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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 (사 42:1-9)

대구성서아카데미

하나님의 정의

42:1-9, 주현절 후 첫째 주일, 2020112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여러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물론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과 의지로 살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고 따라가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척박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혼의 문제인데, 하나님의 정의를 향한 관심과 인식과 열정이 우리에게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영혼의 문제에 관해서 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도 따지고 보면 우리 시대와 크게 다를 게 없었습니다. 세상이 뒤죽박죽으로 보였습니다. 힘이 강한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억눌렀습니다. 제국은 작은 나라를 억압했습니다. 자기들에게는 모든 나라를 압도할만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있으니 함부로 대들지 말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난폭한 제국에 어쩔 수 없이 저항하던 작은 나라는 대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대다수 사람은 입을 다물고 살았습니다. 무엇이 정의인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말을 해봐야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자칫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수 있으니, 그냥 조용히 사는 겁니다. 유대 민중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선지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마음으로만 생각했지 겉으로 나타낼 수 없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선포를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은 삶의 방향을 잡기도 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선지자들의 선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은 유대 민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혼에서 울리는 말씀을 좌고우면 없이 선포했습니다.

지금 사 42장을 선포한 그 선지자의 영혼을 울리는 말씀은 정의였습니다. 1절에서는 정의를 베풀리라고 했으며, 3절에서는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라고 했고, 4절에서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정의가, 속된 표현으로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이사야 선지자가 그토록 간절하게 정의를 부르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사야가 말하는 정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여러 정치 집단과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정의와 이사야가 말하는 정의는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더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으로 사는 데에 정의가 필요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지금 정의롭게 살고 계십니까?

 

주의 종

이사야는 사 42:1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나의 종이고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이며 내가 택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신에 할 주의 종은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 나라에 안에서만이 아니라 이방 나라 안에서도, 즉 세계 전체에 정의를 베풀 것입니다. 엄청난 발상입니다. 당시 이방을 대표하는 나라는 바벨론 제국입니다. 요즘의 미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제국은 자신들이 선이고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제국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할 주의 종을 하나님이 보내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정의를 베풀 주의 종에 대한 묘사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로 나옵니다.

 

1) 2절에 따르면 주의 종은 겉으로 소란스럽게 굴지 않는 방식으로 정의를 베풉니다.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주의 종은 세상의 방식과는 반대로 정의를 베푼다는 사실을 이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가능한 한 자기 목소리를 높입니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가장 전형적으로는 정치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멋진 정치인인지, 민족의 미래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즉 자기가 애국자라는 사실을 과대 포장해서 알립니다. 이런 정치 활동도 필요합니다. 정치는 대중들의 힘을 모아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하는 행위이기에 자기선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선전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는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정의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자주 예를 드는 거지만, 히틀러도 자기선전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히틀러에 선동당한 당시 독일 사람들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보내는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어떨까요? 자기를 드러내면서 잘난척 하는 정치는 아주 쉽게 정의와 평화를 파괴합니다. 이사야가 보는 주의 종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치적인 성취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3절에 따르면 주의 종은 생존의 위기에 떨어진 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의를 시행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금 이사야의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3절을 다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상한 갈대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갈대입니다. 뿌리째 뽑아버리는 게 남아있는 성한 갈대를 위해서 좋습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력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을 끌고 가면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칩니다.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일단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괴된 유대를 가리킵니다. 유대는 인류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이사야는 주의 종이 절체절명에 떨어진 유대, 그리고 이와 비슷한 운명에 떨어진 이방 작은 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살리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정의라고 했습니다. 옳은 진단일까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유대 나라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인생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떨어진 모든 개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착한지 아닌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똑똑한지 그렇지 못한지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의 처지에 떨어진 이들에게 다시 생명의 힘으로 함께하시고 도우신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이 취약 계층에 속한 이를 어떻게 도우실는지는 우리가 지금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도움의 손길이 그에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주이기에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극도의 위기에서 돕습니다. 돕지 않는다면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거부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다는 예수의 비유(13:1-9)와 비슷합니다. 그 농부는 밭을 골라가면서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모든 곳에 씨를 뿌립니다. 문제는 밭입니다. 준비가 되지 못한 밭에서는 씨가 결실을 거두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이 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에도 여러분이 준비만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비밀스럽게 여러분을 붙드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사야가 보는 정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정의 개념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정의를 협의로만 생각합니다.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억울하게 손해를 보지 않는 게 정의라는 식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화두로 자리 잡은 공정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본문에서 정의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디스파트입니다.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듯이 하나님이 판결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판결이 정의입니다. 맞는 이야기인가요? 세상의 정의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가 악이 아닐 때만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디스파트, 즉 하나님의 판결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에 악과 선을 구분하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종말론적입니다. 모든 죽음은 그가 착하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집니다.

3) 4절에 따르면 주의 종은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세웁니다. 이게 세 번째 특징입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미 앞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정의는 단순히 정치 사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차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4절에 나오는 정의는 생명으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읽기 편하게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종은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고 세상의 정의를, 즉 하나님의 생명을 세워나갈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철저하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지치고 낙심하고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서 죽을 때까지 정의를 실천하더라도 결국은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납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생명을 세울 종을 세웁니다. 그 종이 죽으면 다시 또 종을 세웁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방식으로, 마치 지구에 생명 현상이 지속하듯이, 세상에 정의와 생명을 세워가신다고 이사야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신뢰를 가리킵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여기 평생 성실하게 인생을 산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음이 가까이 오자 사람이 점점 더 그리워졌습니다. 자식과 손자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맛난 것을 더 먹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자기 인생에 애착이 더 많아집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져 올수록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느낍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도 점점 더 줄어듭니다. 물건에 관한 관심은 더더욱 없습니다. 이 사람의 영혼에 가득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완성하실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는 기쁨이 이 사람의 영혼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판결하신다는, 즉 정의를 실행하신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살기는 바라십니까? 미리 준비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의와 판결과 생명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느끼지 못하면 겉으로는 행복한 인생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불행한 인생이 아닐는지요.

 

이사야와 예수

마태복음 기자는 마 12: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이 주의 종을 세워서 세상에 정의를 세우신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12:20절에서 사 42:3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예수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당신이 메시야인가?”라고 묻는 대목에서 예수는 오늘 설교 본문인 사 42:7절을 그대로 인용해서 대답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11:5).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여러분은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우리는 동의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동의하는지를 저는 여러분에게 설명해야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정의는 종말론적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이신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완전한 구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정의와 생명은 늘 일시적이고 제한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예컨대 대한민국처럼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면 경제 정의가 훼손됩니다. 북한처럼 경제 정의를 높은 가치로 여기면 전체적으로 가난하게 삽니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소유를 누리고 건강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걸 소유하고 누리는데 치우치면 실질적인 삶이라 할 존재론적 즐거움을 놓칩니다. 건강하기만 하면 병들었다가 치료될 때의 기쁨을 모릅니다. 지난 일주일간 저는 통풍 발작으로 고생했습니다. 두 발로 편히 걷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더 절감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행복을 느끼기 원하면 통풍 발작을 앓아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도 생명으로 충만해지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율법을 성취하는 게 나름으로 최선이었으나 예수 이후에는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마 12:20절이 가리키듯이 예수야말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정의와 생명을 세우시는 하나님이 나의 종으로 선택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범생 인간을 만드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종이라 할 예수를 믿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말씀하시고 살았던 분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은 사회에서 죄인으로 내몰린 사람들까지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 하나님의 정의가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현실(reality)이 되었습니다.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말씀드릴 한 가지는 사실은 다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상한 갈대가 될까, 꺼져가는 등불이 될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에 온전히 기대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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