면에서 산당은 솔로몬이 여호와께 지혜를 받는 긍정적 장소로 나타나는 점을 고려할 때(4-15절), 아직 지나치게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아야 한다(Keil, B hr). 다만 위험한 가능성을 가질 뿐이다. 그 위험의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이다. 즉 여호와의 유일 중앙 성소 명령(신 12:5-14,18,21,26)을 소홀히 할 위험성과 산당을 중심으로 드려지는(신 12:2,3) 가나안 족속의 우상 숭배 행위를 본받을 위험성이다(Patterson). 그런고로 여호와의 성전이 완공된 이후, 이러한 산당은 전혀 불필요했고 또한 결코 합법적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철저한 파괴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통치자들은 너무나 오래도록 산당 제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왕(善王)들 조차도 산당을 훼파하는 데 소홀히 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 행위에 빠져들고 말았다(Patterson, Keil).

성 경: [왕상3:4]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기브온...산당이 큼이라 - '기브온'(Gubeon)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km지점에 위치한 해발 722m 가량의 이스라엘 중부의 주요 성읍이다(수 9:3;10:2;18:25;21:17;삼하21:1). 가나안 정복 후 처음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수 18:25), 후에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구별되었다(수 21:17). 이곳 기브온의 산당이 특별히 유명하게된 것은 사울의 놉(Nob) 제사장 학살 사건(삼상 22:11-19)이후 놉에 있던 여호와의 장막이 기브온으로 옮겨지고 나서 부터였다(대상 16:39;대하 1:3). 즉 그 때 이후로 여호와의 장막(모세의 장막)이 있는 기브온과 여호와의 법궤(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2대 제사 중심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즉위 후 솔로몬은 '일천 번제'라는 대제사을 드리기 위해서는 '놋단'이 있는 기브온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신하들과 백성의 대표들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대하 1:2-6).

(주); 그 단에 - 기브온 산당의 모세 성막(출 27:1-2;38:1,2) 안에 있던 놋 제단을 가리킨다(대하 1:3-6).

(주);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 일천의 숫자가 횟수인지 양(量)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어느쪽이든 엄청난 규모임엔 틀림없다. 솔로몬은 백성들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기 전 무엇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원했다. 따라서 솔로몬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모두 이끌고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가 자신과 백성들을 하나님께 전적 헌신하는 하나의 신상 고백으로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과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한 것이다. 한편, '번제(*, 올라)는 희생제물을 통째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제사로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 정립을 원할 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기를 원할 때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는 자원제이다(레 1:3). 그러므로 솔로몬도 이러한 목적으로 그의 통치 초기에 왕 개인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헌신을 위하여 이처럼 기브온 산당에서 이 '올라'를 드렸던 것이다(Tosef).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규모면에서 '일천 번제'(*, 엘레프 올로트)라는 전무후무성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전적 헌신의 징표일 뿐 아니라, 즉위 초 솔로몬의 강렬한 헌신과 순종에의 열의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혹자는 이 제사 제물들을 힘껏 드린다 할지라도 최소한 칠일 또는 팔일이 소요된다고 보았다(J. Hammond). 여하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은 신하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처럼 충성과 헌신의 표시로 생각되었다(IDB;시68:18). 그러므로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믿고 모시는 솔로몬과 백성들의 신앙 고백 행위인 것이다.

성 경: [왕상3:5]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꿈에 나타나시니라 - '나타나셨다'(*, 니레아)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형체를 구체적으로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B hr, Keil, Hammond). 한편 '꿈'(*, 할롬)은 특히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밝혀 주는 특별한 계시 방편으로 자주 등장한다(창 15:12;28:12;욥 33:15,16;마 1:20-23;2:12).

(주); 내가 네게 무엇을 출꼬 너는 구하라 -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솔로몬의 강렬한 헌신인 일천 번제에 이어 발생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희생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 큰 일을 하시고자 했음을 의미한다(Patterson). 여기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이제 시작될 통치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려는 목적이 있었다(Keil). 따라서 솔로몬에게는 여호와의 뜻에 부합될 정당한 간구를 할 만반의 채비가 갖추어져 있었다(마 6:33;7:7;약 4:3).

성 경: [왕상3:6]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전에 솔로몬은 먼저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이미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간구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이다.

(주); 성실과 공의(公義)와 정직한 마음 -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의 속성이다(신 32:4).

(주);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 다윗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었던 2대 비결이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cum Deo),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행하였기 때문에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

(주); 큰 은혜 - '큰 은혜'(*,헤세드 가돌)의 문자적 의미는 '크신 친절'(greatkindness) 또는 '크신 긍휼'(great mercy)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것들은 다만 행한 대로의 보답이 아닌 오직 은총일 따름이라고 솔로몬은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은혜'(*, 헤세드)는 보통 '언약'과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8:23;신 7:9,12;느 9:32;단 9:4;미 7:20 등). 즉 언약 관계하에서 주어지는 친절, 사랑, 긍휼, 호의 등이 바로 '헤세드'인 것이다. 이런 맥락하에서 특별히 여기서는 당신의 언약을 따라 다윗 가문을 선택하셔서 영구한 왕위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호의를 의미한다(1:48;2:4,45;대하 1:8,9).

성 경: [왕상3:7]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종은 작은 아이라 - 주석가들은 이때의 솔로몬의 나이를 보통 20세 전후로 본다(B hr, Keil 등).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의 이 고백은 반드시 나이의 문제라기 보다는 솔로몬의 자기 겸비를 나타내는 것이다(Patterson, Hammond). 즉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수많은 백성을 통치해야 하는 책임의 막중함에 비해 자신의 경험 미숙과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고 고백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소명에 임하는 인물들은 대개 이와같이 자신의 부족함과 부적격함을 토로하고 있다(출 3:11;삿 6:15;렘 1:6,7등).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그 임무가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 '출입하다'(*, 야차 와보)란 말을 직역하면 '나가고 들어오다'(go out and come in)란 뜻인데, 이는 곧 맡은 바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키 위하여 공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성경의 관용적 표현이다. 따라서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한다'는 솔로몬의 말은 왕으로서 어떻게 백성들을 성공적으로 잘 다스려야 할 지 모르겠다는 말이다(민 27:17;신 28:6;31:2;삼상 18:13;시 121:8).

성 경: [왕상3:8]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주의 빼신 백성 -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신 7:6), 직역하면 "주께서 선택하신 주의백성"이란 의미이다.

(주); 저희는 큰 백성이라...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 이 말은 일찍이 조상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며 한 말이다(창 13:16;15:5;22:17). 한편, 솔로몬 당시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다윗이 그의 말년에 인구 조사를 실시했을 때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만 130만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삼하 24:9).

(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로 '땅의 티끌'(창 13:16), '하늘의 뭇별'(창 15:5), '바닷가의 모래'(창 22:17) 같이 많이 번성하도록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었다.

성 경: [왕상3:9]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누가...재판을 할 수 있사오리까 - '재판하다'(*, 솨파트)는 성경에서 주로 '다스리다'로 번역되었다(삿 12:11;삼상 8:5,20). 왕정(王政) 시대 이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士師)들의 임무는 재판관(쉐파트, '사사'로 번역됨)으로서 사회의 각종 분규를 매듭짓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왕정 시대에 들어와서도 재판은 통치의 주된 기능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국가의 왕들은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 재판관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후 솔로몬이 한 통치의 첫 업무는 재판이었다(16절 이하). 그리고 그 재판이 곧 왕의 권위를 인정받게 하였다(28절).

(주); 지혜로운 마음 - '지혜로운 마음'(*, 레브쇼메아)은 문자대로는 '듣는 마음'이다. 그런데 '듣다'란 동사 '솨마'는 '복종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루터(Luther)가 이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번역한 것은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서 얻는다고 보기 때문이다(시 119:97-99;잠 2:6-9). 여하튼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올바르게 통치하고 재판하기 위해 요구되는 총명과 분별력을 구했다.

(주); 선악을 분별하게 - 통치자로서 백성들의 제반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잘 재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만일 통치자가 백성들 사이의 제반 문제에 대해 시시비비를 옳게 가려 주지 못한다면, 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무엇보다 통치자로서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던 것이다. 한편 솔로몬이 구한 이러한 지혜는 결코 사색적이고 추상적인 지혜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지혜로서, 그 일례가 16-28절의 판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성 경: [왕상3:10]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 직역하면 '주의 눈에 좋았다'란 뜻이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기도를 드린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택한 백성을 맡아 다스릴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무엇보다도 올바른 통치와 재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혜를 요청했기 때문이다<9절>.

성 경: [왕상3:11]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자기를 위하여 수(壽) 도 ... 부(富) 도 ...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 여기서 '수'(*, 야밈 라빔)는 문자적으로 '많은 날들'을 뜻한다. 그런데 특히 구약 사상에서 오래도록 수를 누리는 것은 큰 축복 중 하나였다(신 5:33;욥 5:26;시 91:16;잠10:27). 그리고 보통 '풍부'로 번역되고 있는 '부'(*, 오쉐르)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복으로 간주되었다(창 13:2;14:23;시 24:1). 또한 '원수'(*, 오예브)는 개인의 원수 뿐만 아니라 국가적 원수를 의미하기도 한다(수 24:11;삿 16:23 등). 따라서 '원수의 생명 멸하는 것'은 군사적 승리의 영광을 의미 한다(B hr). 그러므로 수나 부나 권세를 구하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으로, 사실 이것들을 구하는 것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이 이것들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즉 이것들도 매혹의 대상으로서 충분히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주의 백성을 맡아 통치하고 재판할 통치자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구할 것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솔로몬이 합당한 것을 먼저 구하자, 이 나머지 것들도 더불어 주어지고있다(13절;마 6:33).여기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그 무엇을 간구함에 있어, 그 중요도를 따라 구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후일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가르치셨다.

성 경: [왕상3:12]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원문에는 본절의 초두에 '보라'(*, 힌네)란 말이 있어 하나님의 응답이 생생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Keil).

(주);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 후일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이 역사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대상 29:25;대하 9:22).

성 경: [왕상3:13]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영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잊은 채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는 자들에게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신 8:17;삼하 12장;사 10:3;렘 5:27;겔 7:11;호 12:8;미 6:12).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우선되면(10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여타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마 6:32, 33;약 1:5).

성 경: [왕상3:14]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 다윗의 행적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열왕(列王)들의 선악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다(9:4;15:11 등). 그런데 후일 솔로몬의 행적은 다윗의 기준에 못 미쳤던 것으로 판정되고 말았다(11:4,6).

(주); 법도와 명령 -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교훈을 강조하여 지칭하는 증언법적 표현이다. 2:3;신 4:1 주석 참조.

(주); 지키면...네 날을 길게 하리라 - 간구한 대로 솔로몬이 총명한 지혜를 받을 수 있었고, 덧붙여 수(壽)와 부(富)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따라 행했기 때문이었다(3절). 따라서 솔로몬이 이후 계속해서 그같은 지복(至福)의 상태를 누리려면, 변함없이 즉위 초기와 같은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솔로몬은 말년에 이를수록 점점 여호와의 길로부터 벗어나 타락하고 말았다(11:9-13). 그 결과 솔로몬은 "네 날을 길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Keil, Hammond).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관념상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비단 영적인 의미 뿐 아니라 보다 실제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솔로몬이 60세 안팎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결코 그가 장수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3:15]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주);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 여기서 '꿈'(*, 할롬)은 일반적인 평범한 꿈이 아니라, 특별한 꿈으로서 곧 하나님이 주신 꿈이요 그 꿈을 통한 계시였다. 즉 구약시대에 이러한 꿈은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의 사고 작용과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계시 방편이었다(창 20:6;삼상 28:6;단 2:4). 따라서 이러한 꿈을 꾼 자는 꿈을 깬 이후에도 꿈의 내용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으며, 또한 자신의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Patterson, Keil). 일찍이 야곱(창 28:10-22), 요셉(창 37:5-11), 바로(창 41:1-7)도 이같은 꿈을 꾸었었다.

(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잔치하였더라 - 기브온 산당의 제사를 모두 마친 후 솔로몬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법궤가 있는 시온 산 제단에서 새로 번제와 수은제를 드렸다. 그런데 기브온에서와는 달리 예루살렘에서는 특별히 수은제(*, 쉘라밈)가 추가되고 있다. 여기서 '수은제(酬恩祭)는 곧 레 3:1-17;7:11-21,28-34에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화목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감사를 표시하는 제사이다. 즉 솔로몬은 기브온의 일천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마자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화목 제사에 쓰인 제물들은 신하들과의 잔치에 사용되었을 것이다(레 7:15,31;삼상 2:16).

(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 다윗 통치 이후 솔로몬 성전이 완공될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장막이 있었다. 하나는 기브온에 있는 원래의 장막이고(대하 1:3),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 위에 있는 임시 장막이다(삼하 6:17). 그런데 기브온 장막은 원래 모세의 장막과 같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여호와의 궤(법궤, 언약궤)가 없었다. 반면 시온 산 위의 장막 속에는 여호와의 궤가 안치되어 있었지만, 온전한 장막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즉 두 개의 장막이 불완전한 상태로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다윗시대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이 양쪽에서 이중으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 다윗은 왜 언약궤와 장막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영구한 여호와의 성전 건축 계획이 있었으므로, 무리하게 한 쪽을 철회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The Ecpositor's Bible Comme-ntry).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인해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제사를 필한 후,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응답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서 새롭게 번제와 수은제를 드린 것이다.

성 경: [왕상3:16]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구체적으로 이 때가 어느때 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받은 지혜를 (11,12절) 재판에 적용한 한 가지 구체적 실례를 보여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였을 것이기 때문에(Theodoret), 분명 이때는 솔로몬 즉위 초(B.C.970년 경)의 일로서, 기브온 산당에 일천 제사를 필한 직후였을 것이다.

(주); 창기 두 계집이 - '창기'(娼妓)에 해당하는 '자나'(*)가 반드시 '창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자들은 여기의 '창기'를 '여관집 여 주인'(hostess)등으로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B hr, Hammond). 또 혹자는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하도록 하라'는 신 23:17의 율법에 근거하여 이들을 이방인 창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Grotius). 그러나 율법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창녀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내내 존속해 왔고(IDB), 또한 이들은 여관을 거처로 삼아 여행자들에게는 여관집 주인 같은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으며(창 38:14), 그리고 본문의 창기들은 한 집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17절), 이들의 남편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원래의 번역과 의미가 타당하다고 본다.

(주);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 분명 이 '두 창기 사건'은 하위 재판관들에 의해 해결되지 못한 어려운 사건으로서, 결국 최고 재판관인 솔로몬 왕에게까지 올라온 어려운 사건이었다. 따라서 당시 솔로몬은 일종의 시험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만일 솔로몬까지도 이 사건을 해결치 못한다면, 그는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 지혜와 자질이 의심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를 위하여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케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했던 것이고(9절), 하나님께서는 그 응답으로 송사(頌辭)를 듣고 분별할 줄 아는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솔로몬에게 주셨던 것이다(11, 12절).

성 경: [왕상3:17,18]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본문은 재판관이 판단을 내리는데 필요한 외적 증거나 증인이 전혀 없는 상황임을 보여 준다. 아마도 이들은 혼자서 해산 해산(解産)했거나 서로 돕거나 했을 것이다. 실제 히브리 여인들은 건장하기 때문에 오늘날도 남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해산한다고 한다(Hammond,출 1:19). 따라서 그렇게 일이 진행되는 동안, 두 여인 외에는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재판관은 가장 확실한 증인이자 고소인인 이들 두 창기의 내적 진심을 드러내게 하는 것 외에는 진실을 가릴 방도가 도무지 없는 어려운 재판이었다.

(주);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 아마 이 두 여인은 같은 여관을 거처로 삼고 매춘 행위를 하는 창기였던 것 같다. 실제 당시 가나안 땅의 어떤 여관에는 이러한 창기들이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수 2:1).

성 경: [왕상3:19]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누우므로 - 영문 성경은 각각 '위에 몸을 두다'(lay on, NIV RSV), '과중하게 싣다'(overlade, KJV), '굴리다'(roll over, Living Bible) 등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공동 번역은 '깔아 뭉개다'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잠자던 도중 부주의하게도 아기를 깔아 질식사(窒息死)시킨 것을 말한다.

성 경: [왕상3:20]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내 아들을...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 인도의 자타카(Jataka)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Cowell). 즉 이 장면과 비슷하게도 거기에는 한 여자가 목욕하는 동안 여귀(女鬼)가 아기를 훔쳐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 내용이 있었다. 따라서 혹자는 여기 '두 창기 사건'이 그러한 인도 설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James A. Montgomery,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The Books of kin-gs).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도 자타카 설화는 여귀(女鬼)가 등장하는 등 그 사건이 완전히 신화적 형태인 데 반해 여기 두 창기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술되고 있고, 또한 자타카 설화와는 달리 고도로 윤리화된 형태를 갖고 있다. 즉 본절의 '두 창기 사건'은 솔로몬 왕의 즉위 초라는 역사성, 이스라엘의 어떤 여관에 함께 거처하고 있는 두 창기 사이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의 개연성, 그리고 내면의 모성애를 이용하여 지혜롭게 판결을 내린 윤리성 등이 골고루 갖춰진 실제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성 경: [왕상3:21]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미명(未明)에 - '미명'(*, 보케르)은 종종 '아침'으로도 번역되나(창 1:5; 24:54;삼상 5:4 등), 정확하게는 이른 아침 동틀 무렵 즉 '새벽'(출 14:24;삿 16:2;대상23:30)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곧 이어지는 '아침에'와 함께 점점 날이 밝아오는 상태를 알린다.

(주); 본즉 죽었기로(*, 힌네메트) - 직역하면 '보라! 죽어 있도다'(behold, itwas dead, KJV)란 뜻으로, 곧 여인의 경악과 놀라움이 나타나고 있는 장면이다.

(주); 자세히 보니 - 여기서 '자세히 보다'(*, 빈)는 꼼꼼하게 살펴 분별하여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단 10:1;삼상 3:8;스 8:15;시 37:10).

성 경: [왕상3:22]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다른 계집은 이르되 - Living Bible은 '이르되'를 '끼어들되'(interrupted)로 번역함으로써, 다른 여자가 도중에 말을 가로막고 끼어드는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

(주);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 양쪽 모두 자기 주장의 확신과 정당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아무런 증인도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진행되는 모습은 판단의 어려움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성 경: [왕상3:23]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왕이 가로되 - 여기 이 '두 창기 사건'을 왕이 직접 재판하게 된 까닭은 아마도 하급 재판 기관에서 이를 잘 판결할 수 없었던 탓일 것이다. 사실 율법에 의하면, 어떤 사실의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다(신 19:15). 그런데 이 사건에는 한 사람의 증인조차 없었다. 한편 율법은 재판에 임하는 것을 곧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보았다(신 19:17). 따라서 올바른 판결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28절).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 사건을 잘해결함으로써 그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백성들 앞어 명백히 입증해야 했다.

성 경: [왕상3:24,25]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외적(外的) 증거가 전혀 없었음로, 이제는 내적(內的) 증거를 통해 사실을 밝혀내야 했다. 그것은 두 여자 중 누가 참 모성애를 갖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두 여자 자신들이 이 사건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의 심령 깊숙히 감추인 은밀한 부분까지도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다(잠21:2; 미 6:4;롬 2:16).

(주);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반은 저에게 주라 - 혹자들이 비평하는 것처럼, 솔로몬의 이 명령은 결코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한 불확실한 모험이 아니다. 기브온 산당의 일천 번제 이후 솔로몬은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통찰력과 총명한 지혜를 하나님께 부여받았다(12절). 따라서 솔로몬은 두 창기 사건의 본질을 명쾌히 파악하고 있었다. 즉 아이를 죽인 어미는 자신의 부주의와 소홀로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과 수치감, 그리고 산 아들을 품고 있는 어미에 대한 강렬한 질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순간 아이를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실제로는 자신의 아이가 아닌) 그 산 아이에 대해서 진짜 어미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적 모성애(母性愛)는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솔로몬은 신적(神的) 지혜로 이미 간파했고, 따라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솔로몬은 이처럼 산 아이를 칼로 잘라 두 여자에게 공동 분배하라는 일견 기괴하고 잔인한 명령을 과감히 내린 것이다.

성 경: [왕상3:26]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 여기서 '마음'에 해당하는 '라함'(*)은 '창자'(bo-wels, KJV)란 뜻이다. 실제 희노애락을 느낄 때 오장 육부에 영향이 미침을 보고,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곳 창자를 감정과 정서의 좌소로 보았다(J. Hammond). 같은 맥락에서 신약 성경은 '스플랑크나'(*)란 단어를 사용했다(고후 6:12;7:!5;빌 1:8;몬 1:7,20). 또한 이 말은 '자궁'(womb)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을 향해 본능적으로 강력히 발(發)하여지는 모성애를 시사해 준다.

(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 왕의 명령의 진의(眞意)도 모르고 선뜻 동의하는 이 여자의 말은 모성애의 참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따라서 이 여인이 애초에 보였던 아이에의 강한 집착(20,22절)도 사실은 진정한 아이 사랑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질투와 소유욕 때문이었음이 자명해지고 말았다. 따라서 그 여인은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생명을 물화(物化)시키는 지극히 비 인간적인 응답을 선뜻 하고야 만 것이다.

성 경: [왕상3:27]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 두 여자의 반응을 통해 참된 모성애가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히 분별해 낸 다음 솔로몬은 명쾌히 판결을 내린다. 결국 이것은 기브온 산당에서 응답받은 대로(11-14절), 솔로몬에게는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총명한 지혜가 있었고, 그 결과 인간 감정의 움직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Barlow). 한편, 여기서 그로티우스(Grotius)는 이와 비슷한 판결 사건의 일례로서, 디오도루스 시큘루스(Diodorus Siculus)의 글에 나오는 한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있다. 즉 어느 날 트라키아의 왕 아리오파르니스(Ariopharnis, King of the Thractans) 앞에 세 청년이 와서 각기 자신이 키메르 왕국의 왕자라고 주장하면서 공정한 판결을 요구했다. 이 때 트라키아 왕은 선왕(先王)의 시신을 향해 가장 정확히 창을 던지는 자가 곧 왕의 계승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시신을 향해 힘껏 창을 던졌으나, 한 사람은 창 던지기를 거부했다. 이 때 트라키아 왕은 바로 창 던지기를 거부한 그 청년이 키메르 왕국의 왕자라고 판결 내렸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Vol. ,p. 43).

성 경: [왕상3:28]

주제1: [솔로몬의 지혜]

주제2: [솔로몬의 명판결]

(주);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 두 창기 사건의 재판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솔로몬의 권위가 백성들의 마음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고, 그 결과 백성들은 경외하는 심정으로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백성들의 마음속에 이와 같이 권위에의 자발적 복종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심상 11:7). 그러므로 결국 재판 결과를 통해 저자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응답받은 대로(11-14절) 하나님께로부터 총명한 지혜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솔로몬이 후계자 르호보암에게는 이같은 지혜가 없었기에 불행히도 백성들의 순종도 없었다(12:1-18).

(주);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권위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수 1:!7; 삼상 11:6,7;왕상 1:37). 그런데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의 표정은 재판의 지혜로운 판결이었다. 이것은 이전의 지도자들이 군사적 승리로서 권위의 표정을 보여 주었던 것에 비해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요구되는 권위였던 것이다(삿 6:12,14;삼상 11:11,15;18:27,28 등). 한편 본절은 12절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왕상4:1]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내각(內閣)]

(주);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 솔로몬이 왕이 된 사실을 새삼스럽게 기술하는 까닭은 다음에 계속해서 내각, 행정 구역, 문화 및 건축 등 솔로몬 왕국의 일반적인 면모를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마치 국정(國政) 보고서의 첫 서두와도 같은 공식적 서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작되는 4장 전체는 연대순으로 기록되었다기 보다는 솔로몬 통치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Dentan). 한편 이스라엘이 왕정 체제로 들어서게 된 이후 솔로몬 이전에 두 왕이 있었다. 그 두 왕은곧 사울과 다윗이다. 먼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사사 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전되어 가는 과도기의 왕으로서, 당시 이스라엘은 지파들간의 근린 동맹(近燐同盟)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료 정치나 세금 체제, 궁정생활 등이 미숙했을 뿐 아니라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런고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에 의해 발전되었고 확장되었다. 즉 다윗은 국내적으로는 여러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체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주변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여 국경을 넓히고 조공을 거두어 들였다. 무엇보다도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아 강력한 수도를 만들었다. 다윗은 이러한 모든 일을 수행키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다윗도 그의 통치 초기에는 이스라엘의일부만을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숱한 피를 흘려 이룩해 놓은 거대한 왕국을 순순히 이어 받았다. 따라서 솔로몬의 역할은 거대한 왕국 이스라엘을 더욱 결속력있게 하나로 결합시켜 유지해 나가며, 그로 인해 대내외로 힘을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솔로몬은 무엇보다 정치,행정,외교,세제 등의 조직을 더욱 확대 개편하고 체계화시키는 일과 중앙 집중화시키는 일을 착수해야했다. 아무튼 솔로몬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 최전성기의 왕으로서,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솔로몬처럼 그의 생애 내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결국 이 모든 것은 다윗 언약(삼하 7:12-16)에 근거하여 기보온 산당에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3:11-14)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결과였다.

성 경: [왕상4:2]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내각(內閣)]

(주); 신하 - 여기서 '신하'의 '하사림'(*)은 다윗의 부하들을 일컬을 때는 사용되지 않았다(삼하 8:16-18;20:23-26). 이러한 사실은 다윗 시대에 비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국가 조직이 더욱 발전하고 정착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B hr).

(주); 이러하니라 - 본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솔로몬의 신하들의 관직(官職)을 그 순서에서 살펴보면 솔로몬 시대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즉 종교, 행정, 관료가 우선시되는 평화의 시대인 것이다(Keil). 그러나 이전 다윗의 시대는 군대 장관이 최우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전쟁의 시대였다(삼하 8:16;20:23).

(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 - 본절은 여러 가지 해석의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즉 (1) 성경 여러 곳에서 사독의 아들은 '아히마아스'인 것만으로 나오고 있고(삼하 15:27;18:27;대상 6:8) (2) 제사장 아사랴(아사리아)는 아히마아스의 아들이지 사독의 아들이 아니며(대상 6:9) (3) 본절 외에 4절에서 제사장들의 이름이 구태여 한번 더 등장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우선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가 누구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성경 용례상 종종 나타나듯 여기서도 '아들'을 가리키는 '벤'(*)이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2:8;창29:5;31:28등). 아사리아는 사독의 후손으로 곧 그의 손자일 것으로 보는 견해(Hammo-nd). 그런데 이 견해의 난점은 시간 간격상 사독의 손자가 당시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를 나이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2) 아사리아는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형제일 것이라는 견해(Thenius).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더구나 제사장 가문의 족보를 알리는 역대상 6장에 위배된다. (3) 본문(2절)을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로 고쳐 읽은 다음 3절과 연결시켜 아사리아를 시사의 아들 엘리호렙과 아히야와 같이 서기관으로 보는 견해(the Vulgate, Luther).그러나 이러한 본문 수정은 무엇보다 문법상 액센트 문제, 연계사 와우(*)탈락 문제등으로 인해 지지받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난점에도 불구하고 (1)의 견해를가장 타당한 견해로 채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난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면 해결될수도 있다. 첫째, 아사리아의 부친 아히마아스는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로 대제사장직 수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아사리아가 보다 유명한 조부 사독의 이름하에 나올 수 있었다. 둘째, 솔로몬 시대에 아비아달과 사독이 대제사장직으로 있기는 하였으나, 아비아달은 곧 파멸되었고 사독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도록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사리아가 이들과 같이 그리고 이들에 앞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셋째, 당시 사독은 매우 고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길었기 때문에, 사독의 손자가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를 수 있는 나이는 계산상 결코 불가능하지않다(Pulpit Commentary). 한편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아사리아의 직위인 '제사장'이 어떤 직위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카일(Keil)과 베르(B hr)는 여기 '제사장'의 '하코헨'(*)은 '총리 대신'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그들은 '코헨'(*)은 삼하 8:18에서 '대신'(大臣)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또한 솔로몬 왕국의 관료 서열 중 맨 처음에 등장하는 위치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즉 성경 용례상 '코헨'이란 용어는 거의 대부분 순수히 '제사장'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de Va-ux, BDB). 그리고 솔로몬 왕국의 가장 큰 업적은 성전 건축 사업에 있는 것인 만큼,모든 관료들 중 대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릴 수 있다. 즉 아사리아(Azariah)는 사독의 손자로서(대상 6:8,9), 사독이 고령으로 맡은 바 대제사장직을 수행치 못하게 되었을 때 부친 아히마아스 대신 그 직을 승계하여 대제사장으로서 솔로몬 왕국에 봉사한 인물이다.

성 경: [왕상4:3]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내각(內閣)]

(주); 시사 - '시사'(Shisha)는 삼하 8:17의 스라야, 삼하 20:25의 스와, 대상 18:16의 사워사와 동일 인물일 것이다(Keil, B hr, Hammond). 그는 다윗 시대의 서기관이었다.

(주); 서기관(書記官) - '서기관'(*,소페림)의 임무는 나라의 공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 외에도 재정(財政) 문제를 맡는 것도 포함한다(왕하 12:10). 따라서 서기관(scribe, KJV;secretary, NIV)은 매우 중요한 관직이었다(B hr). 관직 명단의 순서도 이를 반영한다(Hammaond). 한편 이 직책은 세습이 된 것 같다. 시사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서기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 여호사밧 - 그는 다윗 왕 때부터 이미 사관(史官)이었다(삼하 8:17;20:24).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솔로몬 시대에도 계속 유임된 것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왕(父王)에게 충성하던 인물들이 그대로 솔로몬에게 등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것 역시 솔로몬 시대가 평화 시대였음을 보여 주는 단면이다.

(주); 사관(史官) - '사관'(*, 마즈키르)의 히브리 동사 '자카르'(*)는 '기억하다','생각해 내다'등의 뜻이다. 따라서 사관(recorder)은 '생각해내는 사람'으로서 국사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어떤 계획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왕으로 하여금 어떤 계획을 기억하도록 상기시켜 주는 임무도 가졌다(Dentan). 이런 맥락에서 드보(De Vaux)는 사관을 궁중 의전(儀典) 관장으로 보았다.

성 경: [왕상4:4]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내각(內閣)]

(주); 브나야는 군대 장관이요 - '브나야'(Benaiah)에 대해서는 삼하 23:20-23;왕상 1:8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브나야를 제외한 솔로몬의 중신들은 모두 종교, 행정, 궁정의 관료들로서 평화 시대에 걸맞는 관직들이었다(Wordsworth).

(주);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요 - 제사장직을 파면당한(2:27)아비아달의 이름이 여기 다시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솔로몬이 그를 다시 복직시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Clericus,Grotius). 그리고 또 혹자는, 아비아달은 제사장의 직무 정지를 당했을 뿐 제사장직 자체를 박탈당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The-odoret). 그러나 본장이 솔로몬 통치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비아달은 솔로몬 즉위 초기에 한동안 솔로몬 치하에서 제사장직을 맡았으므로 여기서 언급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Hammond, Philppson). 그리고 솔로몬 치하에서 실질적인 대제사장을 수행한 자는 사독의 손자 아사리아(아사랴)이지만(1절),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왕국 건설에 이바지한 공이 컸으므로 여기에 기록된 것이다(Patterson).

성 경: [왕상4:5]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내각(內閣)]

(주);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 - 아사리아 혹은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심'이란 뜻인데, 당시에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성경에서 이러한 이름을 가진 동명 이인은 대략 30명가량 된다. 한편, 여기서 '나단'은 데니우스가 주장하듯 다윗 시대의 유명한 선지자 나단이 아니고, 삼하 5:14에 나타나는 다윗의 아들 '나단'이다(Keil,B hr). 따라서 나단의 아들들인 관리장 아사리아와 대신 사봇은 솔로몬의 조카들이었다.

(주); 관리장 - '관리장'(*,알 하니차빔)은 '관장들'(*,나치빔)'위에서'(*,알) 관리하고 지휘하는 직책이다. 따라서 관리장(secretary of state,Living Bible)은 7-19절에 나오는 열 두 관장의 우두머리이다.

(주);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 '대신'(*,코헨)은 2절에서처럼 '제사장'(pri-est, NIV)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공동 번역도 '사제'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이 직책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반 제사장들과는 달리 다윗 시대와 마찬가지로(삼하8:18), 왕의 영적이고 의례적인 일들에 대해 논의하고 조력하는 일종의 고문관일 것으로 추정된다(Patterson). 이 직책을 부연 설명하는 '왕의 벗'(*, 레에함멜렉)이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당시에 '왕의 벗'은 공적 직무의 호칭으로서 명예와 경의의 직함으로 간주되었다. 다윗 시대에는 '후새'가 이같이 불려졌다(삼하 15:37;16:16). 이상으로 미루어 '대신'은 왕의 신뢰할만한 논의 상대로서 일종의 고문(顧問)과 같은 직책인 듯하다(Keil).

성 경: [왕상4:6]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내각(內閣)]

(주); 궁내 대신 - '궁내 대신'(*, 알 하바이트)은 왕궁의 살림을 도맡은 관리자요 청지기 직책이다(16:9;왕하 18:18;사 22:15). 즉 궁중사를 총괄하는 이 직책은 이전에는 없던 것인데, 솔로몬의 부요하고 화려한 궁중생활 때문에 새로 생긴 직책이다(23절;18:3등). 드보(De Vaux)는 'master of palace'로 그리고 리빙 바이블(LivingBible)은 'manager of palace affairs'로 각각 번역했다.

(주); 아도니람은 감역관이더라 - 아도니람은 아도람과 동일 인물일 것이다(삼하 20:24). 그렇다면 그는 다윗 시대때부터 같은 직책을 맡아온 것이다(B hr,Keil). 한편 '감역관'(*, 알 하마스)은 세금과 부역(賦役)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이 직책은 도가 지나칠 때 백성들의 미움을 사기 쉬운 자리였다. 이런 이유로 후에 르호보암 때 아도니람은 백성들의 돌에 맞아 죽는다(12:18).

성 경: [왕상4:7]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솔로몬이 또 이스라엘 위에 열 두 관장을 두매 - '관장들'(*, 나치빔)의 주요 임무는 1차적으로 맡은 바 각자의 지역에서 왕실의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는 것이다. 즉 '세금 징수관'인 것이다(Rosenmuller). 그런데 이들이 맡은 바 임무를 원활히 수행키 위해서는 각자의 지방에서 도백(道伯)과 같은 정치 권력을 지녔을 것이다(Jos-ephus), De Vaux). 한편 이들 열 두 관장이 담당한 구역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기존 열 두 지파의 구획과 유사하긴 하나 꼭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필요한 물량을 일정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각 지역 생산량의 많고 적음을 따라 구역을 나눴기 때문이다(Keil). 같은 의미에서 '열 두 관장'을 둔 이유 역시 기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년 동안의 물량 공급 횟수인 '열 두 달'에 기인한 것이다(Hammond).

(주); 왕과 왕실을 위하여 식물을 예비하되 - 이는 솔로몬 왕국의 중앙 집권화가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이는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실이 모든 지파를 완전 장악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혹자는 이러한 열 두관장 제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를, 이는 당대의 이방 폭군 제도와 다를 바 없는 착취 제도라고 비난한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왕정 체계를 사무엘에게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듯이(삼상 8:10-18), 왕정 제도가 백성들의 재산과 권리를 제어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점이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대로(3:13), 솔로몬 왕국에 부와 영광이 충만했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비단 솔로몬뿐만 아니라 그의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을 뿐 아니라(20절), 포도 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25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 각기 일 년에 한달씩 식물을 예비하였으니 - '일년 중 한달씩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 그들 각자의 임무'라는 뜻이다. 즉 차례대로 한달 분씩의 공급 책임을 졌다는 말이다. 공급 품목은 아마 각 지역의 토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현물(現物), 또는 세금이었을 것이다(J.Hammond).

성 경: [왕상4:8]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에브라임 산지 -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땅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세겜 건너편까지를 말한다(수 17:14-18;24:33). 이곳은 팔레스틴 중부의 산악 지대로서 정착하여 살기 좋은 비옥한 땅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벧엘과 실로에 사사 시대의 두 주요 성소가 있었다(Cundall).

성 경: [왕상4:9]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마가스 - 이 지명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위치 또한 분명치 않다. 단지 본절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단 지파 지역의 어느 곳일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주); 사알빔 - 수 19:42의 '사알랍빈'과 동일 지역. 오늘날의 위치는 '얄로'(Yalo) 북서쪽의 '셀빗'(Selbit)으로 추측된다(Keil).

(주); 벧세메스 - 이 지역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 독자들에게 혼란을 준다. 즉 어떤 때는 유다지파의 성읍으로(수 15:10), 어떤 때는 잇사갈 지파의 성읍으로(수 19:38)등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의 연관 관계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본절의 벧세메스를 수 19:41의 '이르세메스'와 동일시하다(H-ammond, Keil). 그리고 현재의 '아인 세메스'(Ain-Shems)로 추정된다.

(주); 엘론벧하난 - 이 지명은 수19:43의 '엘론'의 변형된 명칭이거나 '벧하난'이라는 또다른 성읍과의 결합된 명칭일 것이다. 70인역(LXX)은 '벧하난' 앞에 '-까지'를 뜻하는 접속사(* ,헤오스)를 삽입하여 '엘론에서 벧하난까지'로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상의 지명들은 단 지파에 속한 지역으로 여겨진다(수 19:40-48).

성 경: [왕상4:10]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아룹봇 - 이 지명은 이 곳 이외에 다른데서는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헤벨 땅에 속한 어느 지역일 것이다.

(주); 소고와 헤벨 온 땅 - 소고와 헤벨 두 성읍은 크게는 헤벨(Hepher) 땅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헤벨 땅은 해안에 위치한 샤론(Sharon)평원의 남부 지방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지명들을 유다 지파에 속한 지역으로 주장하는 몇몇 주석가들의 주장은 혼돈을 일으키기 쉽다(B hr,Keil). 왜냐하면 솔로몬 당시 유다 지방과 헤벨 땅은 그 사이에 벤데겔의 행정구역(9절)이 있었으리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4:11]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돌 높은 땅 - '돌'(Dor)은 갈멜 산남쪽으로 지중해 연안의 한 성읍이다. 그리고 이 성읍은 여러 세기 동안 중요한 항구 도시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한다(Reed).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이에 대항한 가나안 왕들의 동맹 중 일원이 이 돌의 왕이었다(수 11:2;12:23). 한편 '돌 높은 땅'은 이 성읍과 샤론(Sharon) 평원 일부를 포괄하는 지역이다(Josephus,Thenius). 지역 특성상 비옥한 샤론 평야를 끼고 있어야 왕실에 곡물을 댈 수 있었을 것이다(Hammond).

(주); 벤아비나답 - '벤아비나답'(*)은 '아비나답의 아들'(the son of Abin - adab)이다. 이 아비나답은 이새의 둘째 아들이자 다윗의 형 즉 솔로몬의 큰 아버지일 것으로 본다(PEB). 그러므로 벤아비나답, 곧 아비나답의 아들은 솔로몬의 사촌이 된다.

(주); 저가 솔로몬의 딸 다밧으로 아내를 삼았으며 - 벤아비나답이 솔로몬의 사촌이라면 그는 자기 조카와 결혼한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친 결혼은 고대 사회의 왕실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유사한 예를 찾아 볼수 있다(창24:4;28:2;29:19;수 15:16,17;삿 14:3).

성 경: [왕상4:12]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다아낙과 므깃도 - 이 성읍들은 므낫 세 지파의 경내에 속했으며(수 12:21;17:11)갈멜 산의 동쪽 기슭 곧 이스라엘 평원 끝에 위치하였다.

(주); 이스르엘 - 본절의 다른 성읍들과는 달리 이 성읍은 잇사갈 지파의 경내에 속하였다(수 19:18). 그리고 이곳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IDB)한편 아합 왕 시대에는 이 성읍이 왕의 거주지가 되었다(18:45,46). 또한 후일 여기서 나봇의 포도원을 둘러싸고 사건이 일어난다(21장). 이로 미루어 이스르엘(Jezreel)은 매우 비옥한 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세린'(Zerin)이다.

(주); 사르단 - '스레다'(7:46;대하 4:17)라고도 불리웠던 이곳은 여호수아의 영솔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널 때 강물이 기적적으로 멈춰 쌓였던 곳이다(수3:16). 또한 솔로몬 시대에는 히람(Hiram)이 성전 건축을 위해 놋그릇들을 녹여부었던곳이도 한다(7:46).

(주); 벧스안 - 이 성읍은 므낫세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삿 1:27), 이스르엘 골짜기 동편끝에 위치해 있다(수 17:16). 현재의 '베이산'(Beisan)이다(Robinson). 그런데 '벧스안 온 땅'이라 할때는 이스르엘 골짜기 동편 끝에서 요단 골짜기 서북단에 이르는 초승달 형의 옥토 지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곳은 전략상 요충지였으므로, 역사적으로 외세의 많은 침공을 당했다(Hamilton).

(주);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 - '바아나'(Baana)는 사관(史官) 여호사밧(3절)과 형제일 것이다(Keil).

(주); 아벨므홀라 - 이곳은 벧스안 남방 16Km 지점이며, 선지자 엘리사의 고향이다(19:16;삿 7:22).

(주); 욕느암 - 레위인의 성읍 '욕므암'(대상 6:68)과 동일 지역이다. 그리고 '깁사임'(수 21:22)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B hr). 그러나 이 성읍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혹자는 스불론 경내로(Beek), 또 혹자는 므낫세 경내로(Hammond 등) 본다.

성 경: [왕상4:13]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길르앗 라못 - 갓 지파의 성읍으로(수 20:8), 혹은 '라못 길르앗'으로 불리운다. 길르앗 지방 동북쪽의 중요 요새지로서 레위인의 성읍이며(수 21:38;대상 6:80) 요단동쪽의 세 도피성 중 하나이다(신 4:43;수 20:8). 주요 요충지였으므로 역사상 이곳에선 많은 전투가 있었다(15:20;22:3;왕하 8:28;9:14).

(주); 야일의 모든 촌 - 즉, 민 32:41의 '하봇야일'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므낫세 지파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지방을 공격하여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때 므낫세 지파의 용사 야일(Jair)이 빼앗은 성읍들을 통칭 '하봇야일'(Havoth-Jai-r, '야일의 촌락들'이란 뜻)로 부르게 되었다(신 3:14;수 13:30).

(주); 바산 아르곱 땅의 성벽과 놋빗장 있는 큰 성읍 육십 - '바산' 곧 '아르곱'은 길르앗 라못(혹은 라못 길르앗)의 동북 쪽에 위치한 지역이다(신 3:4 주석 참조). 원래 이지역의 60개 성읍은 바산 왕 옥(Og)의 성읍들로 모세 영솔하의 이스라엘이 탈취한 것이다(신 3:1-11). 그런데 그 성읍들은 높은 성벽과 문과 빗장을 가졌고 그 외에 성벽없는 고을이 많이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신 3:5). 따라서 '야일의 모든 촌'과 아르곱(Argob) 땅의 이 '성읍 육십'은 분명 구별된다(Keil).

성 경: [왕상4:14]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마하나임 - 얍복 강 북쪽에 위치한 길르앗 지방의 중요 도시로 갓 지파에 속한 땅이다(수 13:26,30,;21:28). 본래 이 지명은 야곱이 지은 것으로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이다(창 32:1,2). 요단 동편의 이곳은 왕들의 피신처로 종종 이용되었다(삼하2:8,9;17:24-27).

(주); 잇도의 아들 아히나답 - '아히나답'(Ahinadab)은 대하 9:29의 '선견자 잇도'의 아들로 여겨진다(J.Hammond).

성 경: [왕상4:15]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납달리 - 열 두 행정 구역 중 최북단에 위치한 납달리 지파의 영토이다. 납달리 서편에는 아셀, 남쪽에는 스불론, 잇사갈 지파들과 맞닿아 있다.

(주); 아히마아스 - 카일(Keil), 헤몬드(Hammond)등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 인물을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Ahimaaz)일 것으로 본다(삼하 15:27; 17:17).

(주); 솔로몬의 딸 바사맛으로 아내를 삼았으며 - 납달리 지역의 관장 '아히마아스' 역시 돌 지역의 '벤아비나답'과 마찬가지로(11절)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고대 사회의 풍습상 왕은 신하들 중 충성심이 강하고 유능한 인물에게는 이처럼 딸을 배필로 허락함으로써 포상을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왕실(王室)도 공고히 했다. 어쩌면 이를 위해서도 당시 왕의 다처다첩(多妻多妾)이 요구되었을 것이다(Rawlinson).

성 경: [왕상4:16]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아셀 - 납달리 서쪽 곧 지중해에 연한 지역으로 아셀 지파의 영토이다.

(주); 아롯 - 이곳의 위치는 밝혀진 바 없다. 고대 주요 역본들에는 '베아롯'(*)으로 되어 있다(LXX,Vulgate,Syriac,Arabic). 그러나 유다와 단에 위치한 '바아롯'(수15:24;19:44)과는 무관하다(Keil,Hammond).

(주); 후새의 아들 바아나 - '바아나'(Baanah)는 '다윗의 벗'인 아렉 사람 후새의 아들이다(삼하 15:32).

성 경: [왕상4:17]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잇사갈 - 잇사갈 지파의 영토로서 12절의 지역들 즉 다아낙, 므깃도, 벧스안 등을 제외한 이스르엘 평야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서북으로 스불론, 남으로 므낫세 사이에 위치한다(수 19:17-23).

성 경: [왕상4:18]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베냐민 - 베냐민 지방은 여타 지역에 비해 수도 예루살렘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이 지역은 북으로 에브라임, 남으로 유다 사이에 위치하였다(수 18:11).

(주); 엘라의 아들 시므이 - 이 인물은 아도니야의 왕위 찬탈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던 1:8의 시므이(Shimei)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Keil,Patterson).

성 경: [왕상4:19]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열 두 관장]

(주);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과 바산 왕옥의 나라 길르앗 땅 - 아모리 왕 시혼(Sihon)과 바산 왕 옥(Og)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을 저지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패퇴시키고 오히려 그 땅을 차지하였다(민 21:21-35). 그런데 본절의 '길르앗 땅'은 13,14절의 벤게벧과 아히나답의 관할 지역을 제외한 요단 강 동남부 지역을 가리킨다(Keil). 왜냐하면 (1) 보통 길르앗은 요단 동편 전체를 말하며(신 34:1;삿20:1) (2) 13,14절의 지역은 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3) 요단 동편 전체에서 이북쪽 지역을 제외하고도 사해(死海)까지 이르는 므낫세의 땅과 갓의 땅은 매우 광활하기 때문이다(민 21:24,33).

(주); 우리의 아들 게벧 - '우리'(Uri)의 아들 '게벧'(Geber)은 '벤게벧'(13절)의 아버지이다(J.Hammond).

(주); 그 땅에서는 저 한 사람만 관장이 되었더라 - 이 구절의 해석은 구구하나, 대체로 '그렇게 넓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관장이 다스렸다'는 뜻으로 보고 있다(B hr,Keil).

성 경: [왕상4:20]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 창 22:17의 "바닷가의 모래같이"라는 표현이 본절에서 그대로 반복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찍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자손 번성의 약속이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 성취되었다는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자 함이다(창 13:16;15:5;22:17).

(주);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 Living Bible은 본절 전체를 "이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는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으며 만족을 누리는 국가였다"(Israel and were a wealt-hy, populous, contented nation at this time.)로 번역하였다. 또한 공동 번역은 "인구가 불어났지만 먹고 마시는 일에 아쉬움을 모르며 잘 지냈다"로 번역하였다. 결국이 구절은 솔로몬 시대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태평 성대(太平聖代)의 상태임을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고고학은 이 시기와 관련된 많은 곡식 창고들을 발굴해 내었다. 한편, 그런데 이러한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는 솔로몬 왕국이 외교(21,24절), 경제(22,23절), 국방(26절)에 있어서 놀라운 번영을 이룩한 것은 결국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이...다스리므로"라는 표현이 반복 강조되고 있다(21, 24절).

성 경: [왕상4:21]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하수(河水) - 유브라데(Euphrates)강을 말한다(창 31:21;출 23:31;수 1:4;삼하10:16).

(주); 블레셋...애굽...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 솔로몬 왕국의 판도가 북(北)으로는 유브라데 강에서 서(西)로는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그리고 남(南)으로는 애굽의 국경에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 판도내의 모든 국가들이 솔로몬의 속국이 된 것이다. 물론, 모압, 소바, 에돔 등은 선왕 다윗이 정복한 국가들이지만 솔로몬 시대의 국력이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할 수있었던 것이다(삼하 8:1-14). 이처럼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종주국의 지위를가진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한편 본절은 창 15:18에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바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문자 그대로 성취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처럼 광할한 이스라엘의 판도에 대해 비평가들은 다소 과장된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 기록의 사실성은 다음 사항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1) 당시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암흑세기를 맞아 이렇다 할 강대국이 없었던 침체된 상태였고 남쪽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역시 극도로 쇠약하였던 21왕조의 치세하에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스라엘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들의 국경까지 팽창할수 있었던 것이다. (2) 또한 애굽 왕이 자기의 딸을 솔로몬에게 주었던 사실(3:1)도당시 솔로몬 왕국의 강성함이 어떠했는지를 잘 암시해 준다.

(주); 그 나라들이 공(貢)을 바쳐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 이 말은 이전 다윗왕때에 정복되었던(삼하 8:2-14) 모압, 소바, 다메섹, 에돔 등에 대한 지배권을 솔로몬 시대 동안에도 계속 유지하였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국가에서 강력한 통치자가 죽게 될 경우 주변 속국들은 조공을 철회하고 독립을 꾀하곤 하였다. 이것은새 왕의 통치 능력에 대한 일조의 시험이기도 한데, 따라서 새로 즉위한 왕은 자신의통치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정벌 원정에 나서곤 하였다. 그러나 다윗 사후 솔로몬 통치하에서는 이러한 정벌 원정이 필요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변 속국들이 변함없이 조공을 바침으로써 충성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평화 중에서 성전 건립에 전심 전력케 하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였다(Patterson). 한편, 당시 공물로 사용된 것으로는 금,은,옷,향품,갑옷,말,노새 등이 있었다(10:25). 역대하 9:14에는 위에서 언급한 나라들 외에 이스라엘 동남부의 아라비아 부족들도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람(소바,다메섹)과 에돔은 솔로몬 말년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만다(11:14-25). 그리고 솔로몬 사후(死後) 분열된 왕국은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로 잃게 된다.

성 경: [왕상4:22]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 '석'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코르'(*)는 '호멜'(*)의 후기 명칭인데(겔 45:14), 액체나 고체로 된 물질의 용량을 재는 제일 큰 단위이다(B hr).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얼마 만큼의 양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략 1석은 230리터로 추정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데니우스(Thenius)의 계산을 따라 본절의 밀가루 구십 석을 14,000명의 하루치 빵을만들 수 있는 양으로 본다(Hammond,Keil 등). 한편 여기서 '가는 밀가루'(fine flour)와 '굵은 밀가루'(meal)를 구별하여 기록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마 궁궐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었던 것 같다.

성 경: [왕상4:23]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살진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 여기서 '살진 소'는 살이 찌도록 외양간에서 사육한 비육우(肥肉牛)를 가리키고, '초장의 소'는 방목(放牧)하여기른 목장의 소를 가리킨다. 주석가 데니우스(Thenius)의 계산에 의하면, 본절의 고기의 양은 솔로몬 궁궐과 관련있는 14,000명의 인원이 각기 한근 이상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량은 고대 동양의 다른 강대국 왕궁들의 그것과 비교하면 지나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솔로몬 왕국의 경제적 풍요를 가히 짐작케 하는 것이다.

(주); 살진 새들 - '살진 새들'(*, 바르부림 아부심)이란 말은 여기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거위'같은 식용(食用)으로 사육된 조류(鳥類)를 지칭하는 듯하다(Gesenius,Hammond,Gray). 같은 맥락에서 혹자들은 '암탉'(Thenius,G.R.Driver) 또는 '수탉'(Kimchi)으로 보기도 한다.

성 경: [왕상4:24]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원문에서 '까닭'을 알리는 '키'(*)가 본절 초두에 있다. 이것은 본절이 솔로몬 왕국의 풍요한 생활이 가능했던 까닭을 설명하는 구절임을 보여 준다. 즉 본절에서와 같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 많은 왕궁의 소비량(22,23절)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 하수 이편 - '하수 이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베르 하나하르'(*)는 문자적으로는 '강 저편'을 의미한다. 영역본 RSV와 Living Bible은 구체적으로 이것을 '유브라데 강서편'(west of the Euphrates River)으로 번역하였다. 당시 솔로몬왕국의 판도는 유브라데 강을 넘지 않았다(21절). 그러므로 유브라데 강 서편의 솔로몬 영토를 '강 저편'으로 표현한 것은 열왕기서 저자가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유브라데 동쪽에 머물면서 본서를 기록하였음을 암시한다(Bahr,Hammond,Keil).

(주); 딥사 - '딥사'(Tiphsah)는 '탑사쿠스'(Thapsacus)라는 성읍으로서, 유브라데 서쪽 강변에 위치한 번창한 항구도시이다(Wycliffe). 솔로몬 왕국의 동북 국경 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인 이곳을 통해 솔로몬은 국가를 방어하고, 동시에 교역을 통해 많은 수입을 올릴수 있었을 것이다. 가사 - '가사'는 블레셋의 주요 성읍으로(수 13:3),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팔레스틴 최남단 도시이다(Hammond). 그러므로 '딥사에서 가사까지'라는 표현은 솔로몬 왕국의 실제 통치 구역으로서, 곧 솔로몬이 팔레스틴 전역을 폭넓게 다스렸음을 시사(示唆)한다.

(주); 모두 다스리므로...다 관할한바 되매 - 솔로몬 당시의 이스라엘 왕국의 통치 영향력은 세 구역으로 대별될 수 있다. (1) 왕국 중앙부에는 가나안 정복 당시와 흡사한 규모의 본토가 위치하였다. (2) 그 주위에는 조공을 바칠 의무가 있었던 에돔, 모압, 암몬, 아람, 다메섹 등의 나라들이 위치하였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중앙 정부로부터 파견된 총독에 의해 다스려지거나(삼하 8:6,14),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서 지방 왕족들에 의해 통치되기도 하였다. (3) 끝으로 솔로몬의 통치권을 수락해야만 했던 주변 속국들을 들 수 있는데, 블레셋을 비롯하여 북부 트랜스 요르단의 여러 왕국들이 그러하였다.

(주);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 - 원문상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솔로몬은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두와 평화하였다'이다. 공동 번역은 이러한 의미를 충분히 살리면서 '그는...사방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바로 대상 22:9의 "저는 평강의 사람이다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는 언약의 성취이다(Hammond).

성 경: [왕상4:25]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 저자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분열되기 이전의 번영기 즉 솔로몬 시대를 회상하며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 앞에서 언급된 솔로몬 왕국의 전체 세력 판도(21,24절)와는 구별하여 이 표현은 약속의 땅과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본토전 지역, 전 국민에게만 국한하는 표현이다(삿 20:1;삼하 3:10;17:11;24:2). 여기서 '단'(Dan)은 이스라엘 본토의 최북단에 위치한 성읍이며 '브엘세바'(Beersheba)는 최남단의 성읍이다(수 19:47;삿 18:27-31).

(주);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 포도와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작물(作物)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종종 평화와 안정 및 번영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사 36:16;미 4:4;학 2:19;슥 3:10). 본절 역시 태평 성대를 맞아 백성들이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Bahr,Hammon-d). 이와 비슷한 표현이 왕하 18:31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이처럼 이 표현은 평화와 안정된 생활을 가리키는 격언적 표현이 되었다. 따라서 후일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통치하는 왕국의 번영과 평강 및 안정을 가리키는 데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미4:4;슥 3:10).

성 경: [왕상4:26]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솔로몬의 병거(兵車)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 여기서 '외양간'(*, 우르와)은 말을 가두어 두는 '칸막이'(Keil) 또는 말의 먹이를 주는 '구유'(Hammond)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말 한 마리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Bochart). 한편, 여기서 '사만'(*, 아르바임 엘레프)은 '사천'(*, 아르바아 엘레프)의 필사상 오기(誤記)일 것이다(Keil).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까닭은 (1) 병행 구절인 역대하 9:25은 '사천'으로 기록되어 있고 (2) 왕상 10:26의 병거 일천 사백과 마병 일만 이천의 숫자로 미루어 '사천'이 보다 타당하기 때문이다(Patterson). 한편 외양간이 있는 병거성은 동북쪽 국경 수비를 위해 므깃도와 하솔에, 블레셋에 대비해 벧호론과 게셀과 바알랏에, 그리고 에돔에 대비해 아라바의 다말 등 각처에 축조되었다(Wevers, 9:15-19). 그리고 병거는 애굽, 헷, 아람 등지에서 수입해 왔다(10:29).

성 경: [왕상4:27]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예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 솔로몬 왕국의 12관장 체계(7절)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관장들(8-19절)은 충성스럽고 유능하여서 그들의 맡은 직무를 제때에 적절하게 수행하였다. 그럼으로써 그토록 큰 왕궁의 살림을 혼란없이 잘 유지하도록 하였다(M.Henry). 본절은 관장들의 성실과 유능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 경: [왕상4:28]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이스라엘의 태평 성대]

(주); 준마(駿馬) - '준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케쉬'(*)는 '말','낙타','노새'등 일반적으로 '빠른 짐승'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레케쉬'는 왕의 전령(傳令)이나 소식을 전하는 데 사용하는 말이나 병거를 끄는 말 등 우수한 품종의 말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에 8:10,14;미 1:13).

(주); 보리 - 팔레스틴지방에서는 우리가 보통 말의 먹이로 알고 있는 귀리가 나지 않았다. 대신에 이곳에서는 보리가 사료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Hammond,Kei-l).

(주); 그 말의 있는 곳으로 가져왔더라 - '그 말의 있는 곳'은 구체적으로 해당 구역 안의 병거성을 가리킨다(10:26). 본절로 미루어 열두 관장들은 자기 행정 구역 안에 있는 병거성의 보급도 책임졌던 것 같다.

성 경: [왕상4:29]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본절은 3:12의 약속 성취이다.

(주); 지혜 - '지혜'의 '호크마'(*)는 매우 실제적(practical)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적절히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Keil). 원래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때는 '솜씨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비단 장인(匠人)들 뿐만 아니라 시,음악 등 모든 문화의 분야에서 재능과 총명을 발휘하는 인물을 뜻한다(Dentan). 즉 '지혜로운 사람'이란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남다른 분별력과 통찰력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Patterson). 또한 '지혜'는 온전한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자신과 하나님간의 온전한 영적 상태에서 나온다는 사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Blank, 시 104:24;잠 3:19;사 31:2;렘 10:12;단 2:2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호크마)의 근본이라"(시111:10),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호크마)요"(욥 28:28) 등의 성구는 이러한 사상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수 있다.

(주); 총명 - '총명'의 '테부나'(*)는 예리한 판단력으로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정확히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Keil). 이것 역시 '지혜'와 마찬가지로 매우 실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주); 많이 주시고 또 - '또'의 '웨'(*)는 '그리고'(and)의 의미 외에도 '그러므로'(therefore)란 뜻도 있다. 따라서 본절은 '...많이 주셨으므로'라는 원인-결과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공동번역은 "...한없이 주셨으므로'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영문 성경들은 '그리고'(and)의 뜻을 취하고 있다(RSV,KJV,NIV).

(주); 넓은 마음 - '넓은 마음'의 '로하브 레브'(*)는 '다방면에 걸친 해박(該博)한 지식'을 뜻한다. 원문의 뜻은 '큰 넓이를 가진 마음'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마음'은 '두뇌','지식'의 뜻에 해당한다(Hammond). 그리고 '넓이'는 다양한 분야의 광범위한 지식을 수용(受容)할 수 있는 두뇌의 용량(容量)을 말한다(Keil).

(주);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 '바닷가의 모래'라는 표현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음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관용 어법이다(20절;창4:20;22:17;수 11:4;삿 7:12). 여기서는 앞의 '넓은 마음'과 관련하여 솔로몬이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성 경: [왕상4:30]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주); 동양 모든 사람 - 여기서 '동양 모든 사람'(sons of the East)은 팔레스틴 동쪽과 동남쪽에 분포된 넓은 의미의 아라비아인들을 가리킨다(Keil). 따라서 여기의 '동양'은 현재 사용되는 의미와는 달리 당시 이스라엘 편에서 본 '동양'이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하란, 메소보다미아인들을 포함하며, 동시에 스바, 아두매, 데마인들을 포함한다. 그런데 고대로부터 이곳은 문명과 문호의 발상지로 알려져 왔으며, 또한 신화적 내용을 담고 있는 많은 지혜 문서 및 다양한 격언적 지혜로 유명하였다(Patterson;렘49:7;욥 1:8).

(주); 애굽의 모든 지혜 - 피라밋에서 보듯 고대 애굽은 기하학, 천문학, 의학 등 오늘날의 자연 과학과 관계된 실제적으로 분야가 매우 발달하였다(Josephus,Herodotus). 따라서 당시 이러한 '애굽의 지혜'는 속담이 될 정도로 유명했다(사 19:11;31:1,2;행7:22).

(주);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 솔로몬의 문화적 업적이 지금으로 말하면 인문 과학과 자연 과학의 선진국이라 할 만한 나라들을 능가할 정도였음을 말하고 있다.

성 경: [왕상4:31]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주);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 - 카일(Keil)은 이 인물들을 솔로몬과 동시대의(of his time) 인물들로 보면서도, 야곱의 손자 세라의 아들들(대상 2:6)과 동일시하는 모순을 보인다. 그러므로 헤몬드(Hammond)의 주장처럼 이들을 솔로몬 당대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한편 이들 중 '에단'과 '헤만'은 시편의 저자인 듯하다(시 88:1;89:1). 그리고 '갈골'과 '다르다'(다라)는 '에단'과 '헤만'과 더불어 역대상 2:6의 족보, 곧 세라의 아들들로 등장하는 것 이외에는 더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여하튼 본절의 이 네 인물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문화, 예술에 있어 뛰어난 지혜의 사람으로 공인(公認)된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들보다도 뛰어났다고 말함으로써 솔로몬의 지혜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역사상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왕상4:32]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주); 잠언(簪言) 삼천 - 솔로몬의 잠언 삼천은 후세에 다 전해지지 않았고, 성경의 잠언은 그 일부로 약 삼분의 일 분량이다(잠 1:1). 아마도 후대로 전해지는 동안 필사(잠25:1)등의 과정에서 소실(消失)되었거나 혹은 가장 훌륭한 것만 추린 까닭일 것이다(Keil).

(주); 그 노래는 일천 다섯 - 이 노래들도 후대에 다 전해지지 않았다. 성경에서 아가서와 시편 72,127편정도가 그 노래 중에서 남은 것으로 보여진다(Patterson, Hammond,B-ahr). 혹자는 시132편도 이에 속한다고 주장한다(Ewald). 여하튼 이러한 솔로몬의 '잠언'(*, 마솰)과 '노래'(*, 쉬르)는 솔로몬의 뛰어난 신적 지혜가 반영된 것들로서, 궁극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들이기도 하다(3:12).

성 경: [왕상4:33]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주);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 오늘날의 식물학(植物學)과 같은 지식을 말한다. 이는 솔로몬 시대에 많은 학문적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반영한다. 보통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이와 같은 학술 활동도 활발한 법이다.

(주);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 레바논의 산들은 백향목의 주요 산지(産地)로서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 건축용 백향목을 수입한 곳도 여기이다(삼하5:11;7:2;왕상 5:7장;대상 14:1;대하 2장). 이 백향목(the cedar)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일 만큼 크고 튼튼했기 때문에 자주 영광, 힘, 호화(豪華)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Trever;시 29:5;37:35;아 1:17;렘 22:14). 한편 우슬초(the hyssop)는 관목(灌木)류에 속하는 키가 작고 털이 많은 식물이다. 따라서 본절은 가장 큰 나무에서 가장 하찮은 관목에 이르는 모든 식물의 총칭(總稱)을 표현한 말이다.

(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 - 이것은 동물을 그 서식지(땅,하늘,물)및 동작(걷는 것, 나는 것, 기는 것, 헤엄치는 것)에 따라 나눈 성경의 일반적인 분류법이다(창 1:20-23,28). 따라서 모든 동물을 지칭한다. 결국 본절은 식물학(植物學,bot-any)과 동물학(動物學,zoology)에 있어서, 솔로몬이 폭넓은 다양한 격식을 갖추었을 뿐만아니라, 또한 각각의 분야에 있어 깊이까지 갖추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주); 논한지라 - 동사 '다바르'(*)의 기본 뜻은 '말하다'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관찰하고, 연구하며, 저술하는 활동까지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Keil).

성 경: [왕상4:34]

주제1: [솔로몬 왕국의 번영]

주제2: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

(주); 모든 민족...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의 명성은 열방 중에 널리 퍼졌고, 결국 많은 나라의 왕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방문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문화 예술 등 제반분야에서 선진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의 국가들은 솔로몬 왕국과의 교류를 적극 원했을 것이고, 왕들은 직접 혹은 대사를 통해 접촉을 시도하고자 했을 것이다(5:1;10:1). 그리고 솔로몬은 개방 정책을 펴서 많은 방문객들을 맞아들였던 것이다(Wycliffe). 스바 여왕의 방문은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10:1-13).

성 경: [왕상5:2]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솔로몬]

(주); 솔로몬이 히람에게 기별하여 - 히람이 보낸 사절단을 계기로 솔로몬은 사절단의 편으로 성전 건축에 협력을 요청하는 서신을 히람에게 전한다. 그런데 이 서신은 히람의(8절)와 함께 두로의 문서 보관서에 보존되었다는 내용이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타난다(Antiquities, , ii, p.6).

성 경: [왕상5:3]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히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솔로몬]

(주); 당신도 알거니와 -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많은 준비를 생전에 했었다(대상 22장). 그 중에는 많은 기술자 및 백향목을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공급받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로 왕 히람 역시 이러한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작업을 이미 도운 바 있었다.(삼하 5:11대상 22:4). 그러므로 마땅히 히람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과 성전건축을 향한 열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을 시도할 수 없었던 까닭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 다윗이 성전 건축을 열렬히 소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즉 다윗은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으므로 성전 건축의 기회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다윗 자신은 성전 건축을 기대했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빈번한 전쟁을 치른 결과, 다윗은 피를 많이 흘리게 하였으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평화의 성전 건축에 적격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대상 22:8;28:3).

(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 성전 건축의 목적으로서, 이는 "오직...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하신 곳"(신 12:5,11)이라는 유일 중앙 성소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주);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 성전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뜻(대상 22:8-10 ;28:2-6)을 분명히 안 다음,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로서 장차 자기 대신 성전 건축 사역을 담당할 솔로몬에게 가능한한 많은 도움과 편의를 주기 위해, 성전 건축에 필요한 기술자와 제반자재들을 충분히 비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기하였다(대상 22, 29장).

(주);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 성경에서 '발'(*, 레겔)은 보통 종속, 비하의 관계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발은 신체의 하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Dentan). 예를 들면 '발아래 두다'는 정복과 피지배 관계를, '발 아래 앉다'는 선생과 제자의 종속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시 8:6;눅 10:39). 따라서 본절 역시 정복하여 지배하는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시 91:13;사 63:3;롬 16:20;엡 1:22;히 2:8). 실제로 발견된 고대 앗수르의 그림 중에는 정복자가 적의 몸을 발바닥으로 누르고 있는 그림이 있다.

성 경: [왕상5:4]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히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솔로몬]

(주); 사방의 태평 - 여기서 '태평'(*,누아흐)은 '안식'이란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므로 사방의 태평'(RSV, rest on every side)은 국력의 신장(伸張)에 힘입어 나라 안팎으로 평온한 상태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보여 주는 말이다(4:24,25). 이로써 다윗의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사방의 전쟁'(3절)이라는 원인이 사라진 것이다. 한편, 하나님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사방의 태평을 주신 것은 대상 22:9 약속의 성취이다.

(주); 대적도 없고 - 여기서 '대적'(*,사탄)은 '방해하다', '반대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구약에서 보통 사람의 길을 막는 방해자, 전쟁에서의 적군, 또는 법정에서의 고소자 등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었다(Gaster;민22:22;삼상29:4;시109:6,7). 한편, 11:14,23에서 솔로몬의 대적으로 나타나는 바 하닷과 르손의 반역 행위는 분명 성전 건축 후의 일로서, 솔로몬 통치 후기의 사건이다(Keil). 그리고 그것은 후기에 이르러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타락한 솔로몬의 불순종을 치시려는 하나님의 징계였다.

(주); 재앙도 없도다 - 여기서 '재앙'(*, 페가)은 '졸지에 찾아오는 불행'(misfortune, RSV), '갑작스러운 재난'(disaster, NIV)같은 것을 의미한다(전 9:12). 구체적으로는 다윗이 겪었던 반역, 기근, 역병 등이 이에 해당된다(B hr;삼하15:14;20:1;21:1;24:15). 다윗은 이러한 재앙을 많이 겪은 '고난의 왕'이었으나, 성전 건축을 담당할 솔로몬은 '평강의 왕'(대상 22:9)으로서, 이와 같은 재앙들이 전혀 미치지 않은 것이다.

성 경: [왕상5:5]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히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솔로몬]

(주);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 -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성전 건축'에 대한 당신의 뜻을 명확히 전달한 바 있었다. 즉 삼하 7:12, 대상17:11,12에 나타난 말씀으로, 그것은 다윗의 후계자로 말미암아 성전 건축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가 될 솔로몬에게 이러한 성전 건축 사역에 대해 간곡히 권면했던 것이다(대상 22:11-16;28:9-21).

(주); 하신 대로...건축하려 하오니 -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려는 것은 자신의 야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부친 다윗의 유지(遺志)를 따르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Hammond).

성 경: [왕상5:6]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히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솔로몬]

(주);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교섭하는 교역 약조를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로 보아 백향목 숲이 있는 레바논 일부 지역이 히람의 통치 영역에 속했던 것 같다(Keil). 아무튼 레바논은 고대에 백향목의 산지로 유명했다고 한다(Hammond). 그런데 백향목(柏香木, cedar tree)은 1. 성장하는 데 수백년이 걸리고, 2. 곧고 아름다우며, 3. 목재의 쓴맛 때문에 병충해가 적다는 특징 등으로 해서 매우 값진 건축재였다(Gates).

(주); 나의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 영역본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나의 종들을 보내 당신의 종들 곁에서 일하게 하겠다'(I will send my men to workbeside them)로 번역하였다. 즉 벌목(伐木)하는 일을 돕겠다는 뜻이다.

(주);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붙이리이다 - 본절의 뜻이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좀 모호하다. 그러나 영문 성경은 '당신이 요구하는대로의 임금(whatever wages you ask, Living Bible;such wages as you set,RSV)을 지급하겠다'로 번역함으로써 보다 선명하다. 공동 번역도 이와 비슷하게 "당신의 신하들에게는 당신이 정하는 급료를 지불해 드리겠습니다"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솔로몬의 말에서 그의 부(富)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대하 2:10).

(주);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 하는 자가 없나이다 - 벌목(伐木)에는 단순히 나무 자르는 기술 뿐만 아니라 쓸만한 나무를 골라 적절한 시기에 자르고, 또 이를 적절히 보관하는 등 보다 광범위한 지식이 요구된다(Keil). 그런데 시돈 사람(theSidonians) 곧 베니게인들 중에는 그러한 건축 기술자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베니게인들은 무역 중심의 생활을 해왔던 관계로 예전부터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Movers,Schnaase).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농경.목축 생활을 해왔으므로, 목재를 사용하는 건축 기술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시돈 사람'(*, 치도님)이란 명칭은 곧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본래 베니게는 도시 국가 형태로서, 곧 시돈과 두로의 두 주요 도시로 구성된 국가이다.그런데 예전에는 두로보다 시돈이 보다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베니게인들을 속칭 '시돈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백향목이 있는 지역이 시돈 지역에 속했고, 또한 시돈 성의 주민들이 보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시돈 사람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 역시 두로 왕 히람의 통치 영역에 속했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5:7]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의 교역 제의를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이스라엘과 탄탄한 정치적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통상 관계를 통해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베니게(두로와 시돈) 지역은 좁은 해안지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작물 재배가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베니게는 이스라엘에 곡물 수입을 의존해야만 했다(Keil, B hr).

(주);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 '찬양할지로다'(*, 바루크)의 기본 뜻은 '무릎꿇다'이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절의 '찬양'은 히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믿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Keil, Hammond). 사실 히람이 다스리던 베니게 지역은 다신 숭배, 특히 바알 숭배가 성행했던 곳이다(Kapelrud). 그러므로 히람은 단지 대부분의 고대 근동인들의 신앙 태도처럼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인정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창26:28,29). 그렇다면 본절은 히람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시작할 수 있으리만치 안정과 부를 주셨음을 크게 인정하는 표현이라 하겠다(대하 2:12). 한편 이런 견지에서 70인역(LXX)은 본절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만하다'(*, 율로게토스 호 데오스)로 적절하게 번역하였다(Hammond).

(주);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 부친 다윗과 마찬가지로 계속 히람과 화평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려는 솔로몬의 처신이 두로 왕 히람에게 '지혜롭게'(현명하고 분별력 있게) 비쳐졌을 것이다.

성 경: [왕상5:8]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이에 솔로몬에게 기별하여 - 즉 솔로몬의 제의(2-6절)에 대해 히람이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대하 2:11). 그 내용상 일종의 교역 협정을 맺는 것이므로, 솔로몬과 히람사이에 오간 서신들은 국가 공문서와도 같은 것이다. 한편, 히람이 솔로몬의 막대한 규모의 통상 요구를 쾌히 응낙한 사실은 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 외에도 당시 이스라엘의 국력이 그만치 성장하였음을 인정한 측면도 있다(1절).

(주); 잣나무 재목 - 잣나무(fir, KJV;cypress, RSV)는 보통 백향목(cedar) 보다는 못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역시 병충해, 부패에 강하여 내구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튼튼하고 가벼워, 좋은 건축재이다(Winer).

성 경: [왕상5:9]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레바논에서 바다로...바다에서 떼로 엮어 - 건축용 백향목과 잣나무는 레바논 산지에서 벌목된 후 일단 베니게 해안 지대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나무들은 거대한 뗏목으로 엮어져 바닷길로 이스라엘의 항구까지 운송되었다.

(주); 당신이 지정하는 곳 - 역대기 기록에 의하면, 이 장소는 바로 욥바이다(대하2:16). '욥바'(Joppa)는 '아름다움'이란 뜻을 가진 예루살렘 최근교의 항구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56Km 가량의 거리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바위들로 자연 방파제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천연의 선박 기항지였다(Gold). 그런데 정작 레바논에서 욥바까지의 바닷길 보다도 욥바에서 예루살렘까지의 험하고 울퉁 불퉁한 육로가 목재를 운반하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Hammond).

(주); 식물을 주소서 - 베니게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뻗어 있는 길고 좁은 나라이다(Kapelrud).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페니키아(베니게)는 임산물(林産物)이 풍부한 대신 농작물(農作物)이 부족했다. 실제 베니게 지역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평야 지대는 대략 75Km2 정도의 면적에 불과했다고 한다(Josephus). 따라서 비록 비옥한 땅이기는 해도 실제 경작면적은 결코 넓지 못했다. 그러므로 베니게는 외국으로부터의 식량 수입에 상당량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의 교역에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식량이었다(스 3:7;겔 27:17).

성 경: [왕상5:10]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솔로몬의 모든 원대로 - 대하 2:7-9에는 솔로몬의 요구 내용이 좀 더 상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곧 여기에 없는 솜씨좋은 공장(工匠)과 백단목(오동나무)이 추가되어있다.

(주); 재목을 주매 - 여기서 '주매'(*, 노텐)는 분사형으로서, 곧 계속 공급하여 주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은 성전과 왕궁 건축이 모두 필할때까지 근 20년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5:11]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밀 이만 석 - 솔로몬 왕궁의 하루 밀 소비량이 90석(가는 밀가루 30석, 굵은 밀가루 60석)이었으므로, 일년치를 환산해 보면 삼만 이천 팔백 오십 석(코르)이다(4:22)그러므로 혹자는 두로(베니게) 왕궁의 소비 규모가 솔로몬 왕궁의 소비 규모보다 훨씬 적었다고 생각한다(Rawlinson). 그러나 본절의 밀 이만 석이 두로 왕궁의 전체 밀 소비량일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계약상 목재와 노동력의 대가를 그만큼 지불했다는 것 뿐이다(Hammond). 그리고 그만치의 양을 매년 한 차례씩, 아마도 건축이 계속되는 동안(Keil) 계속 보냈다니 상당향 액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그만한 지불을 감당할 수 있었던 솔로몬 왕국의 부강한 일면이 강조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대하 2:10의 식량(밀 이만 석, 보리 이만 석, 포도주 이만 말, 기름 이만 말)은 히람의 일꾼들에게 주는 대가로서, 본절의 식량과는 구별되는 것이다(B hr).

(주); 맑은 기름 - '맑은 기름'(pure oil,KJV)이란 감람 나무 열매에서 짜내는 식용유, 즉 올리브 유(油) 중의 고급 기름이다. 설 익은 감람 나무 열매를 따서, 그것으로 올리브 유를 짜낼 때 처음 나오는 기름을 따로 모으면 그것이 바로 맑은 고급 기름이다(Masterman). 이 기름은 일반 기름보다 더 흰 색깔을 띠고 있으며, 맛은 더 순수하다고 한다(B hr, Symbolik).

(주); 석(*, 코르) - 액체 또는 고체의 용량을 재는 가장 큰 단위로서(4:22), 학자에따라 180리터(D.J Wiseman, D.H. Weaton), 210리터(O.R. Sellers), 380리터(KB)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하나, 대략 230리터 가량 되는 용량 단위이다.

성 경: [왕상5:12]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 본 구절은 솔로몬과 히람이 화친하여 약조를 맺은 사실이 결국 3:12의 성취로서, 솔로몬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지혜에 힘입은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뿐만아니라 13절 이하의 내용, 즉 건축 사업의 조직과 관리에서 솔로몬이 지혜롭게 역량을 발휘한 사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Keil, Henry).

(주); 친목 - 여기서 '친목'(*, 샬롬)은 4:24의 '평화'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주); 약조를 맺었더라 - '약조'(*, 베리트)는 성경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언약'으로 번역되었다(창 6: 18;신 31:16;삼하 3:13 등). 그런데 '베리트'는 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의무를 말한다. 그리고 이 '베리트'를 맺는 데는 보통 종교적 의식(儀式)이 따랐다(Vos). 실제로 본절의 '약조를 맺다'(*, 카라트베리트)는 '언약을 자르다'(cut a covenant)라는 원어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계약 당사자들이 희생 제물을 자른 후 그 사이를 지나가는 맹세 의식을 가진 데서 비롯된 듯하다(창 15:10;렘 34:18). 한편, 삼상 22:8의 원문에서는 '자르다'의 뜻인 '카라트'(*)만으로 '맹약을 맺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였다(Payne).

성 경: [왕상5:13]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을 위한 일꾼들]

(주); 온 이스라엘에서...그 역군의 수가 삼만이라 - 본절의 역군 삼만 명은 이스라엘인들로서 15절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담군 칠만과 돌 뜨는 자 팔만 명과는 구별된다(Keil;9:21;대하 2:17). 즉 본절의 이스라엘 역군들은 아도니람의 지휘하에 만 명씩 석달에 한번 윤번제로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집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이스라엘 역군 삼만 명은 히람의 기술자들을 도와 벌목(伐木)작업을 조력하는 비교적 가벼운 노동을 맡은 자들이었다(Thenius). 따라서 본절 솔로몬이 이스라엘 자손은 노예를 삼지 않았다는 9:22과 모순되지 않는다(Wycliffe).

성 경: [왕상5:14]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을 위한 일꾼들]

(주); 한 달에 일만 인씩 번갈아 레바논으로 보내매 -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로 구성된 역군 삼만 명은 아마도 레바논에서 히람의 일꾼들을 도와 벌목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6절). 그런데 솔로몬이 이들을 '한 달에 일만 인씩 번갈아'일을 시킨 것은 그의 지혜로운 경영을 보여준다. 즉 이와 같은 윤번제 방식으로 해서 이들 역군들은 일년에 팔개월간은 자신의 생업과 가사를 돌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1) 노동의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었고, 2) 전 이스라엘의 일상 경제가 정상적으로 유지되었고, 3) 국민 각자는 자신의 가정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 아도니람은 감독이 되었고 - 여기서 '감독'(*, 알 하마스)은 4:6의 '감역관'(監役官, superintendant)과 같은 말이다. 4: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5:15]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을 위한 일꾼들]

본절의 '담군'과 '돌을 뜨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가나안 사람들이다(9:20,21;대하 2:16, 17;8:7-9). 왜냐하면 이들에 대해서는 앞의 '역군'(*, 마스)삼만 명의 경우와 달리 이스라엘 사람임이 명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Keil,Hammond). 또한 9:21에서 보듯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노예 역군'(*, 마스오베드)이란 말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B hr,Patterson).

(주); 담군(擔軍) - '담군'은 '짐 나르는 사람'(transporter)을 의미한다. 이들의 임무는 벌목한 나무나 뜬 돌을 일정 지점까지 운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주); 돌을 뜨는 자 - '돌을 뜨는 자'란 '돌을 자르는 사람', '석수'(hewer, KJV;stone-cutter,Living Bible)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의 숫자가 팔만이나 되고 또 산에서 일을 한 것을 보면, 이들의 일은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기 보다 단순 노동에 가까운 것, 즉 채석공(採石工)으로서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 번역의 '돌 깨는 사람'은 적절한 표현이다. 보다 기술적인 작업은 히람의 건축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을 것이다. 한편, 목재의 벌목 작업과는 달리 돌의 채석 작업은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목재와는 달리 돌은 먼 거리 수송이 결코 용이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내에서도 채석은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Patterson). 고고학적 발굴 결과, 예루살렘 성 바로 근교에 '솔로몬의 채석장'이라고 불리워진 대규모의 채석장(採石場)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Wood, UnitedMonarchy). 그렇지만 성전의 기초석으로 사용될 크고 우아한 돌은 레바논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다(Hammond).

성 경: [왕상5:16]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을 위한 일꾼들]

(주); 동독(董督)하는 관리가 삼천 삼백 인 - '동독하는 관리'란 노동을 감독하는 관리, 즉 십장(foreman, Living Bible)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관리들의 숫자는 대하 2:18의 '삼천 육백 인'과는 차이가 난다. 혹자는 이것을 필사자(筆寫者)의 실수로 보기도 하지만(Thenius),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분류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된 기록 차이로 본다(B hr, Keil, Patterson, Hammond). 즉 이들은 미카엘리스(J.H. Michaelis)의 견해를 따라 다음과 갈이 설명한다. 열왕기가 제시하는 감독관의 총수(總數)는 본절의 '삼천 삼백'에다 9:23의 '오백 오십'을 더하면 도합 '삼천 팔백 오십'이다. 이 수는 역대기에서 제시된 바 대하 2:18의 '삼천 육백'과 대하 8:10의 '이백 오십'을 합한 슷자와 같다. 그러므로 감독관의 총 숫자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이 일치한다. 단지열왕기(9:23)는 직위의 차이 즉 하급 감독과 상급 감독으로, 역대기(대하 2:18;8:10)는 출신의 차이 즉 가나안인 감독과 이스라엘인 감독으로 분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의 건축 사역의 관리로 발탁된 총 수효는 3,850명인데, 이 중 3,300명은 하급 관리(inferiores proefecti)이고, 550명은 고급 관리(superiores proefecti)이다. 또한 3,850명의 관리 중 3,600명은 가나안 족속 출신 관리이고, 250명은 이스라엘 출신 관리이다(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성 경: [왕상5:17]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을 위한 일꾼들]

(주); 크고 귀한 돌...전의 기초석으로 놓게하매 - '크고 귀한 돌'이 '무거운 돌'이라는 견해(Thenius)에 대해, 카일(Keil)은 그것이 무거운 돌이라기 보다 '값진 돌'을 의미한다고 반박한다. 아무튼 본절의 '크고 귀한 돌'은 성전의 기초석을 놓기 위한 돌이다. 그런데 7:10의 기록에 따르면, 이 '기초석'의 크기는 10규빗 또는 8규빗 되는 정방형의 돌이다. 대략 일규빗은 팔꿈치로부터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로 약 46cm 정도이다(IDB). 이렇게 환산해보면, 성전 기초석은 각각 거의 4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큰 돌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본절의 '크고 귀한 돌'은 무게도 무거웠으려니와 성전 기초석 용도에 걸맞게 값진 돌을 고른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이처럼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지게 됨으로써, 솔로몬 성전은 역사적인 기공식(起工式)을 거행하게 되었다(6:1). 이로써 모세 시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지고,또 여러 장소에 분산되어 있던 하나님의 성소가 마침내 유일 중앙 성소(신 12:5)인 솔로몬(예루살렘) 성전으로 정착하게 될 것이었다.

(주); 떠다가 다듬어서 - 성전 기초석으로 놓이게 될 '크고 귀한 돌'은 하나 하나가 빈틈없이 꼭 맞아 들어가도록 8규빗 내지는 10규빗의 정방형 크기로 다듬어졌다. 그리고 6:7로 미루어 보건대, 이 돌을 잘라내고 다듬는 작업은 채석장 현지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왕상5:18]

주제1: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주제2: [성전 건축을 위한 일꾼들]

(주); 그발 사람 - '그발'은 트리폴리와 베이루트 사이에 위치한, 베니게 최북단 연안의 도시이다. 헬라 시대에는 '비블로스'(Biblos)라고 명명된 이곳은 무역과 조선업의 중심지이다(겔 27:9). 따라서 유능한 해양 선원들과 건축 기술자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Kapelrud). 수 13:5 주석 참조. 그런데 '그발'은 두로, 시돈과 마찬가지로 베니게에 속한 한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발 사람'(the Giblites)이 새삼 '히람의 건축자'와 나란히 언급된 것은 뛰어난 기술자인 그들이 솔로몬의 건축 공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점했기 때문이다(Hammond).

(주);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갖추니라 - 솔로몬이 히람과 협정을 맺은 목적인 성전 건축 준비 작업이 마무리 되었음을 보여 준다(Keil). 한편, 70인역은 이 모든 준비를 갖추는 데 3년이 걸렸다고 덧붙인다(Hammond). 이러한 추론은 아마도 본격적인 성전 건축 공사가 솔로몬 즉위 제 4년째부터 시작되었다는 6:1의 연대기적 진술에 근거한 것같다. 왜냐하면 솔로몬과 히람의 협정은 분명 솔로몬 즉위 초에(5:1) 진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6: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 팔십 년 - 보통 출애굽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B.C. 1,440년 경으로 보는 주장이고('전기 연대설' 또는 '15세기설'), 다른 하나는 B.C. 1,200년 경으로 보는 주장이다('후기 연대설' 또는 '13세기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출애굽기 서론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틸레(Thiele)의 계산을 따라 성전 건축을 시작한 솔로몬 4년 시브웰(유대 종교력 2월;오늘날 태양력 4, 5월)을 B.C. 966년 경으로 볼 때, 본문대로라면 출애굽 연대는 B.C. 1446년 경이 될 것이다. 그런데 본절의 '사백 팔십 년'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즉 많은 학자들은 나름대로의 근거하에서 480년이란 이 연대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곧 (1) 70인역(LXX)은 480년 대신 440으로 보았다. (2) 요세푸스(Josephus)는 480년 대신 592년으로 잡는다. (3) 혹자들은 본문의 480년을 일종의 상징적인 세대수(世代數)로 본다. 즉 벌도우(Bertheau), 뵈쳐(Bottcher) 같은 학자들은 여기 480년을 '40년+12세대=480년'으로 보고, 실제적인 12세대는 250년~280년 가량이므로, 약 200년 가량 단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잡한 계산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주장은 입증할만한 뚜렷한 근거없이이 추측의 선에서 머물고 만다. 반면 카일(Keil)과 메튜 헨리(Matthew Henry) 같은 주석가들 및 우드(L. Wood)와 아쳐(G. A. Archer) 같은 보수주의 구약 학자들은 본문 그대로 480년의 정확성을 뚜렷이 주장한다. 사실 본절이 왕의 통치 년, 월까지 상세히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은 높다. 그리고 이 480년은 부분적인 이견(異見)이 있긴 하지만, 대략 (1) 광야 생활 40년 (2) 가나안 정복기 및 평정기 32년 (3) 사사 시대 331년 (4) 사울의 통치기 33년 (5) 다윗의 통치기 40년 (6) 솔로몬의 즉위 후 4년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한편, 본서 저자가 성전 건축 시기를 특별히 출애굽을 기준으로 해서 기술한 까닭은, 성전 건축은 곧 약속의 땅에 대한 그 때까지의 임시적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항구적 소유를 표징(表徵)하는 신기원(新紀元)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Keil).

(주);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년 - 솔로몬은 즉위 초부터 히람과 협정을 체결하여(5:1-12), 대략 3년 동안 목재, 돌, 역군 등 건축에 필요한 제반 준비 작업을 하였을 것이다(5:13-18).

(주); 시브월 - 37절 주석 참조. 전(殿)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 역대하 3:1에 의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장소는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이다(창 22:2). 그곳은 인구 조사의 죄를 범한 다윗에게 천사가 하나님을 위해 번제단을 쌓도록 지시한 장소(삼하 24:16-25), 곧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다(대상 21:15-27).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쳐 드리던 중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나타난 역사적인 장소이다(창22:2, 14).

성 경: [왕상6: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전(殿) - 여기서 '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성된 성전 본당을 가리킨다.

(주); 장(長)이 육십 규빗이요 광(廣)이 이십 규빗이요 고(高)가 삼십 규빗이며 - 일반적으로 '규빗'(Cybit)은 어른의 팔꿈치에서 중지(中指)까지의 길이로 대략 45.6cm, 혹은 그 안팎이다(Siloam Inxdriptoin;창 6:16;출 37:1;신 3:11). 왕실에서는 좀더 긴 규빗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1규빗이 대략 52~54cm 가량이다(Stinespring). 한편, 대하3:3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에는 '옛적 재는 법', 곧 모세의 측량법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1규빗을 대략 45.6cm 가량으로 잡고 전의 규모를 환산해 보면, 대략 길이가 27.36m, 너비가 9.12m, 높이가 13.68m 가량이다. 그런데 이 규모는 당시의 대건축물에 비하며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이유인즉 아마 이곳은 일반 백성들이 모여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이 거처하는 상징적인 장소로서 오직 제사장들만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Dentan, Hammond).

성 경: [왕상6: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낭실(廊室) - '낭실'(*, 울람)은 '앞서가다', '인도하다'란 뜻을 갖고 있는 '울'(*)에서 파생된 말이다. KJV는 이 말을 '현관'(porch)으로 번역하였다.낭실은 성전 입구가 있는 동쪽에 위치한 부속 건물로 일종의 대기실 역할을 하였다. 문에 대한 언급이 예외적으로 없는 것으로 미루어(31, 33절) 아마 이 낭실은 터널같은 구조가 아니었을까 추측되기도 한다(B hr). 한편, 낭실의 길이는 20규빗(9.12m)이며 너비는 10규빗(4.56m)이었다. 그리고 본절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대하 3:4의 기록에 의하면 낭실의 높이는 120규빗(약 55m)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건축상의 비육이나 건축물의 모양상 이런 낭실의 높이는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역대기의 기록에 필사상의 오류가 개재된 것으로 보고, 낭실의 높이는 성전 본관의 건물 및 낭실의 길이와 너비에 어울리게 20규빗 내지는 30규빗 정도로 추측한다(Keil, Thenius, Hammond, Furgusson, Bertheau, B hr).

성 경: [왕상6: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붙박이 교창(交窓) - 공동 번역은 '붙박이 교창'을 '우묵 들어간 틀에 끼운 창문'으로 번역하였다(windows with recessed frames, RSV). 즉 안쪽보다 바깥 쪽이 더 좁게 생긴 구조이다(Aquila). 그런데 창문의 이러한 구조는 햇빛과 공기가 잘 들어오고 연기는 잘 빠지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Keil). 한편, 지성소에는 이러한 창문이 없었으므로 완전한 암흑이었다.

성 경: [왕상6: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전의 벽...다락들을 건축하되 - 솔로몬은 성전(성소와 지성소) 바깥 벽에 잇대어서 많은 '골방들'로 나뉘어지는 3층 구조의 건물을 지었다.

(주); 골방들(*, 첼라오트) - 이 골방들의 숫자는 30개이다(겔 41:6). 그리고 이 골방의 용도는 겔 42:13, 14에 의하면 (1)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장소. (2)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 (3) 제사장들이 옷을 갈아 입는 장소 등으로 밝혀지고 있다. (4)그리고 성전에는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거처 장소이기도 했다(시 134:1). 한편, 이처럼 솔로몬 성전의 구조와 용도를 밝히는 데 에스겔의 미래의 성전은 곧 솔로몬의 성전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Quellette).

성 경: [왕상6: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하층...중층...삼층 다락 - 다락(*, 야추아)은 3층으로 되어 있었고 밑층에서 윗층으로 올라갈수록 1규빗씩 넓게 고안되었다. 그 까닭은 윗층 바닥이 아랫층의 양 벽에 좌우로 반 규빗씩 걸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각 층은 나사 모양의 사다리로 연결되어 오르내리도록 되었다(8절).

(주);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으며 - '턱을 내어'(*, 미그라오트)라는 말은 '벽의 두께를 줄인다'는 뜻이다(Keil). 예를 들면, 각층 골방의 들보를 지탱하는 선반(턱)을 만즐기 위해서 윗층벽의 두께를 1규빗씩 축소하는 식이다. 한편, 왜 들보들로 전(殿)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고 굳이 턱을 내게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단지 성전 벽면의 돌들이 크고 값진 것이므로 구멍을 내기 싫었을 것으로, 아니면 성소와 지성소의 신성함을 손상치 않으려는 것으로 추측해 볼 따름이다(B hr).

성 경: [왕상6: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 이 구절은 채석장(採石場) 현지에서 이미 치수에 맞춰 돌을 다듬었으므로 정작 건축 장소 내에서는 연장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말한다(Keil, Thenius, B hr). 따라서 다듬을 필요조차 없이 건축물의 치수에 꼭 들어맞는 돌들을 미리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라는 견해(Theodoret)는 무리이다. 물론 그러한 견해는 신 27:5, 6의 정신에 맞추려는 관심에서 주장된 것이다. 그리고 본절이 제시하고 있는 공법(工法)이 어느 정도 그 같은 율법 정신을 반영함도 사실이다(Hammond). 그러나 본절의 문맥상, 그리고 5:18절을 고려할 때 본절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건축현장에 운반되기 전에 채석장 현지에서 미리 치수에 맞도록 돌을 다듬었음을의미한다. 한편, 레바논 외에도 솔로몬은 예루살렘 근처에 소위 '솔로몬의 채석장' 도는 '왕궁의 동굴들'로 일컫는 채석장들을 갖고 있었다 한다(Hammond, Gates, Wood,Josephus).

(주);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 이것은 일차적으로 '철기를 대지 않는 하나님의 제단'이라는 출 20:25;산 27:5의 옛 율법 정신을 형식에서라도 가능한한 접근하려는 노력이다(Gray). 그리고 치석(治石)을 위한 모든 준비 작업이 레바논 채석장이나 '왕궁의 동굴들'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건축 현장에서는 철 연장 소리 없이도 작업이 가능했음을 이해할만 하다. 한편, 이처럼 '피를 흘리게 하는' 철 연장 소리 없이 정숙히 성전 건축 작업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 등을 상징하는 거룩과 평화의 장소로서 성전은 그 성격에 부합되도록 건축 과정에서도 평화로움과 정숙함과 거룩성이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Patterson, M. Henry).

성 경: [왕상6: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중층 골방의 문 - '중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핫티코나'(*)는 '중간'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하층 골방 중간의 문'이라는 의미로 수정한다(B hr, Ewald, Keil 등).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영문 성경들도 '맨 아래층'(the bottom floor, Living Bible'the lowest story, RSV)이란 의미로 본절을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지상 3층 건물의 입구가 2층에서시작될 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상과 같이 해석될 경우, 본절의 '골방'(*, 하첼라)은 에스겔 41:5, 9, 11에서처럼 한 층에 속한 골방 전체를 통틀어 표현하는 말이 된다(B hr, Keil).

(주);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 이처럼 제사장들을 위한 골방에 이르는 문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은 이 보속 건물과 성소 및 지성소, 즉 성전 본 건물 사이에 아무런 연결 통로가 없었음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골방들이 있는 부속 건물에서 성전(성소와 지성소) 내부로 통하는 문이 있었으리라는 테니우스(Thenius)의 가정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것은 성전의 거룩성에도 어긋나는 추측이 아닐 수 없다(Hammond, Keil). 한편, 여기서 '전(殿) 오른편'은 7:39에 의하면 동남쪽 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오른편'은 밖에서 성전 입구를 바라보았을 때가 아니라,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서 밖을 바라보았을 때의 오른편이다.

(주); 나사 모양 사닥다리 - '사닥다리'(*, 룰림)란 단어는 여기와 70인역(LXX), 벌겟역(Vulgate) 등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창 28:12의 '사닥다리'는 본절과달리 '술람'(*)의 번역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의 차이는 '룰림'이 '나선형 계단'(winding stairs)이라면, '술람'은 문자 그대로 '사닥다리'(ladder)를 뜻하는 단어이다. 한편, 과연 고대에 나선형 사닥다리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가능했는지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으나(Stade, Moffatt), 고고학자의 발전이 이를 입증해 줌으로써 반박되었다(Montgomery). 즉 B.C. 18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나선형 사닥다리 유적이 아카나(Achana)의 한 궁전에서 발견되었다(Patterson).

성 경: [왕상6: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 본절은 일단 돌을 사용하는 건축은 끝났음을 의미하는 말로 받아 들여진다. 물론 내장(內粧)과 지붕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10, 15절),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완성은 38절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석조 건축, 즉성전의 외형(外形)공사는 일단 완료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 본절이 보조문으로 삽입된 것이다(Montogomery).

(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 '덮었고' 에 해당하는 '이세폰'(*)은 '감추다'라는 뜻을 가진 '사판'(*)에서 유래된 단어이다(신33:19;렘 22:14). 그러므로 본절의 작업은 15절의 내장 공사와는 달리 지붕을 덮는 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지붕의 모양에 대해서는 (1) 둥근 아아치 형(Thenius), (2) 人자 모양의 박공(博供, gable) 형(Fergusson), (3) 평평한 형(B hr, Keil) 등이 주장된다. 이 중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결정할 수 없다. 그런나 당시 근동의 건축물의 대다수가 그렇듯, 일반적으로는 평평한 형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J.Hammond).

성 경: [왕상6:1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시작]

(주);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 성전 본관 전면(全面), 즉 낭실이 있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의 둘레를 가리킨다(3, 5절).

(주); 고가 다섯 규빗되는 다락방 - 이 '다락방'(*, 야추아)은 6절의 다락들과이에 딸린 골방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속 건물은 3층 건물로서 각 층의 높이가 5규빗(약 2.3m)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3층 건물 전체의 높이는 15규빗(6.84m)이지만, 약간의 여유있는 간격을 염두에 둔다면 대략 18~20규빗(약 8~9m) 정도일 것이다(Hammond). 그런데 이 높이는 성전 본관의 높이(2절)와는 10규빗(4.5m) 이상의 차이가 나므로 이 간격에 창문을 설치했으리라 본다(Keil).

(주);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 - 이 들보들은 성전 벽 바깥 둘레에 이 용도를 위해 일부러 만든 턱(선반)에 걸쳐졌다(6절). 따라서 성전 본관 자체에는 어떤 손상을 주지 않고도 이 건물은 성전에 든든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Keil). 한편, 이 다락들은 분명 물건을 저장할 목적으로 지어졌을 것이다(Patterson).

성 경: [왕상6:1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하나님의 약속]

(주);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 이 말씀은 분명 선지자를 통해 솔로몬에게 전하여졌을 것이다(Keil, B hr, Patterson). 그렇지 않다면 9:2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9:2에서 이루어지는 솔로몬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은 바로 두번째임을 11:9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첫번째 직접적인 교통은 일천번제 이후 기브온 산당에서 나타났다(3:5). 그리고 두번째 교통은 성전 뿐만 아니라 왕궁 및 모든 건축이 마친 시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따라서 본절의 말씀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달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해준 인물은 어쩌면 나단 선지자일 수도 있다. 만일 나단이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최초의 언약(삼하 7:12)을 전해줬던 그가 다시금 그 언약을 새롭게 했음직도 하기 때문이다(Hammond).

성 경: [왕상6:1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하나님의 약속]

(주);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 영역본 RSV는 이 구절을 "네가 짓고 있는 이 집에 관해서"(concerning this house which you are building)로 번역하였고 다은 영역본들도 대부분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내용이 조금 잘린 듯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원문이 조금 망가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네가 짓는 이 집 말인데..."로 옮김으로써 이런 사실을 비교적 잘 드러내주고 있다.

(주); 법도 - '법도'(*, 훅카)는 원래 '새기다', '조각하다'에서 유래된 말이다.즉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주신 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일반적인 법률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에서 나온 법, 곧 율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신4:5, 14;6:20). 따라서 이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는 것이 된다(Wharton).

(주); 지켜 그대로 행하면...이룰 것이요 - 성전의 화려함이나 웅장함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성전에 임재하시도록 붙들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언제나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전제로 해서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성전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순종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Dentan). 한편, 이 조건적 언약의 내용은 2:3;3:14의 반복이다.

(주);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 - 구체적으로는 '네 아비 다윗과 맺은 너에 관한 언약'이란 뜻으로(NASB, JB), 삼하 7:12-16의 언약을 가리킨다.

성 경: [왕상6:1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하나님의 약속]

(주);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 원래 성막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는 것이었다(출 25:8; 레 26:11). 이제 모세 성막을 대신할 솔로몬 성전이 세워짐에 따라 이 약속은 솔로몬 성전에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율법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이 지어진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임재의 보증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인 것이다.

(주); 버리지 아니하리라 - '버리다'(*, 아자브)에는 '배반하다'하는 뜻이 담겨 있다. 따라서 본절은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결코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왕상6:1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솔로몬이 전 건축하기를 마치고 - 이 말은 9절과 같은 보조 문장의 성격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그 이유는 11-13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언급함으로써 잠시 중단된 성전 건축에 대한 묘사를 다시 재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하 15절로부터는 성전 외부 공사(2-10절)에이어 다시 성전 내부 공사를 기술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성 경: [왕상6:1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천장까지의 벽 - '천장까지의 벽' 에 해당하는 '핫시푼 키로트'(*)는 원래 문자대로는 '천장의 벽'이다. 그런데 '천장의 벽'이란 표현은 좀 이상한 말이므로 혹자는 '키로트'(벽)가 '코로트'(*), 즉 '들보'(beam)의 오기(誤記)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Keil). 어쨌든 이것은 천장에 잇닿아있는 데 까지의 벽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의 사면 안벽 전체를 백향목 널판으로 입혔다는 뜻이다. 한편 전의 천장은 이미 백향목으로 덮여 있었다(9절).

(주); 잣나무 널판으로 전 마루를 놓고 - 천장과 벽에 이어 이제 성전 마루에도 나무를 깔았다. 이로써 성전(성소와 지성소)의 내부 전체는 돌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18절). 한편, '잣나무'에 관해서는 5: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6:1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전 뒤편에서부터 이십 규빗 되는 곳에 - 전체 성전 길이의 1/3, 즉 60규빗(2절) 중 뒤편(서편)에서부터 20규빗 되는 곳에 백향목 널판으로 칸막이를 만들어 성전을 둘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성전 자체의 너비가 원래 20규빗 인데다(2절), 이 지성소는 정방형의 모양이 되었다.

(주);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칸막이를 백향목 널판으로 세웠다. 원래 모세 성막에서는 청.홍.자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그 위에 그룹을 수놓은 휘장만이 드리워져 있었다(출 26:31;36:35). 그런데 이제 솔로몬의 성전에는 휘장 뿐만 아니라 백향목 칸막이가 더해진 것이다.

(주); 전의 내소 곧 지성소 - '지성소'(*, 코데쉬 하코다쉼)는 '거룩함 중의 거룩함'(holy of holies), '가장 거룩한 성소'(most holy place)를 의미한다. 원래는 모세 성막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출 26:34). 그런데 이제 솔로몬 성전의 맨 안쪽 방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모세 성막 시절과 마찬가지로 언약궤가 이곳에 안치되었다(8:6;대하 5:7). 그리고 이 지성소에는 창문을 달지 않았으므로 매우 어두웠다(Good;8:12). 한편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규모는 모세 성막의 지성소 규모의 2배였다.

성 경: [왕상6:1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외소 곧 성소의 장이 사십 규빗이며 - 지성소(16절)를 제외한 성전의 나머지 부분은 '성소'(the holy placd)에 해당되었다. 물론 이 성소는 지성소보다 더 크고 높다. 혹자는 성소의 높이도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20규빗으로 추정 하였다(Kurtz, Merz). 이들은 나머지 10규빗은 다락방이 차지한 공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부주의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왜냐하면 다락방은 성전 본관에 달린 것이 아니고 측면의 보속 건물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B hr). 따라서 성소의 높이는 성전 자체와 마찬가지로(2절) 30규빗이었을 것이다. 이 '성소'는 제사장 들이 일년 내내 정규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장소였다. 한편, 지성소와 성소 등 솔로몬 성전의 열개를 이해하려면 출 25-31장,36-40장 부분의 '성막'을 살펴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솔로몬 성전은 기본적으로 모세 성막의 설계를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Dentan).

성 경: [왕상6:1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박 - '박'(*, 페카임)은 공동 번역에서는 '호리병'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근동 지방에서 오두막집이나 시렁을 짓는 데 흔히 하용되는 호리병 박일 것이다. 왕하 4:39의 '들외'나 욘 4:6, 7의 '박넝쿨'도 이와 같은 식물일 것이다. 그런데 호리병 박은 넝쿨과 큰잎들을 갖고 있어서 근동 지방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준다.

(주); 핀 꽃 - '핀 꽃'(*, 페투레이 치침)은 '활짝 피어 만개(滿開)한 상태의 꽃'(open flowers)을 말한다(J. Hammond). 그런데 이 '핀 꽃'은 일반적으로 즐거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영광을 상징한다(사 35:1, 2).

(주); 아로새겼고 - 혹자는 이것을 얕게 돋을 새긴 양각(陽刻, basirelief)이라고 생각한다(keil).

(주); 돌이 보이지 아니하며 - 성전의 천장과 벽, 그리고 마루는 모두 백향목 또느 잣나무 등으로 덧입혀졌기 때문에 성전(성소와 지성소) 안에서는 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웅장한 석벽들은 온통 백향목으로 덧입혀졌기 때문에 마치 통나무 집과 같았다"(Stanley).

성 경: [왕상6:1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여호와의 언약궤 - '언약궤'(*, 아론 하베리트)는 자기 백성과 함께, 그리고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성한 언약의 징표이다(출13:21;14:19, 20). 따라서 이 언약궤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과도 같았다(민 10:35;수 6:8). 물론 언약궤 자체를 우상처럼 하나님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단지 올바른 여호와 신앙을 전제해서만 언약궤는 자기 백성과 친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징하는 지성물이 된다(Payne; 12, 13절 참조). 한편, 이 언약궤에는 본래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한 오멜의 만나,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었으나 솔로몬 시대에는 단지 돌판만이 남아 있었다(8:9;출 16:33;민 17:10;히 9:4).

(주); 두기 위하여...내소를 예비하였는데 - '내소'(*, 데비르), 즉 지성소는 오로지 법궤를 안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왕상6:2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내소...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이십 규빗이라 - 내소, 즉 지성소는 완전한 정육면의 입방체(立方體)였다. 모세 성막의 지성소 및 장차 천상의 거룩한 성 역시 입방체의 모양을 띠고 있다(계 21:16). 분명 이것은 정방형으로서 '절대 완전' 또는 '절대 거룩'의 개념을 상징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J. Hammond). 그런데 본래 성전의 높이는 10규빗의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가장 무난한 견해는 지성소 위의 공간에 10규빗 높이의 '윗 다락'(대하 3:9)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Keil, Stingers).

(주); 정금으로 입혔고 - 본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 방식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금으로 입히다'(*, 예차페후 자하브)란 말은 금으로두텁게 싸는 것일 수도 있고, 도금(鍍金)을 의미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말을 얇은 금판을 못으로 목재에 부착시키는 방식일 것으로 말한다(Hammond). 특히 대하 3:9은 금못의 사용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주장이 옳다고 본다. 아마 그러한 기술은 애굽에서부터 익힌 기술일 것이다(출 25:11, 13). 한편 만일 그랬다면 성전 벽에 입힌 금은 엄청난 양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침략자들이 그 같은 금을 약탈해갔다는 기록이 구체적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점(왕상 14:26;왕하 14:14)을 들어 본절의 사실성을 부인하는 학자도 있다(B. Stade). 그러나 대하 3:6로 미루어 이방 침략자들이 약탈해간 보물, 즉 '보석'은 성전의 금을 포함한다. 실제 성전 내부에 사용된 금은 600달란트(약 20,400kg)나 되었다(대하 3:8).

(주); 백향목 단에도 입혔더라 - 개역 성경 및 KJV의 번역은 '백향바고 제단에 금을 입혔다'라는 의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원문은 '제단에 백향목을 입혔다'라고되어 있다. 원문대로라면 제단의 몸통은 백향목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 제단에 또 나무를 덧입혔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2절과 함께 연결해 보면 제단은 백향목을 입힌 다음 다시 도금을 한 것이 된다(B hr). 즉 성전 내부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의 공정(工程)을 거친 것이다. RSV 및 기타 영역본들은 무난하게 '백향목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made an altar of cedar) 정도의 의미를 취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백향목 단'(제단)은 '향단'을 가리킨다(Keil, Patterson). 비록 향단은 지성소 바로 입구의 '성소'에 위치하고 있었지만(출 30:6;40:5, 26), 그 기능면에 있어서는 '지성소'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지성소에 속한 것처럼 묘사된 것이다. 22절의 '내소(지성소)에 속한 단'이란 표현 역시 이와 같다.

성 경: [왕상6:2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외소 안에 입히고 - 외소, 즉 '성소'의 내부도 내소, 즉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도금을 하였다.

(주); 내소 앞에 금사슬로 건너 지르고 - 이 구절에서는 주로 금사슬의 기능과 용도, 그리고 '건너지른'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가 논란이 된다. 금사슬의 경우, 그것이 단지 장식용이었다는 견해(Meyer)와 실질적인 기능, 즉 지성소의 문을 달아 거는 빗장 또는 휘장을 움직이는 장치로서의 구실을 했으리라는 견해(B hr)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들을 따라 금사슬의 '건너지른' 상태가 달리 설명된다. 예를 들면 지성소 입구 좌우 양벽에 고정시켜 드리웠다든지(Keil, Hammond), 또는 금사슬 양끝에 고리가 있어 거기에 쇠를 가로질러 휘장을 달았다든지(Thenius)하는 등이다. 어쨌든 '내소 앞에 금사슬을 가로지른' 상태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게 하는 뚜렷한 표식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성소 입구에 가로질러 드리워진 금사슬은 정한 규율(레 16:2)외에는 그 누구도 지성소에 근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Patterson). 영역복 KJV는 이런 점을 잘 살려 '금사슬로 구획을 지었다'(made a partiton by thechains of gold)로 의역하였다.

성 경: [왕상6:2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부 단장]

(주); 온 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 '온전'(*, 콜 하바이트)은 지성소와 성소만을 지칭할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B hr, Keil) 하지만 대하 3:4은 낭실도 도금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므로 본절의 '온 전'은 낭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라고 봄이좋다(Hammond).

(주); 내소에 속한 단 - '내소에 속한 단'(*, 하미즈베아흐아쉐르 라드비르)은 지성소에 속한 단 20절 이란 의미로 곧 '향단'(출 30:1-10)을가리킨다. 그런데 이 제단은 지성소 내부가 아닌 입구 앞 성소에 놓여 있었다(출30:6). 이전 성막에서의 위치가 그러했기 때문이다(Keil, Hammond, B hr, Patterson).

(주); 금으로 입혔더라 - 성전 내부를 온통 금으로 입혔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대하 3:6). (1) 금은 빛과 순전함을 상징한다(욥 37:21:계 21:18). 따라서 하나님의 빛이시며 빛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요일 1:5, 7). (2) 금은 불변성과 고귀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들 또한 금과 같이 변치않는 고귀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들 또한 금과 같이 변치않는 고귀한 믿음을 늘 지녀야 한다(히 11:6;벧전 1:7) (3) 정금으로 장식된 성전은 새 예루살렘, 곧 영원한 하늘 나라를 상징한다(계 21:16-18).

성 경: [왕상6:2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소의 그룹]

(주); 감람목 - 즉 올리브 나무. 높이 약5~10m 정도의 물푸레 나무 과(科)에 속하는 나무로 B.C. 3000년 경부터 소아시아에서 재배되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무는 견고하고 내구성이 강해 희랍인들이 신들의 현상을 만드는데 종종 사용했다고 한다(Winer). 한편 솔로몬은 이 감람목에 금을 입혀 그룹 형상을 만들었다(28절).

(주); 두 그룹 - '그룹'(*, 케룹;복수형은 *, 케루빔)은 천사와도 같은 영적 존재의 한 부류이다. 그러나 그룹의 형상과 본성에 대한 문제는 확실히 결정되어 있지 못하다. A. D. 1세기의 유대 사가 요세푸스 조차도 그룹의 형상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했고, 신약 성경도 그룹의 본성은 "낱낱이 말할 수 없는"(히9:5)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의 그룹 형상도 예술적 표현의 하나일뿐이다(출 25:18, 19 주석 참조). 그러나 그룹의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 요점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즉 (1) 감시자의 역할(창 3:24), (2) 하나님의 보좌를 운반하는 역할 (출 25:22;삼상 4:4;왕하 19:15;시 80:1;사 37:16), (3) 불(숯불, 번개, 화광석)과의 관련성(겔 10:2;28:14;사 6:6, 7) 등이다(Acomb). 한편, 성경에서 '둘'(two)이라는 숫자는 선포와 증거의 수이다. 따라서 '두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선포하고 또한 증거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편, 모세 성막내의 두 그룹은 법궤 쪽을 행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자세를 취하였으나(출 25:20;37:9), 솔로몬 성전의 그룹은 모세 성막의 그룹과는 달리 입구 쪽을 향해 정면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대하 3:13). 그리고 두 그룹의 바깥 쪽 날개는 각각 지성소의 중앙 지점에서 서로 맞닿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27절). 38절 그림 참조.

(주); 십규빗 - 혹자는 그룹 형상의 키가 10규빗인데 주의를 기울인다(Hammond). 실제로 성경에서 수(數)의 상징적 용법상 10은 기본수이면서 완전수이다(창 24:10;31:7;레26:26;수 22:14;느 5:18;욥 19:3;마 25:1;계 2:10). 가장 대표적으로 십계명에서의 '10'이란 신성한 수가 그것이다(출 34:1;신 4:13). 그 밖에도 다니엘, 에스겔, 계시록의 상징 등에도 '10'은 완전수로 자주 사용되었다(Pope;단 7:7;계 12:3 등).

성 경: [왕상6:2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소의 그룹]

(주); 이 날개 끝으로부터 저 날개 끝까지 십 규빗 - 한 그룹의 전체 날개 길이는 십 규빗(대략 4.56m)이었다. 그런데 두 그룹의 날개는 성막에서와 마찬가지로(출 37:7-9) 서로 연(演)하여 있었고, 따라서 지성소의 전체 폭(20규빗)을 온통 차지하였다(20절). 그리고 각 그룹의 바깥 날개는 지성소 방의 벽에 닿았고 안쪽 날개는 지성소 방의 중앙에서 서로 맞닿아 있었다(27절).

성 경: [왕상6:25-2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소의 그룹]

(주); 그 두 그룹은 한 척수, 한 모양이요 - 두 그룹은 서로 똑같은 모양과 크기를 가졌다. 한편, 솔로몬 성전에 세워진 이 그룹 형상들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였는지는 의론(議論)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스라엘 주변 근동 문화의 연구를 통해 추측해 볼 따름이다. 예를 들면 바벨론이나 앗수르의 신전 입구에는 애굽의 스핑크스와 비슷한 수호상들이 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사람의 얼굴과 독수리의 날개, 사자 또는 황소의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솔로몬 성전의 그룹도 이와 유사한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에스겔의 환상에서 그룹은 사자, 소, 독수리 그리고 사람 등 네 생물의 형상으로 묘사되며 송아지 발바닥을 가지고 있었다(겔 1:5-10;10:14).

성 경: [왕상6:2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소의 그룹]

(주); 내소 가운데 그룹을 두었으니 - '가운데'(*, 타웨크)는 '중앙'을 의미한다(창 3:3;민 35:5;겔 48:8). 즉 그룹은 지성소 중앙의 법궤를 날개로 덮어 보호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이전 모세 성막에서는 두 그룹이 서로 마주 보는 자세였으나, 솔로몬 성전의 그룹들은 외소, 즉 성소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서 있었다(대하3:13).

(주); 폐었는데 - '폐다'는 '펴이다', 즉 '피다', '폄을 당하다'의 준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룹들의 날개가 펼쳐져 있는 상태가 되게끔 하였다는 말이다. 공동 번역은 이해하기 쉽게 '펼쳐져 있어'로 되어 있다.

성 경: [왕상6:2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내소의 그룹]

(주); 저가 금으로 그룹에 입혔더라 - 이로써 지성소 내부의 모든 것이 금으로 싸여지고 장식되었다(출 25:10-13). 그리고 비단 지성소 뿐만 아니라 성전 내부 전체와 외소의 문짝까지도 금을 입혔다(30, 32, 35절). 이처럼 성전의 주요 부분들이 금으로 장식된 것은 금이 상징하는 빛과 순전함 및 불변성 때문일 것이다(욥 37:22;벧전 1:7;계21:18).

성 경: [왕상6:29]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그룹 - 6:23;출 25:18, 19 주석 참조.

(주); 종려 - '종려'(*, 티모라)는 야자과에 속한 높이 3~8m 내외의 나무로, 고급 정원수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고대 근동에서는 이 종려 나무(palm tree)가 생산력의 상징으로서 신전에 조각되는 등 매우 신성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조각 예술품들에도 사용되었고, 고대 유대의 회당에도 양각(陽刻) 또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Trever). 그리고 성경에서 이 종려는 환영, 즐거움을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요 12:13;계 7:9). 한편, 겔 41:18의 기록에 의하면 종려나무는 그룹 사이 사이에 엇갈려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주); 핀 꽃 - 18절 주석 참조. 활짝 핀 꽃은 예나 지금이나 싱싱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생명력이 가득한 장소로 표현된 것이다(B hr).

성 경: [왕상6:30]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내외 전 마루에는 금으로 입혔으며 - 내외, 즉 지성소와 성소에 깔린 마루 전체에 금이 입혀졌다. 이처럼 바닥에도 금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하게 구별된 성격을 강조하여 준다. 즉 성소(the Holy Place)는 오직 성별된 제사장들만이 직무를 수행하던 곳이고, 더욱이 지성소(the Holy of Holies)는 1년에 한번 속죄의 날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레 16:15,34;민 28:3; 히 9:6-7).

성 경: [왕상6:31]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문 인방 - 인방(引放, lintel)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문이나 창을 아래 위로 가로지르는 나무를 말한다.

(주); 문설주 - 문설주(門楔柱, doorpost)란 문의 양쪽에 세워 문짝을 끼워 달도록 된 기둥을 말한다.

(주); 벽의 오본지 일이요 - '오분지 일'로 번역된 '하미쉬트'(*)를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이 어휘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견해들은 대략 다음 세 가지이다.(1) 문의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즉 성전 폭의 1/5, 즉 4규빗 크기의 문을 의미한다는 견해(Keil, B hr), (2) 엔태블러처(entablature), 즉 건축에서 기둥이 떠받치는 힘의 평형 부분이 기둥의 1/5 지점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견해(Bottcher,Thenius), (3) 오각형(pentagon)모양의 문을 의미한다는 견해(Gray, Meyer, Stier). 한편, 대다수의 영역본들은 이 말을 오각형 모양의 문으로 번역하였다(RSV, apentagon;NIV, Living Bible, five-sided). 그리고 공동 번역도 "오각형을 이루었다"로 해석하였다.

성 경: [왕상6:32]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감람목으로 만든 그 두 문짝 - 지성소 문의 이 문짝들은 7:50로 미루어 금돌쩌귀에 의해 문설주에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돌쩌귀란 문짝을 문설주에 달고 여닫게 하기 위해 쇠붙이로 된, 암수 두 개가 한 벌로 된 물건을 말한다. 암짝은 문설주에, 수짝은 문짝에 박아 맞춘다.

(주);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 지성소의 문에는 벽에 조각된 것과 같은 형상들이 새겨졌다(29절). 한편 조각된 형상들에 금을 입힌 사실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기록상의 특징이다. 즉 새로운 부분이 소개될 때마다 매번 금을 입힌 사실을 꼼꼼이 반복함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성 경: [왕상6:33]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벽의 사분지 일 - '사분지 일'(*, 리비이트)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31절의 '오분지 일'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RSV, NIV 등 영역본들은 대개 '사각형'(square, foursided)의 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공동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성 경: [왕상6:34]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그 두 문짝은 잣나무라 - 외소, 즉 성소의 문짝을 잣나무로 만든 까닭은 이 나무가 감람목(올리므)에 비해 가볍기 때문에 쉽게 가라앉지 않도록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아마도 외소(성솨)의 문짝은 내소(지성소)에 비해 훨씬 더 사용 빈도가 높은 것을 고려하였을 것이다.

(주); 이 문짝도...저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으며 - 각 문짝이 두 짝으로 이루어져 다른 문짝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성소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일상적인 출입을 편리하레 하기 위해서이다(Keil,Montgomery). 그런데 각 문짝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것이 정확히 어떤 형태 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카일(Keil)은 33절의 '사분지 일'을 문의 크기로 보기 때문에 만일 각 문짝이 수직 분할로 되었다면 한 사람이 간신히 드나들기에도 비좁은 크기가 되므로 아마도 수평 불할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평 분할의 경우, 그의 계산으로는 각 문짝의 아래쪽 문은 각각 2규빗(너비), 4규빗(높이)의크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즉 (1) 우선 33절의 문의 크기를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고, (2) 만일 그렇더라도 그의 계산은 본절이 외소의 문짝임에도 불구하고 내소의 문의 크기를 적용한 실수이며, (3) 수평 분할의 문은 당시의 건축에서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각 문작은 수직 분할의 형태로 나뉘어졌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J.Hammond).

성 경: [왕상6:35]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새긴 데 맞게 하였고 - 즉 조각한 형상의 깊고 얕음에 따라 고르게 또한 세심하게 금을 입혔다는 말이다(J. Hammond). 그런데 고대의 도금 방식은 대개 얇은 금판을 못으로 부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Keil). 솔로몬의 성전에도 이처럼 못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대하 3:9).

성 경: [왕상6:36]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의 문]

(주);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 - 돌과 백향목 판자는 안뜰의 담을 구성하는 재료들이다. 여기서 '켜'(*, 투르)란 포개어 놓은 물건의 낱낱의 층(layer, row)을 말한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개 '줄'(line)로 번역되었다(출28:17;39:10;왕상 7:2;대하 4:3). 아마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세줄, 그 위에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줄 하는 식으로 담을 둘렀을 것이다. 이러한 건축 방식은 포로 귀환 후의 제 2성전에서도 재현된다(스 6:4). 한편 대하 7:3에서 추론해 보면 이 안뜰 담의 높이는 백성들이 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을 만큼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주); 안뜰 - '안뜰'(the inner court)이라는 표현 자체가 '바깥뜰'을 전제하는데, 각각 대하 4:9의 '제사장의 뜰'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렘 36:10은 본절의 '안뜰'을 '윗뜰'로 호칭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은 안뜰이 바깥뜰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格)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전의 모세의 성막처럼 성전 앞의 뜰에서 제사장들과 백성들과는 달리 제사장들은 안뜰, 즉 제사장의 뜰에서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생긴 구별일 것이다. 그러나 안뜰과 바깥뜰 모두 크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다른 예들에 비추어 솔로몬 성전이 모세 성막 크기의 2배가 된다면, '안뜰'(제사장의 뜰)의 크기는 동서간의 길이가 200규빗(91.2m), 남북 간의 폭이 100규빗(45.6m) 될 것이다. 그리고 '바깥 뜰'(큰뜰)은 안뜰 크기의 2배, 즉 길이 400규빗(182.4m), 폭 200규빗(91.2m)이 될 것이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6:37]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필역(畢役)]

(주); 시브웰 - '시브'(*, 지우)는 히브리 종교력의 둘째 달(2월)이다. 그리고 '시브'는 '밝음', '찬란함' 등의 의미를 가진 가나안어에서 생긴 말로 추정된다. 그래서 시브웰은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4, 5월 경이므로 꽃들의 찬란함에서 단 명칭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Hammond, Keil).

(주); 기초를 쌓았고 - 목재와 석재의 준비 기간(5:13-18)은 건축 기간에 합산(合算)되지 않았다(Keil, B hr). 즉 본서 저자는 솔로몬 성전의 건축 기간을 성전의 기초석을 정초(定礎)한 시점부터 계산하고 있다.

성 경: [왕상6:38]

주제1: [솔로몬의 성전 건축]

주제2: [성전 건축 필역(畢役)]

(주); 제 십 일 년 불월 곧 팔 월에 - 여기서 '불'(*)은 히브리 종교력의 여덟째 달(8월)로,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10-11월에 해당한다. '불'(*)의 어원에 대하여 게세니우스(Gesenius)는 '비'라고 보았고, 카일(Keil)은 '열매' 라고 보았다. 아무튼 '불월'에 해당하는 히브리 종교력 8월(오늘날 태양력 10-11월)은 팔레스틴의 기후상 우기(雨期)일 뿐더러 과수의 열매를 추수하는 달이므로 이처럼 명명된 것 같다. 한편, '불월'은 후대(B.C. 5세기 경)에는 '마르헤쉬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렇게 바뀐 이유는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바벨론 언어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Saunders).

(주); 그 설계와 식양대로 - 솔로몬 성전의 전체 건축 내용은 일찍이 선왕(先王) 다윗이 솔로몬에게 일러준 것이다. 나아가 성전의 설계와 식양은 성신(聖神)이 다윗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대상 28:11 이하, 특히 12절).

(주); 전을 건축한 동안이 칠 년이었더라 - 성전 건축은 솔로몬 즉위 4년 불월(B.C. 966년 2월)에 기초석을 놓음으로 시작하여(6:1), 솔로몬 즉위 11년 시브웰(B.C. 959년 8월)에 필역되었다. 따라서 건축 기간은 보다 정확히 7년 6개월 걸린 셈이다. 그런데 성전 건축에 걸린 이 기간은 고대의 다른 대건축물에 비하면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에베소의 다이아나(Diana) 신전 건축은 무려 200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Pliny). 또한 애굽의 피라밋 건축에는 대개 20년이 소요된다(Hammond). 이와 비교하면 그토록 화려하고 정교한 건물을 완공하는 데 7년 남짓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1) 성전이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는 점, (2) 많은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최선을 다했다는 점, (3) 그리고 다윗 시대부터 세심한 준비가 축척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솔로몬 성전 건축은 긴 세월 동안 정성을 다한 대건축 사역이었던 것이다.

성 경: [왕상7:2]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저가 레바논 나무로 궁을 지었으니 - '레바논 나무'란 곧 '백향목'(柏香木, Cedar)을 말한다. 그런데 특별히 여기서 '나무'로 번역된 '야아르'(*)는 '모으다', '소집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건축 재료를 백향목으로 사용했다는 뜻을 넘어 백향목의 밀집 상태, 즉 수풀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본절은 '레바논 숲의 궁'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영역본들도 본절의 '나무'를 '숲'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KJV.RSV.Living Biblr, theforest of Lebanon). 아마도 이 궁은 매우 서늘하고 쾌적한 장소였을 것이다(삿3:20). 왜냐 하면 백향목의 숲이 근동의 더위를 잊게 할만큼 시원한 그늘을 형성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하에서 본절의 '레바논 나무 궁'은 레바논의 백향목들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Keil, B hr, Patterson), 후자들의 주장처럼(Dathe,Michaelis) 레바논에 여름 별장용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은 아니다. 한편 이 궁의 용도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으나 일부는 병기고로 사용되었으라는 점만은 분명하다(10:17;사 22:8). 그러나 병기고 외에도 좀더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주); 장(長)이...고(高)가 삼십 규빗이라 - 왕실에서 사용하는 규빗(52-54cm)이었다면<6:2>), 레바논 나무 궁의 크기는 길이 52-54m, 폭 26-27m, 높이 15-16m 가량 이다. 즉 높이만 성전과 같고 길이와 폭은 성전보다 두배 가량 더 크고 넓다(6:2).

(주); 백향목 기둥이 네 줄이요 - 궁전의 하층은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혹자는 이 기둥들의 숫자가 400개라고 주장하나(Thenius), 궁전의 규모를 감안할 때 너무 과밀(過密)하다. 한편 궁전이 단층이 아니라고 추정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7:3]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기둥 위에 있는 사십 오 개 들보...한 줄에 열 다섯이요 - 본절의 난점은 2절과의 모순 때문에 생긴다. 왜냐하면 2절대로라면 백향목 들보도 네 줄이어야 할 것이나 본절은 한 줄에 열 다섯씩 사십 오개, 즉 세 줄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본절의 '들보'를 '골방'으로 해석한다(B ht, Hammond,Keil). 이 같은 견해는 궁전도 성전처럼 다락과 골방을 갖고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데서 비롯된다(6:5). 한편 '덮었는데'에 해당하는 '사푼'(*)은 지붕을 덮었음을 의미한다(6:9). 따라서 앞의 수정된 견해를 취할 경우 본절은 '사십 오 개 골방의 지붕을 백향목으로 덮었다'는 의미가 된다.

성 경: [왕상7:4]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또 창틀이 세 줄로 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대하였고 - 본절이 설명하는 상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3절의 골방(들보)들이 어떤 배열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단층 건물에 창이 세 줄씩 있을 가능성은 회박하다. 만약 그럴 경우 3절의 골방들은 단층 내부에서 세 줄로 나란히 붙어 있는 납득키 어려운 구조로 배열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창과 창이 서로 대하여" 있는 상태를 자연스럽게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그러나 15개씩 세 층으로 배열되었다고 본다면, 본절의 상태가 좀더 자연스럽게 풀린다. 즉 창틀은 각 층에 한 줄씩 있고 각 층의 창은 방 맞은편에 서로 마주보는 창을 갖고 있는 것이다(Keil). 한편 이 골방들의 용도는 병기고및 왕실 시위대의 거처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B hr).

성 경: [왕상7:5]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문과 문설주를...네모지게 - '네모지게'(*, 라바)는 문자대로 문의 모양을사각형(square)으로 만들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사각형의 문에서 문설주와 인방(6:31)은 당연히 사각형을 이를텐데 불필요하게도 '문설주'만 또 언급하고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70인역(LXX)을 따라 '문설주'(*,메주자)를 '창틀'(*, 메헤자)로 고쳐 읽는다(Thenius, Hammond, B hr). 그렇게 되면 본절은 이 건물의 문 뿐 아니라 창문의 모양도 설명하는 셈이 된다.

성 경: [왕상7:6]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기둥을 세워 낭실을 지었으니 장이 오십 규빗이요 광이 삼십 규빗 - 이 낭실은 벽대신에 기둥들로만 둘러져 있는 건물(a porch of pillars, KJV;the Hall of pillars,RSV)이다. 그런데 낭실이 어떤 건물인가 하는 여부에 논란이 좀 있다. 혹자는 이 낭실의 길이가 레바논 나무 궁의 폭과 일치하는 점을 들어(2절) 이 낭실이 바로 레바논 나무 궁의 현관(porch)일 것이라고 주장한다(Rawlinson). 그러나 (1)이 낭실이 성전 과거의 비등한 만치 커다란 크기이고(6:3), (2)성전의 낭실은 그 폭이 성전의 폭과 일치하는데 비해 본절의 낭실 폭은 궁전의 폭과 일치하지 못하며(2절), (3)이 낭실 자체가 또 하나의 낭실을 갖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낭실은 독립된 건물일 것으로 본다(Fergusson). 그러나 본절의 '낭실'(*, 울람)이란 표현은 레바논 나무 궁과 이 건물 그리고 다음 절에 아오는 재판하는 낭실이 어떤 형태로든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이러나 사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입증되는데, 즉 므깃도 궁의 유적을 통해 확인한 결과, 솔로몬 궁전은 분명 당시 수리아 북방과 아나톨리아 남방에서 주로 사용된 '비트-힐라리'(Bit-Hilani, 양 옆의 여러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 낭실을 통하여 넓은 실내로 들어가는 형태의 건축양식) 구조로 건축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Ussishkimn, King Solomon's Palaces).

(주); 섬돌(*,아브) - '섬돌'은 오르내리는 돌 층계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 외에는'아브'(*)를 '섬돌'로 번역하지 않고 있다. 영역본들은 대개 건축물 상단의 수평 돌출 부분, 즉 '처마'나 '차양'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RSV.Living Bible,canopy;Modem Language, cornice). 공동 번역도 역시 '차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왕상7:7]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건 건축]

(주); 보좌의 낭실 곧 재판하는 낭실 - 이 건물은 상아에 정금을 입혀 만든 화려한 보좌와 여섯 층계, 열두사자상들이 있는 곳이다(10:18-20). 한편 본절의 '재판'(*, 솨콰트)은 3:9의 '재판'과 동일하다(대하 1:10,11). 따라서 이 건물은 왕의 주무(主務)를 수행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처럼 입구나 현관의 의미를 지닌 낭실에서 왕이 백성들을 재판한 것은 이전 시대에 성문 앞에서 무리를 재판하던(삼하 15:2;룻 4:1,2) 관습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Stanley).

(주); 온 마루를 백향목으로 덮었고 - 이에 비해 성전의 마루는 잣나무로 덮었고 그 위에 금을 입혔다(6:16, 30).

성 경: [왕상7:8]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솔로몬의 거처할 궁 - 보좌의 낭실(재판하는 낭실) 뒤편에는 왕이 거처하는 궁이 있었다. 이 궁은 레바논 나무 궁이나 재판하는 낭실과 달리 솔로몬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장소였다.

(주); 그 공작이 일반이며 - 즉 재판하는 낭실과 같은 식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솔로몬의 거처가 재판하는 낭실과 같은 크기임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Hammond). 하지만 여기서 '공작'(*, 마아세)이 '솜씨', '기술'(wormanship, RSV)을 의미하므로, 솔로몬의 거처는 재판하는 낭실과 같은 기술과 양식, 그리고 재료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백향목과 상아 장식 등이 사용되어 매우 화려하게 꾸몄을 것이다(10:18-20). 향편 본절로 미루어 6절의 낭실과 7절의 낭실은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7절의 낭실과 같은 식으로 지어진 솔로몬의 거처가 6절의 낭실처럼 기둥만으로 벽을 이룬 건물일 리 없기 때문이다.

(주); 그 장기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같더라 - 솔로몬 일찍이 결혼한 바로의 공주<3:1>를 위해 자신의 거처와 같은 식으로 지은 궁을 마련해 주었다(대하 8:11).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같더라'가 규모의 동일함 보다는 기술 및 재료의 동일함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데니우스(Thenius)가 주장하듯 이 궁은 솔로몬의 모든 부인과 후궁들(11:3)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바로의 공주만을 위한 사저이다(Hammond). 그렇다면 바로의 공주는 애굽의 위세와 더불어 솔로몬의 부인 중 으뜸의 지위를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의 거처는 고대 동양의 왕궁 구조가 대부븐 그렇듯이 왕의 거처와는 분리되어 그 뒤에 위치했을 것이다(Keil). 전체적으로 보아 이처럼 왕과 왕비의 거처와 같은 사적 용도의 건물은 공적 용도의 건물(레바논 나무 궁, 기둥 낭실, 보좌의 낭실 등)에 비해 궁전의 안쪽에 위치했다.

성 경: [왕상7:9]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안팎을 - 이 말이 궁전의 안쪽 지역과 바깥 지역을 일컫는 말인지, 단지 건물 벽의 내면과 외면을 일컫는 말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즉 '2-8절에 소개된 모든 건물의 내면과 외면'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주); 귀하고 다듬은 돌 - '귀하고'(*, 야카르)는 가치있고(valuable), 값비싸며(expensive), 희귀한(rare)의 뜻이 모두 담겨 있다. 그리고 '다듬은'(*, 가시트)은 '자르다'라는 뜻이다. 즉 돌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잘라내어 고르고 반듯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주); 척수(尺數)대로 톱으로 켠 것 - 미리 설계된 규격대로 치수를 재어 잘라냄을 말한다. 한편 '톱'(*, 가라르)은 틉질하는 소리에서 유래된 의성어라 한다(Hammond). 그런데 솔로몬 건축 공사에 사용된 톱의 모양은 알려진 바 없다. 참고로 당시 에굽의 톱은 한쪽 날만 있고, 후대에 니므롯(북 바벨론, 미 5:6)에서 발굴된 톱은 양날을 가졌다고 한다(Layard). 그렇지만 성경 기록상 톱은 다윗 때부터 이미 사용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다(삼하 12:31;대상 20:3).

(주); 기초석에서 처마까지 - '기초석'(*, 마사드)은 건물의 다른 부분들이 이에 의지하여 세워지고 연결되는 크고 귀한 돌이다(5:17). 그리고 '처마'(*, 테파흐)는 그위에 다른 건축물을 세우지 않는 지붕의 돌출부이다(Gesenius, Keil). 따라서 "기초석에서 일종의 대유법(代喩法)적 표현이다.

(주); 외면에서 큰 뜰에 이르기 까지 - 여기서 '외면'(*, 후츠)은 성전의 '바깥뜰'(혹은 '큰 뜰')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대하 4:9).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본절이 궁전의 건물 및 공간 전체를 지시하려고 의도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큰 뜰'이 왕궁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뜰 전체를 지칭한다면(Ewald), 본절의 '외면'은 왕궁과 성전의 경계를 이루는 성전의 뜰을 의미할 것이다. 공동 번역도 이런 입장을 취해 "야훼(여호와)의 전의 뜰"로 해석하였다.(RSV,the courtof house of theLord).

성 경: [왕상7:10]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귀하고 큰 돌 - 5:17 주석 참조. 십 규빗 되는 돌과 여덟 규빗 되는 돌 - 왕실에서 사용되는 규빗(6:2)이 적용된다면, 왕궁의 기초석은 각각 길이 5.2-5.4m 폭 3.68-4.32m의 크기이다.

성 경: [왕상7:11]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그 위에는 척수대로 다듬은 귀한 돌도 있고 - 기초석이 다만 "귀하고 큰 돌"로만 묘사된데 비해, 그 위의 돌들은 "척수대로 다듬은 귀한 돌"로 묘사되고 있다. 성전 기초석의 경우를 염두에 둘 때(5:17), 왕궁의 기초석도 다듬질 안하지는 않았겠으나, 기초석은 눈에 보이지 않거나 땅 속에 박히는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거칠게 다듬어졌음을 암시받을 수 있다. 반면 기초석 위에 세워지거나 꾸며지는 돌들은 보다 매끄러울 뿐 아니라 작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Hammond).

성 경: [왕상7:12]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솔로몬의 왕궁 건축]

(주); 큰 뜰 주위에는 - 솔로몬의 앙궁에도 성전과 마찬가지로 2개 이상의 뜰이 있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1)본절의 '큰 뜰'이라는 표현 자체가 보다 작은 어떤 뜰을 전제하며 (2)8절의 '다른 뜰'은 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큰 뜰'은 분명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뜰을 가리킬 것이다.

(주); 다듬은 돌 세켜...마치...놓은 것 같더라 - 이는 성전의 안뜰과 동일한 방식으로 담을 둘렀음을 의미한다(6:36). 본절에서 "...것 같더라"로 번역된 '웨라하차르'(*)는 '또 (여호와의 전의)뜰도 그렇게'라는 뜻이다. 이때 '또'에 해당하는 '와우'(*)는 잠언서등에서 종종 나타나듯 비교를 나타내는 문법적 기능을 한다고 한다(Gesenius, Ewald 등). 그렇다면 개역 성경의 "마치...같더라"의 번역은 원문의 뜻을 잘 전달해 주고 있는 셈이다.

(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 - 본절의 '낭실'이 성전의 낭실인지 궁전의 낭설인지 분명치 않다(Montgomery). 또 궁전이라 해도 그 중 어느 낭실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추측에 의해 성전 낭실이 아니고 궁전의 기둥 낭실(6절)로 주장하기도 하며(Keil), 또는 재판하는 낭실로 주장하기도 하나(Rawlinson) 확증적인 근거는 없다.

성 경: [왕상7:13]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기술자 히람의 초정]

(주); 보내어 - '보내다'(*, 솰라호)는 '왕의 대리자로 보내다'라는 뜻이다(5:1;8:44;9:27 등). 즉 왕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자 곧 사절, 사신 등을 보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신약(LXX)에서 사용된 '사도'(*, 아포스톨로스-'보냄 받은 자'란 뜻)란 말도 바로 이 '솰라흐'에서 파생, 번역된 말이다. 한편 이같은 동사의 용법으로 미루어 '히람'(Hiram)은 솔로몬이 특별히 두로 왕에게 요청해서 데려온 중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이 대하 2:7-14 보다 상세히 나와있다.

(주); 히람 - '후람'으로도 표기되는(대하 2:13;4:11) 뛰어난 놋 재조 전문 기술자로, 두로 왕 히람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히람은 모세 시대의 성막 제조 기술자인 브사렐(출 31:2-5)과 비견될 수 있는 인물로, 놋 뿐만 아니라 금은동철 및 돌과 나무, 천을 다루는 일에도 탁월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희대의 장인(匠人)이었다(대하2:14).

성 경: [왕상7:18]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성전 기둥 제작]

(주); 두 줄 석류를 한 그물 위에 둘러 - 이 '두 줄 석류'와 사슬 모양의 꽃줄(17절)은 서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두 줄 석류는 꽃줄 장식의 위 아래로 한 줄씩 두른게 아닐까 추측된다(B hr,Keil등).

성 경: [왕상7:24]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놋바다 제작]

(주); 박 - 6:18 주석 참조. 그런데 대하 4:3에는 '박'이 아니라 '소'로 기록되어 있다. 만일 역대기의 기록을 따르면 조절의 기록과 중복될 뿐 아니라 본절의 설명도 어색하다. 왜냐하면 소의 형상을 1규빗 당 10개씩 촘촘히 박은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대기의 기록은 '박'(*, 페카임)을 '소'(*, 베카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Keil).

(주); 바다를 부어 만들 때에...만들었으며 - 즉 새로이 덧붙여(장식한 것이 아니고, 놋대야(바다)를 주문할 때 미리 그 같은 형상이 나오도록 제작하였다.

성 경: [왕상7:27]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물두멍과 받침 제작]

(주); 놋으로 받침 열을 만들었으니 - 이 열개의 놋받침은 물두멍을 받치기 위한 것이다. '두멍'이란 물을 길어 붓고 쓰는 통을 말한다. 그런데 대하 4:6에 의하면, 이 열 개의 물두멍은 희생 제물을 씻는데 사용되었으며 성전의 좌우 양편으로 다섯개씩 갈라져 위치하였다.

(주); 매 받침의...세 규빗이라 - 이 놋받침의 크기는 길이와 폭이 각각 2-2.16m 똑같았고, 높이는 1.5-1.5m였다. 따라서 이 놋받침은 사각형의 상자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왕상7:28]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물두멍과 받침 제작]

(주); 그 받침의 제도는 이러하니 - '제도'(制度)로 번역된 '마아세'(*)는 '기량', '솜씨', '공작'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어떤 공작물의 구조나 얼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주); 변죽 가운데 판이 있고 - '변죽'이란 그릇 따위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받침대의 사면 가장자리에 받침대의 사면 벽을 구성하는 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변죽과 판의 관계를 틀과 그 틀에 끼워서 있는 판자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성 경: [왕상7:32]

주제1: [궁전 건축과 성전 기구 제작]

주제2: [물두멍과 받침 제작]

(주); 바퀴 축은 받침에 연하였는데 - 원문에는 '-안에'의 뜻이 있는 전치사 '베(*)가 보인다. 또한 '연하다'로 번역된 '나가'(*)는 '계속되다', '잇닿아 있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본절의 바퀴축은 받침대 속에 박혀 있었던 듯하다. 공동 번역도 이같이 해석하여 "바퀴축들은 그 받침대 속에 들어 있고"로 번역하였다.

(주); 바퀴의 고는 각각 한 규빗 반 - 바퀴의 높이는 받침대 높이(세 규빗, 27절)의 반이었다.

성 경: [왕상8: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이에 - 본절 초두에 나오는 '이에'(*, 아즈)란 말은 솔로몬이 장로와 족장들을 소집하는 행동이 7:51의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을 마친지라"에 이어지는 행동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2절에서 보듯, 장로와 족장들이 솔로몬 왕에 의해 소집된 시점이 유대 종교력 '칠월'이라는데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6:38은 성전 건축을 마친 시점이 솔로몬 즉위 11년 '불 월' 곧 '팔 월'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팔월'에 끝난 일 다음에 '이에'로 이어지는 사건이 '칠월'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 즉 성전 봉헌식이 이루어진 시기 문제에 대하여 크게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성전이 완공된 해(솔로몬 즉위 11년)의 7월이라는 견해(Ewald, Hammond). 이는 8월에 가서야 비로소 성전이 완공되었으나(6:38). 거족적인 대절기인 초막절에 맞추기 위해 한달 앞당겨 봉헌식을 거행했다는 견해이다. (2) 성전 완공 다음 해의 7월이라는 견해(B hr, Patterson). 성전은 솔로몬 즉위 11년, 즉 B.C.959년 8월에 완공되었으나 성전 기구를 만드는 데 근 1년 정도 걸렸을 것이므로(7:13-50), 봉헌식은 건축 후 11개월만에 비로소 거행될 수 있었다는 견해이다. (3) 솔로몬의 궁전 완공(7:1-12) 이후라는 견해(Keil, Thenius). 이들은 9:1-10에 근거하여 성전 봉헌식은 성전 완공 13년 후인 궁전 완공 이후에 거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전 완공 후 봉헌식까지 13년이나 기다렸다는 이 세번째의 견해는 무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첫번째 견해의 입장에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아즈'(*)는 상당히 폭넓은 말이므로 성전 완성 한달 전도 지시 가능하다. (2) 6:38의 '팔월'은 본장의 봉헌식까지 다 끝난 시점일 수 있다. (3)모든 마루리가 팔월에 끝났더라도 성전의 봉헌식은 전통적인 절기, 즉 칠월의 장막절에 맞추는 것이 의의가 깊으므로 앞당겨 했을 가능성이 있다. (4) 오랜 숙원 사업이자 거국적 최대 관심사인 성전 봉헌식을 해를 달리할 정도로 미루었을 까닭이 없다(Pulpit Commentary).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성전 기구 제작(7:13-50) 기간을 고려한다면, 그래서 완전한 끝마무리 이후에 성전의 봉헌식을 치루었을 것이라고 본다면, 두번째의 견해도 일리가 있다(Expositor's Bible Commentary).

(주);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 여기서 '시온'(Zi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 이름인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명명하였다(삼하5:7). 그리고 다윗은 이곳 다윗 성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를 임시로 안치하여 놓았었다(삼하 6:1-19).

(주); 이스라엘 장로와...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모세 성막에서 이제 영구적 건물인 솔로몬 성전으로 법궤의 자리를 옮기는 봉헌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뜻깊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이 모두 소집된 자리에서 성전 봉헌식은 공시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와 족장들'은 중앙 집권적 정부가 임명하는 관료와는 구별되는 존재들이다. 즉 그들은 인격이나 지혜, 무용 등의 탁월함으로 인해 혈연 및 지파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른바 자연 발생적인 공동체내의 유지나 지도자들이다(Davies). 그런고로 이들은 성전 건축에 관해 의논할 당시에도 다윗에 의해 소집된 바 있으며(대상 28:1-3), 건축 재료를 위해 자신들의 보물들을 기꺼이 바치기도 하였다(대상 29:6-9). 이렇듯 성전은 범민족적 사역에 의해 건축되었으므로,그 봉헌식에 있어서 국민의 대표자인 이들을 소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윗 역시 궤를 옮겨오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소집하였었다(삼하 6:1).

성 경: [왕상8: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모이고 -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 구성된 민족 전체 구성원들을 호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소집된 사람들, 즉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장로와 족장들)이 모인 것을 전 백성이 모인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Keil). 가장(家長)이 곧 가족 전체를 대표하던 고대의 사고 방식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수있다.

(주); 에다님월 곧 칠월 - '에다님'(*, 에타님)은 '시내에 물이 흐른다'는 뜻이다(Gesenius). 유대 종교력으로 7월(오늘날 태양력의 9-10월에 걸쳐 해당)에는 특별히 건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Robinson). 곧 이른 비가 내리는 때로서, 이때 시내가 흘러내리기 때문에 명명된 월명(月明)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7월'이란 설명 어구가 첨가된 것은 이 달의 이름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티스리'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Keil).

(주); 절기에 - 원래 '절기'에 해당하는 '하그'(*)에 관사를 붙여 '헤하그'(*)가 되면 그 자체로 '초막절'(장막절)을 의미하는 이름이 된다(대하 7:8;느 8:14;사30:29;겔 45:23, 25). '초막절'은 유대 종교력 칠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칠일간 거행되는 절기로, 연중 절기 중 가장 크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제일 마지막으로 거행되는 수확의 절기였다. 그리고 본래 이 절기는 광야의 유랑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출 23:16;34:22;레 23:33-36;민 29:12-32;신 16:13-16). 그런데 이 초막절은 그 순서에 있어 계약 율법이 낭독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초막절'은 계약 갱신의 목적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Rylaarsdam). 따라서 바로 그러한 절기에 율법의 판이 담긴 법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었다. 아울러 초막적(장막절, 수장절) 행사는 광야 생활 동안 지켜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절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광야 생활 이후 유리 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솔로몬 성전에 안치시키는 일을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 경: [왕상8: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 민수기의 규례에 따르면, 벰궤는 레위인들이 메어야 했다. 그러나 손을 대어 만질 수는 없었다(민 4:15). 그런데도 다윗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회수할 때 그것을 수레에 싣게 하였고, 게다가 웃사는 손을 대가까지 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삼하 6:3-7). 이제 솔로몬은 규정대로 궤를 운반하였다. 한편, 병행 구절인 대하 5:4에서는 '레위 사람이 궤를 메니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궤를 멘 자들은 '레위족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대하 5:7). 원래 언약궤의 운반은 레위인 가운데서도 고핫 자손에게 맡겨졌으며(민 3:30, 31), 언약궤(법궤)에 덮개를 씌우거나 벗기는 일 등 언약궤를 실제로 돌보고 감독하는 일은 언제나 고핫 자손 중에서도 제사장 계통인 아론의 자손들에게 속한 일이었다(민 4:5-15).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이 언약궤의 운반을 고핫 자손에게 맡기지 않고 상위 직위인 제사장들에게 직접 맡긴 것은, 성전 봉헌식을 더욱 경건하고 비중있게 거행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다(수 3:6, 15, 17;대상 15:11,12). 그리고 이처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직접 멘 실례는 매우 의의 깊은 역사적 사건, 예를 들면 요단 강 도하시(수 3:6, 17), 여리고 성 포위시(수 6:6)등에 이미 시행된 적이 있었다.

성 경: [왕상8: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여호와의 궤 - '법궤'(레 16:2), '언약궤'(민 10:33), '증거궤'(출 26:33) 등으로 불리우는 이 궤는 다윗 성, 곧 시온 산 위 '다윗이 친 장막 가운데' 근 40여년간 머물러 있었다(삼하 6:17).

(주); 회막 - 보통 '장막' 또는 '성막'으로 불리던 '회막'은 실로와 놉을 거쳐 당시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하 1:3). 따라서 '언약궤'는 다윗 성으로부터, '회막'은 기브온 산당에서부터 각각 솔로몬 성전으로 운반되었다.

(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 - 이 모세 성막의 옛 기구들은 이제 그것들(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등)을 대신할 솔로몬 성전의 새 기구들이 제작되었으므로(7:23-50), 더이상 사용되지 않고 옮겨져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을 것이다(7:51).

(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 제사장들은 특별히 언약궤를 메고, 레위인들은 성막과 여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광야 여정에서처럼 그 옮기는 방식과 절차를 따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으로 옮겼을 것이다(Keil; 민 4:1-33).

성 경: [왕상8: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 아마도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기 전 제단이 있는 안뜰에 우선 놓여졌던 것 같다. 그리고 왕과 백성들은 이때 법궤 앞에서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성대히 베풀었던 것 같다(Keil). 따라서 이때의 희생 제사는 단순히 정결만을 위한 예식이라기보다 잔치와도 같은 기쁨과 감사의 행사인 것이다(3:15). 즉 성전의 낙성식으로 갖는 축하의 순간인 것이다(Gates).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법궤가 지성소에 안치되기까지 백성들이 노래하며 춤추었다고 한다. 한편, 그런데 이때의 희생 제사는 감사와 축하의 의도 외에도 법궤와 관련된 이전의 불상사들(삼상 4:17, 18;6:19;삼하 6:7)과 같은 화를 피하기 위한 의도도 분명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Hammond).

성 경: [왕상8: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 성전의 핵심인 그 처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나타내 주던 것은 법궤였다. 따라서 법궤 자체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되기도 하였다(민 10:35, 36). 그러므로 법궤가 성전의 자기 '처소'(*, 마콤) 즉 제 위치에 안치됨으로써,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가장 요긴한 부분의 일이 마무리된 것이다. 아무튼 모세 성막의 다른 모든 기물들은 솔로몬 성전어가 규모에 맞추어 모두 새롭게 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이 언약궤(법궤)만은 시내 산에서 만들어진(출 25:10-22;37:1-5) 바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와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시켰던 것이다.

(주); 내전 - 본절에서 '내전'으로 번역된 '데비르'(*)는 6:16, 17에서 '내소'로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주);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 언약궤(법궤)는 금으로 만들어진 그룹들의 펼쳐진 날개 아래 안치되었다. 6:23-28 주석 참조.

성 경: [왕상8:7]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 법궤와 채(pole, 출 25:13), 곧 법궤에 속한 부분은 모두 그룹의 날개 아래 그늘에 있어 설혹 지성소 문을 열었을 때라도 항상 어두운 상태로 있게 하였다(12절).

성 경: [왕상8:8]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채가 긴 고로 채 끝이...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 본절이 설명하는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본절 수록의 목적이 전래의 성막 규정을 솔론몬 성전 역시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인 듯하다(Keil). 그런데 출 25:15의 규정에 의하면, 채를 법궤의 고리에 꿴 채로 두어야 했다. 어쨌든 본절의 상태를 여러 가지로 추측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비교적 타당해 보인다.(1) 동서로 길게 위치한 성전에 대해 법궤는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였을 것이다(B hr,Patterson). 왜냐하면 성전 전면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룹의 날개 그늘에 법궤와 채가온전히 덮일 수 있는 적절한 위치가 남북이기 때문이다. (2) 본절의 기록상 관찰자의위치는 성소의 우편, 즉 지성소 휘장의 왼쪽을 젖혀 볼 수 있는 자리였을 것이다(Hammond, Montgomery). (3) 그리고 이 관찰자는 아마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을 돕는 제사장 중 하나였을 것이다(Hammond).

(주); 그 채는...그곳에 있으며 - 법궤 운반용 '채'(pole)는 법궤의 고리에 꿰어진 상태로 붙어 있었는데(출 25:13, 15),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광야 생활 동안 나그네로 지냈음을 상기시켜 준다(Patterson).

(주); 오늘까지 - 본서(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다(서론, 기록 연대). 그러므로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고(B.C.586년), 따라서 법궤에 딸린 채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까지'란 말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 이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 이전의 기록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Hammond).

성 경: [왕상8:9]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 히브리서 9:4에 의하면, 언약궤 안에는 본래 '십계명 두 돌판'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 완공 후(B.C.959년)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시킬 때 십계명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보면 나머지 것들은 모세 시대 이후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 시대, 그리고 사울과 다윗 시대를 거치는 근 500여년 동안의 어간에 없어진 듯하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 시절 법궤가 블레셋에게 일시 탈취당했을 때(삼상 4:3-11) 유실된 듯하다(Hammond). 한편, 그러나 혹자들은 본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만들어있었을 뿐(출 25:16;40:20;신 10:5), 만나 항아리와 싹난 지팡이는 '여호와 앞에'(출 26:33) 곧 '증거궤 앞에'(민 17:10) 두었었다고 본다(Keil, B hr). 그리고 히브리서 9:4의 말은 후대 유대 전승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 역시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다.

(주); 호렙 - 시내 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로 추정되는 '호렙 산'(Mt. Hored)은 율법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진 곳으로(신 4:10-13), 통칭 '시내 산'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이름이다. 출 3:1 주석 참조.

성 경: [왕상8:10]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주);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 혹자는 여기서 '구름'을 번제단 위에서 타오른 희생 제물의 연기 구름일 것이라고 보았으나(Bertheau), 전적으로 잘못이다.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영광스러운 '그 구름'(the cloud)이다. 한편, '구름'으로 번역된 '아난'(*)에는 '흐림', '안개'란 뜻도 있다. 그러나 한글 성경에는 언제나 구름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된 구름은 항상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연관되어 등장한다(시 18:11;사 4:5;단 7:13;마 17:5;계1:7). 예를 들면 시내 산과 그리고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는 항상 구름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출 19:16;24:15-18). 원래 구름은 신의 직접적인 광채를 대면할 때 파생되는 인간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신의 옷이라는 사상이 이러한 기록의 배후에 있다(Moor). 그러므로 구름은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표식이된다. 이러한 구름이 이전에 성막 봉헌시에도 나타났고(출 40:34, 35), 지금 성전 봉헌시에도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전의 모세 성막을 승인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이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임재 처소로 승인하셨다는 것이다(Patterson, Hommond, Keil)>

성 경: [왕상8:1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

(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 이 장면 역시 구름 때문에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와 비교된다(출 40:35). 즉 그때의 일이 지금에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의 모세 성막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 역시 자신의 영광의 거처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주);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구별되는 다른 것인가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혹자는 다른 특별한 언급이 없고, 12절은 단지 '캄캄한 곳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본절은 그저 캄캄한 구름을 지칭한다고 본다(B hr).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여기서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어떤 '밝은 빛', '맹렬한 불'같은 것으로 설명한다(Hammond, Keil). 여기서 우리는 그 구체적 형태는 결정할 수 없더라도 '영광'은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밝힐 수 있다. 우선 '구름'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밝힐 수 있다. 우선 '구름'과 '영광'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는 것이다(출 33:20).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름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외피(外皮) 구실을 하는 것이다(10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구름이 곧 영광 자체일 수 없음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본절이 전해 주는바 '짙은 구름'은 그만치 강렬한 하나님의 영광을 반증(反證)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영광'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한편,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당신의 임재의 가견적 표식을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써 당신의 임재를 알리사 교회의 시작을 기념하셨다(행 2:2).

성 경: [왕상8:1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 언제 어디서 하나님이 그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다른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여호와께서...계시려고 의도하셨사오나"라는 뜻으로 이해한다(Thenius). 본절에서 '말씀하다'에 해당하는 '아마르'(*)는 '의도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르'는 그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신 경우에는 대체로 계시, 즉 당신을 알게 하시는 행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하나님은 캄캄한 데 계신 분이심을 알게해 주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구름과 흑암 속 캄캄한 곳에 거하신다가 구절은 많이 찾아 볼 수 있다(출 19:9;20:21;레 16:2;신4:11;5:22;시 18:11;97:2). 따라서 솔로몬은 이러한 상황을 기억하고 이처럼 말한 것같다. 그런데 그 구절들에서 '흑암' 또는 '캄캄함'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접근 불가능함, 또는 사고 불가능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캄캄한 데 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결국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지존(至尊)하심을 시인하는 표현이다.

성 경: [왕상8:1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론몬의 감사 찬양]

(주);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 본절은 외견상 12절의 내용과 상충(相衝)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12절은 제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지존하심을 고백한 구절인 반면, 본절은 바로 그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한 장소에 제한시킬 수 있는 양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은 솔로몬이 성전에 구름이 가득함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가 허락되었음을 확신하고 하는 말이다(Keil). 결국 성막에서든 성전에서든 그곳을 자신의 처소로 삼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 인간의 자의적 결정이 하나님의 처소를 고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절의 표현 속에는 그렇듯 지존하신 하나님을 감히 모시고자 하는 솔로몬의 겸비함이 들어 있다고 볼수 있다(27절). 그러므로 12절과 13절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계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음과 아울러, 그렇듯 고귀하신 하나님을 감히 성전에 모시고자 함에서 연유한 솔로몬의 겸비한 심령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주);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 -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근거로 다음 두 가지가 제시된다. (1) 광야를 유랑하던 시절의 성막이 갖는 이동성과 임시성에 대해 정착과 안정이 있는 성전의 영구성. (2)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영구한 왕위를 세워 주시겠다는 삼하 7:14-16의 약속.

성 경: [왕상8:1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얼굴을 돌이켜 - 그때까지 솔로몬은 성전에 구름이 나타나는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Hammond). 이것은 13절의 솔로몬의 말이, 성전에 가득한 구름이 내리 임함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여 발언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주);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 축복은 제사장만의 고유 권한이라는 데 근거해서(민6:22-27), 혹자는 본절의 솔로몬의 축복을 "권한은 없지만 그저 축하로서 했을 뿐"이라고 해석했고(Hammond), 혹자는 "제사장의 축도를 대신 수해한 것"이라고 각기 해석했다(Stanley). 그러나 (1) '축복하다'에 해당되는 '바라크'(*)의 용법은 실로 다양한데, 때로는 백성이 왕을 축복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고(66절), (2) 그리고 축도가 아닌 광범위한 의미의 '축복'은 제사장에게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창14:19;신 7:12-16). 결국 문맥으로 보아 본절마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한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경축사와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왕상8:1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여호와께서 그 입으로 나의 부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 -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왕위'(王位)와 '성전 건축'등에 대한 '다윗 계약'을 가리킨다(삼하 7:2-17;대상 22:6-12;28:1-10).

(주); 그 손으로 - 성경에서 '손'(*, 야드)이란 말의 사용 용법이 여러 가지이므로,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과 같은 형태로 사용되게 되면 보통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또는 능력을 의미하게 된다. 좀 더 살펴보면 '손'은 (1)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및 권한을 나타내며, (2)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바를 이루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본절의 솔로몬은 고백하는 것이다.

(주); 이루셨도다 -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대로 (1) 아들 솔로몬을 세워 다윗의 위(位)에 앉도록 하사 나라를 견고케 하셨다(삼하 7:12). (2)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대로 솔로몬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케 하셨다(삼하 7:13).

성 경: [왕상8:1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 - 이 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오랜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날로서, 선민 이스라엘이 신정 국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의 주요 국면, 주요 사건 등에서 이 출애굽 사건은 끊임없이 상기되고 회고된다.

(주); 내 이름을 둘 만한 집 - '이름을 두는 집'이라 해서 "하나님이 기신(寄身)하실 곳이 아니고, 그의 이름을 전파하실 곳"으로 이해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름을 내용과 관련없는 피상(皮相)으로 보는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구약 사상에서 '이름'(*, 쉠)은 단순한 호칭이나 명찰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가 갖고 있는 총체적이고도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낸다(창 27:36;32:28;삼상 25:25등). 즉 이름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존재 그 자체이다. "이름이 있는 곳에 그 이름의 주인공이 있다"(Schmidt). 그러므로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곧 하나님자신의 임재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그곳에 계시하시고, 또한 당신의 권위와 영광을 그곳에 두시겠다는 의미이다(신 12:5). 그런고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관심을 갖고 거룩히 지키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신다(겔 20:9;39:7). 결국 이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30절)이 땅의 백성들 사이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통로요 매개체(媒介體)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집,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사이에 임재하신 처소로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곳이 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을 두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이든 성물이든 그 자체가 하나님을 속박해 둘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후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에서 돌아섰을 때 성전은 무의미한 건물로 전락되었고 결국 파괴되지 말았다(사 1:10-17).

(주);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6:5, 6을 참고컨대, 이 말은 '다른 지파의 어느 성읍도 뽑히지 않고 오직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이 뽑혔다'는 의미를 보충해야 뜻이 분명해진다.

(주); 다만 다윗을 택하여 - 본절은 수많은 나라들 중 유독 이스라엘을 택하사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출 19:6), 또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유독 다윗을 택하사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상기시키고 있다(시 78:70). 한편 본절을 통해 솔로몬은(1) 자신을 비롯한 전백성들이 자고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였으며 (2) 하나님의 크신 위엄과 주권 앞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다짐하였고 (3)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자 하였다.

성 경: [왕상8:17]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마음이 있었더니 - '마음'으로 번역되는 '레브'(*) 또는 '레바브'(*)는 '심장'(heart)이란 뜻을 갖고 있다(렘 11:20;17:10). 따라서 본절의 '마음'은 단지 의도, 사고, 기억 같은 개별적인 심리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비롯하여 감정, 의지 등을 통틀어 열렬히 희망함을 의미한다. 한편, 삼하 7:2;대상 17:1 등을 보면, 다윗은 성전을 건축 하고픈 마음을 강렬히 시사했었다.

성 경: [왕상8:18]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 다윗이 품은 성전 건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일단 그 자체는 기쁘게 생각하심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절을 "네게 있는 것은 좋도다"로 이해하면 문맥상의 뉘앙스가 보다 잘 전달된다. 공동번역은 "...생각하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왕상8:19]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이유를 우리는 다음의 두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삼하 7:5-7: 여기서 하나님은 백향목집(성전)을 별로 필요없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2) 대상 22:8: 여기서 하나님은 다윗이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라는 이유로 성전 건축을 허락지 않으신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무관한 이유들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즉 (1)에서 하나님이 성전을 원치 않으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처지 때문이었고, (2)는 다윗이 수많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안정을 위해노력해야 했던 인물임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다윗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성전을 지으리만치 안정된 시대에 속한 인물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의 이유'로 인해 평화 중에 건축되어야 할 성전은 차기 세대로 미루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 네 아들 그가...전을 건축하리라 -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열심은 성전 건축을 위한 소원으로 불타올랐으며,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다윗은 건축 자재를 마련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대상 22:2-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전 양식까지 소상히 계시해 주셨다. 그렇지만 정작 성전 건축 사업만큼은 솔로몬에게 위임하셨다(대상 28:12-20).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 개념이 여실히 드러났으며, 그러한 하나님의 뜻 앞에 흔쾌히 순복한 다윗의 신앙 자세 또한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성 경: [왕상8:20]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이제...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 본절에서 '이루다'로 번역된 동사 '쿰'(*)은 원래 '일어나다' 또는 '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말씀하신 대로 세우셨다'로 번역할 수 있다(Hammond). 그런데 '쿰'이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된 문맥에 사용될 때면 '확립하다' 또는 '확정짓다'란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체결된 언약을 확실하게 하는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솔로몬이, 이전에 부친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삼하 7:13)이 눈 앞에서 실현됨을 보고 하는 말이다.

(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 '이름'은 그것에 의해 호칭되는 사물이나 사람의 '존재'그 자체를 상징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은 곧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16절). 이런 점에서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 임재의 상징적이고 가견적인 처소인 것이다.

성 경: [왕상8:2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찬양]

(주);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 이처럼 '출애굽'사건과 '성전 건축' 사건을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성전의 핵심, 즉 성전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체는 그 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장소라는 데 있다. (2) 그런데 이 임재를 보증 또는 표징하는 것은 바로 '언약궤'이다. (3) 그리고 이 언약궤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사실에 기인한다. (4) 고로 성전 건축의 의의 및 가치는 출애굽을 기점으로 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6:1).

(주); 세우신 - 여기서 '세우다'는 '쿰'이 아니라 '카라트'(*)이다. 그런데 '카라트'는 언약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쿰'과는 달리 '언약을 체결하다' 또는 '언약을 개시(開始)하다'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20절;5:12).

(주);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 - 즉 '법궤' 또는 '증거궤'로도 불리는 '언약궤'를 가리키는데, 이 언약궤 속에는 여호와 언약의 핵심이자 요체(要諦)인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출 25:16;40:20;신 10:5). 그리고 이 언야궤는 성전의 가장 깊숙한 내소, 곧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다(6절).

성 경: [왕상8:2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회중을 마주서서 - 여기서 솔로몬의 자세와 방향이 의문시 된다. 왜냐하면 (1) 본장 54절과 대하 6:13은 솔로몬이 무릎을 끓고 기도하였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2) 성전을 향해 등을 돌리고 회중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못하다는 의심 때문이다. 이에 대해 (1) 솔로몬의 자세 문제는 그가 처음에는 일단 섰다가 곧 무릎을 끓었던 것으로 보이며(Montgomery), (2) 방향 문제는 본문을 그대로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답변할 수 있다. 비록 수정하자는 주장이 있긴 해도(Hammond), 특별히 그래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발견할 수 없는 한 무리한 수정을 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예배의 사회자가 회중을 마주 향한 자세로 기도하는 일은 흔치 않은가! 한편 솔로몬이봉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서있는 자리는 번제단 앞 뜰 가운데 특별히 마련된, 길이와 너비 5규빗(약 2.3m) 높이 3규빗(약 1.4m)되는 일종의 연단(演壇)이다(대하6:13).

(주);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 성경 용례상 '하늘 또는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편다'는 말 자체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된다(Hammond; 출 9:29;사1:15). 그런데 '파라스'(*), 즉 손을 펴거나 뻗치는 행위는 보통 '간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동작을 하늘을 향하여 하게 되면 곧 하나님께 간구하는 의미의 자세가 되기 마련이다. 아무튼 여기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로서 공적 예배를 인도하는 목자 또는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하 전개되는 솔로몬의 기도는 성경 중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공중 기도의 하나이다.

성 경: [왕상8:2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 이 말은 많은 신들 중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제일(第一, the first)이라는 뜻이 아니라, 천지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유일(唯一, the only)하신 신임을 의미하는 말이다(삼하7:22;22:32). 비록 타민족의 눈에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의 국가신으로 비쳤지만(왕하5:17), 이스라엘은 천지간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직 한분이신 유일신으로 알고 믿었다(신 6:4). 한편 본절과 비슷한 표현을 우리는 출 15:11;신 4:39;시 86:8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 온 마음으로...행하는 종들에게...은혜를 베푸시나이다 - 신 7:9과 동일한 의미한 함축한 구절로서, 이는 솔로몬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신앙 고백인 동시에 오늘날 성도들에게 던지는 신앙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 전선(戰線)에서 시달리는 자들에게 있어 '온 마음으로'(wholeheartedly) 하나님을 섬기기란 불가능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당신의 베푸시는 은혜와 도우시는 권능이 반드시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시 27:9;125:1). 또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시 17:8;마 10:30;히 13:8). 따라서 성도들은 목전의 환난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스러운 면모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빌 1:20).

성 경: [왕상8:2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허(許)하신 말씀 - '허하신'의 기본 의미는 '말하다'(*, 다바르)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자대로 번역하면 '말씀하신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맥상 '다바르'를 '허락하다'란 뜻으로 번역한 구절이 몇 군데 있다(출 12:25;신 9:28;삼하 7:28;렘 32:42). 한편 혹자는 '허락하다'는 '말씀하다'로 개역(改譯)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락하다'란 인간이 먼저 청원한 것을 하나님이 승락하신다는 의미이므로 은혜의 성격을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바르'가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를 의미할 때는 오히려 '허락하다'라는 표현이 유용하다. 왜냐하면 계시가 본래 인간이 알수 없던 것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취적 행동이라며나, 이에는 허용 또는 허락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 - 상천 하지의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천지 만물을 홀로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므로, 그분의 입으로 약속하신 바는 무엇이든지 주권자의 크신 능력의 손으로 반드시 이행하실 수 있다. 15절 주석 참조.

(주);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 '카욤 하제'(*, as it is today)는 3:6에서와 같이 눈 앞에 전개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성취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성 경: [왕상8:2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여호와여 주께서...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 이 말씀의 핵심은 삼하 7:8-16의 메시지, 곧 위대한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솔로문에 대한다윗의 마지막 유언(2:4) 속에 나타나 있다.

(주); 자기 길을 삼가서 - '삼가다'(*, 솨마르)는 '지키다', '주의하다'는 뜻을갖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말은 율법을 면밀히 주의하여 지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출 20:6;레 18:26;신 26:16;겔 11:20). 주의할 것은 우리말로 '삼가다'는 '조심하다' 또는 '경계할'라는 소극적인 뜻에 그치는데 반해, 히브리 원문의 '솨마르'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솨마르'의 기본 개념은 '...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다'이다. 따라서 '솨마르'는 단순한 절제나 경계가 아닌 애정이 담긴 실천을 내포하고 있다. 즉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면밀히 계획, 실천하는 행동적 의미가 짙은 말이다.

(주);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 다윗은 향후 이스라엘 열왕들의 행적을 가치 판단하는 표준과 척도로서 제시된다(9:4;15:11 등). 그런데 다윗이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다'는 말에 요약되어 있다.

(주);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 조건절로 되어 있음에 주의하라.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인격적 관계임을 강조해 준다. 사실 성전이든 언약궤든, 혹은 성례전이든 그안에서 인간과 만나시는 분은 산 인격이신 하나님이다. 언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약을 매개로 인간과 대면하시고 만나시는 하나님은 그 언약의 주인으로서이지 결코 언약에 속박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및 다윗 왕조에 주어진 언약도 인격적 관계가 그러하듯 계약 당사자의 성실이 바탕되어야만 했다.

(주); 이제...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또한 위대한 성전 건축 사업도 완료되었다(삼하 7:12, 13). 이제 남은 것은 다윗 가계를 통해 영원토록 왕위에 오를 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 뿐이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러한 약속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약속에는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이라는 조건이 부가되어 있었다(2:4). 하지만 말년의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말았다(11:6). 그 결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 왕국은 다윗의 혈통과 무관한 자에 의해 통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다 왕국 조차도 누적된 범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렇듯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의 왕위 약속이 깨어졌다 하겠으나, 영원한 왕국에 관한 하나님의 숨겨진 경륜은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눅 1:27). 요컨대 그러한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약속 성취는, 첫째로 당신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임. 둘째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볼 수있다(시 23:3;요 13:1).

성 경: [왕상8:2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 '확실하게 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예아멘'(*)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기본형 '아멘'은 이미 말해진 것에 대해 확언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1:36). 따라서 25절 말미의 "...지키시옵소서"와 본절의 "...확실하게 하옵소서" 같은 요구 형태의 기도는 이미 앞서 주어진 약속에 근거하는 기도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미 주어진 약속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어진, 소위 '다윗 언약'(삼하 7:12-16)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바람직한 기도의 한 모범,즉 약속에 근거하여 드리는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성 경: [왕상8:27]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 근동 지방의 무수한 신들이 땅이나 산 등 제한된 지역만의 신으로 믿어지고 숭배되던 당시의 환경 속에서 이같은 솔로몬의 올바른 신(神) 지식은 매우 돋보인다. 분명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충만한 지혜로 인해(3:12;4:29-34) 이같은 올바른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 하늘들의 하늘 - '하늘들의 하늘'로 번역된 '쉐메 핫솨마임'(*)은 두 가지로 이해 가능하다. 즉 (1) 그것은 히브리어가 최상급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평범한 표현일 뿐이라는 견해(Gaster). 이 경우는 '하늘 끝' 또는 '아주 높은 하늘'(the highest heaven)이라는 뜻이 된다. (2)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우주관, 즉 하늘이 층층으로 되어 있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Schottgen).이 경우 '하늘들의 하늘'은 그렇게 '겹쳐진 하늘 중 최상층'(heaven of heavens)을 의미하게 된다. 참고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최고의 신 아누(Anu)는 여러 층중 최상층의 하늘에 거주했다고 한다(Gaster). 어쨌든 어느 쪽의 견해를 취하든 문맥상 본절의 "땅과 하늘들의 하늘"은 천지, 곧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우주전체로도 담아 낼 수 없을 하나님의 무한성을 수사적(修辭的)으로 표현한 말인 것이다(렘 23:24).

(주);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 우주 전체로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처소로서는 부족하거늘 하물며 일개 건물에 지나지 않는 조그마한 성전이 감히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겠느냐는 겸비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하나님의 처소일 수 있는 것은 성전 자체의 어떤 가치나 능력이 하나님을 메어 둘 수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총으로 성전을 인간들 사이에 임재하시는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된다. 실제로 후대의 타락한 이스라엘은 그 역사에서 자주 불순종과 불의에 빠지면서도, 무조건 성전을 마치 하나님이 묶어있는 장소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신 개념을 가졌던 것이다(렘 7:4;미 3:11). 결국 본절에 내포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나님의 편재성(偏在性):즉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대주재(大主宰)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건축된 전(殿)에 국한되실 수 없다(행 17:24). (2)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땅 위에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를 마련토록 하셨다는 사실 자체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비하와 크신 긍휼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비하(卑下)와 사랑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롬 8:3;히 1:3).

성 경: [왕상8:28]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기도와 간구 - 구약에서 '기도'를 의미하는 용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도 본절에 나오는 '테필라'(*)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테필라'는 동사 '팔랄'(*)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팔랄'은 '중재하다'(intervene)란 뜻을 갖고 있다. 본절은 솔로몬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 드리는 장면이다. 따라서 본절의 '테필라'는 그 어원적 의미에 가장 적절하게 사용된 셈이다. 한편 '간구'(*, 테힌나)는 '자비롭다' 또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을 가진 동사 '하난'(*)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하난'은 어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을 주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의 기도와 간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시도록 대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중보기도의 모범적 형태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주);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 - '부르짖음'은 '간구'와 마찬가지로 '하난'에서 온 말이다. 또한 '비는'이란 말로 '기도'와 마찬가지로 '팔랄'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하난'은 자비와 동정을 필요로 하는 어떤 슬픈 처지를 전제(前提)한다. 여하튼 이러한 어휘가 구사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뢰코자 하는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이 토로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8:29]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전에 말씀하시기를 - 아마도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삼하 7:13)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Keil).

(주); 주의 눈이 주야로...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 성전에서, 그리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 즉 그것은 성전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주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그곳을 향한 인간의 기도를 매개(媒介)해 주는 장소이다(단 6:10;시5:7;욘 2:4). 이러한 성전의 핵심적 특성 및 기능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사 56:7;마 21:13). 한편 '주의 눈'에 대해선 9: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8:30]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 사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늘들의 하늘이라 할지라도 주의 거처로서 합당치 못하다(2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히 낮아지셔서 이 땅 위에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짓도록 명하시고 허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당신과 인간의 만남과 교제의 장소로 삼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용서받고 상호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성전 뿐이었다. 이제 솔로몬은 이러한 점을 상기하면서, 약속대로 성전을 통해 주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 주의 계신 곳 하늘 - 비록 본문이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서로 성전을 봉헌하는 장면이지만, 하나님의 진정한 거처는 '하늘'이라고 거듭 밝힘으로써 성전을 상대화시키고 있다(34, 36, 39, 43, 45, 49절). 한편, 본절의 '하늘'은 우주 내의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킨다기보다 성전을 포함하여 어떠한 제한된 장소라도 하나님의 참된 거처일 수 없다는 점을 선포하는 데 강조점이 있다. 즉 본절은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의 진정한 처소일 수는 없으며, 다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의하여 당신의 백성을 만나실 장소로서 땅 위에 그곳을 지정하셨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늘에 계신다는 말속에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모든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감찰하신다는 것이다(39절). 이렇듯 치밀하신 주의 통찰은 경건한 자의 간구에는 보호하시는 은총으로, 그리고 패역한 자에게는 진노의 심판으로 작용하게 된다(시 91:4;렘 17:10).

성 경: [왕상8:3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맹세시킴을 받고 - 어떤 사건의 재판에 있어 도저히 판결을 내릴 수 없거나, 증인들을 내세울 수 없게 되면 최종적으로 다툼 또는 판결을 끝맺기 위해(히 6:16) 맹세를 시켰다(Roland; 출 22:11). 예를 들면, 분실된 물건이 우연히 어느 사람의 수중에 있음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그 물건을 고의로 훔친게 아니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여타 사람은 그 맹세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은 오직 맹세의 대상자가 되시는 진리의 하나님께서 판결할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 주의 단 - 성전 안뜰에 있는 '번제단'을 의미한다. 일반 백성들이 만일 성전에서 맹세할 경우에, 그들은 소위 '평민의 제단'인 번제단 앞에서 맹세하였던 것이다(마5:23, 24).

성 경: [왕상8:3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국문(鞫問)하사 - '국문하사'로 번역된 '솨파트타'(*)는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솨파트'(*)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본래 '솨파트'는 '재판하다'라는 사법적 의미보다 더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즉 입법.사법.행정이 모두 포함된 통치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솨파트타'는 사법적 의미의 '판단'을 수행하는 의미가 짙다. 왜냐하면 선악간을 공정히 가려내셔서 그 행위대로 보응(報應)해 달라는 내용의 맥락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주); 악한 자...의로운 자...갚으시옵소서 -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간에 보상과 처벌로 정당히 보응하신다는 사상은 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보응사상은 계약 관계에서 아예 공식화(公式化)되어 있다(Towner). 즉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 여하에 따라 저주와 축복의 보응이 임하리라는 것이다(신 28:1, 2). 그런데 이러한 보응은 곧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근거하여 신정 국가의 공의를 올바로 세우고자 하는 데 목표가 있다. 솔로몬의 특별 간구 내용 중 무엇보다 먼저 등장하는 내용이 백성들의 맹세의 신실함과 공의로운 보응 사상이다. 이처럼 선민의 공동체 내에서 공의를이루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레 19:15;신 16:18;33:21;시35:24;사 61:8등).

성 경: [왕상8:3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 선민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패배하는 것은 곧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었다(레 26:17, 39-42;신 28:25, 48).

(주); 주께로 돌아와서...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 본절은 적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간 경우를 말하고 있다.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징계요,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자기 땅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Greenberg;호 9:3-5).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징계의 해제요 하나님께로의 귀환이다. 혹자는 본절이 단순히 회개 기도를 의미하고, 포로의 경우는 다음 절(34절)에서나 나온다고 보나(Hammond), 수긍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1) 문맥상 33절과 34절은 하나의 주제로 묶여지며, (2) 본절의 "돌아와서"(*, 슈브)가 일단 추방을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주의 눈이 주야로 보고 있는"(29절)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은 곧 주께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빌며 간구하는 것'(*, 히트팔루 웨히트한누)은 자복하는 겸허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사실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외식으로 흐르기 쉽다(눅 18:1-8).

성 경: [왕상8:3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므로, 비록 포로로 끌려간 이국 땅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개입하셔서 그들을 다시 고국으로 귀환시키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제한된 존재라면, 성전의 파괴는 곧 그의 거처의 상실을 의미하게 된다(왕하 25:9).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여타 민족신들의 운명처럼 역사의 유물로서나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정한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시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당신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초를 감찰하사, 언제라도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살아계신 전능자인 것이다.

(주); 열조(列祖)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 이스라엘에게 있어 땅은 단순히 군사적 점령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업이다(Williams). 따라서 그 땅에서 추방됨은 이스라엘의 위약(違約)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결과이다. 이러므로 조상들에게 선물로 주신 땅, 곧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시금 계약에의 충실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 경: [왕상8:3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하늘이 닫히고...주의 벌을 받을 때에 - 가뭄은 이스라엘의 자연 환경에서는 가히 국가적 재난이었다(17:7;18:1). 왜냐하면 팔레스틴은 샘이나 강이 흔치 않아서 가뭄이 한번 들면 아예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같이 되기 때문이다(Scott). 이처럼 이스라엘의 농작물은 때를 따라 이른비(가을비)와 늦은비(봄비)가 오느냐 혹은 오지 않느냐에 절대 달렸다.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 족속이 폭풍과 농작물의 신(神)으로 섬기는 바알(Baal)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의 길에 빠질때 하나님께서는 하는 문을 닫고 오히려 비를 내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모든 축복의 제공자는 오직 하나님 당신 뿐이심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그런고로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뭄은 그저 자연적 재난이 아니라 그러한 재난을 통해 범죄한 백성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이었다.

(주);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 어떤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의 권위에 참여하여 그 대리자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Abba). 따라서 어떤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이의 권위 및 주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징벌을 당한 이스라엘이 그 곤궁한 처지에서 주의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 및 그 보호하에 들어가는 것이요, 모든 우상 숭배에서 떠나 여호와 유일 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 그 죄에서 떠나거든 - '떠나다'에 해당하는 '슈브'(*)는 회개에 있어서 인간편의 행동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요약해 주는 말이다. 회개의 행동은 (1) 죄에서 돌아서서 (2)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슈브'에는 바로 이두 가지 소극적.적극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떠나다'는 한글 표현이 갖는 소극적 의미에다가,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가 '슈브'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슈브'는 포로 귀환을 의미하는 동사로도 자주 활용된다. 즉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과 죄의 상태에서 돌이키는 것은 동일한 영적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33, 34절).

성 경: [왕상8:3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기도]

(주);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 '가르치다'에 해당하는 '야라'(*)는 어떤 주체의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즉 '던지다','보내다', '(활을)쏘다'등의 의미로 사용된다(출 15:4;시 64:7등). 그런데 본절에서의 '가르침'이란 재난을 겪는 중에 불현듯 임하는 깨우침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던 가르침이 복병이 쏜 화살처럼 예기치 않게 날아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내적 소질 개발과 같은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는 결코 그같은 깨달음을 스스로 가질 수 없는 무자격한 자에게 재난을 통해 강권적으로 임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인간은 원치 않던 고통을 통해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성 경: [왕상8:38]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각각...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 여기서 '재앙'(*,네가)은 이미 그 안에 '징벌'의 의미가 들어 있는 단어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벌을 주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주신다(삼하 7:14;시 89:32). 그런데 '네가'는 '...에 닿다', '만지다'란 뜻을 가진 '나가'(*)에서 파생하였다. 이 '나가'는 감동(感動), 즉 하나님의 손길이 사람의 영혼에 접촉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삼상 10:26). 한편 '깨닫고'에 해당하는 기본형은 '알다'란 뜻인 '야다'(*)인데, 본 문맥에서는 '분별하다'(disinguish)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므로 본절은 단순히 재앙이 임했음을 인지(認知)하는 상태가 아닌, 재앙에 담긴 징계의 의미와 목적을 충분히 분별해 내는 상태를말한다. 한편, 본절에서 특별히 강조된 사항은 (1) 죄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 및 회개와 (2) 어떤 종교적 의식(儀式) 보다는 마음의 상태, 즉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의 진실성이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철저한 죄인식을 통해 마음으로 회개하는 그 진실성과 겸허함을 보고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성 경: [왕상8:39]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 30절 주석 참조

(주); 그 모든 행위대로...갚으시옵소서 - 32절 주석 참조.

(주);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 성경에서 '마음'(*, 레바브)은 정서 활동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적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다(Dentan). 이 핵(核)으로부터 정서, 지식, 의지의 활동이 일어나고 또한 외적 활동까지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18절).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온전히 분별하시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다(렘 17:9, 10).

성 경: [왕상8:40]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그리하시면...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주를 경외함'은 이스라엘 신앙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기도가 응답된 결과로서 '주를 경외함'을 회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신 31: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사유하심이 성도의 하나님 경외에 대한 조건부가 된다는 식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솔로몬의 이 말은(1)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하여 그분의 긍휼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며, (2) 또한 사유(赦宥)하심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시130:4).

성 경: [왕상8:4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이스라엘이 속하지 아니한 자...이방인이라도 - 본절의 '이방인'(*, 노크리)은 이스라엘에 귀환한 자들을 일컫는 체류자(*, 게르)와는 구별된다(민 15:14이하). 다시 말해 '노크리'는 이스라엘에 일시 방문한 상인이나 여행자들이다(Hamlin). 예를 들면 스바 여왕이나 나아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10:1-13;왕하5:1-19). 또한 정치적 목적으로 입국하는 각국의 사절들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본절이 이방인들을 향해 개방성을 띤다는 점에서 꼭 이스라엘에 내방한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 만민'을 향한 개방성인 것이다(43절). 이처럼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 통치, 곧 말씀(복음)의 전세계주의적 성격은 비록 희미하나마 구약 시대에도 면면이 흐르고 있는 주요 사상 중 하나이다(창 22:18;출 22:21;민 15:14-16;시 22:27, 28;사 49:6 등).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사상이 보다 뚜렷히 나타난다(롬 3:29;고전 8:6).

성 경: [왕상8:4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능한 손과...펴신 팔 -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생하고도 역동적인(dynamic) 보호, 섭리, 구원의 행동을 가리키는 의인법적 포현이다(출 6:6;14:8).

(주);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 이러한 이방인들의 기도는 아마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외교 사절로서 그 나라의 민족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Montgomery). 혹은 단지 성전의 수려함과 명성 때문에 그 외양이나 일별(一瞥)코자 방문했을 수도 있다(대상 22:5). 그러나 나아만의 경우처럼(왕하 5장) 좀더 절실하게 찾아 오는 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8:4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 훗날 유대주의를 특징짓는 독선과 배타성을 감안하면 본절의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은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다(사 11:9, 10;롬3:29).

(주); 땅의 만민...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 이방인의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즉 "주의 이름을 알고 이스라엘의 신앙처럼 주를 경외하게 해달라"는 것이다(왕하 5:15-19).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은 일찍부터 세상 만민들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열려진 구원을 말함으로써 편협한 유대주의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구약에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옳게 증언하려는 것이었다(롬 10:12, 13). 한편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는 사상은 주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6,29절). 여기서 강조점은 '주의 이름'에 있지 '성전'에 있지 않다. 이처럼 '장소의 신학'이 아닌 '이름의 신학'을 내세움으로써, 솔로몬은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제한당하는 분이 결코 아님을 밝히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Anderson).

성 경: [왕상8:4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때 -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은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일이었다(삼상 17:47). 그러므로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로 믿었다(Toombs). 그래서 본절과 같이 전쟁터에 종군(從軍)하는 것을 "주의 보내신 길"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견지에서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봉헌된 전사로 생각하였다(삿 5:2;사 13:3).

(주); 전 있는 편을 향하여 - 본절과 48절은 이제까지의 경우들 보다는 훨씬 멀리 떨어진 장소를 시사하다. 즉 전쟁터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단지 그들은 성전이 있는 '방향' 쪽으로만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나마 잊지 않고 방향만이라도 성전 쪽을 향하려는 간절함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은총과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내적 열정 그 자체이다(B hr). 그런고로 솔로몬은 그들이 그처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멸시치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 이처럼 성전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고 기도하는 행위는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의 관습처럼 굳어졌다(B hr;단 6:11).

성 경: [왕상8:4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돌아보옵소서 - '돌아보옵소서'의 기본 어근인 '아사 미쉬파트'(*)는 원래 '공의를 행하다'란 뜻이다. 이는 전쟁도 단지 인간들끼리의 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개입과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뚜렷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할 것과 또한 전쟁 수행 과정에 있어서도 시종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야 함을 뜻한다. 자기 민족의 이익을 무조건 편드는 여타 민족신들의 속성에 비해 오직 공의를 따라 판결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속성이 잘 나타나 있다.

성 경: [왕상8:4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 이것은 솔로몬이 일곱번째 간구(46-51)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이다. 즉 범죄치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레 26:27-39;신 28:64-68). 이것은 솔로몬이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가 단순히 국정(國政) 사무나 자연 현상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까지 심오하게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욥15:16;렘 17:9;롬 3:10-18).

(주); 붙이시매 - '붙이다'에 해당하는 '나탄'(*)에는 '내버려두다' 또는 '허락하다'는 뜻이 들어 있다. 좀더 사법적인 의미로는 '대가를 지불토록 어떤것을 넘겨준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창 23:9;신 15:10 등). 그러므로 본절 속에는 (1) 포로가 되는 것은 범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2) 적에게 패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즉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왕상8:47]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스스로 깨닫고 - 직역하면 "자신의 심령으로 돌아오고"로 번역할 수 있다. 원래'죄'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도하신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과정은 참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 '범죄'(*, 하타)는 '목표에서 빗나감'을 의미하고, '패역'(*, 아와)은 '그릇됨', '어그러지고 구부러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을 짓다'(*, 라솨)는 '방종에 빠져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한번 빗나감으로써 점점 심각해지는 죄의 양상을 점증(漸增)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한편 솔로몬의 이 말은 후일 바벨론 포로 시절에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죄를 깊이 통회할 때 그대로 사용되었다(단 9:5;시106:6).

성 경: [왕상8:48]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온 마음과 온 뜻으로 -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 자세로, 신명기가 제시하는 규례와 일치한다(신 30:2, 6). 신 6:5 주석 참조. 열조에게 주신 땅 - 34절 주석 참조.

(주); 전 있는 편을 향하여 - 44절 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 우리는 기도할 때의 방향이 땅->성->전으로 점점 좁아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될수 있는 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왕상8:49]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 30절 주석 참조.

(주); 기도와 간구 - 28절 주석 참조.

(주); 돌아보옵시며 - 이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미쉬파트'(*)는 '판단하다'란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구에 대해 공의와 긍휼로 판단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진실성 여부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었다. 45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8:50]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허물 - '허물'에 해당하는 '페솨'(*)는 '실수.과오'란 뜻 보다는 더 강한'반역'의 뜻을 갖고 있다. 즉 하나님께 저지를 패역한 범죄라는 성격과 이로 인해 생긴 불화까지도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같은 불화에서 생긴 하나님과의 간격이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왜곡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욥 34:6;시 36:1;잠17:19;29:22 등).

(주);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 '불쌍히 여김'에 해당하는 '라하밈'(*)은'부드러운 자비심'(tender mercy)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들로 하여금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에 국한된 분으로서가 아니라, 이방 통치자의 마음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지배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신앙하고 있다(시 106:44-46;스1:1). 한편, 그런데 그렇게 적들의 동정심이 일어나도록 하는 보다 근본적인 동인(動因)은 바로 하나님의 동정심이다. 즉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회개하는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자비와 용서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불쌍히 여김'이 있기 때문에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또 한편 '라하밈'은 '태' 또는 '자궁'으로 번역되는 '레헴'(*)과 갚은 관련이 있다(3:26). 이는 마치 젖먹이 자식에 대한 어미의 마음처럼 이스라엘을 향해 지극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는 상태를 가리킨다(시 106:44-46).

성 경: [왕상8:5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철 풀무 같은 애굽 - '풀무'(*, 쿠르)는 금속을 제련하는 용광로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련'이란 의미 보다는 철이라도 녹일 정도의 뜨거운'열'이 강조되어, 애굽에서의 생활이 극심한 고통으로 가득했음을 비유로 말하고자 사용되었다. 신 4:20주석 참조.

(주); 주의 산업 - '산업'(*, 나할라)은 '소유' 또는 '상속 재산'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구적인 소유'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주의 '나할라'라는 말은 그들이 결코 버림받을 수 없는 존재, 곧 하나님의 특별하신 소유로 주의 보호와 아낌 및 관심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출 19:5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비록 불순종으로 징벌을 받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회개하면 마침내 원래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언제고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출 34:9;신 4:30, 31;9:26;시 33:12).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주의 '나할라'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계약'이었다(출 19:5, 6;렘 11:4). 따라서 이제까지 솔로몬의 모든 기도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자로 삼으시고 언약을 맺은 사실에 근거하여 드려졌던 것이다. 솔로몬은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미덕이나 공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호소할 수는 없었다(신7:6-11).

성 경: [왕상8:5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눈을 들어 - '눈'(*, 아인)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시119:18;잠 6:17;겔 6:9;마 6:22), '하나님이 눈을 든다'는 표현은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시33:18;34:15). 반면에 '하나님이 눈을 가리운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도와 요청을 무시함을 의미한다(사 1:15).

(주); 종의 간구함...들으시옵소서 - 기도를 시작할 때 사용된 문구(28, 29절)가 지금 기도를 마무리 짓는 부분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달라는 간청으로 앞뒤가 구성된 솔로몬의 기도는 51, 53절에서 보듯 이스라엘이 주의 산업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응답을 요청한 것이다.

성 경: [왕상8:5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성전에 안치된 언약궤]

(주); 주의 종 모세로 말씀하심 같이 - 이는 출 19:3-6의 말씀을 가리킨다.

(주); 세상 만민 가운데서 저희를 구별하여 - 이 말은 출 19:6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에 상응한다. 한편 '구별하다'(*, 바달)란 말 속에는 '분리되다', '차이를 만들다'는 뜻이 있는데, 이 말은 이스라엘이 이방 여러 나라와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문맥에서 자주 등장한다(스 6:21;느 9:2;10:28). 그런데 '거룩'(*, 콰도쉬)에도 이러한 '구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 및 구별에는 단순히 속된 것에서 분리되는 것 외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면이 들이 있다(Eichrodt). 출 19:6의 '제사장 나라'는 바로 그러한 구별의 적극적인 면을 알려 주는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타민족과는 분리된 선민(選民)인 바 이는 이스라엘로 열방 중제사장 나라로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19:6 주석 참조).

(주); 주의 산업 - 51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8:5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솔로몬이 무릎을 끓고 - 기도할 때 솔로몬이 취한 자세에 관해서는 22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그런데 무릎을 끓는 자세에는 (1) 탄원(단 6:10;행 7:60;엡 3:15), (2)복종(왕하 1:13;마 17:14;눅 5:8), (3) 예배(19:18;사 45:23)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Davies). 일반적으로 무릎 끓는 자세는 직립(直立) 및 겸허함 등을 나타내는 자세이다(Crawley).

(주);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 22절 주석 참조.

(주); 기도와 간구 - 28절 주석 참조.

(주); 아뢰기를 - '아뢰다'에 해당하는 '팔랄'(*)은 '호소하다', '기도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테필라'(기도)란 말이 파생되어 나왔다(28절). 그런데 '팔랄'은 '중개자로서 행동하다'는 뜻도 있다(Thomas). 그렇다면 본장의 솔로몬의 기도는 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솔로몬의 기도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종의 중개자로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8:5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회중 - '회중'으로 번역된 '카할'(*)은 특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의 전 국민적 신앙 집회를 가리키는 데 줄곧 사용한 단어이다(Pope). 즉 특별히 종교적 목적을 지니고 모인 무리를 뜻한다.

(주); 축복하며 가로되 - 14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8:5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이하의 내용(56-61절)은 봉헌 기도 이후에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주는 일종의 축사(祝辭)이다. 이에 반해 15-21절은 봉헌 기도에 앞선 인사말이라 볼 수 있다.

(주); 저가 무릇...태평을 주셨으니 - 여기서 '태평'(*, 메누하)은 '안식'이란 뜻인데, 이 안식에의 약속은 신명기 12:9, 10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비록 여호수아21:44에서 이 안식이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땅의 도처에 있었고, 영구한 평화의 상징인 성전도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정복을 거쳐 마침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전이 건축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태평)은 완전 성취되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지금 이러한 사실을 감회스럽게 신앙 고백하고 있다.

(주); 허하신 대로 - 이 역시 '다바르'(*)를 번역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주); 모세를 빙자(憑藉)하여 - '빙자하여'로 번역된 '베야드'(*)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 '베'(*)와 '손'이라는 뜻을 가진 '야드'(*)의 결합이다. 따라서 이는 '모세의 손을 빌어' 또는 '모세를 통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공동 번역은 "모세를 시켜"로 번역하였다. 한편, 이처럼 솔로몬이 말하는 근거 구절로 우리는 레위기26:3-13과 신명기 28:1-14의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 - 여기서 '이루지 않음'에 해당하는 '나팔'(*)은 '떨어지다', '내던져지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는 죽음이나 멸망 또는 방치 등을 지칭하는 데 쓰인다(삿 20:44;애 1:7;대상 20:8). 이처럼 전능자요 선지자인 하나님의 말씀 또는 약속은 호리(毫釐)라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성 경: [왕상8:57]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 '우리와 함께 있다'(*, 임마누)에 들어있는 전치사 '임'(*)은 이미 그 개념 안에 '친교와 교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임'으로 수식되는 관계는 고난이든 번영이든 같이 경험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는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함께 동참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임'으로 수식된 것은 곧 인간과 같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셔서 수치든 실패이든 공동으로 겪으시는 은총의 관계를 의미하다.

(주); 떠나지 마옵시며 - '떠나다'에 해당하는 '아자브'(*)는 '버리다', '포기하다'는 뜻도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소리치신 말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에서 '샤바크'(사박)란 말이 바로 이 '아자브'에 해당하는 아람어이다(마 27:46).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일시 '아자브'하시는 경우는 (1) 연단을 위한 징계로 고통과 곤경에 일시 처하게 하시는 경우(시 22:1;37:25;사 41:17), (2) 그리고 인간의 심중에 있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경우(대하 32:31)등이 있다.

(주); 버리지 마옵시고 - '버리다'에 해당하는 '나타쉬'(*)는 '배척하다', '거절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자브'에 비해 '나타쉬'는 좀더 거부의 뜻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왕상8:58]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우리의 마음을...행하게 하옵시며 - 본절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힙입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57절에서 간구한 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곧 본절이 말하고 있는 '순종의 삶'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주); 명하신 - '명할'(command)에 해당하는 '차와'(*)는 여러 맥락에서 활용되지만(룻 2:9;삼상 17:20;삼하 21:14), 특히 하나님이 그 주체인 경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은 곧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시 33:9;사 45:12). (2)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도 같이 주신다(출31:2-6). (3) 하나님의 명령은 곧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뒤따른다(신 28:8;시 105:8). (4)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수행해야 할 모든 것을 하나님 편에서 책임진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다(대상 16:15).

(주); 계명과 법도와 율례 - '계명'(*, 미츠와)과 '법도'(*, 호크)와 '율례'(*,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과 명령을 가리키는 중언법(重言法)적인 표현이다(2:3;신 4:1). 따라서 여기 언급된 세 가지 규례들을 지킨다는 것은, 곧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성 경: [왕상8:59]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나의 간구한 이 말씀...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 '가까이 있다'에 해당하는 '카라브'(*)에는 좀더 역동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아주 가까이 다가가 친밀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 이 말 속에는 들어 있다. 그 예로 성경에서 '카라브'는 가까이 있어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접촉을 의미하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출 32:29;36:2;레 10:4;민 9:6). 따라서 본절과 같이 솔로몬의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카라브'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에는, 마치 품안에 든 아기에게 기울이는 어미의 지극한 관심처럼 자신의 기도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간곡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주); 날마다 당하는대로 - 즉 '매일의 필요한 것을'(with our daily needs, LivingBible). 출 16:4;마 6:11등의 구절에서 같은 뜻의 말을 찾아 볼 수 있다.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매일의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

성 경: [왕상8:60]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세상 만민에게...알게 하시기를 - 성전을 봉헌함에 있어, 솔로몬은 (1) 그 성전이 주의 이름과 영광을 보존하고 (2) 나아가 그 성전을 통해 열방에 주의 이름과 영광의 빛이 전달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唯一性)이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기를 기원하고 있다(43절).

(주);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 여기서의 '하나님'은 '하엘로힘'(*)으로 정관사 '하'(*)가 들자 있는 '그 하나님'(the God)이다. 즉 살아계셔서 당신의백성들을 위해 친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진정 '여호와'만이 참되고 유일하신 신(神), 즉'엘로힘'이신 것이다. 한편 본절은 23절과 함께 신명기적 신앙 고백의 형태를 띤 것이다(신 4:35, 39).

성 경: [왕상8:61]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축원]

(주); 화합하여 - 본절에서 '화합하여'로 번역된 원어는 전치사 '임'(*)이다. 이 '임'에 담겨있는 본래적 의미를 고려할 때(57절), 본절가 같은 번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과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화합하는' 길이요 또한 '완전케'되는 비결이다.

(주); 완전케 하여...지킬지어다 - '완전하다'[(*, 솰렘)는 어떤 관계가 비뚤어짐없이 건전하게 조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솰렘'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솰롬'이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이 '솰롬'(평화)의 관계에 있는 상태를 곧 '솰렘'(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 보듯 그와 같은 '솰렘'(완전)의 결과 혹은 과정이 곧 '법도를 행하며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완전'을 의미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완전히 성숙함, 그리고 지정된 목적에 도달함"을 의미하고, 라틴어 '페르펙투스'(perfectus)는 "처음부터 철저히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Campbell).

(주); 오늘날과 같이 - 성전 봉헌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 상태가 순종과 헌신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렇듯 당시에는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서 번영과 평안의 상태를 누렸으나, 후일 왕과 백성들이 가증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깊이 깨달아 늘 깨어 있기를 힘써야 한다(벧전 5:8).

성 경: [왕상8:62]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제사]

(주);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 - 성전 낙성식에 참여하고 있는 왕과 백성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친밀하고 화합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57, 61절). 여기에도 '화합', '동행', '친교'의 뜻을 가진 전치사 '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함께 제사를 드리는 왕과 백성들의 이러한 화목함은 신정(神政) 통치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신정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백성들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왕은 단지 하나님이 세운 백성의 목자일 뿐이다(삼상 13:14;삼하 5:2).

(주); 다 여호와 앞에 희생을 드리니라 - 언약궤 안치식(1-21절)과 솔로몬의 봉헌 기도(22-61절)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거대한 규모의 화목제가 드려짐으로써 성전 봉헌식은 그 절정에 달하였다. 병해 구절인 대하 7:4-10에는 악기를 동원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장면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헌신, 친교의 표시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 사건인 성전 봉헌식을 맞이하여 거대한 규모의 희생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63절).

성 경: [왕상8:63]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제사]

(주); 화목제의 희생 - 원어로는 '제바흐 쉘라밈'(*)인데, 이 용어는 제사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제사에만 쓰였다(삼상 1:21;20:29 등). 신 27:7을 보면 "또 '쉘라밈'(화목제)을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레 7:15에 의하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쉘라밈'을 드리는 동기는 즐거움과 감사인 것을 알 수있다(Milgrom).

(주);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 이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일부 학자들은 본절의 기록을 과장 또는 오기(誤記)로 생각하기도 한다(Montgomery, Thenius).그러나 전반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이는 가능한 숫자이다(Keil, B hr). 왜냐하면 (1)보통의 화목제와 달리 성전 낙성식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위한 제사일 뿐 아니라,(2) 이 제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전 국민(가장및 대표들)으로 나타나고 있고(65절), (3) 원래의 번제단만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성전 앞뜰 가운데를 구별해 특별히 사용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64절). 그리고 제물(짐승)을 잡고 준비하는 일은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임무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은 제물을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다. 단지 희생 제물에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리는 일만이 제사장의 직무였다(레 1:5, 6;3:2, 8). 한편, 다윗시대에 30세 이상의 레위인들이 38,000명이었으므로(대사 23:3), 비율에 따라 솔로몬 당시의 제사장들의 수효는 대략 2,000-3,000명 정도였을 것이다(Keil). 그러므로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를 고려한다면, 낙성식 기간의 7일 동안 소 22,000과 양 120,000의 희생 제물을 처리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보면, 네로 황제 당시의 유월절에 양 250,000 마리가 2-3시간 동안에 제물로 드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기를 비롯한 고대의 모든 역본들의 기록이 본문의 기록과 일치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숫자를 기록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주); 낙성식을 행하였는데 - 여기서 '낙성식'(落成式)은 '시작하다', '봉헌하다', '창설하다'란 뜻의 '하나크'(*)에서 파생된 말로, 가옥이나 성전등을 완공한 후 이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식을 의미한다(신 20:5;대하 7:5, 9). 한편, 후대 유대인들은 '하눅카'(Hanukkah)란 절기를 지켰는데, 이는 '수전절'(修殿節)이란 의미로 곧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o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여 더립힌 것을 재건하고 성결케 하여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성 경: [왕상8:64]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제사]

(주); 거룩히 구별하고 - 53절 주석 참조. 그런데 본절에서 '거룩히 구별하다'란 말은 단지 한 단어 '카다쉬'(*)를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거룩'의 기본 의미가 '구별'이기 때문에 이처럼 번역한 듯하다. 그런데 본래 사람이든 장소, 물건이든 그 자체의 거룩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련 및 접촉 때문에 거룩하게 된다(Wood). 한편 '카다쉬'의 반대어 '홀'(*)은 '속된 것' 또는 '평범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전 앞뜰, 곧 제사장의 뜰(6:36)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시적인 제단 장소로 삼았는데, 이는 본래 거룩히 구별된 번제단만으로는 봉헌식 때의 많은 희생제물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 번제와 소제와...화목제 -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부분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8:65]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제사]

(주); 칠일 칠일 합 십 사일 - 성전 봉헌 절기 7일과 초막절 7일을 가리킨다(대하7:8-10).

(주); 하맛 어귀 - 하맛(Hamath) 왕국의 남쪽 경계는 곧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였다(Haldar; 민 13:21;수 13:5;삿 3:3). 이 나라는 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2세에게 정복된다.

(주); 애굽 하수 - '애굽 하수'(*, 나하르 미츠라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으로 등장한다(창 15:18).그리고 여기서 하수(河水)는 바로 나일강을 가리킨다.

성 경: [왕상8:66]

주제1: [성전 봉헌식]

주제2: [솔로몬의 감사 제사]

(주); 제 팔 일에 - 이 날은 절기 '십 사일'중의 '팔 일'이 아니라 첫번째 절기인 성전 봉헌 절기 7일이 끝나고 두 번째 절기의 '팔일'째 되는 날, 즉 초막 절기 7일이 끝나고 난 다음 날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전 봉헌 절기는 7월(에다님 월) 8일부터 14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고, 이어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은 초막절(장막절)로 지켜졌다. 이어 7월 22일, 즉 초막 절기 8일째에는 폐회 축제가 있었으며(레 23:33-39), 결국 백성들은 폐회 축제가 끝난 저녁 또는 다음 날, 곧 7월 23일에 각각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대하 7:10).

(주);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 원래 '장막'(tent)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이동식 거처로 이스라엘이 광야 유량 시절에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시대 당시는 가나안 정착 이후로도 400여년이 지난 때로, 이 때는 이스라엘도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장막으로 돌아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삼하 20:1;삿7:8) 관습화된 언어 표현일 뿐이다(Keil,Hammond).

(주); 다윗과...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즐거워하였더라 - 성전 봉헌식을 마무리 짓는 본절에서 솔로몬 대신 특별히 다윗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성전 건축은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실질적인 성전 건축자는 다윗이었기 때문이다(Keil, B hr). 즉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단순히 다윗의 계획과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감당했을 뿐이다(Hammond).

성 경: [왕상9:1]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 - 구체적으로 이 말이 지시하는 바는 다름아닌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전과 궁전 건축을 마쳤다'는 사실 보도에 덧붙여 '그리고 성전과 궁전 건축은 바로 솔로몬이 원했던 일이다'라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본절과 병행절인 대하 7:11에는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또한 본절은 성전과 궁전은 단지 건축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 구상과 계획에서도 원래 의도했던 바대로 차질없이 지어졌음을 알게 해 주는 말이다.

성 경: [왕상9:2]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 일천번제 이후 여호와께서 기브온 산당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방식은 밤에 꿈을 통해서였다(3:5,15).

(주);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 기브온 계시에 이어 두번째로 하나님의 계시가 솔로몬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꿈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 두번째의 계시가 주어진 시점은 성전 뿐 아니라 궁전까지도 완공된 후였다(1절). 8장의 성전 봉헌식이 성전 완공 후 바로 실시한 것이라면, 두번째 계시는 솔로몬의 봉헌 기도(8:22-53) 후 13년이나 지난 다음에 임한 셈이다. 만일 이러한 시간 상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 8장의 성전 봉헌식이 궁전 완공까지도 완전 끝난 후에 거행되었다는 입장(Keil,Thenius)을 취한다 해도 또 다른 난점이 생긴다. 즉 관연 궁전 건축 기간인 13년 동안 법궤를 안치하지도 않은 채 성전의 기능을 보류해 두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8: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두번째 계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종합 고찰해 볼 수있다. 즉 성전은 성전 완공과 더불어 바로 봉헌되어 졌고, 솔로몬의 봉헌 기도(8:22-53)에 대한 응답으로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희생 제물을 사르고 또한 여호와의 영광의 빛이 성전에 가득임함으로써(대하 7:1) 일단 상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솔로몬은 궁전을 비롯한 일반 성읍 건축(15,19절) 사역을 계속 진행하였고, 마침내 성전 완공 후 13년(17:1)에 궁전 건축을 필하자 하나님의 두번째 계시가 임했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이때는 솔로몬 즉위 24년째 되던 무렵으로(6:37,38;7:1), 안으로는 성전과 궁전을 비롯한 주요 건축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밖으로는 외교와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때였다. 따라서 이때는 솔로몬이 교만과 사치, 그리고 이방문화의 유혹을 가장 많이 받을 우려가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신앙 상태를 재점검해 주실 목적으로 다시금 나타나사(Patterso-n,Hammond). 이하 나오는 두번째의 계시내용(3-9절)은 바로 이러한 목적과 잘 부합된다.

성 경: [왕상9:3]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저에게 이르시되 -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두번째 계시는 과거 솔로몬의 봉헌 기도(8:22-53)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한편, 본문(3-9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7:12-22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주어져 있다.

(주); 네가 - '네가'라는 단수 인칭 대명사로 미루어 3-5절은 솔로몬 개인에게 주는 말씀이다. 반면 6절은 '너희'라는 복수가 사용되고 있어 6절이하 9절까지 내용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말씀임을 알게 해준다.

(주);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 비록 기도한 시점과 응답의 시점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있더라도, 하나님의 두번째 나타나심은 솔로몬의 봉헌 기도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기도와 간구'에 대해서는 8:28 주석을 참조하라.

(주); 내가 들었은즉 - '들었은즉'에 해당하는 '솨마'(*)에는 주의를 기울여 경청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솨마'하셨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와 간구를 소홀히 듣지 않으시고 진지하게 새기셨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의미할 때는 이 '솨마'가 사용되고 있다(삿 13:9;시 4:1;34:17;렘 11:10,11;겔 8:18).

(주); 거룩하게 구별하여 - 8:64주석 참조. 그런데 성전의 거룩성은 그 자체의 종교 의식이나 화려함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사 당신의 이름을 그곳에 두시고(신 12:5,11)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존되어 있다.

(주); 나의 이름을...두며 - 8:16주석 참조. 나의 눈 - 하나님의 '눈'(*, 아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전활동과도 깊이 관련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인간 행동의 선약을 감찰하시기도 하고, 인간의 기도와 요구를 살피시기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하시기 때문이다(15:11;16:25;왕하 19:16;시 33:18;사 37:17). 또한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 그들을 하신다(대하 16:9;암 9:8). 따라서 하나님의 눈의 향방은 곧 보호, 응답 등 그의 전활동의 향방과 일치한다.

(주); 나의 마음 - '마음'(*, 레브)은 단지 심리적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한인격의 내적 기능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다. 즉 감정, 사고, 사려 깊음, 의지 등등이 모두 '마음'에서 기인된다. 그래서 '마음'은 곧 어떤 인격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창 17:17;전 1:16 등). 따라서 '마음'은 그 인격의 외적 활동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본절에서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처럼 마음에는 원해도 실천할 수 없는 연약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원하시는 바는 무엇이든지 실현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주); 항상 거기 있으리니 - 과거 봉헌 기도할 때 솔로몬은 하나님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해주실 것을 간구한 바 있었다(8:29). 이제 하나님께서는 비단 '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항상 성전을 향하여 그곳에 있겠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성 경: [왕상9:4]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행함과 변치 않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척도 또는 표본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다윗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을 받았다(15:3,11;왕하 14:3;16:2;18:3;22:2;대상 17:1,2;대하 7:17,18;28:1;29:2;34:2).

(주);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 이 말은 이스라엘 열왕들의 표준이 되었던 다윗의 마음가짐을 요약해서 보여 준다. 다윗의 생애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다윗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信心)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기름부음 받았다는 이유로 원수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든지,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기쁨과 감격의 춤을 춤으로써 보여 준 열정, 그리고 밧세바 사건...을 철저히 통회하는 모습 등이다(삼상 26:23-25;삼하 6:14;12:7-15). 이러한 사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가짐이라는 특징을 보여 준다. 결국 열왕의 표준인 다윗의 바르고 온전한 행함은 그러한 마음가짐에 바탕된 것이다.

(주); 온전히 - '온전히'로 번역된 '톰'(*)은 '완전 무결함'과 '성실'이란 의미 외에도 '강함'의 뜻도 있다. 따라서 '톰'으로 설명되는 마음가짐의 특성은 하나님을 향한 꾸준한 성실과 야무진 집중에 있다. 사실 그의 삶을 통해 볼 때 다윗은 결코 완전한 삶을 살지는 못하였다(삼하 11:2-12:15;24:10등). 그러나 다윗은 죄악에 빠졌을 때 곧 '철저히' 회개하는 등 하나님을 향한 신앙 원리는 결코 변함이 없었다. 즉 인간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끝까지 여호와 신앙의 도리를 부여잡았다. 그 결과 다윗은 우상 숭배 행위에는 결코 빠지지 않는 유일한 왕이 될수 있었다. 하나님은 바로 다윗의 이러한 점을 기뻐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하셨던 것이다.

(주); 바르게 - '바르게'(*,요쉐르)는 그 품성이 '정직하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길을 곧게 하다'는 뜻도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법, 또는 의로움이 똑바로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 곧 올바름인 것이다.

(주); 법도와 율례 - 이 두 단어는 상호 연결되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교훈'을 강조하여 지칭하는 중언법적(重言法的) 표현이다(2:3;8:58).

(주); ...지키면 - 이러한 조건절의 형태는 다윗 계약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 조건적 의무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신명기적 권고를 담고 있다. 즉 다윗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율법에 순종하는 한에서만 왕위가 계속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Dentan).

성 경: [왕상9:5]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허하여 - 8:24주석 참조.

(주);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견고하게 하려니와 - 이 내용은 흔히 '다윗 계약'이라 불리우는 언약의 반복이다(삼하 7:11-16;왕상 2:4;8:25;시 132:11-13). 그러나보다 직접적으로는 8:25,26에 나타난 바 솔로몬의 기도, 즉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확실하게 하옵소서"에 대한 응답이다. 한편,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편에서의 확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파국이 찾아 오게 되는 이유는 계약에 대한 인간편의 불성실 탓임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왕상9:6]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너희나 너희 자손이 - 이제까지 솔로몬 개인에게 주어지던 말씀의 대상이 갑자기복수(複數)로 바뀌고 있다(3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게로 대상이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이하 6-9절의 내용은 3-5절의 내용과 달리 순종에 실패할 경우의 부정적 결과를 경고하는 것이다. 한편, 후일 이렇게 경고된 재난을 실제로 겪은 바벨론 포로 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자신들을 향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들의 재앙은 바로 불순종에 원인이 있음을 깨닫고 참회와 갱신에로 나아갈수 있었을 것이다(Dentan).

(주); 돌이켜 - '돌이켜'는 긍정적 의미로 '회개'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슈브'는 어느 경우로 쓰이든 항상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같이 포함하고 있다(8:35). 본절에서도 '돌이킴'의 구체적 내용이 (1)소극적인 면:하나님을 좇지 않는 것과 계명및 법도를 지키지 않는 것, (2) 적극적인 면:다른 신을 좇아 섬기고 숭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의 '돌이킴'은 단지 불순종 정도가 아닌, 전적인 배신을 말하는 것이다(J.Hammond).

(주);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 여기서 우상 숭배는 망국(亡國)의 병으로 지적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 패망의 직접적 원인을 강대국의 침공이나 국력의 미비 등에서가 아닌, 우상 숭배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신명기야말로 여호와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줄독 강조하기 때문이다(신 4:35,39;5:26;6:4;10:17;32:39). 즉 신명기는 그 유일하신 하나니께서 만 백성 중 이스라엘을 택하사 당신 백성으로 붙드시는 독톡한 계약 관계를 강조한다(Walker). 이러한 데서 우상숭배가 왜 그토록 심각한 범죄로 주목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고 있는 독특한 계약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영적 간음 행위였던 것이다(신 7:4,25,26; 12:31; 13:14; 18:12; 20:18; 27:15). 그러므로 이러한 시각이 열왕기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왕하 17:16-18;23:26,27).

(주); 다른 신 - 이스라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본래 알지 못할 뿐아니라 결코 좇아 섬겨서는 안되는 이방의 온갖 우상들을 가리킨다(신 6:14; 11:28;13:2).

성 경: [왕상9:7]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끊어 버릴 것이요 - 기본 동사 '카라트'(*)는 하나님과의 교제 및 언약 관계로부터 단절되거나 제외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우상 숭배 죄와 관련되어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주); 던져 버리리니 - 이에 해당하는 기본동사 '쉴라흐'(*)는 '관계를 끊어 버리다', '해고하다'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왕하 24:20). 그리고 이 말은 주로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는 상황을 의미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후일 선지자들은 남편되시는 하나님께서 신실치 못한 아내인 이스라엘을 버리시는 상황을 경고할 때 종종 이 말을 사용하였다(Patterson). 한편, 성전의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갖게 되는 거룩성에 있다(8:64). 그런데 본절에서처럼 하나님이 관계를 끊고 던져 버린 성전은 보통 건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후일에 실제로 솔로몬 성전은 우상숭배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증한 범죄로 말미암아 B.C.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당하고 만다(왕하 25:8,9).

(주); 속담거리 - '속담거리'로 번역된 '마솰'(*)은 격언, 풍자 등의 의미외에도 교훈이란 뜻도 있다. 따라서 본절처럼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가운데 '마솰'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경멸, 조롱 이상의 것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모든 민족에게 하나의 본보기 또는 객관적 교훈이 된다는 것이다.

(주); 이야기거리 - '이야기거리'로 번역된 '쉐니나'(*)는 '찌르다' 또는 '날카롭게 하다'란 뜻의 '쇠난'(*)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신랄하게 '조롱하는 말'이란 뜻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시 64:3). 이처럼 모든 민족의 조롱거리가 되는 민족의 처지란 참으로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다(신 28:37;왕하 17:23).

성 경: [왕상9:8]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이 전이 높을지라도 - 이 표현이 무얼 의미하는지 좀 모호하다. 그러나 '높다'(*, 엘욘)는 말은 대체로 '명성'이 드높다는 뜻일 것으로 본다(J.Hammond). 문제는 어떤 의미의 명성인가 하는 점이다. 즉 비참한 본보기로서의 명성인가 아니면 번영의 표본으로서의 명성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경고가 솔로몬과 당시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형식과 시점을 취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때의 성전은 번영의 상징으로서 드높은 명성을 가졌을 때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이 성전의 명성이 지금은 이렇게 드높지만 결국에는....'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주); 놀라며 - '놀라며'에 해당하는 '솨멤'(*)은 어떤 외적 광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내적 반응으로서의 '공포'와 '충격'을 가리킨다. 그런데 '솨멤'은 '황폐하다'는 뜻을 지닌 '솨맘'에서 온 말이다. 그리고 이 '솨맘'은 원래부터의 황폐가 아니라 어떤큰 재난의 결과로서의 황폐를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보통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생긴 황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놀라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황폐케된 성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생기는 '놀라움'을 가리킨다.

(주); 비웃어 가로된 - '비웃다'에 해당하는 '솨라크'(*)는 조소(嘲笑)의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이다(렘 19:8;욥 27:23;애 2:15,16).

(주); 무슨 까닭으로...이같이 해하셨는고 - 신 29:24 주석 참조.

성 경: [왕상9:9]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주);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 - 마치 자기 부모를 고르거나 대체할 수 없듯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독특한 관계는 바로 출애굽에서 비롯된다. 마치 자식을 낳듯 여호와께서는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탄생시킨 분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고유한 관계는 포기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주); 다른 신...섬기므로...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인 반면에(마 22:37,38), 우상 숭배는 크신 구속의 은총을 업신여기고 저버리는 가장 크고 가증스러운 죄악이다(출 20: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거듭 경계하셨다(출 20:3;신 5:7;겔 14:4-6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역사를 통해 우상이 근절된 때란 실로 드물며, 특히 열왕들의 우상숭배는 남,북 왕국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왕하 17:16-18;23:26,27).

(주); 부종(附從)하여 - 이는 '집착하다','달라붙다'는 뜻을 지닌 '다바크'(*)를번역한 말이다. 마치 신체의 각 부분이 결합해 있듯 지극히 밀착된 관계를 말한다. 특히 연인(戀人)에 대해 연연하고 집착하는 상태를 묘사할때 사용된다(창 2:24;34:3;왕상 11:2). 그런데 이 '다바크'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을 따르도록 권면할 때 자주 사용된 동사이다(신 11:22;13:4;3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에 '다바크'함으로써 하나님의 질투의 진노를 격발(激發)케 하였다(신 6:15).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동사의 사용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를 쉽게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왕상9:10]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이십 년 만에 - 성전 건축에 7년, 왕궁 건축에 13년, 도합 20년이다(6:28;7:1).

성 경: [왕상9:11]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 -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역이다(솔로몬 당시의 갈릴리는 오늘날 갈릴리 지역의 북쪽 일부지역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경계는 모호하고 일정치 않았다. 뚜렷한 경계가 확정된 것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부터였다(Clark). 역사상이 지역은 끊임없이 여러 민족이 이주해 들어오고 또한 나갔다. 그래서 이스라엘 주민의 숫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었다. 주로 베니게인들과 가나안 본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로몬 당시 갈릴리 지역은 히람의 나라 두로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주었으므로 국경선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주); 히람에게 주었으니 - 솔로몬이 왜 이 성읍들을 히람에게 주었는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히람이 건축 자재를 제공한 것과 연관되었다는 점은 문맥으로 미루어 확실하다. 그러나 솔로몬의 이러한 성읍 양도는 단순히 히람의 호의에 답례하는 예물과 같은 성격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선물이라면 히람이 그토록 불평을 한 까닭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기 때문이다(13절). 그러므로 혹자는 두로 왕 히람이 공급한 건축 자재의 물량이 엄청났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충으로서 영토의 일부를 양도해야 했다고 보기도 한다(Dentan).

성 경: [왕상9:12]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눈에 들지 아니하여 - '눈에 들다'에서 특별히 '들다'로 번역된 '야솨르'(*)는 원래 '편편하다','곧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원문대로 직역하면 '눈에 곧지 아니하여'가 된다. 결국 이 말은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성읍들이 자신이 제공한 온갖류의 풍부한 건축 자재의 대가로서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두로 왕 히람이 원한 땅은 해안 지역인 '악고'(Acco) 땅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Rawlinson). 아니면 옥수수 등을 재배할 평지 지역을 원했을 것이다(J.Hammond).그러나 히람에게 주어진 땅은 산악 지대의 성읍이었으므로 실망을 금치 못한 것이다(Porter).

성 경: [왕상9:13]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나의 형이여 - '나의 형'(*, 아히)이란 말은 당시 왕들끼리 대화할 때 상호 사용하는 호칭이다(Keil). 29:32에서 아합이 벤하닷에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주);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하뇨 - 원문에는 의문 대명사 '마'(*)가 있다. 그러나 의문을 표시하는 게 아니고 불평과 경멸을 표시하는 어투이다. 공동 번역은 "당신이 나에게 준 성읍들이 이게 뭣니까?"로 번역하여 원문의 어감을 잘 전해 주고 있다.그런데 왜 히람이 이 성읍들을 불만스럽게 여겼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추측컨대, (1) 해양 민족인 두로에게 있어 갈릴리 산악 지대의 성읍은 무가치하게 보였거나, (2)혹은 그 성읍들 자체가 메마르고 척박한 지역이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주); 가불 - '가불'(*, 카불)은 '별로 좋은 점이 없는','무가치한'이라는 뜻을 지닌 베니게어에서 온 말이다(Josephus,Beek). 혹자는 '경계' 또는 '국경지역'이란 뜻으로 보기도 한다(Gesenius). 아무튼 '가불'은 '악고' 동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카불'일 가능성이 크다(Robinson). 그런데 대하 8:2에 의하면, 히람은 이 성읍들을 솔로몬에게 반환하였다. 그래서 원래부터 이 성읍들은 '담보로서' 히람에게 주어졌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Keil).

(주); 오늘까지 - '오늘까지'(*, 하욤 하제)는 본절 외에도 8:8;9:21;12:19;왕하 8:22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절마다 '오늘까지'가 정확히 언제인지 결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열왕기는 솔로몬의 왕위 계승으로부터 여호야긴의 석방까지 대략 400여 년에 걸친 역사(B.C. 971-562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종 기록은 여호야긴이 석방 이후나 포로 귀환 이전(B.C. 561-537년)일 것이다. 그러므로 각 절에서 '오늘까지'란 표현은 단지 그 기록에 참조된 사본의 표현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Hammond).

성 경: [왕상9:14]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주); 히람이...보내었더라 - 히람이 금을 보낸 까닭은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10-14절에서 솔로몬과 히람의 거래 관계가 좀 모호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분명한 설명을 위해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1) 건축으로 탕진한 국고를 충당키 위해 솔로몬이 갈릴리 성읍들을 담보로 히람에게 빌어온 금이라는 견해(Sanda). (2) 본절의 금을 11절의 금과 동일시하여, 앞서의 갈릴리 성읍들은 바로 이 금값을 지불한 것이라는 견해(Benzinger). (3) 아예 본절을 수정하여 금을 보낸 사람은 히람이 아니고 솔로몬이라는 견해(Gratz). 이 경우는 솔로몬이 갈릴리 성읍을 되찾기 위해 그 값을 치룬 것이라는 주장이 된다. 이중 첫번째와 두번째의 견해가 일리 있는데, 어쨌든이 무렵 솔로몬의 재정 상태는 오랜 건축 사업으로 말미암아 썩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주); 금 일백 이십 달란트 - 고대 이스라엘의 화폐 가치상 금1달란트(talent)는 3,000세겔(shekel)에 해당되는데, 대략 34.27kg의 무게를 지녔다. 참고로, 당시 은 30세겔은 장정 한 사람의 노예값이었는데, 금세겔은 은세겔의 15배 가량 되었다. 따라서 금 1달란트는 은 45,000세겔에 해당되는 값어치를 지녔다<성경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및 월력>.

성 경: [왕상9:15]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밀로(*, Millo) - '밀로'란 명칭은 '채우다'(*, 말레)란 뜻에서 파생된 말로, 곧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 또는 북서쪽 지역에 '흙과 돌로써 채워 세워놓은 성채(城砦)'를 가리킨다(Keil,Mitchell). 원래 이곳은 여부스인들의 성채였으나 다윗이 이를 정복하였다(삼하 5:6-9). 그리고 다윗은 이곳 밀로에서부터 성을 쌓아 수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건축하였다(대상 11:8). 그런데 솔로몬은 바로 이곳 밀로를 증축 또는 수축했던 것이다(24절). 삼하 5:9 주석참조.

(주); 예루살렘 성 - 다윗은 여부스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빼앗아 밀로와 예루살렘성을 건축한 바 있었다(삼하 5:9). 그러나 그 당시 다윗의 건축은 시온 산의 고지대 지역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솔로몬은 수도 방어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저지대 부분까지 성벽을 확장, 증축했던 것이다. 아울러 다윗의 때로부터 근 5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전에 쌓은 성벽을 튼튼히 수축하기도 했을 것이다(11:27).

(주); 하솔(*, 하초르) - '울타리를 둘러 친 땅'이라는 뜻이다. 갈릴리 호수의 북쪽으로 16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솔(Hazor)은 북쪽으로부터 뻗어내려오는 두 주요도로가 합쳐지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이 언덕에 성채를 쌓아 북방 국경 및 훌레 평야를 방어하는 요새로 삼았다(Yadin). 이후 하솔은 B.C. 8세기경 디글랏빌레셀 3세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북방 국경을 방어하는 주요 성읍이 되었다. 여호수아 11:10 주석참조.

(주); 므깃도 - 에스드렐론과 샤론 평원 사이에 위치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또한 이곳은 팔레스틴 내륙에서 베니게에 이르는 길과 애굽에서 수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길의 교차점으로서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삿 5:19;삼상 31:1;왕하 23:29).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상 이곳에서는 많은 전쟁이 치루어졌는데, 이런 맥락에서 계시록은 이곳 므깃도를 그리스도께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멸망시키실 최후의 큰 전투 장소, 곧 아마겟돈 전쟁의 무대로 묘사하고 있다(계 16:16). 여호수아 12:21 주석 참조.

(주); 게셀 - 이곳은 예루살렘과 욥바 중간의 팔레스틴 평지에 있는 성읍이다. 원래 '게셀'(Gezer)에는 가나안인들이 거주하였으나 애굽의 바로가 빼앗아 솔로몬에게 주었다(16절). 이는 솔로몬의 아내인(3:1) 자기 딸을 위한 일종의 지참금이었다(Hamilton).한편 솔로몬은 이곳에 요새를 구축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게셀은 이스라엘의 이후 '게셀'은 마카비 시대까지 주요 군사 요충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텔 엘 예셀'(Tell el-Jezer)로 추정된다. 여호수아 10:33 주석 참조.

성 경: [왕상9:16]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전(前)에 - 언제 무슨 이유로 어떻게 바로가 게셀을 공격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일이 솔로몬과 바로의 딸이 결혼하기전후(B.C. 970년 경)에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할 것이다. 한편 본절은 15,17절의 '게셀'을 설명하기 위한 삽입절이다.

(주); 불사르고...죽이고 - 원래 '게셀'(Gezer)은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되었던 성읍이었으나(수 16:3),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가나안 족속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솔로몬의 때까지 정복되지 못한 상태였다(수 16:10). 그런데 바로가 이 성읍을 정복하여 자기 딸의 결혼 예물(지참금)로 솔로몬 왕에게 주었다. 한편, 애굽 왕 바로가 게셀을 정복할 때 이처럼 주민을 멸절시키고 불을 지른 것은 보통의 전투 행위가 아니라 어떤 보복을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Hammond). 데니우스(Thenius)는 게셀 주민들이 애굽의 해안 지역을 노략, 해적하였으므로 바로가 그 일에 대해 보복하였다고 주장하나, 확실치는 않다(Keil).

성 경: [왕상9:17]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아래 벧호론 - 벧호론(Bethhoron)은 깊은 계곡에 의해 동서로 구분된다. 이중 동쪽 지역을 '윗 벧호론',서쪽 지역을 '아래 벧호론'이라 한다. 왜냐하면 동쪽 지역은 해발525m,서쪽 지역은 해발 315m이기 때문이다(Reed). 그런데 이 벧호론은 게셀과 함께 블레셋에 대한 방어 진지였다. 즉 이곳은 베냐민, 유다, 에브라임 지역을 방어하는 길목이었다(Keil). 따라서 솔로몬은 이곳을 더욱 공고히 요새화시켰던 것이다. 한편, 역대하 8:5에 의하면 솔로몬은 또한 '윗 벧호론'까지 증축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10:10;16:3 주석 참조.

성 경: [왕상9:18]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바알랏 - '여주인'이라는 뜻이다. 원래 단 지파의 영역이며 깁브돈과 여훗 사이에 위치했었다는 기록이 있다(수 19:44,45).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요세푸스는 이곳이 게셀 근처라 했다(Morton).

(주); 다드몰 - 이곳에 다메섹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이다. 후대(희랍과 라틴 시대)에는 '팔미라'(Palmyra)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곳은 많은 정원과 종려나무 숲들이 있어 쾌적한 오아시스 지대 였다고 한다(Owen). 그러므로 솔로몬은 새로 점령한, 왕국의 북동 지역을 지원할 국고성을 다드몰에 건축하였던 것이다(대하 8:3,4).

성 경: [왕상9:19]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국고성(國庫城) - 국고성(the store city)은 나라에 필요한 물품들-군량미, 왕국의재산, 구제용 식량 등-을 비축하는 장소이다(창 41:35;출 1:11;대하 17:12;32:28). 따라서 이러한 국고성은 물품의 저장 뿐 아니라 방비도 요구되었으므로 요새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주); 병거 성들 - 4:26 주석 참조.

(주); 마병의 성들 - 솔로몬이 거느린 마병의 수는 만 이천 명이었다(10:26). 그런데 '마병'으로 번역된 '파라쉬'(*)는 '말' 또는 '마병'으로 번역가능하다. 만일 '말'로 읽게 되면 '파라쉬의 성들'은 곧 마굿간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반면 '마병'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기병들의 주둔지가 되겠다. 그러나 이 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말과 마병이 아주 동떨어진 곳에 제각기 위치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요새화된 국고성과 여타 전쟁용 병거 및 말과 기병대는 주로 북방 국경 지대에있었던 것같다(대하 8:4;16:4). 왜냐하면 당시 솔로몬 왕국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은 북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9:20]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아모리 사람과...남아 있는 자 -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다 쫓아내지 못했던 가나안 토착민들이다(삿 1:21-36). 가나안 정복 전쟁 이후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주하여 살면서 여러 가지 사역에 종사 하였다. 즉 노예 신분으로서 이스라엘 중에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성 경: [왕상9:21]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노예로 역군을 삼아 - 20년에 걸친 솔로몬의 건축 공사는 필연적으로 거대한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본절은 솔로몬이 어떻게 그만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즉 솔로몬 왕은 옛 가나안 토착민의 자손들을 동원하여 강제 노역을 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동원된 가나안인 역군들의 수는 15만명 이상이었다(5:15).

(주); 오늘까지 - 13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9:22]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노예를 삼지 아니하였으니 -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구속의 백성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소유가 될 뿐, 다른 사람의 노예일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레25:39-43). 왕과 백성의 관계라 해도 이러한 형제애의 바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신17:14-20). 본절은 솔로몬이 막대한 노역 동원 중에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 했었다는 점을 애써 보여 주고 있다.

(주); 저희는 군사와...장관이 됨이었더라 - 가나안인들에 비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특권적 지위와 자유를 누렸음이 말한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부역(賦役)이 면제되지는 않았다. 비록 좀더 자유롭고 대가를 지불받으며 편안한 방식이긴 했지만, 성전건축 때 이스라엘 자손 삼만이 동원되었다(5:13,14). 그런데 아마도 갈수록 이스라엘 자손의 노역도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것 같다. 노역(勞役) 사무를 총괄하는 감역관의 존재와 솔로몬 사후 르호보암을 향한 백성들의 호소 및 탄원이 이를 입증해 준다(12:4, 18).

성 경: [왕상9:23]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두목 오백오십 인 - 여기 550명의 감독은 상급 감독으로서 이스라엘인 250명, 가나안인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5:16 주석 참조.

성 경: [왕상9:24]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건축 사업]

(주); 바로의 딸 - 3:1 주석 참조.

(주); 다윗성에서부터 올라와 - 3:1 주석 참조, 한편, 그런데 그때까지 다윗 궁에 거하던 바로의 딸을 굳이 따로 마련한 궁으로 데려온 이유를 우리는 역대하 8:11에서 찾아 볼수 있다. 즉 다윗이 살던 궁은 법궤가 머무렀던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이방 여인인 바로 딸의 거처로서는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주); 밀로를 건축하였더라 - 솔로몬은 바로의 딸, 곧 왕비를 위한 별궁을 짓고 왕비의 거처를 그곳으로 옮긴 후 곧이어 '밀로'를 건축하였다. 그 이유는 (1) 왕비의 이전으로 다윗 궁이 비어진 상태였으므로, 밀로의 건축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거나(Hammond)(2) 또는 왕비의 별궁 건축에 투입된 노동력을 밀로 건축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Keil). 한편 '밀로'(Millo)에 대해서는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9:25]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제사]

(주);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 역대하 8:12에는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으로 나온다. 곧 성전 앞뜰의 '번제단'을 가리킨다.

(주); 해마다 세 번씩 - 대하 8:13에 의하면, 이 세 번의 제사는 일년의 세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다. 그런데 '무교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봄 축제이다. 원래 무교절과 유월절은 약간 차이가 있다. 즉 유월절은 1월 14일(유대 종교력), 어린양을 제물로 잡는 첫날을 가리키며, 반면 무교절은 그 다음 7일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따로 구별하지 않고 이 절기 전체를 '무교절' 혹은 '유월절'로 통칭(通稱)한다(출 12:1-28). 한편 '칠칠절'(혹은 맥추절, 출 23:16)은 3대 절기 중 두번째 절기로서 일종의 수확제이다(레 23:21;민 28:26;렘 5:24). 처음 보리 벧 때부터 밀수확을 끝마치는 7주간이 끝난 다음 날이다. 신약의 '오순절'이 바로 이 날이다(Ryla-arsdam). 또한 '초막절'(장막절)은 3대 절기 중 세번째 절기로서 가을 축제이다(8:2).이 절기에는 광야에서 유랑하던 40년을 회상하면서 계약 갱신의 의식을 갖는다(출23:16;34:22;신 16:13,16). 그런데 이 절기는 순례 절기였다고 한다(Rylaarsdam). 즉 모든 백성들이 성소에 모이는 절기인 것이다(신 16:16;삿 21:16-19;삼상 1:3,21;왕상8:65,66).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를 참조하라.

(주); 이에 전(殿)역사가 마치니라 - 혹자는 이를 '불필요한 반복'이라고 보나(Montgome-ry), 많은 주석가들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즉 일상적인 제사 기능이 발휘됨으로써 성전의 참다운 완성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Bahr,Hammond). 곧 여기서는 원문의 '쉴람 에트 하바이트'(*)를 '성전을 완전하게 하다'또는 '성전을 완성된 상태에 두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Keil).

성 경: [왕상9:26]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무역]

(주); 엘롯 - '엘롯'(Eloth) 또는 '엘랏'(Elath,신 2:8)은 '에시온게벨'(Ezion - geber)과 더불어 홍해의 아카바 만 최북단에 위치한 2개의 주요 항구 도시인데(Winer), '에시온게벨'이 보다 윗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두 항구도시는 전략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였다.

(주); 에시온게벨 - 이곳은 홍해의 한 지류인 아카바 만의 상부에 위치한 항구이다. 이지역은 아카바 만의 상부에 위치한 항구이다. 이 지역은 일찍이 이스라엘이 모압 광야를 지날 때 진을 친 바 있었다(민 33;35,36;신 2;8). 그런데 솔로몬은 이곳에 항구를 건설하여 오빌과의 해상무역 기지로 삼았다. 고고학은 이 지역에서 솔로몬 시대의 건축 공법으로 이루어진 건물과 성벽을 발견하였다(Cohen).

(주); 배들을 지은지라 - 선박 제조에 있어 솔로몬은 당시 항해와 선박 건조 기술이 크게 발달한 베니게인들의 도움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좁은 해안 지대라는 국토의 지형적 조건이 베니게인들로 하여금 일찍부터 바다에 눈을 돌리게끔 했기 때문에, 솔로몬 당시 베니게인들의 항해와 선박 건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Winer, 5:1,9). 한편 '베니게'는 당시 히람 왕의 통치하에 있었던 두로와 시돈 지역을 가리킨다.

성 경: [왕상9:27]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무역]

(주); 히람이...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매 - 역대하 8:18에 의하면, 히람이 솔로몬에게 보낸 것은 사공 뿐만 아니라 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내용에 있어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들은 비록 솔로몬의 소유일지라도 그 제작은 히람이 의뢰를 받아 베니게인들의 기술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과 역대기의 기록 사이에는 하등 모순이 없다.

(주); 바다에 익숙한 사공 - 역대하 8:18에는 '바닷길을 아는 종들'로 되어 있다. 솔로몬의 무역 선단은 일찍부터 해상 무역에 익숙한 베니게인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입었다.

성 경: [왕상9:28]

주제1: [하나님의 언약과 솔로몬의 사업들]

주제2: [솔로몬의 무역]

(주); 오빌 - 오빌(Ophir)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크게 다음 다섯가지 주장이 있다. 즉 (1) 아라비아의 남서부 해안지역, (2) 아라비아의 동남부 해안지역, (3) 아프리카의 동북부 해안 지역, (4) 소아시아 해안지역, (5) 인도 해안 지역등이다. 이 중 마지막 견해인 '인도 해안 지역'이 가장 타당성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무역 품목들-금,은,상아,잔나비,공작 등-이 고대 인도 지역의 주요한 무역품들이다. (2)긴 항해길이 장거리 지점임을 암시한다(10:22). 그런데 인도의 봄베이(Bombay) 근처에 '수파라'(Supara)란 항구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오빌'(Ophir)인 것같다고 학자들은 말한다(Jerom,The New Bible Dictionary). 이런 견지에서 70인역(LX-X)은 '오빌'(Ophir)을 '소피아'(*, Supara)라고 번역했다. 그렇지만 올브라이트(Albright)는 오빌을 아프리카 동북부 해안 지역으로 보았고, 패터슨(Patterson)은 아라비아 남서부 해안 지역으로 본다. 여하튼 이 지역은 고대 세계에 금의 산지로 유명했음이 분명하다(대상 29:4). 따라서 이스라엘은 오빌에서 많은 금을 수입하였는데, 정금이라고 하면 곧 오빌을 연상할 정도였다(욥 22:24;28:16;시 45:9). 솔로몬은 이 오빌에서 금,이외에도 백단목과 각종, 보석 등을 운반해 왔다(10:11).

(주); 금 사백 이십 달란트 - 역대하 8:18에는 '금 사백 오십 달란트'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보통 히브리 알파벳의 숫자 표기상 20(*)과 50(*)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된다(Bahr,Keil). 한편, 당시 금 한 달란트(talent)의 무게는 대략 34.3Kg이었고, 그 가치는 장정 1,500명의 노예값에 해당되었다.

(주);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 왔더라 - 솔로몬의 해상 무역은 그가 가진 부의 주요 원천 중 하나였다. 비록 본절은 해상 무역에 국한하여 소개했지만, 활발한 교역 활동은 솔로몬 시대의 특징이었다(10:2,11,22,28;대하 2:10;9:14). 이러한 활발한 교역 활동에는 평화 시대라는 요인 외에도 애굽,수리아,아라비아 등으로 통하는 주요 교역로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한편, 이렇듯 활발한 통상교역은 이스라엘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즉 이제까지 지파 중심으로 농경과 목축에 주력하던 이스라엘에 상공업의 물결이 밀려들어옴으로써 도시 문화가 발달하게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지파 중심의 생활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대외적인 국가 조직의 재편을 가져왔다.

성 경: [왕상10:1]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 여왕]

(주); 스바 - '스바'(*, 쉐바)는 아라비아 반도 남서쪽 )지금의 예멘에 해당하는지역)에 위치한 셈족 국가로서 사베안(Sabaeans)왕국을 가리킨다(Keil). 이 나라는 그 위치상 이방세력의 영향에서 비교적 안전한 변방 지대여서, 비옥한 초승달(theFertile Crescent)지역의 권력투쟁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따라서 독자적인 정치와 경제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이 나라는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무역 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즉 그 위치 때문에 근동 북방의 여러 나라들 및 아프리카, 인도, 지중해 국가들은 스바를 통하여서만 향료, 보석, 황금등을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Beek; 욥 6:19; 시 72:10,15; 사 60:6; 렘 6:20; 겔 27:22,23;38:13).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나라의 수도 역시 '스바' - 헬라명으로는 '마리아바'(*)-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 여왕 -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4세의 원정 기록에는 B.C732년 경의 원정 당시 아라비아의 한 여왕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Harvey). 그러고 보면 당시 아라비아에는 여왕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그 밖에도 주전 7-8세기 경의 앗수르 원정 기록에는 아라비아의 여왕이 5명이나 나온다(Montgomery). 한편 본문의 스바 여왕은, 아라비아의 전설에 의하면 '발키스'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아비시니아(Abyssinia)전설에 의하면 '마퀴다'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스비 여왕은 솔로몬을 통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아비시니아 왕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전설까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입증되지는 않았다(Winer, Patterson).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 '이름'에 담겨있는 의미를 고려할 때, 이 말은 곧 '여호와의 은혜로운 활동에 힘입어'라는 뜻이다(8:16). 곧 솔로몬의 명예의 근원은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사역(3:12,13)의 결과라는 의미이다.

(주);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 해상 무역의 발달은 솔로몬 왕국의 부강함과 아울러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의 명성을 먼 이방나라에까지 미치게 하였을 것이다. 즉 솔로몬의 명성은 다메섹이나 가사로 가는 도중 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을 통과했던 아라비아 무역상들에 의해 스바 여왕의 귀에 들어간 듯하다(Patterson). 여하튼 여기서 우리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목적을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소문으로만 듣던 솔로몬의 명예와 지혜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고대 아라비아인들은 지혜로 유명한 족속이었으며, 동방 전설에 의하면 특히 당시 스바 여왕은 지혜의 여왕으로 이름나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후일 예수께서는 본문의 사건을 인용하심으로써(마 12:42; 눅 11:31). 당시의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지혜와 의를 적극적으로 사모하고 추구할 것을 촉구하셨다. 두번째로, 스바 여왕은 상업적인 통상관계를 맺기 위해서 방문했을 수 있다. 당시 솔로몬은 홍해 근처에 '에시온게벧'항구를 가지고 홍해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하고 있었고(9:26-28; 10:11,20-28), 스바 또한 금, 향품, 보석 등을 많이 수출하는 나라였다(사 60:6; 렘 6:20; 겔 27:22). 따라서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과 통상을 맺어 남아라비아에까지 확장된 솔로몬의 무역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자 방문하였을 것이다.

(주); 명예 - '명예'(*, 쉐마)는 '듣다'(*, 솨마)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본래 이 단어는 소식이나 평판, 소문 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멀리스바에까지(약 2,400Km) 퍼진 솔로몬의 명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명성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활동에 힘입은 결과였다. 즉 솔로몬은 즉위 과정이나 통치 방법, 대외 정책 등 모든 면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경험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대내외적으로 큰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솔로몬의 모든 부귀와 명예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었으므로, 겸허하게 주를 의지하는 한 그러한 영예는 지속될 것이었다. 그러나 영예의 절정에서 솔로몬은 그만 여호와의 길로부터 벗어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이스라엘 역사에 크나큰 곤경이 도래하게 되었다(11:4-13).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주); 어려운 문제 - '어려운 문제'로 번역된 '히다'(*)는 '수수께끼' 또는 '비유'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비유적 속담들이나 문제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히다'는 지혜에 대한 시험(test)으로 종종 사용된다. 왜냐하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만이 '히다'를 다루고 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잠 1:5,6; 시 49:1-4). 이러한 게임의 양식은 어떤 의미가 암시된 문제를 제시하면 푸는 자가 그 숨은 의미를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다(삿 14:14,18). 따라서 그것은 재미있는 오락이었고 동시에 어떤 사람의 기지 및 지혜를 시험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수수께끼는 아라비아 부족에게는 세련된 대화 방식의 하나였다고도 하는데(Harvey), 사실 아라비아 문학에는 이러한 수수께끼와 비유적 속담들이 풍부히 깃들어있다(Burckhardt). 그런데 여기서 스바 여왕은 '어려운 문제'를 통해 단순히 언어적 유희나 정신적 재치만을 시험한 것은 아닌듯하다. 그녀는 사실 어려운 문제 속에 숨겨진 심오한 진리를 발견코자 나름대로 진지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솔로몬을 방문, 시험했던 것 같다(마 12:42).

성 경: [왕상10:2]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예루살렘에 이르니 - '예멘'(Yemen)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00Km나 되는 먼길이다. 스바 여왕이 이러한 먼 길을 여행하게 된 데에는 무역로의 개척과 통상 협정을 통한 보호 요청의 동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Beek, Dentan). 그러나 본절은 오직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흠모만을 방문 동기로 제시한다. 그리고 훗날 예수님은 스바 여왕이 지혜에 대한 갈망으로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 온 것을 한 귀감으로 말씀하셨다(마12:42; 눅 11:31).

(주); 수원(隨員)이 심히 많고...약대에 실었더라 - 스바의 경제적 부요를 짐작케 하는 표현이다. 당시 스바는 해로 및 육로 무역을 통해 아라비아의 여러 국가들 중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고 한다(Winer). 즉 스바는 선박을 통한 해상 무역 뿐 아니라, 낙타를 이용한 대상(隊商)무역으로도 육지 무역의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 나라이다. 본절은 바로 그러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즉 물품의 운반과 보호에 요구되는 많은 수행원과 낙타의 이용이 그것이다.

(주); 향품과...금과 보석 - 아라비아 향품은 아라비아의 최고급 특산품으로 속담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였다(Herodotus). 그리고 '금'은 현재는 발견되지 않으나 당시에는 아라비아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Strabo, Diodorus). 어쩌면 '금'은 토산품이 아니라 무역품일 가능성도 크다(J.Hammond). '보석'은 지금도 아라비아 지역에서 많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보다 다양한 종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Pliny).

(주); 자기 마음에 있는 것 - 공동번역은 '미리 생각하였던 문제들'로 번역하였다. 물론이 문제들은 수수께끼의 형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끼라고 해서 단순한 말의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등의 원리와 법칙을 탐구하는 고대 세계의 지혜의 방식이었다. 따라서 자연 현상에 대한 주제는 물론이거니와 종교적인 주제의 문제들도 많이 숙고되었다. 스바 여왕의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J.Hammond). 한편 지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보편적이었다고 한다(Montgomery).

성 경: [왕상10:3]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은미하여 - '은미(隱微)하여'의 어근 '알람'(*)은 '숨겨지다', '가리워지다'는 뜻이다. 사실 수수께끼는 표면에 드러나 있는 의미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다(Blank). 그 참된 의미는 애매하고도 간결한 표현으로 가리워진 채 문제를 푸는 사람 앞에 제시된다. 그러므로 그 덮은 베일을 벗겨내지 못하는 한 그 참된 의미는 계속 숨겨진 것, 가리워진 것으로 남는다.

(주);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 본절에서 '대답하다'는 '풀다', '알게 하다'는 뜻을 지닌 '나가드'(*)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이 '나가드'는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눈에 잘 띄게 높이 두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대답'은 솔로몬이 주어진 문제의 숨겨진 의미를 척척 끄집어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확연히 깨우치게 함을 뜻한다. 한편, 이 단어는 요셉과 다니엘의 꿈 해몽과 관련하여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창41:24; 단 5:12).

성 경: [왕상10:4]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솔로몬의 모든 지혜 - 4:29-49주석 참조. 특히 감추인 것을 밝히 드러내는, 수수께끼를 푸는 솔로몬의 막힘없는 지혜가 스바여왕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주); 그 건축한 전 - 역대하 9:3에 의하면, 본절의 '전'은 성전이 아니고 궁전이다. 한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바 여왕은 특히 레바논 나무궁(7:2-4)에 경탄하였다고 한다(J. Hammond).

성 경: [왕상10:5]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그 상의 식물과 - 4:22,23을 보라. 그 신복들의 좌석 - '좌석'으로 번역된 '모솨브'(*)는 '회합'의 뜻이 있다.예를 들어 연회 석상에서의 자리, 또는 장로들의 회합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삼상20:18,25; 대하 9:4; 시 107:32). 그러므로 '신복들의 좌석'은 단순히 빈 자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식사로 모인 공직자들의 배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 신하들의 시립(侍立)한 것 - '시립한 것'(*, 마아마드)은 직책에 따라 제장소에 서는 것을 말한다. 즉 솔로몬의 신하들이 지위와 임무에 따라 도열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주); 술 관원들 - 왕의 술 시중을 드는 관리로서 특별히 왕의 신임을 받는 자들만이 그 자리에 임명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술 관원은 쉽사리 왕을 시해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Wolf). 그런데 이 술 관원의 우두머리는 단지 명목상 술 시중을 들 뿐 실제로는 왕과 친분이 있는 고위 관리의 직책이었다.

(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 - 70인역(LXX)을 비롯한 고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여호와의 전에서 드리는 번제'로 번역한다. 왜냐하면 (1)'올라'(*)는 '층계'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 '번제'로 사용되었고(창 8:20; 출 29:18; 레3:5; 9:17; 민 28:19; 왕상 3:4; 8:64; 9:25). (2) 또한 '올라가다'(*, 알라)란 말은 '드리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삼상10:8; 대상16:40; 겔 43:18). (3) 스바여왕을 경탄시킬 만한 요소는 단순한 층계보다는 솔로몬의 엄청난 규모의 번제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대기의 병행 구절(대하 9:4)과 겔40:26의 기록에 근거하여, 문맥상 본문 그대로 '층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J.Hammond). 왜냐하면 이 '층계'는 왕궁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특별한 계단으로서 매우 예술적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Keil, Bahr, Winer, Ewald).

(주); 정신이 현황하여 - '현황'(眩慌)이란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함을 뜻한다. 원문의 표현대로는 '잠시 동안 그녀 안에 루아흐'(*, '정신' 또는 '영')가 있지 않았다'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진격할 당시 가나안 거민들의 당혹과 놀람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수 2:11; 5:1). 즉 어떤 상황이나광경이 사람의 혼을 뺄 정도로 굉장함을 말하는 것이다. 공동번역은 '넋을 잃을 정도로 감탄하였다'로 번역하여 비교적 원문의 뜻을 잘 전해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스바 여왕이 이토록 감탄하고 놀란 이유는 단순히 건물의 웅장함이나 규모의 거대함 등 외형적인 면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로 말미암은 왕국의 체계적인 조직과 질서 정연함 등 내부적인 면이 더욱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C.F Bumey).

성 경: [왕상10:6]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내 나라에서...들은 소문 - 4:31,34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특히 '소문'(*, 다바르)은 어떤 행적에 대한 보고를 의미하기도 한다(대상 29:29). 날로 발흥(發興)하는 이스라엘의 번영상 및 그 나라의 지혜로운 통치자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는 멀리 스바에까지도 보고되었다.

(주); 진실하도다 - '진실'(*, 에메트)은 '견고'란 뜻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뒷받침하다'(*, 아만)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스바 여왕의 이 말은 소문이 실상으로 뒷받침되어 견고하게 확증되었다는 뜻이다.

성 경: [왕상10:7]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믿지 아니하였더니 - 스바 여왕은 들려온 소문이 분명 과장되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소 봉대(針小棒大), 즉 하찮은 일도 크게 불려서 전달되는 소문의 속성을 감안할 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 목도(目睹)한즉 - 즉 눈으로 직접 보니,

(주); 절반도 못되니 - 보통 귀에 들린 소문에 비해 눈으로 목격하는 실상은 하찮은 것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뒤엎고 소문이 실상에 오히려 못미친다고 말함으로써, 스바 여왕은 찬사의 뜻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 당신의 지혜와 복이...소문에 지나도다 - 원문대로 옮기면 '나의 들은 소문에 당신의 지혜와 복을 더하였다'이다. 아마도 맨 처음 스바 여왕이 보고받은 소문의 내용은 주로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나라는 북방 지역과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국가라는 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스바 여왕이 직접 방문하여 친히 목도한 결과, 그동안 익히 들은 국력의 강대함 외에도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받은 복에 대한 경탄을 금할 길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왕상10:8]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복되도다...복되도다 - 여기서 '복되도다'(*, 아쉐레)는 보다 인간적인 행복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받는 영적 축복 '바라크'(*)와는 구별된다. 한편 '복되도다'가 두번 거듭된 것을 강조를 위한 반복이다. 전반적인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스바의 여왕은 외교적 언변이 유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 당신의 사람들이여 - 이 말은 일반적으로 '당신의 아내들이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Montgomery). 왜냐하면 (1)솔로몬의 신하들에 관해서는 본절 하반부에 다시 나오므로 이들이 솔로몬의 신하일 리 없고, (2) 고대 근동에서는 남자 자신에게 직접 하기보다 그의 아내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안부나 찬사에 대한 동양 귀부인의 예절이었기 때문이다(Hitti). 70인역(LXX)도 이러한 해석의 입장을 취하여 '당신의 부인들이여'로 번역하였다.

(주);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 왕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고대 군주 국가에서, 왕이 지혜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몸소 지혜를 설파하는 상황이라면 그 신복들이나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는 솔로몬의 신복들처럼 솔로몬곁에서 늘 지혜를 들었으면 하는 스바 여왕의 아쉬운 심경이 표현되었다 하겠다. 한편 성도들은 솔로몬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월등한 지혜를 소유하신(마 12:42)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듯 복된 처지를 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말씀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히13:15).

성 경: [왕상10:9]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송축(頌祝)할지로다 - 마태복음 12:42과 관련하여 스바 여왕의 이 말을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 스바 여왕이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하였다고 보는 종래의 해석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좀 지나친 해석이라는 데 대부분의 의견이 일치된다(Gate, Keil, Hammond). 즉 스바 여왕은 두로 왕 히람의 경우처럼(5:7) 다신론의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정한 것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절 초두에서 '우리 하나님' 혹은 '나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당신의 하나님'으로 말한 까닭이 석연찮게 된다. 아울러 여호와의 전에 경배했다든지 혹은 제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 당신을 기뻐하사 - '기뻐하사'(*, 하페츠)는 '기울다'는 뜻으로, 단순히 맘에 든다는 정도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 중심이 솔로몬에게로 완전히 기울어진' 애정 상태를 말한다.

(주); 공과 의 - 여기서 '공'(公)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법도', '공평','판결'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출 21:1; 28:15; 레 18:4,26; 신 17:11; 33:21등). 이는 나라에 법도가 올바로 서 기강이 문란치 않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한편 '의'(義)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의로움','정직'을 의미한다(신 6:25; 33:21; 시22:31; 36:10; 사 33:15등). '미쉬파트'가 법(法)과 같이 좀 형식적인 면에 관련있다면, '체다카'는 윤리(倫理)와 같은 보다 내용적인 면에 관여한다 하겠다.

성 경: [왕상10:10]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저가 금...보석을 왕께 드렸으니 - 스바 여왕의 이같은 선물에 대해 솔로몬도 답례로 많은 물품을 주었다. 이러한 답례 행위는 고대 세계에서 왕들 사이의 관습이었던 것 같다(13절). 한편 솔로몬의 스바 여왕 같의 선물교환은 곧 두 나라 간의 호혜적인 통상 교역을 의미한다(Harvey).

(주); 향품(香品) - '향품'(*, 발삼)이 구체적으로 무얼 지칭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향품이 고대 세계에서 부의 척도가 되리만치 중요하고 값비싼 물품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스바는 당시 남주 아라비아를 통과하는 향품 무역을 관장하였다(Trever). 따라서 혹자는 이 향품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기에는 아라비아 산(産) 순발삼(balsam)이 포함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Keil). 한편 요세푸스에 의하면, 스바 여왕의 방문을 통해 비로소 팔레스틴지역에 향품이 소개되었으며, 이후 솔로몬은 스바와의 무역을 통해 여리고 근처에 발삼 나무로 가득찬 향료 정원을 지었다고 한다(Autiquities VIII, 6.6).

성 경: [왕상10:11]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오빌 - 9:28 주석 참조.

(주); 히람의 배들 - 9:27 주석 참조. 한편 역대하 9:10에는 '후람(히람)의 신복들과 솔로몬의 신복들'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솔로몬의 무역 선단은 두로의 항해 기술자들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입고 있었다.

(주); 백단목 - 이 나무의 정확한 종류와 명칭은 불확실하게 남아 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일종의 소나무 목재로 보았다. 여하튼 백단목(*, 아체 알무김)은 인도와 실로(Ceylon)이 원산인 '붉은 백단향 나무'(학명, Pterocarpussantalinus)곧 '자단목'(紫檀木, red sandal-wood)과 같은 종류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 적갈색의 백단향 나무도 본절의 백단목처럼 단단하고 나무결이 고와 악기 제조에 적합하였다고 한다(Trever).

성 경: [왕상10:12]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난간(*, 미스아드) - 병행 구절인 역대하 9:11에는 '층대'(*, 메실로트)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는 '난간이 있는 층계(계단)'로 이해함이 가장 무난하다(Keil).

(주); 노래하는 자 - 이들은 성전과 궁정에서 활동하는 전문 음악가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 음악가들은 적어도 다윗 시대 이전에는 성경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미리암, 드보라, 그리고 다윗의 승리를 찬양하는 여자들의 경우에서 보듯 여인들의 합창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출 15:20, 21; 삿 5:1이하; 삼상 18:6,7). 그러므로 조직적으로 전문 음악가를 양성한 것은 왕정 시대에 들어선 이후부터이다. 한편 이들 노래하는 자의 기능은 제사에서의 전례 음악, 왕의 즉위 및 향연과 축제에서의 노래,연주 등을 담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Wemer).

(주); 수금 - '수금'(*, 킨노르)은 가장 고귀한 악기로서 귀족 계급이 사용하였다(Wemer). 성경에서 수금은 다윗과 레위인들의 악기로 등장한다(삼상 16:23; 대상15:16; 대하 5:12).

(주); 비파 - '비파'(*, 네벧)는 대체로 하프(harp)와 비슷한 현악기로 간주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역시 레위인들의 악기이다(대상 15:16; 대하 5:12). 시편을 보면이 두 악기는 종종 함께 언급되어 있다(시 71:22; 108;2; 150:3).

성 경: [왕상10:13]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주); 왕의 규례대로 - 여기서 '규례'로 번역된 '야드'(*)는 원래 '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창 3:22; 레 7:30; 신 28:8; 삿 8:3등). 고대 근동에서 왕들끼리의 대면은 상호 예물을 주고 받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맺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솔로몬 왕국에서도 예물에 대한 답례물의 규정이 관례로서 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무릇 구하는 것을 주니 - 역대하 9:12에 의하면,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가져온 대로 답례'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선물에 대해 그 가치에 상응하는 충분한 답례를 하였다. 그러고도 또 스바 여왕이 요구하는대로 아낌없이 선뜻 물품을 내주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본절은 당대의 무역국 스바의 여왕이 더 많은 물품을 탐낼 정도로 솔로몬의 부가 극에 달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요구하는대로 서슴없이 내어주는 솔로몬 왕국의 넉넉함 역시 그 점을 강조해 준다.

성 경: [왕상10:14]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세입금(歲入金) - 솔로몬의 부의 원천은 무역에서 얻는 이익 외에도 세금 징수가그 주된 출처였다. 이 세금은 열 두 관장을 통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삼상8:15)외에도 주변 국가들의 조공, 각국 무역상들이 내는 통행세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Dentan).

(주); 육배 육십 육 금 달란트 - 이는 솔로몬이 매년 정기적으로 거두는 세입금을 말한다(Bahr, Montgomery). 그런데 혹자는 오빌로 항해하는 상선단이 3년마다 귀환한 것을 근거로 이 666 금 달란트는 매년의 세입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1)오빌로 항해했던 선단('히람의 배'로 표기됨,11절)과 3년마다 귀환한 '다시스 배'를 동일시 할 수 없다(9:27,28; 10:11,22). (2)오빌로 항해한 선단이든 다시스 행 배든 이 항해의 일차적인 목적은 무역에 있지 세금징수에 있지 않다. (3)15절을 참고하건데, 본절의 세입금은 정기적인 항목만의 총액이다. 정기적이 아닌, 부가적 세입금은 15절에서 따로 언급되었다. 따라서 설령 무역 선단이 세금을 징수했다 하더라도 그 금액은 15절에 포함되지, 본절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편 금 666달란트가 현대의 화폐 가치로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Living Bible은 2천만 달러로 기록하고 있다. 추측컨대, 당시 금 1달란트의 무게는 34.3kg정도로, 은 45,000세겔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당시 은 30세겔은 노예 장정 한 사람의 값이었으므로(출 21:32), 금 1달란트는 약 1,500명의 노예값을 지불할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아무튼 그 액수가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엄청난 것으로 비추어졌음을 분명하다. 왜냐하면 본장 전체가 솔로몬의 엄청난 부와 사치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한편, 혹자는 이 세입금의 액수와 계시록의 '666'(짐승의 수, 계 13:18)과의 일치를 들어 좀 상징적인 논의를 제시하는데(Hammond), 좀 지나친 견해이다(Bahr). 왜냐하면 (1)열왕기서에 나오는 숫자를 계시록처럼 상징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없고, (2)비록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도 '666'이란 숫자가 나오지만 상징적 의미와는 무관한 경우로 나오기 때문이다(스 2:13).

성 경: [왕상10:15]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상고(商賈) - 본절에서 '상고'(merchantmen, KJV)로 번역된 '아네쉐 하타림'(*)은 번역에 있어 사실 논란이 많은 단어이다. 예를 들면, 70인역은'공물'(tribute)로, 시리아역과 아람역은 '장인'(匠人, artisan)으로, 라틴역은 '대사'(ambassador)로 제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게다가 성경에서 '상고'로 보통 번역되는 말은 '케나안'(*)이나 '사하르'(*)이다(창 23:16; 왕상 10:28;사 23:2; 겔 27:36; 호 12:7). 그런데 '하타림'의 어근 '투르'(*)는 '두루 다니다', '여행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이 말은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군소 상인들을 의미할 수 있다(Keil).

(주); 무역하는 객상 - '객상'(*, 로켈림)의 어근은 '장사 등을 하면서 돌아다니다'는 뜻을 가진 '라칼'(*)이다. 여기서 '객상'(客商)이란 말은 그 자체로외국과의 무역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로켈림'은 앞의 '상고'(하타림)와는 구별되는데, 즉 주로 외국을 상대로 대규모의 상업 행위를 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keil). 한편 이들 상고나 객상들의 상업 활동에는 일정한 세금이 부과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 아라비아 왕들 - 이는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이방 왕들'(Gesenius, theChaldee)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접경한 아라비아 광야에 거하는 모든 잡족들의 왕들'(Keil, Patterson)을 가리킨다(렘 25:24). 당시 이들 지역의 왕들은 모두 솔로몬의 통치하에 있었다.

(주); 나라의 방백들 - 즉 국내의 지방 장관들을 의미한다(4:7-19).

성 경: [왕상10:16]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쳐서 늘인 금 - 성전 건축 때 사용된 공법(工法) 역시 금을 두들겨 얇은 널판처럼 하여 나무에 덧입히는 방식이었다(6:22). 방패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일단 나무로 만든 다음 그 위에 금을 덧입혔음을 짐작케 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혹자(Rawlinson)의 주장처럼, 단순히 금으로 도금한 상태는 아니다.

(주); 큰 방패 - 이는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진지 방어용 방패를 말한다. 한편 당시의 일반적인 방패 제작 방식은 나무에 가죽을 씌우는 것이었다(Wevers). 그런데 본절의 방패는 가죽 대신에 얇은 금판을 입힌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금방패는 실제 전투용이 아닌, 의식(儀式)을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주); 육백 세겔 - 고대의 무게 측정법을 따라 1세겔을 11.424g으로 볼 때(Sellers), 방패 하나 당 약 6.9Kg의 금이 든 셈이다. '마네'(Maneh)로는 12마네가 된다. 즉 작은 방패에 비해(17절) 4배의 금이 더 든 셈이다. 또한 1달란트는 3,000세겔이므로, 큰 방패 200개 전체에는 40달란트의 금이 든 셈이다.

성 경: [왕상10:17]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작은 방패 - '큰 방패'(*, 친나)에 비해 '작은 방패'(*, 마겐)는 백병전에 쓰이는 휴대용 방패이다. 이것은 보통 팔걸이 식의 둥근 방패이다(McCullugh).

(주); 삼 마네 - '마네'(Maneh)는 고대의 무게 단위로서, 약 571.2g으로 50세겔에 해당한다. 따라서 3마네는 150세겔로서 약 1.7kg 이다. 그러므로 작은 방패 300개 전체에 든 금은 15달란트(45,000세겔)이다.

(주); 레바논 나무 궁 - 7:2주석 참조. 분명 이 금방패들은 레바논 나무 궁의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졌을 것이다. 한편, 여기 보관된 금방패들은 르호보암 때 애굽 왕 시삭(Shishak)에게 탈취당하고 말았다(14:26).

성 경: [왕상10:18]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상아(象牙) - '상아'(*, 쉔)는 곧 코끼리의 어금니이다. 한편,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상아가 제공된 출처는 대부분 유브라데 강상류 지역에 서식하던 코끼리 떼였던것 같다. B.C. 1,500년 경의 앗수르의 기록에서도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Pritchard). 그런데 이스라엘에 상아가 유입된 경로는 두로(Tyre)를 통한 교역 또는 다시스(Tarshish)배를 통해 직접 수입이었다(22절).

(주); 큰 보좌를 만들고 - 이 상아보좌는 순전히 상아로만 만든 보좌가 아니고, 상아로 장식한 보좌를 가리킨다(Keil). 즉 나무로 만든 후 금을 입히고, 금판 사이 사이에 상아를 박아 장식한 보좌를 가리킨다(Bahr). 한편, 이 보좌의 제작 역시 두로 기술자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당시의 두로는 상아를 이용한 조각술이 발달했기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상아 조각은 물론 보좌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었다. 원래 이스라엘의 관습은 유목민 특유의 웅크리고 앉거나 기대어 앉은 것이었으므로 의자의 사용은 매우 드물었다(Hammond). 다윗조차도 보좌를 사용했는지의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솔로몬에 이르러 보좌를, 그것도 상아로 만든 보좌를 사용한 것은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이후 보좌(*, 키세)는 왕의 직무와 지극히 밀접한 연결을 갖게 되므로, 그 자체로 왕권을 상징하기까지에 이르른다(Toombs; 시 9:4; 122:5; 사 16:5; 렘 17:25).

성 경: [왕상10:19]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 카일(Kell)은 보좌의 뒷편을 아아치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보며, 베르(Bahr)는 보좌 등판에다 둥근 모양을 덧붙인 것으로 보았다. 한편 본절을 고대 근동에서 권력의 상징이던 황소의 머리가 장식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학자들도 있다(Montgomery, Toombs등). 즉 '둥근'(*, 아골)을 '송아지'(*, 에겔)로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둥근'과 '송아지'는 모음 부호만 다를 뿐 똑같은 철자이다. (2)그런데 후대의 서기관들이 의도적으로모음 부호를 변형시켜 '송아지'를 '둥근'이 되게 했다. (3)그 이유는 황소는 이스라엘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준 송아지 숭배 사건(출 32;4)을 연상시키는 형상이기 때문이다(Gates). (4)또한 '머리'에 해당하는 '로쉬'(*)가 무생물을 향해 쓰이는 경우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창 3:15; 40:13; 출 29:10; 레 4:15; 8:14; 삼상 31:9; 왕하6:32등). (5)그러므로 '로쉬'는 '에겔'(송아지)에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상과 같은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으나 확실히 입증되지는 않았다.

(주); 팔걸이 - 솔로몬의 보좌는 팔걸이와 그 곁의 사자 장식으로 미루어 애굽식에 가까왔던 것 같다. 바사(페르시아)왕의 보좌에는 이러한 팔걸이가 없었다고 한다(Toombs).

(주); 사자가 하나씩 섰으며 -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서(잠 30:30,31), 흔히 성경에서 통치와 심판을 상징한다(암 3:8; 계 10:3). 본절에 언급된 보좌 팔걸이 곁의 두 마리의 사자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왕상10:20]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열 두 사자 - 19절의 두 사자는 팔걸이 곁의 장식으로 본절의 열 두 사자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형태와 크기, 재료에 있어 어떤 구별이 있었음직하다. 여하튼 여섯 층계좌우편의 이 열 두 사자상들은 만민 중 왕과 제사장의 나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였다(Keil).

(주); 여섯 층계 좌우편에 - 열 두 사자상은 한 층계의 좌우에 둘씩 놓였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보좌는 이 여섯 층계 외에도 보좌를 위한 꼭대기의 한 층을 더한, 즉 칠 층 구조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보좌의 구도와 열 두 사자상의 배열은 이제까지의 지파 중심적 이스라엘이 왕권 중심으로 옮겨졌음을 반영해 준다(Hammond). 참고로, 바벨론의 우주관과 그에 따른 신전의 구조도 칠층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Wunsche).

(주); 아무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 고대 근동 지역의 유물들을 고찰하건대, 비록 보좌가 높고, 정교하게 만들어 졌으며, 팔걸이에는 각종 동물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사실들이 입증되었으나(Layard). 그 규모나 형태 및 화려함 등에 있어서는당시대 솔로몬의 보좌와 같은 것은 없었다. 솔로몬의 보좌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보좌는 먼 후대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Rosenmuller, Keil & Delitzsch, Vol. III.p. 164).

성 경: [왕상10:21]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 은(銀, Silver)은 적어도 바사 시대(B.C. 500년 경)이전까지는 금에 비견되는 가장 값진 금속이었다. 바사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많은 은이 산출됨으로써, 금에 비해 그 가치가 하락하게 된다(Garber). 그러므로 B.C 10세기 경인 솔로문 시대에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따라서 이는 그만큼 솔로몬 왕국의 부(富)가 극에 달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27절).

성 경: [왕상10:22]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부(富)]

(주); 다시스 - '다시스'(Tarshish)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실제 지명이거나 아니면 어떤 장소와는 무관하게 '아주 먼 곳'을 지칭하는 경우이거나이다. 후대에 '다시스 배'란 곧 먼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Gordon). 한편, 실제 지명으로 볼 때 다시스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성경 기록상의 추적을 통해, 지중해 연안의 희랍 지역 중 하나이거나 아니면 지중해 건너 남쪽 어떤 항구 도시일 것으로 추정해 볼 따름이다(창 10:4; 욘 1:3; 사 23:1; 66:19). 그리고 성경에는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 행 배를 타고자 욥바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욘 1:3).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다시스를 스페인의 타티스(Tartessus)로 보기도 한다(The NewBible Dictionary). 고대에 이곳은 은을 많이 수출하는 항구였다(렘 10:9; 겔 27:12). 한편 혹자들(Albright, Unger)은 '다시스'(*, Tarshish)란 말 자체가 '광물'(mining) 또는 '녹이다(smelt)란 뜻이므로, 제련소의 물품을 멀리 운반하는 배를 가리켜 '다시스 배'라고 칭했다고 본다. 즉 솔로몬 당시 에시온게벧에는 큰 제련소가 있어 외국에서 수입해온 물품들 - 금,은,백단목,상아,잔나비,공작 등 -에 대한 수출품으로서 구리, 철, 놋과 같은 광물들을 그곳에서 선적하여 다시스 배로 수송했다는 것이다(Wood, Patterson). 이 견해도 상당히 타당성 있는 견해이다.

(주); 다시스 배 - 일반적으로 '배'를 의미하는 '아니야'(*)에 비해 본 절에 쓰인 '아니'(*)는 '선단'(船團)이란 뜻이 있다. 그러므로 '다시스 배'는 9:27,28의 오빌로 항해나는 선단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단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다시스 선단을 곧 오빌 선단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Rawlinson, Hammond). 왜냐하면 본절에서 이 두 선단은 비록 협동 작업은 하지만 서로 구별되는 관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선단에 붙여진 '다시스'란 명칭은 앞서 설명한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내포된 듯하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이 다시스 선단이 운반한 금과 은의 출처는 당시 은과 금속 가공으로 유명한 실제의 다시스일 것이며, (2)상아와 잔나비와 공작 등은 실제의 다시스 외에도 멀리 인도양을 두루 항해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이 다시스 선단의 한 번 항해가 3년씩 걸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

(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 - 이것들은 인도산으로서 아주 귀하고 사치스러운 무역 품목인데, 대부분 궁전 장식용으로 쓰였다.

성 경: [왕상10:23]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예물]

4:30 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부터 25절까지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총괄이다. 즉 3장에서부터 줄 곧 찬양되던 솔로몬의 지혜는 이로써 그 이야기를 끝맺게 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에서 '재산'이 '지혜'보다 더 앞서 강조되어 나타나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이는 사치와 번영으로 인한 솔로몬의 타락 기미가 엿보이는 표현이라고 보았다(Wordsworth).

성 경: [왕상10:24]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예물]

(주);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 - 4:29-34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궁극적으로 이는 기브온 약속(3:12,13)의 완전한 성취이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 솔로몬의 이 마음의 지혜는 이방 여인들과 우상 숭배로 인해 흐려진다(11:3,4). 이러한 대비(對比)에서 열왕기 저자는 왕국의 번영과 쇠퇴를 솔로몬의 지혜의 명암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우상숭배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성 경: [왕상10:25]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예물]

(주); 예물 - 비록 문맥은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본절의 '예물'(*, 민하)은 공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매년 정해진 물량을 바친 것이라는 본절 하반부의 내용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그리고 4:21에서 '공'(貢)으로 번역된 원어도 역시 '민하'이다. 원래 '민하'는 우월한 자에게 '존경'과 '복종'을 표시하기 위한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하'란 단어 속에는 예물과 공물의 성격이 동시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절은 '민하'의 예물로서의 성격만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혜에 의한 솔로몬의 평화로운 통치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성 경: [왕상10:26]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병거]

(주);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은 사실은, 경제적 번성에 따르는 군사적 부강으로 간단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왜냐하면 (1)이스라엘의 지형은 산악 지대가 많아 병거가 많이 필요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다윗이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은 병거 일천 대 중 백 대만을 제외하고 는모두 부셔버린 사실에서도 입증된다(대상 18:4). (2)더구나 왕이 말을 모으는 일은 신명기 규례상 명백히 금지된 일이라는 점(신 17:16) 등의 문제에 대해 솔로몬의 병거와 마병은 (1)단순히 전투용 뿐이아닌 상업적 목적(매매 혹은 상선단의 보호)도 지닌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Dentan), (2)무엇보다도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해석되고 있다(Hammond, Wevers). 한편 신명기 규례가 '왕된 자는 말을 많이 주지말 것'(신 17:16)을 명한 이유는 (1)무엇보다 병마(兵馬)에 의존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시 20:7; 33:17; 잠 21:31). (2)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이킬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즉 말의 주산지인 애굽과의 잦은 외교나 거래 관계는 결국 애굽의 우상 문화를 끌어들이게 되고, 나아가 정치적 종속의 관계를 띨 우려마저 있었기 때문이다(Craigie). 그리고 이렇게 되면,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출애굽 은총이 업신여김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율법의 금지 조항이 염려한 점을 망각하고, 단순히 예비용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말을 애굽으로부터 수입하였다(28,29절). 이로써 솔로몬 왕에게 드러워지는 실패와 타락의 전조(前兆)를 느낄 수 있다. 병거성 - 4:26 주석 참조. 한편 시카고 대학의 발굴단은 므깃도 유적지에서 400마리 정도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외양간을 발견했다고 한다(Montgomery).

성 경: [왕상10:27]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병거]

(주); 은을 돌같이 흔하게 - 21절의 내용을 확대한 말이다. 이것은 극에 달한 솔로몬 왕국의 부를 수사학적으로 과장되게 표현한 말이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은 실제로 돌이많은 지역이다(Englert).

(주);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 앞의 부분과 함께 본절은 히브리적 대구법의 한 유형에 속한다. 즉 대단히 귀중한 것(은, 백향목)이 흔해 빠진 것(돌, 뽕나무)에 비유되어 그 많음이 더욱 강조된다. 한편, '뽕나무'(*, 쉬케마)는 지금의 팔레스틴에서는 오히려 보기드문 나무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흔했다고 한다(사9:10;Bahr, Hammond, Keil). 특히 경사가 완만한 구릉 지대에 무성하였다고 한다(Winer).

(주); 백향목 - 4:33; 5:6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0:28]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병거]

(주); 애굽에서 내어 왔으니 - 이 말은 말들을 인수한 장소가 애굽 내의 어떤 지역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비록 애굽이 이스라엘에 말을 매매하였지만, 실제로 인수된 장소는 애굽 바깥의 어느 지역일 것이다. 아마도 애굽말의 사육장을 많이 갖고 있던 소아시아 남부의 어느 지역이 아닐까 추정된다(Kapelrud).

(주); 떼 - 여기서 '떼'로 번역된 '케웨'(*)에 대해서 해석의 입장이 분분하다. 즉 한글 개역은 게세니우스(Gesenius)의 입장과 같이 '떼'(company)로 번역하였지만(창1:10; 출 7:19; 레 11:36), 흠정역(KJV)은 '아마사'(亞麻絲)로, 영역본 NIV와 RSV 그리고 공동 번역은 지명을 나타내는 '쿠에'(Kue)로 각각 번역하였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쿠에'를 길리기아의 옛명칭이라고 본다(Gates, Kapelrud, Thompson), 그리고 길리기아는 소아시아 남부 해안 지방의 비옥한 고장으로 명마의 생산지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절의 '떼'는 장소를 가리키는 '쿠에'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Keil,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성 경: [왕상10:29]

주제1: [절정기의 솔로몬 왕조]

주제2: [솔로몬의 병거]

(주); 애굽에서 내어 올린 병거 - 당시 애굽은 말과 병거의 주요 수출국이었다. 그런데 애굽에 병거가 성행하게 된 것은 B.C. 1800년 경부터 애굽을 지배하게 된 힉소스인들의 병거 사용에서부터였다(Wevers). 이후 이스라엘인들의 경험 속에서 애굽은 항상 말과 병거의 국가였다(출 14:6; 15:1; 신 17:16; 사 31:1). 그런고로 이러한 애굽과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맺은 솔로몬은 애굽으로부터 병거를 많이 공급받을 수 있었다.

(주); 은 육백 세겔 - 은 1세겔(Shekel)은 대략 11.4Kg이었으므로, 은600세겔은 약 7Kg의중량이다. '마네'(Maneh)로는 12마네, '달란트'(Talent)로는 0.2달란트이다(16절).

(주); 헷사람 - 히타이트족을 가리킨다(창 10:15; 23:3). 그런데 히타이트족은 B.C.2천년대 초 경에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바 있지만, 솔로몬 당시에는 작은 왕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다(Gelb). 그리고 이 왕국들은 팔레스틴 북쪽 변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은 남쪽 애굽과 북쪽 헷 왕국들 사이에서 병거와 말 매매의 중간상인 구실을 한 것이다. 이러한 수입과 매매를 통해 얻은 수익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주); 아람 왕들 - 아람 민족은 유브라데 강주변, 즉 이스라엘의 북쪽 및 북동쪽 경계에 여러 개의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Bowman). 본절의 아람 왕들은 바로 이 작은 국가들의 왕들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이들에게도 애굽의 병거와 말을 수입해 되팔았다. 그런데 아람인들은 이전부터 자주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서왔던 민족이었다(삼하 8:5,6; 10:8-18). 그리고 이러한 적대 관계는 솔로몬 통치 이후 분열 왕국 시대에가서도 내내 계속된다(20:20; 22:35; 왕하 7:15; 8:28; 대하 24:24). 그러므로 솔로몬은 세속적 무역 정책의 결과 결국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무기를 판 셈이 되고 말았다(Wordsworth).

성 경: [왕상11:1]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바로의 딸 - 3:1 주석 참조. 솔로몬은 즉위 초기 애굽과 동맹을 맺고, 그 표시로서 바로의 딸과 결혼하였다. 당시 애굽의 공주가 다른 나라에 주어진 일이 극히 드물었음에 비추어 볼 때. 그 당시 열국 중 솔로몬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케 한다. 여하튼 바로의 딸은 솔로몬의 모든 아내들 증에서 정실(正實)에 속했고, 따라서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위해 특별히 별궁을 건축하기도 했다(9:24). 그리고 문맥상 바로의 딸은 분명 솔로몬올 타락케 만든 다른 이방 여인들과는 구별되고 있다(B hr).

(주);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 '사랑하였으니'에 해당하는 '아하브'(*)는 대상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랑을 말한다. 즉 그 대상을 소유하거나 그 곁에 있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리킨다. 곧 이 '아하브'에는 1) 집착 2) 욕망에 근거한 성적(性的) 열정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진다(창24:67; 출 21:8; 삼하13:1; 호3:1). 그러므로 이 단어는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단순히 정략적으로 취한 것만이 아니고 '안목의 정욕'으로 적극 탐하였음올 알려 준다.

(주);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 열거된 나라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과 전통적로 우호 관계에 있던 나라 외에 적대 관계에 있던 나라도 포함된다(신 23:3이하). 솔로몬이 이러한 모든 나라들과 통혼(通婚)하게 된 데에는 외교적 목적이 분명 들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왕의 국제 결혼에는 외교적 동맹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결혼은 고대의 왕에게는 하나의 자랑거리였다(B hr, Dentan)

성 경: [왕상11:2]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일찌기...말씀하시기를 - 본절의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마침내 요단 강 동편에 이르러 가나안 점령을 목전에 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일러 주신 말씀이다(신 7:3, 4).

(주); 통하지 말며...통하게 말라 - 여기서 '통하다'에 해당하는 '보'(*)는 '가다' 또는 '오다'란 뜻으로서, 이는 단순한 교제가 아니라 결혼을 통해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은 양자의 문화, 풍습 및 종교의 절충과 혼합을 초래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고유의 여호와 신앙은 변질되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들과의 잡혼(雜婚)을 엄격히 금지시켰던 것이다(출 34:11-16;신 7:1-4). 그런데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通婚)금지를 명한 율법은 그 율법의 정신으로 볼 때 비단 가나안 족속 뿐 아니라 여호와 신앙을 변질시킬 우려가 있는 다른 모든 이방 족속들에게도 적용된다. 따라서 솔로몬이 이러한 율법의 명령과 정신을 무시하고 가나안 족속(헷 족속)을 비롯한 이방의 많은 여인들과 결혼한 것은 분명 국력 강화라는 미명하에 편리한 혼합주의를 채택한 실정(失政)이요 범죄였다.

(주); 돌이켜 - 9:6 주석 참조.

(주); 연애하렸더라 - '연애하였더라'에 해당하는 '다바크'(*)는 '집착하다', '달라붙다'는 뜻으로서 강렬한 감정적 애착상태를 의미한다(시 102:5;애 4:4 등). 따라서 이 말은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의 애정에 탐닉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말은 1절의 '아하브'(사랑하였으니)와 함께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찰력과 분별력이 흐려진 이유를 잡작케 해준다.

성 경: [왕상11:3]

주제1: [솔로몬의 타락]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 - 처첩(妻妾)의 숫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단순히 솔로몬의 호색때문만은 아니다. 즉 고대왕들에게 있어 처첩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부와 권세를 과시하는 것이었다(Dentan). 그러므로 태평 성대를 누리고 있는 강대국의 왕 솔로몬은 주변 국가들의 왕들에 비해 처첩들의 수에 있어서도 우월하려고 했던 것이다(Hammond). 이상에서 볼 때 솔로몬이 많은 여인들로 둘러싸이게 된 데에는 안목의 정욕, 정치 . 외교적 목적, 부와 권세의 과시라는 복합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아가서 6:8에 의하면 왕후가 60인이요 첩이 80인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아 6:8, 9). 아마도 열왕기서의 기록은 솔로몬의 전 통치기간을 통해 취해진 모든 처첩들의 수효를 가리키는 것 같고(Keil), 아가서에 언급된 수효는 솔로몬이 젊은 시절에 거느렸던 아내들의 총 수효였다고 짐작된다(Hammond). 다시말해 솔로몬의 부와 영예가 더해감에 따라 그의 아내들의 수효 또한 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절의 수효는 혹자(Thenius)가 의심하듯 믿을수 없을 정도의 터무니없는 기록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코도마누스(DariusCodomanus, B.C. 399-330)는 300명의 아내들을 거느리고 알렉산더 원정에 나섰으며, A.D. 10세기 전후 터어키 왕들의 부인은 대개 1300명에 달했다고 한다(B hr). 아무튼 우리는 전장(10장)에서 솔로몬이 말(馬)을 많이 둔 사실(10:26)과 은금 보화를 많이 쌓은 사실(10:16, 17)을 이미 보았다. 그런데 본절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또한 처첩을 많이 둔 사실을 발견한다. 요컨대,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왕 될 자에게 권면하고 경고하신 바 왕 된 자는 말울 많이 두지 말 것이요,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라(신 17:16, 17)는 세가지 명령을 모두 범한 자가 되고 말았다.

(주); 후비(后妃) - '후비'로 번역된 '사라'(*)는 '후궁'들과는 구별되는, '왕비'의 지위이다. 즉 이들은 원래 이웃 나라의 공주, 혹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구별된 지위와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Hammond). 한편, 바로의 딸은 이들 중에서도 으뜸의 지위를 누렸던 것 같다(3:1;9:24).

(주); 빈장(嬪 ) - '빈장'으로 번역된 '필레게쉬'(*)는 삼하 16:21, 22에서 '후궁'으로 번역된 그 단어이다.

(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 솔로몬이 많은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맞아들인 결과, 그 여인들은 각자 자기 민족의 신(우상)들을 가지고와서 숭배했다. 분명 왕비들은 갖은 방법으로 솔로몬을 회유했을 것이고, 이에 솔로몬은 그러한 신들의 숭배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방 신들을 위해 산당까지 지었던 것이다(7, 8절). 솔로몬이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混合主義,Suncretism)는 이방 국가들의 호의를 얻어 동맹을 더욱 공고히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이방의 우상 숭배를 거듭거듭 경고하고 엄히 금하신 율법의 말씀을 어긴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솔로몬의 말년부터 이스라엘 내에 자리잡게 된 이방 우상의 산당들은 이후 분열왕국 시대동안에도 줄곧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남북 왕국 멸망의 주된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성 경: [왕상11:4]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 레 27:1-8을 참고하건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년과노년의 구분점은 60세였던 듯하다(Blank). 그러므로 '나이 늙을'(*, 지크나)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이때 솔로몬의 나이는 6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노년이 종종 축복과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고결함과 경건한 생애의 뒷받침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욥 5:26; 시 71:9; 잠 20:29 등). 그런데 본절에서 솔로몬의 노년은 문맥상 우상 숭배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서의 노년이란 무기력, 판단력 쇠퇴등의 부정적 측면을 띤 노년이다(전12:1-5). 이러한 부정적 의미의 노년이 본절에 언급된 이유는 솔로몬의 타락은 그의 통치 말년에 국한된 것으로 말하려는 의도와 왕비들의 유혹에 빠져 우상 숭배를 허용한 원인 중 일부을 솔로몬의 노년에 돌리려는 것 때문이다.

(주); 왕비들이....다른 신들을 좇게 하므로 - 솔로몬의 타락을 고발하는 본절의 초점은 솔로몬이 단순히 이방 여인들을 많이 취하였다는 사실에 주어져 있지 않다. 비록 솔로몬의 처첩들의 숫자는 놀랄 만한 것이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일부 다처 자체만을 심각히 비난하기는 어렵다. 다윗만 해도 왕비 7명, 첩이 최소한 10명 이상이었다(대상 3:1-9). 따라서 본절이 보다 부각시키고 있는 점은, 솔로몬의 왕비들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로 빠지게 하는 함정구실을 하였다는 데 있다. 신명기의 경고도 바로 이 점을 겨냥한 것이었다(신 7:3, 4; 17:17).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모압 여인들과 놀아나다가 우상 숭배에 빠졌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민 25:1-5). 따라서 이방 여인과의 접촉에 따르는 위험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은 솔로몬이 이러한 생생한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그 그물에 걸리는 비극을 보여 준다.

성 경: [왕상11:5]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아스다롯 -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풍요의 여신으로, 성적(性的) 사랑과 다산(多産)을 위해 숭배되던 우상이었다. 따라서 이 여신을 위한 제사에는 보통 음란한 행위가 의식의 순서로 따랐다고 한다(B hr).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 여신 숭배와 관련된 진흙싱들이 출토된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유방과 음부를 두드러지게 만든 소규모의 우상으로,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Gray). 그러므로 당시에 이 아스다롯 숭배가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레 26:1-13 강해, 가나안땅의 신들). 삿 2:13; 삼상 7:3; 31:10 주석 참조.

(주); 밀곰 - 암몬의 민족신으로 인신 제사로 유명하며 '몰록' 혹은 '몰렉'과 동일시 된다(7절). 그런데 '밀곰'은 히브리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파생된 명칭이다(IDB). 레18:21; 20:2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1:6]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여호와의 눈앞에서 - 죄악과 자기 합리화로 마음의 눈을 가리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간과(看過)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은 도처에 있으며, 항상 선악을 감찰하시기 때문이다(잠 15:3). 그러므로 본절의 '눈앞에서'(*, 베아인)는 다음 두 가지를일러 준다. 즉 솔로몬의 행위는 어떤 형태로든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점, 솔로몬이 어떤 요설(饒舌)로 자신을 합리화 해도 '하나님의 눈'이라는 표준과 척도에 의해 판단받게 된다는 점이다.

(주); 악을 행하여....좇지 아니하고 - 솔로몬의 이러한 타락이 그의 통치 기간 중 어디쯤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분명 성전 완공 후 감사와 헌신의 봉헌 기도(8:12-53)를 드렸을 당시(즉위 11년)에는 이러한 타락이나 변질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후 왕궁 건축이 완료된(즉위 24년)재임 중기 이후부터 서서히 나타나 재임 말기로 갈수록 심화되었던 것 같다(4절, Leon Wood). 한편, 그러나 이후의 여러 기록들을 참조컨대, 솔로몬은 '이스라엘로 범죄케 만든' 여로보암처럼 직접 이방 우상들에게 제사드린 것 같지는 않다. 즉 솔로몬이 여호와께 제사를 완전히 저버렸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적어도 솔로몬은 그의 통치 말기까지 일년 삼차씩 번제단 위에서 엄숙한 제사는 드렸던 것 같다(J. Hammond). 그러나 그러한 제사 행위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산당을 지음으로 조장까지 했다는 사실에서, 분명 솔로몬은 부친 다윗과는 달리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했던 것이다. 다윗도 비록 그의 생애 중 간음, 살인 교사, 교만 등 중한 죄악을 범하긴 하였으나, 우상 숭배 죄는 결코 범하지 않았다.

(주); 다윗이....온전히 좇음 같이 - 9:4주석 참조.

성 경: [왕상11:7]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그모스 - 모압 민족의 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Movers). 그리고 '그모스'(*, 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Gesenius,Livingston). 그런데 이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록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했다(Gates).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Keil). 민 21:29; 삿 11:24 주석 참조.

(주); 예루살렘 앞산 - 예루살렘 동편의 '감람산'을 말한다. 이 산의 중앙 지역은 해발 822m로 예루살렘 보다 약 30m 정도 높다고 한다. 한편, 그런데 후일 이 감람산의 최남단 봉우리는 '범 죄의 산'(Mons Scandali)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이곳에 우상을 위한 산당을 지었기 때문이다(Robinson, Alden).

(주); 몰록 - '몰록'은 '밀곰'과 동일시 된다. 5절 주석 참조. 원래 '몰록'(*)은 고유 명칭이 아니고 그저 '왕'이라는 뜻이다. 즉 암몬인들은 그들의 신을 왕으로 호칭한 것이다. 한편 '몰렉'이라는 명칭은 '몰록'의 자음에다 '치욕'(*, 보쉐트)이란 단어의 모음을 결합하여 발음한 것이다. 이는 물론 이스라엘인들이 우상을 경멸하기 위해 취한 방식이다(Patterson). 한편 몰록 숭배 제사 의식에는 인신 제물이 바쳐졌다. 그리고 이 제사는 주로 예루살렘 남서쪽 힌놈의 골짜기 도벳에서 행해졌다(Gray; 왕하23:10; 렘 32:35). 레위기 18:21; 20:2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1:8]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우상 숭배]

(주); 다 그와 같이 한지라 - 전술(前述)한 여러 동기로 미루어 솔로몬은 이방 왕비 중 어느 누구에게만 특정적으로 혜택을 줄 수는 없었다(3절).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방 후비들의 모든 신들의 제사를 허용하였고, 또한 그 신들을 모실 산당까지 짓게 하였던 것이다. 아스다롯, 밀곰(몰록), 그모스는 그러한 모든 이방 우상들의 대표적인 우상일뿐이다. 아무튼 그러한 종교적 혼합 정책의 결과, 예루살렘 주변의 산들은 거의 우상을 위한 산당들로 가득하였을 것이다(Hall, Hammond).

(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제사하였더라 - 비록 솔로몬이 왕비들에게 각자의 신을 섬기도록 허용했다지만, 이 왕비들이 자신의 신을 섬기는 데 적극적이고 열심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반대로 솔로몬이 이방 왕비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소개하는데 흥미가 없었음을 입증해 준다. 이러한 이면에는 솔로몬 자신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였음과 솔로몬의 통치 방향이 일종의 혼합주의, 즉 주변 국가들의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쪽으로 잡혀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Dentan). 아무튼 다윗 역시 한때 중한 죄를 범하긴 하였으나(삼하 11:2-27), 솔로몬처럼 우상 숭배의가증스러운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아내들로 각자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산당을 짓기까지 하였다. 또한 솔로몬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였던 반면에 그 아내들이 열심으로 그들의 신을 증거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칼하다. 이렇듯 사단은 누구든 교만하고 방만한 틈을 발견하면 걸코 이를 놓치려 하지 않는다. 한편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이교 산당은 이후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훗날 느헤미야는 포로 귀환민들에게 이방인과의 통혼을 경고하면서, 솔로몬의 범죄를 예로 든 바 있다(느 13:26, 27).

성 경: [왕상11:9]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경고]

(주); 돌이켜 - 9:6 주석 참조.

(주); 진노하시니라 - '진노하시니라'에 해당하는 원어 '아나프'(*)는 특별히 하나님의 분노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이때 하나님의 분노는 언약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범죄에 대해 발(發)하시는 거룩한 분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분노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나프'하게 하는 범죄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저버림으로써 하나님께 큰 상처를 입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었던 솔로몬의 우상 숭배야말로 하나님을 지극히 '아나프'하게 하는 범죄라고 볼수 있다.

(주); 일찌기 두번이나...나타나시고 -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두번 나타나신 장면은 3:5-14과 9:2-9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두 번의 묵시를 살펴보게 되면, 첫번째에 비해 두번째의 묵시는 좀더 경고의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우상 숭배는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명백히 경고하고 있다(9:6-9).

성 경: [왕상11:10]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경고]

(주); 이 일에 대하여 - 이 일이란 곧 '우상숭배'를 말한다. 실로 선민 이스라엘에게 있어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구속적 언약 관계(출 19:5, 6)를 송두리째 부인하는 가장 심각한 범죄였다. 9:6 주석 참조.

(주); 다른 신을 좇지 말라 - 솔로몬의 우상 숭배가 곧 여호와께 드리던 제사의 폐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9:25). 솔로몬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취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솔로몬의 혼합주의적 행위에 대한 성경의 진단(診斷)은 '그가 하나님을 떠났다'라고 내려지고 있다(9절). 진정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전부를 온전히 원하신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 여호와 유일 종교 신앙의 특색이다(신 6:5; 마 6:24).

(주);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 하나님게서 솔로몬에게 명하신 명령과 법도(法度)는 지키기 블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필요 적절한 시기마다 친히 경계의 말씀을 해주셨다(3:5; 6:12; 9:2-9). 따라서 솔로몬의 우상 숭배는 안일과 교만으로 말미암은 불신앙의 소치라 할 수 밖에 없으며, 이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셈이다. 즉 하나님께는 이 일이 극진히 아껴주셨던 당신의 종으로부터 배반당하는 가슴 아픈 일이었으며, 당신의 공의대로 솔로몬을 심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또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번영과 부의 축적, 그리고 사치와 다처 축첩등 모든 세상의 부귀 영화를 다 누리고, 심지어 우상 숭배에도 빠졌던 솔로몬이 그의 말년에 '여호와를 떠난' 인간의 모든 부귀 영화, 우상 숭배, 입신양명이 '다 헛되고 헛된 것'(전 1:2)이라고 고백한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고 할 수있다. 즉 이 고백은 솔로몬은 이러한 사실을 다시금 깊이 깨닫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했던 것 같은데, 이는 솔로몬의 마지막 저술인 전도서를 보면, '사람의 본분(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전 12:13)이라고 명백히 결론지은 사실에서 엿볼수 있다(Leon Wood).

성 경: [왕상11:11]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경고]

(주); 여호와께서...말씀하시되 - 앞서 두번에 걸친 하나님의 직접 현현(3:5; 9:2)과 달리 본절의 말씀은 어느 선지자(아마도 '아히야', 29절)를 통한 간접 전달 방식이었다(b hr, Hammond).

(주); 네가 나의 언약과...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 여호와의 계속적인 축복과 후손들에 대한 왕위 계승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조건 하에서만 보장되었다(3:14; 6:12; 9:4). 그러나 솔로몬은 그 조건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솔로몬과 그의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철회될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불순종에 따른 심판을 면할 길 없었다.

(주); 빼앗아 - 여기서 '빼앗아'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카라'(*)는 '찢다' 또는 '쪼개나'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솔로몬 왕국 전체를 멸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둘로 분열시키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분열 원인은 바로 솔로몬의 우상 숭배와 율법 준수 실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네 신복에게 주리라 - 여기서 신복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인물은 '여로보암'이다. 그는 솔로몬의 노역 감독관이었다(28절). 그런데 솔로몬 사후, 이 예언대로 여로보암은 남북으로 분열된 왕국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되었다(B.C. 930-910).

성 경: [왕상11:12]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경고]

(주);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온전한 마음과 그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은혜로 나타나고 있다(9:4, 5; 삼하 7:15). 특히 여기서 '위하여'(*, 레미안)는 '말미암아' 혹은 '인하여'로 번역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소돔에 열 명의 의인이 있다면 그들로 '인하여' 멸망을 연기하시겠다는 말씀 속에서도 사용된 말이다(창 18:26-33). 또한 과거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조카 롯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창 19:29). 마찬가지로 다윗으로 인하여 솔로몬은 자기 당대의 심판을 모면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솔로몬 자신이 아들 르호보암에게 재앙을 심은 셈이 되고 말았다.

(주);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 여기서 '네 세대에는'(*, 베야메카)은 곧 '너의 날들에는', 즉 솔로몬이 살아있는 동안을 말한다. 실로 솔로몬의 죄는 그가 특별히 받아 누린 특권과 축복들을 생각할 때에 더욱 컸다. 즉 솔로몬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아도니야와 요압과 아비아달의 손으로부터 구원받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친히 두 번이나 나타나사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필요에 따라 지혜와 권면과 경계의 말씀을 적절히 주셨다. 그 결과 솔로몬은 이스라엘은 물론이요 당시 세계 열국의 왕들에 비해 으뜸가는 부와 권력과 명예와 향락을 누렸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평생동안 사랑과 헌신 경외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렸어야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 못했다. 솔로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헛된 우상들에게 그는 눈길올 돌리고 마음을 주었다. 따라서 의당 솔로몬은 하나님의 심판올 직접 받아야 옳았지만, 그러나 다윗 언약을 끝까지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인간은 언약을 저버리지만, 그러나 인간이 저버린 언약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성 경: [왕상11:13]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하나님의 경고]

(주); 뺀 - '뺀'(*, 바하르티)은 '선택하다'(*, 바하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신중히 결정한 선택 또는 궁극적인 것이 되게 하려는 결심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

(주); 예루살렘을 위하여...주리라 - 솔로몬의 왕위가 대(代)를 끊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의 가치 때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바하르'하신 도성으로서, 다윗 언약에 근거된 바(삼하 7:13)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둘 만한 장소로 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의 행위는 그만한 자비를 받을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 자신의 언약과 선택을 위해서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이름을 세계 열방에 전파할 종교적 수도로서 유지되어야 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유다의 주권을 아주 박탈하지 않으신 것이다(Hammond).

(주); 한 지파 - 이는 구체적으로 '유다 지파'를 말한다(12:20).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등을 돌리는 심판 중에 단지 한 지파만이 남는 구차스러움이 엿보인다. 즉 모두 빼앗겨 마땅한 범죄로되, 다윗 언약과 예루살렘의 은총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것만 남긴다는 것이다.

성 경: [왕상11:14]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에돔 - 이스라엘 동남쪽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국가이다. 여기서 '에돔'(*)이란 '붉은 지역'이라는 뜻인데, 이 지역에 붉은 바위와 흙이 많았기 때문에 명명된 이름이다. 한편, 에돔의 선조는 이스라앨의 조상 야곱의 형인 에서이다(창 36:1). 이는 두 국가가 민족적 혈통상 매우 밀접한 관련하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Cohen). 그러나 열왕기 시대에 에돔은 내내 남왕국 유다의 적(敵)이었다.

(주); 하닷 - 원문상 17절은 '아닷'(*)으로 표기되었지만, 같은 이름이다. 그런데 '하닷'(*, Hadad)은 '태양' 아니면 '호통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고유 명사가 아니고, 에돔인들이 왕을 가리켜 단지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Hammond). 한편 시리아 지역의 왕들 이름 역시 벤하닷, 하닷에셀과 같이 '하닷'과 결부되어 등장하곤 한다. 솔로몬 당시 에돔 왕 하닷은 에돔의 왕족으로, 일찍이 요압과 아비새 휘하의 다윗 군대가 어떤 이유로 에돔 왕족과 군대를 진멸시키기 위한 학살 작전을 감행했을 때 애굽으로 도피하여 살아 남았던 유일한 생존자 였다(삼하 8:13, 14;대상 18:12, 13).

(주);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 에돔 사람 하닷 편에서 보면, 솔로몬에 대한 그의 적대는 일종의 독립운동이겠으나, 솔로몬에게 있어 하닷의 적대 행위는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이었다. 이렇듯 얼핏 인간들끼리의 사건처럼 보이는 역사의 모든 대소사의 배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의 선택과 자유 의지적 행위가 언제나 관련되고 전제되어 있다(Davison).

성 경: [왕상11:15]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전에....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 본절이 말하고 있는 시기가 삼하 8:13, 14; 대상 18:12, 13의 시기 즉 염곡 전투 때인 것은 분명하나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전후 관계를 추론해 볼 때,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는 다윗 군대가 정복 전쟁차 에돔에 쳐들어 간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에돔인을 쳐죽인 일의 지휘자가 요압 혹은 아비새(대상 18:12)로 달리 나오는 기록상의 차이는, 형제간인 이들이 같이 종군했으나 직책, 임무 등의 차이가 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Hammond). 마지막으로 본절에서 '죽임을 당한 자'란 당시 에돔과의 전투에서 생긴 이스라엘의 전사자들을 의미할 것이다(B hr).

성 경: [왕상11:16]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에돔의 남자를 다 없이 하기까지 -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에돔인의 씨를 다 말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이스라엘이 에돔을 지속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해 에돔 땅에 수비대를 주둔시켜야 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삼하 8:14; 대상 18:13). 그러므로 본절의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봄이 바람직하다. 1) 여기서의 '에돔의 모든 남자'란 전투가 가능한 남자들만을 가리킨다는 견해(hammond, Keil) 2)다윗의 군대는 실제로 대학살을 획책했을지도 모르나 성공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Kittel)). 아무튼 이러한 본절은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의 노골적인 적대감을 잘 증거해 준다. 그런데 그같은 적대감은 에서와 야곱 간의 관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양국간의 뿌리 깊은 적대 관계는 왕정시대에 이르러 표면화되었는바, 마침내 다윗은 에돔을 정복하고 말았던 것이다(삼하 8:13, 14). 분명 다윗의 이러한 정복 사업은 그 아들 솔로몬 왕국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 왕국의 퇴락 조짐이 보이자 에돔 역시 여타의 속국(屬國)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그 덕분에 이스라엘의 지배하에서 벗어난 적도 많았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에돔은 늘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곧 B.C.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였다.(왕하8:21; 대하20:1; 시137:7; 애4:21)

(주); 여섯달을 그곳에 유하였었더라 - 잔인한 성격의 요압(삼하3:27; 18:9-17; 20:8-21)이 이처럼 6개월간 에돔에 머물면서 가했을 살륙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닷의 끈질긴 복수심을 설명해 준다. 또한 하닷이 다윗과 요압에 대해 갖고 있던 공포심도 짐작케 해준다(21절).

성 경: [왕상11:17]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작은 아이 - '작은 아이'(*, 나아르)는 3:7에서 솔로몬이 자신을 가리켜 사용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문맥상의 의미는 큰 차이가 있다. 3:7에서 이 말은 정신적 또는 연령적으로 성숙치 못한 자를 가리켰으나 본절에서는 단지 연령적으로 어린 소년을 가리키고 있다. 과거 하닷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요압 군대의 학살을 모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왕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압의 군대는 특히 왕족을 멸절시키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Keil). 따라서 그같은 사실이 발각되기 전에 하닷의 신하들은 하닷을 수행(隨行)하여 애굽으로 도망친 것이다.

(주); 애굽으로 가려 하여 - 18절로 미루어 보건대, 하닷은 이스라엘 영토를 우회하여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를 통해 애굽으로 입국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경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취했던 경로의 역(逆)이다(민 10:12; 12:16; 13:3, 26).

성 경: [왕상11:18]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미디안 - 미디안(Midian)은 아카바만 동쪽에 있는 북서 아라비아의 넓은 땅이다(Landes).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동남쪽이며, 에돔의 남쪽에 해당된다. 따라서 하닷처럼 애굽으로 가려는 에돔인은 이스라엘 영토를 경과하지 않는 한 먼저 미디안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미디안은 일찍이 모세가 도망했던 땅이다(출 2:15).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2:15 주석을 참조하라.

(주); 바란 - '바란'(Paran)은 '빛나는 땅'이란 뜻이다. 이곳은 미디안과 애굽 사이에 위치한 시나이 반도 중앙의 넓은 사막 지역으로 가데스(Kadesh)와 신 광야(the wilderness of Zin)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 지역은 그 기복이 심한 지형으로 인해 도피처로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Houston). 한편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지역을 횡단하였고, 이곳에서 팔레스틴으로 정찰병을 보내기도 하였다(민 10:12; 12:16; 13:3).

(주); 바로가 저에게....또 토지를 주었더라 - 여기서의 바로(Pharaoh)는 솔로몬의 장인(丈人)인 바로(3:1)와는 다른 인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닷의 망명은 다윗 시대의 일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의 적에게 은혜를 베푼 자와 솔로몬이 장인.사위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있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9-22절). 한편 망명한 하닷에 대한 바로의 환대는 왕자에 대한 동양적 예우,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바로가 왜 그토록 에돔 사람 하닷을 친절히 맞이하였는지는 확실히 알려진바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애굽이 남쪽의 테베(Thebe) 왕조와 븍쪽의 타니스(Tanis) 왕조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어 있던 점으로 보아, 이는 아마도 대외 융화 정책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성 경: [왕상11:19]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은총 - '은총'(*, 헨)은 '호의', '친절'이란 뜻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게된 호의적(好意的) 감정을 말한다. 이런 경우 호의를 받게 되는 원인은 보통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격적 매력에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망명객이란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하닷이 바로의 호의를 입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하닷이 바로의 보호를 받게된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섭리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39:21; 출 3:21; 11:3; 12:36). 즉 하나님께선 솔로몬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하닷을 보호해 주셨던 것이다. 14절 주석 참조.

(주); 왕비 - 본절에서 '왕비'로 번역된 '학비라'(*)는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왕의 많은 아내들 중에서도 으뜸인 지위에 있는 여성에게 붙이는 칭호이다(Hammond,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 p.174).

(주); 다브네스 - 이러한 형태의 이름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매우 보기 힘든 이름이다. 그래서 '다브네스'(Tahpenes)가 어디서 유래된 어떠한 뜻의 이름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두어 가지로 추측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애굽 여신의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Rosellini, Rawlinson). '바로'의 경우가 그렇듯이, '왕의 아내'를 가리키는 애굽의 공식 명칭이 그대로 고유 명사화된 것라는 견해(Wilson). 출 1:11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1:20]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그누밧을....바로의 궁중에서 젖을 떼게 하매 - 이는 하닷의 아들 그누밧(genubath)이 다브네스의 양자로 입양되었음을 의미한다(Guthrie, Keil, Montgpmery). 한편 고대 근동 사회에서 아기가 젖을 떼는 시기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점으로 간주되었다(창21:8; 삼상 1:21-24; 시 131자:2; 사 28:9). 즉 당시 중근동 지역에서는 이유기(離乳基)가 대개 3살경이었는 바 이 때에야 비로소 그 아이는 완전한 생명체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이 때에는 고유한 종교 의식과 더불어 큰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창 21:8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1:21]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본절은 다윗과 요압이 에돔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를 잘나타내 준다. 즉 다윗과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하닷은 귀국할 엄두를 내고있는 것이다. 한편 다윗이 죽은 해는 B.C. 970년경이며 요압 또한 같은 해에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했다(2:34). 그리고 하닷의 독립 투쟁은 B.C. 940년경으로 추론된다(14절). 따라서 하닷은 에돔으로 돌아간 이래 근 30년 간에 걸쳐 설욕전을 위한 준비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왕상11:22]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하닷]

(주);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게에 - 뚜렷한 이유없이 함께 있기를 마다하는 것을 홀대(忽待)에 대한 인간적 서운함의 표시로 해석하는 동앙적 사고(思考)가 담긴 표현이다. 한편 바로가 이처럼 하닷을 매우 총애했음으로 미루어 보건대(18, 19절), 바로가 하닷에게 베푼 은총을 장차 이스라엘을 견제할 세력 양성의 의도로 해석하는 것(Ewald)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주); 없나이다 그러나....나를 보내옵소서 - 애굽이 제공하는 모든 특권과 안락함으로도 붙잡을 수 없으리만치 하닷의 복수심이 깊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토록 강렬한 하닷의 복수심은 솔로몬의 통치에 얼마만큼 우환이 되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25절a). 한편 본장에는 하닷의 간청을 바로가 승락했는지의 여부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여하튼 하닷이 에돔으로 돌아와 솔로몬의 적수가 된 것은 분명하다(14, 25절).

성 경: [왕상11:23]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르손]

(주); 르손 - '르손'(*)은 '족장'이라는 뜻이다. 소바 왕 하닷에셀의 신하라는 사실 외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다. 물론 르손(Rezon)의 부친 엘리아다(Eliadah)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르손은 15:18에 나오는 '아람 왕 헤시온(Hezion)'과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Corney).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름이 바뀐 까닭은 '족장'이라는 뜻의 이름이 왕으로서는 적당치 않았기 때문일것이다(25절).

(주); 소바 - 아람족에 속한 한 나라로서 레바논과 안티레바논 사이에 위치하였다(Haldar). 아람인들은 강력한 통일 왕국을 형성했던 적이 없으며 시리아와 북부 팔레스틴 지방에 여러개의 조그마한 도시 국가를 이루었을 뿐이다. 삼상 14:47 주석 참조. 그런데 소바(Zobah)는 적어도 사울 왕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다(삼상 14:47). 다윗은 아람 소바(시 60편), 아람 나하라임(시 60편), 벧르홉(삼하 10:6) 등의 아람 왕국들과 싸운 바 있다. 한편 이러한 아람의 여러 소왕국들 중 가장 큰세력으로 성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도시는 다메섹(Damascus)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0: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1:24]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르손]

(주); 다윗이 소바사암을 죽일때에 - 과거 소바 왕 하닷에셀(Hadadzer)이 세력을 회복하려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진군하는 것을 다윗이 기습하여 대패시킨 것을 가리킨다(삼하 8:3, 4). 이후 다윗은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 아람의 연합군도 패퇴시킴으로써 아람을 속국으로 만들었다(삼하 8:5, 6)

(주); 르손이...그 떼의 괴수(魁首)가 되며 - 다윗이 하닷에셀과 아람 연합군을 격파할 때(삼하 8:3-6)에 르손은 하닷에셀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리고 불한당과 산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력을 키웠다. 그런뒤 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 다메섹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르손은 이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다메섹은 르손의 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결집된 아람 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Corney).

성 경: [왕상11:25]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을 대적하는 르손]

(주); 일평생에 - '일평생에'(*, 콜이메)는 문자대로는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솔로몬의 통치 말년에 있어서의 '모든 날들'을 가리킨다. 즉 하닷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 이래(B.C. 940년경) 하닷은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솔로몬의 두통거리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21절 주석 참조.

(주); 환난 - '환난'(*, 라으)은 '걱정', '고민' 등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즉 이는 곧 하닷이 솔로몬의 골칫거리였다는 말이다. 추측컨대 하닷은 애굽에서 귀국한 후 일종의 게릴라 전투를 통해 독립을 꾀하였던 듯하다. 따라서 쉽사리 진압되지 않는 하닷의 활동은 솔로몬에게 눈의 가시와도 같았을 것이다(Gates).

(주); 수리아 - 원문에는 그냥 '아람'(*)으로 되어 있다. 원래 '수리아'(Suria) 혹은 '시리아'(Syria)는 70인역(LXX)과 일부 영역본이 아람(Aram)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 용어이다(IDB). 한편 아람인들은 대대로 통일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고, 대신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형성하곤 하였다(10:29). 이 중 본절의 수리아는 아람 소바, 아람 나하라임 등의 아람 소왕국들과 구별되는 다메섹의 아람 왕국이다. 23절 주석 참조.

(주); 미워하였더라 - '미워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쿠츠'(*)는 어떤 대상에 대한 거부감 이상으로 그 대상이 파멸하기롤 바라는 감정을 말한다. 따라서 이같은 감정은 실제로 대상을 파멸시키려는 행동을 낳기 마련이다.

성 경: [왕상11:26]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여로보암이 또한....대적하였으니 - 이스라엘 남북 분열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인 여로보암아(Jeroboam)에 대하여 드디어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다. 그는 북쪽 10지파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12:16-19), 그 같은 반란은 속국(屬國)들의 독립 운동이었던 하닷과 르손의 반역과는 달리 혁명적 성격을 띠었으므로 이스라엘 왕국에 더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밖에도 여로보암이 끼친 해악은 상당히 큰데, 특히 그는 열왕기가 민감하게 주목하는 우상 숭배에 관한 한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북왕국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 숭배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12:27-30; 출 32:1-5; 수 24:14이하). 그리하여 이후 열왕기기자가 북왕국의 악한 왕들을 평가할 때면 언제나 여로보암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공식문이 될 지경이었다(16:19, 26; 22:52; 왕하 3:3; 10:29; 13:2 등). 즉 여로보암은 다윗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열왕의 표준이 된 것이다.

(주); 에브라임 족속 - 에브라임 족속(Ephrathite)은 수효 면에서나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나 늘 유다 지파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에브라임은 서편 진지의 주도 세력이었다(민 2:18-24). 또한 가나안 정복 전쟁의 영웅 여호수아도 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다(민 13:8; 신 31:7). 그 뿐 아니라 왕정 시대에 들어와 예루살렘이 종교적 수도가 되기 이전에는 에브라임 영토의 실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사실 역시 매우 중요하다(수 18:1; 22:12; 삿 18:31; 21:19; 삼상 1:3, 9; 2:14; 3:21). 이처럼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분열 이면에는 그러한 반목을 낳을 만한 뿌리깊은 경쟁 관계가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솔로몬 사후(死後) 에브라임과 유다의 반목은 강렬하게 표면화되었으며 대다수의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후원하였던 것이다(12:12, 16-19). 그러나 훗날 에스겔은 이러한 지파간의 반목과 질시를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고 참된 단합과 화해의 왕국을 건설할 왕이 다윗 가계로부터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겔 37:15-28)

(주); 스레다 - 스레다(Zereda)의 뜻은 '찌르기' 또는 '서늘함'이다. 그러나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진 바 없다. 대하 4:17절에 동일 지명이 나오긴 하나 그곳은 요단 골짜기의 성읍이란 점에서 본절의 스레다와는 다르다. 혹자는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세리라'(Zerira)가 곧 본절의 '스레다'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분명치 않다(Lange)

성 경: [왕상11:27]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손을 들어 - 여기서 '손을 들다'(*, 헤림 야드)는 말은 '복종하기를 거부하다'는 뜻이다. 특히 '들다'(*, 룸)는 그 자체로 '교만하다', '높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신 8:14; 시 131:1; 사 2:12). 이와 반대로 성경에서 '누구에게 복종하다'는 말은 원문상 '손을 (어떤 사람의) 밑에 주다'는 어구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 9:15 주석 참조.

(주); 다윗의 성의....수축(修築)하였는데 - 솔로몬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라 할 수 있는 다윗 성의 보수 공사를 유다지파가 아닌 에브라임 지파에게 떠맡겼다. 28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렇잖아도 유다 지파와 경쟁의식이 있던 에브라임 지파로서는 이에 불만이 없올 수 없었다(B hr). 26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1:28]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큰 용사 - '큰 용사'(*, 깁보르 하일)는 문자 그대로 '강한 힘을 가진 전사(戰士)'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상류 계급의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상류 계급의 남자는 그 공동체 내에서 군사 행동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된다(Gray). 사울은 베냐민 지파 내의 바로 그러한 가문 출신이었고,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내에서 그러하였던 것 같다(삼상 9:1).

(주); 요셉 족속 - 요셉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말한다.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이다(창 48:5). 그래서 '요셉 족속'이라고 할 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 중 어느 하나를 말하거나 아니면 모두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 두지파는 븍쪽의 가장 강한 지파들이기 때문에 '요셉 족속'은 곧 북왕국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Wintermute). 한편 야곱과 모세의 축복을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의 요셉 족속의 중요성과 그 지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창 49:1-27; 신 33:1-29).

(주); 감독하게 하였더니 -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예루살렘에서 일하게 된 요셉 족속의 부역 총 책임자로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왕상11:29]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아히야 - 아히야(Ahijah)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인 실로(Shiloh)의 제사장 가문의 예언자이다. 때문에 혹자는 아히야가 에브라임 지파의 주도권 쟁취를 위해 여로보암을 충동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그 근거가 지극히 희박하다. 물론 여로보암의 반역 과정에는 지파간의 반목 질시가 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히야 자신은 솔로몬의 우상 숭배를 여호와 신앙에 위배된 상황으로 보고 이를 타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으므로 이를 대언했을 뿐이다(31-39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로보암의 집권 후에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대항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14:1-16). 아무튼 이러한 선지자 아히야는 나단(Nathan) 선지자(1:8, 11-14) 이후로 부터 솔로몬과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14:1-13; 대하 9:29).

(주); 새 의복 -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다는 사실이 본절과 다음절에 걸쳐 두 번이나 언급된 것은 다음과 같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아직 신생 제국에 불과한 시점에서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 것임을 상징한 표현인 것이다. 여호와 신앙이 배척된 상황에서는 다윗의 천신 만고의 노력과 솔로몬의 다방면의 치적(治績)등도 이렇듯 물거품에 불과하다 하겠다.

성 경: [왕상11:30]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 옷을 찢는 것이 곧 왕권 분열의 상징이 되었던 전례는 사울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삼상 15:27-29). 한편 여기서 열 두 조각의 옷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나타낸다.

성 경: [왕상11:31]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열 조각 - 혹자(Keil)는 완전수로서의 '열'에 착안하여 '열 조각'의 의미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온전한 왕권올 갖게 되리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솔로몬에게 돌아간 '하나'(32절)에 대비시켜 온전한 왕권은 여로보암이 차지하고 솔로몬의 후손에게는 한 부분만이 돌아감을 말하려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서 '열 조각'은 바로 '열 지파'를 비유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새삼 다른 해석을 부가할 필요가 없다.

성 경: [왕상11:32]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뺀 성 예루살렘 - 13절 주석 참조.

(주); 한 지파 - 실제로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가 남왕국 유다에 속하였다(12:21; 대하 11:3). 그럼에도 블구하고 본절은 유다와 베냐민을 통틀어 한 지파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 대개 다음의 두 가지가 지적된다(B hr, Hammond, Schmidt). 유다와 베냐민 지경(地境)은 서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계에 위치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5:21-62 지도 참조. 사사 시대 때의 내란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激減)된 베냐민(삿 20:46-48)을 따라 한 지파로 치지 않았거나 유다에 의존되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1:33]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저희가 나를 버리고 - 여기서 '버리다'에 해당하는 '나타쉬'(*)는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이는 강경한 관계 단절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8:57 주석을 참조하라.

(주); 정직한 - '정직한'에 해당하는 '야솨르'(*)는 물론 도덕적 품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야솨르'가 가리키는 정직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말한다(신 6:18).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 요소에 거리낄 것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승인을 얻기에 부족하다면, 아직 야솨르에 못미치는 것이다. 이 야솨르의 구체적 표현은 하나님의 법과 약속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신 6:1-9).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약속을 충실하게 실행해 나가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정직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성 경: [왕상11:34]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 다윗도 전에 하나님의 법도를 어겨 범죄한 적이 있었다(삼하 11:1-27; 24:1-9).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인간적 욕정과 성결된 생활 간의 괴리로 인하여 큰 고뇌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고로 다윗은 나단의 책망을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간절히 구했으며(삼하 12:13; 24:10; 싸; 51편), 하나님께서는 이를 어여삐 보시고 죄과를 도말해 주셨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엄격하신 계명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허다한 과오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죄의 은총을 힘입어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수행을 위해 끝까지 매진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늘 함께 할 것이다(히 3:6, 14).

(주); 솔로몬의 생전에는...빼앗지 아니하고 - 이처럼 이스라엘에 저주를 부른 장본인 솔로몬(1-13절)이 그의 생전에 이렇다 할 보응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일견 불합리하게 보인다. 사실 예고된 심판으로서의 왕국 분열은 정작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치루게 된다(35정마; 12장). 그런데 아비의 죄가 후손에게 씌위지는 것은 만족할 만한 합리적 해답(렘 31:29, 30)이 없는 수수께끼이다(Davison). 여하튼 다윗의 덕분으로 심판을 면하는 솔로몬이나 솔로몬의 죄를 뒤집어 쓰는 르호보암에게서 우리는 아비의 선악을 후손에게까지 응보한다는 신명기적 주제를 보게 된다(신 5:9, 10)

(주); 주관하게 - 원문에는 '나시(*)기 도;게'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시'는 '군주',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종종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출 16:22; 22:28; 수 9:15).

성 경: [왕상11:35]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 '손'(*, 야드)은 힘과 능력을 나타내며, 어떤 사물에 대한 고유한 책임과 권한을 의미하기도 한다. 8:15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아들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주요 책임과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말이다.

성 경: [왕상11:36]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 본절의 문맥상 '한 등불'은 '한 지파에 상응(相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등불이 항상 있다'는 말은, 결코 부강과 번영은 아니지만 어쨌든 명맥은 계속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본절은 비록 한 지파만이라도 다윗 왕조를 계승토록 하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등불이 꺼지는 것'은 죽음, 파국등을 의미한다(삼하 21:17).

성 경: [왕상11:37]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내가 너를 취(取)하리니 - 여기서 '취하다'는 '손에 넣다', '붙잡다'는 뜻의 '라카호'(*)에서 온 말이다. 이러한 용어 사용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도가 개재되었다고 본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의 결과(12:24)임을 밝히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북왕국의 왕이 된 것은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을 왕으로 취하셨을 때에는 '라카흐'가 아닌 '선택받음'의 뜻이 뚜렷한 '바하르'(*)가 사용되었음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8:16; 삼하 6:21; 대상 28:5).

(주);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다스려 - 이 말은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1)왕노릇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즉 절대 권력을 의미한다고 보는 입장(Keil, Living Bible등) 2)여로보암의 평소 소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라는 입장(B hr, 공동 번역 등). 그런데 이 두 입장은 어느 쪽이나 일면의 타당성을 제시하므로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의 입장을 취할 경우 이어지는 38절의 권면이 무색하게 돤다. 따라서 2)의 입장이 비교적 무난하리라 본다.

성 경: [왕상11:38]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모든 일에 순종하고...지키면...네게 주리라 - 비록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은 다윗의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던 남왕국 유다에게 있었지만(3:14; 6:12; 9:4; 삼하 7:11-16) 북왕국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령한 자태를 드러내어야 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북왕국을 대표할 여로보암에게도 당신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축복을 보장하겠다는 언약을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와 같은 조건적 축복의 공식(신 28:1-14)은 모든 왕들에게 열려 있는 셈이다(Gates).

(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 8:57 주석 참조.

(주); 견고한 집을 세우고 - 여기서 '집'(*, 바아트)은 '왕조'(王朝)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즉 여로보암의 가문이 계속해서 왕위에 오르도록 한다는 의미이다(9:4, 5). 그러나 정작 여로보암 왕조는 그 아들 나답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고 말았는데, 그 까닭은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행악(行惡)하였기 때문이다(15:25-30).

성 경: [왕상11:40]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여로보암의 반역]

(주); 이러므로...죽이려 하매 - 39절과 본절 사이에는 생략 및 비약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29-39절의 내용은 여로보암과 아히야의 단 둘만의 대담(對談)인데 솔로몬이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의 역심(逆心)을 알아차리게 된 경위가 본문에서 생략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여하튼 여로보암은 아히야와의 대담 이후 그의 역심(逆心)이 노출되는 어떤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주); 애굽왕 시삭 - 애굽 22대 왕조의 창시자로서 르호보암 때 예루살렘을 약탈한 왕이다(14:25, 26). 그런데 이 시삭(Shishak)이 솔로몬의 장인인 애굽의 바로(3:1)는 아닌 듯하다. 솔로몬의 장인이 솔로몬의 대적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주었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3: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1:41]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죽음]

(주); 사적(事蹟) - '사적'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말하다', '정돈하다', '다스리다' 등의 뜻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그리고 관련된 의미들을 살펴보건대 '사적'은 한 사람의 개인적 행적이 아닌, 공적 활동에 대한 정리된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 솔로몬의 행장 - 이 기록(the acts of Solomon)은 14:19, 29에 등장하는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역대 지략' 중 솔로몬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 즉 이는 역대왕의 실록 중 솔로몬의 치세사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Helmbold). 한편 본서 기자는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이 실록을 주된 자료로 참조하였음에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대하 35:26, 27 주석 및 도표를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왕상11:42]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죽음]

(주); 다스린 날 수가 사십 년 - 대개의 학자들은 솔로몬이 즉위했을 때(2:12)를 20세 전후로 본다(Keil, Lange). 따라서 솔로몬은 대략 60세 정도까지 통치했던 셈이다. 3:7 주석 참조. 한편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부친 다윗의 통치 기간과 마찬가지로 40년간이다(2:11). 그런데 혹자에 의하면, 솔로몬이 왕위에 있은 기간은 다윗 생존시의 섭정 기간을 포함해야 하므로 40년 이상이라고 한다(Gates).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결정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다윗의 40년 통치 기간에 과연 섭정 기간이 포함 되었는지의 여부 조차 모호하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1:43]

주제1: [솔로몬의 타락과 죽음]

주제2: [솔로몬의 죽음]

(주);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비록 열왕기가 솔로몬 치세에 관해 많은 부분을 할당하였지만, 소개된 내용이 충실하게 연대기적 기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기록에는 성전(聖殿)을 중심으로 여러 독럽적인 단편들이 서로 엇갈려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시간적으로 후에 속한 궁전 건축을 언급한 다음 (7:13-51), 다시 성전의 기물을 소개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7:1-12). 그러므로 열왕기의 기록만 가지고 솔로몬의 치세를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기란 매우 어렵다(Myers). 그리고 41절이 암시하듯 열왕기는 솔로몬에 관한 기록의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더구나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어떤 내적 변화가 있었는지 일체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솔로몬이 말년에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였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시적(通視的)으로 살펴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대하 11:17은 '다윗과 솔로몬의 길'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솔로몬의 생애에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도서는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총결산한 책으로 간주되는데, 이 전도서의 결론은 '일의 결국은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이다(전12:13) 2)삼하7:12-17절은 다윗의 후손에게 징계를 내릴지라도 끝내 버리지는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

성 경: [왕상12:1]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르호보암 - '르호보암'(*)은 '백성이 창대하기를 기원하나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여로보암'(Jeroboam)의 이름의 뜻이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게 하소서'인 것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때문에 이러한 두 이름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이 이름들을 다같이 백성의 권리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긴 명칭으로 보는 시각도있다(Maclean). 한편 르호보암(Rehoboam)은 암몬 여인 나아마(Naamah)의 소생으로 솔로몬의 독자였다(14:21,31 ; 대하 12:13). 따라서 솔로몬 사후 당연히 아비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11:43). 르호보암이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는데 그때로부터 그는 17년간 통치하였다(14:21). 연대 문제는 복잡 난점이 따르기는하나 대략 B.C.930-913년 (솔로몬의 즉위를 B.C.970년으로 보고) 기간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이다.

(주); 세겜 - '세겜'(*, 쉐켐)은 '등성이', '비탈'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이 세겜(Shechem)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5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은 곧 그리심 산과 에발산 사이의, 사방으로 통하는 교차 지점이다. 그래서 세겜은 예로부터 이스라엘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다(Reed). 또 이곳은 에브라임에 속한 지역이기도 하다(수 20:7;삿 9;1이하).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수 17:7 주석을 참조하라.

(주);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 여기서 '온 이스라엘'(*, 콜 이세라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전체가 아닌 북쪽의 열 지파를 말한다(B hr,Hammond). 이처럼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이 열 지파만을 일컫던 전례 없지 않다.(삼하2:9, 10, 17, 28). 한편 이스라엘 열 지파가 세겜에서 르호보암의 면담을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백성들의 승인이 이스라엘 왕의 즉위에 있어 필수 요건이였기 때문이다(1:39;삼상 2:15 ;삼하 2:4; 5:3 ;대하 29:22). 2) 그 동안 소외되었던 북쪽 지파의 권리를 호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4절).

성 경: [왕상12:2]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얼굴을 피하여 - '얼굴을 피하여'(*, 바라흐 미프네)는 어떤 불쾌한 이유로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피함을 말한다(시102:2 ; 겔39:23).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이 성경에 간혹 나오는데 '반하여 얼굴을 드는 것'은 적대감의 표현이며(렘21:10),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은 우호적인 영접의 의미(민 6:25)이다(Dentan).

(주); 애굽에 있는 중에 -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0:2에는 '애굽에서 돌아오매'로 되어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대하의 번역이 더 타당한 둣하다. 아히야의 예언(11:31,35,37,38)을 잊지 않았을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사망 소식(11:43)을 듣고 귀국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70인역(LXX) 및 수리아역(Peshitta) RSV, NIV, 그리고 공동 번역 등은 본절을 '애굽에서 돌아와 있었는데'(returned from Egypt)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왕상12:3]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무리가...저를 불렀더라 - 본절로 보아 북쪽 지파들의 반란(16-20절)이 표면화되기 이전부터 여로보암은 저들의 지도자격이었던 것같다. 이러한 사실은 여로보암이 북쪽 지파 중 유력한 지파인 에브라임의 지도자 가문 출신인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11:26, 28주석 참조. 물론 본시점에서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을 거부하기로 결정짓고 있었던 것은 아직 아니다(4절). 단지 유동적인 형편에서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들의 대변자(代辯者)가 되어 줄 것을 부탁받은 것일 뿐이다(Lange). 본절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1절과 마찬가지로 북쪽 열 지파를 가리킨다. 한편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모두 남쪽 지파에서만 배출되었다(사울은 베냐민, 다윗과 솔로몬은 유다). 그런데 이들이 왕위에 오를 때에는 남쪽 지파는 물론 북쪽 지파들의 승인을 얻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 본절은 북쪽 지파들이 르호보암에게도 마찬가지 절차를 밟게 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 점은 분열 왕국 이전에도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 사이에는 일종의 구별 의식이 존재했으리라는 것이다.

(주); 회중 - '회중'에 해당하는 '카할'(*)은 신명기 기자가 온 이스라엘의 국민적 종교 집회를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한 단어이다(한글개역 성경은 대개 '총회'로 번역하고 있음.(신 5:22;9:10;10:4;18:16등). 이에 관하여서는 민 16:2 주석에 상세히 설명해 놓았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2:5]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 이처럼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에 즉각 승락하지 아니하고 대답을 삼 일 뒤로 미룬 이유는 다음 두어 가지로 추정된다. 1) 역대 왕들과달리 선뜻 왕위 승인을 얻지 못하고 난관이 있자 이를 숙고할 기한을 가지려 하기 위함이다. 2) 예루살렘 (세겜에서 약 58Km 떨어진)에서 상의할 모사(謀士)들을 소집할 시간을 얻으려 하기 위함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세겜까지는 그 거리로 보아 나귀를 탄다 해도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다(Hammond).

(주); 하매 백성이 가니라 - 르호보암의 요청에 순순히 말을 듣는 백성에게서 아직까지 그들에겐 반역의 의도가 없었음을 본다. 이 같은 사실은 앞서 그들의 요청(4절)이 진지한 것이었음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이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을 예비했다는 견해(B hr emd)는 성립하기 어렵다.

성 경: [왕상12:6]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 본절에서 '노인'(*, 자켄)은 단순히 연로한 자를 지칭하기보다 국가 행정에 직, 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던 장로들을 의미한다. 출3:16 주석 참조. 이들은 솔로몬의 성공과 실패를 몸소 체험했던 바 통치의 묘(妙)와 백성의 섭리에 익숙한 노련함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솔로몬의 행정 구역을 담당했던 원로대신들도 있었을 것이다(4:2-6).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이스라엘 지역 사회의 문제를 근접한 데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인물들이다.

(주); 교도(敎導)하여 - '교도하여'(*, 이와아츠)는 '충고하다'는 뜻으로 특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겸손히 제시하는 의견을 말한다. 즉 여기서 이는 왕인 르호보암에게 원로들이 진언(進言)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왕상12:7]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 장로들의 이 직언(直言)은 여호와 신앙에 입각한 이스라엘의 전통적이고도 이상적인 군주관이 반영된 말이다. 즉 왕은 백성들에게 봉사할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실제에 있어 왕은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인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으로 표현된다(신 17:14-20). 즉 왕의 권력은 무제한한 것이 아니고 율법에 담긴 민사법과 전통의 규정들에 의해 규제되었다(삼하 11:1 이하;16:4;24:14 등). 그런데 왕에게 이와같은 법의 정신과 의무를 일깨워 주는 역할이 장로들에게 있었다(삼상 10:25;삼하 5:3;왕하11:17). 르호보암이 의논한 장로들 중에도 이와 같은 역할자가 있어 본절과 같이 충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왕들은 율법의 정신과 규정에 제한당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아무튼 본절은 과거 이스라엘의 왕들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나 사회의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즉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무리들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아니되며, 도리어 섬기고 헌신하는 자세로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해야 마땅한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마20:28).

(주); 섬기고 - '섬기고'에 해당하는 '아바드'(*)는 '봉사하다', '일하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자주(290회)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는 그만치 구약이 담고 있는 굵직한 정신의 일맥(一脈)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아바드'는 사물과 사람 및 하나님 모두를 향해 사용된다. 즉 이 단어는 사람이 자연을 경작한다든지 종이 주인에게 봉사한다든지 또는 성도가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하는 모든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창2:5;29:15;렘 22:13;신 15:19;삿 9:28;삼상 11:1등). 그 가운데서도 본절에서 이 단어는 왕으로서의 백성에 대한 행동의 본질적 성격이 곧 '섬김'(serve)임을 강조해 주고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자는 섬기는 자라는 성경의 정신은 여기서도 발견된다(눅22:25, 26).

(주); 좋은 말 - '좋은 말'(*, 드바림 토림)은 본래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하여 승낙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장로들은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의 요구(4절)를 들어주도록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12:8]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버리고 - '버리고'(*, 아자브)는 주로 선한 것, 마땅한 것을 저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말이다(신 28:20;31:16;삿 10:10;렘 1:16). 즉 본절에서 르호보암은 율법의 정신으로 뒷받침된 장로들의 진언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본 문맥에서 '아자브'는 '무시하다'는 뜻이 강하다. 이것은 단순히 아둔함에서 비롯되는 불찰이기보다는, 탐탁치 않은 감정과 나란히 가는 의도적인 배제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오만한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렇게 볼때 르호보암은 부친 솔로몬의 생애 중 후반부의 어두운 면을 물려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즉 당시 솔로몬은 부강함에 집착한 나머지 율법의 정신에 위배되는 짓을 곧잘 벌였던 것이다(11:1-13)

(주); 그 앞에 모셔 있는...소년들 - 이들은 현재 르호보암의 신하로서 6절의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 즉 현재는 원로가 된 솔로몬의 신하들과 대비된다. 이러한 본문이 전하는 사건의 한 측면에는 르호보암 내각 내부에 존재하던 신.구 세력간의 대립이 은연 중 표출되고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대립과 갈등은 곧 이어 완연히 드러나고 만다(10, 11절).

(주); 자기와 함께 자라난 - '함께 자라남'이 시사하듯, 이들 소년들은 르호보암과 같은 경험을 통해 사물과 인간에 대해 같은 관점, 같은 경향을 갖게 된 부류라 하겠다. 즉 이들은 하나의 '파당성'(派黨性)을 가진 무리인 것이다.

(주); 소년들 - '소년'에 해당하는 '옐레드'(*)는 '낳다', '태어나다'는 뜻의 '얄라드'(*)에서 온 말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부터 장성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연령에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르호보암이 41세 때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40대의 동년배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14:21). 왜냐하면 이들은 르호보암과 함께 자랐다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소년'은 왕성한 활력로서의 젊음을 내포한 긍정적인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6절의 '노인'과 날카롭게 대비되어, 경험이 불충분하고 사려깊지 못한 부정적 면이 강조되는 젊음으로서 '소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르호보암과 마찬가지로 권력과 힘을 추종(追從)하되 책임의 면을 고려하지 않는 '힘 지향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용렬(庸劣)함은 상황을 도리어 악화시키는 강경책을 진언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10, 11절).

성 경: [왕상12:9]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 장로들이 충고를 무시해 버린 르호보암의 오만으로 미루어(6-8절) 백성들의 간청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인 르호보암에게 있어선 자신의 무제한한 욕구 충족을 위해서 백성들의 굴종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 들이닥친 백성들의 요구(4절)는 그의 야심에 타격을 주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르호보암의 심사를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12:10]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나의 새끼 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 이 수사학적 표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두 대비(對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1) 굵기의 비교로서, 신체 중 가장가는 부분인 새끼 손가락과 가장 굵은 부분인 허리가 대비된다. 2) 내적 의미 연관의 비교로서, 새끼손가락이 표상하는 바 손끝의 간릉(幹能)한 재주 정도와 허리가 표상하는 바 힘의 근원지(사 45:1;시 69:23)가 서로 대비된다. 결국 이 말은 르호보암이 부친 솔로몬보다 훨씬 능력이 많다는 의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실상 이는 르호보암의 능력에 대해 과장된 찬사를 보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다. 원로들의 충정어린 자문이 노련한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운 것이었음에 반해, 소인배들의 조언은 아첨으로 가득찼으며 젊은 왕의 혈기를 충동질하기에 적절하였다. 만일 왕이 원로들의 조언을 따랐다면, 불만을 품은 백성들은 반역의 구실을 잃게 되었을 것이고 르호보암 자신은 왕국 분열을 조장하는 범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유혹을 해온다. 르호보암은 왕직을 수행하기에 앞서 일종의 테스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막 1:12,13)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통일 왕국이라는 큰 그릇을 소유하기에 부적격자로 판명되었다.

성 경: [왕상12:11]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더욱 무겁게 할지라 - 원래 '무겁다'는 말(*, 카베드)에는 '가혹하다' 외에도 '슬프다'는 뜻도 들어있다. 사실 가혹한 대접을 받는 사람은 슬픔을 안게 마련이다. 아무튼 본절은 백성들에게 이전보다 더 혹독하게 속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처사가 백성들의 슬픔을 가중시키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주); 채찍 - 본절의 '채찍'에 해당하는 원어는 '쇼트'(*)로, 죄를 징책하는 의미의 '채찍', 즉 '네가'(*)와는 구별된다(삼하 7:14;시 89:32). 다시 말해 이는 단지문자 그대로의 '채찍'을 가리키는바 여기서는 통치상의 가혹함과 잔인성을 표상해 주는 말이다.

(주); 징치(徵治)하였으나 - '징치하다'는 말(*, 야사르)은 종종 '징계하다'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신 8:5;시 38:1;잠29:17).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 이 '야사르'는 대개 인간의 변화 및 회개를 겨냥한 긍정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좀 혹독하게 말해서 솔로몬의 '야사르'는 단지 자신의 이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백성을 쥐어짠 것일 뿐이다. 4절 주석 참조.

(주); 전갈 - 대개의 학자들은 본절의 '전갈'(*, 아크랍)을 동물(전갈은 곤충이아니라 절지 동물)로서의 전갈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채찍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즉 앞서의 채찍이 단순히 가죽으로 된 끈인데 본절의 '전갈'은 이 가죽끈에 쇠조각을 박은 채찍이란 주장이다(H.Austel, Gates, Patterson, Montgomery). 한편 전갈(scorpion)은 꼬리 끝에 독침이 있어 이에 쏘이면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는 동물이다. 그러기에 계시록에서도 전갈은 극도의 고통에 비유되었다(계 9:5).

성 경: [왕상12:12]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모든 백성 - 1절의 '온 이스라엘'과 동일한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는 왕이 명하...하였음이라 - 백성들이 아직까지 왕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재차 특기(特記)하고 있는 구절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때까지 백성들은 다윗 왕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후에 벌어진 파국은 르호보암의 불찰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13-20절). 그런데 르호보암의 잘못이 갖는 성격은 우둔한 강압책이라는 표면적인 것보다 율법 정신에 투철치 못한데서 찾아야 한다(7절).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니 이스라엘 남북 분열과 대립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임이 분명해진다(21-24절).

성 경: [왕상12:13]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포학(暴虐)한 말 - 원문에는 단지 '포학하게'(harshly)로 되어 있다. 그런데 '포학하게'는 '난폭하다', '고집이 세다'는 뜻을 지닌 '카솨'(*)에서 온 말이다. 이 '카솨'는 본래 무거운 멍에에 짓눌린 소를 참기 어려운 정도로 혹사하는 농경의 한장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카솨'는 그 행위의 주체에는 완고함이, 그 행위의 객체에는 참기 어려움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거 애굽의 노예생활시 바로가 히브리 노예에 대해 그러했다(출1:14; 6:9; 신 26:6). 또한 훗날 이스라엘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 역시 '카솨'로 인해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사14:3). 결국 '카솨'란 단어에서 발견되는 르호보암의 마음가짐은 애굽의 바로가 그랬드이 고집세고 강퍅한 바로 그것이다(출 7:3;13:15).

(주); 노인의 교도 - 6,7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2:14]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내 부친은...징치하리라 - 본절은 르호보암이 앞서 소년들의 충고 내용을 그대로 읊고 있는 장면이다(11절). 본절은 그 수사학적 표현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상의 우둔함과 무자비성이 가리워지지 않는다. 대신 표현상의 뛰어난 기교는 도리어 르호보암의 악함을 돋보이게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강경한 대답은 3일 동안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백성들(5절)의 마음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성 경: [왕상12:15]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르호보암의 압제 정치]

(주);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 인간 만사(萬事)를 주장하시는 분은 정녕 만유(萬有)의 주재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구절이다(시103:19;단 4:34,35). 아무튼 본절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바는 바로 백성들의 요청에 대한 르호보암의 거부 사실이다(12-14절). 다시 말해 본절은 남북 분열의 파국으로 가는 전환점이 바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빚어졌음을 지적해 준다. 한편 여기서 '이 일'에 해당하는 '십바'(*)는 '사태. 운명의 전환'(a turn about offate)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르호보암의 운명을 전환시키셨음을 증거해 주는 셈이다(Montgo-mery).

(주); 실로 사람 아히야 - 솔로몬 때부터 르호보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던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선지자이다. 11:29 주석 참조.

(주); 응하게 - '응하게'에 해당하는 '쿰'(*)은 어떤 결정이 유효한 것으로 확정,확립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 말은 르호보암이 백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그 순간(12-14절)이 곧 하나님의 심판 판결(11:35,36)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성 경: [왕상12:16]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주); 온 이스라엘 - 1절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북쪽 지파에 한해 사용된 대표적 구절 중 하나이다(삼하2:9,17;3:10;19:41:20:1). 왜냐하면 '온 이스라엘'(all Israel)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는 17절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과는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한편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남왕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사 5:7;미 3:1).

(주);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 북쪽지파가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와 결별을 결심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순간임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주); 대답하여 - 이에 해당하는 원문(*, 야쉬부...다바르)은 '말을 보내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북쪽 지파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왕에게 보내 자신들의 결의 사항을 전달한 듯하다.

(주); 다윗과...이새의 아들에게서 업(業)이 없도다 - 이 말은 반복을 피하기 위한 시적인 대귀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그 의미상 같은 내용이 각기 다른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다윗 왕조에 대한 반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폭(增幅)시켜 준다. 다시말해 본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이 '이새의 아들'로, '관계'(*, 할라크-원래 '영지','영토'란 뜻이다)가 '업'(*, 나할라 - 원래 '유산', '상속'이란 뜻이다)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으로 1) 반복의 강조 효과를 내용상 거두면서도 2) 반복이 가져 올 단조로움은 표현의 변주(變奏)를 통해 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 다윗 왕조로부터 아무 혜택받을 게 없는데 무엇 때문에 충성을 하겠느냐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호는 다윗 가문에 대적한 반란 때마다 외쳐져 왔었던바(삼하 20:1)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지파 의식의 발로이다. 어쨌든 본절에는 모인 무리들의 타락한 신앙 상태가 잘 암시되어있다. 그들이 다윗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다는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시적 고충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파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마저 거스리는 모습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주);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 '돌아가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첨가어(添加語)이다. 그러나 단지 '너희의 장막으로'(To your tents!)라는 말만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라'(Go home!)는 뜻이 된다(Montgomery). 한편 여기서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옥'이란 말대신 '장막'(*, 오헬)이 사용된 것은 옛 유목 생활에서 발생하여 굳어진 관습적 표현이다. :66 주석 참조.

(주); 네 집이나 돌아보라 - '집'에 해당하는 '바이트'(*)는 '족속'으로도 번역할수 있다(수 17:17;삿 1:22;10:9;삼하 19:20등). 그러므로 본절은 다윗 가문은 자기의 속한 지파, 즉 유다 지파나 통치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달리 말해 다른 지파에 대해서는 왕노릇하여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 북쪽 지파들은 더 이상 다윗 왕조의 왕권을 인정치 않겠다는 전갈을 한 것이다.

성 경: [왕상12:17]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리엘의 왕 르호보암]

(주);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 - 단순히 유다 지파라 하지 않고 좀더 포괄적으로 '유다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기록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는 유다 지파가 아니면서도 르호보암에 동조하여 유다 지경(地境)에 머무른 사람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이들이 유다의 '성읍'(cities)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앞서 솔로몬이 벌인 활발한 국제무역(10장)은 이스라엘 사회상에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그중 하나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도시 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한지파 의식을 약화시키고, 도시의 재력(財力)과 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한 도시 주민들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도시 주민 중에는 비록 북쪽 지파 출신이지만, 농경 중심의 북왕국이 갈라져 나가는데 동조하기 싫어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Morgenstern).

성 경: [왕상12:18]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왕 르호보암]

(주); 역군(役軍)의 감독 아도니람 - 개역성경 및 영어 성경에 아도니람(Adoniram) 또는 하도람(Hadoram, eogk 10:18)으로 번역되어 있는 이 '역군의 감독'아름은 실상 원문에 '아도람'(*)으로 나와있다. 그리고 이 아도니람은 본래 선왕(先王) 솔로몬의 주요 관원 중 한 명이다(4:6). 그런데 그가 다윗 시대의 '아도람'과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삼하29:24). 어쨌든 본절의 아도니람은 강제 노동의 감독관으로 상당히 이골이 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동 때문에 10지파가 이탈하겠노라고 선언한 판국에(16절) 르호보암이 아도니람을 그들에게 파견한 것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강압정책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표시였다. 따라서 10지파는 아도니람을 돌로 쳐죽일 뿐아니라 르호보암의 신변마저 위협할 정도로 분노하고 말았다.

(주); 급히 - '급히'에 해당하는 '아메츠'(*)는 '힘있게 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르호보암이 달아나는 일에 힘을 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왕상12:19]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주); 오늘날까지 - 이 말은 남북 왕국의 대치 상태를 전제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열왕기의 최종 기록 연대는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난 뒤의 시기(B.C. 561~537년)이다. 본서 서론, '기록 연대' 참조. 아마도 이러한 사태는 본서 저자가 왕국시대 당시의 어떤 사본 내용을 그대로 차용(借用)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본은 유다 왕국의 실록과 같은 문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기록 내용이 상당히 다윗 왕조에 우호적인 성격(북왕국의 행동을 '배반'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2:20]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주);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 함을 듣고 - 이는 세겜에서 르호보암과 북쪽 지파가 대면하는 데 줄곧 여로보암이 동행했다는 앞서의 기록과 모순되는 듯한 구절이다(3, 12절). 그러나 본절의 '온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의 온 백성으로 이해하고, 앞서 세겜에 갔던 '온 이스라엘'은 북쪽 지파의 대표자들만을 지칭했던 걸로 이해하면 별로 무리가 없다(B hr,Hammond).

(주); 공회(公會) - '공회'(*, 에다)는 '지정하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개 약속된 모임과 무리(congregation)를 동시에 지칭한다. 한편 본절에서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10지파가 자발적으로 구성한 '공회'에 초빙되어 왕으로 추대되고 있다.

(주); 왕을 삼았으니 -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즉위하는 장면이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음(12-19절)은 이처럼 북쪽 10지파로 하여금 다윗 가문으로부터 분리해나가는 당위성을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런데 망명자 여로보암의 초빙(2, 3절)과 그에 따른 왕위 등극은 북쪽 지파의 민의에 따라 공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다윗-솔로몬 치하시 자신들의 의사 표시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민주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를 생각할 때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 즉자신의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주의적 산물이라 하겠다. 한편 본서 저자는이후 열왕의 즉위를 기록함에 있어 남과 북에 차이를 둔다. 즉 남왕국 왕들의 즉위시에는 르호보암의 예에서 보듯, 1) 즉위시의 연령, 2) 통치기간, 3) 모친의 이름 등이 공식처럼 언급된다(14:21;15:1, 2, 9, 10;22:41, 42). 그러나 북왕국의 왕들의 경우에는 즉위 연령, 모친의 이름이 생략된다(15:25, 33;16:8). 아마도 이러한 구성의 특징은 본서 기자가 여러 자료를 참조하는 가운데 자기 격식에 맞춰 본서를 기록했던 데서 생긴 특징일 것이다(Szikszai).

성 경: [왕상12:21]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하나님의 중재 사역]

(주);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 - 베냐민 지파가 르호보암의 편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일견 이상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는 이후 줄곧 다윗 왕조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삼하 2:15;3:7 이하;16:5 이하;20:1,2). 혹자는 이 문제를 수도(首都) 예루살렘이 유다와 베냐민 경계선 위에 있었던 사실(수 18:28)에서 해결한다(Hammond). 즉 유다와 분리될 경우에 생길 예루살렘의 상실을 베냐민 지파가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공동의 이해 관계가 옛불화에도 불구하고 두 지파의 연합을 이루게 한 셈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이상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 전체가 일치된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벧엘, 길갈 등과 같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은 북왕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29절).

(주); 싸워...돌리려 하더니 - 이처럼 무력과 강경 일변도인 르호보암의 모습에서 '힘-지향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14, 18절).

성 경: [왕상12:22]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하나님의 중재 사역]

(주); 스마야 - '스마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스마야(Shemaiah) 선지자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다음 세가지 뿐이다. 1)본장에서 르호보암의 군사 행동을 중지시킨 일(23,24절). 2) 애굽 왕 시삭(Shishak)의 예루살렘 침입 때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 일(대하 12:5). 3) 역대기 저자가 르호보암의 기사를 종결하면서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을 인용한 사실(대하 12:15). 이로 미루어, 스마야는 르호보암 당시 남왕국 유다에서 활약한 선지자로서,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대하 12:5-8).

성 경: [왕상12:23]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하나님의 중재 사역]

(주); 유다 왕 - 본절에서 처음으로 '유다 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비록 본절의 시점이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위해 북진을 준비하였을 때(21절)이지만 이미 왕국 분열은 기정 사실이었다(11:29-39). 따라서 반쪽만의 왕이기를 자존심 상해하는 르호보암에게 본서 저자는 냉정히 '유다 왕'으로 호칭하는 직절(直節)함을 보이고 있다. 이로 보아 본서 저자는 왕국 분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있다(24절).

(주); 그 남은 백성 - 여기서는 북쪽 지파 사람들이면서 유다 성읍에 거주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2:24]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하나님의 중재 사역]

(주); 형제 - 본절에서 '형제'(*, 아흐)는 공동 조상에게서 나온 광범위한 후손을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북왕국 이스라엘도 남왕국 유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며 형제이다. 이와 같이 민족 공동체의 단일성을 나타내는 경우 '형제'란 말은 보통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말과 병행되어 등장한다(레25:46-48;신 3:18;24:7 등).

(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 이스라엘 남북 분열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북부의 선지자 아히야나 남부의 선지자 스마야가 모두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11:31-33). 15절주석 참조.

성 경: [왕상12:25]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세겜을 건축하고 - 새로이 수립된 북왕국의 체제 정비에 있어 여로보암이 첫번째로 한 일은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다(Dentan). 그리하여 그 수도는 븍쪽 지파들의 정치.종교적 중심지인 세겜(Shechem)으로 결정되었다(1절). 본절은 이제 이와 관련 여로보암이 수도 세겜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의 건설 작업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1절 주석 참조.

(주); 부느엘 - 한글 개역 성경에 '브누엘'(Penuel, 삿 8:8)로도 번역되어 있는 '부느엘'은 '브니엘'(Peniel)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은 세겜 맞은 편, 그리고 요단 강 동편 얍복 강가에 위치하였는데 야곱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창 32:30). 아마도 여로보암은 수도인 셰겜의 동쪽 방어를 위해 이곳에 요새를 세웠을 것이다.

성 경: [왕상12:26]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나라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 비록 세겜을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여로보암의 마음을 불안케하는 것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다윗 이래로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능 때문이었다(27절;삼하 6장).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 참조. 그러므로 여로보암에게는 남왕국과의 철저한 분리를 위해서도 어떤 종교적 구심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 우상 숭배(28-33절)의 발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왔으니 그들 중 상당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대탈출을 시도하였다(대하 11:13-16).

성 경: [왕상12:27]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올라가면 -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볼때 예루살렘이 실지로는 아랫쪽 남방임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다'(*, 알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변두리가 중심 지역에 대해 갖는 관계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말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의 예루살렘의 지위와 중요성을 암시해 준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후 예루살렘은 북쪽지파들에게도 명실상부한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6-8장).

(주); 그 주 르호보암 - 문자대로라면, 여로보암도 르호보암이 정통성을 지닌 왕임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Wordsworth). 왜냐하면 르호보암의 앞에 '주'(*, 아돈)라는 호칭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를 옹호하는 본서 저자가 여로보암의 행동 동기를 설명하는 가운데 사용한 호칭임을 잊지말아야 한다(Hammond).따라서 본절의 표현 그대로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을 정통 왕으로 인정했다고 보기 어렵다.

성 경: [왕상12:28]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이에 계획하고 - 여기서 '이에'는 26, 27절의 음습(陰濕)한 동기를 가리킨다. 그리고 26, 27절은 28-33절의 원인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계획하고'(*, 이와아츠)는 '의논하다'는 뜻이다. 즉 여로보암은 그가 염려하는 문제를 여러 사람과 더불어 의논한 것이다.

(주); 금송아지를 만들고 - 이처럼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의도는 물론 북왕국 백성들을 차단하여 예루살렘 성전 순례를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단순히 본절의 금송아지를 이방의 우상 숭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사실 성전 순례를 원하는 백성들은 그야말로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만일 여로보암이 우상 숭배를 강요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멸의 길이다. 이렇게 볼때 금송아지는 적어도 시초에는 오히려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과 관련된 그 무엇이었던 것같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여호와의 발등상으로서의 상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된다(Gray).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이러한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1) 소의 형상은 여호와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전통적 상징이었다는 점(Dentan). 2) 비록 중심적인 지위는 갖지 못했어도 솔로몬의 성전에서도 소의 형상은 발견된다는 점(7:25). 3) 예후, 엘리야 등이 바알 제의를 공격할 때에도 금송아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Cobern).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형상은 과거 모세 당시처럼 우상으로 사용될 위험성을 충분히 안고 있다(출20:4-6). 그러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금송아지 형상은 상징으로 머물지 않고 우상화된 적이 종종 있다(호8:5이하;12:11;13:2). 본절에서의 여로보암의 행위 역시 결과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어지럽히는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낳았다. 더구나 본문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참된 제사의 동기를 갖지 않고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인물로 낙인 찍히고 만 것이다(15:30,34;16:2,19,26).

(주);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 이는 출 32:4에서 언급된 말로서,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언약 자체를 거부케 하려는 의도가 은연 중에 표현되어 있다. 즉 과거 시내 산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로서의 모세를 인정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나타내신 여호와의 언약도 거부하였다(출32!1-6). 그런데도 본절에서 여로보암은 모세 당시의 패역했던 상황을 의도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솔로몬 말기의 부패상과 르호보암의 폭정 등을 경험하였던 백성들 중 대다수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라 주장한 여로보암의 궤사(詭詐)한 말이 그럴듯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전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마저 팔아버리는 행위에 대한 형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마 26:14-16;27:3-10).

성 경: [왕상12:29]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벧엘에 두고...단에 둔지라 - 이처럼 여로보암이 북왕국의 예배 중심지로서 특별히 벧엘(Beth-el)과 단(Dan)을 택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이 두 장소는 전통적으로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즉 벧엘은 과거 아브라함과 야곱이 단을 쌓은 곳이며(창 12:8;13:3, 4; 28:11-19;31:13;35:1) 사사 시대에는 언약궤가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다(삿 20:26). 그리고 단은 그 자체의 신당과 제사장을 소유했던 곳으로서 그 제사장직이 모세의 후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었다(삿 18:30, 31). 2)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남방 경계 지역에(수 18:13), 단은 북방 경계 지역에 위치하였는바(수19:47) 북이스라엘의 전백성들에게 거리상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로(Shiloh)대신 단이 선정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즉 실로는 여러 면에서 단보다 더 예배 중심지로 적합하였으나(수 18:1;삿 21:19;삼상 1:11) 벧엘과 마찬가지로 남방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피택되지 않은 것이다.

(주); 벧엘 -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창 12:8).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현재의 베이틴(Beitin)이다. 본래 지명은 루스(Luz)로서(창 28:19)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선상이면서 동시에 남북 왕국의 경계선상이기도 한 능선에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좋은 샘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B.C 3500년경?) 성읍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오랜 예배 중심지이기도 하다(Jamieson).

(주); 단 - '단'(*)은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팔레스틴 최북단의 도시로서 두로와 다메섹을 잇는 무역로를 굽어 보며 서있다. 이러한 단이 벧엘과 더불어 제2의 성소로 선정된 이유는 북왕국에서도 북쪽에 거주하는 백성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Hammond).그런데 바알 숭배의 본산지인 두로와 잦은 교류를 하는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형상은 아무래도 위험했다(White).

성 경: [왕상12:30]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 '이 일'이 지칭하는 바는 여로로암이 금송아지 형상을 벧엘과 단에 둔 일이다(29절). 그런데 이 일이 죄로 판단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다. 1) 이는 십계명을 어긴 행위이기 때문이다(출 20:4). 2) 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성소(예루살렘)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신 12:5). 3) 그 결과 이스라엘에 우상 숭배가 만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주); 이는 백성들이...숭배함이더라 - 본절의 해석에 대하여선 학자들마다 제각기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백성들이 '하나같이' 숭배했다"로 보는 입장(Ewald). 2) "백성들이 '한 무리는 벧엘로 한 무리는 단으로' 숭배하러 갔다"로 보는 입장(Rawlinson 등). 한편 이와 유사한 설명으로"백성들이 두 곳으로 갔는데, 그 먼 단에까지 숭배하러 갔다"는 해석도 있다(B hr). 3) 초기에는 백성들이 단으로만 숭배하러 갔다고 보는 입장(Hammond). 이상의 세 견해 중 비교적 타당한 것은 두번째 견해인데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단에까지 이르는 전백성이 숭배하였다"는 신축성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성 경: [왕상12:31]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신당을 짓고 -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훼방하기 위해 여로보암이 취한 조처 중 하나이다. 즉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백성들이 주로 산당에서 예배하였는바(3:2;삼상 9:12) 이제 여로보암은 다시금 백성들로 하여금 그같은 산당에서 예배하도록 회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산당들은 성전과 달리 언약의 법궤도 임재의 보증도 없는 곳이다(Keil). 이러한 산당에는 가나안 종교의 우상 숭배 의식과 결합할 가능성 및 유혹이 늘상 있어 왔다. 이에 관하여선 삼상 9:12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주); 보통 백성 - 우리말에서 '보통'이 갖는 순한 어감(語感)과 달리 원문의 '미크초트'(*)는 '황폐하다'는 뜻으로 좀 냉소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보통'이란 말은 '아무나 마구 되는 대로' 정도의 비웃음 띤 표현이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레위인들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출 28:1-4). 그런데도 여로보암이 레위 사람들 대신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결과 레위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대거 남왕국으로 남하하고 말았다(대하 11:13-17). 이러한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율법과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의 고유 사명이 여로보암에 의해 훼손된 점이다(Hanke). 민 35:1-8 주석 참조.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의 불법성을 두드러지게 증거해 준다.

성 경: [왕상12:32]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팔 월 곧 그 달 십 오 일로 절기를 정하여 - 솔로몬 성전의 절기는 7월15일(유대력)이었다(8:2). 창세기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이 절기는 장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로서 한 해의 추수를 기념하는 축제의 절기이다(8:2, 65;9:25).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참조. 그런데 여로보암이 이 절기의 날짜를 8월 15일로 잡은 것은 자의(恣意)대로 한 것이 아니고 북쪽 전통의 복원(復元)이다. 즉 북쪽은 원래 남쪽에 비해 수확이 한달 가량 늦어졌던 것이다(B hr,Keil). 그러나 여로보암의 진정한 목적은 절기의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는 백성들이 7월의 장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여로보암은 이로써 체제 경쟁에 있어 나름의 종교적 정통성을 구색(具色) 갖추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기를 7월로 통일되게 지키도록 한 율법과 상반되는 것이다(레23:34). 따라서 이 역시 죄악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와같은 절기의 분열은 곧 통일 왕국의 정치적 분열에 이어 종교적 분열도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주); 그와 같이 행하여 - 이는 곧 남왕국 유다에서 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제사 의식을 흉내냈음을 말한다. 즉 절기 때의 제의(祭儀)는 단지 한 장소(벧엘)에서, 왕이 친히 집전(執典)한 것이다(Hammond, 8:62-66;9:25).

성 경: [왕상12:33]

주제1: [왕국의 분열]

주제2: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주); 자기 마음대로 정한 - 원문은 "그의 마음(*, 레브)에서 궁리해 낸(*, 바다)"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바다'는 나쁜 의미에서 무엇을 궁리한다는 부정적 어감이 실린 단어이다.

(주); 분향(焚香)하였더라 - 원래 '분향하다'에 해당하는 '카타르'(*)는 분향 뿐 아니라 모든 번제를 지칭할 수 있는 전문적 용어이다. 그러나 그 문맥상 부정적인 이교 제사와 연결되는 경우에는 대개 '분향하다'로 번역되고 있다(대하 25:14;28:4;렘1:16;18:15;44:17;호 2:13등). 그대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주로 '불사르다'로 번역된다(출 29:18;레 1:15;3:16;4:19등). 그런데 본절에서 여로보암의 제사는 그 부정적 의미가 채택되어 '분향하다'로 번역되었다. 여로보암에 대한 열왕기의 부정적 시각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15:30, 34;16:2등).

성 경: [왕상13:1]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하나님의 사람 - '하나님의 사람'(*, 이쉬 하엘로힘)이란 '선지자'(*, 나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나비'와 '이쉬 하엘로힘'간에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으니 곧 전자가 '선지자의 소명'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후자는 선지자가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 하겠다(H.Austel, R.D.Patterson). 아무튼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용어는 대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익명(匿名)의 대상을 지칭하는 경우(삼상 2:27; 대하 25:7). (2)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신 33:1; 왕상 17:18; 대하 8:14 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는 열왕기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특징을 지닌다(12:22; 20:28; 황하 1:9; 4:7; 5:8;6:6; 8:2 등). 한편 이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선 유다 출신의 선지자란 사실 이외에는 달리 알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학자에 따라선 선지자 잇도(대하9:29)나(Josephus, Antip, VIII) 스마야(대하 12:15)일 것으로 추정한다(Tertullian).그러나 잇도나 스마야가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한 선지자들임에 반해 이 '하나님의 사람'은 본장에 등장, 잠시 활동하다 죽고 말았으니(20-24절) 온당치 못한 주장들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 공동 번역은 이를 '야훼의 말씀을 전할 임무를 띠고'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인하여'에 해당하는 원어 '비'(*)는 '안에'(in)란 뜻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가 있을 때 그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며 선포하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Delitzsch).

(주);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 이처럼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키 위해 벧엘에까지 여행하였다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북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참선지자들이 없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벧엘에 살던 늙은 선지자마저 진리를 증거하는 대신 거짓을 일삼았던 점(11-19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주); 여로보암이 ... 분향하는지라 -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절기인 8월 15일을 맞이하여 벧엘에서 친히 제의(祭儀)를 집전한 것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3:3]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예조(豫兆) - '예조'(*, 모페트)는 '이적' (출 4:21; 대상 16:12; 시105:5,6)으로도 번역되긴 하나 여기서는 전조(前兆), 즉 앞 일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조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이 조짐은 다만 그 앞일을 지시하는 기능으로 한정된다. 즉 본문에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正)을 미리 알리는 조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왕하 23:15-20). 그러므로 이는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권위를 더해 주는 부수 현상(附隧現像)일 따름이다. 즉 '예조'란 어디까나 그 이적 자체의 경이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고(2절) 그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이적을 보이신 것은, 당시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매우 퇴락되었음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이다(출 4:21; 대상 16:12,13; 시 105:5,6). 특히 여로보암은 자신의 신체에 발생한 경고의 이적을 직접 체험하고서도 잠깐 놀랐을 뿐(4절) 곧 완패(頑悖)한 심령으로 되돌아갔으며, 결국에는 그의 온 집이 멸절당하는 화를 당하고 말았다(33,34절; 15:27-30).

(주); 이는 여호와의 말씀히신 예조라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예조(3,5절)와 예언(2절)의 관계에 있어 그 강조점이 역전(逆轉)된 듯한 느낌이 있다. 즉 예조 자체가 여호와의 말씀 내용이요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동 번역은 본절을 '그 말이 야훼(여호와)께 받은 것임을 보여 주는 한 표적'으로 풀이하여 그 의미 관계를 잘 보여준다(Living Bible, this proof that his message was from the Lord).

성 경: [왕상13:4]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여로보암 왕이 ... 들을 때에 -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극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요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즉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책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행사를 거행하는 중간에(1절; 12:25-33) 홀연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임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훗날 벨사살 왕의 잔치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 심판의 글자를 쓴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단 5:1-9, 17-28). 즉 축제, 잔치 등의 요소가 심판, 파멸과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절정의 순간에 돌연 그에 대한 심판이 들려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돌발성(突發性)은 심판 선고가 주는 충격을 훨씬 강하게 만들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막 분향하던 참에 들려온 심판 선포에 소스라쳐 놀람과 분노의 당혹한 숨결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주);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마침내 거국적인 종교 행사를 가지게 된 마당에 갑작스런 선지자의 출현과 모욕적 발언이 있자 극도로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신복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그순간 손이 말라버렸다.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마비 현상이었던 것 같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능의 근원이 당신께 있음을 입중하였으며, 그 권능으로 말미암은 심판을 미리 경고하셨다(욥 12:13; 37:23).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행하는 자를 늘보호하고 계신다(시 17:8). 따라서 대적들의 어떠한 핍박도 주의 종들을 상하게 할 수없는 것이다(단 6:22; 행 16:26).

(주); 말라 - '말라'에 해당하는 '야베쉬'(*)는 '시들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식물이 수분이 없어 메마르는 모양을 가리킨다(욥 18:16; 시 102:11; 사 19:7; 렘12:4; 겔 17:9). 그러나 이 '야베쉬'는 또한 '심판'을 의미한다. 땅이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이다(사 15:6; 19:5-7; 렘 12:4; 50:38).

성 경: [왕상13:5]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 여기서 '재'는 희생(犧牲) 제물인 짐승을 태우고 난 뒤남은 재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규례에 따르면 이러한 재는 제사장이 긁어모아 제단 동편 진밖 재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가그곳에다 버리도록 되어 있다(레 1:16; 6:10,11). 그런데 본절에서 재가 제단에 쏟아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희생 제사를 열납치 않으셨음과 그 제사와 제단이 부정(不淨)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Lahge,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P.204).

성 경: [왕상13:6]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네 하나님 여호와 -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my God)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your God)으로 말한 사실이 주목을 끈다. 이에 대하여선 학자들이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불법한 여로보암이 감히 자기 하나님으로 부를 엄두를 못냈다는 주장(Matthew Henry, Wordsworth). (2) 이는 다만 '너를 보내신 그분께'라는 정도의 의미라는 주장 (B hr, Hammond). 그런데 여로보암의 이후 행적과 그 심령의 완악함을 볼 때 첫번째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33,34절). 따라서 위의 견해 중 후자의 설명이 보다 적절하다고 하겠다(Pulpit Commentary).

(주); 은혜를 구하여 - '은혜를 구하여'(*, 힐라 에트페네)는 문자대로는 '얼굴을 어루만지다'는 뜻이다. 즉 이는 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려고 '얼굴'(*, 프네)을 드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려 달라는 간청이다.

성 경: [왕상13:7]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제의를 하게 된 이유는 회유(懷柔)에 초점을 두고 설명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왕권을 수호키위해 여호와 신앙의 규례마저 무시한 여로보암(12:27-33)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한 하나님의 능력은 가슴 섬뜩한 일이었다(3-6절). 즉 이는 그의 왕권에 대한 백성들의 의심을 살만한 것으로서, 자칫 국내적 소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의 소리가 신적 권능이 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그를 뇌물로 회유시키려 했던 것이다(B hr).

성 경: [왕상13:8]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왕과 ...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 고대 근동 지방에 있어서 집으로의 초대와 식사는 우호 및 친교의 표시이다(창 13:1-8; 19:1-3). 따라서 본절은 우상 숭배자들과의 여하한 교제도 나누지 않겠다는 뜻으로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백성들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전통적으로 우상 숭배자 혹은 불경건한 자들과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며(요 4:9),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교제를 금할 대상으로서 탐람하는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討索)하는 자, 분쟁을 조성하는 자 등을 꼽은 바 있다(롬 16:17; 고전 5:11; 살후 3:6,14; 딤후 3:5; 약 4:4; 요이 10절).

성 경: [왕상13:9]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 까닭은 귀로의 도중에 여하한 이유로든 벧엘 사람들과 더블어 지체됨을 방지하려는 것이다(Keil & Delitzsch).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들어간 것은 오직 경고를 발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하한 사귐이나 지연이라도 이 경고의 심각성에 있어서는 감소되기 마련이다(Matthew Henry). 그런데 이 모든 주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실수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즉 그는 벧엘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식사 초대에 응하고 만 것이다(18,19절). 한편 본문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 벧엘에들어올 때 취한 길을 나갈 때는 취하지 않는다는 뜻(10절). (2) 일단 진행한 통로를 여하한 이유로든 돌이키지 않는다는 뜻(16,17절).

성 경: [왕상13:10]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경고]

(주); 이에 다른 길로 가고 -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성공적으로 자기 소임을 다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한편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 20km 지점으로 남왕국 유다와의 번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12:29 주석 참조. 이로 보아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벧엘까지 온 것이 그리 먼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사명은 홀연히 벧엘에 나타나 경고를 던지고는 지체없이 사라지는 데있었다.

성 경: [왕상13:11]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늙은 선지자 - 이 선지자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대개 부정적이다. (1) 자신의 아들들로 하여금 여로보암이 세운 절기 행사(12:32,33)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는 점. (2) 여로보암 치하에서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대하 11:16)이 대거 남왕국의 예루살렘으로 남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는 벧엘에 남아 있었다는 점. (3) 받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거짓말한 점(18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늙은 선지자는 이념적으로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에 동의하고 있던 인물일 것이다.

(주); 이날에 ... 고한 말씀도 ... 아비에게 고한지라 - 이처럼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은 아비에게 그날의 사건을 낱낱이 고하였다. 즉 하나님의 사람의 저주의 내용과 예조(2-5절) 및 하나님의 사람이 취해야할 행동 지침(8,9절)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늙은 선지자가 들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취한 다음 행동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즉 그는 아들들의 얘기를 듣고서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을 것이다(13,14절).

성 경: [왕상13:12]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 이러한 물음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속박되는 금기 사항(9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미 그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사람을 꾀일 요량(料量)이 서 있었던 것이다(15-19절).

성 경: [왕상13:13]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나귀에 안장(鞍裝)을 지우라 - 도보로 귀로에 오른 하나님의 사람(10절)을 신속히 쫓아가 만나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늙은 선지자의 이러한 신속함과 단호함은 본문의 앞 부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준 것과 비슷하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는 본문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어딘가 느슨하고 풀어진 인상을 준다(14,19절). 한편 늙은 선지자가 이렇듯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겠다는 열의를 보인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 서너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1) 자신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은 자책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최선책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2) 자신이 처한 답답한 상황을 호소하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3)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이적을 행한 선지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순수한 열의에서. 한편 '나귀'는 고대 근둥 지방에 있어서 보편적인 승용(乘用) 동물이었다(삿 1:14; 10:4; 12:4; 삼상 25:20; 삼하 17:23; 왕하 4:24).

성 경: [왕상13:14]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상수리나무 - 원문에는 '하엘라'(*), 즉 ' 그 상수리나무'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 상수리나무는 어느 특정 장소의 잘알려진 나무였거나 아니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커서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이었을 걸로 추측된다(Hammond). 한편 상수리나무(oak)는 크고 단단한 재질을 가진, 높이 20-25m가량의 나무이다. 성경에서 이 나무는 종종 '힘', '위엄', '장수' 따위를 상징하였다.

(주); 앉은 것을 보고 - 커다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다리를 쉰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잘 알려진 장소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사명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석연찮다. 저주와 혐오의 장소인 벧엘에서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것 역시 그의 사명에 포함된 것이다(8,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서의 성공에 방심한 탓일까 유혹의 가능성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다. 이것은 경고의 냉혹성을 보여 주어야 할 그의 사명에 아무래도 걸맞지 않는 것이다.

(주); 대답하되 그러하다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그 솔직함과 순진함에서 늙은 예언자의 노회(老獪)함(8절)과 비교된다. 즉 그는 타인이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13:15]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 이것은 가히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즉 벧엘의 노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금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항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피곤한 중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앞서 보인 직절(直節)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16,17절). 따라서 늙은 선지자는 다음 단계의 회유를 준비해야 했다.

성 경: [왕상13:16]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이곳에서 - 이로 미루어 하나님의 사람은 아직 벧엘 경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누구와든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한 이유는, 혐오스런 금송아지 숭배가 행해지는 장소(12:32,33)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기위함이다(1-5절). 그런데 아직까지 그가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14절)은 어딘가 부주의와 방심의 인상을 준다.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이 장면에서 이미 잘못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B hr 등).

성 경: [왕상13:17]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끝까지 준행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첫 믿음을 지키는 문제, 거기에 따라 신앙을 흐트러뜨리는 나태함의 유혹만큼 끈질긴 것은 없다. 본절의 선지자가 받았던 유혹,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자들이 당면한 밥(물질)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유혹을 물리친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마 4:3,4) 이겨낼 수 있다.

성 경: [왕상13:18]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 앞서의 정면 도전(15절)이 저항을 받자 늙은 선지자가 취한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사람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같은 선지자의 부류에 속함을 밝힌다. 사실 누구든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경계 의식을 낮추고 동료 의식을 갖기 쉽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의 자기 신분 표명은 무엇보다도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즉 '선지자'(*, 나비)란 말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자신이 '대변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선 그것만이 하나님의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주); 천사가...내게 이르기를 - 여기서 '천사'(*, 말라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傳言)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킨다(창 22:11,15; 31:11; 민 22:32; 삿 13:3,16등).그런데 혹자는 천사가 통보해 주는 말씀의 권위가 개개인의 마음에 확신시켜 주는 하나님의 주관적 말씀보다 더 높은 것일 거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람이 선뜻 벧엘 선지자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앞서 받은 계시와 벧엘 선지자의 말 간에 상충되는 내용이 있음을 깨닫고서는 심사 숙고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야 했으나 그러하지 아니하였으니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주); 속임이라 - '속임이라'에 해당하는 '키헤쉬'(*)는 '가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자의 대표적 형태이다. 한편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에도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시험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바 있다(마 4:1-11).

성 경: [왕상13:19]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실수]

(주); 이에 - 즉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하는 바람에'라는 뜻이다. 비록 하나님의 사람이 얼른 벧엘 경내를 벗어나지 않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휴식한 것은 실수라 하더라도, 실상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된 주된 원인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은 순진 무구한 유다의 선지자와 거짓말하는 벧엘의 선지자를 뚜렷이 대비시켜 준다.

성 경: [왕상13:20]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저희가 상(床) 앞에 앉았을 때에 - 본장이 전해 주는 이야기의 특징은 언제나 어떤 사건의 진행 중에 이에 대한 부정(No!)의 말씀이 들려 온다는 점이다. 4절 주석 참조. 본절 역시 이러한 특징을 보여 준다. 즉 벧엘의 선지자와 하나님의 사람이 식사를 채 끝마치기도 전(곧 금지된 교제 행위를 완료하기 전)에 이에 대한 심판의 선고가 들려 오고 있는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선지지에게 임하니 - 본장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극적 요소는 반전(反轉)에 있다. 즉 앞서 여로보암에게 징계를 선포했던 자(2절)가 지금은 도리어 징계를 선포받게 된다(21,22절). 그것도 자기를 대접하겠다고 초대한 거짓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성 경: [왕상13:21]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외쳐 가로되 - '외쳐'에 해당하는 '카라'(*)는 그 자체로 이미 어떠한 메시지의 선포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메시지를 받는 자의 어떤 응답을 '불러내는'(call out)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카라'는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 대해 했던 행위이다(2절).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카라'를 받는다.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다음 사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일꾼들은 끝까지 충성해야 한다(히 3:14; 계 2:10). 솔로몬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는 전무 후무한 지혜를 소유하였으나 훗날 영적 방만상태에 빠져 귀중한 은사를 간수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호된 진노를 받았다(11:3-13). 반면에 사도 바울은 구원에의 확신 가운데서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좇아가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빌 3:13,14). (2)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게끔 하는 것은 자신의 능(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이다(고전 15:10). 따라서 주의 일꾼된 자들은 스스로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향다. (3) 하나님의 공의는 지극히 엄정하다. 즉 하나님은 한 때의 업적을 핑계삼아 방만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으시는 것이다.

성 경: [왕상13:22]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墓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열조의 묘실, 즉 가족의 무덤에 묻히지 못함은 곧 객사(客死)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말로 하면 '고향의 선산(先山)에 묻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도 고향과 친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객사한다는 것은 큰 비극이었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금기 사항(8,9절)을 어긴 결과 노선지자의 예언대로 객사하여 타관 사람의 묘실에 장사되고 만다(30절).

(주); 묘실 - '묘실'(*, 케베르)은 '매장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우리말에서 '무덤'이 '묻다'에서 온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묘지는 대개 천연 동굴이나 인공 동굴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시체에 닿으면 부정하다는 믿음 때문에 묘지는 보통 성읍이나 마을 바깥에 위치하였다(레 21:1; 민 6:6; 19:13). 그런데 동굴을 묘지로 사용하는 관습은 이스라엘인들의 가나안 정착 이후 가나안인들에게서 배운 것이라 한다(Reed).

성 경: [왕상13:23]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 한글 개역 성경의 이러한 번역은 좀 애매한 표현이다. 만일 이 말대로 이해한다면 본절은 '자기(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데리고 온 선지자(하나님의 사람)'를 가리키는 셈이 된다. 그러나 본장은 일관되게 '선지자'라는 용어를 오직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만이 예외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여러학자들의 문법적 분석과 그 결론도 본절이 20,26절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B hr 등). 그렇다면 이 말은 개역 성경과는 달리 '그(하나님의 사람)를 데려온 선지자(벧엘의 늙은 선지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지금까지 줄곧 도보로 다녔었다(1,10절). 그런 그에게 이제 나귀 한 마리가 주어졌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이유야 여하튼, 앞서 왕의 선물을 거절한 그가 벧엘에서 결국 선물 하나를 받은 셈이다(7절). (2)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귀를 내준 것은 친절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자기로 인해 지체된 데 대한 보상 행위일 수도 있다. 즉 이러한 행위에는 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생긴 저주(22절)를 시간의 단축으로 해독(解毒)해 보려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이러한 인위적인 제재(除災) 경향은 이 노(老) 종교가의 특징인 것 같다.

성 경: [왕상13:24]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사자 - 사자는 성경 시대의 팔레스틴에 흔한 맹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벧엘의 산간 지대와 요단 계곡의 숲은 사자의 서식처였다(왕하 2:24; 렘 49:19; 슥 11:3). 하지만 이처럼 번성했던 사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13세기경 므깃도(Megiddo) 부근의 레드자(Ledja)에서 죽임당한 후 팔레스틴에서는 멸종하고 말았다.

(주); 만나 - '만나'에 해당하는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이는 '우연히 맞닥뜨리다'보다는 좀더 능동적으로 '구하다가 마침내 따라잡다' 또는 '찾다가 끝내 발견하다'는 의미를 지닌다(신 4:29; 잠 1:28; 사 55:6; 렘 29:13 등). 14,28절에서의 늙은 선지자의 행동이 바로 이 '찾아가 발견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의 사자 역시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 덮친 것이다.

(주);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성은 본장면이 지닌 예외성(例外性)에서 드러난다. 보통, 사자라는 맹수는 주리지 않는 한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드문 동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한 사자는 그를 죽여만 놓고 그 시체를 먹거나 어디로 물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희한한 것은 나귀조차 달아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며 사자 역시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는 점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이러한 요소들이 이 사건에 담긴 초자연적 목적에 생각이 미치게끔 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 p. 205).

성 경: [왕상13:25]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지나가는 사람들이...보고 - 이스라엘의 행인들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유다 선지자의 시체와 그 특이한 죽음 현장을 목격하고서, 늙은 선지자의 성읍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것을 화제 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고 그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벧엘인과 더불어 음식을 저버리고 가증한 우상 숭배를 일삼는 자신들에게 임할 징벌은 실로 엄청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3:26]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선지자가 듣고 -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벤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21,22절)이 실현된 데 대한 경의감과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 등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부랴부랴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는 그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듯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선포된 말씀 또한 그대로 성취되리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32절).

(주); 어긴 - '어긴'(*, 마라)은 '쓰게 하다', '반역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곧불순종과 배반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정을 쓰리게 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동사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귀환 도중에 겪은 불행(24절)을 확연히 조명해 주는 의미 해석이 들어 있다. 즉 그는 스스로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같은 불행을 만난 것이다. 이에 관한보다 자세한 내용은 20,2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붙이시매 - '붙이시매'(*, 나탄)는 '위임하다', '허락하다'는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리물의 행동을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동사 사용에서 사자 습격 사건(24,25절)을 바라보는 늙은 선지자의 관점을 볼 수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시각이다.

성 경: [왕상13:27]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 이는 13절과 동일한 표현이며 동일한 신속함이다. 그러나 이제 늙은 선지자의 내심은 그때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즉 앞서와는 달리 이제 그는 전체사건에 일정하게 작용하는 한 의지(意志)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노련한 종교가로서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술수로서는 도저히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벧엘 제단의 어용 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 제단에 대하여 절대적인 부정(absolutey No!)의 선고(1-5절)를 내리셨다는 것이다. 한편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발람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Montgomery, 민 22:1-24:25).

성 경: [왕상13:28]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시체(屍體) - '시체'(*, 네벧라)는 '시들다'(*, 나벧)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이 동사에는 시들은 잎사귀나 말라버린 초목의 이미지가 실려 있다. 이처럼 생명의 시듦이나 말라버림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하는데 사용되거니와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심판이다. 4절 주석 참조.

(주); 길에 버린 바 되었고 - 여타 민족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시체가 제대로 매장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은 큰 수치의 표시이다(삼하 2:10이하; 삼상31:11-13 등). 그리고 이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신 28:62;렘 7:23; 26:23; 사 5:25).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이 길에 널브러져 있음은 그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심판받은 시체가 벧엘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성읍에 수치와 부정(不淨)을 안겨 주는 것이기도 하다(신 21: 1-9). 한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해진 이러한 징벌은 일견 너무 가혹한 처사인 것같다. 그러나 그 일은 개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벧엘 제단에 대한 하나님의 극한 분노와 혐오라는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1-5절).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혐오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지른 실수는 결코 경미(輕微)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있다. 즉 비록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벧엘로 되돌아와 식사를 함께 한 것(15-19절)은 그 성읍에 내린 경고의 엄중함을 격감시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시체가 벧엘에 버리우는 죽임을 당하게 하셔서라도 경고의 준엄함을 손상받지 않게 하신 것이다.

(주); 나귀와 사자는...찢지도 아니하였더라 - 나귀와 사자가 이때까지 기인한 연출을 계속하고 있었던 까닭이 분명해진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이를 보전(保全)해 줄 인물의 도착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벧엘의 노선지자가 도착하자 이것으로 그 동물들의 소임은 끝난 것이다. 24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3:29]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떠들어 - '떠들어'(*, 나사)는 '들다', '메다'는 뜻이다. 즉 늙은 선지자는시신을 들쳐 메어 나귀에 실은 것이다.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연로한 선지자가 손수 치루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사죄와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반영한다. 26절 주석 참조.

(주);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벧엘로 들였는지 까닭이 분명치 않다. 가장 가능성있는 추측은 하나님의 사람의 묘를 벧엘에 둠으로써 그 성읍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와 교훈의 표시로 남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벧엘의 노(老) 종교가는 회오(悔悟)를 통해 전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자각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선 하나님 편에 선 적극적인 봉사를 한 셈이다.

성 경: [왕상13:30]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그 시체를...나의 형제여 하니라 - 본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즉 (1)하나님의 사람의 시신을 늙은 선지자 자신의 묘에 장사한 것, (2) 애곡, (3) '오호라 나의 형제여'라는 호칭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일단 히브리인들의 장례식에 관습적으로 따르는 요소로서 볼 수 있다(렘 22:18). 그러나 관습적이라 해서 이 일을 무덤덤히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혹자는 시신을 남의 땅, 남의 무덤에 묻은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주장한다(Hall). 그러나 실상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자기 무덤에 안장한 늙은 선지자의 행동은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시이다(Hammond, 창 23:6; 룻 1:17). 그러기에 신약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예수님을 자신의 묘에 장사했다(마 27:57-60).

(주); 오호라 나의 형제여 - 히브리인들의 장례 절차에 있어서도 애곡(哀哭)은 필수요소이다. 그런데 이때 애곡할 의무가 있는 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으며(창 23:2; 삼하11:26), 여기에 구경꾼들이 가담하여 같이 울거나(삼상 25:1; 삼하 1:11) 직업적으로 만가를 부르며 울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대하 35:25; 렘 9:16-19; 암 5:16). 한편 벧엘 선지자는 사자(死者)에 대한 깊은 조의(弔意)의 표시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을 포함하여 모을 수 있는 인원을 총동원하여 애곡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KJV, RSV,그리고 NIV는 본절의 '슬피울며'를 '그들이 애곡하여'(they mourned)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성 경: [왕상13:31]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내가 죽거든...장사하되 - 앞절과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친척'으로 예우하여 장례지낸 것이라 한다(B hr). 그러나 본절은 친척 이상의 무엇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늙은 선지자의 유언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과 한 묘실에 '합장'(合葬)해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부부 사이에나 볼 수 있는 일이다(창조 25:7-10).

(주);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 이 역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경의 표시'에 다름 아니다(B hr 등). 그리고 이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참선지자임을 벧엘 선지자가 시인하고 또 이념적 동의를 표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 유언 덕분에 결과적으로 훗날 벧엘 선지자 자신의 주검도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즉 약 300년 후 요시야 왕이 우상 숭배자들의 뼈들을 거두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묘실은 손대지 않았던 것이다(왕하 23:16-18). 이와 관련 혹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이러한 결과를 미리 예상하고 유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벧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필히 이루어질 것을 믿었음을 볼 때 이는 전혀 타당성 없는 주장만은 아니다(32절).

성 경: [왕상13:32]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

(주); 사마리아 성읍 - '사마리아'(*)란 지명은 여로보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그때로부터 약 50년 뒤에 새로 생긴 지명이다. 즉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사 성읍을 건축한 후 그곳을 북왕국의 수도로 결정하면서 새로 정한 명칭인 것이다(16:24). 따라서 이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말로 보기 어려우며, 후대 기록자가 자기 당대의 용어를 구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Keil, H.J. Austel, R.D.Patterson). 즉 본절에서 열왕기 기자는 벧엘 선지자의 말을 그대로 언급하지 않고,다만 그 말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 기록 당시의 언어로 표현하였다 하겠다. 다시말해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 이후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므로 사마리아에 대한 경고는 곧 북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경고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주);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 - 2절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은 본절에서 그 대상 범위가 좀더 넓게 잡혀있다. 이러한 증폭은 후대의 상황이 반영, 첨가된 것이다. 즉 2절은 막연하게 어떠한 산당을 말하고 있으나 본절은 '사마리아 성읍들의 모든 산당'으로 명료하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의적(自意的) 첨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후대의 상황이 적용된 기록임은 분명하다.

성 경: [왕상13:33]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여로보암의 계속적 타락]

(주); 이 일 후에도...돌이키지 아니하고 - 본장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결국 본장 전체의 구도상 여로보암의 완악함을 가일층 강조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즉 그렇게 엄중한 경고를 받고도 여로보암은 타락과 배교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편 분열 왕국 시대의 첫부분에 해당하는 본장이 이처럼 여로보암의 완악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즉 분열 왕국 시대의 남왕국 유다에는 그래도 비교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나타나곤 했다. 본서 서론 도표,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 참조. 그리고 이러한 왕들이 등장할 때마다 여호와 신앙은 주기적으로 부흥했다(Schultz). 그러기에 열강의 틈새에서도 남왕국의 존속 연한은 북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길었다(북왕국 멸망은 B.C. 722년, 남왕국 멸망은 B.C. 568년).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결국 남북 왕국 각각의 신앙 상태와 결부된다. 즉 비록 전체적으로 쇠락해가는 진행 방향이긴 했어도 남왕국의 역사는 간간(間間)이 부흥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의 배후에는 다윗이라는 이상적 군왕이 서 있었던 것이다(11:9-13; 삼하 7:8-16). 하지만 이에 반해 북왕국의 왕들은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몰두함으로서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모면치 못한다. 그런데 여로보암이야말로 북왕국에 이러한 우상 숭배의 풍조를 뿌리내린 장본인이다. 말하자면 후대의 왕들은 그가 조성한 토양에서 그의 선례를 본받아 우상숭배에 열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 사가(史家)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북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균(原因菌)인 여로보암의 완악함이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본절의 '이 일 후에도...' 부분은 바로 그러한 초점이 모아진 곳이다.

(주); 보통 백성 - 비단 레위 지파 출신 뿐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2:3 주석을 참조하라.

(주); 삼았으므로 - '삼았으므로'에 해당하는 '밀레에트 야도'(*)는 문자대로는 '손을 채우다'이다. 이 말은 제사장직 수여를 의미하는 전문 용어이다(Keil). 한편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출 28:1-4)를 무시한 여로보암의 이러한 정책은 북왕국 내에 진정한 여호와 종교가 발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신앙의 자유와 참예배를 갈구하는 자들은 부득이 유다를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하 11:13-17). 12:31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3:34]

주제1: [하나님의 특사와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주제2: [여로보암의 계속적 타락]

(주); 이 일이...죄가 되어 - '이 일'이란 앞에서 언급된 여로보암의 모든 죄악된 행위를 총칭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즉 이는 (1) 금송아지 숭배(12:28,29) (2)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음(12:31; 13:33) (3)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함(12:32,33)등을 의미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그러한 소행을 계속했다는 것이 본절에서 지적하는 요점이다.

(주); 멸망케 되니라 - '멸망케 되니라'(*, 솨마드)는 '끝내다', '완전히 잡아 꺾다'는 뜻이다. 이 말은 완전히 멸망되어 자취도 남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훗날 여로보암 왕조는 2대로 그치고 멸절되고 만다. 즉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즉위 2년만에 살해당하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이다(15:25-30).

성 경: [왕상14:1]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그 때에 - '그 때에'는 13장 말미의 '여로보암의 범죄 행위'(13:33,34)와 본장의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든 것'을 서로 연관시키는 말이다(Hammaond). 특히 '때'(*,에트)라는 단어는 퍽 광범위한 용법을 지니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어떤 특유한 시점을 각별히 지적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로보암이 범죄 행위를 계속하던 당시를 애써 지적하는 말이다. 즉 이 말을 중심으로 전후 문맥을 살펴 보면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이 난 것은 여로보암의 소행 탓이라는 해석이 은연 중 역력하다.

(주); 아비야 -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라' 이다. 일명 아비얌(Abijam)이라고도 하는 유다왕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Abijah, 31절; 대하 11:22)와 혼돈되기 쉬우나 실상은 동명 이인(同名異人)이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였다는 사실 외에(13절) 달리 알려진 행적이 없다.

(주); 병든지라 - '병든지라'에 해당하는 '할라'(*)는 '약해지다', '슬픔에 젖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병이 들면 육체적으로 약해질 뿐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슬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동사의 외연(外延)에는 병든 심신의 모든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튼 본절에서 이 동사는 병자 아비야 자신 뿐 아니라 여로보암 가문 전체의 근심과 슬픔까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Matthew Henry'sCommentary, Vol.II, P. 650).

성 경: [왕상14:2]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그 아내에게 이르되... - 이로 보아 아들의 병이 여로보암에게 큰 근심거리였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의 해결을 위해 여로보암과 아내가 직접 나서야 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에게 아들의 운명을 묻는 일을 정작 자신이 수행하지 않고 대신 아내에게 떠맡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읽을 수 있다. (1) 일단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아히야가 자신의 왕 될 것을 예견했던 바(11:29-40) 있기 때문이다(J.B Payne, Matthew Henry, Lange). (2)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이 직접 아히야와 대면하기를 꺼렸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이 아히야가 권고한 순종의 길(11:37,38)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R.D. Patterson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3) 따라서 그러한 거리낌이 자신의 아내에게도 여로보암의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도록 요구하게 했다. (4) 때문에 결국 여로보암의 아내는 평범한 아낙네로 변장하여 아히야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4,5절).

(주); 실로 - '실로'(*)는 벤엘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읍이다. 이곳은 여호수아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 동안 법궤와 성막이 머무른 바 있는 종교 중심지이다(삼상 4:3,4). 그런데 이곳은 목초와 물은 많아도 적을 방어하기에는 좋지 않은 지형이라고 한다(Reed). 여로보암이 실로를 제쳐 두고 벧엘을 종교 중심지로 삼은 것은 이러한 군사적 측면도 계산 되었으리라고 본다(12:29 주석 참조). 한편 17절은 당시 여로보암의 집이 '디르사'(Tirzah)에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런데 디르사에서 실로까지는 48km 이상의 거리이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아내는 제법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던 셈이다.

성 경: [왕상14:3]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 -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적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예물을 주는 것이 상례(常例)였다(13:7; 창 18:4; 19:2; 43:24; 삼상 9:7,8). 그런데 본절에서 여로보암이 지시한 예물의 양은 속임수를 쓰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Lange,Hammond, Keil). 왜냐하면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은 평민이 보통 선사할수 있는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이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의 신분을 왕비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나타내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절과 본절은 여로보암의 용의 주도한 면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머리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즉 그는 자신의 책략에만 눈이 어두워 하늘에서 세상 모든 거민을 하감(下瞰)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동자(시 33:13,14)를 미처 인식치 못했던 것이다(5,6절).

성 경: [왕상14:4]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눈이 어두워 - 여러 학자들은 이를 노령으로 인해 안구(眼球)가 고정되면서 생기는 시력 장애로 풀이한다(B hr, Keil 등). 왜냐하면 '눈이 어두워'(*, 카무 에이나요)의 문자적인 뜻은 '눈이 멈추다'이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4:5]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 여로보암의 계략(2,3절)은 눈먼 아히야를 충분히 속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여로보암의 기만책은 물론 여로보암 집안의 장래(6-16절), 그리고 대답의 방식까지도 일러주는 상세한 것이었다. 사실 건강하고 용의 주도한 인물인 여로보암과 늙고 눈까지 먼 인물인 아히야가 벌인 게임의 승부는 뻔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약자의 편에 하나님께서 가세하시므로 얘기는 달라진다. 즉 여로보암이 아히야의 어두워진 눈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 곧 우수한 인간적 재능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만이 내세워질 때는 오히려 큰 올무로 작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비록 여러 면에서 인간적 결점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는 자는,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으 부끄럽게 하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7).

성 경: [왕상14:6]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어찌하여 - '어찌하여'(*, 라마 제)는 물론 몰라서 묻는 의문이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할 때 '왜 이렇게'에 해당하는 냉소적 어감을 지닌 말이다(사 1:11; 암 5:18). 그러므로 이 말은 마치 세상의 군왕들이 떠들썩하게 나서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정작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냉소와 비웃음을 흘리시는 광경을 연상케 해준다(시 2:1-4).

(주); 다른 사람이 체 하느뇨 -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를 변장시켜 아히야가 못알아 보도록 의도하였다(2절). 그러면서도 여로보암은 앞일을 내다보는 아히야의 능력만은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곧 일종의 점술가를 대하는 태도에 해당한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을 감춤으로써 아히야와 인격적 관계 맺기를 거부하면서도 기복(祇福)의 도구로 하나님의 사람인 아히야를 이용하려 든 것이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II, p.210). 그런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적 사물로 인식하는 왜곡된 형태이다. 그러기에 신약에 이르러는 심지어 돈으로 물건을 사듯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입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도 등장한다(행 8:9-24). 한편 이처럼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를 만나게한 여로보암의 모습은 과거 스스로 변장한 채 신접한 여인을 만난 사울과 비교된다(삼상 28:8-19). 더군다나 이들 모두 심판의 예언을 선고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주); 흉한 일 - '흉한'에 해당하는 '카쉐'(*)는 '엄격하다', '가혹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본문에서 이는 여로보암 가문의 멸절을 선언하는 심판의 가혹함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10,11절).

(주); 고(告)하리니 - 여기서 '고하다'(*, 솰루흐)라는 말은 본래 '보내다'(send)는 뜻이다. 이는 곧 선지자들의 메시지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임을 일깨워 준다(사 9:8; 슥 7:12). 한편 이제 아히야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메시지를 다시금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전한다. 그러기에 이 메시지, 즉 심판의 예언은 훗날 반드시 성취되고 말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로서 가능하는 아히야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선지자의 고유한 권한과 한계를 볼 수 있다.

성 경: [왕상14:7]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러한 표현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의 관계가 불가분리의 각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본절의 행간에 감추어진 아히야의 심정은 여로보암이 '그러한 각별한 관계를 파기한'데 대한 상처와 분노이다. 한편 본문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조되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9절의 '다른 신'이다.

(주); 주권자가 되게 하고 - '되게 하고'는 원래 '위임하다'는 뜻의 '나탄'(*)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전횡자(專橫者)가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백성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우주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위임받은 백성을 겸손히 다스려야 하는 제한된 봉사자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저들을 우상 숭배 죄악으로 몰고 간 것이다(12:25-33).

성 경: [왕상14:8]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찢어 내어 - 여기서 이 말은 한 왕조에서 왕조의 일부를 분리해 냄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다(11:30; 삼상 15:28). 한편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인 '옷을 찢는다'함은 비통함과 회개의 표시이기도 하다(창 37:29; 민 14:6; 수 7:6; 호 13:8). 따라서 나라가 찢어졌다는 것은 비통한 현실이기도 하거니와 나라 전체에 회개를 촉구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주); 다윗...같지 아니하고 - 본문은 마치 여로보암의 소행을 놓고 판결을 내리는 법정의 장면과도 같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경쟁 왕조의 다윗인 점이 흥미롭다. 즉 아히야는 이전의 예언에서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이미 충고한 바 있거니와(11:38), 여기서는 다윗에 견주어 그를 책망하고 있다. 하지만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다윗은 적대(敵對) 가문의 전왕(前王)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을지언정 따라야 할 모본(模本)은 아니었다. 한편 본서에서 다윗은 여로보암 뿐만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들의 모본이 될만한 신앙 인물로 제시되고 있는(15:3,11) 반면, 여로보암은 우상 숭배의 대표적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다(15:34; 16:26,30).

성 경: [왕상14:9]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 여기서 '이전 사람들'이란 말이 지시하는 범위 및 이해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능하다. (1) 이전의 왕들, 즉 사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선왕(先王)들을 지칭하는 걸로 볼 수있다(Living Bible). 그러나 이 경우 비교 대상의 범위가 작으므로 여로보암의 악을 강조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있다. (2) 이전의 사사(士師)들까지 포함해서 지칭하는 걸로 볼 수 있다(Hammond).그러나 이는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3) 다만 여로보암의 극악 무도함을 표현하는 수사적 관용 어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는 우상 숭배에 빠진 바 있는 선대(先代)의 인물이 결코 여로보암보다는 악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시사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과거 솔로몬 같은 성군(聖君)도 한때 혼미하여 우상 숭배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여로보암처럼 체계적이고 정책적으로 우상 숭배를 전국에 확산시키지는 않았었다(11:1-8).

(주); 너를 위하여 - 비록 여로보암이 자신의 종교 정책을 전통적 신앙으로의 복귀로 홍보했을지라도 본심은 참된 신앙적 동기에 있지 않았다(12:25-33). 즉 여로보암은 단지 유다와의 체제 경쟁의 맥락에서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종교 정책을 펼쳤을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 그러한 여로보암의 불순함을 간단한 한 마디, '너를 위하여'로 통렬히 지적해 내신다. 사실 겉치레와 간판이 무엇이든 '하나님을 위하여' 참동기가 결여된 제사는 불법이다. 그리고 그런 제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우상을 향한 제사이기 십상이다.

(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 이 표현(겔 23:35)은 하나님을 최대한으로 경멸하고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B hr, Keil, Pulpit Commentary).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태도를 가리켜 종종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시 25:15; 119:37; 123:2; 141:8). 그런데 여로보암의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돌렸을 뿐 아니라, 아예 등을 돌려 버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 뒤에'(*, 아하레 가예카)라는 표현이 갖는 모욕과 경멸의 정도를 짐작할수 있다. 더군다나 여기에 '버리다'(*, 솰라크)라는 말이 추가됨으로서 모욕의 정도는 최대한 중폭된다. 왜냐하면 이 '버리다'는 말은 어떤 것을 무가치한 것처럼 유기(遺棄)해버리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쓰레기만큼도 안여겼다는 말이다.

성 경: [왕상14:10]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 - 원문의 문자적 표현은 '여로보암에게 속한, 벽에다 오줌누는 자들'이다. 이는 곧 여로보암 가문의 모든 남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주);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 '매인 자나 놓인 자'(*, 웨아주브 아추르)는 관용법적 표현으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21:21; 신 32:36;왕하 9:8). 따라서 이 말은 앞서 '여로보암에 속한 사내'와 동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매인 자와 놓인 자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견해가 서로 다르다. 즉 이는 곧 (1) 기혼자와 미혼자(Keil), (2) 종과 자유인(Thenius,Gesenius), (3) 연소자와 연장자(Lange)를 가리킨다는 등 각각의 설명이 구구하다.그런데 원문이 주는 뜻에 일차적으로 근접한 풀이는 역시 '종과 자유인'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원문의 '아주브'(*)는 '종에서 풀려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도 본절을 '자유인이든 종이든'으로 옮기고 있다.

(주); 거름을 쓸어 버림같이 - 여기서 '거름'(*, 갈랄)은 길에 굴러다니는 똥을 말한다. 원어에 비해 한글의 '거름'은 좀 점잖은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거름'은 더럽긴 해도 쓸모있는 무엇이란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갈랄'은 원래 '구르다'는 뜻의 동사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길에 굴러다니는 것', 즉 '똥'(*, 겔)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은 여로보암 일족의 멸망이 마치 길에 굴러 다니는 똥을 치우듯 혐오를 갖고, 조금치의 미련도 없이 수행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15:28-30).

(주); 말갛게 쓸어 버릴지라 - 본래 원문에는 '말갛게'에 해당하는 부사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쓸어 버리다'는 뜻의 동사 '바아르'(*)가 '없애되 완진히 없애는 '강렬함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강렬함을 전하기 위해 '말갛게'가 첨가되어 번역된 것이다. 하기는 누구든 똥을 치우면서 조금이라도 남길 리 만무하다(MatthewHenry).

성 경: [왕상14:11]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새가 먹으리니 -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시체가 무덤에 안장(安葬)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은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큰 수치였다(13:30 주석 참조). 더구나 시신이 야수(野獸)의 밥으로 먹히우는 것은 사자(死者)에 대한 최대의 오욕과 불명예라 할 수 있었다(삼상 17:46; 시 79:2; 렘 7:33; 16:4; 34:20; 겔 29:5). 한편 본절에서 야수 대신 개가 언급된 것은 당시 거리에는 주인도 없이 돌아다니며 짐승들의 시체를 뜯는 들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시 59:6,14).

(주);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 이처럼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은 마치 어떤 공문서로 하여금 비로소 권위와 효력을 갖게 하는 서명 날인과 같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달라서 식언(食言)함이 없기 때문이다(삼상 15:29).

성 경: [왕상14:12]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너는 일어나...가라 - 본문에서 여로보암의 아내의 역할은 일종의 사자(使者, messenger)이다. 즉 그녀는 처음에 올 때에는 여로보암의 사자였으나(1-4절) 이제 갈때에는 아히야의 사자가 된 셈이다. 이러한 전환에서 의미 변화(意味變化)가 발생한다. 즉 여로보암의 아내는 처음에 아이의 생사 여부를 물으러 왔다. 그러나 이제 돌아갈 때 그녀는 여로보암 가문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6-11절)과 그 증거로서 자신의 아이가 죽게 될 것(12,13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여로보암에게 알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즉 말씀의 전언(傳言)과 징조의 해석이 그녀에게 임무로 부과된 셈이다. 결국 여로보암이 아내를 이용하며 아히야를 속이려던 것이 이제는 거꾸로 아히야가 그녀를 통하여 여로보암을 꾸짖게 된 셈이다.

(주); 네 발이...죽을지라 - 여로보암의 병든 아들(1절)은 결국 죽을 운명임이 드러났다. 여로보암이 애초에 아히야에게 묻고자 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3절). 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이 우연과 구별되는 근거로는 '발이 성에 들어갈때'라는 특정한 시점과 아이의 죽음의 순간이 일치한다는 데 있다. 17절을 보면, '발이 성에 들어갈 때'는'집 문지방에 이를 때'로 보다 상세하게 언급된다. 이러한 요소가 아이의 죽음과 아히야의 예언이 갖는 일치를 오비 이락(烏飛梨落), 즉 우연의 일치로 돌릴 수 없게한다(Keil & Delitzsch).

성 경: [왕상14:13]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본절은 아이의 죽음을 역설적으로 차라리 행운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후 여로보암 가문에 밀어 닥칠 심판(10,11,14-16절)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본절의 구조는 전반부가 아이의 죽음이 갖는 상대적 행복의 요소를, 후반부가 이에 대한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먼저 전반부에서 아이의 죽음은 (1) 온 백성의 애도를 받을 수 있음과 (2) 묘실에 매장될 수 있음이 지적된다. 따라서 아무데나 버려져 짐승의 먹이가 될 다른 가족의 주검에 비하면(11절) 이는 거의 축복에 가까은 죽음이다. 다음으로 본절 후반부는 아이의 이 같은 죽음의 이유를 '저가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아무튼 본장에서 우리는 아이의 병, 혹은 죽음을 놓고 서로 엇갈린 시각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아이의 병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여로보암에게는 불행과 슬픔으로 비쳤다(1,2 주석 참조). 그러나 선지자 아히야가 보기에는 그것은 차라리 행복이었던 것이다(잠20:24; 사 55:8,9; 롬 11:33).

(주); 저가...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 11절 예언의 예외로서 오직 아비야만이 온 백성의 애도를 받으며 묘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한 구절이다. 즉 여기서 '선한'(*, 토브)은 어떤 사람의 욕망이나 의지의 방향을 나타내준다. 다시 말해 여로보암의 아들이 가진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유대교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아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백성들을 저지하라는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길에 세운 장애물을 치워 주었다고 한다(B hr,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로보암의 모든 권속들에게 닥쳤던 참화(15:29)를 겪지않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한 아비야의 경우는 '의인은 화액(禍厄) 전에 취하여 감을 입는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사 57:1).

성 경: [왕상14:14]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그 날에 - '그 날에'(*, 제하욤)는 문자적으로는 '이 날'(this day)이다. 그런데 이 말은 평면선상의 어느 시간으로서 이 날 혹은 저 날을 일컫는게 아니다. 오히려 이는 희랍어의 '카이로스'(*)처럼 '결정적인 순간'(decisivemoment)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자연 발생적이 아닌, 돌발적 박진감으로 들이닥치는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는 '마침내 때가 이르면 바로 날에'와 같은 어감을 지닌 말이다.

(주); 어느 때냐 곧 이제라 - 본절에서 이 부분이 주는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데서 연유한다. 문맥상 '그 날에'가 하나님께서 한 왕을 일으키시는 날과 일치함은 분명하다. 임박하는 날은 좌우간 미래의 어느 때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심판의 때가 '바로 지금'(even now!)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이것은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말은 거의 종말론적 언어이다. 즉 너무나 확실한 결정이여서 이미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되고 있는 중 혹은 되어질 것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에 해당하는 '앗타'(*)는 '막', '방금'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이제부터'(ModernLanguage, from now on; RSV, henceforth)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 113:2; 사48:6). 그러므로 본절은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Hammond).

성 경: [왕상14:15]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이스라엘을 쳐서 - 이제 여로보암 가문의 파멸 예언(14절)은 슬그머니 그 대상을 북왕국 전체로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전이(轉移)의 예는 9:5-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왕과 백성이 함께 심판 받음은 저들의 공동 운명적 유대 관계를 암시한다. 즉 백성들도 여로보암의 정책을 묵묵히 따르므로서(12:30) 결국 그에게 동조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백성들이 동조한 우상 숭배는 여로보암 사후에도 계속되어 북왕국 역사 전체을 질곡(桎梏)에 빠뜨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북왕국의 우상 숭배는 왕과 백성의 상호작용에 힘입어 만연하게 된 셈이다.

(주);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 - '갈대'에 해당하는 '카네흐'(*)는 '가지', '줄기'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나온 뜻이다(창 41:5; 출 25:34;겔 42:16). 본래 '갈대'의 일차적인 뜻은 기본적으로 '연약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없는 '상한 갈대'로 비유되기도 한다(왕하 18:21; 사 42:3; 겔 29:6,7 등). 이상을 참고할 때, '물에 흔들리는 갈대'는 강대국에 시달리는 약소국의 처지릍 빗대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주); 뽑아 - 이에 해당하는 '나타쉬'(*)는 뿌리채 뽑는 것, 즉 근절(根絶)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 5:14 에 의하면 '뽑혀야할 것'은 아세라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정작 아세라상을 뿌리 뽑지 않았다. 그래서 거꾸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뿌리 뽑히게 된 것이다(신 11:16,17).

(주); 하수 밖으로 흩으시리니 - 하수는 큰 강 유프라테스를 말하는 바(창 31:21; 삼하10:16), 본절의 예언은 이스라엘 멸망 후 앗시리아로 끌려갈 사건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은 왕하 17:16; 18:11에 기록 되었듯이 B.C. 722년에 성취되고 말았다.

(주); 흩으시리니 - 이에 해당하는 '자라'(*)는 본래 '키질하다', '까부르다'는 뜻이다. 즉 이는 곡식을 키실하여 찌꺼기를 바람에 날림으로써 깨끗케 하는 동작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응징,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인다(레26:34; 렘 15:7; 49:32; 슥 1:19). 즉 이 말은 파괴적 응징로만 그치지 않고 정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동사이다.

(주); 아세라 - 아세라(Asherah)는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풍요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비교적 초기에는 많은 학자들이 아세라와 아스다롯(Ashtaroth)을 동일시해 왔다. 그러나 후대의 연구 결과 및 발굴과 함께 아세라는 아스다롯과 구별되는 또 다른 여신임이 드러났다(Reed). 어쨌든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적으로 등장한다. 엘리야가 활동할 무렵,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는 아세라의 선지자는 무려 400명이 었다(18:19). 또 아세라 숭배는 남왕국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아세라 숭배를 근절시키는게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왕하 23:4-14).

성 경: [왕상14:16]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아히야의 경고]

(주); 여로보암의 죄로...범죄케 하였음이니라 - 본절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전반부에는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진술이 등장한다. 즉 여로보암 일개인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버림받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이스라엘은 공시적(共時的)-통시적(通時的) 개념이다. 즉 이는 여로보암 당대의 북왕국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이후의 북왕국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런데 후반부는 전반부의 불합리한, 혹은 비약적인 전후 관계에 비교적 합리적인 설명을 보태고 있다. 즉 여로보암은 자신이 타락하면서 결국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오염시킨 인자(因子)가 되었다는 것이다(13:33). 이는 곧 여로보암을 기점으로 해서 왕국의 전체를 통시적으로 꿰뚫는 본서기자의 거시적(巨視的) 안목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성 경: [왕상14:17]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

(주); 디르사 - 이로 보아 여로보암은 그의 치세 초기에 수도를 세겜(12:25)에서 디르사로 천도(遷都)한 것 같다. 한편 디르사(Tirzah)는 세겜 북동쪽 11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텔루사(Telluzah) 또는 텔 엘파라(Tell el-Farah)라고도 불리우는 곳이다. 이지역은 수리아등의 북방 지역에 대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니 아마도 여로보암은 군사적 이유로 인해 이곳으로 천도 했으리라고 추측된다(Reed).

(주); 집 문지방에 이를때에 - 여기서 '집'(*, 하바이트, the house)이라는 표현은 12절의 '성'(*, 하이라, the city)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정밀하게 정확한 순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이는 '성내에서도 왕의 집 곧 궁전의 문지방'하는 식으로 보다 자세한 표현인 것이다.

성 경: [왕상14:18]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

(주); 온 이스라엘이...슬퍼하니 - 이처럼 온 백성이 이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국장(國葬)이 치루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왕자는 다음번 왕위에 오를 후계자였던 것 같다(B hr, 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2) 여기서 '슬퍼하다'(*, 사파드)라는 말은 '가슴을 치다', '통곡하다'는 뜻으로 특히 사람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가슴을치고 크게 소리내어 우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왕자는 지금까지 백성의 촉망을 받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성의 이러한 기대는 그가 경건한 인물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13절). 왜냐하면 왕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곧 백성에 대해서도 무도(無道)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2:7).

성 경: [왕상14:19]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여로보암의 죽음]

(주); 남은 행적(行蹟) - 여기서 '행적'(*, 디베르)은 '말하다'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이 단어는 보고(report) 혹은 기록되어진 행동을 의미한다(대상 29:29). 따라서 이는 여로보암 재위시의 활동이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열왕기 기록자에게 있어서는 여로보암의 여타 업적과 활동은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모조리 무시되었다. 즉 본서에서 여로보암은 단지 북왕국 우상 숭배의 원인자로서만 고발되었을 따름이다(16절).

(주); 역대 지략 - 이 책은 왕실의 여러 가지 기록을 참고해서 편찬한 국정일지(國政日誌)이다. 이는 구약 성경 중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한편 이 일지를 계속 기록해 나가는 것은 왕실 서기관들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Kraft). 아무튼 '역대 지략'에 해당하는 '데베레 하야밈'(*)은 '매일의 말(기록)들'이란 뜻으로 이 일지의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Pulpit Commentary). 본서 기자는 북왕국 왕들에 관해 기록할 때 이 일지를 참고하였다(15:31; 16:5,14,20,27;22:39; 왕하 1:18; 10:34; 13:8,12; 14:15,28; 15:11,15,21,26,31). 그런데 남왕국에도 이와 비슷한 역대 지략이 있었다(14:29; 15:7 등).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서론, '7. 열왕기서의 자료'를 참조하라.

성 경: [왕상14:20]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여로보암의 죽음]

(주); 왕이 된 지 이십 이 년 - 대개의 학자들은 여로보암이 왕위에 추대된 해(12:16-20)를 B.C. 930년경으로 본다. 그렇다면 본절이 가리키는 때는 B.C. 910년경인 셈이다. 본서 서론, '12. 열왕기서의 참조 도표' 참조.

(주); 그 열조와 함께 자매 - 아히야의 불길한 예언(10,11,14-16절)에 비하면 열왕기의 간략한 기록은 마치 여로보암이 평온한 임종을 맞은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유다 왕 아비야에게 벧엘마저 빼앗기는 패전의 수모를 겪은 후 죽었다. 그리고 역대기는 그 사실을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하 13:13-20).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여로보암이 패전의 여파로 얻은 지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B hr, Matthew Henry).

성 경: [왕상14:21]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 죄악]

(주); 나이 사십 일 세라 - 르호보암 역시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세겜 회담의 결렬 이후 왕위에 을랐으니 B.C. 930년이 그의 원념(元年)이다(12:17). 그런데 12장에선 르호보암의 동년배들을 가리켜 '소년'으로 부르고 있다(12:8). 때문에 41세의 장년을 소년이라 부른 모순을 해소하려고 혹자는 본절에 나오는 르호보암의 나이를 '21세'로 수정하려 든다(B hr). 그러나 12장에서의 '소년'이란 말은 문맥상 '노인'들에게 대조되는 자들의 경박함을 강조하려는 냉소적 의미의 단어이다. 12:8 주석 참조. 더구나 르호보암이 21세에 즉위해 17년간 통치하고 죽었다면 37세의 한창 나이에 요절한 셈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21세로 수정하느니보다 41세로 나두는 편이 자연스럽다.

(주); 여호와께서...빼신 성 예루살렘 -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중앙 성소로 택정(擇定)된 사실에 대해서는 8:16 주석과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참조하라. 그런데 본절에서 예루살렘이 이처럼 장황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유는, 그러한 신앙의 중심지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장소로 변질되었다(22:28절)을 은연중 부각 시키고자 함이다(Keil 등).

(주); 십 칠 년을 치리(治理)하니라 - 이에 따르면 르호보암의 재위 기간은 B.C. 930-913년이 된다.

(주);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 유다 왕들의 경우에만 모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열왕기의 특징이다(15:2,10; 22:42). 이는 왕들에게 주는 모친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알게 해준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영향력이 혹자의 말처럼 언제나 존경받을 만한 건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B hr). 본절 역시 오히려 불길한 영향력을 느끼게 해준다. 즉 르호보암의 모친 나아마(Naamah)는 솔로몬이 가까이 했던 이방 여인 중 하나로 밀곰(혹은 몰록)을 숭배하던 암몬의 여인이다(11:1-8). 그러므로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 경향은 그 모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Mauchline).

성 경: [왕상14:22]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 죄악]

(주); 유다가 - 이처럼 본서 기자가 '르호보암이'라 하지 않고 '유다가'로 기록한 점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런데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2:1을 보면,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리자 백성들이 이를 본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절의 '유다'는 16절에서의 여로보암과 북왕국 백성 간의 관계와 같은 상호 작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대하 12:1은 르호보암이 율법을 저버린 이유를 국가의 강성함으로 인한 교만에 둔다.

(주); 노를 격발(激發)하였으니 - '격발 하였으니'는 '질투하다'(*, 카나)에서 온말이다. 즉 이는 '질투를 야기시키다'는 뜻이다(RSV, they provoked him tojealousy). 따라서 본절에는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간의 특별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신부 대하듯 하시기 때문에(계 19:8; 겔16:8-14) 때로는 그들로 기뻐하시는가 하면 질투하시기도하는 것이다(출 20:5; 사62:5). 이는 한갖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고 계시는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신약에 더욱 밝히 계시되어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비유되는 것이다(마 25:1 이하; 엡 5:25-33; 계 21:2).

성 경: [왕상14:23]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 죄악]

(주);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 - 가나안 족속들은 대개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에 우상 및 우상을 섬기는 처소를 설치하였다(렘 2:20; 3:6; 겔 6:13; 왕하 16:4;17:10; 대하 28:4). 따라서 르호보암이 '산 위에와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각종 우상을 세웠다는 것은 곧 그가 가나안 족속들의 이교(異敎)에 영향받았음을 시사해 주는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주); 우상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마체바'(*)는 본래 '기둥'(pillar)이란 뜻이다. 그런데 아마도 여기서는 남신(男神) 바알에게 봉헌된 석상(石像)을 가리키는 듯하다(Hammond).

(주); 아세라 목상 - 이는 남신 바알과 함께 한 장소에 나란히 세워진 여신상(女神像) 아세라를 가리킨다. 한편 '아세라'에 대해서는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4:24]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 죄악]

(주); 남색(男色)하는 자 - '남색하는 자'(*, 카데쉬)는 단순한 동성 연애자를 의미하는게 아니라 이방 신전의 남창(男娼)을 말한다. 이들은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 소속된 남창들로서 의식(儀式) 중의 매음 행위에 동원되었다(B hr, Jacobsen).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남왕국 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상 숭배의 만연도 뜻하지만, 아울러 여호와 신앙으로 결집된 이스라엘 공동체 의식이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짐승 같은 성행위는 사악한 이교 제의(異敎祭儀)에 속한 것이고, 그러한 제의가 성행했음은 곧 신정(神政)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출 20:1-17)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을 막론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정국가 건립 목표를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 곧 가나안 원주민을 가리킨다. 이들의 종교의식이나 생활풍속은 음란하기 이를 데 없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레18:3-25).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절시켜 버리도록 명하신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우상 숭배 및 종교 의식을 파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신 7:2). 그러나 여호수아 정복 후에도 일부 가나안 거민들은 여전히 잔존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수 11:13;15:63; 16:10),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주); 가증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토에바'(*)는 '몹시 싫어하다', '지독하게 미워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의 우상 숭배나 사악한 습속(習俗)을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잘 나타내준다.

성 경: [왕상14:25]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시삭의 침입]

(주); 르호보암 왕 제 오 년에 - 즉 B.C. 926년경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무렵 근동에는 심각한 정세 변화가 있었다. 즉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만한 강대국의 등장이 없던 시대이다(14:20-25). 그러나 르호보암이 즉위했을 때 남쪽 애굽에는 이미보다 호전적이고 패권주의적인 22대 왕조가 들어서 있었다. 한편 본절과 병행 구절인 대하 12:2에는 '저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란 구절이 삽입되어 유다의 타락과 시삭의 침공 사건 간의 인과(因果)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 시삭 - 애굽 22대 왕조를 창시한 리비아 부족의 족장 쉐숑크(Sheshonk)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I. p.215). 11:40 주석 참조. 그는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애굽의 중앙 정부를 위협하다가 마침내 애굽 전역의 통치자로 등극하게된다. 그리고 자신의 통치 기간(B.C. 940-915) 중 강력한 애굽 부흥의 기치를 들고 주변국가들에 대해 패권주의적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Wilson).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도 아마 이러한 정책의 맥락에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시삭의 침공이 여로보암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B hr)을 하기도 하는데 근거가 없다. 그 이유는 (1) 여로보암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본서 기자가 본문에서 그일을 빠뜨렸을리 없고, (2) 시삭의 정복 범위는 북왕국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26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4:26]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시삭의 침입]

(주); 다 빼앗은지라 - 열왕기의 '기록은 마치 시삭(Shishak)이 예루살렘만을 집중 강타하여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탈취하는 데 주력한 듯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실상 시삭의 침공은 팔레스틴 전역을 휩쓴 것이었다. 그 결과 남북왕국의 성읍이 약 150여개나 정복 당하였다(Wilson). 그렇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핵(核)이므로, 이곳이 약탈당했다는 것은 전체 이스라엘이 유린된 거나 다름없다. 즉 성전, 왕궁의 보물, 솔로몬의 금방패 등은 이스라엘 황금기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였다. 그러로로 이 자랑거리가 약탈당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번영기가 완전히 끝났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왕상14:27]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시삭의 침입]

(주);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 이 놋방패는 물론 금방패의 대용(代用)이다. 그런데 어쩌면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 변화가 곧 한 시대에서 다른 한 시대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즉 금방패로 대표되는 황금기의 종식과 놋방패로 대표되는 쇠퇴기의 시작이 넌지시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Dentan, 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 p.655).

성 경: [왕상14:28]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시삭의 침입]

본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관찰된다. (1) 시삭의 침공 후에도 어쨌든 르호보암은 계속 왕노룻 할 수 있었다. (2) 성전의 제사도 계속되었다. (3) 쇠락한 느낌을 지을 수 없지만 왕의 행차에 위엄을 갖추려는 노력도 계속되었나. 이상의 요소들이 강조하는 바는 '다 멸절되지 않고 남은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곧장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주셨던 약속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곧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해 다윗 왕조를 존속시켜 주겠다는 은총의 약속이다(11:13,32,3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12,13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4:29]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의 죽음]

(주);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 - '사적'(*, 디베르)은 19절의 '행적'과 같은 말이다. 한편 역대기는 르호보암이 행했던 건축 사업이라든지 각처에서 남하해 온 제사장들을 받아들인 일 등 따위를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대하 11:5-23; 12:1-8). 그러나 열왕기는 르호보암에 대한 본질적 해석의 줄기만 남긴 채 가지치기를 하였다. 즉 르호보암 역시 남왕국 우상 숭배에 대해 책임이 있는 부정적인 왕으로 발췌, 서술한 것이다(21-24절).

(주); 유다왕 역대 지략 - 이 책은 북왕국의 역대 지략(19절)과 마찬가지로 왕실 서기관이 편찬한 남왕국의 국정 일지이다. 열왕기 기록자는 남북 왕조의 왕실 일지를 모두 참조 자료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4:30]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의 죽음]

(주); 르호보암과...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 왕국 분열 초기의 남북 전쟁 위험은 스마야 선지자의 제지로 일보 직전에 가라앉았다(12:21-23). 그러나 본절은 그 후 남북간의 분쟁이 항상 있어왔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남북간에 적대감이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려 들기도 한다(Keil). 그러나 '전쟁'에 해당하는 원어 '밀하마'(*)는 언제나 구체적 전투를 의미할 뿐, 심리적 적대감을 가리킨 용례(用例)는 없다(창 14:2; 민 31:21; 대상 19:14 등). 그러므로 본절 표현대로 지속적인 국지적(局地的) 전투가 남북간에 있어왔던 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적어도 본절에서 남북간의 분쟁은 양 국가간의 대립이라기보다 한 국가 안에 존재했던 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성격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원래다윗 왕조의 창립은 느슨한 지파 동맹의 비효율성을 지양하여 탄생한 일종의 부족 연맹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 당시에는 비교적 우세한 부족이 타부족들을 통합하여 다스렸다. 그런데 그 후 솔로몬의 통치는 그러한 부족 연맹 국가에서 보다 공고한 중앙 집권적 왕정 국가에로의 발돋음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기에 솔로몬의 제도정비는 각 지파의 자체 결집력을 효과적으로 해체하고 왕권 중심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보였다(4:1-19). 그러나 솔로몬 통치 말기는 솔로몬 체제가 내적 갈등을 흡수하는 데 실패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르호보암 왕권에 반발한 여로보암과 북부 열지파는 바로 이 체제에서 이탈한 세력일 뿐이다(12장). 그러므로 남북간의 분쟁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체제간의 경쟁 맥락을 띨 뿐 전혀 이질적인 두 국체(國體)간의 대립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하튼 하나의 신앙에 바탕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처럼 둘로 나뉘어 강대국의 유린을 당하는 시점에서도 늘상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성 경: [왕상14:31]

주제1: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최후]

주제2: [르호보암의 죽음]

(주);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에게서 빼앗아 왕궁으로 삼았던 시온 성(삼하 5:7)을 가리킨다. 2:10 주석 참조.

(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이 그 출생지와 더불어 재차 언급되었다(21절). 이처럼 언급이 반복된 이유로서 다음 세가지가 추측된다. (1) 르호보암이 우상 숭배자로 타락함에 있어서 이 암몬 여인의 영향이 컸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그녀는 유다 땅에 암몬의 가증한 우상 '몰록'을 성행시킨 장본인이었을 것이다(23절; 11:7). (2) 솔로몬의 실책이 그 아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신 28:28). (3) 전 백성들에게 여인의 어그러진 처신에 대해 경계시키기 위함이다. 현숙한 아내와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한 여인이 남편과 자녀는 물론 나아가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또한 엄청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특히 이방 여인과의 통혼을 금하셨다(신 7:3).

(주); 아비얌 - 이 이름의 철자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아비야' 또는 '아비야후'). 1절 주석 참조.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이시다'는 뜻의 '아비야'(*)란 이름(대하 12:16; 13:1,21)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피력한다. (1) 아비야는 즉위명이고 아비얌은 본명이라는 견해, (2) 아비얌은 아비야끝에 암(am)을 덧붙인 애칭이라는 견해, (3) 철자의 혼동(즉 *, 와 사이의 )으로 인해 생겨난 이름들이라는 견해, (4) 아비얌은 아비야에 '얌'(*)이라는 가나안의 바다신 명칭을 첨가한 것이라는 견해(MacLean)등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이상의 제 견해들 중에서 철자의 혼돈이 정확한 설명일 것으로 본다(Hammond 등). 한편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이 있었지만 그중 마아가(Maacah)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래서 마아가의 소생 아비얌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목해 놓았다(대하 11:21,22).

성 경: [왕상15:1]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주); 여로보암 왕 제 십 팔 년에 - 여로보암의 즉위 연대는 B.C. 930년경이다. 그러므로이 해는 B.C. 930년경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유다나 이스라엘 왕의 즉위 연대를 이렇게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의 연대에 비교해서 밝히는 상관 방법은 열왕기의 특징이다(9,25,28,33 절). 당시에는 이외에 달리 객관적 연대 표시 방식이 없었기 때문이다(S-zikszai).

(주); 아비얌 - 아비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유다의 제 2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다. 14:31주석 참조. 그런데 대하 11:21,22에 의하면 아비얌은 원래 장자(長子)가 아닌, 단지 르호보암이 장자로 '삼은'(후계자 지명을 의미) 아들로 나타난다. 이는 아비얌의 모친 마아가(Maachah,2절)가 르호보암이 총애하는 왕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르호보암의 행위는 조부 다윗의 행위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과거 다윗도 장자를 제껴 놓고 총애하는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으로 후계자를 삼았기 때문이다(1:5-40). 그러나 다윗의 경우와 달리 르호보암은 일찌감치 아비얌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함으로써 사전에 왕비를 둘러싼 경쟁 가능성을 봉쇄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성 경: [왕상15:2]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주); 삼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3년은 여로보암 재위 제 18년에서 20년 사이(B.C.913-911년경), 즉 햇수로 3년을 가리킨다(9절). 그러므로 아비얌의 실제 재위 기간은 무척 짧았던 셈이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문이 침묵하므로 적절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주); 마아가 - 이처럼 왕의 즉위시 모친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은 열왕기가 유다 왕들을 취급하는 기록상의 특징이다. 14:21 주석 참조. 한편 마아가는 아비살롬(Abishalom), 즉 압살롬(Absalom)의 딸이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아비얌의 모친은 '우리엘'(Ur-iel)의 딸(대하 13:2)로 나타나 있는데 이 같은 문제는 마아가를 압살롬의 딸 다말(삼하 14:27)이 우리엘에게 출가하여 낳은 딸, 즉 압살롬의 손녀로 봄으로써 해소된다(K-eil&Delitzsch Commentary, Vol.III,p.217). 그러므로 르호보암은 자기 사촌 혹은 조카와 결혼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근친 결혼은 고대 사회에서 흔한 것이지만(창20:12;24:48; 29:15-30) 왕가 내의 근친 결혼에는 특히 정치적 목적이 왕가 내의 근친결혼에는 특히 정치적 목적이 강했을 것이다. 즉 왕권 강화를 위해 각 지파의 유력자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다윗(삼하 3:2-5;5:13-16)의 경우 가족내의 분란을 많이 치뤄야 했다. 따라서 솔로몬은 그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혼인 관계로 왕가를 다시 얽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미남자 압살롬의 딸(정확히 말하자면 손녀)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총애를 받았다. 1절 주석 참조. 한편 대하 13:2의 '미가야'(*)는 '마아가'(*)의 오기(誤記)일 것으로 추측된다(Dahlberg).

성 경: [왕상15:3]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주);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 - 즉 르호보암이 유다 통치 기간 중 전국에 우상숭배를 만연시킨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14:21-24). 그런데 아비얌의 통치 역시 이 점에 관한한 르호보암과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열왕기는 르호보암에게 그러했듯 아비얌에게도 냉정한 힐난(詰難)의 논조를 견지한다. 한편 이와 달리 역대기는 아비얌의 신앙적 색채 짙은 연설과 여로보암에게 거둔 전쟁의 승리를 서술하고 있다(대하13:2-18). 그러나 그런 점들조차 우상 숭배를 허용한 아비얌에 대해 열왕기 기자의 냉정한 평가가 달라지도록 하지는 못한 것이다.

(주); 그 마음이...온전치 못하였으나 - 역대기 기록에 나타나는 아비얌의 경건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그의 우상 숭배행위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다윗의 마음'이란 '하나님을 향해 전심 전력함'이라는 특성으로 요약된다(8:25;9:4). 그런데 이와 달리 우상 숭배란 부정한 배우자(配偶者)의 소행처럼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일이다(14:22). 그러므로 다른 그 무엇으로도 으뜸가는 이 범죄를 메꿀 수는 없는 것이다(출 20:1-6;신 4:15-24).

성 경: [왕상15:4]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원문 초두에는 '그러나'(*, 키)가 있다. 그리고 본절은 '다윗 계약'(삼하 7:8-16)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 따라서 3절에 지적된 바와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비얌의 남왕국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윗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총때문이라는 것이다.

(주); 등불 - 뒤이어 나오는 '후사'(後嗣)와 동의어로 곧 '자손'을 상징하는 말

이다(삼하21:17;욥 18:5,6;시 132: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36 주석을 참조하라.

(주);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 여기서 '세워'(*, 쿰)는 약속이 확립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는 곧 우상 숭배를 허용한 아비얌(3절)이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확립하셨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북왕국의 우상 숭배자들이 자주 대(代)가 끊기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은 것에 비해 남왕국 왕들은 비교적 무사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14:10;16:2;왕하 10:11). 한편 북왕국은 약 250년동안의 존속 기간 동안 무려 아홉 왕조의 교체를 겪었으나 반면 남왕국은 약 400년 동안 다윗왕조의 통치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Hammond). 본서 서론, '12.열왕기서의 참조 도표'참조.

성 경: [왕상15:5]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주); 헷 사람 우리아의 일 - 이는 다윗이 음모를 꾸며 부하 장수 우리아(Uriah)를 죽게하고 그의 처 밧세바를 빼앗은 사건을 말한다(삼하 11:2-27). 한편 법치주의(法治主義) 국가에서는 어떤 권력자도 법의 제한에서 제외될수 없듯, 신정 국가(神政國家) 이스라엘의 왕 역시 하나님의 법에 의해 제한당하고 비판당하여야 했다. 그러나 실제 열왕의 역사는 그러한 이상이 자주 무시당했음을 보여준다. 즉 왕들은 자신의 권력이 무엇으로든 제한되거나 비판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말씀과 경고는 대개 무시당했고 도리어 예언자 자신이 위협을 받곤 하였다(22:13-28).이러한 열왕들의 횡포와 부당성이 이스라엘 역사를 그릇되게 족쇄채웠음을 아는 열왕기 사가(史家)는 바로 그 점에서 다윗의 탁월함을 또 하나 발견한다. 즉 다윗은 우리아의 일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비난했을 때 그를 벌하기는 커녕 자신의 죄악을 철저히 시인하고 통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삼하 12:1-23).

(주); 어기지 - 이에 해당하는 '수르'(*)는 '빗나가다','돌이키다'는 뜻이다. 즉 이는 마치 임무를 띤 군인이 그 임무에서 임의로 이탈하듯 자신의 본분에서 이탈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성 경: [왕상15:6]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이미 14:30에서 언급된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구절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14:3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주); 사는 날 동안 - 14:30의 '항상'(*, 콜 하야밈)은 문자적으로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사는 날 동안'(*, 칼 예메 하야요)은 '생명의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즉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본절에서는 좀더 강조된 부사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강조 효과는 다음 7절과 연계될 때 보다 적절히 발휘된다. 즉 이는 '선대에도 줄곧 전쟁이 있더니 후대에도 그러했다'는 지적인 것이다.

성 경: [왕상15:7]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주);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 본절과 달리 대하 13장은 이 두 왕이 벌인 큰 전투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아비얌이 이끄는 남왕국 유다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승리한다. 즉 이때 유다군은 북왕국 군대의 협공을 받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써 마침내 승리를 거둘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투를 계기로 그때까지의 균형은 허물어지고 남왕국의 경계는 벧엘 훨씬 북쪽의 여사나(Jeshanah)지역까지 북상하게 된다(대하 13:19). 한편 결과적으로 이 승리는 아비얌의 다음 왕인 아사 시대의 10년 평화에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대하 14:1). 왜냐하면 북왕국이 이 전투에서 꺾인 세력을 회복하는 데 그만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R.D.Patterson).

(주); 유다 왕 역대 지략 - 14:19,29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5:8]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비얌의 행적]

(주); 아사 - 혹자는 '아사'(*)란 이름의 뜻이 '치료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Gese-nius). 그러나 분명치는 않다. 한편 유다의 제 3대 왕인 아사(Asa)는 종교 개혁을 단행한 업적(11-15절;대하 14:1-5) 때문에 열왕기가 높이 평가하는 왕 중 한 명이다. 그래서 부친 아비얌이 불과 3년 밖에 재위 하지 못한 사실을 그보다 훌륭한 아들 아사의 길을 빨리 열어 놓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이도 있다(Mattew Henry).

성 경: [왕상15:9]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여로보암 제 이십 년에 아사가 유다왕이 되어 - 그러므로 북왕국의 초대왕 여로보암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남왕국 3대 왕(르호보암,아비얌,아사)을 상대한 셈이다. 그런데 대하 13:20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아비얌과의 전투 이후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사가 즉위할 무렵 여로보암은 패전의 후유증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로보암은 아사의 통치에 별 위험이 되지 못했다. 바로 이 점이 아사가 비교적 안정된 정세 속에 눈을 내부로 돌려 종교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11-15절).

성 경: [왕상15:10]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예루살렘에서 - 북왕국 왕들의 즉위기사가 단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25절)에서 통치하였음을 각별히 밝힌다(2절;14:21). 여기에는 열왕기 사가(史家)의 특수한 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난 뒤에 다시금 국가 재건을 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회복하여야 할 '국체(國體)의 요체가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문제에서 '예루살렘'은 신앙적.정치적 구심체로서 국체의 요체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하에서 본서 기자가 과거 사실을 수집,정리할 때 '예루살렘'은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된다. 즉 국체의 연속성, 정통성의 요체로서 예루살렘은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의의' 및 대상 11:4-9 강해, '예루살렘'을 보다 참조하라.

(주); 사십 일 년을 치리하니라 - 아사는 유다의 역대 왕들 중 세번째로 장기간동안 통치한 인물이다. 유다 왕들의 통치 연대를 살펴보면, 선한 왕들의 통치는 대체로 길고 악한 왕들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오래도록 왕위가 존속되었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였던 것같다(출 20:12). 한편 아사 통치 기간(B.C.910-869) 중 북이스라엘의 왕위는 무려 여섯 차례(나답,바아사,엘라,시므리,오므리,아합)나 바뀌었다.

(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 마아가(Maachah)는 아사의 선왕인 아비얌의 모친이다(1,2절). 그런데 본절에선 마아가가 아사의 모친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은 제각기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1)여기서 '모친'(*, 엠)이란 말은 결코 '조모'의 뜻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사는 아비얌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였을 것이다(Mac Lean). (2) 아비얌은 자신의 모친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Hammond, Lange, Ewald). 이상의 제 견해 중 두번째 주장은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대신 본절에서 '모친'이란 말은 태후로서 섭정을 한다든지 하는 지위와 기능의 명칭으로 이해한다면, 세번째 주장이 비교적 타당할 것이다(Keil등). 왜냐하면 마아가는 태후로서 아들인 아비얌이 죽고 난 뒤에 어린 손자 아사를 대신해 섭정을 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13절).

성 경: [왕상15:11]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그 조상 다윗같이...정직하게 행하여 - 유다의 3대 왕 아사는 모처럼 긍정적 평가를 받은 왕이다. 그런데 그가 '다윗'이라는 열왕(列王)의 표준에 부합되는 까닭은 두말할 나위없이 종교 개혁 때문이다(12-15절). 사실 우상숭배를 공격하는 것은 곧 여호와 신앙에 전심전력하는 표현과 증거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열왕기는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하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는 신명기적 역사관(2:3,4;3:14;11:38)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도 하나님께 대한 거역의 구체적 표현이 언제나 우상 숭배에 대한 태도는 곧 율법 순종 여부의 시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왕상15:12]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남색하는 자 - 단순한 동성 연애자(homesexual)가 아닌 음란한 이교 의식(異敎儀式)에 동원되는 남창(男娼)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24 주석을 참조하라.

(주);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하고 - 이스라엘인들이 틈틈이 숭배해 오던 우상들에는 아세라(14:23),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11:5-7), 바알(18:18) 등이 있다. 레 26:1-13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 참조. 그런데 아사가 이처럼 우상 숭배를 공격한 것은 모든 종교 혼합주의 노선을 거부하고 여호와 유일 신앙이라는 전통 노선으로 회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Dentan). 그리고 역대기에 의하면 그러한 종교 개혁은 오뎃의 아들 아사랴 같은 선지자의 격려를 힘입었다고 한다(대하 15:1-9). 그러므로 왕국 내에는 언제나 옛 국시(國是), 즉 소박 강건한 신정 국가의 이상을 옹호하는 세력이 있는 왔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왕상15:13]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그 모친 마아가가...태후의 위를 폐하고 - 이 사실은 아사의 단호한 개혁 의지를 보여 준다. 즉 철두 철미한 우상 숭배 공격에 있어 태후라고 해서 그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얽매이기 쉬운 사사로운 혈통상의 정분(情分)을 극복하고 오직 진리 수호만을 위한 가치를 높이 든 아사 왕의 태도는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본이 아닐수 없다(마 10:37,38). 한편 본절은 마아가가 태후로서 국가의 정책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을 짐작케 해준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아들 아비얌(1,2절) 때로부터 종교 혼합주의 세력의 주동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아비얌이 일찍 죽고 손자 아사가 아직 어린 동안 실권자로서 섭정을 실시하였을 것이다. 10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아사가 마아가를 폐위한 것은 (1)신앙 개혁,(2)종교 혼합주의 노선의 거부, (3) 왕권의 회복이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주); 기드론 시냇가 - 기드론(Kidron)은 예루살렘 성과 감람 산 사이에 있는 길이 약 5Km의 골짜기 이름이다. 그런데 우기(雨期)에는 이곳에 물이 넘쳐 흐르니 곧 기드론 시내가 되는 것이다. 2:37주석 참조. 한편 기드론 시냇가의 인접 지역에는 솔로몬 말기 왕실의 우상 숭배신당이 몰려 있던 멸망 산이 있다(11:7;왕하 23:13). 그래서 이곳은 여호와 신앙과 이교 신앙의 빈번한 투쟁 장소가 되었다(Barrois). 추측컨대 태후 마아가의 아세라 우상도 이 멸망 산의 어디엔가 세워졌을 것이다.

성 경: [왕상15:14]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오직 산당은 없이하지 아니하니라 - 아사의 철저한 개혁 의지를 감안할 때 그가 이처럼 산당을 남긴 일은 석연치 않아 보인다. 그러므로 아사의 눈에 이 산당은 심각한 우상숭배의 처소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추리할 수 밖에 없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II,p.658).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인들이 산당에서 여호와께 예배드린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12:31 주석참조.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사는 산당을 남기므로서 우상 숭배 부활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왜냐하면 본래 산당은 가나안인들이 자신들의 우상 신을 숭배하던 곳이었는바 언제든지 이교(異敎)의영향이 투영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의 진행을 아는 열왕기 사가(史家)로서는 아사가 산당을 남겨 놓은 사실이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한편 이러한 산당에 대한 대대적 파괴 작업이 비로소 실시된 때는 훗날 요시야(Josiah,B.C. 640-609)왕에 이르러서이다(왕하 23:4-20).

성 경: [왕상15:15]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행적]

(주); 구별한 것 - 여기서 '구별한 것'(*, 카드쉐이)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이란 뜻이다. 즉 이는 보통의 물품 중에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따로 떼어 둠으로써 거록하게 된 물품을 의미한다.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된 물품을 의미한다.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아사 왕은 그의 부친 아비얌이 여로보암과 싸워서 취한 전리품(대하13:8)과 자신이 구스인들과 싸워서 얻은 전리품(대하 14:15) 중에서 은과 금과 그릇들을 모두 하나님께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왕상15:16]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아사와...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 '일생'(*, 칼 예메헴)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이는 앞서 14:30의 '항상'과 15:6의 '사는 날 동안'이나 마찬가지의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 왕국 초기부터 남북간에 전쟁이 있더니 각각 3대 왕에 이르도록 전쟁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대기는 아사즉위 후 십년 동안 평화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대하 14:1). 즉 여로보암의 말기 2년, 나답의 2년, 바아사의 6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은 전쟁이 없었던 것이다. 본서 서론, '12. 열왕기서의 참조 도표'참조. 그 이유는 스마라임 전투에서 아비얌에게 패전한 이후(대하 13:1-22) 미처 세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정권이 교체되는 등 불안정한 북왕국내부의 정정(政情) 때문이다. 그러나 바아사는 어느 정도 정국이 수습되자 다시 남왕국고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분열 왕국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끝없는전쟁의 악순환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시대의 한 표징으로서 열왕기는 이 점을 자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4:30;15:6).

성 경: [왕상15:17]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한지라 - 본절에는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 침공 원인이 밝혀져 있다. 라마는 원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수 18:25) 예루살렘 북방 약6Km 지점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바아사는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같다. (1) 백성들의 남하(南下) 제지: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유다 왕국이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소문은 북 이스라엘 곳곳에까지 전해졌고, 그 소문을 들은 자들 중 대거 월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대하 15:9). 그러자 포악한 바아사왕은 여로보암과 동일한 염려(12:27)에 사로잡힌 나머니 라마를 기반으로 하여 남하 무리들을 강제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2) 유다 정복을 위한 전초 기지 확보:라마는 유다의 정치,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으므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따라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유다의 아사왕은 황급한 나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비책을 마련하였던 것이다(18-22절). 한편, 바아사의 침공 연대를 역대기는 아사 왕 36년이라고 말한다(대하 16:1). 그런데 열왕기는 바아사가 죽고아들 엘라가 즉위한 때가 아사왕 26년이라고 한다(16:8). 따라서 이러한 연대의 문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교적 유력한 견해는 '아사 왕 36년'이란 '왕국분열 이후 36년'으로 보는 견해이다(Liley,Pulpit Commentary).

(주); 라마 - '라마'(*)는 '높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엘람'(er-Ram)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본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남북 왕국 국경의 주요 분쟁 지역에 속한다. 그런데 바아사는 이곳에 요새를 건축하여 남왕국을 압박하였다. 이로 보아 바아사는 이전에 에브라임 북방 여사나까지 밀렸던 영토를 거의 회복한 듯하다. 7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5:18]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남은 은금을...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 당시 성전과 왕궁의 곳간에는 르호보암 당시 애굽의 시삭(Shishak)에게 약탈당하고 남은 것들 이외도(14:26) 아비얌이 여로보암과의 싸움에서 탈취한 보물들과(대하 13:18) 아사가 구스를 물리치고 탈취한 물건등(대하 14:15)이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었던 평화 시기 동안 유다 왕궁에는 많은 은금 보화들이 축적되었을 걸로 짐작된다. 따라서 아사가 이많은 보물들을 '몰수히' 벤하닷에게 바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은, 바아사의 침공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체험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더라면 그렇듯 심각한 공포와 낭패감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15).

(주); 손에 붙여 - 이는 곧 어떤 사람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주); 다메섹 - '동방의 진주'라고 별명을 가진 다메섹(Damascus)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팔레스틴 북방 두로 동편에 위치한 아람족의 국가이다. 한편 과거 다윗은 이다메섹을 포함하여 많은 아람 부족 국가들을 이스라엘에 합병시켰었다(삼하 8:5,6).그러나 르손의 독립 운동(11:24,25)과 이스라엘의 왕국 분열(12장)등이 아람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력을 무산시켰다. 그러므로 아람은 다메섹을 중심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바아사의 유다 공격 당시 북왕국과 다메섹은 서로 동맹을 체결한 상태이다(19절). 그래서 바아사는 배후를 염려하지않고 마음놓고 유다를 공격할 수 있었다.

(주); 헤시온의 손자...벤하닷 - 헤시온(Hezion),B.C.940-915)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벗어나 다메섹에서 아람왕이 된 르손(Rezon)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분명치는 않다. 한편 본절에서 가리키는 벤하닷(Benhadad)은 벤하닷1세(B.C.900-860)를 말한다. 그는 그의 아들인 벤하닷 2세(B.C.860-841)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그런데 벤하닷 1세에서 벤하닷 2세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이들의 정책은 서진(西進)정책이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1) 남동쪽의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도 (2)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기도 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펼쳤다(Bow-ling).

성 경: [왕상15:19]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나와...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 이로 보아 벤하닷 1세는 정책상 이스라엘 남북 왕국 모두와 동맹을 체결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동맹은 매우 가변적이어서 그때그때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파기와 재동맹이 거듭되었음이 분명하다(20:1-24;22:34-36).

(주); 깨뜨려서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라르'(*)는 '깨다','취소하다','무효로하다'란 뜻으로 인간 사이에 맺어진 약조의 배반, 즉 동맹의 일방적 파기를 의미한다.

(주);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 바아사의 북왕국 군대는 잘 준비된 강병(强兵)이었다. 이들의 공격에 수세로 몰린 아사는 벤하닷을 매수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이다. 즉 전선(戰線)이 남쪽 라마로 치우친 동안(17절) 아사는 무방비로 노출된 후방을 공격하여 이스라엘군을 당황케 하려 한 것이다. 물론 이 작전은 주효했다. 그러나 아사는 이로 말미암아 선격자 하나니(Hanani)의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벤하닷)을 의지했기 때문이다(대하 16:7-10).

성 경: [왕상15:20]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벤하닷이...듣고 - 벤하닷으로서는 아사의 제안에 솔깃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제안은 (1) 막대한 금품 수수가 따르는 것이기도 하려니와(18절) (2) 그 내용자체가 무방비 상태의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영토 확장 및 무역로 확보를 꾀할 수 있는 호기(好機)를 의미했기 때문이다(19절).

(주); 이욘과...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 본절에 열거된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벤하닷에게 이 지역은 다메섹에서 갈릴리를 경유하여 지중해에 이를 수있는 대상로(caravan route)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확보는 다메섹으로서는 두로와의 교역 뿐 아니라 지중해 무역이 보장되는 의미를 띤 것이다(Bowman).

(주); 이욘 - 아벧 벧마아가에서 북쪽으로 약 14Km 지점, 훌레(Huleh) 골짜기에 위치한 납달리 지파의 성읍이다. 오늘날의 '텔 디빈'(Tell Dibbin)으로 알려져 있는데 벤하닷에게 침략당한 후 또다시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다(왕하 15:29).

(주); 단 - 본래 지명은 라이스(Laish)였던 이스라엘 최북단의 단지파의 성읍이다. 삿18:29 주석 참조.

(주); 아벧벧마아가 - 북부 갈릴리 위쪽의 훌레 계곡에 위치했던 납달리 지파의 성읍이다. 이욘(Ijon)에서 남쪽으로 약 14Km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본래 아벧(Abel)과 벧마아가(Beth-Maachah)는 서로 인접한 두 마을이다. 그런데 두 지명을 하나로 합쳐 '아벧벧마아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삼하 20:14 주석 참조.

(주); 긴네렛 온 땅 - 성경에서 긴네렛(Chinnereh)은 대개 다음 3가지 용례로 쓰이는데 곧 (1)갈릴리 바다의 옛 지명(민 34:11), (2)납달리 자손의 한 성읍(수 19:35), (3)갈릴리 호수 일대의 게네사렛 땅(마 14:34)등이다. 여기서는 3번째 경우를 가리킨다.

성 경: [왕상15:21]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바아사가 듣고...디르사에 거하니라 - 당시 바아사의 전투 병력은 거개가 라마 부근으로 집중 투입되어 있었다(17절). 그런데 벤하닷 군대는 오히려 후방을 공략,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납달리 지명을 허물어 뜨리고(20절) 그 기세를 몰아 디르사(T-irah)를 향해 계속 직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바아사는 수도(首都)방위를 위해 급히라마에서부터의 퇴군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 디르사 - 디르사는 북방 전략에 치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여로보암이 세겜에서부터 천도한 도시이다(14:17). 요단 강 동편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특히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데 오므리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기 전까지는(16:23,24) 계속 북왕국의 수도였다.

성 경: [왕상15:22]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와 바아사 간의 전쟁]

(주);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 이는 아사가 전국에 부역 총동원령을 내렸음을 말한다. 특히 '모면하지'에 해당하는 '나키'(*)는 '깨끗하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자유롭다'는 뜻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아사가 내린 동원령은 자유스럽지 못한, 속박된 강제동원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역대기는 아사의 통치 일면에 포학스러움이 없지 않았음을 암시한다(대하 16:10).

(주);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 - 바아사는 다메섹 침공의 급보에 접하자 뒷수습도 제대로 못한 채 황급히 철군하였다(21절). 그래서 라마에 건축 자재들을 아사가 탈취해 오히려 자신의 국경 성읍들을 요새화한 것이다.

(주); 게바 - '게바'(*)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라마의 동쪽 그리고 예루살렘 북동쪽 9.6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로서의 유다 왕국의 전통적인 북쪽 경계로 간주된다(왕하 23:8;슥 14:10;느 11:31). 또한 이곳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성을 띤 곳이기도 한다(삼상 13:3,16;14:5;삼하 5:25;따항 14:16). 한편 간혹 게바(Geba)는 기브아(Gibea)와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기브아는 게바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성읍(수 18:24)이다(Mortn).

(주); 미스바 - '미스바'(*, 미치파)는 '바라보다','정탐하다'는 뜻에서 유래한지명이다. 이름이 암시하듯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8Km지점에 위치한 고지대이다. 그런데 이곳은 게바와 마찬가지로 북왕국과의 경계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 또한 이러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 또한 이러한 군사적 중요성 외에도 미스바는 예로부터 종교적 처소이기도 한다(Muilenburg,삿20:1;21:1,8;삼상 7:5-11;10:17-27). 한편 라마에 남겨 놓은 건축 자재로 도리어 국경을 강화한 아사는 이로써 바아사의 남진(南進)을 좌절시켰다. 즉 예루살렘 북쪽 6Km지점인 라마까지 깊숙이 남하하여 유다를 압박하려던 바아사의 의도(17절)는 무산될것이다. 그러나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을 치게 한 아사의 전략은 선지자 하나니의 비난거리였다. 즉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국 군대를 의지한 탓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대하 16:7,8).

성 경: [왕상15:23]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죽음]

(주); 아사의...모든 권세 - '권세'(*, 게부라)는 특별히 왕권을 가리키는 말로써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신 3:24;대상 29:11;욥 12:13 등). 그러나 여기서는 인간의 강력한 왕권 행사를 가리키고 있다. 즉 이는 아사가 강력한 왕권을 지녔었음을 지시하는 말이다. 이후에도 우리는 오므리, 여호사밧 등에게 이 단어가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16:5,27;22:45;왕하 10:34 등).

(주); 발에 병이 있었더라 - 아사는 대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은 왕이긴 하지만(11-15절) 그렇다고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벤하닷을 끌어들여 북왕국을 공격하게 한 일외에도(18-21절) 그가 이처럼 발에 병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역대기는 서술한다(대하 16:12). 이는 곧 아사가 처음과 달리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여호와에게서 멀어져 갔음을 의미하는 한 증거이다(H.J.Austel,Keil&Delitzsch).한편 본절의 '병'에 해당하는 단어(*, 하라)는 '문질러 없애다'란 뜻에서 온 말이다. 이로 보아 아사의 발에 난 병은 가려움증이 아주 심한 피부병이었던 듯하다.

성 경: [왕상15:24]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아사의 죽음]

(주); 그 열조와 함께...장사되고 - 아사의 장례(葬禮)장면을 언급하는 본절은 좀 특이하다. 즉 본절에는 '열조와 함께'라는 문구가 거듭되고 있다. 그리고 장사지(葬事地)도 그저 다윗 성이 아닌 '그 조상 다윗의 성'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1) 잦은 정변으로 왕조 교체가 빈번했던 북왕국에 비해 다윗 왕조가 일관되게 통치했던 남왕국의 연속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본서 서론, '12.열왕기서의 참조 도표'참조. 그런데 이 점은 곧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요소이다. 즉 이는 다윗의 후손이 계속해서 왕위를 잇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삼하 7:11-16)이 실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2) '조상 다윗'이란 표현은 특히 정통성의 소재 문제에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다윗은 신정 국가의 이상적 군왕으로 제시된 인물이다(11:34). 그러므로 다윗과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혈연적 계속이 아니라 가치 판단에서의 계승성 문제이다. 이 점은 북왕국의 왕들에게도 다윗이라는 표준과 척도가 적용되는 데서도 알수 있다(14:8). 그러므로 아사가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었다는 각별한 표현은 신앙적 가치 판단으로서의 정통성이 그에게 있었음을 의미한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5:25]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나답의 행적]

(주);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이 년을...다스린라 - 이처럼 여로보암 왕조의 북왕국 통치는 여로보암 통치 22년(14:20) 그리고 그 아들 나답 통치 2년 도합 2대로 약 23년간에 그쳤다(B.C. 930-909). 그런데 남왕국 유다가 다윗 왕조 통치하에 내적 안정을 이루었던 데 비해, 여로보암 왕조의 이 같은 단명(短命)은 분명코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는 것이 열왕기의 시각이다(14:6-16).

성 경: [왕상15:26]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나답의 행적]

(주);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 즉 여로보암이 자신 뿐 아니라 이스라엘조차 타락케 만든 우상 숭배죄(12:28-33)를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16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15:27]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나답의 행적]

(주); 바아사가...저를 죽였으니 - '바아사'(*)란 이름은 '바알이 듣는다'는 말의 단축형이다(MacLean). 그런데 그가 여로보암 가문을 멸하고 정권을 잡지만 그의 이름이 암시하듯 바아사 또한 우상 숭배에 몰두한 여로보암의 아류(亞流)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 역시 훗날 여로보암과 똑같은 징벌을 받아 아들대 제 2년에 가서 멸족을 당하게 된다(16:8,9). 한편 잇사갈 출신 바아사가 이처럼 에브라임 출신 여로보암 왕조를 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 의미를 지닌다. (1) 이로써 선지자 아히야의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점(14:10,11), (2) 당시 북왕국 내의 지파간 결속이 확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 깁브돈 - '깁브돈'(*)은 '산마루'란 뜻이다. 본래 블레셋의 한 성읍으로 가나안 정복 당시 단 지파에게 배분되었으나 단 지파는 이곳의 점령에 실패한 듯하다(수19:14). 아무튼 이곳은 애굽과 수리아를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이스라엘은 이를 줄 곧 차지하려 들었다. 그런데 아이로니칼(ironical)하게도 바아사가 나답을 모반했던 시기도 깁브돈 공략시이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시므리에게 모반당한 시기도 2차 깁브돈 공략시이다(16:9,15,16).

성 경: [왕상15:28]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주); 아사 제 삼 년에 - 이는 곧 나답의 통치 제 이 년째 되는 해이다(B.C.909). 이로 미루어 나답은 만 이년을 채 통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25절).

(주);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 깁브돈(Gibbethon)포위 공략 중 바아사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실질적으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었음을 증명해준다. 이로 보아 아마도 그는 나답의 군대장관이었던 같다(Hammond). 그런데 이처럼 무력에 의한 유혈 쿠데타는 북왕국 왕권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실추시키는 사건이 아닐수 없다. 이후 이와 같은 반란은 북왕국 역사에 꼬리를 물고 발발하여 하나의 악순환을 이룬다(16:19,20;왕하 9:11-10:36;15:10-31).

성 경: [왕상15:29]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주); 온 집을 쳐서 - 여기서 '쳐서'(*, 나카)는 '살해하다', '쳐죽이다'는 뜻으로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사이다(출 21:12;신19:4;수10:26;삼하2:23 등). 이 동사가 특히 신학적 중요성을 띠는 경우는 하나님이 심판(또는 징계)의 주체가 되실 때이다(신28:22,27,28,35). 본절 역시 여로보암 일족을 멸절시키는 바아사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임이 명시되어 잇따. 즉 이는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성취된 사건인 것일(14:6,11).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이 역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대로이루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이 일에 있어서의 바아사 자신의 동기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보복당할 가능성을 말살하려 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여로보암 가문 중 한 명이라도 남게 된다면 그는 바아사에게 피의 복수를 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민35:16-21). 이는 바아사로서는 큰 후환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바아사는 여로보암 일족을 철저히 진멸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복수 가능성을 봉쇄해 놓고도 그의 운명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바아사 왕조로 하여금 여로보암 왕조의 말로와 같게 하신 것이다(16:11-13).

성 경: [왕상15:31]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주); 무릇 행한 일 - 2년이 채 못되는 나답의 재위 기간(25절) 중 나답의 행적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단 하나의 사실은 그가 깁브돈을 포위, 공격하려 했다는 것 뿐이다(27절). 그리고 역대기는 아예 나답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둘러싸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 여로보암 말년의 패배(7절;대하13장)와 실정(失政, 14:1-20)은 북왕국 내의 여로보암 왕조의 왕권을 인정치 않는 반발의 기운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사실 사사 시대부터 군사적, 정치적 성공을 지도자 승인의 요긴(要緊)이었다. (2)그런데 나답은 이러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한 듯하다. 왜냐하면 바아사의 왕위 찬탈(27,28절)은 세습 왕권보다는 카리스마(Charisma)적 지도자 선택이라는 성향(性向)이 작용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번은 군대의 인기를 독점한 바아사라는 인물이 세습 왕권의 나답을 능가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는 바아사의 출신이 미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서도 엿볼 수 있다(16:2).

(주);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 - 북왕국의 국정 일지에 해당되는 책이다. 본서 기자나 역대기 기자가 성경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이를 참조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4:19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5:30]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주);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 '노를 격동시킨'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화나게하다', '분노를 불러 일으키다'는 뜻이다. 이는 특히 마음의 내적 상태가 점차로 격심한 분노와 흥분 상태에 이르게 됨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으로 표현해서 하나님께서도 언약의 백성이 당신에게 불성실한 경우 그와 같이 상처입고 분노하신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와 상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출34:14;겔16:42). 이와 관련해서는 삼하22:4-20 강해, '신인동형 동성론'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왕상15:32]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주); 아사와...전쟁이 있으니라 - 왕들이 거듭 바뀌어도 남북의 적대 정책에는 이처럼 변함이 없었다. 한편 아사와 바아사 사이의 인상적인 전투는 16-22절에 잘 요약되어있다. 원래 바아사는 무인(武人) 출신이라 전쟁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공적으로 남왕국을 공략해 예루살렘 턱밑 6km 지점 라마까지 진출하였다(17절). 그런데 아사의 책략으로 인해 동맹을 파기하고 북왕국의 후방을 급습한 벤하닷 때문에 바아사는 라마에서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18-21절). 그러나 이 일 후에도 남북왕국은 항상 전시(戰時) 상태에 놓여 있었도 상호 적대감은 증가하였다. 따라서 분열 왕국 시대(B.C.930-586)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깊은 골이 가로놓여 있었던 암울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성 경: [왕상15:33]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앞서 바아사에 대한 언급이 두 번(16-22,23절) 나왔지만, 그것은 유다 왕 아사의 통치(9-24절) 및 이스라엘 왕 나답의 통치(25-32절)를 서술하던 중간이다. 반면 이제 본절은 정식으로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를 서술하는 첫 문장이다. 아마도 이는 16장에서 바아사의 행악(行惡)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그 도입부로 바아사의 통치기간 및 통치 성격을 소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주); 디르사에서 - 디르사(Tirzah)에 관해서는 21절과 14:17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북왕국의 수도가 세겜(Shechem)에서 디르사로 옮겨진 것은 여로보암 때지만, 명시적으로 북왕국의 수도로서 등장하는 것은 본절이 처음이다(21절).

(주); 이십 사 년을 치리하니라 - 바아사의 재위 기간은 B.C. 909-886년이다. 그런데 이 기간은 북왕국 북편의 아람 동맹국들이 다메섹의 주도하에 북왕국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던 시기이다. 즉 이들은 지중해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이스라엘과 분쟁을 일으켰다(19-21절). 또한 이때는 유브라데 강 동편에 있는 앗수르가 서서히 강대국으로 힘을 키우고 있던 시대이다. 이러한 북방의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응하고 위한 정책의 일환이 곧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등의 디르사 왕도화(王都化)이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바아사가 24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강한 군사력을 키우는 데 치중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아사가 남침에 힘을 쏟자 아사조차도 위급하여 벤하닷을 매수치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16-22절).

성 경: [왕상15:34]

주제1: [남북 왕조의 유형적 특성]

주제2: [바아사의 행정]

(주); 여로보암의...죄 중에 행하였더라 - 바아사에 대한 열왕기의 간명한 평기아다. 신앙 공동체와 그 순수성에 관심하는 열왕기의 관점에서 볼 때 바아사는 단지 왕국 분열과 타락의 골을 깊게 한 인물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가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대로 북방의 성소(제멋대로의)를 유지해 나갔음(12:28-33)은 곧 예배의 단일한 중심지(예루살렘)가 지켜 줄 예배의 순수성을 해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배의 통일성이 지켜 줄 민족적 단일성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신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를 보다 참조하라.

성경: [왕상16:1]

(주); 하나니의 아들 예후.- "예후"란 이름은 "그는 여호와이시다"란 뜻이다. 그런데 본절의 예후(Jehu)는 오므리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북이스라엘의 10대 왕 예후와는 同名異人이다(왕하 9:2). 한편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Hanani) 는 유다 왕 아사의 실책을 경고하다 옥에 갇힌 인물이다(대하 16:7-10).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예후는 본장에서처럼 바아사를 책망했을 뿐 아니라 여호사밧 왕을 아합왕과 연합한 일로 책망한 자이다(대하 19: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후 부자(父子)가 모두 하나님의 신실되고도 용맹스러운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주); 바아사를 꾸짖어 가라사대.- 유다의 선자자인 예후가 이처럼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 15:28-34)를 책망한 것은 당시 정세(15:32)로 보건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당시 예후의 예언 속에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끝없는 관심과 배려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되기는 했으나 남유다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 속에 포함된 백성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남왕국의 선지자 예후를 통해 북왕국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인위적 방법이 굳건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렘 3:12).

성경: [왕상16:2]

(주); 내가 너를 진초에서 들어 -되게 하였거늘 - "진토"는 "회색이 되다"/ "빻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누자적으로는 "티끌", "흙"의 뜻이겠으나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을 의미한다. 14:7의 여로보암에 대한 언급이 "백성 중에서 들어 주권자가 되게하고"인 것과 비교하면 이는 훨씬 비하(卑下)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본절은 바아사의 출신 신분이 매우 비천하였음과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상기시켜 준다. 즉 바아사는 왕통을 이은 자도 아니었으며 큰 지파 출신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의 집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14:14) 왕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이 같은 손길(마 10:29-31)을 발견하였더라면 배은 망덕한 여로보암의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H. Austsl).

(주); 주권자 - 이에 해당하는 "나기드"는 "어떤 것을 사람 앞에 눈에 띄도록 높이 두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즉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탁월한 인물을 가리킨다. 한편 바아사가 비천한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된 것은 물론 그의 용맹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 용맹은 궁국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좇아 바아사에게 주신 것이다.

(주); 격동하였은즉- 15:30 주석 참조.

성경: [왕상16:3]

(주); 쓸어 버려 - 이에 해당하는 "바아르"는 본래 "불태우다", "소멸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는 "불태워 완전히 연소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는 사악한 자를 징벌하는 하나님의 격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한편 이후에도 선지자들은 반역한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징벌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예가 있다(사 30:27 ; 렘 7 :20 등).

(주);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리니 - 앞서 2절이 바아사의 죄를 우상 숭배 곧 하나님께 대한 배은 망덕으로 규정하고 있음에 비해 본절은 이제 그에 상응 하는 하나님의 징벌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바아사의 가문을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 내용은 다음 4절에서 언급되고 있으니 참조하라.

성경: [왕상16:4]

(주); 죽은즉 개가 먹고. - 이는 여로보암 가문을 향한 저주로 사용됐던 말(14:11)과 동일한 문구로써, 비참한 말로는 물론 사후에도 치욕을 면치 못할 바아사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이 지은 것과 같은 동일한 죄(14:9)에 빠진 이상(2절) 이처럼 여로보암이 받은 형벌과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됨은 지극히 마땅하다. 한편 이렇듯 엄정하고 단호한 공의의 심판은 오늘날 일시적 탐욕이나 영달에 눈이 어두워 불의와 영합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잠시 오욕의 낙을 누리기 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영예로운 고난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히 11:25).

성경: [왕상16:5]

(주); 바아사의 권세. - 여기서 "권세"는 강력한 왕권(王權)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바아사가 용감하고 전투적인 인물임을 나타내는 단어로 이해하기도 한다(Ewald). 그러나 앞서 유다 왕 아사에게도 같은 단어가 적용되었음을 볼 때 이는 본래대로 통치에 있어서 강력하고 힘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단어로 봄이 타당하다(Keil & Delitzsch).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23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스라엘왕 역대 지략.- 14:19주석 참조.

성경: [왕상16:6]

(주); 디르사. - 세겜(Shechem, 12:25)에 이어 두 번째로 북이스라엘의 수도(首都)가 된 왕도(王都)이다. 세겜 북동쪽 11km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4:17 주석 참조.

(주); 그 아들 엘라. - "엘라"는 상수리나무 비슷한 어떤 나무의 명칭이면서(Guthrie, Jr), 또한 과거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계곡의 지명이기도 하다(삼상 17:2, 19). 이곳은 깁브돈 부근의 인접 지역인데 깁브돈은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자신의 왕조를 창건한 곳이다(15:27,28). 이로 볼 때 아마도 바아사는 그 지역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엘라(Elah)로 지은 것 같다(Hammond).

성경: [왕상16:7]

본절은 1, 2절이 별 의미없이 반복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본절은 2절에서 생길지도 모를 오해를 막으려고 추가된 해설적 성격의 절이다(Bahr, Hammond, Keil). 이때 오해란 바아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召命)을 받아 여로보암의 집을 멸하였다고 생각하는 오해이다. 그러나 본절에 분명히 나타나듯 바아사는 단지 이기적 동기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즉 본절은 바아사가 우상 숭배 죄악을 저질었을 뿐 아니라 여로보암 일족을 살해한 일도 고발하고 있다("또 그 집을 쳤음이더라"). 다시 말해 바아사가 여로보암 왕조를 전복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야심과 정권욕(政權慾)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바아사를 도구로 삼아 패역한 여로보암 가문을 징계한 것일 뿐이다.(15:25-30).

(주); 소위(所爲). - 이에 해당하는 "마아쉐"는 "행하다", "만들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물건을 만드는 것과 관련해서는 "기량", "솜씨"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외에는 윤리적 행위를 지칭 하는데 대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출 23:24 ; 스 9:13 등). 여기서도 바아사가 저지른 부당한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성경: [왕상16:8]

(주);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륙 년에. - 아사의 즉위를 B,C.910년경으로 볼 때 이때는 곧 B.C.886년경이다.

(주); 엘라가...이년을 위에 있으니라. - 엘라는 아사 제 27년째에 자신의 군대 장관 시므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9,10). 따라서 엘라는 만 2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앞서 나답이 당한 것과 똑같은 재난이라 할 수 있다(15:28).

성경: [왕상16:9]

(주); 마시고 취할 때에. - 15절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는 북왕국의 군대가 깁브돈에 출정하여 공략 중에 있었던 때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점에 왕이 대신의 집에서 연회(宴會)를 열고 있었다는 것은 뭔가 방탕한 인상을 준다. 더구나 당시 신하의 향응(響應)를 받았다는 품위에 어긋난 행위라는 지적도 있다.(Rawlinson).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엘라의 인품상 어떤 결점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신복 시므리의 역심(逆心)도 어느 정도 어린 면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 즉 그는 내심 엘라를 왕으로서는 모자라는 인물로 비웃었을 수 있다.

(주); 신복...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 성경에서 시브리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이름도 출신 지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 본절에 의하면 그는 오므리(Omri)와 함께 군부 내의 실력자인 점을 알 수 있다. 즉 이제 시므리는 북왕국 병거대의 절반을 이끄는 군대 장관인 것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이러한 시므리를 언급함에 있어 굳이 "심복"이란 단어를 덧붙이고 있는 의도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즉 솔로몬의 신복이던 여로보암이 반역해 세운 북이스라엘 왕국이 줄곧 신복의 하극상으로 인해 오욕(汚辱)의 역사를 되풀이하였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Hammond). 한편 시므리는 또 한 사람의 군대 장관인 오므리가 깁브돈 출정 중에 있을 때 왕궁 수비를 맡고 있었던 것 같다(15-17절). 그리고 그때 왕이 술에 취하자 정권 탈취라는 야심적 기회를 포착하였을 것이다.

성경: [왕상16:10]

(주); 쳐죽이고. - 이 단어가 연상시켜 주는 잔혹성은 3절의 심판 예언 중 "쓸어 버려"가 주는 참담한 이미지에 상응한다. 즉 엘라가 당한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선고와 그림처럼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 년.- 이때는 곧 엘라 즉위 이듬해인 B.C. 885년경이다. 8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처럼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은 자의 아들이 통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피살되는 사례는 엘라에 이어 북왕국 역사에서 두 번이나 더 발생된다(왕하 15:13,14, 23-26).

성경: [왕상16:11]

(주); 남자. - 이에 해당하는 "솨탄"은 "벽을 향해 소변보다"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실 서서 소변보는 것은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주);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남기지 아니하고. - 반역으로 차지한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 시므리가 한 첫조치는 이처럼 앞서 바아사가 행한 것(15:29)보다 더 광범위한 학살이었다. 즉 시므리는 엘라의 일족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까지도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본절에서 가리키는 "족속"은 엄밀히 (1) 유산 상 속의 권리 및 (2) 피의 복수 의무를 지닌 친족들을 가리킨다(Hammond, 레 25:26 ; 민 35:19 ; 룻 2:12,13 등), 따라서 이들은 언제든지 후환이 될 가능성이 짙은 대상이다. 그러나 시므리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수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엘라의 친구들까지도 학살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정당치 못한 권력 찬탈은 항상 그에 따른 불안감을 갖게 되고 따라서 온갖 자구책(自救策)을 강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시므리는 누구보다도 단명한 7일 천하의 찰나를 누렸을 뿐이다. 따라서 이는 곧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 127:1)는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일례이다.

성경: [왕상16:12]

(주); 멸하였는데. - 이에 해당하는 "솨마드"는 "파괴하다", "진멸시키다"는 뜻이다. 이는 곧 전쟁이나 대량 학살과 같은, 갑작스러운 큰 재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대개 복수나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 본절에서도 시므리가 바아사 왕가를 멸절시킨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경우이다. 즉 이는 불로 태워 재로 만들 듯이 바아사 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갰다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한 번 발하여진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사 55:10,11).

성경: [왕상16:13]

(주); 그 헛된 것. - "헛된 것"에 해당하는 "하벨"은 "무가치한 것"을 뜻한다. 이는 본래 "공연한 헛수고"나 "무의미한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우상(偶像)을 가리키고자 사용 되었다(전 2:11 ; 6:7 ; 8:10 ; 사 49:4). 즉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섬길 수밖에 없는 "거짓 신"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실상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일이란 참된 신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채 미망(迷妄)을 헤매는 "헛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주); 격동하였더라. - 이는 이미 앞서 2절에서 언급된 단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와 관련, 열왕기에서 "우상 숭배=하나님의 노를 격동케 하는 죄"라는 공식(公式)을 계속해서 찾아 볼 수 있다(15:30 ; 21:22 ; 22:53 ; 왕하 17:11 ; 23:26) 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30 주석을 참조하라.

성경: [왕상16:14]

(주); 남은 사적. - "사적"에 해당하는 "다마르"는 일명 "행적"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14:19). 그런데 본서 기자가 엘라의 여타 행위들에 대하여서 일절 침묵하고 있음을 상대적으로 엘라의 죄악(13절)을 보다 두드러지게 고발해 주는 효과를 띤다. 14:19 주석 참조.

성경: [왕상16:15]

(주);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 본문 후반을 참고하면, 시므리가 1주일 동안이라도 재위(在位)할 수 있었던 것은 기실 깁브돈 출정군이 디르사로 회군(回軍)하는 데 1주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군한 군대는 마침내 시므리의 왕 행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시므리의 7일 천하는 3일 천하로 끝난 과거 우리나라의 갑신 정면(1884년)을 생각게 해주다. 그런데 시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처럼 단명(短命)한 것은 백성들이 그의 반란에 동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절).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시므리가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그 까닭은 시므리가 매우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11절).

(주); 때에 백성들이.... 있더니. - 수도 디르사의 왕궁에서 왕관 뺏기 게임이 벌어지는 시점에서 백성들은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이처럼 백성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향연을 벌인 엘라의 모습이 무책임하고 경박한 왕권을 상징하듯(9절), 백성 부재의 현장에서 벌어진 왕위 쟁탈전은 백성과 무관한, 백성을 소외시킨 정통성 결여의 권력 다툼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주);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 이스라엘은 일찍이 나답 왕 때에도 깁브돈을 공격한 바 있는데 그때 나답은 바아사에 의해 살해 되었다(15:27). 그런데 그때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은 또다시 깁브돈을 공략 중이며 이 기간 동안 시므리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느끼게 된다. (1) 동일한 범죄에 대한 동일한 심판이 동일한 장소와 관련하여 일어났다는 것(13절 ; 15:25-30)은 하나님의 심판의 오의(奧義)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2) 그리고 이스라엘의 내란은 불레셋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점이다. 한편 솔로몬 당시, 블레셋 지경(地境)은 이스라엘의 판도 내에 있었다(4:21). 그러나 솔로몬 사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통치권에서 이탈하였다. 그러기에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실지(失地)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썼는데 블레셋 공략을 위한 전초 기지인 깁브돈을 주요 공격 목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 [왕상16:16]

(주); 진중(陣中) 백성들. - 이는 본절 하반부와 다음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무리"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진중 백성들이란 깁브돈 출정군을 가리키니 "이스라엘 무리"라는 호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가 이들을 "이스라엘 무리"로 호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1) 오므리가 비교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범위한 추종을 얻은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실제로 이스라엘의 차기 주권자가 된 인물 역시 오므리임(23절)을 강조하기 위함이다(Montgomery).

(주);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시므리의 왕위 찬탈 소식에 접한 백성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엘라가 통치 기간 중 민심(民心)을 샀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시므리 및 그의 즉위 과정이 백성의 수긍을 받지 못하였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이는 시므리의 왕위 찬탈 자체가 대역무도한 불법이었을 뿐 아니라 엘라 가문과 그 친척, 친구들에 대한 시므리의 난폭하고 잔혹한 살해 행위(11절) 또한 백성들의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주); 진에서... 왕을 삼으매. - 오므리(Omri)는 로마사에서 자주 보듯 전쟁터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Mattew Henry). 따라서 그가 명실 공히 북왕국 전체의 왕으로 군림하기까지는 좀더 많은 세월이 필요 하였다. 즉 오므리는 시므리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17,18절) 디브니(Tibni)라는 경쟁자와 약 5년(B.C. 885-881년)간의 내전을 치뤄야 했던 것이다(21-23절).

성경: [왕상16:17]

(주); 이에...에워쌌더라. - 16절과 본절에 의거할 때 우리는 시므리의 7일간 재위 기간(15절) 동안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1) 시므리의 모반 소식이 깁브돈 출정군에게 전달됨, (2) 진중에서 백성들이 오므리로 왕을 삼은 후 디르사로 회군함. (3) 오므리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궁에서 농성하는 시므리군을 격파함 등이다. 이상에서 보듯 오므리의 행동은 매우 민첩하고 신속했다. 그리하여 시므리는 미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들이닥친 오므리군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이로보아 오므리는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열왕기 본문은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모압 비문(Moabite stone)에 나타나 있듯 실상 오므리는 재위 기간 중 모압을 정복하는 등 많은 군사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Maclean).

성경: [왕상16:18]

(주); 왕궁 위소. - "위소"는 "높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왕궁 내에서도 특별히 높은 곳에 있는, 최후의 요새와 같은 처소일 것으로 보인다.

(주);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 수리아역(Peshitta)은 본절과 관련, 오므리군이 공격차 왕궁 위소에 불을 놓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명백히 시므리의 자살을 말하는 것이다. 즉 디르사 성이 함락되자 시므리는 최후의 도피처인 왕궁 위소로 도피했으나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오므리 군대를 목도하고서는 절망 끝에 그만 불을 놓아 자살하고 만 것이다. 사실 시므리는 자신이 잔혹한 유혈극을 벌였던 인물이었으니(9-11절) 왕권 쟁탈전에서의 자비란 기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자살로 최후를 마친 시므리에게서 우리는 철두철미 자의성(恣意性)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를 본다. 즉 그가 추구한 왕권은 스스로의 권력욕에서 기인했을 뿐 하나님께로부터 봉사의 직분을 받았다는 자각의 흔적이 전혀 없다. 15절 주석 참조. 따라서 신정 정치의 이상을 품은 열왕기 사가(史家)가 그런 시므리에게 조금치의 정통성도 인정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시므리와 오십 보 백 보의 인물들이 들락날락 했던 북왕국 왕권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성경: [왕상16:19]

(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 혹자는 본절을 시므리가 7일 천하(15절) 동안 우상 숭배를 행했음을 비난하는 절이라 단정한다(Bahr). 그러나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범주에는 우상 숭배와 함께 주인을 배반한 죄가 포함된다(12:19). 그러므로 본절에서 시므리에게 적용된 "여로보암의 길"은 하극상(下剋上)의 범죄에 보다 강조가 있다 하겠다. 훗날 이세벨도 요람 왕을 죽인 예후에게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는 말을 하고 있다(왕&#46145;하 9:31). 이처럼 당시 시므리는 "주인을 죽인 자"라는 고착된 이미지로 보통 명사화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본절 역시 시므리의 그런 범죄를 지적한 경우로 보는 것이 옳다.

성경: [왕상16:20]

(주); 시므리의 남은 행위......기록되지 아니 하였느냐. - 본절은 이스라엘 열왕의 결말 공식(5,6,14,27,28절 ; 14:19, 20 ; 15:31)에 맞추어 시므리의 결국을 마무리하려 애쓴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는 "남은 사적", "무릇 행한 일", "열조와 함께 자매" 등의 상투적 어구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재신에 "그 모반한 일"이란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이미 19절에서 언급하였듯 시므리의 행적이 모반자로 규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왕조 실록은 이러한 시므리의 역모(逆謀)나 7일 천하의 행적에 대하여 본서보다 더 상세히 기록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성경: [왕상16:21]

(주); 기낫의 아들 디브니. - 본문을 제외 하고는 디브니(Tibni)에 대한 성경상의 기록이 없다. 그런데 깁브돈 출정군을 이끌고 돌아와 시므리를 격파한 오므리(15-18절)와 경쟁하는 일은 어는 정도 군사력에 자신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대개 디브니를 당시 엘라(8,9절)의 세 군대 장관(시므리, 오므리, 디브니)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Ward). 한편 디브니의 경우 생략되어 있다(16,17,22,23절). 이 점에 착안하여 디브니는 이스라엘 명문가의 후손이나 오므리는 정통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는 자도 있다(Maclean).

성경: [왕상16:22]

(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본절이 강조하는 바는 이제 북왕국이 약육강식의 무대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즉 이제 누구든지 힘만 있으면 왕이 되는 판국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정 정치의 이상으로써 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제사장적 승인, 국민의 동의(1:38,39) 등이 일절 무시되고 대신에 무력에 의한 힘- 제일주의가 횡행하게 된 것이다. 과거 여로보암이 형식적이긴 해도 자신의 왕권을 여호와 종교와 접목시키려 한 것(12:25-33)에 비하면, 이러한 현상은 불법의 노골화로써 일종의 위헌(違憲)적 현상이다. 한편 깁브돈에서 선포한 오므리의 왕권(16절)은 횃수로 5년(아사 27년-아사 31년)간의 내전을 거친 뒤에야 비로서 확정되었다(23절).

성경: [왕상16:23]

본절의 연대 문제는 얼핏 매우 혼란스럽다. 자체내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째문이다. 즉 본절은 오므리의 즉위 연대를 아사 31년(B.C. 880년경)으로 말하면서도 재위 기간은 12년(아사 27년0아사 38년)으로 말한다. 이것은 오므리의 공식 즉위 연대를 그가 디브니를 격파한 시점부터 잡은 반면(22절) 재위 기간은 깁브돈에서의 옹립 시점(16절)부터 잡은 탓이다. 여하튼 깁브돈을 기점으로 오므리 왕조가 출범하였는데 오므리에서 여호람에 이르기까지 오므리 왕조의 총 통치 기간은 44년간(B.c. 885-841)이다.

성경: [왕상16:24]

(주); 은 두 달란트로...사마리아 산을 사고. - 1 달란트(Talent)를 대략 34kg으로 봄으로 은 두 달란트는 68kg 정도이다. 그런데 당시 은의 주가가 아무리 높았다 하더라도 금보다는 낮았을 터이니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구입함에 있어 비싼 가격을 치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점은 오므리가 이 산을 매입한 것이 율법에 위반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토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인 동시에 각 백성즐이 영원한 기업으로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정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은 토지를 영구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였다(레 25:23-28). 물론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을 산 경우가 있기는 하나(삼하 24:21), 오므리의 rluddn와는 그 성경이 달랐다. 즉 아리우나는 이방 족속인 여부스 사람이었으며, 그의 타작 마당을 다윗이 구입한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종교적 목적에서 그리하였다. 한편 오므리의 불법적 토지 매입은 드의 아들 아합에게도 영향을 준듯하다. 아합은 기업으로 물려 받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취하였다(21:1-16).

(주); 사마리아. - 사마리아(Samaria)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67km. 지중해 동쪽으로 약 40km 가량 떨어진 팔레스타인 중앙 산맥의 한 언덕에 위치한 성읍이다(Beek). 이곳은 북왕국의 전(前) 수도였던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주); 그 산위에 성을 건축하고. - 당시는 오므리가 디브니를 물리치고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지 2년 째 되던 해엿다. 그때에는 정국(政局)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으므로 오므리는 새로운 왕궁 건축과 수도 정비 사럽에 온 신경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마리아성 건축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1) 여로보암에 의해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은 시므리에 의해 불타 버렸고(18절), 수도 디르사 또한 그 동안의 극렬한 전투로 말미암아 형편없이 파괴되었을 것이기 때눈(17,22), (2) 새로운 왕조에 걸맞는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3) 사마리아의 지형학적 우수성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에 북왕국을 공격한 여러 나라의 군대가 끝내 사마리아는 점령하지 못했고, 강대국 앗수르조차도 장기적인 포위 공격 끝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던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20:1-30 ; 왕하 6:24 ; 18:9,10).

성경: [왕상16:25]

(주);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 26절로 미루어 보아 오므리의 죄악은 무엇보다도 여로보암의 경우와 같이 우상 숭배의 죄악인듯하다(12:28-30). 그런데 본절에서 보듯 오므리는 이전 누구보다 더욱 악하게 행했다고 고발당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합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고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린 것(29-33)을 보면, 이미 오므리 시대에 이방과의 교류 및 우상 숭배의 정책적 장려가 있었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성경: [왕상16:26]

(주); 헛된 것. - 13절 주석 참조.

(주); 격발케 하였더라. - 또는 "격동시키다"로도 번역되는 원어 "카아스"는 특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분노와 흥분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5:30 주석을 참조하라.

성경: [왕상16:27]

(주); 오므리의....그 베푼 권세. - 비록 열왕기는 오므리를 종교적 관점에서 악한 왕으로 간단히 치부하지만(25,26절) 오므리는 실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즉 (1) 오므리가 모압을 정복했다고 기록된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발굴, (2) 앗수르 왕 살만에셀 2세(Sharmaneser Ⅱ)의 기록에 이스라엘을 언제나 오므리의 집으로 칭한 사실, (3) 이 시기에 유다와의 효과적인 외교로 내전이 없었다는 점 등에서 오므리의 진면목은 충분히 발견된다(Maclean 등). 그런 까닭에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생략되어도 "오므리의 ...베푼 군세"라는 어구가 첨가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왕상16:28]

(주);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 왕들이 수도(首都)에 자기 묘실이 있어 죽고난 후 그곳에 매장되는 것은 관례이다(Hammond). 그러나 앞서 유혈 쿠테타와 내전 등으로 인해 빈번히 정권이 교체된 북왕국의 험난한 역사를 고려할 때 이는 매우 평안한 죽음이다. 한편 여기서 "장사되고"는 "묻다", "매장하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 오므리의 매장은 굴이 아닌, 땅에 묻는 형태로 이루어진 듯하다.

성경: [왕상16:29]

(주); 아사 제 삼십 팔 년에. - 이때는 곧 B.C. 874년경이다.

(주);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 "아합"이란 이름은 "아버지의 형"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Maclean). 그런데 혹자는 이 이름의 뜻을 "아버지의 형제"로 풀어 아합은 부친 오므리와 마찬가지로 불경한 인물임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Hammond). 만일 이 이름이 부친에 대한 존경 때문에 부친과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면, 오므리가 거둔 성공적 업적을 본받고자 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아합도 부친 못지 않게 군사, 외교면에서 유능한 통치자였던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의 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아합은 부친 오므리보다 더 심각한 반신앙적 인물이었을 따름이다(30절).

(주); 이십 이 년을....다스리니라. - 아합의 재위 기간은 B.C 874-853경이다. 이 부렵 북왕국 주면 정세는 오므리 당시의 기본 구도와 큰 차이가 없다. 즉 아람(Aram)의 위협에 대해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시돈(베니게)과 동맹하여 대립하는 한편, 유브라데 동편의 앗수르의 증가하는 압력에 대해서는 일단 대립을 지양하고 관망하는 양상을 띤다. 따라서 이러한 일시적 안정 정세의 추이(推移)는 북왕국의 종교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곧 아합 이하 모든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하여 쉽게 우상 숭배 죄에 물들고 만 것이다(31-33절 ; 18:21).

성경: [왕상16:30]

(주);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악을 더욱 행하여. - 이처럼 아합은 이전의 열왕보다 더한 극도의 혹평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전의 왕들이 우상 숭배를 사사로이 행했을지라도 아합처럼 공식 제사에 이방 종교를 끌어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합이 타락하게 된 데에는 시돈 왕녀 이세벨과의 결혼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31-33절).

성경: [왕상16:31]

(주); 가볍게 여기며. - 원문 "와예히 하나켈"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시시하게 보며"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합 왕은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도는 죄로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완악한 심령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온갖 극악한 범행을 저지르고서도 하등 죄책을 느끼지 않는 화인(火印) 맞은 양심의 소유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한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몇몇 윤리적 계율을 어기지만 않으면 하등 거리낄 것이 없는 것인 양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인류를 뒤덮고 있는 죄악의 실체와 그 치명적 심각성에 대해 밝히 지적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해방되게끔 하는 유일한 해결책 또한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롬 3:9-18 ; 6:18 ; 엡 2:1 ; 골 1:14).

(주); 시돈 사람의 왕. -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Phoenicia)의 두 도시 국가였으나, 시돈이 더 오랜 항도(港都)였기 때문에 페니키아 전체의 대명사로도 불리운다. 즉 두로 왕이 시돈까지 지배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를 "시돈 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두로 왕 히람 2세도 "시돈 왕"이라 불리운 적이 있다. 한편, 오므리는 아합을 페니키아 왕의 딸 이세벨(Jezebel)과 결혼시켰다. 이스라엘과 페니키아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관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편리했지만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바알 숭배를 들여 놓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영적으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두로 또는 페리키아 신은 바알 멜가트(Ball Mrlgart)라 불리우는데 이 신은 가나안의 더 오래된 신인 바알과도 일치한다.

(주); 엣 바알. - "엣 바알"은 "바알이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엣바알(Ethball)은 원래 아스드롯 신전의 제사장이었는데 펠레스(Phe;es) 왕 (히람의 후손)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Come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Ⅲ, p.228).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32년간 통치 하다가 68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이세벨의 극성스럽고 잔인한 성품(19:2)은 이러한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주); 이세벨. - 이 이름의 정확한 뜻은 모르나 우가릿 본문(Ugarit text)을 참조할 때 바알을 가리키는 "즈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 임물이다. 즉 전제 군주적 권력욕이 대단함과 동시에 바알 숭배에 극성스러우리만치 충성했다는 점이다(Harver). 그런데 이러한 특성은 유다 왕 여호람과 혼인하여 훗날 남왕국의 여왕이 된 이세벨의 딸 아달랴(Athaliah)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왕하 8:18).

(주); 아내를 삼고,- 이는 곧 시돈과 이스라엘의 동맹 관계를 위한 정략적 결혼이다. 그런데 이 동맹은 정통적 우호 관계나 상업적 이익 외에도 당시 벤하닷(Benhadad)이 이끄는 아람 세력(20장)에 공동 대처키 위한 것이다(Maclean). 29절 주석 참조. 한편 이세벨은 마치 열정적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의 신을 바알로 대치하려 한 듯하다. 아합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세우게 된 것도 이러한 이세벨의 극성 탓인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 [왕상16:32]

(주); 사마리아에...쌓으며. - 이로써 이제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가 바알 숭배의 중심지가 된 셈이다(Gates). 이 점을 여호와의 성전이 서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한편 "사마리아에 건축된 바알의 산당"은 아직까지 그 흔적조차 발굴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산당은 아합의 궁전의 일부에 속한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발굴자의 보고에 따르면 아합 궁전은 팔레스틴에서 발굴된 어느 건축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성경: [왕상16:33]

(주); 아세라 목상. - 아세라(Asherah)는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숭배된 풍요의 여신이다. 초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Ashtaroth)이 동일한 신으로 오해되었으나 후대의 연구 결과 서로 다른 신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4:15 주석을 참조하라.

(주); 심히...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 여기서 "심히"에 해당하는 원어는 "야사프"라는 동사이다. 이는 "더하다", "증가시키다"는 뜻이다. 즉 아합의 행위는 이전 왕들이 하나님을 분노케 한 것보다 더욱 분노를 증가시키는 행위였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 앞에 범죄하여 그분의 노를 격발시킨 결과 아합과 이세벨의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22:25). 즉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21:23,24) 아함의 피는 개들의 먹이가 되었으며(22:38), 이세벨은 예후의 창에 찔려 머리와 손, 발을 제외하고 전부 개들의 먹이가 되었던 것이다(왕하 9:33-37). 이렇듯 이들의 참혹한 죽음은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음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의 결과였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마지막 심판의 날에 패역하고 완고한 무리들에게 임하게 될 영원한 형벌은 이보다 더욱 비참할 것이다(막 9:48,49).

성경: [왕상16:34]

(주); 그 시대에. - 이에 해당하는 "베아마유"는 "그의 날들에"(in his days)란 뜻이다. 그런데 이는 문맥상 "그의 시대에"로 번역됨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KJV와 RSV("그의 시대에"), NIV("아합의 때에"), Living Bible("그의 통치 동안"), 공동 번역("아합의 다스리는 동안") 등의 번역도 비교적 적절함을 알 수 있다.

(주); 히엘....스굽을 잃었으니. - 여리고(Jericho)는 본래 베냐민 지파에 배당되었던 땅이다(수 18:21). 그런데 10지파의 반란(12:16-20)으로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 북왕국의 국경 성읍이 되었다. 아마도 아합(Ahab)은 이 여리고 성읍을 재건함으로 요단강을 가로지르는 길목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히엘(Hiel)은 이 건축 사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엘은 여리고를 재건하는 도중 두 아들을 잃고 만다. 이는 곧 일찍이 여호수아가 발(發)한 경고(수 6:26)를 무시한 탓인데 당시의 예언이 약 5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문자 그대로 성취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겨기서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사상(삼상 15:29 ; 마 5:18)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성 경: [왕상17:1]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

(주); 길르앗 - '길르앗'(*)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으로 여겨진다(GuthrieJr.). 그렇다면 신앙의 암흑기인 아합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증거자 엘리야가 이 지방에서 배출된 점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한편 길르앗(Gilead)이라는 지명은 넓게는 남쪽 아르논 강에서 북쪽 야르묵 강에 이르는 요단 동편 일대를 가리킨다(Cohen). 이곳은 곡창 지대와 목축지로 유명하였는바 일찍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곳을 자신들의 기업(基業)으로 요구할 정도였다(민 32:1-5).

(주); 디셉 - 디셉(Tisheb)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여섯번이나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21:17, 28; 왕하 1:3, 8; 9:36). 다만 길르앗 북방 산악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리스팁(Listib)일 가능성이 있다(Cohen). 한편 외경 토빗서 1:2에는 납달리에있는 게데스(Kedesh)의 남쪽 한 지역이 '디셉'으로 언급되고 있다. 만일 '디셉 사람'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N. Glueck, 'Explorations in Eastern Palestine IV).

(주); 엘리야 - '엘리야'( 또는 , 엘리야후)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 같은 이름의 뜻을 구현하는 데 바쳐진다. 한편 성경에는 엘리야(Elijah)의 가계(家系)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B.C. 9세기의 유명한 선지자로서 아합 왕(B.C. 874-853) 때부터 아하시야 왕(B.C.853-852)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침례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 볼 정도였다(요 1:21).

(주);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 짧은 어구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즉 본절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말은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참 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말이다. (2) 그리고 그 여호와가 바로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다수인 당시의 형편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현주소와입장을 밝히는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大使)의자격임을 밝히는 말이라 하겠다.

(주);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러한 표현은 구약 시대 당시 일반적인 맹세의 형식이긴 하다(18:10; 렘 5:2; 16:14; 호 4:15). 그러나 단지 상투적 어구만이 아니고 당시 상황하에서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절실해진다. 즉 바알 및 우상 숭배 세력이 지배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참 신은 여호와'라는 이 어구의 한자는 담대한 도전의 성격을 띤 것이라 볼 수 있다.

(주); 내 말이 없으면...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로 언급되고 있다(신 11:11, 14; 욥 5:10;28:26; 36:27; 시 147:8). 그리고 그 반면에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더 이상 비를 내리지 않아 생명을 쇠약하게 하며 땅을 메마르게 하리라는 경고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신 11:17; 28:24). 그런데 수년간 비가 없으리라는 본절의 가뭄 예언 역시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다(16:26-33). 더욱이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한 가뭄이 가시지 않으리라는 엘리야의 선언은 바알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왜냐하면 당시 바알(Baal)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주관하는 신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레 26:1-13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 참조. 그러므로 그 같은 능력조차도 여호와의 장중에 있다는 이 예언은 곧 바알이 생명없는 거짓 신임을 폭로하는 것이다(Lange).

성 경: [왕상17:2]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

(주); 여호와의 말씀이...임(臨)하여 - '임하여'에 해당하는 '하야'(*)는 원래 '되다', '존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정적(靜的)인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대단히 역동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기에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 그저 '있다'라고 하지 않고 '오다', '임하다' 등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편 한 시대의 다수를 홀로 상대해야 할 신앙의 용사 엘리야에게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수시로 말씀을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지시하셨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소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은혜 가운데 주셨음을 의미한다.

성 경: [왕상17:3]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

(주);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 앞서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경고했을 것이다(1절). 그러므로 '여기서'는 아합의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성경에서 '동으로'는 일반적으로 요단 강 동편을 말한다. 요단앞 - '앞'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 페네'(*)는 창 16:12에서 '동방'으로 번역되었는데 여기서도 '동쪽'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할 듯 하다(Keil &Delitzsch, Pulit Commentary). RSV 등 대다수 영역본과 한글 공동 번역도 이를 '동쪽'(east)로 번역하고 있다.

(주); 그릿 시냇가 - '그릿'(*, 게리트)은 '분리', '단절'이란 뜻이다. 그러므로이 시내는 어떠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 구실을 했던 것 같다(Hammond). 한편 이 시내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으나 엘리야가 길르앗 사람인 점(1절)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요단 동편 길르앗의 동굴 지대에 있는 시내 중 하나일 것이다(Cohen).

(주); 숨고 - '숨고'는 문자 그대로 '피하다', '감추다'는 뜻의 '사타르'(*)에서 온말이다. 그러므로 이 동사에서 엘리야의 심판 예언(1절)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벨의 즉각적인 위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입장에서 엘리야의 선포는 민심을 교란하는 유언 비어요 반 정부적인 도전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위협만이 피신의 원인은 아니다. 아직은 여호와 신봉자와 이방신 숭배자간의 정면 대결(18장)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엘리야에게 몸을 숨기도록 명하신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R.D. Patterson).

성 경: [왕상17:4]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까마귀들을 명하여 - 혹자는 까마귀가 부정한 조류(레 11:5)라 하여 '까마귀'(, 오르빔)를 '아랍인들'(*, 아르빔)이나 '상인들'(*,오리빔) 또는 '오렙 사람들'(*, 오레빔)로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Hammond, Kimchi).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오히려 본문은 까마귀로 읽어야 할 강조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 숭배로 돌아선 시점에 여호와 신앙의 용사 엘리야를 지탱해준 것은 까마귀, 이방인 과부(9-16절) 등 이라는 역설의 강조점을 본문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Lange, H. Austel,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37). 즉, 이스라엘이 부정한 것들로 여긴 요소들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구원과 정화에 한몫 기여한 것이다.

성 경: [왕상17:5]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

(주);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 엘리야가 예언 선포 이후(1절) 이처럼 잠적해버린 사실을 놓고 그 당시 비웃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꺼리지 않고 즉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사람의 취향과 기질에 영합하여 영웅이 되기보다 자신을 잊은듯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갈 1:10).

성 경: [왕상17:6]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

(주); 까마귀들이...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 까마귀는 본래 매우 게걸스런 날짐승으로 시체와 썩을 것들을 즐겨 먹어치운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고스란히 날라주었다는 데에서 기적적인 성격이 한층 더 강조된다. 한편 이처럼 까마귀도 순종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엘리야에게 깊은 감명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즉 여호와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엘리야의 눈에는 당시 우상 숭배에 열중하는 백성의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체를 탐하는 까마귀떼처럼 가망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까마귀조차도 순종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강권적은총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엘리야의 심령에 선지자적 소명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17:7]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예언]

(주);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 18:1과 야고보서 5:17에 의하면 당시 이 같은 가뭄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있다. 1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7:8]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엘리야의 식수(食水)였던 그릿 시냇물(3절)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를 위하여 새로운 공궤지(供饋地)를 일러주신다. 그곳은 곧 사르밧(Zarephath)으로(9절) 엘리야는 가뭄이 끌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엘리야가 그릿 시내에서 물을 찾아 사르밧으로 이동한 길을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갈다.

성 경: [왕상17:9]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사르밧 - '사르밧'(*, 차르파트)은 '염색하다'는 뜻에서 온 명칭이다. 따라서 사르밧은 두로와 시돈 등과 마찬가지로 베니게(Phoenicia)의 명물인 염료 생산지였음을 알 수있다. 이 성읍은 헬라어로는 '사렙다'(*)로 불리우는데(눅 4:26)오늘날의 수라펜드(Surafend)로서 두로와 시돈 가운데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37). 그런데 이곳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이다(16:31).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이다. 이 점은 마치 바로(Pharaoh)의 궁전에서 온전히 양육받은 모세를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대적자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이다(출 2:10).

(주);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신처가 이방인, 그것도 무력한 과부에게서 찾아졌다는 것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크나큰 수치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해준다. 한편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부'(*, 알마나)는 남편이 없으므로 인해 사회, 경제적 지위가 형편없는 존재였다(신 24:17).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약한 자를 들어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인바(고전 1:26-31)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할 것이다(Matthew Henry).

(주); 공궤하게 - '공궤'(供饋)란 문자 그대로 '음식을 제공함'(providing with food)을 말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공궤하게'에 해당하는 원어 '카르케레카'(*)는 '간직하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 보살핌'에 더 의미가 담긴 말이다.

성 경: [왕상17:10]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 이는 거리에 흩어져 있는 모든 나뭇가지를 주워 땔감을 삼을 수 밖에 없는 과부의 극빈을 나타낸다. 만일 과부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종을 부려 땔감을 해오게 하였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땔감을 구입하였을 것이다(MatthewHenry).

(주); 물을...나로 마시게 하라 -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번째 시험(test)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창24:17; 요 4:7).

성 경: [왕상17:11]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청컨대...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 앞서의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더 당돌한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더욱 식량란이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을 공궤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9절) 사르밧 과부는 이 두번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다(B hr).

성 경: [왕상17:12]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당신의 하나님 - 어떤 주석가들은 과부의 이 같은 말에서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ange). 그러나 도리어 이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즉 우리는 그녀가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이라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교류가 많던 베니게의 한 여인으로서 이 과부는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 신을 호칭한 것 뿐이다. 사실 이 과부가 여호와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리야의 말을 청종한 그 순간이다(14, 15절). 아무튼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치 않은 반면 이방인 과부는 선뜻 그 말씀을 받아들인 점이 주목된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봉사자가 누군지 분명히 확인하였을 것이다.

(주); 나는...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과부에게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운이다(눅 4:24-26; 21:2).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역사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사 42:16; 마 4:16; 골 1:13).

성 경: [왕상17:13]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두려워 말고 - '두려워'에 해당하는 '야레'(*)는 '무서워하다' 외에도 '존경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그것은 지헤의 토대로서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이라는 이상적(理想的)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단순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전환되는 것이 곧 믿음으로 이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본절에서 엘리야가 지적하는 과부의 두려음은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서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서의 극복이란 이성이나 논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이 높은 정서의 대체로서 완결된다. 즉 과부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될 때 비로소 온전히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주); 먼저...그 후에 - 장차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에의 두려움으로 이행, 즉 믿음으로 가는 과정은 논리적인 순차성을 따라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개재된다. 엘리야의 말 속에서 그러한 결단의 촉구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 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생각!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치라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성 경: [왕상17:14]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에게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처럼 엘리야가 '너의 하나님'이 아닌 객관 서술형의 '이스라엘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사르밧 과부가 이방인이며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종한 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시사해 준다(Ham - mond).12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7:15]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저와 엘리야와 식구 - 12, 13절에의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본절에서 '식구'(*, 바이트), 즉 권속(眷屬)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온 그녀의 친척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여러 날 - '여러 날'(*, 야밈)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년 6개월 간이나 지속되었으니(약 5:17) 그 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절)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공궤(供饋)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로써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마 10:41)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다.

성 경: [왕상17:16]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주); 통의 기루가...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혹자는 본절에 묘사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익한 노릇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말씀을 확실히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있는 것이지 현상 자체의 건조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본절의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막 6:41-43).

성 경: [왕상17:17]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그 집 주모 되는 여인 - '주모'(*, 바알라)는 '여주인'(mistress)란 뜻이다. 즉, 엘리야가 거처하는 집의 소유주인 여성, 곧 앞서의 과부를 말한다. 그런데 그냥 과부라 하지 않고 굳이 그집의 주인인 점을 밝히는 이유는 다음에 잇따르는 상황의 곤경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엘리야가 몸을 의탁한 집주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재앙이 엘리야의 기거와 결부되면서 발생하는 위기의 성격(18절)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주); 숨이 끊어진지라 - '숨'(*, 네솨마)은 생명 현상의 대표적인 기능인 호흡(breath)을 가리킨다. 이는 곧 21절의 '혼'(*, 네페쉬)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처럼 '호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혼이 나갔다', 즉 '생명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성 경: [왕상17:18]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하나님의 사람 -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진정한 선지자를 일컬을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13:1 주석 참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이적을 보고서 엘리야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을 확신한 게 분명하다(15, 16절).

(주); 당신이 나로 더블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층격을 받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한다. 즉,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한 결과가 도리어 이것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대한 일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그 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선지자의 대접을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과부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15절 주석 참조. 그런데 느닷없이 아들이 죽어버리자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큰 고통이 되고 만 것이다.

(주);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 이 말에는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 방식이 잘 담겨 있다(욥 4:7; 요 9:2 등). 즉,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터이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 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요 9:3).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된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롬 3:29)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니 이로써 사르밧 과부는 더욱더 진실되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III, p. 239). 한편 본절의 '생각나게'에 해당하는 원어 '자카르'(*)는 '기억하다', '회상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하나님 앞에 등록하다'는 뜻으로도 풀이한다(sKINNER). 그렇다면 이 말은 사르밧 과부의 죄가 하나님 앞에 기록된 보고서처럼 정식 등록되어 심판이 즉각 떨어지게끔 되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단 7:10).

성 경: [왕상17:19]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 사르밧 과부가 품에 안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의 아들은 퍽 어렸던 것 같다(Hammond). 따라서 그처럼 어린 자식의 죽음은 그녀에게 애처로움을 더해 줬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값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게 했을 것이다.

(주);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 이스라엘인들의 '다락'(*, 알리야)은 우리네 감각과는 달리 그 집의 가장 좋은 처소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틴과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툭 트인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기 대문이다. 대하 33:1-11 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기꺼운 환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17:20]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부르짖어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라'(*)는 도움을 호소하여 급히 부르는 절박함과 안타까움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과부 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항변은 엘리야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당시 엘리야 자신도 미처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간구하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드러났다(24절).

(주); 또 - '또'로 번역된 '감'(*)은 문맥상 '기어코' 또는 '결국'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또'로 번역할 경우 이번과 같은 경우가 그전에 또 있었음을 전제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글 공동 번역은 이를 '기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이는 아이의 죽음을 그대로 당신의 체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항변인 것이다.

성 경: [왕상17:21]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 이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할 때의 간절함 및 치유자의 자기 투신의 극단적 확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므로 그 아이가 소생(蘇生)할 것을 염원하는 신앙적 행동이다(Schmidt). 물론 여기에는 간절한 염원 외에도 의식(ritual)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세 번 엎드린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아이의 소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3'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에는 본절과 비슷한 장면이 더 나오는데 곧 엘리사와 바울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왕하 4:34; 행 20:9 이하).

(주);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 이 말은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인간이 혼과 몸으로 구성된 이원론적 존재임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네페쉬'(*) 어디까지나 '생명', '목슴'을 의미할 따름이다. 17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목숨을 되살려 달라는 말일 뿐이다.

성 경: [왕상17:22]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 '소리'(*, 콜)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은 곧 기도의 응답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들으시므로'에 해당하는 '솨마아'(*)는 특히 '이해하며 경청하는' 세심한 동작을 의미한다. 즉 이는 엘리야의 항변하는 듯한 기도속에 담긴 처지와 곤경, 다급한 마음을 통틀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경청 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한편 엘리야는 신약에서도 기도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된다(약 5:17).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이란 엄밀히 말해 엘리야의 기도들 들으시는 이의 능력이다.

성 경: [왕상17:23]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 17절 이하의 사건에서 다락과 방은 이야기의 전개상 다분히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고대 근동 지방에서 다락이란 귀빈 접대의 장소이다. 19절 주석 참조. 그런데 아이의 즉음이 발발했을 때 엘리야는 다락 아닌 방으로 불려와 있다(17, 18절). 이는 곧 다락으로 상징되는 환대를 받게 했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시금 다락에 올라와 하나님께 호소한다(19-21절). 그리고 여기서 지금까지 그가 다락에 머무를 수 있었던, 또 앞으로 계속있게 할 참된 힘의 소재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죽은 아이가 소생하였기 때문이다(22절).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두번째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갈 때는 이전의 당혹스럽고 비루한 처지가 아니다. 대신 엘리야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안고 내려가는 것이다. 이처럼 외면상 똑같은 동작이긴 하나 거기에 실린 의미의 차이는 엄청나다. 때문에 여기서 모든 의심을 종식 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극적 강조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주); 살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하이'(*)는 '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는 듯의 '하야'(*)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 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왕상17:24]

주제1: [엘리야의 출현]

주제2: [엘리야의 첫번째 이적]

(주); 이제야 - '이제야'(*,앗타제)는 '앗타'(now)와 '제'(this)의 결합어이다. 즉 '이제 이것으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은 아이 소생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과부가 더욱더 확실히 엘리야를 신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주);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 - 원래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곧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따라서 이때 선지자의 입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을 지키기 위해 자의적(恣意的) 조작이 아닌 진실만을 말할 것이 요구된다. 즉, 이때 그의 입은 곧 하나님의 입과 일치가 되어야 한다(렘 15:19). 그런데 비단 선지자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입'(*, 페)은 일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관이다(시 141:3). 그러므로 지금까지 엘리야가 겪은 사건은 엘리야의 입과 하나님의 입 사이의 일치성이 일시적이나마 의심받은 위기의 사건이요(17-21절) 동시에 잠시 후 그 일치의 공고성이 확증됨으로써(22, 23절)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궁극성이 더욱 입증된 승리의 사건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후 이 사건은 그 시대를 향한 엘리야의 모든 발언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효과를 발휘하였을 것이다.

(주); 진실한 줄 아노라 - '진실한'에 해당하는 '에메트'(*)는 그 확실성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하나님 말씀의 본성을 지적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다(시 119:142, 151, 160; 단 10:21).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시인한 점은 이제 그녀가 보다 확고한 신앙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에 이처럼 한 이방인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에메트'라 고백한 사건은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시리 만치 뜻깊은 사건이었다(눅 4:24-26).

성 경: [왕상18:1]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사마리아 땅의 기근]

(주);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 년에 - '많은날'(*, 야밈 라빔)이란 표현은 어감상(語感上)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언제로부터 계산해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체류하기 시작한 때(17:8-16)로부터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에서 '제 삼 년에'라는 설명이 곧 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즉 히브리적 시간 계산 방법에 의거할 때 '제 삼 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실지로 만 3년이 못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의하면, 엘리야 시대의 가뭄은 3년 반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4:25; 약 5:17). 따라서 본절의 '제 삼 년에'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가뭄을 선포한 때(17:1)를 기점으로 잡고 계산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Prlpit Commentary, Lange, Keil & Delitzsch).

(주);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 '보이라'(*, 라아)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물론 '가서 만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보다 폭넓고 깊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어가 '제시하다', '증명해 보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되는 행동은 앞서 선행된 어떤 예시, 예견에 대한 결정적 증거 제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본장에서 엘리야의 행적은 이러한 의미에 부합된다. 즉 엘리야는 일찍이 아합에게 가뭄을 예언한 바 있다(17:1).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가뭄 종식의 예언을 위해 다시 아합과 만나도록 명령받는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 같은 선포를 하여야만 가뭄과 같은 자연력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은 바알(Baal)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17:1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이제 아합에게 '보이러'가는 엘리야의 행동은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해 보이러'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왕상18:2]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사마리아 땅의 기근]

(주);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 사마리아(Samaria)는 아합에 의해 소위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산의 풍부를 보장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중심지가 된 곳이다(16:29-33).그런데 바로 그곳이 기근(饑饉)으로 허덕였다는 점은 본서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름아니라 바로 바알 숭배의 허구성을 폭로해 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심하였더라'(*, 하자크)는 말은 '아주 맹렬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가뭄이 사마리아를 덮쳤다는 말이다.

성 경: [왕상18:3]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사마리아 땅의 기근]

(주); 궁내 대신 오바댜 - '오바댜'(*, 오바드야후)는 '여호와를 섬기다'는 뜻이다. 특히 이 이름 속에 담긴 동사 '아바드'(*)는 '노예처럼, 종처럼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 그대로 오바댜(Obadiah)는 지극한 열심으로 여호와를 섬긴 사람이다. 즉 당시 바알 숭배의 심장부라 할 아합 궁중의 고위직에 있었던 자였음에도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4절)은 가히 그 신앙의 열성과 순수함을 짐작케 해준다. 한편 '오바댜'는 구약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대상3:21; 7:3; 8:38; 9:16; 대하 17:7; 34:12; 스 8:9). 따라서 동명이인(同名異人)을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다.

(주); 크게 - '크게'(*, 메오드)는 '대단히', '지극히' 등의 뜻을 갖는 부사이다.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자주(구약에서 약 300회) 사용되었다(신 6:5; 왕하 23:25). 한편 신약에서 이 단어는 '마음과 힘(mind and strength)을 다하여'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말이 갖는 심도를 잘 드러내 준다(막 12:30; 눅 10:27).

(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야레'(*)에는 '두려워하다'.'놀라워 하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접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체험적 신앙을 은연중 강조해 준다.

성 경: [왕상18:4]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사마리아 땅의 기근]

(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대에 -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치 않으나 학자들은 대개 엘리야의 가뭄 선포(17:1) 이후로 본다(Hammond). 그것은 두어 가지 가능한 추측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의 정면 도전(가뭄 선포)에 대한 보복 조처였으리라는 추정(Hess, Menken)이다. 한편 이세벨(Jezebel)에게 박해를 당한 '선지자들'이란 아마도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일 것이다(B hr, Hammond, Keil, K. Austel). 이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주); 선지자 일백 인을...굴(窟)에 숨기고 - 사마리아 서북방 약 60km 지점에 위치한 갈멜산(Mount Carmel) 주변에는 당시 약 2,000개의 석회굴이 있었다고 한다(Montgomery). 따라서 오바댜가 선지자들을 숨긴 곳도 이 지역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역사적으로도 갈멜산 일대는 피난자들의 은신처였는바 신약 시대에는 일명 '은자(隱者)의 고장'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주); 가져 - 원래 '가져'에 해당하는 '라카흐'(*)는 '취하다', '움켜 쥐다', '채어가다'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대단히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있다. 즉 이는 이세벨의 마수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절박한 시점에서 재빠르게 선지자들을 빼돌리는 오바댜의 스릴있는 움직임을 연상시켜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 성경처럼 '가져'라고 번역하기보다 '빼돌려'라고 번역함이 보다 바람직하다.

성 경: [왕상18:5]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사마리아 땅의 기근]

(주); 물 근원(根源) - 이 말은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좀 어색한 표현이다. 그런데 '근원'에 해당하는 '메에'(*)는 본래 '창자', '생식기' 등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인가를 산출해 내는 내부의 근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물 근원'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곳'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는 '수원지'(水原地)라는 보다 널리 쓰이는 말로 표헌하는 것이 더 낫다.

(주);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 극심한 가뭄과 기근 중에 아합의 관심이 이처럼 말과 노새 보호에 쏠려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혹자는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우리 속의 짐승을 위한 불가피한 처사로 변호하지만(Hammond), 아합의 일차적 관심이 백성에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아합의 권력 기반이 말과 노새가 상징하듯 군사력과 상업력에 있었지, 여호와로부터 위탁받은 백성들로부터의 신망(信望)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8:6]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사마리아 땅의 기근]

(주); 아합은 홀로 길로 가고 - 아합이 왕의 신분으로써 호위 군사나 수행원도 없이 홀로 탐색에 나섰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홀로'(*, 레바드)란 말은 '따로', '별개로'의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사막 지대의 군주나 족장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당시 극심한 가뭄 상황하에서 아합왕이 직접 수원지 탐색에 나선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한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왕상18:7]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저가 알아보고 - 오바댜와 옐리야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로의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오바댜 편에서 볼 때 엘리야를 식별하기란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항간에는 엘리야의 명성과 함께 그의 옷차림과 특이한 용모가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왕하 1:8).

(주);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아여. - 오바댜가 취한 이러한 태도와 언사(言辭)에서 그가 엘리야를 향해 품고 있는 존경심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오바댜는 당대의 고관이고(3절) 엘리야는 일개 야인(野人)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가인 오바댜가 고군 분투하는 신앙의 전사(戰士) 엘리야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더욱이 엘리야가 행하는 권능은 놀라운 것이며(17:13-24) 오바댜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12절). 따라서 오바댜는 지금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 '주인', '소유자'라는 뜻)의 강조형으로서 오직 인간과 만물의 소유주이자 지배자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그런데도 오바댜가 엘리야를'내 주'라고 칭한 것은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는 물론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엘리야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 경: [왕상18:8]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 원문에는 '엘리야가 여기 있다'는 말이 단지 '힌네 엘리 야후'(*)로 되어 있다. 이때 '힌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감탄사로서 '보라 !'(behold !)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본절은 '보라, 엘리야다 !'란 단순하면서도 생생한 표현이 된다. 한편 본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엘리야에게는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던 듯하다. 그런 시점임을 감안할 때 본절은 대단한 박력의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 엘리야가 이 같은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아합을 만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1절,약 5:17).

성 경: [왕상18:9]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붙여 - 여기서 '붙여'로 번역된 '나탄'(*)은 '주다'(give)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약 2,000회 정도 사용되는 이 동사는 의미 또한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즉 이는 '만들다', '지불하다', '놓아 두다' 등 번역상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띨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본절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라는 문구가 이미 의미 파악의 열쇠로 주어져 있다. 즉 여기서 '붙여'는 죄의 대가로 인한 응징, 형벌의 개념으로 사용된것이다(8:32 등). 한편 오바댜가 아합 왕에게 엘리야 발견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곧 죽음과 동일시된 까닭은 10절이하, 특히 12절에서 발견된다. 즉 오바댜는 자신이 엘리야를 찾았다고 아합에게 알린 때에 만약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성 경: [왕상18:10]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이는 앞서 사르밧 과부의 맹세와 동일한 표현이다(17:12). 그러나 이는 당시 아직 여호와 신앙에로 개종하지 아니하였던 사르밧 과부의 말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오바댜는 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물이고 여호와 역시 오바댜의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서는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리야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왕하 2:14).

(주); 당신을...나라가 없었는데 - 이 말은 일종의 과장법적 표현이다. 비록 아합 통치하의 이스라엘이 강력했다지만, 당대 근동의 패권을 온통 거머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나라와 족속을 속속들이 뒤졌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노릇이다. 16:29 주석참조. 여하튼 본절은 당시 아합이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아합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한껏 엘리야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합이 당시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의 저주(17:1) 탓으로 생각했기 때문인듯하다(Hammond, 17절). 그러므로 그 저주를 해소하려는 주술적 조처와 적개심 때문에 아합은 그토록 열심히 엘리야를 수배했을 것이다.

성 경: [왕상18:11]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네 주 - 여기서 '주'라는 말은 '아돈'(*)으로 일반적인 군주(君主)나 주인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7절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오바댜가 섬기던 당시의 이스라엘왕 아합(Ahab. B.C. 874-853)을 지칭한다.

성 경: [왕상18:12]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여호와의 신이...이끌어 가시니라 - 오바댜가 '여호와의 신', 즉 하나님께서 돌연하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엘리야를 그 어느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바댜의 염려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을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믿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靈)이 이와 같은 돌연하고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빌립(Philip)을 옮긴 사실을 볼 수 있다(행 8:39).

(주);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 여기서 '어리다'는 말의 기본형인 명사 '나아르'(*)는 이유기(離乳期)에서 사춘기를 지난 청소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경에서 이제 겨우 젖뗀 유아 모세와 다 자란 압살롬을 똑같이 '나아르'로 부르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출 2:6; 삼하 12:16; 14:21; 18:5). 그러므로 '나아르'는 한 인간의 개체적인 틀이 거의 완성, 고정되는 중요한 시기를 지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바댜는 바로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신앙이 가진 안정성, 확고성을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성 경: [왕상18:13]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내가...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 오바댜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려고 이와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다. 더군다나 오바댜가 선지자들에게 피신처와 음식을 공급한 것은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었지 않은가(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엘리야와 한 편에 속하는 사람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엘리야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여실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즉 오바댜는 엘리야가 여호와의 계시로 말미암아 그러한 비밀스러은 일조차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성 경: [왕상18:14]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이제 당신의 말씀이...나를 죽이리이다 - 이러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오바댜의 당혹감과 불안감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시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아합과 맞닥뜨리는 죽음의 위협에서 분명히 빼돌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2). 그리고 그 사실은 자신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바댜의 그 같은 염려는 아직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빚어진 기우(杞憂)임(15절)이 이내 드러나고 만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673).

성 경: [왕상18:15]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주); 모시는 - 이에 해당하는 '아마드'(*)는 문자적으로 '...앞에 서다'(standbefore)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처럼 '여호와앞에 서다'와 같이 쓰이는 경우. 신학적으로 (1) 중보 기도를 위해 선다는 의미와 (2) 헌신과 충성의 표시로 선다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 중 (2)의 의미를 채택하여 '모시다'로 번역한 것이다. 기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이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意識)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주); 만군(萬軍)의 여호와 - 여기서 '만군'(*, 체바오트)이란 곧 '군대들'(armies)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된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삼상 1:3 주석 참조. 한편 '만군의 여호와'란 호칭은 열왕기에서는 처음으로 본절에 등장하였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사1:9; 2:12; 8:13; 렘 6:6; 20:12; 32:14).

(주); 오늘날 - 학자들 간에는 여기서의 '오늘날'(*, 하욤)이 꼭 문자대로의 오늘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bahr). 물론 '하욤'을 문맥과 함께 '지금' 혹은 '이번에는'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을 꼭 만날 것이라는 엘리야의 결의에 찬 표현으로서의 본절은 그대로 '오늘'의 의미로 두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이를 '오늘'(today)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Living Bible 등).

(주); 보이리라 - 1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8:16]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아합 왕의 만남]

(주);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 여기서 '만나다'에 해당하는 '카라'(*)는 의도적인 만남을 말한다. 이는 곧 7절의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과 같이 분명한 목적을 지닌 만남을 의미한다.

(주); 고하매 아합이...만나려 하여 - 아합이 만만찮은 중대사인 '꼴 구하는 일'(5절)을 간단히 포기하고 이처럼 즉각 엘리야를 만나려 한것을 보면, 엘리야의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그 비중이란 실상 아합이 엘리야를 어떤 식으로든 가뭄의 원인으로 결부시켜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10절 주석 참조. 그런 점은 다음 절에서 아합이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troubler of Israel)로 부른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엘리야 출현 소식을 접한 아합은 이제야 가뭄의 원인을 해소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Hammond).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서두를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성 경: [왕상18:17]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아합 왕의 만남]

(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 - '괴롭게 하다'에 해당하는 '아카르'(*)는 대개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아합은 지금 엘리야를 나라 전체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국적(國賊)으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동은 오로지 아합 편에서의 논리만을 반영한 것이다. 우상 숭배 장려 정책을 펴 나가는 아합 왕조(16:29-33)에 대한 엘리야의 평소 행동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훼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은 가뭄은 그의 저주(아합이 보기엔) 이후에 시작되었다(17:1).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엘리야는 아합에게 불길하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식할 수있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자기 바깥의 척도(즉 하나님)로 비쳐 볼 수 있었다면, 문책의 대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받을 자는 엘리야가 아닌 바로 아합 자신인 것이다(18절).

성 경: [왕상18:18]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아합 왕의 만남]

(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 엘리야는 가뭄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아합의 비난에 대하여 이처럼 똑같이 '아카르' 동사를 사용하여 아합을 힐난한다. 17절 주석 참조. 즉 가뭄이라는 국가적 재난에 책임이 있는 편은 자신이 아닌 바로 아합과 그의 왕조라는 반박이다. 여기서 '당신의 아비의 짐'은 곧 오므리(아합의 아버지) 왕조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 가문은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가 왕조를 연 이래 더욱 가증한 우상 숭배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16:25, 26, 30-33). 따라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민족사의 정도(正道)를 가르치는 오므리 왕조에 대하여 호평(好評)할리 만무하다. 본절에서 엘리야가 단지 아합개인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아비의 집'까지 함께 공박하고 있음도 그 같은 연유에서이다(Matthew Henry).

(주);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 물론 오므리 왕조 이전의 왕 중에도 금송아지 숭배등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여로보암(Jeroboam, B.C. 930-910) 같은 악왕(惡王)이었다(12:25-33). 그러나 아합의 가증한 죄악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바알(Baal) 숭배를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31, 3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왕상18:19]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와 아합 왕의 만남]

(주); 그런즉 - 원문은 '왜 잇타'(*, and now)이다. 그 뉘앙스는 이렇다. 지금 서로를 재난의 원인으로 비난하니(17, 18절) '이제 기필코'(*, 앗타, now) 시비를 가리도록 하자! 그런즉 이는 대단한 박력의 도전이 행간(行間)에 넘쳐 흐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 '상에서 먹는다'는 말은 본문의 문맥상 '공급과 지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Pulip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왕비의 식탁에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함께 식사했다는 것은 있음직 하지 못하기 때문다. 사실 '상'(*, 슐한)은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자들 사이의 '교제'를 은유하는, 보다 중요한 용법을 갖고있다(시 69:22; 128:3: 단 11:27). 한편 본절로 미루어 이세벨은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교사처럼 이스라엘에 바알 및 아세라 숭배 이식을 위해 인력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

(주); 갈멜산 - 갈멜산의 위치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곧 다음과 같다. 한편 '갈멜'(, 카르멜)은 '정원' 또는 '과수원'을 의미한다. 이 산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갈멜 산맥(Mountains Carmel)의 일부로서 각종 식물이 무성하고 또한 석회 동굴이 많은 곳이다. 4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 갈멜 산이 여호와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결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갈멜 산은 엘리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보듯 여호와 신앙인들에게도 특별한 장소였지만(왕하 2:25; 4:25), 동시에 바알에게 바쳐진 성소이기도한 때문이다. (2) 갈멜 산은 이스라엘과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두로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때문이다.

성 경: [왕상18:20]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모으니라 -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 콜-베네이 이스라엘)이란 이전의 세겜 총회(12:1)에 상응하는 말이다(Montgomery). 즉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집단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12:1 주석 참조. 그런데 21절 이하의 내용으로 보아 갈멜 산에는 이 대표자 집단들이 집합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본절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활동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아합이 이들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기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무렵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전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역할을 모두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왕상18:21]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 원문에서 '두 사이에서'는 '알 쉐테이 하세입핌'(*), 즉 '두 의견(opinion)으로(혹은 사이에서)'이다.그리고 '머뭇머믓 하려느냐'는 '파사흐'(*), 즉 '절뚝거리다'이다. 그러므로 이를 문자적으로 옮기면 '어느때까지 두 의견으로 나뉘어 절뚝거리려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당시 백성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하기 보다는 분열상을 지적, 그 해소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숭배를 혼합하려는 세력과 순수 여호와 신앙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B hr, Keil). 그런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 그 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백성들은 왕실의 강압적 우상 숭배정책에 눌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미지근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를 격발(激發)시켰던 셈이다(마 6:24; 계 3:16). 한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향해 과감한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니 우리는 스스로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중용(中庸)이라는 말로 미화시켜서는 아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참된 중용의 도(道)란 애매한 중간치기 내지는 비굴한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고 더 경건한 제 3의 길을 따름인 것이다.

(주); 백성이 한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 이 장면을 수 24:16 이하와 비교해 보면 아합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즉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과 다른 신 중 과연 누구를 섬길 것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에 그 시대의 백성들은 즉각 '다른 신을 섬기다니 말이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아합 시대의 백성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아직껏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마 6:24).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가 아닌가?

성 경: [왕상18:22]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나만 홀로 남았으나 - 나만 홀로 남았으나! 이 말은 당시 여호와의 선지자가 정말 단 한 명만이 남았음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다만 지금 여호와 선지자로서 활동하는 자는 엘리야 자신 홀로이며, 이제 그 홀홀 단신으로 다수의 바알 선지자와 맞서게 되었다는 극적인 대조에 강조점이 있을 뿐이다(Hammond, Montgomery).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여야만 앞서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4절)가 그 동안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리라는 불필요한 추측(Thenius)을 삼갈 수 있게 된다.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탓이다. 즉 19절에는 이교(異敎) 선지자들의 총수가 850인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본절에는 오직 450인만 언급되어 있는 탓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25절과 40절에서도 오직 '바알의 선지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 정리될 수 있다. (1)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갈멜 산의 대결에 참예하지 않았다(25절). 따라서 그들은 학살을 당하지 않았다(40절). (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가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모두 '바알의 선지자'로 통칭(通稱)될 수 있다. (3) 그렇다면 아합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일부(아세라의 제사장?)를 보내지 않은 탓에 갈멜 산 대결에는 450인의 바알 선지자만이 참석하였을 것이다(B hr, Keil 등).

성 경: [왕상18:23]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엘리야는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 신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희생 번제(犧牲燔祭)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들 모두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희생 번제는 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막론하고 고대 팔레스틴에있어서 예배의 기본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Lange).

(주); 각(脚)을 떠서 - 이에 해당하는 동사 '나타흐'(*)는 '잘라서 조각 조각으로 나누다'(cut in pieces)는 뜻이다. 이는 곧 희생(犧牲) 제사에 쓰일 제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말한다(출 29:17; 레 1:6, 12; 삿 20:6).

성 경: [왕상18:24]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이름을 부르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그 인격의 본질과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즉 이름과 존재는 불가 분리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그 존재의 응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때 그 이름의 존재가 실존(實存)한다면 필연코 응답이 있을 것이다. 본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알이 허구 존재가 아니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리라는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 불로 응답(應答)하는 신 -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의 희생 제의는 제물을 불로 사르는데 초점이 있다. 즉 신이 불태워진 제물을 흠향할 때 비로소 인간의 성의가 가납(嘉納)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곧 신이 있어서 차려진 제물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불로 응답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그런데 바알은 자연력을 지배하는 신이자 태양과 불의 신이었다.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 참조. 그러므로 불로 응답하는 일은, 바알이 참신이라면, 그의 전문 분야와도 같다. 그런데도 바알은 끝내 침묵하고 말았으니(25-29절) 그 허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한편 이처럼 그 신의 가장 핵심 요소를 공략하여 허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일찍이 모세가 10가지 재앙으로써 애굽의 거짓 신들을 무색하게 한것과 비견된다(출7:4-12:34).

성 경: [왕상18:25]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너희는 많으니 먼저...부르라 - 본절은 결과적으로 엘리야의 승리(30-40절)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즉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는 확고한 자신감을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말해 우선권을 잡은 바알 선지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반면(26-29절) 엘리야의 승리를 더욱 값지고 위대한 것으로 부각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준 셈이다.

성 경: [왕상18:26]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아침부터 낮까지 - 여기서 '아침'(*, 보케르)은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난 직 후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회합을 갖은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무대 팔레스틴' 참조. 다음으로 '낮'(*, 초하르)은 다음 절에서 '오정'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알 선지자들은 이미 5-6시간 정도를 바알의 이름을 르며 뛰논 셈이다.

(주); 응답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아나'(*)는 본래 '보다', '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들을 외면치 말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서 '쳐다 봐 달라'는 간절한 염원(念願)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주); 뛰놀더라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파사흐'(*)는 본래 '절뚝거리다'는 뜻으로 이미 21절에 나온 단어이다. 2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나뉘어 있다. (1)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광란(狂亂)의 춤(28절)을 비꼬아 표현한 것이다(PulitCommentary). (2) 당시 바알 선지자들이 추었던 춤의 형태가 실제로 절뚝거리는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Davis).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엘리야가 계속적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 것으로 보아(27절) 첫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춤은 자주 예배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나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의 처녀들이 포도밭에서 춤춘 것, 법궤앞에서 춤을 춘 다윗 등 많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출15:20; 삿 21:16-24; 삼상 18:6; 삼하 6:14). 그러나 이러한 춤도 참된 찬양의 대상자에 대한 진솔한 경외의 표현이 아니라면 본절에서 보듯 이는 한갓 광란의 몸짓에 불과하고 마는 법이다. 출 15:20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8:27]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저는 신인즉 - 이처럼 '바알은 신이니까'로 서두를 연 본절은 그러나 신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오정에 이르기까지 간절히 바알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바알 우상의 허구성을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조롱조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주); 묵상하고 있는지 - 바알 선지자들이 그토록 발버둥치고 있는 마당에(26, 28절) 바알은 멀찌 감치 물러 앉아 묵상에 잠겨 있다고만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장면은 없을 것이다.

(주); 잠간 나갔는지 - '나가다'에 해당하는 '수그'(*)는 '옮기다', '이동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잠간 자리를 옮겼는지'의 뜻이다. 그런데 이는 '좀 쉬려고 물러갔는지' 정도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라 한다(Rashi). 하지만 신이 쉬어야 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며 곤비치 않으시지 않는가(사 40:28)!

(주); 길을 행하는지 - 여기서 '길'(*, 데레크)은 '여행'(대개 수일이 걸리는)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이 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경배자들의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 유한성(有限性)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시 139:7-12)

(주);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무더위로 인해 한낮에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고대 팔레스틴' 참조. 엘리야의 조롱은 바로 그러한 습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성 경: [왕상18:28]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그 규례를 따라...상하게 하더라 - (신 14:1; 렘 16:6; 41:5; 47:5). 그런데 본절에서 처럼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하는 습성은 피가 신비한 효능으로 신을 감동시킨다는 이교적 관념 때문이다(Plutarch). 즉 당시 이교도들은 자해와 고행이 신에 이르는 길을 여는 일종의 공로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바알 선지자들의 한낮,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광란을 묘사함으로써 마지막 안간 힘을 써서 바알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해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금욕주의적 태도 또한 자의적(恣意的) 숭배의 소산으로 간주하여 참된 경건에는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골 2:20-23).

성 경: [왕상18:29]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진언을 하여 - 이에 해당하는 '네부아'(*)의 문자적 뜻은 '미친듯이 예언하다'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참된 예언이 아님은 물론이다. 사실 이러한 예언은 광란에 찬 자해 행위자들이 한숨과 신음을 토로하는 현상에 다름아니다Movers). 그리고 이러한 예언이란 대개 비인격적인 외적 조작, 즉 주문(呪文)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려는 주술적 성격이 짙게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의 진언은 일종의 주문, 신비한 웅얼거림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주); 저녁 소제(素祭) 드릴 때까지 - 요세푸스의 기록(Josephus, Antiq., XIV, 65))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리던 시간은 오늘날의 오후 3시 쯤(유대력의 9시)에 해당한다고 한다(A. Edersheim, Pulit Commentary). 이때 신약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과도 일치한다(행 3:1). 한편 '소제'(*, 민하)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비교적 간단한 제사이다. 이 제사에는 희생 제물이 아닌, 떡과 과자가 바쳐졌다(출 29:28-41; 민 28:3-8). 이 소제의 의미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전체적인 삶을 하나님께 위탁한다는 뜻이다. 레 2:1-3 강해, '소제에 대하여' 참조.

(주); 아무 소리도...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 이 부분에는 '전혀 없다'는 뜻인'아인'(*)이 세 번이나 거듭된다. 이 단어는 26절에도 두 번이나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점층법적 강조의 효과를 준다.

성 경: [왕상18:30]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내게로 가까이 오라 - 엘리야가 이처럼 백성들을 가까이 오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1) 이제까지 바알 제단 근처에 모여 있던 백성들을 여호와의 제단 주위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2)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자신의 모든 행위(32-39절)에 어떠한 협잡도 없음을 명백히 증거키 위함이다(Hammond).

(주);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 '수축하다'에 해당하는 '예라체'(*)는 '고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을 세우는것이 아니라 부서졌던 것을 고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갈멜 산상에는 일찍이 여호와의 제단이 서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본서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제단을 헐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음을 증거해 준다(4절; 19:10). 따라서 갈멜 산의 여호와 제단도 이때 헐렸다고 봄이 옳음직하다.

성 경: [왕상18:31]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열 두 돌을 취하니 - 여기서 엘리야의 행동은 약속의 땅 입성시의 여호수아의 행동과 비슷하게 보인다(수 4:9). 그런톄 북왕국의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엘리야가 이처럼 '열 두돌'을 취하여 돌단을 쌓은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12:24)) 그들 모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음을 엘리야는 바로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왕국분열 이래로 멸망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은 한번도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더욱이 앗시라아에 포로로 잡혀간 북 이스라엘 백성들 중 대부분은 영원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이스라엘 집안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열 두 지파 온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열 두 사도'의 터전 위에 건축된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던 것이다(창 35:9-12; 삼하 7:16; 계 7:4-8).

(주); 이 야곱은...하신 자더라 -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을 각성케 하는 여러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야곱, 이스라엘, 여호와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야곱'(Jacob)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한 조상에서 비롯된 헐통적 단일성을 가진 존재들임이 부각된다(창 35:22-26). 그리고 그 야곱이 '이스라앨'(곧 민족의 이름이 된)로 불리은 것(창32:24-28)에서는 이스라엘(Israel)민족이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백성임이 강조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소명의 주체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민족적 정기를 흐리지 않는 민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출 19:5, 6).

성 경: [왕상18:32]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 원문 '브쉠 여호와'(*)는 단순히 '여호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hovah)라는 뜻이다. 즉 '의지하여'는 해석상 추가된 말이다. 그런데 본서 기자가 굳이 '여호와의 이름'과 관련 엘리야의 단 쌓는 행위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단이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여호와께만 드려지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24절 주석 참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쌓은 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동일시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된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본절은 '여호와께만 봉헌하기 위해', 혹은 '여호와만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다.

(주); 곡식 종자 두 세아 - '세아'(Seah, 창 18:6에는 '스아'로 번역되어 있음)는 구약시대 당시 고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다. 1세아는 1/3에바(Hphah)로서 약 7.6리터이다. 그러므로 '두세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용납할 만한 - 이 말의 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결정하기 어렵다. 즉 두 세아정도의 곡식을 부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두 세아의 곡식 종자를 심어도 될 만큼이라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前者), 즉 용량을 의미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B hr, Hammond 등).

성 경: [왕상18:33]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 레 1:3-9에는 소(혹은 송아지)를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 관해 수록되어 있다. 즉 그때에는 제단에 장작을 펴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벌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엘리야는 그 같은 율법의 규정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주);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부으라 - 여기서 말하는 '통'(*, 카드)이 얼마 만한 용량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괄레스틴 여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물 항아리(17:12, 14, 16; 창 24:43, 45; 삿 7:16, 19, 20)를 가리키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음절까지 살펴 보면, 번제물과 나무 위에는 무려 열 두통의 물이 부어진 셈이 된다. 그런데 율법 규정에 있지도 않은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명확하다. 즉 엘리야는 이로써 인위적인 협잡의 여지가 없음을 명백히 백성들에게 인상지우려 한 것이다. 30절 주석 참조. 또한 이처럼 온통 물로 적셔진 제물에 점화시키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써만 가능함을 주지시키려 한 것이다(38절).한편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대의 이교 제사장들 중에는 제단밑에 빈 공간을 판 뒤 그 속에서 불을 붙이고서 이를 이적이라고 속이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Pulit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 249).

성 경: [왕상18:34]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세 번 그리하라 - 한글 개역은 자칫 두 번 물을 부은 뒤 다시 세 번, 즉 도합 다섯번의 물붓기가 행해진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원문은 '솰로쉬'(*, three), 그러므로 '쉈리쉬'(*, third)이다. 그러므로 물붓기는 도합 3회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레아는 3명의 아들을 낳자 비로소 야곱의 완전한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창 29:34). 또한 전장(前章)에서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린 것도 3회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의혹을 없애기 위한 물 붓기는 3회로 그 의미롤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혹자는 4통씩 3회의 물 붓기로 도합 열 두 통의 물을 사용한 것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기 위한 의도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B hr). 31절 주석 참조. 그런데 여하튼 극심한 가뭄 중에(17:1, 7) 이러한 열 두 통의 물은 과연 어디서 길어 온걸까? 혹자는 이를 지중해에서 길어 온 바닷물로 추추하지만(Mattew Henry), 그보다는 갈멜산 옆을 통과하는 기손 시네(Kishon Brook)에서 길어 왔으리라는 추측이 더 유력하다. 19절 지도 참조. 왜냐하면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공급받는 기손은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물줄기이기 때문이다(Beek).

성 경: [왕상18:35]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단으로 두루 흐르고 - 원문에는 '단 으로'란 말에 '주위', '주변'을 의미하는 '사비브'(*)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단 주위에(물이) 두루 흐르다'는 뜻이다. 즉 많은 물을 들이부은 결과(33,34절) 돌로 쌓은 제단(31, 32절)이 온통 물이 줄줄 흐르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는 이교 제사장들이 제단 밑에 한 사람을 숨겨 불붙이는 것과 같은 속임수는 참으로 불가능하다(Stanley).

성 경: [왕상18:36]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말이다. 29절 주석 참조. 그런데 29절에서의 시점이 본절에 중복되는 탓에 독자들은 약간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30절 이하 지금까지의 엘리야의 모든 행동이 바알 선지자들의 광란이 계속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별 무리가 없다.

(주); 아브라함과...이스라엘의 하나님 -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라 할 조상들이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하나님으로서 여호와를 각별히 호칭하는 이유가 의미 심장하다. 즉 여호와는 그 조상들에게 하나님으로 자신을 선포하셨다(출3:6). 그 결과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계약 관계는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라고 믿는 한 파기(破棄)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무엇이 되지 않는 한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한 분 뿐이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야는 본절에서 야곱의 이름조차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된 '이스라엘'로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31절 주석 참조.

(주); 주께서...알게 하옵소서 - 엘리야의 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2) 엘리야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고백, (3) 엘리야 자신의 모든 행위는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특징을 띤다. 사실 엄청난 이적이란 이적 자체와 그것을 행하는 자가 크게 부각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애초에 이적도, 이적을 행하는 자신도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제한하고 있다. 이러한 겸손과 공손함은 그가 본절에서 사용한 '종'(*, 에베드)이라는 단어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래 '에베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겸손히 옆으로 비켜 선 엘리야의 참된 선지자적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Mattew Hanry).

성 경: [왕상18:37]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여호와여...내게 응답하옵소서 - '응답하옵소서'는 26절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아나'(*)이다. 그런데 본절은 '아나'가 두 번 반복되어 기도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사실 바알 신지자들의 광란의 기도(26-29절)에 비하면 엘리야의 기도는 서운할 정도로 짧다. 그러나 그 간명(簡明)한 기도 속에는 진실되고 순전한 정열과 굵직한 뚝심이 들어 있다. 아무튼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은 아니시다(마 6:7). 마치 사랑하는 자식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진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단한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는 진심이 깃들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본절의 엘리야의 기도는 중인 부언하지 않고 하나님께 꼭 아뢸 것만 진실하게 구한 기도였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상 1:9-18강해, '기도와 기도의 응답'을 보다 참조하라.

(주); 돌이키게 - 이에 해당하는 '사바브'(*)는 마음이나 자세의 변화를 뜻하는 단어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된 변화의 상태를 지시하는데 자주 쓰인다(대하 29:6). 본절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은총의 회복, 즉 백성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주); 알게 - 이에 해당하는 '야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 외에도 보다 폭넓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참신이든 우상이든 신과 관련될 때는 '관계'에 역점이 주어지는 말이다(신 13:3; 삼상 2:12; 렘 4:22). 따라서 본절에서 이 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왕상18:38]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주);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의 '여호와의 불'이란 '번개'와는 다른 초자연적인 불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Lange, Keil & Delitzsch, H. Austel). 한편 구약시대 당시 하나님께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불을 내리셨다. (1) 당신의 언약을 보증하실 때(창 15:17), (2) 하나님께서 친히 현현하실 때(출 3:2), (3)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실 때(출 9:24) (4) 인간의 제사를 열납하실 때(레 9:24)등이다.

(주); 번제물과...흙을 태우고 - 여호와의 불에 의해 살라진 것은 번제물 뿐 아니라 이처럼 나무, 돌, 흙까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해 준다. (1) 여호와의 불이 얼마나 강렬했었는지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2) 동시에 거기애는 어떠한 협잡의 여지도 없었음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제단 밑에 사람을 숨겨 불을 붙이는 협잡으로서는 도저히 이만한 화력(火力)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33주석 참조.

(주);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 여기서 '핥은지라'(*, 라하크)는 불길이 혀처럼 널름거리며 도랑물을 증발시키는 장면을 잘 표현해준다.

성 경: [왕상18:39]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본절에는 '여호와의 불'의 이적을 접한 당시 백성들의 경악과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요소가 두가지 있는데 (1) 즉각 엎드린 점. (2)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명쾌한 시인을 거듭 반복한 점이다. 이러한 백성의 모습을 21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졸음이 쏟아지는 한낮에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의 광음을 듣는 충격과도 같다.

성 경: [왕상18:40]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갈멜 산 대결]

바알(Baal)이 거짓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기손 시냇가에서 죽여 버렸다. 이러한 행위는 일견 지나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공의(公義)를 나타내는 일이었기에 필요 불가결하였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계명(신 13:6-9; 17:2-7)에 대한 순종 행위였던 것이다.

(주); 저희에게 이르되...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 엘리야의 승리는 너무도 완벽혀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로서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엘리야로부터 달아나려 했을 터인데 이들을 막기 위해서 이제 엘리야는 백성의 무리를 동원하고있는 것이다.

(주); 기손 시내 - 여기서 '시내'(*, 나할)는 '강'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한편 기손 강(Kishon Brook)은 므깃도 근처의 여러 샘들로부터 발원하여 갈멜 산맥과 나란히 걸쳐진 에스드렐론 광야를 흐른다. 이 강은 갈멜 산 근처에서 제법 넓은 폭을 유지하기도 하는데 대개 건기(乾期)에는 폭 100m 이하의 작은 강이 된다(Beek). 따라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할 당시는 극심한 가뭄 중이었던 점(5절 ; 17:1-7)을 고려하면 '시내'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기손 강은 과거 사사 시대 당시 바락이 시스라를 무찔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곳으로도 유명하다(삿 5:19-21).

성 경: [왕상18:41]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비를 부른 엘리야의 기도]

(주); 올라가서 - 이 말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기손 시내에서 갈멜 산 어디 쯤엔가 설치되어 있을 왕의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아합은 갈멜산상의 대결 현장과 기손 시내의 바알 선지자 처형 현장에 내내 동참했던 모양이다.

(주); 먹고 마시소서 - 아합은 대결의 긴장감 때문에 온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가 음식을 권하는 이 말에는 '이제 더 이상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는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Pulpit Commentary). 원래 사람이 음식을 끊는 것은 슬픔, 근심 등을 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따라서 이제 엘리야가 아합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그러한 근심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 동안 아합에게 직접적인 근심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가뭄일 것이다(5절). 그러나 엘리야가 보기에 그 가뭄이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징계일 뿐이다(17:1). 따라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단한 현시점에 있어서는 곧 가뭄이 끝나리라고 엘리야는 확신한 것이다.

(주);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 여기서 '소리'(*, 콜)란 말은 원래 '음성' 혹은 '목소리'라고 해야 더 적절한 단어이다. 즉 이는 '누구의 음성에 귀기울이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이다(창 4:23; 21:12; 삼하 22:7). 아무튼 본절은 엘리야가 믿음의 귀로써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보여 준다(43-45절).

성 경: [왕상18:42]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비를 부른 엘리야의 기도]

(주); 땅에 꿇어 엎드려 - 야고보는 본절과 관련, '엘리야는...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약 5:17, 18)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절)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의 실현을 위하여 다시금 기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기다리는 행동(롬 4:19, 20)과 기도함으로써 그 실현을 응답받은 행동의 두 가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주);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 엘리야는 이처럼 땅에 무릎을 꿇는 정도에서 지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풀이한다. (1)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 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2)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에로 몰입해 가기 위한 행동이다(B hr).

성 경: [왕상18:43]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비를 부른 엘리야의 기도]

(주); 바다 편 - 갈멜 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지중해를 바라볼 수 있었다(Gate). 여기서 '바다 편'이란 바로 그 지중해 쪽을 의미한다.

(주); 일곱 번 -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사환에게 일곱 번 확인해 보라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성 경: [왕상18:44]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비를 부른 엘리야의 기도]

(주); 사람의 손만한 - '손'(KJV, RSV, NIV,Living Bible; hand)으로 번역된 '카프'(*)는 오히려 '손바닥'(palm)으로 번역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손'을 가리키는 단어는 '야드'(*)이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손바닥 만한'으로 적절히 번역하고 있다.

(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 '막히다'에 해당하는 '아차르'(*)는 '꼭 닫다', '기다리게 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많은 비로 인해 보행을 방해받는 광경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치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기손 강은 갈멜 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40절 주석 참조. 따라서 큰 비가 내릴 때에는 기손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여호와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르렀다(22: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함으로써 심판의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가는' 패역한 자의 전형을 발견케된다(롬 2:4, 5).

성 경: [왕상18:45]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비를 부른 엘리야의 기도]

조금 후에 - 이에 해당하는 '아드 코 웨아드 코'(*)는 '손이 앞뒤로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안'이라는 뜻이다(Ewald). 이는 곧 큰비가 올 것에 대비해'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의 손바닥만한 구름(44절)이 얼마나 급속도로 폭우로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주); 이스르엘 - 과거 솔로몬의 다섯번째 행정 구역에 속하였던 성읍으로서 아합, 아하시야, 요람 당시 왕의 궁궐로 사용되었던 곳이다(왕하 9:15). 이곳은 갈멜 산 동남방 20여km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곧 길보아 산 부근이다. 그런데 당시 이 성읍은 이스르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다(Beek). 한편 훗날 아합은 이곳 이스르엘(Jezreel)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음으로 더욱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21장). 4:12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8:46]

주제1: [갈멜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비를 부른 엘리야의 기도]

(주);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 원문을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즉 원문에는 '여호와의 능력'이란 말이 '여호와의 손'(*, 야드 예호와)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를 '주님의 손'(the hand of the Lord)으로 번역하고 있다(KJV, RSV, ModernLanguage). 그러나 Living Bible은 의미를 충분히 살려 본절을 '주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다'(the Lord gave special strength to Elijah)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의 손'이란 다름아닌 엘리야를 아합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리게 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 허리를 동이고 - 달리는 데 지장이 없도록 긴 옷의 아래부분을 묶었다는 말이다(출12:11). 한편 비유적인 의미로 '허리를 동이다' 말은 어떤 행동을 위해 자신을 긴장시킴으로써 준비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렘 1:17).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출 12:11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 엘리야는 이스르엘 성읍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그 어귀에 머물렀다. 이는 아합의 반응을 면밀히 주시하기 위해서였던 동시에 이세벨의 격노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합이 홀로 도회하기에 급급한데서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그의 의도가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존경하였다면, 그는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엘리야를 마차에 동승시켰을 것이다(행 8:31).

(주);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질러 이스르엘 성읍 어귀까지 이르는 길의 거리는 대략 22.4km이다. 이 거리를 엘리야는 아합의 마차 앞에서 달린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이나 마차 앞에서 달리는 것은 시종(侍從)이나 심부름꾼의 위치를 자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본절은 엘리야 역시 아합의 종으로 처신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이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증명되었음을 시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때 아합은 그 인물 자체의 도덕적 평가롤 떠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상징적 의미로서만 가능하다. 즉 갈멜 산 대결 현장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전령의 위치에 앞세웠다면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호와와 바알 중 어느 신이 참신인가를 결정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이심이 판결났다는 뜻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엘리야는 아합의 앞에서 달리면서 나름의 축하 행진을 한 것이다.

성 경: [왕상19:1]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셉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고하니 - 이에 해당하는 '나가드'(*)는 '알게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말에는 '넌지시 알리다'는 뜻의 어감(語感)이 들어 있다. 때문에 보통 이 동사로 설명되는 관계란 마치 공범자(共犯者)들끼리 갖는 동료의식처럼 친밀한 관계이다. 따라서 아합이 어느 정도로 이세벨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아합이 앞장에서 목도한 이적과 바알 선지자 모두를 칼로 죽인 엘리야의 위업(18:30-467)에 질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국(一國)의 통치자인 아합은 줏대없이 그 모든 사실을 왕후 이세벨(Jezebel)에게 고하고 만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면은 본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이세벨의 과단성(果斷性)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1:7).

성 경: [왕상19:2]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내일 이맘때에는 - 본절은 우리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해준다. 즉 진노한 이세벨은 왜 오늘 당장 엘리야를 처단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위협하여 멀리 쫓아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B hr, Keil& Delitzschk, Matthew Henry, Wordsworth). 왜냐하면 갈멜 산상의 승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환호에 싸인 엘리야(18:30-40)를 직접적으로 처단하기는 어렵다고 이세벨이 판단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세벨의 잔인하고 과감한 성격을 감안할때 그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적어 보인다. 도리어 이세벨은 엘리야를 공개 처형할 의사를 전했다고 봐야 한다. 즉 이세벨은 다음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를 처형함으로써 전날 백성들이 받은 충격을 무효화하려 한 것이다. 아무튼 본장은 적어도 이세벨의 위협이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3, 10, 14절).

(주);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성명 같게 하리라 -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킨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세밸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다. 그녀가 아합으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강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주); 신들이...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 이세벨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 심장하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를 두고 맹세한 것과 비교하면 그 부정적이고 잡다한 인상은 두드러진다(18:15). 그런데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을 신격화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인간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성 경: [왕상19:3]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이 형편(形便)을 보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단순히 '바라보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문맥상 본절과 같이 번역했을 따름이다. 한편 어떤 영역본들은 당시의 상황에서 엘리야가 띠었을 정서적 반응에 주목하여 이를 '두려워했다'(he was afraid)로 번역하였다(Modern Language, RSV). 한글 공동 번역도 같은 경우로써 이와 비슷하게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고 있다.

(주); 그 생명을 위하여...브엘세바에 이르러 - 이세벨의 단호한 경고에 부딪친 엘리야는 할 수 없이도 도피길에 오른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떨쳐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길에 오르는 모습은 실로 아이로니칼(ironical)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네rpq(Negeb) 지방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팔레스틴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이다. 삼상 3:20 주석 참조.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 사환을...머물게 하고 - 엘리야가 행한 이 조치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좌절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온 위협은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낳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되기 쉬운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Lange). 한편 이와 관련하여 엘리야의 피신 경로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성 경: [왕상19:4]

주제1: [호셉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 이스라엘 역사상 '광야'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 영향을 받아야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와 달리,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절(민 33가1-49)은 그들 역사에 있어 가장 순수한 신앙을 보존했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는 흔히 도시 문화에 대한 협오와 함께 광야에 대한 동경이 발견된다고 한다(Talmon). 더구나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의 산 호롑'으로 나아가는 첫 문턱이다. 즉 처음부터 엘리야는 호렙 산을 목적으로 하고 여정을 출발하였던 것이다(Hammond).

(주); 하룻길 -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이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Day's Joumey)은 약 32-40km이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로뎀나무 - 로뎀나무(broom tree,NIV, RSV)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의 높이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 나무를 '금작화'(genista Retem 또는genista Monoserma)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Lange, Robinson,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p. 254).

(주); 여호와여...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 불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주); 넉넉하오니 - 이에 해당하는 '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이다. 그러나 본절은 문자대로의 뜻과는 달리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그러한 뜻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고 있다.

(주); 내 열조(列祖)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낫다'에 해당하는 '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리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선조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임을 명확히 하자.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한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선조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19:5]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천사가...먹으라 하는지라 - 70인역(LXX)에는 '천사'가 '어떤 이'로 나와 있다. 그러나 7절에서 다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 언급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 곧 구약시대 당시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앞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더 살도록 격려하며 기적적으로 음식물을 공급해 주셨다(6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긍휼과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주); 어루만지며 - 이에 해당하는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단 8:18;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하게 하며 새 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 주기도 한다(7절).

성 경: [왕상19:6]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숯불에 구운 떡 - 이에 해당하는 '우가트 레차핌'(*)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는 달리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이란 뜻이다. 당시 초장(草場)을찾아 이리저리 유랑 생활을 하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떡을 구워내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떡이 엘리야에게 제공된 것이다.

성 경: [왕상19:7]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 원문상으로는 '네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크다'는 말이다. 이는 곧 엘리야가 여행해야 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엘리야의 광야행은 처음부터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었음이 다시금 암시된다. 4절 주석 참조. 아마도 엘리야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의 전개에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길을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호렙 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망과 비탄에 지친 엘리야는 여행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없었다. 천사의 도움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엘리야가 침체를 이겨내도록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5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19:8]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호렙 산으로 피신하는 엘리야]

(주); 사십 주(晝) 사십 야(夜) -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km으로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일 정도면 당도할 가능한 거리이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침익(沈溺)하기도 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곧장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 준다(신 9:9;마4:2).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앞에 엎드려 있었다(신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즉 이때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케 하는 수이다. 사실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 받아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케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 기도 덕분이다(신 9:18, 19).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더이상 손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절의 사십 주야인 것이다.

(주); 하나님의 산 호렙 - 호렙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산 시내(Mount Sinai)와 동일시된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벨 무사(Jebel Musa)가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3:1주석을 참조하라. 여하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로 실의에 빠진 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19:9]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의 탄식]

(주);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 굴에 해당하는 원어 '메아라'(*)앞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 있으므로 '그 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엘리야가 들어가 유(留)한 굴은 호렙산에서 흔히 발견되어지는 일반적인 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때에 모세가 피해 있었던 반석 틈(출 33:22)일 가능성도 있다(Matthew Henry'sCommentary, Vol. , p.682).

(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 말(*, 마 렉카 포)은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는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도 그러하다(What are you doing here?NIV, RSV, Living Bible). 그런데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어 질문받는 자를 일깨우는 물음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케 하는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성 경: [왕상19:10]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의 탄식]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18:15 주석참조.

(주); 열심(熱心)이 특심(特甚)하오니 - 이 말(*, 칸느 키느티)은 '질투하다'는 뜻의 '카나'(*)가 두번 반복된 말이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이다(출 20:5).

(주); 오직 나만 남았거늘 -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곧 엘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이다. 더군다나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인 '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당사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다(18절).

성 경: [왕상19:11]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에리야의 탄식]

(주);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 본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공동 번역의 경우 이를 "야훼(여호와)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문장의 전후 관계상 "여호와의 앞에서"는 나가서 산 위에 서는 행동 전체를 받는다. 즉 엘리야가 산 위에 서는 행동이 곧 여호와 앞에 서는 행동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은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출 33:17-23) 이번에는 엘리야에게도 당신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엘리야의 주목(主目)을 촉구하는 말임에 분명하다.

(주);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출 33:19). 즉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지나가다'는 뜻의 '아바르'(*)는 움직임의 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바람은 그 움직임을 볼수 있으되 형상을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요 3:8).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수중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포하신다.

(주); 강한 바람...지진 - 비단 이것들 뿐 아니라 다음절에 나오는 '불' 등은 여호와께서 현현(顯現)하실때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출 19:16-20). 그러나 정작 본절에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다. 그러기에 바람, 지진, 불 따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굉장한 증거임에 틀림없었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한 것은 그러한 현상들 다음에 들려온 '세미한 소리'(12절)였다. 즉 이것이야말로 엘리야에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통해 들려 주시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시 119:105).

성 경: [왕상19:12]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의 탄식]

(주); 세미(細微)한 소리 - '세미한'에 해당하는 '데마마 다카'(*)는 '고요하다'(*, 다맘)와 '곱다'(*, 다크)의 결합어이다. 즉 섬세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 둘이 동원되어 이는 대단히 미세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군다나 강한 바람과 지진, 불이 있은 후의 '세미함'이란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준다. 한편 '소리'(*,콜)는 신약에서의 '포네'(*)와 마찬가지로 '음성'이라 함이 더욱 적절하다(계1:10;4:1 등).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로서 사용되는 경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한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란 외적인 것이기보다 성령에 의해 듣는 자의 의식에 각인(刻印)되는 내적 감화(感化)이다(고전 2:10-14).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Pope).

성 경: [왕상19:13]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의 탄식]

(주); 겉옷으로 엎굴을 가리우고 - 이것은 엘리야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식별하고 취하는 행동이다.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경우 살 수 없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나마 자신의 얼굴을 가리운 것이다. 출 33:20 주석 참조. 한편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지나가심을 경험할 때는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모세를 가리우셨다(출 33:22, 23).

성 경: [왕상19:14]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의 탄식]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엘리야의 답변은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두려움과 절망의 심경을 역력히 반영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를 체험하고서도(11,12절) 여전히 부정적인 심경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구체적 사명에 대하여 일러주셨다(15-18절). 그러자 비로소 엘리야는 용기를 회복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19-21절) 인간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사례를 보여 주는 한 표본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 경: [왕상19:15]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남은 자 칠천]

(주); 네 길을 돌이켜 - 이 말은 단순히 왔던 경로를 되밟아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야가 명령받은 행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돌이키라'는 말은 보다 내적인 태도와 의식의 전환을 지시하는데 그의미가 있다. 즉 이는 실망과 낙담을 안고 왔던 길을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받아 들고 돌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인생에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의식이야말로 낙담과 무의미를 극복케 하는 첩경이다.

(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 하사엘(Hazael)자는 본래 아람 왕 벤하닷(Benhadad)의 군대장관이다. 그러나 그는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후 줄곧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다(왕하 8:13-29;13:1-3).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이스라엘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계획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엘리야가 언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실상 16절까지에서 언급되는 하사엘, 예후, 엘리사 중 그 누구도 엘리야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왕하8:12-15;9:1-10). 그러나 이 난점은 '기름부음'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폭넓게 해석할 때 해결된다. 즉 여기서 '기름 붓다'라는 말은 꼭 문자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 것(시105:15;사 45:1)이나 따로 구별하는 것(출 30:26)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견해이다.

성 경: [왕상19:16]

주제1: [호셉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남은 자 칠천]

(주); 님시의 아들 예후 - 사실 예후(jehu)는 님시의 손자이고 여호사밧의 아들이다(왕하9:2). 본절과 같은 오역(誤譯)은 히브리어의 '아들'(*, 벤)이 '자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서 온 실수이다. 따라서 정확히는 '님시의 자손 예후'가 옳다. 한편 본래 이스라엘 군대장관 중 하나였던 예후는 훗날 라못 길르앗 출정시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다(왕하 9:1-10"17), 이때 예후는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으로 아합 가문을 진멸(盡滅)하였으니 이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다.

(주); 아벨므홀라 - 이 지명의 뜻은 '춤추는 초장'이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벧산 남쪽 16km 지점의 한 유적지를 아벨므홀라(Abel-meholah)로 추정하고 있다. 삿7:22주석 참조.

(주); 엘리사 - '엘리사'(*)란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농부긴 해도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열 두 겨리 소를 부릴 수 있었던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즉각 호응하여 예언자가 되었다(19-21절). 그리하여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왕하 2장) 엘리사는 약50년간(B.C. 848-797년경) 북왕국에서 활약하게 된다. 한편 학자들은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이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본다(Stek). 특히 한 사역이 대를 이어 성취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성 경: [왕상19:17]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남은 자 칠천]

본절에 보이는 하사엘-예후-엘리사의 연결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고 입장이 상충되는 세사람이 마치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서로 대립하는 국가의 왕들인 하사엘과 예후가 의식적으로 같은 목적을 품고 활동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북왕국에 재난과 죽음을 가져다 준 인물들이다. 15, 16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러한 그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과 연결될때, 본절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한편 본절에서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죽이리라'는 표현은 앞서 '기름부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취할 바가 못된다. 15절 주석 참조. 즉 이는 엘리사가 직접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심판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성 경: [왕상19:18]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남은 자 칠천]

(주); 칠천 인을 남기리니 - '남기리니'에 해당하는 '솨알'(*)은 대단히 의미 심장한 말이다. 원래 신정 국가(神政國家)인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에 좌우되기 마련이다(출 19:5,6). 따라서 극도로 타락하고 혼미한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불러 올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미래를 지속케 할 소수의 무리를 항상 남겨 놓으신다. 이때 남은 자들(remnants)은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하심 안에서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은총적 의미가 있다. 즉 이경우 심판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자를 남기셔서 역사를 지속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Stark, Jenni). 한편 본절에서 '칠천 인'은 실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Keil등). 즉 이는 완전수인 7의 배수로서 미래의 역사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 경: [왕상19:19]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남은 자 칠천]

(주); 열 두 겨리 소 - 한 '겨리'(*, 체메드)는 한 명에를 나란히 말하기도 하고, 그 한 쌍의 소가 하루 종일 갈만한 토지 단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 엘리사는 24마리의 소를 앞세워 밭을 간 셈이다.그렇다면 아마도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른 일꾼들이 그와 함께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편 토지 단위로서의 한 겨리는 8분의 5에이커, 즉 약 2,520m2에 해당한다고 한다(Sellers).

(주); 열 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 이 말 역시 열 둘째 쌍의 소를 부린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열 둘째 밭을 맡아 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절 초반을 참고 할 때 열 두번째 쌍의 소를 맡아 부렸다는 뜻이 옳다.

(주);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엘리야의 경우 그의 외모와 함께 특이한 복장은 항간(巷間)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다(Hammond, Keil & Delitzsch). 그러기에 엘리사 역시 이 동작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렸다(20, 21절).

성 경: [왕상19:20]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

(주); 저가 소를 버리고...달려가서 -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소명자들의 비교적 공통된 특징이다(마4:18-22;눅 5:27-29). 아마도 엘리사는 민족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깊이 탄식해 왔던 인물로서 평소부터 엘리야의 활약에 마음깊이 동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주);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법이다. 창 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한편 본절에서의 엘리사의 청원은 눅 9:59의 경우와는 다르다. 즉 눅 9:59에 나오는 사람은, 부친의 생존 기간 동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면에 엘리사는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응당 드려야 할 인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 혹자는 이 말을 약간 힐난조의 말로 본다(Rawlinson, Wordsworth).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은 긍정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뜻이다. 사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행한 것은 선지자적 직무에의 초대이다. 그런데 이 초대는 곧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모에게 입맞추고 오겠다는 엘리사의 요청은 어떤 주저함도 아니다. 도리어 이는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지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엘리야 역시 기꺼운 수락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Lange).

성 경: [왕상19:21]

주제1: [호렙 산상의 엘리야]

주제2: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

(주);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 이 경우는 당연히 '한 쌍의 소'를 도축(屠畜)하였다는 뜻이다. 19절 주석 참조.

(주); 소의 기구(器具)를 불살라 -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를 불사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할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주);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먹게 하고 - 여기서 '백성'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읏 모두를 의미한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惜別)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Pulpit Xommentary).

(주);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 열왕기에서는 엘리야->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다 한다(Stek). 그렇다면 본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요소라 하겠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수종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수종을 든 것이다.(출24:13;수 1:1). 한편 왕하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성 경: [왕상20:1]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아람 왕 벤하닷 - 본절의 벤하닷(Benhadad)은 일찍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와 동맹을 맺은 바 있던 벤하닷 1세(B.C. 900-860)의 아들이다). 그런데 벤하닷 1세는 지중해 무역로 확보를 위해 오므리(아합의 아버지)와도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 국경의 여러 성읍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본장에서 벤하닷 2세(B.C. 860-841)가 아합을 위협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침략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실제로 앗수르와의 전투에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연합군이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추축된다(Bowman). 이 무렵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Sharmaneser ,B.C.859-824)는 서서히 벤하닷의 아람(시리아)을 위협해 오고 있었다.

(주); 왕 삼십이 인 - 당시 아람(Aram)은 여러 개의 소규모 지역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다메섹(Damascus) 왕 벤하닷이 주도권을 잡자 타지역의 왕들에 대한 군주-봉신 관계가 형성되었다. 본절의 32명의 왕들은 바로 벤하닷에게 조공과 병역을 바치는 아람의 소왕들이다. 한편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0:6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20:2]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벤하닷은 이르노니 - 원문은 '벤하닷은 말하다!'(*, 아마르 벤하닷)와 같이 대단히 거만한 말투이다. 즉 여기서 '아마르'(*)는 '명령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수 11:9;대하 29:24;에 9:25). 이는 곧 왕이 신하에게나 걸 법한 말투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이와갈이 말을 걸었다는 것은 충동과 도발의 의도를 지닌 것임이 분명하다.

성 경: [왕상20:3]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네 은금은 내 것이요..내 것이니라 - 이와 같은 벤하닷의 자극적인 언사(言辭)는 아합의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를 뚜렷이 내보인다. 심지어 아합의 아내들까지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는 데서 이스라엘의 왕권을 자신의 발 아래로 완전 복속시키려는 벤하닷의 탐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삼하 16:21, 22;왕상 2:22). 이제 이를 좀더 세분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은금의 요구는 실질적인 국력의 약화로 인해 이스라엘이 벤하닷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하려는 조처이다. (2)처(妻)의 요구는 이스라엘 왕권의 독자성과 존엄성 상실을 겨냥한 처사이다. 2:17 주석참조. (3)자녀들의 요구는 일종의 인질, 볼모를 요구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상과 같은 벤하닷의 요구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략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성 경: [왕상20:4]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내 주 왕이여 - 이 호칭은 일반적으로 신하가 왕을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삼상24:8;26:17). 아합은 벤하닷의 막강한 위세에 눌린 나머지 그에게 신하의 예(禮)를 표한 셈이다.

(주);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 이말은 아합의 잠정적 항복이다. 즉 눈앞의 위기국면을 넘기기 위한 전술적 항복일 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은 벤하닷이 자기의 요구를 실제로 관철하려 들자 아합이 분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7절).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합은 대단히 유약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당시 아람의 막강한 위세에 겁을 먹고 어떻게 해서든 화친하려고 생각했던것 같다.

성 경: [왕상20:5]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이미...내게 붙이라 하였거니와 - '불이다'에 해당하는 '나탄'(*)은 요구하는 것을 '내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2, 3절의 벤하닷의 언동(言動)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단호한 실제적 요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에 대해 아합은 단호한 거절도 실제적인 수락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답변을 했던 것 같다.

성 경: [왕상20:6]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수탐(搜探)하여 - 이에 해당하는 '하파스'(*)는 '찾다'(search for)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약탈물을 뒤져 찾아낸다든지 도망자롤 찾아내려는등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44:12;삼상 23:23;왕하 10:23). 한편 '수탐(搜探)이란 역어(譯語)는 '수사하고 탐지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원어에 걸맞는 표현이라 하겠다.

(주); 네 눈이 기뻐하는 것 - 여기서 '네 눈이'(*,에이네이카)는 특별한 관심이집중되어 있는 방향을 말한다. 그리고 '기뻐하는'(*, 마흐마드)은 사랑스러운아내에 대하여 기뻐하듯 확실히 기뻐하는 것율 말한다. 그러므로 '네눈이 기뻐하는 것'이란 아합이 특별히 귀중히 여기어 아끼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여기에는 비단 물건 뿐 아니라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런데도 공동 번역은 이를 '값진 물건'으로 번역하였으니 본절의 의미를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는 감이 있다.

성 경: [왕상20:7]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장로 - '장로'(*, 자켄)들이란 원래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는 권위자요 대표자들로서 왕정 시대에는 왕의 신하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가 임명하는 관원과는 달리 지역 자체에서 이미 존재가 뚜렷한 사람들로서 단지 왕정 체제의 질서내에 편입되어있을 뿐이다. 이들은 일반 행정 뿐 아니라 전쟁시에도 현명한 충고와 조언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Davies). 그런데 이들의 동의와 지지가 왕에게 그토륵 중요했던 것은 왕정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노동력과 군사력을 바로 이 지역민들로부터 얻어내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아합이 설령 일전(一戰)을 불사(不辭)할 결심을 해도 장로들의 동의가 없이는 전투력에 차질을 빚고 마는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장로직의 유래 및 그 역할 등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신 21:1-9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주); 이 사람이...알라 - '이 사람'에 해당하는 '제'(*)는 경멸과 조소가 담긴 비칭(卑稱)이다. 즉 이 말은 '이 자' 혹은 '이 작자' 정도의 어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이 자가 추구하는 악을 보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보다"(*, 라아)는 말은 단순한 응시가 아닌 '주목하여 살피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자세히 알라'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이 장로들의 의분을 자아내어 자신의 전의(戰意)에 호응토록 유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저가...보내었으나 내가 거절치 못하였노라 - 혹자는 군주가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부끄러운 고백을 했겠는가 의심한다(Hammond). 그러나 이 말의 의도가 장로들로 하여금 분노케 하여 전의를 다지려는 것임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본절은 '너희들의 왕이 힘이 없어 그토록 수모를 당해야했다'는 이면(裏面)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성 경: [왕상20:8]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 이 말은 장로와 백성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협의체와 같은 기구를 가리킨다. 즉 이는 국가의 중대사를 협의하기 위하여 모인 일종의 범국민적 비상 시국 대책 위원회를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이는 '성회'(聖會)로도 번역될수 있는 이스라엘의 '총회'(總會)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민 16:2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주);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지도 마옵소서 - 장로들과 백성들의 한결같은 의견을 집약하고 있는 본구절 속에는 아합 왕의 소아적(小我的)이고도 경솔한 처신에 대한 책망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상 아합의 굴욕적 태도로 인하여 아람 왕 벤하닷의 기세는 한층 거만해졌으며,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긍지는 땅 아래로 실추되고 말았던 것이다(4-6절). 따라서 백성들 중 대다수는 가만히 앉아서 아람의 약탈을 지켜보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을 원하였던 것같다. 특히 그들 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경건한 무리들은 성지 유린을 막기 위해 강경 대응책을 적극 지지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성 경: [왕상20:9]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내 주 왕께 고하기를 -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아합이 벤하닷을 가리켜 '내 주 왕'이라 칭하는 것은 여전히 굴욕적인 자세가 아닐 수 없다. 4절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아합의 처세는 다분히 외교적 실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즉 아합은 표면적으로는 비록 굴욕적으로 보이더라도 최대한의 양보를 통해 승산없는(적어도 아합이 보기에) 전쟁을 피하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 복속(服屬)을 겨냥하고 온 벤하닷은 처음부터 속셈이 달랐다. 즉 그는 이스라엘의 외교적 굴복이 아닌 실제의 굴복을 목표한 것이다. 3절 주석 참조.

(주); 처음에...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 이 말에서 벤하닷의 첫번째 요구와 두번째 요구가 내용에 있어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벤하닷의 첫번째 요구는 전쟁에 패한 왕으로서의 배상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두번째 요구는 아합의 궁전은 물론 그의 온 백성들의 집까지도 뒤져 약탈하겠다는 알종의 수도(首都)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6절). 그러므로 아합의 대답은 최대한 협상일의 폭은 첫번째 요구까지이며 그 이상의 요구에 대해서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내용인 셈이다. 그런데 7,8절을 참고해 보면 장로와 백성들은 벤하닷의 첫번째 요구에 이미 분노를 느끼고는 단호한 거절의 의지를 표명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아합은 백성들의 의지를 확인한 후에도 지극히 유약하고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본문에서 이세벧의 강렬한 성격과 함께 이스라엘의 신앙 타락의 한 원인으로 암시되기로 한다. 19:1, 2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0:10]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사마리아의...족할 것 같으면 - 아합왕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격노한 벤하닷은 고대 근동 특유의 과장적 표현을 통해 더욱 거센 위협을 가하였다. 즉 본절에 담긴 의미는 두 가지인 바 아람군의 무차별 살상과 공략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성은 철저히 잿더미로 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람군의 수효가 하도 엄청나기 때문에 초토화된 사마리아 성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도 아람군들의 주먹조차 채울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성 경: [왕상20:11]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갑옷 입는 자... 자랑치 못할 것이라 - 여기서 '갑옷 입은 자'란 이제 막 싸움의 채비를 차리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갑옷 벗는 자'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제 전투복을 벗는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아직 싸워 보지도 않고 결과를 장담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이는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서 이미 승리를 거둔 둣이 교만방자하게 군 벤하닷을 비꼬는 풍자적(諷刺的) 표현이다. 이는 곧 우리 속담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런데 Living Bible은 영어 속담을 인용하여 본절을 '알이 부화되기도 전에 병아리 수효를 세지 말라'(Dont't count your chickensbefore they hatch!)로 번역하였다. 아무튼 본절과 관련해서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버린 채 돌과 물매만 갖고서 갑옷 입은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소년 다윗을 상기할 수 있다(삼상 17:39-49).

성 경: [왕상20:12]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의 도전]

(주); 장막 - '장막'(*, 수코트)은 '오두막'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고대 근동의사막에서 왕과 장수들을 위해 설치하는 병영내의 가건물을 가리킨다.

(주); 마시다가 - 이에 해당하는 '쇼테'(*)는 곧 '술을 마시다가'란 뜻이다. 이는 우리말에서도 '마신다'는 말만 가지고 음주를 완곡(婉曲)하게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 전쟁터에 와서까지도 한가롭게 술을 마시는 벤하닷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군을 깔보았는지 여실히 증거해 준다.

(주); 진(陳)을 베풀라 - 원문에는 흔히 '진'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마하네'(*)나 '타하나'(*) 같은 명사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마치 '위치로!'하는 군대식 명령이 곧 군대로 하여금 맡은 바 위치에 포진(布陳)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절 역시 '베풀다'는 말 속에 이미 그 같은 의미가 층분히 포함되어 있다.

성 경: [왕상20:13]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주); 한 선지자가 - 이 선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Micaiah)라는 주장도 있으나 22:8에 의해 부인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선지자는 아합에게 기쁜 예언을 전하나 미가야는 한번도 아합에게 좋은 예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Hammond). 또한 메시지의 성격으로 보아서 이 선지자는 엘리야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메시지는 대체적으로 경고와 심판의 내용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18:18;21:20-26). 따라서 이 자는 당시의 무명(無名)의 선지자 생도중 한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5절 주석 참조.

(주);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 본장에는 아합이 벤하닷에게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온다(16-21, 26-34절). 엘리야의 투쟁과 아합의 범죄를 그려 나가던 본서 기자가 이처럼 본장에서 느닷없이 아합의 승리를 수록한 것에 대해 독자들은 석연치 않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절은 아합이 심판받아 마땅한 왕임에도 블구하고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일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크신 권능을 나타내심으서써 오직 당신만이 환난날의 구원자시요(시 9:9) 모든 축복의 근원이되심을 아합은 물론 온 백성들에게 거듭 거듭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요컨대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영원하신 언약을 상기시키려는 집요한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8:9;삿 2:1;대상 11:3;대하 23:16등).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향후(向後)의 태도에서 입증되듯이 아합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격하여 회개하기는 커녕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한갖 위기극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간주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아합의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色慾)거리로 바꾼 것이나 진배없다 하겠다(유 1:4). 아합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도 실상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22:29-40).

성 경: [왕상20:14]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주); 각 도(道)의 방벡(方伯)의 소년들 - '각 도의 방백'이란 아합의 행정 구역을 관할하는 지방 장관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비록 본문은 상세한 기록을 삼가하고 있지만 계속 이어지는 기록으로 볼 때(15-20절) 벤하닷의 침공이 개시되자 이들 지방 장관들은자기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도 사마리아에 집결, 농성(籠城)을 계획했던 듯하다. 한편 본절에서 '소년'(*, 나아르)은 어린 소년을 의미하기보다는 '젊은 청년'을 의미한다. 특히 군사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대개 '병사들'을 가리킨다(수 6:23;삿 9:54;삼상 9:2;25:5;삼하 2:14). 그러므로 '각 도의 방백의 소년들'이란 지방 장관들이 끌고 온 군대를 의미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출중한 무용(武勇)으로 인해 특별히 뽑힌 정예병들로 보인다.

(주);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 '시작하리이까'는 '공격을 개시하다'는 뜻인 '아사르'(*)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누가 맨처음 공격을 개시하리이까'라는 뜻이다.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를 "진두에는 누가 설 것입니까?"로 옮겼다. 이는 원어에 함축된 뜻이 개역 성경에 비해 더 잘 전달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왕상20:15]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이스라엘군의 병력을 소개하는 본절은 그 왜소한 규모를 알림으로써 더욱더 전쟁의 승리가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즉 최소한 10만 이상의 적과 대치한 이스라엘군은 불과 7,232명인 것이다(29절). 그런데 이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한 전공(戰功)이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라는 모티프(motif)는 구약에 자주 등장한다(창 14:14-16;삿 7:16-22).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성 경: [왕상20:17]

주제1: [아합과 벤하단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첫번째 승리]

(주); 탐지군(探知軍)을 보내었더니 - 원문에는 '탐지군'에 해당할 만한 용어가 따로 보이지 않는다. 단지 '벤하닷이 보낸 그들이 말하기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척후 활동에 있음이 분명하므로 '탐지군'이라 호칭한 것이다. 그런데 18절로 미루어 볼 때 탐지군들의 보고는 좀 명확치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보고를 받은 벤하닷이 진출한 이스라엘군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탐지군들 역시 맨처음 진출한 '각도 방백의 소년들'이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에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성 경: [왕상20:18]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첫번째 승리]

본절 역시 당시 벤하닷의 자만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 준다. (1) 즉 이스라엘군이 화친하러 나오든 싸우러 나오든 무조건 그들을 사로 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그가 앞서 아합의 답변(11절)에 몹시 기분상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Hammond). (2)다음으로 사로잡으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당시 벤하닷이 이스라엘군을 숫제 맞붙어 싸울만한 상대로 여기고 있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벤하닷은 설령 이스라엘군이 싸우러 나왔을 경우에도 어른이 어린아이 다루듯 쉽사리 그들을 제압하여 사로잡을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정녕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만심(慢心)에 빠져 있는 벤하닷과 같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 않는가!(잠 16:5;벧전 5:5)

성 경: [왕상20:19]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첫번째 승리]

(주); 저희를 좇는 - 원문은 '아하레이헴'(*), 즉 '그들의 뒤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각 도 방백의 소년들'과 7,000명의 수도 방위 병력(15절)간의 관계 및 임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본절에 의거할때 당시 각 도 방백의 소년들은 특별한 용맹과 무예로 선봉대의 임무를 맡음과 동시에, 수도 방위 병력의 단위부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왕상20:20]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첫번째 승리]

(주);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 원문은 '각자 자기가 맡은 적을 치매'(*, 와야쿠 이쉬 이쇼)라는 뜻이다(KJV, they slew everyone his man).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스라옐 정예병들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각기 습격해야 할 요소(要所)들을 정하는 등 철저하고 조직적인 사진 계획에 따라 일사 불란하게 적진을 난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승전의 원리는 성도들의 영적전투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엡 6:10-20).

성 경: [왕상20:21]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첫번째 승리]

(주); 크게 도륙(屠戮)하였더라 - 원문은 '들이쳐서 큰 학살을 하다'(*, 웨하카 마카 게도르)는 뜻이다. '도륙'(屠戮)이라는 역어(譯語) 역시 '무참하게 마구 죽이다'는 뜻이니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러한 표현에서 당시 아람군은 대군임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변변히 대항도 못한채 죽임당했음을 알수 있다.

성 경: [왕상20:22]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왕은 가서...알고 준비하소서 - 아합에게 내린 선지자의 예언처럼 싸움을 준비하고 훈련된 자만이 다가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일회적 승리는 있을지언정 계속된 승리의 보장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엡6:10-13;벧전5:9) 연승이 약속될 것이다. 따라서 아합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여호와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을 예비해야만 했었다.

(주); 해가 돌아오면 - 이에 해당하는 '테슈바트하솨나'(*)는 '해의 되돌아감'(the return of the year)이란 뜻으로 '명년 봄'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테쿠파트하솨나'(*)가 있는데 이는 '해의 회전'(the turning of the yeardl)란 뜻으로 '명년 가을'을 의미한다. 한편 근동 지방의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므로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성경 총론, '성경의무대 팔레스틴' 참조. 그러므로 당시의 침공은 대개 건가(乾期)인 여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는 수치에 절치 부심(切齒腐心)한 벤하닷은 해가 바뀌자 마자 재차 이스라엘을 침공하려 들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0:23]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 고대의 다신론적 관념에 따르면 한 신은 보통 한 지역 또는 한 기능을 맡는 신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아람인들 눈에 산신(山神)으로 비치었다. 한편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처럼 산의 신이라 믿은 데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은 아직 왕정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 가나안 주민들과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때 철병거와 마병을 소유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인들이 잡은 거점은 팔레스틴의 여러 산악 지대이다. 즉 그러한 장소에서는 가나안의 우수한 병기들이 크게 효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삿 4:1-16).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악지대에서 물을 찾아내고 거기서 거주하는 적응력을 갖고있었다. 이러한 모든 점이 곧 주변 부족 및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 놓은 것이다.

(주);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강할지라 -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첫번째 전투에서 호되게 패한바 있는 아람 왕의 신복들은, 가장 큰 패인(敗因)을 어떤 이적적 신통력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23절). 또한 그러한 미신적 배경외에 객관적 전략 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우세하리라는 판단을 내렸을것이다. 왜냐하면 평지에서는 기습 공격이 쉽사리 먹혀들지 않으며 더구나 아람군은 기병들과 전차 병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히다(1, 25절).

성 경: [왕상20:24]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제하여...떠나게 하고 - '제하여 떠나게 하고'에 해당하는 '하세르'(*)는'돌이키다', '떠나다'는 뜻인 '수르'(*)에서 온말이다. 여기서는 32왕들(1절)이아람 연합군 내에서 맡았던 임무를 해제하도록 권고하는 말로 쓰였다. 즉 벤하닷의 신복들은 나름대로 이전의 패인(敗因)을 분석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들의 지휘 체계에 구멍이 났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왕들은 엇갈린 이해 관계 때문에 성의 있게 전투에 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초반 접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밀리자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대로 퇴각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하닷의 신복들은 이번에는 그런 결함을 제거하고 전쟁에 임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주); 저희 대신에 장관들을 두시고 - 비록 아람 소국(小國)의 32왕들이 명색상 군 통솔자들이었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전투 지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벤하닷의 신븍들은 벤하닷에게 그들 대신 실제 작전에 능한 군대 장관들로 병력을 통솔하도록 주청(奏請)한 것이다.

성 경: [왕상20:25]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군대를...충수(充數)하고 - 흑자는 앞서 벤하닷의 신복들이 32왕들을 연합군에서 배제하자 한 것(24절)은 곧 지원군들의 철수를 주장한 것이라고 풀이한다(B hr). 그러나 본절은 군대를 이전 규모로 복원할 것을 건의하는 말이다. 특히 여기서'충수하고'(*, 티메네)는 '수를 세다'는 뜻인 '마나'(*)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정확히 이전에 유지했던 군대의 숫자 만큼 보충하자는 뜻이다. 그런데 각 왕들의 휘하 부대를 제외하고 단지 벤하닷의 다메섹군만으로 그만치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24절에서 볜하닷 신복들의 건의는 다만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인 32왕들만 실제적으로 유눙한 장관들로 교체하자는 뜻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주);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당혹감,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외로옴....이러한 자들이 선택하여야 할 길은 겉만 번지르르한 사망의 길이다(잠2:18;시 1:6). 인간의 생각에 일견 번쩍이는 섬광같은 지혜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따를 순 없다.

성 경: [왕상20:26]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해가 돌아오매 - 즉 '명년 봄이 되매' 22절 주석 참조.

(주); 점고(點考)하고 - 이에 해당하는 '파카드'(*) 역시 '마나'와 비슷하게 '수를세다'는 뜻이다. 25절 주석 참조. 그러나 그 의미는 퍽 차이가 난다. 즉 '마나'는 산술적(算術的)인 의미에서 '계산하다'인데 반해, '파카드'에는 '아랫사람을 감독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본절의 '점고하다'는 말은 전쟁에 나갈만한 성인 남자의 수를 센다는 뜻으로 곧 병력 소집을 의미한다.

(주); 아벡 - 아벡(Aphek) 또는 아빅(Aphik)의 뜻은 '샘터', '강바닥', '요새'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같은 지명이지만 서로 다른 곳이 몇 군데 나오니 혼돈해서는 안 된다(수13:4;삿1:31;삼상4:1;왕하 13:17), 그 중에서 본절의 아벡은 트랜스 요르단 븍부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다메섹과 벧산 또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연결하는 도로상에 위치하였다.

성 경: [왕상20:28]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하나님의 사람 - 원문에는 이 단어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은 13, 22절에 나오는 선지자와 동일인인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 이미 앞에서도 언급된 사항이긴 하나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일개 지역신으로 간주한 아람인들의 처사는 여호와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독신(瀆神) 행위이다. 23절주석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벡 평지에서의 전투를 통해, 아랍인들의 편협하고 우매한 생각을 무너뜨림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렇듯 허탄한 이교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미연에 조치를 강구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한편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중에도 기독교의 생성 베경을 이스라엘 역사의 발전 과정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즉 원래 여호와는 씨족신 내지는 부족신이었으나 가나안 정착 이후로는 주로 국가신으로 받들어졌으며. 그 후 예수에 의해 문자 그대로 온 인류의 신으로 발전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얄팍한 인지(人智)에 근거한 추측으로서,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온 인류와 우주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의심한데서 기인한 것이다(엡 1:4).

성 경: [왕상:20:29]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제 칠 일에 접전하여 - '접전하다'에 해당하는 '카라브'(*) 는 '전투에 들어가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군대가 막바로 접전하지않고 왜 하필 7일째 되어서야 비로소 전투를 개시하였을까? 한번 패배한 적이 있는 아람군(16-21절)이 신중한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라든지(hammond).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이스라엘인들의 관념 때문이라든지(bahr)하는 주장들도 물론 일면의 통찰을 제공하기는 한다.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개입(28절)에 의한 승리라는 점에서 여리고의 승리와 아벡의 승리가 갖는 유사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즉 여호수아 당시 여리고 성읍도 제 7일째에 함락되었다(수 6:1-21).

(주); 십만을 죽이매. - 여기서 '죽이다'로 번역된 '나카'(*)는 '치다','격파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8만 대군을 모두 죽였다는 뜻이기 보다는 그들을 격파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뒤이어 타오는 절에서 남은 자 27,000명이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30절).

성 경: [왕상20:30]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두번째 승리]

(주); 그 성이...위에 무너지고 - 이처럼 아백 성이 무너진 현상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었었다. 즉 지진이라든가 이스라엘군의 작업에 의한 결과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B hr, Hammond). 그러나 그 상세한 방식을 본문이 알리지 않는한, 집요하게 추측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정작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여호와를 무소 부재하신 분으로 선포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keil & Delitzsch). 즉 인위적인 수단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이 붕괴된 일은 명백히 여리고 성의 전례에 비교된다(수 6:20). 그리고 두 사건의 유사성에서 아벡 성의 붕괴는 여리고 성의 붕괴를 일으킨 같은 주체, 즉 하나님에 의한 결과라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실 평지에 위치한 아벡 성의 붕괴는 여호와가 산의 신만이 아님을 명백히 알리는 사건이다(23,28절).

(주); 벤하닷은...골방으로 들어가니라 - 본절의 '골방'(*, 헤데르 베헤데르)은 '가장 깊숙한 내실'을 의미하는 '헤데르'가 두번 거듭된 말이다. 즉 이는 '골방 중의 골방'이란 뜻이다. 사실 대개의 성은 유사시에 대비해 은밀히 숨을 곳이 만들어져 있기 마련이다. 벤하닷이 피신한 곳도 아벡 성내의 바로 그와 같은 장소이다.

성 경: [왕상20:31]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과 약조하는 아합]

(주);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이 당시 고대근동의 주변 국가들에게 어떻게 비쳤었는지 그 일면을 포착할 수 있다. 즉 대개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왕정은 덜 포학하고 덜 전체적인 것으로 비친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이스라엘 왕정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출발한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애굽왕권의 포학성을 익히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역사적 요구에 따라 왕정 시대를 개막하긴 했으되, 율법으로써 왕권에 상당한 제동을 가하였던 것이다(신 17:14-20).그러므로 비록 자체의 기준(즉 율법)으로 볼 때는 열왕의 성향은 대체로 타락한 것이지만, 주변 국가들의 눈에는 상당히 어질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주); 굵은 베...머리에 이고 - 이러한 행동은 죄인이 용서를 빌거나 또는 상대방에게 복을 표할 때 취하던 고대의 관습적 자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굵은 베는 '참회'의 표시이며 테두키(rope)는 '굴복'의 표시이다(B hr). 그런데 '테두리를 머리에 이다'(*, 하발림 베라슈누)라는 말은 요세푸스의 주장을 참조하면, '줄을 목에 걸다'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때 줄을 목에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생사가 오로지 상대의 결정에 달렸다는 완전한 굴종의 표시이다.

성 경: [왕상20:32]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과 약조하는 아합]

(주); 왕의 종 벤하닷 - 여기서 '왕의 종'이란 말은 신하의 입장을 자청하는 굴복의 표시이다. 앞서 4절에서 '내 주 왕이여'라는 굴욕적 표현을 써야 했던 인물은 이스라엘 왕 아합이었다. 그러나 이제 본절에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처지가 뒤바뀌었다. 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역전은 벤하닷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다(28-30절).

(주); 나의 생명을 샅려 주옵소서 - 이처럼 비참한 벤하닷의 간구는 한때 기세 등등했던 그의 오만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6, 10절).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어 티끌 속에 묻어 버리시며(욥 40:11-13) 자신의 힘을 믿고 악한 계교와 횡포를 일삼는 무리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올무에 빠져 들게 만드신다(시 141:9, 10).

(주); 저는 나의 형제니라 - 여기서 '형제'란 말은 이웃 나라끼리 사용하는 공식적 외교 용어일 경우, '동맹국'또는 '동맹국의 수반(首班)'을 가리킨다. 본절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의미인데 이는 아합의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즉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 자이다. 28절 주석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벤하닷을 멸하기로 작정하셨다(42절). 그런데도 아합이 벤하닷을 가리켜 '나의 형제'라 하였으니 이는 크나큰 실책인 것이다.

성 경: [왕상20:33]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과 약조하는 아합]

(주); 징조(徵兆)로 여기고 - 이에 해당하는 '열심히 관찰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이때 이 말은 곧 어떤 결과를 판단해 내기 위해 열심히 동정을 살펴보는 동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절은 항복 소식을 전하러 온 벤하닷의 신복들이 과연 벤하닷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 열심히 살피는 교활한 눈매를 연상하게 해준다.

(주); 얼른 받아 대답하여 - 벤하닷의 신복들은 아합 왕이 자신이 뱉은 말을 철회할 수없게끔 얼른 그 말을 받아 되풀이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합으로서는 설령 자신의 말을 철회할 마음이 생기더라도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열왕기 기자로부터 역대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는 아합은 줏대없음과 함께(19:1) 이처럼 경솔한 면도 노출시키고 있다.

(주); 왕이 저를 병거에 올린지라 - 이처럼 아합이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태워 자세를 나란히 한 것은 곧 그와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한 이스라엘 영토를 침략한 벤하닷에게 아합은 마치 동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32절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이처럼 애매한 처신은 곧 아합 통치의 성격을 은연 중 드러내보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아합의 통치는 외국과의 교류와 경제에 의존하는 기반위에 토대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심지어 아합이 속한 오므라 왕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하나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아합이 이방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인 점(16:31)이나 우상 숭배를 자행(恣行)한 점(16:32, 33),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경시한 점 등은 모두 이스라엘의 민족적 입장에 대치되는 처사들이었다. 즉 그 모든 행위들은 피아(彼我)를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합이 지금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함께 태우고 있음 역시 그 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한번 드러내 주고 있는 행위와 다름없다. 한편 아합의 이러한 처사를 다른 각도에서 살핀다면, 그는 아람 같은 강국(强國)과 적대하기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성 경: [왕상20:34]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벤하닷과 약조하는 아합]

(주); 내 부친이...빼앗은 모든 성읍 - 혹자는 이 말을 15:20-22에 기록된 내용과 동일시하면서, 벤하닷이 바아사(Baasha, B. C. 909-886)를 아합의 부친으로 착각했을 것이라 추측한다(Hammond). 그러나 이 견해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는 당시 주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왕이었다. 일찍부터 이스라엘과 때로는 친선, 때로는 적대 관계를 맺어 온 아람국들이 바하사와 오므리를 구별못할 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사마리아 성읍은 바아사 당시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마리아가 건축된 때는 오므리 시대이다(16:24). 또한 우리는 열왕기가 왕정 시대의모든 사건을 수록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지않은 전쟁이 벤하닷 1세와 오므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주); 다메섹에서...거리를 만드소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절에서 말하는 '거리'(*, 후초트)를 도시의 특정 지역에 세워진 무역 시장으로 해석한다(ontgomery, Keil & Delitzsch, R.D. Patterson). 그렇다면 아마도 이전까지는 사마리아에만 아람의 무역시장이 있어 아람인들만이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다메섹에 '거리'를 만들도록 한다는 조치가 항복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을 보면, 거기서 올릴 수 있는 수입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주); 이 약조(約條)로 당신을 놓으리라 - 이처럼 아합이 몇몇 성읍의 반환과 무역 이익을 보장 받고선 벤하닷을 살려준 조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가들에겐 납득할 수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는 분명 아합의 처사가 눈앞의 조그마한 경제적 이익과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맞바꾼 불순한 결정으로 보였을 것이다(42절).

성 경: [왕상20:35]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최후 예고]

(주); 선지자의 무리 - 이에 해당하는 '베네 하느비임'(*)은 '선지자의 아들들'(sons of prophets)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선지자의혈육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대신 이는 B.C. 11세기 경 사무엘 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선지자 집단들은 엘리사의 활동과 관련해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왕하2:3;3:11; 4:1,38;6:1,2).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10:1-16 강해, '선지자 학교'를 참조하라.

(주); 동무 - 이에 해당하는 '레아'(*)는 '교제하다', '사귀다'는 뜻인 '리아'서(*)에서 온 말이다. 여기서 이는 선지자 생도의 동료. 즉 함께 생활하고 교제하는 친구를 가리킨다.

(주); 너는 나를 치라 - 하합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할 선지자가 왜이처럼 얻어터지고 상처입은 형상을 취해야만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정컨대 이는 장차 아합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시하기 위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아무튼 본문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온갖 고초마저 무릅쓰는 등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왕상20:36]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최후 예고]

선지자의 동무는 선지자의 단호한 결의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변치 못하고 인간적 정리(情理)에 사로잡혀 감히 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35절). 그러나 본절에서 보듯 그는 그로 인해 사자의 밥이 되는 끔찍한 저주를 당하고 만다. 이에 대하여 독자(讀者)들은 상당향 의아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합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만큼 크고 단호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의아심은 해소될 수있을 것이다. 즉 선지자의 동무는 인간적 정리에 연연하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어야 마땅했다.

성 경: [왕상20:37]

주제1: [아합과 벤하닷 간의 전쟁]

주제2: [아합의 최후 예고]

(주); 그 사람이...상하도록 친지라 - '상하도록'은 '타박상을 입히다'는 뜻의 '파차'(*)이다. 그런데 다음절에서 선지자는 눈을 붕대로 감고 있다. 물론 이는 변장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때 타박상올 입은 곳이 눈부위였던 것 같다. 한편 본절에 등장한 익명의 인물 역시 선지자 생도 중 한 명이다. 왜냐하면 '또 다른'에 해당하는 '아헤르'(*)는 영어의 another(one more of the same kind)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또 다른 사람'이란 '또 다른 선지자 생도'임이 분명하다.

성 경: [왕상21:1]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는 아합]

본절은 나봇 사건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아합(20장)은 당시 이스라엘에 별궁을 지어 두고 사치와 방탕 생활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그 즈음에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유흥지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탐욕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주); 이스라엘 - 므깃도와 벧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제린(Zerin)으로 추정되는 성읍이다. 구약 시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아합은 특별히 이곳에 별궁을 건설, 종종 거처하였던 듯하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8:46 주석을 참조하라.

(주); 나봇 - '나봇'(*, 나보트)은 아마도 '싹트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Ward). 나봇의 조상들은 이스라엘에서 대대로 포도 재배를 해왔을 터이니 그러한 직업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음직도 하다.

(주); 포도원 - 팔레스틴의 가장 특징적 식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와 이를 재배하는 포도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정의 원천이 되었다(Ross). 신20:6은 포도원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에게는 병역 의무를 면제하여 귀가 조치케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팔레스틴에서 포도원이 갖는 경제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신7:13주석 참조.

성 경: [왕상21:2]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는 아합]

(주); 나물 밭 - 여기서 '나물'(*, 야라크)이란 녹색의 풀 종류 일반을 말한다. 그리고 '밭'(*, 간)은 오히려 '뜰' 또는 '정원'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나물 밭'이란 '푸른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공동 번역). 보통 이러한 정원은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장소로 고안되곤 했다. 그리고 또한 종종 우상 숭배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사1:29;65:3;66:17).

(주); 만일 합의하면 - 이에 해당하는 원문(*, 토브 베에이네이크)은 문자적으로 '눈에 좋거든'이란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상대방의 의사를 한껏 존중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비록 왕이라도 남의 토지를 무작정 몰수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데서 비록 초기의 이상(理想)은 많이 빛바랜 것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한 땅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권력자라도 그 소유관계를 함부로 변경할 수는 없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구속력을 보게 된다(레25:23).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제한일 뿐 왕정 시대가 개막된 이래 왕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토지 소유를 확장하려 들었다. 사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모두 대지주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조차 이를 흉내냈다는 현실적 사실은, 조건은 어떠하든지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던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아합이 시도하는 토지 소유의 확대는 일찍이 사무엘이 경고했던 바에 부합한다(삼상8:12,14). 즉 백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왕의 토지를 경작해야 하며, 거기서 거둬 들인 농산물은 더이상 생산자인 백성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왕은 자꾸 백성들의 포도원과 감람원을 빼앗아 자기 신복(臣僕)들의 손에 넘겨 준다. 이러한 경고는 신정 왕국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봉사자여야 하나 실제로는 모든 백성이 도리어 왕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타락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합이 나붓의 포도원을 소유하려는 표면적 구실은 무엇이든 그 실제적 동기는 왕권의 극대화를 위한 토지 소유의 확대 도모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왕상21:3]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는 아합]

(주); 열조의...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나봇(Naboth)의 이 같은 대답은 그가 여호와 신앙가이며 율법에 충실하려는 인물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물론 아합이 후한 보상을 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봇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 포도원이 선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유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전해야 할 분깃인 선조의 유업을 매각하는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1)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을 때 근족이 무를 것, (궁핍하여 무를 날짜를 연기할 때는 연기된 기한을 계속하여 무를 것, (2)무를 힘이 없을 때 그 토지를 산 자가 희년(禧年)에 돌려 줄 것 등을 율법으로 명시하셨다(레25:23-28). 그러나 나봇처럼 전통의 신앙과 이상에 충실하려는 인믈이 아합 시대와 같은 변질된 시대에 얼마나 더 있었는지는 자못 의문스럽다.

성 경: [왕상21:4]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는 아합]

(주); 근심하고 답답하여 - 이에 앞장에서도 언급된 구절로서 내적 격동으로 인해 속이 타거나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20:43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심리상태에 대해 거듭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에서 우리는 그의 완악함과 패역(悖逆)함을 엿볼 수 있다.

(주); 침상(寢狀)에누워...식사를 아니하니 - 본절에서 아합은 마치 투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나타난다. 즉 그는 갖고 싶은 것을 못갖게 하자 심통난 아이처럼 식사를 거절하고 누워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혀 성인다운 면모롤 보이지 않는 아합에게서 독자(讀者)들은 그가 왕으로서 너무 졸렬한 인물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스라엘에 외국의 우상 숭배가 도입되고 번창되게 된 원인(16:29-33)에는 아합의 이처럼 줏대없고 성숙치 못한 사람됨이 한몫을 차지하였다. 한편 아합의 소유욕이 빚어낸 이 우스갯거리는 결국 나봇 살인이라는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5-16절). 여기서도 우리는 죄가 죄를 유발한다는 죄의 속성(약1:15)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성 경: [왕상21:5]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이세벨의 간계(奸計)]

(주); 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 아합의 무기력하고 유치한 면은 도리어 이세벨의 강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을 부각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본절에서도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마치 후견인 같은 자세로 등장한다. 즉 그저 드러 누워 끙끙 앓는 아합에 비해, 질문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려는 이세벨은 훨씬 적극적이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의 관계에 있어 늘상 끌려 다니는 쪽은 아합이었던 것이다. 19:1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1:6]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이세벨의 간계(奸計)]

아합이 일의 자초 지종(自招至終)을 이세벨에게 고하고 있는 본장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1)대체로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전제 군주적(專制君主的)성격이 강한 두로 출신의 이세벨(더구나 이 여자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을 기억해야 한다)에게 아합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게 들렸을까 하는 문화적 차이점이다(16:31). (2)아합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시시콜콜히 이르는 어린 아이처럼 처신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일찍이 자신이 신봉하던 우상 종교 도입을 요청하는 이세벨에게 아합이 여호와 신앙의 바람막이가 되기에는 분명히 역부족이었을것이다(16:31-33). 아합이 펼친 종교 정책에는 언제나 이세벨의 입김이 작용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성 경: [왕상21:7]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이세벨의 간계(奸計)]

(주);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 본절은 의문문이 아니다. 히브리 원문상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왜 그 모양입니까'라는 힐난조의 말이다. ModernLanguage Bible은 이를 '당신은 이스라엘에 대해 왕권을 행사하지 않을 겁니까? '(Donot exercise the kingship over Israel?)로 좀더 풀어 번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세벨이 가긴 왕권 개념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적 개념과는 다른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세벨은 고대 근동의 전제 군주가 일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본절과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왕권은 보다 제한적이다. 2절 주석 참조. 즉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다른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 준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신17:14-20). 이 점은 고대 근동의 거의 무제한적 왕권에 비해 훨씬 행동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아합은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부모의 유업 외에 타인의 유업을 함부로 탈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벨의 눈에는 그같은 아합의 행동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왕답지 못한 처사로 비쳤을 것이다.

(주); 내가...드리리이다 - 나봇의 말 중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3절)을 '내가' 주겠다고 말하는 이세벨의 언동에서, 그녀가 정녕 이스라엘을 해치는 대적임이 극명(克明)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이세벨은 아합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방향을 왜곡하도록 부추긴 암적(癌的) 존재였다.

성 경: [왕상21:8]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이세벨의 간계(奸計)]

(주); 아합의 이름으로...그 인(印)을 쳐서 -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인장(印章)의 용도 역시 다양했다. 즉 인장은 의식서 날인, 재산 증서의 신빙성 보장, 공문서의 권위보증 등 여러 효능을 띠었다. 본절에서 이세벨이 거짓 편지를 쓴 후 아합의 도장으로 인친 것도 그 내용이 의심할 바 없는 것임을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세벨은 백성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기 위해 왕의 인장을 도용(盜用)하는 짓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한편 당시의 도장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외에도 굴려서 인을 찍는 원통형 인장, 그리고 인장 반지도 있었다. 창41:42 주석 참조.

(주); 쳐서 - 이에 해당하는 '하탐'(*)은 그 자체로 '인을 찍다', '봉인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하탐'하는 것은 남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끔 비밀에 붙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친서는 비밀리에 이스르엘의 장로와 귀인(貴人)들에게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 귀인 - 이에 해당하는 '호르'(*)는 성경에 '귀족'으로도 번역되어 있다(전10:17;렘27:20). 그러나 이들의 지위나 직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카일(Keil)은 이들을 행정관들(the members of the magistracy)로 보고 있다.(Keil&Delitzsch Commentary, Vol. III, p.270)

성 경: [왕상21:9]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이세벨의 간계(奸計)]

(주); 금식을 선포하고 -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공적인 금식 선포는 공동체 내의 악행 및 죄에 대해 집단적 참회를 촉구하는 것이다(삼상7:6;14:24). 즉 한 개인의 죄는 그사람만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회개와 관계 개선이 요구된다는 사고 방식이 담긴 행위이다. 에스더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그러나 본절의 금식 선포는 도리어 악행을 짓고자 하는 음모에서 발단된 그릇된 성격의 것이다. 즉 이세벨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성읍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블러 일으키려고 이스라엘 성읍에 금식을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증스러운 죄악'이란 물론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날조된 죄를 의미한다(10,13절).

(주);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앉힌 후에 - 즉 나봇을 피고인(被告人)의 신분으로 재판정에 앉히운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도 모르는 체 이처럼 재판정에 끌려나온 나봇은 필시 어리둥절하였을 것이다. 13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1:10]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이세벨의 간계(奸計)]

(주); 비류(匪類) - 이에 해당하는 '베네벧리야알'(*)은 문자적으로는 '무가치함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잘못없는 존재가 아니라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삿19:22주석과 삼상10:27 주석을 참조하라.

(주); 두 사람을 - 사람을 사형에 처하려면 두세 사람의 증언이 요구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다(신 17:6). 이 규정을 최소한도로 만족시키기 위해 이세벨은 두 명의 비류를 포섭해 두도록 지시한 것이다.

(주);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저주함은 물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입은 지도자들조차 저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20:7;22:28). 우리는 이러한 규례를 어긴 탓에 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사형에 처해진 사례를 레24:10-16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였다(레 24:15). 그런데 이세벨은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 돌로 쳐 죽이라 - 율법상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우상 숭배자(신13:10), 신접하거나 박수가 된 자(레 20:2,27),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레24:14), 간음한 여인(신22:21)등에게 가해졌다. 이러한 형 집행 절차는, 먼저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묶어서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대 위에 올려 두면, 한 증인이 그를 밀어 뜨리고 이어 두번째 증인이 큰 돌로 먼저 쳤다. 그 후 둘러 선 무리가 함께 돌을 들어 쳤는데 이때 죽은 자를 위한 애곡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개적, 공동적 돌 처형법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경각심과 연대(連帶) 의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신13:10,11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1:11]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죽음]

(주); 장로(長老)와 귀인(貴人)들이...쓴대로 하여 - 이스라엘의 장로와 귀인들이란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권익 수호와 율법 준수를 위해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할 위치에 있는 계층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세벨이 율법을 악용하는 범죄에 별 저항없이 동조하였다. 이는 곧 법관이 법을 악용(惡用)하는 것과 같은 형국인바 아합 시대 수뇌부들의 타락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례이다.

(주); 이세벨의 분부 - 본절은 장로와 귀인들이 받은 밀서(密書)가 비록 아합의 명의와 낙인으로 되어 있지만(8절), 그 모의 주체는 이세벨임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런 사실은 편지를 받은 장로와 귀인들도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벨의 잔혹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을 거역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장로와 귀인들은 왕비 이세벨에 영합하여 기왕에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이익을 보존하려던 자들일지도 모른다. 즉 이런 부류들은 세태의 흐름에 영합하여 이세벨에 협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변화(사실은 변질이라 해야 할)를 가져오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1:12]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죽음]

시대를 막론하고 금식은 개인적로나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신앙 훈련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성, 윤리성이 결여된 종교적 의무로서의 재반 의식(儀式)은 본래의 취지와 순수성이 왜곡당하기 쉽다. 즉 알맹이가 빠진 형식이란 불의와 거짓을 가리워주는 잘못된 도구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금식의 오용(誤用) 역시 자주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던 주제 중 하나이다(사 58:4-6). 본절 역시 금식의 순수성을 해쳤던 역사적 사건 중 일례(一例)이다. 9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1:13]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죽음]

본절에 나오는 재판은 무엇인가 졸속(拙速) 진행의 냄새가 난다. 정상적인 재판 절차에서는 피고의 유죄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뿐만 아니라 피고의 혐의를 벗겨 줄 증인도 동석하는 게 보통이다(시 109:31;잠14:25). 그러므로 나봇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다면 무뢰배들의 무고(無告)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통상있게 마련인 원고(고발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수상하다. 따라서 나봇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나와 순전히 형식적인 재판 끝에 희생된 것임이 분명하다. 한편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 절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소송 사건은 고발자(원고)로 등장한 어느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신25:7), 고발은 대부분의 경우 구두로 하였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서류상으로도 가능하였다(사 65:6;단7:10). 그리고 법정에는 재판관과 원고외에도 피고와 중인들이 동석하였다. 한편 재판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원고와 피고는 각각 사실 증명을 위한 증거품들을 제시했으며(출22:13;신 22:13-17), 재판관은 그것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타 고발 사항 및 변호 사항들을 모두 심리(審理)한 후 최종적으로 중인들을 세웠다. 이때 형(刑)의 확정, 선고를 위해서는 최소한 2명의 증인이 요구되었으며, 거짓 증인으로 판명된 자는 도리어 피고에게 뒤집어 쐬우려고 했던 만큼의 형벌을 대신 받아야 했다(신19:15-21).

성 경: [왕상21:14]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죽음]

(주); 이세벨에게 통보하기를 -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비록 아합의 명의로 편지는 왔지만 나봇 살해 음모는 이세벨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장로와 귀인들은 알고 있었다. 11절 주석 참조. 그래서 그 결과는 이처럼 이세벨에게 통보된 것이다.

(주); 나봇이...죽었나이다 - 왕하 9:26에는 본 사건과 관련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가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나봇의 처형 당시 아들들도 함께 몰살당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이때 나봇만 죽였다면 그 아들들이 조상의 유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을 것이다(민16:27; 수 7:24,25).

성 경: [왕상21:15]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죽음]

(주); 그 이스르엘 사람...포도원을 취하소서 - 혹자는 이 말에서 이세벨의 득의 만만하고 표독(慓毒)한 감정을 읽어낸다(Hammond). 즉 '그 멍청이가 돈을 준대도 거절하더니 고스란히 뺏기게 되었다'는 이세벨의 고소해 하는 표정을 연상해 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말에는 '당신이 돈을 제안하고도 갖지 못한 것을 나는 거저 뺏을 수 있었다'는 악한 자랑도 들어 있는 것이다. 한편 '취하소서'는 '이어받다', '상속하다'는 뜻의 '야라쉬'(*)에서 온 말이다. 당시 우상 숭배자의 성읍이나 뒤로부터의 탈취들은 모두 여호와께 바쳐졌듯이(신 13:16) 피정복자나 범죄자의 소유는 모두 왕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Lange, Keil & Delitzsch). 그러므로 아합은 이제 외견상 합법적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상속(?)하게 된 것이다.

성 경: [왕상21:16]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나봇의 죽음]

(주); 곧 일어나 - 70인역(LXX)은 이 같은 행동에 앞서 아합이 옷을 찢고 베를 두르는 동작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합법적으로 탈취할 수 있도록 보다 교묘히 일을 꾸몄음을 알수 있다. 즉 나봇의 죽음은 외견상 일국의 통치자에게 안타까움을 주는 한 백성의 비극으로 꾸며질 필요가 있었다. 이에따라 이세벨은 아합이 공식석상에서는 그같은 제스처를 취하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은 항상 이율 배반적인 양면성을 노출하게 마련이다. 즉 옷을 찢으면서 애통해 하는 척하던 인물이 서둘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려 일어서는 행위는 아무래도 조화되지 않는다. 여하튼 이제 아합은 원하던 것을 갖게 된 어린아이처럼 얼씨구나 하고 일어나 이스라엘로 내려 간 것이다.

성 경: [왕상21:18]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사마리아에 거하는...아합 - 이 말은 독자들에게 좀 홀란스러음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아합은 현재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이스르엘로 내려갔다고 해놓고(16절) 다시금 '사마리아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인간이 한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다론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흑자는 이 말을 그저 '사마리아에 보좌가 있는...아합' 식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Hammond). 그러나 본절과 관련 우리는 우선 현재 엘리야가 있는 장소가 사마리아 아닌 다른 곳임을 기억하자. 또한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은 불과 30여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임을 기억하자. 18:45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먼 데 떨어진 엘리야에게 '사마리아에 사는 아합에게 가봐라. 그가 지금 나봇의 포도원에 가 있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마리아에 거하는'이라는 말이 삽입되므로써 19절의 예언의 정확성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19절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는곳'(즉 이스라엘)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22:38에 의하면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는 곳은 '사마리아 못'이다. 이러한 차이는 외견상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절의 기록으로 미루건대, 아합의 왕궁이 위치한 곳과 나봇의 포도원이 위치한 곳을 통틀어 '사마리아'라 불러도 무방한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절의 예언의 신빙성은 손상되지 않는 것이다.

성 경: [왕상21:19]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 이 말속에는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비분(悲憤)과 탄식의 어감이 어려 있다. 즉 이는 아합의 범죄에 통탄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즉 살인과 탈취를 거듭해 온 아합의 계속적인 악행을 비난하는 말같이 들릴 수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네가 살인을 하였고 거기다 탈취까지 하였다'는 뜻이다. Living Bible은 이를 '나봇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악하지 않은가? 그런데 강도짓까지 해야 했는가?'(Isn't killing Naboth bad enough? Must you rob him, too?)로 옮기고 있다. 한편 참고로 나봇 살해 사건 외에도 아합이 저지른 죄상들을 나열해보면 우상 숭배(16:32), 음란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16:31), 여호와 선지자들 핍박(19:1-3),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벤하닷을 놓아줌(20:42) 등을 들 수 있다. 응당 여호와 신앙의 수호자였어야 할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도리어 이같이 참람한 죄악들만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더욱더 컸음은 지극히 당연하다(20-26절).

성 경: [왕상21:20]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나의 대적(對敵)이여 - '대적'이란 '적의가 있다'는 뜻인 '아야브'(*)에서 온 말이다. 즉 이는 서로 중오와 적의를 품는 관계에 사용되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아합이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가 평소에 얼마나 엘리야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는지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사사건건 자신의 일을 반대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는 최악의 인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태도가 갈멜산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하다(18:17).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은 셈이니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향하여 표출되기 마련이다.

(주); 네가 나를 찾았느냐 - 한글 개역 성경의 본 번역은 엘리야가 마치 점잖게 아합에게 알현을 요청한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찾았느냐'에 해당하는 '마차'(*)는 '발견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갑자기 나타난 대적에게 들켰다는 어감(語感)이 서린 말이다. 그러므로 아합의 이 말은 '아이구 이 원수가 또 나타났구나' 또는 '하필이 작자에게 걸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괴롭게 되었구나'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 하겠다.

(주); 네가 스스로 팔려 - '스스로 팔려'(*, 히트마케르카)란 '스스로 자신을...의 노예 상태가 되게하다'는 뜻이다. 즉 아합은 죄를 범하는 일에 완전혀 몰두하여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로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이세벨의 층동질과 계교를 통해 저질러졌으나 아합의 욕심 때문에 추진된 일임을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합은 탐욕에 이끌려 자신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였고 그 결과 살인과 탈취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고 말할수 있다(롬 7:14).

성 경: [왕상21:21]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매인 자나 놓인 자 - 종이든 자유인이든을 막론하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4:1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21:22]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네 집으로...되게 하리니 - 여로보암(Jeroboam)과 바아사(Baasha)는 각각 자신의 왕조를 열었으나 불과 2대째에 가서 부하의 모반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인물들이다(15:25-31; 16:8-14). 그런데 이들이 동일한 운명을 걸어야 했던 이유는 한 국가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로 이끄는 동일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방의 우상을 도입한 아합이(16:31-33) 같은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편 훗날 실제로 아합의 아들 여호람(혹은 요람)은 부하 예후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고, 아합의 가문은 모두 무참한 참살(慘殺)을 당하고 만다(왕하 99:21-26; 10:1-17; 대하 22:8).

(주); 나의 노(怒)를 격동(激動)하고 - '격동하다'에 해당하는 '카아스'(*)는 점차로 격분에 이르도록 자극한다는 뜻이 있다. 즉 참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거듭 자극을 가함으로써 마침내 분노케 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인간들의 계속적인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침내 절정의 분노를 발하게 하는 죄이다(츨20:3-6).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노는 당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설적 표현과 다름없다. 출 20:5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1:23]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개들이...먹을지라 - 임종을 평안히 맞이하여 조상들의 무덤에 같이 묻힌다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죽음의 방식이다. 반면 객사(客死)를 당해 시체가 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으로 여겨졌다. 14:11 주석 참조. 그런데 이세벨에게 예고된 죽음의 방식은 이보다 처참하다. 즉 생전에 부귀, 영화와 권세를 누누리던 이세벨에게 이스라엘 성 곁에서 개들의 먹이가 되는 죽음이 예고된 것이다. 그것은 곧 이세벨의 전 삶을 송두리째 저주 아래 둔다는 부정적 상징성이 강하게 암시된 죽음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생전의 삶의 방식과 모든 행적이 저주받아 마땅한 그릇된 것임을 생각케 할 것이다. 사실 이세벨은 아합을 충동질하여 온갖 죄악 가운데 놀아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그 삶이 욕된 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수 없다(25절). 한편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훗날 정확하게 성취되었는바 그녀는 예후(Jehu)의 반역시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이 으깨지고 개에게 뜯어 먹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왕하 9:30-37).

성 경: [왕상21:24]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개들이 먹고...새가 먹으리라 - 아합 가문에 속한 자들이 당할 치욕스러운 죽음과 하나님의 강렬한 노여움을 강조해 주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4:1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21:25]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본절은 죄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절이라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간을 그 아래 노예처럼 두려 하는 죄의 권세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죄에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약 1:13-15), 다음으로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판별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달려 있음을 확인케 된다. 사실 죄에 대해 주관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 죄짓는 자의 일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입각할 때죄인은 자신의 처지를 죄로 자각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짓도록 권유하는 자기 외부의 객관적 조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아합의 생애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을 일관하게 된 주유요 원인은 악독한 이사벧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16:31)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죄의 주관적, 객관적 조건들은 서로 맞물려 그 열매를 산출해 낸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반 요소들을 함께 경계해 나가는 것이 죄의 예방에 효과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성경은 우리들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충고하고 있다.

(주);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 '충동하다'에 해당하는 '수트'(*)는 '꾀다', '유혹하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선동(煽動)하는 교활한 행위를 가리킨다. 사실 아합의 처지를 이보다 더 정확히 요약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음란한 계집의 호림에 넘어간, 그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간교한 치맛자락에 놀아난 전형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합도 우매한 결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렇듯 비참한 말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왕상21:26]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과 이세벨이 받을 심판]

(주);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 같이 - '아모리 사람'(Amorites)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이주하기 전의 거민을 가리킨다(창10:16; 출 3:8; 대상 1:14; 겔 16:3). 수9:2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참조. 그런데 '아모리 사람'이라는 종족적 호칭만 갖고는 팔레스틴 역사에서 명멸(明滅)한 여러 족속, 국가들과의 관계를 밝혀내기란 어렵다. 아마도 성경 밖의 역사 자료들을 추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과 관련하여 '아모리 사람'이 던져 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즉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란하고 부정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이다(수24:15; 삿 6:10; 레 18:28; 20:22,23).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틴을 이스라엘에 내줘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견해이다(창 15:16). 그렇다면 '아모리 사람'의 땅을 인수한 이스라엘은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일삼아온 아합의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축출당한 아모리인들의 운명에 이스라엘마저 동일하게 몰아놓은 행위라는 것이 본절의 준론(峻論)이다.

성 경: [왕상21:27]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의 회개]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17-26절)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악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자세를 취한다. 본절과 29절을 통해 판단하건대 아합의 회개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가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포하신 재앙을 아합 당대에서 그의 아들대에로 연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합이 이처럼 회개하고 나서도 다시금 악을 행했다는 데 있다(22:8, 26,27). 즉 아합은 일시적으로는 회개하였으나 지속적으로 회개의 참된 열매를 맺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회개는 다윗의 회개(시 51편)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하겠다.

(주); 옷을 찢고...굵은 베에 누우며 - 본절에 열거된 행위는 모두 회개와 겸손 또는 극한 슬픔을 표시하는 것들이다(스9:3; 에4:1). 29절은 이 모든 행위의 성격을 '겸비함'으로 요약하고 있다. 즉 겉옷을 찢는 행위는 자신의 능력과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의 훼손을 통해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추는 행위이다. 그리고 '베'(*, 사크)로 만든 옷은 종종 슬픔과 자기 비하(卑下)의 표시로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시신(屍身)을 베로 감싸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창37:34; 사37:1; 막 15:46; 눅 23:53),그 뿐 아니라 금식 역시 생명 현상을 지속케 하는 음식을 끊음으로써 자신을 하잘 것없는 존재로 여기는 자기 부인(否認)의 행위이다.

(주); 행보(行步)도 천천히 한지라 - '천천히'에 해당하는 '아트' (*)는 '부드럽게'또는 '상냥하게'라는 뜻이다. 원래 걸음걸이란 그 사람의 성격과 마음자세를 드러내준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걸음을 천천히, 부드럽게 걸었다는 것은 곧 겸손의 자세를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음을 뜻한다.

성 경: [왕상21:28,29]

주제1: [나봇 포도원 탈취 사건]

주제2: [아합의 회개]

(주); 겸비함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카나'(*)는 '꺾이다', '복종하게 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새가 날개를 접다'이다. 여기서 새가 날개를 접는다는 것은 곧 사신의 최대 강점을 포기하는 모습이다. 대개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강한 면모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전의(戰義) 상실과 굴복을 표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아합이 겸비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적하기를 멈추고 할복을 표하였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블 수 없었던 모습이긴 해도 아합의 이러한태도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타락에 끼친 이세벨의 영향에 눈을 돌리게끔 한다. 즉 비록 우매(愚昧)한 자로 묘사되긴 해도 이세벨과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아합도 그토록 배도(背道)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본문을 통해 암묵리(暗默裡)에 독자들에게 주는 인상이다.

(주); 그 아들의 시대에야 ...내리리라 - 여기서 그 아들이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형제인 여호람(또는 요람)을 가리킨다. 22절 주석 참조. 한편 이기주의적, 논리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본절은 당혹감을 안겨 준다. 즉 왜 첵임있는 당사자를 비껴간 징벌이 애궂은(?) 타자에게 떨어져야 하는가 하는 난제(難題)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다. 죄, 기질, 성향의 유전, 교육적 환경, 즉 가치및 태도의 후천적 습득 등 여러 가지 합리적 설명의 노력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연대성(連帶性), 즉 서로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돌리는 신앙적 사고 방식에 입각해 본절을 대한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출20:5,6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성 경: [왕상22:1]

(주); 전쟁이 없이...지내었더라 - 20장에 수록된 아벡(Aphek)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로 아람은 약 3년간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자에 의하면, 이 무렵의 아람은 알만에셀이 이끄는 앗수르와 교전 중이었으며, 아합 역시 아람 동맹군으로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간에 다툴 겨를이 없었다 한다(Rawlinson). 일설에 의하면, 아합은 이때 1만의 병력과 2천대의 병거를 앗수르에 대항하는 아람군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더구나 이러한 동맹은 공동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적인 것일 뿐 양국간의 신뢰에 바탕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20:1 주석 참조. 그 실례로 본장에서 보는 것 처럼 불과 3년만에 양국이 재차 대립 상태에 들어간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아람이 전에 반환하기로 한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다(3절). 즉 이스라엘은 아벡 조약을 통해 다메섹에서의 교역권은 물론 기타 분쟁 지역들을 할당 받기로 하였던 바 그 지역들 중에는 길르앗 라못도 포함되어 있었다(20:34). 그런데 아람 왕 벤하닷은 일단 사경(死境)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애초의 조약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성 경: [왕상22:2]

(주); 제 삼 년에 - 여기서 '제 삼 년'이란 '전쟁 없이 지낸 지 삼 년 만에'란 뜻이다. 즉 이는 20:34에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이 서로 화친을 맺은 때를 기점으로 해서 3년째 되던 해를 가리킨다. 이 말로 미루어 아람과 이스라엘이 휴전(休戰) 상태로 지낸 기간은 만 3년이 채 못됨을 알 수 있다.

(주); 유다 왕 여호사밧이...내려가매 - 지금까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대체적으로 적대 관계를 유지해 왔다(14:30; 15:6,7,16,32). 그런데 그동안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없이 본절에서는 돌연 남북 왕국이 서로 우호(友好) 관계를 누리는 사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추측컨대 이러한 우호 관계는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Jehoram)의 혼인을 매개로 이루어진 듯하다(대하 18:1; 21:6;22:2). 더군다나 당시는 동쪽에서 점점 강성(强盛)해 가는 앗수르의 위협에 대처키 위해 팔레스틴의 여러 국가들이 곧잘 동맹을 맺던 때이다. 그러므로 본래 외교에 능한 아합이 남왕국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당시의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여호사밧(Jehoshaphat)과 공동 전선을 펼쳤던 것이라 보여진다. 또한 팔레스틴 동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는 아람에 대해서도 양국은 나란히 견제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의 아합왕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내려가매'로 표현한 것을 보아 본장은 남왕국을 중심으로 한 기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 여호사밧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이다. 유다의 제 4대 왕인 그는 25년간(B.C.871-847)을 통치하였다. 비록 몇 가지 실책을 저지르기는 하였지만 여호와를 경외한 여호사밧은 히스기야, 요시야와 더불어 유다의 현왕(賢王) 중 한 명으로 분류된다.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스라엘왕 - 다른 사람이 아닌 16장 말미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등장한 아합(Ahab)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이제 본장에서 유명(幽明)을 달리하니 이로써 열왕기상도 끝이 난다.

성 경: [왕상22:3]

(주); 길르앗 라못 - 일명 라못 길르앗(Ramoth in Gilead)으로도 불리우는 이 성읍은 길르앗 지방 동북방의 중요 요새지이다. 혹자는 이곳을 여호수아 13:26에 나오는 라맛 미스베(Ramath Mizpeh)와 동일시하기도 하나(Van de velde) 분명치 않다. 아무튼 길르앗 라못은 요단 동편에 위치한 세 도피성 중 하나였고 래위인의 성읍이었으며, 솔로몬 시대에는 제 6지역 장관이 거주하던 곳이다(4:13; 신4:43; 수20:8). 그런데 이 지역은 고원(高原) 지대로서 골짜기마다 물이 많고 포도와 올리브가 잘 자라는비옥한 지역이다. 그러나 타부족과의 접경에 위치한 관계로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B.C.922년경 르손(Rezon)이 솔로몬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 2세기 동안 이 지역은 아람과 이스라엘 간의 주요 분쟁지역이 되었다(1:23-25).

(주);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은...알지 못하느냐 - 갈르앗 라못을 아람에게 빼앗긴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 지역은 벤하닷 1세가 바아사(15:20) 혹은 오므리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아람에 합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벤하닷 2세가 아합에게 패배한 뒤, 그리고 아합이 앗수르 대항 동맹군에 협력하는 대가로, 길르앗 라못은 이스라엘에 반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20:34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하닷 2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본장의 전쟁은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Cohen).

성 경: [왕상22:4]

(주); 여호사밧...싸우시겠느뇨 - 여호사밧 통치하의 유다는 제법 강성하였다(대하17:1,2,10-19). 따라서 아합은 이스라엘 단독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인 아람에 대하여 여호사밧과 공동 전선을 펴려 하였다. 한편 여호사밧으로서도 당시 유다 주변국들에 대하여 그다지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방 사업으로 내실을 기하면서 외면적으로는 외교에 치중하는 정책을 펴 나갔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람을 견제하는 일은 여호사밧으로서도 도모해 봄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 나는 당신과...일반(一般)이니이다 - 원문에는 '와 같이'라는 뜻인 '케모'(* )가 거듭 사용되었다. 즉 '나나 당신이나 다를 바 없고,내 백성이 곧 당신 백성과 같고, 내 말들이 곧 당신의 말들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현란하리만치 일치를 강조한 의교적 언사(言辭)는 아람을 공격하는 일에 있어 남북 이스라엘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그러나 그 동기야 어떠했던 간에 여기서 여호사밧은 중대한 과실을 범한 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그는 여호와의 대적자였던 아합을 도운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대하19:2). 사실 두 차례에 걸친 아람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20장)께서 이제 아람을 도구로 사용하사 아합을 징치(懲治) 하고자 하셨으리라고는 여호사밧으로서 깨닫기 힘들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2:5]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먼저...물어보소서 - 대하 17:3-4에 의하면, 여호사밧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경건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사밧의 면모가 본절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정치적 판단에 있어 길르앗 라못 공략의 필요성을 공감했더라도 그는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묻자는 태도를 보인다(대하18:4). 이처럼 하나님께 의지하는 태도는 훗날 여호사밧이 여호람과 더불어 모압을 정벌하던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왕하 3:4-12). 그러나 여기서도 굳이 여호사밧의 잘못을 지적하자면 다음과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즉 여호사밧은 구체적 전투 사항을 여호와께 물어 보기 이전에아합과의 군사 동맹 여부 자체에 관해 먼저 물어보았어야 옳았다.

성 경: [왕상22:6]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이에 선지자 사백 인쯤 모으고 - 본장에는 아합이 집합시킨 이 400명의 선지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장의 기록에서 이들은 (1) 왕의 정책 결정에 일종의 자문(諮問) 위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2)권력자의 구미에 맞을만한 말만 하는 아부형의 인물들로 나타난다. 즉 이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권력의 핵심에 포진(鋪陣)한 어용(御用) 선지자들이다. 그런데 또한 이들은 외견상 여호와 신앙에 속하는 선지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참 선지자인 미가야(Micaiah)와 이들의 차이점은 예언의 진위(眞僞) 여부에 있었지(10-28절)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극명한 대립처럼 근본적인 차이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18:20-40). 어쨌든 본장에서는 이 400명의 선지자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합과 이세벨이 한편으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면서(16:31-33) 또 한편으론 형식적이나마 여호와 신앙을 허용하는 종묘 혼합주의 정책을 펼쳤으리라고 추측해 볼수 있다. 사실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경우에도 그녀는 표면상 이스라엘의 전통과 율법에 편승해서 간접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21:9,10). 물론 실제에 있어 이는 여호와 신앙의 파괴였다. 이처럼 과거 여로보암 당시와 마찬가지로 아합 시대에도 이스라엘 전통을 완전히 내버리지는 않으면서 이방 사회의 풍습과 종교를 도입하려는 혼합주의 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12:25-33). 본절의 400명 선지자들은 바로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무리들로 판단된다. 특히 이들이 왕의 정책에 언제나 동조하는 무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그들은 왕권의 무한한 확대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실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專制的) 왕권의 강화란 이방 국가들의 특징이지 이스라엘 전통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즉 여호와 신앙이 뒷받침하는 이스라엘 전통 속의 왕권이란 언제나 제한적이었다. 21:2 주석 참조. 그래서 엘리야 같은 여호와의 선지자는 왕권의 전횡(專橫)에 언제나 비판적이었다(21:17-26).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해 왕전 강화와 이방 체제 도입에 공헌한 400인의 선지자들은 실상 여호와 신앙과 그에 뒷받침된 전통 체제를 붕괴시킨 무리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이 참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주); 길르앗 라못에...올라가소서 - 요단 동편의 길르앗(Gilead) 일대는 대체로 고원 지대였다. 즉 그곳은 해발 약 210m에서 910m까지 이르는 구릉지대인 것이다. 그래서 본절과 같이 '올라가소서'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 경: [왕상22:7]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이 외에...있지 아니하니이까 - '이외에'에 해당하는 '오드'(*)는 '계속해서', '다시'라는 뜻을 가진 부사이다. 즉 여호사밧은 400명의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더 물어 볼 선지자가 없는가 묻고 있다. 여기서 여호사밧이 이들의 예언(달콤한 말임에도 불구하고)에 만족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 신앙 가운데서 살아온 여호사밧은 민감하게도 이 무리들의 예언에서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모나게 발설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성 경: [왕상22:8]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오히려 - '오히려'로 번역된 '오드'(*)는 7절에서 '이 외에'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이다. 문맥상 본절에서는 '아직'으로 번역하는 게 좋음직하다.

(주); 이믈라의 아들 이가야 - '미가야'(*, 미카예후)는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활약하던 참선지자로 엘리야, 엘리사의 계열에 들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아합의 주된 비판자로 나타난다. 즉 물론 엘리야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극렬한 역할을 담당하지는 않았으나(19:2). 미가야 역시 아합이 만나기를 꺼리는 껄끄러운 선지자였다. 본장에서도 그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참된 예언을 대언(代言)하다가 그만 이번 사건에서 옥고(獄苦)를 치루고 만다(24-28절).

(주); 저는 내게...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 여기서 '흉한 일'(*, 라아)은 본래 '재난', '불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은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언으로만이 아니라 교훈과 경고, 권면 등과 같은 보다 폭넓은 '메시지'로서 이해되여야 한다. 한편 본절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미가야는 아합의 그릇된 행위에 대해 자주 비판과 미구(未久)에 임박할 재난들을 경고해 왔던 것 같다. 그러기에 병행 구절인 대하 18:7에는 '항상'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주);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 여호사밧의 대꾸에는 은근한 책망이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좋든 싫든 하나님 말씀 자체로서 존중되어야지,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본절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같은 말가운데서도 여호사밧의 진실한 신앙적 태도를 거듭 엿볼 수 있다.

성 경: [왕상22:9]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내시 - 이에 해당하는 '사리스'(*)는 '거세(去勢)하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곧 본 직책을 가진 사람이 고자(鼓子)임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원래 근동 세계에서는 고자를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는 관습이 있었긴 해도(J.Austel), 이스라엘인들은 고자를 언약의 총회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불완전한 존재로 여겼었다(레 22:24;신 2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아합의 왕궁에서 내시가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이는 두로의 우상과 함께 이방의 사회 체제를 끌어들이는 데 열심이었던 이세벨의 영향 탓일 것이다(16:31-33).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후의 왕들도 계속 내시를 두게 되기까지에 이르른다(왕하 8:6;9:32).

성 경: [왕상22:10]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본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중대사를 눈앞에 두고 소집된 국가 회의의 면모를 짐작케 해준다.

(주); 왕복을 입고 - 원문은 단순히 '그들의 옷을 입고'이다. 물론 '그들'은 왕이므로 '그들의 옷'(*, 베게드)은 '왕복'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본절이 그들의 의복 착용을 새삼스럽게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의복이란 곧 그 사람의 신분 및 직무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본서 기자가 아합과 여호사밧의 왕복 착용 사실을 지적한 이유는 저들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함이라 볼 수 있다. 그만치 본절은 사안(事案)의 중대성을 부각시키는 문구이다.

(주); 문 어귀 광장에서 - '광장'에 해당하는 '고렌'(*)은 본래 '타작 마당'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타작 마당도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R.D.Patterson). 한편 왕이 문 앞에 나와서 회의를 갖는 것은 지도자가 장막 입구에 나와서 재판 등의 직무를 수행하던 이스라엘 족장 시대 이래의 관습이다. 다시 말해 본절의 '문 어귀 광장'이란 현 공동체의 장(長)이 그 구성원들과 만나 의견을 수렴(收斂)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신 21:19; 수 20:4; 왕하 7:1; 느 13:19; 시69:12; 잠 1:21). 실상 건강한 공동체라면 이런 자리에서 기탄없는 견해가 만발하여 지도자의 직무 수행에 참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합의 주변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명의를 빌어 권력에 영합하는 정상 모리배(政商謀利輩)들만이 들끓었다.

(주); 모든 선지자가...예언을 하는데 - 본절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이 왕의 정치적 결단에 조언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이들은 마치 왕의 정치 자문 위원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정책을 조언하고 뒷받침하는 이념적 구실을 하는 것이다. 사실 원래 구약에서 정치, 경제 등을 종교와 구분하는 사고 방식은 낯선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 앞에서는 다만 모든 분야가 통전(通電)된 삶이 놓여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현실이 하나님 앞에 바르냐 그르냐일 뿐이다. 본장에서도 문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토로하지 않고 거짓 예언을 들려주었다는 데 있다.

성 경: [왕상22:11]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시드기야 - '시드기야'(*, 치드키야)란 '여호와는 나의 의로움이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처럼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본문에서 거짓 영에 감동된 선지자라는 부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그의 이름이 지닌 뜻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400명의 선지자들은 철저히 여호와의 선지자로 행세하는 무리였음을 알 수있다.

(주); 철로 뿔들을 만들어 - 성경에서 뿔(Horn)은 상징적으로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삼상2:1,10; 삼하 22:3; 시89:24; 92:10; 단7:21; 8:8). 게다가 철은 당대로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금속으로서 '강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철로 뿔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당할 자가 없는 막강한 힘을 상징한다. 즉 시드기야는 아합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철 뿔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의 과장된 부추김은 가뜩이나 어린애 같은 아합의 불붙는 만용(蠻勇)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하셨다 하고 - 시드기야(Zedekiah)의 이 같은 예언 역시 초자연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시드기야를 포함한 거짓 선지자들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22절). 그러나 본문이 제시하는 문제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거짓 영의 감동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구별 문제와 직결된다(Szikszai). 한편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거짓 영이라는 초자연적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12절) 그들이 윤리적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개 미혹에 빠지게 되는 자들의 마음 바탕에는 욕심과 탐심이 감춰져 있게 마련이다. 마치 세균의 감염은 깨끗치 못한 부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듯 말이다(잠12:36; 렘 23:32; 사44:20; 고후11:3; 약1:14). 그러므로 이 직업적 선지자들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기 보다는 권력 주변에서 곡언(曲言)을 일삼는 무리였음에 분명하다. 즉 그들이 거짓 영의 노리개가 되었던 것도 그들 안에 거짓의 바탕이 상응(相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가야가 거짓 영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그가 정직한 선지자였기 때문이다(14절).

성 경: [왕상22:12]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승리를 얻으소서 - 이에 해당하는 '차라흐'(*)는 '번영하다' 또는 '형통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의도했던 바를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길르앗 라못 공략이 아합의 숙원(宿願)이었으므로 선지자들이 왕이 원하는대로 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합의 의도에 거침없이 반발할 인물은 처음부터 회의에서 제외되었다(8절).

성 경: [왕상22:13]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여출 일구(如出一口) - '여출 일구'란 '이구 동성'(異口同聲)과 같은 말이다. 원문의 '페 에하드'(*) 역시 '한 목소리로' 또는 '한 입으로'라는 뜻이다.

(주); 청컨대...길하게 하소서 - '청컨대'에 해당하는 '나'(*)는 '제발','바라건대'(please 혹은 I pray)와 같은 간곡함이 담긴 말이다. 아마도 아합은 사자(使者)에게 어떻게든 미가야를 회유, 설득하도록 당부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예언에 대한 여호사밧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아합은 깊이 인식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7-10절). 따라서 사자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들어 미가야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다. (1)모든 선지자들의 의견이 하나같이 일치한다는 점(11,12절)이다. 따라서 그러한 마당에 홀로 하나님 말씀의 참된 대언자로 서야 했던 미가야의 심경은 처절한 고립감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2)저주의 예언을 할 경우에는 모종의 단호한 조처가 강구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길하게 하소서'라는 말 속에는 은근한 협박이 내포되어있었음이 후에 입증되었다(27절).

성 경: [왕상22:14]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여호와께서...말하리라 - 미가야의 이같은 대답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요청에 답변하는 발람(Balaam)의 말과 유사하다(민22:38). 그런데 발람의 경우에서도 주목할 것은,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선포할 때는 이전에 쓰던 사술(邪術)과는 다른, 여호와의 영(靈)에 사로잡혀 예언하였다는 점이다(민 24:1). 여기서 우리는 미가야의 예언과 다른 긍정 선지자들의 예언(11,12절)의 구별점을 시사(示唆)받을 수 있다. 즉 우선 미가야와 발람의 참된 예언은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대상에 압도당해 발설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긍정 선지자들과 발람의 사술은 인간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엮어지는 듯한 특징이 있다(13절; 민 22:11; 24:1). 아무튼 미가야는 사자의 청(請)에 대해 직접적 답변을 회피한 채 오직 여호와께서 계시해 주시는 대로만 예언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실상 그 같은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계시를 주시고 또한 그것을 성취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미가야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대언자 노릇을 할 수 있을 뿐이다. (2)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함부로 거짓 예언을 일삼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성 경: [왕상22:15]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아합]

(주); 저가 왕께 이르되...붙이시리이다 - 미가야의 본 대답은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11,12절)과 똑같다. 그런데 미가야가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음에도 블구하고(17절)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아합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비꼬기 위해서였다. 사실 아합의 질문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 하면 순종하겠다는 진지함이 결여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가야도 '당신이 듣고 싶은 게 이 말 아닙니까? '하는 식의 역시 진지하지 못한 답변을 한 것이다(Lange, Mathew Henry).

성 경: [왕상22:19]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미가야의 직언(直言)]

(주); 내가 보니...보좌에 앝으셨고...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 미가야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은 섬기는 천군 천사(天軍天使)들에 둘러싸인 만왕의 왕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여호와를 단순히 민족신, 즉 제신(諸神) 중 하나로 간주하는 관념에 정면으로 상치(相馳)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념은 주변 세계의 영향에 항상 노출되어 온 이스라엘로서는 부단히 씨름해야 하는 문제였다. 심지어 이스라엘 내부에서 조차도 그러한 관념에 바탕하여 이방신들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타협적 경향이 있어왔다. 설상 아합 시대의 다수는 여호와를 아주 내동댕이 치지는 않으면서 이방신들을 끌어들여 함께 섬기겠다는 부류들이 있었다. 6절 주석 참조. 물론 이런 태도는 여호와를 다른 이방신들 중 하나로 격을 떨어뜨려 결국에는 유일신(唯一神) 신앙을 훼손시키는 치명적 행위였다. 그러나 미가야의 환상은 오직 여호와만이 한분 참된 신이자 만왕의 왕이심을 보여 주고 있다(대하 20:6; 시24:10).

성 경: [왕상22:20]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미가야의 직언(直言)]

(주); 누가 아합의 꾀어 - '꾀다'에 해당하는 '파타'(*)는 '속이다', '유혹하다'설득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유혹이란 언제나 유혹자 못지 않게 유혹받는 자에게 전제된 탐심과 욕망을 간과할 수 없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아합에게 하필 전쟁터로 끌어 내어죽게 하는 유혹이 닥친 것은 그의 내면에 군사적 세력 확장의 탐욕이 충일(充溢)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주); 죽게 할고 - 세상 만사와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음을 새삼 증거해 주는 부분이다(눅12:20).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인(惡人)을 무조건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기를 원하신다(겔 33:11). 그런데도 불구하고 악인들이 사망의 길에 이르는 까닭은 다만 그들이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당하기 때문이다(약1:13-15).

성 경: [왕상22:21]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미가야의 직언(直言)]

(주); 한 영 - 여기서 '한 영'은 '어떤 영'과 같은 막연한 지칭이 아니고 정관사 '하'가 붙어 있어 '그 영'(*, 하루아흐)이란 뜻이다. 혹자는 이 영(靈)의 정체를 하나님의 천사로 이해하기도 하나 그렇지는 않다. 즉 본절에서 뚜렷하게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탄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다음절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부정적 역할을 하는 악령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령과 사탄조차도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욥 1:6-2:6)

성 경: [왕상22:22]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미가야의 직언(直言)]

(주); 거짓말하는 영 - 이 영은 분명 사단(Satan)이다. 왜냐하면 그의 역할이 미혹자,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창 3:13; 대상 21:1; 요 8:44). 한편 구약에서 초인적 존재이면서 독특한 하나의 인격체인 사단이 등장하는 부분은 별로 많지 않다. 다만 본절에서처럼 특정 상황에서 톡정 역할을 맡게 되는 익명의 한 영적 존재로서 언급되는 정도이다(Gaster). 이상과 관련해서는 욥 2장 강해, '사단의 정체와 그활동'을 보다 참조하라.

(주); 모든 선지지의 입에 있겠나이다 - 사단과 악령은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요10:10) 하나님께 인간의 죄악을 송사하는 이간자요 고소자이다(욥1:9-11; 2:4,5). 본절 역시 사단과 악령의 그러한 본질을 증거하는 바 저들이 곧아합을 꾀어 멸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거짓 선지자들을 주장(主掌)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왕상22:23]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미가야의 직언(直言)]

(주);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넣으셨고 -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령의 활동을 허락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악의 원인자(原因者)나 방치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20절주석 참조.

(주);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 이 말에는 법정의 판결문처럼 그 효력의 확실성을 의심할수 없게 하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할 뿐만 아니라 헛되이 스러지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이다(시 33:4; 사55:11; 렘 23:29). 그런 여호와의 말씀이 아합에 대해 '화'(*, 라아), 즉 재난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선포를 단지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경고란 그 엄중함과 함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가야의 재난 선포 역시 아합으로 하여금 결정을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21:29).

성 경: [왕상22:24]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옥에 갖히는 미가야]

(주); 시드기야가...뺨을 치며 - 시드기야는 400인 선지자 무리(6절)의 공식적인 지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내세우는 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아합이 숭리하리라는 예언을 쇠뿔 상징을 통해 열정적으로 대변한 인물이다(11절). 그러므로그는 미가야의 반대 예언(17-23절)에 누구보다도 격노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미가야의 예언은 자신의 권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모욕과 같이 들렸을 것이다. 이러한 심정적 반응이 이제 미가야의 뺨을 치는 격한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친 장면은 예수께서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에게 수난당하신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마26:67).

(주); 여호와의 영이...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 '말미암아 가서'에 해당하는 '아바르'(*)는 '통과하다'(pass over)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통과하다'는 말을 통해 시드기야가 대단한 자만심의 소유자였음 하나님의 영을 자신의 올타리에 가두어 둔 것처럼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를 떠나'란 말 역시 그의 독점 의식을 또렷이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실상 이처럼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머문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과 독선(獨善)이 불행하게도 시드기야로 하여금 진실을 경청하는 데 실패케 했다.

성 경: [왕상22:25]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옥에 갖히는 미가야]

(주);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 골방에 숨는 행위는 목숨의 위협에 직면해 깊숙이 피신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골방'은 유사시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은밀한 내실(innerchamber)을 가리킨다. 20:30 주석 참조. 그렇다면 시드기야는 언제, 무엇 때문에 그러한 피신을 감행하게 되는가? 본문은 이에 대해 알려 주는 바가 없다. 다만 추측컨대, 아합의 죽음으로 인해(29-40절) 격분한 이세벨이 책임을 물어 선지자들을 처형하려 들었을 때 그 같은 도피행을 감행하였을 것이다(Hammond).

(주); 보리라 - 이에 해당하는 '라아'(*)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경위(經緯)와 전말(顚末)을 이해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17절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2:26]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옥에 갖히는 미가야]

(주); 부윤(府尹) - '부윤'(*, 사르 하이르)이란 '한 성읍의 지도자'(theruler of the city)를 말한다. 그런데 본절의 '이르'(성읍)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있어 '그 성'이란 뜻이니 이는 곧 미가야가 거주하던 성읍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부윤은 오늘날의 시장(市長)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주); 왕자 요아스 - 부윤 아몬(Amon)은 물론 그와 함께 언급된 왕자 요아스(Joash)에 대해서는 성경상에 특별히 알려진바 없다. 다만 추측컨대 요아스와 아몬은 함께 국가적 죄인을 다루는 형사(刑事) 책임자였던 것 같다.

성 경: [왕상22:27]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옥에 갖히는 미가야]

(주); 옥에 가두고 - '옥에 가두고'(*, 베이트 하켈레)는 문자적으로는 '집에 가두고'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 고대 이스라엘에는 감옥이 따로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미가야 역시 어느 개인의 집에 투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 감시를 미가야 거주지역의 책임자인 아몬과 형사 책임자 요아스가 담당하였을 것이다(대하18:25,26). 한편 감금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때도 반국가적 인물이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에게 가해진 처벌이었다(Greenberg). 그러나 미가야는 양심수(良心囚)였으니 부당한 감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남유다의 선지자 중에서도 미가야와 비슷한 수난을 겪은 자가 있으니 곧 시드기야 왕때 활약한 예레미야이다. 즉 예레미야 역시 당시의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예언에 반대하다가 투옥당하였었다(렘28장;32:1-5).

(주);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 - 이는 곧 감옥 생활에서 오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옥중에서 떡과 물을 마신다는 것 가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것을 말한다. 더군다나 옥중에서 주는 식사란 그 양이 적고 질이 조악(粗惡)할 터이니 그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본절을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떡과 물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왕상22:28]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옥에 갖히는 미가야]

(주); 왕이...돌아오시게 될진대...아니하셨으리이다 - 이 말은 곧 '만약 왕께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신다면 나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미가야에게는 왕의 지위나 권력, 그리고 다수의 주장이나 눈앞에 닥친 위험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優位)에 있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그것보다 더 강하게 자신을 붙들어 맬 확실성은 없었던 것이다.

(주);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 당시 사마리아 문 어귀 광장에 있던 백성들은 지금까지 아합 및 궁중 선지자들과 미가야 간에 있었던 사건의 전개와 오고간 대화 내용을 쭉 지켜 보아 잘 알고 있었다(10-2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미가야가 '백성들아 들어라'하고 외친 것은 저들을 일종의 증인으로서 호출하는 행위이다. 즉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의 아합의 패배 소식을 듣거든 그 결과가 이미 하나님의 작정대로임을 증거하도록 미가야는 백성들을 각성(覺醒)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왕상22:29]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이스라엘 왕과...올라가니라 - 미가야의 예언을 묵살한 채 아합은 '길르앗 라못' 정벌(征伐)을 단행한다. 이처럼 스스로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아합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악인이 패망의 길로 행하는 것을 '내버려둠'이 곧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이다. 실상 아합의 그릇된 결정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원인은 아합 자신의 과욕과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말하는 영 등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과 악령의 미혹이 서로 결합되어 패망으로 향하는 것조차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용 아래 있다는 것이 본문의 주 요지(要旨)이다. 물론 앞에서도 이를 언급한 바이지만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과 악령의 활동을 단지 내버려 두실 뿐이지 악을 주재(主宰)하시는 것은 아니다. 20, 23절 주석 참조. 한편 유다 왕 여호사밧은 비록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혹을 품었다 할지라도 아합과의 동맹에서 몸을 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2:30]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변장(變裝)하고 - 비록 미가야의 예언을 묵살하고 출정(出征)하기는 하나 아합은 내심 미가야의 예언이 적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눈을 속여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죽음을 방지하려 했는데 곧 왕복을 벗고 일개 군사로 변장하는 것이었다.

(주);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 아합은 일견 매우 약삭빠른 제안을 여호사밧에게 하고 있다. 어느 전투에서나 지휘관은 집중 공격의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즉 그만큼 위험부담이 많은 것이 곧 지휘관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에게는 왕복을 입게 하고자신은 변장하겠다는 아합의 본 제안은 매우 비겁하게 보인다. 그러나 혹자는 아람(Aram)과 특별한 원한이 없는 여호사밧은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에 이 같은 제안이 가능했다고도 설명한다(B hr).

성 경: [왕상22:31]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병거의 장관 삼십 이인 - 이들은 아람왕 밴하닷이 이스라엘과의 1차 교전(交戰)에서 패배한 후 새롭게 일선 지휘관으로 세운 32명의 장관들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20:24,25 주석을 참조하라.

(주);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 즉 말단 병졸이든 좀더 신분 높은 장군이든 일절 상대치 말라는 말이다. 이는 곧 오직 전력을 총집중하여 적군의 우두머리인 아합을 상대케 하기 위한 명령이다.

(주); 오직 이스리엘왕과 싸우라 - 아벡 조약 당시 벤하닷이 아합에게 당했던 수모와 굴욕이 매우 컸음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다(20:34). 그러기에 벤하닷은 아합에게 보복하기 위한 날만을 학수 고대해 왔을 것이다. 한편 벤하닷의 이 명령 때문에 여호사밧은 행운을 얻게 된다. 즉 아합과 여호사밧은 둘 다 적군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벤하닷의 명령은 오로지 '이스라엘 왕'만을 지목하였다. 때문에 여호사밧은 체포당하거나 살해당할 위기에서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32,33절). 이 역시 악인은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시나 의인은 굳건히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의 결과임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시1:4-6).

성 경: [왕상22:32]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여호사밧이 소리 지르는 지라 - 아람 병거대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향해 집중 공격을 가해 오자 여호사밧은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공동 번역은 이 부분을 '여호사밧이 기겁을 하여 소리치자'로 옮기고 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단순히 겁에 질려 소리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은연 중 자신이 아합이 아님을 공격자들에게 알리려 하였던 것이다. 다음절에서 아람 장관들이 공격을 멈춘 것만 보더라도 이 점은 입증된다. 그러기에 Living Bible은 본절을 '여호사밧은 (적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소리를 질렀다'(Jehoshabat shouted to identify himself)로 풀이하여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왕상22:33]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 여기서 '보다'에 해당하는 단어 역시 '잘 주목하여 알아내다'는 뜻인 동사 '라아'(*)이다. 17,25절 주석 참조. 즉 아람 장관들은 여호사밧이 아합이 아닌 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꼭 얼굴이나 기타 외양을 봄으로 해서 알아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맥상 아람 장관들이 공격하려던 대상이 아합이 아닌 줄 알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여호사밧의 소리침과 관련된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서 여호사밧이 큰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B hr).

성 경: [왕상22:34]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우연히 - '우연히'(*,레투모)는 문자적으로 '그의 단순함으로'(inhissimplicity)라는 뜻이다. '되는대로' 또는 '별 생각없이' 등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난전(亂戰)중에 누가 맞아도 맞겠거니 하고 아무렇게나 화살을 날린 것을 말한다.

(주); 갑옷 솔기 - 당시 쇠로 만들어진 갑옷은 가슴과 갈빗대 부분을 덮도록 되어 있었고 여기에 하복부를 가리기 위해 금속조각들을 매어 달았다. 그런데 본절에서 '갑옷 솔기'란 바로 이 연결 부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원어 '벤 하드바킴 우벤하쉬른'(*)은 '연결 부위와 가슴막이 사이'(between thejoints and the breastlate)란 뜻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람 병정이 아무렇게나 날린 화살 하나가 하필이면 변장하고 숨은 아람의 갑옷 솔기를 파고 들었다는 점은 이 일이 단순히 우연한 사건이 아님을 감지(感知)할 수 있게 해준다. 즉 미가야의 예언(17-23,28절)에 입각해 볼 때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신 결과인 것이다.

(주); 내가 부상하였으니...나가게 하라 - 지휘관의 부상이나 전사(戰死)는 군대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치명상을 입은 아합은 군사들 몰래 진영 밖으로 빠져나가려 한 것이다.

성 경: [왕상22:35]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 '맹렬하다'에 해당하는 '알라'(*)는 '고조되다'(increased), '타오르다'는 뜻이다. 즉 일단 맞붙은 전투는 점점 열기를 더함으로써 혼전(混戰)에 혼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주); 붙들려 서서 - 이에 해당하는 '아마드'(*)는 '계속해서 서 있다'는 뜻이다.즉 아합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전투 때문에 아합의 병거는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합의 거듭되는 불운을 설명해 준다. 즉 아합은 제때에 부상을 치료받지 못해 결국 과도한 출혈로 죽고 만 것이다.

성 경: [왕상22:36]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각기 성읍으로, 간기 본향으로 - 이 말은 전투 중지와 귀향을 촉구하는 말이다. 분명 아합의 죽음은 벡성들의 전의(戰意) 상실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처음부터 이번 전쟁은 아합의 욕심으로 시작된 것일 뿐 백성들에겐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7절 주석참조. 그러므로 그 날의 전투가 수그러들고 아합의 죽음이 알려지자 진중(陳中)에는 이심 전심(以心傳心)으로 귀향의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본절의 외침, 그 이면에는 반가움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Gesenius).

성 경: [왕상22:37]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본절을 28절과 대비해 보면, 그 극적 인상이 한결 뚜렷해진다. 아합은 죽은 채로 사마리아로 돌아 온다. 이 침울한 장면 위에 미가야가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하던 말이 겹쳐지게 되면 모든 것의 의미가 밝히 드러난다. 즉 여호와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자는 진정 400명의 선지자가 아닌 미가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제 그 증인이 된 것이다. 또한 본절은 20:42 예언의 성취이다. 즉 벤하닷을 풀어 줌으로 인해 아합의 목숨으로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하리라는 예언은 이제 본장에서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성 경: [왕상22:38]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그 병거를...핥았으니 - 본절은 21:19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히 성취되었는지 알려준다. 즉 아합의 시신 자체는 왕의 예우로 장례 지내어졌다(37절). 그러나 아합이 전쟁터에서 흘린 피는 병거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못에서 병거를 세척할 때 개들이 그 피를 핥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 사마리아 못 -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성읍들마다 각기 저수지를 하나 이상씩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성읍 문 밖에 위치하였다(삼하 2:13). 본절의 '못' 역시 바로 그러한 저수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편 요세푸스는 '사마리아못'을 '이스라엘 못'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21:19의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은 아무래도 이스라엘 어느 장소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르엘 역시 넓게는 사마리아 지경(地境)의 한 성읍으로 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21:18주석>.

(주);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 혹자(B hr)는 본절의 창기들을 아세라와 바알 신전에 소속되어 있어 음란한 제의(祭儀)와 매음(賣淫)행위에 종사하던 창녀들로 이해한다. 아무튼 이들이 목욕하던 곳에서 아합의 피가 씻기웠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매우 치욕스러운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Keil &Delitzsch Commentary, Vol. III.p.281)

성 경: [왕상22:39]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그 건축한 상아궁 - 열왕기는 아합을 대단히 나약하고 우유 부단한 인물로 인상짓게 한다. 그러나 종교적 측면을 제외하고 보면 아합은 제법 군사적 성공과 활발한 건축사업의 성과를 거둔 강력한 왕이었다. 그러한 면모의 일단(一端)이 상아궁 건축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는 아합의 결말에서 엿볼 수 있다. 즉 부강을 상징하는 상아궁 건축은 아합 치세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인상깊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추측컨대 아마도 이 같은 상아궁은 아합과 이세벨이 결혼한 기념으로 지은 사치스런 별장이었을것이다. 그린데 홋날 아모스는 사치와 향락의 표상이었던 이러한 상아궁들과 관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 궁들 역시 파괴되리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암3:15).

성 경: [왕상22:40]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합의 전사]

(주); 아하시야 - '아하시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는 뜻이다. 아합의 대를 이어 이스라엘 제 8대 왕으로 즉위한 아하시야(Ahaziah)는 불과 2년(B.C.853-852)밖에 재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는 난간에서 떨어져 병을 얻은 뒤에 영영 회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왕하1:1-4). 그런데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 동생 여호람이 차기(次期) 왕위에 올랐다(왕하8:24-9:29).

성 경: [왕상22:41]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아합 제 사 년에 - 아합의 즉위 연대를 B.C. 874년으로 잡는다면, 이해는 B.C. 871년이다. 이 해에 41년간 선정(善政)으로 유다를 통치하던 아사(Asa)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를 잇게 된다(15:9-24; 대하16:11-14).

(주); 여호사밧 - '여호사밧'(*, 예호솨파트)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는 뜻이다. 그의 치적에 대해서는 역대기가 상세한 정보를 전해 준다. 그중에서도 그의 3대 업적을 들자면 (1)신앙 부흥 운동(대하17:7-9), (2)군사적 업적(대하17:12-19), (3)재판 제도의 체계화(대하 19:4-11)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아 여호사밧은 매우 유능한 통치자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열왕기는 이 가운데서도 오직 주된 관심사 한 가지, 곧 여호사밧이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점만을 지적할 뿐이다(43a절). 그리고 그 외에는 도리어 아합과의 군사 동맹(1-36절과 산당을 남겨둔 일(43b절)등 부정적 요소들만을 들추어 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열왕기 기자의 독특한 사관(史觀)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열왕들의 모든 행적을 '여호와 앞에서'(Coram Deo)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점이다.

성 경: [왕상22:42]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이십 오 년을 처리하니라 - 여호사밧은 B.C. 871-847에 걸쳐 통치하였다. 그가 35세에 즉위하여 25년가 통치하였으니 59세까지 수(壽)를 누린 셈이다. 따라서 북왕국의 왕들이 비교적 단명하고 짧은 기간밖에 재위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여호사밧과 그의 부친 아사는 오랜 재위 기간과 장수를 누린 셈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베푼 선정(善政)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곧 본문의 암묵적(暗默的)인 교훈이다.

(주); 실히 - '실히'(*, 쉴히)란 이름의 뜻은 '창던지는 자'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실히(Shilhi)는 명성 높은 무장(武將) 가문 출신인 것 같다. 실상 그러한 가문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딸 아수바(Azubah)를 왕가로 시집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왕상22:43]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여 - 아사는 열왕기가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으로 평가한 선왕(善王)이다(15:11). 그의 지극한 신앙 열정은 모친조차도 우상 숭배를 범하자 태후의 위를 폐할 정도였다(15:11). 이러한 아사의 곧은 신앙은 아들 여호사밧에게도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심지어 실책이라 할 산당의 잔존 허용까지도 여호사밧은 부친의 전철(15:8)을 되밟고 있다. 여기서 부친의 교육적 책임을 강조하는 신명기의 교훈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신 6:2,7). 즉 부친의 신실된 삶은 그대로 자녀에게 축복을 마련하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수24:14-28 강해, '기독교 가정에서의 부모의 책임' 참조.

(주);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러한 현상은 아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바(15:14) 다음의 사실을 일깨워 준다. 즉 사사 시대 이후로부터 산당 예배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과 깊이 결부되어 왔다. 그리고 산당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산당을 단번에 없애기란 힘들었을 터인데 특히 분열 왕국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15:14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22:44]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여호사밧이...더불어 평화하니라 - 대하 18:1에 의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평화 상태는 양국 왕가의 혼인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즉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Jehoram)을 서로 결혼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정략적 결혼은 남북 분열 이래 60여년간 지속되어온 분쟁의 종식을 가져왔다. 이러한 결혼 동맹은 당시 외세의 침입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던 정세에서 촉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이 결혼은 결국 남왕국에 우상숭배와 정쟁(政爭)을 초래하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왕하 11:18; 대하 22:3, 10). 그뿐 아니라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군사 동맹에 대해서도 선견자 예후(Jeehu)로부터 '악한 자를 돕는' 행위로 비난을 받았다(대하 19:2). 물론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민족주의자 여호사밧의 뜨거운 열정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즉 그는 비단 주변 세력의 위협에 대한 공동대처의 필요성을 통감하였기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남북 분단 이래로 점점 짙어져 갈 우려가 있었던 상호 이질화의 경향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하였던 관계로 민족 단합을 자신에게 부과된 주요 지상 과제들 중의 하나로 여긴 듯하다. 하지만 남북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그의 노력들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을 유발하고 말았다. (1)너무 성급했음 : 애초에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던 것인 만큼(12:24), 여호사밧은 단합 의지를 실행에 옮기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보다 진지하게 물어 보았어야 했다. (2)피상적, 인위적 노력에 치중됨 : 북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우상 숭배가 만연해 있었음에도, 여호사밧은 군사적, 경제적 동맹이나 연혼(連婚)정책 등만을 강구해 나갔던 것이다.

성 경: [왕상22:45]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그 베푼 권세 - '권세'에 해당하는 '게부라'(*)는 '힘' 또는 '세력'을 의미한다. 이는 열왕기에서 비교적 강력한 통치를 폈던 왕들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된 단어이다(15:23; 16:5,27; 왕하 10:34; 13:8; 14:15,28; 20:20). 그러므로 여호사밧 역시 군사적으로도 제법 강력한 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호사밧은 에돔을 장악하여 아라비아의 무역로를 관리하였다. 이것이 여호사밧에게 풍부한 재정 원천이 되어 주었다(대하 17:5; 18:1). 그 외에 유다 성읍의 요새화, 에브라임에 수비대를 주둔시킨 일, 강한 군대의 보유 등이 기록에 등장한다(대하 17:1,2,10-13,14-19). 그밖에도 엔게디(Engedi)에서 모압.암몬.마온의 연합군을 격파한 사실 역시 여호사밧의 힘을 실증해 주는 기록 중 하나이다(대하 20:1-30).

성 경: [왕상22:46]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여호사밧의 통치 일반에 대해 상세한 언급을 생략하는 열왕기가 남색자(男色者) 추방 사실만은 각별히 지적한 점이 이채롭다. 그만치 남색(Sodomy)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혐오스럽고 제거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창 19:1-11 강해, '성 범죄의 제 유형'을 보다 참조하라.

(주); 남색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카데쉬(*)는 특별히 우상 신전의 남창(男娼)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 23:17 주석 참조. 이야말로 부패한 욕정의 대명사로서 우상숭배의 악마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주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금지된 이 존재들을 제거하는 조치는 유다에 경건한 왕들이 등극할 때마다 거듭 취해졌다(15:11,12;왕하 23:7)

성 경: [왕상22:47]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에돔에는...섭접왕이 있었더라 - '섭정왕'(*, 나차브 멜렉)이란 원어상 '세운 왕'이란 뜻이다. 즉 이는 여호사밧이 에돔에 세운 대리 통치자를 가리킨다. 여호사밧 통치 당시 에돔(Edom)은 유다의 지배하에 있었다. 45절 주석 참조. 그런데 유다의 에돔 장악은 곧 솔로몬 이래로 부진했던 아라비아와의 대상(隊商) 및 해상 무역의 재개(再開)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임명한 섭정왕의 에돔 통치는 유다에 엄청난 부를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한편 왕하 3:4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모압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라엘, 유다 그리고 에돔의 세 왕이 출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때의 에돔 왕 역시 여호사밧이 세운 섭정왕일 가능성이 높다(Maclean).

성 경: [왕상22:48]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본서 10:22에 언급된 것과 같은 솔로몬 시대의 해상 무역(에시온게벨을 거점으로 한 다시스 선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은 남북 분열 이래로 중단되었다. 아마도 그 까닭은 남북 왕국 분열이 상대적으로 국력의 반감(半減)을 초래했고, 또한 유다가 북왕국과의 경쟁에 힘을 쏟는 동안 이전 만큼의 지배력을 주변 국가에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본절은 여호사밧이 솔로몬 시대의 영화(榮華)를 재현하고자 노력한 사실을 전해준다. 따라서 앞절의 에돔 장악은 그러한 시도를 가능케 했던 배경 설명이라 하겠다.

(주); 다시스의 선척을 제조하고 - 이 말은 단지 '다시스의 배를 건조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여기서는 '다시스의 선단(船團)을 조직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NIV, 공동 번역).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22 주석을 참조하라.

(주); 오빌로 금을 취하러 보내려 - 오빌(Ophir)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곳이 고대에는 금의 산지로 유명했던 것만은 분명하다(대상 29:4), 9:28 주석 참조.

(주); 에시온게벨 - 홍해의 한 지류인 아카바 만(Gulf of Aqabah)상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과거 솔로몬은 이곳을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삼아 많은 부(富)를 축적하였다. 9:26 주석 참조.

성 경: [왕상22:49]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여호사밧이 허락지 아니하였더라 - 대하 20:35-37에 의하면, 다시스 선단의 파선(48절)은 아하시야 같은 악한 자와 교제하는 여호사밧에 대한 여호와의 징계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는 후에도 다시금 아하시야가 다시스 선단 조직을 제의해 오자 여호사밧은 이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의 협력 제의를 거절한 까닭은 여호와의 징계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아하시야의 제안을 불순한 것으로 판단햇 때문에 거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즉 대하20:35이 '심히 악을 행하는 자'로 지적한 아하시야의 제안은 여호사밧의 이권(利權)에 한몫 끼어들려는 흑심(黑心)이 깔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를 두려워한 여호사밧은 배를 보내 주겠다는 아하시야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여호사밧이 아합과 맺은 동맹 관계(1-4절)는 아합의 아들인 아하시야(Ahaziah,B.C.853-852) 대(代)까지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왕상22:50]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여호사밧의 행적]

(주); 여호람 - '여호람'(*, 또는 요람)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름의 뜻과는 달리 여호람(Jehoram)은 별로 긍정적이지 못한 통치를 펴게 된다. 즉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여호람은 경건했던 부친과는 달리 '이스라엘 왕들의 길', 즉 우상 숭배를 행한다. 아마도 여기에는 그의 아내인 이세벨의 딸 아달랴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대하 21:6). 아무튼 이렇게 정도(正道)에서 이미 빗나간 여호람의 통치는 (1)불과 약 8년 (B.C.847-841)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왕하 8:17; 대하 21:5) (2)자신의 모든 아우(6명)와 몇몇 방백을 살해한 일(대하21:4), (3)에돔의 반란 및 블레셋, 아라비아의 유다 침공(대하 21:8-10,16,17)등 험난한 시대로서의 특성을 고루 갖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그의 죽음 역시 그를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나는 침울한 것이었다. 즉 아무도 그들 애도하지도 않았고 그의 시체는 열조의 묘실에 장사되지도 못했다(대하 21:20).

성 경: [왕상22:51]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하시야의 행적]

아하시야는 약 2년간(B.C.853-852)에 걸쳐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그는 부왕 아합이 길르앗 라못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전사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게 되었다(34-40절). 또한 그의 치세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의 국내 행정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아하시야는 블행스럽게도 그의 궁전 이층의 격자가 무너지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져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아하시야는 이세벨의 혈통답게 자신의 부상에 관해 율법이 정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문의하는 대신에 블레셋 땅 에그론의 신 바알세불에게 문의하도록 했다. 당시 노령에 이른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사자들을 가로막고 아하시야 왕에게 돌아가서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도록 했다(왕하 1:5-8).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0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왕상22:52]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하시야의 행적]

(주); 그 어미의 길과 - 아하시야에 대한 열왕기의 평가문은 독특하게도 '그 어미의 길'(*, 베데레크 임모)이란 문구롤 추가하였다. 이는 아하시야가 그 어미 이세벨(Jezebel)에게 받은 악영향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전이라는 각도에서 열왕의 역사를 바라보는 열왕기의 관점으로서는 이세벨의 출현은 차라리 전염 병균의 침투였다. 그렇잖아도 북왕국은 출발부터가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그릇된 모본(12:25-33)으로 인해 비틀거렸다. 그런데 여기에 아합과 이세벨의 두 존재가 나란히 등장한 아합 시대는 가히 악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시대라 하겠다. 즉 내용상으로는 우상 숭배라 해도 표면상 여호와 종교의 연장(延長)을 자처하던 송아지 숭배(12:28,29)에다, 그들은 아예 이방 종교의 도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북왕국의 타락을 촉진시켰던 것이다(16:31-33). 한편 이세벨의 영향은 아들 뿐 아니라 딸 아달랴를 통해서도 남왕국에 우상 숭배와 정쟁(政爭)의 씨앗으로 전파되었다(왕하 11:1-16;대하 21:6; 22:1-3,10-12; 23:1-15).

성 경: [왕상22:53]

주제1: [아합의 최후]

주제2: [아하시야의 행적]

(주);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 '숭배하다'(*, 아쉐타 헤에)는 본래 '엎드리다'는 뜻이다. 사실 이스라엘에 있어 여호와 신앙이란 백성의 종교적 측면 뿐 아니라 사회, 정치적 측면의 모든 질서를 규제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규범이 곧 율법인데 왕은 백성을 위한 봉사자이면서 동시에 율법의 모범적 준수를 위임받은 자이다. 그런데 그러한 신정(神政) 국가의 왕인 아하시야가 노골적으로 바알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곧 그의 통치의 출발 자체가 이미 파탄을 예견하고 있다는 엄청난 신앙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 아하시야의 통치 서론에 속하는 본절은 자신의 운명을 이방의 신에 의뢰하는 아하시야의 그릇된 신앙을 알려 주는 열왕기하 1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준다. 즉 520절과 함께 본절이 아하시야에 대한 신앙적 평가라면 열왕기하의 첫머리는 그 예중(例證)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본래 히브리 성경에서 열왕기는 분리되지 않은 한편의 책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열왕기를 상권과 하권으로 분리시키는 방식은 1516년 베니스에서 출간된 봄베르크 성경 초판 때 처음 사용되었다 한다(Sxhultz). 그러므로 이러한 구분은 편의상 그렇게 한 것일 뿐 의미상의 필연적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성경 총론, '성경의 사본과 역본'을 보다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