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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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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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16:9~15,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22522

 

 

빌립보 선교

갈릴리 나사렛에서 시작한 예수 복음이 오늘 대한민국까지 건너오게 된 과정에는 몇 번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성경에 나오는 계기는 바울에 의한 유럽 선교 사건입니다. 16:6절에 따르면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이 말하지는 않으나 정황으로 볼 때 선교 방식에 관한 바나바와의 의견 차이로 추정됩니다.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반하려고 했으나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마가가 1차 선교 활동 중에 무책임하게 돌아갔다는 점을 바울이 못마땅하게 여긴 겁니다. 결국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으며,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육로를 통해서 비시디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섰다는 소문이 그 지역에 퍼지면서 바울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들은 바울을 불편하게 여겼었습니다.

바울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에게해 가까운 항구도시 드로아까지 밀려났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고민했을 겁니다. 힘들더라도 계속 아시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과감하게 에게해를 건너 유럽으로 갈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행 16:9절에 따르면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말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처한 상황을 알고 있던 어떤 마게도냐 사람이 비밀리에 바울을 찾아와서 자기 의견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사모드라게와 네압볼리를 거쳐서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도착한 며칠 뒤 안식일을 되어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로 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정보를 얻었겠지요. 보통 같으면 당연히 회당을 찾았을 겁니다. 도시 크기로 보면 빌립보에는 당연히 회당이 있을 법합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인 빌립 2세가 세운 도시이고, 바울이 방문할 당시에는 로마 직할 식민도시였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전략적으로 요충지인 빌립보를 중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회당을 건립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13절에 따르면 그곳에 모인 이들이 모두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는 여자 중에서 한 여자에 관해서 자세하게 보도합니다. 14절의 표현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두아디라는 요한계시록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언급할 때 나오는 도시입니다. 루디아는 빌립보에 살면서 터키 지역을 오가는 국제 무역업자였습니다. 물품은 두아디라의 특산물인 자색 옷감입니다. 자색 옷감은 당시에 고급 물품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바꾸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해당합니다. 루디아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여성 사업가인 셈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표현은 루디아가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퇴폐 문화에 염증을 느낀 탓일까요? 어쨌든지 그녀가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말은 로마 제국이라는 체제와 시대정신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루디아의 친구나 친척들은 루디아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로마 제국에는 인생을 즐길만한 요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을 가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주 정교하고 장엄한 경기장을 세워놓고 거기서 온갖 오락을 그들은 즐겼습니다. 마차 경기대회나 격투기나 공연 예술이 열렸습니다. 빌립보에도 그와 비슷한 야외 공연장이 있습니다. 루디아는 일반 시민이 아니라 상류 계급에 속한 귀부인이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인생을 럭셔리하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로의 개종은 로마 문명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생을 바라볼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로마 체제는 한 마디로 황제숭배 이데올로기입니다. 인간의 신격화입니다. 로마 제국의 절대화입니다. 로마 문명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철학입니다. 신이 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제국을 통해서 발현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당한 정도로 그런 욕망이 로마 제국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로마가 지배한 식민지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넓은 지역입니다. 유대도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유대교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참된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루디아는 유대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루디아가 오늘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바울의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얼마든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에 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빌립보 강가 모임에서 설교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에게 그런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을 겁니다. 자기의 개인 경험에 근거하여 아주 감동적으로 전했을 겁니다. 자신이 원래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던 유대교 랍비였는데, 부활의 예수를 만난 뒤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율법 중심의 유대교에서 답답했던 영혼이 예수의 복음을 통해서 해방되었다는 바울의 말에 루디아의 마음이 움직인 겁니다. 14b절을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마음을 열어라는 표현이 대수로워 보이지 않으나 루디아의 회심 경험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인생에도 터닝포인트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종잡기 어려워서 지적 수준이 높아도 열리지 않는 사람이 있고, 수준이 낮아도 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reality is process.”라는 문장이나 하나님은 영이라.”라는 문장을 읽었다고 합시다. 이 문장이 가리키는 세계가 보이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이 말씀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도 있고, 제자들처럼 큰 충격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열리는 일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서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교 복음을 향해서 그 마음이 열렸나요? 어느 정도로 열렸나요? 문틈으로만 빼꼼히 내다보는 중인가요? 마음은 없이 발걸음만 오가는 건 아닌가요? 루디아는 신세계를 만난 사람처럼 바울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례- 신앙의 시작

마음이 열린 루디아는 이제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합니다. 마음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까지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당시에 빌립보 강가에서 벌어졌던 일을 압축해서 기록한 문장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들어보십시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첫째, 루디아만이 아니라 모든 식솔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도 대개는 세례를 받았을 겁니다. 세례는 삶의 방향을 근본에서 바꾼다는 결단과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새로 태어난 신생아와 같습니다. 그 신생아는 이제 어른으로 자라야 합니다. 모유를 먹다가 이유식을 먹고 이어서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계속 이유식만 먹는다면 그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몸만 자라면 곤란합니다. 지식도 늘어나야 하고, 감수성도 더 예민해져야 하고, 정신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처럼 자기만 아는 게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연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격 자체가 품격을 갖춰나가야 합니다. 세례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이제 시작하겠다는 약속이자 결단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란다는 말을 단순히 교회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을 제대로 하고, 교회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일종의 종교적 지위라 할 수 있는 권사나 장로가 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건 신앙생활의 형식입니다. 그런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자신의 전체 인생을 그리스도교적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삶의 방향을 분명히 잡고 달려가는 사람은 교회 안이나 밖에서 옆 사람과 공연한 일로 실랑이를 벌이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산악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오직 정상에 오르는 일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옆에서 당신은 그 힘든 일을 왜 하냐? 당신 참 못생겼다.’라고 말해도 신경을 안 씁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신경을 안 씁니다. 그런 일은 정상에 오르는 일에 비해서 사소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일에 신경을 너무 많이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주로 정치 문제를 다루는 유튜브나 SNS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나쁜 영향을 줄 겁니다. 저는 정치에 무관심한 목사는 아닙니다. 어떤 교우들에게는 제가 좌파 목사처럼 비칠 겁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는 바르트의 말처럼 세속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외면하고 목사가 어떻게 바른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근본의 차원에서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소비 위주의 삶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듯이 정치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대한민국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그리고 좌파냐 우파냐 하는 정체성보다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쓰십니까? 직장 생활을 하는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낼 겁니다. 남는 시간은 어떻습니까? 티브이 뉴스나 드라마, 홈쇼핑, 친구들과 전화나 단톡방 대화, 요즘 유행하는 넷플릭스 영화 감상, 등등일 겁니다. 또는 좋은 설교나 신학 강의를 유튜브로 듣습니다. 좋은 책 독서나 성경 읽기도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텃밭을 가꾸기도 합니다. 저는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하는지를 모범답안처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모범답안은 불가능합니다. 각자가 처한 형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쓰는 데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도 달라진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홈쇼핑에 주력하는 사람은 그게 인생입니다. 정치 유튜브만 보고 즐거워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은 그게 그의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즉 구원의 삶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길게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가 세례받은 사람이라는 사실과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칫 등한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루디아의 경우처럼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잠깐 마음이 움직이다가도 자신의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런 마음이 사라집니다. 신앙적인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가 모르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경쟁 만능의 이 세상에서 사는 인간으로 풀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절박한 겁니다. 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세속의 삶과 세례받은 자로서 마땅히 가야 할 영적인 삶이 균형을 이루거나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전업 목사가 아니었다면 저 같은 설교자에게 당신은 세상살이의 매운맛을 못 봐서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설교하는 거야.”라고 비판했을지 모릅니다.

 

예배 처소

둘째, 식솔과 함께 세례를 받은 루디아는 바울 일행에게 자기 집에 머물라고 제안합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였으니 집도 넓었을 겁니다. 자기 집을 가정교회처럼 사용하고 싶은 겁니다. 이는 바울 일행을 배려한 제안입니다. 바울은 지금 터키 지역에서의 선교 경쟁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바다 건너 이곳으로 왔습니다. 재정적으로도 열악한 형편이었습니다. 바울은 신체적으로도 병약했습니다. 그는 탁발 수도자처럼 무전여행 하듯이 지금 빌립보까지 왔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이제 루디아의 집을 중심으로 바울 일행은 선교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이 바로 유럽의 최초 교회입니다.

그 이후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는 계속 이어집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꾸준하게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4:16)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1:8)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한 빌립보 교회는 단지 빌립보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서 귀중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루디아의 이런 행동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바울 일행이 머물면 불편한 일이나 짜증 나는 일도 벌어질 겁니다. 식사를 준비하고 침구도 따로 준비해야 합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그런 모든 불편한 일을 감수하면서 자기 집을 내준 이유는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복음 사역에 동참하려는 열정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나는 일전 한 푼 손해 보지 않을 거야. 내 인생에서 호구가 되는 일은 없어.’라는 인생 철학에 꽁꽁 묶여 있는 한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에서 일어난 놀랍고 위대한 이야기는 강 건너 불 보듯이 남의 이야기로 남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소중한 전통을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이어갈 수 있을까요?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라는 태도의 신앙생활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한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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