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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사무엘하

사무엘하 주석

성 경: [삼하1:1]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사울의 죽은 후라 - 사무엘상 . 하를 연결해 주는 의미 있는 구절이다(Cahen, Wordsworth). 랑게(Lange)는 이 문구가 2장에 나온 용례처럼(2:1, 그 후에) 단순히 내용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보편적 형식으로서 사무엘상. 하와 구분점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 중 상당수가 '... 가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아(수 1:1;삿 1:1;왕하 1:1) 이 문구를 사무엘상.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음은 적절하다. 더욱이 이 문구에 의해 내용면에서 폭군 사울 왕의 시대와 성군 다윗 왕의 시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무엘상.하가 히브리 성경에서는 한권으로 되었을지라도 이 문구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은 매우 적절하며 또한 그 의미가 깊다.

(주); 다윗이... 도륙하고 - 삼상 30:16-20의 사건을 가리킨다. 즉 앞서 다윗은 아기스와 함께 출전(出戰)하느라 잠시 시글락을 비워 둔 적이 있다. 그때 아말렉족이 시글락을 침입, 다윗의 백성을 약탈하였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다윗은 그 뒤를 추격, 아말렉족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주); 시글락 - 브엘세바 북서쪽 19. 2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원래 시므온 지파에게 배당 되었으나(수 19:5;대상 4:30) 사울 시대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가드의 아기스 왕은 다윗이 사울에게 뒤쫓기고 있을 때 시글락(Ziklag)을 다윗에게 주어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꾀하기도 했었다(삼상 27:6;대상 12:1,20). 즉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가드로 도망와 아기스 왕과 군사적 관계를 맺고 이 곳을 얻었던 것이다. 덕분에 다윗은 지금까지 이곳을 그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며 은거할 수 있었다(삼상 27:8, 9;30:26-30).

성 경: [삼하1:2]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제 삼 일에 - 다윗이 아말렉 족을 추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삼상 30:16-20) 제 사흘째 되던 날을 가리킨다.

(주);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 사울과 그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레셋군을 맞이하여 교전(交戰)하던 격전지(삼상 31:1-7)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을 가리킨다.

(주);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 이는 그 당시 근동 지방사람들이 자기의 극한 슬픔을 표시하던 한 방법이다(수 7:6;삼상 4:12).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고통이나 번뇌에 사로잡혔을 때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한 표현법이다. 한편 그밖에도 고대 근동인들은 금식, 굵은 베옷을 입는 것, 허리에 굵은 베를 띠는 것 따위에 의해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곤 하였다(창 37:34;삼상 31:13;왕상21:27;시 35:13). 그러나 본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행위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위증(僞證)에 비추어볼 때(5-10절)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 다윗에게...엎드려 절하매 - 이는 곧 다윗을 자신의 주(主)로 인정하는 경외와 복종의 자세이다. 즉 이는 이제 죽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위에 오를 자가 곧 다윗임을 인정하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 두 활과 무릎이 닿을 정도로 부복(俯伏)하는 행위는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군주나 지도자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던 자세이기 때문이다( 14:4;19:18;창 42:6;삼상 24:8;왕상 18:7;왕하2:15).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적으로 씁쓸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도 사울 휘하에서 충성을 다하던 자가 사울이 죽자(1절) 얼른 다윗에게로 도망쳐 와 이처럼 새로운 충성을 표하니 그의 약삭빠름과 간특(奸慝)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p.447).

성 경: [삼하1:3]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 이와 같은 보고를 올리고 있는 이 아말렉 사람은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에 고용된 용병(傭兵)이었을 것이다(8, 13절).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하고 사울마저 위기에 처하자(4-10절;삼상 31:1-6) 진영을 이탈, 잽싸게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성 경: [삼하1:4]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 아말렉 사람의 보고에 대하여 다윗이 좀더 구체적인 전황(戰況)을 묻고 있는 장면이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군이 어떠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기에 아말렉 용병이 다 도망쳐 나올 정도였는지 무척 궁금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한편 이 같은 다윗의 물음은 과거 아벡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엘리 제사장이 초조한 심정으로 묻던 질문과 꼭같다(삼상 4:16). 더군다나 이 두 경우 모두 1)이스라엘의 대전국(對戰國)이 블레셋이며 2)이스라엘군이 참패를 당한 점 3)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에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처럼 과거 아벡 전투결과, 엘리에서 사무엘로 통치권의 전황이 이루어졌듯(삼상 4, 7장) 이제 길보아 전투(삼상 31장) 결과, 사울에서 다윗에게로 통치권이 전환되게 된 사실(2:1-4)은 배후에서 역동적(dynamic)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즉 비록 인간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오히려 그 가운데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성취시켜 나가고 계시는것이다.

(주); 군사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 이미 삼상 31:1-7에서 자세히 언급된 상황이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대패(大敗)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울에게 주셨던 예언(삼상 13:14;15:23, 26, 28;28:19)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하1:5]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사울과...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다윗의 심정이 역설적으로 드러나있는 반문이다. 즉 다윗은 아말렉 사람에게 "네가 직접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목격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찌 감히 네가 함부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고 하느냐?"는 의미로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지금껏 자신을 박해하던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그 아들 요나단이 전사한데 대하여 충격과 당혹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6]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소년 - 이에 해당하는 '나아르'(*)는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소년, 소녀, 청년, 처녀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용병(mercenary)으로 전투에 참여한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기에 공동번역 및 대부분의 영역본(KJV, NIV, RSV)들은 이를 '젊은이'(youngman)로 번역하고 있다.

(주); 내가 우연히...올라 보니 -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마지막 장에 의하면 사울의 죽음을 목격한 자는 그의 '병기 든 자'로서 처음부터 사울과 함께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삼상 31:1-6).

(주); 길보아산 - 이스르엘 골짜기(the valley of Jezreel)에 위치한 해발 497m의 석회암 구릉이다. 삼상 31:1 주석 참조.

(주);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 혹자(Clericus)는 이를 사울이 창을 사용,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지하다'에 해당하는 '솨안'(*)은 '기대다', '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극도로 지친 사울이 땅에 꽂힌 자신의 창을 의지한 채 힘들게 겨우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봄이 낫다(Lange). 이는 당시 역경 중에 처해 있던 사울의 비참한 지경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주); 병거와 기병은 저를...따르는데 - 다시 한번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병거(chariots)는 평지에서나 사용 가능한 도구이지 산에서는 그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을 피해 길보아 산으로 도망친 이유도 저들이 병거를 타고서 추격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삼상31:1). 그러자 그때 블레셋군은 병거나 기병대신 '활쏘는 자들'을 동원 이스라엘군을 추격했었다(삼상 31:3).

성 경: [삼하1:7,8]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아말렉 소년의 보고(6-10절)가 완전히 날조된 거짓 보고임을 드러내 주는 결정적 단서이다. 왜냐하면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사울(삼상 31:4)이 스스로의 신분을 '아말렉 사람'이라고 밝힌 소년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9절)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1:9]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 직역하면 '고통이 나를 붙잡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고통'에 해당하는 '솨바츠'(*)는 간혹 경련, 어지러움증, 현기증 따위를 의미하기도 한다(De Wette, Hesenius,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보아 여기서는 뒤쫓아오는 적들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느낀데서 온 '공포'나 '두려움'을 가리키는 듯하다(Matthew Henry). 이처럼 심령의 평안을 잃어 버리고 죽음의 공포나 인간적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성 경: [삼하1:10]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사울과 요나단의 사망 비보(悲報)]

(주); 엎드러진 후에는 - 여기서 '엎드러지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팔'(*)은 '쓰러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혹자는 이를 사울이 창에 엎드리어 자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atthewHenry).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이를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Lange,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주); 그 곁에 서서 죽이고 - 이처럼 아말렉 소년은 자신이 사울의 부탁을 받고서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상 31: 3, 4에는 사울이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같은 차이점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러 자료들을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견해(Ewald). 2)사무엘상.하의 저자가 동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Wordsworth). 3)아말렉 소년이 다윗으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사울이 자결한 사실을 숨긴 채 거짓 증거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Lange) 등이다. 이 중 첫번째 견해는 성경영감설 자체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견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두번째 견해는 사무엘상.하의 저자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는그 내용을 서로 달리 진술할 수 없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번째 견해는 지금껏 우리가 살펴온 바와 일치한다. 즉 사울의 죽음에 관한 아말렉 소년의 보고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일관된 위증(僞證)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도 세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Brown, Fausset, Jamieson, Rust,R.H.Pfeiffer).

(주); 면류관 - 원어 '네제르'(*)는 일반적으로 '왕관'(crown)을 가리키는 말이다.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사울이 이러한 왕관을 착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아마이는 사울의 투구에 둘러 쳐져 있던 좁다란 금띠로서 왕권을 상징하던 것인 듯하다.

(주); 팔에 있는 고리 - 사울이 팔에 차고 있던 고리는 고대 근동의 군지휘관들이 흔히 지니고 있던 장신구 중의 하나이다(민 31:50). 오늘날 발굴된 앗수르의 조각물들에도 보면 손목과 팔에 고리를 찬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Lavard, Wycliffe).

성 경: [삼하1:11]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죽임 당하는 아말렉인]

(주); 자기 옷을...찢으매 - 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12]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죽임 당하는 아말렉인]

(주); 울며 금식하니라 - 금식 역시 극한 슬픔을 나타내던 한 방법이다. 2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슬픔은 지극히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슬퍼했기 때문이다. 1)그의 동포들이 살육당했기 때문이다. 2)그 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3)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서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같은 이방인에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4)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죽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사울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로 기름 부음 받은, 즉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삼상 10:17-24). 따라서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은 것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1)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됨. 2)사울과 그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권위가 떠남. 이러한 까닭에 다윗은 사울에 대한 그의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즉 다윗은 사울 왕국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아 이방인들에게서 조차 능욕(凌辱)당한 사실을 못내 안타까와하며 슬퍼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하1:13]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죽임 당하는 아말렉인]

(주); 나는...아들이니이다 - 이와 관련 매튜 헨리(Natthew Henry)는 한 유대인 전설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마부였던 도엑(Doeg)의 아들이었다는 전설이다. 그에 따르면 사울은 자결하기 전에 자신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이 청년에게 건네 주면서 다윗에게 바치라고 명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뿐 그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주); 외국인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는 이스라엘에 임시로 체류하는 타국인(*, 노크리)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그 사회에 동화(同和)된 이방인을 의미한다(출 22:21;23:9). 이들은 유대 후기에 완전한 시민들처럼 대우를 받았으며(겔47:22), 제 3의 십일조를 분배받는 특권을 누렸다(신 14:29). 또한 이들은 여호와 종교로 개종할 경우 이스라엘인과 다름없이 율법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며, 동시에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출 12:48,49; 레 16:29; 17:8,15; 18:26; 19:34; 24:22; 25:6; 신 1:16; 10:18; 16:11). 뿐만 아니라, 이들은 법소송에서 위대하신 영주, 곧 하나님께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레 24:22).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인과 같이 땅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분명 외국인이 갖는 불이익이었다. 때문에 아말렉 소년은 이러한 불리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다윗에게 아첨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Rust).

성 경: [삼하1:14,15]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죽임 당하는 아말렉인]

(주); 저를 죽이라 - 이처럼 다윗이 아말렉 소년을 죽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사울을 죽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1)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죽인 것은 여호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으며(삼상 24:11;31:4), 또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는 자의 왕권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2)아말렉 소년은 이스라엘에 귀화(歸化)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절 주석 참조. 즉 그는 적어도 이스라엘 사회가 귀화한 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전심 전력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도 이스라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며 또한 그 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사울을 살해하였으니 은혜를 악으로 갚은 셈이다. 따라서 다윗이 그를 처단한 것은 하나님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는 행위인 동시에, 여호와의 권위에 대적한 악을 제거한 공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이 공의로운 처단을 함으로써 은연중 신정 국가의 왕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16]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죽임 당하는 아말렉인]

(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영혼이 깃든 처소로까지 묘사되어 있다(창 9:4;레 3:17;17:11,14). 그러나 여기에서 피는 최고의 형벌, 또는 죄에 대한 책임 등 처벌을 의미한다. 그리고 머리는 개인의 인격과 육체, 생명 따위를 의미하는 대표 개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피를 흘린 그 책임이 바로 네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즉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것이니"(창 9:6)라는 원리에 따라 다윗은 사울을 살해한 피의 대가를 아말렉 소년에게서 찾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18]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활 노래라 -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즉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0:17-42). 3)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 자들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대상 8:40;12:2). 4)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주); 야살의 책 - 여기서 '야살'(*)은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Keil & Delitzsch,Lange). 이 책은 이곳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이다(Glodschmidt, Keil).

성 경: [삼하1:17]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

(주); 슬픈 노래 - 원어 '키나'(*)는 '(장례 때에) 소리내어 울다'란 뜻의 '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곧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를 가리키는 바'애가', '비가' 또는 '조가'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 앞에서(3:33,34),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죽음 앞에서(대하 35:25) 지은 시들은 모두 이러한 '키나'이다.

성 경: [삼하1:19]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

(주);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 여기서 '산'은 '길보아 산'(mount Gi-lboa)을 가리킨다(삼상 31:1). 그런데 '너의 영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사울 및 요나단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Ephrem).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대표하는 사울과 요나단만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이 중 보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견해는 후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여 지은 애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절내에서 '너의 영광'은 '두 용사'란 말과 서로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영광'에 해당하는 원어 '체비'(*)는 '광채', '영광'이란 뜻 외에도 '가젤 영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수리아 역본(the Syriac Peshitta)은 이를 '가젤 영양'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한다. 아마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민첩성 및 그 용모, 즉 가젤 영양과 같이 재빠르고 아름다운 용모를 염두에 둔 번역일 것이다(삼상 9:2; 10:23).

(주);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 25, 2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구절로 본 애가의 후렴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삼하1:20]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가드...아스글론 - 블레셋의 5대 성읍중 가장 대표적인 성읍들로서(삼상5:8,10;6:17) 그 땅 전체를 두 성읍으로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에 고하지 말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재난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서 이는 훗날 하나의 격언이 되었다(미 1:10).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비극을 원수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금한 이유는 원수의 기쁨이 하나님의 백성의 슬픔을 배가 시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p.290).

(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 여인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용사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춤과 노래로써 축하하는 것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출 15:20;삼상 18:6)이다(Keil,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다윗은 거민들과 수치와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조시키는 가운데 더욱 애잔한 심정으로 애가를 읊고 있는 것이다.

(주); 할례 받지 못한자 - 특히 이 말은 블레셋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 되었는데(삼상14:6;17:26;31:4) '개 같은자'라는 의미를 지닌 경멸어이다(Pulpit Commentary).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의 선민(選民) 사상에서 기인된 것으로 오직 할례받은 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의식(意識)의 반영일 것이다(창 17:9-14).

성 경: [삼하1:21]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

(주); 길보아 산들이...없을지어다 - 이는 자연에 대한 실제적 저주라기 보다는 길보아산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야 한다는 시적 표현이다.

(주);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 여기서 '제물'(*, 트루마)은 거제를 의미한다(레 7:14, 32). 그런데 이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 떡'을 드리는 것이니(민 15:20) '제물 낼 밭'이란 곧 풍성한 첫 열매를 내는 비옥한 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에서 다윗은 길보아 산이 메말라 박토가 되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 주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 - 옛날에는 적의 무기가 잘미끄러져 빗나가도록 하기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것(사 21:5)이 보통이었다(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제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공동 번역)는 것은 곧 사울은 전사하고 그의 방패는 피묻은 채 나뒹구는 비극적 상황을 의미한다(Keil & Delitzsch). 이와 관련 랑게(Lange)는 논평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현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성 경: [삼하1:22]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무용(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개역 성경의 표현은 다소 그 뜻이 애매 모호한데 다음과 같이 공동 번역은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라고 표현하여 그 뜻이 비교적 명쾌하다.

(주);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 '화살은 피에 취하고 칼은 육체를 삼킨다'(신 32:42)는 것과 같은 시적(詩的) 표현이다. 즉 이는 과거 사울이 '천천'이나 되는 (삼상 18:7) 많은 적들을 살육하였음을 회상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 경: [삼하1:23]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 - 이 말은 다윗의 친구 요나단 뿐만 아니라 초기에 유능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 주어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사울(삼상 11:12, 13)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정적(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격상 이노래가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내 준다.

(주);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 자식으로서 끝까지 아비를 버리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 요나단의 효심과 충정을 기억케 해주는 구절이다. 즉 과거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으로 인해 아비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까지 하였다(삼상 20:30-34). 그러나 요나단은 결코 그러한 사울을 배반치 아니하고 조국을 수호하다가 사울과 함께 한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삼상31:1-6).

(주); 독수리보다...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 전쟁에 능하였던 위대한 용사나 영웅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던 개념이다. 즉 독수리 같은 날쌤(욥 9:26; 잠 23:5; 함 1:8)과 사자와 같은 힘셈, 용감함(신 33:22; 시 104:21; 호 13:8)은 고대의 용사들에게서 찾아 볼수 있던 특징이다(Lange, Keil & Delitzch Commentary).

성 경: [삼하1:24]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붉은 옷... 금 노리개 - 아마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져온 전리품(戰利品)들일 것이다. 사울 생전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러한 전리품을 하사받아 자신들을 치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는 사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하1:25]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다 - 19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7]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 여기서 병기는 칼이나 창, 화살 또는 병거와 같은 실제적 병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싸우는 군인', 즉 사울과 요나단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 스스로를 병기처럼 내던졌으나 불행히도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삼상 31:1-7).

성 경: [삼하1:26]

주제1: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

주제2: [다윗의 조가(弔歌)]

(주); 내 형 요나단 - 여기서 '형'에 해당하는 원어 '아흐'(*)는 단순히 연령적으로 손위에 있는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마치 친형제와도 같이 친근한 관계에있는 자를 가리킬 때가 많다. 다윗이 요나단을 가리켜 '내 형'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도 바로 후자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주);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 NIV는 이를 '그대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youwere very dear to me)로, RSV는 '그대는 나에게 심히 기쁨이 되었다'(very pleasanthave you been to me)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생전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가 지극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실 과거에 요나단은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 목숨처럼 위하며 사랑했었다(삼상 20:12-17).

(주);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 '기이하다'에 해당하는 '파라'(*)는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표현할때 사용되었다(출 15:11; 욥 5:9; 9:10; 시 17:7; 78:4; 139:14; 사 29:14; 슥 8:6).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것은 실제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경이로울만치 자기 희생적이었으며 영원 불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말이다. 남녀의 결혼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합도 의미한다(창 2:24, 25;엡 5:22-33). 따라서 남녀의 영적 결합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이보다 승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저들의 마음이 통하고 그들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극찬의 말이 아닐 수 없다(삼상 18:1).

성 경: [삼하2:1]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유다의 왕이 된 다윗]

(주); 그 후에 - 본장과 전장(前章)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관용적 표현이다. 역대상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도 얼마 동안은 블레셋 땅 시글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삼상 25:5-7). 그리고 이때 더욱더 많은 용사들이 다윗에게로 몰려왔기 때문에 그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진 듯하다(대상 12:1-22). 이는 곧 이제 다윗이 전사한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할 때가 이르렀음을 시사해 준다(Pulpit Commentary).

(주); 여호와께 물어 - 아마도 이때 다윗은 우림과 둠밈(Urim and Thummim)으로 여호와께 물었을 것이다. 그 근거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우림과 둠밈을 단 에봇을 아비아달 대제사장이 입고 있었는데, 당시 그가 다윗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23:6). 둘째, 다윗은 과거에도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에게 우림과 둠밈을 사용, 하나님의 뜻을 물어봐 달라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삼상 22:10). 한편 이처럼 다윗은 사울의 사후(死後)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세(政勢)속에서도 자기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은 중요한 일에 부딪칠 때마다 취한 행동으로서(5:19;삼상 22:10), 이는 그가 그만큼 자기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주);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 이제 사울이 죽은 시점에서 다윗은 고국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 다윗이 특별히 유다 땅을 염두에 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는 아직 사울 가문을 추종하는 적대 세력이 있었으니(8, 9절)그는 자기 지파, 유다 땅에서 필시 정착지를 구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Lange).

(주); 헤브론 - 예루살렘 남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성(古城)이다.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Kirjath-Arba)이며(수 15:13;삿 1:10) '헤브론'(Hebron)의 뜻은 '연합', '친교'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명하신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성읍이며 유다 지파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윗이 유다 지파의 세력을 업고 왕이 될 정치적인 거점으로 알맞은 곳이었기 때문이다(4절). (2)헤브론은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에게 패퇴당한 아낙 자손들이 차지했던 요새로서(수 15:13-17) 산지가 성읍으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3)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브론에는 다윗과 친분이 두터운 유다의 장로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30:26, 30).

성 경: [삼하2:2]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유다의 왕이 된 다윗]

(주); 이스라엘 여인 아히노암 - '아히노암'(Ahinoam)의 뜻은 '호감가는 형제'이다. 그녀는 다윗이 자신의 첫번째 아내 미갈을 발디에게 빼앗긴 후 새로이 취한 또 다른 아내이다. 삼상 25:43 주석 참조. 그녀는 다윗에게 한 아들을 낳았는데 곧 장자(長子) 암논이다(3:2).

(주); 갈멜 사람... 아비가일 - '아비가일'(Abigail)의 뜻은 '아버지가 기뻐하심'이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본남편 나발 사후(死後) 다윗에게로 개가(改嫁)하였다. 삼상 25:39-42주석 참조. 그녀 역시 다윗에게 아들을 낳았는데 일명 '다니엘'(대상 3:1)이라고도 하는 '길르압'이다(3:3).

성 경: [삼하2:3]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유다의 왕이 된 다윗]

(주);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헤브론 각성에 거하게 하니라 - 삼상 27:2에는 당시 다윗을 추종하던 자들의 수가 600인 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권속(眷屬)들, 즉 딸린 식구들이 있었다 하니 적어도 그 수는 두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아말렉족에게서 탈취한 무수한 양떼와 소떼도 있었다(삼상 30:18-20). 따라서 아마 다윗은 이들을 헤브론에 다 수용치 못하고 헤브론 및 그 인접한 성읍들에 분산 수용하였을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2:15]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브넬과 요압의 대결]

(주); 열 둘이요... 열 둘이라 - 이처럼 이스보셋과 다윗측에서 각각 열 두 명의 군사를 출전시킨 것은 온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 12지파 전체의 지배권을 걸고서 싸운다는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성 경: [삼하2:17]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브넬과 요압의 대결]

(주);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 선택된 24명의 용사들이 승부를 가리지도 못한 채 모두 죽자(16절)피를 본 양측의 군사들이 자극을 받아 전면전(全面戰)에 돌입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서 '맹렬하다'에 해당하는 '카솨'(*)는 '잔혹하다', '단단하다'는 뜻으로 전쟁의 참혹성을 증거해 준다.

성 경: [삼하2:18]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죽음]

(주); 스루야 - 이름의 뜻은 '분열됨'으로 다윗의 누이이다(대상 2:16).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 계대(係代)를 말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요압, 아비새, 아사헬이 '스루야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든 듯하다. (1)스루야가 특별히 뛰어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2)스루야가 일찍 남편을 사별(死別)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3)요압, 아비새, 아사헬과 다윗과의 친분 관계를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다.

(주); 요압 -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심'이다. 이러한 요압은 다윗 왕조의 중심 인물이며 또한 본서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다윗을 추종했으며, 이스라엘의 통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0:6-19;11:1;12:26;왕상 11:15, 16). 그러나 그는 이중 인격자의 근성을 가진 자로서 한편으로는 다윗을 심히 괴롭힌 장본인이었다. 즉, 그는 다윗을 위해 시온 성을 쌓는 데 협력하는(대상 11:8)등 많은 충성을 하였으면서도(14:23, 31-33;18:14-33), 한편으로는 다윗이 죽이지 말라고 부탁, 또는 명령한 압살롬, 아마사, 아브넬 등을 교묘한 꾀를 써서 살해하였다(3:27;18:14;20:10). 이러한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다윗 왕조를 위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했던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야망으로 행동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에 다윗은 그를 미워하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요압은 이러한 자기의 기질로 인해 솔로몬의 군대 장관 브나야에게 살해 당하고 만다(왕상 2:31-35). 우리는 요압의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은 곧, 참된 충성이란 많은 일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질과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주); 아비새 - '선물의 아비'란 뜻이다. 아비새 역시 형 요압과 함께 일생 동안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한 자이다(17:25;대상 2:16). 그는 요압과 더불어 다윗 군대의 유력한 장군이 되어(10:9, 10)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며(18:1-15) 다윗의 목숨을 구하는 등(21:15-17)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혼자서 창으로 삼백 명의 적군을 무찌른 일로 유명하다(23:18;대상 11:20).

(주); 아사헬 - '하나님께서 만드심'이란 뜻이다. 요압과 아비새의 동생으로서 다윗의 30용사 중 한 사람이다(23:24).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기도 한 그는(대상 27:7) 특히 발 빠르기로 유명하였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스보셋의 군장(軍長) 아브넬에게 살해당하고 마는 불운을 격는다(23절).

성 경: [삼하2:19]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죽음]

(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 이 말은 '한눈 한번 팔지 아니하고', '오직'이란 뜻이다. 후퇴하는 적의 패장(敗將)을 처치한다는 것은 용사로서 매우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아사헬은 다른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아브넬의 뒤만을 쫓았던 것이다.

성 경: [삼하2:22]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죽음]

(주);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 아브넬의 이 같은 말은 아사헬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즉 아브넬은 행여라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아사헬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 아브넬이 굳이 요압을 들먹거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전에 아브넬과 요압은 친구 관계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다윗이 사울왕의 핍박으로 인해 도피하기 이전에는 이들이 서로 군대의 동료로서 우정을 나누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Keil). (2)아브넬이 대세가 다윗측에게로 기우는 것을 확인한 후 앞으로 자신이 요압의 세력하에 들어가게 될 때 그 후환을 염려하여 이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Pulpit Commentary, Rust, Matthew Henry). (3)아브넬이 요압의 사나운 성질을 잘 알고 있어서 그의 복수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같이 말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Lange).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를 댈 수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추측들 모두가 가능성이 없는 것들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가지 견해들을 종합하여 본절을 해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성 경: [삼하2:23]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죽음]

(주);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 이로 보아 아사헬은 자신의 빠른 걸음만을 믿고서 무모할 정도로 만용(蠻勇)을 부렸음에 분명하다. 만일 그가 겸손하고 사리를 분별할 줄만 알았더라면 아브넬이 자신보다 뛰어난 백전 노장임을 깨닫고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단코 어리석은 죽음의 자리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 창 뒤 끝으로... 찌르니 - 이것을 보아 아브넬이 아사헬을 고의(故意)로 죽일 마음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저 아사헬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려고 창 뒤끝으로 찔렀던 것이다(Hertzberg, Lange).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사헬이 죽은 것은 아마(1) 창의 뒤끝에 금속의 일종이 부착되어 있었거나(Lange, Pulpit Commentary), (2)아사헬의 달려듬이 너무나 빨랐기 때문일 것이다(Matthew Henry).

(주); 엎드러져 죽으매 - 이처럼 18절에서부터 본절에 이르기까지 아사헬의 죽음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아마 이는 훗날 요압에 의해 아브넬이 살해당한 이유가 바로 이 아사헬의 죽음 탓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함인 듯하다(3:27, 30).

성 경: [삼하2:24]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기아 맞은편 암마 산 - '기아'(Giah)의 뜻은 '폭포'또는 '솟는 샘'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다만 베냐민 땅, 기브온 광야의 어느 한 지점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람들이 쉬면서 목을 축일 수 있는 샘이나 개울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암마 산'(the hill of Ammah)역시 기브온 광야에서 요단 강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만 추정될 뿐 더 이상 알려진 점이 없다.

성 경: [삼하2:25]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베냐민 족속 - 당시 기브온에 정착하고 있던 베냐민 지파로서 이스보셋을 추종하던 세력이다(9절). 이들은 마침 기브온 못을 확보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왔던 아브넬과 합세하였을 것이다(12, 15절). 그런데 이처럼 이들이 그 어느 지파보다도 적극적으로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추종하였던 까닭은 아마 사울 가문이 자신과 같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삼상 10:17-24).

성 경: [삼하2:26]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 이 말은 '계속해서 칼로 죽여야만 하겠느냐'는 뜻이다. 즉 아브넬은 '이제 피흘리는 싸움을 그만 두자'고 휴전 제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참혹한 일'에 해당하는 '마라'(*)는 '괴로움', '불미스러움', '쓴맛'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양측 모두 전멸하고 마는 '비극'을 의미한다. 때문에 벧겟역(Vulgate)은 이를 '목숨걸고 싸우는 일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로 번역하고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형제 쫓기를... 명하겠느냐 - 지금 대진해 있는 군사들이 형제들, 곧 같은 민족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넬의 간교성(奸巧性)과 다급함을 엿볼 수 있다. 즉 먼저 동족간의 싸움을 제의하고 피흘리기를 좋아하였던 그가(14절)이제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동족애에 호소하여 휴전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로서 휴전이 성립되게 된 것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는 곧 장차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5:1-5)의 간섭하심의 결과가 분명하다.

성 경: [삼하2:28]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나팔을 불매...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 이처럼 요압이 아브넬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퇴각(退却)나팔을 불고 싸움을 중지시킨 것은 아마 다윗을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즉 동족간의 무모한 피흘림을 계속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한을 초래하는 것은 분명 장차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여야 할 다윗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성질 급한 요압이었기는 하지만 이를 고려, 일단 싸움을 중지시켰을 것이다(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2:29]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아라바 - 본래는 요단 강 상류의 헤르몬 산으로부터 갈릴리 호수, 요단 계곡, 사해를 통하여 아카바 만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침식지(浸蝕地)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얍복 강이 흘러들어 오는 요단 강 일대의 계곡 지대를 가리킨다.

(주); 비드론 온 땅 - '비드론'(bithron)의 뜻은 '협곡'또는 '갈라진 틈'이다. 이로 보아 '비드론 온 땅'이란 요단 강 동편의 한 골짜기 일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성 경: [삼하2:30]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궐이 났으나 - 이에 해당하는 '파카드'(*)는 '빠뜨리다', '빠지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전사(戰死)하여 생존자의 수에서 빠진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삼하2:31]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삼백 육십 명을 죽였더라 - 다윗측의 전사자 수가 이십 명인 것에 비교하면 엄청난 수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요압의 뛰어난 전술과 그 휘하 용사들의 용맹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브넬 휘하의 베냐민인들 역시 호전적(好戰的)이고 싸움에 능한 자들이었던 점(창 49:27)에 비추어 볼 때 이 역시 이스보셋 왕가(8-10절)를 쇠퇴하게 하고 대신 다윗 왕조를 굳건케 하시려 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에 분명하다.

성 경: [삼하2:32]

주제1: [다윗의 즉위와 내전(內戰)]

주제2: [아사헬의 장사(葬事)]

(주); 베들레헴에... 장사하고 - 베들레헴은 기브온에서 남쪽으로 약 2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압은 헤브론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사헬의 시신(屍身)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12-32절 지도 참조.

(주); 그 아비 묘 - 요압, 아비새, 아사헬의 아비 곧 스루야의 남편이 젊은 나이에 죽었음을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 18절 주석 참조. 그런데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음은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하3:3]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의 번영과 그의 소생들]

(주); 길르압 - 길르압은 대상 3:1에서 '다니엘'(Daniel)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 네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장남 행세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왕상 1:5-10)그도 일찍 죽은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주); 아비가일 - 2:2 주석 참조. 압살롬 - 암논을 살해하고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요압의 손에 죽고 만 비극적인 인물이다(13-18장).

(주);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 - '그술'(Geshur)은 요단 강 상류의 동쪽 지경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독립국으로(수 13:13), 당시 다윗 왕가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 나라의 공주 마아가(Maacah)와 정략 결혼을 한 셈인데, 그 결과는 오히려 훗날 큰 반역을 일으킬 압살롬을 낳게 된 것이다. 즉 어떤 이유에서든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은 명백히 신정 국가의 왕에 대한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으로서(신 7:3;17:17), 그는 이 일로 인해 마침내 큰 곤욕을 치루게 된 것이다(15장).

성 경: [삼하3:4]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의 번영과 그의 소생들]

(주); 아도니야 - 훗날 이복 동생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비정한 인물이다(왕상 1:5-2:25).

(주); 스바댜 -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이다. 그러나 이드르암(5절)과 더불어 그 행적은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성 경: [삼하3:5]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의 번영과 그의 소생들]

(주); 다윗의 아내 에글라 - 여기서 오직 에글라(Eglah)의 이름 앞에만 '다윗의 아내'(David's wife)란 칭호가 붙어있는 점에서 에글라가 다윗의 본처 미갈(Michal)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Rabbins, Thenius). 그러나 이 견해는 미갈이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6:23). 다만 이 칭호는 아마도 다윗의 아내들에 대한 소개를 이제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Lange). 한편, 삼상 25:42, 43에서는 아히노암이나 아비가일을 모두 다윗의 아내로 호칭하고 있으며 12:24에서도 밧세바를 역시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을 다윗의 첩들과 본처를 구분하는 말로 보는 견해 역시 온당치 못하다.

성 경: [삼하3:8]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불화]

이스보셋의 질문에 대한 아브넬의 분노에 찬 답변이다.

(주);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 '개 대강'이란 '개의 머리'(dog's head)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NIV는 이를 '내가 유다 편에 선 개 대가리냐'(Am I a dog's head an Judah's side)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개를 경멸의 대상으로 보았다(출 22:31;삼상 17:43;24:14;왕하 8:13;시 22:16, 20). 왜냐하면 그들은 의식법(儀式法)상 사체(死體)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개는 썩은 고기나 시체를 먹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다(왕상 4:11;16:4;21:23;왕하 9:10). 따라서 '개의 대강'이란 '하찮은 사람', '형편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본절은 '내가 유다 편에 선 반역자, 곧 형편없는 사람이냐'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주); 내가 오늘날... 내어 주지 아니하였거늘 - 아브넬이 애초부터 이스보셋에게 반역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결국 아브넬의 이같은 주장은 사울왕의 첩 리스바를 취한 일에 대한 변명이다. 즉,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리스바를 취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애정 때문에 취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자기가 그동안 사울 가에게 보여 준 충성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주);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 양심이 마비된 자의 소리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이 이스보셋 정권의 실질적 권력자로서 자신의 오떠한 행동도 정당하다는 패역한 생각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3:9,10]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불화]

아브넬이 이스보셋 앞에서 그를 배반하고 다윗을 따르겠다고 하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반역자로 간주될 바에야 차라리 전이스라엘을 다윗의 휘하에 들어가게 만들겠다고 호언(豪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넬의 돌변하는 태도를 볼 때, 우리는 그가 이스보셋을 옹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것(2:8-10)은 사울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제 이스보셋과 대립하게 된 아브넬은 다윗 휘하에 들어가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유지하려 꾀한다(Leon Wood, Smith). 그러나 그의 계획은 요압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27절). 이상과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두어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는 점이다(잠 16:9). 둘째는,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결국 패망이라는 점이다(시 1:6).

(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직접 맹세하신 것에 대한 성경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이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가의 패망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삼상 15:28, 29)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 (Abigail)과 같은 한 시골 여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삼상 25:28)때문이다(Lange).

(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세우리라 - 여기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24:2;삿 20:1;삼상 3:20;대상 21:2;대하 30:5). 따라서 이는 다윗의 왕권을 온 이스라엘 위에 확립하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보셋 사후(死後),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함으로써 실제로 성취되었다(5:1-5).

성 경: [삼하3:11]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불화]

(주); 이스보셋이... 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 - 당시 이스보셋이 명색만 왕이었을 뿐 아무런 권력도 지니지 못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만일 이스보셋에게 실제적 통수권(統帥權)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반역을 선포하고 나선 아브넬에게 대한 체포 명령을 그 즉시로 내렸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3:12]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 아브넬의 이 말에는 복선(伏線)이 깔린 이중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이말의 표면적 뜻은 '이 모든 이스라엘의 땅은 바로 다윗 당신의 것입니다'이다(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아브넬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Lange, Pulpit Commentary). 즉 아브넬은 이같은 말로써 다윗이 통일 왕국의 위업을 순조로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주); 내 손이 당신을 도와... 돌아가게 하리이다 - 아마 아브넬은 이같은 제의를 통하여 다윗으로부터 적절한 보상과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왕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이해치 못한 행동이다. 즉 아브넬은 능히 자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성 경: [삼하3:13]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 이는 다윗이 아브넬과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건네는 요구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미갈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했던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펴기도 한다. 즉 다윗이 정략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사울 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견해이다(Keil, Hertzberg, Smith). 물론 우리는 그같은 측면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다윗이 아직도 미갈을 사랑하여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Wycliffe). 왜냐하면 첫째, 미갈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백을 베고 정혼한 여인이며(14절), 둘째, 그녀는 사울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여인이었으며(삼상 18:20;19:11), 세째, 그녀 자신이 다윗을 사랑했음에도(삼상 18:27;19:11, 12)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지금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25:44). 아무튼 다윗이 다시금 미갈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은 곧 사울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된 자신의 공적 권리와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의를 지닌다(Lange,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3:14]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 다윗이 사울 왕가를 대표하고 있는 이스보셋에게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송한 것을 가리킨다. 즉 다윗은 아브넬과 이미 밀약(密約)을 맺은 상태이지만, 어디까지나 정식 외교 절차를 밟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한 것이다.

(주);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 일전에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윗을 죽게할 목적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陽皮)일백을 폐백(幣帛)대신 원한 적이 있었다(삼상 18:25). 그런데 오히려 다윗은 쉽게 블레셋인들을 치고 그 양피를 갖다 바친 후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취하였으니(삼상 18:27), 바로 그 사건을 뜻한다.

성 경: [삼하3:15]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이스보셋이 보내어... 취하매 - 이는 이스보셋이 자의로 행한 행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의 위(位)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적수인 다윗의 요구를 자기 스스로 들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보셋이 이와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아브넬의 협박 때문이었다. 즉 다윗이 아브넬과 언약을 맺는 조건으로 미갈을 데려오라는 요구를 하였는 바(13절), 이에 아브넬이 이스보셋에게 공공연히 압력을 가하였음이 분명하다.

(주); 발디엘 - 삼상 25:44에는 '발디'(Phalti)로 나와 있다. '발디'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시다'또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엘이 구원하시다'란 뜻인 '발디엘'(Phaltiel)로 불리우고 있음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일 것이다. 즉 '발디'는 '발디아'(Phaltiel)의 축약형이며, '야훼'(YHWH)에 해당하는 '아'가 또다른 신명(神名)인 '엘'(El)에 해당하는 '엘'로 바뀌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3:16]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그 남편이... 울며... 따라 왔더니 - 다윗이 자신의 아내 미갈을 발디엘에게 빼앗긴 것은 그 때로부터 적어도 10여년 전의 일로 추정된다(삼상 25:44). 따라서 그동안 발디엘은 미갈에게 깊은 정(情)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미갈이 다윗에게로 되돌아가게 된 것에 대하여 발디엘은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격한 슬픔에 겨워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뿌린 씨앗을 스스로 거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 역시 자신의 아내 미갈을 빼앗겼을 때 발디엘과 똑 같은 고통을 당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발디엘은 미갈이 다윗의 아내 였음을 알고 있었을 터이니, 처음부터 미갈을 취하지 않았어야 옳았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60).

(주); 바후림 - 베냐민 지파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동북방 근교에 위치하였다. 훗날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의 고향이자(16:5), 다윗의 첩자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을 피해 그곳 우물에 숨었던 곳이기도 하다(17:17-20).

(주);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 아마 아브넬은 다윗의 심경(心境)을 고려하여 발디엘이 베냐민 지경(地境)을 넘어 유다 지파의 땅에 들어서는 것을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성 경: [삼하3:17]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너희가...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 본절은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다툰 후(7-11절) 아브넬과 장로들 사이에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때에 분명히 아브넬은 다윗을 흠모하는 장로들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Hertzberg). 아마도 그들은 기브온 전투에서의 패배 이래(2:12-32) 이스보셋 정권(政權)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다윗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이스보셋이 아브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환영받지 못했던 무능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주); 여러 번 - 이에 해당하는 '테몰 쉴솜'(*)을 직역하면, '어제도 그저께도'란 뜻이다(Keil & Delitzsch).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흠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다윗이 이제라도 온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억지나 무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마 13:31, 32).

성 경: [삼하3:18]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벗어나게 하리라 하였음이니라 - 이같은 아브넬의 진술 내용 역시 성경에서 그 전거(典據)를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이는 그당시 온 이스라엘에 퍼져 있던 예언적 전승이었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런데 만일 아브넬이 이 전승을 믿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스보셋을 보필하여 온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 거부한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말은 지나친 모순을 지니고 있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명예와 이권에 집착하여 기회주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은 것이다.

성 경: [삼하3:19]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 베냐민 지파는 왕가(王家)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삼상 22:7)사울 왕가의 옹위(擁衛)를 반대하고 이스보셋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특별히 그들을 설득하는 데 신경을 썼던 것이다(Keil & Delitzsch, Wycliffe).

(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 이상과 같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사람들이 아브넬의 말을 선히 여겼다는 것은 이스보셋과 사울 왕가의 완전한 몰락을 시사해 주는 사건이기에 충분하다.

성 경: [삼하3:20]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아브넬이... 헤브론에 이르러 - 아브넬은 이미 밀사(密使)를 보내 다윗을 돕겠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12절). 그리고 이스보셋에게 압력을 가하여 다윗의 요구대로 미갈을 돌려보내기까지 하였다(13-16절). 그리하여 다윗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뢰와 호의를 얻은 그는, 이제 확실한 신변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친히 다윗을 찾아가 최후 협상을 벌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주); 다윗이...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 한 나라의 실권자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은 단순히 즐긴다는 의미 보다는 쌍방간의 언약을 확증한다는 의미(창 26:28-31;31:53-55)를 가진다(Lange). 따라서 다윗이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배설한 것은 (1) 아브넬이 제시한 언약이 기만책(欺瞞策)이 아니었음을 그가 믿었고, (2) 이와 같은 움직임을 그가 자기와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성 경: [삼하3:21]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다윗에게 투항한 아브넬]

(주); 내 주 왕 - 아브엘이 처음으로 다윗을 주(lord)라고 부르는 장면이다. 즉 지금껏 이스보셋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겼던 그(2:8-10)가 이제는 다윗을 새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공식 표명을 한 것이다(Lange).

(주); 온 이스라엘 무리를...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 이 말은 공식적으로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언질이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즉 성경에 보면, 왕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때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으며 백성들은 왕을 순전히 따를 것을 서약했던 것이다(5:1-3;삼상 11:15).

(주); 마음의 원하시는대로... 다스리게 하리이다 - 여기서도 우리는 아브넬의 교만과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자신이 능히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의 왕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하시는 자를 왕위에 올리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이는 어디까지나 전우주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 뿐이시다(사 45:9). 둘째, 그는 다윗이 장차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다윗의 뜻대로 나라를 통치할줄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정(神政)왕국의 왕인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려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성 경: [삼하3:22]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요압이 적군을 치고... 돌아오니 - 아마도 요압이 싸움터에 나가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아브넬과의 중요한 협상을 위해 요압을 일부러 변방에 파견했을 것이라는 말이다(Pulpit Commentary,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그것은 아마 다음 두 가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1) 당시 지나치게 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요압(39절)을 견제하고, 아브넬과의 협상에서 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2)요압과 아브넬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주); 크게 노략한 물건 - 요압이 유다를 공격해온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出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변경 지대에 약탈하러 나갔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같은 노략물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 이었다(삼상 27:8, 9).

성 경: [삼하3:23]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 다윗도 일전에 아브넬에게 죽임당한 아사헬과 같은 유다 지파이자, 더욱이 그의 외삼촌이었는 바(2:28) '피의 복수'(14:7;민 35:19)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도 다윗이 아브넬을 그냥 돌려보냈다는 가시돋힌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성 경: [삼하3:24,25]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다윗이 아브넬과 모종의 협상을 체결한 후 그를 평안히 보내준 데 대해 요압이 불평하는 장면이다. 이 불평은 표면상 다윗을 위하는 양 표현되었으나 실상 그가 불평한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 다윗이 중요한 협상에서 자기를 배제시킨 데서 느끼는 불쾌감, (2) 다윗이 자기보다 아브넬을 신뢰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3)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 대한 복수심 등이다(2:23, 27, 30).

(주); 어찌하여... 하셨나이까 - 요압의 방자(放恣)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장면이다. 즉 그는 마치 다윗이 국사(國事)를 진행함에 있어서 모든 일을 자신과 의논한 후에 처리했어야 했다는 투로 대들고 있는 것이다.

(주); 왕도 아시려니와... 왕을 속임이라 - 요압은 아브넬의 방문 목적을 매도(罵倒)하기 위하여 먼저 아브넬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다윗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요압은 다윗을 향해'당신은 아브넬이라는 작자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 자는 뻔한 놈입니다. 따라서 그가 온 이유 역시 당신을 속이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주); 출입하는 것 - 이 말은 다음에 나오는 '모든 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의 관용어이다(신 28:6;31:2;왕하 19:27;시 121:8).

성 경: [삼하3:26]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시라 우물 -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곳은 헤브론 북방 약 4km 지점으로, 거기에는 대상(隊商)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이다(Josephus). (2) 헤브론 서북방, 곧 예루살렘 방면으로 2. 4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아인 사라'(Ain Sarah)저수지라는 견해이다(R. Young).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아브넬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피하여 이곳에서 쉬면서, 행군하기에 알맞은 서늘한 저녁 때를 기다리다가 요압이 보낸 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주);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 요압이 다윗의 이름을 이용하여 아브넬을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아브넬은 일전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인 연고로 요압을 경계했을 것이다(2:22, 23). 그리하여 요압이 자신의 이름으로 그를 불렀을 경우 아브넬은 틀림없이 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압은 다윗이 미처 아브넬에게 못다한 말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소환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 Lange,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3:27]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 '종용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쉐리'(*)는 '개인적으로'라는 뜻이다. 즉 이는 요압이 마치 아브넬에게 개인적으로 은밀히 얘기할 것이 있는 것처럼 꾸며 그를 유도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요압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복수를 하려 했다면 좀더 당당히 아브넬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62).

(주); 성문으로 들어가서 - 당시 '성문'은 공공 행사를 위항 모임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사교(社交)의 장(場)이기도 하였다. 창 19:1 주석 참조. 따라서 그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니 요압이 아브넬은 은밀히 처리하기에는 부적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혹자는 여기서 가리키는 '성문'이란 '성문 근처의 한적한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70인역(LXX)이 바로 이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공동 번역 역시 '성문 한 옆'으로 번역하고 있다(Wycliffe).

(주);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 본절은 아브넬의 죽음이 요압의 복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일전에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수차례의 경고 후에 어쩔 수 없이 정당 방위로 행한 것이었다(2:21-23). 따라서 이는 피의 복수가 될 수 없다(민 35:22-25). 그런데도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으니 이에는 다른 까닭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력자로(6절) 다윗의 신임까지 받고 있었던 터라(20절), 자신의 지위를 아브넬에게 빼앗길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Wycliffe, Pulpit Commentary). 요압의 이와 같은 악의에 찬 욕망은 다시 아마사를 살해하는 일로 나타난다(20:11).

성 경: [삼하3:28]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6절)는 말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구절로, 아브넬의 죽음에 다윗이 전혀 무관함을 시사해 준다(Lange).

(주); 나와 내 나라는... 무죄하니 -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공적(公的)인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감정과 이기심에 의거한 사적(私的)인 일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돌릴 수 없고 오직 요압에게만 돌아가야 할 뿐이라는 강조적 의미이다.

성 경: [삼하3:29]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그 죄가... 돌아갈지어다 - 다윗이 자신의 신복인 요압을 이토록 저주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요압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는데, 그 죄의 내역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요압의 행위는 정당한 복수(復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아브넬보다 아사헬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2:21, 22). (2) 아무리 정당한 복수라 할지라도 복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레 19:18;눅 6:27;롬 1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복수했던 것이다. (3) 요압은 이 일과 관련하여 왕인 다윗과 전혀 의논을 하지 않았다. 이는 곧 국정(國政)의 최고 책임자인 다윗을 무시한 처사로서, 일종의 반역 행위가 아닐 수 없다. (4) 무엇보다도 요압은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5:1-5;삼상 16:28, 29)을 얼마만큼 지연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죄의 내역으로 보아 다윗이 자신의 신하 요압을 저주한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 아주 공의로운 처사였음을 알 수 있다.

(주); 백탁병자 - 이에 해당하는 '조브'(*)는 '흐르다', '유출하다'는 뜻의 '주브'(*)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는 레위기 15장에 기록된 유출병(流出炳)을 의미하는 듯한데, 그 증세는 임질(淋疾)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 문둥병자 - 이에 해당하는 '차라'(*)는 비단 문둥병 뿐 아니라 각종 피부병에 걸린 자까지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레위기 14:10-20 강해, '문둥병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주);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 - '목발을 의지하는 자'또는 '막대기를 짚는 자'(NIV) 란 뜻이다. 이에는 절름발이나 소경이 해당된다(Lange).

성 경: [삼하3:30]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의 죽음]

(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죽인 것은 - 아브넬 살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아비새도 관계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추측컨데 요압은 사전(事前)에 아비새와 공모하여 아브넬을 유인, 살해하였을런지도 모른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3:31]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다윗이 요압... 백성에게 이르되 -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조차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애통케 한 것은, 아마 그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반성케 하기 위함에서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그런데도 이후 요압이 이번 경우와 유사하게 아마사마저 살해한 것으로 보아(20:9, 10), 요압이 자신의 죄악을 전혀 회개치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 히브리인들이 극한 슬픔을 표출하던 전형적 방법이다. 1:2 주석 참조.

(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왕'으로 언급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다윗이 왕의 신분으로서 마치 자신이 상주(喪主)인 양 아브넬의 장례식을 주도하며 상여 뒤를 따라간 것은 곧 아브넬의 장례식의 국장(國葬)으로 치뤄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아브넬의 장례식에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백성들의 의혹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이 요압과 짜고서 행한 짓으로 오해받기 충분하였다. 때문에 다윗을 불신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시금 이스보셋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백성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37절).

성 경: [삼하3:32]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 히브리인들에 있어서 애곡(哀哭)은 장례식의 첫째 요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슬픔의 발로이자 죽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주나 친족 뿐 아니라 모든 문상객들 역시 빈드시 애곡을 하여야 했다. 본문에서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한 다윗과 모든 백성이 애곡한 것도 이와 같은 풍습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습은 훗날 소위 직업적인 호상인(護喪人), 즉 '애곡하는 여인들'을 생기게 하였다(대하 35:25;전 12;5;렘 9:17;암 5:16;마 9:23).

성 경: [삼하3:33]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애가를 지어 가로되 - 여기서 '애가'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 즉 '키나'(*)를 가리킨다. 1:17 주석 참조.

(주);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권자인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해된 것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크나큰 과오라는 뜻이다. 즉, 블레셋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생존한 그가 요압의 얕은 꾀 하나 짐작하지 못하고 죽은 사실에 대해 다윗은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움 때문에 다윗은 아브넬을 '미련한 자'에다 비유한 것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본절을 보다 의역(意譯)하여 '어이없이 개죽음을 당하다니'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삼하3:34]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네 손이...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한다. 그중 하나는 이 말이,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할 당시 아브넬은 요압의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자유스러운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Lange). 두번째 견해는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행위 (2:23)로 인하여서는 결코 포박당하거나 투옥되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이 중 그 어느 견해를 취하여도 전체 문맥에는 별 지장이 없다. 다만 이는 아브넬이 의외의 죽음을 당하였음을 강조하는 데 그 의지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 원문에서 '불의한 자식'은 복수형인 '불의한 자식들'로 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서 '불의한 자식들'은 강포,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아브넬이 그와 같은 무리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죽은 것처럼 비참하게 살해 당했다는 뜻이다.

성 경: [삼하3:35]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 이 말은 백성들 각자가 다윗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가져왔다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그 당시의 풍습을 보여 주는 말로서, 장례식 이후에 참석자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렘 16:7;겔 24:17, 22;호 9:4)을 백성들이 다윗에게 권했다는 뜻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내가...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마땅하니라 - 다윗이 이처럼 금식(禁食)을 단행한 것은 애도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즉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여 저녁 때까지 금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1:12), 아브넬을 위해서도 금식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성 경: [삼하3:36]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다윗의 행동을 본 백성들이, 그제서야 다윗이 요압과 결탁하여 아브넬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푼 것을 뜻한다(37절). 그리하여 다시금 백성들이 다윗을 신뢰하며 호의(好意)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의 진실된 행동은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진리(롬 8:26)또한 확인할 수 있다.

성 경: [삼하3:37]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이 날에야... 아니라 - '이 날에야'라는 말은 이전에는 백성들이 아브넬을 살해한 범인으로 다윗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 - 이 말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까지도 다윗을 의심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이제 다윗 왕을 믿게 된 것은, 다윗의 논리적인 말이나 권모 술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36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3:38]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 - 여기서 '방백'에 해당하는 '사르'(*)는 간혹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시 45:16;사 9:6;단 8:25), 대개는 군대 장관(단 10:13)이나 한 성읍의 최고 지배자(10:3;삿 8:6;에 3:12)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대인'에 해당하는 '가돌'(*)은 '위대한 자'란 뜻이다.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 두 단어를 합하여 '위대한 장군'으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다윗이 아브넬을 가리켜 이처럼 칭한 까닭은 그가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스보셋의 군장(軍長)이었을 뿐 아니라, 통일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 조력하였던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3:39]

주제1: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쇠퇴]

주제2: [아브넬을 위한 다윗의 애곡]

(주); 내가... 약하여서 - 이는 아마 다윗이 아직 유다 한 지파의 왕으로써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상태일 뿐 아니라(2:1-4), 적대 세력인 이스보셋 정권도 존속하고 있음(2:8-10)을 염두해 둔 말일 것이다.

(주); 여호와는...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 살해 사건을 보고 받자마자(28절) 즉시 요압을 처벌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1) 군장으로서 요압이 지니고 있던 강력한 세력때문, (2) 그를 처벌할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유다 지파의 내분 때문, (3) 전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요압과 같은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다윗이 처벌을 일시 유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압을 사면(赦免)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끝내 회개치 않고 왕국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저질렀던 요압을 처형토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왕상 2:5, 6).

성 경: [삼하4:1]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아브넬의 죽음으로 인한 놀라움]

(주); 헤브론 -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즉위한 왕도(王都)이다. 2:1 주석 참조.

(주); 손 맥이 풀렸고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푸 야다우'(*) 는 '손이 약하여졌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약하여졌다'는 동사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 곧 쇠진(衰盡)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렘 6:24;50:43;겔 21:7).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 그는 아브넬의 반역 행각과 비참한 죽음의 소식에 접하고선 이중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주);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 사실 아브넬의 피살 소식은 온 이스라엘을 당혹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영웅적인 한 인물에게 국가의 운명을 의존하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인물의 급작스런 죽음은 전국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4:2]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아브넬의 죽음으로 인한 놀라움]

(주); 군장 - 이에 해당하는 '사리 게두딤'(*)은 2:8에 나오는 군장, 즉 '사르 차바'(*)와는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사르 차바'는 '군대 사령관'(chief of army)이란 뜻이지만 '사리 게두딤'은 단순히 '무리들의 우두머리'(captains of bands)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여기서의 '군장'은 군 전체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총사령관이 아닌 그 휘하에서 한 단위를 책임지던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공동 번역은 이를 '특공대 대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주); 바아나... 레갑 - '바아나'(Baanah)의 뜻은 '낙타를 타는 사람'이다. 이들은 친형제로서 악을 행하는 데 서로 손을 적시었다(5-7절).

(주); 베냐민 족속... 림몬의 아들들 - 바아나와 레갑의 혈통이 소개된다. 그들은 이스보셋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는 반역의 선봉이 되었음은 비열한 공명심과 사악한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8절 주석 참조.

(주); 브에롯 - 이스라엘이 기브온과의 조약(條約)을 맺을 때 얻은 네 성 중 하나이다(수 9:17). 후에 이 성읍은 베냐민 지파의 14성읍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수 18:25). 한편 많은 학자들이 이 '브에롯'(Beeroth)을 예루살렘 북방 15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황폐한 도시'엘비레'(el Bireh)와 동일시여긴다(Josephus, Robinson, Wycliffe).

성 경: [삼하4:3]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아브넬의 죽음으로 인한 놀라움]

(주);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 '깃다임'(Gittaim)이 어디인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느 11:33에 의하면 바벧론 포로 귀환 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 중의 하나로 '깃다임'이 언급되어 있는데 동일 지명 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이주해 우거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두 견해로 나뉘고 있다. (1) 길보아 전투 (삼상 31장)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습격하자 브에롯을 버리고 깃다임으로 피신했다고 하는 견해이다(Keil, Patrick). (2)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21:1,2) 그곳을 떠났다고 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벧하우젠(Wellhausen)은 깃다임의 블레셋 '가드'(Gath), 또는 '림몬(Rimmon)이라고 주장하였다(Lange).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1)번의 견해는 모순된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지경인 깃다임에 다시 들어간 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증명할 길은 없지만, (1)번의 견해보다 (2)번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성 경: [삼하4:4]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주);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 - '므비보셋'(Mephibosheth)의 뜻은 '부끄러움을 없애 버리는 자'이다. 그런데 다른 성경에 보면, 그의 본명은 '므립바알'(Meribbaal)인 것으로 나와 있다(대상 8:34;9:40). '므립바알'은 곧 '바알로 만족하는 자'란 뜻이다. 따라서 이같은 이름이 므비보셋으로 바뀌게 된 동기는 아마 에스바알이 이스보셋으로 바뀐 그것과 똑같을 것이다. 즉 바알 우상 숭배와 관련 '바알'이란 이름을 혐오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름 속에 철저히 '바알'이란 말을 배격한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2:8 주석 참조. 한편, 여기에서 저자가 므비보셋의 신상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있다. (1)단순히 뒤에 벌어질 사건(9장)의 배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Rust). 이 견해는 므비보셋의 불구 상태(절뚝발이 상태)가 사울가의 몰락(이스보셋의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2)사울가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하였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Hertzberg, Pulpit Commentary). 즉 이스보셋이 죽은 후(5-7절)에 사울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므비보셋이 남으나, 그는 절름발이어서 도저히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울가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몰락했음을 본 구절이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1-4장까지의 문맥이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위 두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올 때에 - 길보아 전투에서의 블레셋과의 싸움 중 요나단이 전사하고 사울은 자결한 소식(삼상 31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된 때를 가리킨다.

(주);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 아마도 블레셋군의 승전(勝戰)소식을 접한 므비보셋의 유모는 블레셋인들이 사울 왕가를 멸절시킬 목적으로 므비보셋마저 제거할 군사를 보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심각한 위기 의식에 젖어 므비보셋을 안고 은신처를 찾아 도피하였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64).

성 경: [삼하4:5]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이스보셋을 암살한 레갑과 바아나]

(주); 볕이 쬘 때 즈음에... 낮잠을 자는지라 - 여기서 '볕이 쬘 때 즈음'이란 '정오', '대낮'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지역의 풍습으로 볼 때, 이때는 이 지역 사람들이 오침(午寢)을 즐기는 시간이었다(2:29, 32;3:26). 이러한 습관은 사막 지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보셋이 이때에 낮잠을 잔 것은 헨리(M. Henry)가 해석한 대로 이스보셋의 극단적인 나태를 보여 주는 행위는 아니었다. 한편, 이스보셋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때에 이스보셋의 집에 온 것은 그가 잠들고 있는 동안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하4:6]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이스보셋을 암살한 레갑과 바아나]

(주);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 두 군장이 어떻게 해서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밀은 병사들에게 줄 군량(軍糧)을 의미한다(Keil, Lange). 이렇게 볼 때 그들은 군량, 곧 밀을 가지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무사히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들은 이러한 군량 수송의 일을 자주 맡아 했기 때문에 문지기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 구절을 엉뚱하게도 '그 집의 문지기가 밀을 까부수다가 조는 동안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라고 해석해 놓았다. 영어 성경 중 이같은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는 RSV와 Jerusalem Bible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가장 오래된 성경이자 전통적 권위를 지닌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상충된다. 그리고 그같은 개역(改譯)의 근거도 어디서 취하였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KJV, NIV, Living Bible 등도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을 취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삼하4:7]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이스보셋을 암살한 레갑과 바아나]

(주); 집에 들어가니 - 5, 6, 7절에서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갔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그 집에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출입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중복적(重複的)표현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진적으로 세밀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Erdmann, Keil & Delitzsch, Lange, Philippson). 즉, 5절은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간 단순한 사실만을 보여주며, 6절은 5절보다 더 상세하게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갔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7절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 저지른 잔인한 범죄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복된 말들은 한 가지 사실을 점진적으로 확대 설명해 주기 위한 표현들이다. 이렇게 볼 때, 6절에서 두 군장에게 배를 찔리운 자는 어떤이의 견해처럼 그 집의 문지기가 아니라 본절에서 두 군장이 쳐죽이고 목을 벤 바로 그 이스보셋인 것이다. 한편 같은 맥락에서 6절의 '도망하였더라'는 말은 본절에서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라는 말로써 확대 설명되어 있다.

(주); 아라바 길 - 아라바 길(the way of the Arabah)은 당시 이스보셋의 왕도(王都)마하나임(2:8)에서 헤브론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곳은 아브넬과 그 군대가 기브온 전투에서 요압과 휴전한 후 마하나임으로 퇴각할 때 거쳐갔던 길이기도 하다. 2:29 주석 참조. 그런데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의 거리는 약 95km였다. 따라서 레갑과 바아나는 밤새도록 쉬지않고 약 20여 시간 동안 시속 5km 이상의 속력으로 걸어 헤브론에 도착했을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향한 악인의 열심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롬 3:13-17).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열심은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였을 뿐임을 유의해야 한다(8-12절).

성 경: [삼하4:8]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이스보셋을 암살한 레갑과 바아나]

(주);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 이 말은 두 군장, 곧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바치면서 이스보셋을 비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비난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보셋 진영과 다윗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보셋이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고 다윗을 살해하고자 했던 흔적을 우리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말은 다윗의 후한 보상을 바라고 저지른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5-7절)를 마치 당연한 처사인 양 미화시켜 보이려 했던 비열한 언사(言辭)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 이처럼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사울의 아들' 임을 강조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옛날 사울로부터 당한 생명의 위협을 회상토록 함으로써 사울 왕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삼상 18:10, 11;19:8-17;23:14).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는데(9-12절)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의식(意識)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주); 여호와께서... 같으셨나이다 - 바아나와 레갑이 이렇게 말한 동기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반드시 세우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그들이 상당한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호도(糊塗)하기 위해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 분명하다(Keil, Lange, Matthew Henry).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보셋을 거명할 때, 단순히 이스보셋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를 다윗 앞에서 감추기 위해 이와 같은 얕은 꾀로 공정한 마음을 혼란케 하려 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하4:9]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암살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주); 내 생명을... 건지신 여호와 - 다윗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범죄 행위가 다윗의 생명 유지에 아무런 필요도 없었던 것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다윗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환난 가운데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 따라서 이는 바아나와 레갑이 말한 대로 실제로 이스보셋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할지라도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무마(撫摩)해 보려 한 그들의 말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4:10]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암살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여기에서 다윗은 레갑과 바아나아게 일전에 사울 왕의 죽음의 소식을 보고한 아말렉 소년을 자신이 시글락에서 처벌한 사실(1:1-16)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목적은 곧 바로 이 두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당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즉, (1)과거 죽임을 당한 사울 왕은 실제로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죄인이었고(2)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 아말렉 소년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중에 그렇게 했다고 사려(思慮)됨에도 불구하고(1:9, 10)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아말렉 소년을 처벌하였다(1:14-16). 따라서 이제 (1) 다윗을 살해하려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무죄한 이스보셋을 (2)그것도 무자비하게 고의로 목을 벤 레갑과 바아나의 행위(5-8절)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것이다.

(주); 시글락 -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하사 받았던 은신(隱身)성읍이다. 1:1 주석 참조.

(주);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 여기서 '갚음'에 해당하는 '베소라'(*)는 본래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악한 소식에 대한 죽음의 보상을 의미한다.

성 경: [삼하4:11]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암살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주); 악인이 의인을... 죽인 것이겠느냐 - 여기에서 다윗은 신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법적인 차원(the legal sphere)에서 악인(wicked man)과 의인(righteous person)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스보셋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볼 때는 죄인일지 모르나, 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사울의 왕권을 찬탈하거나 혹은 어느 누구를 죽이려 한 죄인은 아니었다. 반면 바아나와 레갑은 법적으로 무고한 이스보셋을 잔인하게 살인한 악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살인 행위는 법적으로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분명한 범죄 행위였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311).

(주); 피흘린 죄 - 1:16 주석 참조.

성 경: [삼하4:12]

주제1: [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

주제2: [암살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주); 수족을 베어... 머리를 가져다가... 장사 하였더라 - 다윗의 공정한 심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手足)을 벤 것은 그들이 손과 발로 무고한 자의 목을 베어 헤브론까지 가져왔던 까닭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또한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장사지낸 것은 그가 법에 저촉될 만한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아말렉 소년을 죽인 그 사건(1:1-16)과 마찬가지로 (1)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2) 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가리어 처단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의로운 통치의 결정적인 요소, 곧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 달은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백성들에게 악인의 처참한 말로(末路)를 보여 줌으로써 범죄치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 (2)다윗 왕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공의(公義)를 널리 증거하기 위함이다. (3)아브넬의 죽음의 경우(3:31-37)와 마찬가지로 이번 이스보셋의 죽음의 경우에도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ge, Keil & Delitzsch).

(주); 아브넬의 무덤에 - 이처럼 다윗이 이스보셋의 시신을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合葬)한 것은 생전에 저들의 관계를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생전에 사울 왕가의 왕과 군장 간이었으니(2:8, 9)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5:1]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주); 이스라엘 모든 지파 - 어떤 학자들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3절에 기록된 '이스라엘 모든 장로'와 같은 의미로 본다(Rust, The Interpreter's Bible). 즉, 이들은 20세 이상의 모든 지파의 인구가 헤브론까지 내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 지파의 모든 장로들이 이스라엘 온 백성들을 대표하여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온 것처럼 저자가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대상 12:23-40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을 위해 헤브론으로 나아온 인구가 무려 약 35만명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3절의 '이스라엘 모든 장로'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1, 2절은 이스라엘 온 지파가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장면이며 3절은 그 결과 이스라엘을 대표한 장로들이 다윗을 공식적으로 왕으로 삼는 장면이라 하겠다(Leon Wood, Pulpit Commentary). 즉 1-3절은 한 사건을 중복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과정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주); 왕의 골육 - 직역하면 '당신의 뼈 그리고 당신의 살'(thy bone and thy flesh, KJV)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상호간의 혈육 관계를 나타내는 관용어이다(창 2:23;29:14;37:27;삿 9:2). 따라서 이는 결국 다윗에 대하여 백성들이 전적인 신뢰를 표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5:2]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주); 출입하게 한 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치 웨하메비'(*)는 문자적으로 '나오고 들어감'을 의미하나, 주로 이 용어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출입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삼상 29:6;왕상 3:7;대하 23:7;수 14:11). 따라서 여기서는 사울 휘하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잘 이끌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다윗의 지도력(삼상 18:6, 7)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Lange, Matthew Henry).

(주); 이스라엘의 목자... 주권자가 되리라 - 여기서 '목자'란 백성들에 대한 봉사의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신정 왕국(神政 王國)의 왕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그분의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며 보호하고 먹일 의무가 있는 것이다. 반면 '주권자'란 백성들에 대하여 강한 지도력, 통치권을 행사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왕은 비상시에 군 최고의 통수권자(統帥權者)로서 백성을 효율적으로 관리, 적의 위협을 분쇄해야 할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능률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입각하여 국정(國政)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직접 본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말을 하셨다고 하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3:9, 10, 18;삼상 13:14;15:23, 26, 28;25:30등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이같은 신탁(信託)은 이미 그 당시 백성들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5:3]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주); 언약을 세우매 - 왕위 즉위식 이전에 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였던 이 언약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한 언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다윗 왕이...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라는 본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본 구절의 주어는 '저희'가 아니고 '다윗'이다. 따라서 언약의 주체는 이스라엘 지파가 아니었고 다윗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 언약이 쌍방적인 성격이 아니라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삼상 13:14;15:23, 26, 28)과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며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언약은 다윗이나 기타 모든 백성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결정하신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서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군주와 국민들간의 어떠한 이해 관계를 따져 협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다윗을 왕으로 삼겠다고 맹세하므로, 그 나라에 큰 복을 베푸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의 내용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이 아니었고 그 반대로 백성들이 다윗 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이었다(Hertzberg). 따라서 이 언약을 통해 본 신정 국가의 국가관은, 군주와 국민의 계약 관계를 국가 성립의 근본으로 본 근대의 국가관과는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신정 국가의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독재자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자(代理者)임을 뜻할 뿐이다.

(주);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 다윗이 사무엘 당시(삼상 16:13), 그리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움 받을 당시(2:4)에 이어 마지막 세번째로 기름 부음을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대상 11:3에는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이와 같이 다윗의 세번째의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과 맺으신 그 언약(삼상 16:1)을 어김없이 이루신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2:4 주석 참조.

(주);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 이로써 이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다시금 사울 통치 때와 마찬가지로 한 왕 아래 통일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 아래에서 최초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장 장(章)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삼하5:4]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주); 삼십 세 -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다윗왕의 나이인 삼십 세는 성경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공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였다. 즉, 이 나이는 (1) 레위인이 성전에서 봉사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으며(민 4:3;대상 23:3), (2)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나이였으며(창 41:46), (3)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였다(눅 3:21-23). 이와 같은 사실은 적어도 성도는 이 나라가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암시적 메시지(message)를 제공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나이와 학력 등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의 사람을 적재 적시(適材 適時)에 들어 쓰신다(삼상 17:41-54). 그러나 인격적 성숙은 나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도 사실인 것이다.

성 경: [삼하5:5]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주); 헤브론에서 ... 예루살렘에서 ... 다스렸더라 -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시점에서 그의 통치 연대를 개괄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성경 기자들이 왕조(王朝)의 역사를 기술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서술 양식 중 하나이다(왕상 15:9, 10;16:29;왕하 3:1;12:1;13:1;14:2, 23;15:27).

성 경: [삼하5:6]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 성 수축(修築)]

(주); 그 종자들이 - 여기서 가리키는 다윗의 종자(從者)들이 누구인가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그럴듯한 견해가 있다. (1) 다윗에게 서약하기 위해 온 '온 이스라엘의 군대'(1-3절)라는 주장이다(Lange,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이 주장은 대상 11:4의 내용과 일치한다. (2)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 종자들이 온 이스라엘의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윗과 행동을 함께 해온 그 정예병(精銳兵)들(삼상 22:4;23:13)이라고 주장한다(Rust, Hertzberg). 그들은 그 근거로서, 만일 온 이스라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면 구태여 본서 저자가 '다윗의 종자들'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세운다. 그런데 (1)번의 견해는 평행 구절(대상 11:4)과 일치하며 (2)번의 견해는 문자 해석상 그럴 듯하므로, 따라서 이 두 견해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인 견해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다시 말해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가까이까지는 나아갔으나, 실제로 지형적으로 험난한 예루살렘을 공략한 자들은 다윗의 종자들, 곧 요압과 그 정예 군사들이었다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주); 예루살렘 -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遷都)하려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지형적, 종교적인 이점들 때문이었다. (1) 헤브론(Hebron)은 유다에서 볼때는 중심 지역이었지만 온 이스라엘로 볼 때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2:1 주석 참조. 그러나 예루살렘(Jerusalem)은 온 이스라엘을 치리하기에 아주 좋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Pulpit Commentary). (2) 예루살렘은 주위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었고 성읍 자체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天惠)의 방어 요새였다(Wycliffe). (3)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the valley of Kidron)에는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이 있어 충분한 수원(水源)을 확보하고 있었다(Lange). (4)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였다(수 15:7, 8;18:6). 따라서 예루살렘은 두 지파 간의 심각한 갈등을 해소시키며, 더 나아가 온 나라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적합한 도읍지였다(Keil & Delitzsch). (5)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부로서 중앙 성소를 짓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신 12:4-14 강해, '예루살렘 중앙 성소의 의의' 참조.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 건축의 최적소(최적소)로 예루살렘을 지목하였던 것이다(Leon Wood). 한편 이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보다 전반적인 정보를 얻기 위하여서는 대상 11:4-9 강해, '예루살렘'을 참조하라.

(주); 여부스 사람 - 여부스 족속(Jebusites)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 지역에 계속 정주(定住)해 왔던 족속이다(민 13:29;수 15:8;18:16). 수 9:1, 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참조.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일시적으로 패주하기도 했으나(수 10:23, 26)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그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유다 및(삿 1:8)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삿 1:21)도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고로 그들은 점차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그들의 방어 기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 다윗에 의해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당하고 만 것이다(7-9절). 한편, 여부스(Jebus)는 한때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수18:16, 28;삿 19:10;대상 11:4).

(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 여부스 족속이 쳐들어 오는 다윗에게 큰소리 치는 장면이다. 지리적으로 여부스 족속이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독립한 나라로서 이와 같이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까닭은 다음과 같은 예루살렘의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1) 예루살렘은 당시 가나안을 남북으로 연결시켜 주던 주요 도로인 '왕의 대로'(King's Highway, 민 20:17;21:22;신 2:27)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언덕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3) 예루살렘 주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기드론, 힌놈, 두로베온과 같은 깊은 골짜기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천혜의 방어 기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자신 만만하게 다윗을 향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큰 소리 쳤던 것이다.

(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 메튜 헨리(Mstthew Henry)는 이와 관련, 여부스족들이 다윗을 조롱하기 위해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에 소경과 절뚝발이들을 세워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68). 그 사실 여부는 오늘날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본절은 당시 예루살렘 성을 과신(過信)했던 여부스인들의 자만을 충분히 증거해 준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 철옹성 여리고도 함락시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권능(수 6:1-20)을 기억해야만 했다.

성 경: [삼하5:7]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 성 수축(修築)]

(주); 시온 산성 - 시온(Zion)은 '요새'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丘陵)의 이름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시온'은 광의 적으로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곧잘 사용되었는데(왕하 19:21;사 3:16;슥 2:10),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었다(사 24:23;옵 1:17).

성 경: [삼하5:8]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 성 수축(修築)]

(주); 수구로 올라가서 - 다윗이 천혜의 요새 시온 산성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었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수구'에 해당하는 '친누르'(*)는 '하수도', '배수로', '지하 통로'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坑道)를 의미한다. 이 갱도는 성 안에서 성 밖으로 연결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 불락의 예루살렘 성안으로 군사들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다윗이 이곳을 통해 적 진지에 들어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푸짐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요압과 그 군사들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대상 11:6). 한편 이 수갱(水坑)은 1886년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1967년 워렌(Charles Warren)이 재차 발견하여 현재 '워렌 수갱'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이 수갱이 B. C 2000년 경에 예루살렘 거민들에 의해 건설되었음도 밝혀내었다.

(주); 절뚝발이와 소경 - 여기서는 다윗이 당시 지형적인 이점을 의지하고 교만하게 말했던 여부스 사람들(6절)을 비꼬는 말이다. 즉 저들은 불구자가 아니었지만 이제 다윗의 공격 앞에 꼼짝 못하고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절뚝발이와 소경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는 훗날 속담이 되어 '미운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여부스인들처럼 자기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어떠한 집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삼하5:9]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 성 수축(修築)]

(주); 밀로 - 채우다(*, 말레아)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밀로'(Millo)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성채(城砦)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이 성채는 아마도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 지구인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이나 북서쪽 한쪽 모퉁이에 세워 놓았던 것일 것이다(Hertzberg, Keil, Lange, Rust). 아무튼 다윗은 이 밀로를 기점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성벽을 둘러 쌓음으로써 외세 확장의 기틀과 여호와 종교를 위한 중앙 성소의 기초(대하 3:1)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이 밀로를 증축, 또는 수축한 바 있다(왕상 11:27;대하 32:5).

성 경: [삼하5:10]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 성 수축(修築)]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이에 해당하는 '야웨 엘로헤 체바오트'(*)는 '천군 천사(天軍 天使)의 하나님 여호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체바오트'의 기본형 '체바아'(*)는 본래 '군대', '무리'란 뜻으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거느리고 계시는 수많은 하늘 군대인 천사들(욥 33:23;느 9:6;시 103:21;마 10:27;히 12:22)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란 하나님의 큰 권능과 위엄을 강조하는 신명(神名)으로서, 약칭 '야웨 체바오트'로 종종 표기된다(6:2;삼상 15:2;왕하 3:14;대상 17:24;시 24:10;사 1:9).

(주);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의 결과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군대를 인솔하시어 다윗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니(6-9, 17-25절)그의 왕국이 안으로는 물론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될 정도로(11절)강성해진 것이다. 1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5:11]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두로 왕 히람의 원조]

본절은 다윗 왕과 히람왕 간의 화친(和親)장면이다. 그런데 이는 17절 이하에 나오는 블레셋 정복 사건 이전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블레셋 정복이 다윗과 히람 왕의 화친보다 시간상으로 빨랐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주장한다(Keil, Rust, Lange, Leon Wood). 이러한 견해가 가능한 것은 성경이 반드시 연대순으로(chronologically)만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도(topically) 배열되어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견해가 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1) 결정적으로 본문의 내용 자체가 이를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즉 17절에 보면, 다윗의 블레셋 정복 사업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직후에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며(17-25절)성벽을 구축하는데 여념이 없었던(9절) 다윗 초기에 그가 거할 궁궐을 지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2)또한 다윗이 즉위하던 때에는 히람(Hiram)왕이 분명히 왕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왕상 9:10에 의하면, 히람 왕은 최소한 솔로몬 통치 20년까지는 생존하였다고 하였으니, 그가 다윗의 즉위 초기부터 왕위에 있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이다. 이에 대하여 고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우리에게 간접적인 증언을 해주고 있다. 즉 그의 {고대사}(Antiquities)에 볼 것 같으면, 히람 왕은 그의 부왕 아비바알(Abibaal)을 계승하여 34년간을 통치하다가 그의 나이 53세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Lange, Keil & Delitzsch, Vol. II, pp. 319 ff). 따라서 그의 증거에 의하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할 때(1-3절)그는 왕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따라서 다윗과 히람의 화친은 다윗의 초기가 아니라 말기에 이루어진 사건임이 분명하다. (3) 또한 히람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다윗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였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즉 이는 분명 다윗이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민족들을 보기좋게 제압하자(17-25절)다윗의 큰 세력을 인식한 히람 왕이 화친의 제스처(gesture)로 사자들과 백향목 등을 보내온 것으로 사료(思料)되기 때문이다(Leon Wood). 이상과 같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다윗과 히람 왕의 화친은 다윗의 블레셋 정복 사업보다 훨씬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본절은 저자가 다윗의 흥왕(10절)의 구체적 실례를 보여 주기 위해 앞당겨 기록한 내용일 것이다. 한편, 이로써 히람 왕이 다윗에게 사절단을 파견한 것은 다윗의 즉위를 축하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주장(Thenius)은 이상의 증거들에 위해 근거없는 것임이 판명되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319).

(주); 두로 - 두로(Tyre)는 시돈(Sidon)과 함께 B. C. 8-10세기경 베니게(Phoenicia)의 중심적인 도시 국가였다. 이스라엘 최북단 국경에서 약 24km 서북쪽에 위치해 있던 이 도시 국가는 지중해 연안 국가로서 일찍부터 목재, 밀기름, 포도주, 금속, 노예, 말 등을 수출하는 무역 국가였다. 한편 B. C. 10세기 경에는 두로가 시돈을 압도한 듯 했으나 얼마 후에 두로는 시돈의 지배를 받은것 같다(사 23:2, 12). 하지만 그들의 전성 시기에 두로의 상선들은 애굽과 스페인까지도 진출했었다.

(주); 히람 - 일명 '후람'(Huram)이라고도 하며, 이름의 뜻은'고귀한 자'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두로를 다스리던 왕으로서, 다윗은 물론 솔로몬의 건축 사업에 적극 조력한 것으로 유명하다(왕상 5:1-12).

(주); 백향목- 레바논이 주산지인 백향목(cedar trees)은 왕궁, 성전(왕상 5:5, 6;6:9, 10), 배의 돛대(겔 27:5), 우상 등을 건설 또는 만드는 데 사용될 정도로 최고급 건축 자재였다. 이 나무는 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으며 또한 내구성(耐久性)이 강하며 방향(芳香)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히람 왕이 이렇게 좋은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다윗이 다스리던 신정 국가의 위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성 경: [삼하5:12]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두로 왕 히람의 원조]

(주); 다윗이... 아니라 - 여기서 '알다'(perceive, KJV)에 해당하는 원어 '야다'(*)는 단순한 인식을 의미하는 '나카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 아는 실제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이말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억이나 어떤 사물에 대한 단순한 인식을 의미하지 않고, 전에는 희미하게(막연히) 알았으나 여러 경험을 통해 그 본질을 더욱 확실하게 파악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창 4:1;18:19;신 1:39;8:5). 따라서 본절에서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을 왕을 삼으신 것'을 알았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한 사건(3절)을 기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는 달리, 이 말은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 정복(6-10절), 블레셋 정복(17-25절), 히람 왕과의 화친(11절)등 만사 형통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여호와께서 자기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그 본질을 확실히 파악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예를 들어 설명하면, '학교'라는 말만 아는 어린이가 직접 학교에 들어가 경험해 봄으로써 날마다 학교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듯이,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그 기름 부음의 실제적인 의미를 통하여 더욱 승승장구하는 여러 경험들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 후반부에서 여호와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다윗이 알았다는 말도 같은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사 그 나라를 열방 중에 높이신 것은 다윗 개인에게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복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5:13]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의 소생들]

(주);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였으므로 - 그당시 동양적인 관습에 따르면, 처첩의 수는 곧 권세의 상징이었다(Leon Wood, TheInterpreter's Bible). 따라서 다윗도 그당시 보편화된 관습에 따라 많은 처첩을 거느렸는데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유다 지파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으므로(1-5절)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애기해 다윗이 하나님의 율법(신 17:17)을 어기고 취한 많은 처첩들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를 안겨 주고 말았다. 13-16절 도표 참조. 그리고 훗날 아비 다윗의 영향을 받은 솔로몬 역시 다윗보다 더 많은 처첩을 거느린 결과(왕상 11:3)나라 안에는 각종 이방 우상 숭배 풍조가 만연하였고(왕상 11:4-8) 외환(外患)이 끊이지를 않았다(왕상 11:14-15). 따라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사례만 보더라도 일부 다처주의(一夫 多妻主義), 축첩 행위가 명백히 하나님의 뜻(창 2:24)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그에 따르는 불행 역시 엄청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창 4:16-24 강해, '일부 다처제';창 16:1-6 강해, '축첩 제도의 부당성'참조.

성 경: [삼하5:14]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의 소생들]

(주);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 이들은 모두 밧세바의 소생이다. 13-16절 도표 참조. 그런데 12:24에는 이들 중 마치 솔로몬이 밧세바의 첫 아들인 양 기록되어 있다. 아마 그 까닭은 솔로몬을 다윗의 왕위 계승자로 부각시키려는 목적에서 기록한 탓일 것이다.

성 경: [삼하5:15,16]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다윗의 소생들]

(주); 엘리벧렛 -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심'이다. 그런데 대상 3:6, 8에는 이 이름으로 불리우는 다윗의 아들이 두 명 나온다. 본절의 '엘리벧렛'은 이 중 대상 3:8에 나오는 '엘리벧렛'이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대상 3:6에 나오는 '엘리벧렛'을 '엘벧렛'(Elpalet, 대상 14:5)으로, 본절의 '엘리벧렛'(Eliphalet)은 그냥 그대로 표기함으로써(대상 14:7)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

성 경: [삼하5:17]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주석가들은 본절 이하에서 보여 주고 있는 블레셋과의 전투가 실제로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건(6-10절)이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Leon Wood, Keil, Payne, Hertzberg). 저들은 그 증거로서 몇가지 점을 들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직후에 다윗과 전쟁을 벌이려 쳐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즉 다윗 왕은 즉위하자마자 블레셋의 대침공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할 여유(6-10절)가 없었을 것이다. (2)블레셋 군대가 예루살렘을 직접 공략하지 아니하고 르바임(Rephaim)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18, 22절). 이와 같은 사실은 아직껏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이다(Leon Wood). (3)본 절의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찾았다'는 말은 다윗이 아직 예루살렘에 그의 거처를 정하지 않았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9절). (4)더욱이 본문의 평행 구절에 해당되는 23:13, 14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의 침공을 맞이하여 아둘람 굴에 진영을 설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 준다. 이는 그가 아직도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즉, 그가 이미 예루살렘을 정복했었더라면, 구태여 아둘람 굴에 진영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여러 증거들로 볼 때 다윗의 블레셋과의 전투는 예루살렘 정복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임에 틀림없다.

(주);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다 올라오매 - 블레셋 군대가 전에는 다윗을 죽이려 하지 않다가 그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곧 그를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의 얄퍅한 정치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처지에서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삼상 27:1-12). 그 이유는 다윗을 당시 이스라엘이 왕 사울의 견제 세력으로 키워 이스라엘이 통일 국가가 되지 못하도록 하자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1-3절)길보아 전투(삼상 31장)이후 북방 이스라엘 지경에서 크게 세력을 확보한 그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2:10 주석 참조.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확장된 세력을 굳히기 위해 이제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에서 '블레셋 사람이 다 올라왔다'고 하는 말은 당시 그들이 통일된 다윗의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주); 요해처로 나가니라 - 여기서 '요해처'에 해당하는 '므추다'(*)는 '그물', '접근하기 힘든 장소', '요새'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학자들간에는 이 '요해처'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1)요해처는 다윗이 점령한 예루살렘 요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Lange). 그러나 이 주장은 앞서 일어났던 사건임을 보여준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옳지 못하다. 특히 본절의 '나가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야라드'(*)는 본래 '내려가다'는 뜻이다. 따라서 원래 높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예루살렘 요새로 다윗이 내려갔다는 말은 모순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요해처'는 분명히 예루살렘 요새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Keil). (2)이 요해처는 아둘람 굴을 의미한다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Keil & Delitzsch, Thenius, Pulpit Commentary). 그 근거로 그들은평행 구절인 23:13, 14에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 그의 진영을 설치해 놓았던 사실을 들고 있다. 이는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는 견해인데 많은 학자들도 대체로 이에 동의한다. 한편, 이 아둘람 굴(the cave of Adullam)은 다윗이 사울 왕과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일시 도피하였던 곳으로 이곳에서 다윗은 그를 사모하여 추종한 자들의 장관이 되기도 하였다(삼상 22:1, 2). 오늘날 이곳은 '텔 에쉬-쉐잎 마두쿨'(Tell esh-Sheikh Madhkur)로 알려지고 있는데 가드와 베들레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성 경: [삼하5:18]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 르바임 골짜기(the valley of Rephaim)는 그 뜻이 '거인의 골짜기'인 것으로 보아 이는 아마 그 골짜기 부근에 살았던 거인족 '르바임'(신 2:11)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인 듯하다(Lange, Pulpit Commentary). 실제로 그 지명처럼 르바임 골짜기는 길이가 약 5km, 폭이 약 3km 정도나 되었으니 엄청난 수의 병력이 그곳에 포진(布陣)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다. 이 골짜기의 북쪽 끝은 유다 지파의 북쪽 접경지인 동시에 또한 베냐민 지파의 남쪽 경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블레셋 군대가 이곳을 먼저 점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지인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단시키고자 함이었다(Leon Wood). 그런데 이들이 이처럼 엄청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1)르바임 골짜기 바로 남쪽에 그들의 요새인 베들레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3:14). 아마도 이 베들레헴은 길보아 전투 때에(삼상 31:1)그들의 손 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2)또한 그들은 아직껏 유다와 베냐민의 경계지인 예루살렘 요새가 다윗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17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5:19]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 이말은 다윗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당시 다윗과 함께 했던 제사장 아비아달은 우림과 둠밈을 단 에봇을 소유하고 있었다. 2:1 주석 참조.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중요한 일을 당할 때마다 먼저 여호와의 뜻을 구한 다음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의 훌륭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2:1;삼상 23:9;30:7).

(주); 네 손에 붙이리라 -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개인의 생명이나 국가의 장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나타내 준다(16:8;창 14:20;신 2:30;수 10:8;왕상 20:13). 신 1:2 주석 참조.

성 경: [삼하5:20]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바알브라심 - 본절 후반부의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는 말은 이 지명이 옛부터 내려온 고유의 지명이 아니라 다윗의 대첩(大捷)을 기념하기 위해 새로이 붙여진 이름임을 보여 준다. 한편 바알브라심(Baal-perazim)은 '주'(Lord)라는 뜻의 '바알'(*)과 '터치고 나옴', '부숴뜨림', 또는 '흩음'을 의미하는 페라침(*)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흩으심의 주'이다. 즉, 이는 블레셋 대군을 물을 흩어버림과 같이 쉽게 물리쳐 주신 여호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다윗이 만들어 붙인 신지명(新地名)이다. 한편, 이곳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바알'이란 명칭이 이방 종교의 신 '바알'(Baal)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8 주석 참조. 즉 바알 종교로 인해 '바알'이란 명칭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던 후대의 유대인들이 그 명칭을 내포하고 있는 '바알브라심'이란 지명 자체를 말소시켜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Rust).

(주); 여호와께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 다윗은 이처럼 블레셋을 격파시킨 일이 자신의 지략, 용맹성, 군사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즉 그는 어떤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19절) 그 일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이는 참으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빌 1:20)하여야 할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성 경: [삼하5:21]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 본절은 (1) 당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에 있던 블레셋 대군(18절)이 다윗의 정예 부대 앞에 얼마나 혼비 백산하게 후퇴했는가를 보여 주며, (2) 또한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20절)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준다(Hertzberg). 한편, 블레셋인들이 전쟁터에 그들의 우상을 가져온 것은 그들의 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던 당시 고대 근동 국가의 미신적 관습 때문이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갔던 사실(삼상 4:3,4)과 외형상 일치한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Wyccliffe, Pulpit Commentary).

(주);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 같은 내용의 기사인 대상 14:12에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을 불태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처럼 다윗이 우상을 불태운 것은 우상에 대한 여호와의 율법대로 순종한 행위였다(신 7:5, 25). 아무튼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수년 전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대(삼상 4장)가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들고 행진한 사실(삼상 5:1)과 대조적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들고 갔으나 다윗은 그들의 우상을 가증한 것으로 여겨 불태웠던 것이다(Leon Wood).

성 경: [삼하5:22]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 다윗의 정예 부대 앞에 혼비 백산하여 도망갔던 블레셋 군대(17-21절)가 다시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제 2차 공격을 해오는 장면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하기는 커녕 도리어 예기치 않은 역습을 받아 뿔뿔히 도망쳐야 했던 첫번째의 실패를 만회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23-25절). 즉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힘입은 이스라엘에게 두번 씩이나 연속해서 대패하므로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성 경: [삼하5:23]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올라가지 말고... 엄습하되 - 여기서 '올라가지 말라'는 말은 고지(高地)에 올라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블레셋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지 말라는 뜻이다(Keil).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앞서와 달리(19, 20절)이번에는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전을 택하라고 하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당시 (1) 긴장하고 있는 블레셋 군사들의 사기를 완전히 꺽어놓고(2) 그들을 이스라엘 지경에서 아주 멀리 쫓아 내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의 일환 때문이었다(Leon Wood). 아마도 블레셋군은 지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군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여 만반의 대비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획을 미리 아시고 이번에는 다윗에게 기습 공격을 명하셨던 것이다.

(주); 뽕나무 수풀 - 뽕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 (*)가 과연 어떤 나무를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들이 있다. (1) 배나무로 보는 견해(Rosenmuler, Vulgate). (2) 한글 개역 성경처럼 뽕나무(mulberry tree)로 보는 견해(Luther, KJV). 그러나 본래 '울다', '통곡하다'라는 뜻을 지닌 '바카' (*)에서 파생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우는 나무'(weeping tree)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무가 운다'라는 것은 '나무가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니 이는 곧 '수액(樹液)을 낸다'는 의미이다(Wycliffe). 따라서 대개의 학자들은 '바카'가 '뽕나무'나 '배나무'를 의미하지 않고 수액(樹液)을 내는 '발삼나무'(Balsam tree)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Lange, Keil, Rust). 한편, 달만(Dalman)은 이 '바카'(*)가 관목류(灌木類)가 아닌 덤불에 가까운 종류라고 하였다(Hertzberg). 이렇게 볼 때 바카, 곧 발삼나무 수풀은 이스라엘 군이 매복해 있기에 아주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성 경: [삼하5:24]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보여 주는 공격 신호(attack sign)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의견이 분분하다. (1) 이 공격 신호는 단지 강한 바람에 의해 나무 꼭대기가 흔들리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Rust). 이러한 주장은 바람이 곧 여호와의 영(靈)을 상징하며, 그 움직임은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대의 관념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공격 신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중 하나였으며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아닌 걸음 걷는 소리였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못하다. (2) 또한 이 공격 신호를 '나무의 신탁'(tree oracles)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Hertzberg). 즉, 다윗은 나무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징조를 가지고 점을 쳐서 하나님의 공격 신호를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너무나도 미신적이다. 당시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앙하던 다윗(19, 23절)이 이처럼 어리석은 미신적 행위에 탐닉하였을리 만무하다. (3) 이 공격 신호는 여호와의 군대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소리였다는 견해이다(Lange, Keil). 즉, 이러한 현상은 야곱과 엘리사에게 보였던 하나님의 군대의 진군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창 32:2, 3;왕하 6:17). 이 견해는 '걸음 걷는'에 해당하는 기본 동사 '체아다'(*)가 '행군하다', '전진하다'는 뜻이며 이번 전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성전(聖戰)이었다는 점에 의거할 때 비교적 타당하다.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참조.

성 경: [삼하5:25]

주제1: [통일 왕국의 왕 다윗]

주제2: [블레셋을 격퇴시키는 다윗]

(주);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대상 14:16에는 '기브온에서부터 게셀까지 이르렀더니'라고 되어있다. 즉 본절의 게바(Geba)가 대상 14:16에는 기브온(Gibeon)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차이에 대해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해석들을 가하고 있다. (1) 본절의 게바는 본래 기브온이었으나 이 두 지명의 세 '자음'(*)이 똑같기 때문에 필사자가 실수하여 기브온을 게바라고 오기(誤記)했다는 해석이다(Keil, The Interpreter's Bible). 이 해석은 게바의 위치가 예루살렘 북동쪽인 반면 게셀(Gezer)의 위치는 정반대인 예루살렘 서북쪽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정신없이 도망치는 블레셋 패잔병들이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정반대인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어쩐지 석연치 않다는 주장이다. 반면,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게셀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게바보다는 기브온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제시되는 견해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옳지 않다. (2) 삼상 13:3에 의하면, 게바는 블레셋군의 강력한 수비대(守備隊)가 있었던 곳이다. 한때 요나단에게 이곳을 뻬앗겼던(삼상 13:1-4)블레셋 군대는 길보아 전투(삼상 31장)때 이곳을 다시 재탈환 하여 전보다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본문에서 물처럼 흩어진 패잔병들이 그들의 강력한 수비대가 있는 게바로 일단 후퇴했다가 그곳에서도 이스라엘군을 막아낼 수 없게 되므로 그들의 본토인 게셀로 후퇴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므로 블레셋군이 제 1차로 후퇴했던 곳은 기브온이 아니라 게바임이 분명하다. (3) 그렇다면 이번엔 대상 14:16의 기브온이 또 다른 필사자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단 게바로 후퇴했던 블레셋군이 게셀로 도망갈 때 기브온을 거쳐 도망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블레셋군의 최종 도착지인 게셀은 블레셋 영토의 북동쪽 경계지이며 이번 전투 지점(르바임 골짜기)에서 최소한 24km나 떨어진 곳이었다(Leon Wood). 이로 보아 다윗 군대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거두게 하신 완전한 승리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6:1]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언약궤 이송(移送)]

(주); 뺀 무리 삼만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이다(Keil).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데 이 '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절)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역(LXX)은 본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하라. 한편,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이다.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주); 다시 모으고 -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명이나 모였던 총회(5:1-3;대상 12:23-40)에 이은 제 2차 총회임을 보여 준다.

성 경: [삼하6:2]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언약궤 이송(移送)]

(주); 바알레유다 -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를 '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다(LXX, Vulgate, Luther, J. W. Wevers). 그러나 이 해석은 구문법상(構文法上)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지명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거기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거기서'가 지시하는 지명을 의미하며, 혹자들이 해석한 대로 일반명사는 아니다. 한편,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Baalah)로 불리웠다(수 15:9;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했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 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 동안(B.C. 1075년-B.C. 1003년,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때까지의 기간이다;Leon Wood) 머물러 있었다(삼상 7:1, 2).

(주); 그 궤는...이름하는 것이라 -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 문구, '아론 하엘로힘 아쉐르 니크라 쉠 솽 여호와 체바오트 이쉐브 하케루빔알라우'(*)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 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 알라우)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과연 '그 위에서'는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1)혹자는 '그 위에서'를 '그룹 위에서'로 해석한다(Cleri-cus). 이 경우 본절은 '그룹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되고 만다. 그러나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2) 또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서'를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 위'로 해석한다(Keil,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바로 그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그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표현이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된다. 즉,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寶座)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 궤'라고 한 표현과 일치한다(시 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갖는다 하겠다. 한편, 다윗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한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Ce Graaf).

(주); 그룹들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일단(一團)이다.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즉 이들은 창세초(創世初)에 아담이 쫓겨난 에덴 동산에서 생명 나무를 지켰으며(창 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있다(겔 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겔, 1, 10장;계 4:6-8)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날개를 지녔으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출 25:18, 19 주석 참조.

(주); 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성 경: [삼하6:3,4]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언약궤 이송(移送)]

(주);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민 4:15;7:9).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는바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2)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는바 다윗이 이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법면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다.

(주);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Abinadab)의 집을 가리킨다(삼상 7:1, 2).

(주); 아비나답의 아들 -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는 복수형으로 '아들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를 의미하기도 한다(민 16:1;왕하 25:22;대상 8:40;에 2:5;스 7:1). 이렇게 볼 때 본절의 '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 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Commentary).

(주); 아효 -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이 말은 '그의 형제들'로 번역할 수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한 것이 된다. (2)사람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1)번의 경우처럼 '그의 형제들'로 해석하면, 본서 저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사의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되니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2)번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성 경: [삼하6:5]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언약궤 이송(移送)]

(주); 이스라엘 온 족속 - 이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뽑힌 자들을 의미한다. 1절 주석 참조.

(주);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주악하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다(수 6:4-20;왕상 1:39;대하 5:11-14).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 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입증한다. 한편, 여기서 '주악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이다(삼상 18:7;대상 15:29;잠 8:30, 31;렘 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본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 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주악하더라'고 되어 있다.

(주); 수금 - 히브리어로는 '킨노르'(*)라고 하는데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이다. 대개 노래를 부를 때 반주(伴奏)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주); 비파 - 하아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왕상 10:12;대하 9:11)와 시편(시33:2;57:8;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다.

(주); 양금 - 히브리어로 '므나아느임'(*)이라고 하는 이 악기는 탬버린(tambourine)의 일종이다.

(주); 제금 - 히브리어로 '첼츨림'(*) 또는 '므칠타임'(*, 대상 13:8;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cymbals)dml 일종이다.

(주); 여호와 앞에서 - 그 당시 언약궤 앞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민 10:35;수 6:8).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출 37:1-5 주석 참조.

성 경: [삼하6:6]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베레스웃사 사건]

(주); 나곤의 타작마당 - 이에 대해 대상 13:9에서는 '기돈의 타작 마당'(the threshingfloor of Chidon)이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이 두 기록의 차이를 원문 파손으로 인한 두 저자의 실수로 보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기돈'(Chidon)을 타작 마당의 주인 이름으로 보고 '나곤'(Nachon)을 타작 마당의 수식어로 보는 해석이다. 즉, 나곤이란 말의 의미는 '예비된'이란 뜻으로 나곤의 타작 마당은 곧 '기돈의 예비된 타작 마당'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나곤을 '쿤'(*, 예비된, 준비된)의 파생어로 본 데서 나온 견해이다. (3)'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수식어로 봄은 물론 '기돈' 역시 타작 마당을 수식하는 말로 보는 견해이다. 즉, '기돈'(*)은 '파괴', '재앙'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예비되었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재앙이 웃사에게 내린(7절) '재앙의 타작 마당'이었다고해석한다(Lange). (4)세번째 견해와 같이 '기돈'을 사람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재앙'으로 해석하긴 하나 '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말로 보지 않고 '나카'(*, 치다)의 분사로서 '충돌하는'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eil). 따라서 이 견해는 이 타작 마당을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네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중 (3)번이나 (4)번을 지지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1)번은 해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23:1-7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그리고 (2)번은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3)번과 (4)번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8절) 웃사에게재앙이 임했다고 한 본문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상의 제(諸) 견해에도 불구하고'기돈'이 '나곤'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 역시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주); 소들이 뛰므로 - '뛴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트'(*)는 본래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 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소들이 돌뿌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Keil & Delitzsch, PulpitCommentary). 그런데 이러한 소들의 실수는 앞서 블레셋 백성들이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을 때에는 없었던 불길한 흉조(凶兆)였다(삼상 6:12). 그러므로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블레셋인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긴 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행위는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삼상 6:10-16).

성 경: [삼하6:7]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베레스웃사 사건]

(주); 웃사의 잘못함 -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을 가리킨다(6절).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했던 웃사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또는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할 때 엄연한 신성모독(神聖冒瀆) 행위였다. 18:19-33 강해, '기독교 윤리와 상황 윤리'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법궤의 신적 특성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민 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서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 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민4:20;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민4:15)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출 25:14)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그것을 만진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는 증거인것이다.

(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죽으니라 - 이처럼 구약 시대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향하여 급속한 진노를 발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선 그 모든 진노가 영원히 유보된 것이다(롬 5:8, 9). 그러니 이 같은 영생의 축복을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엡 2:8).

성 경: [삼하6:8]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베레스웃사 사건]

(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 여기서 '충돌'로 번역된 '페레츠'(*)의원동사 '파라츠'(*)는 '무너지다', '파괴하다', '분산시키다'등의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저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신 것(7절)을 가리킨다. 공동 번역은 본절을 '야훼께서 우짜를 치신 일이'로 번역하고 있다.

(주); 다윗이 분하여 - '분하여'에 해당되는 원어 '하라'(*)는 단순히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의 기본 뜻은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로서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 분노를 가리킨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바 크게 두 견해로 나뉘어진다. (1)다윗은 웃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Henry,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 그리고 웃사는 무슨 큰 불경죄(不敬罪)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경솔한 행동을 한 것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형벌을 가하시니(7절) 이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지금껏 하나님을 대해온 다윗의 신실한 태도(2:1;5:12, 23)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하기 어렵다. (2)다윗은 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인하여 빚어진 비극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계획이 자신과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었음을 크게 분해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견해는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구절(9절)에 의거할 때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다윗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 여기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는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곧 '갑작스런 공격', '뜻아니한 재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한 '위반', '범법'이다. 따라서 '베레스웃사'(Perez-uzzah)란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이란 뜻이다. 아마 다윗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율법을 어기고선 법궤를 만진 것(6절)과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일로 인하여(7절) 그곳을 이렇게 명명(命名)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삼하6:9]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베레스웃사 사건]

(주); 다윗이...여호와를 두려워하여 - 아직 미처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들이 율법에 명한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치 아니한 데 있음을 깨닫지 못한 다윗(3, 4절 주석참조)은 우선 법궤로 인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재앙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役事)를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를 변방으로 이송(移送)시켰을 것이다(10절).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법궤를 맡아 관리하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11절).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였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다(Matthew Henry).

성 경: [삼하6:10]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베레스웃사 사건]

(주);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성'에 새로이 명명한 이름이다. 5:7주석 참조.

(주); 가드 사람 오벧에돔 -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Obededom)은 고핫의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그를 가리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 가드림몬(Gathrimmon)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Keil, Clericus, Wycliffe,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6:11]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베레스웃사 사건]

(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제 하나님의 진노(7절)가 깨끗이 풀린 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Hertzberg, Matthew Henry).

성 경: [삼하6:12]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 성으로 운송되는 언약궤]

(주); 다윗이 가서...올라갈새 - 같은 내용을 더욱 자세히 기록한 대상 15장에는 다윗 왕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순종하여 법궤를 운송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는 이번에는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레위인들로 하여금 몸을 성결케 하고 모세의 법대로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대상 15:14, 15).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이 베레스웃사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상고(詳考)한 후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 위에 굳게 선 것을 보게 된다.

성 경: [삼하6:13]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 성으로 운송되는 언약궤]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 - 대상 15:11에 의하면 이들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 우리엘, 아사야, 요엘, 스마야, 엘리엘, 암미나답 이렇게 8명이었음을 알 수있다.

(주); 여섯 걸음을 행하매 - 혹자는 '여섯 걸음을 행할 때마다'로 해석하나(PulpitCommentary)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따를 경우 다윗이 드린 제물의 총수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인데 대상 15:26에는 그 수가 모두 수송아지 일곱, 수양 일곱 마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이 견해는 다윗이 약 5m 간격으로 제물을 잡아드렸다는 주장이 되므로 그 제물의 수로 볼때 너무나 상식 밖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섯 걸음을 행한 후'를 의미함에 분명하다(Lange, Wevers, Keil, Hertzberg). 그런데 다윗이 여섯 걸음을 행한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이번에는 출발부터 하나님이 레위인들과 함께 하심을 본 까닭이다(대상 15:16). 다시 말해서 다윗은 궤를 멘 레위인들이 처음 여섯 걸음을 아무 탈 없이 옮기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법궤 운반을 허락해 주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TheInterpreter's Bible, Bottcher, Wycliffe).

(주); 다윗이...제사를 드리고 - 혹자는 본절과 관련, 다윗이 직접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집전(執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구약 시대 당시 하나님께 대한 공적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제사장뿐이었다(레 1-6장). 그러므로 이는 다윗이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절의 평행 구절에 '무리가...제사를 드렸더라'(대상 15:26)는 언급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더욱이 과거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게 된 결정적 이유도 사무엘의 직분을 월권(越權)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때문임을 기억한다면(삼상 13:8-14) 이는 보다 명백해진다.

성 경: [삼하6:14]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 성으로 운송되는 언약궤]

(주);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 다윗의 종교적 열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고 넘치는 감격적인 기쁨을 잘 드러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를 수도 예루살렘에 모시게 된 데 대하여 감격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이를 기뻐한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한편 국경일이나 종교 절기, 기타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여 춤추며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5, 15절)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몸에 배인 풍습 중 하나였다(출 15:20;삿 11:34;시 149:3;150:4).

(주); 베 에봇을 입었더라 - 베 에봇(linen ephod)은 본래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던 것으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소매가 없는 일종의 겉옷이다. 출 28:4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입은 베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이었다기 보다 제사장이 아니라도 특별한 종교 의식에 참여할 때 입었던 예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 이유는 두 가지 사실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당시 다윗 뿐아니라 법궤의 운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세마포 겉옷이나 베 에봇을 입었기 때문이다(대상15:27). (2)제사장의 적령(適齡)에 이르지 못한 어린 사무엘도 세마포 에봇을 입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삼상 2:18).

성 경: [삼하6:15]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 성으로 운송되는 언약궤]

(주); 즐거이 부르며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트루아'(*)는 '환호성을 지르다', '갈채를 보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춤을 추며 환호성을 지르는 행위는 특별히 새로운 왕을 환영할 때 보여 준 행위였다(왕상 1:34, 39;왕하 11:12, 14;삼상 10:24). 따라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행동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그들 신정 국가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 나팔을 불고 - 대상 15:28에 의하면 이때 백성들은 비단 나팔(trumpet) 뿐아니라 이미 5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제금, 비파, 수금 등을 함께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6:16]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다윗]

(주); 사울의 딸 미갈이...저를 업신여기니라 - 혹자는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긴 까닭에 대해 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인 발디엘(3:15, 16)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기게 된 동기를 그녀가 다윗의 철부지 같은 행동을 본 탓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갈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다윗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업신여기게 된 까닭은 아마 여호와의 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울 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대상 13:3). 본서 저자가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소개하지 않고 '사울의 딸'로 소개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p. 336 f).

성 경: [삼하6:17]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다윗]

(주);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 여기에서 장막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까지(7:1-17;왕상 6장) 임시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는 모세 당시 만든 성막(출 40장)과는 다르다. 다윗 당시 이 성막은 기브온(Gibeon)에 설치되어 있었다(대상 16:39;21:29). 그러나 솔로몬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이 성막과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은 모두 해체되고 만다(대하 5:2-10). 수 18:1-7 강해, '성막의 역사' 참조. 한편, 여기서 '장막 가운데'란 장막의 중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종의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곳이었다(Keil).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드리니라 - 이 역시 다윗이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13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처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법궤를 모실 장소를 성별하기 위한 일종의 봉헌식(奉獻式)이었다(Keil, Lange). 한편 여기에서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의미를 가지며(레 1:3-17), 화목제는 그동안 소원(疎遠)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간구의 의미를 지닌다(레 3:1-17).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참조.

성 경: [삼하6:18]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다윗]

(주); 다윗이...백성에게 축복하고 - 백성에게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의 고유 권한이자 임무 중 하나였다(민 6:22-27). 따라서 일국(一國)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다윗 역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백성들의 평강을 간구하였겠지만 어디까지나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축복하는 것은 제사장들을 시켜서 하였을 것이다. 즉 이는 제사 집전의 경우와 마찬가지 경우였던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성 경: [삼하6:19]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다윗]

(주);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 여기에 언급된 음식물들은 모두 제사용 음식이다(출 29:23;레 8:26;아 2:5;호 3:1). 그런데 이처럼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 함께 그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은 화목 제물과 관련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화목 제물을 드린 후에는 제사 참여자들로 하여금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도록 규정하신 것이다(레 7:15-18). 한편 백성들이 이처럼 제사드린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그들이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Wenham). 이는 곧 이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하나된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성 경: [삼하6:20]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과 미갈간의 불화]

(주); 방탕한 자가...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 여기서 '방탕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크'(*)는 '공허한', '가치없는' 또는 '가난한'이란 의미이다(삿 7:16; 느 5:13;사 29:8).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 곧 신약의 '라가'(*, '어리석은 자'란 뜻)이다(마 5:22). 또한 '그 신복의 계집종'이란 '그 종들의 종년'이란 말로서 가장 천한 자들이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미갈의 말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왕인 다윗이 마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처럼 가장 낮고 비천한 자들 앞에서 품위를 잃은 행동을 했다는 내용의 불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녀가 하나님의 언약궤와 관련된 다윗의 순전(純全)한 기쁨을 이해치 못한 데서 나온 불평에 다름아니다. 16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6:21]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과 미갈간의 불화]

(주);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 이 말은 다윗의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14, 16절)이 미갈의 말처럼 비천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순전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행동임을 천명한 것이다. 즉, 그는 (1)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는 동시에 (2)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일(5:1-3)을 기억하며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지극히 겸손한 행위였다고 할수 있다(시 131:1;마 23:12).

(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 하나님께 범죄한 사울을 내치고 대신 다윗을 택하신 결과(삼상 13:8-14;15장) 사울 가문은 몰락하고 대신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은 지금껏 우리가 충분히 살펴본 바이다(1-5장).

(주); 주권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5:2; 7:8; 삼상7:16; 10:1; 13:14;25:30). 그러므로 다윗 자신을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라고 표현한 것은 곧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봉직(奉職)되었다는 철저한 소명 의식을 드러내 주고 있다.

성 경: [삼하6:22]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과 미갈간의 불화]

(주); 내가...천하게 보일지라도...높임을 받으리라 - 다윗의 행위가 미갈의 말처럼 저질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낮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대답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겸손한 자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그의 확고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삼상 2:7;마 23:12).

성 경: [삼하6:23]

주제1: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언약궤]

주제2: [다윗과 미갈간의 불화]

(주); 그러므로...미갈이...자식이 없으니라 - 혹자는 미갈이 이처럼 무자(無子)한 까닭에 대하여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Dake, Wycliffe).이는 미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음이 분명하다(Pulpit Commentary, Keil &Delitzsch, Matthew Henry). 즉, 그녀는 (1)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고, (2)하나님의 가견적(可見的) 보좌인 법궤에 대하여 무지하였으며 (3)자기의 입술을 가볍게 놀린 결과로 자식이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한 자, 영적으로 무지한 자, 그리고 자기의 감정에 따라 말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성 경: [삼하7:1]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

(주);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거하게 하신 때 - 본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유명한 다윗 언약(4-17절)을 주신 때가 다윗 통치 말기임을 보여 준다. 즉 본절에서 가리키는 때는 (1)다윗이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했을 때인데 여기에서 사방의 모든 대적은 블레셋(5:17-25;8:1) 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 족속(8:2-14)을 의미하므로 그때는 분명히 다윗의 말기이다. (2)또한 그때는 다윗이 백향목으로 지은 예루살렘 궁에 거했을때(2절)인데 이때는 두로의 히람 왕과 교류가 있었던 때(5:11)이므로 이러한 사실 역시 다윗의 통치 말기임을 입증해 준다. 5:11 주석 참조. 따라서 본장은 사실상 8장 이하의 내용보다 더 나중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서가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일관된 흐름을 좇아 기록되었음을 보여 준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7:2]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

(주); 선지자 나단 - 나단(Nathan) 선지자는 다윗과 솔로몬 양대에 걸쳐 크게 활동한 선지자이다. 그는 본장의 다윗 언약 뿐만 아니라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 사건, 솔로몬의 등극(登極)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12:1-15;왕상 1:8-30, 32, 39, 45). 또한 그는 성전예배에 있어서 음악을 장려하였고(대하 29:25), 다윗과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대상 29:29;대하 9:29).

(주);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 예루살렘 정복(5:6-10) 및 주위 대적들을 모두 제압한 때에 다윗은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뜻아니한 호의를 입었다. 그것은 곧 히람이 다윗을 위해 예루살렘에 백향목 궁을 지어 준 것이었다. 이후 다윗은 그곳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본절은 바로 이 일을 의미한다(5:11).

(주); 휘장 가운데 있도다 - 여기에서 휘장(curtains)은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은 10폭의 앙장(仰帳)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으로 성막(tabernacle) 전체를 덮었다(출 26:1;36:8). 다윗은 이처럼 천으로 덮여 있는 성막속에 여호와외 궤가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시 69:9).

성 경: [삼하7:3]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

본절의 나단 선지자의 말 중, 전반부는 옳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았다. 즉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다는 말은 사실이었지만(9절;5:10;삼상 16:18;18:12) 다윗이 행하려 한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5, 6, 13절).

(주);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 나단의 이와 같은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한말이 아니었고 단지 자기 생각에 옳다고 느낀 바를 피력한 것에 불과하였다(Keil,Lange). 즉, 그는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소원이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줄로 알고 즉흥적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러한 나단의 생각이나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앞장서거나 그에 협력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이기 때문이다(고전 10:31). 그러나 이번 경우에만은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 뿐인 것이다.

성 경: [삼하7:4]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그 밤에 - 나단이 다윗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 바로 그날(3절) 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의 그릇된 충언(忠言)을 즉각 시정해 주시기 위하여 이처럼 신속히 나단에게 계시하셨던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79).

(주);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 아마도 나단은 꿈(민 12:6;왕상 3:5)이나 이상(민 12:6;단 2:19;7:2, 13) 또는 직접적인 계시(창 26:24;민 22:20;삿 6:25-27;삼상 3:1-21)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17절에서는 이것을 '묵시'(vision)로 칭하고 있다. 창 40:5-19 강해, '계시의 정의 및 종류' 참조.

성 경: [삼하7:5]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과 관련된 당신의 뜻을 직접 다윗에게 계시하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일단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전달토록 간접적인 방법을 취하고 계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하나님의 뜻과 나단 선지자의 조언(3절) 간의 불일치로 인해 다윗이 당혹치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代言)하는 사명을 지닌 선지자들의 고유직분을 존중하셨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12:1-14 강해, '선지자' 참조.

(주); 네가...건축하겠느냐 - 다윗의 성전 건축 의사를 분명히 반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7:4에서는 '너는...건축하지 말라'고 더욱 확실한 부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 이유를 대상 22:8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것은 곧 다윗이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건축할 자로서의 적합한 이미지는 아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 345).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아직 그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일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 이르러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만 보더라도 알 수있다(13절;대상 17:12;대하 3-6장).

성 경: [삼하7:6]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7절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사를 반대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들려주고 있는구절이다. 그 이유는 곧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한번도 고정된 곳에 계시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시며 이동용(移動用) 건축물에 계셔왔다는 사실이다.

(주); 내가...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과거 430년 동안 종노릇하였던 애굽 땅에서 건져 내셨던 역사적인 날을 가리킨다. 정통주의 학자들에 따르면 그날은 B.C. 1446년경 아빕월 15일이었다고 한다(출 12:41). 출애굽기 서론, '출애굽 연대' 참조.

(주); 집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이트'(*)는 (1)어떤 재료로 만들어진영구한 건축물(16:21;창 19:2;33:17), (2)예배 장소, 또는 성전(출 23:19;왕상 6:5),(3)사람이 거하여 안식하는 장소(욥 17:13;전 12:5)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영구히 거하시며 안식하시며 경배 받으실 만한 견고한 건축물을 의미한다.

(주); 장막과 회막 - 장막(ten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헬'(*)은 '단순히 이동할 수 있는 임시 거주지', 곧 천막을 의미한다(삼상 17:54;대하 14:15). 반면 이와달리 회막(tabernacl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슈칸'(*)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놓은 장막'을 의미한다. 즉 '미슈칸'(*)의 동사형 '솨칸'(*)은 본래 '자리잡다', '앉다', '휴식을 취하다', '살다'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미슈칸'의 의미는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 곧 법궤가 자리잡고 있는 장막을 의미하는것임을 알 수 있다(출 25:9;민 1:50;시 46:5;84:2). 그러나 이와 같은 두 용어의 차이점은 본절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두 용어가 모두 이동용 거처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고정된 집에 거하시지 않고 이동용 천막에 거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지극히 거룩하시고 존귀와 영광으로 가득 차신 여호와 하나님(대상 16:27;겔 39:7)께서 화려한 장소에 계시지 않고 비천한 장소에서 거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지신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삼하7:7]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무릇...더불어 행하는 - 여기에서 '행한다'(*, 할라크)는 말은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도우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모든 행사를 의미한다(Lange).

(주); 먹이라고 - 여기서 '먹인다'(*, 라아)는 말은 본래 목자가 가축을 돌보는것을 의미한다(창 37:13;민 14:33;삼상 16:11). 따라서 이 말은 주권자가 백성을 다스리거나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는 사실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삼하 5:2;시 23:1;슥 10:2). 여기서도 이 말은 백성을 '통치하다', '지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Keil).

(주);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 학자들은 본절의 '지파'라는 말을 놓고서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 말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지파를 사사로 보는 견해이다(Bertheau, Ewald, Thenius).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은 본절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7:6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즉, 본절의 '지파'(*, 쉬브테)라는 말이 대상 17:6에서는 '사사'(*,쉬프테)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본절의 '지파'(*)는 '사사'(*)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한다. (2) '지파'(*)란 말을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이다(Keil, Lange, Hengstenbery, Maurer). 이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어느 지파'란 다윗 이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과같은 지파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두 견해 중 우리는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두 견해를 다 염두에 두고 본절을 대하는 것이 보다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사(士師)들 대부분이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과 같은 지파 출신이기 때문이다. 사사기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들' 참조.

(주); 백향목 집 - '백향목'(cedar)은 그 당시 최고급 건축 자재이며 궁궐과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5:11 주석 참조. 그리고 '집'(*, 바이트)은 이미 6절에서 나온 말로 영구히 거할 수 있는 견고한 구조물을 의미한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는 곧 궁궐이나 성전 따위를 의미한다.

성 경: [삼하7:8]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에는 이제 그 유명한 '다윗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가상(嘉賞)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윗왕조에 대한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특히 이는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임하실 메시야(Messiah)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바(13-16절) 더욱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8-17절 강해,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난 메시야 사상' 참조.

(주); 내가...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아비의 양을 치던 자였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삼상 16:11).

(주); 주권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일꾼을 의미한다. 6:21 주석 참조. 따라서 이 말에 포함되어 있는 강한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selection)이다. 즉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양치는 목자에서 일약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7:9]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다(창 12:2). 그런데 이 언약은 개인적으로 다윗의 존재와 인격 그리고 그에게 속한 후손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존재'와 '인격'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그러나 이 언약은 단지 다윗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언약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의 '주권자'(*)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5:1-5). 따라서 이 언약은 다윗의 통치하에 있는 이스라엘이 열방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될 것이라는 거국적(擧國的)인 축복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기간 동안 상당한 성취를 보았다(8장;대상 20장;대하 9장). 그러나 그 궁극적인 성취는 다윗의 먼 후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빌 2:9-11).

성 경: [삼하7:10]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저희를 심고 - 여기에서 '심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는 본래 '나무를 심는다'는 의미이다(창 2:8;레 19:23;사 5:2). 그런데 이 말이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해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정착된 거주지를 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렘24:6;암 9:15). 따라서 이 말은 과거 사사 시대에 주변국가의 잦은 침략에 시달려 이리저리 쫓겨 다니던 신세에서 벗어나(삿 6:2)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완전히 한곳에 정착하여 사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시대에 그들은 이 같은 평화와 안녕을 구가(謳歌)하였다.

(주);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 여기서 '옮기지'란 말은 그릇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옮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려움 으로) '떨다'(신 2:25;시 4:4;사 32:11)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바른 해석은 '다시는 두려움으로 떨지 않게 하며'이다(Lange, Keil). 즉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이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은 과거 사사 시대의 혼란했던 무정부(無政府)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평화스러운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11절).

성 경: [삼하7:11]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평안케 하리라 -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의 일시적이고 국지적(局地的)인 평화와는 달리 다윗 시대에는 보다 영속적이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해 주신다. 그런데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질 진정한 평화(죄와 사망에서의 해방)를 예표하는 것이기도 하다(눅 2:14;롬 5:1;골 1:20).

(주); 집 - 여기에 나오는 집은 앞에서 이미 언급된 집(5, 7절)과는 의미상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된 집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짓고자 했던 성전을 의미하나 여기에서의 집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지어 주실 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집은 단순히 다윗이 거할 웅장한 건축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웅장한 백향목성(1, 2절;5:11)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집은 외형상의 집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집으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1)성경에서 '집'이란 말은 '가족', 곧 부모나 자식이나 친족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진 용례가 있다(창 7:1;35:2;출 2:1;왕상 11:38;12:16;13:2). 따라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보다도 그의 온 가정을 복되게 세우시겠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2)이 집은 또한 '나라'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근거로 16절에서 '네 집'과 '네 나라'가 서로 병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즉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집이 곧 다윗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은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시겠다는 의미이다. (3) 집이란 용어 속에는 '다윗의 후손들'이란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12, 16, 19, 26, 29절). 왜냐하면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곧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Kaiser).

성 경: [삼하7:12]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네 수한이 차서...잘 때에 -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때는 나이 30세이다. 이후그는 40년간 백성들을 통치한 후 서거(逝去)하였는바(5:4, 5;왕상 2:10, 11) 그때 그의 나이 70세였음을 알 수 있다.

(주); 네 몸에서 날 자식 - 여기에서 '자식'(seed)이란 말을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본래 다윗 언약의 내용은 다윗 당대와 그 후손, 그리고 영원한 세계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8-17절 문단 강해 참조. 따라서 '자식'의 개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해석해야 한다. (1)여기에서 '자식'은 집합적(collective)인 의미를 가진다. 즉, 이 말은 다윗의 사후(死後)그의 뒤를 이을 모든 왕들을 집합적(集合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 자식(seed)이 다윗왕조를 대대로 이어나가면서 견고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자식'은 곧 다윗의 왕손(王孫)들 모두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2)이 '자식'은 한 자손, 곧 솔로몬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첫째, 이 말은 단수(singular number)이며, 둘째, 본몬은 이 자식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13절).(3)또한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본절과 16절에서 이 '자식'에 의해 세워질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견고한 나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나라를 최종적으로 세우신 이는 오직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눅 1:31-33;행 2:29-31;13:22, 23).

성 경: [삼하7:13]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집을 건축할 것이요 - 여기에서의 집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지어 줄 상징적인 집(11절)을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이는 다윗이 그토록 건축하기를 희망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훗날 그의 아들 솔로몬 왕에 의해 비로소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다(대하 3-5장). 하지만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이 집은 단순히 건축물(建築物)로서의 성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집은 외형적인 집과 아울러 본질적인 집, 상징적인 집까지도 함께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집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지은 집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여호와의이름은 여호와의 존재, 그의 영광 등을 의미한다. 9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 집은 여호와께서 영원히 거하시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곳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집은 (1)솔로몬에 의해 지어질 성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2)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영원히 드러내 주는 예수 그리스도(요 1:14;2:19)와 그의 교회(요 14:23;고전 6:19;엡 2:21;히 3:6), 그의 영원한 나라(계 21:1-3)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Keil).

성 경: [삼하7:14]

주제1: [다윗 약속]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그 아비가 되고...내 아들이 되리니 - 훗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던 말씀이다(히 1:5). 이로 보더라도 다윗 언약은 궁극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윗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을 뿐이다(Matthew Henry, Wycliffe). 아무튼 다윗 언약의 극치인 본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1)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다윗 왕국의 기원(起原)을 말해 준다. 즉,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 같이 다윗 왕국은 하나님에 의해 탄생한 나라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Lange, Kaiser). 한편 이러한 언약의 내용은 모세 언약의 장자(firstborn)개념과 일치한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새로운 나라, 곧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로 세워 온 민족 가운데 뛰어난 장자가 되게 하신 것(출4:22;19:4-6)처럼 하나님께서는 새로이 다윗 왕국을 견고한 나라로 세우신 것이다. (2)또한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합된 관계라는 점에 주목해야 된다(Keil). 따라서 하나님은 비록 다윗 왕국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울의 왕국처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15절;삼상 13:8-14;15:10-21) 징계로써 인도하시는 것이다(12:7-15).(3)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속하고 상속받는 관계란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아버지인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기업을 물려받은 다윗 왕국은 영원토록 멸망할 수 없는 것이다(16절).

(주); 막대기와...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아비가 아들에게 체벌(體罰)을 가하면서까지 훈육하듯 하나님께서도 당신 백성들을 징계하면서까지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하는 문학적 표현이다(시 89:32;잠 3:12;히 12:6, 7).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과(犯過)한 자손들에게 가하셨던 징계의 손길은 열왕기 군데군데에 언급되어 있다(왕상11:14-40;왕하 9:27).

성 경: [삼하7:15,16]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메시야 왕국을 예표하고 있는 다윗 왕국은 사울 왕조처럼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몰락하는 불완전한 나라(15절)가 아니며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존속되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구절이다.

(주); 네 집과 네 나라가...영원히 견고하리라 - 이 같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 사후(死後)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왕상 12장) 급기야는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말미암아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기에 이르렀다(왕하 25장).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영원한 나라는 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나라를 의미함을 알 수 있는데 곧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메시야 왕국이다(마 12:28). 8-17절 강해,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난 메시야 사상' 참조.

성 경: [삼하7:17]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성전 건축에 관한 하나님의 뜻]

(주); 묵시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존'(*)은 밤에 무의식 상태로 꾸는 꿈(*, 할롬)과는 다른 것을 가리킨다. 즉 구약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이 말은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다. (1)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주시하는 계시적(啓示的) 사건을 의미한다(단 1:17;8:1, 2, 13;삼상 3:1). 따라서 이 용어는 선지자가 기도 중에 보는 특별한 계시를 가리키기도 한다(단 9:21). (2)하나님의 말씀, 또는 교훈을 의미한다(시 89:19;잠 29:18;합 2:2;나 1:1). 이상에 의거할 때 나단이 받은 이 묵시는 그가 밤새 깨어 있는 상태에서 주시하여 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Keil, Lange). 창 40:5-19 강해, '계시의 정의 및 종류' 참조.

성 경: [삼하7:18]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여호와 앞에 - 이 말은 하나님의 궤를 안치해 둔 장막(6:17) 앞을 가리킨다. 아마도 회막(tabernacle)으로 친다면 그 앞의 바깥뜰(출 27:9-19)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

(주); 앉아서 -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반드시 앉아서 기도했음을 중명해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1)유대인들은 좀처럼 앉아서 기도하지 않았으며(왕상 8:22;느 8:4;9:4), (2)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브'(*)도 반드시 '앉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머물러 있다', '지체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기도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다윗이 시간을 내어 기도한 '행위' 자체를 묘사하고 있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Wycliffe).

(주);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 다윗은 그의 기도 첫 마디에서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비천한 자신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대조적인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놀라운 약속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은혜와 축복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는 마음 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창 32:10;시 8:5;144:3).

성 경: [삼하7:19]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 여기서 '이것'이란 곧 이어 나오는 '영구히 이를 일'과 대조되는 것으로 다윗과 그 가정이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을 의미한다. 즉,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현재의 복도 감당하기 어려운 데 거기에다가 미래에 대한 더 큰 보장까지 해주신 데 대해 크게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주); 이를 일 - 이에 해당하는 '레메라호크'(*)는 '미래에 관한 일'이란 뜻이다. 원래 이 말의 기본 뜻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조트 토라트 하아담'(*)은 직역하면, '이는 인간의 율례입니다'이다. 그러나 이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해석이 분분하다. (1)'토라'(*)를 율례로 보지 않고 '교훈'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따라서 이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주 여호와여, 인간이 그 이웃에게 교훈을 하듯이 당신의 원대한 뜻을 깨닫게 하셨나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토라'가 교훈이란 의미로 사용된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옳지 않다. (2) '토라'를 인간의 도리, 또는 관습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주 여호와여 당신은 사람의 도리, 즉 사람이 자기 후손의 장래를 축복하듯 나와 내 가문에 축복을 베푸셨나이다'라는 뜻이 된다(Clericus). (3) 본절을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전 인류를 지배할 명령입니다'라고 해석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Vulgate). 그러나 이는 전체 문맥과는 약간 동떨어진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4)'토라'를 구약 성경에서 대개 그러하듯 하나님의 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럴 경우 여기서의 '토라'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미 6:8)는 인간 상호간의 규례로 보아야 한다(Keil, Hengstenberg). 따라서 이 견해에 의하면, 본절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규례에 따라 한 인간이 이웃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 줌과 같이 주 여호와께서 나에게 극진한 사랑과 친절을 베푸셨나이다'라는 뜻이 된다(Lange). 이상에서 본절의 전후 문맥과 비교적 일치되는 견해는 (2)와 (4)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평행 구절인 대상 17:17에 의거할 때 보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견해는 (4)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삼하7:20]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종을 아시오니...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 다윗은 그 마음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벅찬 감사를 도저히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깊은 감사의 마음을 말로 나타내기 보다는 자신의 속마음까지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신 속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시 139:1-4;요 21:17).

성 경: [삼하7:21]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이 모든 큰 일 - 여기에서 '이 모든 큰 일'이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4-17절)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계시를 '큰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계시가 (1)시공간(視空間)을 초월한 하나님의 우주적(宇宙的)인 계획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며 (2)또한 다윗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베푸신 큰 은혜였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7:22]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 과거 모세가 토로(吐露)하였던 것과 같은 신앙 고백이다(출 15:11). 물론 다윗은 그의 조상들로부터 참신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고 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7:23]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명한 역사적 근거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여기에서 다윗은 과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세우셨는가를 회상하며 그의 은혜를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주); 땅의 어느 한 나라가...같으리이까 -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이스라엘의 위대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다. 즉, 다윗은 여기에서 그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누리지 못하였음을 밝힘으로써 옛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주); 주의 명성을 내시며 -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며(출 12장) 대적들의 위협에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과 같은 구속적(拘贖的)인 사역을 통하여 당신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열방 중에 스스로 증거하신 것을 의미한다(신 4:39;수 2:11).

성 경: [삼하7:24]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 이것은 과거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시내 산 언약의 주제이다(출 19:5;신 7:6; 14:2; 26:18). 그러나 우리는 본절이 단순히 시내 산 언약에 대한 다윗의 회상(回想)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언약의 주제는 시내 산 언약의 주제보다 더 발전되고 성취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내 산 언약 체결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겨우 구원받은 백성에 불과했으나 이제 다윗 언약이 수여된 시점에서는 모든 대적들을 물리친통일 국가이며 공의와 사랑으로 통치되는 성숙된 신정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시내 산 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할 경우 반드시 형벌을 받으리라고 명시되어있으나 다윗 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범죄할지라도 하나님께선 사랑의 징계로써 인도하시겠다고 하는(14, 15절) 단계로 발전해 있다. 따라서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단순히 시내 산 언약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그 언약을 다윗 통치하에서 더욱 발전시키고 구체화 시킨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감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출 19:1-6 강해, '성경의 주요 언약들' 참조.

성 경: [삼하7:25]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하나님을 찬양하던 가운데 그의 은혜를 확신한 다윗이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장면이다.

(주);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 본절은 다윗의 간절한 소원(26-29절)이 사적(私的)인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묵시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4-17절)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자 했던 그의 생각(1-3절)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의 소원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고 오묘하며 원대하시다는 것(사 55:8, 9)을 깨달은 결과일 것이다.

성 경: [삼하7:26]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주의 이름을 높여 - 다윗이 간구한 모든 소원의 최종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마 6:9, 13). 이는 곧 우리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사도 바울의 교훈을 생각나게 해준다. 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성 경: [삼하7:27]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주);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 여기에서 '알게 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리타 에트오젠'(*)을 직역하면, '귀를 열어 놓았다'는 뜻이다. 혹자는 이 말에 대해 설명하기를, "귀 밑까지 내려 쓴 모자를 벗거나 덮힌 머리를 젖혀 '귀를 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The Interpreter's Bible).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원대한 뜻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인생에게 그 뜻을 밝히 알려 주기 위해 굳게 닫힌 비밀의 문을 열고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 활동(啓示活動)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철저히 깨달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창 40:5-19 강해, '계시의 정의 및 종류' 참조.

성 경: [삼하7:28,29]

주제1: [다윗 언약]

주제2: [다윗의 감사 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다윗이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 내용이다.

(주); 허락하셨사오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다베르'(*)는 기본형이'다바르'(*)로 주어의 능동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강의형(Piel) 동사이다. 따라서 이 말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언약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의 선포를 의미하는 강의형 동사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 경: [삼하8:1]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이후에 - 우리는 이 말을 보는 순간 본장의 다윗의 정복 사업(征服事業)이 7장에 언급된 다윗 언약 이후에 일어난 일인 줄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경우에는 다윗이 모든 대적을 파한 후 평안히 궁에 거했을 때 다윗 언약을 받았다고 한 7:1에 혼란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후에'란 용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예히 아하레 켄'(*)이 반드시 시간적인 전후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용어는 서로 다른 두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단순 접속어로 많이 사용되었다(2:1;10:1;13:1;15:1;삿 16:4;대상 18:1;19:1;대하 20:1). 그러므로 이 용어는 여기서 내용 전개가 서로 다른 두 기사(記事)를 연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윗이 다윗 언약을 받은 때는 본장에서와 같은 정복 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윗 통치 말기의 일임을 이미 앞에서 살펴본바이다. 7:1 주석참조. 한편, 혹자들은 본장에 기록된 다윗의 정복 사업은 5장에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예루살렘 정복 사건 이후의 일이라고 주장한다(Payne, J. W.Wevers).

(주);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 여기에서 '메덱암마'는 어느 한 지명(地名)을 의미하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속한 여러 성읍들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메덱암마'(Metheg-ammah)란 '어머니의 굴레'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1)고대근동 지방에서는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켜 '어머니'라고 불렀다(Keil, Lange,Gesenius). 또한 성경에서도 한 나라의 수도의 통치를 받는 주변 성읍들을 그 수도의 '딸들'이라고 기록하였다(수 15:45, 47). 이렇게 볼 때 '어머니'란 용어가 의미하는바는 블레셋 사람들의 다섯 성읍 중 주도권을 장악했던 '가드'(Gath)를 가리킴에 틀림없다(삼상 27:2, 5;29:2-4, 6, 7). (2)그리고 여기서 '굴레'라는 말은 누구에겐가 종속(從屬)된 상태를 의미한다(Gesenius). 따라서 이 말은 가드에 종속된 블레셋의 네 성읍들(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수 13:3)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Wycliffe)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결론적으로 다윗이 메덱암마를 빼앗았다는 말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연맹 도시들, 즉 수도인 가드와 나머지 네 성읍 모두를 빼앗았다는 의미라고 하겠다(대상 18:1). 따라서 이날의 다윗의 승리는 블레셋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8:2]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모압 - 사해 동쪽에 위치했던 모압(Moab)은 이스라엘과는 비교적 좋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신 2:9;룻 1:1)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을 때 그에게 큰친절을 베푼 나라이기도 하다(삼상 22:3, 4). 그런데 다윗이 이러한 나라를 정복하고 잔혹한 방법으로 다스린 것을 보면, 아마도 그 이후 다윗을 알지 못하는 자가 모압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 다윗과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Lange, Leon Wood). 아무튼 이처럼 다윗이 모압을 정복하고 그들을 조공국으로 삼은 것은 발람의 예언(민 24:17)이 성취된 사건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주); 줄로 재어...살리니 - 여기서 다윗이 죽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장정(壯丁)을 가리킨다. 그리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주로 소년과 노약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싸움에 임할 수 없는 자들은 살려 주고 대신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자들만을 죽임으로써 모압 사람들의 씨를 말리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다윗이 모압 사람 2/3는 죽이고 1/3은 살려 주었을 것으로 추측한다(Keil & Delitzsch, Matthew Henry). 한편 유대 전승(Midrash)은 이러한 다윗의 행위를 가리켜 정당한 복수였다고 주장한다. 즉 과거 다윗이 도피 생활 중에 있을 때 자기 부모를 모압 왕에게 의탁한 적이 있는데(삼상 22:3, 4) 그때 저들이 다윗의 부모를 살해하였으므로 이제 다윗이 그 원한을 갚은 것이라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85). 그러나 이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전승에 불과하므로 그 사실성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성 경: [삼하8:3]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소바 - 소바(Zobah)는 다메섹 북쪽과 레바논 산지의 동쪽에 위치했던 아람 소국(小國)이다. 다윗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 당시 아람인들은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개의 소국가로 분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 가장 강력했던 소국이 바로 소바로서 그 영향력은 유브라데 강 유역에까지 뻗쳐 있었다. 즉 당시 소바는 요단동편과 수리아의 통치권을 놓고 이스라엘과 다툴 정도로 최강적이었다. 때문에 소바는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자주 접전하였다(10:16-18;삼상 14:47;왕상 11:23, 24;대하 8:3).

(주); 하닷에셀 - 소바 왕 하닷에셀(Hadadezer)의 이름의 뜻은 '도움은 하닷이시다'이다. 그런데 '하닷'(Hadad)은 당시 수리아의 태양신의 이름이었으니 우리는 그가 이방 신을 숭배하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주);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 본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삼상 14:47에 의하면, 소바 왕이 사울 왕과 싸워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잃은 지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가 다윗에게 도전했다는 견해이다(Bunsen, Ewald, Lange).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말기(末期)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극도로 쇠약해져 블레셋군에게 위협 당하는 입장이었는데(삼상 28-31장), 소바 왕이 그때를 놓치고 다윗 왕 때에 비로소 그 잃은 지역을 회복하려 했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않기 때문이다. (2)본절의 주어를 하닷에셀이 아닌 다윗으로 보는 견해이다(Keil &Delitzsch). 즉, 다윗은 과거 하닷에셀에게 빼앗겼던 유브라데 강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 또한 다윗이 이전에 유브라데 강 지역을 한번이라도 장악했던 사실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옳지 않다. (3) 자기의 동맹군이 다윗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수치를 느낀 하닷에셀이 제 2차로 군사를 모집하여 다윗에게 도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Keil, Leon Wood). 그런데 이 견해는 같은 사건을보다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는 10장의 기록과 부합된다. 즉 거기에 보면, 암몬 자손이 다윗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람 소국들과 동맹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동맹군은 다윗 앞에서 패주하였고 그 동맹군 중 가장 강력한 나라인 소바 왕 하닷에셀은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다윗에게 도전하러 나아왔던 것이다(10:15-17).

성 경: [삼하8:4]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마병 일천 칠백 - 평행 구절인 대상 18:4에는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athousand chariots and seven thousand horsemen)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70인역(LXX)도 본절을 대상 18:4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추측컨대 본절은 혼동하기 쉬은 히브리어 철자를 착각한 필사자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즉 여기서 '기병'(*, 레켑)이란말이 탈락된 탓에 '칠천'(*)을 가리키는 숫자가 '칠백'(*)을 가리키는 숫자와 착각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PulpitCommentary).

(주); 병거의 말은...힘줄을 끊었더니 - 다윗이 이같이 한 이유는 산악 지대가 많은 팔레스틴의 지형상 병거가 적합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신 17:16)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이에 따라 다윗은 말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보다 더욱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Vol. II, p.485).

성 경: [삼하8:5]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도우러 온지라 - 다메섹(Damascus)은 소바(Zobah)의 바로아래(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 아람의 수도이다. 아마도 이곳의 아람인들은 처음에는 동맹군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패주병들을 끈질기게 쫓아 그들의 지역에까지 이르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소바 왕을 지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는데 솔로몬 당시에는 다메섹 왕 르손이 이스라엘을 침입했었다(왕상 11:23-25). 그리고 분열 왕국 시대에는 벤하닷이 침입해 왔으며(왕상 15:20) 그 후에도 끊임없는 침입이 있었다(왕상 20:1-12;왕하 8:25-29;10:32, 33;12:7, 18;16:5).

성 경: [삼하8:6]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수비대 - 이에 해당하는 '네치브'(*)는 '나차브'(*), 즉 '공고히 하다', '배치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는 내정 간섭을 위한 총독부나 통치 기관이 아니라 군사적인 도전을 막기 위한 군사 기지(軍事基地)를 의미한다(삼상10:5;13:3).

(주); 아람 사람이...조공을 바치니라 -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가 승리한 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널리 성행했던 계약 관계였다. 즉, 그당시 국가 관계를 보여 주는 헷족속(Hittite)의 계약 문서를 보면 속국의 왕(vassal king)은 종주국의 왕(suzerain king)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침으로써 종주국의 불가침 조약(不可侵條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속국의 왕은 여전히 자주권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는데 대신 그 계약을 반드시 이행하여야만 했다. 한편 이상에서처럼 다윗이 유브라데 강 유역에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아람족을 정복하며 다메섹에 수비대를 두며 또한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게 된 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의 지경(地境)이 유브라데 강 유역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15:18).

성 경: [삼하8:7]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하닷에셀의...금방패 - 여기서 '방패'에 해당하는 '쉘레트'(*)는 성경에서대개 '방패'(Shield)로 번역되어 있다(왕하 11:10;대상 18:7;대하 23:9;아 4:4;렘51:11;겔 27:11). 그러나 '쉘레트'는 비단 방패 뿐아니라 각종 무기류나 기타 여러 도구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리아역(the Syriac Peshitta)은 본절의 '금방패'를 '금화살통'으로, 공동 번역은 '금장신구'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다윗은 하닷에셀을 격파한 후 (3-6절) 그와 그 신하들의 각종 무기류 및 장신구 등을 전리품(戰利品)으로 획득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삼하8:8]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정복 전쟁]

(주); 베다와 베로대 - 이들 지명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기록인 대상 18:8에는 '베다'(Betah)가 '디브핫'(Tibhath)으로, '베로대'(Berothai)가'군'(Chun)으로 표기되어 있다. 추측컨대 이곳은 다메섹 부근에 위치했던 성읍들인 것같다. 아무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의 군대가 이스라엘 지경에서 상당히 먼 지역인 아람 소바의 주요 도시들까지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1-14절 지도 참조.

(주);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 대상 18:8에서는 이 많은 놋이 솔로몬 때에 성전 건축을 위해 사용되었음이 밝혀져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놋을 빼앗아온 것이 틀림없다.

성 경: [삼하8:9]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하맛 왕 도이의 예물]

(주); 하맛 - 하맛(Hamath)은 아람 소바 바로 윗쪽(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아람 소국이다. 즉 이 나라는 오론테스 강(the river Orontes) 유역에 건설된 도시 국가였으며 아람 소바와 더불어 유브라데 강으로부터 레바논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이다.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는 이를 '큰 하맛'이라고 불렀다(암 6:2).

(주); 도이 - 이름의 뜻은 '방황하다'이다. 일명 '도우'(Tou)라고도 하는데 이는 '웃는 것'이란 뜻이다(대상 18:9, 10).

성 경: [삼하8:10]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하맛 왕 도이의 예물]

(주);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 대상 18:10에는 요람(Joram)이 하도람(Hadoram)으로 나와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이름이 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하나는 히브리식 발음이며, 또 하나는 아람식 발음이기 때문이다. 즉, 하도람에서 '하도르'(Hador)는 수리아의 신(神)의 이름으로서 이는 아람식 발음이며, 요람은 '여호와는 높으시다'는 뜻으로 히브리식 발음인 것이다(Keil, Lange). 한편, 도이가 한 나라의 왕자를 사절로 보냈다는 사실은 그가 다윗 왕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을 의미한다.

(주); 축복하게 하니 - 여기서 '축복하다'에 해당하는 '바라크'(*)는 '송축하다','축복하다', '축하하다', '찬양하다'는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도이가 다윗의 승전(勝戰)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점에 의거할 때 '축하하다'로 번역함이 가장 무난하다(공동번역).

(주);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터에 - 소바와 하맛은 아람 소국들 중 자웅(雌雄)을 겨루는 강력한 국가들이었다. 3, 9절 주석 참조. 특히 이 두 나라는 인접(隣接)하여 있었기 때문에 잦은 전투를 벌였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소바에 대한 다윗의 승리(3-8절)는 하맛 왕 도이에게는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윗에게 자기 아들을 보내어 감사를 표하고 또한 양국간에 화친(和親)을 도모하고자 한것이다.

성 경: [삼하8:11]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하맛 왕 도이의 예물]

(주); 여호와께 드리되 - 다윗이 모든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뿐 아니라 도이로부터 경하(慶賀)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었다(6, 14절). 즉 다윗의 전쟁은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었으며 그 가운데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므로 주시는 승리를 거둘 뿐이었다.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참조. 따라서 이제 다윗은 전쟁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한편 이 모든 헌물들은 훗날 솔로몬에 의해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다(왕상 6장;7:13-51).

성 경: [삼하8:12]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하맛 왕 도이의 예물]

(주); 암몬 자손 -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예들이다(창 19:38). 요단동편, 모압 북쪽의 랍바(Rabbah)를 중심한 일대에 주로 거주하였는데 호전적(好戰的)인 족속으로 이름 높다(사 15, 16장;렘 48장). 특히 이들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쳐 섬기는 몰록(Moloch)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등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활하였다(왕상 11:7). 그런데 솔로몬의 처 나아마(Naamah)가 바로 이 암몬 여인이다(왕상 14:21, 31).

(주); 아말렉 -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이다(창 36:15, 16). 팔레스틴 남방의 광야지대에서 시내 반도에까지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였는데 일찍부터 다윗과의 충돌이 있었다(1:1;삼상 30장).

성 경: [삼하8:13]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수비대]

(주); 염곡 - 즉 '소금 계곡'(the valley of salt)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란이 있다. (1)혹자는 이곳이 브엘세바 동쪽의 '와디 엘 밀'(Wady el-Milh)이라고 주장한다. (2)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이보다 더 신빙성 있는 곳으로 사해 남쪽의 '에스 셉카'(es-Sebkha)를 제시하고 있다. 이곳은 사해 남쪽 아라바 광야의 소금 지역이다. 이 중 (1)번의 견해보다 (2)번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그 까닭은 다윗이 그의 전성 시기에 이스라엘 지경 내에 있는 '와디 엘 밀' 보다 이스라엘 지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에돔을 정벌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Leon Wood).

(주); 명예를 얻으니라 - 다윗의 훌륭한 통치력이 그의 군사적인 승리로 말미암아 더욱 인정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다윗이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이를 기념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운 것을 의미한다고도 주장하는데 온당치 못한 견해이다(Lange). 왜냐하면 승전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에 주력했던 다윗(11절)이 스스로를 높여 그 같은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8:14]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수비대]

(주); 수비대 - 이는 속국의 군사적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적 요새, 또는 기지를가리킨다. 6절 주석 참조.

(주); 다윗의 종이 되니라 - 이는 에돔이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6절). 그런데 이 같은 사건은 장차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기게 되리라는 이삭(창 27:39)과 발람의 예언(민 24:18)이 성취된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단코 변개(變改)됨이 없이 때가 되면 온전히 성취됨을 볼 수 있다(삼상 15:29).

성 경: [삼하8:15]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내각(內閣)]

(주); 공과 의를 행할 새 - '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공정한 재판을 의미한다. 또한 '의'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된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두 용어는 다윗이 율법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백성들에게 베푼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신정 왕국(theocracy)의 왕답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에 입각해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다. 이는 곧 장차 메시야로 말미암아 이룩될 그의 나라와 의로운 통치를 예표해 준다(시 45:6, 7).

성 경: [삼하8:16]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내각(內閣)]

(주); 사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즈킬'(*)은 '기억하게 하는 자'란 뜻이다. 아마도 이는 왕의 명령은 물론 기타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중요 사건들을 기록하여 문서화하고 이를 관리하는 직무자를 가리키는 듯하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 II, p.365). 공동 번역은 이를 '공보 대신'으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삼하8:17]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내각(內閣)]

(주); 사독과...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 다윗 당시에는 대제사장이 두 명 있었다. 곧 기브온의 제사장인 사독(Zadok)과(대상 16:39) 예루살렘의 제사장인 아히멜렉(Ahimelech)이다. 이 중 사독은 아론의 셋째 아들 엘르아살의 자손이었으며 아히멜렉은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자손이었다(대상 24:3). 한편, 본절이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삼상 22:20의 내용과 배치되는 듯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본절과는 달리 아비아달이 아히멜렉의 아들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자들은 본절의 기록을 필사자(筆寫者)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한다(Movers, Ewald). 그러나 우리는 두 상이한 내용의 기록을 조화시키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같은 주장이 아니더라도 이 두 기록을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아비아달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모두 아히멜렉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Keil, Lange, Oehler, Bertheau). 다시 말해서 삼상 22:20에 나오는 아히멜렉과 본절의 아히멜렉은 할아버지와 손자간으로서 동명 이인(同名異人)인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삼상 22:20에 나오는 아히멜렉의 아버지가 아히둡(Ahitub)으로 밝혀져 있는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삼상 22:9, 20).

(주);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 '스라야'(Seraiah)는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즉 20:25에서는 '스와'(Sheva)로, 왕상 4:3에서는 '시사'(Shisha)로 그리고 대상 18:16에서는 '사워사'(Shavsha)로 각기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현상은 어느 한 단어의 축약형이거나 아니면 각기 다른 필사자에 따른 기록상의 차이일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한편 여기서 '서기관'에 해당하는 '사페르'(*)는 '기록하다', '열거하다', '말하다'는 뜻의 '사파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따라서 이는 혹자가 추정하듯 국무장관(Pulpit Commentary)이나 군사 모집자(Oehler)가 아니라 각 행정 부서간의 서신 연락 사무를 담당하던 비서관을 가리키는 듯하다(공동번역, Keil & Delitzsch, Lange).

성 경: [삼하8:18]

주제1: [다윗의 정복 사업과 조각(組閣)]

주제2: [다윗의 내각(內閣)]

(주);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 -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학자들간에서는 상반된 견해가 되고 있을 뿐인데 곧 다음과 같다. (1)이들을 블레셋의 두 족속으로 보는 견해이다(Ewald, Movers). 이 견해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은 성경 몇 군데에서 블레셋 남서쪽에 위치한 블레셋 지파를 '그렛'(Cherethites)이라 불렀기 때문이다(삼상 30:14;스 2:5;겔 25:16). 그런데 23:23에 의하면 브나야(Benaiah)는 다윗의 시위대 장관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브나야는 블레셋 두 족속으로 다윗의 시위대를 조직하고 관할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지나친 모순이다. 왜냐하면 신정 국가의 왕인 다윗이 이방인 시위병들에게 들러싸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Thenius). (2)'그렛'과 '블렛'을 다윗의 시위병을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eil, Lange). 즉, '그렛 사람'(the Cherethite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크레티'(*)는 '칼로 베다', '죽이다'는 뜻의 '카라트'(*)에서 파생된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왕의 명령에 따라 중죄인을 처벌하는 사형 집행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브나야가 실제로 이런 일을 집행한 일이 있었던 사실에 의거할 때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하다(왕상 2:25). 또한 '블렛 사람'(the Pelethite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플레티'(*)는 '도망하다', '경주하다'는 뜻의 '팔라트'(*)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왕의 급한 엄명을 받고 먼 지방에 속히 전달하는 보발군(步撥軍), 곧 왕명 수행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대하 30:6). 이러한 해석은 고대 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아무튼 이들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들은 다윗 왕조를 위해 헌신적으로 충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즉 그들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유랑길에 나선 다윗을 호위하였을 뿐 아니라(15:18)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에서부터 솔로몬을 보호, 그를 다윗을 잇는 차기(次期)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였던 것이다(왕상 1:38, 39).

(주); 대신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헨'(*)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다. (1)대부분 이 말은 제사장을 뜻한다(창 14:18;출 2:16;레 21:10;민25:25 등).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은 제사장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아들들은 유다 지파의 자손들이었으니 아론의 자손이어야 하는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2)이 말은 '신실한 고문'이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 즉, 왕상4:5에서 이 말은 '왕의 벗'이란 말과 병행하여 사용되었다. 아마 본절에서도 이 말은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왕에게 충성되이 직고(直告)하는 자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Baker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Lange).

성 경: [삼하9:1]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사울의 유족을 찾는 다윗]

(주);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 다윗 왕이 이처럼 사울 가문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게 된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때문에 혹자들 간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논란이 있다. (1)혹자는 이스보셋이 암살당한 직후(4:5-12)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Theniu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때는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기(5:1-3) 전으로서 고작해야 므비보셋(4:4)이 13세에 불과한 때였기 때문이다(2:10, 11;5:5). 그러나 본문은 므비보셋이 젊은 아들을 둔 장성한 성인임을 밝히고 있으니(12절) 이치가 맞지 않는 것이다. (2)또 다른 학자들은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길보아 전투(삼상 31장)가 있은 지 약 20여년이 지난 때 곧다윗의 40년 통치 기간 중, 중반기 때(5:4, 5)의 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PulpitCommentary). 왜냐하면 길보아 전투 당시 므비보셋은 고작 5세에 불과했으나(4:4) 지금은 어엿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기 때문이다(12절). 따라서 지금 므비보셋의 나이는 아무리 적게 쳐도 20세는 넘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한편 이때는 다윗이 어느 정도 이스라엘을 안정 궤도에 올려 놓은 때이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본 견해를 지지한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즉 그들은 모두들 그 동안 눈코 뜰새 없이 강력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만 전념했던 다윗이 이제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서자 그 옛날 절친했던 친구 요나단과의 언약(삼상 20:14, 15, 42)을 기억했을것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3)한편, 러스트(Rust)는 이 사건이 21장에 기록된 기브온 사람들의 보복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즉 과거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위한 지나친 열심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한 적이 있었다(21:1). 그런데 이제 시대가 바뀌자 기브온 사람들이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다윗에게 사울 왕의 아들들의 생명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1:7에 보면, 다윗은 그때 므비보셋을 아껴 그를 그들에게 내어주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곧 므비보셋이 이 사건 이전부터 다윗의 보호를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러스트(Rust)의 견해는 근거없는 것이 되고 만다.

(주);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베풀리라 - 다윗이 이처럼 사울의 후손, 그것도 특별히 요나단의 후손을 찾아 선대(善待)하려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즉 첫째, 요나단은 다윗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8:3, 4;19:1-3;20:4-42). 둘째, 다윗은 요나단 생전에 그의 가족을 보호해 주기로 언약한 바 있기 때문이다(삼상20:14, 15, 42). 아무튼 다윗이 은혜를 베풀기 위해 사울 가문의 남은 자를 찾고 있음은 요나단과 다윗 간의 우정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만큼 깊고도 성실한 것이었음을 증거해 준다(삼상 18:1-3;20:42).

(주); 은총 - 구약에서 은총 또는 은혜에 해당하는 말로는 '헨'(*)과 '라촌'(*), '헤세드'(*) 등이 있다. 이 중 '헨'(*)은 단순히 '즐겁고 아름다운 것'을 의미하며, '라촌'(*)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은총에 해당하는 '헤세드'(*)는 이와는 달리 언약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2:6 주석 참조.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출 19:5, 6)대로 택한 백성에게 부어 주시는 것과 같은 풍성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출15:13;20:6;34:6;신 5:10, 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다윗이 지난번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의 후손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삼상 18:3;20:8, 42).

성 경: [삼하9:2]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사울의 유족을 찾는 다윗]

(주); 사울의 종...시바 - 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베드'(*)는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의미한다. 한편, 사울의 종 시바(Ziba)는 훗날 압살롬의 난을 피해 유랑길에 나섰던 다윗에게 자기의 주인 므비보셋을 모함하고선 그 재산을 차지하는데 이로써 그가 간특(奸慝)한 자였음을 알수 있다(16:1-4;19:24-30).

성 경: [삼하9:3]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사울의 유족을 찾는 다윗]

(주); 하나님의 은총 - 이는 곧 다윗이 요나단의 후손에게 베풀고자 하는 은총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의미한다. 즉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껏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기억하고 그도 타인에게 그 같은 은총을 베풀려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다윗이 요나단과 맺은 맹세가 곧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은 것이었는바(삼상 20:14, 15, 42) 이제 그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대로 신실히 이행하려 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89). 즉 다윗은 사울 가문에 은총을 베풀려는 것은 비록 자신이지만 은총을 베풀도록 자신을 주장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이 말을 통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무슨 일에서든 먼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잊지 않는 아름다운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자세가 아닐 수 없다(고전 10:31).

(주); 요나단의 아들...절뚝발이 - 므비보셋(Mephibosheth)을 가리킨다(6절). 그는 다섯살때에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급히 도망하던 유모의 팔에서 떨어져 불행히도 절뚝발이가 되었었다(4:4). 한편 본장에는 므비보셋이 절뚝발이란 사실이 두번이나 언급되고있다(13절). 이는 곧 더 이상 사울 가문에 희망이 없음을 의미함도 있지만(4:4 주석 참조) 여기서는 무엇보다 므비보셋이 절뚝발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아들처럼 사랑한 다윗의 사랑과 인격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1절). 그런데 이는 오늘날 영적 절뚝발이와 같은 우리들에게도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기억하고선 영생의 축복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사 36:5;렘 31:8;요 3:16; 엡2:12, 13;히 12:12).

성 경: [삼하9:4,5]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사울의 유족을 찾는 다윗]

(주); 로드발 -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17:27에 의하면 로드발(Lo-debar)은 요단 강 건너편 마하나임 부근의 한 성읍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이곳이 수 13:26에 언급된 '드빌'(Debir)이라고도 주장하는데 확실한 증거가 없다(Keil &Delitzsch). 한편 '로드발'(*)이란 말은 '목초가 없는'이란 뜻으로서 그곳은 일종의 황무지와 같은 척박한 지역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주); 마길 - 그의 이름이 17:27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마하나임에 도착한 다윗과 그의 종자들에게 후히 선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마길(Machir)은 곤경에 처한 자를 돌볼 줄 아는 사랑의 정신을 지닌 자이자 그에 필요한 재물도 넉넉히 지녔던 자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9:6]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사울의 유족을 찾는 다윗]

(주); 므비보셋 - 본명은 '므립바알'(Meribbaal)이다(대상 8:34). 그러나 '바알'이란 말이 이방 신의 이름이란 이유로 이는 후대에 '므비보셋'으로 개명(改名)되었다. 4:4 주석 참조.

(주); 주의 종 - 이처럼 므비보셋은 자기를 가리켜 다윗의 종이라고 겸허한 자세를 취하였다. 여기서 '종'이란 이미 앞에서 나온 '에베드'(*)로 '노예'를 의미한다. 2절 주석 참조. 즉 므비보셋은 다윗에 대하여 자신을 노예와 같이 완전히 자유가 없는 자로 칭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하9:7]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다윗]

(주); 무서워 말라 - 왕위에 오르면 일단 정적(政敵)과 그 일가 친족들을 모조리 진멸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일반적 관례이다. 따라서 므비보셋은 그 같은 관습에 따라 다윗 왕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터인데 본절은 바로 그러한 므비보셋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려는 다윗의 애정어린 분부이다(Keil, Lange).

(주);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 사울의 밭은 기브아에 있던 그의 사유지를 의미하는데(삼상 10:26) 아마도 이 말은 그 동안 시바가 관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다윗의 이러한 약속은 간교한 시바에게는 큰 실망거리였겠으나 마길의 집에 숨어 살던 므비보셋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주);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 이말의 의미는 이중적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말은 말 그대로 다윗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상호간의 아름다운 교제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시 69:22;128:3;단 11:27). 따라서 이 말은 다윗과 므비보셋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서로 아름다운 교제의 왕래가 있을 것을 뜻하기도 한다(Rust).

성 경: [삼하9:8]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다윗]

(주); 죽은 개 같은 나 - 유대인들은 개를 멸시하였다(출 22:31;삼상 17:43;24:14;왕하8:13;시 22:16, 20). 더구나 '죽은 개'란 시체를 의미하는데 모세 율법에서 시체는 아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2:4). 따라서 본절은 가장 보기싫고 하찮은 인간을 비유한 말임을 알 수 있다. 3:8 주석 참조. 한편 이처럼 므비보셋이 자신을 극도로 비하시켜 표현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다윗 왕의 큰 은혜에 감격하였기 때문이다. (2)또한 그 자신이 다윗 왕의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Keil, Lange).

성 경: [삼하9:9]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에게 귀속되는 사울가의 재산]

(주); 아들 - 여기에서 아들은 손자(grandson)를 의미한다. 즉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로서 사울의 손자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아들이나 손자를 모두 '벤'(*)이란 말로 표현한다. 6:3 주석 참조.

성 경: [삼하9:10]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에게 귀속되는 사울가의 재산]

(주); 네 주인의 아들을 공궤하라 - 여기서 '아들'이란 말은 므비보셋 한 개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아내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는 한가족의 대표자 므비보셋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므비보셋 개인은 다윗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되어있는바(7, 13절) 시바가 공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실제적인 의미는 '네 주인의 가족들을 공궤하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Keil, Lange).

(주); 시바는...종이 스물이라 - 본절은 적어도 다음 두가지 사실을 시사해 준다. (1)시바가 므비보셋과 그 가족을 공궤하기 위하여 밭을 경작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Lange, Matthew Henry). (2)사울의 종 시바가 그 동안 사울의 유산 중 상당 부분을 유족(遺族)에게 돌리지 않고 착복했을 것이라는 점이다(Pulpit Commentary). 시바의 이 같은 사악하고 간교한 성품은 후에도 여실히 나타난다(16:1-4;19:26, 29).

성 경: [삼하9:11]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에게 귀속되는 사울가의 재산]

(주); 므비보셋은...먹으니라 - 이와 똑같은 구절이 본장에서 모두 4회나 반복되어 있다(7, 10, 13절). 이는 본서 저자가 요나단과의 언약(삼상 20:14, 15, 42)을 철저히 이행하는 다윗의 의리와 사랑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임에 분명하다. 한편, 혹자는 다윗이 이처럼 므비보셋을 선대한 이유에 대하여 다윗이 므비보셋의 세력을 처음부터 견제하기 위해 그를 자기 가까이에 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Hertzberg).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본서 전체에 나타난 다윗의 인품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것이다.

성 경: [삼하9:12]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에게 귀속되는 사울가의 재산]

(주); 젊은 아들...미가 - 여기서 '젊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톤'(*)은 정확히 어떠한 연령층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대개 나이 어린 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면 무난하다. 한편 이러한 므비보셋의 아들 미가(Micha)는 후에 많은 자손들을 갖게 되며 이 자손들은 이스라엘의 용사(勇士) 및 지도적인 인물들이 되었다(대상 8:35-40;9:40-44).

성 경: [삼하9:13]

주제1: [요나단 가문을 돌아본 다윗]

주제2: [므비보셋에게 귀속되는 사울가의 재산]

(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 므비보셋의 약점과 그에 대한 다윗의 은혜를 서로 대조시키고 있는 구절이다. 즉 이와 같이 본서 저자는 이 둘을 대조시켜 놓음으로써 므비보셋에 대한 다윗의 사랑이 극진하며 또한 헌신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3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0:1]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주); 그 후에 - 여기서 '그 후에'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와예히 아하레이 켄'(*)은 8:1의 용례와 같이 시간적인 전후 관계를 연결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단순 접속어이다. 8:1 주석 참조. 따라서 우리는 이 말에 근거하여 본장의 사건이 앞장의 사건 뒤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본장 1-14절의 사건은 8:3-8에 나타난 사건보다 앞서는 것이다(L-eon Wood). 왜냐하면 소바왕 하닷에셀의 다윗에 대한 도전(15-19절 ; 8:3-8)은 본장에 언급된 암몬과의 전투(1-14절)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장1-14절은 8:12에 간략히 언급된 암몬과의 전쟁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부연 설명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암몬 자손의 왕 - 삼상 11장에 언급된 나하스(Nahash)를 가리킨다. 그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려다가 오히려 사울 왕에게 패배한 적이 있다(삼상 11:1-12).

성 경: [삼하10:2]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주);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 나하스가 다윗에게 언제 어떠한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각기 다르게 추측하고 있다. (1)아마도 나하스가 다윗의 즉위식(卽位式, 2:4;5:1-3)에 특사를 보내어 축하해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Lange). (2)또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때 나하스가 그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Keil,Matthew Henry). 즉 사울에게 패배한 나하스(삼상 11장)가 같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다윗을 동정하여 그를 도와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3)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은총'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는 '언약적인 호의'를 의미한다(9:1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쌍방간에 불가침 조약과 같은 모종의 계약을 체결한 것을 가리킬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Rust,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우리는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성경의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서 이러한 사실 여부보다도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고자 한 다윗의 의리있는 인격에 보다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성 경: [삼하10:3]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

(주); 다윗이...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 이는 다윗의 호의에 대한 암몬 방백들의 오해이다. 이와 같은 저들의 오해는 분명 다윗의 세력 확장에 대한 저들의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Rust). 즉 저들은 가나안 지역의 최강자 블레셋과 이웃 나라인 모압이 다윗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사실(8:1, 2)을 알고 저들의 미래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웃 나라인 모압이 다윗에게 패배한 이후에 끔찍한 형벌을 받은 사실(8:2)은 그들에게 더욱 큰 경계가 되었을 것이다(Keil). 따라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다윗의 호의를 그들을 정복하려는 저의(底意)로 오해하게 된 것도 무리(無理)는 아니다.

(주); 이 성 - 이는 암몬(Ammon)의 수도인 랍바(Rabbah) 성을 의미한다. 이 랍바 성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의해서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견고한 요새였다(11:1;12:26;신3:11). 따라서 암몬 사람들은 외국 사절들에게 이 성의 내부를 보여 주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 틀림없다(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0:4]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주); 그 수염 절반을 깎고 - 고대 근동지방에서 남자의 수염은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였다. 또한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를 상징한 것이었다(Lange, PulpitCommentary). 따라서 다윗의 특사들이 수염을 깎이운 것은 노예처럼 취급된 최고의 수치였다(사 7:20;50:6;15:2;렘 41:5).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습은 아랍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그들은 수염을 깎이우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수치로 여기고들 있다(Keil & Delitzsch, Wycliffe). 한편 여기서 '수염의 절반을 깎았다'는 말은 수염의 밑부분을 잘랐다는 말이 아니라 얼굴의 한쪽면에 있는 수염을 깎고 다른 한쪽면은 그대로 두었다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375). 그러나 확실치는 않다.

(주);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 여기서 '의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두'(*)는 '펼치다', '확장시키다'는 뜻의 동사 '마다드'(*)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이는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옷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람인들은 다윗 신하들의 긴 옷을 엉덩이 윗부분까지 잘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겉옷 속에 내의를 입지 않았으니(Keil, Pulpit Commentary)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선 지독한 모욕(侮辱)이 아닐 수 없다(6:20).

성 경: [삼하10:5]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주); 너희는...머물다가 돌아오라 - 다윗이 이처럼 신복들에게 여리고에 머물다가 수염이 어느 정도 자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은 저들의 수치를 감추어 주기 위한 배려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랍바 성에서 가장 가까운 여리고는 비교적 이스라엘의 변방(邊方)으로서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삼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의 이같은 말에는 보다 암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머물다가 돌아오라'는 말 다음에는 아무 말이 없긴 하지만 이는 분명 '머물다가 돌아오라 그 동안에 너희가 당한 수치는 내가 반드시 갚아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91).

(주); 여리고 - 여리고(Jericho)의 뜻은 '향기로운 성읍' 또는 '달의 도시'이다. 그런데 이곳은 종려나무 산지로 유명하였으므로 일명 '종려나무 성읍'(the city of palms)으로도 불리웠다(삿 1:16). 한편 이곳은 랍바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는바 곧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8km 지점이다.

성 경: [삼하10:6]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암몬 및 아람 연합군과의 대전]

(주); 암몬 자손이...고용한지라 - 다윗의 사신들을 모독하므로 일종의 선전 포고(宣戰布告)나 다름없는 짓을 자행한 암몬 왕 하눈(4절)은 이처럼 인근 4개국의 군대 3만 3천명을 고용하여 다윗 군대와의 일전(一戰)에 대비하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고 돌이키기는 커녕 오히려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무력을 갖춘 것이다. 이는 곧회개할 만한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기에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해 하는 악인의 전형적인 표본이 아닐 수 없다(창 3:11-13;삼상 13:8-14). 한편 하눈이 고용한 용병(傭兵)들의 내역을 간략히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지 원 군 병 력 비 고

하맛 어귀에 있는 벧르홉(민 13:21;삿

벧르홉 아람 군대 18:28, 나하라임이라고도 함, 대상 19:

6)을 수도로 한 아람의 도시 국가

보 병

20,000 명 하맛의 남쪽, 즉 오론테스(Orontes) 강

소바 아람 군대 과 유프라테스 (Euphrates) 강 사이에

위치한 아람의 도시 국가(8:3)

마아가 왕의 군대 1,000 명 벧르홉과 그술 사이에 있는 아람 도시

국가

돕 군대 12,000 명 아람과 암몬 사이의 길르앗 동북 지역

에 위치한 도시 왕국(삿 11:15)

이상에 열거된 4개국 중 3개국은 아람 도시 국가였다. 당시 아람인들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각기 분립적(分立的)인 소도시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성경에 나타난 아람의 소국들은 소바 아람(6절 ; 8:3), 벧르홉 아람(6절), 마아가 아람(6절), 다메섹 아람(8:5) 등이 있다.

(주); 벧르홉 아람 - 이는 벧르홉(Beth-rehob2)에 도시를 건설한 아람 소국(小國)을 의미한다. 벧르홉은 단 지파의 성읍인 라이스(Laish)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삿18:28;민 13:21).

(주); 소바 아람 - 소바(Zoba)는 라메섹 북쪽과 레바논 산지의 동쪽에 위치한 아람 소국으로서 아람의 여러 소국들 중 하맛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8:3 주석 참조.

(주); 마아가 - 이는 바산 동북쪽(신 3:14), 헬몬 산 서남쪽에 위치한 아람 왕국이다. 이곳은 그술(Geshur)과 인접한 이웃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절에서 오직 마아가(Maacah)만 암몬의 모병(募兵)에 응하고 그술이 응하지 않은 것은 그술 왕 달매가 다윗의 장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3:3).

(주); 돕 - 돕(Tob)은 독립 국가는 아니었고 이스라엘 지경인 길르앗 지방 내에 있는 한 성이었다(삿 11:2, 5). 이곳은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업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대신 암몬 땅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암몬의 모병에 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 고용한지라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9:6에 보면, 암몬 왕 하눈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사용한 돈은 은 칠천 달란트였다. 이를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드라크마(Drachma)로 환산할 경우, 6백만 드라크마가 된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한편, 암몬왕 하눈이 고용한 2만명의 보병은 역대기의 기록에는 '병거와 마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대상 19:6). 이러한 차이점은 두 저자 중 누군가의 오기(誤記)라고 하기 보다는 아마도 각 저자의 상이한 관점에 따른 기록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당시 하눈이 고용한 아람 용병은 보병과 전차병, 기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Lange, Keil & Delitzsch).

성 경: [삼하10:7]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암몬 및 아람 연합군과의 대전]

(주); 용사의 온 무리 - 혹자는 용사와 온무리 사이에 '와우'(*)를 첨가하여 '용사와 온 무리'라고 번역하기도 한다(Thenius). 그러나 본절은 원문상 '와우'(*)를 첨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Keil, Lange). 여기서 '용사'와 '온무리'는 동격(同格)으로서 본절에서 처럼 '용사의 온무리'로 해석해야 한다(KJV,NIV,RSV). 한편, '용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깃보림'(*)은 '용감한', '힘센'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 '깃보르'(*)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국민병(militiame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 경험이 많고 싸움에 능한 요압의 정예부대를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암몬은 군대의 수(數)에, 다윗은 질(質)에 치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0:8]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암몬 및 아람 연합군과의 대전]

(주); 암몬 자손은...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 여기서 '성문 어귀'는 암몬의 수도인 랍바성문 앞을 가리킨다. 3절 주석 참조.

(주); 소바와...따로 들에 있더라 - 대상 19:7에 의하면, 아람 용병들이 진친 들은 메드바 들(the field of Medeba)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드바 들은 요단 강의 동편 고원 지대로서 랍바 성에서 북서쪽으로 약 6km 지점에 위치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병거와 마병을 원활히 운용하기 위하여 들판에 포진(布陣)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암몬군과 아람 동맹군이 남북으로 따로 진을 쳤던 것은 요압의 군대를 가운데 몰아넣고 양 쪽에서 협공(挾攻)하기 위함이었음에 틀림 없다.

성 경: [삼하10:9,10]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요압의 승리]

(주); 요압이...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 이는 요압이 이스라엘 정예군을 두 대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요압의 지휘는 양쪽에 포진하고 있던 적의 협공에 대비하기 위한 적절한 조처였다.

(주);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 요압이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정예병 중에서 또다시 선발한 무리를 가지고 아람 용병과 대치(對峙)한 것을 의미한다. 즉 암몬군보다는 필시 아람 용병들이 더 전투에 능하리라고 판단한 요압은 스스로가 저들과 맞서려고 전투 태세를 갖춘 것이다.

(주); 그 남은 무리는...아비새의 수하에...진치게 하고 - 이는 곧 아비새로 하여금 암몬군을 공략케 할 뿐 아니라 저들이 아람군을 도와 요압 자신의 용사들을 협공하는 것을 차단케 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다.

성 경: [삼하10:11]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요압의 승리]

(주); 가로되...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 적은 병사로 많은 적군을 물리치기 위한 요압의 작전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즉, 그는 적의 협공이 있기 전에 아비새로 하여금 암몬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도록 해놓고 자신은 일군(一軍)을 이끌고 메드바 들에 있는 아람 동맹군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적의 양군의 결집력(結集力) 또는 협력 관계를 깨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자신의 선제 공격이 실패할 경우에는 아비새가 암몬군을 포기하고 자기에게로 달려오고, 다행히도 그 선제 공격이 성공하면 자신이 아비새에게 달려가기로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압의 작전은 많은 수의 동맹군을 무찌르는 데 가장 이상적인 작전이었음은 분명하나 그만큼 자신과 그 군대에게 미치는 위험이 컸던 것 또한 사실이다.

성 경: [삼하10:12]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요압의 승리]

(주); 너는 담대하라 - 암몬.아람군과의 싸움에 임하기에 앞서 요압이 일사 각오의 정신으로 아비새의 용기를 돋우는 장면이다. 이러한 요압의 각오는 단지 돈을 받고 전쟁에 임한 아람 군대의 정신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주); 하나님의 성읍 - 요압은 이스라엘의 성읍을 이처럼 '하나님의 성읍'(the cities of our God)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요압의 발언은 이스라엘의 모든 기업(基業)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그들에게 주신 것(창 12:6, 7;13:14-17;수 1:15)이라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Keil, Lange). 따라서 그의 이러한 발언 속에는 이스라엘의 한치의 땅도 적들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요압은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위한 명분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 혹자는 요압의 이와 같은 말을 해석하기를 '만약 하나님께서 적에게 승리를 준다해도 우리는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하였다(Clericus, Lange).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바로 앞에서 요압이 한 치의 땅도 빼앗길 수 없다는 의도로 '하나님의 성읍'이라고 발언한 사실과 배치된다. 오히려 이 말은 하나님의 성읍이 이방신을 섬기는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므로 그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말이다. 즉 요압의 이말은 이스라엘의 세(勢)의 불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읍은 하나님께서 지키시리라는 확신을 나타낸 말인 것이다(삼상 17:47).

성 경: [삼하10:13]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요압의 승리]

(주);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하고 - 아람 동맹군이 요압 앞에서 도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할 때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저들은 전쟁을 해야하는 분명한 명분도 없이 단지 돈에 팔려왔기 때문이다(Grotius, Patrick). (2) 또한 저들은 여러 나라가 동맹한 군대로서(6절) 서로 앞장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그뿐 아니라 저들은 요압의 사기 충천한 군대를 보고선 이미 전의(戰意)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전쟁은 비록 소수의 정예 부대와 다수의 싸움이긴 하였지만 소수의 정예 부대가 보기좋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0:14]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요압의 승리]

(주); 아람 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도망하여 - 당시 아람 군대는 병거와 마병을 갖춘 군대로서(18절 ; 대상 19:6, 7) 수리아 지역의 주도권을 다툴 정도였으니 암몬군대보다 훨씬 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아람군이 다윗 앞에서 패퇴(敗退)한 것을 본 암몬군 역시 다윗을 두려워하여 성 안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돈과 사람을 의지한 군대가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군 앞에서 아무 힘도 사용하지 못하고 물러난 사건이었다 하겠다.

(주); 요압이...돌아오니라 - 요압이 다윗의 특사를 모욕한 암몬(4절)의 랍바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이처럼 회군(回軍)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랍바 성은 견고한 요새였으므로 소수 정예 부대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3절). 11:1 주석 참조. (2)또한 이때는 전쟁하기 어려운 겨울이나 혹은 우기(雨期)였기 때문일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Keil). 이러한 추측은 11:1의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라는 말에 의해 더욱 신빙성이 높다.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0:16]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주); 하닷에셀이...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 하닷에셀(Hadadezer)은 그 당시 요단 동편과 유브라데 강 유역 등 수리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던 소바 아람국의 왕이다. 8:3 주석 참조.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아람 동맹군의 패배(13, 14절)를 다른 어떠한 아람 왕들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기고선 그의 지배하에 있는 아람국의 군사들을 대규모로 소집하였을 것이다.

(주); 헬람 - 아람 동맹군의 재집결지인 헬람(Helam)은 지난번 그들이 요압군에게 패주했던 메드바(Medeba) 들(8절 주석 참조)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동쪽으로 약 48km 지점인 오늘날의 알마(Alma)로 알려지고 있다(Ewald, Lange, Thenius).

성 경: [삼하10:17]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주);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 이는 지난번 전쟁에서 다윗 왕이 요압의 정예 부대만을 보낸 것과는 달리(7절) 이번에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병사들을 소집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 왕이 이번에는 총력전으로 나선 것은 재차 이스라엘에 도전해 온 아람군이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새로이 정신적, 군사적인 무장(武裝)을 강화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적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다윗 왕의 신중성과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곧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물론(12절), 인간으로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마 10:16).

성 경: [삼하10:18]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주); 사만을 죽이고 - 아람 동맹군의 전사자(戰死者) 수를 보여 주는 이 통계는 제 일차로 아람 동맹군의 사망 숫자 이만(8:4;대상 18:4)과 후에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 다메섹 아람의 지원군 이만 이천을 합산한 수이다(8:5;대상 18:5). 그런데 여기서 이천 명의 오차가 생기는 것은 아마도 계수(計數)의 착오이거나 붙잡힌 아람 군사 얼마가 도주하므로 생긴 오차일 것이다(Lange).

(주);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 고대 전쟁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16절)의 전사는 곧 그 전쟁의 패배를 의미한다(삼상 17:51-53). 따라서 본절은 아람군 전사자의 통계와 더불어 아람 동맹군의 완전한 참패(慘敗)를 보여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0:19]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 - 이들은 하닷에셀을 지원하여 다윗을 대적했던 아람 소국의 왕들을 의미한다(16절).

(주);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 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승자와 패자 간에 맺는 종주권 계약(宗主權契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때에 패자는 승자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8:6 주석 참조. 아무튼 이처럼 이스라엘이 암몬군과 아람군에게 연전 연승(連戰連勝)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7:11)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성 경: [삼하11:1]

(주);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 때가 되매 - 여기서 '해가 돌아서'란 말은 유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1월(아빕월). 곧 태양력으로 3, 4월이 다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Living Bible은 이를 '다음해 봄이 되어'(in the spring of the following year)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팔레스틴에서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쟁의 시기가 아니나, 봄은 건기(乾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쟁에 적합한 시기이다(성경 총론, '팔레스틴의 기후' 참조). 따라서 지난번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승기(勝機)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계절 문제로 회군하였으나, 이제 다시 건기인 봄이 돌아와 제 2차 출정이 가능해진 것이다(10:14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여기서 '왕들의 출전할 때'란 말은 곧 팔레스틴의 봄, 다시 말해서 전쟁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재차 의미하는 말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Keil, Lange, Josephus,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주); 신복 - 이에 해당하는 '에베드'(* )는 본래 '노예', '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9:2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군주(君主)를 위해 마치 종과 같이 헌신하는 왕의 측근들, 또는 군사적인 관료들(2:12,13;10:1;출5:21;7:10;삼상 8:14, 15;18:5, 22. 23)을 의미한다(Lang, Keil & Delitzch,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은 암몬의 랍바 성이 험란한 요새지임을 알고 요압과 더불어 모략에 뛰어난 군사관료들을 파견한 것이다(Keil).

(주); 온 이스라엘 군대 - 원문에는 군대라는 말이 없고 단지 '온 이스라엘'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이 말은 국가의 거사(擧事)를 위해 온 지파에서 소집한 이스라엘의 총병력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5:1;8:15).

(주); 암몬 자손을 멸하고 에워쌌고 - 10:6-14의 랍바 전투에 이어 랍바 제 2전투가 재개된 것을 가리킨다. 이 전세(戰勢)는 이스라엘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여, 이제 적의 수도인 랍바 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12:27-31).

(주); 랍바 - '큰 성'이란 뜻으로 암몬 족속의 수도이다(10:3 주석 참조). 얍복 강, 곧 현재의 와디 암만(Wady Amman)의 상류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데, 요단 강에서부터 동쪽으로 약 37Km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한편 이 도시는 두 견고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첫째는 물들의 성이다(12:27). 즉, 이 성은 이 도시에 물을 공급해 주는 큰 수원지(水源池)를 지키던 성이다. 다음으로 둘째는 왕성(王城)이다(12:26). 이는 와디 암만의 북쪽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고원 지대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매우 가파른 곳으로서 그야말로 난공 불락의 요새를 이루었다. 한편 이같은 랍바(Rabbah)는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가 되어 있는데, 곧 현재의 암만(Amman)이다(Wycliffe).

(주);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 온 이스라엘 군대가 랍바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장면으로, 다윗이 범죄하게 된 배경을 제공해 준다. 즉 전시(戰時) 상황이라는 비상 사태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예루살렘 궁에 거하던 다윗은 영적 긴장이 플려 결국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모살(謀殺)하는 엄청난 죄악에 빠지고 마는 곳이다(2-27절).

성 경: [삼하11:2]

(주);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사실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물론 이러한 낮잠은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풍습이긴 하였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국가적으로 초긴장 상태에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자세이다. 즉 다윗은 낮잠을 잘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마땅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다윗은 영적으로 나태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이처럼 나태하고 게으른 자의 낮잠은 비극을 부르기 마련이다(4:5,6). 한편, 여기서 '저녁때'는 늦은 오후를 의미한다(삼상30:17). 랑게(Lange)는 대략 이때를 오후 3시경부터 해가 완전히 어두워진 때까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주);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 잠에서 깬 다윗이 저녁녘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기 위해 지붕 위를 산책한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는 다윗의 일상적인 습관이었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그 곳에서 보니 - 당시 다윗 궁은 높은 시온 산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인근 주민의 집 안마당을 잘 내려다 볼 수 있었다. 5:7 주석 참조.

(주);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 혹자는 밧세바의 이러한 목욕 행위가 다윗 왕을 유혹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주거 형태를 살펴볼 때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안마당의 우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럴 경우 지붕 위에서 이웃집을 내려다 보는 행위는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Keil, Patrick Philippson). 대하 33:1-11 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따라서 다윗 왕의 간음 사건(3, 4절)은 밧세바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한 다윗 자신의 범죄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11:3]

(주); 다윗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 다윗이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음을 역력히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 즉 처음에 시각적으로 미혹받은 다윗(2절)은 자제력을 상실한 채 밧세바의 신분을 알아보았으며, 마침내는 정욕에 굴복하여 간음을 자행하고 만 것이다(4절). 이는 곧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약 1:15)는 말씀에 가장 부합되는 경우인 바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함'(살전 5:22)을 절감(切感)케 해준다.

(주); 엘리암의 딸이요 - 같은 내용의 기록인 대상 3:5에서는 '암미엘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엘리암(Eliam)과 암미엘(Ammiel)은 모두 '하나님'이란 뜻의 '엘'(* )과 '백성'이란 뜻의 '암'(* )이 합성된 칭호로서,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즉 이는 모두 '하나님은 동족이심'이란 뜻으로 결국 같은 이름인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Wycliffe). 한편, 23:34절에서 엘리암은 아히도벨(Ahithophel)의 아들로 소개되었는데, 아히도벨은 한때 다윗의 모사로 중용(重用)되었다가 압살롬의 난 때에 다윗을 배반한 자의 이름과 똑같다(15:12;16:20-23). 따라서 혹자는 이둘을 동일 인물로 보고 밧세바의 조부(祖父)인 아히도벨이 본장에 기록된 다윗 와의 파렴치한 행동 때문에 훗날 압살롬의 난에서 다윗을 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Lange). 만일 밧세바의 조부인 아히도벨과 다윗의 모사(謀士)인 아히도벨이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면 이 같은 주장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주); 헷 사람 우리아 - 그는 다윗의 삼십 칠 인 용사들 중 하나였다(23:39). 그의 이름 우리아(Uriah)는 '여호와는 빛이시다'라는 뜻으로, 우리는 그의 이름 가운데서 그가 비록 이방인인 헷족속이긴 하나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한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헷 족속(Hittites)은 원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의 후손으로(창10:15)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이다 수 9:1, 2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참조

성 경: [삼하11:4]

(주); 다윗이 데려오게 하고 -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한 가정과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극형인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범죄였다(출 20:17;레 20:10). 따라서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기는 죄였임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 일어나는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결국 이렇게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약1:15;렘5:8). 한편, 혹자들은 다윗 왕이 이러한 죄를 쉽게 저지를 수 있었던 하나의 원인으로 밧세바의 방조(幇助)를 지적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즉, 본절에는 다윗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밧세바가 반항했다고 하는 아무런 언급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은 다윗에게 있다하더라도 한 남편의 아내(3절)로서 그녀의 태도만은 결코 면책(免責)받을 수없는 것이다(Wycliffe, Keil).

(주);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 히브리 성격의 원문에 따르면 밧세바(Bath-sheba)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케 한 일은 다윗과 동침한 후에 행한 것으로 나와있다. 따라서 본절의 정확한 번역은 '저가 그녀와 동침한 후 그녀는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이다(RSV. NIV, NASB, Jerusalem Bible). 한편 여기서 밧세바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는 말은 남녀가 서로 동침한 후에는 그 몸을 씻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례를 그대로 지킨 것을 의미한다(레 15:18). 이로 보아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하고서도 그에 대한 참된 회개는 결여한 채 의식적(儀式的)정결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11:5]

(주); 여인이 잉태하매 - 마침내 다윗이 뿌린 죄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처럼 인간이 범한 죄는 자생력(自生力)과 번식력이 강하여 반드시 그 열매를 맺고 만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육체적 , 정신적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 다윗에게 고하여 -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만 했다(레 20:10). 따라서 우리아는 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아내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이 틀림 없다. 그러므로 이에 겁이 난 밧세바는 왕의 해결책을 기대하며 그에게 자신이 잉태한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성 경: [삼하11:6]

(주);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 밧세바가 잉태한 자신의 아이를 마치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다윗의 간계(奸計)의 첫 단계이다. 즉 다윗은 우리아와 밧세바를 동침케 함으로서 밧세바의 잉태가 우리아로 말미암은 것처럼 위장하려고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아를 급히 소환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다윗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서 완전히 떠났음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하11:7]

(주); 다윗이 어떠한 것을 묻고 - 자신의 속사정을 위장하기 위한 다윗의 거짓된 물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점점 더 죄악을 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처음에 탐욕죄(출 20:17)로부터 시작하여 간음죄(출 20:14)를 범한 그는, 이제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거짓죄(출 20:16)를 또하나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1:8]

(주); 발을 씻으라 - 이는 히브리인의 관용적 표현으로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다. 즉, 사막 지역인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하루의 일이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무엇보다 먼저 발을 씻고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창 18:4;눅 7:44). 그렇지만 여기서 다윗 와의 이러한 배려는 우리아로 하여금 밧세바와 동침케 하려는 간교한 음모에 다름 아니다.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의 발(feet)은 남성의 성기(性器)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Hertzberg). 그러나 그것은 우리아와 밧세바와의 동침을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다윗이 자신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는 그같은 말을 하였을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

(주);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 여기서 '식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사트'(* )는 '선사하다', '바치다'는 의미의 '나사'(* )에서 파생된 말로서 선물(膳物)을 의미한다(창 43:34;에 2:18). 따라서 다윗이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는 물론 이와 같이 선물까지 수여한 것은 전쟁 영웅에게 베푸는 예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우리아에게 영웅 대접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우리아를 갑자기 소환한 것인 양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다.

성 경: [삼하11:9]

(주); 왕궁 문에서 잔지라 - 여기서 '왕궁문'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왕궁 문을 지키던 시위병들이 거처하던 숙소(왕상 14:27,28)를 의미한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즉 우리아는 다윗 왕의 호의를 사양하고 왕궁의 시위병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아가 이와 같이 행한 이유는 아마 그의 충성심에서였을 것이다. 즉 그는 자기 혼자서만 집에서 편안히 쉬는 것을 사양할 정도로 자기 직무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다윗과의 대화 가운데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11절). 한편 혹자는 이리하여 왕궁 시위병들과 함께 잠을 잔 우리아는, 그들로부터 밧세바가 다윗의 총애를 받고 궁전에 출입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는 우리아가 결국 밧세바의 부정(不貞)을 알게 되었다는 주장이다(Matthew Henry). 그러나 다윗에 대한 우리아의 계속된 이러한 주장은 단지 있음직한 추측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성 경: [삼하11:10]

(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아니하였나이다 - 다윗이 사람을 시켜 우리아를 미행케 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Lange). 아니면 다윗의 선물을 우리아의 집에 배달해 주었던 자(8절)가 우리아의 부재(不在)사실을 확인하고 다윗에게 일러주었을런지도 모른다.

성 경: [삼하11:11]

(주); 언약궤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가 어찌 자리이까 -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전쟁이 곧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종종 언약궤를 동빤하여 전쟁터에 나아갔다(민10:35, 36;14:44;수 3:6).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참조. 따라서 우리아의 이와 같은 진술은 '하나님께서도 현재 싸우고 계시거늘 어찌 나같은 존재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의 말이다. 아마도 우리아의 이러한 충성된 대답은 평소에는 다윗 왕을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을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범죄한 다윗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 내 주 요압과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 이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신앙심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상관에 대한 우리아의 충성심과 동료에 대한 사랑, 따스한 인간애가 담겨있는 진솔(眞率)한 말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말을 듣는 중에도 양심에 가책을 받고 회개할 수 있어야 했다. 즉 자신이 우리아와 같은 충직한 신하의 아내를 탐한 것이 얼마나 괴악한 죄악인지를 깨닫고 이제라도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죄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한 다윗은 그러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우리아와 밧세바를 동침시키려는 계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급기야 그토록 충성스런 우리아를 살해까지 하고 만다(12-25절). 이는 기어이 파괴적인 결말을 가져 오고야 마는 죄의 특성(약 1:15)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주);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 여기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은 사실 다윗의 전인격과 존재를 가리키는 동일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아가 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여 맹세한 것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다윗 왕에게 확고하게 보이고자 함이었음이 분명하다(Lange, Baker Commentary). 한편, 여기서 우리아가 '여호와의 사심'이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왕의 사심'으로 맹세한 것은 그당시 히브리인들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즉 히브리인들은 대개 자신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사심'이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 했으나(4:9;12:5;삿 8:19;룻 3:13;삼상 14:39;왕하 2:2, 6), 자신과 동등한 계층이나 자신보다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던 것이다(삼상2:26;17:55;20:3;왕하2:2,4,6;4:30).

성 경: [삼하11:12]

(주); 오늘도 여기 있으라 이튿날 - 본절로부터 14절을 읽어 보면, 다윗이 '내일은내가 너를 보내리라'한 본절의 약속을 어기고 우리아를 하루 더 묵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하반부에 언급된 '이튿날'에 다윗이 우리아를 궁정으로 불러들여 저녁까지 술레 취하게 하는 장면(13절)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우리아를 되돌려 보낸것처럼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나 실상 13절의기록은 본절의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그리고 14절은 본절의 '이튿날'에 있은 일에 대한 설명이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한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중복적(重複的)인 표현을 곧잘 사용한다. 즉, 그들은 처음 구절에서는 한사건에 대해 간결히 진술한 다음 구절에서 그 사건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는 점진적,중복적 표현법을 즐겨 사용하였다(4:7 주석 참조).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13, 14절은 본절의 간결한 기술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 구절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본절의 '이튿날'이란 말 다음에 '우리아가 예루살렘을 떠나 전쟁터로 되돌아가니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 경: [삼하11:13]

(주); 취하게 하니 - 다윗이 사람의 정신을 혼란케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술의 힘을 빌어 우리아의 성적(性的) 충동을 유발시키려 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윗의 비열한 행동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껏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다윗(1:14-16;4:5-12;6:21;삼상24:4-7;26:6-12) 조차도 순간적으로 가장 비열하게 만드는 죄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

성 경: [삼하11:14]

(주); 다윗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부쳐 - 우리아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편지(15절)를 자신이 배달하리라고는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역이용, 우리아를 죽이는 도구를 이용하였다. 이는 사전에 치밀히 계산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교묘함이었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다윗의 배가(倍加)된 가증스러움과 사악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 p. 498).

성 경: [삼하11:15]

(주); 너희가 우리아를 죽게 하라 -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23:39). 따라서 그가 일단 싸움에 임하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윗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전쟁의 선봉장(先鋒將)이 되게 하여 전사(戰死)당하도록 꾀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일단 우리아를 제거하기만 하면 자신의 부정 행위(4절)가 영원히 감추어지고, 또한 밧세바까지도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을 것(27절)이라는 생각 하에 이같은 죄악을 저질렀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 p.49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반드시 적발해 내시므로(합 1:13) 다윗의 죄악 역시 결국 낱낱이 드러나고 말지 않았는가(12:1-23)!

성 경: [삼하11:16]

(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 여기서 '살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 )는 본래 '방어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성을 포위하여 경계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말이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이 용어는 대개 '관찰하다', '유의하여 감시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삼상1:12;시 59:10;사42:20;창 2;15).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분부를 받은 요압(15절)이 우리아를 적군의 손에 주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그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주); 용사들의 있는 줄을 아는 그곳에 - 여기서 '용사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네쉐-하일'(*, )은 '힘센 남자들'이란 의미이다. 이는 지금 랍바 성 내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는 거민들과은 구별되는 전쟁에 능한 용사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랍바 성 안에서 이스라엘을 방어하고 있는 자들이 모두 다 암몬의 특별한 용사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마도 추측컨대 군사 전략상 성의 견고한 곳에는 일반 거민들이, 성의 취약한 곳에는 암몬의 용사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아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 )는 사변적(思辨的)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출 14:4;삿15:11;삼상29:9).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그동안 적의 동태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요압이 가장 위험한 지역에 우리아를 배치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성 경: [삼하11:17]

(주);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 여기서 '다윗의 신복'이란 다윗의 군사 고문들을 의미한다(1절 주석 참조). 따라서 이들의 죽음은 이스라엘 군의 막대한 손실이었다. 즉 우리아 한 사람을 죽이려던 다윗은 자신의 불의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결국 유능한 많은 신하들을 잃고 만 것이다.

(주);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 요압의 맹목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은 비극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요압의 비정함을 볼 수 있다. 즉, 우리아는 다윗의 서른 일곱 용사 중 한 명이며 요압의 직속 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우리아가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권력에 아부하는 자세로 다윗의 명령만을 준행했던 것이다. 사실, 만일에 요압에게 진정한 충성심과 또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최소한 아무런 죄없는 우리아를 위해 다윗에게 탄원 정도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자기의 출세를 위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하였으며(10:12),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현실 타협적 행동을 한 것이다(Wycliffe, Matthew Henry).

성 경: [삼하11:18,19]

(주); 요압이 그 사자에게 명하여 가로되 - 요압은 다윗에게 전쟁의 결과를 보고할 사자(使者)을 불러 전에 없던 특별한 명령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번 전쟁에서 예상 외로 많은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17절). 즉 이로 인해 왕의 문책을 두려워한 요압(20절)은 이번의 패배를 무마시키는 방편으로 우리아의 죽음을 보고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21절).

성 경: [삼하11:20,21]

(주); 여룹벳세 - 이는 기드온(Gideon)의 별명이다. 본래 기드온의 별명은 여룹바알(Jerubbaal)이었으나(삿 8:35), 후대에 '바알'이란 명칭이 이방신의 이름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그것이 베셋(besheth)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2:8 주석 참조.

(주); 아비멜렉 - 기드온이 세겜의 첩을 통해 낳은 이들이다(삿8:31). 그는 부친의 사후(死後) 자기 형제 70인을 모두 죽이고 므낫세 족속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반발한 세겜 사람들은 '가알'(Gaal)을 지도자로 하여 아비멜렉(Abimelech)을 대항하였으나, 아비멜렉은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성을 헐며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 천 명을 불살라 죽였다(삿 9:46-49). 그리고 이러한 여파를 몰아 아비멜렉은 데메스마저 치려 하였는데, 그때 도리어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다(삿 9:50-57). 그러므로 아비멜렉의 이와같은 역사는 전쟁에 능한 다윗 왕과 요압 이외에도 많은 군지휘관들에게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전술을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수세(守勢)에 몰린 적의 성에 가까이 가는 것은 우발적인 죽음을 초래하기 쉬운 위험스런 일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대 내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다윗 뿐만 아니라 많은 지휘관들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알려졌을 것이다(Lange).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익숙해 있던 요압이 암몬의 랍바 성 근처에서 이스라엘의 귀중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고 하는 사실은 다윗 왕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의 진노가 있을 것을 예상한 요압은 전령(傳令)에게 보고(報告) 내용을 특별히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아비멜렉의 역사를 요압이 언급한 사실에 대해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역사들을 피력하고 있다. 즉 (1)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사사기의 역사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이라는 견해(Lange)와 (2) 아마도 사사기가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이미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사사기에 '여부스족(Jebusites)이 아직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삿1:21), 사사기는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여부스족을 몰아내기(5:6-9) 이전에 기록되었음이 확실하다. 다라서 아비멜렉의 역사는 그 당시 이미 성문화(成文化)된 사사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주);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 이는 성 가까이에서 많은 인재를 잃은 요압(17절)이 자기의 실수를 무마시키기 위한 자구책(自救策)이었다. 즉, 이 말은 이번의 실수가 다윗 와의 명령(15절)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인 불상사(不祥事)였다는 요압의 그럴듯한 해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으로는 요압은 병법에 능한 자였으나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성 밑 가까이에 군대를 투입하였던 것이다(16절).

성 경: [삼하11:22,23]

(주);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승하여 - 이는 수세(守勢)에 몰리고 있던 암몬 사람들 중 힘센 용사들(* , 아네쉐 하일)이 랍바성을 포위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중 가장 취약한 지역을 골라 집중적으로 공격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곳은 요압이 의도적으로 우리아를 배치한 선진(先陣)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우리아의 군사들은 성에서 후퇴하여 들로 나올 수 밖에 없었으며, 다른 진의 군사들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다시금 성문 어귀까지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1:24]

(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 여기서 우리아를 가리켜 '왕의 종'이라 함은 그가 다윗에게 마치 노예와 같이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한 신하였음(11절)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다윗은 우리아의 전사(戰死)보고를 받고선 속으로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쾌재(快哉)를 불렀을 것이다. 즉 다윗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불의한 죄악을 감추려 한 계략(15절)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자, 우리아가 자신의 충직한 신하였다는 사실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이는 우리아의 충성과 대비되는 다윗의 폭정(暴政), 배은(背恩)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성 경: [삼하11:25]

(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 신하들의 전사(戰死)소식에 대하여 다윗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반응은 평상시에 보여 주던 그의 자애로운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1:12;3:31, 32;18:33). 이는 그가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도 쾌재를 감추기 위해 태연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이다(Lange).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다윗이 유능하고 충성스러웠던 신하들의 아까운 죽음(17, 24절) 보다도 자신의 은밀한 죄를 감추기 위해 오직 한 사람 우리아의 죽음 여부에만 온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자신의 한 번 실수(4절)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고력과 판단력을 잃음은 물론 그 심령 또한 완전히 메말라 있는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성 경: [삼하11:26]

(주); 우리아의 처 - 이처럼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부정한 관계를 나누었음(4절)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여인의 이름을 들먹이지 아니하던 히브리인들의 관습때문이다 (30 억울한 죽임을 당한 우리아에 대하여 조의(弔意)를 표하기 위함이다.

(주); 호곡하니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파드'(* )는 '죽은 자를 위해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14:13;창23:2;렘4:8;슥12:10). 한편 히브리인들은 대개 죽은 자를 위해 7일간 호곡하였는데(창 50:10;대상 10:12; 삿 16:24), 특별한 인물이 죽었을 때는 30일간 호곡하기도 하였다(민 20:12;신 34:8). 따라서 밧세바는 자기 남편 우리아를 위해 보통의 경우처럼 7일간 호곡하였을 것이다.

성 경: [삼하11:27]

(주); 그 장사를 마치매 데려오니 - 다윗왕은 우리아의 장례식을 마치자 곧바로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왔다. 다윗의 이러한 처사는 밧세바의 임신을 백성들로부터 은폐시키기 위한 재빠른 행동이었음에 분명하다. 즉 다윗은 밧세바가 아이(5절)를 낳기 전에 얼른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 한 것이다(Wycliffe, Keil & Delitzsch).

(주); 저가 아들을 낳으니라 - 이처럼 밧세바가 낳은 아들은 다윗과의 부정한 관계에서 출생한 죄악의 씨앗이다(4, 5절). 따라서 12장에 의거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을 징치(懲治)하시는 차원에서 그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아이외에도 밧세바는 이후 다윗에게서 네명의 아들을 더 낳았는데 곧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이다(대상 3:5). 5:13-15 주석 도표 참조.

(주); 다윗의 소위가 악하였더라 - 여기서 '악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다음과 같이 서너 가지 뜻을 지닌다. 즉 (1)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불의한 행동(룻 1:21;왕상 17:20), (2)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부도덕한 행동(사31:2;습1:12), (3)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습관적인 행동(창19:9;렘4:22;13:23;잠4:16;17:4)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상의 사실에 의거할 때 이 말은 반드시 보응이 뒤따르는 극악한 죄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 아무튼 다윗의 소위(所爲), 즉 본장 전체에 걸쳐 다윗이 계획하고 실행했던 모든 행동이 악하다고 결론지어진 것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정욕에 사로잡혔을 때 결국 여호와 앞에서 악인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이를 경고삼아 지극히 하찮은 안목의 정욕(요일 2:16)에 미혹되어 다윗과 같은 엄청난 죄악에 빠져들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욥 31:1;시119:9).

성 경: [삼하12:1]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비유]

(주);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 때는 다윗이 범죄한 이후(11:4, 5) 약 1년 정도는 되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해산한 때였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윗이 범죄한 즉시 견책하지 않으시고 약 1년 후에 견책(譴責)하신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다윗으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은 영적인 고통의 실상을 경험케 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시 32:3, 4). (2) 다윗의 완악해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지기를 기다리시기 위함이다(시 32:5).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께서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겔 34:11, 12). 사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 버려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롬 1:28). 한편 나단(Nathan)은 앞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상의한 적이 있는 선지자이다(7:2). 특히 왕의 권세앞에서도 당당히 진리의 말씀을 외치며 죄악을 지적하는 이 선지자의 용기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명감을 고취시켜 준다(행 4:13-22; 고전 4:1, 2).

(주);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 이는 다윗의 무서운 범죄를 지적하기 위한 나단 선지자의 비유(比喩)이다. 나단이 이처럼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코자 했던 이유는 다음 서너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여 다윗의 완고해짐을 막기 위함이다. (2) 우회적(迂廻的)인 방법을 사용, 다윗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3)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에게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환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비유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죄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한 방법이다(사 5:1; 겔 17:3; 19:2, 3; 24:3; 마 13:3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적절한 비유까지 예비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한편 비유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장 1-14절 강해, '비유'(parable)를 참조하라.

성 경: [삼하12:2]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비유]

(주);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 여기서 '부한 자'는 바로 다윗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과 소'는 다윗의 수많은 처첩(妻妾)을 의미한다(3:2-5; 5:13-16; 대상 3:1-9). 나단이 이러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다윗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치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점(3, 4, 9절; 11:2-5, 27)이다 (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500).

성 경: [삼하12:3]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비유]

(주); 가난한 자는...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이라 - 여기서 '사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는 '한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 말에는 개인의 소유 개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창 4:1; 잠 4:7; 15:32; 16:16; 19:8; 룻 4:9, 10). 따라서 이 말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한 가난한 사람의 절대 소유임을 강조해 준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의 '작은 암양 새끼'에 대하여 단순한 재산의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였다(Lange).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은 가축을 그들의 부의 척도로 삼고 있었다는 지론(持論)이다(창 30:25-43; 민 32:1; 욥 1:3). 그러나 여기서 '작은 암양 새끼'는 단순한 재산 이상으로 주인의 온갖 사랑을 받고 재롱을 떠는 애완용 가축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그 근거로서 우리는 근동 지방에서는 지금도 애완용 양을 키우는 관습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Keil).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1) 이 '작은 암양 새끼'는 다른 사람이 앗아갈 수 없는 오직 '가난한 자'의 고유 소유였다는 점이다. (2) 또한 그것은 가난한 자가 극진히 사랑하고 길렀던 애완용 양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 밧세바(11:3)에 대한 우리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딸처럼 되었거늘 - 이는 곧 가난한 자에게 있던 암양 새끼 한 마리가 그에게 있어선 단순한 애완용 동물의 차원을 넘어 그 자신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 담겨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주); 자라며... 먹으며... 마시며... 누우므로 - 암양 새끼와 가난한 주인 간의 동고 동락(同苦同樂) 관계를 묘사한 말로서 곧 우리아와 밧세바 간의 애정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우리아의 가정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우리아의 가정이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삼하12:4]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비유]

(주); 행인... 행인... 자기에게 온 사람 - 혹자는 이와 같이 열거된 동의어(同義語)들이 인간의 탐심의 발전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Wordsworth). 즉, 처음의 '행인'(*, 헬렉크)은 탐심의 초기 단계로서 잠깐 머물다 떠나는 단계이며, 둘째의 '행인'(*, 오레아흐)은 보다 진보된 단계로서 상당히 오래 머무는 단계이며, 셋째의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 이쉬 하바 엘라우)은 완전히 탐심이 그 사람 속에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일련의 동의어들은 어디까지나 같은 의미를 수사학적(修辭學的)으로 다양하게 기술한 것일 뿐이다(Lange, Keil), 왜냐하면 본절의 초점은 부자가 한 행인을 위해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은 강탈 죄를 부각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인간의 탐심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행인'은 사막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행객을 가리킨다. 히브리 관습상 이들은 어느 집에 가서든 하룻밤 거처할 자리와 식사를 요청할 수 있었는데 그 경우 집주인은 저들의 요구에 응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본절에서 부자가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는 대신 오히려 가난한 자의 애지 중지하는 '암양 새끼'를 빼앗았다는 사실은 그의 소행이 마땅히 가중 처벌(加重處罰)에 해당하는 악독한 범행임을 보여 준다.

성 경: [삼하12:5]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비유]

(주); 다윗이... 크게 노하여 - 나단의 비유가 다윗의 잠자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히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만 민감히 반응한 다윗의 모순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마 7:3, 4).

(주);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11:11 주석 참조.

(주);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간음(11:4)과 살인(11:15)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레 20:10; 24:17)을 선고한 셈이다.

성 경: [삼하12:6]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비유]

(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 사 배는 도둑에 대하여 율법이 규정한 배상 기준이다(출 21:37; 22:1). 지금까지 율법을 무시하고 범행을 저지른 다윗이 율법의 기준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큰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적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된다.

성 경: [삼하12:7]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책망과 심판 선언]

(주); 당신이 그 사람이라 - 지금까지의 나단의 비유를 남의 일로만 알고 정죄하던 다윗의 무딘 양심을 결정적으로 일깨워 주는 나단 선지자의 신적(神的) 선포이다. 즉, 나단은 자신의 사사로운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엄위한 권위로써 이제 범죄한 다윗을 정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나단 선지자의 직고(直告)를 통하여 참된 선지자의 사명과 오늘날 교회의 선지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사명의 배후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지 그렇지 못할 때에는 남을 무조건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마 18:21, 22).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구원하고 - 여기서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금껏 다윗에게 베푸셨던 은총에 대한 언급이다. 즉 본절과 8절은 어떠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만족하게 지낼 수 있었던 다윗의 은혜로운 형편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강탈한 행위(11장)는 정상 참작조차 할 수 없는 악랄한 범죄였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다윗의 범죄는 친히 풍성한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그 은혜의 하나님을 배반한 배은 망덕한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삼하12:8]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책망과 심판 선언]

(주);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이트' (*)는 영구적인 거처, 가족이란 의미 이외에도 '나라'를 상징하는 말이다. 본절에서도 이 말은 나라를 의미하는바 본절은 한때 다윗의 주인이었던 사울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옮겨 주신것을 가리킨다(삼상 13:13, 14; 15:28, 29). 7:11 주석 참조.

(주);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 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정권(政權)이 교체될 때 정복 군주가 이전 군주의 후궁들을 모두 거느렸던 당시의 관습을 언급한 말이다. 3:7 주석 참조.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실을 의미할 뿐(2:1-4; 5:1-5) 다윗이 실제로 사울왕의 전처들을 차지했음을 입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에 따르면(3:7; 삼상 14:50). 사울 왕은 본처 한 명과 후첩 한 명만을 거느렸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브넬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주);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더 주었으리라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부족함 없도록 채워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과욕을 부려 범죄한 것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탐욕과 정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하였던 것이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탐욕과 정욕을 경계토록 교훈하고 있음도 바로 이 때문이니, 귀 있는 자는 듣고 마음에 새겨 삼가야 할 것이다(잠 5장; 눅 12:15).

성 경: [삼하12:9]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책망과 심판 선언]

(주);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 다윗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경(輕)히 여겼기에 그에 따를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치 않고 탐욕(11:2, 3)과 간음(11:4), 살인죄(11:15, 17)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신 것(10-12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란 말씀이 정확히 적용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주); 악을 행하였느뇨 - 여기서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하나님의 보응이 반드시 뒤따르는 악독한 죄를 의미한다. 11:27 주석 참조.

(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 여기서 '죽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그' (*)는 흔히 적개심을 품고 누군가를 살해하는 고의적인 행동을 뜻한다(수 10:11; 13:22; 사 10:4; 14:20). 따라서 본절은 암몬 자손의 칼에 의해 우리아가 죽임당하도록 획책한 다윗의 범죄는 왕과 신하 간의 신의(信義)의 관계를 고의적으로 끊어버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보여 준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의 성격에 대하여 이렇게 정확히 규명하신 사실을 통하여 인간의 범죄의 결과 뿐만 아니라 그 범죄의 동기와 원인까지도 간파해 내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통찰력을 재 확인하게 된다(대상 28:9).

성 경: [삼하12:10]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책망과 심판 선언]

(주);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 다윗 당대 뿐 아니라 다윗의 후손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 사건에 휘말려 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고는 훗날 암논의 죽음(13:28, 29), 압살롬의 반란 사건(18:14), 그리고 아도니야의 죽음(왕상 2:24, 25)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 질시하게 된 것도 넓게는 이같은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다윗가의 재앙은 무고한 우리아를 살해한 죄(11:15)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형벌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 경: [삼하12:11]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책망과 심판 선언]

(주);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 여기서의 '재화'(災禍) 역시 다윗의 간음죄에 상응하는 형벌이다. 이에는 암논의 근친 상간(13:1-19), 그로 인한 압살롬의 암논 살해 사건(13:20-29)등을 들 수 있다.

(주);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 이 같은 예고 역시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한 후 이스라엘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한 사건(16:21, 22)으로 인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성 경: [삼하12:12]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나단의 책망과 심판 선언]

(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백주에 이일을 행하리라 - 다윗이 은밀하게 밧세바를 상관하고(11:4) 그 죄악의 열매를 감추려(11:5) 부지런히 애썼듯이(11:6-27) 인간의 모든 범죄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저질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죄악은 도저히 숨겨질 수 없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하감(下鑑)하사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기 때문이다(시 33:13-15). 따라서 인간의 모든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정죄당하고 심판당할 날이 있는데 그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개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전 12:14; 계 20:11-15).

성 경: [삼하12:13]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회개와 나단의 위로]

(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 비록 간단한 한 마디이지만 다윗의 진심이 응결되어 있는 진정한 회개요 자복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인간을 상해(傷害)한 것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9절) 대신(對神) 관계에서의 죄악이었음을 자백한 것이다. 이때 다윗이 지은 회개의 시(詩)가 곧 시 32:51편이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을 참조하라. 아무튼 이러한 다윗의 회개는 참된 회개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바 이제 그 특성을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1)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즉시 회개하였다(Lange). 이는 사울의 경우와 달리 그가 선지자의 대언적(代言的)인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증거이다. (2) 다윗의 회개는 매우 짧았다(Keil). 즉, 그의 회개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삼상 15:15, 20, 21; 시 51:3). (3)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숨김없이 토설(吐說)한 것이었다(시 32:5). 즉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지은 죄악 중 하나만이라도 숨기려 획책치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내어 놓고 사유(赦宥)하심을 간구한 것이다(시 51:3, 9). (4) 다윗의 회개는 겸손한 회개였다(Rust). 즉, 그는 일개 선지자의 찌르는 듯한 말 앞에서 왕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다(시 51:1, 2).

(주);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 여기서 '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르'(*)는 '치우다', '제거하다'란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죄를 거두어 가신 후 본래 죄 없었던 것처럼 여겨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레 20:10; 24:17) 하나님의 이러한 사죄하심은 곧 그의 목숨을 살려 주시는 은총이었다. 따라서 특별히 본절에는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죄는 미워하고 반드시 심판하셔도 회개하는 죄인에게 대해서만은 사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한 특성이다(겔 18:23).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정적(父情的)인 사랑 외에도 다윗 언약(7:4-17)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Keil).

성 경: [삼하12:14]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회개와 나단의 위로]

(주); 여호와의 원수로... 얻게 하였으니 - 이는 다윗의 범죄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의 범죄로서 신정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공적인 성격의 범죄였음을 알려 준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 특징으로 삼는 신정 국가인데(출 19:5, 6; 신 6:1-9) 그 나라의 왕이 율법을 어기므로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훼방거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훼방거리를 없애기 위해 나라의 왕에게도 율법에 따라 공평하게 형벌하신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원수'에 대하여 혹자는 이방인들(Lange), 혹자는 이스라엘 내의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는 꼭 그렇게 보기보다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Keil, Hertzberg).

(주);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 13절의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고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사유(赦宥)해 주신 대신 당신의 공의를 이루며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다윗의 죄의 열매인 '아이'(11:5, 27)를 요구하신 것이다(엡 5:2; 벧전 3:18). 이는 곧 기독교의 대속(代贖)의 진리를 예시해 주는것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사유해 주시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과 같다(히 9장).

성 경: [삼하12:15]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 14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징계가 이제 임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는 보다 광의적(廣義的)으로 이해할 때 10-13절에서 예고된 다윗가의 재난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성 경: [삼하12:16]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다윗이...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 여기서 '안에 들어가서'란 말은 다윗이 성소(sanctuary)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조그마한 골방(마 6:6)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골방에서 7일 동안(18절) 금식 기도를 드린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14, 15절)를 하나님의 은총에 호소하여 살리기 위함이었다(22절). 특히 본절에서 다윗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있었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만을 기다린 애절한 형편을 잘 보여 준다.

성 경: [삼하12:17]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그 집의 늙은 자들 - 이에 대해 혹자는 이들이 다윗의 숙부들과 나이 많은 형들이었다고 주장한다(Ewald). 그러나 이는 확실한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늙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켄'(*)은 성경에서 '장로'(창 50:7; 삼상 4:3; 왕상 8:1, 3)로도 번역된 말로서 '가장 나이 많고 신뢰받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4:2).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 중 다윗에게 가장 신뢰받는 원로급(元老級)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Clerius, Keil).

성 경: [삼하12:18]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 '훼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 라아' (*)는 직역하면, '악을 행하다'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다윗 왕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Lange),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까지도 의미한다(Keil, Hertberg).

성 경: [삼하12:19,20]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먹은지라 - 다윗의 신복들의 염려(17, 18절)와는 정반대로 다윗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도 없이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윗 왕의 의외적인 행동은 학자들간에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1) 혹자는 다윗왕이 애초부터 아이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윗 왕이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 본장의 분명한 기록과 대치된다(16, 22절). (2) 또한 혹자는 다윗 왕이 그의 불행을 불굴의 의지로 딛고 일어선 것이라고 해석한다(Hertzberg, Schulz, Buddle). 그러나 이 해석은 다윗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식음(食飮)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 매달린 사실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3) 다윗 왕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겸손하게 그대로 받아들인 신앙적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Lange). 즉, 다윗은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만큼 죽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본장의 기록과 일치할 뿐더러(22, 23절)이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죽은 아이 대신 솔로몬을 허락하신 사실과도 부합되므로(24, 25절)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삼하12:21,22]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여호와께서... 살려 주실는지 - 다윗이 지금껏 금식 기도한 것(16, 17절)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좀더 정확하게는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뜻(14절)을 돌이키고자 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아이(15절)를 보고선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픔에 젖어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2:23]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밧세바의 초생자(初生子)의 죽음]

(주); 시방은 죽었으니 -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므로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처럼 비록 범죄하였지만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자세는 매우 모범적이다. 즉 다윗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므로 이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욥 1:21; 시 36:9; 42:8).

(주);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아니하리라 - 이는 자신의 아이가 이제 죽어 행복한 곳에 갔을 것이라고 하는 다윗의 확신이 아니다. 대신 이는 단지 아이가 죽은 자들의 거처인 스올(Sheol)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다윗 자신은 생전에 아이를 만날 수 없고 자신의 사후에나 만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피력한 말이다(Lange, Rust, Keil, Clericus). 즉,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가 거주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발전되지 못한 까닭에 형성된 것이었다. 삼상 2:1-10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陰部) 개념', 본장 15-25절 강해, '구약의 사후 개념 - 음부' 참조.

성 경: [삼하12:24]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솔로몬의 출생]

(주); 그 처 밧세바 - 본서 기자는 이제 밧세바(Bath-sheba)를 더 이상 '우리아의 처'(15절; 11:26)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처'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처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주); 위로하고 -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처 밧세바에게 새로운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어지는 '동침하였더니'란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Hertzberg, Caspari).

(주); 솔로몬이라 하니라 - 여기서 '솔로몬'(*, 쉘로모)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Solomon)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Kei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재차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이다(5:14; 대상 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2)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왕상 1장). 한편, 본장에서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사건(26-31절)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의 출생 사건이 랍바 성의 함락 사건 이후에 있었을 것으로 확실히 사려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의 랍바 성에 대한 포위 공격(包圍攻擊)은 밧세바가 죽은 아이(18절)을 잉태하였을 때(11:5)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며(11:1, 14-25) 솔로몬의 출생은 그로부터 약 2년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Keil, Lange, Clericus, Thenius). 따라서 우리는 본 기록 역시 연대별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해 주제별로(topically)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5]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솔로몬의 출생]

(주);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 여기서 '보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라'(*)는 '어떤 특수한 임무를 맡기어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민 13:16, 27; 14:36; 16:28, 29; 렘 19:14; 25:17; 시 105:26, 28; 사 55:11; 61:1). 따라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내방(來訪)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Keil).

(주);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 여기서 '여디디야'(*)란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이름은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과 내용상 같은 점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1)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다(Keil, The Interpreter's Bible). (2)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5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속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7:14-16). 즉, '여디디야'(Jedidiah)라고 하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 Payne).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7:4-16).

성 경: [삼하12:26]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주); 요압이...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 랍바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24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중 하나의 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성은 카알(Keil)의 주장처럼 27절의 '물들의 성'(the city of water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둘은 랍바 내의 각기 다른 두 성이다(Lange).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7]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주); 물들의 성 - 이는 왕성(王城)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이다. 즉 이는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水源池)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다.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8]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주); 이제 왕은... 취하소서 - 랍바 성의 두 성 중 하나인 왕성(王城)을 탈취한 요압(26절)이 나머지 하나인 '물들의 성'을 탈취하기 전에(27절)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을 모셔오는 장면이다(Lange).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직접 랍바성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치(招致), 그로 하여금 랍바 성을 정복케 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견해를 달리한다. (1) 이러한 일은 그 당시 원정군(遠征軍)에게 흔히 있었던 일로서 이 일의 동기를 특별히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 암몬족의 재산을 사적으로 노략하지 않고 당시의 국제적 계약(契約)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Hertzberg). (3) 그러나 이상의 제 견해는 본장의 전체 문맥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처신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야 한다(Lange). 즉, 요압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라는 자신의 현 위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왕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자주 보여지는 다윗왕에 대한 요압의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17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29]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주); 다윗이... 랍바로 가서 -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랍바(Rabbah)까지는 약 70km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 28절)은 그다지 많은 시간을 소요(所要)하지 않고서도 랍바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2:30]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주); 그 왕의 머리에서 - 여기서 '그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캄'(*)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는 암몬족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Keil), 또한 암몬 사람들의 우상인 '말감'(밀곰)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Lange, Wevers, Wellhausen,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삿 2:11-23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 참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첫번째 해석을 취할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1) '그 왕'에서 '그'를 암몬 사람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 보려면 그 앞절에 암몬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야 하는데 없다는 점이다(Wellhausen). (2) 또한 본절에 나오는 '보석 있는 면류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에 달하는데 이는 사람이 오래 쓰고 앉아 있을 수없는 무게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그 왕'이란 당시 암몬인들이 자신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 섬기던 신(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 금 한 달란트라 - 여기서 달란트(Talent)는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무게를 측정하던 도량형으로 1달란트는 34. 27kg에 해당된다. 성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4kg이나 나가는 면류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하12:31]

주제1: [회개하는 다윗]

주제2: [랍바 성 정복]

(주); 톱질과 써레질... 하게 하니라 - 본절은 학자들간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 본절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1) 다윗이 암몬인들에게 톱질이나 써레질 등과 같은 고역(苦役)을 시켰다는 해석이다(Hertzberg, Wycliffe). (2) 다윗이 톱이나 써레 등과 같은 도구로써 암몬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해석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 중 어느 해석이 보다 타당한지는 섣불리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 주었던 점(10:4, 5)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은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암몬인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하13:1]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짝사랑하는 암논]

(주);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 '그 후에'란 용어는 구약에서 대개 다음 두 가지 용례(用例)로 사용되었다. (1) 시간적인 전후 관계를 연결하는 접속사(삼상 24:8 ; 에 2:1). (2) 시간적인 전후 관계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상이한 두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접속사(2:1 ; 8:1 ; 10:1). 8:1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용어는 첫번째 경우로 사용되었다. 즉 이는 본장에 기록된 다윗가의 재난이 나단 선지자의 예언(12:10-12)대로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로 나타난 사건임을 보여 주기 위한 연대기적(chronological) 접속사이다.

(주); 다윗의 아들 압살롬...다말이라 - 이들은 다윗이 그술(Geshur) 왕 달매의 딸 마아가(Maacah)에게서 얻은 자녀들이다(3:3). 당시 그술은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아람 소국이었는데 다윗은 이 이방 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정략 결혼을 하였었다. 3:3 주석 참조.

(주); 암논 - 다윗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Ahinoam)에게서 얻은 장자이다(3:2). 따라서 다말은 그의 이복(異腹) 누이동생이 된다. 5:13-16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3:2]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짝사랑하는 암논]

(주); 저는 처녀이므로 - 여기서 '처녀'에 해당되는 '베투라'(*)는 '동정녀'(virgin)란 뜻으로 단순히 시집가지 아니한 여자가 아닌 지금껏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정숙한 여인을 의미한다(Lange, Keil). 즉, 다말은 순결을 소중히 여기는 품위있는 여인이었으므로 암논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보듯 다말이 암논에게 연정(戀情)을 품게 할 정도로 성숙한 것을 보아 적어도 이때 다말은 15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말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딸이니(대상 3:5-9) 본장의 시대적 배경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지 최소한 15년은 경과한 때임을 알 수 있다(5:1-5).

(주); 심화로 병이 되니라 - 여기서 '심화'(心火)'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차르'(*)는 '괴로워 하다', '고민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암논이 다말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상사병(相思病)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3:3]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짝사랑하는 암논]

(주); 다윗의 형 시므아 - 그는 이새의 셋째 아들이며(대상 2:13) 삼마(Shammah)라고도 불리운다(삼상 16:9; 17:13). 여기서 '간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캄'(*)은 좋은 의미에서 '지혜로운 자', '능숙한 자'를,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교활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요나답은 자기의 지혜로 암논의 부도덕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으므로 약한 지혜의 소유자, 곧 교활한 자였다 하겠다. 어쨌든 본장에서 그는 사람의 마음과 사건의 정황(情況)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으니(5, 32절) 그 지혜가 아깝지 않을 수 없다.

성 경: [삼하13:4]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은 짝사랑하는 암논]

(주); 내가...다말을 연애함이니라 - 여기서 '연애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브'(*)는 '성적(性的)으로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사랑을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암논은 다말의 전인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만을 사랑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암논의 이러한 충동적이고 쾌락 일변도적인 성적 욕망은 그가 다말을 범한 후 오히려 그녀를 싫어한 사실(14, 15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 경: [삼하13:5]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짝사랑하는 암논]

(주);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 '보러 오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여기서 단순히 '우연히 보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여 보다', 또는 '병의 진행 정도를 진찰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16; 레 13:3, 6, 8, 56; 민 13:18; 왕하 8:29; 시 41:7). 따라서 요나답의 아와 같은 말은 다윗 왕이 암논의 병을 염려하여 병문안 올 것을 예상하고서 한 말임을 알 수 있다(Lange).

(주); 내 누이 다말로...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 이는 자식에 대한 다윗 왕의 남다른 애정을 이용하여 암논의 욕망을 이루게 하려는 요나답의 간교한 계략이다. 한편 이와 같이 요나답이 암논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도와 준 까닭은 아마 암논이 다윗 왕의 장자로서(3:2) 왕위 계승의 서열 제1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Smith, Leon Wood). 즉, 요나답은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 차기 왕의 지목에 있어서 가장 유리했던 암논을 가까이 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推論)은 왕위 계승의 서열상 장자가 우선이라는 당시 고대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매우 일리가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앞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의 계승자로 이미 솔로몬을 넌지시 지목하셨다. 12:25 주석 참조.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당시 이러한 사실을 공식 발표하지 않은 것은 아마 왕자들 간의 실권(實權) 다툼(왕상 1:13)을 우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하13:6]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짝사랑하는 암논]

(주); 과자 두어 개 - 여기서 '과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비보트'(*)는 심장(heart)을 의미하는 '레바브'(*)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과자가 심장을 강하게 해주는 일종의 건강식이거나 아니면 심장 모양의 둥근 케잎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Keil, Lange).

성 경: [삼하13:7]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다윗이...이르되 - 암논의 범죄에 다윗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다윗은 후에 발생되는 압살롬의 범죄 때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되었다(23-28절). 이러한 사실은 다윗 가문의 모든 재난이 다윗 자신의 범죄(11장)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음을 다윗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고 볼 수 잇다. 즉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다윗으로 하여금 이전과 같은 죄악을 범치 않도록 채찍질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 가서...음식을 차리라 - 히브리 관습에 따르면 여인들은 음식만드는 일에 초청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다(Jamison). 비록 암논의 요구(6절)가 좀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다윗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도 그 같은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하13:8]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다말이 그 오라비 암논의 집에 이르매 - 본절은 당시 왕의 자녀들이 그들의 어머니(3:2-5; 5:13-16; 대상 3:1-9)와 함께 각기 다른 거처에서 생활하였으므로 또한 장성한 아들들은 각기 독립된 주택에서 생활하였음을 보여 준다(Lange, Wycliffe,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398).

(주); 그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 히브리인들은 실내에 있는 화로(火爐)나 벽난로에서 요리를 하였다. 즉, 저들의 가옥 구조는 부엌과 거실이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대하 33:1-11 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따라서 다말은 암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3:9]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암논이 먹기를 싫어하고...나가게 하라 하니 - 이처럼 암논이 다말의 요리를 거절한 것은 병이 악화되기나 한듯이 방문객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즉 이렇게 하여 그는 다말 이외에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나가도록 한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꾸몄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암논의 꾸밈은 모략가인 요나답의 지시(5절)를 받아 이루어진 것임에 분명하다(Lange).

성 경: [삼하13:10]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다말이...침실에 들어가 그 오라비 암논에게 이르러 - 다말이 미처 오라비 암논의 흑심(黑心)을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그녀는 암논이 자신을 강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병든 암논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구운 과자를 들고서야 기꺼이 암논의 침실에까지 들어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508).

성 경: [삼하13:11]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 암논이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간음(레 18:9)을 요구하고있는 장면이다. 암논은 인간의 눈을 피하기만 한다면(9절) 자신의 죄악이 숨겨질 것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욥 24:15).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암논의 극악한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끝내 그를 징계하셨다(29절). 이처럼 인간의 범죄는 반드시 자신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 특징이다(갈 5:19-21). 따라서 우리가 각종 탐심과 욕정을 억제함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시 119:9 ; 벧 4:2).

성 경: [삼하13:12]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해 건설된 신정 국가 였다(출 19:5, 6). 따라서 율법에 의거, 근칭 상간자는 수간(獸姦)하는 자와 남색(男色)하는 자와 더불어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반드시 제거 되어야만 했다(레 18:9 ; 20:17 ; 신 27:22).

(주); 괴악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발라'(*)는 히위 족속인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겁탈한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말이다(창 34:7). 이 말은 구약에서 대개 다음 두가지를 의미하였다. (1)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짐승같은 행위를 뜻한다. (2) 주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악독한 일, 그중에서도 특히 음행과 관련된 악한 일을 의미한다(수 7:15 ; 삿 19:23, 24 ; 20:6, 10 ; 삼상 25:25 ; 사 9:17 ; 32:6 ; 렘 29:23).

성 경: [삼상13:13]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괴악한 자 - 문자적으로 '어리석은 자'(the wanton fools, RSV)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지혜가 부족한 자가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결국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를 가리킨다(시 14:1).

(주); 왕께 말하라...거절치 아니하시리라 - 다말의 이러한 말은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때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다말은 왕께 말씀만 드리면 근친간(近親間)이라도 결혼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율법에는 엄연히 근친 상간과 근친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레 18:6-18). 그런데 이에 대해 혹자는 근친 상간에 대한 율법의 조항이 남매간의 결혼을 완전히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Theniu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율법에 명시된 분명한 사실을 아무 근거없이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탈무드(Talmud)는 다말이 다윗의 친딸이 아닌 누군가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암논과의 혼인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Wycliffe). 그러나 성경은 다말이 다윗의 친딸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니(1절 ; 대상 3:9)이 역시 그릇된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매간의 결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다말이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이같이 둘러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Lange, Payne, Josephus, Clericus).

성 경: [삼하13:14]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범하는 암논]

(주);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동침하니라 - 다말의 온갖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기어코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말았다. 이는 곧 그 아비 다윗이 이성(理性)을 잃어버린 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11:2-4). 하지만 이는 곧 하루살이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선 불속으로 뛰어듦과 같다. 즉 하루살이는 불빛에 미혹되어 그 속으로 뛰어들지만 맹렬하게 타오른 모닥불은 하루살이를 도리어 태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경은 무릇 다른 죄악보다 온갖 정욕의 죄를 보다 엄히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란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고전 6:18).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같은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불속에 뛰어드는 하루살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성 경: [삼하13:15]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버리는 암논]

(주); 심히 미워하니...연애보다 더한지라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병이 날 정도로(2절) 애모했던 자를 이제 성적 욕구를 채우고 난 후에는 도리어 심히 미워하는 암논의 심리현상은 변태 성욕자(變態性慾者)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즉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 하등 동물적인 욕정에만 사로잡혀 있을 경우, 일단 육체적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심한 수치감과 허탈감, 상대방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 심리 현상인 것이다.

성 경: [삼하13:16]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은 버리는 암논]

(주); 가치 아니하다...그 악보다 더하다 - 암논이 다말을 자기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방금 자신에게 추행(醜行)을 당한 다말의 수치심을 더욱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암논의 행위는 자기 때문에 불행한 생(生)을 맞이하게 된 다말에 대하여 약간의 동정심도 베풀지 아니한 잔악한 행위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다말은 자기를 쫓아보내는 암논의 행위가 이전의 그의 추행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3:17]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버리는 암논]

(주); 문빗장을 지르라 - 암논의 이러한 행위는 실로 자신의 양심에 빗장을 지르는 것이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문빗장을 스스로 지르는 짓이 아닐 수없다. 만일 그가 다말에게 조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수치심을 억누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이라도 주었더라면 다말과 하나님으로부터 일말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논은 스스로를 차꼬 채우듯 보다 철저히 악으로 일관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38, 29절).

성 경: [삼하13:18]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버리는 암논]

(주); 채색 옷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네트 파심'(*)은 '소매가 달린 긴 겉옷'이란 뜻이다. 아마도 이는 공주와 같은 귀족 신분이 입는 소매가 길고 아름답게 장식된 나들이 옷을 의미할 것이다. 창 37:3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3:19]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말을 버리는 암논]

(주);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 이는 자신의 수치스럽고도 비참한 현실에 대한 슬픔과 고뇌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행동이다(삼상4:12; 왕하 5:8). 1:2 주석 참조. 아마도 다말은 조금 전 과자를 구울 때 사용한 화로나 벽난로에서 취한 재(8절)를 머리에 뒤집어 썼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주); 채색 옷을 찢고 - 옷을 찢는 행위 역시 금식이나 굵은 베옷을 입는 행위(왕상21:27; 에 4:3 ;시 35:13)와 더불어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한 표현법이었다. 1:2 주석 참조.

(주); 손을 머리 위에 얹고 -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다. 창 40:13 주석 참조. 따라서 다말이 손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자신의 머리에 수치스러운 것이 임한 것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표현이었다(렘 2:37). 아마도 다말은 이러한 행위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억울함(11-14절)을 표함한 아울러 자신의 순수함과 결백함을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13:20]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압살롬의 증오]

(주);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 매우 슬피 울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다말의 모습을 본 압살롬이 암논의 추행을 짐작하고선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완곡하게 따져 묻는 말(euphemism)이다. 여기서 즉, '...너와 함께 있었느냐'하는 물음은 남녀의 동침 여부를 우회적으로 묻는 말인 것이다(창 39:10). 한편, 본절의 원문에는 '암논'(*)이 '아미논'(*)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필사자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Pulpit Commentary), 또 다른 사람은 '아미논'이 '암논'에 대한 경멸어(輕蔑語)라고도 주장한다(Lange, Thenius). 그런데 사건의 흐름상 이 두 견해 중 후자의 주장이 비교적 설득력 있게 보인다.

(주); 시방은 잠잠히 있고 - 이 같은 압살롬의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 아버지 다윗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이다(21절). (2) 암논에게 복수할 좋은 묘책이 떠오를 때까지는 경거 망동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사실 암논에게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은 채 2년 동안 기회를 노린 점을 볼 때 압살롬의 복수심은 대단했었음을 알 수 있다(22-29절).

(주);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 당시 일부 다처제가 성행하던 세태 속에서 오라비는 자기 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창 34:31). 따라서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자기 누이를 진정시킨 것이다(Pulpit Commentary).

(주); 처량하게 지내니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멤'(*)은 '황폐한', '다 망가진'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마치 폐인(廢人)처럼 되어 이제 괴로운 나날만을 보내고 있는 다말의 비참한 삶을 잘 드러내 준다.

성 경: [삼하13:21]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압살롬의 증오]

(주); 다윗 왕이...심히 노하니라 - 이 처럼 다윗 왕은 암논의 범죄 소식을 듣고선 일시적으로 크게 노하기만 했을 뿐 율법에 따라 암논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았다(레20:17). 그 이유에 대하여 70인역(LXX)은 "암논이 장자인 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외에도 또 다른 이유를 댈 수 있다. 그것은 곧 다윗 왕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이미 지은 자로서(11:4) 자기 아들의 죄를 심판할 자격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란 점이다(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리고 또 자식에 대한 다윗 왕의 약한 마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Lange, Keil). 아무튼 이상의 점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은 인간적인 면에서 좋은 아버지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모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잠 23:13, 14; 엡 6:4). 때문에 이러한 다윗의 잘못은 결국 엄청난 가정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즉 다윗의 우유 부단한 처신에 불만을 품은 압살롬은 결국 암논을 살해하고(23-29절) 더 나아가 다윗에게 반기(叛起)하고 만 것이다(15장).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가정 교육의 주안점은 자녀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즉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준엄하게 징계하여 그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곧 부모의 참된 역할인 것이다(딤후 3:16, 17).

성 경: [삼하13:22]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압살롬의 증오]

(주);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 - 누이 동생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미워하게 된 압살롬이 그 일에 대하여 암논에게 한 마디도 따지거나 변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압살롬이 속으로 암논과 절교(絶交)를 선언하고 또한 잔인한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 경: [삼하13:23]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사롬]

(주); 이 주년 후에 - 즉 '만 2년 후에'(after two full years, KJV, RSV)란 뜻이다. 이 말은 압살롬의 복수극이 즉흥적인 감정에 의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숙고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압살롬의 이러한 음모는 단순히 자기 누이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쿠테타(coup d' etat)였을 것이다. 즉 다윗 왕의 세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다윗의 차남인 길르압이 일찍 조사(早死)하였으므로 장남인 암논만 제거하면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3:3 주석 참조.

(주);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 - 바알하솔(Baal-hazor)은 에브라임 성에서 북쪽으로 약4km,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24km 떨어진 산지(山地)마을이다. 이곳은 해발 1,200m 가량 되는 고지로서 목양(牧羊)하기에 아주 적합한 목초지였다. 압살롬은 다른 왕자들처럼 이곳에 자기 토지를 마련하고 많은 양들을 사육했던 것 같다.

(주); 양털을 깎는 일 - 당시 목축업을 주산업으로 삼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양털을 깎는 일은 축제(祝祭)의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삼상 25:2-8). 따라서 압살롬은 이 일을 미끼로 자연스럽게 형제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3:24]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살롬]

(주); 청컨대 왕은...가사이다 - 압살롬은 먼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을 청한 후 (23절) 이제 다윗 왕을 잔치에 청한다. 그러나 압살롬이 왕을 청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암논을 자기의 계략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펼쳤던 포석 작전(布石作戰)이었다. 즉, 그는 다윗이 신하들을 대동하여 자신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국정상(國政上)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그 대신에 왕의 실질적인 대표라고 간주되었던 암논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26절) 계획적으로 다윗을 잔치에 청하는 척 한 것이다(Hertzberg).

성 경: [삼하13:25]

주제1: [압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살롬]

(주); 복을 비는지라 - 혹자는 이에 대해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풍성한 선물을 주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보아 이는 단지 압살롬이 마련한 축제가 성공적으로 마쳐지기를 기원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Lange).

성 경: [삼하13:26]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살롬]

(주);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 이는 압살롬의 요청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다윗이 완곡하게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즉, 다윗은 암논에 대한 압살롬의 미운 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암논을 보내 달라는 압살롬의 요청을 받고선 내심 불안해 한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Lange).

성 경: [삼하13:27]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살롬]

(주); 압살롬이 간청하매...보내니라 - 이처럼 압살롬의 요청에 대해 다윗이 결국 승락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1) 다윗이 암논의 추행 사건 이후 2년 동안 압살롬으로부터 자기 누이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어떠한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Keil, Pulpit Commentary). (2) 암논은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던 다윗 왕을 대신할 수 있는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압살롬의 요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주장이다(Lange). (3) 미리 모든 왕자들을 초청한 압살롬의 행위(23절)가 다윗의 의혹을 다소 희석시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Pulpit Commentary). 물론 이상의 모든 사실들이 다윗의 행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꼈으면서도(26절) 압살롬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다윗 자신의 우유 부단한 성격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 [삼하13:28]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살롬]

(주); 사환 - 이에 해당하는 '나아르'(*)는 대개 '나이 어린 심부름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7절에 언급된 '부리는 종'과 같은 '청년층의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한다. 왜냐하면 암논을 쳐죽이라는 명령을 수행할 정도라면(29절) 이미 어린 아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주);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 - 70인역(LXX)에 보면, 27절끝에 "압살롬이 왕의 주연(酒宴)을 따라 주연을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부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해설적인 구절을 원문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다면(Thenius, Wellhausen), 압살롬은 암논을 일단 술에 취하게 만들기 위하여 왕에게나 대접하는 것과 같은 진수 성찬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에 따르면, 압살롬은 자신이 암논을 차기(次期) 왕위 계승자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암논에게 왕의 주연을 베풀었고, 그 결과 암논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술에 취하도록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3:29]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암논을 살해하는 압살롬]

(주); 암논에게 행하매 - 암논의 죽음은 압살롬의 주도 면밀한 음모하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923-28절) 아울러 암논의 부주의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암논은 압살롬의 주살(誅殺) 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술에 취함으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술을 즐기는 미련한 자의 결과는 패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잠 19:3; 20:1; 23:1-3). 한편 이처럼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행위는 비록 다말의 수욕(受辱)에 대한 복수이기는 하나 이 역시 온당치 못했다. 왜냐하면 암논의 범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율법적인 차원에서 징계되어야 했는데도(신 32:35) 압살롬이 자신의 분노한 감정에 따라 암논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 행동의 준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지 않는 한 항상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즉 아무리 인간적인 측면에서 동정을 얻고 합리화 시킬 수 잇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배치된 행동은 또 다른 죄악을 낳고 마는 것이다.

(주);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 히브리 사회에서 노새(mule)가 최초로 사용된 사건이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난 잡종이기 때문에 이종 교배(異種交配)를 금지한 율법에 따라(레 19:19) 히브리인들은 노새를 사육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윗 왕 때에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노새가 귀족들의 운송용으로 수입되었다(18:9; 왕상 18:5). 기록에 따르면 압살롬과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도 노새를 자주 타고 다녔음이 분명하다(18:9; 왕상 1:33; 10:25), 후에 노새는 전쟁용이나 짐을 나르는데도 널리 사용되었다(왕하 5:17; 대상 12:40).

성 경: [삼하13:30]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 여기서 '소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무아'(*)는 소문, 풍문(삼상 2:24; 왕상 2:28; 10:7; 왕하 19:7) 뿐 아니라 기별, 통보(4:4; 잠 15:30; 25:25; 렘 49:14; 옵 1:1)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문'보다 '기별' 또는 '통보'가 더 옳은 듯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기록된 상황은 매우 급박한 상황으로서 그 사실이 항간에 소문으로 퍼질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사실과는 매우 다른 보고가 다윗 왕에게 전달된 것은 그 당시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절박한 상황속에서 미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왕자들이 죽임 당했으리라는 지레 짐작하에 성급하게 보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13:31]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그 옷을 찢고 -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처럼 옷을 찢는 행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한 관습이다. 19절 주석 참조.

(주); 신복들도...모셔 선지라 - 여기서 '모셔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차브'(*)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들이 자신들의 옷을 찢은 후 다윗 앞에서 부동 자세(不動姿勢)로 서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하13:32]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 요나답의 정확한 상황 판단이다. 이처럼 요나답이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그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가까이서 살펴 왔음이 틀림없다. 즉, 그는 자신의 묘략을 베풀어 주어 일어났던 암논의 말에 다말에 대한 추행 사건(1-14절)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기에 지난 2년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추적해 왔을 것이다.

(주);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 이를 직역하면, "압살롬의 입에(으로)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나이다"이다. 물론 여기서 '그 일'이란 암논을 살해할 음모를 의미한다(23-29절). 그런데 본절을 좀더 정확히 해석하려는 시도가 학자들간에 잇었으니 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 혹자는 본절을 압살롬이 요나답에게 이미 자신의 속으로 결심한 사실을 입으로 발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Keil0.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이 생사를 다투는 중대한 일을 요나답에게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어렵다(Eerdmann). (2) 갈대아 역(Chaldean)은 본절의 원문에 나오는 '입'을 '마음'으로 고쳐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미는 '압살롬의 마음에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원문에 치중하였다기보다는 해설에 치중한 오역(誤譯)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 (3) '암논을 죽이려는 그의 결심이 굳게 닫친 그의 입술에 잘 나타나 있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Lange). 이 해석은 요나답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묘략가인데다 그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면밀히 추적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타당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성 경: [삼하13:33]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괘념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괘념하다'에 해당하는 '레브 숨'(*)은 어떤 일에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삼하13:34]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 이는 29절의 상황과 이어지는 구절이다. 즉, 본서 저자는 29절에서 압살롬의 암논 살해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30-33절에서는 장면을 바꾸어 다윗궁을 상황을 이야기하였으며 다시금 본절에서는 29절 사건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잇는 것이다. 한편 본서 기자는 본장에서 '압살롬이 도망하니라'는 말을 반복 기술함으로써(37, 38절) 압살롬이 친족을 고살(故殺)한 큰 범죄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좁은 팔레스틴 땅에서 압살롬의 도망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의 권세로 보아 그가 잡고자만 한다면 압살롬을 체포하는 것은 시간 문제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이 그리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27절 주석 참조.

(주); 뒷산 언덕길 - 히브리인들은 동쪽 방향을 앞쪽이라고 불렀고 서쪽 방향을 뒤쪽이라 불렀다(출 3:1; 사 9:12). 따라서 이 말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산길을 의미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13:35]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종의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 요나답의 간사힘이 그대로 드러나는 구절이다. 즉 그는 이미 압살롬이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살해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였었다. 32절 주석 참조. 그렇다면 그는 미리 이 같은 사실을 다윗에게 귀띔하여 사전에 비극을 막도록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서는 요나답은 마치 다윗을 위로라도 하듯 자신의 추측(32절)이 맞은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ery's Commentary, Vol. II, p. 512).

성 경: [삼하13:36]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다윗의 통곡]

(주); 왕과...심히 통곡하니라 - 다윗이 이처럼 대성 통곡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31절에선 자신의 모든 아들들이 죽임당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나서 혼절(昏絶)하였지만 이제 암논만이 죽을 것을 알고서도 대성 통곡한 까닭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이 다말 사건으로 인해 암논을 살해한 사실을 알고선 과거 자신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살해했던 죄를 기억했을 것이다(11장). 그리고 자신이 암논을 엄히 징계하지 못한 결과(21절) 결국 형제간의 살육이란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심한 자괴감(自壞感)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죽임당한 암논에 대한 안타까움, 압살롬에 대한 염려 등이 어우러져 심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13:37]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압살롬의 피신]

(주);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 - 그술(Geshur)은 아람 소국들 중 하나로서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라이다. 즉 '그술'이란 말의 뜻은 '다리의 땅'(bridge land)으로서 이는 헤르몬 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북부 요단강 양편으로 다리처럼 길게 뻗어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한편, 다윗은 당시 그술 왕 달매(Talmai0의 딸 마아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여 그술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압살롬이다. 따라서 그술 왕 달매는 압살롬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3:3 주석 참조.

(주); 날마다 그 아들을...슬퍼하니라 - 카일(Keil)은 본절을 가리켜 다윗이 죽은 암논(28, 29절)을 생각하고 슬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39절에서 다윗은 이미 죽은 암논을 잊어버린 지는 오래이고 다만 도주한 압살롬만을 생각한 것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 왕이 슬퍼했던 아들은 암논이 아니라 압살롬인 것이다.

성 경: [삼하13:38]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압살롬의 피신]

(주); 삼 년이라 - 다윗이 압살롬의 죄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애끓기에 충분한 만큼의 세월이 지났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39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3:39]

주제1: [암논의 추행과 압살롬의 복수]

주제2: [압살롬의 피신]

(주); 다윗 왕의 마음이...간절하니 - 본절은 원문을 의역(意譯)한 것이다. 이에해당하는 히브리 원문, '테칼 다윗 하멜렉 라체아트 엘 압살롬'(*)을 직역하면, '다윗 왕(의마음)이 압살롬에게 가기를 그쳤더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게 간다'는 표현, '라체 아트 엘...'(*)은 '...에게 가서 그를 벌하다'는 뜻을 가진다(신 28:7). 따라서 본절을 보다 정확히 해석하자면 '다윗 왕이 마음속으로 압살롬을 법에 따라 처벌할 의지를 포기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누그러지고 오히려 압살롬에 대한 연민의 정이 되살아 났음을 알 수 잇다.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는 하반절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보다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성 경: [삼하14:1]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을 위한 요압의 지략(智略)]

(주); 요압이...향하는 줄 알고 - 여기에서 '향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전치사는 '알'(*)이다. 그런데 이것이 본절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둘로 나뉘어 있다. (1) 혹자는 이 전치사 '알'(*)을 '대적하여'(against)란 뜻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요압은 이 상황에서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적개심(敵愾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하였다(Keil,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해석은 지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문법상으로는 '알'(*)의 '대적하여' 또는 '싫어하여'란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이러한 해석은 본 문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분노가 이미 누그러져 있었다고 언급한 13:39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2) 전치사 '알'(*)을 '...에게로 향하는'으로 이해하여, 이는 다윗 왕의 자연스러운 부성애를 요압이 발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Lange). 이 해석은 전후 문맥과 잘 어울린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알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새로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기 때문에, 이 동사 또한 새로운 상황의 변화를 제시하는 본 해석을 지지해 준다. 따라서 본절은, 이제 암논 살해 사건 후 3년이 지나자(13:23-39) 다윗이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압살롬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을 요압이 눈치챘다는 의미라 하겠다(Matthew Henry).

성 경: [삼하14:2]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을 위한 요압의 지략(智略)]

(주); 드고아 - 드고아(Tekoah)는 예루살렘 남쪽 16km, 베들레헴 남족 8km 지점에 있는 고지대이다. 이곳은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이자(암 1:1), 르호보암의 산성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대하 11:6).

(주); 슬기 있는 여인 - 이는 생활의 지혜가 있고 민첩하며 재치있는 여인을 의미한다. 한편, 이 여인의 거주지인 드고아는 요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부터 약 2시간 거리였으므로, 아마도 요압은 일찍부터 이 여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Pulipt Commentary, Wycliffe Bible Commentary).

(주); 상복을 입고 -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기 위한 분장(扮裝)이다(6절).

성 경: [삼하14:3]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을 위한 요압의 지략(智略)]

(주); 할 말을 그입에 넣어주니라 - 요압이 이처럼 압살롬의 사면(赦免)을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압살롬이 차기의 왕이 되리라고 믿고 이 시점에서 그의 환심을 얻어 자기의 권력을 확고히 해두기 위함이었다(Leon Wood, Hertzberg). 이런 점에서도 요압은 자기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음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3:27; 11:16). 만일 요압이 다윗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이 있었다면 드고아 여인을 쓰는 대신 나단 선지자에게 이번 일을 부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압은 그리하지 아니하고 그릇된 욕심과 스스로해 낸 인간적 계책으로 이번 일을 도모하였으니, 그 결과 도리어 압살롬의 반란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15장).

성 경: [삼하14:4]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이는 곧 완전한 겸손과 헌신을 나타내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법이다(창 50:18; 왕하 4:37; 대하 20:18). 특히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이처럼 인사한 것은 왕께 대한 존경과 충성, 완전한 복종을 표시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1:2; 9:6).

성 경: [삼하14:5]

주제1: [압살롬의 귀한]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나는 참 과부니이다 - 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여인의 거짓말이다. 즉 히브리 사회에서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특별한 동정과 보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과부로 가장한 것이다(신 14:29; 시 10:14; 68:5; 146:9; 사 1:17; 10:2; 욥 31:16, 18).

성 경: [삼하14:6]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저가 이를 쳐죽인지라 - 여기에서 여인이 설명한 자기 아들의 죽음과 암논의 죽음(13:29)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전자의 죽음은 쌍방간의 싸움에서 일어난 과실 치사(過失致死)이나 후자의 죽음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몰래 계획한 모살(謀殺)이었던 것이다(13:23-29).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러한 질적인 차이는 덮어두고 사건의 결과만을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죄악성을 교묘히 경감시키려는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드고아 여인은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살해자에게 이롭도록 상황 설명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4:7]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 형제끼리 서로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쳐죽인 것은 물론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동기에 잇어서 이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수반된 분명한 살인이다. 따라서 동생을 살해한 형을 죽이겠다는 군중들의 주장은 율법의 규례에 따른 합당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민 35:16-19).

(주); 사자 - 이에 해당하는 '야라쉬'(*)는 '상속하다', '차지하다'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씨'(seed)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다른 말로는 '후사'(後嗣)로도 번역할 수 있다.

(주);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 여기서 숯불이란 가문(家門)을 이을 남은 아들을 비유한 말이다. 히브리 사회에서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그 가문에 속한 기업(基業)을 상실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무서운 불행으로 간주되었다(마 21:38). 따라서 이러한 불행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여인의 비유는 다윗의 나약한 감정을 움직이고도 남을만 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의 나약한 감정에 호소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의와 진리의 율법을 주목하지 못하도록 본(本) 비유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비유의 사용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재발견하도록 비유를 사용했던 나단 선지자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2:1-4)

성 경: [삼하14:8]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 이는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의 호소를 다 받아들여 그 남은 아들이 죽지 않도록 선처하겠다는 대답이다. 아마도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큰 아들이 동생을 죽인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살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상(情狀)을 참작, 동정을 베풀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6절; 민 35:22-28).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사견(私見)이 압살롬에 대하여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압살롬은 암논을 고의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13:22-29).

성 경: [삼하14:9]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 여기서 '그죄'란 형제를 살해한 아들(6절)을 벌하지 아니한 죄, 곧 율법의 규정(민 35:16-19)대로 심판하지 아니한 죄를 의미한다. 즉 드고아 여인은 다윗이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아들을 선처(善處) 주겠다고 하자(8절), 행여라도 그로 인해 발생할 불상사는 다윗이 아닌 마땅히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애기하고 있는 것이다(공동번역). 따라서 본절은 다시금 "이 살인죄를 벌하지 않은데 대한 잘못은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만 있습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408). 그런데 드고아 여인이 이같은 말을 한 진정한 목적은 분명 압살롬의 범죄의 근원적 책임이 그 부모 곧 다윗에게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려는 데 있을 것이다.

성 경: [삼하14:10]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네게 말하는 자를...데려오라 - 이번 일로 인하여 드고아 여인을 기소(起訴)하려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하려는 자가 잇으면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 자신에게로 데려오라는 뜻이다(Wycliffe). 즉 지금 다윗은 국태 민안(國泰民安)에 힘쓸 최고 통치자로서 어려움에 처한 과부를 기꺼이 보호해 주겠다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

성 경: [삼하14:11]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비유]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 다윗 왕과의 대화에서 세번째로 드고아 여인을 말하는 장면이다(4-7, 9절). 여기서 이 여인은 다시금 다윗 왕의 공정한 판단력을 흐트리고 그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즉, 드고아 여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두 속성인 공의와 사랑 중 공의는 무시하고 사랑만을 강조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 문제에 있어서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

(주); 원수 갚는 자 - 히브리어로는 '고엘 하담'(*)으로, 그 뜻은 '피의 보복자'(avenger of blood)이다. 민 35:19에서는 '피를 보수하는 자'로 번역되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가리킨다. 율법에 의하면 이들은 억울하게 죽임당한 친척을 위해 반드시 복수할 의무를 지니도록 되어 있다. 민 35:12 주석 참조.

(주);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11:11 주석 참조.

(주); 머리카락 하나라도...아니하리라 -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맹세는 하나님의 자비만을 생각하고 공의를 무시한 잘못된 맹세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드고아 여인과 군중들(7절)의 입장을 다 들어보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야 할 재판장인데도 오직 한 쪽 편의 말만을 듣고 섣불리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편벽되기 쉬운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의 맹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경솔한 맹세였다고 할 수 있다. 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참조.

성 경: [삼하14:12]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여인이 가로되...여쭙게 하옵소서 - 지금까지 얻어낸 다윗 왕의 맹세(8, 10, 11절)를 압살롬의 경우에 적용시키기 위한 드고아 여인의 교묘한 청원이다.

성 경: [삼하14:13]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어찌하여...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도모를 -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이같은 도모'란 외국에 도피한 압살롬(13:37, 38)을 용서하지 않는 다윗 왕의 처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대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은 긍정적인 의미(toward)가 아닌 부정적 의미(against)를 지닌다(Keil).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스려 압살롬을 요납하지 아니하시나이까'가 된다. 즉 이 말은 다시 풀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인정하고 그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유독 왕께서서만 압살롬의 죄를 용납하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주); 이 말씀 - 지금까지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맹세한 말(8, 10, 11절)을 가리킨다.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 여기서 '죄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쉠'(*)은 고범죄자(故犯罪者)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부지중에 실수한 경범죄자(輕犯罪者)를 의미한다(레 4:13, 22, 27; 5:2, 3, 17). 따라서 본절의 드고아 여인의 말은 다윗 왕이 압살롬을 돌아오지 못하게 조치하므로 말미암아 왕이 부지중에 백성들의 여론과 반대되는 가벼운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같은 여인의 말은 적어도 서너 가지 점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1) 자신의 비유(6,7절)를 압살롬 사건(13:23-29)과 일치시켜 다윗을 정죄한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점,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다윗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점, (3) 다윗이 압살롬을 내쫓는 것이 아니라 암논을 죽인 후 압살롬 스스로가 도망쳤다는 점 등이다.

(주); 그 내어쫓긴 자 - 이는 그술에 도피해 있는 압살롬(13:37, 38)을 은연중 지칭하는 말이다. 즉 드고아 여인은 지금 압살롬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여인이 우회적으로 압살롬을 표현한 것은, 아마도 어떻게 해서든 사건의 진상을 덮어두고 다윗 왕의 약한 감정만을 움직여 압살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였을 것이다(Ewald, Lange).

성 경: [삼하14:14]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같을 것이오나 - 본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1) 이 말은 암논의 죽음(13:28, 29)과 관련된 말이라는 견해이다(Thenius). 즉 본절은, 이미 한 번 죽은 암논은 쏟아버린 물처럼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고아 여인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2) 그러나 본절은 그보다 죽음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이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죽으리니'란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아직 완료되지 아니한 사실, 곧 일반적인 진리를 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첫째, 죽음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며, 둘째, 죽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종말적인 일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드고아 여인이 의도하는 바가 분명히 드러난다. 즉 이 여인은 본절에서 압살롬도 인간이므로 반드시 죽을 것이며, 일단 그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므로 압살롬이 죽기 전에 그를 용서하라고 다윗 왕에게 넌지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과도 문맥상 잘 어울린다.

(주); 하나님은...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 드고아 여인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언급한 것으로, 앞 구절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즉,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용서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이 곧 이 여인의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다윗으로 하여금 죽을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바 있었던 자신의 과거(12:13)를 기억나게 하였을 것이다(Lange, Matthew Henry).한편, 이와 같은 드고아 여인의 말은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고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압살롬에게 적용하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경우와는 달리 압살롬의 경우에는 죄를 범한 당사자가 회개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드고아 여인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다만 요압의 분부를 좇아(1-3절) 이러한 말을 하였는데,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4:15-17]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드고아 여인이 자기가 왕께 찾아온 동기가 순수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이 여인은 단지 자기 자신의 괴로운 문제 때문에 다윗에게 찾아와 호소한 것이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여인은 (1) 자신이 백성들로부터 살인한 아들을 처벌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었으며(15절), (2) 자신이 다윗의 지혜와 수완을 크게 믿고 있었다는 사실(16,17절)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드고아 여인이 자기가 다윗에게 나아온 동기에 대하여 불필요하게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압살롬의 사면(赦免)을 우회적으로 요청한(13, 14절) 자신의 의도가 지나치게 다윗 왕에게 노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성 경: [삼하14:15]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 즉 동생을 죽인 형(6절)을 율법에 따라 벌하지 아니하고 감싼 데 대하여, 백성들이 자기를 핍박하며 살인자를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는(7절) 드고아 여인의 진술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 까지나 지금껏 애기한 비유(5-7절)를 실제의 일인양 가장, 다윗을 속이려 든 여인의 강변(强辯)일 뿐이다.

성 경: [삼하14:16]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하나님의 산업 - '하나님의 산업'이란 본래 이스라엘 민족(Keil)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약속의 깡 가나안(Hertzberg)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다윗 왕과 그의 왕조를 은연 중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하다(Hertzberg). 즉, 드고아 여인은 자기와 자기 아들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현상을 은연 중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에다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드고아 여인은 자기가 다윗을 찾아온 동기를 변명하고 있는 과정에서 조차 자신의 참된 의도를 은밀히 시사하고 있다.

성 경: [삼하14:17]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아크 엘로힘'(*)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천사'를 의미한다(창 28:12; 31:11; 32:1, 3; 민 22:24; 삿 2:1, 4; 5:23). 따라서 본절은 드고아 여인이 다윗 왕을, 신적 권위를 부여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천사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다윗 왕은 천사도 아니고 천사와 같은 지혜와 공정한 능력도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는 드고아 여인이 어떻게 해서든 다윗 왕의 이성(理性)을 흐리게 하기 위한 아첨의 말이었다 하겠다. 사실 아첨은 듣는 이의 판단력을 굽게 만드는 독약과 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잠 26:28; 29:5; 행 12:21-23).

성 경: [삼하14:18]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라 - 왕이 드고아 여인 불필요한 변명과 낯간지러운 아첨을 듣고 난 다윗이 이제서야 여인의 진정한 의도를 눈치챘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성 경: [삼하14:19]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 다윗 왕이 드고아 여인에게 이와 같이 캐물은 까닭은 아마 한갖 여인으로서는 이처럼 엄청난 일을 꾸미기 힘들리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다윗이 여인의 말을 듣는 중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있으리라고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요압은 일찍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자인 동시에 지략가 였으므로, 다윗 왕은 이번에도 그가 자기의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술수를 부렸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3:27; 11:16).

(주); 왕의 말씀을...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 다윗 왕의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이 정곡(正鵠)을 찔렀다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드고아 여인의 이와 같은 말은 다윗 왕의 지혜와 현명함에 대한 지나친 칭찬으로 이는 자기에게 있게 될지도 모르는 다윗 왕의 진노를 조금이라도 진정시켜 보려한 아부성 발언이었음에 다름아니다.

성 경: [삼하14:20]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드고아 여인의 소청(訴請)]

(주); 이 일이 형편을 변하려 하여 - '이 일의 형편'이란 압살롬이 그술 땅으로 도망쳐 그곳에 있는 지 삼년째이며(13:37, 38) 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사면(赦免)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은 현재의 상황을 가리킨다.

(주);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 여기서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는 온 세상, 또는 세계를 의미한다(창 9:13; 10:8, 25; 신 4:26; 대하 36:23; 스 1:2; 욥 1:8; 2:3). 따라서 드고아 여인의 이 말은 다윗 왕의 조그마한 통찰력을 하나님의 전지한 능력에다 비유한 엄청난 과장(誇張)이다. 즉 드고아 여인은 17, 19절에 이어 계속해서 아첨을 늘어놓음으로써 다윗의 환심을 사려 꾀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4:21]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귀환 허락]

(주);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 본절은 원문을 상당히 의역한 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는 '네가 이 일을 이미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 즉 이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너의 계획에 동의를 하였으니 이 일은 다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는 의미이다.

성 경: [삼하14:22]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귀환 허락]

(주); 종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 이 말은 요압이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1-3절) 다윗에게 구한 내용을 이제 다윗이 허락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우리는 본절에 의거 요압이 압살롬의 사면을 위해 지금껏 왕께 간청해 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Lange, Keil). 왜냐하면 여기서 '종의 구함'이란 말은 요압이 드고아 여인을 통해 다윗에게 직접 드린 간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이 같은 추측이 사실이라면 다윗이 드고아 여인에게 던졌던 물음(19절)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처럼 요압이 이전부터 압살롬의 사면을 간청해 왔기 때문에, 아마도 다윗 왕은 드고아 여인의 비유와 얘기(4-17절)를 다 듣고나서는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작용한 것으로 쉽게 확인했을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14:23]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귀환 허락]

(주); 그술 - 이스라엘 북쪽에 인접한 아람 소국(小國) 중 하나이다. 13:37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4:24]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귀환 허락]

(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이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표명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Lange). 한편 혹자는 이러한 다윗 왕의 조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즉, 다윗 왕은 일단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이다(Payne, Keil).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악독한 죄악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앞으로 백성들을 통치 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마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Lange, Patrick). 아무튼 이처럼 다윗과 압살롬 간에 형성된 껄끄러운 관계는 결국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한 미움과 반역이라는 새로운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15장).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 예고한 징벌이 어떤 식으로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12:10-12).

성 경: [삼하14:25]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신상(身上)]

(주);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 이는 압살롬의 외모의 출중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주);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 압살롬이 뛰어난 미남이라는 사실이 온 나라 안에 알려져 있었고, 그로 인해 압살롬이 백성들의 존경과 갈채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압살롬의 외모는 훗날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차기 왕위를 계승할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지목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15:10-12).

(주); 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뭄'(*)은 신체적인 결함(缺陷)을 의미하는 말이다(레 21:17-22; 22:20, 21; 24:19; 민 19:2; 신 15:21).

성 경: [삼하14:25-27]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신상(身上)]

갑작스럽게 문맥이 바뀌어 압살롬의 신상(身上)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이다. 추측컨대 이는 후에 있을 압살롬의 반역(15장)과 관련, 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이 도리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18:9-15)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인 듯하다. 본장 25-33절 강해 '잘못된 자랑거리' 참조.

성 경: [삼하14:26]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신상(身上)]

(주);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 이는 압살롬의 머리 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머리털은 힘과 미(美)의 상징이었으며(Eerdmann), 그것이 빨리 자란다는 것은 힘의 왕성함(삿 16:17)을 의미하는 것이었다(Keil). 또한 숱이 많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비로움울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의 머라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에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세상 자랑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18:9).

(주);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 율법에는 머리털을 깎되 민머리로 완전히 깎는 것은 엄히 금지되어 있다(레 19:27; 렘 9:26; 25:23; 49:32). 왜냐하면 고대 사회의 이방인들이 자기의 머리를 길게 기른 다음 민머리도 완전히 잘라 그것을 사당(祠堂)에 바치곤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율법의 규정에 따라 머리를 지나치게 기르지도 아니하였고(나실인은 제외) 민머리로 깎지도 않았으며 축제일에 적당히 깎곤 하였다. 그리고 그때 깎은 머리털은 무게를 달아 은(銀)으로 바꾸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곤 하였다(Wycliffe). 아마도 본절에서 압살롬이 머리털을 깎아 무게를 달았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관습에 기인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주);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 - 여기서 왕의 저울로 계산한 세겔(Sheckl)이란 곧 '왕실 세겔'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 사회에서 무게를 측정하던 기본 단위는 세겔인데 이에는 '보통 세겔'과 '왕실 세겔', '성소 세겔'이 있었다. 그 중 왕실 세겔은 보통 세겔의 1/5을 더한 중량이었다. 한편 보통 세겔의 경우 한 세겔은 11.4g이므로 이백 세겔은 약 2.3kg에 해당되는 무게이다. 보통 사람의 머리털이 1년 동안 자랄 수 있는 평균 무게인 약 500g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혹자는 이 수치가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고대의 모든 역본들(Targum, the Syriac Peshitta, Vulgate, LXX)이 한결같이 같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수치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Keil). 구약 총론, '성경의 도량형과 화폐 및 월력' 참조.

성 경: [삼하14:27]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압살롬의 신상(身上)]

(주); 아들 셋...낳았는데 - 여기서 압살롬의 세 아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까닭은 이들이 모두 조사(早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18의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 한탄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에 의해 분명히 뒷받침 된다.

(주);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 압살롬이 딸의 이름을 다말(Tamar)이라고 지은 것은 암논에게 추행당한 자기의 불행한 누이동생 다말(13:1-14)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는 아마도 압살롬의 딸이 그의 누이 동생을 많이 닮았거나(Pulpit Commentary), 아니면 압살롬이 누이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한편, 70인역(LXX)에는 "(다말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아내가 되어 그 아들 아비얌을 낳았다"란 구절이 첨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르호보암의 아내이자 아비얌의 어머니는 마아가(Maachah)라고 기록되어 있는 왕상 15:2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70인역의 첨가 구절은 신빙성이 없다(Wycliffe, Keil, Lange).

성 경: [삼하14:28,29]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과 압살롬의 상봉]

(주);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 그 술에서 삼년 동안이나 망명 생활을 하고 왔는데도(13:38) 또 다시 예루살렘에서 2년 동안이나 연금 상태에 있게 되자(24절 주석 참조), 압살롬이 자기의 불행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압을 이용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요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좋지 못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Lange).

성 경: [삼하14:30,31]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과 압살롬의 상봉]

(주);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 압살롬의 이와 같은 행위는 요압의 방관적인 태도(29절)에 대한 보복적 행위이자, 또한 요압을 억지로라도 자기에게 오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압살롬의 고의적 행위는 자칫 엄청난 화재(火災)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스런 악행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압살롬은 지금까지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뉘우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자신의 불편한 처지만을 불평해 왔음을 알 수 있다(Payne).

성 경: [삼하14:32]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과 압살롬의 상봉]

(주);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 본절은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한 압살롬의 오만 불손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즉, 압살롬은 자기가 이스라엘 땅에서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부자지간의 정을 끊어버리고라도 그술에가서 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는 불효막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의 자숙하는 기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에게 도피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곳은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그술로서, 이 나라는 일찍이 다윗 왕이 정략 결혼을 통하여 화친을 맺은 나라이다(3:3; 13:37, 38). 따라서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란의 가능성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셈이라 할 수 있다.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일반적 자연 법칙인 바,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씨를 뿌린 결과 이제 그 악의 열매를 하나하나 거두고 있는 것이다(갈 6:7).

(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가하니라 -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압살롬의 이 말은 다윗의 면전에서 자기 죄의 유무를 따져 법에 따라 처벌 받겠다고 하는 겸손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Pulpit Commentary, Keil). 오히려 이는 오만 불손하게도 자신의 살인 행위(13:28, 29)가 정당한 행위인 양 자신의 무죄를 정당히 표현한 것이다(Payne,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즉, 압살롬은 암논의 추행(13:4)에 자기라도 나서서 암논을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 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의 죄는 일체 부정하고 오히려 아버지 다윗에게 죄가 있는 양, 모든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드는 극단적인 사고(思考)의 좋은 예이다.

성 경: [삼하14:33]

주제1: [압살롬의 귀환]

주제2: [다윗과 압살롬의 상봉]

(주);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는 행위는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취해야 하는 예절이다(4절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다윗 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표시가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요압(3:27; 20:9, 10)이나 가룟 유다(마 26:48)의 경우와 같은 가식적인 예절만을 갖추었을 뿐, 마음 속에는 오히려 다윗 왕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15장).

(주);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 여기서 입을 맞추는 행위는 화해의 표시로서, 특히 아버지가 범죄한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그를 완전히 용서한다는 표시이다(창 33:4; 45:15; 눅 15:20). 이로 보아 우리는 이제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압살롬을 단지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 때문에 용납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이로 말미암아 압살롬이 차기 왕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적 활동(15:1-12)을 사실상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Payne). 결국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반란을 허용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인간적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되며, 항상 공명 정대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 경: [삼하15:1]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백성의 환심을 사는 압살롬]

(주); 이 후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아레이 켄'(*)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모두 3회 등장하는데(3:28; 대하 32:23), 이는 유사한 접속사 '아하레이 켄'(*)과 구별된다. 즉, '아하레이 켄'은 (1)시간의 전후 관계를 이어 주는 시간적 접속사, (2) 서로 다른 두 내용을 이어주는 단순 접속사(2:1; 10:1; 13:1; 15:1; 대상 18:1; 19:1; 대하 20:1)로 사용된 반면, '메아레이 켄'은 오직 시간의 전후 관계를 이어 주는 시간적 접속사로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장에 나오는 사건은 시간적으로 14:33의 사건 이후에 일어난 후속(後續) 사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주); 병거와 말들...전배 오십 명 - 압살롬이 병거와 말들과 오십 명의 전배들을 갖춘 것은 반역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병기를 구비한 행위일 뿐 아니라, 아도니야의 경우처럼 차기 왕으로서의 위용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왕상 1:5). 즉 이러한 병력의 배치는 흔히 이방의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강한 권세와 화려한 영화를 나타내기 위해 곧잘 이러한 수행원들을 거느렸던 것이다(삼상 8:11). 따라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1) 이방 왕들의 사치한 풍습을 따른 것이었고, (2)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한 반역적 행위였으며, (3)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모으려는 계략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The Interperter's Bible, Keil, Lange). 한편, 여기서 '전배'(前陪)는 히브리어로 '이쉬 라침'(*)인데, 이는 '달려가는 사람', '경주자'란 뜻이다. 즉 '전배'란 당시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다니며 마차가 지나갈 길을 정비하고 왕을 경호하던 경호부대(警護部隊)를 가리킨다(Jamieson).

성 경: [삼하15:2]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백성의 환심을 사는 압살롬]

(주); 일찌기 일어난 성문 길 곁에 서서 - 여기서 성문이란 왕궁의 문을 의미한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Pulpit Commentary).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마을의 성문은 장로들이 앉아서 재판하는 장소였다(창 23:10, 18; 욥 29:7; 잠 24:7; 31:23; 신 21:19; 22:15). 때문에 이러한 관례에 따라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성문, 곧 궁궐 문에 합법적인 재판관(裁判官)을 세워 재판을 베풀는 풍속이잇었다. 그리고 그때 재판관은 먼저 예루살렘 주민들을 재판하고 다음에 타성읍의 소송 문제들을 재판하였는데, 그 재판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de Vaux). 따라서 압살롬은 성문에서 열리는 왕의 재판을 전적으로 방해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성문 길 곁에 섰던 것이다.

(주);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 압살롬의 왕이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개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다. 백성들에 대한 압살롬의 이러한 친절은 자기를 왕으로 보이기 위해 거창하게 병력을 대치한 오만 불손한 행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절). 그렇지만 이 역시 그가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취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음흉한 행동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없다(6절).

성 경: [삼하15:3]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백성의 환심을 사는 압살롬]

(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 재판도 하기 이전에 사법적인 결정을 내려주고 있는 압살롬의 독단적 발언이다. 즉, 압살롬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유리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장차 다윗 왕에 대하여 불평할 수 있는 여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주);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 압살롬이 다윗을, 백성들에 대한 자기의 기본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자로 매도(罵倒)하고 있는 구절이다. 한편 여기서 '송사 들을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는 사법적 처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재판관, 또는 사법 관리를 의미 한다. 이는 왕이 직접 임명한 자였기 때문에 왕적 권위로 재판할 수 있었고, 이 사람이 한번 결정하면 더 이상 상소할 수 없었다(de Vaux). 그런데 당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운 것은 아마도 혼자서 모든 소송을 검토하고 재판하기에는 너무 벅찼으며, 또한 재판에는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따라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 압살롬의 거짓 증거는 다윗이 사법적 의무에 대해 방임하고 있는 양 매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성 경: [삼하15:4]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백성의 환심을 사는 압살롬]

(주); 내가...재판관이 되고 - 이처럼 압살롬이 왕자란 신분을 이용, 스스로 백성의 재판관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관 조직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그 같은 조직이 전문화된 형태를 갖춘 것은 유다 왕 여호사밧 때의 일이다(대하 19:4-1).

(주); 내게로 오는 자에게 - 여기서 '내개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리'(*)는 '내 위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본절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마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피력하고 있다. (1) '내 위로 나오는'이란 표현이 당시 재판 현장의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이란 견해이다. 즉, 당시 재판장은 자리에 앉아서 재판하였으며 백성들은 재판장 곁에 서서 재판을 받았다(출 18:13). 따라서 압살롬은 이러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은연 중 백성들에게 재판을 베풀어 주겠다는 자기의 의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Keil). (2) '내 위로 나온다'는 표현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짐을 그에게 맡기는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Lange). 따라서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이 곤란한 문제를 자기에게 자져올 경우 자기가 맡아서 처리해 줄 것이라는 언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판단키 곤란하다. 그러나 양 견해 모두 압살롬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을 나타내 주므로 그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성 경: [삼하15:5]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백성의 환심을 사는 압살롬]

(주); 입을 맞추니 - 본래 입을 맞추는 것은 반가움의 표시이며 진정한 화해의 표시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에게 자기를 선전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14:33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5:6]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백성의 환심을 사는 압살롬]

(주);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 여기서 '도적하다'에 해당하는 '가납'(*)은 특히 '남을 속여서 훔치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압살롬은 백성에게 관심을 보이고(2절), 현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3절), 약자를 동정하고(4절), 그들에게 애정을 보였다(5절). 그런데도 본서 저자가 이 모든 압살롬의 행위를 가리켜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 하였다'고 언급한 까닭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성실한 통치를 베풀어 신망(信望)받는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기만하는 술책으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은 압살롬과 같이 불의한 방법으로 기존 권세자에 대하여 항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롬 13:1, 2). 그러나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유린하는 정부에 대하여선 스스로를 지키며 또한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불의에 항거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기도 하다(벧전 2:13, 14). 그러므로 오늘날 그 어느 현장, 어느 집단에서든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억압되며 생존권이 침해 당한다면, 그곳에서 크리스챤(Christian)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시 58:1).

성 경: [삼하15:7]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압살롬의 반역]

(주); 사 년만에 - 어떤 사본에는 '40년만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전제 통치 기간도 40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5:4, 5). 따라서 40년이란 기록은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誤記)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대부분의 역본의 기록대로 4년을 따라야 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Vulgate 등). 한편, 혹자들은 본절을 '40일만에'로 보기도 한다(Ussher, Patrick). 그러나 40일은 압살롬이 반란의 준비를 갖출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짧은 기간이므로 이 역시 지지할 수 없다.

(주);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 압살롬이 하나님께 어떠한 서원(誓願)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압살롬의 패역한 행동과 전후 문맥 관게로 보아, 이는 다윗을 속이고서 헤브론으로 가려 한 압살롬의 거짓말 이었음이 거의 확실시 된다. 즉 그는 다윗으로부터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거사(擧事)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이제 하나님까지 팔아 먹고 있다 것이다(9-12절).

(주); 헤브론에 가서...이루게 하소서 - 본래 이름이 기럇아르바(Kirjath-arba)인 헤브론(Hebron)은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이다(창 13:18).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이나 기브온(대상 16:39)과 같은 종교 중심지가 있긴 하였지만, 압살롬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8절)은 그다지 이상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Matthew Henry).

성 경: [삼하15:8]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압사롬의 반역]

(주);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 암논 살해 사건 후 압살롬이 외조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도망쳐 그 곳에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때를 가리킨다(13:37, 38). '서원하기를...여호와를 섬기리라'는 압살롬의 말은 그가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이다(7절). 그런데 압살롬이 이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까닭은 그가 헤브론에서 반역의 기치(旗幟)를 들기 위함이었다. 즉 압살롬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며(3:1, 3), 다윗이 그곳에서 기름 부음 받은 것(2:1-4)을 생각하고 자기도 그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려 작정한 것이다(Leon Wood).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5:1-10)으로 옮긴 탓에 생긴 헤브론 주민들의 섭섭한 감정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Thenius, Wycliffe,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 헤브론을 수도로 삼은 동안 그곳 거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기득권(旣得權)을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난 후에는 자연히 그같은 이권을 상실하였을 터이니, 헤브론 주민들은 점차 다윗에 대하여 불만과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로서 헤브론을 지목하고서, 어떻게든 반역의 무리를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10-12).

성 경: [삼하15:9]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압살롬의 반역]

(주); 평안히 가라 - 다윗 왕의 이러한 허락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의 움직임에 대하여 다윗 왕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아마 온유한 성품을 지닌 다윗 왕이 압살롬을 단지 사랑스런 한 아들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6:12-19; 신 12:4-14)을 놔두고 굳이 헤브론에까지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한 압살롬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갖지 않고 쾌히 승락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5:10]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압살롬의 반역]

(주); 정탐을...두루 보내어 - 압살롬이 이처럼 반란 전에 정탐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낸것은 아마 각 지파의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Kiel), 자신이 거사(擧事)할 때 반발하지 않도록 미리 정지(整地) 작업을 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주); 나팔 소리를 듣거든 - 여기서 나팔 소리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든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당시 압살롬이 나팔 소리 하나만으로 전국에 거사를 알린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혹자의 주장처럼 압살롬이 순전히 나팔 소리로만 거사를 알렸다고 볼 수 없으며(Pulpit Commentary), 나팔 이외에도 다양한 신호 방법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Lange).

성 경: [삼하15:11]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압살롬의 반역]

(주); 이백 명이...저와 함께 갔으며 -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이백 명의 인사(人士)는 단순히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 예루살렘 성의 고위 관리들이었을 것이다. 즉, 압살롬은 이들이 자기의 거사에 동조(同調)해 줄 경우 자기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명목(7,8절)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Lange). 그렇다면 이는 이백 명의 인사들은 압살롬의 반란 기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유인당한 셈이므로, 아마 압살롬은 이들이 반항할 경우 이들을 살해하려고까지 했을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성 경: [삼하15:12]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압살롬의 반역]

(주);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하도벨 - 길로(Giloh)은 유다 남쪽 산지에 있는 한 성이다(수 15:51).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벱 잘라'(Khirbet Jala)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아히도벨(Ahithophel)은 지략이 뛰어나 다윗의 모사(謀士)로 중용(重用)되었던 자로서(31절),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지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그를 영입하였는데, 과연 그의 기대대로 아히도벨은 기발한 모략을 제공하여 압살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16:20-23; 17:1-3). 그런데 한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활약했던 아히도벨이 이처럼 쉽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을 놓고 추정해 볼 때, 그 까닭은 아마도 다윗 왕의 악행에 대한 그의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1:3과 23:34 또는 대상 3:5 등을 통해서 볼 때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히도벨이, 자기의 손녀를 추행하고 또한 손녀 사위인 우리아를 모살(謀殺)한 다윗 왕의 파렴치한 행위(11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가 압살롬의 제의가 있자 이렇게 빨리 변심할 수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1:3 주석 참조.

(주);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급속도로 압살롬에게 크게 유리해진 반면, 다윗 왕에게는 크게 불리해졌다. 그 원인은 아마도 압살롬의 매력적인 외모(14:25, 26)와 그의 간교한 여론 조성(1-6절)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비추어진 다음과 같은 다윗 왕의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의 죽음(11장), (2) 암논의 범죄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한 조치(13:21), (3) 영토 확장 사업(8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화된 다윗 왕의 대국민 관심(對國民關心)과 과다한 세금 징수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백성들은 이제 다윗 왕의 공정성과 윤리성, 그리고 통치력에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Lange, Leon Wood).

성 경: [삼하15:13]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피신]

(주); 이스라엘의 인심이...돌아갔나이다 - 이 말은 문맥상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백성들이 이제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Keil). (2) 백성들이 이제 이익을 위해 압살롬의 편에 붙었다는 뜻이다(Lange).

성 경: [삼하15:14]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피신]

(주); 일어나 도망하자 -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자마자 이처럼 즉각적으로 피신하려 한 것은 아마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예언했던 재앙(12:10, 11)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다윗은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성(都城) 예루살렘이 전화(戰火)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이 이처럼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면서도 궁을 지키도록 후궁 10명을 남겨둔 것(16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주); 우리 한 사람도...피하지 못하리라 - 다윗은 2년 동안이나 벼르다가 기어코 암논을 살해하고야 말았던 압살롬의 강한 복수심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13:23-29). 따라서 이번에도 2년 동안의 연금(軟禁) 상태(14:28)를 비롯하여 다윗과 여러 가지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압살롬(13:20, 21, 31; 14:24)이 잔인한 복수극을 펼칠 것으로 충분히 예상 했을 것이다(Lange, Keil & Delitzsch, 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다윗은 피난길을 재촉하였는데, 이때 다윗 왕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탈출한 사람은 그의 호위병과 6백 명의 병사들 그리고 많은 대신(大臣)과 백성들이었다(17절).

성 경: [삼하15:15,16]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피신]

(주);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명을 남겨 두어 - 다윗 왕은 자기에가 앙심을 품은 압살롬이 자기의 이복 형제들과 왕비들까지 모두 살해할 것을 염려하여 이들 모두는 피난 길에 함께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후궁(後宮)열 명은 죽을 염려가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궁을 지키게 하였을 것이다(Hertzberg). 하지만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2:11; 16:20-22). 즉 하나님께서는 인긴의 생각까지도 친히 주장하사, 한번 선고한 죄악의 징벌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성 경: [삼하15:17]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피신]

(주);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다윗 왕을 따라 나온 예루살렘 성내의 모든 사람들, 곧 왕의 가족들과 그의 신하들 및 성내 주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주); 벧메르학 - '벧메르학'(*)은 '먼 집', 또는 '먼 궁'이란 뜻이다. 이는 동네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있던 다윗의 별궁(別宮)이었던 것 같다. 학자들은 이 별궁이 다윗 성(5:9) 동편 기드론 시내(the brook Kidron)를 넘기전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렇게 볼 때,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기드론 시내를 넘기 전에 이 별궁에서 안전한 탈출을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제 이와 관련 본절에서부터 언급되는 다윗의 도피 경로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벧메르학에서 감람 산 길로 진행함(18, 30절) (2) 감람 산 부근의 바후림에 이르름(16:5) (3)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당도함(18:5) (4) 에브라함 수풀에서 압살롬군과 격돌함(18:6-8).

성 경: [삼하15:18]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피신]

(주);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 - 여기서 그렛(Cherethites)과 블렛(Pelethites)은 다윗 왕의 시위병(侍衛兵)들을 의미한다. 이 중 그렛은 왕명을 따라 중죄인을 처벌하는 사형집행 기관의 병사들이며, 블렛은 왕의 보발군(步撥軍)들이다. 8:18 주석 참조.

(주);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 인 - 우리는 이들을 다윗 왕이 블레셋의 수도인 가드(Gath)를 점령했을 때(8:1)포로로 잡아온 병사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대적의 포로들로 자기의 근위대(近衛隊)를 조직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드에서 온 육백 인'이란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시절에 그의 도피처였던 블레셋의 자드에서부터 충실히 다윗 왕을 추종했던 용사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은 가드에서부터(삼상 27:2) 시글락(삼상 27:6; 30:1), 헤브론(2:3)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5:6)다윗 왕을 보필하는 데 초지 일관(初志一貫)한 신실한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왕의 근위대로 임명되어, 지금은 다윗을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Wycliffe, Keil & Delitzsch).

성 경: [삼하15:19]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을 추종하는 잇대]

(주); 가드 사람 잇대 - 여기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란 말은 '블레셋의 가드에서 망명하여 온 사람'이란 뜻이다. 즉, 지금 다윗 왕을 따르고 있는 잇대는 그의 고향에서 어떠한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자의(自意) 또는 타의에 의해서 본국을 떠나 다윗에게로 망명하여 온 용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의 본국에서 대단히 용맹을 떨쳤던 큰 용사였기 때문에 다윗 왕은 그의 무용(武勇)과 지위를 인정하여 자신의 군대 장관 중 한 명으로(18:1, 2) 임용하엿던 것이다(Keil, Eward, The Interpreter's Bible). 잇대는 얼마 후에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한 위치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는 다윗군의 지휘자가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주);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 여기서 '쫓겨난 나그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레'(*)는 비단 포로(스 1:11; 10:8; 렘 28:6; 겔 1:1; 3:11) 뿐 아니라 이주민, 또는 망명자, 추방자까지도 의미하는 단어 이다(대상 5:22 ' 스 4:1; 렘 29:16; 겔 12:7; 왕하 24:14; 25:11).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할 때 여기서는 후자 곧 망명자, 추방자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1) 잇대는 혈혈 단신으로 다윗 왕에게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가족과 시종들까지 거느리고 왔기 때문이다(22절). 즉, 만일 잇대가 포로나 인질로 예루살렘에 끌려왔다면 혼자서 왔을 것이나, 그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온 점으로 보아 그는 포로가 아니라 망명자인 것이다. (2) 잇대는 가드 사람으로서 다윗 왕의 측근이 되었으며, 심지어 다윗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이다(18:1, 2).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단순한 포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한 용사임을 증거해 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적군의 포로를 자기 곁에 두거나 군대의 사령관으로 삼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잇대는 다윗 왕의 전쟁 포로가 아니라(Thenius), 분명히 정치적으로 망명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Keil,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주);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 여기서 '왕'은 현재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임을 자처하고 있는 압살롬을 가리키는 말이다(10-12절). 따라서 본절은 다윗 왕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곤경에 빠져 잇으면서도 한 사람의 무고한 외국인을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잇대는 본토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기 때문에 공연히 타국의 정치적 내란으로 인해 목숨을 내걸 필요가 없다고 다윗 왕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 왕의 언사를 통해 자신의 곤경 중에도한 사람의 난감한 처지를 이해하여 주는 그의 깊은 사려(思慮)와, 용사의 힘을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도모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난국을 타개하려는 그의 대담한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다윗은 압살롬을 가리켜 굳이 '왕'이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본절에서는 그를 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아마도 다윗이 압살롬을 진정 왕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잇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렇게 칭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압살롬이 반란에 성공할 경우, 외국인인 잇대는 현재 이스라엘에 망명한 정치적 망명자이므로 압살롬을 왕으로 섬겨야만 하는 것이다(Keil, Lange).

성 경: [삼하15:20]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을 추종하는 잇대]

(주); 너는 어제 왔고 - 여기서 '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트몰'(*)은 반드시 문자적으로 어제만을 의미하지 않고, 가까운 과거 곧 얼마전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이다(창 31:2, 5; 출 5:7, 8, 14; 신 4:42; 수 3:4; 룻 2:11; 욥 8:9).

(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 잇대의 앞날에 대한 다윗 왕의 축원(祝願)인 이 말에 대해, 혹자는 부사적으로 해석하여 '은혜롭고 진실되게 너와 함께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는 의미인 것으로 해석한다.(Maurer). 그러나 여기서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밀접하게 관련된 말이다. 즉 구약의 모든 용례들을 살펴볼 때, 이 용어들은 거의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은혜)과 신실성(진리)을 의미하는 것들이다(출 34:6; 시 25:10; 40:10, 11; 57:3; 61:7; 잠 3:3; 14:22; 16:6).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것과 같은 언약의 축복들이 너에게도 함께 하기를 원하노라는 다윗 왕의 신앙적인 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Keil, Vulgate, LXX). 2:6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5:21]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을 추종하는 잇대]

(주); 여호와의 사심과...맹세하옵나니 - 이 말은 잇대가 다윗 왕에게 망명한 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이는 이제 잇대가 블레셋의 우상 종교를 버리고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改宗)했음을 시사해 준다.

(주); 어느 곳에 계시든지...그곳에 있겠나이다 - 다윗 왕의 깊은 배려에 대한 잇대의 충성스런 대답이다. 이러한 잇대의 결심은 다윗 왕의 신앙 인격에 매료된 나머지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아까와하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다윗 왕은 한때 스스로 죄악에 빠지고(11장) 자녀 교육을 제대로 시행치 못하는(13:21)등 인간적 잘못을 보이긴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이방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순수한 신앙 인격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신앙 인격으로 말미암아 한 충성스런 용사를 얻을 수 잇었고, 후일 왕권 회복에 있어서 큰 도움을 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8:2). 이처럼 바른 인격과 참된 신앙의 소유자는 이웃에게 감화를 끼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정녕의 성도가 힘써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마 5:14-16; 고후 2:15).

성 경: [삼하15:22]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을 추종하는 잇대]

(주); 그와 함께한 아이들 - 여기서 '아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프'(*)는 본래 (1) 어린이, 유아들을 의미하나 (2) 딸린 식구들, 처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출 12:37; 창 47:12). 그런데 여기서의 의미는 후자로서, 이 말은 잇대에게 속한 식구들, 곧 그의 모든 처자(妻子)들을 가리킨다(Keil, Lange).

성 경: [삼하15:23]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을 추종하는 잇대]

(주); 온 땅 사람이 대성 통곡하며 - 여기서 '온 땅 사람'이란 17절의 '모든 백성'과는 의미가 다른 말로, 다윗 일행이 피난중 거쳐 지나간 지방의 모든 주민들을 의미한다.

(주); 기드론 시내 - 예루살렘과 감람 산 사이에 잇는 깊은 골짜기로서, 강우량이 많은 겨울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인 여름에는 메말라 있는 간헐천(間歇泉)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동편의 여호사밧 골짜기(욜 3:2)에 위치해 있다. 위클리프(Wycliffe)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에서 요단 계곡이나 여리고 방면으로 여행하는 자들은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 산 비탈길을 넘는 루트(root)를 애용한다고 한다.

(주); 광야 길 - 예루살렘 북쪽 벧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유다 광야상의 길이다. 다윗 왕은 이 길을 거쳐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17절 지도 참조.

성 경: [삼하15:24]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주); 사독과...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 이처럼 사독과 그와 함께한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언약궤를 메고 나와(6:12-19) 다윗과 동행하려 한 사실은, 그들 전체가 다윗 왕을 지지하고 나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Payne, Matthew Hhenry). 즉 그들은 단지 내란 중(10-12절)에 언약궤를 안전히 보호해야겠다는 의도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장물인 언약궤를 다윗 편에 둠으로써 장차의 전투에서 다윗 왕에게 유리하게 하고픈 심사(心思)에서 그리하였던 것이다. 한편 사독(Zadok)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Eleazar)의 후손으로서, 다윗 치하에서 아비아달 가문과 더불어 제사장작을 수행하던 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8:17 주석을 참조하라.

(주); 내려놓고...기다리더니 -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은 장소는 기드론 시내(23절) 건너편에 위치한 감람 산이다(30절). 즉, 사독과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내의 사람들이 미처 다 빠져 나오지 못하자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감람 산에 언약궤를 잠시 안치해 놓고서 기다렸던 것이다.

(주);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 여기서 '올라오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알라'(*)는 '밑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아비아달이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으로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알라'가 '제물을 드리다'는 뜻으로 사용된 극히 제한된 경우(24:22; 삼상 2:28; 왕상 3:15)를 들어, 혹자는 이 말이 아비아달의 제사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Michaelis, Bottcher). 그러나 그들이 증거 구절로 제시한 본문들에서는 제사와 관련된 제물이나 기구 등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 본문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피신 길에 어른 다윗 일행과 합류하려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온 아비아달이 그 와중에서 제사를 드릴 시간적인 여유를 가졌다는 것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한편 아비아달(Abiather)은 놉의 제사장 아하멜렉(8:17; 삼상 21:1; 22:20)의 아들로,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이다. 이 가문 역시 다윗 치하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으니, 다윗 시대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이란 양대 제사장 가문이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8:17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5:25]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주); 하나님의 궤도...도로 메어 가라 - 이처럼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렐 성내로 다시 반환시킨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 중 우선 표면적(表面的)인 이유로서, 예루살렘 성내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함이었음을 들 수 있다. 즉 다윗은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연락원(連絡員)이 필요하였는데, 이에 적합한 인물로서 제사장들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압살롬에게 언약궤를 지키는 자로만 보여질 것이므로,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28절). 다음으로 다윗이 이처럼 행동한 내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금의 곤경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26절). 즉, 다윗은 자신이 현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한 언약궤를 모신다 해도 과거의 죄에 대한 징계(12:10-12)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렇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의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확신하였다(14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가 언약궤를 반환한 것은, 비록 하난미의 임재의 가견적(可見的)인 상징물이 곁에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나라를 영원히 지속시켜 주시갰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7:16)을 믿은 까닭임이 분명하다(The Interpretre's Bible, Lange). 또한 다윗이 언약궤를 반환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현재 피신길에 오른 자신과 더불어 정처없이 유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Schulz). 즉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였기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낸것이다.

(주);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보이시리라 - 이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미신적(迷信的)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의 곁에 있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과 함께 함을 더욱 중요시 여겼던 것이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다윗의 신앙 고백이며,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하는 순전(純全)한 신앙의 표현이라 하겠다(Lange).

성 경: [삼하15:26]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주);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 본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뻐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의 처사에 자기 자신을 모두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복하겠다고 하는 다윗의 진정한 겸손과 순종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삼상 15:22).

성 경: [삼하15:27]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주);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 여기서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에'(*)는 '보다', '감찰하다'는 뜻의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서 관찰자(觀察者)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윗 왕이 사독을 가리켜 선견자라고 부른 것은 대제사장의 관찰 기능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즉, 당시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임무 뿐만 아니라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관찰하여 왕이 나아갈 바를 자르쳐 주는 임무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삼상 22:10; 23:6). 따라서 본절은 다윗이 사독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왕인 자신을 위하여 그가 모든 일을 관찰해야 할 임무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이로써 사독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의 동태를 살펴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도록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선견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9: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하15:28]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주); 광야 나룻터 - 이는 요단 강 나루터로서 사해 입구에서 약 4.5km 떨어진 지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여차하면 요단강을 건너 먼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다윗 왕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보고를 기다렸던 것이다(17:16, 21, 22).

성 경: [삼하15:29]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주); 사독과 아비아달이...도로...유하니라 - 사독과 아비아달이 다윗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그들은 이제 압살롬의 동정 파악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띠고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이다(27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와 같은 순종의 자세는 뒤이어 후새에게도 발견된다(32-37절).

성 경: [삼하15:30]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주); 감람 산 - 예루살렘 성읍과 유다 광야 사이에 병풍처럼 서있는 높은 구릉(丘陵)이다.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으로 유명하다(행 1:12). 한편 솔로몬은 이방인 아내들을 위하여 이곳에 우상 산당을 지었는 바(왕상 11:7, 8) 요시야 때에 가서야 훼파되었다(왕하 23:23, 24).

(주);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가리운 행위는 깊은 슬픔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또한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의 상징이므로,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곧 자신의 명예가 상실된 것을 부끄러워한 행동이기도 하다(에 6:12; 겔 24:17; 렘 2:37). 즉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파생된 압살롬의 반역(12:10-12)에 대하여 이제 큰 고통과 수치, 슬픔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13:19 주석 참조. 한편, 이 와중에서 다윗이 맨발로 울며 행했다는 말은 그가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Eward). 동시에 이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Thenius).

성 경: [삼하15:31]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주);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 여기에서 저자는 이미 앞서 압살롬의 모사(謨士)가 된(12절) 아히도벨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이는 그에 맞서 싸우게 될 다윗의 모사 후새(32-37절)을 소개하기 위한 도입부인 듯하다. 즉, 이들이 지략의 대결은 본 사건의 이름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그 전(前)단계로 여기서 아히도벨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17:1-23).

(주);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 이는 다윗 왕의 간절한 기도이다. 애통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심정에서 드려진 이 기도는 비록 짧지만 하나님께 그대로 상달되어 이루어졌다. 즉, 아히도벨의 모략은 뒤에가서 후새에 의하여 완전히 무력화(無力化)되었던 것이다(17:14). 여기서 우리는, 마음을 다한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능력이 있음을 보게 된다(막 9:28, 29 ;약 5:16-8). 삼상 1:1-18 강해, '기도와 기도의 응답' 참조.

성 경: [삼하15:32]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 - 이는 감람 산 꼭대기를 가리킨다(30절). 한편 여기서 '경배'란 말은 제사보다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24절 주석 참조). 한편 이곳은 지리적으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생전에 이곳에서 기도하신 적이 있다(마 26:30; 눅 21:37; 22:39).

(주); 아렉 사람 후새가...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 후새가 자신의 옷을 찢으며 흙을 머리에 무릅쓴 채 다윗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곧 통일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 길에 나서게 된데 대한 자신의 충격과 슬픔을 토로(吐露)한 것이었다(1:2 주석 참조). 아무튼 다윗이 이처럼 피난 길에서나마 후새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31절)의 응답(應答)이었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후새를 만남으로써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할 수 잇는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있게된 것이다(17:1-23). 한편, 후새(Hushai)는 다른 곳에서 다윗의 친구로 기록되어 있는데(37절; 16:16; 대상 27:33), '친구'에 해당하는 '레에'(*)는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왕에게 직고하는 대신(8:18)을 의미하는 말이다(Hertzberg, Keil). 따라서 후새는 다윗 왕의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왕의 정책 결정에 상당 부분 관여한 모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렉 사람(the Archite)이란 에브라엠 지경의 에렉 성 출신자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의 거주지는 벧엘과 아다롯 사이 곧 에브라임 지파의 남쪽 경계수(수 16:2)였다(Lange).

성 경: [삼하15:33]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주); 내게 누를 끼치리라 - 다윗 왕이 후새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 후새가 나이가 매우 많아 자신의 일행을 따라오기 힘들 것으로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 가운에는 아히도벨에 버금가는 모사인 후새가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압살롬측의 정보를 탐지하고, 저들의 계략을 파하는 것이 휠씬더 유익하다는 의미 또한 담겨있을 것이다(34절).

성 경: [삼하15:34]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주); 압살롬에게 말하기를...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 다윗이 후새로 하여금 이러한 모략을 꾸미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 였다. (1) 아히도벨이 다윗 왕을 추격하는 일에 대하여 압살롬에게 모략을 베푸는 일을 후새가 중간에서 방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17:1-14). (2) 압살롬의 결정 사항을 사독과 아비달에게 알려 주어 다윗 자신에게 기별하기 위함이다(35, 36절; 17:15-23).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고 있음을 볼 수 잇다.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인간적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과 기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구하고, 구한 다음에는 찾고, 찾은 다음에는 두드리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마 7:7, 8).

성 경: [삼하15:35,36]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이 부분은 다윗의 비상 연락망이 어떻게 짜여졌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것은 곧 후새-사독-아비아달-아히마아스와 요나단-다윗의 순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5:37]

주제1: [압살롬의 반란]

주제2: [다윗의 친구 후새]

(주); 후새가 곧 성으로 들어가고 - 앞의 대제사장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9절) 후새도 다윗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사실상 이러한 순종은 압살롬에 의해 그 음모가 발각될 경우 살해를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모험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새가 이를 감행한 것은 그만큼 그가 다윗 왕을 존경했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이와 같이 국내의 종교 지도자(대제사장들)과 정치 지도자(후새)가 충성스럽게 다윗 왕을 지지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Payne).

(주);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급히 피신 길에 오른 소식(13-18절)을 들은 압살롬이, 이제 반란지(反亂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승리의 입성(入成)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7-12절).

성 경: [삼하16:1]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시바의 간계]

(주);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 여기서 '마루턱'(top of hill)이란 감람 산 마루턱 곧 감람 산 꼭대기를 의미한다.

(주);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 - 본래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이다 (9:2, 9-11). 그는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그의 그 같은 성품은 본장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다.

(주); 여름 실과 - 여름이 끝나갈 무렵 완전히 익은 열매를 가리킨다(암 8:1,2). 이 실과는 열매 야자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70인역(LXX)에서는 '대추야자'(*, 포 이닉스)로 번역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열대 지방이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행시에 종종 이것으로 갈증을 해소한다고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16:2]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시바의 간계]

(주); 시바가 가로되...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 시바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 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공궤한 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이같이 많은 음식물을 날라 온 것으로 추정된다(The Interpreter's Bible).

성 경: [삼하16:3]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시바의 간계]

(주); 저가 말하기를...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 이와 같은 시바의 말은 철저한 위증(僞證)이다(19:26, 27).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缺格事由)를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4 :4 주석 참조)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가 마치 므비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은 물욕(物慾)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즉 시바는 피난 중에 경황이 없는 다윗을 흥분시켜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 하려는 사악한 목적 하에서 이같은 모함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4절).

성 경: [삼하16:4]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시바의 간계]

(주);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 이는 시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의 경솔한 결정이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시바가 공궤한 음식(1, 2절)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다. (3) 다윗에게 다소나마 사울가의 부상(浮上)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Keil).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이처럼 실언(失言)을 한 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데, 실상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이다.

성 경: [삼하16:5]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주); 바후림 - 바후림(Bahurim)은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을 넘어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지점이다. 15:17 지도 참조.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과거 다윗이 옛 아내인 미갈을 당시의 남편 발디엘로부터 취하여 왔을 때 발디엘이 올며 따라오다가 되돌아간 역사적인 성읍이기도 하다(3 :16).

(주); 게라의 아들...시므이 - 사울의 친족 중 한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므이(Shimei)는 자기 지파와 가문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됨을 시기하고, 이제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이를 반기면서 다윗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물론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이와 같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긴 하였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왕상 2:36-46).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인 지파주의자 또는 혈통주의자(血統主義者)의 편협한 사상과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오늘날 가문, 혈통, 지연(地緣) 등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대아(大我)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표상으로 이 시므이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6:6]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주);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 여기서 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이다(Wycliffe). 그런데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까닭은 다윗이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물론 여기서 '사울가의 피'란 사울 왕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장 아브넬의 죽음을 의미 한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죽음은 블레셋과의 전투인 길보아 전투에서 생긴 죽음으로(삼상 31장) 다윗 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나,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어느 정도 다윗 왕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3:27;4:6). 즉, 시므이는 여기서 다윗 왕이 과거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죽인 장본인이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의 책임이 바로 다윗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Hertzberg).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을 뿐이다(9: 9,10). 따라서 시므이의 이같은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先入見)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는 바, 우리는 여기서 선입견의 무서운 실상을 보게 된다.

성 경: [삼하16:7]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주); 비루한 자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벧리야알'(*)을 직역하면 '벧리알의 사람아'란 뜻이다. 여기서 벧리알이란 말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 또는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아', 또는 '파괴를 일 삼는 자식아'란 뜻이다(Wycliffe). 이렇게 볼 때 시므이의 욕설은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독설(毒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일 신약 시대에 이르러 벧리알(Belial)이란 말은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 발전되었다(고후 6:15).

(주); 가거라 가거라 - 이는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는 욕설이다. 이와 같은 욕은 약속의 땅 가나안(창 13:14-17))을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믿고 있었던 히브리인들 에게는 아주 악랄한 저주였다.

성 경: [삼하16:8]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15:10-12)이 이스보셋과 이브넬을 죽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시므이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다윗을 정죄하고 있지만 실상 그의 정죄는 정하지 못하며, 지극히 감정적이그 무지에 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의 책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5:28).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 역시 다윗의 사적(私的)인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벌이었기 때문이다(12:10, 11).

성 경: [삼하16:9]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안내]

(주); 아비새 - 요압의 동생으로(2:18), 다윗 왕의 조카이자 그의 충성스런 신하이다(3:30;10:10).

(주); 죽은 개 -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隱語)이다(3:8;9:8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6:10]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안내]

(주); 스루아야의 아들들아 - 스루야(Zeruiah))는 아비새의 어미이다(2 :18). 그런데 여기서 '아들들'이란 복수(plural number)로 보아 아비새 곁에는 그의 형 요압도 함께 있었던 것에 분명하다. 요압은 아마도 시므이을 단칼에 목 베어 버리자는 아비새의 의견(9절)을 지지했을 것이다.

(주);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아비새의 제의(9절)를 일축해 버리는 말로서, '나의 생각과 너희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왕상 17:18;수 22:24).

(주); 여화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 시므이의 악독한 저주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시므이의 저주까지 포함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런의 모든 사건들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그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2:10-12)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과거 실수한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인간에게 당하는 억울함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던 자기의 추악한 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새로운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성 경: [삼하16:11]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안내]

(주); 내 몸에서 난 아들도...이 베냐민 사람이랴 - 이는 시므이의 저주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윗의 역설(力說)이다. 즉 자신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는데(15:10-12), 하물며 다른 지파 출신인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주 한 마디 한 것쯤이야 하나님의 징계치고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반문이다.

성 경: [삼하16:12]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안내]

(주); 나의 원통함...그 저주 까닭에...갚아주시리라 -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있는 본 구절에는 '원통함'과 '저주'라는 용어가 서로 대조되고 있다. 이 중 '원통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인'(*)은 죄, 사악한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과거 다윗이 실제로 범했던 죄(11장)를 의미한다. 반면, '저주'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행한 저주를 의미하는 바, 곧 다윗이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가의 피를 흘린 자라는 저주(7, 8절)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자기가 이러한 수욕(受辱)을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가해진 과다한 저주를 기억하셔서 자기를 궁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현재 자기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6:13]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안내]

(주); 저를 향하여...티끌을 날리더라 - 여기서 '티끌을 날리다'는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는 뜻이다(공동 번역). 즉 시므이는 다윗 앞서 행하면서 다윗을 모독하는 의미로 짐짓 그 앞길에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흙먼지는 다윗은 물론 시므이 그 자신의 머리 위에도 덮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 역시 홅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그것은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가 합당치 아니한 것일 때 그 저주는 도리어 저주를 발했던 시므이에게로 되돌아갈 뿐이란 사실이다(12절). 삿 17:1-6 강해, '저주에 대하여' 참조.

성 경: [삼하16:14]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안내]

(주); 곤비하여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예핌'(*)은 '피곤하다'는 뜻의 동사 '아이프'(*)의 형용사형으로, '피곤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KJV). 그런데 혹자는 '아예핌'이 여기서는 지명(地名)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근거로 본절에서 '샴'(*) 이라고 하는 지시 부사가 사용되었음을 든다. 즉 이 '샴'이란 용어는 '거기에서'란 뜻으로, 다윗과 그 일행이 휴식을 취한 한 장소를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이 중 어느 견해가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쪽을 취하여도 문맥에 큰 변동은 없다. 다만 '아예핌'을 고유 명사로 볼 경우, 17:18, 21에 의거할 때 '아예핌'은 바후림을 지나 요단 강 근처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성 경: [삼하16:15]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후새의 거짓 투항]

(주);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 여기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란 압살롬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을 의미한다(19:9, 10). 한편 압살롬 반역 사건과 관련, 본서 저자는 압살롬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다윗을 지지하는 자들을 '모든 백성'으로 표현하고 있다(15: 17, 23, 24;17:2, 3) 그런데 본 저자가 이와 같이 표현한 까닭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압살롬을 왕으로 받아들여 압살롬의 세력은 이스라엘 건국에 걸쳐 확장된 반면, 다윗의 경우에는 각 지파들로부터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를 따랐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주); 예루살렘에 이르고 - 15:37에서 언급한 상황을 다시 한번 반복,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이는 다윗과 그 일행이 황급히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자(15:14) 압살롬이 반역의 도배(徒輩)들을 이끌고 헤브론(15:9-13)에서 예루살렘으로 무혈 입성(無血入城)한 것을 가리킨다.

(주);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 이는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아히도벨로 말미암아 모종의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암시 하고 있는 전조(前兆) 구절이다. 즉 이는 아히도벨의 사주로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겁탈하는 사건(20-23절)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도입 구절이다. 한편 아히도벨(Ahithophel)의 신앙에 관하여서는 15:12 주석을 참조 하라.

성 경: [삼하16:16]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후새의 거짓 투항]

(주); 아렉 사람 후새 - 아히도벨에 버금가는 다윗의 모사(謀士)이다. 다윗의 명을 좇아 압살롬에게 거짓 투항한 그는(15:32-37) 아히도벨의 모략을 꾀하는 데 성공하므로써(17:1-23), 압살롬의 반역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18장). 15:32 주석 참조.

(주); 왕이여 만세 - '왕이여 만세수(萬世壽)를 하옵소서'란 뜻이다. 공동 번역은 이를 "임금님, 만수무강을 빕니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압살롬에 대한 후새의 이와 같은 환영은 앞으로 압살롬의 주변에서 지내면서 다윗을 위해 활약할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일 뿐이다(Wycliffe).

성 경: [삼하16:17]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후새의 거짓 투항]

(주);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 자기를 환영하는 후새에게 일단 의심을 품고 그의 진의(眞意)를 떠보기 위해 질문하는 압살롬의 조롱섞인 말이다. 즉 이 말은 "네가 내 밑에 들어오는 것은 네 친구인 다윗을 배반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의미이다.

성 경: [삼하16:18]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후새의 거짓 투항]

(주);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 - 자기에 대한 압살롬의 의심을 불식 (拂拭)시키기 위해 후새가 압살롬의 정권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후새가 이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진심으로 압살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마치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처럼 이스라엘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당시 압살롬의 상황(15:6, 12)만을 주관없이 전달 함으로써 자기의 의중(意中)를 감추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후새에게 있어서 압살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인정받지 못한 단순한 반란자였올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 압살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듯한 후새의 대답은 반란 주모자인 압살롬의 마음을 충분히 흐뭇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즉 압살롬은 후새의 아첨에 마음이 동하여 그를 측근에 두고 만 것이다(17:5).

성 경: [삼하16:19]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후새의 거짓 투항]

(주);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 자신이 전왕(前王) 다윗에 이어 압살롬을 새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왕위 계승법상(繼承法上)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후새의 그럴 듯한 주장이나. 즉, 압살롬은 당시 다윗의 장자였기 때문에 다윗을 이어 왕이 된다는 것은 당시 주변 국가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같은 주장은 아직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엄연히 생존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릇된 주장이다. 그러나 후새의 말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 행세를 할 수 있는 그럴 듯한 정당성을 발견한 압살롬은 더이상 후새를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성 경: [삼하16:20]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첩들을 범하는 압살롬]

(주);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 여기서 '가르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하부'(*)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너희 들은...가르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압살롬은 아히도벨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여러 모사들에게도 모략을 베풀라고 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12-23절).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략중 압살롬에 의해 세종적으로 채택된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이었음이 분명하다(21-23절). 한편, 여기서 압살롬이 신하들에게 모략을 베풀라고 한 것은 곧, 자신이 탈취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략을 일러달라는 의미이다.

성 경: [삼하16:21]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첩들을 범하는 압살롬]

(주); 왕의 아버지가...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 -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갈 때 궁을 관리하고 지키게 할 목적으로 남겨 두었던 열명의 후궁들을 가리킨다(15:16).

(주);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 아히도벨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의 폐위(廢位)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압살롬의 왕권을 완전히 굳히기 위한 작전이었다. 즉, 왕위 찬탈자들이 자신의 왕권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왕(前王)의 후궁들을 취해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보편적 관례였다. 따라서 아히도벨은 이러한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 따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케 함으로써 그의 왕권을 가시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3 : 7 주석 참조.

(주);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강하여 지리이다 - 이와같은 아히도벨의 말은 그의 모략 속에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 외에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음흉한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1) 아히도벨의 모략은 압살롬의 왕권의 가시화 뿐만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 간의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완전히 끊어놓기 위함이었다. 즉 만일 압살롬이 부친의 첩들을 취한다면, 이것이 야말로 부자지간의 상봉(相逢)을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는 확실한 계략이 되는 것이었다(창 35:22;49:4). (2) 그리하여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모든 자들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려란, 다름 아니라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라도 하는 날에는 자기들이 모조리 반역자로 몰리어 처벌되고 말 것이라는 염려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히도벨은 압살롬 추종자들이 안심하고 새 왕을 좇을 수 있도록 새 왕권의 완전한 독립성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3) 그밖에도 아히도벨의 이러한 모략은 다윗 왕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즉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조부라는 사실이 거의 분명하므로(11:3 주석 참조), 우리는 아히도벨이 밧세바를 강탈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모살한 다윗 왕(11장)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다윗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히도벨의 이와 같은 모략은 세상 사람들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할 때 분명 사악한 궤계가 아널 수 없다. (1) 근친 상간(近親相姦)을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했다는 점이다(레 18:7, 8) (2)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삼상 16:1-13)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점이다.

성 경: [삼하16:22]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첩들을 범하는 압살롬]

(주); 지붕에 - 이 지붕은 다윗이 목욕하던 밧세바를 바라보고 음욕을 불태웠던 곳인 다윗 성의 왕궁 지붕(11:2), 바로 그곳일 것이다.

(주); 장막을 치니 - 따가운 햇볕을 괴하면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기 위해 평평한 지붕위에 텐트(tent)를 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에 대하여서는 대하 33:1-11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를 참조하라.

(주);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더불어 동침하니라 - 나단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순간이다(12:11).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징계로서 장차 그의 처들이 백주(白晝)에 겁탈당할 것이라고 선고 하셨는데, 이제 아히도벨의 불의한 모략에 의하여 그같은 심판이 그대로 성취되고 만 것이다.

성 경: [삼하16:23]

주제1: [곤고(困苦)에 처한 다윗]

주제2: [다윗의 첩들을 범하는 압살롬]

(주);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이와 같더라 - 여기서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이란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알아낸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5 :19, 23;삿 1:1;18:5;20:18, 23, 27). 따라서 아히도벨의 모략이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는 말은, 그의 모략이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해 받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처럼 다윗과 압살롬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같은 아히도벨의 모략은 비록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런지 모르나, 압살롬에게는 악정(惡政)을 일삼도록 만든 촉진제 구실을 하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이 현명한 머리는 지니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선한 양심은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아히도벨의 지혜는 병든 양심에 사로잡힌 것이었으므로 그가 베푼 지혜는 필연적으로 파괴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7:1]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아히도벨의 전략]

(주);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 여기서 '오늘 밤' 은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급히 도망가고(15:14-16)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로 그날(15:37;16:15)밤을 가르킨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2. p.429). 따라서 아히도벨(Ahithophel)의 이와 같은 모략(謀略)은 다윗에게 약간의 쉴 겨를도 주지말고 바로 뒤따라가 다윗을 처치 하자는 계략이었다. 사실 이러한 아히도벨의 상황 판단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은 피곤한 몸으로 바후림(또는 아예핌) 부근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곳은 예루살에서 밤 사이에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 요단강 근처였기 때문이다. 16:14 주석 참조. 그러므로 만일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군을 급파 하였더라면 다윗은 꼼짝 못하고 칼에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성 경: [삼하17:2]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아히도벨의 전략]

(주); 약할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르페 야딤'(*)은 직면하면 '손들이 무력해질 때' 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손들'이란 말은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볼때 대개 '힘'을 상징하는 말이다(레 12:8;14:21,32;민6:21;신3:24;16:10;시89:48;겔8:1).

(주);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예견(豫見) 또한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은 소수의 시위병들과 육백인의 용사들(15:18)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무장하지 아니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거나 선량한 백성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15:17 주석 참조. 따라서 압살롬의 정예부대가 엄습(掩襲)할 경우 아히도벨의 예견대로 이들은 모두 혼비 백산(魂飛魄散)하여 흩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아히도벨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게 된다.

(주); 다윗왕만 쳐 죽이고 - 다윗 왕만을 쳐 죽이겠다는 아히도벨의 이같은 모략은 치밀한 계략에서 나온것이었다. 즉, 아히도벨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대다수가 압살롬을 지지하고 있으며(15:12), 현실적으로 실제적인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대상 3:1-9) 무의미한 살인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고 계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지 다윗 왕만 처치하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압살름의 지휘하로 몰려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히도벨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이사도벨의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지략(智略)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침해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이 제거하려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이다(삼상16:1-13).

성 경: [삼하17:3]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아히도벨의 전략]

(주);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 다윗왕을 추종하던 세력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16:15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로 보아 아히도벨은 다윗이 사망한 이후에는 다윗왕을 추종하던 자들일 지라도 이미 사망한 왕을 더이상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음을 알수 있다. 한편, 여기서 아히도벨은 '돌아오게 하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곧 그가 다윗의 추종자들을 국가의 반란자들로 그리고 압살롬의 정권(政權)을 정통성 있는 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즉 아히도벨은 이갈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압살롬에게 은연 중 아부하고 있었던 것이다(Keil,Lange) 한편, 70인역(LXX)에서는 본절 다음에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옴과 같이...'이란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말은 압살롬을 신랑에다, 국가 또는 백성들을 신부에다 비유한 것으로 곧 압살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히도벨의 낯 간지러운 아첨이라고볼 수 있다(Ewald,Thenius,Pyne) 그러나 이 구절이 원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정말로 아히도벨이 이러한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Keil,Lange).

(주); 왕의 채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 이는 다욋 추종자들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다윗의 생사(生死) 여부에 달린 문제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죽기만 하면 백성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압살름에게로 오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Pulpit,Commentary,keil).

성 경: [삼하17:4]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아히도벨의 전략]

(주);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 '옳게 여기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르'(*)는 '좋아하다', '기뻐하다', '바르게 여기다'는 뜻(삿 14:3,7 민23:27;삼상18:26;시 119:128)인데, 이 단어의 형용사형 '요쉐르'(*)는 '마땅히 행해야 하는'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욥 33:23; 잠 14:2). 따라서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 모두가 아히도벨의 말을 기뻐하면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로 인해 부패해진 인간들의 이성적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절감(切感)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친아버지 다윗을 죽이자는 제안에 스스럼없이 '옳게 여긴' 압살롬이나, 지금껏 섬겨오던 자신들의 왕 다윗을 쳐죽이자는 제안에 동조한 이스라엘 장로들이나 모두 다 건전한 이성(理性)을 지녔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17:5,6]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 압살롬이 후세(Hushai)를 불러 그의 견해를 경청코자 한 사실로 보아 이제 후새는 아히도벨 못지 않게 압살롬으로부터 대단한 신임받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Lange).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다윗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결코 간과 해서는 안된다(14절).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압살롬의 이 작은 조치 하나로 말미암아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바뀌어지기 때문이다(17:14-26).

성 경: [삼하17:7]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이 때에는 아히도벨의 베푼 모략이 선치 아니하니이다 - 이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지금까지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잘못된 것이라는 후새의 주장이다. 즉 후새는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15-26절) 아히도벨의 모략(謀略)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성 경: [삼하17:8]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격분하였고 - 이와 같은 후새의 주장은 다윗이 지금 기진맥진해 있다고 한 아히도벨의 주장(2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즉 후새는 아히도벨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은 용사(勇士)들이며 지금은 예루살렘 성을 빼앗긴 일로 인하여 격분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즉시 군사적인 행동을 개시 하자고 주장한(1절) 아히도벨의 모략을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위급한 상황을 최대한 호도(糊塗)하여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려는 후새의 절실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후새가 본절에서 다윗과 그 종자들을 '새끼를 빼앗긴 곰' 에다 비유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여기서 곰은 팔레스틴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시리아의 갈색곰을 가리키는데(Wycliffe), 이것은 매우 사나운 것으로 이름나 있다(잠 17:12; 호13:8). 즉 후새는 다윗과 그 종자들을 사나운 시리아의 갈색 곰에다 비유 함으로써 지금 심히 약화된 다윗의 실제 전력(戰力)을 압살롬이 직시하지 못하도록 꾀하였던 것이다(16:14).

(주);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 이러한 후새의 주장 또한 기습 공격시 쉽게 승리롤 이끌어낼 것이라고 한 아히도벨의 낙관적인 주장(2절)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즉, 후새는 아히도벨이 아무리 기습 공격을 한다 하더라도 다윗은 병법(兵法)에 뛰어난 사람이므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도피할 때 실제로 많은 추격 부대를 여러차례 따돌린 바 있고(삼상24:1-22;26:1-15), 또한 그가 뛰어난 지략가라는 사실은 이미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후새의 주장은 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呼訴力)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2, p.533).

성 경: [삼하17:9]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 부대를 파견할 경우(1-4절) 압살롬과 다윗 진영은 사실상 최초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후새는 이 최초의 전투에서 기습 공격에 능한 다윗군에게 압살롬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7:10]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 이는 최초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몰고올 압살롬 군대의 심각한 사기 저하(士氣低下)를 예상하는 후새의 말이다. 즉 '사자'는 성경에서 대개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스러운 자를 상징하는 바, 여기서는 압살롬의 용맹스런 군사를 의미한다(1:23;창49:9;사38:13;벧전 5:8). 그리고 '저상하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메스 이마스'(*)는 '완전히 녹아버리다' 또는 '완전히 낙담하다'는 뜻이다(시 22:14;112:10;사 34:3 겔 21:7;나 2:10). 따라서 본절을 해석하면 아무리 용맹스러운 압살롬의 군사라도 그 마음이 완전히 낙담해 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후새의 논리는 매우 그럴듯 하다. 왜냐하면 군사전략상 최초의 전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전(一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있을 전투는 압살롬 진영과 다윗 진영의 실세(實勢)를 판단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같이 중요한 최초의 일전에서 압살롬의 군대가 그일부라도 다윗군의 기습 작전에 말려 들어 패하게 된다면, 그 소문이 온 군대에 퍼져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은 당연했다. 특히 압살롬의 군대는 반란 동조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난이 실패할 경우 국가의 법에 따라 처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후새는 바로 이와 같은 논리로써, 만약 실패 할 경우 너무나도 큰 손실을 보게 될 이번의 성급한 출전을 포기하도록 압살롬을 회유(懷柔)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7:11]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온 이스라엘을...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 아히도벨의 모략(1-3절)을 대신하는 후새의 대안(代案)이다. 여기서 후새는 이스라엘의 국민병(國民兵)을 온 지파 에서모집 할 것을 제안한다(Matthew Henry).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이 국민병을 모집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다윗 왕으로 하여금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모면케 하기 위한 교묘한 방책이었다(15-26절). 그런데 이같은 후새의 제안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모든 힘을 한번 과시해 볼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라는 점에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끌었다(Clericus).또한 여기서 후새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총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진두 지휘(陣頭指揮)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실상 압살롬을 전장(戰場)에 끌어들이기 위한 계략이다. 즉 반란의 주모자인 압살롬이 전장에 나가서 죽거나 포로가 된다면 반란은 끝이 나기 때문에 후새는 압살롬 자신이 친히 전장에 나가도록 부추겼던 것이다(18절). 그런데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영웅 의식을 자극하였다. 즉, 거대한 군대를 친히 지휘한다는 것은 섀로운 통치자 압살롬에게 있어 매력적인 것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던 것(14절)이다(Payne).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여, 당시 상황하에서 최선책(最善策)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후새의 뛰어난 활동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실 후새의 이러한 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14절).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다윗의 죄에 대하여서는 징계할지라도, 그의 생명과 나라는 끌까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바(7;14-16; 12:9-13) 이제 그에따라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신 것이다.

(주);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팔레스딘 최북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일명 '라이스', '레센'으로도 불리운다(수 19:47). 그리고 브엘세바(Beer - sheba)는 팔레스틴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과거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가 된 곳이다(삼상 8:2).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국토를 의미하는데(24:2, 15; 삼상3:20), 본절 역시 그러한 의미이다. 삿 18:29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7:12]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저의 위에 덮여 - 여기서 '덮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누아흐'(*)는 '앉다'는 뜻으로 이슬이 내려앉는 것 외에도 황충(蝗蟲)의 떼가 농작물을 갉아먹는 모습(출 10:14), 혹은 파리떼나 꿀벌떼가 먹이를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7;19). 따라서 본절은 엄청난 다수로써 소수를 몰아붙이는 인해 전술(人海戰術)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Wycliffe). 그런데 후새가 제안한 이러한 전술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전술로서, 일찍이 제시됐던 소수의 민첩한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순식간에 다윗을 살해하자는 아히도벨의 모략(1, 2절)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다.

성 경: [삼하17:13]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그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니이다. 다윗이 요행히도 성 안으로 도피할 경우 밧줄로 그 성과 시설물들을 묶어 모조리 강으로 끌어내리자는 뜻이다. 물론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즉 여기서 후새는 이스라엘 대중의 힘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인해 전술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자신의 제안(11,12절)을 더욱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 것이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Vol.2, p.431).

성 경: [삼하17:14]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대응 전략]

(주); 압살롬과 온 이스리엘 사람들이...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전략이었던 아히도벨의 모사(1-3절)를 거부하고, 그보다 열등한 전략이었던 후새의 모사를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는 압살롬 진영의 치명적인 실책(失策)이었다. 여기서 이러한 압살롬의 치명적인 실책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두어 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압살롬이 앞으로의 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였기 때문이다. 즉, 압살롬은 앞으로도 다윗의 세력은 미미할 것이나 자기의 세력은 국민병의 모집으로 인해(11절) 크게 획장될 것 이라고 낙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의낙관과는 달리 다윗에게는 뜻하지 않은 군사적 원조가 들어왔으나(27-29절) 압살롬은 거국적인 국민병 모집에 실패하였던 듯하다(Keil,lange). 압살롬이 후새의 아첨에 우쭐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 총병력의 지휘자가 되라는 후새의 아첨(11절)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직관력(直觀力)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Payne).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압살롬의 통치 능력(統治能力)의 부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항상 자만심에 빠지지 않은 다윗의 자세와는 현저히 비교된다(5:19, 23).

(주); 여호와께서...작정하셨음이더라 - 아히도벨의 모략이 파기되는 대신 후새의 모략이 채택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사태의 변화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략과 술수가 팽배하던 압살롬의 군사 회의에 마치 친히 참석하셨던 것과도 같이 역사하사 악인들의 불의한 모략을 결국 파하시고 만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의인에게는 평안과 복을 뜻하지만 악인에게는 파멸과 심판을 의미할 뿐임을 재삼 획인할 수 있다(요 1:14; 14:16).

성 경: [삼하17:15]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밀사 파송]

(주);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 사독(Zadok)과 아비아달(Abiathar)은 모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앞서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피하는 다윗 왕과 함께 동행하려 했으나 다윗 왕이 압살롬의 정세를 캐내도록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자들이다(15:24-29). 따라서 후새는 이제 이들을 통하여 중요한 정보를 다윗에게 빼돌리기 위해 이들과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주);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 후새는 두 제사장들에게 아히도벨의 모사(1-3절)는 물론 자신이 압살롬에게 베푼 모사의 내용(7-13절)까지도 전달해 준다. 이와 같이 후새가 자신의 모사를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알려준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앞으로 압살롬의 전술에 맞설 적절한 작전을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이 분명하다(18:1-5).

성 경: [삼하17:16]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밀사 파송]

(주); 오늘밤에 ... 건너가소서 - 여기서 '오늘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나오고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친 바로 그날밤을 의미한다. 1절 주석참조. 그런데 후새가 여기서 그날 밤 다윗더러 요단 강을 건너라 일러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즉, 후새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지 못하도록 이미 그럴 듯한 모사를 베풀었고(7-13절) 또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자기의 모사에 동의한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14절), 아직 최후 결정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다윗에게 빨리 강 건너 요단 동편 땅으로 피신하라고 통보하였던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Keil, Payne).

성 경: [삼하17:18]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밀사 파송]

(주);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 여기서 '한 소년'은 글자 그대로 '어린 소년'을 의미 한다기 보다는 압살롬이 다윗의 은밀한 첩보 활동(諜報活動)을 차단하기위해 풀어놓은 첩자(諜者)라고 보아야 한다(Pulpit Commentary,Keil). 이같은 사실은 이 소년이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압살롬에게 고했다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소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가 성경에서 '부하', 또는 '종자'(從者)라는 의미로도 많이 사용된 점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18:15; 삿7:10,11; 8:14; 느4:16,22,23; 5:10,15,16; 6:5). 한편 이러한 압살롬의 첩자의 눈에 비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의 행동은 이 첩자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장들인데도 불구하고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6:12-19)을 떠나 성 밖에 느로겔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남달리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신분이 다른 하층계급의 계집종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첩자는 이들을 다윗의 연락원으로 단정하고 압살롬에게 즉각 이 같은 사실 알렸던 것이다.

(주); 바후림 어떤 사람의...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 바후림(Bahurim)은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을 넘어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다. 16:5 주석 참조. 일찍이 이곳은 다윗 왕이 압살롬으로부터 도피할 때 시므이로부터 혹독한 저주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서 다윗의 연락원들이 한 여인으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고 있는것이다. 한편, 바후림의 여인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숨겨 주었던 '우물'은 물을 저장해놓는 수조(水槽)를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집집마다 수조를 설치해 놓고 거기다 물을 길어 저장하던 것이 보통이었기 패문이다. 추측컨대 아마도 당시는 때마침 건기(乾期)여서 수조가 비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그곳에 안전하게 숨을 수 있었을것이다(Pulpit Commentary,Keil). 아무튼 이들이 수조 속에 숨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었는가 잘 보여준다(Hertzberg).

성 경: [삼하17:19]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밀사 파송]

(주); 덮을 것을 가져다가...그 위에 널매 - 여기서 '덮을 것'이란 수조의 뚜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위에 널어놓은 '찧은 곡식'이란 아마도 '껍질깐 보리'(잠 27:22)를 의미하는듯하다(Keil, 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인의 이같은 행동은 마치 곡식을 햇볕에 말리기나 하는 듯이 뚜껑 위에 널어놓음으로써, 아무도 수조속에 사람이 숨어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만책(欺瞞策)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여인의 행동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곧 가나안 정탐꾼들을 숨겨준 라합의 용기를 연상시킨다(수 2:4-6). 한편. 만일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도움이 없었더라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요단 강 나룻터에 있던 다윗과 그 일행 또한 모조리 몰살당하는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21,22절; 15:2).

성 경: [삼하17:20]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후새의 밀사 파송]

(주); 그들이 시내를 건너 가더라. 여기서 '시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칼 하마임'(*) 작은 시내' 또는 '개울'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기드론 시내(15:28)가 아닌 바후림 근처의 작은 시내를 가리키는것 같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17:21]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 여기서 '물'은 요단 강을 가리킨다. 요나단과 아히마하스는 바후림에서 구사 일생하여 요단 나룻터(15:28)에 이른 후, 다윗 왕에게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빨리 요단 강을 건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후새의 전갈(15, 16절)을 전해 준 것이다.

성 경: [삼하17:22]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 새벽에 미쳐서...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 이처럼 밤 사이에 다윗과 그의 온 일행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군사 전략상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아히도벨의 모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그를 급습하여 살해하자는 것(1, 2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일단 압살롬으로부터의 위기를 모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을 재정비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다윗의 요단 강 도하(渡河) 사건은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었던 압살롬의 반역 일정(日程)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이다.

성 경: [삼하17:23]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아희도벨의 죽음]

(주); 아히도벨이...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 압살롬의 모사(謨士)인 아히도벨이 이처럼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앞로의 사태를 예견하는 뛰어난 능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압살롬 정권의 연한이 다하였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략이 선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서글픔과, 앞으로 다윗 왕에게 당하게 될 자신의 비참한 처후에 대한 공포심과 수치심에 못이겨 자살의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Lange). 한편, 이러한 아히도벨의 죽음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큰 사건이었다. 즉 아히도벨의 죽음은 압살롬이 이제부터는 다윗왕을 이길 만한 좋은 계략을 더 이상 얻을 수없게 되었다는 불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야 할 반란군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치명적(致命的)인 손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아히도벨의 죽음은 곧 압살롬의 죽음(18:9-15)을 예고하는 서막(prelude)이었던 것이다(Hertzberg).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결국 아히도벨의 죽음은 다윗의 간절한 기도(15:31)가 최종적으로 응답된 것이며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Lange). 이처럼 아히도벨의 자살은 불의한 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형을 훗날 가룟 유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7:5; 행 1:18).

(주); 고향으로 돌아가서 - 아히도벨의 고향은 유다 산지에 위치한 성읍 길로(Goloh)이다. 15:12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7:24]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압살롬]

(주); 마하나임 - 한때 이스보셋 왕국의 수도였던 마하나임(Mahanaim)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 지파의 기업 경계(基業境界)에 위치해 있었다(2:8 주석참조). 따라서 이곳은 군사 모집에 유리한 이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벽과 성문이 있는 요새화된 성읍이었기 때문에(18:24) 다윗의 임시 정부의 거점(據點)으로서 안성 마춤이었다. 한편, 이곳은 과거 야곱이 천사들을 만나 복을 받았던 유서깊은 성읍인데(창 32장), 이제 다윗도 이곳에서 야곱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세 사람의 도움(27-29)을 받게 된다(C.J Goslinga).

(주);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 이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국민병을 모집하여 인해진술을 사용하자는 후새의 제안(11절)을 따랐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따라서 압살롬이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동안에 다윗은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음이 분명하다(18:1-5). 한편 압살롬이 이처럼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이제 그가 두 가지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중 하나는 다윗 진영이 요새화된뒤 마하나임에 안전한 본부를 둔 반면에 압살롬 진영은 무방비 상태의 들에 진을 처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윗 왕이 마하나임 성읍에서 군사를 지휘한 반면(18:3) 압살롬은 직접 전쟁에 나섬으로써 다윗 왕보다 훨씬 더 죽음의 위험이 컸다는 점이다(Payne). 그런데 이는 바로 후새가 의도하던 바였다. 즉 후새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유도해 내려고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의 것(1-3절)과는 반대되는 모사를 베풀었던 것이다(11절).

성 경: [삼하17:25]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압살롬]

(주); 아마사 -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의 사촌이다(대상 2:13-17). 따라서 그나 압살롬과는 고종 사촌간이다. 혹자는 아마사(Amasa)가 다윗의 30인 용사의 두목인 아마새(Amasai, 대상 12:17,18)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나(Eald, Bertheau, Pulpit Commentary), 확실치는 않다. 한편 아마사는 압살롬 사후에 다윗의 군장(軍長)이 되었으나 기회주의자인 요압에게 살해당하였다(20:10).

(주);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 - 아마사의 아버지인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Ethra)는 대상 2 :17에서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 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여기서 '예델'(Jether)은 '이드라'의 축약형 이라고 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드라가 과연 '이스마엘' 사람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인지 분명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상2:17의 기록대로 그는 이스마엘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는 외국인이 아닌 경우에는 결코 그 사람의 국적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이드라는 이스마엘 사람인 것이 분명해지는데, 그렇다면 그를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본절의 기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개의 학자들이 이드라가 이스마엘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여인(아비갈)에게 장가들어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즉. 이드라는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아내와의 연고(緣故)로 이스라엘인으로 국적을 바꾼 외국인(*, 게르)이었다는 말이다.

(주); 나하스의 딸 아비갈 - 아비갈(Abigal)은 일명 아비가일(Abigail)로도 불리웠는데 곧 다윗이 누이인 스루야와 자매지간이다(대상 2:16). 그러나 나하스 (Nahash)가 누구인가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러 주장들을 너세우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나하스는 아비갈의 첫 남편이었다는 견해이다(Hertzberg, Michaelis, schultz). 그러나 이는 아비갈이 나하스의 딸(daughter)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는 본절과 상치된다(공동번역). 나하스는 다윗의 아비 이새의 둘째부인이었다는 견해이다(Movers, Thenius). 그러나 히브리 사회에서 `나하스'(* 자마 )란 이름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이름일 뿐이었다(Pulpit Commentary). 나하스는 이새의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Kimchi, Pulpit Commentary). 그러나 본서 저자가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새의 별명을 명기(明記)한 까닭이 석연치 않으며. 또한 나하스가 이새의 별명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Keil). 이상에서처럼 기금껏 제시되고있는 학자들의 견해 중 어느 정도라도 타당성을 지닌 견해는 아직 없다. 그러면 과연 나하스는 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본절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본서 저자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을 스루야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즉, 여기서 저자는 왜 아비갈을 직접적으로 다윗의 누이라고 소개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 아비갈이 다윗의 완전한 동생(full sister)이 아니기 때문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즉, 아비갈은스루야와는 완전한 자매지간이었으나 다윗과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만 같은 이부동복(異父同服)의 관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아비갈을 다윗과의 관계에서 보다는 스루야와의 관계에서 소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문자 그대로 나하스는 아비갈의 아버지임이 분명한 것이다. 때문에 공동 번역도 나하스를 가리켜 아마사의 외조부(外祖父)로 언급하고 있는것이다.

성 경: [삼하17:26]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을 추격하는 압살롬]

(주);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 여기서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25절)의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 압살롬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길르앗 땅에 진친 이스라엘 병력을 압살롬이 직접 진두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Hertzberg). 따라서 이제 압살롬은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하려 한 후새의 계략에 말려든 셈이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7:27]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을 선대하는 자들]

(주);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 - 소비(Shobi)는 암몬의 전왕(前王) 나하스의 아들이며 하눈의 동생이다(10:1 주석 참조). 그가 이제 다윗에게 와서 도움을 준 것으로 보아, 그는 자기의 형 하눈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 나하스와 다윗 왕 간의 친분 관계를 기억하고 다윗과의 교제를 유지하려 한 듯하다(Ewald). 아니면 그는 랍바 성이 정벌당한 후(12:26-31) 다윗에 의해 어느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받았을 가능성이 높다(The Interpreter's Bible).

(주);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 - 마길(Machir)은 일찍이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보호해 준사람이다(9:4). 아마도 그는 지난날 므비보셋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던 다윗의 호의를 기억하고 지금 다윗을 도우러 왔을 것이다(Pulpip Commentary, Payne). 즉 그는 다윗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고 그를 도왔던 것이다.

(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 - 로글림(Rogelim)은 길앗의 한 성읍인 바, 바실래(Barzillai)는 이 성의 거부였다(19:32). 이 사람이 다윗을 도우러 온 이유에 대하여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다윗 왕의 훌륭한 통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가능성이 높다(Payne). 즉 길르앗(Gilead)은 요단 강동편의, 북으로는 야르묵 강에서남으로 아르논 강 사이에 있는 광활한 땅인 바아람 사람들의 침략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삿 5:17 주석 참조. 그러나 이제 다윗의 강력한 군사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8장). 따라서 이 지역의 부호들은 다윗 왕의 강력한 통치에 상당히 감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층분히 상상할 수 있는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이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다윗 왕의 인격이나 통치력에 감복(感服)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힘썼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8:15).

성 경: [삼하17:28,29]

주제1: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을 선대하는 자들]

(주); 침상...치스를 가져다가 - 이처럼 소비, 마길, 바실래가 다윗 일행에게 제공한 물건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병사들에게 아주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필수품(必需品)들이었다. 그중 여기서 침상(*, 미쉐캅)은 담요 등의 침구를 가리킨다. 그리고 '대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폿트'(*)는 본래 대접이란 뜻이나, 여기서는 야외용 가마솥을 의미하는 듯하다(Lange, Keil). 또한 `볶은 곡식'과 `볶은 녹두'는 히브리 원어에서는 모두 같은 단어인`칼리'(*)인 바, 추추컨대 이는 각기 다른 곡식들을 복은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Lange, Pulpit Commentary). 아무튼 황급히 피신 길에 나서느라 제대로 행장(行裝)을 갖추지 못했던 다윗 일행(15:13-18)에게 이처럼 풍성한 구호물이 제공된 것은. 다윗을 지켜 보호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결과가 아닐수 없다(7:8-16).

성 경: [삼하18:1]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의 전열(戰列) 정비]

(주); 백성 계수하고 - 여기서 다윗이 '백성을 계수했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계수(計數)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가 군대의 조직을 정비하고 사열했음을 의미한다. 즉 다윗왕은 자기를 따르던 기존의 용사들과 새로운 지원병들을 재 편성하여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전시(戰時)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Wycliffe Bible Commentary). 한편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이와 관련, 당시 다윗군의 병력이 그렛 군과 블렛 군 및 가드에서 온 육백 용사, 기타 추가 병력을 합하여(15:18) 약 4천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Dake's Annotated Reference Bible, Matthew Henry's Commentary, Vol.2, p.537).

(주); 천부장과 백부장을...세우고 - 여기서'천부장'(captains of thousands)과 '백부장'(captains of hundreds)이란 각기 자기 수하에 천 명과 백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편제(編制)는 신약 시대 당시 로마 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행 10:1; 21:31,32; 23:10-17).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러한 편제는 모세에 의해 최초로 수립되었는 바 평상시에는 행정 체제로 운용되다가 비상시에는 군사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출 18:24-26 주석 참조). 아무튼 본절에서 다윗이 백부장과 천부장 같은 소단위 지휘관을 세우는 등 지휘 계통을 확립한 것은 전군(全軍)의 힘을 결집시키고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가능케 한 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성 경: [삼하18:2]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의 전열(戰列) 정비]

(주); 요압의 수하에...아비새의 수하에...잇대의 수하에 - 다윗이 자신의 전(全)군대를 삼분(三分)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와 같이 군대를 셋으로 나누는 전술은 소수로써 적의 많은 군대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근세(近世)까지만 해도 많이 사용되었던 전술이다(삿 7:16; 9:43; 삼상 11:11). 한편. 다윗이 이방인 출신의 잇대(Ittai)를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하게 삼분의 일의 군장(軍長)으로 삼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조치였다(15:19 주석 참조). 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예루살렘에서 급히 도망할 당시 보여 주었던 잇대의 충성을 다윗이 인정하였다는 증거이다(15:21).

(주);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 원문에는 다윗의 참전(參戰) 의지가 더욱 확실히 표현되어 있다. 즉, 원문에는 인칭 대명사 '나'가 '아니'(*)로 나와 있는데, 이는 강조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또한 '나가리라'는 말, '야차'(*) 앞에도 절대 부정사 '야초'(*)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다윗 자신이 반드시 전쟁에 나가리라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군사들 앞에서 솔선 수범하려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다윗은 지금의 이 전쟁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났으므로(12:7-14; 13:21; 14:28-33) 속죄하는 마음에서도 이같은 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성 경: [삼하18:3]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의 전열(戰列) 정비]

(주); 왕은 나가지 마소서 - 백성들의 이와같은 만류는 자기들의 왕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 주는 말이다. 즉, 백성들은 진심으로 다윗왕을 아끼고 사랑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반역자들이 생명을 노리고 있는 다윗(17:21)을 전장(戰場)에 내보내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다윗이 전사할 경우 자신들은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게 될 것임을 염려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와 같이 솔선수범하는 왕과, 왕을 아끼는 백성들의 아름다운 모습속에서 이미 건쟁의 승리를 예감(豫感)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 요압과 같은 약삭빠른 사람은 보다 실제적인 계산 하에서 왕의 출전을 만류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Hertzberg, payne). 즉. 요압은 다윗이 건쟁에 참여할 경우 혈육이 정 때문에 반란의 주모자인 압살롬의 생명을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계산하에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을 수도 있다.

(주);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 여기서 '성'은 다윗이 현재 압살롬을 피해 거처하고 있는 마하나임의 성을 가리킨다(17절 주석 참조). 한편 이처럼 백성들은 다윗 왕이 마하나임 성에 있는 것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점에서 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즉 다윗 왕이 무엇보다도 안전할 수 있다는 점, 다윗 왕이 성에 남아서 후방(後方)을 튼튼하게 지킬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사실 숫자면에서 압살롬의 군대에 비해 열등한 다윗 군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또한 성에는 귀중한 보급품이 저장되어 있어(17:27-29), 유사시 이를 적절하게 공급해 줄 지도자도 필요했다(Lange).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를 들어 백성들은 당시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을 것이다.

성 경: [삼하18:4]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의 전열(戰列) 정비]

(주); 너희가 선히 여기는대로 내가 행하리라 - 여기서 '너희가 선히 여기는대로'라는 말은 본래 '너희 눈에 좋은 대로'(Whatever seems best to you, RSV)란 뜻이다. 아무튼 본절은 백성들의 사리(事理)에 맞는 말을 겸허히 수용할줄 아는 다윗의 고매한 인품을 잘 드러내준다.

성 경: [삼하18:5]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의 전열(戰列) 정비]

(주);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 여기서 '너그러이 대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트'(*)는 '부드럽게 감싸다'는 뜻이다(욥 15:11). 따라서 이같은 다윗의 말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자기의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확신(15:16, 25)과 압살롬을 용서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Hertzberg, Payne). 이와 같이 다윗의 강열한 부성에(父性愛)는 아버지의 생명만을 노렸던 압살롬(17:1-4)의 경우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향편, 본절에서 다윗은 압살롬을 '소년'이라고 부름으로써 아직도 압살롬을 정치적 반란자이기 보다는 자신의 철없는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Wycliffe). 즉 여기서 `소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미성숙한 아이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창 14:24; 21:12,17 삼상 1:22,24 ;2:11; 왕상 3:7 대상 22:5 호 11:1).

(주);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 혹자는 본절을 가리켜 다윗 왕이 지휘 체계에 따라 자신의 명령을 말단 군사들에게 까지 시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ry).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주장을 지지할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은 백성들이 지휘 체계를 통해 다윗의 명령을 시달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전 군대를 사열할때(1절) 군장들에게 특별히 명령하는 것을 백성들이 들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증거로 우리는 12절에 나오는 한 사람의 말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거기서 자신이 왕의 명령을 시달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군장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것이다.

성 경: [삼하18:6]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군의 승리]

(주); 에브라임 수풀 - 본절에서 뜻하는 에브라임 수풀(the wood of Ephraim)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현제 학자들 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수풀'하면 우선 요단 서편의 에브라임 경내(境內)에 있는 무성한 숲을 연상할 수 있기때문이다(수17:15,16). 그러나 본문에는 다윗군이 요단 강을 건너 다시금 서편 땅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이 없다. 대신 본문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윗 군과 압살롬 군 간의 전쟁이 요단저편(동편), 곧 마하나임 근처(17:24,26,27)에서 벌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보여 준다. 즉 아히마아스가 승전 소식을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 왕에게 알리기 위해 요단 계곡의 길을 달려갔다고 함은 본 전쟁이 마하나임에서 가까운 요단 동편에서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19-23절). 또한 다윗 군이 압살롬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마하나임으로 회군(回軍)한 사실(19:3)도 이 전쟁이 요단 동편의 수풀에서 있었음보여 주는 것이다(Thenius) 다시 말해서, 만약이 전쟁이 요단 서편의 수풀에서 있었더라면 다윗 군은 아마 마하나임으로 회군하기 보다는 곧장 예루살렘까지도 정복했으리라는 주장이다(Ewald). 그러나 다윗 군이 그렇게 아니했음은 전쟁의 무대가 요단 동편이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본장에서 전쟁의 무대가 되고 있는 '에브라임 수풀'은 비록 그 명칭상 혼동이 되기는 하지만 요단 이편(서편)의 수풀이 아닌 요단 저편(동편)의 수풀이었음을 결론지을 수있다.

성 경: [삼하18:7]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군의 승리]

(주);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 여기서 '이스라엘 무리'란 압살롬 휘하의 군사들을 가리킨다(17:26). 그리고 '다윗의 신복들'이란 다윗이 세운 군장들과 천부장과 백부장및 그휘하의 군사들을 의미한다 (1,2절). 그런데 이처럼 본서 저자가 다윗 군에 의해 압살롬의 대군이 패퇴하였다고 기록한 것 다윗 군대의 우수한 조직력(組織力)과 그 지휘관들의 탁월한 지휘력(指揮力)을 보여 주기위함이었다. 즉 이는 다윗 군대가 숫자면에서의 열세를 조직력과 지휘력의 월등한 우세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8:8]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다윗군의 승리]

(주); 사면으로 퍼져. - 여기서 '퍼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츠'(*)는 '흩어지다', `정신없이 도망치다'는 뜻이다(민 10:35; 왕상 22:17 대하 18:16; 사 21:1 렘 23:2). 즉 본절은 압살롬의 군사들이 다윗 군에 대항하기 위해 사방으로 배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군의 훌륭한 조직력과 효율적인 공격에 의해 혼비 백산(魂飛魄散)하며 홑어지는 모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Keil).

(주); 수풀에서 죽은 자가...많았더라 - 요단 동편의 에브라임 수풀에는 좁은 협곡이나 가파른 벼랑, 또는 늪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윗 군의 효율적인 공격에 뿔뿔이 흩어졌던 압살롬의 군사들은 이러한 곳에 떨어지거나 빠져 그곳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성 경: [삼하18:9]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 히브리 원문에는 '다윗의 신복'이 복수형(複數型)으로 나와있다. 따라서 압살롬은 다윗의 여러 신복들과 마주쳐 신분이 발각되었음을 알수 있다. 때문에 압살롬은 그 순간 자기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도망쳤던 것이다.

(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 노새는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개 왕족이나 귀족들이 이용하던 운송 수단이었다. 13:29 주석 참조.

(주);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 히브리 원문에는 압살롬의 `머리'(*, 로쉬)가 상수리 나무에 걸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절만으로는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 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 끼었는지, 아니면 숱이 많은 그의 머리털이 가지에 걸렸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압살롬의 머리털이 걸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Wycliffe Bible Commentary). 한편, 압살롬의 머리털 숱이 많고 빨리 자라기로 소문나 있었다(14:26). 그러나 여기서 압살롬은 자기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두 가지로 말미암아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노새는 왕의 신분을 나타내던 것이며 그의 무거운 머리털은 백성들의 큰 호감을 사던 것이었으나, 이제 그는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Lange). 우리는 여기서 악인의 자랑거리를 도리어 수치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섭리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성 경: [삼하18:10]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 다윗 군의 한 군사가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달린 것을 요압에게 보고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가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보고한 까닭은, 그가 압살롬을 너그러히 대접하라 한 다윗 왕의 명령(5절)을 들은 탓이었다.

성 경: [삼하18:11]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은 열 개와 띠 하나 - 이는 전공(戰功)을 세운 군사들에게 주는 포상물(褒賞物)이다. 한편 여기서 '은 열 개'는 화폐라기 보다는 군복에 다는 일종의 장식품 또는 소지품(눅15:8)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Lange). 또한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고라'(*) 역시 허리에 두르는 군장(軍裝)으로서, 화려한 수가 놓인 일종의 장식품이기도 하다(왕상 2:5; 사3:24; 22:21). 따라서 요압이 제시한 포상물은 군인의 명예를 세워주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하18:12]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 이는 명예스러운 훈장 보다는 다윗 왕의 명령(5절)에 순종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병사의 말이다.

(주); 우리가 들었거니와...하셨나이다 - 왕명을 귀히 여기고 있는 병사가 온갖 명예와 특권들(11절)을 거부함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요압의 잘못된 생각까지 돌이켜 주려고 애쓰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지난날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불의한 명령에도 기꺼이 순종하였던 요압의 행동과는 극히 대조적이다(11:14-17).

성 경: [삼하18:13]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내가 만일...해하였더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 만일 자신이 압살롬을 죽일 경우 훗날 다윗 왕 앞에서 받을 혹독한 질책을 다윗의 병사가 우려하고 있는 장면이다. 즉, 그는 자신이 압살롬을 죽일 경우, 요압이 도리어 자기를 압살롬을 살해한 자로 다윗 왕에게 고소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아 이 병사는 평소 요압의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지 아니한 듯하다.

성 경: [삼하18:14]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 이처럼 요압이 지체하지 않고 압살롬을 죽이려한 것은 아마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공식적인 사면령(赦免令)이 내려지기 전에 그를 처치하기위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즉 요압은 압살롬을 살려 둘 경우 그가 또다른 국가적인 큰 재앙을 야기시키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기에 그 화근(禍根)을 미리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서둘러 압살롬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전에 압살롬의 귀환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진했던 요압(814:1-24)이 이제는 도리어 그를 살해하려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시류(時流)에 편승하기에 급급한 요압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주); 작은 창 셋을 가지고 - 여기서 `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트'(*)는 날카로운 창이나 화살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지팡이', 혹은'길쭉한 막대기'를 의미한다(대상 11:23; 욥9 34;시 23:4; 잠 26:3; 29:15 사9:4). 즉 요압은 끝이 뾰족한 막대기를 들고서 압살롬을 죽이러 간 것이다. 요압이 그와 같은 것을 세 개씩이나 갖고 갔던 까닭도 그것이 날카로운 창이나 화살이 아닌 막대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요압이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후에도 열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인 사실(15절)은 더욱더 요압이 뾰족한 막대기를 사용했음을 입증해 준다(Keil, Lang). 즉, 요압이 막대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압살롬이 즉시 죽지 아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날카로운 무기를 가져가지 않고 막대기를 가져간 까닭은 아마 그의 마음이 너무도 조급하여 손에 잡혀지는대로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아 이 용어를 `창', 또는 `쇠꼬챙이'로 번역한 70인역(LXX)이나 벌겟역(Vulgat)은 재고(再考)해 볼 여지가 있다.

성 경: [삼하18:15]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죽음]

(주); 병기를 맡은 소년 - 직속 상관 밑에 예속되어 있어 항상 그를 보좌하며 상관의 병기를 대신 들고 다니면서 관리하는 병졸을 가리킨다. 대개 이같은 직책은 신분이 확실하며 총명하고 남다른 충성심과 용맹을 지닌 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통례였다(삿 9:54 삼상 31:4).

(주); 압살롬을...쳐 죽이니라 - 이처럼 요압과 그의 신복들이 압살롬을 살해한 행위는 다윗의 명령(5절)을 거역한 처사이자 다윗 왕가에 대한 일종의 뗬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파괴자요 인격의 파탄자인 압살롬을 요압의 손을 빌어서라도 결국 공의의 심판에 처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전(全)역사를 주장하사 모든 존재들을 공의의 법대로 이끌어 가신다. 따라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최선책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진실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 하겠다(왕상 2:4; 렘 4:1,2; 엡 5:9). 한편, 압살롬이 과거 자신의 종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 하였던 것(13:28,29)과 유사하게 요압의 신복들의 손에 의해 죽임당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또다른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마 26:52).

성 경: [삼하18:16]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기념비]

(주);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로 그치게 하니 - 압살롬의 죽음(14,15절)은 곧 반란(15:10-12)에 대한 완전한 평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요압은 자신의 군사는 물론 압살롬의 군사들도 더이상 희생당하지 않도록 나팔을 불어 종전(終戰)을 선포한 것이다(Keil, Kurtz).

성 경: [삼하18:17]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기념비]

(주); 큰 구멍 - 여기서 말하는 구멍(pit)란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렁이나 아니면 현재는 폐쇄된 과거의 우물 따위를 의미하는 듯하다(Wycliffe). 왜냐하면 팔레스틴에는 물이 귀하므로 곳곳에 우물을 파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창 26:17-22).

(주);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 요압이 이처럼 압살롬의 시체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패륜아는 돌로쳐서 죽이라는 율법의 조항을 준수한 것이었다(신 21:21). 또한 이 돌무더기는 아간과 아이왕의 경우처럼 반역자의 수치를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였다(수 7:26; 8:29). 따라서 이는 곧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한 자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한 결말과 수치 뿐임을 교훈해 주는 산 증표라 하겠다(겔 32:26-28; 마 27:3-8).

성 경: [삼하18:18]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압살롬의 기념비]

(주);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 본래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조사(早死)하고 말았다(14:27 주석 참조).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이름을 이을 소망이 없게 되자,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석을 세워 자기의 명예를 후대에 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압살롬의 과도한 욕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에서 세워진 그의 비석은 이제 정반대로 그의 수치(41-17절)를 전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교만한 자의 악한 계획은 끝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나타나게 될 뿐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있다(창 11:1-9; 잠 18:12).

(주); 왕의 골짜기에 있고 - '왕의 골짜기'(the king'sdale)는 창 14:17에 나오는 '사웨 골짜기'(the valley of Shaveh)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물리친 후 소돔 왕과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났던 골짜기이다. 한편, 혹자는 이곳에 다윗이 거닐며 휴식을 취하던 동산이있었다고 주장한다(Barrois). 그렇다면 이 왕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바로 근처에 있었다고 볼 수있으므로, 곧 기드론 골짜기(the valley of Kidron)와 일치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요세푸스(Josephus)는 왕의 골짜기가 예루살렘에서 약 400미터의 거리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Ant. Vii,3). 이러한 요세푸스의 주장은 왕의 골짜기가 기드론 골짜기의 어느 한 부분임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것이다(Keil, Lange).

성 경: [삼하18:19]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아히마아스...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 다윗 왕의 연락원 아히마아스(15:27,36; 17:17-22)가 다윗 군의 승리를 다윗 왕에게 전달하겠다고 자원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아히마아스가 이 일을 자원한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그가 다윗군의 승리만을 알았을 뿐 압살롬의 죽음(14-17)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그러면서 그들은 그 증거로서,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는 다윗 왕의 추궁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한 아히마아스의 대답(29절)을 든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 왕의 연락원이었던 아히마아스가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압살롬의 죽음을 몰랐었다고 추측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20절에서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고 한 요압의 말은 이미 아히마아스가 압살름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히마아스가 이 일을 자원했다고는 볼 수 없다. 추측컨데 아히마아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다윗 왕에 대해 진정한 동정심(同情心)을 품고 있었던 그였기에 본 사건을 보다 부드럽게 전하려고 이 일을 자원했을 것이다(Payne, Rust).

(주);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 본절을 직역하면.`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들의 손으로부터 심판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히마아스가 `...로부터'(*, 민)란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원수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Keil). 즉 아히마아스는 다윗군의 승리를 다윗왕을 원수의 세력에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 이해하였던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18:20]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 요압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 문에(14-17절) 이처럼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승전(勝戰)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금하였다. 즉, 요압은 이번에는 이 일에 아히마아스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히마아스는 지금까지 좋은 소식만을 전달한 다윗의 심복이었으므로 이번에도 다윗은 그가 좋은 소 식을 가져오는 줄로 착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27절). 따라서 요압은 압살롬의 죽음을 알리는 이번 일에는 아히마아스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다음번에 연락원의 임무를 수행하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8:21]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고하라 - 성경에 나오는 구스(Cush), 즉 에디오피아(Ethiopia)는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를 수도(首都)로 삼고 있는 오늘날의 에디오피아와는 다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구스 (민 12:1; 대하 14:9-15; 행 8:27-39)는 오늘날의 수단(Sudan) 북부와 이집트의 남부 사이에 위치한 누비아(Nubia) 지방을 영토로 삼았던 나라이다. 또한 사료(史料)에 따르면 구스는 애굽 왕 세소스트리스 1세(Sesostris I, B.C.1971-1930)의 치세하에 예속되어 있다가 B.C.1000년 경에 독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이 구스 왕조는 B.C.715-663년에 에굽을 통치하기도 하였는데, 애굽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제 25왕조(누비아 왕조)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구스 사람'이 바로 이 에디오피아인인데, 아마 그는 다윗 왕의 노예로서 이번 전쟁(1-4절)에 참전하였던 것 같다. 한편, 요압이 이번의 흉사(凶事)를 다윗에게 알리는 일을 이 구스인에게 맡긴 까닭은 아마 그가 외국인인데다 다윗 왕의 노예였으므로 아무런 부담감 없이 압살롬의 죽음을 알릴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Rust). 또한 다윗 왕이 이 구스인 전령(傳令)을 보는 순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예감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윗 왕의 충격 완화를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하18:22]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 이 말의 원문인 '레카 에인 베소라 모체에트'(*)를 직역하면, `네게 보여진 소식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너에게 유익(상급)이 될 만한 소식은 없다'(Bottcher, Thenius)는 의미이다. 즉 요압은 전쟁에서의 승리(6-8절) 보다도 압살롬의 죽음(14-17절)이 다윗 왕에게 더욱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 줄 것이라고 내다보고 현재 소식을 전하려 하는 아히마아스를 자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8:23]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서니라 - 여기서 들길은 `요단 계곡의 길'을 의미한다(Keil,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Wycliffe Bible Commentary). 이 길은 평평한 평지의 길이었으므로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구스인은 에브라임 수풀(6절)에서 마하나임으로 가는 직선거리를 택하였던 것 같다. 그 길은 비록 거리상으로는 짧은 길이었으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험란한 길이었다. 따라서 아히마아스가 비록 구스인보다 뒤늦게 출발하였지만 이 구스인을 따라 잡수 있었던 것이다(Hertzberg, Wycliffe Bible Commentary).

성 경: [삼하18:24]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때에 다윗 왕이 두 문 사이에 앉았더라 - 여기서 `두 문 사이'란 성의 외문(The outer gate)과 내문(The inner gate) 사이를 의미한다(Keil, Hertzberg, Lange). 이곳은 파숫꾼의 성문루(城門樓)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따라서 다윗 왕은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전쟁터에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8:25,26]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 전쟁에서 아군이 패배할 경우에는 여러 명의 패잔병들이 도망쳐 올 것이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승리하였을 경우에는 한 사람이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올 것임은 기정 사실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성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다윗 왕은 이제 승리의 소식 알리는 연락병이 오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 경: [삼하18:27]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 이로 보아 아히마아스는 평소 그 달음질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익을 정도로 분주히 뛰어다니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파숫꾼은 대뜸 그 걸음걸이를 보고서도 달려오는 자가 아히마아스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Lange, Keil).

(주);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말은 물론 `다윗 왕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책무(責務)를 소흘히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일 것이다. 즉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전장(戰場)에서 혼자만 도망쳐 올 정도로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기에 아히마아스의 입에는 자신들이 기대하던 `좋은 소식', 곧 승전보(勝戰報)가 담겨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히마아스가 이렇게 평가되기 까지에는 평상시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참으로 신뢰받을 만한 삶의 모범을 보여 왔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향기로운 인품은 갑작스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꾸준히 그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18:28]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평강하옵소서 - 히브리어로 `솰롬'(*)인 이같은 인사말은 `건강', `행복',`평화', `안녕'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이같은 인사말을 하면서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영존(永存)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사 자신들을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하는데, 이는 곧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본절에서 아히마아스는 다윗에 이같은 인사말을 하면서 특별히 두어 가지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곧 전쟁 후의 평화와, 압살롬의 죽은 사건이 완만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한편 이상과 관련하여서는 창33:1-11 강해, `구약 시대의 인사법'을 참조하라.

(주); 얼굴을 땅에 대고 절혀여 - 이같은 인사는 곧 자신을 최대할 낮추므로써 상대방을 높이는 겸양의 자세이다. 여기서 아히마아스는 다윗 왕에 대한 충성과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신하의 예(禮)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14:22 주석참조.

(주); 그 손을 들어 내 주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 여기서 `그 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붙여 주셨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가르'(*)는 '가두다', '폐쇄하다'는 뜻이다 (창 19:6, 10; 시17:10; 겔 46:12;출 14:3). 따라서 본절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반란자들을 더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묶어 주셨다는 뜻이다.즉 이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다윗 군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성 경: [삼하18:29]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 이처럼 다윗 왕은 아히마아스에게 무엇보다도 압살롬의 생존 여부부터 물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반란군의 진압 성공 여부부터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도, 아버지로서의 강한 부성애(父性愛)를 먼저 나타냈던 것이다.

(주); 나를 보낼 때에...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 압살름의 생사 여부에 관련 다윗왕의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는 아히마아스의 말이다. 즉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이 다윗 왕에게 큰 충격이 될 줄 알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였던 것이다. 이는 분명 다윗 왕에 대한 그의 동정심에서 나온 행동일 뿐만 아니라, 요압의 언질을 기억한 행위이다(Hertzberg). 즉. 요압은 아히마아스에게 이는 상 받을 만한 소식이 아니므로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던 것이다(22절). 할편 이같은 아히마아스의 행위와 관련된 윤리성 문제는 본장 19-33 강해, `아히마아스의 거짓에 대한 정당한판단'을 참조하라.

성 경: [삼하18:30]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 이처럼 다윗 왕이 아히마아스를 물러서게 한 것은 곧 이어 구스 사람이 당도하였기 때문이다(24-27, 31절). 한편 여기서 `서 있으라'에 해당하는 `야차브'(*)는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자리로 돌아가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어떠한 목적이나 임무 수행을 위해서 있으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출 8:20;9:13;신 31:14;삼상 10:19; 12:7; 욥 33:5; 렘 46:14). 따라서 다윗 왕이 아히마아스에게 곁에 서 있으라고 명령한 것은, 구스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후에 아히마아스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더 듣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하18:31]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여호와께서...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보고하였던 것과 같은 내용이다(28절). 아마도 구스인은 무엇보다도 다윗이 전쟁의 결과를 궁금히 여기리라 생각하고 먼저 이같은 보고를 올렸을 것이다.

성 경: [삼하18:32]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 29절에 이어 다윗이 다시 압살롬의 신변부터 염려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분명 지금껏 다윗을 위하여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반란을 무찔렀던 다윗의 군사들(1-8절)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19:5, 6). 훗날 요압이 아도니야와 손을 잡고서 솔로몬에게 반역한 것(왕상 1:7)도 이러한 다윗의 태도에 실망한 때문일 것이다.

(주); 왕의 원수...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 압살롬의 죽음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구스인의 보고이다. 그런데 여기서 구스인이 압살롬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급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즉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화(禍)를 당하리라는 공공연한 인식(19-22절)에도 불구하고, 구스인은 압살롬의 죽음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던져 주는데 사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우주 통치권을 믿는 자라면 이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진실을 증거할수 있을 것이다(단3:16-18; 행4:17-21).

성 경: [삼하18:33]

주제1: [진압당하는 압살롬]

주제2: [전령의 보고와 다윗의 애곡]

(주);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본래 `떨다', `전율(戰慄)하다'는 뜻이다(22:8; 출 15:14 삼상 14:15;시 18:7; 77:16; 99:1). 따라서 본절은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접한 후 극심한 충격과 함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비탄에 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 저가 올라갈 때에 - 여기서 `올라갈'이란 말은 바로 앞에 나온동사 `올라가서'와는 다른 용어이다. 즉, 앞의 동사 `올라가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는 `밑에서 아래로 올라가다'는 뜻이다(15:24 창 19:28; 출 8:3). 그러나 여기서 `올라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얄라크'(*)는 `행하다', `나가다'는 뜻이다(창 11:31; 출33:16; 레 18:4; 신 8:6; 10:12; 왕상 2:3,4). 따라서 이 말은 앞의 경우처럼 다윗 왕이 성루에 올라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없다. 대신 이 말은 성루에 이미 올라간 다윗 왕이 이리저리, 또는 미친 듯이 다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다시금 `저가 이리저리 배회할 때에', 또는 `저가 미친 듯이 방황하면서'로 개역(改譯)할 수 있다.

(주);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 이러한 다윗 왕의 절규에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슬픔이 내재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본능적 비탄이다. 자신의 범죄(11장)가 가져온 뿌리깊고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12:10-12)에 대한 아픔이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죽음이 자기의 죄의 결과임을 절감하면서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신의 범죄로 인해 이미 두 아들을 잃었는 바 (12:15-19; 13:30-39), 이제 또 압살롬을 잃게 되자(14, 15절) 자신의 뼈아픈 과거의 죄가 기억나서 통한(痛恨)의 울음을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격정적인 절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금껏 압살롬을 대항하여 싸웠던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3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9:1]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 이는 성내에 있던 한 사람이 이제 막 전쟁터로부터 회군(回軍)하여 돌아오는 요압에게 달려가 다윗 왕의 동정(動靜)을 보고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 사람이 이처럼 요압에게 달려가 왕의 슬픔을 알린 이유는 개선하는 군사들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환영식(歡迎式)이 없는 데 대하여 요압과 군사 들의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Lange).

(주);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 여기서 `울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는 `애곡하다',`호곡하다'는 뜻으로 곧 `소리내어 크게 우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13:36; 창 45:14; 신 21:13; 스 10:1; 왕하 20:3;22:19;애1:2).

성 경: [삼하19:2]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그 날에 백성들 에게 들리매 - 압살롬의 군대를 쳐부수고 돌아오는 그 날 요압에게 보고된 사실이 개선(凱旋)하는 군사들에게 소문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이다.

(주); 그 날의 이김이...슬픔이 된지라 - 이는 승전(勝戰)한 다윗의 군사들이 매우 처량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 한사람의 절제되지 못한 감정 처리가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이김'에 해당하는 `테슈아'(*)란 말은 어떤 고통이나 속박 또는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구원' 또는 `구출'을 가리키는 전쟁 용어이다.

성 경: [삼하19:3]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부끄러워...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 이는 승전한 군사들이 마치 패잔병(敗殘兵)들처럼 슬며시 입성(入城)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여기서 `부끄러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칼람'(*)은 더러운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겔 16:27, 61; 43:11; 사45:16).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군사들이 승전한 군사들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크게 죄를 지은 자들과 같이 초라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입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구절에서 우리는 개선하는 군사들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입성식 또는 환영식이 전혀 없었뿐만 아니라 군사들 조차도 대오(隊伍)를 맞추어 의기 양양하게 입성하지 않고 개인적로 뿔뿔이 흩어져 입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성 경: [삼하19:4]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왕이 엎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 이는 승전의 소식(18:28-32)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압살롬의 죽음만을 생각하는 다윗 왕의 비통한 심경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Wycliffe Bible Commentary). 즉 여기서 얼굴을 가리운 것은 왕의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표시였으며(사 53:3). 또한 큰 소리로 부르짖은 것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터뜨린 행위였다.

(주);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 성경 문학상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양시키는 반복법적(反復法的) 표현으로, 다윗의 호곡(號哭)이 지금도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이토록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절규한 이유는 자신의 양심에 저리도록 사무치는 회한(悔恨)이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의 처절한 애곡 속에는 단순히 아비로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혈육의 정 뿐만 아니라 과거 자신이 지은 죄악의 보응이라는 심한 자책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성 경: [삼하19:5]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 업무를 전폐하고 압살롬의 죽음만을 비통해하는 다왹의 행동에 대해 정치적 불안을 느낀 요압은 민심(民心)의 동요를 우려하여 백성들의 대변인(vox populi)으로 자처하였던 것이다(Hertzberg). 비록 요압이 다윗의 깊은 심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약간 무례하고 강경한 어조로 항변한 것은 사실이지만(Smith), 당시 요압의 이러한 행동은 다윗 왕으로 하여금 그의 걷잡을 수 없었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던 적절한 직언(直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 왕의 생명과...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함 - 여기서 요압은 이번 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왕과 그 전 가족의 생명이 구출되었다고 말하고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요압의 말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압살롬이 이번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면, 그는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에 따라 선왕(先王)과 선왕의 전 가족들을 몰살시키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Smith, Lange).

(주);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 이는 아낌없는 칭찬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아야 될 모든 군사들에게 오히려 수치를 안겨 준 다윗 왕의 처사를 책망하는 요압의 말이다. 즉, 여기서 요압은 승전한 군사들을 기쁘게 영접하고 칭찬하는 것이 왕의 중요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감정에 매여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만 저하시킨 왕의 무책임한 처사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하19:6]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미워하는 자 - 곧 다윗 왕을 거스려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가리킨다.

(주); 사랑하는 자 - 곧 다윗 왕을 위하여 목숨 걸고 싸워 압살롬의 군대를 쳐부순 `다윗 왕의 신하들'을 가리킨다.

(주);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해석은 `오늘 당신은 당신에게 장관들과 신복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하셨나이다'이다(F.R Fay). 즉 장관들과 신복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자들처럼, 다윗 왕은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말이다.

(주); 만일 압살롬이 살고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 요압의 말대로 만일 압살롬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왕과 그 가족 모두는 압살롬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윗 왕이 이와 같은 결과를 참으로 바라고 있었던 양 표현한 요압의 이 말은 너무나도 무정한 말이었다(R. Payne Smith). 먼저 요압은 여기서 다윗의 슬퍼하는 심정을 올바로 이해함이 없이 거침없이 말하였다. 즉 다윗의 슬픈 감정은 단지 압살롬의 죽음 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뼈저린 뉘우침이기도 하였는데, 요압은 이러한 다윗의 속사정을 몰라주고 거침없이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요압은 슬퍼하는 다윗의 감정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비록 지금은 슬퍼하고 있지만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숭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말 속에서 요압의 거칠고 사나운 기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요압의 사나운 비난은 오히려 다윗 왕으로 하여금 자기의 임무를 다시금 깨닫게 한 좋은 자극제(刺戟劑)가 되었다. 이는 요압이 비록 무정한 사람이긴 했지만, 백성들의 소리를 그대로 대변했기 때문이다.

성 경: [삼하19:7]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 이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신복들의 마음에 말씀하소서'가 된다. 이는 곧 신복들의 불평을 달래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라는 권면이다.

(주);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모든 화보다 더욱심하리이다 - 혹자들(Josephus, Matthew Henry)의 주장처럼, 이는 요압이 자신의 반역 의사를 내비친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요압은 여기서 다윗왕이 계속해서 자기의 슬픈 감정에만 휘말려 있으면, 자연적으로 민심이 동요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시금 왕위를 노리는 반란이 이어지게 될 것이고, 이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 사태는 것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도 높게 경고한 것이다.

성 경: [삼하19:8]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요압의 간청]

(주);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 고대 사회에서 성문(城門)은 매매, 행정, 집회 등의 주무대였다(룻4:1,2 삼상 9:18 ;욥29:7 ;암 5:10, 12). 아울러 성문은 왕이 백성들과 만나는 장소였으며 왕의 재판(裁判) 장소였다(15:2). 따라서 다윗 왕이 이곳(마하나임의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자신의 임무를 다시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을 치하 격려하고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의 올바른 깨우침을 볼수 있다. 즉 요압의 권고가 비륵 거칠고 무정한 점은 있었으나, 다윗 왕은 그 말의 옳음을 인정하고 요압의 권면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Keil). 그러나 결국 다윗의 이 같은 결단이 있기까지에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위로가 있었을 것이다(시 40:17; 56:13). 실로 인간의 사정을 그 당사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야 말로 진정 근심과 슬픔과 절망에 짖눌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대상 28:9; 잠 16:2,3).

(주);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 이 말은 왕 앞에서 군대의 개선 행진이 있었으며, 또한 승리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왕과 백성들 간에 즐거운 대면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Keil, Smith).

(주); 이스라엘은...도망하였더라 - 여기서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반역에 참가했던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이들은 더 이상 저항할 명분과 기력을 상실하고 각자 뿔뿔이 후어져 자기 장막(처소)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라는 평화를 되찾고,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9:9]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 여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유다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변론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둔'(*)은 `다투다', `정죄하다'는 뜻이다(창 15:14; 욥 36:31; 시 110:6; 전 6:10).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다윗 왕 복권의 지체(遲滯)에 대하여 서로를 책망하였다는 내용의 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은 지난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기들의 행동이 크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Keil).

(주);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 백성들이, 과거 다윗 왕이 자기들을 위해 세운 큰 공적을 회상하는 말이다. 즉, 다윗 왕의 순간적인 실수에 대한 반발과 압살롬의 수려한 외모에 반하여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했던 백성들이, 이제 상황이 달라지자 다윗 왕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9:10]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무리가 기름을 부어...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는 공식적인 행사, 곧 기름 부음 받는 의식(儀式)이 분명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분명히 `이스라엘 온 무리'라 일컬었고, 다윗의 군사들을 `백성들'이라 일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또한 `다윗 왕이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다'고 한 9절의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무튼 압살롬의 공식적인 즉위식(卽位式)은 다윗 왕의 복권(復權)에 다소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말해서 다윗 왕이 복권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 선언이 그에게 또다시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윗 왕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예루살렘으로 곧 돌아가지 아니하고, 마하나임 성에 그대로 남아 백성들의 대대적인 지지선언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복권 이유로 압살롬의 전사(戰死)를 들고 있다. 즉, 그들이 지지했던 압살롬이 이제는 죽고 없으니,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논리였다. 우리는 여기서 만일 압살롬이 살았더라면 그들이 압살롬을 계속 지지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R. Payne Smith). 따라서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그들의 소리는 다분히 이해 타산적이며 현실적인 것이었다(Herzberg). 우리는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당시 백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한편에서는 지난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함과 동시에 다윗 왕을 다시금 존경하면서 그의 복권을 주장하는 참신한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껏 압살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만 그가 죽었으므로 나라의 안정을 위해 다윗 왕의 복권을 주장한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들도 있었으며, 또는 이미 대세(大勢)가 다윗 왕에게로 기운 것을 파악하고 재빨리 친(親) 다윗계로 처신하는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와같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다윗 왕에 대한 또 하나의 반란을 예상할수 있다(20:1-26).

성 경: [삼하19:11]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다윗 왕이...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 이는 다윗 왕이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위해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두 제사장, 곧 사독과 아비아달을 교섭의 실무자(實務者)로 임명하는 장면이다. 다윗 왕이 이처럼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시도하게 된 동기는 다른 이스라엘 지파내에서 일어났던 다윗 왕의 복권 추진 움직임 때문이었다(9, 10절). 즉 만일 이스라엘 지파들만이 다윗 왕을 지지하는 가운데 그가 꼭 복권된다면, 다윗 왕과 유다 지파 사이는 대단히 소원(疏遠)한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가 다윗 왕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다윗 왕을 복권시키겠다고 나선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그들의 왕을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성읍 으로 모실 위험성까지 있었던 것이다(Wycliffe Bible Commentary). 또한 다윗 왕은 자기가 이스라엘 지파들에 의해서만 복권될 경우, 자기의 통치력이 심히 약화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Hertzberg). 왜냐하면 다윗 왕은 유다 지파출신으로서, 만일 타 지파에서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를 지지할 지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자신이 복권하는데 유다 지파도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과거 압살롬의 반역을 주도했던 유다 지파의 죄를 용서하고 온 나라의 총화 단결을 도모하고자 했던것이다(Leon Wood).

(주); 유다 장로들 - 이들은 유다지파를 다윗 왕에게로 돌릴 수 있는 실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이들이 압살롬의 반란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 다윗 왕이 복권된 후 자기들에게 미칠 후환(後患)을 우려하여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R. Payne Smith).

성 경: [삼하19:12]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 여기서 다윗 왕은 자기가 유다 지파 출신이므로 유다 지파 바로 그들이 자기의 복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말은 자기를 반역한 유다 지파에 대해 유화정책적(宥和政策的)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제안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다윗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다 지파 다윗 왕의 복권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이 불평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40-43절).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이스라엘은 세바(Sheba)의 난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골육'(骨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쳄 우바사르'(*)를 직역하면, `뼈와 살'(bone and flesh)이란 뜻이다. 이는 곧 피를 나눈 친척이나, 또는 자기 신체의 일부라 할 정도로 가까운 인간관계를 멎고 있는 자에게 사용되는 히브리 문학의 한 표현이다.

성 경: [삼하19:13]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 압살롬의 군장(軍長)이었던 아마사(Amasa)는 실제로 다윗 왕의 조카였으며, 요압과는 사촌지간이었다(17:25; 대상 22:16,17).

(주); 요압을 대신하여...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다윗 왕은 요압(Joab)을 축출하고 새로이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으려 한다. 이처럼 다윗 왕이 요압을 축출하려 한 이유는 요압에 대한 그의 좋지 못한 인상 때문이었다. 즉 요압은 다윗 왕이 죽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장본인이었으며(18:14), 또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윗 왕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사납고 거친 비난을 서슴치 않았던 자였고(5-7절; Hertzberg), 그리고 요압은 다윗 왕의 집권 초기에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부당하게 죽인 난폭자였다(3:27, 39). 그러나 이러한 요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 외에 또 다른 측면에서 다윗 왕은 아마사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즉 다윗 왕은 당시 반란군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모두 규합(糾合)하려고 하였던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로서, 다윗 왕은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음으로써 자기를 반역했던 모든 압살롬의 추종자들에게 자기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던것이다(Payne).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은 불공평하고 현명치 못한 처사였다(Smith). 즉 다윗은 화합이라는 대전제 아래 무모한 관용과 앞뒤를 가늠하지 않은 결단함으로써 재난의 불씨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20:10). 특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살해한 요압(4:14, 15)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있었다 하더라도 요압은 반란군 진압의 공헌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요압을 제쳐놓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자를 군대의 통솔자로 삼은 것은 다윗의 실수로 밖에 볼 수 없다. 즉 그때 다윗은 공의로운 통치 원리보다 인간의 이해를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거나 실수를 범하게 마련이다(마 26:69-75). 결국 이러한 다윗의 처사에 앙심을 품은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점(20:8-13)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의 다윗의 처사는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다고 판단된다(Keil, Wycliffe Bible Commentary).

성 경: [삼하19:14]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히매 - 여기서 `돌리게 하매'의 주체는 아마사나 대제사장들 (사독과 아비아달)이 아니라 바로 다윗 왕이다. 즉, 본 구절에서 저자는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 왕의 지혜로운 정책(11,12절)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묘사하고 있다(Keil, Lange).

성 경: [삼하19:15]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민심을 수습하는 다윗]

(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급히 요단 강을 건널 때(17:22)와는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권속과 승전한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 당당하게 요단 강에 이르렀다(F.R fay).

(주); 요단을 건네려 하여 - 이는 `다윗 왕을 호위하여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도록 하기 위하여'란 뜻이다(Keil). 길갈 엘리사의 길갈(왕하 2:1-4), 갈릴리에 있는 길갈(수12:23),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는 길갈(수 15:7), 에발 산 근처에 있는 길갈(신 11:30) 등이 있으나, 여기의 길갈은 여리고 근처, 곧 요단강가의 길갈을 의미한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긴넌 후 진을 치고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이다(수 4:19, 20절). 한편 이곳은 바로 요단 강가에 위치했으므로, 유다의 장로들이 다윗 왕을 맞이하는 이 편리한 곳이었다(R.Payne. Smith).

성 경: [삼하19:16]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바후림 -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다(16:5).

(주); 게라의 아들 시므이 - 시므이는(Shimei)는 베냐민 사람이며, 자기 지파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자이다. 또한 그는 지난번 다윗 왕이 압살롬 난을 피하여 도망갈 때 왕에게 돌던지며 혹독하게 저주했던 사람이다. 16:5-8부분의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9:17]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하고. - `길갈'은 베냐민 지파의 경내에 있는 지역이었다(수 4:19). 그리고 예루살렘 성(城)또한 이 지파의 경계에 위치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유다 지파와 더불어 왕을 영접하기 위해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Hertzbrg). 그러나 다윗 왕을 마중나온 일천 명의 사람들은 시므이가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데리고 온 자들이었다(Schmid, Payne). 즉, 지난번의 큰 과오(16:5-8)를 용서해 달라는 표시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왕의 환궁(還宮)을 환영함으로써 왕에게 아첨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베냐민 지파 내에서의 시므이의 실권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시므이는 일천 명의 사람들을 능히 동원할 수있는 지파 내의 실력자였던 것이다(Smith).

(주); 시바도 그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 시바(Ziba)는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의 종으로서, 사울의 유산을 관리하던 자였다. 그는 지난번 다윗 왕이 난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자기의 주인 므비보셋을 모함하여 므비보셋의 재산을 착복한 자였다(16:3, 4). 그런데 이제 다윗 왕이 복권하여 다시 돌아오자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다윗 왕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마중나온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시바가 자기의 여러 식솔들을 데리고 온 것은 다윗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첨의 행동이었다.

(주); 요단 강을 밟고 건너 - 여기서 `밟고 건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찰레아흐'(*)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듯 `급히 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삼상 10:6; 삿 14:19; 15:14). 따라서 이 말은 시므이와 시바가 요단 강을 급히 건너 요단 동편에 있는 왕 앞에 당도한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Lange). 이처럼 저들이 다윗 왕을 제일 먼저 맞이하고자 애쓴 까닭은 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지난 날의 과오에 대한 형벌을 면해보고자 함이었다(Hertzberg). 여기서 우리는 시대의 조류에 재빠르게 편승하는 기회주의적인 두 인물을 본다. 즉 이들은 이제 정국이 다시 다윗의 시대로 복귀되자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다윗을 맞으러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성 경: [삼하19:18]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 여기서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란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베아브로 바야르덴'(*)을 직역하면 `그가 요단을 건넜을 때에'(as he crossed the Jordan)이란 뜻으로, 사실상 주어가 구체적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 구절의 주어를 다윗 왕으로 본다(Keil, Bunsen). 그리하여 `다윗 왕이 건넜을 때에'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시므이와 시바일행이 황급히 요단 강을 건넜다고 한 17절의 기록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의 주어는 시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Lang, Pulpit Commentary, Hertzberg). 왜냐하면 본 구절에서는 황급히 다윗 왕에게 사과하는 시므이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시므이가 요단을 건너자마자 곧(as soon as) 왕의 앞에 엎드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 왕이 아직 요단 동편에 있을 때에 시므이가 황급히 요단 강을 건넜고, 또한 요단 강을 건넘과 동시에 왕 앞에 무릎 꿇는 시므이의 즉각적(卽刻的)인 행동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므이가 왕 앞에서 즉각적인 굴복과 사죄의 행동을 취한 것은 지난날 그가 다윗 왕에게 혹독한 저주를 퍼부었던 큰 과오(16:5-8) 때문이었다.

성 경: [삼하19:19]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 이는 시므이가 구차하게 자기의 지난 날의 과오를 변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다. 아울러 용서를 구하는 시기도 매우 시의(時宜) 적절했다. 그러나 시므이는 자기의 죄를 참으로 회개한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자신이 무사하기만을 위해 빌었던 것이다(Keil, Fay).

성 경: [삼하19:20]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 와서 - 여기서 `요셉의 온 족속'은 다윗이 속해 있는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를 가리킨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요셉 족속의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중 에브라임 지파를 의미한다(삿 1:22, 35; 시 78:67). 즉 에브라임 지파는 넓은 땅과 많은 인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 지파에 대한 지배권(支配權)을 갖고 있던 가장 강력한 지파였기 때문에, 흔히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온 지파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결국 여기서도 요셉의 온 족속이란 말은 유다 지파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총칭하는 말이다(왕상 11:28; 대상 5:1,2; 암 5:6). 이렇게 볼 때 베냐민 지파 소속인(4절) 시므이의 이와 같은 말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 자기가 제일 먼저 요단 강을 건너 왕을 영접한다는 아부의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기서 이스라엘 온 지파의 `첫 사람'(The first Israelite)이라고 자처하면서 왕 앞에 절함으로써, 이제 온 이스라엘이 왕의 지배권 하에 있게 됐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시므이는 이스라엘이 다시금 다윗 왕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 최초의 순간에 사죄함으로써 왕의 무서운 형벌을 피할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Hertzberg). 이와 같은 시므이의 처신은 비록 교활하고 가증스럽기는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매우 대담하면서도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므이의 이러한 처신속에는 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왕상 2:46).

성 경: [삼하19:21]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아비새가...가로되...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 일찍이 아비새는 시므이가 피난 중의 다윗 왕을 저주할 당시에도 의분을 터뜨리고 그를 죽이려 했었다(16:9). 지금 아비새는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다시금 시므이를 죽일 것을 주장한다. 사실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저주한 자는 마땅히 처형시켜야 한다는 아비새의 말은 옳다(출 22:28). 그리고 다윗도 아비새의 말에 감정적으로는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피난의 긴 여정을 마감하고 환궁하는 시점에서, 사울 왕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 소속의 유력자 시므이를 처형하는 것은 시기적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따라서 다윗은 아비새의 진언을 거절하고 시므이의 사면(辭免)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므이의 범죄를 용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징계를 보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다윗은 시므이의 행위(16:5-13)를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도전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기름 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인식에 근거, 삼상 26:9-11)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비록 현실적인 문제(민심 수습)로 그를 당장에 처단하지는 않았지만 끝내는 처형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왕상 2:8,9). 인간이 범하는 실수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과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 주권적 사역을 방해하는 자에게는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

성 경: [삼하19:22]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 여기서 `대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탄'(*)은 본래 '사단', 또는 '대적'을 의미한다(대상 21:1; 욥 1:6-9; 2:1; 시 109:6).그러나 여기서는 `중간에서 길을 막는 방해자(妨害者)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민 22:22). 즉 다윗 왕은 지금 왕위(王位)를 회복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으며, 온 나라는 새로운 태평시대를 앞두고 있었다. 이러한 마당에 선왕(先王)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실권자 시므이를 죽이는 처사는 아직껏 사울 왕가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베냐민 사람들의 원성을 사는 일로서, 곧 나라의 평화를 깨뜨리고 마는 치명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윗 왕은 시므이를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비새를 나라의 평화를 방해하는 방해자로 규정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을 초월하여 나라의 안정을 내다보는 다윗 왕의 폭넓은 지도력을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다윗왕이 아비새를 가리켜 `스루야의 아들들'이라고 복수(plural)로 칭한 것에 대해 반드시 아비새의 형 요압이 아비새의 주장에 협조한 것이라고 볼수는 없고(Smith), 다만 아비새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리 경고를 주기 위하여 스루야의 아들들로 통칭 표현하며 책망할 듯하다. 한편, 본절에서 시므이의 사면을 허락하는 다윗의 말 속에 `오늘'이라는 말이 세번씩이나 반복 언급되는 것은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사면에 `모든 지파의 화합'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깃들어 있음을 은연 중 시사한다(F.R. Fay).

성 경: [삼하19:23]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시므이의 사죄]

(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 - 다윗 왕이 시므이를 사면(赦免)해준 것은 주로 정치적인 의도에서였다. 즉 다윗은 반대파인 시므이를 사면해 줌으로써. 이스라엘 지파 특히 베냐민 지파의 감정을 건드리지 아니하고 온 지파의 화합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즉 이러한 차원에서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한 다윗의 맹세는 온 나라의 화합을 추진하는 왕의 의도를 백성들에게 자연히 보여주는 일종의 제스쳐였다. 그러나 후일 다윗 왕은 그의 임종시에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벌하도록 명하였다(왕상 2:8, 9). 그리고 솔로몬은 부친의 명을 좇아 결국 시므이를 처형시켰다(왕상 2:46). 그런데 여기에 대하여 두 가지의 견해가있다. 다윗은 결국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않은 셈이다(Keil). 즉 다윗은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복수를 하고 만 것이다.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해야 한다'(시 15:4)고 읊은 사람은 바로 누구였던가?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롤 처벌하라고 부탁한 것은 자신의 맹세와 모순되지 아니한다(Lange). 즉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사면 맹세는 자신의 집권 당대에만 유효한 것일 뿐, 이후의 왕에 대해서까지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다윗은 솔로몬 치세 때의 번영과 안정을 위하여 암적 존재요 상습적 모반자인 시므이를 경계 처벌토록 부탁했던 것으로, 오히려 현명한 조처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하19:24]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 여기서 `내려와서'란 말은 므비보셋이 높은 고지에 있던 예루살렘에서 낮은 지대인 요단 강가의 계곡으로 내려왔다는 의미이다(Leil).

(주);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옷을 빨지 아니 하였더라 - 이러한 므비보셋의 행동은 마치 부모의 상(喪)을 당한 자식처럼, 왕위를 찬탈당한 다윗 왕의 고통에 적극 동참한다는 의도에서 보여준 깊은 애도의 표현이었다(겔 24:17). 그러므로 이와 같은 므비보셋의 자세는 다윗 왕에 대한 그의 변치않는 충성심(忠誠心)을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새로운 집권자인 압살롬의 주변에서 다윗 왕을 위해 애도의 표시를 나타낸 것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라도 오직 다윗 왕만을 섬기겠다고 하는 그의 굳은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이러한 므비보셋의 모습은 말 많고 변덕스런 악인들(16절)의 자기 변호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화려한 언변보다 투박하고 진실된 삶이 더욱 가치있게 드러난다 (잠 11:20; 마 25:40). 그런 점에서, 비록 여기서 다윗이 그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다(빌 4:7).

성 경: [삼하19:25]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예루살렘에서 와서 - 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Dathe, Thenius)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할 경우 24절의 `내려와서'(*, 야라드)란 말과 중복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예루살렘에 왔을 때'(LXX, Luther, Michaelis, Maurer)란 뜻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므비보셋이 이미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16:3의 내용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예루살렘이 왔을 때'(*, 키 바 예루솰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거민의 대표자들, 또는 그 주민들을 의미하는 말이다(Keil, Lange). 즉 므비보셋은 다윗 왕을 맞이하도록 파견된 예루살렘 주민 대표단 가운데 끼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 왕과 므비보셋의 만남은 요단 강변에서 있었다 (Leil and Delizsch, Vol. 2-2. pp.447-448).

(주);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 이는 다윗 왕의 책망조의 질문이다. 이처럼 다윗이 모처럼 만난 므비보셋에게 책망조로 말한것은 다윗 왕이 기왕에 므비보셋을 모함한 시바의 말(16:3)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성 경: [삼하19:26]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 실제로 절뚝발이는 나귀에 안장을 지을 수 없다. 따라서 본 구절의 실제의 뜻은 므비보셋이 그의 종 시바에게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고 명령한 것을 의미한다(Keil, Smith, Fay). 이처럼 자기가 직집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이 한 것처럼 기록하는 것은 성경 기록의 문학적 특징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창22:3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 여기서 `속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는 우연한 거짓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빼앗기 위해 고의적으로 속이는 악한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다(창 29:25; 수 9:22; 삼상 19:17; 28:12; 잠 26:19; 애 1:19). 따라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사실로 보아 므비보셋은 여기서 시바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므비보셋이 다윗 왕앞에서 시바를 거리낌 없이 정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시바는 주인을 태우고 가야할 나귀에, 대신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예물을 가지고 혼자 갔다(16:4). 즉 시바는 주인을 버리고 혼자서 다윗 왕을 만난 것이다(Fay). 그리고 시바는 주인 집으로 돌아온 직후 곧 바로 다윗 왕의 명령대로(16:4) 므비보셋의 재산을 가로챘던 것이다(Keil).

성 경: [삼하19:27]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참소하였나이다 - 기본동사 `라갈'(*)은 '험담하다', '물어뜯다', '비방하다',란 뜻으로, 곧 자신의 유익 또는 어떤 목적을 노리고 상대방을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중상하고 모략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사단의 대표적인 속성이요, 악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계 12:10).

(주);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다(14:17). 그러므로 여기서 므비보셋이 다윗 왕의 공정한 심판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신뢰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즉 다윗 왕은 신적 권위를 가진 공의로우신 분으로서, 그가 내리는 판단은 반드시 공정할 것이라고 므비보셋은 믿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 왕의 인격을 절대 신뢰하는 므비보셋의 충성심을 볼 수 있다. 이는 일찍이 부친 요나단이 다윗에 대해 가졌던 신뢰와 사랑과 충정을 연상케 한다(삼상 18:1,3; 19:1;20:42).

(주); 처분대로 하옵소서 - 처음 다윗은 므비보셋을 의심했다(25절). 이에 므비보셋은 자신의 불편한 몸과 시바의 죄악에 관해 언급하고, 오직 다윗의 공의로운 판단에 맡길 뿐이라고 했다. 이처럼 므비보셋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다윗의 인격을 인정하고 그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삼하19:28]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 여기서 므비보셋은 자기가 사울 가(家)의 사람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당시의 관례 대로라면 사울의 직계 혈통인 므비보셋은 새로운왕 다윗에게 죽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 왕으로부터 어떠한 처분을 받더라도, 그저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감사할 뿐 그외 다른 어떤 소원도 전혀 없음을 겸손히 말하고 있는것이다.

성 경: [삼하19:29]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 사울 왕가의 므비보셋에게 자신이 베푼 은혜를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다윗의 말이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다윗 왕은 므비보셋의 재산중 절반만을 그에게 다시 환수시킨다. 이처럼 다윗이 절반만을 므비보셋에게 환수시킨 것은 분명히 므비보셋에 대해 불공평한 처사였다. 즉 다윗은 마땅히 므비보셋에게 모든 재산을 되돌려주어야만 공평했다(9:7-11). 그러나 다윗이 시바의 참소와 므비보셋의 결백성(潔白性)을 확인하고서도 이같이 행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다윗은 아마도 전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되돌려 줄 경우 16:4에서 내린 그의 결정이 경솔한 것으로 판명되므로, 자기의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Lange). 같은 맥락에서, 또한 다윗은 어쨌든 피난 시절에 시바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에 따라 시바와 일단 약속한 내용(16:1-4)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Payne).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다윗이 이러한 판정을 내릴 수 밖에 없도록 작용한 것은 당시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통치 원리(統治 原理)이다. 즉, 이스라엘 왕위에 복권하는 마당에 있어서 다윗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Payne). 곧 원만한 탕평(蕩平)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더욱이 므비보셋이나 시바는 모두 사울가와 관련된 인물로서,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로 불이익이 돌아감으로써 사울가와 관련된 무리들 가운데 불만의 원인이 싹트는 것을 다윗은 원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하19:30]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다윗을 영접하는 므비보셋]

(주);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 혹자는 이러한 므비보셋의 말이 왕의 처분에 어떠한 불만을 은연 중 표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윗의 인격을 진심으로 존경한 므비보셋의 언행(24,27,28절)을 살펴볼 때, 그가 이러한 처분에 대하여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므비보셋의 이와같은 말은 재산 때문에 다윗 왕과의 관계가 소원(疏遠)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말이었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즉 이번 일은 재산 때문에 벌어진 일로서, 이것으로 인해 므비보셋은 다윗 왕에게 오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는 오직 다윗 왕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 곧 왕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며, 그러므로 재산은 없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므비보셋은 재물보다 다윗과의 관계 정상화를 더 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다윗과의 관계 정상화는(그의 식탁에서 먹음, 9:6-13) 므비보셋의 필요를 모두 채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마치 우리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부요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한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롬 10:12; 고후 6:10; 계 2:9).

성 경: [삼하19:31]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길르앗 사람 바실래 - '길르앗'(Gilead)은 요단강 동북쪽이며, '바실래'(Barzillai)는 이곳의 대부호(大富濠)였다(17:27). 그는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쫓겨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소비와 마길과 더불어 다윗 왕을 후원한 사람이었다(17:27-29).

(주); 함께 요단에 이르니 - 여기서 '이르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르'(*)는 '건너다', '통과하다'란 뜻이다(18:9; 창 15:17; 32:10; 민 32:21; 신 29:16; 욥 17:11; 잠 24:30; 렘 48:32). 따라서 본 구절은 바실래가 다윗 왕을 전송하는 과정에서, 왕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넜음을 미리 보여주는 말이다(36절).

성 경: [삼하19:32,33]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 여기서 '공궤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쿨'(*)은 `떠받치다', `유지하다','제공하다' 등의 뜻으로, 특별히 물질적인 필요를 제공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이는 길르앗의 거부 바실래가 다윗 왕이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는 동안 내내 왕과 그의 일행들을 공궤하였다는 말이다.

(주);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 그동안 자기를 공궤해 준 바실래에게 보답하겠다는 다윗 왕의 말이다.

성 경: [삼하19:34]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올라가리이까 - 이는 노령(老齡)을 이유로 다윗의 보은(報恩)을 겸손히 사양하는 바실래의 대답이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겸손하며, 결코 모남이 없는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는 나이에 구애됨 없이 그 삶이 향기롭다. 특히 여기 등장한 바실래는 부자들이 흔히 범하는 교만(삼상 25:9-38)과 무관한 자로서, 곤경에 처해 있던 다윗을 위문한 일이있다(17:27-29). 더욱이 그때의 선행은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단지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도운 순수한 행위였다(전 11:1). 한편 바실래의 거절을 통해 우리는 늙음과 죽음이 가져다 주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배우게 된다. 인간의 생명에는 그 연한이 있으며(시90:10), 기력은 반드시 쇠할 수 밖에 없다(전12: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며 온전한 인격을 지닌 자의 늙음과 죽음은 결코 추하지 않다(욥 12:12; 시 92:14,15; 잠 16:31; 20:29)

성 경: [삼하19:35]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 이는 선악(善惡) 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이다(왕상 3:9; 겔 44:23; 사 59:2; 욘4:11). 즉, 여기서 바실래는 자기는 이미 노령으로 판단력을 상실해 버렸기때문에, 다윗 왕의 유능한 모사(謨士)가 될 수없는 처지임을 말씀드린 것이다(Lange).

(주); 음식의 맛을...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 여기서 바실래는 화려한 궁중 생활이 육체적 감각이 둔한 늙은이인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성 경: [삼하19:36]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 바실래는 왕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넌 목적에 대하여 분명히 밝힌다. 즉, 그 목적은 왕의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을 배웅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바실래나 이러한 그의 목적을 `작은 일'(*, 메아트)이라고 표현하였다(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뜻이 명확하게 번역되지 아니하였다). 한편 후자들은 바실래가 왕과 함께 요단 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동편에서 왕과 헤어졌다고 주장하나(Hertzberg, Pulpit Commentary), 이러한 주장은 본 구절의 내용과 상반되므로 지지할 수 없다(Lange).

성 경: [삼하19:37]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 즉 고향에서 여생을 살다가, 가족의 장지(葬地)에 묻히고 싶다는 노거부(老巨富)의 바램이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특히 열조의 묘를 중시했다(창 49:29-31;50:25). 즉 히브리인들은 조상의 묘 곁에 함께 묻힘으로써, 사후에도 조상들과 연관 되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바실래도 자신의 최후 안식처가 부모의 묘 곁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주); 김함 - 본 구절에서는 `김함'(Chimham)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으나, 왕상2:7로 추추컨대 아마도 그는 다윗 왕을 전송하기 위해 부친 바실래와 함께 내려온 바실래의 아들인 듯하다(Josephus, 70인역). 그렇다면 여기서 바실래는 다윗 왕의 호의에 감사하여 자신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아들 `김함'을 대신 다윗 왕에게 부탁함으로써, 다윗의 따뜻한 배려를 받아들인 것이다.

성 경: [삼하19:38]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내가 너의 좋아하는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 다윗 왕은 다른 왕자들에게 하듯이, 바실래의 호의(17:27-20)를 생각하여 김함에게도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토지를 선사하였던 것 같다(Smith). 한편 렘 41:17을 보면, 베들레헴 근처에 `게롯김함', 곧 '김함의 숙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애굽으로 가는 여행객이나 또는 대상(隊商)들이 잠시 묵고 가는 여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그리고 후일 바로 이러한 여관에 요셉과 마리아가 일시 지냈다고 한다(눅2:7; Stanley, Jewish church, 2.201). 이외에도 다윗 왕은 임종시에 김함의 안전을 특별히 솔로몬에게 부탁함으로써, 바실래의 호의에 대한 보답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왕상 2:7).

성 경: [삼하19:39]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충직한 백성 바실래]

(주); 입을 맞추고 - 이는 다윗 왕과 바실래가 아쉬운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었음을 보여 준다(룻 1:9).

성 경: [삼하19:40]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왕으로 인한 다툼]

길갈로 건너오고 '길갈'(Gilgal)은 여리고 근처이며 요단 강변에 위치했다(19:15). 이곳은 역사적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강변이었으므로 많은 무리의 집합이 가능하였다(수 4:19; 5:10-12;9:6;10:6; 14:6; 삼상 7:16;11:14,1513:7-9).

(주);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 - 여기서 유다 백성은 모두 모인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절반 밖에 모이지 못한 까닭은,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예루살렘 귀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윗 왕이 요단 건널 때에 그 황궁 행사의 주도권은 유다 지파가 행사하였다. 반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는 단지 그 주변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모일수 있었던 것이다(Pulpit Commentary, Lange).

(주); 왕을 호행하니라 - 여기서 `호행하니라'는 말은 `건너다', `통과하다'란 뜻의 동사 `아바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온 유대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 왕을 호위하여 요단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물론 여기서 `백성'이란 표현은 `백성의 대표자들'을 가리킨다).

성 경: [삼하19:41]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왕으로 인한 다툼]

(주); 온 이스라엘 사람 - 이는 뒤늦게 왕의 귀환 소식을 듣고, 급히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과 합류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Clericus).

(주);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 뒤늦게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들은 유다 지파 단독으로 왕의 귀환을 주도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유다 지파의 단독적인 행사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환궁(還宮) 문제는 온 나라의 협의하에 이루어져야 했으며. 이미 이스라엘 각 지파는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하고 있는중이었기 때문에(9, 10절), 유다 지파는 그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불평은 유다 지파와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지파는 사사 시대 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했던 지파로서, 다윗 시대에 나라의 주도권이 유다 지파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삿8:1;12:1). 또한 이들이 유다 지파소속인 다윗 왕 앞에서 유다 지파를 정면으로 불평한 것으로 보아, 유다 지파를 특별히 배려 하고 있는(11-15절) 다윗 왕에 대한 불만도 가진듯하다(The Interpreter's Bible).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의 불평은 수그러들지 아니하고, 곧 세바의 반란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20:1,2).

(주); 왕을 좇는 모든 사람 - 이는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쫓기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갈 때, 왕과 함께 동행했던 무리들을 의미한다(15:17,18).

성 경: [삼하19:42]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왕으로 인한 다툼]

(주);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 여기서 `대답하되'란 말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순히 답변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대적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알'(*)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이 구절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하는 감정 섞인 말투로 그들에게 답변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양 지파간의 갈등이 심각한 정도로 발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연합된 공동체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안에 존재한다. 즉 공동체의 연합을 깨뜨리고 결국에 모든 인격들을 함몰시키는 질투심과 불건전한 경쟁심 및 이기심은 외부에서 도전해오는 악한 세력보다 더 위험하다(고전 1:10-17; 갈 5:20). 이스라엘은 이러한 내부의 적에 의해 또 한번의 분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왕의 환궁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공동으로 추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도권을 유다가 가지고 이 일을 진행한 것에 불만을 품고 이스라엘 10지파가 유다를 공박함으로 분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 환궁에 관련된 사건은 드러난 이유에 불과하며, 분규의 근본원인은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에 계속적으로 팽배해 있던 시기심과 경쟁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은 솔로몬 사후(死後) 남 북이 분열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주);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 여기서 `지친'(至親)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로브'(*)는 `가까운', 또는 `같은 혈족인'이란 뜻이다. 즉, 이 말은 다윗 왕이 자기들과 같은 유다 지파에 소속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유다 지파 사람들의 말은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의 지역 감정을 촉발시키는 촉진제(促進劑)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

(주);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 이는 유다 지파가 다윗 왕으로부터 아무런 특혜(特惠)도 받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말이다. 이와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말은 아마도 이전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왕으로부터 어떤 특혜를 입은 사실을 간접적로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삼상 22:7; Keil, The Interpreter's Bible).

성 경: [삼하19:43]

주제1: [다윗의 환궁(還宮)]

주제2: [왕으로 인한 다툼]

(주);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 다윗 왕이 자기 지파 소속이라고 주장한 유다 지파의 말(42절)을 반박하기 위해 이스라엘지파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숫자의 우월성(優越性)을 강조한다. 즉, 다윗 왕은 다른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의 왕이며 어떤 특정한 지파의 왕이 아니므로, 다윗왕은 유다 지파보다 훨씬 많은 열 지파나 되는 자기들과 더욱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Lange). 따라서 자신들은 다윗 왕의 귀환 계획에 마땅히 참여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것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들이 열 지파라고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들로부터 두 지파를 제외시켰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Keil). 그러나 본 문맥의 내용상 레위 지파가 유다 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 열 지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 주장은 애매하다. 혹자는 이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라고 주장한다(Smith). 그 이유로서 스미드 박사는 시므온 지파의 미미한 영향력과 유다 지파에 복속된 그 지파의 지역적 특수성을 든다. 그러나 다윗 왕의 귀환 문제라는 첨예한 문제를 놓고 혈연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유다 지파에 대해 숫적 우위성의 공동전선을 펴야 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서 구태여 약한 지파라고 해서 시므온 지파를 제외시킬 리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지파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라고 보아야 한다(Lange, Thenius). 왜냐하면 이스라엘 열 한지파 중 유일하게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의 단독적인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즉, 베냐민 지파의 실력자인 시므이는 일천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제일 먼저 왕 앞에 배알(拜謁)했던 것이다(16-20절). 따라서 이러한 베냐민 지파의 움직임은 분명히 다른 열 지파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결국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왕국이 여로보암에 의해 돌로 쪼개질 때 유다 왕국에 속하게 된다(왕상 12:21).

(주);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 이스라옐 열 지파는 다윗 왕의 귀환 계획에 자신들이 참여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주);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 여기서 `강경하였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솨'(*)는 `완강하다', `거칠다'. `격렬하다'. `날카롭다',`쓰리다', `고집이 세다'는 뜻이다(창 49:7; 출 13:15;32:9; 33:3). 따라서 이 구절은 유다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욱 큰목소리로 감정을 섞어 격렬하게 말하였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에 의해 저질러질 새로운 반역의 조짐을 느낄 수 있다(Hertzberg).

성 경: [삼하20:1]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세바의 반역]

(주); 거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솽'(*)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먼저 이 말은 장소적(場所的)인 의미로서 '거기서'를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세바(Sheba)라 하는 자가 지파 간의 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길갈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2) 또한 이 말은 시간적(時間的)인 의미로서 '그 후에' 또는 '그 일로부터'를 뜻한다(왕상 17:13). 따라서 이 용어에서 우리는 결국 다윗 왕의 환궁(還宮)을 둘러싼 지파간의 다툼(19:41-43)이 원인이 되어 세바의 난이 일어났음을 발견할 수 있다(Lange).

(주); 난류 하나가 있으니 - 여기서 '난류'(亂類)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벧리야알'(*)은 '무익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또는 '파괴적인 사람'이란뜻이다(16:7). 성경 다른 곳에서는 '비류'(삿 19:22; 삼상 10:27; 30:22; 왕상 21:10;대하 13:7), 또는 '불량자'(삼상 2:12; 25:17, 25; 잠 6:12; 16:27)란 말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곧 부도덕하고 사악한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끼칠 수없는 무익하고 쓸모없는 자라는 뜻이다(고후 6:15).

(주);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 - 혹자는 여기서 '비그놀(*)의 아들'이란 말은 아마도 베냐민의 둘째 아들인 '베겔(*)의 후손'(창 46:21)을 뜻하는 것 같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리고 혹자는 베냐민의 둘째 아들인 베겔이 사울 왕의 조상인 '베고랏'(*, 삼상 9:1)과 동일 인물이라고 가정하면서, 아마도 세바는 사울 왕의 친척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는 불충분하다. 아무튼 세바가 사울 왕의 친척이든 아니든, 그는베냐민 지파의 족장급 인물로서 사울가를 지지하는 과격한 선동가적 인물임은 분명하다(Lange).

(주); 저가 나팔을 불며 - 여기서 '나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파르'(*)는 수양의 뿔로 만든 양각(羊角) 나팔을 가리킨다. 이 쇼파르(Shofar)는 2개의 음만을 내기 때문에 악기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다만 신호용(信號用)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것은 임박한 재앙을 경고하거나 파문(破門)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E. Werner). 이렇게볼 때 세바가 쇼파르를 분 것은 다윗 왕의 파문과 자신의 반란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이었다고 볼수 있다.

(주);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업이 없도다 - 여기서 '분의'(分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혤레크'(*)는 '기업' 또는 '분깃'을 의미하며(창 14:24; 민18:20; 신 10:9; 12:12; 14:27), '업'(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할라'(*)는 '유산', '소유물'등을 의미하는데(왕상 12:16; 대하 10:16; 사 58:14), 구체적으로는 공히 '토지'(수 18:5, 6, 7, 9; 22:25, 27; 왕하 9:36, 37)나 '백성'(신 32:9)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다윗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토지나 백성들이 다윗의 간섭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세바의 반역적인 언사였다.

(주); 이새의 아들 - 세바는 '다윗왕'이라고 하는 명예로운 호칭 대신 '이새의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다윗을 일개 필부(匹夫)의 아들로 격하(格下)시키는 호칭으로서, 곧 다윗을 모욕하는 것이었으며(삼상 20:27; 22:7; 25:10),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표현이었다.

(주);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 여기서 '장막'(*, 오혤)은 '집', '처소'란 의미인데, 이 용어는 출애굽 이후 광야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 생활을 한 사실로부터 비롯된 용어이다(Fay, Wycliffe). 한편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집으로 되돌아가는 행위는 다윗 왕에게 등을 돌려 그의 통치를 거절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R. Payme Smith). 그런데 이때 세바가 반란의 격문으로 외친 이 말은후일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리워질 때 여로보암에 의해 재주창된 말이라는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業)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왕상 12:16).

성 경: [삼하20:2]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세바의 반역]

(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라가 - 이는 세바의 반역적인 말에 동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갈'에서 길을 돌이켜 세바를 따라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갔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여기서 우리는 지파 간의 감정 때문에, 자기들이 기름 부어 세운 다윗 왕을 또 다시 배반하는 이스라엘 지파의 반역적 행위를 발견할 수 있다.

(주); 유다 사람들은...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 세바의 반란이 시작된 길갈은 요단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저자는 길갈을 넓은 의미에서 요단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한편, '합하여... 좇으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들어붙다', '연합하다'는 뜻을 가진다(창 2:24; 신 28:60; 욥 19:20; 29:10; 시102:5; 119:25, 31). 따라서 이 말은 유다 사람들이 다윗 왕을 철저하게 호위하는 가운데 길갈로부터 예루살렘 성까지 모시고 왔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성 경: [삼하20:3]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처벌당하는 다윗의 후궁들]

(주); 후궁 열 명... 생과부로 지내니라 - 여기서 열 명의 후궁(後宮)은 예루살렘 성에 남겨졌던 후궁들로서(15:16),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주에 강간했던 후궁들이었다(16:21, 22). 따라서 다윗 왕이 이들을 별실에다 가두어 격리시켜 놓은 것은 이들의 불결함 때문이었다(Grotius). 그러나 한편으로 다윗 왕은 수치를 범한 여인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 조항(신 9:1-4)을 따라 이와 같이 조치한 것이었다. 즉, 모세 율법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4). 더군다나 아들과 동침한 여인과 다시 동침하는 행위는 가증한 근친상간죄에 해당되기 때문에(레 18:6-8), 다윗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다윗 왕은 이들을 성밖으로 내어 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이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죽이거나 내어 쫓는 가혹한 형벌만은 삼가했던 것이다.

성 경: [삼하20:4]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세바를 추격하는 아비새 일행]

(주);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소집하고 - 다윗 왕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국민병 모집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이러한 조치는 지난번 아마사에게 제의한 약속(19:13)을 이행하기 위한 예비 조치였다. 즉 아마사의 등용 기회를 찾고 있던 다윗은 세바 반란 진압을 아마사에게 맡김으로써, 반란군을 진압하고 요압의 기(氣)를 꺾는 동시에 아마사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3중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주); 너도 여기 있으라 - 이는 국민병을 소집하고 아마사도 그곳에 함께 있으라는 말이다. 다윗 왕이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세바의 난을 진압할 군대의 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임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윗의 이와 같은 조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즉 (1) 다윗은 무엇보다도 아마사를 군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거칠고 반항적인 요압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며, (2) 또한 압살롬 반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마사를 내세움으로써, 압살롬의 난에 선봉장(先鋒長) 역할을 한 유다 지파의 사기를 북돋아 주려 했던 것이다(19:13).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의도는 군대 소집의 지체와 요압의 반발로 인하여 실패하고 만다.

성 경: [삼하20:5]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세바를 추격하는 아비새 일행]

(주); 아마사가...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 아마사가 군대의 소집을 기한내에 완료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마사의 무능력에 있었던 것 같다(Payne). 즉, 다윗 왕은 요압에게 하듯이 아마사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아마사는 경험많고 노련한 요압에 비해 실무(實務)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졌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마사는 마하나임 전투에서 압살롬의 대군을 이끌고도 요압의 소수 정예병력에 의해 격파당했던 것이다(17:25; 18:6-8). (2) 유다 사람들의 비협조(非協調)에 었었다고 볼 수 있다(Keil, Lange). 다시 말해서 아마사는 반군의 지도자였다는 이유로 유다 백성들로부터 의혹과 불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다 백성들은 아마사의 모병(募兵)에 응하지 아니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19:13)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즉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던 유다 사람들은 반역자요 변절자인 아마사 휘하에 들어가기롤 꺼려함으로써, 아마사의 등용을 방해하였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아비새에게 반란군 진압을 명함으로써 사태를 일단 수습하였다(6절).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백성들과 측근을 무시한 행동으로, 특히 그의 측근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기는 일이었다. 결국 과격하고 정치욕이 강했던 요압은(3:27; 18:14) 질투심과 원한에 의해 반역자 아마사를 살해하고 말았다(10절).

성 경: [삼하20:6]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세바를 추격하는 아비새 일행]

(주);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 아마사의 지체에 불안을 느낀 다윗 왕이 아비새에게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명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다윗 왕이 아비새를 세바 진압의 지휘자로 임명하는 것이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평소 같으면 그동안 이스라엘의 군장(軍長)으로 계속 활약해 왔던 요압에게 명령했을 것이나 이례적으로 동생인 아비새에게 지휘권(指揮權)을 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 다윗 왕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인(18:14) 난폭한 성미의 요압을 상당히 못마땅해 했음을 알 수 있다(Wycliffe Bible Commentary, Lange).

(주);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 세바의 난이 압살롬의 난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다윗 왕의 예상이다. 그 근거로서 다윗 왕은 세바의 난과 압살롬의 난 사이의 근본적인 성격 차이를 생각한 듯 하다. 즉, 압살롬의 난은 압살롬 개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세바의 난은 오래 묵은 지파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번 세바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할 경우, 그 피해는 압살롬의 난 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온 나라에 미치게 될 것이라고 다윗은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판단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파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그 세(勢)가 약화된 르호보암 때에는 세바의 주창과 같은 구호를 내건 여로보암에 의해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왕상 12:16, 17).

(주);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 여기서 '네 주의 신복들'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왕의 시위병들과 정예 군사들을 가리킨다(7절). 한편 여기서 다윗 왕은 지난번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갔을 때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과 똑같은 지시를 여기서 내리고 있다(17:1-3). 즉, 일단 반기의 기치를 든 세바가 자기의 세력을 키워 대항해 오지 못하도록 그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전혀 주지 않고 즉각적인 공격을 가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주); 우리들을 피할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칠 에네누'(*)를 직역하면, '우리의 눈을 빼앗을까'란 뜻이다. 즉, 여기서 '히칠'(*)의 기본형'나찰'(*)은 '빼앗다', '찾다'는 뜻이며(창 31:16; 삼상 7:14; 삼상 30:8, 18;호 2:9), 그리고 '눈'(*, 아인)은 신 32:10, 슥 2:10에 관련시켜 볼 때 '가장 가치있는 것' 또는 '중요한 소유물'을 상징하는 말이다(Thenius, Bottcher, Keil).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 왕국의 중요한 소유물들, 그것이 백성이든 아니면 토지이든 성읍이든, 그러한 것들을 세바가 빼앗아 가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다윗 왕의 말이라고 볼 수있다.

성 경: [삼하20:7]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세바를 추격하는 아비새 일행]

(주); 요압을 좇는 자들 - 그동안 요압의 통솔을 받아왔던 요압의 정예 군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 - 이들은 왕의 근위병들이었다. 이들의 업무 분담에 대해서는 8:18을 참조하라. 다윗 왕이 이들을 파견할 경우 다윗 궁은 완전히 무방비(無防備)상태가 될 것이었지만, 다윗은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고 이들까지 파송하였다.

(주); 모든 용사들 - 여기서 '용사들'이란 히브리어로 '깁보림'(*)인데, 이들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다윗 왕을 추종한 다윗의 용사들을 의미한다(삼상 23:13; 27:2). 이들은 압살롬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한결같이 다윗 왕을 보좌하였던 충성된 일꾼들이었다(15:18). 다윗 왕은 이들까지 파견함으로써, 성중에 있는 모든 병력을 세바의 반란 진압에 투입하게 되었다.

성 경: [삼하20:10]

주제1: [세바의 난]

주제2: [아마사의 죽음]

(주);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 (1) 혹자는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요압이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운 칼이라고 주장한다(Lange). 그러나 만일 그러했다면 아마사는 분명히 요압의 그 칼을 주의했을 것이다. (2) 이렇게 볼 때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요압이 자기의 품속 어디엔가에 숨겨놓은 '단검'(短劍)이었다고 우리는 볼 수 있다(Hertzberg, Wycliffe Bible Commentary). 즉 요압은 자기의 칼을 떨어뜨림으로써 아마사를 안심케 한 후,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마추는 순간 왼손으로 품 속에 있는 단검을 꺼내어 세게 찌른 것이다. 이처럼 요압은 정치적인 원한과 질투로 인해 세번째의 살인(3:27; 18:14)을 하고 말았다. 물론 아마사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요압의 살인은 변명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살해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분노와 질투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변명될 수 없는 죄악이다(마 5:22)). 요압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다면, 그의 원통함을 자신이 해결하려 들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였을 것이다(롬 12:19). 결국 이러한 요압의 방자하고 난폭한 행동은 다윗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되고, 후일 요압을 제거하라는 다윗의 유언(왕상 2:5, 6)을 받은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한 요압을 마침내 죽이고 만다(왕상 2:28-35).

(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좇을새 - 이는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후 아비새와 더불어 스스로 군대의 지휘자로 나선 것올 보여주는 구절이다.

성 경: [삼하21:1]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기브온 사람의 피값으로 인한 기근]

(주); 다윗의 시대에 - 이 말은 정확한 연대를 말해 주지 않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또한 본문에 나타나 있는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은 성경의 다른 부분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다윗 시대의 어느 때에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7-9절에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 사건은 다윗왕이 므비보셋을 찾은 얼마 후에 발생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본 사건은 분명 압살롬의 반란(삼하 15:7-12, B. C. 979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이다(Keil, Ewald, The Interpreter's Bible).

(주);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기근(饑饉)은 단순히 자연적인 재해(災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기근은 칼(전쟁), 사나운 짐승, 온역 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일종의 심판(審判)이었다(겔 14:21; 왕상 8:35). 특히 건조 지대인 팔레스틴 땅에서 3년 연속 기근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심판이었다(왕상 17:1-7; 왕하 25:1-7; 느 5:3; 애 4:4)

(주);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 이는 연속적인 기근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실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그 진상을 알아보는 다윗의 신앙적 행동이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란 말을 직역하며, '여호와의 얼굴을 찾으매'란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말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다윗이 대제사장에게 있는 '우림과 둠밈'(출 28:30)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Lange).

(주);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이 사울 시대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징벌이 가해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즉 (1)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시간과 인격을 초월한 단일 공동체이며, (2) 아비의 허물이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율법의 성취인 동시에(출 34:7), (3) 징계를 통하여 당신 백성의 범죄를 방지하고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악 1:2-4) 및 (4) 인간의 죄는 언젠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부르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전 12:14; 고후 5:10).

(주);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 여기서 기브온 사람(the Gibeonites)은 가나안 땅의 기브온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본래 진멸의 대상이었으나(신 7:1-5),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이름으로'(수 9:15, 18-20) 화친 조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종, 곧 여호와의 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가 되었다(수 9:3-27). 그 약조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을 해하지 않고 살릴 것이라는 언약이었다(수 9:15). 따라서 사울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브온 거민과 맺은 약조를 무시하고, 이들을 죽인 행위는 하나님의 성호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킨 변명할 여지없는 살인죄였다.

성 경: [삼하21:2]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기브온 사람의 피값으로 인한 기근]

(주); 기브온 사람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 본래 기브온 사람은 히위 족속(Hivites)이었다(수 11:19). 그러나 구약 성경의 용례상 아모리 족속은 일반적으로 남쪽의 수리아와 팔레스틴 지역을 대표하였다(창 15:16). 즉, '아모리 족속'(the Amorites)은 가나안 땅의 이방 민족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브온 사람이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고 불리웠던 것이다(Keil, Ewald).

(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맹세하였거늘 - 가나안 정복 시대 당시, 여호수아 군대의 승승 장구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기브온 거민들은 마치 먼 나라 족속인양 위장하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이스라엘과 화친 조약 맺기를 원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은 확인함도 없이 섣불리 그들과 화친 조약을 맺었다. 이유야 어떻든 이스라엘은 당시 그들을 해하지 않고 살릴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약조를 맺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수 9:3-27부분의주석을 참조하라.

(주);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동기가 본 구절에 나타나 있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라는 말은 사울이 자기 민족에 대한 애족심(愛族心)에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음을 나타낸다. 곧 사울 왕은 순수한 단일 민족을 구축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이방 족속 축출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울의 열심은 원칙상 율법의 조항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신 7:2, 24; 출 34:11).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율법의 조항은 이방 민족과 약조를 맺기 이전에 관한 것이며, 사울의 학살 행위는 약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사울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율법 정신에서 벗어난 그릇되고 편협한 민족애의 한 예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주);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 기브온 거민 학살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혹자는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살해할 때(삼상 22:18, 19) 기브온 사람들도 함께 살해하였다고 주장한다(Hertzberg, Abarbanel). 그리고 혹자는 사울이 그의 통치 초기에 율법에 근거하여(출 22:18; 레 20:6) 가나안 땅의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낼때, 기브온 거민들도 학살하였다고 본다(Smith, Fay).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미흡하다.

성 경: [삼하21:3]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기브온 사람의 피값으로 인한 기근]

(주);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 여기서 '속죄하여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동사 '카파르'(*)는 문자적으로 '덮다', '가리다'는 뜻이다(창 6:14). 그러므로 다윗의 이 물음은 어떻게 하면 기브온 사람들에게 행한 이스라엘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가리워질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말은 피해를 입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연약한 거류민들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보상을 요구할 길을 찾지 못했으나 이번의 기근을 통하여 보상을 약속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 없이 학대 당한 자들을 마침내 신원(伸寃)해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하게 된다(시 10:17, 18).

(주); 여호와의 기업 - 열조와 맺은 언약에 따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신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20:19).

성 경: [삼하21:4]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기브온 사람의 피값으로 인한 기근]

(주);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살인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속전(贖錢)을 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서는 부요한 자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고살자(故殺者)에 대해서는 속전 내는 것을 금하고 반드시 죽일 것을 명하였다(민 35:31). 이렇게 볼 때 기브온 사람들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과 그 집이 고의로 자기들을 살해하였으므로, 반드시 죽음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율법의 규정대로 주장했던 것이다.

(주);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 즉 사람을 처형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뜻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본토인도 아니며 거류민들인 기브온 거민들로서는 다윗 왕의 허락이 없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성 경: [삼하21:5]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기브온 사람의 피값으로 인한 기근]

(주);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 여기서 '학살하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나 '멸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드'(*)는 모두 '진멸하다', '멸망시키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브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울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진멸하려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은 '이방 세력 멸절'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충족시키고자 기브온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인간적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보복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여호와를 위하는 일은 그 목적과 실행 방법 및 실행 원칙이 공명 정대하고 선해야 한다.

성 경: [삼하21:6]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기브온 사람의 피값으로 인한 기근]

(주);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 여기서 일곱 명의 자손들은 사울의 기브온 거민 학살 행위에 동참한 사울 가문의 자손들이다. 그 근거로 우리는 사울의 친척들(사울의 집)이 이일에 깊이 관여했음을 1, 4절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일곱'이란 숫자는 여기서 신성한 의미의 숫자(a sacred umber)이다 (Keil, Lange). 즉 일곱은 하나님의 숫자로서, 이번에 사울 집안에 속한 일곱 명의 자손들이 처형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일곱 명의 자손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속 제물의 의미도 있었다(The Interpreter's Bible).

(주); 여호와의 빼신 사울 - 이는 곧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사울'이란 말이다. 실제 사울은 기름 부음 받아 세워진 이스라엘의 선택된 왕이었다(10:1).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풍자적인 의미를 띤다. 왜냐하면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마땅히 여호와의 뜻을 성실히 좇았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 조약을 맺은 기브온 거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461).

(주); 사울의 고을 기브아 - 지난번 기브온 사람 학살 사건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울에게 있었다. 따라서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집에 속한 일곱 명의 자손들을 처형할 장소로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Giveah, 삼상 10:26)를 지정한 것이다.

(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란 말은 정확히 '여호와를 위하여'란 뜻이다. 즉, 이 말로써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일곱 자손들을 처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기 위한 공의적 차원의 일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한편 '목매어 달겠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는 '매달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목매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겠다는 의미 보다는, 죽이기 위해 매달거나 또는 죽인 후 시체를 매어 달겠다는 의미이다(Smith). 특히 이 말에 상응하는 헬라어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사용했던 어휘 '스타우로오'(*)이다.

성 경: [삼하21:7]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죽임당한 사울의 후손]

(주); 왕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 본 구절의 배경은 9장에 잘 나타나 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던 요나단과의 우정의 언약(삼상 18:3; 20:16, 42; 23:18)을 지키는 뜻에서 일곱 명의 명단에서 므비보셋을 제외시킨 것이다.

성 경: [삼하21:8]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죽임당한 사울의 후손]

(주); 아야의 딸 리스바 - 리스바(Rizpah)는 사울의 첩이었으며, 사울 사후 아브넬과 이스보셋 간에 불화의 요인이 되었던 장본인이었다(3:7).

(주); 사울의 딸 메랍 - 메랍(Merab)은 사울의 장녀였으며, 사울이 다윗에게 주기로 하였다가 그 약속을 어기고 아드리엘에게 시집보낸 여인이었다(삼상 18:17-19). 한편 히브리 본문과 흠정역(A.V.)에는 '메랍' 대신 '미갈'(Michal)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필사자의 착오이다(Keil, Fay, Smith). 왜냐하면 '아드리엘'(Adriel)의 처는 분명 메랍일 뿐 아니라(삼상 18:19), 미갈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6:23).

성 경: [삼하21:9]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죽임당한 사울의 후손]

(주); 산 위에서 -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 근처의 산을 의미한다(6절).

(주); 함께 죽으니 - 이는 사울의 일곱 자손들이 모두 '같은 날에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다.

(주);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 이 때는 히브리 종교력으로 니산(Nisan)월 중순이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 말하자면 4월 경이다.

성 경: [삼하21:10]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이장(移葬)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주); 굵은 베 - '굵은 베'는 슬픔과 비탄을 상징하는 애곡자의 옷이었다(3:31; 왕하 19:1, 2; 에 4:1-4; 욥 16:15; 시 30:11). 반석 위에 펴고 - 시체에는 사나운 짐승과 새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이러한 맹수나 맹조에 의하여 뜯기우는 것을 최대의 수치요 모욕이라고 생각했다(삼상 17:44). 따라서 리스바는 시체에 이러한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굵은 베옷을 반석에다 깐 후, 시체 곁에 계속 머물면서 밤낮으로 시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주);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 모세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을 죄를 짓고 나무 위에 달려 죽더라도 그 시체를 당일에 내려 장사(葬事) 지내도록 규정하였다(신 21:22, 23). 그러나 이번에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사울의 일곱 후손의 시체들은 사건의 성격상 예외에 해당되기 때문에 율법의 규정대로 당일에 장사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즉, 사울의 일곱 후손들은 3년 연속 기근을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한 속죄 제물의 의미로 처형당한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시체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기근이 끝나는 순간, 곧 비가 내리기까지 나무 위에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이다(Lange). 한편, 혹자는 시체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때는 우기(雨期)인 10월 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따라서 리스바는 4월부터 10월까지 곧 6개월 동안이나 시체를 보호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Smith, 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무리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졌다고 하는 표현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졌다고 하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즉, 본절의 비는 우기에 내린 자연스런 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인의 형벌당함을 보시고 이제 당신의 진노를 풀었다는 표시(sign)로서 내리신 비인 것이다(Keil, Lange).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가 언제 시체 위에 쏟아졌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스바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를 지켰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비가 즉시로 시체에 쏟아지지 않은 것 만큼은 문맥의 흐름상 확실한 것 같다(Josephus, Clericus, Ewald, Bottcher).

성 경: [삼하21:11]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이장(移葬)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주);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 당시 시체가 정식 장례 절차에 의해 무덤에 안치되지 않고 방치되어 짐승에게 손상당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던 사실로 미뤄 보건대(삼상 17:44), 리스바의 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녀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오랫동안 시체 주위에 몰려드는 짐승의 온갖 위협을 막아내는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이러한 정성과 사랑에 감동한 다윗은 그들의 뼈를 사울가의 가족 묘지에 합장(合葬)하였다(14절). 이렇게 하여 실추되었던 사울가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고 리스바의 슬픔 역시 약간은 가실 수 있었다. 이처럼 자기 희생은 허물을 덮어 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며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제공해 준다(마 26:13; 벧전 4:8).

성 경: [삼하21:12]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이장(移葬)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주);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취하니 - 사울의 뼈와 요나단의 뼈는 지난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의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되었다(삼상 31:11-13; 삼하 2:4, 5). 그런데 이번에 다윗 왕은 이들의 뼈를 가져다가 이들의 가족 묘에 묻어준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배려는 (1) 사울의 첩 리스바의 지극한 모성애(母性愛)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요, (2) 또한 자신이 사울가에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주); 벳산 거리에 매어단 것을 - 삼상 31:10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벳산'(Bethshan, 혹은 '벱산') 성벽에 못박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본절의 '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홉'(*)은 '광장'(廣場)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의 중앙에 있는 광장 뿐 아니라 성문 앞 또는 옆에 있는 광장도 의미하기 때문이다(대하 32:6; 스 10:9; 느 8:1, 3, 16). 이렇게 볼 때, 블레셋 사람들은 수많은 백성들이 왕래하는 성문 앞 광장의 성벽에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못박았으며, 그리고 그 시체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몰래 취하여 온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21:13]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이장(移葬)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주);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 여기서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는 사울의 일곱 후손들의 뼈이다. 혹자는 이들의 뼈가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가족의 묘에 합장(合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하나(Lange, Keil), 본절에서 보듯 사울과 요나단의 뼈가 이장(移葬)될 때에 사람들이 이들의 뼈를 거두었다는 기록은 합장(合葬)을 암시해 준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하21:14]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이장(移葬)되는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

(주); 셀라 - 베냐민 지파의 땅이나(수 18:28),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 그 후에야 하나님이... 들으시니라 - 사울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3년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적극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시 66:18; 사 59:2; 요일 3:21, 22).

성 경: [삼하21:15]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 본 구절로부터 본장 마지막 절(22절)까지는 다윗 왕을 도와 큰 전공을 쌓은 영웅들의 위업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드'(*)는 시기적으로 앞의 사건과 연관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블레셋과의 전투는 오직 다윗 왕의 즉위 초기에만 있었기 때문이다(5:17-25; 8:1). 또한 '오드'(*)는 '다시'라는 뜻 이외에도 '그 외에'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신 4:35; 34:10; 왕상 22:7). 따라서 본 구절의 배경이 되고 있는 블레셋과의 전투는 다윗 왕의 즉위 초기에 있었던 전투들(5:17-25)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15-22절)에 나타난 영웅들의 이야기들은 '여호와의 전쟁기'(Book of the Wars of Yaweh)에서 본서 저자가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hertzberg, Smith; als 21:14).

(주); 내려가서 - 이는 유다 산지에서 블레셋 평지로 내려갔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성 경: [삼하21:16]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장대한 자의 아들 - 여기서 '장대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파' (*)이다. 이 '라파'는 거인족(巨人族)이었던 르바임의 원주민들을 가리킨다(Keil,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신 2:11; 3:11, 13; 창 14:5). 그리고 이들의 명칭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근처 계곡을 '르바임 골짜기'라 부른 듯하다.

(주); 삼백세겔 중 되는 놋창 - 1세겔(Shekel)이 11. 4g이므로, 삼백 세겔은 약 3. 4kg에 해당한다. 새 칼을 찬 - 여기서 '새 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솨'(*)는 형용사형으로 '새 것'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비브놉이 허리에 찬 무기가 칼(Vulgate, A. V. )인지 철퇴(LXX)인지 단정지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은 '새 무기를 찬'으로 해석해야 한다(Bottcher, Philippson).

(주); 이스비브놉 - '이스비브놉'(Ishbbienob)은 '고지대의 거주자'란 의미를 갖는다(Keil, Gesenius). 따라서 '이스비브놉'은 본래의 이름이 아니라 후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게 이러한 별명이 붙여진 까닭은, 아마도 그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고지대의 성(城) 또는 바위 틈에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Keil, Lange).

성 경: [삼하21:17]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 - '아비새'(Abishai)는 다윗 왕의 조카이자 요압의 동생이다(2:18; 10:10; 18:2; 20:6).

(주);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 여기서 '등불'은 타오르는 '생명'과 '번영' 및 '영광'을 상징한다. 따라서 다윗 신하들의 이 말은 이스라엘의 번영과 안정 및 영광의 핵(核)이신 다윗 왕이 위험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터에 참전하는 것을 막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 18:5, 6에서는 '등불의 꺼짐'이 곧 '죽음'과 '파멸'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한편, 그런데 다윗왕이 이스라엘의 등불이 된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등불이 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즉, 다윗은 본서 22:29과 시 18:28에서 여호와께서 나의 등불이시며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비천한 곳에서 존귀와 영광의 자리로 높여주셨음을 고백한 말이다.

성 경: [삼하21:18]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곱- '곱'(Gob)에 대하여는 성경 전체에서 본 구절과 19절에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며,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1) 혹자는 곱을 '게셀'이라고 주장하며(Thenius) (2) 어떤 번역본은 '가드'라고 번역하였다(LXX). (3) 그러나 '곱'이 18절과 19절에 연이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다른 지명으로 볼 수 없으며, 아마도 게셀 근처의 작은 소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Keil, Lange).

(주); 후사 사람 십브개 - '십브개'(Sibbechai)는 다윗의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다(대상 20:4). 그는 23:27절에 등장하는 후사 사람 '므분내'(Mebunnai)와 동일 인물이다(Smith). 따라서 '므분내'는 '십브개'의 오기(誤記)임이 분명하다(Fay). 즉, 필사자의 착오로 십브개를 므분내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철자상 '십브개'(*)와 '므분내'(*)는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십브개'는 대상 27:11에 따르면, 이만 사천 명을 지휘하는 제 8부대의 지휘관이었다. 또한, '후사 사람'(the Hushathite)이란 말은 유다의 족속인 후사의 자손이란 의미이다(대상 4:4)

(주); 장대한 자의 아들 - 16절 주석 참조.

(주); 삽 - '삽'(*)은 '이스비브놉'과 마찬가지로 거인족인 르바임 족속의 용사로, 대상 20:4에는 '십배'(*)라고 소개되어 있다.

성 경: [삼하21:19]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 죽였는데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20:5에는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라고 되어 있다. 즉 본 구절의 '야레오르김'은 역대기에서는 '야일'로, 그리고 대상 20:5과는 달리 본 구절의 원문에는 '... 의 아우 라흐미'란 말이 빠져 있다(한글 개역 성경에 있는 이 말은 첨가된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두 구절의 상이한 기록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1)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역대기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그리고 본서(삼하)의 기록을 오기(誤記)로 본다(Piscator, Clericus, Michaelis, Movers, Thenius). (2) 반면, 다른 소수의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그리고 역대기의 기록을 오기라고 주장한다(Ewald, Bertheau, Bottcher). 즉 이들은 골리앗이란 이름의 사람이 실제로 둘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억측이다. (3) 혹자는 다윗과 엘하난을 동일 인물로 본다(Jerome, Targum). 즉 '다윗'이란 이름은 본래 이름이 아니라 왕명(throne name)이었으며, 그의 본래 이름은 '엘하난'이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엘하난'(Elhanan)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란 뜻을 지닌다는 사실은 이같은 주장을 입중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 구절의 배경이 되는 장소, 곧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하는 곳은 '곱'이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장소는 엘라 골짜기이기 때문이다(삼상 17:19). 이상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본 구절이 잘못된 오기(誤記)이며, 역대기의 기록이 원문에 일치하는 올바른 기록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역대기의 기록에 맞추어 '... 의 아우 라흐미'를 첨가하여 읽어야 한다(Keil). 결론적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고, 엘하난은 '골리앗의 아우'를 죽인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서론, No. 7. 사무엘서에 대한 고등 비평 비판'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 구절의 '엘하난'은 다윗의 30인 용사 중의 한 사람인 도도의 아들 '엘하난'(23:24)과는 다른 인물이다.

성 경: [삼하21:20]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키 큰 자(*, 이쉬 마딘) - 굉장한 '거구'(巨軀)로서, 싸움을 잘하는 '용사'를 가리킨다(Maurer, Bertheau, Bottcher).

(주); 매 손과 매 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 네 가락 - 이러한 육손과 육발은 일종의 유전적 성격을 띠는 기형인데, 플리니(Pliny)의 'Natural History'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아주 드문 기형(奇型)은 아닌 듯하다.

성 경: [삼하21:21]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삼마의 아들 요나단 - '요나단'은 암논의 교활한 모사(謀士) '요나답'의 형제이다(13:3). 한편 '삼마'는 다른 곳에서 '시므아'라고 기록되기도 하였다(13:3; 대상 2:13).

성 경: [삼하21:22]

주제1: [재앙을 극복하는 다윗]

주제2: [다윗의 용사들]

(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 죽었더라 - 본 구절은 앞의 기록(15-21절)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후기(後記)에 해당한다. 여기서 '장대한 자의 소생'이란 가나안의 거인족(巨人族) 원주민 '라파'(*)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21:16>. 따라서 이 네 사람은 라파 족속의 남은 생존자들로서, '가드'(수 11:22; 13:3)에서 태어나 블레셋의 용병(傭兵)으로 활약해 왔던 자들이었다. 한편, '다윗의 손... 에... '란 말은 (1) 다윗이 이스비브놉과 맞서 싸웠던 사실을 내포하고 있으며(Keil), (2) 또한 다윗 신하들의 승리가 곧 다윗의 승리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Smith). 그리고 더 나아가 다윗의 이러한 승리의 개가는 다윗의 치적과 영광을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 다윗 왕국의 승리와 번영을 주도하셨던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22장에 나타나고 있는 구원을 감사하는 다윗의 노래가 바로 이같은 사실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여기 나타난 함축된 승리의 전쟁 기사(15-22절)는 22장의 감사와 찬미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성 경: [삼하22:1]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다윗의 노래]

(주); 여호와께서 다윗을... 구원하신 그 날에 - 혹자는 다윗 왕이 이 시(時)를 쓴 때를 다윗왕의 말기로 보고 있다(Keil). 즉, 모든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물리치고 또한 압살롬과 세방의 난(15:7-12;20:1, 2)등 모든 반란을 진압한 후에 본 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시의 내적 증거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의 통치 초기 즉 다윗 왕이 주변의 대적들을 정복한 이후에 곧 바로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먼저 본 시 44-46절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다윗 왕이 아람의 동맹군을 물리쳤을 때, 하맛 왕 도이가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조공을 바친 역사적인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8:9, 10). (2) 또한 본시에는 다윗 왕의 말년을 어둡게 하였던 강간, 살인, 반란 등 수치와 슬픔의 어두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21-25절에는 다윗이 자신의 삶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 시가 수치와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다윗 왕의 말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등극 후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던 초기에 쓰여진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가 다윗 왕의 통치 초기(B. C. 1010-B. C. 995?)에 쓰여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본 시는 '감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제의하고(7:1, 2)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 언약'(7:4-16)을 체결할 당시 곧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한 직후(7:17)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Pulpit Commentary,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아무튼 기쁨, 감사, 감격이 넘치는 본시의 흐름으로 보아 이 시는 다윗의 신앙이 가장 고조되었던 떼에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본시의 역사성과 그 배경 및 취지를 소개한 표제어(表題語)에 해당된다. 이 표제는 사울 왕의 핍박과 이방인들의 세력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제어는 출 15:1, 민 21:17, 신 31:30마의 표제와 유사하다.

(주);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 여기서 '모든 대적'이란 말은 즉위 직후 다윗이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기하기 위해 간단없이 전쟁을 치렀던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이방 국가들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을 비롯하여 아람, 모압, 암몬, 아말렉, 소바, 에돕등을 가리킨다(8:1-14). 그리고 '사울의 손'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 왕 생전에 사울 왕으로부터 당했던 무서운 추격과 생명의 위협을 가리킨다(삼상 18:10, 11, 17, 25;19:2, 9-12;20:1, 3, 31;21:10;23:15, 19-26;24:2;26:2). 이처럼 다윗은 구체적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막연하고 피상적인 시어(詩語)가 아닌 현장감 넘치는 언어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들이 노래하는 여호와의 구원 역시 결코 미래에 국한된 막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털어 체험하고 확신한, 즉 삶에서 구체화된 실존적인 구원의 노래여야 한다.

(주);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 본 구절은 이 시가 다윗 자신의 저작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시는 시편 18편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시 18편과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일치하며, 문체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본 시는 다윗 왕의 원시(原詩)요, 시 18편은 그의 말년에 교정을 본 시이기 때문에 두 시(詩) 간에 문체의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Henstenberg, The Interpreter's Bible). 진정 이 노래는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을 현장과 현장에서 생생히 체험한 다윗의 시(詩)요, 아울러 이 노래는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이 동감할 수 있는 신앙 송으로서, 노래를 되뇌일 때마다 살아 계셔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분명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삼하22:2]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구원자 하나님]

(주);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시요 - 본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총괄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등의 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특히 '반석'과 '요새'는 팔레스틴의 지형적 여건에서 따온 용어들이다. 우선 '반석'(rock)은 가파르고 접근하기 매우 까다로운 바위를 의미한다. 위기에 처한 용사들은 곧잘 이곳에 피하여 몸을 숨기곤 하였다(삼상 13:6). 다윗도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당시에 이곳에 몸을 숨김으로써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삼상 22:5;24:23). 또한 '요새'(fortress)는 가파른 바위에 둘러싸인 산 꼭대기를 의미하며, 팔레스틴 지역에는 이러한 요새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삿 6:2;욥 39:27, 28;사 33:16). 이 또한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때 숨었던 피신처였다(삼상 23:14, 19). 이처럼 다윗은 역경과 환난의 때에 자기를 바위와 요새에 숨기어 위기를 넘기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반석과 요새에다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나를 건지시는 자'(my deliverer)란 앞의 비유적인 두 단어(반석, 요새)를 실제적인 의미로 바꾸어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Keil).

성 경: [삼하22:3]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구원자 하나님]

(주); 나의 하나님이시요 -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 )인데, 이는 능력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 호칭이다(창 1:1;롬 11:36).

(주); 나의 피할 바위시요 - 여기서 '바위'는 2절의 '반석'(*, 셀라)가는 다른 용어로써,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견고성(堅固性)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용어가 최초로 하나님께 비유된 유래는 모세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묘사한 데서 찾을 수 있다(신 32:4). 여기에서 '반석'의 의미는 쉽게 흩날리는 사막 지대의 모래 산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의 견고성과 불변성을 의미하며, 또한 광야의 여행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은혜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본 구절의 바위는 2절의 반석과는 달리 아주 거대한 바위 덩어리(산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웅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신 32:15, 31;사 30:29). 다윗은 이러한 바위와 같으신 하나님께 피할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였다.

(주);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 '방패'(shield)는 수비용 무기이며, '뿔'(horn)은 공격용 무기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적의 공격을 방어해 주기도 하시며(창 15:1;신 33:29;시 3:4;59:12), 때로는 적의 세력을 파(破)하는 공격도 감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자삼상 2:1). 그러므로 '뿔'은 그러한 세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힘', '능력', '권세'를 상징하기도 하며(삼상 2:1, 10;시 89:17, 24;겔 29:21;신 33:17;미 4:13), 그러한 공격의 결과 얻어지는 '승리',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눅 1:69;신 33:17;합 3:4).

(주); 나의 높은 망대시요 - 여기서 '높은 망대'(high tower, KJV;stronghold, NI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갑'(*)는 '높은', '안전한'이란 의미의 형요사 '사가브'(*)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이는 적의 공격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높은 산성, 다시 말해서 안전한 장소를 뜻하는 말이다(시 33:5;잠 18:11;시 9:9;18:2;46:7, 11;사 33:16).

(주); 나의 피란처시요 - '피란처'(refuge)는 사막 지대의 기후상 갑자기 몰아닥치는 모래 바람과 폭풍우 등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하고도 큰 바위 밑이나 동굴 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인생의 폭풍우를 만났을 때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주); 나의 구원자시라... 구원하셨도다 - 본 시에서는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마지막에 걸쳐 여러번 언급되어 있다(1, 4, 20, 47, 51절). 이같은 사실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이 자기에게 구체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시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22:4]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구원자 하나님]

(주); 여호와께 아뢰리니... 구원을 얻으리로다 - 여기서 '아뢴다'는 말은 여호와의 도움을 위해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뢰리니'와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미완료형(未完了形, imperfect tense)으로서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 내가 여호와께 기도할 때마다 구원을 얻었고,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때마다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로다'란 의미를 지닌다(Lange, Keil).

성 경: [삼하22:5]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구원자 하나님]

(주);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 - 이러한 표현들은 자신을 삼키고자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왔던 사울의 무서운 핍박과 다윗 초기에 있었던 숱한 전쟁의 위험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망의 물결'이란 표현은 시 18편에서는 '사망의 줄'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불의의 창수'에서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벧리야알'(*)은 불의(不義)란 뜻 외에도 '무익한 것',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파괴를 일삼는 사악하고 가치없는 자에 의한 재난의 위기와 죽음의 위협을 의미하는 말이다.

성 경: [삼하22:6]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구원자 하나님]

(주); 음부의 줄... 사망의 올무 - 다윗은 5절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성난 파동의 해일(海溢)로 묘사했다. 이어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설치는 악인의 계교를 사냥꾼의 사냥(hunting)에 비유하고 있다. 즉 여기서 '줄'(*, 헤벧; trap, cord)이나 '올무'(*, 모케쉬; snares, trap, noose)는 사냥할때 사냥꾼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들은 마치 사냥꾼이 밧줄과 덫으로서 짐승을 사냥하듯 적의 갑작스런 공격과 간교한 속임수를 나타내는 말들이다(Keil). 여기서 다윗은 아마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Lange). 그리고 다윗은 실제로 사울 왕의 추격을 사냥 행위에 비유하기도 했었다(삼상 24:14;26:20). 한편, '음부'(*, 쉐올;sheol-창 37:35 주석 참조)는 죽은 자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음부의 줄'이란 곧 사망의 줄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성 경: [삼하22:7]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구원자 하나님]

(주); 아뢰며... 아뢰었더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카라'(*)는 '부르짖다'는 뜻이다(시 34:6;55:17;118:5;119:145, 146;120:1;렘 29:12;31:6). 이는 곧 간절한 기도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뢴 후 주의 도움심을 간구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다윗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구원자와의 긴밀한 교제를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엄하시고 권위적이시며 공의를 따라 철저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간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놓여 있다고 대체로 믿어졌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삶에 찾아 오셔서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체험을 통해 간증했다(시 50:15;59:10). 다윗이 이처럼 구약적인 한계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갚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1)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2) 그분과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인해 가능했다. 즉 기록된 율법서나 타인의 가르침에만 의존해서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초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윗은 이처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 여기서 '전'(*, 헤칼)이란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를 의미한다(Smith, k Keil). 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며, 따라서 인간의 참된 간구가 이 보좌에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당신의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시 11:4). 그러므로 여기 다윗의 노래도 이러한 개념하에서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성 경: [삼하22:8]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이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 기초가... 흔들렸으니 - 이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시내 산 언약을 선포하셨을 때의 자연 현상과 비슷하다(출 19:16, 18).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의 대적을 멸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분연히 일어나사 이 따으로 강림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Keil, Lange). 즉,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대적들의 위협과 올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현현(現顯)을 시적(詩的)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강림하셨을 때, 실제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적인 표현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구원의 손길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시적 표현일 뿐이다. 한편 '지진'은 하나님의 진노의 강림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였다(욜 2:10, 11).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강림의 목적이 다윗의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여기서 '하늘 기초'('산의 터', 시 18:7)가 요동하고 흔들렸다고 하는 말은 전 우주의 떨림을 묘사한 말로서, 곧 대적을 멸하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분연히 일어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실상을 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성 경: [삼하22:9]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 여기서 '코' 또는 '입'과 같은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된 것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초이성적인 측면을 의인화시켜 이성적으로 묘사함으로 인간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문학적 표현 방법이다. 그리고 여기서 '연기'는 불이 나오기 이전의 단계이다. 즉 연기가 나온 다음 불이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가 하나님의 코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난 사람이 숨을 거칠게 쉬고 코를 씰룩거리며 콧김을 연발하듯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에 대하여 분을 내심을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신 32:22). 또한 연기에 이어 불이 솟아오른다. 이 불은 모든 사악한 원수들을 일거에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상징한다(신 32:22;출 19:18).

(주);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 이 구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것에서부터(*, 밈벤누) 숯이 피워졌다'가 된다. 여기서 '그것'은 문맥상 '하나님의 입'이 틀림없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불이 어찌나 뜨겁든지 그것은 마치 불타오르는 난로나 가열된 용광로에서 꺼낸 숯불과도 같아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무서운 효력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불이 모든 사악한 것을 태워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창 15:17).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의 숯불을 빛을 번쩍이는 '번개'로 이해하였으나(R. Payne Smith), 연기와 숯의 상관 관계에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할. 그리고 진노의 불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한 까닭은 아마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Lange).

성 경: [삼하22:10]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 이는 낮게 깔린 빽빽한 비구름을 묘사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성(臨迫性)을 나타낸다(시 144:5;사 64:1). 여기서 '드리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는 '기울이다', '숙이다'는 뜻으로서(삿 9:3;16:30;시 40:1;잠 4:27;시 102:11), 마치 하늘이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접근하는 듯한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시시각각 다가오는 심판의 임박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_ 이는 빽빽한 비구름으로 인해 땅 위에 깔리워지는 짙은 흑암의 상탤마 묘사하는 말이다. 이와같은 흑암의 상태는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서,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출 19:16;20:21;신 4:11;시 104:29;나 1:3). 결국 이러한 흑암과 더불어 땅위에 강림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악인들에게 있어서 곧 무서운 심판을 의미하므로, 큰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실로 악인들은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볼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와 심판의 무시무시한 징조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J. H. Michaelis;Keil & Delitzsch, Vol. -ii. p. 473).

성 경: [삼하22:11]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수종드는 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의 그룹은 특별히 언약궤의 덮개 위에 있는 두 그룹을 의미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 두 그룹 사이에 좌정하사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다(출 25:20-22;삼상 4:4;시 80:2).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고 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좌가 지상으로 이동하사 강림하셨다는 의미이며, 이렇게 볼 때 여기서의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를 실어 나른 셈이 되는 것이다(Keil). 이런 의미에서 여기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는 표현은 그룹의 날개짓을 연상케 한다. 출 25:20에 보면, 언약궤를 덮었던 그룹들의 날개는 항상 나를 준비가 된, 높이 편 상태로 있었다.

(주);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 이 역시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시적인 표현이다(시 104:3). 즉 바람의 재빠름성을 이용하여 그것을 날개 삼아 지상으로 강림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나타나셨도다'란 말은 시 18:10에서는 '뜨셨도다'로 표현되었는데, 이 표현 역시 재빠르게 이동하여 강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성 경: [삼하22:12]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저가 흑암... 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 이 구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모습을 악인들에게서 감추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에 대해 분노하사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실 때, 짙고 어두운 비구름이 마치 둘린 장막처럼 하나님을 에워싸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은 볼 수 없게 되고, 대신 캄캄한 흑암만이 무서운 심판의 전조로서 그들에게 보여질 뿐인 것이다.

(주);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 - '흑암' 과 '모인 물'과 '빽빼한 구름'은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들로서, 곧 '짙은 비구름'을 가리킨다. 즉 '짙은 비구름'은 '흑암'을 동반하며, 또한 그것은 '모인 물덩어리'와 같으며, 그것은 '빽빽한 구름'인 것이다. 한편 시 18:11에서는 '모인 물' 대신에 '물의 흑암'이란 말로 표현했다. 역시 동일한 의미의 시적 표현이다.

성 경: [삼하22:13]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 여기서 '광채'(brightnes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가흐'(*)는 '불꽃', 또는 '섬광'(閃光)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빽빽한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뜻한다(Keil, Smith). 따라서 이 말은 9절의 '불'과는 다른 의미의 말이다(Lange). 또한 '숯불이 피었다'는 말은 그 번개의 화염에서 불꽃이 튀어 나왔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장면을 시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표현이다.

성 경: [삼하22:14,15]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뇌성을 발하시며... 음성을 내심이여 - 전형적인 시적(詩的) 병행 구절로서, '뇌성'(雷聲)과 '음성'은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다. 즉 히브리인들은 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여기서는 악인에 대한 분노의 음성이기 때문에, 그 뇌성은 더욱 무시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욥 37:3;출 9:23;시 29:3;46:7;68:34;77:18).

(주); 살을 날려... 번개로 - 여기서 '살'(arrow)은 '번개'(lightning)와 동의어이다. 고대인들은 번개를 하나님의 화살로 생각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을 징벌할 때 번개한 화살을 사용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시 7:13, 14;38:3;욥 6:4;신 32:23;애 3:12, 13).

(주); 파하셨도다 - 기본 동사 '하맘'(*)은 '깨뜨리다', '혼란케 하다', '파괴하다'란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천둥, 지진, 번개 등을 동원하여 적을 기적적으로 쳐부술 때 사용된 표현이다(출 14:24;23:27;수 10:10;삿 4:15;삼상 7:10).

성 경: [삼하22:16]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권능자 하나님]

(주);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 - 여기서 '꾸지람'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우뢰 소리를(시 114:7), '콧김'은 하나님의 분노(9절)를 각각 상징한다.

(주);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 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윗이 창수(漲水)와 같은 대적들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여기에서 '물'은 다윗을 핍박한 대적의 세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리고 '물 밑'이나 '땅의 기초'는 바닷물이 무겁게 내리 누르는 바다 밑바닥을 지시하며, 이는 상징적으로 다윗이 대적으로부터 받아온 압박감(壓迫感)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물의 세력, 곧 대적의 세력이 완전히 파멸되고, 다윗이 그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Delitzsch). 한편, 혹자는 '따의 기초'를 '스올'(sheol, 음부)이라고 보았으나(Keil, Hengstenberg) 본 구절의 문맥상 이는 이미 언급한 대로 다윗의 환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Lange).

성 경: [삼하22:17]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손을 펼치신 것을 의미한다(시 144:7;Lange, Keil). 여기서 '위에서'라 함은 하나님의 초월성, 또는 지존성(至尊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위로부터 강림하셨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지엄하신 강림으로 인해 자연계가 요동하고 악인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본 것이다. 곧 주위 사방에서 사나운 파도와 같이 대적의 세력이 밀려올 때에도 다윗은 그 신앙의 눈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한 것이다.

(주);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 여기서 '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솨'(*)는 모세가 나일 강물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출 2:10). 그러므로 이 말에서 '모세'(*, '건짐을 받은 자'란 뜻)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 다윗은 여기서 '많은 물'로부터 건지움 받은 자신의 구원을 나일 강물로부터 건지움 받은 모세의 경우에다 비유하여 여호와의 크신 구원의 은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Luther, Keil, Fay). 한편, 그리고 여기서 '많은 물'(*, 마임라빔)은 '사망의 물결' 또는 '불의의 창수'(5절)와 같은 죽음의 위험과 재앙을 가리킨다(시 32:6;46:12;69:2, 3;사 43:2).

성 경: [삼하22:18]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강한 원수 - 여기서 '원수'는 단수형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오직 다윗의 하나의 원수, 곧 사울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다윗을 대적한 모든 원수들을 다 포함시킨 집합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Lange, Keil). 왜냐하면 곧 이어 나오는 동의어(미워하는 자들;원문에는 복수 형태의 분사임)나 지시대명사(저희는)가 모두 복수 형태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다윗은 사울 뿐만 아니라 그의 집권 초기에 그를 위협했던 주변 이방 국가의 강력한 정복자들로부터 자신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주);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 이 구절은 본시에서 다윗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감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다윗은 철저하게 왕으로서의 자신의 탁월성과 위대성을 감추고, 오직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성(軟弱性)과 무능력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와 성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은혜의 법을 잘 깨닫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Hertzberg).

성 경: [삼하22:19]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나의 재앙의 날 - 이 날은 어느 특정한 한 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이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큰 곤궁에 빠지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을 때를 말한다. 특히 사울의 추격을 받아 더 이상 피할 곳도, 그리고 도움을 바랄 수도 없게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 환란 중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한 다윗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안'(*)은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의 동사 '솨안'(*)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며, 이의 본래 뜻은 '지주'(支柱), '버팀목'이다(사 3:1;시 18:19). 따라서 본 구절은 환자가 전적으로 버팀목에 의지하듯이 환란을 당한 다윗이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여 위로를 받는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다윗의 순수한 신앙은 시 23:4에 잘 나타나 있다.

성 경: [삼하22:20]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 여기서 '넓은 곳'이란 환란과 압박의 좁고 협착한 상태와는 반대적인 개념으로, 자유가 넘치는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를 상징하는 말이다(Fay, Smith). 즉 이 말은 어린 양이 넓은 들에서 마음대로 걱정없이 풀을 뜯고 있는 자유와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호 4:16;시 31:8;118:5;합 1:6).

(주);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베푼 모든 선한 일의 이유와 결론을 보여 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와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변치않고 어떠한 위경 가운데서도 다윗을 구원하셨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고 있었던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악인들의 심판을 통해 얻게될 자신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자이신 동시에 자신의 구원자로서 확신하였다(롬 11:36;고전 8:6). 이처럼 전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기뻐하시고 구원하셨다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당신을 의뢰하는 한 생명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명해 준다(마 6:25;10:31;16:26).

성 경: [삼하22:21]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 여기서 '상 주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말'(*)은 '보상하다'는 뜻으로(신 32:6;대하 20:11;시 103:10), 이는 악인 또는 의인에게 그 행한 대로 갚는 공정한 보응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 구절에서 자신의 구원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義)라 함은 전혀 죄가 없는 상태, 곧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절대적 의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 또는 사악함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과 지속적인 친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Keil). 다시 말해서 이 '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 내 손의 깨끗함 - 여기서 '손'은 인간의 행위를 상징한다(Lange). 따라서 이 말은 죄와 불의로부터 떠난 다윗의 깨끗한 행위를 의미한다(시 7:5;24:4;26:6;욥 9:30;22:30).

성 경: [삼하22:22,23]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 다윗이 자신의 의(義)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상을 받은 이유와 또한 자신의 손(행위)이 깨끗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21절)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즉 그것은 의의 길이요 정결의 길인 '여호와의 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도'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규례'와 '율례'를 가리킨다(23절). 즉 그 규례와 율례의 길에서 좌우로 벗어나지 아니하고, 온전히 붙들고 좇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규례'(*, 미쉬파트)와 '율례'(*, 후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교훈을 강조하는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이다(신 4:1 주석 참조). 결국 구약적인 의미에서 '의'(義)런 윤리적이고 도덕적 측면보다는 법적인 뉘앙스가 더 짙은 용어로서,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과 규범에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도에 순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와 불의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절대 의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제시한 모든 법도는 당신의 성품을 대변한 것으로서 의롭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자신의 의와 정결과 완전함을 하나님께 보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본문의 말은 스스로 구원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교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다윗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살아간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상급)을 은혜로 받았음을 가리킨다(창 7:9;15:6;22:12-18).

성 경: [삼하22:24]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 여기서 '완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은 21절의 '내 손(행위)의 깨끗함'과 대조적으로 마음의 고결함 또는 순결함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20:5;시 26:1;잠 10:9). 특히 이 말은 욥의 '순전(純全)한' 마음에 적용된 용어로서 그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욥 1:1). 그러나 이 말이 결코 도덕적으로 전혀 무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만한 순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Hertzberg). 성경은 이러한 내적인 완전(순수)의 상태에서 정결한 행위가 나온다고 증거하고 있다(마 23:26). 한편, 이런 맥락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칠만한 '흠(欠) 없는'정결한 동물을 가리킬 때 적용되었다(레 1:3, 10;3:1, 6등). 그리고 후일 사도 바울은 이 '타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모스'(*)를 사용하여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강조하고 있다(엡 1:4;5:27;골 1:22).

성 경: [삼하22:25]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내 의대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 본절은 21절의 고백에 대한 또 한번의 확증적 증언이다. 이러한 다윗의 이중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결단코 잊지 아니하고, 때가 이르면 반드시 갚아 주시는 상급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상급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베푸시는 구원의 원리와 더불어 성도들에게 주어진 귀한 은총과 은혜의 원리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원의 원리'가 무조건적인 은총의 원리라면, '상급의 원리'는 행한대로 갚아주시는 보응적 은혜의 원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상급의 원리는 구원 받은 자로 하여금 더욱 신실히 하나님의 뜻을 좇게 하고, 의롭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성 경: [삼하22:26,27]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21-25절에서 자신의 상급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전한 마음과 깨끗하고 의로운 결과임을 밝힌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의 보편적 진리(the general truth)를 도출해 낸다. 곧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진리를 그동안의 생의 경험을 통하여 확시하고, 여기서 이 진리를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다.

(주); 자비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드'(*)는 '인애', '사랑'이란 의미의 단어 '헤세드'(*)의 변형이며, 따라서 이 말은 '사랑을 품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사랑은 인간 사이의 일반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사랑을 의미한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견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신 33:8;시 4:3;12:1;50:5).

(주); 완전한 자 - 24절의 '완전하여'와 동의어이다. 24절 주석 참조.

(주); 깨끗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르'(*)는 본래 '분리시키다', '쪼개다', '선택하다'는 뜻의 동사 '바라르'(*)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을 온갖 세속의 더러움과 죄로부터 분리시켜, 날마다 의로움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거룩한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사 52:11;시 18:27;단 11:35).

(주); 사특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익케쉬'(*)는 '굽다', '뒤틀리다'란 뜻의 '아카쉬'(*)에서 파생된 말로, 곧 생각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왜곡되고 삐뚤어진 자를 의미한다(욥 9:20;잠 28:18).

(주);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 이에 해당하는 '티타팔'(*)의 기본 동사 '파탈'(*)은 '역겨움을 느끼다', '붙들고 싸우다', '심술궂음을 보이다', '거칠게 대하다'란 뜻이다. 곧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해 비뚤어지고 왜곡된 행동을 하는 사특한 자에게 역시 하나님께서도 거칠고 심술궂게 대하사 그를 낭패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 경: [삼하22:28]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공의의 하나님]

(주);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리이다 - 26, 27절에서 언급된 보편적 진리를 재확인하는 구절이다. 즉 다윗은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를 대조시켜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보상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잠 6:17;21:4;30:13;시 101:5). 여기서 '곤고한 백성'은 억압받는 경건하고 겸손한 무리들을 의미하며 '교만한 자'는 부와 권세를 자랑하는 경건치 못한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Keil, Lange). 그리고 '교만한 자'는 시 18:27에는 '교만한 눈'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한편,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을 '곤고한 백성'의 범주에 포함시켜 곤고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통해 확신있게 진술하고 있다.

성 경: [삼하22:29]

주제1: [감사와 찬송의 시(詩)]

주제2: [능력의 근원]

(주);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모든 구원과 존귀와 형통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주는 나의 등불'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등불'은 (1)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밤중에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