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의 실체 (사 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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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의 실체 (사 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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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의 실체

55:1~9, 사순절 셋째 주일, 2022320

 

 

바벨론 포로

구약 이사야는 66장이나 되는 아주 방대한 책입니다. 신학계에서는 이사야의 저자를 세 명으로 봅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일어난 기원전 587년 이전에 살던 사람과 바벨론 포로기에 살던 사람과 포로 귀환 이후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사 55:1~9절은 포로기에 살던 사람이 쓴 40~55장에 이르는 대목에서 마지막 단락에 해당합니다. 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목마른 자가 구체적으로 누굴까요? 시대적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 대략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때입니다. 1세대 사람들은 대다수가 바벨론에서 죽었을 겁니다. 끌려올 때 나이가 어렸던 1.5세대나 이곳에서 태어난 2세대가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교포들을 비교해서 보면 됩니다. 어떤 이들은 바벨론에서 내로라하는 지위를 얻었을 겁니다. 공직으로 나간 사람도 있고, 사업으로 한밑천 잡은 사람도 있고, 대학교수나 엔지니어처럼 전문가 집단에 속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별 볼일 없이 차별받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겁니다. 바벨론 여자나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유대인은 왜 없었겠습니까.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라도 그들이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라는 사실만은 같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야말로 영원한 고향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50년 전인 기원전 587년에 붕괴하였습니다.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있었고, 부모에게 전해 들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나치에게 당한 홀로코스트를 직접 목격한 유대인과 나중에 전해 들은 유대인이 있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붕괴는 그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생활보다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이 가능한 바벨론에서의 삶에 그들이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일종의 목마름이라는 정신적인 병을 당시 바벨론에 살던 모든 유대인이 앓고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걸 외면하고 일상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직면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목마름의 실존

지금부터 25백 년 전 바벨론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목마른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을 찾는다면 부러움입니다. 목마르니까 부러워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글을 쓰는 젊은이들의 꿈은 신춘문예 대상을 받는 것입니다.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대상 수상자를 부러워합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연봉이 높은 직장에 취업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현대인은 그런 특정한 사안만이 아니라 매사를 부러워하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바탕에 부러움이 깔린 게 아닐지요. SNS 활동도 그런 욕망의 발로일지 모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부러워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목마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신춘문예 대상을 받은 사람도 그 받은 순간만 짜릿할 뿐이지 글을 더 잘 써서 이름을 떨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여기서 예외가 없습니다. 바티칸의 교황 역시 선의에서라도 목마를 겁니다.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이번 대한민국 20대 대선이 0.73%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고 합니다. 패한 사람과 그쪽 진영 사람만이 아니라 이긴 사람과 그쪽 진영 사람도 똑같이 목마릅니다. 0.73%가 아니라 5%는 이겨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으로 목마른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권력을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국가를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그걸 사람들은 행복한 고민이라고 말하지만, 근본에서는 목마름입니다. 그 어떤 삶의 조건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 조건만을 찾다가는 헛고생만 하고 인생을 다 보낼 겁니다. 자기에게는 목마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거나 뻔뻔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정신병원에 들어간 사람이겠지요.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중심에는 자기 연민이 자리합니다.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기를 높임으로써 자기를 확인하려는 열망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강도의 차이가 있으나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힘입니다. 성경은 그걸 죄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기에 기회만 되면 타인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게 자기를 확인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하고, 또는 사회적 지위나 외모로 지배하려고 합니다. 온갖 중상모략이나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합니다. 국가 차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권력자들이 자기의 권력 욕망에 기대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합니다. 최고의 지성과 풍요를 자랑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 실제의 전쟁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자체가 전쟁처럼 작동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 건데, 뭘 어쩌라고?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두문불출 구도 정진하는 도사가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적자생존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이 진화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진화 메커니즘을 핑계 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 메커니즘이 우리 인간 세계에 작동하는 건 분명하지만, 인간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물과 똑같이 진화 메커니즘에 종속적으로 묶여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외침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이사야가 볼 때 목마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목마른 방식으로, 즉 헛된 일에 열중한다는 겁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양식 아닌 것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바벨론 제국이 제시하던 삶의 방식과 내용을 가리킵니다. 50년 전에 이곳으로 끌려와 나름으로 자리를 잡고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한평생 붙들려고 했던 삶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속적인 성공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성공으로 일컬어지는 삶을 오히려 헛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잘살게 되었어도 여전히 목마르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그 목마름은 더 심해집니다. 성공이라는 잣대로만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합니다. 삶이 다층적이고 심층적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돈과 권력만을 추구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처럼 삽니다. 그래서 영혼이 배부릅니까? 해갈됩니까? 아니잖아요.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수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법안을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반대하잖아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한국 기독교인이 더 유별나게 목말라 못 견디는 사람처럼 야박하고 모질게, 때로는 혐오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 가까이

바벨론에서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살던 유대인들은 근동의 패권이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넘어가고 있었기에 고국으로 돌아갈 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오래 남북 분단이 이어질 거라면 차라리 조금 더 기다려서 해방되는 게 낫지 않았을는지요. 유대인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재건하려고 노력했으나 별반 좋아진 게 없었습니다. 삶 자체가 새로워지지 않았는데, 강력한 나라를 세워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삶에 대한 이해가 천박한 사람이 벼락부자가 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생각이 빈약한 목사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들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뚫어본 이사야는 3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필요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하나님에게로 나오라는 외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만 영혼이 생명을 얻고,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7절에서 다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목마름의 원인을, 즉 목마름의 실체를 이사야는 두 가지로 말한 겁니다. 하나는 참된 양식이 아닌 것을 얻으려고 수고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으면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영혼이 거룩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대체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일은 다 헛된 것이니 다 포기하고 교회에만 묶여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일상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됩니다. 여행도 다니십시오. 사업도 하고, 정치도 해야 합니다. 연극 활동도 하고, 물리학과 화학 공부도 하십시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십시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은 세상과 거기에 속한 일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삶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모든 선물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는 영원히 즐길 수는 없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었어도 다시 배가 고픕니다. 권력의 맛도 일시적입니다. 손에 넣은 권력으로 인간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성적 욕망도 한 번으로 완전히 해소되는 게 아닙니다. 일시적이고, 잠정적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급식당에서 식욕을 돋우기 위해서 미리 먹는 전채(前菜, appetizer)와 비슷합니다. 그걸 독차지하려고 하니, 그리고 주요리(主料理)를 기다리지 않은 채 전채에서 완전한 맛을 욕망하다 보니 목마름이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주변에서 보는 모든 부러워할 만한 삶의 조건도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니 그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택배 기사만이 아니라 기업 총수도 목말라합니다. 결혼 안 한 사람만이 아니라 결혼한 사람도, 자식 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식 있는 사람도 목말라합니다. 그 모든 일상은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그를 부르라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럴 때 그의 영혼을 살 것이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양식 아닌 것과 배부르게 못 할 것과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할 것들이 우리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역설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들어갈 작은 영역마저 우리에게 없을지 모릅니다. 길을 가다가 민들레꽃에 꽂혀서 한참 들여다보고 존재의 희열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독서삼매에 빠지듯이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잡념에 기울어지지 않고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렇지 못했다면 여기에는 물론 설교자의 책임이 더 크긴 합니다.

설교자인 당신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느냐고 묻고 싶으신가요? 늦게 철드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 선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 말씀으로 만족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언어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 시인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그래도 목마름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저의 영혼 전체를 화염처럼 불사르는 경험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저에게 남아 있는 인생에서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경험될지가 기대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40년 이상 기독교 신앙의 전문가를 자처했는데도 이제야 조금 눈치챌 정도라면 이전투구로 돌아가는 세상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사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더 벅차고 막막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원한 생수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 빌립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4장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벌어졌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던 여자가 여러분 자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본문을 나중에 찬찬히 읽어보십시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하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온 여자에게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설마 인생의 목마름이 실제로 해결되겠나, 신앙적인 수사이겠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가 왜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인지를 지금 설교가 끝나는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거칠게 들리겠으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속는 셈 치고 예수를 믿어보십시오. 손해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무언가 다른 대상을 믿게 될 겁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자신만 믿겠지요. 자기를 믿다니, 정말 초라한 세계관입니다. 저는 예수가 영원한 생명수라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인생을 배팅했습니다. 이 배팅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저는 믿고, 또한 그렇게 기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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