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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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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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재난 & 욥의 믿음

1:1, 2:1~10, 창조절 5, 2021103

 

 

욥의 아내

욥 이야기를 다루는 욥기는 그 내용이 아주 강렬해서 서양 예술과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도 웬만한 분들은 욥 이야기를 알 정도입니다. 욥기의 서사구조는 예상외로 간단합니다. 당대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알려진 욥이 대재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인생이 더 잘 풀렸다는 구조입니다. 간단한 서사인데도 길이가 42장이나 됩니다. 욥과 그 친구들 사이에 긴 논쟁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읽어내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하늘에서 열린 천상회의를 제외하고 욥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욥과 세 명의 친구들과 한 명의 후배입니다. 예상외의 인물이 나옵니다. 욥의 아내입니다. 이름은 없습니다. ‘페미니즘신학자 중에서 이 문제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본문에 욥의 아내가 악처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는 말은 재난당한 남편에게 아내가 할 소리는 아닙니다. 이런 문장만 본다면 그녀는 악녀 중의 악녀로 보입니다. 4세기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욥의 아내를 악마의 보조자라고 했고, 칼뱅은 사탄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욥을 비난하고 떠났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욥의 옆을 지켰는지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욥의 운명이 잘 풀려서 백사십 년을 살면서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다고 하는데, 욥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없습니다. 외경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나오긴 합니다.

욥의 아내는 남편에게 왜 이렇게 모진 말을 한 것일까요? 그녀가 자기 가족에게 임한 재난의 책임을 욥에게 묻는 것일까요? 요즘도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서로 비난하는 부부들이 있지 않습니까. 욥의 가정에 임한 재난의 크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많던 재산을 강도에게 강탈당했습니다. 아랫사람들도 야만족에게 당했습니다. 양과 소와 낙타, 그리고 남은 종들은 불벼락을 맞아 다 죽었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도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 자리에서 몰살했습니다. 욥과 그의 아내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재난 앞에서 남편보다는 아내가 받는 충격이 더 큽니다. 재산도 재산이지만 자기 몸으로 낳은 열 명의 자식을 생각해보십시오. 재난을 미리 막지 못한 남편을 원망할만합니다. 당신이 뭔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기에 우리가 이런 재난을 당한 거 아니냐고 따지는 중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욥 부부에게 임한 재난은 자식을 잃고 모든 재산을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재앙이 닥쳤습니다. 욥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로 뒤덮였습니다. 8절에 따르면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가 아니라 똥더미로 나옵니다. 마을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악성 피부병 대한 공포심이 아주 컸습니다. 한 가족이나 마을 전체가 몰살되는 일이 흔했기에 악성 피부병 환자가 생기면 일단 격리했습니다. 욥은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고 합니다. 가려움증을 해소하려고 긁었을 수도 있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는 뜻으로 긁었을 수도 있습니다.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장면을 본 욥의 아내가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게 낫다고 말할만합니다.

그런데 욥의 아내가 한 발언을 조금 자세하게 살펴보십시오. 그는 두 가지를 짚었습니다. 첫째, 욥이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지킨다. 둘째, 그러니(그럴 바에야)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게 낫다. 욥의 아내도 유대인이기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한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욥이 결국에는 자신의 대재난이라는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욥은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긴 하나, 이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우리는 모릅니다.

이 두 진술에서 핵심은 전자입니다. 욥의 아내가 볼 때 자기가 온전하다는 욥의 주장은 잘못입니다. 당시 유대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재난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잘못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우선 중요합니다. 그게 유대교의 정통 신앙입니다. 자신이 온전한데도 이런 비참한 운명에 떨어졌다면 그건 곧 유대교의 정통 신앙을 부정하는 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욥 부부는 모든 걸 잃게 됩니다. 자식, 재산, 남편의 건강, 그리고 유대교의 정통 신앙을 다 잃습니다. 최소한 신앙만은 건져야 합니다. 욥의 아내는 그걸 강조하는 겁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욥의 아내는 욥에게 악담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하나님 신앙만은 지키자고 호소하는 겁니다.

이런 호소는 욥의 아내만이 아니라 그를 위로하러 온 세 명의 친구들도 똑같았습니다. 욥기 4장부터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과 논쟁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고 충고했습니다. 모두 선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이 욥을 용서해주신다는 논리였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누가 발언한 것인지를 확인하지 않고 발언 내용만 보면 욥의 발언인지 친구들의 발언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의 발언을 누구의 발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빌닷의 발언입니다. 이 발언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자기의 온전함을 주장하는 욥을 비판하려고 사용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좋은 발언이 아닙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려면 욥은 자기가 온전하다는 주장을 거둬들여야 합니다. 일단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용서를 받은 후에라야 창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충고와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서 이런 재난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은 뻔뻔한 인물입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으로 문제가 있는 구절 하나를 보십시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욥의 발언입니다. 지금 욥의 재난은 하나님께서 욥을 단련하려고 주신 것이니, 이를 통과하면 더 순전한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런 주장은 세 친구와의 논쟁이 끝난 뒤에 찾아와서 욥을 비판한 엘리후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고난과 재난은 연단의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주장에 상당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욥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의미가 정확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나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욥은 끝까지 자신의 온전함을 내세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욥은 뻔뻔한 인물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욥은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일까요? 실제로 그는 조금의 잘못도 없는 인간이었을까요? 그래서 자기 아내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와 엘리후의 충고와 비난 앞에서 떳떳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낸 사람 치고 자기의 온전함(integrity)을 주장한 사람은 없습니다. 욥이 뻔뻔스럽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당하는 재난의 책임을 죄로 돌리는 유대교 전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난이나 불행을 죄와 연결하는 해석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습니다. 예수 공생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9:1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와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선천성 시각장애인을 보았을 때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역사적으로 예수에 앞서 재난의 원인을 죄라고 본 유대 정통 신앙에 저항한 구약 인물이 바로 욥입니다.

 

복과 화

여러분은 재난과 불행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유라는 게 아예 없는 것일까요? 이런 재난과 불행이 없을 수 없는 이 세상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요? 혹시 자신의 인생에는 지금까지 그런 재난과 불행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그런 질문에는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큰 착각입니다. 착각인 이유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아내를 향한 욥의 말을 확인해야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겠느냐.”라는 이 구절은 1:21절과 맥이 닿습니다. 전 재산과 하인과 자식까지 다 잃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 구절은 물론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이 엄중한 사실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삶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만약 알몸이라는 사실을, 빈손이라는 사실을 삶에서 받아들인다면 지금처럼 악다구니처럼 살지는 않겠지요.

알몸으로 돌아가니까 인생살이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의 신앙적인 의미가 10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바로 대재난을 당한 욥의 믿음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동의한다고 해도 자기에게 화가 닥치는 건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당장 욥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래도 설교자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의 믿음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과 화 개념을 일단 넘어서야 합니다. 복을 받으면 행복하고 화를 당하면 불행하다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아무도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항목이 우리를 반드시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겁니다. 적은 연봉을 받거나 건강이 나빠졌다면 불편한 일이 많겠지만 이로 인해서 좋은 일도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할 수도 있고, 더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에서만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안다면 복과 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은 재난과 불행이 인생살이에서 얼마나 끔찍한지를 모르기에 나오는 것이라고, 그저 이론일 뿐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욥을 보십시오. 그가 당한 재난과 불행은 최악이었습니다. 3장에서 그는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몇 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베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3)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11)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16) “나에게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6) 욥은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그는 비존재의 나락으로 떨어진 겁니다.

저는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욥의 탄식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번역은 26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평화, 평안, 안식은 간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평화로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걱정도 많고 불안도 많습니다. 우울증도 있고, 신경증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 안에서 정말 평화로운 인생을 산다고 말할 겁니다. 자기 인생을 행복의 지표라고 생각할 겁니다. 젊은이들은 SNS로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직간접으로 표현하면서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행복이 실체인지 허상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들 자신도 모릅니다. 일단 실체라고 해둡시다. 그래도 우리의 인생은 결국 욥의 한탄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바에야 태어나지 않은 게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저는 앞에서 재난과 불행을 당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뒤에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대재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기도는 <레퀴엠>에 나오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런 걸 생각할 때마다 저는 저의 아내나 자식들이, 그리고 교우 모두가 불쌍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레퀴엠>의 내용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욥의 한탄 가운데서도 섬광 같은 구원의 빛을 느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욥의 믿음입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엄청난 재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재난의 깊이를 경험했기에 구원의 깊이도 경험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존재의 심연을 느껴본 사람만이 존재의 신비와 기쁨을 압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를 얻지 못합니다. 죽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하반신 마비로 오래 걷지 못했던 사람만이 치료된 후에 걷는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는 거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집단 히스테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재난을 두려워하는 21세기를 삽니다. 욥의 아내와 친구들처럼 서로에게 책임을 묻고 충고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 문제나 개인의 실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욥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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